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9년(1409년) 2월에 신의왕후의 정릉(貞陵)을 천장(遷葬, 이장)하면서 지은 제문(祭文)과, 이후 현종 10년(1669년)에 송시열(宋時烈)이 올린 차자(箚子)입니다. 정릉을 옮긴 이유와 그 의미, 그리고 이후 논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유명(幽明, 저승과 이승)의 이치는, 이치는 하나이나 나뉘면 다르네. 신령의 도(神道)는 청정함을 귀하게 여기니, 어찌 앞사람의 말이 거짓이겠는가? 옛날부터 지금까지 살펴보니, 나라의 도읍에 무덤을 쓴 예가 없네. 예관(禮官)이 이 뜻을 받들어 아뢰니, 크고 작은 신료들이 함께 따르네. 이에 터를 점쳐 푸른 까마귀(靑烏, 풍수지리)로써 하니, 도성 동북쪽 모퉁이에서 얻었네. 물은 졸졸 흐르고, 산은 아득히 굽이쳐 있네. 현궁(玄宮, 무덤)을 두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니, 어찌 속세와 가깝다고 하겠는가? 좋은 날을 택하여 옮기는 것을 고하오니, 이에 술을 드려 제사를 지냅니다. 바라옵건대 신령께서 밝게 감응하시어, 슬픈 정성을 펼쳐 아뢰나이다.
수문전 직제학 신 변계량(卞季良)이 짓다.
이 제문은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기는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성 안에 무덤을 두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옮긴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추부 사실
현종 10년 기유년(1669년) 정월 26일 경신일에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차자를 올리기를,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대륜(大倫)을 밝히고 대법(大法)을 세우는 것일 뿐입니다. 이른바 대륜이란, 부자, 군신, 부부이고, 이른바 대법이란, 이 세 가지 사이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밝혀지지 않으면, 이 세 가지 사이에서 행하는 것이 온전하지 못하면, 중국은 오랑캐로 떨어지고, 사람은 금수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스스로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모두 이것을 먼저로 삼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건국한 이래로, 삼강(三綱)이 바르고, 오상(五常)이 밝으니, 중국의 오랑캐 풍속을 일변하고, 삼고(三古)의 큰 도리를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이, 항상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칭하니, 이는 진실로 옳은 말입니다.
불행히도 건국 초에, 간신 정몽주 등이 위태로운 말을 퍼뜨리고, 은밀히 간사한 꾀를 행하여, 태조 대왕께서 천자의 지위를 버리게 하였습니다. 소도(昭悼) 두 공(이방번, 이방석)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 태종 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수한 효성으로, 옛날보다 뛰어나시니,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전하고, 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받은 것이, 질서가 있었습니다. 변고에 처하는 도리가, 당시에도 후세에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오직 신덕왕후의 능침(陵寢)의 의식에 손상이 있고, 배향(配享)의 예가 오랫동안 빠져 있습니다. 이는 다만 당시 예관이 예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헤아린 탓으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대로 답습하고 구차하게 오늘에 이르렀으니, 청묘(淸廟, 종묘) 위에는, 비록 주현소월(朱絃疎越)의 음악과 옥잔황류(玉瓚黃流)의 제사가 있으나, 태조 대왕의 신령께서, 반드시 마음 아파 탄식하고, 크게 노여워하실 것이고, 태종 대왕 또한 반드시 불안해하며, 오르내리는 사이에 어찌할 바를 모르실 것입니다. 겸하여 온 나라의 신민 또한 성자의 신손이, 태종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지 못한다고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히 오늘날 성스러운 효성이 하늘에서 나와, 대왕대비(大王大妃), 왕대비(王大妃)를 섬기는 것이, 정성을 다하고 도리를 다하니, 사람들이 흠잡을 말이 없습니다. 추원(追遠, 먼 조상을 추모함)의 두터움에 미루어, 영원히 근본을 생각합니다. 특별히 예관에게 명하여 정릉을 자세히 살피게 하니, 나무가 무덤을 누르고 있는 것은, 즉시 제거하고, 수호하는 관리와 재사(齋舍)를 차례로 세웠습니다. 어찌 다만 종묘의 신령이 어두운 곳에서 기뻐하겠습니까? 온 세상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고, 모두 성스러운 효성을 우러러봅니다. 이는 어찌 이익으로 유혹하고 위협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천리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기대하지 않아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묘향(廟享, 종묘 제사)의 의식은 오히려 망설입니다. 