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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번역 167

기유년(己酉年) 10월 초하루 신유일(辛酉日)에 거행된 부묘 제문

기유년(己酉年, 1669년) 10월 초하루 신유일(辛酉日)에 거행된 부묘제(祔廟祭)의 제문(祭文)입니다. 여기서 '대비(大妃)'는 신덕왕후(神德王后)를 가리키며, '열조(烈祖)'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킵니다. 즉, 이 제문은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 즉 부묘 의식에서 사용된 제문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대비(大妃, 신덕왕후)께서는 열조(烈祖, 태조)의 배필이 되시어, 중국 조정의 명을 받으시고, 왕실의 안주인이 되셨습니다. 덕스러운 말씀은 비록 멀어졌으나, 아름다운 명칭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부묘의 예가 거행되지 않은 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밝게 오르내리시니, 마치 임하시어 돌아보시는 듯합니다. 어린 저로서는, 이에 두려워합니다. 늦가을 첫날, 날과 시각이 길합니..

휘호를 추상한 옥책문 [현종 10년 기유년(1669년). 실록에 의거하면, 태조 원년 임신년(1392년) 8월 7일 병진일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고, 원당기(願堂記)에 의하면 훙서(薨逝)한 해는 병자년이며, 사후에 신덕(神德)으로 추시(追諡)되었으나, 두 책봉문(현비 책봉문과 신덕 추시문)은 전해지지 않고, 애책(哀冊, 왕후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현종 10년(1669년)에 신덕왕후에게 휘호(徽號)를 추상(追上, 사후에 올림)하며 올린 옥책문(玉冊文)입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태조 원년(1392년) 8월 7일에 현비(顯妃, 신덕왕후)로 책봉되었고, 원당기(願堂記)에 따르면 병자년에 훙서(薨逝)하였으며, 사후에 신덕(神德)으로 추시(追諡)되었으나, 당시의 책봉문과 시호문, 애책(哀冊)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 옥책문은 오랜 시간이 흘러 신덕왕후의 위상이 복원된 이후에 작성된 것입니다. “세차(歲次) 기유년(己酉年) 9월 신묘삭(辛卯朔) 29일 기미(己未)에, 효증손(孝曾孫)인 사왕(嗣王) 신(臣, 현종의 이름)은 삼가 다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떳떳한 법도가 오랫동안 빠져 있었으므로, 이에 등배(登配, 왕비로 책봉)..

정릉 고천 제문 (태종 9년 기축년 2월. 신구 능지문은 전해지지 않음.)

태종 9년(1409년) 2월에 신의왕후의 정릉(貞陵)을 천장(遷葬, 이장)하면서 지은 제문(祭文)과, 이후 현종 10년(1669년)에 송시열(宋時烈)이 올린 차자(箚子)입니다. 정릉을 옮긴 이유와 그 의미, 그리고 이후 논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유명(幽明, 저승과 이승)의 이치는, 이치는 하나이나 나뉘면 다르네. 신령의 도(神道)는 청정함을 귀하게 여기니, 어찌 앞사람의 말이 거짓이겠는가? 옛날부터 지금까지 살펴보니, 나라의 도읍에 무덤을 쓴 예가 없네. 예관(禮官)이 이 뜻을 받들어 아뢰니, 크고 작은 신료들이 함께 따르네. 이에 터를 점쳐 푸른 까마귀(靑烏, 풍수지리)로써 하니, 도성 동북쪽 모퉁이에서 얻었네. 물은 졸졸 흐르고, 산은 아득히 굽이쳐 있네. 현궁(玄宮, 무덤)을 두는 것이 ..

고부 후 태조 황제 위로 조칙 (태조 6년 정축년 3월 8일 신유일, 참찬문하부사 안익, 동지중추원사 김희선,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이 가지고 옴.)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강씨(康氏)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나라 황제가 내린 위로의 조칙(慰勅)과 관련된 기록입니다. 태조 6년(1397년) 3월 8일에 안익(安翊), 김희선(金希善), 권근(權近)이 조칙을 가지고 왔으며, 이후의 상황과 권근이 지은 글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신이 도착하여 왕의 첫 번째 부인 강씨의 죽음을 듣고, 아, 슬프도다! 왕께서는 반드시 밤낮으로 그리워하시어 스스로 그치지 못하실 것이니, 어찌 그러하겠는가? 옛날 가정을 이루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부인의 훌륭한 내조가 있었으니, 삼한(三韓)의 어머니로서의 모범이 된 분이 강씨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지금 사람은 죽었으나 그 자취는 남아 있으니, 어찌 그리워하지 않고 스스로 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옛날 생존..

가상 시호 옥책문 (태종 8년 무자년 9월 6일 신해일, 존시를 더함. 즉 태조 발인 전날. 태종 11년 신묘년 6월 2일 신묘일에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옥책을 올림. 찬성사 이천우를 봉책사로 삼음.)

태종 8년(1408년) 9월 6일 신해일에 신의왕후 한씨에게 존시(尊諡)를 추가로 올리는 옥책문(玉冊文)입니다. 태조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에 거행된 의식이며, 이후 태종 11년(1411년) 6월 2일 신묘일에 면복(冕服)을 갖추고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옥책을 올리는 의식이 다시 거행되었습니다. 이때 이천우(李天祐)가 봉책사(奉冊使)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지극한 은혜를 영원히 생각하오니, 감격하고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높고 아름다운 칭호를 추가로 올리오니, 지극히 높고 숭상하는 것입니다. 삼가 옛 법도를 따라, 효성스러운 정성을 펼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신령스럽고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시고, 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덕은 하늘의 근원(乾元)과 부합하니, 마치 도산씨(塗山..

