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국조명신언행록

국조명신언행록 후집 권8

諺解 2025. 5. 19.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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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李德馨)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德馨
字明甫, 廣州人, 號漢陰。 嘉靖辛酉生。 萬曆庚辰登第。 選槐院, 被翰薦, 以親嫌不應講¹。 壬午, 拜弘文正字, 湖堂賜暇, 歷吏郞、直提學、大司諫、副提學、大司成。 辛卯, 超拜禮曹參判、兼大提學。 壬辰, 擢刑曹判書, 轉吏、兵判。 戊戌入相, 至領議政。 辛丑, 都體察使。 癸丑卒, 年五十三。

번역문:
이덕형(李德馨)
자는 명보(明甫)이고, 광주(廣州) 사람이며, 호는 한음(漢陰)이다.¹ 명(明)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 16)에 태어났다. 만력(萬曆) 경진년(1580, 선조 13)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괴원(槐院)²에 선발되고 한림(翰林)³의 추천을 받았으나, 친족간의 문제(親嫌)⁴ 때문에 강론(講論)⁵에 응하지 않았다. 임오년(1582, 선조 15)에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⁶에 제수되고 호당(湖堂)⁷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 정랑(吏曹 正郎), 직제학(直提學)⁸, 대사간(大司諫)⁹, 부제학(副提學)¹⁰, 대사성(大司成)¹¹을 역임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 24)에 예조 참판(禮曹 參判)¹² 겸 대제학(大提學)¹³에 파격적으로 제수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형조 판서(刑曹 判書)¹⁴에 발탁되었고,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거쳤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정승¹⁵의 반열에 들어 영의정(領議政)¹⁶에 이르렀다. 신축년(1601, 선조 34)에 도체찰사(都體察使)¹⁷가 되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향년 53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1.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민성(李民聖)이다.
  2.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의 별칭. 외교 문서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3. 한림(翰林): 예문관(藝文館)의 별칭. 임금의 명령인 교서(敎書)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이다.
  4. 친혐(親嫌):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이 같은 관청이나 감독 관계에 있는 관청에 함께 근무하는 것을 피하는 제도 또는 그 경우를 이른다. 당시 이덕형의 종형(從兄) 이산해(李山海)가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었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5. [주-D001] 講 : 저본(底本)에는 “구(搆)”로 되어 있으나, 장서각본(藏書閣本), 《한음문고(漢陰文稿)》 시상(諡狀), 《우복집(愚伏集)》 한음이공행장(漢陰李公行狀)에 근거하여 “강(講)”으로 수정하였다. 문맥상 강론(講論)이나 강독(講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講'이 적절하다.
  6.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 홍문관의 정9품 관직. 홍문관은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및 문한(文翰)의 처리,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담당했다.
  7.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또는 그 기관.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도 한다.
  8. 직제학(直提學):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정3품 관직.
  9.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10.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 관직. 대제학 다음가는 직위이다.
  11.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교육 행정을 총괄했다.
  12. 예조 참판(禮曹 參判): 예조의 버금 벼슬. 종2품. 예조는 문교(文敎), 제례(祭禮), 외교 등을 담당했다.
  13. 대제학(大提學): 홍문관과 예문관의 으뜸 벼슬. 정2품. 학문과 문장을 관장하는 최고의 영예직으로 여겨졌다.
  14. 형조 판서(刑曹 判書): 형조의 으뜸 벼슬. 정2품. 형조는 법률, 형벌, 노비 등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15. 입상(入相): 정승(政丞)이 됨.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정승이라 하며, 국가 최고위직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16.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조선시대 최고 관직이다.
  17. 도체찰사(都體察使): 조선시대 비변시(非邊時)나 국난 시에 군무(軍務)를 총괄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하던 정1품의 군직(軍職).

원문:
生有異質, 沈毅醇謹, 不好弄。 八歲, 讀《小學》, 請問元亨利貞之義, 議政公【父諱民聖。】大奇之。 十一歲, 吐辭驚人, 十二而大成, 長篇大作, 信筆滔滔。 十四, 楊蓬萊士彦相携遊水石間, 占一律, 公和曰: “野闊暮光薄, 水明山影多。” 楊歎曰: “君我師也。”

번역문: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침착하고 굳세며(沈毅) 순박하고 신중하여(醇謹)¹⁸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덟 살에 《소학(小學)》¹⁹을 읽다가 원형이정(元亨利貞)²⁰의 뜻을 물으니, 의정공(議政公)【아버지 휘(諱)²¹는 민성(民聖)이다.】께서 매우 기특하게 여기셨다. 열한 살에는 말을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열두 살에 크게 이루었으며(大成), 장편(長篇)의 큰 작품들을 붓 가는 대로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열네 살 때 양봉래(楊蓬萊) 사언(士彦)²²이 서로 데리고 물과 돌 사이를 노닐다가 율시(律詩) 한 수를 읊자, 공(公)이 화답(和答)²³하여 이르기를, “들 넓으니 저문 빛 엷어지고, 물 맑으니 산 그림자 많아라(野闊暮光薄, 水明山影多).” 하였다. 양사언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스승이다.” 하였다.

주석:
18. 침의순근(沈毅醇謹): 성품이 침착하고 의지가 굳으며, 순박하고 신중함을 의미한다.
19. 《소학(小學)》: 중국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유관(劉瓘) 등과 함께 편찬한 아동용 유교 윤리 교과서. 조선시대에 매우 중시되었다.
20. 원형이정(元亨利貞):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네 가지 덕(四德)을 나타내는 말. 일반적으로 만물의 근원(元), 형통함(亨), 이로움(利), 곧고 바름(貞)을 의미한다. 어린 나이에 이러한 심오한 철학적 개념에 대해 질문한 것은 그의 비범함을 보여준다.
21. 휘(諱): 돌아가신 분의 생전의 이름.
22. 양봉래(楊蓬萊) 사언(士彦): 양사언(楊士彦, 1517~158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봉래(蓬萊). 시문(詩文)과 서예(書藝)에 뛰어났다.
23. 화답(和答): 남의 시에 운(韻)이나 뜻을 맞추어 시를 지어 응답하는 것.


원문:
宣廟將講《訓義》、《綱目》, 命選才臣, 特賜內藏御帙, 使之溫習, 備顧問, 一時榮之。 凡五人, 公與焉。

번역문:
선조(宣廟)²⁴께서 장차 《훈의(訓義)》²⁵와 《강목(綱目)》²⁶을 강론하려 하시어, 재능 있는 신하를 선발하도록 명하고 특별히 내장(內藏)²⁷의 어질(御帙)²⁸을 하사하여 온습(溫習)²⁹하게 함으로써 고문(顧問)³⁰에 대비하게 하시니, 당대에 영광으로 여겼다. 모두 다섯 사람이었는데, 공도 거기에 참여하였다.

주석:
24. 선묘(宣廟):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를 가리킨다.
25. 《훈의(訓義)》: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유교 경전의 훈고(訓詁)와 의리(義理)에 관한 책일 것으로 추정된다.
26. 《강목(綱目)》: 일반적으로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 역사서의 편찬 체재 중 하나로, 중요한 사실을 강(綱)으로, 부수적인 사실을 목(目)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27. 내장(內藏): 궁궐 안에 있는 창고. 왕실의 재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28. 어질(御帙): 임금이 보는 책(御)을 넣어두는 책갑(帙). 임금의 서책을 의미한다.
29. 온습(溫習): 배운 것을 다시 익히고 복습함.
30. 고문(顧問):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것.


원문:
壬午, 詔使王公敬民游觀漢江, 公以製述官隨。 王公聞其名, 願與相見, 公以禮無私覿辭。 王公不敢强, 遺一絶以結神交, 有通衢千里見神駒之句。

번역문:
임오년(1582, 선조 15)에 조사(詔使)³¹ 왕공(王公) 경민(敬民)³²이 한강(漢江)을 유람할 때, 공이 제술관(製述官)³³으로 수행하였다. 왕공이 그의 명성을 듣고 서로 만나보기를 원하였으나, 공은 예법상 사사로이 만날 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왕공이 감히 강요하지 못하고 절구(絕句) 한 수를 보내 정신적인 교류(神交)³⁴를 맺었는데, 그 시에 “넓은 길 천 리 너머 신령한 망아지를 보았네(通衢千里見神駒)”라는 구절이 있었다.

주석:
31. 조사(詔使): 중국 황제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온 사신.
32. 왕경민(王敬民): 명나라 사신. 이름은 경민(敬民)이며, 왕공(王公)은 그를 높여 부르는 칭호이다.
33. 제술관(製述官): 시문(詩文)을 짓는 일을 맡은 관리. 사신 접대 시 연회 등에서 시를 짓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했다.
34. 신교(神交): 마음으로 사귐. 직접 만나지 않고도 정신적으로 깊이 통하는 교제를 의미한다.


원문:
公與李公恒福同以玉堂參下, 得賜暇爲第一淸望, 時論翕然, 稱爲得人。 時栗谷李公典文衡, 實主是選。 有一宰夜訪李公, 屛人曰: “兩李果人望。 然未知意向, 不可輕易引進, 或壞時事。” 李公曰: “薦人貴於得才, 何論意向?” 其人爭之, 至夜分, 不得而去。

번역문:
공이 이공(李公) 항복(恒福)³⁵과 함께 옥당(玉堂)³⁶ 참하(參下)³⁷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되어 제일의 청망(淸望)³⁸이 되니, 당시의 여론(時論)이 일치하여 인재를 얻었다고 칭송하였다. 이때 율곡(栗谷) 이공(李公)³⁹이 문형(文衡)⁴⁰을 관장하며 실로 이 선발을 주관하였다. 어떤 재상(宰相)이 밤에 이공(율곡)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두 이씨(이덕형, 이항복)는 과연 인망(人望)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향(意向)⁴¹을 알 수 없으니, 경솔하게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혹시 시사(時事)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하니, 이공(율곡)이 말하기를,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재능 있는 인재를 얻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어찌 의향을 따지겠습니까?” 하였다. 그 사람이 논쟁하였으나, 밤이 깊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석:
35. 이공(李公) 항복(恒福): 이항복(李恒福, 1556

161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 이덕형과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36.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37. 참하(參下): 홍문관의 정3품 부제학(副提學) 이하 관원을 통칭하는 말.
38. 청망(淸望): 청렴하고 명망이 높음. 또는 그러한 사람. 당시 젊은 엘리트 관료로서 큰 기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39. 율곡(栗谷) 이공(李公): 이이(李珥, 1536

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호는 율곡(栗谷).
40.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맡았다. 여기서는 이이가 인재 등용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41. 의향(意向): 마음이 향하는 바. 정치적인 성향이나 입장을 의미한다. 이 재상은 이덕형과 이항복의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아 등용을 반대한 것이다.


원문:
上幸瑞葱臺, 公應製居首。 自是聲名藉甚, 無敢爭鋒。 一日, 命文臣試大庭, 同列爭道者問於政院曰: “明日李某又占高第耶?” 公聞之, 稱疾不就試, 識者器之。

번역문:
상(上)께서 서총대(瑞葱臺)⁴²에 행차하셨을 때, 공이 응제(應製)⁴³하여 수석을 차지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이 자자하여 감히 겨룰 자가 없었다. 하루는 문신들에게 대궐 뜰에서 시험을 치르도록 명하였는데, 동료 중에 길을 다투던 자⁴⁴가 정원(政院)⁴⁵에 묻기를, “내일 이모(李某, 이덕형)가 또 높은 등수를 차지하겠지요?” 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 병을 핑계로 시험에 나아가지 않으니, 식견 있는 자들이 그를 그릇으로 여겼다(器之)⁴⁶.

주석:
42. 서총대(瑞葱臺):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임금이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던 장소로 보인다.
43. 응제(應製): 임금이 낸 제목에 따라 시나 글을 짓는 것.
44. 동렬쟁도자(同列爭道者): 동료 중에 길에서 앞서 가려고 다투던 사람. 이덕형의 뛰어남을 시기하거나 경쟁심을 느끼던 동료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45.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비서 기관이다.
46. 기지(器之): 그를 큰 인물이 될 그릇으로 여김. 그의 겸손함과 남을 배려하는 인품을 높이 평가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日本使玄蘇、平義智來聘。 上以機關甚重, 且玄蘇有文才, 命極擇宣慰使。 銓曹以公應旨, 上特遷公吏曹正郞以遣之。 玄蘇輩望其儀表, 灑然起敬。 及入京, 請報聘甚力。 公於宴席從容語曰: “兩國修好, 本以信義爲重。 頃者我國賊沙火同逃入日本, 誘率賊倭, 寇掠邊民, 而你國不之禁, 信義安在? 未可遽議報聘也。” 玄蘇等急遣卒倭, 不踰月, 以沙火同及被擄男女百餘人來獻。 上嘉之, 超拜直提學, 賜銀帶, 陞同副承旨。

번역문:
일본 사신 겐소(玄蘇)⁴⁷와 다이라 요시토모(平義智)⁴⁸가 예방(來聘)하였다. 상께서 그 기관(機關)⁴⁹이 매우 중요하고 또한 겐소가 문재(文才)가 있다 하여 선위사(宣慰使)⁵⁰를 신중히 선택하도록 명하였다. 전조(銓曹)⁵¹가 공으로 그 명에 응하니, 상께서 특별히 공을 이조 정랑(吏曹 正郎)으로 승진시켜 파견하였다. 겐소 무리가 그의 용모와 거동(儀表)을 보고 깨끗한 마음으로 공경심을 일으켰다(灑然起敬). 서울에 들어와서는 답방(報聘)⁵²을 매우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공이 연회석상에서 조용히 말하기를, “두 나라가 우호를 닦는 것은 본래 신의(信義)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우리나라의 도적 사화동(沙火同)⁵³이 일본으로 도망쳐 들어가 왜적(倭賊)들을 꾀어 이끌고 변방 백성을 노략질하였는데, 귀국에서 이를 금지하지 않으니 신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갑자기 답방을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겐소 등이 급히 병사와 왜인을 보내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사화동과 잡혀갔던 남녀 백여 명을 잡아 바쳤다. 상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직제학(直提學)에 파격적으로 제수하고 은대(銀帶)⁵⁴를 하사하였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⁵⁵로 승진시켰다.

주석:
47. 겐소(玄蘇): 일본 승려이자 외교관. 임진왜란 전후 조선과의 교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48. 다이라 요시토모(平義智): 쓰시마(對馬島)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가리킨다. 당시 성씨를 다이라(平)로 칭하기도 했다.
49. 기관(機關): 기밀에 속하는 중요한 일이나 관계. 여기서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의미한다.
50. 선위사(宣慰使): 외국 사신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51. 전조(銓曹): 이조(吏曹)를 가리킨다.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52. 보빙(報聘): 사절 방문에 대한 답례로 사절을 파견하는 것.
53. 사화동(沙火同): 조선인으로 일본에 도망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노략질한 인물.
54. 은대(銀帶): 은으로 만든 허리띠. 관복(官服)의 일부로, 품계에 따라 재질과 장식이 달랐다. 하사품으로서 특별한 영예를 상징하기도 한다.
55.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인 승지(承旨) 중 하나. 임금의 비서 역할을 담당했다.


원문:
壬辰, 日本大擧入寇, 宣言欲見李宣慰議和。 上會群臣議, 莫能決。 公曰: “寇深矣, 何可辭難?” 入對請行, 單騎馳至龍仁, 賊已散漫, 不可入。 還到漢江, 大駕已西幸矣, 從間路追及於平壤。 賊進逼浿江, 又請見公, 公扁舸會于江中。 是日, 群臣諸將在江岸望見者, 無不竦然失色。 公見賊, 辭氣自若, 數之曰: “若等無故興兵, 壞却數百年通好, 是何意耶?” 玄蘇等曰: “吾欲假道入大明, 而朝鮮不許。 譬如將入人家, 不得不先撤藩籬也。” 公曰: “你欲犯我父母之邦, 而脅我假道, 國可亡, 道不可假。 自此兩國之好絶矣, 何和可議?” 聲氣俱厲, 賊不敢復言。 後玄蘇極稱於人曰: “倉黃之際, 言語氣色與昔日尊俎時無異, 人所難及也。”【竝鄭愚伏經世撰行狀。】

번역문:
임진년(1592, 선조 25)에 일본이 대거 침입(入寇)하여, 이 선위사(李宣慰, 이덕형)를 만나 화의(議和)⁵⁶를 하고자 한다고 선언하였다. 상께서 여러 신하를 모아 의논하였으나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적의 침입이 깊으니, 어찌 어려움을 사양하겠습니까?” 하고, 입대(入對)하여 가기를 청하고는 홀로 말을 타고 용인(龍仁)까지 달려갔으나, 적이 이미 흩어져 들어갈 수 없었다. 한강으로 돌아오니 어가(大駕)⁵⁷가 이미 서쪽으로 피난(西幸)⁵⁸하였으므로, 샛길을 따라 평양(平壤)에서 어가를 따라잡았다. 적이 패강(浿江)⁵⁹까지 진격해오자 또 공을 만나기를 청하니, 공이 작은 배(扁舸)⁶⁰를 타고 강 가운데서 만났다. 이날 신하들과 여러 장수들이 강기슭에서 바라보는 자들은 모두 두려워 얼굴빛을 잃지 않음이 없었다(竦然失色). 공이 적을 만나서는 말투와 기색이 태연자약(辭氣自若)하였고, 그들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 수백 년 동안의 우호 관계(通好)를 무너뜨리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니, 겐소 등이 말하기를, “우리가 길을 빌려(假道)⁶¹ 명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조선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남의 집에 들어가려 할 때 부득이 먼저 울타리를 철거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너희가 나의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를 침범하려 하면서 우리를 위협하여 길을 빌리려 하니,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길은 빌려줄 수 없다(國可亡, 道不可假). 이로부터 두 나라의 우호 관계는 끊어졌으니, 무슨 화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목소리와 기색이 모두 엄하여(聲氣俱厲) 적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후에 겐소가 다른 사람들에게 극구 칭찬하여 말하기를, “경황(倉黃) 중에도 말과 기색이 지난날 연회석상(尊俎)⁶²에서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으니, 다른 사람이 미치기 어려운 바이다.” 하였다.【이상 정우복(鄭愚伏) 경세(經世)⁶³가 지은 행장(行狀)⁶⁴에서 인용】

주석:
56. 의화(議和): 화의(和議)를 논의함. 즉 평화 협상을 의미한다.
57.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의 행차를 의미한다.
58. 서행(西幸):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 가는 것.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는 의주(義州) 방면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59. 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 평양을 가로질러 흐른다.
60. 편가(扁舸): 작고 납작한 배.
61. 가도(假道): 길을 빌림.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조선을 통해 가겠다는 일본의 요구를 의미한다. ‘정명가도(征明假道)’라고 한다.
62. 존조(尊俎): 제사나 연회 때 술을 담는 그릇인 존(尊)과 고기를 담는 그릇인 조(俎). 연회나 잔치 자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63. 정우복(鄭愚伏) 경세(經世):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우복(愚伏). 이덕형과 교유하였다.
64.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글. 묘비명(墓碑銘), 묘지명(墓誌銘),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의 기본 자료가 된다.


원문:
上次肅川, 以李德馨爲請援使, 赴遼告急。 時李恒福、李德馨夜對請: “上進住寧邊, 臣等親往乞師遼東。” 因爭請自往, 副提學沈忠謙以爲: “恒福方在本兵, 不可遣。” 於是遂遣德馨。【《宣廟寶鑑》。】

번역문:
상께서 숙천(肅川)에 머무르실 때,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⁶⁵로 삼아 요동(遼東)⁶⁶으로 가서 위급함을 알리게(告急)⁶⁷ 하였다. 이때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이 밤에 입대하여 청하기를, “상께서는 나아가 영변(寧邊)에 머무르시고 신들이 직접 요동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겠습니다.” 하고는 서로 자기가 가겠다고 다투어 청하였는데, 부제학(副提學) 심충겸(沈忠謙)⁶⁸이 “항복은 현재 병조(兵曹)⁶⁹에 있으니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이덕형을 파견하였다.【《선묘보감(宣廟寶鑑)》⁷⁰에서 인용】

주석:
65. 청원사(請援使): 원병(援兵)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신.
66. 요동(遼東): 현재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동부 지역.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67. 고급(告急):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것.
68. 심충겸(沈忠謙, 1545~1594): 조선 중기의 문신.
69. 병조(兵曹): 군사 업무를 담당하던 중앙 관청. 이항복은 당시 병조판서였다.
70. 《선묘보감(宣廟寶鑑)》: 조선 선조 시대의 정치와 주요 사건, 임금의 언행 등을 기록한 편년체 사서(史書).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원문:
明甫將發, 余送之南門。 明甫曰: “恨無快馬兼程疾馳。” 余卽解所乘馬與之, 曰: “兵不出, 君當索我於重獲, 無相見也。” 明甫曰: “兵不出, 吾當棄骨於盧龍, 再不渡鴨水也。” 二人灑涕而別。【李白沙恒福撰墓誌。】

번역문:
명보(明甫, 이덕형)가 장차 출발하려 할 때, 나(余, 이항복)는 남문(南門)에서 그를 전송하였다. 명보가 말하기를, “빨리 달릴 수 있는 좋은 말이 없어 길을 재촉해 달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내가 즉시 내가 타던 말을 풀어 그에게 주며 말하기를, “군사가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마땅히 중죄를 지은 나⁷¹를 찾을 것이니,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군사가 나오지 않으면 나는 마땅히 노룡(盧龍)⁷²에서 뼈를 묻을 것이니, 다시는 압록강 물을 건너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두 사람은 눈물을 뿌리며 헤어졌다.【이백사(李白沙) 항복(恒福)⁷³이 지은 묘지(墓誌)⁷⁴에서 인용】

주석:
71. 중획(重獲): 중죄를 얻음. 여기서는 원병 요청에 실패할 경우 자신이 받게 될 처벌을 각오하는 이항복의 비장한 심정을 나타낸다. 원문의 '索我於重獲'은 직역하면 '중죄 중에 있는 나를 찾는다'는 의미인데, 문맥상 '원병 요청 실패 시 자신은 중죄인이 되어 있을 것이니 찾을 필요도 없다' 또는 '원병 요청 실패는 곧 나라도 망하고 나도 죽는 것이니 만날 수 없을 것이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72. 노룡(盧龍): 중국 허베이성(河北省)에 있는 지명. 산해관(山海關) 근처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원병 요청에 실패하면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죽겠다는 이덕형의 결의를 보여준다.
73. 이백사(李白沙) 항복(恒福): 이항복(李恒福). 호가 백사(白沙)이다.
74. 묘지(墓誌): 묘지명(墓誌銘). 죽은 사람의 이름, 본관, 생애, 행적 등을 돌이나 도판 등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 것, 또는 그 글.


원문:
公行至遼東, 郝巡按杰見辭語慷慨, 爲之愍然改容, 卽便宜遣祖承訓等三將, 先嘗賊鋒, 皆敗還。 天朝遂大發兵, 遣提督李如松督諸將東征。 明年春, 大軍到義州, 公以大司憲爲接伴使。 時三京丘墟, 八路潰裂, 百度蕩然, 無着手處。 公周旋其間, 竭力焦心, 日應待諸將, 辦給芻糧, 不致乏絶, 提督大悅, 遂克平壤, 復松京。 上懋其功, 增秩爲刑曹判書。

번역문:
공이 길을 떠나 요동(遼東)에 이르니, 순안(巡按)⁷⁵ 학걸(郝杰)⁷⁶이 그의 강개(慷慨)한 말을 듣고는 가엾게 여겨 얼굴빛을 고치고, 즉시 편의(便宜)⁷⁷에 따라 조승훈(祖承訓)⁷⁸ 등 세 장수를 보내 먼저 적의 예봉(賊鋒)을 시험하게 하였으나 모두 패하여 돌아왔다. 천조(天朝)⁷⁹가 마침내 대군을 일으켜 제독(提督)⁸⁰ 이여송(李如松)⁸¹을 보내 여러 장수를 감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다. 이듬해 봄, 대군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공은 대사헌(大司憲)⁸²으로서 접반사(接伴使)⁸³가 되었다. 이때 삼경(三京)⁸⁴은 폐허가 되고 팔도(八路)는 무너져 내렸으며, 온갖 제도(百度)가 흔적 없이 사라져 손 쓸 곳이 없었다.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周旋)하며 힘을 다하고 마음을 태워, 날마다 여러 장수들을 응대하고 추량(芻糧)⁸⁵을 마련하여 공급하여 부족하지 않게 하니, 제독이 크게 기뻐하였다. 마침내 평양을 격파하고 송경(松京)⁸⁶을 회복하였다. 상께서 그 공을 힘쓰게 여겨(懋) 품계를 높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주석:
75. 순안(巡按): 명나라 때 지방을 순찰하며 관리를 감찰하던 임시 관직. 정식 명칭은 순안어사(巡按御史)이다.
76. 학걸(郝杰): 명나라 요동 순안어사.
77. 편의(便宜):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함.
78. 조승훈(祖承訓): 명나라 장수.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79. 천조(天朝): 하늘 아래의 조정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조정을 높여 부르는 말.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80. 제독(提督): 명나라, 청나라 때의 군사 지휘관 직함.
81. 이여송(李如松, 1549~1598): 명나라 장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총사령관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평양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82.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이때 이덕형은 일시적으로 대사헌 직함을 가지고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83. 접반사(接伴使): 외국 사신이나 군대를 맞이하여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84. 삼경(三京): 세 개의 수도. 조선시대에는 한성(漢城), 개성(開城), 평양(平壤)을 가리켰다.
85. 추량(芻糧): 꼴(芻)과 군량(糧). 군마(軍馬)의 사료와 군대의 식량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86. 송경(松京): 개성(開城)의 고려시대 이름.


원문:
先是, 上在肅川, 令募兵敎鍊, 扈衛帳殿。 至是, 公與西厓柳相國協心規畫, 張大其事, 置陣製器, 皆倣中朝制, 廣設屯田, 以助軍需, 公私賴焉。

번역문:
이에 앞서 상께서 숙천(肅川)에 계실 때 병사를 모집하고 훈련시켜 장전(帳殿)⁸⁷을 호위하게 하라고 명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서애(西厓) 유 상국(柳相國)⁸⁸과 마음을 합하여 계획하고 그 일을 확장하여, 진법(陣法)을 설치하고 무기(器)를 만드는 것을 모두 중조(中朝,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며, 둔전(屯田)⁸⁹을 널리 설치하여 군수(軍需)를 도우니, 공사(公私)가 이에 힘입었다.

주석:
87. 장전(帳殿): 임금이 거처하는 장막. 임시 행궁(行宮)을 의미한다.
88. 서애(西厓) 유 상국(柳相國):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서애(西厓).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 상국(相國)은 정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89. 둔전(屯田): 국경 지대나 군사 요충지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병사들이 직접 경작하던 토지.


원문:
甲午夏, 丁內憂。 上以國事艱危, 非公不能濟, 冬, 命起復治事, 公九上章不起。 上曰: “予不以賊不退爲慮, 以卿不出爲憂。” 辭旨切峻, 促令赴召, 遂黽勉入朝, 由吏判移判兵曹。

번역문:
갑오년(1594, 선조 27) 여름에 어머니 상(內憂)⁹⁰을 당하였다. 상께서 나라 일이 어렵고 위태로워 공이 아니면 구제할 수 없다 하여 겨울에 기복(起復)⁹¹하여 일을 다스리도록 명하였으나, 공이 아홉 번 상소(上章)⁹²를 올리고 일어나지 않았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적이 물러가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卿)이 나오지 않는 것을 근심한다.” 하시고, 말씀의 뜻이 간절하고 엄준(切峻)하여 부름에 응하도록 재촉하시니, 마침내 힘써(黽勉) 조정에 들어와 이조 판서에서 병조 판서로 옮겼다.

주석:
90. 내우(內憂): 어머니의 상(喪). 부친상은 외간(外艱)이라 한다.
91. 기복(起復): 부모상(父母喪) 중에 있는 관리를 상기(喪期)가 끝나기 전에 특별히 다시 벼슬에 나오게 하는 것.
92. 상장(上章): 임금에게 글(章)을 올리는 것. 상소(上疏)와 같은 의미이다.


원문:
丁酉, 賊再動, 天子遣四大將發兵十萬, 以御史楊鎬監軍經理朝鮮事。 楊公年少有俠氣, 輕視天下士, 動以氣勢凌轢人。 先聲至, 人皆洶懼。 上以公前在李都督軍中, 能得上下心, 命往儐之。 楊公一見傾到如舊。 公因言曰: “今賊已逼畿甸, 若失漢江則事危矣。 今能疾馳進以鎭都城人心, 賊勢可及遏截也。” 楊公從之, 卽單騎馳到, 督戰益急, 遣偏師大破賊鋒於稷山, 賊將淸正等悉敗走。 楊公南下, 追圍於島山, 拔外城, 賊走入土窟, 朝夕且降。 會天大雨雪, 人馬凍飢, 天兵左次。 時公在軍中, 氣益厲不少挫。 楊公甚奇之, 謂諸將曰: “李陪臣雖在中朝, 亦當端委廟堂, 而尙屈百僚, 不亦異乎?” 未幾, 楊公被讒去, 公還朝。 戊戌, 拜右議政。

번역문:
정유년(1597, 선조 30)에 적이 다시 움직이니(丁酉再亂)⁹³, 천자(天子)께서 네 명의 대장(大將)을 보내 군사 십만을 발병하고, 어사(御史) 양호(楊鎬)⁹⁴를 감군(監軍)으로 삼아 조선의 일을 경리(經理)⁹⁵하게 하였다. 양공(楊公)은 나이가 젊고 협기(俠氣)⁹⁶가 있었으며 천하의 선비들을 가볍게 보고, 걸핏하면 기세(氣勢)로 사람을 짓밟았다(凌轢). 그 명성이 먼저 이르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상께서 공이 전에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의 군중에 있으면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하여, 가서 그를 맞이하여 접대(儐之)⁹⁷하도록 명하였다. 양공이 한 번 보고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마음을 기울였다(傾倒). 공이 이로 인하여 말하기를, “지금 적이 이미 기전(畿甸)⁹⁸에 다다랐으니, 만약 한강을 잃으면 일이 위태로워집니다. 지금 빨리 달려 나아가 도성(都城)의 인심을 진정시키면, 적의 기세를 막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양공이 그 말을 따라 즉시 홀로 말을 타고 달려가 전투를 더욱 급히 독려하고, 편사(偏師)⁹⁹를 보내 직산(稷山)에서 적의 선봉을 크게 격파하니, 적장 가토 기요마사(淸正)¹⁰⁰ 등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양공이 남쪽으로 내려가 도산(島山)¹⁰¹에서 추격하여 포위하고 외성(外城)을 함락시키니, 적이 토굴(土窟)로 도망쳐 들어가 조석(朝夕)간에 항복하려 하였다. 마침 하늘에서 큰 눈비가 내려 사람과 말이 얼어붙고 굶주려, 천병(天兵, 명나라 군대)이 주춤하였다(左次)¹⁰². 이때 공이 군중에 있었는데 기세가 더욱 강하여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양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이 배신(李陪臣)¹⁰³은 비록 중조(中朝)에 있더라도 마땅히 묘당(廟堂)¹⁰⁴에 단정히 앉아 있을 만한데, 오히려 여러 관리 아래에 있으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공이 참소(讒訴)를 당하여(被讒) 떠나가자, 공도 조정으로 돌아왔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다.

주석:
93. 정유재란(丁酉再亂): 임진왜란 중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이 1597년(정유년) 다시 조선을 침략한 사건.
94. 양호(楊鎬, ?

1629): 명나라 장수. 정유재란 때 경리(經理)로서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95. 경리(經理): 명나라 때 파견된 군사 감독관. 군사뿐 아니라 행정, 재정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96. 협기(俠氣): 의협심이 강한 기개. 때로는 호방하고 과감한 성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97. 빈지(儐之): 손님을 맞이하여 인도하고 접대함.
98. 기전(畿甸): 수도와 그 부근의 땅. 여기서는 한성(서울) 근교를 가리킨다.
99. 편사(偏師): 주력 부대에서 나누어 보낸 부대.
100.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

1611). 일본의 무장.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101. 도산(島山): 현재의 울산(蔚山).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울산성 전투).
102. 좌차(左次): 군대가 진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후퇴함.
103. 배신(陪臣): 제후국의 신하를 이르던 말. 명나라 관리들이 조선의 신하를 낮추어 부르는 칭호였으나, 여기서는 양호가 이덕형을 높이 평가하는 의미로 사용했을 수 있다.
104. 묘당(廟堂): 종묘(宗廟)와 명당(明堂). 조정(朝廷)을 의미한다. '단위묘당(端委廟堂)'은 조정의 높은 자리에 앉아 정사를 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提督劉綎將南下, 言於上曰: “願得本國第一人文武備具者同行。” 上顧右議政李恒福曰: “意有在耶?” 恒福對曰: “必李某也。” 上遂命從征。 綎喜曰: “吾濟矣。” 兵至順天, 賊酋行長勢益窘蹙, 堅壁不出。 綎性狡, 憚戰而貪功, 令間密諭行長使遁去, 欲因爲己功。 公獨鉤得其狀², 卽夜急通於統制使李舜臣, 令與舟師提督陳璘邀擊于洋中大破之。 公惡綎所爲, 密啓于朝, 有惎公者宣之, 故令綎聞之。 綎大怒曰: “俺三十年功名, 因李某墜落盡耶?”

번역문:
제독(提督) 유정(劉綎)¹⁰⁵이 장차 남쪽으로 내려가려 할 때, 상께 아뢰기를, “본국(本國) 제일의 문무(文武)를 갖춘 자를 얻어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께서 우의정 이항복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가?” 하시니, 항복이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모(李某, 이덕형)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마침내 정벌에 따라가도록 명하시니, 유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성공하겠구나(吾濟矣).” 하였다. 군대가 순천(順天)에 이르자, 적의 우두머리 유키나가(行長)¹⁰⁶의 형세가 더욱 궁색해져 성벽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유정은 성품이 교활하여 싸우기를 꺼리고 공을 탐하여, 사람을 시켜 은밀히 유키나가에게 달아나도록 알려주고는 이를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 하였다. 공이 홀로 그 실상(狀)¹⁰⁷을 알아내어(鉤得), 즉시 밤에 급히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¹⁰⁸에게 통보하여, 수군 제독(舟師提督) 진린(陳璘)¹⁰⁹과 함께 바다 가운데서 맞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게 하였다. 공이 유정의 소행을 미워하여 비밀리에 조정에 아뢰었는데, 공을 모함하려는 자(惎公者)가 이를 누설하여 유정으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유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나의 삼십 년 공명(功名)이 이모 때문에 모두 떨어져 없어지게 되었는가?” 하였다.

주석:
105. 유정(劉綎, 1558

1619): 명나라 장수.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의 부총병(副總兵)으로 참전했다.
106.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1600). 일본의 무장, 기독교 신자.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참전했으며, 강화 교섭에도 참여했다.
107. [주-D002] 狀 : 저본(底本)에는 “수(收)”로 되어 있으나,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한음문고(漢陰文稿)》 시상(諡狀), 《우복집(愚伏集)》 한음이공행장(漢陰李公行狀)에 근거하여 “상(狀)”으로 수정하였다. 문맥상 유정의 계략의 '실상' 또는 '정황'을 알아냈다는 의미이므로 '狀'이 적절하다.
108. 이순신(李舜臣, 1545

1598): 조선 중기의 명장.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서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하여 국난 극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109. 진린(陳璘, 1543

1607): 명나라 수군 제독.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조선 수군과 연합하여 노량해전 등에서 싸웠다.


원문:
辛丑, 以都體察使居南方歲餘, 振肅軍政, 蠲除民瘼, 南土晏然。 尤長於料敵, 算無遺策。 一日, 倭使橘持正持書啓出來, 有恐喝求和意。 公以爲“此是馬島詐稱, 非日本所持”, 不許下陸, 遣人語之曰: “天朝以日本反覆難信, 屯兵本國, 以爲善後之計, 不可於此時輕易發此口也。” 乃收聚天兵之落留我境者, 作爲一屯以示之, 揭報邢軍門, 出諭倭告示, 張掛釜營, 折其哄脅之謀。 邊陲之至今無事, 公之力也。

번역문:
신축년(1601, 선조 34)에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남쪽 지방에 1년 남짓 머무르면서 군정(軍政)을 정비하고 엄숙히 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니(蠲除民瘼)¹¹⁰ 남쪽 땅이 편안해졌다. 특히 적의 정세를 헤아리는 데(料敵)¹¹¹ 뛰어나 계책에 빠뜨리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왜사(倭使) 다치바나 시게마사(橘持正)¹¹²가 서계(書契)¹¹³를 가지고 나왔는데, 공갈(恐喝)하며 화친을 구하려는 뜻이 있었다. 공은 “이는 대마도(馬島)¹¹⁴에서 거짓으로 칭한 것이지 일본 본국에서 보낸 것이 아니다”라고 여겨 육지에 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그에게 말하기를, “천조(天朝)에서는 일본이 반복하여 믿기 어렵다 하여 본국에 군대를 주둔시켜 선후책(善後策)으로 삼고 있으니, 이때에 경솔하게 이런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에 우리 국경에 남겨진(落留) 천병(天兵)들을 모아 하나의 둔(屯)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보여주고, 형 군문(邢軍門)¹¹⁵에게 보고하고 왜인에게 알리는 고시(告示)¹¹⁶를 내어 부산(釜山) 병영에 걸어서, 그들의 공갈하고 위협하려는 꾀(哄脅之謀)를 꺾었다. 변방(邊陲)이 지금까지 무사한 것은 공의 힘이다.

주석:
110. 견제민막(蠲除民瘼):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瘼)을 덜어주고 제거함(蠲除). 선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111. 요적(料敵): 적의 강약, 허실 등 정세를 헤아리는 것.
112. 귤지정(橘持正): 다치바나 시게마사(橘重正). 쓰시마(대마도) 출신의 인물로 추정된다.
113. 서계(書契): 외교 문서. 국서(國書)보다 격이 낮은 문서로, 주로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조선에 보내는 문서에 사용되었다.
114. 마도(馬島):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섬.
115. 형 군문(邢軍門): 명나라 장수 형개(邢玠)를 가리킨다. 군문(軍門)은 군영의 문, 또는 군영 자체를 의미하며, 장수를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116. 고시(告示): 관청에서 일반 백성에게 알리는 글이나 게시물.


원문:
命策宣武、扈聖諸勳, 下敎曰: “李某當倭寇充斥之日, 以扁舟往見賊酋, 非忘身殉國者, 不能也。” 命錄勳。 公八上箚力辭, 上執不許。 勘定日, 柳永慶爲首相, 指公辭箚曰: “此實錄也。 漢老辭勳宜矣。” 竟不錄, 物議稱屈。

번역문:
선무공신(宣武功臣)¹¹⁷과 호성공신(扈聖功臣)¹¹⁸ 등 여러 공신을 책봉하도록 명하고 교서(敎書)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이모(李某, 이덕형)는 왜구가 가득 날뛰던 날에 작은 배를 타고 가서 적의 우두머리를 만났으니,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忘身殉國者)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시고, 공신으로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여덟 번 차자(箚)¹¹⁹를 올려 강력히 사양하였으나, 상께서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공신을 감정(勘定)하는 날, 유영경(柳永慶)¹²⁰이 수상(首相)¹²¹으로서 공이 사양한 차자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실록(實錄)¹²²이다. 한로(漢老, 이덕형)¹²³가 공신 훈작을 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끝내 기록되지 않으니, 세간의 평판(物議)¹²⁴이 억울하다고 일컬었다.

주석:
117.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118.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한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119. 차자(箚): 상소문(上疏文)의 한 종류. 주로 사은(謝恩), 사직(辭職), 진언(進言) 등에 사용되었다.
120. 유영경(柳永慶, 1550~1608):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말년에 영의정을 지내며 소북(小北) 세력을 이끌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다가 광해군 즉위 후 사사되었다.
121.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122. 실록(實錄): 실제의 기록. 여기서는 이덕형이 공을 사양한 것이 사실이고 진심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23. 한로(漢老): 이덕형의 호인 한음(漢陰)을 변형하여 부른 것으로 보인다.
124. 물의(物議): 여러 사람의 비평이나 논의. 여기서는 공신에 기록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는 여론을 의미한다.


원문:
先是, 光海在東宮, 天朝以捨長立少, 不許冊封。 至是, 告訴使李好閔至, 則天朝遣嚴、萬兩差官査問臨海病狂狀。 一日, 差官於御前面質其虛實, 入侍諸臣錯愕莫能措語。 光海命召公入, 公趨入, 曰: “以弟證兄, 義不可。” 差官不敢更問而退。 時天朝不卽許封, 擧國遑遑。 光海命公爲陳奏使, 公以爲: “差官將還, 誣言先入, 則使臣繼至, 雖力辨無益, 不如先至京師, 備陳實狀。” 遂星夜兼程, 二十七日而至京師, 留五月, 竣事而還。 光海大悅, 命父某超陞通政、判決事, 官其子六品職, 賜田土、臧獲倍數。

번역문:
이에 앞서 광해군(光海君)이 동궁(東宮)¹²⁵에 있을 때, 천조(天朝)에서 장자를 버리고 어린 아들을 세운다(捨長立少)¹²⁶ 하여 책봉(冊封)¹²⁷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고주사(告奏使)¹²⁸ 이호민(李好閔)¹²⁹이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천조에서 엄(嚴)¹³⁰, 만(萬)¹³¹ 두 차관(差官)¹³²을 보내 임해군(臨海君)¹³³이 미쳐 날뛰는(病狂) 상황을 조사하게 하였다. 하루는 차관이 어전(御前)에서 그 허실(虛實)을 면질(面質)¹³⁴하자,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당황하여(錯愕)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광해군이 공을 부르도록 명하자, 공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말하기를, “아우가 형을 증언하는 것은 의리(義理)상 불가합니다.” 하니, 차관이 감히 다시 묻지 못하고 물러갔다. 당시 천조에서 즉시 책봉을 허락하지 않아 온 나라가 불안해하였다(遑遑). 광해군이 공을 진주사(陳奏使)¹³⁵로 삼으니, 공이 생각하기를, “차관이 장차 돌아가 거짓된 말이 먼저 들어가면, 사신이 뒤이어 가더라도 힘써 변론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먼저 경사(京師)¹³⁶에 도착하여 실상(實狀)을 갖추어 아뢰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마침내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星夜兼程)¹³⁷ 27일 만에 경사에 도착하여 5개월간 머무르며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광해군이 크게 기뻐하여 공의 아버지 모(某)¹³⁸를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¹³⁹로 승진시키고, 그의 아들에게 6품 직을 제수하며, 전토(田土)와 장획(臧獲)¹⁴⁰을 배로 하사하였다.

