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蘇軾)의 남행전집서(南行前集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 및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남쪽으로 가는 여정 이전에 쓴 글로, 문장을 짓는 행위와 그의 문학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무릇 옛날에 글을 짓는 사람들은 능히 잘 지으려고 해서 잘 지은 것이 아니라, 능히 짓지 않을 수 없어서 잘 짓게 된 것이다. 산천에 구름이 있고 초목에 꽃과 열매가 있는 것처럼, 충만하고 왕성한 기운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비록 없애려 한들 어찌 가능하겠는가! 젊었을 때부터 아버님의 논문(論文, 문장에 대한 논의)을 들어왔다. 옛날의 성인들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서 글을 지었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나와 아우 철(轍)이 글을 지은 것이 매우 많지만, 일찍이 감히 글을 지으려는 의도를 가진 적이 없었다. 기해년(己亥年)에 아버님을 모시고 초나라(楚)로 가는 길에, 배 안에서 할 일이 없어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집안의 즐거움이라 할 수 없었다. 산천의 빼어난 아름다움, 풍속의 소박함과 거칢, 현인 군자의 유적, 그리고 무릇 눈과 귀로 접하는 것들이 뒤섞여 마음속에 와 닿았고, 그것이 영탄(詠歎, 감탄하여 읊음)으로 나타났다. 대개 아버님의 작품과 아우 철의 글이 모두 실려 있는데, 모두 백 편이며, 이를 남행집(南行集)이라 한다. 장차 이로써 당시의 일을 기록하고, 훗날에 찾아서 살펴볼 자료로 삼으며, 또한 담소하는 사이에 얻어진 것이지 억지로 지은 글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때는 12월 8일, 강릉역(江陵驛)에서 쓰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소식이 남쪽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그의 문학관을 밝히는 서문입니다.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설명하겠습니다.
- "능히 잘 지으려고 해서 잘 지은 것이 아니라, 능히 짓지 않을 수 없어서 잘 짓게 된 것이다(非能為之為工,乃不能不為之為工也).": 이 문장은 이 글의 핵심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소식은 문학 창작의 본질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치 자연 현상(구름, 초목의 꽃과 열매)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처럼, 진정한 문학은 작가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문학계의 형식주의적인 경향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억지로 꾸며 쓴 글이 아닌, 진솔한 감정을 담은 글이 가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 아버지의 영향: 소식은 아버지 소순(蘇洵)의 문학관의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합니다. 아버지는 '옛날의 성인들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서 글을 지었다'고 보았는데, 이는 소식의 문학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순, 소식, 소철 삼부자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일컬어지는 뛰어난 문장가 집안으로, 특히 소식은 아버지와 동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 "감히 글을 지으려는 의도를 가진 적이 없었다(未嘗敢有作文之意).": 이는 앞서 언급한 '억지로 짓지 않는다'는 사상과 연결됩니다. 소식은 글을 쓰기 위해 억지로 주제를 정하거나 형식을 맞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면의 감정과 외부 세계의 자극에 따라 자연스럽게 글이 써졌다는 것입니다.
- 남행의 경험: 소식은 남쪽으로 가는 여정에서 겪은 경험들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밝힙니다. 빼어난 자연 경관, 소박한 풍속, 역사적 유적 등을 접하면서 마음속에 일어난 감흥을 글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유배라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연과 역사,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글을 썼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 남행집의 의미: 소식은 이 글들을 모아 '남행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단순히 당시의 일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훗날 사람들이 찾아볼 수 있는 자료로 삼고, 또한 억지로 지은 글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후대에 자신의 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줍니다.
- 기해년(己亥年): 소식이 이 글을 쓴 해는 1059년입니다. 이때 소식은 아버지 소순을 모시고 초나라(楚)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소식의 문학관, 즉 '억지로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글'을 강조하고 있으며, 남행이라는 경험이 그의 문학 창작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아버지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의미 부여와 후대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송장자평시서(送章子平詩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 및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친구인 장자평(章子平)의 지방관 부임을 축하하며 지은 시에 대한 서문입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진사 등과록(進士登科錄, 과거 합격자 명단)을 살펴보니, 천성(天聖) 초년부터 가우(嘉祐) 말년까지 모두 4천 5백 17명이었다. 그중 귀하고 현명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중 상위 세 사람을 헤아려보니, 모두 39명이었는데, 공경(公卿, 높은 벼슬)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5명뿐이었다. 가히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후직(后稷)의 농사(穡)를 도우시니, 재상의 도리로다(誕后稷之穡,有相之道)”라고 하였으니, 우리 인종(仁宗)께서 선비를 대우하심도 이와 같았다. 성률(聲律, 시의 운율)로 비교하고, 호명(糊名, 답안지에 이름을 가리고 채점하는 방식)으로 뽑았는데도 뛰어난 인재가 나왔다. 이는 어떠한 술책인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겪고,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 중에 크고 밝고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찌 사람의 힘이겠는가? 하늘이 도우심이다. 하늘이 임금을 도우심은 사람을 주어 그를 돕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인종께서 재위하신 35년 동안, 과거는 대략 열 번이나 거행되었는데, 우리 자평을 얻어 수석으로 삼았다. 자평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경학(經學)의 풍부함, 정치의 민첩함, 바름으로 지키고 겸손으로 행하니, 이는 공명과 부귀가 쫓아다니며 용서하지 않는 바이다. 비록 수석으로 뽑히지 않았더라도, 누가 그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곤궁하고 좌절하여 10년이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건대 임무가 무겁고 길이 머니, 반드시 늙은 뒤에 크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 인종의 밝으심과 하늘의 도우심으로 사람을 주어 그 일을 맡게 하셨는데, 어찌 공연한 일이겠는가! 희녕(熙寧) 3년 겨울, 자평이 우사간(右司諫)에서 직집현원(直集賢院)을 거쳐 정주(鄭州)의 목사(牧使, 지방관)로 나가게 되었다. 사대부들이 그가 장차 중용될 것을 알고, 10월 정미일에 관음의 불사(佛舍)에 모여 함께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나는 자평과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친구이므로, 여러 사람들이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기에 사양할 수 없었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장자평의 지방관 부임을 축하하는 시에 대한 서문으로, 다음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과거 제도의 성대함과 인재 등용의 중요성: 소식은 과거 합격자 수를 언급하며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강조하고, 특히 인종 시대의 인재 등용을 높이 평가합니다. ‘성률로 비교하고 호명으로 뽑았는데도 뛰어난 인재가 나왔다’는 부분은 공정성을 기한 과거 제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인재가 배출된 것은 하늘의 뜻, 즉 천상(天相)이라고 표현하며,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장자평의 뛰어남: 소식은 장자평의 뛰어난 재능과 덕망을 칭찬합니다. 문장, 경학, 정치 능력뿐만 아니라, 바름과 겸손을 갖춘 인물로 평가하며, 이는 당연히 높은 벼슬에 올라야 할 인물임을 강조합니다. '공명과 부귀가 쫓아다니며 용서하지 않는 바이다'라는 표현은 장자평의 뛰어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장자평의 오랜 좌절: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낮은 지위에 머물러 있었던 장자평의 상황을 언급합니다. 이는 능력 있는 인재가 제대로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장자평의 중용에 대한 기대: 장자평의 지방관 부임을 계기로 그가 앞으로 중용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합니다. 인종의 현명함과 하늘의 도움을 언급하며, 장자평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 서문을 쓰게 된 이유: 소식은 자신과 장자평이 동년(同年,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이)이라는 이유로 여러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 이 서문을 쓰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장자평의 지방관 부임을 축하하는 글이자,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입니다. 또한, 장자평의 뛰어난 능력과 그동안의 좌절, 그리고 앞으로의 중용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으며, 인종 시대의 인재 등용에 대한 소식의 긍정적인 평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모란기서(牡丹記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 및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태수 심공(沈公)과 함께 모란꽃을 구경한 후, 심공이 편찬한 모란에 관한 책에 대한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희녕(熙寧) 5년 3월 23일, 나는 태수 심공을 따라 길상사(吉祥寺)의 승려 수지(守之)의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였다. 정원에는 꽃이 천 그루나 있었고, 그 품종은 백 가지가 넘었다. 술이 거나해지고 흥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이 크게 모여 금쟁반과 채색 바구니에 음식을 담아 자리에 있는 53명에게 바쳤다. 술 마시는 흥이 매우 높아 평소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들도 모두 취했다. 가마꾼과 하인들까지 모두 꽃을 꽂고 따랐고, 구경하는 사람은 수만 명이었다. 다음 날, 심공이 모아 놓은 모란에 대한 기록 10권을 손님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모란에 대해 전기에 나타난 내용과 재배하고 가꾸고 옮겨 심는 방법,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시와 부, 심지어 괴이한 소설까지 모두 있었다. 나는 꽃의 극성함을 구경하고, 고을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논 것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이 책의 정밀하고 박식함을 보게 되었기에, 이 세 가지를 모두 기록할 만하다고 여겼는데, 심공이 또 나에게 글을 써서 책의 앞에 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대개 이 꽃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겨진 지 3백여 년이 되었는데, 요염함과 화려함을 다하여 천하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였고, 근래에는 더욱이 변화무쌍하게 새로운 기이함을 추구하여 당시의 유행을 쫓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는 초목의 지혜와 교묘함과 아첨하는 것이다. 지금 심공은 노인으로서 덕망이 높고, 나는 또 어리석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세상 사람들이 견줄 사람이 없으니, 그렇다면 이 책에 대해서는 모두 그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녹문자(鹿門子)는 항상 송광평(宋廣平)의 사람됨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그의 마음은 쇠와 돌처럼 굳건하리라 생각했지만, 매화부(梅花賦)를 지은 것을 보니 맑고 아름다움이 넘쳐 남조(南朝) 서유(徐庾)의 풍격을 얻었다. 지금 내가 살펴보니, 무릇 어리석고 촌스럽게 행동하여 세상을 현혹하는 것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비록 그 사람은 아니지만, 억지로 심공을 위해 기록한다. 심공의 집에는 책이 2만 권이나 있어 널리 보고 굳게 기억하여, 일을 만나면 책을 지으니, 모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분석 및 설명:
이 서문은 모란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심공의 연구를 칭송하는 내용과 함께,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드러내면서도 글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 성대한 모란 구경: 소식은 심공과 함께한 성대한 모란 구경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수많은 꽃과 사람들, 흥겨운 분위기를 통해 당시 모란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보여줍니다.
- 심공의 모란 연구: 심공이 편찬한 모란에 대한 책의 방대함과 정밀함을 칭찬합니다. 역사적 기록부터 재배 방법, 시와 부, 소설까지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심공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줍니다.
- 모란의 변화무쌍함: 모란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았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품종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지적합니다. 이를 ‘초목의 지혜와 교묘함과 아첨’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기호에 맞춰 변화하는 모란의 속성을 빗댄 것입니다.
