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堯) 임금은 단주(丹朱)를 버리고 순(舜)에게 선양하였으니, 순에게는 중화(重華)의 덕이 있었지만, 요의 인자함은 더욱 멀리까지 미쳤다. 문왕(文王)은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세웠으니, 무왕에게는 큰 업을 계승한 빛나는 공적이 있었지만, 주(周)나라의 업은 더욱 창성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당(唐, 요임금의 나라)과 우(虞, 순임금의 나라)의 선양과 하후(夏后), 은(殷), 주(周)의 계승은 그 뜻이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하나라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마음이 없음을 이른다. 우리 태종(太宗)의 선위(禪位)는 그 요임금과 문왕의 마음과 같은 것이고, 우리 세종(世宗)의 선위를 받은 것은 그 순임금과 무왕의 덕과 같은 것이다!
태종이 재위에 있을 때, 일찍이 원자(元子) 제(禔, 양녕대군)를 세자로 세우고, 현명한 스승과 벗을 선택하여 가르치고 기르는 방법을 다하였다. 세자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있어 학문은 이루지 못하고 덕은 나아가지 못하니, 태종이 깊이 근심하였다. 영락(永樂) 무술년(戊戌年) 6월, 세자의 잘못이 더욱 심해지자, 태종은 적손(嫡孫)을 세워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다. 대신(大臣)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세자를 가르치고 기르심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오히려 이와 같으니, 지금 어린 손자를 세우면 어찌 훗날의 어짊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는 것이 의리에 어떠하겠습니까? 차라리 현명한 자를 택하여 후계자로 삼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세종은 세자의 동복 아우로서 서열이 셋째였고, 일찍이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해져 있었다. 태종이 말하기를 “충녕이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니, 마땅히 그를 세워야 한다.”라고 하고, 이에 세자로 세우니, 종친과 문무백관이 하례하고, 나라 안팎이 화합하여 칭송하였다. 드디어 천자(天子,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니, 칙서가 내려 이르기를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떳떳한 도리이다. 그러나 후계자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관련된다. 왕이 국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하여, 흥망성쇠의 기틀을 살펴, 현명한 자를 세워 후계자로 삼고자 하니, 왕의 선택에 맡긴다.”라고 하였다.
이 해 8월,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사신을 보내 명을 청하였다. 11월, 세종이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종에게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다음 해 기해년(己亥年) 봄 정월, 천자가 홍려시승(鴻臚寺丞) 유천(劉泉)을 보내 세종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6월, 천자가 태종에게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번에 셋째 아들이 효성스럽고 학문에 힘써 종사를 계승할 만하다고 스스로 아뢰며, 또 나이가 많아 정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자리를 물려주기를 청하였다. 짐은 왕의 식견이 명철함을 헤아려 특별히 이를 허락한다. 대를 잇는 것은 후사가 있는 데에 있고, 전위는 현명한 사람을 얻는 데에 있다. 이제 왕이 현명한 사람을 가려 등용하여 종사를 맡기니, 나라 사람들의 기대를 부응하는 것이라, 매우 기쁘게 여긴다. 왕에게 잔치를 베풀어주니, 이는 왕 한 집안의 경사일 뿐 아니라, 왕의 온 나라 사람들의 경사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또 세종에게 칙서를 내려 충효의 도리로 권면하고, 역시 잔치를 내려주었다. 8월, 사신이 나라에 도착하니, 두 성인이 경복궁(景福宮)의 근정전(勤政殿)에서 잔치를 받았으니, 예악(禮樂)의 성대함이 온 나라를 놀라게 하였다.
처음에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가 홍무(洪武) 정축년(丁丑年) 4월 10일 임진일에 한양(漢陽)의 잠저(潛邸)에서 세종을 낳았다. 네 살 때 왕후가 꿈을 꾸었는데, 태종이 세종을 안고 해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이 보위(寶位)에 오르고, 세종이 또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하늘이 덕이 있는 자에게 명한 것이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세종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말이 적고 조용하여 숭고한 용모가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총명하고 지혜로움은 뭇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인이었고, 너그럽고 온화함은 백성을 포용하고 무리를 기르는 덕이었다. 사물을 제정하는 데에는 홀로 뛰어난 운용이 있었고, 강하고 굳센 의지를 지녔으며, 두려워할 만하고 본받을 만하면서도, 엄숙하고 바른 공경함이 있었고,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의 경지에 들어가면서도, 문리(文理)를 치밀하게 살피는 분별력이 있었다. 매일 새벽 4경에 옷을 입고, 날이 밝으면 조회를 받고, 이어서 정사를 보고, 이어서 윤대(輪對)를 하였고, 이어서 경연(經筵)에 나아갔다가, 이에 궁궐 안으로 들어가서도 오히려 서적을 보았으니,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이에 정사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고,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없었다. 태종은 이미 왕위를 물려준 후, 스스로 맡긴 사람을 잘 얻었다고 생각하여, 산수(山水)의 흥취를 즐기며, 여러 차례 교외로 나가 사냥을 하며 스스로 한가로움을 즐겼다.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밝은 임금에게 나라 정사를 맡기고 근심이 없는 것은, 천하에 나 같은 사람이 없다. 어찌 천하에 나 같은 사람이 없을 뿐이겠는가? 고금을 통틀어 또한 나 같은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그 근심한 것이 깊었으므로, 그 기뻐함이 이와 같았다.
