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원래 저자가 베이징 대학에서 강의할 때 사용했던 강의록으로, 이후 수정과 보완을 거쳐 1923년과 1924년에 베이징 대학 신조사에서 《중국소설사략》이라는 제목으로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고, 1925년에는 베이징 북신서국에서 한 권으로 합쳐져 출판되었습니다. 1931년에는 북신서국에서 개정 초판을 출판했습니다. 1935년 제10판에는 일부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이후의 모든 판은 제10판과 동일합니다.
서문
중국의 소설은 예로부터 제대로 된 역사가 없었다. 있다고는 하지만 외국인이 지은 중국 문학사[1]에서 처음 보이고, 그 후에 중국인이 지은 것 중에도 있지만, 그 양은 모두 책 전체의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소설에 대해서는 여전히 상세하지 않다.
이 원고는 비록 전문 역사서이지만 또한 대략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지은 것은, 3년 전에 우연히 이 역사를 강의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 말을 잘하지 못하여 듣는 사람들이 혹 많이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해서니 그 대요를 정리하여 써서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베끼는 사람의 수고로움을 염려하여 다시 문언으로 줄여서 예시를 생략하여 요략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러나 마침내 인쇄하게 된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등사하면서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이 실로 일찍부터 수고로웠기 때문인데, 다만 활자 조판이 오히려 더 수고를 덜 것이므로 인쇄하게 된 것이다.
편집하고 등사한 이래로 네다섯 명의 친구들이 혹은 서적을 빌려주거나 혹은 교정을 도와주었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여 3년 동안 한결같았다. 아아, 이에 감사드린다!
1923년 10월 7일 밤, 루쉰 북경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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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국인이 지은 중국 문학사 중 가장 이른 것은 영국의 자이리스의 《중국 문학사》(1901년 런던 출판), 독일의 그루베의 《중국 문학사》(1902년 라이프치히 출판) 등이 있다. 중국인이 지은 것으로는 린촨자의 《중국 문학사》(1904년 출판), 셰우량의 《중국 대문학사》(1918년 출판) 등이 있다. 린의 저서는 소설을 배척했고, 셰의 저서는 전서 63장 중 단지 네 개의 장만이 소설을 논하고 있다.
제1편 사가(史家)의 소설에 대한 기록 및 논술
소설이라는 이름은 옛날 장주(莊周)가 “소설로 현령(縣令)을 간(干)한다”[1](《장자(莊子)》 <외물(外物)>)고 말한 데서 보이지만, 그 실제를 살펴보면 자질구레한 말을 뜻하는 것으로, 도술(道術)이 있는 곳이 아니므로 후세에 이른바 소설과는 본래 다르다. 환담(桓譚)은 “소설가는 남은 작은 말들을 모아 가까운 비유를 취하여 짧은 글을 지으니, 몸을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 볼 만한 말이 있다.”[2](이선(李善) 주 《문선(文選)》 31권 인용 《신론(新論)》)라고 하였으니, 비로소 후대의 소설과 비슷한 듯하지만, 《장자》에서 요(堯)가 공자(孔子)에게 물었다거나, 《회남자(淮南子)》에서 공공(共工)이 제(帝)와 땅을 다투어 지유(地維)가 끊어졌다고 한 것을 당시에도 많이들 “짧은 글이라 쓸모없다”[3]고 여겼으니, 이 소설이라는 것은 여전히 우언(寓言)이나 이기(異記)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전(經傳)에 근본하지 않고 유술(儒術)을 등지는 것이었다. 후세의 여러 설은 더욱 분분하니, 지금 다 논하지 않고 사서(史書)에서 찾아보겠다.
본래 예문(藝文)을 논단하는 것은 역시 사관(史官)의 직책이었다.
진(秦)나라가 이미 문장을 불태워 백성을 어리석게 하였으므로[4],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널리 서적을 모아 사관(寫官)을 두었고, 성제(成帝)와 애제(哀帝) 두 황제 때에 다시 전후로 유향(劉向)과 그의 아들 유흠(劉歆)에게 명하여 서적을 교정하게 하였으니, 유흠은 이에 여러 서적을 총괄하여 《칠략(七略)》[5]을 올렸다. 《칠략》은 지금 없어졌고, 반고(班固)가 《한서(漢書)》[6]를 지으면서 그 요점을 삭제하여 《예문지(藝文志)》를 만들었는데, 그 셋째가 <제자략(諸子略)>으로, 기록한 것이 모두 열 집안인데 “볼 만한 것은 아홉 집안”[7]이라고 하였고, 소설은 함께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맨 끝에 남아 열다섯 집안을 얻었다. 반고는 <지(志)>에 스스로 주석을 달았고, 그 가운데 ‘모(某)가 말하기를’ 운운한 것은 당(唐)나라 안사고(顏師古)[8]의 주석이다.
《이윤설(伊尹說)》[9] 27편 (그 말이 얕고 박하여 거짓으로 의탁한 듯하다.)
《육자설(鬻子說)》[10] 19편 (후세에 더한 것이다.)
《주고(周考)》[11] 76편 (주(周)나라 일을 고찰한 것이다.)
《청사자(青史子)》[12] 57편 (옛 사관이 일을 기록한 것이다.)
《사광(師曠)》[13] 6편 (<춘추(春秋)>에 보이는데, 그 말이 얕고 박하여 본래 이와 같으니, 거짓으로 의탁한 듯하다.)
《무성자(務成子)》[14] 11편 (요(堯)가 물었다고 하니, 옛날 말이 아니다.)
《송자(宋子)》[15] 18편 (손경(孫卿)이 송자(宋子)를 말하였으니, 그 말은 황로(黃老)의 뜻이다.)
《천을(天乙)》[16] 3편 (천을은 탕(湯)을 이르니, 그 말은 은(殷)나라 때의 것이라 하니, 모두 거짓으로 의탁한 것이다.)
《황제설(黃帝說)》 40편 (허황되고 거짓으로 의탁하였다.)
《봉선방설(封禪方說)》 18편 (무제(武帝) 때의 것이다.)
《대조신요심술(待詔臣饒心術)》 25편 (무제 때의 것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유향의 《별록(別錄)》에 이르기를 “요(饒)는 제(齊)나라 사람으로,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무제 때 대조(待詔)가 되어 글을 지으니, 이름을 《심술(心術)》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조신안성미앙술(待詔臣安成未央術)》 1편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도가(道家)로, 양생(養生)하는 일을 좋아하여 미앙(未央)의 술(術)을 지었다고 하였다.)
《신수주기(臣壽周紀)》 7편 (항국(項國)의 옥인(圉人)으로, 선제(宣帝) 때의 사람이다.)
《우초주설(虞初周說)》 943편 (하남(河南) 사람으로, 무제 때 방사(方士)로서 시랑(侍郎)이 되었고, 호를 황거사자(黃車使者)라 하였다. 응소가 말하기를, 그 설은 《주서(周書)》를 근본으로 하였다고 하였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우초는 낙양(洛陽)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소설 구백 편은 본래 우초로부터 비롯되었다.”라는 것이다.)
《백가(百家)》 139권
오른쪽의 소설 열다섯 가는 모두 1380편이다.[17] 소설가라는 부류는 대개 패관(稗官)에서 나왔으니, 거리의 이야기와 길에서 들은 말을 지어낸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비록 작은 도(道)일지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으나, 먼 곳에 이르면 막힐까 염려한다.”[18]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군자(君子)는 하지 않는 것이나, 또한 없애지는 않는 것이니, 마을의 작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미치는 바를 또한 이어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니, 혹 한마디라도 취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는 또한 초요(芻荛)와 광부(狂夫)의 의논이다.
오른쪽 기록한 열다섯 집안은 양(梁)나라 때에는 겨우 《청사자》 1권만 남았고, 수(隋)나라에 이르러서도 없어졌다.
오직 반고의 주석에 의거하면, 여러 서적은 대개 혹 옛사람에게 의탁하거나, 혹은 옛 일을 기록하였으니, 사람에게 의탁한 것은 자(子)와 같으나 얕고 박하며, 일을 기록한 것은 역사와 가까우나 멀고 허황된 것이다.
당 정관(貞觀) 연간에 장손무기(長孫無忌)[19] 등이 《수서(隋書)》를 편찬하였는데, 《경적지(經籍志)》는 위징(魏徵)[20]이 지었고, 진(晉)나라 순욱(荀勖)의 《중경부(中經簿)》[21]를 계승하여 조금 바꾸어 경(經)·사(史)·자(子)·집(集)의 사부(四部)로 나누었고, 소설은 본래 자부(子部)에 속하였다. 그 기록한 것을 보면 《연단자(燕丹子)》[22] 외에는 진(晉)나라 이전의 책이 없고, 따로 담소 응대와 예술 기물 유락(遊樂)에 관한 것을 더하였는데, 논술한 것은 여전히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이후 약칭 <한지(漢志)>)를 답습하였다.
소설이라는 것은 거리의 이야기와 항간의 말이라는 것이다. 《전(傳)》에는 여인(輿人)의 칭송이 실리고, 《시(詩)》에는 초요(芻蕘)에게 물어 아름다움을 구하니, 옛날에 성인이 위에 있으면 사(史)는 글을 쓰고, 고(瞽)는 시를 읊고, 공(工)은 잠간(箴諫)을 외우고, 대부(大夫)는 규회(規誨)하고, 선비는 말을 전하고 서인(庶人)은 비방하였다. 맹춘(孟春)에는 목탁(木鐸)을 돌려 노래를 구하고, 순행하여 사람들의 시를 보고 풍속을 알았으니, 허물이 있으면 바로잡고 잘못이 있으면 고쳤으니,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주관(周官)은 훈계하는 말을 외워 사방의 뜻을 밝혀 일을 알리고, 사방의 은밀한 일을 밝혀 꺼리고 피할 것을 알렸으며, 직방씨(職方氏)는 사방의 정사와 그 위아래의 뜻을 맡아, 사방의 전하는 말을 외워 그 의물을 살펴보았다.[23] 공자가 말하기를, “비록 작은 도(道)일지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으나, 먼 곳에 이르면 막힐까 염려한다.”라고 하였다.
석진(石晉) 때에 유욱(劉昫) 등이 위술(韋述)의 옛 사서를 인하여 《당서(唐書)》 <경적지(經籍志)>(이후 약칭 <당지(唐志)>)를 지었는데, 무경(毋炯) 등이 편찬한 《고금서록(古今書錄)》[24]을 근본으로 하였고,[25] 뜻은 간략하게 하는 데 있었으므로 작은 서문과 해설을 삭제하였으니, 사관의 논술은 이로 인해 볼 수 없게 되었다. 기록한 소설은 《수서》 <경적지>(이후 약칭 <수지(隋志)>)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나, 다만 없어진 책을 삭제하고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26] 10권을 더하였는데, 이는 《수지》에서는 본래 잡가(雜家)에 속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소설에 들어갔다.
송 황우(皇祐) 연간에 증공량(曾公亮)[27] 등이 명을 받아 옛 사서를 삭제하고 바로잡았는데, <지(志)>를 지은 사람은 구양수(歐陽修)[28]였다. 그의 《예문지(藝文志)》(이후 약칭 <신당지(新唐志)>) 소설류(小說類) 가운데에는 진(晉)나라부터 수(隋)나라 때까지의 저작을 크게 더하였으니, 장화의 《열이전(列異傳)》, 대조(戴祚)의 《견이전(甄異傳)》부터 오균(吳筠)의 《속제해기(續齊諧記)》 등 신괴(神怪)를 기록한 15가(家) 115권,[29] 왕연수(王延秀)의 《감응전(感應傳)》부터 후군소(侯君素)의 《정이기(旌異記)》 등 인과(因果)를 밝힌 9가 70권,[30] 여러 책은 이전의 <지(志)>에도 본래 있었는데, 모두 사부(史部) 잡전류(雜傳類)에 있었고, 기구(耆舊), 고은(高隱), 효자(孝子), 양리(良吏), 열녀(烈女) 등의 전(傳)과 함께 나열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소설로 물러났고, 사부에는 드디어 귀신전(鬼神傳)이 없어졌다. 또 당나라 사람의 저작을 더하였으니, 이서(李恕)의 《계자습유(誡子拾遺)》[31] 등의 가르침과 경계를 내린 것, 유효손(劉孝孫)의 《사시(事始)》[32] 등의 고사(故事)를 나열한 것, 이부(李涪)의 《간오(刊誤)》[33] 등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 육우(陸羽)의 《다경(茶經)》[34] 등의 용도를 서술한 것을 함께 이 부류에 넣었으니, 사례가 더욱 어지러워졌다. 원나라에서 《송사(宋史)》를 편찬할 때에도 또한 변화가 없이 단지 무질서하게 더할 뿐이었다.
명나라 호응린(胡應麟)[35](《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 28권)은 소설이 번거롭고 종류가 많으므로, 이에 대강을 종합하여 여섯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지괴(志怪)이니, 《수신기(搜神記)》, 《술이(述異)》, 《선실(宣室)》, 《유양(酉陽)》의 종류[36]가 이것이다.
둘째는 전기(傳奇)이니, 《비연(飛燕)》, 《태진(太真)》, 《최앵(崔鶯)》, 《곽옥(霍玉)》의 종류[37]가 이것이다.
셋째는 잡록(雜錄)이니, 《세설(世說)》, 《어림(語林)》, 《쇄언(瑣言)》, 《인화(因話)》의 종류[38]가 이것이다.
넷째는 총담(叢談)이니, 《용재(容齋)》, 《몽계(夢溪)》, 《동곡(東谷)》, 《도산(道山)》의 종류[39]가 이것이다.
다섯째는 변정(辨訂)이니, 《서박(鼠璞)》, 《계륵(雞肋)》, 《자하(資暇)》, 《변의(辨疑)》의 종류[40]가 이것이다.
여섯째는 잠규(箴規)이니, 《가훈(家訓)》, 《세범(世範)》, 《권선(勸善)》, 《성심(省心)》의 종류[41]가 이것이다.
청 건륭(乾隆) 연간에 칙명을 내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42]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기윤(紀昀)이 그 일을 총괄하였고, 소설을 따로 세 갈래로 나누었으나 논술한 것은 옛 기록을 답습하였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대략 세 갈래가 있으니, 하나는 잡사(雜事)를 서술한 것이고, 하나는 이문(異聞)을 기록한 것이고, 하나는 자잘한 이야기를 모아 엮은 것이다. 당송(唐宋) 이후로 작자가 더욱 많아졌는데, 그 가운데 거짓되고 진실을 잃어 요망한 말로 사람들의 귀를 현혹하는 것이 자못 많으나, 권계(勸戒)를 담고 견문(見聞)을 넓히고 고증(考證)에 도움이 되는 것 또한 그 가운데 섞여서 나왔다. 반고는 “소설가라는 부류는 대개 패관(稗官)에서 나왔다.”라고 하였고, 여순(如淳)[43]의 주석에서는 “왕자가 마을의 풍속을 알고자 하여 패관을 세워 이야기를 전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널리 채집하고 두루 찾는 것은 이 또한 옛 제도이니, 진부하고 잡다하다고 하여 폐할 필요는 없다.
지금 고르고 가려서 고상하고 순정한 것을 기록하여 견문을 넓히고자 하니, 오직 저속하고 거칠며 황당하여 공연히 귀와 눈을 어지럽히는 것은 내치고 싣지 않는다.
《서경잡기(西京雜記)》[44] 6권, 《세설신어(世說新語)》 3권……
오른쪽은 소설가류 잡사의 부류……
《산해경(山海經)》[45] 18권, 《목천자전(穆天子傳)》 6권, 《신이경(神異經)》 1권……
《수신기(搜神記)》 20권…… 《속제해기(續齊諧記)》 1권……
오른쪽은 소설가류 이문의 부류……
《박물지(博物志)》 10권, 《술이기(述異記)》 2권, 《유양잡조(酉陽雜俎)》 20권, 《속집(續集)》 10권……
오른쪽은 소설가류 쇄어의 부류……
오른쪽 세 갈래는 호응린(胡應麟)이 나눈 것과 비교해 보면 실제로 단지 두 종류이니, 앞의 하나는 곧 잡록(雜錄)이고, 뒤의 둘은 곧 지괴(志怪)이니, 다만 서사에 조리가 있는 것을 이문(異聞)으로 하고, 자질구레한 것을 베껴 기록한 것을 쇄어(瑣語)라고 하였을 뿐이다. 전기(傳奇)는 기록하지 않았고, 총담(叢談), 변정(辨訂), 잠규(箴規) 세 종류는 대부분 잡가(雜家)로 옮겨졌으니, 소설의 범위는 이때에 이르러 조금 정돈되었다. 그러나 《산해경》, 《목천자전》은 또 이때부터 소설로 물러났으니, 안어(案語)에서 이르기를, “《목천자전》은 옛날에는 모두 기거주류(起居注類)에 넣었는데,……
실제로는 황홀하여 증거할 것이 없으니, 또한 《일주서(逸周書)》[46]와 비교할 바가 아니니,…… 사실(史實)로 여겨 기록한다면 사체(史體)가 섞이고 사례(史例)가 깨어지는 것이다. 지금 소설가에 두는 것은 의리가 마땅함을 구하는 것이니, 옛것을 바꾼다고 하여 꺼릴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설의 지괴류 가운데 본래 의탁한 역사가 아닌 것이 섞여 들어갔고, 사부(史部)에는 드디어 많은 전설의 책을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송나라의 평화(平話), 원명(元明)의 연의(演義)에 이르러서는 예로부터 민간에서 성행하였으니, 그 책이 마땅히 매우 많을 것이나, 사지(史志)에는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오직 명나라 왕기(王圻)가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47]를 지었고, 고유(高儒)가 《백천서지(百川書志)》[48]를 지었는데, 모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수호전(水滸傳)》을 실었고, 청나라 초기의 전증(錢曾)이 《야시원서목(也是園書目)》[49]을 지었는데, 또한 통속 소설 《삼국지》 등 세 종류, 송나라 사람의 사화(詞話) 《등화파파(燈花婆婆)》 등 열여섯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삼국지》, 《수호전》은 가정(嘉靖) 연간에 도찰원(都察院)의 간본(刊本)[50]이 있어 세상 사람들이 관서(官書)처럼 여겼으므로 실린 것을 볼 수 있었고, 이후의 서목(書目)에서는 곧 싣지 않았고, 전증은 오로지 수집하는 일을 하였고, 판본을 중시하였으므로 옛 간행본이기 때문에 비로소 기록하였으니, 예문에 진정한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드디어 이전의 사례를 배반한 것이다. 사가의 선입견은 한나라부터 지금까지 대략 같으니, 목록 또한 역사의 지류이므로 진실로 그 분수를 넘어서는 것이 어려웠다.
[1] “소설로 현령을 간한다”는 말은 《장자(莊子)》 <잡편(雜篇)> <외물(外物)>에 보인다. 현령에 대해 루쉰은 《중국 소설의 역사적 변천》에서 “‘현(縣)’은 높다는 뜻이니, 높은 명성을 말하고, ‘령(令)’은 아름답다는 뜻이니, 아름다운 명예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2] 환담(桓譚)(기원전?~56)의 자는 군산(君山)이고, 동한(東漢) 패국(沛國)(지금의 안후이성 화이베이시) 사람으로, 벼슬은 의랑급사중(議郎給事中)에 이르렀다. 지은 책 《신론(新論)》은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17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지금은 청나라 사람이 편집한 책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소설가는 남은 작은 말들을 모은다” 등의 말은 《문선(文選)》 권31 강엄(江淹)의 시 <이도위(李都尉)> 이선(李善) 주에 보이는데, “잔총(殘叢)”은 “총잔(叢殘)”으로, “비유(譬喻)”는 “비론(譬論)”으로 되어 있다.
[3] “짧은 글이라 쓸모없다”는 《태평어람(太平御覽)》 권602에 인용된 환담의 《신론》에 나온다. “내가 《신론》을 지은 것은 옛날과 지금을 논하여 다스림을 일으키고자 함이니, 《춘추(春秋)》의 포폄(褒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 의심하는 자가 있으니, 이른바 방합(蚌蛤)이 다르고, 이오(二五)가 십(十)이 아닌 것과 같다. 환담은 유향의 《신서(新序)》, 육가(陸賈)의 《신어(新語)》를 보고 이에 《신론》을 지었다. 장주의 우언에서는 ‘요(堯)가 공자(孔子)에게 물었다’고 하고, 《회남자(淮南子)》에서는 ‘공공(共工)이 제(帝)와 다투어 지유(地維)가 끊어졌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모두 허망하게 지은 것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많이들 ‘짧은 글이라 쓸모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늘의 일은 성명(聖明)보다 밝은 것이 없으니, 장주 등이 비록 허탄할지라도 마땅히 그 좋은 것을 취해야 할 것이니, 어찌 다 버린다고 하겠는가?” 《장자》는 전국시대 장주가 지었다. 《한서(漢書)》 <예문지>에는 52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33편이 남아 있다. “요가 공자에게 물었다”는 내용은 현재의 《장자》에는 보이지 않는다. 《회남자》는 서한(西漢)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과 그의 문객들이 편찬하였다. 《한서》 <예문지>에는 내편(內篇) 21편, 외편(外篇) 33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내편이 남아 있다. 이 책의 <천문훈(天文訓)>에서는 “옛날에 공공이 전욱(顓頊)과 더불어 제위를 다투다가 화가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으니,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부러지고 땅의 벼리가 끊어졌다. 하늘이 서북쪽으로 기울어지므로 해와 달과 별들이 옮겨 갔고, 땅이 동남쪽으로 차지 않으므로 물과 티끌이 그곳으로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4] 문장을 불태워 백성을 어리석게 하였다는 말은 《한서》 <예문지> 총서(總序)에 보인다. 검수(黔首)에 대해 당나라 안사고(顏師古)는 “진나라에서는 사람을 검수라고 하였으니, 머리가 검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주석하였다.
[5] 유향(劉向)(약 기원전 77~기원전 6)의 본명은 갱생(更生)이고, 자는 자정(子政)이며, 서한 패현(지금의 장쑤성 페이현) 사람으로, 벼슬은 간대부(諫大夫), 중루교위(中壘校尉) 등을 지냈다. 천록각(天祿閣)에서 여러 서적을 교정하여 《별록(別錄)》을 지었다. 원래 《유향집(劉向集)》 6권이 있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명나라 사람이 《유중루집(劉中壘集)》을 편집하였다. 유흠(劉歆)(?~23)의 자는 자준(子駿)이고, 벼슬은 기도위(騎都尉), 봉거광록대부(奉車光祿大夫)를 지냈다. 조서를 받아 아버지 유향과 함께 비서(秘書)를 교정하여 《칠략(七略)》을 지었다. 원래 《유흠집(劉歆集)》이 있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명나라 사람이 《유자준집(劉子駿集)》을 편집하였다. 《칠략》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록 서적으로, 《수서》 <경적지>에는 7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지금은 청나라 사람이 편집한 책 1권이 남아 있다.
[6] 반고(班固)(32~92)의 자는 맹견(孟堅)이고, 동한 안릉(지금의 산시성 셴양시) 사람으로, 벼슬은 난대령사(蘭台令史)를 지냈다. 비서(秘府)에서 서적을 교정하였고, 아버지 반표(班彪)를 이어 《한서》 총 100권을 편찬하였다. 그중 <예문지>에는 유흠이 “여러 서적을 총괄하여 《칠략》을 올렸으므로 《집략(輯略)》, 《육예략(六藝略)》, 《제자략(諸子略)》, 《시부략(詩賦略)》, 《병서략(兵書略)》, 《술수략(術數略)》, 《방기략(方技略)》이 있다. 지금 그 요점을 삭제하여 편적(篇籍)을 갖추었다.”라고 실려 있다.
[7] “볼 만한 것은 아홉 집안”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제자략(諸子略)>에는 열 집안을 기록하였는데,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및 소설가를 가리키며, 아울러 평론하여 이르기를 “여러 제자 열 집안 중에 볼 만한 것은 아홉 집안뿐이다.”라고 하였다.
[8] 안사고(顏師古)(581~645)의 이름은 주(籀)이고, 당(唐)나라 만년(萬年)(지금의 산시성 시안시) 사람으로, 일찍이 중서시랑(中書侍郎), 비서소감(秘書少監)을 지냈다. 훈고(訓詁)에 정통하였고, 《한서》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9] 《이윤설(伊尹說)》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또한 도가류에는 《이윤(伊尹)》 51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또한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佚書)》에는 《이윤서(伊尹書)》 1권이 편집되어 있고,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에는 이윤의 유문(遺文) 11칙(則)이 편집되어 있다. 이윤의 이름은 지(摯)이고, 상(商)나라 초기의 대신이다.
[10] 《육자설(鬻子說)》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또한 도가류에는 《육자(鬻子)》 22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또한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에는 1권이 편집되어 있다. 육자의 이름은 웅(熊)이고, 《사기(史記)》 <초세가(楚世家)>에는 그가 주 문왕(周文王) 때의 사람이라고 하며, 주 성왕(周成王)이 그의 후손 웅역(熊繹)을 초만(楚蠻)에 봉하였으니, 이가 곧 초나라의 시작이다.
[11] 《주고(周考)》는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12] 《청사자(青史子)》는 주(周)나라 청사자(青史子)가 지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수서》 <경적지> <연단자(燕丹子)> 제목 아래에 부기하기를 “양(梁)나라에 《청사자》 1권이 있었는데,……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루쉰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沉)》에 편집본이 있다. 청사는 복성(複姓)이고, 고대의 사관이다.
[13] 《사광(師曠)》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또한 병음양가류에는 《사광》 8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또한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사광의 자는 자야(子野)이고, 춘추(春秋) 진(晉)나라 사람으로, 평공(平公)의 신하이며, 음악에 정통하였다. 그의 언론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일주서(逸周書)》 등에 보인다.
[14] 《무성자(務成子)》는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또한 오행가류에는 《무성자재이응(務成子災異應)》 14권, 방중가류에는 《무성자음도(務成子陰道)》 36권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무성은 복성이고, 이름은 소(昭)라고도 하고 부(跗)라고도 한다. 동한(東漢)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 <찬학(贊學)>에는 “요(堯)의 스승 무성”이라는 기록이 있다.
[15] 《송자(宋子)》는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옥함산방집일서》에 1권이 편집되어 있다. 송자의 이름은 형(钘)이고, 전국 시대 송(宋)나라 사람이다. 이 책 제3편을 참고하라.
[16] 《천을(天乙)》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記)>에 “주계(主癸)가 죽고, 아들 천을이 즉위하니, 이가 곧 성탕(成湯)이다.”라고 하였다. 아래의 《황제설(黃帝說)》, 《봉선방설(封禪方說)》, 《대조신요심술(待詔臣饒心術)》, 《대조신안성미앙술(待詔臣安成未央術)》, 《신수주기(臣壽周紀)》, 《우초주설(虞初周說)》, 《백가(百家)》 또한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백가》는 유향이 편찬하였다.
[17] 《한서》 <예문지>에 기록된 소설의 총 수는 “1390편”이어야 한다.
[18] “비록 작은 도일지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다” 등의 구절은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보인다.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비록 작은 도일지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으나, 먼 곳에 이르면 막힐까 염려하니, 이 때문에 군자는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9] 장손무기(長孫無忌)(?~659)의 자는 보기(輔機)이고, 당(唐)나라 낙양(洛陽)(지금의 허난성) 사람으로, 벼슬은 태위(太尉)에 이르렀고, 조국공(趙國公)에 봉해졌다. 영휘(永徽) 3년(652)에 명을 받아 《수서(隋書)》 10지(志)의 편찬을 감독하였다.
[20] 위징(魏徵)(580~643)의 자는 현성(玄成)이고, 당나라 관도(館陶)(지금의 허베이성) 사람으로, 벼슬은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일찍이 비부(秘府)의 도서를 교정하였고, 정관(貞觀) 3년(629)에 양(梁), 진(陳),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오조(五朝)의 역사 편찬 작업을 주관하였다. 위징은 《수서》 기전(紀傳) 부분의 편찬에만 참여하였고, 《경적지(經籍志)》는 장손무기 등이 편찬하였다.
[21] 순욱(荀勖)(?~289)의 자는 공증(公曾)이고, 진(晉)나라 영음(潁陰)(지금의 허난성 쉬창시) 사람이다. 위(魏)나라에서 진나라로 들어갔고, 비서감(秘書監)을 지냈으며, 벼슬은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그는 위나라 정묵(鄭默)의 《중경(中經)》에 의거하여 《중경부(中經簿)》를 지었는데, 《칠략(七略)》 이후 가장 자세한 목록학 저작으로, 현재는 흩어져 없어졌다. 《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중경부》는 갑(甲), 을(乙), 병(丙), 정(丁) 사부(四部)로 나뉘었는데, 갑부에는 육예(六藝) 및 소학(小學) 등의 서적, 을부에는 고(古) 제자가(諸子家), 근세 제자가, 병서(兵書), 병가(兵家), 술수(術數), 병부에는 사기(史記), 구사(舊事), 황람부(皇覽簿), 잡사(雜事), 정부에는 시부(詩賦), 도찬(圖贊), 급총서(汲冢書)를 수록하였다. 《수서》 <경적지>는 이에 의거하여 여러 서적을 경(經), 사(史), 자(子), 집(集) 사부로 나누었으나, 갑을 경, 을을 사, 병을 자, 정을 집으로 한 것은 순욱이 정한 을을 자, 병을 사로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22] 《연단자(燕丹子)》의 작자는 미상이고, 혹은 한(漢)나라 사람이 지었다고 한다. 《수서》 <경적지>에는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전국 시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에게 명하여 진왕(秦王)을 찌르려 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23] 여기의 “직방씨(職方氏)”는 “훈방씨(訓方氏)”로 써야 한다. 《주례(周禮)》 <하관(夏官)>에 따르면 “훈방씨는 사방의 정사와 그 위아래의 뜻을 맡는다. 사방의 전하는 말을 외우고, 해마다 사방에 펴서 훈계하고, 새로운 사물을 살핀다.”라고 하였고, “직방씨는 천하의 지도를 맡아 천하의 땅을 맡는다.”라고 하였다.
[24] 유욱(劉昫)(887~946)의 자는 요원(耀遠)이고, 후진(後晉) 귀의(歸義)(지금의 허베이성 슝현) 사람으로, 벼슬은 태보(太保)에 이르렀고, 일찍이 《구당서(舊唐書)》의 편찬을 감독하였다. 위술(韋述)(?~757)은 당나라 만년(지금의 산시성 시안시) 사람으로, 벼슬은 공부시랑(工部侍郎)에 이르렀다. 현종(玄宗) 때 일찍이 국사(國史)의 주관 편찬을 맡았다. 무경(毋炯)은 당나라 낙양(지금의 허난성) 사람으로, 일찍이 우솔부주조참군(右率府胄曹參軍)을 지냈다. 내부(內府)의 도서를 정리하고 교정하는 데 참여하였고, 위술 등과 함께 《군서사부록(群書四部錄)》 200권을 다시 편찬하였고, 후에 또 홀로 이 책을 간추려 《고금서록(古今書錄)》 40권을 편찬하였다.
[25] 《한서》 <예문지>는 총서 외에 매 부류마다 요점을 평술한 것이 있는데, 통칭 소서(小序)라고 한다. 《구당서》 <경적지서(經籍志序)>에 따르면 “형 등이 모아 편집한 것은 반고(班固)의 《예문지》 체례에 의거하여 여러 서적은 부(部)에 따라 모두 소서가 있어 그 뜻을 밝혔다.”라고 하였다. 그 후 《구당서》 편찬자들이 《고금서록》에 의거하여 《경적지》를 편찬할 때, 간략하게 하기 위해 소서를 전부 삭제하였다.
[26] 장화(張華)의 자는 무선(茂先)이고, 진나라 방성(方城)(지금의 허베이성 구안현) 사람이다. 지은 책 《박물지(博物志)》는 《신당서(新唐書)》 <예문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래의 《열이전(列異傳)》은 일설에는 위(魏)나라 조비(曹丕)가 지었다고 하며,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이 책 제5편을 참고하라.
[27] 증공량(曾公亮)(999~1078)의 자는 명중(明仲)이고, 북송(北宋) 진장(晉江)(지금의 푸젠성) 사람이다. 일찍이 사관수찬(史館修撰)을 지냈고, 벼슬은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에 이르렀다. 그는 《신당서(新唐書)》 편찬 작업을 주관하였고, 책이 완성되자 그의 이름으로 상주(上奏)하였다.
[28] 구양수(歐陽修)(1007~1072)의 자는 영숙(永叔), 호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고, 북송 지안(吉安)(지금의 장시성) 사람으로, 벼슬은 추밀부사(樞密副使),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송기(宋祁)와 함께 《신당서》를 합작하였고, 지은 책으로는 《신오대사(新五代史)》, 《구양문충집(歐陽文忠集)》이 있다.
[29] 대조(戴祚)의 자는 연지(延之)이고, 진(晉)나라 강동(江東) 사람으로, 일찍이 유유(劉裕)를 따라 요진(姚秦)을 서정(西征)하였고, 후에 서융주부(西戎主簿)를 지냈다. 지은 책 《견이전(甄異傳)》은 《수서》 <경적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오균(吳筠)의 자는 숙상(叔庠)이고, 양(梁)나라 고장(故鄣)(지금의 저장성 안지현) 사람이다. 《양서(梁書)》 <문학전(文學傳)>, 《수서》 <경적지>, 양 《당지(唐志)》에 따르면 오균은 모두 “오균(吳均)”으로 되어 있다. 이 책 제5편을 참고하라. 여기서 말하는 “신기한 일을 기록한 15가 115권”은 장화의 《열이전》 1권, 대조의 《견이전》 3권, 원왕수(袁王壽)의 《고이전(古異傳)》 3권, 조충지(祖沖之)의 《술이기(述異記)》 10권, 유질(劉質)의 《근이록(近異錄)》 2권, 간보(干寶)의 《수신기》 30권, 유지린(劉之遴)의 《신록(神錄)》 5권, 양 원제(梁元帝)의 《연신기(妍神記)》 10권, 조태지(祖台之)의 《지괴(志怪)》 4권, 공씨(孔氏)의 《지괴》 4권, 순씨(荀氏)의 《영귀지(靈鬼志)》 3권, 사씨(謝氏)의 《귀신열전(鬼神列傳)》 2권, 유의경(劉義慶)의 《유명록(幽明錄)》 30권, 동양의무이(東陽无疑)의 《제해기(齊諧記)》 7권, 오균의 《속제해기》 1권을 가리킨다.
[30] 왕연수(王延秀)는 남조 송(宋)나라 태원(太原)(지금의 산시성) 사람이다. 일찍이 상서랑(尙書郎)을 지냈다. 지은 책 《감응전(感應傳)》은 《신당서》 <예문지>에 8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일문(佚文) 2칙(則)이 남아 있다. 후군소(侯君素)는 후백(侯白)의 자이고, 수나라 위군(魏郡)(군치는 지금의 허난성 린장현) 사람이다. 이 책 제7편을 참고하라. 지은 책 《정이기(旌異記)》는 《신당서》 <예문지>에 15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과를 밝힌 9가 70권”은 왕연수의 《감응전》 8권, 육과(陸果)의 《계응험기(繋應驗記)》 1권, 왕염(王琰)의 《명상기(冥祥記)》 10권(《신당서》 <예문지>에는 1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 <경적지>와 《구당서》 <경적지>에는 모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9가 70권으로 계산하면 10권이 옳다), 왕만영(王曼穎)의 《속명상기(續冥祥記)》 11권, 유영(劉泳)의 《인과기(因果記)》 10권, 안지추(顏之推)의 《원혼지(冤魂志)》 3권, 또 《집령기(集靈記)》 10권, 무명씨의 《징응집(徵應集)》 2권, 후군소의 《정이기》 15권을 가리킨다.
[31] 이서(李恕)는 《신당서》 <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따르면 당나라의 이름이 이서인 사람은 세 명이 있는데, 한 명은 농서군(隴西郡) 이성(李晟)의 아들로, 일찍이 광록경(光祿卿)을 지냈고, 나머지 두 명은 모두 조군(趙郡) 사람이다. 《계자습유(誡子拾遺)》는 《신당서》 <예문지>에 4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은 이서가 누구인지는 고증을 기다려야 한다.
[32] 유효손(劉孝孫)은 수나라 말 당나라 초 형주(荊州)(치소는 지금의 후베이성 장링현) 사람이다. 일찍이 태자세마(太子洗馬)를 지냈다. 지은 책 《사시(事始)》는 《신당서》 <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유효손과 방덕무(房德懋)가 함께 지었다.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 따르면 《사시》 전 책은 26문(門)으로 나뉘어 있고, 내용은 사물의 기원을 고찰한 것이다.
[33] 이부(李涪)는 당나라 말 사람이다. 일찍이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냈다. 지은 책 《간오(刊誤)》는 《신당서》 <예문지>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책에서는 고사를 고찰하고, 옛 제도를 인용하여 당나라 제도의 오류를 바로잡았고, 하권에는 잡사(雜事)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34] 육우(陸羽)(733~804)의 자는 홍점(鴻漸)이고, 당나라 경쟁(竟陵)(지금의 후베이성 톈먼시) 사람이다. 지은 책 《다경(茶經)》은 《신당서》 <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차(茶)에 관한 최초의 전문 저작이다.
[35] 호응린(胡應麟)(1551~1602)의 자는 원서(元瑞), 호는 소실산인(少室山人)이고, 명(明)나라 난시(蘭溪)(지금의 저장성) 사람이다. 지은 책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은 《명사(明史)》 <예문지(藝文志)>에 32권, 또 속집 16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주로 경사백가(經史百家)에 관한 고증이며, 그중 소설 희곡에 대한 평술이 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36] 《수신(搜神)》은 곧 진(晉)나라 간보(干寶)의 《수신기(搜神記)》이고, 《술이(述異)》는 곧 진나라 조충지(祖沖之)의 《술이기(述異記)》이니, 이 책 제5편을 참고하라. 《선실(宣室)》은 곧 당(唐)나라 장독(張讀)의 《선실지(宣室志)》이고, 《유양(酉陽)》은 곧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이니, 이 책 제10편을 참고하라.
[37] 《비연(飛燕)》은 곧 송(宋)나라 진순(秦醇)의 《조비연외전(趙飛燕外傳)》이고, 《태진(太真)》은 곧 송나라 악사(樂史)의 《양태진외전(楊太真外傳)》이니, 이 책 제11편을 참고하라. 《최앵(崔鶯)》은 곧 당나라 원진(元稹)의 《앵앵전(鶯鶯傳)》이고, 《곽옥(霍玉)》은 곧 당나라 장방(蔣防)의 《곽소옥전(霍小玉傳)》이니, 이 책 제9편을 참고하라.
[38] 《세설(世說)》은 곧 남조 송나라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이고, 《어림(語林)》은 곧 진나라 배계(裴啟)의 《어림(語林)》이니, 이 책 제7편을 참고하라. 《쇄언(瑣言)》은 곧 《북몽쇄언(北夢瑣言)》이니, 송나라 손광헌(孫光憲)이 지었고, 《송사(宋史)》 <예문지>에 12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나라, 오대(五代) 사대부의 유문(遺文)과 자잘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인화(因話)》는 곧 《인화록(因話錄)》이니, 당나라 조린(趙璘)이 지었고, 《신당서》 <예문지>에 6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나라 사람의 전해지는 이야기와 잃어버린 일 등을 기록하였다.
[39] 《용재(容齋)》는 곧 《용재수필(容齋隨筆)》이니, 송나라 홍매(洪邁)가 지었고, 《송사》 <예문지>에 5집 74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경사백가 및 의복성산(醫卜星算)의 변정고거(辨訂考據)이다. 《몽계(夢溪)》는 곧 《몽계필담(夢溪筆談)》이니, 송나라 심괄(沈括)이 지었고, 26권, 또 《보필담(補筆談)》 3권, 《속필담(續筆談)》 1권이다. 내용은 사지(史地), 과학 기술, 예문 등에 관련된다. 《동곡(東谷)》은 곧 《동곡소견(東谷所見)》이니, 송나라 이지언(李之彦)이 지었고, 《송사》 <예문지보(藝文志補)>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논설성 단문이다. 《도산(道山)》은 곧 《도산청화(道山清話)》이니, 지은 사람은 미상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송나라의 잡사(雜事)를 기록하였다.
[40] 《서박(鼠璞)》은 송나라 대식(戴埴)이 지었고, 《송사》 <예문지보>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책에는 주로 경사(經史)의 의문과 명물전고(名物典故)의 차이점을 고증하였다. 《계륵(雞肋)》은 곧 《계륵편(雞肋編)》이니, 송나라 장계유(莊季裕)가 지었고, 3권이며, 내용은 고의(古義)를 고증하고, 일화와 전해지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자하(資暇)》는 곧 《자하집(資暇集)》이니, 당나라 이광문(李匡文)이 지었고, 《신당서》 <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은 고물을 고증하고, 역사적인 일을 기록하였다. 《변의(辨疑)》는 곧 《변의지(辨疑志)》이니, 당나라 육장원(陸長源)이 지었고, 《신당서》 <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부(說郛)》에 실린 일문에 따르면, 내용은 석가와 도교 두 종교의 신기하고 괴이한 영험설의 허망함을 변명한 것이다. 《신당서》 <예문지>와 송나라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 따르면 “변(辯)”은 모두 “변(辨)”으로 되어 있다.
[41] 《가훈(家訓)》은 곧 《안씨가훈(顏氏家訓)》이니, 북제(北齊) 안지추(顏之推)가 지었고, 《구당서》 <경적지>에 7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은 입신(立身)과 치가(治家)의 도를 이야기하는 것을 주로 하고, 아울러 전고를 고증하고, 문예를 평론하였다. 《세범(世範)》은 곧 《원씨세범(袁氏世範)》이니, 송나라 원채(袁采)가 지었고, 《송사》 <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권선(勸善)》은 《송사》 <예문지>에 왕민중(王敏中)의 《권선록(勸善錄)》 6권, 《군재독서지》에 주명적(周明寂)의 《권선록》 6권, 명나라 심절보(沈節甫)가 편집한 《유순록(由醇錄)》 중에 진관(秦觀)의 《권선록》 1권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어떤 책을 가리키는지는 고증을 기다려야 한다. 《성심(省心)》은 곧 《성심잡언(省心雜言)》이니, 송나라 이방헌(李邦獻)이 지었고, 《송사》 <예문지>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세 책은 모두 입신처세(立身處世)의 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42]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는 청(清) 건륭(乾隆) 37년(1772)부터 건륭 46년(1781)까지 영용(永瑢), 기윤(紀昀)이 명을 받아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찬수(纂修)하였는데, 필사하여 창고에 넣은 책과 필사하여 보존한 책의 목록을 모두 제요(提要)로 작성하였으니, 총 200권이다. 정식으로 창고에 넣은 책은 3470종이고, 존목서(存目書)는 6819종이다. 기윤의 자는 효람(曉嵐)이다. 이 책 제22편을 참고하라.
[43] 여순(如淳)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풍익(馮翊)(치소는 지금의 산시성 다리현) 사람으로, 벼슬은 진군승(陳郡丞)을 지냈다. 일찍이 《한서(漢書)》에 주석을 달았다. 인용한 글은 《한서》 <예문지> 주에 보인다.
[44] 《서경잡기(西京雜記)》는 《구당서(舊唐書)》 <경적지(經籍志)》, 《신당서(新唐書)》 <예문지>에 갈홍(葛洪)이 지었다고 되어 있으니, 이 책 제4편을 참고하라.
[45] 《산해경(山海經)》의 작자는 미상이고, 이 책 제2편을 참고하라. 《목천자전(穆天子傳)》은 진(晉)나라 때 전국 시대 위(魏) 양왕(襄王)의 무덤에서 발견된 선진(先秦) 고서의 일종이니, 이 책 제2편을 참고하라. 《신이경(神異經)》은 예전에는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지금은 편집본 1권이 남아 있으니, 이 책 제4편을 참고하라.
[46] 《일주서(逸周書)》는 곧 《주서(周書)》이니, 서문까지 합하여 71편이다.
[47] 왕기(王圻)의 자는 원한(元翰)이고, 명(明)나라 상하이 사람이다. 일찍이 산시포정사참의(陝西布政使參議)를 지냈다. 지은 책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는 총 254권으로, 남송(南宋) 가정(嘉定)부터 명나라 만력(萬曆) 초까지의 전장 제도(典章制度)의 연혁 상황을 분류하여 기록하였다. 《수호전(水滸傳)》에 관한 기록은 이 책 권177 <경적고(經籍考)> 전기류(傳記類)에 보인다.
[48] 고유(高儒)는 명나라 탁주(涿州)(치소는 지금의 허베이성 줘현) 사람이다. 무변(武弁) 출신으로, 장서(藏書)를 좋아하였다. 지은 책 《백천서지(百川書志)》는 20권으로, 그의 장서 목록이다. 이 책 사부(史部) 야사류(野史類)에는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이 기록되어 있다.
[49] 전증(錢曾)(1629~1701)의 자는 준왕(遵王)이고, 청(清)나라 창수(常熟)(지금의 장쑤성) 사람이다. 그는 장서를 매우 많이 하였고, 지은 책 《야시원서목(也是園書目)》은 10권으로, 경(經), 사(史), 자(子), 집(集), 삼장(三藏), 도장(道藏), 희곡 소설(戱曲小說)의 7류로 나누었다. 이 책 희곡 소설류 통속 소설 부분에는 《고금연의삼국지(古今演義三國志)》, 《구본나관중수호전(舊本羅貫中水滸傳)》, 《여원광기(黎園廣記)》 세 종류가 기록되어 있고, 송나라 사람의 사화(詞話) 부분에는 《등화파파(燈花婆婆)》, 《종과장로(種瓜張老)》, 《자라개두(紫羅蓋頭)》, 《여보원(女報冤)》, 《풍취교아(風吹轎兒)》, 《착참최녕(錯斬崔寧)》, 《소(산)정아(小(山)亭兒)》, 《서호삼탑(西湖三塔)》, 《풍옥매단원(馮玉梅團圓)》, 《간첩화상(簡帖和尚)》, 《이환생오진우(李煥生五陣雨)》, 《소금전(小金錢)》, 《선화유사(宣和遺事)》, 《연분소설(煙粉小說)》, 《기문류기(奇聞類記)》 및 《호해기문(湖海奇聞)》 열여섯 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50] 도찰원(都察院) 간본(刊本)은 명나라 주홍조(周弘祖)의 《고금서각(古今書刻)》 상편에 따르면, 도찰원 항목 아래에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이 있다.
제2편 신화와 전설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에 대해 장자(莊子)는 제해(齊諧)가 있다고 하였고, 열자(列子)는 이견(夷堅)이라고 하였으나, 〔1〕 모두 우언(寓言)이므로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한서(漢書)》에서는 비관(稗官)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나, 비관은 오직 채집하는 것이 직무이지 창작하는 것이 아니므로, “거리의 이야기와 속담”은 민간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니, 진실로 어느 한 사람의 독자적인 창작이 아니다. 그 근원을 탐구해 보면,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신화와 전설에 있다.
옛날 처음의 사람들은 천지만물이 변화무쌍한 것을 보고, 그 여러 현상이 또한 인간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여겼으므로, 스스로 여러 설을 지어 이를 설명하려 하였으니, 무릇 설명한 바를 지금은 신화라고 한다. 신화는 대개 하나의 “신격(神格)”을 중심으로 하고, 또 이야기를 전개하여, 이야기하는 바의 신과 그 일에 대해 또 따라서 신앙하고 경외하니, 이에 그 위엄과 신령함을 노래하고, 아름다움을 사당에 바치니, 오래될수록 더욱 발전하여 문물이 마침내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화는 단지 종교의 싹일 뿐만 아니라, 미술이 일어나는 바이며, 또한 실제로 문장의 근원이다. 오직 신화는 문장을 낳지만, 시인은 신화의 적이니, 노래하고 기록하는 때에 매번 꾸며서 본래의 모습을 잃는 것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화는 시가를 빌려 빛나고 보존되지만, 또한 이로 인해 바뀌고 소멸되기도 한다. 천지 개벽에 대한 이야기가 중국에 남은 것은 이미 발상이 비교적 높아져서 처음 사람들의 본모습을 볼 수 없으니, 곧 그 예이다.
천지는 혼돈하기가 마치 달걀과 같았는데, 반고(盤古)가 그 가운데에서 태어나 만팔천 년이 되었다. 천지가 개벽하니, 맑은 양기(陽氣)는 하늘이 되고, 탁한 음기(陰氣)는 땅이 되었으며, 반고는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하루에 아홉 번 변하니, 신령함은 하늘에 있고, 성스러움은 땅에 있었다. 하늘은 날마다 한 길씩 높아지고, 땅은 날마다 한 길씩 두터워지고, 반고는 날마다 한 길씩 자라나니, 이와 같이 만팔천 년이 되니, 하늘의 수는 지극히 높고, 땅의 수는 지극히 깊고, 반고는 지극히 길었다. 후에 이에 삼황(三皇)이 있었다.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인용된 서정(徐整)의 《삼오력기(三五曆記)》)
천지 또한 사물이다. 사물에는 부족함이 있으므로, 옛날 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녹여 그 허물을 메우고, 자라의 발을 잘라 사극(四極)을 세웠다. 그 후에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더불어 제위를 다투다가 화가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으니,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부러지고 땅의 벼리가 끊어졌다. 그러므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어지므로 해와 달과 별들이 그곳으로 갔고, 땅은 동남쪽으로 차지 않으므로 모든 물과 티끌이 그곳으로 돌아갔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신화가 발전함에 이르러서는 중심이 되는 것이 점차 인간의 본성에 가까워지니, 무릇 서술한 바를 지금은 전설이라고 한다. 전설에서 말하는 바는 혹은 신성한 인간이거나, 혹은 옛 영웅이니, 그 기이한 재주와 뛰어난 능력이 신통한 용맹은 범인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하늘에서 받았거나 혹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자이니, 간적(簡狄)이 제비의 알을 삼켜 상(商)나라를 낳고, 〔2〕 유모(劉媼)가 교룡(蛟龍)과 교합하여 계(季)를 잉태한 것, 〔3〕이 모두 그 예이다. 이 외에도 매우 많다.
요(堯) 임금 때 열 개의 해가 함께 나타나 곡식을 태우고 초목을 죽이니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었다.
해요(猰貐), 착치(鑿齒), 구영(九嬰), 대풍(大風), 봉희(封豨), 수사(脩蛇)는 모두 백성에게 해가 되었다. 요 임금은 이에 예(羿)에게 명하여……
위로는 열 개의 해를 쏘고 아래로는 해요를 죽였다.…… 온 백성이 모두 기뻐하며 요 임금을 세워 천자로 삼았다.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
예는 서왕모(西王母)에게 불사약을 구하였는데, 항아(姮娥)가 훔쳐서 달로 달아났다. (《회남자》 <람명훈(覽冥訓)>. 고유(高誘)는 주석에서 말하기를, “항아는 예의 아내이다. 예가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구하였으나 아직 먹지 못하였는데, 항아가 훔쳐 먹고 신선이 되어 달 속으로 들어가 월정(月精)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옛날 요 임금이 곤(鯀)을 우산(羽山)에 귀양 보내니, 그 신이 누런 곰으로 변하여 우연(羽淵)으로 들어갔다.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
눈먼 노인(瞽瞍)이 순(舜)에게 곡식 창고(廪) 위로 올라가게 하고, 아래에서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려 하자, 순은 두 개의 삿갓으로 몸을 가리고 내려와 죽음을 면하였다. 눈먼 노인은 또 순에게 우물을 파게 하였는데, 순은 우물을 파면서 숨을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사기(史记)》 <순본기(舜本纪)>) 〔4〕중국의 신화와 전설은 지금 아직 전문 서적으로 집록된 것이 없고, 단지 고서에 흩어져 있는데, 《산해경(山海經)》에 특히 많다. 《산해경》은 지금 전해지는 것이 18권인데, 해외의 산천, 신, 괴이한 사물 및 제사 지내는 데 마땅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우(禹)와 익(益)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본래 아니고, 《초사(楚辭)》로 인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5〕기록된 신에게 제사 지내는 물건은 대부분 정미(精米)인 서(糈)를 사용하는데, 무술(巫術)과 합치되니, 대개 옛 무서(巫書)이지만, 진한(秦漢) 사람도 더하고 뺀 것이 있다.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져 항상 고사(故事)로 인용되는 것으로는 곤륜산(昆仑山)과 서왕모(西王母)가 있다.
곤륜의 언덕은 실로 천제(天帝)의 아래 도읍이니, 신 육오(陸吾)가 다스리는데, 그 신의 모습은 호랑이 몸에 아홉 개의 꼬리, 사람 얼굴에 호랑이 발톱이다. 이 신은 하늘의 아홉 부분과 천제의 동산을 맡는다. (《서산경(西山經)》)
옥산(玉山)은 서왕모가 사는 곳이다. 서왕모의 모습은 사람과 같으나 표범 꼬리에 호랑이 이빨을 가졌고 잘 휘파람을 불며, 헝클어진 머리에 승(勝)을 꽂고, 이는 하늘의 재앙과 오잔(五殘)을 맡는다. (위와 같음)
곤륜의 폐허는 사방 팔백 리이고, 높이는 만 길이다. 위에는 목화(木禾)가 있는데, 길이는 다섯 아름이고, 둘레는 다섯 아름이다. 앞에는 아홉 개의 우물이 있는데, 옥으로 난간을 만들었고, 앞에는 아홉 개의 문이 있는데, 문에는 개명수(開明獸)가 지키고 있다. 모든 신이 있는 곳이다. 팔방의 바위, 적수(赤水)의 물가에 있는데, 어진 예(羿)가 아니면 오르지 못한다. (《해내서경(海內西經)》)
서왕모는 사다리에 기대어 승(勝)과 지팡이를 들고 있다. (살피건대 이 글자는 마땅히 덧붙여진 것이다.) 그 남쪽에는 세 마리의 푸른 새가 있는데, 서왕모를 위해 음식을 가져온다. 곤륜 폐허의 북쪽에 있다. (《해내북경(海內北經)》)
넓은 황무지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풍저옥문(豐沮玉門)이니, 해와 달이 들어가는 곳이다. 신령한 산이 있는데, 무함(巫咸), 무즉(巫即), 무반(巫朌), 무팽(巫彭), 무고(巫姑), 무진(巫真), 무례(巫禮), 무저(巫抵), 무사(巫謝), 무라(巫羅) 열 명의 무당이 이곳에서 오르내리고, 온갖 약이 이에 있다. (《대황서경(大荒西經)》)
서해(西海)의 남쪽, 유사(流沙)의 물가, 적수(赤水)의 뒤, 흑수(黑水)의 앞에 큰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곤륜의 언덕이라 한다. 신인(神人)으로서 사람 얼굴에 호랑이 몸, 꼬리가 모두 흰 자가 산다. 그 아래에는 약수(弱水)의 깊은 못이 둘러싸고 있다. 그 밖에는 염화(炎火)의 산이 있어 물건을 던지면 곧 불이 붙는다. 사람이 승(勝)을 쓰고, 호랑이 이빨에 표범 꼬리를 하고, 굴에 사는데, 이름하여 서왕모라 한다. 이 산에는 만물이 다 있다. (위와 같음)
진(晉) 함녕(咸寧) 5년, 급현(汲縣) 백성 부준(不准)이 위(魏) 양왕(襄王)의 무덤을 도굴하다가 〔6〕죽간(竹簡)으로 된 책 《목천자전(穆天子傳)》 5편과 또 잡서(雜書) 19편을 얻었다. 《목천자전》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모두 6권인데, 앞의 5권은 주(周) 목왕(穆王)이 여덟 필의 준마를 타고 서쪽으로 정벌한 일을 기록하였고, 뒤의 1권은 성희(盛姬)가 도중에 죽어 돌아와 장사 지낸 일까지 기록하였으니, 곧 잡서의 한 편이다. 전(傳)에는 또한 서왕모를 만났다고 하였으나 여러 기이한 모습은 서술하지 않았으니, 그 모습이 이미 인간 임금과 매우 가깝다.
좋은 날인 갑자일(甲子日), 천자가 서왕모를 맞이하니, 이에 흰 구슬(白圭)과 검은 구슬(玄璧)을 잡고 서왕모를 뵈었다. 비단 실뭉치 백 순(純), C 실뭉치 삼백 순을 바치니, 서왕모가 두 번 절하고 받았다. C 을축일(乙丑日). 천자가 요지(瑤池) 위에서 서왕모에게 술잔을 올렸다. 서왕모가 천자를 위해 노래를 지어 말하기를, “흰 구름은 하늘에 있고, 산〔7〕은 저절로 솟아났네. 길이 멀고 멀어 산과 물이 막고 있네. 그대는 죽지 않으니,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천자가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동쪽 땅으로 돌아가 여러 하(夏)나라를 화목하게 다스려, 모든 백성을 고르게 하리. 나는 그대를 보기를 바라니, 3년이 되면 다시 들에 오리라.”라고 하였다. 천자는 드디어 엄산(弇山)으로 말을 몰아 올라가 이에 그 자취를 엄산의 돌에 기록하고, 홰나무를 심으니, 이름을 서왕모의 산이라 하였다. (권3)
범이 가 가운데에 있었다. 천자가 장차 이르려 하니, 칠췌(七萃)의 무사 고분융(高奔戎)이 사로잡아 범을 바치기를 청하며, 반드시 온전히 하겠다고 하니, 이에 산 채로 범을 사로잡아 바쳤다. 천자가 명하여 나무 우리(柙)에 가두어 동우(东虞)에서 기르니, 이것이 호뢰(虎牢)이다. 천자가 고분융에게 사냥 말 열 쌍을 하사하고, 태뢰(太牢)로 돌아가게 하니, 고분융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권5)
한(漢)나라 응소(應劭)〔8〕는 말하기를, 《주서(周書)》는 우초(虞初)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일주서(逸周書)》 중에는 오직 <극은(克殷)>, <세부(世俘)>, <왕회(王会)>, <태자진(太子晋)>〔9〕네 편만이 기록이 매우 과장되어 전설과 유사하고, 나머지 글은 그렇지 않다. 급총(汲冢)에서 나온 주나라 때의 죽간 책 중에는 본래 <쇄어(瑣語)> 11편이 있었는데, 여러 나라의 점복, 꿈, 요괴, 관상에 대한 책으로 지금은 없어졌고, 《태평어람(太平御覽)》〔10〕에 간혹 그 글이 인용되어 있다. 또 급현(汲縣)에는 진(晉)나라가 세운 <여망표(呂望表)>〔11〕가 있는데, 역시 《주지(周志)》를 인용하였으니, 모두 꿈의 징험을 기록한 것으로, 매우 소설과 유사하니, 우초가 비롯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일 수 있으나, 다른 명확한 증거가 없어 또한 단정하기 어렵다.
제(齊) 경공(景公)이 송(宋)나라를 치러 곡릉(曲陵)에 이르렀을 때, 꿈에 키가 작은 사나이가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안자(晏子)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꾸신 꿈은 어떠하셨습니까?”라고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 “그 손님은 매우 키가 작고, 위는 크고 아래는 작으며, 말이 매우 노하고, 엎드리기를 좋아하더라.”라고 하였다. 안자가 말하기를, “그러하다면 이윤(伊尹)입니다. 이윤은 매우 크면서도 키가 작고, 위는 크고 아래는 작으며, 얼굴색은 붉고 수염이 있으며, 말은 엎드려 낮은 소리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라고 하였다. 경공이 말하기를, “맞소.”라고 하였다. 안자가 말하기를, “이는 임금의 군대를 노하게 하는 것이니, 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송나라를 치지 않았다. (《태평어람》 378)
문왕(文王)이 꿈에 천제(天帝)가 검은 옷을 입고 영호(令狐)의 나루터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천제가 말하기를, “창(昌)아, 너에게 망(望)을 주노라.”라고 하였다. 문왕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태공(太公)도 뒤에서 또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문왕이 꿈을 꾼 밤에 태공도 꿈을 꾼 것이 그러하였다. 그 후에 문왕이 태공을 보고 이에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이름이 망이오?”라고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예, 망입니다.”라고 하였다. 문왕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에게서 본 것이 있는 듯하오.”라고 하니, 태공이 그 연월일과 또한 그 말을 다 이야기하니, “신이 이로써 뵙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문왕이 말하기를, “그러하오, 그러하오.”라고 하고는 드디어 함께 돌아가 경사(卿士)로 삼았다. (진나라가 세운 <태공여망표> 석각, 동위(东魏)가 세운 <여망표>로 빠진 글자를 보충함.)
그 외 한(漢)나라 이전의 《연단자(燕丹子)》, 한나라 양웅(楊雄)〔12〕의 《촉왕본기(蜀王本紀)》, 조엽(趙晔)의 《오월춘추(吳越春秋)》〔13〕, 원강(袁康), 오평(吳平)의 《월절서(越絕書)》〔14〕 등은 비록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으나, 모두 기이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시가에서 구한다면 굴원(屈原)이 지은 것이 특히 《천문(天問)》〔15〕에서 신화와 전설을 많이 볼 수 있으니, “야광(夜光)은 무슨 덕이 있기에 죽으면 다시 살아나는가? 그 이로움은 오직 무엇이기에 달토끼(顾菟)가 배 속에 있는가?”, “곤(鯀)은 무엇을 경영하였고, 우(禹)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강회(康回)가 화를 내니 땅은 무슨 까닭으로 동남쪽으로 기울어졌는가?”, “곤륜산의 동산은 그 거처가 어디에 있는가? 증성(增城)의 아홉 겹은 그 높이가 몇 리인가?”, “능어(鲮鱼)는 어디에 있으며, 기도(鬿堆)는 어디에 있는가? 예(羿)는 어디에서 활을 쏘아 해를 다 쏘았는가? 까마귀는 어디에서 날개를 풀어 헤쳤는가?” 등이 그것이다. 왕일(王逸)〔16〕이 말하기를, “굴원이 쫓겨나 산과 물가를 방황하다가 초(楚)나라에 선왕(先王)의 사당 및 공경(公卿)의 사당이 있는 것을 보고, 천지, 산천, 신령의 기이하고 괴이한 그림 및 옛 현인과 성인의 괴이한 행적을 보고, …… 이에 벽에 써서 어찌 그러한지 물었다.”(이 책의 주석)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이야기가 당시 입으로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사당의 장식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풍습이 한나라에 이르러 끊이지 않아 지금도 무덤 사이에 돌에 새긴 신, 괴물, 성인, 선녀의 그림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晉)나라가 급총의 책을 얻자, 곽박(郭璞)〔17〕이 《목천자전》에 주석을 달고, 또 《산해경》에 주석을 달고 그림과 찬(贊)을 지으니, 그 후 강관(江灌)〔18〕 또한 그림과 찬을 지었으니, 신이(神異)에 대한 이야기가 진나라 이후에도 선비들에게 깊이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거대한 작품으로 모아 녹여낸 것은 그리스의 서사시〔19〕와 같은 것이 전해지지 않고, 단지 시문의 장식으로 사용되었고, 소설에서 그 흔적을 흔히 볼 수 있을 뿐이다.
중국의 신화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는 이유는, 어떤 사람〔20〕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중국 땅의 백성은 먼저 황하 유역에 거주하였는데, 하늘의 은혜가 부족하여, 삶이 부지런하였으므로 실제를 중시하고 허황된 생각을 물리쳐, 옛이야기를 모아 큰 글로 만들 수 없었다. 둘째는 공자(孔子)가 나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의 실용적인 것을 가르침으로 삼아 귀신을 말하려 하지 않았으니, 태고의 황당한 이야기는 모두 유학자들이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 후에 널리 빛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흩어져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유는 대개 신과 귀를 구별하지 않은 데에 있다. 천신(天神), 지기(地祇), 인귀(人鬼)는 옛날에는 구별이 있었던 것 같으나, 인귀 또한 신기가 될 수 있었다. 사람과 신이 뒤섞이니, 원시 신앙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었다. 원시 신앙이 존재하니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날마다 생겨나 그치지 않고, 기존의 것은 이에 굳어 죽고, 새로 나오는 것 또한 더욱 빛을 잃게 되었다. 아래의 예와 같으니, 앞의 두 가지는 수시로 새로운 신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고, 뒤의 세 가지는 옛 신이 바뀌기만 하고 발전하지 않는 것이다.
장자문(蔣子文)은 광릉(廣陵) 사람인데, 술을 좋아하고 여색을 탐하며, 경박하고 방탕함이 끝이 없었다. 항상 스스로 뼈가 푸르다고 말하며, 죽으면 신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한나라 말에 말릉위(秣陵尉)가 되어, 도적을 쫓아 종산(鍾山) 아래에 이르렀는데, 도적이 이마를 쳐서 상처를 입히자, 이에 끈을 풀어 상처를 묶고, 잠시 후에 드디어 죽었다. 오(吳)나라 선주(先主) 초기에 그의 옛 부하가 길에서 장자문을 보고, ……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이 땅의 신이 되어 너희 백성을 복되게 할 것이니, 너희는 백성에게 알리어 나를 위해 사당을 세우라. 그렇지 않으면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해 여름에 큰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이 서로 두려워하고 떨며, 몰래 제사 지내는 자가 많았다.
세상에는 자고신(紫姑神)이 있는데,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어떤 집의 첩이었는데, 큰 부인에게 질투를 받아 매번 더러운 일을 시키며 괴롭힘을 당하다가 정월 보름날 원통하게 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날 그 형상을 만들어 밤에 변소나 돼지우리 옆에서 맞이한다. …… 던지는 자가 무겁게 느끼면(살피건대 ‘던지다(投)’는 ‘잡다(捉)’로 써야 하며, ‘가지다(持)’라는 뜻이다) 곧 신이 온 것이니,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면 또한 모습이 빛나고 윤택해지는 것을 느끼며, 곧 춤을 추며 뛰고 그치지 않는다. 여러 일을 점칠 수 있고, 미래의 누에치기를 점치며, 또한 갈고리를 잘 던진다. 좋으면 크게 춤을 추고, 나쁘면 하늘을 보고 눕는다. (《이원(異苑)》 5)
넓은 바다 가운데 도삭산(度朔之山)이 있는데, 위에는 큰 복숭아나무가 있고, …… 그 가지 사이 동북쪽을 귀문(鬼門)이라 하는데, 모든 귀신이 출입하는 곳이다. 위에는 두 신인이 있는데, 하나는 신도(神荼)라 하고, 하나는 울루(郁垒)라 하는데, 모든 귀신을 살펴 거느리는 것을 주관하며, 사람을 해치는 악귀는 갈대 밧줄로 묶어 호랑이에게 먹인다. 이에 황제(黃帝)가 예법을 만들어 때에 맞춰 쫓아내고, 큰 복숭아나무 인형을 세우고, 문에는 신도와 울루와 호랑이를 그리고, 갈대 밧줄을 걸어 흉한 요괴를 막았다. (《논형(論衡)》 22에 인용된 《산해경》, 살펴보건대 지금의 책에는 없다.)
동남쪽에 도도산(桃都山)이 있는데, …… 아래에 두 신이 있으니, 왼쪽은 융(隆)이라 하고, 오른쪽은 구(窌)라 하며, 모두 갈대 밧줄을 잡고 불길한 귀신을 엿보다가 잡아서 죽인다. 지금 사람들은 정월 아침에 두 개의 복숭아나무 인형을 만들어 문 옆에 세우는데, …… 이는 남은 모습이다. (《태평어람》 29 및 918에 인용된 《현중기(玄中記)》를 《옥촉보전(玉燭寶典)》의 주석으로 보충함)
문신(門神)은 곧 당(唐)나라 진숙보(秦叔保)와 호경덕(胡敬德) 두 장군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 태종(太宗)이 병이 나자, 침실 문 밖에서 기와를 던지고 깨뜨리니, 귀신과 도깨비가 울부짖었다. …… 태종이 이를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에게 고하니, 진숙보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평생 사람 죽이기를 오이를 가르듯이 하였고, 시체를 쌓기를 개미를 모으듯이 하였으니, 어찌 도깨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원컨대 호경덕과 함께 군복을 입고 문 밖에 서서 엿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그 아룀을 허락하니, 밤에 과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화가에게 명하여 두 사람의 형상을 그리게 하여, …… 궁궐 좌우 문에 걸어 놓으니, 요사스러운 기운이 사라졌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따라 하여 마침내 영원히 문신이 되었다. (《삼교수신대 전(三教搜神大全)》 7)
〔1〕 제해(齊諧):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제해라는 자는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이다.”라고 실려 있다. 후세 사람들은 제해를 괴이한 소설집의 서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유송(劉宋) 동양무의(東陽無疑)의 《제해기(齊諧記)》, 양(梁) 오균(吳均)의 《속제해기(續齊諧記)》 등이 있다. 이견(夷堅):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넓은 바다에 곤(鯤)과 붕(鵬)이 있는데, 우(禹)가 가서 보고, 백익(伯益)이 알고 이름을 지으니, 이견이 듣고 기록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견을 괴이한 소설집의 서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송(宋) 홍매(洪邁)의 《이견지(夷堅志)》, 금(金) 원호문(元好問)의 《속이견지(續夷堅志)》 등이 있다.
〔2〕 간적(簡狄)이 제비 알을 삼켜 상(商)나라를 낳은 일: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은(殷)나라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인데, 유융씨(有娀氏)의 딸로, 제곡(帝喾)의 두 번째 비(妃)였다.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하다가 검은 새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주워 삼키니, 이로 인해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라고 실려 있다. 상은 곧 설이며, 상나라의 시조이다.
〔3〕 유모(劉媪)가 교룡(蛟龍)과 교합하여 계(季)를 잉태한 일: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유모가 일찍이 큰 못의 언덕에서 쉬다가 꿈에 신과 만났다. 이때 우레와 번개가 어둡고 캄캄하였는데, 태공(太公)이 가서 보니, 교룡이 그 위에 있었다. 이윽고 임신하여 드디어 고조(高祖)를 낳았다.”라고 실려 있다. 교룡은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는 ‘교룡(交龍)’으로 되어 있다. 계는 한 고조 유방(劉邦)의 자(字)이다.
〔4〕 고수(瞽瞍)가 순(舜)을 해치려 한 일: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원문에는 “고수가 또 다시 그를 죽이려 하여, 순에게 곡식 창고 위로 올라가게 하니, 고수가 아래에서 불을 질러 창고를 태웠다. 순은 이에 두 개의 삿갓으로 몸을 가리고 내려와 떠나가서 죽음을 면하였다. 후에 고수가 또 순에게 우물을 파게 하니, 순은 우물을 파면서 숨을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순이 이미 깊이 들어가자, 고수와 상(象)이 함께 흙을 내려 우물을 채우니, 순이 숨은 공간에서 나와 떠나갔다.”라고 되어 있다.
〔5〕 《산해경(山海經)》의 저자에 대해: 우(禹)와 익(益)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한(漢)나라 유흠(劉歆)의 《상산해경표(上山海經表)》에 “우가 구주(九州)를 나누고, 땅에 따라 공물을 정하니, 익 등이 사물의 선악을 분류하여 《산해경》을 지었다.”라고 되어 있고, 한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별통편(別通篇)>에 “우와 익이 함께 홍수를 다스리고, …… 듣고 본 바를 가지고 《산해경》을 지었다.”라고 되어 있다. 《산해경》이 《초사(楚辭)》로 인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송나라 주희(朱熹)의 《초사변증(楚辭辨證)》(하)에 “대개 고금에 《천문(天問)》을 말하는 자는 모두 이 두 책(《산해경》과 《회남자》를 가리킴)에 근거하는데, 지금 글의 뜻으로 살펴보면, 이 두 책은 본래 이 《문》을 해설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의심된다.”라고 되어 있다.
〔6〕 부준(不准)이 위(魏) 양왕(襄王)의 무덤을 도굴한 일: 《진서(晉書)》 <무제기(武帝紀)>에 함녕(咸寧) 5년(279) 겨울 10월에 “급군(汲郡) 사람 부준이 위 양왕의 무덤을 파다가 죽간으로 된 작은 전서체의 옛 책 십여만 자를 얻었다.”라고 실려 있다. 부준은 사람 이름이다. 위 양왕의 무덤은 일설에는 안리왕(安釐王)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진서(晉書)》 <속석전(束皙傳)>에 따르면 급총에서 죽간 수십 수레를 얻었는데, “그 《기년(紀年)》 13편은 하(夏)나라 이래로 주(周)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게 멸망당한 일까지 기록하고, 일로 이어받아 삼가(三家)로 나뉘어 여전히 위나라 안리왕 20년까지의 일을 서술하였다. …… 《쇄어(瑣語)》 11편은 여러 나라의 점복, 꿈, 요괴, 관상에 대한 책이다. …… 《목천자전(穆天子傳)》 5편은 주 목왕이 사해를 유행하며 제대(帝台), 서왕모(西王母)를 만난 일을 말한다. …… 또 잡서 19편은 《주식전법(周食田法)》, 《주서(周書)》, 《논초사(論楚事)》, 《주목왕미인성희사사(周穆王美人盛姬死事)》이다.”라고 되어 있다.
〔7〕 陵: 언덕 릉의 이체자. 아래 글의 “丌”, “稽”는 각각 “其”, “稽”의 이체자이다.
〔8〕 응소(應劭): 자는 중원(仲遠)이고, 동한(東漢) 여남 남돈(汝南南頓, 지금의 허난성 샹청) 사람이다. 태산 태수를 지냈다. 《풍속통의(風俗通義)》, 《한서집해음의(漢書集解音義)》 등을 저술하였다.
〔9〕 《극은(克殷)》: 《일주서(逸周書)》 제36에 실려 있으며, 주 무왕(周武王)이 목야(牧野)에서 은(殷)나라 주(紂)를 이긴 일을 기록하였다. 《세부(世俘)》: 《일주서》 제40에 실려 있으며,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계속해서 은나라 제후국을 추격하고 포로로 제사 지낸 일을 기록하였다. 《왕회(王會)》: 《일주서》 제59에 실려 있으며, 주 성왕(周成王)이 제후들을 크게 모아 각국이 진귀한 물건을 바친 일을 기록하였다. 《태자진(太子晉)》: 《일주서》 제64에 실려 있으며,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晉)이 진(晉)나라 대부 사광(師曠)과 대화할 때 말을 잘한 일을 기록하였다.
〔10〕 《태평어람(太平御覽)》: 유서(類書)로, 북송(北宋) 이방(李昉) 등이 황제의 명을 받아 편집하였고,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983)에 완성되었다. 총 1천 권으로, 55개 부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인용한 서적이 1,690종에 이른다. 이 책은 《쇄어(瑣語)》 17칙을 인용하고 있다.
〔11〕 진(晉)나라가 세운 《여망표(呂望表)》 석각 비문: 일명 《태공비(太公碑)》라고도 한다. 송(宋)나라 조명성(趙明誠)의 《금석록(金石錄)》에 “진 태강(太康) 10년 3월에 급현(汲縣) 현령 노무기(盧無忌)가 세웠다.”라고 실려 있다. 표 안에는 《주지(周志)》의 “문왕이 천제의 꿈을 꾸다”라는 문단이 인용되어 있다. 《주지》는 《좌전(左傳)》 문공(文公) 2년에 “지(志)는 기록하는 것이니, 이를 《주지》라 하였으니, 주나라 때의 책임을 분명히 알 수 있으나, 그 책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아래 글의 “동위(東魏)가 세운 《여망표》”는 청(清)나라 필원(畢沅)의 《중주금석기(中州金石記)》에 따르면, 진나라가 세운 태공비가 훼손된 후, 동위 무정(武定) 8년(548) 4월에 다시 세웠다. 모자용(穆子容)이 썼다.
〔12〕 양웅(楊雄): (기원전 53년—18년) 또는 양웅(揚雄)이라고도 쓰며, 자는 자운(子雲)이고, 서한(西漢) 촉군 성도(蜀郡成都, 지금의 쓰촨성) 사람으로, 성제(成帝) 때 급사황문랑(給事黃門郎)을 지냈다. 그의 저작으로는 명(明)나라 사람이 편집한 《양자운집(揚子雲集)》 6권이 있다. 지은 《촉왕본기(蜀王本紀)》 1권은 촉나라 건국부터 진(秦)나라 때까지 여러 촉왕의 기이한 일을 기록하였다.
〔13〕 조엽(趙晔): 자는 장군(長君)이고, 동한 산음(山陰, 지금의 저장성 사오싱) 사람이다. 지은 《오월춘추(吳越春秋)》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12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은 오(吳)나라 태백(太伯)부터 부차(夫差)까지, 월(越)나라 무여(無餘)부터 구천(勾踐)까지의 역사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그중에는 많은 민간 전설이 있다.
〔14〕 원강(袁康): 동한 회계(會稽, 지금의 저장성 사오싱) 사람이다. 오평(吳平): 자는 군고(君高)이고, 동한 회계 사람이다. 《월절서(越絕書)》는 내용이 오나라와 월나라의 역사 지리 및 부차, 오자서(伍子胥), 문종(文種), 범려(范蠡) 등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경적지>에는 16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자공(子貢)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이 책의 기록이 진한(秦漢) 시대까지 미치므로, 지은이가 자공일 리는 없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회계의 원강이 지었고, 같은 군의 오평이 정하였다.
〔15〕 《천문(天問)》: 《초사(楚辭)》의 편명으로, 굴원(屈原)이 지었다. 시 전체는 170개가 넘는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고대 역사, 신화 전설 및 자연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루쉰(魯迅)의 《마라시력설(摩羅詩力說)》에서는 이 시를 “태고의 처음부터 모든 사물의 사소한 것까지 의심하며, 거침없이 말하여, 이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였다.”라고 평하였다.
〔16〕 왕일(王逸): 자는 숙사(叔師)이고, 동한 남군 의성(南郡宜城, 지금의 후베이성) 사람이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연간에 교서랑(校書郎)을 지냈고, 순제(順帝) 때 시중(侍中)으로 나아갔다. 지은 《초사장구(楚辭章句)》는 《초사》의 가장 오래된 주석본이다. 아래 글의 “본서주(本書注)”는 왕일의 《초사장구》 중 《천문》 장구 서(序)를 가리키며, 여기서는 일부 생략되었다.
〔17〕 곽박(郭璞): (276—324) 자는 경순(景純)이고, 진(晉) 하동 문희(河東聞喜, 지금의 산시성) 사람이다. 저작좌랑(著作佐郎), 왕돈(王敦)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을 지냈다. 도찬(圖贊):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곽박의 《산해경도찬(山海經圖贊)》 2권이 기록되어 있는데, 《산해경》의 내용을 소재로 한 그림의 찬시이다.
〔18〕 강관(江灌): 자는 도군(道群)이고, 진 진류(陳留,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현) 사람으로, 오군 태수(吳郡太守)까지 지냈다. 《구당서(舊唐書)》 <경적지>와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강관이 지은 것은 《이아도찬(爾雅圖贊)》이다.
〔19〕 그리스 서사시: 장편 서사시 《일리아스(Iliad)》와 《오디세이(Odyssey)》를 가리키며, 기원전 9세기의 맹인 시인 호메로스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오랜 기간 구전되다가 기원전 6세기에 책으로 정리되었다. 작품은 많은 신화와 역사 전설을 연결하여 후세의 문학 예술 창작에 풍부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20〕 말하는 사람: 일본의 시오야 온(鹽谷溫)을 가리킨다. 그가 중국 고대 신화가 적은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한 것은 그가 지은 《중국문학개론강화(中國文學概論講話)》 제6장(손양공(孫俍工) 역)에서 볼 수 있다.
제3편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실린 소설
《한지(漢志)》에서 소설가를 서술하며 “패관(稗官)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는데, 순열(淳曰)이 말하기를, “가는 쌀을 패(稗)라고 한다. 거리의 이야기와 골목의 속설은 매우 자질구레한 말이다. 왕은 마을의 풍속을 알고자 하여 패관을 두어 이야기하게 하였다.”(본 주석)라고 하였다. 그 기록된 소설은 지금 모두 전해지지 않으므로 깊이 고찰할 수 없으나, 제목을 살펴보면 《시경(詩經)》의 <국풍(國風)>〔1〕과 같이 민간에서 채록한 것 같지는 않다. 그중 옛사람에게 의탁한 것이 일곱 가지이니, 《이윤설(伊尹說)》, 《육자설(鬻子說)》, 《사광(師曠)》, 《무성자(務成子)》, 《송자(宋子)》, 《천을(天乙)》, 《황제(黃帝)》이다. 옛일을 기록한 것이 두 가지이니, 《주고(周考)》, 《청사자(青史子)》인데, 모두 언제 지어졌는지 말하지 않았다. 분명히 한(漢)나라 때의 것이라고 밝힌 것이 네 집안이니, 《봉선방설(封禪方說)》, 《대조신 요심술(待詔臣饒心術)》, 《신수주기(臣壽周紀)》, 《우초주설(虞初周說)》이다. 《대조신 안성미앙술(待詔臣安成未央術)》과 《백가(百家)》는 비록 언제 지어졌는지 말하지 않았으나, 그 차례에 따라 스스로 한나라 사람의 것이다.
《한지》 도가(道家)에 《이윤설》〔2〕 51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소설가에는 27편으로 되어 있어 고찰할 수 없으니,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주석에 《이윤서(伊尹書)》를 인용하여 “기산(箕山)의 동쪽, 청조(青鳥)의 곳에, 노귤(盧橘)이 여름에 익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남은 글의 극히 일부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본미편(本味篇)>〔3〕에서 이윤이 지극한 맛으로 탕왕(湯王)에게 설명한 것을 서술하며, 또한 “청조가 단맛을 가진 것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설명이 매우 자세하나, 글은 풍부하나 뜻은 얕으니, 대개 《이윤서》에 근거한 것이다.
이윤이 요리(割烹)로 탕왕에게 중용된 것〔4〕을 맹자(孟子)가 일찍이 자세히 변론하였으니, 이는 대개 전국 시대의 선비가 지은 것이다.
《한지》 도가에 《육자(鬻子)》 22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 권만 남아 있으니, 어떤 사람은 그 말이 얕고 거칠다고 하여 도가의 말이 아니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사람들이 인용한 잃어버린 글에는 지금의 《육자》와 매우 다른 것이 있으니, 이는 대개 진실로 도가의 말이 아니다.
무왕이 병거를 이끌고 주를 정벌하였다. 주왕의 호랑이 군대 백만 명이 상(商)나라 교외에 진을 쳤는데, 황조(黃鳥)에서 시작하여 적부(赤斧)에 이르기까지, 달리기가 빠른 바람과 같고,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삼군의 군사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지 않은 이가 없었다. 무왕이 이에 태공(太公)에게 명하여 흰 깃발을 잡고 어루만지게 하니, 주나라 군대가 도리어 달아났다. (《문선(文選)》 이선 주 및 《태평어람》 301)
청사자(青史子)는 옛날의 사관(史官)이나, 언제 시대의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책은 수(隋)나라 시대에 이미 없어졌으니, 유지지(劉知幾)의 《사통(史通)》〔5〕에서 “《청사》는 거리의 이야기에 덧붙여졌다.”라고 한 것은 대개 《한지》의 말을 근거한 것이니, 당나라에 이르러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니다. 남은 글은 지금 세 가지 일이 전해지는데, 모두 예(禮)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당시 어찌하여 소설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옛날의 태교(胎教)는 왕후가 임신 7개월이 되면 연회하는 방으로 나아가니, 태사(太史)는 구리 종을 들고 문 왼쪽에 서고, 태재(太宰)는 되(斗)를 들고 문 오른쪽에 서고, 태복(太卜)은 서죽(蓍竹)과 거북점을 들고 당 아래에 서고, 여러 관리는 모두 그 직책으로 문 안에 섰다. 석 달에 이르기까지, 왕후가 구하는 소리가 예악(禮樂)이 아니면, 태사는 거문고를 안고 익숙하지 않다고 말하고, 구하는 맛이 바른 맛이 아니면, 태재는 되에 의지하여 감히 조리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감히 왕태자를 기다리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태어나 울면, 태사는 구리 종을 불며 말하기를, “소리가 모 율(律)에 맞습니다.”라고 하고, 태재가 말하기를, “맛이 모 맛에 맞습니다.”라고 하고, 태복이 말하기를, “명이 모라고 합니다.”라고 한 후에 왕태자를 위해 활을 거는 예의를 행하였다. …… (《대대례기(大戴禮記)》 <보부편(保傅篇)>, 《가의신서(賈誼新書)》 <태교십사(胎教十事)>)
옛날에는 여덟 살이 되면 집 밖의 집으로 나가 작은 재주를 배우고 작은 예절을 행하였고, 머리를 묶으면 대학에 나아가 큰 재주를 배우고 큰 예절을 행하였다. 거처할 때는 예의범절을 익히고, 다닐 때는 패옥 소리를 내고, 수레를 타면 화란(和鸞) 소리를 들었으니, 사악한 마음이 들어올 곳이 없었다. …… 옛날의 노차(路車)는 둥글게 만들어 하늘을 상징하고, 28개의 바퀴살은 별자리를 상징하고, 네모난 수레 밑바닥은 땅을 상징하고, 30개의 바퀴는 달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위를 보면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를 보면 지리를 살피고, 앞을 보면 화란 소리를 보고, 옆을 들으면 사시의 운행을 보았으니, 이는 거마(巾車) 교육의 도이다. (《대대례기(大戴禮記)》 <보부편(保傅篇)>)
닭은 동방의 가축이다. 한 해가 끝나고 다시 시작하며, 동쪽에서 일을 시작함을 분별하니, 만물이 문을 두드리고 나오므로, 닭으로 제사를 지낸다. (《풍속통의(風俗通義)》 8)
《한지》 병음양가(兵陰陽家)〔6〕에 《사광(師曠)》 8편이 있는데, 이는 잡다한 점술 책으로, 소설가에 있는 것은 고찰할 수 없고, 오직 본지의 주석에 근거하여, 대부분 《춘추(春秋)》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일주서(逸周書)》 <태자진(太子晉)> 편에 사광이 태자를 만나 소리를 듣고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태자 또한 스스로 “3년 후에 하늘에 손님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자못 소설가와 비슷하다.
우초(虞初)의 일은 본지의 주석에 자세히 실려 있고, 또한 일찍이 정부인(丁夫人)〔7〕 등과 함께 방술로 흉노(匈奴)와 대완(大宛)을 저주하였으니, 《교사지(郊祀志)》에 보인다. 지은 《주설(周說)》이 거의 천 편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진(晉)나라와 당나라 사람들이 《주서(周書)》를 인용한 것 중에, 《산해경》 및 《목천자전(穆天子傳)》과 같은 세 가지 일이 있는데, 《일주서》와 같지 않으니, 주우증(朱右曾)〔8〕(《일주서집훈교석(逸周書集訓校釋)》 11)은 이를 《우초설》이라고 의심하였다.
개산(芥山)은 신(神) 욕수(蓐收)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 산은 서쪽으로 해가 지는 곳을 바라보니, 그 기운이 둥글고, 신의 광채가 주관하는 곳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3)
천구(天狗)가 머무는 곳은 땅이 모두 기울어지고, 남은 빛이 하늘을 비추어 유성(流星)이 되니, 길이가 십여 장이고,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그 소리가 우레와 같고, 그 빛이 번개와 같다. (《산해경》 주 16)
목왕(穆王)이 사냥하는데, 검은 새가 비둘기 같았는데, 펄럭이며 날아와 저울대에 앉으니, 어자가 채찍으로 쳐서 죽이니, 말이 달아나 멈추지 못하고, 수레에 걸려 황제의 왼쪽 넓적다리를 다치게 하였다. (《문선(文選)》 이선 주 14)
《백가(百家)》는 유향(劉向)의 《설원(說苑)》〔9〕 서록(敘錄)에서 말하기를, “《설원잡사(說苑雜事)》는 …… 그 일이 종류가 많으니, …… 《신서(新序)》와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얕고 의리에 맞지 않으므로, 따로 모아 《백가》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설원》은 지금도 전해지는데, 기록한 것이 모두 옛사람의 행적의 자취이니, 법도로 삼을 만한 것이니, 이를 가지고 《백가》를 미루어 보면, 거의 이야기로 정치의 도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 여러 집안은 모두 고찰할 수 없다. 지금 그 서명을 살펴보면, 사람에 의지한 것은 이윤(伊尹), 육웅(鬻熊), 사광(師曠), 황제(黃帝)이고, 일에 의지한 것은 봉선(封禪), 양생(養生)이니, 대개 대부분 방사(方士)가 거짓으로 꾸민 것이다. 오직 청사자만은 그렇지 않다.
또한 무성자(務成子)의 이름은 소(昭)인데, 《순자(荀子)》에 보이고, 《시자(尸子)》에서는 일찍이 그의 “역경을 피하고 순리를 따르는” 가르침〔10〕을 기록하였다. 송자(宋子)의 이름은 형(钘)인데, 《장자(莊子)》에 보이고, 《맹자(孟子)》에는 송경(宋徑)으로, 《한비자(韓非子)》에는 송영자(宋榮子)로, 《순자》에서는 자송자(子宋子)를 인용하여 “모욕을 당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싸우지 않게 한다.”〔11〕라고 하였으니, “황로(黃老)의 뜻”이지만, 모두 방사(方士)의 설이 아니다.
〔1〕 국풍(國風): 《시경(詩經)》의 구성 부분으로, 대부분 주(周)나라 초기부터 춘추(春秋) 중기까지의 민요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옛날에는 시를 채록하는 관리가 있었으니, 왕이 풍속을 관찰하고 득실을 알기 위한 것이니, 스스로 고쳐 바로잡는 것이다.”라고 실려 있다.
〔2〕 《이윤설(伊尹說)》: 《한서·예문지》 도가(道家)류에는 《이윤(伊尹)》으로 되어 있다.
〔3〕 《여씨춘추(呂氏春秋)》: 전국(戰國) 말기 진(秦)나라의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문객들과 함께 공동으로 편찬하였고, 《한서·예문지》에는 26권, 총 160편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미편(本味篇)》은 《여씨춘추·효행람(孝行覽)》에 보이는데, 이윤이 각지의 산해진미를 열거하며, 오직 천자의 나라에서만 비로소 누릴 수 있다고 말하며, 탕왕(湯王)에게 정치 개혁을 권하여 천하를 취하도록 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4〕 할팽요탕(割烹要湯): 《맹자(孟子)》 <만장(萬章)>에 “만장이 묻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윤이 요리(割烹)로 탕왕에게 중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습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윤은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았는데, 요순(堯舜)의 도를 즐거워하였다. …… 나는 그가 요순의 도로 탕왕에게 중용되었다는 것은 들었으나, 요리로 중용되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5〕 유지기(劉知幾): (661—721) 자는 자현(子玄)이고, 당(唐)나라 팽성(彭城,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 사람이다. 저작랑(著作郎), 좌사(左史) 등의 관직을 지냈고, 여러 차례 관에서 편찬하는 역사서에 참여하였다. 지은 《사통(史通)》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적 비평서이다. 20권으로,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나뉘어 있으며, 내편은 사가의 체례를 논하고, 외편은 사적의 유래와 득실을 논한다. 또한, “《청사(青史)》는 거리의 이야기에 덧붙여졌다.”라는 말은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 <제자편(諸子篇)>에 보이는데, “덧붙여졌다”의 원문은 “구부러졌다(曲)”이다.
〔6〕 병음양가(兵陰陽家): 즉 병서(兵書) 중의 음양가(陰陽家)이다. 《한서·예문지》에 “음양이란, 때에 따라 발하고, 형벌과 덕을 미루어 행하고, 북두칠성을 따라 공격하고, 오행의 상극을 이용하여, 귀신을 빌려 도움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唐)나라 안사고(顏師古)는 주석에서 “오승(五勝)은 오행의 상극이다.”라고 하였다.
〔7〕 정부인(丁夫人): 《한서·교사지(郊祀志)》에 무제(武帝) 태초(太初) 원년(104)에 서쪽으로 대완(大宛)을 정벌할 때, “정부인이 낙양(雒陽)의 우초(虞初) 등과 함께 방술로 흉노와 대완을 저주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당나라 위소(韋昭)는 주석에서 “정은 성이고, 부인은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8〕 주우증(朱右曾): 자는 존로(尊魯)이고, 청(清)나라 가정(嘉定, 지금의 상하이) 사람이다. 귀주(貴州) 준의 지부(遵義知府)를 지냈다. 《일주서집훈교석(逸周書集訓校釋)》, 《좌씨전해의(左氏傳解誼)》 등을 저술하였다.
〔9〕 《설원(說苑)》: 서한(西漢) 유향(劉向)이 지었고, 《수서(隋書)》 <경적지>에는 2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추전국(春秋戰國)부터 진한(秦漢) 사이의 역사 이야기를 분류하여 서술하고, 의론을 섞었다. 《설원잡사(說苑雜事)》는 곧 《설원》이다. 《신서(新序)》는 유향이 지었고, 《수서·경적지》에는 3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과 체제가 《설원》과 유사하다.
〔10〕 무성자(務成子): 《순자(荀子)》 <대략편(大略篇)>에 “배우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 요(堯)는 군주(君疇)에게 배우고, 순(舜)은 무성소(務成昭)에게 배우고, 우(禹)는 서왕국(西王國)에게 배웠다.”라고 하였다. 《시자(尸子)》 권하(卷下)에 무성자가 순에게 가르치기를 “천하의 역경을 피하고, 천하의 순리를 따르면, 천하는 취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시자》는 전국 시대 노(魯)나라 시교(尸佼)가 지었고, 《한서·예문지》에는 20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지금 전해지는 《시자》는 위진(魏晉) 시대 사람이 의탁하여 보충하여 지은 것으로 의심된다.
〔11〕 “모욕을 당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싸우지 않게 한다.”라는 말은 《순자·정론(正論)》에 보인다.
제4편 현재 보이는 한나라 사람의 소설
현재 전해지는 소위 한나라 사람의 소설이라는 것은, 대개 하나도 진정으로 한나라 사람이 지은 것이 없고, 진(晉)나라 이후로, 문인과 방사(方士)들이 모두 위작을 하였으니,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에 이르러서도 끊이지 않았다. 문인은 교활함을 부리기를 좋아하고, 혹은 기이한 책을 과시하고자 하였고, 방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신성하게 하려는 데 뜻이 있었으므로, 왕왕 옛 서적에 의탁하여 남을 현혹하였다. 진나라 이후 사람들이 한나라에 의탁한 것은 또한 한나라 사람들이 황제(黃帝)와 이윤(伊尹)에게 의탁한 것과 같다. 이 여러 책 중에, 동방삭(東方朔)과 반고(班固)〔1〕가 지었다고 하는 것이 각각 두 가지이고, 곽헌(郭憲)과 유흠(劉歆)〔2〕이 지었다고 하는 것이 각각 한 가지인데, 대개 변방의 일에 대해서는 동방삭과 곽헌이라고 하고, 한나라의 일에 관련되면 유흠과 반고라고 하였으니, 큰 뜻은 신선(神仙)에 대해 말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동방삭이 지었다고 하는 것에는 《신이경(神異經)》 1권이 있는데, 《산해경(山海經)》을 모방하였으나, 산천의 도리에 대해서는 소략하고 이물(異物)에 대해서는 자세하며, 간혹 풍자하는 말이 있다. 《산해경》은 한나라 때에 조금 나타났다가 진나라 때에 성행하였으니, 이 책은 마땅히 진나라 이후 사람이 지은 것이다. 그 글에 중복되는 것이 꽤 있으니, 대개 또한 일찍이 흩어져 없어졌다가, 후 사람이 당나라와 송나라의 유서(類書)에서 인용한 잃어버린 글을 베껴 다시 지은 것이다. 주석이 있는데, 장화(張華)가 지었다고 하였으나, 또한 위작이다.
남쪽에는 사탕수수 숲이 있는데, 그 높이가 백 장이고, 둘레가 세 척 여덟 치이며, 마디가 짧고, 즙이 많고, 꿀처럼 달다. 그 즙을 씹어 먹으면, 사람을 윤택하게 하고, 회충을 제거할 수 있다. 사람 배 속의 회충은, 그 모양이 지렁이와 같으니, 이는 곡식을 소화시키는 벌레인데, 많으면 사람을 해치고, 적으면 곡식이 소화되지 않는다. 이 사탕수수는 많은 것을 없애고 적은 것을 덮을 수 있으니, 모든 사탕수수도 그러하다. (《남황경(南荒經)》)
서남쪽 변방에서 나오는 아수(訛獸)는, 그 모양이 토끼와 같고, 사람의 얼굴을 하고 말을 할 수 있으며, 항상 사람을 속이니, 동쪽이라고 말하고 서쪽이라고 하고, 나쁘다고 말하고 좋다고 한다. 그 고기가 맛있으니, 먹으면, 말이 진실하지 않게 된다. (원래 주석, 그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이 말을 진실하게 하지 않는다.) 한 번의 거짓말이다. (《서남황경(西南荒經)》)
곤륜산(崑崙山)에는 구리 기둥이 있으니, 그 높이가 하늘에 들어가니, 이른바 “천주(天柱)”이다. 둘레가 삼천 리이고, 둥글기가 깎은 것과 같다. 아래에는 둥근 집이 있는데, 사방 백 장이고, 신선 구부(九府)가 다스린다. 위에는 큰 새가 있는데, 이름하여 희유(希有)라고 하니, 남쪽을 향하고, 왼쪽 날개를 펼쳐 동왕공(東王公)을 덮고, 오른쪽 날개를 펼쳐 서왕모(西王母)를 덮는다. 등의 작은 곳은 깃털이 없으니, 1만 9천 리이고, 서왕모가 해마다 날개 위에 올라, 동왕공을 만난다. (《중황경(中荒經)》)
《십주기(十洲記)》〔3〕 1권 또한 동방삭이 지었다고 하였는데, 한무제(漢武帝)가 서왕모에게 조주(祖洲), 영주(瀛洲), 현주(玄洲), 염주(炎洲), 장주(長洲), 원주(元洲), 유주(流洲), 생주(生洲), 봉린주(鳳麟洲), 취굴주(聚窟洲) 등 십주(十洲)에 대해 듣고, 이에 동방삭을 불러 그 있는 물건의 이름을 물으니, 또한 《산해경》을 꽤 모방하였다.
현주(玄洲)는 북해(北海) 가운데, 술해(戌亥)의 땅에 있으니, 사방 7천 2백 리이고, 남쪽 해안에서 36만 리 떨어져 있다. 위에는 대현도(大玄都)가 있으니, 선백(仙伯)과 진공(真公)이 다스린다. 많은 언덕과 산이 있다. 또한 풍산(風山)이 있는데, 소리가 우레와 번개와 같으니, 하늘의 서북쪽 문과 마주한다. 위에는 태현선관(太玄仙官)의 궁실이 많으니, 궁실이 각각 다르다. 풍성한 금빛 영지와 옥풀이 있다. 이에 세 천군(三天君)이 내려와 다스리는 곳이니, 매우 엄숙하다.
정화(征和) 3년, 무제가 안정(安定)에 행차하였다. 서쪽 오랑캐 월지(月支)가 향 4냥을 바쳤는데, 크기가 참새 알만 하고, 검기가 오디와 같았다. 황제가 향이 중국에 없는 것이라 여겨, 외창고에 맡겼다. ……
후원(後元) 원년에 이르러, 장안(長安) 성 안의 병자가 수백 명이었는데, 죽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황제가 시험 삼아 월지의 신향을 성 안에서 태우니, 죽은 지 석 달이 되지 않은 자들이 모두 살아났고, 향기가 석 달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으므로, 이에 그 신령한 물건임을 믿고, 이에 다시 남은 향을 비밀리에 기록하였으나, 후에 하루아침에 또 잃어버렸다. ……
내년에 황제가 오작궁(五柞宮)에서 붕어(崩御)하였으니, 이미 월지 나라 사람과 오산진단(鳥山震檀) 등의 향이 없어진 것이다. 만약 사신을 후하게 대하였다면, 황제가 붕어할 때, 어찌 영험한 향의 효험을 얻지 못하였겠는가? 스스로 목숨이 다한 것이다!
동방삭은 비록 해학으로 이름났으나, 허황됨이 이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한서(漢書)》 <삭전(朔傳)>의 찬(贊)에서 이르기를, “동방삭의 해학은 점을 치고 사복(射覆)하는 데 맞추었으니, 그 일이 피상적이고 천박하여, 여러 백성들 사이에 행해지니, 아이들과 목동들까지도 현혹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후대의 호사가들이 이에 기이한 말과 괴이한 이야기를 취하여 동방삭에게 덧붙였다.”라고 하였으니, 한나라 시대에 동방삭에 대해 이미 많은 억지스러운 이야기가 덧붙여졌음을 알 수 있다. 두 책(《신이경》과 《십주기》)은 비록 위작이지만, 《수서(隋書)》에 이미 기록되었고, 또한 사의(辭意)가 새롭고 달라서, 제나라와 양나라의 문인들이 왕왕 고사로 인용하였다. 《신이경》은 진실로 또한 신선가의 말이지만, 문사(文思)가 비교적 심오하니, 대개 문인이 지은 것이다. 《십주기》는 특히 천박하니, 월지국(月支國)에서 향이 다시 나는 것을 기록한 것과, 편의 처음에 이르기를, “동방삭이 말하기를, 신은, 신선을 배우는 자이지,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오니, 국가의 성대한 아름다움으로써, 장차 명유(名儒)와 묵객(墨客)을 문교(文教) 안으로 불러들이고, 속세를 끊는 도를 허황된 자취로 막으려 하시니, 신이 이에 은둔함을 감추고 왕정에 나아왔고, 양생(養生)을 간직하고 붉은 대궐을 모셨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다만 방사(方士)가 실지(失志)할까 염려하여, 빌려 세속을 진동시키고 현혹시키며, 또한 스스로 해조(解嘲)하는 작품일 뿐이다.
반고(班固)가 지었다고 하는 것으로, 하나는 《한무제고사(漢武帝故事)》〔4〕인데, 지금 1권이 전해지니, 무제가 의란전(猗蘭殿)에서 태어난 때부터 붕어하여 무릉(茂陵)에 장사지낼 때까지의 잡사를 기록하였고, 또한 성제(成帝) 때까지 미친다. 그중에 비록 많은 신선과 괴이한 이야기가 있으나, 자못 방사를 믿지 않으니, 문 또한 간결하고 우아하니, 마땅히 문인이 지은 것이다. 《수지(隋志)》에는 2권으로 기록되었고, 지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송나라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서 비로소 “세상에서 반고가 지었다고 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당나라 장간지(張柬之)의 책 《동명기(洞冥記)》 뒤에 이르기를, 《한무고사》는 왕검(王儉)이 지은 것이다.”〔5〕라고 하였으니, 후 사람이 드디어 반씨(班氏)에게 돌린 것이다.
황제가 을유년(乙酉年) 7월 7일에 의란전에서 태어나, 나이 네 살에 교동왕(膠東王)으로 세워졌다. 몇 년 후, 장공주(長公主)가 무릎 위에 앉히고 묻기를, “아이가 아내를 얻고 싶으냐?”라고 하니, 교동왕이 말하기를, “아내를 얻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장공주가 좌우의 장어(長御) 백여 명을 가리키며, 모두 쓸모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그 딸을 가리키며 묻기를, “아교(阿嬌)는 어떻더냐?”라고 하니, 이에 웃으며 대답하기를, “좋습니다. 만약 아교를 얻는다면, 금으로 만든 집에 저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공주가 크게 기뻐하며, 이에 황제에게 간곡히 청하니, 드디어 혼인을 이루었다.
황제가 일찍이 수레를 타고 낭서(郎署)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을 보니,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고, 의복이 단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묻기를, “공은 언제 낭(郎)이 되었으며, 어찌 이리 늙었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성은 안(顏)이고 이름은 사(驷)이며, 강도(江都) 사람입니다. 문제(文帝) 때 낭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어찌 이리 늙도록 등용되지 못하였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는 글을 좋아하였는데 신은 무(武)를 좋아하였고, 경제(景帝)는 노인을 좋아하였는데 신은 젊음을 숭상하였고, 폐하는 젊은이를 좋아하는데 신은 이미 늙었습니다. 이 때문에 삼대에 걸쳐 등용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그 말에 감동하여, 회계도위(會稽都尉)로 발탁하였다.
7월 7일, 황제가 승화전(承華殿)에서 재계(齋戒)하는데, 해가 정중할 때, 갑자기 푸른 새가 서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 황제가 동방삭에게 물으니, 동방삭이 대답하기를, “서왕모가 저녁에 반드시 존귀한 모습을 황제께 내리실 것입니다.”〔6〕라고 하였다. …… 이 날 밤 누각 7각에, 공중에 구름이 없는데, 희미하게 우레 소리 같았고, 온 하늘이 자줏빛 기운이었다. 잠시 후, 왕모가 이르렀는데, 자줏빛 수레를 탔고, 옥녀(玉女)가 함께 수레를 몰았다. 칠승(七勝)을 썼고, 푸른 기운이 구름 같았고, 두 마리의 푸른 새가 왕모의 곁에서 모셨다. 수레에서 내리자, 황제가 맞이하여 절하고, 왕모를 맞아 앉히고, 불사약(不死藥)을 청하였다. 왕모가 말하기를, “…… 황제께서 감정을 풀지 못하시고, 욕심이 오히려 많으시니, 불사약을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복숭아 일곱 개를 내놓으니, 왕모가 스스로 두 개를 먹고, 황제에게 다섯 개를 주었다. 황제가 씨앗을 앞에 두었다. 왕모가 묻기를, “이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시오?”라고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이 복숭아가 아름다워, 심으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모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복숭아는 삼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으니, 인간 세상에 심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오경까지 머무르며, 세상 일을 이야기하고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고, 엄숙히 떠나갔다. 동방삭이 주작 창문 안에서 왕모를 엿보았다. 왕모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죄과를 짓기를 좋아하고, 거칠고 무뢰하니, 오랫동안 쫓겨나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나, 본래 마음은 악하지 않으니, 곧 돌아갈 것이다. 황제께서 잘 대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왕모가 떠나자, 황제가 오랫동안 실망하였다.
그중 하나는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7〕인데, 역시 1권으로, 역시 효무제(孝武帝)가 처음 태어난 때부터 붕어하여 장사지낼 때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서왕모(西王母)가 내려온 것을 특히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 글이 비록 화려하지만 얕고, 또한 불교의 말을 훔쳐 썼고, 또 《십주기(十洲記)》 및 《한무고사(漢武故事)》 중의 말을 많이 사용하였으니, 두 책(《십주기》와 《한무고사》)보다 나중에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송나라 때에는 오히려 지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명나라에 이르러 이에 《한무고사》와 함께 모두 반고(班固)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반고의 이름이 중하여, 인하여 같은 종류로 여겨 의탁한 것이다.
밤 2경 이후에, 갑자기 서남쪽에서 흰 구름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울창하게 곧장 와서, 궁정으로 곧장 나아갔다. 잠시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니, 구름 속에서 피리와 북 소리가 들리고, 사람과 말의 소리가 들렸다. 밥 반 그릇 먹을 동안에, 왕모가 도착한 것이다. 궁전 앞에 매달아 던지니, 마치 새가 모이는 것 같았고, 혹은 용과 호랑이를 타고, 혹은 흰 기린을 타고, 혹은 흰 학을 타고, 혹은 높은 수레를 타고, 혹은 하늘의 말을 타고, 여러 신선 수천 명이, 빛이 뜰을 비추었다. 이미 이르자, 수행하는 관리는 다시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오직 왕모가 자줏빛 구름의 수레를 타고, 아홉 빛깔의 얼룩 용을 탄 것만 보였다. 따로 오십 명의 하늘의 선녀가, …… 모두 전각 아래에 머물렀다. 왕모는 오직 두 시녀를 부축하여 전각에 오르니, 시녀의 나이는 16, 17세쯤 되었고, 푸른 비단 저고리를 입었고, 눈동자가 반짝이며, 신의 모습이 맑고 빼어나니, 참으로 미인이다! 왕모가 전각에 올라, 동쪽을 향하여 앉으니, 황금 덧옷을 입었고, 문채가 선명하고, 광채와 위엄이 훌륭하고 엄숙하고, 영비대수(靈飛大綬)를 띠었고, 허리에 분경지검(分景之劍)을 찼고, 머리에는 태화계(太華髻)를 하였고, 태진신영지관(太真晨嬰之冠)을 썼고, 검은 구슬과 봉황 무늬의 신발을 신었으니, 보기에 나이가 30세쯤 되었고, 키가 알맞고, 하늘의 자태가 그윽하고 아름다우며,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니, 참으로 신령한 사람이다!
황제가 꿇어앉아 사례하였다. …… 상원부인(上元夫人)이 황제에게 돌아앉으라고 하였다. 왕모가 부인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하는 말은, 매우 급하고 간절하니, 다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 하여금, 의지에 두려워하게 합니다.”라고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만약 그 뜻이 도에 있다면, 장차 몸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지고, 몸이 부서지고 없어지는 것을 잊고, 불을 밟고 물을 건너는 것을, 굳건한 뜻으로 하니, 반드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 급하게 말하는 것은, 그 뜻을 이루고자 함일 뿐이니, 아모(阿母)께서 이미 염려하시니, 반드시 시해(尸解)하는 방법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모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부지런한 마음을 가진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여, 드디어 그 바른 뜻을 허물고자 하니, 마땅히 천하에 반드시 신선이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니, 이 때문에 내가 낭궁(閬宮)에서 떠나, 잠시 속세에 머무른 것이니, 이미 그 신선의 뜻을 굳건히 하고자 하고, 또한 향화(向化)하여 미혹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서로 만나니,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시해하는 하방(下方)에 이르러서는, 나는 매우 아끼지 않습니다. 3년 후에, 나는 반드시 성단(成丹) 반 제(劑)와, 석상산(石象散) 하나를 줄 것입니다. 모두 주면, 철저히 다시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흉노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변방에 일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그로 하여금 갑자기 천하의 존귀함을 버리고, 곧바로 숲속으로 들어가게 하겠습니까? 다만 마땅히 굳건한 뜻이 어떠한지 물어야 합니다. 만약 그 마음을 돌이킨다면, 나는 바야흐로 여러 번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모가 인하여 황제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네가 상원부인의 지극한 말을 쓴다면, 반드시 장생을 얻을 것이니, 힘쓰지 않겠느냐?”라고 하니, 황제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철저히 책에 써서 금 간찰에 기록하여, 몸에 차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한무동명기(漢武洞冥記)》 4권이 있는데, 후한(後漢)의 곽헌(郭憲)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책 전체 60칙은, 모두 신선 도술 및 먼 곳의 괴이한 일을 말한다. 그 이름을 《동명기》라고 한 이유는, 서문에서 이르기를, “한무제는 명철하고 뛰어난 임금이요, 동방삭은 해학으로 간언하였으니, 도교에 마음을 꿰뚫어, 은밀한 자취의 오묘함을, 밝게 드러나게 하였다. 지금 옛 역사책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을, 시험 삼아 보고 들은 것으로써, 《동명기》 4권을 지어, 한 집안의 책을 이루었다.”라고 하였으니, 의지한 바 또한 동방삭에 있다.
곽헌의 자는 자횡(子橫)이고, 여남(汝南) 송(宋)나라 사람으로, 광무제(光武帝) 때 박사(博士)로 천거되어 강직하게 간언하여, “관동의 굳세고 곧은 곽자횡(關東觥觥郭子橫)”〔8〕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단지 술을 뿜어 불을 끈 일로, 갑자기 방사(方士)에게 끌어들여졌고,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9〕를 지으면서, 드디어 또한 살피지 않고 《방술열전(方術列傳)》 중에 두었다. 그러나 《동명기》를 곽헌이 지었다고 한 것은, 실로 유후(劉昫)의 《당서(唐書)》에서 시작되었고, 《수지(隋志)》에는 다만 곽씨(郭氏)라고만 하였고, 이름이 없었다. 육조(六朝) 사람들이 허황하게 신선가의 말을 지을 때, 매번 곽씨라고 칭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거의 곽박(郭璞)을 빗대려는 것이므로, 《곽씨현중기(郭氏玄中記)》가 있고, 《곽씨동명기》가 있다. 《현중기》〔10〕는 지금 전해지지 않는데, 그 남은 글을 살펴보면, 또한 《신이경》과 서로 유사하다. 《동명기》는 지금 온전히 전해지는데, 글은 아래와 같다.
황안(黃安)은, 대군(代郡) 사람이다. 대군의 졸(卒)이 되었는데, …… 항상 주사(朱砂)를 복용하여, 온 몸이 모두 붉고, 겨울에도 갖옷을 입지 않고, 넓이가 두 자인 신령한 거북 위에 앉았다. 사람들이 “그대는 이 거북에 앉은 지 몇 년이 되었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옛날 복희(伏羲)가 처음 그물과 덫을 만들어, 이 거북을 얻어 나에게 주었으니, 내가 거북 등에 앉은 지 이미 평평해졌소. 이 벌레는 해와 달의 빛을 두려워하니, 2천 년에 한 번 머리를 내미는데, 내가 이 거북에 앉아, 이미 다섯 번 머리를 내미는 것을 보았소.” …… (권2)
천한(天漢) 2년, 황제가 창룡각(蒼龍閣)에 올라, 신선술을 생각하며, 여러 방사를 불러 먼 나라의 일을 말하게 하였다. 오직 동방삭만이 자리 아래에서 붓을 잡고 꿇어앉아 나아갔다. 황제가 말하기를, “대부가 나를 위해 말하는가?”라고 하니, 동방삭이 말하기를, “신이 북극(北極)을 유람하여, 종화산(種火山)에 이르렀는데, 해와 달이 비추지 않는 곳에, 청룡(青龍)이 촛불을 물고 산의 사방 끝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원포(園圃)와 지연(池苑)이 있었는데, 모두 기이한 나무와 풀을 심었습니다. 명경초(明莖草)가 있었는데, 밤에는 금빛 등불과 같고, 가지를 꺾어 횃불로 삼으니, 귀신의 형체를 비추어 보았습니다. 신선 영봉(甯封)이 항상 이 풀을 복용하여, 밤 어두울 때, 배의 빛이 밖으로 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동명초(洞冥草)라고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풀을 찧어 진흙으로 만들어, 운명지관(雲明之館)에 바르게 하니, 밤에 이 관에 앉으니, 등불을 더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또한 조매초(照魅草)라고도 하니, 발에 깔면,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권3)
인간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을 잡다하게 기록한 것에 이르러서는, 《서경잡기(西京雜記)》〔11〕가 있는데, 본래 2권이었으나, 지금 6권인 것은 송나라 사람이 나눈 것이다. 말미에 갈홍(葛洪)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말하기를, “그 집안에 유흠(劉歆)의 《한서(漢書)》 100권이 있어, 반고가 지은 것을 고찰하니, 거의 모두 유씨(劉氏)의 것을 취하였고, 조금 다른 점이 있으나, 반고가 취하지 않은 것이니, 2만여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베껴 내어 2권으로 삼으니, 《한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수지》에는 지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고, 《당지(唐志)》에는 갈홍이 지었다고 하였으니, 당시에는 모두 진정으로 유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성식(段成式)〔12〕(《서양잡조(西陽雜俎)》 <어자편(語資篇)>)에서 이르기를, “유신(庾信)이 시를 지을 때, 《서경잡기》의 일을 사용하였는데, 곧 스스로 고쳐 말하기를, ‘이는 오균(吳均)의 말이니, 쓰기에 부족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후 사람이 인하여 오균이 지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소위 오균의 말이라는 것은, 문구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서경잡기》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칙령을 내려 은운(殷芸)에게 《소설(小說)》〔13〕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모두 옛 책을 베껴 뽑았는데, 이미 《서경잡기》를 매우 많이 인용하였으니, 양나라 초기에 이미 세상에 유행하였으니, 진실로 갈홍이 지은 것이 가깝다고 여기는 것이 옳다. 혹은 또 글 중에서 유향을 가군(家君)이라고 칭하였으므로, 인하여 갈홍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나, 이미 유흠의 이름을 빌렸으니, 유흠의 말을 모방하는 것은, 또한 이치와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책에 기록한 것은, 마치 황성증(黃省曾)〔14〕의 서문에서 말한 것과 같으니,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곧 외설스러워 생략할 만한 것, 한가롭고 흩어져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그리고 아득하고 의지하기 어려운 것, 꺼리고 숨겨야 할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니, 만약 문학을 논한다면, 이는 고대 소설 중에서, 진실로 뜻과 정서가 뛰어나고, 문장이 볼 만한 것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처음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성도(成都)로 돌아왔을 때, 가난에 시달려 근심에 차 있었는데, 지은 옷인 검은 담비 갖옷을 가지고 저잣사람 양창(陽昌)에게 술을 바꿔, 문군과 함께 즐겼다. 이윽고 문군이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말하기를, “내 평생 부유했는데, 지금 이에 옷으로 술을 바꾸다니!”라고 하였다. 드디어 서로 의논하여, 성도에서 술을 팔았다. 상여가 직접 짧은 바지를 입고 그릇을 씻어, 왕손(王孫)을 부끄럽게 하였다. 왕손이 과연 이를 병통으로 여겨, 이에 문군에게 후하게 주니, 문군이 드디어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문군은 아름답고, 눈썹은 멀리 있는 산과 같고, 얼굴은 항상 부용(芙蓉)과 같고, 피부는 부드럽고 매끄럽기가 기름과 같았으며, 사람됨이 방탕하고 풍류스러웠으므로, 장경(長卿, 사마상여의 자)의 재주를 좋아하여 예법을 넘었다. …… (권2)
곽위(郭威). 자는 문위(文偉)이고, 무릉(茂陵) 사람이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이아(爾雅)》를 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아》에 “장중(張仲)은 효성스럽고 우애하다.”라는 말이 있으니, 장중은 선왕(宣王) 때의 사람이니, 주공이 지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내가 일찍이 양자운(楊子雲)에게 물으니, 자운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의 문도인 유하(游夏)의 무리가 기록하여, 육예(六藝)를 해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군(家君)이 생각하기를 《외척전(外戚傳)》에 “사일(史佚)이 그 아들에게 《이아》를 가르쳤다.”라고 하였으니, 《이아》는 소학(小學)이다. 또 기록에 이르기를 “공자가 노애공(魯哀公)에게 《이아》를 가르쳤다.”라고 하였으니, 《이아》의 출현이 오래되었으니, 옛 전하는 학자들은 모두 주공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장중 효우’ 등의 종류는, 후 사람이 덧붙인 것이다. (권3)
사마천(司馬遷)이 분발하여 《사기(史記)》 130편을 지으니, 선배들이 훌륭한 역사의 재주라고 칭하였다. 그 백이(伯夷)를 열전(列傳)의 맨 앞에 두어, 선을 행하고도 보답이 없다고 여겼고, 항우(項羽)를 본기(本紀)로 삼아,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덕과 관계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 굴원(屈原)과 가의(賈誼)를 서술함에 이르러서는, 말의 뜻을 억누르고 드높이며, 슬프지만 상심하지 않으니, 또한 근대의 위대한 재주이다. (권4)
(광천왕(廣川王) 거질(去疾)이 무뢰한들을 모아) 난서(欒書)의 그림, 관(棺)과 널, 명기(明器)는, 썩어서 남은 것이 없었다. 흰 여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사람을 보고 놀라 달아나니, 좌우가 쳤으나, 잡지 못하고, 왼쪽 발을 다치게 하였다. 그날 저녁, 왕이 꿈에 한 장부가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얀 모습으로,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내 왼쪽 발을 다치게 하였소?”라고 하였다. 이에 지팡이로 왕의 왼쪽 발을 두드렸다. 왕이 깨어나니, 발이 붓고 통증이 생겨 종기가 나서, 죽을 때까지 낫지 않았다. (권6)
갈홍(葛洪). 자는 치천(稚川)이고, 단양(丹陽) 구용(句容) 사람이다. 어려서 유학으로 이름을 알렸고, 전적을 널리 보았으며, 특히 신선 도양(導養)의 법을 좋아하였고, 태안(太安) 연간에, 복파장군(伏波將軍)을 지냈다. 도적을 평정한 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간보(干寶)와 매우 친하게 지냈고, 갈홍의 재주가 국사를 편찬할 만하다고 천거하였으나, 갈홍은 교지(交趾)에서 단사(丹砂)가 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구루현령(句漏縣令)이 되기를 구하였고, 광주(廣州)에 이르러, 자사(刺史)에게 붙잡혀 머물게 되었고, 드디어 나부산(羅浮山)에 머물렀고, 나이 81세에, 가만히 잠자는 듯이 죽었다(약 290—370). 전기가 《진서(晉書)》에 있다. 갈홍의 저작은 매우 많아, 6백 권이나 되는데, 그 《포박자(抱朴子)》(내편 3)에서 태구장(太丘長) 영천(潁川)의 진중궁(陳仲弓, 진실)에게 《이문기(異聞記)》〔15〕가 있다고 말하고, 또 그 글을 인용하였는데, 대략 군(郡) 사람 장광정(張廣定)이 난을 피하여 네 살 된 딸을 옛 무덤 속에 두었는데, 3년 후 다시 돌아가니, 딸이 귀식(龜息)을 본받아 죽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의 이 기록은, 사서(史書)에 실려 있지 않고, 그 일 또한 매우 방사(方士)의 상투적인 이야기와 유사하니, 또한 거짓으로 지어낸 것으로 의심된다. 갈홍이 한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신선에 빠졌으므로, 그 말 또한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다.
또한 《비연외전(飛燕外傳)》〔16〕 1권이 있는데, 조비연(趙飛燕) 자매의 이야기를 기록하였고, 한나라 하동도위(河東都尉) 영현자우(伶玄子于)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사마광(司馬光)이 일찍이 그 “화수멸화(禍水滅火)”라는 말을 《통감(通鑑)》〔17〕에 인용하였으니, 거의 진정한 한나라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여겼으나, 아마 당나라와 송나라 사람이 지은 것일 것이다. 또한 《잡사비신(雜事秘辛)》 1권이 있는데, 후한에서 양기(梁冀)의 여동생을 선발하고 책봉한 일을 기록하였는데〔18〕, 양신(楊慎)〔19〕의 서문에서 이르기를, “안녕(安寧) 토지주(土知州) 만씨(萬氏)에게서 얻었다.”라고 하였는데, 심덕부(沈德符)〔20〕(《야획편(野獲編)》 23)은 곧 양신이 한때 지어낸 작품이라고 여겼다.
〔1〕 동방삭은 《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 제9편 및 주석 〔14〕를 참고. 반고는 본 권 제11쪽 주석 〔6〕을 참고.
〔2〕 곽헌의 자는 자횡(子橫)이고, 동한(東漢) 여남(汝南) 신치(新郪, 지금의 안후이성 타이허 현) 사람으로, 관직은 광록훈(光祿勳)에 이르렀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한무동명기(漢武洞冥記)》 1권이 기록되어 있는데, 곽씨(郭氏)가 지었다고 되어 있고, 《구당서(舊唐書)》 <경적지>에 《한별국동명기(漢別國洞冥記)》 4권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곽헌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유흠은 본 권 제11쪽 주석 〔5〕를 참고.
〔3〕 《십주기(十洲記)》는 《수서》 <경적지>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동방삭이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제나라와 양나라 이후 방사(方士)가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다.
〔4〕 《한무제고사(漢武帝故事)》는 《수서》 <경적지>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다. 책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명나라 오관(吳琯)의 《고금일사(古今逸史)》에 1권이 남아 있고, 루쉰(魯迅)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沉)》에 편집본이 있다.
〔5〕 조공무의 자는 자지(子止)이고, 남송(南宋) 거야(鉅野, 지금의 산둥성) 사람이다. 저명한 장서가(藏書家)이다. 지은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제요(提要)가 붙어 있는 사가(私家) 서목(書目)으로, 많은 실전된 고적(古籍)을 이 책으로 인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한무제고사》의 지은 사람에 대한 인용문은, 이 책 권2 사부(史部) 전지류(傳記類)에 보인다. “세상에서 반고(班固)가 지었다고 한다. 당나라 장간지(張柬之)의 책 《동명기(洞冥記)》 뒤에 이르기를 ‘《한무고사》는 왕검(王儉)이 지은 것이다.’”
〔6〕 “서왕모가 저녁에 반드시 존귀한 모습을 황제께 내리실 것이다.”라는 구절에 대해, 루쉰의 《고소설구침》 <한무고사>는 《감주집(紺珠集)》 권9에 근거하여 교정 보충하여, “서왕모가 저녁에 반드시 존귀한 모습을 내리실 것이니, 황제께서는 마땅히 쓸고 닦아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7〕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은 《수서》 <경적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다.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주석에서 “지은 사람을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허윤중(何允中)의 《광한위총서(廣漢魏叢書)》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나라 반고가 지었다고 되어 있다.
〔8〕 “관동의 굳세고 곧은 곽자횡(關東觥觥郭子橫)”은 《후한서》 <방술열전>에 실려 있다. “당시 흉노가 자주 변방을 침범하니, 황제가 이를 근심하여, 이에 모든 신하를 불러 조정에서 의논하였다. 곽헌은 천하가 피폐하여,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 간쟁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자, 이에 땅에 엎드려 현기증을 호소하며 다시 말하지 않았다. 황제가 두 명의 낭(郎)에게 명하여 전각 아래로 부축하게 하니, 곽헌 또한 절하지 않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일찍이 관동의 굳세고 곧은 곽자횡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내 헛되지 않구나!’라고 하였다.” 또 기록에 이르기를, 곽헌이 일찍이 황제의 수레를 따라 남쪽 교외에 갔는데, “곽헌이 지위에 있으면서, 갑자기 동북쪽으로 향하여, 술을 세 번 뿜었다.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불경하다고 아뢰었다. 조서를 내려 그 까닭을 물으니, 곽헌이 대답하기를 ‘제나라에 불이 났으므로, 이로써 막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제나라에서 과연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교외와 같은 날이었다.”
〔9〕 범엽(398—445)의 자는 울종(蔚宗)이고, 남조(南朝) 송나라 순양(順陽, 지금의 허난성 시촨 현) 사람으로, 관직은 좌위장군(左衛將軍),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다. 《후한서》를 편찬하였는데, 제기(帝紀)와 열전(列傳) 부분 90권, 지(志) 부분은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고, 후 사람이 서진(西晉) 사마표(司馬彪)의 《속한서(續漢書)》의 8편의 지를 나누어 30권으로 하여 합쳤다.
〔10〕 《현중기(玄中記)》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 및 두 《당지(唐志)》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지은 사람은 자세하지 않다. 이 책은 옛날에는 《곽씨현중기(郭氏玄中記)》라고 하였는데, 송나라 나필(羅泌)의 《노사(路史)》에서는 진(晉)나라 곽박(郭璞)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루쉰(魯迅)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沉)》에 편집본이 있다.
〔11〕 《서경잡기(西京雜記)》는 《구당서(舊唐書)》 <경적지>와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갈홍(葛洪)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갈홍의 발문(跋文)에서 말한 유흠(劉歆)의 《한서(漢書)》 100권은, 역사서 <경적지>와 <예문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서경잡기》에 기록된 것은 모두 서한(西漢)의 잃어버린 이야기와 일화이며, 괴이한 전설이 섞여 있다.
〔12〕 단성식(段成式)(?—863)의 자는 가고(柯古)이고, 당나라 임치(臨淄, 지금의 산둥성 쯔보 시) 사람이다. 지은 《유양잡조(酉陽雜俎)》는, 이 책 제10편을 참고.
〔13〕 은운(殷芸)(471—529)의 자는 관소(灌蔬)이고, 남조(南朝) 양(梁)나라 진군(陳郡) 장평(長平, 지금의 허난성 시화 현) 사람이며, 안우장사(安右長史), 비서감(秘書監)을 지냈다. 양 무제(武帝)가 그에게 《소설(小說)》을 편찬하도록 명하였고, 《수서》 <경적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상에서는 《은운소설(殷芸小說)》이라고 부른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14〕 황성증(黃省曾)(1490—1540)의 자는 면지(勉之)이고, 명나라 오현(吳縣, 지금의 장쑤성) 사람이다. 인용문은 그가 지은 《서경잡기서(西京雜記序)》에 보인다.
〔15〕 《포박자(抱朴子)》는 갈홍이 스스로 포박자(抱朴子)라고 호를 지었고, 그 호를 책 이름으로 삼았다. 《수서》 <경적지>에 내편(內篇) 21권, 음편(音篇) 1권, 외편(外篇) 30권이 기록되어 있다. 내편 <대속(對俗)>에서 일찍이 진중궁(陳仲弓)의 《이문기(異聞記)》의 “장광정(張廣定)”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진중궁(104—187)의 이름은 실(寔)이고, 동한(東漢) 영천(潁川) 허(許, 지금의 허난성 쉬창 시) 사람이다. 일찍이 태구장(太丘長)을 지냈다. 지은 《이문기》는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16〕 《비연외전(飛燕外傳)》은 《수서》 <경적지> 및 두 《당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송사(宋史)》 <예문지>에 《조비연외전(趙飛燕外傳)》 1권이 기록되어 있으며, 영현(伶玄)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내용은 한 성제(成帝)의 황후 조비연 자매의 궁중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영현의 자는 자우(子于)이고, 서한(西漢) 말 노수(潞水, 지금의 허베이성 싼허 시) 사람이다. 일찍이 하동도위(河東都尉)를 지냈다.
〔17〕 사마광(司馬光)(1019—1086)의 자는 군실(君實)이고, 북송(北宋) 섬주(陝州) 하현(夏縣, 지금의 산시성) 사람이다. 관직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겸 문하시랑(門下侍郎)에 이르렀다. 일찍이 《통감(通鑑)》(《자치통감(資治通鑑)》)을 주편하였다. “화수멸화(禍水滅火)”는, 《통감》 권31에 실려 있다. 비연 자매가 궁으로 불려 들어왔을 때, “선제(宣帝) 때 비향박사(披香博士) 탁방성(淖方成)이 황제 뒤에 있으면서,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이는 화수(禍水)이니, 불을 끄리라!’라고 하였다.”
〔18〕 《잡사비신(雜事秘辛)》은 명나라 허윤중(何允中)의 《광한위총서(廣漢魏叢書)》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나라 무명씨(無名氏)가 지었다고 되어 있다. 양기(梁冀)(?—159)의 자는 백탁(伯卓)이고, 동한(東漢) 안정(安定) 오씨(烏氏, 지금의 간쑤성 핑량 시) 사람이다.
외척으로 관직이 대장군에 이르렀다.
〔19〕 양신(楊慎)(1488—1559)의 자는 용수(用修), 호는 승암(升菴)이며, 명나라 신도(新都, 지금의 쓰촨성) 사람으로,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저작이 100여 종에 이르며,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장사패(張士佩)가 그의 주요 저작을 편집하여 《승암집(升菴集)》 81권으로 만들었다.
〔20〕 심덕부(沈德符)(1578—1642)의 자는 경천(景倩), 또 다른 자는 호신(虎臣)이며, 명나라 수수(秀水, 지금의 저장성 자싱 시) 사람이다. 지은 《야획편(野獲編)》은 20권, 속편 12권이다. 명나라 건국부터 만력 연간까지의 조정의 법령과 국가의 옛 제도 및 거리의 이야기와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였으며, 아울러 일부 희곡 소설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양신이 《잡사비신》을 위작한 일에 대해, 《야획편》 권23에 기록되어 있다. “근래에 《잡사비신》을 간행하여 후한에서 양기의 여동생을 선발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 안에 ‘금중(禁中)과 같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드디어 동한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여겼다. 이 책은 본래 양용수(양신의 자)가 거짓으로 지은 것으로, 왕충문(王忠文)이 토착 족장의 집에서 얻었다고 칭탁한 것임을 알지 못하니, 양신은 단지 한때 장난삼아 한 것이나, 후 사람들이 책을 너무 진실로 믿어, 드디어 속은 것이다.”
제5편 육조의 귀신 지괴 서(상)
중국은 본래 무속을 믿었고, 진한(秦漢) 이래로 신선 사상이 성행하였으며, 한나라 말에는 또 무풍(巫風)이 크게 일어나, 귀신의 도가 더욱 성행하였다. 마침 소승 불교 또한 중국에 들어와, 점점 유행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귀신을 크게 선전하고, 신령하고 기이한 일을 칭송하였으므로, 진(晉)나라부터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특히 귀신 지괴 서적이 많았다. 그 책은 문인에게서 나온 것도 있고, 교도(불교 승려)에게서 나온 것도 있다. 문인의 작품은, 비록 석가와 도가처럼, 그 가르침을 스스로 신성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또한 일부러 소설을 지으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대개 당시에는 인간 세계와 귀신 세계는 비록 길이 다르지만, 사람과 귀신은 모두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겼으므로, 그 기이한 일을 서술하는 것이, 인간 세상의 일상사를 기록하는 것과, 스스로 생각하기에 진실과 거짓의 구별이 없었던 것이다.