주석:
125. 동궁(東宮): 왕세자(王世子) 또는 그 거처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세자 시절의 광해군(光海君)을 의미한다.
126. 사장입소(捨長立少): 장자(長子)를 버리고 어린 아들을 세움. 선조의 적장자(嫡長子)는 아니었지만 맏아들이었던 임해군(臨海君) 대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을 명나라에서 문제 삼은 것이다.
127. 책봉(冊封): 중국 황제가 주변국의 왕위 계승자를 왕이나 세자로 공식 임명하는 의례. 조선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야 왕위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128. 고주사(告奏使): 왕의 즉위나 세자 책봉 등 국가의 중요한 일을 중국 황제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하던 사신.
129. 이호민(李好閔, 1553

1634):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의 세자 책봉 승인을 요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0. 엄(嚴): 명나라 사신 엄일괴(嚴一魁).
131. 만(萬): 명나라 사신 만공(萬孔).
132. 차관(差官): 임무를 띠고 파견된 관리.
133. 임해군(臨海君, 1574

1609): 선조의 맏아들이자 광해군의 형. 성품이 거칠고 행실이 좋지 않아 세자가 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 후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134. 면질(面質): 얼굴을 마주하고 따져 묻는 것.
135. 진주사(陳奏使): 사정을 자세히 아뢰기 위해 파견하는 사신.
136. 경사(京師): 수도. 여기서는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을 가리킨다.
137. 성야겸정(星夜兼程):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둘러 길을 감.
138. 부모(父某): 아버지 모(某). 이덕형의 아버지 이민성(李民聖)을 가리킨다. 당시 이미 사망했으므로 추증(追贈)된 것이다.
139.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 判決事): 통정대부는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고, 판결사는 고려시대 및 조선 초기의 관직명으로, 여기서는 명예직으로 추증된 것으로 보인다.
140. 장획(臧獲): 노비(奴婢)를 의미한다.


원문:
壬子春, 海西逆獄起, 逮至搢紳名人。 癸丑, 朴應犀等獄繼起, 則獄事狼藉, 誣引宮禁。 光海素蓄疑忌, 前後獄, 必逐日親鞫, 未嘗委有司淑問。 奸人樂禍者又入左腹慫慂之, 事有不忍言者。 公首相, 日入侍, 守正平反, 棘棘不阿, 橫罹者多得釋。 時永昌大君㼁齒纔齔 ... 李爾瞻等指爲禍本, 嗾三司交章請誅, 且言三公宜率百僚庭爭。 一日, 光海入更衣, 大司憲李³諄、大司諫李冲於殿上揚言曰: “廷議皆以大臣不卽伏閤爲非, 不敢不告。” 公起, 與李公恒福謀曰: “事將若何?” 恒福曰: “子以首相, 當斷此論。 若令出置闕外, 則我當屈首從之。 若如三司之論, 必欲磬于甸人, 則不得不立異。 死生命也。” 公曰: “吾意也。” 明日, 百官伏閤, 以出置請, 光海不聽。 居數日, 爾瞻抗言於大臣曰: “朝議皆欲置辟, 而大臣只請出置, 非所以爲宗社意也。” 公笑曰: “已領矣。” 及草啓, 持前議不變。 翌日, 爾瞻稱疾不來, 曰: “不可苟同。” 公聞之, 笑曰: “不來耶? 人各有見, 可任之也。”

번역문:
임자년(1612, 광해군 4) 봄에 해서 역옥(海西逆獄)¹⁴¹이 일어나 진신(搢紳)¹⁴² 명사들에게까지 체포가 미쳤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박응서(朴應犀) 등의 옥사¹⁴³가 연이어 일어나자 옥사가 낭자(狼藉)¹⁴⁴하여 궁궐(宮禁)까지 무고(誣告)하여 끌어들였다. 광해군은 평소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있어, 이전과 이후의 옥사를 반드시 날마다 직접 국문(親鞫)하고 일찍이 유사(有司)¹⁴⁵에게 맡겨 신중히 조사(淑問)¹⁴⁶하게 하지 않았다. 간사하고 화를 즐기는 자들이 또 좌우의 심복(左右腹心)으로 들어가 부추기니(慫慂), 차마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공이 수상(首相)¹⁴⁷으로서 날마다 입시(入侍)하여 정도(正道)를 지켜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平反) 하고, 굳세어 아첨하지 않으니(棘棘不阿)¹⁴⁸, 억울하게 화를 당한(橫罹) 자들이 많이 석방되었다. 이때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¹⁴⁹는 나이가 겨우 이를 갈 때였는데(齒纔齔)¹⁵⁰, 이이첨(李爾瞻)¹⁵¹ 등이 화의 근본(禍本)으로 지목하고 삼사(三司)¹⁵²를 부추겨 번갈아 상소를 올려 주살(誅殺)할 것을 청하며, 또 삼공(三公)¹⁵³이 마땅히 백관을 이끌고 뜰에서 다투어야(庭爭)¹⁵⁴ 한다고 말하였다. 하루는 광해군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을 때, 대사헌 이순(李諄)¹⁵⁵과 대사간 이충(李冲)¹⁵⁶이 전상(殿上)에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조정의 의논이 모두 대신(大臣)이 즉시 복합(伏閤)¹⁵⁷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 하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일어나 이공 항복(李公恒福)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일이 장차 어찌 되겠는가?”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그대가 수상으로서 마땅히 이 논의를 결단해야 한다. 만약 대궐 밖으로 내쫓도록(出置闕外) 한다면 나는 마땅히 머리를 숙여 따를 것이다. 만약 삼사의 논의처럼 반드시 죄인을 사형에 처하려(磬于甸人)¹⁵⁸ 한다면, 부득이 다른 의견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 뜻도 그러하다.” 하였다. 다음 날 백관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내쫓을 것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듣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이이첨이 대신에게 맞서 말하기를, “조정의 의논이 모두 사형에 처하고자 하는데, 대신은 단지 내쫓기만 청하니, 종사(宗社)를 위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알아들었다.” 하였다. 계(啓)¹⁵⁹를 초안할 때에 이르러서도 이전의 주장을 고수하여 바꾸지 않았다. 다음 날 이이첨이 병을 핑계로 오지 않고 말하기를, “구차하게 같이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오지 않는가? 사람마다 각기 소견이 있으니,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하였다.

주석:
141. 해서 역옥(海西逆獄): 김직재(金直哉) 등이 일으킨 역모 사건. 황해도(해서)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났다. 이 사건을 빌미로 많은 서인(西人) 세력이 제거되었다.
142. 진신(搢紳): 홀(笏)을 허리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벼슬아치 또는 사대부를 가리킨다.
143. 박응서(朴應犀) 등의 옥사: 박응서, 서양갑(徐羊甲) 등이 강변칠우(江邊七友)와 함께 은(銀)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강도 사건이 역모 사건으로 비화된 것(계축옥사). 이 사건으로 영창대군이 연루되어 폐서인되고, 인목대비(仁穆大比) 폐모론의 빌미가 되었다.
144. 낭자(狼藉): 이리(狼)가 누웠던 자리가 어지럽다는 뜻으로, 매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양. 옥사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145. 유사(有司): 직책을 맡은 관리. 여기서는 옥사를 담당하는 관리를 의미한다.
146. 숙문(淑問): 잘 살펴서 신문함. 죄의 유무를 신중하게 가려내는 것을 의미한다.
147.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
148. 극극불아(棘棘不阿): 가시나무처럼 꼿꼿하여 아첨하지 않음. 강직한 성품을 비유한다.
149.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 1606

1614):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嫡子). 광해군 즉위 후 역모에 연루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증살(蒸殺)당했다.
150. 치재츤(齒纔齔): 나이가 겨우 유치(乳齒)를 갈 때임. 7

8세 정도의 어린 나이를 의미한다.
151. 이이첨(李爾瞻, 1560

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광해군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많은 옥사를 일으켰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처형되었다.
152.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한다.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153.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킨다.
154. 정쟁(庭爭): 조정의 뜰에서 쟁론함. 신하들이 대궐 뜰에 모여 국왕에게 강력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155. [주-D003] 李 : 저본(底本)에는 “송(宋)”으로 되어 있으나, 장서각본(藏書閣本), 《한음문고(漢陰文稿)》 시상(諡狀), 《우복집(愚伏集)》 한음이공행장(漢陰李公行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5년 7월 21일 기록 등에 근거하여 “이(李)”로 수정하였다. 당시 대사헌은 이순(李諄)이었다.
156. 이충(李冲, 1568

1619):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에 속했다.
157. 복합(伏閤):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임금에게 의견을 아뢰거나 처분을 기다리는 것.
158. 경우전인(磬于甸人): 전인(甸人, 교외 형장에서 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경(磬, 목매달아 죽이는 형벌)하게 함. 사형에 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159. 계(啓):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주로 보고나 건의 사항을 담는다.


원문:
獄事日急, 外間或傳言將廢母后, 臺官尹訒、鄭造於避嫌中發其議。 公謂恒福曰: “此事何可一刻容忍? 我心如焚。 今日請與君同進, 先以克盡誠孝, 慰安慈殿之意, 反復開陳, 以待上悟。 因極言此輩不道之狀, 悉力擊破之無遺可也。” 恒福曰: “不可。 啓辭未半, 天威震怒, 或臺諫狙擊之, 勢難畢說。 此事必詢于大臣, 當於獻議中引經據義, 段段攻破, 因及永昌不可誅之義可也。” 公諾之。

번역문:
옥사가 날로 급해지고, 바깥에서는 혹 어머니(대비)를 폐위(廢母后)¹⁶⁰하려 한다는 말이 전해지자, 대관(臺官)¹⁶¹ 윤인(尹訒)¹⁶², 정조(鄭造)¹⁶³가 혐의를 피하는 가운데(避嫌中)¹⁶⁴ 그 의논을 제기하였다. 공이 항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 한시라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이 불타는 듯하다. 오늘 그대와 함께 나아가기를 청하여, 먼저 정성과 효도를 극진히 하여 자전(慈殿)¹⁶⁵의 뜻을 위로하고 안정시키는 것으로써 반복하여 아뢰어 상께서 깨닫기를 기다리자. 이어서 이 무리들의 무도(不道)한 실상을 극력 말하여 남김없이 힘껏 쳐부수는 것이 옳다.”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불가하다. 아뢰는 말이 반도 끝나기 전에 임금의 위엄이 진노하시면, 혹 대간(臺諫)이 저격(狙擊)¹⁶⁶할 것이니, 형세상 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일은 반드시 대신에게 물으실 것이니, 마땅히 의견을 올릴(獻議) 때 경전(經傳)을 인용하고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조목조목 공박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주살해서는 안 된다는 뜻까지 언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공이 이를 따랐다.

주석:
160. 폐모후(廢母后): 어머니인 왕후(后)를 폐위함.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 논의를 가리킨다.
161. 대관(臺官): 사헌부(司憲府)의 관리를 가리킨다.
162. 윤인(尹訒, 1575

1636):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
163. 정조(鄭造, 1559

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 폐모론을 주도했다.
164. 피혐중(避嫌中): 혐의를 피하는 중. 폐모론과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기하는 상황을 나타낸다.
165. 자전(慈殿): 대비(大妃)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인목대비를 가리킨다.
166. 저격(狙擊): 숨어서 노려 쏘는 것. 여기서는 대간(臺諫) 관리들이 기회를 엿보아 공격하거나 탄핵하는 것을 비유한다.


원문:
大妃父金悌男以謀逆受誣死。 方議告訃當否, 公引《春秋》子無絶母、讎母等語, 時議大愕。 未幾, 光海允庭請, 取永昌于大妃側, 出置江華。 論者必欲置之法, 促公先倡。 公進一箚以示意, 爾瞻輩大怒, 以爲黨逆。 於是李惺、朴鼎吉等希意攘臂, 請按律。 三司爭之踰月, 而光海不許, 只命削職。 公退歸龍津別墅, 睠顧國事, 仰屋飮泣, 却食不進, 得疾日劇, 遂不起。

번역문:
대비(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¹⁶⁷이 모반(謀逆)으로 무고를 받아 죽었다. 부고(訃告)¹⁶⁸를 알려야 할지 여부를 의논할 때, 공이 《춘추(春秋)》¹⁶⁹의 “아들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子無絶母)”,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讎母)” 등의 말을 인용하니, 당시의 여론(時議)이 크게 놀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해군이 조정의 청을 윤허하여 대비 곁에서 영창대군을 데려다가 강화(江華)로 내쫓았다. 논자(論者)들이 반드시 법으로 처치하고자 하여 공에게 먼저 주장하도록 재촉하였다. 공이 차자(箚) 하나를 올려 반대 의사를 보이자, 이이첨 무리가 크게 노하여 역적에 가담(黨逆)했다고 여겼다. 이에 이성(李惺)¹⁷⁰, 박정길(朴鼎吉)¹⁷¹ 등이 왕의 뜻에 영합하여 팔을 걷어붙이고(希意攘臂)¹⁷², 법률에 따라 처벌(按律)하기를 청하였다. 삼사(三司)가 이를 두고 한 달 넘게 다투었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고 단지 관직을 삭탈(削職)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물러나 용진(龍津) 별서(別墅)¹⁷³로 돌아가서 나라 일을 걱정하며 집 천장을 바라보고 눈물을 삼키며 음식을 물리치고 먹지 않다가 병을 얻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주석:
167. 김제남(金悌男, 1562

1613): 조선 중기의 문신. 인목대비의 아버지. 계축옥사 때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역모 혐의로 사사되었다.
168. 부고(訃告):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 국왕의 장인이자 대비의 아버지가 역모로 죽었으므로, 그 죽음을 공식적으로 알려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69. 《춘추(春秋)》: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유교 경전. 《춘추》의 기록과 그 해석(주로 《춘추좌씨전》)을 인용하여 폐모론의 부당함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자무절모(子無絶母)'는 어머니가 죄를 지었더라도 아들은 인륜상 관계를 끊을 수 없음을, '수모(讎母)'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것이 자식의 도리임을 강조하는 말로 사용될 수 있다.
170. 이성(李惺, 1557

1625):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
171. 박정길(朴鼎吉, 1562~1621):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
172. 희의양비(希意攘臂): 임금의 뜻에 영합(希意)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나섬(攘臂). 권력에 아부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173. 용진(龍津) 별서(別墅):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용진)에 있던 이덕형의 별장.


원문:
公精神明秀, 風度凝遠, 未弱冠, 人已以公輔期之。 天分甚高, 絶出流輩, 而謙謹自持, 未嘗有一毫矜高色。 平居粥粥若無能, 而遇事英氣奮發, 恢恢有游刃地。 立朝三十四年, 匪躬盡瘁, 不擇夷險, 卒能贊襄中興之業, 而方且自視欿然, 不以功自居。 與人相接, 色笑雍容, 和氣襲人。 前後儐接天將, 莫不懽然相得, 有如醇醪醉心。 戊申, 陳奏之行, 名動中原。 其往返一路, 諸鎭將官或酒饌出迎, 或贈贐護行者相屬於道。 每本國貢使至京, 必問公安否。【竝行狀。】

번역문:
공은 정신이 밝고 빼어났으며 풍채와 태도(風度)가 깊고 원대하여(凝遠), 약관(弱冠)¹⁷⁴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이미 공보(公輔)¹⁷⁵로 기대하였다. 타고난 자질(天分)이 매우 높아 동배(流輩)들보다 월등히 뛰어났으나, 겸손하고 신중하게(謙謹) 스스로를 지켜 일찍이 조금도 교만하고 거만한(矜高)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는 보잘것없어(粥粥)¹⁷⁶ 마치 무능한 듯하였으나, 일을 당하면 영웅적인 기상(英氣)이 분발하여 매우 여유롭게 일을 처리하였다(恢恢有游刃地)¹⁷⁷. 조정에 선 지 34년 동안 자신을 돌보지 않고(匪躬)¹⁷⁸ 온 힘을 다하여(盡瘁)¹⁷⁹ 평탄하거나 험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마침내 중흥(中興)의 위업을 도왔으나(贊襄), 또한 스스로를 부족하게(欿然) 여겨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사람들과 접할 때는 얼굴빛과 웃음이 온화하고 점잖아(雍容) 화기(和氣)가 사람을 감쌌다. 이전과 이후에 천조(天朝)의 장수들을 접대(儐接)할 때 기꺼이 서로 마음을 얻지 않음이 없어, 마치 좋은 술(醇醪)이 마음을 취하게 하는 듯하였다. 무신년(1598, 선조 31) 진주사(陳奏使)로 갔을 때 명성이 중원(中原)¹⁸⁰에 떨쳤다. 그가 오고 가는 길에 여러 진(鎭)의 장관(將官)들이 혹 술과 음식을 차려 나와 맞이하거나, 혹 노자(贐)를 증정하고 호송하는 자들이 길에 이어졌다. 매번 본국의 공사(貢使)가 경사(京師)에 도착하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물었다.【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74.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를 가리킨다.
175. 공보(公輔): 정승(公)과 같은 보필(輔)하는 신하. 즉 재상을 의미한다.
176. 죽죽(粥粥): 부드럽고 약하여 능력이 없는 모양. 겸손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177. 회회유유인지(恢恢有游刃地):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포정(庖丁)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 넓고 넉넉하여 칼날을 움직일(游刃) 공간(地)이 있다는 뜻으로, 기술이 매우 뛰어나거나 능력에 여유가 있어 일을 쉽게 처리함을 비유한다.
178. 비궁(匪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음. 《주역(周易)》 정괘(鼎卦)에서 유래했다.
179. 진췌(盡瘁): 온 힘과 정신을 다하여 애씀.
180. 중원(中原): 중국의 중심부. 중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원문:
余嘗謂: “明甫推賢讓能似子皮, 應對賓客似叔向, 知無不爲似宋璟, 尊儒樂善似留正, 不立私黨似司馬光。 率是以行, 上以出於晉、鄭之間, 不失爲名大夫; 下以出於唐、宋之際, 不愧爲賢宰相。” 又謂“李某心大, 能臨事不動”, 果以是獲戾于時, 亦以是揚名於後。【墓誌。】

번역문: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명보(明甫)는 현명한 이를 추천하고 능력 있는 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피(子皮)¹⁸¹와 같고, 빈객(賓客)을 응대하는 것은 숙향(叔向)¹⁸²과 같으며, 알아서 행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송경(宋璟)¹⁸³과 같고, 유학(儒學)을 존중하고 선(善)을 즐기는 것은 유정(留正)¹⁸⁴과 같으며, 사사로운 당파(私黨)를 세우지 않는 것은 사마광(司馬光)¹⁸⁵과 같다. 이를 따라 행하니, 위로는 진(晉)나라와 정(鄭)나라 사이¹⁸⁶에 나왔더라도 명망 있는 대부(大夫)가 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아래로는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시대¹⁸⁷에 나왔더라도 현명한 재상(宰相)이 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이모(李某)는 마음이 커서(心大) 일에 임하여 동요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과연 이 때문에 당시에 죄를 얻었으나, 또한 이 때문에 후세에 명성을 날렸다.【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181. 자피(子皮):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대부(大夫) 한호(罕虎). 자는 자피(子皮). 자산(子産)에게 정승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유명하다.
182. 숙향(叔向):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양설힐(羊舌肸). 자는 숙향(叔向).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다.
183. 송경(宋璟, 663

737):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재상. 강직하고 법을 엄격히 집행했다.
184. 유정(留正, 1129

1206): 남송(南宋) 효종(孝宗), 광종(光宗), 영종(寧宗) 때의 재상. 성리학(性理學)을 존숭했다.
185. 사마광(司馬光, 1019~1086): 북송(北宋)의 정치가, 역사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 당파를 배격하고 원칙을 중시했다.
186. 진(晉)나라와 정(鄭)나라 사이: 춘추시대.
187.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시대.


원문:
公事光海, 自戊申始。 當是時, 新造天崩之痛, 虞危萬端。 公之竭忠盡知, 追先后之際遇, 欲報新君者, 諸葛武侯之心也。 觀於戊申新政箚, 公可謂社稷臣也。 縷縷數千言, 上言全臨海, 次言畏天命, 中言盡孝母后。 下及輔導儲位, 開言路納忠直, 嚴宮禁戚畹事, 出入《詩⁴》、《書》、《易》、《春秋》, 指前代以爲鑑戒。 光海如用其中什一二, 安有癘憐王事者? 悲夫!【龍洲趙絅撰碑。】

번역문:
공이 광해군을 섬긴 것은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새로 임금이 되어 천붕(天崩)¹⁸⁸의 아픔을 겪고 우려와 위태로움이 만 가지였다. 공이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돌아가신 임금(先后, 선조)의 지우(際遇)를 추념하며 새로운 임금(광해군)에게 보답하고자 한 것은 제갈무후(諸葛武侯)¹⁸⁹의 마음이었다. 무신년의 신정차(新政箚)¹⁹⁰를 보면, 공은 사직(社稷)의 신하¹⁹¹라 할 만하다. 수천 마디 말을 조목조목 아뢰었는데, 위로는 임해군(臨海君)을 온전히 보전할 것을 말하고, 다음으로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할 것을 말하며, 중간에는 어머니(대비)께 효도를 다할 것을 말하였다. 아래로는 저위(儲位,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것, 언로(言路)를 열어 충직한 말을 받아들이는 것, 궁궐의 기강(宮禁)과 외척(戚畹)의 일을 엄격히 하는 것에까지 이르렀으며, 《시경(詩經)》¹⁹²,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를 넘나들며 전대(前代)를 가리켜 교훈(鑑戒)으로 삼게 하였다. 광해군이 만약 그중 십분의 일이나 이라도 썼다면, 어찌 왕업(王事)을 병들고 위태롭게(癘憐)¹⁹³ 하는 자가 있었겠는가? 슬프도다!【용주(龍洲) 조경(趙絅)¹⁹⁴이 지은 비(碑)에서 인용】

주석:
188.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짐. 임금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선조의 죽음을 가리킨다.
189.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 181

234).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재상. 유비(劉備) 사후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하며 충성을 다했다. 무후(武侯)는 그의 시호이다.
190. 무신신정차(戊申新政箚): 이덕형이 광해군 즉위년인 무신년(1608)에 올린 차자(箚子).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제시한 글이다.
191. 사직지신(社稷之臣): 나라의 안위를 자기 임무로 여기는 중신(重臣). 국가의 기둥과 같은 신하를 의미한다.
192. [주-D004] 詩 : 저본(底本)에는 “제(諸)”로 되어 있으나, 《한음문고(漢陰文稿)》 신도비명(神道碑銘) 및 《용주유고(龍洲遺稿)》 영의정한음이공신도비명(領議政漢陰李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시(詩)”로 수정하였다. 문맥상 유교 경전인 《시경(詩經)》을 가리키는 것이 자연스럽다.
193. 여련(癘憐): 병들고 위태롭게 함.
194.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

166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용주(龍洲).


원문:
光海初年, 李元翼、李德馨、李恒福居三公, 鄭仁弘、李爾瞻忌之, 嗾其鷹犬恣行搏噬, 誣獄繼起, 交搆三賢, 擠陷不測。 一時淸名矜節之士, 無一人得脫。 壬子年間, 倫紀日斁, 德馨上章忠諫, 主不悛益甚。 一日, 將請對極言, 恒福曰: “固也。 吾亦欲正諫, 今可同時請對。 但吾等雖欲格王, 主必逆耳。 徑先起入, 則徒速已禍, 於事無益, 難以極言畢告。 不如撰箚袖入進於榻前而仍且指陳, 雖逢彼怒, 庶其示于來世。” 德馨然之, 使恒福草箚, 約以明朝俱詣閤門, 其日爲朴榟等所擊去。 德馨旣削黜, 居楊根墓莊, 每日上家園, 北首痛哭, 憂憤成疾而卒。 卒之日, 白氣滿室, 移時不散。 恒福常悔歎曰: “使漢陰齎恨入地, 我之罪也。”【《休窩雜纂》。】

번역문:
광해군 초년에 이원익(李元翼)¹⁹⁵, 이덕형, 이항복이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었는데, 정인홍(鄭仁弘)¹⁹⁶, 이이첨이 이를 시기하여 그들의 응견(鷹犬)¹⁹⁷을 부추겨 멋대로 공격하고 물어뜯게(搏噬) 하여, 무고한 옥사가 연이어 일어나 세 현인(三賢)을 서로 얽어 모함(交搆)하여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뜨렸다(擠陷不測). 한 시대의 맑은 명성(淸名)과 긍지 높은 절개(矜節)를 지닌 선비들이 한 사람도 벗어날 수 없었다. 임자년(1612) 연간에 윤리 기강(倫紀)이 날로 무너지자, 이덕형이 상소를 올려 충간(忠諫)하였으나 임금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不悛) 더욱 심해졌다. 하루는 장차 대면하여 극력 간언하기를 청하려 하자, 항복이 말하기를, “진실로 그렇다. 나 또한 바르게 간하고자 하니, 지금 동시에 대면을 청할 수 있다. 다만 우리들이 비록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나 임금은 반드시 귀에 거슬려 할 것이다. 곧바로 먼저 일어나 들어가면 다만 스스로 화를 재촉할 뿐이고 일에는 유익함이 없어, 극력 간언하여 다 아뢰기 어려울 것이다. 차자를 지어 소매에 넣고 들어가 탑전(榻前)¹⁹⁸에 올리고 이어서 지적하여 아뢰면, 비록 저들의 노여움을 만나더라도 아마 후세에 보여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덕형이 그렇다고 여겨 항복에게 차자를 초안하게 하고, 다음 날 아침 함께 합문(閤門)¹⁹⁹에 이르기로 약속하였는데, 그날 박자(朴榟)²⁰⁰ 등에게 공격을 받아 쫓겨났다. 이덕형이 이미 삭탈 관직되어 쫓겨나 양근(楊根)의 묘막(墓莊)²⁰¹에 머무르면서, 매일 집 동산에 올라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통곡하며, 근심과 분노로 병이 들어 졸하였다. 졸한 날에 흰 기운(白氣)이 방 안에 가득하여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항복이 항상 후회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한음(漢陰)으로 하여금 한(恨)을 품고 땅속에 들어가게 한 것은 나의 죄이다.” 하였다.【《휴와잡찬(休窩雜纂)》²⁰²에서 인용】

주석:
195. 이원익(李元翼, 1547

163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오리(梧里). 영의정을 여러 차례 지냈다. 청렴하고 강직한 재상으로 명망이 높았다.
196. 정인홍(鄭仁弘, 1535

162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조식(曺植)의 제자로 북인(北人)의 영수였다. 광해군 때 이이첨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나 인조반정 후 처형되었다.
197. 응견(鷹犬): 매(鷹)와 개(犬). 남에게 고용되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을 비유한다.
198. 탑전(榻前): 임금이 앉는 평상 앞. 어전(御前)과 같은 의미이다.
199. 합문(閤門): 대궐의 문.
200. 박자(朴榟): 광해군 때의 인물로 추정되나, 자세한 정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201. 묘장(墓莊): 무덤 근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집이나 농장.
202. 《휴와잡찬(休窩雜纂)》: 이덕형의 손자 이소한(李昭漢, 1604~1654)의 문집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서지 정보는 확인이 필요하다. 휴와(休窩)는 이소한의 호이다.


원문:
光海初政, 已有斁滅倫紀之漸。 公於是時獨先事盡言, 欲以防微於未然, 凜爾氷霜之節, 確如山岳之鎭。 惜其言路旣錮, 彼讒滔天, 夜光明月終爲按劍之歸。 自是而朝廷日厖, 大臣之以言而逐者踵相接, 一時稱梧里與弼雲幷公爲昏朝三李, 以其盡忠同而被讒亦同也。【《道東編》。】

번역문:
광해군 초기 정치에 이미 윤리 기강을 무너뜨리는(斁滅倫紀) 조짐이 있었다. 공이 이때 홀로 먼저 나서서 일을 다 말하여, 화근(禍根)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고자(防微於未然) 하였으니, 엄숙하기가 얼음과 서리 같은 절개(凜爾氷霜之節)와 확고하기가 산악(山岳)이 진압하는 듯함(確如山岳之鎭)이었다. 애석하게도 언로(言路)가 이미 막히고 저들의 참소(讒訴)가 하늘에 넘쳐, 야광주(夜光珠)와 밝은 달(明月)이 마침내 칼을 누르는 귀결(按劍之歸)²⁰³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이 날로 어지러워지고(日厖), 대신 중에 말 때문에 쫓겨나는 자가 발꿈치를 이어 서로 뒤따르니, 당시에 오리(梧里, 이원익)와 필운(弼雲, 이항복)²⁰⁴과 공을 아울러 혼조삼이(昏朝三李)라 일컬었으니, 그들이 충성을 다한 것이 같고 참소를 당한 것 또한 같았기 때문이다.【《도동편(道東編)》²⁰⁵에서 인용】

주석:
203. 야광명월종위안검지귀(夜光明月終爲按劍之歸):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편 고사에서 유래. 화씨(和氏)가 얻은 보배로운 옥(夜光)을 왕에게 바쳤으나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여기서는 이덕형의 충언(夜光·明月)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배척당하는(按劍, 칼을 눌러 경계함) 상황을 비유한다.
204. 필운(弼雲): 이항복(李恒福)의 다른 호.
205. 《도동편(道東編)》: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원문:
相國, 宣廟名臣, 至今閭巷傳說中興故事, 必稱漢陰李相國之賢。 又其傳家遺訓, 不但躬行雅謹而已, 必以古聖賢爲師。 君子之敎, 固不越乎禮樂之本, 如是皆可法也。 相國歿五十年, 子孫及事相國者爲我言: “相國雖燕私, 不衣冠不處。 每公退, 對卷終日, 或夜分不寢。” 上議疏箚、詞命諸作甚多, 家無留稿云。【眉叟許穆《題漢陰訓子孫書跋》。】

번역문:
상국(相國, 이덕형)은 선조 때의 이름난 신하로, 지금도 여항(閭巷)²⁰⁶에서 중흥(中興)의 옛이야기를 전설처럼 말할 때 반드시 한음(漢陰) 이 상국(李相國)의 현명함을 일컫는다. 또한 그가 가문에 전한 유훈(遺訓)은 단지 몸소 행실을 우아하고 삼갈(躬行雅謹) 뿐만 아니라, 반드시 옛 성현(聖賢)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군자(君子)의 가르침은 진실로 예악(禮樂)의 근본을 넘어서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본받을 만하다. 상국이 몰(歿)한 지 50년 후에 자손과 상국을 섬겼던 자가 나에게 말하기를, “상국께서는 비록 한가롭게 사사로이(燕私) 계실 때라도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고는 거처하지 않으셨습니다. 매번 공무에서 물러나시면 책을 대하여 종일토록, 혹은 밤이 깊도록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소(上疏)와 차자(箚), 사명(詞命)²⁰⁷ 등 지은 글이 매우 많았으나, 집에 남은 원고(留稿)가 없다고 한다.【미수(眉叟) 허목(許穆)²⁰⁸의 〈한음훈자손서(漢陰訓子孫書)에 대한 발문(跋)〉에서 인용】

주석:
206. 여항(閭巷):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나 거리. 민간을 의미한다.
207. 사명(詞命): 임금이 내리는 명령이나 외교 문서 등 공적인 글.
208.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호는 미수(眉叟). 남인(南人)의 영수였다.


원문:
近代爲大提學者, 李漢陰德馨年三十一, 最少。 時主文缺, 漢陰與金誠一俱以通政被選。 圈點時, 沈右相守慶獨不圈漢陰, 曰: “李某年少在前, 豈有年三十一爲主文者乎? 吾欲其成就也。” 先輩愛惜人才之意如此。 漢陰竟陞授大學士。【《芝峯類說》。】

번역문:
근대에 대제학(大提學)이 된 사람 중에 이한음(李漢陰) 덕형(德馨)이 나이 31세로 가장 어렸다. 당시 주문(主文)²⁰⁹이 공석이었는데, 한음이 김성일(金誠一)²¹⁰과 함께 통정대부(通政大夫)²¹¹로서 선발되었다. 권점(圈點)²¹²을 할 때, 우상(右相) 심수경(沈守慶)²¹³만이 유독 한음에게 권점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나이가 젊어 앞날이 창창한데, 어찌 나이 31세에 주문이 되는 자가 있겠는가? 나는 그가 더욱 크게 성공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선배가 인재를 아끼는 뜻이 이와 같았다. 한음은 마침내 승진하여 대학사(大學士)²¹⁴에 제수되었다.【《지봉유설(芝峯類說)》²¹⁵에서 인용】

주석:
209. 주문(主文): 문과(文科) 시험을 주관하는 시험관. 대제학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210. 김성일(金誠一, 1538

159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학봉(鶴峯).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병사했다.
211.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당상관의 품계.
212. 권점(圈點): 후보자의 이름 위에 둥근 점(圈)을 찍어 추천하거나 선발하는 방식.
213. 심수경(沈守慶, 1516

1599): 조선 중기의 문신. 우의정(右議政, 右相)을 지냈다.
214. 대학사(大學士): 대제학(大提學)의 다른 이름.
215.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호는 지봉(芝峯).

이항복(李恒福)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恒福【文忠公。】
字子常, 號白沙, 慶州人。 嘉靖丙辰生。 庚辰文科。 薦翰苑, 賜暇湖堂, 選入玉堂爲正字, 歷吏郞、舍人、典翰、直提學。 庚寅, 陞承旨, 策平難勳。 壬辰, 特陞吏參, 封鰲城君, 尋特授刑判, 移兵判。 乙未, 拜吏判, 典文衡。 戊戌拜相, 進爵府院君, 以陳奏使如京。 庚子, 拜領相, 策扈聖元勳。 丁巳, 獻議被謫。 戊午, 卒於北靑配所, 年六十三。

번역문:
이항복(李恒福)【문충공(文忠公)¹이다.】
자는 자상(子常)이고, 호는 백사(白沙)이며, 경주(慶州) 사람이다. 명(明) 가정(嘉靖) 병진년(1556)에 태어났다. 경진년(1580, 선조 13)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한원(翰苑)²에 추천되고 호당(湖堂)³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⁴하였으며, 옥당(玉堂)⁵에 선발되어 정자(正字)⁶가 되었고, 이조 정랑(吏曹正郎)⁷, 사인(舍人)⁸, 전한(典翰)⁹, 직제학(直提學)¹⁰을 역임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승지(承旨)¹¹로 승진하였고, 평난공신(平難功臣)¹²에 책록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특별히 이조 참의(吏曹參議)¹³로 승진하고 오성군(鰲城君)¹⁴에 봉해졌으며, 곧 특별히 형조 판서(刑曹判書)¹⁵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판서(兵曹判書)¹⁶로 옮겼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이조 판서(吏曹判書)¹⁷에 임명되고 문형(文衡)¹⁸을 관장하였다. 무술년(1598, 선조 31) 재상(우의정)¹⁹에 임명되고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²⁰으로 작위가 올랐으며, 진주사(陳奏使)²¹로 명나라 수도[京]²²에 다녀왔다. 경자년(1600, 선조 33)에 영의정(領議政)²³에 임명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원훈(元勳)²⁴에 책록되었다.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건의(獻議)²⁵하였다가 유배되었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북청(北靑) 유배지(配所)²⁶에서 졸(卒)하니, 나이 63세였다.

주석:

  1. 문충공(文忠公): 이항복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충(忠)은 위험에 임하여 절개를 지킴(危身奉上) 등의 의미를 갖는다.
  2.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의 별칭. 임금의 교서(敎書) 등을 짓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3. 호당(湖堂): 조선 시대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또는 그 장소(독서당). 동호(東湖, 현재의 옥수동 부근)에 위치하여 호당이라 불렸다.
  4.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것. 문신에게 큰 영예로 여겨졌다.
  5.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6. 정자(正字): 홍문관, 교서관 등에 속한 정9품 문관직. 교서(校書)의 일을 맡았다.
  7. 이조 정랑(吏曹正郎):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이조는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핵심 부서이며, 정랑은 전랑(銓郎)의 하나로 인사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8. 사인(舍人): 여러 관청에 속했던 관직명. 여기서는 예문관 검열(檢閱) 또는 승정원 주서(注書) 등을 거쳤음을 의미할 수 있다.
  9. 전한(典翰):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직. 부제학(副提學) 다음가는 직위이다.
  10. 직제학(直提學): 홍문관 또는 예문관의 정3품 당상관 직. 제학(提學)을 보좌하는 역할이다.
  11.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직.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왕의 핵심 측근이었다. 도승지(都承旨),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의 6승지가 있었다.
  12. 평난공신(平難功臣):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평정한 공신에게 내린 공신호. 이항복은 당시 사건 수습 과정에 참여하여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3.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조의 정3품 당상관 직. 판서, 참판 다음가는 직위이다.
  14. 오성군(鰲城君): 이항복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조선 시대 공신이나 왕족에게 주던 봉작(封爵)이다.
  15. 형조 판서(刑曹判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형조는 법률, 소송, 노비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16. 병조 판서(兵曹判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병조는 무관의 인사, 군무, 병기, 병선, 역마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17.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핵심 직책이다.
  18.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 및 문풍(文風)을 관장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보통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과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겸임하며 문단과 학계의 최고 권위를 상징했다. 이항복은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했다.
  19. 배상(拜相): 재상에 임명됨. 이때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20. 부원군(府院君): 조선 시대 정1품 문무관 또는 왕비의 아버지, 공신 등에게 주던 작위. 이항복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21. 진주사(陳奏使): 조선 시대에 중국 황제에게 특정 사안을 아뢰기 위해 보내던 임시 사절. 이항복은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22. 경(京): 경사(京師).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23. 영의정(領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최고 재상직이다.
  24. 호성공신(扈聖功臣) 원훈(元勳):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책록된 공신. 이항복은 호성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원훈은 으뜸가는 공신이라는 뜻이다.
  25. 헌의(獻議): 의견을 올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에 반대하는 의견을 올린 것을 가리킨다. 이로 인해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되었다.
  26. 배소(配所): 귀양살이하는 곳. 유배지.

원문:
八歲, 始授書, 聰悟絶人。 參贊公【公父夢亮。】命以劍琴作騈句, 公應聲曰: “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 聞者知其將大成。

번역문:
8세에 처음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고 깨달음이 남보다 뛰어났다. 참찬공(參贊公)【공의 아버지 몽량(夢亮)²⁷이다】이 검(劍)과 금(琴)을 가지고 변구(騈句)²⁸를 지으라고 명하자, 공이 소리에 맞춰 응답하여 말하였다. “칼에는 장부(丈夫)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에는 천고(千古)의 소리가 감춰져 있네.” 듣는 자들이 그가 장차 크게 성공할 것을 알았다.

주석:
27. 몽량(夢亮): 이몽량(李夢亮, 1520-1582). 이항복의 아버지. 호는 동암(東巖). 관직은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사후 아들의 현달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찬(參贊)은 의정부의 정2품 관직인데, 여기서는 찬성을 지칭한 듯하다.
28. 변구(騈句): 변려체(騈儷體) 문장의 대구(對句). 두 구절이 짝을 이루어 글자 수, 품사, 의미 등이 서로 대칭되도록 짓는 방식이다.


원문:
十二三時, 已負氣好義, 有疎財濟物之志。 嘗着新襦, 隣兒有衣弊者見而欲之, 公卽解而與之, 又脫所着屨以與人, 跣而歸。 崔夫人欲試其意, 陽怒呵之, 公對曰: “人有欲者, 不忍不與。” 崔夫人歎曰: “此異事也。”【竝谿谷張維撰行狀。】

번역문:
12~13세 때, 이미 기개(氣槪)가 있고 의(義)를 좋아하여, 재물을 소홀히 여겨 남을 구제하려는(疎財濟物)²⁹ 뜻이 있었다. 일찍이 새 저고리[襦]³⁰를 입었는데, 이웃 아이 중에 옷이 해진 아이가 보고서 그것을 탐내자, 공이 즉시 벗어서 그에게 주었고, 또 신고 있던 신[屨]을 벗어 남에게 주고 맨발[跣]³¹로 돌아왔다. 최부인(崔夫人)³²이 그의 뜻을 시험하고자 거짓으로 노하며 꾸짖자, 공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차마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최부인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는 기이한 일이다.”【이상은 계곡(谿谷) 장유(張維)³³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29. 소재제물(疎財濟物):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남(物)을 구제함.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남을 돕는 의로운 성품을 나타낸다.
30. 유(襦): 짧은 저고리.
31. 선(跣): 맨발.
32. 최부인(崔夫人): 이항복의 어머니 강릉 최씨(江陵崔氏). 최담(崔湛)의 딸이다.
33.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이항복의 문인이다. 그의 문집 《계곡집(谿谷集)》에 이항복의 행장(行狀, 고인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이 실려 있다.


원문:
善角抵, 喜蹴踘。 會大街分曹賈勇, 諸少年莫敢埒。 大夫人聞而切責, 公泣受敎, 卽其日已之。 折節讀書, 痛自檢束。【月沙李廷龜撰墓誌。】

번역문:
각저(角抵)³⁴를 잘하고 축국(蹴踘)³⁵을 좋아하였다. 마침 큰 거리에서 편을 나누어 용맹을 겨루는데(分曹賈勇), 여러 소년들이 감히 필적하지 못하였다. 대부인(大夫人)³⁶께서 듣고 간절히 꾸짖으시니, 공이 울면서 가르침을 받고 즉시 그날로 그만두었다. 절개(節槪)를 꺾고 독서에 힘쓰며, 자신을 통렬히 검속(檢束)하였다.【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³⁷가 지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34. 각저(角抵): 씨름.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힘겨루기 놀이.
35. 축국(蹴踘): 공차기 놀이.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며,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36. 대부인(大夫人):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최부인을 가리킨다.
37.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이항복의 절친한 친구이다. 그의 문집 《월사집(月沙集)》에 이항복의 묘지명(墓誌銘, 죽은 사람의 행적을 돌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 글)이 실려 있다.


