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金誠一)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金誠一
字士純, 號鶴峯, 義城人。 嘉靖戊戌生。 甲子司馬, 宣祖戊辰登第。 選入史局, 賜暇湖堂, 歷三司、吏郞、舍人、大成、副學。 庚寅, 以通信副使往日本。 壬辰, 特除慶尙兵使, 旋授招諭使, 仍拜監司。 癸巳卒, 年五十六。
번역문:
김성일(金誠一)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峯)이며, 의성(義城) 사람이다.¹ 명(明)나라 가정(嘉靖) 무술년(1558, 명종 13)에 태어났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사마시(司馬試)²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무진년(1588, 선조 2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³ 사국(史局)⁴에 선발되어 들어갔고, 호당(湖堂)⁵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삼사(三司)⁶ㆍ이조 정랑(吏曹正郞)⁷ㆍ사인(舍人)⁸ㆍ대사성(大成)⁹ㆍ부제학(副提學)¹⁰ 등을 역임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통신부사(通信副使)¹¹로서 일본에 갔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특별히 경상 병마절도사(慶尙兵馬節度使)¹²에 제수되었고, 곧 초유사(招諭使)¹³를 제수받았으며, 이어서 감사(監司)¹⁴에 임명되었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졸(卒)하니, 나이 56세였다.
주석:
- 의성인(義城人): 본관(本貫)이 의성(義城)임을 나타낸다. 의성 김씨(義城 金氏).
- 사마(司馬): 사마시(司馬試)의 약칭. 조선 시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진사시는 문장력을 주로 평가했다.
- 등제(登第): 과거(科擧), 특히 문과(文科)에 급제함을 의미한다.
-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관청. 춘추관(春秋館)을 가리킨다.
-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조선 시대 문흥(文興)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기관. 여기에 선발되는 것은 큰 영예였다.
- 삼사(三司): 조선 시대 언론 기능을 담당했던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한다. 김성일은 이 세 기관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 이낭(吏郞): 이조 정랑(吏曹正郞). 정5품 관직으로, 문관의 인사(人事)에 관여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 사인(舍人): 여러 관청에 소속된 관직명.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 대성(大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정3품 당상관으로 국립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책임자이다.
- 부학(副學):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으로, 학문 연구와 경연(經筵) 등을 담당하는 요직이다.
- 통신부사(通信副使): 조선 시대 일본에 파견된 외교 사절인 통신사(通信使)의 부사(副使). 정사(正使) 다음가는 직책이다. 이때의 통신사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 경상병사(慶尙兵使):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종2품의 무관직으로 해당 도의 군사 책임자이다. 특제(特除)는 특별히 임명함을 의미한다.
- 초유사(招諭使): 난리가 났을 때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나 물자를 모집하기 위해 파견되던 임시 관직.
- 감사(監司): 관찰사(觀察使). 각 도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 종2품. 김성일은 경상도 관찰사를 맡았다.
원문:
兒時與群兒共游層巖上, 一兒失足墜地, 他兒驚散, 公卽奔告, 使及救活。 聞者異之, 比之擊甕事。【鄭寒岡逑撰行狀。】
번역문: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함께 층암(層巖) 위에서 노는데, 한 아이가 발을 헛디뎌 땅에 떨어지자 다른 아이들은 놀라 흩어졌으나, 공(公)은 즉시 달려가 알려서 그 아이를 구하여 살리게 하였다. 듣는 자들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항아리를 깨뜨린 일¹⁵에 비견하였다.【정한강(鄭寒岡) 구(逑)¹⁶가 지은 행장(行狀)¹⁷에서 인용】
주석:
15. 격옹사(擊甕事): 항아리를 깨뜨린 일. 중국 송(宋)나라의 명재상 사마광(司馬光)의 어린 시절 일화이다. 친구가 물이 가득 찬 큰 항아리에 빠졌을 때, 다른 아이들은 당황하여 울거나 어른을 부르러 흩어졌지만, 사마광은 침착하게 돌로 항아리를 깨뜨려 물을 빼내 친구를 구했다. 이 고사는 어린 나이에도 침착함과 뛰어난 판단력, 결단력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김성일의 어린 시절 일화를 이에 비견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비범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16. 정한강(鄭寒岡) 구(逑): 정구(鄭逑, 1543~1620).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을 모두 계승하였으며, 영남학파의 중요한 인물이다.
17.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생애 동안의 행적, 즉 성품, 학문, 관직 생활, 업적 등을 기록한 글. 주로 가까운 사람이나 제자가 짓는다.
원문:
弱冠, 與弟復一讀尙書, 忽喟然曰: “學而志於穀, 恥也。 退溪李先生, 今之儒宗, 盍往求敎乎?” 遂請于考判書公【諱璡。】, 判書公喜而許之。 卽徒步往謁, 請問人心、道心之說、璿璣玉衡之制。 退與弟反復硏究, 手自作圖, 講論不輟。 先生嘉其誠篤, 期待甚不淺。【鄭愚伏經世撰神道碑。】
번역문:
약관(弱冠)¹⁸에 아우 복일(復一)¹⁹과 함께 《상서(尙書)》²⁰를 읽다가, 홀연히 탄식하며 말하였다. “배우면서 녹봉(祿俸)에 뜻을 두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²¹은 지금의 유종(儒宗)²²이시니, 어찌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부친 판서공(判書公)【휘(諱)²³는 진(璡)이다】²⁴께 청하니, 판서공께서 기뻐하며 허락하셨다. 즉시 걸어서 찾아가 뵙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설²⁵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제도²⁶에 대해 질문하였다. 물러나와 아우와 함께 반복하여 연구하고 손수 그림을 만들며 강론(講論)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생께서 그 성실하고 독실함을 가상히 여기시어 기대함이 매우 적지 않으셨다.【정우복(鄭愚伏) 경세(經世)²⁷가 지은 신도비(神道碑)²⁸에서 인용】
주석:
18.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를 가리키는 말.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二十曰弱, 冠”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
19. 제복일(弟復一): 아우 김복일(金復一, 1541-1590). 자는 사원(士元), 호는 괘봉(掛峯). 형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0. 《상서(尙書)》: 유교의 오경(五經) 중 하나. 중국 고대 요(堯), 순(舜) 임금부터 주(周)나라 때까지의 정치 관련 기록과 문서를 모은 책. 《서경(書經)》이라고도 한다.
21.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이다.
22. 유종(儒宗): 유학(儒學)의 대가, 으뜸가는 학자.
23. 휘(諱): 돌아가신 분의 생전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 또는 그 이름 자체를 가리킨다.
24. 고판서공(考判書公)【휘(諱)는 진(璡)이다】: 돌아가신 부친 판서공. 이름은 김진(金璡, 1500-1580)이다. 호는 청계(靑溪). 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25. 인심(人心)ㆍ도심(道心)지설(之說): 인심과 도심에 대한 학설. 성리학의 중요한 개념이다. 인심은 형기(形氣)에서 나와 사욕(私慾)으로 흐르기 쉬운 마음이고, 도심은 성명(性命)의 바름에서 나와 도의(道義)를 따르는 마음이다. 인심을 잘 다스리고 도심을 보존하는 것이 수양(修養)의 핵심 과제이다.
26. 선기옥형(璿璣玉衡)지제(之制): 선기(璿璣)와 옥형(玉衡)은 고대 중국의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渾天儀)의 부품 이름이다. 여기서는 우주의 운행 원리나 성리학적 이법(理法)의 체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 듯하다.
27. 정우복(鄭愚伏) 경세(經世):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김성일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28.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
원문:
退溪先生嘗與人書曰: “金士純來寓陶山, 冒極熱踰山來往, 質《書傳》疑義。 此人敏而嗜學, 與之共業, 甚覺有益。” 又寄書其孫安道曰: “近看金某志趣甚好, 能專意此事。 立心之誠切如此, 何求不得? 何學無成?” 又嘗歷敍聖賢相傳之心法, 作爲屛銘, 手自淨寫以與之。
번역문:
퇴계 선생께서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말씀하셨다. “김사순(金士純)이 도산(陶山)에 와서 머무는데, 극심한 더위를 무릅쓰고 산을 넘어 왕래하며 《서전(書傳)》²⁹의 의심스러운 뜻을 질문하오. 이 사람은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그와 함께 학업을 하니 매우 유익함을 느끼오.” 또 그 손자 안도(安道)³⁰에게 보낸 편지에 말씀하셨다. “근래 보니 김모(金某)³¹의 지취(志趣)가 매우 좋아 능히 이 일³²에 뜻을 오로지 하오. 마음을 세운 정성이 간절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구하여 얻지 못하며, 어찌 학문을 이루지 못하겠소?” 또 일찍이 성현(聖賢)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³³을 차례로 서술하여 병풍의 명(屛銘)³⁴으로 만들어, 손수 깨끗이 써서 그에게 주셨다.
주석:
29. 《서전(書傳)》: 《상서(尙書)》의 주석서. 보통 송나라 채침(蔡沈)이 주희(朱熹)의 설을 바탕으로 편찬한 《서집전(書集傳)》을 가리킨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상서》를 해석한 책으로, 조선 시대에 널리 읽혔다.
30. 손안도(孫安道): 이황의 손자 이안도(李安道).
31. 김모(金某): 김성일을 가리킨다.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성씨에 ‘모(某)’를 붙여 지칭하는 방식이다.
32. 차사(此事): 이 일. 성리학 공부, 즉 도학(道學)을 가리킨다.
33. 심법(心法): 마음을 닦는 방법. 성현들이 깨달아 전수해 온 학문의 핵심 요체를 의미한다.
34. 병명(屛銘): 병풍에 써 붙이는 명(銘). 명은 공덕을 기리거나 경계의 뜻을 담아 기물 등에 새기는 글이다. 이황이 김성일에게 학문의 요체를 담은 글을 써 주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황이 김성일을 매우 아끼고 기대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素性薄於名利, 嘗欲停擧業, 稟於先生。 先生曰: “有父兄在, 何敢輒循己意? 但內外、輕重之分, 不可以不明。 須常記得‘箇中自有超然處, 肯學兒曹一例忙’之句, 爲處心第一義可耳。”
번역문:
본래 성품이 명리(名利)에 담박하여, 일찍이 과거 공부(擧業)를 그만두려 하여 선생께 여쭈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부형(父兄)께서 계신데, 어찌 감히 문득 자기 뜻만 따르려 하는가? 다만 내외(內外)³⁵와 경중(輕重)³⁶의 구분은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모름지기 항상 ‘그 속³⁷에 스스로 초연한 경지가 있으니, 어찌 아이들처럼 한결같이 바쁘게 배우려 하는가(箇中自有超然處, 肯學兒曹一例忙)’³⁸라는 시구를 기억하여, 마음가짐의 첫째가는 뜻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석:
35. 내외(內外): 안과 밖. 여기서는 학문의 본질적인 측면(內)과 부수적인 측면(外, 예: 과거 공부)을 가리킬 수 있다. 또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의미할 수도 있다.
36. 경중(輕重): 가볍고 무거움. 일의 중요도나 우선순위를 의미한다. 과거 공부보다는 학문 자체나 수양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함을 시사한다.
37. 개중(箇中): 그 속. 마음 속, 또는 학문의 세계를 가리킨다.
38. ‘箇中自有超然處, 肯學兒曹一例忙’: 송(宋)나라 성리학자 정이(程頤)의 시 〈추일우성(秋日偶成)〉의 한 구절이다. 마음 속에 본연의 고요하고 초월적인 경지가 있는데, 어찌 세속적인 일(兒曹)에 매달려 바쁘게만 살아가려 하느냐는 뜻이다. 이황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김성일에게 과거 공부에만 매몰되지 말고 학문과 수양의 본질에 집중하되, 현실(과거 준비)도 완전히 외면하지는 말라는 중용적인 자세를 권고한 것이다.
원문:
拜正言。 一日, 上御經筵, 從容問曰: “卿等以予視前代帝王, 可方何主?” 有對曰: “堯、舜之君也。” 公曰: “可以爲堯、舜, 可以爲桀、紂。” 上曰: “堯、舜、桀、紂若是班乎?” 公對曰: “克念作聖, 罔念作狂。 殿下天資高明, 爲堯、舜不難矣。 但有自聖拒諫之病。 拒諫非桀、紂之所以亡乎?” 上動色改坐, 筵中震悚。 柳成龍進曰: “二人之言皆是也。 堯、舜之對, 引君之辭也; 桀、紂之喩, 儆戒之言也, 無非愛君。” 上爲之改容。
번역문:
정언(正言)³⁹에 제수되었다. 하루는 상(上)께서 경연(經筵)⁴⁰에 납시어 조용히 물으셨다. “경(卿)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제왕(帝王)에 비추어 볼 때, 어느 군주에 견줄 만한가?” 어떤 이가 대답하였다. “요(堯)ㆍ순(舜)⁴¹과 같은 군주이십니다.” 공(公)이 아뢰었다. “요ㆍ순이 될 수도 있고, 걸(桀)ㆍ주(紂)⁴²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요ㆍ순과 걸ㆍ주가 이처럼 같은 반열인가?” 공이 대답하였다. “‘스스로 성찰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망령되이 생각하면 광인(狂人)이 된다’⁴³ 하였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천자(天資)가 높고 밝으시니 요ㆍ순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며 간언(諫言)을 거부하는 병통이 있으십니다. 간언을 거부하는 것이 걸ㆍ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상께서 안색이 변하여 자리를 고쳐 앉으시니, 경연 자리가 진동하고 송구스러워하였다. 유성룡(柳成龍)⁴⁴이 나아가 아뢰었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요ㆍ순이라고 대답한 것은 임금을 이끌려는 말씀이고, 걸ㆍ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씀이니, 임금을 사랑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상께서 이에 용안(容顔)을 바로잡으셨다.
주석:
39.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주로 임금에게 간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40.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41. 요(堯)ㆍ순(舜):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聖君). 태평성대의 이상적인 군주로 꼽힌다.
42. 걸(桀)ㆍ주(紂): 각각 중국 고대 하나라와 상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43. 克念作聖, 罔念作狂: 《서경(書經)》 〈다방(多方)〉편에 나오는 구절. 능히 생각하고 노력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 없이 망령되게 행동하면 광인이 된다는 뜻. 자신의 노력과 마음가짐에 따라 성군도 폭군도 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44.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명재상.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 이 일화는 김성일의 강직함과 유성룡의 지혜로운 중재를 보여준다.
원문:
時金戣爲司諫, 將行相會禮。 公曾於筵中心鄙其爲人, 及是詣闕, 獨啓直斥, 戣遂不容於朝。 自是朝著肅然憚敬。 金公應南貽書謂曰: “直節壁立千仞, 三十年來所未有者。 鐵面風彩, 何幸親見?”【幷行狀。】
번역문:
이때 김괴(金戣)⁴⁵가 사간(司諫)⁴⁶이 되어 장차 상견례(相見禮)⁴⁷를 행하려 하였다. 공(公)이 일찍이 경연에서 마음속으로 그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궐에 나아가 홀로 아뢰어 곧바로 배척하니, 김괴가 마침내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조정 신료들이 숙연(肅然)히 꺼리면서도 공경하였다. 김공(金公) 응남(應南)⁴⁸이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곧은 절개가 천 길 절벽처럼 우뚝 서니, 30년 이래 없었던 일입니다. 철면(鐵面)⁴⁹과 같은 풍채(風彩)를 어찌 다행히 직접 뵙게 되었습니까?”【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45. 김괴(金戣, 1547-?): 조선 중기의 문신. 이 일화는 김성일이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공적인 판단에 따라 직언을 서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로 인해 정치적 반감을 사기도 했다.
46. 사간(司諫): 사간원의 정3품 관직. 대사간(大司諫)을 가리킨다.
47. 상견례(相見禮): 새로 임명된 관리가 동료나 상관들과 처음으로 만나 인사하는 의례.
48. 김공(金公) 응남(應南): 김응남(金應南, 1546-159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망(重望), 호는 괴봉(槐峯).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다.
49. 철면(鐵面): 쇠처럼 차갑고 엄격한 얼굴.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공정하고 엄격함을 비유한다.
원문:
宋判書麒壽以特進官詣經筵, 其子應漑以玉堂、應泂以注書同入侍。 講畢, 語及乙巳事, 宋公泣陳其冤枉之狀, 悲動左右。 鶴峯亦以正言在筵, 進曰: “麒壽在乙巳間, 附麗權奸, 至錄僞勳, 享其富貴二十餘年。 及今聖明在上, 公論大行, 乃以悲辭苦語, 指陳其冤, 欲竊公論之名, 眞小人情狀也。” 麒壽惶恐而退。 三父子一時引疾, 聞者縮頸, 而公辭氣自如。【《涪溪記聞》。】
번역문:
송 판서(宋判書) 기수(麒壽)⁵⁰가 특진관(特進官)⁵¹으로 경연(經筵)에 나아갔는데, 그의 아들 응개(應漑)는 옥당(玉堂)⁵²으로, 응동(應泂)은 주서(注書)⁵³로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론(講論)이 끝나자, 말이 을사사화(乙巳士禍)⁵⁴에 미치니 송공(宋公)이 울면서 그 원통하고 억울한 상황을 아뢰어 좌우를 슬프게 감동시켰다. 학봉(鶴峯) 역시 정언(正言)으로 경연에 있다가 나아가 아뢰었다. “기수(麒壽)는 을사년(乙巳年) 사이에 권력 있는 간신(權奸)에게 붙어서 위훈(僞勳)⁵⁵에 기록되기까지 하여 그 부귀를 20여 년간 누렸습니다. 이제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고 공론(公論)이 크게 행해지자, 슬픈 말과 괴로운 이야기로 그 원통함을 아뢰어 공론이라는 이름을 훔치려 하니, 참으로 소인(小人)의 실상입니다.” 기수가 황공하여 물러갔다. 세 부자(父子)가 한꺼번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니, 듣는 자들이 목을 움츠렸으나, 공은 말과 기색이 태연자약하였다.【《부계기문(涪溪記聞)》⁵⁶에서 인용】
주석:
50. 송(宋) 판서(判書) 기수(麒壽): 송기수(宋麒壽, 1509-1589). 조선 중기의 문신.
51. 특진관(特進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원로대신에게 주던 명예직으로, 경연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다.
52.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송응개(宋應漑)는 당시 홍문관 관원이었다.
53. 주서(注書):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정7품 관직으로 임금의 명령과 언동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다. 송응동(宋應泂)이 이 직책에 있었다.
54.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년)에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 세력이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 세력을 제거한 사건. 이 과정에서 많은 선비들이 희생되었다. 송기수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나, 이후 그 공적이 거짓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55. 위훈(僞勳): 거짓 공훈. 을사사화 당시 공이 없음에도 공신으로 책록된 것을 비판하는 말이다.
56.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중기의 문신 이륙(李陸, 1438-1498)의 《청파극담(靑坡劇談)》을 잘못 표기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유사한 성격의 야사, 설화집일 가능성이 있다. 부계(涪溪)는 이경석(李景奭)의 호이기도 하나,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청파극담》에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원문:
誠一在近侍, 論劾貴近, 人多畏憚, 稱爲殿上虎。 河原君以王室至親, 淫湎縱恣, 侵害閭里, 誠一捕繫家奴, 重刑之, 宮家怨怒而不敢言。 上於筵中問: “近來廉恥道喪, 何爲而然耶?” 誠一對曰: “有爲大臣而亦受人賄贈者, 廉恥之喪, 無足怪也。” 時相盧守愼在首席, 出而伏之, 曰: “誠一言是也。 臣之族人爲北方邊將, 以臣有老母, 寄以小貂裘, 臣受而遺母矣。” 上曰: “臺諫直言, 大臣引過, 可謂兩得之矣。 臣僚能相責勵如是, 則國事可爲也。” 守愼亦厚謝誠一, 不以爲忤。【《宣廟寶鑑》。】
번역문:
성일(誠一)이 근시(近侍)⁵⁷로 있을 때 귀인(貴人)과 외척(近戚)을 논핵(論劾)하니, 사람들이 많이 두려워하고 꺼려서 전상호(殿上虎)⁵⁸라 칭하였다. 하원군(河原君)⁵⁹이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음주가무에 빠지고 방자하게 행동하며 여항(閭巷)을 침해하자, 성일이 그 집 노비를 잡아 가두고 중형(重刑)을 가하니, 궁가(宮家)⁶⁰에서 원망하고 노여워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상(上)께서 경연 자리에서 물으셨다. “근래 염치(廉恥)의 도(道)가 땅에 떨어졌는데, 어찌하여 그러한가?” 성일이 대답하였다. “대신(大臣)이 되어서도 남의 뇌물(賄賂)과 증여(贈與)를 받는 자가 있으니, 염치가 사라진 것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 재상 노수신(盧守愼)⁶¹이 수석(首席)에 있다가 나와 엎드리며 아뢰었다. “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臣)의 족인(族人)이 북방 변방의 장수가 되어 신에게 노모(老母)가 있다 하여 작은 담비 갖옷[小貂裘]을 보내왔기에, 신이 받아서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대간(臺諫)⁶²은 직언(直言)하고 대신은 잘못을 인정하니, 양쪽 모두를 얻었다고 할 만하다. 신료(臣僚)들이 능히 이처럼 서로 책려(責勵)한다면 국사(國事)를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신 역시 성일에게 후하게 사례하고 언짢게 여기지 않았다.【《선묘보감(宣廟寶鑑)》⁶³에서 인용】
주석:
57. 근시(近侍):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경연관, 승지 등을 가리킨다.
58. 전상호(殿上虎): 대궐 위(殿上)의 호랑이라는 뜻. 임금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직언하고 기개가 당당한 관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59. 하원군(河原君): 정종(靖宗)의 10남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 이정(李鋥, 1512-1571). 선조 대의 종친(宗親)이다.
60. 궁가(宮家): 왕실, 왕족의 집안.
61.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이재(伊齋). 영의정을 지냈다. 이 일화는 김성일의 강직함뿐 아니라 노수신의 대범함과 공적인 자세를 함께 보여준다.
62.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63. 《선묘보감(宣廟寶鑑)》: 선조(宣祖) 시대의 주요 사건과 모범적인 언행을 기록한 책.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원문:
丁亥秋, 得地於靑城之山洛水之上, 巖壑瑰奇, 波潭淨綠。 愛其幽迥, 築室而扁之曰“石門精舍。” 一室明瑩, 圖書滿架, 端居其中, 頹然有終老之意。【行狀。】
번역문:
정해년(1587, 선조 20) 가을에 청성(靑城)⁶⁴의 산 낙수(洛水)⁶⁵ 가에서 땅을 얻었는데, 바위와 골짜기가 뛰어나게 기이하고 물결치는 연못은 맑고 푸르렀다. 그 그윽하고 외진 곳을 사랑하여 집을 짓고 편액(扁額)을 걸기를 “석문정사(石門精舍)”⁶⁶라 하였다. 방 하나는 밝고 깨끗하며 서가에는 책이 가득하여, 그 안에 단정히 거처하며 편안히 늙어갈 뜻이 있었다.【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64. 청성(靑城):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일대의 옛 지명. 또는 김성일의 고향인 의성(義城) 지역을 가리킬 수도 있다. 문맥상 안동 지역이 유력하다.
65. 낙수(洛水): 낙동강(洛東江)을 가리킨다.
66. 석문정사(石門精舍): 김성일이 만년에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정사(精舍). 안동 부포리에 그 터가 남아있다.
원문:
己丑, 日本平秀吉滅源氏, 代爲關白, 來請通好。 朝廷方議報聘, 而賊情叵¹測, 人莫肯行。 公謂家人曰: “趣治裝。 吾必往。” 果以副使行。 明年夏, 船行入大洋, 颶風大作, 舟中人恇悸號哭, 公獨端坐, 色不怖。 至對馬島, 義智等請遊觀國分寺。 使臣往, 則玄蘇迎坐中堂, 義智後至, 轎行歷階。 公謂正使黃允吉曰: “彼敢凌轢我若此, 與之交酬, 則自辱也。” 起還館, 書狀許筬隨之。 義智怪而審之, 譯官以疾作告。 公聞之, 對倭使杖之, 曰: “此島世受國恩, 作我東藩, 使臣之來, 行則後護, 見則前拜, 乃其分也。 汝不能援據典禮, 折其悖慢, 顧乃權辭以求媚耶?” 義智慙悔, 歸罪於擔夫而斬之, 匍匐入謝罪。 自是折節不敢慢。
번역문:
기축년(1589, 선조 22)에 일본의 평수길(平秀吉)⁶⁷이 원씨(源氏)⁶⁸를 멸망시키고 대신 관백(關白)⁶⁹이 되어 와서 통호(通好)⁷⁰를 요청하였다. 조정에서 마침 답방(報聘)을 의논하는데, 적의 실정(賊情)을 헤아리기 어려워⁷¹ 사람들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공(公)이 집안사람에게 일렀다. “빨리 행장을 꾸리라. 내가 반드시 가겠다.” 과연 부사(副使)로 가게 되었다. 이듬해 여름, 배가 큰 바다로 들어서자 허리케인(颶風)⁷²이 크게 일어 배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떨며 부르짖고 울었으나, 공은 홀로 단정히 앉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마도(對馬島)에 이르자, 의지(義智)⁷³ 등이 국분사(國分寺)⁷⁴를 유람하며 구경하기를 청하였다. 사신(使臣)이 가니, 현소(玄蘇)⁷⁵가 중당(中堂)에 맞이하여 앉히고 의지는 뒤늦게 도착하여 가마를 탄 채 섬돌을 지나왔다. 공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⁷⁶에게 말하였다. “저들이 감히 우리를 이처럼 업신여기니, 그들과 교류하고 응수한다면 스스로 욕되는 것입니다.” 일어나 객관(館)으로 돌아오니, 서장(書狀) 허성(許筬)⁷⁷이 따라왔다. 의지가 괴이하게 여겨 알아보니, 역관(譯官)이 병이 났다고 알렸다. 공이 이를 듣고 왜의 사자(倭使)⁷⁸를 불러 매질하며 말하였다. “이 섬(대마도)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어 우리의 동쪽 울타리(東藩)가 되었으니, 사신이 오면 갈 때는 뒤에서 호위하고 뵐 때는 앞에서 절하는 것이 그 분수이다. 너는 능히 전례(典禮)를 근거로 들어 그들의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한 행동을 꺾지 못하고, 도리어 임시방편의 말로 비위를 맞추려 하느냐?” 의지가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죄를 가마꾼(擔夫)에게 돌려 그를 베고는, 엎드려 기어 들어와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몸가짐을 낮추어 감히 오만하게 굴지 못하였다.
주석:
67. 평수길(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일본 센고쿠 시대를 통일한 인물.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성씨인 도요토미(豊臣)를 평(平)으로 표기한 것은 당시 조선에서 그의 출신을 낮게 보아 명문가인 다이라(平)씨를 참칭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 있다.
68. 원씨(源氏): 미나모토(源) 가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명문 무가(武家). 여기서는 히데요시에게 멸망당한 특정 세력을 지칭하기보다는, 히데요시가 기존의 권위 있는 세력을 누르고 실권을 장악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다.
69. 관백(關白): 일본 천황을 보좌하는 최고위 관직. 히데요시는 이 직위에 올라 일본을 통치했다.
70. 통호(通好): 서로 통하여 우호를 맺음. 히데요시는 조선에 명나라 정복 계획을 알리고 협조(길 안내)를 요구하며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71. 적정叵측(賊情叵測): [주-D001] 叵 : 저본(底本)에는 “匹”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학봉집(鶴峯集)・신도비명(神道碑銘)》, 《우복집(愚伏集)・유명조선국……김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金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적의 실정이나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72. 구풍(颶風): 허리케인, 태풍과 같은 매우 강한 바람.
73. 의지(義智):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 대마도주(對馬島主).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74. 국분사(國分寺): 일본 각지에 세워진 관립 사찰. 대마도의 국분사는 외교 사절 접대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75. 현소(玄蘇):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1539-1611). 임제종 승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외교 고문 역할을 하며 조선과의 교섭에 깊이 관여했다.
76. 황윤길(黃允吉, 1536-?): 조선 중기의 문신. 이때 통신사 정사(正使)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의 의견과 달라 논란이 되었다.
77. 서장(書狀) 허성(許筬): 허성(許筬, 1548-161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악록(岳麓). 이때 통신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파견되었다.
78. 왜사(倭使): 왜(倭)의 사자. 여기서는 의지(義智)나 현소(玄蘇) 측의 인물을 가리킬 수 있다. 혹은 의례를 잘못 수행한 담당자를 통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원문:
有西海道倭遣人致禮饋, 書中有朝鮮使臣來朝語, 不省而受其饋, 省而問之, 則已分諸從者矣。 公謂允吉、筬曰: “將若何?” 曰: “禽獸不足與校。” 公曰: “辱國而饋之, 其爲恥不翅嘑蹴, 尙可安而受之耶? 彼其所饋皆出市貿。 今若照數貿還曰‘汝主失辭命。 旣覺則不可仍受, 汝可歸報’云, 則辭嚴義正, 辱可灑也。” 卽如之。【竝神道碑。】
번역문:
서해도(西海道)⁷⁹의 왜(倭)가 사람을 보내 예물을 바치는데, 그 글 가운데 ‘조선 사신이 내조(來朝)했다’는 말이 있었다. (정사 황윤길이) 살피지 않고 그 예물을 받았다가, 살펴보고 나서 물으니 이미 수행원들에게 나누어 준 뒤였다. 공(公)이 윤길(允吉)과 성(筬)에게 말하였다.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그들이) 말하였다. “금수(禽獸)같은 자들이니 더불어 따질 것이 못 됩니다.” 공이 말하였다. “나라를 욕되게 하며 예물을 바쳤는데, 그 치욕이 발길질하여 쫓아내는 것⁸⁰보다 심하니, 어찌 편안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바친 것은 모두 시장에서 사온 것들입니다. 이제 만약 그 수량대로 사서 돌려주며 말하기를 ‘너희 주군(主君)이 사명(辭命)⁸¹을 잘못하였다. 이미 알았으니 그대로 받을 수 없다. 너는 돌아가 보고하라’고 한다면, 말이 엄정하고 의리가 바르니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시 그대로 하였다.【이상 신도비(神道碑)에서 인용】
주석:
79. 서해도(西海道): 규슈(九州) 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규슈 지방의 다이묘(大名) 중 한 명이 보낸 사절일 것이다.
80. 호축(嘑蹴): 소리쳐 꾸짖고 발길질하여 쫓아냄. 모욕적인 대우를 의미한다.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나오는 표현이다.
81. 사명(辭命): 외교적인 언사나 명령. 여기서는 외교 문서의 표현이 부적절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내조(來朝)'는 속국이 종주국에 와서 조회한다는 의미이므로, 조선 사신에게 사용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를 넘어 모욕적인 표현이다.
원문:
公與書狀許筬論見關白一節, 書狀以爲當拜於庭下, 公以爲當拜於楹外, 數日不決。 公於宴席問玄蘇曰: “貴國諸殿見關白時, 拜于庭下乎? 堂上乎?” 玄蘇答曰: “與諸殿同是天皇臣也, 何庭拜之有?” 公又問: “自前我國使臣, 亦行禮于楹外, 今則何以爲之?” 玄蘇答曰: “使臣之問良是。 弊邦亦有接待典故, 關白來則當自定之。” 又問都船主琉球使臣行禮事, 曰: “陞堂。” 公曰: “日本諸臣見關白時, 本無庭拜之禮。 琉球小國之使亦已陞拜, 則其不使吾輩獨拜於庭下, 在所不問矣。” 蓋公慮玄蘇輩業已庭拜於我國, 或欲與之相方, 故先爲微諷, 而逆閉其途。 玄蘇等將公之意, 通于關白, 遂定楹外之拜。
번역문:
공(公)이 서장(書狀) 허성(許筬)과 함께 관백(關白)을 만나는 절차에 대해 논의하는데, 서장은 마땅히 뜰 아래에서 절해야 한다고 여겼고, 공은 마땅히 기둥 밖(堂下)에서 절해야 한다고 여겨, 여러 날 동안 결정하지 못하였다. 공이 연회 자리에서 현소(玄蘇)에게 물었다. “귀국의 제전(諸殿)⁸²들이 관백을 만날 때, 뜰 아래에서 절합니까? 당(堂) 위에서 절합니까?” 현소가 대답하였다. “제전들과 더불어 모두 천황(天皇)의 신하인데, 어찌 뜰에서 절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공이 또 물었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사신 역시 기둥 밖에서 예를 행하였는데, 지금은 어찌 하려 합니까?” 현소가 대답하였다. “사신(使臣)의 질문이 참으로 옳습니다. 폐방(弊邦)⁸³에도 역시 접대 전례(典故)가 있으니, 관백께서 오시면 마땅히 스스로 정하실 것입니다.” 또 도선주(都船主)⁸⁴에게 류큐(琉球)⁸⁵ 사신이 예를 행하는 일에 대해 물으니, “당(堂)에 올라서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일본의 여러 신하들이 관백을 만날 때 본래 뜰에서 절하는 예가 없고, 류큐 소국(小國)의 사신 역시 이미 당에 올라 절하였으니, 우리들만 유독 뜰 아래에서 절하게 하지 않을 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대개 공은 현소 무리가 이미 우리나라(사신)에게 뜰에서 절하였으므로 혹 그들과 서로 맞추려 할까 염려하여, 일부러 먼저 은근히 비판하여 미리 그 길을 막은 것이다. 현소 등이 공의 뜻을 관백에게 통하여, 마침내 기둥 밖에서 절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주석:
82. 제전(諸殿): 일본의 여러 다이묘(大名)나 고위 귀족들을 높여 부르는 말.