《수서(隋志)》에는 《열이전(列異傳)》 3권이 있는데, 위 문제(魏文帝)〔1〕가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오직 예로부터 문적(文籍) 속에 자못 많이 인용되었으므로, 오히려 그 남은 글을 볼 수 있으니, 곧 《수지》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귀물(鬼物)의 기이한 일을 서술한 것”이다. 글 가운데 감로(甘露) 연간의 일이 있는데, 이는 문제 이후의 일이니, 혹 후 사람이 더 보탠 것이거나, 지은 사람이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거나, 모두 알 수 없다. 두 《당지(唐志)》에는 모두 장화(張華)가 지었다고 하였으나, 또한 다른 증거가 없으니, 아마 후에 그 잘못을 깨달은 사람이 있어, 고쳐 쓴 것일 것이다. 오직 송나라 배송지(裴松之)〔2〕의 《삼국지주(三國志注)》, 후위(後魏) 여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3〕에 모두 인용되었으니, 위진(魏晉) 사람이 지은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남양(南陽)의 종정백(宗定伯)이 젊었을 때, 밤에 가다가 귀신을 만나, 묻기를, “누구냐?”라고 하니, 귀신이 말하기를, “귀신이다.”라고 하였다. 종정백이 묻기를, “그대는 또 누구냐?”라고 하니, 종정백이 속여 말하기를, “나 또한 귀신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이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완시(宛市)에 가고 싶다고 하니, 귀신이 말하기를 나 또한 완시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함께 몇 리를 가니, 귀신이 말하기를 걸어 다니기가 매우 힘드니, 함께 번갈아 서로 업고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종정백이 좋다고 하였다. 귀신이 먼저 종정백을 몇 리를 업으니, 귀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매우 무거우니, 귀신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종정백이 말하기를, 나는 새로 죽었으므로, 무거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종정백이 다시 귀신을 업으니, 귀신은 전혀 무겁지 않았다. 이와 같이 두세 번 하였다. 종정백이 다시 말하기를, 나는 새로 죽어서, 귀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한다. 귀신이 말하기를, 오직 사람이 침 뱉는 것을 싫어한다. …… 완시에 거의 다다르자, 종정백이 이에 귀신을 머리 위까지 업고, 급히 붙잡았다. 귀신이 크게 소리치며 내려달라고 하였다. 다시 듣지 않고, 바로 완시 가운데로 가서, 땅에 놓으니 한 마리 양으로 변하였다. 이에 팔았다. 다시 변할까 두려워, 이에 침을 뱉으니, 돈 천오백을 얻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884,
신선 마고(麻姑)가 동양(東陽) 채경(蔡經)의 집에 내려왔는데, 손톱이 길이 네 치였다. 채경이 생각하기를, “이 여자는 정말 좋은 손을 가졌으니, 원컨대 등으로 긁을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마고가 크게 노하였다. 갑자기 채경이 땅에 쓰러지니,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태평어람(太平御覽)》 370)
무정(武晶) 신현(新縣) 북쪽 산 위에 망부석(望夫石)이 있는데, 사람 서 있는 모양과 같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정절 있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 남편이 군역에 종사하여, 멀리 나라의 어려움에 달려가니, 부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 산에서 전송하였는데, 서서 바라보다가 모습이 돌로 변하였다고 한다. (《태평어람》 888)
진(晉)나라 이후 사람들이 거짓 책을 지을 때, 다른 지방의 기이한 사물에 대해 기록할 때는 매번 장화(張華)의 이름을 빌렸으니, 또한 신선과 신의 세계에 대해 말할 때는 동방삭(東方朔)의 이름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장화의 자는 무선(茂先)이고, 범양(范陽) 방성(方城) 사람이며, 위(魏)나라 초기에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천거되었고, 진나라에 들어가 사공(司空)에 이르렀고, 저작(著作)을 거느렸고, 장무군공(壯武郡公)에 봉해졌는데, 영강(永康) 원년 4월 조왕(趙王) 윤(倫)의 변란〔4〕에, 장화가 해를 입어, 삼족이 멸망당하였으니, 당시 나이 69세였다(232—300), 전기가 《진서(晉書)》에 있다. 장화는 도참서(圖讖書)를 통달하였고, 또한 방술(方術) 책을 많이 보았으며, 재앙과 상서로운 일, 기이한 사물을 알아볼 수 있었으므로, 박물통달하다는 칭호를 얻었으나, 또한 많은 억지스러운 설이 붙게 되었다. 양(梁)나라 소기(蕭綺)가 기록한 왕가(王嘉)의 《습유기(拾遺記)》〔5〕(9)에서 장화가 일찍이 “천하의 잃어버린 것을 모아, 문자 기록의 처음부터, 신기한 일을 고증하고, 세상의 마을에서 전해지는 말을, 《박물지(博物志)》 400권을 지어, 무제(武帝)에게 올렸다.”라고 하니, 무제가 부질없이 의심스러운 것을 잘라내도록 명하여, 10권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 책이 지금 남아 있으니, 기이한 경계와 기이한 사물 및 고대의 소문과 잡사를 기록한 종류이니, 모두 옛 책에서 베껴 온 것이라, 특별히 새롭고 기이한 것이 부족하니, 그 명성에 부합하지 못하니, 혹 후 사람이 덧붙여 편집하여 다시 이루어진 것이지, 그 원래의 모습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남아 있는 한나라부터 수나라까지의 소설은, 대개 이러한 종류이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서역(西域)에서 화완포(火浣布)를 바쳤고, 곤오씨(昆吾氏)가 옥을 자르는 칼을 바쳤는데, 화완포는 더러워지면 태우면 깨끗해지고, 칼은 옥을 자르기가 밀랍과 같았다.”라고 하였다. 화완포는 한나라 때 바친 사람이 있었으나, 칼은 듣지 못하였다. (권2 <이산(異產)>)
자라를 잘게 썰어 바둑돌 크기만 하게 하고, 붉은 비름 즙과 섞어, 두껍게 띠풀로 싸서, 오뉴월에 만들어, 연못에 던지면, 열흘이 지나면 조각조각 모두 자라가 된다. (권4 <희술(戲術)>)
연(燕) 태자 단(丹)이 진(秦)나라에 볼모로 있었는데, …… 돌아가고자 하여, 진왕(秦王)에게 청하였다. 왕이 듣지 않았다. 거짓으로 말하기를,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되고, 말이 뿔이 나면, 이에 가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단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니, 까마귀가 곧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머리를 숙여 탄식하니, 말이 뿔이 났다. 진왕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내주었으나, 함정을 놓은 다리를 만들었는데, 단이 말을 몰아 지나가니 다리가 작동하지 않았다. 도망쳐 관문(關門)에 이르렀으나, 관문이 열리지 않으니, 단이 닭 울음소리를 내니, 이에 모든 닭이 모두 울어, 드디어 돌아갔다. (권8 <사보(史補)>)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만민은 모두 서왕모(西王母)에게 맡겨졌고, 오직 왕, 성인, 진인, 선인, 도인의 명만, 위로 구천군(九天君)에게 속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권9 <잡설(雜說)> 상)
신채(新蔡) 사람 간보(干寶)의 자는 영승(令升)이고, 진(晉)나라 중흥(中興) 이후 사관(史官)을 두었는데, 간보가 비로소 저작랑(著作郎)으로 국사(國史)를 거느렸고, 집이 가난하여 산음령(山陰令)에 보임되기를 구하였고, 시안태수(始安太守)로 옮겼고, 왕도(王導)〔6〕가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로 천거하기를 청하였고,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옮겼다(4세기 중엽). 간보가 《진기(晉紀)》〔7〕 20권을 지었는데, 당시 좋은 사서라고 칭송받았다.
그러나 성품이 음양술수(陰陽術數)를 좋아하였고, 일찍이 그의 아버지의 여종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그의 형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일에 감동을 받았고, 스스로 천신(天神)의 일을 보았다고 말하였고, 이에 《수신기(搜神記)》〔8〕 20권을 지었다. “신도(神道)가 거짓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자서(自序) 중의 말)라고 하였으니, 《진서》 본전에 보인다. 《수신기》가 지금 전해지는 것은 바로 20권이나, 또한 원래의 책이 아니고, 그 책은 신기(神祇), 영이(靈異), 인물 변화 외에, 자못 신선(神仙), 오행(五行)을 말하고, 또 간혹 석씨(釋氏, 불교)의 이야기가 있다.
한(漢)나라 하비(下邳) 사람 주식(周式)이, 일찍이 동해(東海)에 이르렀는데, 길에서 한 관리를 만나, 한 권의 책을 가지고, 부탁하여 실어 가기를 청하였고, 십여 리를 가니, 주식에게 말하기를, “내가 잠시 들를 곳이 있으니, 책을 그대의 배 안에 맡기니, 삼가 열어보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간 후, 주식이 몰래 열어 보니, 책의 내용은 여러 죽은 사람의 기록이고, 아래 조목에 주식의 이름이 있었다. 잠시 후 관리가 돌아오니, 주식은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관리가 노하여 말하기를, “일부러 알려주었는데, 소홀히 여기는구나!”라고 하였다. 주식이 머리를 조아리며 피를 흘리니, 오랫동안 있다가, 관리가 말하기를, “그대가 멀리까지 태워 준 것에 감동하여, 이 책에서 그대의 이름을 지울 수는 없으나, 오늘 이미 갔으니, 집으로 돌아가 3년 동안 문을 나가지 않으면,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책을 보인 것을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주식이 돌아와, 나가지 않은 지 2년여가 되니, 집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이웃 사람이 갑자기 죽으니, 아버지가 가서 조문하도록 하니, 주식이 어쩔 수 없이, 막 문을 나서니, 곧 이 관리를 보았다. 관리가 말하기를, “내가 그대에게 3년 동안 나가지 말라고 하였는데, 지금 문을 나섰으니, 다시 어찌하겠는가? 내가 다시 연루되어 매 맞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이미 그대를 보았으니, 다시 어찌하겠는가? 사흘 후 정오에, 마땅히 잡으러 오겠다.”
…… 사흘 후 정오에, 과연 잡으러 온 것을 보고, 곧 죽었다. (권5)
완담(阮瞻)의 자는 천리(千里)이고, 평소 귀신이 없다는 주장을 굳게 믿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으며, 매번 스스로 이 이치로써 인간 세계와 귀신 세계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고 여겼다. 갑자기 한 손님이 이름을 밝히고 완담을 찾아왔는데, 인사말을 마치고, 명리(名理)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손님이 매우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 완담이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귀신 이야기에 이르러, 반복하여 매우 심하게 논쟁하니, 손님이 드디어 굴복하였다가, 얼굴색을 변하며 말하기를, “귀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성현들이 함께 전해 온 것인데, 그대는 어찌 홀로 없다고 말하는가? 바로 내가 귀신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다른 형상으로 변하더니, 잠시 후 사라졌다. 완담은 말없이 있었고, 얼굴색이 매우 나빠졌으며, 일 년여 만에 죽었다. (권16)
초호묘(焦湖廟)에는 하나의 옥베개가 있는데, 베개에 작은 틈이 있다. 당시 단부현(單父縣) 사람 양림(楊林)이 장사꾼으로, 사당에 가서 기도하니, 무당이 말하기를, “그대는 좋은 혼인을 하고 싶은가?”라고 하니, 양림이 말하기를, “다행입니다.”라고 하였다. 무당이 곧 양림을 베개 곁으로 보내니, 이에 틈 안으로 들어가니, 곧 붉은 누각과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 조태위(趙太尉)가 그 안에 있었는데, 곧 딸을 양림에게 시집보내어, 여섯 아들을 낳으니, 모두 비서랑(秘書郎)이 되었다. 수십 년을 지냈는데, 돌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다가, 갑자기 꿈에서 깬 듯하니, 여전히 베개 곁에 있었다. 양림이 슬퍼하며 오랫동안 있었다. (현재의 책에는 이 조목이 없고,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126에 인용된 것을 보았다.)
간보의 책을 이은 것으로는, 《수신후기(搜神後記)》 10권이 있다. 도잠(陶潛)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9〕. 그 책이 지금 온전히 전해지는데, 또한 앞의 기록과 같이 영이(靈異)와 변화의 일을 기록하였으니, 도잠은 관대하고 달관하였으니, 반드시 귀신에만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니, 아마 거짓으로 지은 것일 것이다.
간보의 자는 영승이고, 그의 선조는 신채 사람이다. 아버지 영(瑩)은 총애하는 첩이 있었다. 어머니는 매우 질투하였는데, 간보의 아버지가 장사 지낼 때, 살아 있는 첩을 무덤 속에 밀어 넣었으니, 간보 형제는 나이가 어려, 이를 알지 못하였다. 십 년이 지나 어머니가 죽어, 무덤을 여니, 그 첩이 관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옷은 살아 있을 때와 같았고, 가서 보니 오히려 따뜻하였다. 집으로 데려오니, 하루 종일 있다가 깨어나, 간보의 아버지가 항상 음식을 주고,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였으며, 은혜와 정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고 말하였다. 집안의 길흉사를 이야기해 주곤 하였는데, 확인해 보니 모두 들어맞았고, 평범하게 회복된 지 수년 후에야 죽었다. 간보의 형이 항상 병을 앓았는데, 기절한 지 여러 날이 지나도 식지 않았는데, 후에 드디어 깨어나, 천지간의 귀신 일을 보았다고 말하였으니, 꿈에서 깬 듯하여, 자신이 죽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권4)
진나라 중흥 이후, 초군(譙郡) 주자문(周子文)의 집이 진릉(晉陵)에 있었는데, 어렸을 때 사냥을 좋아하였다. 항상 산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산골짜기 사이에 한 사람이 키가 다섯여 장이나 되었고, 손에 활과 화살을 쥐고 있었는데, 화살촉의 머리가 너비 두 자쯤 되었고, 하얗기가 서리나 눈과 같았는데, 갑자기 소리를 내어 “아서(阿鼠)!”라고 불렀다. (원래 주석에, 자문의 아명이라고 함) 자문이 무의식중에 “네”라고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곧 활을 당겨 화살을 자문에게 겨누니, 자문이 곧 혼이 나가 엎드렸다. (권7)
진나라 때, 또한 순씨(荀氏)가 《영귀지(靈鬼志)》〔10〕를 지었고, 육씨(陸氏)가 《이림(異林)》〔11〕을 지었고, 서융주부(西戎主簿) 대조(戴祚)〔12〕가 《견이지전(甄異傳)》을 지었고, 조충지(祖沖之)가 《술이기(述異記)》〔13〕를 지었고, 조태지(祖台之)가 《지괴(志怪)》〔14〕를 지었으니, 이 외에 지괴를 지은 사람이 오히려 많으니, 공씨(孔氏), 식씨(殖氏), 조비(曹毗)〔15〕 등이 있으니, 지금은 모두 없어졌고, 간혹 남은 글이 있다. 현재 전해지는 《술이기》 2권은, 양(梁)나라 임방(任昉)〔16〕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당송(唐宋) 시대 사람이 거짓으로 지은 것으로, 조충지의 책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나라 책에는 모두 인용된 적이 없다.
유경숙(劉敬叔)의 자는 경숙이고, 팽성(彭城) 사람이며,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진나라 말에 남평국낭중령(南平國郎中令)에 제수되었고, 송나라에 들어가 급사황문랑(給事黃門郎)이 되었고, 수년 후, 병으로 면직되었고, 태시(泰始) 연간에 집에서 죽었다(약 390—470). 지은 책으로는 《이원(異苑)》〔17〕 십여 권이 세상에 전해진다. (명나라 호진형(胡震亨)이 지은 작은 전기(傳記)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급고각본(汲古閣本) 《이원》 권수에 있다.) 《이원》은 지금 10권이 전해지지만, 또한 원래의 책은 아니다.
위나라 때, 대궐 앞 큰 종이 까닭 없이 크게 울리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 장화에게 물으니, 장화가 말하기를, “이는 촉군(蜀郡)의 구리 광산이 무너졌기 때문에, 종이 울려 이에 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촉군에서 그 일을 보고하니, 과연 장화의 말과 같았다. (권2)
의희(義熙) 연간에, 동해(東海) 서씨(徐氏) 집의 여종 난(蘭)이 갑자기 영양실조에 걸렸는데, 먼지 터는 일은 매우 이상하게 하니, 함께 몰래 살펴보니, 비가 벽 모퉁이에서부터 여종의 침상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이에 가져다 태우니, 여종이 곧 회복되었다. (권8)
진나라 태원(太元) 19년, 파양(鄱陽) 환천(桓闡)이 개를 죽여 고을의 수산(綏山)에 제사 지냈는데, 삶은 고기가 익지 않았다. 신이 노하여, 곧 무당에게 가르침을 내려 말하기를, “환천이 익지 않은 고기로 나에게 주었으니, 마땅히 벌하여 스스로 먹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 해 갑자기 호랑이로 변하였는데, 호랑이로 변하기 시작할 때, 사람이 호랑이 가죽옷을 입힌 것을 보니, 곧 뛰어다니며 쫓아 물 수 있었다. (권8)
동관(東莞) 유옹(劉邕)은 성품이 부스럼 딱지를 먹기를 좋아하여, 맛이 전복과 같다고 여겼다. 일찍이 맹영휴(孟靈休)를 찾아갔는데, 맹영휴가 먼저 뜸을 뜬 상처를 앓고 있었는데, 딱지가 침상에 떨어지니, 유옹이 가져다 먹으니, 맹영휴가 크게 놀라, 딱지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을 모두 벗겨내어 유옹에게 주었다. 남강국(南康國)의 관리 200여 명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않고, 번갈아 가며 채찍질을 당하니, 부스럼 딱지가 떨어지면, 항상 그것으로 반찬을 만들었다. (권10)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18〕(403—444)은 성품이 검소하고, 문학을 좋아하여, 저술한 것이 매우 많다(자세한 것은 《송서(宋書)》 <종실전(宗室傳)>에 보인다). 《유명록(幽明錄)》 30권이 있는데, 《수서(隋志)》 <사부잡전류(史部雜傳類)>에 보이고, 《신당지(新唐志)》에는 소설로 들어갔다. 그 책은 지금 비록 전해지지 않지만, 다른 책에 인용된 것이 매우 많으니, 대개 《수신기(搜神記)》, 《열이전(列異傳)》과 같은 종류이다. 그러나 모두 이전 사람들이 지은 것을 모아 기록한 듯하니,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니다. 당나라 때 일찍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유지기(劉知幾, 《사통(史通)》)는 《진서(晉書)》가 많은 부분을 여기서 취했다고 하였다.
송나라 산기시랑(散騎侍郎) 동양(東陽) 무의(無疑)는 《제해기(齊諧記)》〔19〕 7권이 있었는데, 또한 《수서》에 보이고, 지금은 없어졌다. 양(梁)나라 오균(吳均)이 《속제해기(續齊諧記)》〔20〕 1권을 지었는데, 지금 오히려 전해지지만, 또한 원래의 모습은 아니다.
오균의 자는 숙양(叔痒)이고, 오흥(吳興) 고장(故鄣) 사람이며, 천감(天監) 초에 오흥주부(吳興主簿)가 되었고, 곧 건안왕(建安王) 위(偉)의 기실(記室)을 겸하였고, 마침내 봉조청(奉朝請)에 제수되었는데, 《제춘추(齊春秋)》를 지은 것이 사실과 달라 면직되었고, 이어서 다시 불러, 통사(通史)를 짓게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21〕, 보통(普通) 원년에 죽으니, 나이 52세였다(469—520). 일은 《양서(梁書)》 <문학전(文學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오균은 일찍부터 시인으로서 명성이 있었고, 문체가 맑고 빼어났으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혹 모방하였으니, “오균체(吳均體)”〔22〕라고 불렀으므로, 그가 지은 소설 또한 뛰어나게 볼 만하니, 당송(唐宋) 문인들이 많이 인용하여 전거로 삼았으니, 양선(陽羨)의 거위 우리에 대한 기록은, 특히 기이하고 괴이한 것이다.
양선(陽羨)의 허언(許彥)이 수안산(綏安山)을 가다가, 한 서생을 만났는데, 나이가 17, 18세이고, 길가에 누워, 발이 아프다고 하며, 거위 우리에 태워 가기를 청하였다. 허언이 농담으로 여겼는데, 서생이 곧 우리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 또한 더 넓어지지 않았고, 서생 또한 더 작아지지 않았으니, 마치 두 마리 거위와 함께 앉아 있는 것과 같았고, 거위 또한 놀라지 않았다.
허언이 우리를 지고 갔는데, 전혀 무겁다고 느끼지 못하였다. 앞으로 가다가 나무 아래에서 쉬니, 서생이 이에 우리에서 나와 허언에게 말하기를, “그대를 위해 작은 잔치를 베풀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허언이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입에서 하나의 구리 함지(奁子)를 토해 내니, 함지 안에 여러 가지 음식과 반찬이 갖추어져 있었다. …… 술을 몇 순배 돌리니, 허언에게 말하기를, “전에 한 부인을 데리고 함께 왔습니다. 지금 잠시 초대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허언이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입에서 한 여자를 토해 내니, 나이가 15, 16세쯤 되었고, 옷은 화려하고, 용모는 매우 뛰어났고, 함께 앉아 잔치를 벌였다. 이윽고 서생이 술에 취해 누우니, 이 여자가 허언에게 말하기를, “비록 서생과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실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전에 또한 한 남자를 몰래 데리고 함께 왔는데, 서생이 이미 잠들었으니, 잠시 부르겠으니, 그대는 부디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허언이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여자가 입에서 한 남자를 토해 내니, 나이가 23, 24세쯤 되었고, 또한 영리하고 귀여웠고, 이에 허언과 인사를 나누었다. 서생이 누워서 깨려고 하니, 여자가 입에서 비단 휘장을 토해 내어 서생을 가리니, 서생이 이에 여자와 함께 누웠다. 남자가 허언에게 말하기를, “이 여자는 비록 정이 있으나, 마음이 다하지는 않습니다. 전에 또 한 여자를 몰래 데리고 함께 왔는데, 지금 잠시 보고자 하니, 원컨대 그대는 누설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허언이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남자가 또 입에서 한 부인을 토해 내니, 나이가 20여 세쯤 되었고,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를 매우 오래 하다가, 서생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두 사람이 잠에서 깨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토해낸 여자를 다시 입 안으로 넣었다. 잠시 후, 서생의 여자가 나와 허언에게 말하기를, “서생이 일어나려 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그 남자를 삼키고, 홀로 허언과 마주 앉았다. 그러자 서생이 일어나 허언에게 말하기를, “잠시 잠들었는데 너무 오래 잤습니다. 그대는 홀로 앉아, 답답하였겠지요? 날도 저물었으니, 그대와 헤어져야겠습니다.”
드디어 그 여자를 삼키고, 모든 그릇들을 모두 입 안으로 넣고, 큰 구리 쟁반 두 자 넓이 정도 되는 것을 남겨, 허언과 헤어지며 말하기를, “그대에게 빌려 줄 것이 없으니, 그대와 서로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허언은 대원(大元) 연간에 난대령사(蘭台令史)가 되었는데, 쟁반을 시중(侍中) 장산(張散)에게 주니, 장산이 그 명문(銘文)을 보니, 영평(永平) 3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대개 중국에서 본래 있던 것이 아니고, 단성식(段成式)은 이미 천축(天竺, 인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으니, 《유양잡조(酉陽雜俎)》 <속집(續集)> <폄오편(貶誤篇)>에서 말하기를, “석씨(釋氏)의 《비유경(譬喻經)》에서 말하기를, 옛날 범지(梵志)가 술법을 부려, 하나의 병을 토해 내니, 병 안에 여자와 병풍이 있었고, 집을 만들어 살았다. 범지가 잠시 쉬니, 여자가 다시 술법을 부려, 하나의 병을 토해 내니, 안에 남자가 있었고, 다시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범지가 깨어나, 차례로 서로 삼키고, 지팡이를 짚고 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균이 일찍이 이 일을 보았으니, 그 이야기를 이상하게 여겨 매우 괴이하게 여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석씨의 경전이라는 것은, 곧 《구잡비유경(舊雜譬喻經)》이니, 오나라 때 강승회(康僧會)가 번역한 것으로, 〔23〕지금 오히려 전해진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일은, 또 다른 경전을 근본으로 하니,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권1)에서 관불(觀佛)의 고행(苦行) 때 백호모상(白毫毛相)〔24〕을 말하기를, “하늘이 털 안에서 백억의 빛이 있는 것을 보니, 그 빛이 미묘하여, 다 말할 수 없다. 그 빛 가운데, 변화한 보살을 나타내니, 모두 고행을 닦으니, 이와 같이 다르지 않다. 보살은 작지 않고, 털 또한 크지 않다.”라고 하니, 마땅히 또 범지가 병을 토해내는 이야기의 근원이 될 것이다. 위진(魏晉) 이래로, 점점 불경이 번역되니, 천축의 이야기가 또한 세상에 유행하니, 문인들이 그 뛰어나고 기이함을 좋아하여,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 사용하여, 드디어 중국의 것으로 변하였으니, 마치 진나라 사람 순씨가 《영귀지(靈鬼志)》를 지었는데, 또한 도인이 바구니 안에 들어가는 일을 기록하였는데, 오히려 외국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으나, 오균이 기록하기에 이르러, 이에 중국의 서생이 되었다.
태원(太元) 12년에, 한 도인이 외국에서 왔는데,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해 내고, 구슬과 옥, 금은을 토해 낼 수 있었는데, 스스로 그 스승에게 받은 바를 말하니, 곧 백의(白衣)이니, 사문(沙門, 승려)이 아니었다. 일찍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위에 작은 바구니가 있었는데, 한 되 남짓 담을 수 있었는데, 짐을 진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걸어가기가 매우 힘드니, 그대의 짐에 맡기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짐을 진 사람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그에게 말하기를,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였다. …… 곧 바구니 안으로 들어가니, 바구니는 더 커지지 않았고, 그 사람 또한 더 작아지지 않았으니, 짐을 진 사람은 또한 전보다 더 무겁다고 느끼지 못하였다. 이미 수십 리를 가다가, 나무 아래에서 쉬며 밥을 먹으니, 짐을 진 사람이 함께 밥 먹자고 부르니, “나는 먹을 것이 있다”라고 하며,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 밥을 반쯤 먹으니, 짐을 진 사람에게 “나는 부인과 함께 밥을 먹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곧 다시 입에서 여자를 토해 내니, 나이가 20여 세이고, 옷과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고, 두 사람이 곧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거의 다 먹으니, 그 남편이 곧 누웠다. 부인이 짐을 진 사람에게 말하기를, “저는 다른 남편이 있는데, 와서 함께 밥을 먹고자 하니, 남편이 깨더라도, 그대는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부인이 입에서 한 젊은 남자를 토해 내니, 함께 밥을 먹었다. 바구니 안에는 곧 세 사람이 있었으니, 넓고 좁은 일 또한 다시 다르지 않았다. 잠시 후, 그 남편이 움직이니, 깨려고 하는 듯하니, 부인이 곧 다른 남편을 입 안으로 넣었다. 남편이 일어나, 짐을 진 사람에게 말하기를, “갑시다!”라고 하니, 곧 부인을 입 안으로 넣고, 다음으로 식기들을 넣었다. …… (《법원주림(法苑珠林)》 61, 《태평어람(太平御覽)》 359)
〔1〕 위 문황제(魏文皇帝)는 곧 조비(曹丕)(187—226)이고, 자는 자환(子桓)이다. 패국(沛國) 초(譙, 지금의 안후이성 보저우현) 사람이다. 조조(曹操)의 둘째 아들이다. 조조가 죽자, 조비가 지위를 이어 위왕(魏王)이 되었다. 후에 한(漢)나라를 대신하여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위(魏)라 하였다. 저서로는 《위문제집(魏文帝集)》이 있다.
〔2〕 배송지(裴松之)(372—451)의 자는 세기(世期)이고, 남조 송(宋)나라 문희(聞喜, 지금의 산시성 관할) 사람이며,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냈다. 명령을 받아 진(晉)나라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 주석을 달았는데, 여러 책 140여 종을 널리 참고하여, 적지 않은 문헌 사료를 보존하였다.
〔3〕 여도원(酈道元)(466 또는 472—527)의 자는 선장(善長)이고, 북위(北魏) 범양(范陽, 지금의 허베이성 줘저우현) 사람이며, 어사중위(御史中尉), 관우대사(關右大使)를 지냈다. 저술한 《수경주(水經注)》 40권은, 우리나라 고대의 문학적 가치를 지닌 지리 명저이다.
〔4〕 조왕 윤의 변란(趙王倫之變) 조왕 윤은, 곧 사마륜(司馬倫)(?—301)이고, 자는 자이(子彝)이다. 진(晉)나라 사마의(司馬懿)의 아홉 번째 아들이며, 진 무제(晉武帝) 때 조왕(趙王)에 봉해졌다. 《진서(晉書)》 <효혜제기(孝惠帝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영강(永康) 원년(300) 4월, 조왕 윤 등이 “거짓 조서를 꾸며 가후(賈后)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삼았고, 사공(司空) 장화(張華), 상서복야(尙書僕射) 배외(裴頠)가 모두 해를 입었다.”라고 한다.
〔5〕 소기(蕭綺) 남조 양(梁)나라 남난릉(南蘭陵, 지금의 장쑤성 창저우시) 사람이다. 그가 왕가(王嘉)의 《습유기(拾遺記)》를 간추린 일에 대해서는, 이 책 제6편을 참고하라.
〔6〕 왕도(王導)(276—339)의 자는 무홍(茂弘)이고, 동진(東晉) 낭야(琅琊) 임기(臨沂, 지금의 산둥성 관할) 사람이다. 명문 벌족 출신으로, 원(元), 명(明), 성(成) 세 황제를 섬겼고, 관직은 승상(丞相)에 이르렀다.
〔7〕 《진기(晉紀)》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23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진(東晉) 간보(干寶)가 지었다. 진 선제(晉宣帝)부터 민제(愍帝)까지 전후 53년간의 일을 기록하였다. 《진서(晉書)》 <간보전(干寶傳)>에 “그 책은 간략하고, 직설적이면서도 능히 완곡하니, 모두 좋은 사서라고 칭송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8〕 《수신기(搜神記)》 《수서(隋書)》 <경적지>에 30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간보가 지었다고 되어 있다. 지금의 책은 20권으로, 후 사람이 여러 유서(類書)에서 모아 편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9〕 《수신후기(搜神後記)》 《수서(隋書)》 <경적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도잠(陶潛)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도잠(약 372—427)은, 또한 이름은 연명(淵明)이고, 자는 원량(元亮)이며, 동진(東晉) 심양(潯陽) 시앙(柴桑, 지금의 장시성 주지앙시) 사람이다.
〔10〕 순씨(荀氏)의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저술한 《영귀지(靈鬼志)》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魯迅)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沉)》에 편집본이 있다.
〔11〕 육씨(陸氏)는 《삼국지(三國志)》 <종요전(鍾繇傳)> 배송지 주석에 따르면 육운(陸雲)의 조카라고 한다.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저술한 《이림(異林)》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고, 종요(鍾繇)가 귀신 여자를 만난 일을 기록하였다.
〔12〕 대조(戴祚)는 이 권 제13쪽 주〔29〕를 참고하라.
〔13〕 조충지(祖沖之)(429—500)의 자는 문원(文遠)이고, 남제(南齊) 범양(范陽) 계(薊, 지금의 베이징시 다싱구) 사람이며, 관직은 장수교위(長水校尉)에 이르렀다. 그는 수학, 역법 등 방면에서 모두 매우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저술한 《술이기(述異記)》는, 《수서》 <경적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14〕 조태지(祖台之)의 자는 원진(元辰)이다. 조충지의 증조부이며, 동진(東晉) 안제(安帝) 때 관직이 시중(侍中),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저술한 《지괴(志怪)》는, 《수서》 <경적지>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15〕 공씨(孔氏)는 공약(孔約)을 가리키며, 진나라 사람이고,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저술한 《지괴(志怪)》는, 《수서》 <경적지>에 4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식씨(殖氏)는, 생평이 자세하지 않다. 저술한 《지괴기(志怪記)》는, 《수서》 <경적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비(曹毘)는, 자는 보좌(輔佐)이고, 초국(譙國) 사람이며, 관직은 광록훈(光祿勳)에 이르렀다. 저술한 《지괴》는, 《수서》 <경적지> 및 두 《당지(唐志)》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세 책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고,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각각 편집본이 있다.
〔16〕 임방(任昉)(460—508)의 자는 언승(彥升)이고, 남조 양(梁)나라 낙안(樂安) 박창(博昌, 지금의 산둥성 쇼우광시) 사람이다. 송(宋), 제(齊), 양(梁) 삼조를 섬겼다. 《술이기(述異記)》는,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임방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17〕 《이원(異苑)》은 《수서》 <경적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송(宋)나라 급사(給事) 유경숙(劉敬叔)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18〕 유의경(劉義慶)은 남조 송(宋)나라 팽성(彭城,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 사람이다. 임천왕(臨川王)의 작위를 이었다. 저서로는 《세설(世說)》, 《서주선현전(徐州先賢傳)》 등이 있다. 《유명록(幽明錄)》은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2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魯迅)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沉)》에 편집본이 있다. 유지기(劉知幾)가 당나라에서 편찬한 《진서(晉書)》가 《유명록》 등의 책을 많이 참고했다는 말은, 《사통(史通)》 <채찬(采撰)>에 보인다. “진나라 시대의 여러 서적은, 실로 한 종류가 아니니, 만약 《어림(語林)》, 《세설》, 《유명록》, 《수신기(搜神記)》 등의 무리는, 그 기록한 바가 혹 해학적인 작은 논쟁이거나, 혹 신귀(神鬼), 괴물(怪物)이다. 그 일은 성인의 가르침에 어긋나니, 양웅(揚雄)이 보지 않은 바이고, 그 말은 신을 어지럽히니, 공자(孔子)가 말하지 않은 바이다. 황조(皇朝)에서 새로 편찬한 《진사(晉史)》는, 많이 채택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19〕 동양 무의(東陽無疑)의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저술한 《제해기(齊諧記)》는 《수서》 <경적지>에 7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20〕 《속제해기(續齊諧記)》는 《수서》 <경적지>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의 모습은 오래전에 없어졌다. 지금 전해지는 명나라 편집본은, 《태평광기(太平廣記)》 등의 책에서 뽑아 모아 이루어진 것이다.
〔21〕 오균(吳均)이 《제춘추(齊春秋)》를 지은 것이 사실과 달라 면직된 일에 대해서는, 《양서(梁書)》 <오균전(吳均傳)>에 보인다.
“균이 표문을 올려 《제춘추》를 편찬하기를 청하였고, 책을 완성하여 올리니, 고조(高祖, 양 무제 소연)가 그 책이 사실과 다르다고 여겨, 중서사인(中書舍人) 유지린(劉之遴)을 시켜 여러 조목을 캐물으니, 마침내 지리멸렬하여 대답하지 못하므로, 명령을 내려 관청에 넘겨 태워 버리게 하였고, 이로 인해 면직되었다. 이어서 조서를 내려 불러들여, 《통사(通史)》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삼황(三皇)에서 시작하여 제(齊)나라 시대까지 이르렀고, 균이 본기(本紀), 세가(世家)의 초고를 썼으니, 공적은 이미 끝났다. 오직 열전(列傳)만 마치지 못하였다.”
〔22〕 “오균체(吳均體)”는 《양서》 <오균전>에 기록되어 있기를, 오균의 “문체는 맑고 빼어나며 옛 기운이 있으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혹 본받으니, ‘오균체’라고 일컬었다.”
〔23〕 《구잡비유경(舊雜譬喻經)》 2권은, 경전의 내용이 비유를 통해 교의를 선양한다. 강승회(康僧會)(?—280)는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승려로, 대대로 천란(天蘭)에 살다가, 후에 교지(交趾)로 이주하였다. 오나라 적오(赤烏) 10년(247)에 건업(建業, 지금의 장쑤성 난징시)에 이르렀고, 손권(孫權)이 그를 위해 탑과 절을 지어 주어,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번역한 것으로는 《육도집(六度集)》, 《구잡비유경》 등이 있다.
〔24〕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10권은, 동진(東晉) 불타발타(佛陀跋陀)가 번역하였다. 백호모상(白毫毛相)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32가지 형상 중 하나로, 부처의 눈썹에 흰 털이 길게 나 있는데, 길이가 한 길 다섯 자이며, 평소에는 눈썹 옆에 오므라져 있다고 한다. 아래에 인용한 경전의 내용은, 불가의 원융호섭(圓融互攝)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세계의 만사만물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니, 마음에는 크고 작음이 없고, ‘모습’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므로, 털 안에 보살이 있어도, 보살은 작지 않고, 털 또한 크지 않다.
제6편 육조의 귀신 지괴 서적 (하)
석씨(釋氏)가 불교 교화를 돕기 위해 지은 서적은, 《수서(隋書)》에 아홉 종류가 자부(子部) 및 사부(史部)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오직 안지추(顏之推)의 《원혼지(冤魂志)》〔1〕만 전해지고, 경전과 역사를 인용하여 인과응보를 증명하였으니, 이미 유교와 불교를 혼합하는 단서를 열었다고 할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남은 글로써 고찰할 수 있는 것으로는, 송(宋)나라 유의경(劉義慶)의 《선험기(宣驗記)》〔2〕, 제(齊)나라 왕염(王琰)의 《명상기(冥祥記)》〔3〕, 수(隋)나라 안지추의 《집령기(集靈記)》, 후백(侯白)의 《정이기(旌異記)》〔4〕 네 종류가 있는데, 대개 경전과 불상의 효험을 기록하고, 응험의 실제가 있음을 밝혀, 세속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경건하고 믿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니, 후세에는 혹 소설로 여겨지기도 한다. 왕염은 태원(太原) 사람으로, 어렸을 때 교지(交趾)에 있었고, 오계(五戒)를 받았으며, 송나라 대명(大明) 및 건원(建元)(5세기 중엽) 연간에, 두 번 금불상의 기이한 일을 겪었으므로, 기록을 지어, 불상에 관한 일을 모아 엮고, 이어서 탑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여, 모두 10권으로 하였으니, 이를 《명상(冥祥)》이라 하였고, 스스로 그 일을 매우 자세히 서술하였다 (《법원주림(法苑珠林)》 권17에 보인다). 《명상기》는 《주림》 및 《태평광기(太平廣記)》에 가장 많이 남아 있고, 그 서술 또한 가장 자세하니, 지금 대략 세 가지 일을 인용하여, 나머지 내용을 개괄하고자 한다.
한 명제(漢明帝)가 꿈에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형상이 두 길이나 되었고, 몸은 황금색이었으며, 목에는 해의 빛을 두르고 있었다.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혹은 대답하기를, “서방에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을 부처(佛)라 하니, 형상이 폐하께서 꿈에서 보신 것과 같으니, 혹 그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사신을 천축(天竺)에 보내어, 경전과 불상을 베껴 오게 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니, 천자(天子)에서 왕후(王侯)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경히 섬기니, 사람이 죽으면 정신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 사신 채음(蔡愔)이 서역(西域)의 사문(沙門) 가섭마등(迦葉摩騰) 등을 데리고 우전왕(優填王)이 그린 석가불상을 가지고 왔는데, 황제가 이를 중히 여겼으니, 꿈에서 본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에 화공을 보내어 여러 폭의 그림을 그리게 하여, 남궁(南宮) 청량대(清涼臺) 및 고양문(高陽門) 현절수릉(顯節壽陵) 위에 공양하였다. 또한 백마사(白馬寺) 벽에 천 대의 수레와 만 명의 기병이 탑을 세 바퀴 도는 그림을 그렸으니, 여러 전기에 자세히 실려 있는 것과 같다. (《주림》 13)
진(晉)나라 사안(謝敷)의 자는 경서(慶緒)이고, 회계(會稽) 산음(山陰) 사람인데, …… 젊어서 고상한 절개가 있었고, 동산(東山)에 은거하였으며, 대법(大法, 불교)을 독실히 믿어, 정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손수 《수능엄경(首楞嚴經)》을 썼으니, 도읍 백마사 안에 있었는데, 절이 화재로 인해 번져, 물건과 남은 경전이, 모두 재가 되었으나, 이 경전은 종이의 가장자리만 탔을 뿐이고, 글자는 모두 남아 있어, 훼손된 바가 없었다. 사안이 죽을 때, 친구가 그가 도를 얻었다고 의심하였는데, 이 경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더욱 놀라워하였다. …… (《주림》 18)
진(晉)나라 조태(趙泰)의 자는 문화(文和)이고, 청하(清河) 패구(貝丘) 사람인데, …… 35세 때, 일찍이 갑자기 심한 통증을 겪고, 잠시 후에 죽었다. 시신을 땅에 내려놓으니, 심장이 여전히 따뜻하였고, 몸을 굽히고 펴는 것이 사람을 따랐다. 시신을 열흘 동안 두니, 새벽에, 목에서 빗소리와 같은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깨어났다. 처음 죽었을 때를 말하기를, 꿈에 한 사람이 심장 아래로 다가왔고, 또 두 사람이 누런 말을 타고, 종자 두 명이, 조태의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곧장 동쪽으로 갔는데, 얼마나 갔는지 알 수 없었고, 큰 성에 이르니, 매우 높고 험준하였고, 성의 색은 푸르고 검었다. 조태를 성문으로 데리고 들어가니, 두 겹의 문을 지나, 기와집이 수천 칸 있었고, 남녀노소 또한 수천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관리는 검은 옷을 입었는데, 다섯여 명이었고, 이름과 성씨를 적으니, “마땅히 관리에게 보고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조태의 이름은 서른 번째에 있었고, 잠시 후, 조태를 수천 명의 남녀와 함께 일시에 나아가게 하였다. 관리는 서쪽을 향해 앉아, 명부를 살펴보기를 마치고, 다시 조태를 남쪽 검은 문으로 들여보냈다. 어떤 사람이 얇은 옷을 입고 큰 집 아래에 앉아, 차례로 이름을 부르며, “살았을 때 무슨 일을 하였는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무슨 복된 일을 행하였는가? 너희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 사실대로 말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는 항상 육부(六部)의 사자(使者)를 인간 세상에 보내어, 선악을 기록하게 하니, 모두 조목이 갖추어져 있어, 거짓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조태가 대답하기를, “아버지와 형은 모두 이천석(二千石)의 벼슬을 하였고, 저는 어렸을 때 집에 있으면서, 학문만 닦았으니, 한 일이 없고, 또한 악을 범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조태를 수관(水官)의 장작(將作)으로 삼았다. …… 후에 조태를 수관 도독(水官都督)으로 옮겨 모든 옥사(獄事)를 관장하게 하였고, 조태에게 병마(兵馬)를 주어, 지옥을 순행하게 하였다. 이르는 여러 지옥마다, 형벌이 각각 달랐으니, 혹은 바늘로 혀를 꿰뚫으니, 피가 온 몸에 흘렀고, 혹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몸으로 맨발로, 서로 끌고 갔고, 큰 몽둥이를 든 자가 있어, 뒤에서 재촉하였고, 쇠로 만든 침상과 구리 기둥은, 불에 타서 활활 타올랐고, 이 사람들을 몰아, 그 위에 안고 눕게 하니, 닿자마자 타서 문드러졌다가, 곧 다시 살아났다. …… 혹은 검으로 된 나무가 높고 넓어, 한계를 알 수 없으니,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이, 모두 칼로 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 베니, 스스로 올라가고 기어오르니, 기꺼이 경쟁하는 듯하였으나, 몸과 머리가 잘려, 조각조각 떨어졌다.
조태가 조부모와 두 동생이 이 지옥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만나 눈물을 흘렸다. 조태가 지옥 문을 나서니, 두 사람이 문서를 가지고 와서 옥리(獄吏)에게 말하기를, 세 사람이 있는데, 그 집에서 그들을 위해 탑과 절에서 번(幡)을 걸고 향을 피워, 그 죄를 구제하였으니, 복된 곳에서 나가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윽고 세 사람이 지옥에서 나오니, 이미 자연스러운 옷을 입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쪽의 한 문으로 향하니, 이름을 개광대사(開光大舍)라고 하였다. ……
조태가 순행을 마치고, 수관의 곳으로 돌아왔다. …… 주관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죄가 없으므로, 나로 하여금 수관 도독이 되게 한 것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태가 주관하는 자에게 묻기를, “사람이 무슨 행위를 하면, 죽어서 즐거운 보답을 얻습니까?”라고 하니, 주관하는 자는 오직 “법을 받드는 제자가 정진하여 계율을 지키면, 즐거운 보답을 얻고, 벌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조태가 다시 묻기를, “사람이 법을 섬기기 전에 행한 죄과는, 법을 섬긴 후에, 제거될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 제거됩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주관하는 자가 등나무 상자를 열어 조태의 나이를 살펴보니, 아직 남은 수명이 30년이나 있었으므로, 이에 조태를 돌려보냈다. …… 이때는 진(晉) 태시(太始) 5년 7월 13일이었다. …… (《주림》 7, 《광기》 377)
불교가 이미 점점 널리 퍼지니, 경전과 논서가 날로 많아지고, 여러 이야기가 또한 날로 나오니, 듣는 자는 혹 무상(無常)을 깨달아 귀의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혹 무상을 두려워하여 도망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동으로, 방사(方士) 또한 스스로 거짓 경전을 만들고, 여러 기이한 이야기를 지어, 장생(長生)과 오래 사는 도(道)로, 세상의 고통과 허무를 피하려는 자들을 끌어모았으니, 지금 전해지는 한나라 소설은, 한두 문인의 저술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대개 모두 이러한 것이다. 방사가 책을 지을 때, 대개 옛 사람의 이름을 빌렸으므로, 진나라와 송나라 사람의 저작이라고 하는 것이 많지 않고, 오직 유서(類書) 사이에 《신이기(神異記)》〔5〕를 인용한 것이 있는데, 이는 도사(道士) 왕부(王浮)가 지은 것이다. 왕부는, 진나라 사람이고, 얕고 허황하다는 평을 들었고, 곧 혜제(惠帝) 때(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백원(帛遠)과 논쟁하다가 여러 번 굴복하였고, 드디어 《서역전(西域傳)》을 고쳐 노자(老子)의 《명위화호경(明威化胡經)》을 지은 자이다〔6〕 (당나라 승려 법린(法琳)의 《변정론(辯正論)》 6에 보인다). 그 기록 또한 신선(神仙)과 귀신에 대해 말한 듯하니, 《동명기(洞冥記)》, 《열이전(列異傳)》과 같은 종류이다.
진민(陳敏)은, 손호(孫皓)의 시대에 강하태수(江夏太守)가 되었고, 건업(建業)에서 부임지로 가다가, 궁정묘(宮亭廟)의 영험함을 듣고 (원주에 이르기를 영험하다고 한다), 지나가면서 재임 중의 안온함을 빌었고, 은 지팡이 한 개를 바쳤다.
기한이 이미 차서, 지팡이를 만들어 절에 돌려주려고, 쇠를 두드려 줄기를 만들고, 은으로 칠하였다. 얼마 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어, 궁정(宮亭)에 가서, 지팡이를 절에 돌려주는 것을 마치고, 곧 길을 떠났다. 날이 저물자, 신령한 무당이 내려와 가르침을 전하기를, “진민(陳敏)이 나에게 은 지팡이를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지금 칠한 지팡이를 주니, 곧 물에 던졌으니, 마땅히 돌려주어야 한다. 속이고 업신여긴 죄는, 용납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은 지팡이를 가져와 보니, 쪼개어 보니 안에 쇠 줄기가 있는 것을 보고, 이에 호수에 던졌다. 지팡이가 물 위에 떠서, 그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았고, 멀리 진민의 배 앞으로 가니, 진민의 배가 곧 뒤집혔다. (《태평어람(太平御覽)》 710)
단구생(丹丘生)은 큰 차를 마시니, 이를 마시면 날개가 돋아난다. (《사류부(事類賦)》 주 16)
《습유기(拾遺記)》 10권은, 진(晉)나라 농서왕(隴西王) 왕가(王嘉)가 지었다고 되어 있고, 양(梁)나라 소기(蕭綺)가 기록하였다. 《진서(晉書)》 <예술열전(藝術列傳)>에 왕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는 자년(子年)이고, 농서 안양(安陽) 사람이며, 처음에 동양곡(東陽谷)에 은거하였고, 후에 장안(長安)에 들어갔는데, 부견(苻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할 수 있었으니, 말이 참서(讖書)와 같았으므로, 당시에는 능히 이해하는 사람이 적었다. 요장(姚苌)이 장안에 들어가, 왕가를 억지로 따라오게 하였고, 후에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요장의 뜻에 거슬렸으므로, 요장에게 살해당하였다 (약 390년). 왕가는 일찍이 《견삼가참(牽三歌讖)》〔7〕을 지었고, 또한 《습유록(拾遺錄)》 10권을 지었으니, 그 일은 대부분 괴이하니, 지금 세상에 유행한다. 전기에 이른 《습유록》이라는 것은, 아마 지금의 《습유기》일 것이고, 앞에 소기의 서문이 있는데, 책은 본래 19권, 220편이었는데, 부진(苻秦) 말기에, 전장(典章)이 흩어져 없어졌으므로, 이 책 또한 많이 없어졌고, 소기가 다시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고 실제적인 것을 남겨, 하나의 책으로 합쳤으니, 모두 10권이다. 지금 책의 앞 9권은 복희(庖犧)부터 동진(東晉)까지를 기록하였고, 마지막 1권은 곤륜산(崑崙山) 등 구선산(九仙山)을 기록하였으니, 서문에 이른바 “일이 서진(西晉) 말에 이르렀다”라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그 문체는 자못 화려하지만, 일은 모두 허황하고 사실이 없으니, 소기의 기록 또한 부회한 것이니, 호응린(胡應麟) (《필총(筆叢)》 32)은 “대개 곧 소기가 지어 왕가에게 부친 것이다”라고 여겼다.
소호(少昊)는 금덕(金德)으로 왕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황아(皇娥)이고, 선궁(璇宮)에 거처하며 밤에는 베를 짜고, 혹은 뗏목을 타고 낮에는 노니, 궁상(窮桑) 창망한 물가를 지나갔다. 이때 신동(神童)이 있었는데, 용모가 속세와 뛰어났고,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불렸으니, 곧 태백성(太白星)의 정기(精氣)로, 물가에 내려와, 황아와 함께 잔치를 벌이며 놀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며 노닐며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궁상이란, 서해(西海)의 물가에, 외로운 뽕나무가 있는데, 곧바로 천 길이나 솟아 있고, 잎은 붉고 열매는 자줏빛이며, 만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으니, 먹으면 하늘과 함께 늙는다. ……
제자(帝子)와 황아가 나란히 앉아, 동봉(桐峰)의 오동나무 거문고를 타니, 황아가 거문고에 기대어 맑은 노래를 부르기를, “하늘은 맑고 땅은 넓고 아득하니, 만상이 돌고 바뀌어 끝이 없네, 하늘은 넓고 넓어 아득히 바라보니, 뗏목을 타고 가볍게 노닐며 해 곁에 이르렀네, 마땅히 어디에 이르러 궁상에 이르렀는가, 마음은 화락하고 즐거움이 다함이 없음을 아네.”라고 하였다. 속세에서 놀이를 하는 곳을 상중(桑中)이라고 하니, 《시경(詩經)》 <위풍(衛風)>에 “나를 상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네”라고 하였으니,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 …… 황아가 소호를 낳으니, 호를 궁상씨(窮桑氏)라고 하였고, 또한 상구씨(桑丘氏)라고 하였다. 육국 시대에 이르러, 상구자가 음양서(陰陽書)를 지었으니, 곧 그의 후예이다. …… (권1)
유향(劉向)이 성제(成帝) 말년에, 천록각(天祿閣)에서 책을 교정하며, 오로지 정신을 집중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밤에, 노인이 누런 옷을 입고, 푸른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누각에 올라와, 유향이 어둠 속에서 홀로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노인이 이에 지팡이 끝을 불어, 연기가 타오르니, 이로써 유향을 보았고,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유향이 이에 오행홍범(五行洪範)의 글을 받았고, 말이 번거롭고 넓어 잊을까 염려하여, 비단과 갓끈을 찢어, 그 말을 기록하였고, 새벽에 떠나갔다. 유향이 이름을 물으니, “나는 태일(太一)의 정기이고, 천제(天帝)가 묘금(卯金)의 아들이 박학하다는 말을 듣고, 내려와 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품속에서 대나무 책을 꺼내니, 천문 지도에 관한 책이었고, “내가 대략 너에게 전수한다.”라고 하였다. 유향의 아들 유흠(劉歆)에 이르러, 유향에게 그 술법을 전수받았다. 유향 또한 이 사람을 깨닫지 못하였다. (권6)
동정산(洞庭山)은 물 위에 떠 있는데, 그 아래에 금당(金堂) 수백 칸이 있고, 옥녀(玉女)가 거처하니, 사계절 금석(金石)과 사죽(絲竹) 소리가 들리니, 산꼭대기까지 들렸다. 초 회왕(楚懷王) 때에, 여러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아 물가에서 시를 짓게 하였다. …… 후에 회왕이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을 등용하니, 여러 현인들이 월(越)나라로 도망쳤다. 굴원(屈原)이 충성으로 인해 배척당하여, 원수(沅水)와 상수(湘水)에 숨어, 덤불을 헤치고 풀을 먹으며, 새와 짐승과 섞여 살고,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잣나무 열매를 캐어 계수나무 기름과 섞어, 심신을 길렀으나, 왕에게 쫓겨나, 이에 맑은 물에 몸을 던졌으니, 초나라 사람들이 그리워하여, 수신(水神)이라고 불렀다. 그 신령이 하늘의 은하수에 노닐고, 정령이 때때로 상수에 내려오니, 초나라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웠으니, 한나라 말에도 오히려 있었다. (권10)
〔1〕 안지추(顏之推)(531—?)의 자는 개(介)이고, 북제(北齊) 낭야(琅玡) 임기(臨沂, 지금의 산둥성 소속) 사람이다. 처음에 양(梁)나라에서 벼슬했고, 북제에 들어가 황문시랑(黃門侍郎)이 되었으며, 수(隋)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죽었다. 저술한 《원혼지(冤魂志)》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 전해지는 책은 모두 《환원지(還冤志)》라고 불린다. 아래 글에서 말하는 《집령기(集靈記)》는, 《수서》 <경적지>에 2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魯迅)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沉)》에 편집본이 있다.
〔2〕 《선험기(宣驗記)》는 《수서》 <경적지>에 13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유의경(劉義慶)이 지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3〕 왕염(王琰)은 남제(南齊) 태원(太原, 지금의 산시성 소속) 사람이다. 제나라 태자사인(太子舍人)이었고, 양나라에 들어가 오흥령(吳興令)이 되었다. 저술한 《명상기(冥祥記)》는, 《수서》 <경적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4〕 후백(侯白)은 이 책 제7편을 참고하라. 저술한 《정이기(旌異記)》는, 《수서》 <경적지>에 15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5〕 《신이기(神異記)》는 왕부(王浮)가 지었다. 《수서》 <경적지> 및 두 《당지(唐志)》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권수는 자세하지 않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6〕 백원(帛遠)은 불교도이다. 속성은 만(萬)이고, 자는 법조(法祖)이며, 진(晉)나라 하내(河內, 지금의 허난성 비양현) 사람이다. 일찍이 장안(長安)에서 경전을 강설하였다. 왕부가 백원과 변론하다가, 여러 차례 실패하였고, 드디어 노자(老子)의 이름을 빌려 《명위화호경(明威化胡經)》을 지었다. 《서역전(西域傳)》에 따르면 불교가 노자보다 먼저 생겨났다고 여기는데, 책에서 노자가 계빈국(罽賓國)에 이른 것을 서술하기를, “내가 태어남이 어찌 이리 늦었는가, 부처가 세상에 나옴이 어찌 이리 빨랐는가”라고 하였다. 왕부가 《명위화호경》을 지을 때는 이를 뒤집어, 노자가 유사(流沙)에 이르러, 부도(浮屠, 불탑)를 만들고, 죽은 후에 부처가 되었다고 말하여, 이로 인해 불교가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불교와 도교 두 종교가 정통 지위를 놓고 다투는 싸움을 반영한다.
〔7〕 《견삼가참(牽三歌讖)》은 진(晉)나라 왕가(王嘉)가 지었으며, 《수서》 <경적지> 및 두 《당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진서(晉書)》 <왕가전(王嘉傳)>에 기록되어 있기를, “그가 지은 《견삼가참》은, 일이 지나면 모두 들어맞았으므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졌다”라고 하였다.
제7편 《세설신어(世說新語)》와 그 전후
한나라 말 사대부들은 이미 인물을 품평하는 것을 중시하였고, 명예의 성쇠가 한마디 말에 달려 있었으니, 위진(魏晉) 이후에, 이에 더욱 언어의 격조를 숭상하였으니, 말하는 것은 현허(玄虛)에 흘러가고, 행동거지는 일부러 거칠고 방탕하게 하였으니, 한나라의 오직 준수하고 굳세고 뛰어나기만 한 것을 중시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대개 그 시대에 불교가 널리 퍼져, 세속을 벗어나는 풍조를 다소 드날렸고, 노장(老莊)의 학설 또한 크게 성행하였으니, 불교로 인해 노자를 숭상하는 것을 반동으로 삼았고, 세상을 싫어하고 떠나려는 것은 일치하였으니, 서로 대립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부추겨, 마침내 광범위하게 청담(清談)으로 되었다. 강을 건넌 이후에, 이러한 풍조가 더욱 심해졌으니, 다른 말을 하는 자는, 오직 한두 명의 영웅호걸뿐이었다. 세상에서 숭상하는 바가, 이에 편집이 있었으니, 혹은 옛날 이야기를 모아 엮고, 혹은 가까운 일을 기록하였으니, 비록 자잘한 이야기 모음에 지나지 않지만, 모두 인간 세상의 언행이므로, 지괴(志怪)의 울타리에서 벗어났다.
인간 세상을 기록하는 것은 이미 매우 오래되었으니, 열어구(列御寇)와 한비(韓非) 모두 기록이 있었으나, 그 기록한 바는, 열은 도(道)를 비유하는 데 사용하였고, 한은 정치를 논하는 데 저장하였다. 만약 감상을 위해 지은 것이라면, 실로 위나라에서 싹트고 진나라에서 크게 성행하였으니, 비록 세속의 풍조를 따르고, 혹은 추측하고 헤아리는 것을 제공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지만, 요컨대 실용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오락에 가까워졌다. 진나라 융화(隆和)(362) 연간에, 은거하는 선비 하동(河東) 배계(裴啟)가, 한나라와 위나라 이후부터 당시까지의 언어와 응대 중에서 칭찬할 만한 것을 모아 지었으니, 이를 《어림(語林)》〔1〕이라 하였고, 당시 꽤 성행하였으나, 사안(謝安)의 말을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였으므로〔2〕, 사안에게 비난을 받아, 책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세설신어》 <경훼편(輕詆篇)>에 보인다). 이후에도 여전히 있었으니, 모두 10권이었으나, 수나라에 이르러 없어졌으나, 여러 책 속에서 또한 흔히 그 남은 글을 볼 수 있다.
누호(婁護)의 자는 군경(君卿)이고, 여러 제후의 집에 돌아다녔는데, 매일 아침, 여러 제후의 집에서 각각 음식을 보내주니, 군경은 맛에 싫증을 느껴, 이에 여러 제후가 보낸 생선젓을 섞어 먹어보니, 매우 맛이 있었다. 세상에서 이른바 “오후청(五侯鲭)”이라는 것은, 군경이 이룬 것이다. (《태평광기(太平廣記)》 234)
위 무제(魏武帝)가 말하기를, “내가 잠자는 중에는 함부로 가까이하지 말라, 가까이하면 문득 사람을 베어도 깨닫지 못한다. 좌우는 마땅히 삼가라!”라고 하였다. 후에 이에 거짓으로 잠을 자니, 총애하는 어린아이가 몰래 이불을 덮어주니, 이로 인해 곧 베어 죽였고, 이때부터 감히 가까이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707)
종사계(鍾士季)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 한 장의 글을 썼는데, 사람들이 완보병(阮步兵)의 글이라고 하니, 모두 글자마다 의미가 살아 있었는데, 내가 쓴 것임을 알고 나서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속담조(續談助)》 4)
조사언(祖士言)이 종아(鍾雅)와 함께 말로 서로 조롱하니, 종아가 조사언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 여영(汝潁)의 선비는 날카로움이 송곳과 같고, 그대 연대(燕代)의 선비는 둔함이 망치와 같다.”라고 하였다. 조사언이 말하기를, “나의 둔한 망치로, 너의 날카로운 송곳을 치겠다.”라고 하니, 종아가 말하기를, “스스로 신령한 송곳이 있으니, 칠 수 없다.”라고 하니, 조사언이 말하기를, “이미 신령한 송곳이 있다면, 반드시 신령한 망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종아가 마침내 굴복하였다. (《어람》 466)
왕자유(王子猷)가 일찍이 잠시 남의 빈집에 빌붙어 살면서,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심게 하였다. 혹은 잠시 사는데 어찌 그리 번거롭게 하느냐고 물으니, 오랫동안 휘파람을 불고 읊조리다가, 곧바로 대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어찌 하루라도 이 군주가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람》 389)
《수지(隋志)》에는 또한 《곽자(郭子)》 3권이 있으니, 동진(東晉) 중랑(中郎) 곽징지(郭澄之)가 지었고〔3〕, 《당지(唐志)》에는 “가천(賈泉)이 주석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그 남은 글을 살펴보면, 또한 《어림》과 유사하다.
송(宋)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의 《세설(世說)》 8권이 있었는데, 양(梁)나라 유효표(劉孝標)가 주석을 달아 10권으로 하였으니〔4〕, 《수서(隋書)》에 보인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3권으로 된 《세설신어(世說新語)》이니, 송나라 사람 안수(晏殊)가 삭제하고 합친 것이다〔5〕, 주석에 대해서도 약간의 가감을 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다시 신어(新語) 두 글자를 더했는지는 알 수 없고, 당나라 때에는 신서(新書)라고 하였으니, 아마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유가(儒家) 류에 기록된 유향(劉向)이 서문을 쓴 67편 중에, 이미 《세설》이 있었으므로, 글자를 더하여 구별한 것이다. 《세설신어》 지금의 책은 모두 38편으로, <덕행(德行)>부터 <구혁(仇隙)>까지, 종류별로 따르니, 일은 후한(後漢)에서 시작하여, 동진(東晉)에 그치고, 말을 기록한 것은 현묘하고 차갑고 날카로우며, 행위를 기록한 것은 고상하고 간결하며 기이하니, 심지어 허황한 이야기까지도, 웃음을 자아낸다. 효표가 주석을 지을 때, 또한 광범위하게 인용하였다. 혹은 반박하고 혹은 해설하며, 본문과 어우러져, 그 빼어남을 더하였으니, 사용한 책이 400여 종이나 되는데, 지금은 또한 많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더욱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세설》의 문자는, 간혹 배계(裴啟)와 곽징지(郭澄之) 두 사람의 책에 기록된 것과 같은 경우가 있으니, 아마 또한 《유명록(幽明錄)》, 《선험기(宣驗記)》와 같으니, 옛 글을 모아 편집한 것이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다. 《송서(宋書)》〔6〕에 이르기를 유의경은 문장력이 뛰어나지 않았으나, 문학하는 선비들을 불러 모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반드시 이르렀으니, 여러 책이 여러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졌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완광록(阮光祿)이 섬(剡)에 있을 때, 일찍이 좋은 수레가 있었는데, 빌리는 자에게 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데, 빌리고 싶어 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완이 후에 이를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수레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이 감히 빌리지 못하게 하니, 수레를 가지고 무엇하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태워 버렸다. (권상 <덕행편>)
완선자(阮宣子)는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태위(太尉) 왕이부(王夷甫)가 만나 보고 묻기를, “노장(老莊)과 성교(聖教, 유교)는 같습니까 다릅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아마 같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위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벽(辟)하여 연(掾)으로 삼으니, 세상에서 “삼어연(三語掾)”이라고 불렀다. (권상 <문학편>)
조사(祖士)는 재물을 좋아하였고, 완요집(阮遙集)은 나막신을 좋아하였는데, 모두 항상 스스로 경영하니, 똑같이 하나의 짐이었으나, 그 득실을 판단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조사를 찾아갔는데, 재물을 헤아리고 살펴보는 것을 보고, 손님이 이르자, 가리개를 다 치우지 못하고, 남은 두 개의 작은 상자를, 등 뒤에 놓고 몸을 기울여 가리니,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혹은 어떤 사람이 완을 찾아갔는데, 스스로 불을 불어 나막신에 옻칠하는 것을 보고, 이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한평생 얼마나 많은 나막신을 신어야 할지 모르겠네.”라고 하니, 신색이 한가롭고 편안하였다. 이에 승부가 비로소 나뉘었다. (권중 <아량편>)
세상 사람들이 이원례(李元禮)를 일컬어 “굳센 소나무 아래 바람처럼 시원하다”라고 하였다. (권중 <상예편>)
공손도(公孫度)가 병원(邴原)을 보고 말하기를, “이른바 구름 속의 흰 학이니, 참새의 그물로는 잡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음)
유령(劉伶)은 항상 술을 마시고 방탕하였는데, 혹은 옷을 벗고 나체로 집 안에 있었다. 사람들이 비웃으니, 유령이 말하기를, “나는 천지를 집으로 삼고, 집을 속옷으로 삼았으니, 여러 군자는 어찌하여 내 속옷 속에 들어왔는가?”라고 하였다. (권하 <임탄편>)
석숭(石崇)은 매번 손님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 때, 항상 미인에게 술을 따르게 하였는데, 손님이 술을 다 마시지 않으면, 황문(黃門)으로 하여금 미인을 베게 하였다. 왕승상(王丞相)과 대장군(大將軍)이 일찍이 함께 석숭에게 갔는데, 승상은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하므로, 매번 억지로 마시다가, 만취에 이르렀다. 매번 대장군에 이르러서는, 굳이 마시지 않고 그 변화를 구경하니, 이미 세 사람을 베었으나, 얼굴빛이 평소와 같았고, 오히려 마시려 하지 않으니, 승상이 그를 나무라니, 대장군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자기 집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어찌 당신 일에 상관합니까?”라고 하였다. (권하 <태치편>)
양(梁)나라 심약(沈約)(441—513, 《양서(梁書)》에 전기가 있다)이 《속설(俗說)》〔7〕 3권을 지었는데, 또한 이러한 종류이니, 지금은 없어졌다. 양 무제(梁武帝)가 일찍이 안우장사(安右長史) 은운(殷芸)(471—529, 《양서》에 전기가 있다)에게 명하여 《소설(小說)》 30권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수나라에 이르러 겨우 10권만 남았고, 명나라 초에는 오히려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오직 《속담조》 및 원본 《설부(說郛)》〔8〕 중에서만 보인다. 또한 여러 책을 모아 편집하여 이루어졌으니, 시대를 차례로 하였고, 특히 제왕의 일을 권수(卷首)에 두었고, 주나라와 한나라로 이어지고, 남제(南齊)에 끝맺었다.
진(晉) 함강(咸康) 연간에, 선비 주위(周谓)라는 자가 있었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천제(天帝)가 불러 만났다고 말하며, 이끌려 대전에 올라, 우러러 천제를 보니, 얼굴이 네모나게 한 자였다. 좌우에게 묻기를, “이분은 옛날 장천제(張天帝)이십니까?”라고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상고 시대의 천제는, 오래전에 이미 성인이 되어 떠나셨고, 이분은 가까운 조 명제(曹明帝)이십니다.”라고 하였다. (《감주집(绀珠集)》 2)
효무제(孝武帝)는 일찍이 나귀를 본 적이 없었는데, 사태부(謝太傅)가 묻기를, “폐하께서는 그 모양이 마땅히 무엇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니, 효무제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하기를, “바로 돼지와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속담조(續談助)》 4. 원주에 이르기를, 《세설》에서 나왔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책에는 없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산에서 노닐다가, 자로(子路)에게 물을 가져오게 하였다. 물 있는 곳에서 호랑이를 만나, 함께 싸워, 꼬리를 잡아 얻어, 품속에 넣고, 물을 가져 돌아왔다. 공자에게 묻기를, “뛰어난 선비는 호랑이를 어떻게 죽입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뛰어난 선비는 호랑이를 죽여 호랑이 머리를 잡는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중간 선비는 호랑이를 어떻게 죽입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중간 선비는 호랑이를 죽여 호랑이 귀를 잡는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못난 선비는 호랑이를 어떻게 죽입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못난 선비는 호랑이를 죽여 호랑이 꼬리를 잡는다.”라고 하였다. 자로가 꼬리를 내버리고, 이에 공자를 원망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은 물 있는 곳에 호랑이가 있는 줄 아시면서, 나에게 물을 가져오게 하셨으니, 나를 죽이려 하신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에 돌판을 품고 공자를 맞추려 하다가, 또 묻기를 “뛰어난 선비는 사람을 어떻게 죽입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뛰어난 선비는 사람을 죽여 붓끝으로 한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중간 선비는 사람을 어떻게 죽입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중간 선비는 사람을 죽여 혀끝으로 한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못난 선비는 사람을 어떻게 죽입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못난 선비는 사람을 죽여 돌판을 품는다.”라고 하니, 자로가 나가서 그것을 버리고, 이에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원본 《설부(說郛)》 25. 원주에 이르기를, 《충파전(冲波传)》에서 나왔다고 한다.)
귀곡 선생(鬼谷先生)이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두 군의 발 아래, 공명이 혁혁하시나, 봄날의 꽃이 가을에 이르니, 오래도록 무성하지 못합니다. 날짜가 장차 겨울에 이르니, 때가 끝나면 장차 늙을 것입니다. 그대들은 홀로 강가의 나무를 보지 못하는가? 종이 가지를 꺾고, 파도가 뿌리를 격동시키니, 이 나무가 천하 사람과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 있는 곳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숭산(嵩山)과 태산(岱山)의 소나무와 잣나무, 화산(華山)과 곽산(霍山)의 나무를 보았는가? 위로는 잎이 푸른 구름에 닿고, 아래로는 뿌리가 삼천(三泉)에 통하니, 위에는 원숭이가 있고, 아래에는 붉은 표범과 기린이 있으니, 천 년 만 년 동안, 도끼의 벌목을 만나지 않으니, 이 나무가 천하의 사람과 골육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있는 곳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두 자는 아침 이슬의 영화를 좋아하고, 오래도록 공을 세우는 것을 소홀히 여기며, 키 큰 소나무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구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일시적인 벼슬을 귀하게 여기니, ‘여자의 사랑은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남자의 즐거움은 수레바퀴를 마치지 못한다’라고 하니, 슬프도다 슬프도다, 두 군 두 군!”이라고 하였다. (《속담조》 4. 원주에 이르기를, 《귀곡선생서(鬼谷先生書)》에서 나왔다고 한다.)
《수지》에는 또한 《소림(笑林)》〔9〕 3권이 있으니, 후한(後漢) 급사중(給事中) 한단순(邯鄲淳)이 지었다. 순의 이름은 축(竺)이고, 자는 자례(子禮)이며, 영천(潁川)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원가(元嘉) 원년(151년)에, 상우(上虞)의 장도상(长度尚)이 조아(曹娥)를 위해 비석을 세우니〔10〕, 순은 상의 제자였는데, 자리에서 비문을 지으니, 붓을 잡고 써서 이루니, 고치거나 정한 곳이 없었으니, 드디어 이름을 알렸고, 황초(黃初) 초(약 221년)에, 위(魏)나라 박사(博士) 급사중이 되었으니, 《후한서(後漢書)》 <조아전(曹娥傳)> 및 《삼국지(三國志)》 <왕찬전(王粲傳)> 등의 주에 보인다. 《소림》은 지금 없어졌고, 남은 글이 20여 가지 전해지니, 잘못된 것을 들추어내고, 잘못된 것을 드러내니, 실로 《세설》의 한 종류이고, 또한 후대 비방하고 해학적인 문자의 시초이다.
노나라에 긴 장대를 들고 성문에 들어가려는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 세워서 들으니 들어갈 수 없었고, 가로로 들으니 또한 들어갈 수 없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윽고 노인이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성인이 아니지만, 다만 일을 많이 보았으니, 어찌 가운데를 톱으로 잘라 들어가지 않는가!”라고 하니, 이에 따라 잘랐다. (《태평광기》 262)
평원(平原)의 도구씨(陶丘氏)가 발해(渤海) 묵태씨(墨台氏)의 딸을 취하였는데, 여자의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재주가 매우 뛰어나고, 다시 서로 존경하였는데, 이미 아들 하나를 낳고 돌아갔다. 어머니 정씨(丁氏)가, 나이가 들어, 사위를 만나러 갔다. 사위가 이미 돌아가고 아내를 돌려보내니, 아내가 떠나려 하면서 용서를 구하니, 남편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부인을 보니 나이와 덕이 이미 쇠하였으니, 예전과 같지 않고, 또한 새 아내가 늙은 후에는, 반드시 다시 이와 같을까 염려하였으므로, 돌려보내는 것이니, 실로 다른 이유가 없다.”라고 하였다. (《태평어람》 499)
갑(甲)의 부모가 살아 있는데, 3년 동안 나가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외삼촌이 그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묻고, 아버지를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것을 차례로 이야기하였다. 이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위양(渭陽)의 생각은, 진 강공(秦康公)보다 지나칩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아버지가 그를 꾸짖으며, “네가 배운 것이 무슨 이익이 있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어릴 때 가정의 가르침을 잃었기 때문에, 배움이 이익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광기(廣記)》 262)
갑과 을(乙)이 싸우다가, 갑이 을의 코를 물어뜯으니, 관리(官吏)가 이를 판결하려 하자, 갑이 을이 스스로 물어뜯었다고 주장하였다. 관리가 말하기를, “사람의 코는 높고 입은 낮으니, 어찌 몸소 물어뜯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갑이 말하기를, “그가 침상을 밟고 올라가 물어뜯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음)
《소림(笑林)》 이후에, 뒤이어 지은 작품이 적지 않으니, 《수지(隋志)》에는 《해이(解頤)》〔11〕 2권이 있다. 양송분(楊松玢)이 지었으나, 지금은 한 글자도 전해지지 않고, 여러 책에서 항상 《담수(談藪)》〔12〕를 인용하니, 곧 《세설(世說)》의 종류이다. 《당지(唐志)》에는 《계안록(啟顏錄)》 10권이 있으니, 후백(侯白)이 지었다. 백의 자는 군소(君素)이고, 위군(魏郡) 사람이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재주가 민첩하였고, 해학을 잘하고 말을 잘하였고,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유림랑(儒林郎)이 되었고, 해학적인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하였으니,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고 친하게 지냈고, 가는 곳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시장과 같았다. 수 고조(隋高祖)가 그의 이름을 듣고, 불러서 비서성(秘書省)에서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고, 후에 5품의 녹봉을 주었고, 한 달여 만에 죽었다(약 6세기 후반). 《수서(隋書)》 <육상전(陸爽傳)>에 보인다. 《계안록》 또한 없어졌으나, 《태평광기》에서 인용한 것이 매우 많으니, 위로는 자사(子史)의 옛 글을 취하고, 가까이는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였으니, 일은 대부분 얕고, 또한 비속한 말로 사람을 조롱하기를 좋아하니, 해학이 지나쳐, 때로는 경박함에 흘러갔다. 그 당나라 시대의 일은, 후 사람이 더한 것이다. 옛 책 속에 흔히 있으니, 소설에서 더욱 심하다.
개황(開皇) 연간에, 어떤 사람의 성은 출(出)이고 이름은 육근(六斤)이었는데, (양)소(素)를 만나 뵈려 하여, 명함을 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후백을 만나, 그에게 성을 써 달라고 청하니, 이에 써서 말하기를 “육근반(六斤半)”이라고 하였다. 이름이 이미 들어가니, 소가 그 사람을 불러, 묻기를, “그대의 성은 육근반이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성은 출이고 이름은 육근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어찌하여 육근반이라고 하였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전에 후 수재에게 써 달라고 청하였는데, 아마 잘못 쓴 것 같습니다.”라고 하고, 곧 후백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사람의 이름을 잘못 썼소?”라고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잘못 쓰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소가 말하기를, “만약 잘못 쓰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성은 출이고 이름은 육근인데, 그대에게 써 달라고 청하니, 이에 육근반이라고 하였소?”라고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성문에 있을 때, 갑자기 저울을 찾을 곳이 없어서, 이미 듣기로는 출육근이라고 하였으므로, 헤아려 보니 마땅히 육근반이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소가 크게 웃었다. (《광기》 248)
산둥(山東) 사람이 포주(蒲州)의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대부분 영(癭, 갑상선종)을 앓았는데, 그 아내의 어머니의 목에 있는 영이 매우 컸다. 결혼한 지 몇 달이 지나, 여자 집에서 사위가 어리석다고 의심하여, 장인이 술자리를 베풀어 친척들을 모아, 시험하려 하였다. 묻기를, “아무개 낭군이 산둥에서 글을 읽었으니, 마땅히 도리를 알 것입니다. 기러기와 학이 울 수 있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소나무와 잣나무가 겨울에도 푸른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길가의 나무에 뼈가 있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인이 말하기를, “아무개 낭군은 전혀 도리를 알지 못하니, 어찌하여 함부로 산둥에 머무르는가?”라고 하고, 이에 희롱하여 말하기를, “기러기와 학이 울 수 있는 것은 목덜미가 길기 때문이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겨울에도 푸른 것은 마음속이 강하기 때문이고, 길가의 나무에 뼈가 있는 것은 수레 바퀴가 상하게 했기 때문이니, 어찌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겠는가?”라고 하니, 사위가 말하기를, “두꺼비가 울 수 있는 것은, 어찌 목덜미가 길기 때문이겠습니까? 대나무 또한 겨울에도 푸르니, 어찌 마음속이 강하기 때문이겠습니까? 부인의 목 아래에 있는 영(癭)이 이처럼 크니, 어찌 수레 바퀴가 상하게 했기 때문이겠습니까?”라고 하니, 장인이 부끄럽고 창피하여, 대답할 말이 없었다. (위와 같음)
그 후에는 당나라에 하자연(何自然)의 《소림(笑林)》〔13〕이 있었으나, 지금은 또한 없어졌고, 송나라에는 여거인(呂居仁)의 《헌거록(軒渠錄)》〔14〕, 심징(沈征)의 《해사(諧史)》〔15〕, 주문기(周文玘)의 《개안집(開顏集)》〔16〕, 천화자(天和子)의 《선학집(善謔集)》〔17〕, 원나라와 명나라에는 또 10여 종이 있으니, 대개 혹은 자사(子史)의 옛 글을 취하고, 혹은 당시의 자질구레한 일을 모으니, 특별히 새로운 뜻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동파(東坡, 소식)의 이름을 빌린 《애자잡설(艾子雜說)》〔18〕이 조금 뛰어나니, 대체로 세상의 풍속을 조롱하고, 당시의 폐단을 비판하니, 또한 《소림》의 아무런 목적 없이 지은 것과는 다르다.
《세설》의 종류에 이르러서는, 모방한 것이 더욱 많으니, 유효표(劉孝標)는 《속세설(續世說)》 10권이 있으니, 《당지(唐志)》에 보이나, 《수지(隋志)》에 따르면, 거의 곧 주석한 임천왕의 책이다. 당나라에는 왕방경(王方慶)의 《속세설신서(續世說新書)》〔19〕(《신당지(新唐志)》 잡가(雜家)에 보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송나라에는 왕당(王谠)의 《당어림(唐語林)》〔20〕, 공평중(孔平仲)의 《속세설(續世說)》〔21〕, 명나라에는 하량준(何良俊)의 《하시어림(何氏語林)》〔22〕, 이소문(李紹文)의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23〕, 초굉(焦竑)의 《유림(類林)》 및 《옥당총화(玉堂叢話)》〔24〕, 장용(張墉)의 《이십일사식여(廿一史識餘)》〔25〕, 정중기(鄭仲夔)의 《청언(清言)》〔26〕 등이 있으나, 옛 이야기를 모은 것은 특별히 새롭고 뛰어난 것이 없고, 당시의 일을 서술한 것은 억지로 꾸민 것이 많으니,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그치지 않고 이를 지으니, 청나라에 이르러, 또한 양유추(梁維樞)가 《옥검존문(玉劍尊聞)》〔27〕을 지었고, 오숙공(吳肅公)이 《명어림(明語林)》〔28〕을 지었고, 장무공(章撫功)이 《한세설(漢世說)》〔29〕을 지었고, 이청(李清)이 《여세설(女世說)》〔30〕을 지었고, 안종교(顏從喬)가 《승세설(僧世說)》〔31〕을 지었고, 왕탁(王晫)이 《금세설(今世說)》〔32〕을 지었고, 왕완(汪琬)이 《설령(說鈴)》을 지었고 혜동(惠棟)이 주석을 더하였으니〔33〕, 지금 또한 이종기(易宗夔)가 《신세설(新世說)》〔34〕을 지었다.
〔1〕 배계(裴啟)의 자는 영기(榮期)이고, 동진(東晉) 하동(河東, 군의 치소는 지금의 산시성 융지현) 사람이다. 저술한 《어림(語林)》은,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 《연단자(燕丹子)》 제하의 부주에 기록되어 있기를, “양(梁)나라에 …… 《어림》 10권이 있었는데, 동진의 은거하는 선비 배계가 지었고,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루쉰(魯迅)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沉)》에 편집본이 있다.
〔2〕 사안(謝安)(320—385)의 자는 안석(安石)이고, 동진 진군(陳郡) 양하(陽夏, 지금의 허난성 타이캉현) 사람이며, 효무제(孝武帝) 때 관직이 중서감(中書監)이었고, 녹상서사(錄尚書事)를 겸하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경훼편(輕詆篇)>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유도계(庾道季)가 배계의 《어림》에 기록된 사안과 관련된 배계, 지돈림(支道林)의 이야기를 사안에게 전하니, 사안이 말하기를, “모두 이러한 두 마디 말이 없고, 배가 스스로 지어낸 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유가 동정(東亭, 왕순(王珣))의 《경주로하부(經酒壚下賦)》를 읽고 있을 때, 사안이 또 말하기를, “그대는 다시 배씨의 학문을 짓는구나!”라고 하였으니, 이때부터 《어림》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3〕 《곽자(郭子)》는 《수서》 <경적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곽징지(郭澄之)가 지었다. 곽징지의 자는 중정(仲靜)이고, 동진 태원(太原) 양곡(陽曲, 지금의 산시성 소속) 사람이며, 일찍이 유유(劉裕)의 상국종사중랑(相國從事中郎)을 지냈다. 《곽자》는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가천(賈泉)(440—501)은, 곧 가연(賈淵)이다. 당나라 사람들이 이연(李淵)의 휘(諱)를 피하여, 연(淵)을 천(泉)으로 고쳤으니, 자는 희경(希鏡)이다. 남조 송나라 평양(平陽) 양릉(襄陵, 지금의 산시성 샹펀현) 사람이다.
〔4〕 《세설(世說)》은 곧 《세설신어(世說新語)》이다. 지금 전해지는 각 판본은 <덕행(德行)>부터 <구혁(仇隙)>까지 모두 36편이다. 유효표(劉孝標)(462—521)의 이름은 준(峻)이고, 남조 양나라 평원(平原, 지금의 산둥성 소속) 사람이며, 일찍이 형주호조참군(荊州戶曹參軍)을 지냈다.
〔5〕 안수(晏殊)(991—1055)의 자는 동숙(同叔)이고, 북송 임천(臨川, 지금의 장시성 소속) 사람이며, 관직이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동평장사(同平章事) 겸 추밀사(樞密使)에 이르렀다. 안수가 《세설신어》를 삭제하고 합친 일에 대해서는, 명나라 원경(袁褧)의 판본 《세설신어》에 남송 동분(董弅)의 발문에 이르기를, “우리 집안의 옛 소장본은 대개 왕원숙(王原叔)의 집에서 얻은 것이고, 후에 안 원헌공(元獻公, 안수의 시호)이 손수 교정한 책을 얻으니, 중복된 것을 모두 없애고, 주석 또한 약간 가감하였으니, 가장 좋은 판본이다.”라고 하였다.
〔6〕 《송서(宋書)》는 양나라 심약(沈約)이 편찬하였고, 100권이며, 기전체(紀傳體) 남조 송나라의 역사이다. 아래 글의 유의경에 대한 평론은, 이 책 권51 <유의경전(劉義慶傳)>에 보인다.
〔7〕 심약의 자는 휴문(休文)이고, 남조 양나라 오흥(吳興) 무강(武康, 지금의 저장성 더칭현) 사람이며, 관직이 상서령(尚書令)에 이르렀다. 저술한 《속설(俗說)》은, 《수서》 <경적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8〕 《속담조(續談助)》는 송나라 조재지(晁載之)가 편찬하였고, 5권이며, 모두 소설, 잡저 20종을 수록하였다. 원본 《설부(說郛)》는, 원나라 말 명나라 초 도종의(陶宗儀)가 편찬하였고, 100권이며, 한나라와 위나라부터 송나라와 원나라까지의 여러 필기 소설을 모아 편집하여 이루어졌다.
〔9〕 《소림(笑林)》은 《수서》 <경적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한단순(邯鄲淳)이 지었다.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편집본이 있다.
〔10〕 도상(度尚)의 자는 박평(博平)이고, 동한(東漢) 호륙(湖陸, 지금의 산둥성 위타이현) 사람이며, 관직이 요동태수(遼東太守)에 이르렀다. 조아(曹娥)는, 동한 상우(上虞) 사람이다. 그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은 후 그녀가 강에 투신하여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죽었으니, 효녀로 일컬어진다. 도상이 상우의 장(長)으로 있을 때 일찍이 그녀를 위해 비석을 세웠고,
〔11〕 《해이(解頤)》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양송분(楊松玢)이 지었다. 지금은 없어졌다.
〔12〕 《담수(談藪)》는 당나라 유지지(劉知幾)의 《사통(史通)》 <잡술편(雜述篇)> 소언류(瑣言類)에서 일찍이 “양개송(陽玠松)의 《담수》”를 언급하였다.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는 양송개(陽松玠)의 《팔대담수(八代談藪)》 2권이 기록되어 있다.
〔13〕 하자연(何自然)의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저술한 《소림(笑林)》은, 《신당서(新唐書)》 <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14〕 여거인(呂居仁)(1084—1145)의 이름은 본중(本中)이고, 호는 동래선생(東萊先生)이며, 송나라 수주(壽州, 치소는 지금의 안후이성 서우현) 사람이고, 일찍이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다. 저술한 《헌거록(軒渠錄)》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도종의(陶宗儀)가 편찬한 《설부(說郛)》 권7에 편집본이 있다.
〔15〕 심징(沈征)은 송나라 때 삽계(霅溪, 지금의 저장성 우싱현) 사람이고, 다른 것은 자세하지 않다. 저술한 《해사(諧史)》 2권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도종의가 편찬한 《설부》 권23에 편집본이 있는데, 1권이고, 제목이 송나라 심숙(沈俶)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16〕 주문기(周文玘)는 송나라 사람이고, 일찍이 시비서성교서랑(試秘書省校書郎)을 지냈다. 저술한 《개안집(開顏集)》은, 《송사》 <예문지>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도종의가 편찬한 《설부》 권65에 편집본이 있다.
〔17〕 천화자(天和子)는 송나라 사람이다. 저술한 《선학집(善謔集)》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도종의 《설부》 권65에 편집본이 있다.
〔18〕 동파(東坡)는 곧 소식(蘇軾)(1037—1101)이고, 북송 미산(眉山, 지금의 쓰촨성 소속) 사람이며,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상서(禮部尚書)를 지냈다. 《애자잡설(艾子雜說)》은, 또 《애자(艾子)》라고도 하며, 1권이고, 소식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명나라 고원경(顧元慶)의 《고씨문방소설(顧氏文房小說)》에 편집본이 있다.
〔19〕 왕방경(王方慶)(?—702)의 이름은 린(綝)이고, 당나라 함양(咸陽, 지금의 산시성 소속) 사람이며, 관직은 봉각시랑지정사(鳳閣侍郎知正事)에 이르렀다. 《속세설신서(續世說新書)》는, 《신당서》 <예문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20〕 왕당(王谠)의 자는 정보(正甫)이고, 북송 장안(長安, 지금의 산시성 시안) 사람이다. 저술한 《당어림(唐語林)》은,
〔21〕 공평중(孔平仲)의 자는 의보(义甫) 또는 이보(毅甫)이고, 북송 임강(临江) 신유(新喻, 지금의 장시성 신위현) 사람이며, 일찍이 집현교리(集贤校理)를 지냈다. 저술한 《속세설(续世说)》은, 《송사(宋史)》 <예문지(艺文志)>에 12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22〕 하량준(何良俊)(1506—1573)의 자는 원랑(元朗)이고, 호는 탁호(柘湖)이며, 명나라 화정(华亭, 지금의 상하이 송장구) 사람이고, 일찍이 남경한림원공목(南京翰林院孔目)을 지냈다. 《하시어림(何氏语林)》은, 《명사(明史)》 <예문지>에 3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23〕 이소문(李绍文)의 자는 절지(节之)이고, 명나라 화정(华亭, 지금의 상하이 송장구) 사람이다. 저술한 《명세설신어(明世说新语)》는, 《명사》 <예문지>에 8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24〕 초굉(焦竑)(1540—1620)의 자는 약후(弱侯)이고, 호는 이원(漪园), 또 담원(澹园)이라고도 하며, 명나라 강녕(江宁, 지금의 장쑤성 난징시) 사람이고, 관직은 한림원수찬(翰林院修撰)에 이르렀다. 저술한 《유림(类林)》은, 또 《초씨유림(焦氏类林)》이라고도 하며, 《명사》 <예문지>에 8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따로 지은 《옥당총화(玉堂丛话)》는, 《명사》 <예문지>에 8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25〕 장용(张墉)의 자는 석종(石宗)이고, 명나라 전당(钱塘,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시) 사람이다. 저술한 《이십일사식여(廿一史识余)》는, 또 《죽향재유서(竹香斋类书)》라고도 하며, 37권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库全书总目提要)》 사초류(史钞类) 존목(存目)에 있다.
〔26〕 정중기(郑仲夔)의 자는 용여(龙如)이고, 명나라 강시성 사람이다. 저술한 《청언(清言)》은, 전체 명칭이 《난완거청언(兰畹居清言)》이며, 10권이다. 자신이 편찬한 《옥진신담(玉尘新谭)》 내에 수록되었다.
〔27〕 양유추(梁维枢)(1589—1662)의 자는 신가(慎可)이고, 청나라 진정(真定, 지금의 허베이성 정딩현) 사람이다. 저술한 《옥검존문(玉剑尊闻)》은, 《청사고(清史稿)》 <예문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28〕 오숙공(吴肃公)의 자는 우약(雨若)이고, 청나라 선성(宣城, 지금의 안후이성 소속) 사람이다. 저술한 《명어림(明语林)》은, 《청사고》 <예문지>에 14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29〕 장무공(章抚功)의 자는 인염(仁艳)이고, 청나라 전당(钱塘,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시) 사람이다. 저술한 《한세설(汉世说)》은, 《청사고》 <예문지>에 14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30〕 이청(李清)(1602—1683)의 자는 심수(心水), 또 영벽(映碧)이라고도 하며, 호는 천일거사(天一居士)이고, 명나라 흥화(兴化, 지금의 장쑤성 소속) 사람이며, 관직은 형과(刑科), 이과급사중(吏科给事中)을 지냈다. 저술한 《여세설(女世说)》은 4권이다.
〔31〕 안종교(颜从乔)가 지은 《승세설(僧世说)》은 조사를 기다린다. (즉, 정보가 부족하여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야 함을 의미)
〔32〕 왕탁(王晫)(1636—?)의 자는 단록(丹麓)이고, 청나라 초기 인화(仁和,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시) 사람이다. 저술한 《금세설(今世说)》은, 《청사고(清史稿)》 <예문지>에 8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33〕 왕완(汪琬)(1624—1691)의 자는 초문(苕文), 호는 둔암(钝庵)이고, 청나라 장주(长洲,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사람이며, 관직은 한림원편수(翰林院编修)에 이르렀다. 저술한 《설령(说铃)》은, 《청사고》 <예문지>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혜동(惠栋)(1697—1758)의 자는 정우(定宇), 호는 송애(松崖)이고, 청나라 오현(吴县, 지금의 장쑤성 소속) 사람이다.
〔34〕 이종기(易宗夔)의 자는 울유(蔚儒)이고, 후난성 샹탄 사람이다. 북양 정부 시기에 국무원 법제국 국장(国务院法制局局长)을 지냈다. 저술한 《신세설(新世说)》은 8권이고, 1918년 베이징에서 출판되었다.
제8편 당나라의 전기 문학 (상)
소설은 시와 같아서, 당나라에 이르러 일대 변화를 이루었다. 비록 여전히 기이한 일을 탐색하고 숨겨진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서술이 완곡하고 문사가 화려하여, 육조 시대의 대략적인 줄거리만 서술한 것과 비교하면, 발전의 자취가 매우 뚜렷하며, 특히 두드러진 것은 이때부터 비로소 의도를 가지고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호응린(胡應麟)은 (《필총(筆叢)》 36)에서 말하기를, “기이한 이야기는 육조 시대에 성행했지만, 대부분 전해 내려오는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어서, 반드시 모두 허구의 이야기는 아니었고, 당나라 사람에 이르러 비로소 의도를 가지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가탁의 이야기를 빌려 붓끝에 담았다.”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의도를 가지다”와 “허구”라는 것은, 곧 의식적인 창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종류의 문자는, 당시에는 혹은 여러 편을 모아 엮은 모음집이거나, 혹은 단편이었는데, 대개 분량이 길고, 서술이 자세하고, 때로는 해학에 가깝기도 하여, 논하는 자들이 매번 그 비속함을 비난하며, 폄하하여 “전기(传奇)”라고 하였으니,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1〕 등의 고상한 문장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매우 유행하여, 문인들이 흔히 창작하였고, (윗사람에게) 글을 올릴 때 혹은 행권(行卷)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지금 《태평광기(太平廣記)》〔2〕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이 (다른 책에 실린 것은, 시대와 저자가 잘못된 것이 많아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다), 실로 당나라의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이후의 유파는, 또한 번성하지 못하고, 단지 이야기를 풀어서 서술하거나, 혹은 모방할 뿐이었으니, 오직 원나라와 명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잡극(雜劇)이나 전기(传奇)를 지었고, 그 영향이 마침내 곡(曲)에까지 미쳤다.
허구를 사용하여 글을 짓는 것은, 진나라 시대에도 이미 성행하였으니, 완적(阮籍)의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 유령(劉伶)의 《주덕송(酒德頌)》,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등이 모두 그러하다〔3〕. 그러나 모두 우언(寓言)을 근본으로 삼고, 문사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으므로, 그 흐름이 발전하여 왕적(王績)의 《취향기(醉鄉記)》, 한유의 《오자왕승복전(圬者王承福傳)》, 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4〕 등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전기와는 관련이 없다. 전기라는 것은, 그 근원이 지괴(志怪)에서 나왔으나, 화려한 문장을 사용하고, 그 파란을 확대하였으므로, 이룬 바가 특별히 다르니, 그 사이에는 또한 혹은 풍유를 빌려 답답한 심정을 풀고, 화복(禍福)을 이야기하여 징계와 권면의 뜻을 담기도 하지만, 대체적인 귀결은 결국 문채와 의상(意想)에 있으니, 옛날 귀신과 신령의 인과(因果)를 전하여 그 외에 다른 뜻이 없는 것과는, 그 취향이 매우 다르다.
수나라와 당나라 사이에, 왕도(王度)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경기(古鏡記)》를 지었다 (《광기》 230에 보이는데, 제목이 《왕도》라고 되어 있다). 스스로 후생(侯生)에게 신령한 거울을 얻었다고 서술하였는데, 능히 정령(精靈)과 요괴를 물리칠 수 있었고, 후에 그의 동생 기(勣, 즉 績)가 멀리 유람할 때, 빌려서 따라가게 하니, 또한 여러 귀신과 요괴를 죽였지만, 마침내 변화하여 사라졌다. 그 글이 매우 길지만, 단지 옛 거울의 여러 영이한 일을 엮었으니, 여전히 육조 지괴의 풍습이 남아 있다. 왕도는, 태원(太原) 기현(祁縣) 사람이고, 문중자(文中子) 통(通)의 동생이고, 동고(東皋) 선생 적(績)의 형이니, 대개 개황(開皇) 초에 태어났고 (송나라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 10에 이르기를 통은 개황 4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대업(大業) 연간에 어사(御史)가 되었고, 파면되어 하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장안으로 들어가 저작랑(著作郎)이 되었고, 조서를 받들어 국사를 편찬하였고, 또 나가서 예성령(芮城令)을 겸하였고, 무덕(武德) 연간에 죽었다 (약 585—625), 역사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고경기》, 《당문수(唐文粹)》 및 《신당서》 <왕적전(王績傳)>에 보이는데, 단지 전에는 형의 이름이 응(凝)이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하지 않다), 남긴 글은 단지 이 한 편뿐이다. 적이 관직을 버리고 용문(龍門)으로 돌아간 후, 역사에는 그가 유람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니, 대개 왕도가 가설한 것이다.
당나라 초에는 또 《보강총백원전(补江總白猿傳)》 1권이 있었는데,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고, 송나라 시대에는 여전히 단행본으로 유통되었으나, 지금은 《광기(廣記)》(444, 제목은 《구양흘(歐陽紇)》)에서 보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양나라 장수 구양흘〔1〕이 땅을 공략하여 장락(長樂)에 이르러, 깊숙이 계곡 동굴로 들어가니, 그의 아내가 마침 흰 원숭이에게 납치되었고, 구출되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으며, 1년 만에 아들을 낳으니, “그 모습이 (원숭이와) 매우 닮았다.”라고 한다. 흘은 후에 진 무제(陳武帝)에게 살해되었고, 아들 순(詢)은 강총〔8〕에게 거두어져 성인이 되었고, 당나라에 들어가 명성을 떨쳤으나, 모습이 원숭이와 비슷하여, 꺼리는 자들이 이로 인해 전기를 지어, 강총을 보충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가탁의 소설로 헐뜯는 풍습을 행한 것이니, 그 유래 또한 매우 오래되었다.
무측천(武后) 시대에는, 심주(深州) 육혼(陸渾) 사람 장탁(張鷟)〔9〕의 자는 문성(文成)이었는데, 조로(調露) 초에 진사(進士)에 등제하였고, 기왕부참군(岐王府參軍)이 되었고, 여러 시험에서 모두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문명(文名)이 매우 높았고, 장안위(長安尉)로 옮겨졌으나, 성격이 조급하고 변덕스러우며, 방탕하고 절제가 없어, 요숭(姚崇)이 특히 그를 미워하였다. 개원(開元) 초에, 어사(御史) 이전교(李全交)가 탁이 당시의 정치를 비방하고 헐뜯는다고 탄핵하여, 영남(嶺南)으로 좌천되었고, 곧 내지로 돌아왔고, 최종적으로 사문원외랑(司門員外郎)으로 생을 마쳤다 (약 660—740, 자세한 내용은 《당서(唐書)》 <장천전(張薦傳)>을 참고). 일본에는 《유선굴(遊仙窟)》 1권이 있는데, 영주(寧州) 양악현위(襄樂縣尉) 장문성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막휴부(莫休符)〔10〕는 “탁이 약관(弱冠)에 응시하여, 붓을 대자 글이 이루어졌고, 중서시랑(中書侍郎) 설원초(薛元超)가 특별히 양악위(襄樂尉)를 제수하였다.”(《계림풍토기(桂林風土記)》)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젊은 시절에 지은 것이다. 하원(河源)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도중에 밤에 큰 저택에 묵게 되었는데, 십낭(十娘)과 오소(五嫂)라는 두 여인을 만나, 연회를 베풀고 웃고 즐기며, 시로 서로 희롱하고, 묵고 갔다고 스스로 서술하였는데, 문장이 변려문(駢儷文)에 가깝고 때로는 비속한 말이 섞여 있으며, 기개는 그가 지은 《조야첨재(朝野僉載)》, 《용근봉수판(龍筋鳳髓判)》〔11〕과 정확히 같다. 《당서》에는 “탁은 붓을 대면 곧 글을 이루었으나, 경박하고 화려하여 이치가 적었고, 그의 저술은 대부분 비방하고 헐뜯는 내용으로 더러웠으나, 한때 크게 유행하여, 후대의 학자들이 전하고 기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신라와 일본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금은보화를 내어 그의 글을 사들였다.”라고 하였으니, 거의 사실 기록이다. 《유선굴》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실전되었고, 후인 또한 다시 그 체제를 모방하지 않았으니, 지금 대략 수십 마디를 기록하여 대략적인 모습을 보이니, 곧 마루에 올라 연회를 베풀 때의 상황이다.
……십낭이 향아(香兒)를 불러 소부(少府)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금석(金石)을 아울러 연주하고, 피리와 관악기가 번갈아 울렸다.
소합(蘇合)은 비파를 타고, 녹죽(綠竹)은 필률(筚篥)을 불고, 신선은 거문고를 타고, 옥녀(玉女)는 생황을 불고, 현학(玄鶴)은 머리를 숙여 거문고 소리를 듣고, 흰 물고기는 뛰어올라 박자에 맞추었다.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니, 잠시 후에는 대들보 위의 먼지가 날리고, 맑고 아정한 가락이 울려 퍼지니,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듯하니, 한때 맛을 잊으니, 공자가 (음악 소리에)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헛되지 않고, 사흘 동안 대들보를 감돌았다는 것이, 한아(韓娥)의 여운이 진실이다. …… 두 사람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며, 함께 하관(下官)에게 권하니, …… 드디어 춤을 추며 가사를 지어 말하기를, “예로부터 사방을 순회하다가, 홀연히 두 신선을 만나니, 눈썹 위에는 겨울에 버드나무가 나고, 뺨에는 가뭄 땅에 연꽃이 피었네. 천 번을 보아도 천 가지로 아리땁고, 만 번을 보아도 만 가지로 곱네. 오늘 밤 만약 (함께 하지) 못한다면, 목숨을 내놓고 황천으로 가리라.”라고 하였다. 또 한때 크게 웃었다. 춤을 마치고, 이에 사례하여 말하기를, “저는 실로 용렬한 재능으로, 맑은 감상을 함께 하게 되었고, 음악을 내려 주시니, 부끄럽고 감사함을 이기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십낭이 시를 읊어 말하기를, “뜻을 얻음은 원앙새와 같고, 정이 어긋남은 호월(胡越)과 같으니, 그대 곁에서 다하지 못한다면, 다시 어디에서 쉬겠는가?”라고 하니, 십낭이 말하기를, “저희들은 모두 거둘 만한 것이 없고, 소부께서 말씀하시기를 ‘겨울에 버드나무가 나고, 가뭄 땅에 연꽃이 핀다’고 하셨으니, 모두 서로 희롱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그러나 작가들이 크게 일어선 것은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이후이다. 대력(大曆) 연간에는 심기제(沈既濟)가 있었는데, 소주(蘇州) 오군(吳郡) 사람으로, 경학(經學)에 해박하였고, 양염(楊炎)〔12〕의 추천으로, 소환되어 좌습유(左拾遺) 사관수찬(史館修撰)에 임명되었다. 정원(貞元)〔13〕 연간에 양염이 죄를 얻자, 기제는 좌천되어 처주(處州) 사호참군(司戶參軍)이 되었고,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의 지위에 이르렀고, 죽었다 (약 750—800). 《건중실록(建中實錄)》〔14〕을 편찬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능력을 칭찬하였고, 《신당서(新唐書)》에 전기가 있다. 《문원영화(文苑英華)》〔15〕(833)에 그의 《침중기(枕中記)》(또한 《광기(廣記)》 82에 보이는데, 제목은 《여옹(呂翁)》) 한 편이 실려 있는데, 소설가의 말로, 대략 개원 7년에, 도사(道士) 여옹이 한단(邯鄲) 길을 가다가, 여관에 쉬는데, 여관에 있던 젊은이 노생(盧生)이 실의에 빠져 탄식하는 것을 보고, 이에 주머니 속의 베개를 꺼내어 주었다. 노생은 꿈에 청하(清河) 최씨(崔氏)에게 장가들고,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벼슬이 섬목(陝牧)에 이르렀고, 안으로 들어가 경조윤(京兆尹)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 융로(戎虜)를 격파하고, 옮겨져 사부시랑(史部侍郎)이 되었고, 옮겨 호부상서(戶部尚書) 겸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고, 당시 재상에게 미움을 받아, 헛소문으로 모함당하여, 단주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고, 3년이 지나 다시 소환되어 상시(常侍)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훌륭한 계책과 은밀한 명령으로, 하루에 세 번이나 (황제의) 접견을 받았고, (황제에게) 건의하고 깨우쳐 주어, 현명한 재상으로 불렸으나, 같은 벼슬아치들이 그를 시기하여, 다시 변방 장수와 결탁하여, 불궤한 일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감옥에 갇히게 하니, 관리가 그를 따라 그 문에 이르러 급히 붙잡았다. 노생은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처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 산동(山東)에 좋은 밭 다섯 이랑이 있으니, 추위와 굶주림을 막기에 충분한데, 어찌 괴로이 벼슬을 구했는가?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짧은 옷을 입고 푸른 말을 타고 한단 길을 가는 것을 생각하니, 얻을 수 없구나!”라고 하며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니, 그의 아내가 구하여 겨우 면하였다. 그 연루된 자들은 모두 죽었으나, 오직 노생만이 환관(宦官)이 보호하여, 죄를 감하여 환주(驩州)로 귀양 보내졌다. 몇 년 후, 황제가 억울함을 알고, 다시 불러 중서령(中書令)으로 삼고, 연국공(燕國公)에 봉하니, 은혜로운 조칙이 매우 특별하였다. 노생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 그 혼인 관계는 모두 천하의 명문 거족이었고, 손자가 십여 명이었다. …… 후에 나이가 점점 들어,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병이 들자, 환관들이 문안하는 것이, 길에 이어졌고, 명의와 좋은 약이,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 죽었다. 노생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니, 자신의 몸이 여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고, 여옹이 그 곁에 앉아 있었고, 주인이 짓던 기장밥이 아직 익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다. 노생이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어찌 꿈이었던가?”라고 하니, 여옹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인생의 즐거움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노생이 멍하니 한참 있다가, 사례하여 말하기를, “무릇 영욕의 이치, 궁달의 운명, 얻고 잃음의 이치, 죽고 삶의 정을, 모두 알았습니다. 이는 선생께서 저의 욕심을 막으신 이유입니다. 감히 가르침을 받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떠났다.
이러한 상상은, 공명을 흠모하는 당나라 시대에, 비록 기이하고 환상적이어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만, 또한 독창적인 것에서 나온 것은 아니니, 간보(干寶)의 《수신기(搜神記)》에 초호(焦湖)의 사당지기가 옥베개로 양림(楊林)을 꿈에 들게 한 일이 있다 (제5편에 보인다). 대략적인 내용이 모두 같으니, 마땅히 이 편의 근본이 되었을 것이고, 명나라 탕현조(湯顯祖)〔16〕의 《한단기(邯鄲記)》는, 또한 이 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기제의 문필은 간결하고, 또한 권계(勸誡)의 뜻이 많으니, 이야기가 비록 허황되지만, 여전히 당시에 존중받았으니, 한유의 《모영전(毛穎傳)》〔17〕에 비견되었다. 간혹 그 해학을 비난하는 자도 있었으니, 이는 작가가 일찍이 사관(史官)이었기 때문에, 인하여 사법(史法)으로 얽매었으니, 소설의 뜻을 잃은 것이다. 기제는 또한 《임씨전(任氏傳)》(《광기》 452에 보인다) 한 편이 있는데, 요호(妖狐)가 변화한 것을 말하였고, 마침내 지조를 지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니, “비록 지금의 부인 중에도 이보다 못한 자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세상을 풍자한 작품이다.
“오흥의 재사”(이하의 말) 심아지(沈亞之)〔18〕의 자는 하현(下賢)이고, 원화(元和) 10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태화(太和) 초에 덕주(德州) 행영사자(行營使者) 백기(柏耆)의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기가 죄를 지어 좌천되자, 아지 또한 남강위(南康尉)로 좌천되었고, 최종적으로 영주연(郢州掾)으로 생을 마쳤다 (약 8세기 말에서 9세기 중엽). 문집 12권이 지금 남아 있다. 아지는 문명(文名)이 있었고, 스스로 “아름답고 은밀한 생각을 창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 문집에는 전기문 3편(《심하현집(沈下賢集)》 권2, 권4, 또한 《광기(廣記)》 282 및 298에 보인다)이 있는데, 모두 화려한 필치로, 황홀한 감정을 서술하였고, 귀신과 죽음에서 부활하는 이야기를 좋아하여, 특히 동시대 문인들과 다른 취향을 보였다. 《상중원(湘中怨)》은 정생(鄭生)이 우연히 고아인 여인을 만나, 서로 의지하며 몇 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이별하는데, 스스로 “교룡 궁궐의 여동생”이라고 하며, 귀양 기한이 이미 찼다고 말하는 것을 기록하였고, 십여 년 후, 또 멀리서 화려한 배 안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으나,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일어” 마침내 간 곳을 잃었다. 《이몽록(異夢錄)》은 형봉(邢鳳)이 꿈에 미인을 보고, “활시위 굽히는” 춤을 보여주는 것을 기록하였고, 왕염(王炎)이 꿈에 오왕(吳王)을 오랫동안 모시다가, 갑자기 피리와 북소리를 듣고, 이에 서시(西施)를 장사지내는 것을 알고, 인하여 가르침을 받들어 만가(輓歌)를 지으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긴 것을 기록하였다. 《진몽기(秦夢記)》는 스스로 장안(長安)을 지나, 객지인 탁천(橐泉)의 여관에 묵는데, 꿈에 진나라 관리로서 공을 세우는 꿈을 꾸었고, 당시 농옥(弄玉)의 사위 소사(簫史)가 먼저 죽었으므로, 인하여 공주와 혼인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취미궁(翠微宮)이라고 이름 지은 것을 서술하였다. 진 목공(秦穆公)이 아지를 또한 매우 후하게 대하였는데, 어느 날, 공주가 갑자기 병 없이 죽자, 목공은 다시 아지를 만나려 하지 않고, 그를 돌려보냈다.
떠나려 할 때, 목공이 술자리를 크게 베풀고, 진나라 음악을 연주하고, 진나라 춤을 추니, 춤추는 자들이 손뼉을 치고 넓적다리를 치며 흐느끼니 소리에 불쾌한 기색이 있었고, 소리가 매우 원망스러웠다. …… 이윽고, 두 번 절하고 하직하고 떠나니, 목공이 다시 명하여 취미궁에 이르러 공주의 시녀들과 작별하게 하니, 다시 궁궐 안으로 들어갔을 때, 구슬과 비취가 부서져 푸른 섬돌 아래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창의 얇은 비단과 붉은 점은 여전하였고, 궁인들이 아지를 마주보며 울고 있었다. 아지는 감격하여 목이 메어 한참 있다가, 인하여 궁문에 시를 지어 말하기를, “임금은 많은 감회에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로부터 진나라 궁궐을 다시 기약하지 못하리라. 봄 경치는 스스로 진나라 임금을 잃은 것을 슬퍼하고, 꽃잎은 비처럼 떨어져 눈물은 연지처럼 붉구나.”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별하고, …… 깨어나 보니 여관에 누워 있었다.
다음 날, 아지가 친구 최구만(崔九萬)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니, 구만은 박릉(博陵) 사람으로, 옛일에 밝았는데, 나에게 말하기를, “《황람(皇覽)》에 이르기를, ‘진 목공이 옹(雍)의 탁천 기년궁(祈年宮) 아래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니, 그 신령이 의지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지는 다시 진나라 때의 지지를 구하여 보니, 구만이 말한 것과 같았다. 아아!
농옥은 이미 신선이 되었는데, 어찌 또 죽었겠는가?
진홍(陳鴻)이 글을 지으면, 말과 뜻이 강개하고, 옛일을 기리는 데 능하여,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것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였다. 홍은 어려서 사학(史學)을 배웠고, 정원 21년에 태상시(太常寺)에 급제하였고, 비로소 한가로이 지내며 뜻을 이루니, 이에 《대통기(大統紀)》 30권을 편찬하였고, 7년 만에 완성하였다(《당문수(唐文粹)》 95). 장안에 있을 때, 일찍이 백거이(白居易)〔19〕와 친구로 지냈고, 《장한가(長恨歌)》의 전(傳)을 지었다(《광기》 486에 보인다). 《신당지(新唐志)》 소설가류(小說家類)에 진홍의 《개원승평원(開元升平源)》〔20〕 1권이 있는데, 주석에 이르기를, “자는 대량(大亮)이고, 정원 주객낭중(主客郎中)이다”라고 하였으니, 혹은 또한 그 사람일 것이다 (약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중엽). 지은 것으로 또 《동성노부전(東城老父傳)》〔21〕(《광기》 485에 보인다)이 있는데, 가창(賈昌)이 병화 이후에, 태평성대를 회상하며, 영화의 성쇠를, 서로 비교하니, 그 말이 매우 슬프다. 《장한가전(長恨歌傳)》은 원화 초에 지었는데, 또한 개원 연간에 양귀비(楊妃)가 궁에 들어온 때부터 촉(蜀)에서 죽은 전말을 추술하였으니, 방법이 《가창전》과 유사하다. 양귀비 이야기는, 당나라 사람들이 본래 즐겨 이야기하였으나, 이처럼 조리 있게 질서정연하게 서술한 것은 드물었는데, 또 백거이가 지은 노래를 얻었으므로, 특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청나라 홍승(洪昇)이 지은 《장생전전기(長生殿傳奇)》〔22〕는, 곧 이 전과 노래의 뜻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전은 지금 여러 이본이 있는데, 《광기》 및 《문원영화》(794)에 실린 것은, 자구의 차이가 이미 많고, 명나라 사람들이 《문원영화》 뒤에 덧붙여 실은 《여정집(麗情集)》 및 《경본대곡(京本大曲)》〔23〕에서 나온 것은 더욱 다르니, 대개 후인(《여정집》의 저자인 장군방(張君房)?)이 또 더하고 덜한 것이다.
천보(天寶) 말년, 형 국충(國忠)이 승상(丞相)의 지위를 도둑질하고, 나라의 권력을 농락하였고, 안록산(安祿山)이 군대를 이끌고 대궐을 향하니, 양씨(楊氏)를 토벌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다. 동관(潼關)을 지키지 못하자, 황제가 남쪽으로 피난하였고, 함양(咸陽)을 나와,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니, 육군(六軍)이 머뭇거리며, 창을 잡고 나아가지 않았고, 수행하는 관리와 아전들이 말 앞에 엎드려, 조착(晁錯)을 죽여 천하에 사죄할 것을 청하니, 국충은 쥐의 꼬리를 잡고 물에 빠져, 길가에서 죽었다. 좌우의 뜻이 아직 풀리지 않자, 황제가 물으니, 당시 감히 말하는 자가 귀비(貴妃)를 죽여 천하의 원망을 막을 것을 청하니, 황제는 슬픈 얼굴을 하였으나, 다만 차마 그 죽음을 보지 못하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끌고 가게 하였다. 급히 우왕좌왕하다가, 마침내 척조(尺組, 끈) 아래에서 죽었다.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실린 내용)
천보 말년, 형 국충이 승상의 지위를 도둑질하고, 나라의 권력을 몰래 농락하였고, 오랑캐 호족이 연나라에서 난을 일으켜, 두 서울이 잇달아 함락되었고, 황제가 남쪽으로 피난하여, 수레가 도성 서문에서 백여 리를 나가니, 육군이 머뭇거리며, 창을 든 채 나아가지 않았고, 수행하는 관리와 아전들이 말 앞에 엎드려, 조착을 죽여 사죄할 것을 청하니, 국충은 쥐의 꼬리를 잡고 물에 빠져, 길가에서 죽었다. 좌우의 뜻이 아직 풀리지 않자, 당시 감히 말하는 자가 귀비를 죽여 천하의 노여움을 막을 것을 청하니, 황제는 슬픈 얼굴을 하였으나, 다만 차마 그 죽음을 보지 못하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끌고 가게 하였다. (귀비가) 황제 앞에 절하니, 고개를 돌리니 피눈물이 흘러내렸고, 금비녀와 비취 깃털 장식이 땅에 떨어지니, 황제가 직접 주워 담았다. 아아, 아름다운 마음과 고귀한 자질, 천자의 사랑을 받았지만, 부득이 척조 아래에서 죽었으니, 숙향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매우 아름다운 것은 반드시 매우 나쁜 일이 있다”고 하였고, 이연년(李延年)이 노래하기를 “나라를 기울이고 또 성을 기울인다”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여정집(麗情集)》 및 《대곡(大曲)》에 실린 내용)
백행간(白行簡)의 자는 지퇴(知退)이고, 그의 선조는 대개 태원(太原) 사람이고, 후에 한성(韓城)에 살다가, 또 하규(下邽)로 이사하였고, 거이(居易, 백거이)의 동생이다. 정원 말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문원외랑 주객낭중(主客郎中)에 이르렀고, 보력(寶曆) 2년(826) 겨울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는 대략 50여 세였다. 두 《당서(唐書)》 모두 《거이전(居易傳)》에 함께 실려 있다. 문집 20권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광기(廣記)》(484)에 그의 전기문 한 편이 실려 있는데, 이름하여 《이와전(李娃傳)》이라 한다. 형양(滎陽)의 명문 거족의 아들이 장안(長安)의 창녀 이와에게 빠져, 가난하고 병들어 곤궁에 이르러, 만랑(挽郎)으로 전락하였다가, 다시 이와에게 구제받고,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받아, 드디어 급제하여, 성도부참군(成都府參軍)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행간은 본래 문필이 뛰어났고, 이와의 이야기가 또한 현실적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하였으므로, 애절하고 감동적으로 볼 만하다. 원나라 사람들이 이미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곡강지(曲江池)》〔24〕를 지었고, 명나라 설근윤(薛近兖)은 이를 가지고 《수유기(繡襦記)》〔25〕를 지었다. 행간은 또 《삼몽기(三夢記)》 한 편이 있는데 (원본 《설부(說郛)》 4에 보인다), “저쪽의 꿈에서 간 곳이 이쪽에서 만나는 것, 혹은 이쪽에서 한 일이 저쪽의 꿈에 나타나는 것, 혹은 양쪽이 서로 꿈을 통하는 것” 세 가지 일을 들었는데, 모두 서술이 간결하고, 이야기가 매우 기이하니, 그 첫 번째 이야기가 특히 뛰어나다.
천후(天后, 측천무후) 때, 유유구(劉幽求)가 조읍승(朝邑丞)이었는데, 일찍이 사신으로 밤에 돌아오다가, 집에 10여 리 못 미쳐, 마침 불교 사찰이 있었는데, 길이 그 옆으로 나 있었고, 절 안에서 노래하고 웃는 소리가 화기애애한 것을 들었다. 절의 담장이 낮고 허술하여, 그 안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유가 몸을 숙여 엿보니, 10여 명의 남녀가 섞여 앉아, 여러 가지 음식과 술을 차려 놓고, 둘러싸고 함께 먹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그 가운데 앉아 이야기하고 웃는 것을 보았다. 유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였고, 오래 지나, 또 생각하니 마땅히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다시 버릴 수 없었다. 또 자세히 보니 용모와 말씨와 웃음이 다름이 없으니, 가서 살펴보려 하니, 절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고, 유가 기와 조각을 던져, 술 항아리를 맞추니, 깨져 흩어지고 달아나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유가 담장을 넘어 곧장 들어가니, 종들과 함께 대전과 행랑을 보니, 모두 사람이 없었고, 절 문은 예전과 같았다. 유는 더욱 이상하게 여겨, 말을 달려 돌아왔다.
집에 이르러 보니, 아내가 바야흐로 잠들어 있었고, 유가 온 것을 듣고, 이에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마치니, 아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방금 꿈에 수십 명과 함께 한 절에 갔는데, 모두 서로 알지 못하고, 대청에서 함께 밥을 먹는데, 밖에서 기와 조각을 던지는 사람이 있어, 밥상과 술잔이 어지러워졌고, 인하여 깨어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유 또한 그가 본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이른바 저쪽의 꿈에서 간 곳이 이쪽에서 만나는 것이다.
〔1〕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킨다. 한유(768—824)의 자는 퇴지(退之)이고, 당나라 하남(河南) 하양(河陽, 지금의 허난성 멍현) 사람이며, 일찍이 이부시랑(吏部侍郎) 등의 관직을 지냈다. 저술한 것으로 《한창려집(韓昌黎集)》이 있다. 유종원(773—819)의 자는 자후(子厚)이고, 당나라 하동(河東) 해현(解縣, 지금의 산시성 윈청시) 사람이며, 일찍이 유주자사(柳州刺史) 등의 관직을 지냈다. 저술한 것으로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당나라 산문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2〕 《태평광기(太平廣記)》는 유서(類書)로, 북송(北宋) 이방(李昉)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편집하였고,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에 완성되었으며, 500권이다. 이 책 제11편을 참고하라. 아래에서 말하는 “다른 책”은, 노신(魯迅)의 《당송전기집(唐宋傳奇集)》 <서례(序例)>에 따르면, 《설해(說海)》, 《고금일사(古今逸史)》, 《오조소설(五朝小說)》, 《용위비서(龍威秘書)》, 《당인설회(唐人說薈)》, 《예원군화(藝苑捃華)》 등을 가리킨다.
〔3〕 완적(阮籍)(210—263)의 자는 사종(嗣宗)이고, 삼국 시대 위나라 진류(陳留) 위씨(尉氏, 지금의 허난성 소속) 사람이며, 일찍이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지냈다. 그는 세속의 예법을 무시하였고, 저술한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은, 대인 선생의 허무하고 세속을 초월한 인생 태도를 서술하였다. 유령(劉伶)의 자는 백륜(伯倫)이고, 서진(西晉) 패국(沛國, 지금의 안후이성 쑤저우시) 사람이며, 위나라에서 건위참군(建威參軍)을 지냈다. 저술한 《주덕송(酒德頌)》은, 대인 선생의 “오직 술만 일삼는” 생활을 서술하였다. 도잠(陶潛)이 저술한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어부가 도화원에서 본 마을 사람들의 안녕하고 순박한 생활 정경을 서술하였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은, 오류 선생의 가난에 만족하고, 영화를 탐하지 않는 것을 서술하였다. 이 글들의 인물과 이야기는, 모두 작가의 허구에서 나온 것으로, 우언(寓言)에 가깝다.
〔4〕 왕적(王績)(585—644)의 자는 무공(無功)이고, 호는 동고자(東皋子)이며, 수나라 말 당나라 초 강주(絳州) 용문(龍門, 지금의 산시성 허진시) 사람이며, 일찍이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를 지냈다. 저술한 《취향기(醉鄉記)》는, 세상을 초월한 “술의 고향” 생활을 서술하였다. 한유의 《오자왕승복전(圬者王承福傳)》은, 미장이 왕승복의 태연자약하고, 홀로 자신을 수양하는 처세 태도를 서술하였다. 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은, 곽탁타가 나무를 심는 이야기를 서술하여, “자연에 맡기고, 본성에 따르는” 도리를 설명한다.
〔5〕 《고경기(古鏡記)》 왕도의 《고경기》 및 뒷부분에서 서술한 무명씨의 《보강총백원전(补江總白猿傳)》, 심기제의 《침중기(枕中記)》, 《임씨전(任氏傳)》, 심아지의 《상중원(湘中怨)》, 《이몽록(異夢錄)》, 《진몽기(秦夢記)》, 진홍의 《장한가전(長恨歌傳)》, 《개원승평원(開元升平源)》, 《동성노부전(東城老父傳)》, 백행간의 《이와전(李娃傳)》, 《삼몽기(三夢記)》 등은, 노신의 《당송전기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6〕 문중자(文中子)는 곧 왕통(王通)(584—617)이고, 자는 중엄(仲淹)이며, 왕적의 형이다. 일찍이 촉군사마서좌(蜀郡司馬書佐)를 지냈다. 저술한 것으로 《중설(中說)》 등이 있다. 죽은 후 그의 문인들이 사사로이 시호를 “문중자”라고 하였다.
〔7〕 구양흘(歐陽紇)(538—570)의 자는 봉성(奉聖)이고, 남조(南朝) 진(陳)나라 임상(臨湘, 지금의 후난성 창사시) 사람이며, 일찍이 안원장군(安遠將軍), 광주자사(廣州刺史)를 지냈다. 그의 아들 순(詢)(557—641)의 자는 신본(信本)이고, 일찍이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지냈다.
〔8〕 강총(江總)(519—594)의 자는 총지(總持)이고, 남조 진나라 제양(濟陽) 고성(考城, 지금의 허난성 란카오현) 사람이며, 진나라 때 상서령(尚書令)을 지냈고, 세상에서 강령(江令)이라고 불렀다.
〔9〕 장탁(張鷟)의 본적에 관해서, 두 《당서(唐書)》 <장천전(張薦傳)> 모두 “육택(陸澤)”이라고 하였다. 육택은 당나라 때 심주(深州)의 치소(治所)로, 지금의 허베이성 선현(深縣)에 있다.
〔10〕 막휴부(莫休符)는 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연간에 융주자사(融州刺史)를 지냈다. 저술한 《계림풍토기(桂林風土記)》는, 《신당서(新唐書)·예문지(藝文志)》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1권만 남아 있다.
〔11〕 《조야첨재(朝野僉載)》는 《신당서·예문지》에 2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지금 남아 있는 편집본은 6권으로, 주로 수나라와 당나라 두 시대의 조정과 민간의 숨겨진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용근봉수판(龍筋鳳髓判)》은 4권으로, 판결문 모음집으로, 문장이 모두 변려문(駢儷文)으로 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의 율령(律令)과 법식(程式)을 알 수 있다.
〔12〕 양염(楊炎)(727—781)의 자는 공남(公南)이고, 당나라 봉상(鳳翔) 천흥(天興, 지금의 산시성 펑샹현) 사람이며, 벼슬이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郎同平章事)에 이르렀다.
〔13〕 여기서 “정원(貞元)”은 “건중(建中)”으로 고쳐 써야 한다. 두 《당서》의 양염 본전에 따르면, 정원 연간에 양염은 이미 죽었고, 그가 죄를 얻어 좌천된 것은 건중 2년(781)이다.
〔14〕 《건중실록(建中實錄)》은 《신당서·예문지》에 10권으로, 《송사(宋史)·예문지》에 15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나라 덕종(德宗) 건중 연간의 연대기 순으로 기록한 대사기(大事記)이다.
〔15〕 《문원영화(文苑英華)》는 북송(北宋) 이방(李昉)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편찬하였다. 총 1천 권으로, 위로는 《문선(文選)》을 이었고, 남조 양나라 말부터 당나라 시대까지의 시와 문장을 수록하였다.
〔16〕 탕현조(湯顯祖)(1550—1616)의 자는 의잉(義仍)이고, 호는 약사(若士)이며, 명나라 임천(臨川, 지금의 장시성 소속) 사람이고, 일찍이 저장성(浙江省) 수이창현(遂昌縣) 지현(知縣)을 지냈다. 《한단기(邯鄲記)》는 총 36출(出)로, 심기제의 《침중기》와 비교하면, 내용상 더 많은 윤색이 있다. 또 《자채기(紫釵記)》, 《환혼기(還魂記)》(일명 《모란정(牡丹亭)》), 《남가기(南柯記)》를 지었는데, 《한단기》와 함께 《임천사몽(臨川四夢)》이라고 불린다.
〔17〕 《모영전(毛穎傳)》은 한유가 글에서 붓을 의인화하여 모영(毛穎)으로 삼아, 그의 내력을 서술하였고, 이를 빌려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토로하였다.
〔18〕 “오흥의 재사(吳興才人)”라는 말은 당나라 이하(李賀)의 《송심아지가(送沈亞之歌)》에 보인다. “오흥의 재사가 동풍을 원망하니, 복숭아꽃이 길에 가득하여 천 리에 붉구나.” 그 서문에는 “문인 심아지가 원화 7년에 글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오강(吳江)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심아지(781—832)의 자는 하현(下賢)이고, 당나라 오흥(吳興, 지금의 저장성 소속) 사람이다. 문장에 능하였고, 전기를 잘 지었다. 아래에서 말하는 “스스로 ‘아름답고 은밀한 생각을 창조할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은, 《심하현집》 권2 <위인찬걸교문(爲人撰乞巧文)>에 보인다.
〔19〕 백거이(白居易)(772—846)의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당나라 태원(太原, 지금의 산시성 소속) 사람이고, 벼슬이 형부상서(刑部尚書)에 이르렀다. 저술한 것으로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이 있다.
〔20〕 《개원승평원(開元升平源)》의 저자는 오긍(吳兢)이라는 설이 있는데, 요숭(姚崇)이 당명황(唐明皇)에게 간언한 열 가지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21〕 《동성노부전(東城老父傳)》은 또한 《가창전(賈昌傳)》이라고도 하는데, 저자는 진홍조(陳鴻祖)라는 설이 있다.
〔22〕 홍승(洪昇)(1645—1704)의 자는 방사(昉思)이고, 호는 패휴(稗畦)이며, 청나라 전당(錢塘,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시) 사람이고, 국자감생(國子監生)이었다. 저술한 《장생전전기(長生殿傳奇)》는, 50출(出)로,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든 것이다.
〔23〕 《여정집(麗情集)》은 20권이다. 저자는 장군방(張君房)으로, 북송(北宋) 안륙(安陸, 지금의 후베이성 소속) 사람이고, 벼슬은 상서도지위원외랑(尚書度支員外郎), 집현교리(集賢校理)를 지냈다. 이 책은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지금은 1권만 남아 있다. 《경본대곡(京本大曲)》은 자세하지 않다.
〔24〕 《곡강지(曲江池)》는 원나라 석군보(石君寶)가 지었다. 잡극(雜劇)으로, 4절(折)이다.
〔25〕 설근윤(薛近兖)은 대략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의 사람이다. 저술한 《수유기(繡襦記)》는, 4권, 41출이다. 명나라 서림(徐霖)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제9편 당의 전기문 (하)
그러나 전기 여러 작가들 중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는 두 사람이 있다. 그 하나는, 지은 작품은 많지 않으나 영향이 매우 크고, 명성 또한 매우 높은 원진(元稹)이고, 다른 하나는, 지은 작품은 많으나, 영향 또한 매우 크지만 명성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이공좌(李公佐)이다.
원진의 자는 미지(微之)이고, 하남(河南) 하내(河內) 사람이며,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에 보임되었고, 원화(元和) 초에 제책(制策)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혔고, 좌습유(左拾遺)에 제수되었고,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쳤고, 일로 인해 강릉(江陵)으로 좌천되었고, 또 괵주장사(虢州長史)로부터 소환되어, 점차 승진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승지학사(承旨學士)에 이르렀고, 공부시랑동평장사(工部侍郎同平章事)로 나아갔으나, 얼마 안 되어 재상에서 파면되었고, 동주자사(同州刺史)로 나갔다가, 또 월주(越州)로 바뀌어, 절동관찰사(浙東觀察使)를 겸임하였다. 태화(太和) 초에, 조정에 들어가 상서좌승검교호부상서(尚書左丞檢校戶部尚書) 겸 악주자사무창군절도사(鄂州刺史武昌軍節度使)가 되었고, 5년 7월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하루 만에 관사에서 죽으니, 당시 나이 53세였다(779—831). 두 《당서(唐書)》에 모두 전기가 있다. 원진은 젊었을 때부터 백거이(白居易)와 시를 주고받았고, 당시 시를 논하는 자들은 원백(元白)이라 일컬었으며, “원화체(元和體)”라고 불렀다. 그러나 전해지는 소설은, 오직 《앵앵전(鶯鶯傳)》 한 편뿐이다.
《앵앵전》은 곧 최(崔)씨와 장(張)씨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으로, 또한 《회진기(會真記)》라고도 한다. 대략 정원(貞元) 연간에, 장생(張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품과 용모가 온화하고 아름다웠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나이 23세가 되도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당시 장생이 포주(蒲州)에서 유람하는데, 보구사(普救寺)에 머물렀는데, 마침 최씨 과부가 장안(長安)으로 돌아가려다가, 포주를 지나, 또한 이 절에 머물렀는데, 그 친척 관계는 장생에게는 먼 친척의 외숙모뻘이었다. 마침 혼감(渾瑊)이 죽자, 군인들이 상을 틈타 포주 사람들을 크게 소란하게 하였고, 최씨는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장생은 포주 장수들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보호를 받게 하였고, 십여 일 후에 염사(廉使) 두확(杜確)이 와서 군대를 다스리니, 군대가 마침내 진정되었다. 최씨는 이로 인해 장생에게 매우 감사하였고, 이에 잔치를 베풀어, 그의 딸 앵앵(鶯鶯)을 보니, 장생은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최씨의 하녀 홍낭(紅娘)에게 《춘사(春詞)》 두 수를 부탁하여 마음을 전하니, 그날 밤 채색 종이를 얻어, 그 편에 제목을 쓰기를 《명월삼오야(明月三五夜)》라 하였고, 시에 이르기를, “달을 서쪽 누각 아래에서 기다리고, 바람을 맞아 문을 반쯤 여니, 담 너머 꽃 그림자가 움직이니, 혹시 아름다운 사람이 오는가 의심하네.”라고 하였다. 장생은 기뻐하고 놀랐고, 이윽고 최씨가 왔으나, 단정한 옷차림에 엄숙한 얼굴로, 그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꾸짖고, 마침내 가버리니, 장생은 실망한 채 오랫동안 지냈다. 며칠 밤 후, 최씨가 또 왔으나, 새벽이 되기 전에 가버렸고, 밤새도록 한마디 말도 없었다.
…… 장생은 날이 밝자 일어나, 스스로 의심하여 말하기를, “혹시 꿈인가?”라고 하니, 날이 밝자, 화장품이 팔에 있고, 향기가 옷에 있으며, 눈물 자국이 반짝이며 오히려 자리 위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후 또 십여 일이 지나도록, 소식을 다시 알 수 없었다. 장생은 《회진시(會真詩)》 30운을 지었는데, 마치기도 전에 홍낭이 마침 이르러, 이에 (시를) 주어, 최씨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다시 (장생을) 받아들여, 아침에는 숨어서 나갔고, 저녁에는 숨어서 들어왔고, 함께 예전에 서쪽 누각이라고 불렀던 곳에서 거의 한 달을 지냈다. 장생이 항상 최씨의 마음을 물으니, (홍낭이) 말하기를, “저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생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얼마 후, 장생이 장안으로 가게 되자, 먼저 마음을 전하니, 최씨는 완곡하게 거절하는 말은 없었으나, 근심하고 원망하는 모습이 사람을 감동시켰다. 떠나려는 날 저녁, 다시 볼 수 없었고, 장생은 마침내 서쪽으로 내려갔다. ……
다음 해, 과거에 불리하여, 장생은 마침내 서울에 머물렀고, 최씨에게 편지를 보내어 마음을 넓히려 하니, 최씨가 답장을 하였고, 장생은 그 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양거원(楊巨源)이 《최낭시(崔娘詩)》를 지었고, 원진 또한 장생의 《회진시》 30운을 이어서 지었고, 장생의 친구들은 듣는 이들 모두 놀라워하였고, 장생의 뜻 또한 끊어졌다. 원진은 장생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그 이야기를 물으니, 장생이 말하기를:
“대저 하늘이 내린 요물(尤物)이란, 그 몸에 요사스러움이 나타나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서 요사스러움이 나타난다. 만약 최씨의 딸이 부귀한 사람과 만나, 귀한 총애를 받아, 구름이 되고 비가 되지 않는다면, 이무기나 규룡이 될 것이니, 나는 그 변화를 알지 못하겠다. 옛날 은나라의 주왕(辛)과 주나라의 유왕(幽)은, 만승(萬乘)의 나라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 세력이 매우 두터웠으나, 한 여인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흩어지게 하고, 그 몸을 죽이니, 지금에 이르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나의 덕으로는 요물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이로써 정을 억누른 것이다.”
일 년여가 지나, 최씨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고, 장생 또한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고, 마침 그녀가 사는 곳을 지나다가, 외사촌 형으로 만나기를 청하니, 최씨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며칠 후, 장생이 떠나려 하자, 최씨는 시 한 수를 지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버려두니 지금 어찌해야 할지, 당시에는 또한 스스로 친했거늘, 장차 옛 마음을 가지고, 눈앞의 사람을 가엾이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다시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장생이 잘못을 잘 바로잡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원진은 장생에 자신을 빗대어, 자신이 직접 겪은 상황을 서술하였으니, 비록 문장이 뛰어난 수준은 아니나, 때때로 정취가 있으니, 또한 볼 만하나, 오직 마지막 부분에서 잘못을 꾸며 덮으려 하였으니, 마침내 나쁜 방향으로 떨어졌고, 이신(李紳), 양거원(楊巨源) 등의 무리가 이미 각각 시를 지어 장생을 칭찬하였고, 원진 또한 일찍이 시명(詩名)이 있었고, 후에 높은 벼슬을 지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이야기하니, 송나라 조덕린(趙德麟)은 이미 그 일을 취하여 《상조접련화(商調蝶戀花)》 열 곡을 지었고, 금나라에는 동해원(董解元)의 《현색서상(弦索西廂)》이 있고, 원나라에는 왕실보(王實甫)의 《서상기(西廂記)》, 관한경(關漢卿)의 《속서상기(續西廂記)》가 있고, 명나라에는 이일화(李日華)의 《남서상기(南西廂記)》, 육채(陸采)의 《남서상기》 등이 있고, 그 외에 《경(竟)》, 《번(翻)》, 《후(後)》, 《속(續)》이라고 이름 붙인 작품들이 더욱 많으니, 지금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그 일을 칭송하는 이들이 있다. 당나라 전기에서 남긴 것이 적지 않으나, 후에 이처럼 크게 유명해진 것은, 오직 이 작품과 이조위(李朝威)의 《유의전(柳毅傳)》뿐이다.
이공좌의 자는 전몽(顓蒙)이고, 농서(隴西) 사람이며, 일찍이 진사에 응시하였고, 원화 연간에 강회(江淮)에서 종사(從事)하였고, 후에 벼슬을 그만두고 장안으로 돌아왔다(지은 《사소아전(謝小娥傳)》에서 보인다). 회창(會昌) 초에, 또 양부(楊府)의 녹사(錄事)가 되었고, 대중(大中) 2년에, 일로 인해 두 번이나 관직을 삭탈당하였다(《당서》《선종기(宣宗紀)》에서 보인다). 대략 대종(代宗) 때 태어나, 선종(宣宗) 초까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약 770—850). 그 외의 일은 자세하지 않다.