원문:
壬午六月, 上臨筵謂大提學李珥曰: “予欲講《綱目》, 卿可預選才臣俾專講讀, 以備顧問。” 珥以奉敎李恒福、正字李德馨、檢閱吳億齡、修撰李廷立、奉敎李嶸應選。 上各賜內府秘藏《綱目》, 又命五臣除吏文、漢語、試射等諸肄習, 俾專文事。【《宣廟寶鑑》。】

번역문:
임오년(1582, 선조 15) 6월, 상(上)께서 경연(經筵)³⁸에 임하여 대제학(大提學)³⁹ 이이(李珥)⁴⁰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강목(綱目)》⁴¹을 강(講)하고자 하니, 경은 미리 재능 있는 신하를 선발하여 오로지 강독(講讀)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도록 하라.” 이이가 봉교(奉敎)⁴² 이항복, 정자(正字) 이덕형(李德馨)⁴³, 검열(檢閱)⁴⁴ 오억령(吳億齡), 수찬(修撰)⁴⁵ 이정립(李廷立), 봉교(奉敎) 이용(李嶸)을 선발하여 응하게 하였다. 상께서 각각 내부(內府)⁴⁶에 비밀리에 소장된 《강목》을 하사하시고, 또 다섯 신하에게 이문(吏文)⁴⁷, 한어(漢語)⁴⁸, 시사(試射)⁴⁹ 등 여러 익히는 과목을 면제하여 오로지 학문[文事]에만 전념하게 하였다.【《선묘보감(宣廟寶鑑)》⁵⁰에서 인용】

주석:
38.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39. 대제학(大提學):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으뜸 벼슬. 문형(文衡)을 관장하는 학계와 문단의 최고 영예직이다.
40.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 정치가. 호는 율곡(栗谷).
41. 《강목(綱目)》: 주희(朱熹)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삭하여 편찬한 역사책. 정식 명칭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다. 성리학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강(綱, 큰 줄기)과 목(目,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 사실을 기록하고 포폄(褒貶, 칭찬과 비판)을 분명히 하였다. 제왕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42. 봉교(奉敎): 예문관의 정7품 관직. 임금의 명령이나 교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43.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가. 호는 한음(漢陰). 이항복과 절친한 친구로,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로 유명하다.
44. 검열(檢閱): 예문관의 정9품 관직. 서적 교정 및 교서 작성 보조 등의 일을 맡았다.
45. 수찬(修撰): 춘추관(春秋館)의 정6품 관직. 또는 홍문관의 정6품 관직. 역사 기록 편찬 또는 경연 참여 등의 일을 맡았다.
46. 내부(內府): 궁궐 안의 창고. 왕실 재물을 보관하던 곳.
47. 이문(吏文): 관리들이 실무에서 사용하는 공문서 작성법이나 문체.
48. 한어(漢語): 중국어. 당시 사신 왕래 등으로 인해 외교관이나 관련 관리들에게 필요했다.
49. 시사(試射): 활쏘기 시험. 문관도 기본적인 무예 소양을 갖추어야 했다.
50. 《선묘보감(宣廟寶鑑)》: 선조(宣祖) 시대의 정치적 사적과 모범이 될 만한 언행을 모아 편찬한 책. 후대 왕들의 귀감이 되도록 한 것이다.


원문:
甲申, 論大司諫李潑朋比, 大忤當路, 遂引疾三告。 宣廟下敎曰: “李某不可離玉堂, 其令斷來章。”

번역문:
갑신년(1584, 선조 17), 대사간(大司諫)⁵¹ 이발(李潑)⁵²이 붕당(朋黨)을 지어 편을 가른다고 논핵(論劾)하여 당시 권세 있는 자[當路]⁵³의 뜻을 크게 거스르니, 마침내 병을 핑계로 세 번이나 사직을 아뢰었다. 선조께서 교서(敎書)를 내려 말씀하셨다. “이모(李某, 이항복)는 옥당(玉堂)⁵⁴을 떠나서는 안 되니, (사직) 상소를 올리지 못하게 하라.”

주석:
51.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임금에게 간쟁(諫諍)하고 신료들을 탄핵하는 역할을 했다.
52. 이발(李潑, 1544-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東人)의 핵심 인물.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과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아 옥사했다.
53. 당로(當路): 길목을 막고 섬. 권세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 즉 집권 세력을 가리킨다. 당시 동인이 정권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항복은 서인(西人) 이이(李珥)의 문인이었기에 동인의 공격을 받았다.
54.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원문:
己丑, 鄭汝立謀叛事發, 上親臨鞫囚。 公以問事郞入侍, 明敏稱旨, 宣廟每名呼公曰: “使李某傳說。” 同僚拱手不敢望。 每大臣議讞, 公周旋其間, 務從平反, 所全活甚多。 嘗侍講筵, 宣廟特召公前, 道問事時事, 而亟稱高才高才。

번역문:
기축년(1589, 선조 22), 정여립(鄭汝立)⁵⁵의 모반 사건이 발생하자, 상께서 친히 임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셨다. 공이 문사랑(問事郞)⁵⁶으로 입시(入侍)하였는데, 명민(明敏)하여 임금의 뜻에 맞으니, 선조께서 매번 공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시기를, “이모(李某)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라”고 하셨다. 동료들이 공수(拱手)⁵⁷하고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다. 매번 대신(大臣)들이 죄를 심의(議讞)⁵⁸할 때마다 공이 그 사이에서 주선(周旋)하며 힘써 공평하게 처리하여 혐의를 벗겨주려고(平反)⁵⁹ 노력하여,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일찍이 강연(講筵)⁶⁰에 모셨을 때, 선조께서 특별히 공을 앞으로 불러, 문사랑(問事) 때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매우 ‘고재(高才)로다, 고재로다’⁶¹라고 칭찬하셨다.

주석:
55. 정여립(鄭汝立,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처음에는 서인에 속했으나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李珥) 등을 비판했다. 1589년 모반을 꾀했다는 고변으로 인해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 관련자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56. 문사랑(問事郞): 국문(鞫問)할 때 임금의 말을 죄인에게 전달하고 죄인의 말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낭관(郎官). 주로 예문관 관원이 맡았다.
57. 공수(拱手): 두 손을 마주 잡고 공경의 뜻을 표하는 것.
58. 의얼(議讞): 죄인의 죄상을 의논하고 판결함.
59. 평반(平反): 죄가 없거나 가벼운 사람의 혐의를 벗겨 주거나 감형(減刑)해 주는 것.
60. 강연(講筵): 경연(經筵) 또는 서연(書筵, 왕세자 교육) 등의 강학(講學) 자리.
61. 고재(高才):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사람.


원문:
辛卯, 爲戶曹參議, 精核要會, 節縮宂費, 纔閱月, 庫藏充牣。 判書尹公斗壽大器之, 歎曰: “文翰士乃能辦錢穀, 眞通才也。”【竝行狀。】

번역문:
신묘년(1591, 선조 24)에 호조 참의(戶曹參議)⁶²가 되어, 요긴한 회계(要會)⁶³를 정밀하게 심사하고 불필요한 비용(宂費)을 절약하고 줄이니, 겨우 한 달 만에 창고[庫藏]가 가득 찼다. 판서(判書) 윤공 두수(尹公斗壽)⁶⁴가 그를 크게 기국(器局)이 있다고 여기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문한(文翰)⁶⁵ 선비가 이에 능히 전곡(錢穀)⁶⁶ 업무를 처리하니, 참으로 통달한 인재(通才)로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62. 호조 참의(戶曹參議): 호조(戶曹)의 정3품 당상관 직. 호조는 국가의 재정, 조세, 호구 등을 담당하는 부서이다.
63. 요회(要會): 중요한 회계 장부나 재정 관련 사항.
64.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가. 호는 오음(梧陰). 서인의 중진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다.
65. 문한(文翰): 문장과 서찰. 문장 짓는 일을 주로 하는 문신을 가리킨다.
66. 전곡(錢穀): 돈과 곡식. 국가 재정을 의미한다. 보통 문신들은 재정 실무에 약하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윤두수가 이항복의 실무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원문:
壬辰, 賊報至, 公夙夜在公, 誓以身殉節。 衙退處外舍, 禁無以家事關我, 病妾求一面訣, 不許。

번역문:
임진년(1592, 선조 25), 적(賊)⁶⁷의 보고가 이르자, 공은 밤낮으로 공무(公務)에 있으며 몸으로 순절(殉節)할 것을 맹세하였다. 관아(衙)에서 퇴청하여 외사(外舍)⁶⁸에 머물면서, 집안일로 나에게 관여하지 말라고 금하였고, 병든 첩(妾)이 한번 만나 작별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주석:
67. 적(賊):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을 가리킨다.
68. 외사(外舍): 바깥채. 관아 근처에 임시로 머물던 숙소일 수 있다. 공무에 전념하기 위해 집과 거리를 둔 것이다.


원문:
去邠日, 天雨夜黑, 百僚未集, 中殿獨與女侍數十人步出仁和門, 公執燭前導。 是夜, 車駕渡臨津, 擔夫皆散, 公步泥淖中召集, 扈行三更達東坡驛。 召公入侍, 且趣召大臣及尹斗壽問計。 公首言: “我國兵力無以當此賊, 唯有西赴乞援天朝耳。” 上曰: “予意本如此。”

번역문:
도성을 떠나 피난[去邠]⁶⁹하던 날,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밤은 어두운데 백관(百僚)이 미처 모이지 못하였고, 중전(中殿)⁷⁰께서 홀로 여시(女侍) 수십 인과 함께 인화문(仁和門)⁷¹을 걸어 나오시니, 공이 촛불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였다. 이날 밤, 어가(車駕)⁷²가 임진강(臨津江)을 건너는데 담부(擔夫)⁷³들이 모두 흩어지자, 공이 진흙탕 속을 걸으며 불러 모아, 호위하여 삼경(三更)⁷⁴에 동파역(東坡驛)⁷⁵에 도착하였다. (상께서) 공을 불러 입시(入侍)하게 하고, 또 재촉하여 대신(大臣) 및 윤두수(尹斗壽)를 불러 계책을 물으셨다. 공이 가장 먼저 말하였다. “우리나라 병력으로는 이 적을 감당할 수 없으니, 오직 서쪽으로 가서 천조(天朝)⁷⁶에 군사를 요청[乞援]할 뿐입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뜻도 본래 이와 같다.”

주석:
69. 거빈(去邠): 빈(豳) 땅을 떠남. 《시경(詩經)》 〈빈풍(豳風)〉에 주(周)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융적(戎狄)의 침입을 피해 빈 땅을 떠나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간 고사에서 유래했다.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성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한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것을 가리킨다.
70. 중전(中殿): 왕비(王妃)를 가리킨다. 당시 왕비는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이다.
71. 인화문(仁和門): 창덕궁(昌德宮)의 서남쪽에 있던 문.
72. 거가(車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의 행차를 의미한다.
73. 담부(擔夫): 짐꾼 또는 가마꾼.
74. 삼경(三更): 밤 시간을 다섯으로 나눈 오경(五更) 중 세 번째.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다.
75. 동파역(東坡驛): 경기도 파주(坡州) 동쪽에 있던 역(驛).
76. 천조(天朝): 하늘의 조정.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원문:
駕至平壤, 敎曰: “李某志慮貞亮, 宜陞擢委以重任。” 俄拜刑曹判書、大司憲。 與漢陰李公德馨入對, 更請亟奏天朝, 又建請三調度管軍興, 以濟天兵糧餉, 再造之業, 實基於此。

번역문:
어가(駕)가 평양(平壤)에 이르자, 교서(敎)를 내려 말씀하셨다. “이모(李某)는 뜻과 생각이 곧고[貞亮] 미더우니, 마땅히 승진시켜 발탁하여 중임(重任)을 맡겨야 한다.” 얼마 후 형조 판서(刑曹判書), 대사헌(大司憲)⁷⁷에 임명되었다.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입대(入對)⁷⁸하여, 거듭 천조(天朝)에 속히 아뢸 것을 청하고, 또 삼도(三道)⁷⁹의 조도(調度)⁸⁰로 군수(軍需)를 관장하여 명나라 군대[天兵]의 양향(糧餉)⁸¹을 돕도록 건의하니, 재조(再造)⁸²의 공업(功業)이 실로 여기에서 기초하였다.

주석:
77.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78. 입대(入對): 임금 앞에 나아가 정사(政事)를 아뢰거나 질문에 답하는 것.
79. 삼도(三道): 당시 왜군의 침입을 덜 받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80. 조도(調度): 군수 물자를 조달하고 관리하는 것.
81. 양향(糧餉): 군대의 식량과 군수품.
82. 재조(再造): 거의 망하게 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움.


원문:
公請赴遼東求援, 漢陰亦請自往。 沈公忠謙言: “李某方判中兵, 不可去。” 遂遣德馨, 公送至西門, 解驂與之, 曰: “兵不出, 君當索我於重獲。” 漢陰曰: “兵不出, 吾當棄骨於盧龍。” 聞者易容。

번역문:
공이 요동(遼東)⁸³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겠다고 청하고, 한음(漢陰) 또한 스스로 가겠다고 청하였다. 심공 충겸(沈公忠謙)⁸⁴이 말하였다. “이모(李某)는 바야흐로 중병(中兵)⁸⁵을 맡고 있으니 갈 수 없습니다.” 마침내 이덕형을 파견하였는데, 공이 서문(西門)까지 전송하며 자신의 말[驂]⁸⁶을 풀어 주면서 말하였다. “군대가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마땅히 중죄인[重獲]⁸⁷ 속에서 나를 찾으시오.” 한음이 말하였다. “군대가 나오지 않으면, 나는 마땅히 노룡(盧龍)⁸⁸에서 뼈를 버릴 것이오.” 듣는 자들이 얼굴빛이 변하였다.

주석:
83. 요동(遼東): 중국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 당시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관할하던 지역으로, 조선에서 명나라로 가는 관문이었다.
84. 심충겸(沈忠謙, 1545-159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만사(晩沙). 서인의 일원. 임진왜란 때 병조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며 선조를 호종했다.
85. 중병(中兵):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가리킨다. 오행(五行)에 따라 중앙을 맡은 병조라는 의미이다.
86. 참(驂): 멍에 참. 수레를 끄는 세 마리 말 중 곁말. 여기서는 자신이 타던 말을 의미한다.
87. 중획(重獲): 거듭 잡힌 자. 중죄인을 의미한다. 구원병을 데려오지 못하면 자신은 죄인이 되어 옥에 갇힐 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를 나타낸다.
88. 노룡(盧龍):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지명. 산해관(山海關) 부근을 가리킨다. 명나라 수도로 가는 길목이다. 구원병을 얻지 못하면 그곳에서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나타낸다.


원문:
至義州, 人民驚散。 公請修掃公廨, 示久駐意。 數日, 稍稍還集, 得成行宮貌樣。 公又言: “漢南諸路, 必謂車駕已渡遼, 煽動思亂, 宜急發使諭以起兵勤王。” 自此朝廷命令得通於湖、嶺, 官軍、義兵頗修奔問, 國勢賴振。【竝墓誌。】

번역문:
의주(義州)에 이르자, 인민(人民)들이 놀라 흩어졌다. 공이 공해(公廨)⁸⁹를 수리하고 청소하여 오래 머물[久駐] 뜻을 보이기를 청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점점 다시 모여들어 행궁(行宮)⁹⁰의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공이 또 말하였다. “한양 이남[漢南]의 여러 지방에서는 필시 어가(車駕)가 이미 요동(遼東)으로 건너갔다고 여겨, 선동하여 난리를 일으킬 생각을 할 것이니, 마땅히 급히 사신을 보내 군대를 일으켜 왕을 위해 힘쓰라[起兵勤王]⁹¹고 유시(諭示)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조정의 명령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에 통하게 되어, 관군(官軍)과 의병(義兵)들이 자못 정비하여 달려와 문안하니, 국세(國勢)가 이에 힘입어 떨쳐졌다.【이상은 묘지에서 인용】

주석:
89. 공해(公廨): 관아(官衙) 건물.
90. 행궁(行宮):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
91. 기병근왕(起兵勤王): 군사를 일으켜 왕을 위해 힘씀. 임금이 위난에 처했을 때 신하나 백성들이 군사를 일으켜 돕는 것을 말한다.


원문:
先是, 遼左訛言, 謂我導倭入寇。 兵部尙書石星遣指揮黃應暘來覘, 應暘初頗疑我, 請見倭書。 公在都日, 已慮及此, 自齎辛卯倭酋嫚書以來, 及是以示應暘。 應暘疑大釋, 至拊膺大慟, 歸具以實報, 東援之議遂決。

번역문:
이에 앞서 요동(遼東) 지방[遼左]⁹²에 와언(訛言)⁹³이 있어, 우리나라가 왜(倭)를 인도하여 침입하게 했다고 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尙書)⁹⁴ 석성(石星)⁹⁵이 지휘(指揮)⁹⁶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엿보게[覘] 하였는데, 황응양이 처음에는 자못 우리를 의심하여 왜의 서신[倭書]을 보기를 청하였다. 공이 도성[都]에 있을 때 이미 이를 염려하여, 신묘년(1591) 왜의 추장[倭酋]⁹⁷이 보낸 오만한 서신[嫚書]⁹⁸을 직접 가지고 왔었는데, 이때 이르러 이것을 황응양에게 보여주었다. 황응양의 의심이 크게 풀려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기에 이르렀고, 돌아가 사실대로 상세히 보고하니, 동쪽을 구원[東援]하자는 논의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주석:
92. 요좌(遼左): 요동(遼東)을 가리킨다.
93. 와언(訛言): 그릇된 소문. 유언비어.
94. 병부상서(兵部尙書): 명나라 병부(兵部)의 장관. 병부는 국방,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95. 석성(石星, ?-1599): 명나라의 문신. 임진왜란 당시 병부상서로 조선 파병을 결정하고 이여송(李如松)을 제독(提督)으로 추천하는 등 조선을 적극 지원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심유경(沈惟敬)의 강화 협상이 실패하자 책임을 지고 투옥되어 옥사했다.
96. 지휘(指揮): 명나라의 군관직.
97. 왜추(倭酋): 왜의 우두머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가리킨다.
98. 만서(嫚書): 오만한 내용의 서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니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는 요구를 담아 보낸 국서를 말한다. 이항복이 이 국서를 보여줌으로써 조선이 일본과 공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략 요구를 받았음을 증명한 것이다.


원문:
天將祖承訓、史儒將兵三千先至, 公曰: “祖將躁而無謀, 軍必敗。” 進兵平壤, 果大敗。 提督李如松率五萬兵東渡, 公見行師有紀律, 白上曰: “師必有功。 但幕下鄭同知、趙知縣二人用事, 異日沮大計者, 必是夫也。” 癸巳, 提督進擊平壤賊克之。 追賊至碧蹄, 遇覆不利, 提督氣挫, 遂爲和議所撓。 鄭、趙實主其謀, 公言果驗矣。

번역문:
명나라 장수[天將] 조승훈(祖承訓)과 사유(史儒)가 군사 3천을 거느리고 먼저 이르자, 공이 말하였다. “조 장수(祖將)는 조급하고 모략이 없으니, 군대가 반드시 패할 것이다.” 평양으로 진격하였다가 과연 크게 패하였다. 제독(提督)⁹⁹ 이여송(李如松)¹⁰⁰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건너오자, 공이 군대의 행진[行師]에 기율(紀律)이 있음을 보고 상께 아뢰었다. “군대가 반드시 공(功)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막하(幕下)의 정 동지(鄭同知)¹⁰¹와 조 지현(趙知縣)¹⁰² 두 사람이 실권을 행사하니[用事], 뒷날 큰 계획을 저지(沮止)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들일 것입니다.” 계사년(1593, 선조 26), 제독이 평양의 적을 진격하여 승리하였다. 적을 추격하여 벽제(碧蹄)¹⁰³에 이르렀다가 복병(覆兵)을 만나 불리해지자, 제독의 기세가 꺾여 마침내 화의(和議)¹⁰⁴에 흔들리게 되었다. 정씨와 조씨가 실로 그 계책을 주도하였으니, 공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주석:
99. 제독(提督): 명나라 때 군사 지휘관의 직함 중 하나. 이여송은 정동제독(征東提督)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파병된 명군을 총지휘했다.
100. 이여송(李如松, 1549-1598): 명나라의 장수. 요동 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梁)의 아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01. 정 동지(鄭同知): 정문부(鄭文孚)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또는 이여송 막하의 중국인 참모일 수도 있다. 동지(同知)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 여러 관직에 쓰였다.
102. 조 지현(趙知縣):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명나라 군대의 참모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 지현(知縣)은 현(縣)의 수령이다. 정씨와 조씨가 화의를 주장하여 이여송의 적극적인 공세를 막았다는 의미이다.
103. 벽제(碧蹄): 경기도 고양(高陽)에 있던 역(驛). 벽제관(碧蹄館). 1593년 1월, 평양에서 패퇴한 일본군을 추격하던 이여송의 명군이 이곳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크게 패하였다.
104. 화의(和議): 전쟁 당사국 간의 화평을 위한 협상. 벽제관 패전 이후 명나라는 일본과 강화 협상을 추진하게 된다.


원문:
世子在洪州, 欲移駐保寧之水營, 使公往審之。 公還跪對以爲不可駐。 或疑之, 公曰: “永保亭勝槩冠湖中, 恐少主居之, 啓異日侈蕩心。” 識者服其遠識。

번역문:
세자(世子)¹⁰⁵가 홍주(洪州)¹⁰⁶에 있을 때, 보령(保寧)의 수영(水營)¹⁰⁷으로 옮겨 머물고자 하여, 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공이 돌아와 꿇어앉아 대답하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어떤 이가 이를 의심하자, 공이 말하였다. “영보정(永保亭)¹⁰⁸의 뛰어난 경치[勝槩]가 호서(湖西) 지방¹⁰⁹에서 으뜸이니, 어린 주군[少主]께서 그곳에 거처하시면 뒷날 사치하고 방탕한 마음[侈蕩心]을 일으킬까 염려됩니다.” 식견 있는 자들이 그의 원대한 식견[遠識]에 감복하였다.

주석:
105. 세자(世子): 당시 왕세자는 광해군(光海君)이었다. 임진왜란 중 분조(分朝)를 이끌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활약했다.
106. 홍주(洪州): 현재의 충청남도 홍성(洪城).
107. 수영(水營): 수군(水軍)의 진영(鎭營). 충청 수영(忠淸水營)을 가리킨다.
108. 영보정(永保亭): 충청 수영 안에 있던 정자.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109. 호중(湖中): 호서(湖西) 지방, 즉 충청도를 가리킨다.


원문:
皇朝遣使冊封日本酋, 副使楊方亨請得公伴接使, 上許之。 楊使敬重公甚至, 常曰: “東方有此人物, 何可以外國輕之?”

번역문:
황조(皇朝)¹¹⁰에서 사신을 보내 일본의 추장[日本酋]¹¹¹을 책봉(冊封)¹¹²하게 되었는데, 부사(副使) 양방형(楊方亨)¹¹³이 공을 반접사(伴接使)¹¹⁴로 삼기를 청하자 상께서 허락하셨다. 양 사신은 공을 지극히 경중(敬重)하여 항상 말하였다. “동방(東方)¹¹⁵에 이러한 인물이 있으니, 어찌 외국(外國)이라고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주석:
110. 황조(皇朝): 황제의 조정.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111. 일본추(日本酋): 일본의 우두머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가리킨다.
112. 책봉(冊封): 명나라 황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하는 것. 명나라는 임진왜란 강화 조건의 하나로 히데요시의 책봉을 추진했으나, 히데요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113. 양방형(楊方亨): 명나라의 관료. 책봉 부사로 조선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가려 했으나, 정유재란 발발 등으로 인해 실제 일본으로 가지는 못했다.
114. 반접사(伴接使): 조선 시대에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원접사(遠接使)라고도 한다.
115. 동방(東方): 동쪽 나라. 조선을 가리킨다.


원문:
丁酉, 楊御使鎬經理軍務, 檄召戶、兵、工三曹官, 來候境上。 公往迓于九連城, 應對悉中機宜。 公自壬辰來, 凡五判兵曹, 屬大賊充斥, 天兵水陸輳集, 凡事關軍旅者, 靡不歸之於本兵。 公隨宜措處, 沛然有餘地, 恒蓄羨布萬匹, 以備急時之用。 楊經理服公才猷, 每遇事之難者, 必曰: “須李尙書。”【竝行狀。】

번역문:
정유년(1597, 선조 30), 어사(御史)¹¹⁶ 양호(楊鎬)¹¹⁷가 군무(軍務)를 경리(經理)¹¹⁸하면서, 격문(檄文)¹¹⁹을 보내 호조(戶曹), 병조(兵曹), 공조(工曹)의 삼조(三曹) 관리를 불러 국경[境上]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공이 구련성(九連城)¹²⁰으로 가서 맞이하였는데, 응대(應對)가 모두 기미(機微)와 마땅함[宜]에 맞았다. 공은 임진년 이래로 무릇 다섯 차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맡았는데, 큰 적[大賊]이 가득하고 명나라 군대[天兵]가 수륙(水陸)으로 모여드는 때를 당하여, 무릇 군사[軍旅]에 관련된 일은 병조[本兵]¹²¹에 귀속되지 않음이 없었다. 공이 마땅함을 따라 조처(措處)함에 넘쳐흐르듯 여유가 있었으며(沛然有餘地), 항상 여분의 베[羨布]¹²² 만 필(匹)을 축적하여 급할 때의 쓰임에 대비하였다. 양 경리(楊經理)가 공의 재주와 지략[才猷]에 감복하여, 매번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말하였다. “모름지기 이 상서(李尙書)¹²³가 필요하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116. 어사(御史): 감찰을 담당하던 관직. 명나라에서는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파견하여 지방 행정이나 군무를 감독하게 했다.
117. 양호(楊鎬, ?-1629): 명나라의 문신, 장수. 정유재란 때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의 직책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명군을 지휘했다. 울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파직되었다.
118. 경리(經理): 명나라 때 특정 지역의 군사 및 행정 업무를 총괄하던 임시 직책.
119. 격(檄): 격문(檄文). 관청에서 명령이나 포고를 위해 내는 글.
120. 구련성(九連城): 압록강 북쪽, 현재 중국 단둥(丹東) 시 진강산성(鎭江山城)으로 추정되는 곳. 당시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121. 본병(本兵): 병조(兵曹)를 가리킨다.
122. 선포(羨布): 여유분의 베. 비축 물자를 의미한다.
123. 상서(尙書): 원래 중국의 관직명이나, 조선에서는 판서(判書)를 높여 부르는 말로도 쓰였다. 여기서는 병조 판서 이항복을 가리킨다.


원문:
贊畫丁應泰搆誣我國, 上奏參劾, 宣廟震驚, 閉閤不視事。 群議大臣當往陳辨, 首相柳公成龍不卽請行。 宣廟特拜公右議政, 爲陳奏正使。 疾馳進奏, 皇帝竝下應泰疏, 命五府、六部、九卿、科道一倂看議來說。 公與一行諸官日詣東閤, 操文陳說, 辭語剴切, 多官聳歎。 覆奏痛湔國恥。

번역문:
찬획(贊畫)¹²⁴ 정응태(丁應泰)¹²⁵가 우리나라를 얽어 무고(搆誣)하여, 상주(上奏)하여 참핵(參劾)¹²⁶하니, 선조께서 크게 놀라 문을 닫고[閉閤] 정사를 보지 않으셨다. 여러 의논이 대신(大臣)이 마땅히 가서 진술하고 변명[陳辨]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수상(首相)¹²⁷ 유공 성룡(柳公成龍)¹²⁸이 즉시 가기를 청하지 않았다. 선조께서 특별히 공을 우의정(右議政)¹²⁹에 임명하여 진주정사(陳奏正使)¹³⁰로 삼으셨다. 질치(疾馳)하여 나아가 아뢰니, 황제(皇帝)¹³¹가 정응태의 상소[疏]를 아울러 내려, 오부(五府)¹³², 육부(六部)¹³³, 구경(九卿)¹³⁴, 과도(科道)¹³⁵에게 명하여 일제히 살펴보고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공이 일행(一行)의 여러 관리들과 함께 날마다 동합(東閤)¹³⁶에 나아가, 글을 지어 진술하고 설명하는데 말[辭語]이 절실하고 간절[剴切]하니, 많은 관리들이 놀라 감탄하였다. 복주(覆奏)¹³⁷하여 나라의 치욕[國恥]을 통쾌하게 씻었다.

주석:
124. 찬획(贊畫): 명나라 때 군무(軍務)를 보좌하던 임시 관직.
125. 정응태(丁應泰): 명나라의 문신. 만력제(萬曆帝) 때 병부급사중(兵部給事中)으로 있으면서, 조선이 일본과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무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항복의 변론으로 그의 무고가 밝혀져 파직되었다.
126. 참핵(參劾): 죄상을 들어 탄핵함.
127.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128.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서애(西厓).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129.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재상.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자리이다.
130. 진주정사(陳奏正使): 진주사(陳奏使)의 정사(正使).
131. 황제(皇帝): 명나라 만력제(萬曆帝)를 가리킨다.
132. 오부(五府): 명나라의 최고 군사 기관인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가리킨다.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 전군(前軍), 후군(後軍)의 다섯 도독부이다.
133. 육부(六部): 명나라의 중앙 행정 기관인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여섯 부서.
134. 구경(九卿): 명나라의 주요 중앙 관청의 장관들을 통칭하는 말. 시대에 따라 지칭하는 관직이 조금씩 달랐다.
135. 과도(科道): 육과급사중(六科給事中)과 도어사(都御史)를 아울러 이르는 말. 감찰 및 간쟁 기능을 담당했다.
136. 동합(東閤): 명나라 때 내각(內閣) 대학사(大學士)들이 사무를 보던 곳으로 추정된다. 또는 예부(禮部) 등 관련 관청을 의미할 수도 있다.
137. 복주(覆奏): 신하가 올린 상소나 보고에 대해 황제가 다시 회답하거나 처리 결과를 알리는 것. 여기서는 명나라 조정에서 정응태의 무고를 밝히고 조선의 입장을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원문:
時議政柳相成龍主和, 公上章自劾, 以爲曾贊和議, 不敢倖免, 遂引疾遞。 宣廟敎曰: “與人同事, 終乃反覆者, 李某之罪人也。”【竝墓誌。】

번역문:
이때 의정(議政) 유상 성룡(柳相成龍)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자, 공이 상소[章]를 올려 스스로를 탄핵하며, 일찍이 화의를 찬성하였으니 감히 요행히 면할 수 없다고 여겨 마침내 병을 핑계로 체직(遞職)되었다. 선조께서 교서를 내려 말씀하셨다. “남과 함께 일을 도모하다가 마침내 번복하는 자는 이모(李某)의 죄인이다.”¹³⁸【이상은 묘지에서 인용】

주석:
138. 남과 함께 ~ 죄인이다: 이 구절은 해석이 다소 모호하다. 문맥상 이항복이 유성룡의 화의론을 따르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꿔 자劾했음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 역사적 맥락에서는 이항복은 처음부터 주전론(主戰論)에 가까웠고, 유성룡의 화의론이 비판받자 자신도 관련 논의에 참여했음을 들어 책임을 지려 한 것이다. 선조의 발언은 화의를 추진하다 실패한 유성룡이나 명나라 협상단 등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이항복의 자劾을 만류하며 그의 충성심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묘지명의 기록이므로 이항복에게 불리하게 해석될 여지는 적어 보인다.


원문:
壬寅春, 時事大變, 三司論成牛溪渾將追加之罪, 公草箚以爲: “渾負儒林重名, 不可罪。” 會有人承柄臣指, 上疏擊公, 謂公黨鄭相澈。 公遂引告, 箚不果上。 免相就閑, 杜門謝客, 遍讀經傳及濂、洛諸書, 課程甚嚴。 雅性喜山水, 少日多遊中興洞壑。 至是, 每値佳辰, 輒從一二子姪, 匹馬往遊, 吟嘯竟夕而還。

번역문:
임인년(1602, 선조 35) 봄,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삼사(三司)¹³⁹에서 우계(牛溪) 성혼(成渾)¹⁴⁰에게 장차 죄를 추가해야 한다고 논하자, 공이 차자(箚子)¹⁴¹ 초안을 잡아 아뢰기를, “성혼은 유림(儒林)의 중한 명망을 지고 있으니 죄를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병신(柄臣)¹⁴²의 지시를 받들어, 상소를 올려 공을 공격하며 공이 정 상공 철(鄭相公澈)¹⁴³의 당(黨)이라고 하였다. 공이 마침내 사직을 아뢰니, 차자가 끝내 올라가지 못하였다. 재상직에서 면직되어 한가로이 지내며,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경전(經傳) 및 염락(濂洛)¹⁴⁴의 여러 서적을 두루 읽는데 과정(課程)¹⁴⁵이 매우 엄격하였다. 본래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젊은 시절 중흥동(中興洞)¹⁴⁶ 골짜기에서 많이 노닐었다. 이때 이르러 매번 좋은 때[佳辰]를 만나면 문득 한두 명의 자질(子姪)을 데리고 필마(匹馬)로 가서 노닐다가,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불며[吟嘯] 저녁이 다하도록 즐기고 돌아왔다.

주석:
139.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한다.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140.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서인(西人)의 영수 중 한 명. 이이(李珥)와 절친했다. 임진왜란 이후 동인(북인)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141.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의 한 종류. 주로 간단한 사안이나 의견을 개진할 때 사용했다.
142. 병신(柄臣): 정권의 권병(權柄, 권력의 자루)을 잡고 있는 신하. 당시 북인(北人) 세력을 가리킨다.
143.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호는 송강(松江). 서인의 영수. 건저 문제(建儲問題, 세자 책봉 문제)로 실각하고 동인의 탄핵을 받았다. 이항복이 서인 계열로 분류되었기에 함께 공격받은 것이다.
144. 염락(濂洛): 중국 송(宋)나라 성리학(性理學)의 대표 학파. 주돈이(周敦頤, 濂溪)와 정호(程顥)·정이(程頤, 洛陽) 형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리학 서적을 의미한다.
145. 과정(課程): 매일 또는 정기적으로 해야 할 학업의 분량이나 진도.
146. 중흥동(中興洞): 서울 삼청동(三淸洞) 부근의 옛 지명으로 추정된다. 이항복이 젊은 시절 교유하던 장소였을 것이다.


원문:
盜殺宰臣柳熙緖, 賊不得。 捕盜大將邊良傑窮治其獄坐謫, 熙緖子亦杖流。 首相李相德馨疏論忤旨, 遂罷相。 公代李公復相累辭, 有曰: “良傑之貶, 臣心實傷之, 特未及言耳。 德馨卽已言之臣, 臣卽未言之德馨, 罪雖未彰, 何忍匿情?” 章八上, 乃許。

번역문:
도둑이 재신(宰臣) 유희서(柳熙緖)¹⁴⁷를 살해하였는데, 도둑을 잡지 못하였다. 포도대장(捕盜大將)¹⁴⁸ 변양걸(邊良傑)이 그 옥사(獄事)를 철저히 다스리다가 연좌(連坐)되어 좌천되었고, 희서의 아들 또한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수상(首相) 이상 덕형(李相德馨)이 상소를 올려 논박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르니, 마침내 재상직에서 파면되었다. 공이 이공(李公, 이덕형)을 대신하여 다시 재상(영의정)이 되었는데 여러 차례 사양하며 아뢰기를, “양걸(良傑)의 좌천을 신의 마음속으로 실로 애통하게 여겼으나, 다만 미처 말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덕형은 곧 이미 말한 신이고, 신은 곧 아직 말하지 않은 덕형이니, 죄가 비록 드러나지 않았으나 어찌 차마 실정(實情)을 숨기겠습니까?” 상소[章]를 여덟 번 올리니, 이에 허락하셨다.

주석:
147. 유희서(柳熙緖, 1550-1606):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
148. 포도대장(捕盜大將): 포도청(捕盜廳)의 으뜸 벼슬. 종2품. 수도의 치안과 도둑 체포 등을 담당했다. 유희서 살해 사건의 범인을 잡지 못하고 관련자를 무리하게 처벌한 책임을 물어 변양걸이 좌천된 것으로 보인다.


원문:
有金稽者上疏, 請追尊德興大院君, 蓋永慶風之也。 上下其事, 希望之徒爭相傅會, 公議曰: “此事在上行之者, 哀、安、桓、靈; 在下非之者, 周、張、程、朱。” 群議乃定, 事得寢。【竝行狀。】

번역문:
김계(金稽)¹⁴⁹라는 자가 상소를 올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¹⁵⁰을 추존(追尊)¹⁵¹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개 영경(永慶)¹⁵²이 부추긴[風] 것이었다. 상께서 그 일을 아래로 내려보내니, (권세에) 기대는 무리[希望之徒]¹⁵³들이 다투어 서로 부회(傅會)¹⁵⁴하였으나, 공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일은 위에서 이를 행한 자는 애제(哀帝), 안제(安帝), 환제(桓帝), 영제(靈帝)¹⁵⁵이고, 아래에서 이를 그르다고 한 자는 주자(周子), 장자(張子), 정자(程子), 주자(朱子)¹⁵⁶입니다.” 여러 의논이 이에 정해져, 일이 중지되었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149. 김계(金稽):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50.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 이름은 초(岹). 중종(中宗)의 아들이며 선조(宣祖)의 생부이다. 선조가 즉위하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151. 추존(追尊): 임금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죽은 왕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에게 임금의 칭호를 올리는 것. 김계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는 선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와 관련될 수 있다.
152. 영경(永慶): 김경(金絅)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실세였던 유영경(柳永慶)을 지칭할 수도 있다. 유영경은 소북(小北)의 영수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했다.
153. 희망지도(希望之徒):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무리.
154. 부회(傅會): 억지로 끌어다 붙임. 여기서는 대원군 추존 논의에 동조하여 아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155. 애(哀), 안(安), 환(桓), 영(靈): 모두 중국 후한(後漢)의 황제들. 이들은 방계(傍系)에서 제위를 이어받아 생부(生父)를 추존하려는 시도를 했거나 그런 논의가 있었다. 이항복은 이러한 추존이 정당하지 못한 선례임을 지적한 것이다.
156. 주(周), 장(張), 정(程), 주(朱): 송(宋)나라 성리학의 대학자들.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호(程顥)·정이(程頤),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이들은 예법(禮法)과 명분(名分)을 중시하여 부당한 추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을 들어 대원군 추존의 부당함을 강조한 것이다.


원문:
戊申, 樂禍之輩煽訛飛箝, 中外疑惑, 仁弘之疏入矣。 光海襲位, 積疑又甚, 集兵衛闕, 宮門當晝不開。 三司將密啓臨海不軌狀, 諫長來問於公, 公曰: “服喪王子, 形跡未著, 胡遽寘辟?” 其人然公言而亦不能止。 獄將具, 公與首相李公元翼力陳全恩之意, 臨海遂竄喬桐。 言者目爲護逆, 遂爲搢紳間禍本。

번역문:
무신년(1608, 선조 41/광해군 즉위년), 화(禍)를 즐기는 무리들이 헛소문을 부채질하고 비방하는 글[飛箝]¹⁵⁷을 퍼뜨려 조정 안팎[中外]이 의혹에 휩싸였는데, (이)인홍(仁弘)¹⁵⁸의 상소가 들어왔다. 광해군(光海君)이 왕위를 계승하자 쌓인 의심이 또 심하여, 군사를 모아 궁궐을 지키니 궁문이 대낮에도 열리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장차 임해군(臨海君)¹⁵⁹의 불궤(不軌)¹⁶⁰한 상황을 비밀리에 아뢰려 하자, 사간원(司諫院)의 우두머리[諫長]¹⁶¹가 와서 공에게 물으니, 공이 말하였다. “복상(服喪) 중인 왕자가 형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어찌 갑자기 법[辟]¹⁶²에 처하려 하시오?” 그 사람이 공의 말을 옳다고 여겼으나 또한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옥사(獄事)가 장차 갖추어지려 하자, 공이 수상(首相) 이공 원익(李公元翼)¹⁶³과 함께 온전한 은혜[全恩]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을 힘써 진술하여, 임해군이 마침내 교동(喬桐)¹⁶⁴으로 유배되었다. 언관(言官)들이 역적을 보호[護逆]한다고 지목하니, 마침내 사대부[搢紳]¹⁶⁵ 사이의 화근(禍本)이 되었다.