겨울 10월, 나라 안팎의 사사(寺社)의 노비(奴婢)를 모두 혁파하여 관(官)에 소속시키고, 얼마 후 오교(五敎, 고려 시대의 다섯 종파 불교)를 폐지하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두 종파만 남겼다. 이에 이단(異端)의 가르침이 깨끗이 제거되었다. 경자년(庚子年) 봄, 비로소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文學)의 선비들을 선발하여 모아 자문에 대비하였다. 이 여름,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학질(瘧疾)에 걸려 외부로 피신하였는데, 수레를 옆에서 모시고 걸어서 따르며, 심지어는 노숙하며 약을 올리는 일까지 있었으니,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7월, 왕후가 훙서(薨逝)하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니, 태종이 억지로 권하니, 이에 조금 마셨다.
신축년(辛丑年) 8월, 천자(天子, 명나라 황제)가 북쪽을 정벌하러 가면서 말 1만 필을 바치니, 천자가 칭찬하고 은과 비단을 내려주었다. 9월, 태종에게 태상왕(太上王)의 칭호를 올렸다. 임인년(壬寅年) 5월, 태종이 훙서하니, 3년 동안 상을 치르되, 상복을 입고 일을 행하는 것을 영원한 법으로 정하였다. 갑진년(甲辰年) 가을,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가 붕어(崩御)하자, 인종 소황제(仁宗昭皇帝)가 즉위하니, 표문을 올려 위로하고 하례를 다하니, 천자가 충성스럽고 간절함을 가상히 여겨 채색 비단을 내려주었다. 을사년(乙巳年), 인종이 붕어하고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가 즉위하니, 또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하례하였다. 선덕(宣德) 병오년(丙午年) 봄, 천자가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며 비단과 함께 왕비에게까지 내려주었다. 이 해 겨울, 또 《오경(五經)》, 《사서(四書)》, 《성리대전(性理大全)》,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의 서적을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하사하는 물품이 해마다 이르지 않는 해가 없었고, 심지어는 쓰시던 보배로 장식한 띠고리와 도검을 내려주기까지 하였다. 기유년(己酉年) 여름, 성균관(成均館)에 행차하여 선성(先聖, 공자)에게 배알하고 선비를 뽑았다. 나라 사람들이 항상 금과 은이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조정에 바치는 세공(歲貢)이 이어지기 어려웠다. 이에 친동생 공녕군(恭寧君) 이인(李裀)을 보내 이유를 갖추어 진정하니, 천자가 특별히 바치는 것을 면제해주고, 토산물로 대신하여 정성을 바치게 하고, 공녕군에게 내리는 상이 매우 후하였다. 이 해 겨울, 천자가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정에서 보낸 사람 등이 왕의 나라에 이르거든, 왕은 다만 예로써 대우하고, 물건으로 하사하지 말라. 왕의 부자가 조정을 공경히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해지니, 짐이 깊이 아는 바이며, 측근의 무리들이 능히 이간질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왕은 가히 뛰어나게 현명한 왕이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파저강(婆猪江) 등지의 야인(野人)이 다른 부족과 연결하여, 그들이 노략질한 요동(遼東), 개원(開原) 변방의 군민 중에서 우리나라로 도망쳐 온 자가 500여 명이었다. 모두 경사(京師)로 돌려보내니, 야인들이 분노를 품고 우리나라 북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계축년(癸丑年) 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순몽(李順蒙) 등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니, 그 우두머리 이만주(李滿住) 등이 새처럼 흩어지고 짐승처럼 달아나므로, 그 소굴을 휩쓸고 돌아왔다.
갑인년(甲寅年) 봄, 또 선성(先聖)에게 배알하고 선비를 뽑았다. 3월 병오일, 헌릉(獻陵, 태종의 능)에 배알하니, 감로(甘露)가 소나무와 잣나무에 내리고, 또 경복궁(景福宮) 후원에 있는 소나무에도 내렸다. 백관(百官)이 하례(賀禮)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함길도(咸吉道) 북쪽 변방의 압록강(沿江) 주(州)와 군(郡)은 본래 고려의 옛 강토이고, 우리 조종(祖宗)이 왕업을 일으킨 땅인데, 야인(野人)에게 점거되었다. 비로소 회령(會寧),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 등의 여러 진(鎭)을 설치하여, 그 옛 땅을 모두 회복하였다.
주요 내용 정리:
- 종교 정책: 불교 종파 정리, 이단 억제.
- 인재 등용: 집현전 설치, 과거 시행.
- 효심: 왕후의 병간호, 태종의 상 치름.
- 명과의 외교: 조공, 사신 파견, 칙서 및 하사품 수령.
- 국방 강화: 야인 정벌, 북방 영토 회복.
- 기타: 감로 현상.
