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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번역 134

성조황제가 하사한 제문 (무자년 9월 27일 임신일에 사신을 보내 태뢰로 문소전에서 제사 지내니, 임금(태종)이 최복을 입고 맞이하여 예를 행하다.)

영락(永樂) 6년 모년 모월 모일, 황제(성조)는 도지감 좌소감(都知監左少監) 기보(祁保)와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을 보내 돌아가신 조선 국왕 이 (태조의 휘)의 영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왕(태조)은 현명하고 사리에 밝으며 선(善)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비롯되었고, 지극한 정성으로 변함이 없었다. 옛날 황고(皇考, 선황제) 태조 고황제(주원장) 때에 하늘의 도(道)를 공경히 따르고, 의(義)를 행하며 충성을 다하고, 공손하고 부지런히 대국을 섬기며,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더욱 오래도록 더욱 삼가고, 한 지역의 백성들을 보살펴 부유하고 풍족하게 하였으니, 모두 편안하고 즐겁게 살았다. 우리 황고(주원장)께서 왕의 충성됨을 깊이 가상히 여기시어 특별히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내려 주시어 특별..

시책문 (태종 8년 무자년 9월 4일 기유일에 섭태부(攝太傅)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지(李至)와 섭중서령(攝中書令) 한성부윤(漢城府尹) 맹사성(孟思誠)을 보내 시책과 보를 빈전에 바치다. 애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태종 8년(1408년) 9월 4일에 태종이 이지(李至)와 맹사성(孟思誠)을 보내 태조 이성계의 빈전(殯殿)에 시책(諡冊)과 보(寶)를 바칠 때 사용한 시책문(諡冊文)입니다. 시책은 왕이나 왕비 등이 승하한 후 그 공덕을 기리어 올리는 시호(諡號)를 적은 문서입니다. 여기서는 태조에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시호와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를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애책(哀冊)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업(創業)하여 후세에 계책을 남기심은 실로 큰 덕(德)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름을 바꾸고 시호를 정함은 오직 지극히 공정(公正)함으로 하는 것이다. 삼가 옛 제도를 따라 아름다운 칭호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대행태상왕(大行太上王, 돌아가신 태상..

태상왕 상존호 옥책문 (정종 2년 경진년에 임금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에서 존호를 올리다.)

정종 2년(1400년)에 정종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德壽宮)에서 태상왕(太上王), 즉 태조 이성계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 사용한 옥책문(玉冊文)입니다. 옥책은 왕이나 왕비 등의 존호, 시호 등을 적어 올리는 문서로, 여기서는 태조에게 ‘계운신무(啓運神武)’라는 존호를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건문(建文) 2년(1400년) 경진년 7월 초하루 갑자일로부터 엿새째 되는 날인 기사일에 국왕 신 (이름)은 머리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삼가 책문을 받들어 올립니다.천년의 운수에 응하여 나타나신 임금께서는 큰 운수를 여셨고, 한 나라를 아들에게 전하시니, 지극히 높이는 칭호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전례(典禮)를 따라 삼가 정성스러운 효심을 펼치고자 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태상왕 전하께..

태조황제 사국호후 반교 (태조 2년 계유년 2월 15일 경인일에 반포하다. 이 해에 이첨(李恬)을 보내 고려의 인신(印信)을 바치게 하다.)

태조가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받은 후 반포한 교서(敎書), 즉 ‘태조황제 사국호후 반교(太祖皇帝賜國號後頒敎)’입니다. 태조 2년(1393년) 2월 15일에 반포되었으며, 국호 개정의 경위와 새로운 통치 방침을 밝히고 있습니다.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내가 박덕(薄德)으로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받아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전에 중추원사(中樞院使) 조림(趙琳)을 보내 황제(명 태조 주원장)께 보고하니, 답하기를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바꾸었는가? 빨리 와서 보고하라.” 하였다. 즉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한상질(韓尙質)에게 명하여 국호 개정을 청하게 하였다. 홍무(洪武) 26년(1393년) 2월 15일에 한상질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돌아왔다. 예부 우시랑(右侍郞)..

개국반교 (태조 원년 임신년 7월 28일 정미일에 반포하다.)

조선 태조가 건국 직후 백성들에게 내린 교서(敎書), 즉 개국반교(開國頒敎)입니다. 태조 원년(1392년) 7월 28일에 반포되었으며, 건국의 정당성과 새로운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개국반교 (태조 원년 임신년 7월 28일 정미일에 반포하다.)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늘이 백성을 내시고, 임금을 세우신 것은 백성들을 서로 도우며 살게 하고, 다스려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도(道)에는 잘함과 못함이 있고, 백성의 마음에는 따름과 배반함이 있으니, 천명(天命)의 옮겨감과 머무름이 이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는 이치의 당연함이다. 홍무(洪武) 25년(1392년) 7월 16일 을미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크고 작은 신료(臣僚)들이 함께 아뢰어 왕위에 나아가시기를..

지문 (태종 8년 1408년 11월 11일 을묘일에 좌대언 이조(李慥)를 보내 지석(誌石)을 내렸다.)

