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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을 옮긴 기록 (예종 원년 기축년. 옛 능의 지문은 전해지지 않음.)

集賢堂 2024. 12. 20.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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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가 대명(大明) 홍무(洪武) 30년 정축년(丁丑年) 4월 10일 임진일(壬辰日)에 한양(漢陽)의 사저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났으므로, 두 궁(宮, 태종과 원경왕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장성하여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비록 병중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자(世子) 제(禔, 양녕대군)가 많은 잘못을 저지르므로, 영락(永樂) 16년 무술년(戊戌年) 여름, 여러 신하들이 폐위를 청하니, 태종이 왕에게 숨겨진 덕이 있다고 여겨,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명나라 영락제)에게 자세히 아뢰어, 세자로 책봉하였다. 가을 8월, 태종이 나라 일에 지치어, 왕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사신을 보내 명을 청하였다. 이듬해 기해년(己亥年) 정월, 황제(명나라 영락제)가 사신을 보내 왕으로 명하는 조서를 내리고, 이어서 사신을 보내 잔치를 내리고, 또 태종에게도 잔치를 내리며,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왕이 능히 현명한 이를 간택하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에 의탁할 곳이 있게 하였으니, 오직 왕 한 집안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왕의 온 나라 사람의 경사이다.”라고 하였다.

경자년(庚子年), 원경왕후가 병환이 드시어, 꺼려하여 외부의 사저로 피하시니, 왕이 걸어서 가마를 붙드니, 이슬을 맞으며 밤을 지새우는 때도 있었다. 훙서(薨逝)하시자, 슬퍼하고 애통해함이 예(禮)를 넘었다. 이 해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널리 유능한 선비를 뽑아, 20명을 두어 자문에 대비하였다. 임인년(壬寅年) 여름 5월, 태종이 훙서하니, 3년 동안 상(喪)을 치렀다. 선덕(宣德) 원년 병오년(丙午年), 선종 황제(宣宗皇帝, 명나라 선덕제)가 채색 비단과 서적을 내려주니, 이로부터 총애와 하사가 빈번하여, 역사에 끊임없이 기록되었다. 정미년(丁未年) 가을, 비로소 종학(宗學)을 설치하고, 종실의 자제들을 모두 학업을 받도록 하니, 여러 아들로서 외부 스승에게 나아가지 않은 자들도, 또한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적자와 서자 사이에도, 예는 엄격하고 은혜는 돈독하니, 사람들 사이에 불평하는 말이 없었다. 무신년(戊申年) 겨울, 조정의 조회 때 쓰는 음악을 만들고, 큰 모임에서 비로소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해마다 금과 은을 공물로 바쳤으나, 우리나라의 토산물이 아니므로, 항상 부족함을 근심하였다. 이에 친동생을 보내 표문을 올려 청하니, 조정에서 어렵게 여겼다. 황제(명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조선 왕은 반드시 속이지 않을 것이니, 어찌 남에게 없는 것을 억지로 요구하겠는가?” 하고 공물을 면제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이 여러 차례 변방을 침범하므로, 계축년(癸丑年) 4월, 장수를 보내 토벌하게 하고, 땅을 개척하여 경흥(慶興) 등의 진(鎭)을 설치하니, 고려 말부터 함길도(咸吉道) 연변의 땅이 야인에게 점거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옛 강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갑자년(甲子年),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岐島)의 왜(倭)가 상국(上國, 명나라)을 침략하고, 또 우리나라 제주(濟州)의 경계를 침범하므로, 왕이 사람을 보내 섬의 섬주(島主)에게 타이르니, 섬주가 명을 받들어, 왜적 62명을 잡아 보냈다. 이에 경사(京師)에 압송하니, 황제가 채색 비단을 내려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무릇 왜적의 완악하고 사나움으로, 굴복시킨 것은 문서 한 장으로 된 것이고, 야인의 사납고 거만함이, 정벌하는 군대에 소멸되었으니, 은혜와 신의가 평소에 두터이 쌓이고 위엄과 신령함이 멀리 떨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주요 내용 정리:

  • 세종의 출생과 어린 시절, 세자 책봉 과정.
  • 태종의 선위와 명나라의 승인.
  • 원경왕후의 죽음과 세종의 효성.
  • 집현전 설치 및 학문 장려.
  • 명나라에 대한 외교 활동 (공물 면제 요청).
  • 국방 강화 및 외적 대응 (야인 토벌, 왜구 소탕).