신은 진실로 성상의 뜻이 있는 바를 아는 고로, 신이 예관과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 일을 찾아보고, 여론을 널리 물어 행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이미 생각해보니, 능의 제사와 종묘의 제사는, 예에 차이가 없는데, 저것은 있고 이것은 폐지되었으니, 일에 근거가 없습니다. 이미 예가 아니라고 한다면, 오십 보가 백 보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지극함을 논한다면, 아름다움을 다하는 것이 훌륭함을 다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입니다. 신은 밤낮으로 안타까워하며, 마치 불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차자는 신덕왕후의 능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종묘에 배향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정몽주 등의 간신 때문에 태조가 어려움을 겪었고, 그 여파로 신덕왕후의 예우가 소홀해졌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효를 중시하는 유교적 관점에서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는 단순히 이익이나 위협 때문이 아니라 천리에 따른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지금 성조(聖祖, 태조) 때 태학생(太學生)의 상소문을 보니, 당시 조정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났음을 알 수 있고, 그 말이 매우 자세하고 간절합니다. 또 신이 가만히 보니 권근(權近)이 명을 받아 지은 《정릉 흥천사 기문(貞陵興天寺記文)》을 통해, 태조 대왕의 애도와 추증의 뜻과, 태조 고황제(명 태조)가 내린 조칙과 위로의 예식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고사(故事)이고, 여론이니, 더 조사하고 물어볼 것도 없이 이미 의심할 바가 없으므로, 감히 (의견을) 제출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한가하신 사이에 자세히 살펴보시고, 특별히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종묘 배향의 의식을 함께 의논하게 하시면, 태조 대왕의 신령께서, 아마도 위에서 기뻐하실 것이고, 태종 대왕 또한 ‘나에게는 후대에 능히 뜻을 이어갈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실 것이며, 반드시 자손 천억에게 영원히 복을 내리는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아! 사람이 생긴 이래로, 부자(夫子, 공자)보다 성대한 분은 없는데, 부자가 위나라 정치를 하려 할 때, 이름을 바로잡는 것(正名)을 먼저로 삼았고, 처음으로 노나라 정치를 할 때, 소공(昭公)의 무덤을 옮겨 합장하였습니다. 대륜(大倫)이 밝혀지지 않고, 대법(大法)이 행해지지 않으면, 비록 성인이 정치를 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이것을 먼저로 삼은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깊이 살펴주십시오.”
이 부분은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과거의 사례와 권근의 기록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자의 정명 사상을 언급하며, 신덕왕후의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민적(李敏迪) 등 여러 신하들이 함께 올린 차자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월 초 5일 무진일에 부제학 이민적, 응교 남이성, 교리 윤심, 이규령, 부교리 김만균, 수찬 홍주국, 부수찬 김만중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천하의 일은, 본래 앞에서 폐지되었으나 뒤에 거행되는 것이 있고, 또한 한때 억울함을 당했으나 만세에 펼쳐지는 것이 있으니, 오직 그 일의 옳고 그름을 볼 뿐입니다. 옛날 제왕들은, 비록 주나라와 한나라의 융성함으로, 제도와 법령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남은 글과 빠진 법전이, 오히려 후대 왕의 추거(追擧)를 기다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성왕(成王)이 선공(先公)을 높인 것은, 무왕(武王)이 행하지 못한 바이고, 한나라 세종(世宗)의 종묘 제도는, 대부분 위(韋)나라와 유(劉)나라 여러 유학자들의 논의에서 고쳐 정해진 것이니, 이는 그 뜻을 이루고, 그 일을 계승하여 큰 효도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정(人情)이 편안히 여기지 못하는 것은, 일이 오래되었다고 하여 폐지해서는 안 되고, 천리(天理)가 없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조종(祖宗)이 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어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이치가 매우 분명하고, 역대의 통례입니다.