주석:
157. 비검(飛箝): 떠도는 비방이나 무고하는 글. 검(箝)은 함구령을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비방 문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58. 이인홍(李仁弘): 이이첨(李爾瞻)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이첨(1560-1623)은 대북(大北)의 영수로 광해군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여기서는 광해군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상소를 올린 인물로 묘사된다.
159. 임해군(臨海君, 1574-1609): 선조의 맏아들이자 광해군의 형. 성품이 거칠고 행실이 좋지 않아 세자가 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 후 역모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160. 불궤(不軌): 모반이나 역모 등 법도에 어긋나는 행위.
161. 간장(諫長):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을 가리킨다.
162. 벽(辟): 법, 형벌. 여기서는 사형을 의미할 수 있다.
163.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의 문신, 청백리. 호는 오리(梧里). 영의정을 여러 차례 지냈다. 이항복, 이덕형 등과 함께 광해군 초 정국을 이끌었다.
164. 교동(喬桐): 강화도 서쪽에 있는 섬. 고려, 조선 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하나였다.
165. 진신(搢紳): 홀(笏)을 허리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벼슬아치, 즉 사대부 계층을 가리킨다. 임해군 처벌 문제로 조정 내 대립이 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원문:
仁弘上疏, 詆先正晦齋、退溪不當祀文廟。 太學諸生上書訟辨, 仍削仁弘儒籍。 其徒朴汝樑訴之, 光海命禁錮首倡儒, 多士捲堂去。 公聞而愕曰: “亡國之擧也。” 再上箚陳之。 仁弘一隊大銜¹⁶⁶公, 乃以體府兵權太重之說, 必欲陷之死。

번역문:
(이)인홍(仁弘)이 상소를 올려 선정(先正)¹⁶⁷ 회재(晦齋)¹⁶⁸와 퇴계(退溪)¹⁶⁹를 문묘(文廟)¹⁷⁰에 종사(從祀)해서는 안 된다고 비방[詆]하였다. 태학(太學)¹⁷¹의 여러 유생들이 상서(上書)하여 변론하고, 이어서 인홍의 유적(儒籍)¹⁷²을 삭제하였다. 그의 무리 박여량(朴汝樑)이 이를 고소하자, 광해군이 주동한 유생[首倡儒]들을 금고(禁錮)¹⁷³하라고 명하니, 많은 선비들이 권당(捲堂)¹⁷⁴하고 떠나갔다. 공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망국(亡國)의 행위이다.” 다시 차자(箚)를 올려 이를 진술하였다. 인홍의 일파[一隊]가 공에게 크게 원한[銜]¹⁷⁵을 품고, 마침내 체부(體府)¹⁷⁶의 병권(兵權)이 너무 무겁다는 설(說)로써, 반드시 그를 죽음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주석:
166. [주-D002] 銜 : 저본(底本)에는 “어(御)”로 되어 있다. 《월사집(月沙集)・제백사문(祭白沙文)》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함(銜)'은 '원한을 품다'는 의미로 문맥에 더 적합하다.
167. 선정(先正): 학문과 덕행이 높아 후세의 모범이 되는 선현(先賢).
168.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169.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대학자.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170. 문묘(文廟):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 성균관(成均館)과 지방 향교(鄕校)에 설치되었다. 공자 외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과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등 우리나라의 유현(儒賢)들을 함께 모셨다[從祀].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는 선조 때 결정되었으나, 북인 세력은 이를 반대했다.
171. 태학(太學):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조선 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172. 유적(儒籍): 유생(儒生)의 명부. 유적에서 삭제된다는 것은 유생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불명예스러운 조치였다.
173. 금고(禁錮): 죄인을 가두거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형벌.
174. 권당(捲堂): 유생들이 식당 출입을 거부하고 동맹 휴학하는 것.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는 유생들의 집단행동이었다.
175. 함(銜): 재갈 함. 원한이나 불만을 마음속에 품는 것을 의미한다. 주석 [주-D002] 참조.
176. 체부(體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가리키는 듯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전쟁 등 비상시에 군사권을 위임받아 군대를 총괄 지휘하던 임시 관직이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군사 관련 직책을 맡았기에, 그의 병권이 너무 크다는 빌미로 공격받은 것이다.


원문:
永昌大君甫八歲, 三司指爲逆魁, 交章請誅。 政府獨不廷請, 群小磨牙, 禍且不測。 有二宰臣連夜造公所, 脅以禍福。 公曰: “我受先朝厚恩, 位台鼎, 豈忍屈志負君, 自虧名義?” 兩司長官揚言于鞫廳榻前曰: “群議以大臣不伏閤爲非, 不敢不告。” 公退出, 漢陰隨出, 曰: “廷議至此, 吾輩當先及禍, 子將如何?” 公曰: “禮云‘內亂不與焉’, 何必爲永昌死也? 若至出置城外, 我當屈意從之。 必如三司之議, 不得不立異。” 漢陰遂會百僚, 以本仁斷義, 出置闕外爲辭。 柄臣大望, 掌令鄭造、尹訒遂發廢母之論。 公曰: “吾得死所矣。 爲永昌死則傷勇, 爲母后不死則傷義。 今人誣引《春秋》, 我當引經據義, 段段攻破。” 進一箚, 仍及永昌不可加罪之意也。 是夕至第, 不解朝衣, 坐外廊, 瞠視不語。 子弟問故, 公曰: “三綱滅矣, 我以大臣, 寧惜餘命?” 大司憲崔有源來見公, 公曰: “萬代瞻仰, 在此一擧。” 有源素敬公, 乃定議, 與李志完、金止男貳於造、訒。 其論之未卽行, 公之力也。【竝墓誌。】

번역문:
영창대군(永昌大君)¹⁷⁷이 겨우 8세였는데, 삼사(三司)에서 역적의 우두머리[逆魁]로 지목하여 번갈아 상소[交章]하며 주살(誅殺)할 것을 청하였다. 정부(政府)¹⁷⁸만이 홀로 조정에서 청하지 않으니[不廷請], 군소배(群小輩)들이 이를 갈며[磨牙] 화(禍)가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두 재신(宰臣)이 있어 밤늦도록 공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 화복(禍福)으로 위협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내가 선조(先朝)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지위가 삼공(台鼎)¹⁷⁹에 이르렀는데, 어찌 차마 뜻을 굽혀 임금을 저버리고 스스로 명의(名義)를 훼손하겠는가?” 양사(兩司)¹⁸⁰의 장관이 국청(鞫廳)¹⁸¹ 탑전(榻前)¹⁸²에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러 의논이 대신(大臣)들이 복합(伏閤)¹⁸³하지 않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므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이 퇴출(退出)하자 한음(漢陰)¹⁸⁴이 따라 나오며 말하였다. “조정의 의논[廷議]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무리가 마땅히 먼저 화를 입을 것인데, 자네는 장차 어찌할 것인가?” 공이 말하였다. “《예기(禮記)》¹⁸⁵에 이르기를 ‘안에서 일어난 난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영창(永昌)을 위해 죽어야 하겠는가? 만약 성 밖에 내쫓는 데 이른다면, 내가 마땅히 뜻을 굽혀 이를 따를 것이다. 반드시 삼사(三司)의 의논과 같이 한다면, 부득이 다른 의견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한음이 마침내 백관(百僚)을 모아, 인(仁)에 근본하고 의(義)로 판단하여 궁궐 밖에 내쫓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병신(柄臣)이 크게 실망하자, 장령(掌令)¹⁸⁶ 정조(鄭造)¹⁸⁷와 윤인(尹訒)¹⁸⁸이 마침내 폐모(廢母)¹⁸⁹의 논의를 발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영창(永昌)을 위해 죽는다면 용기[勇]를 해치고, 모후(母后)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의리[義]를 해친다. 지금 사람들이 《춘추(春秋)》¹⁹⁰를 무고(誣告)하게 인용하니, 내가 마땅히 경전(經傳)을 인용하고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조목조목[段段] 공파(攻破)하리라.” 차자(箚) 하나를 올렸는데, 이어서 영창대군에게 죄를 더할 수 없다는 뜻에까지 언급하였다. 이날 저녁 집에 이르러 조복(朝衣)을 벗지 않고 외랑(外廊)¹⁹¹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瞠視] 말을 하지 않았다. 자제(子弟)들이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였다. “삼강(三綱)¹⁹²이 무너졌으니, 내가 대신으로서 어찌 남은 목숨을 아끼겠는가?” 대사헌(大司憲) 최유원(崔有源)¹⁹³이 와서 공을 뵙자, 공이 말하였다. “만대(萬代)의 첨앙(瞻仰)¹⁹⁴이 이 한 번의 행동에 달려 있소.” 최유원이 평소 공을 공경하였기에, 마침내 의논을 정하여 이지완(李志完), 김지남(金止男)과 함께 정조(造)와 윤인(訒)에게 이의(異議)를 제기하였다. 그 논의가 즉시 실행되지 못한 것은 공의 힘이었다.【이상은 묘지에서 인용】

주석:
177.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 선조의 유일한 적자(嫡子). 어머니는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의 견제를 받아 역모 혐의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증살(蒸殺)당했다.
178.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당시 영의정은 이항복, 좌의정은 이덕형, 우의정은 이원익이었다.
179. 태정(台鼎): 삼태성(三台星)과 정(鼎, 발 셋 달린 솥)을 합친 말. 삼공(三公),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비유한다.
180.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
181. 국청(鞫廳): 죄인을 국문(鞫問)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182. 탑전(榻前): 임금이 앉는 평상 앞.
183. 복합(伏閤): 대궐 뜰에 엎드려 임금에게 상소하거나 처분을 기다리는 것. 여기서는 영창대군 처벌을 청하는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184.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가리킨다.
185. 《예기(禮記)》: 유교 경전의 하나. 〈곡례(曲禮)〉편에 “國有大故, 曰內亂, 曰外患. 內亂不與焉, 外患弗辟焉.”(나라에 큰 변고가 있음은 안의 난리와 밖의 우환을 말한다. 안의 난리에는 참여하지 않고, 밖의 우환은 피하지 않는다.)이라고 하였다. 이항복은 영창대군 문제는 왕실 내부의 문제이므로 신하가 직접 나서서 죽을 필요는 없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186.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4품 관직.
187. 정조(鄭造, 1564-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의 핵심 인물. 폐모론을 주도했다.
188. 윤인(尹訒, 1575-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의 핵심 인물. 폐모론을 주도했다.
189. 폐모(廢母): 어머니를 폐위함. 광해군이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킨 사건을 가리킨다. 이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요 명분이 되었다.
190. 《춘추(春秋)》: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유교 경전. 폐모론자들이 《춘추》의 기록을 자신들의 주장에 유리하게 왜곡하여 인용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191. 외랑(外廊): 바깥 행랑.
192. 삼강(三綱):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은 신하의 벼리),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 부위부강(夫爲婦綱, 남편은 아내의 벼리). 유교 사회의 기본 윤리. 폐모론은 이러한 강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본 것이다.
193. 최유원(崔有源, 1565-1623): 조선 중기의 문신.
194. 첨앙(瞻仰): 우러러봄.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의미한다.


원문:
公旣被劾, 一僮控馬出東郭, 僑居于江干。 至秋, 移寓蘆原村舍, 斗屋蓬戶, 疎糲不給, 處之晏如也。 唯潛心讀書, 暇則杖屨徜徉山溪間以自遣。 嘗微服跨驢, 往遊淸平山, 遇者不知其爲公也。【行狀。】

번역문:
공이 이미 탄핵을 받자, 동자[僮] 하나가 말을 끌고 동쪽 성곽[東郭]을 나가 강가[江干]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가을에 이르러 노원(蘆原)¹⁹⁵의 시골집[村舍]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두옥(斗屋)¹⁹⁶과 봉호(蓬戶)¹⁹⁷에 거친 음식[疎糲]¹⁹⁸조차 부족하였으나, 편안하게 지냈다(處之晏如). 오직 조용히 마음을 쏟아[潛心] 독서하고, 틈이 나면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杖屨] 산과 계곡 사이를 거닐며[徜徉] 스스로 소일(消遣)하였다. 일찍이 미복(微服)¹⁹⁹ 차림으로 나귀를 타고 청평산(淸平山)²⁰⁰에 가서 노닐었는데, 만나는 자들이 그가 공(公)임을 알지 못하였다.【행장에서 인용】

주석:
195. 노원(蘆原): 현재의 서울특별시 노원구 일대. 당시 한양 외곽 지역이었다.
196. 두옥(斗屋): 말(斗)처럼 작은 집. 매우 비좁은 집을 비유한다.
197. 봉호(蓬戶): 쑥(蓬)으로 엮어 만든 문. 누추한 집을 비유한다.
198. 소려(疎糲): 거친 나물과 현미. 변변찮은 음식을 의미한다.
199. 미복(微服): 평민처럼 꾸민 수수한 옷차림.
200. 청평산(淸平山):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춘천시 경계에 있는 산.


원문:
丁巳冬, 廢后之論已定, 公忼慨不食, 忽大雷撼屋。 公曰: “天其戒告之矣。” 俄而樞府郞來收議, 公方病, 扶起奮筆書曰: “誰爲殿下畫此計者? 非堯、舜不陳, 古之明訓。 虞舜不幸, 頑父嚚母常欲殺舜, 浚井塗廩, 危逆極矣。 號泣怨慕, 不見其有不是處, 誠以父雖不慈, 子不可以不孝。 故《春秋》子無讎母之義, 況爲伋也妻者, 是爲白也母, 誠孝之重, 夫焉有間? 今當以孝治國家, 一邦之內, 將有漸化之望, 此言奚爲至於紸纊之下哉? 爲今之道, 體舜之德, 克諧以孝, 烝烝乂, 回怒爲慈, 愚臣之望也。” 議至, 見者泣下, 邸吏草公議, 手戰不能定筆。 三司請絶邊圍籬安置, 凡四易配所, 將配三水, 命竄北靑。

번역문:
정사년(1617, 광해군 9) 겨울, 폐후(廢后)의 논의가 이미 정해지자, 공이 강개(忼慨)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였는데, 홀연히 큰 우레가 집을 흔들었다. 공이 말하였다. “하늘이 아마 경계하여 알리는[戒告] 것이리라.” 얼마 후에 추부랑(樞府郞)²⁰¹이 와서 의견[議]을 수합하는데, 공이 마침 병중이었으나 부축을 받아 일어나 붓을 떨쳐 쓰기를, “누가 전하(殿下)를 위하여 이 계책을 꾸몄습니까? 요(堯)임금, 순(舜)임금이 아니면 진술하지 않는다는 것이 옛날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우순(虞舜)²⁰²은 불행하여 완고한 아버지[頑父]와 모진 어머니[嚚母]²⁰³가 항상 순(舜)을 죽이려 하여, 우물을 깊이 파고 곡식 창고를 칠하는 등²⁰⁴ 위태롭고 거스름[危逆]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은) 부르짖어 울며 원망하고 사모하여[號泣怨慕] 그 그릇된 점을 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아버지가 비록 자애롭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는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子無讎母之義]²⁰⁵가 없는데, 하물며 급(伋)의 아내가 된 이는 백(白)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니²⁰⁶, 지극한 효도[誠孝]의 중함에 어찌 부부 사이인들 간격이 있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효도(孝道)로써 국가를 다스려야 하니, 온 나라 안에 장차 점점 교화될 희망이 있을 것인데, 이 말이 어찌하여 지광(紸纊)²⁰⁷ 아래에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지금의 도리를 위해서는 순(舜)의 덕(德)을 본받아, 능히 효도로써 화합하여[克諧以孝] 점점 다스려지게[烝烝乂]²⁰⁸ 하고, 노여움을 돌려 자애로움으로 삼는 것이 어리석은 신[愚臣]의 바람입니다.” 의견이 (조정에) 이르자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고, 저리(邸吏)²⁰⁹가 공의 의견을 초(草)하는데 손이 떨려 붓을 제대로 잡지 못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변방으로 보내 위리안치(圍籬安置)²¹⁰할 것을 청하여, 무릇 네 차례 유배지[配所]를 바꾸다가 장차 삼수(三水)로 유배하려 하였으나, 북청(北靑)으로 유배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주석:
201. 추부랑(樞府郞): 중추부(中樞府)의 낭관(郎官)을 가리키는 듯하다. 중추부는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들을 소속시켜 대우하던 관청이다. 여기서는 폐모론에 대한 의견을 수합하는 역할을 맡은 관리로 보인다.
202. 우순(虞舜): 중국 고대의 성군(聖君) 순(舜)임금. 유(虞)는 순임금의 국호이다.
203. 완부은모(頑父嚚母):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瞽瞍)와 계모(繼母). 고수는 완악하고 계모는 잔소리가 심하며 모질었다고 한다.
204. 준정도름(浚井塗廩): 우물을 깊이 파고 곡식 창고를 흙칠함. 순임금의 부모가 순을 죽이려고 꾸민 계략. 우물을 파게 하고는 위에서 흙으로 덮어버리고, 창고 지붕을 수리하게 하고는 밑에서 불을 질렀으나, 순은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205. 자무수모지의(子無讎母之義):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에 나오는 원칙. 아들은 어머니를 원수로 여길 수 없다는 윤리를 강조한다. 폐모론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206. 급야처자 시위백야모(伋也妻者 是爲白也母): 위(衛)나라 선공(宣公)의 아들 급자(伋子)와 그의 아내 선강(宣姜)의 고사를 인용한 듯하나, 맥락이 명확하지 않다. 급자의 아내는 후에 계모가 되었고, 그 사이에서 아들 수(壽)와 삭(朔)을 낳았다. '백(白)'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불분명하다. 아마도 선강이 급자의 아내가 되었을 때 이미 다른 아들(백?)의 어머니였다는 의미이거나, 또는 단순히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관계를 강조하는 일반적인 표현일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계모라 할지라도 어머니로서 공경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것으로 이해된다.
207. 주광(紸纊): 실과 솜. 예전에 귀마개로 쓰였다. 임금의 귀를 가리는 측근 간신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폐모론과 같은 부당한 논의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개탄하는 의미이다.
208. 증증예(烝烝乂):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오는 구절. 백성들이 점점 선하게 다스려짐을 의미한다.
209. 저리(邸吏): 저사(邸舍, 관아나 숙소)의 관리.
210.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는 형벌.


원문:
到配感病。 夢宣廟臨軒, 柳相成龍、金相命元、李相德馨竝侍。 李相請宣召, 公旣寤, 歎曰: “吾其不久乎?” 聞奴酋犯遼、廣, 我兵不赴援, 涕下曰: “國其不競乎?” 越二日卒。【竝墓誌。】

번역문:
유배지에 도착하여 병이 들었다. 꿈에 선조께서 행차에 임하시고, 유상 성룡(柳相成龍), 김상 명원(金相命元)²¹¹, 이상 덕형(李相德馨)이 함께 모시고 있었다. 이상(李相, 이덕형)이 (임금께) 불러 만나보시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잠에서 깨어나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그 오래지 않으리라.” 노추(奴酋)²¹²가 요동(遼東)과 광녕(廣寧)²¹³을 침범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구원하러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라가 그 겨루지[競] 못하는가?” 이틀이 지나 졸(卒)하였다.【이상은 묘지에서 인용】

주석:
211. 김명원(金命元, 1534-160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주은(酒隱). 임진왜란 당시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를 지내며 전쟁을 총괄했다. 좌의정을 역임했다.
212. 노추(奴酋): 오랑캐의 우두머리. 후금(後金, 훗날 청나라)의 누르하치(努爾哈赤)를 가리킨다.
213. 광녕(廣寧): 요동 서쪽의 전략적 요충지. 1622년(광해군 14) 후금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 기록은 1618년의 일이므로, 당시 후금이 요동 지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던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少時豪爽, 嘗悅一官妓, 忽自念情有所偏, 必害于身心, 遂痛絶之。 自後絶不近聲色。

번역문:
젊었을 때 호방하고 상쾌하였는데, 일찍이 한 관기(官妓)를 좋아하였다가, 문득 스스로 생각하기를 정(情)이 치우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몸과 마음에 해로울 것이라 여겨, 마침내 통렬히 끊었다. 이후로 다시는 성색(聲色)²¹⁴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주석:
214.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


원문:
公始釋褐, 嘗謁栗谷李文成公。 文成公知其國器, 謂曰: “我有歸志, 子其訪我於石潭。” 時文成公方秉銓嚮用, 公嫌於形跡, 不能數叩函丈。 未幾, 文成公下世, 公終身以爲恨。【竝行狀。】

번역문:
공이 처음 관복(官服)을 입었을 때[釋褐]²¹⁵, 일찍이 율곡(栗谷) 이문성공(李文成公)²¹⁶을 찾아뵈었다. 문성공이 그가 나라의 그릇[國器]임을 알아보고 일러 말하였다. “나에게 돌아갈[歸]²¹⁷ 뜻이 있으니, 그대는 석담(石潭)²¹⁸에서 나를 찾아오게.” 이때 문성공이 바야흐로 전형(銓衡)²¹⁹을 잡고 등용되고 있었으므로, 공이 형적(形跡)²²⁰을 꺼려 자주 문하(函丈)²²¹를 두드리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성공이 세상을 떠나니, 공이 종신토록 한(恨)으로 여겼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215. 석갈(釋褐): 갈옷(褐衣, 평민의 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216. 이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를 가리킨다. 문성(文成)은 그의 시호이다.
217. 귀(歸):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이나 은거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218. 석담(石潭): 이이가 만년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던 황해도 해주의 지명.
219. 전형(銓衡): 인재를 저울질하여 뽑아 씀. 즉 인사권을 의미한다. 이이는 당시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며 인사 행정을 주관했다.
220. 형적(形跡): 드러나는 자취나 행동. 권력자에게 자주 찾아가면 아첨하는 것처럼 보일까 꺼린 것이다.
221. 함장(函丈): 스승이 거처하는 자리 앞. 스승의 문하(門下)를 가리킨다.


원문:
爲文章, 以氣爲主, 以俊逸爲宗, 意到立成, 若不搆思而自出機杼。 語多驚人, 人得片言隻字, 多藏去以爲珍。 奏疏駸駸兩京, 筆法尤豪有法。 少時汎濫諸家, 旣博通其義, 又不肯竟。 晩喜濂、洛群書, 亦不規規於箋註之末。 旣爭居沈潛, 益有自得之趣。 嘗著《涵養銘》、《恥辱》・《書牀》・《養夜》・《戒晝》・《警夕》五箴書諸壁, 其自治之功又然也。

번역문: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기(氣)²²²를 위주로 하고 준일(俊逸)²²³함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뜻이 이르면 즉시 이루어져 마치 생각을 짜내지 않아도 저절로 기저(機杼)²²⁴에서 나오는 듯하였다.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이 짧은 말 한마디나 글자 하나[片言隻字]를 얻으면 많이들 감추어 가서 보배로 삼았다. 주소(奏疏)²²⁵는 양경(兩京)²²⁶에 성하게 퍼졌고, 필법(筆法)은 더욱 호방하면서도 법도(法度)가 있었다. 젊었을 때는 여러 학설[諸家]을 널리 섭렵하였고, 이미 그 뜻에 널리 통달하였으나 또한 끝까지 파고들려 하지는 않았다. 만년에는 염락(濂洛)의 여러 서적들을 좋아하였으나, 또한 전주(箋註)²²⁷의 자잘한 것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이미 다투어 침잠(沈潛)²²⁸하여 지내면서 더욱 스스로 터득하는[自得] 취미(趣味)가 있었다. 일찍이 《함양명(涵養銘)》²²⁹과 〈치욕(恥辱)〉, 〈서상(書牀)〉,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의 다섯 잠(箴)²³⁰을 지어 벽에 써 붙였으니, 그 스스로를 다스리는[自治] 공부 또한 그러하였다.

주석:
222. 기(氣): 문장의 기세나 기백.
223. 준일(俊逸): 뛰어나고 속되지 않음. 호방하고 활달함을 의미한다.
224. 기저(機杼): 베틀의 북(機)과 실패(杼). 창의적인 생각이나 독창적인 표현을 비유한다.
225. 주소(奏疏):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226. 양경(兩京): 두 개의 수도. 조선과 명나라의 수도(한양과 북경)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의 문장이 국제적으로도 알려졌음을 의미한다.
227. 전주(箋註): 경전이나 서적의 내용을 풀이한 주석. 자구(字句) 해석에만 얽매이지 않고 큰 뜻을 파악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228. 침잠(沈潛): 학문이나 사색에 깊이 몰두함.
229. 함양명(涵養銘): 마음을 닦고 덕성을 기르는 것에 대한 명(銘, 쇠붙이나 돌에 새기는 글, 또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글).
230. 잠(箴): 경계하는 내용을 담은 글의 한 형식.


원문:
公之在蘆村, 余携兒明漢佩酒往訪, 則公欣然迎謂曰: “吾欲賞道峯泉石, 未遇會心人, 君適至矣。” 仍以道巾、芒鞋, 騎驢而去, 歷遍諸勝, 同宿枕流堂。 三更月上, 余方困臥, 公蹴余曰: “月色如許, 何睡耶?” 携出川上, 忽愀然不語, 仰天長吁, 使明漢誦《出師表》, 又誦《赤壁賦》, 飄然有羽化登仙之想。

번역문:
공이 노원(蘆村)에 있을 때, 내[余]²³¹가 아들 명한(明漢)²³²을 데리고 술을 차고 가서 방문하니, 공이 흔연히 맞이하며 일러 말하였다. “내가 도봉산(道峯山)의 샘물과 돌[泉石]²³³을 감상하고자 하였으나 마음이 맞는 사람[會心人]을 만나지 못하였는데, 그대가 마침 왔구려.” 이어서 도건(道巾)²³⁴과 망혜(芒鞋)²³⁵ 차림으로 나귀를 타고 가서, 여러 명승지[諸勝]를 두루 거치고 함께 침류당(枕流堂)²³⁶에서 묵었다. 삼경(三更)에 달이 떠오르자 내가 마침 곤하여 누워 있었는데, 공이 나를 발로 차며 말하였다. “달빛이 이와 같은데, 어찌 잠을 자는가?” 데리고 냇가[川上]로 나가, 홀연히 슬퍼하며[愀然] 말을 않다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하고는, 명한(明漢)으로 하여금 《출사표(出師表)》²³⁷를 외우게 하고, 또 《적벽부(赤壁賦)》²³⁸를 외우게 하니, 표연(飄然)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羽化登仙] 듯한 생각이 들었다.

주석:
231. 여(余): 나. 이 글(묘지명)의 저자인 이정귀(李廷龜)를 가리킨다.
232. 명한(明漢): 이명한(李明漢, 1595-1645). 이정귀의 아들. 호는 백주(白洲). 문장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233. 천석(泉石): 샘물과 돌. 아름다운 자연 경치를 의미한다.
234. 도건(道巾): 도사(道士)들이 쓰는 두건. 또는 유생들이 평상시에 쓰던 두건의 일종.
235. 망혜(芒鞋): 짚신. 소박한 차림을 의미한다.
236. 침류당(枕流堂):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 집'이라는 뜻. 자연 속에 있는 거처를 의미한다. 구체적인 건물 이름일 수도 있다.
237. 《출사표(出師表)》: 중국 촉(蜀)나라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로, 위(魏)나라를 정벌하러 떠나면서 자신의 충정과 결의를 밝힌 명문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이항복의 심경을 반영한다.
238. 《적벽부(赤壁賦)》: 중국 송(宋)나라의 문호 소식(蘇軾)이 적벽(赤壁)에서 노닐며 지은 부(賦). 인생의 덧없음과 자연의 영원함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항복의 탈속적인 심경을 보여준다.


원문:
丁巳冬, 兇論益張, 請廢之疏四面而起, 陳好善、全瀅等請先誅公及余。 余匹馬曉出城, 訪公於東岡曰: “火色甚急, 吾等當先見收矣。 今日之事, 異議者死, 不議者不至於死。 吾受祿在職, 理難得免。 公旣去朝, 病不收議, 例也。” 公掀髥笑曰: “死生命也。 且上必不能辦殺吾等, 或南或北, 不相遠則幸矣。” 余知公意決, 口號短律贈公, 有“斜陽數行淚, 立馬穆陵村”之句。 公曰: “以此爲訣足矣。” 遂握手而別。 居數日, 公之議上, 粤一月而公謫矣。【竝墓誌。】

번역문:
정사년(1617, 광해군 9) 겨울, 흉악한 논의[兇論]²³⁹가 더욱 기세를 떨쳐 폐위[廢]²⁴⁰를 청하는 상소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진호선(陳好善), 전형(全瀅) 등이 먼저 공과 나[余]를 주살(誅殺)할 것을 청하였다. 내가 필마(匹馬)로 새벽에 성을 나와 동쪽 언덕[東岡]²⁴¹에서 공을 찾아보고 말하였다. “화급(火急)함이 매우 심하니, 우리들이 마땅히 먼저 잡혀갈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다른 의견을 내는 자는 죽고, 의논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녹(祿)을 받고 관직에 있으니 이치상 면하기 어렵습니다. 공께서는 이미 조정을 떠나셨고 병으로 의견을 수합하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공이 수염을 쓰다듬으며[掀髥] 웃으며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다. 또 상께서 반드시 우리들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니, 남쪽이든 북쪽이든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내가 공의 뜻이 결정되었음을 알고, 구호(口號)²⁴²로 짧은 율시(律詩)를 지어 공에게 주었는데, “석양에 두어 줄기 눈물 흘리며, 말을 세우니 목릉(穆陵)²⁴³ 마을이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공이 말하였다. “이것으로 작별 인사를 삼기에 족하네.” 마침내 손을 잡고 헤어졌다. 며칠이 지나 공의 의견[議]이 올라가고, 한 달이 지나 공이 유배되었다.【이상은 묘지에서 인용】

주석:
239. 흉론(兇論): 흉악한 논의. 폐모론(廢母論)을 가리킨다.
240. 폐(廢): 폐위(廢位).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것을 의미한다.
241. 동강(東岡): 동쪽 언덕. 이항복이 머물던 곳을 가리킨다.
242. 구호(口號): 즉석에서 입으로 읊어 짓는 것.
243. 목릉(穆陵): 선조(宣祖)와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계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의 능.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에 있다. 선조의 능이 있는 곳을 보며 이별의 슬픔과 나라에 대한 걱정을 표현한 것이다.


원문:
初, 臨津未失守, 李恒福時爲備局有司堂上, 言于行朝諸大臣曰: “今八道潰裂, 雖有智者, 亦不知爲國家計。 昔以孔明之智, 及荊州失守, 請求救於孫將軍, 卒成赤壁之捷, 以基鼎足之業。 我國之力, 今無可爲, 不如具奏天朝, 請兵來援, 以冀萬一。” 廷臣皆以爲迂, 或云: “雖奏請天朝, 焉肯出兵來救?” 或云: “假令出兵, 當出遼、廣兵馬。 遼、廣之人與㺚無異, 必將憑陵橫暴, 侵害公私。 今七路, 皆爲灰燼一片乾淨地, 只此一路, 復爲天兵蹂躪, 則我何着足? 此策決不可行也。” 恒福連日爭之不得。 李德馨自嶺南詣行在, 聽其計以爲可。 兩公極陳利害, 諸宰亦稍悟。 大臣曰: “試具由取稟。” 令恒福具草記以入, 上旣允許。

번역문:
처음에 임진강(臨津江)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을 때, 이항복이 당시 비국(備局)²⁴⁴ 유사 당상(有司堂上)²⁴⁵으로 있으면서 행재소(行在所)²⁴⁶의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팔도(八道)가 무너지고 찢어졌으니,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국가를 위한 계책을 알지 못합니다. 옛날 공명(孔明)²⁴⁷의 지혜로도 형주(荊州)를 잃었을 때 손 장군(孫將軍)²⁴⁸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마침내 적벽(赤壁)의 승첩(勝捷)²⁴⁹을 이루어 삼국 정립[鼎足]의 공업(功業)을 기초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힘으로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천조(天朝)에 갖추어 아뢰어 군사를 청하여 구원[請兵來援]하여 만일(萬一)의 경우를 바라는 것만 못합니다.” 조정 신하[廷臣]들이 모두 현실과 동떨어졌다[迂]고 여기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비록 천조에 아뢰어 청하더라도 어찌 기꺼이 군대를 내어 구원하겠는가?”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가령 군대를 내더라도 마땅히 요동(遼東)과 광동(廣東)²⁵⁰의 병마(兵馬)를 낼 것이다. 요동과 광동 사람들은 달자(㺚子)와 다름이 없어²⁵¹, 반드시 업신여기고 횡포를 부려 공사(公私)를 침해할 것이다. 지금 칠로(七路)²⁵²가 모두 잿더미가 되어 한 조각 깨끗한 땅인데, 다만 이 일로(一路)²⁵³마저 다시 천병(天兵)에게 유린(蹂躪)당한다면 우리가 어디에 발붙일 곳이 있겠는가? 이 계책은 결코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항복이 연일(連日) 이를 주장하며 다투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덕형(李德馨)이 영남(嶺南)에서 행재소(行在)에 이르러, 그 계책을 듣고 옳다고 여겼다. 두 공(公)이 이해(利害)를 극진히 진술하자 여러 재상[諸宰]들도 또한 차츰 깨달았다. 대신(大臣)이 말하였다. “시험 삼아 사유를 갖추어 품의(稟議)하라.” 이항복에게 명하여 초기(草記)²⁵⁴를 갖추어 올리게 하니, 상께서 이미 윤허하셨다.

주석:
244. 비국(備局): 비변사(備邊司)의 약칭. 조선 중기 이후 국방 문제를 비롯한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던 최고 합의 기구.
245. 유사 당상(有司堂上): 비변사의 실무를 담당하던 당상관(堂上官).
246.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행차하여 머무는 곳. 피난 중인 임시 조정을 가리킨다.
247.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 181-234).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승상. 지혜와 충절의 상징이다.
248. 손 장군(孫將軍): 손권(孫權, 182-252).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초대 황제.
249. 적벽지첩(赤壁之捷): 208년 적벽(赤壁)에서 손권과 유비(劉備)의 연합군이 조조(曹操)의 대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250. 광동(廣東): 중국 남부 지역. 요동과 광동의 병사들이 거칠고 군기가 문란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듯하다.
251. 달자(㺚子): 달단(韃靼, 타타르) 사람. 북방 민족을 낮잡아 부르는 말.
252. 칠로(七路): 당시 조선의 행정 구역인 팔도(八道) 중 평안도를 제외한 일곱 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253. 일로(一路): 평안도를 가리킨다. 당시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 중이었고, 이곳마저 명나라 군대에 의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254. 초기(草記): 간단한 형식의 보고서 또는 상소문.


원문:
臨津旣失守, 西路無一兵馬, 國事無復可爲, 行在公卿諸臣惟憂愁度日。 未幾, 李鎰率麾下數百入朝。 大臣問鎰以駐駕之所, 鎰曰: “鍾城險固可駐。” 於是決策北行。 及賊鋒至大同江, 中殿及妃嬪先向鍾城而行, 大駕隨發。 行至寧邊, 李恒福極言于備局諸宰曰: “嘗聞咸鏡只有一條路。 賊若直衝, 將束手就縛。 且已乞兵天朝, 萬一得請, 大兵一朝出來, 而無人迎接, 則天子聞之, 將謂我何如? 不如直抵義州, 以候天兵。 事若不幸, 一行上下求爲內附, 以圖再擧可也。” 左右相視, 莫有應者。 沈忠謙曰: “公意如此, 何不請對?” 於是忠謙請對, 上御寧邊東軒, 張燭引見, 夜已向闌。 忠謙進曰: “李恒福以鍾城爲危, 欲陳其見, 故敢請對。” 恒福仍歷陳利害。 上曰: “予意本欲內附, 卿言如此, 可幸義州。 但中殿一行若已踰嶺, 奈何?” 時中殿到劍山嶺下, 雲山郡守成大業承命, 達夜馳往, 迎中殿追及於博川。

번역문:
임진강(臨津江)이 이미 함락되자 서쪽 지방[西路]에 하나의 병마(兵馬)도 없어 국사(國事)를 다시 어찌해 볼 수 없게 되니, 행재소(行在)의 공경(公卿)과 여러 신하들은 오직 근심하며 날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일(李鎰)²⁵⁵이 휘하(麾下) 수백 명을 거느리고 조정에 들어왔다. 대신(大臣)이 이일에게 어가(駕)를 머물 만한 곳을 묻자, 이일이 말하였다. “종성(鍾城)²⁵⁶이 험하고 견고하여 머물 만합니다.” 이에 북쪽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적의 칼끝[賊鋒]이 대동강(大同江)에 이르자 중전(中殿) 및 비빈(妃嬪)들이 먼저 종성(鍾城)을 향해 떠나고, 대가(大駕)도 따라 출발하였다. 행차가 영변(寧邊)에 이르렀을 때, 이항복이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들에게 극력 말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함경도(咸鏡道)에는 오직 길이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적이 만약 곧바로 쳐들어오면 장차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힐[束手就縛] 것입니다. 또한 이미 천조(天朝)에 군사를 청하였으니, 만일 요청이 받아들여져 대군(大兵)이 하루아침에 나오게 되었는데 맞이할 사람이 없다면, 천자(天子)께서 들으시고 장차 우리를 어떻다고 여기시겠습니까? 곧바로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천병(天兵)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일이 만약 불행하게 되면 일행(一行) 상하(上下)가 내부(內附)²⁵⁷하기를 구하여 재기(再起)를 도모함이 옳습니다.” 좌우(左右)가 서로 쳐다볼 뿐 응하는 자가 없었다. 심충겸(沈忠謙)이 말하였다. “공의 뜻이 이와 같으니, 어찌 입대(請對)하지 않습니까?” 이에 심충겸이 입대를 청하니, 상께서 영변 동헌(東軒)²⁵⁸에 거처하시며 촛불을 밝히고 인견(引見)하시는데, 밤이 이미 깊어가고 있었다. 심충겸이 나아가 아뢰었다. “이항복이 종성(鍾城)을 위태롭다고 여겨 그 견해를 진술하고자 하기에, 감히 입대를 청하였습니다.” 이항복이 이어서 이해(利害)를 차례로 진술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뜻도 본래 내부(內附)하고자 하였는데,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의주(義州)로 가는 것이 좋겠다. 다만 중전(中殿) 일행이 만약 이미 고개[嶺]를 넘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때 중전이 검산령(劍山嶺) 아래에 도착하였는데,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이 명을 받들어 밤새 달려가서 중전을 맞이하여 박천(博川)에서 따라잡았다.

주석:
255. 이일(李鎰, 1538-1601):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발발 당시 순변사(巡邊使)로 상주(尙州) 전투에서 패배했다.
256. 종성(鍾城): 함경북도 북쪽 끝 두만강 연안에 있는 고을.
257. 내부(內附): 나라가 위태로울 때 다른 나라에 귀속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것. 여기서는 명나라에 귀부(歸附)하는 것을 의미한다.
258. 동헌(東軒): 지방 관아에서 수령이 공무를 보던 중심 건물.


원문:
上命世子分率百官, 進駐江原、京畿等地, 號召散卒, 以圖興復。 上自幸義州, 若有不幸, 計欲率群臣內附。 群臣皆以渡遼爲難, 上於燭下親問願從者, 大臣皆不應。 次至群臣, 皆不應。 李恒福對曰: “臣年少無病, 亦無父母, 請隨駕。” 上曰: “卿顧不有難事乎? 再加詳量。” 恒福對曰: “此非臣今日口頭所辦。 筮仕之初, 已有願忠之志, 及出國門, 誓以效死, 妻子兄妹已與永訣, 臣之素定久矣。” 上嘖嘖嗟歎。【竝《休窩雜纂》。】

번역문:
상께서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백관(百官)의 일부[分]를 거느리고 강원도(江原道), 경기도(京畿道) 등지에 나아가 주둔하며 흩어진 군졸[散卒]을 불러 모아 흥복(興復)을 도모하게 하셨다. 상께서는 직접 의주(義州)로 행차하시어,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내부(內附)하고자 계획하셨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요동으로 건너가는[渡遼] 것을 어렵게 여기자, 상께서 촛불 아래에서 직접 따르기를 원하는 자를 물으셨으나 대신(大臣)들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항복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신은 나이가 젊고 병이 없으며 또한 부모도 없으니, 어가(駕)를 따르기를 청합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경인들 어찌 어려운 일이 없겠는가? 다시 자세히 헤아리라.” 이항복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이는 신이 오늘 입으로만 처리하는 바가 아닙니다. 처음 벼슬할[筮仕]²⁵⁹ 때부터 이미 충성을 바랄[願忠] 뜻이 있었고, 국문(國門)을 나설 때 맹세코 죽음으로써 보답하기로 하여 처자(妻子)와 형제자매(兄妹)와 이미 영결(永訣)하였으니, 신의 평소 결정[素定]은 오래되었습니다.” 상께서 혀를 차며[嘖嘖] 감탄하셨다.【이상은 《휴와잡찬(休窩雜纂)》²⁶⁰에서 인용】

주석:
259. 서사(筮仕):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감.
260. 《휴와잡찬(休窩雜纂)》: 작자 미상의 야담, 설화집. 조선 중기 이후의 인물들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원문:
辛丑春, 白沙公以疾辭相位, 余勉出之, 則寫近體一首以答曰: “中興作者足謀謨, 老子何堪聖世需? 自識孔君元齟齬, 誰言呂相不糊塗? 時名短拙關心少, 身計差池入手殊。 却怪晉家王太傅, 白頭猶道宦情無。” 蓋言時勢之不可爲也。

번역문:
신축년(1601, 선조 34) 봄, 백사공(白沙公)이 병으로 상위(相位)²⁶¹를 사양하자, 내[余]²⁶²가 힘써 나오도록 권하였더니,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써서 답하며 말하였다. “중흥(中興)의 작자(作者)²⁶³들이 모략(謀謨)을 족히 하니, 늙은이[老子]²⁶⁴가 어찌 성세(聖世)의 수요(需)를 감당하리오? 공 군(孔君)²⁶⁵이 원래 어긋났음[齟齬]을 스스로 알았고, 누가 여 상(呂相)²⁶⁶이 호도(糊塗)하지 않았다 말하는가? 시명(時名)은 짧고 졸렬하여 관심(關心)이 적고, 신계(身計)는 어긋나 손에 넣음이 다르다네. 도리어 진(晉)나라 왕 태부(王太傅)²⁶⁷가 괴이하니, 백발(白頭)에도 오히려 벼슬할 마음[宦情] 없다 말하였네.”²⁶⁸ 대개 시세(時勢)가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주석:
261. 상위(相位): 재상(宰相)의 지위. 영의정 직을 가리킨다.
262. 여(余): 나. 이 글의 저자인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을 가리킨다.
263. 작자(作者): 일을 계획하고 시작하는 사람. 새롭게 등용되는 젊은 인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264. 노자(老子): 늙은 자신을 가리키는 말.
265. 공 군(孔君): 공자(孔子)를 가리키는 듯하다.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66. 여 상(呂相): 주(周)나라의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는 다른 인물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가 정치를 명확하게 처리하지 못했음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267. 왕 태부(王太傅): 진(晉)나라의 왕도(王導) 또는 왕술(王述) 등을 가리킬 수 있다. 태부(太傅)는 태자(太子)의 스승으로 고위 관직이다.
268. 이 시는 자신의 능력 부족과 세상과의 불화를 언급하며 사직의 뜻을 밝히는 내용이다. 공자, 여상, 왕 태부 등 고인의 예를 들어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고,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원문:
白沙李相國戊午春諫廢大妃遠竄出城之日, 有詩一絶: “白日陰陰晝晦微, 朔風吹裂遠征衣。 遼東城郭應依舊, 只恐令威去不歸。” 聞者泣下。【竝象村《晴窓軟談》。】

번역문: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²⁶⁹이 무오년(1618, 광해군 10) 봄 대비(大妃) 폐위를 간하다가 멀리 유배되어 성을 나가던 날, 절구(絶句) 한 수가 있었다. “밝은 해는 침침하여 낮에도 어둑하고, 삭풍(朔風)은 불어 갈라놓네, 멀리 가는 옷자락을. 요동(遼東)의 성곽(城郭)은 응당 예전과 같으련만, 다만 영위(令威)²⁷⁰가 가면 돌아오지 못할까 두렵네.” 듣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다.【이상은 상촌(象村)의 《청창연담(晴窓軟談)》²⁷¹에서 인용】

주석:
269. 이상국(李相國): 상국(相國)은 재상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항복을 가리킨다.
270. 영위(令威): 정령위(丁令威). 중국 전설상의 인물. 요동(遼東) 사람으로 영허산(靈虛山)에서 도(道)를 배워 신선이 되어 학(鶴)으로 변해 고향에 돌아왔다는 고사가 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271. 《청창연담(晴窓軟談)》: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申欽)이 지은 수필집. 인물, 고사, 시문(詩文)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문:
鰲城素性泊如, 視貨具如草芥。 家居尤儉約, 子弟服飾, 常加貶損。 婚娶之後, 有服華鮮者, 輒於目前, 盡脫其表裏, 分給貧族之在座者, 卽令仍服貧時舊衣。

번역문:
오성(鰲城)은 본래 성품이 담박(淡泊)하여 재물[貨具] 보기를 초개(草芥)²⁷²와 같이 하였다. 집에서의 생활[家居]은 더욱 검약(儉約)하여, 자제(子弟)들의 복식(服飾)을 항상 깎아내리고 줄였다. 혼인[婚娶]한 뒤에 화려하고 산뜻한 옷[華鮮]을 입은 자가 있으면, 문득 눈앞에서 그 겉옷과 속옷[表裏]을 모두 벗겨 자리에 있는 가난한 친족[貧族]에게 나누어 주고, 즉시 가난할 때 입던 옛 옷을 그대로 입게 하였다.