- 자신의 겸손: 심공의 높은 덕망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대비시키며, 자신이 이 책에 대한 서문을 쓸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이는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겸양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송광평의 사례 인용: 녹문자가 송광평의 인품과 그의 문장 스타일이 달랐던 점을 지적한 사례를 인용하여,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내면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비록 부족하지만 심공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글을 쓰게 되었음을 정당화합니다.
- 심공의 학문적 업적: 마지막으로 심공의 방대한 장서와 학문적 업적을 다시 한번 칭찬하며, 그가 모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능통한 학자임을 강조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성대한 모란 구경을 계기로 심공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는 내용입니다. 모란의 아름다움과 변화, 심공의 방대한 연구, 그리고 자신의 겸손을 적절히 조화시켜 서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송광평의 사례를 인용한 부분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함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글을 쓰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소식(蘇軾)의 송항주진사시서(送杭州進士詩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 및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항주(杭州)의 진사(進士)들이 예부(禮部)의 시험을 보러 떠나는 것을 배웅하며 지은 시에 대한 서문으로, 관리의 자세와 도리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오른쪽의 ‘저 공당에 오르다(登彼公堂)’ 네 장(章), 각 장 네 구절은 태수 진공(陳公)의 시이다. 소자(蘇子, 소식 자신)가 말한다. 선비가 벼슬을 구하는 것은 뜻이 얻는 데 있으니, 벼슬하면서 얻는 데 뜻이 없는 것은 거짓이다. 진실로 얻는 데 뜻을 두면서도 그 도(道)를 따르지 않고, 시세의 오르내림을 보아 가며 자신의 학문을 바꾸어 말하기를 “나는 단지 얻기만 하면 된다.”라고 한다면, 무릇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괜찮겠는가? 옛날에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사냥을 나가 우인(虞人, 사냥터 관리)을 부르는데 깃발(旌)로 불렀지만 오지 않았다. 공자(孔子)께서 이를 칭찬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우인을 부를 때는 가죽 모자(皮冠)로 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깃발과 가죽 모자는 의리상 손익(損益)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학문을 버리고 도가 아닌 것을 배우게 하는 것보다야 어떻겠는가? 희녕(熙寧) 5년, 전당(錢塘, 항주의 옛 이름)의 선비로서 예부에 바쳐진(시험을 보러 간) 사람이 아홉 명이었는데, 10월 을유일에 중화당(中和堂)에서 잔치를 베풀었고, 진공께서 이 시를 지어 그들에게 당부하여 말씀하시기를 “흘러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물이고, 때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이다.”라고 하셨다. 물을 말하면서 소나무와 잣나무에까지 미친 것은, 그 움직이는 것에 있어서 나아가기 어려움을 바란 것이다. “만세토록 변하지 않는 것은 산이고, 때로 날고 때로 멈추는 것은 기러기이다.”라고 하셨다. 산을 말하면서 기러기에까지 미친 것은, 그 고요한 것에 있어서 때에 맞추기를 바란 것이다. 진공께서 선비를 대우하심은 가히 주도하다고 할 만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말이 없어도 갚지 않음이 없고, 덕이 있어도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無言不醻,無德不報).”라고 하였으니, 이 두세 사람들이 무엇으로 진공에게 보답하겠는가?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벼슬을 구하는 선비의 자세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으며, 진공의 시를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 벼슬을 구하는 올바른 자세: 소식은 벼슬을 구하는 목적이 단지 ‘얻는 것’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얻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를 따르지 않고 시세에 따라 변하는 행태를 비판하며, 이는 옳지 않은 처사임을 분명히 합니다.
- 공자의 사례 인용: 제 경공이 우인을 부르는 방법을 잘못 사용하여 공자에게 비판받은 사례를 인용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일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물며 학문을 버리고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행위는 더욱 용납될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 진공의 시: 진공이 지은 시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그 의미를 해석합니다. ‘흘러서 돌아오지 않는 물’과 ‘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대비시켜, 벼슬을 구하는 선비는 물처럼 융통성을 가지되,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굳건한 절개를 지녀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만세토록 변하지 않는 산’과 ‘때로 날고 때로 멈추는 기러기’를 대비시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함을 역설합니다.
- 진공의 인재 사랑: 소식은 진공이 선비들을 대우하는 태도를 ‘주도하다(周)’고 평가하며 칭찬합니다. 이는 진공이 선비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 그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선비의 보답: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선비들은 진공의 은덕에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인 보답이 아닌, 진공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기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벼슬을 구하는 선비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 즉 도를 따르고 절개를 지키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공의 시를 통해 이러한 교훈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인재를 아끼고 격려하는 진공의 모습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비로서 스승의 은덕에 보답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소무성시집서(邵茂誠詩集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 및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과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친구 소무성(邵茂誠)의 시집에 대한 서문으로, 그의 불운한 삶을 애도하고 그의 시를 칭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귀함과 천함, 장수와 요절은 하늘의 뜻이다. 현명한 사람은 반드시 귀하게 되고, 어진 사람은 반드시 장수하는 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하늘의 뜻과 마침 맞아떨어지는 것은 실로 어려우니, 비유하자면 장인(匠人)이 산을 깎아 언덕을 만들려다 오히려 빈터를 얻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항상 그러하겠는가? 그 마침 맞아떨어짐을 인하여 항상 그러하기를 책망하는 것은, 이 때문에 사람들이 원망은 많으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이다. 문인(文人)에 이르러서는, 그 곤궁함이 진실로 마땅하다. 마음을 써서 정신을 소모하고, 왕성한 기운으로 사물과 어긋나니, 늙기도 전에 쇠약해지고 병들며, 악한 일이 없어도 죄를 얻으니, 문인으로서 이렇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이 맞아떨어짐이 이미 어려운데, 사람이 또 스스로를 해침이 이와 같으니, 비록 곤궁하지 않으려 한들 어찌 가능하겠는가? 무성의 휘는 영(迎)이고, 성은 소씨인데, 나와 같은 해에 진사로 급제한 지 15년 만에 오흥(吳興)의 손신로(孫莘老)의 자리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의 시 수백 편을 내놓았다. 내가 그것을 읽으니, 한 달이 지나도록 싫증나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맑고 조화로우며 아름다워, 마치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사람과 같았다. 시는 더욱 사랑스러워, 씹을수록 맛이 나고, 강좌(江左)의 당(唐)나라 사람의 풍격을 섞었다. 그의 사람됨은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며, 법률을 꿰뚫어 보고 관리 일에 민첩하였다. 그의 모습은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할 것 같았고, 말과 기운은 겨우 이어지는 정도였다. 나는 진실로 그가 많은 어려움을 감당하여 그 몸을 지치게 할까 염려하였고, 또한 그가 병들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1년이 지나 무성이가 죽었다. 또 다음 해에 내가 고우(高郵)를 지나가니, 그 상(喪)이 그곳에 있었다. 들어가 곡하니, 허물어진 휘장과 깨진 등잔, 먼지가 쓸쓸히 쌓여 있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무릇 원헌(原憲)의 가난함, 안회(顏回)의 단명, 양웅(揚雄)의 무자(無子), 풍연(馮衍)의 불우함, 황보사안(皇甫士安)의 심한 질병은, 그들이 그중 하나를 만났는데도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슬퍼한다. 그런데 무성이는 이 모든 것을 겸하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그의 글을 기록하니, 슬퍼하되 원망하지 않는 것은, 또한 무성의 뜻이다.
분석 및 설명:
이 서문은 소무성의 시집을 기리는 글로서, 그의 뛰어난 재능과 불운한 삶을 대비시키며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 운명론: 글의 서두에서 귀천, 수요는 하늘의 뜻이라는 운명론을 제시합니다. 이는 소무성의 불운한 삶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 문인의 고난: 문인으로서 겪는 고난을 언급합니다. 정신적인 고통과 외부 세계와의 불화로 인해 건강을 해치고 죄를 얻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며, 이는 소무성의 상황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 소무성의 인품과 재능: 소무성의 인품과 재능을 극찬합니다. 학문적 깊이, 뛰어난 기억력, 공손하고 검소한 성품, 효심과 우애, 법률에 대한 지식, 관리로서의 능력 등 다방면에서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그의 시에 대해서는 진송 시대의 풍격과 강좌 당나라 시의 풍격을 섞어 씹을수록 맛이 나는, 즉 깊은 의미와 감동을 주는 시라고 평가합니다.
- 소무성의 병약함: 소식은 소무성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병약함을 염려했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그의 요절을 예견하는 복선으로 작용합니다.
- 소무성의 죽음에 대한 애도: 소무성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의 슬픈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허물어진 휘장, 깨진 등잔, 쌓인 먼지 등의 묘사를 통해 그의 불우한 처지를 더욱 부각합니다.
- 역사적 인물들의 불운 사례 인용: 원헌, 안회, 양웅, 풍연, 황보사안 등 역사적으로 불운했던 인물들의 사례를 인용하여, 소무성의 불운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인간의 운명에 내재된 비극임을 강조합니다.
- 애이불원(哀而不怨): 글의 마지막에 슬퍼하되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의 ‘애이불원’을 언급하며, 이는 소무성의 뜻이기도 하다고 밝힙니다. 이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그의 삶을 기리는 소식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이 서문은 소무성의 뛰어난 재능과 불운한 삶을 대비시키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입니다. 운명론, 문인의 고난, 소무성의 인품과 재능, 죽음에 대한 애도, 역사적 사례 인용 등을 통해 그의 비극적인 삶을 더욱 부각하고 있으며, 슬픔을 넘어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소식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전당근상인시집서(錢塘勤上人詩集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 및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구양수(歐陽脩)와 그의 제자 혜근(惠勤)의 관계를 통해 사귐의 도리에 대해 논한 글로, 혜근의 시집에 대한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옛날에 적공(翟公)이 정위(廷尉)에서 파면되자, 빈객이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에 다시 등용되자, 빈객들이 찾아오려 하자, 적공이 그 문에 크게 써 붙이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삶을 겪어야 사귐의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을 겪어야 사귐의 태도를 알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을 겪어야 사귐의 진실이 나타난다.”라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이를 입에 담았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가볍게 여겨, 빈객은 속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적공이 빈객을 대하는 태도 또한 작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태자소사(太子少師) 구양공은 선비를 좋아함이 천하 제일이었다. 선비가 한마디 말이 도리에 맞으면, 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갔으니, 선비가 구양공을 찾는 것보다 더 심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호걸과 준걸을 모두 불러 모았으니, 평범한 사람으로부터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사람이 진실로 많았다. 그러나 선비로서 구양공을 배신하는 사람 또한 때때로 있었다. 일찍이 슬프게 탄식하며, 사람을 알기 어려움을, 선비를 좋아하는 사람의 경계로 삼았다. 생각건대 구양공이 선비에 대해서는 이로부터 조금은 게을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수(潁水) 위에서 은퇴하여 늙었을 때, 내가 찾아가 보니, 여전히 선비의 현명함을 논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이는 죄가 나에게 있고,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적공의 빈객은 사생(死生)과 귀천(貴賤) 사이에서 그를 배신하였고, 구양공의 선비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배신하였다. 적공은 빈객을 탓하였고, 구양공은 자신을 탓하였으니, 선비와 더욱 돈독해졌으니, 옛사람보다 훨씬 현명하다. 구양공은 불교와 도교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무리 중에 시서(詩書)를 닦고 인의(仁義)를 배우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이끌어 등용하였다. 불교 승려 혜근은, 구양공을 따라 30여 년을 지냈는데, 구양공은 항상 그를 가리켜 총명하고 재주와 지혜가 있으며 학문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 구양공이 여음(汝陰)에서 돌아가시자, 내가 그 집에서 곡하였다. 그 후에 혜근을 만나 구양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혜근은 진실로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었고, 구양공 또한 혜근에게 덕을 베푼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니, 그 눈물을 흘리며 잊지 못하는 것은 어찌 이익 때문이겠는가? 나는 이로써 혜근의 현명함을 더욱 알게 되었다. 그를 사대부의 반열에 두어 공명에 종사하게 하였다면, 그가 구양공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희녕 7년, 내가 전당(錢塘)에서 고밀(高密)로 떠나려 할 때, 혜근이 그의 시 몇 편을 내놓고 나에게 글을 써서 세상에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시는 글을 기다려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됨의 대략에 대해서는 이 글이 아니고는 전할 방법이 없다.
