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살펴보건대 태후 민씨는 여흥의 명문 집안이다. 고려 문하시랑 평장사 문경공 민영모로부터 6대를 내려와 황고조(皇高祖, 고조할아버지) 민종유에 이르렀으니, 의릉(毅陵)의 재상으로서 도첨의시랑 찬성사를 지냈고,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은 황증조(皇曾祖, 증조할아버지) 판밀직사사 시호 문순(文順) 민적을 낳았고, 문순은 황조(皇祖, 할아버지) 대광 여흥군 민변을 낳았으며, 대광은 황고(皇考, 아버지) 순충동덕찬화공신 보국숭록대부 여흥부원군 수문전 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 시호 문도(文度) 민제를 낳았다. 황비(皇妣, 어머니) 송씨는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니, 고려 중대광 여량군 송선지의 딸이다. 을사년 7월 정묘일에 송경 철동의 사저에서 태후를 낳았다.
태후는 태어나면서부터 어질고 아름다우셨으며, 총명함이 남달랐다. 15세가 되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우리 성덕신공상왕(태종)에게 시집오셨다.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품고,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며, 집안의 재산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태후는 집안을 다스리는 데 능하셨고, 음식을 주관하는 데 신중하셨으며, 그 공을 힘쓰셨고, 여러 아들을 가르치시되 의로운 방향으로 따르게 하셨으며,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시어 부인의 도리를 다하셨다. 홍무 임신년(1392년), 상왕(태조)께서 태조를 도와 나라를 여시니, 정녕옹주(靜寧翁主)에 봉해졌다. 경진년(1400년), 공정왕(정종)이 후사가 없으므로, 우리 상왕을 세자로 봉하시고, 태후를 정빈(貞嬪)에 봉하셨다. 그해 11월, 상왕께서 공정왕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시니, 정비(靜妃)에 봉해졌다. 영락 계미년(1403년) 4월, 명나라 황제가 조거임을 보내어 우리 상왕을 조선 국왕으로 봉하였다. 이 해 겨울 10월, 명나라 황제가 태후에게 관복을 하사하니, 그 화려함이 견줄 데 없었다. 이때부터 정유년(1417년)까지 여러 차례 명나라 황제의 하사를 받았으니 모두 다섯 번이었다. 무술년(1418년) 8월, 상왕께서 우리 주상 전하(세종)께 선위하시니, 전하께서 즉위하시고, 그해 겨울 11월 갑인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상왕께 성덕신공(聖德神功)이라는 칭호를 올리고, 태후께는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라는 칭호를 올렸다. 기해년(1419년) 정월, 명나라 황제가 고명과 인장을 하사하여 우리 주상 전하를 국왕으로 봉하였다. 경자년(1420년) 5월 25일, 태후께서 병을 얻으시니, 상왕께서 날마다 병환을 살피셨고, 주상께서는 곁에서 모시며 부채를 부치고, 직접 탕약을 올리는 등, 모든 치료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7월 10일에 수강궁 별전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크고 작은 신하들부터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 슬프도다! 상왕께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시어, 조금이라도 불편하셨고, 주상께서는 대신을 보내어 고기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흰 옷을 입고 소찬(素饌)으로 30일을 보내셨다. 주상께서는 슬픔이 극심하여, 여막(諒闇)에 거처하셨고, 상왕께서는 장례 후에 상복을 벗는 것을 허락하셨다. 주상께서는 9월 14일에 존호(尊號)를 올려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 하였다. 대신들이 의논하여 “5월에 장사 지내는 것이 예법입니다. 그러나 송나라 제도에는 왕공 이하 모두 3월에 장사 지냅니다. 지금 주상께서 오랫동안 여막에 계시어 문안을 드리지 못하니, 마땅히 시의에 맞게 송나라 제도를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니, 상왕께서 허락하셨다. 3개월이 지난 17일 임오일에 광주 치소의 대모산에 안장하니, 능호를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해설:
이 지문은 태종의 비이자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의 생애와 죽음을 기록한 글입니다. 세종 2년(1420년)에 작성되었으며, 원경왕후의 가계, 혼인, 내조, 정치적 역할, 병환, 죽음, 장례 과정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 가계: 원경왕후의 가문이 고려의 명문가 출신임을 밝히고, 조상들의 관직과 시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비의 가문을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합니다.