추가 설명:
이 기록은 세종대왕의 내치와 외교, 효심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북방 영토를 회복한 업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 정책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로 현상은 당시 사람들이 세종의 덕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을묘년(乙卯年) 봄, 선종(宣宗)이 붕어하고 지금의 태상황제(太上皇帝, 명나라 영종)가 즉위하니, 표문을 올려 위로하니, 천자가 사신을 보내 금단(錦段)을 내려주었다. 정통(正統) 무오년(戊午年) 8월, 또 원유관복(遠遊冠服)을 내려주었다. 임술년(壬戌年) 5월, 달달(韃靼)의 사신이 글을 가지고 우리나라 북쪽 변방에 이르러 회유하니, 변방 장수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명의 임금이 없다. 지금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너희는 어찌 불의한 말을 하는가?” 하고 드디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종이 급히 경사(京師)에 보고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려주었다. 갑자년(甲子年) 봄,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유한 변방 일을 모두 능히 준행하여 어긋나거나 게을리함이 없으니, 왕은 참으로 현명하도다!” 하고 특별히 곤룡포(衮龍袍)를 내려주어 특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岐島) 등의 섬의 왜적(倭賊)이 상국(上國, 명나라)의 연해 지방을 침략하고, 또 우리나라 제주(濟州)의 경계를 침범하므로, 변방 장수가 사로잡았으나 다 잡지 못하고, 조금씩 본 섬으로 도망쳐 돌아간 자가 있었다. 세종이 사람을 보내 섬의 섬주(島主)에게 사로잡아 보낼 것을 타이르니, 섬주가 엎드려 명을 받들어 모두 수색하여 잡아 보내니, 드디어 경사(京師)로 돌려보내 천벌을 받게 하였으니, 전후로 모두 60여 명이었다. 천자가 매우 가상히 여겨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왕이 능히 너의 선왕(先王)이 하늘을 공경하고 큰 나라를 섬기던 마음을 본받아 공손함을 지극히 하여 정성을 펴니,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해진다. 이에 조정이 보살피고 대우함이 더욱 융성하니, 가히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사이가 없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 또 변방을 침범한 왜적을 포박하여 보내니, 왕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변방을 지키는 데 사람을 잘 써서 흉악함을 막는 공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조정이 착한 것을 가상히 여기고 현명한 자를 중히 여겨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니, 이른바 ‘덕이 두터운 자는 총애와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니, 왕이 바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동량북주(東良北住) 올량합(兀良哈) 낭보야은두(浪甫也隱豆)는 일찍이 아비를 시해한 자이다. 이 해에 와서 조회하니, 세종이 “대역(大逆)의 사람은 천지(天地)가 용납하지 못하고, 왕법(王法)이 용서하지 않는다. 동량북은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으니, 오랫동안 왕의 교화를 입었으니, 주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여겨,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국경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게 하고, 야인(野人)에게 교유(敎諭)하니, 야인 등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을축년(乙丑年), 나라를 근심하는 데 힘쓰다가 병을 얻으시니, 지금의 전하(殿下, 문종)에게 명하여 모든 정사를 함께 결정하게 하였다. 병인년(丙寅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모든 소리와 운(韻)의 변화를 다하였으니, 오랑캐와 한(漢)의 여러 소리를 번역하는 데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제작이 정밀하고 미묘하니, 가히 고금을 초월한다고 이를 만하다. 무진년(戊辰年), 원손(元孫, 단종의 어휘)을 왕세손(王世孫)으로 봉하였다.
기사년(己巳年) 가을, 지금의 황제 폐하(명나라 영종)가 천하를 다스리게 되니, 표문을 올려 하례하고, 또 말을 바쳐 변방의 방비를 도우니, 황제가 한림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과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을 보내 비단과 베를 내려주었다. 우리나라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명나라 태조) 때부터 구장면복(九章冕服)을 받았으니, 품계가 친왕(親王)과 같았다. 오직 왕세자(王世子)에게는 면복(冕服)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부족하게 여겼다. 세종이 칠장면복(七章冕服)을 청하니, 마침내 윤허하는 소리를 들었다.
세종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날마다 수강궁(壽康宮)에 문안드리니, 즐거운 얼굴과 부드러운 용모로 사랑하고, 옥(玉)을 잡고 술잔을 받드는 공경함은, 이전 시대의 제왕들이 미치지 못한 바였다. 상(喪)과 제사(祭祀)를 맞이함에, 예(禮)를 다하고 지극한 정성을 다하니, 모두 법도에 맞았다. 비빈(妃嬪) 이하를 은혜로 대우하되, 각기 그 분수에 맞게 하니, 불화하는 말이 없었다. 여러 아들을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치니, 적자와 서자의 존비(尊卑)와 의장(儀章), 은혜의 정도가 분명하게 차등이 있었고, 모두 학문을 좋아하고 이치를 통달하여, 마침내 교만하고 게으르거나 사치스러운 습성이 없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니, 구슬과 옥이 서로 연결된 듯하고, 기러기가 줄지어 들어가는 듯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시경(詩經)》의 〈종사(螽斯)〉와 〈인지(麟趾)〉의 경사가 있다고 탄식하였다.
주요 내용 정리:
-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지속: 황제 즉위 시 축하 사절 파견, 조공 및 하사품 수령, 변방 문제 협력.
- 국방 강화 및 외적 대응: 달달의 회유 거부, 왜구 소탕, 북방 야인에 대한 강경 대응.
- 주요 업적: 훈민정음 창제.
- 왕실 예법 정비: 왕세자 면복 청원, 상례 및 제례 준행.
- 가정 생활: 효심, 가족 간의 화목, 자녀 교육.