지금 신덕왕후의 능묘에 대한 논의는, 대신(大臣)이 이미 발의하였고, 성명(聖明)께서 또한 그 말에 감동하신 바 있습니다. 원릉(園陵)의 제도는, 관리를 두고 물건을 갖추어, 여러 능에 비할 것이니, 성인의 넓은 효도에, 누가 흠모하고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엎드려 듣자 하니 연석(筵席)에서, 성상께서 종묘 제사 한 가지에, 오히려 어렵게 여기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신 등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덕왕후께서 신의왕후가 돌아가신 후에, 성조(태조)께서 가정을 이루어 나라를 세우신 날을 맞아,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고, 한 나라의 어머니의 모범을 누리시어, 정위(正位)에 여러 해가 있었습니다. 지금 옛 유학자 이색(李穡)이 지은 《정릉비(定陵碑)》를 살펴보니, 또한 ‘먼저 모씨(某氏)에게 장가들고, 후에 모씨에게 장가들었다’고 하였으니, 원차(元次, 정실과 첩의 차이)의 구별이 없고, 권근이 지은 《흥천사비(興天寺碑)》를 통해, 봉작을 받고 정위에 오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세종 때 이루어졌는데, 또한 신덕왕후로 기록되어 있으니, 위호(位號)가 바뀌지 않았음이, 이는 또 명백한 증거입니다. 어찌 다시 고증한 후에야 알 수 있겠습니까? 승하하신 후에, 시호를 올리는 것은, 예관에서 폐지하지 않았고, 제사 의식과 축문은, 오히려 향실(香室)에 남아 있습니다. 태종 대왕께서 직접 향을 전하는 축문을 지으셨으니, 그 위호와 축문의 존숭함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않았고, 원릉의 석물(石物)의 갖춤 또한 지극히 숭상합니다. 살아 계실 때는 정비(正妃)가 되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존호를 받으셨고, 중국 조정에서 명을 받았고, 성조와 배필이 되셨으니, 홀로 태묘(太廟)에 배식(配食)되지 못하는 것은, 어찌 인정에 불안하고, 천리에 크게 어긋나며, 성조의 빠진 예법이 되고, 천고의 유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당시 예의를 논하던 신하들이, 어찌 이처럼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일이 알기 어려우니, 굳이 그 득실을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선묘조(宣廟朝, 선조) 신사년(1641년) 간에, 대신과 삼사(三司) 또한 일찍이 건의하였으나, 성대한 예식이 거행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일에는 기다림이 있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오늘 성조의 책임입니다.”
이 부분은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마땅함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례와 여러 기록들을 제시하며, 신덕왕후가 정비로서의 지위를 누렸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색의 《정릉비》, 권근의 《흥천사비》, 《용비어천가》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신덕왕후의 위호가 변하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신덕왕후가 태조의 배필로서 중국 조정의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종묘에 배향되지 못하는 것은 인정과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조 때에도 이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해결되지 못했음을 언급하며, 현 왕조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릉(昭陵, 당 태종의 능)의 복위(復位)는, 여러 왕조를 거쳐, 비로소 중묘(中廟, 명 신종) 때에 행해졌으니, 일찍이 조종(祖宗)이 행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또한 일이 오래되었다고 하여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옛 일을 말하더라도,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 송나라의 가법(家法)이 가장 순정하다고 일컬어지는데, 원우 황후(元祐皇后)의 복호(復號)를, 정자(程子)가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신덕왕후의 존호(尊號)는 폐지되지 않았고, 정릉의 의물(儀物)은 오히려 왕의 법령에 남아 있으니, 소릉의 개봉(改封)이나 원우 황후의 복위처럼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빠진 예법을 추거(追擧)하여, 한 단계를 더 나아가, 정성과 문채를 다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한 연후에, 비로소 천리에 합하고 인심에 순응할 것입니다.
무릇 국가의 전례는, 비록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나, 혹 미처 겨를이 없는 것이 있고, 혹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수백 년을 지나도록, 거행하지 못하였다면, 오히려 핑계 댈 수 있으나, 논의가 이미 발의되고, 여러 사람의 뜻을 막기 어려우면, 의리와 이치를 헤아려, 결단하여 행해야 합니다. 청하옵건대 대신과 예관에게 명하여 속히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여, 큰 예식을 완결하게 하십시오.”