83. 폐방(弊邦): 자기 나라를 낮추어 부르는 겸양의 표현.
84. 도선주(都船主): 선박 관리나 무역을 담당하던 책임자를 가리킬 수 있으나, 여기서는 류큐 사절의 접대나 의례에 대해 잘 아는 인물로 보인다.
85. 류큐(琉球): 현재의 오키나와(沖縄). 당시 독립 왕국으로 존재하며 중국, 일본, 조선 등과 교류했다.
원문:
旣傳命, 秀吉使人言曰: “書契隨當修送, 使臣可往待於界濱也。” 公曰: “不受國書, 是事未竣也, 不可徑出。 況界濱遠在百里外, 如有事當相爭者, 又將柰何?” 一行皆以脫身虎口爲幸, 輒駕徑發, 公爭之不能得。
번역문:
이미 (만나보라는) 명령이 전해지자, 수길(秀吉)이 사람을 시켜 말하였다. “국서(書契)는 마땅히 뒤따라 작성하여 보낼 것이니, 사신은 계빈(界濱)⁸⁶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공(公)이 말하였다. “국서를 받지 않으면 이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니, 바로 떠날 수 없다. 하물며 계빈은 백 리 밖에 멀리 있는데, 만약 서로 다투어야 할 일이 생기면 또 장차 어찌하겠는가?” 일행(一行)이 모두 호랑이 아가리(虎口)⁸⁷를 벗어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문득 수레를 준비하여 바로 출발하려 하니, 공이 다투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석:
86. 계빈(界濱): 국경의 해안가.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나, 사신 일행이 일본 본토를 떠나 귀국하기 전에 머물렀던 대마도나 규슈 북부의 항구일 가능성이 있다.
87. 호구(虎口): 호랑이의 아가리. 매우 위험한 곳이나 상황을 비유한다. 당시 사신 일행이 히데요시의 진의를 의심하며 불안감을 느꼈음을 보여준다.
원문:
出留界濱半月, 書契始至, 辭甚悖慢, 至以殿下爲閤下, 以所送禮幣爲方物領納。 又有一超直入大明國、貴國先驅入朝等語。 公見之大駭, 據義却之, 作書與玄蘇曰: “若不改此等語, 使臣有死而已, 義不敢還。” 玄蘇辭屈, 許改“閤下方物領納”六字, 超入大明國、先驅入朝等語, 則諉以入朝大明, 終不許改。 上使、書狀皆信其爲然, 而不欲再請。 公正色折之, 復貽書玄蘇。 玄蘇見公之書, 對譯官亹亹稱道, 卽裁答書, 深以公言爲是。 然其犯大明等語, 終始詭辭以對。 公再爲書, 期於必改而後已。 一行皆以生事爲懼, 百般沮抑, 使不得傳致。 公終不得行其志, 憤歎鬱抑, 乃以其書投于洋中, 因作詩有水底魚龍應識字之句也。【竝行狀。】
번역문:
(계빈으로) 나와 머문 지 반 달 만에 국서(書契)가 비로소 도착했는데, 그 표현이 매우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여, 전하(殿下)를 합하(閤下)⁸⁸라 하고 보낸 예물(禮幣)을 방물(方物)로 영납(領納)⁸⁹한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또 ‘단번에 대명국(大明國)으로 쳐들어가겠다(一超直入大明國)’느니, ‘귀국(貴國)은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하라’⁹⁰는 등의 말이 있었다. 공(公)이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의(義)에 근거하여 이를 물리치고 현소(玄蘇)에게 글을 지어 보냈다. “만약 이와 같은 말들을 고치지 않는다면, 사신은 죽음이 있을 뿐이며, 의리상 감히 돌아갈 수 없다.” 현소가 말에 궁하여 ‘합하(閤下)’, ‘방물(方物)’, ‘영납(領納)’ 여섯 글자를 고치는 것은 허락하였으나, ‘대명국으로 쳐들어가겠다(超入大明國)’,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하라’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대명(大明)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이라고 핑계를 대며 끝내 고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상사(上使)⁹¹와 서장(書狀)이 모두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다시 청하려 하지 않았다. 공이 정색(正色)하고 그들을 꾸짖고, 다시 현소에게 글을 보냈다. 현소가 공의 글을 보고 역관(譯官)을 마주하여 힘써 칭찬하며, 즉시 답서를 재단하여 공의 말이 매우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대명(大明)을 침범한다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거짓말로 대답하였다. 공이 다시 글을 써서 반드시 고친 뒤에야 그만두기로 기약하였다. 일행이 모두 일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온갖 방법으로 저지하고 억눌러 글을 전달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끝내 그 뜻을 행하지 못하고 분개하고 탄식하며 답답해하다가, 마침내 그 글을 바다 가운데 던져버리고, 이로 인해 시(詩)를 지었는데 ‘물 밑의 어룡(魚龍)은 응당 글자를 알리라(水底魚龍應識字)’⁹²는 구절이 있다.【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88. 합하(閤下): 전하(殿下)보다 격이 낮은 칭호. 조선 국왕을 합하라고 칭한 것은 외교적 결례이다.
89. 방물(方物)로 영납(領納): 방물은 속국이나 번국(藩國)이 종주국에 바치는 토산물을 의미하고, 영납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것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이 보낸 외교 선물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조선을 속국 취급하는 오만한 태도이다.
90. 一超直入大明國、貴國先驅入朝: 히데요시의 명나라 침략 계획과 조선에 대한 협조(선봉 역할) 요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91. 상사(上使): 정사(正使) 황윤길을 가리킨다.
92. 水底魚龍應識字: 물속의 물고기와 용은 글자를 알 것이라는 뜻. 자신의 정당한 주장이 담긴 글이 인간(일본 측)에게는 전달되지 못했지만, 물속의 신령한 존재는 알아줄 것이라는 울분과 자부심을 표현한 구절이다.
원문:
辛卯三月, 回自日本, 黃允吉馳啓情形, 以爲必有兵禍。 旣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 “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論奏, 撓動人心, 甚乖事宜。” 上問: “秀吉何狀?” 允吉言: “其目光爍爍, 似是膽知人也。” 誠一曰: “其目如鼠, 不足畏也。” 蓋誠一憤允吉到彼恇㥘失體, 故言言相左如此。【《宣廟寶鑑》。】
번역문:
신묘년(1591, 선조 24) 3월에 일본에서 돌아와, 황윤길(黃允吉)이 달려가 실정을 아뢰며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복명(復命)⁹³하자 상(上)께서 인견(引見)하고 물으시니, 윤길이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일(誠一)이 아뢰었다. “신(臣)은 그러한 실정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윤길의 논주(論奏)는 인심을 동요시켜 사태에 매우 어긋납니다.” 상께서 “수길(秀吉)의 모습이 어떠한가?” 하고 물으시니, 윤길이 말하였다. “그 눈빛이 번쩍번쩍하여 담력 있고 지혜로운 사람인 듯합니다.” 성일이 말하였다.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것이 못 됩니다.” 대개 성일은 윤길이 그곳(일본)에 도착해서부터 두려워하고 위엄을 잃은 것에 분개하였으므로, 말마다 서로 이처럼 어긋났던 것이다.【《선묘보감(宣廟寶鑑)》에서 인용】
주석:
93. 복명(復命): 사신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는 것.
해설:
이 부분은 통신사 파견 이후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이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강력히 경고한 반면, 부사 김성일은 이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듯한 보고를 하였다. 이 기록은 김성일이 황윤길의 태도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부러 반대로 보고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김성일이 실제로 침략 가능성을 낮게 보았는지, 아니면 국내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보고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김성일은 큰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원문:
拜副提學, 連上箚, 極言時事, 凡十條。 其一曰: “正朝廷以正百官。 朝廷之不正有三焉, 賢邪不辨也, 請托公行也, 貪汚成風也。” 其二曰: “興學校以明敎化。 學校之不興有三焉, 師道不立也, 士習不正也, 科擧累人也。” 其三曰: “嚴內治以齊家政。 內治之不嚴有三焉, 女謁盛行也, 王子敎誨不預也, 貨利崇殖也。” 其四曰: “祛民瘼以固國本。 民瘼之不祛有五焉, 聚斂太甚也, 族隣侵督也, 徭役繁興也, 貢賦不均也, 防納害民也。” 其五曰: “修軍政以固邊圉。 軍政之不修有四焉, 軍律解弛也, 防守不均也, 債帥侵漁也, 操鍊無法也。” 其六曰: “審刑獄以伸冤枉。 刑獄之不審有三焉, 法令不一也, 官吏枉法也, 大獄延蔓也。” 其七曰: “任大臣以尊朝廷。 大臣之不重有二焉, 體貌不敬也, 政出多門也。” 其八曰: “納諫諍以開言路。 諫諍之不聞有三焉, 諛佞得志也, 士氣摧折也, 公論不張也。” 其九曰: “明聖學以立治本。 聖學之要有三焉, 明道術也, 體天德也, 崇敬畏也。” 其十曰: “禁奢侈以崇節儉。 奢侈之弊有三焉, 土木成妖也, 衣服僭亂也, 飮食過豐也。” 每一上箚, 言益剴切, 不避觸諱。 同僚或漸退避, 而戚里、權貴深嫉之, 至曰: “金某在朝, 吾輩安歸?” 臺諫皆避嫌求退, 三公至欲待罪。 三箚一出, 四方傳誦, 至有以爲可擬於陸贄《奏議》。 柳相成龍以書賀之曰: “直辭一達, 天心感動。 不有君子, 其何能國?”
번역문:
부제학(副提學)⁹⁴에 제수되어 연달아 차자(箚子)⁹⁵를 올려 시사(時事)를 극언(極言)하였는데, 무릇 10개 조항이었다.
그 첫째는 “조정(朝廷)을 바로잡아 백관(百官)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조정이 바르지 못한 점이 세 가지 있으니, 현명함과 사악함(賢邪)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청탁(請托)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 탐욕과 부패(貪汚)가 풍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둘째는 “학교(學校)를 일으켜 교화(敎化)를 밝혀야 합니다. 학교가 흥하지 못하는 점이 세 가지 있으니, 스승의 도리(師道)가 서지 못한 것, 선비의 풍습(士習)이 바르지 못한 것, 과거(科擧)가 사람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 셋째는 “내치(內治)⁹⁶를 엄하게 하여 가정(家政)을 가지런히 해야 합니다. 내치가 엄하지 못한 점이 세 가지 있으니, 여알(女謁)⁹⁷이 성행하는 것, 왕자(王子)의 교회가 미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 재화와 이익(貨利)을 숭상하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넷째는 “백성의 고통(民瘼)을 제거하여 국본(國本)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백성의 고통이 제거되지 못하는 점이 다섯 가지 있으니, 수탈(聚斂)이 너무 심한 것, 친족과 이웃(族隣)⁹⁸이 침탈하고 독촉하는 것, 요역(徭役)이 번거롭게 일어나는 것, 공물(貢物)과 부세(賦稅)가 균등하지 못한 것, 방납(防納)⁹⁹이 백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 다섯째는 “군정(軍政)을 정비하여 변방(邊圉)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군정이 정비되지 못한 점이 네 가지 있으니, 군율(軍律)이 해이해진 것, 방수(防守)가 균등하지 못한 것, 채수(債帥)¹⁰⁰가 침탈하고 착취하는 것, 조련(操鍊)에 법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 여섯째는 “형옥(刑獄)을 신중히 살펴 원통하고 억울함(冤枉)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형옥이 신중히 살펴지지 않는 점이 세 가지 있으니, 법령(法令)이 통일되지 않은 것, 관리(官吏)가 법을 왜곡하는 것, 대옥(大獄)¹⁰¹이 길게 번지는 것입니다.”
그 일곱째는 “대신(大臣)을 임용하여 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대신이 존중받지 못하는 점이 두 가지 있으니, (임금의) 예우(體貌)가 공경스럽지 못한 것, 정사(政事)가 여러 문(門)¹⁰²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여덟째는 “간쟁(諫諍)을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열어야 합니다. 간쟁이 들리지 않는 점이 세 가지 있으니, 아첨하는 자(諛佞)가 뜻을 얻는 것, 사기(士氣)가 꺾이는 것, 공론(公論)이 펼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아홉째는 “성학(聖學)¹⁰³을 밝혀 다스림의 근본(治本)을 세워야 합니다. 성학의 요점(要)에 세 가지가 있으니, 도술(道術)¹⁰⁴을 밝히는 것, 하늘의 덕(天德)을 체득하는 것, 경외(敬畏)¹⁰⁵를 숭상하는 것입니다.”
그 열째는 “사치(奢侈)를 금하여 절검(節儉)을 숭상해야 합니다. 사치의 폐단에 세 가지가 있으니, 토목 공사(土木)가 요사스러움을 이루는 것, 의복(衣服)이 참람하고 어지러운 것, 음식(飮食)이 지나치게 풍성한 것입니다.”
매번 차자를 올릴 때마다 말이 더욱 간절하고 적절하여(剴切) 임금의 뜻을 거스르거나 꺼리는 바(觸諱)를 피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혹 점차 물러나 피하였으나, 외척(戚里)과 권세가(權貴)들이 그를 깊이 질투하여 심지어 말하기를 “김모(金某)가 조정에 있으면 우리들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간(臺諫)이 모두 혐의를 피하여 물러나기를 구하고, 삼공(三公)¹⁰⁶마저 죄를 기다리고자(待罪) 할 정도였다. 세 차례의 차자가 나오자 사방에서 전하여 외웠으며, 심지어 육지(陸贄)의 《주의(奏議)》¹⁰⁷에 비길 만하다고 여기는 이도 있었다. 유 상공(柳相公) 성룡(成龍)이 편지로 축하하며 말하였다. “곧은 말이 한번 전달되니 하늘의 마음(天心)이 감동하였습니다. 군자(君子)가 있지 않다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주석:
94.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 관직. 학문과 경연을 담당하는 요직이다.
95.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상소(上疏)보다 격식이 간략하며 주로 시급한 현안에 대해 아뢸 때 사용되었다.
96. 내치(內治): 나라 안의 다스림. 여기서는 특히 궁궐 안, 즉 왕실 내부의 기강과 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97. 여알(女謁): 여인을 통한 청탁. 주로 후궁이나 궁녀 등 궁중 여성을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98. 족린(族隣): 친족과 이웃. 당시 지방 사회에서 이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을 침탈하는 폐단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99. 방납(防納): 공물(貢物)을 대신 납부해주고 높은 이익을 취하던 폐단. 조선 중기 이후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100. 채수(債帥): 빚을 진 장수. 또는 부채와 관련된 군 폐단을 지칭할 수 있다. 군 지휘관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남용하거나 군수품을 착복하는 등의 폐단을 가리킬 수 있다.
101. 대옥(大獄): 규모가 큰 옥사(獄事). 주로 역모(逆謀) 사건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가리키며, 종종 무고한 사람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102. 정출다문(政出多門): 정치가 여러 문에서 나옴. 권력이 분산되어 통일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여러 세력이나 인물에 의해 좌우되는 혼란한 상황을 의미한다.
103. 성학(聖學): 성인(聖人)의 학문. 임금이 배우고 익혀야 할 유교적 통치 이념과 덕목을 의미한다.
104. 도술(道術): 도(道)의 방법. 올바른 정치와 교화의 방법을 가리킨다.
105. 경외(敬畏): 공경하고 두려워함. 하늘의 이치와 백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유교에서 군주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106.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킨다.
107. 육지(陸贄) 《주의(奏議)》: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의 명재상 육지(陸贄, 754-805)가 올린 상소문들을 모은 책. 강직하고 논리적인 문장으로 유명하여 후대 문장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김성일의 차자를 이에 비견한 것은 최고의 찬사이다.
원문:
壬辰, 特差慶尙右兵使, 政院防啓, 不允。 公承命卽行, 朝之賢士大夫或有出唁於道者。 公曰: “負國罪大, 獲受重任, 天恩罔極。 此身未死, 唯當盡瘁, 事之成敗, 非所道也。” 渡漢江題詩曰: “杖鉞登南路, 孤臣一死輕。 終南與渭水, 回首有餘情。”【竝行狀。】
번역문:
임진년(1592, 선조 25)에 특별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兵馬節度使)¹⁰⁸에 차견(差遣)되니, 정원(政院)¹⁰⁹에서 막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공(公)이 명을 받들어 즉시 떠나니, 조정의 현명한 사대부들이 혹 길에 나와 조문(弔問)¹¹⁰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말하였다.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큰데¹¹¹ 막중한 임무를 받게 되었으니, 하늘의 은혜가 망극합니다. 이 몸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오직 마땅히 힘을 다할 뿐이며, 일의 성공과 실패는 말할 바가 아닙니다.” 한강(漢江)을 건너며 시를 지어 썼다. “부월(斧鉞)¹¹²을 짚고 남쪽 길 오르니, 외로운 신하 한번 죽음 가벼워라. 종남산(終南山)과 위수(渭水)¹¹³여, 머리 돌리니 남은 정(情)이 있네.”【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08.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兵馬節度使): 이전 기록에서는 경상병사(慶尙兵使)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우병사(右兵使)로 구체화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의 긴급한 상황에서 내려진 인사 조치였다.
109.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 기관이다. 승정원에서 김성일의 임명을 반대한 것은 그가 통신사 시절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보고하여 결과적으로 국방 대비를 소홀하게 했다는 비판 때문이었다.
110. 조문(弔問): 보통 죽은 사람을 조상하고 그 가족을 위문하는 것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위험한 임무를 맡아 떠나는 김성일의 처지를 위로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11. 부국죄대(負國罪大):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크다는 말. 통신사 시절의 잘못된 보고로 인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데 대한 자책의 표현이다.
112. 장월(杖鉞): 부월(斧鉞)을 짚음. 부월은 고대에 장수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도끼이다. 장수로서의 임무를 받아 떠남을 의미한다.
113. 종남(終南)여위수(與渭水): 종남산과 위수. 중국 장안(長安) 근처의 산과 강 이름. 여기서는 서울(한양) 부근의 산천, 즉 임금이 계신 곳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떠나는 신하의 충성심과 미련을 나타낸다.
원문:
公至忠州, 聞賊艘已蔽海, 釜山、東萊連陷, 晨夜兼程, 將直赴本營。 至宜寧, 麾下士相與謀曰: “寇深矣, 直進危, 莫如由晉州出咸安, 以觀賊勢, 而主帥必不聽, 宜托以他辭。” 囑公仲子湙入白曰: “鼎津水漲無船, 趨晉便。” 公使軍校金玉往視之。 玉還卽詭, 公曰: “事急, 不可迂路。” 直馳往。 至則有船, 卽下玉及湙, 將斬之, 諸將皆叩頭爭, 玉亦願先登自贖¹¹⁴, 乃貰之。 未到營三十里, 前兵使曺大坤棄鎭而退, 將遁走, 不意見公至, 錯愕迎交印訖, 欲辭去。 公正色曰: “將軍咫尺提兵, 以金海與賊, 律所不赦。 況可逃乎?” 適其偏裨追至曰: “本營陷矣。” 公知其謾, 數之曰: “汝以元戎麾下守城, 不肯發一矢向賊, 乃來熒惑之耶?” 卽斬以徇, 大坤禠魄。 翌日, 探報賊至。 公曰: “相距幾何?” 曰: “五里矣。” 乃命選銳士。 俄有一騎賊, 銀盔金面, 揮劍而前, 將士莫不股慄。 公踞繩床, 令毋動。 賊疑其整暇, 不敢進。 公命所選數十人突之, 令曰: “有不急上馬者斬!” 呼金玉曰: “爾今日不先登耶?” 數十人一時突進。 赶逐數里, 遇賊, 決戰良久, 軍校李崇仁射倒金面挑戰者, 餘賊皆奔。 斬二賊, 奪其健馬、金鞍、寶劍而還。 自賊下陸以後, 列鎭瓦解, 無或嬰其鋒, 而公乃以單兵挫其銳。 自是軍心稍振, 遂遣崇仁馳啓獻馘。【神道碑。】
번역문:
공(公)이 충주(忠州)에 이르러, 적의 배들이 이미 바다를 뒤덮었고 부산(釜山)과 동래(東萊)가 연달아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곧장 본영(本營)¹¹⁵으로 달려가려 하였다. 의령(宜寧)에 이르자, 휘하(麾下)의 군사들이 서로 모의하여 말하였다. “적군이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나아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진주(晉州)를 거쳐 함안(咸安)으로 나가 적의 형세를 살피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주수(主帥)께서 반드시 듣지 않으실 것이니, 마땅히 다른 말로 핑계를 대야 합니다.” 공의 둘째 아들 익(湙)¹¹⁶에게 부탁하여 들어가 아뢰게 하였다. “정진(鼎津)¹¹⁷의 물이 불어 배가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합니다.” 공이 군교(軍校) 김옥(金玉)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김옥이 돌아와 즉시 속이자, 공이 말하였다. “일이 급하니 길을 돌아갈 수 없다.” 곧바로 말을 달려갔다. 도착하니 배가 있었으므로, 즉시 김옥과 아들 익을 끌어내려 장차 베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다투어 말리고 김옥 또한 앞장서서 공을 세워 스스로 죄를 속(贖)하기를 원하므로, 이에 용서해주었다. 본영에 도착하기 30리 전, 전임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이 진(鎭)을 버리고 물러나 장차 도망치려 하다가, 뜻밖에 공이 도착한 것을 보고는 당황하여 맞이하여 인수(印綬)를 교환하고 마치자 떠나려 하였다. 공이 정색(正色)하며 말하였다. “장군이 지척(咫尺)에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김해(金海)를 적에게 내주었으니, 법률로도 용서할 수 없는 바이다. 하물며 도망갈 수 있겠는가?” 마침 그의 편비(偏裨)¹¹⁸가 뒤쫓아 와서 말하였다. “본영이 함락되었습니다.” 공이 그 속임수를 알고 꾸짖어 말하였다. “너는 원융(元戎)¹¹⁹의 휘하로서 성을 지키면서 화살 하나 적에게 쏘려 하지 않고, 이제 와서 현혹시키려 하느냐?” 즉시 베어 조리돌리고(徇)¹²⁰, 대곤은 넋을 잃었다(禠魄). 이튿날, 정탐 보고가 적이 도착했다고 하였다. 공이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으니, “5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예 군사를 선발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후 적 기병 하나가 은 투구에 금 가면(金面)을 쓰고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오니, 장사(將士)들이 다리가 떨리지 않음이 없었다. 공이 승상(繩床)¹²¹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적이 그 정돈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의심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공이 선발한 수십 명에게 돌격하도록 명하고, 명령을 내렸다. “급히 말에 오르지 않는 자는 베겠다!” 김옥을 불러 말하였다. “네가 오늘 먼저 나아가지 않겠느냐?” 수십 명이 일시에 돌진하였다. 몇 리를 추격하다가 적을 만나 한참 동안 결전하였는데, 군교 이숭인(李崇仁)이 금 가면을 쓰고 도전하던 자를 쏘아 쓰러뜨리자 나머지 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적 두 명을 베고 그 건장한 말과 금 안장, 보검을 빼앗아 돌아왔다. 적이 육지에 내린 이후로 여러 진(鎭)들이 와해되어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마침내 단독 병력으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다. 이로부터 군심(軍心)이 차츰 진작되었고, 마침내 이숭인을 보내 달려가 아뢰고 벤 머리(馘)를 바치게 하였다.【신도비(神道碑)에서 인용】
주석:
114. 贖 : [주-D003] 贖 : 저본(底本)에는 “續”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학봉집・신도비명》, 《우복집・유명조선국……김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죄를 면하기 위해 공을 세우거나 대가를 치르다'는 의미이다.
115. 본영(本營):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본진. 경상우병영은 당시 진주(晉州)에 있었다.
116. 중자 익(仲子湙): 둘째 아들 김익(金湙).
117. 정진(鼎津): 의령군 지정면에 있는 나루. 남강(南江)에 위치한다.
118. 편비(偏裨): 장수를 보좌하는 부장(副將).
119. 원융(元戎): 군대의 총수, 즉 병마절도사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조대곤을 지칭한다.
120. 순(徇): 죄인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돌려 보임으로써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
121. 승상(繩床): 노끈이나 가죽 끈으로 엮어 만든 휴대용 의자. 호상(胡床)이라고도 한다. 지휘관이 야전에서 사용했다.
원문:
時邊報日急, 京城大震。 上敎政院曰: “金誠一嘗大言‘倭必不來’, 使邊情解弛, 致此賊變。 予將鞫之, 其令禁府拿來。” 誠一聞拿命將至, 而道梗未及達。 人言: “上旨未降, 大寇當前, 閫帥豈可容易棄鎭?” 誠一曰: “君命不可久滯。” 卽就道。 是日, 虞候李浹沈軍械於池水, 燒倉廩而遁, 昌原府使張義國亦棄城走。 誠一在道, 金睟¹²²出見, 唁其被拿。 誠一略無辭色, 但曰: “國事至此, 願令公努力討賊, 以報國恩。” 營吏等相謂曰: “被拿不憂, 國事爲憂, 眞忠臣也。”【《山西雜錄》¹²³。】
번역문:
이때 변방의 보고가 날로 급하여 경성(京城)이 크게 진동하였다. 상(上)께서 정원(政院)에 하교하셨다. “김성일이 일찍이 ‘왜적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쳐서 변방의 실정을 해이하게 하여 이 적변(賊變)을 초래하였다. 내가 장차 국문(鞫問)할 것이니, 금부(禁府)¹²⁴에 명하여 잡아오게 하라.” 성일이 체포 명령이 장차 이를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으나, 길이 막혀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말하였다. “상(上)의 명령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고 큰 도적이 눈앞에 닥쳤는데, 곤수(閫帥)¹²⁵가 어찌 쉽게 진(鎭)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성일이 말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오래 지체할 수 없다.” 즉시 길을 떠났다. 이날 우후(虞候)¹²⁶ 이협(李浹)이 군기(軍器)를 못에 빠뜨리고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으며, 창원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성일이 길에 있을 때, 김수(金睟)¹²⁷가 나와 만나 체포되는 것을 위로하였다. 성일은 전혀 변명하는 기색 없이 다만 말하였다.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영공(令公)께서는 힘써 적을 토벌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십시오.” 영리(營吏) 등이 서로 말하였다. “체포되는 것을 근심하지 않고 국사를 근심하니, 참으로 충신이다.”【《산서잡록(山西雜錄)》¹²⁸에서 인용】
주석:
122. 睟 : [주-D004] 睟 : 저본(底本)에는 “晬”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난중잡록(亂中雜錄)》 선조 임진(25년) 및 《북저집(北渚集)・유명조선국……김공시장(有明朝鮮國……金公諡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이하 본 인물 내에서 “金睟”의 “睟”는 동일하다.
123. 錄 : [주-D005] 錄 : 저본(底本)에는 “記”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즉 《산서잡록(山西雜錄)》이 맞다.
124. 금부(禁府): 의금부(義禁府)의 약칭. 임금의 명을 받아 중죄인을 심문하던 사법 기관.
125. 곤수(閫帥): 변방을 지키는 장수. 병마절도사 등을 가리킨다.
126. 우후(虞候):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 아래의 종3품 또는 정4품 무관직.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127. 김수(金睟, 1537-1615):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몽촌(夢村).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다.
128. 《산서잡록(山西雜錄)》: 문헌의 정보가 명확하지 않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이나 일화를 모은 야사(野史) 또는 잡록(雜錄)으로 추정된다.
원문:
始公慮外寇未至而腹心先潰, 頗有鎭定之言。 至是, 上追咎公言, 命拿鞫。 左相柳成龍及臺諫救解之, 皆不納。 未幾, 崇仁至, 上謂宰臣曰: “金誠一狀啓, 有一死報國之語, 誠一果能之乎?” 成龍對曰: “誠一見或未及, 忠則有餘, 其不墜此言, 臣可任之矣。” 王世子亦力救, 乃釋之, 就授招諭使。 公被初命, 行到稷山, 聞宣傳官疾馳來。 從者皆驚惶呼哭, 公神色不變, 指揮後事。 旣至, 乃恩命也。 南趨到咸陽, 則列邑已空, 士民皆鳥獸匿。 公立草檄諭之, 忠義鼓動, 辭氣慷慨, 見者無不泣下。
번역문:
처음에 공(公)은 외적(外寇)이 미처 이르기 전에 복심(腹心)¹²⁹이 먼저 무너질까 염려하여 자못 (민심을) 진정시키는 말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上)께서 공의 말을 추궁하여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좌상(左相) 유성룡(柳成龍) 및 대간(臺諫)이 구원하고 해명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숭인(崇仁)이 도착하자, 상께서 재신(宰臣)에게 말씀하셨다. “김성일의 장계(狀啓)¹³⁰에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말이 있는데, 성일이 과연 능히 그렇게 하겠는가?” 성룡이 대답하였다. “성일의 견해가 혹 미치지 못했을 수는 있으나 충성심은 남음이 있으니, 그가 이 말을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신(臣)이 책임질 수 있습니다.” 왕세자(王世子)¹³¹ 역시 힘써 구원하니, 마침내 그를 석방하고 나아가 초유사(招諭使)를 제수하였다. 공이 처음 명령¹³²을 받고 길을 떠나 직산(稷山)에 도착했을 때, 선전관(宣傳官)¹³³이 급히 말을 달려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따르는 자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부르짖고 울었으나, 공은 신색(神色)이 변하지 않고 뒷일을 지휘하였다. 선전관이 도착하고 보니 바로 은혜로운 명령¹³⁴이었다. 남쪽으로 달려 함양(咸陽)에 도착하니, 여러 고을이 이미 비어 있고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었다. 공이 즉시 격문(檄文)¹³⁵을 지어 그들을 타이르니, 충의(忠義)가 북돋아지고 말과 기운이 강개(慷慨)하여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129. 복심(腹心): 마음 속 깊은 곳. 여기서는 내부의 사기나 민심을 가리킨다.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보고한 이유가 외적의 위협보다 내부 혼란을 더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변호의 논리가 담겨 있다.
130. 장계(狀啓): 지방 관찰사나 병마절도사 등이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 이숭인이 가지고 온 김성일의 전투 보고서를 가리킨다.
131. 왕세자(王世子):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光海君)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발발 후 분조(分朝)를 이끌며 국난 극복에 힘썼다.
132. 초명(初命): 처음 명령. 즉, 금부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가리킨다.
133. 선전관(宣傳官): 왕명을 전달하거나 의례 때 임금을 호위하던 무관직.
134. 은명(恩命): 은혜로운 명령. 석방하고 초유사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가리킨다.
135. 격문(檄文): 어떤 일을 널리 알리거나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쓰는 글. 여기서는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義兵) 봉기를 촉구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원문:
公以晉州、湖南之保障, 而賊所必爭, 令判官金時敏收兵得數千人, 修城壕, 繕器械, 計垜分隊, 爲死守計。 尋聞金沔守牛峴, 爲諸賊所攻, 遂馳赴之。 昌原賊覘知公去晉而晉備弛, 乃與鎭海賊來寇。 公還至丹城, 發咸陽等四邑兵以援之, 勅時敏堅守。 郭再祐亦先已入城, 軍勢頗盛, 賊至南江, 不敢逼。 公繼至, 諸將益用命, 賊敗遁, 遂復泗川、鎭海、固城等邑。 又令再祐擊退昌寧、靈山、玄風三邑賊, 江左右自是得通。【竝神道碑。】
번역문:
공(公)은 진주(晉州)가 호남(湖南)의 보장(保障)¹³⁶이 되고 적이 반드시 다툴 곳이라 여겨, 판관(判官)¹³⁷ 김시민(金時敏)¹³⁸에게 명하여 군사를 수습하여 수천 명을 얻게 하고, 성곽과 해자(城壕)를 수리하고 무기(器械)를 정비하며, 타(垜)¹³⁹를 헤아려 부대를 나누어 죽음으로 지킬 계획을 세웠다. 얼마 후 김면(金沔)¹⁴⁰이 우현(牛峴)¹⁴¹을 지키는데 여러 적들에게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달려갔다. 창원(昌原)의 적이 공이 진주를 떠나 진주의 방비가 해이해진 것을 염탐하여 알고는, 진해(鎭海)의 적과 함께 와서 침략하였다. 공이 돌아와 단성(丹城)에 이르러 함양(咸陽)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징발하여 구원하게 하고, 김시민에게 굳게 지키라고 명하였다. 곽재우(郭再祐)¹⁴² 역시 이미 먼저 성에 들어와 군세(軍勢)가 자못 성대하였으므로, 적이 남강(南江)에 이르렀으나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공이 뒤이어 도착하자 여러 장수들이 더욱 명령을 받들어, 적이 패하여 달아났고 마침내 사천(泗川), 진해(鎭海), 고성(固城) 등의 고을을 회복하였다. 또 곽재우에게 명하여 창녕(昌寧), 영산(靈山), 현풍(玄風) 세 고을의 적을 격퇴하게 하니, 강(江)의 좌우가 이로부터 통할 수 있게 되었다.【이상 신도비(神道碑)에서 인용】
주석:
136. 보장(保障): 중요한 근거지를 지키는 요새나 방어 시설. 진주성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이곳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137. 판관(判官):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 목(牧)이나 부(府) 등에 파견되어 수령을 보좌하던 종5품 문관직. 김시민은 당시 진주판관이었다.