추가 설명:
이 부분은 세종의 외교, 국방, 문화, 가정 생활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면서도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적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비롯하여, 왕실의 예법을 정비하고 가족을 화목하게 이끄는 모습에서 성군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경(詩經)》의 〈종사(螽斯)〉와 〈인지(麟趾)〉의 경사가 있다”는 표현은 자손이 번성하고 어진 인물이 많이 나올 것을 비유하는 것으로, 세종의 가정과 그 후손에 대한 높은 평가를 보여줍니다.
처음에 태종이 제(禔, 양녕대군)를 외부에 내쫓았으나, 세종은 때때로 불러 보고, 마침내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친애함에 꺼리낌이 없으니, 여러 신하들이 굳게 불가하다고 주장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두 형을 섬기고 여러 아우들을 대우함에, 형제로서의 정을 다하였다. 종실의 여러 친척 또한 자주 만나 보고,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화합하게 하였다. 복상(服喪) 중인 친척은 모두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었고, 멀리 시골에 한가롭게 사는 자들에게도 또한 집집마다 세금을 면제하여, 구휼하였다. 외척(外戚)에 이르러서도 대우함이 또한 마땅함을 얻었다. 또 종학(宗學)을 설치하여, 태조의 손자로서 종실에 속한 자는 모두 학업을 받도록 하니, 가르치고 기르는 도리가 지극하였다. 여러 신하를 예로써 대우하되, 착한 일을 칭찬하고 능하지 못한 자를 불쌍히 여겨, 형벌을 받은 자가 없었다. 환관(宦官) 등의 무리에게는 엄숙하게 대하되, 권력을 맡기지 않았다.
큰 나라를 섬기는 예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모든 진헌(進獻)하는 문서와 토산물을 모두 직접 검사하였으므로, 역대 성군들의 총애와 은혜를 받았고, 내려주신 물품의 융성함과 포상의 말씀은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었다. 왜(倭)나라에서 보물을 바치고, 야인(野人)이 폐백을 드리니,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높이고 친애함에 감격하고 흠모함이 마음에서 우러나왔다. 전주(銓注)를 세워 관리를 내치고 등용하는 법을 세우니, 지극히 정밀하고 갖추어져, 요행을 바라는 것이 사라지고, 현명하고 어진 사람이 등용되었다. 수령(守令)이 이임(離任) 인사를 하러 오면, 인견(引見)하여 얼굴을 마주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정사를 타이르니, 사람마다 스스로 힘썼다. 농사와 양잠에 뜻을 두어, 책을 지어 권유하고, 밭을 갈고 곡식을 심는 것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즐거이 근본에 힘썼다. 부세(賦稅)를 거두는 폐단을 없애고, 일정한 공법(貢法)을 정하니, 땅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해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위아래로 세금을 매기니, 삼대(三代)의 공(貢)과 철(徹)의 옛 법을 회복하였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종(鍾)과 경(磬)을 만들게 하고, 율(律)을 불어 음(音)을 맞추니, 아악(雅樂)이 일신되었고, 회례(會禮)에 비로소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다. 또 조종(祖宗)의 공덕을 서술하여, 《정대업(定大業)》, 《여민락(與民樂)》 등의 음악을 지으니, 소리와 용모의 아름다움이 지극하였고, 《당속악보(唐俗樂譜)》를 지어 느리고 빠른 곡조를 고르게 하니, 사람들마다 악보에 따라 연주하여, 스승에게 배우는 수고로움이 없으니, 여러 음악이 각기 그 바른 가락을 얻었으니, 또한 이전 시대에 없었던 일이었다. 고금을 참고하여 《오례의(五禮儀)》를 정하니, 뜻과 문체의 갖춤을 다하였다. 비로소 양로연(養老宴)의 예(禮)를 설치하니, 남자에게는 임금이 직접 나아가고, 여자에게는 왕비가 직접 잔치를 베풀어주었고, 주(州)와 군(郡)에 있는 자는 수령이 직접 잔치를 베풀어주었고, 100세 이상인 자에게는 달마다 술과 고기를 보냈고,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작위를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이에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재앙을 만나면 하늘을 두려워하고, 흉년을 구제하고 백성을 구휼함에, 마음과 힘을 다하니, 모두 실질로 하였고 꾸밈으로 하지 않았다. 《칠정(七政)》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을 수정하고, 여러 의상(儀象)과 규표(圭表) 및 《흠경(欽敬)》, 《보루(報漏)》 등의 누각(樓閣)을 만드니, 혼상(渾象), 성귀정시의(星晷定時儀), 앙부의(仰釜儀), 한양(漢陽)의 해 뜨고 지는 시각의 분(分)까지, 모두 직접 창제하였다. 이에 천문과 역수(曆數)가 비로소 착오가 없어졌다.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지으니, 풍속을 갈고 닦기 위한 것이고, 《명황계감(明皇戒鑑)》을 지으니, 방탕한 즐거움을 막기 위한 것이고, 《통감훈의(通鑑訓義)》,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수정하니, 흥망(興亡)을 거울삼기 위한 것이고, 《역대병요(歷代兵要)》를 모으니,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의약(醫藥)에 관한 여러 책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교정하여 새롭게 하였고, 활자를 만들고, 거리 측량에 쓰는 북[記里鼓] 등의 종류 또한 그 뜻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진설(陣說)》을 지어 진법(陣法)을 익히고, 전함(戰艦)을 더욱 수리하고, 화통(火桶)을 늘려 만들었다. 성곽(城郭)을 수리하고, 갑병(甲兵)을 단련하니, 무비(武備)가 엄정해졌고, 법률(法律)을 밝히고, 송사(訟事)를 공평하게 판결하니, 형벌이 맑아졌다. 술을 경계하고 형벌을 신중히 할 것을, 모두 교서(敎書)로 내려, 관리들을 경계하고 단속하였다. 이때에, 비록 모든 장인(匠人)의 기술이 모두 그 능력을 정밀하게 하였다. 상림원(上林園) 관리가 꽃 그릇을 갖추기를 청하니, 이르기를 “나는 본래 화훼(花卉)를 좋아하지 않으니, 관리는 마땅히 실질에 힘써야 한다. 뽕나무, 닥나무, 과일나무는 모두 일상생활에 절실하니, 너희들은 지금 이후로, 이것으로 직무를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일찍이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지난날을 두루 살펴보니, 태평한 세상에도 오히려 옷자락을 잡고 간언(諫言)하는 자가 있었다. 지금 비록 소강(小康)이지만, 옛날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감히 말하는 자가 보이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하고 항상 마음을 열어 간언을 구하고, 힘써 모든 말을 다하게 하니, 말이 비록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일찍이 죄를 주지 않았고,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반드시 대신과 더불어 의논한 후에 시행하였으므로, 지나친 일이 없었다.