영락 6년(1408년) 5월 24일 임신일에 우리 태조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께서 갑자기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전하(태종)께서는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없어 상중의 예(禮)를 다 하시고, 삼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올리셨습니다. 이 해 9월 9일 갑인일에 서울 동쪽 양주(楊州)의 치소(治所)인 검암촌(儉巖村)의 건원릉(健元陵)에 안장(安厝)하시니, 예(禮)에 따른 것입니다.삼가 살펴보건대 선원(璿源, 왕실의 계통)의 유래는 신라(新羅) 때부터 시작되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가문에서 여러 대에 걸쳐 인덕(仁德)을 쌓아 후대의 경사(慶事)를 이루었습니다.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비로소 원(元)나라를 섬겨 천호장(千戶長)이 되시었고, 4대에 걸쳐 작위(爵位)를 ..

건원릉 신도비명 뒷면에 기록된 내용[碑陰記]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는 지극한 덕과 풍성한 공으로 큰 업을 창건하시고, 날마다 정치에 힘쓰셨습니다. 이에 병환으로 오래 머무르시게 되자, 선위(禪位)하시어 후사를 위한 계책을 남기시고, 오랫동안 편안히 지내셨습니다. 영락(永樂) 무자년(戊子年, 1408년) 봄 정월에 또 병환이 드시니, 우리 전하(태종)께서 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 하늘에 기도하시어 목숨을 연장받으셨습니다. 다섯 달이 지나 다시 병이 깊어지시어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에 따라 양주(楊州)의 검암산(儉巖山)에 장사 지내시니, 서울에서 20여 리 떨어져 있습니다. 산의 뿌리는 장백산(長白山)에서 뻗어 내려, 2천여 리를 굽이굽이 이어져 철령(鐵嶺)에 이르러 꺾이고, 서쪽으로 수백 리를 가서 멈추어 우뚝 솟은 곳을 백운산(..

건원릉 신도비명[병서. ○태종 9년 1409년 4월. ○행장은 전하지 않음.]

하늘의 은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운을 열 때에는 반드시 먼저 기이한 일이 나타나 그 징조를 드러냅니다. 하나라에는 검은 구슬(玄圭)을 받은 일이 있었고, 주나라에는 신령스러운 점괘의 꿈이 있었습니다. 한나라 이후로도 시대마다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모두 하늘이 내린 것이지 사람의 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용연(옛날 책에는 ‘잠룡’이라고 되어 있음)에 계실 때에도 공훈과 덕망이 이미 높았고, 징조 또한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꿈에 신인이 금으로 만든 자(尺)를 들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공은 마땅히 이 자를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시오.”라고 하셨으니, 하나라의 검은 구슬과 주나라의 꿈과 같은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기이한 사람이 문에 와서 글을 바치며 말하기를 “지리..

국조인물고 - 이원 비명 1.7.7

鐵城之李, 高麗大族。 有諱瑨, 登第不仕, 種德遺後。 生監察大夫諱尊庇, 以文名顯隆。 生鐵城君諱瑀, 以幹能歷淮、金、全、晉數州, 所至多遺愛。 生門下侍中諱嵒, 事忠定王爲左政丞, 尋奉身乞退, 恭愍朝復相。 己亥, 毛賊犯西關, 爲都元帥, 有制勝功。 才兼將相, 勳名蓋世。 爲詩亦簡古, 眞、草、行三法皆妙絶。 卒諡曰文貞。 生諱岡, 有父風, 人皆以公輔期之, 早歿。 官至密直副使。 辛丑紅寇之變, 恭愍倉卒南巡, 公爲慶尙道按廉使, 奉迎儀衛甚盛, 供頓充斥。 人皆嘖嘖稱美, 王甚器重。 及卒, 王歎曰: “天何奪我岡之速也?” 舊制樞密無諡, 特諡曰文敬。 夫人郭氏, 判開城延俊之女, 洪武戊申正月某甲生公。公諱原, 字次山, 號容軒。 初, 公生四月而文敬卒, 郭夫人常抱悲泣曰: “天若祚李, 其在此孤乎。” 公在襁褓, 嶷然如成人。 稍長, 力學不倦。 公姊權文忠..

국조인물고 - 한상경 유사 1.5.5

西原府院君韓尙敬卒。 尙敬字淑敬, 淸州人, 文敬公脩之子也。 仕高麗, 拜司膳署令, 擢壬戌文科第三人, 拜禮儀佐郞, 遷右正言, 歷典理正郞、藝文應敎、工部摠郞、宗簿令。 歲壬申, 陞密直司右副代言。 我太祖開國, 與推戴之議, 奉寶璽以獻, 賜翊戴開國功臣之號, 遷中樞院都承旨, 陞推忠翊戴開國功臣、簽書中樞院事、都評議使司事。 出爲忠淸道都觀察使, 封西原君, 又爲京畿左道都觀察使。 建文二年, 太宗卽位, 謂尙敬曰: “予承丕緖, 罔知攸濟, 心實以爲難焉。” 尙敬對曰: “古人有言曰: ‘后克艱厥后。’ 殿下克知其艱, 實我東方之福也。 然非知之艱, 行之惟艱。” 太宗嘉納之, 拜參知議政府事。 欽差兵部主事端木智來, 命尙敬爲接伴使, 數旬禮待逾謹。 智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公其人也。” 出爲豐海、江原兩道都觀察使, 入爲工曹判書, 遷知議政府事、兼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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