138.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로서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순절하였다.
139. 타(垜):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몸을 숨기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 성가퀴.
140. 김면(金沔, 1541-1593): 조선 중기의 의병장. 호는 송암(松庵). 임진왜란 때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했다.
141. 우현(牛峴): 현재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과 합천군 쌍책면 경계에 있는 고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주요 활동 거점 중 하나였다.
142.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선 중기의 의병장. 호는 망우당(忘憂堂).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붉은 옷을 입고 싸워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렸다.
원문:
金誠一自咸陽到山陰, 縣監金洛館誠一于換鵝亭, 盛陳茶盤而進。 誠一變色, 召洛責之曰: “如此盛饌, 非臣子今日所忍銜。 雖食, 不能下咽。” 洛慙謝而退。 縣人吳長、宜寧李旨、丹城金景謹皆杖劍迎謁, 誠一謂長等曰: “諸生慇懃來訪, 必有異策。 願聞其說。” 景謹曰: “不斬金睟, 無以伸大義而成恢復之功。” 誠一笑曰: “除是閑說話, 不得濟事。”【《山西雜錄》。】
번역문:
김성일이 함양(咸陽)에서 산음(山陰)¹⁴³에 도착하자, 현감(縣監) 김락(金洛)이 김성일을 환아정(換鵝亭)¹⁴⁴에 머물게 하고 성대하게 다과상(茶盤)을 차려 올렸다. 김성일이 안색을 바꾸며 김락을 불러 꾸짖어 말하였다. “이처럼 성대한 음식은 신자(臣子)로서 오늘날 차마 먹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비록 먹는다 해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다.” 김락이 부끄러워 사죄하고 물러갔다. 고을 사람 오장(吳長),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이 모두 칼을 짚고 와서 맞이하며 뵈었다. 김성일이 오장 등에게 말하였다. “제생(諸生)들이 은근히 찾아왔으니 반드시 다른 계책이 있을 것이다. 원컨대 그 말을 듣고 싶다.” 김경근이 말하였다. “김수(金睟)를 베지 않으면 대의(大義)를 펼치고 회복의 공(功)을 이룰 수 없습니다.” 김성일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閑說話)는 제외하고는 일을 구제할 수 없단 말인가?”【《산서잡록(山西雜錄)》에서 인용】
주석:
143. 산음(山陰):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144. 환아정(換鵝亭): 산청군 생초면에 있는 정자. 중국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거위를 좋아하여 자신의 글씨와 거위를 바꾸었다는 고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해설:
이 일화는 전란 중 김성일의 청렴하고 엄격한 자세,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 사치스러운 대접을 받는 것을 꾸짖었고, 의병 활동 등에 대한 논의를 기대했으나 일부 인사들이 이전 관찰사 김수에 대한 비판(도망 등의 이유로)에만 집중하자 이를 '한설화(쓸데없는 이야기)'로 치부하며 실질적인 방책을 요구했다.
원문:
秋, 拜公爲左¹⁴⁵方伯。 聖敎若曰: “卿剛直方嚴, 聞于縉紳; 忠信篤敬, 動於蠻貊。 旣是本道之人, 而又效尤異之績, 今欲剗削醜類, 克復舊疆, 舍卿而誰?” 公旣拜命渡江, 而左右路義旅皆失心解體, 士子爭上請留疏。 行到新寧, 聞旋授右伯, 回渡河濱, 會前使金睟于居昌, 交承印符。 自是守令聳動, 將士增氣, 益用命不懈。 觀其諸陣獻馘之相繼、晉州守城之偉績, 秋毫皆公節制, 而苟非精忠大義有以激人之心膽, 何得至此乎?【《永嘉志》¹⁴⁶。】
번역문:
가을에 공(公)을 좌도 방백(左道方伯)¹⁴⁷으로 임명하였다. 성교(聖敎)¹⁴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경(卿)은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하며 엄격함이 진신(縉紳)¹⁴⁹들에게 알려졌고, 충성스럽고 신의 있으며 독실하고 공경함이 만맥(蠻貊)¹⁵⁰을 감동시켰다. 이미 본도(本道)¹⁵¹의 사람이고 또 더욱 뛰어난 공적을 나타냈으니, 이제 추악한 무리(醜類)¹⁵²를 깎아 없애고 옛 강토(舊疆)를 회복하고자 함에, 경을 버리고 누구를 쓰겠는가?” 공이 이미 명령을 받고 강을 건넜는데, 좌우도(左右路)의 의병(義旅)들이 모두 마음을 잃고 해체되자 선비들이 다투어 머물러 달라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길을 떠나 신녕(新寧)에 도착했을 때, 다시 우도 방백(右道方伯)¹⁵³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강가(河濱)를 건너 거창(居昌)에서 전임 감사(前使) 김수(金睟)를 만나 인수(印符)를 주고받았다. 이로부터 수령(守令)들이 두려워하며 움직이고 장사(將士)들이 기운을 더하여, 더욱 명령을 받들어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러 진(陣)에서 벤 머리를 바치는 것이 서로 이어지고 진주(晉州)를 지켜낸 위대한 공적(偉績)을 보건대, 추호(秋毫)라도 모두 공의 절제(節制)¹⁵⁴였으니, 만약 정성스러운 충성과 큰 의리(精忠大義)로 사람의 마음과 담력(心膽)을 격려함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영가지(永嘉志)》¹⁵⁵에서 인용】
주석:
145. 左 : [주-D008] 左 : 《선조실록(宣祖實錄)》 26년 5월 15일 기록에 근거할 때 “우(右)”가 되어야 한다. 김성일은 경상우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본문의 '좌방백'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146. 志 : 藏書閣本에는 ‘志’로 되어 있으나, 奎章閣本에는 ‘誌’로 되어 있다. 두 글자는 통용되기도 한다.
147. 좌도 방백(左道方伯): 경상좌도 관찰사(慶尙左道觀察使). 방백은 관찰사의 별칭이다. 주석 [주-D008]에서 지적하듯, '우도 방백'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본 번역은 원문을 따르되, 오류 가능성을 인지한다.
148. 성교(聖敎): 임금의 가르침이나 명령.
149. 진신(縉紳): 벼슬아치, 사대부 계층.
150. 만맥(蠻貊): 오랑캐. 남쪽의 만(蠻)과 북쪽의 맥(貊)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151. 본도(本道): 해당 도, 즉 경상도를 의미한다. 김성일은 경상도 출신이었다.
152. 추류(醜類): 추악한 무리. 왜적을 가리킨다.
153. 우도 방백(右道方伯): 경상우도 관찰사. 좌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 관찰사로 변경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록 등의 기록과 교차 확인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우병사, 이후 우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54. 절제(節制): 지휘하고 통솔함.
155. 《영가지(永嘉志)》: 조선 후기에 편찬된 안동(安東) 지방의 읍지(邑誌). 안동의 옛 이름이 영가(永嘉)이다.
원문:
公嘗曰: “吾平生得一語攻吾過者, 乃吾師。” 又曰: “‘毋自欺’三字, 須終身佩服, 爲善去惡, 一有不誠則皆僞也。” 揭“寬弘”二大字, 以寓佩韋之意。 濂、洛諸書, 無所不好, 而尤好李先生所節要朱子書, 潛心玩味, 至忘寢食, 體認服行, 以爲持身標準。【神道碑。】
번역문:
공(公)이 일찍이 말하였다. “내 평생 한마디 말이라도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을 얻는다면, 그가 바로 나의 스승이다.” 또 말하였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毋自欺)’¹⁵⁶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몸에 지니고 실천해야 하니, 선(善)을 행하고 악(惡)을 제거함에 하나라도 정성되지 못함이 있으면 모두 거짓이다.” ‘관홍(寬弘)’¹⁵⁷ 두 큰 글자를 걸어놓고 부드러운 가죽을 차는 뜻¹⁵⁸을 담았다. 염락(濂洛)¹⁵⁹의 여러 서적들을 좋아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특히 이 선생(李先生)¹⁶⁰께서 절요(節要)하신 주자(朱子)의 글¹⁶¹을 좋아하여 마음을 깊이 두고 음미(玩味)하여 잠자고 먹는 것도 잊을 정도였으며, 몸소 체험하여 인식하고 실천하여(體認服行) 몸가짐의 표준(標準)으로 삼았다.【신도비(神道碑)에서 인용】
주석:
156. 무자기(毋自欺): 《대학(大學)》에 나오는 구절로, 성의(誠意)의 핵심이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고 진실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157. 관홍(寬弘): 너그럽고 넓음.
158. 패위지의(佩韋之意): 부드러운 가죽(韋)을 몸에 찬다는 뜻. 성급한 성격을 경계하고 유순함을 기르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서문표(西門豹)가 성급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부드러운 가죽 띠를 찼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김성일이 자신의 강직한 성격을 스스로 경계했음을 보여준다.
159. 염락(濂洛): 중국 송나라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파.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리학 전반을 가리킨다.
160. 이 선생(李先生): 퇴계 이황을 가리킨다.
161. 이 선생(李先生) 소절요(所節要) 주자서(朱子書): 이황이 주희(朱熹)의 방대한 저술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뽑아 편집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가리킨다. 이 책은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원문:
居喪致其哀, 奉祭盡其誠。 嘗曰: “喪禮, 人道之大節, 人子必誠必信之地。 我東自圃隱、冶隱兩先生廬墓終喪, 人皆觀感, 文敬、文獻諸先生亦皆行之。 雖非古禮, 而孝子不忍遽離體魄之所藏, 實出於至情。 魂返室堂, 雖是《禮經》之正, 而中人以下鮮能久而不惰, 甚至內外混處, 經營家事, 如是而猶曰‘墓廬非禮, 返魂合經’, 喪紀之紊, 世道之非, 何足怪哉?” 祭必沐浴齋戒, 省視牲羞, 務令精潔, 語不及凶穢, 灑掃廳事, 設位陳器, 儼若祖先之來臨也。 或遊宦遠方, 則亦必設位而行之。
번역문:
상(喪)을 당해서는 그 슬픔을 다하고, 제사(祭祀)를 받들 때는 그 정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말하였다. “상례(喪禮)는 인도(人道)의 큰 예절이요, 인자(人子)가 반드시 정성스럽고 반드시 신의를 다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포은(圃隱)¹⁶², 야은(冶隱)¹⁶³ 두 선생께서 여묘(廬墓)¹⁶⁴하며 상(喪)을 마친 이래로 사람들이 모두 보고 느껴, 문경공(文敬公)¹⁶⁵, 문헌공(文獻公)¹⁶⁶ 여러 선생들께서도 또한 이를 행하셨다. 비록 고례(古禮)는 아니지만, 효자(孝子)가 차마 체백(體魄)이 묻힌 곳을 갑자기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지극한 정(情)에서 나온 것이다. 혼(魂)이 집안 당실(堂室)로 돌아오는 것¹⁶⁷이 비록 《예경(禮經)》¹⁶⁸의 바른 예법이지만, 중인(中人) 이하의 사람들은 오래도록 게을러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어, 심지어 내외(內外)가 섞여 지내고 집안일을 경영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으면서도 오히려 ‘여묘는 예가 아니고 반혼(返魂)이 경전(經傳)에 합당하다’고 말하니, 상례의 기강(喪紀)이 문란해지고 세도(世道)가 잘못됨을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목욕하고 재계(齋戒)하며 희생(牲)과 제수(羞)를 살피고 보아 힘써 정결하게 하였으며, 말은 흉하고 더러운 것에 미치지 않았다. 청사(廳事)를 청소하고 신위(位)를 설치하며 제기(器)를 진설하기를 엄숙히 하여 마치 조상께서 와 계신 듯이 하였다. 혹 멀리 벼슬살이를 할 때에도 또한 반드시 신위를 설치하고 제사를 행하였다.
주석:
162.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말의 충신, 성리학자.
163.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164. 여묘(廬墓):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묘를 지키는 것. 삼년상(三年喪) 동안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165. 문경(文敬):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시호.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166. 문헌(文獻):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시호.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167. 혼반실당(魂返室堂): 혼(魂)이 집안 당실로 돌아옴. 상례(喪禮) 중 혼을 집으로 모셔와 신주(神主)에 깃들게 하는 의례, 또는 제사를 통해 조상의 혼을 집으로 모시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김성일은 여묘의 진정성을 강조하면서도 형식적인 반혼 의례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168. 《예경(禮經)》: 예(禮)에 관한 경전.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을 통칭한다.
원문:
治家嚴而有法, 每朔望, 令子侄序立參拜, 一如司馬公家儀, 婢僕亦令於正朝敍拜, 一家大小皆知事長上以禮, 門庭斬斬焉。 著奉先儀及吉凶慶弔之式, 本之朱子之說, 參以諸儒之論, 令禮俗相稱, 情文兩得, 授子弟講行之。【神道碑。】
번역문:
집안을 다스림(治家)이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다. 매월 초하루(朔)와 보름(望)에 자질(子侄)들에게 차례로 서서 참배(參拜)하게 하기를 한결같이 사마공(司馬公)의 가의(家儀)¹⁶⁹와 같이 하였고, 비복(婢僕)들도 정월 초하루(正朝)에 차례로 절하게 하여 온 집안의 대소(大小)가 모두 예(禮)로써 장상(長上)을 섬길 줄 알으니, 문정(門庭)¹⁷⁰이 정연하였다. 봉선의(奉先儀)¹⁷¹ 및 길흉경조(吉凶慶弔)의 의식(式)을 저술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설(說)을 근본으로 삼고 여러 유학자(儒)들의 논의를 참고하여, 예(禮)와 풍속(俗)이 서로 부합하고 정(情)과 형식(文)¹⁷²이 모두 갖추어지게 하여, 자제(子弟)들에게 가르쳐 강론하고 행하게 하였다.【신도비(神道碑)에서 인용】
주석:
169. 사마공(司馬公) 가의(家儀):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서의(書儀)》 또는 《가범(家範)》 등을 가리킬 수 있다. 가정 내의 예절과 규범을 제시한 책이다.
170. 문정(門庭): 집안, 가문.
171. 봉선의(奉先儀): 조상을 받드는 의식. 제례(祭禮) 절차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72. 정문양득(情文兩得): 마음(情)과 형식(文)을 모두 얻음. 예(禮)의 본질적인 정신과 외적인 형식을 조화롭게 갖춤을 의미한다.
원문:
常戒子弟曰: “學者當以心學爲先。 若徒以擧業爲務, 則雖得一科, 其本心則先已汨沒於利欲矣, 可不愼哉?” 一日, 以劍贈曰: “汝等知所以贈劍之意乎? 須以斬斷義利之關, 以別其取舍也。” 其誨門人則曰: “學者所患, 唯在立志不誠, 才或不足, 非所患也。 無才而不妨爲君子, 有才不免爲小人之歸, 只在爲學立志之如何耳。” 又曰: “不能致力於涵養克治之功, 而名之曰學者, 何異於名爲養苗而不爲培埴, 名爲去草而不事鋤治者乎?” 見門人有信步而入見者, 責之曰: “古語云‘行第一步, 心在第一步上; 行第二步, 心在第二步上’, 不可不知也。”
번역문:
항상 자제(子弟)들을 경계하여 말하였다. “학자(學者)는 마땅히 심학(心學)¹⁷³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한갓 과거 공부(擧業)만을 힘쓴다면, 비록 한 과목¹⁷⁴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그 본심(本心)은 이미 먼저 이욕(利欲)에 빠져버릴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는 칼을 주며 말하였다. “너희들은 칼을 주는 까닭을 아느냐? 모름지기 의(義)와 이(利)의 관문(關)을 베어 끊어서 그 취하고 버림(取舍)을 분별해야 한다.” 그 문인(門人)들을 가르칠 때는 말하였다. “학자가 근심하는 바는 오직 뜻을 세움(立志)이 성실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요, 재주가 혹 부족한 것은 근심할 바가 아니다. 재주가 없어도 군자(君子)가 되는 데 방해되지 않지만, 재주가 있어도 소인(小人)의 귀결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학문을 하고 뜻을 세움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또 말하였다. “함양(涵養)¹⁷⁵하고 극치(克治)¹⁷⁶하는 공부에 힘쓰지 못하면서 학자라고 이름하는 것은, 싹을 기른다고 이름하면서 북돋아주지(培埴) 않는 것과, 잡초를 제거한다고 이름하면서 김매주지(鋤治)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문인 중에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들어와 뵙는 자가 있자, 꾸짖어 말하였다. “옛말에 ‘첫걸음을 갈 때 마음이 첫걸음 위에 있고, 둘째 걸음을 갈 때 마음이 둘째 걸음 위에 있다’¹⁷⁷고 하였으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주석:
173. 심학(心學): 마음을 닦는 학문. 성리학의 중요한 부분으로, 내면 수양을 통해 본성을 회복하고 도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74. 일과(一科): 과거 시험의 한 과목, 또는 과거 자체를 의미할 수 있다.
175. 함양(涵養): 덕성이나 학문 등을 꾸준히 길러 쌓음. 물이 스며들어 적시듯 천천히 수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176. 극치(克治): 자신의 사욕(私慾)이나 나쁜 감정을 이겨내고 다스림. 극기(克己)와 유사한 의미이다.
177. ‘行第一步, 心在第一步上; 行第二步, 心在第二步上’: 걸음걸이 하나하나에도 마음을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 일상생활 속에서의 마음 집중과 경건함(敬)의 자세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적 수양론을 반영한다. 정확한 출전은 확인되지 않으나, 유사한 가르침이 성리학 문헌에 자주 보인다.
원문:
奉招諭、征討之命, 人心渙¹⁷⁸散, 時事已去, 有同狂瀾旣倒, 隄防無計, 雖專方面閫帥之責者, 亦皆縮首而却步。 公以經幄宿儒, 軍旅之事, 非所嘗聞, 而道內無乾淨之地, 手下無尺寸之兵。 唯將血誠, 鼓發士氣, 片片赤心, 推置人心腹。 言必涕泣而道之, 文必和淚而寫之。 不但懷忠慕義者, 懽趨之不暇, 至於頑暴强戾者, 莫不欣然而來附, 逃將、潰卒亦皆奮迅興起, 咸願爲國效死。
번역문:
초유(招諭)와 정토(征討)의 명을 받들었을 때, 인심은 흩어지고(渙散) 시사(時事)는 이미 기울어져, 마치 미친 듯이 이는 물결(狂瀾)이 이미 뒤집어져 둑으로 막을 계책이 없는 것과 같았다. 비록 방면(方面) 곤수(閫帥)¹⁷⁹의 책임을 맡은 자들조차도 또한 모두 머리를 움츠리고 뒷걸음질 쳤다. 공(公)은 경연(經幄)의 숙유(宿儒)¹⁸⁰로서 군대(軍旅)의 일은 일찍이 들어본 바가 아니었고, 도내(道內)에는 깨끗한 땅이 없었으며, 수하(手下)에는 한 자 한 치의 병사도 없었다. 오직 혈성(血誠)을 가지고 사기(士氣)를 북돋아 일으키고, 조각조각 붉은 마음(片片赤心)을 사람들의 마음속(心腹)에 밀어 넣었다. 말할 때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글은 반드시 눈물에 버무려 썼다. 충성심을 품고 의리(義)를 사모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완고하고 포악하며 사납고 비뚤어진(頑暴强戾) 자들까지도 흔연히 와서 따르지 않음이 없었고, 도망친 장수와 흩어진 병졸들도 또한 모두 떨치고 일어나 모두 나라를 위해 죽기를 원하였다.
주석:
178. 渙 : [주-D007] 渙 : 저본(底本)에는 “換”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학봉집・행장》, 《한강집・유명조선국……김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흩어지다'는 의미의 '환(渙)'이 문맥상 맞다.
179. 방면곤수(方面閫帥): 한 지역(方面)의 군사 책임을 맡은 장수(閫帥). 각 도의 병마절도사나 방어사 등을 가리킨다.
180. 경악숙유(經幄宿儒): 경연(經筵)에 오랫동안 참여한 학식 높은 유학자. 김성일이 문관으로서 학문에는 뛰어났으나 군사 경험은 부족했음을 나타낸다.
원문:
倭寇之入海州也, 見芙蓉堂有公題詠, 盡撤去他懸板, 獨留公詩, 籠以彩錦。 官廨、村閻盡被凶焰, 而芙蓉堂獨無事。【竝行狀。】
번역문:
왜구(倭寇)가 해주(海州)¹⁸¹에 들어왔을 때, 부용당(芙蓉堂)¹⁸²에 공(公)이 지어 읊은 현판(題詠)이 있는 것을 보고, 다른 걸려있는 판자(懸板)는 모두 철거하고 유독 공의 시만 남겨두고 채색 비단(彩錦)으로 덮어두었다. 관아(官廨)와 마을(村閻)이 모두 흉악한 불길(凶焰)에 휩싸였으나, 부용당만 유독 무사하였다.【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81. 해주(海州): 황해도(黃海道)의 중심 도시.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 지역도 왜군의 침입을 받았다.
182. 부용당(芙蓉堂): 해주에 있던 정자 또는 건물 이름.
해설:
이 일화는 김성일의 명성이 적국인 일본에까지 알려져 존경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가 걸린 현판만 남겨두고 보호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인품과 학문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일화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전란 중의 기록이므로 사실 여부에 대한 교차 검증은 필요하다.
원문:
慶尙左巡察使金誠一卒。 誠一奉使日本, 誤奏敵情, 幾陷罪辟。 及蒙宥受命, 憂憤感激, 誓死討賊。 平生不解軍旅, 而至誠諭衆, 調劑官義諸軍, 保全一隅逾年, 皆其統率效也。【《宣廟寶鑑》。】
번역문:
경상좌도 순찰사(慶尙左巡察使)¹⁸³ 김성일이 졸(卒)하였다. 성일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적의 실정(敵情)을 잘못 아뢰어 거의 죄(罪)와 형벌(辟)에 빠질 뻔하였다. 용서를 받고 명을 받자, 근심하고 분개하며 감격하여 죽음으로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하였다. 평생 군대(軍旅)의 일을 알지 못하였으나, 지극한 정성으로 무리를 타이르고 관군(官軍)과 의병(義兵) 여러 군대를 조제(調劑)¹⁸⁴하여 한 지역(一隅)을 1년 넘게 보전하였으니, 모두 그의 통솔(統率)의 효과였다.【《선묘보감(宣廟寶鑑)》에서 인용】
주석:
183. 경상좌도 순찰사(慶尙左道巡察使): 순찰사는 관찰사의 다른 이름이다. 이 기록은 김성일을 좌도 관찰사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전 기록 및 실록 등을 고려할 때 우도 관찰사가 맞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좌도, 우도 관찰사를 겸임했거나 직책이 변경되었을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우도 관찰사로 알려져 있다.
184. 조제(調劑): 약을 조제하듯 잘 조절하고 안배함. 여기서는 서로 다른 성격의 관군과 의병 부대들을 효과적으로 조율하고 지휘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當初黃允吉、金誠一等回自日本, 二人所言, 賊勢不同。 余一日親見誠一, 問之曰: “君言與黃使有異, 萬一倭果來, 則如何?” 誠一曰: “吾亦豈必倭之終不來耶? 但黃言太重, 似若倭踵使臣而來, 人情洶洶, 故如此言之耳。”【《西厓集》。】
번역문:
당초 황윤길(黃允吉), 김성일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이 말한 적의 형세(賊勢)가 같지 않았다. 내(余)¹⁸⁵가 하루는 직접 성일을 만나 물었다. “그대의 말이 황 사신(黃使)과 다른데, 만일 왜적이 과연 온다면 어찌하겠는가?” 성일이 말하였다. “나 또한 어찌 반드시 왜적이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겠는가? 다만 황 사신의 말이 너무 무거워 마치 왜적이 사신을 뒤따라 올 것처럼 여겨져 인심(人情)이 흉흉하였기에, 이처럼 말했을 뿐이다.”【《서애집(西厓集)》¹⁸⁶에서 인용】
주석:
185. 여(余): 나. 이 글의 저자인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가리킨다.
186. 《서애집(西厓集)》: 유성룡의 문집.
해설:
유성룡의 이 기록은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황윤길의 보고가 지나치게 위협적이어서 민심 동요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보고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김성일의 보고에 대한 가장 유력한 해명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원문:
金鶴峯誠一從黃同知允吉等使日本, 强項自持, 少無畏懾。 受書諸議, 皆力爭矯正, 同行縮頸, 敵人敬嘆, 亦可謂畢命君子矣。 至稱以使四方不辱命, 則吾恐有愧也。 夫所謂專對者, 豈指僥倖、節目之事哉? 鶴峯旣還, 上問賊人情形。 允吉等皆以謂賊來有徵, 鶴峯抗言不然, 累千言深攻允吉等, 自以爲備悉賊情。 明年, 賊傾國入寇, 至於廟社不守、民生魚肉, 兵禍之慘自古無有如壬辰者。 其不得要領如此, 謂之專對可乎? 如遇漢高之時, 則難免前使十輩之誅矣。【《涪溪記聞》。】
번역문:
김학봉(金鶴峯) 성일(誠一)이 동지(同知)¹⁸⁷ 황윤길(黃允吉) 등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강직한 태도(强項)를 스스로 지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됨이 없었다. 국서(國書)를 받는 것에 대한 여러 논의에서 모두 힘써 다투어 바로잡으려 하니, 동행들은 목을 움츠렸고 적국의 사람들은 공경하고 감탄하였으니, 또한 목숨을 다하는 군자(畢命君子)¹⁸⁸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데 이르러서는, 내 생각에 부끄러움이 있을 듯하다. 무릇 이른바 전대(專對)¹⁸⁹라는 것이 어찌 요행이나 절차상의 일만을 가리키겠는가? 학봉이 이미 돌아오자, 상(上)께서 왜적의 실정을 물으셨다. 윤길 등은 모두 왜적이 올 징조가 있다고 하였으나, 학봉은 강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수천 마디 말로 윤길 등을 깊이 공격하고 스스로 왜적의 실정을 자세히 안다고 여겼다. 이듬해 왜적이 나라를 기울여 침입하여 종묘사직(廟社)을 지키지 못하고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병화(兵禍)의 참혹함이 예로부터 임진년(壬辰年)과 같은 경우가 없었다. 그 요령(要領)을 얻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전대(專對)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만약 한 고조(漢高祖)¹⁹⁰ 때를 만났더라면, 이전 사신 열 무리의 주살(誅殺)¹⁹¹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부계기문(涪溪記聞)》에서 인용】
주석:
187. 동지(同知):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의 관직 약칭. 황윤길은 통신사 파견 당시 동지중추부사였다.
188. 필명군자(畢命君子): 목숨을 다하는 군자.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189. 전대(專對): 사신이 외국에 나가 임기응변으로 임금의 명령 없이도 외교적 현안을 잘 처리하는 것.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유래한 말이다.
190. 한고(漢高):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
191. 전사십배지주(前使十輩之誅): 한 고조가 흉노(匈奴)에 사신을 보냈을 때, 사신 열 무리가 모두 흉노의 강성함만 보고하고 그 약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자 그들을 모두 주살했다는 고사. 사신의 임무는 적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보고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예이다.
해설:
이 글은 김성일의 강직한 태도와 절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통신사로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적정(賊情) 파악에는 실패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서애집》의 기록과는 달리, 김성일이 단순히 민심 안정을 위해 다른 보고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상황을 오판했다고 보고 있다. 이는 김성일에 대한 상반된 평가 중 하나를 보여준다.
권율(權慄)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權慄【莊烈公。】
字彦愼, 轍之子, 安東人。 嘉靖丁酉生。 萬曆壬午登第。 壬辰倭亂, 以光州牧使, 超陞全羅監司, 仍拜都元帥。 官至戶曹判書。 己亥卒, 年六十三。 錄宣武勳一等, 追封永嘉府院君。
번역문:
권율(權慄)【장렬공(莊烈公)¹⁷¹이다.】
자는 언신(彦愼)이고, 권철(權轍)¹⁷²의 아들이며, 안동(安東) 사람이다.¹⁷³ 가정(嘉靖)¹⁷⁴ 정유년(1537)에 태어났다. 만력(萬曆)¹⁷⁵ 임오년(1582)에 과거에 급제(登第)¹⁷⁶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¹⁷⁷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¹⁷⁸에서 전라 감사(全羅監司)¹⁷⁹로 파격적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도원수(都元帥)¹⁸⁰에 제수되었다. 관직은 호조 판서(戶曹判書)¹⁸¹에 이르렀다. 기해년(己亥年, 1599)에 졸(卒)하니, 나이 63세였다. 선무공신(宣武勳)¹⁸² 일등(一等)에 녹훈(錄勳)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¹⁸³에 추봉(追封)되었다.
주석:
171. [주-D001] 莊烈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6년 11월 6일 기록에 “증 영의정 권율에게 시호를 장렬(莊烈)이라 내렸다.”가 있고, 《숙종실록(肅宗實錄)》 34년 5월 6일 기록에 “우참찬 권율의 시호를 양렬(襄烈)로 고쳤다.”가 있으며, 38년 12월 25일 기록에 “우참찬 권율의 시호를 충장(忠莊)으로 다시 내렸다.”가 있다. 이에 근거할 때 최종 시호는 “충장(忠莊)”이 되어야 한다. 저본은 장렬(莊烈)로 되어 있어 그대로 번역하고 주석에서 바로잡는다.
172. 철(轍): 권철(權轍, 1503-1578).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173. 안동인(安東人):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임을 나타낸다.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다.
174. 가정(嘉靖):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175.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1573-1620).
176. 등제(登第): 과거(科擧), 특히 문과(文科)에 급제하는 것. 권율은 46세의 늦은 나이에 급제하였다.
177.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선조 25, 임진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벌어진 전쟁.
178. 광주 목사(光州牧使): 광주(光州)의 지방관. 정3품.
179. 전라 감사(全羅監司):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180. 도원수(都元帥): 전쟁 시 여러 도(道)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임시 최고 군직.
181. 호조 판서(戶曹判書): 호조(戶曹)의 으뜸 벼슬. 정2품. 호조는 재정, 호구, 조세 등을 담당하는 중앙 관서이다.
182. 선무공신(宣武勳):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183.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왕비의 아버지나 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위이다. 영가(永嘉)는 안동(安東)의 옛 이름으로, 권율의 본관을 나타낸다. 추봉(追封)은 죽은 뒤에 관직이나 작위를 높여주는 것이다.
원문:
壬辰四月, 日本平秀吉擧大兵, 衆號六十萬, 連陷釜山、東萊, 中外大震。 上曰: “予聞權某有可用之材, 今在何處? 拜兩南巨鎭, 以試其材。” 卽日, 以公爲光州牧使, 公謝恩輒行。 時余以都承旨直政院, 公就與之別, 余曰: “何行之遽?” 公曰: “國家事急, 此正臣子效死之秋。 何敢徘徊晷刻, 效俗兒輩悲啼狀耶?” 時昇平日久, 猝聞兵至, 朝臣視兩南爲死地, 公辭語慷慨, 昂然就道, 政院同列無不嘖嘖稱其宏量。
번역문:
임진년(1592) 4월, 일본의 평수길(平秀吉)¹⁸⁴이 큰 군대를 일으키니, 그 수가 60만이라 일컬었으며,¹⁸⁵ 연이어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자 중앙과 지방(中外)¹⁸⁶이 크게 진동하였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듣기로 권모(權某)¹⁸⁷에게 쓸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하던데,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양남(兩南)¹⁸⁸의 거진(巨鎭)¹⁸⁹에 제수하여 그 재주를 시험해 보라.” 즉시 공(公)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삼으니, 공은 사은(謝恩)¹⁹⁰하고 즉시 길을 떠났다. 이때 나[余]¹⁹¹는 도승지(都承旨)¹⁹²로서 정원(政院)¹⁹³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공이 와서 작별 인사를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어찌 이리 서둘러 가시오?” 공이 말하였다. “국가의 일이 위급하니, 이때야말로 바로 신하된 자가 목숨 바쳐 보답할 때입니다. 어찌 감히 잠시라도 머뭇거리며 속된 아이들처럼 슬피 우는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당시는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되었던 터라 갑자기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 신하들은 양남(兩南)을 죽음의 땅으로 여겼는데, 공은 강개(慷慨)한 어조로 사양하고 의젓하게 길을 나섰으므로, 정원(政院)의 동료들이 모두 그의 넓은 도량을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184. 평수길(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일본 센고쿠 시대를 통일하고 조선 침략을 일으킨 인물. 평(平)은 그의 초기 성씨 중 하나이다.
