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은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운을 열 때에는 반드시 먼저 기이한 일이 나타나 그 징조를 드러냅니다. 하나라에는 검은 구슬(玄圭)을 받은 일이 있었고, 주나라에는 신령스러운 점괘의 꿈이 있었습니다. 한나라 이후로도 시대마다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모두 하늘이 내린 것이지 사람의 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용연(옛날 책에는 ‘잠룡’이라고 되어 있음)에 계실 때에도 공훈과 덕망이 이미 높았고, 징조 또한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꿈에 신인이 금으로 만든 자(尺)를 들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공은 마땅히 이 자를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시오.”라고 하셨으니, 하나라의 검은 구슬과 주나라의 꿈과 같은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기이한 사람이 문에 와서 글을 바치며 말하기를 “지리산 바위 속에서 얻었는데, ‘목자(木子)가 삼한(三韓)을 다시 바로잡는다’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사람을 보내 맞이하려 하니 이미 가고 없었습니다. 살펴보니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에 “건목(建木)이 아들을 얻고”, “조선이 곧 진단이다”라는 설이 수천 년 전에 나왔는데 이제야 그 징험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심이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선원(璿源, 왕실의 계보)을 살펴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명문입니다. 사공(司空) 휘(諱) 한(翰)께서는 신라에서 벼슬하였고, 왕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6세에 이르러 경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서 벼슬하였습니다. 13세에 이르러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호(千夫)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4대에 걸쳐 작위를 이어받아 모두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다. 원나라의 정치가 이미 쇠퇴하자 황고(皇考) 환왕(桓王)께서 고려 공민왕을 다시 섬기게 되었습니다.
지정(至正) 신축년(辛丑年)에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시키자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하였고, 사신을 보내어 되찾도록 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먼저 올라가 승전보를 올리셨습니다. 다음 해 임인년(壬寅年)에는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쳐서 쫓아냈고, 또 다음 해 계묘년(癸卯年)에는 거짓 왕 탑첩목(塔帖木)을 쫓아냈습니다. 공민왕은 더욱 의지하고 중용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며, 조정과 지방을 출입하며 경서(經書)와 역사서를 즐겨 보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구제할 만한 도량과 백성을 사랑하는 덕은 지극한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민왕이 돌아가시고 다른 성씨가 왕위를 훔치고 권신(權臣)이 나라를 제멋대로 하여 조정을 어지럽히고, 왜구(倭寇)가 깊이 침입하여 고을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습니다. 홍무(洪武) 경신년(庚申年)에 우리 태조께서 운봉(雲峯)에서 싸워 이기시어 동남쪽을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무진년(戊辰年)에는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신을 주살하였는데 너무나 잔혹하였으나 우리 태조의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많았습니다. 최영은 이에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서 우군도통절월(右軍都統節鉞)을 주어 요동(遼東)을 치도록 강제로 보냈습니다. 군대가 위화도(威化島)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의로운 깃발을 돌이켰습니다. 군대가 섬에 오르자 큰 물이 섬을 덮쳤으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물러난 최영을 잡아 가두고 명망 높은 선비 이색(李穡)으로 좌시중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권신의 농간과 어지러움, 미치광이 같은 모함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고 혼란을 헤아릴 수 없었으니, 우리 태조의 힘으로 바로잡지 않았다면 나라가 거의 망했을 것입니다. 이색이 말하기를 “지금 공께서 의를 들어 중국을 높이시니, 그러나 집정자가 직접 조현(朝見)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날짜를 정하여 서울로 가니 태조께서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 우리 주상 전하와 이색을 함께 보내 조현하게 하였고,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께서 가상히 여기고 돌려보냈습니다. 기사년(己巳年) 가을에 황제께서 다른 성씨가 왕이 된 것을 꾸짖으시자 태조께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왕씨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우고 정성을 다해 보좌하였습니다. 사전을 혁파하고 쓸데없는 관리를 없애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공이 높아지자 시기를 받아 모함하는 무리가 서로 짜고 모함하니 정창군이 미혹되기도 하였습니다. 태조께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서쪽으로 가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시니 모함하는 자들이 더욱 급해졌으나 우리 전하께서 기회를 보아 변란을 막으시니 여러 사람의 모의가 무너졌습니다.