추가 설명:

이 부분은 세종의 출생부터 즉위 초까지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종의 선위 과정과 명나라의 승인, 원경왕후의 죽음에 대한 세종의 효성, 집현전 설치 등 중요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 공물 면제를 받아낸 일, 그리고 야인과 왜구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일 등을 통해 세종의 외교적 능력과 국방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은혜와 신의가 평소에 두터이 쌓이고 위엄과 신령함이 멀리 떨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라는 문장을 통해 세종의 덕망이 외교 및 국방 성과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세자(世子, 양녕대군)는 비방을 피해 외부에서 20년을 지냈는데, 서울로 불러 돌아오게 하자, 여러 신하들이 간절히 간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형을 섬기고 여러 아우들과 우애를 나누되, 지극히 공경하고 사랑하였으며, 구족(九族)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돈독하게 화목하였다. 왕(세종)의 영특함과 뛰어남은 옛날에도 으뜸이었고, 성스러운 학문으로 보좌를 받았다. 왕위에 오른 이후로, 밤낮으로 정치를 구하고, 예악(禮樂), 형정(刑政), 제도(制度), 문물(文物) 등 이전 시대에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을, 모두 들어 힘써 행하였다. 옛것과 지금 것의 문채와 바탕을 참작하여,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수정하였다. 조종(祖宗)의 공덕의 성대함을 서술하여, 《정대업(定大業)》 등의 음악을 지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28자로 천하의 언어를 모두 통하게 하였으니, 문자의 오묘함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여러 조정을 거치면서 내려온 법령을 가감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이루니, 규모가 광대하고 심오하며, 조목과 조리가 자세하고 치밀하여, 만세의 법도가 될 만하였다. 특히 천문(天文)과 율력(律曆)을 환히 아시어, 《칠정산(七政算)》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을 수정하고, 여러 천문 기구를 만드니,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여러 주석을 취하여, 교정하고 편찬하니, 이름을 《훈의(訓義)》라고 하였다. 또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여러 책을 지으니, 문교(文敎)를 융성하게 하고 인륜(人倫)을 두텁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억울한 옥사(獄事)를 불쌍히 여겨, 신중하게 형벌을 시행하라는 가르침이 있었고, 백성들이 음란하고 편벽될까 염려하여, 계주서(戒酒書)를 지었다. 마음을 비우고 간언을 받아들이고, 현명한 이를 존경하고 선비를 예로 대우하니, 왕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대신 중에 형벌을 받은 자가 없었다. 특히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을 중요하게 여겨, 조정의 신하로서 수령(守令)을 지내지 않은 자는, 감히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30년 동안, 관리는 그 직분을 다하고, 백성은 그 업에 편안히 하니, 조정은 맑고 밝았고, 사방은 편안하였으므로, 동방의 요(堯), 순(舜)이라고 불렸다.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는 청송(靑松)의 명문가이다. 황증조(皇曾祖)의 휘(諱)는 용(龍)이니, 고려(高麗) 증(贈)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이다. 조부(祖父)의 휘는 덕부(德符)이니,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두 번 문하시중을 지냈고, 우리 공정왕조(恭靖王朝, 조선)에 이르러, 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이 되었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아버지의 휘는 온(溫)이고, 벼슬은 (기록 누락). 어머니 안씨(安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시호가 소의공(昭懿公)인 천보(天保)의 딸이고,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홍무(洪武) 을해년(乙亥年) 9월 기미일(己未日)에 왕후를 양주(楊州)의 사저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정숙한 덕이 있었는데, 영락(永樂) 무자년(戊子年), 왕후가 비녀를 꽂을 나이가 되자, 왕(세종)의 빈(嬪)으로 뽑히니,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두 궁(태종과 원경왕후)을 공경히 섬기어, 은혜와 사랑을 돈독히 받았다. 왕후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왕(세종)은 반드시 일어나 맞이하니, 그 공경하는 예절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丁酉年) 가을 9월, 삼한국대부인으로 고쳐 봉해졌고, 왕(세종)이 세자(世子)에 봉해지자, 경빈(敬嬪)으로 나아가 봉해졌고, 왕위에 오르자, 공비(恭妃)에 봉해졌다. 임자년(壬子年) 정월,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중궁(中宮)에 아름다운 칭호가 있는 것은, 옛 제도에 맞지 않습니다.” 하여, 왕비(王妃)로 고쳐 봉하였다. 왕후가 중궁의 바른 자리에 오른 이후,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신중하였고, 빈(嬪)과 잉(媵)을 예로 대하니, 매우 기뻐하였다. 후궁에 새로이 임신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로하고 받아들였고, 낳은 여러 아들을, 궁중에서 길러, 마음을 다해 어루만지고 길러, 자신이 낳은 아들과 같이 하였다. 어선(御膳)이 올라오면, 반드시 몸소 살펴서 보았다. 궁중의 일은,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위(임금)에게 아뢰었고, 또한 일찍이 친척과 자제를 위하여, 벼슬을 구하거나 혼인을 청하지 않았다. 검소함으로써 몸을 다스리고, 자애로써 아랫사람에게 미치게 하였다. 새벽에 닭이 울면 나아가 경계하는 말을 전하고, 음덕(陰德)을 널리 알리니, 배필의 덕이 함께 밝으니, 한 나라의 국모(國母)였다. 아! 세종은 문왕(文王)의 성스러움이 있었고, 왕후는 태사(太姒)의 어짊이 있었다. 그러므로 능히 《관저(關雎)》의 교화와 《종사(螽斯)》의 경사를 이루었으니, 근본 가지가 백세에 이어지고, 복록이 끝없이 흘러갈 것이다!