추상 시호 죽책문 (태조 7년 무인년 9월, 정종 선위, 11월 11일 계미일, 우정승 김사형을 봉책사로, 정당문학 하륜을 부사로 보내 문소전에 책을 올림. 태조 즉위 초에 절비로 추존되었으나 책문은 전해지지 않음.)

태조 7년(1398년) 9월에 정종이 선위(禪位)를 받은 후 11월 11일 계미일에 신의왕후 한씨에게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리는 죽책문(竹冊文)입니다. 태조 즉위 초에 절비(節妃)로 추존되었으나, 이후 시호를 다시 정하여 올리는 의식에 사용된 글입니다. 당시의 책문은 전해지지 않고, 이 글만 남아 있습니다. 예(禮)보다 더 큰 것은 이름을 바로잡는 것(正名)이고, 정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본에 보답하는 것(報本)입니다. 이에 말씀을 짓는 전례를 따라, 감히 시호를 정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성모(聖母) 한씨께서는 하늘의 조화로운 기운을 받으시고, 땅의 순리에 부합하셨습니다. 인륜의 근본을 바로 세우시어, 영원히 아름다움을 주셨고, 왕의 교화의 기틀을 도우시어, 그 후손을 크게 번..

중각비 부기 (영종 20년 갑자년 11월)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齊陵)에 세워진 비석을 다시 새긴 후 그 내용을 덧붙인 기록, 즉 ‘중각비부기(重刻碑附記)’입니다. 영종 20년(1744년) 11월에 작성되었으며, 이전에 세워졌던 비석이 임진왜란 이후 훼손되어 그 내용을 다시 새기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 이곳은 바로 우리 태조 강헌대왕의 원비(元妃)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입니다. 갑좌경향(甲坐庚向)의 방향입니다. 태종 계미년(1403년) 2월에 길창군 신 권근이 비문을 지어 올렸고, 갑신년(1404년) 2월에 비석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이후로 다만 지장(誌狀, 묘지명)에 기록된 글만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 임금(영종) 17년 신유년(1737년)에 도신(道臣, 지방 관찰사)이 옛 비석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는 일이 있었으나, 그때는 일이..

제릉 신도비명 병서 (태종 3년 계미년 10월)

예로부터 제왕이 천명을 받아 일어섬에는 반드시 현명한 배우자(妃匹)의 도움을 받아 덕을 함께하고 경사를 길러 그 사업을 영원히 하였습니다. 하나라에는 도산씨(塗山氏)가 있어 하나라 우왕(禹)이 능히 뒤를 잇게 하였고, 주나라에는 태사(太姒)가 있어 주나라 무왕(武王)이 크게 계승하였으니, 우왕과 문왕(文王)이 하늘과 짝하는 제사를 지낸 것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 영원하였습니다. 아, 훌륭하도다!우리 신의왕후께서는 천성이 맑고 아름다우시며, 땅의 덕(坤德)은 부드럽고 정결하셨습니다. 일찍이 용연(龍淵, 태조의 옛 지명)에 시집오시어 왕업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거룩한 성인을 낳으시어, 끝없는 통치를 드리우셨습니다. 신령한 공덕과 아름다운 모범은 옛날과 비교해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홀로 애석한 ..

추상 시호 옥책문 (숙종 9년 계해년)

숙종 9년(1683년)에 태조 이성계에게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리는 옥책문(玉冊文), 즉 ‘추상시호옥책문(追上諡號玉冊文)’입니다. 이미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던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는 시호를 추가하는 내용입니다.  **계해년 6월 임신 초하루부터 12일 계미까지, 효증손(孝曾孫) 임금 신 (숙종의 휘)은 삼가 다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큰 기틀을 처음 세우시어 하늘과 짝하는 엄숙한 제사를 받으시고, 높고 빛나는 칭호를 더하시어 빛나는 날의 아름다운 문장을 올립니다. 삼가 정성을 펼치오니, 어찌 다 칭송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께서는 자질이 뛰어나게 성스러우시고, 운..

문소전 악장 (세종 15년 계축년)

세종 15년(1433년)에 문소전(文昭殿)에서 사용된 악장(樂章)입니다. 문소전은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이 악장은 태조를 기리는 제향에서 연주되었을 것입니다. (환환곡(桓桓曲) - 초헌(初獻)에 사용)빛나고 빛나신 성조(聖祖, 태조)시여, 하늘의 명을 널리 펼치셨습니다. 공덕은 예로부터 빛나고, 상서로운 징조에 부합합니다. 하늘과 사람이 함께 순응하니, 동방(東方)을 모두 차지하셨습니다. 후세에 풍족한 계책을 남기시니, 우리에게 끝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유황곡(維皇曲) - 아헌(亞獻)에 사용)오직 넓으신 하늘은 사방의 나라를 살피시어, 동쪽 백성을 돌보십니다. 덕 있는 이를 도우시어, 신과 사람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화목한 백성들은 깊은 은혜를 우러러 봅니다. 고려의 운수가 장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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