이 부분은 과거 왕조의 사례를 통해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선례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소릉의 복위와 원우 황후의 복호 사례를 들며, 신덕왕후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간단한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또한, 이미 논의가 진행된 상황에서 왕이 결단을 내려야 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신명규(申命圭) 등 여러 신하들이 함께 올린 계사(啓辭)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의 신명규, 사간 박증휘, 지평 신정, 임상원, 정언 어진익 등이 아뢰기를, “예에는 백세(百世) 이후에 거행해야 할 것이 있고, 일에는 천재(千載) 위에 다시 빛나야 할 것이 있으니, 진실로 다시 빛낼 수 있다면, 이전 시대에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어렵게 여겨서는 안 되고, 마땅히 거행해야 할 바에 있다면, 그 일이 지극히 중하다고 하여 마침내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로써 주 태왕(周太王)의 숭봉(崇奉)의 전례는, 비로소 성왕(成王) 때에 행해졌고, 송 효장(孝章)의 추부(追祔)의 예는, 또한 여러 세대 이후에 있었으니, 어찌 예에 마땅히 거행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행하여도 어려움이 없고, 일에 다시 빛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결단하여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은 신덕왕후의 부묘(祔廟, 종묘에 모시는 것)에 대한 논의가,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청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으나, 임금의 말씀은 날로 멀어지고, 윤허하는 말씀은 오히려 닫혀 있습니다. 실로 신 등의 정성이 얕고 박하여,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기 때문이오나, 전하의 성명하신 덕과 인효하신 지극함으로, 어찌 의리의 바름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러 사람의 뜻을 속히 윤허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주저하고 신중하기를, 이처럼 지나치게 하십니까? 신 등은 가만히 의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신덕왕후께서는 살아 계실 때 이미 한 나라의 어머니의 모범이 되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마땅히 백세에 종묘에서 제사를 받으셔야 하는 분이시니, 하늘의 법칙으로 헤아리고, 땅의 이치에 비추어 보아도, 진실로 바뀌지 않는 정해진 예입니다. 불행히도 신의왕후의 예는 용잠(龍潛, 왕위에 오르기 전)의 날에 있었고, 성조(태조)께서 나라를 처음 세우실 때에 미쳐, 신덕께서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고, 정위(正位)에 여러 해가 있었으니, 부묘의 옳고 그름을, 어찌 논의할 바가 있겠습니까? 다만 당시 의논하던 신하들이, 견식이 잘못되어, 의리의 당연함을 알지 못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 까닭을 따져보면,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태조의 돈독한 생각을 말하자면, 큰 의식과 보책(寶冊)으로, 예우를 능침에 융성하게 하였고, 매번 그 어진 보좌라고 칭하였고, 태종의 진실한 효성을 돌이켜 생각하자면, 삼가 제사를 받들고, 직접 향을 전하는 축문을 지었으니, 더욱 그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더욱 강조합니다. 주 태왕과 송 효장의 사례를 다시 언급하며, 신덕왕후의 경우는 이미 정비로서의 지위와 명분을 확립했으므로, 종묘 배향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역설합니다. 또한, 당시 신하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이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하며, 태조와 태종의 뜻을 헤아려 신덕왕후를 종묘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천경(天經)”, “지위(地緯)”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하늘의 이치와 땅의 도리에 부합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 그 죽고 사는 은혜와, 살아 계실 때와 돌아가신 후의 받듦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와 같으니, 유독 이 종묘 배향만 미처 거행하지 못한 것은, 어찌 조종(祖宗)의 본뜻이겠는가? 당시 제사의 규모를 줄이고, 능의 제도를 간략히 한 것은, 모두 예관(禮官)의 잘못에서 비롯되었고, 종사(宗社)의 부끄러움을 남긴 것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삼백 년입니다. 다행히 우리 성상(聖上)께서 정성으로 먼 조상을 추모하시고, 두려워하며 감동하시어, 옛 의식을 따라, 한 번의 명령으로 모두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나 빈궁(閟宮, 신주를 모신 곳)의 정식 제사는, 유독 빠져 있으니, 어찌 큰 흠결이 아니겠는가? 혹 예가 중대하여, 가볍게 고치려 하지 않아서 그러한가? 아니면 일이 조종에 관계되므로, 추후의 논의를 꺼려서 그러한가?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무릇 미세한 것을 잃는 것은, 오히려 조금 소홀히 할 수 있으나, 중대한 것에 관계되면, 더욱 급히 하지 않을 수 없고, 책임이 성상(聖躬)에게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조금 늦출 수 있으나, 조종에 관계되면, 더욱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에 미치지 못하십니까?