《신당서(新唐書)》 《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에 천우비신(千牛備身) 공좌(公佐)가 있으니, 다른 한 사람이다. 그의 저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네 편인데,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광기(廣記)》 475에 실려 있고, 제목은 《순우분(淳于棼)》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 《당어림(唐語林)》에 의거하여 바로잡는다)이 가장 유명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평(東平) 순우분의 집은 광릉군(廣陵郡) 동쪽 10리에 있었고, 집 남쪽에 큰 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정원(貞元) 7년 9월에 술에 심하게 취하여 병이 나자, 두 친구가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와, 동쪽 행랑 아래에 눕히고, 자신들은 말을 먹이고 발을 씻으며 그를 기다렸다. 순우분은 베개에 눕자, 혼미하게 꿈을 꾸니, 두 명의 자색 옷을 입은 사자가 왕의 명을 받들어 초청한다고 하며, 문을 나가 수레에 올라, 옛 홰나무 구멍을 가리키며 가는 것을 보았다. 사자는 수레를 몰아 구멍으로 들어가니, 갑자기 산천이 나타났고, 마침내 큰 성에 들어갔는데, 성루 위에 금색 글씨로 “대괴안국(大槐安國)”이라고 쓰여 있었다. 순우분이 (성에) 이르자, 부마(駙馬)에 임명되었고, 다시 나가 남가태수(南柯太守)가 되었고, 군을 다스린 지 30년 동안, “풍속과 교화가 널리 퍼지고, 백성들이 노래를 불렀으며, 공덕비(功德碑)를 세우고, 생사우(生祠宇)를 지으니,” 왕이 매우 중히 여겼고, 높은 지위로 계속 승진시켰다. 순우분은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고, 후에 군대를 이끌고 단라국(檀蘿國)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고, 공주 또한 죽었다. 순우분은 태수 자리에서 파면되었으나, 위엄과 복력이 날로 성해지니, 왕이 의심하고 꺼려하여, 마침내 순우분의 교유를 금지하고, 사저(私第)에 머물게 하였고, 얼마 후 돌려보냈다. 깨어나 보니, “집의 아이들이 뜰에서 비질을 하고, 두 손님이 평상에서 발을 씻고 있었고, 저무는 해는 아직 서쪽 담장에 숨지 않았고, 남은 술잔은 오히려 동쪽 창가에 담겨 있었으니, 꿈속의 잠깐 동안이, 마치 한 세상을 보낸 것과 같았다.” 그 구상(構想)은 《침중기(枕中記)》와 같으나, 묘사가 더욱 자세하니, 명나라 탕현조(湯顯祖) 또한 이를 바탕으로 전기를 지으니 《남가기(南柯記)》라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하인을 시켜 구멍을 파서, 근원을 탐구하게 하니, 개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모두 앞의 꿈과 부합하였으니, 허구를 실증함으로써 환상을 보여주니, 여운이 그윽하니, 비록 사물의 이치를 다 밝히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침중기》가 미치지 못한 바이다.
…… 큰 구멍이 있었는데, 뿌리가 뚫려 밝게 드러나, 평상 하나를 들일 만하였다. 위에는 흙이 쌓여 성곽과 전대(殿台)의 형상을 이루었고, 수 섬의 개미가 그 안에 숨어 모여 있었다. 가운데 작은 단(壇)이 있었는데, 그 색깔이 붉은 듯하였고, 큰 개미 두 마리가 그곳에 있었는데, 흰 날개에 붉은 머리였고, 길이가 석 자나 되었고, 좌우에 큰 개미 수십 마리가 보좌하고 있었으니, 다른 개미들은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 왕이었다. 곧 괴안국의 도읍이다. 또 다른 구멍을 끝까지 쫓아가니, 곧장 남쪽 가지로 넉 자 높이 뻗어 있었고, 굽이굽이 사방으로 이어져 있었고, 또한 흙으로 만든 성과 작은 누각이 있었고, 여러 개미 또한 그 안에 있었다. 곧 순우분이 다스린 남가군이다. ……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마음에 감탄스러워하며, …… 두 손님에게 (구멍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고, 급히 예전처럼 막도록 하였다. …… 다시 단라국 정벌의 일을 생각하고, 또 두 손님에게 밖에서 자취를 찾아보도록 청하니, 집 동쪽 1리 밖에 오래된 마른 개울이 있었고, 옆에 큰 박달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등나무와 담쟁이덩굴이 얽혀, 위로는 해를 볼 수 없었고, 옆에 작은 구멍이 있었고, 또한 여러 개미가 그 사이에 숨어 모여 있었다. 단라국이 어찌 이곳이 아니겠는가? 아아! 개미의 신령하고 기이함도 오히려 다 헤아릴 수 없으니, 하물며 산에 숨고 나무에 엎드린 큰 것들의 변화야 어떠하겠는가? ……
《사소아전(謝小娥傳)》(《광기(廣記)》 491에 실려 있음)에는 소아(小娥)의 성은 사(謝)이고, 예장(豫章) 사람이며,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후에 역양(歷陽)의 협객 단거정(段居貞)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부부는 아버지와 함께 장사를 하였고, 강호를 오갔는데, 도둑에게 살해당하였고, 소아 또한 발을 다쳐 물에 빠졌으나, 다른 배가 건져 올려, 상원현(上元縣)까지 흘러가, 묘과사(妙果寺)의 비구니에게 의탁하여 살았다. 처음에, 소아는 꿈에서 아버지가 원수를 “수레 속의 원숭이 동쪽 문 풀”이라고 알려주었고, 또 꿈에서 남편이 원수를 “벼 속에서 하루 동안 남편이 달아나다”라고 알려주었는데, 널리 지혜로운 자를 구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는데, 공좌(公佐)에 이르러서야 이를 분별하여 말하기를, “수레 속의 원숭이는, 수레 차(車) 자에서 위아래 획을 각각 하나씩 빼면, 신(申) 자가 되고, 또 신(申)은 원숭이에 속하므로, 수레 속의 원숭이라고 한 것이다. 또 풀 아래에 문이 있고, 문 안에 동쪽이 있으니, 곧 난(蘭) 자이다. 또 벼 속에서 달아난다는 것은 밭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니, 곧 신(申) 자이다. 하루 남편이라는 것은, 남편 부(夫) 자 위에 한 획을 더하고, 아래에 해 일(日) 자가 있으니, 곧 춘(春) 자이다. 너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신란(申蘭)이고, 너의 남편을 죽인 자는 신춘(申春)이니, 충분히 명확하다.”라고 하였다. 소아는 이에 남자 옷으로 변장하여 머슴이 되었고, 과연 심양(潯陽)에서 두 도둑을 만나, 찔러 죽였고, 관에 알리니, 그 무리를 붙잡았고, 소아는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수수께끼를 풀어서 도둑을 잡은 것은, 매우 이치에 맞지 않으나, 당시에도 널리 전해졌고, 이복언(李復言)은 이미 그 이야기를 《속현괴록(續玄怪錄)》에 넣었고, 명나라 사람들은 이를 바탕으로 평화(平話)를 지었다.
나머지 두 편 중, 하나는 원래 제목이 자세하지 않고, 《광기》에는 《여강풍온(廬江馮媪)》(343)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강(董江)의 아내가 죽고 다시 장가들었는데, 풍온(馮媪)이 길가 한 방에서 여자아이가 우는 것을 보고, 후에 곧 죽은 사람의 무덤임을 알게 되었고, 동강이 듣고는 요망한 것으로 여겨, 풍온을 쫓아내니, 그 일이 매우 간단하므로, 문장 또한 화려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고악독경(古岳瀆經)》(《광기》 467에 실려 있고, 제목은 《이탕(李湯)》이라고 되어 있음)인데, 이탕(李湯)이라는 자는, 영태(永泰) 연간에 초주자사(楚州刺史)였는데, 어부가 거북산(龜山) 아래 물속에 큰 쇠사슬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이에 사람과 소를 시켜 끌어내니,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일어났고, “한 짐승이 모양이 원숭이와 같았는데, 흰 머리에 긴 갈기를 하고, 눈처럼 흰 이빨에 금색 발톱을 하고, 갑자기 언덕 위로 올라왔는데, 키가 5장 정도 되었고, 웅크린 모습이 원숭이와 같았으나, 두 눈은 뜨지 못하고, 멍한 듯하였고, …… 오래 지나서야 목을 길게 빼고 하품을 하니, 두 눈이 갑자기 뜨였는데, 빛이 번개와 같았고, 사람들을 돌아보니, 미친 듯이 화를 내려고 하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달아나니, 짐승 또한 천천히 쇠사슬을 끌고 소를 끌고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마침내 다시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이탕과 초주의 이름난 인사들은, 모두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고 깜짝 놀랐다. 후에 공좌가 옛 동오(東吳)를 방문하고, 동정호(洞庭湖)를 건너고, 포산(包山)에 오르고, 영동(靈洞)에 들어가, 신선 서적을 탐색하다가, 돌 굴 사이에서 《고악독경》 제8권을 얻으니, 이에 그 까닭을 알게 되었는데, 그 경전의 문자는 기이하고 고대하며, 편집 순서가 좀먹어 훼손되어, 자못 해석할 수 없었는데, 공좌가 도사(道士) 초군(焦君)과 함께 자세히 읽으니, 아래와 같다.
“우(禹)가 물을 다스릴 때, 세 번이나 동백산(桐柏山)에 이르렀는데, 거센 바람이 불고 우레가 치고, 돌이 울부짖고 나무가 울부짖고, 토백(土伯)이 강을 막고, 천로(天老)가 군대를 엄숙히 하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가 화를 내어, 모든 신령을 불러 모으고, 경룡(羹龍)에게 명령을 내리니, 동백산 등의 산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명령을 청하니, 우는 이에 홍몽씨(鴻濛氏), 장상씨(章商氏), 두로씨(兜盧氏), 이루씨(犁婁氏)를 가두었고, 이에 회수(淮水)의 수신(水神)인 무지기(無支祁)를 잡았는데, 말을 잘하고, 강회(江淮)의 얕고 깊음, 평야와 습지의 멀고 가까움을 분별하였고, 모양은 원숭이와 같았고, 들창코에 높은 이마를 하고, 푸른 몸에 흰 머리를 하고, 금빛 눈에 눈처럼 흰 이빨을 하고, 목은 백 척이나 뻗었고, 힘은 아홉 코끼리보다 뛰어났고, 때리고 치고 뛰어 달리는 것이 매우 빨랐고, 가볍고 날쌔어 순식간이었고, 쳐다보는 것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우는 동률(童律)을 주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고, 오목(烏木) 유(由)를 주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고, 경신(庚辰)을 주니, 제어할 수 있었다. 치비(鸱脾), 환호(桓胡), 목매(木魅), 수령(水靈), 산요(山祆), 석괴(石怪)가 울부짖으며 모여들어, 수천 년 동안, 경신이 싸움(혹은 창이라고도 함)으로 쫓아내었고, 목에 굵은 밧줄을 묶고, 코에 금방울을 꿰어, 회음(淮陰)의 거북산 아래에 옮겨, 회수가 영원히 편안히 흘러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경신 이후에는, 모두 이 형상을 그린 자는, 회수의 파도와 비바람의 어려움을 면하였다.”
송나라 주희(朱熹)는(《초사변증(楚辭辨證)》에서) 일찍이 승가(僧伽)가 무지기(無支祁)를 항복시킨 일을 속된 이야기라고 비판하였고, 나필(羅泌)(《노사(路史)》)은 《무지기변(無支祁辯)》을 지었고, 원나라 오창령(吳昌齡)의 《서유기(西遊記)》 잡극에는 “무지기는 그의 자매이다”라는 말이 있고, 명나라 송렴(宋濂) 또한 그 일을 간략하게 인용하여 글을 지었으니, 송나라와 원나라 이후로, 이 이야기가 끊임없이 유행하였고, 또한 민간에 널리 퍼져, 학자들이 비판하는 수고를 하게 하였으나, 사실은 단지 이공좌의 가설적인 작품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다만 후에 점차 우(禹)를 승가 또는 사주대성(泗洲大聖)으로 잘못 알게 되었고, 명나라 오승은(吳承恩)이 《서유기》를 지으면서, 또 그 신묘한 변화와 날쌘 모습을 손오공(孫悟空)에게 옮겨 놓았으니, 이에 우가 무지기를 항복시킨 이야기는 마침내 묻히게 되었다.
전기 문학은, 이 외에도 여전히 많은데, 비교적 두드러진 것으로는, 농서(隴西) 이조위(李朝威)가 지은 《유의전(柳毅傳)》(《광기》 419에 실려 있음)이 있는데, 유의(柳毅)가 과거에 낙방하고 상빈(湘濱)으로 돌아가려다가, 경양(涇陽)을 지나, 양을 치는 여자를 만났는데 용녀(龍女)라고 하며, 시부모와 남편에게 박해를 받아, 유의에게 아버지 동정군(洞庭君)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고, 동정군에게는 동생인 전당군(錢塘君)이 있는데 성격이 강하고 포악하여, 남편을 죽이고 딸을 데려왔고, 유의에게 아내로 삼으려 하였으나, 유의가 엄하게 거절하여 그만두었다. 후에 유의는 아내를 잃고, 금릉(金陵)으로 이사하여, 범양(范陽) 노씨(盧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곧 용녀였다. 또 남해(南海)로 이사하였고, 다시 동정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사촌 동생 설하(薛嘏)가 일찍이 호수에서 그를 만났고, 선약(仙藥) 50환을 얻었고, 이후로 마침내 소식이 끊어졌다. 금나라 사람들은 이미 그 일을 취하여 잡극으로 만들었고(동해원의 《현색서상》에서 언급됨), 원나라 상중현(尚仲賢)은 《유의전서(柳毅傳書)》를 지었고, 내용을 바꾸어 《장생자해(張生煮海)》를 지었고, 청나라 이어(李漁)는 또 절충하여 《신중루(蜃中樓)》를 만들었다. 또 장방(蔣防)이 지은 《곽소옥전(霍小玉傳)》(《광기》 487에 실려 있음)이 있는데, 이익(李益)이 20세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고, 장안에 들어가, 유명한 기생을 얻고자 생각하였는데, 이에 곽소옥(霍小玉)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렀고, 함께 지낸 지 2년이었다. 그 후 이익이 정현(鄭縣) 주부(主簿)에 제수되자, 굳게 혼인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익이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비로소 이미 노씨와 혼약이 정해진 것을 알았고, 어머니 또한 평소 엄격하였으므로, 이익은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마침내 소옥과 인연을 끊었다. 소옥은 오랫동안 이익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마침내 병들어 누웠고, 사람을 시켜 이익을 찾았으나, 이익 또한 감히 가지 못하였다.
어느 날 이익이 숭경사(崇敬寺)에 있었는데, 갑자기 황색 옷을 입은 호걸이 강제로 그를 데려가, 곽씨의 집에 이르니, 소옥이 병든 몸을 이끌고 만나, 그의 배신을 꾸짖고, 크게 통곡하며 죽었다. 이익은 그를 위해 흰 옷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매우 슬피 울었고, 후에 노씨와 혼인하였으나, 원귀에게 시달려, 마침내 의심 때문에 아내를 내쫓았고, 세 번 장가들었으나, 모두 그러하였다. 두보(杜甫)의 《소년행(少年行)》에 이르기를, “황색 옷 입은 젊은이는 자주 와야 마땅하건만, 집 앞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결을 보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또 허요좌(許堯佐)가 지은 《유씨전(柳氏傳)》(《광기》 485에 실려 있음)이 있는데, 시인 한굉(韓翃)이 이생(李生)의 아름다운 기생 유씨(柳氏)를 얻었는데, 마침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유씨를 법령사(法靈寺)에 맡기고 자신은 치청절도사(淄青節度使)의 서기(書記)가 되었고, 난이 평정된 후 다시 돌아오니, 유씨는 이미 번장(蕃將) 사힐리(沙叱利)에게 빼앗겼고, 치청의 여러 장수 중에 협객 허우후(許虞侯)라는 자가, 협박하여 한굉에게 돌려주었다.
그 일은 또 맹기(孟棨)의 《본사시(本事詩)》에도 보이니, 대개 사실 기록이다. 그 외에 유정(柳珵)(《광기》 275 《상청전(上清傳)》), 설조(薛調)(또 486 《무쌍전(無雙傳)》) 등이 있다.
황보매(皇甫枚)(또 491 《비연전(非煙傳)》), 방천리(房千里)(위와 같음 《양창전(楊娼傳)》) 등도 모두 창작한 바가 있다. 그러나 두광정(杜光庭)의 《구염객전(虬髯客傳)》(《광기》 193에 실려 있음)은 유독 널리 유행하였는데, 광정은 촉(蜀)의 도사(道士)로, 왕연(王衍)을 섬겼고,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대개 허황된 내용이 많으나, 이 전기는 양소(楊素)의 기생인 집홍불(執紅拂)이라는 여인이 이정(李靖)이 평민이었을 때 그를 알아보고, 함께 도망갈 것을 약속하였고, 도중에 또 구염객(虬髯客)을 만나, 그 비범함을 알아보고, 재물을 내놓고, 병법을 전수하여, 태종(太宗)을 도와 당나라를 일으키게 하였고, 자신은 해적을 이끌고 부여국(扶余國)에 들어가 그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즐겨,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으니, 이를 삼협(三俠)이라고 불렀고, 곡(曲)에서는 명나라 능초성(凌初成)이 《구염옹(虬髯翁)》을 지었고, 장봉익(張鳳翼)과 장태화(張太和)는 모두 《홍불기(紅拂記)》를 지었다.
위에 열거한 것 외에도, 작자를 알 수 없는 《이위공별전(李衛公別傳)》, 《이임보외전(李林甫外傳)》, 곽식(郭湜)의 《고력사외전(高力士外傳)》, 요여능(姚汝能)의 《안록산사적(安祿山事跡)》 등이 있는데, 저술한 본래의 의도는, 숨겨진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 있었거나, 전기가 아니었으나, 다만 문장을 서술함에 있어 가지가 많거나, 혹은 사소한 일을 주워 모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또한 매번 소설로 여겼다.
〔1〕 “원화체(元和體)” 《구당서(舊唐書)·원진전(元稹傳)》: 원진은 “태원(太原) 백거이(白居易)와 사이가 좋았다. 시를 잘 지었고, 풍태(風態)와 사물의 형상을 묘사하는 데 능하였으므로, 당시 시를 논하는 자들은 원(元)과 백(白)이라고 일컬었다. 의관을 갖춘 선비로부터, 시정의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외우고 읊었으니, ‘원화체’라고 불렀다.”
〔2〕 《앵앵전(鶯鶯傳)》 원진의 《앵앵전》 및 아래에 서술된 이조위(李朝威)의 《유의전(柳毅傳)》, 이공좌(李公佐)의 《사소아전(謝小娥傳)》,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 《여강풍온전(廬江馮媪傳)》, 《고악독경(古岳瀆經)》, 장방(蔣防)의 《곽소옥전(霍小玉傳)》, 유정(柳珵)의 《상청전(上清傳)》, 설조(薛調)의 《무쌍전(無雙傳)》, 황보매(皇甫枚)의 《비연전(非煙傳)》, 방천리(房千里)의 《양창전(楊娼傳)》, 두광정(杜光庭)의 《구염객전(虬髯客傳)》, 루쉰(魯迅)의 《당송전기집(唐宋傳奇集)》은 모두 수록한 바 있다.
〔3〕 양거원(楊巨源)의 자는 경산(景山)이고, 당나라 포주(蒲州)(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융지시(永濟市)) 사람이며, 벼슬은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이르렀다. 지은 《최낭시(崔娘詩)》는 《전당시(全唐詩)》 권333에 수록되어 있다.
〔4〕 《회진시(會真詩)》 30운은 《전당시》 권790에 수록되어 있다.
〔5〕 이신(李紳)(772—846)의 자는 공수(公垂)이고, 당나라 무석(無錫)(지금의 장쑤성(江蘇省)에 속함) 사람이며, 벼슬은 수복사(守僕射),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원진, 백거이와 교류가 매우 많았고, 《추석유집(追昔遊集)》을 지었다. 지은 《앵앵가(鶯鶯歌)》는, 일명 《동비백로서비연가위앵앵작(東飛伯勞西飛燕歌為鶯鶯作)》이라고도 하며, 《전당시》 권483에 보인다. 그 시에 이르기를, “백로는 느리게 날고 제비는 빠르게 나니, 수양버들은 금빛 꽃을 피워 해를 보고 웃네. 푸른 창가의 아리따운 아가씨 이름은 앵앵, 금빛 비녀 꽂은 시녀는 나이 열일곱. 황고는 하늘에 있고 어머니는 세상에 없으니, 쓸쓸한 모습은 흰 연꽃과 같은 자태. 문은 굳게 닫힌 쓸쓸한 절 안에, 꽃다운 풀과 꽃 피는 시절에 일찍이 나오지 않았네.”라고 하였다.
〔6〕 조덕린(趙德麟)(1051—1107)의 이름은 영치(令畤)이고, 호는 요복옹(聊復翁)이며, 송나라 철종(哲宗) 때 사람이다. 지은 《후청록(侯鲭錄)》은 8권으로, 내용은 대부분 사소한 이야기와 잡다한 일이고, 문학에 관한 논술도 있다. 권5는 원진의 《회진기(會真記)》에 대한 고증이 매우 자세하고, 그 일을 취하여 《상조접련화사(商調蝶戀花詞)》 10곡을 지었다. 서문에 이르기를, “지금 한가한 날에, 그 글을 자세히 보니, 번거롭고 외설스러운 것을 생략하고, 10장으로 나누었다. 매 장 아래에 사(詞)를 붙였으니, 혹은 그 글을 전부 베꼈고, 혹은 그 뜻만 취하였고, 또 따로 한 곡을 지어, 전에 실으니, 먼저 앞 편의 뜻을 서술하였고, 곡조는 《상조(商調)》라 하였고, 곡 이름은 《접련화(蝶戀花)》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사(詞)의 마지막에 이르기를 “낙천(樂天)이 말하기를 ‘천지가 영원해도 다할 때가 있거늘, 이 한은 끝없이 이어지리라’ 하였으니, 어찌 저들뿐이겠는가!
〔7〕 동해원(董解元)은 대략 금나라 장종(章宗) 때 사람이다. 지은 《현색서상(弦索西廂)》은, 일명 《서상기제궁조(西廂記諸宮調)》라고도 한다.
〔8〕 왕실보(王實甫)는 원나라 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北京)) 사람이다. 지은 잡극은 지금 14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3종이 남아 있는데, 《서상기》가 가장 유명하다.
〔9〕 관한경(關漢卿)의 호는 이재수(已齋叟)이고, 대략 13세기 전기에 태어나, 원나라가 남송(南宋)을 멸망시킨 후에 죽었다. 원나라 대도(지금의 베이징) 사람이다. 지은 잡극은 지금 60여 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8종이 남아 있다. 어떤 사람은 왕실보의 《서상기》는 단지 4본이고, 제5본은 관한경이 이어서 지은 것이라고 여긴다. 여기에서의 《속서상기(續西廂記)》는 곧 《서상기》 제5본을 가리킨다.
〔10〕 이일화(李日華)는 명나라 오현(吳縣)(지금의 장쑤성(江蘇省)에 속함) 사람이다. 지은 《남서상기(南西廂記)》의 이야기 개요는 왕실보의 《서상기》와 대략 같다. 《서상기》는 잡극이고, 《남서상기》는 전기이다.
〔11〕 육채(陸采)(1497—1537)의 원래 이름은 작(灼)이고, 자는 자현(子玄), 호는 천지(天池)이며, 명나라 장주(長洲)(지금의 장쑤성 우현(吳縣)) 사람이다. 《남서상기》 등 전기 5종을 지었다.
〔12〕 《경(竟)》은 곧 《경서상(竟西廂)》이고, 실제 이름은 《금서상(錦西廂)》이며, 청나라 주항종(周恒綜)이 지었다. 《번(翻)》은 곧 《번서상(翻西廂)》이고, 청나라 초기 연설자(研雪子)가 지었다. 《후(後)》는 곧 《후서상(後西廂)》이고, 청나라 석방(石龐), 설단(薛旦), 탕세영(湯世滢) 세 사람이 각각 같은 이름의 희곡 작품을 지었다. 《속(續)》은 곧 《속서상(續西廂)》이고, 청나라 차지좌(查繼佐)가 지었다.
〔13〕 이복언(李復言)의 이름은 량(諒)이고, 당나라 농서(지금의 간쑤성(甘肅省) 동남쪽) 사람이며, 일찍이 팽성령(彭城令), 소주자사(蘇州刺史) 등을 지냈다. 지은 《속현괴록(續玄怪錄)》은, 또 《속유괴록(續幽怪錄)》이라고도 하며, 내용은 대부분 기이한 이야기와 일화이다. 그중 《묘적니(妙寂尼)》는, 사소아(謝小娥)의 일을 기록하였다.
〔14〕 명나라 사람이 이를 바탕으로 평화(平話)를 지었다는 것은, 명나라 능몽초(凌濛初)가 지은 초각(初刻) 《박안경기(拍案驚奇)》 권19: 《이공좌교해몽중언(李公佐巧解夢中言),
〔15〕 주희(朱熹)(1130—1200)의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이며, 남송(南宋) 휘주 무원(婺源)(지금의 장시성(江西省)에 속함) 사람이고, 일찍이 비각수찬(秘閣修撰) 등의 벼슬을 지냈다. 지은 《초사변증(楚辭辨證)》은 2권으로, 내용은 옛 주석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승가(僧伽)가 무지기(無支祁)를 항복시킨 일을 속된 이야기라고 비판한 것은, 해당 책 권하(卷下)에 보인다. “지금 세상에서 속인들이 승가가 무지기를 항복시키고, 허손(許遜)이 교신정(蛟蜃精)을 벤 것과 같은 것은, 본래 근거가 없는데, 일을 좋아하는 자들이 드디어 거짓으로 지어내어 이를 사실로 만들었다. 이치를 밝히는 선비들은 모두 웃어넘길 수 있으니, 굳이 깊이 따질 필요도 없다.”
〔16〕 나필(羅泌)의 자는 장원(長源)이고, 송나라 여릉(廬陵)(지금의 장시성 지안(吉安)) 사람이다. 지은 《노사(路史)》는 47권으로, 내용은 주로 우리나라 전설 시대의 역사를 논술한 것이다. 《무지기변(無支祁辯)》은, 해당 책 《여론(余論)》 권3에 보인다.
〔17〕 《서유기(西遊記)》 잡극의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원나라 오창령(吳昌齡)이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원나라 말 명나라 초 양눌(楊訥)(자 경현(景賢))이 지은 것이다. 6본 24절이다. 제1절 《수손연주(收孫演咒)》에 이르기를, “저 오랑캐 원숭이의 기력은 하늘과 같으니, 옥황상제의 선주(仙酒)를 훔치고, 노자의 금단(金丹)을 훔쳤으니, 그는 저 마군(魔君) 중에서 제일을 차지하였으니, 그는 여산노모(驪山老母)의 형제이고, 무지기는 그의 자매이다.”라고 하였다.
〔18〕 송렴(宋濂)(1310—1381)의 자는 경렴(景濂), 호는 잠계(潛溪)이며, 명나라 포강(浦江)(지금의 저장성(浙江省)에 속함) 사람이고, 벼슬은 학사승지 지제고(學士承旨知制誥)에 이르렀다. 그가 무지기에 대해 논술한 것은, 지은 《송학사전집(宋學士全集)》 권28 《산고악독경(刪古岳瀆經)》에 보인다.
〔19〕 동해원의 《현색서상》 권1에 따르면, “옛 현인들의 악부(樂府)는 듣기에 마땅하지 않고, 제궁조(諸宮調)에서는 도리어 뛰어나다. …… 이별한 혼령의 여인도 아니고, 죽을 먹으러 온 최호(崔護)도 아니고, 쌍점(雙漸)의 예장성(豫章城)도 아니고, 유의(柳毅)가 편지를 전한 것도 아니다.”
〔20〕 상중현(尚仲賢)은 원나라 진정(真定)(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정딩(正定)) 사람이고, 일찍이 강절행성(江浙行省)의 관리(官吏)를 지냈다. 지은 잡극은 지금 11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유의전서(柳毅傳書)》 등 3종이 남아 있다.
〔21〕 《장생자해(張生煮海)》는 하나는 상중현(尚仲賢)이 지었으나, 이미 실전되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원나라 이호고(李好古)가 지은 것이다. 줄거리는 장우(張羽)와 용녀(龍女)가 서로 사랑하였으나, 용왕(龍王)에게 막히고, 후에 신선(神仙)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부부가 된다는 내용이다.
〔22〕 이어(李漁)(1611—약 1679)의 호는 입옹(笠翁)이고, 청나라 난계(蘭溪)(지금의 저장성(浙江省)에 속함) 사람이다. 지은 《신중루(蜃中樓)》의 줄거리는 동정(洞庭), 동해(東海) 두 용녀가 신기루에서 놀다가 유의(柳毅), 장우(張羽)를 만나, 각각 서로 사랑하여 혼인한다는 내용이다.
〔23〕 장방(蔣防)의 자는 자미(子微)이고, 당나라 의흥(義興)(지금의 장쑤성 이싱(宜興))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24〕 두보(杜甫)(712—770)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당나라 공현(鞏縣)(지금의 허난성(河南省)에 속함) 사람이며, 일찍이 좌습유(左拾遺)를 지냈다. 지은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있다. 지은 《소년행(少年行)》 제2수(第二首)의 원시는 “둥지에서 새끼를 이끌고 모두 가 버리니, 강가의 꽃은 열매를 맺었으나 얼마 남지 않았네. 황색 옷 입은 젊은이는 자주 와야 마땅하건만, 집 앞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결을 보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다.
〔25〕 허요좌(許堯佐)는 당나라 헌종(憲宗) 때 사람이며, 일찍이 태자교서랑(太子校書郎),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
〔26〕 맹기(孟棨)는 맹계(孟啟)라고도 쓰며, 자는 초중(初中)이다. 당나라 사람이며, 사훈낭중(司勳郎中)을 지냈다. 지은 《본사시(本事詩)》는 1권으로, 당나라 시인들의 일화와 민간의 전설을 기록하였다.
〔27〕 유정(柳珵)은 당나라 포주 하동(蒲州河東)(지금의 산시성 융지(永濟)) 사람이다. 지은 《상청전(上清傳)》은 당나라 재상 두참(竇參)이 총애하는 비첩 상청(上清)이 당 덕종(德宗)에게 하소연하여, 두참의 억울함을 풀어준 이야기를 썼다. 설조(薛調)는 당나라 하중 보정(河中寶鼎)(지금의 산시성 완룽(萬榮)) 사람이며, 일찍이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지냈다. 지은 《무쌍전(無雙傳)》은 유무쌍(劉無雙)과 왕선객(王仙客)의 사랑 이야기를 썼다. 황보매(皇甫枚)의 자는 준미(遵美)이고, 당나라 안정(安定)(지금의 간쑤성 징촨(涇川)) 사람이며, 일찍이 여주(汝州) 노산현령(魯山縣令)을 지냈다. 지은 《삼수소두(三水小牘)》 등이 있다. 《비연전(非煙傳)》은 보비연(步非煙)과 조상(趙象)이 서로 사랑하여,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은 이야기를 썼다. 방천리(房千里)의 자는 곡거(鵠舉)이고, 당나라 하남(河南)(지금의 허난성 뤄양(洛陽)) 사람이며, 일찍이 국자박사(國子博士), 고주자사(高州刺史)를 지냈다. 지은 《양창전(楊娼傳)》은 장안(長安)의 명기(名妓) 양창(楊娼)이 영남(嶺南)의 장수 갑(甲)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장수가 죽자, 양창이 죽음으로 보답한 이야기를 썼다.
〔28〕 두광정(杜光庭)(850—933)의 자는 성빈(圣宾), 스스로 호를 동영자(东瀛子)라 하였으며, 당나라 말 오대(五代) 처주(处州) 진운(缙云)(지금의 저장성(浙江省)에 속함) 사람이다. 일찍이 천태산(天台山)에서 도를 배웠고, 당나라에서는 내정공봉(內廷供奉)을 지냈으며, 촉(蜀)에 들어간 후에는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
〔29〕 능초성(凌初成)(1580—1644)은 곧 능몽초(凌濛初)이며, 명나라 오정(乌程)(지금의 저장성 우싱(吴兴)) 사람이고, 일찍이 상하이현승(上海縣丞), 서주통판(徐州通判)을 지냈다. 이 책 제21편을 참고하라. 지은 잡극 《구염옹(虬髯翁)》의 정식 명칭은 《구염옹정본부여국(虬髯翁正本扶余国)》이고, 4절이다.
〔30〕 장봉익(张凤翼)(1527—1613)의 자는 백기(伯起), 호는 영허(灵墟)이며, 명나라 장주(长洲)(지금의 장쑤성 우현(吴县)) 사람이다. 희곡 작품은 지금 5종이 남아 있다. 《홍불기(红拂记)》는 총 34출이다. 장태화(张太和)의 자는 유우(幼于), 호는 병산(屏山)이며, 명나라 전당(钱塘)(지금의 저장성 항저우(杭州)) 사람이다. 지은 《홍불기(红拂记)》는 지금 실전되었다.
〔31〕 《이위공별전(李卫公别传)》은 당나라 이복언(李復言)이 지었다. 《태평광기(太平广记)》 권418에 수록되었고, 제목은 《이정(李靖)》이며, 글 말미에 주석에 “《속현괴록(续玄怪录)》에서 나옴”이라고 되어 있다.
〔32〕 《이임보외전(李林甫外传)》 1권은, 《고금설해(古今说海)》, 엽덕휘(叶德辉)가 편집한 《당개원소설육종(唐开元小说六种)》 등의 책에서 보인다.
〔33〕 곽식(郭湜)의 생평 사적은 자세하지 않다. 지은 《고력사외전(高力士外传)》 1권은, 명나라 고원경(顾元庆)의 《고씨문방소설(顾氏文房小说)》, 《당개원소설육종》 등의 책에서 보인다.
〔34〕 요여능(姚汝能)은 화음위(华阴尉)를 지냈고, 그 외의 일은 자세하지 않다. 지은 《안록산사적(安禄山事迹)》은 《신당서(新唐书)·예문지(艺文志)》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뮤취안쑨(缪荃孙)이 편집한 《우향령습(藕香零拾)》, 《당개원소설육종》 등의 책에서 보인다.
제10편 당나라의 전기집 및 잡저
전기를 지은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은, 당나라 때 많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우승유(牛僧孺)의 《현괴록(玄怪錄)》이다. 승유의 자는 사암(思黯)이고, 본래 농서(隴西) 적도(狄道) 사람이며, 완(宛)과 엽(葉) 사이에 거주하였고, 원화(元和) 초에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대책(對策)에서 1등을 하였는데, 실정을 지적하는 조목이 재상을 꺼리지 않는 직언이었으므로, 시험관들까지 모두 좌천되었고, 승유는 이궐위(伊闕尉)로 좌천되었다.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점차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렀고, 후에 호부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戶部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고, 무종(武宗) 때 여러 번 좌천되어 순주장사(循州長史)가 되었고,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비로소 소환되어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고, 대중(大中) 2년에 죽으니, 태위(太尉)로 추증되었고, 나이 69세였다(780—848), 시호는 문간(文簡)이었고, 두 《당서(唐書)》에 전기가 있다. 승유는 성격이 고집스럽고 괴이한 것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지은 《현괴록》 10권은 지금 이미 실전되었으나,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인용된 것이 31편이나 남아 있어, 대략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글은 다른 전기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때때로 사람들에게 지어낸 것임을 보여주어, 믿음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이공좌(李公佐)와 이조위(李朝威) 같은 사람들은, 단지 뛰어난 문장 솜씨를 드러내는 데 그쳤으므로, 오히려 일의 허황됨을 말하려 하지 않았는데, 승유에 이르러서는 나아가 구상(構想)의 허황됨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였으므로, 일부러 꾸며낸 흔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원무유(元無有)》가 바로 그 한 예이다.
보응(寶應) 연간에, 원무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항상 늦은 봄에 홀로 유양(維揚)의 교외를 거닐었다. 저녁때가 되어, 비바람이 크게 내렸는데, 당시 병란 이후라, 인가가 많이 도망가서, 길가 빈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비가 그치고, 기울어진 달이 막 뜨자, 원무유가 북쪽 창가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서쪽 행랑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달빛 속에 네 사람이 보이는데, 옷차림이 모두 달랐고, 서로 이야기하고 시를 읊으며 매우 즐거워하였는데, 이에 말하기를, “오늘 저녁은 가을 같고, 바람과 달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이 어찌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평생의 일을 펼치겠는가?” …… 읊는 소리가 낭랑하자, 원무유가 듣고 모두 알게 되었다. 그중 옷차림이 키가 큰 사람이 먼저 시를 읊어 말하기를, “제나라 비단과 노나라 명주가 서리나 눈 같으니, 맑고 높은 소리는 내가 내는 것이라.” 하였고, 그 두 번째 검은 옷을 입은 키가 작고 초라한 사람은 시를 읊어 말하기를, “귀한 손님과 좋은 모임 맑은 밤에, 밝고 밝은 등불을 내가 들 수 있다.” 하였고, 그 세 번째 낡은 누런 옷을 입은 사람도 키가 작고 초라하였는데, 시를 읊어 말하기를, “차갑고 맑은 샘을 아침에 길으니, 칡 넝쿨로 서로 이어져 항상 드나드네.” 하였고, 그 네 번째 낡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시를 읊어 말하기를, “땔나무를 때고 샘물을 저장하여 서로 달이니, 다른 사람의 입과 배를 채우느라 내가 수고하네.” 하였다. 원무유 또한 네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네 사람 또한 원무유가 집 안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번갈아 서로 칭찬하였는데, 그 스스로 뽐내는 모습을 보니, 비록 완적(阮籍)의 《영회시(詠懷詩)》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듯하였다. 네 사람은 날이 밝아서야 옛 곳으로 돌아갔다.
원무유가 찾아보니, 집 안에는 낡은 절구와 등잔대와 물통과 깨진 솥만 있었다. 이에 네 사람이 곧 이 물건들이 변한 것임을 알았다. (《광기》 369)
우승유(牛僧孺)가 조정에 있을 때, 이덕유(李德裕)와 각기 문호를 세워 당쟁을 벌였는데, 〔1〕 그가 소설 짓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덕유의 문객 위관(韦瓘)이 이에 우승유의 이름을 빌려 《주진행기(周秦行紀)》〔2〕를 지어 그를 모함하였다.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자신이 진사(進士)에 낙방하고 완(宛)과 엽(葉)으로 돌아가던 중, 이궐(伊闕) 명고산(鳴皋山) 아래를 지나다가, 저물어 길을 잃어, 박태후(薄太后)의 사당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비빈(妃嬪)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태후가 지금 천자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지금 황제는 선제의 장자입니다.’라고 하니, 태진(太真)이 웃으며 말하기를, ‘심파아(沈婆兒)가 천자가 되었구나. 정말 이상하다!’”라고 하였다. 다시 시를 읊었는데, 마지막에는 소군(昭君)이 시침(侍寢)하는 내용까지 이르렀고, 날이 밝아 이별하고 떠났는데,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였다.”(자세한 내용은 《광기(廣記)》 489 참조) 덕유는 이로 인해 논설을 지어, 승유의 성(姓)이 도참(圖讖)에 응하고, 《현괴록》 또한 많은 은어(隱語)를 지어, 백성을 미혹시키려 한다고 하였고, 《주진행기》는 몸소 후비(后妃)와 몰래 만난 것을 썼으니, 자신의 신분이 신하의 모습이 아님을 증명하려 한 것이며, “나아가 덕종(德宗)을 희롱하여 심파아라고 하고, 대종(代宗)의 황후를 심파라고 하였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뼈가 오싹하게 하니, 가히 그 임금에게 무례함이 심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반역이 만약 당대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자손에게서 일어날 것이므로, “모름지기 ‘태뢰(太牢)’로 하여금 젊은이와 어른을 모두 법에 두어야, 형벌이 공정해지고 사직이 편안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자세한 내용은 《이위공외집(李衛公外集)》 4 참조) 〔3〕 예로부터 소설을 빌려 사람을 모함하는 일은, 이것이 가장 괴이한 일인데, 당시 세상의 말도 역시 행해지지 않았다. 오직 승유는 이미 재능과 명성이 있었고, 또한 높은 벼슬을 지냈으므로, 그 저작이 세상에 널리 전해졌다. 모방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는데, 이복언(李復言)은 《속현괴록(續玄怪錄)》 10권을 지었는데, “신선술과 감응 두 문으로 나누었고”, 설어사(薛漁思)〔4〕는 《하동기(河東記)》 3권을 지었는데, “또한 괴이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서문에 이르기를 우승유의 책을 이은 것이라고 하였다.”(모두 송나라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 13 참조) 또 《선실지(宣室志)》〔5〕 10권을 지었는데, 신선과 귀신의 영이한 사적을 기록한 사람은, 장독(張讀)의 자는 성붕(聖朋)인데, 장작(張鷟)의 후손이자 우승유의 외손이다.(《당서(唐書)》 《장천전(張薦傳)》 참조) 후세 사람들은 또한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이 많았으므로, 그 흐름을 따랐다.”라고 의심하였다.(청나라 《사고제요(四庫提要)》 자부 소설가류 3)
그 밖에도 무공(武功) 사람 소악(蘇鶚)은 《두양잡편(杜陽雜編)》〔6〕을 지었는데, 당나라 시대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먼 지방의 진귀한 사물을 과장하여 묘사한 것이 많고, 참료자(參寥子) 고언휴(高彥休)는 《당궐사(唐闕史)》〔7〕를 지었는데, 비록 간혹 사실 기록도 있지만, 또한 꿈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이야기를 말하였으므로, 모두 전기이지만, 약간 변형되었다. 강병(康骈)의 《극담록(劇談錄)》〔8〕에 이르러서는 점차 세상의 일들을 많이 다루었고, 손기(孫棨)의 《북리지(北里志)》〔9〕는 오로지 기생들의 이야기를 서술하였고, 범서(范摅)의 《운계우의(雲溪友議)》〔10〕는 특히 시가를 중시하였으니, 비록 사람의 감정에 가까워지고, 영괴한 이야기와는 멀어진 듯하지만,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은 신선하고, 문장을 쓰는 것은 유려하여, 여전히 전기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배형(裴铏)이 책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바로 《전기(傳奇)》라고 칭하였는데, 신선과 괴이하고 기이한 일을 크게 서술하였고, 또한 많이 꾸며내어, 보는 사람을 미혹시켰다. 형은 회남절도부대사(淮南節度副大使) 고병(高骈)의 종사(從事)였는데, 병이 후에 뜻을 잃고, 더욱 신선을 좋아하다가, 마침내 반역하여 죽었으니, 이는 아마도 당시 아첨하는 글을 지은 것이지, 본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섭은낭(聶隱娘)이 승묘수공공아(勝妙手空空兒)의 일을 이긴 이야기가 바로 이 책에서 나왔다.(글은 《광기》 194 참조) 명나라 사람들이 이를 취하여 위작인 단성식(段成式)의 《검협전(劍俠傳)》에 넣어, 유행이 널리 퍼졌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소위 문인이라는 사람들에게 향유되고 있다.
단성식(段成式)의 자는 가고(柯古)이고, 제(齊)나라 임치(臨淄) 사람이며, 재상 문창(文昌)의 아들인데, 음보(蔭補)로 교서랑(校書郎)이 되었고, 여러 번 승진하여 길주자사(吉州刺史)에 이르렀고, 대중(大中) 연간에 서울로 돌아왔고, 벼슬은 태상소경(太常少卿)에 이르렀고, 함통(咸通) 4년(863) 6월에 죽었다. 《신당서(新唐書)》는 단지현(段志玄)의 전기에 덧붙여 기록되어 있다.(나머지는 《유양잡조(酉陽雜俎)》 및 《남초신문(南楚新聞)》 참조) 성식의 집에는 기이한 글과 비장된 서적이 많았고, 널리 배우고 기억력이 뛰어났고, 특히 불교 서적에 깊었고,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였고, 또한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사구(詞句)는 심오하고 박식한 것이 많아, 세상에서 진귀하게 여겼고, 그 소설에는 《여릉관하기(廬陵官下記)》〔12〕 2권이 있었는데, 지금은 실전되었고, 《유양잡조》 20권은 모두 30편인데, 지금 모두 전해지고 있고, 아울러 《속집(續集)》 10권이 있다. 권1에는, 혹은 비서(秘書)를 기록하였고, 혹은 기이한 일을 서술하였는데, 신선, 부처, 사람, 귀신에서부터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실었고, 종류별로 모아 놓았으니, 마치 유서(類書)와 같고, 비록 근원은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서 나왔지만, 당나라 때에는, 오히려 독창적인 작품과 같았다. 매 편마다 각기 제목이 있는데, 또한 매우 은밀하고 편벽하니, 도술을 기록한 것은 《호사(壺史)》라 하고, 불경을 베껴 해석한 것은 《패편(貝編)》이라 하고, 장례를 서술한 것은 《시준(尸窀)》이라 하고, 괴이한 일을 기록한 것은 《낙오기(諾皋記)》라 하였는데, 내용을 선택하고 서술하는 것 또한 매우 고풍스럽고 뛰어나, 그 제목에 부합한다.
하계(夏啓)는 동명공(東明公)이 되고, 문왕(文王)은 서명공(西明公)이 되고, 소공(邵公)은 남명공(南明公)이 되고, 계찰(季札)은 북명공(北明公)이 되니, 사시(四時)가 사방(四方)의 귀신을 주관한다. 지극히 충성스럽고 지극히 효성스러운 사람은, 목숨이 끝나면 모두 지하의 주인이 되는데, 140년이 지나면, 이에 하선(下仙)의 가르침을 받고, 대도(大道)를 받는다. 지극히 높은 성인의 덕이 있는 사람은, 목숨이 끝나면 삼관서(三官書)를 받아, 지하의 주인이 되는데, 1000년이 지나면 삼관의 오제(五帝)로 바뀌고, 다시 1400년이 지나야 비로소 태청(太清)을 유행하며, 구궁(九宮)의 중선(中仙)이 된다.
(권2 《옥격(玉格)》)
처음 하늘에서 태어나는 자는 다섯 가지 모습이 있으니, 하나는 빛이 몸을 덮어 옷이 없고, 둘은 사물을 보고 희한한 마음을 내고, 셋은 얼굴이 수척하고, 넷은 의심하고, 다섯은 두려워한다. (권3 《패편(貝編)》)
나라 초기에 승려 현장(玄奘)이 서인도에 가서 경전을 가져왔는데, 서역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성식이 왜국(倭國)의 승려 금강삼매(金剛三昧)를 만났는데, 일찍이 중천사(中天寺)에 갔었다고 말하였는데, 절 안에는 현장의 마혜(麻屩) 및 수저 등을 그린 그림이 많았는데, 채색 구름을 타고 있었는데, 대개 서역에는 없는 것인데, 매번 재일(齋日)에, 문득 숭배한다고 하였다. (위와 같음)
천옹(天翁)의 성은 장(張)이고, 이름은 견(堅), 자는 자갈(刺渴)이며, 어양(漁陽)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구속받기를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다. 항상 그물을 쳐서 흰 참새 한 마리를 잡았는데, 아끼고 길렀는데, 꿈에 유천옹(劉天翁)이 꾸짖는 것을 보고, 매번 죽이려 하였는데, 흰 참새가 문득 장견에게 알려주어, 장견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비하니, 끝내 해치지 못하였다. 천옹이 드디어 내려와 살펴보니, 장견이 성대하게 빈주(賓主)의 예절을 갖추니, 이에 몰래 천옹의 수레를 훔쳐 타고, 흰 용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하늘에 오르니, 천옹이 남은 용을 타고 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장견이 이미 현궁(玄宮)에 이르러, 백관(百官)을 바꾸고, 북문(北門)을 막고, 흰 참새를 상경후(上卿侯)로 봉하고, 흰 참새의 자손은 아래 땅에서 나지 않도록 고쳤다. 유옹은 다스림을 잃고, 오악(五岳)을 배회하며 재앙을 일으키니, 장견이 이를 근심하여, 유옹을 태산태수(泰山太守)로 삼아, 생사의 기록을 주관하게 하였다. (권14 《낙오기(諾皋記)》)
대력(大曆) 연간에, 위남(渭南)에 사는 선비 장(莊)씨가 서울에서 병들어 죽으니, 그의 아내 유씨(柳氏)가 장씨의 집에 거처하였다. …… 선비가 재계(齋戒)하는 날, 저녁에, 유씨가 평상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는데, 말벌이 그 얼굴 주위를 맴돌자, 유씨가 부채로 쳐서 땅에 떨어뜨리니, 호두였다. 유씨가 급히 주워, 손바닥에 놓고 가지고 놀았는데, 이윽고 커져, 처음에는 주먹만 하더니, 사발만 해지고, 놀라 돌아보는 사이에, 이미 쟁반만 해졌다. 갑자기 두 조각으로 나뉘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벌이 흩어지는 소리와 같더니, 갑자기 유씨의 머리에 합쳐졌다. 유씨는 머리가 부서지고, 이빨이 나무에 박혔다. 그 물건은 이에 날아가 버렸는데, 결국 어떤 괴물인지 알지 못하였다. (위와 같음)
또 문신(文身)에 대한 일을 모은 것이 있는데 《경(黥)》이라 하고, 매를 기르는 방법을 서술한 것이 있는데 《육확부(肉攫部)》라 하고, 《속집(續集)》에는 《폄오(貶誤)》가 있어 고증(考證)을 모았고, 《사탑기(寺塔記)》가 있어 가람(伽藍)을 기록하였으니, 관련된 것이 이미 넓으므로, 많은 진귀한 것이 있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며 가지고 놀았고, 전기와 함께 나란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성식은 시를 잘 지었는데, 심오하고 번잡한 것이 그의 다른 저술과 같았는데, 당시에 기주(祁) 사람 온정균(溫庭筠)〔13〕의 자는 비경(飛卿)이고, 하내(河內) 이상은(李商隱)〔14〕의 자는 의산(義山)인데, 또한 모두 이러한 것으로 서로 자랑하였으니, “36체(三十六體)”〔15〕라고 불렀다.
온정균 또한 소설 3권이 있는데 《간자(干子)》라 하는데, 남은 글이 《광기》에 보이는데, 단지 사실만 기록하여, 간략하여 볼 만한 것이 없으니, 그의 시부(詩賦)의 화려함과는 같지 않다. 이상은은 소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지금 《의산잡찬(義山雜纂)》 1권이 있는데, 《신당지(新唐志)》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송나라 진진손(陳振孫)〔16〕(《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 11)은 이상은이 지은 것이라고 여겼는데, 책은 모두 저속한 세상 이야기와 비속한 일을 모아, 종류별로 따랐으니, 비록 자질구레한 것을 모으는 데 그쳤지만, 또한 세상일의 은밀한 부분을 꿰뚫고 있으니, 단지 웃음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살풍경(殺風景)
소나무 아래에서 호령하며 꽃구경하니 눈물이 나고 이끼 위에 자리를 펴고 늘어진 버드나무를 베어 버리네.
꽃 아래에서 바지를 말리고 봄놀이에 무거운 돌기둥을 싣고 달빛 아래에서 돌을 묶고 불을 피우네.
걸어서 장군이 산을 등지고 누각을 짓고 과수원에 채소를 심고 꽃架 아래에서 닭과 오리를 기르네.
추한 모습
손님으로 가서 남과 다투어 욕하고 …… 손님으로 가서 상을 엎어 버리고 ……
장인 장모에게 음란한 노래를 부르고 먹다 남은 생선과 고기를 쟁반에 되돌려 놓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드러누워 젓가락을 국그릇 위에 가로놓네.
십계(十誡)
술에 취하도록 마시지 말 것이며 어두운 곳에서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 것이며 남에게 음흉하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이며
홀로 과부의 방에 들어가지 말 것이며 남의 편지를 열어보지 말 것이며 남의 물건을 희롱하여 가져가지 말되 남이 알지 못하게 하지 말 것이며 어두운 곳에서 홀로 다니지 말 것이며 무뢰한 자제와 왕래하지 말 것이며
남의 물건을 빌려 쓰고 열흘이 지나도록 돌려주지 말지니라. (원래 한 조목이 빠져 있음)
중화(中和) 연간에 이취금(李就今)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는 곤구(衮求)이고, 임진현령(臨晉令)을 지냈는데, 또한 의산(義山)이라 하였고, 시를 잘 지었고, 처음 과거에 응시할 때 항상 친구 집을 유람하였는데, 손기(孫棨)의 《북리지》를 보니, 《잡찬》의 지음이, 혹은 이 사람에게서 나왔을 것이니, 반드시 이상은에게 속한 것은 아닐 것이나, 그 외에 명확한 증거가 없어, 단정할 수 없다. 후에 또한 때때로 모방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송나라에는 속(續)이 있었는데 왕군옥(王君玉)〔17〕이라 칭하였고, 재속(再續)이 있었는데 소동파(蘇東坡)〔18〕라 칭하였고, 명나라에는 삼속(三續)이 있었는데 황윤교(黃允交)〔19〕라 하였다.
〔1〕 이덕유(李德裕)(787—850)의 자는 문요(文饒)이고, 당나라 조군(趙郡)(지금의 허베이성 자오현(趙縣)) 사람이며, 무종(武宗) 때 벼슬이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郎同平章事)에 이르렀고, 후에 애주(崖州)로 좌천되어 죽었다. 지은 책으로는 《차류씨구문(次柳氏舊聞)》, 《회창일품집(會昌一品集)》이 있다. 당쟁(黨爭)은, 당나라 목종(穆宗), 선종(宣宗) 연간에, 이길보(李吉甫), 이덕유 부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과 우승유(牛僧孺), 이종민(李宗閔)을 우두머리로 하는 두 거대한 관료 집단이 수십 년 동안 벌인 붕당(朋黨) 싸움을 가리킨다.
〔2〕 위관(韋瓘)의 자는 무홍(茂弘)이고, 당나라 경조(京兆) 만년(萬年)(지금의 산시성 시안(西安)) 사람이며, 벼슬은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이르렀다. 지은 책 《주진행기(周秦行紀)》는, 루쉰(魯迅)의 《당송전기집(唐宋傳奇集)》에 수록된 적이 있다.
〔3〕 이덕유는 《주진행기》에 근거하여 《주진행기론(周秦行紀論)》을 지었는데, 그중에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태뢰씨(태뢰는 양국공(涼國公) 이공(李公)이 일찍이 우승유를 태뢰라고 불렀다.……)가 그 몸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 행실을 위태롭게 하고 쉽게 여긴다고 들었다. 그 성씨가 국가의 명을 받는다는 도참(圖讖)에 응한다고 하였으니, 이르기를 ‘머리와 꼬리에 세 마리 기린이 60년이요, 두 뿔 가진 송아지가 제멋대로 날뛰니, 용과 뱀이 서로 싸워 피가 내를 이루리라.’라고 하였고, 《현괴록(玄怪錄)》을 보니, 많은 은어(隱語)를 지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태뢰의 《주진행기》를 얻어, 반복하여 보니 그 태뢰가 몸소 제왕의 후비(后妃)와 몰래 만난 것을 썼으니, 자신의 신분이 신하의 모습이 아님을 증명하려 한 것이며, 장차 ‘날뜀’에 뜻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진행기론》은 《이위공외집(李衛公外集)》 권4에 보인다.
〔4〕 설어사(薛漁思)의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지은 책 《하동기(河東記)》는 3권인데, 이미 실전되었다. 《설부(說郛)》에 1권이 수록되어 있다.
〔5〕 《선실지(宣室志)》는 《신당서(新唐書)·예문지(藝文志)》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선실(宣室)에서 가의(賈誼)를 불러 귀신 일을 물은 고사에서 책 이름을 따왔다. 지은 사람은 장독(張讀)이고, 자는 성붕(聖朋)(혹은 성용(聖用)이라고도 함)이며, 당나라 심주(深州) 육택(陸澤)(지금의 허베이성 선현(深縣)) 사람이다. 대중(大中) 연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 예부시랑(禮部侍郎)을 지냈고, 최종적으로 상서좌승(尚書左丞)을 지냈다.
〔6〕 소악(蘇鶚)의 자는 덕상(德祥)이고, 당나라 무공(武功)(지금의 산시성(陝西省)에 속함) 사람이며, 광계(光啟) 연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두양잡편(杜陽雜編)》은 《신당서·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7〕 고언휴(高彥休)의 호는 참료자(參寥子)이고,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지은 책 《당궐사(唐闕史)》는 《신당서·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8〕 강병(康骈)의 자는 가언(駕言)이고, 당나라 지주(池州)(지금의 안후이성 구이츠(貴池)) 사람이며, 건부(乾符) 연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숭문관교서랑(崇文館校書郎)에 이르렀다. 지은 책 《극담록(劇談錄)》은 《신당서·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9〕 손기(孙棨)의 자는 문위(文威)이고, 스스로 호를 무위(无为)라 하였으며, 당나라 희종(僖宗) 때 사람이고, 벼슬은 한림학사 중서사인(翰林學士中書舍人)에 이르렀다. 지은 책 《북리지(北里志)》는 1권이다.
〔10〕 범서(范摅)는 스스로 호를 오운계인(五云溪人)이라 하였고, 대략 당나라 함통(咸通) 연간의 사람이다. 지은 책 《운계우의(云溪友议)》는 《신당서·예문지(新唐書·藝文志)》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배형(裴铏)은 당나라 말기 사람이고, 일찍이 고병(高骈)의 종사(从事)를 지냈고, 후에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 성도절도부사(成都節度副使)에 이르렀다. 지은 책 《전기(传奇)》는 《신당서·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실전되었다. 《세계문고(世界文庫)》에 편집본이 있다. 아래 글의 고병(?—887)은, 자는 천리(千里)이고, 당나라 말기 유주(幽州)(지금의 베이징(北京)) 사람이며, 일찍이 성도윤(成都尹), 검남서천절도관찰사(劍南西川節度觀察使) 등을 지냈다.
〔12〕 《여릉관하기(庐陵官下記)》는 《신당서·예문지》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청나라 도정(陶珽)이 다시 편집한 《설부(說郛)》에 일문(佚文)이 수록되어 있다.
〔13〕 온정균(温庭筠)(약 812—866)의 자는 비경(飞卿)이고, 당나라 태원(太原)(지금의 산시성(山西省)에 속함) 사람이며, 일찍이 방성위(方城尉), 국자조교(國子助教)를 지냈다. 지은 책 《간자(干子)》는 《신당서·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흩어져 없어졌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일문이 수록되어 있다.
〔14〕 이상은(李商隐)(약 813—858)의 자는 의산(义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이다. 당나라 회주(怀州) 하내(河內)(지금의 허난성 친양(沁阳)) 사람이며, 일찍이 비서랑(秘书郎), 동천절도사판관(东川节度使判官)을 지냈다.
〔15〕 “삼십육체(三十六体)”는 《신당서·문예전(新唐書·文藝傳)》에 “상은이 처음 글을 지을 때에는 뛰어나고 기이하고 고풍스러웠는데, 영호초(令狐楚)의 집에 있을 때, 초가 본래 장주(章奏)를 잘 지었으므로, 이에 그 학문을 전수받았다. 상은은 대우(對偶)의 장단(長短)을 사용하였는데, 번잡함이 지나쳤다. 당시에 온정균, 단성식 모두 이러한 것으로 서로 자랑하였으니, ‘삼십육체’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 또한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의 《소학감주(小学绀珠)》에 이르기를, 세 사람의 항렬이 모두 16번째이므로, 이러한 명칭이 있다고 하였다.
〔16〕 진진손(陈振孙)의 자는 백옥(伯玉)이고, 호는 직재(直斋)이며, 남송(南宋) 안길(安吉)(지금의 저장성(浙江省)에 속함) 사람이고, 일찍이 시랑(侍郎)을 지냈다. 지은 책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는 22권이고, 역대 서적을 53가지 종류로 나누어, 권수, 저자 및 비평의 득실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원본은 이미 없어졌고, 현재 전하는 책은 《영락대전(永樂大典)》에서 편집하여 교정한 것이다.
〔17〕 왕군옥(王君玉)은 송나라 때 두 사람이 있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 기록되어 있다.
《국로담원(國老談苑)》 2권, 옛 책에는 이문은수(夷門隱叟) 왕군옥 찬(撰)이라고 되어 있다. 또, 《송사(宋史)·왕규전(王珪傳)》에, 규의 종형(從兄) 기(琪)의 자가 군옥이고, 성도(成都) 화양(華陽) 사람이며, 인종(仁宗) 때 관각교감(館閣校勘), 집현교리(集賢校理)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잡찬속(雜纂續)》 1권의 저자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일 것이다.
〔18〕 소동파(蘇東坡)는 이 책 제7편을 참고하라. 《잡찬이속(雜纂二續)》 1권, 소식(蘇軾) 찬(撰)이라고 되어 있다.
〔19〕 황윤교(黃允交)는 명나라 흡현(歙縣)(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에 속함) 사람이다. 지은 책 《잡찬삼속(雜纂三續)》은 1권이다.
제11편 송나라의 지괴 및 전기문
송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여러 나라의 서적을 거두어들였는데, 항복한 왕과 신하들 중에는 해내의 명사들이 많았으므로, 이에 모두 관각(館閣)으로 불러들여, 녹봉을 후하게 주어, 책을 편찬하게 하니, 《태평어람(太平御覽)》과 《문원영화(文苑英華)》 각 1천 권을 완성하였고, 또 야사(野史), 전기(傳記), 소설(小說) 등의 여러 학자의 책을 모아 5백 권의 책과 목록 10권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태평광기(太平廣記)》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 3월에 조칙을 받들어 편찬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8월에 책이 완성되어 표(表)를 올려 바쳤고, 8월에 조칙을 받들어 사관(史館)으로 보냈고, 6년 정월에 조칙을 받들어 조판(雕印板)하였다.(《송회요(宋會要)》 및 《진서표(進書表)》에 근거함) 후에 어떤 사람이 후학(後學)에게 급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으므로, 이에 판을 거두어 태청루(太清樓)에 저장하였기 때문에 송나라 사람들조차 오히려 많이 보지 못하였다. 《광기》는 채록한 것이 매우 풍부하여, 사용한 책이 344종에 이르니, 한(漢)나라와 진(晉)나라부터 오대(五代)까지의 소설가의 말을, 현재 이 책이 이미 흩어져 없어진 것을, 왕왕 이 책에 의지하여 고찰할 수 있고, 또 분류하여 편집하였으니, 55부(部)를 얻었고, 각 부의 권질(卷帙)의 많고 적음을 보면, 또한 진(晉)나라와 당(唐)나라 소설에서 서술한 것이, 어떤 것이 많은지 알 수 있으니, 비단 패설(稗說)의 심해(深海)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문심(文心)의 통계인 것이다. 지금 비교적 많은 부를 아래에 들었는데, 그 마지막에 잡전기(雜傳記) 9권이 있으니, 곧 당나라 사람의 전기문이다.
신선 55권 여선 15권 이승 12권 보응 33권 징응(휴구(休咎)를 말함) 11권 정수 15권 몽 7권 신 25권 귀 40권 요괴 9권 정괴 6권 재생 12권 용 8권 호 8권 호 9권 《태평광기》는 이방(李昉)〔1〕이 감수(監修)하였고, 함께 편찬한 사람은 12명인데, 그중에 서현(徐鉉)〔2〕이 있고, 오숙(吳淑)이 있으니, 모두 일찍이 소설을 지었으니, 지금 모두 전해진다. 현의 자는 정신(鼎臣)이고, 양주(揚州) 광릉(廣陵) 사람이고, 남당(南唐)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이욱(李煜)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벼슬이 직학사원급사중산기상시(直學士院給事中散騎常侍)에 이르렀고, 순화(淳化) 2년에 죄를 받아 정난행군사마(靜難行軍司馬)로 좌천되었고, 추위에 병들어 좌천된 곳에서 죽었으니, 나이 76세였다.(916——991) 자세한 내용은 《송사(宋史)》 《문원전(文苑傳)》에 기록되어 있다. 현은 당나라 때 이미 지괴를 지었는데, 20년을 거쳐 《계신록(稽神錄)》 6권을 완성하였는데, 겨우 150가지 일만 기록하였으니, 《광기》를 편찬할 때, 항상 채록되기를 바랐으나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여, 송백(宋白)〔3〕으로 하여금 이방에게 물으니, 이방이 말하기를, “어찌 서솔경(徐率更)이 근거 없는 말을 한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드디어 채록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글은 평범하고 간략하여, 이미 육조(六朝) 지괴의 고풍스러운 바탕을 잃었고, 다시 당나라 사람 전기의 섬세하고 유려함도 없으니, 송나라 초기에, 지괴는 또한 “믿을 만함”으로 장점을 삼으려 하였고, 이로 인해 이 도(道)가 다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광릉에 왕할머니(王姥)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며칠 동안 병들어, 갑자기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반드시 서계(西溪) 호씨(浩氏) 집안의 소로 태어날 것이니, 네가 마땅히 속죄해야 할 것이니, 내 배 아래에 ‘왕(王)’ 자가 있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죽으니, 그 서계라는 곳은, 해릉(海陵)의 서쪽 지명이다. 그 백성 호씨 집안에서, 소를 낳았는데, 배에 흰 털이 ‘왕’ 자를 이루었다. 그 아들이 찾아내어, 비단 묶음으로 속죄하여 데리고 돌아왔다. (권2)
과촌(瓜村)에 어부가 있었는데, 아내가 노수병(痨瘦病)에 걸려, 서로 전염되어, 죽은 사람이 여러 명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병든 사람을 산 채로 관 속에 못 박아, 버리면, 그 병을 끊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그 딸이 병들자, 곧 산 채로 관 속에 못 박아, 강에 흘려보냈는데, 금산(金山)에 이르러, 어떤 어부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 뭍으로 끌어당겨, 열어 보니, 여자가 오히려 살아 있었으므로, 이에 데려다가 어부의 집에 두니, 많은 뱀장어(鳗鯬魚)를 얻어 먹이니, 오래 지나 병이 나았고, 드디어 어부의 아내가 되었으니, 지금까지 오히려 탈이 없다. (권3)
오숙(吴淑)은 서현(徐铉)의 사위인데, 자는 정의(正仪)이고, 윤주(润州) 단양(丹阳) 사람이며,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시원스러웠고, 글 짓는 데 민첩하였고, 남당(南唐)에서 진사에 급제하였고, 교서랑(校書郎)으로 내사에 있었고, 이욱(李煜)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벼슬이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郎)에 이르렀고, 함평(咸平) 5년에 죽었으니, 나이 56세였다.(947——1002) 또한 《송사(宋史)》 《문원전(文苑傳)》에 보인다. 지은 책 《강회이인록(江淮異人錄)》 3권은, 지금 《영락대전(永樂大典)》〔4〕에서 편집한 책이 있는데, 모두 25명이고, 모두 당시의 협객(俠客), 술사(術士) 및 도류(道流)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행실이 대개 괴이하다.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이 지은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이미 《도협(盜俠)》이라는 한 편이 있어, 괴이한 백성과 기이한 일을 서술하였으나, 겨우 9명이었는데, 여러 괴환(詭幻)한 인물을 모아, 전문 서적으로 지은 사람은, 실로 오숙에서 시작되었으니, 명나라 사람이 《광기(廣記)》를 베껴 거짓으로 《검협전(劍俠傳)》을 지어 또 그 파도를 일으켰고, 공중을 나는 칼 이야기(乘空飛劍之說)가 날로 성행하였으니, 지금까지 오히려 쇠하지 않는다.
성유문(成幼文)이 홍주(洪州) 녹사참군(录事参军)이 되었는데, 거처가 큰길에 임해 창문이 있었다. 어느 날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때마침 비가 개어 진흙탕이었으나 약간 길이 있었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신발을 파는데, 모습이 매우 가난하였다. 어떤 악소년(惡少年)이 아이와 마주쳤는데, 신발이 진흙 속에 떨어졌다. 아이가 울면서 값을 구하였으나, 소년은 꾸짖으며 주지 않았다.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집은 아직 먹을 것도 없는데, 신발을 팔아 먹을 것을 마련하려 하였는데, 모두 더럽혀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서생(書生)이 지나가다가, 불쌍히 여겨, 값을 대신 갚아 주었다. 소년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아이가 나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며 욕하였다. 서생이 매우 화난 기색을 띠었다. 성유문이 그의 의로움을 가상히 여겨, 불러 함께 이야기하니, 매우 기이하게 여겨, 이에 머물러 자게 하였다. 밤에 함께 이야기하는데, 성유문이 잠시 안으로 들어가니, 다시 나오니, 서생을 잃어버렸으니, 바깥 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찾아도 얻지 못하였다. 잠시 후 다시 앞에 이르러 말하기를, “아침에 왔던 나쁜 놈을, 나는 용납할 수 없어, 이미 그 목을 베었습니다.”라고 하며 땅에 던졌다. 성유문이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실로 군자를 거슬렀으나, 사람의 목을 베어, 피가 땅에 있으니, 어찌 연루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서생이 말하기를, “걱정 마십시오.”라고 하며 적은 약을 내어, 머리에 바르고, 머리털을 쥐어 비비니, 모두 물로 변하였고, 이에 성유문에게 말하기를, “보답할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이 술법을 그대에게 전수해 주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성유문이 말하기를, “저는 방외(方外)의 사람이 아니므로,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생은 이에 읍(揖)하고 떠나갔는데, 모든 문은 잠겨 있었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송나라가 비록 유학을 숭상한다고 하였으나, 불교와 도교를 함께 용납하였고, 신앙의 근본은, 본래 무속과 귀신에 있었으므로, 서현과 오숙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변괴(變怪)와 참응(讖應)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니, 장군방(张君房)의 《승이기(乘异记)》〔5〕(함평(咸平) 원년 서문), 장사정(张师正)의 《괄이지(括异志)》,〔6〕 섭전(聂田)의 《조이지(祖异志)》〔7〕(강정(康定) 원년 서문), 진재사(秦再思)의 《낙중기이(洛中纪异)》,〔8〕 필중순(毕仲询)의 《막부연한록(幕府燕闲录)》〔9〕(원풍(元丰) 초년에 지음), 모두 그러한 종류이다. 마침내 휘종(徽宗)이 도사(道士) 임영소(林灵素)에게 미혹되어, 신선을 독실하게 믿어, 스스로를 “도군(道君)”이라 하였고, 천하가 크게 도법(道法)을 받들었다. 남쪽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이러한 풍습이 바뀌지 않았고, 고종(高宗)이 남쪽 궁궐로 물러나 거처하면서, 또한 신선과 환상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을 좋아하였으니, 이때에는 지흥국군(知兴国军) 역양(历阳) 곽단(郭彖)이라는 사람이 자는 차상(次象)이고 지은 책이 《규거지(睽车志)》〔10〕 5권이고, 한림학사(翰林學士) 파양(鄱阳) 홍매(洪迈)라는 사람이 자는 경로(景卢)이고 지은 책이 《이견지(夷坚志)》 420권이니, 모두 일찍이 올려 바쳐 임금의 열람에 대비하였을 것이다. 여러 책들은 대개 사적(事狀)에 치우치고, 서술이 적으니, 《계신록》과 거의 같으나, 《이견지》는 홀로 지은 사람의 이름과 권질의 많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홍매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많은 책을 널리 읽었으나, 두 형과 함께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였으나 홀로 떨어졌고, 나이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칙령소산정관(敕令所刪定官)이 되었다. 아버지 홍호(洪皓)는 일찍이 진회(秦桧)를 거슬렀으므로, 원한이 홍매에게까지 미쳤으므로, 마침내 내보내져 첨차칙수복주(添差敕授福州)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랑 겸 예부(吏部郎兼禮部)가 되었다. 일찍이 금나라 사신을 접반하였는데, 자못 그들을 꺾었고, 곧 보빙사(報聘使)가 되어, 조회(朝見) 예절을 다투다가 굽히지 않아, 거의 억류될 뻔하였고, 돌아와서는 또 금나라 사신으로서 명을 욕되게 하였다는 논의로 파면되었다가, 곧 기주(泉州)의 지주(知州)로 다시 기용되었고, 또 여러 곳의 지주를 거쳐, 길주(吉州), 간주(赣州), 무주(婺州), 건녕(建宁) 및 소흥부(绍兴府)를 지냈고, 순희(淳熙) 2년에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로 치사(致仕)하여 죽었으니, 나이 80세였다.(1096——1175)〔11〕, 시호는 문민(文敏)이고, 전기가 《송사》에 있다. 홍매는 조정에서 감히 바른말을 하였고, 또 널리 보고 들은 것이 많아, 많은 저술을 하였고, 고증하고 변증하는 것이, 모두 평범한 흐름을 뛰어넘었고, 《이견지》는 만년에 흥취를 달래기 위해 지은 책이니, 소흥(绍兴) 말년에 처음 간행되었고, 순희 초년에 절필하였으니, 십여 년 동안에, 갑(甲)부터 계(癸)까지 200권을 이루었고, 지갑(支甲)부터 지계(支癸) 삼갑(三甲)부터 삼계(三癸)까지 모두 100권을 갖추었고, 사갑(四甲) 사을(四乙) 각 10권이니, 권질의 많음이, 거의 《태평광기》와 같으니, 지금 오직 갑부터 정까지 80권, 지갑부터 지무까지 50권 삼지(三志) 약간 권, 또 적초본(摘鈔本) 50권 및 20권이 남아 있다. 기이한 일은, 본래 희귀하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지는데, 저자의 서문에는, 매우 많음을 기뻐하였고, 만년에 급히 책을 완성하려 하여, 혹은 50일 만에 10권을 지었으니, 망령된 사람이 이에 조금 옛이야기를 바꾸어 바쳤으니, 심지어 몇 권을 채운 것도 있으니, 또한 삭제하고 다듬을 겨를도 없이, 곧 기록에 넣었다.(진진손(陈振孙)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 11에서 말함), 대개 많음을 취하는 데 뜻이 있고, 본전(本傳)에서 말한 “귀신과 사물의 변화를 극진히 탐구한다”와 같이 할 수 없었다. 오직 지은 작은 서문 31편은, 십중팔구 “각각 새로운 뜻을 내었고, 서로 중복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조여시(赵与旹)가 일찍이 그 대략을 뽑아 자신이 지은 《빈퇴록(宾退录)》〔12〕(8)에 넣었는데, “미칠 수 없다”고 탄식하였으니, 이 책에 대해서는 가히 지언자(知言者)라고 할 만하다.
전기(传奇)의 글에도, 또한 지은 사람이 있으니, 지금 당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 잘못 전해지는 《녹주전(绿珠传)》〔13〕 1권, 《양태진외전(杨太真外传)》〔14〕 2권은, 곧 송나라 악사(乐史)의 저작이다. 《송지(宋志)》에는 또한 《등왕외전(滕王外传)》, 《이백외전(李白外传)》, 《허매전(许迈传)》〔15〕 각 1권이 있으나, 지금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사의 자는 자정(子正)이고, 무주(抚州) 의황(宜黄) 사람이며, 남당(南唐)에서 송나라에 들어가 저작좌랑(著作佐郎)이 되었고, 나가서 능주(陵州)의 지주(知州)가 되었고, 부(赋)를 바친 것으로 인해 삼관편수(三馆编修)로 불려 들어갔고, 또 여러 차례 지은 책을 합쳐 420여 권을 바쳤으니, 모두 과거 급제, 효도, 신선에 대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저작랑(著作郎), 직사관(直史馆)으로 옮겼고,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전임되었고, 나가서 서주(舒州)의 지주, 황주(黄州)의 지주를 지냈고, 또 상주(商州)의 지주를 지냈고, 복직한 후 다시 문관(文馆)에 들어갔고, 서경감마사(西京勘磨司)〔16〕를 맡았고, 금자(金紫)를 하사받았고, 경덕(景德) 4년에 죽었으니, 나이 78세였다.(930——1007) 자세한 내용은 《송사(宋史)》 《악황목전(乐黄目传)》 처음에 기록되어 있다. 사는 또한 지리에 능통하여, 《태평환우기(太平寰宇记)》〔17〕 200권이 있는데, 여러 서적을 100여 종까지 인용하였고, 때때로 소설가의 말을 섞었으니, 녹주와 태진 두 전기에 이르러서는, 본래 야사(稗史)를 모아 글을 이루었으니, 또한 여지지(舆地志)의 말을 참고하였다. 편(篇) 끝에 경계하는 말을 덧붙였으니, 또한 당나라 사람과 같으나, 그 엄격하고 냉정한 것을 더하였으니, 송나라 사람의 오랜 습관이 이와 같으니, 《녹주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조왕(赵王) 윤(伦)이 항상 법도를 어지럽히니, 손수(孙秀)가 사람을 보내 녹주를 구하니,…… 숭(崇)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다른 것은 아끼는 바가 없으나, 녹주는 얻을 수 없다!”라고 하니, 수가 이로 인해 윤의 무리를 모함하였다. 군사를 거두어 갑자기 이르니, 숭이 녹주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너로 인해 죄를 얻었다.”라고 하니, 녹주가 울면서 말하기를, “원컨대 군 앞에서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며 이에 누각에서 떨어져 죽었다. 숭은 동쪽 시장에 버려졌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 누각을 녹주루(绿珠楼)라고 이름하였다. 누각은 보경리(步庚里)에 있고, 적천(狄泉)과 가까이 있으니, 샘은 정성(正城)의 동쪽에 있다. 녹주에게는 제자 송의(宋袆)가 있었는데, 뛰어난 용모를 지녔고, 피리를 잘 불었고, 후에 진(晋)나라 명제(明帝)의 궁중에 들어갔다. 지금 백주(白州)에 한 갈래 물이 있으니, 쌍각산(双角山)에서 나와, 용주(容州)의 강과 합쳐지니, 녹주강(绿珠江)이라고 부르니, 또한 귀주(归州)에 소군촌(昭君村) 소군장(昭君场)이 있고, 오(吴)나라에 서시곡(西施谷) 지분당(脂粉塘)이 있는 것과 같으니, 대개 미인이 나온 곳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또한 녹주정(绿珠井)이 있으니, 쌍각산 아래에 있으니, 나이 많은 사람이 전하기를, 이 우물을 길어 마시는 사람은, 딸을 낳으면 반드시 매우 아름다우니, 마을 사람들이 식견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무익하다고 여겨, 이에 큰 돌로 눌러 막았으니, 이후에 딸을 낳아 단정하고 아름다운 자가 있었으나, 칠규(七竅)와 사지(四肢)가 대부분 온전하지 못하였다. 이상하구나, 산수의 조화로다!……
……그 이후 시인들이 가무 기생을 노래하는 자는, 모두 녹주로 이름을 삼았다.……그 까닭은 무엇인가? 대개 한 비자(婢子)로서, 글을 알지 못하나, 능히 주인의 은혜에 감격하여, 분개하여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굳센 절개가 두려우니, 진실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앙모하고 노래하게 할 만하다. 후한 녹봉을 누리고, 높은 지위를 도둑질하고, 인의(仁义)의 본성을 잃고,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아침저녁으로 이익만을 꾀하니, 절개가 한 부인만도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지금 이 전기를 지은 것은, 단지 아름다움을 서술하고, 재앙의 근원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배반하는 무리를 징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후에 박주(亳州) 초(谯) 사람 진순(秦醇)〔18〕의 자는 자복(子复)(혹은 자이(子履)라고도 함)인데, 또한 전기를 지었으니, 지금 네 편이 남아 있으니, 북송(北宋) 유부(刘斧)가 편찬한 《청쇄고의전집(青琐高议前集)》 및 《별집(别集)》〔19〕에 보인다. 그의 글은 자못 당나라 사람을 본받으려 하였으나, 말과 뜻이 모두 거칠고 졸렬하며, 오직 간혹 한두 마디 좋은 말이 보이는 정도이다. 또 대개 옛일에 의탁하고, 가까운 일에는 감히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전히 선비들의 습관이 구속되고 삼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악사(乐史) 또한 그러하였다. 하나는 《조비연별전(赵飞燕别传)》이니, 서문에 이르기를 이씨(李氏) 집 담벼락 모퉁이의 부서진 광주리 속에서 얻었다고 하였으니, 조황후(赵皇后)가 입궁하여 자결하기까지의 일을 기록하였고, 다시 명보(冥报)로 큰 자라(大鼋)로 화(化)한 일을 덧붙였으니, 글 가운데 “난탕(兰汤)이 넘실거리니, 소의(昭仪)가 그 가운데 앉아 있으니, 마치 석 자의 차가운 샘물에 밝은 옥을 담근 듯하다.”라는 말이 있으니, 명나라 사람들이 드디어 혹은 손뼉을 치며 진정한 옛 책이라고 놀라워하였으니, 지금 사람들이 양신(杨慎)이 거짓으로 지은 한나라 《잡사비신(杂事秘辛)》에 미혹된 것과 꼭 같다. 이른바 한나라 영현(伶玄)이 지었다는 《비연외전(飞燕外传)》 또한 이러한 종류이나, 문사와 말이 훨씬 뛰어날 뿐이다. 둘째는 《여산기(骊山记)》이고, 셋째는 《온천기(温泉记)》이니, 장유(张俞)가 과거에 낙방하고 촉(蜀)으로 돌아가, 여산(骊山) 아래에서 늙은이에게 양귀비(杨贵妃)의 숨겨진 일을 물으니, 늙은이가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다른 날 유가 다시 여산을 지나다가, 양귀비가 보낸 사자를 만나 부름을 받아, 인간 세상을 물으니, 또한 목욕을 하사하였고, 다음 날 관리에게 명하여 돌려보내니, 놀라 깨어나 꿈에서 깬 듯하였으니, 이에 역참(驿站)에 시를 지었고, 후에 들판을 거니는데, 목동이 화답한 시를 보내 주었으니, 전날 어떤 부인이 부탁한 것이라고 하였다. 넷째는 《담의가전(谭意歌传)》이니, 곧 당시의 이야기이다. 의가(意歌)는 본래 양가(良家)의 자녀인데, 장사(长沙)로 흘러들어 기생이 되었고, 여주(汝州) 백성 장정자(张正字)라는 사람과 서로 사랑하여, 혼약을 굳게 맺었으나, 정자는 어머니의 명에 핍박받아, 마침내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 3년이 지나 아내가 죽으니, 마침 손님이 장사에서 와서, 정자의 배신을 꾸짖고, 또한 의가의 어짊을 이야기하니, 마침내 맞이하여 돌아왔다. 후에 그 아들이 진사에 급제하니, 의가는 “마침내 종신토록 명부(命妇)가 되어, 부부가 함께 늙고, 자손이 번성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장방(蒋防)의 《곽소옥전(霍小玉传)》을 모방하였으나, “단원(团圆)”으로 맺은 것이다.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대업습유기(大业拾遗记)》〔20〕 2권은, 당나라 안사고(颜师古)가 지었다고 하였으니, 또한 《수유록(隋遗录)》이라고도 한다.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회창(会昌) 연간에 상원와관사(上元瓦棺寺) 누각 위에서 얻었다고 하였으니, 본래 이름은 《남부연화록(南部烟花录)》이고, 《수서(隋书)》의 유고(遗稿)인데, 아깝게도 많이 빠졌으므로, 이에 전(传)으로 보충하였다고 하였으니, 말미에 이름이 없으니, 대개 지은 사람과 같은 사람의 솜씨이다. 기록은 양제(炀帝)가 장차 강도(江都)로 가려고, 마숙모(麻叔谋)에게 운하를 파게 한 일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도중에 여러 방자한 일에 미치고, 다시 미루(迷楼)를 지어, 안에서 게으르고 황폐하게 지낸 일을 기록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의 희망은, 이에 당공(唐公)에게 돌아갔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장차 난을 모의하려 하여, 이에 관노(官奴)를 풀어 위아래로 나누어 지키게 해 달라고 청하니, 조칙으로 허락하였으니, “이로 인해 분초(焚草)의 변”〔21〕이 있었다. 그 서술은 자못 어지럽고, 사실과 다른 것이 많으나, 문체는 맑고 아름다우며, 정취 또한 때때로 엿볼 만한 것이 있다.
……장안(长安)에서 공물로 바친 어거녀(御车女) 원보아(袁宝儿)는, 나이 15세였는데, 허리가 가늘고, 어리석고 아첨하는 태도가 많았으므로, 황제가 특별히 매우 아꼈다. 이때 낙양(洛阳)에서 합체영련화(合蒂迎辇花)를 바쳤는데, 숭산(嵩山) 골짜기에서 얻었다고 하였고, 사람들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캔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바친 것이다.……황제가 보아에게 가지게 하고, “사화녀(司花女)”라고 불렀다. 이때 우세남(虞世南)이 요나라를 정벌하는 지휘 덕음 칙서(征遼指揮德音敕書)를 황제 곁에서 초안하고 있었는데, 보아가 오랫동안 주시하였다. 황제가 우세남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조비연(赵飞燕)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다고 전해지는데, 짐은 항상 유생(儒生)들이 글자로 꾸민다고 여겼으니, 어찌 사람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지금 보아를 얻고 나서야 옛일을 알게 되었으니, 그러나 어리석은 태도가 많으니, 지금 경을 주목하니, 경은 재주 있는 사람이니, 곧바로 조롱해 보라!”라고 하니, 우세남이 조칙에 응하여 절구(绝句)를 지어 말하기를, “검은 눈썹 그리는 것 반도 마치지 못했는데, 어깨에 드리운 소매가 너무 어리석게 태어났네, 어리석음으로 인해 도리어 임금의 아낌을 얻으니, 항상 꽃가지를 잡고 수레 곁을 가네.”라고 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황제의 혼미함이 더욱 심해져, 왕왕 요사스러운 것에 미혹되었으니, 일찍이 오공(吴公)의 집 닭 대(鸡台)에서 놀다가, 황홀한 사이에 진(陈)나라 후주(后主)와 마주쳤다.……무희(舞姬) 수십 명이, 좌우에 늘어서 모시는데, 가운데 한 사람이 유달리 아름다웠으므로, 황제가 여러 차례 눈여겨보았다. 후주가 말하기를, “폐하는 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곧 여화(丽华)입니다. 매번 도엽산(桃叶山) 앞에서 전함을 타고 이 아이와 함께 북쪽으로 건너던 때를 생각합니다. 그때 여화가 가장 원망하였는데, 바야흐로 임춘각(临春阁)에 기대어 동곽준(东郭皴)의 자색 붓으로, 작은 연지 붉은 비단에 강령(江令)의 ‘벽월(璧月)’ 구절에 대한 답시를 쓰고 있었는데, 시가 끝나기도 전에, 한금호(韩擒虎)가 푸른 총이(青骢驹)를 타고, 만 명의 갑옷 입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달려드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바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푸른 무늬가 있는 소라고둥 껍데기로 붉은 기장으로 새로 빚은 술을 권하니, 황제가 매우 즐겁게 마시고, 인하여 여화에게 “옥수후정화(玉树后庭花)”를 춤추라고 청하니, 여화가 오래되어 버려두었다고 사양하며, 우물 속에서 나왔으니, 허리가 비틀거려, 예전의 자태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황제가 재삼 청하니, 이에 천천히 일어나 한 곡을 마쳤다. 후주가 황제에게 묻기를, “소비(萧妃)는 이 사람과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봄의 난초와 가을의 국화는, 각각 한때의 아름다움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개하기(开河记)》 1권은, 마숙모(麻叔谋)가 수 양제(隋炀帝)의 조칙을 받들어 운하를 파면서, 백성을 학대하고 무덤을 파헤치고, 뇌물을 받고, 어린아이를 잡아먹은 일을 서술하였고, 일이 발각되어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미루기(迷楼记)》 1권은, 양제가 만년에 황음무도하게 지낸 일을 서술하였고, 왕의(王义)가 간절히 간하자, 홀로 이틀 동안 지냈으나, 즐겁지 않게 여겨, 다시 궁궐로 들어갔고, 후에 동요(童谣)를 듣고, 스스로 운이 다했음을 알았다. 《해산기(海山记)》 2권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다음으로 토목공사를 일으킨 일, 요귀(妖鬼)를 본 일, 강도(江都)로 간 일, 왕의에게 물은 일, 죽임을 당한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세히 기록하였다. 세 책은 《수유록》과 서로 비슷하나, 서술이 더욱 자세하나, 때때로 속된 말을 섞어, 문채가 부족하다. 《해산기》는 이미 《청쇄고의》 가운데 보이니, 이는 북송 사람이 지은 것이고, 나머지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지금 책에 당나라 한악(韩偓)〔22〕이 지었다고 한 것은, 명나라 사람이 거짓으로 더한 것이다. 제왕의 방자함은, 세상 사람들이 겪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즐겨 이야기하는 것이니, 당나라 사람들은 명황(明皇)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고, 송나라 사람들은 더욱 수 양제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니, 명나라 나관중(罗贯中)이 다시 모아 《수당지전(隋唐志传)》〔23〕을 지었고, 청나라 저인획(褚人获)이 또 더하고 고쳐 《수당연의(隋唐演义)》〔24〕를 지었다.
《매비전(梅妃传)》 1권 또한 지은 사람이 없으니, 대개 당시 그림에 매미인(梅美人)을 매비(梅妃)라고 부르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당 명황 때 사람이라고 막연히 말하고, 인하여 이 전기를 지었으니, 강씨(江氏)의 이름은 채빈(采苹)이라고 하고, 입궁하여 태진(太真)의 질투를 받아 다시 내쫓겼고, 녹산(禄山)의 난을 만나, 군사에게 죽었다고 하였다. 발문(跋文)에 대략 전하기를 전기는 대중(大中) 2년에 쓴 것이고, 만권(万卷) 주존도(朱遵度)〔25〕의 집에 있었는데, 지금 오직 엽소온(叶少蕴)〔26〕과 내가 얻었다고 하였으니, 말미에 이름을 쓰지 않았으니, 대개 또한 곧 본문을 지은 사람이고, 스스로 엽몽득(叶梦得)과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남쪽으로 건너간 전후의 작품일 것이다. 지금 책에 혹은 당나라 조업(曹邺)〔27〕이 지었다고 하였으니, 또한 명나라 사람이 거짓으로 더한 것이다.
〔1〕 이방(李昉)(925—996) 자는 명원(明远)이고, 북송(北宋) 심주(深州) 요양(饶阳)(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에 속함) 사람이며, 벼슬이 우복야(右仆射), 중서시랑평장사(中书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일찍이 《구오대사(旧五代史)》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태평어람(太平御覽)》, 《태평광기(太平廣記)》와 《문원영화(文苑英華)》의 감수(監修)를 맡았다. 《태평광기·진서표(太平廣記·進書表)》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함께 《태평광기》를 편찬한 12명은 여문중(吕文仲), 오숙(吴淑), 진악(陈鄂), 조린기(赵邻几), 동순(董淳), 왕극정(王克贞), 장기(张洎), 송백(宋白), 서현(徐铉), 탕열(汤悦), 이목(李穆), 호몽(扈蒙)이다.
〔2〕 서현(徐铉)(916—991) 북송 양주(扬州) 광릉(广陵)(지금의 장쑤성(江苏省) 강두(江都)) 사람이다. 남당(南唐)에서 벼슬하였고, 후에 이욱(李煜)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이 되었다. 아래 글의 이방의 말은 송나라 원경(袁褧)의 《풍창소독(枫窗小牍)》 권상(卷上)에 보인다. 지은 책 《계신록(稽神錄)》은, 《송사·예문지(宋史·艺文志)》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원나라 말 명나라 초 도종의(陶宗仪)가 편찬한 《설부(说郛)》 권3, 권14에 편집본이 있다.
〔3〕 송백(宋白) 자는 태소(太素)이고, 송나라 대명(大名)(지금의 허베이성에 속함) 사람이며,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尚书)에 이르렀다. 일찍이 《태평광기》, 《문원영화》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4〕 《영락대전(永樂大典)》 명나라 영락(永乐) 연간에 해진(解缙) 등이 편집한 유서(类书)이다. 처음 이름은 《문헌대성(文献大成)》이었고, 후에 여러 종류의 서적 7~8천 종을 널리 거두어, 22877권으로 편집하였고, 범례(凡例), 목록 60권으로, 이름을 《영락대전》으로 정하였다. 이미 흩어져 없어졌고, 지금 영인 출판된 일문(佚文) 730권이 있다.
〔5〕 장군방(张君房)은 본 권 제79쪽 주〔23〕을 참고하라. 그는 일찍이 비각(秘阁)에 소장된 도교 서적의 교정을 주관하였고, 요점을 뽑아 《운급칠첨(云笈七籤)》 122권을 편집하였다. 지은 책 《승이기(乘异记)》는, 《송사·예문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6〕 장사정(张师正) 자는 불의(不疑)이고, 송나라 희녕(熙宁) 연간에 진주(辰州)의 수령(帅)이었다. 지은 책 《괄이지(括异志)》는, 《송사·예문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7〕 섭전(聂田)의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조이지(祖异志)》는, 도종의가 편찬한 《설부》 권6에 편집본이 있고, 권수(卷数) 및 지은 사람의 이름이 없다. 청나라 도정(陶珽)이 다시 편집한 《설부》 권118에 《조이기(徂异记)》 1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송나라 섭전이 지었다고 되어 있다.
〔8〕 진재사(秦再思)의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지은 책 《낙중기이(洛中纪异)》는, 《송사·예문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9〕 필중순(毕仲询)은 송나라 원풍(元丰) 연간에 남주(岚州)의 추관(推官)이었다. 지은 책 《막부연한록(幕府燕闲录)》은, 《송사·예문지(宋史·艺文志)》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곽단(郭彖)의 자는 백상(伯象)이고, 북송 화주(和州) 역양(历阳)(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허현(和县)) 사람이다. 진사(进士)로 여러 관직을 거쳐 지흥국군(知兴国军)을 지냈다. 지은 책 《규거지(睽车志)》는, 《송사·예문지》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송나라 진진손(陈振孙)의 《직재서록해제(直斋书录解题)》에는 5권으로 되어 있다.
〔11〕 홍매(洪迈)의 생졸년은, 전대흔(钱大昕)의 《홍문민공연보(洪文敏公年谱)》에 따르면, 홍매는 1123년에 태어나서 1202년에 죽었다.
〔12〕 조여시(赵与旹)(1172—1228) 자는 행지(行之)이고, 송나라 종실(宗室)이며, 일찍이 여수승(丽水丞)을 지냈다. 지은 책 《빈퇴록(宾退录)》은, 10권이다.
〔13〕 《녹주전(绿珠传)》은 《송사·예문지》에 증치요(曾致尧)의 《광중대기(广中台记)》 80권, 또한 《녹주전》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단림(马端临)의 《문헌통고·경적고(文献通考·经籍考)》,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斋读书志)》 등의 책에서는 송나라 악사(乐史)가 지은 것으로 여긴다. 노신(鲁迅)의 《당송전기집(唐宋传奇集)》에 일찍이 편집되어 실렸다.
〔14〕 《양태진외전(杨太真外传)》은 《송사·예문지》에 《양비외전(杨妃外传)》 1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주(注)에 “지은 사람을 쓰지 않음(不作作者)”이라고 되어 있다. 진진손의 《직재서록해제》는 “《양비외전》 1권은, 직사관(直史馆) 임천(临川) 악사 자정(子正)이 지었다(《杨妃外传》一卷,直史馆临川乐史子正撰)”라고 분명히 지적하였다. 노신의 《당송전기집》에 일찍이 편집되어 실렸다.
〔15〕 《등왕외전(滕王外传)》, 《이백외전(李白外传)》, 《허매전(许迈传)》은, 《송사·예문지》에 모두 각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앞의 두 책은 악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고, 뒤의 책은 지은 사람을 쓰지 않았다.
〔16〕 감마사(勘磨司)는 《송사·악황목전(宋史·乐黄目传)》에 따르면 “마감사(磨勘司)”로 되어 있다.
〔17〕 《태평환우기(太平寰宇记)》는 북송 악사가 편찬한 지리 총지(地理总志)로, 200권이다. 태평흥국(太平兴国) 연간에 완성되었고, 내용은 지역의 연혁을 서술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풍속, 인물, 경제, 문화 등에 대해서도 겸하였다.
〔18〕 진순(秦醇)은 북송 사람이다. 유부(刘斧)의 《청쇄고의(青琐高议)》에 실린 《조비연별전(赵飞燕别传)》에는 “초천(谯川) 진순 자복(秦醇子复)이 지었다(谯川秦醇子复撰)”라고 되어 있고, 《온천기(温泉记)》에는 “박주(亳州) 진순 자이(秦醇子履)가 지었다(亳州秦醇子履撰)”라고 되어 있다. 나머지 일은 자세하지 않다.
〔19〕 유부(刘斧)는 대략 송나라 인종(仁宗), 철종(哲宗) 때 사람이고, 《청쇄고의(青琐高议)》 권수(卷首) 손부추(孙副枢)의 서문에서 그를 “유부 수재(刘斧秀才)”라고 칭하였다. 나머지 일은 자세하지 않다. 《청쇄고의》는, 근대 동강(董康)이 사례거(士礼居)의 사본에 의거하여 간행하였으니, 전후집 각 10권, 《별집(别集)》 7권이다.
〔20〕 《대업습유기(大业拾遗记)》는 《송사·예문지(宋史·艺文志)》 소설류(小说类)에 안사고(颜师古)의 《수유록(隋遗录)》 1권, 전기류(传记类)에 안사고의 《대업습유(大业拾遗)》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업습유기》의 본문과 발문(跋文)의 지은 사람 문제에 대해서는, 노신(鲁迅)의 《당송전기집·패변소철(唐宋传奇集·稗边小缀)》에서 일찍이 말하기를, 이 책은 “본문과 발문의 말과 뜻이 거칠고 졸렬하니, 한 사람의 솜씨인 듯하다. 그러나 안사고에게 의탁한 것은, 그 수법이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杂记)》에서, 유흠(刘歆)의 《한서(汉书)》 유고(遗稿)에서 베꼈다고 한 것과 꼭 같다. 그러나 재주와 식견이 훨씬 못하므로, 허술한 곳이 매우 많으니, 따져 묻지 않아도, 그 거짓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21〕 분초지변(焚草之变)은 《수서·우문화급전(隋书·宇文化及传)》에 실린 바에 따르면, 우문화급 등이 병변(兵变)을 일으킬 때, 사마덕감(司马德戡)이 일찍이 군사를 성 안으로 모아 불을 질러 성 밖과 호응하였는데, 수 양제(隋炀帝)가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배건통(裴虔通)이 거짓으로 “풀밭에 불이 나서, 바깥 사람들이 불을 끄기 때문에, 시끄러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제는 이를 진실로 믿고, 대비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역사에서 이 병변을 “분초지변”이라고 부른다.
〔22〕 한악(韩偓)(844—923) 자는 치요(致尧)(혹은 치광(致光)이라고도 함), 소자(小字)는 동랑(冬郎)이고, 당나라 경조(京兆) 만년(万年)(지금의 산시성(陕西省) 시안(西安)) 사람이며, 일찍이 한림학사(翰林学士), 중서사인(中书舍人)을 지냈다.
〔23〕 나관중(罗贯中) 및 《수당지전(隋唐志传)》은, 이 책 제14편을 참고하라.
〔24〕 저인획(褚人获) 및 《수당연의(隋唐演义)》는, 이 책 제14편 및 그 주〔11〕을 참고하라.
〔25〕 주존도(朱遵度)는 남당(南唐) 청주(青州)(지금의 산둥성(山东省)에 속함) 사람이다. 책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여, “주만권(朱万卷)”이라는 칭호가 있었고,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 《군서려조목록(群书丽藻目录)》 등이 있다.
〔26〕 엽소온(叶少蕴)(1077—1148) 이름은 몽득(梦得)이고, 호는 석림거사(石林居士)이며, 남송 오현(吴县)(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이고, 일찍이 강동안무제치대사(江东安抚制置大使)를 지냈고, 겸하여 건강부(建康府)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 《피서록화(避暑录话)》, 《석림사(石林词)》 등이 있다.
〔27〕 조업(曹邺) 자는 업지(业之), 혹은 엽지(邺之)라고도 하며, 당나라 계주(桂州)(지금의 광시성(广西省) 구이린(桂林)이 다스리는 곳) 사람이고, 일찍이 사부랑중(祠部郎中), 양주자사(洋州刺史)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 《조사부집(曹祠部集)》이 있다.
제12편 송나라의 화본(话本). 송나라 시대 문인들이 지은 지괴(志怪)는, 너무 평범하고 문채가 부족하고, 전기(传奇)는, 또 대부분 지나간 일을 의탁하고 가까운 일은 피하였으니, 옛것을 모방하는 것조차 훨씬 미치지 못하고, 더욱 독창적인 것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저잣거리에서는, 색다른 예술과 문학이 일어났다. 즉 속된 말로 책을 지어, 이야기를 서술하였으니, 이를 “평화(平话)”라고 하였으니, 지금 이른바 “백화 소설(白话小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백화로 책을 쓴 것은, 실로 송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청나라 광서(光绪) 연간에, 돈황(敦煌) 천불동(千佛洞)의 장경(藏经)이 비로소 드러났는데, 대부분 영국과 프랑스로 옮겨졌고, 중국 또한 그 나머지를 주워 모아 경사(京师) 도서관에 두었다.
책은 송나라 초기에 소장되었던 것으로, 대부분 불경이고, 그 안에 속문체(俗文体)의 이야기 몇 종류가 있으니, 대개 당나라 말 오대(五代) 사람이 베낀 것으로, 예를 들어 《당태종입명기(唐太宗入冥记)》, 《효자 동영전(孝子董永传)》, 《추호 소설(秋胡小说)》은 런던 박물관에 있고, 《오자서 입오 고사(伍员入吴故事)》는 중국의 모씨(某氏)〔1〕에게 있으니, 안타깝게도 직접 보지 못하여, 후대의 소설과의 관계를 알 수 없다. 짐작해 보건대, 속문의 흥기는, 마땅히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으니, 하나는 즐거움을 주기 위함이고, 하나는 권선징악(劝善惩恶)하기 위함인데, 특히 권선징악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위에 나열한 여러 책은, 대부분 징계와 권면에 관한 것이고, 경사 도서관에 소장된 것 또한 속문 《유마(维摩)》, 《법화(法华)》 등의 경전 및 《석가팔상성도기(释迦八相成道记)》, 《목련입지옥 고사(目连入地狱故事)》〔2〕도 있다.
《당태종입명기》는 처음과 끝이 모두 빠지고, 중간만 남아 있으니, 대개 태종이 건성(建成)과 원길(元吉)을 죽이고, 생혼(生魂)이 심문받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자신의 왕조의 과오를 숨기는 것이, 송나라에서 비로소 성행하였으니, 이는 비록 태종과 관련되나, 그러므로 마땅히 여전히 당나라 사람의 작품일 것이다.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판관(判官)이 몹시 싫어하여, 감히 이름을 말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경은 가까이 앞으로 오라.”라고 하니, 가볍게 말하기를, “성은 최(崔)이고, 이름은 자옥(子玉)입니다.”라고 하였다. “짐이 마땅히 알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람을 시켜 황제를 뜰 문으로 인도하게 하고,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잠시 이곳에 서 계십시오. 신이 들어가 판관에게 속히 오도록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온 사람을 시켜 대청에 가서 절하고, “판관께 아뢰옵니다. 대왕의 명을 받들어, 태종의 생혼이 왔으니, 판관을 모시고 심문하려 하오니, 지금 문밖에 있으니, 감히 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판관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황급히 일어나,……
송나라에 《양공구간(梁公九谏)》 1권(《사례거총서(士礼居丛书)》에 있음)이 있으니, 글 또한 앞의 기록처럼 소박하고 누추하다. 책은 무후(武后)가 태자를 폐위시켜 여릉왕(庐陵王)으로 삼고, 조카 무삼사(武三思)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는데, 적인걸(狄仁杰)이 극력 간한 것이 아홉 번에 이르러, 무후가 비로소 깨닫고, 다시 불러들여 태자로 세운 일을 서술하였다. 권수(卷首)에 범중엄(范仲淹)의 《당상 양공 비문(唐相梁公碑文)》〔3〕이 있으니, 파양(番阳)에 귀양 가서 지은 것이니, 책이 나온 것은 마땅히 명도(明道) 2년(1033) 이후일 것이다.
제6간(第六谏)
측천무후(则天武后)가 한밤중에 잠이 들었는데, 또 하나의 꿈을 꾸었으니, 대라천녀(大罗天女)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데, 바둑판에 바둑돌이 있었는데, 곧바로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천녀에게 졌는데, 갑자기 놀라 깨어났다. 다음 날 조회를 받고, 대신들에게 물으니, 그 꿈이 어떠한가? 적상이 아뢰기를, “신이 이 꿈을 해몽하건대, 나라에 불길한 일입니다.
폐하께서 대라천녀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꿈을 꾸셨는데, 바둑판에 바둑돌이 있었는데, 곧바로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천녀에게 지셨으니, 대개 바둑판에 바둑돌이 있으나, 그 지위에 있지 못하고, 곧바로 공격을 받아, 주인을 잃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태자 여릉왕이 방주(房州)로 천 리나 귀양 갔으니, 이는 바둑판에 바둑돌이 있으나, 그 지위에 있지 못한 것이니, 드디어 이 꿈을 느끼신 것입니다. 신은 동궁(东宫)의 지위에, 속히 여릉왕을 세워 저수(储君)로 삼기를 원하오니, 만약 무삼사를 세운다면, 마침내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송나라 통속 소설로 살펴보면, 당나라 말의 주로 권선징악을 주장하는 것과는 약간 다르고, 실제로 잡극(杂剧) 중의 “설화(说话)”에서 나왔다. 설화란, 입으로 예나 지금의 놀랍고 듣기 좋은 일을 말하는 것을 이르니, 당나라 때에도 이미 있었으니,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阳杂俎)》(《속집(续集)》 4 《폄오편(贬误篇)》)에 이르기를, “내가 태화(太和) 말년에, 아우의 생일을 맞아 잡희(杂戏)를 보니, 저잣거리 사람이 소설(小说)을 하는데, 편작(扁鹊)을 ‘褊鹊’이라는 글자로 부르니, 상성(上声)이었다.……”라고 하였다. 이 상은(李商隐)의 《교아시(骄儿诗)》(집1)에도 또한 이르기를, “혹은 장비(张飞)의 오랑캐 짓을 희롱하고, 혹은 등애(邓艾)의 말을 더듬는 것을 비웃는다.”라고 하였으니, 당시 이미 삼국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송나라 도읍 변량(汴梁)은, 백성과 물자가 풍족하고, 유락(游乐)하는 일이 매우 많으니, 저잣거리에는 여러 가지 기예(技艺)가 있었는데, 그중에 “설화”가 있었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을 “설화인(说话人)”이라고 하였다. 설화인 중에는 전문가가 있었으니, 맹원로(孟元老)〔4〕(《동경몽화록(东京梦华录)》 5)가 일찍이 그 목록을 들었으니, 소설, 합생(合生), 설혼화(说诨话), 설삼분(说三分), 설《오대사(五代史)》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이 풍습은 바뀌지 않았으니, 오자목(吴自牧)〔5〕(《몽량록(梦粱录)》 20)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설화하는 사람은, 혀의 재치라고 이르니, 비록 네 가지 종류가 있으나, 각각 문정(门庭)이 있다.
또 “소설”은 “은자아(银字儿)”라고 하니, 예를 들어 연분(烟粉), 영괴(灵怪), 전기(传奇), 공안(公案), 박도(扑刀), 간봉(赶棒), 발적(发迹), 변태(变态)의 일이다.……예나 지금을 논하니, 물의 흐름과 같다.
“담경(谈经)”은, 불경을 연설하는 것을 이르니, “설참청(说参请)”은, 손님과 주인이 참선(参禅)하여 깨닫는 등의 일을 이른다.……또 “설혼경(说诨经)”이 있다.
“강사서(讲史书)”는, 《통감(通鉴)》, 한(汉)나라, 당나라 역대 서사(书史), 문전(文传), 흥폐(兴废), 전쟁의 일을 강설하는 것을 이른다.
“합생”은, 지금의 수의금(随宜吟)과 비슷하니, 각각 한 가지 일을 맡는다.
관원내득옹(灌园耐得翁)〔7〕(《도성기승(都城纪胜)》)이 임안(临安)의 성대한 일을 서술하면서, 또한 설화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으니, 소설, 설경설참청, 설사(说史), 합생이라고 하였고, 소설을 세 가지로 나누었으니, 즉 “하나는 은자아이니, 예를 들어 연분, 영괴, 전기이고, 공안을 말하는 것은, 모두 주먹으로 치고 칼을 휘두르고 몽둥이를 쫓고 발적과 변태의 일이고, 철기아(铁骑儿)를 말하는 것은, 군사와 말, 징과 북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주밀(周密)〔8〕의 책(《무림구사(武林旧事)》 6)은, 네 가지 종류를 서술한 것이 또 약간 다르니, 연사(演史), 설경혼경, 소설, 설혼화라고 하였고, 합생이 없고, 또한 소설에 웅변사(雄辩社)(권3)가 있다고 하였으니, 당시 설화하는 사람들이 각자 가수를 지킬 뿐만 아니라, 또한 모임을 가져 그 기예를 연마하는 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화하는 일은, 비록 설화하는 사람들이 각자 솜씨를 부려, 수시로 만들어 내나, 여전히 저본(底本)이 있어 의지하니, 이것을 “화본(话本)”이라고 한다. 《몽량록》(20) 영희(影戏) 조항 아래에 이르기를, “그 화본은 강사서와 매우 같으니, 대개 진실과 거짓이 반반이다.”라고 하였다. 또 소설강경사 조항 아래에 이르기를, “대개 소설은, 한 왕조 한 시대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으니, 순식간에 꾸며 낸다.”라고 하였다. 《도성기승》에서 말한 것도 같으니, 다만 “꾸며 내다(捏合)”를 “드러내다(提破)”라고 했을 뿐이다. 이는 강사의 체제는, 역사를 차례로 서술하면서 허황한 말을 섞는 데 있고, 소설의 체제는, 한 이야기를 말하면서 결말을 정하는 데 있음을 안다. 지금 남아 있는 《오대사평화(五代史平话)》 및 《통속소설(通俗小说)》〔9〕 잔본은, 대개 곧 이 두 가지 종류 화본의 흐름이니, 그 체제가 바로 이와 같다.
《신편오대사평화(新编五代史平话)》는, 강사(讲史)의 하나이니, 맹원로(孟元老)가 이른바 “《오대사(五代史)》를 말한다(说《五代史》)”라는 화본이니, 이는 거의 이에 가깝다. 그 책은 양(梁), 당(唐), 진(晋), 한(汉), 주(周) 각 왕조마다 2권으로 되어 있고, 각각 시(诗)로 시작하고, 다음으로 본문에 들어가고, 또 시로 끝맺는다. 오직 《양사평화(梁史平话)》는 개벽(开辟)으로 시작하고, 다음으로 역대 흥망의 일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논지를 세운 것이 매우 기이하고, 또한 황당한 인과설(因果说)을 섞었다.
용과 호랑이가 싸운 지 몇 년인가, 오대(五代)는 양, 당, 진, 한, 주이니, 흥하고 망함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으니, 임금이 바뀌고 나라가 변하는 것이 마치 우편을 전하는 것과 같다.
옛날 아득한 옛날 세상이 처음 열리고, 세상의 기운이 비로소 열리니, 복희(伏羲)가 팔괘(八卦)를 그려 문자가 생기고, 황제(黄帝)가 옷을 드리워 천하가 다스려졌다.……그때 제후들이 모두 이미 순종하였는데, 오직 치우(蚩尤)가 염제(炎帝)와 함께 제후들을 침략하고 포악하게 굴어, 왕의 교화에 복종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에 제후들을 거느리고, 군사를 일으켜 무리를 동원하여,……
드디어 염제를 죽이고, 치우를 사로잡으니, 만국이 평정되었다. 이 황제가 싸움의 우두머리가 되어, 천하 후세에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가르쳤다.……탕왕(汤王)이 걸(桀)을 치고, 무왕(武王)이 주(纣)를 친 것은, 모두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천하를 찬탈한 것이다. 탕왕과 무왕이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후에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제후가 강대해지니, 춘추 시대 240년 동안,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인 일도 있고, 아들이 그 아버지를 죽인 일도 있었다. 공자 성인이 삼강(三纲)이 무너지고, 구법(九法)이 폐지되는 것을 보고, 곧은 붓을 잡고, 한 권의 책을 지었으니, 이름을 《춘추(春秋)》라고 하였으니, 그 착한 것을 포상하고, 그 악한 것을 벌하였으므로,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공자가 《춘추》를 지으니 난신적자(乱臣贼子)가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다. 오직 한 고조(汉高祖)는 성은 유(刘)이고 이름은 계(季)이니, 그 진 시황(秦始皇)의 천하를 취하면서 찬탈의 계략을 쓰지 않았으니, 참으로 이러하다.
손에 석 자의 용천검(龙泉剑)을 쥐고, 중원(中原)의 사백 주(州)를 빼앗았다.
유계는 항우(项羽)를 죽이고, 나라 이름을 한이라고 하였는데, 단지 공신을 의심하고 꺼렸기 때문에, 한왕 신(韩王信), 팽월(彭越), 진희(陈豨) 등의 무리는, 모두 멸족과 주벌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 세 공신이 원통함을 품고 하늘에 호소하니, 하느님이 가엾게 여겨 세 공신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그들 세 명에게 다시 태어나 세 명의 호걸이 되도록 명하였다. 한신은 조(曹)씨 집안에 태어나 조조(曹操)가 되었고, 팽월은 손(孙)씨 집안에 태어나 손권(孙权)이 되었고, 진희는 그 종실 집안에 태어나 유비(刘备)가 되었다. 이 세 명이 그의 천하를 나누었으니,……삼국은 각각 역사가 있으니, 이르기를 《삼국지(三国志)》라고 한다.……
이에 다시 진(晋)나라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소(黄巢)의 변란에 이르기까지, 주씨(朱氏)가 나라를 세우기까지 서술하였는데, 그 하권은 지금 빠져 있으니, 마땅히 양나라의 멸망으로 끝났을 것이다. 전 책의 서술은, 자세함과 간략함이 매우 다르니, 대개 역사상의 큰일은, 곧 발휘하는 것이 없고, 자질구레한 일에 관계되면, 곧 더 꾸미는 것이 많으니, 변려문(骈俪文)으로 형용하고, 시가로 증명하고, 또한 익살스러운 말을 섞어, 웃음을 자아내니, 예를 들어 황소가 과거에 낙방하고, 주온(朱温) 등과 도둑이 되어, 후가장(侯家庄) 마평사(马评事)를 습격하러 갈 때 도중의 정경을 말한 것이, 곧 그 예이다.
……황소가 말하기를, “만약 그를 습격하러 갈 때, 현제(贤弟)가 손을 쓸 필요가 없으니, 나에게는 삼문검(桑门剑) 한 자루가 있으니, 이는 하늘이 황소에게 내린 것이니, 내가 칼을 한 번 가리키면, 그가 어떤 사람이라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을 마치고 곧 갔는데, 현도봉(悬刀峰)이라는 높은 고개를 지나갔는데, 스스로 반나절을 가서야, 고개에서 내려왔다. 좋은 고개로다! 이는 이러하다. 뿌리는 땅 모퉁이에 박혀 있고, 꼭대기는 하늘 끝에 닿아 있고, 푸르고 늙은 향나무는 긴 하늘을 스치고, 굳건한 외로운 소나무는 푸른 하늘을 침범하고, 산닭은 해와 함께 싸우고, 은하수는 시냇물과 이어져 흐르고, 날아 흐르는 샘물은 비발처럼 가늘게 내리고, 기이한 바위는 구름과 서로 부딪친다. 어찌 높은 것을 볼 수 있는가?
몇 년 동안 나무꾼 한 사람이 굴러 떨어졌는데, 지금까지 끝까지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
황소 형제 네 명이 이 높은 고개를 지나, 후가장을 바라보았다. 좋은 집이로다! 이에 보니, 돌은 한가로운 구름을 끌어당기고, 산은 시냇물과 이어져 있고, 둑가의 수양버들은, 바람에 하늘하늘 시냇가 다리를 스치고, 길가의 한가로운 꽃은, 햇빛에 무리 지어 들판 나루터를 가리고 있다. 그 네 형제가 집을 바라보니 멀리 오 리(里) 밖의 밭이 나오지 않으니, 해 질 녘이라, 함께 나무 숲에 들어가 쉬다가, 저녁이 되자 서쪽으로 가서 그 마씨(马氏) 집 문 앞에 갔다.……
《경본통속소설(京本通俗小说)》은 본래 몇 권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 권10부터 권16까지 남아 있으며, 매 권마다 한 편씩 있으니, 《연옥관음(碾玉观音)》, 《보살만(菩萨蛮)》, 《서산일굴귀(西山一窟鬼)》, 《지성 장주관(志诚张主管)》, 《요상공(拗相公)》, 《착참 최녕(错斩崔宁)》, 《풍옥매단원(冯玉梅团圆)》 등이며, 각 편마다 처음과 끝을 갖추고, 순식간에 끝낼 수 있으니, 오자목(吴自牧)이 기록한 바와 같다. 그 소재는 대부분 가까운 시대에 있으며, 혹은 다른 종류의 설부(说部)에서 취하기도 하였으니, 주로 즐거움을 주는 데 있고, 징계와 권면을 섞었다. 체제는 십중팔구 먼저 한담(闲话)이나 다른 일로 시작하고, 후에야 이어 붙여, 정문(正文)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 《연옥관음》은 함안군왕(咸安郡王)의 유춘(游春)을 서술하려 하니, 곧 봄 노래를 열댓 수나 들었다.
산빛은 맑고 아지랑이는 경치가 아름다우니, 따뜻한 기운에 기러기는 모래톱에서 날아오르고, 동쪽 들에는 점점 꽃이 눈에 가득하고, 남쪽 밭에는 어렴풋이 풀이 싹트는구나. 둑 위의 버들은, 까마귀를 감추지 못하고, 꽃을 찾아 걸음을 재촉하여 산가(山家)에 이르니, 언덕 위 몇 그루 붉은 매화는 지고, 붉은 살구 가지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네.
이 《자고천(鹧鸪天)》은 맹춘(孟春)의 경치를 말한 것이니, 원래 중춘(仲春)의 노래만큼 잘 지은 것은 아니다.
…………
이 세 수의 시는, 모두 왕안석(王安石)이 꽃잎이 조각조각 바람에 불려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원래 이 봄이 돌아가는 것은 동풍이 보내는 것이라고 한 것만큼 잘 지은 것은 아니다. 시에 이르기를,
봄날 봄바람은 때로 좋고, 봄날 봄바람은 때로 모질구나, 봄바람이 없으면 꽃이 피지 않고, 꽃이 피어도 또 바람에 불려 떨어지네.
소동파(苏东坡)는 말하기를, 동풍이 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봄비가 봄을 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비 오기 전에는 처음으로 꽃 사이의 꽃술을 보았는데, 비 온 후에는 온통 잎 아래의 꽃이 없어졌네, 벌과 나비는 분분히 담을 넘어 가니, 도리어 봄빛이 이웃집에 있는 줄 의심하네.
진소유(秦少游)는 말하기를, 바람의 일도 아니고, 비의 일도 아니고, 버들개지가 봄빛을 가지고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삼월 버들 꽃은 가볍게 흩어지고, 흩날리며 봄을 보내니, 이 꽃은 본래 무정한 물건이니, 한결같이 동쪽으로 날아가고 한결같이 서쪽으로 날아가네.
…………
왕암수(王岩叟)는 말하기를, 바람의 일도 아니고, 비의 일도 아니고, 버들개지의 일도 아니고, 나비의 일도 아니고, 꾀꼬리의 일도 아니고, 두견새의 일도 아니고, 제비의 일도 아니고, 구십 일 봄날이 이미 지나 봄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시에 이르기를,
바람을 원망하고 비를 원망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니, 바람과 비가 오지 않아도 봄은 돌아가네, 뺨의 붉은 기운은 푸른 매실처럼 작아지고, 입가의 누런 기운은 젖먹이 제비처럼 날아가네, 촉나라의 혼은 힘껏 꽃 그림자를 따라 울고, 오나라의 누에는 억지로 뽕나무를 먹으니, 봄이 돌아갈 곳이 없어 애태우니, 강호(江湖)가 도롱이를 저버렸네.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이 봄 노래를 말하는가? 소흥(绍兴) 연간에, 행재(行在)에 관서(关西) 연주(延州) 연안부(延安府) 사람이 있었으니, 본래 삼진절도사(三镇节度使) 함안군왕이었는데, 당시 봄이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은 권속을 데리고 유춘을 하였으니,……
이러한 인서(引首)는, 강사(讲史)에서 먼저 천지개벽(天地开辟)을 서술하는 것과는 약간 다르니, 대개 시사(诗词) 외에도, 또한 고사(故事)를 사용하거나, 서로 비슷한 것을 취하거나, 서로 다른 것을 취하는데, 대부분 시사(时事)를 사용한다. 서로 다른 것을 취하는 것은 반대에서 정면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서로 비슷한 것을 취하는 것은 비교적 얕고 깊음이 있으니, 갑자기 서로 끌어당겨, 본사(本事)로 들어가므로, 서술이 비로소 시작되나, 주의(主意)는 이미 명확하니, 내득옹(耐得翁)이 이른바 “드러내다(提破)”라고 한 것과, 오자목(吴自牧)이 이른바 “꾸며 내다(捏合)”라고 한 것은, 거의 이것을 가리킨다. 무릇 그 상반부(上半部)를, “득승두회(得胜头回)”라고 하니, 두회(头回)는 오히려 전회(前回)라고 이르니, 이야기 듣는 사람이 대부분 군민(军民)이므로, 길한 말로 “득승”이라고 붙였으니, 궁중에 들어가서 강론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체에 이르러서는, 《오대사평화(五代史平话)》의 자질구레한 일을 펴서 서술하는 곳과 매우 비슷하나, 비교적 자세하다. 《서산일굴귀(西山一窟鬼)》에서 오수재(吴秀才)가 한 번 귀신에게 유인된 일을 서술하는데, 만나는 것이 하나도 귀신이 아닌 것이 없으니, 대개 《귀동(鬼董)》〔10〕(4)의 《번생(樊生)》에 근본하였으나, 묘사한 것이 구불구불하고 자질구레하니, 비록 명청(明清) 연의(演义)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 그 약혼의 시작을 기록한 것이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학당을 연 후에, 일 년이 지나니, 죄송하게도, 저잣거리 사람들이 모두 아이들을 데려와 그에게 가르치게 하니, 자못 넉넉하였다. 그날 마침 학당에서 글을 가르치고 있는데, 푸른 포렴(布帘)에서 방울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오 교수가 들어온 사람을 보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십 년 전에 이사 간 이웃집 왕 할멈이었다. 원래 그 할멈은 “중매쟁이”로, 오로지 중매를 하여 생계를 이었다. 오 교수가 서로 읍(揖)하고 나서,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지금 할멈은 어디에 사십니까?”라고 하니, 할멈이 말하기를, “교수께서 늙은 할멈을 잊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늙은 할멈은 전당문(钱塘门) 안 성을 따라 삽니다.”라고 하였다. 교수가 묻기를, “할멈의 연세는 얼마나 되십니까?”라고 하니, 할멈이 말하기를, “늙은 할멈의 나이는 일흔다섯입니다. 교수의 젊은 나이는 얼마나 되십니까?”라고 하니, 교수가 말하기를, “소인은 스물두 살입니다.”라고 하였다.
할멈이 말하기를, “교수가 겨우 스물두 살인데, 서른 살 이상 된 사람 같습니다. 생각하건대 교수께서는 날마다 얼마나 마음을 쓰십니까? 제가 보기에, 작은 아씨 하나가 함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교수가 말하기를, “저도 여기서 여러 번 사람을 시켜 물어보았으나, 이러한 인연이 없었습니다.”라고 하니, 할멈이 말하기를, “‘원수가 아니면 만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을 관인(官人)께서 아시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혼처가 여기에 있으니, 천 관(贯)의 집값에, 시집가는 하인 한 명을 데리고 가고, 또한 인물도 좋고, 악기도 한 상자 다 вмі고, 글도 쓰고 셈도 잘하고, 또한 쩌쩌(唓嗻) 큰 관청의 집안 출신이니, 오로지 글 읽는 관인에게 시집가려고 합니다. 교수께서는 원하십니까?”라고 하니, 교수가 말을 듣고 나서, 기쁨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하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 “만약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이 작은 아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남송(南宋)이 멸망하자, 잡극이 쇠퇴하고, 설화는 마침내 다시 행해지지 않았으나, 화본은 대개 남아 있는 것이 많으니, 후인(后人)이 보고 배워 책을 지으니, 비록 이미 입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나, 오히려 옛 형식을 보존하였으니, 소설의 종류에는 《박안경기(拍案惊奇)》, 《취성석(醉醒石)》〔11〕 등의 무리가 있고, 강사의 종류에는 《열국연의(列国演义)》, 《수당연의(隋唐演义)》〔12〕 등의 무리가 있으니, 오직 세상에서는 이 두 종류에 대해, 점점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어, 모두 “소설”로 통칭하게 되었다.
〔1〕 《당태종입명기(唐太宗入冥记)》는 왕중민(王重民) 등이 편집한 《돈황변문집(敦煌变文集)》 권2에 실려 있다.
《효자 동영전(孝子董永传)》은 《돈황변문집》 권1에 실려 있으며, 제목은 《동영변문(董永变文)》이다. 《추호 소설(秋胡小说)》은 《돈황변문집》 권2에 실려 있으며, 제목은 《추호변문(秋胡变文)》이고, 현존하는 것은 잔본(残本)이다. 《오자서 입오 고사(伍员入吴故事)》는 《돈황변문집》 권1에 실려 있으며, 제목은 《오자서변문(伍子胥变文)》이다.
〔2〕 《유마(维摩)》의 전체 명칭은 《유마힐경강경문(维摩诘经讲经文)》이며, 《돈황변문집》 권5에 실려 있고, 현재 함께 남아 있는 것은 잔권(残卷) 6편이다. 《법화(法华)》의 전체 명칭은 《묘법연화경(妙法莲华经)》이며, 《돈황변문집》 권5에 실려 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편이다. 《석가팔상성도기(释迦八相成道记)》는 《돈황변문집》 권4의 《태자성도경(太子成道经)》, 《태자성도변문(太子成道变文)》, 《팔상변(八相变)》 및 권7의 《팔상압좌문(八相押座文)》 네 편에 따르면, 모두 석가모니의 성도(成道)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으니, 《석가팔상성도기》는 이 네 편을 가리켜 말하는 듯하다. 《목련입지옥 고사(目连入地狱故事)》는 《돈황변문집》 권6에 실려 있으며, 제목은 《대목건련명간구모변문(大目乾连冥间救母变文)》이다.
〔3〕 범중엄(范仲淹)(989—1052) 자는 희문(希文)이고, 북송(北宋) 오현(吴县)(지금의 장쑤성(江苏省)에 속함) 사람이며, 일찍이 참지정사(参知政事)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 《범문정공집(范文正公集)》이 있다. 《당상 양공 비문(唐相梁公碑文)》은 《범문정공집》 권11에 실려 있다. 이 책의 부록 《범문정공연보(范文正公年谱)》에 따르면, 범중엄은 보원(宝元) 원년(1038)에 파양(鄱阳)에서 윤주(润州)로 가면서, “길을 가다 팽택(彭泽)을 지나, 적양공(狄梁公) 사당에 참배하고, 명절(名节)을 흠모하여, 그를 위해 기록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라고 한다.
〔4〕 맹원로(孟元老) 호는 유란거사(幽兰居士)이고, 송나라 사람이며,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혹자는 송 휘종(徽宗)을 위해 긍악(艮岳)을 감독하여 만든 맹규(孟揆)라고도 한다). 지은 책 《동경몽화록(东京梦华录)》은 10권이고, 남송 초기에 완성되었다. 내용은 북송의 도읍 변량(汴梁)의 도시, 거리, 세시(岁时), 풍속, 기예 등을 추억하여 기록하였다.
〔5〕 오자목(吴自牧) 남송(南宋) 전당(钱塘)(지금의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 사람이고,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지은 책 《몽량록(梦粱录)》은 20권이고, 남송의 도읍 임안(临安)의 교묘(郊庙), 궁전, 풍속, 물산 및 백공(百工) 잡희(杂戏) 등을 기록하였다.
〔6〕 기금수금(起今随今)은 《몽량록》 권20에 따르면, 원작은 “기령수령(起令随令)”이다.
〔7〕 관원내득옹(灌园耐得翁)은 관포내득옹(灌圃耐得翁)이라고도 하며, 성은 조(赵)이고, 남송(南宋) 사람이다. 지은 책 《도성기승(都城纪胜)》은 1권이고, 시정(市井), 와사(瓦舍)의 여러 기예 등 14가지로 나누어, 당시 도읍 임안(临安)의 거리 상점, 원림 건축과 와사 기예 등을 기록하였다.
〔8〕 주밀(周密)(1232—1298) 자는 공근(公谨), 호는 초창(草窗)이다. 남송(南宋) 제남(济南) 사람으로, 저장성(浙江省) 오흥(吴兴)에 거주하였고, 일찍이 의오현(义乌县) 현령(县令)을 지냈다. 지은 책 《무림구사(武林旧事)》는 10권이고, 송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남송의 도읍 임안(临安)의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중 민간 기예에 대한 기록이 매우 자세하다.
〔9〕 《오대사평화(五代史平话)》는 곧 《신편오대사평화(新编五代史平话)》이며, 전 책은 오대(五代)의 흥망 역사를 개괄적으로 서술한다. 《통속소설(通俗小说)》은 곧 《경본통속소설(京本通俗小说)》이며, 화본집으로, 잔본(残本) 9편이 남아 있다. 강동노음(江东老蟫)(묘전손(缪荃孙))의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그중 “정주삼괴(定州三怪) 한 회(回)는, 파손이 너무 심하고, 금나라 해릉왕(海陵王)의 황음한 두 권은, 너무 외설스러워서, 감히 전하여 베끼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므로, 현재 통행하는 책은 7편뿐이다.
〔10〕 《귀동(鬼董)》의 다른 이름은 《귀동호(鬼董狐)》이고, 5권이다. 작가의 성은 심(沈)이고, 송나라 사람이다.
〔11〕 《박안경기(拍案惊奇)》, 《취성석(醉醒石)》은 이 책 제21편을 참고하라.
〔12〕 《열국연의(列国演义)》는 이 책 제15편을 참고하라. 《수당연의(隋唐演义)》는 이 책 제14편을 참고하라.
설화가 이미 성행하니, 당시의 여러 저작들도, 당연히 화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북송(北宋) 때, 유부(刘斧) 수재(秀才)가 옛날과 지금의 패설(稗说)을 모아 《청쇄고의(青琐高议)》 및 《청쇄척유(青琐摭遗)》〔1〕를 지었는데, 문사는 비록 졸렬하고 속되나, 아직 화본은 아니지만, 문장 제목 아래에, 이미 각각 칠언시(七言诗)를 붙였으니, 예를 들어 《유홍기(流红记)》(붉은 잎에 시를 써서 한씨(韩氏)를 아내로 맞이하다)
《조비연외전(赵飞燕外传)》(별전에서 비연의 본말을 서술하다)
《한위공(韩魏公)》(잔을 깨고 수염을 태운 사람을 벌하지 않다)
《왕사(王榭)》(거센 파도에 오의국(乌衣国)으로 표류해 들어가다)〔2〕 등은, 모두 하나의 제목에 하나의 해설을 붙였으니, 매우 원나라 희곡 결말의 “제목(题目)”과 “정명(正名)”과 유사하므로, 변량(汴梁) 설화의 제목, 체재가 혹은 이와 같았을 것이라고 의심하니, 습속이 스며들어, 문장에까지 미쳤다. 전체적으로 그 변화를 받은 것으로는, 지금 오히려 《대당삼장법사취경기(大唐三藏法师取经记)》 및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遗事)》〔3〕 두 책이 유전되는데, 모두 처음과 끝을 시로 일관하고, 중간에 시사(诗词)로 장식하였으니, 어구가 많이 속되나, 화본과는 또 다르니, 강사에 가깝지만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소설과 비슷하지만 꾸며 낸 것은 없다. 전증(钱曾)은 《선화유사》에 대해, 《등화파파(灯花婆婆)》 등 15종〔4〕을 아울러 “사화(词话)”라고 하였으니(《역시원서목(也是园书目)》 10), 시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의 《착참최녕(错斩崔宁)》, 《풍옥매단원(冯玉梅团圆)》 두 종류는, 또한 《경본통속소설(京本通俗小说)》 중에도 보이니, 본래 설화의 한 종류로, 전문가로부터 전해졌으니, 이야기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여, 통편이 서로 어울리니, 《선화유사》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대개 《선화유사》는 비록 시와 이야기가 있으나, 완전히 설화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작자가 옛 책을 모으고, 소설을 더하여, 덧붙여 연결하여, 억지로 한 권의 책을 만들었으므로, 형식만 남아 있고, 정채(精彩)는 마침내 뒤떨어지니, 문사 또한 대부분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므로, 창작이라고 할 수 없다. 《취경기(取经记)》는 더욱 간략하다. 오직 설화가 소멸하고, 화본이 마침내 저작으로 변하였으니, 또한 이러한 것들에 의지하여 그 중추가 되었을 뿐이다.
《대당삼장법사취경기》 3권은, 옛 책이 일본에 있고, 또한 작은 책 하나가 있으니 이름하여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经诗话)》라고 하는데, 내용이 모두 같고, 권말 한 줄에 “중와자 장가인(中瓦子张家印)”이라고 하였으니, 장가는 송나라 때 임안(临安)의 서점이었으므로, 세상에서는 이로 인해 송나라 간행본이라고 여겼으나, 원나라에 이르러, 장가가 혹은 무사하였을 수도 있으니, 이 책이 혹은 원나라 사람이 지었을 수도 있으니, 알 수 없다. 3권은 17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지금 보이는 소설의 장회(章回)를 나누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매 장마다 반드시 시가 있으므로, 시화(诗话)라고 한다. 첫 장은 두 책 모두 빠져 있고, 다음 장은 현장 등이 원숭이 행자(行者)를 만난 것을 기록하였다.
행정(行程)에서 원숭이 행자(行者)를 만난 곳에서 승려 일행 여섯 명이, 당일에 길을 떠났다.……어느 날 정오에, 흰 옷을 입은 선비(秀才) 한 명이, 정동쪽에서 오는 것을 보니, 곧 화상(和尚)에게 읍(揖)하며, “만복만복(万福万福)! 화상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혹 다시 서천(西天)에 경전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십니까?”라고 하니, 법사(法师)가 합장(合掌)하여 말하기를, “빈도(贫道)는 칙명(敕命)을 받들어, 동토(东土)의 중생에게 아직 불교가 없으므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비가 말하기를, “화상께서는 생전에 두 번 경전을 구하러 갔으나, 중도에 재난을 당하였으니, 이번에 만약 간다면, 천 번 죽고 만 번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법사가 이르기를, “그대는 어떻게 아시오?”라고 하니, 선비가 말하기를, “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화과산(花果山) 자운동(紫云洞)의 팔만사천 동두철액(铜头铁额) 미후왕(弥猴王)입니다. 제가 지금 화상을 도와 경전을 구하러 왔으니, 이곳에서 백만 리(程途)의 길을 가서, 서른여섯 나라를 지나는데, 많은 화난(祸难)의 곳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응하여 이르기를, “정녕 이와 같다면, 삼세(三世)에 인연이 있는 것이니, 동토의 중생이, 큰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곧 고쳐 원숭이 행자라고 불렀다. 승려 일행 일곱 명이, 다음 날 함께 갔으니, 좌우에서 모시었다. 원숭이 행자가 시를 남겨 이르기를,
백만 리의 길 저쪽을 향하니, 지금 와서 대사(大师)의 앞을 도우니, 일심으로 진정한 가르침을 만나기를 축원하며, 함께 서천 계족산(鸡足山)으로 가네.
삼장법사가 시로 답하여 이르기를,
이날은 전생에 숙연(宿缘)이 있었으니, 오늘 아침 과연 대명선(大明仙)을 만났네, 앞길에 만약 요마(妖魔)의 곳에 이르면, 신통력(神通力)을 나타내어 부처님 앞에서 진압하기를 바라네.
이에 행자의 신통력을 빌려, 함께 대범천왕(大梵天王)의 궁궐에 들어가니, 법사가 설법을 마치니, “은형모(隐形帽) 한 개, 금환석장(金镮锡杖) 한 개, 바리때 한 개, 세 가지 물건을 갖추어” 하사받고, 다시 하계(下界)로 돌아와, 향림사(香林寺)를 지나, 큰 뱀 고개(大蛇岭) 구룡지(九龙池) 등의 위험한 곳을 거치니, 모두 행자의 법력으로, 편안하게 진행하였다. 또한 심사신(深沙神)이 몸을 변화시켜 금교(金桥)를 만들어, 큰 물을 건너게 하고, 귀자모국(鬼子母国), 여인국(女人国)을 지나 왕모지(王母池)에 이르니, 법사가 복숭아를 먹고 싶어, 원숭이 행자에게 가서 훔쳐 오라고 명하였다.
