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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번역 134

상왕 상존호 옥책문 (上王 上尊號 玉冊文)(태종 18년 무술년 8월, 세종이 선위받다. 11월, 곤면(袞冕)을 갖추고 인정전에서 책보(冊寶)를 진책관 박은, 진보관 이원에게 주어 수강궁에 나아가 올리게 하다.)

영락 16년 무술년 11월 초하루부터 여드레째 되는 갑인일에, 국왕 신(臣, 태종의 이름)이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책문을 받들어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스럽고 신묘함은 비록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나, 신하와 자식의 정으로 반드시 아름다운 칭호를 높여야 합니다. 이에 떳떳한 법도를 들어 효심을 펼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상왕 전하(태종)께서는 높으신 지혜는 하늘에 짝하고, 넓고 두터우심은 땅과 같습니다. 조상(태조)을 도와 나라를 여셨고, 적장자(嫡長子)를 높여 성업을 지키셨습니다. 덕은 모든 왕보다 으뜸이시니, 순(舜)임금과 문(文)왕의 본성과 같고, 공은 만대에 높으니, 탕(湯)왕과 무(武)왕과 더불어 부합합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을 돈독히 하셨고, 큰 나라를 섬기고 ..

혜종 황제 봉왕 고 (惠宗皇帝 封王 誥)(태종 원년 신사년 6월 12일 기사, 사신 통정사승 장근, 문연각 대조 단목례가 와서 명령을 내리니,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올리고, 무일전(無逸殿)에 맞이하여 고유문을 선포하다. ○ 살펴보건대 3년 계미년 4월에 성조 황제(영락제)가 도지휘 고득 등을 보내 다시 고유문과 인장을 내렸으나, 고유문은 전하지 않는다.)

옛날의 현명한 임금이 다스림을 행할 때에는, 덕을 다하여 널리 베풀어 만방을 덮어 기르니, 모든 나라가 안팎의 구별 없이 신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군장(君長)을 세워 그 백성을 다스리게 하여, 오랑캐와 중화(中華)의 경계에 울타리가 되게 하였다. 짐(朕, 명나라 황제)이 대통을 이어받아 옛 법을 따르니, 너 조선 권지국사 이(태종의 이름)에게 묻노라. 부형의 전함을 이어 이 땅을 진정시키고 다스리며, 와서 직분을 바치고 조공을 행함에, 예의를 따르고 정성을 다하였으나, 아직 책봉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간청하기를 부지런히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너를 조선 국왕으로 명하고, 금인(金印)을 내리니, 이 동쪽 땅을 길이 다스리라. 아! 하늘에는 일정한 마음이 없고, 오직 백성을 따르고, 백성에게는 일정..

선위 교서 (禪位敎書)(경진년 11월 11일 신미, 정종이 선위하다. 판삼군부사 이무가 교서를 받들고, 도승지 박석명이 국보를 받들고 인수부(仁壽府)에 올렸다. 13일 계유에 수창궁에서 즉위하다. ○ 실록에는 “반교문(頒敎文)”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이 다소 다르다.)

임금이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조상께서 인자하고 후덕하게 덕을 쌓아 큰 명을 모으셨다. 우리 개운(啓運) 신무 태상왕(태조)께서 창업하실 때에, 왕세자(태종의 이름)께서는 밝은 지혜로 먼저 기미를 아시고, 천명을 분명히 아시어, 먼저 큰 의를 제창하여 큰 업을 세우셨으니, 우리 조선의 개국은 오직 그대의 공이 실로 많았다. 그러므로 처음에 세자를 세우자는 의논이 있을 때, 온 세상의 기대가 모두 그대에게 돌아갔으나, 뜻밖에 권간(權姦)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우려 하여 장차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하늘이 그 속마음을 깨닫게 하시어, 계책을 세워 평정하게 하시어 종묘사직을 안정시키셨으니, 우리 조선의 다시 세움 또한 오직 그대의 공에 힘입은 것이다. 나라는 그때 이미 그대의 것이 되었으나, 이..

건저 부교 (建儲副敎)(날짜는 위와 같음.)

임금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세자를 세우는 것은 종묘사직을 존중하고 나라의 근본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예문에 살펴보니, 적자와 같은 어머니의 아우를 세운다는 말이 있으니, 혹은 세대를 이어가기도 하고 혹은 미치기도 하니, 오직 지극히 마땅한 것을 따를 뿐이다. 과인(정종)이 어리석게 선왕의 업을 이어받아 삼가 정치를 생각한 지 이제 3년이 되었다. 돌아보니 적자가 없고, 다만 서출의 아들만 있으니, 어둡고 약하여 지혜롭지 못하다. 매번 후계의 중요함을 생각하며, 항상 사람을 얻기 어려울까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며 감히 편안히 지내지 못하였다. 오직 같은 기운의 친족을 생각하여 우애의 의리를 돈독히 하려 하였다. 뜻밖에 회안공 방간이 간사한 무리를 믿고 의심과 시기를 함부로 일으켜..

왕세자 책봉 책문(정종 2년 경진년 2월 4일 기해,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립하다.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에 해당한다. ○ 교명은 전하지 않는다.)

