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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비 옥책문 (封靜妃玉冊文)(태종 원년 신사년 정월 초10일 경오일에, 참찬문하부사 권근에게 명하여 책보를 내리게 하였다. ○ 옛 기록에는 “봉왕비책(封王妃冊)”이라 하였으나, 중궁(왕비)을 단지 “왕비”라고 칭한 것은 세종 임자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지금 바로잡는다. ○ 교명은 전하지 않는다.)

集賢堂 2024. 12. 20.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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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교화의 근본은, 반드시 집안의 바름에서 시작되고, 종묘 제사의 계통은, 진실로 배필의 존귀함과 관계된다. 이에 떳떳한 법도를 거행하여, 빛나는 책에 기록하고자 한다. 생각하건대 그대 정빈 민씨는 깊고 조용하며 정숙하고 고요하며, 진실로 한결같고 단정하다. 머리를 묶어 부부가 된 이후로, 일찍이 집안을 다스리는 덕을 드러내었고, 능히 계책을 결정하고 갑옷을 갖추어, 나라를 안정시킨 공을 도왔다. 이에 큰 사업을 잇게 되었으니, 또한 안의 도움이 많았다. 이에 어려웠던 시절의 은혜를 잊지 않고, 아름다운 왕비의 예의를 높이고자 한다. 아! 집안이 만년토록 이어져, 번성하고 평화로운 복을 길이 누리고, 왕실의 혈통이 백세토록 이어져, 영원히 후손에게 풍족함을 남기는 계책을 내릴 것이다.

(지어 바친 신하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해석 및 해설:

이 옥책문은 태종이 즉위한 후, 그의 부인 민씨를 정비(靜妃)로 책봉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서 정빈으로 책봉되었던 민씨는 태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다시 책봉 의례를 거행한 것입니다. 이 문서를 통해 우리는 당시 왕실의 가치관, 여성의 역할, 그리고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책봉의 의의: 책문은 왕의 교화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과 종묘 제사의 계통이 왕비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왕비 책봉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는 유교적인 가치관에 따라 가정을 다스리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것의 근본이라고 여겼던 당시 사회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 민씨의 덕행 칭송: 민씨의 성품을 “유한정정(幽閑貞靜, 깊고 조용하며 정숙하고 고요함)” “성일단장(誠一端莊, 진실로 한결같고 단정함)” 등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덕행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특히 “결책이제갑(決策而提甲, 계책을 결정하고 갑옷을 갖추어)”이라는 표현은, 민씨가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단순한 내조의 역할을 넘어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던 왕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 조강지처(糟糠之妻)의 언급: “불망조강지구(不忘糟糠之舊, 어려웠던 시절의 은혜를 잊지 않고)”라는 표현은, 태종이 어려웠던 시절부터 함께 해 온 민씨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부부의 의리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조강(糟糠)”은 술지게미와 쌀겨를 의미하며,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 왕실의 번영 기원: 책문의 말미에는 왕실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실가만년(室家萬年, 집안이 만년토록 이어짐)” “본지백세(本支百世, 왕실의 혈통이 백세토록 이어짐)” 등의 표현은, 왕조의 영속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 기록의 수정: “봉왕비책(封王妃冊)”을 “봉정비옥책(封靜妃玉冊)”으로 바로잡은 것은,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입니다. 또한, 중궁을 “왕비”라고만 칭했던 관례가 세종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옥책문은 왕비 책봉이라는 의례를 통해 당시 왕실의 가치관과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특히 왕비의 역할, 부부의 의리, 왕조의 영속성 등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으며, 태종과 민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또한, 기록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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