주석:
272. 초개(草芥): 풀과 겨자씨. 아주 하찮은 것을 비유한다.


원문:
鰲城第宅僻陋, 殆不可堪居。 隣居張晩, 嘗於公執弟子禮, 按嶺日, 辭於公曰: “相國居處甚陋, 若卜他居, 則俺當辦得累百布, 以輸其直。” 公笑曰: “令公欲白晝攫公家物, 以累我耶?” 晩曰: “吾家財稍足, 何至損公物也? 不然則當搬得一屋之材, 以助工役。” 公亦不許。

번역문:
오성(鰲城)의 집[第宅]은 궁벽하고 누추하여[僻陋] 거의 거처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웃에 살던 장만(張晩)²⁷³이 일찍이 공에게 제자(弟子)의 예(禮)를 행하였는데, 영남 안찰사[按嶺]²⁷⁴로 부임하던 날 공에게 하직하며 말하였다. “상국(相國)의 거처가 매우 누추하니, 만약 다른 곳에 거처를 정하신다면 제가 마땅히 베 수백 필(匹)을 마련하여 그 값을 대겠습니다.”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영공(令公)²⁷⁵이 대낮에 공적인 재물[公家物]을 움켜쥐어 나에게 누(累)를 끼치려 하는가?” 장만이 말하였다. “저의 집 재산이 조금 넉넉하니, 어찌 공적인 재물을 손상시키는 데 이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집 한 채의 재목을 운반해 와서 공사[工役]를 돕겠습니다.” 공이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주석:
273. 장만(張晩, 1566-1629): 조선 중기의 무신. 호는 낙서(洛西).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활약했다.
274. 안령(按嶺): 영남(嶺南) 지방의 안찰사(按察使) 또는 관찰사(觀察使)를 가리킨다.
275. 영공(令公):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


원문:
鰲城平居訓誨子弟, 有不善, 但微示不悅之色而已, 未嘗有恚詈之加。 一日, 在村莊, 二郞着白苧裌袴, 自外來見, 公呼侍婢, 持綿袴來, 使之遞着, 而卽以苧袴, 與村老之來謁者。

번역문:
오성(鰲城)이 평소에 자제(子弟)를 훈회(訓誨)할 때, 잘못이 있으면 다만 기뻐하지 않는 기색[不悅之色]을 약간 보일 뿐이요, 일찍이 성내고 꾸짖는[恚詈] 일이 없었다. 하루는 시골집[村莊]에 있는데, 둘째 아들[二郎]²⁷⁶이 흰 모시[白苧] 겹바지[裌袴]²⁷⁷를 입고 밖에서 와서 뵈니, 공이 시비(侍婢)를 불러 솜바지[綿袴]를 가져오게 하여 그에게 갈아입게 하고, 즉시 모시 바지를 마을 노인 중 찾아와 뵌 자에게 주었다.

주석:
276. 이랑(二郎): 둘째 아들. 이항복의 둘째 아들은 이소한(李昭漢)이다.
277. 협고(裌袴): 겹으로 만든 바지.


원문:
癸丑逆獄, 有慈山人李春福者爲人所告引, 金吾郞到慈山跟捕, 則境內無李春福而有李元福。 金吾具聞于朝, 鞫廳欲拿問之。 時鰲城以委官在座, 見群議已定, 堅不可破, 欲不言則恐無辜橫罹, 乃曰: “吾名亦與彼相近, 須上章自辨, 然後可免矣。” 左右相笑, 事遂寢。 時逆獄大起, 收司之律甚嚴, 公不動聲色, 而能以一語而解之, 人莫不偉之。 一日, 見人情迹不明而有誣伏者, 公歎曰: “吾嘗見擣松皮而成餠矣, 今見擣人而成逆賊矣。” 其氣像恢廓, 雜以諧恢, 而獄賴而平反者甚多。

번역문:
계축역옥(癸丑逆獄)²⁷⁸ 때, 자산(慈山) 사람 이춘복(李春福)이라는 자가 남에게 고발되어 관련[告引]되었는데, 금오랑(金吾郞)²⁷⁹이 자산에 도착하여 체포하려 하니 고을 안에 이춘복은 없고 이원복(李元福)이 있었다. 금오랑이 조정에 갖추어 아뢰니, 국청(鞫廳)에서 그를 잡아다 문초[拿問]하고자 하였다. 이때 오성(鰲城)이 위관(委官)²⁸⁰으로 자리에 있었는데, 여러 의논이 이미 정해져 확고하여 깨뜨릴 수 없음을 보고, 말하지 않으려니 죄 없는 이[無辜]가 억울하게 화를 입을까[橫罹] 두려워, 이에 말하였다. “내 이름 또한 저 사람과 서로 비슷하니, 모름지기 상소[章]를 올려 스스로 변명한 뒤에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좌우(左右)가 서로 웃으니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때 역옥(逆獄)이 크게 일어나 수사(收司)²⁸¹의 법률이 매우 엄격하였는데, 공이 동요하는 기색[聲色] 없이 능히 한마디 말로 이를 해결하니, 사람들이 그를 위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하루는 사람들의 실정(實情)과 행적(行迹)이 분명하지 않은데 무고(誣告)로 죄를 받는 자가 있음을 보고, 공이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소나무 껍질[松皮]을 찧어 떡[餠]을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사람을 찧어 역적(逆賊)을 만드는 것을 보는구나.” 그 기상(氣像)이 넓고 커서[恢廓] 해학(諧恢)²⁸²이 섞여 있었으며, 옥사(獄事)가 이에 힘입어 공평하게 처리되어 혐의를 벗은[平反] 자가 매우 많았다.

주석:
278. 계축역옥(癸丑逆獄):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옥사. 서궁(西宮, 인목대비)의 궁인(宮人)들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박응서(朴應犀) 등의 고변으로 시작되어, 많은 서인 및 남인 계열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279. 금오랑(金吾郞): 의금부(義禁府)의 관원을 가리키는 듯하다. 의금부는 왕명에 따라 중죄인을 심문하던 특별 사법 기관이다.
280. 위관(委官): 특정 업무를 위임받은 관리. 여기서는 국청의 심문관을 가리킨다.
281. 수사(收司): 죄인을 체포하고 수사하는 관리 또는 기관.
282. 해회(諧恢): 익살스럽고 재치 있는 말이나 행동.


원문:
鰲城居相位, 有達官來謁, 皆坐而受拜。 一日, 有報申訓導在門, 公徒跣而出, 迎入升堂, 俛受所言, 應對甚恭。 家人怪問之, 是公兒時所受業者也。 翌日, 公往謝所館, 將綿布十餘、大米數石, 以供旅次之用。 其人曰: “行橐所需, 數斗米足矣。 其餘謝不受。” 可見其人之賢必有所可敬者, 而亦見公尊師好德之誠, 足以爲範於衰世也。【竝《蒼石集・異聞錄》。】

번역문:
오성(鰲城)이 재상[相位]의 자리에 있을 때, 달관(達官)²⁸³이 와서 뵙기를 청하면 모두 앉아서 절[拜]을 받았다. 하루는 신 훈도(申訓導)²⁸⁴가 문에 와 있다고 보고하자, 공이 맨발[徒跣]로 나가 맞이하여 안으로 들어와 당(堂)에 오르게 하고, 몸을 굽혀[俛] 말하는 바를 받으며 응대(應對)가 매우 공손하였다. 집안사람[家人]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이는 공이 어릴 때 수업(受業)을 받았던 스승이었다. 다음 날, 공이 그가 묵는 곳[所館]으로 가서 사례하며, 면포(綿布) 십여 필과 쌀[大米] 두어 섬[石]을 가지고 가서 여차(旅次)²⁸⁵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행장(行橐)²⁸⁶에 필요한 것은 두어 말[斗]의 쌀이면 족합니다.” 그 나머지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의 현명함이 반드시 존경할 만한 바가 있었음을 볼 수 있으며, 또한 공의 스승을 존경하고 덕(德)을 좋아하는[尊師好德] 정성이 쇠퇴한 세상[衰世]에 모범[範]이 되기에 족함을 볼 수 있다.【이상은 《창석집(蒼石集)・이문록(異聞錄)》²⁸⁷에서 인용】

주석:
283. 달관(達官): 지위가 높은 관리.
284. 훈도(訓導): 조선 시대 향교(鄕校)나 사학(四學)에서 유생을 가르치던 종9품 교관.
285. 여차(旅次): 나그네가 임시로 묵는 곳. 숙소.
286. 행탁(行橐): 여행용 짐 꾸러미.
287. 《창석집(蒼石集)・이문록(異聞錄)》: 조선 후기의 문신 이돈(李墩, 1745-1811)의 문집 《창석집》에 실린 <이문록>. 기이하거나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원문:
公初配昌城, 過忘憂嶺, 賦詩曰: “獰風難透鐵心肝, 不怕西關萬疊山。 歇馬震巖千丈嶺, 夕陽回望穆陵寒。”

번역문:
공이 처음에 창성(昌城)²⁸⁸에 유배되었을 때, 망우령(忘憂嶺)²⁸⁹을 지나며 시를 지어 말하였다. “사나운 바람도 쇠 같은 마음[鐵心肝] 뚫기 어려우니, 서관(西關)²⁹⁰의 만 겹 산 두렵지 않네. 진암(震巖) 천 길 고개에서 말을 쉬게 하고, 석양(夕陽)에 목릉(穆陵)²⁹¹을 돌아보니 차갑구나.”

주석:
288. 창성(昌城): 평안북도 북서부에 있는 고을. 유배지였다.
289. 망우령(忘憂嶺): 서울특별시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 사이에 있는 고개.
290. 서관(西關): 평안도(平安道) 지역을 가리킨다. 관서(關西) 지방.
291.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 주석 243 참조.


원문:
登鐵嶺作歌, 傳播都下, 宮人皆習唱。 一日, 光海君遊宴後庭, 酒酣, 問此曲誰所作也? 宮人以實對, 光海愀然不樂, 因泣下罷酒而終不能召還。 至今聞之者莫不感泣。 宋尤齋時烈翻而爲詞曰: “鐵嶺高處宿雲飛, 飛飛何處歸? 願帶孤臣數行淚作雨, 去向終南、北岳間, 沾灑瓊樓、玉欄干。”【竝《北遷錄》。】

번역문:
철령(鐵嶺)²⁹²에 올라 노래를 지으니 도성 아래[都下]에 전파되어 궁인(宮人)들이 모두 익혀 불렀다. 하루는 광해군이 후정(後庭)에서 유연(遊宴)하다가 술이 거나해지자, 이 곡을 누가 지었는지를 물었다. 궁인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광해군이 슬퍼하며[愀然] 즐거워하지 않고 이내 눈물을 흘리며 술자리를 파하였으나, 끝내 (이항복을) 불러 돌아오게 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이를 듣는 자들이 감격하여 울지 않음이 없다. 송우암(宋尤庵) 시열(時烈)²⁹³이 이를 바꾸어 사(詞)²⁹⁴를 지어 말하였다. “철령 높은 곳에 묵은 구름 나르니, 훨훨 날아 어디로 돌아가는가? 원컨대 외로운 신하[孤臣] 두어 줄기 눈물 비 되어 가져가, 종남산(終南山)²⁹⁵과 북악산(北岳山)²⁹⁶ 사이로 가서, 경루(瓊樓)와 옥난간(玉欄干)²⁹⁷에 뿌려 적시려네.”【이상은 《북천록(北遷錄)》²⁹⁸에서 인용】

주석:
292. 철령(鐵嶺):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에 있는 고개. 관북(關北) 지방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다. 이항복은 북청으로 유배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며 시조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293. 송우암(宋尤庵) 시열(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서인의 영수. 효종(孝宗)의 북벌(北伐) 계획에 참여했으며, 예송(禮訟) 논쟁의 중심인물이었다. 숙종(肅宗) 때 사사(賜死)되었다.
294. 사(詞): 중국 송(宋)나라 때 유행한 문학 양식의 하나. 정해진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가사이다. 여기서는 시조를 한역(漢譯)한 것을 가리킨다.
295. 종남산(終南山): 중국 장안(長安) 남쪽에 있는 산. 여기서는 한양의 남산(南山)을 비유하는 듯하다.
296. 북악산(北岳山): 한양의 주산(主山). 경복궁 뒤쪽에 있는 산이다.
297. 경루(瓊樓), 옥난간(玉欄干): 구슬로 장식한 누각과 옥으로 만든 난간. 궁궐을 아름답게 표현한 말이다. 임금이 계신 곳을 의미한다.
298. 《북천록(北遷錄)》: 이항복의 유배 생활을 기록한 글 또는 관련 기록 모음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戊午五月十七日甲辰, 前領議政李恒福卒于謫所。 恒福豪爽有風度, 少與李德馨齊名同進, 以文學顯。 鄭澈常比之祥麟、瑞鳳, 而材識吏能, 過於德馨。 壬辰之亂, 以都承旨扈從, 擢至兵判, 功勞最大。 平生不作關節文字, 門絶贈遺, 位在台輔, 家貧如寒士。 戊申初政, 閭閻多疑臨海作變, 朝廷先動, 德馨亦爲處置之論, 而恒福獨凝然不動。 時爲訓鍊都提調, 或勸其密飭兵備, 恒福曰: “臨海若叛, 我以徒手取之有餘矣。” 其後嘗謂門下: “汝等年少, 當及見臨海伸冤時也。” 果如其言。 以其不主偏黨, 隨世傲事, 士論或疑其滑稽苟容。 及大論收議, 方待罪郊外, 非與聞國事之時, 而取筆草議, 少無難色, 其大節之不可奪如此。【實錄。】

번역문:
무오년(1618, 광해군 10) 5월 17일 갑진일, 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유배지[謫所]에서 졸(卒)하였다. 이항복은 호방하고 상쾌하며[豪爽] 풍도(風度)가 있었고, 젊어서 이덕형(李德馨)과 나란히 명성을 얻어 함께 진출하여 문학(文學)으로 드러났다. 정철(鄭澈)이 항상 상서로운 기린[祥麟]과 상서로운 봉황[瑞鳳]에 비유하였는데, 재주와 식견[材識] 및 관리로서의 능력[吏能]은 이덕형보다 나았다. 임진왜란 때 도승지(都承旨)로서 호종(扈從)하여 병조 판서(兵判)에 발탁되기까지 공로(功勞)가 가장 컸다. 평생 청탁하는 글[關節文字]²⁹⁹을 짓지 않았고, 문에는 증여(贈遺)가 끊겼으며, 지위가 삼공[台輔]³⁰⁰에 있었으나 집은 가난하여 한사(寒士)³⁰¹와 같았다. 무신년(1608) 즉위 초[初政], 여염(閭閻)³⁰²에서 임해군(臨海君)이 변란을 일으킬까 의심하는 이가 많아 조정이 먼저 움직였고 이덕형 또한 처치(處置)하자는 논의를 하였으나, 이항복만 홀로 태연히[凝然] 동요하지 않았다. 이때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提調)³⁰³로 있었는데, 어떤 이가 비밀리에 병비(兵備)를 신칙(申飭)하도록 권하자, 이항복이 말하였다. “임해군이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내가 맨손[徒手]으로 잡고도 남음이 있다.” 그 후에 일찍이 문하(門下)에게 일러 말하였다. “너희들은 나이가 젊으니, 마땅히 임해군의 원통함이 풀리는[伸冤] 때를 볼 것이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그가 편당(偏黨)을 주장하지 않고 세태를 따라 일을 처리함[隨世傲事]³⁰⁴을 보고, 사론(士論)에서 혹 그의 행위가 세속에 영합하여 구차하게 용납되려는 것[滑稽苟容]³⁰⁵이라고 의심하였다. 대론(大論)³⁰⁶ 때 의견 수합에 미쳐서는, 바야흐로 교외(郊外)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어 국사(國事)에 관여할 때가 아니었는데도, 붓을 들어 의견을 초(草)함에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었으니, 그 대절(大節)의 빼앗을 수 없음이 이와 같았다.【실록(實錄)에서 인용】

주석:
299. 관절문자(關節文字): 청탁이나 뇌물을 목적으로 주고받는 글.
300. 태보(台輔): 삼공(三公)을 가리킨다.
301.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
302. 여염(閭閻): 백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 민간.
303.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提調):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으뜸 벼슬.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 설치된 중앙 군영이다. 도제조는 주로 현직 의정(議政)이 겸임했다.
304. 수세오사(隨世傲事): 세태를 따라 일을 처리함. '오(傲)'는 '거만하다'는 뜻 외에 '방임하다, 마음대로 하다'는 의미도 있다. 문맥상 시류에 영합하거나 현실과 타협하는 듯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05. 활계구용(滑稽苟容): 익살스럽고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춤. 원칙 없이 시류에 영합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이다.
306. 대론(大論): 중대한 논의. 폐모론(廢母論)을 가리킨다.


원문:
凡公之爲, 無所不豪。 鳳生丹穴, 五彩其毛; 鶴唳瑤臺, 聲徹九皐。 氷壺玉鑑, 赤芾錦袍。 望若神仙, 超然自高。 是公之豪形於儀標也。 接人雅量, 藹其和平。 霏屑淸言, 一坐盡傾。 玉露翻空, 光風解慍。 是公之豪發於談論也。 軒冕無心, 煙霞寄想。 佳辰勝景, 遇興獨往。 邀月納涼, 迎風引爽。 是公之豪見於氣像也。 自出機杼, 刊落陳言。 駸駸兩京, 亹亹開元。 渥洼神駒, 不屑銜轅。 泛駕橫驅, 逸氣超群。 此則公之豪於文也。 臨池落筆, 一瞬千行。 驟雨颯颯, 飛雪茫茫。 變態自奇, 天趣有餘。 此則公之豪於書也。 拾芥一第, 平步金鑾。 主盟文席, 建牙將壇。 年纔强仕, 位冠黃扉。 素履蕭然, 一介布衣。 視鍾彝與台鼎, 不啻春夢一幻。 此則公之豪於宦也。 公秉化樞, 與天周旋。 盡塞僥穴, 門常寂然。 一噓春雨, 片言華衮。 英才積於藥籠, 故吏遍於藩閫。 本不與於鑑衡, 終若浼於權柄。 此則公之豪於政³⁰⁷也。 兵戈搶攘, 左酬右答。 若不意會, 俱於理合。 雲行電決, 刃迎縷解。 應之無跡, 不滯纖芥。 事若可爲, 勇不顧前後。 知不可行, 則袖手斂避。 此則公之豪於事也。 顚沛之際, 一節險夷。 柱天勳業, 談笑了之。 宇宙再闢, 浴日麗空。 公冠通候, 寂若無躬。 此則公之豪於功也。 癸丑之秋, 禍慘一網。 有含其沙, 擠公罪黨。 上未釋公, 公早自決。 匹馬東門, 不俟終日。 如司馬之居洛, 而封爵猶在; 同鄭公之釋位, 而祠祿亦廢。 此則公之豪於進退也。 廷議震動, 人皆脅息。 從違之間, 立見鼎鑊。 公旣遯于荒野, 雖不言亦非公責。 公乃奮筆抗言, 竭盡平生所抱。 以隻手扶植二百年綱常, 流竄困厄處之若嗜好。 此則公之豪於處變守死善道者也。【李月沙祭公文。】

번역문:
무릇 공의 행위는 호방(豪)하지 않음이 없었다. 봉황(鳳凰)이 단혈(丹穴)³⁰⁸에서 나니 그 털이 오색(五彩)이요, 학(鶴)이 요대(瑤臺)³⁰⁹에서 우니 그 소리가 구고(九皐)³¹⁰에 사무친다. 얼음 담은 병[氷壺]과 옥 거울[玉鑑]³¹¹ 같고, 붉은 슬갑[赤芾]과 비단 도포[錦袍]³¹²로다. 바라보면 신선(神仙) 같아 초연(超然)히 스스로 높으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의표(儀表, 외모와 풍채)에 드러난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아량(雅量)은 온화하고 평화로우며[藹其和平], 맑은 말이 눈처럼 쏟아지니[霏屑淸言] 온 좌중(一坐)이 모두 기울어진다. 옥 같은 이슬[玉露]이 허공에 나부끼고, 맑은 바람[光風]³¹³이 분노[慍]를 풀어주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담론(談論)에서 발현된 것이다. 벼슬[軒冕]에 무심하고 자연[煙霞]에 생각을 부치며, 좋은 때[佳辰]와 뛰어난 경치[勝景]를 만나면 흥취(興)가 일어날 때 홀로 간다. 달을 맞이하여 더위를 식히고[邀月納涼], 바람을 맞이하여 상쾌함[爽]을 이끄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기상(氣像)에서 나타난 것이다. 스스로 기저(機杼)에서 내어 진부한 말[陳言]을 깎아 없애니, 양경(兩京)에 성하게 퍼지고 개원(開元)³¹⁴처럼 성대하도다. 악와(渥洼)의 신마(神駒)³¹⁵는 굴레와 끌채[銜轅]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멍에를 벗고 멋대로 달려[泛駕橫驅] 빼어난 기운[逸氣]이 무리에서 뛰어나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문(文)에 있어서이다. 연못에 임하여 붓을 떨어뜨리니[臨池落筆]³¹⁶, 한 순간에 천 줄[千行]이로다. 소나기[驟雨]는 쏴아 쏴아 내리고, 날리는 눈[飛雪]은 아득하구나. 변화하는 모습[變態]이 스스로 기이하고 하늘의 운치[天趣]가 남음이 있으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서(書, 글씨)에 있어서이다. 지푸라기 줍듯[拾芥]³¹⁷ 한 번에 급제[一第]하여 평탄하게 대궐[金鑾]³¹⁸에 올랐고, 문단[文席]의 맹주(盟主)가 되고 장수들의 단[將壇]에 깃발을 세웠다[建牙]³¹⁹. 나이 겨우 강사(强仕)³²⁰에 이르러 지위는 재상[黃扉]³²¹ 중 으뜸이었으나, 평소 행실[素履]은 쓸쓸하여[蕭然] 일개 베옷[布衣]³²²과 같았다. 종이(鍾彝)³²³와 태정(台鼎) 보기를 한바탕 봄꿈[春夢一幻]에 지나지 않는 듯 여기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환(宦, 벼슬살이)에 있어서이다. 공이 조화(造化)의 추축[化樞]³²⁴을 잡고 하늘과 더불어 주선(周旋)하니, 요행을 바라는 구멍[僥穴]을 모두 막아 문이 항상 고요하였다. 한 번 숨을 내쉬면 봄비[春雨]³²⁵가 되고, 짧은 말 한마디는 화려한 예복[華袞]³²⁶이 되었다. 영재(英才)들이 약롱(藥籠)³²⁷에 쌓이고, 옛 관리[故吏]들이 지방[藩閫]³²⁸에 두루 퍼졌다. 본래 인재 감별[鑑衡]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나, 마침내 권력의 자루[權柄]에 오염된 듯하였으니³²⁹, 이는 공의 호방함이 정(政, 정치)에 있어서이다. 병란(兵戈)이 어지러울[搶攘] 때 좌우(左右)로 응수(酬答)하는데, 마치 미리 뜻을 맞추지 않은 듯하나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다. 구름처럼 행하고 번개처럼 결단하며, 칼날을 맞이하면 실이 풀리듯[刃迎縷解] 하였다. 응(應)함에 흔적이 없고 티끌[纖芥]만큼도 막힘[滯]이 없었다. 일이 만약 할 만하면 용감히 전후(前後)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할 수 없음을 알면 곧 소매에 손을 넣고[袖手] 물러나 피하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사(事, 일 처리)에 있어서이다. 위태롭고 어려운[顚沛] 때에도 한결같은 절개[一節]는 험난할 때나 평탄할 때나 같았다. 하늘을 떠받치는[柱天] 훈업(勳業)을 웃으며 이야기하고 말았다. 우주(宇宙)가 다시 열리고 해를 목욕시켜[浴日] 하늘에 아름다우니, 공은 통후(通侯)³³⁰ 중 으뜸이었으나 고요하기가 몸이 없는 듯하였다. 이는 공의 호방함이 공(功)에 있어서이다. 계축년(癸丑, 1613) 가을, 화(禍)가 참혹하여 한 그물[一網]에 걸렸다. 그 모래를 머금은 자[含其沙]³³¹가 있어 공을 죄인의 당[罪黨]으로 밀어 넣었다. 상께서 공을 풀어주지 않으셨으나 공은 일찍 스스로 결단하여, 필마(匹馬)로 동문(東門)을 나서 종일(終日)을 기다리지 않았다. 마치 사마(司馬)³³²가 낙양(洛陽)에 거처하면서도 봉작(封爵)은 여전히 있었던 것과 같고, 정공(鄭公)³³³이 자리를 내놓으면서 사당의 녹봉[祠祿] 또한 폐지된 것과 같으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진퇴(進退)에 있어서이다. 조정의 의논[廷議]이 진동하여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고, 따르고 어김[從違]의 사이에 서면 즉시 솥[鼎鑊]³³⁴에 삶기는 것을 보았다. 공이 이미 황야(荒野)로 달아났으니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또한 공의 책임이 아니었다. 공은 이에 붓을 떨쳐 항변(抗言)하며 평생 품은 바를 다 쏟아내었다. 한쪽 손[隻手]으로 이백 년 강상(綱常)을 부지(扶植)하였고, 유배되어 곤궁하고 액운을 겪음[流竄困厄]을 마치 기호(嗜好)처럼 여기니, 이는 공의 호방함이 변고에 대처하고 죽음으로써 도리를 지킴[處變守死善道]에 있어서이다.【이월사(李月沙)가 공을 제사지낸 글[祭公文]에서 인용】

주석:
307. [주-D001] 政 : 저본(底本)에는 “공(攻)”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월사집(月沙集)・영의정오성부원군증시문충이공묘지명(領議政鰲城府院君贈諡文忠李公墓誌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308. 단혈(丹穴): 붉은 굴. 전설상 봉황이 사는 곳.
309. 요대(瑤臺): 옥으로 장식한 누대. 신선이 사는 곳을 비유한다.
310. 구고(九皐): 깊은 연못. 《시경(詩經)》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가 들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野)"는 구절이 있다.
311. 빙호옥감(氷壺玉鑑): 맑고 깨끗한 얼음 담은 병과 옥 거울. 맑고 깨끗한 인품을 비유한다.
312. 적불금포(赤芾錦袍): 붉은 슬갑(무릎덮개)과 비단 도포. 고위 관료의 복장. 높은 지위를 상징한다.
313. 광풍(光風): 비 갠 뒤 맑게 부는 바람. 깨끗하고 고결한 인품을 비유한다.
314. 개원(開元): 당(唐) 현종(玄宗)의 연호(713-741). 당나라의 전성기로 문물이 융성했던 시기. 이항복의 문장이 성대했음을 비유한다.
315. 악와신구(渥洼神駒): 악와(한혈마의 산지)에서 난 신마. 천리마를 의미한다. 뛰어난 재능을 비유한다.
316. 임지낙필(臨池落筆): 서예가가 연못가에서 글씨 연습을 하여 연못물이 먹물로 검게 변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글씨를 매우 잘 쓰는 것을 의미한다.
317. 습개(拾芥): 지푸라기를 줍는다는 뜻으로, 매우 쉬운 일을 비유한다. 과거에 쉽게 급제했음을 의미한다.
318. 금란(金鑾): 금란전(金鑾殿). 황제가 정사를 보는 궁전. 대궐을 의미한다.
319. 건아(建牙): 장수의 군영 앞에 아기(牙旗, 상아로 장식한 깃발)를 세우는 것. 장수가 군권을 장악함을 의미한다.
320. 강사(強仕): 나이 40세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四十曰強 而仕"(40세를 강이라 하고 벼슬한다)라고 하였다.
321. 황비(黃扉): 재상이 사무를 보던 관청의 문을 누런 칠을 한 데서 유래. 재상의 지위를 의미한다.
322. 포의(布衣): 베옷. 평민 또는 벼슬 없는 선비를 가리킨다.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청빈하게 살았음을 의미한다.
323. 종이(鍾彝): 제례에 사용되던 종(鍾)과 솥(彝). 귀한 기물을 상징한다.
324. 화추(化樞): 조화(造化)의 추축(樞軸). 천지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중심 역할을 비유한다. 재상으로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325. 춘우(春雨): 봄비. 만물을 소생시키는 은택을 비유한다.
326. 화곤(華衮): 화려한 예복. 훌륭한 문장이나 공적을 비유한다.
327. 약롱(藥籠): 약을 담는 상자. 《당서(唐書)》 〈적인걸전(狄仁傑傳)〉에 당 태종이 적인걸을 칭찬하며 "나의 약롱 속의 약이다"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비유한다.
328. 번곤(藩閫): 번진(藩鎭, 지방)과 군문(軍門, 군영). 중앙과 지방의 관직 및 군직을 아우른다.
329. 본불여어감형 종약매어권병(本不與於鑑衡 終若浼於權柄): 원래는 인재 감별과 등용(鑑衡)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권력의 자루(權柄)에 오염(浼)된 듯하였다. 이 부분은 이항복이 말년에 정치적 논란에 휘말렸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330. 통후(通侯): 열후(列侯)의 다른 이름. 중국 한(漢)나라 때의 작위로, 제후 중 가장 높은 등급. 공신 중 으뜸임을 의미한다.
331. 함기사(含其沙): 모래를 머금음. 《수신기(搜神記)》에 나오는 여귀(蜮鬼, 모래 귀신)의 고사에서 유래. 남을 몰래 중상하고 해치는 것을 비유한다.
332. 사마(司馬):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키는 듯하다. 사마천은 궁형(宮刑)을 받은 후에도 《사기(史記)》 저술에 몰두했다.
333. 정공(鄭公): 정현(鄭玄) 또는 정자(程子, 정이 또는 정호) 등을 가리킬 수 있다. 구체적인 고사가 명확하지 않다. 벼슬을 버리면서 녹봉까지 반납한 청렴함을 의미하는 듯하다.
334. 정확(鼎鑊): 솥. 죄인을 삶아 죽이는 형벌 도구. 극형 또는 위태로운 상황을 비유한다.


원문:
士禍起松江爲禍首, 俟譴江上, 親舊不敢問。 李白沙獨歷訪, 從容移日, 人皆爲公危之。 未幾, 臺諫請以鄭澈罪案榜示朝堂, 劾恒福以承旨緩於奉行罷職。 尋復拜承旨, 臺官挾前憾, 將寘竄黜中, 都憲李元翼力救而止。【《紀年通攷》。】

번역문:
사화(士禍)³³⁵가 일어나 송강(松江)³³⁶이 화의 우두머리가 되어 강가[江上]에서 견책(譴責)을 기다릴 때, 친구[親舊]들이 감히 문안하지 못하였다. 이백사(李白沙)만이 홀로 두루 찾아가 종용(從容)히 하루를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간(臺諫)³³⁷이 정철(鄭澈)의 죄안(罪案)을 조정 당상(朝堂)에 방(榜)으로 써 붙일 것을 청하고, 이항복을 승지(承旨)로서 명령 받듦[奉行]을 게을리하였다고 탄핵하여 파직(罷職)시켰다. 곧 다시 승지(承旨)에 임명되자, 대관(臺官)³³⁸이 이전의 유감[前憾]을 품고 장차 찬출(竄黜)³³⁹에 처하려 하였으나, 도헌(都憲)³⁴⁰ 이원익(李元翼)이 힘써 구원하여 그만두었다.【《기년통고(紀年通攷)》³⁴¹에서 인용】

주석:
335. 사화(士禍): 선비들이 화를 입는 사건. 여기서는 1591년(선조 24)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건저 문제)로 실각하고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된 사건(기축옥사의 여파)을 가리킨다.
336.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호.
337.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을 아울러 이르는 말.
338. 대관(臺官): 사헌부 관원.
339. 찬출(竄黜): 먼 곳으로 유배 보내거나 관직에서 내쫓는 것.
340. 도헌(都憲): 대사헌(大司憲)의 별칭.
341. 《기년통고(紀年通攷)》: 조선 후기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이 단군조선부터 인조(仁祖) 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한 역사책.


원문:
李鰲城早樹勳業, 爲中興名輔, 眞不世出之人豪也。 亂平後, 公入相數歲而罷。 旣而宣廟專任小北一隊。 光海初再入相, 然時勢已無可爲者, 公不能匡正, 間雜詼諧, 有安石坐鎭之意, 物議甚不快。 宋公永耉下鄕時, 往訪値駕, 乃以一大西瓜遺侍者進之。 公還見曰: “此人殆病我以與世推移也。” 光海嘗削任叔英科, 公不能力爭, 沈一松喜壽反爭之。 石洲語人曰: “豈知今日鰲城乃不及於沈某乎?” 石洲之獄亦然, 物情益駭。 及永昌之議, 漢陰欲守正, 公謂爲永昌死則傷勇, 漢陰先敗。 後五年而始因廢大妃爲收議, 辭義凜然, 竄歿北塞, 謗公者大服, 所謂恐負遼東翟黑子也。 蓋公壬寅罷相以來, 好讀《左氏春秋》、《禮記》等書, 見識文章益大進, 可謂能先立乎大者, 不惟其天資爲然也。

번역문:
이오성(李鰲城)은 일찍이 훈업(勳業)을 세워 중흥(中興)의 이름난 보필[名輔]이 되었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不世出] 인물 중 호걸(人豪)이다. 난리[亂]가 평정된 후, 공이 재상[入相]이 되어 수년을 지내다가 파직되었다. 이윽고 선조께서 오로지 소북(小北)³⁴² 일파를 임용하셨다. 광해군 초에 다시 재상[入相]이 되었으나, 시세(時勢)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 공이 바로잡지[匡正] 못하고, 간간이 해학(詼諧)을 섞으며 안석(安石)³⁴³이 앉아서 진압[坐鎭]하려던 뜻이 있었으니, 물의(物議)³⁴⁴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송공 영구(宋公永耉)³⁴⁵가 시골로 내려갈 때, 찾아가니 마침 (송공의) 수레[駕]가 도착했는데, 이에 큰 수박[西瓜] 하나를 시자(侍者)에게 남겨 올리게 하였다. 공이 돌아와 보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내가 세상과 함께 추이(推移)³⁴⁶한다고 병통으로 여기는구나.” 광해군이 일찍이 임숙영(任叔英)³⁴⁷의 과명(科名)을 삭제하였는데, 공이 힘써 다투지 못하였으나 심일송 희수(沈一松喜壽)³⁴⁸는 도리어 이를 다투었다. 석주(石洲)³⁴⁹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알았으랴, 오늘날 오성(鰲城)이 이에 심모(沈某)에게 미치지 못할 줄을?” 석주의 옥사(獄事)³⁵⁰ 또한 그러하여 물정(物情)³⁵¹이 더욱 놀랐다. 영창(永昌)의 의논에 미쳐, 한음(漢陰)이 정도(正道)를 지키려 하자, 공이 영창을 위해 죽는 것은 용기[勇]를 해친다고 하였고, 한음이 먼저 패하였다. 5년 뒤에 비로소 폐대비(廢大妃) 문제로 인해 의견 수합을 하게 되자, 말과 의리[辭義]가 늠름(凜然)하여 북쪽 변방[北塞]에 유배되어 죽으니, 공을 비방하던 자들이 크게 감복하였으니, 이른바 ‘요동(遼東)의 적흑자(翟黑子)³⁵²에게 미안할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대개 공이 임인년(1602) 재상에서 파면된 이래로, 《좌씨춘추(左氏春秋)》³⁵³, 《예기(禮記)》 등의 서적 읽기를 좋아하여 견식(見識)과 문장(文章)이 더욱 크게 진보하였으니, 가히 먼저 큰 것[大者]에 설 수 있었다고 이를 만하며, 비단 그 천부적인 자질[天資]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석:
342. 소북(小北): 조선 중기 북인(北人)의 한 분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했던 유영경(柳永慶)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광해군 즉위 후 대북(大北) 세력에게 제거되었다.
343. 안석(安石): 중국 동진(東晉)의 명재상 사안(謝安)의 자(字). 그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하게 대처하며 정국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이항복이 복잡한 정국 속에서 직접적인 행동보다는 원숙한 경륜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음을 비유하는 듯하다.
344. 물의(物議): 여러 사람들의 비판적인 의논.
345. 송영구(宋永耉):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346. 여세추이(與世推移): 세상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해감. 여기서는 원칙 없이 시류에 영합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347. 임숙영(任叔英, 1576-1623): 조선 중기의 문신.
348. 심희수(沈喜壽, 1548-162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일송(一松). 서인의 중진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349.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 조선 중기의 문인. 호는 석주. 강직한 성품으로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시를 짓다가 장살(杖殺)당했다.
350. 석주의 옥사(獄事): 권필이 광해군을 비판한 시 〈궁류시(宮柳詩)〉 필화 사건으로 죽음에 이른 일을 가리킨다. 이 사건에 대해 이항복이 소극적으로 대처했음을 비판하는 맥락이다.
351. 물정(物情):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나 여론.
352. 적흑자(翟黑子): 요동(遼東) 사람 적공(翟公)을 가리키는 듯하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오는 인물로, 권세가 있을 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실각하자 손님이 끊겼고, 다시 복직하자 사람들이 찾아오니 "죽고 사는 형편을 보아야 비로소 교정(交情)의 참됨을 알 수 있다(死生存亡, 乃知交情)"고 한탄하며 대문에 써 붙였다고 한다. 이항복이 폐모론에 반대하여 절의를 지킴으로써, 이전에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353. 《좌씨춘추(左氏春秋)》: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春秋)》의 대표적인 주석서 중 하나.


원문:
鰲城在光海時, 爲都體察使, 專管西北面除拜, 又引金昇平瑬爲從事官。 武臣自申平城景禛、具綾城宏、具綾川仁垕、鄭錦南忠臣以下, 文士前輩自象村、月沙、淸陰, 後輩自崔完城、張新豐、趙浦渚以下, 出入其門者甚盛。 靖社諸公, 大抵皆公素儲養也, 得人之盛, 古無其比。 反正之日, 公夢于昇平、延平二公曰: “今日固爲宗社有此擧, 然此後一事, 有大於是者, 吾甚憂之。 諸公勉旃。” 蓋指南漢出城也。 此豈所謂魏公精爽可畏者耶? 異哉異哉!

번역문:
오성(鰲城)이 광해군 때 도체찰사(都體察使)³⁵⁴가 되어 서북면(西北面)³⁵⁵의 제배(除拜, 관직 임명)를 오로지 관장하였고, 또 승평군(昇平君) 김류(金瑬)³⁵⁶를 이끌어 종사관(從事官)³⁵⁷으로 삼았다. 무신(武臣)으로는 평성군(平城君) 신경진(申景禛)³⁵⁸, 능성군(綾城君) 구굉(具宏)³⁵⁹,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³⁶⁰,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³⁶¹ 이하, 문사(文士) 선배로는 상촌(象村), 월사(月沙), 청음(淸陰)³⁶², 후배로는 완선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³⁶³, 신풍군(新豐君) 장유(張維), 포저(浦渚) 조익(趙翼)³⁶⁴ 이하로, 그 문(門)을 출입하는 자가 매우 성하였다. 정사(靖社)³⁶⁵의 여러 공(公)들은 대저 모두 공이 평소에 길러낸[儲養] 이들이니, 사람을 얻은 성대함이 옛날에도 그에 비할 바가 없었다. 반정(反正)하던 날, 공이 몽중에 승평(昇平), 연평(延平)³⁶⁶ 두 공(公)에게 나타나 말하였다. “오늘 진실로 종사(宗社)를 위하여 이러한 거사(擧)가 있었으나, 이 뒤의 한 가지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있으니 내가 심히 걱정하노라. 제공(諸公)은 힘쓸지어다.” 대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나간 것[出城]³⁶⁷을 가리킨 것이다. 이 어찌 이른바 위공(魏公)³⁶⁸의 정신[精爽]이 두렵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이하도다, 기이하도다!