주요 내용 정리:
- 인재 중용 및 관리 통솔: 종실 및 외척 대우, 종학 설립, 신하 예우, 환관 견제.
- 대외 관계: 명과의 외교 강화, 조공 및 하사품 수령, 주변국과의 관계 유지.
- 경제 및 민생 안정: 농업 장려, 세제 개혁, 재해 구휼.
- 문화 및 예술 발전: 아악 정비, 악서 편찬, 오례 정비.
- 과학 기술 발전: 천문 기구 제작 및 역법 개정.
- 국방 강화: 군사 훈련, 무기 개발, 성곽 수축.
- 법치 확립: 법률 정비, 공정한 재판.
- 간언 장려: 대신들과의 소통 중시, 비판 수용적인 자세.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庚午年) 봄 2월, 병환이 드시어 의원들이 의술을 다하고 신에게 두루 기도하였으나, 끝내 효험이 없었다. 17일 임진일, 별궁(別宮)에서 훙서(薨逝)하시니, 향년 54세이고, 재위 기간은 33년이었다. 신하와 백성들이 은택을 입어, 모두 “큰 덕은 반드시 장수하여 영원히 만년을 누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갑자기 만백성을 버리셨으니, 아, 슬프도다! 크고 작은 신료로부터, 가마꾼, 하인, 종에 이르기까지, 소리 내어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금의 전하(殿下, 문종)께서 유명을 받들어 재궁(梓宮) 앞에서 왕위에 오르시니, 상중(喪中)의 예(禮)를 다하고,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책보(冊寶)를 받들어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칭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 하였다. 여름 6월 12일 갑신일, 영릉(英陵) 서쪽 방에 합장(合葬)하였으니, 또한 유언이었다. 부고(訃告)가 전해지자, 천자(天子, 명나라 황제)가 크게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 제사(祭祀)를 지내주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諡號)를 장헌(莊憲)이라 하고, 우리 전하(殿下, 문종)에게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내려주고, 여전히 왕작(王爵)을 습봉(襲封)하게 하고, 곤면(衮冕) 구장(九章)과 왕비(王妃)의 관복(冠服)을 내려주었으니, 우리 전하에게 내린 고명에 대략 이르기를 “옛 조선 국왕 이(李, 세종의 이름)는 자혜(慈惠)하고 겸손(謙恭)하며, 총명(聰明)하고 뛰어나며, 선(善)을 즐기고 이치(理)를 따르며, 아주 작은 일이라도 능히 삼가며, 하늘을 공경하고 윗사람을 섬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정성으로 하였으니, 어짊과 후덕함이 나라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공렬(功烈)이 변방에 드러났다. 조선이 나라를 가진 이래로, 왕과 같은 이는 드물었다. 너 이(李, 문종의 이름)는 그의 세자이니, 충성과 효성이 진실하고, 공경하고 신중함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어른답고 현명하므로, 마땅히 전위를 이어받아야 한다. 오직 충성과 효성으로, 영원히 네 아비의 행실을 따르라.”라고 하였다. 대개 우리 세종의 성대한 덕이 온 세상에 빛나고, 하늘에까지 들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과 영광의 전례가 이와 같이 지극하였다. 아, 성대하도다!
