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永樂) 17년 기해년(己亥年, 1419년) 가을 9월 26일 무진일(戊辰日)에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 정종)의 승하(晏駕)하심에, 우리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 태종) 전하와 우리 주상(主上, 세종) 전하께서 슬퍼하고 그리워함이 지극하여, 상례(喪禮)를 다하고, 위로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올렸다. 이듬해 경자년(庚子年, 1420년) 정월 초사흘 임인일(壬寅日)에 예에 따라 송경(松京, 개성) 해풍군(海豐郡)에 있는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에 합장하였으니, 이는 유언이었다.
대왕은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의 둘째 아들이시다. 천성적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공손하고 신중하며, 용맹과 지략이 남달랐다.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장상(將相)에 이르렀다. 항상 태조를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경오년(庚午年, 1390년)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예산(禮山)에서 왜구를 잡아 승리 소식을 전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392년) 가을 7월에 태조께서 즉위하시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무인년(戊寅年, 1398년) 가을 8월에 태조께서 병환이 드시자, 권신(權臣) 중에 어린 군주를 옹립하여 난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었는데, 우리 상왕(태종)께서 재빨리 제거하고 태조께 청하여 대왕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다. 9월 정축일(丁丑日)에 태조의 선위(禪位)를 받았다. 경진년(庚辰年, 1400년) 봄 2월에 후사가 없으므로 우리 상왕을 세자로 봉하였다. 그해 겨울에 병환이 드시어 우리 상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상왕께서 대왕께 인문공예(仁文恭睿)라는 존호를 올렸다. 상왕께서 사랑하고 존경하며 효도를 다함이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대왕의 춘추(春秋, 향년)는 63세이고, 왕위에 있던 기간은 3년이며, 한가롭게 지내며 병을 치료한 기간은 20년이다. (20년은 어떤 책에는 ‘19년’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슬픔과 영광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왕비 김씨(金氏)는 증(贈)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질투하지 않고, 첩들을 예로 대우하였다. 우리 상왕께서 존호를 올려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로 하고, 사후에 정안왕후(定安王后)로 추시(追諡)하였다. (옛 책에는 ‘증’이라고 되어 있다.) 자녀는 없었다. 궁첩(宮妾)에게서 난 아들은 15명, 딸은 10명이다. 원생(元生)은 의평군(義平君)에 봉해졌고, 다음은 무생(茂生), 다음은 어리니, 지씨(池氏)에게서 났다. 군생(群生)은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고, 다음은 의생(義生), 다음은 셋째이니, 모두 어리다. 딸은 전주부윤(全州府尹) 김겸(金謙)의 아들 김세민(金世敏)에게 시집가 숙신택주(淑愼宅主)에 봉해졌고, 다음 두 딸은 모두 어리니, 기씨(奇氏)에게서 났다. 그 외의 남녀는 모두 어리다. 의평군은 금천감무(衿川監務) 최치숭(崔致崇)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으니, 모두 어리다. 순평군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설존(薛存)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신하 변계량(卞季良)이 짓다.
추가 설명:
- 승하(晏駕): 임금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 존호(尊號):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칭호.
- 선위(禪位): 임금이 살아 있는 동안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일.
- 추시(追諡): 죽은 뒤에 시호를 내리는 일.
- 궁첩(宮妾): 궁중의 첩.
이 지문은 정종의 장례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출생, 성장 과정, 업적, 가족 관계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조를 도와 세운 공, 왕위 계승 과정, 태종과의 관계, 그리고 많은 자녀를 두었던 사실 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변계량이 지었다는 정보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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