주요 내용 정리:

  • 세종의 뛰어난 자질과 즉위 후의 업적 (정치, 문화, 과학, 외교 등).
  • 소헌왕후의 가계와 인품, 세종과의 관계, 내명부에서의 역할.

추가 설명:

이 부분은 세종의 업적과 소헌왕후의 덕행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종의 업적을 정치, 문화, 과학, 외교 등 다양한 분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훈민정음 창제, 《경제육전》 편찬, 천문학 발전 등 중요한 업적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헌왕후의 가계와 인품, 특히 내명부에서의 역할과 세종과의 관계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종과 소헌왕후를 각각 문왕과 태사에 비유하며, 그들의 뛰어난 덕과 업적을 칭송하고, 그로 인해 나라에 큰 복이 이어질 것이라고 기원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정통(正統) 11년 병인년(丙寅年) 봄 3월 24일 신묘일, 병으로 사저에서 훙서(薨逝)하니, 향년 52세였다. 왕(문종)은 어진 보좌를 잃은 것을 슬퍼하여, 흰 옷을 입고 소찬(素膳)으로 30일을 지냈다. 여름 6월, 책봉을 내려 시호(諡號)를 소헌왕후(昭憲王后)라 하였다. 5년이 지난 경오년(庚午年) 봄 2월 17일 임진일, 왕(세종) 또한 병으로 별궁에서 훙서하니, 향년 54세이고, 재위 기간은 33년이었다. 문종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시호를 올려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 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시호를 바꾸기를 청하니, 황제(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고, 시호를 장헌(莊憲)이라 내렸다. 처음에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지금의 전하(殿下, 성종)가 즉위한 원년 기축년(己丑年) 봄 3월 6일 경인일, 여흥부(驪興府) 고을 북쪽 성산(城山) 남쪽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으니, 실로 성화(成化) 5년이었다.

