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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번역/열성지장통기 92

문소전 악장 (세종 15년 계축년)

세종 15년(1433년)에 문소전(文昭殿)에서 사용된 악장(樂章)입니다. 문소전은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이 악장은 태조를 기리는 제향에서 연주되었을 것입니다. (환환곡(桓桓曲) - 초헌(初獻)에 사용)빛나고 빛나신 성조(聖祖, 태조)시여, 하늘의 명을 널리 펼치셨습니다. 공덕은 예로부터 빛나고, 상서로운 징조에 부합합니다. 하늘과 사람이 함께 순응하니, 동방(東方)을 모두 차지하셨습니다. 후세에 풍족한 계책을 남기시니, 우리에게 끝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유황곡(維皇曲) - 아헌(亞獻)에 사용)오직 넓으신 하늘은 사방의 나라를 살피시어, 동쪽 백성을 돌보십니다. 덕 있는 이를 도우시어, 신과 사람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화목한 백성들은 깊은 은혜를 우러러 봅니다. 고려의 운수가 장차 다..

종묘 악장

종묘 제향(宗廟祭享)에서 사용된 악장(樂章)입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악장은 여러 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곡은 특정한 의식 절차에 맞춰 연주되었을 것입니다. (융화(隆化) - 초헌(初獻)에 사용)아, 거룩하신 성조(聖祖, 태조)시여! 뛰어난 덕을 이어받으셨습니다. 인(仁)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고 의(義)로 복종하게 하시니, 신의 교화가 널리 미쳤습니다. 저 멀리 섬 오랑캐(왜구)와 그 산 오랑캐(여진)까지도, 아름다운 덕으로 품으니, 따르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배로 건너오고 사다리를 타고 오니, 정성껏 우리에게 끊임없이 조공을 바칩니다. 아, 혁혁하신 그 신령스러움이여! 가까이는 편안하게 하시고 멀리는 엄숙하게 하시네.(선위(宣威) - ..

부묘시 악장 (태종 10년 경인년 7월 26일 신묘일에 거행하다.)

태종 10년(1410년) 7월 26일에 태조 이성계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실 때 사용한 악장(樂章)입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태조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아아, 황고(皇考, 돌아가신 아버지)시여! 하늘로부터 도우심을 받으셨습니다. 문덕(文德)과 무공(武功)은 후세에 이어져 앞을 빛내셨습니다. 아, 혁혁(赫赫, 빛나는 모양)하십니다. 종묘에 계시니, 처음 제사를 삼가 올립니다. 이처럼 흠모하고 이처럼 제향(祭享)을 드리오니, 천만 년 동안 이어지리이다.(지어 올린 신하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이 짧은 악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태조의 공덕 찬양: “하늘로부터 도우심을 받으셨습니다.”라는 구절..

사시고 (무자년 9월 29일 갑술일에 사신이 시고를 가지고 왕궁에 이르니, 임금이 면복을 입고 맞이하여 예를 갖추어 받았으며, 상복을 입고 문소전에서 분황례를 행하다.)

명나라 황제가 태조 이성계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는 조서(詔書), 즉 ‘사시고(賜諡誥)’입니다. 태종 8년(1408년) 9월 29일에 사신이 시고(諡誥)를 가지고 왕궁에 도착하였고, 태종은 면복(冕服)을 입고 맞이하여 예를 갖추어 받았으며, 상복을 입고 문소전에서 분황례(焚黃禮)를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짐(朕, 황제의 자칭)은 삼가 하늘의 명(命)을 받아 만방(萬方, 온 세상)을 다스리니, 넓고 편안하게 하여 인심(人心)을 화합하게 하고, 현명한 덕(德)을 표창하여 다스림을 일으키니, 온 세상 안팎을 한결같이 공정하게 여긴다. 하물며 변방의 신하로서 훌륭한 자가 이처럼 운명(殞歿)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반드시 포상(褒賞)하고 구휼(救恤)하여 칭찬하고 기리는 뜻을 보여야 한다. 이에 조선 국왕 이 ..

성조황제가 하사한 제문 (무자년 9월 27일 임신일에 사신을 보내 태뢰로 문소전에서 제사 지내니, 임금(태종)이 최복을 입고 맞이하여 예를 행하다.)

영락(永樂) 6년 모년 모월 모일, 황제(성조)는 도지감 좌소감(都知監左少監) 기보(祁保)와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을 보내 돌아가신 조선 국왕 이 (태조의 휘)의 영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왕(태조)은 현명하고 사리에 밝으며 선(善)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비롯되었고, 지극한 정성으로 변함이 없었다. 옛날 황고(皇考, 선황제) 태조 고황제(주원장) 때에 하늘의 도(道)를 공경히 따르고, 의(義)를 행하며 충성을 다하고, 공손하고 부지런히 대국을 섬기며,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더욱 오래도록 더욱 삼가고, 한 지역의 백성들을 보살펴 부유하고 풍족하게 하였으니, 모두 편안하고 즐겁게 살았다. 우리 황고(주원장)께서 왕의 충성됨을 깊이 가상히 여기시어 특별히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내려 주시어 특별..