- 혼인과 내조: 태종과의 혼인, 젊은 시절의 뜻, 가정생활에서의 역할 등을 묘사하며, 현명하고 덕망 있는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 정치적 역할: 태종이 조선 건국에 참여하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녕옹주, 정빈, 정비 등의 칭호를 받았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비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보여줍니다.
- 죽음과 장례: 원경왕후의 병환, 죽음, 장례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태종과 세종의 슬픔, 상복 착용 기간, 장례 절차 등에 대한 기록은 당시 왕실의 장례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송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장례 기간을 조정한 사실은 당시 조선이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존호 추상: 사후에 원경왕태후라는 존호를 올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비의 공덕을 기리고 존경을 표하기 위한 의례였습니다.
이 지문은 원경왕후의 삶을 통해 당시 왕실의 생활, 정치, 문화, 장례 제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특히 왕비의 역할과 위상,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유교적 예법의 영향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태후께서는 깊고 조용하며 정숙한 덕을 품으시고, 능히 성상(태종)을 배필로서 잘 섬기시어, 오로지 안의 일을 다스리시니, 19년 동안, 왕비의 위엄이 엄숙하고 조용하였으며, 또한 성스러운 아들을 낳으시어, 종묘사직의 주인이 되게 하시고,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게 하셨다. 아! 성대하도다! 태후께서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으셨으니, 우리 주상 전하(세종)는 그중 셋째이시다. 장남은 제(禔)이니, 일찍이 세자가 되었으나, 덕을 삼가지 못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세자로 삼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아뢰니, 상왕께서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여 폐하고, 양녕대군에 봉하였다. 둘째는 부(𥙷)이니, 효령대군에 봉하였다. 셋째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음)이니, 성녕대군에 봉하였으나, 먼저 죽었다. 장녀 정순궁주는 청평부원군 이백강에게 시집갔으니, 이씨는 한 이씨가 아니다. 둘째 경정궁주는 평양군 조대림에게 시집갔다. 셋째 경안궁주는 길창군 권궤에게 시집갔으나, 역시 먼저 죽었다. 넷째 정선궁주는 의산군 남휘에게 시집갔다. 우리 중궁(中宮, 왕비) 공비 심씨는 문하시중 심덕부의 넷째 아들 온의 딸이다.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양녕은 김한로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과 한 딸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효령은 호조판서 정역의 딸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과 한 딸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성녕은 경창부윤 성억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정순궁주는 딸을 낳아, 동부지돈녕 이계린에게 시집갔으니, 역시 한 이씨가 아니며, 한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경정궁주는 네 딸을 낳았으니, 장녀는 유학 안진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궁주는 두 아들을 낳았으니, 담개(聃改)는 사헌장령 정연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둘째는 어리다. ‘담개’ 두 글자는 ‘장남(長男) 담(聃)’의 잘못으로 보인다. 정선궁주는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판돈녕부사 권홍에게 명하여 여러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의정부 참찬 변계량이 짓다.
해설:
이 부분은 원경왕후의 덕행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그녀가 낳은 자녀들과 그들의 혼인 관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왕실의 가족 관계와 혼인 풍습, 그리고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 태후의 덕행: 태후의 내조(內助)의 공을 강조하며, 그녀가 낳은 아들(세종)이 종묘사직의 주인이 되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비의 역할이 단순히 왕의 배우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정과 번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던 당시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 자녀들의 출생과 혼인: 태후가 낳은 네 아들과 네 딸의 이름과 봉호, 배우자, 자녀 관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남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왕위 계승의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딸들의 혼인 상대를 기록하면서 ‘한 이씨가 아니다(非一李也)’라고 명시한 것은, 동성동본 혼인을 피하려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보여줍니다.
- 중궁 공비 심씨: 세종의 왕비인 공비 심씨의 가계와 자녀 관계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 자녀들의 배우자 가문: 자녀들의 배우자 가문을 언급함으로써, 당시 혼인을 통한 정치적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 기록의 오류 추정: ‘담개(聃改)’라는 이름에 대해 ‘장남(長男) 담(聃)’의 잘못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한 것은,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입니다.
- 권홍의 역할: 판돈녕부사 권홍에게 비석 건립을 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원경왕후 개인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 왕실의 가족 관계, 혼인 풍습, 정치적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특히 왕위 계승 문제, 외척 문제, 동성동본 혼인 금지 등 조선 초기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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