분석 및 설명:
이 서문은 구양수와 혜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귐의 도리를 논하고 있으며, 혜근의 시집에 대한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 적공의 사례 비판: 적공의 사례를 제시하며, 인간관계의 진실성은 어려울 때 드러나는 것이라는 주장을 비판합니다. 적공의 태도는 속물적이며, 진정한 사귐의 도리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 구양수의 인재 사랑: 구양수의 인재를 아끼고 등용하는 태도를 극찬합니다. 도리에 맞는 말을 하는 선비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존중하고 등용했으며, 심지어 자신을 배신한 사람조차 너그럽게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진정한 사귐은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구양수와 혜근의 관계: 구양수와 혜근의 관계를 통해 이상적인 사제 관계, 더 나아가 인간관계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구양수는 혜근의 재능을 아끼고 인정했으며, 혜근은 구양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이는 물질적인 이익이나 세상적인 명예를 초월한 순수한 인간적인 유대감을 보여줍니다.
- 혜근의 인품: 소식은 혜근의 인품을 높이 평가합니다. 구양수에 대한 변치 않는 존경심과 슬픔을 통해 그의 진실된 마음을 보여주며, 그가 만약 사대부의 반열에 있었다면 구양수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서문을 쓰게 된 이유: 소식은 시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므로 굳이 서문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혜근의 사람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서문을 쓰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혜근의 시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 또한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소식의 뜻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이 서문은 적공과 구양수의 사례를 대비시켜 진정한 사귐의 도리를 논하고 있으며, 구양수와 혜근의 관계를 통해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물질적인 이익이나 세상적인 명예를 초월한 순수한 인간적인 유대감을 강조하며, 혜근의 인품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조군성시집서(晁君成詩集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친구 조군성(晁君成)의 시집에 대한 서문으로, 그의 숨겨진 재능과 겸손한 인품을 기리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현명한 사람이 출세하면 후손이 있다는 것은 장탕(張湯)의 경우이다. 장탕은 본래 후손이 없어야 마땅한 사람이다. 실력은 없으면서 이름만 도둑질하는 사람은 후손이 없으니, 양웅(揚雄)이 그러하다. 양웅은 본래 후손이 있어야 마땅한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이 출세하면 후손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로써 현명함을 가린 사람에게 후손이 없는 줄을 안다. 실력은 없으면서 이름만 도둑질하는 사람에게 후손이 없는 것을, 나는 이로써 실력은 있으면서 이름을 사양하는 사람에게 후손이 있는 줄을 안다. 현명함은 백성이 살아가는 근본인데, 그것을 가리는 것은 백성을 끊는 것이다.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존귀한 것인데, 부귀보다 더 중하게 여겨 그것을 도둑질하는 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백성을 끊고 하늘을 속이니, 후손이 없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이 출세하는 것과 실력은 있으면서 이름을 사양하는 사람은 모두 후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외우곤 했다. 이번에 항주(杭州)의 관리로 있을 때, 항주의 신성현(新城縣) 현령 조군 군성(晁君 君成), 이름은 단우(端友)인 사람을 만났는데, 군자다운 사람이었다. 내가 그와 3년 동안 교유하면서 그가 군자인 줄은 알았지만, 글과 시를 지을 줄은 몰랐고, 그 또한 일찍이 이 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 후에 군이 서울에서 죽자, 그의 아들 보지(補之)가 그의 시 360편을 내놓았다. 읽어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아아, 시의 뜻은 비록 미묘하지만, 그 아름다움과 추함, 높고 낮음은 오히려 말로 전하고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의 현명함과 불초함은 그 심오하고 아득하여 알기 어려움이, 시보다 훨씬 심하다. 지금 내가 오히려 군의 시를 지을 수 있음을 알지 못하니, 그 이른바 군을 군자라고 안 것이, 과연 능히 다 안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군은 진사로 벼슬을 얻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편안하고 즐거워하여 그가 떠날까 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한마디 말로도 남에게 부탁한 적이 없었다. 벼슬살이 23년 만에 관직을 바꾸어 죽었다. 이로써 살펴보면, 나만 모른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그를 몰랐다. 군의 시는 맑고 후덕하며 고요하고 심오하니, 그 사람됨과 같으며, 매 편마다 문득 새로운 뜻과 기이한 어구를 내놓으니, 마땅히 사람들에게 함께 사랑받을 만한데, 그 형세가 군이 스스로 깊이 숨기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알았을 것이다. 그의 아들 보지는, 글에 능하지 않은 것이 없고, 박식하고 언변이 뛰어나고 준수하고 뛰어나,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니, 장차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낼 것이다. 나는 이로써 실력은 있으면서 이름을 사양하는 사람은 반드시 후손이 있음을 더욱 알게 되었다. 옛날에 이합(李郃)이 한중(漢中)의 현령의 아전이었는데, 화제(和帝)가 두 사자를 보내 몰래 평복 차림으로 촉(蜀)에 들어가 이합의 관사에 묵게 하였다. 이합은 천문을 보고 이를 알았다. 3년 후에, 사자는 한중 태수가 되었지만, 이합은 여전히 현령의 아전이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의 박학하고 덕을 숨긴 보답이 그의 아들 고(固)에게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화락하고 덕 있는 군자이니, 신이 수고롭게 여기신다(豈弟君子,神所勞矣).”라고 하였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조군성의 시집에 대한 서문으로, 그의 뛰어난 재능과 겸손한 인품을 기리는 내용입니다. 특히 ‘유능하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가치에 대해 깊이 있게 논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서론의 논리 전개: 현명한 사람의 출세와 후손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시작합니다. 장탕과 양웅의 사례를 대비시켜 ‘실력은 있으면서 이름을 사양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이는 조군성의 인품을 설명하기 위한 서론의 역할을 합니다.
- 조군성의 인품: 조군성을 ‘군자’라고 칭하며 그의 겸손함과 청렴함을 강조합니다. 3년 동안 교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를 짓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점, 벼슬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남에게 청탁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통해 그의 겸손함을 부각합니다.
- 조군성의 시: 조군성의 시를 읽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화자의 반응을 통해 그의 시적 재능을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그의 시는 맑고 후덕하며 고요하고 심오하여 그의 인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새로운 뜻과 기이한 어구를 담고 있어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하다고 칭찬합니다.
- 세상의 무지: 조군성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무지를 지적합니다. 이는 조군성의 겸손함이 지나쳐 오히려 그의 재능이 묻히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조군성의 아들 보지: 조군성의 아들 보지의 뛰어난 재능을 언급하며, ‘실력은 있으면서 이름을 사양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후손이 있다’는 논리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는 조군성의 덕이 후대에까지 이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 이합의 고사 인용: 한나라 이합의 고사를 인용하여, 숨겨진 덕은 반드시 후대에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조군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임을 시사합니다.
- 시경 구절 인용: 마지막으로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덕 있는 군자는 하늘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의미를 담아 글을 마무리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서문은 조군성의 시집을 기리는 글이지만, 단순히 시에 대한 평가에 그치지 않고 그의 겸손하고 청렴한 인품, 그리고 유능하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가치에 대해 심도 있게 논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 고사와 시경의 구절을 적절히 활용하여 글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부역선생시집서(鳧繹先生詩集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선친(先친)의 말씀을 빌려 부역 선생(鳧繹先生)의 시와 문장을 칭송하고, 당시 문단의 경향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히려 사관(史官)의 글에서 빠진 부분을 보았노라. 말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빌려 주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구나.”라고 하셨다. 사관의 글에서 빠진 부분이 없는 것과 말을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 것이, 어찌 세상에 손익(損益)이 있겠는가? 그러나 또한 기록하였으니, 세상의 군자(君子)와 덕망 높은 어른이 날로 멀어지고, 후세 사람들이 다시는 그들의 풍류와 남은 풍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써 날로 지혜와 기교에 치우치고, 말재주만 능란해져 그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비록 세상에 손익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군자와 덕망 높은 어른의 은택이 그 안에 있으므로, 공자께서 기록하신 것인데, 하물며 세상에 손익을 끼칠 만한 것이겠는가? 옛날에 우리 선친께서 서울에 가시어 경사대부(卿士大夫)들과 교유하시고, 돌아오셔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후로, 문장은 날로 정교해지겠지만, 도(道)는 장차 흩어질 것이다. 선비들은 먼 것을 숭상하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며, 화려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실질적인 것을 천하게 여기니, 나는 이미 그 조짐을 보았다.”라고 하셨다. 노(魯)나라 사람 부역 선생의 시와 문장 십여 편을 나에게 보여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얘야, 이것을 기록해 두어라. 이후 수십 년이 지나면, 천하에 다시는 이러한 글을 짓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선생의 시와 문장은, 모두 뜻이 있어 지은 것으로, 날카롭고 강하며 진실되고 고통스러우며, 말은 반드시 당대의 잘못을 꼬집으니, 분명하고 확실하기가 마치 오곡(五穀)이 반드시 주림을 치료할 수 있는 것과 같고, 단정하고 확실하기가 마치 약과 돌이 반드시 병을 고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헛된 이야기로 고상함을 삼고, 꾸며낸 말로 보기 좋은 것을 삼는 것은, 선생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 선친께서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말씀은 남아 있었다. 글을 짓는 사람들이, 모두 형체의 겉모습에서 초연히 벗어나, 미묘한 말과 고상한 논의로, 이미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를 비루하게 여기고, 그 반복적인 논쟁과, 바른말을 꺼리지 않는 것이, 선생의 글과 같은 것은,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이 때문에 공자의 말씀을 슬퍼하고, 선친의 유훈을 마음에 품고, 더욱 선생의 글을 구하여, 그의 아들 복(復)에게서 얻어, 이에 기록하여 간직한다. 선생의 휘는 태초(太初)이고, 자는 순지(醇之)이며, 성은 안씨(顏氏)인데, 선사(先師) 연공(兗公)의 47세손이라고 한다.
