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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번역 134

시책문 (문종 즉위 초년 경오년, 좌의정 황보인이 시책을 받들다.)

경태 원년(景泰元年, 명나라 대종의 연호) 세차(歲次) 경오년(庚午年) 5월 갑진삭(甲辰朔) 21일 갑자일에, 고아이자 뒤를 이은 왕 신(臣, 문종의 이름)이 삼가 다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아뢰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천지의 큰 덕은, 비록 형언(形言)으로 다 표현할 수 없으나, 신하의 지극한 정은, 오직 드러내어 아름답게 하는 데 절실합니다. 삼가 항례(常例)를 따라,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옵니다.삼가 생각하옵건대 선왕(先王, 세종)께서는 지극히 거룩하고 넓고 깊으시며, 총명하고 지혜로우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힘쓰시어, 다스림의 근원을 깊이 하셨고,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시어, 정치의 큰 강령을 넓히셨습니다. 유학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셨으며, 농사를 장려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셨습니다. 조..

봉왕 칙서 (날짜는 위와 같음.)

황제(명나라 황제)가 조선 국왕(세종의 이름)에게 칙유(勅諭)한다. 너의 아버지(태종의 이름)는 돈독하고 노련하며, 능히 하늘의 도리를 공경하고, 조정을 공손히 섬겨, 한 나라 사람들을 위해 복을 만들었으니, 충성스럽고 순순한 정성이, 더욱 오래되어도 변치 않는다. 최근 너의 효성스럽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으며 힘써 배우므로, 종묘의 제사를 계승하고 나라 사람들을 주재할 만하다고 하여, 왕위를 잇기를 청하였으므로,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하여, 너를 조선 국왕으로 삼는다. 너는 마땅히 왕위를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고, 작록(爵祿, 벼슬과 녹봉)이 가볍지 않음을 생각하며,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충성으로써 윗사람을 섬기며, 하늘의 도리를 공경하고 삼가하여, 한 나라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면, 하늘의 ..

상왕(태종)에게 내린 칙서 (기해년 8월 17일 기축일 선칙)

황제(명나라 황제)가 전 조선 국왕(태종의 이름)에게 칙유(勅諭)한다. 왕은 지극히 성실하고 돈독하며, 조정(朝廷, 명나라 조정)을 공경히 섬기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근 셋째 아들(세종의 이름)이 효성스럽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으며 힘써 배우므로, 종묘의 제사를 계승하고 나라 사람들을 주재할 만하다고 하여, 또 스스로 나이가 많아 국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왕위를 물려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짐(朕)은 왕의 식견이 밝고 통달함을 생각하여,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한다. 대대로 왕위를 잇는 것은 후손이 있는 데에 있고, 왕위를 전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에 있다. 이제 왕이 능히 선대의 업을 이어받고, 삼가 번복(藩服, 제후의 임무)을 지키면서, 현명하고 덕 있는 이를 ..

성조 황제 봉왕 고 (세종 원년 기해년 정월 19일 갑자일, 홍려승 유천 등이 받들고 옴)

황제(명나라 영락제)가 다음과 같이 내렸다. “제왕은 천하의 주재(主宰)가 되니, 다스리는 법도는 동인(同仁, 어짊)보다 더 넓어야 하고, 현명한 덕은 한 나라의 표본이 되니, 이치는 반드시 먼저 있고 후에 있어야 한다. 짐(朕)이 하늘의 명을 받아, 만방(萬邦)을 통치하니, 안정시키고 어루만져, 하나같이 차별 없이 대한다. 그러므로 현명하고 덕 있는 이를 뽑아, 번복(藩服, 제후의 임무)을 맡기고, 사정에 따라 마땅하게 하여, 교화의 이치를 이루니, 계승을 중하게 여기고 민심을 결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에 조선 국왕 이(태종의 이름)가 와서 아뢰기를, ‘맏아들 제(禔, 양녕대군)가 덕이 없어, 후사를 이을 수 없으므로, 셋째 아들(세종의 이름)이 효성스럽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으며 힘써 배우므로, 온 ..

태종이 선위할 때 신하들에게 내린 교서 (1418년 8월 초8일 을유일에 태종이 선위하였고, 열흘 뒤 정해일에 그 사실을 널리 알렸다.)

왕(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덕이 부족함에도, 태조의 큰 사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정성을 다해 다스리려고 노력한 지, 이미 18년이 되었다.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재앙과 변고를 초래하였으며, 또 지병이 있는데, 최근에 더욱 심해져, 정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세자(세종의 이름)는 영명하고 공손하며 검소하고, 효성스럽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으며 너그럽고 어질어, 왕위를 이을 만하다. 이미 영락(永樂) 16년 무술년 8월 8일에, 직접 대보(大寶, 왕위)를 전수하여, 모든 정사를 전담하게 하였으니, 오직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만,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너희 중외(中外)의 크고 작은 신하들에게 고하노라! 모두 나의 지극한 마음을 헤아리고, 한마음으로..

