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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왕후(昭憲王后) 지문 (세종 28년 병인년. ○ 예종 기축년, 대왕릉과 함께 여흥으로 옮기다.)

集賢堂 2024. 12. 20.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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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심씨(沈氏)이고, 청송(靑松)의 명문가이다. 황증조(皇曾祖)의 휘(諱, 이름)는 용(龍)이시니, 고려(高麗)에서 증 문하시중(贈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이시다. 황조(皇祖)의 휘는 덕부(德符)이시니,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어 다시 문하시중이 되셨고, 우리 공정 왕조(恭靖王朝, 조선)에 이르러 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으로,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지셨다. 황고(皇考, 아버지)의 휘는 온(溫)이시다. 황비(皇妣, 어머니) 안씨(安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지셨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시호가 소의공(昭懿公)인 천보(天保)의 딸이시다. 홍무(洪武) 을해년(乙亥年, 1395년) 9월 기미일에 왕후를 양주(楊州)의 사저(私第)에서 낳으셨다.

왕후는 태어나면서부터 어질고 순하며, 덕행을 갖추셨다.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출합(出閤, 성인이 되어 궁궐에서 나가 생활하는 것)하실 때, 태종대왕께서 훌륭한 가문을 가려 배필을 구하셨다. 영락(永樂) 무자년(戊子年, 1408년), 왕후께서 장차 비녀를 꽂을 나이(15세)가 되시자, 덕과 용모로 인해 이에 맞아들여 빈(嬪)으로 삼으시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하셨다. 두 궁궐(태종과 원경왕후)을 공경히 섬기시어, 두터운 사랑을 받으셨다. 가정을 다스리시는 날에는, 안에서 바른 위치에 자리하셨다. 자애롭고 검소하시어, 엄숙하고 화목한 아름다움을 이루셨다. 왕후께서 나아가고 물러나실 때, 전하께서는 반드시 일어나셨으니, 그 존경하고 예우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丁酉年, 1417년) 가을 9월, 삼한국대부인으로 개봉(改封)되었다.

무술년(戊戌年, 1418년) 여름, 문무백관이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저궁(儲宮, 세자)이 덕이 없으니, 현명한 이를 택하여 세자를 세우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종대왕께서 이를 따르시어, 태종 문황제(명나라 영락제)에게 갖추어 아뢰었고, 전하를 왕세자로 책봉하시고, 왕후를 경빈으로 봉하셨다. 이 해 가을 8월, 전하께서 태종의 내선(內禪, 왕위를 물려줌)을 받아 즉위하셨다. 11월, 왕후를 공비(恭妃)로 봉하셨다. 신축년(辛丑年, 1421년) 가을 9월, 태종 문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특별히 단(段)과 견(絹)을 하사하셨다. 이로부터 홍희(洪熙), 선덕(宣德) 연간에, 비단과 사라(紗羅)의 하사가 여러 차례 이르렀다. 임자년(壬子年, 1432년) 정월, 유사(有司, 관청)에서 아뢰기를 “중궁(中宮, 왕비)에게 아름다운 칭호가 있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라고 하였고, 5월, 왕비로 개봉되었다.

왕후는 자애롭고 어질며 거룩하고 착하심이, 천성에서 나오셨으니, 중궁의 자리에 오르신 후,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신중하셨다. 빈어(嬪御)를 예로써 대하시고, 아래로 궁인(宮人)에 이르기까지, 어루만져 사랑하고 은혜를 더하지 않음이 없었다. 후궁(後宮)에서 나아가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로하고 받아들이셨다. 만약 총애하는 자가 있으면, 특별히 융숭한 대우를 더하시니, 지극한 정에 막힘이 없었다. 낳은 여러 아들들은, 모두 기르도록 하셨고, 후궁 또한 정성을 다해 받들어 기르니, 자신이 낳은 아들보다 더하였다. 또 일을 맡기시되, 의심하지 않고 맡기시니, 후궁 또한 진심으로 받들어 순종하여,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빈어 이하가, 부모를 대하듯 사랑하고 공경하였고, 서출(庶出)의 아들을 보기를, 모두 자신이 낳은 아들처럼 하였다. 어선(御膳)이 올라오면, 반드시 몸소 살피시어,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자 힘쓰셨다. 29년 동안의 왕후로서의 기간 동안, 경계하고 조심하는 도움은 있었으나, 편안히 지내려는 사사로운 마음은 없었다. 일찍이 친척을 위해 은혜를 구하지 않았고, 또 외부 일과 전혀 관계하지 않으셨다. 비록 궁중의 일상적인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위(세종)께 아뢰었고,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으셨다. 안의 법도가 능히 바르니, 교화가 밖으로 흘러갔다. 여러 아들을 가르치시되,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 하셨으니, 이에 《인치(麟趾)》와 《충사(螽斯)》의 경사가 있었다. 대개 하늘이 성인을 내시면, 반드시 현명한 배필을 지어,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게 하신다. 주(周)나라의 태사(太姒)가, 《풍(風)》과 《아(雅)》를 읊어, 천고에 빛나게 하였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이미 지극한 덕과 지극한 다스림으로, 문왕(文王)을 좇으시니, 왕후께서 또한 이와 같은 덕과 행실이 있으시니, 진실로 하늘이 만든 한 쌍이라 할 만하니, 문왕의 후비가 홀로 앞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핵심 내용:

  • 소헌왕후의 가계와 출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
  • 세종과의 혼인 과정과 태종의 사랑을 받은 이야기.
  • 왕비로서의 덕행과 궁중 생활에 대한 묘사 (겸손, 자애, 공경, 검소).
  • 후궁들과의 관계 (화목, 신뢰, 배려).
  • 자녀 교육에 대한 지침 (의로운 가르침).
  •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 (사신 파견, 하사품).
  • 세종의 성덕과 소헌왕후의 현숙함을 주나라 문왕과 태사에 비유하며 극찬.