왕후(王后)의 성(姓)은 심씨(沈氏)이고, 청송(靑松)의 명문가이다. 황증조(皇曾祖)의 휘(諱)는 용(龍)이니, 고려(高麗) 증(贈)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이다. 황조(皇祖)의 휘는 덕부(德符)이니,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두 번 문하시중을 지냈고, 우리 공정왕조(恭靖王朝, 조선)에 이르러,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이 되었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황고(皇考)의 휘는 온(溫)이니,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지냈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다. 황비(皇妣) 안씨(安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고, 돈녕부사(敦寧府事) 천보(天保)의 딸이다. 왕후는 태어나면서부터 어질고 온순하였으므로, 태종이 묘하게 선택하여 빈(嬪)으로 맞아들이니,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하였다. 두 궁(宮, 태종과 원경왕후)을 공경히 섬기어, 은혜와 총애를 돈독히 받았다. 세종이 왕세자(王世子)에 봉해지자, 왕후는 경빈(敬嬪)에 봉해졌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는 공비(恭妃)에 봉해졌다. 선덕(宣德) 임자년(壬子年)에, 예관(禮官)의 말에 따라, 아름다운 칭호를 없애고, 왕비(王妃)로 고쳐 봉하였다. 왕후는 그윽하고 한가하며 정숙하고 조용한 덕이 있었으니, 세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왕후의 나아가고 물러남에, 세종은 반드시 일어나 맞이하고, 깊이 공경하는 예(禮)를 더하였다. 왕후가 중궁(中宮)이 되어서는, 여러 차례 천자(天子)의 하사품을 받았다. 왕후는 빈(嬪)과 잉(媵), 아래로는 시첩(侍妾)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로 대하였고, 서출(庶出)의 아들을 보되, 모두 자신이 낳은 아들처럼 어루만지고 사랑하였다. 어선(御膳)을 올릴 때에는 반드시 직접 살펴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간(諫)하는 도움은 있었으나, 사사로운 청탁은 행하지 않았다. 안살림을 바르게 하니, 교화가 나라에 흘러, 멀리 태사(太姒, 주 문왕의 비)의 풍모를 따랐다. 정통(正統) 병인년(丙寅年) 봄, 병을 얻으니, 세종이 밤낮으로 임하여 살피고, 우리 전하(殿下, 문종)는 곁에서 모시며 탕약(湯藥)을 올렸다. 3월 24일 신묘일 훙서(薨逝)하니, 향년 52세이고, 시호(諡號)는 소헌(昭憲)이다. 7월 19일 을유일, 영릉(英陵) 동쪽 방에 안장(安葬)하였다.
주요 내용 정리:
- 세종의 죽음과 장례: 병환, 훙서, 백성들의 슬픔, 문종의 즉위, 장례 절차, 묘호 및 시호 추증.
- 명나라의 반응: 부고에 대한 애도, 제사, 시호 하사, 문종의 왕위 계승 인정.
- 소헌왕후의 가계와 인품: 명문가 출신, 태종의 선택, 세종과의 관계, 내명부에서의 역할, 병환과 죽음.
우리 전하(殿下, 문종)의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는 증(贈)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전(專)의 딸이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고 훙서(薨逝)하였으니, 아들은 (端宗御諱, 단종의 이름)이고, 지금 왕세자(王世子)에 봉해졌고, 딸은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니,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사칙(司則) 양씨(楊氏)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은 증 좌의정(贈左議政) 윤번(尹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으니, 장남은 (德宗御諱, 덕종의 이름)이고, 도원군(桃源君)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측실 박씨(朴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증 좌의정(贈左議政) 정연(鄭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우직(友直)이고, 의춘군(宜春君)이고, 차남은 우량(友諒)이고, 덕양정(德陽正)이다. 임영대군(臨瀛大君)은 증 우의정(贈右議政) 최승녕(崔承寧)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장남은 주(澍)이고, 오산군(烏山君)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자수(申自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부(溥)를 낳았으니, 영순군(永順君)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증 좌의정(贈左議政) 최사강(崔士康)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평원대군(平原大君)은 증 좌의정(贈左議政) 홍이용(洪利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아들이 없다. 영응대군(永膺大君)은 증 좌의정(贈左議政) 정충경(鄭忠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화의군(和義君)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측실 김씨(金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계양군(桂陽君)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한확(韓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의창군(義昌君)은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김수(金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한남군(漢南君)은 호조 정랑(戶曹正郞) 권격(權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밀성군(密城君)은 인수부 소윤(仁順府少尹) 민승서(閔承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수춘군(壽春君)은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정자제(鄭自濟)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익현군(翼峴君)은 예빈시 소윤(禮賓寺少尹) 조철산(趙鐵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영풍군(永豐君)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박팽년(朴彭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영해군(寧海君)은 증 좌찬성(贈左贊成) 신윤동(申允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정정의공주(貞懿公主)는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딸 중 장녀는 돈녕부승(敦寧府丞) 정광조(鄭光祖)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정현옹주(貞顯翁主)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의춘군(宜春君)은 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신(臣)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조화의 오묘함은 사물에 나타나고, 성인의 마음은 정치에 나타난다. 오직 우리 세종은 나면서부터 아는 성인(生知之聖)으로서, 중(中)을 세우고 극(極)을 세워, 인륜(人倫)의 지극함을 이루었고, 선(善)을 계승하고 선을 서술하여, 제왕의 효도를 밝혔다. 구족(九族)이 이미 화목하고, 만백성이 화합하니, 모든 정사가 다 조화롭고, 명성이 온 세상에 가득하였다. 천자(天子, 명나라 황제)는 그 충성스럽고 현명함을 칭찬하여, 내려주신 것이 매우 많았고, 이웃 나라들은 그 성실함과 신의를 존경하여, 사신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신이 10년 동안 모시었고,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 20여 년 동안 출입하며, 밝은 덕을 가까이 하였으니, 진실로 광대함을 이루고 정미함에 이르며, 지극히 고명하면서도 중용의 도를 다하였으니, 실로 동방의 요(堯), 순(舜)이라고 하겠다. 소헌왕후(昭憲王后)는 곤후(坤厚)한 덕으로, 건강(乾剛)한 성인을 배필로 맞이하여, 한 나라의 국모(國母)가 되어, 교화가 사방에 미쳤다. 또한 아들을 많이 두는 경사가 있었으니, 우리 전하(殿下, 문종)를 낳아, 성스러운 덕으로 대통(大統)을 잇게 하였다. 또 물고기가 줄지어 가는 듯한 총애를 받았으니, 메뚜기 날개처럼 많은 자손을 두었다. 진실로 하늘이 맺어준 배필로서 주(周)나라의 태사(太姒)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견줄 만하다고 하겠다.