왕모지에 들어간 곳 열한 번째……법사가 이르기를, “오늘 반도(蟠桃)가 열매 맺었으니, 서너 개 훔쳐 먹을 수 있기를 바라네.”라고 하니, 원숭이 행자가 이르기를, “제가 팔백 살 때 열 개를 훔쳐 먹었다가, 왕모에게 붙잡혀, 왼쪽 옆구리에 팔백 대, 오른쪽 옆구리에 삼천 대의 쇠몽둥이 형벌을 받고, 화과산 자운동에 유배되었으니, 지금까지 옆구리가 아직도 아프니, 저는 지금 정녕 감히 훔쳐 먹지 못할 것입니다.”……앞으로 가는 사이에, 홀연히 만 길이나 높은 돌벽을 보고, 또 사오 리(里) 넓이의 돌판을 보고, 또 수십 리 넓이의 두 개의 연못을 보니, 아득히 만 길이나 깊고, 까마귀와 새도 날지 못하였다. 일곱 명이 앉아, 마침 쉬고 있을 때,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 만 길이나 되는 돌벽 가운데, 몇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울창하게 푸르러, 위로는 푸른 하늘에 닿아 있고, 가지와 잎은 무성하고, 아래로는 연못물에 잠겨 있었다.……행자가 이르기를, “나무 위에 지금 십여 개가 있으니, 지신(地神)이 그곳을 지키고 있으므로, 훔치러 갈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스승이 이르기를, “그대는 신통력이 광대하니, 가면 반드시 무방할 것이다.”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개의 반도를 연못에 떨어뜨리니, 스승이 매우 놀라,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스승께서는 놀라지 마십시오(惊의 약자), 이는 반도가 막 익어서, 물에 떨어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스승이 이르기를, “가서 찾아와 먹어라!”……
행자가 지팡이로 돌을 치니, 앞뒤로 두 동자(童子)가 나타났는데, 한 명은 삼천 살, 한 명은 오천 살이라고 하니, 모두 쫓아 버렸다.……또 여러 번 치니, 우연히 아이 하나가 나와서, “너는 나이가 얼마나 되느냐?”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칠천 살입니다.”라고 하였다. 행자가 금환장을 내려놓고, 아이를 손에 넣어 오라고 하니, 화상에게 먹겠느냐고 물으니, 화상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도망갔다. 행자가 손에서 몇 번 돌리니, 아이가 대추 한 개로 변하였다. 당시 입에 삼키니, 후에 동토 당나라로 돌아와, 마침내 서천(西川)에서 토해 내니,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인삼이 나는 것이다. 공중에서 한 사람이 보이는 듯하더니, 시를 읊어 이르기를,
화과산 중에 한 인재, 어려서 일찍이 이곳에서 잘못을 저질렀네, 지금 귀가 뜨거워짐을 공중에서 보니, 전에 복숭아를 훔치던 객이 또 왔네.
이로 인해 마침내 천축(天竺)에 이르러, 경문 오천사백 권을 구하였으나, 《다심경(多心经)》은 빠졌으니, 향림사로 돌아오니, 비로소 정광불(定光佛)에게서 받았네. 일곱 명이 이미 돌아오니, 황제가 교외에서 맞이하고, 여러 주(州)에서 법을 받드니, 7월 15일 정오에, 천궁(天宫)에서 연꽃 배(采莲舡)가 내려오니, 법사가 그것을 타고, 서쪽으로 신선이 되어 갔네. 후에 태종(太宗)이 다시 원숭이 행자를 동근철골대성(铜筋铁骨大圣)으로 봉하였다.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遗事)》는 세상에서 대부분 송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 여기지만, 글 중에 여성원(吕省元)〔5〕의 《선화강편(宣和讲篇)》 및 남유(南儒)의 《영사시(咏史诗)》가 있는데, 성원과 남유는 모두 원나라 시대의 용어이므로, 이 책이 혹 원나라 사람에게서 나왔거나, 혹은 송나라의 옛 책인데, 원나라 때 다시 더해졌을 수도 있으니, 모두 알 수 없고, 어투가 송나라 사람과 매우 비슷한 것은, 옛 책을 베껴 모았기 때문이지, 저자의 본래 어투가 아니다. 책은 전집(前集)과 후집(后集)으로 나뉘는데, 요순(尧舜)을 칭송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고종(高宗)이 임안(临安)에 도읍을 정하는 것으로 끝나니, 연도에 따라 서술하였으니, 체재가 매우 강사(讲史)와 비슷하다. 오직 내용을 발췌하여 책을 만들고, 융회(融会)하지 않았으므로, 앞뒤의 문체가, 서로 차이가 있음이, 분명히 보인다. 그 표절한 책은 마땅히 열 종류〔6〕가 있을 것이다. 전집은 먼저 역대 제왕의 황음한 잘못을 말한 것이 그 첫 번째이니, 대개 마치 송나라 사람이 강사의 서두를 여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왕안석(王安石) 변법의 화(祸)를 서술한 것이 그 두 번째이니, 또한 북송 말 사대부의 논의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다음으로 안석이 채경(蔡京)을 조정에 끌어들이고 동관(童贯), 채유(蔡攸)가 변방을 순찰하는 것을 서술한 것이 그 세 번째이니, 처음 하나는 구어체이고, 다음 두 개는 문언체이면서 시를 섞었다. 그 네 번째는, 양산박(梁山泺) 의거의 본말이니, 먼저 양지(杨志)가 칼을 팔다가 사람을 죽인 일, 조개(晁盖)가 생일 선물을 강탈한 일을 서술하고, 드디어 스무 명을 불러 모아, 함께 태행산(太行山) 양산박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니, 송강(宋江) 또한 염파석(阎婆惜)을 죽이고 도망하여, 집 뒤 구천현녀묘(九天玄女庙)에 숨어 있다가, 관병이 이미 물러간 것을 보고, 나와서 현녀에게 사례한다.
……향안(香案) 위에서 우렁찬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쳐다보니, 한 권의 문서가 위에 있었다. 송강이 펼쳐 보니, 천서(天书)임을 알아보았다. 또한 서른여섯 명의 성명이 쓰여 있었고, 또한 네 구절의 시가 적혀 있었다.
나라를 망친 것은 산의 나무 때문이고, 군사와 칼은 물의 공로 때문이네, 하루아침에 장령(将领)이 되니, 온 세상에 위풍이 떨치네.
송강이 읽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네 구절은 분명히 내 이름과 성을 말한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천서 한 권을 펼쳐, 자세히 살펴보니, 서른여섯 장수의 성명이 있었다. 그 서른여섯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지다성 오가량(智多星吴加亮) 옥기린 이진의(玉麒麟李进义) 청면수 양지(青面兽杨志) 혼강룡 이해구(混江龙李海) 구문룡 사진(九纹龙史进) 입운룡 공손승(入云龙公孙胜) 낭리백조 장순(浪里白条张顺) 벽력화 진명(霹雳火秦明) 활염라 완소칠(活阎罗阮小七) 입지태세 완소오(立地太岁阮小五) 단명이랑 완진(短命二郎阮进) 대도 관필승(大刀关必胜) 표자두 임충(豹子头林冲) 흑선풍 이규(黑旋风李逵) 소선풍 시진(小旋风柴进) 금창수 서녕(金枪手徐宁) 박천조 이응(扑天雕李应) 적발귀 유당(赤发鬼刘唐) 일직당 동평(一直撞董平) 삽시호 뇌횡(插翅虎雷横) 미염공 주동(美髯公朱同) 신행태보 대종(神行太保戴宗) 새관색 왕웅(赛关索王雄) 병울지 손립(病尉迟孙立) 소이광 화영(小李广花荣) 몰우전 장청(没羽箭张青) 몰차란 목횡(没遮拦穆横) 낭자 연청(浪子燕青) 화화상 노지심(花和尚鲁智深) 행자 무송(行者武松) 철편 호연작(铁鞭呼延绰) 급선봉 색초(急先锋索超) 필명삼랑 석수(拚命三郎石秀) 화선공 장잠(火船工张岑) 만착운 두천(摸着云杜千) 철천왕 조개(铁天王晁盖) 송강이 인명을 보고, 마지막에 한 줄 글씨가 쓰여 있었다. “천서(天书)를 천강원(天罡院) 서른여섯 명의 맹장(猛将)에게 부치니, 호보의(呼保义) 송강을 수령으로 삼아, 널리 충의를 행하고, 간사하고 사악한 것을 없애라.”
이에 송강은 주동 등 아홉 명과 함께 또한 산채(山寨)로 가서, 조개가 이미 죽은 것을 만나, 드디어 수령으로 추대되어, “각각 강한 사람들을 통솔하여, 주(州)를 약탈하고 현(县)을 쳐서, 방화하고 사람을 죽이고, 회양(淮阳), 경서(京西), 하북(河北) 세 길의 스물네 주(州) 여든여덟 현(县)을 공격하여, 남녀와 옥백(玉帛)을 약탈하니, 매우 많이 노략질하였다.” 이미 노지심 등이 또한 투항하러 오니, 드디어 서른여섯 명의 수를 채웠다.
어느 날, 송강이 오가량(吴加亮)과 상의하기를, “우리 서른여섯 명의 맹장(猛将)이, 이미 수를 채웠으니, 동악(东岳)의 보호해 준 은혜를 잊지 말고, 마땅히 가서 향을 피우고 제사 지내어 소원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날을 택하여 길을 떠나니, 송강이 네 구절의 시를 지어 깃발에 써서 길을 나섰다.
올 때는 서른여섯이었으나, 갈 때는 열여덟 쌍이 되리라, 만약 한 명이라도 적다면, 정녕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송강이 서른여섯 장수를 거느리고 동악에 가서, 금 향로(金香炉)에 제사 지내어 소원을 빌었다. 조정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부득이 방(榜)을 내어 송강 등을 불러들였다. 원수(元帅) 성은 장(张)이고 이름은 숙야(叔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대로 장수 집안의 자제로, 와서 회유하니, 송강과 서른여섯 명은 송나라에 귀순하여, 각각 대부(大夫)의 고칙(诰敕)을 받고, 여러 길(路)의 순검사(巡检使)로 나뉘어 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세 길의 도적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후에 송강을 보내어 방랍(方腊)을 토벌한 공으로, 절도사(节度使)에 봉하였다.
그 다섯 번째는, 휘종(徽宗)이 이사사(李师师)의 집에 행차한 일, 조보(曹辅)가 간언한 일 및 장천각(张天觉)이 은거한 일이다. 그 여섯 번째는, 도사(道士) 임영소(林灵素)가 등용된 일 및 그 죽음과 장례의 이변이다. 그 일곱 번째는, 섣달에 미리 원소(元宵)를 즐긴 일 및 원소에 등불 구경의 성대한 모습이니, 모두 평화체(平话体)이다. 원소 등불 구경을 서술한 것은 다음과 같다.
선화(宣和) 6년 정월 14일 밤, 대내문(大内门)에서 곧장 붉은 비단 줄 위로, 선학(仙鹤) 한 마리가 날아 내려오니, 입에 조서(诏书) 한 통을 물고 있었다. 한 명의 중사(中使)가 받아 펼쳐 보니, 성지(圣旨)였다. 만백성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니는 사람이 손에 금자패(金字牌)를 들고, “만백성에게 알리라!”라고 외치니, 잠시 후, 서울의 백성들이 구름과 파도처럼 모여드니, 모두 머리에 옥매(玉梅), 설류(雪柳), 요아(闹蛾儿)를 꽂고, 오산(鳌山) 아래까지 가서 등불을 구경하였다. 곧 선덕문(宣德门)으로 가서 위에는 서너 명의 귀한 관리들이,……성지를 받아, 금전과 은전을 뿌리니, 만백성이 금전을 쟁탈하였다. 나중에 교방대사(教坊大使) 원도(袁陶)가 사(词)를 지었는데, 이름하여 《살금전(撒金钱)》이라고 한다.
자주 우러러 뵈오니, 태평성대에 또 원소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기쁘도다. 오산은 높이 솟아 푸르고, 단문(端门)과 마주하여 구슬과 옥이 얽혀 있으니, 마치 항아(嫦娥)가, 선궁(仙宫)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인간 세상에 임한 듯하네. 은혜로운 이슬을 고르게 베푸시니, 어란(御阑)에 기대어 성스러운 얼굴을 내리시네. 금전을 뿌리니, 어지럽게 흩어지니, 만백성이 다투어 빼앗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네. 관리에게 고하니, 이는 실례(失仪)이니, 또한 죄를 면해 주소서.
이날 밤 금전을 뿌린 후, 만백성이 각각 시정(市井)을 두루 유람하였으니, 가히 이르기를,
등불은 반짝거려 하늘이 밤이 아니고, 생황과 노래 소리는 시끄러워 땅에 봄이 길도다.
후집(后集)은 금나라 사람이 양식을 운반해 오는 것으로 시작하여, 경성(京城)이 함락되는 것으로 여덟 번째이다. 또 금나라 군대가 성에 들어오고, 황제와 황후가 북쪽으로 끌려가 모욕을 당하는 것으로부터 고종(高宗)이 임안(临安)에 도읍을 정하는 것으로 아홉 번째와 열 번째이니, 곧 《남신기문(南烬纪闻)》, 《절분록(窃愤录)》 및 《속록(续录)》〔7〕을 취하여 조금 삭제한 것이니, 두 책은 지금 모두 남아 있으며, 혹은 신기질(辛弃疾)〔8〕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송나라 사람들은 이미 위서(伪书)로 여겼다. 권말(卷末)에 다시 결론이 있으니, 이르기를 “세상의 유자(儒者)들이 고종이 중원(中原)을 회복할 기회를 놓친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하니, 건염(建炎) 초기에 기회를 놓친 것은, 잠선(潜善)의 백언(伯彦)이 눈앞의 안일만 탐하여 잘못한 것이고, 소흥(绍兴) 이후에 기회를 놓친 것은, 진회(秦桧)가 오랑캐에게 이용당하여 잘못한 것이다. 이 두 기회를 놓쳐, 중원의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임금과 아버지의 큰 원수를 갚지 못하고, 국가의 큰 치욕을 씻지 못하였으니, 이는 충신(忠臣)과 의사(义士)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원수 신하의 살을 먹고 그 가죽 위에서 자지 못함을 한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남송(南宋) 때 진회 일당이 실세한 후 사대부의 논의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1〕 《청쇄고의(青琐高议)》 및 《청쇄척유(青琐摭遗)》는 곧 《청쇄고의별집(青琐高议别集)》이니, 이 책 제108쪽 주〔19〕를 참고하라.
〔2〕 《유홍기(流红记)》는 《청쇄고의》 전집(前集) 권5에 보인다. 《조비연외전(赵飞燕外传)》은 《청쇄고의》 전집 권7에 보이는데, “외전(外传)”은 “별전(别传)”이라고도 한다. 《한위공(韩魏公)》은 《청쇄고의》 후집(后集) 권2에 보인다. 《왕사(王榭)》는 《청쇄고의별집》 권4에 보인다.
〔3〕 《대당삼장법사취경기(大唐三藏法师取经记)》의 다른 이름은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经诗话)》이고, 3권이다. 일본에는 도쿠토미 소호(德富苏峰)의 세이키도(成篑堂) 소장 대자본(大字本) 《취경기》, 미우라 칸주(三浦观树) 소장 소자(小字) 건상본(巾箱本) 《취경시화》가 있다(후에 오쿠라 키하치로(大仓喜七郎)에게 귀속). 두 가지 모두 각각 잔결(残缺)이 있다. 1916년 우리나라에 영인본(影印本)이 있었다.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遗事)》는, 약칭 《선화유사》라고 하며, 원형이정(元亨利贞) 4집(集), 혹은 전후(前后) 2집으로 나뉜다. 이 책은 《대당삼장법사취경기》와 함께 모두 송원(宋元) 사이에 나왔으며, 저자는 미상이다.
〔4〕 《등화파파(灯花婆婆)》 등 15종은 이 책 제16쪽 주〔49〕를 참고하라.
〔5〕 여상원(吕省元)은 여중(吕中)인 듯하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库全书总目提要)·대사기강의(大事记讲义)》:
“송나라 여중이 지었으니, 중의 자는 시가(时可)이고, 천주(泉州) 진강(晋江) 사람이다. 순우(淳祐) 연간에 진사(进士)에 급제하고, 국자감승(国子监丞)으로 옮겼으며, 숭정전설서(崇政殿说书)를 겸하였고, 조경교수(肇庆教授)로 옮겼다.”
〔6〕 표절한 책은 마땅히 10종이 있을 것이다. 이 10종의 책은 대략 《속송편년자치통감(续宋编年资治通鉴)》, 《구조편년비요(九朝编年备要)》, 《전당유사(钱塘遗事)》, 《빈퇴록(宾退录)》, 《건염중흥기(建炎中兴记)》, 《황조대사기강의(皇朝大事记讲义)》, 《남신기문(南烬纪闻)》, 《절분록(窃愤录)》, 《절분속록(窃愤续录)》, 《임영소전(林灵素传)》이다.
〔7〕 《남신기문(南烬纪闻)》은 1권이다. 《절분록(窃愤录)》, 《속록(续录)》은 각 1권이다. 두 책은 모두 송 휘종(徽宗), 흠종(钦宗) 두 황제가 포로로 잡혀 북쪽으로 끌려간 일을 기록하였다.
〔8〕 신기질(辛弃疾)(1140—1207) 자는 유안(幼安), 호는 가헌(稼轩)이며, 남송 역성(历城)(지금의 산둥성 지난(济南)) 사람이다. 호북(湖北), 강서(江西), 후난(湖南), 푸젠(福建), 절동(浙东) 등지의 안무사(安抚使)를 역임하였고, 적극적인 항금(抗金)을 주장하였다. 지은 시집으로 《가헌장단구(稼轩长短句)》 등이 있다.
제14편 원명(元明) 시대 전래의 강사(讲史)(상)
송나라의 설화인(说话人)은, 소설 및 강사에서 모두 고수(高手)(《몽량록(梦粱录)》 및 《무림구사(武林旧事)》에 이름이 보임)가 많았으나, 저작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원나라 시대에는 전란이 많아, 문화가 쇠락하였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 내각문고(内阁文库)에는 지정(至治)(1321—1323) 연간 신안(新安) 우씨(虞氏)가 간행한 전상(全相)(지금 이른바 수상전도(绣像全图)와 같음) 평화(平话) 5종〔1〕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르기를 《무왕벌주서(武王伐纣书)》, 《악의도제칠국춘추후집(乐毅图齐七国春秋后集)》, 《진병육국(秦并六国)》, 《여후참한신전한서속집(吕后斩韩信前汉书续集)》, 《삼국지(三国志)》라고 하며, 매 집마다 각 3권이다(《사문(斯文)》 제8편 제6호, 시오야 온(盐谷温)의 《명나라 소설 “삼언(三言)”에 대하여》). 지금 오직 《삼국지》만 인쇄본이 있고(시오야 박사 영인본 및 상무인서관(商务印书馆) 번인본), 다른 네 종류는 보지 못하였다. 그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国志平话)》는 상하 두 칸으로 나뉘는데, 상단은 그림이고, 하단은 이야기를 서술하며, 도원결의(桃园结义)에서 시작하여, 공명(孔明)의 병몰(病殁)으로 끝난다. 또한 서두에는 먼저 한고조(汉高祖)가 공신(功臣)을 살육한 일, 옥황(玉皇)이 판결을 내려, 한신(韩信)을 환생시켜 조조(曹操)로, 팽월(彭越)을 유비(刘备)로, 영포(英布)를 손권(孙权)으로, 고조는 헌제(献帝)로 삼았다고 서술하니, 구상이 《오대사평화(五代史平话)》와 다름이 없다. 오직 문필은 훨씬 못 미치니,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하고, 대략적인 줄거리만 갖추었을 뿐이니, 예를 들어 “적벽알병(赤壁鏖兵)”을 서술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무후(武侯)가 강을 건너 하구(夏口)에 이르니, 조조(曹操)가 배 위에서 크게 외치기를 “나는 죽었구나!”라고 하니, 여러 군사들이 말하기를, “모두 장간(蒋干) 때문이다.”라고 하니, 여러 관리들이 칼로 장간을 난자하여 만 갈래로 찢었다. 조조가 배에 올라, 황급히 도망치니, 강 어귀에서 나가 보니, 사방의 배 위가, 모두 불이었다. 수십 척의 배를 보니, 위에 황개(黄盖)가 말하기를, “조적(曹贼)을 베어, 천하를 태산처럼 편안하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조조의 여러 관리들은, 수전에 능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화살을 쏘아 서로 공격하였다. 말하자면 조조가 어찌할 바를 모르니,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고, 앞에서는 또 화살을 쏘았다. 조조가 도망치려 하니, 북쪽에는 주유(周瑜)가 있고, 남쪽에는 노숙(鲁肃)이 있고, 서쪽에는 능통(陵统)과 감녕(甘宁)이 있고, 동쪽에는 장소(张昭)와 오포(吴苞)가 있으니, 사방에서 죽이라고 외쳤다. 사관(史官)이 말하기를, “만약 조공(曹公)의 집에 오제(五帝)의 구분이 있지 않았다면, 맹덕(孟德)은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조가 목숨을 건져, 서북쪽으로 도망치니, 강 언덕에 이르니, 여러 사람들이 조공을 말에 태웠다. 말하자면 황혼에 불이 일어나, 다음 날 아침 식사 때가 되어서야 나왔으니, 조조가 뒤돌아보니, 오히려 하구의 배 위에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은 것을 보니, 본부 군대는 만 명도 남지 않았다. 조승상(曹丞相)이 서북쪽을 바라보며 도망치니, 오 리(里)도 가지 못하여, 강 언덕에 오천 명의 군대가 있으니, 정산(常山)의 조운(赵云)임을 알아보니, 막아서니, 여러 관리들이 일제히 공격하였으나, 조 승상은 진을 뚫고 지나갔다.……
저녁이 되어, 큰 숲에 이르렀다.……조공이 활영(滑荣) 길을 찾아 가니, 이십 리도 가지 못하여, 오백 명의 칼 든 군사가 있으니, 관 장군이 막았다. 조 승상이 좋은 말로 관 장군에게 고하기를, “조후(曹侯)가 은혜를 베풀어 주셨소.”라고 하니, 관공(关公)이 말하기를, “군사(军师)의 엄한 명령이오.”라고 하니, 조 승상이 진을 뚫고 지나갔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얼굴에 먼지가 일더니, 조공이 벗어날 수 있었다. 관공이 수 리를 쫓다가 다시 돌아왔으니, 동쪽으로 십오 리를 가지 못하여, 현덕(玄德), 군사를 만났다. 이는 조적(曹贼)을 놓아준 것이니, 관공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을 시켜 현덕에게 작게 알리라고 하였다(案 이 구절은 이해할 수 없다). 여러 사람들이 어째서 그러냐고 물으니, 무후(武侯)가 말하기를, “관 장군은 인덕(仁德)이 있는 사람이니, 지난날 조 승상의 은혜를 입었으므로, 이로 인해 벗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관공이 말을 듣고, 분연히 말을 타고, 주공(主公)에게 다시 쫓아가겠다고 고하였다. 현덕이 말하기를, “내 아우의 성품은 돌이 아니니, 어찌 싫증내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군사가 말하기를, “제갈 적(亦?)이 갔으니, 만에 하나도 실수할 리 없을 것이다.”……
(권중 18~19쪽)
그 간략한 곳을 보니, 자못 설화인이 사용한 화본이라고 의심할 만하니, 이로 인해 추론하여, 크게 파란(波澜)을 더하면, 곧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으나, 페이지마다 반드시 그림이 있으니, 역시 사람들이 열람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머지 네 종류도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삼국지(三国志)》를 이야기하는 것은, 송나라 때 이미 매우 성행하였으니, 대개 당시 영웅이 많고, 무용(武勇)과 지략(智略)이, 뛰어나고 사람을 감동시키며, 사건의 양상이 초한(楚汉)처럼 간략하지도 않고, 또 춘추열국(春秋列国)처럼 번잡하지도 않으므로, 더욱 강설(讲说)에 적합하였다. 동파(东坡)(《지림(志林)》 6)에서 이르기를 “왕팽(王彭)이 일찍이 말하기를, 길거리의 어린아이들이 버릇없어, 그 집에서 싫어하고 괴로워하면, 문득 돈을 주어, 모여 앉아 옛날이야기를 듣게 하니, 삼국사(三国事)를 이야기할 때에 이르러, 유현덕(刘玄德)이 패했다는 것을 들으면, 자주 눈살을 찌푸리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고, 조조(曹操)가 패했다는 것을 들으면, 곧 기뻐하며 소리치고 좋아한다. 이로써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은택이, 백세(百世)에 끊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와사(瓦舍)에서, “삼분(三分)을 이야기하는 것”은 설화(说话)의 한 전문 과목이 되어, “《오대사(五代史)》를 강론하는 것”과 함께 나란히 하였다(《동경몽화록(东京梦华录)》 5).
금원(金元) 잡극(杂剧) 또한 자주 삼국 시대의 일을 사용하였으니, 예를 들어 《적벽알병(赤壁鏖兵)》, 《제갈량추풍오장원(诸葛亮秋风五丈原)》, 《격강투지(隔江斗智)》, 《연환계(连环计)》, 《복탈수선대(复夺受禅台)》〔2〕 등이 있으며, 오늘날 희곡으로 공연되는 것이 더욱 많으니, 세상에서 즐겨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는, 이에 나관중(罗贯中)의 본(本)이 있기에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관중(贯中)은, 이름은 본(本)이고, 전당(钱唐) 사람이다(명나라 낭영(郎瑛) 《칠수류고(七修类稿)》 23, 전여성(田汝成) 《서호유람지여(西湖游览志余)》 25, 호응린(胡应麟)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笔丛)》 41). 혹은 이름은 관(贯)이고, 자는 관중(贯中)이라고도 하고(명나라 왕기(王圻) 《속문헌통고(续文献通考)》 177), 혹은 월(越) 사람이고, 홍무(洪武) 초기에 태어났다고도 하니(주량공(周亮工) 《서영(书影)》), 대개 원명(元明) 간의 사람이다(약 1330—1400). 지은 소설이 매우 많으니, 명나라 때 수십 종이 있다고 하였으나(《지여(志余)》),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삼국지연의(三国志演义)》 외에, 오히려 《수당지전(隋唐志传)》, 《잔당오대사연의(残唐五代史演义)》, 《삼수평요전(三遂平妖传)》, 《수호전(水浒传)》 등이 있다. 또한 사곡(词曲)에도 능하여, 잡극 《용호풍운회(龙虎风云会)》〔3〕가 있다(목록은 《원인잡극선(元人杂剧选)》에 보임). 그러나 지금 전해지는 여러 소설은, 모두 여러 사람을 거쳐 증손(增损)되었으니, 진면목은 거의 다시 볼 수 없다.
나관중 본(本) 《삼국지연의(三国志演义)》〔4〕는,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명나라 홍치(弘治) 갑인년(甲寅年)(1494) 간행본이 가장 오래되었으니, 전서 24권, 240회로 나뉘어, 제목에 “진(晋) 평양후(平阳侯) 진수(陈寿) 사전(史传), 후학(后学) 나본(罗本) 관중(贯中) 편집(编辑)”이라고 하였다. 한 영제(灵帝) 중평(中平) 원년 “제천지 도원결의(祭天地桃园结义)”에서 시작하여, 진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 “왕준(王濬) 계취석두성(计取石头城)”으로 끝나니,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97년(184—280)의 사실을, 모두 진수의 《삼국지》 및 배송지(裴松之)〔5〕 주(注)에 따라 배열하고, 사이사이 평화(平话)를 또한 채용하고, 또 더하여 추연(推演)하여 지은 것이다. 논단(论断)은 자못 진수, 배송지 및 습착치(习凿齿), 손성(孙盛)〔6〕의 말을 취하고, 또 더욱 “사관(史官)” 및 “후인(后人)”의 시를 많이 인용하였다. 그러나 옛 역사에 의거하면 곧 서술하기 어렵고, 허사(虚辞)를 섞으면 다시 혼효(混淆)시키기 쉬우므로, 명나라 사조제(谢肇淛)〔7〕(《오잡조(五杂组)》 15)는 이미 “너무 사실적이면 곧 부패에 가깝다”라고 여겼고, 청나라 장학성(章学诚)〔8〕(《병진찰기(丙辰札记)》)은 또 “칠실삼허(七实三虚)가 관람하는 사람을 현혹시킨다”라고 병통으로 여겼다. 사람을 묘사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또한 자못 실수가 있으니, 유비를 드러내고자 하여 장후(长厚)함을 하려다 거짓처럼 되고, 제갈의 지모가 많음을 묘사하려다 요괴에 가깝게 되었다. 오직 관우(关羽)에 대해서는, 특별히 좋은 말을 많이 하여, 의용(义勇)의 모습이, 때때로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예를 들어 관우의 출신, 풍채 및 용력을 서술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계단 아래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소장이 원컨대 가서, 화웅(华雄)의 머리를 베어 장막 아래 바치겠나이다!”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니, 그 사람의 키는 아홉 자 다섯 치이고, 수염 길이는 한 자 여덟 치이며, 단봉안(丹凤眼)에 와잠미(卧蚕眉)이고, 얼굴은 대추색과 같고, 목소리는 큰 종과 같으며, 장막 앞에 서 있었다. 소(绍)가 누구냐고 물으니, 공손찬(公孙瓒)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유현덕(刘玄德)의 아우 관 모(关某)입니다.”라고 하였다. 소가 돌아서서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찬이 말하기를, “유현덕을 따라 마궁수(马弓手)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장막 위 원술(袁术)이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우리 여러 제후들에게 큰 장수가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이냐? 겨우 궁수 따위가, 어찌 감히 함부로 말하는가. 나를 위해 몽둥이로 마구 때려 내쫓아라!”라고 하니, 조조(曹操)가 급히 말리며 말하기를, “공로(公路)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이 사람이 이미 큰 말을 하였으니, 반드시 넓은 학식이 있을 것입니다. 시험 삼아 말을 내보내 보십시오. 만약 이기지 못하면, 죽여도 늦지 않습니다.”……관 모가 말하기를, “만약 이기지 못하면, 제 목을 베어 주십시오.”라고 하니, 조조가 뜨거운 술 한 잔을 부어, 관 모에게 마시게 하고 말을 태웠다. 관 모가 말하기를, “술은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제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고 장막을 나가 칼을 들고, 몸을 날려 말에 올랐다. 여러 제후들이 진영 밖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고, 함성(喊声)이 크게 일어나는 것을 들으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산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알아보려 하였다. 요란한 방울 소리가 나는 곳에서, 말이 중군(中军)에 이르니, 운장(云长)이 화웅의 머리를 들고, 땅에 던지니, 그 술이 오히려 따뜻하였다.……
(제9회 《조조기병벌동탁(曹操起兵伐董卓)》)
또 조조가 적벽(赤壁)에서 패한 것과 같이, 공명(孔明)은 조조의 명이 다하지 않을 것을 알고, 이에 일부러 관우(关羽)로 하여금 화용도(华容道)를 막게 하여, 그를 놓아주게 하고, 또 일부러 군법으로 서로 요구하여, 군령장(军令状)을 써서 가게 하였으니, 이는 공명의 교활함만 드러내고, 관우의 기개는 늠름하니, 원나라 간행본 평화(平话)와는, 거리가 멀다.
……화용도 위에서, 세 부대의 군마가, 한 부대는 뒤에 떨어지고, 한 부대는 구덩이를 메우고, 한 부대는 조조를 따라 험준한 곳을 지나, 길이 조금 평탄해졌다. 조조가 뒤돌아보니, 겨우 삼백여 기(骑)만이 뒤따르고, 의갑(衣甲)과 포개(袍铠)를 제대로 갖춘 자가 없었다.……또 수 리를 가지 못하여, 조조가 말 위에서 채찍을 가하며 크게 웃었다. 여러 장수들이 승상(丞相)이 웃는 이유를 물으니, 조조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제갈량(诸葛亮)과 주유(周瑜)를 지략이 많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들이 무능함을 비웃는 것이다. 지금 이 한 번의 패배는, 내가 스스로 적을 속인 과실이지만, 만약 이곳에 한 부대의 군사가 매복해 있었다면, 우리들은 모두 꼼짝없이 사로잡혔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 소리 한 번 울리니, 양쪽에서 오백 명의 칼 든 군사가 늘어서 있고, 가운데 관운장이 청룡도(青龙刀)를 들고, 적토마(赤兔马)를 타고, 가는 길을 막았다. 조조의 군대는 이를 보고, 혼비백산(魂飞魄散)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모두 말을 하지 못하였다. 조조가 사람들 속에서 말하기를, “이미 이곳에 이르렀으니, 다만 죽을 각오로 싸울 뿐이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사람은 비록 겁내지 않더라도, 말의 힘이 다하였으니, 싸우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욱(程昱)이 말하기를, “제가 듣기에 운장은 윗사람에게는 오만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차마 모질게 대하지 못하고, 강한 자는 업신여기지만 약한 자는 능멸하지 않으며, 사람에게 환난이 있으면, 반드시 구해주니, 인의(仁义)가 천하에 퍼져 있습니다. 승상께서 옛날에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어찌 직접 그에게 고하지 않으십니까. 반드시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조가 그 말을 따라, 즉시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 몸을 숙여 운장에게 말하기를, “장군 별일 없으시오?”라고 하니, 운장 또한 몸을 숙여 대답하기를, “관 모는 군사(军师)의 장령(将令)을 받들어, 승상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조가 말하기를, “조조가 군대에 패하여 위태로우니,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으니, 장군께서 옛날의 말씀을 중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운장이 대답하기를, “옛날에 관 모가 비록 승상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나, 저는 일찍이 백마(白马)의 위기를 풀어 갚았습니다. 오늘 명령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을 따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조조가 말하기를, “오관참장(五关斩将) 때를, 오히려 기억하는가? 옛날의 대장부는 세상을 살아감에, 반드시 신의(信义)를 중히 여겼으니, 장군께서는 《춘추(春秋)》를 깊이 아시니, 어찌 유공(庾公)의 사(斯)가 자탁유자(子濯孺子)를 쫓은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니, 운장이 듣고, 고개를 숙인 채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조조가 이 일을 인용하여,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운장은 의를 산처럼 중히 여기는 사람이요, 또 조조의 군대가 황황하여, 모두 눈물을 흘리려는 것을 보고, 운장은 오관참장 때 그를 놓아준 은혜를 생각하니,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이에 말머리를 돌려, 여러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사방으로 흩어져 벌리라!”라고 하니, 이는 분명히 조조를 놓아주려는 뜻이었다. 조조가 운장이 말머리를 돌린 것을 보고, 곧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돌진하여 지나가니, 운장이 몸을 돌이켰을 때, 앞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조조를 호송하여 지나갔다. 운장이 큰 소리로 외치니, 모두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울며 절하니, 운장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바로 망설이는 중에, 장료(张辽)가 말을 타고 이르니, 운장이 이를 보고, 또한 옛 정을 생각하여, 길게 탄식하며, 모두 놓아주었다. 후에 사관(史官)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간담(肝胆)에 의(义)를 길이 간직하고, 평생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하네, 위풍(威风)은 해와 달과 나란하고, 명예(名誉)는 천지에 떨치네, 충용(忠勇)은 삼국에서 높고, 신묘(神谋)는 일곱 진영을 함정에 빠뜨렸네, 지금 천고(千古) 아래까지, 군대에서 영혼에게 절하네.
(제100회 《관운장의석조조(关云长义释曹操》)
홍치(弘治) 이후, 간행본이 매우 많으니, 곧 명나라 시대를 논하더라도, 지금 아직 몇 종류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자세한 내용은 《소설월보(小说月报)》 20권 10호 정진탁(郑振铎)의 《삼국지연의의 연화(三国志演义的演化)》를 보라). 청나라 강희(康熙) 때에 이르러, 무원(茂苑) 모종강(毛宗岗) 자 서시(序始)가 김인서(金人瑞)가 《수호전(水浒传)》 및 《서상기(西厢记)》를 개정한 방법을 따라, 곧 옛 판본을 두루 개작하니, 스스로 옛 판본을 얻었다고 하며, 평을 달아 간행하니, 또한 “성탄외서(圣叹外书)”〔9〕라고 일컬었으며, 모든 옛 판본은 다시 유행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개정한 바는, 그 서례(序例)에서 볼 수 있으니, 대략 큰 부분을 들면, 첫째는 고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옛 판본 제159회 《폐헌제 조비찬한(废献帝曹丕篡汉)》에서 본래 조후(曹后)가 오빠를 도와 헌제를 꾸짖었다고 하였으나, 모본(毛本)에서는 한나라를 도와 조비를 꾸짖었다고 하였다. 둘째는 더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제167회 《선주야주백제성(先主夜走白帝城)》에서 본래 손부인(孙夫人)에 대한 내용이 없었으나, 모본에서는 “부인이 오나라에서 이릉(猇亭)의 군대 패배 소식을 듣고, 잘못 전해진 선주가 군중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강가에 이르러, 서쪽을 바라보며 멀리서 곡하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라고 하였다. 셋째는 삭제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제205회 《공명화소목책채(孔明火烧木栅寨)》에서 본래 공명이 사마의(司马懿)를 상방곡(上方谷)에서 불태울 때, 위연(魏延)을 함께 불태우려 하였고, 제234회 《제갈첨대전등애(诸葛瞻大战邓艾)》에서 등애(邓艾)가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하니, 첨(瞻)이 보고 의심하였고, 그 아들 상(尚)이 꾸짖으니, 이에 결사 항전하였으나, 모본에서는 모두 없앴다. 그 나머지 작은 부분은, 첫째는 회목(回目)을 정돈하는 것이고, 둘째는 문사(文辞)를 수정하는 것이고, 셋째는 논찬(论赞)을 삭제하는 것이고, 넷째는 자질구레한 일을 더하거나 빼는 것이고, 다섯째는 시문(诗文)을 바꾸는 것일 뿐이다.
《수당지전(隋唐志传)》〔10〕의 원래 판본은 보이지 않고, 청나라 강희 14년(1675) 장주(长洲) 저인획(褚人获)〔11〕이 개정한 판본이 있으니, 이름을 《수당연의(隋唐演义)》로 바꾸었고,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수당지전》은 나씨(罗氏)가 처음 지었고, 임씨(林氏)가 찬집(纂辑)하였으니, 가히 잘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수나라 궁궐에서 채색 비단을 자르는 것으로 시작하니, 앞부분에 빠진 것이 많고, 그 후에 당나라 말의 한두 가지 일을 보충하였으나, 또한 영성(零星)하여 이어지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난하는 바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수당연의》는 모두 100회로, 수나라 임금이 진(陈)나라를 정벌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음으로 주나라가 수나라에 선양(禅让)한 일, 수나라가 당나라에 멸망한 일, 무후(武后)가 존위를 차지한 일, 명황(明皇)이 촉(蜀)으로 행차한 일, 양귀비(杨贵妃)가 마외(马嵬)에서 목매어 죽은 일, 이미 두 경(京)을 회복한 일, 명황이 서내(西内)로 물러나 거주한 일, 도사(道士)에게 양귀비의 혼을 구하게 하여, 장과(张果)를 만나게 되어, 인하여 명황과 양귀비가 수 양제(隋炀帝)와 주귀아(朱贵儿)의 후신(后身)임을 알게 되니, 온 책이 끝난다. 모든 수당(隋唐) 사이의 영웅, 예를 들어 진경(秦琼), 두건덕(窦建德), 단웅신(单雄信), 왕백당(王伯当), 화목란(花木兰) 등의 사적은, 모두 앞 70회 중에 삽입되어 나온다. 그 명황과 양귀비의 다시 태어난 인연 이야기는, 서문에 원우령(袁于令)이 소장한 《일사(逸史)》〔12〕에서 얻었다고 하니, 그 새로움과 기이함을 좋아하여, 인하여 책에 넣었다. 이 다른 사적은, 대부분 정사(正史) 기전(纪传)에 근거하고, 또 당송(唐宋)의 야사(杂说)를 더하였으니, 예를 들어 수나라 일은 《대업습유기(大业拾遗记)》, 《해산기(海山记)》, 《미루기(迷楼记)》, 《개하기(开河记)》〔13〕, 당나라 일은 《수당가화(隋唐嘉话)》, 《명황잡록(明皇杂录)》, 《상시언지(常侍言旨)》, 《개천전신기(开天传信记)》, 《차류씨구문(次柳氏旧闻)》, 《장한가전(长恨歌传)》, 《개원천보유사(开元天宝遗事)》 및 《매비전(梅妃传)》, 《태진외전(太真外传)》〔14〕 등과 같으니, 서술에 많은 내력이 있으니, 거의 《삼국지연의》에 뒤지지 않는다. 오직 그 문필은, 순전히 명나라 말의 풍조와 같으니, 화려함은 겉에 있고, 침착함은 부족하니, 나씨(罗氏)의 규범은, 거의 사라졌고, 또한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니, 정신이 오히려 쓸쓸해졌다. 지금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현종(玄宗)이 소경궁(昭庆宫)에서 한가로이 앉아 있으니, 녹산(禄山)이 곁에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배가 무릎 아래로 늘어진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의 배는 큰 항아리를 안은 것과 같으니,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구나?”라고 하니, 녹산이 손을 모아 대답하기를, “이 속에는 다른 물건이 없고, 오직 붉은 마음뿐입니다. 신은 이 붉은 마음을 다하여, 폐하를 섬기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현종이 녹산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알지 못하였으니:
사람의 마음은, 헤아려 알 수 없네. 스스로 붉은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은 먹처럼 검으니!
현종이 안녹산을 대하는 것은, 진실로 배 속의 마음과 같이 하였으나, 안녹산이 현종을 대하는 것은, 순전히 도적의 마음, 늑대의 마음, 개의 마음이니, 참으로 배은망덕한 마음이다. 마음 있는 사람은, 이에 이를 갈며 통탄하니, 당장 그 마음을 갈라, 그 마음을 먹고 싶어 한다. 하물며 그는 오히려 사람을 속여 붉은 마음이라고 하니. 가소롭다 현종은 오히려 그 늑대 같은 야심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진심이라고 믿으려 하니, 어찌 어리석지 않은가. 한가한 이야기는 줄이고. 당일 현종과 안녹산이 마주 앉아 반나절이 지나, 좌우를 돌아보며, 비빈(妃嫔)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이때는 마침 봄이 깊을 때라, 날씨가 따뜻해지니, 귀비(贵妃)는 바야흐로 후궁에서 난탕(兰汤)에 앉아 목욕하고 있었다. 궁인(宫人)이 현종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비빈께서 목욕을 막 마치셨습니다.”라고 하니, 현종이 미소 지으며 말하기를, “미인이 새로 목욕하였으니, 마치 물에서 나온 부용(芙蓉)과 같구나.”라고 하였다.
궁인에게 즉시 비빈을 불러오라고 하니, 다시 세수하고 단장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잠시 후, 양귀비(杨贵妃)가 도착하였다. 그가 새로 목욕한 후,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말해 보라. 한 곡의 《황앵아(黄莺儿)》가 잘 말해주고 있다:
밝고 밝기는 옥과 같고, 빛나고 부드럽기는 보석과 같으니, 몸은 더욱 향기롭고, 구름 같은 머리는 나른하게 헝클어져 더욱 아리따운 모습이네. 긴 치마는 싫어하고, 가벼운 적삼을 시원하게 걸치고, 바람을 맞으며 작게 서 있으니 신태(神态)가 한가롭네. 자세히 살펴보니: 물에서 나온 부용도, 미인의 단장만 못하네. (제83회)
《잔당오대사연의(残唐五代史演义)》〔15〕는 보이지 않고, 일본 《내각문고서목(内阁文库书目)》에 이르기를 2권 60회이고, 제목에 나본(罗本)이 지었고, 탕현조(汤显祖)가 비평하였다고 한다.
《북송삼수평요전(北宋三遂平妖传)》의 원래 판본 또한 볼 수 없으니, 비교적 앞선 판본은 4권 20회이고, 서문에 왕신수(王慎修)〔16〕가 보충하였다고 하며, 패주(贝州) 왕칙(王则)이 요술로 변란을 일으킨 일을 기록하였다. 《송사(宋史)》(292 《명고전(明镐传)》)에 이르기를 왕칙은 본래 탁주(涿州) 사람으로, 흉년이 들어, 은주(恩州)(당나라 때는 패주)로 흘러 들어왔고, 경력(庆历) 7년에 동평군왕(东平郡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득성(得圣)이라 고쳤으니, 66일 만에 평정되었다. 소설은 곧 이 일을 근거로 하였으니, 서두는 변주(汴州) 호호(胡浩)가 신선 그림을 얻었는데, 그 아내가 불태우니, 재가 몸에 휘감겨, 인하여 임신하여, 딸을 낳으니, 영아(永儿)라 하였고, 요호(妖狐) 성고고(圣姑姑)가 도법(道法)을 전수하니, 드디어 종이 사람과 콩으로 만든 말을 만들 수 있었다. 왕칙은 곧 패주 군대의 병졸이었고, 후에 영아와 혼인하니, 술사(术士) 탄자화상(弹子和尚) 장란(张鸾) 복길(卜吉)이 모두 와서 뵈니, 왕칙이 왕이 될 것이라고 하였고, 마침 지주(知州)가 탐욕스럽고 포악하니, 드디어 요술로 창고의 돈과 쌀을 운반하여 군대를 사서 난을 일으켰다. 이미 문언박(文彦博)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니, 이때 장란, 복길, 탄자화상은 왕칙이 무도한 것을 보고, 모두 먼저 떠났고, 문언박의 군대 또한 이기지 못하였다. 다행히 탄자화상이 화신(化身)한 제갈수지(诸葛遂智)가 문언박을 도와, 사악한 법을 진압하였고, 마수(马遂)가 거짓 항복하여 왕칙을 공격하여 입술을 찢으니, 주문(咒文)을 외우지 못하게 하였고, 이수(李遂) 또한 굴자군(掘子军)을 이끌고 땅굴을 파서 성에 들어갔으니, 이에 왕칙 및 영아를 사로잡았다. 공을 세운 세 사람이 모두 이름에 ‘수(遂)’ 자가 있으므로, 《삼수평요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평요전》 지금 통행하는 판본은 18권 40회이고, 초황(楚黄) 장무구(张无咎)의 서문이 있으니, 용자유(龙子犹)가 보충하였다고 한다. 그 판본은 명나라 태창(泰昌) 원년(1620)에 이루어졌고, 앞에 15회를 더하여, 원공(袁公)이 구천현녀(九天玄女)에게 도법을 받은 일, 다시 탄자화상에게 도둑맞은 일, 및 요호 성고고가 법을 수련한 일을 기록하였다. 다른 5회는 옛 판본의 각 회 사이에 흩어져 들어가, 여러 괴이한 백성들의 도술을 많이 보충하여 서술하였다. 사적은 뜻으로 지어낸 것 외에, 또한 다른 야사(杂说)를 채취하여, 부회(附会)하여 넣었다. 예를 들어 제29회에서 두칠성(杜七圣)이 부적을 파는 것을 서술하고, 아울러 환술(幻术)을 보이니, 어린아이의 머리를 베고, 이불로 덮으니 곧 다시 이어졌으나, 우연히 큰 말을 하니, 탄자화상이 듣게 되어, 드디어 어린아이의 생혼(生魂)을 거두어, 국수 가게 쟁반 아래에 덮으니, 두칠성이 거듭 주문을 외웠으나, 아이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두칠성(杜七圣)은 당황하여,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며 말하기를, “여러 구경꾼 여러분, 위에서 보시기에, 도로는 비록 각각 다르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모두 일반이니, 단지 생계가 궁핍하여 그러합니다. 방금 말한 것이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구경꾼 여러분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저에게 머리를 이어 주시면, 내려가 술 한 잔 마시겠습니다. 온 세상 안에서, 모두 서로 아는 사이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두칠성이 잘못을 인정하며 말하기를,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어 주십시오.”라고 하며, 오로지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요(褥子)를 들추어 보니, 또 이어지지 않았다. 두칠성이 초조하게 말하기를, “당신이 내 아이의 머리를 이어 주지 않으니, 내가 또 당신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였는데, 당신은 이토록 무례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곧 뒤쪽의 새장 안에서 종이 포장 하나를 꺼내어, 곧 열고, 호리병 씨앗 하나를 끄집어내어, 땅에 가서, 흙을 파서 부드럽게 하고, 그 호리병 씨앗을 땅에 묻고, 입으로 주문을 외우고, 입김을 한 번 불고, “질(疾)!” 하고 소리치니, 순식간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땅에서 덩굴이 하나 뻗어 나오는 것이 보이더니, 점점 자라나, 곧 가지와 잎이 생기고, 그러고 나서 꽃이 피고, 곧 꽃이 지는 것이 보이더니, 작은 호리병 하나가 맺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고, 모두 환호하며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였다. 두칠성이 그 호리병을 꺾어, 왼손에는 호리병을 들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말하기를, “네가 먼저 이치에 맞지 않게, 내 아이의 혼백(魂魄)을 거두어, 내가 머리를 잇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생각은 하지 마라!”라고 하며, 호리병을 향하여, 허리를 가로질러 칼로 베어, 호리병 반쪽을 베어 내었다. 말하자면 그 화상(和尚)이 누각 위에서, 국수를 집어 들고 막 먹으려 하는데, 그 화상의 머리가 몸통에서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1층에서 국수를 먹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담이 작은 사람은 국수를 버리고 아래층으로 도망치고, 담이 큰 사람은 발을 멈추고 구경하였다. 그 화상이 허둥지둥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나 누각 바닥을 만지니, 만져서 머리를 만지니, 두 손으로 두 귀를 잡고, 그 머리를 들어 몸통에 붙이니, 반듯하게 붙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 화상이 말하기를, “내가 오로지 국수 먹는 데 정신이 팔려, 그의 아들의 혼백을 돌려주는 것을 잊었구나.”라고 하며, 손을 뻗어 쟁반을 들추었다. 여기에서는 마침 쟁반을 들추어 올릴 수 있게 되니, 저기에서는 두칠성의 아이가 벌써 뛰어 일어났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두칠성이 말하기를, “나는 예로부터 이 가법(家法)의 술법을 행하였는데, 오늘 스승을 만났구나.”……(제29회 하 《두칠성한행속두법(杜七圣狠行续头法)》)
이는 대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울지욱(尉迟偓)〔18〕(《중조고사(中朝故事)》)는 당나라 함통(咸通) 연간의 일이라고 하였고, 사조제(谢肇淛)(《오잡조(五杂组)》 6)는 또 명나라 가정(嘉靖), 융경(隆庆) 연간의 일이라고 여겼으니, 다만 술사(术士)의 이름은 없고, 승려 또한 죽었으니, 이 책에서 약간 고쳐 사용한 것이다. 마수(马遂)가 도적을 치다가 죽은 것은 당시의 사실이니, 송나라 정해(郑獬)가 《마수전(马遂传)》〔19〕을 지었다.
〔1〕 신안(新安) 우씨(虞氏) 간행본 전상평화(全相平话) 5종은 일본에 소장된 원래 간행본의 제목이 “건안(建安) 우씨 신간(新刊)”이다. 건안은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젠어우시(建瓯市)이고, 우씨는 간행자의 성씨이다. 이 5종의 평화는 모두 상중하(上中下) 3권으로 나뉘며, 저자를 밝히지 않았다.
〔2〕 《적벽알병(赤壁鏖兵)》은 도종의(陶宗仪)의 《철경록(辍耕录)》 권25 “금원본 명목(金院本名目)”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제갈량추풍오장원(诸葛亮秋风五丈原)》은, 다른 이름은 《제갈량군둔오장원(诸葛亮军屯五丈原)》이며, 조본(曹本)의 《녹귀부(录鬼簿)》에 기록되어 있고, 금원(金元) 시대 왕중문(王仲文)이 지었으며, 지금은 일문(逸文)만 남아 있다. 《격강투지(隔江斗智)》는, 전체 이름은 《양군사격강투지(两军师隔江斗智)》이며, 원명(元明) 시대 무명씨(无名氏)가 지었다. 명나라 장진숙(臧晋叔)의 《원곡선(元曲选)》 신집(辛集)에 수록되었다.
《연환계(连环计)》는, 전체 이름은 《금운당암정연환계(锦云堂暗定连环计)》이며, 일명 《금운당미녀연환기(锦云堂美女连环记)》라고도 하며, 원나라 무명씨가 지었다. 명나라 장진숙의 《원곡선》 임집(壬集)에 수록되었다. 《복탈수선대(复夺受禅台)》는, 전체 이름은 《사마소복탈수선대(司马昭复夺受禅台)》이다. 같은 이름의 극작품이 두 종류 있으니, 하나는 원나라 이수경(李寿卿)이 지었고, 하나는 원나라 이취진(李取进)이 지었으며, 조본의 《녹귀부》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 전해지는 판본은 보이지 않는다.
〔3〕 《용호풍운회(龙虎风云会)》의 전체 이름은 《송태조용호풍운회(宋太祖龙虎风云会)》이며,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赵匡胤)이 밤에 조보(赵普)를 방문한 일과 중국을 통일한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명나라 식기자(息机子)가 편집한 《잡극선(杂剧选)》에 수록되었다.
〔4〕 《삼국지연의(三国志演义)》는 또한 《삼국지통속연의(三国志通俗演义)》라고도 하며, 권수(卷首)에 홍치(弘治) 갑인년(甲寅年)(1494) 용우자(庸愚子)(장대기(蒋大器))의 서문과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 관중수염자(关中修髯子)(장상덕(张尚德))의 소인(小引)이 있으나, 상무인서관(商务印书馆)에서 영인할 때 그 소인을 빼버렸기 때문에, 홍치 연간의 간행본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은 지금 볼 수 있는 《삼국지연의》 중 가장 오래된 간행본이다.
〔5〕 진수(陈寿)(233—297) 자 승조(承祚), 서진(西晋) 안한(安汉)(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난충시(南充市)) 사람, 진나라 때 저작랑(著作郎), 치서시어사(治书侍御史)를 지냈다. 진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삼국 시대의 관찬(官撰) 및 사찬(私撰) 저작을 모아, 《삼국지(三国志)》라는 책을 지었다. 배송지(裴松之)는, 본 권 제51쪽 주〔2〕를 참고하라.
〔6〕 습착치(习凿齿)(?—384) 자 언위(彦威), 동진(东晋) 양양(襄阳)(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샹판시(襄樊市)) 사람, 일찍이 형양태수(荥阳太守)를 지냈고, 《한진춘추(汉晋春秋)》를 지었다. 손성(孙盛), 자 안국(安国), 동진 태원중도(太原中都)(지금의 산시성(山西省) 핑야오현(平遥县)) 사람, 벼슬이 비서감(秘书监)에 이르렀고, 급사중(给事中)이 더해졌다. 《위씨춘추(魏氏春秋)》, 《진양추(晋阳秋)》 등을 지었다.
〔7〕 사조제(谢肇淛) 자 재항(在杭), 명나라 장락(长乐)(지금의 푸젠성(福建省)에 속함) 사람, 만력(万历) 연간에 광시우포정사(广西右布政使)를 지냈다. 지은 《오잡조(五杂组)》는 16권으로, 풍물(风物)과 장고(掌故)를 많이 기록하였다. 그중 《삼국연의》에 대해 논할 때 이르기를, “일이 너무 사실적이면 부패에 가까우니,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즐겁게 할 수는 있지만, 사대부(士大夫)가 이야기할 만한 것은 못 된다.”라고 하였다.
〔8〕 장학성(章学诚)(1738—1801) 자 실재(实斋), 청나라 회계(会稽)(지금의 저장성(浙江省) 사오싱시(绍兴市)) 사람, 일찍이 국자감전적(国子监典籍)을 지냈다. 지은 《문사통의(文史通义)》 등이 있다. 지은 《병진찰기(丙辰札记)》는 1권으로, 그중 일찍이 이르기를, “무릇 연의(演义)의 책은, 예를 들어 《열국지(列国志)》, 《동서한(东西汉)》, 《설당(说唐)》 및 《남북송(南北宋)》과 같은 것은, 대부분 사실을 기록하였고, 《서유기(西游记)》, 《금병매(金瓶梅)》와 같은 종류는, 완전히 허구에 의지하였으니, 모두 해로울 것이 없다. 오직 《삼국연의》는 7할이 사실이고, 3할이 허구이니, 관람하는 사람들이 왕왕 그것에 현혹된다.”라고 하였다.
〔9〕 모종강(毛宗岗)은 청나라 초 장주(长洲)(지금의 장쑤성(江苏省) 쑤저우시(苏州市)) 사람으로,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김인서(金人瑞)는, 곧 김성탄(金圣叹)(1608—1661)으로, 본래 성은 장(张)이고, 이름은 채(采), 청나라 초 우현(吴县)(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이다.
김성탄은 《수호전》 매 회 본문 앞에 평어를 더하여, “성탄외서(圣叹外书)”라고 칭하였고, 모종강도 같은 수법으로, 《삼국연의》 매 회 앞에 평어를 더하고, 매 회 안에 또한 협비(夹批)를 넣고, “성탄외서”라고 거짓 칭하였다.
〔10〕 《수당지전(隋唐志传)》 나관중의 《수당지전》 원본은 이미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의 판본은 제목이 《수당양조지전(隋唐两朝志传)》으로, 12권, 122회이고, 명나라 만력(万历) 기미년(己未年)(1619) 간행본으로, 권수(卷首)에 양신(杨慎) 및 임한(林瀚)(곧 아래 글의 “임씨(林氏)”)의 서문이 있고, 임한의 서문은 스스로 그 책을 자신이 찬집(纂辑)하였다고 하였다. 내용은 수나라 말부터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연간의 일을 기록하였다. 임한, 자 형대(亨大), 명나라 민현(闽县)(지금의 푸젠성 민허우현(闽侯县)) 사람, 벼슬이 남경이부상서(南京吏部尚书)에 이르렀다.
〔11〕 저인획(褚人获) 자 석농(石农), 청나라 장주(长洲)(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 사람. 지은 책으로 《견호집(坚瓠集)》, 《독사수필(读史随笔)》 등이 있다.
〔12〕 원우령(袁于令)(1592—1674) 이름은 온옥(韫玉), 호는 탁암(箨庵), 명나라 말 청나라 초 우현(吴县)(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 지은 책으로 전기(传奇) 《서루기(西楼记)》 및 소설 《수사유문(隋史遗文)》 등이 있다. 소장한 《일사(逸史)》는, 당나라 노조(卢肇)가 지었고, 이미 없어졌다. 저인획의 《수당연의》 서문에 실려 있기를, “옛날 탁암 원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소장한 《일사》를 보여 주었는데, 수 양제(隋炀帝), 주귀아(朱贵儿), 당 명황(唐明皇), 양옥환(杨玉环)의 다시 태어난 인연의 일을 실었으니, 매우 새롭고 기이하여 가히 좋아할 만하므로, 인하여 상의하여 이 책에 편입하여, 한 부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13〕 《대업습유기(大业拾遗记)》 이 책 및 《해산기(海山记)》, 《미루기(迷楼记)》, 《개하기(开河记)》는, 이 책 제11편을 참고하라.
〔14〕 《수당가화(隋唐嘉话)》 3권, 당나라 유숙(刘餗)이 지었다. 《명황잡록(明皇杂录)》, 2권, 당나라 정처회(郑处诲)가 지었다. 《상시언지(常侍言旨)》, 1권, 당나라 유정(柳珵)이 지었다. 《개천전신기(开天传信记)》, 1권, 당나라 정계(郑棨)가 지었다. 《차류씨구문(次柳氏旧闻)》, 1권,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지었다. 《개원천보유사(开元天宝遗事)》, 4권, 오대(五代) 왕인유(王仁裕)가 지었다. 《장한가전(长恨歌传)》, 《매비전(梅妃传)》은, 각각 이 책 제8편, 제11편을 참고하라. 《태진외전(太真外传)》은, 이 권 제108쪽 주〔14〕를 참고하라.
〔15〕 《잔당오대사연의(残唐五代史演义)》 일본 《내각문고서목(内阁文库书目)》에 기록되기를, “《잔당오대사연의전(残唐五代史演义传)》, 60회, 2권. 송나라 나본(罗本). 명나라 탕현조(汤显祖) 비평. 청나라 판본, 4책.”이라고 하였다.
〔16〕 왕신수(王慎修)는 명나라 전당(钱塘)(지금의 저장성(浙江省) 항저우시(杭州市)) 사람으로,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17〕 장무구(张无咎) 이름은 예(誉), 명나라 말 초황(楚黄)(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황강시(黄冈市)) 사람,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다. 용자유(龙子犹)는, 곧 풍몽룡(冯梦龙)이니, 이 책 제21편을 참고하라.
〔18〕 울지욱(尉迟偓)은 남당(南唐) 사람으로, 일찍이 조의랑수급사중(朝议郎守给事中)을 지냈고, 국사(国史)를 편수하였다. 《중조고사(中朝故事)》는 《송사·예문지(宋史·艺文志)》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술사(术士)가 머리를 잇는 이야기는, 하권(下卷)에 보인다.
〔19〕 정해(郑獬)(1022—1072) 자 의부(毅夫), 북송(北宋) 안륙(安陆)(지금의 후베이성에 속함) 사람. 일찍이 한림학사(翰林学士)를 지냈고, 개주부(开卦府)를 다스렸다. 《마수전(马遂传)》은, 지은 《훈계집(郧溪集)》에 보인다.
제15편 원명(元明) 시대에 전해진 강사(講史)(하)
《수호(水滸)》 이야기는 남송(南宋) 이후 유행한 전설이며, 송강(宋江) 또한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송사(宋史)》(22)에 따르면 휘종(徽宗) 선화(宣和) 3년에 “회남(淮南)의 도적 송강 등이 회양군(淮陽軍)을 침범하자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고, 또 경동(京东), 강북(江北)을 침범하여 초(楚) 해 주(海州) 경계까지 들어가자 지주(知州) 장숙야(張叔夜)에게 명하여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고 한다. 항복 이후의 일은 역사에 기록이 없으나, 야사에서는 “방랍(方臘)을 토벌한 공이 있어 절도사(節度使)에 봉해졌다”고 한다(13편 참조). 그러나 방랍을 사로잡은 사람은 한세충(韓世忠)(《송사》 본전)으로, 송강 등과는 관련이 없으며, 오직 《후몽전(侯蒙傳)》(《송사》 351)에 “송강이 경동을 침략하자 후몽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송강은 36명으로 제(齊)와 위(魏)를 횡행하니, 관군 수만 명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니, 송강을 사면하여 방랍을 토벌하게 하여 스스로 속죄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이는 곧 야사의 근거로 보인다. 당시 비록 이러한 논의가 있었으나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고, 송강 등은 결국 죽임을 당했다.
홍매(洪邁)의 《이견을지(夷堅乙志)》(6)에 “선화 7년에 호부시랑(戶部侍郎) 채거후(蔡居厚)가 파면되어 청주(青州)의 지주가 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금릉(金陵)으로 돌아갔는데,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측근 왕생(王生)이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 채거후가 명부(冥府)의 벌을 받는 것을 보고, 왕생에게 돌아가 그의 아내에게 전하라고 부탁하기를, ‘지금 단지 윤주(郓州)의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부인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시랑께서 작년에 윤주를 다스릴 때, 양산박(梁山泊)의 도적 5백 명이 항복하였는데, 이내 모두 죽였으니, 제가 여러 번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한다. 《을지》는 건도(乾道) 2년에 완성되었으니, 선화 6년으로부터 4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보고 들은 것이 매우 가깝고, 명부의 벌은 소설가의 이야기이지만, 항복한 사람을 죽인 것은 허위로 지어낼 수 없으니, 산박의 건아들의 최후는 대개 이와 같았을 뿐이다.
그러나 송강 등이 양산박에 모여 있을 때, 그 기세는 실로 매우 성대하여, 《송사》(353)에도 “열 개의 군(郡)을 옮겨 다니며 약탈하니, 관군이 감히 그들의 예봉을 막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기이한 이야기와 다른 설이 민간에서 생겨나, 여러 번 바뀌어 이야기가 되었고, 다시 호사가(好事者)들이 모아 꾸며내어, 문헌으로 나오게 되었다. 송나라 유민(遺民) 공성여(龔聖與)가 《송강삼십육인찬(宋江三十六人贊)》〔1〕을 지었는데, 서문에서 이미 “송강의 일은 거리의 이야기에서 보이니,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고, 비록 이숭(李嵩)과 같은 높은 사람이 전하여 썼더라도, 사대부 또한 배척하지 않았다”(주밀(周密) 《계신잡식(癸辛雜識)》 속집 상)고 하였다. 지금 이숭이 지은 것은 흩어져 없어졌으나, 송나라 말에 이미 전하여 쓴 책이 있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선화유사(宣和遺事)》는 옛 기록을 베껴 모아 만든 것이므로, 전집(前集) 중의 양산박 의거의 시말 또한 당시 전해지던 이야기 중 하나일 것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지(杨志) 등이 화석강(花石綱)을 호송하다가 눈 때문에 기한을 어기게 되자 양지는 가난에 시달리다 칼을 팔아 사람을 죽이고 위주(卫州)로 자자(刺配)되었다. 손립(孙立) 등이 양지를 빼앗아 태행산(太行山)으로 가서 산적이 되었다. 석갈촌(石碣村)에서 조개(晁盖) 일당이 생신강(生辰綱)을 강탈하였다. 송강(宋江)이 조개 등과 연락하여 도망치게 하였다. 송강이 염파석(阎婆惜)을 죽이고 벽에 시를 썼다. 송강이 천서(天书)를 얻어 36장(将)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송강이 양산박(梁山泊)으로 가서 조개를 찾았다. 송강과 36장이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송강이 동악(东岳)에 제사를 지내 소원을 풀었다. 장숙야(张叔夜)가 송강과 36장을 조정에 항복시켰다. 송강이 방랍(方腊)을 토벌한 공으로 절도사(节度使)에 봉해졌다. 오직 《선화유사(宣和遗事)》에 실린 내용만이 공성여(龚圣与)의 찬(赞)과는 상당히 다르다. 찬의 36인 중에는 송강이 있지만, 《유사》에는 밖에 있다. 《유사》의 오가량(吴加亮), 이진의(李进义), 이해(李海), 완진(阮进), 관필승(关必胜), 왕웅(王雄), 장청(张青), 장잠(张岑)은 찬에서는 오학구(吴学究), 노진의(卢进义), 이준(李俊), 완소이(阮小二), 관승(关胜), 양웅(杨雄), 장청(张清), 장횡(张横)으로 되어 있다. 칭호 또한 간혹 다르다. 또한 원나라 잡극 또한 여러 차례 수호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는데〔3〕, 송강, 연청(燕青), 이규(李逵)가 특히 많이 등장하며, 성격은 지금의 《수호전》에 나오는 인물들과 차이가 있지만, 송강의 인의롭고 후덕함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진태(陈泰)〔4〕(다릉(茶陵) 사람, 원나라 연우(延祐) 을묘년 진사)가 뱃사공에게 들은 바를 기록한 것에 따르면 “송강의 사람됨은 용감하고 호방하였다(《소안유집보유(所安遗集补遗)》 《강남곡서(江南曲序)》)”라고 하니, 다른 책들과는 정반대이다. 생각건대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 입에 매우 많이 오르내렸을 것이고, 비록 이미 여러 종류의 책이 있었을지라도 간략하거나 오류가 많았을 것이므로, 다시 누군가가 일어나 모아 취사선택하여 큰 책으로 엮어, 비교적 조리가 있고 볼 만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후대의 대부(大部) 《수호전》이다. 그것을 엮은 사람은 혹은 나관중(罗贯中)이라고도 하고(왕기(王圻), 전여성(田汝成), 낭영(郎瑛)의 설), 혹은 시내암(施耐庵)이라고도 하고(호응린(胡应麟)의 설), 혹은 시내암이 짓고 나관중이 엮었다고도 하고(이탁오(李贽)의 설), 혹은 시내암이 짓고 나관중이 이었다고도 한다(김인서(金人瑞)의 설). 〔5〕원본 《수호전》은 지금 구할 수 없고, 주량공(周亮工)〔6〕(《서영(书影)》 1)은 “노인들의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나씨(罗氏)가 《수호전》 100회를 지었는데, 각 회의 처음에 요이(妖异)한 이야기로 시작하였고, 가정(嘉靖) 때 곽무정(郭武定)이 그 책을 다시 간행하면서 그 이야기를 삭제하고, 본전(本传)만 남겼다.”고 하였다. 삭제된 것은 대개 “등화파파(灯花婆婆) 등의 일(《수호전전서(水浒传全书)》 발범)”이며, 본래 송나라 사람의 단편 사화(词话)(《야시원서목(也是园书目)》 10)이었는데, 나씨가 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며, 다른 것은 고찰할 수 없다.
현재 존재하는 《수호전》은 알려진 바로는 6가지 판본이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4가지이다.
첫째는 115회본 《충의수호전(忠义水浒传)》이다. 앞에는 “동원(东原) 나관중(罗贯中) 편집”이라고 쓰여 있으며, 명나라 숭정(崇祯) 말년에 《삼국연의》와 함께 《영웅보(英雄谱)》〔8〕로 합각되었고, 단행본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홍태위(洪太尉)가 요마(妖魔)를 잘못 풀어놓는 것으로 시작하고, 이어서 108명이 점차 양산박에 모이는 이야기, 이후 조정에 항복하여 요나라를 깨뜨리고, 전호(田虎), 왕경(王庆), 방랍(方腊)을 평정하는 이야기, 이에 지심(智深)이 육화사(六和寺)에서 좌화(坐化)하고, 송강은 독약을 먹고 자결하며, 여러 차례 영험을 나타내어 마침내 신명이 되는 이야기로 끝맺는다. 다만 문사가 거칠고 서툴며, 체제가 어지럽고, 중간의 시가 또한 대부분 비속하여, 마치 초고를 막 완성하여 윤색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거의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임충(林冲)이 고구(高俅)를 거슬러 창주(沧州)로 유배되고, 대군 초장을 지키게 되었는데, 큰 눈 속에서 허름한 집에서 술을 구하러 나가는 장면을 기록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임충이 짐을 풀고, 사방을 보니 모두 허물어져 있었으므로, 생각하며 말하기를, “이 집에서 어떻게 겨울을 날 수 있을까, 눈이 개면 미장이를 불러 수리해야겠다.”라고 하였다.
흙 널빤지 옆에서 잠시 불을 쬐니, 몸이 춥게 느껴져, 생각하기를 “방금 노군(老军)이 (5리 밖에 시정이 있다고) 말했으니, 어찌 술을 사러 가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화창(花枪)에 술병을 걸고 나와, 발길 닿는 대로 동쪽으로 향하니, 반 리도 채 가지 않아, 오래된 사당 하나가 보이는지라, 임충이 절하며 말하기를, “신명께서 보우하시어, 훗날 종이를 태우러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1리를 가니, 여러 집의 가게가 보이므로, 임충이 바로 가게로 갔다. 가게 주인이 말하기를, “손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임충이 말하기를, “이 술병을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가게 주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초장의 노군의 것입니다. 대형께서 이곳에 오셨으니, 앉으십시오, 우선 자리를 마련하여 접대의 예로 삼겠습니다.” 임충이 잠시 먹고, 소고기 한 덩이와 술 한 병을 사서, 화창에 걸고 돌아오니, 이미 저물었는지라, 초장에 달려가 보니, 그저 괴롭다고 외칠 뿐이었다. 원래 천리가 분명하여, 충신 의사를 보호하니, 이 큰 눈이 임충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그 두 칸짜리 초청(草厅)은 이미 눈에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제9회 《표자두자육겸부안(豹子头刺陆谦富安)》)
또한 110회본 《충의수호전》 또한 《영웅보》 본으로, “내용이 115회본과 거의 같다(《호적문존(胡适文存)》 3).” 별도로 124회본 《수호전》이 있는데, 문사가 간략하여, 종종 읽기 어려우니,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이다.
둘째는 100회본 《충의수호전》이다. 앞에는 “전당(钱塘) 시내암(施耐庵)의 본, 나관중 편차(编次)”라고 쓰여 있다(《백천서지(百川书志)》 6). 곧 명나라 가정(嘉靖) 때 무정후(武定侯) 곽훈(郭勋)〔9〕의 집안에서 전해지던 본으로, “앞에는 한태함(汗太函)의 서문이 있고, 천도외신(天都外臣)이라는 가명을 썼다(《야획편(野获编)》 5).”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별도로 또한 100회본이 있는데, 이탁오(李贽)〔10〕의 서문과 비점이 있으니, 거의 곽씨 본에서 나왔으나, 제목을 “시내암 집찬(集撰), 나관중 찬수(纂修)”로 고쳤다. 그러나 지금 또한 구하기 어려우며, 오직 일본에 享保 戊申(享保 13년, 1728)에 번각한 앞 10회와 宝历(宝历 9년, 1759)에 이어 번각한 11회부터 20회까지가 남아 있으니, 또한 요마를 잘못 풀어놓는 것으로 시작하여 노달(鲁达), 임충의 사적으로 이어지니, 115회본과 같고, 제5회에 노달에게 “곧 이름을 변방 북쪽에 삼천 리까지 떨치게 하고, 깨달음을 강남 제일의 고을에서 증명하게 하리라”라는 말이 있으니, 곧 육화사 좌화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결말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문사에서는 크게 증삭(增削)하여, 거의 모습을 바꾸었으니, 나쁜 시를 제거하고, 변려문(骈语)을 더하였고, 묘사 또한 더욱 세밀하게 되었으니, 예를 들어 임충이 눈 속에서 술을 사러 가는 대목을 서술한 것이, 115회본보다 1배 이상 많다.
……다만 임충이 침상에 이불 보따리를 놓고, 앉아서 불을 피우기 시작하니, 집 옆에 땔감과 숯이 한 더미 있었으므로, 몇 조각을 가져와 화로에 피웠다. 고개를 들어 초가집을 보니, 사방이 허물어져 있었고, 또 북풍에 흔들리고 떨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임충이 말하기를, “이 집에서 어떻게 겨울을 날 수 있을까, 눈이 개면 성 안으로 가서 미장이를 불러 수리해야겠다.”라고 하였다. 잠시 불을 쬐니, 몸이 춥게 느껴져, 생각하기를 “방금 노군이 말한 5리 밖에 있는 시정에 어찌 술을 사러 가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보따리에서 은돈 몇 닢을 꺼내어, 화창에 술병을 걸고, 불씨를 덮고, 펠트 모자를 쓰고, 열쇠를 가지고 나와, 초청 문을 잡아당겨 닫고, 대문 앞에 나가, 두 짝의 초장 문을 반대로 잡아당겨 닫고, 잠그고, 열쇠를 가지고, 발길 닿는 대로 동쪽으로 향하니, 눈밭에서 부서진 옥 조각을 밟으며, 천천히 북풍을 등지고 갔다. 그 눈은 한창 내리고 있었다. 반 리도 채 가지 않아, 오래된 사당 하나가 보이는지라, 임충이 정중히 절하며 말하기를, “신명께서 보살펴 주시어, 훗날 돈과 종이를 태우러 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얼마를 가니, 여러 집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이므로, 임충이 발을 멈추고 보니, 울타리 안에 빗자루 하나가 밖에 드러나 있었다.
임충이 바로 가게로 갔다. 주인이 말하기를, “손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임충이 말하기를, “이 술병을 알아보십니까?” 주인이 보고 말하기를, “이 술병은 초료장의 노군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충이 말하기를, “어떻소? 바로 알아보는구려.” 가게 주인이 말하기를, “초료장을 지키는 대형이시니, 잠시 앉으십시오, 날씨가 추우니, 술 세 잔을 드시면서 접대의 예로 여기십시오.”
가게 주인이 삶은 소고기 한 접시를 썰고, 따뜻한 술 한 주전자를 데워, 임충에게 권하였다. 또 스스로 소고기를 좀 사고, 또 술 몇 잔을 마시고, 다시 술 한 병을 사고, 그 소고기 두 덩이를 싸서, 은돈 몇 닢을 남겨두고, 화창에 술병을 걸고, 품속에 소고기를 넣고, “실례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울타리 문을 나와, 여전히 북풍을 맞으며 돌아왔다. 보니 눈은 저녁이 되니 더욱 많이 내렸다. 옛날에 어떤 선비가, 가난한 사람들이 눈을 미워하는 마음을 읊은 사(词)를 지었는데:
차가운 바람이 땅을 휩쓸고, 이 눈은 정말 잘 내리는구나, 솜을 뜯어내고, 큰 키처럼 크게 몇 조각을 잘라내니, 숲 속 대나무 집과 초가집이 거의 그 눈에 무너질 뻔하네.
부잣집에서는, 오히려 “재앙을 막는 것이 오히려 적다”고 말하며, 짐승 숯 화로를 향하고, 솜옷과 솜 두루마기를 입고, 매화를 쥐고, “나라의 상서로운 징조”라고 노래하며, 가난한 백성들의 작은 고통은 생각하지 않네. 높은 곳에 은거하는 사람이 있어, 시를 읊는구나.
다시 말해 임충은 그 상서로운 눈을 밟고, 북풍을 맞으며, 나는 듯이 초장 문 앞에 달려가,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저 괴롭다고 외칠 뿐이었다. 원래 천리가 분명하여, 선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보호하니, 이 큰 눈이 임충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그 두 칸짜리 초청은 이미 눈에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제10회 《임교두풍설산신묘(林教头风雪山神庙)》)
세 번째는 120회본 《충의수호전전서(忠义水浒全书)》이다. 또한 “시내암 집찬, 나관중 찬수”라고 쓰여 있으며, 이탁오 서문이 있는 100회본과 같다. 맨 앞에 초(楚) 사람 양정견(杨定见)〔12〕의 서문이 있는데, 스스로 이탁오의 일을 기록하였고, 원무애(袁无涯)〔13〕의 청에 의해 이 전기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발범(发凡) 10조(条)가 있고, 그 다음에는 《선화유사》 중의 양산박 본말 및 108인(人)의 본적과 출신이 있다. 전서(全书)는 처음부터 조정에 항복하기까지의 사략(事略)은 115회본과 완전히 같고, 요나라를 깨뜨리는 것은 조금 다르며, 또한 시사(诗词)가 적고, 전호(田虎), 왕경(王庆)은 사략 또한 다르며, 방랍(方腊)을 사로잡는 것은 모두 같다. 문사는 100회본과 거의 차이가 없으나, 특히 자구(字句)에 약간의 변경이 있으니, 예를 들어 100회본 중에 “임충이 말하기를, ‘어떻소? 바로 알아보는구려.’”라고 한 것은 여기서는 “임충이 말하기를, ‘원래 그렇소.’”라고 되어 있다. 시사는 또한 비교적 많으니, 간행할 때 더한 것이므로, 발범에서 이르기를, “옛 판본은 시사의 번거로움을 제거하였으니, 한 가지는 일의 실마리가 끊어질까 염려한 것이고, 한 가지는 시야가 흐려질까 염려한 것이니, 매우 직설적이고 명료하나, 다만 이것을 얻어 사람의 태도를 형용하려 하니, 문정(文情)을 꺾는 것이 있으므로, 또한 모두 제거할 수는 없어, 이에 다시 더하고 정하였으니, 혹은 원본을 끌어들여 있는 것을 더하고, 혹은 옛 뜻을 거슬러 없는 것을 더하였으니, 오직 권선징악(劝善惩恶)을 주(周)히 하고, 해학(戏谑)을 겸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탁오의 평이 있는데, 100회본과는 다르나, 둘 다 얕고 속되니, 곧 엽주(叶昼)〔14〕 등이 거짓으로 지은 것이다(자세한 것은 《서영(书影)》 1 참조).
발범에서 또한 이르기를, “옛 판본에 나씨(罗氏)의 치어(致语)가 있었는데, 전하는 말에 등화파파(灯花婆婆) 등의 일이 있었으니, 이미 다시 볼 수 없으니, 이에 후인(后人)이 ‘사대구(四大寇)’의 구속(拘)으로 인해 줄인 것이 있고, 120회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도태시킨 것이 있으니, 모두 잘못이다. 곽무정(郭武定)의 판본은 곧 옛 판본에서 염파 일(阎婆事)을 옮겨 놓았으니, 매우 좋고, 그 도적 중에서 왕전(王田)을 제거하고 요나라를 더한 것은, 오히려 작은 집안의 조응(照应)하는 방법이니, 큰 손으로 쓰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수호》에 옛 판본 100회가 있었고, 당시 “이미 다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옛 판본이 있으니, 120회와 같고, 그 안에 “사대구”가 있으니, 곧 왕전, 방랍 및 송강을 이르는 것이니, 곧 시진(柴进)이 백병풍(白屏风) 위에서 본 어서(御书)에 있는 것이다(115회본의 67회 및 《수호전서》 72회 참조). 곽씨의 판본이 비로소 그 구속을 깨고, 왕전을 깎고 요나라를 더하여, 100회를 이루었고, 《수호전서》는 다시 왕전을 더하고, 여전히 요나라를 남겨두어, 다시 120회가 되었으니, 송강은 이에 비로소 사구(四寇)의 밖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선화유사》에서 이른바 “삼로(三路)의 도적”은, 실제로 회양(淮陽), 경서(京西), 하북(河北) 세 길을 공격하여 빼앗은 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니, 모두 송강의 무리인데, 어떤 사람이 잘못 읽어, 이에 왕경, 전호 무리를 그들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요나라를 깨뜨리는 이야기는 또한 명나라 때 처음 지어진 것이 아닐 것이니, 송나라 때 외적이 침략하고, 국정이 해이해지자, 도리어 초택(草泽)을 생각하니, 대개 또한 인심이니, 혹은 야언(野语)을 지어 스스로 위로하였고, 다시 여러 다른 설이 있어, 합치될 수 없으니, 이에 후대의 소설은, 이미 취사(取舍)가 다름으로 인해 갈라지고, 취한 것 또한 화본(话本)이 하나가 아니므로 달라지니, 전호, 왕경은 100회본과 117회본〔15〕에서 이름은 같으나 문사가 매우 다르니, 대개 또한 이로 말미암은 것일 뿐이다. 오직 그 후에 방랍을 토벌하여 평정한 것은, 각 판본이 모두 같으니, 곽씨 판본이 의거한 옛 판본 이전에, 마땅히 또 다른 판본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니, 곧 방랍을 평정한 것으로 항복 이후에 이으니, 《선화유사》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하니, 사리에 비로소 부합되나, 그러나 증거가 아직 부족하여, 정할 수 없다.
위의 다섯 가지 판본을 종합해 보면, 현재 존재하는 《수호전》은 실제로 두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간략하고, 하나는 번잡하다. 호응선(胡应麟)은 “내가 20년 전에 본 《수호전》 판본은 오히려 음미할 만한 점이 많았는데, 십여 년 사이에 민중 서적상들이 간략하게 간행하여, 사실만 기록하고, 중간의 유려한 어휘와 운치, 심정을 담은 곳을 모두 삭제하니, 이내 다시 읽을 가치도 없어졌고, 또 수십 년이 지나도록 원본의 증거가 없으니, 이 책은 영원히 폐기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응린이 본 판본은 지금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만약 115회 간략본이라면, 완성 시기는 아마 번잡한 판본보다 앞설 것이니, 그 용자와 조문이 번잡한 판본과 매번 차이가 있으니, 만약 삭제하여 남긴 것이라면, 고쳐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간략본의 저자는 단지 나관중이라고만 쓰여 있고, 주량공이 노인들에게 들은 것 또한 단지 나씨라고만 하였으니, 곽씨 판본이 나온 것보다 먼저 시내암이라고 쓰기 시작하였으니, 시내암은 번잡한 판본을 지은 사람의 가명이라고 의심되니, 후대에 생긴 것이지, 옛 판본에 있던 것이 아니다. 후인들은 번잡한 판본에 시내암이 짓고 나관중이 엮었다고 쓰인 것을 보고, 그 가탁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내 억측하여 시내암과 관중이 같은 고향 사람으로 여기고, 전당 사람이라고 여기며(명나라 고유(高儒) 《백천서지》 6), 또한 그의 스승이라고 하였다.〔16〕 호응린 또한 자신이 본 《수호전》의 작은 서문을 믿어, 시내암이 “일찍이 시중에 들어가 옛 책을 보니, 낡은 종이에서 송나라 장숙야가 도적을 사로잡고 항복을 권유한 기록 한 통을 얻어, 그 108명이 일어난 바를 자세히 알게 되어, 이에 윤색하여 이 책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시 아무개의 일은 전숙화(田叔禾) 《서호지여(西湖志余)》에 보인다”고 하였으나, 《지여》 중에는 실제로 없으니, 잘못 기록한 것이다. 근래 오매(吴梅)가 《고곡진담(顾曲尘谈)》〔17〕을 지었는데, “《유규기(幽闺记)》는 시군미(施君美)가 지은 것이다. 군미의 이름은 혜(惠)이니, 곧 《수호전》을 지은 내암거사(耐庵居士)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혜 또한 항주(杭州) 사람이지만, 그가 내암거사라는 것은 어느 책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또한 경솔하게 믿을 수 없다.
네 번째는 70회본 《수호전》이다. 정전(正传) 70회와 설자(楔子) 1회를 합하여, 실제로는 71회이며, 원서(原序) 한 편이 있는데, “동도(东都) 시내암 찬(撰)”이라고 쓰여 있으며, 금인서(金人瑞), 자 성탄(聖嘆)이 전한 것으로, 스스로 옛 판본을 얻었는데, 단지 70회이고, 송강이 천서를 받은 이후, 곧 노준의(卢俊义)가 모든 무리가 장숙야에게 사로잡히는 꿈을 꾸는 것으로 끝나고, 항복 이하를 나관중이 이어 지었다고 지적하며, “악찰(恶札)”이라고 배척하였다. 그 책은 120회본의 앞 70회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변려문(骈语)을 삭제한 것이 특히 많고, 120회본 발범에 “옛 판본은 시사의 번거로움을 제거하였다”라는 말이 있으니, 매우 성탄이 진정 옛 판본을 얻은 것과 같으나, 문장 중에 시사를 삭제함으로 인해, 어기가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 있으니, 의거한 것은 여전히 100회본일 것이다. 주량공은 《수호전》을 기록하기를, “근래 금성탄이 70회 이후부터, 나씨가 이어 지었다고 단정하고, 이에 나씨를 극구 비방하고, 다시 거짓으로 시씨의 서문을 앞에 지었으니, 이 책은 이로 인해 시씨의 것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살았으니, 그 말은 믿을 만하다. 다만 자구 또한 조금 좋은 부분이 있으니, 예를 들어 제5회에 노지심이 와관사(瓦官寺) 승려를 꾸짖는 대목을 서술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지심이 앞으로 걸어가니, 그 중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곧 “스님, 앉으십시오, 함께 술 한 잔 드시지요.”라고 하였다. 지심이 주장자를 들고 말하기를, “너희 두 놈은, 어찌 절을 폐했느냐?”라고 하니, 그 중이 곧 “스님, 앉으십시오, 소승의 말을……” 지심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말해 보아라!” “……말하기를: 예전에 저희 절은, 매우 좋은 곳이었는데, 전장 또한 넓고, 승려가 매우 많았는데, 단지 복도 아래의 그 늙은 중 몇 명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고, 돈으로 여자를 길러, 장로가 그들을 금지하지 못하고, 또 장로를 배척하여 내쫓았으니, 이로 인해 절을 모두 폐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은 “소승의 말을……” 아래에 주석을 달아 “그 말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고, “……말하기를” 아래에 또한 여러 가지로 풀이하였으며, 마침내 “장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예로부터 없던 것이다”라고 칭찬하였으니, 이러한 “기이하고 뛰어남”은 바로 성탄이 한 짓이라고 의심되니, 그가 《서상기(西厢记)》를 비평하고 고친 것 또한 이와 같다. 이 글은 100회본에는 “그 중이 곧 ‘스님, 앉으십시오, 소승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지심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말해 보아라!’ 그 중이 말하기를, ‘예전에 저희 절은, 매우 좋은 곳이었는데, 전장이 넓게 있었고, 승려가 매우 많았는데……’”라고 되어 있고, 115회본에는 지심이 눈을 부릅뜨는 글이 전혀 없고, 단지 “그 중이 말하기를, ‘스님, 소승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예전에 저희 절은, 전장이 넓게 있었고, 승려도 많았는데……’”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간행하여 없앤 이유는, 십중팔구 세상의 변화 때문이니, 호적(胡适)은 “성탄은 도적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에 살았으니, 장헌충(张献忠), 이자성(李自成)과 같은 도적 무리가 전국에 해독을 끼치는 것을 눈으로 보았으므로, 그는 도적을 옹호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입으로 꾸짖고 글로 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청나라에 이르러, 세상이 달라지고 인정이 변하니, 다시 “비록 처음에는 행실이 바르지 못하였으나, 능히 갑자기 뉘우치고, 방향을 바꾸어, 선하게 자신을 닦으니, 그 뜻은 진실로 가상하고, 그 공은 진실로 잊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115회본의 67회부터 결말까지를 잘라내어, 《후수호(后水浒)》, 또는 《탕평사대선(荡平四大宣传)》이라고 부르며, 70회 뒤에 붙여 간행하였다. 그 권수(卷首)에는 건륭(乾隆) 임자년(1792) 상심거사(赏心居士)의 서문이 있다.
청나라 초기에, 《후수호전(后水浒传)》 40회가 있었는데, “옛 송나라 유민이 짓고, 안탕산초(雁宕山樵)가 평하였다”고 하니, 대개 100회본을 이은 것이다. 그 책은 송강이 이미 죽고, 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송나라를 위해 금나라에 대항하지만, 공이 없어, 이준(李俊)이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시암라(暹罗)의 왕이 되는 이야기로, 결말이 두광정(杜光庭)의 《구염객전(虬髯客传)》과 매우 비슷하다. 옛 송나라 유민이란 사람은, 이 책 권수 《논략(论略)》에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나, 시대로 살펴보면, 시내암과 나관중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거나, 혹은 그와 동시대 사람으로, 서로 못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침(陈忱)의 가명이다. 침의 자는 하심(遐心)이고, 절강(浙江) 오정(乌程) 사람으로, 평생 저작이 모두 없어졌고, 오직 이 책만 남아 있으니, 명나라 말 유민이다. 그러므로 비록 희롱 삼아 지은 것이지만, 또한 피난한 뜻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도광(道光) 연간에 이르러, 산음(山阴) 유만춘(俞万春)이 《결수호전(结水浒传)》 70회를 지으니, 결자(结子) 1회를 더하여, 또한 《탕구지(荡寇志)》라고도 하였는데, 뜻을 정반대로 하여, 양산박 수령들을, 죽거나 주벌하게 하였으니, 오로지 “당년에 송강이 항복을 받아 방랍을 평정했다는 말은 없고, 단지 장숙야에게 사로잡혀 정법을 받았다는 말 한마디만 있다”고 하여, 70회본을 맺었다. 유만춘의 자는 중화(仲华)이고, 별호는 홀래도인(忽来道人)으로, 일찍이 그의 아버지를 따라 광동(广东)에서 벼슬하였다. 요민(瑶民)의 변란에, 종군하여 공이 있어 논의되었고, 후에 항주에서 의술을 행하였고, 만년에는 도석(道释)을 받들었고, 도광 기유년(1849)에 죽었다. 《탕구지》의 지음은 병술년에 시작하여 정미년에 이르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22년이니, “미처 수식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니, 함풍(咸丰) 원년(1851), 그의 아들 용광(龙光)이 비로소 수식하여 간행하였다(이 책 식어(识语)). 책에서 일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이, 때로는 거의 전편의 성채를 모방하려 하였고, 광경을 기록한 것 또한 시내암과 나관중이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옛 작품과 얽힌 동류의 소설 중에서는, 대개 조금 뛰어난 것이다.
이 외에 역사 이야기 종류는, 그 수가 매우 많다. 명나라에는 이미 아득한 옛날 우(虞), 하(夏) 시대(주유(周游)의 《개벽연의(开辟演义)》, 종성(锺惺)의 《개벽당우전(开辟唐虞传)》 및 《유하지전(有夏志传)》)〔20〕, 동주(东周), 서주(西周) 시대(《동주열국지(东周列国志)》, 《서주지(西周志)》, 《사우전(四友传)》)〔21〕, 전한(前汉), 후한(后汉) 시대(원굉도(袁宏道) 평 《양한연의전(两汉演义传)》)〔22〕, 서진(西晋), 동진(东晋) 시대(《서진연의(西晋演义)》, 《동진연의(东晋演义)》)〔23〕, 당(唐) 시대(웅종곡(熊锺谷)의 《당서연의(唐书演义)》)〔24〕, 송(宋) 시대(척확재(尺蠖斋) 평석 《양송지전(两宋志传)》)〔25〕 등의 역사 이야기 평화(评话)가 있었고, 청나라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으며, 혹은 전체 역사를 총괄하거나(《이십사사통속연의(二十四史通俗演义)》)〔26〕, 혹은 옛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기도 하였으나(양한, 양진, 수, 당 등), 대개 《삼국지연의》를 모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고, 비록 뛰어난 작품이라도, 또한 역사적 사실에 얽매이고, 진부한 말을 답습하였으므로, 문장 표현이 서툴렀고, 또한 이야기 서술을 꺼려 하였으니, 채애(蔡奡)의 《동주열국지독법(东周列国志读法)》〔27〕에서 이르기를, “만약 정경(正经) 책이라고 한다면, 결국 소설의 모습이고,…… 다만 그를 소설이라고 말하려고 하면, 그는 모든 것이 경전(经传)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으니, 본래는 칭찬한 것이지만, 역사 이야기의 병폐 또한 이에 있다.
어떤 시대의 이야기를 서술하되 특히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게 비중을 두는 것에 대해서는, 《몽량록(梦粱录)》(20) 강사(讲史) 조(条) 아래에 이르기를, “왕육대부(王六大夫)가 함순(咸淳) 연간에 《복화편(复华篇)》 및 《중흥명장전(中兴名将传)》을 풀어 이야기하니,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강사에 속해야 한다.
《수호전》이 바로 그 중 하나이고, 후에 나온 것이 더욱 많다. 비교적 유명한 것으로는 《황명영렬전(皇明英烈传)》〔28〕, 또는 《운합기종(云合奇踪)》이라고도 하는데, 무정후 곽훈의 집안에서 전해지며, 명나라 건국 무훈을 기록하였는데, 특히 그 선조 곽영(郭英)의 공을 드높였다. 후에 《진영렬전(真英烈传)》〔29〕이 나왔는데, 그 일을 반박하고 비난하였다.
《송무목왕연의(宋武穆王演义)》〔30〕는 웅대본(熊大本)이 편찬하였고, 《악왕전연의(岳王传演义)》〔31〕는 여응오(余应鳌)가 편찬하였고, 또한 《정충전전(精忠全传)》〔32〕은 추원표(邹元标)가 편찬하였으니, 모두 송나라 악비(岳飞)의 공적과 억울한 옥살이를 기록하였다. 후에 《설악전전(说岳全传)》〔33〕이 나왔는데, 그 일을 풀어 이야기하였다. 청나라에는 《여선외사(女仙外史)》〔34〕가 있는데, 저자는 여웅(吕熊)이라고 한다(유정기(刘廷玑) 《재원잡지(在园杂志)》에 나옴), 청주(青州) 당새아(唐赛儿)의 난을 서술하였다. 《도올한평(梼杌闲评)》〔35〕은 저자 이름이 없고, 위충현(魏忠贤)과 객씨(客氏)의 악행을 기록하였다. 무용에 대해서는, 당나라의 설씨 가문(《정동정서전전(征东征西全传)》)〔36〕, 송나라의 양씨 가문(《양가장전전(杨家将全传)》) 및 적청(狄青) 등(《오호평서평남전(五虎平西平南传)》)〔37〕을 서술한 것이 있는데, 문장이 모두 서툴지만,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그 외에 옛 사실을 빙자하여, 비방하거나 원한을 갚는 작품 또한 많으니, 지금 다시 말하지 않겠다.
〔1〕 공성여(龚圣与, 1222—약 1304)의 이름은 개(开)이고, 호는 취암(翠岩)이며, 송나라 말 원나라 초 회음(淮阴, 지금의 강소성(江苏省)에 속함) 사람이다. 《송강삼십육인찬(宋江三十六人赞)》은 공성여가 각각 송강 등 36인을 위해 지은 사언시(四言诗) 모음으로, 송나라 주밀(周密)의 《계신잡식독집(癸辛杂识读集)》에 보인다.
〔2〕 고여 이숭(高如李嵩) 등은 고여, 이숭 등 송나라와 원나라 사이에 민간 문인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고여는 인명이 아니고, 온 문장의 뜻은 당대의 고수(高手)는 이숭과 같은 부류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숭은 남송(南宋) 전당(钱塘,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항주(杭州)) 사람으로, 일찍이 삼조화원대조(三朝画院待诏)를 지냈으며, 인물화를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3〕 원나라 잡극 중 수호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은, 지금 알려진 바로는 30여 종이 있고, 현존하는 것으로는 고문수(高文秀)의 《흑선풍쌍헌공(黑旋风双献功)》, 이문위(李文蔚)의 《동락원연청박어(同乐院燕青博鱼)》, 강진지(康进之)의 《양산박흑선풍부형(梁山泊黑旋风负荆)》, 무명씨의 《노지심지상황화곡(鲁智深智赏黄花峪)》 등이 있다.
〔4〕 진태(陈泰)의 자는 지동(志同)이고, 호는 소안(所安)이며, 원나라 다릉(茶陵, 지금의 후난성(湖南省)에 속함) 사람으로, 한림서길사(翰林庶吉士)에서 용남령(龙南令)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소안유집(所安遗集)》을 저술하였다.
〔5〕 《수호전》 편찬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혹은 나관중이라고도 하는데, 왕기(王圻)의 《속문헌통고(续文献通考)》 권177에 “《수호전》은 나관이 지었다(《水浒传》,罗贯着).”라고 하였고, 전여성(田汝成)의 《서호유람지여(西湖游览志余)》 권25에 “전당 나관중의 판본은, 소설 수십 종을 편찬하였는데, 《수호전》은 송강 등의 일을 서술하였으니, 간사한 도둑질과 속임수, 기계가 매우 자세하다(钱塘罗贯中本者,编撰小说数十种,而《水浒传》叙宋江等事,奸盗脱骗机械甚详).”라고 하였고, 낭영(郎瑛)의 《칠수류고(七修类稿)》 권상에 “삼국지와 송강 두 책은, 항주 사람 나본 관중이 편찬하였다(三国宋江二书,乃杭人罗本贯中所编).”라고 하였다. 혹은 시내암이라고도 하는데, 호응린의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笔丛)》 권41에 “원나라 사람 무림(武林) 시 아무개가 편찬한 《수호전》이 특히 성행하였다(元人武林施某所编《水浒传》特为盛行).”라고 하였으니, 시 아무개는 시내암을 가리킨다. 혹은 시내암이 짓고 나관중이 엮었다고도 하는데, 명나라 원무애가 처음 간행한 《이탁오평충의수호전(李卓吾评忠义水浒全传)》(120회, 권수를 나누지 않음)에 “시내암 집찬, 나관중 찬수(施耐庵集撰,罗贯中纂修)”라고 쓰여 있고, 이탁오의 《충의수호전서(忠义水浒传叙)》 또한 이르기를: “시씨와 나씨 두 분이 수호를 전하였다(施罗二公传水浒).”라고 하였다. 혹은 시내암이 짓고 나관중이 이었다고도 하는데, 본 권 제151쪽 주〔16〕을 참고하라.
〔6〕 주량공(周亮工, 1612—1672)의 자는 원량(元亮)이고, 호는 력원(栎园)이며, 명나라 말 청나라 초 상부(祥符,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开封)) 사람이다. 명나라 숭정(崇祯) 때 감찰어사(监察御史)를 지냈고, 청나라에 들어가 호부우시랑(户部右侍郎)을 지냈다. 《뢰고당집(赖古堂集)》, 《인수옥서영(因树屋书影)》 등을 저술하였다.
〔7〕 등화파파(灯花婆婆)는 전증(钱曾)의 《야시원서목(也是园书目)》 사화(词话) 부분에 《등화파파》 한 편이 실려 있는데, 당나라 유적중(刘积中)이 등잔불에서 튀어나온 백발노파에게 시달리는 이야기를 썼다. 원문은 이미 없어졌고, 《평요전(平妖传)》에 그 일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8〕 《영웅보(英雄谱)》는 명나라 숭정(崇祯) 연간에 간행되었다. 매 페이지를 위아래 두 칸으로 나누어, 위에는 《충의수호전(忠义水浒传)》을 싣고, 아래에는 《삼국연의(三国演义)》를 실었다.
〔9〕 곽훈(郭勋)은 명나라 호주(濠州,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봉양(凤阳)) 사람이다. 명나라 건국 공신 곽영(郭英)의 후손으로, 무정후(武定侯)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10〕 이탁오(李贽, 1527—1602)의 자는 탁오(卓吾)이고, 별호는 온릉거사(温陵居士)이며, 명나라 천주(泉州) 진강(晋江, 지금의 푸젠성(福建省)에 속함) 사람이다. 일찍이 윈난(云南) 요안(姚安) 지부(知府)를 지냈다. 저술로는 《분서(焚书)》, 《장서(藏书)》 등이 있으며, 일찍이 《수호전》을 평점하였다.
〔11〕 향보(享保)는 일본 나카미카도 천황(中御门天皇)의 연호(1716—1736)이다. 보력(宝历)은 일본 모모조노 천황(桃园天皇)의 연호(1751—1764)이다.
〔12〕 양정견(杨定见)의 자는 봉리(凤里)이고, 명나라 마성(麻城,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에 속함) 사람이다. 그는 《충의수호전·소인(忠义水浒全书·小引)》에서 말하기를: “나는 탁오 선생을 섬겼으니, 모습은 받았고 마음은 맡겼으니, 탁오 선생이 아닌 것이 없다. …… 내가 오(吴)나라를 유람할 때, 진무이(陈无异) 사군(使君)을 방문하여, 원무애(袁无涯) 씨를 얻었다. …… 이후 여러 차례 왕래하며 이야기하니, 이야기할 때마다 탁 선생에 대해 언급하였고, 탁 선생의 유언을 매우 힘써 구하였고, 탁 선생이 비평하고 열람한 남은 책을 또한 매우 힘써 구하였으니, 무애 씨가 어찌 미치거나 병들었겠는가? 내가 나의 행낭을 살펴보니, 탁오 선생이 비평하고 정한 《충의수호전》 및 《양승암집(杨升庵集)》 두 책이 함께 있었으므로, 가지고 그에게 주었다. 무애가 기뻐하며 보물을 얻은 듯이 여겨, 세상에 공개하기를 원하였다.”라고 하였다.
〔13〕 원무애(袁无涯)의 이름은 숙도(叔度)이고, 명나라 말 쑤저우(苏州) 사람이다. “서식당(书植堂)”을 경영하며, 서적을 간행하였다.
〔14〕 엽주(叶昼)의 자는 문통(文通)이고, 명나라 무석(无锡, 지금의 강소성에 속함) 사람이다. 《열객편(悦客编)》 등을 저술하였다. 항상 명인의 이름을 빌려 여러 책을 평점하였다. 주량공의 《인수옥서영》에서 지적하기를: “온릉(온릉거사, 이탁오)의 《분서》, 《장서》가 성행할 때, 서적상들이 여러 가지로 온릉의 이름을 빌려 행한 것이, 《사서제일평(四书第一评)》, 《사서제이평(四书第二评)》, 《수호전》, 《비파기(琵琶记)》, 《배월기(拜月记)》 등의 평은, 모두 문통의 손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15〕 117회본은 현재 보이는 《수호》 중에 117회본은 없다.
〔16〕 시내암과 나관중의 관계 문제에 대해, 고유(高儒)의 《백천서지(百川书志)》 권6 사지3에 “《충의수호전》 100권은, 전당(钱塘) 시내암의 원본이고, 나관중이 편차하였다(《忠义水浒传》一百卷,钱塘施耐庵的本,罗贯中编次).”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호응린의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笔丛)》 권41에 “원나라 사람 무림(武林) 시 아무개가 편찬한 《수호전》이 특히 성행하였고, …… 그의 문인 나본(罗本) 또한 그를 본받아 《삼국지연의》를 지었으니, 매우 얕고 천박하여 비웃을 만하다(元人武林施某所编《水浒传》,特为盛行,……其门人罗本亦效之为《三国志演义》,绝浅陋可嗤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17〕 오매(吴梅, 1884—1939)의 자는 구안(瞿安)이고, 호는 상애(霜厓)이며, 장주(长洲, 지금의 강소성(江苏省) 우현(吴县)) 사람이다. 일찍이 베이징 대학 등 여러 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저술한 《고곡진담(顾曲尘谈)》은 희곡의 음률 및 작곡 방법을 논술하였는데, 그중에 한 장(章)이 원나라와 명나라 이래의 희곡가들의 남은 일화와 소문을 전문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18〕 “악찰(恶札)”은 금성탄이 후몽(侯蒙)이 송강을 조정에 불러들여 항복시키자는 상소에 반대하며, “반적”은 조정에 불러들일 수 없고, 오직 토벌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관화당본(贯华堂本) 《김인서산정수호전(金人瑞删定水浒传)》 권수(卷首) 《송사목(宋史目)》 평어(评语)에 “군자의 한마디 말이 지혜롭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지혜롭지 못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후몽과 같은 사람은, 또한 다행히 죽었을 뿐이다. 진실로 동평을 알았다면, 어찌 크게 공사를 망치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겠는가! 어찌하여 나관중은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설을 따랐으며, 《수호전》을 이어 쓴 악찰이 되었는가!(君子一言以为智,一言以为不智。如侯蒙其人者,亦幸而遂死耳。脱真得知东平,恶知其不大败公事,为世僇笑者哉!何罗贯中不达,犹祖其说,而有续《水浒传》之恶札也)”라고 하였다.
〔19〕 여기의 “당년에 송강이 조정에 항복을 받아 방랍을 평정했다는 말은 없다(当年宋江并没有受招安平方腊的话)” 등의 두 구절은, 유만춘(俞万春)의 《탕구지(荡寇志)》 권수(卷首) 《인언(引言)》에 보인다.
〔20〕 아득한 옛날 우(虞), 하(夏) 시대를 쓴 것으로는, 주유(周游)의 《개벽연의(开辟演义)》, 종성(锺惺)의 《개벽당우전(开辟唐虞传)》 및 《유하지전(有夏志传)》 등이 있다. 주유의 자는 앙지(仰止)이고, 호는 오악산인(五岳山人)이다. 명나라 사람으로,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개벽연의》는 6권 80회이다. 종성(1574—1624)의 자는 백경(伯敬)이고, 명나라 후광(湖广) 경릉(竟陵) 사람이다. 《개벽당우전》은 곧 《반고지당우전(盘古至唐虞传)》 2권 14칙(则)이다. 《유하지전》은 4권 19칙이다. 두 책은 옛 기록에 “경릉 종성 경백부가 편집하고, 고오(古吴) 풍몽룡(冯梦龙) 유룡부가 감정하였다(景陵锺惺景伯父编辑”,“古吴冯梦龙犹龙父鉴定).”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명나라 무명씨가 지은 것이다.
〔21〕 동주(东西周) 시대를 쓴 것으로는, 《동주열국지(东周列国志)》, 《서주지(西周志)》, 《사우전(四友传)》 등이 있다.
《동주열국지》는 24권 108회이다. 명나라 여소어(余邵鱼)가 《열국지전(列国志传)》을 지었고, 명나라 말 풍몽룡(冯梦龙)이 개정하여 《신열국지(新列国志)》로 만들었고, 청나라 채원방(蔡元放)이 삭제하고 고쳐 《동주열국지》로 만들었으며, 아울러 평어를 더하였다.
《서주지》는 보이지 않는데, 황마서(黄摩西)의 《소설소화(小说小话)》에 따르면, 이 책은 “주나라 소왕(昭王)의 남정(南征), 목왕(穆王)이 서왕모(西王母)를 만난 일 및 서언왕(徐偃王)을 평정한 일을 펼쳐 썼다(铺张昭王南征、穆王见西王母及平徐偃王事).”라고 한다. 《사우전》은 곧 《귀곡사우지(鬼谷四友志)》로, 3권이고, 회목(回目)을 나누지 않았으며, 청나라 양경창(杨景淐)이 지었다.
〔22〕 양한(两汉) 시대를 쓴 것으로는, 원굉도(袁宏道) 평 《양한연의전(两汉演义传)》 등이 있다. 원굉도(1568—1610)의 자는 중랑(中郎)이고, 호는 석공(石公)이며, 명나라 공안(公安, 지금의 후베이성에 속함) 사람이다. 명나라 삼태관본(三台馆本) 《전한지전(全汉志传)》은 14권이고, 권수에 원굉도의 서문이 있다.
〔23〕 양진(两晋) 시대를 쓴 것으로는, 《동서진연의(东西晋演义)》 등이 있다. 이 책은 《서진연의(西晋演义)》 4권, 《동진연의(东晋演义)》 8권을 포함한다. 명나라 무명씨가 지었고, “말릉(秣陵) 진씨(陈氏) 척확재(尺蠖斋) 평석(评释)”이라고 쓰여 있으며, 맨 앞에 치형산인(雉衡山人, 명나라 양이증(杨尔曾))의 서문이 있다.
〔24〕 당(唐) 시대를 쓴 것으로는, 웅종곡(熊钟谷)의 《당서연의(唐书演义)》 등이 있다. 웅종곡은 곧 웅대목(熊大木)으로, 명나라 건양(建阳, 지금의 푸젠성에 속함) 사람이다. 《당서연의》의 전체 이름은 《당서지전통속연의(唐书志传通俗演义)》이고, 90절(실제로는 89절)이다.
〔25〕 송(宋) 시대를 쓴 것으로는, 척확재 평석 《남북양송지전(南北两宋志传)》 등이 있다. 척확재는 명나라 진계유(陈继儒)의 서재 이름이다. 《남북양송지전》은 《남송지전(南宋志传)》, 《북송지전(北宋志传)》을 포함하며, 각 10권 50회이다. 책에는 “고숙(姑孰) 진씨 척확재 평석(评释)”이라고 쓰여 있다. 《남송》에는 “진계유 편차(陈继儒编次)”라고 쓰여 있고, 《북송》에는 저자를 쓰지 않았다. 전자는 태조(太祖)의 일을, 후자는 송나라 초기 및 진종(真宗), 인종(仁宗) 두 황제 때의 일을 썼다. 책 이름이 “남송”, “북송”이지만, 실제 역사의 남송과 북송의 구분과는 관련이 없고, 남송 시대의 일을 다루지 않았다.
〔26〕 전체 역사를 통틀어 쓴 것으로는, 《이십사사통속연의(二十四史通俗演义)》 등이 있다. 이 책은 26권 44회이고, 청나라 여무(吕抚)가 지었다. 원래 이름은 《강감연의(纲鉴演义)》였으나, 나중에 전해지는 판본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27〕 채애(蔡奡)의 자는 원방(元放)이고, 호는 야운주인(野云主人)이며, 청나라 강녕(江宁, 지금의 강소성에 속함) 사람이다. 《동주열국지독법(东周列国志读法)》은 그의 평본 《동주열국지》에 보인다.
〔28〕 《황명영렬전(皇明英烈传)》은 6권이고, 명나라 무명씨가 지었다.
〔29〕 《진영렬전(真英烈传)》은 보이지 않는다. 황마서(黄摩西)의 《소설소화(小说小话)》에 따르면: “앞의 책(《영렬전》을 가리킴)에 반대하여 지은 듯하며, 개국 공신 중에서, 곽영(郭英)을 많이 통렬하게 비난하였다(似因反对前书(指《英烈传》)而作,开国诸将中,于郭英多所痛诋).”라고 한다.
〔30〕 《송무목왕연의(宋武穆王演义)》는 곧 《대송중흥통속연의(大宋中兴通俗演义)》로, 8권 80칙이고, “오봉(鳌峰) 웅대목(熊大木) 편집(编辑)”이라고 쓰여 있다.
〔31〕 《악왕전연의(岳王传演义)》는 곧 《대송중흥악왕전(大宋中兴岳王传)》으로, 8권이고, “홍설산인(红雪山人) 여응오(余应鳌) 편차(编次)”라고 쓰여 있으나, 실제로는 곧 웅대목의 《대송중흥통속연의》의 다른 전본이다. 여응오는 생평이 자세하지 않다.
〔32〕 《정충전전(精忠全传)》은 곧 《악무목왕정충전(岳武穆王精忠传)》으로, 6권 68회이고, 명나라 무명씨가 편찬하였으며, 웅대목의 《대송중흥통속연의》의 삭제본이다. “추원표(邹元标) 편정(编订)”이라고 쓰여 있으나, 거짓으로 빌린 것이다. 추원표(1551—1624)의 자는 이첨(尔瞻)이고, 명나라 길수(吉水, 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속함) 사람으로, 일찍이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郎)을 지냈으며, 《원학집(愿学集)》을 저술하였다.
〔33〕 《설악전전(说岳全传)》은 20권 80회이고, 청나라 전채(钱彩)가 지었다. 채의 자는 금문(锦文)이고, 인화(仁和, 지금의 저장성 항주) 사람이다.
〔34〕 《여선외사(女仙外史)》는 100회이다. 여웅(吕熊)의 자는 문조(文兆)이고, 청나라 초 오(吴)나라 사람이며, 《시경육예변(诗经六艺辨)》 등을 저술하였다.
〔35〕 《도올한평(梼杌闲评)》은 《명주연(明珠缘)》이라고도 하며, 50회이고, 지은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다.
〔36〕 당나라의 설씨 가문을 서술한 것으로는, 《정동정서전전(征东征西全传)》 등이 있다. 《정동(征东)》은 곧 《설당후전(说唐后传)》으로, 55회이고; 《정서(征西)》는 곧 《정서설당삼전(征西说唐三传)》으로, 10권 88회이며, 모두 청나라 무명씨가 지었다. 설씨 가문은 당나라 명장 설인귀(薛仁贵) 일가를 가리킨다.
〔37〕 송나라의 양씨 가문 및 적청(狄青) 등을 서술한 것으로는, 《양가장전전(杨家将全传)》 및 《오호평서평남전(五虎平西平南传)》 등이 있다. 《양가장전전》은 《양가통속연의(杨家通俗演义)》라고도 하며, 8권 58칙이고, 명나라 무명씨가 지었다. 《오호평서평남전》은 《오호평서전전(五虎平西前传)》, 《오호평남후전(五虎平南后传)》을 포함하며, 전전은 14권 112회이고; 후전은 6권 42회이며, 모두 청나라 무명씨가 지었다. 양씨 가문은 송나라 명장 양업(杨业) 일가를 가리킨다. “오호(五虎)”는 적청 등 다섯 사람을 가리킨다.
제16편 명의 신마 소설 (상)
송 선화 시대에 도교를 숭상하는 풍조가 극에 달했고, 원나라 역시 불교를 숭상했지만 도교 또한 매우 숭배하여, 그 환혹적인 이야기들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었다. 명나라 초에는 다소 쇠퇴했지만, 중엽에 이르러 다시 매우 성행하게 되었다. 성화제 때에는 방사 이자, 석계효가 있었고, 정덕제 때에는 색목인 우영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방술과 여러 잡기로 벼슬을 얻어 영화를 누렸고,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부러워하자 요망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성행하였고, 그 영향은 문학에까지 미쳤다. 또한 역대로 삼교(유교, 불교, 도교)의 논쟁은 해결되지 않고 서로를 용인하며 “근원이 같다”고 하였다. 이른바 의와 리, 사악함과 올바름, 선과 악,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 등 모든 것들이 뒤섞였다가 다시 나뉘어 이원론으로 통합되었다. 비록 특정한 명칭은 없지만, 신마라고 부르면 대략적으로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명나라 초의 《평요전》이 이미 그 시작을 열었고, 이후에 등장한 작품들은 더욱 많았다. 서술된 내용들은 송나라 이후 도사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백성들의 입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었기에 거칠고 천박하여 볼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힘이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고, 혹은 문인들이 일어나 이를 모아 다듬기도 하였으니, 이는 곧 거대한 작품의 태아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설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현재 《사유기》가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책은 총 네 종류이며, 저자는 세 명이지만 누가 편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간행된 형태를 보아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상동팔선전》으로, 《팔선출처동유기전》이라고도 하며, 2권 56회로 구성되어 있고, “난강 오원태 저”라고 되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철괴(성은 이, 이름은 현)가 도를 얻어 종리권을 제도하고, 종리권은 여동빈을 제도하였으며, 이 두 사람은 다시 한상자와 조우를 함께 제도하였고, 장과, 남채화, 하선고는 따로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어느 날 모두 반도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각자 보물을 밟고 바다를 건너는데, 용왕의 아들이 남채화가 밟고 있던 옥판을 탐내어 빼앗으려 하자 큰 싸움이 벌어진다. 팔선은 “동양을 불태웠고”, 용왕은 패하여 천병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이 또한 패배한다. 후에 관음보살의 중재로 화해하고 각자 물러나니, “하늘과 연못이 완전히 달라지고 천하가 태평해지는” 계기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책에는 문어체와 구어체가 섞여 나오고, 내용 또한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이것저것 가져와서 쓴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오현영관대제화광천왕전》, 즉 《남유기》로, 4권 18회로 구성되어 있고, “삼태산인 앙지 여상두 편”이라고 되어 있다. 여상두는 명나라 말기의 서적 판매상으로, 《삼국지연의》 간행본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책에서는 묘길상 동자가 독화귀를 죽인 일로 여래의 뜻을 거슬러 마이낭낭의 아들로 강등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삼안영광이며, 다섯 가지 신통력을 가지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영허를 유람하다가 금창을 훔친 일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다. 다시 염마천왕의 집에서 태어나 영요가 되어 천존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또 그의 금도를 훔쳐 금덩이로 만들어 법보로 삼고, 결국 천궁을 소란하게 하여 상계가 들끓는다. 현천상제가 물로 그를 제압하여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내니, 소씨의 몸에 잉태되어 화광이 되었고, 여전히 신통력을 가지고 신과 마귀와 싸우니, 하계 또한 들끓는다. 황제는 이에 그를 용서한다. 화광은 금덩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만들고자 금탑을 찾아다니다가 철선공주를 만나 사로잡아 아내로 삼고, 여러 요괴들을 항복시키니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저승을 찾아갔다가 다툼으로 인해 명부까지 소란하게 하니, 하계가 또 다시 들끓는다. 이후 자신의 생모가 사실 요괴이며, 이름은 길지타 성모이고, 소 장자의 아내를 잡아먹고 그 모습으로 변하여 화광을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부처에게 붙잡혀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었고, 화광은 이에 어머니를 구출해 간다.
……화광이 세 번 풍도에 내려가 어머니를 구출해 내자, 길지타 성모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내 아들, 네가 나를 구해 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나는 기아를 먹고 싶다.” 화광이 물었다. “기아가 무엇인지, 제 아내들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기아를 모른다고? 천리안과 순풍이에게 가서 물어보아라.” 화광이 곧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말했다. “그 기아는 사람인데, 사람을 잡아먹으려 합니다.” 화광은 이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풍도에서 고통받으시는 것을 보고, 제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구해 드렸는데, 어찌 또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십니까? 이는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먹고 싶다! 불효자식, 네가 나에게 기아를 구해 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구하려 했겠느냐?” 화광은 어쩔 수 없이 “이틀 안에 구해다 드리겠다”고 둘러댔다.…… (제17회 《화광삼하풍도》)
이에 방을 붙여 의원을 구하니, 오직 선도를 먹어야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자가 있었다. 화광은 곧 제천대성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훔쳐다 바치니, 길지타는 비로소 사람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제천대성이 의심을 받아 불모에게 물으니, 화광인 줄 알고 찾아와 화단에 불타 패배하였다. 그의 딸 월패는 해골 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적의 머리를 치면 곧 통증을 느끼고 이틀 안에 죽었다. 화광은 술법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화염왕광불이 나타나 화의를 제안하니, 월패가 뼈에서 맞은 자국을 깎아내자 화광은 비로소 나았고, 결국 불도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사조제(《오잡조》 15)는 화광 소설을 《서유기》에 비유하며 “모두 오행 상극의 이치로, 불의 기세가 치솟으면 하늘과 땅 어디에도 끌 수 없지만, 진무가 물로 제압해야 비로소 정도에 돌아온다”고 하였다. 또한 길지타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사람을 먹으려 한 일에 대해서는 개전의 어려움에 대해 개탄하며, 만력제 때 이미 이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심덕부(《야획편》 25)는 극곡에 대해 논하며 “화광이 신통력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 요망하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이야기가 당시 극본으로도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북방진무현천상제출신지전》, 즉 《북유기》로, 4권 24회로 구성되어 있고, 역시 여상두가 편찬하였으며, 진무 본인과 득도하여 요괴를 물리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상제를 현천이라고 하는 설은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주례》《대종백》 정씨 주), 이후의 현제와는 사실 또 다르다. 이 현제 진무는 송나라 때 우객의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즉 《원동옥력기》(《삼교수신대전》 인용)에서 “원시천존이 옥청에서 설법할 때, 아래를 보니 악한 기운이 가득하여, 이에 주 무왕에게 명하여 은나라를 정벌하여 양을 다스리게 하고, 현제에게 명하여 마귀를 거두어 음을 다스리게 하니, 위에서 현제에게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금 갑옷과 검은 도포를 입고 검은 깃발을 들고 정병을 거느리고 인간 세상에 내려가 육천 마왕과 동음의 들에서 싸우게 하였다. 이때 마왕은 감리와 이기를 이용하여 검은 거북과 거대한 뱀으로 변화시켜 나타나니, 현제가 신력으로 발아래에 거두어 풍도 대동에 귀신 무리를 가두니, 백성들은 편안해지고 온 세상이 깨끗해졌다”고 한 것이다. 원나라에서도 봉호를 더했고, 명나라에서도 숭배하였다. 이 전에서 말하는 바는 옛 설과 부합하는 부분이 있지만, 또한 때때로 불경의 이야기를 훔쳐 오고, 비속한 말을 섞고, 효험을 크게 과장하니, 마치 시골 무당이나 사당 관리의 모습과 같다. 처음에는 수 양제 때, 옥황상제가 연회를 베풀 때 갑자기 인간 세상을 그리워하여 세 혼 중 하나로 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며, 여래와 삼청이 함께 와서 점화하니 이에 봉래에 숨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마음으로 가사국에서 태어나고, 다음에는 서하에서 태어났는데, 모두 왕자였으며, 천존의 가르침을 받아 나라를 버리고 출가하여, 공덕을 마치자 옥황상제를 뵙고, 항마천존으로 봉하여 천장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에 다시 정락국의 왕자로 태어나 두모원군의 점화를 받고 무당산에 들어가 도를 이루었다. 현제가 막 천궁으로 올라가자 갑자기 요기가 중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곧 천장임을 알고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알고 다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거북과 뱀 괴물을 항복시키고 조공명을 굴복시키고 뇌신을 거두고 월패 및 다른 신장들을 사로잡아 이끌고 하늘에 올라갔다. 옥황상제는 곧 여러 신들을 현천의 부하 장수로 봉하니, 모두 서른여섯 명이었다.
그러나 양자강에는 솥과 대나무 밧줄 두 요괴가 있었는데, 홀로 달아나 잡을 수 없었으므로, 진무는 하나의 화신을 만들어 다시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 무당산에서 지키게 하였다. 편의 마지막에는 영락 3년에 현천이 나라를 도와 적을 물리친 일을 기록하고, 아래에 “지금까지 2백여 년”이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이 유행한 것은 명나라 말기인 듯하다. 그러나 옛 판본에는 뒤의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있는 것은 나중에 추가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네 번째는 《서유기전》으로, 4권 41회로 구성되어 있고, “제운 양지화 편, 천수 조경진 교”라고 되어 있으며, 손오공이 도를 얻고, 당태종이 저승에 가고, 현장이 명을 받아 경전을 구하러 가는 도중에 어려움을 겪고, 마침내 서쪽 땅에 도착하여 경전을 얻어 동쪽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태종의 꿈은 이미 여러 사람이 이야기했고, 장탁의 《조야첨재》에 이르기를 “태종이 한밤중에 갑자기 선정에 들어 한 사람을 보니, ‘폐하 잠시 오셔야 합니다. 곧 돌아가실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신은 인간 세상의 일을 저승에서 판결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종이 들어가 판관을 만나 6월 4일의 일을 물으니, 곧 돌아가라고 하여, 전에 보았던 사람이 다시 마중 나와 안내하여 나갔다.”라고 한다. 또한 속된 이야기에도 이 일을 기록한 것이 있으며, 잔권이 돈황 천불동에서 발견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제12편 참조). 현장이 인도로 간 것은 사실 명을 받아서 간 것이 아니고, 자세한 내용은 《당서》(191권 《방기전》)에 있으며, 또한 전문적인 전기인 《대자은사삼장법사전》이 《불장》에 있는데, 처음에는 여러 기이한 이야기가 없었지만, 후에 야사에서 영괴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게 되었다. 《대당삼장취경시화》에는 이미 원숭이 행자, 심사신 및 여러 이경이 있었고, 금나라 연극에도 《당삼장》이 있었고(도종의 《철경록》), 원나라 잡극에는 오창령의 《당삼장서천취경》(종사성 《녹귀부》), 일명 《서유기》(현재 일본 시오야 야스시가 교정한 판본이 있음)가 있는데, 그중 손오공을 거두고, 금고저를 씌우고, 사오정, 저팔계, 홍해아, 철선공주 등이 모두 나타난다. 취경 이야기는 당나라 말부터 송나라와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점점 신이한 이야기로 발전했고, 또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니, 소설가 또한 이를 가져다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체 책의 앞 9회는 손오공이 신선이 되어 강복당하는 이야기까지로, 돌 원숭이가 물 근원을 찾아 여러 사람이 왕으로 받들었고, 다시 산에서 나와 스승을 찾아 도를 깨닫고, 큰 신통력으로 천지를 어지럽히니, 옥황상제가 어쩔 수 없이 제천대성으로 봉했지만, 다시 반도회를 어지럽히자, 옥황상제가 관구 이랑진군에게 토벌하게 하니, 마침내 큰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전투의 변화하는 상황을 서술한 것은 다음과 같다.
……그 어린 원숭이가 진군이 온 것을 보고 급히 원숭이 왕에게 알렸다. 원숭이 왕은 곧 금고봉을 쥐고 구름 신발을 신고 올라갔다. 두 사람이 만나 각자 이름을 말하고, 곧 진영을 벌여 3백여 합을 겨루었다. 두 사람은 각자 만 길의 몸으로 변신하여 구름 속으로 들어가 싸우니, 동굴 입구를 벗어났다.
……대성이 한창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본산의 여러 원숭이들이 놀라 흩어지는 것을 보고 몸을 빼 도망쳤다. 진군이 큰 걸음으로 쫓아오니, 급히 도망치고 급히 쫓겼다. 대성은 황망히 몸을 변신하여 물속으로 들어갔다. 진군이 “이 원숭이가 물에 들어가면 반드시 물고기나 새우로 변할 것이니, 내가 물수리로 변하여 쫓으리라.”라고 하였다. 대성이 진군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다시 따오기로 변하여 나무 위로 날아가니, 진군이 활을 당겨 쏘아 풀밭에 떨어뜨렸지만, 두루 찾아봐도 보이지 않자, 천왕의 진영으로 돌아가 원숭이 왕이 패배한 일 등을 이야기하고, 또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천왕이 조요경을 비추니, 급히 “요망한 원숭이가 너의 관구로 갔다.”라고 하였다. 진군이 관구로 돌아가니, 원숭이 왕이 급히 진군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중당에 앉아 있었는데, 이랑이 신창으로 찌르니, 원숭이 왕이 피하고 본모습으로 변하니, 두 사람이 솜씨를 겨루며 화과산으로 돌아가려 하였지만, 사방의 천장들이 둘러싸고 주문을 외웠다. 갑자기 진군과 보살이 구름 속에서 바라보니, 원숭이 왕의 기력이 거의 다한 것을 보고, 노군이 금강권을 던져 원숭이 왕의 머리에 한 번 치니, 원숭이 왕이 땅에 넘어졌다. 진군의 신견이 가슴과 배를 물어 또 한 번 넘어뜨리니, 진군의 형제들이 신창으로 찔러 쇠사슬로 묶었다.
……(제7회 《진군수착후왕》)
그러나 베어도 상처가 없고, 불에 태워도 죽지 않으므로, 여래는 그를 오행산 아래에 눌러 놓고 경전을 구하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였다.
다음 네 회는 위징이 용을 베고, 태종이 저승에 가고, 유전이 수박을 바치고, 현장이 명을 받아 서쪽으로 가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는 경전을 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14회 이하에서는 현장이 도중에 제자를 거두고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다루며, 부처를 만나 경전을 얻어 동쪽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끝맺는다. 제자는 세 명으로, 손행자, 저팔계, 사오정이며, 용마를 얻는다. 재난은 서른여 가지가 넘는데, 그중 큰 것은 오장관, 평정산, 화운동, 통천하, 독적산, 육이미후, 소뢰음사 등이다. 기록된 내용은 간략하고 음운이 많지만, 가끔 유희적인 표현을 섞어 웃음과 즐거움을 더하는데, 예를 들어 화운동의 싸움을 묘사한 것은 다음과 같다.
……그 산 앞뒤의 토지신들이 모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이름을 알리며, “이곳을 고송간이라 하고, 간 옆에 있는 산 동굴을 화운동이라 하며, 동굴에는 마왕이 한 명 있는데, 우마왕의 아들이고, 이름은 홍해아입니다. 그는 삼매진화를 가지고 있는데, 매우 강력합니다.”라고 하였다.
행자는 이 말을 듣고 토지신을 꾸짖어 물러가게 하고,…… 팔계와 함께 동굴로 들어가 찾으러 갔는데,……
그 마왕은 작은 요괴에게 분부하여 다섯 바퀴의 작은 수레를 내놓아 오방에 벌여 놓고, 창을 들고 달려 나와 행자와 수 합을 싸우니, 팔계가 도우러 나서자, 마왕은 돌아가 코를 한 번 치니, 코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고, 순식간에 다섯 수레에서 맹렬한 불이 일어났다. 팔계가 “형님 빨리 가요! 조금 있으면 저 돼지를 통째로 태워 버리고, 향신료를 더해 마음대로 쓸 거예요.”라고 하였다.
행자는 불에 타는 것은 피했지만, 연기만은 두려워하여,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도망쳐 돌아왔다.……
(제32회 《당삼장수요과흑하》)
다시 관세음을 청하니, 칼을 연꽃대로 변화시켜 유인하여 사로잡으니, 이미 항복시켰지만 다시 배반하므로, 오금 고리를 채우고 감로수를 뿌리니, 비로소 두 손을 합장하고 낙가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서유기》 잡극 중 《귀모귀의》라는 극에서는 바리때를 들어 어린아이를 구하는 이야기를 사용하는데, 그중 “세존께 고하오니, 자비의 힘을 베푸소서. 제가 당삼장을 서쪽으로 가게 하면 돌아올 것이고, 화해아 요괴는 놓아주었습니다. 앞에 가면 모름지기 이성랑이 구해주어야 합니다.”(권3)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우마왕의 아들로 바꾸었고, 선지식을 찾는 선재동자와 혼동하였다.
〔1〕이자(李孜)는 이자성(李孜省)이라고도 한다. 그와 계요(继尧), 우영(于永) 세 사람의 행적은 《명사·영행열전》에 나온다.
〔2〕여상두(余象斗)는 자가 앙지(仰止)이고, 스스로 삼태산인(三台山人)이라 칭했으며, 명나라 건안(지금의 푸젠성 젠어우시) 사람이다. 그는 《남유기》, 《북유기》 등을 편찬했고, 《열국지전》, 《전한지전》, 《삼국지전평림》, 《수호지전평림》 등을 간행했다.
〔3〕심덕부(沈德符)는 본 권 제41쪽 주〔20〕을 참고하라.
〔4〕원나라와 명나라 두 왕조에서 진무제를 숭배한 일에 대해서는 《원사·성종기》에 따르면, 원 성종 테무르 대덕 7년(1303) 12월에 진무에게 “원성인위현천상제”라는 칭호를 더했다고 한다. 《명사·예지》에 따르면, 명 태조 주원장은 난징에 사당을 지어 진무를 숭배했고, 명 성조 주체 영락 13년(1415)에는 베이징에 “진무묘”를 지어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5〕《조야첨재》는 본 권 제78쪽 주〔11〕을 참고하라. 여기에 인용한 문장은 현재 전해지는 6권본 권6에 나온다. 6월 4일의 일은 이세민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인 일을 가리키며, 《구당서·태종기》를 참고하라.
〔6〕현장이 인도로 간 것은 《구당서·방기전》에 따르면 “승려 현장은 성이 진씨이고, 뤄저우 옌스 사람이다. 대업 말에 출가하여 경전과 논서를 널리 섭렵하였다. 일찍이 번역된 것이 오류가 많다고 여겨, 서역으로 가서 다른 판본을 널리 구해 비교하려고 하였다. 정관 초에 상인을 따라 서역으로 유람하였다.”라고 한다.
〔7〕《대자은사삼장법사전》 10권은 당나라 승려 혜립이 원래 지었고, 언종이 주석을 달아 보충하였다. 현장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책은 《불장》 권50에 수록되어 있다. 《불장》은 불교 경전의 총집으로, 경장, 율장, 논장 삼장으로 나뉘며, 인도와 중국 불교 저작을 수록하고 있다. 남북조 시대에 처음 편찬되었고, 이후 각 시대에 또 새로 번역된 경전과 저술이 편입되었다.
〔8〕《당삼장》은 《철경록》 권25 《금원본명목》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9〕오창령은 원나라 대동(지금의 산시성 다퉁시) 사람이다. 그가 지은 《당삼장서천취경》은 지금 두 절만 남아 있다. 아래 문장에서 시오야 야스시가 교정한 《서유기》는 실제로는 양눌이 지은 《서유기》 잡극이며, 본 권 제88쪽 주〔17〕을 참고하라.
제17편 명의 신마 소설 (중)
또한 100회본 《서유기》가 있는데, 이는 41회본 《서유기전》 이후에 나온 것으로, 현재 매우 성행하고 있으며, 원나라 초기의 도사 구처기(丘處機)가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구처기는 실제로 서쪽으로 간 적이 있고, 이지상이 그의 일을 기록하여 《장춘진인서유기》를 지었는데, 총 2권으로 현재 《도장》에 남아 있다. 다만 이름이 같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하나의 책으로 여기게 되었다. 청나라 초기에 《서유기》 소설을 간행한 사람은 또 우집(虞集)이 지은 《장춘진인서유기》의 서문을 책머리에 실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이야기는 더욱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건륭 말년에 이르러, 전대흔이 《장춘진인서유기》의 발문(《잠연당문집》 29)에서 이미 소설 《서유연의》는 명나라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고, 기윤(《여시아문》 3)은 더욱 “그중에 제사국의 금의위, 주자국의 사례감, 멸불국의 동성병마사, 당태종의 대학사 한림원 중서과가 모두 명나라 제도와 같다”는 이유로, 명나라 사람이 의탁하여 지은 것이라고 단정했지만, 아직 누가 지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향토 문헌은 특히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후 산양 사람인 정안(《석정기사속편》), 완규생(《다여객화》) 등이 모두 옛 기록을 탐색하여 《서유기》의 저자가 오승은임을 알게 되었다. 오옥진(《산양지유》) 또한 그렇게 말했지만, 오히려 구처기의 책을 윤색한 것으로 의심했는데, 마치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를 윤색한 것과 같다고 여긴 것은, 2권본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한 “혹자는 《후서유기》가 있다고 하는데, 사양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고 하였으니, 단지 세상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일 뿐이다.
오승은의 자는 여충이고, 호는 사양산인이며, 성품이 민첩하고 지혜로웠으며, 널리 책을 읽었고, 또한 해학과 희극에 능하여 여러 종류의 잡기를 지어 명성이 한때 세상을 진동시켰다. 가정 갑진년에 공생이 되었고, 후에 장흥현의 현승을 지냈으며, 융경 초에 산양으로 돌아왔고, 만력 초에 죽었다(약 1510~1580년). 잡기 중 하나가 곧 《서유기》이다(《천계회안부지》 16 및 19 《광서회안부지》 공거표 참조).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다. 또한 시를 잘 지었는데, 그의 시는 “말은 미묘하지만 뜻은 광범위하고 심오하다”(진문촉 서문)라고 하여, 명나라 시대 회군 시인 중 최고로 여겨졌지만, 가난하고 늙어 후사가 없어, 남긴 원고가 많이 흩어져 없어졌고, 구정강이 남은 것을 모아 《사양존고》 4권과 《속고》 1권으로 엮었고, 오옥진이 모두 《산양기구집》에 수록하였다(《산양지유》 4). 그러나 동치 연간에 《산양현지》를 수정한 사람은 《인물지》에서 “해학과 희극에 능하여 잡기를 지었다”는 말을 빼버렸고, 《예문지》에서는 또 《서유기》 항목을 싣지 않았으므로, 오씨의 성품과 행실이 사실과 달라졌고, 《서유기》가 오씨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 또한 점점 적어졌다.