분석 및 설명:
이 서문은 부역 선생의 시집에 대한 서문이지만, 단순히 시에 대한 평가에 그치지 않고 당시 문단의 풍조를 비판하고 선친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 공자의 말 인용: 글의 서두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옛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세태를 비판합니다. 이는 부역 선생의 문학이 지닌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서론의 역할을 합니다.
- 선친의 예견: 소식의 선친은 당시 문단이 화려하고 현학적인 글만 숭상하고 도(道)를 담은 진실한 글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이는 부역 선생의 문학이 이러한 세태와 대비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 부역 선생의 문학: 부역 선생의 시와 문장을 ‘뜻이 있어 지은 것으로, 날카롭고 강하며 진실되고 고통스럽다’고 묘사하며, 그의 문학이 현실 비판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오곡’과 ‘약석’에 비유하여 그의 문학이 지닌 효용성을 부각합니다.
- 당시 문단의 풍조 비판: 당시 문인들이 형이상학적인 논쟁과 화려한 언변에만 치중하여 진실한 내용을 담지 못하는 글을 쓰는 것을 비판합니다. 이는 부역 선생의 문학이 이러한 풍조와 대조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 선친의 유훈 계승: 소식은 선친의 말씀을 기억하고 부역 선생의 문학을 소중히 여겨 그의 아들에게서 글을 구해 기록으로 남깁니다. 이는 선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부역 선생의 문학적 가치를 후대에 전하려는 소식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 부역 선생의 가계: 글의 말미에 부역 선생의 이름과 자, 성씨, 가계 등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서문은 부역 선생의 시집을 기리는 글이지만, 당시 문단의 풍조를 비판하고 선친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부역 선생의 문학은 현실 비판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당시 문단의 화려하고 현학적인 글과 대비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선친의 유훈을 계승하여 그의 문학적 가치를 후대에 전하려는 소식의 의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소식(蘇軾)의 서주녹명연부시서(徐州鹿鳴燕賦詩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서주(徐州)에서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을 축하하기 위해 베푼 녹명연(鹿鳴宴)에 대한 기록입니다. 소식이 이 연회에 대한 시를 짓고 그 서문을 쓴 것입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내가 듣기로, 덕행으로 어진 이를 천거하는 것은 너무 고상하여 시험해 볼 수 없고, 활쏘기와 말 타기로 선비를 뽑는 것은 이미 낮아져서 행할 만하지 못하다. 삼대(三代, 하夏, 은殷, 주周) 이래로 생각건대, 우리 송(宋)나라처럼 성대한 때는 없었다. 향거리선(鄉舉里選)에서 시작하여, 대부분 위평(韋平)의 한 경전(經典)을 사용하고, 전시(廷試)에서 끝나니, 거의 조착(晁錯)과 동중서(董仲舒)의 삼도(三道)에 가깝다. 이 방심(房心)의 들을 돌아보니, 실로 효성스럽고 뛰어난 인재의 근원이었다. 원풍(元豐) 원년, 세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서주에서 천거되었다. 9월 신축일 그믐날, 황루(黃樓)에 모여 옛 일을 닦았다. 뜰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섰고, 먼저 합격한 사람들의 거북점을 바쳤으며, 악공은 세 번 절하며 노래하니, 그 뜻은 시경(詩經) 식빈(食蘋)의 사슴을 취한 것이다. 이 날, 하늘은 높고 기운은 맑으며, 물이 빠지고 돌이 드러났으니, 우러러 사방의 산의 어둑함을 보고, 굽어 두 홍수(二洪水)의 성난 울부짖음을 들으니, 돌아보건대, 즐길 만한 것이 있었다. 이에 폐지된 예(禮)를 강론하고, 외설적인 음악을 내보내며, 부자사(部刺史)는 수레를 권하고, 향촌의 어른은 자리에 앉았으니, 여러 현인들이 모두 모였고, 숨어 지내던 사람들도 와서 모였다. 옛날에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이야기하고, 군자는 글로 벗을 모았다고 하였으니, 이에 붓과 종이를 펼쳐 술자리를 도왔다. 얼굴에 기쁨을 띠고 웃으니, 반수(泮水)에서와 같았고, 한 잔 술에 한 수 시를 읊으니, 산음(山陰)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참으로 예의의 남은 풍속이자 태평성대의 훌륭한 행사였다. 대부와 여러 선비들이, 나를 천하게 여기지 않고, 이 글을 지어 이 의례를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가우(嘉祐) 말년에, 진사로 벼슬에 들어갔으니, 변려문(騈儷文)은 예전에 올리던 것이다. 양웅이 비록 젊었을 때 지은 글을 후회하였지만, 종의(鍾儀)가 어찌 남쪽 음악을 폐하였겠는가. 옛 친구들에게 전해 주더라도, 반드시 나를 비웃지 않을 것이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녹명연의 성대한 모습과 그 의미를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과거 제도의 우수성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식 자신이 이 연회에 대한 시를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과거 제도의 우수성: 덕행만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무예로 선발하는 것은 수준이 낮다고 지적하며, 송나라의 과거 제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칭송합니다. 향거리선부터 전시까지의 과정을 언급하며, 경전과 경학적 소양을 중시하는 송나라의 과거 제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 서주의 인재: 서주가 예로부터 뛰어난 인재를 많이 배출한 곳임을 강조합니다. ‘방심의 들’이라는 표현은 서주의 넓은 지역과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의미하며, 이러한 환경이 뛰어난 인재를 배출하는 기반이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 녹명연의 성대한 모습: 황루에서 베풀어진 녹명연의 성대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하하고 즐기는 분위기를 전하며, 하늘과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묘사하여 연회의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 고대의 의례 인용: 고대의 의례를 인용하며, 녹명연이 단순한 잔치가 아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중요한 의례임을 강조합니다. ‘식빈’의 고사를 인용하여, 사슴을 잡은 후 베푸는 잔치가 인재를 등용하고 축하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문학적 교류: 연회에서 시를 짓고 주고받는 문학적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언급하며, 이는 고대의 ‘반수’와 ‘산음’의 고사를 인용하여 더욱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녹명연이 단순한 잔치가 아닌, 문인들의 교류의 장이기도 했음을 보여줍니다.
- 서문을 쓰게 된 경위: 여러 사람들의 부탁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며, 과거에 자신이 변려문을 썼던 것을 언급합니다. 양웅과 종의의 고사를 인용하여, 과거의 문체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 맞는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녹명연의 성대한 모습과 그 의미를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과거 제도의 우수성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식 자신이 이 연회에 대한 시를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고대의 의례와 문학적 전통을 계승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왕정국시집서(王定國詩集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자신의 일로 인해 귀양을 갔던 친구 왕정국(王定國)의 시집에 대한 서문으로, 그의 시에 대한 감탄과 함께 그의 고결한 인품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이 시에 대해 논하기를 “국풍(國風)은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되 음란하지 않고, 소아(小雅)는 원망하고 비방하되 혼란스럽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보건대, 이는 단지 변풍(變風)과 변아(變雅)만을 안 것이요, 어찌 시의 바른 이치를 보았겠는가? 옛날 선왕(先王)의 은택이 쇠한 뒤에야 변풍이 감정에서 발현되니, 비록 쇠하였으나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이에 오히려 예의(禮義)에 머물러,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을 뿐이다. 무릇 감정에서 발현되어 충효(忠孝)에 머무르는 시와는 어찌 같은 날에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시인은 많지만, 두자미(杜子美, 두보)가 으뜸이 되는 것은, 어찌 그의 파란만장하고 굶주리고 추운 삶 속에서, 평생 쓰임을 받지 못하면서도 한 끼의 밥조차 임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정국은 나 때문에 죄를 얻어, 바닷가로 3년 동안 귀양 갔고, 한 아들은 귀양지에서 죽고, 한 아들은 집에서 죽었으며, 정국 또한 병들어 거의 죽을 뻔했다. 나는 그가 나를 매우 원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편지로 소식을 묻지 못했다. 그런데 정국이 돌아와 강서(江西)에 이르러, 그의 영남(嶺南)에서 지은 시 수백 수를 나에게 보내 왔는데, 모두 맑고 평화롭고 풍성하며, 훌륭한 세상의 음악과 같은 소리가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말과 뜻은 도(道)를 행하는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근심하고 답답해하며 탄식하는 작품 또한 있었지만, 단지 귀양지에서 죽어, 천자의 은혜가 보답에 미치지 못하여,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힐까 두려워했을 뿐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으니, 정국이 하물며 나를 원망하지 않는데, 어찌 하늘을 원망하겠는가! 나는 이에 책을 덮고 탄식하며, 스스로 나의 얕음을 한탄하였다. 또 옛날에 정국이 팽성(彭城)에서 나를 찾아와, 열흘을 머물면서, 오가며 시를 수백 편이나 지었던 것을 생각하니, 나는 그의 많음에 괴로워하고, 그의 민첩함에 두려워하며, 그의 뛰어난 솜씨에 감탄하였다. 하루는 정국이 안복장(顔復長)과 함께 사수(泗水)에서 놀고, 환산(桓山)에 올라, 피리를 불고 술을 마시며, 달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나 또한 황루(黃樓) 위에서 술을 차려 놓고 그들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이태백(李太白)이 죽은 후, 세상에 이러한 즐거움이 300년 동안 없었다.”라고 하였다. 지금 나는 늙어, 다시 시를 짓지 않고, 또 병으로 술을 끊고,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 문밖 몇 걸음이면 큰 강인데, 한 달이 지나도록 강가에 가지 않으니, 어리석고 멍하니 정말 한 늙은 농부와 같다. 그런데 정국의 시는 더욱 뛰어나고, 술 마시는 것도 쇠하지 않으니, 가는 곳마다 산수의 뛰어난 경치를 찾아, 곤궁함과 늙음을 이유로 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지금 이후로, 내가 정국에게 두려워하고 감탄하는 것은, 단지 그의 시만이 아니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왕정국의 시집에 대한 서문으로, 그의 시에 대한 감탄과 함께 그의 고결한 인품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특히,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그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소식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시의 본질에 대한 논의: 태사공의 시론을 비판하며, 시의 본질은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도(道)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두보의 시를 예로 들어, 시인이 처한 상황과 그의 정신세계가 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 왕정국의 고난: 왕정국이 소식 때문에 귀양을 가게 되고,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은 사실을 언급합니다. 소식은 이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 왕정국의 시에 대한 감탄: 귀양지에서 돌아온 왕정국이 보낸 시를 읽고 소식은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의 시는 맑고 평화로우며 풍성하여, 마치 태평성대의 음악과 같았다고 칭찬합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원망이나 분노가 아닌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 공자의 말 인용: ‘불원천 불우인(不怨天不尤人)’이라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왕정국의 고결한 인품을 더욱 부각합니다.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왕정국이 하늘을 원망할 리 없다는 논리를 통해 그의 넓은 마음을 칭송합니다.
- 과거의 추억 회상: 과거 왕정국과 함께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즐거웠던 시간을 회상합니다. 특히, 이태백에 비견하며 그들의 풍류를 극찬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 늙고 병들어 시와 술을 멀리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대비시킵니다.