홍무(洪武) 임신년(壬申年) 가을 7월 16일에 전하(殿下, 태종 이방원)께서 대신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등 52명과 함께 의를 내세워 추대하니,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뜻을 같이하였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께서는 변고를 듣고 깜짝 놀라 일어나 거듭 사양하였으나, 억지로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대궐 계단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게 된 것은 하늘의 도움과 덕이 아니고서는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곧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옛 책에는 ‘신’자가 있음) 조반(趙胖)을 보내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삼한(三韓)의 백성이 이미 이씨(李氏)를 존경하니, 백성에게 전쟁의 화가 없고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곧 하늘의 명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조서가 내려 “나라의 칭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문관(藝文館, 옛 책에는 ‘관’자가 있음) 학사(學士, 옛 책에는 ‘신’자가 있음) 한상질(韓尙質)을 보내 청하니, 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오직 조선(朝鮮)이라는 칭호가 아름다우니, 그 이름에 근본하고 그것을 조상으로 삼을 만하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려 길이 후손을 번창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태조의 위엄과 의로운 기개가 위로 천자에게까지 알려지니, 황제의 마음에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을 청할 때마다 번번이 윤허를 받았으니,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3년이 지난 갑술년(甲戌年) 여름에 나라를 모함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황제는 친히 아들을 보내 조현(朝見)하도록 명하였습니다. 태조께서는 우리 전하께서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사리에 밝아 여러 아들보다 어질다고 여겨 곧 보내 명에 응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명나라에) 이르러 자세히 아뢰니 황제의 뜻에 부합하여 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 해 겨울 11월에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정하고 궁실을 짓고 종묘를 세웠습니다. 일찍이 4대 조상을 추존하였으니,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으로, 배위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로,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로, 황조(皇祖)를 도왕(度王)으로,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로, 황고(皇考)를 환왕(桓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로 하였습니다. 예악(禮樂)을 정비하고 제사(祭祀)를 신중히 하였으며, 의복의 제도를 정하고 신분에 따른 차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기르고, 녹봉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였습니다. 송사를 분명히 판결하고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발하였습니다. 잘못된 정사를 모두 개혁하니 모든 일이 매우 융성하였고, 왜구가 와서 항복하니 사방의 국경이 안정되었습니다. 우리 태조의 크고 넓은 덕은 진실로 하늘이 용기와 지혜, 총명과 신무(神武)하고 웅장한 기개를 내린 주군이라 할 만합니다.
간신 정 도전(鄭道傳)이 표문(表文)의 말로 인해 명나라 조정의 꾸지람을 받았고, 은밀히 명을 거역하려 하였는데, 무인년(戊寅年)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께서 병환 중인 틈을 타서 어린 세자를 끼고 자신의 뜻을 펼치려 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기미를 알아내어 제거하고 적통(嫡統)이자 장자(長子)로서 상왕(上王, 태조)을 세자로 세우기를 청하였습니다. 9월 정축일(丁丑日)에 태조께서 병이 낫지 않으셨으므로 상왕에게 선위(禪位)하였습니다. 상왕에게는 계승할 후사가 없었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정한 것은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고 여겨 이에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경진년(庚辰年)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에게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칭호를 올렸습니다. 겨울 11월 계유일(癸酉日)에 상왕 또한 병으로 인해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고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 보고하였습니다. 영락(永樂) 원년(元年)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 조서와 인장(印章)을 가지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봉하였습니다. 이어서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 우리 전하에게 곤면구장(衮冕九章)을 하사하니, 지위가 친왕(親王)과 같았습니다.