《서유기》 전체의 차례는 양지화가 지은 41회본과 거의 같다. 앞의 7회는 손오공이 도를 얻어 항복당하는 이야기로, 이는 양본의 앞 9회에 해당한다. 8회는 석가가 경전을 만드는 일을 기록하는데, 불경에서 아난이 결집했다는 이야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9회는 현장의 부모가 어려움을 겪고 현장이 복수하는 일을 기록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며, 양본에는 모두 없고, 오승은이 더한 것이다. 10회부터 12회는 위징이 용을 베는 일부터 현장이 명을 받아 서쪽으로 가는 일까지로, 이는 양본의 10회부터 13회에 해당한다. 14회부터 99회는 모두 인도로 가는 도중에 어려움을 겪는 일을 기록하는데, 9는 궁극을 의미하고, 사물이 9에 이르기 때문에, 9 곱하기 9는 81이므로, 81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100회는 동쪽으로 돌아와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끝맺는다.
다만 양지화의 본은 대체적인 틀은 갖추었지만, 문사가 거칠고 조잡하여 겨우 책의 형태만 갖추었을 뿐이다. 오승은은 뛰어난 재능과 민첩한 지혜, 풍부하고 우아한 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자료를 취한 것은 매우 광범위하여, 《사유기》 중에서도 《화광전》과 《진무전》을 참고하였고, 서유기 이야기에서도 《서유기 잡극》과 《삼장취경시화》(?)를 참고하였으며, 이야기를 바꿔 옮기는 데는 당나라의 전기(예를 들어 《이문집》, 《유양잡조》 등)를 활용하였고, 풍자와 야유에는 당시의 세태를 취하여, 거기에 과장된 묘사를 더하니, 거의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관구 이랑과 손오공의 싸움을 보면, 양본에는 3백여 자밖에 없지만, 여기에는 10배나 되며, 먼저 두 사람이 각자 “법상”을 나타내는 것을 기록하고, 다음에는 대성이 참새로 변하고, “큰 가마우지”로 변하고, 물고기로 변하고, 물뱀으로 변하니, 진군은 참매로 변하고, 큰 바다 학으로 변하고, 물수리로 변하고, 회색 학으로 변하니, 대성은 다시 따오기로 변하자, 진군은 그 천한 새로 여겨 비교하려 하지 않고, 곧 본모습을 나타내어 탄환으로 쏘아 떨어뜨린다.
……그 대성은 기회를 틈타 산비탈 아래로 굴러 내려가 엎드려 있다가 또 변신하는데, 토지신 사당으로 변한다. 입을 크게 벌려 마치 사당 문처럼 만들고, 이빨은 문짝으로, 혀는 보살상으로, 눈은 창문으로 만들고, 오직 꼬리만 감추지 못하고 뒤에 뻗어 깃대로 만들었다. 진군이 벼랑 아래까지 쫓아갔지만, 쓰러진 따오기는 보이지 않고, 작은 사당 하나만 있기에, 급히 봉의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니, 깃대가 뒤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이 원숭이로구나. 그가 또 나를 속이려 하는구나. 나도 사당은 본 적이 있지만, 깃대가 뒤에 서 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분명 이 짐승이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가 나를 속여 들어가게 하면, 그가 한입에 물어 버릴 것이다. 내가 어찌 들어가겠느냐? 내가 먼저 주먹으로 창문을 부수고, 발로 문짝을 차리라.”라고 하였다. 대성이 듣고,…… 벌떡 뛰어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진군은 앞뒤로 마구 쫓아다니다가,…… 공중에 솟아올라 보니, 이천왕이 조요경을 높이 들고 나타와 함께 구름 끝에 서 있었다. 진군이 “천왕, 그 원숭이 왕을 보셨습니까?”라고 하니, 천왕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서 그를 비추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군은 그 변화를 걸고, 신통력을 부리고, 원숭이 무리를 잡은 일을 모두 이야기하고, “그가 사당으로 변했을 때, 막 치려는 순간에 가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천왕이 이 말을 듣고, 또 조요경을 사방으로 비추더니, 허허 웃으며 “진군, 빨리 가시오. 그 원숭이가 은신술을 써서 진영을 빠져나가 당신의 관강구로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성은 이미 관강구에 이르러, 몸을 흔들어 이랑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하고, 구름을 누르고 곧장 사당으로 들어갔다. 귀신 관원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하나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그는 가운데에 앉아 향불을 점검하는데, 이호가 사례한 삼생, 장룡이 약속한 보복, 조갑이 구하는 아들의 문서, 전병이 병을 고쳐 달라고 비는 소원을 보았다. 한창 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또 다른 할아버지가 오셨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여러 귀신 관원들은 급히 바라보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진군은 오히려 “어떤 제천대성이 이제야 여기에 왔느냐?”라고 하니, 여러 귀신 관원들이 “어떤 대성도 보지 못했고, 오직 한 할아버지가 안에서 점검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진군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니, 대성이 보고 본모습을 드러내며 “낭군, 소란 피울 것 없소. 사당은 이미 손씨의 것이 되었소!”라고 하였다. 이에 진군은 삼첨양인신봉을 들어 얼굴을 향해 베었다. 그 원숭이 왕은 몸을 재빨리 움직여 신봉을 피하고, 수놓은 바늘을 꺼내 휘두르니, 사발만큼 굵어지며 앞으로 달려가 마주 싸웠다. 두 사람은 소리치며 떠들썩하게 사당 문 밖으로 나가, 반은 안개 속에서 반은 구름 속에서, 가면서 싸우고 또 화과산까지 싸우며 돌아갔다. 놀란 사대천왕 등 여러 사람들이 방비를 더욱 엄하게 하니, 이강 장군 등은 진군을 맞이하여, 마음을 합쳐 힘을 다해 그 미후왕을 에워쌌다.
그러나 작가의 환상적인 구상은 대부분 81가지 어려움 가운데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금감산의 싸움(50~52회), 두 마음의 다툼(57~58회), 화염산의 싸움(59~61회) 등에서 변화를 베푸는 것이 매우 기이하고 방자하다. 앞의 두 가지 일은 양본에도 있었지만, 뒤의 한 가지 일은 잡극 《서유기》와 《화광전》의 철선공주를 취하여 《서유기전》에서 이름만 보이는 우마왕과 짝을 지어, 더욱 신기하고 기이하게 만든 것이다.
우마왕이 여러 신들에게 항복을 받고, 나찰녀에게 파초선을 바치게 하여, 화염산의 불을 끄게 하여, 현장 등이 서쪽으로 가는 상황을 묘사한 것은 다음과 같다.
……그 늙은 소는 혼비백산하여,…… 위를 향해 달아났다. 마침 타탑 이천왕과 나타 태자가 어복 약차와 거령신장을 거느리고 공중을 가로막았다.……
우왕은 다급해져, 이전처럼 몸을 흔들어 다시 큰 흰 소로 변신하여, 두 개의 쇠뿔로 천왕을 들이받으려 하니, 천왕은 칼을 휘둘러 베었다. 뒤이어 손행자가 또 도착하여,……
“이 놈의 신통력이 만만치 않구나. 또 이처럼 큰 몸으로 변하다니, 어찌해야 하나?”라고 하니, 태자가 웃으며 “대성, 염려 마시오. 내가 그를 사로잡는 것을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 태자는 큰 소리로 “변!”이라고 외치니, 세 개의 머리와 여섯 개의 팔로 변하여, 몸을 날려 소 왕의 등에 올라타, 요괴를 베는 칼로 목을 향해 한 번 휘두르니, 자신도 모르게 소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천왕은 칼을 던지고, 비로소 행자와 만났다. 그 소 왕의 몸통에서 또 하나의 머리가 튀어나오니, 입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내고, 눈에서 금빛을 쏘았다. 나타가 또 칼로 베니, 머리가 떨어진 곳에서 또 하나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연달아 열댓 번을 베니, 곧 열댓 개의 머리가 솟아났다. 나타는 화륜을 꺼내어 늙은 소의 뿔에 걸고, 참된 불을 불어넣으니, 불길이 활활 타올라, 소 왕을 태우니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흔들었다. 막 변신하여 벗어나려 하는데, 또 타탑 천왕이 조요경으로 본모습을 비추니, 움직이지 못하고, 도망칠 방법이 없어, “내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기꺼이 불교에 귀순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나타가 “목숨을 아끼겠다면, 빨리 부채를 내놓아라!”라고 하였다.
우마왕이 “부채는 내 아내가 있는 곳에 보관되어 있소.”라고 하자, 나타는 이 말을 듣고 요괴를 묶는 밧줄을 풀어,…… 콧구멍에 꿰어 손으로 끌고,…… 파초 동굴 입구로 돌아왔다. 늙은 소가 외치기를 “부인, 부채를 내어 주어 내 목숨을 구해주시오!”라고 하니, 나찰은 외침을 듣고 급히 비녀와 팔찌를 풀고, 화려한 옷을 벗고, 푸른 머리를 도사처럼 틀고, 흰 옷을 입어 비구니처럼 하고, 두 손으로 한 길 두 자 길이의 파초 부채를 받쳐 들고 문을 나섰다. 또 금강 여러 성인과 천왕 부자를 보고, 황급히 땅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며 “보살께서 저희 부부의 목숨을 살려 주시기를 바라오며, 이 부채를 손 숙부에게 바쳐 성공하도록 돕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
……손대성이 부채를 잡고 산 근처로 가서, 있는 힘을 다해 한 번 부치니, 화염산의 불길이 평온하게 꺼지고, 조용히 빛이 사라졌다. 또 한 번 부치니,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소리만 들렸다. 세 번째 부치니, 온 하늘에 안개가 자욱하고,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시로 증명하는 바가 있다.
화염산은 멀리 팔백 리, 불빛이 온 땅에 이름 떨쳤네. 불에 볶으니 오루의 단약도 익히기 어렵고, 불에 그슬리니 삼관의 도도 밝히기 어렵네. 특별히 파초를 빌려 비와 이슬을 내리니, 다행히 천장의 도움을 받아 신공을 이루었네. 소를 끌어 부처에게 돌아가 사악함을 굴복시키니, 물과 불이 서로 이어져 본성이 저절로 평화로워지네. (제61회 하 《손행자삼조파초선》)
또한 작가의 본성은 “해학과 희극에 능”하므로, 비록 변화무쌍하고 황홀한 일을 서술하면서도, 매번 웃음을 자아내는 말을 섞어, 신과 마귀 모두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게 하고, 정령과 도깨비 또한 세상 물정에 통달하게 하여, 세상을 경시하는 뜻을 담았다(자세한 내용은 후스 《서유기 고증》 참조). 예를 들어 손오공이 금감 동굴의 서 요괴에게 크게 패하여 금고봉을 잃고, 옥황상제를 뵙고 군대를 보내 토벌해 줄 것을 청하는 대목을 기록한 것은 다음과 같다.
……당시 사천사가 영소전에 전하여 옥좌 앞에 나아가 뵙게 하니, 행자가 위를 향해 큰 절을 하며 “노인장, 폐를 끼쳤습니다. 저 늙은 손이 당승을 보호하여 서천에 경전을 구하러 가는 길에 흉한 일이 많고 적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금감산 금감 동굴에 이르렀는데, 서 요괴가 있어 당승을 동굴에 잡아 가두었는데, 찌려고 하는지, 삶으려고 하는지, 말리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 늙은 손이 그 문에 찾아가 싸웠는데, 그 요괴의 신통력이 매우 커서 저의 금고봉을 빼앗아 갔으므로, 요괴를 묶기가 어렵습니다. 그 요괴가 저 늙은 손을 좀 안다고 하기에,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늘의 흉성이 인간 세상을 그리워하여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여, 이에 특별히 아뢰러 왔으니, 엎드려 천존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살펴봐 주시고, 명령을 내려 흉성을 조사하고, 군대를 보내 요괴를 토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늙은 손은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깊이 허리를 굽히며 “아뢰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곁에 있던 갈선옹이 웃으며 “원숭이는 어찌하여 전에는 거만하고 뒤에는 공손한가?”라고 하니, 행자가 “감히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는 거만하고 뒤에는 공손한 것이 아니라, 저 늙은 손은 이제 몽둥이가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제51회 상 《심원공용천반계》)
이 책을 평론한 사람으로는 청나라 사람 산음 오일자 진사빈의 《서유진론》(강희 병자년 우동 서문), 서하 장서신 《서유정지》(건륭 무진년 서문)와 오원도인 유일명의 《서유원지》(가경 15년 서문) 등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권학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참선을 이야기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도를 강론한다고 하는데, 모두 이치를 밝히는 것이며, 문사가 매우 번잡하다. 그러나 작가는 유생이지만, 이 책은 실제로 유희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책 전체에서 간혹 오행 상극의 평범한 이야기만 보일 뿐이고, 특히 불교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회에는 황당하고 근거 없는 경전 목록까지 있다. 다만 혼동된 가르침으로 인해 유행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그의 저작은 또한 석가와 노자가 같은 부류이고, 진성과 원신이 뒤섞여 나와, 삼교의 무리들이 모두 형편에 따라 끌어다 붙일 수 있게 했을 뿐이다. 억지로 큰 뜻을 구하고자 한다면, 사조제(《오잡조》 15)의 “《서유기》는 과장되고 허탄하지만, 그 종횡의 변화는 원숭이를 마음의 신으로, 돼지를 뜻의 방일로 비유하였으니, 처음의 방종함은 하늘과 땅 어디에도 막을 수 없었지만, 금고주 하나의 주문으로 마음의 원숭이를 길들여 죽을 때까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하였으니, 또한 방심을 구하는 비유이지, 함부로 지은 것이 아니다”라는 몇 마디 말로 이미 충분하다. 작가가 말한 것 또한 다만 “여러 승려들이 불문의 정해진 뜻을 의논하고, 서천에 경전을 구하러 가는 연유를……
삼장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키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니, 여러 승려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삼장이 말하기를 ‘마음에서 온갖 마가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마가 멸하나니, 제자는 일찍이 화생사에서 부처님께 맹세하였으니, 이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가면 반드시 서천에 가서 부처님을 뵙고 경전을 구하여, 우리 법이 다시 이어지게 하고, 황실의 기틀이 영원히 굳건하게 하리라’”(13회)라고 했을 뿐이다.
《후서유기》 6권 40회는 누가 지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내용 중에는 화과산에서 다시 돌 원숭이가 태어나, 여전히 신통력을 얻어, 대전 화상에게 반게라는 호를 받은 사람을 도와 다시 서천에 가서 진정한 해답을 간절히 구한다고 한다. 도중에 돼지 일계(一戒)를 거두고, 사미를 얻고, 여러 마귀를 만나 여러 번 위험에 빠지지만, 결국 영산에 도달하여 해답을 얻고 돌아온다. 유교와 불교가 본래 하나라고 하는 것은 《서유기》와 같지만, 문장과 이야기 구성은 모두 뒤떨어지므로, 오승은의 시문의 맑고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지은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속서유기》가 있다고 하는데, 보지 못했고, 《서유보》에 붙은 잡기에 “《속서유》는 모방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답답한 면이 있고, 비구 영허를 더해 놓은 것은 더욱 뱀의 발과 같다”라고 하였다.
〔1〕《서유기》 100회본과 41회본의 선후 문제에 대해서는, 100회본이 먼저 나왔어야 한다. 루쉰은 1935년 《〈중국소설사략〉 일본어 번역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진탁 교수는 또 《서유기》 중의 《서유기》는 오승은 《서유기》의 발췌이며, 원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는데, 이는 졸저 제16편에서 말한 바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으로, 그 정확한 논문은 《구루집》에 수록되어 있다.” (《차개정잡문2집》 참고). 정진탁의 논문 제목은 《서유기의 연화》이다.
〔2〕구처기(1148~1227)는 자가 통밀이고, 스스로 장춘자라고 칭했으며, 원나라 서하(지금의 산둥성) 사람이다. 칭기즈 칸이 중앙아시아에서 그를 만나 국사로 봉하고, 도교를 총괄하게 하였다. 죽은 후에는 장춘연도주교진인으로 추증되었다. 《섭생소식론》, 《대단직지》 등을 저술하였다.
〔3〕이지상(1193~1256)은 자가 호연이고, 도호는 통현대사이다. 구처기의 제자로, 일찍이 구처기를 따라 칭기즈 칸을 만났고, 돌아온 후 여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춘진인서유기》 2권을 지었다. 이 책은 《도장》 정을부에 수록되어 있다. 《도장》은 도교 경전의 총집이다. 육조 시대에 도경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후 각 시대에 또 증보되었다. 현재 통행하는 《도장》은 《정통도장》(5305권)과 《만력속도장》(180권)이다.
〔4〕우집(1272~1348)은 자가 백생이고, 호는 도원이며, 원나라 인수(지금의 쓰촨성) 사람으로, 벼슬은 한림직학사 겸 국자좨주에 이르렀다. 《도원학고록》을 저술하였다. 청나라 초기에 왕상욱이 《서유증도서》를 평론하고 간행하면서, 비로소 우집이 지은 《장춘진인서유기 서문》을 책머리에 실었다.
〔5〕전대흔(1728~1804)은 자가 신미이고, 호는 죽정이며, 청나라 가정(지금의 상하이) 사람으로, 벼슬은 소좨주에 이르렀다. 《이십이사고이》, 《잠연당문집》 등을 저술하였다. 《잠연당문집》 권29 《〈장춘진인서유기〉 발문》에서 “세속 소설에 《당삼장서유연의》가 있는데, 이는 명나라 사람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6〕기윤은 본서 제22편을 참고하라.
〔7〕정안(1794~1875)은 자가 검경이고, 청나라 산양(지금의 장쑤성 화이안시) 사람으로, 벼슬은 내각중서을 지냈다. 《희지재총서》 22종을 편찬하였다. 그가 지은 《석정기사속편》 1권은 화이안과 관련된 일부 저작의 서문과 발문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책의 《서〈서유기〉 후》라는 글에서 “우리 고을 강희 초의 옛 기록 예문 서적 목록을 살펴보니, 오승은 아래에 《서유기》 한 종류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완규생(1727~1789)은 자가 보성이고, 호는 몽산이며, 청나라 산양 사람으로, 벼슬은 형부시랑을 지냈다. 그가 지은 《다여객화》 30권은 청나라 초기의 법령 제도 및 당시 인물의 언행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 권21에서 “옛 기록에 사양은 성품이 민첩하고 지혜로웠으며, 시문을 쓰면 곧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해학에 능하여 여러 종류의 잡기를 지었다. 안타깝게도 잡기의 서명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오직 《회현문목》에 사양이 지은 《서유기통속연의》가 실려 있다.”라고 하였다.
〔8〕오옥진(1698~1778)은 자가 적오이고, 호는 산부이며, 청나라 산양(지금의 장쑤성 화이안시) 사람으로, 봉양부 훈도를 지냈다. 일찍이 《산양현지》와 《회안부지》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가 지은 《산양지유》 4권은 현지와 부지에 실리지 않은 산양의 여러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 권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정 연간에 오 공생 승은의 자는 여충이고, 호는 사양산인이며, 우리 회안의 재사이다.…… 《서유기》를 살펴보면 옛날에는 증도서라고 불렸는데, 금단의 큰 뜻에 부합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원나라 우도원의 서문에는 이 책이 그 나라 초기의 구장춘 진인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지에는 선생의 손에서 나왔다고 하니, 천계 때에는 선생과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그 말이 반드시 근거가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장춘이 처음에 이 기록이 있었고, 선생에 이르러 비로소 통속 연의로 만든 것이니, 마치 《삼국지》가 본래 진수의 것이지만, 연의는 나관중의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책 속에는 우리 고향의 방언이 많으니, 그 산양 사람의 솜씨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혹은 《후서유기》가 있다고 하는데, 사양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9〕구정강은 곧 구도이고, 호는 여홍이며, 청나라 산양(지금의 장쑤성 화이안시) 사람이다. 오승은의 외종손으로, 벼슬은 광록사경에 이르렀다. 그가 편찬한 《사양선생존고》 4권의 권두에는 진문촉의 서문이 있다. 《속고》는 보이지 않는다.
〔10〕《산양기구집》은 보이지 않는다. 오옥진의 《산양지유》 권4에서 “내가 처음에 한 필사본을 얻었는데, 종이와 먹이 이미 해지고 낡았고, 후에 차례로 간행본 4권과 속집 1권을 얻었는데, 또한 완전하다.
그의 시를 모두 《산양기구집》에 실었다.”라고 하였다.
〔11〕《산양현지》 21권은 청나라 동치 연간에 존보, 하소기 등이 편찬하였다.
이 책 권12 《인물지》 2에서 “오승은의 자는 여충이고, 호는 사양산인이며, 글씨를 잘 썼고, 가정 연간에 세공으로 공생이 되었고, 장흥현의 현승을 지냈다. 영민하고 박식하여 세상에서 추앙받았으며, 당시 금석문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집이 가난하고 아들이 없어, 남긴 원고가 많이 흩어져 없어졌는데, 고을 사람 구정강이 남은 것을 모아 4권으로 나누어 세상에 간행하니, 태수 진문촉이 그 서문을 지었는데, 이름하여 《사양존고》라고 하였고, 또 《속고》 1권이 있으니, 대개 십분의 일 정도 남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권18 《예문지》에는 “오승은 《사양존고》 4권, 《속고》 1권.”이라고 하였다.
〔12〕진사빈의 자는 윤생이고, 호는 오일자이며, 청나라 산음(지금의 저장성 사오싱시) 사람이다.
《서유진전》은 100회로, 매 회 본문 뒤에 진사빈의 평론이 있다.
〔13〕장서신의 자는 남훈이고, 청나라 서하(지금의 산시성) 사람이다. 장서신 평론본의 이름은 《신설서유기》이다. 또 다른 종류인 《통역서유기정지》는 청나라 장함장이 지은 것이다.
〔14〕유일명의 호는 오원자, 소박산인이며, 청나라 유중(지금의 간쑤성 란저우시) 사람이다.
도사이다. 《서유원지》는 100회로, 매 회 본문 뒤에 유일명의 평론이 있다.
〔15〕《후서유기》는 40회로, “천화재자 평점”이라고 쓰여 있으며, 지은 사람은 자세하지 않다.
강희 연간 유정기의 《재원잡지》에서 이미 이 책을 논하였으니,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의 사람이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16〕《속서유기》는 100회로, “수상비평속서유진전”이라고 쓰여 있으며, 권수에는 진복거사의 서문이 있고, 지은 사람은 자세하지 않다. 숭정 연간 동설의 《서유보》에 붙은 잡기에서 이미 이 책을 논하였으니, 명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제18편 명나라의 신마 소설 (하)
《봉신전》 100회본은 현재 저자를 표기하지 않고 있다. 양장거(梁章钜) (《낭적속담(浪跡續談)》 6)〔1〕에서 “임월정(林樾亭)(안건대 이름은 교음(喬蔭)) 선생이 일찍이 나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봉신전》이라는 책은 명나라 이전의 한 명망 있는 유학자가 지은 것으로, 《서유기(西遊記)》, 《수호전(水滸傳)》과 함께 삼대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여, 우연히 《상서(尚書)》 〈무성(武成)〉 편의 ‘오직 너에게 신이 있어 나를 도울 수 있다(唯爾有神尚克相予)’라는 말을 읽고, 이 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봉신(封神)의 일은 《육도(六韜)》(《구당서(舊唐書)》 〈예의지(禮儀志)〉 인용), 《음모(陰謀)》(《태평어람(太平御覽)》 인용),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당서(唐書)》 〈예의지(禮儀志)〉 등의 각 서적에 근거를 두고, 과장되고 기이하게 펼쳐 놓았으니, 모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명망 있는 유학자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일본에 소장된 명나라 간행본에는 허중린(許仲琳)〔3〕 편(《내각문고도서제2부한서목록(內閣文庫圖書第二部漢書目錄)》)이라고 쓰여 있는데, 현재 그 서문이 보이지 않아 언제 지어졌는지 확정할 수 없지만, 장무구(張無咎)가 《평요전(平妖傳)》 서문을 지으면서 이미 《봉신(封神)》을 언급하였으니,〔4〕 대략 융경(隆慶) 만력(萬曆) 연간(16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책의 첫머리 시에 “상주 연의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다(商周演義古今傳)”라고 하였으니, 역사를 연술하는 데 뜻을 둔 듯하지만, 신기하고 괴이한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아, 십중팔구는 허구로 지어낸 것이니, 실제로 상주(商周)의 싸움을 빌려, 스스로의 환상을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수호(水滸)》와 비교하면 확실히 허구성이 강하고, 《서유(西遊)》와 비교하면 그 웅장하고 방자함이 부족하므로, 지금까지 삼대 걸작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이르기를 “팔신장(八神將)은 태공(太公) 이래로 만들어졌다.”〔5〕라고 하였다. 《육도(六韜)》 《금궤(金匱)》〔6〕 중에도 간혹 태공의 신술을 기록하고 있다. 달기(妲己)가 여우 요괴라는 것은 당나라 이한(李瀚)의 《몽구(蒙求)》〔7〕 주석에서 보이는데, 이는 상주(商周) 시대의 신이한 이야기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봉신(封神)” 또한 명나라 시대의 속된 말로, 《진무전(真武傳)》에서 보이니, 반드시 《상서(尚書)》에 근본한 것은 아니다. 《봉신전》은 곧 수신(受辛)이 여와궁(女媧宮)에 향을 피우러 갔다가 신을 모독하는 시를 지은 데서 시작하여, 신이 세 요괴에게 명하여 주(周)를 돕도록 하면서 은(殷)을 미혹하게 하였다. 제2회부터 30회까지는 상주(商紂)의 포악함, 자아(子牙)의 은둔과 현신, 서백(西伯)의 화를 벗어남, 무성(武成)의 은나라 배반 등을 섞어 서술하여 은주(殷周)가 싸우는 국면을 이루었다. 이후에는 전쟁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신과 부처가 번갈아 나타나 주를 돕는 자는 천교(闡教), 즉 도석이고, 은을 돕는 자는 절교(截教)이다. 절교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데, 전정방(錢靜方) (《소설총고(小說叢考)》 상)〔8〕은 《주서(周書)》 〈극은편(克殷篇)〉에 “무왕(武王)이 드디어 사방을 정벌하니, 앙심을 품은 나라가 아흔아홉 나라이고, 마귀를 베어 죽인 것이 억 십만 칠천칠백칠십구이고, 포로로 잡은 사람이 삼억만 이백삼십이었다.” (살피건대 이 글은 《세부편(世俘篇)》에 있는데, 전정방이 잘못 기록한 것이다)라고 한 데서, 마귀와 사람을 구별하여 말한 것을 작가가 이로부터 발전시켜 절교로 만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라(摩羅)”는 범어로, 주나라 시대에는 번역되지 않았고, 《세부편》의 마귀 ‘魔’ 자는 혹은 ‘磨’로 쓰기도 하였으니, 잘못된 글자일 것이며, 자세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 싸움은 각자 도술을 펼쳐, 서로 죽고 다치는 일이 있었지만, 절교는 결국 패하였다. 이에 주왕(紂王)의 자분(自焚), 주 무왕(周武王)의 은나라 입성, 자아의 귀국 봉신(封神), 무왕의 열국 분봉으로 끝을 맺는다. 봉국(封國)은 공신에게 보답하기 위함이고, 봉신은 공이 있는 귀신을 위로하기 위함이며, 사람과 신의 죽음은 겁수(劫數)에 맡긴다. 그 사이사이 불교 용어가 나오기도 하고, 유교의 가르침을 간혹 이야기하기도 하여, 삼교를 혼합하였으니, 대략 《서유기》와 같지만, 그 근본은 방사(方士)의 견해일 뿐이다. 여러 전쟁 중에서, 오직 절교의 통천교주(通天教主)가 만선진(萬仙陣)을 펼치고, 천교의 여러 신선이 합세하여 깨뜨린 것이 가장 치열하다.
이른바 노자(老子)와 원시(元始)가 만선진 안으로 쳐들어가 통천교주를 에워쌌다. 금령성모(金靈聖母)는 세 대사에게 포위되었는데,…… 옥여의(玉如意)로 세 대사를 여러 차례 막아내다가, 부지불식간에 정수리의 금관이 땅에 떨어지고,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이 성모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싸우다가, 싸우는 도중에 연등도인(燃燈道人)을 만나, 정해주(定海珠)를 던져 맞히니, 정수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가련하구나! 바로 이것이다.
봉신하여 바른 지위를 얻어 별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북쪽 대궐의 향불 연기가 만 년 동안 이어지리라.
연등은 정해주로 금령성모를 쳐 죽였다. 광성자(廣成子)는 주선검(誅仙劍)을 던지고, 적정자(赤精子)는 육선검(戮仙劍)을 던지고, 도행천존(道行天尊)은 함선검(陷仙劍)을 던지고, 옥정진인(玉鼎真人)은 절선검(絕仙劍)을 던지니, 여러 줄기의 검은 기운이 하늘로 솟아올라, 만선진을 덮었다. 봉신대에 이름이 오른 자는, 마치 오이를 자르는 것처럼,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자아는 타신편(打神鞭)을 던져, 마음대로 행하였다. 만선진 안에서, 또 양임(楊任)이 오화선(五火扇)으로 수천 장의 맹렬한 불길을 일으키니,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나타(哪吒)는 삼두팔비(三首八臂)를 드러내고, 오가며 충돌하였다.……
통천교주는 만선이 이러한 도륙을 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크게 노하여, 급히 외치기를 “장이정광선(長耳定光仙)은 어서 육혼번(六魂幡)을 가져오라!” 하니, 정광선은 접인도인(接引道人)이 흰 연꽃으로 몸을 감싸고, 사리가 빛을 내는 것을 보고, 또 십이 대 제자인 현도문인(玄都門人)이 모두 영락금등(瓔珞金燈)을 가지고, 광채가 몸을 덮는 것을 보고, 그들이 출신이 청렴하고 올바르며, 절교는 결국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육혼번을 거두어, 가볍게 만선진에서 걸어 나와, 곧장 노봉 아래에 숨었다. 바로 이것이다.
뿌리가 깊은 본래 서방의 손님이니, 노봉에 숨어 보배로운 깃발을 바쳤네.
통천교주(通天教主)는…… 싸울 마음이 없어…… 물러서려고 하였으나, 또 교중 문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또 노자(老子)에게 지팡이로 한 번 맞으니, 통천교주는 급해져서, 자전추(紫電錘)를 던져 노자를 치려 하였다. 노자는 웃으며 “이 물건이 어찌 나에게 가까이 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정수리 위에서 영롱보탑(玲瓏寶塔)이 나타났다. 이 망치가 어찌 내려올 수 있겠는가?……
보아하니 이십팔수(二十八宿) 성관(星官)은 이미 거의 다 죽임을 당하였다. 지추인(止邱引)은 형세가 좋지 않음을 알고, 토둔(土遁)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육압(陸壓)이 보고, 쫓아가지 못할까 두려워, 급히 공중에 이르러, 호리병을 열어, 한 줄기 흰 빛을 내뿜으니, 위에서 한 물건이 날아 나왔다. 육압은 허리를 굽혀 “보배야 돌아라(寶貝轉身)”라고 명하니, 가련한 지추인은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한편 접인도인(接引道人)은 만선진 안에서 건곤대(乾坤袋)를 열어, 삼천 홍기지객(三千紅氣之客)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극락의 고향으로 갈 인연이 있는 자는, 모두 이 주머니 안에 넣었다. 준제(准提)는 공작명왕(孔雀明王)과 함께 진중에서 이십사 개의 머리와 열여덟 개의 손을 드러내고, 영락(瓔珞), 우산, 화관(花貫), 어장(魚腸), 금궁(金弓), 은극(銀戟), 백월(白鉞), 번(幡), 당(幢), 가지신저(加持神杵), 보좌(寶銼), 은병(銀瓶) 등의 물건을 잡고, 통천교주와 싸우러 왔다. 통천교주는 준제를 보고, 갑자기 삼매진화(三昧真火)를 일으키며,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이 몹쓸 도사야! 어찌 감히 나를 이토록 심하게 속이고, 또 와서 나의 이 진을 어지럽히느냐!” 하고, 규우(奎牛)를 몰고 달려와, 칼을 휘둘러 곧장 덤벼드니, 준제는 칠보묘수(七寶妙樹)를 펼쳐 막았다. 바로 이것이다.
서방 극락의 끝없는 법은, 모두 연꽃의 한 화신이다. (제84회)
《삼보태감서양기통속연의(三寶太監西洋記通俗演義)》 또한 100회로, “이남리인(二南里人) 편차”라고 쓰여 있다. 앞에 만력(萬曆) 정유년(1597년) 국추지길(菊秋之吉) 나무등(羅懋登)〔9〕의 서문이 있는데, 나가 곧 저자이다. 책은 영락(永樂) 연간 태감 정화(鄭和)와 왕경홍(王景宏)〔10〕이 외이(外夷) 39개국을 복속시켜, 모두 조공하게 한 일을 서술하였다. 정화는 《명사(明史)》(304 〈환관전(宦官傳)〉)에 이르기를 “윈난 사람으로, 세상에서 삼보태감이라고 하는 자이다. 영락 3년에, 정화와 그 무리 왕경홍 등에게 명하여 서양에 사신으로 가게 하니, 장졸 2만 7천 8백여 명과, 많은 금과 비단을 가지고, 큰 배를 만들어……
쑤저우(蘇州) 유가하(劉家河)에서 바다를 건너 푸젠(福建)에 이르렀고, 다시 푸젠 우후먼(五虎門)에서 돛을 올리고, 처음으로 참파(占城)에 도달하였고, 이어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천자의 조서를 선포하고, 그 군장에게 하사품을 주었고, 복종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위협하였다.”라고 하였다.
일곱 차례 사신으로 파견되어, 거친 곳이 모두 30여 개국이고, 얻은 이름 없는 보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중국의 소모 또한 적지 않았다. 정화 이후로, 해외에 사명을 띠고 가는 자는, 모두 정화를 크게 칭찬하여 외국의 오랑캐에게 자랑하였으므로, 속담에 “삼보태감(三保太監)이 서양에 내려갔다(下西洋)”는 말이 명나라 초기의 성대한 일로 전해진다. 정화가 명나라 시대에 명성이 혁혁하여, 세상 사람들이 즐겨 이야기하였는데, 가정(嘉靖) 이후로 왜구의 침략이 매우 심하여, 백성들은 현재의 나약함을 슬퍼하고, 또 옛 이야기에 얽매여, 장수를 생각하지 않고 환관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속된 이야기들을 모아 이 작품을 이루었으므로, 서문에서 “지금 동쪽 일이 절박한데, 어찌 서쪽 오랑캐를 이야기하겠는가, 서쪽 오랑캐를 이야기할 수 없으니, 어찌 왕(王)과 정(鄭) 두 공으로 하여금 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다만 책은 괴이한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고, 오로지 황당한 것을 숭상하니, 서문의 강개함과는 다소 부합하지 않는다. 제1회부터 7회까지는 벽봉 장로(碧峰長老)가 하생(下生)하여, 출가 및 강마(降魔)한 일이고, 제8회부터 14회까지는 벽봉이 장천사(張天師)와 도술을 겨룬 일이고, 제15회 이하로는 정화가 도장을 받아, 군사를 모집하여 서쪽을 정벌하니, 천사와 벽봉이 그를 도와, 요사스러운 것을 베어 없애고, 여러 나라가 조공하니, 정화가 사당을 세운 일이다. 서술한 전쟁은 《서유기》, 《봉신전》을 섞어 베꼈는데, 문사(文詞)가 공교롭지 못하고, 더욱 가지를 뻗어 번거롭게 하였지만, 특히 항간의 이야기, 예를 들어 “오귀가 재판을 어지럽히다(五鬼鬧判)” “오서가 동경을 어지럽히다(五鼠鬧東京)” 등의 이야기는, 모두 여기에서 고찰해 볼 수 있으니, 또한 그 장점이다. 오서의 일은 《서유기》의 이심(二心)의 다툼에서 비롯된 듯하고, 오귀의 일은 외이(外夷)가 명나라와 싸운 후에, 나라를 위해 죽은 혼령이 명부에서 심판을 받는 것을 기록하였는데, 대부분 악한 보응을 받았으므로, 크게 소란을 피우며, 판관을 마구 때리니, 그 오가는 변론의 말은 다음과 같다.
……오귀가 말하기를 “비록 사사로이 법을 팔아먹은 것은 아니지만, 조사한 이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어느 이치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냐? 네가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보겠다.” 맨 처음 강노성(姜老星)이 말하기를 “소인은 금련상국(金蓮象國)의 한 총병관으로, 나라를 위해 집을 잊었으니, 신하의 직분인데, 어찌 또 제가 벌을 받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로써 말하면, 도리어 나라를 위해 잘못 힘을 쓴 것이 아닙니까?” 최판관(崔判官)이 말하기를 “나라에 큰 어려움이 없는데, 어찌 나라를 위해 힘을 쓴다고 하는 것이냐?” 강노성이 말하기를 “남쪽 사람들이 큰 배 수천 척, 장수 천 명, 용맹한 군사 백만 명이니, 마치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인데, 오히려 나라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최판관이 말하기를 “남쪽 사람들이 어찌 남의 사직을 멸망시키고, 남의 땅을 빼앗고, 남의 재물을 탐하였느냐, 어찌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고 하는 것이냐?” 강노성이 말하기를 “이미 국세가 위태롭지 않다면, 내가 어찌 사람을 끝없이 죽였겠느냐?” 판관이 말하기를 “남쪽 사람들이 온 것은, 한 장의 항복 문서만으로도 충분하였으니, 그가 어찌 남을 위협하였느냐, 모두 너희가 억지로 강하게 싸운 것이니, 이것이 사람을 끝없이 죽인 것이 아니냐?” 교해간(咬海干)이 말하기를 “판관 대왕은 틀렸습니다. 우리 자와국(爪哇國)의 오백 명 어안군(魚眼軍)이 칼에 두 동강이 나고, 삼천 명 보졸이 솥에 삶아졌으니, 이것 또한 우리가 강하게 싸운 것입니까?” 판관이 말하기를 “모두 너희가 자초한 것이다.” 원안첩목아(圓眼帖木兒)가 말하기를 “우리는 한 사람이 네 조각으로 찢어졌으니, 이것 또한 우리가 강하게 싸운 것입니까?” 판관이 말하기를 “또한 너희가 자초한 것이다.” 반룡 삼태자(盤龍三太子)가 말하기를 “내가 칼을 들어 스스로 목을 베었으니, 어찌 그의 위협이 아니겠습니까?” 판관이 말하기를 “또한 너희가 자초한 것이다.” 백리안(百里雁)이 말하기를 “우리는 불에 태워 섶나무 귀신이 되었으니, 어찌 그의 위협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판관이 말하기를 “또한 너희가 자초한 것이다.” 다섯 귀신이 일제히 소리치며 말하기를 “네가 무엇을 자초라고 하느냐, 예부터 이르기를 ‘사람을 죽인 자는 목숨으로 갚고, 빚을 진 자는 돈으로 갚는다’라고 하였는데, 그가 함부로 칼로 우리를 죽였으니, 네가 어찌 그들을 위해 억지 판단을 내리느냐?” 판관이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법을 집행함에 사사로움이 없으니, 어찌 억지 판단이라고 하겠느냐?” 다섯 귀신이 말하기를 “이미 법을 집행함에 사사로움이 없다면, 어찌 그가 우리 인명을 갚도록 판단하지 않느냐?” 판관이 말하기를 “너희에게 갚아 줄 필요가 없다!” 다섯 귀신이 말하기를 “다만 ‘갚아 줄 필요가 없다’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사사로운 폐단이다.”
이 다섯 귀신은 사람도 많고 입도 많아, 마구 소리치고 고함치며, 한 덩어리로 시끄럽게 떠들었다. 판관은 그들이 험악하게 오는 것을 보고,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겨우 일어나 큰 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이 놈들, 어떤 놈이 감히 여기서 함부로 지껄이는가! 나에게 사사로움이 있다면, 내가 이 붓을 잡고 사사로움을 용납하겠느냐?”
다섯 귀신이 다 함께 앞으로 나아가, 손으로 잡아 낚아채듯 붓을 빼앗아 내리며 말하기를 “쇠로 만든 붓은 사사로움이 없다. 네 거미줄 같은 털로 만든 붓은, 이빨 틈새가 모두 사사로운 실이니, 감히 사사로움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 (제90회 《영요부 오귀 요판(靈曜府五鬼鬧判)》)
《서유보》 16회는 천목산 초(天目山樵)〔11〕가 서문을 썼는데, 운남에서 몰래 지은 것이다. 남잠(南潛)은, 오정(烏程) 동설이 출가한 후의 법명이다. 설의 자는 약우이고, 만력 경신년(1620년)에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사리를 잘 깨달았고, 스스로 먼저 《원각경(圓覺經)》을 외우기를 원했고, 다음으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었고, 열 살에 글을 지을 수 있었고, 열세 살에 학교에 들어갔고, 중원의 유적(流寇)의 난을 보고, 마침내 출세할 뜻을 끊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영암(靈岩)에서 머리를 깎고, 이름을 남잠이라 하였고, 호를 월함(月函)이라 하였고, 그 외의 다른 자가 매우 많았고, 30여 년 동안 도시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오직 어부와 나무꾼을 벗하였고, 세상에서 불문의 존숙으로 추앙받았고, 《상당만참창수어록(上堂晚參唱酬語錄)》〔12〕 (뉴수(鈕琇)의 《고잉속편(觚賸續編)》의 강포양생(江抱陽生)의 《갑신조사소기(甲申朝事小記)》), 및 《풍초암잡저(豐草庵雜著)》 10종 시문집 약간 권이 있다. 《서유보》에서 “삼조파초선(三調芭蕉扇)” 이후의 일을 서술하기를, 오공이 탁발을 가서, 청어 정령에게 홀려, 점점 꿈속으로 들어가, 진시황(秦始皇)에게 구산탁(驅山鐸)을 빌려, 화염산(火焰山)을 쫓으려 하니, 배회하는 사이에, 만경루(萬鏡樓)에 들어가니, 이에 크게 뒤바뀌어, 혹은 과거를 보고, 혹은 미래를 구하고, 갑자기 미인으로 변하고, 갑자기 염라대왕으로 변하니, 허공 주인(虛空主人)의 부름을 받고서야 꿈에서 깨어나, 청어가 본래 오공과 동시에 세상에 나왔고, “환부(幻部)”에 살고, 스스로 “청청 세계(青青世界)”라고 불렀고, 모든 경계는 모두 그가 만든 것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곧 “행자의 정(情)”이므로, “대도를 깨달으려면, 반드시 먼저 정근(情根)을 비워 깨뜨려야 하고, 정근을 깨뜨리려면 반드시 먼저 정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정 안으로 들어가 세상 정근의 허함을 보고 나서 정 밖으로 나와 도근의 실함을 깨달아야 한다” (이 책 권수 《답문(答問)》)라고 하였다. 그 청어 정령, 청청 세계, 소월 왕(小月王)이라고 한 것은, 모두 정을 이른다. 혹은 그 안에 “살청 대장군(殺青大將軍)” “도치 역일(倒置曆日)” 등의 말이 있으므로, 이로 인해 나라가 바뀐 후에, 숨겨진 말을 담은 것이라고 하였으나, 책 전체는 실제로 명나라 말의 세태를 비판하는 뜻이 많고, 종묘사직의 아픔을 나타낸 흔적이 적으므로, 책이 이루어진 날은, 오히려 명나라 멸망 이전에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므로, 다만 변방 일의 근심만 있었고, 또한 불가의 오묘함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주된 눈길이 머무는 곳은, 단지 당시의 풍조와 같이, 행자에게 세 명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으니, 하나는 조사(祖師)이고, 둘은 당승(唐僧)이고, 셋은 목왕(악비)(穆王(岳飛))이니, “삼교 전신(三教全身)을 이루었다” (제9회)라고 한 것과 같다. 오직 그 일을 만들고 말을 쓰는 것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모습이고, 아득하고 환상적이고, 기이하고 돌출한 곳은, 때로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고, 간혹 해학을 쓰니, 또한 항상 뛰어나서, 같은 시대의 작가들이 감히 바라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행자(당시 우미인(虞美人)과 녹주(綠珠) 무리와 연회를 마치고 작별하고 나옴)는 곧 본모습을 드러내고, 머리를 들어 보니, 원래 바로 여와(女媧) 문 앞이었다. 행자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 하늘이, 소월 왕(小月王)이 보낸 한 무리의 답공 사자(踏空使者)에게 산산이 뚫렸는데, 어제 도리어 죄명을 내 몸에 덮어씌웠으니…… 듣자 하니 여와는 오랫동안 하늘을 보수하는 데 익숙하다고 하니, 내 오늘 여와에게 부탁하여 나를 대신해 잘 보수해 달라고 하고서야 영소(靈霄)에 가서 울며 하소연하여,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야 하니, 이 기회가 매우 묘하다.”
문가에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두 짝의 검은 옻칠 문이 굳게 닫혀 있고, 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는데, “20일에는 헌원(軒轅) 집에 가서 한담하고, 10일 만에 돌아오니, 늦은 존귀한 손님이 있더라도, 먼저 이로써 죄를 알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행자는 보고 나서, 고개를 돌려 가니, 귓속에서 닭 우는 소리 세 번이 들리니, 하늘이 이미 밝아 오고, 수백만 리를 갔지만, 진시황(秦始皇)은 보이지 않았다. (제5회)
갑자기 한 검은 사람이 높은 누각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행자는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 세계에도 도둑이 있구나, 얼굴에 검댕을 잔뜩 칠하고 여기서 대중에게 보이는구나.” 몇 걸음 가다가, 또 말하기를 “역적이 아니구나. 원래 도리어 장비(張飛)의 사당이구나.” 또 생각하기를 “이미 장비의 사당이라면, 마땅히 두건을 써야 할 텐데…… 황제의 모자를 쓰고, 또 검은 얼굴이니, 이 사람은 분명 대우 현제(大禹玄帝)이다. 내가 곧 나아가 그를 뵙고, 요괴를 다스리고 마귀를 베는 비결을 얻으면, 나도 진시황을 찾을 필요가 없겠구나.” 보아하니 눈앞에 이르니, 대 아래에 돌로 만든 장대가 서 있고, 장대 위에 한 폭의 비백기(飛白旗)가 꽂혀 있는데, 깃발에 여섯 자의 보라색 글자가 쓰여 있었다.
“선한 명사 항우(先漢名士項羽).”
행자는 보고 나서,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정말로 ‘일이 오지 않았을 때는 생각하지 말 것이요, 생각해 보니 결국 마음 같지 않다’라는 말이로구나. 내 노손(老孫)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였는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전혀 엉뚱한 것이, 도리어 내 녹주루(綠珠樓) 위의 요 남편(遙丈夫)일 줄이야.” 당시에 또 다른 생각을 하니, “아이쿠, 내 노손은 오로지 진시황을 찾아, 그를 대신해 구산탁(驅山鐸)을 빌리려고, 그래서 옛날 세계로 들어왔는데, 초나라 패왕이 그의 뒤에 있는데, 이제 이미 보았으니, 그는 어찌 보이지 않는가? 나에게 한 가지 이치가 있으니, 곧바로 대 위에 올라가 항우를 만나, 시황의 소식을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오히려 확실한 단서가 될 것이다.” 행자는 즉시 뛰어 올라 자세히 보니, 높은 누각 아래에…… 한 미인이 앉아 있고, 귓가에 “우미인 우미인”이라고 부르는 소리만 들렸다.…… 행자는 즉시 몸을 흔드니, 여전히 이전의 미인 모습으로 변하여, 드디어 높은 누각에 올라, 소매 속에서 한 자의 빙라(冰羅)를 꺼내어, 끊임없이 눈물을 가리며, 오로지 반쪽 얼굴만 드러내고, 항우를 바라보니, 원망하는 듯 성난 듯하였다. 항우는 크게 놀라, 허둥지둥 꿇어앉으니, 행자는 등을 돌렸고, 항우는 또 급히 달려와 행자 앞에 꿇어앉아, “미인이여, 당신의 베갯머리 사람을 가련히 여겨, 잠시 웃는 얼굴을 보여 주시오”라고 하였다. 행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항우는 어찌할 수 없어, 그저 함께 울었다. 행자는 비로소 붉은 복사꽃 같은 얼굴을 하고, 항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못된 도둑아! 네가 혁혁한 장군이 되어, 한 여자를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이 높은 대에 앉아 있는가?” 하니, 항우는 그저 울기만 하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행자는 조금이라도 차마 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손으로 일으켜 주며 말하기를 “늘 말하기를 ‘사나이 두 무릎에는 황금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네가 이후로 함부로 꿇어앉지 말라!”…… (제6회)
〔1〕 양장거(梁章鉅)(1775—1849)의 자는 홍중(閎中)이고, 호는 퇴암(退庵)이며, 청나라 장락(長樂)(지금의 푸젠성(福建省)에 속함) 사람이고, 관직은 강소 순무(江蘇巡撫)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귀전쇄기(歸田瑣記)》, 《낭적총담(浪跡叢談)》 등이 있다. 《낭적속담(浪跡續談)》은 8권으로, 기이한 이야기와 숨겨진 이야기, 명승고적을 기록하였고, 희곡과 소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2〕 《육도(六韜)》는 전해지기로 주나라 여상(呂尚)이 지었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 〈예의지(禮儀志)〉에서 《육도》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 눈이 한 길 넘게 쌓여, 다섯 수레와 두 필의 말이, 수레바퀴 자국이 없이, 영채에 이르러 뵙기를 구하였다. 무왕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태공(太公)이 대답하기를 ‘이는 반드시 오방(五方)의 신이, 일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 이름으로 불러들여, 각기 그 직책으로 명하였다. 이윽고 은(殷)을 이기니, 바람이 순조롭고 비가 알맞게 내렸다.”라고 하였다. 《음모(陰謀)》의 전체 이름은 《태공음모서(太公陰謀書)》이고, 전해지기로 또한 주나라 여상이 지었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태평어람(太平御覽)》 12에 관련된 “태공 봉신(太公封神)”의 인용문은 《금궤(金匱)》에서 나오지, 《음모》에서 나오지 않는다.
〔3〕 허중린(許仲琳)의 호는 종산일수(鍾山逸叟)이고, 명나라 응천부(應天府)(지금의 장쑤성 난징(江蘇省南京)) 사람이고,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살펴보건대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 금창(金阊) 서재양(舒載陽)의 《봉신연의》 간행본(일본 내각문고 소장본) 권수(卷首) 이운상(李雲翔)의 서문에 이르기를 “서중보(舒仲甫)가 초(楚) 땅에서 많은 재물을 들여 종백경(鍾伯敬) 선생이 비평하고 열람한 《봉신》 한 책을 구입하였는데, 아직 그 일을 마치지 못하여, 이에 나에게 부탁하여 그 일을 마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권2 첫 페이지에 “종산일수 허중린 편집(鍾山逸叟許仲琳編輯)”이라고 쓰여 있다. 대개 이 책의 원래 저자는 허중린이고, 개정하고 비평한 사람은 이운상이다.
〔4〕 《평요전(平妖傳)》 서문에서 장무구(張無咎)는 숭정(崇禎) 연간에 《평요전》을 다시 수정하였는데, 지은 서문에서 말하기를 “《속삼국지(續三國志)》, 《봉신연의》 등에 이르러서는, 마치 병자의 헛소리와 같아, 오로지 허튼소리만 한다.”라고 하였다.
〔5〕 여기의 “팔신장(八神將), 태공 이래로 만들어졌다(太公以來作之)”라는 말은,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원문에는 “팔신장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혹은 태공 이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八神將自古而有之,或曰太公以來作之)”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는 양장거의 《귀전쇄기》 권7에서 인용한 것에 근거하였다.
〔6〕 《금궤(金匱)》는 전해지기로 주나라 여상이 지었고, 고대의 병서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7〕 이한(李瀚)은 당나라 말 만년(萬年)(지금의 산시성 시안(陝西省西安)) 사람이고, 후진(後晉)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지은 《몽구(蒙求)》는 2권으로, 송나라 서자광(徐子光)의 집주(集注)가 있다. 달기가 여우 요괴라는 것은 서자광의 주석본에는 보이지 않는다.
〔8〕 전정방(錢靜方)의 별호는 무동일해(泖東一蟹)이고, 근대 청포(青浦)(지금의 상하이(上海)에 속함) 사람이다. 지은 《소설총고(小說叢考)》는 1916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되었다.
〔9〕 나무등(羅懋登)의 자는 등지(登之)이고, 호는 이남리인(二南里人)이며,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 사람이다.
〔10〕 정화(鄭和)(1371—1435)의 본래 성은 마(馬)이고, 아명은 삼보(三保)이며, 회족(回族)이고, 명나라 곤양(昆陽)(지금의 윈난성(雲南省) 진닝(晉寧)) 사람이다. 환관으로, 연왕(燕王)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고, 정(鄭) 씨 성을 하사받았다. 일찍이 일곱 차례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서양(西洋)”에 통교하였고, 가장 멀리 아프리카 동해안과 홍해 해구까지 항해하였다. 왕경홍(王景宏)은, 곧 왕경홍(王景弘)이고, 명나라 환관이다. 일찍이 여러 차례 정화의 부사로 임명되어, “서양”에 사신으로 갔다.
〔11〕 천목산 초(天目山樵) 장문호(張文虎)(1808—1885)의 자는 맹표(孟彪)이고, 별호는 천목산 초이며, 청나라 남회(南匯)(지금의 상하이(上海)에 속함) 사람이다. 일찍이 《유림외사(儒林外史)》를 평술하였다.
〔12〕 《상당만참창수어록(上堂晚參唱酬語錄)》 (《광서 오정현지(光緒烏程縣志)》 권31에 동설의 저작이 매우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오직 이 책만은 미치지 못한다. 노신(魯迅)의 《소설구문초(小說舊聞鈔)》에 포양생(抱陽生)의 《갑신조사소기(甲申朝事小記)》를 기록하기를 《상당만참창수어록》이라고 하였으니, 동설이 출가 후에 지은 것이다. 아래의 《풍초암잡저(豐草庵雜著)》 10종은, 《광서 오정현지》 권31에 근거하면, 10종은 《소양몽사(昭陽夢史)》(다른 이름은 《몽향지(夢鄉志)》), 《비연향법(非煙香法)》, 《유곡편(柳谷編)》, 《하도괘판(河圖卦板)》, 《문자발(文字發)》, 《분야발(分野發)》, 《시율표(詩律表)》, 《한요가발(漢鐃歌發)》, 《악위(樂緯)》 및 《소엽록(掃葉錄)》이다. 또, 근대인 유승간(劉承幹)이 편집한 《오흥총서(吳興叢書)》에는 《풍초암시집(豐草庵詩集)》 11권, 《풍초암문집(豐草庵文集)》 전집 3권, 후집 3권, 《보운시집(寶雲詩集)》 7권, 《선악부(禪樂府)》 1권이 수록되어 있다.
〔13〕 《서유보》는 현재 숭정 14년(1641년) 의여거사(嶷如居士) 서문이 있는 판본이 남아 있으니, 이 책이 명나라 멸망 이전에 지어졌음을 증명할 수 있다.
제19편 명나라의 인정 소설(상)
신마 소설이 성행할 때, 인사를 기록하는 것 또한 갑자기 일어났으니, 그 소재는 마치 송나라 시정 소설의 “은자(銀字兒)”와 같아, 대개 이합비환(離合悲歡) 및 발적변태(發跡變態)의 일이고, 간혹 인과응보(因果報應)를 섞었으나, 영괴(靈怪)를 많이 말하지 않았고, 또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여, 세상의 차가움과 뜨거움을 보였으므로, 혹은 또한 “세정서(世情書)”라고도 일컬었다.
여러 “세정서” 중에서, 《금병매(金瓶梅)》가 가장 유명하다. 처음에는 오직 필사본으로 유통되었는데, 원굉도(袁宏道)가 몇 권을 보고, 곧 《수호전(水滸傳)》에 짝지어 “외전(外典)”이라고 하였으므로, 명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세상에서는 또 《서유기(西遊記)》를 더하여, 삼대 기서(三大奇書)라고 일컬었다. 만력 경술년(1610년), 오중(吳中)에서 비로소 간행본이 있었으니, 모두 100회이고, 그 53회부터 57회까지는 원래 빠져 있었는데, 간행할 때 보충한 것이다(《야획편(野獲編)》 25에 보임). 작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데, 심덕부(沈德符)는 가정(嘉靖) 연간의 대명사라고 하였다(또한 《야획편》에 보임). 세상에서는 이로 인해 태창(太倉) 왕세정(王世貞)에 비유하거나, 혹은 그의 문인이라고 하였다(강희 을해년 사이(謝頤) 서문에 이르기를). 이로 인해 다시 헛소문이 생겨, 왕세정이 이 책을 지어, 이에 독을 종이에 넣어, 그의 원수 엄세번(嚴世蕃)을 죽였다고 하거나, 혹은 당순지(唐順之)라고도 하였으므로, 청나라 강희 연간 팽성(彭城) 장죽파(張竹坡)가 비평하고 간행한 판본에는, 드디어 《고효설(苦孝說)》을 그 머리에 두었다. 《금병매》 전 책은 《수호전》의 서문경(西門慶)을 실마리로 삼아, 서문경의 호는 사천(四泉)이고, 청하(清河) 사람이고, “그다지 책을 읽지 않고, 종일 한가로이 놀고 방탕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아내 한 명과 첩 세 명이 있고, 또 “곁에서 아첨하고 입만 놀리며 본분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사귀어, 열 명의 형제를 맺고, 다시 반금련(潘金蓮)을 좋아하여, 그 남편 무대(武大)에게 독을 먹여 죽이고, 첩으로 들였고, 무송(武松)이 복수하러 왔으나, 찾지 못하고, 이외부(李外傅)를 잘못 죽이고, 맹주(孟州)로 귀양 갔다. 서문경은 본래 무사하였으므로, 이에 날로 방자해져, 금련의 하녀 춘매(春梅)와 통정하고, 다시 이병아(李瓶兒)와 사통하여, 또한 첩으로 들였고, “또 두세 차례 횡재를 얻어, 집안이 번성하였다.” 이윽고 이병아가 아들을 낳으니, 서문경은 채경(蔡京)에게 뇌물을 주어 금오위 부천호(金吾衛副千戶)가 되었으니, 이에 더욱 방자해져, 약을 구하여 음욕을 부리고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반금련은 이병아에게 아들이 있음을 질투하여, 여러 차례 계책을 세워 놀라게 하니, 아들은 마침내 경련으로 죽었고, 이병아는 아들을 슬퍼하다가 또한 죽었다. 반은 서문경에게 힘껏 아첨하니, 서문경은 하룻밤 약을 지나치게 마셔, 또한 갑자기 죽었다. 금련과 춘매는 다시 서문경의 사위 진경제(陳敬濟)와 통정하니, 일이 발각되어 팔려 갔고, 금련은 드디어 왕파(王婆)의 집에서 머물며 시집갈 날을 기다렸는데, 무송이 마침 사면을 받아 돌아오니,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다. 춘매는 주 수비(周守備)의 첩으로 팔려, 총애를 받아, 또 아들을 낳으니, 드디어 부인으로 책봉되었다. 손설아(孫雪娥)는 유괴를 당했다가 다시 관아에 잡혀 팔리게 되니, 춘매는 일찍이 “진경제를 부추겼다”고 원망하여, 이에 사들여 모욕하고, 곧 술집에 팔아 창기가 되게 하였다. 또 진경제를 아우라고 부르며, 집안에 불러들여, 여전히 통정하였다. 이윽고 수비가 송강(宋江)을 정벌한 공으로, 제남 병마 제치(濟南兵馬制置)로 승진하니, 진경제 또한 군문에 이름을 올려, 참모(參謀)로 승진하였다. 후에 금나라 군사가 침입하니, 수비는 전사하였고, 춘매는 일찍이 그의 전처의 아들과 통정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또한 음란하고 방탕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금나라 군사가 청하에 다다르려 할 때, 서문경의 아내는 그의 유복자 효가(孝哥)를 데리고 제남으로 달아나려 하니, 도중에 보정 화상(普淨和尚)을 만나, 인과로 꿈에 나타내어 교화하니, 효가는 드디어 출가하여, 법명을 명오(明悟)라고 하였다.
작자는 세상의 인정에 대해, 진실로 매우 통달하여, 무릇 형용한 바는, 혹은 조리 있게 펼치고, 혹은 굽이굽이 묘사하고, 혹은 날카롭게 드러내어 모든 모습을 다 보여주고, 혹은 은밀히 숨겨 풍자하고, 혹은 한때에 양면을 함께 써서, 서로 대비시키니, 변화무쌍한 인정이, 어디에서나 뚜렷이 드러나 보이니, 같은 시대의 소설 중에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므로, 세상에서는 왕세정이 아니면 지을 수 없다고 여겼다. 이 책의 지음이, 오로지 시정의 음란한 남편과 방탕한 아내를 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내용과 매우 부합하지 않으니, 서문경은 본래 세가(世家)라 일컬어지고, 벼슬아치였으니, 권세 있는 귀인과 사귈 뿐만 아니라, 선비들과도 교류하였으니, 이 한 집안을 쓴 것은, 곧 여러 부류를 모두 욕한 것이니, 단지 하류의 언행을 묘사하여, 붓으로 꾸짖은 것만이 아니다.
……부인(반금련)이 말하기를 “이 몹쓸 것,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니 한 가지 일이 생각나는데, 내가 말하려다 또 잊었네.”라고 하고, 춘매에게 명령하여, “저 신발을 가져다가 그에게 보여 주어라.” “네가 이 신발이 누구의 신발인지 알아보겠느냐?” 서문경이 말하기를 “나는 누구의 신발인지 모르겠소.” 부인이 말하기를 “네가 아직도 시치미를 떼는구나. 나를 속이고 몰래, 네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내왕(來旺) 아내의 더러운 발 하나를, 보배 구슬처럼 소중히 간직하여 장춘오(藏春塢) 설동(雪洞) 안에 있는 서찰 상자 안에, 글씨 쓴 종이와 향과 함께, 한곳에 두었으니. 얼마나 귀한 물건이기에, 집안일에도 쓰지 않는지, 그 도둑질하는 음란한 여자가 죽어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구나.”라고 하고, 또 추국(秋菊)을 가리키며 꾸짖어 말하기를 “이 몹쓸 것이 내 신발을, 또 꺼내어, 나에게 몇 대 맞게 하였구나.”라고 하고 춘매에게 분부하기를 “어서 내다 버려라.”라고 하니, 춘매는 신발을 땅에 내던지고, 추국을 보며 말하기를 “너에게 주어 신으라고 주는 것이다.”라고 하니, 추국은 신발을 주워 들고 말하기를 “마님 이 신발은, 겨우 제 발가락 하나만 담을 수 있겠네요.”라고 하니,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도둑 같은 것, 아직도 무슨 마님이라고 부르느냐. 그는 네 집 주인의 전생의 어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의 신발을 이토록 소중히 간직하겠느냐? 내일이라도 대대로 전하게. 염치없는 것!”
추국이 신발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부인이 다시 불러, “칼을 가져오너라, 내가 음란한 여자의 신발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변소에 던져 버리게, 그 도둑 같은 음란한 여자가 음산한 저편에서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못하게.”라고 분부하였다. 서문경에게 말하기를 “네가 볼수록 마음 아파할 테니, 내가 더욱 일부러 모양을 내어 잘라 네게 보여 주겠다.”라고 하니, 서문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몹쓸 것, 그만두시오, 내 어찌 그런 마음이 있겠소.”…… (제28회)
……등불을 켤 시간이 되니, 채 어사(蔡御史)가 곧 “하루 종일 폐를 끼쳤으니, 술은 그만두어야겠소.”라고 말하고 일어나 자리를 떴다. 좌우에서 곧 등불을 켜려 하니, 서문경이 말하기를 “잠시 등불을 켜지 마시오. 어르신을 뒤쪽에서 옷을 갈아입도록 청하겠소.”라고 하니, 이에…… 비취헌(翡翠軒)으로 안내하니,…… 모퉁이 문을 닫으니, 두 명의 가수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계단 아래에 서서, 앞으로 촛불을 꽂듯이 네 번 절하였다.…… 채 어사가 보고,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어, 곧 말하기를 “사천, 그대는 어찌 이토록 후하게 대접하는가? 아마 안 될 것이오.”라고 하니, 서문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 동산(東山)의 유람과, 또 무엇이 다르겠소?”라고 하니, 채 어사가 말하기를 “제가 안석(安石)의 재주만 못하고, 그대는 왕우군(王右軍)의 높은 뜻을 지니셨소.”…… 이에 헌 안으로 들어가니, 문물이 여전한 것을 보고, 종이와 붓을 찾으니, 곧 시동에게 명령하여 단계 벼루에 먹을 진하게 갈게 하고, 비단 서명지를 털어 내리게 하였다. 이 채 어사는 결국 장원(狀元)의 재주가 있어, 붓을 손에 쥐니, 글에 더하지 않고, 글자는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니, 등불 아래 한 번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제49회)
명나라 소설 중 외설적인 내용을 선양하는 것은, 인물마다 가리키는 바가 있으니, 대개 문자를 빌려 오랜 원한을 갚는 것이지만, 그 시비는 실로 헤아리기 어렵다. 심덕부(沈德符)는 《금병매》 또한 당시의 일을 비판한다고 하였으니, “채경(蔡京) 부자는 분의(分宜)를 가리키고, 임영소(林靈素)는 도중문(陶仲文)을 가리키며, 주면(朱勔)은 육병(陸炳)을 가리키고, 그 외에도 또한 각각 소속된 바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주로 서문경과 같은 인물은, 당연히 별도의 주된 이름이 있을 것이니, 곧 서두에 이른바 “한 곳의 집안이, 예전에는 어찌 그리 부귀하였는지, 나중에는 매우 처량하게 되었으니, 권모술수는, 조금도 쓸 데가 없고, 친척과 형제는, 한 명도 의지할 데가 없으니, 몇 년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많은 이야기의 표적이 되었으니. 그 안에는 또 몇몇이 총애를 다투고 강함을 겨루며 간사한 자에게 아첨하고 교태를 부리는 자가 있으니, 처음에는 얼마나 요염하고 아리따웠는지, 나중에는 또한 시신이 등불 그림자 아래 널리고, 피가 빈 방을 물들이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제1회)라는 것이 이것이다. 결말에 조금 나아가, 불가의 말을 써서, 서문경의 유복자 효가(孝哥)가 바야흐로 영복사(永福寺) 방장에 자고 있는데, 보정(普淨)이 그 어미와 무리를 이끌고 가서, 선장(禪杖)으로 가리키니, 효가가 “몸을 돌리니, 곧 서문경이었는데, 목에는 무거운 칼을 쓰고, 허리에는 쇠사슬을 매고 있었다. 다시 선장으로 한 번 가리키니, 여전히 효가가 침상에 자고 있었다.…… 원래 효가는 곧 서문경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제100회)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의 형상은, 진실로 기이하지만, 또한 단지 업보가 남아, 여러 세대에 이르도록 이와 같으니, 해탈의 도는, 오직 “명오(明悟)”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효자가 원한을 품고, 이로써 복수한다고 한다면, 비록 기이한 계략과 뛰어난 행실이, 이 책에 빛을 더할 것이지만, 증거가 부족하니,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사와 의상으로 《금병매》를 보면, 세정(世情)을 묘사하는 것 외에, 그 진실과 거짓을 다하였고, 또 쇠퇴하는 세상이라, 모든 일이 문란해졌으므로, 이에 고통스러운 말을 하였으니, 매번 매우 준엄하고 급박하지만, 또한 때로 은밀하고 굽은 곳에 이르니, 외설스러운 것이 많다. 후세 사람들이 혹은 다른 글은 생략하고, 이 점에만 집중하여, 이에 나쁜 시호를 주어, “음서(淫書)”라고 하였으니, 당시에는, 실로 또한 유행이었다. 성화(成化) 때, 방사(方士) 이자승(李孜僧)이 계효(繼曉)에 이어 방중술을 바쳐 갑자기 귀하게 되었고, 가정(嘉靖) 연간에 이르러 도중문(陶仲文)이 단약을 바쳐 세종(世宗)의 총애를 얻으니, 관직이 특진 광록대부 주국 소사 소부 소보 예부 상서 공성백(特進光祿大夫柱國少師少傅少保禮部尚書恭誠伯)에 이르렀다. 이에 퇴폐적인 풍조가 점점 사대부에게 미치니, 도어사(都御史) 성단명(盛端明)과 포정사 참의(布政使參議) 고가학(顧可學)은 모두 진사(進士)로 시작하였지만, 모두 “추석방(秋石方)”을 빌려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순식간에 현달하여, 세속에서 우러러 부러워하니, 요행을 바라는 자가 많은 지력을 다해 기이한 방술을 구하니, 세상에서는 이에 점점 규방의 약방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풍기가 이미 변하니, 문림(文林)에까지 미치니, 방사가 등용된 이래로, 약방이 성행하고, 요사스러운 마음이 일어나고, 소설 또한 신마의 이야기를 많이 하였고, 또 매번 남녀의 잠자리에 관한 일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금병매》의 작자는 글을 잘 쓰므로, 비록 외설스러운 말이 섞여 있지만, 다른 좋은 점이 저절로 있으니, 말류에 이르러서는, 뜻을 두어 쓴 것이, 오로지 성교에만 있으니, 또 일상적인 정을 넘어서니, 마치 미친 병과 같으니, 오직 《육포단(肉蒲團)》의 사상이 이여(李漁)와 다소 비슷하니, 비교적 뛰어날 뿐이다. 그 더욱 못한 것은 외설스러운 말을 하고자 하였지만, 글을 잘 쓰지 못하니, 이에 작은 책을 지어, 세상에 간행하니, 중간에 금지를 당하였으니, 지금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만력 때 또 《옥교리(玉嬌李)》라는 유명한 것이 있었으니, 또한 《금병매》 작자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원굉도는 대략적인 내용을 들었는데, “앞의 책과 각각 보응과 인과를 설정하였으니, 무대는 후세에 음란한 남편이 되어, 위로는 아랫사람과 간통하고 아래로는 윗사람과 간통하였고, 반금련 또한 하간(河間)의 부인이 되어, 마침내 극형을 받았고, 서문경은 어리석고 어리숙한 남자가 되어, 처첩의 외도를 보고만 있으니, 윤회가 어긋나지 않음을 보였다.”라고 하였다. 후에 심덕부가 첫 권을 보니, “외설스럽고 더러움이 백 가지에 이르니, 인륜을 등지고 이치를 멸시하니,…… 그 황제는 완안대정(完顏大定)이라고 일컫고, 귀계(夏言)와 분의(엄숭)가 서로 모함하는 것도 또한 암암리에 담겨 있다. 가정 신축년 서상(庶常) 여러 공에 이르러서는, 곧 이름을 직접 쓰니, 더욱 놀랍고 괴이하다.…… 그러나 필봉이 제멋대로 횡행하고 호탕하니, 더욱 《금병매》보다 나은 듯하다.”(모두 《야획편》 25에 보임) 지금 그 책은 이미 없어졌으니, 비록 혹 우연히 보는 자가 있지만, 문장과 사적이, 모두 원굉도와 심덕부의 말과 같지 않으니, 대개 후세 사람이 모방하여 지은 것이지, 당시 보았던 책이 아니다.
《속금병매(續金瓶梅)》는 전후집 모두 64회이고, “자양도인(紫陽道人) 편”이라고 되어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동한(東漢) 때 요동(遼東) 삼한(三韓)에 선인(仙人) 정영위(丁令威)가 있었고, 500년 후에 임안(臨安) 서호(西湖)에 선인 정야학(丁野鶴)이 있었는데, 임종 때 유언을 남기기를 “‘500년 후에 또 한 사람 이름이 정야학인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는 내 후신이니, 이곳에 와서 나를 찾아보라’고 하였다. 후에 명나라 말에 이르러, 과연 동해(東海)의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과 성이 같았는데, 이곳에 와서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면서, 스스로 자양도인이라고 칭하였다.”(62회) 권수(卷首)에는 《태상감응편 음양무자해(太上感應篇陰陽無字解)》가 있는데, “노(魯) 제읍(諸邑) 정요항 참해(丁耀亢參解)”라고 쓰여 있고, 서문에는 이르기를 “간신 기(杞)가 남도(南都)에서 나의 《천사(天史)》를 불태운 이후로, 세상이 변하여, 다시는 인과(因果)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지금 성천자(聖天子)께서 친히 반포하신 《감응편(感應篇)》을 보니, 스스로 어제(御製) 서문을 지어, 신하들에게 훈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속금병매》는 청나라 초기에 이루어졌고, 정요항이 곧 그 저자임을 알 수 있다. 요항의 자는 서생(西生)이고, 호는 야학(野鶴)이며, 산동(山東) 제성(諸城) 사람이고, 젊어서 유생이 되어, 강남에 가서 여러 명사와 함께 문사 모임을 만들었고, 돌아온 후, 울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천사》 10권을 지었다. 청나라 순치(順治) 4년에 북경에 들어가, 순천부(順天府)의 발공(拔貢)으로 발탁되어, 양백기(鑲白旗) 교습(教習)을 지냈고, 시명(詩名)이 매우 높았다. 후에 용성(容城) 교유(教諭)가 되었고, 혜안(惠安) 지현(知縣)으로 옮겨졌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60세 이후 눈병을 얻어, 스스로 목계도인(木雞道人)이라고 칭하였고, 72세에 죽었다(약 1620—1691), 저서로는 시집 10여 권, 전기(傳奇) 4종(건륭(乾隆) 《제성지(諸城志)》 13 및 36)이 있다. 《천사》는, 역대 길흉의 여러 일을 모아 엮은 것으로, 남도에서 불태워졌으니,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제성지》에는 단지 “익도(益都) 종우정(鍾羽正)에게 바치니, 우정이 기이하게 여겼다.”라고 하였을 뿐이다.
《속금병매》의 주된 의도는 매우 단순하니, 전집에서는 보정(普淨)이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화신이라고 하였고, 하루는 시식(施食)을 베푸는데, 윤회 대부(輪迴大簿)로 여러 귀신을 가리켜, 장래의 악보(惡報)를 알게 하니, 후에 모두 그 말과 같았다. 서문경은 변경(汴京)의 부유한 집안 심월(沈越)의 아들인데, 이름은 금가(金哥)이고, 월의 처남 원 지휘(袁指揮)가 맞은편에 사는데, 딸 상저(常姐)가 있으니, 곧 이병아의 후신인데, 일찍이 심씨 집에서 그네를 타다가, 이사사(李師師)에게 보여,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거짓 조칙으로 빼앗아, 이름을 은병(銀瓶)으로 바꾸었다. 금나라 사람들이 변경을 함락시키니, 백성들이 유랑하게 되었고, 금가는 마침내 거지 신세가 되었고, 은병은 창기가 되었고, 정옥경(鄭玉卿)과 통정하였고, 후에 적 원외(翟員外)의 첩이 되었고, 또 정과 함께 도망하여 양주(揚州)에 이르렀는데, 묘청(苗青)에게 속임을 당하니, 이에 목을 매어 죽었다. 후집에서는 동경(東京) 공 천호(孔千戶)의 딸 이름 매옥(梅玉)이라는 여자를 서술하는데, 부귀를 부러워하여, 스스로 금나라 사람 금합목아(金哈木兒)의 첩이 되었는데, 큰 부인이 “흉악하고 질투가 많아”, 빼앗아 학대하니, 매옥이 자결하려 하다가, 꿈에서 자신이 춘매의 후신임을 알게 되었고, 큰 부인은 손설아(孫雪娥)의 다시 태어난 모습임을 알게 되어, 이에 장재(長齋)하며 염불하니,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아,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반금련에 이르러서는 산동(山東) 여 지휘(黎指揮)의 딸로 다시 태어났는데, 이름은 금계(金桂)이고, 남편은 유 절름발이(劉瘸子)인데, 그의 전생은 실로 진경제였으니, 전생의 업보로 인하여, 몸이 온전하지 못하였고, 금계는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 요사스러운 벌레를 불러들였고, 또 놀람을 받아, 마침내 고질병이 되었다.
나머지 글은 모두 다른 사람의 얽히고설킨 업보를 서술하고, 국가의 대사를 그 사이에 삽입하였고, 또 불경(佛經), 도경(道經), 유학의 이치를 끌어들여, 자세히 해석하였으니, 자주 십중팔구 《감응편(感應篇)》으로 귀결되니, 이른바 “불도를 이야기하고 도를 이야기하고 이학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인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인과가 근거가 없으면, 또 《금병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제1회)라는 것이다. 명나라의 “음서(淫書)” 작자는, 본래 인과를 밝히는 것으로 스스로 해명하기를 좋아하였으니, 이 책에 이르러서는, “오직 부부의 윤리는, 변고가 매우 많으니,…… 많은 원한의 업을 만들어 내어, 세상세상 갚으니, 참으로 애욕의 강물에 스스로 빠지고, 욕망의 불에 스스로 달이는 것이니, 《금병매》 한 부는 색(色)이라는 글자를 말하였고, 《속금병매》 한 부는 공(空)이라는 글자를 말하였으니, 색에서 공으로 돌아가니, 곧 공이 색이니, 이에 과보로부터, 불법(佛法)으로 옮겨갔다.”(제43회)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불법은, 다시 매우 순수하지 못하니, 여전히 유도(儒道)와 섞여, 신마 소설 여러 작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단지 비교적 실행을 중시하는 듯하고, 또 집착하는 바가 없고자 하였으므로, 또한 당시 공허하게 삼교(三教)의 일치를 이야기하고 망령되이 삼교의 등급을 나누는 등의 폐단을 꽤 비판하였으니, 이사사(李師師)의 옛 집을 몰수하여 관아에 들여, 대각니사(大覺尼寺)로 세우니, 유도에서 또 나서서 분쟁하는 것이, 곧 그 예이다.
……여기 대각사(大覺寺)의 흥성한 불사(佛事)는 거론하지 않는다. 후에 천단(天壇)의 도관(道官)과 모든 학생(學生)들이 이 땅을 다투었기 때문에, 상관에서 결단하여 열어 주지 않으니, 각각 올술 태자(兀術太子)의 영(營)에 상소를 올려, “이 이사사의 집터가 넓고, 승려와 기생이 섞여 사니, 단지 비구니에게 절을 짓도록 주는 것은, 오래되면 일을 만들 염려가 있으니, 공소(公所)로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그 후반의 화원은, 절반을 나누어, 삼교당(三教堂)으로 만들어, 유교, 불교, 도교 삼교의 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니, 왕야(王爺)가 허락하니, 비로소 세 곳의 분쟁이 그쳤다. 그 도관은 자신이 홀로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사분오열되었으니, 돌보러 오지 않았다. 그 개봉부(開封府)의 수재(秀才) 오도리(吳蹈理)와 복수분(卜守分) 두 염치없는 유생이, 이를 빌미로, 또한 공문(公文)을 붙여, 한 사람당 3전씩, 도리어 3~4백 냥의 분자(分資)를 거두었다. 얼마 안 되어 세 칸의 큰 전각을 지으니, 원래는 석가불(釋迦佛)이 중앙에 있고, 노자(老子)가 왼쪽에 있고, 공자(孔子)가 오른쪽에 있었는데, 단지 자기 집의 체면을 깎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공자를 중앙에 두고, 불교와 도교를 좌우로 나누어, 이단 외도를 폄하하는 뜻을 보였다. 그 원 안의 누대와 연못, 그리고 그 두 칸의 화장하는 집은, 예전에 은병(銀瓶)이 침실로 썼던 곳인데, 서재로 고쳐 만들었다.
……이러한 풍류를 아는 선비와, 흥취 있는 문인, 그리고 그 경박한 젊은이들이, 선(禪)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도(道)를 이야기하지도 않고, 매일 삼교당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니, 도리어 색(色)이라는 글자를 이야기하였으니, 정말 쾌활한 곳이었다. 이름을 삼공서원(三空書院)이라고 하였으니, 삼교가 모두 공(空)하다는 뜻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제37회 상 《삼교당 청루 성 정토(三教堂青樓成淨土)》)
또 《격렴화영(隔簾花影)》 48회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또한 《금병매》의 후속작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속금병매》 중의 인명(예를 들어 서문경을 남궁길(南宮吉)로 바꾼 것 등)과 회목(回目)을 바꾸고, 그 구구절절한 인과 이야기를 삭제하여 만든 것이니, 책의 끝이 완결되지 않았으니, 장차 속작하려 하였지만, 나오지 않았다. 다른 이름은 《삼세보(三世報)》이니, 장차 속작하려던 일을 포괄하는 듯하고, 혹은 무대가 독살당한 것도, 또한 전생의 업보로 여겨, 수를 합하여 삼세(三世)를 얻은 것이다.
〔1〕《금병매(金瓶梅)》는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이 지었으며, 실제 이름은 자세하지 않다. 난릉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이현(嶧縣)에 있다. 노신(魯迅)은 《<중국소설사략> 일본어 번역본 서문》에서 지적하기를 “《금병매사화(金瓶梅詞話)》가 북평(北平)에서 발견되었으니, 지금 세상에 통행하는 같은 책의 조본(祖本)이 되며, 문장은 현재의 판본보다 거칠지만, 대화는 모두 산동의 방언으로 쓰여 있으니, 이것이 결코 강소(江蘇) 사람 왕세정(王世貞)이 지은 책이 아님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라고 하였다.
〔2〕《금병매》를 “외전(外典)”이라고 부르는 문제에 대해, 원굉도(袁宏道)의 《상정(觴政)·장고(掌故)》에서는 주보(酒譜), 주령(酒令)을 “내전(內典)”으로 삼고, 사전(史傳), 시부(詩賦)를 “외전”으로 삼았으며, “전기(傳奇)는 《수호전(水滸傳)》, 《금병매》 등을 일전(逸典)”으로 삼았다. 심덕부(沈德符)의 《야획편(野獲編)》 권25에는 “원 중랑(袁中郎)의 《상정》에서 《금병매》를 《수호전》에 짝지어 외전으로 삼았으니, 나는 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다.”라고 하였으니, “일전”을 “외전”으로 잘못 쓴 것이다. 노신은 여기서 《야획편》의 설을 따라 쓴 것이다.
〔3〕삼대 기서(三大奇書)는 서호 낚시꾼(西湖釣叟)의 《속금병매 서문》에서 이르기를 “지금 천하의 소설이 숲과 같으니, 오직 삼대 기서를 추천하니, 가로되 《수호》, 가로되 《서유(西遊)》, 가로되 《금병매》이다.”라고 하였다.
〔4〕《금병매》의 저자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심덕부의 《야획편》 권25에는 “듣건대 이 책은 가정(嘉靖) 연간 대명사의 필적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한화암수필(寒花庵隨筆)》에는 “세상에 전하기를 《금병매》라는 책은, 왕엄주(王弇州) 선생의 필적이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청나라 고공섭(顧公燮)의 《소하한기적초(消夏閑記摘抄)》 또한 저자는 “(왕)유(忬)의 아들 봉주(鳳洲)”라고 하였다. 장죽파(張竹坡) 평본 《금병매》의 사 이(謝頤) 서문에는 “《금병》이라는 책은, 봉주의 문인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며, 혹은 곧 봉주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왕세정(王世貞)(1526—1590)은, 자는 원미(元美)이고, 호는 봉주(鳳洲), 엄주산인(弇州山人)이며, 명나라 태창(太倉)(지금의 강소성(江蘇省)에 속함) 사람이고, 관직은 남경 형부 상서(南京刑部尚書)에 이르렀다. 《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稿)》 등을 지었다.
〔5〕왕세정이 책을 지어 “그 원수를 죽였다”라는 것에 대해, 전설이 분분하다. 고공섭의 《소하한기적초》에는 왕유(王忬)의 집에 소장된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를, “엄세번(嚴世蕃)이 강제로 요구하니, 유는 차마 버리지 못하여, 명수를 찾아 모사한 가짜를 만들어 바쳤다.”라고 하였다. 세번은 이를 안 후에 해를 끼쳤다. “유의 아들 봉주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통탄하여, 복수할 길이 없어”, 드디어 《금병매》를 지어 바쳤다. 봉주는 많은 돈을 주고 발을 고치는 장인을 매수하여 세번이 책을 열심히 볼 때 살짝 그의 발을 다치게 하였고, “몰래 썩는 약을 바르니, 후에 점점 궤양되어,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고”, 엄숭(嚴嵩) 또한 나이가 들어 둔해지니, 부자가 점점 총애를 잃어 패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화암수필》에서는 “이 책은 한 효자가 지은 것으로, 그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다. 대개 효자가 아는 한 거공(巨公)이, 실로 효자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복수를 꾀하였으나 번번이 이루지 못하였다. 후에 갑자기 거공이 책을 볼 때, 반드시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긴다는 것을 알아냈다.”라고 하였다. 효자가 3년 동안 이 책을 지으니, “종이 모서리에 독약을 발랐고”, 거공이 이 책을 다 보니, “독이 발작하여 죽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효자는 곧 봉주이다. 거공은 당경천(唐荊川)이다. 봉주의 아버지 유는 엄씨에게 죽었으니, 실로 경천이 모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엄세번(?—1565)은, 호는 동루(東樓)이고, 명나라 분의(分宜)(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속함) 사람이고, 관직은 공부 좌시랑(工部左侍郎)에 이르렀다. 그의 아버지 엄숭과 함께 국정을 농단하여, 악행을 여러 해 동안 저질렀고, 후에 처형되었다. 당순지(唐順之)(1507—1560)는, 자는 응덕(應德)이고, 호는 경천(荊川)이며, 명나라 무진(武進)(지금의 강소성에 속함) 사람이고, 관직은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에 이르렀다. 《경천선생문집(荊川先生文集)》 등을 지었다.
〔6〕장죽파(張竹坡)는 청나라 팽성(彭城)(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사람으로, 생평은 자세하지 않다. 유정기(劉廷璣)의 《재원잡지(在園雜誌)》에는 “인정과 세상일에 대해 심오하게 통찰한 것은, 《금병매》만한 것이 없으니, 진정 기서라고 일컬을 만하다.…… 팽성의 장죽파가 먼저 전체의 대강을 정리하고, 다음에는 권마다 단락마다 나누어 주석하고 비평하였으니, 무성탄(武聖嘆)을 이을 만하며, 징계하고 권면하는 것이, 한눈에 명확하다. 안타깝게도 그의 명이 길지 못하여, 죽은 후에 간행하려던 목판을 묵은 빚을 왕창부(汪蒼孚)에게 갚는 데 써서,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중국 내에 전해지는 것이 매우 적다.”라고 하였다. 《고효설(苦孝說)》은 장죽파가 지은 것이다. 《금병매》의 저자는 한 효자라고 하였으니, 그 어버이가 원수에게 모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이 있었으니, 글 말미에 “작자의 마음은, 그 남은 아픔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금병매》는 마땅히 《기산지(奇酸誌)》, 《고효설》이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 등의 말이 있다.
〔7〕분의(分宜)는 엄숭(嚴嵩)을 가리키니, 명나라 분의(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속함) 사람이고, 가정(嘉靖) 때의 간신이며, 《명사(明史)·간신열전(奸臣列傳)》에 전기가 있다. 도중문(陶仲文), 육병(陸炳)은 모두 가정 때의 간신이며, 《명사·녕행열전(佞幸列傳)》에 전기가 있다.
〔8〕성단명(盛端明) 및 아래 글의 고가학(顧可學)은 모두 가정 때의 간신이며, 《명사·녕행열전》에 전기가 있다.
〔9〕《육포단(肉蒲團)》은 또한 《각후선(覺後禪)》이라고도 하며, 6권 20회이고, 옛 판본에는 “정치반정도인(情痴反正道人) 편집”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이름은 “정은선생(情隱先生) 편집”이며, 권수에는 서릉 여여 거사(西陵如如居士)의 서문이 있다. 유정기의 《재원잡지》에는 이여(李漁)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여는 본 권 89쪽 주 〔22〕를 참고하라.
〔10〕《옥교리(玉嬌李)》는 또한 《옥교려(玉嬌麗)》라고도 하며, 이미 없어졌다. 심덕부의 《야획편》 권25에는 “중랑이 또 말하기를, 또한 《옥교리》라는 것이 있으니, 또한 이 명사의 손에서 나왔으며, 앞의 책과 각각 보응과 인과를 설정하였다.”라고 하였다.
〔11〕귀계(貴溪)는 하언(夏言)을 가리키니, 귀계(지금의 강서성에 속함) 사람이고, 가정 때 관직이 무영전 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이르렀다. 《명사·하언전(夏言傳)》을 보라.
〔12〕《태상감응편 음양무자해(太上感應篇陰陽無字解)》는 정요항이 지은 것이다. 내용은 《태상감응편》의 주된 뜻을 해석한 것이다. 《태상감응편》은 《도장(道藏)·태청부(太清部)》에 30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송(宋) 이창령(李昌齡) 전(傳)”이라고 쓰여 있다.
〔13〕정요항의 저서에 대해, 《건륭 제성지(乾隆諸城志)》에 따르면, 시집 《소요유(逍遙遊)》 1권, 《육방시초(陸舫詩草)》 5권, 《초구시(椒邱詩)》 2권, 《강간초(江干草)》 1권, 《귀산초(歸山草)》 2권, 《청산정초(聽山亭草)》 1권이 있다. 전기 4종은 《서호선전기(西湖扇傳奇)》, 《화인유전기(化人遊傳奇)》, 《동사담전기(蚒蛇膽傳奇)》, 《적송유전기(赤松遊傳奇)》를 가리킨다.
〔14〕종우정(鍾羽正)의 자는 숙렴(叔濂)이고, 명나라 익도(益都)(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속함) 사람이며, 관직은 공부 상서(工部尚書)에 이르렀다. 《숭아당집(崇雅堂集)》을 지었다.
〔15〕《격렴화영(隔簾花影)》의 전체 이름은 《삼세보 격렴화영(三世報隔簾花影)》이다. 청나라 무명씨(無名氏)가 지었으며, 권수에는 사교거사(四橋居士)의 서문이 있다. 대개 강희(康熙) 이후의 작품이다.
제20편 명나라의 인정 소설 (하)
《금병매》, 《옥교리》 등이 이미 세상에서 널리 칭송받으니, 모방하는 자들이 잇따라 일어났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흐름이 생겨났으니, 인물과 사건의 양상이 모두 다르지만, 서명은 여전히 많이 답습하였으니, 《옥교리(玉嬌梨)》, 《평산냉연(平山冷燕)》 등이 모두 그러하다. 서술된 내용에 이르러서는, 대개 재자(才子)와 가인(佳人)의 일이고, 문아(文雅)와 풍류(風流)로 그 사이를 꾸미고, 공명(功名)과 우연한 만남을 주로 하니, 처음에는 어긋나는 일이 있지만, 결국에는 대부분 뜻대로 되므로, 당시에는 또한 “가화(佳話)”라고도 불렀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매번 당나라 사람의 전기(傳奇)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또 관련이 없으니, 대개 서술된 인물이, 대부분 재인(才人)이기 때문에, 시대가 비록 다르지만, 사적이 문득 유사하여, 이로 인해 우연히 일치한 것이지, 반드시 모방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옥교리》, 《평산냉연》은 프랑스어 번역이 있고, 또 이름난 《호구전(好逑傳)》이라는 것은 프랑스어와 독일어 번역이 있으므로, 외국에서 특히 이름나서, 중국에서보다 훨씬 더 유명하다.
《옥교리》는 지금 혹은 《쌍미기연(雙美奇緣)》으로 제목을 바꾸기도 하며, 저자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 책은 겨우 20회이고, 명나라 정통(正統) 연간에 태상경(太常卿) 백현(白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고, 만년에 딸 하나를 얻으니 홍옥(紅玉)이라 하였는데, 매우 문재가 있어, 아버지를 대신하여 지은 국화시(菊花詩)로 손님에게 알려졌고, 어사(御史) 양정조(楊廷詔)가 이로 인해 아들 양방(楊芳)의 아내로 삼고자 하니, 현은 방을 집으로 불러, 처남인 한림(翰林) 오규(吳珪)에게 그를 시험하도록 부탁하였다.
……오 한림이 양방과 함께 툇마루 옆에 서 있었다. 양방이 고개를 들자, 문득 위쪽에 가로로 걸린 편액을 보니, “불고헌(弗告軒)”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양방은 자신이 이 세 글자를 안다고 믿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오 한림이 양방이 자세히 보는 것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이 세 글자는 바로 빙군(聘君) 오여필(吳與弼)이 쓴 것이니, 필획이 굳세고 힘차니, 명필이라고 일컬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양방은 글자를 아는 것을 자랑하려 하여, 이에 대답하기를, “과연 명필입니다. 이 헌(軒) 자는 또한 평범하지만, 이 불고(弗告) 두 글자는 신묘하게 썼습니다.”라고 하였지만, ‘告’ 자를 거성(去聲)으로 읽었으니, ‘弗告’ 두 글자는, 대개 《시경(詩經)》에 “불훤불고(弗諼弗告)”의 의미를 취한 것이고, 이 ‘告’ 자는 마땅히 ‘곡(곡)’ 자와 같은 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오 한림이 듣고, 마음속으로 알고, 어물쩍 대답하였다.……(제2회)
백현은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양은 원망한다고 여겨, 이에 현을 녜선(乜先)의 영(營)에 추천하여 태상황(太上皇)을 맞이하게 하니, 현은 딸을 오 한림에게 맡기고 떠났다. 오규는 곧 홍옥을 데리고 금릉(金陵)으로 돌아가니, 우연히 소우백(蘇友白)이 벽에 쓴 시를 보고, 그의 재주를 아껴, 홍옥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우백은 신부를 잘못 알아보아,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규는 화를 내어, 학관(學官)에게 우백의 수재(秀才) 자격을 박탈하도록 부탁하니, 학관이 망설이고 있는데, 백현이 조정에서 돌아와 관직이 더해져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마침 이르러, 곧 그에 따라 내쫓았다. 우백은 쫓겨나, 장차 북경에 가서 그의 숙부를 찾아가려 하였는데, 도중에 여러 젊은이가 괴롭게 시를 읊는 것을 보니, 이에 바야흐로 백홍옥의 새로운 버드나무 시에 화답하고 있었다. 운(韻)을 맞출 수 있는 자가 있으면, 곧 그에게 시집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우백 또한 두 수를 화답하니, 장궤여(張軌如)가 갑자기 훔쳐서 백현에게 바치니, 현은 그를 서빈(西賓)으로 머물게 하였다.
이어서 소유덕(蘇有德)이라는 자가 또 우백을 사칭하여, 백씨에게 혼인을 청하니, 잔치 자리에서 장을 보고, 서로 공격하고 비방하니, 모두 실패하였다. 우백은 홍옥의 새로운 버드나무 시를 보고, 사모하여, 이에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서, 오규에게 혼인을 청하려 하였는데, 도중에 도둑을 만나, 잠시 이씨의 집에 머무르니, 우연히 한 소년 노몽리(盧夢梨)를 만나니, 매우 우백의 재주에 탄복하여, 이에 그의 여동생의 평생을 부탁하였다. 우백은 이에 북경에 들어가 감생(監生)으로 과거를 보아, 두 번째로 급제하였다. 다시 노를 찾아가니, 이미 화를 피하여 멀리 이사하였으니, 이에 크게 실망하였다. 노는 실로 백홍옥의 이종사촌으로, 이미 먼저 금릉에 가서 백씨에게 의탁하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백현은 사위를 얻기 어려워, 이름과 성을 바꾸어 산음(山陰)을 유람하다가, 우적사(禹跡寺)에서 한 소년 성이 유(柳) 씨인 사람을 보니, 재주와 식견이 비범하여, 다음 날 찾아가니, 곧 그의 딸과 이종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돌아와 그 까닭을 말하기를,
……“… … 문득 한 소년을 만났는데, 성이 유 씨이고, 또한 금릉 사람입니다. 그의 사람됨이 풍류스러우니, 정말 ‘사씨 집안의 옥 같은 나무’입니다.…… 제가 보니 그의 정신이 맑고 뼈대가 빼어나고, 학문이 넓고 재주가 높으니, 조만간에 마땅히 한림원에 날아오를 것입니다.…… 홍옥을 그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지만, 또 조카딸이 제가 편애한다고 말할까 염려되고, 조카딸을 시집보내려 하니, 또 홍옥이 제가 꾸며낸다고 말할까 염려됩니다.
유생(柳生) 외에는, 다시 한 사람을 찾으려 하면, 결단코 불가능합니다. 저는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舜)을 함께 섬긴 것을 생각하니, 옛 성인도 이미 행한 바가 있고, 저는 또 당신 자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좋은 벗과 다름없음을 보았으니, 저는 또한 헤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면전에서 한입으로 모두 허락하였습니다. 이 일을 저는 매우 쾌하게 처리했습니다.”……(제19회)
두 딸은 모두 우백(友白)을 사모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매우 실망하였다. 이어서 유가 백씨 집에 이르러, 스스로 실은 소우백이라고 말하니, 대개 그때 또한 이름과 성을 바꾸어 산음(山陰)을 유람하고 있었다. 현(玄) 또한 진실된 이름과 성을 알려주니, 모두 크게 기뻐하고 뜻밖으로 여겨, 마침내 혼인을 이루었다. 노몽리(盧夢梨)는 실은 여자이고, 처음에는 남장을 하고 스스로 우백에게 의탁한 것이라고 한다.
《평산냉연(平山冷燕)》 또한 20회이고, “적안산인(荻岸山人) 편집”이라고 쓰여 있다. 청나라 성백이(盛百二)는 《유당속필담(柚堂續筆談)》에서 가흥(嘉興) 장박산(張博山)이 14~15세 때 지은 것이라고 하였고, 그의 아버지의 친구 아무개가 이어서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박산의 이름은 소(劭)이고, 청나라 강희(康熙) 때 사람으로, “어려서 신동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아홉 살에 《매화부(梅花賦)》를 지어 스승을 놀라게 하였다.”(완원(阮元)의 《양절유헌록(兩浙輶軒錄)》 7에 이방첨(李方湛)의 말을 인용함) 대개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또한 이 책을 그에게 붙였지만, 문장이 진부하여, 어린아이가 지은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책은 ‘선조(先朝)’의 융성한 일을 서술하고 있지만, 언제 지었는지 말하지 않았으므로, 또한 ‘선조’가 어느 임금인지 알 수 없다. 그때 흠천감(欽天監) 정당 관리가 규벽(奎壁)의 빛이 흘러 온 세상에 가득하다고 아뢰니, 천자는 크게 기뻐하며, 진정한 인재를 구하라고 조칙을 내렸고, 또 마침 흰 제비가 빙빙 도는 것을 보고, 이에 모든 관리에게 흰 제비 시를 짓도록 명하니, 여러 사람이 능히 하지 못한다고 하니, 대학사(大學士) 산현인(山顯仁)이 이에 그의 딸 산대(山黛)의 작품을 바치니, 시에 이르기를,
저녁 해에 쓸쓸한 마음을 기대니 드무니, 배꽃 속으로 숨어드니 시비가 없네. 엷어져 까마귀에게서 색을 빌리지 않고, 여위어 오직 눈에게 살찌움을 허락하네. 밤이 되어 돌아와도 오히려 그림자를 남기고, 봄의 붉음을 다 머금어도 옷을 더럽히지 않네. 얼마나 많은 부잣집이 부귀를 자랑하는가, 마침내 능히 나의 깨끗한 몸을 돌아가게 하네. (제1회)
천자는 곧 불러 만나보고, 계책을 바치도록 하니, 뜻에 맞으니, 옥자(玉尺) 한 자를 하사하며, “이로써 천하의 인재를 헤아리라.” 하였고, 금 여의(金如意) 한 자루를 하사하며, “문으로는 능히 글씨를 지휘하고, 무로는 능히 강포를 막을 수 있으니, 장성하여 사위를 고르는데, 망령된 사람이 강제로 구하면, 곧 이로써 그 머리를 치되, 쳐 죽여도 논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 어서(御書) 편액 한 폭을 하사하니 이르기를 “홍문재녀(弘文才女)”라고 하였다. 이때 대는 바야흐로 열 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누각을 지어 옥자를 보관하니, 이를 옥척루(玉尺樓)라고 하였고, 또한 곧 대가 글을 읽는 곳으로 삼으니, 이에 재녀의 이름이 크게 떨치니, 시문을 구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후에 대가 시로 한 귀한 집안의 자제를 조롱하니, 원한을 사서, 사람을 시켜 시문이 모두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무고하니, 또 봉지를 내려 문신(文臣)에게 옥척루에 가서 대와 시합하도록 명하니, 문신이 미치지 못하니, 무고한 자가 죄를 얻고 대의 이름은 더욱 드높아졌다. 그때 또 시골 여자 냉강설(冷絳雪)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또한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으니, 산인(山人) 송신(宋信)을 거슬리니, 신이 계책으로 함정에 빠뜨려, 관에서 사서 산씨의 시비(侍婢)로 보내게 하였다. 강설은 도중에 시를 지어 낙양(洛陽)의 재인(才人) 평여형(平如衡)을 만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서로 잃었다. 이미 산씨 집에 이르러, 스스로 그 재주를 드러내니, 곧 크게 경애를 받았고, 또한 시를 지은 것으로 천자에게 알려졌다. 평여형이 운간(雲間)에 이르러 재사를 방문하니, 연백한(燕白頷)을 얻으니, 집안이 부유하고 귀하며 큰 재주가 있고, 시를 잘 지었다. 장관이 모두 조정에 천거하니, 두 사람은 천거로 출신하기를 원하지 않아, 이에 모두 도성에 들어가 과거를 보았고, 또한 이름과 성을 바꾸어 산대를 만나 뵙기를 구하였다. 대는 일찍이 그의 비판하는 시를 보았기 때문에, 강설과 더불어 옷을 바꿔 입고 푸른 옷을 입고, 시로 시험하니, 서로 화답하기를 여러 번 하니, 두 사람은 마침내 굴복하고, 떠나갔다. 또 장인(張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또한 구혼하러 산씨 집에 이르러, 옥척루 아래에서 시험을 받으니, 장은 글을 짓지 못하여, 크게 우롱을 당하였고, 다시 허둥지둥 누각에 오르다가, 거의 여의에 맞아 죽을 뻔하였으니, 빌고 기도하여 비로소 면하였다. 장은 이에 예관(禮官)에게 조정에 아뢰도록 부탁하니, 대가 소년과 더불어 시를 주고받으며 희롱하니, 풍속에 해가 된다고 하였다. 천자는 곧 잡아 심문하였고, 장은 또 두 사람이 실은 평과 연이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 고발하였는데, 마침 방이 발표되니, 평은 회원(會元)에 급제하고, 연은 회괴(會魁)에 급제하였다. 이에 천자가 크게 기뻐하며, 산현인에게 명하여 사위로 고르도록 하니, 이에 산대를 연백한에게 시집보내고, 냉강설을 평여형에게 시집보냈다. 혼인하는 날, 모든 일이 아름답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두 여인이 가마에 오르고, 시중드는 시녀가 자그마치 백 명이 넘으니, 길에는 화포와 풍악 소리가 하늘을 뒤덮고, 오색 깃발과 꽃등이 눈부시니, 참으로 천자가 혼인을 내리고, 재상이 딸을 시집보내고, 장원과 탐화가 아내를 맞이하는 모습이니, 일시의 부귀가, 인간 세상의 성대함을 다 차지하였다.…… 진정 재능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지금껏 도성 안에서 모두 평산냉연을 사대 재자(四大才子)라고 전한다.
한가로운 창가에서 역사를 읽다가, 몹시 부러워하며 이에 전기를 세운다.(제20회)
두 책의 대략적인 뜻은, 모두 여자를 드높이고, 그 뛰어난 재능을 칭송하며, 또 과거 제도를 가볍게 여기고 시적 재능을 숭상하며, 뛰어난 인재를 중시하고 속된 선비를 비웃으니, 이른바 재능이라는 것은, 오직 시를 짓는 데 있으니, 제시된 훌륭한 시편들은, 다시 많이 비루하니, 시골 학동이 지은 것과 같다. 또 무릇 배우자를 구하는 것은 반드시 시험을 거치고, 혼인은 조칙을 기다리니, 당시 과거 사상이 굳게 자리 잡은 바이고, 만약 작자가 구속받지 않는 재능이 없다면, 진정 떨쳐 일어나 높이 날아오를 수 없을 것이다.
《호구전(好逑傳)》 18회, 다른 이름은 《협의풍월전(俠義風月傳)》이며, “명교 중인(名教中人) 편집”이라고 쓰여 있다. 그 뜻을 세운 것도 또한 앞의 두 책과 약간 같지만, 문사와 표현이 비교적 뛰어나고, 인물의 성격 또한 조금 다르니, 이른바 “아름다우면서 재능 있고, 아름다우면서 또한 의협심이 있는” 것이다. 책에서 수재 철중옥(鐵中玉)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북직례(北直隸) 대명부(大名府) 사람으로,…… 풍채가 준수하여, 마치 한 미인과 같으니, 이 때문에 마을에서 붙인 별명이 “철미인(鐵美人)”이라고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의 품행이 수려하다면, 성격은 마땅히 온순해야 할 것이다.
뜻밖에 그는 비록 수려하게 생겼지만, 성격은 마치 생철과 같으니, 매우 고집이 세고, 또 약간의 완력이 있어, 걸핏하면 성을 내고 함부로 행동하려 한다. 함부로 그가 웃고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없다.…… 또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으니, 사람이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 그에게 구하면,…… 흔쾌히 도와준다. 만약 아첨하는 말로, 은혜를 바라려고 하면, 그는 다만 듣지 못한 것으로 여기니,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에게 감사하면서도, 함부로 가까이하지 못한다.……(제1회)
그의 아버지 철영(鐵英)은 어사(御史)인데, 중옥은 강직함으로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도성에 들어가 간언한다. 마침 대쾌후(大夬侯) 사리(沙利)가 한원(韓願)의 아내를 빼앗으니, 곧 지혜를 써서 빼앗아 한원에게 돌려주니, 크게 의협심이 있다는 칭송을 얻었다. 그러나 중옥 또한 화를 두려워하여, 도성에 머무르지 못하고, 산동(山東)으로 유학을 떠난다. 역성(歷城)의 퇴직한 병부 시랑(兵部侍郎) 수거일(水居一)에게 딸 빙심(冰心)이 있는데, 매우 아름답고, 재능과 식견이 남자보다 뛰어나다. 같은 현에 그 조부보다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대학사의 아들로, 강제로 구혼하러 오니, 수거일은 감히 거절하지 못하지만, 조카딸로 빙심을 바꿔 시집보내니, 혼인 후에야 알게 되어, 그 조부가 크게 원망하여, 계략을 써서 거일을 함정에 빠뜨리고, 다시 온갖 방법으로 딸을 찾으려 하지만, 빙심은 모두 지혜로 피한다. 그 조부가 또 현령(縣令)에게 부탁하여 거짓으로 조칙을 전하여 빙심을 협박하니, 중옥이 마침 역성에 있다가, 이를 만나, 거짓임을 꾸짖으니, 계략이 또 실패하였다. 빙심은 이로 인해 철중옥에게 매우 탄복하고, 중옥이 갑자기 병이 들자, 이에 그의 집에 머무르도록 청하여 간호하니, 닷새 만에 떠났다. 이후 그 조부는 여전히 여러 차례 빙심을 아내로 맞이하려 하지만, 모두 얻지 못한다. 중옥은 마침내 빙심과 혼인하지만, 합근(合卺)하지 않고, 이어서 대학사가 어사 만악(萬諤)에게 부탁하여 두 집안의 혼인을 아뢰니, 먼저 “홀아비와 과부가, 한 방에 함께 있으니, 어찌 남녀 간의 은밀한 정이 없겠는가, 지금 부모가 사사로운 정을 따르고, 길거리에 떠들썩하게 알리고 함부로 이루니, 실로 명교(名教)에 해가 된다.”라고 하였다. 조칙을 내려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후에 황제가 두 사람이 비록 혼례를 치렀지만 동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이에 빙심을 불러 황후에게 시험하도록 하니, 과연 정절 있는 여자이므로, 이에 무고한 자들이 모두 문책을 받았고, 수씨와 철씨를 “진정한 좋은 배필 중에서 뛰어난 자”라고 칭찬하며, 다시 혼례를 치러 명교를 빛내도록 명하고, 또 이르기를 “너는 돌아가서 더욱 후덕을 힘써 풍속을 드러내라.”라고 하였다.
또 《철화선사(鐵花仙史)》 26회가 있다. “운봉산인(雲封山人) 편집”이라고 쓰여 있다. 전당(錢唐) 채기지(蔡其志)가 친구 왕열(王悅)과 함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매검원(埋劍園)에서 함께 놀며, 부용(芙蓉)을 감상하다가, 꽃이 지고 나서야 헤어진다고 한다. 후에 도성에 들어가 또 서로 만나니, 이미 각각 갓난아이가 있었으므로, 이에 혼인을 약정하고, 왕래가 더욱 잦아졌다. 왕열의 아들 유진(儒珍)은 일곱 살에 시를 지을 수 있었고, 같은 반 친구 진추린(陳秋麟)과 함께 모두 13~14세에 학교에 들어갔고, 일찍이 매검원에 빌려 살며, 친구를 초대하여 꽃을 감상하고 시를 지었다. 추린은 밤에 여자를 만나니, 스스로 부검화(符劍花)라고 칭하였고, 후에 여러 번 찾아왔고, 어느 날 밤 폭풍우에 옥부용이 뽑히자, 곧 끊어졌다. 후에 왕씨 집안이 몰락하고, 유진 또한 과거에 낙방하니, 채는 그 가난함을 싫어하여, 딸을 하원허(夏元虛)에게 다시 시집보내려 하니, 이때 추린은 이미 해원(解元)에 급제하였으므로, 절친한 친구 소자신(蘇紫宸)에게 계략을 꾸미니, 중매를 통해 얻으니, 임시로 유진에게 돌려주려 하니, 채의 딸 약란(若蘭)이 드디어 도망가서, 자신(紫宸)의 숙부 성재(誠齋)에게 거두어져 양육되었다. 하원허는 명문세가의 자제이지만 행실이 좋지 않아, 여동생 요지(瑤枝)가 때때로 비웃으니, 이로 인해 천거하여 점선(點選)에 응하도록 하였다. 요지는 징집되어 도성으로 들어가는데, 도중에 배가 파손되어, 또한 성재에게 구조되었다. 성재는 또 유진을 서빈으로 초빙하였고, 채기지는 만년에 외롭고 쓸쓸하여, 또한 여러 번 왕을 맞이하러 와서, 아들로 삼아 길렀고, 또한 과거에 급제하여, 성재의 딸 형여(馨如)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추린은 하요지에게 구혼하니, 성재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 딸이 스스로 찾아오니, 이에 함께 도망갔다.
이때 자신은 이미 해적을 평정하고, 신선이 되었는데, 문득 왕과 진 두 사람에게 편지를 남기니, 진정한 요지는 본래 소씨 집에 있고, 함께 도망간 자는 실은 요괴라고 말하며, 두 사람에게 오뢰법(五雷法)으로 다스리도록 가르치니, 요괴는 곧 도망가고, 성재 또한 마침내 진정한 요지를 그에게 허락하였다. 어느 날 유진이 소씨 집에 이르러, 문득 약란의 옛 하녀를 보고, 매우 놀랐다. 성재는 이에 거두어들인 채의 딸임을 확실히 알고, 유진의 아내로 맞이하였고, 또한 유진에게 돌려주었다. 후에 두 집안 부부는 모두 여든이 넘었는데, 자신이 준 금단을 먹고, 어느 날 밤 병 없이 죽으니, 세상 사람들은 시해(尸解)라고 여겼다.
《철화선사》는 비교적 나중에 나왔으니, 옛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므로, 일을 설정함에 힘써 기이함을 추구하였다. 작자 또한 꽤 자부심이 있어, 서문에 이르기를, “전기 작가는 재자와 가인의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을 모사하여, 사람들에게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완성하고 이름을 붙임에 있어서도, 왕왕 대략 뜻을 더하지 않는다. 《평산냉연》과 같이 모두 재자와 가인의 성을 이름으로 삼고, 《옥교리》는 또 각기 그 사람 이름의 한 글자를 따서 전하니, 소홀함이 이와 같으니, 진정으로 일부러 재자와 가인을 모독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마음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책을 엮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은 특별함이 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쇠(鐵)가 되고 꽃(花)이 되고 신선(仙)이 된 자가 읽도록 하고, 재자와 가인의 일이 그 사이에 비추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장이 졸렬하고 거칠고, 사건이 번잡하며, 또 전쟁 및 신선과 요괴의 일을 섞어 넣으니, 이미 인정 소설의 범위를 벗어났다.
这段文字主要解释了《金瓶梅》等书的书名由来,以及《玉娇梨》、《平山冷燕》和《好逑传》在国外的翻译和流传情况,并补充了一些作者和相关人物的生平信息。以下是现代韩语翻译和更详细的解释,并附有汉字繁体字:
현대 한국어 번역:
〔1〕《금병매(金瓶梅)》라는 서명은 소설 속 인물 반금련(潘金蓮), 이병아(李瓶兒), 춘매(春梅) 세 사람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구성되었다. 이러한 방식을 답습한 것으로, 《옥교리(玉嬌梨)》는 백홍옥(白紅玉)의 ‘옥(玉)’, 오무교(吳旡嬌)(백홍옥의 가명)의 ‘교(嬌)’와 노몽리(盧夢梨)의 ‘리(梨)’ 세 글자를 따서 구성되었고, 《평산냉연(平山冷燕)》은 평여형(平如衡), 산대(山黛), 냉강설(冷絳雪), 연백한(燕白頷) 네 사람의 성을 따서 구성되었다.
〔2〕《옥교리》, 《평산냉연》 프랑스어 번역본 《옥교리》 프랑스어 번역본 《Ju-Kiao-Li》는, 가장 먼저 프랑스인 르뮈사(ABRémusat)가 번역하였고, 또 다른 이름은 《두 명의 사촌 자매(Les deux cousines)》이며, 1826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후에 또 줄리앙(SBJulien)의 번역본이 있으며, 또한 이름은 《두 명의 사촌 자매》이며, 1864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평산냉연》 프랑스어 번역본 《Ping-Chan-Ling-Yen》 또한 줄리앙이 번역하였고, 또 다른 이름은 《두 명의 재능 있는 젊은 아가씨(Les deux jeunes filles lettrées)》이며, 1860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3〕《호구전》 프랑스어·독일어 번역본 프랑스어 번역본은 《Hao-Khieou-tschouan》이며, 다르시(GBd’Arcy)가 번역하였고, 또 다른 이름은 《완벽한 아가씨(La femme accomplie)》이며, 1842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독일어 번역본 중 비교적 이른 것은 《HaohKjo’hTschwen》이며, 무어(CBGBVonMurr)가 영어에서 중역하였고, 또 다른 이름은 《호구의 즐거운 이야기(Die angenehme Geschichte des HaohKjoDh)》이며, 호구를 사람 이름으로 잘못 여겼고, 1766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되었다. 중국어에서 직접 번역한 이름 《빙심과 철중옥(Eisherz und Edeljaspis)》은, 프란츠 쿤(FBKuhn)이 번역하였고, 또 다른 이름은 《행복한 결합 이야기(Die Geschichte einer glücklichen Gattenwahl)》이며, 1926년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되었다.
〔4〕《옥교리》는 청나라 장균(張勻)이 지었다. “이제산인(荑荻山人) 편집”이라고 쓰여 있다. (‘이제산인’은 ‘적안산인(荻岸散人)’이라고도 한다.)
〔5〕성백이(盛百二)(1720—?) 자는 진천(秦川)이고, 청나라 수수(秀水)(지금의 저장성(浙江省) 가흥(嘉興)) 사람이다. 일찍이 치천(淄川)의 지현(知縣)을 지냈다. 지은 《유당속필담(柚堂續筆談)》 3권은, 내용이 대부분 문단의 일화와 고사(故事)를 기록하였다.
장박산(張博山)은 이름이 소(劭)이고, 청나라 수수 사람이다. 지은 책으로 《목위시초(木威詩鈔)》가 있으며, 《양절유헌록(兩浙輶軒錄)》에 그의 시가 실려 있다.
〔6〕《호구전》에 따르면, ‘한원 처(韓願妻)’는 ‘한원 딸(韓願女)’로 써야 한다.
제21편 명나라의 의송(擬宋) 시인 소설 및 후대 선본(選本)
송나라 사람의 ‘설화(說話)’가 후대에 미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은 강사(講史)와 같으니, 저작이 잇따라 나왔으니, 제14, 15편에서 말한 바와 같다. 명나라의 ‘설화’를 하는 사람 또한 대개 강사로 이름을 얻었고, 간혹 경서(經書)를 해설하거나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하였지만, 소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오직 명나라 말에 이르러서, 송나라 시인 소설의 흐름이 다시 일어났으니, 옛 글을 보존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내놓으니, 다시 널리 세상에 유행하였지만, 옛 이름은 사라져, 다시 시인 소설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이러한 책 중에서 가장 풍부한 것은, 가장 먼저 《전상고금소설(全像古今小說)》 10권이 있으니, 서적상 천허재(天許齋)의 광고에 이르기를, “본 서재에서 고금 명인의 연의(演義) 120종을 구하였는데, 먼저 그 3분의 1을 초각(初刻)으로 한다.”라고 하였고, 녹천관주인(綠天館主人)의 서문에는 이르기를, “무원(茂苑)의 야사가(野史家)가 소장한 고금 통속 소설이 매우 풍부한데, 장사치의 요청으로, 가히 시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만한 것을 뽑으니, 모두 40종으로, 초각으로 만들게 하였다.”라고 하였지만, 속각(續刻)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이어서 ‘삼언(三言)’이 있으니, ‘삼언’이란, 첫째는 《유세명언(喻世明言)》, 둘째는 《경세통언(警世通言)》이니, 지금은 모두 보이지 않고, 단지 서목(序目)만 알려져 있다.
《명언》 24권은, 그 21편이 《고금소설》에서 나왔고, 3편 또한 《통언》 및 《성세항언》에서 보이니, 곧 《고금소설》의 잔본(殘本)을 가져다 만든 것과 같다.
《통언》은 40권인데, 천계(天啓) 갑자년(1624) 예장(豫章) 무애거사(無礙居士)의 서문이 있으며, 안에 《경본통속소설(京本通俗小說)》 7편을 수록하였으니(시오야 온(鹽谷溫)의 《명나라 소설 ‘삼언’에 대하여》 및 《송명 통속 소설 유전표》 참조), 이로 인해 이러한 모음집은, 대개 또한 옛 책을 겸하여 채록한 것이지, 모두 의작(擬作)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성세항언(醒世恒言)》이니, 또한 40권이고, 천계 정묘년(1627) 농서(隴西) 가일거사(可一居士)의 서문에서 이르기를, “육경(六經)과 국사(國史) 외에, 무릇 저술은, 뜻은 소설이지만, 이치를 숭상하면 혹은 너무 심오하여 병이 되고, 수사(修辭)가 혹은 너무 화려하여 상처가 되니, 시골 사람들의 귀에 와 닿아 항상심을 떨치게 하기에 부족하니, 이것이 《성세항언》이 《명언》, 《통언》을 이어 지어진 이유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항언》의 출현이, ‘삼언’ 중에서 마지막임을 알 수 있고, 중에 《십오관희언성교화(十五貫戲言成巧禍)》 한 이야기는, 곧 《경본통속소설》 권15의 《착참최녕(錯斬崔寧)》이니, 이는 또한 옛 작품을 겸하여 보존한 것이니, 사례는 《통언》과 같은 것이다.
송선노인(松禪老人)이 《금고기관(今古奇觀)》 서문에서 이르기를, “묵한재(墨憨齋)에서 《평요(平妖)》를 증보하였다. 온갖 공을 들여 변화를 주었지만, 본래의 것을 잃지 않았다.…… 지은 바 《유세(喻世)》, 《성세(醒世)》, 《경세(警世)》 ‘삼언’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풍속과 인정의 갈림길을 극도로 묘사하고,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의 정치를 자세히 썼다.”라고 하였다. 《평요전(平妖傳)》에는 장무구(張無咎)의 서문이 있는데, 이르기를 “대개 내 친구 용자유(龍子猶)가 보충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첫 장에는 제명이 있으니, “풍유룡(馮猶龍) 선생 증정(增定)”이라고 하였으니, 이로 인해 ‘삼언’ 또한 풍유룡이 지은 것임을 알 수 있고, 용자유라고 한 것은, 곧 ‘유룡(猶龍)’ 두 글자를 바꾸어 쓴 것이다. 유룡의 이름은 몽룡(夢龍)이고, 장주(長洲) 사람이다(《곡품(曲品)》에는 오현(吳縣) 사람이라고 하였고, 《완담시화(頑潭詩話)》에는 상숙(常熟)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녹천관주인(綠天館主人)이 그를 일컬어 무원(茂苑)의 야사(野史)라고 하였고, 숭정(崇禎) 연간에 공생(貢生)으로 수녕(壽寧)의 지현(知縣)에 선임되었고, 시에는 《칠락재고(七樂齋稿)》가 있고, “기쁘게 하는 말을 잘 짓고, 간혹 익살스러운 가락을 넣으니,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주이존(朱彝尊)의 《명시종(明詩綜)》 71에 이르기를)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詞)와 곡(曲)에 능하여, 《쌍웅기전기(雙雄記傳奇)》가 있고, 또 《묵한재전기정본십종(墨憨齋傳奇定本十種)》을 간행하였으니, 당시 칭송을 받았고, 그중 《만사족(萬事足)》, 《풍류몽(風流夢)》, 《신관원(新灌園)》은 모두 자신이 지은 것이다. 또한 소설을 좋아하여, 《평요전》을 보충하였고, 다시 ‘삼언’을 지었고, 일찍이 심덕부(沈德符)에게 《금병매》를 베껴 서방(書坊)에 넘겨 간행하도록 권유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야획편(野獲編)》 25)
《경본통속소설》에 기록된 7편은, 그 5편이 고종(高宗) 때 일이고, 가장 먼 것은 신종(神宗) 때 일이니, 보고 들은 것이 매우 가까우므로, 서술이 쉽게 사실과 같아진다. 《성세항언》은 그 사례를 바꾸어, 한나라 일 2편, 수나라와 당나라 일 11편을 섞으니, 대부분 진나라와 당나라 소설(《속제해기(續齊諧記)》, 《박이지(博異志)》, 《유양잡조(酉陽雜俎)》, 《수유록(隋遺錄)》 등)에서 취재하였는데, 고금의 풍속은, 변천이 이미 많으므로, 허황한 말로 이야기하니, 도리어 생기를 잃었다. 송나라 일 11편은 꽤 생동하니, 《착참최녕》 외에, 혹 송나라 화본(話本)에서 채록한 것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지만, 자세하지 않다. 명나라 일 15편은 쓴 것이 모두 가까이 들은 것이니, 세상의 풍속과 사물, 인정은, 허구로 지어낼 필요가 없으므로, 한나라와 당나라를 고담(高談)하는 것보다 낫다.
제9권 《진다수생사부부(陳多壽生死夫妻)》 한 편은, 주씨와 진씨 두 사람이 바둑 친구로 사돈을 맺은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진씨의 아들이 후에 나병에 걸리니, 주씨는 혼인을 후회하려 하지만, 딸은 허락하지 않고, 끝내 진씨 집안에 시집가서 병을 간호하고, 3년이 지나, 부부가 모두 약을 먹고 죽었다. 두 사람이 혼인을 약정하는 것과 딸의 어머니가 불평하는 여러 부분을 서술한 것은, 모두 꾸미려 하지 않았지만, 정태가 도리어 그림과 같다.
……왕삼로(王三老)와 주세원(朱世遠)은 그 어린 학생이 걷는 모습이 여유롭고, 목소리가 맑고 밝으며, 또한 읍하는 차례가 매우 예의 바른 것을 보고, 입으로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왕삼로는 곧 물었다. “영랑(令郎)은 몇 살입니까?” 진청(陳青)이 대답하여 말하길, “아홉 살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삼로가 말하길, “옛날 탕병회(湯餠會) 때를 생각하니, 마치 어제와 같았는데, 순식간에, 이미 구 년이니, 참으로 광음이 화살과 같으니, 어찌 우리를 늙지 않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주세원에게 물어 말하길, “노인이 기억하기에 댁의 영애(令愛) 또한 이 해에 태어났지요.”라고 하였다. 주세원이 말하길, “정말입니다. 소녀(小女)가 복이 많아, 지금 또한 아홉 살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삼로가 말하길, “노인이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하지 마시오, 당신 두 사람은 한평생의 바둑 친구이니, 어찌 사돈을 맺지 않으시오. 옛날에 주진촌(朱陳村)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한 마을에 오직 두 성씨만 있었는데, 대대로 혼인하였으니, 지금 당신 두 사람의 성씨가 마침 서로 부합하니, 응당 하늘의 인연입니다. 하물며 좋은 남자와 좋은 여자이니, 당신도 알고 나도 보니, 무엇이 아름답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주세원은 이미 그 어린 학생을 마음에 들어 했으므로, 진청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대답하여 말하길, “이 일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진 형이 원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만약 기꺼이 허락한다면, 소자는 다시 다른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청이 말하길, “주 형이 가난하고 미천한 저를 버리지 않으시니, 소자는 남자 집안이니,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곧 삼로에게 중매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왕삼로가 말하길, “내일은 중양절(重陽節)이니, 양구(陽九)는 불리하고, 모레가 매우 좋은 날이니, 노인이 곧 문에 찾아가겠습니다. 오늘 한마디로 정하니, 두 분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니, 노인은 다만 몇 잔의 마련된 잔치 술을 마시려는 것이니, 중매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청이 말하길, “제가 우스갯소리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인황(人皇)과 사돈을 맺으려 하여, 의논하여 말하길, ‘두 사돈이 모두 황제이니, 또한 황제를 중매로 삼아야 좋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조왕신(竈王神) 황제에게 하계에 내려가 혼담을 말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인황이 조왕신을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길, ‘저 중매하는 자는 어찌 저렇게 검은가?’라고 하니, 조왕신이 말하길, ‘예로부터 중매하는 사람 중에, 공짜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삼로와 주세원은 모두 웃었다. 주씨와 진씨 두 사람은 또 밤늦도록 바둑을 두다가 헤어졌다.
오직 한 판의 승패로, 삼생의 남녀 인연을 정하였네.
…………
……주세원의 아내 유씨(柳氏)는, 사위가 저러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훌쩍훌쩍 울었다. 남편을 원망하여 말하길, “내 딸이 또 추해진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급하게 아홉 살에 남에게 시집보냈는가? 지금은 어찌하면 좋은가? 차라리 그 두꺼비가 죽었다면, 내 딸도 벗어났을 텐데, 지금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으니, 딸아이는 점점 나이가 차서, 시집을 보내려 해도 보낼 수 없고, 물리치려 해도 물리칠 수 없으니. 끝내, 저 나병 환자를 보며 홀로 늙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은 왕삼로 저 늙은 자라가 온 힘을 다해 부추겨, 내 딸의 일생을 망쳤다.”라고 하였다.…… 주세원은 본래 아내를 두려워하는 병이 있어, 아내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도, 스스로 욕하다가 그치니, 말을 끼어넣지 않고, 마음속으로 답답해했다. 어느 날, 유씨가 우연히 부엌 찬장을 정리하다가, 바둑판과 그 바둑돌을 보고, 문득 크게 화를 내며, 또 남편을 욕하기 시작하여 말하길, “당신 두 사람은 오직 이 몇 수의 바둑으로 말이 통해, 사돈을 맺어, 내 딸을 망쳤으니. 아직 이 재앙덩어리를 남겨 두어 무엇 하려는가?”라고 하였다.
한쪽으로 말하면서, 한쪽으로 문 앞으로 걸어가, 그 바둑돌을 함부로 길에 뿌리고, 바둑판 또한 내던져 여러 조각으로 만들었다. 주세원은 본분 있는 사람이니, 아내가 성을 내는 것을 보고, 막을 수 없어, 허둥지둥 피하여 갔고, 딸 다복(多福) 또한 부끄러워하여, 와서 말리지 못했다. 아내가 지겨워하며 떠드는 것을 내버려 두니, 비로소 그만두었다.
당시에 또 《박안경기(拍案驚奇)》 36권이 있었는데, 권마다 한 편으로, 당나라 이야기 6편, 송나라 이야기 6편, 원나라 이야기 4편, 명나라 이야기 20편으로, 또한 옛날 이야기를 겸하여 수록하였으니, ‘삼언’과 같다. 맨 앞에 즉공관주인(即空觀主人)의 서문이 있는데, 이르기를 “용자유(龍子猶) 씨가 편집한 《유세(喻世)》 등의 여러 말(言)은, 고상한 도리를 보존하고, 때로 좋은 규범을 드러내어, 지금 시대의 나쁜 습속을 깨뜨리니, 송나라와 원나라의 옛 종자(種子)와 같이, 또한 거의 다 찾아 모았다.…… 이에 고금의 자잘한 일을 취하여, 새로 듣고 본 것, 이야기를 돕는 것을, 펼쳐서 상세히 이야기하니, 이와 같이 여러 권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각(二刻)》 39권이 있는데, 춘추 시대 이야기 1편, 송나라 이야기 14편, 원나라 이야기 3편, 명나라 이야기 16편, 분명하지 않은 것(명나라?) 5편, 부록으로 《송공명요원소잡극(宋公明鬧元宵雜劇)》 1권이 있으니, 숭정(崇禎) 임신년(1632)에 자서(自序)에서, 대략 이르기를 “정묘년 가을에…… 우연히 고금에서 들은 바, 한두 가지 기이한 일을 기록할 만한 것을 취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40종을 얻었다.…… 그 지은 것이 백량(柏梁)의 남은 재목, 무창(武昌)의 남은 대나무와 같으니, 또한 적지 않으니, 뜻이 차마 버려둘 수 없어, 다시 40편을 엮었다.……”라고 하였다. 정묘년은 천계(天啓) 7년이니, 곧 《성세항언(醒世恒言)》이 간행될 때이니, 이에 마침 나와서 기이함을 다투었지만, 서술이 평판하고, 인용한 내용이 빈약하여, 미치지 못한다. 즉공관주인은 능몽초(凌濛初)의 별호이고, 몽초의 자는 초성(初成)이고, 오정(烏程) 사람이고, 지은 책으로 《언시익(言詩翼)》, 《시역(詩逆)》, 《국문집(國門集)》, 잡극 《휴염옹(虬髯翁)》 등이 있다.(《명나라 소설 ‘삼언’》)
《서호이집(西湖二集)》 34권 부록으로 《서호추색(西湖秋色)》 100운이 있으니, “무림(武林) 제천자(濟川子) 청원보(清原甫) 찬(纂)”이라고 쓰여 있다. 매 권마다 한 편으로, 또한 고금의 일을 섞어 이야기하되, 반드시 서호(西湖)와 관련된다. 그 책 이름을 보건대, 초집(初集)이 있을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앞에 호해사(湖海士)의 서문이 있는데, 청원(清原)을 주자(周子)라고 칭하고, 일찍이 《서호설(西湖說)》을 지었다고 하였지만, 나머지 일은 자세하지 않다. 청나라 강희(康熙) 때 태학생(太學生) 주청원(周清原) 자 완초(浣初)가 있지만, 무진(武進) 사람이고(《국자감지(國子監志)》 82 《학징록(鶴徵錄)》 1), 건륭(乾隆) 때 주오(周吳) 자 청원이 있지만, 전당(錢塘) 사람이고(《양절유헌록(兩浙輶軒錄)》 23), 시대가 서로 맞지 않으니, 모두 다른 한 사람이다. 그 책 또한 다른 일로 본문을 이끌어내니, 스스로 이름을 “인자(引子)”라고 한다. 인자가 혹은 세네 개에 이르니, 다른 책과 조금 다르다. 문장 또한 유려하지만, 황제의 덕을 칭송하고, 교훈을 드리우기를 좋아하고, 또한 분한 말이 많으니, 거의 이른바 “사명(司命)이 나를 너무 심하게 괴롭히고 여우와 쥐가 나를 까닭 없이 업신여긴다.”(서문에서 청원의 말)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당나라 시인 융욱(戎昱)을 빌려 문사(文士)가 뜻을 얻지 못한 한을 펼친 것은 다음과 같다.
……또 한공(韓公) 부하의 한 관리, 성은 융(戎)이고 이름은 욱(昱)인 사람이 있었는데, 절서(浙西) 자사(刺史)였다. 이 융욱은 반안(潘安)의 용모와, 조식(曹植)의 재능이 있어, 글을 쓰면 사람을 놀라게 하고, 천 마디 글을 바로 지으니,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믿어, 본성이 지극히 거만하여, 사람을 눈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난리 난 세상이라, 무(武)를 중시하고 문(文)을 중시하지 않으니, 만약 수백 근의 힘이 있다면,…… 열여덟 가지 무예를 모두 능통하다고 말할 것도 없고, 한두 가지를 안다고 해도,…… 모름지기 머리에 사모(紗帽)를 쓰고 다녔다.…… 말 앞에서 호통치고, 앞에서 부르고 뒤에서 따르니, 얼마나 위풍당당한 기세인지, 무용을 떨치니, 어찌 “천지현황(天地玄黃)” 네 글자를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 융욱은 자신의 재화를 믿었지만, 이때 무를 중시하는 때에, 뜻밖에 큰 시장에서 평천관(平天冠)을 팔면서 호랑이 가죽을 파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장사를 누가 사겠는가, 보기에 다른 사람이 너를 쓰지 않을 것이다. 네가 자신의 재화를 믿지만, 누구를 놀라게 하겠는가? 천백 편의 시를 지어낸다고 해도, 진에 나갈 수 없고, 싸울 수 없고, 오랑캐를 물리칠 수 없고, 도적을 제압할 수 없으니, 그를 무엇에 쓰겠는가? 융욱은 이 시 자루를 짊어지고, 팔 곳이 없어, 뜻밖에 한 기생에게 거두어졌다. 이 기생은 누구인가?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봉(鳳)이고, 나이는 바야흐로 열아홉 살이고, 용모가 비할 데 없고, 노래와 춤에 능하고, 성품이 그윽하고 한가하여, 다시 시끄러운 일을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시부(詩賦) 두 글자를 좋아하였다. 그가 융욱의 이 시 자루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융욱은 마침 팔 곳이 없어, 김봉이 그의 이 시 자루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곧 이 자루를 펼쳐 놓으니, 마치 잡화점을 여는 것과 같으니, 낱낱이 꺼내 놓았다. 두 사람은 매우 서로 뜻이 맞아, 너는 탐하고 나는 사랑하니, 다시 서로 버리지 않았다. 이로부터 김봉은 다시 손님을 받지 않았다. 바로 이러하니:
슬프고 슬프도다 살아 이별이, 즐겁고 즐겁도다 새로운 만남이.
이로부터 융욱은 정사(政事)의 여가에, 서호 위에서 노니, 매번 김봉과 함께 머무르며 즐거워하였다.……(권9 《한진공인렴양증(韓晉公人奩兩贈)》)
《취성석(醉醒石)》 15회는 “동로고광생(東魯古狂生) 편집”이라고 쓰여 있다. 기록된 것은 오직 이미(李微)가 호랑이로 변한 일은 당나라 때 일이고, 나머지는 모두 명나라 때 일이며, 또한 숭정(崇禎) 연간의 일까지 미치니, 대개 그 시대의 작품이다. 문체는 꽤 날카롭고 드러내놓는 편이지만, 지나치게 간략하기 때문에, 평화(平話)의 습기가 때때로 사람을 덮친다. 교훈을 드리우고, 평론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서호이집(西湖二集)》보다 더욱 심하다. 송나라 시인 소설은, 비록 간혹 훈계와 비유를 섞었지만, 주된 뜻은 저잣거리의 일을 서술하여, 마음을 즐겁게 하는 데 있다. 명나라 사람이 모방한 말류(末流)에 이르러서는, 훈계가 연이어 이어지고, 시끄럽게 주된 것을 빼앗고, 또한 대부분 화려하게 영달한 일을 칭송하고, 선비들을 옹호하므로, 형식만 남고 정신은 송나라와 완전히 다르다. 제14회에 회남(淮南)의 막옹(莫翁)이 딸을 소수재(蘇秀才)에게 시집보냈는데, 오래 지나 딸이 소의 가난함을 싫어하여, 스스로 떠나기를 구하고, 다시 술집 여자가 된 일을 기록하였다. 소는 곧 연달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술집 앞을 지나가, 딸이 술잔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마에서 내려 읍하니, 딸은 겉모습은 변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매우 괴로워하고, 또한 여러 사람의 비웃음과 꾸지람을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목매어 죽으니, 곧 이른바 가난한 선비를 위해 크게 분을 토해낸 것이다.