왕후(소헌왕후)는 여덟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장남은 문종 공순 대왕(文宗恭順大王)이니, 경태(景泰) 3년 임신년(壬申年) 5월 14일에 훙서하였다. 차남은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이니, 성화(成化) 4년 9월 8일에 훙서하였다. 다음은 용(瑢)이니, 계유년(癸酉年)에 불궤(不軌)를 꾀하다 사사(賜死)되었다. 다음은 구(璆), 임영대군(臨瀛大君)이니, 능을 옮기기 두 달 전에 죽었다. 다음은 여(璵), 광평대군(廣平大君)이다. 다음은 유(瑜)이니, 또한 불궤를 꾀하다 사사되었다. 다음은 린(琳), 평원대군(平原大君)이니, 여와 함께 먼저 죽었다. 다음은 염(琰),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니, 능을 옮기기 2년 전에 죽었다. 딸 중 장녀는 비녀를 꽂기도 전에 죽어, 정소공주(貞昭公主)로 추증(追贈)되었다. 다음은 정의공주(貞懿公主)이니,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신빈(愼嬪) 김씨(金氏)는 여섯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증(璔), 계양군(桂陽君)이다. 다음은 긍(玒), 의창군(義昌君)이다. 다음은 심(琛), 밀성군(密城君)이다. 다음은 관(璭), 익현군(翼峴君)이다. 다음은 장(璋), 영해군(寧海君)이다. 다음은 기(璖), 담양군(潭陽君)이다. 능을 옮길 해에는 오직 밀성군만 살아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먼저 죽었다. 혜빈(惠嬪) 양씨(楊氏)는 세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감(𤥽)이다. 다음은 현(玹), 수춘군(壽春君)이니, 일찍 죽었다. 다음은 천(瑔)이니, 감과 함께 용의 무리라 하여 외방으로 폄적되어 죽었다. 숙원(淑媛) 이씨(李氏)는 딸 하나를 낳았으니, 정안옹주(貞安翁主)이고, 의빈(儀賓) 심안의(沈安義)에게 시집갔다. 상침(尙寢) 송씨(宋氏)는 딸 하나를 낳았으니, 정현옹주(貞顯翁主)이고,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에게 시집갔다. 궁인(宮人) 강씨(姜氏)는 아들 영(瓔)을 낳았으니, 또한 용의 무리라 하여 외방으로 폄적되어 죽었다.

문종의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는 증 의정부 좌의정(贈議政府左議政) 전(專)의 딸이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들은 곧 노산군(魯山君, 단종)이다. 딸은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니, 정종(鄭悰)에게 하가하였다. 사칙(司則) 양씨는 딸 하나를 낳았으니, 경숙옹주(敬淑翁主)이고, 의빈 강자순(姜子順)에게 시집갔다. 세조의 자성왕비(慈聖王妃) 윤씨(尹氏)는 증 의정부 좌의정 번(璠)의 딸이다.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들 중 장남은 의경세자(懿敬世子)이고, 일찍 죽었다. 다음은 곧 지금의 전하(殿下, 성종)이다. 딸 의숙공주(懿淑公主)는 의빈 정현조(鄭顯祖)에게 하가하였다. 모 관직의 박씨는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서(曙), 덕원군(德源君)이고, 다음은 성(晟), 창원군(昌原君)이다.

주요 내용 정리:

  • 소헌왕후와 세종의 사망 및 장례, 이장 과정.
  • 세종의 자녀 및 후궁 소생 자녀들의 정보 (이름, 작위, 사망일, 혼인 관계 등).
  • 문종, 세조, 성종의 배우자 및 자녀 정보.