- 왕정국에 대한 존경: 마지막으로, 왕정국의 시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 전체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이 서문은 왕정국의 시를 칭찬하는 글이지만, 단순히 시에 대한 평가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고결한 인품, 특히 역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소식 자신의 죄책감과 과거의 추억 회상을 통해 왕정국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부각하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성산자서(聖散子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약인 성산자(聖散子)의 효능을 설명하고, 이 약을 얻게 된 경위와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게 된 이유를 적은 글입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옛날에 일찍이 천금방(千金方)을 살펴보았다. 삼건산(三建散)에 이르기를 “풍랭(風冷)으로 인한 담음(痰飮), 징벽(癥癖), 학질(瘧疾) 등,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손사막(孫思邈)이 특별히 논설을 지어 말하기를, 이 처방의 약 사용은, 절도가 인정에 가깝지 않지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데에는, 그 효험이 특히 다르다고 하였다. 이에 신묘한 물건의 효험을 나타내는 것은, 일정한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며, 지극한 이치는 미혹함을 열어 주지만,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성산자는, 거의 이러한 종류인가? 예로부터 병을 논할 때, 오직 상한(傷寒)이 가장 위급하다고 여겼으니, 그 표리(表裏)의 허실(虛實), 날짜와 증상, 땀을 내야 하는지 설사시켜야 하는지 등의 구별이,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곧 구제할 수 없게 되는데, 성산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일체를 묻지 않는다. 무릇 음독(陰毒)과 양독(陽毒), 남녀의 병이 서로 바뀌는 것, 증상이 매우 위급한 사람이라도, 연이어 몇 첩을 마시면, 곧 땀이 나고 기가 통하며, 음식이 조금씩 나아가고, 정신이 완전히 회복되니, 다시 다른 약을 연이어 복용하여 차도를 볼 필요가 없다. 가벼운 사람은 심장과 이마에 약간의 땀이 나면, 바로 병이 없어진다. 약 기운은 약간 뜨겁지만, 양독으로 발광하는 종류의 병에, 복용하면 곧 시원함을 느끼니, 이는 거의 일상적인 이치로는 따질 수 없다. 만약 전염병이 유행하면, 이른 아침에 큰 가마솥에 끓여, 노인과 아이,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묻지 않고, 각자 큰 잔으로 한 잔씩 마시면, 곧 전염병의 기운이 그 문에 들어오지 못한다. 평소에 병이 없는 사람이, 빈속에 한 번 복용하면, 음식 섭취가 평소의 배가 되고, 온갖 병이 생기지 않는다. 진실로 세상을 구제하는 도구이자, 집안을 지키는 보물이다. 그 처방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미산(眉山) 사람 소군곡(巢君穀)에게서 얻었는데, 소군곡은 많은 좋은 처방을 배우고, 이 처방을 아끼고 숨겨, 그 아들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내가 간절히 구하여 얻었다. 황주(黃州)에 귀양살이할 때, 여러 해 동안 전염병이 유행하여, 이 약을 만들어 나누어 주니, 살린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니, 소군곡이 처음 나에게 전해 줄 때, 남에게 전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강물을 가리켜 맹세하였다. 내가 몰래 안타깝게 여겨, 이에 기수(蘄水) 사람 방군 안시(龐君安時)에게 전하였으니, 안시는 의술에 능하다는 명성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또한 글을 잘 지어, 후세에 전하고자 하므로, 그에게 전해 준 것이니, 또한 소군곡의 이름이 이 처방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소식이 자신이 소장한 약인 성산자의 효능을 극찬하고, 이 약을 얻게 된 경위와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성산자의 뛰어난 효능과 전염병 예방 효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산자의 효능: 여러 질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삼건산의 효능을 언급하며, 성산자가 이와 유사한 효능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상한과 같은 위급한 질병에 효과가 뛰어나며, 전염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일상적인 이치로는 따질 수 없다’는 표현을 통해, 성산자의 효능이 매우 신묘함을 나타냅니다.
- 성산자를 얻게 된 경위: 미산 사람 소군곡에게서 성산자를 얻게 된 과정을 설명합니다. 소군곡이 이 처방을 매우 아끼고 숨겼지만, 소식이 간절히 구하여 얻게 되었다는 내용을 통해, 성산자의 가치를 더욱 부각합니다.
- 황주에서의 경험: 황주에 귀양살이할 때, 전염병이 유행하여 성산자를 나누어 주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이를 통해 성산자의 효능을 입증하고, 자신이 이 약을 널리 알리려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 다른 사람에게 전수한 이유: 소군곡과의 약속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려 했지만, 방안시에게 전수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방안시가 의술에 능하고 글을 잘 지어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소군곡의 이름과 성산자를 함께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냅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성산자의 효능을 극찬하고, 이 약을 얻게 된 경위와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성산자의 뛰어난 효능과 전염병 예방 효과를 강조하며, 이 약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소식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소군곡과의 약속과 방안시에게 전수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전표성주서(田表聖奏議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고(故) 간의대부(諫議大夫) 증사도(贈司徒) 전공 표성(田公 表聖)의 주소(奏疏) 열 편에 대한 서문으로, 전공의 직언(直言)을 두려워하지 않는 곧은 성품과 선견지명을 기리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돌아가신 간의대부 증사도 전공 표성의 주소 열 편이다. 아아, 전공은 옛날의 곧은 신하였다. 그의 직언불휘(直言不諱), 즉 꺼리는 것 없이 다 말하는 것은, 대적(對敵) 이하의 사람들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하물며 임금에게 있어서랴! 나는 이로써 이종(二宗, 태종과 진종)의 성스러움을 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이후로부터 함평(咸平)에 이르기까지, 가히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다고 할 만하니, 천 년에 한 번 있는 때였다. 그런데 전공의 말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근심이, 바로 아침저녁에 닥칠 것처럼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태평성대를 근심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롭게 여겼다. 밝은 임금은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지만, 태평한 세상에는 두려워할 만한 방비가 없다. 무릇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으면, 반드시 그 신하를 가볍게 여기고, 두려워할 만한 방비가 없으면, 반드시 그 백성을 쉽게 여긴다. 이는 군자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형벌은 쓰이지 않고, 전쟁은 치르지 않았지만, 가의(賈誼)의 말에 이르기를 “천하에 길이 탄식할 만한 일이 있고,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있고, 통곡할 만한 일이 있다.”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로써 한 문제를 폄하하지 않았고, 또한 이로써 가의를 지나치게 칭찬하지도 않았다. 이로써 살펴보면, 군자가 태평성대를 만나 밝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가의는 비록 뜻을 얻지 못했지만, 그가 말한 바는 대략 이미 시행되었으니,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 공렬(功烈)이 당시에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나 가의는 일찍이 건의하여, 제후와 왕의 자손들이 각기 차례대로 봉지를 받게 하였는데, 문제는 미처 쓰지 못하였고, 효경(孝景)을 거쳐 무제(武帝)에 이르러, 주부언(主父偃)이 이를 시행하니, 한나라 왕실이 이로써 편안해졌다. 지금 전공의 말은, 열 중 다섯여섯도 쓰이지 못하였으니, 어찌 뒷세상에 주부언과 같은 사람이 있어, 들어서 행하지 않을 줄 알겠는가. 바라건대 그의 글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면, 반드시 전공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는 또한 충신과 효자의 뜻이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전공의 주소에 대한 서문으로, 그의 직언과 선견지명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평성대에도 위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공의 인품: 전공을 ‘옛날의 곧은 신하’라고 칭하며, 그의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임금조차 그의 직언을 감당하기 어려워했을 정도라고 언급하며, 그의 용기를 칭송합니다.
- 태평성대의 위기: 태평흥국부터 함평까지의 시대를 ‘천하가 크게 다스려진’ 시대로 평가하면서도, 전공은 항상 위기를 경계하는 말을 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태평성대에도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군자의 자세: 옛 군자는 태평성대를 근심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롭게 여겼다고 언급하며, 이는 밝은 임금의 뛰어난 자질이 오히려 신하를 가볍게 여기게 하고, 태평한 세상의 방비가 소홀해져 백성을 쉽게 여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 가의의 고사 인용: 한나라 가의의 고사를 인용하여, 태평성대에도 위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가의는 문제에게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당장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후대에 그의 주장이 실현되어 한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언급합니다.
- 전공의 주소에 대한 기대: 전공의 주소 역시 당대에는 제대로 쓰이지 못했지만, 후대에 가의와 같은 인물에 의해 실현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는 전공의 주소가 지닌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후세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 글을 널리 알리려는 이유: 전공의 글을 세상에 널리 퍼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전공의 뜻을 기리는 동시에, 그의 충성심과 효심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전공의 주소를 기리는 글이지만, 단순히 그의 주소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강직한 성품과 선견지명을 칭송하며, 태평성대에도 위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의의 고사를 적절히 활용하여 글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낙전선생문집서(樂全先生文集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낙전선생(樂全先生) 장공 안도(張公 安道)의 문집에 대한 서문으로, 그의 고매한 인품과 뛰어난 식견을 공북해(孔北海, 공융)와 제갈공명에 비견하며 극찬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공북해는 뜻이 크고 논의가 높았으나, 공적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영웅호걸의 기개는, 스스로 한 시대의 숭앙을 받았다. 그의 성효장(盛孝章)과 치홍예(郗鴻豫)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강렬한 대장부의 풍모가 있었고, 제갈공명은 문장으로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사물을 열고 일을 이루는 모습, 명분과 실질을 종합하고 단련하는 뜻이, 저절로 말에서 드러났다. 특히 출사표(出師表)는 간결하면서도 뜻을 다 담았고, 곧으면서도 방자하지 않았으니, 위대한 말이로다. 이윤(伊尹)의 훈계와 태갑(太甲)에게 한 말과 서로 표리를 이루니, 진한(秦漢) 이후로 임금을 섬기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항상 이 두 사람의 글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음을 한탄했는데, 지금 우리 낙전선생 장공 안도는, 거의 그에 가깝다! 아아, 선비가 천하의 무거운 책임을 스스로 맡은 지 오래되었다. 언어는 능숙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정치와 문학은 민첩하고 박식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해서는, 그 본래의 것을 잊고 지켜야 할 것을 잃지 않는 사람이 드무니, 그릇이 작기 때문이다. 공은 평범한 백성일 때, 이미 훤칠하게 정승의 기대를 받았고, 젊어서 벼슬길에 나아가,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일찍이 말로 사물을 따르거나, 얼굴빛으로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비록 임금을 대할 때도, 뜻이 같아진 뒤에야 말했다. 비방과 칭찬에도 동요하지 않고, 얻고 잃는 것을 하나같이 여겼으니, 진실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신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긴다’는 사람이다. 세상이 멀어지고 도가 흩어지니, 비록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이라도, 혹시 낮추어 벼슬을 구하기도 하지만, 공은 홀로 나아가는 기개로, 정대(正大)한 말을 행하여, 말하기를 “쓰면 나아가고, 버리면 숨는다.”라고 하였다. 위로는 임금의 뜻에 맞추려 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귀하게 되었지만 쓰이지 못했고, 쓰이더라도 다 쓰이지 못했다. 아래로는 사대부의 뜻에 맞추려 하지 않았으므로, 공을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천하의 위대한 사람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여겼다. 공은 천성을 다하고 천명을 알며, 자연에 따르고, 어쩔 수 없는 일을 행하였으니, 문자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려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력(慶曆) 이후로부터 원풍(元豐)까지 40여 년 동안, 임금과 함께 천하의 일을 논한 것이, 장주(章疏)에 나타난 것이 많으니, 쓰이기도 하고 쓰이지 않기도 했지만, 모두 예의에 근본하고, 인정에 부합하며, 옳고 그름은 이전에 고찰함이 있었고, 성공과 실패는 이후에 증험함이 있었다. 그 밖의 시와 문장은, 모두 맑고 멀며 웅장하고 아름다우니, 읽는 사람이 그 사람됨을 상상하여 볼 수 있다. 진실로 공북해, 제갈공명과 닮은 점이 있다. 내가 스무 살 때, 여러 유생들과 함께 성도(成都)에서 공을 뵈었는데, 공은 한 번 보고, 나라의 선비로 대우하였다. 지금 30여 년이 지났으니, 나를 깨우쳐 이루어 주신 것이 지극하지만, 나는 끝내 공에게 조금도 보답한 것이 없으니, 홀로 그의 문집을 구하여, 손수 교정하여 집에 간직하고, 또한 그 대략을 논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린다. 옛날 증로공(曾魯公)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공이 임금 앞에서 큰일을 논할 때, 다른 사람은 종일토록 반복해도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공은 반드시 몇 마디 말로 결단하니, 뚜렷하게 문장을 이루어, 모두 기록하여 외울 만하다고 하였다. 말은 비록 다 쓰이지 않았지만, 경력 이후로, 명신으로서 임금에게 존경받는 것은 공만한 사람이 없었다. 공은 올해 81세이니, 문을 닫고 쓸어 없애고, 종일토록 위태롭게 앉아, 장차 조물주와 함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노닐 것이니, 말조차 듣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의 글이랴. 무릇 지은 글이 몇 권, 몇 편이다.