우리 전하(殿下, 태종 이방원)께서는 두 궁(兩宮, 태상왕과 왕대비)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영락(永樂) 무자년(戊子年)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太祖, 이성계)께서 승하하시니, 춘추 74세, 왕위에 계신 지 7년, 정사에서 물러나 계신 지 11년이었습니다. 갑자기 활과 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시니, 아, 슬프고 애통합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슬픔과 사모함이 끝이 없으셨고, 상중(喪中)의 예(禮)를 다하였으며,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께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칭호를 올렸습니다. 이 해 9월 9일 갑인일에 성 동쪽 양주(楊州)의 검암산(儉巖山)에 장사지냈으니, 능(陵)을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습니다. 부고(訃告)가 전해지자 황제(명나라 황제)는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멈추고, 곧 예부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 태뢰(太牢)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에 대략 이르기를 “오직 왕은 현명하고 사리에 밝으며 선(善)을 좋아함이 천성에서 나왔다. 하늘의 도(道)를 공경히 따르고 의(義)를 행하며 충성(忠誠)을 다하였다. 공손히 대국(大國)을 섬기고 한 지방의 백성을 보살폈다. 우리 황고(皇考)께서 충성됨을 깊이 가상히 여겨 다시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내려 주셨다. 왕의 공덕이 뚜렷하니, 비록 옛 조선의 현명한 왕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명(誥命, 옛 책에는 ‘詔’라고 되어 있음)을 내려 시호(諡號)를 강헌(康獻)이라 하였습니다. 또 전하에게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내려 주시니, 특별한 은총의 예가 지극하여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대개 우리 태조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뜻을 이어받는 효성이 전후로 이어져 하늘의 마음을 능히 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과 끝에 하늘과 인간, 위와 아래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니, 이와 같이 지극하였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정비(正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명문세가(名門世家)로, 증(贈)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휘(諱) 경(卿)의 딸인데,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처음에는 시호를 절비(節妃)라 하였고, 후에 시호를 더하여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라 하였습니다. 여섯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상왕(上王, 정종)이 둘째이고, 우리 전하가 다섯째입니다. 장남은 방우(芳雨)로 진안군(鎭安君)인데 먼저 죽었고, 셋째 방의(芳毅)는 익안대군(益安大君)인데 또한 먼저 죽었고, 넷째 방간(芳幹)은 회안대군(懷安大君)이고, 여섯째 방연(芳衍)은 등과(登科)하였으나 요절하여 원윤(元尹)으로 추증되었습니다. 딸 중 장녀는 경신궁주(慶愼宮主)로 상당군(上黨君) 이주(李佇)에게 하가(下嫁)하였으니, 같은 이씨가 아닙니다. 차녀는 경선궁주(慶善宮主)로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하가하였습니다. 계비(繼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로, 처음에는 현비(顯妃)로 봉해졌으나 먼저 돌아가셨고, 시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입니다.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으니, 장남은 방번(芳蕃)으로 공순군(恭順君)으로 추증되었고, 차남은 방석(芳碩)으로 소도군(昭悼君)으로 추증되었습니다. 딸은 경순궁주(慶順宮主)로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하가하였으니, 역시 같은 이씨가 아닙니다.(옛 책에는 ‘也’자가 없음) 모두 먼저 죽었습니다. 상왕의 비(妃, 옛 책에는 ‘配’라고 되어 있음) 김씨(金氏)는 지금 왕대비(王大妃)로 봉해졌고, 증 문하시중(贈門下侍中) 천서(天瑞)의 딸인데, 후사가 없습니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靜妃) 민씨(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시호 문도공(文度公) 휘(諱) 제(霽)의 딸입니다.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았으니, 장남은 세자(世子) 제(禔, 옛 책에는 ‘禔, 世子’라고 되어 있음)이고, 차남은 호(祜, 후에 𥙷로 고침)로 효녕대군(孝寧大君, 옛 책에는 ‘大’자가 없음)이고, 셋째는 (세종의 휘) 충녕대군(忠寧大君, 옛 책에는 ‘大’자가 없음)이고, 막내입니다. 딸 중 장녀는 정순궁주(貞順宮主)로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하였으니, 역시 같은 이씨가 아니고, 차녀는 경정궁주(慶貞宮主)로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하였고, 셋째는 경안궁주(慶安宮主)로 길창군(吉昌君) 권휴(權跬)에게 하가하였고, 막내입니다. 진안군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은 복근(福根)으로 봉녕군(奉寧君)이고, 차남은 덕근(德根)으로 원윤(元尹)입니다. 익안군은 증 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해(崔仁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석근(石根)을 낳았으니, 익평군(益平君)입니다. 회안군은 증 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맹종(孟宗, 옛 책에는 ‘衆’이라고 되어 있음)을 낳았으니, 의녕군(義寧君)입니다.