임금이 이르기를, “세자를 세우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는 것이요, 지위를 높이는 것은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에 전장(典章)을 따라 책례(冊禮)를 거행한다. 오직 너 정안공(태종의 이름)은 문무를 겸비하고 덕은 영명하다. 태상왕(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실 초기에 큰 의리를 제창하였고, 과인(寡人, 정종 자신)이 사직을 안정시킨 날에는 특별한 공을 세웠다. 여러 사람의 칭송이 돌아가는 바이고, 마땅히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아야 하므로, 너를 왕세자로 명한다. 아! 사람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아들 노릇하기도 어렵다. 친족으로서 현명함으로 이미 종통을 이을 지위에 처해 있으니, 오직 충성과 효도로써 정치를 보좌하는 방도를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가르쳐 보이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할 것..

중각비 부기 (重刻碑 附記)(숙종 21년 을해년 5월)

아! 이곳은 바로 우리 태종 공정대왕의 헌릉입니다. 능 아래 옛 신도비가 있었으나, 병화(兵火: 전쟁으로 인한 재앙)를 겪어 돌에 새긴 글씨가 깎이고 떨어져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우리 전하(숙종)께서 즉위하신 지 20년 되는 갑술년 봄 2월, 능에 나아가 참배하시고 돌아보시며 탄식하시며, 다시 기덕(紀德: 덕을 기록함)하는 일을 밝힐 방법을 생각하셨습니다. 이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새 돌을 다듬어 옛 글을 다시 새기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재건청(重建廳)을 설치하고, 예조와 공조의 관원들이 그 일을 맡아 감독하고 다스렸습니다. 다음 해 을해년 5월에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니, 좋은 날을 택하여 옛 비각을 헐고, 처마와 기둥을 늘려 옛 비석과 함께 나란히 세웠습니다. 대개 옛 비석은 변계량..

비음기 (碑陰記) (비석 뒷면에 새긴 기록)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종대왕의 성스러운 덕과 신령한 공적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으뜸이며, 나이가 아직 높지 않은데 성자(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셨습니다. 바야흐로 편안히 지내시며 영화로운 봉양을 받으시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우리 전하(세종)께서 슬픔으로 몸이 상할 정도로 예를 다하셨습니다. 5월에 원경왕태후의 헌릉에 합장하였으니, 이는 (태종의) 유언을 따른 것입니다. 능은 광주 치소의 서쪽 대모산 아래 건해(乾亥) 방향의 산에 자리 잡고 있으며,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북쪽으로 서울에서 30여 리 떨어져 있습니다. 삼가 살펴보니 산은 장백산에서 뻗어 내려와 수천 리를 지나 상주의 속리산에 이르러 서북쪽으로 꺾여 또 수백 리를 지나 과천의 청계산에 이르렀고, 또 동북쪽으로 꺾여 한강을 등지고 멈추..

헌릉 신도비명 (머리말과 함께 씀. ○ 세종 6년 갑진년 5월)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덕 있는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과 신령한 손자를 내어 밝은 운수를 열고 영원한 큰 복을 누리게 한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의 흥성함은 우리 태종을 아들로, 우리 전하(세종)를 손자로 두었기 때문이다. 아, 얼마나 성대한가! 어찌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하늘의 뜻이다. 그가 은나라의 현명하고 성스러운 임금들의 계속된 출현, 주나라의 태왕, 왕계, 문왕, 무왕의 서로 이어진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신이 삼가 왕실의 계보를 살펴보니 이씨는 전주(全州)의 명문 성씨이다. 사공(司空) 휘(諱) 한(翰)은 신라에서 벼슬하였고, 왕족의 여인과 혼인하여 6세에 휘(諱) 경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서 벼슬하였고, 13세에 황현조(皇玄祖) 목왕(..

*행장 (세종 4년 임인년(1422년), 형조판서 이발 등을 보내 행장을 가지고 경사(京師, 명나라 수도)에 가서 부고를 알리고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 지문(誌文, 묘지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국왕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방원, 자는 유덕이다. 어머니는 왕비 한씨로, 오(吳, 명나라)의 원년 정미년(1367년) 5월 16일 신묘일에 왕을 낳았다.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있었다. 홍무 16년 계해년(1383년) 17세에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무진년(1388년) 10월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문하시중 이색을 따라 황제의 정통(正統) 즉위를 축하하러 갔다. 신미년(1391년) 9월에 어머니 왕비가 돌아가시자, 왕은 묘 옆에서 여막살이를 하며 3년 상(喪)을 마치려 하였다. 이때 고려의 운세는 이미 다하고 임금은 어리석고 정치는 혼란하여, 강헌(康獻, 이성계의 시호)의 공이 높고 덕이 성함을 꺼렸다. 마침 강헌이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해지자, 모함이 매우 급해졌다. 왕은..

추상 휘호 옥책문(숙종 7년 신유년)

유세차(維歲次) 신유년(辛酉年, 1681년) 12월 경진삭(庚辰朔) 초이레 병술일(丙戌日)에 효증손(孝曾孫) 사왕(嗣王) 신(臣, 숙종의 이름)이 삼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말씀을 올립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백 년 동안 거행하지 못했던 의식을 바로잡으니, 묘호(廟號)는 이미 바르게 되었고, 네 글자로 된 아름다운 칭호를 드러내니, 숨은 공덕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빛나는 책(冊)을 추서(追敍)하여 진열하니, 떳떳한 법도(彝章)가 모두 갖추어집니다.삼가 생각하옵건대 정안왕후(定安王后)께서는 자태가 온화하고 아름다우시며, 마음 씀씀이가 깊고 넓으셨습니다. 아래 사람에게 베푸는 인자함은, 역사에 빛나고(彤管에 빛나고), 하늘의 뜻을 순히 따르심은, 도(道)가 황상(黃裳, 곤괘의 괘사로 지극히 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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