……궤짝 옆에 단정하고 아름다운 부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바로 막씨(莫氏)였다. 소 진사가 보고 말하길, “내가 가서 그를 한번 만나보아,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리라.”라고 하고, 가마를 멈추게 하고, 우산을 쓰고, 공복(公服)을 입고, 곧장 가게로 갔다. 그 가게 주인이 저쪽에서 돈을 세고 있었는데, 두 조각 옷을 입고, 관리가 오는 것을 보고, 숨었다. 그 막씨는 가마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이미 소 진사인 줄 알아보았지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얼굴을 가다듬었다. 소 진사가 앞으로 나아가, 공손하게 읍을 하였다. 그가 말하길, “당신은 당신의 관직을 하시고, 저는 저의 술을 팔겠습니다.”라고 하며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 진사는 웃으며 떠났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떠난 아내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서로 만나 웃을 뿐이니, 잠시 머뭇거릴 뿐이다. 내 생각에 막씨의 마음이 어찌 움직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인정 없고 의리 없는 일을 하였으니, 곧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기꺼이 맞이한다 해도, 기뻐하며 다시 합칠 수 없고, 더욱 슬픔을 머금고 눈물을 흘리며, 옷자락을 잡고 스스로 꾸짖는다 해도, 불쌍히 여겨 다시 받아들일 수 없으니, 차라리 모질게 하는 것이, 한번에 두 갈래로 갈라서는 것이, 오히려 깨끗하다. 그의 마음속에, 당시 경솔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항상 어찌할 수 없으니:
마음속으로 슬프고 시큼함을 몰래 탄식하니, 몇 번이나 옛날의 잘못을 후회하는가,
동산의 아름다운 나무를 옮겨 심었더니, 도리어 문 앞의 복숭아, 오얏꽃이 되었네.
결말에 논평이 있는데, “살아서는 비난을 남기고 죽어서는 악취를 남긴다.”, “이는 주매신(朱買臣)의 아내 이후의 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논평을 조금 너그럽게 하면, 죄를 남자, “가난하고 천한 것을 편안히 여기지 않는” 사람 아래에 두지만, 또한 끝내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부인을 논하면, 글자를 읽고, 도리를 깨닫는 것이 매우 적으니, 어찌 큰 견해, 큰 지조가 있겠는가? 하물며 혹은 기한(饑寒)이 서로 핍박함에 이르러, 서로 비교하고, 곁에서 비웃는 것을 견디기 어렵고, 친척의 냉담함을 견디기 어려우니, 과거에 급제한 이름을 잡아오지 못하고, 몸에 입은 푸른 옷 한 벌을 벗어 버리지 못하니, 늘 곤궁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는 남편을 격려하지 못하니, 다 통곡할 만하니, 어찌 그에게 원망하고 탄식하지 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 일이다.”라고 하니, 눈앞에 이 가난한 선비가 아직 살아 있는데, 다시 다른 사람을 안으니, 어찌 아침저녁의 은정이 없겠는가? 너무나도 인륜을 멸시하는 것이다! 이 주매신의 아내가, 그래서 천고에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유세(喻世)》 등 ‘삼언’은 청나라 초기에 대체로 여전히 유행하였는데, 왕사정(王士禎)이 《향조필기(香祖筆記)》 10에서 이르기를 “《경세통언(警世通言)》에 《요상공(拗相公)》 한 편이 있는데, 왕안석(王安石)이 재상에서 물러나 금릉(金陵)으로 돌아간 일을 서술하였으니, 사람들의 마음에 매우 통쾌하니, 이는 노다손(盧多遜)이 영남(嶺南)으로 귀양 간 일로 인해 조금 덧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이상한 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후에 점점 흐릿해졌지만, 그 작은 부분은, 곧 선본(選本)으로 인해 지금까지 유전된다. 그 책을 《금고기관(今古奇觀)》이라고 하는데, 모두 40권 40회로, 서문에서 이르기를 “‘삼언’과 《박안경기(拍案驚奇)》를 합하여 모두 200가지 일이니, 두루 보기가 어려우므로, 포옹노인(抱甕老人)이 뽑아 이 책으로 간행하였다.”라고 하였다. 《송명통속소설유전표(宋明通俗小說流傳表)》에 따르면, 《고금소설(古今小說)》에서 취한 것이 18편이고, 《성세항언(醒世恒言)》에서 취한 것이 11편(제1, 2, 7, 8, 15~17, 25~28회), 《박안경기》에서 취한 것이 7편(제9, 10, 18, 29, 37, 39, 40회), 《이각(二刻)》에서 3편이다. ‘삼언이박(三言二拍)’의 인쇄본은 지금 매우 보기 어려우니, 이를 빌려 그 대략을 엿볼 수 있다. 책이 이루어진 시기는, 숭정(崇禎) 때일 것이니, 그것과 ‘삼언이박’의 시대 관계를, 시오야 온(鹽谷溫)이 일찍이 표를 세웠으니(《명나라 소설 ‘삼언’》), 아래와 같다:
[원본 확인 필요]
《금고기문(今古奇聞)》 22권은, 권마다 한 가지 일로, “동벽산방주인(東壁山房主人) 편집”이라고 쓰여 있다. 그 기록한 바가 매우 어지러이 섞여 있는데, 《성세항언》의 글 4편(《십오관희언성대화(十五貫戲言成大禍)》, 《진다수생사부부(陳多壽生死夫妻)》, 《장숙아교지탈양생(張淑兒巧智脫楊生)》, 《유소관자웅형제(劉小官雌雄兄弟)》)이 있고, 다른 한 편은 《서호가화(西湖佳話)》의 《매서한적(梅嶼恨跡)》이고, 나머지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자세하지 않다. 글 중에 “발적(發逆)”이라는 글자가 있으니, 청나라 함풍(咸豐) 동치(同治) 때의 책일 것이다.
《속금고기관(續今古奇觀)》 30권은, 또한 한 권에 한 가지 일로, 지은 사람 이름이 없다. 그 책은 《금고기관》에서 고르지 않은 《박안경기》 29편을 모두 수록하였다. 그리고 《금고기문》 한 편(《강우인경재중의득과명(康友仁輕財重義得科名)》)으로 권수를 채웠으니, 거의 선본이라고 할 수 없고, 동치 7년(1868)에, 강소순무(江蘇巡撫) 정일창(丁日昌)이 일찍이 음란한 사(詞)와 소설을 엄격히 금지하였는데, 《박안경기》 또한 금지 목록에 있었으니, 이 책은 서적상이 금지 후에 지은 것일 것이다.
〔1〕 《전상고금소설(全像古今小說)》 40권, 명나라 풍몽룡(馮夢龍)이 편찬. 원본에는 저자가 쓰여 있지 않고, 권수(卷首)에 녹천관주인(綠天館主人)의 서문이 있음. 녹천관주인의 이름은 자세하지 않고, 서문에서 일컫는 “무원야사(茂苑野史)”는 풍몽룡의 별호임. 이 책은 후에 《유세명언(喻世明言)》으로 바뀌었고,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과 함께 “삼언(三言)”이라고 불림.
〔2〕 《명언(明言)》 24권은 연경당(衍慶堂)에서 간행되었고, 《중각증보고금소설(重刻增補古今小說)》이라고 쓰여 있지만, 사실은 《고금소설(古今小說)》의 잔본(殘本) 21편에, 《경세통언(警世通言)》 1편(《가신선대요화광묘(假神仙大鬧華光廟)》)과 《성세항언(醒世恒言)》 2편(《백옥낭인고성부(白玉娘忍苦成夫)》, 《장정수도생구부(張廷秀逃生救父)》)을 더하여 짜깁기한 것임.
〔3〕 풍유룡(馮猶龍) (1574—1646)의 이름은 몽룡(夢龍)이고, 다른 이름은 용자유(龍子猶), 고곡산인(顧曲散人), 묵한재주인(墨憨齋主人), 무원야사(茂苑野史) 등임. 명나라 장주(長洲) (지금의 강소성 오현(江蘇省吳縣)) 사람. 지은 시집 《칠락재고(七樂齋稿)》는 이미 흩어져 없어짐.
〔4〕 《쌍웅기전기(雙雄記傳奇)》는 또 《선악도(善惡圖)》라고도 하며, 풍몽룡이 편찬. 단신(丹信)과 유쌍(劉雙)이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가, 후에 왜구를 정벌한 공으로, 관직이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이른 이야기를 서술.
〔5〕 《묵한재전기정본십종(墨憨齋傳奇定本十種)》은 또 《신곡십종(新曲十種)》이라고도 하며, 풍몽룡이 다시 정함. 십종(十種)은: 《신관원(新灌園)》, 《주가옹(酒家傭)》, 《여장부(女丈夫)》, 《양강기(量江記)》, 《정충기(精忠旗)》, 《쌍웅기(雙雄記)》, 《만사족(萬事足)》, 《몽뢰기(夢磊記)》, 《쇄설당(灑雪堂)》, 《초강정(楚江情)》임. 아래에서 서술된 《만사족(萬事足)》, 《풍류몽(風流夢)》, 《신관원(新灌園)》 세 종류 중, 《만사족(萬事足)》은 풍몽룡이 편찬, 《신관원(新灌園)》은 장봉익(張鳳翼)의 《관원기(灌園記)》를 개작하여 이루어짐. 《풍류몽(風流夢)》은 위에 언급된 십종 외에, 탕현조(湯顯祖)의 《모란정(牡丹亭)》을 개작하여 이루어짐.
〔6〕 《박안경기(拍案驚奇)》는 현재 남아 있는 명나라 상우당(尚友堂) 간행본에 따르면 40권임. 36권본은 그 잔본임.
〔7〕 능몽초(凌濛初)는 본 권 제89쪽 주(註) 〔29〕를 참고. 지은 책 《언시익(言詩翼)》은 4권으로, 이전 사람들의 《시경(詩經)》 평주(評注)를 채집. 《시역(詩逆)》은 4권으로, 《시경(詩經)》의 지은 바를 해석. 《국문집(國門集)》은 1권으로, 능몽초가 남경(南京)에 머물 때 지은 시문을 수록. 잡극 《휴염옹(虬髯翁)》의 전체 이름은 《휴염옹정본부여국(虬髯翁正本扶余國)》임.
〔8〕 청원(清原) 주즙(周楫)의 자는 청원(清原), 호는 제천자(濟川子)이며, 명나라 무림(武林) (지금의 절강성 항주(浙江省杭州)) 사람. 《서호이집(西湖二集)》 호해사(湖海士) 서문에 실린 바에 따르면, “주자는 집이 가난하여, 공명(功名)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라고 하여, 매우 뜻을 이루지 못했음.
〔9〕 융욱(戎昱)은 당나라 형남(荊南) (지금의 호북성 강릉(湖北省江陵)) 사람. 일찍이 건주자사(虔州刺史)를 지냈고, 숙종(肅宗) 때 진주자사(辰州刺史)로 좌천됨. 후세 사람들이 《융욱시집(戎昱詩集)》을 편집하여 펴냄.
〔10〕 《취성석(醉醒石)》은 명나라 무명씨(無名氏)가 지었고, “동로고광생(東魯古狂生) 편집”이라고 쓰여 있음. 이미(李微)가 호랑이로 변한 이야기는 《취성석》 제6회 “고재생오세실원형(高才生傲世失原形), 의기우념고분반봉(義氣友念孤分半俸)”에 나옴. 원래는 당나라 전기 소설 이야기이며, 《태평광기(太平廣記)》 권427에 《선실지(宣室志)》를 인용하여, 제목을 《이징(李徵)》이라고 하였음.
〔11〕 왕사정(王士禎) (1634—1711)의 자는 이샹(貽上), 호는 완정(阮亭), 어양산인(漁洋山人)이며, 청신성(清新城) (지금의 산동성 환대(山東省桓台)) 사람. 벼슬은 형부상서(刑部尚書)에 이르렀음. 지은 책으로 《대경당집(帶經堂集)》 등이 있음. 지은 책 《향조필기(香祖筆記)》는 12권으로, 고사를 고증하고 시문을 평론한 책임. 노다손(盧多遜)은 송나라 회주 하내(懷州河內) (지금의 하남성 심양(河南沁陽)) 사람. 태평흥국(太平興國) 때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지냈고, 병부상서(兵部尚書)를 더함. 후에 진왕(秦王) 조정미(趙廷美)와 사귀었기 때문에, 영남 애주(嶺南崖州)로 유배됨.
〔12〕 여기서 말하는 “《고금소설(古今小說)》에서 취한 18편”은, 《고금소설》에서 취한 8편(《금고기관(今古奇觀)》 제3, 4, 11~13, 23, 24, 32회)으로 고쳐 써야 하고, 《경세통언(警世通言)》에서 취한 10편(《금고기관》 제5, 6, 14, 19~22, 31, 33, 35회), “《박안경기(拍案驚奇)》에서 취한 7편”은, 《박안경기》 초각(初刻)에서 8편(《금고기관》 제9, 10, 18, 29, 30, 37, 39, 40회)으로 고쳐 써야 하고, 《박안경기》 이각(二刻)에서 취한 3편(《금고기관》 제34, 36, 38회)임.
〔13〕 《금고기문(今古奇聞)》은 “동벽산방주인(東壁山房主人) 편집”이라고 쓰여 있음. 광서(光緒) 13년(1887) “동벽산방주인 왕인(王寅) 야매보(冶梅甫)” 서문이 있음. 왕인(王寅)의 자는 야매(冶梅)이고, 청나라 강소성 남경(江蘇省南京) 사람.
〔14〕 《서호가화(西湖佳話)》의 전체 이름은 《서호가화고금유적(西湖佳話古今遺蹟)》이고, 16편이며, “고오 묵랑자(古吳墨浪子) 편집”이라고 쓰여 있음. 서호(西湖)의 명승지를 배경으로, 갈홍(葛洪), 백거이(白居易) 등의 이야기를 서술. 《매서한적(梅嶼恨跡)》은 《서호가화》 제14편으로, 풍소청(馮小青)의 이야기를 서술.
〔15〕 《금고기문》은 《성세항언(醒世恒言)》, 《서호가화(西湖佳話)》에서 선택한 5편 외에, 나머지 15편은 청나라 두강(杜綱)의 《오목성심편(娛目醒心編)》에서 선택하였고, 다른 한 편 《유상주득양우기연(劉孀姝得良遇奇緣)》은 청나라 무명씨(無名氏)가 편집한 《기재회편(紀載彙編)》 (서서일수(墅西逸叟)가 지은 《과허지(過墟志)》)에서 선택하였고, 《임예향행권계전절(林蕊香行權計全節)》은 청나라 왕도(王韜)가 지은 《둔굴난언(遁窟谰言)》 (권7 《영예향(寧蕋香)》)에서 선택하였음.
〔16〕 정일창(丁日昌) (1823—1882)의 자는 우생(雨生)이고, 청나라 풍순(豐順) (지금의 광동성(廣東省)에 속함) 사람. 1868년 강소순무(江蘇巡撫)를 지낼 때 두 차례에 걸쳐 음란한 사(詞)와 소설을 엄격히 금지할 것을 주청하였고, 금지한 책이 269종이나 됨.
제22편 청나라의 진당 소설 모방과 그 지류
당나라 사람의 소설은 단행본으로 전해지다가, 명나라에 이르러 십중팔구 흩어져 없어졌다. 송나라에서 《태평광기(太平廣記)》를 편찬하였으나, 또한 반포하지 않아, 거의 유전되지 않았으므로, 후에 우연히 그 책을 보고, 모방하여 글을 지으니,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기이하고 뛰어나다고 여겼다. 명나라 초기에, 전당(钱塘)의 구우(瞿佑)〔1〕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는 종길(宗吉)이고, 시로 이름이 있었고, 또한 소설 《전등신화(剪燈新話)》를 지었는데, 문장 제목과 의경이 모두 당나라 사람을 모방하였으나, 문체가 너무 번잡하고 나약하여 어울리지 않았지만, 여인의 정을 꾸미고, 아름다운 말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특히 당시의 유행에 맞아, 모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고, 금지령이 내려진 후에야, 그 풍조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가靖 연간에 이르러서야, 당나라 소설이 다시 나왔는데, 서적상들은 종종 《태평광기》의 글을 베껴, 다른 책과 섞어, 총서로 간행하였으니, 진위가 뒤섞여 있었지만, 꽤 성행하였다.〔2〕 문인들은 비록 본래 소설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또한 매번 기이한 사람, 협객, 아이, 심지어 호랑이, 개, 벌레, 개미까지 전기를 지어, 총서에 실었다. 전기 소설의 풍조가, 명나라 말기에 실제로 천하에 가득 차 있었고, 왕조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문 서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이(聊齋志異)》이다. 송령의 자는 유선(留仙), 호는 유천(柳泉)이고, 산동성 치천(山東淄川) 사람이고, 어릴 때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늙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생으로서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강희(康熙) 신묘년에 비로소 세공생(歲貢生)이 되었고(《요재지이》 서발), 4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86세였다(1630—1715)〔3〕, 지은 책으로는 《문집(文集)》 4권, 《시집(詩集)》 6권, 《요재지이》 8권(문집 부록에 장원이 지은 묘비가 붙어 있음), 및 《성신록(省身錄)》, 《회형록(懷刑錄)》, 《역자문(歷字文)》, 《일용속자(日用俗字)》, 《농상경(農桑經)》 등이 있다(이환의 《기헌유징(耆獻類徵)》 431). 그의 《지이》는 혹은 16권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모두 431편이고, 50세에 비로소 완성하였고, 스스로 제사(題辭)를 지었는데, 말하기를 “재주는 간보(干寶)만 못하지만, 귀신 이야기를 매우 좋아하고, 정은 황주(黃州)와 같아, 사람들이 귀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여, 한가하면 붓을 놀려, 이로써 책을 엮었다. 오래 지나자, 사방의 동지들이 또한 우편으로 보내 주어, 이로 인해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쌓인 것이 더욱 많아졌다.”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저장하고 수집한 것이 오래되었음을 말한다. 하지만 책 속의 사적은, 또한 당나라 전기 소설에서 전환되어 나온 것이 꽤 있다(예를 들어 《봉양사인(鳳陽士人)》, 《속황량(續黃粱)》 등), 이는 스스로 밝히지 않았으니, 아마 옛것을 모방하면서 또한 숨긴 것이다. 저자가 기이한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 문 앞에 차와 술을 차려 놓고, 농부와 시골 노인들을 불러, 억지로 이야기하게 하여 원고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5〕 다만 巷간의 이야기일 뿐이다.
《요재지이》는 비록 또한 당시의 같은 종류의 책과 같이, 신선, 여우, 귀신, 도깨비 이야기를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묘사가 자세하고, 서술이 정연하고, 전기 소설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괴이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변화무쌍한 모습이 눈앞에 있는 듯하다. 또한 혹은 가락을 바꾸고 줄을 바꾸어, 달리 기이한 사람의 행적을 서술하니, 환상의 세계에서 나와, 갑자기 인간 세상으로 들어간다. 간혹 자잘한 이야기를 서술할 때도, 또한 대부분 간결하므로, 독자들의 이목이 새로워진다. 또한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어양산인(渔洋山人) (왕사정)이 그 책을 매우 칭찬하여, 사려고 했으나 얻지 못했다고 하니,〔6〕 이로 인해 명성이 더욱 떨쳐, 다투어 베껴 썼다. 하지만 결국 저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간행되지 못했고, 건륭(乾隆) 말년에 비로소 엄주(嚴州)에서 간행되었다.〔7〕 후에 단명륜(但明倫), 여담은(呂湛恩) 모두 주석을 달았다.〔8〕
명나라 말년의 지괴(志怪) 서적들은, 대개 간략하고, 또한 대부분 황당하고 괴이하여, 허황되고 인정이 없었지만,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유독 자세한 것 외에, 평범함을 보여주어, 꽃 요괴와 여우 도깨비가, 대부분 인간적인 정을 갖게 하여, 친근하고 쉽게 다가가게 하여, 다른 종류임을 잊게 하고, 또한 간혹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여주어, 다시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한다. 예를 들어 《호해(狐諧)》에서 박흥(博興)의 만복(萬福)이 제남(濟南)에서 여우 여자와 결혼했는데, 여자가 우아하게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잘하여, 온 좌중을 매료시켰지만, 후에 갑자기 떠나갔으니, 모든 것이 보통 사람과 같았다. 《황영(黃英)》에서 마자재(馬子才)가 도씨(陶氏) 황영(黃英)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실은 국화 정령이었으니, 재산을 모아 이익을 취하니, 사람과 다름이 없었지만, 그의 동생이 술에 취해 쓰러지자, 갑자기 국화로 변하니, 곧 변화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어느 날, 술자리를 크게 열었는데, 만복이 주인 자리에 앉고, 손님과 두 손님이 좌우에 나누어 앉고, 아래에 평상을 놓고 여우를 앉히려고 하였다. 여우가 술을 잘 못한다고 사양하니, 모두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청하니, 허락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여러 사람들이 주사위를 던져 과만(瓜蔓)의 영(令)을 정했는데; 손님이 오이색을 만나자, 마땅히 마셔야 하니, 농담으로 술잔을 윗자리로 옮기며 말하길, “여우 아가씨는 매우 맑은 정신이니, 잠시 술 한 잔을 빌리겠습니다.”라고 하니, 여우가 웃으며 말하길, “저는 본래 술을 마시지 않으니, 원컨대 한 가지 고사(故事)를 이야기하여 여러 공들의 술 마시는 것을 돕겠습니다.”……손님들이 모두 말하길, “남을 욕하는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니, 여우가 웃으며 말하길, “제가 여우를 욕하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길, “좋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귀를 기울여 함께 들었다. 여우가 말하길, “옛날 한 대신이, 홍모국(紅毛國)에 사신으로 갔는데,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관을 쓰고 국왕을 보니, 국왕이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무슨 짐승의 털인데, 따뜻하고 두터운가?’라고 물으니, 대신이 ‘여우’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이 말하길 ‘이 짐승은 평생 들어 본 적이 없소. 여우라는 글자는 어떻게 쓰는가?’라고 하니, 사신이 허공에 글씨를 써서 아뢰길, ‘오른쪽에는 큰 오이이고, 왼쪽에는 작은 개입니다.’라고 했습니다.”라고 하니, 주인과 손님들이 또 다시 크게 웃었다.……몇 달을 지내고, 만복과 함께 돌아왔다.……일 년이 지나, 만복이 다시 제남에 일이 있어 갔는데, 여우 또한 함께 갔다. 갑자기 몇 사람이 오니, 여우가 함께 이야기하며, 극진히 안부를 물으니; 이에 만복에게 말하길, “저는 본래 섬서(陝西) 사람인데, 당신과 연분(缘分)이 있어, 드디어 당신을 따라 이만큼 있었으니, 지금 제 형제들이 왔으니, 함께 돌아가려 하니, 함께 지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만류하였지만, 되지 않고, 드디어 떠났다. (권5)
……도음(陶飲)은 평소 호탕하여, 취해 쓰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친구인 증생(曾生)이 있었는데, 주량 또한 대적할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말을 타고 마씨(馬氏)의 집에 들르자, 마씨가 도음과 술 내기를 시켰는데, 두 사람은……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각자 백 병의 술을 다 마시니, 증생은 진흙처럼 흠뻑 취하여, 앉은 채로 깊이 잠들었고, 도음은 일어나 잠자러 돌아갔는데, 문을 나서 국화밭을 밟자, 옥산(玉山)이 무너지듯 쓰러져, 옷을 옆에 벗어 놓으니, 그 자리에 국화로 변하였다. 키는 사람과 같고, 꽃은 열댓 송이 모두 주먹보다 컸다. 마씨는 깜짝 놀라, 황영(黃英)에게 알리니; 황영이 급히 가서, 뽑아 땅에 놓으며, 말하길, “어쩌다 이렇게까지 취했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옷을 덮어 주고, 마씨와 함께 떠나며, 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날이 밝아 다시 가 보니, 도음이 밭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으니, 마씨는 누이와 동생이 국화 정령임을 깨닫고,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도음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후, 술을 더욱 마음대로 마셨는데,……화조(花朝)를 맞아, 증생이 찾아와, 두 하인에게 약을 담근 백주 한 단지를 들려, 함께 다 마시자고 약속하였다.……증생은 이미 취하여 지쳐, 여러 하인들이 그를 부축하여 돌아갔다. 도음은 땅에 누워 또 국화로 변하였다; 마씨는 익숙하게 보아 놀라지 않고, 같은 방법으로 뽑아, 그 옆을 지키며 변화를 살펴보니, 오래 지나자, 잎이 점점 시들해지자, 크게 두려워하며, 비로소 황영에게 알렸다. 황영이 듣고, 깜짝 놀라 말하길, “내 동생을 죽였구나!”라고 하며 달려가 보니, 뿌리와 줄기가 이미 말라 있었다; 너무나도 아파하며, 줄기를 잘라 화분에 심고, 방으로 들여와, 날마다 물을 주었다. 마씨는 후회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증생을 매우 미워하였다. 며칠 지나, 증생이 이미 술에 취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화분 속의 꽃이 점점 싹이 트더니, 9월이 되자, 이미 피었는데, 짧은 줄기에 흰 꽃송이가 피었고, 냄새를 맡으니 술 향기가 났으니, 이름을 “취도(醉陶)”라고 하였고, 술을 주면 무성하게 자랐다.……황영은 늙어 죽을 때까지, 다른 이상한 일은 없었다. (권4)
또한 인간 세상을 서술할 때도, 또한 다만 묘사하는 데 그쳐, 지나쳐서 정도를 잃으니, 《마개보(馬介甫)》라는 편에서 양씨(楊氏)에게 사나운 아내가 있어, 시아버지를 학대하고, 또한 손님을 함부로 대하는데, 형제들은 다만 두려워하여, 손님을 대할 때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한다:
……약 반 년이 지나, 마씨가 갑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양씨의 집에 들르니, 바로 양 노인이 문밖에서 햇볕을 쬐며 이를 잡고 있었는데, 하인으로 의심하여, 성씨를 전하여 주인에게 알리게 하였다; 노인은 이불을 덮고 들어가니, 혹은 마씨에게 알리길, “이분이 바로 그 노인입니다.”라고 하니, 마씨가 비로소 놀라니, 양씨 형제들이 두건을 쓰고 나와 맞이하며, 대청에 올라 읍하고, 곧 아버지를 뵈러 가자고 청하니, 만석(萬石)은 우연한 병으로 사양하고, 앉아서 웃으며 이야기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만석이 여러 번 밥상을 차리라고 말했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으니, 형제들이 번갈아 드나드니, 비로소 마른 하인이 술 한 병을 들고 왔는데, 잠시 후 다 마시니, 앉아서 오랫동안 기다리니, 만석이 자주 일어나 재촉하니, 이마와 뺨 사이에 뜨거운 땀이 솟아올랐다. 이윽고 마른 하인이 반찬을 가지고 나왔는데, 거친 쌀밥에 반찬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매우 맛이 없었다. 밥을 먹고 나서, 만석은 허둥지둥 곧 떠났다; 만종(萬鍾)이 이불을 가지고 와 손님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권10)
각 권의 말미에, 항상 짧은 글을 덧붙였는데, 사건을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여, 전기 소설의 필법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몇 줄이면 끝나니, 육조(六朝)의 지괴와 가깝다. 또한 《요재지이습유(聊齋志異拾遺)》 1권 27편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주워 모은 것이고; 그중에는 뛰어난 작품이 없으니, 아마 본 저자가 스스로 삭제한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모방하여 지은 것일 것이다.
건륭(乾隆) 말년, 전당(钱塘)의 원매(袁枚)〔10〕가 《신제해(新齊諧)》 24권, 속집 10권을 지었는데, 처음 이름은 《자불어(子不語)》였으나, 후에 원나라 사람의 설부(說部)에 같은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이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서문에서 이르길 “망령된 말을 망령되이 듣고, 기록하여 보존할 뿐, 어떤 감회가 있어서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글은 꾸밈을 없애고, 도리어 자연에 가까웠지만, 너무 함부로 쓴 경향이 있어, 또한 쓸데없는 내용이 많으니, 스스로 “희편(戲編)”이라고 쓴 것이, 그 실상을 얻은 것이다. 만약 순전히 《요재》를 모방한 것으로는, 당시 오문(吳門)의 심기봉(沈起鳳)이 지은 《해탁(諧鐸)》〔11〕 10권(건륭 56년 서문)이 있는데, 뜻이 너무 희롱에 치우쳤고, 문장 또한 가늘고 좁았다; 만주족 화방액(和邦額)〔12〕이 지은 《야담수록(夜譚隨錄)》 12권(역시 56년 서문)은, 다른 책의 내용을 많이 빌려 왔으니(예를 들어 《동기각(佟觭角)》, 《야성자(夜星子)》, 《양의(瘍醫)》는 모두 《신제해》에 근본을 두었다), 모두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고, 어휘와 기세 또한 때때로 거칠고 난폭함을 잃지 않았지만, 변방의 풍경과 시정의 상황을 기록한 것은 특히 볼 만하다. 다른 것으로는 장백(長白) 호가자(浩歌子)〔13〕의 《형창이초(螢窗異草)》 3편 12권(건륭 연간에 지은 듯함, 별도로 4편 4권이 있는데, 서적상이 위조한 것이다). 해창(海昌) 관세호(管世灝)〔14〕의 《영담(影談)》 4권(가경 6년 서문), 평호(平湖) 풍기봉(馮起鳳)〔15〕의 《석류척담(昔柳摭談)》 8권(가경 연간에 지음), 근래에는 금궤(金匱) 추도(鄒弢)〔16〕의 《요수집(澆愁集)》 8권(광서 3년 서문)이 있는데, 모두 지이(志異)로, 또한 모두 《요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직 서여예손(黍余裔孫)〔17〕의 《육합내외쇄언(六合內外瑣言)》 20권(가경 초년에 지은 듯함) 또는 《쇄잡기(璅雜記)》라는 이름의 책은, 일부러 기이하고 심오한 어휘를 사용하고, 풍자와 비유를 숨겨 놓았으니, 그 체제는 이전 작가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뜻은 얕고 박약하다; 김무상(金武祥)〔18〕(《강음예문지(江陰藝文志)》 하)의 말에 따르면, 강음(江陰)의 도신(屠紳) 자 현서(賢書)의 작품이라고 한다. 신은 또한 《악정시화(鶚亭詩話)》 1권이 있는데, 문사가 비교적 간략하고, 또한 모두 기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 풍격을 살펴보면, 실로 이러한 종류이다.
《요재지이》가 백 년이 넘도록 유행하니, 모방하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기윤(紀昀)에 이르러 비판적인 의견이 있었다. 성시언(盛時彦)〔19〕(《고망청지(姑妄聽之)》 발)이 그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길, “《요재지이》는 한때 매우 유행했지만, 재주 있는 사람의 필치이지, 책을 쓰는 사람의 필치는 아니다. 우초(虞初) 이하 천보(天寶) 이상 고서는 많이 없어졌다; 그 완전한 책을 볼 수 있는 것은, 유경숙(劉敬叔)의 《이원(異苑)》, 도잠(陶潛)의 《속수신기(續搜神記)》는, 소설류이고, 《비연외전(飛燕外傳)》, 《회진기(會真記)》는, 전기류이다. 《태평광기(太平廣記)》는 일을 종류별로 모았으므로, 함께 실을 수 있지만; 지금 한 책이 두 가지 체제를 겸하니, 이해하지 못할 바이다. 소설은 이미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하니, 곧 서사에 속하고, 연극의 장면과는 달라서, 마음대로 꾸밀 수 없다;……”
지금 요염하고 친밀한 어휘와, 아첨하고 간사한 태도를, 세밀하고 구불구불하게, 마치 살아 있는 듯 묘사하여, 당사자가 직접 말한 것이라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고, 작가가 대신 말한 것이라고 하면, 어디에서 보고 들었겠는가, 또한 이해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당나라 전기 소설의 자세함이 있으면서, 또한 육조 지괴의 간략함이 섞여 있으니, 스스로 서술한 글이 아니면서, 오로지 묘사하는 데 뜻을 다한 것이다. 윤(昀)의 자는 효람(曉嵐)이고, 직례 헌현(直隸獻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용서(容舒)이고, 요안 지부(姚安知府)를 지냈다. 윤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24세에 순천 향시(順天鄉試) 해액(解額)을 받았으나, 31세에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고, 편수(編修)에서 시독학사(侍讀學士)에 이르렀고, 기밀을 누설한 일로 울루무치(烏魯木齊)로 귀양 갔다가, 3년 뒤에 소환되어, 편수를 제수받았고, 또 3년 뒤에 시독으로 승진하였고,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총찬(總纂)을 맡아, 서국(書局)을 13년 동안 관장하였으니, 일생의 정력을, 모두 《사고제요(四庫提要)》 및 《목록(目錄)》에 쏟았으므로, 다른 저술은 매우 적다. 후에 여러 번 승진하여 예부상서(禮部尚書)에 이르렀고, 경연 강관(經筵講官)을 겸하였고, 이로부터 또 총헌(總憲)을 다섯 번, 예부장(禮部長)을 세 번 지냈다(이원도(李元度)의 《국조선정사략(國朝先正事略)》 20). 건륭 54년, 비적(秘籍)을 편찬하기 위해 열하(熱河)에 갔는데, “당시 교리(校理)가 오래도록 끝나지 않아, 특별히 감독하는 관리에게 서명하고 서가에 꽂아 두도록 하였을 뿐, 낮 시간이 길어도 할 일이 없었다.”라고 하여, 보고 들은 것을 추록하여, 패설(稗說) 6권을 지으니,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이라고 하였다. 2년 뒤, 《여시아문(如是我聞)》을 지었고, 다음 해에 또 《괴서잡지(槐西雜志)》를 지었고, 다음 해에 또 《고망청지(姑妄聽之)》를 지었으니, 모두 4권이다; 가경 3년 여름에 다시 열하에 이르러, 또 《난양속록(灤陽續錄)》 6권을 완성하였으니, 당시 나이가 이미 75세였다. 2년 뒤, 그의 문인 성시언(盛時彦)이 합쳐서 간행하니, 이름을 《열미초당필기 오종(閱微草堂筆記五種)》(이 책)이라고 하였다. 10년 정월, 다시 예부로 옮겨,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에 임명되었고, 태자소보(太子少保)를 더하였고, 국자감사(國子監事)를 관장하였다; 2월 14일에 관직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82세였다(1724—1805), 시호는 “문달(文達)”이다(《사략(事略)》).
《열미초당필기》는 비록 “날을 보내기 위한” 책이지만, 법칙이 매우 엄격하니, 그 체요(體要)를 들자면, 질박함을 숭상하고 화려함을 물리치고, 진(晉)나라와 송(宋)나라를 따르는 데 있으니; 서문에서 이르길, “옛날 작가들처럼 왕중임(王仲任), 응중원(應仲遠)이 경전을 인용하고 옛일을 근거로 하여, 널리 변론하고 크게 통달하였고, 도연명(陶淵明), 유경숙(劉敬叔), 유의경(劉義慶)은 간략한 몇 마디 말로, 자연스럽고 심오한 뜻을 나타내었으니, 진실로 감히 앞선 사람들을 함부로 모방하지 못하지만, 큰 뜻은 풍속과 교화에 어긋나지 않기를 기한다.”〔20〕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그의 규범이 이와 같으므로, 《요재》의 전기 소설을 취하는 방법과는 길이 저절로 다르지만, 진송(晉宋) 사람의 책과 비교하면, 《열미》는 또 논의(論議)에 너무 치우쳐 있다. 대개 단지 소설만 지으려 하지 않고, 더욱 사람들의 마음에 유익하고자 하니, 곧 진송 지괴의 정신과는, 저절로 거리가 멀어지고; 또한 말류(末流)가 더욱 심해지면, 보응인과(報應因果)의 이야기로 떨어지기 쉽다.
오직 기윤은 본래 문필이 뛰어나고, 비서(秘书)를 많이 보았으며, 또한 마음이 넓고 시원하였으므로, 귀신의 정황을 헤아리고, 인간 세상의 은미한 이치를 드러내며, 여우 귀신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펼치는 데 있어, 뛰어난 생각과 묘한 말로, 때때로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고; 간혹 고증과 변론을 섞으니, 또한 명확한 견해가 있었다. 서술 또한 너그럽고 담담하며, 자연스러운 흥취가 가득하였으므로, 후에 아무도 그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었으니, 진실로 단지 지위가 높고 명망이 높아서 전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제 비교적 간단한 것 세 가지를 아래에 제시한다:
유을재(劉乙齋) 정위(廷尉)가 어사(御史)였을 때, 일찍이 서하(西河) 연안의 한 집을 빌렸는데, 매일 밤 여러 사람이 딱딱이를 치니, 소리가 낭랑하게 새벽까지 울려 퍼져,……보니 형체가 없으니, 귀에 거슬려 잠시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을재는 본래 강직하였으므로, 이에 직접 글 한 편을 지어, 그 죄를 지적하고, 크게 써서 벽에 붙여 쫓으니, 그날 밤 조용해졌다. 을재는 스스로 창려(昌黎)가 악어를 쫓은 것보다 못하지 않다고 자랑하였다. 내가 말하길 “그대의 문장과 도덕은, 아마 아직 창려에 미치지 못하지만, 성품이 강직하고 기세가 왕성하여, 평생 애매한 일을 하지 않으므로, 감히 당당하게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어렵게 이 집으로 이사 왔으니, 힘이 다하여 다시 이사할 수 없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어, 오직 귀신과 죽을힘을 다해 맞서는 것뿐이니: 이는 그대에게는 ‘궁지에 몰린 짐승이 오히려 싸운다’는 것이고, 귀신에게는 ‘궁한 도적은 쫓지 말라’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니, 을재가 웃으며 내 등을 치며 말하길, “위수(魏收)가 경박하구나! 하지만 그대가 나를 아는구나.”라고 하였다. (《난양소하록》 6)
전백암(田白岩)이 말하길, “일찍이 여러 친구들과 부기(扶乩)를 하였는데, 그 신선이 스스로 진산민(真山民)이라 칭하며, 송나라 말년의 은군자라고 하였는데, 시를 주고받는 것이 한창 즐거울 때, 밖에서 아무 손님 아무 손님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부기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날 다시 내려오자, 여러 사람들이 어제 갑자기 간 이유를 물으니, 부기가 써서 말하길, ‘이 두 분은, 한 분은 세상일에 너무 능숙하고, 사교에 너무 익숙하여, 만나면 반드시 아첨하는 말이 수백 마디 있을 것이니, 운수산인(雲水散人)은 응대하는 데 서투르니, 피하는 것이 나은 것이고; 한 분은 마음씀이 너무 꼼꼼하고, 예의가 너무 분명하여,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항상 한 글자 한 글자 따져, 끝없이 책망하니, 한가로운 구름과 들의 학이 어찌 이러한 가혹한 요구를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망가는 것을 더욱 서두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에 선 요안공(姚安公)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길, “이 신선은 결국 고결한 선비이지만, 도량이 넓지 못하구나.”라고 하였다. (《괴서잡지》 1)
이의산(李義山)의 시 ‘헛되이 자야의 귀신 슬픈 노래를 듣네(空聞子夜鬼悲歌)’는, 진나라 때 귀신 노래 《자야》의 일을 쓴 것이고; 이창곡(李昌谷)의 시 ‘가을 무덤에서 귀신이 포씨 집안의 시를 노래하네(秋墳鬼唱鮑家詩)’는, 포참군(鮑參軍)에게 《호리행(蒿里行)》이 있으니, 그 말을 빌린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실로 종종 이러한 일이 있다. 전향심(田香沁)이 말하길, “일찍이 별장에서 책을 읽었는데, 어느 날 밤 바람이 잔잔하고 달이 밝으니, 곤곡(昆曲)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니, 맑고 낭랑하며, 마음을 슬프게 하고 혼을 흔들었으니,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모란정(牡丹亭)》의 《규화(叫畫)》 한 장면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잊고, 끝까지 귀 기울여 들었다. 갑자기 깨달으니 담장 밖은 모두 끊어진 개울과 황폐한 언덕이고, 인적이 드무니, 이 곡조가 어디에서 왔겠는가? 문을 열고 보니, 오직 갈대만 쓸쓸히 흔들릴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고망청지》 3)
윤은 또한 “천성이 고독하고 강직하여, 심성(心性)에 대한 헛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고, 문벌을 내세우지 않았다.”(성씨의 서문)라고 하니, 그의 처신은 너그러움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논할 때는 용서하고자 하였으므로, 송나라 유학자들의 가혹한 비판에 대해, 특별히 반대하는 말을 하였으니, 책 속에 언급된 것이 곧바로 드러나니, 《사고총목제요》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 또한 인정에 맞지 않는 논리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익숙하게 여기고 살피지 않는 것에 대해, 또한 매번 의문을 제기하여, 그 고루함을 드러내니, 이는 이전의 여러 작가들이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시끄럽게 다투어 권선징악의 훌륭한 작품으로 칭찬한다.
오혜숙(吳惠叔)이 말하길, “어떤 의원이 매우 신중하고 후덕하였는데, 어느 날 밤, 한 노파가 금팔찌 한 쌍을 가지고 와 낙태약을 사러 왔으니, 의원이 크게 놀라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다음 날 밤, 또 진주 꽃 두 가지를 더 가지고 오니, 의원이 더욱 놀라며, 힘껏 내쫓았다. 반 년 남짓 지나, 갑자기 꿈에 명부(冥府)에 붙잡혀 갔는데, 자신을 살인죄로 고소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가 보니,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목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울면서 약을 구했으나 주지 않은 상황을 진술하였다. 의원이 말하길, ‘약은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것이니, 어찌 감히 사람을 죽여 이익을 취하겠는가. 네가 스스로 간통하여 패륜을 저질렀으니, 나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여자가 말하길, ‘제가 약을 구할 때, 아이는 아직 형체를 이루지 못했으니, 만약 낙태할 수 있었다면, 저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무지한 핏덩이를 없애고, 장차 다할 목숨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약을 얻지 못하니, 낳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아이는 질식사당했고, 온갖 고통을 받았고, 저 또한 억지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는 당신이 한 목숨을 온전히 하려다, 도리어 두 목숨을 해친 것입니다. 죄가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명관(冥官)이 탄식하며 말하길, ‘네가 말한 것은, 상황의 형편을 헤아린 것이고; 저 사람이 고집하는 것은 이치이다. 송나라 이후로 오직 한 가지 이치만 고집하고 상황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는, 오직 이 사람뿐이구나? 너는 이제 그만 물러가라!’라고 하며 책상을 치니 소리가 났고, 의원은 두려워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여시아문(如是我聞)》 3)
동광(東光)에 왕망하(王莽河)가 있는데, 곧 호소하(胡蘇河)이다, 가물면 마르고, 물이 불면 불어나, 매번 건너는 것이 어려웠다. 외삼촌 마공(馬公) 주록(周箓)이 말하길, “옹정(雍正) 말년에 한 걸인 여자가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병든 시어머니를 부축하며 이 물을 건너는데, 시냇물 한가운데 이르러, 시어머니가 넘어져 쓰러지니, 여자가 아이를 물에 버리고, 힘껏 시어머니를 부축하여 나왔다. 시어머니가 크게 꾸짖으며 말하길, ‘나는 일흔 노파이니, 죽은들 무슨 해가 있겠느냐? 장씨(張氏)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이 아이로 종사를 이으니, 네가 어찌 아이를 버리고 나를 구하느냐? 조상의 제사를 끊는 자는, 바로 너이다!’라고 하니, 여자는 울면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틀 지나, 시어머니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 밥을 먹지 않고 죽었고; 여자는 흐느껴 울며 소리를 내지 못하고, 멍하니 며칠을 앉아 있다가, 또한 말라 죽었다.……논하는 자가 있어, 아이와 시어머니를 비교하면 시어머니가 중요하고, 시어머니와 조상을 비교하면 조상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만약 여자가 남편이 있거나, 혹은 형제가 있었다면, 아이를 버리는 것이 옳고; 이미 두 대에 걸쳐 과부이고, 오직 하나의 외아들만 있다면, 시어머니가 꾸짖는 것이 옳으니: 여자는 비록 죽었지만, 남은 후회가 있을 것이다. 요안공(姚安公)이 말하길, ‘강학하는 사람들은 남을 책망하기를 그칠 때가 없다. 거센 물살이 들이치면, 조금만 늦춰도 곧 휩쓸려 가니, 어찌 능히 깊이 생각하고 오래도록 헤아릴 수 있겠는가? 형세가 양쪽을 다 온전히 할 수 없다면, 아이를 버리고 시어머니를 구하는 것이, 천리(天理)의 바른 것이고 인심이 편안히 여기는 것이다. 만약 시어머니는 죽고 아이가 살아남았다면,……또 아이를 사랑하고 시어머니를 버렸다고 책망하는 세상이 있지 않겠는가? 또한 아이는 겨우 안고 있는 상태이니, 기를지 못 기를지 알 수 없으니, 만약 시어머니는 죽고 아이 또한 자라지 못한다면, 후회가 더욱 어떠하겠는가? 이 여자가 한 행동은, 평범한 정을 훨씬 뛰어넘었으니, 불행히도 그 시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음으로 따랐으니, 또한 슬프다. 오히려 고집스럽게 입을 놀리며, 정밀한 이치의 학문이라고 여기니, 어찌 백골이 원한을 품고, 황천(黃泉)에서 한을 품지 않겠는가? 손복(孫復)이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를 지었는데, 240년 안에 깎아내리기만 하고 칭찬하는 것이 없었고; 호치당(胡致堂)이 《독사관견(讀史管見)》을 지었는데, 삼대(三代) 이후로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니, 분별하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지만,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괴서잡지(槐西雜志)》 2)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이 막 탈고되자, 곧 서점에서 간행되어, 이내 《요재지이》와 맞섰고; 《여시아문(如是我聞)》 등이 잇따르니, 유행이 더욱 넓어졌다. 그 영향이 미친 바는, 문인들이 모방하여 작품을 짓게 하였으니, 비록 여전히 《요재》의 남은 풍습이 있었지만, 세밀하게 묘사하는 필치는 크게 줄어들고, 마침내 송(宋)나라와 명(明)나라 사람들의 담이(談異) 서적과 유사해졌다. 예를 들어 동시대의 임천(臨川) 악균(樂鈞)〔21〕의 《이식록(耳食錄)》 12권(건륭 57년 서문), 《이록(二錄)》 8권(59년 서문), 후에 나온 해창(海昌) 허추차(許秋垞)〔22〕의 《문견이사(聞見異辭)》 2권(도광 26년 서문), 무진(武進) 탕용중(湯用中)〔23〕의 《익경패편(翼駉稗編)》 8권(28년 서문) 등은, 모두 그러한 부류이다. 장주(長洲) 왕도(王韜)가 《둔굴난언(遁窟谰言)》(동치 원년에 완성) 《송은만록(淞隱漫錄)》(광서 초년에 완성) 《송빈쇄화(淞濱瑣話)》〔24〕(광서 13년 서문) 각 12권을 짓고, 천장(天長) 선정(宣鼎)〔25〕이 《야우추등록(夜雨秋燈錄)》 16권(광서 21년 서문)을 짓기에 이르러서는, 그 필치가 또 순전히 《요재》의 흐름을 따랐으니, 한때 널리 퍼졌지만, 기록한 내용은 이미 여우 귀신은 점점 드물어지고, 연화 분대(煙花粉黛)의 일이 성행하였다.
체제가 기씨(紀氏)의 다섯 책과 비교적 가까운 것으로는, 운간(雲間) 허원중(許元仲)〔26〕의 《삼이필담(三異筆談)》 4권(도광 7년 서문), 덕청(德清) 유홍점(俞鴻漸)〔27〕의 《인설헌수필(印雪軒隨筆)》 4권(도광 25년 서문)이 있는데, 후자는 《열미》를 매우 칭송하면서, “그중 송나라 유학자들을 배척하는 말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조금 흠이다.”(권2)라고 하였으니, 지향하는 바가 실로 다르다. 광서 연간에, 덕청 유월(俞樾)〔28〕이 《우태선관필기(右台仙館筆記)》 16권을 지었는데, 오직 기이한 이야기만 서술하고, 인과응보를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양주옹(羊朱翁)(역시 유월)이 《이우(耳郵)》 4권을 지었는데, 스스로 “희편(戲編)”이라고 썼고, 서문에서 이르길 “뜻을 쓰고 말을 쓴 것이, 또한 선악의 보응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단지 세월을 보내기 위한 것이니, 감히 권선징악에 뜻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자못 《신제해(新齊諧)》를 본받은 듯하지만, 기록이 간략하고 우아하니, 곧 《열미》와 유사하지만, 내용은 매우 다르니, 귀신 이야기는 십 분의 일에 불과할 뿐이다. 다른 것으로는 강음(江陰) 김봉창(金捧阊)〔29〕의 《객창우필(客窗偶筆)》 4권(가경 원년 서문), 복주(福州) 양공신(梁恭辰)〔30〕의 《지상초당필기(池上草堂筆記)》 24권(도광 28년 서문), 동성(桐城) 허봉은(許奉恩)〔31〕의 《이승(里乘)》 10권(아마 도광 연간에 지은 듯함) 또한 기이한 일을 기록하여, 겉모습은 지괴와 같은 부류이지만, 화복(禍福)을 크게 진술하고, 오로지 권선징악을 주장하니, 이미 소설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하다.
〔1〕 구우(瞿佑, 1341—1427)의 자는 종길(宗吉)이며, 명나라 전당(钱塘,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 사람이다. 일찍이 국자조교(國子助教), 주왕부 장사(周王府長史)를 지냈다. 저서로는 《존재유고(存齋遺稿)》, 《귀전시화(歸田詩話)》 등이 있다. 지은 책인 《전등신화(剪燈新話)》는 4권, 21편으로, 당나라 사람의 전기 소설을 모방하였다. 청나라 황우직(黃虞稷)의 《천경당서목(千頃堂書目)》 자부 소설류 주석에 따르면, “구우는 또한 《전등여화(剪燈餘話)》(주: 《신화(新話)》로 써야 함)가 있는데, 정통(正統) 7년 계유년에 이시면(李時勉)이 그 책의 금지와 소각을 청하였으므로, 이정(李楨)의 《여화(餘話)》와 함께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2〕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이후 설부(說部)를 모아 총서로 간행한 것으로는, 육즙(陸楫) 등이 편집 간행한 《고금설해(古今說海)》, 이식(李栻)이 편집 간행한 《역대소사(歷代小史)》, 오관(吳琯)이 편집 간행한 《고금일사(古今逸史)》, 왕문호(王文浩)가 편집 간행한 《당인설췌(唐人說薈)》(또는 《당대총서(唐代叢書)》) 등이 있다. 이 책들은 진위가 뒤섞여 있으므로, 루쉰(魯迅)은 《파당인설췌(破唐人說薈)》, 《당송전기집(唐宋傳奇集)》 서례 등의 글에서 비판한 바 있다.
〔3〕 포송령(蒲松齡)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청나라 장원(張元)의 《유천포선생묘표(柳泉蒲先生墓表)》에서, 송령이 “강희(康熙) 54년(1715) 정월 22일에 졸하였고, 향년 76세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출생 연도는 숭정(崇禎) 13년(1640)으로 추정된다.
〔4〕 황주(黃州)는 여기에서 북송 시대에 황주로 좌천되었던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송나라 엽몽득(葉夢得)의 《피서록화(避暑錄話)》 권1에, “자첨(子瞻, 소식의 자)이 황주와 영표(嶺表)에 있을 때, 매일 아침 일어나, 손님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가서 손님을 방문하였다.……이야기하고 농담하는 것이 자유분방하여, 다시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야기를 잘 못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억지로 귀신 이야기를 시켰고; 혹은 없다고 하면, ‘일단 망령된 이야기를 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고, 모두 즐겁게 돌아갔다.”라고 한다.
〔5〕 포송령이 기이한 이야기를 수집한 일에 대해서는, 추도(鄒弢)의 《삼차려필담(三借廬筆談)》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선생이 향리에 거주할 때,……이 책을 지을 때, 매일 새벽, 큰 사기 항아리를 가지고, 그 안에 쓴 차를 담고, 담배 한 봉지를 갖추어, 행인들이 다니는 큰 길가에 놓고, 갈대 자리를 깔고, 그 위에 앉아, 담배와 차를 곁에 두었다. 길을 가는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억지로 붙잡아 이야기를 나누고, 기이한 이야기를 찾았으니, 사람들의 아는 바를 따랐고, 목이 마르면 차를 마시게 하거나, 혹은 담배를 권하였으니, 반드시 마음껏 이야기하게 한 후에야 그만두게 하였다. 우연히 한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 돌아와서 윤색하였다. 이와 같이 20여 년 동안, 이 책이 비로소 완성되었다.”라고 한다.
〔6〕 왕사정(王士禎)이 《요재지이》를 사려고 했던 일에 대해서는, 청나라 육이념(陸以恬)의 《냉려잡식(冷廬雜識)》에 이르길, “포씨 송령의 《요재지이》가 국내에 널리 퍼져, 거의 집집마다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어양산인(漁洋山人, 왕사정의 호)이 이 책을 매우 중히 여겨, 500금(金)으로 사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예홍(倪鴻)의 《동음청화(桐陰清話)》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루쉰의 《소설구문초(小說舊聞鈔)》 중 《요재지이》 조의 안어(按語)에서 지적하길, “왕어양이 《요재지이》의 원고를 사려고 했던 일과 포유선(蒲留仙, 포송령의 호)이 억지로 길 가는 사람을 붙잡아 기이한 이야기를 하게 했던 두 가지 일은, 가장 근거가 없지만,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즐겨 전하니, 이상하다.”라고 한다.
〔7〕 여기서 말하는 《요재지이(聊齋志異)》가 처음 간행된 곳이 엄주(嚴州)라는 것은, 건륭(乾隆) 31년(1766) 청가정(青柯亭) 간행본, 조기고(趙起杲)가 간각한 것을 가리킨다. 엄주는, 치소(治所)가 지금의 저장성 건더(建德)에 있다.
〔8〕 단명륜(但明倫)의 자는 천서(天敘), 또는 운호(雲湖)이며, 청나라 광순(廣順, 지금의 구이저우성 창순) 사람이고, 일찍이 양회염운사(兩淮鹽運使)를 지냈다. 그가 주석한 《요재지이》는 도광(道光) 22년(1842)에 간행되었다. 여담은(呂湛恩)은 청나라 문등(文登, 지금의 산둥성에 속함) 사람이며, 그가 지은 《요재지이》의 주석은, 일찍이 도광 5년(1825)에 단독으로 간행되었고, 도광 23년(1843) 주석과 《요재지이》 원문이 합각되었다.
〔9〕 《요재지이습유(聊齋志異拾遺)》 1권 27편 본은 보이지 않는다. 별도로 도광 10년(1830) 득월이총서(得月簃叢書) 본 《요재지이습유》 1권, 광서 4년(1878) 베이징 거진당(聚珍堂) 본 《요재습유(聊齋拾遺)》 4권 등이 있다.
〔10〕 원매(袁枚, 1716—1798)의 자는 자재(子才), 호는 간재(簡齋), 수이원노인(隨園老人)이며, 청나라 전당(錢塘,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 사람이고, 일찍이 강포(江浦), 강녕(江寧) 등의 현지현(縣知縣)을 지냈다. 저서로는 《소창산방집(小倉山房集)》, 《수원시화(隨園詩話)》 등이 있다.
〔11〕 심기봉(沈起鳳, 1741—?)의 자는 동위(桐威), 호는 홍심사객(紅心詞客)이며, 청나라 오현(吳縣, 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이다. 지은 책은 《해탁(諧鐸)》 12권이다.
〔12〕 화방액(和邦額)의 자는 한재(閑齋), 호는 제운주인(霽雲主人)이며, 청나라 만주족 사람이다.
〔13〕 호가자(浩歌子)는 곧 윤경란(尹慶蘭)이며, 자는 사촌(似村)이고, 청나라 만주 양황기(鑲黃旗) 사람이다.
〔14〕 관세호(管世灝)의 자는 월미(月楣)이며, 청나라 해창(海昌, 지금의 저장성 하이닝) 사람이다.
〔15〕 풍기봉(馮起鳳)의 자는 자화(梓華)이며, 청나라 평호(平湖, 지금의 저장성에 속함) 사람이다.
〔16〕 추도(鄒弢)의 자는 한비(翰飛), 호는 소상관시자(蕭湘館侍者)이며, 청나라 금궤(金匱, 지금의 장쑤성 우시) 사람이다. 저서로는 《삼차려필담(三借廬筆談)》 등이 있다.
〔17〕 서여(黍余)의 후손은 곧 도신(屠绅)이니, 이 책의 제25편을 참고하라.
〔18〕 김무상(金武祥, 1841—1924)의 자는 창생(淐生), 호는 속향(粟香)이며, 청나라 말기 강음(江陰, 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이다. 저서로는 《속향수필(粟香隨筆)》, 《강음예문지(江陰藝文志)》 등이 있다.
〔19〕 성시언(盛時彥)의 자는 송운(松雲)이며, 청나라 북평(北平, 지금의 베이징) 사람이다. 기윤(紀昀)의 문인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 서문에서 보인다.
〔20〕 이 단락의 인용문은 《열미초당필기·고망청지(姑妄聽之)》 서문에서 보인다.
〔21〕 악균(樂鈞)의 자는 원숙(元淑), 호는 연상(蓮裳)이며, 청나라 임천(臨川, 지금의 장시성에 속함) 사람이다. 저서로는 《청지산관시집(青芝山館詩集)》이 있다.
〔22〕 허추차(許秋垞)는 청나라 해창(海昌, 지금의 저장성 하이닝) 사람이다. 저서로는 《비파연의(琵琶演義)》 등이 있다.
〔23〕 탕용중(湯用中)의 자는 지경(芷卿)이며, 청나라 상주(常州, 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이다.
〔24〕 왕도(王韜, 1828—1897)의 자는 자전(紫詮), 호는 중도(仲弢), 또한 천남둔수(天南遁叟)라고도 하며, 청나라 장주(長洲, 지금의 장쑤성 우현) 사람이다. 저술과 번역이 매우 많다. 지은 책인 《송은만록(淞隱漫錄)》은, 또한 《후요재지이(後聊齋志異)》라고도 하며; 《송빈쇄화(淞濱瑣話)》는, 또한 《송은속록(淞隱續錄)》이라고도 한다.
〔25〕 선정(宣鼎, 1834—1879)의 자는 수매(瘦梅)이며, 청나라 천장(天長, 지금의 안후이성에 속함) 사람이다. 저서로는 《반혼향전기(返魂香傳奇)》 등이 있다.
〔26〕 허원중(許元仲)의 자는 소구(小歐)이며, 청나라 송강(松江, 지금의 상하이에 속함) 사람이다.
〔27〕 유홍점(俞鴻漸, 1781—1846)의 자는 의백(儀伯)이며, 청나라 덕청(德清, 지금의 저장성에 속함) 사람이다. 저서로는 《인설헌문초(印雪軒文鈔)》, 《인설헌시초(印雪軒詩抄)》 등이 있다.
〔28〕 유월(俞樾, 1821—1907)의 자는 음보(蔭甫), 호는 곡원(曲園)이며, 청나라 덕청 사람이다. 저술이 매우 많으며, 총칭하여 《춘재당전서(春在堂全書)》라고 한다.
〔29〕 김봉창(金捧阊, 1760—1810)의 자는 개당(玠堂)이며, 청나라 강음(江陰, 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이다. 지은 책인 《객창우필(客窗偶筆)》은, 원래 8권이었으나, 후에 흩어져 없어졌고, 그의 손자가 4권을 모아, 《객창이필(客窗二筆)》 1권과 합쳐서 간행하였다.
〔30〕 양공신(梁恭辰)의 자는 경숙(敬叔)이며, 청나라 복주(福州, 지금의 푸젠성에 속함) 사람이다.
〔31〕 허봉은(許奉恩)의 자는 숙평(叔平)이며, 청나라 동성(桐城, 지금의 안후이성에 속함) 사람이다.
제23편 청나라의 풍자 소설
패사(稗史)에 비웃음과 비판을 담는 것은 진(晉)나라와 당(唐)나라에도 있었으나, 명(明)나라에 이르러 성행하였고, 특히 인정 소설(人情小說)에서 그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소설은, 대개 한 명의 평범한 사람을 설정하여, 그의 못나고 열등한 모습을 극도로 묘사하고, 이를 통해 준수한 선비를 부각시켜, 그의 재능과 화려함을 드러내므로, 종종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 재능의 쓰임이 ‘익살’에 비유된다.
비교적 뛰어난 작품의 경우, 묘사할 때 또한 매우 날카롭고, 비판의 날카로움은 칼날을 넘어서기도 하지만, 《서유보(西遊補)》 외에는, 매번 한 사람 혹은 한 가문에 집중되는 듯하니,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악한 말을 퍼뜨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니, 세상일에 불만이 있어서 붓을 들어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무리를 꾸짖는 것에 가까운 것으로는, 《종규착귀전(鍾馗捉鬼傳)》 10회가 있는데, 아마 명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 여겨지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취하여, 여러 귀신에 비유하여, 하나하나 파헤쳐, 그 숨겨진 사정을 드러내지만, 어휘와 뜻이 천박하게 드러나, 이미 욕설과 같으니, 이른바 ‘완곡(婉曲)’은, 실로 알지 못하는 바이다. 오경재(吳敬梓)의 《유림외사(儒林外史)》가 나오자, 비로소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시대의 폐단을 지적하였으니, 비판의 날카로운 기세가 향하는 바는, 특히 사림(士林)에 있었다; 그의 문장은 또한 슬프면서도 해학적이고, 완곡하면서도 풍자가 많으니: 이에 설부(說部) 중에서 비로소 풍자 서적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 생겨났다.
오경재의 자는 민헌(敏軒)이고, 안후이성 전초(全椒) 사람이며,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좋았고, 조금 자라 관학(官學)의 제자원(弟子員)에 보충되었고, 특히 《문선(文選)》에 정통하였으며, 시와 부는 붓을 들면 곧바로 지었다. 그러나 살림살이를 잘하지 못하였고, 성품 또한 호방하여, 몇 년 되지 않아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으니,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고, 옹정(雍正) 을묘년에, 안후이성 순무(巡撫) 조국린(趙國麟)이 박학굉사과(博學鴻詞科)에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집을 금릉(金陵)으로 옮겨, 문단의 맹주가 되었고, 또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우화산(雨花山) 기슭에 선현사(先賢祠)를 세우고, 태백(泰伯) 이하 230명을 제사 지냈으니, 자금이 부족하여, 살던 집을 팔아 이를 이루었으니, 집안은 더욱 가난해졌다. 만년에는 스스로 문목노인(文木老人)이라 하였고, 양주(揚州)에 객으로 있으면서, 더욱 불우하게 술을 마셨고, 건륭(乾隆) 19년에 객지에서 죽었으니, 향년 54세(1701—1754)였다. 저서로는 《시설(詩說)》 7권, 《문목산방집(文木山房集)》 5권, 시 7권이 있으나, 모두 널리 전해지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신표점본 《유림외사》 권수 참조).
오경재의 저작은 모두 홀수이니, 그러므로 《유림외사》 또한 하나의 예로, 55회이다; 그 완성은 아마 옹정 말년에 이루어졌으니, 저자가 바야흐로 금릉에 객으로 거주할 때이다. 당시 명나라가 망한 지 100년이 되지 않았으니, 사대부들은 아마 여전히 명나라 말기의 풍습이 있었으니, 제술(制述) 외에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였고, 단지 꾸미는 일만 하였으니, 성현을 본받고자 하였다. 경재가 묘사한 것은 바로 이 무리이니, 대부분 자신이 듣고 본 것에 근거하였고, 또한 필력이 충분히 이를 전달할 수 있었으므로, 능히 숨겨진 것을 밝히고 은밀한 것을 찾아내어, 만물이 형체를 숨기지 못하게 하였으니, 모든 관리, 유학자, 명사, 산인, 간혹 저잣거리의 하찮은 백성까지, 모두 종이 위에 모습을 드러내니, 목소리와 태도가 함께 일어나, 저 세상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하니, 오직 전 책에 주된 줄거리가 없으니, 단지 여러 인물들을 부려, 줄지어 오게 하니, 일은 그들이 옴과 함께 일어나고, 또한 그들이 감과 함께 끝나니, 비록 장편이라고 하지만, 자못 단편과 같으니; 마치 여러 조각의 비단을 모아, 병풍을 만든 것과 같으니, 비록 큰 그림은 아니지만, 때때로 진귀하고 기이한 것이 보이니, 이로 인해 또한 마음을 즐겁게 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한다. 경재는 또한 재능 있는 선비를 아꼈으니, “끌어들이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고, 홀로 ‘시문사(時文士)’를 원수처럼 미워하였으니, 그중 특히 뛰어난 자는, 더욱 미워하였다.” (정진방(程晉芳)이 지은 전기에 이르길) 그러므로 책 속에서 제술 및 제술로 출신한 자들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 또한 매우 심하니, 마치 선가(選家) 마이 선생(馬二先生)으로 하여금 제술의 가치 있는 이유를 스스로 서술하게 한 것과 같다.
“…‘거업(舉業)’ 두 글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공자가 춘추 시대에 태어났을 때, 그때는 ‘말을 드날리고 행동을 들어 올림(言揚行舉)’으로 벼슬을 하였으므로, 공자는 단지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녹봉이 그 안에 있다(言寡尤,行寡悔,祿在其中)’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곧 공자의 거업이었다. 한나라에 이르러,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과거를 보았으므로, 공손홍(公孫弘)과 동중서(董仲舒)가 현량방정으로 천거되었으니: 이것이 곧 한나라 사람의 거업이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시와 부로 선비를 뽑았으니; 그들이 만약 공맹의 말을 하였다면, 벼슬을 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당나라 사람들은 모두 몇 구절의 시를 지었으니: 이것이 곧 당나라 사람의 거업이었다. 송나라에 이르러, 또 좋아졌으니, 모두 이학(理學)을 하는 사람들로 벼슬을 시켰으므로, 정주(程朱)는 이학을 강론하였으니: 이것이 곧 송나라 사람의 거업이었다. 본조(本朝, 청나라)에 이르러, 문장으로 선비를 뽑으니, 이는 지극히 좋은 법칙이다. 설령 부자(夫子, 공자)가 지금 세상에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문장을 읽고, 거업을 하였을 것이니, 결코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날마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다’라고 강구한다면, 누가 그대에게 벼슬을 주겠는가? 공자의 도는, 또한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제13회)
《유림외사》에 전해지는 인물은, 대부분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 있었고, 모양을 본뜨거나 소리[음]를 빌리거나 축약된 어휘나 숨긴 말로 그 이름을 나타내었으니, 만약 옹정(雍正)과 건륭(乾隆) 연간 여러 사람의 문집과 참고하면, 열에 여덟 아홉은 맞는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상원 김화(金和)의 발문 참조). 이 마이 선생의 자는 순상(純上)이고, 처주(處州) 사람이며, 실제로는 곧 전초의 풍취중(馮粹中)〔3〕이니, 저자의 절친한 친구이고, 그의 말은 진솔하고, 또한 일찍이 춘추한당(春秋漢唐)을 숭상하였으니, ‘시문사’ 중에서는 실로 오히려 성실하고 박통한 선비에 속하지만, 그의 의론은, 당시 학문에 대한 견해를 모두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른바 유학자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본 것이다. 그 성품과 행실에 대해서는, 또한 군자이니, 예를 들어 서호 유람의 경우, 비록 전혀 마음이 통하는 바가 없어, 자못 풍경을 해치지만, 멍하니 크게 먹고 돌아오니, 우활한 선비의 본색이 진실로 그러하다:
마이 선생은 홀로, 돈 몇 푼을 가지고, 전당문(錢塘門)을 걸어 나와, 찻집에서 차 몇 사발을 마시고, 서호 물가 패루(牌樓) 앞에 앉아, 배 한 척 한 척 시골 부녀자들이 향을 사르러 오는 것을 보니,……뒤에는 모두 자신의 남편들이 따라왔고,……뭍에 올라, 각 사찰로 흩어져 갔다. 마이 선생은 한 번 둘러보았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일어나 또 1리 남짓 길을 걸어가, 호숫가를 바라보니 연이어 몇 개의 주점이 있었으니,……마이 선생은 돈이 없어 사 먹지 못하고,……겨우 국숫집에 들어가, 열여섯 푼으로 국수 한 그릇을 먹으니, 배가 부르지 않아, 또 옆방의 찻집에 가서 차 한 사발을 마시고, 두 푼짜리 ‘처편(處片)’을 사서 씹으니, 조금 맛이 느껴지는 듯하였다. 다 먹고 나와서,……앞으로 걸어가, 육교(六橋)를 지나갔다. 모퉁이를 도니, 시골 마을과 같은 곳이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관, 묘지 사이에, 걸어가도 제대로 걸을 수 없으니; 매우 싫었다. 마이 선생은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걷는 사람을 만나, “앞에 또 재미있게 놀 만한 곳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 사람이 말하길, “돌아가면 정자(淨慈), 뇌봉(雷峰)입니다. 어찌 재미있게 놀 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이 선생은 이에 또 앞으로 걸어갔다.……
뇌봉을 지나, 멀리 높낮이가 있는 많은 집들이 유리 기와로 덮여 있는 것을 보니,……
마이 선생은 앞에 이르러, 매우 높은 산문(山門)과, 금색으로 쓴 직사각형 현판을 보니, 위에 “칙사정자선사(敕賜淨慈禪寺)”라고 쓰여 있었다; 산문 옆에 작은 문이 있었다. 마이 선생은 들어가니;……부귀한 집안의 여인들이, 떼를 지어, 안팎으로, 오고 가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마이 선생은 키가 또 크고, 높은 방건(方巾)을 쓰고, 검은 얼굴에, 배를 내밀고, 두꺼운 밑창의 해진 신발을 신고, 몸을 비스듬히 하여 함부로 뛰어다니니, 오로지 사람들 사이에 부딪힐 뿐이었다. 여자들은 그를 보지도 않고, 그 또한 여자를 보지 않았다. 앞뒤로 한 바퀴 뛰어다니고, 또 나와서 저 찻집 안에 앉아,……차 한 사발을 마셨다. 櫃 위에는 많은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귤 병과자, 깨엿, 종자(粽子), 호떡, 처편, 검은 대추, 삶은 밤, 마이 선생은 모든 종류를 몇 푼씩 사서, 좋든 싫든, 배불리 먹었다. 마이 선생은 피곤함을 느끼고, 발을 쭉 뻗고 청파문(清波門)으로 뛰어 들어갔다; 숙소에 도착하여, 문을 닫고 잠을 잤다. 많이 걸었기 때문에, 숙소에서 하루 종일 잤다; 셋째 날 일어나, 성황산(城隍山)에 가 보려고 하였다.……
(제14회)
범진의 집안이 본래 가난하고 미천했는데, 향시(鄉試)에 합격하여 갑자기 출세하게 된 것을 서술하면서, 곧 모친상을 당하여, 조심스럽게 예의를 다하는 것을 서술하는 데는 한마디의 비난도 없지만, 거짓된 감정과 가식이 모두 드러나니, 진실로 미묘한 어휘의 절묘한 선택이며, 또한 날카로운 비판의 솜씨이다:
……두 사람(장정재(張靜齋)와 범진)이 들어와, 먼저 정재가 인사를 드리고, 범진이 올라와 스승과 제자의 예절을 갖추었다. 탕 지현(湯知縣)은 거듭 겸손하게 사양하고,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도록 권하였다. 정재와 오랫동안 헤어진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범진의 문장을 칭찬하고, “어찌하여 회시(會試)에 가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범진이 비로소 말하길, “선모(先母)께서 돌아가셔서, 제도에 따라 상을 치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탕 지현은 크게 놀라, 급히 길복(吉服)을 갈아입도록 하였다. 공손히 안채로 들어가, 술상을 차렸다.……
지현이 자리에 앉으니, 사용하는 것은 모두 은으로 장식한 잔과 젓가락이었다. 범진은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잔과 젓가락을 들지 못하니, 지현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정재가 웃으며 말하길, “세 선생(世先生, 범진)께서 제도에 따라, 이 잔과 젓가락을 쓰지 않으시는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지현은 급히 바꾸도록 하였다. 사기 잔과 상아 젓가락 한 쌍으로 바꾸어 오니, 범진은 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정재가 말하길, “이 젓가락도 쓰지 않으십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흰색 대나무 젓가락 한 쌍으로 바꾸어 오니, 비로소 괜찮아졌다. 지현은 의아해하였다: “그가 상을 치르는 것이 이토록 예의를 다하니, 혹시 고기와 술을 쓰지 않는다면, 준비하지 못했을 텐데.” 나중에 그가 제비집 그릇에서 큰 새우 완자를 집어 입에 넣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하였다.…… (제4회)
이 외에도 거짓되고 허황된 곳을 묘사한 것이 매우 많고, 습속을 비판한 것 또한 자주 보인다. 왕옥휘의 딸이 남편을 따라 순사(殉死)하자, 옥휘가 크게 기뻐하였는데, 사당에 들어가 정려(旌閭)를 세울 때가 되자, “도리어 마음이 상하여, 오지 않으려 사양하였다”, 후에 또 스스로 말하길 “집에서 날마다 늙은 아내가 슬피 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차마 볼 수 없었다”(제48회)라고 하였으니, 양심과 예교(禮教)의 충돌을 묘사한 것이, 매우 날카롭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전현동(錢玄同) 서문 참조); 작가가 청나라 초기에 태어나, 또한 명교(名教) 안에 몸을 묶었으면서, 능히 마음속에 따르지 않는 바가 있어, 패설(稗說)에 의탁하여 생각을 부쳤으니, 아마 또한 이에 대해 깊이 깨달은 바가 있을 것이다. 군자를 말하자면, 또한 사람이 있으니, 두소경(杜少卿)은 작가 자신을 비유한 것이고, 더욱이 두신경(杜慎卿)(그 형 두청연(杜青然)), 유육덕(虞育德)(오몽천(吳蒙泉)), 장상지(莊尚志)(정면장(程綿莊))가 있으니, 모두 절개 있는 선비이다; 그 성대한 거사는 선현을 제사 지내는 것에 이르렀다. 남경(南京)의 명사들이 점차 사라지고, 선현사 또한 황폐해졌지만; 기인은 다행히 저잣거리에서 끊어지지 않았으니, 한 명은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 한 명은 “화지통(火紙筒)을 파는 사람”, 한 명은 “찻집을 운영하는 사람”, 한 명은 “재봉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한 명은 더욱 담담하니, 삼산가(三山街)에 거주하며, 이름은 형원(荊元)이고,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을 수 있으며, 바느질하는 틈틈이, 왕왕 이를 통해 스스로를 달랬다; 간혹 그 동류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형원이 밥을 먹고 나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곧장 청량산(清涼山)으로 걸어갔다.……그에게는 성이 于인 오랜 친구가 있었는데, 산 뒤에 살았다. 이 우 노인(于老者)은 글을 읽지도 않고, 장사를 하지도 않고,……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채소를 가꾸었다.
……이날, 형원이 걸어 들어오니, 우 노인이 맞이하며 말하길, “오랫동안 형님 오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장사가 매우 바쁘신가?”라고 하였다. 형원이 말하길, “정말 그렇습니다. 오늘에야 겨우 좀 정리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노인 어른을 뵈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우 노인이 말하길, “마침 끓여 놓은 차가 있으니, 한 잔 드십시오.”라고 하며 따라 주었다. 형원이 받아, 앉아서 마시며, 말하길, “이 차는, 색, 향, 맛이 모두 좋습니다. 노인 어른께서는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좋은 물을 가져오셨습니까?”라고 하였다. 우 노인이 말하길, “우리 성 서쪽은 당신들 성 남쪽과는 달라서, 어디든 우물물이 모두 마실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형원이 말하길, “옛사람들이 늘 ‘도원(桃源)에 세상을 피한다’라고 말하는데, 제가 생각해 보니, 어찌 도원이 필요하겠습니까. 오직 노인 어른처럼 이토록 한가롭고 자유롭게, 이러한 ‘도회지의 산림(城市山林)’과 같은 곳에 사시는 것이, 바로 지금의 살아있는 신선입니다.”라고 하였다. 우 노인이 말하길, “저는 늙고 재주가 없어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니, 어찌 형님처럼 거문고 한 곡을 탈 줄 알겠습니까, 또한 조금이라도 소일거리가 될 텐데요. 요즘에는 더욱 거문고를 잘 타시는 듯하니, 언제 한번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까요?”라고 하였다. 형원이 말하길, “이 또한 쉬운 일입니다, 노인 어른께서 더러운 귀로 여기지 않으신다면, 내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작별하고 돌아왔다. 다음 날, 형원이 직접 거문고를 안고, 뜰에 오니, 우 노인은 이미 향로에 좋은 향을 피워 놓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 노인이 형원을 대신하여 거문고를 돌 탁자에 놓으니, 형원은 땅에 자리를 깔고 앉고, 우 노인 또한 옆에 앉았다. 형원은 천천히 현을 고르고, 거문고를 타기 시작하니, 쟁쟁 울리는 소리가, 숲의 나무들을 진동시켰다.……한참을 타다가, 갑자기 변치(變徵)의 소리를 내니, 처량하고 맑게 구슬펐다. 우 노인은 깊고 미묘한 곳을 듣고, 저도 모르게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였다. 곧 이렇게 작별하였다. (제55회)
그러나 홀로 사대부들과 왕래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고, 또한 사대부들 또한 자신과 벗하는 것을 하찮게 여길 것을 알았으니: 진실로 ‘유림(儒林)’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에 어진 사람과 군자가 《유림외사》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작가는 단지 의문을 남겨둘 뿐이다.
《유림외사》는 처음에는 필사본으로만 전해졌고, 후에 양주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니, 이미 간행본이 하나만이 아니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전 책의 인물을 배열하여, ‘유방(幽榜)’을 만들었는데, 신종(神宗)이 수한(水旱)으로 인한 재앙으로, 유민(流民)이 길에 가득 차자, ‘숨겨진 인재를 표창하여’ 복을 빌고자 하여, 이에 함께 진사(進士)에 급제시키고, 또한 예관(禮官)을 보내 국자감(國子監)에서 제사 지내게 하였다; 또한 작가의 문집에서 변려문(騈文)을 잘라내어, 모아 조서(詔書)를 만들었다 (김화의 발문에 이르길), 모두 한 회로 묶어 맨 끝에 붙였다: 그러므로 어떤 책에는 56회로 되어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스스로 4회를 지었는데, 내용이 이치에 맞지 않고, 어휘 또한 저속하였는데, 또한 56회 본에 섞어 넣어, 세상에 인쇄하여 유통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책에는 또한 60회로 되어 있다.
이후에도 공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풍자한 책이 《유림외사》와 같은 것이 드물다.
〔1〕 《종규착귀전(鍾馗捉鬼傳)》은 또한 《참귀전(斬鬼傳)》이라고도 하며, 옛 간행본에는 “양직초운산인(陽直樵雲山人) 편집”이라고 되어 있다. 서곤(徐昆)의 《유애외편(柳崖外編)》에는 저자가 청나라 초기 유장(劉璋)이라고 한다.
〔2〕 《시설(詩說)》은 이미 실전되었다. 《유림외사》 제34회 및 김화(金和)의 발문에서 인용한 단편적인 자료로부터, 이 책이 《시경(詩經)》을 해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목산방집(文木山房集)》은 《전초지(全椒志)》에 12권(문 5권, 시 7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4권본이 남아 있는데, 즉 부(賦) 1권, 시 2권, 사(詞) 1권이다.
〔3〕 풍취중(馮粹中)의 이름은 조태(祚泰)이고, 청나라 전초(지금의 안후이성에 속함) 사람이며, 일찍이 정백기(正白旗) 관학(官學) 교습(教習)을 지냈다.
〔4〕 두신경(杜慎卿)의 원형인 청연(青然)은, 곧 오경(吳檠, 1696—1750)이니, 자는 청연이고, 청나라 전초 사람이다. 오경재의 종형(族兄)이며, 일찍이 형부주사(刑部主事)를 지냈다. 아래 문장에서 유육덕(虞育德)의 원형인 오몽천(吳蒙泉)은, 이름은 배원(培源), 자는 호첨(岵瞻)이고, 청나라 무석(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이다. 일찍이 상원현(上元縣) 교유(教諭), 수안현(遂安縣) 지현(知縣)을 지냈다.
장상지(莊尚志)의 원형인 정면장(程綿莊, 1691—1767)은, 이름은 정조(廷祚), 자는 계생(啟生)이고, 청나라 상원(지금의 장쑤성 난징) 사람이다. 저서로는 《청계문집(青溪文集)》이 있다.
〔5〕 《유림외사》 양주(揚州) 초간본의 연대에 대해서, 김화의 《유림외사》 발문에 따르면: “이 책은 전초 종정 선생(棕亭先生)이 양주부 교수(教授)로 있을 때 간행하여 세상에 유통되었으니, 이후 양주 서점의 간행본이 하나만이 아니었다.” 김종정은 건륭(乾隆) 무자년부터 기해년(1768—1779) 사이에 양주부 교수를 지냈으므로, 이 책이 건륭 기해년(1779)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6〕 56회본 《유림외사》는, 즉 와한초당본(臥閑草堂本)이며, 가경(嘉慶) 8년(1803)에 간행되었으니, 현재 보이는 가장 오래된 간행본이다. 김화의 발문에 기록되길: “이 책의 원본은 단지 55권이었는데, 금기서화(琴棋書畫) 네 선비를 서술한 것이 끝나자, 곧 《심원춘(沁園春)》 사(詞)가 이어졌다; 언제 어떤 사람이 함부로 ‘유방(幽榜)’ 1권을 더하였으니, 그 조표(詔表)는 모두 선생의 문집에서 변려문(騈文)을 잘라내어 모아 만든 것이니, 더욱 저속하고 웃을 만하니, 이제 마땅히 삭제하여 옛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 60회본 《유림외사》는, 즉 증보된 제성당본(齊省堂本)이며, 광서(光緒) 14년(1888)에 간행되었고, 동무석홍생(東武惜紅生)의 서문이 있다. 그중 증보된 4회는, 심경지(沈瓊枝)가 송(宋)씨에게 시집가 부자가 되는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제24편 청나라의 인정을 그린 소설
건륭제 중엽(1765년경), 《돌의 기록(石頭記)》이라는 소설이 홀연히 베이징에서 나타나 5, 6년 동안 크게 유행하였으나 모두 필사본이었고, 수십 냥의 높은 가격으로 장터에서 팔렸다. 그 책은 80회까지만 있었는데, 첫머리에서 이 책의 유래를 서술하며, 여와가 하늘을 메울 때 홀로 남겨진 돌이 스스로를 한탄하다가, 문득 한 승려와 도사를 만나 “모양새는 보물이지만 아직 실질적인 효용이 없으니, 다시 글자를 새겨 사람들이 한눈에 기이한 물건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런 후에 너를 융성하고 창명한 나라, 시와 예의를 숭상하는 가문, 꽃과 버드나무가 번성한 곳, 온화하고 부귀한 고향으로 데려가 편안히 살게 해주겠다”라는 말을 듣고 그들이 돌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떠났다고 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으나, 공공도인(空空道人)이 이 큰 돌을 발견하니, 돌에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돌의 부탁에 따라 세상에 필사하여 내놓았다. 도인 또한 “텅 빈 것에서 색을 보고, 색에서 정이 생기고, 정을 색에 전하고, 색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이름을 정승(情僧)으로 바꾸고, 《돌의 기록》을 《정승록(情僧錄)》으로 고쳤다. 동로(東魯)의 공매계(孔梅溪)는 《풍월보감(風月寶鑑)》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후에 조설근(曹雪芹)이 도홍헌(悼紅軒)에서 10년 동안 읽고 다섯 번이나 내용을 더하고 빼어 목록을 만들고 장과 회를 나누어 제목을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고 하였으며, 절구 한 수를 지어 적었다. ‘온통 허황한 말로 가득 차 있고, 한 움큼의 쓰라린 눈물이 담겨 있네. 사람들은 모두 작가가 어리석다고 하지만, 그 속의 참뜻을 누가 알겠는가?’ (척요생(戚蓼生)이 서문을 쓴 80회본의 제1회)
본문에서 서술하는 일은 석두성(石頭城, 금릉이 아님)의 가씨 가문에서 일어난 일로, 영국공(寧國公)과 영국공(榮國公)의 후손들 이야기이다. 영공의 장손은 부(敷)인데 일찍 죽었고, 둘째인 경(敬)이 작위를 이었으나 성품이 도를 좋아하여 아들인 진(珍)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집을 떠나 신선이 되었다. 이에 진은 방탕하게 지냈고, 아들 용(蓉)이 있었는데 진가경(秦可卿)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영공의 장손은 사(赦)이고, 아들은 련(璉)인데 왕희봉(王熙鳳)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둘째는 정(政)이고, 딸은 민(敏)인데 임해(林海)에게 시집갔다가 중년에 죽어 외동딸인 대옥(黛玉)을 남겼다. 가정(賈政)은 왕씨와 결혼하여 아들 주(珠)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다음으로 딸 원춘(元春)을 낳았는데 후에 후궁으로 뽑혔다. 다시 아들을 얻으니 옥을 물고 태어났고, 옥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어서 보옥(寶玉)이라고 이름 지으니, 사람들은 모두 “내력이 심상치 않다”고 여겼고, 특히 정(政)의 어머니인 사태군(史太君)이 매우 아꼈다.
보옥(寶玉)은 일곱 여덟 살이 되자 총명함이 남달랐으나, 여자를 매우 좋아하여 늘 “여자는 물로 된 골육이고, 남자는 흙으로 된 골육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장차 ‘색귀(色鬼)’가 될 것이라고 여겼고, 가정(賈政) 또한 그다지 아끼지 않고 매우 엄하게 다스렸는데, 이는 “이 아이의 내력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책을 많이 읽고 글자를 깨우쳐 앎에 이르고 사물을 탐구하는 공부와 도를 깨닫고 현묘함을 연구하는 힘을 더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척본(戚本) 제2회 가우촌(賈雨村)의 말) 가씨 집안은 실로 “규방 안에 뚜렷한 사람들이 있었고”, 주인을 모시는 사람 외에도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 또한 많았는데, 대옥(黛玉)과 보채(寶釵)처럼 와서 의탁하는 이들도 있었고, 사상운(史湘雲) 또한 때때로 왔으며, 비구니 묘옥(妙玉)은 후원에 거처하며 조용히 수행하였다. 오른쪽은 가씨 집안의 가계의 대략적인 것으로, 점선은 혼인 관계를 나타내고, × 표시는 부부를 나타내며, G 표시는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에 속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이야기는 임 부인(가민(賈敏))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대옥은 어머니를 잃고 또 병약하여 외가에 의탁하게 되었는데, 당시 보옥과 같은 해에 태어나 열한 살이었다. 이어서 왕 부인의 여동생이 낳은 딸 또한 왔으니, 바로 설보채(薛寶釵)로, 한 살 더 많았고 매우 아름다웠다. 보옥은 순박하여 두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했고, 보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대옥은 약간 질투했다. 어느 날 보옥이 진가경(秦可卿)의 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문득 태허경(太虛境)에 꿈속에서 들어가 경환선자(警幻仙子)를 만나 《금릉십이채 정책(金陵十二釵正冊)》과 《부책(副冊)》을 보았는데, 그림과 시가 있었으나 이해하지 못했다. 경환은 새로 지은 《홍루몽(紅樓夢)》 열두 곡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그 마지막 곡은 《비조각투림(飛鳥各投林)》으로, 가사에 이르기를,
“벼슬하는 자는 가업이 쇠락하고, 부귀한 자는 금은이 흩어진다. 은혜를 베푼 자는 죽음에서 살아나고, 무정한 자는 분명히 보응을 받는다. 빚진 목숨은 이미 갚았고, 빚진 눈물은 이미 다 흘렸다! … 세상을 꿰뚫어 본 자는 불문에 들고, 어리석음에 빠진 자는 헛되이 목숨을 보낸다.
마치, 새들이 먹이를 다 먹고 숲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 하얀 대지가 깨끗하게 비었구나!” (척본 제5회)
그러나 보옥은 또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다른 꿈을 꾸고 깨어났다. 원춘(元春)이 후궁으로 간택되자 영국공부(榮國公府)는 더욱 귀하고 융성해졌고, 그녀가 친정을 방문했을 때는 대관원(大觀園)을 지어 잔치를 베풀었으며, 친척들이 모두 모여 지극한 가족의 즐거움을 누렸다. 보옥 또한 점점 성장하여 밖에서는 진종(秦鐘), 장옥함(蔣玉函)과 친하게 지냈고, 집으로 돌아오면 누이들과 사촌 누이들, 그리고 시녀인 습인(襲人), 청문(晴雯), 평아(平兒), 자견(紫鵑) 등과 어울리며 친하게 지내면서도 존경하여 그들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했고, 널리 사랑하느라 마음이 지치고 근심 또한 날로 심해졌다.
이날, 보옥은 상운(湘雲)의 병세가 차츰 나아진 것을 보고 나서 대옥(黛玉)을 보러 갔다. 마침 대옥이 낮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보옥은 깨우지 않으려 했다. 자견이 회랑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가가 “어젯밤에 기침은 좀 어떠셨어?”라고 물었다. 자견이 “좀 나아졌어요.”라고 하자 (보옥이 “아미타불, 부디 나으셔야 할 텐데.”라고 했다. 자견이 웃으며 “당신도 부처님을 찾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라고 했다.) 보옥이 웃으며 “이른바 ‘병이 위독하니 아무 의사나 찾아가는’ 격이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견이 엷은 무늬의 솜옷 위에 푸른 비단 조끼만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 옷 위를 쓸어보며 “이렇게 얇게 입고 바람 부는 곳에 앉아 있다니. 봄바람이 막 불기 시작해서 날씨가 가장 안 좋아. 또 병나면 더욱 힘들어질 텐데.”라고 말했다. 자견은 “이제부터 우리는 말만 하고,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할 거예요. 또 저런 엉터리 같은 것들이 뒤에서 당신에 대해 험담할 거고요. 당신은 늘 조심하지 않고 어렸을 때처럼 행동하니,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아가씨께서도 항상 저희에게 당신과 농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요즘 아가씨를 보세요. 당신을 멀리하고, 멀리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정도예요.”라고 말하며 바느질 도구를 들고 다른 방으로 가 버렸다.
보옥은 이러한 상황을 보고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을 느꼈고, 대나무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마침 축마(祝媽)가 죽순을 캐고 대나무를 손질하러 왔기 때문에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지만, 잠시 정신을 놓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돌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멍하니 있다가 저절로 눈물을 흘렸다. 다섯, 여섯 끼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멍하니 온갖 생각을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연히 설안(雪雁)이 왕 부인의 방에서 인삼을 가지고 오다가 이곳을 지나갔고, … 다가와 쪼그리고 앉아 웃으며 “여기서 뭐 하세요?”라고 물었다.
보옥은 갑자기 설안을 보고 “너는 또 뭘 하러 나를 부르러 온 거야? 너도 여자애가 아니니? 그분이 꺼리시니, 너희들이 나를 상대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네가 또 나를 찾아오다니, 혹시 누가 보면 또 구설수에 오를 거 아니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설안은 그가 또 대옥에게서 서운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방으로 돌아갔지만, 대옥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삼을 자견에게 주었다. … 설안이 “아가씨는 아직 안 깨셨는데, 누가 보옥을 화나게 했길래 거기 앉아서 울고 있대요.”라고 말했다. … 자견은 이 말을 듣고 바느질을 멈추고 … 곧장 보옥을 찾아 나섰다. 보옥 앞에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저는 그저 두 마디 말을 했을 뿐인데, 모두 잘 되라고 한 말이었어요. 당신은 화가 나서 이 바람 부는 곳으로 뛰쳐나와 울고, 병이라도 나서 저를 놀라게 하려고요.”라고 말했다. 보옥은 “누가 화가 났다고 그래? 네가 한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해서,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할 것이고, 나중에는 점점 아무도 나를 상대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혼자 슬퍼하고 있었던 거야.”라고 말했다.
… (척본 제57회, 괄호 안의 문장은 정본(程本)에 따라 보충함.)
하지만 영국공부는 비록 혁혁했으나, “식구는 날로 늘고, 일은 날로 많아지는데, 주인과 하인, 위아래를 막론하고 부귀와 영화만 누리려는 자는 많지만, 일을 계획하고 경영하는 자는 하나도 없으니, 그 일상적인 겉치레는 또 어찌할 도리 없이 사치스러워” 결국 “겉모습은 아직 크게 무너지지 않았지만, 속은 이미 텅 비어 버렸다.” (제2회) 몰락의 운세가 막 이르러 변고가 점점 많아졌다. 보옥은 화려하고 풍족한 생활 속에서도 또한 여러 차례 ‘무상(無常)’과 마주쳤는데, 먼저 가경(可卿)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진종(秦鐘)이 요절했으며, 자신 또한 아버지의 첩이 쓴 저주술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고, 이어서 금천(金釧)이 우물에 몸을 던졌고, 우이저(尤二姐)가 자결했으며, 아끼던 시녀 청문(晴雯)마저 쫓겨나 곧 죽었다. 비량한 안개가 화려한 숲을 뒤덮었지만, 그것을 느끼고 깨닫는 이는 오직 보옥뿐이었다.
… 그는 두 명의 어린 하녀를 데리고 돌 뒤로 가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그 두 사람에게 “내가 간 후에 습인(襲人) 누나가 사람을 보내 청문 누나를 보러 갔었니?”라고 물었다. 한 아이가 “송 유모를 보내 보러 갔었어요.”라고 대답했다. 보옥이 “돌아와서 뭐라고 했니?”라고 묻자, 어린 하녀가 “돌아와서는 청문 누나가 밤새도록 목이 쉬도록 울부짖더니, 오늘 아침 일찍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보옥은 다급히 “밤새도록 누구를 불렀니?”라고 물었다. 어린 하녀가 (“밤새도록 어머니를 불렀어요.” 라고 했다. 보옥이 눈물을 닦으며 “또 누구를 불렀니?”라고 묻자, 어린 하녀가,) “다른 사람은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보옥이 “네가 정신이 없구나, 아마 제대로 듣지 못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 다시 생각했다.) “비록 임종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제라도 영전에 가서 절이라도 해야 지난 5, 6년의 정을 다하는 것이지.”
… 드디어 곧장 정원을 나가 예전에 있던 곳으로 갔는데, 관이 안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과 형수는 그가 한숨 쉬는 것을 보자 곧 안으로 돌아가, 약간의 장례 비용이라도 받으려고 했다.
왕 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은 열 냥을 내주었고, 또 “즉시 밖으로 보내 태워 버리라고 하세요. ‘딸의 병’으로 죽은 것이니 절대 남겨 둘 수 없어요!”라고 명했다. 그의 형과 형수는 이 말을 듣고 곧 사람을 고용하여 염습을 하고 성 밖 화장터로 옮겨 갔다. … 보옥이 와 보니 헛걸음이었고, … 한참 동안 서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몸을 돌려 정원으로 들어갔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매우 허무함을 느껴, 가는 길에 대옥을 찾아갔지만 공교롭게도 방에 없었다. … 또 형무원(蘅蕪院)에 가 보니 적막하고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소상관(潇湘館)으로 갔지만, 공교롭게도 대옥(黛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왕 부인의 하녀가 그를 찾으러 와서 “나리께서 돌아오셨어요. 당신을 찾으세요. 또 좋은 시제가 나왔으니, 빨리 가 보세요!”라고 말했다. 보옥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 그때 가정(賈政)은 여러 막료들과 가을 경치를 구경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또 “헤어질 때 갑자기 한 가지 이야기를 꺼냈는데, 정말 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풍류, 준수한 풍채, 충의, 강개’ 여덟 글자를 모두 갖추고 있네. 정말 좋은 시제이니, 모두 만사(挽詞) 한 수를 지어야 하네.”라고 말했다. 여러 빈객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어떤 훌륭한 시제인지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이에 가정은 “요즘 항왕(恒王)이라는 분이 청주(青州)에 부임했는데, 이 항왕은 여색을 매우 좋아하고, 공무 외에는 무예를 즐겨 많은 미녀를 뽑아 날마다 무예를 익히게 한다고 하더군. … 그중 임(林)씨 성을 가진 넷째 딸이 있는데, 용모가 빼어나고 무예가 더욱 뛰어나 모두 임사낭(林四娘)이라고 부르는데, 항왕이 가장 아껴서 여러 미녀들을 통솔하게 하여 姽婳 장군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이라고 말했다.
여러 빈객들은 모두 “정말 묘하고 신기합니다! ‘姽婳’ 아래에 ‘장군’ 두 글자를 더하니, 더욱 아름답고 풍류가 느껴지니, 정말 세상에 드문 훌륭한 글입니다! 항왕 또한 최고의 풍류 인물이로군요.”라고 칭찬했다. … (척본 제78회, 괄호 안의 문장은 정본에 따라 보충함.)
《돌의 기록》의 결말은 일찍이 보옥의 꿈속에 나타났지만, 80회에서는 단지 “슬픈 소리”만 드러냈을 뿐, 그 결말을 확실히 알기는 매우 어려웠다. 건륭 57년(1792년)에 이르러서야 120회로 된 인쇄본이 나왔는데, 이름을 《홍루몽(紅樓夢)》으로 바꾸었고, 글자 또한 때때로 달랐다. 정위원(程偉元)은 그 앞에 서문을 써서 “… 원래 목록은 120권이었는데, … 이에 온 힘을 다해 찾으니, 서적을 소장한 집에서 심지어 헌 종이 더미 속에서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여러 해 동안 겨우 20여 권을 모았는데,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10여 권을 얻어, 비싼 값을 주고 샀다. … 하지만 너무 낡고 흩어져서 어찌할 수 없었기에, 친구와 함께 자세히 정리하고, 긴 부분을 자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전부를 베껴 썼고, 다시 판을 새겨 여러 사람들과 함께 보기로 했다. 《돌의 기록》 전권이 이에 비로소 완성되었다.”라고 했다. 친구는 아마 고악(高鹗)을 가리키는 듯하며, 그 또한 서문이 있고, 말미에는 “건륭 신해년 동지 후 하루”라고 적었는데, 정위원보다 1년 앞선다.
뒤의 40회는 분량은 처음 책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큰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고, 몰락과 죽음이 이어져, 이른바 “새들이 먹이를 다 먹고 날아가 버리고 빈 땅만 남았다”라는 말과 상당히 부합하지만, 결말은 다시 조금 활기를 띤다. 보옥은 먼저 영험한 옥을 잃고, 마치 정신을 잃은 사람과 같은 상태가 된다. 마침 가정(賈政)이 외직으로 부임하게 되어, 보옥이 장가간 후에 떠나려고 했으나, 대옥이 병약했기 때문에 보채(寶釵)를 맞이한다. 혼인 일은 왕희봉(王熙鳳)이 계획했는데, 매우 은밀하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대옥이 알게 되었고, 피를 토하고 병이 날로 심해져, 보옥이 결혼하는 날 결국 죽는다. 보옥은 장가간다는 것을 알고, 당연히 대옥과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잔치 자리에 갔지만, 신부가 보채인 것을 보고 슬퍼하며 다시 병이 났다. 이때 원비(元妃)가 먼저 죽었고, 가사(賈赦)는 “외관과 내통하여 권세를 믿고 약한 자를 괴롭힌 죄”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집이 몰수되어 영국부에까지 피해가 미쳤다. 사태군(史太君) 또한 곧 죽었고, 묘옥(妙玉)은 도둑을 맞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왕희봉 또한 실세하여 우울하게 죽는다. 보옥의 병 또한 더욱 심해져, 어느 날 거의 죽게 되었는데, 갑자기 한 승려가 옥을 가지고 와서 다시 살아났지만, 승려를 보자 다시 기절했고, 끔찍한 꿈을 꾸고 깨어났다. 이에 갑자기 행동을 바꾸어, 분발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치려 하여, 다음 해 향시에 응시하여 7등으로 합격한다. 보채 또한 아이를 가졌지만, 보옥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가정은 금릉에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서울로 돌아가려다가 눈 내리는 밤에 비릉역(毗陵驛)에 배를 대었는데, 한 사람이 머리를 깎고 맨발로 붉은 융단을 걸치고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보고, 자세히 보니 보옥인 것을 알았다. 막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한 승려와 도사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함께 갔고, 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노래가 들리는데, “넓은 황무지로 돌아간다”라고 했다. 쫓아갔지만 아무것도 없고, “하얗고 넓은 들판만 보일 뿐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 전기를 보고, 또한 네 구절의 시를 지어, 작가의 이야기의 시작을 더욱 자세히 설명했는데, ‘쓰라린 일을 말하자니, 허황됨이 더욱 슬프구나. 예로부터 같은 꿈이니, 세상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지 마오.’라고 했다.” (제120회)
전체 책에서 쓴 내용은 비록 슬픔과 기쁨의 감정, 만남과 헤어짐의 자취를 벗어나지 않지만, 인물과 사건은 옛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인정 소설과는 매우 다르다. 마치 첫머리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공공도인(空空道人)이 돌에게 말했다. “돌 형, 당신의 이 이야기는 … 내가 보기에 첫째, 어느 시대인지 연대를 고증할 수 없고, 둘째, 큰 현인이나 큰 충신, 조정의 정치를 다스리고 풍속을 바로잡는 선정을 베푼 이야기가 없고, 그저 몇몇 특이한 여자들, 혹은 정에 얽매이거나, 혹은 어리석거나, 혹은 작은 재주와 미약한 선행을 가진 여자들의 이야기일 뿐, 반소(班昭)나 채염(蔡琰)과 같은 덕행과 능력을 가진 이도 없으니, 내가 베껴 쓴다 해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네.”
돌이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은 어찌 그리 어리석으십니까! 만약 어느 시대인지 고증할 수 없다고 한다면, 지금 스승님께서 한나라나 당나라 등의 연대를 빌려 덧붙인다고 한들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역대 야사(野史)는 모두 같은 전철을 밟았으니, 차라리 제가 이 틀을 빌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특할 것입니다. 다만 그 사건의 실체와 이치만을 취할 뿐입니다. … 역대 야사는 혹은 임금과 재상을 비방하거나, 혹은 남의 아내와 딸을 폄하하여 간음과 흉악한 일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기록했습니다. … 재자(才子)와 가인(佳人)을 다룬 책에 이르러서는 또 천 편의 책이 하나의 틀에서 나왔고, 또 그중에는 음란함에 빠지지 않을 수 없어, 온통 ‘반안(潘安)과 조식(曹植)’, ‘서시(西施)와 탁문군(卓文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하녀들조차 입만 열면 ‘者也之乎’를 말하고, 글이 아니면 이치만 따지니, 하나하나 살펴보면 모두 서로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뿐입니다. 차라리 제가 반평생 동안 직접 보고 들은 이 몇몇 여자들의 이야기가 낫습니다. 비록 이전의 모든 책에 나오는 사람들보다 낫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사건의 내력과 원인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름을 덜고 답답함을 풀 수는 있을 것입니다. … 만남과 헤어짐의 슬픔과 기쁨, 흥망성쇠의 운명에 이르러서는 또 사실을 그대로 쫓아 기록하여 감히 조금이라도 꾸며내지 않았으니, 헛되이 남의 눈을 속이려다가 오히려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척본 제1회)
대체로 서술한 내용은 모두 진실에 근거하고, 보고 들은 것은 모두 직접 겪은 일이니, 바로 사실대로 썼기 때문에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간과하고, 매번 다른 심오한 의미를 찾으려 하니, 추측하는 이야기가 오래될수록 많아졌다. 지금은 터무니없어 변별할 가치도 없는 것들을 제거하는데, 예를 들어 화신(和珅)을 풍자한 것이라거나(《담영실필기(譚瀛室筆記)》), 참위설(谶纬說)을 담고 있다거나(《기와잔췌(寄蝸殘贅)》), 주역의 상징을 나타낸다거나(《금옥연(金玉緣)》 평론) 하는 것들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 널리 퍼진 설들을 아래에 적어 본다.
첫째, 납란성덕(納蘭成德)의 집안일이라는 설은 예로부터 이를 믿는 사람이 매우 많다. 진강기(陳康祺)는 《연하향췌록(燕下鄉脞錄)》 권5에서 강신영(姜宸英)이 강희(康熙) 기묘년 순천향시에 응시했다가 죄를 얻은 일을 기록하면서, 그의 스승인 서시동(徐時棟)(호는 유천(柳泉))의 말을 인용하여 “소설 《홍루몽》은 바로 옛 재상 명주(明珠)의 집안일을 기록한 것으로, 금으로 만든 비녀 열둘은 모두 납란 시어(侍御)가 귀한 손님으로 모셨던 사람들이다. 보채(寶釵)는 고담인(高澹人)을, 묘옥(妙玉)은 곧 서명 선생(西溟先生)을 가리킨다. ‘묘(妙)’는 ‘소녀(少女)’이고, ‘강(姜)’ 또한 부인의 아름다운 칭호이니, ‘여옥(如玉)’과 ‘여영(如英)’은 의미상 통용될 수 있다.”라고 했다. 시어는 명주의 아들 성덕을 가리키는데, 후에 이름을 성덕(性德)으로 바꾸고 자는 용약(容若)이라고 했다. 장위병(張維屏)은 《시인징략(詩人征略)》에서 “가보옥(賈寶玉)은 바로 용약이다. 《홍루몽》에서 말한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일이다.”라고 했다.
유월(俞樾) 또한 “거인(舉人)에 합격한 것이 겨우 15세였으니, 책에서 서술한 내용과 상당히 부합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행적은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후적(胡適)은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문존(文存)》 3)에서 이미 그 잘못을 바로잡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첫째, 강신영이 《제납란성덕문(祭納蘭成德文)》을 지었는데, 서로의 친밀함이 묘옥과 보옥에 비할 바가 아니고, 둘째, 성덕이 죽을 때 나이가 31세였으니, 당시 명주는 한창 권세가 높을 때였다는 것이다.
둘째, 청나라 세조(世祖)와 동악비(董鄂妃)의 이야기라는 설은 왕몽완(王夢阮)과 심병암(沈瓶庵)이 함께 지은 《홍루몽색은(紅樓夢索隱)》에서 주장한 것이다. 그 제요에는 “일찍이 서울의 노인들에게 들으니, 이 책은 온전히 청나라 세조와 동악비를 위해 지은 것이며, 당시 여러 명왕(名王)과 기이한 여인들의 이야기도 겸하고 있다고 한다. …”라고 했고, 또 동악비를 바로 진회(秦淮)의 옛 기생이었다가 모상(冒襄)의 첩이 된 동소완(董小宛)이라고 지적했는데, 청나라 군대가 강남을 점령할 때 북쪽으로 끌려가 청나라 세조의 총애를 받아 귀비(貴妃)에 봉해졌다가 곧 요절했고, 세조는 슬픔에 잠겨 오대산(五台山)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맹삼(孟森)은 《동소완고(董小宛考)》(《심사총간(心史叢刊)》 3집)에서 이 설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소완이 명나라 천계(天啓) 갑자년에 태어났으니, 만약 순치(順治) 7년에 입궁했다고 하면 이미 28세인데, 당시 청나라 세조는 겨우 14세였다는 것이다.
셋째, 강희(康熙) 시대 정치 상황을 나타낸다는 설은 바로 서시동(徐時棟)에게서 비롯되었고, 채원배(蔡元培)의 《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에서 크게 완성되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석두기》는 청나라 강희 시대의 정치 소설이다. 작가는 민족주의를 매우 굳건히 지니고 있으며, 책의 내용은 명나라의 멸망을 애도하고 청나라의 실정을 폭로하는 데 있으며, 특히 한족 명사로서 청나라에 벼슬한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다. …”라고 했다. 이에 비유하고 확장하여 그 의미를 맞추려고 했는데, ‘홍(紅)’을 ‘주(朱)’자의 그림자로 여기고, ‘돌(石頭)’을 금릉(金陵)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고, ‘가(賈)’를 위조 조정을 비난하는 것으로 여기고,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를 청나라 초 강남의 명사들에 비유했다. 예를 들어 임대옥(林黛玉)은 주이존(朱彝尊)을, 왕희봉(王熙鳳)은 여국주(余國柱)를, 사상운(史湘雲)은 진유송(陳維崧)을, 보채(寶釵)와 묘옥(妙玉)은 서시동의 설을 따랐으며, 여러 방면의 자료를 인용하며 매우 힘썼다. 하지만 후적(胡適)이 작가의 생애를 고증한 후 이 설은 성립하지 않게 되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조설근(曹雪芹)이 한군(漢軍)이었고, 《석두기》는 실제로 그의 자서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홍루몽》이 작가의 자서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책의 첫머리와 부합하는 것으로, 그 주장이 나온 것은 사실 가장 먼저였지만, 확정된 것은 오히려 가장 나중이었다. 가경(嘉慶) 초, 원매(袁枚)(《수원시화(隨園詩話)》 2)는 이미 “강희 때, 조연정(曹練亭)이 강녕직조(江寧織造)였는데, … 그의 아들 설근이 《홍루몽》이라는 책을 지어, 풍류와 번화의 성대함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중에 이른바 대관원(大觀園)이라는 곳은 바로 나의 수원(隨園)이다.”라고 했다. 마지막 두 구절은 과장이고, 원매 또한 작은 오류가 있었지만(예를 들어 련(楝)을 련(練)으로, 손(孫)을 아들로 쓴 것), 이미 설근의 책이고, 기록한 것은 그가 보고 들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이를 믿는 사람은 특히 적었고, 왕국유(王國維)(《정암문집(靜庵文集)》) 또한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른바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는 것은 또한 곁에서 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직접 극중 인물이 된 것은 아니다.”라고 여겼다. 후적이 고증을 한 후에야 비교적 명확하게 밝혀져, 조설근이 실제로 영화를 누리는 집안에서 태어나 몰락으로 끝났고, 반평생의 경험이 ‘돌’과 매우 흡사하며, 서쪽 교외에서 책을 썼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고, 나중에 나온 전권은 고악(高鶚)이 이어 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근(雪芹)의 이름은 점(霑)이고, 자는 근계(芹溪)이며, 또 다른 자는 근포(芹圃)이고, 정백기(正白旗) 한군(漢軍)이다. 할아버지 조인(祖寅)의 자는 자청(子清)이고, 호는 연정(楝亭)인데, 강희(康熙) 때 강녕직조(江寧織造)를 지냈다. 청나라 세조(世祖)가 남쪽을 순행할 때, 다섯 차례나 직조의 관청을 행궁으로 사용했는데, 뒤의 네 차례는 모두 조인이 재임 중이었다. 하지만 풍류를 매우 좋아하여, 일찍이 옛 책 10여 종을 간행하여 당시에 칭송을 받았고, 글 또한 잘 지어 저서로는 《연정시초(楝亭詩鈔)》 5권, 《사초(詞鈔)》 1권(《사고전서(四庫全書)》 목록), 전기(傳奇) 2종(《재원잡지(在園雜志)》)이 있다. 조인의 아들, 즉 설근의 아버지 또한 강녕직조를 지냈기 때문에 설근은 남경(南京)에서 태어났다. 때는 대략 강희 말년이었다. 옹정(雍正) 6년, 관직에서 물러나자 설근 또한 북경(北京)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나이는 약 10세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후 조씨 가문은 큰 변고를 겪은 듯, 집안이 갑자기 몰락했고, 설근은 중년에 이르러 서쪽 교외의 가난한 집에서 살며 죽을 먹었지만, 여전히 오만하고 고고하여 때때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며, 《석두기》를 지은 것도 이때였다. 건륭(乾隆) 27년, 아들이 죽자 설근은 슬픔에 병을 얻어, 섣달 그믐날 죽었는데, 나이는 40여 세였다(1719?~1763). 그의 《석두기》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지금 전해지는 것은 80회뿐이다(자세한 내용은 《후적문선(胡適文選)》 참고).
뒤의 40회를 고악(高鶚)이 지었다고 하는데, 유월(俞樾)(《소부매한화(小浮梅閒話)》)은 “《선산시초(船山詩草)》에 《증고란서악동년(贈高蘭墅鶚同年)》이라는 시가 있는데, ‘아름다운 정을 사람들은 《홍루》라고 말하네.’라는 주석에 ‘《홍루몽》 80회 이후는 모두 란서가 보충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향시(鄉試)와 회시(會試)에서 오언팔운시(五言八韻詩)를 쓰게 된 것은 건륭 때부터인데, 책 속에서 과거 시험에 대한 내용에 시가 이미 있으니, 그가 고군(高君)이 보충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라고 했다. 하지만 악이 쓴 서문에는 단지 “친구 정자(程子) 소천(小泉)이 그의 구입한 전권을 보여 주며 ‘이는 내가 여러 해 동안 조금씩 모은 노고이니, 판에 새겨 여러 사람들과 함께 보려고 한다. 자네는 한가하고 또 지쳤으니, 함께 맡아보는 것이 어떻겠나.’라고 했다. 나는 이 책이 … 아직 명교(名教)에 어긋나지 않으니, … 그 일을 도왔다.”라고 했을 뿐, 자신이 지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은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악의 자는 란서이고, 양황기(鑲黃旗) 한군이며, 건륭 무신년 거인, 을묘년 진사(進士)이고, 곧 한림(翰林)에 들어갔고, 관직은 시독(侍讀)이었으며, 또 일찍이 가경 신유년 순천향시 동고관(同考官)을 지냈다. 그가 《홍루몽》을 보충한 것은 건륭 신해년 때였는데, 아직 진사가 되기 전이었고, “한가하고 또 지쳤으니”, 설근의 쓸쓸한 감정과 우연히 통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뜻이 꺾이지 않았으니, 이른바 “만년의 사람이 되어, 가난과 병이 번갈아 닥쳐, 점점 세상을 떠날 기색을 드러내는 것”(척본 제1회)과는 전혀 다르다. 이 때문에 속서(續書) 또한 슬프지만, 가씨(賈氏)는 결국 “난초와 계수나무가 함께 향기를 뽐내고”, 가업이 다시 일어나, 망망한 빈 땅이 되어 정말 깨끗하게 된 것과는 매우 다르다.
《홍루몽》 80회본을 이은 사람은 고악 한 사람만이 아니다. 유평백(俞平伯)은 척요생(戚蓼生)이 서문을 쓴 80회본의 옛 평론에서 내용을 찾아내어, 먼저 30회 속서가 있었는데, 가씨 집안 자손들이 흩어지고, 보옥은 가난하여 견디지 못하고 “벼랑에서 손을 놓아”, 결국 승려가 되는 내용을 서술한 듯하지만, 그 자세한 내용은 고증할 수 없다(《홍루몽변(紅樓夢辨)》 하에 전문 논문이 있음). 혹은 “대군 성부가 옛 진본 한 권을 보았는데, 80회 이후는 모두 지금의 책과 다르고, 영녕부가 몰락한 후 모두 매우 쓸쓸했고, 보채 또한 일찍 죽었고, 보옥은 집안을 일으킬 방법이 없어, 순라꾼으로 전락했다. 사상운은 거지가 되었고, 후에 보옥과 다시 부부가 되었다. … 듣기로는 오윤생(吳潤生) 중승(中丞) 집안에 아직 그 책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라고 한다(장서조(蔣瑞藻) 《소설고증(小說考證)》 7 인용 《속열미초당필기(續閱微草堂筆記)》).
이것 또한 또 하나의 속서인데, 대체로 속서이다. 두 책에서 보충한 내용은 혹은 모두 작가의 본래 의도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긴 밤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앞 책의 복선과 어긋나지는 않는다.
이 외에도 속작은 매우 많은데, 예를 들어 《후홍루몽(後紅樓夢)》, 《홍루후몽(紅樓後夢)》, 《속홍루몽(續紅樓夢)》, 《홍루복몽(紅樓復夢)》, 《홍루몽보(紅樓夢補)》, 《홍루보몽(紅樓補夢)》, 《홍루중몽(紅樓重夢)》, 《홍루재몽(紅樓再夢)》, 《홍루환몽(紅樓幻夢)》, 《홍루원몽(紅樓圓夢)》, 《증보홍루(增補紅樓)》, 《귀홍루(鬼紅樓)》, 《홍루몽영(紅樓夢影)》 등과 같은 것들이다. 대개 고악의 속서를 이어받아 그 결함을 보충하고, “단원(團圓)”으로 결말을 맺는다. 심지어 작가가 본래 책 속에 한 명의 좋은 사람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파고들어 비판하고 크게 비난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책 자체의 말에 따르면 단지 사실대로 서술했을 뿐, 결코 비난한 것이 없고, 오직 자신에 대해서만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이는 진실로 사람들이 흔히 좋게 여기는 바이기 때문에 《홍루몽》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만, 또한 사람들이 흔히 이상하게 여기는 바이기 때문에 다시 불만을 품고 일어나서 보충하고 원만하게 하려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도량이 서로 얼마나 먼지 보여 주는 것이며, 또한 조설근이 미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전히 그의 말을 기록하여 이 글을 맺는다.
… 작가는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한바탕 꿈과 같은 일을 겪은 후에, 진실된 일을 숨기고, ‘통령(通靈)’의 설을 빌려 이 《석두기》라는 책을 지었다고 한다. …
또 스스로 말하기를, 지금 세상일에 바빠서,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했는데, 문득 지난날의 모든 여자들을 생각하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의 행동과 식견이 모두 나보다 뛰어남을 깨달았다. 어찌 나의 당당한 사내의 모습이 저 여인들만 못하단 말인가? 실로 부끄러움은 남아돌고,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날이다. 이에 지난날 하늘의 은혜와 조상의 덕에 의지하여 비단옷을 입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던 날, 아버지와 형의 교육의 은혜를 저버리고, 스승과 친구의 가르침의 덕을 배신하여 오늘날 한 가지 재주도 이루지 못하고, 반평생을 초라하게 보낸 죄를 모아 책을 지어 천하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나의 죄는 진실로 면할 수 없지만, 규방(閨房)에는 본래 뚜렷한 사람들이 있으니, 결코 나의 불초함 때문에 스스로 잘못을 감추어 함께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비록 오늘날의 초가집과 낡은 창문, 허술한 부엌과 낡은 침상이라도, 아침저녁의 바람과 이슬, 섬돌의 버드나무와 뜰의 꽃이 또한 나의 마음을 막고 붓을 꺾고 먹을 갈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비록 내가 배우지 못하여 글 솜씨가 부족하더라도, 어찌 속된 말과 시골의 말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펼쳐내어, 규방에 전해지게 하고, 또한 세상을 즐겁게 하고, 사람들의 시름과 답답함을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 (척본 제1회)
〔1〕고악(高鶚)(약 1738~약 1815) 자는 란서(蘭墅), 또 다른 호는 홍루외사(紅樓外史)이고, 한군(漢軍) 양황기(鑲黃旗) 사람이다. 내각중서(內閣中書), 한림원시독(翰林院侍讀)을 지냈다. 저서로는 《고란서집(高蘭墅集)》, 《월소산방유고(月小山房遺稿)》가 있다. 청나라 장문도(張問陶)의 《증고란서악동년(贈高蘭墅鶚同年)》 시의 주석에 “전기(傳奇) 《홍루몽》 80회 이후는 모두 란서가 보충한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 전해지는 120회본 《홍루몽》의 뒤 40회는 일반적으로 고악이 이은 것으로 여겨진다.
〔2〕화신(和珅)을 풍자했다는 설. 화신은 청나라 만주 정홍기(正紅旗) 사람으로, 성은 뉴후루(鈕祜祿)씨이고, 자는 치재(致齋)이며, 관직은 대학사(大學士)에 이르렀다. 《담영실필기(譚瀛室筆記)》에는 “화신이 정권을 잡을 때, 총애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아내 이하, 정부와 같은 내비(內嬖)가 24명이었으니, 곧 《홍루몽》에서 가리키는 정부(正副) 12채이다.”라고 했다. 참위설을 담고 있다는 설. 왕곤(汪堃)의 《기와잔췌(寄蝸殘贅)》 권9에는 “일찍이 한 깃발 아래 있는 친구에게 듣기로 ‘《홍루몽》은 참위의 책이다.’라고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이러한 주장이 있는데, 확실하게 말하며, 인용한 내용도 있다.”라고 했고, 조설근이 《홍루몽》을 지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이 “멸족의 화(禍)를 당했는데, 실제로 이에 근거한다.”라고 했다. 주역의 상징을 나타낸다는 설. 《증평보상전도금옥연(增評補象全圖金玉緣)》 권수에는 장신지(張新之)의 《석두기독법(石頭記讀法)》에 “《주역》에 이르기를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고, 아들이 그 아버지를 시해하는 것은 하루아침의 이유가 아니니, 그 유래한 바가 점차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삼상(履霜)의 경계를 삼가야 한다. 《석두기》 한 권은 (연) 한 글자의 점(漸)을 나타낸다.”라고 했다.
〔3〕납란성덕(納蘭成德)(1655~1685) 후에 이름을 성덕(性德)으로 바꾸었고, 자는 용약(容若)이며, 청나라 만주 정황기(正黃旗) 사람이다. 대학사 명주(明珠)의 장남이고, 일찍이 일등시위(一等侍衛)를 지냈다. 저서로는 《음수사(飲水詞)》, 《통지당집(通志堂集)》 등이 있다.
〔4〕진강기(陳康祺) 자는 균당(鈞堂)이고, 청나라 은현(鄞縣)(지금의 저장성(浙江省)에 속함) 사람이며, 관직은 낭중(郎中)에 이르렀다. 저서 《연하향췌록(燕下鄉脞錄)》 16권.
〔5〕강신영(姜宸英)(1628~1699) 자는 서명(西溟), 호는 담원(湛園)이며, 청나라 자계(慈溪)(지금의 저장성에 속함) 사람이다. 강희 기묘년(1699)에 순천향시(順天鄉試) 고관(考官)이었는데, 과거 시험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담원미정고(湛園未定稿)》, 《서명문초(西溟文鈔)》 등이 있다.
〔6〕서시동(徐時棟)(1814~1873) 자는 정우(定宇), 호는 유천(柳泉)이며, 청나라 은현(지금의 저장성에 속함) 사람이다. 일찍이 내각중서를 지냈고, 저서로는 《유천시문집(柳泉詩文集)》 등이 있다. 아래에 인용한 서시동의 말과 관련된 명주(明珠)(1635~1708)는 성이 납란이고, 청나라 만주 정황기 사람이다. 강희 연간에 형부상서(刑部尚書),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를 지냈다. 고담인(高澹人)(1644~1703)의 이름은 사기(士奇), 호는 강촌(江村)이며, 청나라 전당(錢塘)(지금의 저장성 항저우(杭州)) 사람이다. 일찍이 예부시랑(禮部侍郎)을 지냈다. 저서로는 《청음당전집(清吟堂全集)》, 《천록식여(天祿識餘)》 등이 있다.
〔7〕장위병(張維屏)(1780~1859) 자는 남산(南山)이고, 청나라 번우(番禺)(지금의 광둥성(廣東省)에 속함) 사람이며, 관직은 강서남강지부(江西康知府)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송심시집(松心詩集)》, 《문집(文集)》 등이 있다. 《시인징략(詩人征略)》은 곧 《국조시인징략(國朝詩人征略)》으로, 1편 60권, 2편 64권이다. 인용문은 2편 권9에 보인다.
〔8〕후적(胡適)(1891~1962) 자는 적지(適之)이고, 안후이성(安徽績溪) 사람이다. 그의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은 1921년에 지어졌으며, 《홍루몽》의 작가와 판본에 대한 고증을 진행했다.
〔9〕청나라 세조는 곧 순치(順治) 황제 복림(福臨)(1638~1661)이다. 동악비(董鄂妃)는 세조의 비(妃)이며, 내대신(內大臣) 악석(鄂碩)의 딸이다. 일부 색은파(索隱派) 홍학가(紅學家)들은 동악비가 곧 동소완(董小宛)이라고 여긴다.
〔10〕왕몽완(王夢阮)은 자세하지 않다. 심병암(沈瓶庵)은 중화서국(中華書局) 편집자로, 일찍이 《중화소설계(中華小說界)》 잡지를 편집했다. 왕몽완과 심병암이 함께 지은 《홍루몽색은(紅樓夢索隱)》은 1916년에 중화서국에서 출판한 120회본 《홍루몽》에 부록으로 실렸고, 권수에는 그들이 쓴 《홍루몽색은제요(紅樓夢索隱提要)》가 있다.
〔11〕모상(冒襄)(1611~1693) 자는 벽강(辟疆), 호는 소민(巢民)이며, 청나라 초 여고(如皋)(지금의 장쑤성(江蘇省)에 속함) 사람이다. 명나라 말 부공(副貢)이었고, 청나라에 들어간 후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저서로는 《소민시집(巢民詩集)》, 《문집(文集)》이 있다. 동소완(董小宛)(1624~1651)의 이름은 백(白)이고, 원래 진회(秦淮)의 명기(名妓)였으며, 후에 모상의 총첩(寵妾)이 되었다.
〔12〕맹삼(孟森)(1868~1937) 자는 춘손(蓴蓀), 필명은 심사(心史)이고, 장쑤성 우진(武進) 사람이다. 일찍이 베이징 대학 교수를 지냈다. 저서 《심사총간(心史叢刊)》은 총 3집으로, 대부분 명청사(明清史)에 관한 고증 논문이다.
〔13〕채원배(蔡元培)(1868~1940) 자는 학경(鶴卿), 호는 걸민(孑民)이며, 저장성 사오싱(紹興) 사람이다. 일찍이 난징 임시 정부 교육 총장, 베이징 대학 총장을 지냈다. 그가 지은 《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에서 임대옥(林黛玉)을 강주선자(絳珠仙子)로 비정했는데, ‘주(珠)’와 ‘주(朱)’의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임대옥이 살던 소상관(瀟湘館)을 주이존(朱彝尊)의 호 ‘죽차(竹垞)’에 비추어, 임대옥이 주이존을 암시한다고 여겼다. ‘왕(王)’은 곧 ‘주(柱)’ 자의 변방을 줄인 것이고, ‘국(國)’은 속자로 ‘國’으로 쓰며, 희봉(熙鳳)의 남편은 ‘련(璉)’이니, 곧 두 ‘왕(王)’ 자가 이어진 것이므로, 왕희봉이 곧 여국주(余國柱)를 암시한다고 여겼다. 진유송(陳維崧)의 자는 기년(其年), 호는 가릉(迦陵)인데, 사상운(史湘雲)이 패용한 ‘기린(麒麟)’과 발음이 비슷하므로, 사상운이 곧 진유송을 암시한다고 여겼다.
〔14〕왕국유(王國維)(1877~1927) 자는 정안(靜安), 호는 관당(觀堂)이며, 저장성 하이닝(海寧) 사람이다. 저서로는 《송원희곡사(宋元戲曲史)》, 《관당집림(觀堂集林)》 등이 있다. 인용문은 《정안문집(靜安文集)·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에 보인다.
〔15〕조인(曹寅)(1658~1712) 일찍이 통정사(通政使), 쑤저우(蘇州), 강녕직조(江寧織造)를 지냈다. 《전당시(全唐詩)》, 《패문운부(佩文韻府)》의 간행을 주관했다. 저서 전기는 《호구여생(虎口餘生)》, 《속비파기(續琵琶記)》 두 종류이다. 아래 글의 “청나라 세조(清世祖)”는 “청나라 성조(清聖祖)”로 써야 한다.
〔16〕유평백(俞平伯) 이름은 명형(銘衡)이고, 저장성 더칭(德清) 사람이다. 저서 《홍루몽변(紅樓夢辨)》은 1923년에 출판되었다(후에 개정하여 이름을 《홍루몽연구(紅樓夢研究)》로 바꾸어 1952년에 출판).
〔17〕《후홍루몽(後紅樓夢)》은 소요자(逍遙子)가 지었고, 30회이며, 건가(乾嘉) 연간 간행본이다. 《속홍루몽(續紅樓夢)》은 동명 이인이 지은 것이 두 종류 있다. 하나는 진자침(秦子忱)이 지었고, 30권이며, 가경(嘉慶) 4년 포옹헌(抱甕軒) 간행본이다. 다른 하나는 “해포주인수제(海圃主人手制)”라고 쓰여 있고, 40회이며, 가경 연간 간행본이다. 《홍루복몽(紅樓復夢)》은 “홍향각소화산초 남양씨 편집(紅香閣小和山樵南陽氏編輯)”이라고 쓰여 있고, 100회이며, 가경 10년 금곡원(金谷園) 간행본이다. 《홍루몽보(紅樓夢補)》는 귀추자(歸鋤子)가 지었고, 48회이며, 가경 24년 등화사(藤花榭) 간행본이다. 《홍루환몽(紅樓幻夢)》은 화월치인(花月痴人)이 지었고, 24회이며, 도광(道光) 23년 소영재(疏影齋) 간행본이다. 《홍루원몽(紅樓圓夢)》은 몽몽선생(夢夢先生)이 지었고, 31회이며, 가경 19년 홍장각(紅薔閣)에서 쓰고 새긴 본이다. 《증보홍루(增補紅樓)》는 낭환산초(嫏嬛山樵)가 지었고, 32회이며, 도광 4년 간행본이다. 《귀홍루(鬼紅樓)》는 곧 진자침의 《속홍루몽》이다. 《참옥루총서제요(懺玉樓叢書提要)》에 따르면 “이 책은 《후홍루몽》 이후에 지어졌는데, 사람들이 귀신 이야기를 한다고 하여 희롱하며 《귀홍루》라고 불렀다.”라고 한다. 《홍루몽영(紅樓夢影)》은 운차외사(雲槎外史)(다른 이름은 서호산인(西湖散人))가 지었고, 24회이며, 광서(光緒) 3년 베이징 취진당(聚珍堂) 활자 간행본이다. 《홍루후몽(紅樓後夢)》, 《홍루보몽(紅樓補夢)》, 《홍루중몽(紅樓重夢)》, 《홍루재몽(紅樓再夢)》은 보이지 않는다.(이상 이속(一粟)의 《홍루몽서록(紅樓夢書錄)》에 의거함)
제25편 청나라의 소설로 재능을 보인 학자들.
소설을 학문과 문장을 담는 그릇으로 여겨 교훈을 주는 것과 뜻은 같지만 용도가 다른 경우, 청나라에서는 《야수폭언》(野叟曝言)보다 앞선 것이 없다[1]. 이 책은 광서 초기에 처음 나왔는데, 서문에 따르면 강희제 때 강음(江陰) 사람인 하씨(夏氏)가 지었다고 한다. 그는 “이름난 유생으로 성균관에 천거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大人) 선생의 초청에 응하여 자주 제주의 막부(幕府)에서 일하며 연(燕), 진(晉), 진(秦), 농(隴) 등지를 두루 다녔다. …… 이어서 검(黔), 촉(蜀)을 거쳐 상(湘)에서 한수(漢水)를 따라 내려가 장강(長江)을 거슬러 돌아왔다. 다닌 곳이 풍부해지자 문장을 지으니 더욱 기이한 기운이 더해졌고, …… 머리는 이미 희끗해졌다. (이후로) 출세하려는 뜻을 버리고 오로지 책을 쓰는 데 전념하여” 《야수폭언》 20권을 완성했지만, 단지 친구들에게 보여줄 뿐 세상에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인쇄되어 나올 때에는 이미 약간의 내용이 빠져 있었고, 한 권만 유일하게 완전한데, 다른 사람이 보충한 것으로 의심된다. 두 판본 모두 저자의 이름이 없는데, 김무상(金武祥)의 《강음예문지》(江陰藝文志) 범례에는 하이명(夏二銘)이 지었다고 한다. 이명은 하경거(夏敬渠)의 호이다. 광서 《강음현지》(江陰縣志) 17권 <문원전>(文苑傳)에는 “경거(敬渠)의 자는 무수(懋修)이고, 유생이다. 영민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역사서와 경전을 통달했고, 제자백가(諸子百家), 예악(禮樂), 병형(兵刑), 천문산수(天文算數)의 학문까지 널리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평생 발길이 거의 천하에 미쳤고, 사귄 사람은 모두 현명하고 호걸이었다. 저서로는 《강목거정》(綱目舉正), 《경사여론》(經史余論), 《전사약편》(全史約編), 《학고편》(學古編), 시문집(詩文集) 몇 권이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서문에 있는 내용과 상당히 일치한다. 다만 조희명(趙曦明)[2] 이후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륭 연간에도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수폭언》은 방대한 저작으로, 회차는 154회에 달하며, “무예를 떨치고 문장을 헤아리니 천하에 비할 데 없고, 경전과 역사를 녹여내니 인간 세상의 제일 기서(奇書)로다(奮武揆文天下無雙正十熔經鑄史人間第一奇書)”라는 20자로 각 권을 엮었는데, 이는 곧 저자가 이 책 전체를 포괄하고자 한 것이다. 내용에 대해서는 범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야기, 이치 설명, 경전 이야기, 역사 논평, 효도 가르침, 충성 권유, 운용과 계책, 병법, 시, 의술, 산법, 인간의 감정인 희로애구(喜怒哀懼), 도학 강론, 사악한 이야기 배척 등”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으며, 문백(文白)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자가 소신(素臣)인 문백은 “굳센 철의 사나이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로, 강산을 두루 읊었고, 가슴속에는 별과 별자리를 품고 있었다. 그가 벼슬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치를 옻칠처럼 분명하게 꿰뚫어 보았고, 그가 풍류를 모른다고 하지만, 송옥(宋玉)처럼 다정다감했다. 붓을 휘둘러 부(賦)를 지으면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손뼉을 치며 병법을 논하면 제갈량(諸葛亮)과 견줄 만했으며, 힘은 솥을 들어 올릴 만했지만, 물러나면 옷을 가누지 못하는 듯했고, 용기는 용을 잡을 만했지만, 두려워하는 모습은 마치 골짜기에 떨어질 듯했다. 여러 학문에 통달하여 역법(曆法)을 하찮게 여겼고, 의학을 즐겨 연구하여 중경(仲景)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친구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고, 유교의 가르침을 신명처럼 받들었다. 정말이지 매우 혈기 넘치는 진정한 유학자이자 세상의 변화를 모르는 명사였다. 그는 평생 큰 재주가 있었는데, 오로지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믿지 않는 것이었고, 뛰어난 안목이 있었는데, 남들이 풀지 못하는 것을 풀고, 남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제1회) 그러나 현명한 군주가 위에 있으니, 군자는 곤궁하지 않아, 특별히 발탁되어 승승장구하니 모든 일이 뜻대로 되었다. 책 이름처럼 귀신을 물리치고, 손을 들어 요괴를 없애니, 여러 오랑캐들이 신의 위엄에 떨었고, 상서로운 징조들이 그의 집에 모였다. 문무의 공적이 한 몸에 모이니, 천자가 예로써 숭상하여 그를 “소부(素父)”라고 불렀다. 그는 여전히 신기한 재주가 있어서, 모습을 바꾸기도 하고, 궁중 여인들을 잘 구슬리기도 하여, 많은 첩을 거느렸고, 스물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아들들은 또한 크게 귀하게 되었고, 또 백 명의 손자를 낳았으며, 손자들은 또 아들을 낳았고, 또 현손(玄孫)을 두었다. 그의 어머니 수씨(水氏)는 백 살이 되어 “육대 동당(六代同堂)”을 보았고, 수명을 축하하러 온 사람도 70개국이나 되었다. 황제는 그에게 대련(對聯)을 하사하여 “진국위성인효자수선성문모수태부인(鎮國衛聖仁孝慈壽宣成文母水太夫人)”이라고 불렀다(144회).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일들은 선비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책에 거의 다 실었지만, 감히 제왕을 넘보지는 않았다. 이단을 배척하는 데에는 더욱 힘을 기울여 도교 수행자와 불교 승려들은 많이 주살되었고, 제단과 사당은 황폐해졌으며, 탑과 절은 허물어졌고, 오직 “소부”의 집안만이 상서로움이 가득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야수서언》(野叟曙言)에서는 저자가 “비범한 포부를 품었으나, 훌륭한 명성을 얻지 못하여 늙도록 경륜을 펼치지 못했다”고 말하며, 이로 인해 붓을 들었다고 하고, “늙은이가 할 일 없이 햇볕을 쬐며 맑은 이야기를 나눈다(野老無事,曝日清談)”고 비유한다(범례에서 말함). 이를 통해 과시적인 학문과 세상에 대한 개탄이 실제로 주요 원인임을 알 수 있으며, 성인(聖人)과 존귀한 영예를 추구하는 것은 곧 포부로 이어진다. 이는 명나라의 신마(神魔) 소설 및 가재자(佳人才子) 소설과는 외형상 달라 보이지만, 근본은 실질적으로 같다. 다만 이단을 마귀로 바꾸고, 성인을 재자로 바꾸었을 뿐이다. 뜻은 이미 과장되었고, 문장은 또한 무미건조하여 예술 작품이라고 칭하기에는 매우 부족하지만, 당시 이른바 “이학가(理学家)”의 심리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에서 상당히 고찰해 볼 만한 것이 있다.