추가 설명:

이 묘지명은 소헌왕후의 생애와 덕행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왕비로서의 겸손함, 자애로움, 공경심, 검소함 등을 강조하며, 후궁들과의 원만한 관계, 자녀 교육에 대한 지침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세종과의 관계를 주나라 문왕과 태사에 비유하며 극찬하는 부분은, 소헌왕후가 세종의 성군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빛나게 하는 현숙한 배우자였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정통 병인년(1446년) 3월 초열흘, 왕후께서 병을 느끼시자, 전하(殿下, 세종)께서는 밤낮으로 가까이에서 보살피셨고, 동궁(東宮, 문종) 이하가 곁에서 모시며, 직접 약을 올렸으며, 모든 의료와 기도에, 그 극진함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달 24일 신묘일, 별궁(別宮)에서 훙서(薨逝)하시니, 춘추(春秋, 향년) 52세였다. 안으로는 궁첩(宮妾)으로부터, 밖으로는 대소 신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하인에 이르기까지,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늘은 어찌 이 아름다운 덕을 후하게 하시어, 홀로 장수하지 못하게 하시어 이에 이르게 하셨는가? 아, 슬프도다! 전하께서는 어진 배우자를 일찍 잃으신 것을 슬퍼하시어, 슬픔을 이기지 못하시고, 흰옷을 입고 소찬(素膳)으로 30일을 보내셨으며, 책봉하여 시호를 소헌왕후(昭憲王后)라 내리셨다. 영릉(英陵)을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마련하고, 같은 능역 안에 다른 곳에, 동쪽에 안장(安葬)하였으니, 예(禮)이다.

왕후께서는 여덟 아들과 두 딸을 낳으셨다. 맏아들은 [문종의 이름]이시니,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둘째는 [세조의 이름]이시니,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고, 셋째는 용(瑢)이니, 안평대군(安平大君)에 봉해졌고, 넷째는 구(璆)이니, 임영대군(臨瀛大君)에 봉해졌고, 다섯째는 여(璵)이니, 광평대군(廣平大君)에 봉해졌으나, 2년 전에 졸(卒)하였고, 여섯째는 유(瑜)이니, 금성대군(錦城大君)에 봉해졌고, 일곱째는 린(琳)이니, 평원대군(平原大君)에 봉해졌으나, 1년 전에 졸하였고, 여덟째는 염(琰)이니, 영흥[구본에는 “응(膺)”이라 되어 있음.]대군에 봉해졌다. 딸 중 장녀 정소공주(貞昭公主)는 일찍 졸하였고, 둘째 정懿公主(貞懿公主)는 광덕대부(光德大夫)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왕세자빈 권씨(權氏)는 증 의정부 좌의정 전(專)의 딸로, 원손(元孫)과 평창군주(平昌郡主)를 낳고 일찍 졸하였다. 사칙(司則) 양씨(楊氏)는 딸 하나를 낳았고, 궁인 장씨(張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정씨(鄭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모두 어리다.

수양(세조)은 중추원사(中樞院使) 윤번(尹璠)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낳으니, 아들은 [덕종의 이름]이시니,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졌고, 딸들은 모두 어리다. 안평은 증 의정부 좌의정 정연지(鄭淵之)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으니, 맏아들은 우직(友直)이니,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영은 증 의정부 우의정 최승녕(崔承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으니, 맏아들은 주(澍)이니, 오산군(烏山君)에 봉해졌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광평은 중군 호군(中軍護軍) 신자수(申自守)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어리다. 금성은 증 의정부 좌의정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평원은 증 의정부 좌의정 홍이용(洪利用)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영흥[구본에는 “응”이라 되어 있음.]은 사재부정(司宰副正) 송복원(宋復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정懿공주는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모두 어리다.

처음에, 정인지(鄭麟趾)가 초고를 갖추어 올리자, 임금(세종)께서 보시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시기를, “지문은 후세 사람들이 함께 볼 것이다. 지금 왕비는 청탁하는 사사로운 일이 전혀 없었고,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은혜가 있었으니, 의심하고 꺼리는 바가 없다. 그 뜻을 인지에게 알려, 아울러 싣도록 하라.”라고 하셨다.

예조판서 신 정인지가 짓다.

핵심 내용:

  • 소헌왕후의 병환과 임종 과정.
  • 세종의 슬픔과 장례 절차.
  • 소헌왕후의 자녀 및 혼인 관계 상세 기록.
  • 세종의 지문에 대한 의견 제시 및 정인지의 작문.

추가 설명:

이 기록은 소헌왕후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제공합니다. 특히, 세종이 왕후의 병환을 극진히 간호하고, 사후에도 깊은 슬픔에 잠겼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후의 자녀와 그들의 혼인 관계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조선 왕실의 계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세종이 직접 지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부분입니다. “왕비는 청탁하는 사사로운 일이 전혀 없었고,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은혜가 있었으니, 의심하고 꺼리는 바가 없다.”라는 세종의 언급은, 소헌왕후가 왕비로서 매우 청렴하고 어진 덕을 갖추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배우자를 잃은 슬픔을 넘어, 국가의 어머니로서 소헌왕후의 공덕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소헌왕후의 삶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기록으로서, 앞서 번역한 묘지명과 함께 살펴보면, 소헌왕후의 생애 전반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이해를 도울 것입니다. 또한, 당시 왕실의 장례 문화와 왕실 구성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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