능의 이름과 존호(尊號)가 오히려 지금도 바뀌지 않고, 엄연히 어머니의 도리가, 백세에 오히려 남아 있으니, 오늘에 이르러, 종묘에 올리는 의식을, 마침내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 논의는 선묘(宣廟, 선조) 때에 처음 발의되었는데, 선묘조에서 의심하고 어렵게 여기던 것은, 이미 모두 허락되었으니, 유독 종묘 배향 한 가지에, 이와 같이 고집하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전하께서 진실로 결단하여 행하시면, 어머님(신덕왕후)의 억울함이, 구천(九泉) 아래에서 풀릴 것이고, 조종의 하늘에 계신 신령 또한 반드시 어두운 곳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는 예에 마땅히 거행해야 할 일이고, 다시 빛내야 할 일이며, 조종에게 크게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전하께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능을 봉하고 정각(亭閣)을 세우셨고, 또한 관리를 두고 청소까지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 유독 종묘 배향만 중단한다면, 예절로 헤아려 보아도, 결단코 이치가 없습니다. 삼가 다시 생각하시어, 다시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속히 예관에게 명하여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의 예식을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십시오.”
이 부분은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단순히 예법의 문제가 아니라, 조종의 뜻을 받들고 억울함을 풀어드리는 효의 문제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이미 능의 정비와 관리까지 마친 상황에서 종묘 배향만 거행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선조 때부터 제기된 논의가 이제는 결론을 내야 할 시점임을 강조하며, 왕의 결단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품(二品) 이상의 신하들이 빈청(賓廳)에 모여 올린 계사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을 청하는 것은, 곧 온 나라의 위아래가 함께 논하는 것입니다.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예(禮)를 인용하여 다투고, 평범한 선비들은, 경전(經傳)에 근거하여 진술하니, 어찌 살아 계실 때에는 한 나라의 어머니의 모범이 되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백세에 종묘에서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 곧 천지의 떳떳한 법칙이고,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통례이며,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므로,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치는 해와 별처럼 밝으니,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전하의 밝으심으로, 천리의 편안함과 인심의 있는 바를 꿰뚫어 보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건마는, 지금까지 어렵게 여기시는 것은, 혹 관계되는 바가 중대하여 가볍게 거행하기 어렵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까? 신 등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이미 중하고 크면, 더욱 속히 행해야 하고, 결단코 시간을 끌고 날을 보내어, 천리를 어기고 인심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이 부분은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온 나라의 여론임을 강조하며, 하늘의 이치와 인심에 부합하는 일임을 다시 한번 역설합니다. 왕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나, 이미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천리와 인심에 부합하는 일인 만큼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신 정태화와 신 허적 등은 얼마 전 앞자리에서 자세히 진달하였고, 여러 관서가 함께 연이어 상소한 지, 또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윤허의 말씀을 기다렸으나, 끝내 들은 바가 없으니, 신 등은 이에 더욱 답답하고 울적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에 여러 재상과 함께 빈청(賓廳)에 나아가, 한 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여러 사람의 뜻을 좇아, 즉시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의 예식을 속히 완결하게 하십시오.”
이 부분은 앞선 상소에도 불구하고 왕의 응답이 없자, 정태화와 허적을 비롯한 신하들이 다시 한번 빈청에 모여 집단적으로 상소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답답함과 간절함을 표현하며, 왕의 빠른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8월 초하루 신유일에, 조정에서 여러 신하들이 모여 청하니, 영의정 정태화, 판중추부사 정치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신 등과 여러 재상이, 빈청에 모여, 간곡하게 힘써 청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매번 성상(聖上)의 비답(批答)을 받들 때마다, 오직 윤허하지 않는다는 가르침뿐입니다. 이는 실로 신 등의 정성이 얕고 박하고, 글이 부족하여, 하늘의 말씀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한 탓입니다. 신 등이 머리를 맞대고 주위를 돌아보니, 더욱 황송하고 부끄럽고 답답하고 울적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지금 이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은, 다만 천리에 비추어 보아도 당연하고, 인심으로 헤아려 보아도 어긋나지 않으니, 진실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하에 바뀌지 않는 떳떳한 법칙입니다.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날마다 논하여 아뢰고, 평범한 선비들은, 잇따라 상소하니, 온 나라의 공통된 논의임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전하의 성명하심으로도 미처 살피지 못한 바가 있어, 천리와 인심에, 억지로 여론을 거슬러, 이토록 오래도록 이르십니까?
