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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번역 134

상왕 상존호 책문 (정종 2년 경진년 11월, 태종이 선위를 받았다. 12월에 모든 관리를 거느리고 상왕(정종)의 앞에 책보(冊寶)를 올리고, 이어 수를 바쳤다.)

덕은 친애(親愛)를 돈독히 함으로써 사양(辭讓)의 빛을 드러내고, 예는 존숭(尊崇)에 합당하게 함으로써 더욱 훌륭한 이름을 드높이는 도리를 돈독히 합니다. 이에 떳떳한 법전(法典)을 따라 이에 아름다운 칭호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품은 온화하고 문(文)에 바탕을 두셨으며, 마음은 효성과 우애로 가득하십니다. 태상왕(太上王, 태조)을 이어 정사에 나아가 능히 그 도리를 편안히 하셨고, 어린 임금(태종)을 보호하시어 인(仁)을 다하시어 이에 왕위를 물려주셨습니다. 물려받아 돌아온 실마리를 돌아보시며, 오로지 보답하는 마음을 품고 계십니다. 신은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존호(尊號)를 올려 인문공예상왕(仁文恭睿上王)이라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도를 즐기시며 한가롭게 지내시고,..

선위 교서(무인년 9월 초닷새 정축일, 태조가 직접 교서를 내리고, 세자가 받아 품에 넣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부덕(否德)한 몸으로 조상의 음덕을 이어받고, 천자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처음 세우고, 신하와 백성을 다스린 지 지금 7년이 되었다. 이에 오랫동안 군대 생활을 하여 서리와 이슬을 무릅쓴 탓에, 금년에 이르러 노쇠한 병이 생겨 밤낮으로 정사를 보기 어려우니, 여러 사무가 많고 급하여 혹 잘못되는 일이 많을까 염려된다. 생각건대 너 왕세자(정종의 옛 이름)는 적장자(嫡長子)의 자리에 있으며, 평소에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드러났고, 또한 개국 초기에 도와서 공을 많이 세웠으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모두 이를 알고 있다. 이에 홍무(洪武) 31년 9월 초닷새에 종묘에 고하고, 이에 왕위를 너에게 물려주노라. 너는 마땅히 법도를 따르고,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며, ..

봉왕세자교문 (태조 7년 무인년 8월 26일 기사. ○ 책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적자를 세워 맏아들로 삼는 것은 만세의 떳떳한 이치이고, 종자를 나라의 울타리로 삼는 것은 과인의 바람이다. 생각건대 너의 아비(태조 자신)가 일찍이 나라를 세웠으나, 맏아들을 버리고 어린 아들을 세운 것은 곧 방석(芳碩, 의안대군)을 세자로 삼은 것은, 단지 나의 사사로운 사랑에 밝지 못한 과오일 뿐만 아니라, 도전(道傳), 은(誾) 등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만약 초나라에서 어린 아들을 사랑한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을 인용하여 조정에서 간쟁하였다면, 내가 어찌 따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도전 등의 무리는 간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방석)가 세워지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며칠 전 도전, 은, 효생(孝生), 지화(至和) 등이 몰래 불측한 일을 꾀하여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었으나..

후릉지문 (세종 2년 경자년)

영락(永樂) 17년 기해년(己亥年, 1419년) 가을 9월 26일 무진일(戊辰日)에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 정종)의 승하(晏駕)하심에, 우리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 태종) 전하와 우리 주상(主上, 세종) 전하께서 슬퍼하고 그리워함이 지극하여, 상례(喪禮)를 다하고, 위로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올렸다. 이듬해 경자년(庚子年, 1420년) 정월 초사흘 임인일(壬寅日)에 예에 따라 송경(松京, 개성) 해풍군(海豐郡)에 있는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에 합장하였으니, 이는 유언이었다.대왕은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의 둘째 아들이시다. 천성적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공손하고 신중하며, 용맹과 지략이 남달랐다.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장상(將相)에 이르렀다. 항..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행장(세종 원년 기해년, 부고 사신 도총제 권희달과 부윤 서선이 서울로 가서 시호를 청하였다.)

전 권서국사(前權署國事, 이전에 임시로 국사를 맡았던) 휘(諱) 경(曔)의 자(字)는 광원(光遠)이며, 강헌왕(康獻王, 태조)의 적자(嫡子)로 정유년(丁酉年, 1357년) 7월 초하루에 태어났다. 성품이 순수하고 신중하며, 뜻과 행동이 단정하고 바르다. 무략(武略)에 뛰어났으며, 일찍이 강헌왕을 따라 여러 도적을 쳐부수어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경오년(庚午年, 1390년)에는 예산(禮山)에서 왜구를 잡아 바치고 승리를 보고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398년) 가을 9월에 아버지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아 3년간 재위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400년) 겨울 11월에 병으로 인해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한가롭게 지내며 병을 치료하기를 20년간 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419년) 9월 26일에 정침(..