분석 및 설명:
이 서문은 장공 안도의 문집을 기리는 글이지만, 그의 문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고매한 인품과 뛰어난 식견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공융과 제갈공명에 비견하며 그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공융과 제갈공명과의 비교: 서두에서 공융과 제갈공명을 언급하며, 이들의 뛰어난 자질과 업적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특히, 이들이 문장뿐만 아니라 인품과 식견으로도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하며, 장공 안도를 이들과 비교함으로써 그의 가치를 높입니다.
- 당시 사대부의 문제점 지적: 당시 사대부들이 언변은 뛰어나지만 큰일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이는 장공 안도가 이들과는 달리 큰 그릇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 장공 안도의 인품: 장공 안도의 고매한 인품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묘사합니다. 평범한 백성일 때부터 정승의 기대를 받았고, 벼슬길에서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임금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대신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긴다’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의 충성심과 강직함을 극찬합니다.
- 장공 안도의 정치적 식견: 장공 안도가 임금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의 간언은 모두 예의에 근본하고 인정에 부합하며, 옳고 그름은 이전에 고찰함이 있었고, 성공과 실패는 이후에 증험함이 있었다고 평가하며, 그의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강조합니다.
- 소식과 장공 안도의 인연: 소식이 젊은 시절 장공 안도를 만나 큰 가르침을 받았던 인연을 회상합니다. 장공 안도가 자신을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와, 그에 보답하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합니다.
- 문집을 편찬하는 이유: 장공 안도의 문집을 손수 교정하여 간직하고, 서문을 쓰는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장공 안도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고, 그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 증로공의 평가 인용: 증로공의 말을 인용하여, 장공 안도의 뛰어난 언변과 명석한 판단력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 장공 안도의 만년: 장공 안도의 만년의 모습을 묘사하며, 그의 글을 다시 접하기 어려워진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서문은 장공 안도의 문집을 기리는 글이지만, 그의 문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고매한 인품과 뛰어난 식견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공융과 제갈공명에 비견하며 그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당시 사대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의 뛰어남을 더욱 부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식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인용하여 글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범문정공문집서(范文正公文集敘)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존경하는 정치가이자 문인인 범중엄(范仲淹, 시호는 문정文正)의 문집에 대한 서문으로, 범중엄의 인품과 업적을 기리고 자신과의 인연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경력(慶曆) 3년, 내가 비로소 머리를 묶고 향교(鄕校)에 들어갔을 때, 서울에서 온 선비가 노(魯)나라 사람 석수도(石守道)가 지은 경력성덕시(慶曆聖德詩)를 향선생(鄕先生)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곁에서 몰래 보니, 그 시어를 외우고 익힐 수 있었고, 선생에게 시에서 칭송한 열한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들이 하늘 사람이라면, 감히 알지 못하겠지만, 만약 또한 사람이라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은 내 말을 기이하게 여겨, 모두 알려주고, 또 말하기를 “한(韓, 한기韓琦), 범(范, 범중엄), 부(富, 부필富弼), 구양(歐陽, 구양수歐陽脩), 이 네 사람은, 인걸(人傑)이다.”라고 하였다. 그때는 비록 다 알지는 못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그들을 기억해 두었다. 가우(嘉祐) 2년, 비로소 진사시에 급제하여, 서울에 이르니 범공은 이미 돌아가셨다. 장례를 마치고, 묘비가 나왔는데, 읽다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됨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대략 15년 동안, 한 번도 그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 해에 등제(登第)하여, 비로소 구양공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구양공을 통해 한기, 부필을 알게 되었는데, 모두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범문정공을 알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그 후 3년, 허주(許州)를 지나다가, 비로소 범공의 둘째 아들, 지금의 재상 요부(堯夫)를 알게 되었다. 또 6년, 비로소 그의 숙부 이수(彝叟)를 서울에서 보았다. 또 11년, 드디어 그의 막내아들 덕유(德孺)와 함께 서주에서 동료가 되었다. 모두 한 번 보았는데도 옛날부터 알던 사이와 같았다. 또한 범공의 유고(遺稿)를 보여주며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또 1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아, 범공의 공덕은, 글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드러나 있고, 그의 글 또한 서문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전해진다. 그러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범공을 존경하고 사랑할 줄 알았으니, 지금 47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 세 영걸(英傑, 한기, 부필, 구양수)은, 모두 그와 함께 교유할 수 있었지만, 유독 나는 그를 알지 못했으니, 평생의 한으로 여겼는데, 만약 그의 문자 속에 이름을 걸어, 문하생의 맨 끝에라도 자신을 의탁할 수 있다면, 어찌 예전부터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군자, 이윤(伊尹), 태공(太公), 관중(管仲), 악의(樂毅)와 같은 사람들은, 그 왕패(王霸)의 계략이, 모두 밭 가운데에서 정해졌으니, 벼슬한 뒤에 배운 것이 아니다. 회음후(淮陰侯, 한신)가 한중(漢中)에서 고제(高帝, 유방)를 뵙고, 유방과 항우의 장단점을 논하고, 삼진(三秦)을 취할 계책을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하였으니, 고제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게 되자, 한중에서의 말이, 하나도 보답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갈공명이 초려(草廬)에 누워, 선주(先主, 유비)와 조조, 손권을 책략하고, 유장을 취할 계획을 세우고, 촉(蜀)나라의 자원을 이용하여, 천하를 다투었으니, 평생토록 그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는 어찌 입으로 전해 듣고, 시험 삼아 해 보고, 요행히 혹 성공한 것이겠는가. 범공은 천성(天聖) 연간에, 태부인(太夫人)의 상을 당하여 거상(居喪) 중에도, 천하를 근심하고, 태평을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만언서(萬言書)를 지어 재상에게 남기니, 천하에 전해져 외워졌다. 장수로 쓰이고, 발탁되어 집정(執政)이 되어서도, 그의 평생의 행한 바를 살펴보니, 이 만언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었으니, 지금 그의 문집 20권에는, 시부(詩賦) 268편, 문(文) 165편이 있다. 그의 인의예악(仁義禮樂), 충신효제(忠信孝弟)에 대해서는, 마치 주림과 목마름이 음식에 대한 것과 같아, 잠시라도 잊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고, 불의 뜨거움과 같고, 물의 습함과 같으니, 그의 천성이 부득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비록 붓을 놀리고 희롱하는 말을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지어도, 반드시 여기에 귀결된다. 그러므로 천하 사람들이 그의 성실함을 믿고, 다투어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덕이 입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싸우면 이기고, 제사 지내면 복을 받는다.”라고 하였으니, 능히 싸우는 것이 아니라, 덕이 노여움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원우(元祐) 4년 4월 21일.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범중엄의 문집에 대한 서문으로, 소식이 범중엄을 존경하는 마음과 그의 인품 및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특히, 범중엄의 사상이 그의 모든 행적의 근본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범중엄과의 인연: 소식이 어린 시절부터 범중엄의 이름을 듣고 존경하게 되었지만, 정작 생전에 만나보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이후 그의 아들들과 교류하며 유고를 접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이 서문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힙니다.
- 범중엄의 인품과 사상: 범중엄의 인의예악, 충신효제에 대한 강조는 마치 본능과 같았다고 묘사하며, 그의 도덕적 됨됨이를 극찬합니다. 특히, 거상 중에도 만언서를 지어 나라를 걱정했던 일화를 통해, 그의 애민정신과 정치적 식견이 이미 젊은 시절부터 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의 모든 행적이 이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합니다.
- 고대 현인들과의 비교: 이윤, 태공, 관중, 악의, 한신, 제갈공명 등 고대의 현인들을 언급하며, 이들이 밭에서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것처럼, 범중엄 역시 젊은 시절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범중엄의 뛰어남을 고대의 현인들에 비견함으로써 더욱 부각하는 효과를 줍니다.
- 공자의 말씀 인용: ‘유덕자필유언(有德者必有言)’과 ‘아전즉극 제즉수복(我戰則克 祭則受福)’이라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범중엄의 덕이 그의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임을 설명합니다.