봉왕세자 책문 (무술년 6월 17일 병신일)

(교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살펴보건대 이 해에 성조 황제(成祖皇帝, 명나라 영락제)가 내관 육선재(陸善財)를 보내 칙서(勅書)를 가지고 와 왕세자로 봉하였다. 칙서의 내용은 신도비(神道碑)에 대략적으로 나타나 있으나, 전문(全文)은 전해지지 않는다.)세자를 세우는 것은 인심에 관계되는 것이니, 실로 큰 의례이고, 훌륭한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니, 오직 지극히 공정함에 달려 있다. 이에 명위(名位)의 융성함을 바로잡고, 책봉의 숭고한 예(禮)를 거행한다. 이에 너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의 이름)에게 고하노라. 너는 너그럽고 넓으며 신중하고 중후하며,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겸손하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며 섬기되, 평소에도 조심하고 삼가는 모습이다.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

세자를 세울 때 신하들에게 내린 교서 (태종 18년 무술년 6월 초3일 임오일)

왕(태종)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자를 세움에 어진 이를 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의리이고, 죄가 있으면 폐하는 것은, 오직 나라의 변하지 않는 규범이다. 일은 한 가지로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치에 마땅함에 기준을 둘 뿐이다. 내가 일찍이 맏아들 제(禔, 양녕대군)를 세자로 세웠는데, 나이가 이미 스무 살이 넘도록, 글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풍류와 여색에 빠졌다. 나는 그가 어리다고 여겨, 장성하면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랐다. 나이가 20세를 넘었으나, 도리어 간사한 무리들과 사사로이 통하고, 함부로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였다. 지난봄에는,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수십 명이었다. 제는 이에 그 잘못을 모두 적어,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글을 올리니, 스스로..

영릉을 옮긴 기록 (예종 원년 기축년. 옛 능의 지문은 전해지지 않음.)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가 대명(大明) 홍무(洪武) 30년 정축년(丁丑年) 4월 10일 임진일(壬辰日)에 한양(漢陽)의 사저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났으므로, 두 궁(宮, 태종과 원경왕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장성하여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비록 병중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자(世子) 제(禔, 양녕대군)가 많은 잘못을 저지르므로, 영락(永樂) 16년 무술년(戊戌年) 여름, 여러 신하들이 폐위를 청하니, 태종이 왕에게 숨겨진 덕이 있다고 여겨,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명나라 영락제)..

영릉 신도비명 (서문과 함께. 문종 원년 신미년 7월)

요(堯) 임금은 단주(丹朱)를 버리고 순(舜)에게 선양하였으니, 순에게는 중화(重華)의 덕이 있었지만, 요의 인자함은 더욱 멀리까지 미쳤다. 문왕(文王)은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세웠으니, 무왕에게는 큰 업을 계승한 빛나는 공적이 있었지만, 주(周)나라의 업은 더욱 창성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당(唐, 요임금의 나라)과 우(虞, 순임금의 나라)의 선양과 하후(夏后), 은(殷), 주(周)의 계승은 그 뜻이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하나라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마음이 없음을 이른다. 우리 태종(太宗)의 선위(禪位)는 그 요임금과 문왕의 마음과 같은 것이고, 우리 세종(世宗)의 선위를 받은 것은 그 순임금과 무왕의 덕과 같은 것이다!태종이 재위에 있을 때, 일찍이 원자(元子) 제(禔..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 행장 (문종 즉위 초년 경오년에 지중추원사 이훤 등을 경사(京師)에 보내 부고를 알리고 시호를 청하니, 의정부에서 행적을 지어 예부에 보고하다.

국왕의 성은 이씨이고, 휘(諱)는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민씨 부인으로, 홍무(洪武) 30년 4월 10일에 탄생하였다. 성장하여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천성이 영특하고 지혜로우며, 마음이 깊고 신중하였다.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일찍이 병이 있었음에도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공정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충녕군의 학문 사랑은 참으로 천성이다.” 하였다.영락(永樂) 16년 6월, 세자 제(禔, 양녕대군)가 덕을 잃어 폐위되자, 나라 사람들이 왕이 여러 아들 중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후계자로 세울 것을 청하였다. 공정왕이 이를 따르고 조정에 보고하니, 얼마 후 노환으로 정사를 돌볼 수 없음을 아뢰어 왕에게 전위하기를 청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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