옹정(雍正) 말년, 강음 사람인 양명시(楊名時)[3]가 운남 순무(雲南巡撫)가 되었는데, 그의 고향 사람인 발공생(拔貢生) 하종란(夏宗瀾)[4]이 일찍이 그에게 《역경》(易經)을 물었다. 양명시를 이광지(李光地)[5]의 문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광지를 함께 숭상하며 이야기가 더욱 괴이해졌다. 건륭(乾隆) 초년, 양명시가 예부 상서(禮部尚書)로 들어가자, 하종란 또한 경학(經學)으로 천거되어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教)에 임명되었고, 여러 강좌를 거치기도 했지만, 결국 평생 양명시를 스승으로 모셨다(《사고전서 총목》(四庫書目) 6권 및 10권, 《강음지》(江陰志) 16권 및 17권). 조금 뒤에는 또 유생 하조웅(夏祖熊)[6]이 있었는데, 역시 “여러 경전에 박통했으며, 특히 성리학(性命之學)을 매우 좋아했고, 불교와 도교의 이야기가 만연하는 것을 걱정하여 다시 고증하고 분별하여 정통으로 돌아가고자 했다(博通群經,尤篤好性命之學,患二氏說漫衍,因復考辨以歸于正)”(《강음지》 17권). 강음에는 양명시(사후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定)을 받음)가 나타난 이후로 그 영향이 고향 선비들의 풍조에 상당히 미쳤고, 하종란이 양명시를 스승으로 모신 이후 그 영향이 유독 성대하여 문백과 같은 사람의 언행과 처지는 진실로 저자 한 사람의 이상적인 인물만은 아니었다. 문백은 혹 저자 자신의 자아를 투영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하(夏)’ 자를 분석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태사(太師)는 곧 양명시를 가리키는데, 그 숭상은 하종란의 영향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이로 인해 혹 《야수폭언》을 종란의 작품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다.
소설에서 그 재능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한다면, 도신(屠紳)의 《이사》(蟫史) 20권이 있다. 신의 자는 현서(賢書)이고, 호는 홀암(笏岩)이며, 역시 강음 사람으로 대대로 농업에 종사했다. 신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자질이 총명하여 13세에 이미 향교(鄕校)에 들어갔고, 20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했으며, 곧 운남 사종현 지현(雲南師宗縣知縣)에 임명되었고, 심전주 지주(尋甸州知州)로 옮겼으며, 다섯 번 향시(鄉試)의 시험관을 맡아 인재를 잘 선발했다고 칭송받았고, 후에 광주 동지(廣州同知)가 되었다. 가경(嘉慶) 6년에 보결(候補)로 북경에 머무르던 중 갑자기 병으로 객사에서 죽으니, 나이 58세였다(1744-1801). 신은 호방하고 세속을 싫어했으며, 평소 탕현조(湯顯祖)의 사람됨을 흠모했지만, 관리로서는 매우 엄격했고, 또한 여색을 좋아하여 많은 첩을 거느렸다(이상은 모두 《악정시화》(鶚亭詩話) 부록에서 나옴). 문장을 지을 때는 고풍스럽고 난해하며 화려하고 기이하게 쓰려고 하여 그 뜻을 모호하게 했고, 지괴 소설로는 《육합내외쇄언》(六合內外瑣言)이 있고, 잡설로는 《악정시화》(제22편 참조)가 있는데, 모두 이와 같다. 《이사》는 장편 소설로, “뇌과산방원본(磊砢山房原本)”이라고 쓰여 있는데, 김무상(金武祥)의 《속향수필》(粟香隨筆) 2권에는 신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8] 책 속에는 상촉생(桑蠋生)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는 저자 자신을 비유한 것으로, 그 말 중에 “나는 갑자년에 태어났다(予,甲子生也)”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신의 출생 연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서두에는 또한 “옛날 오의(吳依)가 월령(粵嶺)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나이가 대연(大衍)에 이르렀을 때, 변방을 다니면서 얻은 것이 있는 듯하여 보고 들은 것과 전해 들은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한 권으로 엮었다(在昔吳依官於粵嶺,行年大衍有奇,海隅之行,若有所得,輒就見聞傳聞之異辭,匯為一編)”라고 쓰여 있다. 또한 부내(傅鼐)[9]가 묘족(苗族)을 진압한 일(건륭 60년)을 주된 내용으로 삼았으니, 처음 지은 시기는 가경 초년이고, 몇 년 안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5년 4월 소정 도인(小停道人)의 서문이 있다. 그 다음 해에 신은 죽었다.
《담사》(蟫史)의 첫머리에서는 바로 민(闽) 사람인 상촉생(桑蠋生)이 바다를 항해하다가 배가 파선되어 물에 빠져 갑자석(甲子石) 바깥의 작은 만(澳)까지 떠내려갔는데, 어부에게 구조되어 감정(甘鼎)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한다. 감정은 지휘(指揮)라는 관직에 있었는데, 마침 조정의 명령을 받아 성을 쌓아 해적을 막으려던 차에 지형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 상촉생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그의 그림대로 갑자석을 성벽으로 삼으니, 마침내 신기한 성이 완성되어 적이 엿볼 수 없었다. 또한 땅굴 속에서 세 개의 상자를 얻었는데, 그중 하나는 총 20권으로, ‘철토작가(徹土作稼)의 글, 귀허야부씨(歸墟野凫氏)가 그린 그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또 다른 상자에는 천인도(天人圖)가 있었는데, ‘안장수미승도작(眼藏須彌僧道作)’이라고 쓰여 있었다. 또 다른 상자에는 방서(方書)가 있었는데, ‘육자휴지극노인구수(六子攜持極老人口授)’라고 쓰여 있었다. 촉생은 지휘에게 말했다. “이 책들은 분명히 저와 나리께 주신 것입니다.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 철토는 상(桑)이고, 작가는 감(甘)입니다.” …… 비밀스러운 방에 사당을 짓고 책들을 보관했고, 다닐 때는 베개 속에 넣어 다녔다. 무엇인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할 때는 절하고 함께 책을 펼쳐 보았으니, 두 사람은 매우 기뻐했다.”(제1회) 이어서 광천룡(邝天龙)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광주왕(廣州王)이라 칭했고, 그의 부하인 누만적(娄万赤)은 신기한 술법을 가지고 그를 보좌했다. 감정이 토벌하러 나섰는데, 용녀(龍女)가 나타나 도와 광천룡을 사로잡았지만, 만적은 도망쳤다. 감정은 공을 세워 진무(鎮撫)로 승진했고, 여전히 석궐(石珏)과 함께 해적을 소탕했으며, 또 교지인(交人)을 격파했다. 만적은 교지에 있었지만, 여전히 잡을 수 없었다. 이윽고 병마총수(兵馬總帥)로 승진하여 초(楚), 촉(蜀), 검(黔), 광(廣)의 아홉 갈래 묘족(苗族)을 대비하러 갔고, 여러 묘족과 싸우면서 많은 기이하고 위험한 일을 겪었지만, 모두 승리했다. 그중 한 가지 일은 다음과 같다.
…… 잠시 후, 묘족 병사들이 크게 외쳤다. “한나라 장수는 감히 진영을 드러내지 못하는가?” 계손(季孫)이 5백 명을 이끌고 양쪽 날개를 펼치며 나아갔다. 두 개의 깃발이 갑자기 내려오자, 땅속에서 피 묻은 닭 여섯 마리가 날아 나와 한나라 장수들을 향해 울었고, 또한 불빛을 띤 개 여섯 마리가 또한 승냥이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군사들은 낯빛이 재색이 되어 멍하니 서서 겨우 무기에 의지했다. 구아(矩兒)가 쇠망치(椎)를 날려 개 여섯 마리의 머리를 부수니, 모두 찢어졌다. 목란(木蘭)은 소매 속의 뱀을 꺼내 닭 한 마리를 쪼게 하니, 입을 벌리고 죽었다. 다섯 마리의 닭은 홰에 함께 앉아 울지 않았다. 기와 조각에 그린 닭과 개의 형상만 땅에 흩어져 있었으니, 실제로 두 동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다시 금대도독(金大都督)의 진영에 이르니, 옴이 오른 소와 병든 말 각각 여섯 마리가 있었는데, 모두 가죽만 있고 털은 없었다. 병사들은 뿔에 받히거나 발에 밟히는 자는 모두 죽었고, 소 한 마리가 금대도독의 발을 물었는데, 이미 이빨이 뼈에 박혔다. 구아가 두 개의 도끼를 휘둘러 소의 머리를 치니, 이빨은 여전히 빠지지 않았다. 목란이 급히 호랑이 머리 모양의 망치(虎頭神)를 보내 그 이빨을 빼내니, 발의 뼈 또한 부러졌다. 좌우에 명하여 큰 진영으로 옮겨 가게 했다. 소와 말은 날뛰며 제어할 수 없었는데, 목란이 비늘 모양의 수건(鯉鱗帕)을 뿌리니, 비늘 하나하나가 칼날을 드러내어 소와 말 열 마리를 모두 베었다. 그 물건들은 각각 네다섯 자의 불을 뿜어냈고, 비늘 칼날은 그 때문에 그을렸고, 불이 크게 번져 소와 말은 모두 소리치며 제멋대로 날뛰었다. 원숭이가 몸을 던져 들어가 손을 들어 우레 소리를 내니, 폭우가 불을 끄고, 평지에 높이 한 길(丈)이 넘는 물이 솟아올라 소와 말을 모두 물에 잠기게 하여 죽였다. 목란이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본래 낙왕자(樂王子)가 멸화진인(滅火真人)의 의발(衣鉢)을 전수받을 수 있음을 알았다.” 물이 빠지니, 소와 말은 모두 없어졌고, 허물어진 항아리 벽에 붉은 글씨로 소와 말의 글자를 써 놓았다.
이는 선요(鱻妖)의 “궁신진화(窮神盡化)”라고 하는 것이다. ……(9권)
누만적(娄万赤) 역시 묘족 가운데 있었는데, 교지(交址)에 일이 있을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왔다. 감정(甘鼎)이 광주(廣州)에 이르러 순무(撫軍) 구성(区星)과 함께 교지를 공격했다. 구는 흉맹한 계책을 써서 빠르게 의경(宜京)을 들이쳐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 왕을 사로잡으니, 교지 백성들이 모두 항복했다. 감정은 수로를 통해 진군하여 강교(江橋) 북쪽에 진영을 세웠다.
…… 누만적은 그의 스승 이장각(李長腳)과 강교 남쪽에서 술법 대결을 벌였다. …… 이장각이 금으로 된 우물을 만들어 만적에게 주니, 곧 빠졌는데, 갑자기 쇠로 된 나무가 솟아나와 우물 난간을 부술 듯이 했다.
구성이 경희(庆喜)를 데리고 와서 흰 비단 수건을 나무 꼭대기에 던지니, 쩌렁 하는 소리가 나며 쇠나무는 다시 보이지 않았고, 이장각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만적을 찾으니, 다리 옆 모래밭 사이에 누워 있었다. 이에 소매에서 흰 병 하나를 꺼내 만적의 정수리에 대고 주문을 외우니, …… 주문을 마치고 손을 들어 우레를 일으켰다.
만적의 정기는 이미 쇠약해져 강물에 뛰어들어 물결을 따라 바다로 나가려 했다. 목란(木蘭)이 갑옷 입은 병사 백 명을 불러 그를 추격하게 하니, 물 위에 떠 있는 곳마다 고함 소리가 들렸고, 곧 자물쇠 안장으로 변했다. 바다게의 빈 배에 올라 그 속에 들어가 “몸을 숨길 곳으로 굳건히 여겼다.” 교지 사람 중 게를 잘 잡는 자가 이 물건을 키처럼 큰 것을 얻고는 매우 기뻐하며 게의 배를 갈라 기름기를 취하려 하니, 벌레 한 마리가 손을 따라 나와 순식간에 땅에 떨어져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고, 잠시 후 자라나니 정말로 장님 승려의 모습이었다. 그에게 물어보아도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백정(屠者)이 칼을 들고 와서 보며 혀를 차며 말했다. “게 배 속에 ‘신선’이 있다니, 이름이 ‘화상(和尚)’이라니, 이는 농담일 뿐이다. 결코 다른 내장이 이 요물을 담을 리 없으니, 죽이지 않으면 우리 남쪽 교지에 재앙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칼을 휘둘러 그 머리를 베었다. 이때 감정은 이미 성에 들어가 구성 순무와 함께 군대를 돌릴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상(常) 월(越)의 부하 병사들이 장님 승려의 머리를 가지고 와서 두 원수에게 전했다. 상 장사(長史)가 나아가 말했다. “이는 필시 만적의 머리일 것입니다. 천인도 두 번째 그림에 큰 게가 바다 가운데 떠 있는 그림이 있고, ‘횡행자폐(橫行自斃)’라고 쓰여 있는 것을 기억합니다. 제가 처음에 만적이 먼저 죽을 것이라고 의심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증명되었습니다.” 마침 이장각이 작별 인사를 하러 들어와 그 머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 도적은 수화음양(水火陰陽)으로 중국을 해치려 했으니, 황월(黃鉞)에 죽지 않고 백정의 칼에 죽었으니, 진실로 개나 돼지 같은 무리일 뿐이다. 신선 뼈는 어디에 있겠는가?
……” …… (20권)
이로써 교지는 평정되었다. 상촉생은 민(闽)으로 돌아갔고, 감정 또한 관직을 버리고 떠나 유령(庾嶺)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담사》의 신기한 모습은 매우 기이한 듯하지만, 그 근본을 탐구해 보면 실질적으로 신마 소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음란한 이야기를 덧붙인 것은 물론 저자의 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나라 “세정서(世情書)”의 유행을 이은 것이다. 다만 억지로 어려운 말을 만들고, 옛 책을 본뜨려고 하여 난해한 문장을 이루었으니, 드디어 평범하고 속된 뜻을 가릴 수 있었다. 홍양길(洪亮吉)10는 그의 시를 평하여 “화분에 심은 붉은 모란 같고, 연못에 기른 무늬 있는 물고기 같다(如栽盆紅藥,蓄沼文魚)”고 했다. 왕전(汪瑔)[11]은 그의 《악정시화》 서문에서 “심오하게 보이려 하지만 실제로는 평이하고, …… 그러나 필치가 빼어나고 기이하여 볼 만하다(貌淵奧而實平易,……然筆致逋峭可喜)”고 했는데, 이는 곧 화려하지만 자연스러운 흥취가 부족하고, 기이하고 빼어나지만 심오한 뜻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사》 또한 그러하니, 다만 그 문체가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은 것이므로, 독보적이라고 할 만하다.
배우체(排偶體)의 문체로 소설을 쓴 것으로는 진구(陈球)의 《연산외사》(燕山外史) 8권이 있다.
구(球)의 자는 온재(蕴斋)이고, 수주(秀水)의 유생으로 집이 가난하여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며, 변려문(骈俪文)을 잘 짓고 전기(传奇)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짓게 되었다(《광서가흥부지》(光绪嘉兴府志) 52권). 그는 스스로 “역사서에는 사륙변려문(四六骈文)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없었으니, 내가 처음으로 이를 시도하는 것이니, 매우 주제넘다는 것을 안다. …… 다만 야사에 실리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줄여서 실리기를 바랄 뿐이다(史體從無以四六為文,自我作古,極知僭妄,……第行于稗乘,當希末減)”라고 했다. 아마 장작(張鷟)의 《유선굴》(游仙窟)(제8편 참조)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독창이라고 여긴 듯하다.
이 책은 가경(嘉慶) 연간(약 1810년)에 완성되었는데, 오로지 화려한 문사에 치중하고, 약간의 감회를 담았기 때문에, 명나라 풍몽정(冯梦桢)이 지은 《두생전》(窦生传)[12]을 기본 줄거리로 삼아 내용을 부연하여 3만 1천여 자로 만들었다. 이야기는 대략 영락(永樂) 연간에 두승조(窦绳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본래 연(燕)나라 사람으로 가흥(嘉興)에서 공부하며 가난한 여인 이애고(李爱姑)를 좋아하여 맞아들여 함께 살았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억지로 치천(淄川)의 명문가와 결혼하게 하자, 결국 관계를 끊었다. 애고는 다시 금릉(金陵)의 소금 상인에게 속아 이리저리 떠돌다 기생집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협객 마린(马遴)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다시 두승조에게 돌아왔지만, 본부인이 매우 질투하여 학대하니, 애고는 견디지 못하고 두승조와 함께 도망쳤고, 마침 당새아(唐賽兒)의 난이 일어나 다시 헤어졌다. 두승조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재산이 이미 바닥났고, 부인 또한 떠나려 했으니, 홀로 남게 되었는데, 애고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그날 니암(尼庵)에 숨어 있었다고 하며, 이제 돌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해 두승조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산동 순무(山東巡撫)까지 이르렀다. 애고를 관아로 맞아들여 정명 부인(誥命夫人)처럼 대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았고, 유모를 구하니, 응하는 자가 있었는데, 바로 예전 본부인이었다. 개가한 남편이 죽고 아들 또한 죽어, 결국 곤궁하여 천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두승조는 여전히 너그럽게 대우했다. 그러나 부인은 또 마린을 해치려는 계략을 꾸몄고, 두승조 또한 연루되어 죄를 얻었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밝혀져 다시 관직에 복귀했고, 후에 애고와 함께 신선이 되어 떠났다. 그 이야기는 매우 평범하고, 모든 가재자 소설의 상투적인 수법과 같지만, 작가가 굳이 이 작품을 취한 것은 아마도 이야기의 전개가 비교적 많아 글 쓰는 솜씨를 보여줄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말마다 사륙변려문을 써서 곳곳에서 제약이 많았고, 사물을 묘사하고 감정을 서술하는 데 모두 생기를 잃었으니, 육조(六朝)의 변려문은 논할 것도 없고, 장작의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해학은 없지만 생동감 또한 부족하다. 그래도 두승조가 아버지의 재촉으로 돌아가고, 애고가 실의에 빠진 상황을 묘사한 부분을 기록하여 하나의 격식으로 삼고자 한다.
…… 그의 아버지는 마음속에는 송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밖으로는 소를 잡으려는 태도를 보였으니, 쥐를 잡으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것을 꺼리지 않았고, 오리를 잡으려다 원앙을 놀라게 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우리에서 내보낸 돼지는 쫓아와 다시 우리에 넣고, 집을 나간 개는 꾸짖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급히 몰아치니 몸은 양처럼 약해졌고, 이에 우리를 고치는 계책을 세웠으니, 엄하게 가두니 사람의 방비는 호랑이와 같아, 끝내 우리에서 나갈 때가 없었다. 용의 성격은 길들이기 어렵다고 걱정하여 쇠기둥에 매어 놓았고, 원숭이의 마음은 쉽게 흔들릴까 염려하여 회초리로 모욕을 주었다. 이로 인해 애고는 장미 덩굴 옆에서 눈썹을 찡그리려 하고, 능소화 담장 옆에서 붉은 꽃이 시들려 하니, 정향나무 가지에 마음을 의탁했지만,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두구(豆蔻) 가지 끝에 마음을 부쳤지만, 이 마음을 스스로 비유할 뿐이었다. 이에 연꽃의 속은 홀로 괴롭고, 대나무의 진액은 말라 가려 하니, 도리어 버들 꽃씨가 무슨 정이 있어 눈처럼 흩날리는 것을 싫어하고, 해당화가 힘없이 빽빽하게 가지를 늘어뜨린 것을 원망했다. 섣달을 겨우 지나 또 오뉴월을 겪으니, 순무(葑)와 갈(葛)을 캤지만, 다만 헛된 기약만 할 뿐이고, 오얏을 던지고 복숭아를 던졌지만, 모두 낡은 흔적이 되었으니, 희미한 꿈속에서 헛되이 시녀의 꽃을 심고, 답답한 가슴속에 헛되이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풀을 지니고 있었다. 분함을 풀지 못했으니, 어찌 근심을 잊을 수 있겠는가? 거문고의 끊어진 줄을 언제 다시 이을 것이며, 다락 위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어찌 떠난 사람은 더욱 멀어지고, 기다림은 헛될 뿐임을 알겠는가? 옛날에는 비록 소식이 오래 끊어졌지만, 오히려 같은 고을 사람과 같았는데, 이후에는 마침내 꿈과 영혼이 영원히 단절되어 갑자기 산천으로 막혔다. 집은 가깝지만 사람은 멀리 있으니, 매번 가을의 쓸쓸함을 느끼고, 세월이 흐르고 사물이 바뀌니, 다만 두 곳의 그리움을 깊이 느낄 뿐이었다. ……(2권)
광서 초년(1879년)에 영가(永嘉)의 부성곡(傅声谷)이 주석을 달았지만, 오히려 본문에서 삭제한 부분이 있었다.
옹정(雍正)과 건륭(乾隆) 연간 이후, 강남(江南)의 인사들은 문자화(文字禍)를 두려워하여 역사 이야기를 피하고, 방향을 바꾸어 경전(經傳)과 자서(子書)에서부터 소학(小學)에 이르기까지 고증에 힘썼고, 예술의 미세한 부분까지 폐하지 않았다. 다만 반드시 사실에 근거하여 이야기하고, 헛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렸으니, 박식한 풍조가 이에 성행했다. 풍기가 이미 형성되자, 학자들의 면모 또한 자연히 갖추어졌고, 소설은 “길에서 들은 이야기를 지어낸 것(道聽塗說者之所造)”이라 여겼고, 역사에서는 “볼 만한 것이 없다(無可觀)”고 여겼기 때문에 또한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여진(李汝珍)의 작품 《경화연》(鏡花緣)이 있었다. 여진의 자는 송석(松石)이고, 직례(直隸) 대흥(大興)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영특했으며, 당시의 문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건륭 47년에 형을 따라 해주(海州)에 부임하여 능정감(凌廷堪)[13]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논문을 하는 틈틈이 음운(音韻)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스스로 “혜택을 매우 많이 받았다(受益極多)”고 말했으니, 당시 나이가 약 20세였다. 그의 평생 교유한 사람들 중에는 성운(聲韻)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진 또한 특히 운학(韻學)에 뛰어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재주에도 능통했는데, 임둔(壬遁), 성점(星卜), 상위(象緯)에서부터 서법(書法), 바둑(弈道)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생으로 해주에서 늙어 죽었으니, 만년에 궁핍하고 근심스러워지자 소설을 지어 스스로를 위로했고, 10여 년 만에 완성하여 도광(道光) 8년에 마침내 간행되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여진 또한 죽었으니, 나이는 60여 세였다(약 1763-1830). 음운에 관한 저술로는 《음감》(音鑑)[14]이 있는데, 실용을 중요시하고, 현재의 발음을 중시하며, 감히 옛것을 바꾸었다(이상은 신표점본 《경화연》 권수 호적(胡適)의 <서론(引論)>에 자세히 나와 있다). 오직 성운의 학문에 정통하면서도 감히 옛것을 바꾸었기 때문에 학자의 대열에 설 수 있었고, 박식하고 여러 방면에 통달하면서도 감히 소설을 지을 수 있었다. 오직 소설에서 또한 학문을 논하고 재주를 이야기하며,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경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끝없이 이어져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으니, 박식하고 여러 방면에 통달한 것이 오히려 해가 되었다.
《경화연》은 총 100회로, 대략 무후(武后)가 추운 날씨에 꽃을 감상하고자 하여 모든 꽃에게 피어나라는 조서를 내리니, 화신(花神)이 감히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따랐지만, 또한 하늘의 벌을 받아 인간 세상으로 쫓겨나 100명의 여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때 수재 당오(唐敖)는 과거에 응시하여 탐화(探花)에 급제했지만, 언관(言官)의 탄핵을 받아 반역자 서경업(徐敬業)의 무리와 구면이 있다고 하여 다시 쫓겨났고, 이로 인해 비분강개하여 세상을 벗어나려는 생각을 품고, 아내의 동생 임지양(林之洋)의 상선을 따라 해외를 유람하며, 여러 이국 땅을 돌아다니며, 때로는 기이한 사람을 만나고, 또한 많은 기이한 풍속과 괴물을 보았고, 다행히 선초(仙草)를 먹어 “성인(聖人)의 경지에 들어가 속세를 초월(入聖超凡)”하여 마침내 산에 들어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딸 소산(小山) 또한 배에 몰래 타서 아버지를 찾아 나서, 여러 이경(異境)을 돌아다니고, 또한 여러 위험을 겪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다만 산속의 나무꾼에게서 아버지의 편지를 얻었는데, 이름을 규신(閨臣)이라고 지었고, “중국의 여자 중 가장 재능 있는 여자(中過才女)”가 된 후에 만날 수 있다고 약속했다. 더 나아가니, 황량한 무덤을 보았는데, 경화총(鏡花塚)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니, 수월촌(水月村)에 들어갔고, 더 나아가니, 읍홍정(泣紅亭)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비석이 있었고, 위에는 10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니, 맨 처음은 사유탐(史幽探)이고, 마지막은 필전정(畢全貞)이었다. 당규신은 11번째에 있었다. 사람 이름 뒤에는 총론이 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읍홍정 주인이 말하기를, 사유탐을 맨 앞에 두고 애췌방(哀萃芳)으로 시작한 것은, 주인이 스스로 야사(野史)를 깊이 탐구하여 일찍이 본 바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여러 꽃다운 여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글로 기록한 것이다. …… 꽃이 다시 피어나 향기를 낸다는 뜻의 화재방(花再芳)으로 맺고 필전정으로 끝맺은 것은, 여러 꽃다운 여인들이 세상에서 잊혀 거의 사라질 뻔했지만, 지금 이 글로 인해 불멸하게 되었으니, 꽃이 다시 향기를 내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나열된 백 명은 모두 아름다운 나무와 옥과 같은 존재이니, 합벽병주(合璧駢珠)와 같으므로, 필전정으로 끝맺은 것이다.(48회)
규신(閨臣)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마침 무후(武后)가 과거를 열어 재녀(才女)를 시험하니, 시험에 응시하여 또한 입선되었고, 등수는 비문에 쓰인 것과 같았다. 이에 같은 합격자 백 명이 종백부(宗伯府)에 모여 큰 모임을 가졌고, 여러 날 연회를 베풀며,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짓고, 바둑을 두고 활쏘기를 겨루고, 축국(蹴鞠)과 투초(鬥草)를 하고, 술잔을 돌리며 논문을 짓고, 운보(韻譜)를 평하고, 《모시》(毛詩)를 해석하며, 술 마시며 시 읊는 즐거움을 다했다. 이윽고 두 여자가 왔는데, 스스로 사등 재녀(四等才女)로 뽑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풍이(風姨)와 월저(月姊)의 화신이었다. 이내 다시 문자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자, 바람을 일으켜 모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괴성(魁星)은 본모습을 드러내 여러 여자들을 도왔고, 마고(麻姑) 또한 도관(道姑)으로 변신하여 화해시키러 왔고, 이에 즉석에서 시를 읊으니, 모두 모임에 있는 여러 사람들의 신세를 담고 있었으니, 과거에서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간혹 슬픈 곡조가 있어 듣는 이들이 침울해졌지만, 곧 뜻을 이해하고 처음처럼 즐겁게 웃었다. 마지막에는 문예(文芸)가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바로잡으려 했고, 재녀들 또한 군대에 있었으니, 죽은 자도 있었다. 무씨(武氏)의 군대는 마침내 패배했다. 이에 중종(中宗)이 복위했고, 여전히 태후 무씨를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로 존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에 조서가 내려와, 내년에 다시 여자 과거를 열 것이라고 했고, 아울러 이전 과거의 여러 재녀들에게 다시 “홍문연(紅文宴)”에 참석하라고 명령하니, 《경화연》은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이상은 단지 전체 이야기의 절반일 뿐이고, 작가는 스스로 “거울 속의 온전한 그림자를 알고자 한다면, 다음 인연을 기다려야 한다(鏡中全影,且待後緣)”고 했으니, 속편이 있어야 하지만, 결국 짓지 않았다.
작가가 붓을 든 이유는 《읍홍정기》(泣紅亭記)에 나타나 있는데, 여러 여자들에 대해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여 야사(野史)에 의탁하여 그들의 훌륭한 행적을 전하려 한 것이다. 책 속에는 여자에 대한 논의 또한 많기 때문에, 호적(胡適)은 “이는 부녀 문제를 논하는 소설로, 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남녀가 평등한 대우, 평등한 교육, 평등한 선거 제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這是一部討論婦女問題的小說,他對於這個問題的答案,是男女應該受平等的待遇,平等的教育,平等的選舉制度)”라고 여겼다(자세한 내용은 이 책의 <서론(引論)> 4에 나와 있다). 사회 제도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어, 매번 사건을 설정하여 이상을 담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의 제약으로 인해 여전히 고루한 부분이 많으니, 예를 들어 군자국(君子國)의 인정(人情)은 작가가 매우 감탄했지만, 사양으로 인해 다투는 것이 지나치게 가식적이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또한 힘들 것이다. 차라리 해학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는 효과가 있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번화한 거리에 이르렀는데, 하급 관리(隶卒) 한 명이 물건을 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손에 물건을 들고 말하기를, “어르신께서 이렇게 좋은 물건을 이처럼 싼 값에 파시니, 제가 사 가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부디 값을 더 올려 주십시오. 그래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만약 다시 겸손하게 구시면, 일부러 거래를 하지 않으시려는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 물건 파는 사람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살펴 주시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방금 함부로 높은 값을 불렀으니, 이미 뻔뻔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뜻밖에 어르신께서 오히려 물건은 좋고 값은 싸다고 하시니, 어찌 저를 더욱 부끄럽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제 물건은 ‘값을 깎지 않는다(言無二價)’는 것이 아니며, 그 안에 허수가 좀 있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하늘 높이 값을 부르고, 땅에서 값을 깎는다(漫天要價,就地還錢)’고 합니다. 지금 어르신께서는 깎지는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올려 주시려 하시니, 이처럼 자신을 낮추시니, 다른 집으로 가서 거래하시라고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명령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당오(唐敖)가 말했다. “‘하늘 높이 값을 부르고, 땅에서 값을 깎는다’는 것은 본래 물건을 사는 사람이 예로부터 하던 속된 말입니다. ‘값을 깎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 안에 허수가 좀 있다’는 것 또한 물건을 사는 사람의 말입니다. 뜻밖에 지금 모두 물건 파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니, 정말 재미있습니다.” 하급 관리가 또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르신께서 좋은 물건을 싸게 파시면서, 오히려 저를 ‘자신을 낮춘다(克己)’고 하시니, 충서(忠恕)의 도를 잃은 것이 아닙니까? 모든 일은 모름지기 서로 속임이 없어야 공평합니다. 시험 삼아 묻건대 ‘어느 배 속에 주판이 없겠습니까(那個腹中無算盤)’ 제가 어찌 남에게 속임을 당하겠습니까?” 오랫동안 이야기했지만, 물건 파는 사람은 뜻을 굽히지 않고 값을 올리지 않았다. 하급 관리는 화가 나서 부른 값대로 돈을 내고, 물건의 절반을 들고 막 걸어가려 했다. 물건 파는 사람이 어찌 따르려 하겠는가, 단지 “값은 많고 물건은 적다(價多貨少)”고 말하며, 막아섰다. 길가던 노인 두 명이 잘 타일러, 공정하게 판단하여, 하급 관리에게 부른 값대로 8할의 물건을 가져가게 하니, 이에 거래가 이루어졌다.
……당오가 말했다. “이처럼 보니, 이 몇 번의 거래 광경은 ‘잘 양보하고 다투지 않는다(好讓不爭)’는 한 폭의 즐거운 그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엇을 더 알아보겠는가? 저 앞으로 다시 가서 즐겁게 유람하자. 이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제11회 <아화(雅化)를 구경하고 한가로이 군자국을 유람하다(觀雅化閒遊君子邦)>)
……또한 고전의 재예(才艺)를 나열한 것도 매우 많으니, 당씨 부녀의 유람과 재녀 백 명의 모임에 대해 서술한 것이 거의 책 전체의 십중칠을 차지하며, 모두 옛 문헌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대략 전정방(錢靜方)의 《소설총고》(小說叢考) 상권[15] 참조), 여러 재예를 자세히 진술하여, 한때의 일이거나 혹은 여러 회에 걸쳐 나타난다. 그러나 작가는 매우 스스로 만족하여, 임지양(林之洋)의 익살을 빌려 자신의 책에 대해 논평하기를, “이 ‘소자(少子)’라는 책은 바로 성스러운 조정의 태평한 시대에 나온 것이고, 우리 천조(天朝)의 책 읽는 사람이 지은 것이다. 이 사람은 바로 노자(老子)의 후예이다. 노자가 지은 것은 《도덕경》(道德經)이고, 이야기한 것은 모두 현묘하고 오묘한 이치이다. 그의 이 ‘소자’는 비록 유희를 일삼지만, 은연중에 권선징악의 뜻을 담고 있으니, 《시경》 풍(風)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위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인물, 화조(花鳥), 서화(書畫), 금기(琴棋), 의복(醫卜), 성상(星相), 음운(音韻), 산법(算法)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또한 여러 가지 등수(燈謎), 여러 가지 주령(酒令), 및 쌍륙(雙陸), 마작(馬吊), 사곡(射鵠), 축구(蹴毬), 투초(鬥草), 투호(投壺) 등 각종 백희(百戲) 종류가 있다. 하나하나 모두 졸음을 쫓을 수 있고, 또한 사람들을 배꼽 잡고 웃게 할 수 있다(這部‘少子’,乃聖朝太平之世出的;是俺天朝讀書人做的。這人就是老子的後裔。老子做的是《道德經》,講的都是元虛奧妙。他這‘少子’雖以遊戲為事,卻暗寓勸善之意,不外風人之旨。上面載著諸子百家,人物花鳥,書畫琴棋,醫卜星相,音韻算法,無一不備。還有各樣燈謎,諸般酒令,以及雙陸馬吊,射鵠蹴毬,斗草投壺,各種百戲之類。件件都可解得睡魔,也可令人噴飯。)”(23회)라고 했다. 학술의 흐름, 문예의 나열이라고 여겼지만, 또한 《만보전서》(萬寶全書)[16]와 이웃하고 있었다. 다만 작가의 뛰어난 솜씨를 거쳐, 내용을 잘라내고 활용했기 때문에, 또한 비록 고전에 구속되었지만, 오히려 여유롭고 풍치가 있는 부분이 있으니, 대략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다구공(多九公)이 말했다. “임 형이 배고픈 것 같으니, 마침 이곳에 배를 채울 만한 것이 있습니다.” 곧 푸른 풀숲에서 풀 몇 가지를 꺾었다. …… 임지양이 건네받으니, 이 풀은 마치 부추와 같았고, 안에는 부드러운 줄기가 있었고, 푸른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었으니, 곧 입에 넣으니,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풀은 맑은 향기가 나니, 또한 맛이 좋습니다. 구공께 여쭙건대, 이름이 무엇입니까? ……” 당오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 해외의 작산(鵲山)에 푸른 풀이 있는데, 꽃은 부추와 같고, 이름은 ‘축여(祝余)’라고 하며, 굶주림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략 이 물건일 것입니다.”
다구공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 당오가 갑자기 길가에서 풀 한 가지를 꺾었는데, 잎은 소나무와 같고, 매우 푸르렀으며, 잎에는 겨자씨만큼 큰 열매가 맺혀 있었으니, 열매를 떼어내고, 손에 풀을 쥐고 말했다. “처남은 방금 축여를 드셨으니, 저는 이것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배 속에 넣었다. 또한 그 겨자씨를 손바닥에 놓고, 입김을 한 번 불어넣으니, 곧 그 씨에서 풀 한 가지가 돋아났는데, 또한 소나무 잎과 같았고, 길이가 약 한 자(尺)였고, 다시 입김을 한 번 불어넣으니, 또 한 자가 자랐고, 연달아 세 번 입김을 불어넣으니, 모두 세 자의 길이였고, 입가에 대고, 곧 다시 먹었다. 임지양이 웃으며 말했다. “매제가 이렇게 많이 씹으려 하니, 이곳의 풀이 모두 매제에게 먹힐까 두렵습니다. 이 겨자씨가 갑자기 풀로 변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다구공이 말했다. “이는 ‘섭공초(躡空草)’라고 하며, 또한 ‘장중개(掌中芥)’라고도 합니다. 씨를 취하여 손바닥에 놓고, 한 번 불면 한 자가 자라고, 다시 불면 또 한 자가 자라, 세 자에 이릅니다. 사람이 먹으면, 공중에 설 수 있으므로, 섭공초라고 합니다.”
임지양(林之洋)이 말했다. “이런 좋은 점이 있다면, 나도 몇 가지 먹어야겠네.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만약 집에 도둑이 있다면, 내가 섭공(躡空)으로 쫓아가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이에 여러 곳을 오랫동안 찾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다구공(多九公)이 말했다. “임 형은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풀은 불지 않으면 나지 않습니다. 이 빈 산중에 누가 입김을 불어 심겠습니까? 방금 당 형(唐兄)이 먹은 것은, 아마 이 씨앗이 새나 참새에게 쪼아 먹히다가, 숨결의 기운을 받아, 이로 인해 땅에 떨어져 난 것이니,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그대가 어떻게 찾겠습니까? 제가 해외에 여러 해 있었지만,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만약 당 형이 불지 않았다면, 저는 또한 그것이 섭공초(躡空草)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 (제9회)
〔1〕 《야수폭언》(野叟曝言): 청나라 하경거(夏敬渠, 1705—1787)가 지음. 이 책은 청나라 광서 7년(1881) 비릉회진루(毗陵匯珍樓) 활자본, 20책, 152회로, 그중 132회부터 135회까지 빠져 있고, 136회는 마지막 페이지만 남아 있음. 또한 광서 8년(1882) 신보관(申報館)에서 간행한 인쇄본, 20권, 154회로, 2회가 더 많고, 원본에서 빠진 부분을 모두 보완함. 권수에는 광서 임오년(1882) 서민산초(西岷山樵)의 서문이 있음. 하경거는 《야수폭언》 외에 《완옥헌집》(浣玉軒集) 등을 지음.
〔2〕 조희명(趙曦明, 1704—1787):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감강산인(瞰江山人), 청나라 강음(江陰, 현재의 장쑤성(江蘇省)에 속함) 사람, 《상재견문록》(桑梓見聞錄), 《안씨가훈주》(顏氏家訓注) 등을 지음.
〔3〕 양명시(楊名時, 1661—1757): 자는 빈실(賓實), 호는 응재(凝齋), 청나라 강음(현재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 예부상서 겸 국자감좨주(禮部尚書兼國子監祭酒)까지 관직을 지냄. 《역의수기》(易義隨記), 《시의기강》(詩義記講) 등을 지음.
〔4〕 하종란(夏宗瀾): 자는 기팔(起八), 청나라 강음 사람. 발공생(拔貢生)으로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教)에 천거되어 임명됨. 《역괘차기》(易卦剳記) 등을 지음.
〔5〕 이광지(李光地, 1642—1718): 자는 진경(晉卿), 호는 용촌(榕村), 청나라 안계(安溪, 현재의 푸젠성(福建省)에 속함) 사람, 문연각 대학사(文淵閣大學士)까지 관직을 지냄. 《성리정의》(性理精義), 《주자대전》(朱子大全) 등의 책을 주편했고, 따로 《용촌전집》(榕村全集) 등을 지음.
〔6〕 하조웅(夏祖熊): 자는 몽점(夢占), 청나라 강음 사람. 《역학대성》(易學大成) 등을 지음.
〔7〕 정주(程朱): 북송의 정호(程顥), 정이(程頤)와 남송의 주희(朱熹)를 가리킴. 정호(1032—1085)는 자는 백순(伯淳), 명도 선생(明道先生)으로 불렸고, 낙양(洛陽, 현재의 허난성(河南省)에 속함) 사람. 정이(1033—1107)는 자는 정숙(正叔), 이천 선생(伊川先生)으로 불렸고, 정호의 동생. 두 사람의 저작은 주희가 편집하여 《이정전서》(二程全書)로 엮음. 주희는 본 권 88쪽 주[15] 참조. 육왕(陸王): 남송의 육구연(陸九淵)과 명나라 왕수인(王守仁)을 가리킴. 육구연(1139—1193)은 자는 자정(子靜), 호는 존재(存齋), 남송 금계(金溪, 현재의 장시성(江西省)에 속함) 사람. 《상산선생전집》(象山先生全集)이 있음. 왕수인(1472—1528)은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 명나라 여요(餘姚, 현재의 저장성(浙江省)에 속함) 사람.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가 있음. 정주 학설은 객관적 유심주의에 치우치고, 육왕 학설은 주관적 유심주의에 치우침.
〔8〕 《임사》(蟫史)의 저자에 관해서는 《속향수필》(粟香隨筆) 권2에 이르기를, “도훌암(屠笏岩) 자사(刺史)의 이름은 신(紳)이고, 또한 호는 현서(賢書)이다. …… 저서로는 《육합내외쇄언》(六合內外瑣言) 20권이 있고, 서명은 서여예손(黍餘裔孫)이 편찬했다고 되어 있다. 《임사》 20권은 뇌가산인(磊砢山人)이 지었다고 되어 있으며, 최근 상하이에서 서양식으로 인쇄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다.”라고 한다.
〔9〕 부내(傅鼐, 1758—1811): 자는 중암(重庵), 청나라 산음(山陰, 현재의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속함) 사람, 영이현 지현(寧洱知縣), 봉황청 동지(鳳凰廳同知), 후난 안찰사(湖南按察使)를 역임했다. 건륭(乾隆) 말년부터 가경(嘉慶) 연간까지, 후난(湖南)과 구이저우(貴州) 일대에서 묘족(苗族)의 봉기를 진압했다.
〔10〕 홍량길(洪亮吉, 1746—1809): 자는 치존(稚存), 호는 북강(北江), 청나라 양호(陽湖, 현재의 장쑤성(江蘇省) 창저우(常州)에 속함) 사람, 편집(編修)으로 있다가 구이저우 학정(貴州學政)을 감독하러 파견되었다. 《홍북강전집》(洪北江全集) 등을 지음.
〔11〕 왕전(汪瑔, 1828—1891): 자는 부생(芙生), 호는 곡암(谷庵), 청나라 산음(현재의 저장성 사오싱에 속함) 사람. 《수산관집》(隨山館集) 등이 있음.
〔12〕 풍몽정(馮夢楨, 1548—1605): 자는 개지(開之), 명나라 수수(秀水, 현재의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에 속함) 사람, 남경 국자감좨주(南京國子監祭酒)까지 관직을 지냄. 《역대공거지》(歷代貢舉志), 《쾌설당집》(快雪堂集) 등을 지음. 그가 지은 《두생전》(竇生傳)은 두승조(竇繩祖)와 이애고(李愛姑)의 슬프고 기쁜 이별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 전기는 소설 《연산외사》(燕山外史) 권수에도 실려 있다.
〔13〕 능정감(凌廷堪, 1755—1809): 자는 차중(次仲), 청나라 흡현(歙縣, 현재의 안후이성(安徽省)에 속함) 사람, 영국부 학 교수(寧國府學教授)를 지냈다. 《연악고원》(燕樂考原), 《교례당문집》(校禮堂文集) 등을 지음.
〔14〕 《음감》(音鑑): 이여진(李汝珍)이 지었으며, 6권으로, 남북 방언을 연구하는 음운학 저작이다.
〔15〕 전정방(錢靜方)의 《소설총고·경화연고》(小說叢考·鏡花緣考)에 따르면, 이 책에 서술된 “군자국(君子國)은 《박물지》(博物志)에 보이고”, “대인국(大人國)은 《산해경》(山海經)에 보이고”, “비견국(毗騫國)은 《남사》(南史)에 보인다”고 한다.
〔16〕 《만보전서》(萬寶全書): 옛날에는 명나라 진계유(陳繼儒)가 찬집하고, 청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증보했다고 전해진다. 정편 20권, 속편 6권. 내용은 주로 일상 생활 지식을 싣고, 주령(酒令), 등수(燈謎), 박희(博戲), 복서(卜筮) 등을 섞어 놓았다.
제26편 청나라의 협사 소설
당나라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대부분 유흥을 즐겼고, 이러한 습속이 이어져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기생의 이야기가 문인들 사이에서도 문장으로 쓰여졌으니,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최령흠(崔令欽)의 《교방기》(教坊記) 및 손기(孫棨)의 《북리지》(北里志)[1]가 있다. 명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러, 작자가 더욱 많아졌으니, 명나라 매정조(梅鼎祚)의 《청니연화기》(青泥蓮花記)[2], 청나라 여회(余懷)의 《판교잡기》(板橋雜記)[3]가 특히 유명하다. 이후에는 양주(揚州), 오문(吳門), 주강(珠江), 상하이 등 여러 곳의 풍류 이야기가 모두 기록되었고[4], 또한 기생의 짧은 전기도 점차 지이(志異) 서적의 종류에 침입했지만, 대개 잡다한 일과 소소한 이야기일 뿐, 조리가 없었고, 다만 우연히 붓을 놀려, 그저 아름다운 회포를 달랠 뿐이었다. 만약 협사 속 인물과 사건을 책 전체의 주된 줄거리로 삼고, 또한 조직하여 장편으로 수십 회에 이르는 것은, 대개 《품화보감》(品花寶鑑)[5]에서 처음 보이며, 다만 기록한 것은 배우(伶人)에 대한 것이다.
명나라에는 교방이 있었지만, 사대부의 출입을 금지했고, 또한 기생을 끼고 놀 수 없었지만, 유독 배우를 부르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관 명사들은 금령을 피하기 위해, 매번 배우를 불러 술자리에 함께 있게 하고, 노래와 춤을 추게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했으며, 문명이 있는 자는 또한 칭찬하고 감탄하며, 왕왕 술에 취한 듯했으니, 그 유행이 이로 인해 날로 성행했다. 청나라 초기에, 배우의 기세가 조금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후에 다시 타올랐고, 점차 더욱 외설스럽고 저속해져, “상고(像姑)”라고 불리며, 품격이 창녀와 비견되었다. 《품화보감》은 함풍(咸豐) 2년(1852)에 간행되었는데, 바로 건륭(乾隆) 이후 베이징의 배우를 전문적으로 서술했고, 기록한 내용 안에는 때때로 외설적인 말이 섞여 있으며, 스스로 배우에게 정(正)과 사(邪)가 있고, 손님 또한 아(雅)와 속(俗)이 있다고 하며, 아름다움과 추함을 함께 진술하니, 본래 권선징악의 뜻이 있었으니, 그 설명은 명나라 사람들의 모든 “세정서(世情書)”와 약간 같다. 서사 행문에 이르러서는, 마치 애절함으로 장점을 삼으려 하고, 풍류를 주로 하려 했지만, 남녀의 이야기를 묘사한 책은 옛날에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옛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비록 이른바 상품, 즉 작가의 이상적인 인물인 매자옥(梅子玉)과 두금언(杜琴言) 같은 무리도, 배우는 가인(佳人)과 같고, 손님은 재자(才子)에 지나지 않으며, 다정한 말과 부드러운 말을 끝없이 늘어놓으니, 유독 가인이 여자가 아닌 것은, 다른 책에서 쓰지 않은 것일 뿐이다. “명기(名且)” 두금언이 매자옥의 집에 병문안 갔을 때의 상황을 서술한 것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두금언이 매씨 집에 도착했을 때,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워하며, 이번에는 반드시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 부인을 만난 이후에,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고, 또한 그에게 자옥을 위로하라고 명하니, 또한 뜻밖이었으니, 마음속으로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다만 자옥의 병세가 얼마나 심한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할 뿐이었다. 그저 부인의 명을 따라, 얼굴을 두껍게 하고 자옥의 방으로 갔다. 휘장이 걷히지 않고, 책상과 안석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작은 남목 침상에는 얇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운아(云儿)가 먼저 휘장을 걷어 올리고, “도련님, 금언이 뵈러 왔습니다”라고 외쳤다. 자옥은 꿈속에 있다가, 어렴풋이 두어 마디 대답했다. 금언은 침상 가에 앉아, 그 자옥의 얼굴이 누렇게 마르고, 초췌한 것을 보았다.
금언은 베갯머리에 다가가, 나지막이 한 마디 외치니,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려, 자옥의 얼굴에 떨어졌다. 자옥이 갑자기 허허 웃는 것을 보았다.
“칠월 칠일 장생전, 밤중 인적 끊긴 사사로운 이야기 나눌 때(七月七日長生殿,夜半無人私語時。)”
자옥(子玉)이 시를 읊은 후, 또 연달아 두 번 웃었다. 금언(琴言)은 그가 꿈에 사로잡힌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자옥의 몸을 두어 번 흔들었지만, 부인이 밖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 큰 소리로 부르지 못하고, “도련님”이라고 고쳐 불렀다. 자옥은 여전히 꿈속에서 그리워하며, 칠월 칠일이 되기를 기다려, 소란(素蘭)의 처소에 가서, 금언을 만나, 세 사람이 다시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는 자옥이 시시각각 잊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두 구절의 당나라 시를 읊은 것이다. 혼몽이 이미 무르익었으니, 잠시 깨어나기 어려웠고, 또한 그가 크게 웃다가, 또 읊조리는 것을 보았다.
“내 생각엔 황천과 푸른 하늘, 두 곳 모두 찾기 어려운데(我道是黃泉碧落兩難尋,……)”
노래를 마치고, 몸을 돌려 안쪽으로 누웠다. 금언은 그가 이렇게 정신을 잃은 것을 보고, 눈물이 더욱 많아졌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다시 부르지 못했다. …… (제29회)
《품화보감》 속 인물은 대개 실제로 존재하며, 그 이름과 성품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직 매(梅)와 두(杜) 두 사람은 모두 가설이며, 자(字)를 “옥(玉)”과 “언(言)”으로 한 것은, 즉 “우언(寓言)”의 의미이니, 대개 지은이는 매우 뛰어나다고 여겼고, 세상에 이미 그림자로 비출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책 속에 고상한 품격이 있는 것은, 자신을 빗댄 것이니, 실은 상주(常州) 사람 진삼(陳森)의 글이다(작자의 수고본인 《매화몽전기》(梅花夢傳奇) 상권에, 스스로 비릉(毘陵) 진삼이라고 서명했으니, “글(書)”자는 잘못 덧붙여진 것일 수 있다). 호는 소일(少逸)이고, 도광(道光) 연간에 베이징에 거주하며, 극단(菊部)을 출입하며, 보고 들은 일을 모아 30회로 책을 지었지만, 또 중단했고, 베이징을 떠나 만유하다가, 기유년(1849)에 광시(廣西)에서 다시 베이징에 이르러, 비로소 후반부를 완성했으니, 모두 60회이고, 호사가들이 다투어 베껴 썼고, 3년이 지나서야 간행본이 있었다(양무건(楊懋建)의 《몽화쇄부》(夢華瑣簿)).
저자의 이상적인 결말은 마지막 회에 나타나는데, 명사와 명단(名旦)이 구향원(九香園)에 모여, 배우의 초상화를 그려 화신(花神)으로 삼고, 여러 명사는 찬사를 쓴다. 여러 배우는 또한 여러 명사의 장수와 복록의 위패를 써서, 각자 찬사를 쓰니, 모두 돌에 새겨 구향루 아래에 모신다. 이때 여러 배우는 이미 배우 생활을 그만두었고, 이에 “뭇 명사들 앞에서”, 비녀와 장신구를 녹이고, 의복을 불태우니, 거의 다 타 버렸을 때, “갑자기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 그 재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니, 흩날리는 모습이, 붉은 해를 비추며, 마치 무수한 꽃과 나비가 춤추는 듯하고, 금빛과 화려함에 눈이 부시고, 향기가 코를 찌르며, 점점 더 높이 올라가, 하늘 한가운데 이르러, 만 점의 금빛으로 변해, 번쩍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화월흔》(花月痕) 16권 52회가 있는데, “면학주인(眠鶴主人)이 편차하다”라고 적혀 있고, 함풍(咸豐) 무오년(1858)에 서문이 쓰였지만, 광서(光緒) 연간에 비로소 유행했다. 이 책이 비록 협사를 온전히 쓰지는 않았지만, 기생과 특히 관련이 있으며, 책 전체에 은연중에 나타나고, 명사와 짝을 이루니, 또한 가인재자(佳人才子) 소설의 정형과 같다. 대략 말하자면, 위치주(韋痴珠)와 한하생(韓荷生)은 모두 뛰어난 재주와 넓은 학식을 지녔고, 병주(并州)에서 막부 생활을 하며, 매우 친하게 지냈고, 또한 함께 유흥을 즐겼으며, 또한 각자 마음에 둔 기생이 있었으니, 위는 추흔(秋痕)이라 하고, 한은 채추(采秋)라 했다. 위는 풍류와 문채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운이 없어, 타지에서 곤궁하게 지냈다. 추흔은 비록 마음을 기울였지만, 또한 끝내 위에 시집가지 못했다. 이윽고 위의 아내가 먼저 죽고, 위 또한 곧 죽으니, 추흔은 그를 따라 죽었다. 한은 먼저 고관의 막부에서 상빈(上賓)이 되었고, 기밀한 일을 참여했고, 곧 도적을 평정한 공으로, 거인(舉人)에서 보증을 받아 병과급사중(兵科給事中)으로 승진했고, 다시 전공으로 인해, 여러 번 승진하여 제후에 봉해졌다. 채추는 오래전에 한에게 시집갔고, 또한 일품 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군대를 돌려 봉작을 받은 후에, “큰 잔치를 사흘 동안 베푸니, 대장군부터 하졸에 이르기까지,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高宴三日,自大將軍以至走卒,無不雀忭。)”(제50회) 그러나 위는 단지 외아들 하나만 외롭게 남아, 관을 부축하며 남쪽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그 구도는 대개 흥망성쇠를 대비시키려는 데 있고, 행문 또한 오로지 애절함을 주로 하지만, 때때로 비량하고 애원하는 필치가, 그 사이에 교차하여, 환락의 때에, 또한 암울한 빛을 함께 보이려 했고, 시와 사, 간찰 등이, 책 속에 가득 차 있으니, 문식이 이미 번잡해지니, 정취가 오히려 흐릿해졌다. 부조륜(符兆綸)[6]이 평하기를, “사부(詞賦)의 명가이지만, 소설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그 흠뻑 드러내는 곳 또한 사부에서 발휘되어 나온 것이니, 슬프고 감동적이며 완연하다.……”라고 했으니, 조금 아첨하는 말이지만, 또한 그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결말에 이르러 한하생의 전공을 서술함에, 갑자기 요사스러운 일을 섞으니, 마치 사랑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귀신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같으니, 더욱더 책 전체의 흠이 된다.
……채추가 말했다. “……묘옥(妙玉)은 ‘담 밖의 사람(檻外人)’이라 하고, 보옥(寶玉)은 ‘담 안의 사람(檻內人)’이라 합니다. 묘옥이 사는 곳은 농취암(櫳翠庵)이고, 보옥이 사는 곳은 이홍원(怡紅院)입니다. …… 책에서 먼저 묘옥이 얼마나 깨끗한지 말하고, 보옥은 항상 자신을 더러운 물건이라고 여깁니다. 장차 맑은 것이 탁해지고, 탁한 것이 지극히 맑아지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까?” 치주가 한숨을 쉬며, 높이 읊조리기를, “한 번 발을 헛디디니 천고의 한이 되고, 다시 돌아보니 이미 백 년의 몸이네(一失足成千古恨,再回頭已百年身。)”라고 했다. 이어서 말했다. “…… 책에서 ‘가우촌의 말(賈雨村言)’의 예를 들자면, 설(薛)은 설치하다(設)이고, 대(黛)는 대신하다(代)입니다. 이 사람을 설치하여 보옥을 대신하여 쓰게 했으므로, ‘보옥(寶玉)’ 두 글자는, 보(寶) 자는 채(釵)에 속하니, 바로 보채(寶釵)이고, 옥(玉) 자는 대(黛)에 매이니, 바로 대옥(黛玉)입니다. 채와 대는 완전히 ‘자허우유(子虛烏有)’이니,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묘옥은, 정말로 보옥의 반대되는 거울이 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묘(妙)라고 한 것입니다. 한 명의 승려와 한 명의 비구니는, 은연중에 암시하니, 당신은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채추가 대답했다. …… 치주가 이어서 말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며, 곧 책상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읊조렸다.
“은쟁반에 탄 심향(心香) 곡조, 영웅은 어찌 그리 부드럽지 못한 마음인가? 나는 모든 것을 비운 곳에서 바라보니, 천화(天花)로 도량을 삼으려네. 연꽃 노래 속에서 연밥을 맞추고, 계수나무 꽃 필 때 또 그대를 보니, 어찌 채찍을 흔들며 꽃을 등지고 가랴, 십 년 마음 이미 향기로 정해졌네(銀字箏調心字香,英雄底事不柔腸?我來一切觀空處,也要天花作道場。采蓮曲裡猜蓮子,叢桂開時又見君,何必搖鞭背花去,十年心已定香熏。)”
한하생(韓荷生)은 치주(痴珠)가 시를 다 읊기도 전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됐네, 술이나 마시자.” 한바탕 웃고 이야기하니, 날이 밝았다. 치주는 아침 식사를 하고, 채추(采秋)의 차를 타고 먼저 갔다. 정오에, 한하생의 편지를 받았는데, 다음과 같았다.
“방금 추흔(秋痕)을 만났는데, 눈물이 말과 함께 흘러내리니, 가련하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여러 번 위로하고 달래어, 천천히 도모하게 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저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기를, ‘부디 조용히 몸조리하십시오. 이 마음 굳건하니, 반드시 보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간절한 그리움을 알기에, 이에 알려 드립니다. 아울러 작은 시 네 수를 올리니, 화답을 구합니다.”
시는 칠언절구 네 수였다. …… 치주는 다 읽고 나서, 본래 운에 따라 화답하여 읊었다.
“까닭 없이 꽃 소식이 너무 늦으니, 시든 꽃잎은 마음 아프게 남은 가지를 꺾네, 나는 그를 대신하여 깨끗한 경지를 구하려 하지만, 도리어 모진 바람이 온전히 불지 못할까 염려하네. 더디게 지는 해 곁에서 한이 되고, 호수와 바다에 스무 해를 떠도니, 낙타와 버드나무 가지 모두 사라졌네(無端花事太凌遲,殘蕊傷心剩折枝,我欲替他求淨境,轉嫌風惡不全吹。蹉跎恨在夕陽邊,湖海浮沉二十年,駱馬楊枝都去也,……)”
바로 이어서 쓰려고 하는데, 대머리 하인이 돌아와서 말했다. “채시가(菜市街) 이씨 집에서 사람을 보내어 청하는데, 유 아가씨가 병세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치주는 깜짝 놀라, 차를 타고 추심원(秋心院)으로 갔다. 추흔은 머리에 주름진 수건을 쓰고, 평상에 앉아, 곁에 몇 권의 책을 놓고, 눈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치주를 보고, 미소를 머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열흘도 못 버틸 줄 알았어요. 도대체 왜 그렇게 고생하세요?” 치주가 말했다. “그들이 당신이 아프다고 해서, 제가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추흔이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한 번 청하면 곧 오시니, 앞으로 또 질척거리게 될 거예요.” 치주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 의논하죠.” 이때부터, 치주는 예전처럼 다시 왕래했다. 그날 밤, 치주는 화답시를 이어서 지었는데, 마지막 수에 “미인의 죽음으로 기쁨을 얻으니, 과연 지기(知己)는 경국지색에 속하네(博得蛾眉甘一死,果然知己屬傾城)”라는 구절이 있으니,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 (제25회)
장락(長樂) 사장정(謝章铤)의 《도기산장시집》(賭棋山莊詩集)에 《제위자안소저서후》(題魏子安所著書後)[7] 오언절구 세 수가 있는데, 하나는 《석경고》(石經考), 하나는 《해남산관시화》(陔南山館詩話), 하나는 바로 《화월흔》(蔣瑞藻《小說考證》八引《雷顛筆記》)이라 하였으니, 이로 인해 이 책이 위자안(魏子安)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자안의 이름은 수인(秀仁)이고, 푸젠성(福建省) 허우관(侯官)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을 떨쳤지만, 20여 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교에 들어갔고, 곧 병오년(1846) 향시(鄉試)에 연이어 합격했지만, 여러 번 진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고, 이에 산시성(山西省), 산시성(陝西省), 쓰촨성(四川省)을 유람하다가, 마침내 청두(成都) 부용서원(芙蓉書院) 원장이 되었으나, 난리를 피해 돌아오다가 죽으니, 나이 56세였다(1819——1874). 저서가 집에 가득 찼지만, 세상에는 유독 그의 《화월흔》만 전해진다(《賭棋山莊文集》五).[8] 수인이 산시에 머물 때, 타이위안(太原) 지부(知府)를 위해 거문고를 가르쳐 아들을 교육했는데, 수입이 꽤 많았고, 또한 한가한 시간이 많았지만, 심심함을 괴로워하여, 이에 소설을 지어, 위치주(韋痴珠)로 자신을 비유했고, 보(保)가 우연히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힘껏 그 완성을 격려하여, 마침내 거대한 저작이 되었다고 한다(謝章铤《課餘續錄》一).[9] 그러나 의탁한 것이 이뿐만이 아닌 듯하니, 권수에는 타이위안의 기생 《유후봉전》(劉栩鳳傳)[10]이 있는데, “부도객(逋客)에게 마음을 기울여, 몸을 맡기려 했으나”, 높은 몸값 때문에 중지되었고, 장차 울적하고 초췌하게 죽으려 한다고 한다. 즉 추흔은 대개 이 사람의 그림자이고, 부도객은 실로 위(魏)이다. 위와 한은, 또한 부도객의 그림자이니, 궁핍과 출세의 두 갈래 길을 설정하여, 각자 그가 이를 수 있는 바를 비추어 생각했으니, 궁핍하면 위와 같고, 출세하면 한과 같으니, 그러므로 비록 한 사람의 자신을 비유했지만, 또한 나누어 둘로 만든 것이다.
책 전체에서 기녀를 주제로 한 것으로는, 《청루몽》(青樓夢) 64회가 있는데, “희봉(釐峰) 모진산인(慕真山人)이 짓다”라고 적혀 있고, 서문에는 유음향(俞吟香)이라고 한다. 음향의 이름은 달(達)이고, 장쑤성(江蘇省) 창저우(長洲) 사람으로, 중년에 꽤 유흥을 즐겼고, 후에 벗어나려 했으나, 세상일이 얽히고설켜, 또한 갑자기 떠날 수 없었고, 광서 10년(1884) 풍병으로 죽으니, 저서로는 《취홍헌필화》(醉紅軒筆話), 《화간방》(花間棒), 《오중고고록》(吳中考古錄) 및 《한구집》(閒鷗集)[11] 등이 있다(추도(鄒弢)《삼차려필담》(三借廬筆談)四). 《청루몽》은 광서 4년에 완성되었으니, 오중(吳中)의 창녀를 취하여, 그의 “화국(花國)을 유람하고, 미인을 보호하고, 학문(采芹香)을 닦고, 높은 벼슬(巍科)을 얻고, 정사(政事)를 맡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친구와의 의리를 돈독히 하고, 부부의 정을 돈독히 하고, 자녀를 기르고, 친척과 이웃을 화목하게 하고, 번화함을 버리고, 도를 구한다(遊花國,護美人,采芹香,掇巍科,任政事,報親恩,全友誼,敦琴瑟,撫子女,睦親鄰,謝繁華,求慕道)”(제1회)를 펼쳐 보였다.
이러한 큰 이상으로, 쓴 것이 사실이 아님을, 이로부터 알 수 있다. 대략 말하자면, 김읍향(金挹香)의 자는 기진(企真)이고, 쑤저우부(蘇州府) 창저우현(長洲縣)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글에 능했고, 자라서는 더욱 총명하고 아름다웠지만, 장가를 가지 않았으니, “마음이 맞는 사람(有情人)”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며, “당세가 도도하니, 이 사람이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마침내 한낱 가난한 선비로 하여금, 재주를 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하게 하니, 공경대부 중에 한 사람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도리어 청루(青樓)의 여자만 못하니, 마침내 밝은 눈으로 영웅을 뜻을 얻지 못했을 때 알아보는 사람이 있구나(竟使一介寒儒,懷才不遇,公卿大夫竟無一識我之人,反不若青樓女子,竟有慧眼識英雄於未遇時也)”(이 책 《제강(題綱)》)라고 했다. 그러므로 읍향이 협사(狹邪)를 유람하며, 특히 기녀의 사랑과 존중을 받았으니, 지휘가 뜻대로 됨이, 마치 남면하여 왕 노릇 하는 것과 같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읍향이 두 친구 및 열두 명의 기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세 사람이 거듭 구경하니, 그 안의 꾸밈이, 다른 솜씨가 있음을 보았다. 집 밖에 이름난 꽃들이 화려하고, 초목이 생기가 넘쳤다. 정중앙에 잔치 자리를 차려 놓으니, 월소(月素)가 자리 차례를 정해 놓았는데, 세 사람은 가운데에 앉고, 여러 미인 또한 차례대로 앉았다.
첫 번째 자리 원앙관(鴛鴦館) 주인 저애방(褚愛芳), 두 번째 자리 연류산인(煙柳山人) 왕상운(王湘雲), 세 번째 자리 철적선(鐵笛仙) 원교운(袁巧雲), 네 번째 자리 애추여사(愛雛女史) 주소경(朱素卿), 다섯 번째 자리 석화춘기조사자(惜花春起早使者) 육리춘(陸麗春), 여섯 번째 자리 탐매여사(探梅女士) 정소경(鄭素卿), 일곱 번째 자리 완화선사(浣花仙史) 육문경(陸文卿)…… 열한 번째 자리 매설쟁선객(梅雪爭先客) 하월견(何月娟), 맨 끝 자리 호방루(護芳樓) 주인 자신이 앉았다. 양옆에는 네 쌍의 시녀가 술을 따랐다. 여러 미인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정을 다했다. 읍향이 혜경(慧瓊)에게 말했다. “오늘 이처럼 성대한 모임에는, 술잔치 놀이를 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 좋은 때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자.” 월소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으니, 곧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읍향이 말했다. “주인이 직접 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월소가 사양하다 못해, 겨우 말했다. “정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 미인이 말했다. “영관(令官)은 반드시 먼저 문면배(門面杯)를 마시고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이에 열두 명의 미인이 모두 각자 술 한 잔씩을 따라, 읍향에게 바쳤다. 읍향이 단숨에 마시고, 이에 입을 열어 말했다. “술 명령은 군대 명령보다 엄하니, 어기는 자는 큰 술잔 세 잔을 벌주로 내리겠다!” 여러 미인이 공손히 명령을 들었다. …… (제5회)
읍향(挹香) 또한 정에 깊어, 병간호와 수고로움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읍향이 유향각(留香閣)에 이르니, 애경(愛卿)이 마침 위통병이 발작하여, 음식을 먹지 못했다. 읍향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문득 청전(青田)의 저서인 《의문보(醫門寶)》 4권이, 아직 집 서가 안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에 집으로 가서 가져와 다시 이르러, “향울산(香郁散)”이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내어, 시녀에게 약을 조제해 오게 하고, 직접 약탕기와 차 끓는 화로를 돌보았다.
또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고, 아침저녁으로 유향각에서 함께했다. 애경은 더욱 감격하여, 이에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읍향에게 보답했다. …… (제21회)
후에 마침내 “높은 벼슬(掇巍科)”을 하고, 다섯 명의 기녀를 맞이하고, 아내 한 명과 첩 네 명을 두었다. 또한 부모를 봉양할 계획을 위해, 벼슬을 내놓고 여항(余杭)의 관리가 되었고, 곧 지부(知府)로 승진하니, 곧 “정사(任政事)”를 한 것이다. 이윽고 부모가 모두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읍향 또한 도를 깨닫고, 산에 들어가려 하며, ……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나는 속세를 벗어나려 하지만, 그들에게 분명히 알려 줄 수 없으니, 다만 몰래 그들을 속이고, 나가야겠다.” 다음 날 세 통의 편지를 써서, 배림(拜林)과 몽선(夢仙) 중영(仲英)에게 보냈으니, 그들에게 편지를 남겨 작별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고, 또한 배림에게 일찍이 매(梅)의 혼인 일을 대신 마무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지나, 읍향은 또 수십 냥의 은자를 가지고, 직접 도포와 도복, 삿갓, 샌들을 마련하여, 남의 집에 맡기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또 매화관(梅花館)에 이르니, 마침 다섯 미인이 모두 있었다. 읍향은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전히 웃으며 그곳에 있으니, 마음속으로 아직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미 정(情)의 고비를 풀었으니, 무엇을 그리워하랴!” …… (제60회)
마침내 떠나, 천태산(天台山)에서 신선이 되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모든 처첩을 제도하니, 이에 “김씨 집안에서 두 대에 걸쳐 대낮에 하늘로 올라갔다(金氏門中兩代白日升天)”(제61회). 그의 아들은 일찍이 장원 급제했고, 옛 친구 또한 읍향의 도움으로 모두 신선이 되었고, 예전에 알았던 서른여섯 명의 기녀 또한 하나하나 “본래 자리로 돌아갔으니”, 이들은 “대부분 산화원(散花苑) 주인의 아래에서 꽃을 맡은 선녀였는데, 우연히 인간 세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이제 인간 세상의 인연이 다 되었으니, 마땅히 다시 선반(仙班)으로 돌아가야 한다(多是散花苑主坐下司花的仙女,因為偶觸思凡之念,所以謫降紅塵,如今塵緣已滿,應該重入仙班)”(제64회)라고 한다.
《红楼梦》의 판본이 간행되자, 속작과 번안하는 사람들이 곧 분기하여, 각자 지혜와 재주를 다하여, 원만하게 만들고자 했고, 오래 지나자, 이에 점차 흥미를 잃었으니, 대개 도광(道光) 말년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류의 책을 그다지 짓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미친 영향이 오히려 광범위하니, 오직 보통 사람의 집안은, 사람 수가 매우 적어, 일이 많지 않고, 비록 파란이 있더라도, 또한 《红楼梦》의 필의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이에 완전히 바뀌었으니, 곧 남녀가 뒤섞인 협사(狹邪)를 서술함으로써 발설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권의 책과 같이, 비록 의도와 규모에 고하가 있고, 문체에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지만, 모두 부드러운 감정을 묘사하고, 화려한 행적을 펼쳐 놓으니, 정신이 있는 곳은, 실로 다르지 않으니, 다만 채(釵)와 대(黛)를 이야기하는 것에 싫증이 나서, 인하여 창우(倡優)에게서 미인을 구했고, 대관원(大觀園)을 아는 사람이 이미 많으니, 곧 북리(北里)에서 다른 정장을 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해상화열전》(海上花列傳)이 나오자, 비로소 실제로 기녀의 집안을 묘사하고, 그 간사하고 속이는 행태를 폭로하며, “경험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게 하여(以過來人現身說法)”,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취를 따라 찾고, 마음으로 그 뜻을 통하게 하여, 현재 서시(西施)처럼 아첨하는 것을 보면, 곧 뒤에서 야차(夜叉)처럼 사나운 것을 알 수 있고, 오늘날 겨와 쭉정이처럼 친밀한 것을 보면, 곧 훗날 뱀과 전갈처럼 독할 것을 예측할 수 있게 하려 했다(按跡尋蹤,心通其意,見當前之媚於西子,即可知背後之潑於夜叉,見今日之密於糟糠,即可卜他年之毒於蛇蝎)”(제1회). 곧 명확하게 밝히니, 이미 앞사람과 다르며, 《红楼梦》이 협사 소설에 미친 영향은, 이로부터 끊어졌다.
《해상화열전》은 현재 64회로 되어 있고, “운간(雲間) 화야련농(花也憐儂)이 짓다”라고 적혀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곧 쑹장(松江)의 한자운(韓子雲)[12]이라고 하는데, 바둑을 잘 두고, 아편을 즐기며, 상하이에 매우 오래 거주했고, 일찍이 신문사 편집을 맡았고, 얻은 필묵의 자금을, 모두 유흥에 탕진했고, 경험이 이미 깊으니, 이에 이 속의 속임수를 꿰뚫어 알았다고 한다(《小說考證》八引《談瀛室筆記》). 그러나 그 이름은 자세하지 않고, 스스로 운간이라고 서명했으니, 화팅(華亭) 사람이다. 이 책은 광서 18년(1892)에 나왔고, 매 7일마다 2회씩 인쇄하여,[13] 시중에 널리 팔렸고, 꽤 유행했다. 대략 조박재(趙朴齋)를 책 전체의 실마리로 하여, 조가 17세에 어머니의 외삼촌 홍선경(洪善卿)을 찾아 상하이에 이르러, 곧 청루에서 놀게 되었고, 세상 물정을 잘 몰라, 매우 곤궁한 지경에 빠졌고, 곧 홍에게 보내져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는 또 몰래 돌아와, 더욱 타락하여, “인력거를 끄는” 지경에 이르렀다. 책이 여기까지 이르러 28회인데, 갑자기 다시 인쇄하지 않았다.
작가는 비록 시선을 시종일관 조(赵)에게서 떼지 않지만, 행적은 단지 이뿐이고, 오직 조로 인해 조계지 상인 및 방탕한 자제들과 연루되어, 그들의 탐닉하고 쫓아다니는 모습을 섞어 서술하고, 또한 유흥에 대해 언급하는데, “장삼(长三)”부터 “화연간(花烟间)”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대략 《유림외사(儒林外史)》와 같으니, 이어질 듯 끊어질 듯, 긴 이야기로 엮었다. 그 창녀의 깊은 정이 없음을 비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곳에서 잘하도록 책망하는 것이지만, 기록은 사실과 같으니, 과장이 매우 적으니, 곧 능히 스스로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정신을 전달하며, 말을 지어 일을 비유하고, 점을 찍고 색칠하여, 생생하게 뛰어나오게 한다(寫照傳神,屬辭比事,點綴渲染,躍躍如生)”(제1회)라는 약속을 실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박재(趙朴齋)가 처음 상하이에 도착하여, 장소촌(張小村)과 함께 “화연간”에 갔을 때의 상황을 서술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아이(王阿二)는 소촌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큰 소리로 외쳤다. “자네 잘 지냈나! 날 속였지, 그렇지? 자네가 두세 달 만에 돌아온다고 했잖아, 이제야 겨우 왔네. 두세 달인가? 아마 두세 해는 되었을 거야!……” 소촌은 바쁘게 웃으며 애원했다. “화내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할게.” 곧 왕아이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네 마디도 채 말하지 않았는데, 왕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자네 정말 약삭빠르구먼. 자네가 젖은 옷을 다른 사람에게 입히려고 하니, 자네는 알몸이 되는 셈이지, 그렇지?” 소촌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야, 자네도 내 말을 다 들어보게.” 왕아이는 곧 다시 소촌의 품에 안겨 귀 기울여 들었는데,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알 수 없지만, 소촌이 말하면서, 입을 삐죽 내미니, 왕아이는 곧 고개를 돌려 조박재를 흘끗 쳐다보았고, 이어서 소촌이 몇 마디 더 말했다. 왕아이가 말했다. “자네는 그러면 어떻게 할 건가?” 소촌이 말했다. “나는 원래대로 할 거야.” 왕아이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일어서서, 등잔을 밝히고, 박재의 존함을 물었고, 또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박재는 얼굴을 돌려, 차림표를 보는 척했다. 반 늙은 하녀가, 한 손에는 물주전자를 들고, 한 손에는 두 상자의 담배 연고를 들고, …… 올라와서, ……
담배 상자를 담뱃접시에 놓고, 담뱃불을 붙이고, 찻잔을 씻고, 여전히 주전자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왕아이는 소촌 곁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박재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침상에 와서 기대앉으세요.” 박재는 바라던 바였기에, 곧 담배 침상으로 가서 누웠고, 왕아이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담뱃대에 담아, 소촌에게 건네니, 휙휙 소리를 내며 끝까지 빨아들였다. …… 세 번째 담배에 이르러, 소촌이 말했다. “이제 그만 피워.” 왕아이는 담뱃대를 돌려, 박재에게 건네주었다. 박재는 담배를 피우는 데 익숙하지 않아, 반도 채 피우지 못하고, 담뱃구멍이 막혔다. …… 왕아이는 송곳으로 담뱃구멍을 뚫어 주고, 그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박재는 이때를 틈타 그의 손목을 잡았고, 왕아이는 손을 빼앗으며, 박재의 다리를 힘껏 밀쳤는데, 박재는 시큰하고 아프면서도 시원했다. 박재는 담배를 다 피우고, 몰래 소촌을 쳐다보니, 소촌은 눈을 감고, 어렴풋이, 자는 듯 자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박재는 낮은 목소리로 “소촌 형”이라고 불렀다. 두 번이나 불렀지만, 소촌은 손만 흔들고, 대답하지 않았다. 왕아이가 말했다. “담배에 취했으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박재는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 (제2회)
광서 20년에 이르러, 제1회부터 60회까지 모두 나왔고, 이어서 홍선경(洪善卿)이 우연히 조(赵)가 인력거를 끄는 것을 보고, 곧 누이에게 편지를 보내, 그 상황을 서술했다. 홍씨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오직 그의 딸 이보(二寶)라는 자가 꽤 능숙했기에, 이에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에 가서 찾아, 그를 만났지만, 또한 모두 머무르며 서둘러 돌아가지 않았다.
홍선경은 힘껏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듣지 않자, 이에 인연을 끊었다. 세 사람의 자본이 점차 바닥나, 마침내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이보는 마침내 창기가 되었고, 명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윽고 사(史)씨 삼 공자를 만났는데, 거부라고 하며, 이보를 매우 사랑하여, 별장으로 맞아들여 여름을 보냈고, 장차 아내로 맞이할 것이라고 하며, 특별히 난징(南京)에 잠시 다녀와야, 비로소 맞이하러 오겠다고 하여, 이에 헤어졌다. 이보는 이로 인해 다른 손님을 거절했고, 또한 금을 빌려 의복을 만들어, 혼수 자금을 마련했지만, 사씨 삼 공자는 끝내 오지 않았다. 박재(朴齋)를 난징에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하니, 공자가 새로 약혼했고, 바야흐로 양저우(揚州)에 장가들러 갔다고 한다. 이보는 소식을 듣고 혼절했고, 구제하여 겨우 깨어났지만, 빚이 3~4천 금에 이르러, 다시 옛 일을 하지 않고는 갚을 수 없었기에, 이에 다시 손님을 받았고, 끔찍한 꿈을 꾸고 이야기가 끝났다. 자서(自跋)에서 장차 속작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후반부는 이른바 해상 명류(海上名流)의 아집(雅集)에 대해, 기록이 매우 자세하지만, 다소 사실과 어긋나고, 다른 사람의 탐닉하고 쫓아다니며, 돈을 낭비하고, 서로 속이는 상황을 묘사한 것은, 앞 30회에 못지않다. 뇌(賴) 공자가 여배우에게 상을 주는 대목을 서술한 것이, 당시 세태를 매우 잘 보여준다.
……문군(文君)이 분장하고 무대에 오르니, 한 문객이 흥을 돋우며, 먼저 “잘한다!”라고 외쳤다.
뜻밖에도 잇달아, 너도 잘한다 외치고, 나도 잘한다 외치니, 온통 소리가 하늘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는 듯했다. …… 오직 뇌 공자만이 배를 잡고 크게 웃으며, 매우 의기양양해했다.
절반 정도 부르자, 하인에게 명하여 상을 내리게 했다. 하인은 한 묶음의 양전을 바구니에 담아, 뇌 공자에게 보여 주고, 무대 위로 한 번 뿌리니, 짤랑 하는 소리가 들리자, 많은 반짝이는 것들이, 무대 위에 흩어져 굴렀고, 무대 아래의 구경꾼들이 또 한 소리를 질렀다. 문군은 뇌 공자가 자신을 희롱하려 함을 알고, 마음에 급해져, 오히려 대책을 생각해 내어, 그 자리에서 여전히 열심히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와, ……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방심하는 사이에 뇌 공자가 한 손으로 문군을 품에 안았다. 문군은 깜짝 놀라 밀어내고 일어서며, 화난 척했지만, 다시 뇌 공자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귓속말을 몇 마디 하자, 뇌 공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다.” …… (제44회)
책 속의 인물 또한,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고, 모두 그들의 진짜 이름을 숨겼지만,[14] 오직 조박재(趙朴齋)만은 숨기지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는 본래 작가의 절친한 친구였고, 당시 금전으로 도움을 주었지만, 오래 지나자 싫증을 내고 인연을 끊었고, 한(韓)은 이에 이 책을 지어 그를 비방했고, 28회까지 인쇄하여 팔자, 조가 급히 많은 뇌물을 보내자, 비로소 붓을 멈추었지만, 책은 이미 유행했고, 이윽고 조가 죽자, 이에 속작하여 이익을 얻었고, 또한 마음대로 그의 여동생이 창기가 되는 것까지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二寶)의 타락은, 실로 작가가 미리 정해 놓은 구도이므로, 처음 책머리에 조박재가 처음 홍선경(洪善卿)을 만났을 때, 곧 홍이 “자네 여동생이 있는데, …… 차를 받은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을 서술하자, 대답은 “아직 없습니다. 올해 열다섯 살입니다.”라고 했으니, 이미 뒷이야기를 위한 복선이었다. 광서 말년부터 선통 초년까지, 상하이에서 이러한 류의 소설이 특히 많이 나왔고, 왕왕 몇 회 만에 곧 중지되었으니, 대개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단지 기녀 집안의 죄악을 들추어내려는 책 또한 일어났지만, 대부분 교묘하게 죄를 엮었으므로, 지나친 말을 지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려 했으니, 끝내 《해상화열전》처럼 평담하고 자연에 가까운 것은 없었다.
〔1〕 최령흠(崔令欽)은 당나라 박릉(博陵, 지금의 허베이성 定县) 사람이다. 개원(開元) 연간에는 좌금오(左金吾)를 지냈고, 천보(天寶) 연간에는 저작좌랑(著作佐郎)으로 옮겼으며, 숙종(肅宗) 때에는 창부낭중(倉部郎中)으로 개정되었고, 후에는 만주자사(萬州刺史)를 지냈으며, 최종적으로 국자사업(國子司業)을 지냈다. 저술한 《교방기(教坊記)》는 1권으로, 당나라 개원과 천보 연간의 교방의 제도, 일화, 그리고 악곡의 기원과 내용 등을 기록하고 있다. 손기(孫棨)의 《북리지(北里志)》는, 본 권 97쪽 주[9]를 참고하라.
〔2〕 매정조(梅鼎祚, 1549—1615)의 자는 우금(禹金)이고, 명나라 선성(宣城, 지금의 안후이성) 사람이다. 창극 《옥합기(玉合記)》, 잡극 《곤륜노(昆侖奴)》 등을 저술했다. 저술한 《청니연화기(青泥蓮花記)》는, 7개 부문 13권으로 나뉜다.
〔3〕 여회(余懷, 1616—?)의 자는 담심(澹心)이고, 별호는 만지노인(鬘持老人)이며, 청나라 보톈(莆田, 지금의 푸젠성) 사람이다. 《미외헌문고(味外軒文稿)》, 《연산당집(研山堂集)》 등을 저술했다. 저술한 《판교잡기(板橋雜記)》는, 아유(雅游), 여품(麗品), 일사(軼事)의 3권으로 나뉜다.
〔4〕 기녀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으로, 양저우(揚州)에는 분리타행자(芬利它行者)의 《죽서화사소록(竹西花事小錄)》 등이 있고, 오문(吳門, 쑤저우)에는 서계산인(西溪山人)의 《오문화타록(吳門畫舵錄)》, 개중생(個中生)의 《오문화항속록(吳門畫航續錄)》 등이 있으며, 주강(珠江, 광저우)에는 지기생(支機生, 뮤겐)의 《주강명화소전(珠江名花小傳)》, 주우량(周友良)의 《주강매류기(珠江梅柳記)》 등이 있고, 상하이에는 송북옥섬생(松北玉魫生, 왕도)의 《해추야유록(海陬冶遊錄)》, 《송빈쇄화(淞濱瑣話)》 등이 있다.
〔5〕 《품화보감(品花寶鑒)》 권수에는 석함씨(石函氏, 진삼)의 자서가 있다. 함풍(咸豐) 2년(1852)에 간행되었고, 원 간행본의 표지에는 “무신년(戊申年, 1848) 10월 환중료환재(幻中了幻齋)에서 조각을 시작하여, 기유년(己酉年, 도광 29년, 1849) 6월에 완공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몽화쇄부(夢華瑣簿)》에 따르면 “《보감》은 이 해(정유년, 도광 17년, 1837)에 겨우 앞 30회를 완성했고, 기유년에 소일(少逸)이 광시(廣西)를 유람하고 돌아와 서울에 이르러, 이에 60권을 완성했다. 나는 임자년(咸豐 2년, 1852)에야 그 간행본을 보았다.”라고 한다.
〔6〕 부조륜(符兆綸)의 자는 설초(雪樵)이고, 청나라 이황(宜黃, 지금의 장시성) 사람이며, 일찍이 푸젠 지현(福建知縣)을 지냈다. 《몽리운시초(夢梨雲詩抄)》 등을 저술했다. 아래의 인용문은 《회도화월인연(繪圖花月姻緣)》 권수에 나온다.
〔7〕 사장정(謝章铤)의 자는 매여(枚如)이고, 청나라 장러(長樂, 지금의 푸젠성) 사람이며, 내각중서(內閣中書)까지 벼슬을 지냈다. 《도기산장전집(賭棋山莊全集)》을 저술했다. 《도기산장시집(賭棋山莊詩集)》은 14권이다. 《위자안(魏子安)이 지은 책에 쓰다》 오언시 세 수는, 8권에 보인다. 《화월흔(花月痕)》에 쓴 시 한 수는 다음과 같다. “눈물은 흘릴 땅이 없어, 모두 관성자(管城子)에게 부치네. 좋은 술과 여인, 말년이 이에 이와 같구나. 홀로 한 조각 마음을 안으니, 살아도 죽은 것도 아니네(有淚無地灑,都付管城子。醇酒與婦人,末路乃如此。獨抱一片心,不生亦不死).”
〔8〕 《도기산장문집(賭棋山莊文集)》 권5 《위자안 묘지명(魏子安墓志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수인(秀仁)의 자는 자안(子安)이고, 또 다른 자는 자돈(子敦)이며, 허우관(侯官) 사람이다. …… 어릴 때 동자시(童試)에 불리했고, 28세에 비로소 제자원(弟子員)에 보충되었고, 곧 연이어 병오년 향시(丙午鄉試)에 합격했다. …… 이미 여러 번 춘관(春官)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하자, 이에 진(晉), 진(秦), 촉(蜀)을 유람했다. 고향의 선배들과, 당시 화복(禍福)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를 사랑하고 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끝내 그를 크게 도와줄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일이 위태로울 만한 것이 많음을 보고, 손에 작은 권력도 없고, 말이 남들과 다르지 않지만, 강직하고 답답한 기운을, 발설할 곳이 없어, 인하여 패관 소설을 지으니, 남녀의 사사로운 일에 의탁하여, 그 책의 이름을 《화월흔》이라 했다.”
〔9〕 《화월흔》의 저술 과정에 대해, 《과여속록(課余續錄)》 권1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때 자안은 산시(山西)에 머물며, 타이위안 지부(太原知府) 보면금 태수(保眠琴太守)의 집에 있었다. …… 한가한 날이 많아, 책을 읽으려 했지만, 또한 여러 가지 일에 시달려, 무료하기 그지없자, 이에 소설을 지으니, 스스로를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책 속에서 일컫는 위영(韋瑩)의 자는 치주(痴珠)인 자는, 곧 자안이다. 한두 회를 쓰기 시작할 때, 마침 태수가 그의 방에 들어왔다가,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이에 자안과 약속했다. 열흘에 한 회를 완성하기로. 한 회가 완성되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극단을 불러, 선생의 윤필료를 축하했으니, 이에 점점 수십 회에 이르러, 거대한 책이 되었다.”
〔10〕 《유후봉전(劉栩鳳傳)》은 곧 《서오화사소전(棲梧花史小傳)》으로, 내용은 허난성 화현(河南滑縣)의 가기(歌妓) 유후봉(劉栩鳳)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
〔11〕 《취홍헌필화(醉紅軒筆話)》 이 책과 《화간방(花間棒)》, 《오중고고록(吳中考古錄)》, 《한구집(閑鷗集)》은, 모두 추도(鄒弢)의 《삼차려필담(三借廬筆談)》에 보이지만, 간행본은 보이지 않는다.
〔12〕 한자운(韓子雲, 1856—1894)의 이름은 방경(邦慶)이고, 별호는 태선(太仙)이며, 청나라 쑹장(松江, 지금의 상하이) 사람이다. 일찍이 신보관(申報館) 편집을 맡았다.
〔13〕 《해상화열전》의 간행 상황에 대해, 이 책은 광서 18년(1892) 2월 초하루부터, 한방경(韓邦慶)이 편집한 문예 잡지 《해상기서(海上奇書)》에 속속 간행되었다. 이 간행물은 처음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한 번씩 간행되었고, 매 호마다 《해상화열전》 2회씩 실었다. 제9호부터는, 매달 한 번으로 바뀌었고, 15호까지 나오고 폐간되었으며, 《해상화열전》은 총 30회가 실렸다.
〔14〕 《담영실수필(譚瀛室隨筆)》에 따르면, 《해상화열전》 “책 속의 인명은, 대개 가리키는 바가 있으며, 동치(同治)와 광서(光緒) 연간 상하이 명류의 사실에 익숙한 사람은, 대체로 말할 수 있다. 이에 우선 아는 바를 들면 다음과 같다. 제운수(齊韻叟)는 심중부(沈仲馥)이고, 사천연(史天然)은 이목재(李木齋)이고, 뢰두원(賴頭鼋)은 늑원협(勒元俠)이고, 방봉호(方蓬壺)는 원상부(袁翔父)이며, 일설에는 왕자전(王紫詮)이라고도 하고, 이실부(李實夫)는 성박인(盛朴人)이고, 이학정(李鶴汀)은 성행손(盛杏荪)이고, 여전홍(黎篆鴻)은 후설암(胡雪岩)이고, 왕연생(王蓮生)은 마미숙(馬眉叔)이고, 소류아(小柳兒)는 양후자(楊猴子)이고, 고아백(高亞白)은 이유선(李芋仙)이다. 이외의 여러 사람도, 유추해 보면, 거의 십중팔구 맞을 것이니, 이는 읽는 사람의 주의에 달려 있다.”
제27편 청나라의 협의 소설 및 공안.
명나라 말기부터 세상 사람들은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를 “사대기서”라 불렀고, 설부(說部, 소설류)의 맨 윗자리에 두었으며, 청나라 건륭 연간 중기에 《홍루몽》이 크게 유행하자, 드디어 《삼국지》의 자리를 빼앗았고, 특히 문인들에게 칭송받았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삼국지》와 《수호전》이었다. 시대 상황이 여러 번 바뀌고, 인심이 예전과 달라짐에 따라, 오래되니 조금 싫증을 내고, 점차 다른 흐름이 생겨났으니, 비록 예전의 여러 책에서 비롯되었지만, 정신은 지극히 정반대에 이르기도 했으며, 대략 용감한 협객을 칭송하고, 호방함을 찬미하는 데 뜻을 두었지만, 또한 반드시 충의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는 문인들이 혹 《홍루몽》에 불만을 가진 데서 비롯되었으니, 그 대표가 《아녀영웅전》이고, 다른 하나는 민심이 이미 《수호전》과 통하지 않게 된 데서 비롯되었으니, 그 대표가 《삼협오의》이다.
《아녀영웅전 평화》는 본래 53회였으나, 지금은 40회가 남아 있으며, “연북한인(燕北閑人) 지음”이라고 되어 있다. 마종선(馬從善)의 서문에는 문강(文康)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도광 연간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문강은 페이모(費莫)씨이고, 자는 철선(鐵仙)이며, 만주 양홍기 사람이고, 대학사 늑보(勒保)의 둘째 손자이다. “재산을 이용하여 이번원 낭중이 되었고, 군수로 나갔으며, 여러 번 관찰사로 승진했고, 부모의 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특별히 주사장신(駐藏大臣)으로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가지 못하고, 집에서 죽었다.” 집안은 본래 귀하고 융성했지만, 여러 아들이 불초하여, 몰락하여 곤궁에 이르렀다. 문강은 만년에 방에 홀로 거처하며, 붓과 먹만이 남아 있었기에, 이 책을 지어 스스로를 달랬다. 흥하고 쇠하는 것을 모두 직접 겪었으므로, “세운의 변천과, 인심의 반복에, 세 번이나 뜻을 두었다.”(서문과 함께) 영화가 이미 떨어지고, 슬픈 마음을 품고, 붓을 들어 말을 남겼으니, 그 상황은 대략 조설근(曹雪芹)과 매우 유사하다. 다만 그는 사실적으로, 스스로를 서술했지만, 이는 이상적으로, 남을 서술했으며, 게다가 겪은 일이 다시 다르므로, 성취가 드디어 크게 달라졌다. 책 머리에는 옹정 갑인년 관감아재(觀鑑我齋)의 서문이 있는데, “격물(格物)의 책”이라고 하며, 《서유기》 등의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반박하고 바로잡았다.
〔4〕 다음에 건륭 갑인년(乾隆甲寅年)에 동해오료옹(東海吾了翁)이 기록하기를, 춘명(春明)의 저잣거리에서 얻었지만, 작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여러 번 읽고 연구하여, “글자가 빠진 곳에서 그 의미를 구하니”[5], 비로소 말이 모두 근거가 있음을 알고, 이에 그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서문을 붙였다고 하는데, 모두 작가의 가탁이다. 책머리에서는 “이 평화는…… 처음 이름이 《금옥연(金玉緣)》이었고, 전하는 것이 서울의 한 공안 사건이므로, 또한 《일하신서(日下新書)》라고도 했다. 책 속의 뜻과 말은, 비록 문장에 합당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외설적인 말과 음란한 가사를 씻어내고, 바른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또한 《정법안장오십삼참(正法眼藏五十三參)》이라고도 했으니, 처음에는 불가의 말이 아니었다. 후에 동해오료옹이 다시 정리하여, 제목을 《아녀영웅전 평화》라고 했다.……”(첫 회)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세우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역시 《홍루몽》의 방식이다.
소위 “서울의 한 공안 사건”이라는 것은, 협녀(俠女) 하옥봉(何玉鳳)이 있는데, 본래 명문가 출신이고, 지혜와 용맹이 세상에 뛰어나며, 그의 아버지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었기에, 어머니를 모시고 산림에 숨어 살며, 틈을 엿보아 복수하려 했다. 그의 원수인 기헌당(紀獻唐)은, 나라에 큰 공로가 있어, 세력이 매우 강성했다. 하옥봉은 급히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하자, 성명을 바꾸어 십삼매(十三妹)라고 하고, 저잣거리에서 왕래하며, 제멋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우연히 여행 중에 효자 안기(安驥)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그를 구해주었고, 이로써 서로 알게 되었고, 후에 점점 친해졌다. 이윽고 기헌당이 조정에 의해 주살되었고, 하는 비록 직접 원수를 갚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원수는 이미 갚았으므로, 출가하려 했지만, 결국 말리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움직여, 안기에게 시집갔다. 안기에게는 또한 아내 장금봉(張金鳳)이 있는데, 또한 일찍이 옥봉에게 구원받은 적이 있으므로, 이에 자매처럼 화목하게 지냈고, 후에 각자 아이를 가졌으므로, 이 책의 처음 이름이 《금옥연》이었다.
책 속의 인물 또한 종종 동시대 사람을 모델로 삼았다. 혹은 이전 사람을 취하기도 했는데, 기헌당 같은 경우가 그렇다. 장서조(蔣瑞藻)는 《소설고증(小說考證)》 8에서, “내 생각에는, 기(紀)는 연(年)이고, 헌(獻)은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개의 이름이 갱헌(羹獻)’이라고 했고, 당(唐)은 요임금의 연호이니, 합치면 연갱요(年羹堯)이다. …… 그의 사적이 본전(本傳)에 기록된 것과 모두 부합한다.”라고 한다. 안기는 아마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거나, 혹은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반대로 쓴 것이다. 십삼매는 자세하지 않지만, 아마 순전히 작가의 뜻으로 지어낸 것일 것이니, 영웅 남녀의 모습을, 한 몸에 갖추게 하려 했으므로, 드디어 성격이 정상을 잃고, 언행이 매우 달라져, 억지스러운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예를 들어 안기가 처음 여관에서 하를 만났을 때, 그가 방에 들어갈까 염려하여, 사람을 불러 돌을 옮겨 문을 막으려 했지만, 여러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는데, 하가 오히려 그것을 옮겨 들여보냈으니,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 단락은 《아녀영웅전》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십삼매의 초인적인 힘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또한 작품의 결말과 후속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여자가 또 말했다. “이 돌멩이 하나 옮기는 데, 어찌 이렇게 말과 사람이 뒤집히도록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오?” 장삼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받아서 말했다. “어째서 ‘말과 사람이 뒤집히는’ 것이오? 이 녀석을 보시오,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움직일 수 있겠소? 장난치는 줄 아시오.” 그 여자가 앞으로 걸어가, 그 돌멩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 대략 240~250근 정도의 무게가 나가고, 원래 곡식을 찧는 돌확이었다. 위쪽 가장자리에는, 구멍이 뚫린 고리눈이 있었다. …… 그는 먼저 소매를 걷어올리고, …… 그 돌을 평평한 땅에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밀어 한 바퀴 돌려, 그 고리눈을 찾아, 두 손가락을 넣어 걸고, 위로 한 번 들어 올리니, 그 200근이 넘는 돌확을, 단번에 손을 놓고 들어 올렸다. 장삼과 이사에게 말했다. “너희 둘도 가만히 있지 말고, 이 돌 위의 흙을 깨끗이 털어내거라.” 두 사람은 혼비백산하여, 대답을 하고, 허둥지둥 손으로 흙을 털어내고,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얼굴에 봄빛을 가득 담고 안 공자에게 말했다. “손님, 이 돌을 어디에 놓을까요?” 안 공자는 부끄러워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고, 눈은 코를 보고 코는 마음을 보며 대답을 했다. “수고스럽지만, 방 안에 놓아주시오.” 그 여자는 듣고는, 한 손으로 돌을 들고, 가볍게 작은 발을 움직여, 섬돌을 올라갔고, 그 손으로 포렴을 걷어 올리고, 문을 넘어 들어가, 조용히 그 돌을 방 안 남쪽 벽 아래에 놓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숨도 차지 않고, 얼굴도 빨개지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어 방 안을 살펴보니, 모두 놀라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4회)
결말에는 안기가 탐화로 급제하고, 다시 국자감 제주에서 오리야수타이 참찬 대신으로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또 “학정으로 바뀌어, 폐하께 하직 인사를 드린 후 곧 부임하여, 어려운 큰 사건들을 처리하니, 정치가 칭송을 받았고, 지위가 신하의 극에 이르렀으니, 다 쓸 수 없다.”라고 한다. 이로 인해 다시 어떤 사람이 32회 분량의 속편을 지었는데, 문장이 졸렬하고, 또한 완결되지 않았으며, 두 개의 속편이 있다고 하는데, 서문에 “연월을 헤아리지 않는 무명씨”라고 되어 있으니, 대개 광서 20년경 베이징 서적상들이 지어낸 것이다.
《삼협오의》는 광서 5년(1879년)에 나왔으며, 원래 이름은 《충렬협의전(忠烈俠義傳)》이었고, 120회로 구성되었으며, 맨 앞에 “석옥곤(石玉昆)[7] 지음”이라고 되어 있지만, 서문에는 문죽주인(問竹主人)이 원래 소장했고, 입미도인(入迷道人)이 편집했다고 하는데, 모두 어떤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무릇 이러한 류의 저작은, 비록 용감한 협객을 서술하여,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선량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포악한 자를 제거하며,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는 데 뜻을 두었지만, 반드시 명신(名臣) 대리(大吏)를 중심으로 삼아, 모든 호걸을 총괄하게 하였으니, 《삼협오의》에서는 포증(包拯)이 그러하다. 증의 자는 희인(希仁)이고, 진사로 벼슬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郎)에 이르렀고, 그 사이에 일찍이 천장각 대제(天章閣待制)를 지냈고, 또 용도각 학사(龍圖閣學士)를 지냈으며, 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를 맡았으니, 조정에 서 있음이 강직하고,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염라대왕에 비유하였으니, 전기가 《송사(宋史)》(316권)에 있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지는 바는, 행사가 대개 괴이하니, 원나라 잡극(雜劇)에는 이미 포공(包公)의 “단립태후(斷立太后)” 및 “심오분귀(審烏盆鬼)”[8] 등의 이설이 있었고, 명나라 사람은 또 단편 소설 10권인 《용도공안(龍圖公案)》[9]을 지었으니, 또한 《포공안(包公案)》이라고도 하였는데, 증이 사사로운 방문, 꿈의 계시, 귀신의 말 등을 빌려 기이한 사건 63건을 판결한 것을 기록하였으나, 문장이 매우 졸렬하니, 대개 겨우 글자를 아는 자가 지은 것이다. 후에 또 대부로 발전시켜, 여전히 《용도공안》이라고 하였으니, 구성이 치밀해지고, 처음과 끝이 이어지니, 곧 《삼협오의》의 원형이 되었다.[10] 《삼협오의》의 첫머리에는, 송 진종(宋真宗)에게 아들이 없고, 유(劉)·이(李) 두 비빈이 모두 임신하였는데, 아들을 낳은 자를 정궁(正宮)으로 세우기로 약속한 것을 서술한다. 유씨는 내시 곽괴(郭槐)와 몰래 모의하여, 이씨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려, 곧 껍질 벗긴 살쾡이로 바꿔치기하여, 괴물을 낳았다고 하였다. 태자는 궁인 구주(寇珠)에게 맡겨, 목매달아 물에 버리라고 명하였으나, 구주는 차마 하지 못하고, 몰래 진림(陳林)에게 주어, 팔대왕(八大王)의 집에 숨기니, 제3자라고 하여, 비로소 자라게 되었다. 유씨는 또 이 비빈을 모함하여 내쫓으니, 충성스러운 환관들이 많이 죽었다. 진종은 아들이 없이, 이미 붕어하였고, 팔대왕의 제3자가 이에 왕위를 이었으니, 곧 인종(仁宗)이다. 책은 이로부터 곧 포증의 탄생을 서술하니, 이전의 사건을 이후 내용의 복선으로 삼을 뿐이다. 다시, 증의 혼인, 벼슬, 사건 판결 등의 사적을 서술하니, 왕왕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취하여, 함께 덧붙였다. 개봉부를 다스리게 되자, 민간에서 이 비빈을 만나, ‘이묘환자(狸猫換子)’의 옛 사건을 밝히니, 이때 인종은 비로소 이씨가 친어머니임을 알고, 맞아들여 돌아왔다. 증은 또 충성스러운 행동으로, 호걸들을 감화시키니, 삼협, 곧 남협 전조, 북협 구양춘(歐陽春), 쌍협 정조란(丁兆蘭), 정조휘(丁兆蕙), 및 오서, 곧 찬천서 노방(盧方), 철지서 한창(韓彰), 천산서 서경(徐慶), 번강서 장평(蔣平), 금모서 백옥당(白玉堂) 등이, 모두 도적 출신의 협객으로, 강호 사이를 종횡하니, 혹은 우연히 서울에 들어가, 함부로 궁중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였으나, 사람들도 막을 수 없었지만, 모두 차례로 마음을 기울여, 투항하여 벼슬을 받고, 함께 강포한 자를 토벌하니, 백성들이 크게 편안해졌다. 후에 양양왕(襄陽王) 조궐(趙珏)이 모반을 꾀하여, 그 무리의 맹서를 충소루(沖霄樓)에 숨기니, 오서가 순안(巡按) 안차산(顔查散)을 따라 탐방하다가, 백옥당이 갑자기 홀로 가서 훔치다가, 드디어 동망진(銅網陣)에 떨어져 죽었다. 책은 이에 이르러 끝난다. 그중 인물 중 역사에 보이는 자는, 포증, 팔대왕 등 몇 사람뿐이다. 이야기 또한 대부분 사실이 아니며, 오서는 비록 명나라 사람의 《용도공안》 및 《서양기(西洋記)》에 모두 기록되었지만, 모두 요물이라고 하였으니, 이 책에서 의사(義士)로 묘사한 것과는 다르며, 종실의 모반은, 인종 때 실제로 없었으니, 이는 대개 명나라 신호(宸濠)의 일[11]로 인해 영향을 받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다. 사단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자못 유치하고 약한 점이 있지만, 유독 초야의 호걸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생동감 있고 정신이 넘치며, 간혹 세상의 풍속을 곁들이고, 해학을 섞으니, 또한 매번 무부(莽夫)를 특별히 돋보이게 한다. 세상 사람들이 한창 요괴에 대한 이야기,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한 이야기에 물들어 있을 때, 이에 이 책은 거칠고 호방한 필치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한이 말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금모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 전 대협은 함공도(陷空島)의 여러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들의 별호를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공손 선생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분명히 알아듣고, 갑자기 깨닫고 말했다. “이 사람이 대형을 찾아온 것은, 바로 대형과 기를 겨루려는 것입니다.” 전 대협이 말했다. “그와 나는 평소에 원한이 없는데, 나와 무슨 기를 겨룬다는 것이오?” 공손책(公孫策)이 말했다. “대형,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다섯 명은 ‘오서(五鼠)’라고 불리고, 대형은 ‘어묘(御貓)’라고 불리니, 어찌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분명 대형을 어묘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니, 그가 대형과 기를 겨루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 대협이 말했다. “현제(賢弟)의 말이, 이치에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이 ‘어묘’는, 성상께서 하사하신 것이지, 제가 일부러 ‘고양이’라고 칭하며, 친구를 업신여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정말 이 일 때문에 온 것이라면, 제가 기꺼이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이후로 어묘라고 칭하지 않아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오직 조호(趙虎)만이 한창 술을 마시는 중에, …… 조금 불복하는 마음이 들어, 술잔을 들고, 일어서서 말했다. “대형, 당신은 평소 담력이 남달랐는데, 오늘 어찌 이리 기가 죽으셨습니까? 이 ‘어묘’ 두 글자는, 성상께서 하사하신 것인데,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 무슨 백설탕이니, 흑설탕이니 하는 자가, 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온다면, 제가 뜨거운 물 한 주전자를 끓여, 그에게 부어 마시게 하여, 제 답답한 기운을 풀어주겠습니다.” 전 대협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사제(四弟) 조용히 말하게. ‘담장 너머에도 귀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막 이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한 물건이 날아 들어와, 비뚤어지지도 않고, 바로 조호가 들고 있던 그 술잔 위에 맞으니,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며, 술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조 대협은 깜짝 놀랐고, 여러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대협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격선(隔扇, 덧문)을 살짝 닫고, 몸을 돌려 다시 등불을 끄고, 겉옷을 벗으니, 안에는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몰래 보검을 손에 쥐고, 격선을 일부러 여는 척하니, 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또 한 물건이 격선에 맞았다. 전 대협은 그제야 격선을 열고, 기세에 따라 몸을 날려 뛰쳐나갔다. 마주치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니,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칼 한 자루가 날아왔다. 전 대협은 칼을 옆으로 뉘어, 위로 막으니, 곧바로 막고 막으며, 별빛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온통 푸른색의 야행 의복을 입고, 발걸음이 날렵했다. 어렴풋이 전에 묘가집(苗家集)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쨍그랑쨍그랑 울렸다. 전 대협은 막기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고, 그가 칼을 휘두르는 것이 매우 급하고, 솜씨가 정교하고 기이함을 보고, 남협은 속으로 감탄했다. 또 생각했다. “이 친구는 나아가고 물러설 줄을 모르는구나. 내가 양보하며, 너를 다치게 하려 하지 않는데. 어찌 굳이 끝까지 몰아세우려 하는가? 설마 내가 너를 두려워할 줄 아는가?” 속으로 “그에게도 좀 알게 해 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보검을 옆으로 뻗어, 칼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학려장공세(鶴唳長空勢)’를 써서, 힘껏 위로 쳐올렸다. 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사람의 칼은 이미 두 동강이 났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그가 몸을 한 번 날리니, 이미 담 위로 올라갔다. 전 대협이 몸을 날려, 또한 따라 올라갔다. ……(제39회)
유월(俞樾)이 오하(吴下)에 머물 때, 반조음(潘祖荫)[12]이 베이징에서 돌아와 이 책을 보여주었는데, 처음에는 평범한 속서(俗書)로 여겼으나, 다 읽고 나서, “사적이 새롭고 기이하며, 필치가 호방하고 자유로우며, 묘사가 아주 세밀하고, 표현 또한 절묘하니, 마치 유마자(柳麻子)가 ‘무송타점(武松打店)’을 말한 것과 같으니, 처음 가게에 도착했을 때 사람이 없다가, 갑자기 한 번 포효하니, 가게 안의 빈 항아리와 빈 독에서 모두 웅웅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한가한 중에 채색하니, 정신이 백 배나 된다.”(유 서문)라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책의 첫머리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의 허황함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따로 제1회를 지어, “역사와 전기를 근거로 하여, 속설을 바로잡았다.” 또한 책 속의 남협(南俠), 북협(北俠), 쌍협(雙俠)은, 그 수가 이미 넷이니, 셋으로 포괄할 수 없으므로, 소협(小俠) 아이호(艾虎)를 더하니, 또 다섯이 되었고, “흑요호(黑妖狐) 지화(智化)는, 소협의 스승이고, 소제갈(小諸葛) 심중원(沈仲元)은, 제100회 중에서 그가 유희에서 협의를 만들어냈다고 크게 칭찬하니,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협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여 다시 이름을 《칠협오의(七俠五義)》로 고쳐, 광서 기축년(1889년)에 서문을 써서 전하니, 이에 처음의 책과 함께 병행하여 유통되었고, 강절(江浙) 지역에서 특히 성행하였다.
그해 5월, 다시 《소오의(小五義)》가 베이징에서 나왔고, 10월, 또 《속소오의(續小五義)》가 나왔는데, 모두 124회였다. 서문에는 《삼협오의》와 모두 석옥곤의 원고이고, 그의 제자에게서 얻었다고 하였다. “원래 3천여 편이었는데, 상중하 3부로 나누었고, 총칭을 《충렬협의전》이라 하였고, 원래 크고 작다는 말이 없었는데, 상부의 삼협오의가 창시한 사람이므로, 대오의(大五義)라 하였고, 중하 2부의 오의는 곧 그 후손이 세상에 나온 것이므로, 소오의(小五義)라 하였다.” 《소오의》는 비록 상부를 이었지만, 또한 백옥당이 맹세를 훔친 일에서부터 시작하니, 대략 상부의 101회에 해당한다. 전 책은 양양왕의 모반, 의협의 무리들이 다투어 그 숨겨진 일을 탐색하는 것을 줄거리로 삼는다. 이때 백옥당은 이미 피살되었고, 나머지도 점점 늙어가고, 후배들이 이어 일어나, 부친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노방의 아들 진(珍), 한창의 아들 천금(天錦), 서경의 아들 량(良), 백옥당의 조카 운생(芸生)이, 뜻밖에 객사에 모여, 소협 아이호를 더하니, 드디어 형제를 맺었다. 여러 사람들이 길을 다니며, 제법 호강(豪强)을 토벌하고, 마침내 무창(武昌)에 모여, 함께 동망진을 깨뜨리려 하였으나, 함정에 빠지기 전에 책이 끝난다. 《속소오의》는 곧 이전 사건을 이어 서술하니, 동망진이 먼저 깨지고, 반역한 왕은 드디어 도망치고, 여러 협객은 여전히 강호에서 도적을 토벌한다. 이미 양양왕이 사로잡히고, 천자가 공을 논하니, 협의의 무리들이 모두 봉상을 받았고, 이에 전 책이 끝난다. 서문에는 두 책이 모두 석옥곤의 옛 책이라고 하였지만, 상부와 비교하면, 중부는 매우 거칠고 조잡하고, 하부에 들어가면 또 조금 세밀해지니, 초고는 한 사람에게서 나왔고, 윤색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고, 그 기량이 잘하고 못함이 있으므로, 정본과 속본이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 의심된다.
또한 서경의 타고난 성격은 매우 급하고 충동적이어서, 결코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잠시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는 얼굴색을 바꾸고, 상을 엎으니,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릇들이 모두 깨졌다.
종웅은 진흙 인형처럼, 고집 센 성격이라, 너희를 붙잡고는, 좋게 대해 주고, 술상을 차려 대접했는데, 너는 오히려 이러하니,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삼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어찌 된 것이냐?” 삼야가 말했다. “이것은 좋은 것인데.” 채주가 말했다.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삼야가 말했다. “너를 때리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주먹을 날렸다. 종웅은 손가락 끝으로 삼야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이고!” 푹! 삼야는 땅에 쓰러졌다. 종 채주가 쓴 것은 “십이지강관법(十二支講關法)”이라고도 하고 “폐혈법(閉血法)”이라고도 하며, 속어로는 “지압(點穴)”이라고 하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삼야는 속으로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종웅은 발로 차서, 묶으라고 분부했다. 삼야는 그제야 온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다시 사람들에게 오화대박(五花大綁)으로 묶였다. 전남협(展南俠)은 스스로 두 팔을 뒤로 하고, “나를 묶어라!”라고 말했다. 여러 사람들은 차마 묶으려 하지 않았지만, 묶지 않을 수도 없었다. 종웅이 명령을 내려, 단봉교(丹鳳橋)에서 효수하라고 했다. 안에서 어떤 사람이 외쳤다. “칼 아래 사람을 살려주시오!” …… (《소오의》 제17회)
또한 흑요호 지화와 소제갈 심중원 두 사람이 몰래 의논하여, 독자적인 의견을 내어, 왕부(王府)에 가서 맹세를 훔쳐 오려고 했다. …… (지화는) 매달린 감실 위에 엎드려, 천리화(千里火)로 비추니, 아래는 네모난 상자였다. …… 위에는 길쭉한 단단한 나무 상자가 있고, 양쪽에는 여의금환(如意金環)이 있었다. 손을 뻗어 두 개의 금환을 잡고, 품속으로 당기니, 위에서 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반달 모양의 작두가 내려왔다. 지화는 눈을 감고, 앞으로 뛰어가지도 못하고, 뒤로 움츠러들지도 못하고, 허리뼈에서 덜컥 하는 소리가 나자, 지화는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줄 알았지만, 천천히 눈을 떠 보니, 아픔을 느끼지 못했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여러분,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모두 그것이 반달 모양이기 때문이다. 만약 풀을 베는 작두였다면, 사람을 두 동강으로 잘랐을 것이다. 이 칼 가운데에는 고개(過隴兒)가 있어, 그다지 크지도 않고, 또 지 노인의 허리에 맞고, 또 백보낭(百寶囊)을 풀어서, 밑에 받치는 것이 없고, 또 등 뒤에 이 칼을 메고 있어, 칼집과 칼끝까지, 바로 허리뼈를 보호하고 있었다. …… 요컨대: 지화는 목숨이 끊어질 운명이 아니었다. 심중원은 혼비백산했다. …… (《속소오의》 제1회)
대소오의의 책이 모두 나오자, 곧 《정속대소오의전(正續大小五義全傳)》이 간행되었으니, 모두 15권 60회이고, 앞에 광서 임진년(1892년) 수곡거사(繡谷居士)의 서문이 있다. 그 책은 곧 《소오의》 및 속서를 취하여, 한 부로 합치고, 중복된 부분을 없애고, 또한 장황한 서술을 줄여, 13권 52회로 생략했다. 마지막 두 권 여덟 회는 양양왕이 장차 사로잡히게 되었지만, 또 도망쳐, 홍라산(紅羅山)에 이르러, 군사를 일으켜 다시 싸우다가, 이에 비로소 패망한다고 하니, 이는 두 책에는 없는 것으로, 실로 사족이다. 문장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또한 비록 간명함이 더해졌지만, 원래의 유창한 어투와 운치가, 많이 삭제되었으므로, 정신은 오히려 덜해졌다.
포증과 안차산 외에, 다른 사람을 전 책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도광 18년(1838년), 《시공안(施公案)》 8권 97회가 있었는데, 일명 《백단기관(百斷奇觀)》이라고도 하였고, 강희제 때 시세륜(施仕綸)(시세륜으로 써야 함)[13]이 태주 지주에서 조운 총독에 이르기까지의 행사를 기록하였으니, 문장이 모두 졸렬하여, 대략 명나라 사람의 《포공안》과 같으나, 조금 더 곡절을 더하였고, 한 사건이 혹은 여러 회에 걸치기도 하였다. 또한 사건 판결 외에, 위험을 겪는 일이 있으니, 이미 협의 소설의 선도가 되었다. 광서 17년(1891년)에 이르러서는 《팽공안(彭公案)》 24권 100회가 있었는데, 탐몽도인(貪夢道人)이 지었고, 팽붕(彭朋)(팽붕으로 써야 함)[14]이 강희제 때 삼하현 지현을 지냈고, 여러 번 승진하여 하남 순무가 되었으며, 서울로 돌아와 대동의 중요한 사건을 조사하는 등의 이야기를 서술하였으니, 또한 현명한 신하의 사적인 행차, 호걸의 도둑질 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문구는 졸렬하여, 거의 문장이 되지 못하였다.
기타 《삼협오의》와 유사한 책은 매우 많으니, 통행하는 것으로는 《영경승평(永慶升平)》 97회가 있는데, 노하(潞河) 곽광서(郭廣瑞)가 하보원(哈輔源)[15]의 연설을 기록하였고, 강희제가 변장하여 사적으로 방문한 것, 및 사악한 종교를 제거하고, 반역한 무리를 평정한 여러 사건을 서술하였다. 곧이어 속 100회가 있었으니, 또한 탐몽도인이 지었다. 또한 《성조정성만년청(聖朝鼎盛萬年青)》 8집, 총 76회가 있으니, 지은 사람의 이름이 없고, 강희제가 대정(大政)을 유당(劉塘)과 진굉모(陳宏謀)[16]에게 맡기고, 스스로 강남을 유람하며, 여러 간사한 무리가 법을 어지럽히는 일, 영걸이 충성을 바치는 일을 겪은 것을 기록하였다. 나머지 《영웅대팔의(英雄大八義)》, 《영웅소팔의(英雄小八義)》, 《칠검십삼협(七劍十三俠)》, 《칠검십팔의(七劍十八義)》[17] 등과 같은 것은, 그 종류가 매우 많으니, 대개 광서 20년경에 나왔다. 후에 또 《유공안(劉公案)》(유용), 《이공안(李公案)》(이병인(李丙寅)은 이병형(李秉衡)으로 써야 함)[18]이 있었고, 《시공안》 또한 10집까지 이어졌고, 《팽공안》은 17집까지 이어졌다.
《칠협오의》는 24집까지 이어졌으니, 천편일률적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많고, 심지어 한 사람의 성격 또한 전후가 갑자기 달라지니, 대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함께 나쁜 책을 이루었으니, 함부로 살피지 않으니, 드디어 모순이 많아졌다.
《삼협오의》 및 그 속서는, 소리를 그리고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매우 평화(平話)의 습관이 있으니, 《아녀영웅전》 또한 그러하다. 곽광서가 《영경승평》 서문에서 이르기를, “내가 젊어서 사해를 유람하며, 항상 평사(評詞)에서 《영경승평》이라는 책을 연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 나라 초부터, 이러한 실제 일이 전해 내려왔고, 함풍 연간에 강진명(姜振名) 선생이 있었으니, 곧 옛날과 지금의 사람을 평론하는 사람이었고, 일찍이 이 책을 연설하였으나, 능히 간행하여 세상에 전하지 못하였다. 내가 오랫동안 하보원 선생의 연설을 들으니, 마음속에 익히 기억하고, 한가한 때에, 4권으로 기록하였다. ……” 《소오의》 서문 또한 《삼협오의》와 모두 석옥곤의 원고이고, 그의 제자에게서 얻었다고 하였으니, 석옥곤은 대개 또한 함풍 때의 이야기꾼이고, 강진명과 각각 한 종류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하였다. 문강(文康)이 이야기책을 듣는 것을 익히고, 그 어투를 본뜨니, 이에 《아녀영웅전》 또한 특별한 ‘연설’의 풍습이 있었다. 협의 소설이 청나라에 있는 것은, 바로 송나라 화본(話本)의 정통 맥을 이은 것이니, 진실로 평민 문학이 700여 년을 거쳐 다시 일어난 것이다. 오직 후에는 단지 모방한 작품 및 속서만 있었고, 또한 대부분 남용되고 악화되었으니, 이 도는 또 쇠락하였다.
청나라 초기에, 유구(流寇)가 모두 평정되자, 유민(遗民)들은 옛 임금을 잊지 못하여, 마침내 초야의 영웅으로서 명나라를 위해 힘쓴 자들을 생각하게 되었으므로, 진침(陈忱)이 《후수호전(后水浒传)》을 지으니, 이준(李俊)이 나라를 떠나 시암(暹罗)의 왕이 되게 하였다(제15편 참조). 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 130여 년을 거치면서, 위력이 널리 미치고, 인민은 두려워하며 복종하였으니, 심지어 사대부(士大夫)조차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으므로, 도광제 때 유만춘(俞万春)이 《결수호전(结水浒传)》을 지으니, 108명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였다(역시 제15편 참조). 그러나 이는 오히려 하급 관리의 견해이다.
《삼협오의》는 서민들의 마음을 쓴 것이니, 비교적 《수호전》의 여운이 있는 듯하지만, 또한 단지 그 외모일 뿐이고, 정신은 아니다. 명나라가 망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이야기하는 곳은 또한 베이징이었으니, 그 이전에는 여러 차례 내란을 평정하였고, 떠돌이 백성들은 군대를 따라 공명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을 빛내는 것을 흔히 하였으니, 또한 매우 시골 사람들의 선망을 불러일으켰으므로, 무릇 협의 소설 속의 영웅은, 민간에서 매번 매우 거칠고 호방하며, 크게 녹림(绿林)의 습성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에는 큰 관리의 하급 졸개가 되어, 부림을 받고 뛰어다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니, 이는 대개 진심으로 기뻐하며, 신하와 종이 되는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책에 대해서는, “선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항상 화를 당하며, 사악한 자는 반드시 흉한 재앙을 만나고, 바른 자는 마침내 길한 보호를 받으니, 보응이 분명하여, 밝게 드러나 어긋남이 없으니, 독자로 하여금 책상을 치며 통쾌해하는 즐거움이 있게 하고, 책을 덮고 길게 탄식하는 때가 없게 한다……”(《삼협오의》 및 《영경승평》 서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유럽 사람의 힘이 또 중국에 침입하였다.
〔1〕 “사대기서” 청나라 이여(李渔)의 《삼국연의서》에서 이르기를, “옛날 감주 선생(弇州先生)이 우주 사대기서의 목록을 정하였으니, 가로되 《사기(史記)》, 《남화(南華)》, 《수호(水浒)》와 《서상(西廂)》이다. 풍유룡(冯犹龙) 또한 사대기서의 목록을 정하였으니, 가로되 《삼국(三國)》, 《수호(水浒)》, 《서유(西游)》와 《금병매(金瓶梅)》이다. 두 사람의 논의가 각각 다르다. 내가 생각건대 책의 기이함은, 마땅히 그 종류를 따라야 하니, 《수호》는 소설가에 있으니, 경서와 역사의 종류와 같지 않고, 《서상》은 사곡(詞曲)이니, 소설과 또한 종류가 같지 않다. 이제 그 종류를 따라 그 기이함을 배정한다면, 풍설(冯说)이 거의 옳다.” (청나라 양형당(兩衡堂) 간본 《삼국지제일재자서(三國志第一才子書)》 권수 참조) 이여 서문.
〔2〕 마종선(马从善)은 스스로 고요낭포(古遼阆圃)라고 호를 하였고, 문강 집안의 식객이었으나,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의 서문은 광서 무인년(1878년)에 쓰여졌고, “《아녀영웅전》이라는 책은, 문철선 선생(文鐵仙先生) 강(康)이 지은 것이다.”라고 칭하였다.
〔3〕 륵보(勒保)(1740—1819)는 페이모씨(费莫氏)이고, 자는 의헌(宜轩)이며, 청나라 만주 양홍기 사람이고, 벼슬은 섬감 총독, 사천 총독, 무영전 대학사 겸 군기 대신 등을 지냈다. 일찍이 사천, 호북, 섬서 등지의 백련교의 난 및 운남, 귀주 묘족의 난을 진압하였다.
〔4〕 관감아재(觀鑒我齋)의 《아녀영웅전》 서문에서 이르기를, “그 책은 천도를 강령으로 삼고, 인도를 기강으로 삼고, 성정을 의지로 삼고, 아녀영웅을 문장으로 삼으니, …… 나는 뜻하지 않게 과연 성정, 수신, 제가, 치평 외에, 이 격치(格致)의 책을 쾌히 보게 되었다.” 또한 이르기를, “《서유기》는 그 신령스럽고 괴이하고, 《수호전》은 그 힘이고, 《금병매》는 그 혼란이다.”라고 하였다.
〔5〕 동해오료옹(東海吾了翁)의 《아녀영웅전》 서문에서 이르기를, “그 일은 세상의 오래된 이야기이고, 그 글은 갑자기 엄숙하고 갑자기 해학적이니, 마치 명확하기도 하고 마치 어둡기도 하니, …… 여러 번 연구하여 읽고, 더욱 글자가 없는 곳에서 구하니, 비로소 그 갑자기 엄숙하고 갑자기 해학적이고, 마치 명확하기도 하고 마치 어둡기도 한 것은, 말이 아무 까닭 없이 발해진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 슬프다! 안타깝게도 원고가 반쯤 훼손되어 순서를 잃었으므로, 이에 고루함을 마다하지 않고, 쇠로 금을 보태듯이, 꿰매어 책을 이루고, 그 이름을 《아녀영웅전 평화(評話)》라고 고쳤다.”
〔6〕 《속아녀영웅전》은 모두 32회이고, 권수에 무명씨의 자서가 있으나, 연월을 기록하지 않았다. 광서 24년(1898년) 베이징 홍문 서국에서 인행하였다.
〔7〕 석옥곤(石玉昆)(약 1810—약 1871) 자는 진지(振之)이고, 청나라 톈진 사람이다. 도광, 함풍 연간의 이야기꾼이다.
〔8〕 “단립태후(斷立太后)”는 원나라 잡극 《포장합(抱妝盒)》에 보이는데, 줄거리는 송 진종 때 이미인(李美人)이 아들을 낳았는데, 유황후(劉皇后)의 질투를 받아, 진림(陳琳)이 화장 상자를 안고 어린 주인을 구출하고, 어린 주인이 후에 즉위하여 인종이 되었고, 몰래 진림에게 물어, 생모 이씨를 황태후로 존경한다는 내용을 서술한다. “심오분귀(審烏盆鬼)”는 원나라 잡극 《분아귀(盆兒鬼)》에 보이는데, 줄거리는 변경 사람 양국용(楊國用)이 장사를 하다가 해를 당했는데, 시신이 비록 불에 타 재와 흙으로 만들어져 질그릇이 되었지만, “원혼”이 흩어지지 않고, 사람의 소리를 낼 수 있었고, 후에 포공이 심리하여 원한을 풀어준다는 내용을 서술한다.
〔9〕 《용도공안(龍圖公案)》 10권은, 명나라 무명씨가 지었고, 서문에 “강좌(江左) 도랑(陶烺) 원내빈(元乃斌)의 아버지가 호구(虎丘)의 오석헌(悟石軒)에서 쓰다.”라고 되어 있다. 번본과 간단본 두 종류가 있는데, 번본은 이야기 100칙이고, 간단본은 이야기 66칙이다. 포공이 사건을 심리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10〕 여기서의 《용도공안》은 필사본 《용도이록(龍圖耳錄)》 120회를 가리키는데, 석옥곤이 이야기한 《용도공안》의 기록본(창사(唱詞)를 삭제한 것)이다. 간행본 《충렬협의전(忠烈俠義傳)》(또한 《삼협오의》라고도 함)은 곧 이 책에서 나왔다.
〔11〕 명나라 신호(宸濠)의 일은 명나라 정덕 14년(1519년), 종실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가 거짓으로 태후의 밀조를 받았다고 칭하며, 남창(南昌)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고, 후에 군대가 패하여 죽임을 당했다.
〔12〕 유월은 이 책 219쪽 주[28]을 참조. 유월은 《삼협오의》의 이름을 《칠협오의》로 고치고, 서문을 지었다. 서문에서 말한 유마자(柳麻子)는, 곧 유경정(柳敬亭)(1587—1890)이고,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이야기꾼이다. 유월의 서문에서 유경정이 《수호》를 이야기한 기록은, 본래 명나라 장대(張岱)의 《도암몽억(陶庵夢憶)》 권5 《유경정설서(柳敬亭說書)》에서 나온 것이다. 반조음(潘祖荫)(1830—1890) 자는 백인(伯寅)이고, 호는 정석(郑奭)이며, 청나라 오현(吴县)(지금의 장쑤성) 사람이고, 벼슬은 공부 상서에 이르렀다. 《정석시존(郑奭诗存)》, 《정석문존(郑奭文存)》 각 1권을 지었고, 《방희재총서(滂喜斋丛书)》를 편찬하였다.
〔13〕 시세륜(施世綸)(?—1722) 자는 문현(文贤)이고, 청나라 한군 양황기 사람이다. 일찍이 태주 지주를 지냈고, 후에 호부 시랑, 조운 총독을 지냈으며, 《남당집(南堂集)》을 지었다. 《시공안》은 그의 관련 사적을 서술하는데, 대부분 억지로 갖다 붙여 지어낸 것이다.
〔14〕 팽붕(彭鹏)(1637—1704) 자는 분사(奋斯)이고, 호는 고우(古愚)이며, 청나라 푸톈(莆田)(지금의 푸젠성) 사람이고, 삼하 지현에서 광동 순무까지 벼슬하였다. 《고우심언(古愚心言)》을 지었다. 《팽공안》은 그의 관련 사적을 서술하는데, 대부분 억지로 갖다 붙여 지어낸 것이다.
〔15〕 곽광서(郭广瑞) 자는 소정(筱亭)이고, 별호는 연남거사(燕南居士)이며, 청나라 노하(潞河)(지금의 베이징 통현) 사람이다.
하보원(哈辅源)은 만주 기인이다. 이야기꾼으로, 《영경승평》을 전문으로 이야기하여 유명하다.
〔16〕 유용(刘墉)(1719—1804) 자는 숭여(崇如)이고, 호는 석암(石庵)이며, 청나라 제성(诸城)(지금의 산둥성) 사람이고, 벼슬은 이부 상서, 체인각 대학사에 이르렀다. 진굉모(陈宏谋)(1696—1771) 자는 여자(汝咨)이고, 호는 용문(榕门)이며, 청나라 임계(临桂)(지금의 광시성) 사람이고, 벼슬은 호광 총독, 동각 대학사에 이르렀다. 본문 “강희”는 “건륭”으로 고쳐 써야 한다.
〔17〕 《영웅대팔의(英雄大八義)》 4권, 56회. 《영웅소팔의(英雄小八義)》는 그 속집이고, 4권, 44회. 도쿄 변경(东京汴梁) 송사공(宋士公) 등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칠검십삼협(七劍十三俠)》, 또한 《칠자십삼생(七子十三生)》이라고도 하며, 3집, 180회, “고소 도화관 주인(姑苏桃花馆主人) 당운주(唐芸洲) 편차”라고 되어 있다. 명나라 왕수인이 주신호의 반란을 평정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칠검십팔의(七劍十八義)》는 보이지 않고, 같은 종류의 책으로 《칠검팔협십육의(七劍八俠十六義)》, 《오검십팔의(五劍十八義)》 등 여러 종류가 있다.
〔18〕 《유공안(劉公案)》은 창본 《유용사방대청전(刘墉私访大清传)》 4권만 보이는데, 건륭 때 유용이 황제의 명을 받아 국구(国舅), 제남 순무 국태(国泰)의 일을 조사한 것을 서술한다. 《이공안(李公案)》, 일명 《이공안기문(李公案奇闻)》, 34회, “석홍거사(惜红居士) 편찬”이라고 되어 있다. 청나라 이병형이 송사를 처리한 일을 서술한다.
제28편 청나라 말기의 견책 소설
광서 경자년(1900년) 이후, 견책 소설의 출현이 특히 성행하였다. 대개 가경 이후, 비록 여러 차례 내란(백련교, 태평천국, 염군, 회족)을 평정하였지만, 또한 여러 차례 외적(영국, 프랑스, 일본)에게 패하였으니, 서민들은 어둡고 희미하여, 오히려 차를 마시며 반란을 평정한 무공을 들었지만, 식자들은 이미 갑자기 개혁을 생각하고, 적개심에 의지하여, 유신과 애국을 외쳤고, ‘부강’에 더욱 뜻을 두었다. 무술변법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2년이 지나 경자년에 의화단 사건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정부가 함께 다스릴 수 없음을 알았고, 갑자기 비판하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소설에서는, 숨겨진 것을 들추어내어, 그 폐단과 악함을 드러내고, 시정(時政)에 대해, 엄하게 비판하고, 혹은 더욱 확장하여, 풍속에까지 미쳤다. 비록 뜻은 세상을 바로잡는 데 있었으니, 풍자 소설과 같은 부류인 듯하지만, 말과 기운이 경박하게 드러나고, 붓에 날카로움을 감추지 않고, 심지어 그 말을 지나치게 하여, 당시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었으니, 그 도량과 기술의 차이가 또한 멀다. 그러므로 따로 견책 소설이라고 한다. 그 작가로는, 남정정장(南亭亭長)과 아불산인(我佛山人)의 이름이 가장 유명하다.
남정정장은 이보가(李宝嘉)이고, 자는 백원(伯元)이며, 장쑤성 우진(武进) 사람이고, 젊어서 제예(制藝) 및 시부에 능하였고, 1등으로 입학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였고, 이에 상하이로 가서 《지남보(指南报)》를 운영하였고, 곧 그만두고, 따로 《유희보(游戏报)》를 운영하였으니, 해학적이고 조롱하는 글이었다. 후에 ‘포저(铺底)’로 상인에게 팔았고, 또 따로 《해상번화보(海上繁华报)》를 운영하였으니,[1] 창기(倡妓)의 기거를 기록하고, 시와 소설을 실었으니, 매우 성행하였다. 지은 것으로는 《경자국변탄사(庚子国变弹词)》 몇 권, 《해천홍설기(海天鸿雪记)》 6권, 《이연영(李莲英)》 1권,[2] 《번화몽(繁华梦)》, 《활지옥(活地狱)》[3] 각 몇 권이 있다. 또한 오로지 시대의 폐단을 비판하는 것으로 《문명소사(文明小史)》가 있으니, 《수상소설(绣像小说)》에 나누어 실렸고,[4] 특히 유명하다. 당시 바로 경자년이었으니, 정령이 거꾸로 행해지고, 온 세상이 실망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화근의 이유를 찾으려 하였고, 그 죄인을 비난하여 스스로 통쾌해하려 하였으니, 이보가 또한 상인의 부탁에 응하여, 《관장현형기(官场现形记)》를 지었으니, 10편으로 하려고 하였고, 편마다 12회로 하였으니, 광서 27년부터 29년 중에 3편을 완성하였고, 2년 후에 또 2편을 완성하였고, 32년 3월에 폐병으로 죽었으니, 나이 40세였다(1867—1906). 책은 마침내 완성되지 못하였다. 또한 아들이 없었고, 배우 손국선(孙菊仙)[5]이 그의 장례를 치렀으니, 《번화보》의 칭찬에 보답한 것이다. 일찍이 경제 특과에 응시하라는 추천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으니, 당시에는 고상하다고 여겼다. 또한 전각에 능하였으니, 《우향인보(芋香印谱)》[6]가 세상에 전해진다(주계생(周桂笙)의 《신암필기(新庵笔记)》 3, 이조걸(李祖杰)이 후적(胡适)에게 보낸 편지 및 고힐강(顾颉刚)의 《독서잡기(读书杂记)》 등 참조).