주석:
354. 도체찰사(都體察使): 전쟁 등 비상시에 임명되어 군사 및 행정권을 총괄하던 임시 최고 사령관.
355. 서북면(西北面):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당시 후금(後金)과의 국경 지대로 군사적 중요성이 컸다.
356. 승평군(昇平君) 김류(金瑬, 1571-1648):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 중 한 명. 영의정을 지냈다.
357. 종사관(從事官): 도체찰사 등 고위 관리를 보좌하던 무관직.
358. 평성군(平城君) 신경진(申景禛, 1575-1643): 조선 중기의 무신. 인조반정의 주역.
359. 능성군(綾城君) 구굉(具宏, 1577-1642): 조선 중기의 무신. 인조반정 참여.
360.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 1578-1658): 조선 중기의 무신. 인조반정의 주역.
361.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조선 중기의 무신. 이괄의 난, 정묘호란 때 활약했다.
362. 상촌(象村), 월사(月沙), 청음(淸陰): 각각 신흠(申欽), 이정귀(李廷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호. 모두 조선 중기의 명망 높은 문신들이다.
363. 완선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다. 영의정을 지냈다.
364.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다. 영의정을 지냈다.
365. 정사(靖社): 사직(社稷)을 안정시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미화하여 이르는 말이다.
366. 연평(延平): 이귀(李貴, 1557-1633)의 봉호(연평부원군). 인조반정의 주역.
367. 남한출성(南漢出城): 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청(淸)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성을 나간 사건. 이항복이 꿈에 나타나 이 사건을 예견하고 우려했다는 것이다.
368. 위공(魏公): 조조(曹操)를 가리킬 수도 있고, 당(唐)나라 위징(魏徵)을 가리킬 수도 있다. 위징은 죽은 후에도 당 태종의 꿈에 나타나 간언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世常說公謫北日, 昇平公送之東郊, 與衆賓辭退。 公獨留之謂曰: “吾今行必不返。 環顧當世, 其可托以宗社大計者, 亡踰於君, 吾故留之。 事到今日, 只有廢昏立明一節而已, 唯君勉之。” 是雖不見於前此公私記載, 揆以時勢大體, 宜亦不誣者。 乃今獲聞傳畫事本末, 尤可異焉。 其言曰“昇平暇日造公陪語久之, 公出一丈幅畫以示, 仍問曰: ‘此畫何如?’ 蓋其畫爲畫一馬繫於柳樹下, 且書所畫年月日于右方者也。 昇平諦視之, 似是手生者所寫, 對曰: ‘以愚所見, 不知其爲善品。’ 公笑曰: ‘吾意則不然。 幸令公持去, 欲推畫主以與之。’ 昇平敬諾齎歸。 所寓適在京城內道旁, 乃揭其畫于壁上, 客至輒詢之, 久而莫能知其主者。 一日天陰, 雷雨驟至, 有闖門而入者, 昇平迓之座與語, 非素際也。 雨勢仍注, 遂相對移時。 客就視壁上所揭畫, 識之曰: ‘此殆吾所曾見者歟!’ 昇平問曰: ‘不識公曾見於何處? 又能知畫之者否?’ 客皆不明言, 第欲得以袖歸, 昇平亦不許。 少頃, 侍婢進酒饌, 頗豐潔, 相與酬酢而罷。 蓋所謂客卽仁祖大王, 方爲宗室綾陽君時也。 昇平入謂夫人曰: ‘吾家方苦乏食, 夫人何以有此饌耶?’ 對曰: ‘妾夜夢天雨甚, 傳說車駕來幸。 及至座與語, 一如今日客來之狀, 妾心異之, 故敢有此設耳。’ 未數日, 仁祖又來訪款語, 愈欲得畫以歸, 昇平又不許。 然念旣爲近屬公子屢屈, 不可不一謝, 乃造門焉。 自此往返, 情義密勿, 遂與翊戴, 共成中興大業, 竟亦不知其畫出於某人也。 至反正後, 仁祖置酒別殿, 命諸元勳入見, 從容良久, 敎于昇平曰: ‘向時卿所揭壁上畫馬一幅, 未知得於何人耶? 此正予少時膺先王命而寫之者。’ 昇平起拜對曰: ‘臣嘗爲故相臣李恒福從事遊好甚篤, 因以得此幅耳。’ 又述其語大略。 旣出, 乃招公子井男, 問其得之之故。 對曰: ‘宣祖於末年, 一日, 賜先人私對, 且令諸王子、王孫出見, 遂以其所書及畫示之。 先人遍觀諸書畫, 獨得此幅而歸, 宣廟許之。 是其曲折也。’ 於是昇平始大悟, 知公之傳畫意有所在”云。 嗟乎奇哉! 蓋公少習丹靑, 稱爲妙筆。 未幾, 絶而不爲, 猶能目辨古今品流臧否甚晢, 殆無不中者, 豈亦當時洞見其爲此畫者有異日人君氣象故耶? 然而不示於人, 而必傳諸昇平者, 可謂默識前知, 能托元功而啓興運矣。 嗟乎奇哉!【竝《南溪集・雜著》。】
번역문: (계속)
소매에 넣어 돌아가려 하였으나 승평공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후 시비(侍婢)가 술과 음식[酒饌]을 올리는데 자못 풍성하고 정결[豐潔]하여,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酬酢] 파하였다. 대개 이른바 손님은 바로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바야흐로 종실(宗室) 능양군(綾陽君)³⁶⁹이셨을 때였다. 승평공이 들어가 부인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이 바야흐로 음식이 부족하여 어려운데, 부인은 어찌하여 이런 음식을 마련하였소?’ 부인이 대답하였다. ‘첩이 간밤에 꿈을 꾸니 하늘에서 비가 심하게 내리는데 어가(車駕)께서 오셨다는 소문이 전해졌습니다. 자리에 이르러 함께 이야기하는데 오늘 손님이 오신 상황과 똑같아서, 첩의 마음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감히 이렇게 차렸을 뿐입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인조께서 또 와서 방문하여 정답게 이야기하며[款語] 더욱 그림을 얻어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승평공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이미 가까운 종실의 공자[近屬公子]께서 여러 번 몸을 낮추셨으니 한번 사례하지 않을 수 없다 여겨, 이에 문을 찾아갔다. 이로부터 왕래하며 정의(情義)가 친밀[密勿]하여, 마침내 함께 익대(翊戴)³⁷⁰하여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나, 끝내 또한 그 그림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반정(反正) 후에 이르러 인조께서 별전(別殿)에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원훈(元勳)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뵙게 하고는, 종용(從容)히 한참 있다가 승평공에게 말씀하셨다. ‘지난날 경(卿)이 벽에 걸어두었던 말 그림 한 폭을 어떤 사람에게서 얻었는지 알지 못했는가? 이는 바로 내가 젊었을 때 선왕(先王)의 명을 받들어 그린 것이다.’ 승평공이 일어나 절하고 대답하였다. ‘신(臣)이 일찍이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의 종사관(從事)으로 매우 돈독하게 교유(遊好)하여, 이로 인해 이 그림 폭을 얻었을 뿐입니다.’ 또 그 말의 대략을 진술하였다. 이미 나온 뒤에 이에 공의 아들 정남(井男)³⁷¹을 불러 그 그림을 얻은 까닭을 물었다. 정남이 대답하였다. ‘선조께서 말년에 하루는 돌아가신 아버지[先人]에게 사사로이 대면하시고, 또 여러 왕자(王子), 왕손(王孫)들을 나와 뵙게 하고는, 마침내 그 쓰신 글씨와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여러 서화(書畫)를 두루 보시고 유독 이 그림 폭을 얻어 돌아오려 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그 곡절(曲折)입니다.’ 이에 승평공이 비로소 크게 깨달아, 공이 그림을 전한 뜻이 있는 바를 알았다”고 한다. 아, 기이하도다! 대개 공은 젊어서 단청(丹靑)³⁷²을 익혀 묘필(妙筆)³⁷³이라 칭송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능히 눈으로 고금(古今)의 품격의 높낮이[品流]와 좋고 나쁨[臧否]을 매우 밝게[晢] 분별하여 거의 맞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찌 또한 당시에 이 그림을 그린 이에게 뒷날 임금의 기상(人君氣象)이 있음을 통찰(洞見)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반드시 승평공에게 전한 것은, 가히 말없이 미리 알고[默識前知] 능히 으뜸 공신[元功]에게 부탁하여 흥하는 운수[興運]를 열었다고 이를 만하다. 아, 기이하도다!【이상은 《남계집(南溪集)・잡저(雜著)》³⁷⁴에서 인용】
주석:
369. 능양군(綾陽君): 인조(仁祖, 1595-1649)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군호(君號). 선조의 손자이다.
370. 익대(翊戴): 임금을 도와 받듦.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한 것을 의미한다.
371. 정남(井男): 이정남(李井男). 이항복의 셋째 아들.
372. 단청(丹靑): 붉은색과 푸른색 물감. 그림 또는 그림 그리는 일을 의미한다.
373. 묘필(妙筆): 매우 뛰어난 글씨나 그림 솜씨.
374. 《남계집(南溪集)・잡저(雜著)》: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문집 《남계집》에 실린 <잡저>.

원문:
李相公恒福豁然不拘細故, 能以所存忘富貴, 亦偉人。 永昌之死, 以爲大臣不爲一王子死。 及大妃廢時, 極言力諫, 窮死漠北, 可謂能踐言者也。【《眉叟記言》。】
번역문:
이상공(李相公) 이항복(李恒福)은 마음이 활달하여[豁然] 자잘한 일[細故]에 구애되지 않았고, 능히 마음에 지닌 바[所存]로써 부귀(富貴)를 잊었으니 또한 위인(偉人)이다. 영창(永昌)이 죽었을 때는 대신(大臣)은 한 왕자(王子)를 위해 죽지 않는다고 여겼다. 대비(大妃) 폐위에 미쳐서는 극력 말하며 힘써 간하여[極言力諫], 북쪽 변방[漠北]에서 곤궁하게 죽었으니, 가히 능히 말을 실천한[踐言] 자라고 이를 만하다.【《미수기언(眉叟記言)》³⁷⁵에서 인용】
주석:
375. 《미수기언(眉叟記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은 책. 역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문과 견해를 기록하였다. 미수(眉叟)는 허목의 호이다.

원문:
丁巳冬, 光海將廢母后, 收議于在外大臣。 先生已獲罪, 遯于東郊, 奮筆自書, 辭嚴義正, 凶徒膽慄, 三司俱發, 禍將不測。 先生待命於靑坡奴家, 嘗手抄《禮記》, 掛諸馬鞍而行。 先生端坐室中看《禮記》, 子弟及吾輩數人在庭下, 或坐或起, 以待來報。 忽有急脚自城中奔馳而來, 氣竭, 口不能言, 衆皆失色顚倒迎視之, 乃請按律之報也。 余欲白于先生, 而遲回嗚咽, 不忍啓口。 先生覽畢, 了無異色, 看書不輟。 少焉進夕飯, 飮噉自若, 及夜就枕, 鼻息如雷。 房室極狹, 子弟侍者皆在廳事, 獨余侍寢, 憂憤所激, 輾轉達曉。 鷄旣鳴, 先生睡覺, 名余曰: “某! 汝尙不寢乎?” 余起而對曰: “不寢矣。” 因更坐曰: “敢問於先生。 死生亦大矣, 今日之事, 雖傍觀者, 亦不能自定。 小子侍側, 仰察警咳, 先生安閑舒泰, 少無異於平時。 君子於死生之際, 若是其恝耶?” 先生莞爾而笑曰: “我非不動心者。 然事有先後, 動有次第。 今者始請按罪, 則判下然後當就理, 結案然後當伏法。 若見請罪之章, 便自驚動, 其如三木之下何? 其如椹質之前何?” 因復就睡, 終無幾微見於辭色者。 古人吾不及見, 然以我觀吾先生, 雖使古人處之, 無以加焉。【李相國時白所記。】
번역문:
정사년(1617, 광해군 9) 겨울, 광해군이 장차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여 외방(在外)에 있는 대신(大臣)들에게 의견을 수합하였다. 선생(先生)³⁷⁶께서는 이미 죄를 얻어 동쪽 교외[東郊]로 피해 있었는데, 붓을 떨쳐 스스로 쓰니 말[辭]은 엄하고 의리[義]는 바르므로, 흉악한 무리[凶徒]들이 간담(肝膽)이 서늘해졌고[膽慄] 삼사(三司)가 모두 들고 일어나 화(禍)가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선생께서는 청파(靑坡)³⁷⁷ 노비(奴)의 집에서 명(命)을 기다리며, 일찍이 손수 《예기(禮記)》를 베껴 말안장[馬鞍]에 걸고 다녔다. 선생께서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예기》를 보시는데, 자제(子弟) 및 우리 무리[吾輩]³⁷⁸ 두어 사람이 뜰 아래에서 혹은 앉고 혹은 일어나며 오는 보고를 기다렸다. 홀연히 급한 보고를 전하는 사람[急脚]이 성 안에서 급히 달려와 기운이 다하여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하니, 무리가 모두 실색(失色)하여 허둥지둥[顚倒] 맞이하여 보니, 바로 법률에 따라 처벌[按律]하기를 청하는 보고였다. 내[余]가 선생께 아뢰려 하였으나 머뭇거리며 오열(嗚咽)하여 차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선생께서 보기를 마치시고 전혀 다른 기색(異色)이 없으시며 책 보기를 그치지 않으셨다. 잠시 후에 저녁밥을 올리니 마시고 드시는 것[飮噉]이 태연자약[自若]하시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드시니 코 고는 소리[鼻息]가 우레와 같았다. 방(房)이 매우 좁아 자제와 시자(侍者)들은 모두 대청[廳事]에 있었고, 홀로 내[余]가 잠자리 곁을 모셨는데[侍寢], 근심과 분함[憂憤]에 격동되어 이리저리 뒤척이다[輾轉] 새벽에 이르렀다. 닭이 이미 울자 선생께서 잠에서 깨어 내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셨다. “아무개야! 너는 아직 잠들지 않았느냐?” 내가 일어나 대답하였다. “잠들지 못했습니다.” 이내 다시 앉아 말하였다. “감히 선생께 여쭙니다. 죽고 사는 것[死生] 또한 큰일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비록 곁에서 보는 자[傍觀者]라도 또한 스스로 안정할 수 없습니다. 소자(小子)가 곁에서 모시며 기침 소리[警咳]³⁷⁹를 우러러 살피니, 선생께서는 편안하고 한가하며 느긋하시어[安閑舒泰]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십니다. 군자(君子)는 사생(死生)의 즈음에도 이처럼 무심[恝]³⁸⁰하십니까?” 선생께서 빙그레[莞爾]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일에는 선후(先後)가 있고, 동요함에는 차례[次第]가 있다. 지금 비로소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니, 판결이 내려진 뒤에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고, 안(案)이 결정된 뒤에 마땅히 법(法)에 엎드려야 한다. 만약 죄를 청하는 상소[章]를 보고 문득 스스로 놀라 동요한다면, 삼목(三木)³⁸¹ 아래에서는 어찌할 것이며, 심질(椹質)³⁸² 앞에서는 어찌할 것인가?” 이내 다시 잠드시고, 끝내 조금의 기미[幾微]도 말과 얼굴빛[辭色]에 나타나는 자가 없었다. 옛사람을 내가 미처 보지 못하였으나, 내가 나의 선생을 보건대 비록 옛사람으로 하여금 이에 처하게 하더라도 더할 것이 없을 것이다.【이상국(李相國) 시백(時白)³⁸³이 기록한 바이다.】
주석:
376. 선생(先生): 여기서는 이항복을 가리킨다.
377. 청파(靑坡):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일대.
378. 오배(吾輩): 우리 무리. 이 글의 저자인 이시백(李時白)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가리킨다.
379. 경해(警咳): 기침 소리. 윗사람의 동정을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380. 활(恝): 무심하다, 개의치 않다.
381. 삼목(三木):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枷), 손에 채우는 수갑(杻), 발에 채우는 차꼬(械)의 세 가지 형구(刑具).
382. 심질(椹質): 죄인의 머리를 올려놓고 도끼로 찍어 죽이는 형틀. 사형틀을 의미한다.
383. 이시백(李時白, 1581-1660): 이항복의 맏아들. 호는 조죵(調죵).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다. 영의정을 지냈다.

장운익(張雲翼)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張雲翼
字萬里, 德水人。 嘉靖辛酉生。 己卯司馬。 壬午, 擢魁科。 歷兩司、承旨、黃海道觀察使, 官至刑曹判書。 己亥卒, 年三十九。

번역문:
장운익(張雲翼)
자는 만리(萬里)이고, 덕수(德水) 사람이다.¹ 명(明) 가정(嘉靖) 신유년(1561)에 태어났다. 기묘년(1579, 선조 12)에 사마시(司馬試)²에 합격하고, 임오년(1582, 선조 15)에 문과(文科)에서 장원³으로 뽑혔다. 양사(兩司)⁴, 승지(承旨)⁵,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⁶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형조판서(刑曹判書)⁷에 이르렀다. 기해년(1599, 선조 32)에 졸(卒)하니, 나이 39세였다.

주석:

  1. 덕수인(德水人): 본관(本貫)이 덕수(德水)임을 나타낸다. 덕수 장씨(德水 張氏)이다.
  2. 사마(司馬): 사마시(司馬試)의 약칭. 조선 시대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인 소과(小科)를 가리킨다.
  3. 괴과(魁科): 문과(文科)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함을 이른다. 장운익은 1582년(선조 15) 별시(別試) 문과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4.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言論)과 감찰(監察)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5.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6.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황해도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7. 형조판서(刑曹判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법률, 소송, 형옥(刑獄), 노비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원문:
公磊落雋拔, 遇事風生。 擧劾無所避, 群不悅者側目視之。 會倖相之有奧援者恚淸議擯己, 陰圖自安, 蜚語熒惑, 上意不能無動。 於是先去一隊名士, 公得襄陽。 亡何禍作, 鄭公澈謫江界, 尹公斗壽謫洪原, 公與洪公聖民、李公海壽俱謫北邊。

번역문:
공(公)은 마음이 활달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磊落雋拔)⁸, 일을 만나면 바람을 일으키듯 처리하였다. 탄핵(擧劾)함에 피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불쾌하게 여기는 무리들이 곁눈질하며 그를 보았다. 마침 배경(奧援)⁹이 있는 총애받는 재상(倖相)¹⁰이 청의(淸議)¹¹가 자기를 배척하는 것에 분노하여, 몰래 스스로 편안할 방도를 도모하며 뜬소문(蜚語)¹²으로 현혹시키니, 상(上)¹³의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먼저 일단의 명사(名士)들을 제거하였는데, 공은 양양(襄陽)¹⁴으로 가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화(禍)가 일어나, 정공 철(鄭公 澈)¹⁵은 강계(江界)로 유배되고 윤공 두수(尹公 斗壽)¹⁶는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으며, 공은 홍공 성민(洪公 聖民)¹⁷, 이공 해수(李公 海壽)¹⁸와 함께 모두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¹⁹

주석:
8. 뇌락준발(磊落雋拔): 마음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磊落), 재능과 기량이 남보다 뛰어남(雋拔).
9. 오원(奧援): 깊숙한 곳의 도움. 남모르게 돕는 세력이나 배경을 의미한다.
10. 행사(倖相):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재상. 당시 이산해(李山海)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11. 청의(淸議): 공정하고 깨끗한 논의. 주로 사림(士林) 세력의 공론(公論)을 의미한다.
12. 비어(蜚語): 근거 없이 떠도는 헛소문. 유언비어(流言蜚語).
13. 상(上): 임금. 선조(宣祖)를 가리킨다.
14. 양양(襄陽): 강원도 양양. 이곳의 부사(府使)로 좌천된 것을 의미한다.
15. 정공 철(鄭公 澈): 정철(鄭澈, 1536-1593). 서인(西人)의 영수.
16. 윤공 두수(尹公 斗壽):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서인(西人)의 중진.
17. 홍공 성민(洪公 聖民): 홍성민(洪聖民, 1536-1594). 서인(西人) 관료.
18. 이공 해수(李公 海壽): 이해수(李海壽, 1535-1593). 서인(西人) 관료.
19.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1591년(선조 24)에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여파로 발생한 신해옥사(辛亥獄事), 또는 건저 문제(建儲問題)와 관련된 정철의 실각 사건을 가리킨다. 정철이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자 동인(東人), 특히 이산해 등이 이를 문제 삼아 정철 및 서인 세력을 대거 축출하였다. 장운익도 이때 서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된 것이다.


원문:
壬辰, 倭寇大入, 宣廟西幸, 悉還諸放臣, 用慰人心。 公冒鋒鏑赴行在, 以善華語, 常侍左右。

번역문: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여 선조(宣廟)께서 서쪽으로 파천(西幸)하시자,²⁰ 모든 방면된 신하들을 불러들여 인심(人心)을 위로하셨다. 공은 칼날과 화살(鋒鏑)을 무릅쓰고 행재소(行在)로 달려갔는데, 중국어(華語)를 잘하였으므로 항상 임금의 좌우에서 모셨다.

주석:
20. 선묘서행(宣廟西幸):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란 간 것을 말한다.
21. 행재(行在): 임금이 머무는 곳. 임금이 궁궐을 떠나 다른 곳에 있을 때 그 임시 거처를 이른다. 당시 의주(義州)를 가리킨다.


원문:
拜都承旨, 時賊據南邊, 羽書旁午, 天朝將士塡館, 籌畫接應, 事機百端。 公素强力饒才諝, 應對出納之際, 咸中肯緊。 上察公才可堪重寄, 眷顧日隆, 特賜金帶。

번역문:
도승지(都承旨)²²에 제수되었다. 이때 적(賊)이 남쪽 변방을 점거하고 있어 우서(羽書)²³가 어지럽게 오가고, 천조(天朝)²⁴의 장수와 병사들이 관사(館舍)에 가득 차서 접응(接應)할 것을 계획하는 등, 일의 기틀(事機)이 백 가지로 많았다. 공은 평소 강인하고 재능과 지혜(才諝)가 풍부하여, 응대(應對)하고 출납(出納)하는 즈음에 모두 요점(肯綮)에 잘 맞았다. 상(上)께서 공의 재능이 중임(重寄)을 감당할 만하다고 살피시어, 권고(眷顧)하심이 날로 융숭해졌고 특별히 금대(金帶)²⁵를 하사하셨다.

주석:
22. 도승지(都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으뜸 벼슬. 정3품. 왕명 출납을 총괄하는 중책이다.
23. 우서(羽書): 깃털을 꽂은 격문. 군사상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는 문서를 말한다.
24. 천조(天朝): 하늘의 조정이라는 뜻으로, 중국 명(明)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파견했다.
25. 금대(金帶): 금으로 장식한 허리띠. 임금이 특별한 공로나 총애의 표시로 내리는 귀한 물품이었다.


원문:
出爲海州牧使。 州俗悍劇, 加以兵荒凋弊, 幾不爲州。 屬王妃分駐, 煩費倍蓰。 公至治法自出方略, 裁辦如流, 綽有餘裕。 或見公無事, 疑太簡佚, 退而耳目於外, 官蓄積增, 諸宿案如洗, 民赴愬者不經宿。 閭里靜暇, 各事其事, 扈衛官寮曁流寓人士, 無不足公者。 於是人人皆以爲公才不可及。

번역문:
외직(外職)으로 나가 해주 목사(海州牧使)²⁶가 되었다. 고을의 풍속이 사납고 심한 데다(悍劇), 병란(兵亂)과 흉년(荒年)으로 피폐해져 거의 고을 구실을 못 할 지경이었다. 마침 왕비(王妃)²⁷께서 나누어 주둔(分駐)하고 계셔서 번거로운 비용이 배나 되었다(倍蓰)²⁸. 공이 이르러 다스리는 방법을 스스로 방략(方略)을 내어, 일 처리가 물 흐르듯 하여(裁辦如流) 매우 여유(綽有餘裕)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공이 하는 일이 없는 것을 보고 지나치게 간편하고 안일(簡佚)하다고 의심하였으나, 물러나 바깥에서 보고 들어보니 관청의 저축(官蓄積)이 늘어나고 여러 묵은 안건(宿案)들이 깨끗이 처리되었으며, 백성들 중 하소연하러 오는 자들은 하룻밤을 넘기지 않았다. 마을(閭里)이 조용하고 한가하여 각자 자기 일에 종사하였고, 호위(扈衛)하는 관료들과 그곳에 머물던(流寓) 인사(人士)들 중에 공에게 만족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사람마다 모두 공의 재능은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주석:
26. 해주 목사(海州牧使): 황해도 해주의 지방관. 정3품.
27. 왕비(王妃): 당시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전란 중 왕족들이 임시로 머무는 경우가 있었다.
28. 배사(倍蓰): 배(倍) 또는 다섯 배(蓰). 여러 배로 많음을 의미한다.


원문:
擢爲忠淸道觀察使, 州民擁馬號泣曰: “公忍舍我赤子去乎?” 道枳不得行, 乃以計脫身馳去。 追至闕下, 上書請還公者累百人, 上命換節本路。 公習知西土利病, 因其俗而加振刷焉, 民益翕然稱便。 大治首陽山城, 儲胥甲兵, 屹爲一道保障。 亡何, 被誣免歸。

번역문:
발탁되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자, 해주 백성들이 말고삐를 잡고 부르짖으며 울면서 말하였다. “공께서는 차마 우리 적자(赤子)²⁹들을 버리고 가시렵니까?” 길이 막혀(道枳) 갈 수가 없자, 마침내 꾀를 내어 몸을 빼서 말을 달려 떠났다. (백성들이) 궐하(闕下)³⁰까지 추격해 와서 공을 돌려보내 달라고 상소(上書)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으므로, 상께서 명하여 본도(本路)³¹의 절(節)³²을 바꾸도록 하였다. 공은 서쪽 지방(西土)³³의 이해(利病)를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풍속에 따라 진작시키고 쇄신(振刷)하니, 백성들이 더욱 한마음으로 편리하다고 칭송하였다. 수양산성(首陽山城)³⁴을 크게 수리하고 군량(儲胥)과 갑병(甲兵)을 비축하여, 우뚝이 한 도(道)의 보장(保障)³⁵이 되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무고(誣告)를 입어 면직되어 돌아갔다.

주석:
29. 적자(赤子): 갓난아이. 백성을 자식처럼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30. 궐하(闕下): 대궐 아래. 임금이 계신 곳을 의미한다.
31. 본로(本路): 본래 부임하기로 되어 있던 길. 즉 충청도를 가리킨다.
32. 환절(換節): 절(節)을 바꿈. 절은 관찰사의 신표(信標)인 부절(符節)을 의미하며, '환절본로'는 장운익을 원래 임명된 충청도가 아닌 황해도 관찰사로 다시 임명했다는 뜻이다.
33. 서토(西土): 서쪽 땅. 황해도를 가리킨다.
34. 수양산성(首陽山城): 황해도 해주시와 신원군 경계에 있는 산성. 국방상의 요지였다.
35. 보장(保障): 막아서 지키는 요새나 방어물.


원문:
麻提督貴之來, 以儐使逆諸境。 麻帥一見敬重之, 相得甚歡。 事有急難應副, 或盛怒不可解者, 公斥譯人, 自吐一辭, 無不釋然從之。 自都監官以至郡邑吏民皆賴之, 於國體亦多有補焉。 隨提督往湖南, 仍隨至嶺南。 島山之役, 暴露原野數十日。 時天寒雨雪, 提督戒公, 待于數舍之外。 公辭以受命以來, 義不可離, 雖矢石所及, 亦不避, 提督益重之。

번역문:
마 제독(麻提督) 귀(貴)³⁶가 오자, 빈사(儐使)³⁷로서 국경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마 제독은 한번 보고 공을 공경하고 중히 여겨, 서로 뜻이 맞아 매우 환대하였다. 일에 급하고 어려운 부응(應副)이 있거나, 혹은 마 제독이 크게 노하여 풀 수 없는 경우가 있으면, 공이 통역관(譯人)을 물리치고 스스로 한마디 말을 하면 풀려서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도감관(都監官)으로부터 군읍(郡邑)의 관리와 백성(吏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에게 힘입었고, 나라의 체면(國體)에도 또한 보탬이 된 바가 많았다. 제독을 따라 호남(湖南)으로 갔고, 이어서 따라 영남(嶺南)에 이르렀다. 도산(島山)의 전투³⁸ 때는 들판(原野)에서 풍찬노숙(暴露)하기를 수십 일이었다. 이때 날씨가 춥고 비와 눈이 내리자, 제독이 공에게 경계하며 몇 사(舍)³⁹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명을 받은 이래로 의리상 떠날 수 없으니, 비록 화살과 돌이 미치는 곳이라도 또한 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니, 제독이 더욱 그를 중히 여겼다.

주석:
36. 마제독 귀(麻提督 貴):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 때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왔다.
37. 빈사(儐使):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
38. 도산지역(島山之役): 1597년(선조 30) 12월부터 1598년 1월까지 조명(朝明) 연합군이 울산(蔚山)의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전투. 제1차 울산성 전투라고도 한다.
39. 사(舍): 고대에 행군할 때 하루 머무는 거리. 약 30리를 의미한다. '수사(數舍)'는 몇 사의 거리, 즉 상당히 떨어진 거리를 뜻한다.


원문:
公資性豁達, 好氣槪有威風, 長於政術。 家居, 雖童孺、臧獲, 未嘗大言呵責。 至當官莅職, 坐堂顧眄, 猾吏脅息, 不敢仰視, 牒訴盈前, 剖斷立盡。 其治劇部, 雖窮僻小民, 一見悉記其姓名。 海州時, 有投狀不當理者, 斥去之, 旣久復來, 乘擾以進, 公輒識之, 詰曰: “是故某時決遣, 今何敢再慁?” 吏民驚服, 稱神明。

번역문:
공은 자품(資性)이 활달(豁達)하고 기개(氣槪)를 좋아하며 위엄 있는 풍모(威風)가 있었으며, 정무 처리 능력(政術)에 뛰어났다. 집에 있을 때는 비록 어린아이나 노비(童孺臧獲)⁴⁰에게도 일찍이 큰 소리로 꾸짖지 않았다. 관직에 임하여 당(堂)에 앉아 돌아볼 때면, 교활한 아전(猾吏)들이 숨을 죽이고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으며, 앞에 쌓인 소장(牒訴)들을 즉시 판결하여 처리하였다. 그가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劇部)⁴¹을 다스릴 때는 비록 궁벽한 곳의 작은 백성이라도 한 번 보면 모두 그 성명을 기억하였다. 해주에 있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 소장(訴狀)을 올린 자가 있어 물리쳐 보냈는데, 이미 오래된 후에 다시 와서 소란한 틈을 타 나아가자, 공이 문득 그를 알아보고 꾸짖어 말하였다. “이 자는 예전에 아무 때 판결하여 보냈는데, 지금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하는가?” 관리와 백성들이 놀라서 감복하여 신명(神明)⁴²이라 칭송하였다.

주석:
40. 동유(童孺), 장획(臧獲): 어린아이와 남녀 노비를 아울러 이르는 말. 집안의 아랫사람들을 통칭한다.
41. 극부(劇部): 다스리기 어려운 번거로운 고을.
42. 신명(神明): 귀신같이 밝고 영험함. 판단력이나 기억력이 매우 뛰어남을 비유한다.


원문:
公豐貌白晳, 少鬚髥, 神采曄如也。 遇人坦蕩, 不設畦畛, 至於淑慝枉直之辨, 處之未嘗苟焉。 坐此罹禍網, 竄身絶塞。 晩亦屢遭齮齕, 乍起乍跲, 不能久安於朝。 生平不問家人生産, 祿食二十年, 歷望郡沃藩, 位至八座, 先業之外, 不長尺寸。 蚤以文藝進, 及仕用政事顯, 雕篆之技, 有所不屑。 其交遊盡一時英俊, 至論通才偉器, 未有以先公者。【竝金淸陰撰碑。】

번역문:
공은 풍채가 좋고 피부가 희며(白晳) 수염(鬚髥)이 적었고, 정신과 풍채(神采)가 빛나는 듯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마음이 넓고 거리낌이 없어(坦蕩) 경계(畦畛)⁴³를 두지 않았으나, 선악(淑慝)과 곡직(枉直)의 분별에 이르러서는 처리함에 일찍이 구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화(禍)의 그물에 걸려 외진 변방(絶塞)으로 몸을 숨겼다. 만년(晩年)에도 또한 여러 차례 모함(齮齕)⁴⁴을 만나, 잠시 기용되었다가 잠시 넘어지곤(乍起乍跲)⁴⁵ 하여 조정에서 오래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평생 집안사람들의 생업(生産)에 관여하지 않았고, 녹(祿)을 먹은 지 20년 동안 명망 있는 군(望郡)과 풍요로운 번(沃藩)⁴⁶을 역임하고 지위가 팔좌(八座)⁴⁷에 이르렀으나, 선대(先代)의 산업(産業) 외에는 한 자 한 치(尺寸)도 늘리지 않았다. 일찍이 문예(文藝)로 진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서는 정사(政事)로 드러났으므로, 문장(文章)을 다듬는 기예(雕篆之技)⁴⁸는 달갑게 여기지 않는 바가 있었다. 그의 교유(交遊)는 모두 당대의 영준(英俊)들이었으며, 모든 분야에 능통한 재능과 위대한 기량(通才偉器)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공보다 앞설 만한 이가 없었다.【이상은 모두 김청음(金淸陰)⁴⁹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43. 예진(畦畛): 밭두둑과 길의 경계. 사람 사이의 구별이나 경계를 비유한다.
44. 의흘(齮齕): 입으로 물어뜯음. 남을 헐뜯고 모함하는 것을 비유한다.
45. 자기자겁(乍起乍跲): 잠시 일어났다가 잠시 넘어짐. 관직에 잠시 등용되었다가 곧 물러나거나 좌천됨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46. 망군(望郡), 옥번(沃藩): 명망이 높고 중요한 고을과 물자가 풍부하고 중요한 지역. 좋은 벼슬자리를 의미한다.
47. 팔좌(八座): 상서(尙書)의 좌우 복야(僕射) 각 1명과 육조(六曹)의 상서 각 1명을 합하여 이르던 말. 높은 재상의 지위를 통칭한다. 여기서는 형조판서를 지낸 것을 가리킨다.
48. 조전지기(雕篆之技): 글자를 새기고(雕) 전서(篆書)를 쓰는 기예. 시문(詩文)을 짓고 다듬는 재주를 의미한다. 장운익은 실무적인 정치 능력을 더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49.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청음(淸陰)은 그의 호 중 하나이다.


오억령(吳億齡)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吳億齡
字大年, 號晩翠, 同福人。 嘉靖壬子生。 庚午司馬, 宣廟十五年壬午登第。 選入史局, 賜暇湖堂, 歷吏郞、典翰、大成、大諫、副學、大憲、吏參、黃海監司、開城留守, 官至右參贊。 戊午卒, 年六十七。

번역문:
오억령(吳億齡)
자는 대년(大年)이고, 호는 만취(晩翠)이며, 동복(同福) 사람이다.¹ 명(明) 가정(嘉靖) 임자년(1552)에 태어났다. 경오년(1570, 선조 3)에 사마시(司馬試)²에 합격하고, 선조(宣廟) 15년 임오년(158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³에 선발되어 들어가고 호당(湖堂)⁴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⁵, 전한(典翰)⁶, 대사성(大司成)⁷, 대사간(大司諫)⁸, 부제학(副提學)⁹, 대사헌(大司憲)¹⁰, 이조 참판(吏曹參判)¹¹, 황해도 감사(黃海道監司)¹², 개성 유수(開城留守)¹³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우참찬(右參贊)¹⁴에 이르렀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졸(卒)하니, 나이 67세였다.

주석:

  1. 동복인(同福人): 본관(本貫)이 동복(同福)임을 나타낸다. 동복 오씨(同福 吳氏)이다.
  2. 사마(司馬):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소과(小科)를 가리킨다.
  3.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기관. 춘추관(春秋館)을 가리키거나, 실록 편찬 등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實錄廳) 등을 의미할 수 있다.
  4. 호당(湖堂): 조선 시대 문신(文臣) 중에서 재능이 뛰어난 젊은 관료들을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또는 그 기관. 주로 동호(東湖) 근처에 위치하여 호당이라 불렸다.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도 한다.
  5.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文官)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였다. 약칭하여 이랑(吏郞)이라고도 한다.
  6. 전한(典翰):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하관.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하는 직책이다.
  7. 대성(大成):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8. 대간(大諫):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9. 부학(副學):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책으로 문형(文衡)을 보좌했다.
  10. 대헌(大憲):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11. 이참(吏參):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조(吏曹)의 버금 벼슬. 종2품.
  12. 황해 감사(黃海監司):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종2품.
  13. 개성 유수(開城留守): 개성부(開城府)의 으뜸 벼슬. 종2품. 수도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인 개성의 행정을 책임졌다.
  14. 우참찬(右參贊): 의정부(議政府)의 정2품 관직. 좌참찬(左參贊)과 함께 삼정승(三政丞)을 보좌하였다.

원문:
公五歲知讀書, 七歲, 能綴文, 人稱以神童。

번역문:
공은 다섯 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일곱 살에 글을 지을 수 있어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칭찬하였다.


원문:
宣祖將講《綱目》, 選才學臣五人, 各賜《綱目》一部, 公與焉。 因令毋責以漢語、吏文等宂藝, 俾專其業, 以備顧問, 一時榮之。

번역문:
선조께서 장차 《강목(綱目)》¹⁵을 강론(講論)하려 하시면서, 재주와 학문이 있는 신하 다섯 명을 뽑아 각각 《강목》 한 부(部)씩을 하사하셨는데 공도 거기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한어(漢語)¹⁶, 이문(吏文)¹⁷ 등 잡다한 기예(宂藝)로 책임을 지우지 말고, 그 학업에 전념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도록 명하시니, 당시에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주석:
15. 《강목(綱目)》: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 성리학적 역사관을 반영한 중요한 서적이었다.
16. 한어(漢語): 중국어.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통역 등에 필요한 실무 기술이었다.
17. 이문(吏文): 관리들이 실무에서 사용하는 문서 작성 기술.


원문:
倭使玄蘇來, 爲宣慰使。 蘇初頗傲慢, 旣而賦一律示公求和, 公詩立就, 蘇驚服, 乃更爲恭遜。 初公未見蘇, 道聞蘇明言來年將大擧, 假道犯上國, 卽具所聞馳啓, 言倭寇必至狀。 時當國者主偏聽, 謂倭必不動, 凡言倭情有異者, 輒論以生事。 公啓至, 朝議大駭, 遂啓遞之。 公旣還, 進問答日記, 又悉錄前語。 子弟多諫止, 謂且¹⁹速大譴。 公慨然曰: “賊兵將至, 擧朝擁蔽, 吾何忍畏禍不言, 以誤國事?”

번역문:
왜(倭)의 사신 겐소(玄蘇)¹⁸가 오자, 선위사(宣慰使)²⁰가 되었다. 겐소가 처음에는 자못 오만하였으나, 이윽고 율시(律詩) 한 수를 지어 공에게 보이며 화답(和答)을 구하자, 공의 시가 즉시 이루어지니 겐소가 놀라서 감복하여 마침내 다시 공손해졌다. 처음에 공이 겐소를 미처 만나기 전에, 길에서 겐소가 내년에 장차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길을 빌려 상국(上國)²¹을 침범할 것이라고 명백히 말하는 것을 들었다. 즉시 들은 바를 갖추어 급히 아뢰어(馳啓), 왜구(倭寇)가 반드시 이를 상황임을 말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은 자(當國者)는 한쪽 말만 듣는 것(偏聽)을 주장하며 왜가 반드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무릇 왜의 사정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말하는 자는 번번이 일을 일으킨다고 죄를 논하였다. 공의 계(啓)가 이르자 조정의 논의가 크게 놀라, 마침내 아뢰어 그(오억령)를 교체하였다. 공이 돌아오자 문답(問答)한 일기(日記)를 올리고, 또 이전의 말을 모두 기록하였다. 자제(子弟)들이 많이 간하여 말렸는데, 큰 견책(譴責)을 재촉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공이 개연(慨然)히 말하였다. “적병(賊兵)이 장차 이를 것인데 온 조정이 (진실을) 가리고 막으니, 내가 어찌 차마 화(禍)를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음으로써 국사(國事)를 그르치겠는가?”

주석:
18. 현소(玄蘇): 겐소(げんそ). 일본 센고쿠 시대 및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승려. 쓰시마(対馬) 섬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외교 고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을 받아 조선과 명나라 정복 계획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19. [주-D001] 且 : 저본(底本)에는 “구(具)”로 되어 있다. 《오봉집(五峯集)・유명조선국……이공시장(有明朝鮮國……李公諡狀)》 및 《동주집(東州集)・연릉부원군이공시장(延陵府院君李公諡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구(具)'는 '갖추다'는 의미이고, '차(且)'는 '장차, 또' 등의 의미이다. 문맥상 '장차 큰 견책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의 '차(且)'가 자연스럽다.
20. 선위사(宣慰使): 외국 사신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21. 상국(上國): 윗나라. 당시 조선이 사대(事大)하던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원문:
以質正官如京師。 壬辰四月還, 道聞倭變, 公復命于松都, 遂扈從抵義州。 拜直提學、吏曹參議, 旋移承旨。 上嘗語及變前事, 顧謂公曰: “曩無一人言賊來者, 獨承旨言之, 先見明矣。”

번역문:
질정관(質正官)²²으로서 경사(京師)²³에 갔다. 임진년(1592) 4월에 돌아오다가 길에서 왜의 변란(倭變) 소식을 듣고, 공은 송도(松都)²⁴에서 복명(復命)²⁵하고 마침내 임금을 따라(扈從)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직제학(直提學)²⁶, 이조 참의(吏曹參議)²⁷에 제수되고, 곧 승지(承旨)로 옮겼다. 상(上)께서 일찍이 변란 이전의 일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공을 돌아보며 이르셨다. “지난날 적이 올 것이라고 말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승지(承旨)만이 그것을 말하였으니, 선견(先見)이 명확하였도다.”

주석:
22. 질정관(質正官): 조선 시대에 중국에 보내던 사신(使臣)의 한 종류. 주로 학문적인 문제나 의례(儀禮) 등에 관해 질문하고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다.
23. 경사(京師): 수도(首都). 당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24. 송도(松都): 개성(開城)의 옛 이름.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25. 복명(復命): 사신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임금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
26.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부제학(副提學)과 함께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27.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 참판(參判) 다음가는 직위이다.