주요 내용 정리:
- 문종의 가족 관계: 왕후, 후궁, 자녀들의 정보 (이름, 작위, 혼인 관계 등).
- 세종의 업적에 대한 찬양: 성인으로서의 자질, 정치적 업적, 대외 관계, 명나라와 주변국의 평가.
- 소헌왕후에 대한 찬양: 덕망, 내조의 공, 많은 자녀를 낳은 복.
신(臣)의 필력이 거칠고 졸렬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 없으니, 거의 천지의 큼을 그리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리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명을 받았으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손을 모아 머리 숙여 명(銘, 찬문)을 바치나이다.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을 이어받아 중화(重華)가 진실로 부합되었고, 무왕(武王)은 문왕(文王)을 이어받아 큰 업을 능히 창성하게 하였으니, 덕이 성대하면 제(帝)가 되고, 공이 높으면 왕(王)이 되는 것입니다. 빛나고 뚜렷하여 문채가 있고, 이에 큰 광명을 내리셨으니, 어진 이와 아들에게 전하는 것은 하늘이 진실로 명한 것입니다. 혹은 선양하고 혹은 계승하니, 오직 공변됨이요 사사로움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 세종은 하늘이 내린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셨으니, 효성스럽고 공손한 천성과 충성스럽고 신실한 자질을 갖추셨습니다.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시어, 주공(周公)의 뜻과 공자(孔子)의 생각을 깊이 연구하셨습니다. 밝고 밝으신 태종께서는 오직 기미를 살피심이 깊고 또 깊으셨으니, 어두운 이를 폐하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시니, 요 임금과 문왕의 마음이셨습니다. 조정에 널리 아뢰니, 황제께서 윤허하는 말씀을 내리셨고, 이윽고 부지런함에 지치시어, 이에 왕위를 선양하셨습니다. 천자께서 명을 내리시니, 천자의 사신이 이에 이르렀고, 천자께서 잔치를 내리시니, 두루 행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도(道)가 그 몸에 쌓이니, 총명하고 지혜로우셨고, 밤늦게 옷을 입고 새벽에 식사하시며, 정성을 다하여 정치를 도모하셨습니다. 능히 책임을 이어받으니, 부왕께서 기뻐하셨고, 두 궁(宮)을 즐겁게 해드리니, 즐거운 얼굴과 부드러운 용모이셨습니다. 용루(龍樓)에서 문안드리니, 더욱 공손하고 더욱 공경하셨고, 상(喪)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하늘에서 감로(甘露)가 내리니, 그 신령함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궁궐에 계실 때에는 화목하시어, 편애함이 없었고, 가법(家法)이 바르니, 사람들 사이에 불평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맏형이 외부에 있었으나, 와서 뵙는 것이 끊이지 않았고, 이윽고 불러 돌아오게 하시니, 공경하고 사랑함이 더욱 돈독해지셨습니다. 마음으로 인하니 벗이 되고, 이에 형제간에 화목하였고, 그 즐거움이 심오하니, 형제들이 서로 빛내었습니다. 구족(九族)에 이르기까지, 은택을 널리 베푸셨고, 씩씩한 자손들이 많으니, 번성함이 메뚜기 떼와 같았습니다.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치고, 글을 읽고 시를 외우게 하니, 의장(儀章)에 차등이 있어, 적자와 서자 모두 마땅하였습니다. 여러 신하를 예로써 대우하니, 형벌을 더하지 않았고, 지극한 정성으로 큰 나라를 섬기니, 천자께서 칭찬하고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무엇을 내려주셨는가? 띠고리와 보배로운 칼을 내려주셨고, 또 무엇을 내려주셨는가? 곤룡포를 내려주셨습니다. 예로써 이웃 나라와 사귀니, 이웃 나라들이 화합하였고, 사신이 폐백을 가지고 오니, 만 리가 한 집안과 같았습니다. 백성들이 이미 부유하고 넉넉해지니, 인의(仁義)에 점차 젖어들었고, 인(仁)에 그치고 효(孝)에 그치고, 공경에 그치고 신의에 그치셨습니다. 중(中)을 세워 화(和)에 이르니, 인륜이 요순과 같았습니다. 관리 선발 법이 정밀하니, 요행을 바라는 것이 사라졌고, 현명한 이를 등용하고 능한 이를 쓰니, 각기 그 직분에 마땅하였습니다. 전제(田制)가 이미 정해지니, 간사한 관리의 손이 움츠러들었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으니, 세금 부과가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천문 기구를 만들고, 이어서 역법을 정하였고, 오례(五禮)를 가감하니, 뜻과 문체의 지극함이었습니다. 새로운 음악의 소리와 용모는 조종(祖宗)의 공덕이었고, 회례(會禮)에 아악을 쓰니, 비로소 여악을 물리쳤습니다. 직접 양로연(養老宴)에 나아가시니, 가을에 예식으로 삼았습니다. 서적과 역사를 편찬하여, 잘잘못을 거울삼았고, 훈민정음을 지어, 낡은 풍속을 일소하였습니다. 토산물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니, 천자의 칙서가 있었고, 세자의 칠장면복은 온 나라를 빛나게 하였습니다. 