- 문집의 내용 소개: 범중엄의 문집에 실린 시부와 문장의 수를 언급하며, 그의 문학적 업적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소식(蘇軾)의 육일거사집서(六一居士集敘)는 구양수(歐陽脩)의 문집에 대한 서문으로, 언어의 힘, 특히 성인의 언어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양수의 문장이 이러한 성인의 언어에 비견될 만하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무릇 말에는 크지만 과장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통달한 사람은 믿고, 보통 사람들은 의심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장차 이 문화를 없애려 하신다면, 나중에 태어난 사람은 이 문화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고,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우(禹) 임금은 홍수를 다스리셨고, 공자는 춘추(春秋)를 지으셨으니, 나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았다.”라고 하셨으니, 대개 이로써 우 임금과 짝하신 것이다. 문장의 득실이 어찌 하늘과 관계되며, 우 임금의 공은 천지와 나란한데, 공자와 맹자는 빈말로 짝하신 것이니, 과장된 것이 아니겠는가. 춘추가 지어짐으로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하였고, 맹자의 언행이 행해짐으로부터, 양주와 묵적의 도가 폐지되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이는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그 공을 알지 못한다. 맹자가 이미 돌아가신 후, 신불해(申不害), 상앙(商鞅), 한비(韓非)의 학문이 있어, 도(道)를 어기고 이익을 좇아, 백성을 해쳐 임금을 두텁게 하였으니, 그 학설이 지극히 비루하지만, 선비들은 이로써 그 윗사람을 속였다. 윗사람들은 요행으로 모든 공을 바랐으니, 휩쓸려 이를 따르니, 세상에 공자와 맹자와 같은 대인 선생이 없어, 그 근본과 말단을 미루어, 그 화와 복의 경중을 헤아려, 그 미혹함을 구제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학문이 드디어 행해졌다. 진(秦)나라는 이로써 천하를 잃었고, 쇠퇴하여 승(勝, 진승)과 광(廣, 오광),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화에 이르러, 죽은 자가 십중팔구이니, 천하가 쓸쓸하였다. 홍수의 환란은, 대개 이에 이르지 못하였다. 바야흐로 진나라가 뜻을 얻기 전에, 다시 한 맹자가 있었다면, 신불해와 한비는 빈말이 되었을 것이니, 그 마음에 행해지면, 일에 해롭고, 일에 행해지면, 정치에 해로운 것이, 반드시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양주와 묵적이 천하에 뜻을 얻었다면, 그 화가 어찌 신불해와 한보다 덜하겠는가! 이로써 말하면, 비록 맹자로써 우 임금과 짝하여도 옳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대개 공은 황로(黃老)를 말하고, 가의와 조착은 신불해와 한비를 밝히었다.”라고 하였으니, 조착은 말할 것도 없고, 가의 또한 이를 행하였으니, 나는 이로써 사설(邪說)이 사람을 옮기는 것을 안다. 비록 호걸의 선비라도, 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랴!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구양수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지만, 단순히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를 넘어, 언어의 힘, 특히 성인의 언어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또한, 구양수의 문장이 이러한 성인의 언어에 비견될 만하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언어의 힘: 서두에서 ‘크지만 과장되지 않은 말’의 존재를 언급하며, 이러한 말은 통달한 사람은 믿지만 보통 사람들은 의심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진실되고 영향력 있는 언어는 쉽게 이해받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 성인의 언어: 공자와 맹자의 말을 인용하며, 성인의 언어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특히, 맹자가 우 임금과 자신을 비교하며 양묵의 도를 막았다고 한 말을 통해, 언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춘추의 저술이 난신적자를 두렵게 하고, 맹자의 언행이 양묵의 도를 폐지시킨 것을 예로 들어, 언어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입증합니다.
- 사설의 폐해: 맹자 이후 신불해, 상앙, 한비 등의 학문이 득세하여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바른 도(道)를 담지 않은 언어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진나라의 멸망을 예로 들어, 사설이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강조합니다.
- 가의와 조착의 사례: 태사공의 말을 인용하여, 가의와 조착 역시 사설에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사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구양수 문장의 가치: 비록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글 전체의 논지를 통해 구양수의 문장이 성인의 언어에 비견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즉, 구양수의 문장 역시 세상을 교화하고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서문은 언어, 특히 성인의 언어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펼치고 있으며, 구양수의 문장이 이러한 성인의 언어에 비견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칭송하는 내용입니다. 사설의 폐해를 강조함으로써, 바른 도(道)를 담은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서 언급된 구양수(歐陽脩)의 문집 서문, 즉 <육일거사집서(六一居士集敘)>의 뒷부분입니다. 앞부분에서 언어의 힘과 성인의 언어에 대해 논했다면, 이 뒷부분에서는 구양수의 학문과 문장이 한유(韓愈)와 맹자(孟子)의 계보를 잇는 정통 유학임을 강조하고, 그의 등장으로 인해 송나라의 학문과 풍속이 크게 변화했음을 설명합니다.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한(漢)나라 이후로, 도술(道術)이 공자(孔子)의 가르침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가 많았다. 진(晉)나라는 노장(老莊)으로 인해 망했고, 양(梁)나라는 불교로 인해 망했으나, 바로잡는 사람이 없어, 5백여 년이 지나서야 한유를 얻으니, 학자들이 한유를 맹자와 짝하였으니, 거의 가깝다. 한유 이후 3백여 년이 지나서야 구양자를 얻으니, 그의 학문은 한유와 맹자를 미루어 공자의 가르침에까지 도달하였고, 예악(禮樂)과 인의(仁義)의 실질을 드러내어, 대도(大道)에 부합하게 하였다. 그의 말은 간략하면서도 명확하고, 진실하면서도 통달하며, 사물을 끌어 모아 종류별로 연결하고, 지극한 이치로 판단하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구양자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떠들썩하게 공격하였으나, 능히 그의 몸을 곤궁하게 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말을 굽힐 수는 없었다. 선비들은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할 것 없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말하기를 “구양자는 지금의 한유이다.”라고 하였다. 송(宋)나라가 건국된 지 70여 년,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고, 부유해져 가르침을 받았으니, 천성(天聖)과 경우(景祐) 연간에는 지극하였으나, 이 문화는 끝내 옛날에 부끄러움이 있었다. 선비들 또한 낡은 것을 답습하고, 논의는 비루하고 기개는 약하였다. 구양자가 나온 이후,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자신을 씻고 갈아, 경전을 통달하고 옛것을 배우는 것을 높이 여겼고, 시대를 구제하고 도를 행하는 것을 어질다고 여겼고, 임금의 얼굴을 범하며 간언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여겼다. 길러내고 성취시킨 것이, 가우(嘉祐) 말년에 이르러, 많은 선비라고 일컬어졌다. 구양자의 공이 매우 많다. 아아, 이는 어찌 사람의 힘이겠는가? 하늘이 아니고서 누가 능히 그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구양자가 돌아가신 지 10여 년, 선비들은 비로소 신학(新學)을 하였으니, 불교와 도교의 유사함으로, 주공(周公)과 공자의 진실을 어지럽히니, 식자들이 근심하였다. 다행히 천자께서 명철하고 성스러워, 조서를 내려 선비를 취하는 법을 고치게 하니, 학자들을 독려하여, 오로지 공자의 가르침을 연구하게 하고, 이단을 물리치니, 그 후 풍속이 일변하였다. 스승과 벗을 고찰하고, 근원을 따져 보니, 다시 구양자의 글을 외우고 익히게 되었음을 알았다. 내가 그의 시와 문장 766편을 그의 아들 비(棐)에게서 얻어, 이에 차례대로 논하여 말하기를 “구양자가 대도를 논하는 것은 한유와 같고, 일을 논하는 것은 육지(陸贄)와 같고, 일을 기록하는 것은 사마천(司馬遷)과 같고, 시부는 이백(李白)과 같다.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구양자의 이름은 수(脩)이고, 자는 영숙(永叔)이다. 늙어서 스스로를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하였다.
분석 및 설명:
이 뒷부분은 구양수의 학문과 문장이 유학의 정통 계보를 잇고 있으며, 그의 등장으로 인해 송나라의 학문과 풍속이 크게 변화했음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유학의 정통성 회복: 한나라 이후 유학이 쇠퇴하고 여러 사상이 혼란을 야기했다고 지적하며, 한유와 구양수의 등장을 통해 유학의 정통성이 다시 확립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구양수의 학문이 한유와 맹자를 계승하여 공자의 가르침에까지 도달했다고 평가하며, 그의 학문적 위치를 높입니다.
- 구양수의 문장: 구양수의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고, 진실하면서도 통달하며, 사물을 끌어 모아 이치에 맞게 설명하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칭찬합니다. 이는 그의 문장이 뛰어난 설득력과 교화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 구양수의 영향력: 구양자의 등장 이후, 학자들이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학문에 힘쓰게 되었으며, 사회 전반의 풍속 또한 변화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구양수가 단순한 문인을 넘어,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 신학의 등장과 반성: 구양수 사후,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은 신학이 등장하여 유학의 본질을 흐리게 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천자의 현명한 조치로 인해 다시 유학이 중흥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시 구양수의 책을 찾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 구양수에 대한 평가: 구양수가 대도를 논하는 것은 한유와 같고, 일을 논하는 것은 육지와 같고, 일을 기록하는 것은 사마천과 같고, 시부는 이백과 같다고 평가하며, 그의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재능을 극찬합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를 인용한 것으로, 그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이 뒷부분은 구양수의 학문과 문장이 유학의 정통 계보를 잇고 있으며, 그의 등장으로 인해 송나라의 학문과 풍속이 크게 변화했음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그의 문장이 가진 힘과 그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소식(蘇軾)의 문여가자설(文與可字說)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의 친구인 문여가(文與可, 본명 文同)의 자(字)인 ‘여가(與可)’의 의미를 해석한 글로, 공자(孔子), 자하(子夏), 자장(子張)의 언행을 인용하며 군자의 처세와 인간관계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직 부족하다.”라고 하셨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말씀하시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 중 착한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셨다. “착한 사람이 좋아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이 싫어하면, 군자가 되기에 충분합니까?”라고 물으니, 말씀하시기를 “아직 부족하다.”라고 하셨다. 공자께서는 질문한 사람을 위해 말씀하신 것이니, 질문한 사람보다는 현명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군자가 마을에 거처할 때에는, 착한 사람에게는 권면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주니, 어찌 싫어함이 있겠는가? 군자는 남을 싫어하지 않으니, 또한 남에게 싫어함을 받지도 않는다. 자하는 사람을 대할 때, 옳은 사람은 함께하고, 옳지 않은 사람은 거절하였다. 자장이 말하기를 “군자는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여러 사람을 포용한다. 착한 일을 칭찬하고 능하지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라고 하였다. 내가 크게 어진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무엇을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어질지 못하다면, 사람들이 장차 나를 거절할 것이니, 어떻게 남을 거절하겠는가? 자장의 뜻은, 어찌 옳은 사람과는 함께하고, 옳지 않은 사람은 저절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옳지 않은 사람이 과연 멀어진다면, 그것은 거절함이 심한 것이니, 자장이 어찌 거절함을 싫어하겠는가?”라고 물으니, “일부러 거절하려는 마음을 싫어하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만약 일부러 거절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천하 사람들이 서로 이끌고 그를 떠날 것이니, 내가 누구와 함께 거처하겠는가? 그렇다면 공자께서 유비(孺悲)를 대하신 것은, 거절이 아니겠는가?”라고 물으니, “공자께서는 가르치려 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침을 삼으신 것이니, 거절이 아니다. 만약 일부러 거절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옳은 사람은 함께할 것이니, 비록 공자와 자장이라도 모두 그러하다.”라고 답하였다. 내 친구 문군의 이름은 동(同)이고, 자는 여가(與可)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하와 같은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아니다. 함께하는 것을 취하고, 거절하는 것을 취하지 않았으니, 자장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답하였다. 여가의 사람됨은, 도를 지키고 권세를 잊으며, 의를 행하고 이익을 잊으며, 덕을 닦고 이름을 잊으니, 의롭지 않은 일을 하느니, 비록 천승의 녹봉이라도 돌아보지 않는다. 비록 그렇지만, 일찍이 남을 싫어한 적이 없고, 남 또한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가는 자장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문여가의 자 ‘여가’를 해석하는 것을 빌어, 군자의 처세와 인간관계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공자, 자하, 자장의 언행을 비교하며, ‘함께함(與)’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의도적인 ‘거절(拒)’을 경계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 공자의 가르침: 서두에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선악의 구별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조차도 궁극적인 군자의 모습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 군자의 처세: 진정한 군자는 남을 싫어하지 않으며, 남에게 싫어함을 받지도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군자가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자연스럽게 선은 가까이하고 악은 멀어지게 하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자하와 자장의 비교: 자하는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여 사람을 사귀었지만, 자장은 어진 사람을 존경하면서도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비교합니다. 소식은 자장의 태도를 더 높이 평가하며, 의도적인 거절을 경계합니다.