추가 설명:

이 부분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이장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여, 세종의 모든 자녀와 후궁 소생 자녀들, 그리고 문종, 세조, 성종의 배우자와 자녀들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러 왕자들이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또한, 능의 이장 과정까지 자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세종과 관련된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빠짐없이 기록하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이로써 세종대왕 행장의 모든 내용이 마무리됩니다. 이 행장을 통해 우리는 세종의 삶과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관계와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까지 폭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瑢, 안평대군)은 증 좌의정(贈左議政) 정연(鄭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우직(友直), 차남은 우량(友諒)인데, 모두 연좌되어 죽었다. 임영(臨瀛)은 증 우의정(贈右議政) 최승녕(崔承寧)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아들 중 장남은 주(澍), 오산군(烏山君)이고, 다음은 준(浚), 구성군(龜城君)이고, 다음은 순(淳), 정양군(定陽君)이고, 다음은 정(淨), 팔계군(八溪君)이고, 다음은 징(澄), 환성군(懽城君)이다. 딸 중 장녀는 중모현주(中牟縣主)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거창군(居昌君) 신승선(愼承善)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청하현주(淸河縣主)이고, 사도정(司䆃正) 안우건(安友騫)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은 네 아들과 여섯 딸을 낳았으니, 아들 중 장남은 함(涵), 영양부정(英陽副正)이고, 다음은 린(潾), 단계부정(丹溪副正)이고, 다음은 탁(濯), 윤산부정(輪山副正)이고, 다음은 옥(沃), 옥천부정(玉川副正)이다. 딸들은 모두 어리다.

광평(廣平)은 모 관직(某官) 신자수(申自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부(溥), 영순군(永順君)을 낳았다. 유(瑜, 금성대군)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최사강(崔士康)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평원(平原)은 증 좌의정(贈左議政) 홍이용(洪利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영응(永膺)은 모 관직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측실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영(瓔)은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아들이 없고, 측실이 아들 하나를 낳았다. 계양(桂陽)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낳았으니, 아들 중 장남은 봉(灃), 영원군(寧原君)이고, 다음은 융(瀜), 강양군(江陽君)이고, 다음은 식(湜), 부림도정(富林都正)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 중 장녀는 모 관직 안계송(安繼宋)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측실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들은 어리고, 딸은 모 관직 정종선(鄭從善)에게 시집갔다. 의창(義昌)은 모 관직 김수(金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낳았으니, 아들은 호(灝), 사산군(蛇山君)이다. 딸 중 장녀는 참봉(參奉) 신우정(辛禹鼎)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어리다. 감(𤥽)은 호조 정랑(戶曹正郞) 권격(權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밀성(密城)은 군기 부정(軍器副正) 민승서(閔承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아들 중 장남은 계(誡), 운산군(雲山君)이고, 다음은 당(譡), 춘성군(春城君)이고, 다음은 치(𧭢), 수안도정(遂安都正)이고, 다음은 설(䛿), 석양도정(石陽都正)이다. 딸 중 장녀는 모 관직 아무개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어리다. 수춘(壽春)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정자제(鄭自濟)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니, 모 관직 심순로(沈順老)에게 시집갔다. 익현(翼峴)은 모 관직 조철산(趙鐵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들은 지(漬), 괴산군(槐山君)이고, 딸은 어리다. 천(瑔)은 박팽년(朴彭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영해(寧海)는 모 관직 신윤동(申允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정의공주(貞懿公主)는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아들 중 장남은 안여달(安如獺), 첨지사(僉知事)이고, 다음은 온천(溫泉), 부정(副正)이고, 다음은 상계(桑鷄), 전첨(典籤)이고, 다음은 빈세(貧世), 참판(參判)이다. 정현옹주(貞顯翁主)는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윤반(尹磻), 첨지사이고, 다음은 린(磷), 호군(護軍)이다. 정안옹주(貞安翁主)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들은 어리고, 딸은 모 관직 최맹사(崔孟思)에게 시집갔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신 이승소(李承召)가 짓다.

주요 내용 정리:

  • 안평대군(용) 이하 여러 왕자들의 배우자, 자녀, 혼인 관계, 사망 원인 등을 자세하게 기록.
  • 공주와 옹주들의 혼인 관계 기록.
  • 글을 지은 사람 (이승소) 명시.

추가 설명:

이 부분은 앞서 언급된 왕자들의 배우자와 자녀들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합니다. 특히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한 왕자들의 가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주와 옹주들의 혼인 관계를 기록하여 왕실의 혼맥(婚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쓴 사람이 예문관 제학 이승소임을 명시하며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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