아! 성명께서 어렵게 여기시는 뜻을, 신 등 또한 알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고, 예가 떳떳한 법칙에 관계됩니다. 신 등은 부득이 허락을 받는 것을 기약으로 삼고, 번거롭게 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능침을 복구하고, 재각(齋閣) 등을 세우는 일에, 이미 단호하게 허락하셨는데, 종묘 배향의 청에만, 유독 어렵게 여기시니, 이는 여러 사람의 뜻이 더욱 격렬해지는 이유입니다. 신 등은 이에 여러 관리를 거느리고 모두 조정의 뜰에 나아가, 다시 호소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즉시 윤허하는 말씀을 내리시어, 속히 종묘 배향의 예식을 행하여, 신인(神人)의 기대를 갚으십시오.” (이로부터 날마다 연이어 상소하였다.)
이 부분은 신하들이 더욱 집단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왕의 결단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날마다 논하여 아뢰고”, “잇따라 상소하니”, “온 나라의 공통된 논의”, “여러 사람의 뜻이 더욱 격렬해지는 이유” 등의 표현을 통해, 이 문제가 단순히 일부 신하들의 주장이 아니라 온 나라의 여론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이 다른 사안들은 허락했으면서 유독 종묘 배향만 거부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왕의 빠른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천리를 어기고 인심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라는 표현은 왕의 결단이 천명과 민심에 부합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종실에서 조정에 청하여 아뢰기를, “천하에 바뀌지 않는 큰 윤리가 있고, 억누를 수 없는 공론이 있습니다. 큰 윤리가 바르지 않으면, 천리가 없어지게 될 것이고, 공론이 펼쳐지지 않으면, 국맥(國脈)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은, 삼사에서 번갈아 상소하고, 평범한 선비들이 상소하며, 이로 인해 모든 관리가 한 목소리로, 논하여 그치지 않습니다. 그 큰 윤리가 바뀌지 않고, 공론이 억누를 수 없음은, 이미 성명께서도 꿰뚫어 아시는 바인데, 그러함에도 오히려 여러 사람의 뜻을 굳게 거부하고, 억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찌 일이 조종에 관계되므로, 감히 가볍게 거행하지 못해서 그러하십니까?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신덕왕후께서 나라 초기에, 임금의 지위에 배필이 되시어, 온 나라의 어머니의 모범이 되셨으니, 태조의 배필로서의 예가 바릅니다. 향을 전하는 축문을 직접 지으셨고, 능침에 존호가 있으니, 태종의 존경하고 받드는 도 또한 지극합니다. 당초 규모를 줄이자는 의논은, 결단코 태종의 본뜻이 아니고, 한두 의논하는 신하가 따로 잘못된 견해를 내어, 간사한 논리를 주장하여, 태종으로 하여금 그 효도를 마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식견 있는 사람들이 탄식하고 통탄하는 바이니, 스스로 그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왕실의 구성원인 종실에서 직접 상소하는 내용입니다. “바뀌지 않는 큰 윤리”와 “억누를 수 없는 공론”을 언급하며,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태종이 신덕왕후를 박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신하들의 잘못된 주장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태종의 명예를 옹호하는 동시에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아! 예에는 윗사람을 깎아내리는 글이 없고, 경전에는 앞을 빛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당초의 폄손(貶損)은, 태종의 잘못된 전례라고 핑계 대었으니, 이후의 왕들이 마땅히 그 마음을 크게 경계하여, 잘못이 없을 것을 생각하며, 급히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해야 합니다. 하물며 이 폄손의 거사는, 원래 태종의 본뜻이 아니고, 다만 의논하는 신하의 잘못된 견해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전하께서 만약 이 일의 폐결(廢缺)이 이미 오래되었고, 역대 성군(聖君) 또한 행하지 않았으므로,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의논할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이는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천하의 일은, 오직 의리에 합당한지 아닌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앞 시대의 시행하지 않음은, 논할 것이 못 됩니다. 신 등은 굳이 먼 옛날의 일을 들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 삼아 본조(本朝)의 이미 행한 것을 말하자면, 소릉(昭陵)이 허물어진 것이, 이미 성묘(成廟, 성종)를 거쳤으나, 보수하지 못하였는데, 중묘(中廟, 명종)에 이르러, 비로소 능을 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과 사람이 모두 기뻐하고, 조상의 업적이 다시 빛났으니, 우리 조상의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덕으로서 본받을 만한 것이, 또한 많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를 본받지 않으시고, 공연히 미처 거행하지 못한 폐기된 전례를 취하여, 굽히고 고치지 않는 작은 예절을 지키려 하십니까? 이는 진실로 신 등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전하의 밝으심으로, 오늘날의 일에 대해, 의리가 이미 밝혀졌고, 옳고 그름이 이미 정해졌으니, 능침의 의물을, 모두 옛 제도로 회복하셨습니다. 그 행하지 않은 바는, 오직 종묘 배향 한 부분이니, 신 등은 외람되이 종반(宗班)에 참여하여, 의리가 이해를 같이하므로, 어찌 우리 전하의 계술(繼述)의 효도를 돕지 않겠습니까? 이에 감히 임금의 존엄을 무릅쓰고, 조정의 청을 우러러 바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위로 태조와 태종의 본뜻을 헤아리시고, 한두 의논하는 신하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으시고, 굽어보시어 윤허하는 말씀을 내리시어, 속히 성대한 예식을 거행하시어, 이백여 년 동안 정해지지 않은 윤리가, 이에 이르러 다시 바르게 되고, 온 나라에 펼쳐진 공론이, 이에 이르러 펼쳐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당시 예문관에서 교지를 받든 조사석 등이 차자를 올렸고, 감찰 한공필 등 또한 상소를 올려 논하였다.)