원문:
懿仁王后之喪, 上旣成服十二日, 禮官言當釋衰, 進麻布帶。 公在玉堂, 進箚論其非禮, 識者是之。 上命簡朝臣廉謹者, 以風厲百僚, 選者四人, 而公居其一, 力辭乃許。

번역문:
의인왕후(懿仁王后)²⁸의 상(喪) 때, 상께서 이미 성복(成服)²⁹하신 지 12일이 되자 예관(禮官)³⁰이 마땅히 최복(衰服)을 벗고 마포대(麻布帶)³¹를 착용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공이 옥당(玉堂)³²에 있으면서 차자(箚子)³³를 올려 그것이 예(禮)가 아님을 논하니, 식견 있는 자들이 이를 옳다고 하였다. 상께서 명하여 조정 신하 중 청렴하고 근신(廉謹)한 자를 선발하여 백관(百僚)을 풍력(風厲)³⁴하게 하였는데, 선발된 자가 네 명이었고 공이 그중 한 명이었으나, 힘써 사양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주석:
28.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 선조(宣祖)의 정비(正妃). 박씨(朴氏).
29. 성복(成服): 상(喪)을 당하여 처음으로 상복(喪服)을 입는 것.
30. 예관(禮官): 예조(禮曹)의 관리 또는 의례(儀禮)를 담당하는 관리.
31. 석최(釋衰), 마포대(麻布帶): 최복(衰服)은 상복(喪服) 중 가장 무거운 참최(斬衰)와 재최(齊衰)를 말하며, 거친 삼베로 만든다. 상을 시작할 때 입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점차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는데, 여기서 논란이 된 것은 성복 후 12일 만에 최복을 벗고 상대적으로 덜 무거운 마포대를 착용하는 것이 예법에 맞느냐는 점이었다. 오억령은 이것이 너무 이르다고 본 것이다.
32.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33. 차자(箚子): 조선 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상소문의 한 형식. 비교적 간단한 사안에 대해 아뢰거나 의견을 제시할 때 사용되었다.
34. 풍력(風厲): 바람을 일으켜 격려함. 모범을 보여 기강을 세우고 분발하게 함.


원문:
公早以才敏名, 而有志問學, 以操存踐履爲本。 嘗語子弟曰: “士君子事業至大, 文章特餘事耳。” 立朝四十年, 歷揚華膴, 而恒以恬遜爲心, 盛滿爲懼。 持議平和, 不爲刻核崖異之論, 然至大是非, 未嘗少苟。 癸丑變起, 鄭造、尹訒首發廢母之論。 公之二子翊、靖在玉堂, 公謂曰: “此是人倫大變, 安所逃死?” 遂口占箚辭以授之, 二子竟以是劾去造、訒, 公之敎也。 晩節常思退休, 而遭劾待譴, 未能行其志。 有時仰屋自咤曰: “安能處無母之國而苟活耶?” 病革, 占韻賦詩累十首。 其文章之美, 草隷之能, 皆爲一世所重。【竝張谿谷撰墓誌。】

번역문:
공은 일찍이 재주와 민첩함(才敏)으로 이름났으나, 학문(問學)에 뜻을 두어 마음을 보존하고 실천하는 것(操存踐履)³⁵을 근본으로 삼았다. 일찍이 자제(子弟)들에게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의 사업(事業)은 지극히 큰 것이고, 문장(文章)은 특별히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조정에 선 지 40년 동안 화려하고 기름진 관직(華膴)³⁶들을 두루 거쳤으나, 항상 담박하고 겸손함(恬遜)을 마음으로 삼고 성만(盛滿)³⁷을 두려워하였다. 의론(持議)을 평화(平和)롭게 하여 각박하고 괴이한(刻核崖異)³⁸ 주장을 하지 않았으나, 큰 시비(是非)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조금도 구차하지 않았다. 계축년(1613)에 변란(變亂)³⁹이 일어나 정조(鄭造)⁴⁰, 윤인(尹訒)⁴¹이 처음 폐모(廢母)의 논의를 발하자, 공의 두 아들 익(翊)⁴², 정(靖)⁴³이 옥당(玉堂)에 있었는데, 공이 일러 말하였다. “이는 인륜(人倫)의 큰 변고이니, 어찌 죽음을 피할 곳이 있겠는가?” 마침내 구두(口占)로 차자(箚子)의 글을 지어 그들에게 주니, 두 아들이 마침내 이로써 정조와 윤인을 탄핵하여 제거하였으니, 공의 가르침이었다. 만절(晩節)에 늘 퇴휴(退休)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탄핵을 당하여 견책(譴責)을 기다리느라 그 뜻을 행하지 못하였다. 때로 집 천장을 우러르며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 어머니 없는 나라⁴⁴에 처하여 구차하게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운(韻)을 정하여 시(詩) 수십 수를 지었다. 그의 문장의 아름다움과 초서(草書)·예서(隷書)의 능함은 모두 당세에 중시되었다.【이상은 모두 장계곡(張谿谷)⁴⁵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에서 인용】

주석:
35. 조존천리(操存踐履): 마음을 굳게 지켜 보존하고(操存), 배운 바를 실제로 행함(踐履).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수양(修養)의 방법이다.
36. 화무(華膴): 화려하고 기름진 자리. 중요하고 좋은 관직을 의미한다.
37. 성만(盛滿): 가득 차서 넘침. 권세나 명성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를 경계하는 말이다.
38. 각핵애이(刻核崖異): 지나치게 엄격하고 모나며 괴팍함.
39. 계축변기(癸丑變起):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 광해군 때 대북(大北) 세력이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킨 사건을 말한다.
40. 정조(鄭造, 1559-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의 일원으로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했다.
41. 윤인(尹訒, 1575-1627): 조선 중기의 문신. 대북파의 일원으로 폐모론을 주장했다.
42. 오익(吳翊, 1577-1617): 오억령의 아들. 홍문관 관료로 있으면서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43. 오정(吳靖, 1582-1617): 오억령의 아들. 형 오익과 함께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44. 무모지국(無母之國): 어머니 없는 나라. 인목대비가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된 상황을 비판하는 말이다.
45.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계곡(谿谷)은 그의 호이다.


이호민(李好閔)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好閔
字孝彦, 號五峯, 延安人。 嘉靖癸丑生。 己卯, 魁進士。 宣廟十六年癸未, 魁庭試, 賜直赴。 翌年殿試, 選入史局, 賜暇湖堂。 歷弘文正字、吏曹佐郞、藝文應敎、典翰、副提學、大司憲, 官至禮曹判書。 典文衡, 策扈聖功臣, 封延陵府院君。 甲戌卒, 年八十二。

번역문:
이호민(李好閔)
자는 효언(孝彦)이고, 호는 오봉(五峯)이며, 연안(延安) 사람이다.¹ 명(明) 가정(嘉靖) 계축년(1553)에 태어났다. 기묘년(1579, 선조 12)에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魁)하였고, 선조(宣廟) 16년 계미년(1583)에 정시(庭試)에서 장원(魁)하여 직부(直赴)²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전시(殿試)³에 합격하고, 사국(史局)⁴에 선발되어 들어가고 호당(湖堂)⁵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⁶, 이조 좌랑(吏曹佐郞)⁷,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⁸, 전한(典翰)⁹, 부제학(副提學)¹⁰, 대사헌(大司憲)¹¹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예조 판서(禮曹判書)¹²에 이르렀다. 문형(文衡)¹³을 관장하였고, 호성공신(扈聖功臣)¹⁴에 책록되어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¹⁵에 봉해졌다. 갑술년(1634, 인조 12)에 졸(卒)하니, 나이 82세였다.

주석:

  1. 연안인(延安人): 본관(本貫)이 연안(延安)임을 나타낸다. 연안 이씨(延安 李氏)이다.
  2. 직부(直赴): 조선 시대 과거 제도에서,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바로 문과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던 특전. 이호민은 정시(庭試)에서 장원했으므로 이 특전을 받았다.
  3. 전시(殿試): 조선 시대 문과(文科)의 마지막 시험 단계. 임금이 직접 시험관이 되어 대궐 뜰에서 치렀다. 이호민은 1584년(선조 17)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4.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기관. 춘추관(春秋館) 또는 실록청(實錄廳) 등을 의미한다.
  5. 호당(湖堂): 사가독서(賜暇讀書). 젊고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또는 기관.
  6.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홍문관(弘文館)의 정9품 관직. 교서(敎書) 작성, 경적(經籍) 관리 등의 일을 맡았다.
  7.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조(吏曹)의 정6품 관직. 정랑(正郞)과 함께 문관 인사 실무를 담당하는 요직이었다.
  8.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예문관(藝文館)의 정4품 관직. 임금의 명령이나 교서(敎書) 등을 짓는 일을 담당했다.
  9. 전한(典翰):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하관.
  10.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11.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12. 예조 판서(禮曹判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예악(禮樂), 제사(祭祀), 외교, 교육, 과거 등을 담당했다.
  13. 문형(文衡): 문형(文衡)을 관장함. 문형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겸임하며 문단(文壇)과 학계(學界)를 영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호민은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14.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한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이호민은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5.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에게 내려진 부원군(府院君)의 봉호(封號). 부원군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작위이다.

원문:
公四歲失所怙。 七歲就師, 師以“紙”字試題, 公應口卽對, 造語不凡, 師大奇之。 十二, 就伯氏舍人公所, 見監試榜, 瞥然看過, 卽寫出二百姓名、具父名, 一字不差。 舍人公入賀大夫人前。【蒼石李埈撰墓誌。】

번역문:
공은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일곱 살에 스승에게 나아갔는데, 스승이 “지(紙)” 자로 시험 삼아 글제를 내자, 공이 입에 따라 즉시 대답하였는데(應口卽對) 지어낸 말이 비범하여 스승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열두 살에 백씨(伯氏)인 사인공(舍人公)¹⁶ 댁에 갔다가 감시(監試)¹⁷의 방(榜)¹⁸을 보고 얼핏 훑어본 뒤, 즉시 2백 명의 성명과 아버지 이름까지 갖추어 써내었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사인공이 들어가 대부인(大夫人)¹⁹ 앞에 하례(賀禮)하였다.【창석(蒼石) 이준(李埈)²⁰이 지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16. 사인공(舍人公): 사인(舍人) 벼슬을 지낸 공(公). 이호민의 백씨(伯氏, 큰형) 이효민(李孝閔)이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를 지냈는데, 도사는 사인의 예칭(例稱)으로 쓰이기도 하므로 그를 가리킬 수 있다.
17. 감시(監試): 조선 시대에 각 도(道)에서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뽑기 위해 실시하던 예비 시험.
18. 방(榜): 과거 합격자의 명단을 적어 내걸던 게시물.
19.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이호민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20.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창석(蒼石).


원문:
拜注書。 一日, 上問“苯”字義, 左右默然。 上謂公: “聞爾富文學, 爲我言之。” 公辭謝曰: “是出《西京賦》苯尊蓬茸, 茂盛之貌。” 又對巢車舊制甚悉, 上甚悅。 轉內翰, 上曰: “此人奇才, 培養不可拘常規。” 命脫禁直, 專意學業。

번역문:
주서(注書)²¹에 제수되었다. 어느 날, 상(上)께서 “분(苯)” 자의 뜻을 묻자 좌우(左右)가 잠잠하였다. 상께서 공에게 이르셨다. “듣건대 네가 문학(文學)이 풍부하다 하니, 나를 위해 말해보라.” 공이 사양하며 아뢰었다. “이는 《서경부(西京賦)》²²에 나오는 ‘분준봉용(苯尊蓬茸)’으로, 무성(茂盛)한 모양입니다.” 또 소거(巢車)²³의 옛 제도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히 대답하니, 상께서 매우 기뻐하셨다. 내한(內翰)²⁴으로 옮기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기이한 재주이니, 배양(培養)함에 상규(常規)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명하여 금직(禁直)²⁵에서 벗어나 학업에 전념하게 하였다.

주석:
21. 주서(注書): 승정원(承정원)의 정7품 관직. 임금의 언행과 정사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22. 《서경부(西京賦)》: 후한(後漢)의 문장가 장형(張衡)이 지은 부(賦). 서도부(西都賦)라고도 한다. 장안(長安)의 웅장함과 번화함을 묘사했다. '분준봉용(苯尊蓬茸)'은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진 모양을 나타낸다.
23. 소거(巢車): 고대 중국에서 적의 성(城)을 정찰하거나 공격할 때 사용하던 높은 수레. 망루(望樓)와 같은 구조물을 갖추었다.
24. 내한(內翰):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 등 문한(文翰)을 다루는 관청의 관원을 통칭하는 말. 여기서는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등의 직책을 가리킬 수 있다.
25. 금직(禁直): 궁궐 안에서 숙직하는 것.


원문:
壬辰, 倭警猝急, 扈駕西出, 泣與大夫人訣, 觀者哽咽。 至龍灣有渡遼之議, 上簡願從者, 公哭曰: “臣旣忍絶裾, 願以死從。”

번역문:
임진년(1592)에 왜(倭)의 경보가 갑자기 급박해지자, 임금을 모시고(扈駕) 서쪽으로 나가면서 울면서 대부인(大夫人)과 이별하니, 보는 자들이 목메어 울었다. 용만(龍灣)²⁶에 이르러 요동(遼東)으로 건너갈 의논이 있자, 상께서 따르기를 원하는 자를 선발하시니, 공이 곡하며 아뢰었다. “신(臣)이 이미 차마 옷자락을 끊었사오니(絶裾)²⁷, 원컨대 죽음으로써 따르겠습니다.”

주석:
26.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옛 이름. 압록강 하류에 위치하여 중국과의 국경 지대였다.
27. 절거(絶裾): 옷자락을 끊음. 어머니를 떠나 임금을 따르겠다는 굳은 결의를 나타낸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고사로,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망명길에 오를 때 어머니가 옷자락을 잡고 말리자 이를 끊고 떠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원문:
時事變錯, 出咨奏旁午。 公副急應卒, 不躓不竭。 天將黃應暘招募遺民, 臨行索諭檄甚遽。 上以命公, 立草成文。 嘗撰罪己敎書, 有曰: “龍灣一隅, 天步艱難。 地維已盡, 予將何歸? 瞻彼長江, 亦流于東。 思歸一念, 如水滔滔。” 遠近聞之, 莫不流涕, 世以比興元詔云。【竝東州李敏求撰諡狀。】

번역문:
이때 시사(時事)가 변화무쌍하고 자문(咨文)과 주문(奏文)²⁸이 어지럽게 오갔다(旁午). 공은 급한 일에 대응하고 갑작스러운 일에 대처함(副急應卒)에 막히거나(躓) 다함(竭)이 없었다. 천장(天將) 황응양(黃應暘)²⁹이 유민(遺民)을 초모(招募)하면서, 떠나기에 임박하여 유시(諭示)하는 격문(檄文)을 매우 급하게 요구하였다. 상께서 이를 공에게 명하시니, 즉시 초안을 잡아 글을 이루었다. 일찍이 죄기 교서(罪己敎書)³⁰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용만(龍灣) 한 모퉁이에서 천운(天步)³¹이 간난(艱難)하구나. 땅의 벼리(地維)³²가 이미 다하였으니, 내 장차 어디로 돌아갈까? 저 장강(長江)³³을 바라보니 또한 동쪽으로 흐르네. 돌아가고픈 한결같은 생각, 물처럼 도도(滔滔)하구나.”라고 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세상에서는 원(元)나라의 조서(詔書)에 비하였다고 한다.³⁴【이상은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³⁵가 지은 시장(諡狀)에서 인용】

주석:
28. 자(咨), 주(奏): 자문(咨文)과 주문(奏文). 각각 평등한 관계 또는 하급 기관에서 상급 기관으로 보내는 공문서의 일종이다. 여기서는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 등을 가리킨다.
29. 황응양(黃應暘): 명나라의 관리.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되어 유민(遺民)을 모으는 등의 활동을 했다.
30. 죄기 교서(罪己敎書): 임금이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며 내리는 교서. 국가적 재난이나 변고가 있을 때 민심을 수습하고 하늘의 뜻을 돌리기 위해 발표했다.
31. 천보(天步): 하늘의 운행. 국가의 운명이나 시운(時運)을 의미한다.
32. 지유(地維): 땅의 벼리. 국토 또는 국가의 기강을 의미한다.
33. 장강(長江): 압록강(鴨綠江)을 가리킨다.
34. 원(元)나라의 조서(詔書)에 비하였다: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Kubilai)가 남송(南宋)을 멸망시킨 후, 송나라 황족과 유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내린 조서가 매우 감동적이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호민의 글이 그만큼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음을 나타낸다.
35.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1589-1670):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호는 동주(東州).


원문:
上命製平壤大捷奏文。 時宋經略、李提督方爭功, 措語甚難。 公備述諸將指授方略, 協力血戰之功, 事核而辭順。 經略與提督讀之, 節節稱賞曰: “東國有人。” 且³⁶問其出何人手。

번역문:
상께서 평양 대첩(平壤大捷)의 주문(奏文)³⁷을 짓도록 명하셨다. 이때 송 경략(宋經略)³⁸과 이 제독(李提督)³⁹이 바야흐로 공(功)을 다투고 있어 말을 쓰기(措語)가 매우 어려웠다. 공이 여러 장수들이 방략(方略)을 지휘하고(指授) 힘을 합쳐 혈전(血戰)한 공로를 갖추어 서술하니, 사실이 정확하고(事核) 말이 순탄하였다(辭順). 경략과 제독이 이를 읽고 구절마다 칭찬하고 감상하며 말하기를, “동국(東國)⁴⁰에 인물이 있구나”라고 하고, 또한 그것이 어떤 사람의 손에서 나왔는지 물었다.

주석:
36. [주-D001] 且 : 저본(底本)에는 “구(具)”로 되어 있다. 《오봉집(五峯集)・유명조선국……이공시장(有明朝鮮國……李公諡狀)》 및 《동주집(東州集)・연릉부원군이공시장(延陵府院君李公諡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具'는 '갖추다'는 의미이고, '且'는 '또, 또한'의 의미이다. 문맥상 칭찬하고 나서 '또한' 누가 썼는지 물었다는 의미의 '且'가 자연스럽다.
37. 평양 대첩 주문(平壤大捷奏文): 1593년 1월, 조명(朝明)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승리를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는 글.
38. 송 경략(宋經略):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총지휘관 격이었다. 경략은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고위 직책이다.
39. 이 제독(李提督):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다. 제독은 군대를 통솔하는 장수를 의미한다. 송응창과 이여송은 평양성 탈환의 공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40. 동국(東國): 동쪽 나라. 중국에서 조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문:
石尙書星倡和議, 諭我同遣使賊中。 上引大臣臺諫問得失, 左右皆請以計羈縻, 姑緩師期。 公獨曰: “萬世之讎, 一朝許和, 殿下何顔拜宣、靖兩聖於宗廟乎?” 上厲聲曰: “終始不屈, 惟予與李某而已。”【竝墓誌。】

번역문:
상서(尙書) 석성(石星)⁴¹이 화의(和議)를 제창하며, 우리에게 타일러 함께 적(賊)의 진중에 사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상께서 대신(大臣)과 대간(臺諫)⁴²을 인견(引見)하여 이해득실을 물으시니, 좌우(左右)가 모두 계책으로 기미(羈縻)⁴³하여 우선 군사 행동의 시기(師期)를 늦추기를 청하였다. 공만이 홀로 아뢰었다. “만세(萬世)의 원수와 하루아침에 화의를 허락한다면, 전하께서 무슨 면목으로 선조(宣祖)와 정종(靖宗) 두 성군(聖君)⁴⁴을 종묘(宗廟)에 배알하시겠습니까?” 상께서 준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이는 오직 나와 이모(李某)⁴⁵뿐이다.”【이상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41. 상서(尙書) 석성(石星):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사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42. 대간(臺諫): 사헌부(司憲府, 臺)와 사간원(司諫院, 諫)의 관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
43. 기미(羈縻): 굴레(羈)와 고삐(縻)라는 뜻으로, 상대를 구속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외교적 수단을 써서 시간을 벌고 상대를 묶어두려는 계책을 의미한다.
44. 선정양성(宣靖兩聖): 선조(宣祖)와 정종(靖宗). 선종(宣宗)과 정종(靖宗)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선종은 명나라 선덕제(宣德帝), 정종은 명나라 영종(英宗)을 가리킬 수 있으나, 문맥상 명나라의 황제보다는 조선의 선왕들을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다만, 선조 당시 종묘에 모셔진 왕들 중 칭호에 '선(宣)'이나 '정(靖)'이 들어간 왕이 마땅치 않아 정확한 지칭 대상은 불분명하다. 문맥상 '선대 성군들(先朝聖君)'을 통칭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45. 이모(李某): 이 아무개. 이호민 자신을 가리킨다.


원문:
奉旨候李提督于松京, 仍請省母於信川, 許之。 及遭艱, 上諭一路護送歸葬, 亦異數也。 公旣去, 而辭命無主者, 上命奪情起復, 公十數哀籲, 終不許。 聖批有曰: “辭命得失, 係國存亡, 非爾文辭, 不能條達事情。 詞鋒豈下於兵鋒也?” 慰諭備至。【《潛谷舊錄》。】

번역문:
왕지(王旨)를 받들어 송경(松京)⁴⁶에서 이제독(李提督)을 문후(問候)하고, 이어서 신천(信川)에 계신 어머니를 성묘(省墓)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상(喪)을 당하자, 상께서 유시(諭示)하여 길을 따라 호송(護送)하여 돌아가 장사 지내게 하셨으니, 또한 특별한 대우(異數)였다. 공이 이미 떠나자 사명(辭命)⁴⁷을 주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상께서 명하여 탈정 기복(奪情起復)⁴⁸하게 하시니, 공이 십수 차례 애달프게 호소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으셨다. 성상(聖上)의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사명(辭命)의 잘잘못은 나라의 존망(存亡)에 관계되니, 너의 문장(文辭)이 아니면 사정(事情)을 조리 있게 전달(條達)할 수 없다. 말의 칼날(詞鋒)이 어찌 군대의 칼날(兵鋒)보다 못하겠는가?”라고 하시고, 위로하고 타이름(慰諭)이 지극하였다.【《잠곡구록(潛谷舊錄)》⁴⁹에서 인용】

주석:
46. 송경(松京): 개성(開城)의 별칭.
47. 사명(辭命): 외교 문서의 작성이나 사신 응대 등 외교 관련 업무를 가리킨다.
48. 탈정 기복(奪情起復): 부모상(父母喪) 중에 있는 신하에게 슬픔을 억누르고(奪情) 다시 관직에 나와 복무(起復)하도록 명하는 것. 국가의 중대사를 위해 예외적으로 시행되었다.
49. 《잠곡구록(潛谷舊錄)》: 김육(金堉, 1580-1658)의 문집인 《잠곡유고(潛谷遺稿)》에 실린 기록일 수 있으나, 정확한 출처 확인이 필요하다. '잠곡구록'이라는 제목의 문헌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원문:
丙申, 特授大司憲, 擧正王子臨海君容庇姦宄之罪, 上曰: “父子之間, 人所難言, 卿能言之, 風采可尙。”【諡狀。】

번역문:
병신년(1596, 선조 29)에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는데,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⁵⁰이 간사한 자들을 용납하고 비호(容庇姦宄)한 죄를 바로잡을 것을 아뢰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부자(父子) 사이는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바인데, 경(卿)이 능히 그것을 말하니 풍채(風采)⁵¹를 높이 살 만하다.”【시장(諡狀)에서 인용】

주석:
50. 임해군(臨海君, 1574-1609): 선조(宣祖)의 맏아들. 이름은 진(珒). 성품이 포악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 세자(世子)가 되지 못했다.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51. 풍채(風采):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태도. 여기서는 직언(直言)하는 기개와 당당함을 의미한다.


원문:
丁酉, 差陳御史效接伴使, 隨御史南下。 己亥, 御史卒于軍, 護喪西下, 五月復命。 時群小用事, 柳西厓被斥, 正人君子無容足之地。 公亦不安于朝, 退處西湖, 上疏乞退。 答曰: “姑不論他事, 今國家艱危, 詞命之重, 非卿大手不可。 卿棄母從予於流離之際, 此所謂所在致死之義。 卿之忠孝, 貫日月, 何獨於今日忍而棄予?”

번역문:
정유년(1597, 선조 30)에 차임(差任)되어 진주 어사(陳奏御史)⁵²를 본받아 접반사(接伴使)⁵³가 되어, 어사(御史)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기해년(1599, 선조 32)에 어사가 군중(軍中)에서 졸(卒)하자, 상(喪)을 호송하여 서쪽으로 내려와 5월에 복명(復命)하였다. 이때 소인(小人)의 무리가 권력을 잡아(用事), 유서애(柳西厓)⁵⁴가 배척당하고 올바른 사람(正人君子)들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 공 또한 조정에서 편안하지 않아 서호(西湖)⁵⁵로 물러나 거처하며 상소(上疏)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우선 다른 일은 논하지 않더라도, 지금 국가가 어렵고 위태로운데 사명(詞命)의 중요함은 경(卿)과 같은 대가(大手)가 아니면 불가하다. 경은 어머니를 버리고 나를 따라 유랑(流離)하는 때를 겪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있는 곳에서 죽음을 바치는 의리이다. 경의 충효(忠孝)는 해와 달을 꿰뚫는데, 어찌 유독 오늘날에 차마 나를 버리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주석:
52. 진주 어사(陳奏御史): 명나라에서 파견한 어사(御史). 조선의 사정을 조사하여 황제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띠었다.
53. 접반사(接伴使):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54. 유서애(柳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명재상. 호는 서애(西厓).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했으나, 전란 후 북인(北人)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55. 서호(西湖): 서울 서쪽(현재 마포구, 서대문구 일대)에 있던 호수. 경치가 아름다워 사대부들의 별서(別墅)가 많았다.


원문:
執義金順命論臨海作弊, 上厲聲曰: “順命何許人?” 公進曰: “臣扈從於奔竄之際, 情意交孚, 有同家人父子, 每見聖上, 以義掩私過。 壬辰未久, 志氣懈怠, 順命出入帷幄已久, 仰恃聖明, 敢言無隱, 其志可尙。 今以何許人下敎, 此豈君使臣以禮之道?” 上曰: “卿言是也。 予亦悔恨。”

번역문:
집의(執義) 김순명(金順命)⁵⁶이 임해군(臨海君)이 폐단을 일으킴을 논하자, 상께서 준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순명(順命)이 어떤 사람인가?” 공이 나아가 아뢰었다. “신(臣)이 달아나 숨던 때(奔竄之際)에 임금을 모셨는데, 정의(情意)가 서로 부합(孚)하여 집안 식구나 부자(父子)와 같음이 있었습니다. 매번 성상(聖上)께서 의(義)로써 사사로운 허물을 덮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임진년(壬辰年)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지기(志氣)가 해태(懈怠)해지셨습니다. 순명은 장막 안(帷幄)⁵⁷에 출입한 지 이미 오래되어, 성상(聖上)의 밝으심을 우러러 의지하여 감히 숨김없이 말한 것이니, 그 뜻을 높이 살 만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냐고 하교(下敎)하시니, 이것이 어찌 임금이 신하를 예(禮)로써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상께서 말씀하셨다. “경의 말이 옳다. 나 또한 후회스럽다.”

주석:
56. 김순명(金順命): 조선 중기의 문신. 집의(執義)는 사헌부(司憲府)의 종3품 관직이다.
57. 유악(帷幄): 군대의 장막 또는 임금의 침소. 임금의 측근에서 정사를 보좌하는 것을 비유한다.


원문:
己酉, 奉審胎室于大丘。 臨行謂人曰: “吾行當過鄭仁弘居。 吾嘗薄其爲人, 入見非情。” 或引《易》之見惡人無咎, 公微哂。 仁弘掃榻以待, 而終不見, 亦不伻問。 時仁弘勢焰薰天, 往來冠蓋織路, 公獨毅然不屈, 其待小人之嚴如此。【竝墓誌。】

번역문: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명(命)을 받들어 대구(大丘)에서 태실(胎室)⁵⁸을 봉심(奉審)하였다. 떠나기에 앞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가는 길에 마땅히 정인홍(鄭仁弘)⁵⁹이 사는 곳을 지나게 될 것이다. 내가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박하게 여겼으니, 들어가 보는 것은 실정(實情)이 아니다.” 어떤 이가 《주역(周易)》의 ‘악인(惡人)을 보아도 허물이 없다’⁶⁰는 구절을 인용하자, 공이 빙그레 웃었다(微哂). 정인홍이 걸상(榻)을 쓸고 기다렸으나, 끝내 만나보지 않았고 또한 사람을 보내 문안하지도 않았다. 당시 정인홍의 권세(勢焰)가 하늘을 찔러, 오가는 관리(冠蓋)⁶¹들이 길을 메웠으나, 공만이 홀로 의연(毅然)히 굽히지 않으니, 그 소인(小人)을 대함의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이상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58. 태실(胎室): 왕실 자손의 태(胎)를 봉안하는 석실(石室). 봉심(奉審)은 왕명을 받들어 태실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59. 정인홍(鄭仁弘, 1535-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북인(北人)의 영수로 광해군(光海君)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폐모론을 주도하고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60. 악인(惡人)을 보아도 허물이 없다: 《주역(周易)》 명이괘(明夷卦) 육오효(六五爻)에 “기자(箕子)의 명이(明夷)이니, 올바르면 이롭다(利貞)”라는 효사(爻辭)가 있고, 《상전(象傳)》에 “기자의 올바름은 그 밝음이 안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箕子之貞, 明不可息也)”라고 풀이했다. 기자는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 미친 척하며 지냈는데, 이는 악인을 보면서도 자신의 밝음을 드러내지 않아 화를 면한 예로 해석된다. 이호민은 정인홍을 만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여겨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61. 관개(冠蓋): 관(冠)은 벼슬아치의 모자, 개(蓋)는 수레의 덮개. 벼슬아치 또는 그 행차를 의미한다. '관개직로(冠蓋織路)'는 고관대작들의 왕래가 매우 빈번함을 뜻한다.


원문:
光海在位數年, 愎諫滋甚, 斥逐言官相繼。 公因鄭蘊外補, 上疏保留。 且言: “金玏先朝舊臣, 七十之年, 流離嶺海; 李埈論事不容, 片舸南歸; 沈諿、金致遠連貶遠惡。 臣知所惡於言官者非暫而久也。” 疏入不省。

번역문:
광해군(光海君)이 재위(在位)한 지 수년이 되자, 간언(諫言)을 거부함(愎諫)이 더욱 심해져 언관(言官)⁶²을 배척하고 내쫓는 일이 서로 잇따랐다. 공은 정온(鄭蘊)⁶³이 외직(外職)으로 보임(補任)된 것을 계기로 상소(上疏)하여 유임(留任)시킬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륵(金玏)⁶⁴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인데 70의 나이에 영남 바닷가(嶺海)에서 유랑하고 있고, 이준(李埈)⁶⁵은 일을 논하다가 용납되지 못하여 조각배(片舸)로 남쪽으로 돌아갔으며, 심집(沈諿)⁶⁶, 김치원(金致遠)⁶⁷은 연달아 먼 곳의 악지(惡地)로 좌천되었습니다. 신(臣)은 언관(言官)을 미워하시는 바가 잠시가 아니라 오래되었음을 압니다.”라고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살피지 않았다.

주석:
62. 언관(言官): 주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원으로, 간쟁(諫諍)과 탄핵(彈劾)을 통해 왕과 조정의 잘못을 비판하는 역할을 했다.
63. 정온(鄭蘊, 1569-1641):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동계(桐溪). 폐모론(廢母論)에 극력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등용되었다.
64. 김륵(金玏, 1540-1616):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으나, 광해군 때 정인홍 등과의 불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65. 이준(李埈, 1560-1635):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창석(蒼石). 광해군 때 대북파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앞서 이호민의 묘지(墓誌)를 지은 인물이다.
66. 심집(沈諿, 1569-1644):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67. 김치원(金致遠):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 때 정치를 비판하다가 유배되었다.


원문:
壬子金直哉獄, 公以姻親被逮卽釋。 仁弘嗛前憾, 又發戊申使事。 三司承頤下氣, 連章請竄。 光海重違仁弘意, 又愍公無罪, 不卽批下, 待命郊外者七年。 時倫彝喪敗, 諸名賢一時流逬, 白沙相謫關北, 公就別途次, 相與賦詩悲慨, 聞者傷之。

번역문:
임자년(1612, 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⁶⁸ 때, 공은 인척(姻親)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즉시 석방되었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전의 유감(憾)을 품고(嗛)⁶⁹, 또 무신년(1608)의 사행(使行)⁷⁰ 때의 일을 들추어냈다. 삼사(三司)⁷¹가 그의 뜻을 받들어(承頤下氣)⁷² 연달아 상소(連章)하여 유배(竄)를 청하였다. 광해군이 정인홍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하면서도 또한 공이 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즉시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아 교외(郊外)에서 명(命)을 기다린 것이 7년이었다. 이때 인륜(倫彝)⁷³이 무너지고 여러 명현(名賢)들이 한꺼번에 유배되거나 내쫓겼는데, 백사 상공(白沙相公)⁷⁴이 관북(關北)으로 유배되자, 공이 다른 길로 가는 도중에 나아가 서로 시(詩)를 지어 슬퍼하고 개탄하니, 듣는 자들이 마음 아파하였다.

주석:
68. 김직재 옥(金直哉獄): 김직재(金直哉)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일어난 옥사. 계축옥사(癸丑獄事)의 발단이 되었다.
69. 혐전감(嗛前憾): 이전의 유감을 품음. 앞서 이호민이 정인홍을 만나주지 않았던 일에 대한 원한을 가리킨다.
70. 무신사사(戊申使事): 무신년(1608)에 이호민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던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정인홍이 이때의 일을 문제 삼아 이호민을 공격했다.
71.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한다.
72. 승이하기(承頤下氣): 윗사람의 뜻을 받들어 비위를 맞춤. '이(頤)'는 턱을 뜻하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것을 비유한다.
73. 윤이(倫彝): 인륜(人倫)과 상도(常道).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과 규범. 폐모살제(廢母殺弟) 등 광해군 시대의 사건들을 비판하는 말이다.
74. 백사 상(白沙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명재상. 호는 백사(白沙).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상(相)'은 재상(宰相)을 의미한다.


원문:
公壽躋大耋, 與一時諸老作洛社耆老會, 每於春秋携酒相會, 龐眉華髮, 奕如圖畫中人。

번역문:
공은 수(壽)가 대질(大耋)⁷⁵에 이르러, 당대의 여러 노인들과 함께 낙사 기로회(洛社耆老會)⁷⁶를 만들어, 매년 봄가을에 술을 가지고 서로 모였는데, 흰 눈썹과 흰 머리(龐眉華髮)⁷⁷가 빛나서 그림 속 인물 같았다.

주석:
75. 대질(大耋): 질(耋)은 70세 또는 80세를 이르는 말이다. 대질은 80세 이상의 고령을 의미한다. 이호민은 82세까지 살았다.
76. 낙사 기로회(洛社耆老會): 중국 송(宋)나라 때 문언박(文彦博) 등이 낙양(洛陽)에서 조직했던 기로회(耆老會)를 본뜬 모임. 나이 많은 명망 있는 신하들이 모여 시주(詩酒)를 즐기던 친목 모임이다.
77. 방미화발(龐眉華髮): 뒤섞인 흰 눈썹과 희끗희끗한 머리털. 노인의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


원문:
公嘗以所得於皇朝恩錫者, 買地於斜川, 築小亭, 華使朱之蕃⁷⁸命名以彰賜而書其額。 有水石之勝, 一時名卿韻人多詠其風致。【竝墓誌。】

번역문:
공이 일찍이 황조(皇朝)⁷⁹에서 은혜로 하사받은(恩錫) 것으로 사천(斜川)⁸⁰에 땅을 사서 작은 정자(亭子)를 지었는데, 중국 사신(華使) 주지번(朱之蕃)⁸¹이 하사받은 것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이름을 짓고 그 편액(扁額)을 써주었다. 물과 돌의 뛰어난 경치(水石之勝)가 있어, 당대의 명망 있는 관리(名卿)와 풍류 있는 인사(韻人)들이 그 풍치(風致)를 많이 읊었다.【이상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78. [주-D002] 蕃 : 저본(底本)에는 “번(番)”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오봉집(五峯集)・유명조선국……이공묘지명(有明朝鮮國……李公墓誌銘)》, 《창석집(蒼石集)・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이공묘지명(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李公墓誌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주지번(朱之蕃)이 올바른 표기이다.
79. 황조(皇朝): 황제의 조정. 명(明)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80. 사천(斜川):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경치 좋은 계곡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도연명(陶淵明)의 시에도 등장한다.
81. 주지번(朱之蕃, 1558-1624): 명나라의 관리, 서화가. 1606년(선조 39) 책봉사(冊封使)로 조선에 왔다.


원문:
公素尙儉約, 不喜服美。 宣廟嘗謂公曰: “今日筵臣, 衣俱文綺, 卿獨不然, 深用嘉尙。” 因擧示御衣, 乃綿布襖也, 左右大慙。

번역문:
공은 평소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아름다운 옷 입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조(宣廟)께서 일찍이 공에게 이르시기를, “오늘 경연(經筵)의 신하(筵臣)들이 모두 무늬 있는 비단옷(文綺)을 입었는데, 경만이 유독 그렇지 않으니 깊이 가상히 여기고 높이 평가한다”라고 하셨다. 이어서 어의(御衣)를 들어 보이셨는데, 바로 무명 두루마기(綿布襖)였으므로 좌우(左右)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원문:
壬辰, 車駕播遷龍灣, 方議渡遼, 群議未定。 五峯於座上賦一律, 有曰: “天心錯莫臨江水, 廟算凄涼對夕暉。” 滿座皆泣。

번역문:
임진년(1592)에 어가(車駕)가 용만(龍灣)으로 파천(播遷)하여 바야흐로 요동(遼東)으로 건너갈 것을 의논하는데, 여러 의논이 정해지지 않았다. 오봉(五峯)이 좌석에서 율시(律詩) 한 수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천심(天心)은 착막(錯莫)하여 강물에 임하였고, 묘산(廟算)은 처량(凄涼)하여 저녁 빛을 대하네.”⁸²라고 하니, 자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주석:
82. 천심(天心)은…대하네: 하늘의 뜻은 어지러워 알기 어렵고(錯莫) 강물(압록강)에 다다랐으며, 조정의 계책(廟算)은 쓸쓸하고 희망이 없어 저녁 햇살만 마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과 피란길의 암담한 심정을 노래한 시구이다.

박동현(朴東賢)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朴東賢
字學起, 號活塘, 潘南人。 冶川紹之孫。 嘉靖甲辰生。 以學行除昭格署參奉。 宣祖二十一年戊子登第, 歷修撰、吏郞、應敎。 甲午卒, 年五十一。

번역문:
박동현(朴東賢)
자는 학기(學起), 호는 활당(活塘), 반남(潘南) 사람이다. 야천(冶川) 박소(朴紹)¹의 손자이다. 가정(嘉靖) 갑진년(1544)에 태어났다. 학행(學行)²으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³에 제수(除授)⁴되었다. 선조(宣祖) 21년 무자년(1588)⁵에 문과에 급제(登第)⁶하여, 수찬(修撰)⁷, 이조 정랑(吏曹正郎)⁸, 응교(應敎)⁹를 역임하였다. 갑오년(1594)에 졸(卒)하니, 나이 51세였다.

주석:

  1. 박소(朴紹): 생몰년 미상. 박동현의 조부. 호는 야천(冶川).
  2. 학행(學行): 학문과 품행. 조선 시대에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관직을 제수하는 제도가 있었다.
  3.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 소격서는 도교(道敎)의 초제(醮祭)를 관장하던 관서. 참봉은 종9품의 종교직이었다. 성리학을 숭상하던 사림(士林)에게는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학행으로 처음 제수된 관직이다.
  4. 제수(除授): 임금이 신하에게 관직을 내림.
  5. 선조 21년 무자년(1588): 선조 재위 21년은 1587년(정해년)이지만, 무자년은 1588년(선조 22년)이다. 박동현의 급제 연도는 1588년이므로, 원문의 '二十一年'은 '二十二年'의 오기이거나, 해당 시기를 넓게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선조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4위로 급제했다고 나온다. 선조 즉위년(1567)을 원년으로 계산하면 1588년은 재위 22년이지만,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에 따라 즉위 다음 해인 1568년을 원년으로 삼으면 1588년은 재위 21년이 된다. 여기서는 원문을 존중하여 '선조 21년 무자년(1588)'으로 표기하고 번역하였다.
  6. 등제(登第): 과거(科擧), 특히 문과(文科)에 급제하는 것.
  7. 수찬(修撰): 예문관(藝文館)의 정6품 관직. 왕명(王命)과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고 경연(經筵)에 참여했다.
  8. 이조 정랑(吏曹正郎):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文官)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要職) 중 하나였다. 원문의 '이낭(吏郞)'은 이조 정랑의 약칭이다.
  9.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의 정4품 관직. 경연(經筵)에서 강론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했다.

원문:
辛卯, 入玉堂, 屬信使回自日本, 持秀吉書, 有同犯上國, 語辭絶悖。 上臨朝, 命群臣議奏聞當否。 大司憲尹斗壽首曰: “宜急奏, 以盡事大之誠。” 左相柳成龍執不可, 以爲: “此特恐動耳。 假令具聞而無實, 必貽後悔。” 其餘和之者, 爭論紛然。 上以問公, 對曰: “人臣旣聞犯上之言, 其在大義, 豈可晏然而已? 苟不急奏, 其禍有不可勝道者。 至於辭意曲折, 所繫非細, 劃令大臣, 廣議取旨。” 上從之。 壬辰之變, 天朝果疑我引賊爲亂, 而卒以此獲伸, 因出大兵來援者, 公與尹公之力也。

번역문:
신묘년(1591)에 옥당(玉堂)¹⁰에 들어갔을 때, 마침 통신사(通信使)¹¹가 일본에서 돌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秀吉]의 서신을 가지고 왔는데, ‘함께 상국(上國)¹²을 침범하자’는 내용이 있어 언사(語辭)가 매우 불순(悖)하였다. 상(上)께서 조회(朝會)에 임어(臨御)하여 군신(群臣)들에게 명하여 이를 명나라에 보고[奏聞]¹³해야 할지 여부를 의논하게 하였다. 대사헌(大司憲)¹⁴ 윤두수(尹斗壽)가 먼저 아뢰었다. “마땅히 급히 보고하여 사대(事大)¹⁵의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좌의정(左議政)¹⁶ 유성룡(柳成龍)은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생각하기를, “이는 단지 위협하려는 것[恐動]일 뿐입니다. 만약 갖추어 보고하였는데 실상이 없다면 반드시 후회를 남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나머지 유성룡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들도 다투어 논란함이 분분하였다. 상께서 공(公)에게 묻자, 대답하였다. “신하된 자가 이미 상국을 침범하려는 말을 들었으니, 대의(大義)¹⁷에 있어 어찌 편안히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만약 급히 보고하지 않는다면 그 화(禍)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의 뜻과 곡절(曲折)에 이르러서는 관계된 바가 작지 않으니, 분명하게 대신(大臣)들에게 명하시어 널리 의논하여 처리할 방침[旨]을 정하게 하소서.” 상께서 그 말을 따랐다. 임진왜란(壬辰倭亂)¹⁸ 때 천조(天朝)¹⁹가 과연 우리가 왜적을 끌어들여 난을 일으켰다고 의심하였으나, 마침내 이로 인하여 [우리의 입장이] 해명될 수 있었고(獲伸)²⁰, 이로 말미암아 대군(大軍)을 내어 구원하러 온 것은 공과 윤공(尹公)²¹의 힘이었다.