- 의도적인 거절의 문제점: 의도적으로 사람을 거절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그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군자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감화시켜야 한다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공자의 유비에 대한 태도: 공자가 유비를 가르치려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가르침을 주었다는 해석을 통해, 진정한 가르침은 강제적인 거절이 아닌, 자연스러운 감화에서 비롯됨을 설명합니다.
- 문여가의 인품: 문여가의 인품을 도를 지키고, 의를 행하며, 덕을 닦는 인물로 묘사합니다. 특히, 남을 싫어하지 않고, 남에게 싫어함을 받지도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의 인품이 자장의 이상적인 군자상에 부합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문여가의 자를 해석하는 형식을 빌려, 군자의 처세와 인간관계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함께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의도적인 ‘거절’을 경계하며,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감화시키는 이상적인 군자상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공자, 자하, 자장의 언행을 적절히 인용하여 논지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문여가의 인품을 통해 이러한 이상적인 군자상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소식(蘇軾)의 양천자설(楊薦字說)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소식이 양천(楊薦)이라는 사람의 자(字)를 지어주고 그 의미를 설명한 글로, 군자의 자기 존중의 방식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겉으로 보기에 불필요하고 과도해 보이는 예의범절이 실은 군자의 자기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합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양 군이 자신의 이름 천(薦)으로 나에게 자를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그의 자를 존(尊)으로 지어주고, 이에 그에게 말하기를, “옛날의 군자는, 옥을 차고 슬갑(韍)을 입으며, 면류관을 쓰고 술(旒)을 늘어뜨렸고, 한 번 술잔을 올리는 예절에도, 손님과 주인이 백 번 절하고, 몸을 굽힌 후에 음식을 먹었다. 무릇 음식을 먹는 것은, 배부르기 위함이고, 옷을 입는 것은, 따뜻하기 위함이다. 만약 다만 배부르고 따뜻하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저 옛날의 군자는, 어찌 시끄럽고 쓸데없으며, 우활하고 지나치다고 하지 않겠는가? 대개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족함과 부족함 사이에서 생긴다. 이 정도면 족하다고 하는데도, 반드시 절문(節文, 예의범절)을 행한다. 그러므로 그 몸을 기르는 바가 매우 주도하고, 그 스스로 처신하는 바가 매우 높고 두려우니, 엄숙함이 마치 규중에 있는 처녀와 같고, 조심스러움이 마치 천금의 구슬을 품고 다니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불인한 자는 감히 그에게 이르지 못하고, 불의한 자는 감히 그 문을 지나지 못한다. 오직 그 행하는 바가, 족하면 그만이라는 사이에 그치면, 사람 또한 그를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며, 불의를 더한다. 이로써 살펴보면, 무릇 세상에서 이른바 시끄럽고 쓸데없으며, 우활하고 지나치다고 하는 것은, 모두 군자가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흰 띠풀을 깔고 쓰면, 허물이 없다.’라고 하였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에 놓으면 된다.’라고 하셨다. 띠풀을 깔아 쓰는 것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땅이 놓기에 부족한 것이 아닌데, 반드시 띠풀로 자리를 까는 것은, 이는 군자가 지나치게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나는 양 군이 지나치게 스스로를 존중하기를 바라므로, 그의 이름 천(薦)을 인하여, <주역>에서 취하여 자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 군은 준수한 재능이 있고, 총명하고 과감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만, 나는 오직 그 스스로를 아끼고 소중히 하는 것이 부족할까 걱정할 뿐이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양천의 자 ‘존(尊)’에 담긴 의미를 풀이하면서, 군자의 자기 존중 방식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과도하고 불필요해 보이는 예의범절이 실은 군자의 내면적 가치를 드러내고 외부의 침범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예의범절의 의미: 음식과 의복의 본질적인 목적은 각각 배부름과 따뜻함이지만, 군자는 이를 넘어 예의범절을 갖춘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예의범절은 단순히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군자와 소인을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군자의 자기 존중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합니다.
- 군자의 자기 존중: 군자는 마치 규중의 처녀나 천금의 구슬을 가진 사람처럼, 항상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자신을 지킨다고 묘사합니다. 이는 외적인 예의범절이 내적인 자기 존중과 연결되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형성함을 의미합니다.
- <주역>과 공자의 말씀 인용: <주역>의 ‘백모(白茅)’ 고사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겉으로 보기에 불필요해 보이는 행위도 실은 군자의 자기 존중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합니다. 흰 띠풀을 까는 행위는 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사를 더욱 엄숙하게 하기 위한 군자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처럼, 군자의 모든 행동은 내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 양천에 대한 기대: 양천의 재능과 지략은 뛰어나지만, 스스로를 너무 가볍게 여길까 염려하여, ‘존(尊)’이라는 자를 지어주고, 항상 자신을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양천의 자를 해석하는 형식을 빌려, 군자의 자기 존중 방식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과도하고 불필요해 보이는 예의범절이 실은 군자의 내면적 가치를 드러내고 외부의 침범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양천에게 항상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소식(蘇軾)의 장후지충보자설(張厚之忠甫字說)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분석하며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낙전선생(樂全先生)의 아들인 장후지(張厚之)의 자(字), 즉 ‘충보(忠甫)’에 대한 해석입니다. 소식은 스승의 뜻을 기려 장후지의 자를 지어주고, ‘충(忠)’, ‘서(恕)’, ‘후(厚)’ 세 덕목이 하나로 통하는 도(道)임을 설명하며, 이를 통해 장후지가 현명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
장후지 충보는, 낙전선생의 아들이다. 아름다운 재능을 지니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도를 믿고 뜻이 독실하다. 선생께서 그의 이름을 서(恕)라고 지으셨고, 그 문객인 소식 자첨과 화중(和仲)이 선생의 뜻을 받들어, 그의 자를 후지(厚之)라고 하였고, 또 충보(忠甫)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일에는 가까우면서 쓰임이 먼 것이 있고, 말에는 간략하면서 의미가 넓은 것이 있으니, 목마르면 반드시 마시고, 배고프면 반드시 먹으며, 먹되 반드시 오곡을 먹고, 마시되 반드시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이는 부부의 어리석은 자도 모두 아는 바이고, 성인의 지혜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 말로 평생토록 행할 수 있는 것은, 서(恕)이다. 어진 자는 이를 얻은 후에 어질게 되고, 지혜로운 자는 이를 얻은 후에 지혜롭게 된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친구 사이에서 행하되, 어디에 적용하든 옳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목마름과 배고픔에 음식을 먹고 마시는 도리와 같다. 그러므로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하였고, 공자 또한 말씀하시기를 ‘만약 주공(周公)의 재능의 아름다움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라고 하셨다. 무릇 교만하고 인색한 것은, 서(恕)하지 않음일 뿐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능히 서(恕)하다면, 비록 공자와 거의 같아질 수 있고, 사람이 능히 서(恕)하지 못하다면, 비록 주공이라도 볼 것이 없다. 선생께서 아들에게 남겨주신 것은 지극하니, 나는 이에 털끝만큼도 더할 수 없다. 그러나 증자는 이를 충서(忠恕)라고 일컬었고, 시인은 이를 충후(忠厚)라고 일컬었다. 내가 보건대, 충(忠)과 서(恕)와 후(厚), 이 세 가지 말은, 성인이 말씀하신 하나의 도(道)이다. 혹은 곡식이라고 하고, 혹은 쌀이라고 하고, 혹은 밥이라고 하니, 어찌 두 가지 물건이겠는가? 그러나 곡식과 쌀이라고 하고, 쌀과 밥이라고 하면 옳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가 세 가지 말을 꿰뚫어 함께 지니기를 바란다. 장차 행할 일이 있거나, 장차 할 말이 있을 때, 반드시 돌이켜 자신에게 구하여 말하기를 ‘내가 서(恕)하지 않은가? 후(厚)하지 않은가? 충(忠)하지 않은가?’라고 해야 한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 서(恕)하고, 후(厚)하고, 충(忠)하다면, 그런 후에 행해야 한다. 이는 공자, 증자, 시인의 뜻이고, 선생의 뜻이다.”
분석 및 설명:
이 글은 장후지의 자 ‘충보’를 해석하면서, ‘충(忠)’, ‘서(恕)’, ‘후(厚)’ 세 가지 덕목이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일상적인 필요(음식과 물)에 비유하여, 이 세 덕목이 인간 관계의 기본 원리임을 설명하고, 이를 통해 장후지가 이상적인 인격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내용입니다.
- ‘서(恕)’의 중요성: ‘서’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모든 인간 관계의 기본이라고 설명합니다. 증자의 말을 인용하여 공자의 도가 ‘충서’일 뿐이라고 강조하고, 공자의 말씀(주공의 재능이 있어도 교만하고 인색하면 볼 것이 없다)을 통해 ‘서’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부각합니다. 교만과 인색은 ‘서’의 반대되는 성질임을 지적합니다.
- ‘충(忠)’, ‘서(恕)’, ‘후(厚)’의 관계: 증자는 ‘충서’라고, 시인은 ‘충후’라고 표현했지만, 소식은 이 세 가지 덕목이 하나의 도(道)를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곡식, 쌀, 밥의 비유를 통해, 본질은 하나이지만 표현만 다를 뿐임을 명확히 합니다. 즉, ‘충’은 마음의 진실됨, ‘서’는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 ‘후’는 너그럽고 관대한 태도를 의미하며,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 장후지에 대한 당부: 장후지가 앞으로 행동하거나 말할 때, 항상 ‘서’, ‘후’, ‘충’ 세 가지 덕목을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이를 실천하도록 당부합니다. 이는 공자, 증자, 시인, 그리고 낙전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장후지가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장후지의 자 ‘충보’를 해석하는 형식을 빌려, ‘충’, ‘서’, ‘후’ 세 가지 덕목이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장후지가 이상적인 인격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내용입니다. 일상적인 비유와 고전의 인용을 통해, 추상적인 덕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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