모든 시행한 것이, 연(燕)나라의 익(翼)처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 없었고, 북쪽 변방에 진(鎭)을 세우니, 옛 강토를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위엄과 덕이 멀리까지 미치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군대를 북쪽으로 보내니, 오랑캐의 무리가 숨을 죽였고, 곧바로 소굴을 치니, 저절로 전복되었습니다. 척서(尺書)를 남쪽으로 보내니, 왜노(倭奴)가 포박되었고, 경사(京師)로 돌려보내니, 드러난 형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다스려질 때에도 혼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성보(城堡)는 험한 곳에 의지하여 세우고, 창과 칼을 만들었고, 전함을 새로 만드니, 굳세기가 철과 돌 같았고, 화통(火桶)이 발사되니, 빠르기가 번개와 같았습니다. 군수 물자와 기계는 이전 시대를 훨씬 뛰어넘었고,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더욱 극진히 하여 구휼하였고, 형벌은 공평하고 올바르니, 억울함을 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장인의 기술이 모두 법도에 이르렀고, 완호(玩好)를 좋아하지 않고, 오직 질박함에서 따르셨습니다. 더욱 겸손함을 지키시어, 말씀을 구하기를 목마른 듯이 하셨습니다. 높고 높은 덕과, 무성하고 성대한 문채는, 그 성대함을 이름 짓기 어렵고, 그 큰 공훈은 더할 나위가 없으니, 우(虞), 주(周)와 짝하고, 한(漢), 당(唐)에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33년 동안, 아비가 되고 임금이 되셨으니, 하늘이 돌보지 않으시어, 갑자기 신민을 버리셨습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슬픔에 잠기고, 애모함이 친부모와 같았습니다. 우리 임금(문종)께서 왕위를 이으시니, 지극한 효성이 본성에서 나왔고, 밝음으로 밝음을 잇고, 성스러움으로 성스러움을 이으셨습니다. 산릉(山陵)의 상례(喪禮)는 모두 유명을 따르셨고, 천자께서 조문하시고, 제사를 내리고 애사(誄辭)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절(節), 혜(惠)로 이름을 정하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내리셨고, 후한 부의(賻儀) 또한 이르렀으니, 구휼의 전례가 갖추어졌습니다. 왕작을 이어받게 하시고, 면복(冕服)을 내려주셨고, 왕비에게까지 미치니, 주관(珠冠)과 유적(褕翟)을 내려주셨습니다.
천자(天子, 명나라 황제)의 은혜는 실로 융숭하고 두터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왕후(王后, 소헌왕후)는 하늘의 누이와 같으신 분입니다. 왕가(王家)에 와서 빈(嬪)이 되시어, 안(內)의 바른 자리에 계셨으니, 태사(太姒)의 덕은 문왕(文王)의 배필이었습니다. 독실하게 성주(聖主, 세종)를 낳으시니, 큰 기틀이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이에 아들을 많이 두시니, 기린(麒麟)이 시에 읊어지듯 하였습니다. 실로 우리 동방(東方, 조선)의 영구한 경사입니다. 아, 슬프도다 선왕(先王)! 흥망(興亡)의 거울을 탄식합니다. 별이 다섯 바퀴 돌기도 전에, 갑자기 활과 칼(왕의 죽음을 비유)을 남기셨으니, 산을 인하여 능(陵)을 삼고, 같은 궁궐 다른 방에 계십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해와 같은 이마(日角, 제왕의 상징)를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 아픕니다. 오직 이 성대한 덕은 만대에 한결같을 것입니다. 삼가 대략적인 내용을 지어, 머리 숙여 명사(銘詞, 찬사)를 바칩니다. 하늘이 길고 땅이 오래도록, 빛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실록을 살펴보니, 이 비석에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 김조(金銚)가 지은 음기(陰記, 비석 뒤에 새기는 기록)가 있고, 아울러 당대 명신(名臣)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나, 지금은 고증할 수 없다.)
공조판서(工曹判書) 신 정인지(鄭麟趾)가 짓다.
주요 내용 정리:
- 명나라 황제의 은혜에 대한 언급.
- 소헌왕후의 덕을 칭송하고, 세종과의 사이에서 많은 아들을 낳은 것을 축복함.
- 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슬픔과 영릉에 안장된 사실을 언급.
- 세종의 덕이 영원할 것임을 기원하며 찬사를 바침.
- 비석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 (김조의 음기, 명신들의 이름).
- 찬문을 지은 사람 (정인지) 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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