신(臣)이 역대 천명을 받은 군주들을 살펴보니, 그 덕업의 성대함과 하늘의 뜻을 받은 신성함이 책에 빛나고 그 빛이 끝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조선의 건국 또한 성대한 덕과 바른 징조가 옛날부터 빛났습니다. 이는 마땅히 이미 얻은 지위와 더불어 장수를 누려, 큰 기틀을 굳건히 하고, 아름다운 복록을 길이 전하여 천지와 함께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근래에 비문을 짓는 명을 받았기에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펼쳐 길이 빛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필력이 비루하고 졸렬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밝은 뜻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합니다. 삼가 훈공과 덕이 사람들의 이목에 있는 바를 모아 감히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명문을 바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시어 다스리게 하셨으니, 이에 성장시키고 이에 다스리시며 이에 덕 있는 자를 돌보십니다. 하늘의 간곡한 뜻이 아니면 어찌 이렇듯 혁혁한 명령이 있겠습니까! 우(禹)임금은 검은 규(圭)를 받았고, 주(周)나라는 꿈의 점괘로 천명을 받았습니다. 오직 우리 조선은 왕업의 기틀을 처음 세우니, 꿈에 신인이 나타나 금으로 만든 자(尺)를 주었습니다. 부록(符籙)에 앞서 정해져 있었으니, 천명이 밝게 드러났습니다. 고려의 운이 이미 다하니, 임금은 어둡고 신하는 포악하였습니다.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큰 나라와 틈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군대가 의롭게 돌아오니, 죄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충성스러운 마음이 위(임금)에게 전해지니, 임금의 마음이 기뻐하였습니다. 천명이 돌아갈 곳이 있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절박하였습니다. 큰 업이 이미 이루어지니, 시장의 질서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고황제(명 태조 주원장)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에게 나라를 주노라.”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의 재앙이 없으니, 하늘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이어서 국호를 내려 주시니, 조선을 회복하였습니다. 땅을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漢)나라의 북쪽입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듯하니, 왕의 기운이 쌓였습니다. 궁궐은 높고 웅장하며, 종묘는 엄숙하고 정결합니다. 인자함이 깊어 생명을 좋아하고, 다스림은 무성하고 생각이 화목합니다. 모든 법도를 함께 닦으니, 만물이 조화롭게 됩니다. 이에 부지런함에 지치시어, 거룩한 적자(嫡子)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이에 공을 사양하시니, 오직 세상과 후대에 미치게 하셨습니다. 밝고 밝으신 우리 임금(태종)께서는 모든 일을 반드시 밝히십니다. 재난과 혼란을 다시 평정하시니, 그 경사가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하니, 모두 우리의 공적입니다. 큰 명령을 거절하기 어려우니, 신기(神器)에 의탁되었습니다. 두 궁궐(태상왕과 임금)을 받들어, 더욱 공손하고 삼가 하셨습니다. 효성과 우애가 신령함에 통하니, 하늘의 은총이 더욱 두터웠습니다. 상을 당하시어 슬픔에 잠기시니, 슬퍼하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황제께서 듣고 크게 슬퍼하시어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곡하게 하셨습니다. 큰 희생으로 제사를 지내고, 후한 부의(賻儀)를 내리는 조칙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고 칭찬하며, 모든 예절을 갖추었습니다. 하늘이 도우시니, 처음부터 끝까지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큰 복록이 면면히 이어지니, 자손이 천억입니다. 종묘의 제사가 영원히 이어지니,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습니다.
길창군 신 권근이 짓다.
이 비문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권근의 문장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 국호의 회복, 도읍의 결정 등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며 조선 건국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KP#/dir/node?dataId=ITKC_KP_C001A_0030_010_0010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는 한국의 역사와 왕조 변천을 예언한 도참서(圖讖書)의 일종입니다.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단어가 가진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구변(九變): 아홉 번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국도(國都) 또는 왕조의 아홉 번에 걸친 변천, 즉 국가의 흥망성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한국사에서 아홉 번의 뚜렷한 왕조 교체 또는 국가적 변혁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고조선, 삼한,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까지를 꼽는 해석이 있습니다.
- 진단(震檀): '진(震)'은 팔괘(八卦) 중 동쪽을 의미하며, 고대에는 동쪽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단(檀)'은 단군(檀君)을 의미하며, 고조선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진단'은 동방의 단군 조선, 즉 한국의 역사를 가리키는 고유한 표현입니다.
- 지도(之圖): 그림 또는 도식을 의미합니다. 즉, 구변진단지도는 한국사의 변천을 그림이나 도식으로 나타낸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구변진단지도는 한국사의 아홉 번에 걸친 변천을 예언한 그림 또는 도식으로, 일종의 예언서 또는 도참서로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천문, 역수, 기후 등을 관측하던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서 일부러 감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구변진단지도와 관련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목자(木子)**입니다. '목(木)'과 '자(子)'를 합치면 '이(李)'가 되므로, 목자는 이씨(李氏)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조선 건국과 관련하여 이성계(李成桂)의 등장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또한, **건목득자(建木得子)**라는 표현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라는 뜻으로, 이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구변진단지도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활용되었습니다.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사람들은 구변진단지도의 예언이 실현된 것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조선 건국이 하늘의 뜻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요약하자면, 구변진단지도는 한국사의 변천을 예언한 도참서로, 특히 이씨 왕조의 건국을 예언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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