《관장현형기》는 이미 완성된 60회는, 전반부이고, 제3편이 인행될 때(1903년) 자서가 있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또한 일찍이 관리를 보았으니, 송영(送迎) 외에는 치적(治績)이 없고, 공장(供張) 외에는 재능이 없으니, 주림과 갈증을 참고,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행향(行香)은 날이 밝으면 가고, 보고(禀見)는 해가 기울면 돌아오니, 마침내 그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지 못하고, 또한 마침내 그 무엇 때문에 갔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해에 혹 흉한 재앙이 있으면, 진휼(振恤)을 행하니, 또한 “모두 구원과 도움의 전례를 얻고, 포상과 은혜를 구하니, 이른바 관리라는 것은, 날이 뜨면 끝날 기약이 없다.”에 이른다. 조정에서 내쫓는 것을 의논하면, “위아래가 속이니, 예전과 같고, 특히 심한 것은, 소인배의 손을 빌리고, 사사로운 사람에게 뜻을 주어, 뇌물을 인하여 융통하고, 뇌물을 인하여 해명하니, 이는 폐단을 없애려다 도리어 폐단을 더하는 것이다.”에 이른다. 이에 여러 관리가 수탈하니, 백성은 곤궁하고, 백성은 감히 말하지 못하니, 관리는 더욱 방자해지니, “남정정장은 동방의 해학(諧謔)과 순우(淳于)의 활계(滑稽)를 가지고, 또한 관의 추악하고 비열한 요점과, 혼궤하고 호도하는 대의를 익히 알았으니”, “함축하고 함양하여 충후함을 보존하고, 통쾌하고 거침없이 그 은미한 것을 펼치기를 좋아하여, …… 여러 해 여러 달,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책 한 질을 이루었으니, 이름을 《관장현형기》라고 하였다.
…… 신우(神禹)도 솥에 주조하지 못하고, 온교(温峤)도 무소의 뿔로 비추지 못하는 것을, 모두 갖추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릇 서술한 것은, 모두 영합, 전영, 몽혼, 나굴, 경알 등의 이야기이고, 선비가 관리가 되는 것에 열심인 것, 및 관리 규중의 은밀한 사정을 겸하였다. 머리끝이 이미 번잡하고, 등장인물이 또한 많으니, 그 기록하는 일이 마침내 한 사람과 함께 일어나고, 또한 곧 그 사람과 함께 끝나니, 끊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니, 《유림외사》와 대략 같다. 그러나 억측이 많으니, 실록이라고 하기 어렵고, 자서에서 이른바 “함축하고 함양”한 실제가 없으니, 매우 문목 노인의 뒤를 따르기를 바랄 수 없다. 하물며 수집한 것은, 또한 단지 ‘화병(話柄)’일 뿐이니, 이러한 것들을 연결하여, 유서(類書)를 이루었으니, 관장의 기량은, 본래 조금 다르고 크게 같으니, 긴 글로 모으면, 곧 천편일률이다. 다만 시대의 요구에 따라, 이것으로 통쾌함을 얻었으므로, 《관장현형기》는 갑자기 큰 명성을 얻었고, ‘현형’이라는 명목을 답습하여, 다른 일을 묘사하는 것이, 상계, 학계, 여계와 같은 것도 잇따랐다. 이제 남정정장의 작품 800여 자를 예로 들어, 나머지 사람들을 개괄한다.
……각설하고 가 대사야(贾大少爷)는, ……보니 이미 인견(引見)할 시기가 되었으니, 전날 부(部)에 가서 예의를 익히니, 모든 것이 전례의 의주(儀注)대로였으니, 자세히 서술할 필요가 없다. 이날 가 대사야는 한밤중에 일어나, 차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 …… 줄곧 여덟 시까지 기다리니, 비로소 인견을 이끄는 사관(司官) 어르신이 그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어느 전각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나, 사관이 소매를 한 번 휘두르니, 그 일행 몇 사람이 섬돌에 일렬로 꿇어앉으니, 위쪽과는 대략 두 장(丈) 정도 떨어져 있으니,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곧 “지금(當今)”인 줄 알았다. …… 그는 도반(道班)이고, 또한 명보(明保)의 사람이니, 당일에 조칙이 있었으니, 그에게 다음 날 소견(召見)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 가 대사야는 비록 세가(世家)의 자제이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황상을 뵙는 것이니, 비록 여러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국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당시 인견을 마치고 내려와, 먼저 화 중당(华中堂)을 보았다. 화 중당은 그에게 은자 만 냥과 골동품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 만나자 길고 짧게 물으니, 매우 관심을 가져주었다. 후에 가 대사야가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말하기를, “내일 조정에서 뵐 때, 문생의 아버지는 현재 안찰사(臬司)이신데, 문생이 위를 뵈었을 때, 머리를 부딪쳐야 하는지 부딪치지 않아야 하는지?”라고 하니, 화 중당은 앞의 말을 듣지 못하고, 다만 “부딪치다(碰头)”라는 두 글자만 들었으니, 연달아 대답하여 말하기를, “많이 부딪치고, 말을 적게 하시오. 이는 벼슬아치의 비결입니다.”라고 하였다. 가 대사야는 급히 분변하여 말하기를, “문생이 말하는 것은 위에서 문생의 아버지를 물으면, 당연히 머리를 부딪쳐야 하고, 만약 묻지 않으면, 또한 머리를 부딪쳐야 하는지 부딪치지 않아야 하는지?”라고 하니, 화 중당이 말하기를, “위에서 그대를 묻지 않으면, 그대는 부디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마땅히 머리를 부딪쳐야 할 곳에서는, 또한 만만히 잊지 말고 부딪쳐야 하니, 곧 마땅히 부딪치지 않을 곳이라도, 그대는 머리를 많이 조아리면, 처벌받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 말이 가 대사야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였고, 다시 물어보려고 하니, 중당은 이미 일어나 손님을 배웅하였다. 가 대사야는 어쩔 수 없이 나와, 마음속으로 화 중당이 일이 바빠서, 그를 번거롭게 하기가 불편하니, 차라리 황 대군기(黄大军机)를 찾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니, …… 혹시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줄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만나자, 가 대사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황 어른이 먼저 “그대는 중당을 보았는지? 그가 어떻게 말하던가?”라고 물으니, 가 대사야가 들은 대로 한 번 말하니, 황 어른이 말하기를, “화 중당은 경험이 깊으니, 그가 그대에게 머리를 많이 부딪치고 말을 적게 하라고 한 것은, 노성한 사람의 견해이니, 이는 조금도 틀림이 없다.”라고 하였다.
……가 대사야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 다시 서 대군기(徐大军机)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서 어른은, 나이가 많아, 두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 곧 때로는 두 마디를 들어도, 모르는 척하였다. 그는 평생 심신을 수양하는 학문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니, 두 가지 비결이 있었으니, 하나는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不動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을 쓰지 않는 것(不操心)”이었다. …… 후에 그의 이 비결은 동료들 사이에서 모두 간파되었으니, 사람들은 그에게 외호를 하나 붙여주었으니, 그를 “유리알(琉璃蛋)”이라고 불렀다.
……이날 가 대사야는 …… 그에게 가르침을 구하러 갔는데, 만난 후, 몇 마디 안부를 묻고, 곧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서 어른이 말하기를, “본래 머리를 많이 부딪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곧 머리를 부딪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대는 마땅히 머리를 부딪쳐야 할 때에는, 머리를 부딪치고, 부딪칠 필요가 없을 때에는, 역시 부딪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니, 가 대사야가 또 화 어른과 황 어른 두 분의 말을 다시 이야기하니, 서 어른이 말하기를, “그 두 분이 한 말은 모두 옳습니다. 그대는 그 두 분의 말을 따라, 일을 보아 일을 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라고 하니, 한참 동안 이야기하였으나, 여전히 조금의 이치도 말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또 물러났다. 후에 줄곧 어떤 소군기(小军机)를 찾아갔는데, 또한 그의 어르신의 친구였으니, 비로소 의주를 명확히 말해주었다. 다음 날 소견을 하러 올라가니, 의외로 아무런 실수도 없었다. ……(제26회)
아불산인(我佛山人)은 오워야오(吴沃尧)이고, 자는 견인(茧人)이고, 후에 간인(趼人)으로 고쳤고, 광둥성 난하이(南海) 사람이고, 포산진(佛山镇)에 거주하였으므로, 스스로 “아불산인”이라고 칭하였다. 나이 20여 세에 상하이에 이르러, 항상 일간신문에 글을 썼으니, 모두 소품(小品)이었다. 광서 28년에 신회(新会) 양계초(梁启超)[7]가 《신소설(新小说)》을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행하였으니, 한 달에 한 권이었고, 다음 해(1903년), 워야오는 비로소 장편을 짓기 시작하였으니, 곧 그것을 보냈으니, 전후로 여러 종류이니, 가로되 《전술기담(电术奇谈)》, 가로되 《구명기원(九命奇冤)》,[8] 가로되 《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现状)》이니, 이름이 이때부터 성해졌고, 마지막 한 종류는 특히 세상에서 칭송받았다. 후에 산둥에 머물렀고, 일본을 유람하였으니,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다시 상하이에 거주하였다. 32년에 《월월소설(月月小说)》[9]의 주필이 되어, 《겁여회(劫余灰)》, 《발재비결(发财秘诀)》, 《상하이유참록(上海游骖录)》[10]을 지었고, 또한 《지남보(指南报)》를 위해 《신석두기(新石头记)》[11]를 지었다. 또 1년 후에는 광지소학교를 주관하였으니, 학무에 매우 힘을 기울였으니, 지은 것이 많지 않았다. 선통 기원년에, 비로소 《근십년지괴현상(近十年之怪现状)》[12] 20회를 완성하였고, 2년 9월에 갑자기 죽었으니, 나이 45세였다(1866—1910). 따로 《한해(恨海)》, 《호보옥(胡宝玉)》[13] 두 종류가 있으니, 먼저 모두 단행본이었다. 또한 일찍이 상인의 부탁에 응하여, 300금을 받고 《환아영혼기(还我灵魂记)》를 지어 그 약을 칭송하였으니,[14] 한때 비난을 받았고, 글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신암필기(新庵笔记)》 3, 《근십년지괴현상》 자서, 《아불산인필기(我佛山人笔记)》 왕유보(汪维甫) 서문 참조). 단문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으나, 후에 명성이 높아졌으므로, 또한 사람들이 모아 《간전필기(趼廛笔记)》, 《간인십삼종(趼人十三种)》[15] 《아불산인필기사종(我佛山人笔记四种)》, 《아불산인활계담(我佛山人滑稽谈)》, 《아불산인찰기소설(我佛山人札记小说)》[16] 등으로 만들었다.
《이십년목도지괴현상》은 본래 《신소설》[71]에 연재되었고, 후에 또한 《신소설》과 함께 중단되었고, 광서 33년에 비로소 단행본 갑부터 정까지 네 권이 있었고, 선통 원년에 또 무부터 신까지 네 권이 나왔으니, 모두 108회이다. 전 책은 스스로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고 하는 사람을 실마리로 하여, 20년 동안 겪은 일, 본 일, 들은 천지간의 놀라운 일을 기록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끝맺음이 없고, ‘화병(話柄)’을 모아 놓았으니, 《관장현형기》와 같다. 그러나 작가의 경험이 비교적 많으므로, 서술한 족류 또한 비교적 많으니, 관리, 스승, 선비, 상인이, 모두 기록되었고, 당시의 전설을 수집하는 것 외에, 또한 옛 작품(예를 들어 《종규착귀전》 같은 것)을 팔아, 뉴스로 삼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단지 내가 세상에 나와 응세한 20년 동안, 돌이켜 생각해보니, 만난 것이 오직 세 가지 물건뿐이니, 첫 번째는 뱀, 벌레, 쥐, 개미이고, 두 번째는 승냥이, 이리, 호랑이, 표범이고, 세 번째는 도깨비, 도깨비, 망량이다.”(제1회)라고 하였으니, 온 책에서 서술한 것이, 이러한 인물의 언행을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오워야오는 성격이 강직하여, 남에게 뒤지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불우하게 세상을 마쳤으니, 그러므로 그의 말이 매우 개연(慨然)하다. 안타깝게도 묘사가 과장되었고, 때로는 지나치게 악함을 드러내는 데 치우쳤으니, 말이 진실과 어긋나면,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갑자기 미약해지니, 결국 연편의 ‘화병’에 지나지 않으니, 단지 한가한 사람들이 담소하는 자료에 불과하다. 그가 베이징의 같은 거처 사람 부미헌(符弥轩)이 그 조부를 학대한 것을 서술한 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저녁이 되어, 각 사람들이 이미 편안히 쉬고 있었는데, 나는 베개 위에서 희미하게 시끄러운 소리가 동쪽 뜰에서 나는 것을 들었다. …… 한바탕 시끄럽게 하다가, 또 잠잠해졌다가, 잠잠해졌다가, 또 한바탕 시끄럽게 하니, 비록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만 귓가가 깨끗하지 않고, 잠을 편안히 잘 수 없다고 느꼈다. …… 자명종이 세 시를 알린 후에야, 비로소 희미하게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어나니, 이미 아홉 시가 넘었다. 급히 일어나, 옷을 입고, 객당으로 나가니, 오량신(吴亮臣)과 이재지(李在兹)와 두 명의 학도, 한 명의 요리사, 두 명의 허드렛일꾼이, 함께 모여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급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 양신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재지가 말하기를, “왕삼에게 말하게 하시오. 우리 입 아낄 수 있게.”라고 하니, 허드렛일꾼 왕삼이 곧 말하기를, “동쪽 뜰 부 어르신 댁의 일입니다. 어젯밤 한밤중에 제가 용변을 보러 일어났는데, 동쪽 뜰에서 누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 뒷뜰로 더듬어 갔는데, …… 안을 엿보니, 부 어르신과 부 부인이 마주 앉아 있고, 우리 집에 밥을 얻으러 오는 노인이 아래에 앉아 있는데, 두 부부가 그 노인을 꾸짖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 부인이 가장 기이하게 꾸짖었는데, 말하기를, ‘사람이 5, 60세까지 살았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지, 80세가 넘은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부 어르신이 말하기를, ‘살아있는 것도 괜찮다. 죽이든 밥이든,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안분수기하면 괜찮은데, 오늘은 죽을 싫어하고, 내일은 밥을 싫어하니, 네가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마시고, 좋은 것을 입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벌어들여야 하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노인이 말하기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약간의 짠 반찬을 구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 어르신이 듣고, 곧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오늘은 짠 반찬을 원하고, 내일은 짠 고기를 원하고, 모레는 닭, 거위, 생선, 오리를 원하고, 좀 더 지나면,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까지 원할 것이다. 나는 보직도 없는 가난한 관리이니, 공급할 수 없다!’라고 거기까지 말하고, 탁자를 치고 의자를 치며 크게 꾸짖었습니다. ……
실컷 꾸짖고 나니, 노파가 술과 음식을 가져와, 가운데 외다리 원탁에 차렸다. 부 어르신 부부는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데, 오히려 웃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아래에 앉아, 그저 흐느끼며 울기만 하였다. 부 어르신은 두 잔 마시고, 두 마디 꾸짖고, 부 부인은 그저 뼈다귀를 가져와 강아지와 놀았다. 그 노인은 울상을 지으며,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르나, 부 어르신이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며, 그 외다리 탁자를 걷어차니, 쩡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 위의 물건이 온 바닥에 엎어지고, 큰 소리로 “네가 먹어라!”라고 외쳤다. 그 노인도 너무나 염치없으니, 정말로 바닥에 엎드려 주워 먹었다. 부 어르신이 갑자기 일어서서, 앉았던 의자를 들고, 그 노인을 향해 던졌다. 다행히 서 있던 노파가 달려와 막아주니, 비록 막지는 못했지만, 기세를 많이 막았다. 그 의자가 비록 여전히 그 노인의 머리에 떨어졌지만, 겨우 머리 가죽만 조금 벗겨졌다. 만약 그가 막지 않았더라면, 아마 뇌수가 터져 나왔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저절로 온몸에 식은땀이 났고, 가만히 스스로 대책을 세웠다. 밥 먹을 때가 되자, 나는 이재지에게 빨리 집을 구하라고 하니, 우리는 이사를 가려고 하였다. ……(제74회)
오워야오가 지은 것으로는, 오직 《한해(恨海)》, 《겁여회(劫余灰)》, 및 연술 번역본인 《전술기담(电术奇谈)》 등 세 종류는, 스스로 정사 소설이라고 하였고, 다른 것은 모두 이러한 종류이고, 견책의 정도가 조금 다르다. 본래의 뜻에 이르러서는, 붓과 먹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므로, 주계생(《신암필기》 3)의 말과 같이, 또한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각기 변태가 있다.”라고 하였으나, 그 대요는, “옛 도덕을 회복하는 것을 주장하는 데 있다.”(《신암역설》 평어 참조)라고 한다.
또한 《노잔유기(老残游记)》 20장이 있으니, “홍도백련생(洪都百炼生)”이 지었다고 쓰여 있으나, 실은 유악(刘鹗)[18]의 작품이다. 광서 병오년(1906년) 가을에 상하이에서 쓴 서문이 있다. 혹은 본래 미완성이고, 마지막 몇 회는 그의 아들이 이어서 지었다고 한다. 악의 자는 철운(铁云)이고, 장쑤성 단투(丹徒) 사람이고, 어려서 산학에 정통하였고, 글을 읽을 수 있었으나, 방탕하여 규범을 지키지 않았고, 후에 갑자기 후회하고, 문을 닫고 1년여를 지내고, 이에 상하이에서 의술을 행하였고, 곧 또 버리고 장사를 배웠으나, 그 자본을 모두 잃었다. 광서 14년에 황하가 정저우에서 터지니, 악은 동지(同知)로서 오대징(吴大澂)[19]에게 투신하여, 치수에 공이 있었으니, 명성이 크게 일어났고, 점차 지부(知府)로 쓰이게 되었다. 베이징에 2년 동안 있으면서, 상소하여 철도를 부설할 것을 청하였고, 또한 산시 광산을 개발할 것을 주장하였으니, 이미 이루어지자,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여, “한간(汉奸)”이라고 불렀다. 경자년의 난리에, 악은 싼 값으로 태창의 저장된 곡식을 유럽인에게서 사들였으니, 혹은 진실로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후 몇 년 후, 정부는 곧 사사로이 저장된 곡식을 팔았다는 죄로 그를 처벌하여, 신장으로 유배 보내 죽였다(약 1850—1910, 자세한 내용은 나진옥(罗振玉)의 《오십일몽흔록(五十日梦痕录)》 참조). 그의 책은 곧 철영(铁英)이라는 호를 가진 노잔(老残)의 유행을 빌려, 그 언론과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경치를 서술하고 사물을 묘사하였으니, 때로 볼 만한 것이 있고, 작가의 신앙이, 또한 안에 나타나 있고, 관리들을 공격하는 부분 또한 많다. 그가 강필(刚弼)이 위씨 부녀를 13명의 목숨을 앗아간 중범으로 잘못 알고, 위씨의 하인이 뇌물을 주어 면죄를 구하니, 강필은 곧 이것으로 이를 증명하였으니, 이른바 청렴한 관리라는 자의 가증함을 폭로한 것이니, 혹은 탐관오리보다 더욱 심하니, 사람들이 일찍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였으니, 비록 작가 또한 매우 스스로 기뻐하여, “탐관오리는 가증하니, 사람들이 모두 아나, 청렴한 관리는 더욱 가증하니,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한다. 대개 탐관오리는 스스로 병이 있는 줄 알고, 감히 공공연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나, 청렴한 관리는 곧 스스로 돈을 탐하지 않는다고 여기니, 무엇을 하지 못하겠는가? 강퍅하고 자기 고집만 세니, 작게는 사람을 죽이고, 크게는 나라를 그르치니, 우리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한다. 시험 삼아 서동(徐桐)과 이병형(李秉衡)[20]을 보라, 그 분명한 자들이다. ……
역대 소설은, 모두 탐관오리의 악함을 드러내었다. 청렴한 관리의 악함을 드러낸 자는, 《노잔유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여겼다.
……그 아전들은 이미 위씨 부녀를 데려왔는데, 모두 거의 죽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뜰에 꿇어앉으니, 강필은 곧 품에서 그 은표 천 냥과 그 오천오백 냥 증서를 꺼내어, …… 아전에게 주어 그 부녀에게 보여주라고 하니, 그 부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무슨 연유입니까?”라고 대답하였다. …… 강필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모르겠지만, 내가 와서 알려주면, 곧 알게 될 것이다. 어제 어떤 호 거인(胡举人)이 나를 찾아왔는데, 먼저 은자 천 냥을 보내며, 너희 사건을, 내가 방법을 써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만약 벗어나게 해주면, 은자를 더 많이 주겠다고 하였다. ……
내가 다시 자세히 알려주겠네. 만약 인명이 그대가 모해한 것이 아니라면, 그대 집에서 어찌 수천 냥의 은자를 내놓아 뒷거래를 하려 하겠는가? 이것이 첫 번째 증거이네. …… 만약 사람이 그대가 해친 것이 아니라면, 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500냥에 한 명의 목숨으로 계산하면, 마땅히 6,500냥이어야 하네.’라고 하면, 그대 집의 관리하는 사람은 마땅히 말하기를, ‘인명은 실로 우리 집에서 해친 것이 아니니, 만약 위원께서 대신 밝혀주신다면, 7,000냥, 8,000냥도 괜찮고, 6,500냥이라는 액수는 감히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텐데, 어찌 그가 아무 의심 없이, 곧 500냥에 한 명의 목숨으로 계산하는가? 이것이 두 번째 증거이네. 내가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조만간 자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 많은 형벌의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 부녀 두 사람은 연달아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청천벽력 같은 대감. 정말로 억울합니다.”라고 하니, 강필이 탁자를 치며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타일러도, 너희는 여전히 자백하지 않는가? 다시 나를 위해 형틀에 묶어 고문하라!”라고 하니, 아래의 아전들이 우레 같은 소리로 “예!”라고 대답하였다. …… 막 형벌을 가하려 하는데, 강필이 또 말하기를, “잠깐. 형벌을 집행하는 아전들은 올라오라,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 너희 수법을, 나는 모두 알고 있다. 너희는 그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면, 돈을 받고, 형벌을 가볍게 하여, 죄인이 심하게 고통받지 않게 하고, 너희는 그 사건이 중대하여, 뒤집을 수 없다고 여기면, 돈을 받고, 갑자기 세게 하여, 죄인을 그 자리에서 죽게 하여, 그에게 온전한 시신을 만들어 주고, 본관은 또 엄형으로 죽였다는 처분을 받는다. 나는 모두 알고 있다. 오늘 나를 대신하여 먼저 가 위씨를 고문하되, 단 그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고문하고, 다만 안색이 좋지 않으면 형벌을 풀고, 그가 숨을 돌린 후에 다시 고문하라. 열흘의 시간을 준비하니, 그대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자백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16회)
《얼해화(孽海花)》는 광서 33년에 《소설림(小说林)》[21]에 실렸고, “역사 소설”이라고 칭하였고, “자유를 사랑하는 자가 발기하고, 동아병부가 편술하였다.”라고 서명하였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실은 창수(常熟)의 거인(举人) 증박(曾朴)[22] 자 맹박(孟朴)이 지은 것이다. 제1회는 마치 서문과 같고, 60회의 전체 목록이 있고, 김윤(金汮)이 장원 급제한 것부터 시작하여, 곧 실마리로 사용하여, 청나라 말기 30년간의 전해지는 이야기와 숨겨진 이야기를 섞어서 서술하였고, 후에 마치 예상되는 혁명으로 끝맺으려 하였으나, 갑자기 중단되었고, 이윽고 합쳐서 책 10권으로 엮었으나, 단지 20회뿐이다. 김윤은 오현(吴县)의 홍균(洪钧)을 이르니, 일찍이 강시(江西)의 시험을 주관하였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돌아와, 상하이를 지나, 명기(名妓) 부채운(傅彩云)을 첩으로 들였고, 후에 영국에 사신으로 가니, 데리고 함께 갔고, 부인이라고 칭하였으니,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홍이 베이징에서 죽으니, 부는 다시 상하이로 가서 기생이 되었고, 조몽란(曹梦兰)이라고 칭하였고, 또 톈진에 이르러, 사이진화(赛金花)라고 칭하였고, 경자년의 난리에, 연합군 통수와 친밀하였으니, 세력이 매우 컸다. 책은 홍과 부에 대해 특히 많은 풍자와 희롱이 있고, 당시의 고관대작의 모습 또한 매우 통렬하게 묘사하였고, 또한 때로는 그 말을 과장하였으니, 마치 모든 견책 소설의 공통적인 병폐와 같으나, 오직 구성이 정교하고, 문채가 뛰어나니, 곧 그의 장점이다. 책 속의 인물은, 거의 모두 암시하는 바가 있으니, 만약 지은이가 정말 전해지는 바와 같다면, 이순객(李纯客)이라고 고쳐 쓴 사람은 실은 그의 스승 이자명(李慈铭)[23] 자 춘객(莼客)(증이 지은 《월만당병체문집서(越缦堂骈体文集序)》 참조)이니, 가까이 모신 지 오래되었으니, 묘사가 마땅히 실제에 가까울 수 있으나, 형용이 때로 지나치니, 또한 자연스러움을 잃었으니, 대개 꾸미는 것을 숭상하고 백묘를 천하게 여겼으니, 당시의 작풍이 진실로 그러하였다. 곧 예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각설하고 소연은 평복 차림으로 가벼운 수레를 타고, 마부에게 곧장 성 남쪽 보안사 거리로 가라고 하였다. 그때 가을 하늘은 높고 맑았고, 길은 부드럽고 말발굽은 가벼우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문 앞에 도착하였다. 수레를 문 앞 두 그루의 큰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세웠다. 집안사람이 막 통보하려 하자, 소연은 손을 흔들며 “필요 없다”라고 하고, 스스로 가볍게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막 문을 들어서려 하는데, 문에 새로 붙인 옅은 붉은 주사로 쓴 문짝 대련(門對)이 눈에 띄었는데, 씩씩하고 빼빼하고, 흩어지고 기울어진 두 줄의 글씨로 쓰여 있었으니, 이르기를,
보안사 거리에 책 십만 권을 감추고 호부 원외는 천 년 동안 보궐한다
소연은 웃었다. 문을 들어서니 가림벽이 있고, 가림벽을 돌아 동쪽으로 향하니, 북쪽으로 세 칸의 맞이하는 방이 있고, 맞이하는 방의 복도를 따라 곧장 들어가니, 가을 잎 모양의 문이 있고, 문 안에는 네모난 작은 뜰이 있었다. 뜰 앞에는 등나무 한 그루가, 푸른 잎이 무성하였고, 뜰 안에는 목부용이 가득 심어져 있으니, 붉고 탐스럽게 피어 있었으니, 바로 꽃이 피는 때였다. 세 칸의 조용한 방에는, 상렴(湘簾)이 드리워져 있고, 조용히 사람 소리가 없었다. 그때 마침 한 줄기 미풍이 부니, 소연은 주렴 틈새로 한 줄기 약 연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으니,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주렴을 걷고 들어가니, 쪽진 머리를 한 어린아이가, 낡은 부채를 들고, 중당 동쪽 벽 옆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다. 소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막 일어나려 하는데, 방 안에서 높은 소리로 시를 읊으니, “엷은 먹으로 그린 수건 등잔가의 글씨, 작은 풍경 패옥 꿈속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소연이 한 발을 들여놓으며, 웃으며 말하기를, “’꿈속의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한편으로 보니, 순객은 반쯤 낡은 숙라 반소매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본래 멀쩡하였는데, 한 손으로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낡은 대나무 평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소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눕히고, 낡은 책에 엎드려 숨을 헐떡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 어찌 소옹이 오셨나, 늙은이의 병든 몸이 일어나 맞이할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나, 어찌하면 좋나?”라고 하였다. 소연이 말하기를, “순 어르신께서는 편찮으시다니, 언제부터 그러셨습니까? 어찌 아우는 소식조차 몰랐습니까?”라고 하니, 순객이 말하기를, “바로 여러 공들이 노부를 위해 수연(壽宴)을 정한 날부터 그러하였네. 가히 노부의 복이 박하여, 여러 공들의 후의를 감당하지 못함을 알 수 있네. 운와원 모임은, 아마 오늘 가지 못할 듯하네.”라고 하였다. 소연이 말하기를, “감기 기운이 조금 있으신 것이니, 약을 드시면 곧 조금 나으실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선생님께서 속히 오셔서, 여러 군들의 간절한 바람을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소연이 말할 때, 눈을 훔쳐보니, 평상 위 베개 옆으로 긴 종이가 늘어져 있었으니, 종이 가득 모두 윗부분의 글귀들이었다. 그 윗부분의 글귀는 이상하였으니, “각하(閣下)”, “태단(台端)”도 아니고, 또한 “장자(長者)”, “좌우(左右)”도 아니니, 겹겹이 모두 “망인(妄人)” 두 글자였다. 소연은 이상하다고 여기고, 한두 줄을 자세히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가을 잎 문 밖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살금살금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순객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대나무 주렴이 펄럭 소리를 냈다. 바로 이러하다.
십 장 붉은 먼지 속에 협객의 뼈를 묻고, 한 폭 가을 경치 속에 시인의 혼을 기르네.
오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다음 회를 들어보자.(제19회)
《얼해화》 또한 다른 사람이 이어서 쓴 책이 있으니(《벽혈막(碧血幕)》, 《속얼해화(续孽海花)》[24]이니, 모두 칭찬받지 못한다.
이 외에 사회의 폐단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자처하며, 이러한 종류의 소설을 지은 사람은 오히려 많으나, 십중팔구 앞의 몇 권의 책을 따라 하였으나, 매우 미치지 못하니, 단지 꾸짖는 글만 지을 뿐이고, 도리어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없으니, 곧 생겨났다 곧 사라지니, 또한 완성되지 않은 것이 많다. 그보다 못한 것은 심지어 사적인 원수를 추하게 비방하니, 비방서와 같고, 또 혹은 함부로 꾸짖는 뜻은 있으나 감정을 펼쳐내는 재능이 없으니, 곧 타락하여 “흑막 소설(黑幕小说)”[25]이 된다.
[1] 《지남보(指南报)》는 광서 22년(1896)에 창간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간되었다. 《유희보(游戏报)》는 광서 23년(1897)에 창간되어, 선통 2년(1910)에 폐간되었다. 《해상번화보(海上繁华报)》는 자세하지 않고, 이백원이 운영했던 《세계번화보(世界繁华报)》와 같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해당 신문은 광서 27년(1901)에 창간되어, 선통 2년에 폐간되었다.
[2] 《경자국변탄사(庚子国变弹词)》는 40회로, 장편 탄사로, 팔국연합군의 중국 침략의 죄행을 폭로하였으나, 의화단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해천홍설기(海天鸿雪记)》는 20회로, “이춘거사(二春居士) 편”이라고 쓰여 있고, 매 회 뒤에는 남정정장(南亭亭长)의 평이 있다. 상하이 기생의 생활을 서술하였고, 당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일부 폭로하였다. 《이연영(李莲英)》은 보이지 않고, 주계생의 《신암필기(新庵笔记)》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3] 《번화몽(繁华梦)》의 전체 명칭은 《해상번화몽(海上繁华梦)》으로, 3집, 100회이고, “고호경몽치선희묵(古沪警梦痴仙戏墨)”이라고 쓰여 있으나, 실은 손가진(孙家振)이 지은 것이다. 《활지옥(活地狱)》은 43회이다. 이보가가 생전에 39회까지 지었고, 나머지는 오워야오, 구양거원(欧阳巨源)이 이어서 완성하였다. 이 책은 15개의 길고 짧은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4] 《문명소사(文明小史)》는 60회로, 청나라 관리의 혼용하고 부패함을 서술하였고, 개량을 제창하였다. 《수상소설(绣像小说)》은 이보가가 주편하였다. 소설 잡지로, 광서 29년(1903)에 상하이에서 창간되어, 광서 32년(1906)에 폐간되었다.
[5] 손국선(孙菊仙)(1841—1931)의 이름은 염(濂)이고, 톈진 사람이다. 경극 배우이다.
[6] 《우향인보(芋香印谱)》는 창저우시 박물관에 《우향실인존(芋香室印存)》이 소장되어 있고, 권수(卷首)의 독고찬(独孤粲)의 《이백원전략(李伯元传略)》에서 이가 “우향인보를 세상에 내놓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우향인보》는 곧 《우향실인존》일 것이다.
[7] 양계초(梁启超)(1873—1929)의 자는 탁여(卓如)이고, 호는 임공(任公)이고, 광둥성 신후이(新会) 사람이다. 광서 무술년(1898)에 강유위(康有为), 담사동(谭嗣同) 등과 함께 변법자강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일찍이 “시계혁명(诗界革命)”, “소설계혁명(小说界革命)”을 주창하였고, 저술이 매우 많으니, 주요하게는 《음빙실문집(饮冰室文集)》 등이 있다.
这段文字继续提供了一些关于晚清谴责小说及相关背景的注释,涉及小说作品、报刊信息以及相关背景等。我将其翻译成现代韩语并进行详细的分析:
翻译:
[8] 《전술기담(电术奇谈)》은 《최면술(催眠术)》이라고도 하며, 24회이고, 일본 기쿠치 유호(菊池幽芳)가 짓고, 방경주(方庆周)가 번역하고, 오건인(吴趼人)이 연술하였다. 내용은 인도 한 부족의 족장의 딸과 한 영국 청년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구명기원(九命奇冤)》은 36회이고, 두 집안의 지주가 미신인 풍수를 믿어 아홉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9] 《월월소설(月月小说)》은 오연인, 주계생 등이 주편하였다. 1906년 9월에 상하이에서 창간되어, 1908년 12월에 폐간되었고, 총 24기가 발행되었다. 간행된 것은 소설 외에, 희극, 논문, 잡저 등이 있다.
[10] 《겁여회(劫余灰)》는 16회이고, 한 쌍의 재주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슬픈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발재비결(发财秘诀)》은 《황노외사(黄奴外史)》라고도 하며, 10회이고, 한 가난한 사람이 홍콩에서 투기로 돈을 번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상하이유참록(上海游骖录)》은 10회이고, 한 지주의 아들이 혁명당에 의탁하는 이야기를 서술하였고, 그중 혁명당 사람들을 많이 공격하였다.
[11] 《신석두기(新石头记)》는 40회이고, 경자사변 전후의 베이징을 배경으로, 가보옥의 이름을 빌려, 이야기를 꾸며냈으니, 원래의 《홍루몽(红楼梦)》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다.
[12] 《근십년지괴현상(近十年之怪现状)》은 《최근사회악착사(最近社会龌龊史)》라고도 하며, 20회이고, 당시 사회의 어두운 상황을 서술하였으니, 《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现状)》의 속집으로 볼 수 있다.
[13] 《한해(恨海)》는 10회이고, 경자사변을 배경으로, 두 쌍의 젊은 남녀의 혼인 비극을 서술하였다. 《호보옥(胡宝玉)》은 《삼십년상하이북리지괴역사(三十年上海北里之怪历史)》라고도 하며, 전서 8장으로 나뉘어, 명기(名妓) 호보옥 등의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14] 《환아령혼기(还我灵魂记)》는 원래 제목이 《환아혼령기(还我魂灵记)》이고, 오워야오가 1910년에 약방을 위해 쓴 광고 문구이다. 그중의 상인은 중법대약방 사장 황초구(黄楚九)를 가리키고, 칭송한 약은 애라보뇌즙(艾罗补脑汁)이다. (1910년 7월 22일 《한구중서보(汉口中西报)》에 의거)
[15] 《견전필기(趼廛笔记)》는 총 72칙으로, 내용은 전해지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도 있고, 독서 기록도 있다. 《견인십삼종(趼人十三种)》은 곧 《광서만년(光绪万年)》, 《무리취료서유기(无理取闹西游记)》, 《입헌만세(立宪万岁)》, 《흑적원혼(黑籍冤魂)》, 《의도기(义盗记)》, 《경축입헌(庆祝立宪)》, 《대개혁(大改革)》, 《평보청운(平步青云)》, 《쾌승관(快升官)》, 《사공과(查功课)》, 《인경학사귀곡전(人镜学社鬼哭传)》, 《견전잉묵(趼廛剩墨)》 및 《견전시산잉(趼廛诗删剩)》이다. 앞뒤로 모두 《월월소설(月月小说)》에 발표되었다. 오건인이 죽은 후, 다른 사람이 모아 책으로 인쇄하였다.
[16] 《아불산인필기사종(我佛山人笔记四种)》은 곧 《아불산인필기(我佛山人笔记)》이고, 왕유보(汪维甫)가 편집하였다. 《견전수필(趼廛随笔)》, 《견전속필(趼廛续笔)》, 《중국정탐삼십사안(中国侦探三十四案)》 및 《상하이삼십년염적(上海三十年艳迹)》 네 종류를 수록하였다. 앞의 두 종류는 《견전필기》와 내용이 기본적으로 같다. 《아불산인활계담(我佛山人滑稽谈)》은 우스갯소리 종류 170여 칙을 수록하였다. 《아불산인찰기소설(我佛山人札记小说)》은 4권, 53편으로, 기록한 것은 대부분 기이한 이야기와 숨겨진 이야기이다.
[17] 《신소설(新小说)》은 광서 28년(1902)에 양계초가 요코하마에서 창간하였고, 총 2권이 간행되었고, 소설을 위주로 하고, 시가, 희곡, 필기 등에 미쳤다.
[18] 유악(刘鹗)(1857—1909)은 일찍이 후보 지부(候补知府)를 지냈고, 후에 관직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노잔유기(老残游记)》 외에, 갑골문 《철운장귀(铁云藏龟)》 등을 편찬하였다.
[19] 오대징(吴大澂)(1835—1902)의 자는 청경(清卿)이고 호는 확재(愙斋)이고, 청나라 오현(지금의 장쑤성) 사람이고, 후난 순무(湖南巡抚)를 지냈다. 《확재시문집(愙斋诗文集)》, 《확재집고록(愙斋集古录)》 등을 저술하였다.
[20] 서동(徐桐)(1819—1900)의 자는 음헌(荫轩)이고, 한군 정람기 사람이고, 예부, 이부 상서(吏部尚书)를 역임하였다. 완고하게 보수적이었고, 변법자강 운동을 반대하였다. 이병형(李秉衡)(1830—1900)의 자는 감당(鉴堂)이고, 하이청(지금의 랴오닝성) 사람이고, 산둥 순무, 순열 장강 수사 대신(巡阅长江水师大臣) 등을 지냈다. 팔국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할 때 패전하여 자진하였다.
[21] 《소설림(小说林)》은 황마오시(黄摩西)가 주편하였다. 1907년 1월에 상하이에서 창간되어, 1908년 9월에 폐간되었고, 총 12기가 발행되었고, 주로 번역 소설을 실었다.
[22] 증박(曾朴)(1872—1935)의 자는 맹박(孟朴)이고, 필명은 동아병부(东亚病夫)이고, 장쑤성 창수(常熟) 사람이고, 신해혁명 후에 장쑤성 재정청장, 정무청장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소설림 서점을 창간하였다. 지은 소설은 《얼해화(孽海花)》 외에, 《노남자(鲁男子)》 등이 있다. 《얼해화》의 앞 6회는 자유를 사랑하는 자(김송잠(金松岑))가 지었고, 증박이 수정하였다.
[23] 이자명(李慈铭)(1830—1894)의 자는 기백(炁伯)이고, 호는 춘객(莼客)이고, 회계(지금의 저장성 사오싱) 사람이고, 산시 도 감찰 어사(山西道监察御史)까지 지냈다. 《월만당일기(越缦堂日记)》, 《백화강부각시집(白华绛跗阁诗集)》, 《호당림관병체문초(湖塘林馆骈体文钞)》 등을 저술하였다.
[24] 《얼해화》의 속서(续书)에 대하여. 《벽혈막(碧血幕)》은 포천소(包天笑)가 지었다. 광서 정미년(1907) 《소설림》 본이 있으나, 완성되지 않았다. 《속얼해화(续孽海花)》는 육사악(陆士谔)이 지었다. 원래 제목은 《얼해화속편(孽海花续编)》이고, 책 안의 제목은 《얼해화삼편(孽海花三编)》으로 되어 있다. 후에 또 4, 5, 6편을 이어서 썼고, 제목은 《신얼해화(新孽海花)》이다. 증박이 처음 《얼해화》를 지을 때 60회 회목(回目)을 구상하였으나, 초고는 단지 20회만 완성되었다. 이 속서는 증박이 구상한 회목에 의거하여, 21회부터 시작하여, 60회까지이다.
[25] “흑막 소설(黑幕小说)”은 1916년 10월 《시사신보(时事新报)》가 “상하이 흑막(上海黑幕)” 특별 기고란을 마련한 후 점차 유행한 한 종류의 소설로, 대표 작품으로는 《회도중국흑막대관(绘图中国黑幕大观)》 등이 있다.
후기
오른쪽 중국 소설 사략 28편은 그 제1편부터 제15편까지는 작년 10월에 이미 인쇄를 마쳤고, 이후 주이준(朱彝尊)[1]의 명시종(明诗综) 권80에서 안탕산초(雁宕山樵) 진침(陈忱)의 자가 하심(遐心)이고 호적(胡适)이 후수호전(后水浒传) 서문을 쓴 것을 알게 되어[2] 그 일을 고찰하니 사 무량(谢无量)의 평민 문학의 두 대 문호보다 더욱 많았다[3]. 제1편에서 설당전(说唐传)의 옛 책에는 여릉(庐陵) 나본(罗本)이 지었다고 쓰여 있고 분장루(粉妆楼) 또한 나관중(罗贯中)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안타깝게도 현재 볼 수 없어 나중에 증수하지 못하였다. 그 제16편 이하의 초고는 책상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고 때때로 고쳐 썼으나 식견이 좁고 보고 읽은 것이 두루 미치지 못하여 명청 소설에서 빠진 것이 오히려 많을 뿐만 아니라 근대의 작가인 위자안(魏子安), 한자운(韩子云) 등의 이름 또한 다른 일에 얽매여 널리 방문할 겨를이 없었다. 하물며 소설 초간본은 대부분 서문과 발문이 있어 그것을 빌려 책이 완성된 연대와 그 지은 사람을 알 수 있으나 옛 책을 보기 어려워 겨우 새 책 장사치의 허술한 것을 본문 이외에 대부분 삭제한 것을 얻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편집하니 또한 의거할 것이 부족하여 때로 오류가 있을까 염려하였으나 여러 해를 거치면 조금은 타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급박하여 다시 인쇄하게 되었으니 그 부족함을 그대로 두고 인쇄에 부쳤다. 예전에 품었던 뜻은 듣는 사람의 살핌을 돕고, 묘사의 번거로움을 풀어주려는 뜻이었으니 이에 마치는 바이다. 1924년 3월 3일 교정을 마치고 기록하다.[4]
[1] 주이존(朱彝尊)(1629—1709)의 자는 석창(锡鬯)이고, 호는 죽차(竹垞)이고, 청나라 수수이(지금의 저장성 자싱) 사람이다. 지은 《명시종(明诗综)》 100권 중 권80에 진침(陈忱)의 시 한 수를 실었고, “침의 자는 하심(遐心)이고, 우청(乌程)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2] 《후수호전서(后水浒传序)》는 곧 《수호속집양종서(水浒续集两种序)》이고, 《호적문존(胡适文存)》 2집 권4에 실려 있다.
[3] 사 무량(谢无量)(1884—1964)의 이름은 몽(蒙)이고, 쓰촨성 쯔퉁 사람이고, 일찍이 상하이 중화서국 편집을 역임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중국대문학사(中国大文学史)》, 《중국부녀문학사(中国妇女文学史)》 등이 있다. 《평민문학지양대문호(平民文学之两大文豪)》는 후에 《나관중여마치원(罗贯中与马致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4] 본문에는 원래 구두점이 없었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시험 삼아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어 보았다.
오른쪽 《중국소설사략》 28편 중, 그 제1편부터 제15편까지는 작년 10월에 이미 인쇄를 마쳤다. 이후 주이존의 《명시종》 권80에서 안탕산초 진침의 자가 하심임을 알게 되었고, 호적이 《후수호전서》에서 그 일을 고찰한 것이 더욱 많음을 알게 되었다. 사 무량의 《평민문학지양대문호》 제1편에서 《설당전》의 옛 책에는 여릉 나본이 지었다고 쓰여 있고, 《분장루》 또한 나관중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안타깝게도 현재 볼 수 없어 나중에 증수하지 못하였다. 그 제16편 이하의 초고는 책상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고, 때때로 고쳐 썼으나, 식견이 좁고 보고 읽은 것이 두루 미치지 못하여, 명청 소설에서 빠진 것이 오히려 많을 뿐만 아니라, 근대의 작가인 위자안, 한자운 등의 이름 또한 다른 일에 얽매여 널리 방문할 겨를이 없었다. 하물며 소설 초간본은 대부분 서문과 발문이 있어, 그것을 빌려 책이 완성된 연대와 그 지은 사람을 알 수 있으나, 옛 책을 보기 어려워, 겨우 새 책 장사치의 허술한 것을 본문 이외에 대부분 삭제한 것을 얻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편집하니 또한 의거할 것이 부족하여, 때로 오류가 있을까 염려하였으나, 여러 해를 거치면 조금은 타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급박하여, 다시 인쇄하게 되었으니, 그 부족함을 그대로 두고, 인쇄에 부쳤다. 예전에 품었던 뜻은 듣는 사람의 살핌을 돕고, 묘사의 번거로움을 풀어주려는 뜻이었으니, 이에 마치는 바이다. 1924년 3월 3일 교정을 마치고 기록하다.
중국 소설의 역사의 변천(1)
이 글은 루쉰이 1924년 7월 시안에서 강학할 때의 기록 원고로, 본인이 수정 후, 서북대학교 출판부에서 1925년 3월에 인쇄한 《국립서북대학、섬서 교육청 합판 하계 학교 강연집》(2)에 수록되었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중국 소설의 역사의 변천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인류의 역사는 진화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중국 역시 예외일 리 없다. 그러나 중국의 진화 양상을 보면, 두 가지 매우 특별한 현상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것이 온 지 오래되었는데 옛 것이 다시 회복되는 것, 즉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이 온 지 오래되었는데 옛 것이 폐지되지 않는 것, 즉 혼재이다. 그렇다면 진화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다만 비교적 느릴 뿐이어서, 우리처럼 성급한 사람들에게는 하루가 삼 년처럼 느껴질 뿐이다. 문예, 문예의 하나인 소설도 당연히 그러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작품 속에는 당송의, 심지어 원시 인민의 사상 수단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러한 찌꺼기—비록 그것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환영받고 있을지라도—를 고려하지 않고, 역행하는 잡다한 작품들에서 진행의 실마리를 찾아내려는 것으로, 총 여섯 강으로 나눌 것이다.
제1강 신화에서 신선전까지
소설이라는 이름을 고찰해 보면, 가장 오래된 것은 《장자(庄子)》에서 말한 “소설을 꾸며 현령(县令)을 구한다”에서 보인다. ‘현’은 높음을 말하고, ‘령’은 아름다움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말하는 자잘한 이야기, 도술과 관계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후에 말하는 소설과는 다르다.
공자, 양자[1], 묵자[2] 각 학파의 학도들을 장자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다른 학파에서 장자를 보면 그의 저작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한서(汉书)》 《예문지(艺文志)》에서 말하는 “소설이란, 길거리와 골목의 이야기이다.”라는 것이 비로소 현재의 소설이라고 하는 것에 가깝지만, 이 역시 단지 옛날 패관이 일반 백성들이 이야기하는 자잘한 이야기를 모아, 나라의 민정, 풍속을 고찰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현재의 소설이라고 하는 가치는 없었다.
소설은 어떻게 기원했을까? 《한서》 《예문지》에서 말하기를 “소설가라는 부류는, 대개 패관에서 나왔다.”라고 한다. 패관이 소설을 수집했는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설령 정말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소설 서적의 기원일 뿐, 소설 자체의 기원은 아니다. 현재 문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설이 신화에서 기원했다고 여긴다. 원시 민족은 동굴에서 살고 들에서 지내며 천지만물의 변화—예를 들어 바람, 비, 지진 등—가 인간의 힘으로 헤아리거나 저항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며, 반드시 만물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여겼고, 그에 따라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신의 생활, 동작을 상상했는데, 예를 들어 중국에는 반고씨가 천지를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화”를 이루었다. 신화에서 발전하면서 이야기는 점차 인간성에 가까워지고, 나타나는 것은 대개 “반신”인데, 예를 들어 옛날에 큰 공을 세운 영웅을 말할 때, 그 재능은 범인 이상이고, 하늘이 내려 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적이 제비 알을 삼켜 상나라를 낳았다는 이야기, 요임금 때 “열 개의 해가 동시에 나타났다”고 하여 요임금이 예에게 활을 쏘게 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범인과는 다르다. 이러한 구전(口傳)을 지금 사람들은 “전설”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다시 발전하면, 정사는 역사로 돌아가고, 숨겨진 역사는 곧 소설이 된다.
나는 문예 작품이 발생하는 순서에서, 아마도 시가가 먼저이고 소설이 나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가는 노동과 종교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노동할 때, 한편으로 일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래를 부르면, 노동의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외침에서 발전하여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표현하고, 자연스러운 운율을 갖게 되었다. 둘째, 원시 민족은 신명에 대해 점차 두려움에서 경외심을 갖게 되었고, 그 위엄과 신령함을 노래하고, 그 공적과 위업을 찬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시가의 기원이 되었다. 소설에 대해서는, 나는 오히려 휴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노동할 때, 이미 노래를 통해 스스로 즐기고, 그것을 빌려 노동의 고통을 잊었다면, 휴식할 때 또한 반드시 어떤 일을 찾아 여가를 보내야 한다. 이러한 일이 바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바로 소설의 기원이다.—그래서 시가는 운문이고, 노동할 때 발생한 것이고, 소설은 산문이고, 휴식할 때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소설이든 시가든, 그 요소는 항상 신화와 떨어질 수 없었다. 인도, 이집트, 그리스가 그러했고, 중국 또한 그러했다. 단지 중국에는 신화를 담은 큰 저작이 없고, 그 흩어져 있는 신화는 현재까지도 전문 서적으로 모아져 있지 않다. 우리가 찾으려면 오직 고서에서 조금씩 얻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고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해경(山海经)》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 또한 체계적이지 않고, 그중 가장 중요하고, 이후와 관계있는 기록으로는 서왕모(西王母)의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하나를 예로 들어 보겠다.
“옥산(玉山)은 서왕모가 사는 곳이다. 서왕모의 모습은 사람과 같지만, 표범의 꼬리와 호랑이의 이빨을 가졌고 휘파람을 잘 불며, 헝클어진 머리에 승(胜)을 꽂고, 하늘의 재앙과 오형(五刑)을 주관한다.”
이와 같은 종류가 적지 않다. 이 고전은 당나라까지 유행하다가, 여산노모(骊山老母)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다. 이 외에 《목천자전(穆天子传)》이라는 것이 있는데, 주 목왕이 여덟 필의 준마를 타고 서쪽으로 정벌한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급군(汲郡) 고분에서 나온 잡서 중 하나이다.—요컨대 중국 고대의 신화 자료는 매우 적고,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들이며, 장편이 없고, 또한 나중에 흩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적었던 것 같다. 우리가 여기서 그 원인을 추구해 보려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 너무 고된 노동: 중화 민족은 먼저 황하 유역에 살았는데, 자연 환경이 좋지 않아, 생계를 위해 생활이 매우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고, 현묘한 상상을 가볍게 여겼고, 그래서 신화가 발달하거나 전해 내려오지 못했다. 노동은 문예가 발생하는 하나의 원천이라고 하지만, 조건이 있다. 바로 너무 과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과 휴식이 적절하거나, 약간의 고통을 느낄 때, 여러 가지 시가가 발생하고, 약간의 여가가 있을 때, 소설을 이야기한다. 만약 노동이 너무 많고, 휴식 시간이 적고, 피로를 회복할 여유가 없다면, 잠자고 먹을 시간조차 부족한데,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문예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 쉽게 잊혀짐: 중국 고대에는 천신, 지기(地祇), 사람, 귀신이 흔히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원시적인 신앙이 전설에 남아 있는 것이 날마다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옛것은 굳어 죽고, 후세 사람들은 알 길이 없었다. 예를 들어 신도(神荼), 울루(郁垒)는 고대의 대신(大神)으로, 전설에는 일종의 갈대 밧줄을 손에 들고 호랑이를 묶고, 흉한 요괴를 막았다고 하여, 고대에는 그들을 문신(门神)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중에 문신을 진경(秦琼), 울지경덕(尉迟敬德)으로 바꾸고, 여러 가지 사실을 끌어들여 증거로 삼았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단지 진경과 울지경덕이 문신인 줄만 알고, 신도, 울루는 다시 알지 못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외에 이와 같은 것이 매우 많다.
중국의 신화는 장편이 없기 때문에, 이제 《한서(汉书)》 《예문지(艺文志)》에 실린 소설을 다시 살펴보겠다. 《한서》 《예문지》에 실린 많은 소설 목록은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약간의 유문(遗文)은 여전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대례(大戴礼)》 《보부편(保傅篇)》에서 인용한 《청사자(青史子)》의 말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여덟 살이 되면 집을 나가 바깥에서 거처하며 작은 기예를 배우고, 작은 예절을 행하였다. 머리를 묶으면 대학에 나아가 큰 기예를 배우고, 큰 예절을 행하였다. 거처할 때는 예의와 문장을 익히고, 다닐 때는 패옥 소리를 내고, 수레를 타면 화란(和鸾) 소리를 들었으니, 이로써 그릇된 마음이 들어올 곳이 없었다.”
《청사자》의 이러한 말은 고대의 소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예기(礼记)》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데, 어찌하여 소설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혹은 그 안에 유가와 다른 사상이 많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이른바 한대 소설로는 동방삭(东方朔)이 지었다고 하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신이경(神异经)》이고, 다른 하나는 《십주기(十洲记)》이다. 반고(班固)가 지은 것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한무고사(汉武故事)》이고, 다른 하나는 《한무제내전(汉武帝内传)》이다. 이 외에 곽헌(郭宪)이 지은 《동명기(洞冥记)》, 유흠(刘歆)이 지은 《서경잡기(西京杂记)》가 있다. 《신이경》의 문장은 《산해경》을 모방한 것으로,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 괴이한 일이다. 지금 하나를 예로 들어 보겠다.
“서남쪽 황량한 산속에서 ‘알’이라는 짐승이 나오는데, 그 모습은 토끼와 같고, 사람의 얼굴을 하고 말을 할 수 있으며, 항상 사람을 속여, 동쪽이라고 말하고 서쪽을 가리키고, 나쁘다고 말하고 좋다고 한다. 그 고기는 맛있는데, 먹으면 말이 진실되지 않게 된다.” (《서남황경(西南荒经)》)
《십주기》는 한 무제가 서왕모에게 십주(十洲)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을 기록한 것으로, 역시 《산해경》을 모방한 것이지만, 《신이경》보다는 조금 더 엄숙하다. 《한무고사》와 《한무제내전》은 모두 무제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동명기》는 신선 도술 및 먼 곳의 괴이한 일을 말한다. 《서경잡기》는 인간 세상의 자잘한 일을 기록한다.
그러나 《신이경(神异经)》, 《십주기(十洲记)》는 《한서(汉书)》 《예문지(艺文志)》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동방삭(东方朔)이 지은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이 거짓으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무고사(汉武故事)》, 《한무제내전(汉武帝内传)》은 반고(班固)의 다른 글과는 필체가 다르고, 중간에 불교 용어가 섞여 있는데—당시 불교는 아직 성행하지 않았고, 한나라 사람들은 원래 불교 용어를 즐겨 쓰지 않았다—거짓임을 알 수 있다. 《동명기(洞冥记)》, 《서경잡기(西京杂记)》는 이미 육조 시대 사람이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여섯 종류의 소설은 모두 가짜이다. 오직 이 외에 유향(刘向)의 《열선전(列仙传)》[3]만이 진짜이다. 진나라의 갈홍(葛洪) 또한 《신선전(神仙传)》[4]을 지었는데, 당송 시대에는 더욱 많았고, 후대의 사상 및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유향의 《열선전》은 당시 소설을 의도하고 지은 것이 아니고, 실제 있었던 일로 여겨 지은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아동 독서 자료로 많이 쓰인다. 지금 흔히 발생하는 문제가 있는데, 즉 이러한 신화를 아동의 독서 자료로 써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도 겸사겸사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신화로 아동을 가르치는 것은 미신을 키울 뿐이고, 매우 해롭다고 말하고, 찬성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신화로 아동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의 천성에 부합하고, 매우 흥미를 느끼게 하며, 해로운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사회의 교육 상황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다. 만약 아동이 계속해서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장차 과학을 배우면 자연히 알게 되어, 미신에 빠지지 않으므로 당연히 해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만약 아동이 계속해서 더 심도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없고, 학식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면, 어릴 때 가르친 신화를 영원히 진실로 믿을 것이므로, 아마도 해로울 것이다.
[1] 양자(杨子)는 곧 양주(杨朱)로, 전국 초기 위나라 사람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자신을 중시하며”, “본성을 온전히 하고 진실을 보존하며, 외부 사물로 몸을 괴롭히지 않는다”라는 “위아(为我)” 사상을 주장했다. 그의 언론과 사적은 《맹자(孟子)》, 《장자(庄子)》, 《한비자(韩非子)》, 《여씨춘추(吕氏春秋)》 등의 책에 흩어져 있다. 《열자(列子)》에 《양주(杨朱)》 편이 있지만, 후세 사람이 거짓으로 지은 것이다.
[2] 묵자(墨子)(약 기원전 468—기원전 376)의 이름은 적(翟)이고, 춘추 전국 시대 노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송나라 대부를 지냈고, 묵가 학파 창시자이다. 그는 “사랑에 차별이 없다”라는 “겸애(兼爱)” 사상을 주장했다. 현재 《묵자》는 53편이 남아 있다.
[3] 《열선전(列仙传)》은 《수서(隋书)》 《경적지(经籍志)》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유향(刘向)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적송자(赤松子) 등 71명의 신선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4] 《신선전(神仙传)》은 《수서(隋书)》 《경적지(经籍志)》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갈홍(葛洪)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허유(许由), 소부(巢父) 등 84명이 신선 반열에 오른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제2강 육조 시대의 지괴(志怪)와 지인(志人)
지난번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첫째, 신화는 문예의 싹이다. 둘째, 중국의 신화는 매우 적다. 셋째, 모든 신화는 장편이 없다. 넷째, 《한서(汉书)》 《예문지(艺文志)》에 실린 소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다섯째, 현재 남아 있는 한나라 사람의 소설은 대부분 가짜이다. 이제 육조 시대의 소설은 어떠한지 살펴보겠다. 중국은 원래 귀신을 믿었는데, 귀신과 사람은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귀신이 소통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무(巫)가 나타났다. 무는 나중에 두 파로 나뉘었다. 하나는 방사(方士)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무이다. 무는 주로 귀신 이야기를 하고, 방사는 주로 연금술과 구선(求仙)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진한(秦汉) 이후 그 풍습이 날로 성행했고, 육조 시대에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지괴(志怪) 서적이 특히 많았다. 예를 들어 《박물지(博物志)》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볼모로 있었는데,… 돌아가고자 하여 진나라 왕에게 청했다. 왕이 듣지 않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되고, 말이 뿔이 나면 보내주겠다.’라고 했다. 단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자, 까마귀 머리가 곧 하얗게 되었고, 땅을 굽어보며 탄식하자, 말에게 뿔이 났다. 진나라 왕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냈다…” (권8 《사보(史补)》)
이것은 모두 괴이한 이야기로, 방사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또 예를 들어 유경숙(刘敬叔)의 《이원(异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희(义熙) 연간에, 동해(东海) 서씨 집안의 여종 난(兰)이 갑자기 영황병(羸黄病)에 걸렸는데, 먼지를 터는 행동이 이상했다. 함께 몰래 살펴보니, 빗자루가 벽 모퉁이에서 와서 여종의 침상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에 그것을 가져다 태우니, 병이 곧 나았다.” (권8)
이것을 보면 육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요괴가 될 수 있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무(巫)의 사상, 즉 이른바 “만유신교(万有神教)”이다. 이러한 사상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나무에 “유구필응(有求必应)”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사회에서 여전히 나무를 신으로 여기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며, 마치 육조 사람들과 같은 미신이다. 사실 이러한 사상은 원래 어느 나라든 옛날에는 있었지만, 나중에는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중국에는 여전히 성행한다.
육조 지괴 소설은 위에서 언급한 《박물지(博物志)》, 《이원(异苑)》 외에, 간보(干宝)의 《수신기(搜神记)》, 도잠(陶潜)의 《수신후기(搜神后记)》가 있다. 하지만 《수신기》는 대부분 유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명나라 사람이 여러 책에서 인용한 내용을 모아 다른 지괴 서적을 더해 만든 것으로,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인 서적이다. 《수신후기》 또한 영이(灵异)하고 변화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도잠은 성격이 호방하고 달관했기 때문에, 직접 짓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다른 사람이 이름을 빌린 것일 것이다.
이 외에 육조 사람들의 지괴 사상 발달을 도운 것으로 인도 사상의 유입이 있다. 진(晋), 송(宋), 제(齐), 양(梁) 사조(四朝)에 불교가 크게 유행했고, 당시 번역된 불경이 많았는데, 동시에 귀신과 신기한 이야기도 함께 나왔기 때문에, 당시 중국과 인도의 귀신 이야기를 소설에 합쳐, 더욱 발달하게 했다. 예를 들어 양선(阳羡) 거위 우리 이야기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양선의 허언(许彦)이 수안산(绥安山)을 가다가, 한 서생을 만났는데,… 길가에 누워 발이 아프다고 하며, 거위 우리에 함께 가게 해 달라고 했다. 허언은 농담이라고 여겼는데, 서생이 곧 우리 안으로 들어갔고,… 마치 두 마리 거위와 함께 앉아 있었고, 거위 또한 놀라지 않았다. 허언이 우리를 지고 갔는데,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가다가 나무 아래에서 쉬는데, 서생이 우리에서 나와 허언에게 말하기를 ‘그대를 위해 간단한 음식을 차려 주고 싶소.’라고 했다. 허언이 말하기를…”
‘좋소.’ 이에 입에서 구리 합 하나를 뱉어냈는데, 그 안에는 음식이 갖추어져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허언에게 말하기를 ‘전에 한 부인을 데리고 다녔는데, 지금 잠시 초대하려 하오.’… 또 입에서 한 여자를 뱉어냈고,… 함께 앉아 연회를 즐겼다. 이윽고 서생이 술에 취해 눕자, 이 여자가 허언에게 말하기를 ‘…전에 또한 한 남자를 몰래 데리고 다녔는데,… 잠시 불러 보겠소…’… 여자가 입에서 한 남자를 뱉어냈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고, 완전히 인도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로써 육조의 지괴 소설이 인도와 얼마나 큰 관련이 있는지 대략 알 수 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육조 사람들의 지괴는 대개 오늘날의 뉴스 기록과 같아서, 당시에는 소설을 의도하고 지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육조 시대 지괴 소설이 위와 같으므로, 이제 지인(志人)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육조 지인 소설은 매우 간단하고, 지괴 소설과 거의 비슷한데, 송나라 유의경(刘义庆)이 지은 《세설신어(世说新语)》가 대표가 될 수 있다. 이제 한두 가지를 예로 들어 보겠다.
“완광록(阮光禄)이 섬(剡)에 있을 때, 좋은 수레가 있었는데, 빌리는 사람에게 모두 주었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데, 빌리고 싶었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다. 완광록이 나중에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에게 수레가 있는데 사람들이 감히 빌리지 못하니, 수레를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는 곧 태워 버렸다.” (권상 《덕행편(德行篇)》)
“유령(刘伶)은 항상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지냈는데, 옷을 벗고 나체로 집 안에 있기도 했다. 사람들이 비웃자, 유령이 말하기를 ‘나는 천지를 집으로 삼고, 집을 속옷으로 삼았는데, 여러분은 어찌하여 내 속옷 속에 들어왔는가?’라고 했다.” (권하 《임탄편(任诞篇)》)
이것이 이른바 진(晋)나라 사람의 풍도이다. 현재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완광록(阮光禄)이 수레를 태운 것이나, 유령(刘伶)의 방탕한 행동은 다소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진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귀하게 여긴 것이 기이한 행동과 현묘한 청담(清谈)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청담은 본래 한나라의 청의(清议)에서 비롯되었다. 한나라 말 정치의 암흑기에, 일반 명사들이 정사를 의논했는데, 처음에는 사회에서 매우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집정자들의 질시를 받아, 점차 해를 입게 되었고, 예를 들어 공융(孔融), 미형(祢衡) 등은 모두 조조(曹操)가 방법을 써서 죽였다.[1] 그래서 진나라 시대의 명사들은 감히 다시 정사를 의논하지 못하고, 오로지 현묘한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청의를 하되 정사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른바 청담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청담을 하는 명사들은 당시 사회에서 여전히 매우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묘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명사의 자격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졌다. 《세설(世说)》이라는 책은 거의 명사들의 교과서로 볼 수 있다.
《세설》 이전에 《어림(语林)》, 《곽자(郭子)》가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사라졌다.
《세설》은 후한(后汉)부터 동진(东晋)까지의 옛 글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나중에 유효표(刘孝标)가 《세설》에 주석을 달았는데, 주석에 인용된 옛 책이 400여 종에 이르지만, 현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세설》을 더욱 귀하게 여겼고, 현재까지도 매우 널리 통용된다.
이 외에 위나라 한단순(邯郸淳)이 지은 《소림(笑林)》이라는 책도 《세설》보다 앞선다.
그 글은 《세설》보다 소박한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당송 시대 사람들의 유서(类书)에 인용된 유문을 약간 볼 수 있는데, 이제 그것을 하나 예로 들어 보겠다.
“갑(甲)의 부모가 살아 있는데, 3년간 유학을 하고 돌아오자, 외삼촌이 무엇을 배웠는지 묻고, 아버지를 오래도록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에 대답하기를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진나라 강공(康公)보다 지나칩니다.’ (진나라 강공은 부모가 이미 죽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그를 꾸짖으며 ‘네가 배운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어릴 때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배움이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광기(广记)》 262)
이로써 《소림(笑林)》에서 말하는 것은 대개 해학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소림》, 《세설》 두 종류의 책은 나중에 크게 발전하지 못했는데, 이는 모방만 있었고, 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소림광기(笑林广记)》는 당연히 《소림》의 갈래이지만, 《소림》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 지식상의 해학인데 반해, 《소림광기》[2]에 이르러서는 형체상의 해학으로 떨어져, 오로지 비속한 말로 형체를 가지고 사람을 희롱하여, 경박함에 이르렀기 때문에, 해학의 재미는 훨씬 줄어들었다.
《세설》의 경우, 나중에 모방한 것이 더욱 많은데, 유효표(刘孝标)의 《속세설(续世说)》—《당지(唐志)》에 보임—부터 청나라 왕탁(王晫)이 지은 《금세설(今世说)》, 현재 역종이(易宗夔)가 지은 《신세설(新世说)》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설》을 모방한 책이다. 하지만 진나라와 현대 사회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때의 소설을 모방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럽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나라 말부터 육조까지가 찬탈의 시대였고, 온 세상이 시끄러웠으며, 사람들이 염세주의를 많이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교와 도교 두 종교가 한때 크게 유행하여, 모두 현실 초탈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은 먼저 그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신선 수련을 하러 가서,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약 먹기를 좋아했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영원히 술에 취한 채 세상일을 묻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약을 먹는 사람들—진나라 사람들이 먹었던 약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오석산(五石散)인데, 다섯 종류의 돌로 만든 것으로, 그 성질이 매우 건조하고 뜨거웠다—은 몸에 항상 염증이 생겨, 낡은 옷을 입기에 적합했다—새 옷은 피부를 쉽게 상하게 하기 때문에—또한 항상 씻지 않아서, 이가 매우 많이 생겼기 때문에, “이를 잡으며 이야기한다.”라고 말했다. 술 마시는 사람들은, 방탕한 생활 외에, 술에 취해 살았다.—이것이 진나라 시대의 사회 상황이다. 그런데 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생활 상황이 완전히 다른데, 그때의 사회 배경에서 생겨난 소설을 모방하려 하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조 사람들은 소설을 의도하고 지은 것이 아닌데, 이는 그들이 귀신 일과 사람 일을 똑같이 보고, 모두 사실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당서(旧唐书)》 《예문지(艺文志)》에서는 그러한 지괴 서적을 소설에 넣지 않고, 역사의 전기(传记) 부류에 넣었는데, 송나라 구양수(欧阳修)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소설에 넣었다. 하지만 지인(志人)의 한 부류는 육조 시대에 지괴의 한 부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출세와 매우 큰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시 시골의 학자들이 출세하기를 원하면, 그들은 반드시 명사(名士)를 찾아가야 했는데, 진나라 시대에는 왕도(王导), 사안(谢安)과 같은 인물을 찾아뵈어야 했으니, 이른바 “용문에 한 번 오르면, 신분이 열 배나 오른다.”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이러한 명사들과 대화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비위에 맞출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의 비위에 맞추려면, 《세설(世说)》, 《어림(语林)》과 같은 책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당시 완선자(阮宣子)가 태위 왕이보(王夷甫)를 만났는데, 왕이보가 노자(老子)와 장자(庄子)의 차이점을 묻자, 완선자가 대답하기를 “장무동(将毋同)”이라고 했다. 왕이보는 그를 매우 감탄하여, 벼슬을 주었는데, 즉 세상에서 말하는 “삼어연(三语掾)”이다. 하지만 “장무동” 세 글자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사람은 “거의 다르다(殆不同)”라는 뜻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어찌 다르지 않겠는가(岂不同)”라는 뜻이라고 한다—요컨대 일종의 양가적이고, 아득하고 희미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아득한 이야기를 배우려면, 《세설》을 보지 않을 수 없다.
[1] 공융(孔融) (153—208) 자(字)는 문거(文举)이고, 동한(东汉) 말 노나라(鲁国)(지금의 산둥성 취푸(山东曲阜)) 사람이다.
일찍이 북해상(北海相)을 지냈고, 후에 조조(曹操)에 반대하다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미형(祢衡) (173—198) 자는 정평(正平)이고, 동한 말 평원군 반현(平原般)(지금의 산둥성 린이(山东临邑)) 사람이다. 조조에 반대하다가 유표(刘表)에게 보내졌고, 유표는 다시 그를 황조(黄祖)에게 보냈으며, 결국 황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2] 《소림광기(笑林广记)》는 청나라 유희주인(游戏主人)이 편집했다. 해학 모음집으로, 4권으로 되어 있고, 고염(古艳), 부류(腐流), 형체(形体), 규풍(闺风) 등 12가지 종류로 나뉜다.
제3강 당나라의 전기문(传奇文)
소설은 당나라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맞이했다. 나는 지난번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조 시대의 지괴(志怪)와 지인(志人)의 글은 모두 매우 간략하고, 또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의식적으로 소설을 짓게 되었는데, 이는 소설사에서 큰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글이 매우 길어졌고, 또한 굴곡 있게 묘사할 수 있게 되어, 이전의 간결하고 고풍스러운 문체와는 매우 달랐는데, 이는 문체상으로도 큰 진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고문(古文)을 짓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매우 불만족스러워하며, “전기체(传奇体)”라고 불렀다. “전기(传奇)” 두 글자는 당시에는 실제로 비난하는 의미였고, 현대인이 생각하는 소위 “전기”와는 다르다. 하지만 이러한 전기 소설은 현재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송나라 초기의 《태평광기(太平广记)》—이 책은 소설의 대규모 유서(类书)라고 할 수 있는데, 육조부터 송나라 초기까지의 소설을 모아 만든 것이다—에서 우리는 당나라 전기 소설의 대략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초기에 왕도(王度)가 지은 《고경기(古镜记)》는 자신이 신기한 거울을 얻은 기이한 일을 서술한 것인데, 글은 매우 길지만, 단지 여러 기이한 일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여, 아직 육조 지괴의 풍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외에 또 무명씨가 지은 《백원전(白猿传)》이 있는데, 양나라 장군 구양흘(欧阳纥)이 장락(长乐)에 이르러, 깊은 계곡 동굴에 들어갔는데, 그의 아내가 흰 원숭이에게 납치당했다가, 나중에 구출되어 돌아와, 아들을 낳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닮았다”라는 이야기를 다룬다. 흘은 후에 진 무제(陈武帝)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의 아들 구양순(欧阳询)은 당나라 초기에 매우 명망이 높았는데, 모습이 원숭이와 닮았기 때문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지어냈다. 나중에 소설을 빌려 사람을 공격하는 풍습이, 당시에도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무측천(武则天) 때에, 장작(张鷟)이 지은 《유선굴(游仙窟)》이 있는데, 그가 장안(长安)에서 하황(河湟)으로 가는 도중,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묵게 되었는데, 이 집에 십낭(十娘)과 오수(五嫂)라는 두 여자가 있어,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즐기는 등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다. 사실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지만, 변려문(骈体文)으로 지어졌다. 이러한 변려문으로 소설을 짓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므로, 일종의 특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청나라 진구(陈球)가 지은 《연산외사(燕山外史)》는 변려문으로 되어 있는데, 작가는 자신이 변려문으로 소설을 짓는 것을 자신이 새롭게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미 장작이 시작한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유선굴》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실전되었고, 오직 일본에서만 현재 남아 있는데, 이는 장작이 당시에 매우 문명이 높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많은 돈을 주고 그의 글을 사갔는데, 이것이 아마 그때 가져간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그의 글은 매우 경박하고, 그다지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필치가 활발할 뿐이다.
당나라 개원(开元), 천보(天宝) 이후, 작가들이 많이 나타나, 이전과는 매우 달라졌다. 이전에는 소설을 업신여겼던 사람들이, 이때에는 소설을 짓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환경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당나라 때 과거 시험을 볼 때, 이른바 “행권(行卷)”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과거를 보러 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서울에 와서, 자신이 잘 지은 시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당시의 명인들을 찾아뵙는데, 만약 칭찬을 받으면, “명성이 열 배나 오르게” 되고, 나중에는 급제할 희망이 생기기 때문에, 행권을 당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개원, 천보 이후, 점차 시에 대해 다소 싫증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소설 또한 행권에 넣었고, 게다가 결국 명성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소설을 불만족스럽게 여겼던 사람들이, 이때에는 많이 소설을 짓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전기 소설이 한때 매우 성행했다. 대력(大历) 연간에, 먼저 심기제(沈既济)가 지은 《침중기(枕中记)》가 있었는데—이 책은 사회에서 매우 흔해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노생(卢生)이라는 사람이, 한단(邯郸)으로 가는 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여옹(吕翁)을 만나, 베개를 하나 받았는데, 노생이 잠이 들자, 꿈에 청하 최씨(清河崔氏)와 결혼하게 되었다.—청하 최씨는 대성(大姓)에 속한다. 그래서 청하 최씨와 결혼하게 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그리고 과거에 급제하여, 줄곧 승진하여 상서 겸 어사대부(尚书兼御史大夫)에 이르렀다. 후에 재상에게 미움을 받아, 단주(端州)로 좌천되었다. 몇 년 후, 다시 불러들여 중서령(中书令)에 임명하고, 연국공(燕国公)에 봉해졌다. 후에 늙고 병들어, 침상에서 신음하다가, 숨이 끊어져 죽었다. 꿈속에서 죽자, 그는 깨어났는데, 아직 밥 한 그릇이 익기도 전이었다.—이는 사람들에게 조급하게 나아가지 말고, 공명과 부귀를 담담하게 보라는 의미이다. 후에 명나라 탕현조(汤显祖)가 지은 《한단기(邯郸记)》, 청나라 포송령(蒲松龄)이 지은 《요재지이(聊斋志异)》 중의 《속황량(续黄粱)》은, 모두 이 《침중기》에 근거한 것이다.
이 외에 또 다른 유명한 사람인 진홍(陈鸿)이 있는데, 그와 그의 친구 백거이(白居易)는 안사의 난(安史之乱) 이후, 양귀비(杨贵妃)가 죽고, 미인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기에, 옛 일을 추모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백거이는 《장한가(长恨歌)》를 지었고, 그는 《장한가전(长恨歌传)》을 지었다. 이 이야기는 후에 영향을 미쳐, 청나라 홍승(洪昇)이 지은 《장생전(长生殿)》 전기(传奇)는, 이것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 또 다른 유명한 것은, 백거이의 동생 백행간(白行简)이 지은 《이와전(李娃传)》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형양(荥阳)의 거족의 아들이, 장안에 와서, 주색에 빠져, 가난하고 병들어 곤궁해져, 결국 만랑(挽郎)으로 전락했다.—만랑은 사람들이 장례를 치를 때, 관을 끄는 사람으로, 반드시 만가(挽歌)를 불러야 한다.—후에 이와(李娃)에게 구출되어, 그에게 공부를 권유받았고,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참군(参军)에 이르렀다. 행간의 글은 본래 훌륭했고, 이와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은, 또한 매우 애절하고 볼 만하다. 이 이야기는 후대의 소설[1]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원나라의 《곡강지(曲江池)》, 명나라 설근윤(薛近兖)의 《수유기(绣襦记)》는, 모두 이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소설은, 귀신 이야기를 그다지 많이 다루지 않고, 간혹 있더라도, 단지 장식하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일부 단편 모음집은, 여전히 귀신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는데, 이는 여전히 육조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예를 들어 우승유(牛僧孺)의 《현괴록(玄怪录)》,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阳杂俎)》, 이복언(李复言)의 《속현괴록(续玄怪录)》, 장독(张读)의 《선실지(宣室志)》, 소악(苏鹗)의 《두양잡편(杜阳杂编)》, 배형(裴铏)의 《전기(传奇)》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어쨌든 당나라 사람들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육조 사람들이 지은 것보다 훨씬 더 곡절이 있고 아름답다.
당나라 전기 작가 중,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 외에,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주목할 만한 두 사람이 더 있는데, 한 명은 저작이 많지는 않지만, 영향이 매우 크고, 또한 매우 유명한 원미지(元微之)이고, 다른 한 명은 저작이 많고, 영향도 매우 크지만, 후대에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이공좌(李公佐)이다. 이제 나는 이 두 사람을 나누어 이야기해 보겠다.
- 원미지의 저작 원미지의 이름은 진(稹)이고, 시인이며, 백거이(白居易)와 이름을 나란히 했다. 그가 지은 소설은, 단 한 편 《앵앵전(莺莺传)》인데, 장생(张生)과 앵앵의 일을 이야기한 것으로, 이는 아마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므로, 나는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지의 시문은 본래 매우 유명하지만, 이 전기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게다가 그 마지막 부분에서 장생이 앵앵을 버린 것을 서술하면서, 무슨 “… 덕이 요망함을 이기기에 부족하여, 이에 정을 끊었다.”라고 말하는데, 잘못을 꾸며 변명하는 것으로, 거의 변명하는 글이다. 하지만 후대의 많은 곡자(曲子)는, 모두 이것에서 나왔는데, 예를 들어 금나라 동해원(董解元)의 《현색서상(弦索西厢)》—현재의 《서상》은 연극으로 공연하는 것이고, 이것은 탄창(弹唱)이다—원나라 왕실보(王实甫)의 《서상기(西厢记)》, 관한경(关汉卿)의 《속서상기(续西厢记)》, 명나라 이일화(李日华)의 《남서상기(南西厢记)》, 육채(陆采)의 《남서상기(南西厢记)》 등, 매우 많으며, 모두 이 《앵앵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앵앵전》 원본에서 서술한 내용과는 약간 다른데, 즉 장생과 앵앵이 나중에 결국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심리가, 매우 재회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인데, 아마 인생 현실의 결함을, 중국인들도 잘 알고 있지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말하게 되면, “어떻게 이 결점을 보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번민하고, 개량해야 하며,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번거로움과 번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지금 만약 소설에서 인생의 결함을 서술하면, 독자들이 불쾌하게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역사적으로 재회하지 못한 것도, 소설에서는 종종 재회하게 하고, 보복받지 않은 것도, 보복받게 하여, 서로 속이는 것이다.—이는 실로 국민성에 관한 문제이다.
2. 이공좌의 저작 이공좌는 예로부터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가 지은 소설은 매우 많지만, 현재는 단 네 종류만 남아 있다. (1) 《남가태수전(南柯太守传)》: 이 이야기는 가장 유명한데, 동평(东平) 순우분(淳于棼)의 집 남쪽에,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어느 날 분이 술에 취해 동쪽 행랑 아래에 누워 잠들었는데, 꿈에 자주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를 청하여 대괴안국(大槐安国)으로 데려갔고, 부마(驸马)가 되었고, 남가태수(南柯太守)로 나갔다. 정치적 업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 후에 군대를 이끌고 단라국(檀萝国)과 전쟁을 벌였는데, 패배했고, 공주 또한 죽었기 때문에, 다시 그를 돌려보냈다. 깨어나 보니 찰나의 꿈이었고, 마치 한 세상을 보낸 것 같았다. 느티나무를 보러 가니, 개미굴이 있었고, 개미들이 들락날락하며 어지럽게 다니고 있었는데, 이른바 대괴안국과 남가군은, 바로 이 곳에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침중기》와 거의 비슷하지만, 그 결말은, 여운이 아득하여, 《침중기》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후에 명나라 탕현조가 《남가기(南柯记)》를 지었는데, 역시 이 이야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2) 《사소아전(谢小娥传)》: 이 이야기는 사소아의 아버지와, 그녀의 남편이, 모두 강호를 오가며, 장사를 하다가, 도둑에게 죽임을 당한 이야기를 다룬다. 소아는 아버지의 꿈에서 원수가 “수레 속 원숭이 동쪽 문 풀”이라고 알려주었고, 또 남편의 꿈에서 원수가 “벼 속을 달리는 하루 남편”이라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후에 이공좌가 그 뜻을 해설해 주었다. “수레 속 원숭이, 동쪽 문 풀”은 “신란(申兰)” 두 글자이고, “벼 속을 달리는 하루 남편”은 “신춘(申春)” 두 글자이다. 후에 과연 그것 때문에 도둑을 잡았다. 이는 비록 수수께끼를 풀어서 도둑을 잡은 것이지만, 큰 이치는 없지만, 그 사상이 후대의 소설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이복언이 그 이야기를 《속현괴록》에 넣어, 제목을 《묘적니(妙寂尼)》라고 했고, 명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바탕으로 평화를 지었다. 그의 다른 이야기, 《포공안(包公案)》에서 서술한 내용 중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많다. (3) 《이탕(李汤)》: 이 이야기는 초주(楚州) 자사(刺史) 이탕이, 어부가 귀산(龟山) 아래에서, 물속에 큰 쇠사슬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람과 소의 힘으로 끌어내니, 큰 풍랑이 일어났다. 그리고 원숭이처럼 생긴 괴수가, 하얀 이빨과 금색 발톱을 가지고, 물가로 뛰쳐 올라왔는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달아났고, 괴수는 다시 쇠사슬을 끌고 물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이공좌는 이에 대해 해설하기를, 괴수는 회수(淮水)의 수신(水神) 무지기(无支祁)라고 했다. “힘이 아홉 코끼리보다 강하고, 때리고 치솟고 질주하는 것이 빠르고 날쌔며 순식간과 같다.”
우(禹) 임금이 경진(庚辰)에게 명령하여 그를 제압하게 하니, 목에 굵은 밧줄을 채워, 회음(淮阴)의 귀산(龟山) 아래로 옮겨, 회수가 편안히 흐르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영향도 매우 큰데, 나는 《서유기(西游记)》의 손오공(孙悟空)이 바로 무지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경 대학 교수 후스즈(胡适之) 선생은 인도에서 전래되었다고 생각했고, 러시아인 강허타이(钢和泰) 교수 또한 인도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2] 하지만 내가 보기에, 《서유기》를 쓴 사람은, 불경을 보지 않았고, 중국에서 번역된 인도 경전 중에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없다. 작가—오승은(吴承恩)—은 당나라 소설에 익숙했고, 《서유기》 중에서 당나라 소설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적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손오공이 무지기를 답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스즈 선생은 마치 이공좌가 인도 전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는 내가 현재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4) 《여강풍온(庐江冯媪)》: 이 이야기는 내용이 매우 간단하고, 글도 그다지 좋지 않으므로, 우리는 지금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당나라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후에 모두 곡자(曲子)로 옮겨졌다. 예를 들어 “홍선(红线)”, “홍불(红拂)”, “휴염(虬髯)”[3] 등은, 모두 당나라의 전기에서 나왔고, 이로 인해 간접적으로 사회에 널리 퍼져, 현재 사람들도 알고 있다. 전기 자체는, 당나라가 멸망하자 그와 함께 끊어졌다.
[1] 여기서 “소설”은 “희곡”이어야 한다.
[2] 후스는 그의 《서유기 고증(西游记考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항상 이 신통력이 광대한 원숭이가 국산품이 아니라, 인도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의심한다. 아마 무지기의 신화조차도 인도의 영향을 받아 모방한 것일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강허타이 박사의 지시에 따라,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 《라마전(拉麻传)》에서 하누만(哈奴曼)을 찾았는데, 대략 제천대성(齐天大圣)의 뒷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스 문존(胡适文存)》 2집 참조). 강허타이는, 러시아 제국 시대의 귀족으로, 10월 혁명 이후 중국에 와서, 북경 대학에서 고대 인도 종교학과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쳤다.
[3] “홍선”은, 명나라 양진어(梁辰鱼)가 일찍이 잡극 《홍선녀(红线女)》를 지었다. “홍불”은, 명나라 장봉익(张凤翼)이 일찍이 전기 《홍불기(红拂记)》를 지었다. “휴염”은, 명나라 능몽초(凌濛初)가 일찍이 잡극 《휴염옹(虬髯翁)》을 지었다.
제4강 송나라 사람의 “설화(说话)”와 그 영향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전기 소설은, 당나라가 멸망할 때 함께 끊어졌다. 송나라에 이르러, 비록 전기를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매우 달랐다. 왜냐하면 당나라 사람들은 대개 당시의 일을 묘사했지만, 송나라 사람들은 아주 많은 옛날 이야기를 했다. 당나라 소설은 교훈이 적었지만, 송나라는 교훈이 많았다. 대개 당나라 때는 이야기하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비록 당시의 일을 쓰더라도, 화를 입지는 않았지만, 송나라 때는 꺼리는 것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문인들은 방법을 찾아 피하고, 옛날 이야기를 했다. 게다가 송나라 때는 이학(理学)이 한때 매우 성행했기 때문에, 소설 또한 많이 이학화되었고, 소설이 교훈을 담고 있지 않으면,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예가 문예인 이유는, 교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약 소설을 수신 교과서로 만든다면, 무슨 문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송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전기를 지었지만, 내가 전기가 끊어졌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하지만 송나라의 사대부(士大夫)는, 소설에 대한 공로는, 《태평광기(太平广记)》라는 책을 편찬한 데 있다. 이 책은 한나라부터 송나라 초까지의 자질구레한 이야기 소설을 수집한 것으로, 총 500권으로, 소설의 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그들을 불러서 한 것이다. 왜냐하면 송나라 초에, 천하가 통일되고, 국내가 태평해지자, 국내의 명사들을 불러, 그들의 녹봉을 후하게 하여, 책을 편찬하게 했는데, 당시에 《문원영화(文苑英华)》, 《태평어람(太平御览)》과 《태평광기》를 이루었다. 이는 정부의 목적에서, 이러한 사업을 이용하여, 명인들을 거두어들여, 정치에 대한 그들의 반동을 줄이려는 것일 뿐, 결코 문예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중에, 우리에게 옛 소설의 숲을 남겨주었다. 창작 방면에 있어서는, 송나라의 사대부는 실제로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사회에는 또 다른 평민의 소설이, 이를 대신하여 흥기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체재가 다를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백화(白话)를 사용했기 때문에, 실로 소설사에서 큰 변화이다. 왜냐하면 당시 일반 사대부는, 모두 이학을 이야기하고, 소설을 천시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오락을 원했기 때문에, 평민의 소설이 일어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송나라는 변(汴)에 도읍을 정했는데, 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하고 편안하여, 유흥거리가 많았고, 시정에는 일종의 잡극(杂剧)이 있었는데, 이러한 잡극 중에 이른바 “설화(说话)”가 포함되어 있었다. “설화”는 네 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강사(讲史), 둘째, 설경 혼경(说经诨经), 셋째, 소설(小说), 넷째, 합생(合生). “강사”는 역사적인 일과, 명인들의 전기 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는 후대 역사 소설의 기원이다. “설경 혼경”은, 속어로 불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설”은 짧은 이야기이다. “합생”은, 먼저 모호한 두 구절의 시를 읊고, 그 후에 몇 구절을 더 읊어야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아마 당시 사람들을 풍자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종류 중 후대의 소설과 관계있는 것은, “강사”와 “소설”뿐이다. 당시 이러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설화인(说话人)”이라고 불렀고, 또한 그들은 조직된 단체도 있었는데, “웅변사(雄辩社)”라고 불렀다. 그들은 또한 설화할 때 의지하고 활용하기 위한 책을 편찬했는데, 이 책의 이름은 “화본(话本)”이다. 남송 초년에는, 이러한 화본이 여전히 유행했지만, 송나라가 멸망하고 원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 잡극은 쇠퇴하고, 화본 또한 통용되지 않았다. 명나라에 이르러, 비록 여전히 설화인이 있었지만,—예를 들어 유경정(柳敬亭)은 당시 매우 유명한 설화인이었다—이미 송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고, 또한 그들은 잡극에 속하지 않았고, 어떠한 조직도 없었다. 현재에 이르러, 우리는 거의 송나라 때의 화본이 도대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다행히 현재 몇 종류의 책이 번각되어, 표본으로 볼 수 있다.
한 종류는 《오대사평화(五代史平话)》인데, 강사로 볼 수 있다. 강사의 체제는, 대개 천지개벽부터 시작하여, 이야기하려는 왕조까지 이어진다. 《오대사평화》 또한 그러하다. 그 문장은, 각 단락이 시로 시작하고, 그 다음 본문으로 들어가며, 또 시로 끝나는데, 언제나 한 단락 한 단락 시로 증명한다. 하지만 그 문제점은 허황된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고,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은 적다는 것이다. 시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대략 당나라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당나라 때는 시를 매우 중시했고, 시를 잘 짓는 사람은 청렴한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설화인들이 그들을 숭상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화본 중에 시가 많이 들어갔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짓는 소설 중에도 아직 고쳐지지 않았다. 또한 후대의 역사 소설에서 매 회의 마지막에, 항상 “앞으로의 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 다음 회를 들어보시라(不知后事如何?且听下回分解)”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대략 설화인에게서 비롯된 것 같다. 왜냐하면 설화는 반드시 사람들이 다음에 다시 들으러 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완의 이야기로 그들을 붙잡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장회 소설이 여전히 그것을 모방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유적일 뿐인데, 마치 우리 뱃속의 맹장과 같이, 아무 쓸모가 없는 것과 같다. 한 종류는 《경본통속소설(京本通俗小说)》인데, 이미 완전하지 않고, 십여 편만 남아 있다. “설화”에서 이른바 소설은, 현재 이르는 광의의 소설과는 달리, 매우 짧게 이야기하고, 또한 대부분 당시의 일을 다룬다. 처음에는 머리말을 이야기하는데, 시를 사용하기도 하고, 여전히 이야기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름을 “득승두회(得胜头回)”라고 한다.—“두회(头回)”는 전 회의 의미이고, “득승(得胜)”은 길한 말이다.—이후에 본문으로 들어가지만, 그다지 장황하지 않고, 길이와 머리말이 거의 비슷하며, 짧은 시간 안에 끝난다. 송나라 설화에서의 이른바 소설은, 즉 “단편 소설”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경본통속소설》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러한 종류의 소설의 대략을 보기에 충분하다.
앞서 언급한 두 종류 외에도,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遗事)》라는 것이 있는데, 처음과 끝에 모두 시가 있고, 중간에 속된 구절이 섞여 있어서, “강사”에 가깝지만 구어체는 아니다. 마치 “소설”과 같지만 간결하지는 않다. 다만 그중에서 양산박(梁山泊)의 일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수호(水浒)》의 전신으로,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또한 현재 새로 발견된 책이 있는데, 《대당삼장법사취경시화(大唐三藏法师取经诗话)》라고 한다.—이 책은 중국에서 일찍이 사라졌고,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다.—이른바 “시화(诗话)”는, 현재 사람들이 말하는 시화가 아니라, 시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로 증명한다(有诗为证)”를 중시하는 종류의 소설의 다른 이름이다.
이 《대당삼장법사취경시화》는, 비록 《서유기》의 전신이지만, 또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도인삼과(盗人参果)”라는 일에서,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이 훔치려고 했지만, 당승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취경시화》에서는 선도(仙桃)이고, 손오공은 훔치지 않았지만, 당승이 명령하여 훔치게 했다.—이는 시대의 차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사상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유기》의 작가는 사대부이고, 《취경시화》의 작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사람을 논하는 데 매우 엄격하여, 당승이 어찌 남의 인삼과를 훔치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드시 이 일을 원숭이에게 미루어야 했다. 반면에 시인은 사람을 평가하는 데 비교적 관대하여, 당승이 몇 개의 하찮은 선도를 훔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고 생각하고, 더 이상 마음 써서 그를 숨기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써 내려간 것이다.
요컨대, 송나라 사람의 “설화”의 영향은 매우 크며, 후대의 소설은, 십중팔구 화본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첫째, 후대의 소설, 예를 들어 《금고기관(今古奇观)》 등의 단편적인 서술은, 즉 송나라의 “소설”을 모방한 것이다. 둘째, 후대의 장회 소설, 예를 들어 《삼국지연의(三国志演义)》 등의 장편의 서술은, 모두 “강사”에서 비롯되었다. 그중 강사의 영향이 더욱 크며, 명청부터 현재까지, “이십사사(二十四史)”를 모두 이야기로 만들었다. 작가 중에는, 또한 유명한 인물이 나왔는데, 바로 나관중(罗贯中)이다.
나관중의 이름은 본(本)이고, 전당(钱唐) 사람으로, 대략 원나라 말 명나라 초에 살았다. 그가 지은 소설은 많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네 종류만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네 종류 또한 후 사람들에 의해 많이 고쳐져서,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왜냐하면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소설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경서와 같지 않아서, 함부로 고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나관중의 생애에 대한 사적은, 우리 또한 알 길이 없다. 어떤 이는 그가 수호를 지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 삼대가 벙어리였다고 하는데, 그것 또한 하나의 유언비어이다. 나관중의 네 종류의 소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연의》, 둘째, 《수호전(水浒传)》, 셋째, 《수당지전(隋唐志传)》, 넷째, 《북송삼수평요전(北宋三遂平妖传)》. 《북송삼수평요전》은, 패주(贝州)의 왕칙(王则)이 요술을 빌려 난을 일으킨 일을 기록한 것으로, 그를 평정한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에 모두 ‘수(遂)’자가 있어서, “삼수평요”라고 불린다. 《수당지전》은, 수나라가 선위한 때부터, 당나라 명황까지의 일을 서술한 것이다.—이 두 종류의 책의 구성과 문장은 그다지 좋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성행하지 않았다. 가장 성행하고, 또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은, 《삼국연의》와 《수호전》이다.
첫째, 《삼국연의》는 삼국 시대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관중으로부터 시작된 것만은 아니다. 송나라 때 거리의 사람들이 옛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 “삼국 이야기(说三分)”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삼국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소동파(苏东坡)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팽(王彭)이 일찍이 말하길, ‘길거리의 어린아이들이, … 앉아서 옛이야기를 듣는데, 삼국 이야기를 들을 때, 유현덕(刘玄德)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주 눈살을 찌푸리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고, 조조(曹操)가 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기뻐하며 노래를 부른다.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은택이, 백세토록 끊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나관중 이전에도, 《삼국연의》와 같은 종류의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 시대의 일은, 오대(五代)처럼 어지럽지도 않고, 초한(楚汉)처럼 단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딱 적당히 복잡하고, 소설을 짓기에 적합하다. 게다가 삼국 시대의 영웅들은, 지략과 무용이, 매우 감동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가져다가 소설의 재료로 삼기를 좋아한다. 또한 배송지(裴松之)가 《삼국지(三国志)》에 주석을 단 것이, 매우 자세해서,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삼국 시대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창작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계승한 것인지는, 현재 함부로 단정할 수 없지만, 명나라 가정(嘉靖) 때의 판본에 “진(晋) 평양후(平阳侯) 진수(陈寿)의 사전을, 명나라 나본(罗本)이 편찬하다(晋平阳侯陈寿史传,明罗本编次)”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직접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삼국연의》는 이미 후 사람들에 의해 많이 고쳐져서,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그 책의 장단점을 논하자면, 논하는 사람들은 그 결점이 세 가지 있다고 여긴다. (첫째)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왜냐하면 중간에 서술된 일들은, 칠할은 사실이고, 삼할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유독 사실이 많고 허구가 적기 때문에, 사람들은 혹 허구를 진실로 믿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왕어양(王渔洋)은 유명한 시인이자 학자인데, 그에게는 “낙봉파에서 방사원을 조문하다(落凤坡吊庞士元)”라는 시제가 있는데, 이 “낙봉파(落凤坡)”는 《삼국연의》에만 있고, 다른 근거가 없는데, 왕어양은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했다. (둘째) 묘사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착한 사람을 쓸 때는, 정말 조금의 나쁜 점도 없고, 반면에 나쁜 사람을 쓸 때는, 또한 조금의 좋은 점도 없다. 사실 이는 사실과 다른데, 왜냐하면 사람은 모든 면에서 다 좋을 수도 없고, 모든 면에서 다 나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조조는 정치적으로도 좋은 점이 있고, 유비, 관우 등도, 전혀 비판할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가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주관적인 면으로 써 내려가서, 종종 이치에 벗어난 사람이 된다. (셋째) 문장과 주제가 일치하지 않는다—이는 작가가 표현하는 것과 작가가 상상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그는 조조의 간사함을 쓰려고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호방하고 지략이 많은 것처럼 보이고, 공명의 지혜를 쓰려고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교활하게 보인다.—그러나 결국 좋은 점이 있는데, 관운장이 화웅을 베는 장면을 쓴 것처럼, 정말 생생하고 박진감 넘친다.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주는 장면은, 의롭고 용감한 기개가 손에 잡힐 듯하고, 마치 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이후에 역사 소설을 짓는 사람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개벽연의(开辟演义)》, 《동서한연의(东西汉演义)》, 《동서진연의(东西晋演义)》, 《전후당연의(前后唐演义)》, 《남북송연의(南北宋演义)》, 《청사연의(清史演义)》… 모두 《삼국연의》를 따라잡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보기를 좋아하고, 앞으로도 여전히 상당한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둘째, 《수호전》. 《수호전》은 송강 등의 일을 서술한 것으로, 나관중으로부터 시작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송강은 실제로 있던 사람이고, 도적이 된 것 또한 사실이며,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남송 이후로 사회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송나라와 원나라 사이에 고여(高如), 이숭(李嵩) 등이, 즉 수호 이야기를 가지고 소설을 지었고, 송나라의 유민 공성여(龚圣与)는 또한 《송강삼십육인찬(宋江三十六人赞)》을 지었다. 또한 《선화유사》에도 “송강이 방랍을 사로잡은 공이 있어, 절도사에 봉해졌다” 등의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이야기가 이미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거나, 일찍이 여러 가지 간략한 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후에 나관중이 여러 설이나 작은 책의 《수호》 이야기를 모아서 취사선택하여, 대부의 《수호전》을 만들었다. 하지만 원래의 《수호전》은, 현재 구할 수 없고, 통용되는 《수호전》은 두 종류가 있다.
한 종류는 70회로 된 것이고, 한 종류는 70회가 넘는 것이다. 70회가 넘는 한 종류는 먼저 홍태위(洪太尉)가 요마(妖魔)를 잘못 풀어주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108명이 점차 양산박에 모여, 도둑질을 하다가, 나중에 조정의 초안을 받아, 요나라를 깨뜨리고, 전호(田虎), 왕경(王庆)을 평정하고, 방랍(方腊)을 사로잡아, 큰 공을 세운다. 마지막에 조정이 의심하여, 송강이 독약을 먹고 죽고, 결국 신명이 된다. 그중 초안에 대한 이야기는, 송나라 말에서 원나라 초의 사상인데, 왜냐하면 당시 사회가 혼란하고, 관병이 평민을 억압하여, 백성 중 온화한 자는 이를 참고, 온화하지 않은 자는 분리되어 도적이 되었다. 도적은 한편으로는 관병과 맞서 싸우고, 관병이 이기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을 약탈하여, 민간은 자연히 때때로 그 소란을 받았다. 하지만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관병 또한 저항하지 못할 때, 인민은 외족을 증오하기 때문에, 관병보다 더 나은 도적을 사용하여 그에 저항하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도적은 당시 칭송을 받았다. 송강이 독약을 먹는 이야기는, 명나라 초에 추가된 것으로, 명태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공신을 의심하고, 함부로 죽여, 좋은 결말을 맺은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은 피해를 입은 공신에 대해 동정을 표하기 위해, 송강이 독약을 먹고 신이 되는 일을 추가한 것이다.—이는 또한 사실상의 결점인데, 소설이 그들을 화해시키는 오랜 관례이다.
《수호전》은 많은 사람들이 시내암(施耐庵)이 지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70회가 넘는 《수호전》에는 번본(繁本)과 간본(简本) 두 종류가 있는데, 그중 한 종류의 번본의 작자는, 시내암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내암은 아마 나중에 번본으로 만든 사람이 가탁한 이름일 것이고, 사실은 나관중 이후에 태어났다. 후 사람들이 번본에 시내암이 지었다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간본은 오히려 요약본이라고 여겨, 시내암을 더 오래된 사람으로 여겨, 나관중 이전에 배치해 버렸다. 청나라 초에, 김성탄(金圣叹)은 또한 《수호전》이 “초안”까지는 좋고, 이후에는 매우 나쁘다고 말했다.
한 종류는 70회로 된 것이고, 한 종류는 70회가 넘는 것이다. 70회가 넘는 한 종류는 먼저 홍태위(洪太尉)가 요마(妖魔)를 잘못 풀어주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108명이 점차 양산박에 모여, 도둑질을 하다가, 나중에 조정의 초안을 받아, 요나라를 깨뜨리고, 전호(田虎), 왕경(王庆)을 평정하고, 방랍(方腊)을 사로잡아, 큰 공을 세운다. 마지막에 조정이 의심하여, 송강이 독약을 먹고 죽고, 결국 신명이 된다. 그중 초안에 대한 이야기는, 송나라 말에서 원나라 초의 사상인데, 왜냐하면 당시 사회가 혼란하고, 관병이 평민을 억압하여, 백성 중 온화한 자는 이를 참고, 온화하지 않은 자는 분리되어 도적이 되었다. 도적은 한편으로는 관병과 맞서 싸우고, 관병이 이기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을 약탈하여, 민간은 자연히 때때로 그 소란을 받았다. 하지만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관병 또한 저항하지 못할 때, 인민은 외족을 증오하기 때문에, 관병보다 더 나은 도적을 사용하여 그에 저항하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도적은 당시 칭송을 받았다. 송강이 독약을 먹는 이야기는, 명나라 초에 추가된 것으로, 명태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공신을 의심하고, 함부로 죽여, 좋은 결말을 맺은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은 피해를 입은 공신에 대해 동정을 표하기 위해, 송강이 독약을 먹고 신이 되는 일을 추가한 것이다.—이는 또한 사실상의 결점인데, 소설이 그들을 화해시키는 오랜 관례이다.
《수호전》은 많은 사람들이 시내암(施耐庵)이 지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70회가 넘는 《수호전》에는 번본(繁本)과 간본(简本) 두 종류가 있는데, 그중 한 종류의 번본의 작자는, 시내암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내암은 아마 나중에 번본으로 만든 사람이 가탁한 이름일 것이고, 사실은 나관중 이후에 태어났다. 후 사람들이 번본에 시내암이 지었다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간본은 오히려 요약본이라고 여겨, 시내암을 더 오래된 사람으로 여겨, 나관중 이전에 배치해 버렸다. 청나라 초에, 김성탄(金圣叹)은 또한 《수호전》이 “초안”까지는 좋고, 이후에는 매우 나쁘다고 말했다.
〔1〕 “낙봉파에서 방사원을 조문하다” 시는 왕사정(王士禛)의 문집인 《어양산인정화록(渔洋山人精华录)》 권10에서 볼 수 있다.
제5강 명나라 소설의 두 가지 큰 흐름
지난 시간에는 송나라 소설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원나라는 어떠했을까요? 원나라는 사극(詞曲, 가사와 곡조)이 매우 발달했지만, 소설 분야에서는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명나라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명나라 중엽, 즉 가정(嘉靖) 연간을 전후로 하여 소설이 많이 등장했는데, 그중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과 마귀의 싸움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인정(人情)을 그린 것입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나누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신과 마귀의 싸움을 그린 것
이러한 사조가 일어난 것은 당시의 종교와 방사(方士, 도교의 술법을 행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송나라 선화(宣和) 연간에는 도교를 매우 숭상했습니다. 원나라는 불교와 도교를 함께 숭상했고, 방사의 세력도 적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원래 쇠퇴하는 추세였지만, 성화(成化) 연간에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방사 이자(李孜)와 승려 계효(繼曉)가 있었고, 정덕(正德) 연간에는 색목인(色目人, 몽골족 이외의 서역 출신 사람들) 우영(于永)이 있었는데, 모두 방술과 기예 등의 잡다한 기술로 벼슬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요망한 이야기들이 날로 성행했고, 그 영향이 문학에까지 미쳤습니다.
게다가 예로부터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종교 간의 다툼은 해결되지 않았고, 대개는 서로 조화하고 용납하며, 결국에는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同源)”고 한 후에야 끝이 났습니다. 새로운 종파가 들어오면 비록 서로를 이단으로 여기며 다툼을 벌이기도 했지만, 일단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고 인정하면 차별하는 뜻이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또 다른 새로운 종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만 그 세 종교가 다시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칭하며, 이 ‘같은 근원’에서 나오지 않은 이단을 공격했습니다. 당시의 사상은 매우 모호했습니다. 소설에서 묘사된 사악함과 올바름은 유교와 불교, 혹은 도교와 불교, 혹은 유교, 도교, 불교와 백련교(白蓮教)의 대립이 아닌, 그저 모호한 서로 간의 싸움일 뿐입니다. 저는 그것들을 통틀어 하나의 명칭으로 부르는데, 바로 ‘신마 소설(神魔小說)’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큰 흐름을 대표하는 소설로는 세 작품이 있습니다.
(1) 《서유기(西遊記)》 (2) 《봉신연의(封神演義)》 (3) 《삼보태감서양기(三寶太監西洋記)》
오늘은 먼저 《서유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서유기》
《서유기》는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원나라의 도사 구처기(丘處機)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처기 자신은 별도로 《서유기》 3권을 썼는데, 이는 기행문으로 지금도 《도장(道藏)》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책 이름이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청나라 초기에 《서유기》 소설을 간행한 사람이 우집(虞集)이 지은 《장춘진인서유기서(長春真人西遊記序)》를 책 머리에 붙이는 바람에, 사람들은 더욱 《서유기》를 구처기가 지은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서유기》를 지은 사람은 강소성 산양(山陽) 사람 오승은(吳承恩)입니다. 이는 명나라 때 편찬된 《회안부지(淮安府志)》에 기록되어 있지만, 청나라 때 다시 편찬된 지지(志)에서는 이 기록이 삭제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서유기》는 100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처음에는 손오공이 도를 이루는 과정을, 다음에는 당나라 승려가 경전을 구하러 가게 된 유래를, 마지막에는 81가지 고난을 겪고 마침내 동쪽 땅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 역시 오승은이 완전히 창작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던 《대당삼장법사취경시화(大唐三藏法師取經詩話)》에서 이미 원숭이 행자, 심하의 신 등 여러 신기한 경지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원나라의 잡극(雜劇)에도 당삼장이 서쪽으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것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또한 명나라 때에는 비교적 짧은 《서유기전(西遊記傳)》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현장(玄奘)의 서천 취경 이야기가 당나라 말부터 송나라와 원나라를 거치면서 점차 신이한 이야기로 발전했고, 간단한 소설로도 많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나라의 오승은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모아 대작 《서유기》를 완성한 것입니다.
오승은은 본래 해학에 뛰어났습니다. 그는 요괴의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을 인간의 감정에 가깝게 묘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매우 좋아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뛰어난 재능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쓸 곳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삼국연의(三國演義)》처럼 유비를 보면 기뻐하고 조조를 보면 미워하는 것과는 달리, 《서유기》에는 요괴들만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재미있게 볼 뿐입니다. 이른바 득실을 잊고 오로지 감상만 남게 하는 것, 이것 또한 그의 뛰어난 재능입니다.
이 책의 주제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은 학문을 권장하는 내용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선(禪)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도(道)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등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작가의 유희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다만 그가 삼교동원(三教同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석가, 노군, 관음, 진성, 원신 등 모든 것이 등장하여,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든 각자의 입맛에 맞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반드시 이 책의 큰 뜻을 물어야 한다면, 저는 명나라 사람 사조제(謝肇淛)가 말한 “《서유기》는… 원숭이를 마음의 신으로, 돼지를 뜻의 방일함으로 비유하였는데, 처음에는 제멋대로 날뛰며 하늘과 땅을 오르내려 아무도 막을 수 없었지만, 금고주(緊箍咒) 한 마디 주문에 마음의 원숭이를 길들여 죽을 때까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라는 말이 이미 충분히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후서유기(後西遊記)》와 《속서유기(續西遊記)》 등이 나왔지만, 모두 앞의 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동설(董說)의 《서유보(西遊補)》에 이르러서는 풍자 소설이 되어, 이러한 종류와는 큰 관계가 없어졌습니다.
(2) 《봉신연의(封神演義)》
《봉신연의》는 사회적으로도 매우 유행했는데, 누가 지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작자가 가난한 사람이라 이 책을 만들어 팔아 딸의 혼수 자금으로 썼다고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전설에 불과합니다.
이 책의 사상 역시 삼교동원(三教同源)의 모호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주왕(受辛)이 여와궁(女媧宮)에 향을 피우러 갔다가 신을 모독하는 시를 지어, 여와가 세 요괴를 보내 주(周)나라를 돕도록 하여 은(殷)나라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주로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신과 부처가 뒤섞여 나옵니다. 주나라를 돕는 쪽은 천교(闡教)이고, 은나라를 돕는 쪽은 절교(截教)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천(闡)”은 밝히다는 뜻이고, “천교”는 정교(正教) 즉 바른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절(截)”은 끊다는 뜻이니, “절교”는 아마 불교에서 말하는 단견 외도(斷見外道)일 것입니다. 어쨌든 삼교동원의 영향을 받아 삼교는 신으로, 다른 가르침은 마귀로 여긴 것입니다.
(3) 《삼보태감서양기(三寶太監西洋記)》
《삼보태감서양기》는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의 책으로, 현재는 보기 드뭅니다. 이 책은 영락(永樂) 연간에 환관 정화(鄭和)가 39개 외국을 복속시켜 조공하게 한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정화가 서양에 갈 때 벽봉 장로(碧峰長老)가 법술로 외국을 굴복시켜 공을 세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는 비록 나라와 나라의 싸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중국은 신에 가깝고 외국은 마귀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신마 소설의 범주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창작은 당시의 환경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정화는 명나라 시대에 명성이 드높아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받았습니다. 가정(嘉靖) 이후에는 동남쪽에서 왜구(倭寇)가 창궐하여 백성들이 현재의 나약함을 안타까워하며 과거의 번성했던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책을 쓴 것입니다. 하지만 장수를 생각하지 않고 환관을 생각하고,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법술을 의지한 것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사상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환관이 실제로 감군(監軍)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권력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법술로 외국을 정벌한다는 사상은 청나라까지 이어져, 이를 진실로 믿은 의화단(義和團)이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흐름, 즉 세상의 인정(人情)을 그린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 세상의 인정(人情)을 그린 소설
신마 소설이 성행할 때, 세상의 인정을 그린 소설 또한 함께 등장했습니다. 그 원인은 물론 당시의 사회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일부는 신마 소설과 마찬가지로 방사(方士)와도 큰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설들은 대개 풍류와 방탕한 일을 서술하며,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속에서 냉정한 세상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금병매(金瓶梅)》입니다. 이 책은 《수호전(水滸傳)》에 나오는 서문경(西門慶)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집안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서문경에게는 원래 아내와 세 첩이 있었는데, 후에 반금련(潘金蓮)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의 남편 무대(武大)를 독살하고 첩으로 들입니다. 또한 금련의 하녀 춘매(春梅)와도 간통하고, 이병아(李瓶兒)와도 사통하여 그녀 역시 첩으로 맞이합니다. 나중에 이병아와 서문경은 먼저 죽고, 반금련은 무송(武松)에게 살해당하며, 춘매 또한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로 병들어 죽습니다. 금나라 군대가 청하(清河)에 이르렀을 때, 서문경의 아내는 그의 유복자 효가(孝哥)를 데리고 제남(濟南)으로 가려다가 길에서 보정 화상(普淨和尚)을 만나 영복사(永福寺)로 가게 되고, 불법으로 효가를 감화시켜 결국 출가시켜 명오(明悟)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반금련, 이병아, 춘매가 모두 중요한 인물이기에 책 이름을 《금병매》라고 지은 것입니다.
명나라 사람들이 외설적인 행위를 그린 소설은, 인물에 특정한 대상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문자를 빌려 원한을 갚은 것입니다. 이 《금병매》에서 묘사된 서문경은 신사였는데, 아마 작가의 원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 없습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역시 현재까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왕세정(王世貞)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 왕유(王忬)가 엄숭(嚴嵩)에게 모함을 당했고, 엄숭의 아들 세번(世蕃)은 한때 세력이 막강하여 엄숭에게 불리한 상소는 모두 억압당해 임금에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왕세정은 세번이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이 책을 지어 그를 탐닉하게 만들어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게 하고, 그 틈을 타 엄숭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나라 초기의 번각본에는 《고효설(苦孝說)》이 책 머리에 붙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며, 믿을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금병매》의 문장은 상당히 잘 쓰여졌고, 왕세정은 당시에 문명(文名)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작가의 이름을 그에게 씌운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고, 게다가 《고효설》을 책 머리에 붙인 것 역시 사회적인 비난을 줄이기 위한 수단일 뿐, 왕세정이 지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제 《금병매》보다 더 심하게 방탕한 일을 그린 《옥교리(玉嬌梨)》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청나라 때 이미 실전되었고, 간혹 보이는 것도 원본이 아닙니다. 또한 산동성 제성(諸城) 사람 정요항(丁耀亢)이 지은 《속금병매(續金瓶梅)》라는 책이 있는데, 앞의 책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는 《금병매》의 인과응보 설을 다룬 것으로, 무대의 후세가 음탕한 남자가 되고, 반금련 또한 하간(河間)의 여인이 되어 결국 극형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서문경은 어리석고 멍청한 남자가 되어 아내와 첩의 외도를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이를 통해 윤회는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후 세정 소설(世情小說)은 명백하게 인과응보를 이야기하는 책으로 변모하여 권선징악의 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후세의 일을 이야기하는 소설은,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면 삼세 사세까지 영원히 끝낼 수 없을 정도로, 정말 기이하고 재미있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는 고대 인도에서 이미 있었던 일로, 《앙굴마라경(鴦堀摩羅經)》이 그 한 예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세정 소설은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과응보를 크게 강조하는 변화를 겪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반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평산냉연(平山冷燕)》, 《호구전(好逑傳)》, 《옥교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책 이름은 여전히 《금병매》의 형식을 많이 따라, 종종 책 속 인물의 이름을 따서 책 제목을 짓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음탕한 남편과 아내가 아닌, 재자와 가인(才子佳人)의 이야기로 변했습니다. 이른바 재자란 대개 시를 좀 지을 줄 아는 사람을 말하며, 재자와 가인의 만남은 종종 시를 짓는 것을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부모의 명령과 중매쟁이의 말(父母之命,媒妁之言)”에 따른 혼인과는 매우 상반되는 것으로, 옛 습관에 대해 어느 정도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는 항상 임금의 명령으로 혼인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작가가 더 큰 명분을 찾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의 문장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매우 유명합니다. 한 가지 이유는 《옥교리》와 《평산냉연》은 프랑스어 번역본이 있고, 《호구전》은 독일어와 프랑스어 번역본이 있기 때문에 중국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어서 중국 문학사를 쓸 때 대략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일부일처제 국가에서는 한 명 이상의 가인이 한 명의 재자를 동시에 사랑하면 매우 큰 분쟁이 발생하지만, 이러한 소설에서는 아무런 문제 없이 단번에 모두 결혼하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는 정말 새롭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제6강 청나라 소설의 네 가지 유파와 그 말류
청나라 시대의 소설 종류와 그 변화는 명나라에 비해 비교적 많지만, 시간 관계상 지금은 네 가지 유파로 나누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 네 가지 유파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의고파(擬古派)
- 풍자파(諷刺派)
- 인정파(人情派)
- 협의파(俠義派)
오늘은 먼저 의고파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의고파
의고란 육조 시대의 지괴(志怪,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문학 양식)나 당나라 시대의 전기(傳奇, 기이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를 모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나라 사람들의 단편 소설은 명나라 시대에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고, 간혹 모방한 작품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새롭고 특이하게 여겼습니다. 원나라 말 명나라 초에 전당(錢塘) 사람 구우(瞿佑)가 당나라 전기 소설을 모방하여 《전등신화(剪燈新話)》를 지었는데, 문장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화려한 언어로 남녀 간의 애정을 묘사했기 때문에 특히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 모방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린 후에야 이러한 풍조가 점차 쇠퇴했습니다. 하지만 가정(嘉靖) 연간에 이르러 당나라 전기 소설이 다시 유행하면서, 그 이후로 모방하는 사람들이 다시 여기저기서 나타났습니다. 문인들은 대개 몇 편의 전기체 문장을 짓는 것을 좋아했고, 소설만을 전문적으로 지어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재지이(聊齋志異)》입니다.
《요재지이》는 산동성 치천(淄川) 사람 포송령(蒲松齡)이 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책을 쓰기 전에 매일 문 앞에 차와 담배를 준비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여 저작의 재료로 삼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고, 많은 부분이 고서, 특히 당나라 전기 소설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봉양사인(鳳陽士人)》, 《속황량(續黃粱)》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그를 의고파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책에서 서술된 내용은 대부분 신선, 여우 귀신, 요괴 등의 이야기로, 당시 출간된 동류의 책들과 비슷하지만,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습니다.
(1) 묘사가 상세하고 자상하며, 필치가 변화무쌍하고 능숙하다. (2) 요괴를 묘사할 때 인간적인 감정을 부여하고 세상 물정에 밝게 하여,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끼고 그다지 무섭게 느끼지 않도록 한다.
다만 고전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요재지이》가 나온 후 약 100년 동안 매우 유행했고, 이 기간 동안 이를 모방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지만 건륭(乾隆) 말년에 이르러 직례 헌현(直隸獻縣) 사람 기윤(紀昀)이 나타나 그에 반대했습니다. 기윤은 《요재지이》의 단점으로 다음 두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1) 체례가 너무 잡다하다. 즉, 한 사람의 작품에 두 시대의 문체 형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재지이》에는 긴 글은 당나라 전기 소설을 모방한 것이 있는 반면, 짧은 글은 육조 시대의 지괴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묘사가 너무 상세하다. 즉, 그의 작품은 다른 사람의 행적을 서술한 것인데,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하여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 많고, 그중에는 본인이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내용도 있는데 작자가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기윤은 이러한 두 가지 단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지은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를 완전히 육조의 방식을 모방하여 간결하고 고풍스럽게 서술하며, 당나라 방식은 철저히 피했습니다. 그의 자료는 대부분 직접 만들어낸 것이며, 주로 여우 귀신의 이야기를 빌려 사회를 공격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는 스스로 여우 귀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일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는 신의 가르침을 빌려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존경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가 건륭 시대, 즉 법령이 가장 엄격했던 시대에 살면서도 감히 글을 빌려 사회의 불합리한 예법과 황당한 습속을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정말 대단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류에 이르러서는 그의 사회를 공격하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신의 가르침을 빌려 가르치려 했던 그의 의도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이 유파의 소설은 거의 권선징악의 책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책이 나온 이후, 의고파의 작품은 모두 이들을 모방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상하이에는 소위 문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이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대부분 찌꺼기만 배우고 있기 때문에 의고파는 이미 그 추종자들의 발밑에서 짓밟혀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유파인 풍자파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 풍자파 소설
소설 속에 풍자를 담는 것은 진(晉)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도 있었지만, 명나라의 인정 소설에서 특히 많았습니다. 청나라에는 풍자 소설이 오히려 적은 편인데, 유명하고 거의 유일한 작품은 《유림외사(儒林外史)》입니다. 《유림외사》는 안휘성 전초(安徽全椒) 사람 오경재(吳敬梓)가 지었습니다. 오경재는 보고 들은 것이 많고 표현에도 능숙했기 때문에, 그가 서술한 모든 내용은 마치 종이 위에서 소리와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특히 유학자들의 기이한 모습과 행태를 유독 많이, 그리고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당시 명나라가 멸망한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 말기의 유풍이 여전히 사대부들 사이에 남아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팔고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오경재는 사대부로서 그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추한 모습을 더욱 자세하게 폭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책은 단편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있고, 뚜렷한 줄거리는 없지만, 변화가 많고 재미가 풍부하여 중국 역사상 그보다 더 뛰어난 풍자 소설 작가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외교가 실패하고, 사회 사람들은 나라의 기세가 약해졌음을 느끼며 그 이유를 매우 알고 싶어 했습니다. 소설가들 또한 원인이 무엇인지 찾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보가(李寶嘉)는 남정정장(南亭亭長)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관료 사회의 폐단을 그린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를 지었습니다. 이 책은 청나라 말기에 매우 유행했지만, 문장은 《유림외사》에 비해 훨씬 못 미쳤습니다. 또한 작가가 관료 사회의 실정을 그다지 투철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 후 광동성 남해(廣東南海) 사람 오옥요(吳沃堯)는 아불산인(我佛山人)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사회의 낡은 도덕이 사라지는 것을 원인으로 지적하며 《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을 지었습니다. 이 책 또한 매우 유행했지만, 그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할 때 종종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고, 은밀한 부분까지 파고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격정적인 어조를 사용했는데, 이는 남정정장과 같은 단점입니다. 이 두 종류의 책은 모두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뚜렷한 줄거리나 주인공이 없다는 점에서 《유림외사》와 비슷하지만, 예술적인 수법은 훨씬 떨어집니다.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유림외사》는 풍자이지만, 나머지 두 작품은 거의 비난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풍자 소설은 그 뜻은 미묘하게 드러내면서도 표현은 부드럽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만약 말을 지나치게 하면 문학적인 가치를 잃게 됩니다. 그 말류의 작품들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자 소설은 《유림외사》 이후로는 거의 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유파인 인정파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3. 인정파
이 유파의 소설은 유명한 《홍루몽(紅樓夢)》을 대표로 들 수 있습니다. 《홍루몽》의 처음 이름은 《석두기(石頭記)》였으며, 총 80회로 구성되어 건륭(乾隆) 중년에 갑자기 베이징에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필사본이었고, 건륭 57년에 이르러서야 정위안(程偉元)의 목판본이 나왔는데, 여기에 40회를 더하여 총 120회가 되었고, 제목도 《홍루몽》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위안의 말에 따르면, 이는 옛 집안과 길거리에서 모아 전체를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의 원본은 현재 거의 볼 수 없고, 현재 석인본(石印本) 하나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과연 원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홍루몽》은 석두성(石頭城) 안, 즉 지금의 난징(南京)이 아닐 수도 있는 곳의 가씨 집안의 일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영국부(榮國府)의 가정(賈政)이 낳은 아들 보옥(寶玉)은 매우 총명하지만 이성을 매우 좋아하는 것입니다. 가씨 집안에는 좋은 여자들이 많았는데, 하인 외에도 친척들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대옥(黛玉)과 보채(寶釵) 등은 와서 기거했고, 사상운(史湘雲) 또한 자주 왔습니다. 보옥은 대옥을 가장 깊이 사랑했지만, 후에 가정은 보옥에게 아내를 맞이하게 했는데, 뜻밖에 보채를 맞이하게 됩니다. 대옥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보옥 또한 우울해하며 슬퍼하다 병이 납니다. 그 후 영국부의 가사(賈赦)가 파면되고 가산을 몰수당하는 일이 발생하여 영국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가세는 기울어집니다. 보옥은 결국 미쳐 버렸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과거에 급제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후에 가정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러 비릉(毗陵)을 지나가다가 맨발로 머리를 깎은 채 자신에게 절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보옥이었습니다. 막 말을 건네려는데 갑자기 승려 한 명과 도사 한 명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가 버립니다. 쫓아가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고, 하얗게 펼쳐진 황야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홍루몽》의 작가는 책에 쓰여 있듯이 모두가 조설근(曹雪芹)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설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후스(胡適) 선생의 고증을 통해 우리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근의 이름은 귀(𬘯)이고, 자는 근포(芹圃)이며, 한군기인(漢軍旗人)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이름은 인(寅)으로, 강희(康熙) 연간에 강녕직조(江寧織造)를 지냈습니다. 청나라 세조가 남쪽을 순행할 때 직조국을 행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또한 강녕직조를 지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어렸을 때 정말 대단한 명문가의 도련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난징에서 태어났고,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습니다. 그 후 중간에 무슨 변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설근은 중년에 베이징 서쪽 교외의 가난한 집에서 살게 되었고, 때로는 배불리 먹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앞에서 이야기했던 《홍루몽》과 조설근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지냈고, 《홍루몽》의 창작도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후에 아들을 일찍 여의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나이는 40여 세였습니다. 《홍루몽》 또한 완성하지 못하고 80회까지만 남았습니다. 후에 정위안이 간행한 책은 120회까지 늘어났는데, 여러 곳에서 모았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의 친구인 고악(高鶚)이 이어 쓴 것으로, 원본이 아닙니다.
책에서 서술된 내용에 대한 추측도 매우 많습니다. 그중 비교적 중요한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나란성덕(納蘭性德)의 집안일을 기록한 것이라는 설입니다. 이른바 금채십이(金釵十二)는 성덕이 귀빈으로 모셨던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덕이 시인이었고,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그의 집안 또한 후에 가산을 몰수당했는데, 보옥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추측해 낸 것입니다. 하지만 가산을 몰수당한 일은 보옥은 생전에 겪은 일이고, 성덕은 사후에 일어난 일이며, 그 외에도 다른 차이점이 많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비슷하지 않습니다.
(2) 순치제(順治帝)와 동악비(董鄂妃)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라는 설입니다. 또한 악비를 진회(秦淮)의 기생이었던 동소완(董小宛)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청나라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소완을 베이징으로 잡아갔고, 이로 인해 청나라 세조의 총애를 받아 귀비(貴妃)로 봉해졌습니다. 후에 소완이 요절하자 청나라 세조는 매우 슬퍼하며 오대산(五台山)으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습니다. 《홍루몽》에서 보옥 또한 중이 되는 것은 분명히 이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악비는 만주족 사람이고, 동소완이 아니며, 청나라 군대가 강남을 점령했을 때 소완은 이미 28세였습니다.
이제 순치제와 동악비에 대한 설에 이어서, 《홍루몽》의 내용에 대한 다른 추측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순치제는 당시 14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완을 비로 삼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설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3) 강희제(康熙帝) 시대의 정치 상황을 서술한 것이라는 설입니다. 즉, 《석두기》는 정치 소설이며, 책의 내용은 명나라의 멸망을 애도하고 청나라의 실정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홍(紅)”은 “주(朱)”자를 의미하고, “석두(石頭)”는 “금릉(金陵)”을 가리키며, “가(賈)”는 거짓 조정, 즉 청나라를 비난하고, 금릉 십이 채(金陵十二釵)는 청나라에 항복한 명사들을 비웃는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 설은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해석에 가깝고, 게다가 현재 작가가 한군기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한족을 대신하여 망국의 아픔을 느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4)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라는 설입니다. 이 설은 가장 먼저 나왔지만, 믿는 사람은 가장 적었으나, 현재는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조설근 자신의 처지가 책에서 서술된 내용과 매우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설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강녕직조를 지냈고, 그의 집안의 호화로움은 실제로 가씨 집안과 거의 같았습니다. 조설근 또한 어릴 때는 훌륭한 도련님이었으니 보옥과 비슷했고, 그 후 갑자기 가난해진 것은 가산을 몰수당했거나 이와 유사한 사고 때문이라고 가정하면 이치에 맞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홍루몽》은 뒷부분 대부분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홍루몽》의 가치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 소설 중에서 정말 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감히 사실대로 묘사하고, 숨기거나 꾸미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소설들이 착한 사람은 완전히 착하게, 나쁜 사람은 완전히 나쁘게 묘사한 것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서술된 인물들은 모두 실제 인물과 같습니다. 요컨대 《홍루몽》이 나온 이후 전통적인 사상과 서술 방식은 모두 깨졌습니다. 그 문장의 아름다움과 애틋함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젊은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국 사람들이 소설을 감상하는 태도로 감상하지 못하고, 스스로 책 속으로 들어가 억지로 그중 한 역할을 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홍루몽》을 보면 보옥이나 대옥이 되려 하고, 나이 든 사람은 또 가정처럼 보옥을 단속하는 입장을 취하여 온통 이해타산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이제 《홍루몽》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홍루몽》 이후로 속작(續作, 후속 작품)이 매우 많이 나왔습니다. 《후홍루몽(後紅樓夢)》, 《속홍루몽(續紅樓夢)》, 《홍루후몽(紅樓後夢)》, 《홍루복몽(紅樓復夢)》, 《홍루보몽(紅樓補夢)》, 《홍루중몽(紅樓重夢)》, 《홍루환몽(紅樓幻夢)》, 《홍루원몽(紅樓圓夢)》 등이 있었는데, 대개는 원작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결말을 행복하게 맺으려는 내용이었습니다.
도광(道光) 연간에 이르러서야 《홍루몽》에 대한 이야기가 시들해졌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집안일을 서술하자니 미인(佳人)이 부족하고, 사건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홍루몽》의 필치를 사용하여 배우(優伶)와 기녀(妓女)의 일을 쓰게 되었고, 장면 또한 일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품화보감(品花寶鑒)》과 《청루몽(青樓夢)》이 있습니다. 《품화보감》은 건륭(乾隆) 이후 베이징의 배우들을 전문적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등장인물은 《홍루몽》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애틋한 감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묘사된 배우와 손님(狎客) 또한 미인과 재자와 거의 비슷합니다. 《청루몽》은 책 전체가 기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용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작가의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기녀만이 재자의 지기(知己)라고 생각했고, 여러 곡절을 거친 후에는 행복하게 결합한다는 내용으로, 여전히 명나라 말기의 미인재자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광서(光緒) 중년에 이르러 《해상화열전(海上花列傳)》이 등장했는데, 이 또한 기녀를 다루고 있지만, 《청루몽》처럼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기녀에게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고 보아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습니다. 광서 말년에 이르러 《구미귀(九尾龜)》와 같은 작품이 나오자, 묘사된 기녀는 모두 나쁜 사람이고, 손님 또한 건달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해상화열전》과는 또 달랐습니다. 이처럼 작가가 기녀를 그리는 방식은 세 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미화했고, 중간에는 사실에 가깝게 그렸으며, 마지막에는 지나치게 악하게 그렸고, 심지어 일부러 과장하고 비난했습니다. 몇몇 작품은 모함하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인정 소설의 말류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 네 번째 유파인 협의파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4. 협의파 소설
협의파 소설은 《삼협오의(三俠五義)》를 대표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의 기원은 원래 찻집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후에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이를 글로 옮기면서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소설은 《홍루몽》처럼 오로지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거나, 《서유기》처럼 요괴 이야기만 다루는 것이 많아 사람들이 다소 지겨워했는데, 《삼협오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어 매우 신선했기 때문에 특히 빠르게, 그리고 크게 유행했습니다.
판조음(潘祖蔭)이 베이징에서 오나라로 돌아올 때 이 책을 가지고 가서 유곡원(俞曲園)에게 보여주었는데, 유곡원은 매우 칭찬했지만 역사를 너무 벗어난다고 여겨 제1회를 수정해 주었습니다. 또한 책 속의 북협(北俠), 남협(南俠), 쌍협(雙俠)은 사실 이미 네 명이기 때문에 ‘삼(三)’이라는 숫자에 맞지 않아 애호(艾虎)와 심중원(沈仲元)을 더하여 아예 이름을 《칠협오의(七俠五義)》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개정본은 현재 강절(江浙) 지방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협오의》 또한 단번에 창작된 책은 아닙니다. 송나라 포증(包拯)은 조정에서 올곧은 모습을 보였고, 《송사(宋史)》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간 전설에서는 행적이 매우 기이하게 전해집니다. 원나라 때부터 이야기로 전해졌고, 명나라 때에는 점차 소설로 발전했는데, 그것이 바로 《용도공안(龍圖公案)》입니다. 후에 이 책의 구성이 더욱 치밀해지면서 대부(大部)의 《용도공안》이 되었고, 이것이 바로 《삼협오의》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사회에서 매우 환영했기 때문에 《소오의(小五義)》, 《속소오의(續小五義)》, 《영웅대팔의(英雄大八義)》, 《영웅소팔의(英雄小八義)》, 《칠검십삼협(七劍十三俠)》, 《칠검십팔의(七劍十八義)》 등이 연이어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소설은 대개 협의로운 사람들이 도적을 소탕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이야기를 서술하며, 중간에는 항상 명신(名臣)이나 고위 관리가 모든 것을 총괄합니다. 이보다 먼저 《시공안(施公案)》이 있었고, 같은 시대에는 《팽공안(彭公案)》과 같은 소설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서 서술된 협객은 대부분 호방한 성격으로, 《수호전》의 인물과 매우 흡사합니다. 따라서 그 사실은 《용도공안》에서 왔지만, 근원은 여전히 《수호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호전》의 인물은 정부에 반항하는 반면, 이러한 종류의 책에 나오는 인물은 정부를 돕는다는 점에서 작가의 사상이 크게 다릅니다. 이는 아마 사회 배경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책은 대개 광서 초년에 나왔는데, 그 이전에 국내에서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장모(長毛)를 평정하고, 염비(捻匪)를 평정하고, 교비(教匪)를 평정하는 등의 전쟁이 있었는데, 많은 시정의 사람들, 즉 천한 사람들이나 무뢰한 부류가 군대에 들어가 공을 세워 높은 관직을 얻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부러워하며 “왕을 위해 앞장서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찻집에서 생겨난 소설 또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현재 《칠협오의》는 24집까지, 《시공안》은 10집까지, 《팽공안》은 17집까지 나왔지만, 대개 천편일률적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지는 않지만, 작가와 독자 모두 이토록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계속 만들어내고 읽는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기적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네 가지 유파의 소설은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자잘한 유파의 작품들이 더 있지만, 모두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국(民國)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유파의 소설은 아직 역사가 짧고, 발전하고 창조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뚜렷한 대표작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또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오늘까지 두 주 동안 이야기한 《중국 소설의 역사적 변천》은 이로써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대략적인 내용만 급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빠뜨린 부분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제 지식이 부족하고, 말솜씨가 서툴며, 날씨 또한 이렇게 더운데도 많은 분들이 끝까지 제 강의를 들어주셔서 정말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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