185. 수가 60만이라 일컬었다: 실제 동원된 일본군의 수는 15만 8천여 명에서 2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60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조선에서 느낀 공포감이나 과장된 소문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186. 중외(中外): 중앙(中)과 지방(外), 즉 조정을 포함한 나라 전체를 의미한다.
187. 권모(權某): 아무개 권씨라는 뜻으로, 특정 인물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 여기서는 권율을 가리킨다.
188. 양남(兩南): 남쪽의 두 도(道), 즉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를 가리킨다.
189. 거진(巨鎭): 크고 중요한 진영(鎭營) 또는 관직. 여기서는 중요한 지방관직을 의미한다.
190. 사은(謝恩): 임금의 은혜에 감사함을 표하는 것. 관직 제수 등에 대한 감사를 의미한다.
191. 여(余): 나. 이 글은 권율의 사위인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권율 유사(權慄遺事)》에 실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도승지였다.
192. 도승지(都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193.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원문:
公單騎馳至州, 未及莅事, 大駕西巡, 徵兵入衛。 全羅道巡察使李洸、防禦使郭嶸發兵四萬, 洸自領二萬, 以羅州牧使李慶祿爲中衛將, 助防將李之詩爲先鋒; 嶸分領二萬, 以公爲中衛將, 助防將白光彦爲先鋒。 公以文人, 置諸前行, 人或訝之, 公笑曰: “是吾職事也。” 兩軍分路而進, 洸自龍安渡江, 由林川、溫陽等路; 嶸自全州, 由礪山、公州等路, 俱會于稷山。 時慶尙巡察使金睟¹⁹⁴、忠淸巡察使尹國馨皆來會, 忠淸兵亦數萬, 軍容甚盛。 遂進陣水原, 洸令嶸進擊龍仁, 公曰: “賊已據險, 今難仰攻。 今主公掃境內入援, 國家存亡在此一擧, 務在持重, 以圖萬全, 不可與小敵爭鋒, 徑費神威。 惟當直渡祖江, 以塞臨津, 則西路自固, 糧道亦通。 得其形便, 畜銳伺釁, 以待朝廷之令可也。” 洸不聽。 嶸先使光彦往觀道路, 還曰: “道狹樹密, 不可輕進。” 洸有慍色。 嶸曰: “事將奈何?” 遂進兵。 洸令李之詩來助戰, 之詩、光彦各領精兵一千, 意甚輕敵。 公戒之曰: “愼勿輕進, 俟中衛軍至乃戰。” 公未至, 光彦見賊少, 促兵逆戰。 賊拔劍大呼, 順丘而下, 我師披靡, 賊乘勝亂斫, 之詩、光彦皆死。 是夜, 軍中虛驚, 戰士莫有鬪志。 朝日, 賊從山谷, 張旗而出, 諸軍大潰。 公遂還光州曰: “主將當有分付, 整束以待。” 久之寂然。 公曰: “宗社灰燼, 鑾輿播越, 人臣豈可坐待國亡?” 遂聚州境內子弟五百餘人, 傳檄傍郡, 又得千餘名, 進陣於慶尙界上。 聞南原之民自焚廬舍、劫掠官倉, 公移陣本府, 撫定人心。
번역문:
공이 단기(單騎)로 달려 고을에 이르러 미처 부임하여 일을 보기도 전에, 대가(大駕)¹⁹⁵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시면서 군사를 징발하여 호위하게 하였다.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洸)¹⁹⁶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¹⁹⁷이 군사 4만을 징발하여, 이광이 직접 2만을 거느리고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를 선봉(先鋒)으로 삼았으며, 곽영이 나누어 2만을 거느리고 공을 중위장으로,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으로 삼았다. 공이 문관(文人)인데도 전위(前行)에 배치되자 사람들이 혹 의아하게 여기니,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이 나의 직무이다.” 양군(兩軍)이 길을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이광은 용안(龍安)에서 강을 건너 임천(林川), 온양(溫陽) 등지의 길을 경유하였고, 곽영은 전주(全州)에서 여산(礪山), 공주(公州) 등지의 길을 경유하여 모두 직산(稷山)에서 합류하였다. 이때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¹⁹⁸와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¹⁹⁹도 모두 와서 합류하였는데, 충청도 군사 또한 수만 명이어서 군대의 위용이 매우 성대하였다. 마침내 수원(水原)에 나아가 진을 쳤는데, 이광이 곽영에게 명하여 용인(龍仁)을 공격하게 하자, 공이 말하였다. “적이 이미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있으니 지금 우러러 공격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주공(主公)께서는 경내(境內)의 군사를 쓸어 모아 구원하러 가시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 힘써 신중함을 지켜 만전(萬全)을 도모해야 하며, 작은 적과 날카로움을 다투어 함부로 군대의 위엄을 소모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마땅히 조강(祖江)²⁰⁰을 바로 건너 임진강(臨津江)을 막아야 하니, 그러면 서쪽 길이 저절로 튼튼해지고 군량미 수송로 또한 통할 것입니다. 유리한 형세를 얻어 날카로움을 기르고 적의 허점을 엿보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이광이 듣지 않았다. 곽영이 먼저 백광언을 보내 도로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돌아와서 아뢰었다. “길이 좁고 나무가 빽빽하여 경솔하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광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곽영이 말하였다. “일을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마침내 군사를 진격시켰다. 이광이 이지시에게 명하여 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이지시와 백광언이 각각 정병(精兵) 1천 명을 거느렸는데, 적을 매우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공이 그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삼가 경솔하게 나아가지 말고, 중위군(中衛軍)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싸우라.” 공이 미처 도착하지 않았는데, 백광언이 적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군사를 재촉하여 맞서 싸웠다. 적이 칼을 뽑고 크게 외치며 언덕을 따라 내려오자 아군이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흩어졌고, 적이 승세를 타고 마구 베니 이지시와 백광언이 모두 죽었다. 그날 밤 군중(軍中)에 헛된 소문으로 소동이 일어나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아침 해가 뜨자 적이 산골짜기에서 깃발을 펼치고 나오니, 여러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공은 마침내 광주(光州)로 돌아와 말하였다. “주장(主將)이 마땅히 분부가 있을 것이니, 군대를 정돈하고 기다리겠다.” 오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공이 말하였다. “종묘사직이 재가 되고 임금의 수레가 멀리 피란 가셨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앉아서 나라가 망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마침내 고을 경내의 자제 500여 명을 모으고 인근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 또 1천여 명을 얻어, 경상도 경계 위에 진을 쳤다. 남원(南原)의 백성들이 스스로 집을 불태우고 관청 창고를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본부(本府, 남원)로 진을 옮겨 민심을 어루만져 안정시켰다.
주석:
194. [주-D002] 睟 : 저본(底本)에는 “췌(晬)”로 되어 있다. 《백사집(白沙集)・증숭정대부……증숭정대부》 및 《북저집(北渚集)・유명조선국……김공시장(金公諡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95.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을 가리킨다.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란 간 것을 말한다.
196. 이광(李洸, 1541-?):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발발 당시 전라도 순찰사로 근왕군(勤王軍)을 이끌고 북상했으나, 용인 전투에서 대패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197. 곽영(郭嶸):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방어사로 이광과 함께 용인 전투에 참전했다.
198. 김수(金睟, 1547-1615):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순찰사였다.
199. 윤국형(尹國馨, 1543-1611):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순찰사였다.
200. 조강(祖江): 현재의 임진강(臨津江)과 한강(漢江)이 합류하는 하류 지역을 가리키는 옛 이름. 전략적 요충지였다.
원문:
李洸聞公起兵, 以公權稱都節制, 仍令督率諸郡, 以遏奔衝, 公進駐梨峙。 時嶺南諸賊勢甚猖獗, 直擣全羅, 分兵來向。 公聞賊勢張甚, 阻嶺爲固, 嚴兵以待。 七月, 與賊遇於嶺上, 縱兵急擊。 同福縣監黃進勇冠諸軍, 中丸而退, 一軍沮喪, 士無鬪志, 稍稍韜戈抱頭而走²⁰¹, 軍中洶洶。 晡時, 賊乘我困, 跳入砦內。 公乃挺劍大呼, 親冒鋒刃, 責戰益力, 人皆死戰, 無不一當百者。 於是呼聲震地, 矢石如雨, 賊不能抵敵, 遂棄甲曳尸以走, 軍資、器械委棄狼藉, 血流被道, 川谷爲之腥臭。 賊不能再窺湖南, 用爲根本, 爲國保障, 數年之間, 東西飛輓以供, 軍儲未嘗乏絶者, 公之力也。
번역문:
이광(李洸)이 공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공을 임시로 도절제사(都節制)²⁰²라 칭하게 하고, 이어 여러 고을을 독려하여 적의 돌진을 막도록 명하니, 공은 이치(梨峙)²⁰³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이때 영남(嶺南)의 여러 적들의 기세가 매우 창궐하여 곧바로 전라도를 치려고 군사를 나누어 이쪽으로 향하였다. 공은 적의 기세가 매우 드세다는 것을 듣고, 고개를 막아 견고히 하고 군비를 엄히 하여 기다렸다. 7월에 고개 위에서 적과 만나 군사를 풀어 급히 공격하였다.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²⁰⁴이 용맹이 여러 군사 중 으뜸이었는데, 탄환에 맞고 물러나자 온 군대의 사기가 꺾이고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없어 차츰 창을 감추고 머리를 감싸 안고 달아나²⁰⁵ 군중이 소란스러웠다. 포시(晡時)²⁰⁶에 적이 우리의 곤궁함을 틈타 목책 안으로 뛰어들었다. 공이 이에 칼을 빼 들고 크게 외치며 친히 칼날을 무릅쓰고 싸움을 독려함이 더욱 힘차니,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일당백(一當百)이 아닌 자가 없었다. 이에 외침 소리가 땅을 진동시키고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하니, 적이 대적하지 못하고 마침내 갑옷을 버리고 시체를 끌고 달아났으며, 군수 물자와 무기들이 어지럽게 버려져 있었고, 피가 흘러 길이 뒤덮였으며 골짜기가 그로 인해 비린내로 가득 찼다. 적이 다시는 호남(湖南)을 엿보지 못하게 되었고, 호남이 근본이 되어 나라의 보장(保障)이 되었으며, 수년 동안 동서에서 수레로 빠르게 실어 날라 공급하여 군량미가 일찍이 부족하거나 끊어진 적이 없었던 것은 공의 힘이었다.
주석:
201. [주-D003] 走 : 저본(底本)에는 “보(步)”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백사집・증숭정대부……권공유사(權公遺事)》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보두이주(抱頭而走)’가 관용적인 표현이다.
202. 도절제사(都節制): 절도사(節度使) 또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유사한 군사 직책. 임시로 부여된 직함으로 보인다.
203. 이치(梨峙): 전라북도 완주군과 충청남도 금산군 경계에 있는 고개. 임진왜란 당시 호남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을 막아낸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웅치(熊峙) 전투와 혼동되거나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204. 황진(黃進, 1550-1593):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동복 현감으로 이치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205. 창을 감추고 머리를 감싸 안고 달아남: 패주(敗走)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관용적인 표현.
206. 포시(晡時): 신시(申時)에 해당하며,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를 가리킨다.
원문:
秋, 除羅州牧使, 未至官, 拜本道巡察使。 公迎拜敎書于陣中, 稽首西向而哭, 哀動一軍, 軍校、將吏、士無不爲之揮涕。 公令防禦使代守梨峙, 親到全州, 發道內兵萬餘, 西向勤王。
번역문:
가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이르기 전에 본도(本道) 순찰사(巡察使)에 임명되었다. 공이 진중(陣中)에서 교서(敎書)를 맞이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서쪽(의주 방향)을 향해 곡(哭)하니, 그 슬픔이 온 군대를 감동시켜 군교(軍校), 장리(將吏), 사졸(士卒)들이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방어사(防禦使)에게 명하여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직접 전주(全州)에 도착하여 도내(道內)의 군사 만여 명을 징발하여 서쪽을 향해 근왕(勤王)²⁰⁷하였다.
주석:
207. 근왕(勤王): 왕을 위해 힘쓰다. 임금이 위기에 처했을 때 신하들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權慄進兵至稷山, 體察使鄭澈戒勿輕進, 慄乃住軍以聞。 朝廷請下旨責澈, 促慄進圖京城。【《國朝寶鑑》。】
번역문:
권율이 군사를 진격시켜 직산(稷山)에 이르자, 체찰사(體察使)²⁰⁸ 정철(鄭澈)²⁰⁹이 경솔히 진격하지 말라고 경계하니, 권율이 이에 군사를 멈추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정철을 견책하고 권율에게 속히 경성(京城) 수복을 도모하라고 독촉하는 하지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국조보감(國朝寶鑑)》²¹⁰에서 인용】
주석:
208. 체찰사(體察使): 조선 시대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왕명을 받아 군무(軍務)를 총괄하고 지방을 순시하며 민정(民政)을 살피던 임시 관직.
209.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가사 문학의 대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좌의정 겸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였으나, 신중론을 주장하다가 강경론자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210.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 시대 역대 임금의 모범이 될 만한 언행과 치적을 모아 편찬한 책. 후대 왕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원문:
時賊酋行長已拔平壤, 入據其城, 長政據黃海道, 隆景據開城府, 平秀嘉督率諸酋, 領大兵屯京城, 放兵四劫, 西路已絶。 勤王諸軍皆入江華, 阻江爲固, 以避其銳。 公聞上在義州, 召諸將計曰: “今平壤以南皆爲賊壘。 京城爲根本之地, 不如先復京城, 連綴行長, 恫疑東顧, 使不得一意西追, 則諸賊無能爲也。 今若轉入江華, 示賊弱也。” 遂進駐水原之禿城。
번역문:
이때 적의 추장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²¹¹은 이미 평양(平壤)을 함락시키고 들어가 그 성을 점거하였고, 장정(長政, 구로다 나가마사)²¹²은 황해도(黃海道)를 점거하였으며, 융경(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²¹³은 개성부(開城府)를 점거하였고, 평수가(平秀嘉, 우키타 히데이에)²¹⁴는 여러 추장들을 감독하고 거느리며 큰 군대를 이끌고 경성(京城)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풀어 사방을 노략질하니, 서쪽 길이 이미 끊어졌다. 근왕(勤王)하던 여러 군대들은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을 막아 견고히 함으로써 그들의 예봉(銳鋒)을 피하였다. 공이 상(上)께서 의주(義州)에 계시다는 것을 듣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획하며 말하였다. “지금 평양 이남은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다. 경성은 근본이 되는 땅이니, 먼저 경성을 회복하여 행장(行長)을 연이어 압박하고 두려워하여 동쪽(후방)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가 한마음으로 서쪽(의주)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면, 여러 적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만약 강화로 옮겨 들어간다면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마침내 수원(水原)의 독성(禿城)²¹⁵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주석:
211.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1군 사령관. 평양을 점령했다.
212. 장정(長政):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 일본군 제3군 사령관.
213. 융경(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 일본군 제6군 사령관.
214. 평수가(平秀嘉):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2-1655). 일본군 제8군 사령관이자 총사령관격. 평(平)은 그의 성씨이다.
215. 독성(禿城): 경기도 오산시에 있는 산성. 독산성(禿山城)이라고도 한다. 권율이 이곳에 주둔하며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원문:
上聞公駐禿城, 解劍馳賜曰: “諸將有不從令者, 以此劍從事。” 秀嘉憚公兵勢甚銳, 以兵數萬, 分爲三陣, 聯營於烏山等處, 往來排陣。 公堅壁固守, 不與交鋒, 間出銳師, 應賊所向, 以挫其銳。 賊機牙自壞, 角距俱落, 剽掠無所得。 居數日, 燒營夜遁, 畿內諸賊次第入城。 自此西路得通, 列郡義兵望風蜂起, 一時響應。 公起板蕩之餘, 以孤軍在衆賊之間, 虛喝强寇, 扶護兩湖。 至今論中興之功者, 以公爲稱首。【竝遺事。】
번역문:
상(上)께서 공이 독성(禿城)에 주둔함을 들으시고 차고 있던 칼을 풀어 급히 하사하며 말씀하셨다. “여러 장수들 중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처리하라.” 수가(秀嘉)가 공의 군세가 매우 날카로운 것을 꺼려, 군사 수만을 세 진(陣)으로 나누어 오산(烏山) 등지에 연이어 진을 치고 왕래하며 진을 벌였다.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며 교전하지 않고, 간간이 날랜 군사를 내어 적이 향하는 곳에 대응하여 그 예봉을 꺾었다. 적의 계책과 송곳니[機牙]가 스스로 무너지고 뿔과 발톱[角距]이 모두 떨어져 나가 약탈하여 얻는 것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진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치니, 기내(畿內)의 여러 적들이 차례로 성(서울)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쪽 길이 통하게 되고, 여러 고을의 의병(義兵)들이 소문을 듣고 벌떼처럼 일어나 일시에 호응하였다. 공은 판탕(板蕩)의 혼란 속에서 일어나 외로운 군대로 수많은 적들 사이에 있으면서, 빈말로 강한 도적을 위협하고 양호(兩湖)를 보호하였다. 지금까지 중흥(中興)의 공을 논하는 자들이 공을 으뜸으로 꼽는다.【이상은 유사(遺事)에서 인용】
원문:
癸巳二月, 全羅巡察使權慄敗賊兵於幸州。 時京城賊合屯大熾, 慄欲連絡天兵, 以圍京城, 乃留兵。 使宣居怡領全師, 屯衿川光敎山, 分抄精兵四千, 自陽川濟江, 陣于幸州山上, 設柵²¹⁶爲衛。 賊見其孤懸深入, 悉衆數萬, 乘曉圍柵。 鐃鼓動地, 柵中震駭, 慄申令鎭定。 賊分軍迭進, 自卯至酉, 內外皆殊死戰。 我軍占地高峻, 後臨江壁, 逃走無路, 皆懷死心。 賊仰攻, 丸道不直。 湖南壯軍皆善射, 射必中傷, 矢如雨注, 賊輒披靡。 乃各持束草, 縱火燒柵, 柵中以水撲滅。 賊毁西北隅柵一間, 所守僧軍少却, 慄自用劍, 斬退數人, 復樹柵以拒之。 矢將盡, 水使李蘋舟載箭數萬以繼之。 賊遂敗退, 聚積屍爲四堆, 覆芻以焚之, 臭聞數里。 我軍收斬餘屍一百三十級。
번역문:
계사년(癸巳年, 1593) 2월, 전라 순찰사 권율이 행주(幸州)²¹⁷에서 적병을 격파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의 적들이 합세하여 주둔하며 기세가 매우 성하여, 권율은 천병(天兵)²¹⁸과 연락하여 경성을 포위하고자 하여 군사를 남겨두었다. 선거이(宣居怡)²¹⁹에게 명하여 전군(全師)을 거느리고 금천(衿川) 광교산(光敎山)에 주둔하게 하고, 정병(精兵) 4천 명을 선발하여 나누어 직접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성 위에 진을 치고 목책(柵)을 설치하여²²⁰ 방어하였다. 적이 그곳이 외떨어져 깊숙이 들어온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무리를 총동원하여 새벽을 틈타 목책을 포위하였다. 징과 북소리가 땅을 진동시키자 목책 안이 놀라 동요하였으나, 권율이 거듭 명령하여 진정시켰다. 적이 군사를 나누어 번갈아 진격하여, 묘시(卯時, 오전 5-7시)부터 유시(酉時, 오후 5-7시)까지 안팎에서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아군이 점거한 땅이 높고 험준하며 뒤로는 강 절벽에 임하여 도망갈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마음을 품었다. 적이 우러러 공격하였으나 탄환의 길이 곧지 못하였다. 호남(湖南)의 장사(壯士)들이 모두 활을 잘 쏘아, 쏘면 반드시 맞추어 상처를 입혔고 화살이 비 쏟아지듯 하니 적이 번번이 쓰러졌다. 이에 각기 풀 묶음을 가지고 불을 질러 목책을 태우자, 목책 안에서는 물로 불을 껐다. 적이 서북쪽 모퉁이 목책 한 칸을 부수자, 그곳을 지키던 승군(僧軍)²²¹이 조금 물러나니, 권율이 직접 칼을 써서 물러나는 자 몇 사람을 베고 다시 목책을 세워 막았다. 화살이 거의 떨어지자 수사(水使)²²² 이빈(李蘋)²²³이 배에 화살 수만 개를 싣고 와서 이어주었다. 적이 마침내 패하여 물러가고, 시체를 모아 네 무더기로 쌓고 풀을 덮어 태우니, 그 냄새가 수 리(里)까지 퍼졌다. 아군이 남은 시체 130여 구를 베어 수습하였다.
주석:
216. [주-D004] 樹 : 저본(底本)에는 “수(守)”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국조보감・선조조》 계사(26년)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목책을 세우다’라는 의미의 ‘수책(樹柵)’이 문맥에 맞다.
217. 행주(幸州):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 있는 행주산성(幸州山城)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218. 천병(天兵): 하늘의 군대라는 뜻으로,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된 명(明)나라 군대를 가리킨다.
219. 선거이(宣居怡, 1550-1598):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활약했다.
220. 목책(柵)을 설치하여: 행주산성은 본래 토성이었으나, 권율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목책을 추가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221. 승군(僧軍):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 등이 이끄는 승군이 크게 활약하였다. 행주 전투에도 처영(處英) 등이 이끄는 승군이 참전했다.
222. 수사(水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약칭. 각 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종2품 무관직이다.
223. 이빈(李蘋): 이빈(李薲, 1535-1594)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전라우수사를 지냈다. 행주대첩 때 권율에게 화살을 공급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일부 기록에는 이름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원문:
時李提督駐兵開城府, 聞公大捷, 遣其褊裨視戰處, 致禮物爲賀。 後數日, 請與相見, 公整陣以待, 旗幟鮮明, 器械精利, 號令嚴明, 部伍不亂。 天將待之加敬, 至相謂曰: “權家軍與他陣自別, 信外國有眞將也。”
번역문:
이때 이제독(李提督, 이여송)²²⁴은 개성부(開城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공의 대첩 소식을 듣고 그의 편비(褊裨)²²⁵를 보내 싸움터를 살펴보게 하고 예물을 보내 축하하였다. 며칠 뒤 서로 만나기를 청하자, 공이 진(陣)을 정돈하고 기다리는데, 깃발은 선명하고 무기는 정교하고 예리하며, 호령은 엄격하고 분명하여 부대 대오가 혼란하지 않았다. 천장(天將)이 그를 더욱 공경하며 대하고, 마침내 서로 말하기를 “권가군(權家軍)은 다른 진영과 다르니, 진실로 외국에도 참된 장수가 있구나.”라고 하였다.
주석:
224. 이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 1549-1598). 명나라 장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援軍)의 제독(提督)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평양성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225. 편비(褊裨): 부장(副將) 또는 하급 장교를 가리킨다.
원문:
天朝總督軍經略宋應昌移咨本國, 略曰: “自倭奴摧陷朝鮮, 王國三都、諸郡縣悉皆望風奔潰, 曾無一英雄傑士倡義師排大亂、守封疆以圖恢復者, 王國可謂無人。 獨全羅觀察使權某扼守孤縣, 招集衆庶, 屢出奇謀, 時抗大敵, 近復囊沙爲糧, 諉倭來, 槍而劍殺之。 此正王國板蕩忠臣, 中興名將。” 仍賞紅段絹四端、白銀五十兩, 以爲忠勇之勸, 且令國王加之爵祿, 以風動本國僚宰。 天朝兵部尙書石星因是上本以爲: “全羅頗能用命, 陪臣權某獨守孤危, 以抗强勁。” 事聞, 天子嘉之。 兵部欽奉聖旨以爲: “朝鮮素稱强兵, 今觀全羅道斬獲數多, 該國人民尙可振作。” 因差鴻臚寺官, 宣諭本國。 自是天朝文武大小官每聞公名, 必曰莫是前日幸州奏捷者耶?
번역문:
천조(天朝)²²⁶ 총독군(總督軍) 경략(經略)²²⁷ 송응창(宋應昌)²²⁸이 본국(本國)에 이자(移咨)²²⁹를 보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왜노(倭奴)가 조선을 함락시킨 이래, 왕국의 삼도(三都)와 여러 군현(郡縣)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무너져, 일찍이 영웅호걸 한 사람이라도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큰 난리를 물리치고 나라의 강토를 지켜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없었으니, 왕국에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다. 유독 전라 관찰사 권모(權某)만이 외로운 고을을 막아 지키며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여러 차례 기묘한 계책을 내어 때때로 큰 적에게 항거하였으며, 최근에는 다시 모래를 포대에 담아 군량으로 속여 왜적을 유인하여 창과 칼로 죽였다고 한다.²³⁰ 이는 바로 왕국의 판탕지신(板蕩之臣)²³¹이자 중흥(中興)의 명장이다.” 이에 홍단(紅緞) 비단 네 필과 백은(白銀) 50냥을 상으로 주어 충성스럽고 용감함에 대한 권장으로 삼고, 또한 국왕에게 명하여 그에게 작위와 녹봉을 더하여 본국 관리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천조 병부상서(兵部尙書)²³² 석성(石星)²³³이 이로 인해 상본(上本)하여 아뢰기를 “전라도가 자못 능히 명을 받들고, 배신(陪臣) 권모가 홀로 위태로운 곳을 지키며 강한 적에게 항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천자(天子)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셨다. 병부(兵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아뢰기를 “조선은 본래 강한 군대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전라도에서 베어 죽이고 사로잡은 수가 많은 것을 보니, 해당 국가의 인민들이 아직 떨쳐 일어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홍려시관(鴻臚寺官)²³⁴을 파견하여 본국에 선유(宣諭)하였다. 이로부터 천조의 문무 대소 관료들이 매번 공의 이름을 들으면 반드시 “혹시 전날 행주에서 승첩을 아뢴 그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주석:
226. 천조(天朝): 하늘의 조정이라는 뜻으로, 당시 조선이 사대(事大)하던 명(明)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227. 총독군 경략(總督軍經略): 명나라의 군사 관련 고위 관직명. 경략(經略)은 특정 지역의 군사 및 행정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송응창은 조선 파견 명군의 총책임자였다.
228. 송응창(宋應昌, 1536-1606): 명나라의 문신. 임진왜란 당시 경략(經略)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명군을 총지휘했다.
229. 이자(移咨): 같은 등급 또는 하급 관청에 보내는 공식 문서.
230. 모래를 포대에 담아 군량으로 속여... 죽였다고 한다: 행주산성 전투 당시 군량이 부족하자 모래를 쌀가마니처럼 쌓아 적을 속였다는 일화가 전해지나,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 기록은 명나라 측에 그러한 소문이 알려졌음을 보여준다.
231. 판탕지신(板蕩之臣): 나라가 어지러울 때(판탕) 절개를 지키고 공을 세우는 충신. 《시경(詩經)》 〈대아(大雅) 판(板)〉, 〈대아(大雅) 탕(蕩)〉 편에서 유래하였다.
232. 병부상서(兵部尙書): 명나라 육부(六部) 중 하나인 병부(兵部)의 장관. 국방 및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233. 석성(石星, ?-1599): 명나라의 문신. 병부상서를 지내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 파병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책임을 지고 파직, 옥사하였다.
234. 홍려시관(鴻臚寺官): 명나라에서 조회(朝會) 의례, 외국 사신 접대, 제후 및 번국(藩國) 관련 업무 등을 담당하던 홍려시(鴻臚寺)의 관리.
원문:
公移陣于坡州山城, 賊擧衆而來, 欲報幸州之敗, 望見公壁壘高深, 斂衆而退, 如是者三。 其年四月, 秀嘉諸酋自知兵勢益衰, 與提督²³⁵講和, 悉兵遁還。 公聞之, 以輕兵達夜馳入城, 則賊已渡江矣。 公促令先鋒兼程疾馳, 追躡其後。 公整點大兵, 未及起程, 提督與諸將謀曰: “全羅布政慷慨善戰, 士卒用命。 今若悉衆而追, 敗我和事。” 夜半, 急遣遊擊將軍戚金馳至露梁津, 盡收津船, 使不得渡軍。 金遣其腹心, 抵公邀與計事。 及到, 金詰之曰: “公不待李爺分付, 徑欲追擊, 何耶?” 日遣其下, 覘公動靜, 密爲之隄備, 公不敢動, 遂引兵還本道。
번역문:
공이 파주 산성(坡州山城)으로 진을 옮기자, 적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행주에서의 패배를 갚으려 하였으나, 공의 벽루(壁壘)가 높고 깊은 것을 멀리서 보고는 군사를 거두어 물러가기를 세 번 하였다. 그해 4월, 수가(秀嘉) 등 여러 추장들이 병세가 더욱 약해짐을 스스로 알고 제독(提督)²³⁶과 강화(講和)를 논의하고, 군사를 모두 이끌고 도망쳐 돌아갔다. 공이 이를 듣고 경기병(輕兵)으로 밤새 달려 성(서울)에 들어갔으나, 적은 이미 강을 건넌 뒤였다. 공이 선봉(先鋒)에게 재촉하여 배도(倍道)로 빨리 달려 그 뒤를 추격하게 하였다. 공이 대군을 정돈하고 점검하여 미처 출발하지 못했는데, 제독이 여러 장수와 모의하여 말하였다. “전라도 포정(布政, 권율)은 강개(慷慨)하고 싸움을 잘하며 사졸들이 명령을 잘 따른다. 지금 만약 군사를 총동원하여 추격한다면 우리의 강화 논의를 깨뜨릴 것이다.” 한밤중에 급히 유격장군(游擊將軍)²³⁷ 척금(戚金)²³⁸을 노량진(露梁津)²³⁹으로 보내 진선(津船)을 모두 거두어 군사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척금이 그의 심복을 보내 공에게 와서 함께 일을 계획하자고 하였다. 도착하자 척금이 그를 꾸짖어 말하였다. “공은 이 야(李爺, 이제독)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추격하려 하니, 어찌하여 그러한가?” 날마다 부하를 보내 공의 동정을 살피고 몰래 그에 대해 대비하니, 공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본도(本道)로 돌아갔다.
주석:
235. [주-D005] 提 : 저본(底本)에는 “제(諸)”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백사집・증숭정대부……권공유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을 가리킨다.
236. 제독(提督): 명나라의 군사 직책. 여기서는 이여송(李如송)을 가리킨다.
237. 유격장군(游擊將軍): 명나라의 군사 직책. 총병관(總兵官) 아래에 속하며, 기동 타격 부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238. 척금(戚金):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부하였다.
239. 노량진(露梁津): 현재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일대의 한강 나루터. 당시 중요한 교통로였다.
원문:
六月, 拜都元帥, 督諸軍移駐嶺南。 有一武官憚於赴戰, 逃匿金²⁴⁰州, 自托於天將。 公屢移本州, 使之械送軍門。 州官怵於天將, 不敢誰何。 公巡到本州, 發吏捕之。 天將苦口乞哀, 公竟斬之。 居無何, 國相有視師南方者到州, 武官之家搆公於國相。 公竟坐免, 笑曰: “爲大將三年, 斬一逃兵, 至於解官耶?”
번역문:
6월에 도원수(都元帥)에 제수되어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영남(嶺南)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한 무관(武官)이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꺼려 금주(金州)²⁴¹에 숨어 스스로 천장(天將)에게 의탁하였다. 공이 여러 차례 본주(本州)에 공문을 보내 그를 포박하여 군문(軍門)으로 보내게 하였으나, 주관(州官)이 천장을 두려워하여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 공이 본주를 순시하다가 관리를 보내 그를 체포하였다. 천장이 간절히 애걸하였으나, 공이 마침내 그를 참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상(國相)²⁴²으로 남방을 시찰하는 자가 주(州)에 도착하자, 무관의 집안이 공을 국상에게 모함하였다. 공이 마침내 연좌되어 면직되자, 웃으며 말하였다. “대장(大將)이 된 지 3년 만에 도망병 한 명을 베었다고 해관(解官)되기에 이르는가?”
주석:
240. [주-D006] 金 : 저본(底本)에는 “전(全)”으로 되어 있다. 《백사집・증숭정대부……권공유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금주(金州)는 현재의 김해(金海)이다.