이 부분은 신하들이 과거의 사례를 들어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이 정당함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특히 소릉의 복구 사례를 언급하며, 이미 의리와 시비가 명확히 가려진 상황에서 왕이 결단을 내려야 함을 역설합니다. 또한, 종실의 입장에서 왕의 효도를 돕고자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간곡하게 왕의 윤허를 청하고 있습니다.
을축일에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오늘날 다투는 바는, 백세(百世)에도 바뀌지 않는 떳떳한 법칙이고, 의리의 바름과, 인륜의 중함은, 전후에 이미 자세히 진술하였습니다.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드니, 또 윤허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신 등은 답답하고 울적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의리의 당연함과, 공론의 대동(大同)함은, 전하께서 또한 아래로 살피셨으나, 오히려 신중함을 위주로 하여, 즉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성상의 뜻이 신중하신 이유는, 일이 오래되었으므로 가볍게 고치기 어렵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라면, 침각(寢閣)을 다시 세우는 것 또한 앞 시대에 행하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찌 유독 종묘 배향에만 어렵게 여기십니까? 일이 조종에 관계되므로, 추후의 논의를 꺼린다고 여기신다면, 실록을 살펴보면, 또한 조종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폐기된 전례를 추후에 고치는 것에, 또한 무슨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능의 제도와 종묘의 의식은 본래 차이가 없는데, 장차 차례로 행해야 할 전례를, 마치 옳고 그른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여기시니, 이는 신 등이 의혹하는 바입니다. 일에 임하여 신중함은, 비록 성인의 자세한 살핌의 도리이나, 일의 의심할 바 없는 것에, 지나치게 신중하면, 또한 《역경(易經)》에서 말하는 건단쾌결(乾斷夬決)의 뜻과는 다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속히 성대한 예식을 거행하시어, 신인(神人)의 기대를 위로하십시오.” 답하여 이르기를, “신중한 뜻은, 끝내 스스로 고집할 수 없다. 경 등의 청이, 또 이에 이르렀으니, 내 뜻을 버리고 따르겠다. 계사(啓辭)에 따라 시행하라.”
이 부분은 신하들이 다시 한번 강경하게 상소하는 내용입니다. 왕이 신중함을 이유로 결정을 미루는 것에 대해, 다른 사안들은 이미 허락했으면서 유독 종묘 배향만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역경》의 “건단쾌결”이라는 용어를 인용하여, 이미 명확한 일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결단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마침내 왕은 신하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신덕왕후의 종묘 배향을 윤허합니다. “내 뜻을 버리고 따르겠다”라는 왕의 답변에서, 오랜 논쟁 끝에 결국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오일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덕왕후의 기일(忌辰)은, 이미 지금 8월 13일로, 대신(大臣)들이 정하여 결정하였습니다. 본릉(本陵)의 기일 제사는, 이로써 행사를 마련하여, 각 해당 관서에 분부할 뜻입니다.” 전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권근의 기록에 “8월 무술일”이라는 말을 근거로, 실록을 고증하고, 역법을 계산하여, 이 날로 정하였다.)
이 부분은 왕의 윤허 이후, 예조에서 신덕왕후의 기일을 확정하고 제사 준비를 진행하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권근의 기록과 실록, 역법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기일을 정하는 모습에서, 신중하게 절차를 진행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