정릉(貞陵) 표석(表石)의 음기(陰記)[앞면에는 큰 전서체(篆書體)로 ‘조선국 신덕왕후 정릉(朝鮮國神德王后貞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정릉(貞陵) 표석(表石)의 음기(陰記), 즉 뒷면에 새겨진 기록입니다. 정릉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즉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입니다.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는 태조대왕(太祖大王)의 계비이시다. 6월 14일에 탄생하셨다. 홍무(洪武) 25년 임신년(壬申年)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셨다. 병자년(丙子年) 8월 13일에 승하(昇遐)하셨다. 정축년(丁丑年)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에 장사지냈다. 영락(永樂) 7년 기축년(己丑年) 2월 23일에 양주(楊州) 남사하리(南沙河里) 경좌(庚坐)의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현종(顯宗) 기유년(己酉年)에 태묘(太廟), 즉 종묘에 추부(追祔)되었다.”각 용어에 대한 설명:정릉(貞陵): 신덕왕후의 능 이름입니다..

부묘 후 기유년(己酉年) 10월 초이틀 임술일(壬戌日)에 반포된 교서

임금이 이르기를, “선대의 추부(追祔) 의식을 거행하여, 종묘의 큰 일(제사)을 행하였으니, 온 나라가 함께 경축하는 뜻을 알리노라. 이는 사람의 인정(人情)이 편안히 여기는 바이며, 천도(天道)가 반드시 회복됨을 믿는 것이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우리 선후(先后, 선대 왕후)께서는, 실로 개국(開國)의 현비(顯妃)이시다. 지위는 중궁(中宮, 왕비의 자리)에 바르셨고, 천자의 명을 받으셨으며, 나라에 임하시어, 처음으로 풍화(風化)의 기틀을 여셨다. 비록 시대가 바뀌었으나, 오히려 아름다운 명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날의 간언(諫言)을 돌이켜 생각하니, 성조(聖祖, 태조)의 애통함이 더욱 깊으셨고, 산릉(山陵, 능)을 받들어 모시니, 선묘(獻廟, 태종)의 정성스러운 효성이 지극하였다. 오직 배식(配食,..

기유년(己酉年) 10월 초하루 신유일(辛酉日)에 거행된 부묘 제문

기유년(己酉年, 1669년) 10월 초하루 신유일(辛酉日)에 거행된 부묘제(祔廟祭)의 제문(祭文)입니다. 여기서 '대비(大妃)'는 신덕왕후(神德王后)를 가리키며, '열조(烈祖)'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킵니다. 즉, 이 제문은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 즉 부묘 의식에서 사용된 제문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대비(大妃, 신덕왕후)께서는 열조(烈祖, 태조)의 배필이 되시어, 중국 조정의 명을 받으시고, 왕실의 안주인이 되셨습니다. 덕스러운 말씀은 비록 멀어졌으나, 아름다운 명칭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부묘의 예가 거행되지 않은 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밝게 오르내리시니, 마치 임하시어 돌아보시는 듯합니다. 어린 저로서는, 이에 두려워합니다. 늦가을 첫날, 날과 시각이 길합니..

휘호를 추상한 옥책문 [현종 10년 기유년(1669년). 실록에 의거하면, 태조 원년 임신년(1392년) 8월 7일 병진일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고, 원당기(願堂記)에 의하면 훙서(薨逝)한 해는 병자년이며, 사후에 신덕(神德)으로 추시(追諡)되었으나, 두 책봉문(현비 책봉문과 신덕 추시문)은 전해지지 않고, 애책(哀冊, 왕후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현종 10년(1669년)에 신덕왕후에게 휘호(徽號)를 추상(追上, 사후에 올림)하며 올린 옥책문(玉冊文)입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태조 원년(1392년) 8월 7일에 현비(顯妃, 신덕왕후)로 책봉되었고, 원당기(願堂記)에 따르면 병자년에 훙서(薨逝)하였으며, 사후에 신덕(神德)으로 추시(追諡)되었으나, 당시의 책봉문과 시호문, 애책(哀冊)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 옥책문은 오랜 시간이 흘러 신덕왕후의 위상이 복원된 이후에 작성된 것입니다. “세차(歲次) 기유년(己酉年) 9월 신묘삭(辛卯朔) 29일 기미(己未)에, 효증손(孝曾孫)인 사왕(嗣王) 신(臣, 현종의 이름)은 삼가 다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떳떳한 법도가 오랫동안 빠져 있었으므로, 이에 등배(登配, 왕비로 책봉)..

정릉 고천 제문 (태종 9년 기축년 2월. 신구 능지문은 전해지지 않음.)

태종 9년(1409년) 2월에 신의왕후의 정릉(貞陵)을 천장(遷葬, 이장)하면서 지은 제문(祭文)과, 이후 현종 10년(1669년)에 송시열(宋時烈)이 올린 차자(箚子)입니다. 정릉을 옮긴 이유와 그 의미, 그리고 이후 논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유명(幽明, 저승과 이승)의 이치는, 이치는 하나이나 나뉘면 다르네. 신령의 도(神道)는 청정함을 귀하게 여기니, 어찌 앞사람의 말이 거짓이겠는가? 옛날부터 지금까지 살펴보니, 나라의 도읍에 무덤을 쓴 예가 없네. 예관(禮官)이 이 뜻을 받들어 아뢰니, 크고 작은 신료들이 함께 따르네. 이에 터를 점쳐 푸른 까마귀(靑烏, 풍수지리)로써 하니, 도성 동북쪽 모퉁이에서 얻었네. 물은 졸졸 흐르고, 산은 아득히 굽이쳐 있네. 현궁(玄宮, 무덤)을 두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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