시책문 (태종 8년 무자년 9월 4일 기유일에 섭태부(攝太傅)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지(李至)와 섭중서령(攝中書令) 한성부윤(漢城府尹) 맹사성(孟思誠)을 보내 시책과 보를 빈전에 바치다. 애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태종 8년(1408년) 9월 4일에 태종이 이지(李至)와 맹사성(孟思誠)을 보내 태조 이성계의 빈전(殯殿)에 시책(諡冊)과 보(寶)를 바칠 때 사용한 시책문(諡冊文)입니다. 시책은 왕이나 왕비 등이 승하한 후 그 공덕을 기리어 올리는 시호(諡號)를 적은 문서입니다. 여기서는 태조에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시호와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를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애책(哀冊)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업(創業)하여 후세에 계책을 남기심은 실로 큰 덕(德)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름을 바꾸고 시호를 정함은 오직 지극히 공정(公正)함으로 하는 것이다. 삼가 옛 제도를 따라 아름다운 칭호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대행태상왕(大行太上王, 돌아가신 태상..

태상왕 상존호 옥책문 (정종 2년 경진년에 임금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에서 존호를 올리다.)

정종 2년(1400년)에 정종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德壽宮)에서 태상왕(太上王), 즉 태조 이성계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 사용한 옥책문(玉冊文)입니다. 옥책은 왕이나 왕비 등의 존호, 시호 등을 적어 올리는 문서로, 여기서는 태조에게 ‘계운신무(啓運神武)’라는 존호를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건문(建文) 2년(1400년) 경진년 7월 초하루 갑자일로부터 엿새째 되는 날인 기사일에 국왕 신 (이름)은 머리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삼가 책문을 받들어 올립니다.천년의 운수에 응하여 나타나신 임금께서는 큰 운수를 여셨고, 한 나라를 아들에게 전하시니, 지극히 높이는 칭호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전례(典禮)를 따라 삼가 정성스러운 효심을 펼치고자 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태상왕 전하께..

태조황제 사국호후 반교 (태조 2년 계유년 2월 15일 경인일에 반포하다. 이 해에 이첨(李恬)을 보내 고려의 인신(印信)을 바치게 하다.)

태조가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받은 후 반포한 교서(敎書), 즉 ‘태조황제 사국호후 반교(太祖皇帝賜國號後頒敎)’입니다. 태조 2년(1393년) 2월 15일에 반포되었으며, 국호 개정의 경위와 새로운 통치 방침을 밝히고 있습니다.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내가 박덕(薄德)으로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받아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전에 중추원사(中樞院使) 조림(趙琳)을 보내 황제(명 태조 주원장)께 보고하니, 답하기를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바꾸었는가? 빨리 와서 보고하라.” 하였다. 즉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한상질(韓尙質)에게 명하여 국호 개정을 청하게 하였다. 홍무(洪武) 26년(1393년) 2월 15일에 한상질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돌아왔다. 예부 우시랑(右侍郞)..

개국반교 (태조 원년 임신년 7월 28일 정미일에 반포하다.)

조선 태조가 건국 직후 백성들에게 내린 교서(敎書), 즉 개국반교(開國頒敎)입니다. 태조 원년(1392년) 7월 28일에 반포되었으며, 건국의 정당성과 새로운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개국반교 (태조 원년 임신년 7월 28일 정미일에 반포하다.)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늘이 백성을 내시고, 임금을 세우신 것은 백성들을 서로 도우며 살게 하고, 다스려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도(道)에는 잘함과 못함이 있고, 백성의 마음에는 따름과 배반함이 있으니, 천명(天命)의 옮겨감과 머무름이 이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는 이치의 당연함이다. 홍무(洪武) 25년(1392년) 7월 16일 을미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크고 작은 신료(臣僚)들이 함께 아뢰어 왕위에 나아가시기를..

지문 (태종 8년 1408년 11월 11일 을묘일에 좌대언 이조(李慥)를 보내 지석(誌石)을 내렸다.)

영락 6년(1408년) 5월 24일 임신일에 우리 태조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께서 갑자기 여러 신하들을 버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전하(태종)께서는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없어 상중의 예(禮)를 다 하시고, 삼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올리셨습니다. 이 해 9월 9일 갑인일에 서울 동쪽 양주(楊州)의 치소(治所)인 검암촌(儉巖村)의 건원릉(健元陵)에 안장(安厝)하시니, 예(禮)에 따른 것입니다.삼가 살펴보건대 선원(璿源, 왕실의 계통)의 유래는 신라(新羅) 때부터 시작되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가문에서 여러 대에 걸쳐 인덕(仁德)을 쌓아 후대의 경사(慶事)를 이루었습니다.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비로소 원(元)나라를 섬겨 천호장(千戶長)이 되시었고, 4대에 걸쳐 작위(爵位)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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