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열성지장통기

지문 (태종 8년 1408년 11월 11일 을묘일에 좌대언 이조(李慥)를 보내 지석(誌石)을 내렸다.)

集賢堂 2024. 12. 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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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6년(1408년) 5월 24일 임신일에 우리 태조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께서 갑자기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전하(태종)께서는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없어 상중의 예(禮)를 다 하시고, 삼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올리셨습니다. 이 해 9월 9일 갑인일에 서울 동쪽 양주(楊州)의 치소(治所)인 검암촌(儉巖村)의 건원릉(健元陵)에 안장(安厝)하시니, 예(禮)에 따른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원(璿源, 왕실의 계통)의 유래는 신라(新羅) 때부터 시작되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가문에서 여러 대에 걸쳐 인덕(仁德)을 쌓아 후대의 경사(慶事)를 이루었습니다.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비로소 원(元)나라를 섬겨 천호장(千戶長)이 되시었고, 4대에 걸쳐 작위(爵位)를 세습하니, 군사(士卒)들이 즐거이 따랐습니다. 우리 태조께서는 어려서부터 그릇과 도량이 크시고,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넓고 크시어 세상을 구제할 만한 도량을 가지셨고, 지극히 어질고 생명을 아끼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시어 여러 관직을 거쳐 장상(將相)에 이르시니, 중앙과 지방을 출입하며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워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군대를 운용할 때에는 엄정하고 숙연하여 추호(秋毫)도 범하지 않으셨고, 크고 작은 백여 차례의 싸움에서 신축년(辛丑年)의 홍건적(紅巾賊)을 섬멸(殲滅)하고 왕성(王城)을 수복(收復)한 일과, 임인년(壬寅年)에 나하추(納哈出)를 쫓아낸 일과, 경신년(庚申年)에 운봉(雲峯)에서 승리한 일은 더욱 칭송받는 바입니다. 공민왕께서 후사(後嗣) 없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그 신하 임견미(林堅味) 등이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하고, 토지(土地)를 빼앗고, 탐욕과 오염이 정도를 넘었습니다.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분개하여 주살(誅殺)을 행하니, 우리 태조를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은 것은 사람들의 바람을 따른 것입니다. 최영 또한 배우지 못하여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 하니, 우리 태조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국경으로 내몰았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말씀하시기를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의리(義理)이다. 그 윗나라(명나라)에 죄를 얻어 백성들에게 재앙을 끼치는 것보다 어찌 권신(權臣)을 제거하여 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시고는 이에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의(義)를 내세워 군대를 돌이켜 최영을 잡아 그 죄를 바로잡고, 왕씨(王氏)의 종친(宗親)인 공양군(恭讓君)을 선택하여 세우고, 충성을 다하여 보좌하며,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사전을 혁파하여 경계(經界)를 바로잡고, 쓸데없는 관리를 없애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였습니다. 법도를 세우고 기강을 펼치니, 규모가 웅대하였습니다. 전 왕조의 폐정(弊政)을 남김없이 제거하니, 중앙과 지방의 민심(民心)이 모두 따랐습니다. 그러나 공양왕(恭讓王)은 어리석고 의심이 많아 장차 불리한 일을 꾀하려 하였습니다. 홍무(洪武) 25년(1392년) 임신년 가을 7월에 충신과 의사(義士)들이 함께 추대(推戴)하니, 우리 태조께서 세 번이나 사양하시다가 여러 사람들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보위(寶位)에 오르셨습니다. 밀직신(密直臣) 조방(趙胖)을 보내 조정(명나라)에 보고하니, 높으신 황제(고황제 주원장)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국호(國號)를 바꾸는 것을 허락하시어 조선(朝鮮)의 칭호를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무인년(戊寅年) 가을 9월에 병환이 드시어 상왕(上王, 정종)에게 내선(內禪)하시었습니다. 경진년(庚辰年) 겨울 11월에 상왕 또한 병환이 드시어 또 우리 전하(태종)에게 선위(禪位)하시었습니다. 존호(尊號)를 올려 우리 태조를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하셨습니다. 향년(享年) 74세, 왕위에 계신 지 7년, 늙어서 정사(政事)를 듣지 않으시고 편안히 지내신 지 11년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과 영화로움이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첫 번째 부인 한씨(韓氏)는 증(贈)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 휘(諱) 경(卿)의 딸로, 먼저 돌아가시어 추증(追贈)하시기를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라 하셨습니다. 여섯 아들과 두 딸을 낳으시니, 장남은 방우(芳雨)로, 진안군(鎭安君)에 봉해졌으나 먼저 죽었습니다. 다음은 상왕(정종)이시고, 우리 전하(태종)는 다섯 번째이십니다. 방의(芳毅)는 세 번째로, 익안대군(益安大君)에 봉해졌으나 또한 먼저 죽었습니다. 방간(芳幹)은 네 번째로, 회안대군(懷安大君)에 봉해졌습니다. 방연(芳衍)은 여섯 번째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요절(夭折)하였습니다. 장녀는 경신궁주(慶愼宮主)로,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는데, 다른 이씨(李氏)입니다. 다음 딸은 경선궁주(慶善宮主)로,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습니다. 상왕은 적자(嫡子)가 없으셨습니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靜妃) 민씨(閔氏)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휘(諱) 제(霽)의 딸입니다.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으시니, 장남은 세자(世子) 제(禔)이고, 다음은 유(𥙷, 양녕대군), 효령군(孝寧君)이며, 다음은 (세종의 휘) 충녕군(忠寧君)이고, 다음은 어립니다. 장녀 정순궁주(貞順宮主)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다른 이씨입니다. 다음은 경정궁주(慶貞宮主)로,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습니다. 다음은 경안궁주(慶安宮主)로, 길창군(吉昌君) 권휴(權跬)에게 시집갔습니다. 다음은 어립니다.

 

**길창군 신 권근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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