241. 금주(金州):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242. 국상(國相): 재상(宰相)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 여기서는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의 고위 관료, 즉 경략(經略)이나 어사(御史)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丙申, 拜忠淸道觀察使。 時賊久不退, 朝廷方議拜元帥, 上問: “誰可爲元帥者?” 左右對以他人, 上曰: “何不以權某爲之?” 仍特拜公爲元帥。 公上疏乞免, 上曰: “卿忠勞茂著, 勇略超世, 名聞天下, 威慴敵國, 元帥之任, 捨卿伊誰? 卿宜勿辭, 更加盡心, 以濟時難。” 後數日, 公入侍經筵, 上曰: “以予之罪, 卿久勞于外, 非卿, 國家何以得至今日?” 特賜內廏馬一匹。 三月, 公拜辭, 上引見, 問以南方形勢、軍糧器械多寡、人心風俗、守令賢否、諸將勇㥘、軍情苦樂、人材沈滯者, 反覆咨問, 日昃不倦。 乃曰: “勞卿再出, 殄殲凶賊, 奠安國家, 予惟望之。” 因賜酒。 公臨出, 上又曰: “使國家事至此, 予之罪也。 卿其率勵士卒, 刻日平賊。 今時事粗安, 繄卿之功是賴。” 又賜內廏馬一匹及馬粧。
번역문:
병신년(丙申年, 1596)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이때 적이 오랫동안 물러가지 않아 조정에서 막 원수(元帥)를 임명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상(上)께서 “누가 원수가 될 만한가?”라고 물으시니, 좌우에서 다른 사람으로 대답하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권모(權某)를 삼지 않는가?” 이에 공을 특별히 원수로 제수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경(卿)의 충성스러운 노고가 크게 드러났고 용맹과 지략이 세상에 뛰어났으며,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고 위엄이 적국을 두렵게 하니, 원수의 임무를 경을 버리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경은 마땅히 사양하지 말고 더욱 마음을 다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며칠 뒤 공이 경연(經筵)²⁴³에 입시(入侍)하니, 상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죄로 경이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하였으니, 경이 아니었다면 국가가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특별히 내구마(內廏馬)²⁴⁴ 한 필을 하사하였다. 3월에 공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께서 인견(引見)하시고 남방의 형세, 군량과 기계의 많고 적음, 인심과 풍속, 수령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 여러 장수들의 용감함과 겁 많음, 군대의 고락(苦樂), 재능이 있으나 등용되지 못한 인재 등에 대해 반복하여 자문하시기를 해가 기울도록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이윽고 말씀하셨다. “경을 수고롭게 다시 내보내니, 흉악한 적을 모조리 섬멸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기를 나는 오직 바랄 뿐이다.” 이어서 술을 하사하셨다. 공이 막 나가려 할 때 상께서 또 말씀하셨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나의 죄이다. 경은 사졸들을 거느리고 격려하여 날을 정해 적을 평정하라. 지금 시국이 대강 안정된 것은 오직 경의 공에 의지한 것이다.” 또 내구마 한 필과 마장(馬粧)을 하사하셨다.
주석:
243.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들이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244. 내구마(內廏馬): 임금의 마구간인 내구(內廏)에서 기르던 말. 임금이 하사하는 말은 큰 영예로 여겨졌다.
원문:
七月, 忠淸道庶人李夢鶴聚兵作亂。 都元帥權慄檄忠勇將金德齡等, 引兵來赴, 湖南兵進至石城。 賊徒先已聞購捕之令, 夜卽其陣中, 斬夢鶴首來降。 朴名賢等出城追擊, 徒衆盡散。 慄傳令搜捕, 州縣各自捕囚, 慄卽訊取服, 皆就京獄。
번역문:
7월, 충청도 서인(庶人) 이몽학(李夢鶴)²⁴⁵이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도원수 권율이 충용장(忠勇將)²⁴⁶ 김덕령(金德齡)²⁴⁷ 등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게 하니, 호남병(湖南兵)이 석성(石城)에 진격하였다. 적도(賊徒)들이 이미 현상 수배령을 듣고, 밤에 즉시 그 진중으로 가서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와서 항복하였다. 박명현(朴名賢) 등이 성을 나와 추격하니, 무리들이 모두 흩어졌다. 권율이 수색 체포 명령을 내리니, 주현(州縣)에서 각기 죄인들을 체포하여 가두었고, 권율이 즉시 신문하여 자복을 받아내어 모두 서울의 옥으로 보냈다.
주석:
245. 이몽학(李夢鶴, ?-1596): 조선 중기의 인물. 임진왜란 중 혼란을 틈타 충청도 홍산(鴻山) 등지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246. 충용장(忠勇將): 조선 시대 무관에게 내린 칭호 또는 직함.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이 칭호를 받았다.
247.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임진왜란 때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나,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아 옥사하였다.
원문:
時天朝方遣使日本, 封秀吉爲日本國王, 倭酋之屯據我邊者與本國諸將俱各按兵, 靜以待之。 公條上軍務七事, 深以賊鋒再肆猖獗爲憂。 冬, 我人回自日本, 朝廷始知二使不納、淸正將再渡, 中外人情洶洶靡定。 公在密陽, 聞余過界, 爲來相見, 大言: “近聞朝廷以邊報不佳, 諸公惟聚首愁苦, 無一策及於邊事, 此何理耶? 假令淸正再來, 不過前日之淸正。 此賊旣不得志於前日, 豈必收功於再擧而中外將相但坐愁耶? 國家事尙可爲, 若朝廷不容小兒輩壞了大事, 令我得以措手, 少遲時月, 淸正雖來, 吾自有待之之術矣。” 仍陳分兵列柵東西應援之策, 上甚加嘉納。 時邊報日急, 廷臣睽睽相視, 無敢發一慮以言者。 及見公狀啓, 咸曰: “元帥如此, 差强人意。” 卽嘉奬覆啓, 而事竟不行。
번역문:
이때 천조(天朝)에서는 막 사신을 일본에 보내 수길(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므로, 우리 변경에 주둔한 왜 추장들과 본국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공이 군무(軍務) 7개 조목을 올리면서, 적의 칼날이 다시 창궐할 것을 깊이 우려하였다. 겨울,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서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비로소 두 사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²⁴⁸이 장차 다시 건너올 것임을 알게 되어, 안팎의 인심이 흉흉하여 안정되지 못하였다. 공이 밀양(密陽)에 있을 때, 나[余]²⁴⁹가 경계를 지나는 것을 듣고 와서 서로 만나 크게 말하였다. “근래 듣건대 조정에서는 변방의 보고가 좋지 않다고 하여 여러 공(公)들이 오직 머리를 맞대고 근심하고 괴로워할 뿐 변방의 일에 대해 내놓는 계책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설령 청정(淸正)이 다시 온다 한들 전날의 청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적이 이미 전날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재차 거병하여 공을 거둘 것이라 여기고 안팎의 장상(將相)들이 다만 앉아서 근심만 하겠습니까? 국가의 일은 아직 해볼 만합니다. 만약 조정에서 소아배(小兒輩)들이 큰일을 망치도록 용납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손을 쓸 수 있게 하여 조금만 시간을 늦추어 준다면, 청정이 비록 오더라도 내게는 스스로 그를 대적할 방법이 있습니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목책을 설치하고 동서에서 서로 응원하는 계책을 아뢰니, 상(上)께서 매우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셨다. 이때 변방의 보고가 날로 급해지자 조정 신하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한 가지 생각이라도 내어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공의 장계(狀啓)를 보고서야 모두 말하기를 “원수가 이와 같으니 자못 사람의 마음에 만족스럽다[差强人意].”라고 하였다. 즉시 가상히 여겨 답하는 계(啓)를 내렸으나, 일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
주석:
248.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2군 사령관.
249. 여(余): 나. 이항복(李恒福)을 가리킨다.
원문:
丁酉秋, 賊分道西上, 先鋒至忠淸道。 朝廷欲遮絶漢江, 令公疾馳入朝, 與都體察使柳成龍協力守禦。 及入朝, 公與成龍同入侍。 成龍請以把截江面之事, 專責於公, 上允之。 初公之入朝也, 上驚曰: “南方賊勢方熾, 元帥何遽入朝?” 公對曰: “有旨矣。” 左右皆曰: “頃日賊鋒已迫畿甸, 廷議欲截漢以守, 非權某不可, 故徵之矣。” 時賊新挫於稷山, 捲衆而迴。 朝廷亦徵西北兵, 促公南下, 收拾²⁵⁰餘燼, 策勵諸將, 協同天兵, 以圖再擧。 冬, 欽差經理都察院都御史楊鎬與提督總兵麻貴領兵四萬, 分爲三道, 水陸竝進。 公部署諸將, 協隨天兵, 自領輕騎, 選帶梟將, 親隨提督營下。 提督至聞慶縣, 召三路大將, 密議軍務, 公亦在座。 提督密語曰: “天兵到蔚山, 元帥亦令水軍整備戰船, 多載砲手, 耀兵於前洋, 以助聲勢。” 公一如其言。 及提督攻蔚山不利, 經理令公獨領本國土兵爲火攻。 公督諸將突進, 斬後進者二人以徇, 諸軍無不踊躍讙呼而進。 本國大將、兵使、防禦使以下諸將蟻附而上, 俱入柵內, 進薄城下。 提督於帳前望見, 暗暗稱奇曰: “元帥能行號令。” 翌日, 經理亦稱朝鮮兵力戰助勢, 深爲可喜。 公嘗言於經理曰: “今攻島山, 右道沿海, 賊陣星列, 聞島山之急, 其勢必合兵來援。 宜分一枝兵馬, 以遏外寇, 則淸正之頭, 可致於麾下。” 及天兵圍島山十二日, 城小而堅, 賊亦盛爲之備, 百道攻城, 終不能拔。 公協隨周旋, 枕戈露處, 鎧甲至生蟣蝨, 而銳氣不衰。 終以賊援大至, 天兵爲之左次, 一如公言。
번역문:
정유년(丁酉年, 1597) 가을, 적이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와 선봉이 충청도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한강(漢江)을 차단하고자 공에게 속히 입조(入朝)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²⁵¹ 유성룡(柳成龍)²⁵²과 협력하여 수어(守禦)하게 하였다. 입조하자 공이 성룡과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성룡이 강변을 차단하는 일을 오로지 공에게 맡길 것을 청하니, 상(上)께서 윤허하셨다. 처음에 공이 입조할 때, 상께서 놀라 말씀하셨다. “남방의 적세가 바야흐로 치성한데, 원수가 어찌 급히 입조하였는가?” 공이 대답하였다. “분부가 있었습니다.” 좌우에서 모두 말하였다. “요즈음 적의 칼날이 이미 기甸(기전)에 임박하였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한강을 막아 지키려 하는데 권모(權某)가 아니면 불가하기에 그를 불렀습니다.” 이때 적이 막 직산(稷山)²⁵³에서 꺾여 무리를 이끌고 돌아갔다. 조정에서도 서북병(西北兵)을 징발하고 공에게 남하(南下)하여 남은 무리를 수습하고²⁵⁴ 여러 장수를 책려(策勵)하며 천병(天兵)과 협동하여 재거(再擧)를 도모하라고 촉구하였다. 겨울, 흠차(欽差)²⁵⁵ 경리(經理) 도찰원 도어사(都察院都御史)²⁵⁶ 양호(楊鎬)²⁵⁷와 제독(提督) 총병(總兵)²⁵⁸ 마귀(麻貴)²⁵⁹가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세 길로 나누어 수륙(水陸)으로 함께 진격하였다. 공이 여러 장수를 부서(部署)하여 천병을 협력하여 따르게 하고, 자신은 경기병(輕騎)을 이끌고 날랜 장수를 뽑아 데리고 친히 제독(提督)의 영(營) 아래를 따랐다. 제독이 문경현(聞慶縣)에 이르러 삼로(三路) 대장을 소집하여 비밀리에 군무를 의논하였는데, 공 또한 자리에 있었다. 제독이 비밀리에 말하였다. “천병이 울산(蔚山)에 도착하면 원수께서도 수군(水軍)에게 명하여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포수(砲手)를 많이 실어 앞바다에서 병력 시위를 하여 성세(聲勢)를 돕게 하라.” 공이 그 말과 같이 하였다. 제독이 울산(蔚山)²⁶⁰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게 되자, 경리(經理)가 공에게 명하여 본국 토병(土兵)만을 이끌고 화공(火攻)을 하게 하였다. 공이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돌진하고 뒤처지는 자 두 사람을 베어 조리돌림하니, 여러 군사들이 용약(踊躍)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나아가지 않음이 없었다. 본국의 대장(大將), 병사(兵使), 방어사(防禦使) 이하 여러 장수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올라가 모두 목책 안으로 들어가 성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제독이 장막 앞에서 바라보고 남몰래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원수가 능히 호령을 행하는구나.” 다음 날 경리도 조선 병사들이 힘써 싸워 세(勢)를 도운 것을 매우 기뻐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공이 일찍이 경리에게 말하였다. “지금 도산(島山)을 공격하는데, 우도(右道) 연해에는 적진(賊陣)이 별처럼 늘어서 있으니, 도산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형세상 반드시 군사를 합쳐 구원하러 올 것입니다. 마땅히 한 갈래의 병마를 나누어 외부의 적을 막는다면, 청정(淸正)의 머리를 휘하(麾下)에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천병이 도산(島山)²⁶¹을 12일간 포위하였으나, 성은 작고 견고하며 적 또한 성대하게 방비를 갖추었으므로, 온갖 방법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공은 협력하여 따르며 주선(周旋)하고 창을 베고 이슬을 맞으며 지냈으며, 갑옷에 이[蟣蝨]가 생길 정도였으나 날카로운 기세가 쇠하지 않았다. 마침내 적의 구원병이 크게 이르자 천병이 그로 인해 좌차(左次)²⁶²하였으니, 모든 것이 공의 말과 같았다.
주석:
250. [주-D007] 拾 : 저본(底本)에는 “사(捨)”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백사집・증숭정대부……권공유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남은 무리를 수습하다’는 의미의 ‘수습여진(收拾餘燼)’이 문맥에 맞다.
251. 도체찰사(都體察使): 체찰사(體察使)의 으뜸. 전쟁 등 비상시에 군사·행정권을 가지고 여러 도를 총괄 지휘하던 임시 최고 관직.
252.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로서 전쟁 수행을 총괄했다. 《징비록(懲毖錄)》의 저자이다.
253. 직산(稷山):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정유재란 초기인 1597년 9월, 명나라군과 조선군이 연합하여 남하하는 일본군과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254. 수습(收拾)여진(餘燼): 불타고 남은 것을 거두어들임. 전쟁 후 남은 패잔병이나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비유한다.
255. 흠차(欽差): 황제의 명을 받아 파견되는 사신 또는 관리.
256. 경리 도찰원 도어사(經理都察院都御史): 명나라의 관직명. 경리(經理)는 특정 지역의 군사·재정·민정을 총괄하는 직책이고, 도어사(都御史)는 감찰 기구인 도찰원(都察院)의 고위 관리이다. 양호는 경리 겸 도어사의 자격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257. 양호(楊鎬, ?-1629): 명나라 장수. 경략(經理)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정유재란 때 명군을 지휘했으나, 울산성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258. 총병(總兵): 명나라의 지방 군사령관 직책. 정2품.
259. 마귀(麻貴, ?-1612): 명나라 장수. 임진왜란 때 제독(提督)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260. 울산(蔚山): 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군이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두 차례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261. 도산(島山): 울산성(蔚山城)의 다른 이름. 가토 기요마사가 축조한 일본식 성곽이다.
262. 좌차(左次): 군대가 전투에서 불리하여 후퇴하거나 주둔지를 옮기는 것.
원문:
戊戌秋, 天朝總督軍門大司馬邢玠用三大將, 三路再進: 提督麻貴趨蔚山之路, 提督董一元趨泗川之路, 提督劉綎趨順天之路。 大軍將發, 三大將各有希冀, 要得本國名將, 爲之協隨。 麻貴、劉綎皆要得權元帥, 爭之不已, 上竟以公屬之劉綎。 天兵至順天, 圍倭橋不能拔, 劉提督本無戰心。 公憤恚, 自募各營敢死士勇於衝鋒者, 大呼先登, 請與天兵協力齊進, 則提督曰“試召諸將議之”, 依違而已, 其意已決退矣。 提督攻圍九日, 軍竟無功。 公初隨麻貴, 再隨劉綎。 島山之役, 倭橋之戰, 小大之體有異, 尊卑之序不同。 承事天將, 閣手仰成, 受其羈靮, 奉行惟謹, 不敢有所主張以施其能。 屢遭有爲之機, 躑躅而不敢進, 終使驊騮、山子之才踠足於中途, 抑天意歟? 惜也!
번역문:
무술년(戊戌年, 1598) 가을, 천조(天朝) 총독(總督) 군문(軍門) 대사마(大司馬)²⁶³ 형개(邢玠)²⁶⁴가 세 명의 대장(大將)을 써서 세 길로 다시 진격하였다.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울산(蔚山) 방면으로, 제독 동일원(董一元)²⁶⁵은 사천(泗川)²⁶⁶ 방면으로, 제독 유정(劉綎)²⁶⁷은 순천(順天)²⁶⁸ 방면으로 나아갔다. 대군이 장차 출발하려 할 때, 세 대장이 각기 바라는 바가 있어 본국의 명장(名將)을 얻어 협력하여 따르게 하기를 요구하였다. 마귀와 유정이 모두 권 원수를 얻으려 하여 다툼이 그치지 않자, 상(上)께서 마침내 공을 유정에게 소속시켰다. 천병이 순천에 이르러 왜교(倭橋)²⁶⁹를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유 제독은 본래 싸울 마음이 없었다. 공이 분개하여 스스로 각 영(營)에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돌격하는 병사들을 모집하여, 크게 외치며 먼저 올라가 천병과 협력하여 함께 나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제독은 “시험 삼아 여러 장수를 불러 의논해 보겠다”고 하며 결정을 미룰 뿐, 그의 뜻은 이미 물러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제독이 9일간 포위 공격하였으나 군은 끝내 공이 없었다. 공은 처음에는 마귀를 따르고 다시 유정을 따랐다. 도산(島山) 전투와 왜교(倭橋) 전투는 작고 큰 형세가 다르고 높고 낮은 차례가 같지 않았다. 천장(天將)을 받들어 섬기느라 손을 묶고 이루어지기만 바라며[閣手仰成], 그 굴레와 고삐[羈靮]에 매여 오직 삼가 받들어 행할 뿐, 감히 주장하는 바가 있어 그 능력을 펼치지 못하였다. 여러 차례 공을 세울 기회를 만났으나 머뭇거리며[躑躅]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마침내 화류(驊騮)와 산자(山子)²⁷⁰ 같은 재능이 중도에 발을 절게[踠足] 하였으니, 또한 하늘의 뜻인가? 애석하도다!
주석:
263. 군문 대사마(軍門大司馬): 군문(軍門)은 군영(軍營)의 문 또는 군사 지휘부를 가리키며, 대사마(大司馬)는 병부상서(兵部尙書)의 별칭으로 군정을 총괄하는 최고위직을 의미한다. 형개는 병부상서로서 정유재란 당시 명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했다.
264. 형개(邢玠, 1540-1612): 명나라의 문신. 병부상서로서 정유재란 때 명군을 총지휘했다.
265. 동일원(董一元): 명나라 장수. 정유재란 때 제독(提督)으로 참전하여 사천 전투 등에서 싸웠다.
266. 사천(泗川): 경상남도 사천시. 정유재란 당시 중요한 격전지였다.
267. 유정(劉綎, 1558-1619): 명나라 장수. 정유재란 때 제독(提督)으로 참전하여 순천 왜교성 전투 등을 지휘했다.
268. 순천(順天): 전라남도 순천시. 정유재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던 왜교성(倭橋城)이 있었다.
269. 왜교(倭橋):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에 있던 순천 왜성(倭城)을 가리킨다. 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군이 이곳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270. 화류(驊騮), 산자(山子): 모두 고대 중국의 명마(名馬) 이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을 비유한다. 권율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이다.
원문:
公梨峙之戰, 威聲始著; 幸州之捷, 榮聞遠播。 後行長與義智、調信求和甚至, 要與慶尙兵使金應瑞會於中路。 語未半²⁷¹, 三酋問權元帥有何所求, 切願薦誠。 及淸正願與本國純信人有所講話。 朝廷差山人惟政入其營, 淸正先問權元帥起居。 自是倭人每見本國之人, 必問權元帥何在、近何所爲。 嘗有朝京使臣, 以事至兵部衙門, 尙書石星語次, 謂曰: “爾國群臣, 若得如權某者數人, 吾何憂哉?”
번역문:
공은 이치(梨峙) 전투에서 위엄 있는 명성이 처음 드러났고, 행주(幸州) 대첩에서 영예로운 명성이 멀리 퍼졌다. 후에 행장(行長)이 의지(義智, 소 요시토시)²⁷²와 조신(調信, 데라자와 히로타카)²⁷³과 함께 화의를 구하기를 매우 간절히 하여, 경상 병사(慶尙兵使)²⁷⁴ 김응서(金應瑞)²⁷⁵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를 요구하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²⁷⁶ 세 추장이 권 원수에게 무엇을 구하는지 묻고, 간절히 정성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청정(淸正)이 본국의 신의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하자, 조정에서 산인(山人)²⁷⁷ 유정(惟政)²⁷⁸을 그의 진영으로 보내니, 청정이 먼저 권 원수의 안부를 물었다. 이로부터 왜인들이 매번 본국 사람을 보면 반드시 권 원수가 어디에 있는지, 요즘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일찍이 조경사신(朝京使臣)²⁷⁹이 일 때문에 병부 아문(兵部衙門)에 이르렀을 때, 상서(尙書) 석성(石星)이 말하는 중에 이르기를 “그대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만약 권모(權某) 같은 자를 몇 사람 얻는다면 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석:
271. [주-D008] 半 : 저본(底本)에는 “삼반(三半)”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백사집・증숭정대부……권공유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어미반(語未半)’ 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가 문맥에 자연스럽다.
272. 의지(義智):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 쓰시마(対馬) 도주.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에 속해 참전했으며, 강화 교섭에도 참여했다.
273. 조신(調信):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1563-1633). 임진왜란 때 참전했으며, 주로 병참과 연락 임무를 맡았다.
274. 경상 병사(慶尙兵使):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종2품 무관직.
275. 김응서(金應瑞, 1564-1624):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으로 활약했으며, 강화 교섭에도 참여했다.
276.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문은 ‘어미반(語未半)’이다.
277. 산인(山人): 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로 승려(僧侶)를 가리킨다.
278. 유정(惟政, 1544-1610): 조선 중기의 고승. 임진왜란 때 스승 휴정(休靜)의 명을 받아 승군(僧軍)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 등에 참여했으며, 전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포로 송환 교섭을 벌였다. 호는 사명당(泗溟堂).
279. 조경사신(朝京使臣): 경사(京師), 즉 중국의 수도(당시 베이징)에 조빙(朝聘)하러 가는 사신.
원문:
己亥春, 公在嶺南。 一日, 取一卷子, 箚記壬辰以後前後聖旨, 看過數遍, 曰: “我無嗣, 我死, 無人以揚先德, 我亦本不要賁飾我身後事。 雖然, 有婿李議政在, 必能誌我墓, 如欲尋我平生事, 只此足矣。”【竝遺事。】
번역문:
기해년(己亥年, 1599) 봄, 공이 영남(嶺南)에 있었다. 하루는 한 권의 책자를 가져와 임진년(壬辰年) 이후 전후의 성지(聖旨)²⁸⁰를 차기(箚記)²⁸¹한 것을 여러 번 훑어보고 말하였다. “나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으니, 내가 죽으면 선친의 덕을 드러낼 사람이 없다. 나 또한 본래 내 사후(身後)의 일을 꾸미려 하지 않는다. 비록 그러하나 사위 이 의정(李議政)²⁸²이 있으니, 반드시 나의 묘지명(墓誌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나의 평생의 일을 찾으려 한다면 다만 이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이상은 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280. 성지(聖旨): 임금의 명령이나 분부.
281. 차기(箚記): 중요한 내용이나 자신의 의견 등을 간단히 적어 둔 기록. 메모.
282. 이 의정(李議政): 이항복(李恒福, 1556-1618). 호는 백사(白沙). 권율의 사위이며, 영의정을 지냈다. 권율의 행적을 기록한 《권율 유사(權慄遺事)》를 남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上嘗論水陸諸將之功曰: “李、元海上之鏖, 權慄幸州之捷, 當爲首功。” 此不易之定論。 然其間曲折, 有未盡露者。 權聘君嘗言於余曰: “世以我幸州之事爲功, 此固可謂功也。 然我起自行間, 積功至此, 大小之戰不爲不多, 而全羅熊峙之戰爲最, 幸州次之, 終以幸州顯, 事有不可知者。 蓋熊峙之戰, 在首事之初, 賊氣方銳, 我軍單弱, 且無健卒, 軍情洶洶, 難以爲恃。 乃能出死力血戰, 以不能滿千之弱卒, 當十倍之悍賊, 卒保湖南, 爲國家根本, 此其所以難也。 而當是時, 西路阻絶, 聲問不通, 本道潰散, 人多竄匿。 我雖有功, 無人褒奬, 朝廷無由得聞, 比如無人暗夜自相擊殺, 故功不能顯。 幸州之役, 在我立功之後, 權位已重, 士心已附。 湖南精兵、猛將盡屬手下, 而兵過數千, 地利亦險, 賊之數雖過熊峙, 其氣已衰, 此易與爲攻。 而政當天兵壓臨, 我國諸路勤王兵棋布畿甸, 都城士民之在江華者引領以待, 而我之成功適先於諸陣, 此其功之所以易顯也。”【《白沙集》。】
번역문:
상(上)께서 일찍이 수륙(水陸) 여러 장수들의 공을 논하며 말씀하시기를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의 해상에서의 큰 싸움과 권율의 행주(幸州) 대첩을 으뜸 공로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곡절(曲折)에는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다. 권 빙군(權聘君)²⁸³께서 일찍이 나[余]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나의 행주에서의 일을 공(功)으로 여기는데, 이는 진실로 공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내가 졸병[行間]에서 일어나 공을 쌓아 이 지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전라도 웅치(熊峙)²⁸⁴ 전투가 최고이고 행주가 그다음이다. 그런데 마침내 행주로써 드러났으니, 일의 실상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웅치 전투는 전쟁 초기에 있었고 적의 기세가 막 날카로웠으며 아군은 단독으로 약하고 또한 건장한 병졸이 없었으며, 군대의 상황이 흉흉하여 의지하기 어려웠다. 이에 죽을힘을 내어 혈전(血戰)하여, 천 명을 채우지 못하는 약한 병력으로 열 배나 되는 사나운 적을 상대하여 마침내 호남(湖南)을 보전하여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그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서쪽 길이 막혀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는 무너져 흩어져 사람들이 많이 숨어버렸다. 내가 비록 공이 있었으나 포상하고 장려하는 사람이 없었고 조정에서도 들을 길이 없었으니, 비유하자면 사람 없는 어두운 밤에 서로 치고 죽이는 것과 같아서 공이 드러날 수 없었다. 행주 전투는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고 권위와 지위가 이미 무거워졌으며 병사들의 마음도 이미 따랐다. 호남의 정병(精兵)과 용맹한 장수들이 모두 수하에 속해 있었고 병력은 수천 명이 넘었으며 지리(地利) 또한 험준하였다. 적의 수는 비록 웅치 때보다 많았으나 그 기세는 이미 쇠하였으니, 이는 공격하기 쉬웠다. 그리고 마침 천병(天兵)이 압박해 오고 우리나라 여러 방면의 근왕병(勤王兵)들이 기전(畿甸)에 바둑돌처럼 포진해 있었으며, 도성의 사민(士民)들 중 강화(江華)에 있는 자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의 성공이 마침 여러 진영보다 앞섰으니, 이것이 그 공이 쉽게 드러난 까닭이다.”【《백사집(白沙集)》²⁸⁵에서 인용】
주석:
283. 권 빙군(權聘君): 권율의 자(字)는 언신(彦愼)이다. 빙군(聘君)은 자에 대한 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저자인 이항복이 장인인 권율을 존칭하여 부른 것이다.
284. 웅치(熊峙):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 경계에 있는 고개.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7월, 전주성으로 향하던 일본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치(梨峙) 전투와 시간, 장소가 가까워 종종 혼동되거나 함께 묶여 서술된다. 권율은 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광주 목사로서 전라도 방어에 관여했다.
285. 《백사집(白沙集)》: 이항복(李恒福)의 문집.
원문:
熊峙之戰, 權元帥以光州牧使, 雖受任節制, 然其力戰之功, 則皆出於同福縣監黃進, 而賊兵亦不過數千。 厥後賊擧軍至梨峙, 諸將皆退縮。 黃進獨與魏大奇、孔時億等終日力戰, 賊兵大敗, 伏屍數里, 賊大將亦爲進所射殺, 倭中人至今歎服不已。 無乃白沙久而忘之, 以梨峙認以爲熊峙耶? 但梨峙則權元帥不與焉, 寧有是理也? 大抵梨峙雖曰大戰, 至比於幸州, 則大相懸絶。 況熊峙小戰, 其視幸州, 萬萬不侔。 若以熊峙爲最, 幸州次之, 則幸州之戰, 人安得至今稱之也? 及白沙撰權元帥碑銘、遺事, 改熊峙爲梨峙, 則所親聞聘君之說, 何若是其相反? 定論果如是乎? 變初釜、萊陷, 鳥嶺軍潰, 巡察使李洸領兵至州, 聞大駕西遷, 卽令軍中曰: “已未及矣, 其各罷陣。” 時權元帥駐板峙, 與其參謀官前萬戶朴大樹²⁸⁶及靑巖察訪姜弘壽等馳見洸, 謂曰: “都城失守, 君父播越, 則爲臣子所當挺身赴難, 與賊俱死, 職耳。” 公之罷兵, 有何意歟? 大樹按劍而前, 瞪目睨視, 洸流涕曰: “吾未之思耳。 欲還聚散卒, 軍已潰, 無可奈何。” 遂與權元帥及諸守令同下全州, 因爲再擧, 以此權元帥爲一道多士所推許。 熊峙、幸州之戰, 諸將莫敢違令, 能成大功, 終爲恢復元勳者, 此其權輿, 而白沙前後記事, 無此一款。 余惜其埋沒無傳, 幷錄于此。【《荷潭破寂錄》。】²⁸⁷
번역문:
웅치(熊峙) 전투는 권 원수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서 비록 절제(節制)의 임무를 받았으나, 그 힘써 싸운 공은 모두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에게서 나왔고, 적병 또한 수천에 불과했다. 그 후 적이 대군을 이끌고 이치(梨峙)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퇴축(退縮)하였으나, 황진이 홀로 위대기(魏大奇)²⁸⁸, 공시억(孔時億)²⁸⁹ 등과 함께 종일 힘써 싸워 적병이 대패하고 쓰러진 시체가 수 리(里)에 달했으며, 적의 대장 또한 황진에게 사살되니, 왜인들이 지금까지도 감탄해 마지않는다. 백사(白沙, 이항복)가 오래되어 잊어버리고 이치를 웅치로 잘못 안 것이 아닌가? 다만 이치 전투에는 권 원수가 참여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대저 이치는 비록 대전(大戰)이라 하나 행주에 비하면 크게 차이가 나고, 하물며 웅치 소전(小戰)은 행주와 비교하면 만만(萬萬)으로도 견줄 수 없다. 만약 웅치를 최고로 여기고 행주를 다음으로 친다면, 행주 전투를 사람들이 어찌 지금까지 칭송하겠는가? 백사가 권 원수의 비명(碑銘)과 유사(遺事)를 지으면서 웅치를 이치로 고쳤으니, 직접 빙군(聘君, 권율)에게 들었다는 말과 어찌 이처럼 상반되는가? 정론(定論)이 과연 그러한가? 전쟁 초 부산(釜山)과 동래(東萊)가 함락되고 조령(鳥嶺)의 군대가 무너지자, 순찰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거느리고 주(州)에 이르렀다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중에 명하여 “이미 때가 늦었으니 각기 진을 파하라.”라고 하였다. 이때 권 원수는 판치(板峙)²⁹⁰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의 참모관(參謀官)인 전 만호(前萬戶) 박대수(朴大樹)²⁹¹와 청암 찰방(靑巖察訪)²⁹² 강홍수(姜弘壽)²⁹³ 등과 함께 이광에게 달려가 말하였다. “도성이 함락되고 군부(君父)께서 피란길에 오르셨으니, 신하된 자로서 마땅히 몸을 던져 국난에 나아가 적과 함께 죽는 것이 직분일 뿐입니다. 공께서 군사를 파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박대수가 칼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자, 이광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오.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모으려 하나 군대가 이미 무너졌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 마침내 권 원수 및 여러 수령들과 함께 전주(全州)로 내려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로 인해 권 원수가 일도(一道)의 많은 선비들에게 추앙받게 되었다. 웅치, 행주 전투에서 여러 장수들이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능히 큰 공을 이루어 마침내 회복의 으뜸 공신[元勳]이 된 것은 이것이 그 시작[權輿]²⁹⁴이었는데, 백사의 전후 기록에는 이 대목이 없다. 나[余]²⁹⁵는 그것이 매몰되어 전해지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아울러 여기에 기록한다.【《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인용】
주석:
286. [주-D009] 樹 : 《은봉전서(隱峯全書)・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에는 “수(壽)”로 되어 있다. 아래 “대수(大樹)”의 “수(樹)”도 동일하다. 박대수(朴大樹) 또는 박대수(朴大壽)로 기록이 나뉜다.