주석:
10.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경연(經筵)을 담당하던 중요한 학술 및 정책 연구 기관. 박동현은 이때 응교(應敎)로 재직했다.
11. 통신사(通信使): 조선 시대에 일본 막부(幕府)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던 공식 외교 사절단. 이때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이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에 대해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12. 상국(上國): 윗나라. 당시 조선이 사대(事大)하던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13. 주문(奏聞):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거나 보고함. 여기서는 조선 조정의 일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14.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기강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15. 사대(事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외교 정책.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의 예를 행했다.
16. 좌의정(左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재상. 영의정 다음가는 관직.
17. 대의(大義):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큰 의리. 여기서는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의리를 의미한다.
18.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임진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19. 천조(天朝): 하늘의 조정이라는 뜻으로, 중국 왕조(여기서는 명나라)를 높여 부르는 말.
20. 획신(獲伸): 억울함이나 의심을 풀고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을 펼 수 있게 됨.
21. 윤공(尹公): 대사헌 윤두수(尹斗壽)를 가리킨다. 윤두수와 박동현이 명나라에 히데요시의 국서를 보고할 것을 주장한 것이 후에 명나라의 의심을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미이다.


원문:
時昇平狃安, 百度俱廢。 會上賜對便殿, 語及舊制, 公進曰: “人君能保治安者, 不過廣開言路, 樂聞其失, 而亟自改, 此誹謗之木、諫諍之旌所由設也。 我國家自祖宗以來, 所以納諫甚至。 若言經筵, 則一日設朝、晝、夕講, 是接賢士大夫之時多, 而親宦官、宮妾之日少。 又慮其不足徧及於朝臣, 則有常參、朝參、輪對、召對等事, 使六曹諸各司衙門, 亦得畢陳所懷。 或遇天災, 必下敎求言, 以盡其趣, 而雖有狂簡不中之說, 未嘗因此沮廢者, 誠不可以壞祖宗之法, 塞納諫之路也。 今者經筵已罕, 徒爲文具, 至於常參、輪對, 廢且二十年, 所當汲汲修明, 以無墜列聖美意。 然自上苟不以至誠行之, 亦豈能有所補於治道哉?”

번역문:
이때는 태평성대에 안주하여(狃安)²² 온갖 법도(百度)²³가 모두 폐지되었다. 마침 상(上)께서 편전(便殿)²⁴에서 대면(對面)을 허락하시고 말씀이 옛 제도에 미치자, 공이 나아가 아뢰었다. “임금께서 치안(治安)을 능히 보전하는 방법은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자신의 잘못을 즐겨 듣고 빨리 스스로 고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이 비방지목(誹謗之木)과 간쟁지정(諫諍之旌)²⁵이 설치된 까닭입니다. 우리나라가 조종(祖宗)²⁶ 이래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지극하였습니다. 만약 경연(經筵)²⁷을 말하자면, 하루에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을 베푸니, 이는 현명한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하는 시간이 많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하는 날이 적었던 것입니다. 또 조신(朝臣)들에게 두루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상참(常參)·조참(朝參)·윤대(輪對)·소대(召對)²⁸ 등의 일이 있어, 육조(六曹)와 여러 각사(各司)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또한 품은 바를 모두 아뢸 수 있게 하였습니다. 혹 천재(天災)를 만나면 반드시 하교(下敎)하여 구언(求言)²⁹함으로써 그 뜻을 다하게 하였고, 비록 미치고 간략하여[狂簡]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있더라도 일찍이 이 때문에 저지하거나 폐지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조종의 법을 무너뜨리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경연은 이미 드물어져 한갓 형식적인 문서[文具]³⁰가 되었고, 상참과 윤대에 이르러서는 폐지된 지 또한 20년이나 되었으니, 마땅히 서둘러 밝게 닦아서 열성(列聖)³¹의 아름다운 뜻을 떨어뜨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만약 지극한 정성으로 이를 행하지 않으신다면, 또한 어찌 치도(治道)에 보탬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주석:
22. 유안(狃安): 편안함에 익숙해져서 타성에 젖음.
23. 백도(百度): 온갖 법도와 제도.
24. 편전(便殿):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보는 궁전.
25. 비방지목(誹謗之木), 간쟁지정(諫諍之旌): 고대 중국에서 백성들이 임금이나 관리의 잘못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붙이던 나무 기둥과, 간언할 일이 있는 사람이 흔들던 깃발. 임금이 널리 언로를 열어 비판과 간언을 구했음을 상징한다.
26. 조종(祖宗): 나라를 세운 왕(太祖)과 그 뒤를 이은 역대 왕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27.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國政)을 논의하던 자리. 조강(朝講, 아침), 주강(晝講, 낮), 석강(夕講, 저녁)으로 나뉘어 열렸다.
28. 상참(常參)·조참(朝參)·윤대(輪對)·소대(召對): 조선 시대에 신하들이 임금을 만나 국정을 보고하고 논의하던 여러 형식의 조회(朝會) 및 대면(對面) 제도. 상참은 매일 열리는 약식 조회, 조참은 매월 정기적으로 열리는 조회, 윤대는 관원들이 차례로 임금을 만나 의견을 아뢰는 것, 소대는 임금이 특정 신하를 불러 만나는 것이다.
29. 구언(求言): 임금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널리 의견을 구하는 것. 주로 천재지변이나 국정의 어려움이 있을 때 행해졌다.
30. 문구(文具): 형식만 갖추고 실질적인 내용은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
31. 열성(列聖): 역대의 성군(聖君). 여기서는 조선의 역대 임금들을 가리킨다.


원문:
先是, 己丑逆獄起於搢紳, 彼此士類咸懷疑懼, 欲藉公以爲重, 引置天官。 未幾, 以事自免。 至是, 時論一變, 虞疑之端有倍前日。 而公乃侃侃自持, 務存風采, 不少假借, 大爲群小所惡, 遂以微故擊去之。

번역문:
이에 앞서 기축옥사(己丑獄事)³²가 사대부[搢紳]³³ 사이에서 일어나 피차 사류(士類)³⁴들이 모두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는데, 공(公)을 중요하게 여겨[藉公以爲重] 이끌어 천관(天官)³⁵에 두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 때문에 스스로 면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시론(時論)³⁶이 한번 변하여 의심하는 단서가 전날보다 배가 되었다. 그러나 공은 강직하게[侃侃]³⁷ 스스로를 지켜 풍채(風采)³⁸를 보존하는 데 힘쓰고 조금도 가차(假借)³⁹함이 없어, 여러 소인배(群小)들에게 크게 미움을 받아 마침내 사소한 빌미로 공격받아 물러나게 되었다.

주석:
32.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년(선조 22, 기축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대규모 옥사(獄事). 서인(西人) 정철(鄭澈) 등이 주도하여 동인(東人) 세력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열되는 등 정국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33. 진신(搢紳): 홀(笏)을 허리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벼슬아치 또는 사대부 계층을 가리킨다.
34. 사류(士類): 선비의 무리. 사대부 계층, 특히 당시의 관료 집단을 의미한다.
35. 천관(天官): 이조(吏曹)의 별칭. 주(周)나라 관제에서 재상인 총재(冢宰)를 천관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이조 판서 또는 이조 참판 등의 고위직을 의미하거나, 이조 정랑(吏曹正郎)을 가리킬 수도 있다. 박동현은 기축옥사 이후인 1590년(경인년)에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36. 시론(時論): 당시 사람들의 여론이나 정치적 논의. 기축옥사 이후 당파 간의 대립과 의심이 더욱 심해졌음을 의미한다.
37. 간간(侃侃): 성품이나 태도가 굳세고 거리낌이 없는 모양. 강직함을 의미한다.
38. 풍채(風采):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태도. 여기서는 관리로서의 위엄과 절개를 의미한다.
39. 가차(假借): 용서하거나 너그럽게 봐줌. 또는 임시로 빌림. 여기서는 불의나 부정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원문:
癸巳, 拜持平。 上疏略曰: “國家治亂, 繫於論相。 自平世猶然, 矧今中興, 事同草昧, 不可坐守前轍。 如欲改紀立政, 以迓維新之命, 則臣愚竊謂宰相之任, 非學問精深士林推仰者不可。” 意指牛溪先生云。

번역문:
계사년(1593)에 지평(持平)⁴⁰에 제수되었다. 상소(上疏)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치란(治亂)은 재상(宰相)을 논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평상시에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지금은 중흥(中興)⁴¹하여 일이 초매(草昧)⁴²와 같으니, 이전의 방식을 그대로 지키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를 세워 유신(維新)의 명(命)⁴³을 맞이하고자 하신다면,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재상의 임무는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사림(士林)이 추앙(推仰)하는 자가 아니면 불가하다고 여겨집니다.” 그 뜻은 우계(牛溪) 선생⁴⁴을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

주석:
40.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대사헌, 집의(執義)와 함께 대관(臺官)으로 불리며 간쟁(諫諍)과 탄핵(彈劾)을 담당했다.
41. 중흥(中興): 쇠퇴하였던 나라나 왕실이 다시 일어남. 여기서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다시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42. 초매(草昧): 천지가 처음 열릴 때의 혼돈하고 미개한 상태. 《주역(周易)》 둔괘(屯卦)의 '둔(屯), 원형이정(元亨利貞), 물용유유왕(勿用有攸往), 건후(建侯)'에서 유래하며, 일이 처음 시작될 때의 어려움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 직후의 혼란하고 어려운 상황을 가리킨다.
43. 유신지명(維新之命): 모든 것을 새롭게 개혁하라는 하늘의 명 또는 시대적 요구.
44. 우계 선생(牛溪先生):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서인(西人)의 영수. 박동현은 성혼을 재상으로 천거하여 난국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원문:
公屢經變故, 而其氣節彌厲, 糾劾官邪, 扶植人常, 雖怨媢者比肩, 無所畏避。 上之駐博川, 光海以世子分朝, 命宮官趙挺致起居。 及其還, 而上授以一封書, 挺乃徑尋家眷, 久之但使人遞上而已。 光海與大臣拆視之, 卽永訣書也。 辭甚悲慘, 不忍聞。 上下莫不失聲號泣, 而經年未有擧論者, 公輒正其罪, 請置重律。 自此行朝綱紀肅然改觀。【竝南溪撰行狀。】

번역문:
공(公)은 여러 차례 변고(變故)를 겪었으나 그 기개와 절조[氣節]는 더욱 굳세어져, 관리들의 부정[官邪]을 규탄하고 탄핵하며 인륜의 떳떳함[人常]을 붙들어 세우니, 비록 원망하고 시기하는[怨媢] 자들이 줄을 이어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바가 없었다. 상(上)께서 박천(博川)⁴⁵에 머무르실 때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서 분조(分朝)⁴⁶하고 있었는데, 궁관(宮官) 조정(趙挺)에게 명하여 문안[起居]⁴⁷하게 하였다. 그가 돌아올 때 상께서 봉한 서신 한 통을 주었는데, 조정은 곧장 자기 집 권속(眷屬)을 찾아가 오랫동안 있다가 단지 사람을 시켜 전달[遞上]했을 뿐이었다. 광해군이 대신(大臣)과 함께 뜯어보니 바로 영결서(永訣書)⁴⁸였다. 글 내용이 매우 비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상하(上下)가 소리 내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해가 지나도록 이를 들어 논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문득 그 죄를 바로잡아 중한 형률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행재소 조정[行朝]⁴⁹의 기강이 엄숙하게 일신되었다.【이상은 남계(南溪)⁵⁰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45. 박천(博川): 평안북도 박천군.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란 가는 도중 머물렀던 곳이다.
46. 분조(分朝): 임진왜란 중 선조는 의주로 피란하고, 세자였던 광해군은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에서 별도의 조정을 운영하며 군사를 모집하고 민심을 수습했는데, 이를 분조라 한다.
47. 기거(起居): 안부(安否)를 묻는 것. 여기서는 세자가 부왕에게 보내는 문안 인사를 의미한다.
48. 영결서(永訣書): 영원히 이별한다는 내용의 글. 당시 선조는 전세가 불리하고 명나라 구원병도 오지 않자 요동(遼東)으로 망명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므로, 비장한 심정으로 세자에게 글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49. 행조(行朝): 임금이 피란 중이거나 순행(巡行) 중일 때 임시로 머무는 곳에 설치된 조정.
50. 남계(南溪): 남계 박세채(朴世采, 1631-1695)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동현과 같은 반남 박씨이며, 서인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행장(行狀)은 고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글이다.


원문:
有一宰, 少擢魁科, 屈身權門, 躐致淸顯, 爲世所棄。 晩復托婚當路, 至授方伯, 乃自敍前日所歷, 遂以上聞, 爲進取計。 又有一宰, 隨駕到平壤, 托言覲親, 中途遇妻子而止, 終不赴母所, 公常痛惡之。 適二人竝授天將接伴之任, 公進曰: “接待天將, 職任極重, 不可付之忘親無行之人。” 上卽允之, 筵官皆震慄。

번역문:
어떤 재상(宰相)은 젊어서 장원 급제[魁科]⁵¹하였으나 권세가[權門]에 몸을 굽혀 청현직(淸顯職)⁵²을 뛰어넘어 차지하여[躐致] 세상의 버림을 받았다. 만년에 다시 권력자[當路]와 혼인 관계를 맺어 마침내 방백(方伯)⁵³에 제수되기에 이르자, 이에 지난날 겪은 바를 스스로 서술하여 마침내 상(上)께 아뢰어[上聞] 출세의 계책[進取計]으로 삼았다. 또 어떤 재상은 임금의 행차를 따라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어버이를 뵙겠다[覲親]고 핑계 대고는 중도(中途)에서 처자(妻子)를 만나자 그곳에 머물고 끝내 어머니 계신 곳으로 가지 않았는데, 공(公)이 항상 이를 통탄하고 미워하였다. 마침 이 두 사람이 나란히 명나라 장수 접반(接伴)⁵⁴의 임무를 제수받자, 공이 나아가 아뢰었다.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것은 직임(職任)이 극히 중요하니, 어버이를 잊고 행실이 없는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상께서 즉시 윤허하시니, 경연관(筵官)⁵⁵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震慄].

주석:
51. 괴과(魁科): 과거 시험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는 것.
52. 청현직(淸顯職): 청직(淸職)과 현직(顯職)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학문과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 주로 맡는 중요한 관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의 관직이 해당된다. '엽치(躐致)'는 차례를 뛰어넘어 차지한다는 뜻으로, 부정한 방법이나 비정상적인 경로로 높은 자리에 올랐음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53.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 또는 감사(監司)의 별칭. 각 도(道)의 으뜸 벼슬이다.
54. 접반(接伴): 외국 사신이나 장수를 맞이하여 접대하는 일, 또는 그 임무를 맡은 관원(접반사, 接伴使).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구원군 장수를 접대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55. 연관(筵官):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관리. 주로 홍문관 관원들이 맡았다.


원문:
公天姿峻潔, 性行正直, 濟以學力, 所造甚高。 日用事爲之間, 無所矯揉, 雖不規規繩墨, 而自有法度。 每日淸晨謁家廟, 出入必告, 朔望率群從子弟參拜, 未嘗無故或廢。 或有攻己之短, 必自先反於心, 果有之, 則喜而佩服, 雖非實有, 亦必笑而受之, 少無厭惡之色。 以此人皆樂告以善。 雖習科文, 而亦不輟爲己之學, 沈潛涵養於誠正格致之方, 講磨孜孜, 勉進德業。 甲申, 以學行授昭格署參奉, 人有勸之出, 曰: “此乃儒先一蠧先生所嘗爲者。” 又曰: “古人有爲親屈者。” 公笑而不就。【竝公弟貞憲公所記。】

번역문:
공(公)은 타고난 자품[天姿]이 높고 깨끗하며[峻潔] 성품과 행실[性行]이 정직하였고, 이를 학문의 힘[學力]으로 이루어 그 이룬 바[所造]가 매우 높았다. 일상생활[日用事爲] 속에서 꾸미거나 부자연스러운[矯揉] 바가 없었으며, 비록 자잘하게 법도[規規繩墨]⁵⁶를 따지지는 않았으나 저절로 법도(法度)가 있었다. 매일 맑은 새벽에 가묘(家廟)⁵⁷에 참배하고, 나가고 들어올 때 반드시 고하였으며, 초하루[朔]와 보름[望]에는 여러 종자제(從子弟)⁵⁸들을 이끌고 참배하여, 일찍이 까닭 없이 혹시라도 폐한 적이 없었다. 혹 자신의 단점을 공격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스스로 마음에 돌이켜보고, 과연 그러한 점이 있으면 기뻐하며 마음에 새겼고[佩服], 비록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또한 반드시 웃으며 받아들이고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즐거이 선(善)으로써 알려주었다. 비록 과거 공부[科文]를 익혔으나 또한 위기지학(爲己之學)⁵⁹을 그만두지 않아, 성(誠)·정(正)·격(格)·치(致)⁶⁰의 방법에 침잠(沈潛)하고 함양(涵養)하며, 부지런히 강론하고 연마하여[講磨孜孜] 덕업(德業)에 힘써 나아갔다. 갑신년(1584)⁶¹에 학행(學行)으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벼슬에 나아가라고 권하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유학의 좀벌레 같은 선비[儒先一蠧]⁶²들이 일찍이 하던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어버이를 위해 [뜻을] 굽힌 이가 있다.”고 하였으나, 공은 웃으며 나아가지 않았다.【이상은 공의 아우 정헌공(貞憲公)⁶³이 기록한 바이다.】

주석:
56. 규규승묵(規規繩墨): 작은 법도나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비유하는 말. 규(規)는 원을 그리는 도구, 구(矩)는 네모를 그리는 도구, 승(繩)은 먹줄, 묵(墨)은 먹통을 의미한다.
57. 가묘(家廟): 집안에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
58. 종자제(從子弟): 일가친척의 자제들.
59.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인격 완성을 위한 학문.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비된다.
60. 성(誠)·정(正)·격(格)·치(致): 성의(誠意), 정심(正心), 격물(格物), 치지(致知)를 줄인 말.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양(修養)의 조목들이다.
61. 갑신년(1584): 박동현이 소격서 참봉에 제수된 해이다.
62. 유선일두(儒先一蠧): 유학을 좀먹는 벌레 같은 선비. 소격서는 도교와 관련된 관서였으므로, 성리학자들은 소격서 관직을 맡는 것을 유학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여겨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63. 정헌공(貞憲公): 박동현의 아우인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을 가리킨다.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창(梧窓),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인조반정 이후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원문:
立朝忠讜, 志節凜然, 人不敢犯, 蓋亦得之家庭者居多焉。 繇正言至司諫, 修撰至應敎, 五年之間, 所爭論是非, 上及乘輿, 下乃與宰臣角立。 然義理明白, 確乎有不可拔者。 及當正邪消長之際, 必兢兢致謹, 而剛腸嫉惡, 遇事直截, 尤無所顧。 比卒, 被斥者往往相與報賀, 唯玄軒申公以詩哭之曰: “凄涼赤墀上, 無復批龍鱗。” 亦可謂知公矣。 至於見義勇往、見利若浼, 實有古人所難及者。【行狀。】

번역문:
조정에 서서는 충성스럽고 강직하며[忠讜] 뜻과 절개[志節]가 늠름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또한 가정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정언(正言)⁶⁴에서 사간(司諫)⁶⁵에 이르고, 수찬(修撰)에서 응교(應敎)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시비(是非)를 다투어 논함에 위로는 임금[乘輿]⁶⁶에게까지 미치고 아래로는 재신(宰臣)과 각을 세웠다[角立]. 그러나 의리(義理)가 명백하여 확고해서 뽑을 수 없는[不可拔] 바가 있었다. 정(正)과 사(邪)가 성하고 쇠하는[消長] 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조심하고 삼갔으며[兢兢致謹], 강직한 마음[剛腸]으로 악(惡)을 미워하여 일을 당하면 명확하게 처리하고[直截] 더욱 돌아보는 바가 없었다. 졸(卒)함에 이르자, 배척당했던 자들이 왕왕 서로 축하하였으나, 오직 현헌(玄軒) 신공(申公)⁶⁷만이 시(詩)로써 곡(哭)하며 말하기를, “쓸쓸한 궁궐 뜰[赤墀]⁶⁸ 위에, 다시는 용의 비늘을 거스르는 이 없으리[批龍鱗]⁶⁹.”라고 하였으니, 또한 공(公)을 안다고 할 만하다. 의(義)를 보면 용감히 나아가고 이(利)를 보면 더럽힘을 당할까[浼]⁷⁰ 두려워하는 점에 이르러서는, 실로 옛사람도 미치기 어려운 바가 있었다.【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64.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을 담당했다.
65. 사간(司諫):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 정3품)을 가리키거나, 사간원 전체 또는 사간원 관원을 통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대사간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정언에서 시작하여 사간원의 고위직에 이르렀다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66. 승여(乘輿):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 또는 왕실을 가리킨다.
67. 현헌 신공(玄軒申公): 현헌 신극례(申克禮, 1551-1611) 또는 신흠(申欽, 1566-1628)을 가리킬 수 있으나, 시기적으로나 교유 관계상 신흠일 가능성이 높다. 신흠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호는 현헌(玄軒) 또는 상촌(象村)이다.
68. 적지(赤墀): 붉은 칠을 한 섬돌. 궁궐의 뜰을 가리킨다. 조정을 상징한다.
69. 비룡린(批龍鱗):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린다는 뜻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직간(直諫)하는 것을 비유한다.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편에 나온다.
70. 메(浼): 더럽히다, 흐리게 하다. '견리약메(見利若浼)'는 이익을 보면 마치 더러운 것에 오염될까 두려워하듯 멀리한다는 뜻이다.


원문:
公嘗入侍經席, 時朝廷創設訓鍊都監, 欲行鳥銃法, 領相柳公成龍所建請也。 是日, 柳公於上前親作試放狀, 擧措頗不佳。 公卽進曰: “今日殿下, 無望國家之中興也。 某以首輔, 親作放砲狀於經席, 亦豈能有所補於治道哉?” 宣祖瞪視不答。 及罷, 柳公出, 語人曰: “今日朴某言, 誠是矣。 然古人言‘諸侯有爭臣, 不失其國’, 此豈不足以中興乎?” 時以爲兩難。【記聞。】

번역문:
공(公)이 일찍이 경연(經筵) 자리에 입시(入侍)하였는데, 당시 조정에서 처음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⁷¹을 설치하여 조총법(鳥銃法)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니, 영의정[領相] 유공 성룡(柳公成龍)⁷²이 건의하여 청한 바였다. 이날 유공(柳公)이 상(上) 앞에서 친히 시험 발사하는 모습[試放狀]을 보였는데, 거동[擧措]이 자못 보기 좋지 않았다. 공이 즉시 나아가 아뢰었다. “오늘 전하께서는 국가의 중흥(中興)을 바랄 수 없습니다. 아무개⁷³가 수보(首輔)⁷⁴로서 친히 경연 자리에서 포(砲)를 쏘는 모습을 보이니, 대신(大臣)의 체모(體貌)가 이와 같고서야 어찌 능히 중흥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께서 눈을 부릅뜨고 보시며[瞪視] 답하지 않으셨다. 경연이 파하자 유공이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박 아무개[朴某]의 말이 진실로 옳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제후(諸侯)에게 간쟁하는 신하[爭臣]⁷⁵가 있으면 그 나라를 잃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중흥에 부족하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양쪽 다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兩難].【들은 것을 기록함[記聞].】

주석:
71. 훈련도감(訓鍊都監):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유성룡의 건의로 설치된 중앙 군영(軍營).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 체제를 갖추고 조총 등 신무기 훈련을 담당했다.
72. 영의정 유공 성룡(柳公成龍):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전쟁을 총괄 지휘하고 군제 개편과 군량 확보에 힘썼다.
73. 아무개[某]: 특정 인물을 지칭하면서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을 때 쓰는 표현. 여기서는 유성룡을 가리킨다.
74. 수보(首輔): 으뜸 재상.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75. 쟁신(爭臣): 임금이나 주군에게 잘못을 간(諫)하는 신하.


원문:
崔應久嘗言: “我平生見大將軍。” 余問誰也, 曰: “朴學起也。” 曰: “學起是書生, 何以稱大將軍?” 曰: “丁丑謁聖, 吾接中, 學起所製最佳。” 傍人皆預賀。 正草纔寫完, 燭刻已過。 大殿別監素與學起相識者, 自殿上直趨下, 請自袖去, 曰: “燭刻雖盡, 我當直投台位前, 庶幾有望。” 學起笑曰: “我與汝輩爲謀, 早已登第, 豈至於抵今空老?” 乃折貼而藏之袖中, 別監大慙而退。 此非大將軍勇力而何?【金尙寯《續玉露》。】

번역문:
최응구(崔應久)⁷⁶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대장군(大將軍)을 보았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박학기(朴學起)이다.” 내가 말하기를, “학기(學起)는 서생(書生)인데 어찌 대장군이라 칭하는가?” 대답하기를, “정축년(丁丑年, 1577) 알성시(謁聖試)⁷⁷ 때, 내가 접중관(接中官)⁷⁸이었는데 학기가 지은 것이 가장 뛰어났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미리 축하하였다. 정식 답안[正草]을 겨우 다 썼을 때 촛불 눈금[燭刻]⁷⁹이 이미 지났다. 대전 별감(大殿別監)⁸⁰으로 평소 학기와 서로 아는 사이인 자가 전상(殿上)에서 바로 달려 내려와 소매에 넣어 가져가겠다고 청하며 말하기를, “촛불 눈금이 비록 다 되었으나, 내가 마땅히 바로 시관석[臺位] 앞에 던져 넣을 것이니, 거의 합격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학기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너희 무리와 공모하였다면 벌써 급제하였을 것이니, 어찌 지금에 이르도록 헛되이 늙었겠는가?” 이에 [답안지를] 접어서 소매 속에 감추니, 별감(別監)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이것이 대장군의 용력(勇力)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김상준(金尙寯)의 《속옥로(續玉露)》⁸¹에서 인용】

주석:
76. 최응구(崔應久):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77. 알성시(謁聖試): 조선 시대에 임금이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에 참배[謁聖]한 후에 특별히 보이던 과거 시험.
78. 접중관(接中官): 과거 시험장에서 수험생들의 답안지를 받아 시관(試官)에게 전달하는 등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리로 추정된다.
79. 촉각(燭刻): 초에 눈금을 새겨 시간을 재던 것. 과거 시험의 시간제한을 의미한다.
80. 대전 별감(大殿別監): 궁궐 내에서 잡다한 일을 맡아보던 관원으로 추정된다.
81. 《속옥로(續玉露)》: 김상준(金尙寯, 1561-1635)이 지은 설화집. 《옥로(玉露)》를 계승하여 조선 시대 인물들의 일화를 모아 기록했다. 박동현의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나급(羅級)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羅級
字子升, 羅州人。 嘉靖壬子生。 宣廟丙子司馬, 乙酉登第, 歷憲府、春坊。 壬寅卒, 年五十一。

번역문:
나급(羅級)
자는 자승(子升), 나주(羅州) 사람이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에 태어났다. 선조(宣祖) 병자년(1576)에 사마시(司馬試)¹에 합격하였고, 을유년(1585)에 문과에 급제(登第)²하여, 사헌부(憲府)³와 춘방(春坊)⁴을 역임하였다. 임인년(1602)에 졸(卒)하니, 나이 51세였다.

주석:

  1. 사마시(司馬試):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아울러 이르는 말. 소과(小科)라고도 하며,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고 대과(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2. 등제(登第): 과거(科擧), 특히 문과(文科)에 급제하는 것.
  3. 헌부(憲府): 사헌부(司憲府).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등의 일을 맡았던 관청. 나급은 감찰(監察),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역임했다.
  4.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 나급은 사서(司書) 등을 역임했다.

원문:
公天賦樂易, 純善無惡, 未嘗飾貌軟語, 見人過, 專務覆蓋之。 居平接物, 唯直柔耳, 未見有大異於人者, 而及至邪正、是非、死生、夷險之際, 其剛不可及, 其義不可奪。 其在臺憲, 彈擧無所避。 王子縱奴歐人, 公嚴刑幾斃, 諸僚縮頸莫敢言。 戊午年間, 逆魁汝立新負朝望, 人爭趨競, 勸與同訪, 公曰: “曾見其眸子, 必大奸慝。” 終不一見。

번역문:
공(公)은 천부적으로 화락하고 평탄하며[樂易] 순수하고 선하여 악함이 없었으며, 일찍이 얼굴을 꾸미거나 말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남의 허물을 보면 오로지 덮어주기에 힘썼다. 평소 사람을 대할 때[接物] 오직 정직하고 부드러울 뿐이어서 남들과 크게 다른 점을 볼 수 없었으나, 사(邪)와 정(正), 시(是)와 비(非), 죽음과 삶[死生], 평탄함과 험난함[夷險]의 때에 이르면 그 강직함은 남들이 따를 수 없었고 그 의리(義理)는 빼앗을 수 없었다. 대헌(臺憲)⁵에 있을 때 탄핵하고 규탄함[彈擧]에 피하는 바가 없었다. 왕자(王子)⁶가 종을 풀어놓아 사람을 때리자[歐人] 공이 엄한 형벌을 가하여 거의 죽게 하였는데, 여러 동료들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598)⁷ 무렵에 역적의 우두머리 여립(汝立)⁸이 새로 조정의 명망을 얻어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몰려들면서[趨競] 함께 방문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일찍이 그의 눈동자[眸子]⁹를 보니 반드시 크게 간사하고 사특한[奸慝] 자이다.” 하고, 끝내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다.

주석:
5. 대헌(臺憲): 사헌부(司憲府)를 가리킨다.
6. 왕자(王子): 구체적으로 어느 왕자를 지칭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선조에게는 여러 왕자들이 있었다. 이 일화는 나급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불의를 보면 엄격하게 대처했음을 보여준다.
7. 무오년(戊午年): 1598년. 그러나 정여립 사건은 1589년(기축년)에 일어났다. 원문의 '戊午年間'은 '己丑年間(기축년 무렵)'의 오기이거나, 정여립이 역모로 고발되기 이전, 즉 조정의 명망을 얻고 있던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여립은 1583년 이조 전랑으로 추천되었고, 1584년 수찬이 되는 등 한때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8. 역괴 여립(逆魁汝立): 정여립(鄭汝立, ?-1589)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처음에는 서인이었으나 후에 동인으로 돌아섰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선조를 비방하며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촉발시켰다. 그는 옥사가 시작되자 자결하였다.
9. 모자(眸子): 눈동자. 맹자(孟子)는 사람의 선악(善惡)은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孟子》 〈離婁上〉). 나급이 정여립의 눈동자를 보고 그의 간악함을 간파했다는 것은 나급의 뛰어난 인물 감식안을 보여준다.


원문:
倭亂之初作, 宰韓山, 領軍禦賊。 官軍潰於龍仁, 公獨守一壁, 堅坐不動, 曰: “是我死所, 棄將何歸? 兵使以主將先遁, 我當手斬之。” 聞者股栗。 及賊追已迫, 從者擁馬僅免。

번역문:
왜란(倭亂)¹⁰이 처음 일어났을 때 한산 군수[宰韓山]¹¹로서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관군(官軍)이 용인(龍仁)¹²에서 무너지자, 공은 홀로 한 보루[一壁]¹³를 지키며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말하였다.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버리고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병사(兵使)¹⁴가 주장(主將)으로서 먼저 달아났으니, 내가 마땅히 손수 그의 목을 벨 것이다.” 듣는 자들이 두려워 다리를 떨었다[股栗]. 적의 추격이 이미 닥쳐오자 따르는 자들이 말을 에워싸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주석:
10. 왜란(倭亂): 임진왜란(1592-1598)을 가리킨다.
11. 재한산(宰韓山): 한산(韓山, 현재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군수(郡守)로 재직함을 의미한다. 나급은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당시 한산 군수였다.
12. 용인(龍仁): 경기도 용인. 1592년 6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조선군이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배하였다(용인 전투).
13. 일벽(一壁): 하나의 보루 또는 진영.
14. 병사(兵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약칭. 각 도의 군사 지휘관이다. 당시 충청도 병사는 신익(申翌)이었다. 용인 전투 패배 후 주장들이 먼저 달아난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원문:
在公州, 歲大侵, 人相食, 州倉陳腐巨萬, 而閉糴不賑, 飢民相聚爲盜。 通判請捕, 公曰: “盜亦我赤子, 濟活則自當奠居, 立視其死而不知發, 反勦殺耶?” 通判有所希冀, 捕告陞職, 而公終不與。 乃悉集窮民及士之流寓者, 開倉大賑, 左右撫循, 朝夕視餔, 所全活幾萬人。 方伯責以擅用國穀, 公曰: “穀可得, 民命不可續。 且齎盜糧, 非計也。” 乃辭疾去官。

번역문:
공주(公州)¹⁵에 있을 때, 그해 크게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는데, 고을 창고[州倉]에는 묵고 썩은 곡식[陳腐]이 막대하였으나 곡식 방출[糴]¹⁶을 막고 진휼(賑恤)하지 않아,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모여 도적이 되었다. 통판(通判)¹⁷이 체포하기를 청하자, 공이 말하였다. “도적 또한 나의 적자(赤子)¹⁸이니, 구제하여 살려주면 스스로 마땅히 안정되어 살 것[奠居]인데, 그들이 죽는 것을 옆에서 보고만 있으면서 [창고를] 열 줄은 모르고 도리어 토벌하여 죽이겠는가[勦殺]?” 통판은 바라는 바가 있어 (도적을) 체포하여 보고함으로써 승진하려 하였으나, 공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곤궁한 백성과 유랑하는 선비[士之流寓者]들을 모두 모아 창고를 열어 크게 진휼하고, 좌우에서 어루만지고 돌보며[撫循] 아침저녁으로 먹는 것을 보살피니, 온전히 살아난 자가 거의 만 명이나 되었다. 방백(方伯)¹⁹이 함부로 나라 곡식을 사용한 것을 책망하자, 공이 말하였다. “곡식은 다시 얻을 수 있으나 백성의 목숨은 이을 수 없습니다. 또한 도적에게 양식을 대주는 꼴[齎盜糧]²⁰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이에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주석:
15. 공주(公州): 나급은 1593년(계사년)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부임했다.
16. 적(糴): 곡식을 사들임. 여기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하는 '발적(發糴)'의 뜻으로 쓰였다.
17. 통판(通判): 조선 시대 각 부(府), 목(牧), 군(郡)에 배치되었던 종5품 또는 종6품의 지방관.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18. 적자(赤子): 갓난아이. 임금이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고 사랑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19.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의 별칭. 당시 충청도 관찰사를 가리킨다.
20. 자도량(齎盜糧): 도둑에게 양식을 가져다준다는 뜻. 백성을 구휼하지 않고 도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결국 도둑을 돕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순자(荀子)》 〈대략(大略)〉편에 나온다.


원문:
丙申, 陳遊擊媾賊至釜營, 伴臣夜逃, 賊大怒, 囚遊擊, 將再犯, 京師大震。 朝廷擇伴臣, 六易乃歸公。 公在外聞命, 過家不入, 直詣闕拜命。 公時有老母, 無兄弟, 群議不忍遣。 公曰: “出身事主危難, 敢以親辭乎?” 卽日辭朝, 赴賊陣。 白沙李相以接伴使駐境, 謂公曰: “聞賊已殺遊擊, 可觀勢進退。” 公曰: “我承命入賊營。 死生天也, 何可坐此觀望?” 李相義之, 賦一詩。 公散遣從行家僮曰: “吾死職耳, 汝輩俱死無益。” 賊聞公至, 張兵六十里, 白刃森列, 脅公入囚門。 公奮罵曰: “我是使价, 不當入是門。” 賊觀公動止安閑, 略無怖色, 知不可屈, 開正門以入, 卽放陳遊擊, 遇公盡禮, 事遂定。【竝李月沙廷龜撰神道碑。】

번역문:
병신년(1596)에 진 유격(陳遊擊)²¹이 적과 화의(媾賊)²²하다가 부산(釜山)의 군영(軍營)에 이르렀는데, 반신(伴臣)²³이 밤에 도망치자 적이 크게 노하여 유격(遊擊)을 가두고 장차 다시 쳐들어오려 하니 서울[京師]이 크게 진동하였다. 조정에서 반신을 뽑는데 여섯 번이나 바뀐 뒤에야 공에게 돌아왔다. 공이 외방에 있다가 명을 듣고 집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대궐로 나아가 명을 받들었다. 공에게는 당시에 노모(老母)가 계시고 형제가 없었으므로, 여러 의논들이 차마 보내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출신(出身)²⁴하여 임금을 섬기는데 위난(危難)에 처하여 어찌 감히 어버이를 핑계로 사양하겠는가?” 즉시 조정에 하직하고 적진(賊陣)으로 갔다.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²⁵이 접반사(接伴使)로서 국경에 머물고 있다가 공에게 일러 말하였다. “듣건대 적이 이미 유격(遊擊)을 죽였다고 하니, 형세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 공이 말하였다. “나는 명을 받들어 적의 군영으로 들어간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여기에 앉아 관망(觀望)할 수 있겠는가?” 이 상국이 그의 의로움을 기려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공이 따라온 집안의 종[家僮]들을 흩어 보내며 말하였다. “나는 직책 때문에 죽을 뿐이니, 너희 무리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하다.” 적이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60리에 걸쳐 배치하고 번쩍이는 칼날[白刃]을 삼엄하게 늘어세우고는, 공을 위협하여 죄수를 가두는 문[囚門]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공이 분연히 꾸짖으며 말하였다. “나는 사신 행차의 관리[使价]이니, 마땅히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적이 공의 행동거지[動止]가 안 nhàn 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것을 보고는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정문(正門)을 열어 들어오게 하고는 즉시 진 유격(陳遊擊)을 풀어주고 공을 예(禮)로써 대우하니, 일이 마침내 안정되었다.【이상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신도비(神道碑)²⁶에서 인용】

주석:
21. 진 유격(陳遊擊):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을 가리킨다. 유격(遊擊)은 명나라 군대의 관직명이다.
22. 구적(媾賊): 적과 화친(和親)하거나 강화(講和)를 맺음. 당시 명나라는 일본과 강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23. 반신(伴臣): 외국 사신을 수행하며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신하. 여기서는 명나라 장수 진인을 수행하던 조선 관리를 가리킨다.
24. 출신(出身):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 벼슬길에 나아감.
25. 백사 이상국(白沙 李相國):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 상국(相國)은 재상(宰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당시 이항복은 명나라 군대를 접대하는 접반사(接伴使)로 나가 있었다.
26.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고관(高官)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 월사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이다.


원문:
公內行純備, 學諭公病谻, 截指進血, 獲延數日。 事母夫人, 終身無違色, 得甘毳必袖歸, 常爲童子戲, 以歡其心。 兄績狂易, 學諭公以宗祀之重, 欲先婚公, 公執不從。 兄歿, 始娶焉。 娣妹六人貧窶, 衣食婚姻, 亡不於公室乎取。 天性恬於勢利, 旣第, 視其志猶未第時; 旣顯, 視其色猶未顯時; 旣更州郡, 視其家猶未更州郡時。 人以此多之。【金淸陰尙憲撰墓誌。】

번역문:
공(公)은 집안에서의 행실[內行]이 순수하고 갖추어져, 학유(學諭)²⁷공께서 각기병[谻]²⁸을 앓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截指進血]²⁹ 며칠을 더 연명하게 하였다. 어머니[母夫人]를 섬김에 평생토록 거스르는 기색이 없었고, 달고 부드러운 음식[甘毳]³⁰을 얻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 돌아와 항상 어린아이 장난[童子戲]³¹을 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형님 적(績)이 미쳐서 온전치 못하였는데[狂易], 학유공께서 종사(宗祀)³²의 중요함 때문에 공을 먼저 혼인시키려 하였으나, 공은 고집하며 따르지 않았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장가들었다. 여동생[娣妹] 여섯 사람이 가난하고 궁핍하였는데, 의식(衣食)과 혼인(婚姻)을 공의 집[公室]에서 가져가지 않음이 없었다. 천성이 세력과 이익[勢利]에 담담하여, 이미 급제하였으나 그 뜻을 보면 아직 급제하지 않았을 때와 같았고, 이미 현달하였으나 그 안색을 보면 아직 현달하지 않았을 때와 같았으며, 이미 주군(州郡)을 역임하였으나 그 집안 살림을 보면 아직 주군을 역임하지 않았을 때와 같았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좋게 여겼다[多之].【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지(墓誌)³³에서 인용】

주석:
27. 학유공(學諭公): 나급의 부친 나정언(羅廷彦)을 가리킨다. 학유(學諭)는 향교(鄕校)의 교관(敎官) 벼슬(종9품)이다.
28. 각(谻): 각기병(脚氣病). 다리가 붓고 저리며 마비되는 병이다.
29. 절지진혈(截指進血):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모의 약에 타서 드리거나 입에 넣어 드리는 행위. 조선 시대에 효행(孝行)의 하나로 여겨졌다.
30. 감취(甘毳): 달고 부드러운 음식. 맛있는 음식을 의미한다.
31. 동자희(童子戲):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리는 것. 노래자(老萊子)가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아이처럼 놀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32. 종사(宗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일. 대(代)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33.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 생년월일, 행적, 자손 등을 돌이나 도판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 기록.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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