287. [주-D010] 荷潭破寂錄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는 해당 구절(“熊峙之戰……幷錄于此。”)이 보이지 않는다고 교감주에 명시되어 있다. 이 인용문의 출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288. 위대기(魏大奇):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
289. 공시억(孔時億): 조선 중기의 인물. 임진왜란 때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290. 판치(板峙): 구체적인 위치는 불명확하나, 당시 전라도 지역의 고개 이름으로 보인다.
291. 박대수(朴大樹):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권율의 참모관으로 활동했다.
292. 청암 찰방(靑巖察訪): 청암역(靑巖驛)의 찰방(察訪). 찰방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 외관직이다. 청암역은 전라도 지역에 있었다.
293. 강홍수(姜弘壽): 조선 중기의 인물. 임진왜란 당시 청암 찰방으로 권율을 도운 것으로 보인다.
294. 권여(權輿): 사물의 시작, 시초, 근원을 의미한다.
295. 여(余): 나. 이 글의 저자인 하담(荷潭)을 가리킨다. 하담은 김시양(金時讓) 또는 이제(李穧)의 호로 알려져 있으나, 《하담파적록》의 저자는 이제(李穧, 1591-1640)로 추정된다.
이순신(李舜臣)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舜臣【忠武公。】
字汝諧, 德水人, 貞靖公邊之五代孫。 嘉靖乙巳生。 宣祖九年丙子, 登武科。 歷司僕、主簿、造山萬戶、井邑縣監。 辛卯, 擢全羅左水使。 癸巳, 拜統制使。 戊戌, 中丸卒, 年五十四。 贈領議政, 錄宣武勳, 追封德豐府院君。
번역문:
이순신(李舜臣)【충무공(忠武公)¹이다.】
자는 여해(汝諧)이고, 덕수(德水)² 사람으로 정정공(貞靖公) 변(邊)³의 5대손이다. 가정(嘉靖)⁴ 을사년(1545)에 태어났다. 선조(宣祖) 9년 병자년(1576)에 무과(武科)⁵에 급제하였다. 사복(司僕)⁶, 주부(主簿)⁷, 조산만호(造山萬戶)⁸, 정읍현감(井邑縣監)⁹을 역임하였다. 신묘년(1591)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¹⁰에 발탁되었다. 계사년(1593)에 통제사(統制使)¹¹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98)에 탄환에 맞고 졸(卒)하니, 나이 54세였다. 영의정(領議政)¹²에 추증(追贈)되고 선무공신(宣武功臣)¹³에 녹훈(錄勳)되었으며,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¹⁴에 추봉(追封)되었다.
주석:
-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시호(諡號). 인조(仁祖) 21년(1643)에 내려졌다. 무신(武臣)에게 내리는 시호 중 으뜸으로 여겨진다.
- 덕수(德水): 본관(本貫). 덕수 이씨(德水 李氏)이다.
- 정정공(貞靖公) 변(邊): 이순신의 외5대조(外五代祖)인 정정공(貞靖公) 이변(李邊, 1391~1473)을 가리킨다. 정정(貞靖)은 시호이다.
- 가정(嘉靖):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 무과(武科): 조선 시대에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과거 시험.
- 사복(司僕): 사복시(司僕寺)의 관원을 가리키는 듯하다. 사복시는 조선 시대에 궁중의 가마[輿馬], 마구(馬廐), 목장 등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실제로는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종6품)를 지낸 바 있다.
- 주부(主簿): 조선 시대 여러 관청에 두었던 종6품 관직. 이순신은 병조정랑(兵曹正郎) 겸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를 거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지냈다.
- 조산만호(造山萬戶): 함경도 온성(穩城)에 속한 조산보(造山堡)의 만호(萬戶). 만호는 조선 시대 각 도의 여러 진(鎭)에 파견된 종4품의 무관직이다.
- 정읍현감(井邑縣監): 전라도 정읍현(井邑縣)의 수령인 현감(縣監). 종6품.
-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의 줄임말. 정3품 무관직으로, 전라도 동쪽 지역의 수군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 통제사(統制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줄임말. 정2품 또는 종2품의 무관직으로,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통합 지휘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순신이 초대 통제사였다.
- 영의정(領議政):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사후(死後)에 관직을 높여주는 것을 추증(追贈)이라 한다.
-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조선 시대에 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위(爵位). 부원군(府院君)은 왕비의 아버지나 1등 공신에게 주어졌다. 덕풍(德豐)은 이순신의 본관인 덕수(德水)와 그의 고조부인 이백록(李百祿)이 봉해진 풍해군(豐海君)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원문:
公兒時, 英爽不羈, 與群兒戲, 常作戰陣狀, 群兒推爲元帥。 閭里有不快意, 輒凌挫之, 里人畏之。 及長, 折節恭謹, 讀書通大義。 然不屑佔畢業, 遂從武擧, 騎射絶倫。 雖游於武人, 高簡靜默, 口不褻言, 儕流咸憚出其下。【澤堂李植撰諡狀。】
번역문:
공(公)은 어릴 때 영특하고 활달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며, 여러 아이들과 놀 때 항상 전쟁놀이(戰陣狀)를 하여 아이들이 원수(元帥)로 추대하였다. 마을(閭里)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번번이 그를 꺾어 놓으려 하니,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자라서는 절개(節槪)를 지키고 공손하며 삼가고, 독서하여 대의(大義)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문과(文科) 공부¹⁵에 뜻을 두지 않아 마침내 무과(武科)를 따라, 기마(騎馬)와 활쏘기[騎射]가 뛰어나게 뛰어났다. 비록 무인(武人)들과 어울렸으나, 고상하고 간결하며 조용하고 과묵하여 입으로 함부로 말하지 않으니, 동료(儕流)들이 모두 그 아래에 서기를 꺼렸다.【택당(澤堂) 이식(李植)¹⁶이 지은 시장(諡狀)¹⁷에서 인용】
주석:
15. 점필업(佔畢業): 문필(文筆)에 종사하는 일. 즉, 글공부를 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관(文官)이 되는 길을 의미한다. '불설(不屑)'은 '달갑게 여기지 않다'는 뜻으로, 문관의 길에 뜻을 두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16. 이식(李植, 1584~164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택당(澤堂).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17. 시장(諡狀):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글. 대상의 가계, 생애, 공적, 성품 등을 기록하여 행적을 증명한다. 이식이 이순신의 시장을 지었다.
원문:
公嘗應擧就講, 至《張良傳》, 考官曰: “良從赤松子遊, 眞不死耶?” 對曰: “《綱目》書留侯張良卒, 則良之志, 豈眞欲仙也?” 一座大奇之。【白沙李恒福撰遺事。】
번역문:
공이 일찍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강(講)¹⁸에 나아갔는데, 《장량전(張良傳)》¹⁹에 이르자, 시험관(考官)이 묻기를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²⁰를 따라 노닐었다 하니, 참으로 죽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강목(綱目)》²¹에 유후(留侯) 장량이 졸(卒)하였다고 쓰여 있으니, 장량의 뜻이 어찌 참으로 신선(神仙)이 되고자 함이었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²²이 지은 유사(遺事)²³에서 인용】
주석:
18. 강(講): 과거 시험의 한 과목. 경서(經書)나 역사서의 특정 구절에 대해 수험생이 강론(講論)하고 시험관이 질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 《장량전(張良傳)》: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개국 공신인 장량(張良)의 일대기를 다룬다.
20. 적송자(赤松子):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선(神仙)의 이름. 《사기》 〈유후세가〉에는 장량이 말년에 곡기를 끊고 도인술(導引術)을 익히며 적송자를 따라 노닐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21. 《강목(綱目)》: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 편년체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재편성하고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포폄(褒貶)을 가한 책이다. 이순신은 《강목》의 기록을 근거로 장량이 실제로 신선이 된 것이 아니며, 그의 본뜻도 신선이 되는 데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기록에 근거한 합리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22.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 오성(鰲城)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덕형(李德馨)과의 우정 이야기로 유명하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다.
23. 유사(遺事): 죽은 사람이 남긴 행적이나 일화에 관한 기록. 이항복이 이순신의 일화를 기록한 글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원문:
旣出身, 絶意進取, 不事干謁。 爲訓鍊奉事時, 兵曹判書金貴榮有孼女, 欲與公爲妾, 公曰: “吾初出仕路, 豈宜托迹權門?” 立謝媒人。【諡狀。】
번역문:
이미 출신(出身)²⁴한 뒤로는 나아가려는 뜻을 끊고 간알(干謁)²⁵을 일삼지 않았다.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²⁶로 있을 때, 병조판서(兵曹判書) 김귀영(金貴榮)²⁷에게 얼녀(孼女)²⁸가 있었는데 공에게 첩(妾)으로 주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 벼슬길에 나섰는데, 어찌 권세 있는 집안(權門)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고 즉시 매파(媒婆)에게 사절하였다.【시장(諡狀)에서 인용】
주석:
24. 출신(出身):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감.
25. 간알(干謁): 벼슬이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권세 있는 사람을 찾아가 만나는 것.
26.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훈련원(訓鍊院)의 종8품 관직. 훈련원은 조선 시대에 무예의 교습과 병법의 강론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27. 김귀영(金貴榮, 1519~1592): 조선 중기의 문신.
28. 얼녀(孼女): 첩(妾)이 낳은 딸. 서녀(庶女)와는 구분되는데, 서녀는 양인(良人) 첩에게서 난 자녀이고, 얼녀(孽女)는 천인(賤人) 첩에게서 난 자녀를 가리킨다.
원문:
西厓柳相公與公少相善, 每稱才可將。 栗谷李先生長銓時, 因西厓求見, 公不肯曰: “同宗可相見, 在銓地則不可見。”【行狀。】
번역문: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²⁹은 공과 젊어서부터 서로 잘 지냈는데, 매번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율곡(栗谷) 이선생(李先生)³⁰이 이조판서[長銓]³¹로 있을 때 서애를 통해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승낙하지 않고 말하기를 “같은 종친(同宗)이니 서로 만날 수는 있지만, 전선(銓選)을 담당하는 자리에 있다면 만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행장(行狀)³²에서 인용】
주석:
29.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
1607)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 ‘상공(相公)’은 재상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천거하고 후원했다.
30. 율곡(栗谷) 이선생(李先生):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
1584)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31. 장전(長銓): 전선(銓選), 즉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일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또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조판서를 의미한다. 이이는 1582년(선조 15)과 1583년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32.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자, 호, 본관, 생애, 업적, 저술 등을 기록한 글. 보통 시장(諡狀)보다 상세하다.
원문:
兵曹正郞徐益, 有所親在訓鍊院, 欲越次薦報, 舜臣以院中掌務官, 執不可。 益招舜臣, 庭詰之, 舜臣辭色不變, 直辨無撓。 益大怒, 盛氣臨之, 舜臣從容酬答, 終不少沮。 益本多氣傲人, 雖同僚亦憚之, 難與爭辨。 是日下吏在階下, 皆相顧吐舌曰: “此官敢與本曹抗, 獨不顧前路耶?”【《懲毖錄》。】
번역문:
병조정랑(兵曹正郎)³³ 서익(徐益)³⁴이 친한 사람 중 훈련원(訓鍊院)에 있는 자가 있어 차례를 넘어 천거하여 보고하고자 하였는데, 순신이 훈련원의 장무관(掌務官)³⁵으로서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서익이 순신을 불러 뜰에서 꾸짖었으나, 순신은 말과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고 곧게 변론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서익이 크게 노하여 대단한 기세로 다그쳤으나, 순신은 조용히 응답하며 끝내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서익은 본래 기개가 넘치고 남에게 오만하여 동료들 또한 그를 꺼려서 함께 다투고 변론하기 어려워하였다. 이날 아랫사람 관리[下吏]들이 섬돌 아래에 있다가 모두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 관리가 감히 본조(本曹)³⁶에 맞서니, 유독 앞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였다.【《징비록(懲毖錄)》³⁷에서 인용】
주석:
33. 병조정랑(兵曹正郎): 병조(兵曹)의 정5품 관직. 병조는 국방, 무관 인사 등을 담당하던 중앙 관청이다.
34. 서익(徐益, 1542~1587): 조선 중기의 문신.
35. 장무관(掌務官): 업무를 주관하는 관리. 훈련원의 실무 책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36. 본조(本曹): 해당 관청. 여기서는 병조(兵曹)를 가리킨다.
37. 《징비록(懲毖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의 원인, 경과, 결과 등을 기록한 책. ‘징비(懲毖)’는 《시경(詩經)》 〈주송(周頌) 소자(小毖)〉의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간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교훈 삼아 다시는 그러한 환란을 겪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문:
爲鉢浦萬戶, 主將遣人欲取堡庭桐木爲琴, 公不許曰: “此官家木也。 植者旣有意, 斫者又何意耶?” 主將噎喟, 思有以中公者, 終公之在官拾掇, 不得毫毛罪。【遺事。】
번역문:
발포만호(鉢浦萬戶)³⁸로 있을 때, 주장(主將)³⁹이 사람을 보내 보(堡)의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고 하자, 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는 관가(官家)의 나무이다. 심은 사람에게 이미 뜻이 있었는데, 베려는 자는 또 무슨 뜻인가?”라고 하였다. 주장이 분하고 한탄하며 공을 모함할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공이 관직에 있는 동안 끝내 샅샅이 찾아보아도 털끝만한 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38. 발포만호(鉢浦萬戶): 전라도 고흥(高興)에 있던 발포진(鉢浦鎭)의 만호(萬戶). 종4품.
39. 주장(主將): 주된 장수. 여기서는 이순신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성박(成搏)을 가리킨다.
원문:
爲乾原堡權管。 有賊胡亐乙只乃大, 久爲邊患, 公到任, 卽設奇誘致, 生縛以獻。 兵使嫌其事不由己, 反以擅兵請罪, 朝廷內嘉其功, 而賞不行。
번역문:
건원보 권관(乾原堡權管)⁴⁰으로 있을 때, 적호(賊胡) 우을기내대(亐乙只乃大)⁴¹라는 자가 있어 오랫동안 변방의 우환이 되었는데, 공이 부임하자 즉시 기책(奇策)을 베풀어 유인하여 사로잡아 바쳤다. 병사(兵使)⁴²가 그 일이 자신을 통하지 않았음을 꺼려, 도리어 군사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하여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속으로 그 공을 가상히 여겼으나 상(賞)은 시행되지 않았다.
주석:
40. 건원보 권관(乾原堡權管): 함경도 경원(慶源)에 속했던 건원보(乾原堡)의 임시 책임자. 권관(權管)은 정식 관리가 임명되기 전까지 임시로 직무를 대행하는 직책이다.
41. 우을기내대(亐乙只乃大): 당시 함경도 변경을 침범하던 여진족(女眞族) 추장의 이름으로 보인다.
42. 병사(兵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줄임말. 각 도의 군사를 지휘하던 종2품 무관직.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는 김우서(金禹瑞)였다.
원문:
丁亥, 授造山萬戶。 時方伯建議, 設鹿屯島屯田, 付公兼管。 公以地遠兵少爲憂, 屢請添戍, 兵使李鎰不許。 及秋熟, 虜果擧兵搗寨, 公挺身拒戰, 射仆其酋, 虜卽捲退。 公追擊, 奪還被擄屯卒六十餘人。 方戰, 公中流矢, 潛自拔⁴³矢, 顔色不動, 一軍無有知者。 兵使欲殺公自解, 陳刑具, 將斬之。 軍官等環視泣訣, 勸酒壓怖, 公正色曰: “死生命也。 飮醉何爲?” 卽就庭抗辨, 不肯署狀。 兵使意沮, 止囚而聞, 宣廟察其無罪, 命從軍自效。 俄以擊反胡獻級, 蒙宥。
번역문:
정해년(1587)에 조산만호(造山萬戶)에 제수되었다. 이때 방백(方伯)⁴⁴이 건의하여 녹둔도(鹿屯島)⁴⁵에 둔전(屯田)⁴⁶을 설치하고 공에게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공이 땅이 멀고 병사가 적은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수자리 병사[戍]를 늘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병사(兵使) 이일(李鎰)⁴⁷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에 곡식이 익자 오랑캐[虜]가 과연 군사를 일으켜 보루[寨]를 습격하였는데, 공이 몸소 나서서 막아 싸우며 그 추장(酋長)을 쏘아 쓰러뜨리니, 오랑캐가 즉시 물러났다. 공이 추격하여 사로잡혔던 둔전병[屯卒] 60여 명을 되찾아왔다. 싸우던 중 공이 유시(流矢)에 맞았으나,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고⁴⁸ 얼굴빛이 동요하지 않아 온 군사 중에 아는 이가 없었다. 병사가 공을 죽여 스스로 변명하려 하여, 형구(刑具)를 늘어놓고 장차 베려 하였다. 군관(軍官) 등이 둘러서서 울며 작별하고 술을 권하여 두려움을 누르려 하자, 공이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다. 술 마시고 취하여 무엇 하겠는가?” 하고, 즉시 뜰로 나아가 항변하며 공술서[狀]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병사의 뜻이 꺾여, 가두기만 하고 보고하니, 선조(宣廟)⁴⁹께서 그 죄 없음을 살피시고 종군(從軍)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도록 명하셨다. 얼마 후 반란한 오랑캐를 쳐서 목을 바친 공으로 용서받았다.
주석:
43. [주-D001] 拔 : 저본(底本)에는 “투(投)”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백사집(白沙集)・고통제사리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투(投)'는 '던지다'는 의미이고, '발(拔)'은 '뽑다'는 의미이므로 문맥상 '발(拔)'이 옳다.
44.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의 별칭. 각 도의 으뜸 벼슬. 당시 함경도 관찰사는 정언신(鄭彦信)이었다.
45. 녹둔도(鹿屯島): 두만강 하류에 있던 섬. 당시 여진족과의 접경 지역이었다.
46. 둔전(屯田): 국경 지대나 군사 요충지에서 군인 또는 농민에게 토지를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군량(軍糧)을 조달하던 제도 또는 그 토지.
47. 이일(李鎰, 1538~1601):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초기 상주(尙州) 전투에서 패전하였다.
48. 발시(拔矢): 화살을 뽑음. 주석 [주-D001] 참조.
49. 선묘(宣廟):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의 묘호(廟號).
원문:
己丑, 拜井邑縣監, 甚有治聲。 都事曺大中辭連鄭汝立逆獄, 被追詣理。 金吾郞搜取文書, 見公有《答問書》, 密語公欲去之。 公曰: “吾書無他語, 且已在搜中, 不可不上。” 竟無所坐。 大中之柩過邑前, 公具奠哭送。 人有詰者, 公曰: “曺公不服而死, 其罪不可知。 纔經本道, 使客未可恝視也。” 鄭相彦信亦繫獄。 公適隨牒至京, 以其爲舊帥也, 詣獄門候問, 聞者義之。【竝諡狀。】
번역문:
기축년(1589)에 정읍현감(井邑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다스림의 명성이 매우 높았다. 도사(都事)⁵⁰ 조대중(曺大中)⁵¹이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⁵²에 연루되어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었다. 금오랑(金吾郞)⁵³이 문서를 수색하다가 공이 보낸 답문서(答問書)를 발견하고, 공에게 몰래 말하여 그것을 없애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 편지에는 다른 말이 없고, 또 이미 수색하는 가운데 있으니 올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아무 죄에도 연좌되지 않았다. 조대중의 영구(靈柩)가 고을 앞을 지나가자, 공이 제물(奠物)을 갖추고 곡(哭)하며 보냈다. 어떤 사람이 나무라자, 공이 말하기를 “조공(曺公)은 죄에 복종하지 않고 죽었으니 그 죄를 알 수 없다. 이제 막 본도(本道)를 지나가는데, 사객(使客)⁵⁴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정상(鄭相) 언신(彦信)⁵⁵ 또한 옥에 갇혔다. 공이 마침 공문(牒)을 따라 서울에 이르렀는데, 그가 옛 수령(帥)이었으므로 옥문(獄門)에 나아가 문안하니, 듣는 자들이 의롭게 여겼다.【이상 시장(諡狀)에서 인용】
주석:
50. 도사(都事): 조선 시대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 밑에 속한 종5품 관직. 감찰 업무 등을 담당했다. 조대중은 당시 전라도 도사였다.
51. 조대중(曺大中, ?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하였다.
52. 정여립 역모 사건(鄭汝立逆獄):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옥사. 전주 출신의 정여립이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고변으로 시작되어, 동인(東人) 세력이 대거 숙청되는 기축옥사(己丑獄事)로 확대되었다.
53. 금오랑(金吾郞): 의금부(義禁府)의 도사(都事) 또는 경력(經歷)을 가리키는 별칭. 의금부는 왕명에 따라 중죄인을 다스리던 사법기관이다.
54. 사객(使客): 사신(使臣)과 빈객(賓客). 여기서는 죽은 조대중을 가리킨다.
55. 정상(鄭相) 언신(彦信): 재상 정언신(鄭彦信, 1527
1591)을 가리킨다. 정여립 사건 당시 정승(좌의정)이었으나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순신이 함경도에 있을 때 관찰사였으므로 '옛 수령(舊帥)'이라고 한 것이다.
원문:
壬辰五月, 全羅水軍節度使李舜臣赴援慶尙道, 大敗倭兵于巨濟之前洋。 倭兵之渡海也, 慶尙右水使元均知勢不敵, 悉沈戰艦、戰具, 散水軍萬餘人, 獨與玉浦萬戶李雲龍、永登萬戶禹致績棲泊于南海縣前, 欲尋陸避賊。 雲龍抗言曰: “使君受國重寄, 義當死於封內。 此處乃兩湖⁵⁶咽喉, 失此處則湖西危矣。 今吾衆雖散, 猶可保聚, 湖南水軍可請來援也。” 均從其計, 遣栗浦萬戶李英男詣舜臣請援。 舜臣方聚諸浦舟師于前洋, 欲待寇至而戰。 聞英男言, 諸將多以爲: “我守我疆且不足, 何暇赴他道耶?” 惟鹿島萬戶鄭運、軍官宋希立慷慨涕泣, 勸舜臣進擊以爲: “討賊無彼此道。 先挫賊鋒, 則本道亦可保也。” 舜臣大悅。 彦⁵⁷陽縣監魚泳潭自請爲水路嚮導居前, 遂會均於巨濟前洋。 均使雲龍、致績爲先鋒, 到玉浦, 遇賊船三十隻, 進擊大破之, 餘賊登陸而走, 盡焚其船而還。 復戰于露梁津, 燒賊船十三隻, 賊皆溺死。 先是, 舜臣大修戰備, 自以意造龜船。 其制船上鋪板如龜背, 上有十字細路, 容我人通行, 餘皆列揷刀錐。 前作龍頭, 口爲銃穴,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左右各有銃穴六, 藏兵其底。 四面發砲, 進退縱橫, 捷速如飛。 戰時覆以編茅, 使錐刀不露, 賊超登則掐于錐刀, 掩圍則火銃齊發。 橫行賊船中, 我軍無所損, 而所向披靡, 以此常勝。 朝廷見舜臣捷報, 賞加嘉善。【《宣廟寶鑑》。】
번역문:
임진년(1592) 5월에 전라수군절도사(全羅水軍節度使) 이순신이 경상도(慶尙道)로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바다[前洋]에서 왜병(倭兵)을 크게 무찔렀다. 왜병이 바다를 건너올 때,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⁵⁸ 원균(元均)⁵⁹은 형세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가라앉히고 수군(水軍) 만여 명을 흩어버린 뒤, 홀로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⁶⁰, 영등만호(永登萬戶) 우치적(禹致績)⁶¹과 함께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면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운룡이 항거하며 말하기를 “사군(使君)⁶²께서는 나라의 중대한 부탁을 받으셨으니, 의리상 마땅히 봉지(封地)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⁶³의 목구멍이니, 이곳을 잃으면 호서(湖西)가 위태로워집니다. 지금 우리 무리가 비록 흩어졌으나 오히려 보전하여 모을 수 있고, 호남(湖南) 수군에게 와서 구원해 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⁶⁴을 보내 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순신은 마침 여러 포구의 수군[舟師]을 앞바다에 모아 놓고 적이 오기를 기다려 싸우고자 하였다. 이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 대부분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우리 강역(疆域)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道)로 달려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오직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⁶⁵과 군관(軍官) 송희립(宋希立)⁶⁶만이 강개(慷慨)하여 눈물을 흘리며 순신에게 나아가 공격할 것을 권하며 아뢰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 피차의 도(道)가 없습니다. 먼저 적의 칼날을 꺾으면 본도(本道) 또한 보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언양현감(彦陽縣監)⁶⁷ 어영담(魚泳潭)⁶⁸이 스스로 수로(水路)의 향도(嚮導)가 되어 앞장서기를 청하니, 마침내 원균과 거제 앞바다에서 만났다. 원균이 이운룡과 우치적을 선봉(先鋒)으로 삼아 옥포(玉浦)에 도착하여 적선(賊船)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크게 깨뜨리니, 남은 적들은 육지에 올라 달아났고, 그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다시 노량진(露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보다 앞서 순신은 전비(戰備)를 크게 정비하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거북선(龜船)을 만들었다. 그 제도는 배 위에 판자를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위에는 십(十)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우리 군사가 통행할 수 있게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줄지어 꽂았다. 앞에는 용머리[龍頭]를 만들어 입을 총 구멍[銃穴]으로 삼았고, 뒤에는 거북 꼬리[龜尾]를 만들어 꼬리 아래에 총 구멍을 두었다. 좌우에 각각 총 구멍 여섯 개가 있었고, 병사들은 그 밑바닥에 숨었다. 사면에서 포(砲)를 쏘며 나아가고 물러남이 종횡(縱橫)하여 날듯이 빨랐다. 싸울 때에는 엮은 띠풀[編茅]로 덮어 송곳과 칼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으므로,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렸고, 에워싸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적선(賊船) 속을 가로질러 다녀도 아군(我軍)은 손상이 없었으나, 향하는 곳마다 적들이 쓰러지니(披靡), 이로써 항상 승리하였다. 조정에서 순신의 첩보(捷報)를 보고, 상(賞)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⁶⁹의 품계를 더하였다.【《선묘보감(宣廟寶鑑)》⁷⁰에서 인용】
주석:
56. [주-D002] 湖西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신도비(神道碑)》 및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조(宣祖朝)》 임진(25년)에는 “양호(兩湖)”로 되어 있다. 양호(兩湖)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고, 호서(湖西)는 충청도를 가리킨다. 문맥상 남해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역이므로 '양호의 목구멍'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57. [주-D003] 彦 : 본 인물의 전후 서술, 《선조실록》 25년 6월 28일 및 8월 16일, 《이충무공전서・연보》에 근거할 때 “광(光)”이 되어야 한다. 즉,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이다. 《선조실록》의 “김영담(金泳潭)”은 “어영담(魚泳潭)”의 오류이다.
58.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의 줄임말. 정3품 무관직으로, 경상도 서쪽 지역의 수군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59. 원균(元均, 1540
1597):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수사였으며, 후에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했다.
60. 이운룡(李雲龍, 1562
1610): 조선 중기의 무신. 옥포만호로서 옥포 해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61. 우치적(禹致績, 1558
?): 조선 중기의 무신. 영등포만호로서 옥포 해전에 참전하였다.
62. 사군(使君): 절도사(節度使), 관찰사(觀察使) 등 ‘사(使)’자가 붙는 관직의 존칭. 여기서는 원균을 가리킨다.
63. 양호(兩湖): 전라도와 충청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 주석 [주-D002] 참조.
64. 이영남(李英男, 1563
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율포만호로서 원균의 명으로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사천(泗川) 해전에서 전사했다.
65. 정운(鄭運, 1543
1592): 조선 중기의 무신. 녹도만호로서 이순신 휘하에서 활약하다 부산포(釜山浦) 해전에서 전사했다.
66. 송희립(宋希立, 1553
1623):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한 군관.
67. 언양현감(彦陽縣監): 주석 [주-D003]에 따라 광양현감(光陽縣監)으로 보아야 한다.
68. 어영담(魚泳潭, 1532~1594): 조선 중기의 무신. 광양현감으로서 수로 안내를 자청하여 이순신 함대의 첫 출전에 기여했다.
69.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정2품 하계(下階)의 문무관 품계명.
70. 《선묘보감(宣廟寶鑑)》: 《국조보감(國朝寶鑑)》 중 선조(宣祖) 시대의 기록을 가리킨다. 《국조보감》은 역대 왕들의 모범이 될 만한 언행과 치적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원문:
是戰也, 公夢見白頭老翁, 蹴公起曰: “賊來矣!” 公蹶然驚起, 促領戰艦, 會元均于露梁, 則賊果來矣。 初一交戰, 焚破一船。 追至泗川洋中, 遙見海上一山, 有賊百餘, 長蛇而陣, 其下有船十二艘, 緣岸列泊。 早潮已退, 港口水淺, 海舟不得進。 公曰: “我若佯退, 賊必乘船逐我。 今以計引出洋中, 我以巨艦合擊, 蔑不勝矣。” 遂鳴螺回船, 行未一里, 賊果乘船逐之。 公令龜船突進, 先嘗賊陣, 焚其船十二艘, 餘賊遠望, 頓足叫呼。 方戰, 賊丸中公左肩, 貫徹至背, 公猶執弓注矢, 督戰不已。 及戰罷, 公令人用刀尖挑出, 一軍始知公中丸, 莫不愕然。 日暮, 回陣於蛇梁前洋, 軍中夜驚, 擾亂不止, 公堅臥不起, 良久使人搖鈴, 一軍乃定。【遺事。】
번역문:
이 싸움에서 공이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공을 차서 일으키며 말하기를 “적이 온다!”라고 하였다. 공이 벌떡 놀라 일어나 급히 전함(戰艦)을 거느리고 노량(露梁)에서 원균(元均)과 합류하니, 과연 적이 왔다. 처음 한 차례 교전(交戰)하여 적선 한 척을 불태워 깨뜨렸다. 추격하여 사천(泗川) 앞바다 가운데 이르러, 멀리 바다 위 한 산에 적 100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래에는 배 12척이 해안을 따라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이른 조수[早潮]가 이미 물러가 항구(港口)의 물이 얕아 전함[海舟]이 나아갈 수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거짓으로 물러나면 적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쫓을 것이다. 이제 계책으로 유인하여 넓은 바다로 끌어낸 뒤, 우리가 큰 배[巨艦]로 합세하여 공격하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소라[螺]를 불어 배를 돌려 1리(里)도 못 가서, 적이 과연 배를 타고 쫓아왔다. 공이 거북선(龜船)에게 명하여 돌진하여 먼저 적진(賊陣)을 맛보게 하여 그 배 12척을 불태우니, 남은 적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부르짖었다. 싸우던 중 적의 탄환이 공의 왼쪽 어깨에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공은 여전히 활을 잡고 화살을 메기며 전투를 독려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싸움이 끝나자 공이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후벼 파내게 하니, 온 군사가 비로소 공이 탄환에 맞았음을 알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 사량(蛇梁) 앞바다로 진을 돌렸는데, 군중(軍中)에서 밤중에 놀라 요란함이 그치지 않자, 공이 굳건히 누워 일어나지 않다가 한참 뒤에 사람을 시켜 요령(搖鈴)을 흔들게 하니, 온 군사가 마침내 안정되었다.【유사(遺事)에서 인용】
원문:
李舜臣於巨濟前洋, 遇賊船四百餘艘, 大戰良久, 未有勝負。 舜臣謂諸將曰: “彼賊船上建三重樓, 飾以金碧, 有一賊踞床指揮, 此必大將。 我之龜船, 輕而疾行, 又可避丸, 若使二三龜船, 直衝賊䑸, 得梟此賊, 餘必自潰。” 遂選壯士百餘人, 分乘三龜船, 出入賊船間, 疾如飛梭, 賊莫敢近。 遂犯三重樓船, 出入賊船, 百餘人一時呼噪而出, 矢如雨集。 賊將被箭至三, 猶不避箭, 中腦始仆。 舜臣等望見其戰甚酣, 亦鼓譟直進, 賊船遂崩潰, 溺死者不能勝記, 得器械無算。 賊自是不敢直犯全羅道。 蓋元均、李舜臣一處合戰之力, 而元均則本道物力已皆蕩殘, 得舜臣成此功云。【《寄齋雜記》。】
번역문:
이순신이 거제 앞바다에서 적선 400여 척을 만나 오랫동안 크게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순신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저 적선 위에 삼중 누각(三重樓)을 세우고 금색과 푸른색[金碧]으로 장식하였으며, 한 적(賊)이 평상[床]에 걸터앉아 지휘하고 있으니, 이는 필시 대장(大將)일 것이다. 우리의 거북선은 가볍고 빠르게 나아가며 또한 탄환을 피할 수 있으니, 만약 두세 척의 거북선으로 하여금 곧바로 적의 소굴[賊䑸]⁷¹로 돌격하여 이 적의 목을 베게 한다면, 나머지는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장사(壯士) 100여 명을 뽑아 세 척의 거북선에 나누어 타고 적선 사이를 드나드니, 빠르기가 나는 북[飛梭]과 같아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마침내 삼중 누각선(三重樓船)을 침범하여 적선을 드나드는데, 100여 명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나오니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적장(賊將)이 화살을 세 대나 맞고도 여전히 화살을 피하지 않다가 머리에 맞고서야 비로소 쓰러졌다. 순신 등이 그 싸움이 매우 치열한 것을 바라보고 또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곧바로 나아가니, 적선이 마침내 무너져 물에 빠져 죽은 자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고, 얻은 기계(器械)는 셀 수 없었다. 이로부터 적이 감히 전라도(全羅道)를 바로 침범하지 못하였다. 대개 원균과 이순신이 한곳에서 합전(合戰)한 힘이었으나, 원균은 본도(本道)의 물력(物力)이 이미 모두 소진되었으므로 순신의 도움을 얻어 이 공(功)을 이루었다고 한다.【《기재잡기(寄齋雜記)》⁷²에서 인용】
주석:
71. 적송(賊䑸): 적의 소굴, 적의 본거지. '䑸'는 배 밑바닥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적의 지휘선 또는 핵심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72. 《기재잡기(寄齋雜記)》: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문벌, 고사(故事), 인물평, 시화(詩話)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문:
六月四日, 進至唐項浦前洋, 全羅右水使李億祺領戰船二十五艘來會。 先是, 諸將常以孤軍深入爲憂, 至是, 見億祺來, 無不增氣。 翌日, 諸軍出外洋, 諸賊陣於唐項浦前。 公先遣哨船往探形勢, 哨船纔出海口, 卽放砲報變。 諸軍一時促櫓, 首尾連亘, 魚貫而進。 至召所江, 賊船二十六艘擺列港口, 中有一大船, 上設三層板閣, 外垂黑綃帳, 前立靑蓋。 遙見帳內, 隱隱有侍立之狀, 知其爲頭酋。 戰未數合, 公佯敗而退, 層閣大船見公敗退, 擧帆直出。 諸將挾擊, 乘銳崩之。 賊酋中矢而死, 焚船一百餘隻, 斬賊二百一十餘級, 溺水死者甚衆。 事聞, 進階資憲。【遺事。】
번역문:
6월 4일에 당항포(唐項浦)⁷³ 앞바다까지 나아가니,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⁷⁴ 이억기(李億祺)⁷⁵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러 장수들이 항상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억기가 오는 것을 보고 기세가 더해지지 않음이 없었다. 다음 날 여러 군사가 외양(外洋)으로 나가니, 여러 적들이 당항포 앞에 진(陣)을 치고 있었다. 공이 먼저 초선(哨船)⁷⁶을 보내 형세를 정탐하게 하였는데, 초선이 겨우 해구(海口)를 나가자마자 즉시 포(砲)를 쏘아 변고를 알렸다. 여러 군사가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머리와 꼬리가 이어져 물고기가 꿰어 나아가듯[魚貫]⁷⁷ 진격하였다. 소소강(召所江)⁷⁸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항구에 배열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큰 배 한 척이 있어 위에 삼층 판각(三層板閣)을 설치하고 밖에는 검은 비단[黑綃] 휘장을 드리웠으며 앞에는 푸른 일산[靑蓋]을 세웠다. 멀리서 휘장 안을 보니 희미하게 모시고 서 있는 모습이 보여, 그가 우두머리 추장[頭酋]임을 알았다. 싸운 지 몇 합(合)이 되지 않아 공이 거짓 패하여 물러나니, 층각(層閣)이 있는 큰 배가 공이 패하여 물러나는 것을 보고 돛을 올리고 곧바로 나왔다. 여러 장수들이 협공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타고 무너뜨렸다. 적의 추장이 화살에 맞아 죽었고, 불태운 배는 100여 척, 목을 벤 적은 210여 급(級)이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일이 알려지자 품계(品階)가 자헌대부(資憲大夫)⁷⁹로 올랐다.【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73. 당항포(唐項浦):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회화면(會華面)에 있는 포구. 임진왜란 때 이순신 함대가 왜 수군을 크게 격파한 곳이다.
74.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의 줄임말. 정3품 무관직으로, 전라도 서쪽 지역의 수군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75.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과 함께 여러 해전에서 활약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76. 초선(哨船):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배.
77. 어관(魚貫): 물고기가 한 줄로 꿰어 헤엄치듯 차례로 줄지어 나아감.
78. 소소강(召所江): 당항포 안쪽의 작은 강 또는 포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다.
79.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정2품 상계(上階)의 문무관 품계명.
원문:
李舜臣大敗倭兵于固城見乃梁。 是時, 倭賊大發舟師, 向湖南。 舜臣與李億祺各促所領而進, 遇賊于見乃梁, 賊船蔽海而來。 元均狃於前勝, 直欲衝擊, 舜臣曰: “此處海港隘淺, 不足以用武, 當誘出于大海而擊之。” 均不聽。 舜臣曰: “公不知兵乃如此。” 令諸將佯北, 賊果乘勝追之。 至閑山島前洋, 還軍促戰, 砲熖沸海, 鏖盡賊船七十餘艘, 腥血漲海。 又逆擊援兵于安骨浦敗之, 賊登岸走, 燒其船四十艘。 倭中傳言“閑山之戰, 倭兵死者九千人”云。
번역문:
이순신이 고성(固城) 견내량(見乃梁)⁸⁰에서 왜병을 크게 무찔렀다. 이때 왜적이 수군[舟師]을 크게 일으켜 호남(湖南)으로 향하였다. 순신이 이억기와 함께 각각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아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났는데, 적선이 바다를 덮고 왔다. 원균이 이전의 승리(勝利)에 익숙해져 곧바로 충격(衝擊)하고자 하였으나,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 해항(海港)은 좁고 얕아 무력(武力)을 쓰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큰 바다로 유인해 내어 공격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원균이 듣지 않았다. 순신이 말하기를 “공(公)이 용병(用兵)을 알지 못함이 이와 같구나.” 하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거짓으로 패주(敗走)하니, 적이 과연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전투를 재촉하니, 포의 불꽃[砲熖]이 바다에 끓어오르고 적선 70여 척을 모조리 죽여(鏖盡), 비린 피[腥血]가 바다에 넘실거렸다. 또 안골포(安骨浦)⁸¹에서 구원병(援兵)을 맞아 쳐서 패배시키니, 적이 뭍에 올라 달아났고, 그 배 40척을 불태웠다. 왜(倭)에서는 “한산도 전투에서 왜병 사망자가 9천 명이다.”라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주석:
80. 견내량(見乃梁): 경상남도 거제시(巨濟市)와 통영시(統營市)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한산도 대첩의 주요 무대였다.
81. 안골포(安骨浦): 경상남도 창원시(昌原市) 진해구(鎭海區)에 있는 포구. 한산도 대첩과 같은 날 안골포 해전이 벌어졌다.
원문:
全羅左水使李舜臣請移營閑山島, 從之。 島在巨濟南三十里, 山勢周回, 便於藏船。 倭船欲犯湖南, 則必由是路⁸²。 舜臣以本鎭僻在, 難於控禦, 故有是請。
번역문: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한산도(閑山島)⁸³로 진영(營)을 옮길 것을 청하니, 이를 따랐다. 섬은 거제 남쪽 30리에 있는데, 산세(山勢)가 둘러싸고 있어 배를 감추기에 편리하였다. 왜선(倭船)이 호남을 침범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 길⁸⁴을 경유하였다. 순신은 본진(本鎭)⁸⁵이 외진 곳에 있어 통제하고 방어하기[控禦] 어렵다고 여겼으므로 이러한 요청이 있었다.
주석:
82. [주-D004] 路 : 저본(底本)에는 “군(軍)”으로 되어 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조(宣祖朝)》 임진(25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왜선이 지나가는 '길(路)'이라는 의미가 자연스럽다.
83. 한산도(閑山島): 경상남도 통영시(統營市) 한산면(閑山面)에 속한 섬. 한산도 대첩 이후 이순신은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하여 해상 방어의 중심 기지로 삼았다.
84. 로(路): 길. 주석 [주-D004] 참조.
85. 본진(本鎭): 본래의 진영. 여기서는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 있던 여수(麗水)를 가리킨다.
원문:
以李舜臣兼三道水軍統制使, 本職如舊。 朝議以三道水軍不相統攝, 特置統制以主之。 舜臣以陸地困於軍興, 請於體府曰: “但付一面海浦, 則糧械自足。” 至是, 煮海販鹽, 積穀鉅萬, 營舍、器具無不完備, 募民完聚, 爲一巨鎭。【竝《宣廟寶鑑》。】
번역문: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겸임시키고, 본직(本職)⁸⁶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조정의 논의[朝議]에서 삼도(三道)의 수군이 서로 통솔하고 관할[統攝]되지 않는다고 여겨, 특별히 통제사(統制使)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순신은 육지(陸地)가 군수품 조달[軍興]⁸⁷로 곤란을 겪고 있다고 여겨, 체부(體府)⁸⁸에 청하기를 “단지 한 면(面)의 해포(海浦)만 맡겨 주시면 양식과 기계[糧械]가 스스로 충족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팔아 곡식 수만 석을 쌓았고, 영사(營舍)와 기구(器具)가 완비되지 않음이 없었으며, 백성을 모집하여 온전히 모이게 하니 하나의 큰 진영(巨鎭)이 되었다.【이상 《선묘보감(宣廟寶鑑)》에서 인용】
주석:
86. 본직(本職): 본래의 관직. 이순신의 경우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를 가리킨다.
87. 군흥(軍興):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
88. 체부(體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줄임말.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조선 시대에 국난(國難) 시 임명되던 임시 최고 군직(軍職)으로, 군사뿐 아니라 행정권까지 장악했다. 당시 도체찰사는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원문:
元均性本猜暴, 又自以先輩, 恥居公下, 不遵節制。 公絶口不言長短, 自咎乞遞, 朝廷以均爲忠淸兵使。 均締結朝貴, 搆誣百端。 時賊將行長、淸正詐爲相圖之狀, 使要時羅爲間, 令先擊淸正, 朝廷信之, 促公進兵。 公知其詐, 守便宜持難, 言者劾以逗遛。 丁酉二月, 下公吏, 體相李公元翼馳啓: “賊之所憚者, 舟師也, 李不可遞, 元不可遣。” 朝廷不從。 李相歎曰: “國事無復可爲。” 上命議于大臣, 判府事鄭琢曰: “軍機不可度, 其不進, 未必無意。 請責後效。” 命白衣從軍。 時母夫人卒于牙山, 公號哭曰: “竭忠於國, 而罪已至, 欲孝於親, 而親則亡。” 人聞而悲之。
번역문:
원균은 성품이 본래 시기하고 포악하며, 또 스스로 선배(先輩)라 여겨 공의 아래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절제(節制)⁸⁹를 따르지 않았다. 공은 입을 다물고 장단(長短)을 말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탓하며 교체되기를 빌자 조정에서 원균을 충청병사(忠淸兵使)⁹⁰로 삼았다. 원균이 조정의 귀인(貴人)들과 결탁하여 온갖 방법으로 거짓을 꾸며 모함하였다. 이때 적장(賊將) 행장(行長)⁹¹과 청정(淸正)⁹²이 서로 도모하는 척 거짓으로 꾸미고, 요시라(要時羅)⁹³를 시켜 간첩 노릇을 하게 하여 먼저 청정을 치도록 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를 믿고 공에게 진병(進兵)할 것을 재촉하였다. 공이 그 속임수를 알고 편의(便宜)⁹⁴를 지키며 어려움을 견지(堅持)하였으나, 말하는 자들이 머뭇거린다고 탄핵하였다. 정유년(1597) 2월에 공을 옥리(獄吏)에게 내려 보내니, 체찰사 상공[體相]⁹⁵ 이원익(李元翼)⁹⁶이 급히 아뢰기를 “적이 꺼리는 바는 수군[舟師]이니, 이순신을 교체해서는 안 되고 원균을 보내서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따르지 않았다. 이상(李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국사(國事)를 다시는 해 볼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명하여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게 하시니, 판부사(判府事)⁹⁷ 정탁(鄭琢)⁹⁸이 아뢰기를 “군사 기밀[軍機]은 헤아릴 수 없으니, 그가 나아가지 않은 것이 반드시 뜻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후일의 공효(功效)를 책려(責勵)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백의종군(白衣從軍)⁹⁹을 명하였다. 이때 어머니[母夫人]께서 아산(牙山)에서 돌아가시니, 공이 부르짖으며 곡(哭)하기를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나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께 효도하고자 하였으나 어버이께서 돌아가셨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슬퍼하였다.
주석:
89. 절제(節制): 통제사의 지휘와 명령.
90. 충청병사(忠淸兵使):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종2품.
91.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1600). 임진왜란 때 일본군 제1군을 이끌고 침략한 장수.
92.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
1611). 임진왜란 때 일본군 제2군을 이끌고 침략한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93. 요시라(要時羅): 일본 이름은 요시라(よしら, 慶長).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으로,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휘하에서 활동하며 이중간첩 역할을 했다. 그가 전달한 가토 기요마사 공격 정보는 이순신을 모함하기 위한 일본군의 계략이었다.
94. 편의(便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함. 임기응변(臨機應變)과 유사한 의미이다.
95. 체상(體相):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한 재상(相)을 높여 부르는 말.
96. 이원익(李元翼, 1547
163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오리(梧里). 영의정을 여러 차례 역임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97. 판부사(判府事): 정1품의 관직인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 또는 돈녕부 판사(敦寧府判事) 등을 가리킨다. 실권은 없으나 명예직으로 원로 대신에게 주어졌다.
98. 정탁(鄭琢, 1526
1605):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약포(藥圃). 영의정을 지냈으며, 이순신을 구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99. 백의종군(白衣從軍): 죄를 지은 무관(武官)에게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공을 세우게 하던 처벌.
원문:
公在鎭, 置運籌堂, 與諸將論事其中。 均代公, 一反公所爲, 貯妾其堂, 而籬隔之, 諸將罕見其面, 專事酗虐, 大失軍情。 要時羅來言: “淸正後軍方來, 可遮擊也。” 朝廷又趣戰。 七月, 均悉衆而進, 賊乘夜掩襲, 均軍潰走死, 艅艎百艘盡沒於閑山。【竝行狀。】
번역문:
공이 진(鎭)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¹⁰⁰을 설치하고 여러 장수들과 그 안에서 일을 논의하였다. 원균이 공을 대신하자 공이 하던 바를 모두 뒤집어, 그 당(堂)에 첩(妾)을 들여놓고 울타리를 쳐서 막으니 여러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고, 오로지 술주정과 포학한 짓만 일삼아 군심(軍心)을 크게 잃었다. 요시라가 와서 말하기를 “청정(淸正)의 후군(後軍)이 막 오고 있으니, 막아 공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또 싸움을 재촉하였다. 7월에 원균이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자, 적이 밤을 틈타 엄습하여 원균의 군사가 무너져 달아나다 죽고, 전함[艅艎]¹⁰¹ 100여 척이 한산(閑山)에서 모두 침몰하였다.【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00. 운주당(運籌堂): 계책(籌)을 운용(運)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작전 회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순신이 한산도 통제영에 설치한 작전 회의실의 이름이다.
101. 여황(艅艎): 고대 중국 오(吳)나라 왕이 타던 큰 배를 가리키는 말. 여기서는 주력 전함, 즉 판옥선(板屋船)을 의미한다.
원문:
閑山敗報至, 朝野震駭。 上召見備邊司諸臣問之。 慶林君金命元、兵曹判書李恒福以爲: “方今之計, 惟復以李舜臣爲統制使乃可。” 上從之。【《宣廟寶鑑》。】
번역문:
한산(閑山)의 패전 보고[敗報]가 이르자 조야(朝野)가 크게 놀랐다. 상(上)께서 비변사(備邊司)¹⁰²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 물으셨다.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¹⁰³,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오직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아야 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이를 따르셨다.【《선묘보감(宣廟寶鑑)》에서 인용】
주석:
102. 비변사(備邊司): 조선 중·후기에 군사 및 외교 문제를 비롯한 국가의 중요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던 최고 회의 기구.
103. 김명원(金命元, 1534~160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주은(酒隱). 임진왜란 발발 시 도원수(都元帥)였으며, 후에 좌의정을 지냈다.
원문:
時新敗之餘, 舟船、器械蕩然無存。 公聞命, 單騎馳到會寧浦, 道遇慶尙右水使裵楔。 時楔所帶戰船, 只有八艘, 又得鹿島戰船一艘。 公咨楔以進取之計, 楔曰: “事急矣。 不如捨船登陸, 而自托於湖南陣下, 助戰自效。” 公不聽, 楔果棄舟而去。 公召全羅右水使金億秋, 使之召集管下諸將五員, 收拾兵船, 分付諸將, 粧作戰艦, 以助軍勢。 約曰: “吾等共受王命, 義當與同死生。 國事至此, 何惜一死? 惟死於忠義, 沒亦有榮。” 諸將無不感畏。
번역문:
이때 막 패배한 뒤라 배[舟船]와 기계(器械)가 탕진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공이 명(命)을 듣고 홀로 말을 타고 회령포(會寧浦)¹⁰⁴에 달려가다가, 길에서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¹⁰⁵을 만났다. 이때 배설이 거느린 전선(戰船)은 단지 8척뿐이었고, 또 녹도(鹿島)의 전선 1척을 얻었다. 공이 배설에게 나아가 취할 계책을 물으니, 배설이 말하기를 “일이 급합니다.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호남(湖南) 진(陣) 아래에 몸을 의탁하여, 싸움을 도와 스스로 공효(功效)를 나타내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듣지 않으니, 배설이 과연 배를 버리고 가버렸다. 공이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김억추(金億秋)¹⁰⁶를 불러, 그로 하여금 관할 아래 여러 장수 5명을 소집하고 병선(兵船)을 수습하게 하여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주고 전함(戰艦)처럼 꾸며 군세(軍勢)를 돕게 하였다. 약속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함께 왕명(王命)을 받았으니, 의리상 마땅히 함께 죽고 살아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忠義)를 위해 죽으면 죽더라도 또한 영광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감격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104. 회령포(會寧浦):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회천면(會泉面)에 있는 포구.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교서(敎書)를 받은 곳이다.
105. 배설(裵楔, ?
1599): 조선 중기의 무신. 칠천량 해전 직전 원균에게 반발하여 12척의 배를 이끌고 이탈했으며, 전투 후 도망쳤다가 권율(權慄)에게 참수되었다. 여기서는 8척이라고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12척으로 알려져 있다.
106. 김억추(金億秋, 1548
1618): 조선 중기의 무신. 이억기(李億祺)의 동생. 칠천량 해전에서 탈출하여 이순신에게 합류했으며, 명량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원문:
公起板蕩之餘, 再膺藩命。 兩南諸郡盡爲賊藪, 行長在陸路, 義智在水路, 飛謀蓄銳, 以伺我隙。 獨以瘡殘餘卒, 領十三戰船, 棲依無所, 逡巡於碧波亭洋中, 見者危之。 一日, 忽下令軍中曰: “今夜賊必伐我, 諸將各宜整軍戒嚴。” 是夜, 賊果潛師以來, 公自起大喝, 令諸軍各下碇以待, 責戰益力。 賊解圍, 公回軍, 在右水營鳴梁洋中。 天明, 望見賊船五六百艘蔽海而上。 先是, 湖南士庶乘船避亂者皆聚陣下, 倚公爲命。 至是, 公以衆寡不敵, 先令避亂船次第而退, 排列布陣爲疑兵, 自領戰艦當前。 賊見公整船而出, 各促櫓直進, 旌旗、樓櫓彌滿海中。 時早潮方退, 港中湍悍, 巨濟縣令安衛順潮而下, 風便迅駛, 船行如箭, 直衝陣前, 賊四面圍抱。 衛冒死突戰, 公督諸軍繼之, 先破賊船三十一艘, 賊小却。 公擊楫誓衆, 乘勝而進, 賊死咋不敢抵敵, 擧軍以遁。 公亦移陣於寶化島。【竝遺事。】
번역문:
공이 판탕(板蕩)¹⁰⁷의 뒤에 일어나 다시 번진(藩鎭)의 명¹⁰⁸을 받들었다. 양남(兩南)¹⁰⁹의 여러 고을이 모두 적의 소굴[賊藪]이 되었고, 행장(行長)은 육로(陸路)에, 의지(義智)¹¹⁰는 수로(水路)에 있으면서 계책을 날리고 예봉(銳鋒)을 길러 우리의 빈틈을 엿보고 있었다. 홀로 부상당하고 남은 군사[瘡殘餘卒]와 13척의 전선(戰船)¹¹¹을 거느리고 의지할 곳 없이 벽파정(碧波亭)¹¹² 앞바다 가운데서 머뭇거리니, 보는 자들이 위태롭게 여겼다. 하루는 홀연히 군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오늘 밤에 적이 반드시 우리를 칠 것이니, 여러 장수들은 각기 마땅히 군사를 정돈하고 경계를 엄히 하라.”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몰래 군사를 이끌고 오자, 공이 스스로 일어나 크게 꾸짖고 여러 군사에게 명하여 각각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하며, 싸움을 독려하기를 더욱 힘썼다. 적이 포위를 풀자, 공이 군사를 돌려 우수영(右水營)¹¹³ 명량(鳴梁)¹¹⁴ 앞바다에 있었다. 날이 밝자 적선 500~600척이 바다를 덮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보다 앞서 호남(湖南)의 사족(士族)과 서민(庶民) 중 배를 타고 피란하는 자들이 모두 진(陣) 아래에 모여 공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적고 많음[衆寡]이 대적할 수 없다고 여겨, 먼저 피란선들을 차례로 물러나게 하고, 배열하여 진(陣)을 펼쳐 의병(疑兵)¹¹⁵으로 삼았으며, 스스로 전함(戰艦)을 거느리고 앞장섰다. 적이 공이 배를 정돈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각각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진격하니, 정기(旌旗)와 누각과 노[樓櫓]¹¹⁶가 바다 가운데 가득 찼다. 이때 이른 조수가 막 물러가 항구 가운데 물살이 사나웠는데, 거제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¹¹⁷가 조수를 타고 내려오니 바람을 타고 빨라 배의 움직임이 화살과 같아 곧바로 진 앞으로 돌격하자, 적이 사면에서 에워쌌다.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여 싸우자, 공이 여러 군사를 독려하여 뒤를 이으니,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자 적이 조금 물러났다. 공이 노를 치며¹¹⁸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승세를 타고 나아가니, 적이 죽을까 두려워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온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다. 공 또한 보화도(寶化島)¹¹⁹로 진을 옮겼다.【이상 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107. 판탕(板蕩):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인 판(板)과 탕(蕩)에서 유래한 말로,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한 시국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칠천량 해전의 참패 이후 극도로 혼란했던 상황을 가리킨다.
108. 번명(藩命): 번진(藩鎭)의 명. 번진은 국경 지역의 군사 요충지를 의미하며, 번명은 그곳을 지키는 장수(절도사, 통제사 등)의 임명을 뜻한다.
109. 양남(兩南): 영남(嶺南, 경상도)과 호남(湖南, 전라도)을 아울러 이르는 말.
110. 의지(義智):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
1619).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활약한 일본 장수.
111. 십삼 전선(十三戰船): 칠천량 해전 패배 후 남은 조선 수군의 전선 수. 일반적으로 12척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서는 1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배설이 이탈하기 전의 수일 수도 있다.
112. 벽파정(碧波亭): 전라남도 진도군(珍島郡) 고군면(古郡面)에 있는 정자. 명량 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함대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113. 우수영(右水營):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을 가리킨다.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문내면(門內面)에 위치해 있다.
114. 명량(鳴梁):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의 해협. 물살이 매우 빠르고 거세어 '울돌목'이라고도 불린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130여 척(기록에 따라 300여 척 또는 50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한 명량 대첩의 장소이다.
115. 의병(疑兵): 적을 속이기 위해 실제보다 병력이 많은 것처럼 꾸미는 계책 또는 그 군사.
116. 누로(樓櫓): 배 위에 세운 망루(望樓)와 큰 방패 또는 큰 노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적선의 규모와 위세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117. 안위(安衛, 1563
?): 조선 중기의 무신. 거제현령으로서 명량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118. 격즙(擊楫): 노(楫)를 치며 맹세함. 동진(東晉)의 조적(祖逖)이 장강(長江)을 건너며 노를 치고 중원 회복을 맹세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굳은 결의를 다짐하는 행동을 비유한다.
119. 보화도(寶化島):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가 잠시 머물렀던 섬. 현재의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팔금도(八禽島) 또는 안좌도(安佐島) 부근으로 추정된다.
원문:
捷聞, 上欲賞崇品, 言者沮之以祿位之高。 時經理楊公鎬在京, 移咨致賀曰: “近來無此捷, 吾欲掛紅, 而遠未能焉。” 爲送白金、紅段使褒之。 掛紅者, 華人相賀以幣之禮也。【行狀。】
번역문:
승전 보고[捷聞]가 알려지자 상(上)께서 숭품(崇品)¹²⁰으로 상을 주려 하셨으나, 말하는 자들이 녹위(祿位)가 높다는 이유로 저지하였다. 이때 경리(經理)¹²¹ 양공(楊公) 호(鎬)¹²²가 서울에 있었는데, 자문(咨文)¹²³을 보내 축하하며 말하기를 “근래에 이러한 승첩(勝捷)이 없었으니, 내가 붉은 비단을 걸어주고 싶으나¹²⁴ 멀리 있어 능히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백금(白金)과 붉은 비단[紅段]을 보내 그를 포상하게 하였다. 괘홍(掛紅)이라는 것은 중국[華人] 사람들이 서로 폐백[幣]으로 축하하는 예(禮)이다.【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20. 숭품(崇品): 숭정대부(崇政大夫) 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와 같이 '숭(崇)' 자가 들어가는 정1품 품계를 가리킨다.
121. 경리(經理): 명나라 때 파견된 군무 총괄 책임자의 직함. 정식 명칭은 경략독찰사(經略督察使) 또는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이다.
122. 양공(楊公) 호(鎬): 양호(楊鎬, ?~1629).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경리(經理)로서 명군을 지휘했으나, 울산성(蔚山城) 전투에서 패배하여 소환되었다.
123. 자문(咨文): 같은 등급 또는 하급 관청 사이에 주고받던 공문서.
124. 괘홍(掛紅): 붉은 비단을 걸어 축하하는 중국의 풍속. 경사스러운 일이나 공을 세웠을 때 붉은 비단이나 천을 걸어 축하하고 포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是時舜臣已有軍八千餘人, 進駐古今島, 患乏糧, 作海路通行帖, 令曰: “三道沿海公私船無帖者, 以奸細論, 毋得通行。” 於是凡避亂乘船者皆來受帖, 舜臣以船大小差次, 使納米受帖, 大船三石, 中船二石, 小船一石。 避亂之人盡載財穀入海, 故不以納米爲難, 而以通行無禁爲喜, 旬日得軍糧萬餘石。 又募民輸銅鐵, 鑄大砲, 伐木造船, 事事皆辦。 遠近避兵者往依舜臣, 結廬造幕, 販賣爲生, 島中不能容。
번역문:
이때 순신에게는 이미 군사 8천여 명이 있었는데, 고금도(古今島)¹²⁵로 나아가 주둔하며 양식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여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¹²⁶을 만들어 명령하기를 “삼도(三道) 연해(沿海)의 공사선(公私船) 중 통행첩이 없는 자는 간세(奸細)¹²⁷로 논하여 통행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무릇 피란하며 배를 탄 자들이 모두 와서 통행첩을 받으니, 순신이 배의 크고 작음에 따라 차등을 두어 쌀을 바치고 통행첩을 받게 하였는데, 큰 배는 3석(石),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이었다. 피란하는 사람들이 재물과 곡식을 모두 싣고 바다로 들어왔으므로 쌀을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통행이 금지되지 않음을 기뻐하니, 열흘 만에 군량(軍糧) 만여 석을 얻었다. 또 백성을 모집하여 구리와 쇠[銅鐵]를 수송하게 하여 대포(大砲)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니, 일마다 모두 갖추어졌다. 원근(遠近)에서 병란(兵亂)을 피하는 자들이 가서 순신에게 의지하여 오두막[廬]을 짓고 장막[幕]을 치며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니, 섬 안이 능히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석:
125. 고금도(古今島):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고금면(古今面)에 속한 섬.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은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 재건에 힘썼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과 연합 함대를 형성한 곳이기도 하다.
126.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 바닷길을 통행하는 것을 허가하는 증명서. 이를 발급하는 대가로 쌀을 받아 군량을 확보한 것은 이순신의 뛰어난 경영 능력을 보여준다.
127. 간세(奸細): 간첩(間諜).
원문:
天朝水兵都督陳璘出來, 南下古今島, 與舜臣合兵。 璘性暴猛, 與人多忤, 人多畏之。 舜臣聞璘將至, 令軍人大畋漁, 得鹿豕、海物甚多, 盛備酒醪而待之。 璘船入海, 舜臣備軍儀遠迎。 旣到, 大享其軍, 諸將以下無不沾醉。 士卒傳相告語曰: “果良將也。” 璘亦喜, 凡事一咨於舜臣, 出則與舜臣竝轎, 不敢先行。 舜臣遂約束唐軍, 與己軍無間, 有奪民一縷者, 皆拿致梱打, 無敢違令者, 島中肅然。【竝《懲毖錄》。】
번역문:
천조(天朝)¹²⁸ 수병도독(水兵都督)¹²⁹ 진린(陳璘)¹³⁰이 나와서 남쪽으로 고금도(古今島)에 내려와 순신과 군사를 합쳤다. 진린은 성품이 포악하고 사나워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여 사람들이 많이 두려워하였다. 순신이 진린이 장차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들에게 명하여 크게 사냥하고 고기잡이[畋漁]를 하여 사슴, 돼지[鹿豕], 해산물[海物]을 매우 많이 얻고, 술[酒醪]을 성대히 갖추어 그를 기다렸다. 진린의 배가 바다로 들어오자, 순신이 군대의 의장[軍儀]을 갖추고 멀리서 맞이하였다. 이미 도착하자 그 군사들에게 큰 잔치를 베푸니, 여러 장수 이하로 흠뻑 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사졸(士卒)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과연 훌륭한 장수이다.”라고 하였다. 진린 또한 기뻐하여 모든 일을 한번 순신에게 자문하였고, 나갈 때에는 순신과 나란히 가마를 타고 감히 먼저 가지 않았다. 순신이 마침내 당군(唐軍)¹³¹을 단속하여 자기 군사와 간격이 없게 하였고, 백성의 실 한 오라기[一縷]라도 빼앗는 자가 있으면 모두 잡아들여 곤장(梱打)¹³²을 치니, 감히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어 섬 안이 숙연(肅然)해졌다.【이상 《징비록(懲毖錄)》에서 인용】
주석:
128. 천조(天朝): 하늘 아래 으뜸가는 조정이라는 뜻으로, 당시 조선에서 명(明)나라 조정을 높여 부르던 말이다.
129. 수병도독(水兵都督): 명나라 수군(水軍)을 지휘하는 도독(都督).
130. 진린(陳璘, 1543~1607):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수군 도독. 이순신과 함께 노량 해전에서 싸웠다.
131. 당군(唐軍): 당(唐)나라 군대라는 뜻으로, 당시 조선에서 명나라 군대를 일컫던 말이다.
132. 곤타(梱打): 곤장(棍杖)으로 치는 형벌.
원문:
行長憚公威名, 遣其亞將齎鳥銃、長劍遺公。 公却之曰: “我自壬辰殺賊無算, 所得銃劍, 自足爲用。” 賊又因都督欲遺以銀兩、酒肉, 公曰: “此賊於天朝亦有難赦之罪, 老爺反欲受賂耶?” 其後賊使再來, 都督辭之曰: “我於統制公旣已見愧, 何可再爲?”【遺事。】
번역문:
행장(行長)이 공의 위명(威名)을 꺼려, 그 아장(亞將)¹³³을 보내 조총(鳥銃)과 장검(長劍)을 가지고 와서 공에게 주었다. 공이 물리치며 말하기를 “내가 임진년 이래로 죽인 적이 셀 수 없이 많아 얻은 총과 칼이 스스로 쓰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적이 또 도독(都督)¹³⁴을 통해 은(銀)과 술, 고기[酒肉]를 주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적은 천조(天朝)에도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데, 노야(老爺)¹³⁵께서는 도리어 뇌물을 받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그 후 적의 사자(使者)가 다시 오자, 도독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내가 통제공(統制公)¹³⁶에게 이미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어찌 다시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133. 아장(亞將): 부장(副將). 버금가는 장수.
134. 도독(都督):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을 가리킨다.
135. 노야(老爺): 중국에서 고위 관료나 귀인, 또는 연장자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진린을 가리킨다.
136. 통제공(統制公): 통제사(統制使)인 이순신을 높여 부르는 말.
원문:
公雖起復從戎, 日食數溢米, 形容頓悴。 上特遣使諭旨從權。 偏將宋汝悰與漢船同擊賊, 斬七十級, 漢人無所得。 陳璘慙怒, 公解之曰: “大人來統我軍, 我軍之捷, 卽天兵之捷, 何敢私焉? 謹盡納所獲。” 陳大喜曰: “素聞公名, 今果然矣。” 汝悰失望自訴, 公笑曰: “腐胔何惜? 汝功吾當狀奏。” 汝悰亦服。 陳見公治兵設策, 歎服曰: “公非小國人。 若入中朝, 當爲天下大將。” 進書於上曰: “李統制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蓋心服也。 遂奏聞于帝, 帝甚嘉之, 賜公都督印, 至今藏于營。【行狀。】
번역문:
공이 비록 기복(起復)¹³⁷하여 군무(軍務)를 따랐으나, 하루에 두어 홉[數溢]¹³⁸의 쌀만 먹어 모습[形容]이 매우 초췌해졌다. 상(上)께서 특별히 사신을 보내 권도(權道)를 따르라는 유지(諭旨)를 내리셨다. 편장(偏將)¹³⁹ 송여종(宋汝悰)¹⁴⁰이 한선(漢船)¹⁴¹과 함께 적을 공격하여 70급(級)을 베었으나, 한인(漢人)은 얻은 것이 없었다. 진린이 부끄러워하고 노하자, 공이 그를 달래며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오셔서 우리 군사를 통솔하시니, 우리 군사의 승첩(勝捷)은 곧 천병(天兵)¹⁴²의 승첩인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하겠습니까? 삼가 얻은 바를 모두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린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평소 공의 명성을 들었는데, 이제 과연 그렇구나.”라고 하였다. 송여종이 실망하여 스스로 호소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썩은 고깃덩어리[腐胔]¹⁴³를 어찌 아끼겠는가? 그대의 공(功)은 내가 마땅히 장계(狀啓)로 아뢸 것이다.”라고 하니, 송여종 또한 승복하였다. 진린이 공이 군사를 다스리고 계책을 세우는 것을 보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공은 작은 나라 사람이 아니다. 만약 중조(中朝)¹⁴⁴에 들어온다면 마땅히 천하의 대장(大將)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上)께 글을 올려 아뢰기를 “이 통제사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¹⁴⁵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¹⁴⁶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다. 마침내 황제(帝)¹⁴⁷에게 아뢰니, 황제가 매우 가상히 여겨 공에게 도독인(都督印)¹⁴⁸을 하사하였는데, 지금까지 진영(營)에 보관되어 있다.【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37. 기복(起復): 부모의 상(喪) 중에 있는 관리가 상기(喪期)를 마치기 전에 조정의 명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는 것.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 모친상(母親喪)을 당했으나, 통제사로 재임명되어 상중에 군무를 수행했다.
138. 수일(數溢): 몇 홉. '일(溢)'은 고대 용량 단위로, 약 1홉(合)에 해당한다. 매우 적은 양의 식사를 했음을 나타낸다.
139. 편장(偏將): 주장(主將)을 보좌하는 장수. 부장(副將)과 비슷한 의미이다.
140. 송여종(宋汝悰):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 휘하에서 활약했다.
141. 한선(漢船): 한(漢)나라 배라는 뜻으로, 명나라 군선(軍船)을 가리킨다.
142. 천병(天兵): 하늘의 군대라는 뜻으로, 명나라 군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143. 부자(腐胔): 썩은 고깃덩어리. 여기서는 베어낸 적의 머리[首級]를 비유한다. 수급(首級) 자체보다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이순신의 태도를 보여준다.
144. 중조(中朝): 중국 조정을 가리킨다.
145.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 하늘을 경륜하고 땅을 조직하는 재능. 천하를 다스릴 만한 뛰어난 재능을 비유한다.
146.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 무너진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공. 세상을 바로잡고 나라를 구한 매우 큰 공을 비유한다.
147. 황제(帝):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를 가리킨다.
148. 도독인(都督印): 명나라 도독(都督)의 인장(印章). 명나라 황제가 외국 장수에게 수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이순신의 공적과 명성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팔사품(八賜品) 중 하나로 통영 충렬사(忠烈祠)에 보관되어 있다.
원문:
行長築城于順天倭橋堅守, 劉綎以大兵進攻不利, 還順天。 旣而復進攻之, 李舜臣與陳璘扼海口以逼之。 行長求援於泗川賊沈安頓吾, 頓吾從水路來援。 舜臣進擊大敗之, 焚賊船二百餘艘, 殺獲無算。 追至南海界, 舜臣親犯矢石力戰, 有飛丸中其胸¹⁴⁹出背後, 左右扶入帳中。 舜臣曰: “戰方急, 愼勿言我死。” 言訖而絶。 舜臣兄子莞秘其死, 以舜臣令, 督戰益急, 軍中不知也。 陳璘所乘船爲賊所圍, 莞揮其兵救之, 賊散去。 璘使人謝救己, 始聞其死, 從椅上自投于地, 撫膺大慟。 我軍與唐軍連營慟哭, 如哭私親。 柩行所至, 人民處處設祭, 挽車而哭, 道路擁塞, 車不得進。 海邊之人相率爲祠, 號曰愍忠, 以時致祭, 商賈漁船往來過其下者, 人人祭之云。【《懲毖錄》。】
번역문:
행장(行長)이 순천(順天) 왜교(倭橋)¹⁵⁰에 성(城)을 쌓고 굳게 지키자, 유정(劉綎)¹⁵¹이 대병(大兵)으로 진공(進攻)하였으나 불리하여 순천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다시 진공하니, 이순신이 진린과 함께 해구(海口)를 막아 그를 압박하였다. 행장이 사천(泗川)의 적 심안돈오(沈安頓吾)¹⁵²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돈오가 수로(水路)를 따라 와서 구원하였다. 순신이 진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적선 200여 척을 불태웠으며,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셀 수 없었다. 추격하여 남해(南海) 경계에 이르러, 순신이 친히 화살과 돌[矢石]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다가, 날아온 탄환[飛丸]이 그의 가슴에 맞고 등 뒤로 나가자, 좌우에서 부축하여 장막(帳幕) 안으로 들어갔다.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삼가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순신의 형의 아들 이완(李莞)¹⁵³이 그 죽음을 비밀로 하고 순신의 명령이라 하여 전투를 독려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이완이 그 병사를 지휘하여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린이 사람을 시켜 자신을 구해준 것에 감사하다가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 의자 위에서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지며 가슴을 치고 크게 통곡하였다. 아군(我軍)과 당군(唐軍)이 진영(營)을 잇대어 통곡하니, 마치 사사로운 어버이를 곡(哭)하는 듯하였다. 영구(靈柩)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사(祭祀)를 지내고 상여(喪輿)를 끌며 곡(哭)하여 도로가 막혀 수레가 나아가지 못하였다. 해변(海邊) 사람들은 서로 이끌고 사당(祠堂)을 세워 이름을 민충(愍忠)¹⁵⁴이라 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으며, 상인(商賈)과 어선(漁船)이 왕래하며 그 아래를 지날 때면 사람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징비록(懲毖錄)》에서 인용】
주석:
149. [주-D007] 胸 : 저본(底本)에는 뒤에 “중(中)”이 더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징비록(懲毖錄)》에 근거하여 삭제하였다. '중기흉(中其胸)'만으로 '그의 가슴에 맞았다'는 의미가 충분하다.
150. 왜교(倭橋): 현재 전라남도 순천시(順天市) 해룡면(海龍面) 신성리(新城里)에 있는 왜교성(倭橋城)을 가리킨다. 정유재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둔했던 곳이다.
151. 유정(劉綎, 1558
1619):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조명 연합군의 육군을 지휘했다.
152. 심안돈오(沈安頓吾):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가리킨다. '심안(沈安)'은 시마즈(島津)의 음차이고, '돈오(頓吾)'는 그의 관직명이었던 사쓰마노카미(薩摩守) 또는 통칭인 효고노카미(兵庫頭)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노량 해전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러 왔다가 이순신과 진린의 연합 함대에 대패했다.
153. 이완(李莞, 1579
1627): 이순신의 조카. 이순신의 맏형 이희신(李羲臣)의 아들이다. 이순신을 따라 종군하며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임종을 지켰다.
154. 민충(愍忠): 충절(忠節)을 가엾게 여김.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의 이름으로 쓰였다.
원문:
陳都督抵書曰: “吾夜觀乾象, 晝察人事, 東方將星將病矣, 公之禍不遠矣。 公豈不知耶? 何不用武侯之禳法乎?” 公答書曰: “吾忠不及於武侯, 德不及於武侯, 才不及於武侯, 此三件事皆不及於武侯, 而雖用武侯之法, 天何應哉?” 翌日, 果有大星墜海之異。【《忠武公家乘》。】
번역문:
진도독(陳都督)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내가 밤에 천문 현상[乾象]을 관찰하고 낮에 인사(人事)를 살피니, 동방(東方)의 장성(將星)¹⁵⁵이 장차 병들 것이니, 공의 화(禍)가 멀지 않았습니다. 공께서 어찌 알지 못하십니까? 어찌하여 무후(武侯)¹⁵⁶의 양법(禳法)¹⁵⁷을 쓰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답서(答書)하여 말하기를 “나의 충성(忠誠)이 무후에 미치지 못하고, 덕(德)이 무후에 미치지 못하고, 재능(才能)이 무후에 미치지 못하니, 이 세 가지 일이 모두 무후에 미치지 못하는데, 비록 무후의 법을 쓰더라도 하늘이 어찌 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다음 날 과연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는 이변(異變)이 있었다.【《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¹⁵⁸에서 인용】
주석:
155. 장성(將星): 장군(將軍)을 상징하는 별. 장수의 운명을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156. 무후(武侯):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가리킨다. 시호가 충무후(忠武侯)였으므로 보통 무후(武侯)라고 불린다.
157. 양법(禳法): 재앙이나 병이 없어지도록 빌거나 푸닥거리하는 방법. 제갈량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기 전에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북두칠성(北斗七星)에 빌었다는 고사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온다.
158.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 이순신 가문의 기록. 이순신 및 그 후손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원문:
公治軍簡而有法, 不妄殺一人, 而三軍壹志, 莫敢違令。 其臨戰, 意思從容, 常有餘地, 見可而進, 持難而退, 必三吹打, 耀兵而旋。 故身死之日, 紀律、節度猶自若, 卒以取勝。 其在陣, 遠斥候, 嚴警衛, 賊來必先知之。 每夜休士, 必自理箭羽, 常以空弮與射士, 待賊船逼前, 然後散箭與之, 又自操弓齊射。 將士慮公復創於丸, 扶掖諫止曰: “何不爲國自愛?” 公指天曰: “我命在彼, 豈可令汝輩獨當賊乎?” 其以死勤事素定者如此。【諡狀。】
번역문:
공은 군사를 다스림이 간결하면서도 법도(法度)가 있었고,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나 삼군(三軍)¹⁵⁹이 뜻을 하나로 하여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 전투에 임해서는 생각과 뜻[意思]이 조용하여 항상 여유가 있었고, 가능함을 보고 나아가며 어려움을 지켜 물러나되, 반드시 세 번 취타(吹打)¹⁶⁰하고 군사의 위용(威容)을 빛내며 돌아왔다. 그러므로 몸이 죽던 날에도 기율(紀律)과 절도(節度)가 여전히 평소와 같아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진(陣)에 있을 때에는 척후(斥候)를 멀리 보내고 경계와 수비[警衛]를 엄히 하여, 적이 오면 반드시 먼저 알았다. 매일 밤 군사들을 쉬게 할 때에는 반드시 스스로 화살 깃[箭羽]을 다듬었으며, 항상 빈 활[空弮]을 사수(射手)들에게 주었다가 적선이 가까이 닥친 뒤에야 화살을 나누어 주고, 또 스스로 활을 잡고 일제히 쏘았다. 장수와 사졸[將士]들이 공이 다시 탄환에 부상당할까 염려하여 부축하며 간하여 말리기를 “어찌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공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의 명(命)은 저기에 있으니, 어찌 너희들만 홀로 적을 당하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일에 힘쓰기를 평소에 결정한 것이 이와 같았다.【시장(諡狀)에서 인용】
주석:
159. 삼군(三軍): 온 군대. 육군(陸軍)의 경우 좌군(左軍), 중군(中軍), 우군(右軍)을 이르지만, 여기서는 수군(水軍) 전체를 통칭한다.
160. 취타(吹打): 군중(軍中)에서 연주하던 음악. 부는 악기[吹]와 치는 악기[打]를 아울러 이른다. 여기서는 군대의 진퇴(進退) 신호나 위엄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원문:
公膽量過人, 志操堅確, 持身如學者之繩墨, 自律居家, 行誼甚篤。 其兄皆先亡, 撫養遺孤, 若已出, 日用之物, 婚嫁之禮, 必先姪而後子。 雖或非罪而在縲絏之中, 不以死生動其心。 其所養有本, 故出謀發慮, 擧無遺策, 料敵如神, 卒以取勝, 全湖西南數千里封疆, 爲國家中興之根基。 功蓋一國, 名聞四海, 嗚呼, 偉矣哉! 公嘗有詩曰: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誦之者莫不垂淚而激烈也。【行狀。】
번역문:
공은 담력(膽量)이 남보다 뛰어나고 지조(志操)가 굳건하며, 몸가짐이 학자(學者)의 승묵(繩墨)¹⁶¹과 같았고, 스스로를 단속하고 집에 거처할 때에도 행실과 의리[行誼]가 매우 돈독하였다. 그의 형들이 모두 먼저 죽자, 남겨진 자식[遺孤]들을 돌보아 기름이 마치 자신이 낳은 듯하였고, 일상 용품과 혼인 예물[婚嫁之禮]은 반드시 조카[姪]를 먼저 하고 아들[子]을 뒤로 하였다. 비록 혹 죄가 아닌데도 감옥[縲絏]¹⁶²에 있었으나, 죽고 사는 것으로 그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그 수양(修養)한 바가 근본이 있었으므로, 계책을 내고 생각을 폄에 있어 하나도 빠뜨리는 계책이 없었고, 적을 헤아림이 귀신과 같아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서남쪽 수천 리의 강토[封疆]를 보전하여 국가 중흥(中興)의 근본 터전이 되게 하였다. 공(功)은 온 나라를 덮었고 이름은 사해(四海)에 알려졌으니, 아, 위대하도다! 공이 일찍이 지은 시에 이르기를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魚龍)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草木)이 아는구나.”¹⁶³라고 하였으니, 이를 외는 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음이 없었다.【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61. 승묵(繩墨): 먹줄과 먹통. 목수(木手)가 나무를 자르거나 다듬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 여기서는 사물의 표준이나 법도를 비유한다. 이순신의 몸가짐이 학자의 행동 규범처럼 엄격했음을 의미한다.
162. 누설(縲絏): 죄인을 묶는 검은 포승줄. 감옥 또는 죄수의 몸을 비유한다.
163.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이순신이 지은 한시 〈진중음(陣中吟)〉의 한 구절. 임진왜란 중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결의를 나타낸다.
원문:
柳相㙉見公有好樣箭筒求之, 公謝曰: “此一筒甚微, 而小人之納, 大監之受, 害義大矣。” 柳相愧屈。 當下獄議律, 有胥吏告云: “有行賄蹊徑, 可以緩死。” 公怒叱曰: “死則死耳, 何可苟免?” 由其自守不阿如是, 故半世落拓, 世莫能知。 及遭亂著庸, 誠格上下, 而猶不容於世議, 中陷刑獄, 亦以此也。【諡狀。】
번역문:
유상(柳相) 성룡(成龍)¹⁶⁴이 공에게 좋은 모양의 전통(箭筒)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구하자,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 전통 하나는 매우 미미한 것이나, 소인(小人)이 바치고 대감(大監)께서 받으시면 의(義)를 해침이 큽니다.”라고 하니, 유상(柳相)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하옥(下獄)되어 법률 적용을 의논 당할 때, 서리(胥吏)¹⁶⁵ 한 사람이 고하기를 “뇌물을 쓸 길이 있어 죽음을 늦출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노하여 꾸짖기를 “죽으면 죽을 뿐이지, 어찌 구차하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스스로를 지켜 아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반평생을 불우하게 지내 세상이 능히 알아주지 못하였다. 난리를 만나 공을 세움에 이르러 정성이 상하(上下)를 감동시켰으나, 오히려 세상의 여론[世議]에 용납되지 못하여 중간에 형옥(刑獄)에 빠진 것도 또한 이 때문이었다.【시장(諡狀)에서 인용】
주석:
164. 유상(柳相) 성룡(成龍):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가리킨다.
165. 서리(胥吏): 관청의 아전.
원문:
公在軍七年, 苦身困心, 未嘗近女色, 戰勝得賞, 則必散施諸將, 無所遺儲。 與元均因軍事兩有違言, 積不相能, 公常戒子弟曰: “若有人問之者, 爾等當言彼有功, 勿言所短。” 有一卒當刑, 子弟在傍¹⁵⁵曰: “罪重不可貸也。” 公徐曰: “子弟之道, 當以生道救人。”【遺事。】
번역문:
공이 군중에 있은 지 7년 동안 몸을 괴롭히고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일찍이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싸움에 이겨 상(賞)을 얻으면 반드시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베풀어 남겨두고 저축하는 바가 없었다. 원균과 군사(軍事) 문제로 인하여 양쪽이 서로 어긋나는 말이 있어 쌓여 서로 용납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항상 자제(子弟)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묻거든, 너희들은 마땅히 그에게 공(功)이 있다고 말하고, 단점(短點)을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한 병졸이 형벌을 받게 되자, 자제가 곁¹⁵⁶에서 말하기를 “죄가 무거우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자제(子弟)의 도리는 마땅히 살릴 방도[生道]로 사람을 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155. [주-D008] 傍 : 저본(底本)에는 “방(榜)”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백사집(白沙集)·고통제사리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방(榜)'은 '방을 붙이다'는 의미이고, '방(傍)'은 '곁'이라는 의미이므로 문맥상 '방(傍)'이 옳다.
156. 방(傍): 곁. 주석 [주-D008] 참조.
원문:
公嘗在陣, 晝夜戒嚴, 未嘗解甲而臥。 一夜, 月¹⁵⁷色甚明, 公忽起飮一盃, 悉召諸將曰: “賊多詐謀, 無月時, 固當襲我, 月明亦應來, 不可不儆備。” 遂吹角, 令諸船皆擧碇。 俄而候船告賊來, 落月掛西, 賊船從陰黑中來者不可勝數。 中軍放大砲吶喊, 諸船皆應, 賊知有備, 遂不敢犯而退。 諸將以爲神。
번역문:
공이 일찍이 진(陣)에 있을 때 밤낮으로 계엄(戒嚴)하여 일찍이 갑옷을 풀고 누운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 달¹⁵⁸빛이 매우 밝았는데, 공이 갑자기 일어나 술 한 잔을 마시고 모든 장수를 불러 말하기를 “적은 속임수와 꾀[詐謀]가 많으니, 달이 없을 때에는 진실로 마땅히 우리를 습격하겠지만, 달이 밝아도 또한 응당 올 것이니, 경계하고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각(角)¹⁵⁹을 불어 모든 배에 명하여 다 닻을 올리게 하였다. 얼마 후 후선(候船)¹⁶⁰이 적이 온다고 보고하였는데, 지는 달이 서쪽에 걸려 있고 적선이 어둠 속에서 오는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중군(中軍)¹⁶¹이 대포(大砲)를 쏘고 고함치자 모든 배가 다 응하니, 적이 대비가 있음을 알고 마침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여러 장수들이 신(神)과 같다고 여겼다.
주석:
157. [주-D009] 月 : 저본(底本)에는 없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지봉유설(芝峯類說)》 및 《지봉유설(芝峯類說)・인물부(人物部)・절의(節義)》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뒤의 '월명(月明)'과 호응하려면 '월색(月色)'이 자연스럽다.
158. 월(月): 달. 주석 [주-D009] 참조.
159. 각(角): 뿔피리. 군중(軍中)에서 신호용으로 사용하던 악기.
160. 후선(候船): 정찰선. 초선(哨船)과 같은 의미이다.
161. 중군(中軍): 군대 편제상 중앙에 위치하는 부대 또는 그 지휘관. 여기서는 이순신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 또는 그 기함(旗艦)을 가리킬 수 있다.
원문:
公別儲精米五百石而封之, 或問何用。 公曰: “主上越在龍灣, 若至渡遼, 則以龍舟浮海迎駕, 仍圖恢復, 吾之職也。 此可以備玉食之供。” 其識慮之遠大, 皆此類也。【竝行狀。】
번역문:
공이 따로 정미(精米) 500석(石)을 저장하여 봉해 두었는데, 어떤 이가 어디에 쓰려는지 묻자, 공이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멀리 용만(龍灣)¹⁶²에 계신데, 만약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시는 지경에 이르면 용주(龍舟)¹⁶³를 바다에 띄워 어가(御駕)를 맞이하고 이어서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나의 직책이다. 이것은 옥식(玉食)¹⁶⁴의 공급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식견과 생각이 원대함이 모두 이런 종류였다.【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62.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별칭. 임진왜란 초기 선조가 파천(播遷)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163. 용주(龍舟): 임금이 타는 배. 어선(御船).
164. 옥식(玉食): 임금의 수라. 임금의 식사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원문:
行長之遁也, 統制使李舜臣以舟師追之, 大捷。 戰方酣, 舜臣中流丸。 天將陳璘素服舜臣智略, 待爲兄弟。 是日望見舜臣船爭首級, 大驚曰: “統制使死矣!” 左右曰: “何以知之?” 璘曰: “吾觀統制使軍律甚嚴。 今其船爭首級而亂, 是無號令也。” 戰旣罷問之, 則果然矣。【《涪溪記聞》。】
번역문:
행장(行長)이 달아날 때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舟師]으로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싸움이 바야흐로 치열할 때 순신이 유탄(流丸)에 맞았다. 천장(天將)¹⁶⁵ 진린은 평소 순신의 지략(智略)에 감복하여 형제(兄弟)처럼 대하였다. 이날 순신의 배가 수급(首級)을 다투는 것을 바라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통제사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하니, 진린이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통제사의 군율(軍律)이 매우 엄격하다. 지금 그 배가 수급을 다투며 혼란스러우니, 이는 호령(號令)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싸움이 이미 끝나고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부계기문(涪溪記聞)》¹⁶⁶에서 인용】
주석:
165. 천장(天將): 천자(天子)의 장수라는 뜻으로, 명나라 장수를 가리킨다.
166. 《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涪溪) 윤국형(尹國馨, 1543~1611)이 지은 필기집. 주로 임진왜란 전후의 정치, 사회, 인물 등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원문:
統制使李舜臣, 壬辰, 督率舟師, 遮截海中, 累破倭船, 擒斬無數。 賊畏之, 再不敢由水路而西, 使兩湖得全, 以底恢復, 皆其力也。 戊戌, 倭賊將遁去, 舜臣曰: “不可使此賊全師而歸。” 進戰於海上, 燒船大捷, 賊退而舜臣中丸死矣, 邊民莫不號慟。 後立祠于順天水營, 賜額忠愍, 每歲三、九月上旬, 降香行祀。【《芝峯類說》。】
번역문:
통제사 이순신은 임진년에 수군[舟師]을 독려하고 거느려 바다 가운데서 막아 끊어 여러 차례 왜선(倭船)을 격파하고 사로잡거나 벤 것이 무수하였다. 적이 그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감히 수로(水路)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였으니, 양호(兩湖)가 온전함을 얻어 회복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그의 힘이었다. 무술년에 왜적이 장차 달아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 적들이 온전한 군사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해상(海上)에서 나아가 싸워 배를 불태우고 크게 이겼으나, 적이 물러가고 순신은 탄환에 맞아 죽으니, 변방 백성들이 통곡하지 않음이 없었다. 후에 순천(順天) 수영(水營)¹⁶⁷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충민(忠愍)¹⁶⁸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였으며, 매년 3월과 9월 상순(上旬)에 향(香)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지봉유설(芝峯類說)》¹⁶⁹에서 인용】
주석:
167. 순천 수영(順天水營):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여수(麗水) 진남관(鎭南館) 일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해전이 순천부(順天府) 관할 해역과 가까웠기 때문에 순천 수영으로 언급했을 수 있다. 혹은 노량 해전 직전 이순신이 주둔했던 순천 왜교(倭橋) 부근을 의미할 수도 있다.
168. 충민(忠愍):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가엾게 여김. 현종(顯宗) 4년(1663)에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에 내려진 사액(賜額) 이름이다. 여수 충민사(忠愍祠)를 가리킨다.
169. 《지봉유설(芝峯類說)》: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 천문, 지리, 역사, 제도, 문학, 종교, 동식물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망라하였다.
원문:
嘗論水陸諸將之功, 元均特因人而成事者, 固不敢與李舜臣抗衡, 舜臣之功, 當冠水軍矣。 若究其心, 亦必有分其功者, 而事不明著, 不見於文書, 余亦得之於道路, 亦難傳信。 余往來海陣, 見人必問諸將用兵如何, 海陣之人言之頗詳。 當嶺南陷敗之日, 舜臣在水營, 不知所以爲計, 欲列艦露梁口, 遏賊來路, 修城自守。 又欲固守本道, 不窺閑山之口, 猶豫未決。 順天府使權俊、光陽縣監魚泳潭移書起之, 身自馳往, 力贊下海之計, 乃始起兵云。 此說若然, 則俊與泳潭當分其功。 論其功, 則舜臣實是首功; 語其心, 則於兩人差有愧焉。【《白沙雜記》。】
번역문:
일찍이 수륙(水陸) 여러 장수들의 공(功)을 논하건대, 원균은 특별히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일을 이룬 자이니 진실로 감히 이순신과 항형(抗衡)¹⁷⁰할 수 없고, 순신의 공은 마땅히 수군(水軍)의 으뜸이 될 것이다. 만약 그 마음을 궁구해 본다면 또한 반드시 그 공을 나눌 자가 있을 것이나, 일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문서(文書)에도 보이지 않으며, 나 또한 길거리에서 들었으니 또한 전하여 믿게 하기 어렵다. 내가 해진(海陣)¹⁷¹을 왕래하며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여러 장수들의 용병(用兵)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는데, 해진의 사람들이 그것을 자못 상세히 말하였다. 영남(嶺南)이 함락되고 패하던 날, 순신이 수영(水營)에 있으면서 계책을 세울 바를 알지 못하여, 노량(露梁) 어귀에 전함(列艦)을 늘어놓아 적이 오는 길을 막고 성(城)을 수리하여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다. 또 본도(本道)를 굳게 지키고 한산(閑山)의 길목을 엿보지 않으려 하여, 유예(猶豫)하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순천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¹⁷²과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글을 보내 그를 일으키고, 몸소 달려가서 바다로 나아갈 계책을 힘써 찬성하자, 이에 비로소 군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 말이 만약 그러하다면 권준과 어영담이 마땅히 그 공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그 공을 논하자면 순신이 실로 으뜸가는 공[首功]이나, 그 마음을 말하자면 두 사람에게 자못 부끄러움이 있다¹⁷³.【《백사잡기(白沙雜記)》¹⁷⁴에서 인용】
주석:
170. 항형(抗衡): 저울대[衡]처럼 맞서 겨룸. 서로 맞서 대항함.
171. 해진(海陣): 바다의 진영. 수군 진영.
172. 권준(權俊, 1547~1611):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발발 시 순천부사로서 이순신의 첫 출전에 기여했다.
173. 어양인차유괴언(於兩人差有愧焉): 이순신이 처음 출전을 망설였다면, 그 공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권준과 어영담에게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순신의 공적을 다소 폄하하려는 시각이 반영된 기록으로, 다른 기록들과는 차이가 있다.
174. 《백사잡기(白沙雜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필기잡록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백사집(白沙集)》에도 이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원문:
白沙曰: “上嘗論水陸諸將之功曰: ‘李、元海上之鏖, 權慄幸州之捷, 當爲首功。’ 此不易之定論。” 又曰: “元均因人而成事者, 固不敢與李舜臣抗衡。 云云。” 白沙此言, 何其誤也? 當賊以舟師, 長驅向湖南也, 舜臣出萬死之計, 遮絶於閑山, 使之不敢西棹者凡六年。 均則惶㥘失措, 自沈其戰船, 竄伏海島。 舜臣引置軍中, 優給糧資, 其所獲首虜, 分載於均, 使均非徒得免軍律, 又從而受賞焉。 均之於舜臣, 卵育之恩固爲不些, 而均也及其得志之後, 反懷忌疾之心, 凡所以害舜臣者, 無所不至, 做出海王之說, 傳播遠近。 及淸正渡海, 密啓舜臣逗撓不進, 舜臣終至於拿鞫。 均代之, 曾不踰時, 全師覆沒, 有罪可誅, 無功可記。 顧乃與舜臣、權慄幷稱者, 何也? 蓋均世居京洛, 族連貴近, 又諂事時人, 右之者多, 故欺罔君父, 刑賞倒置。 白沙其未之聞歟?【白沙雜著論。】
번역문:
백사(白沙)가 말하기를 “상(上)께서 일찍이 수륙(水陸) 여러 장수들의 공(功)을 논하며 말씀하시기를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海上)에서의 섬멸전[鏖]과 권율(權慄)¹⁷⁵의 행주(幸州)에서의 승첩(勝捷)이 마땅히 수공(首功)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원균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일을 이룬 자이니, 진실로 감히 이순신과 항형(抗衡)할 수 없다. 운운(云云).”라고 하였다. 백사의 이 말이 어찌 그리 잘못되었는가? 적이 수군[舟師]으로 멀리 내달아 호남(湖南)으로 향할 때, 순신이 만 번 죽을 계책[萬死之計]을 내어 한산(閑山)에서 차단하여 그들로 하여금 감히 서쪽으로 노를 젓지 못하게 한 것이 무릇 6년¹⁷⁶이었다. 원균은 황공(惶恐)하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惶㥘失措] 스스로 그 전선(戰船)을 가라앉히고 해도(海島)에 숨어 엎드렸다. 순신이 그를 이끌어 군중에 두고 양식과 자금[糧資]을 넉넉히 공급하였으며, 그 사로잡은 머리와 포로[首虜]를 원균에게 나누어 실어주어, 원균으로 하여금 한갓 군율(軍律)을 면하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따라서 상(賞)을 받게 하였다. 원균이 순신에게 입은 알을 품어 기르는 듯한 은혜[卵育之恩]¹⁷⁷가 진실로 적지 않았으나, 원균은 그 뜻을 얻은 뒤에는 도리어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忌疾之心]을 품어, 무릇 순신을 해치려는 바를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해상왕(海上王)¹⁷⁸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원근(遠近)에 퍼뜨렸다. 청정(淸正)이 바다를 건너오자, 비밀리에 순신이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않는다고 아뢰어, 순신이 마침내 잡혀가 국문[拿鞫]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균이 그를 대신하여 일찍이 시간도 넘기지 않아 전군(全師)이 복멸(覆沒)하였으니, 죄는 베어 마땅함이 있었으나 공은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다. 돌아보건대 이에 순신, 권율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원균은 대대로 서울[京洛]에 살았고 친족이 귀인(貴人)과 가까운 이[貴近]와 연결되었으며, 또 당시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섬겨 그를 편드는 자가 많았으므로, 임금과 어버이[君父]¹⁷⁹를 속여 업신여겨 형벌과 상(賞)이 뒤바뀌었다. 백사는 그것을 듣지 못하였는가?【백사잡저론(白沙雜著論)에서 인용】
주석:
175. 권율(權慄, 1537~1599): 조선 중기의 문신, 무신. 임진왜란 때 행주 대첩(幸州大捷)을 이끈 명장이다. 도원수(都元帥)를 지냈다.
176. 범육년(凡六年): 1592년(임진년)부터 1597년(정유년)까지 이순신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 수군이 서해로 진출하지 못한 기간을 대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177. 난육지은(卵育之恩): 알을 품어 새끼를 기르는 듯한 은혜.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준 은혜를 비유한다.
178. 해상왕(海上王): 바다 위의 왕. 원균 등이 이순신의 세력이 너무 커져 왕처럼 행세한다고 모함한 말을 가리킨다.
179. 군부(君父): 임금과 어버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 해야 함을 강조하는 유교적 표현이다.
원문:
有僧玉洞者, 嘗從李統制舜臣在舟師, 不暫離左右。 及統制沒, 仍居忠愍祠, 搆精舍其側, 守直不廢, 每手備祭膳以祀之, 年今八十餘矣。 自言能以左右鼻出入息, 定時刻不差云。 驗之果然, 蓋非庸僧也。 又言海上如有警報, 則統制必先期見夢云。 豈公之靈尙有未泯者, 而一片爲國之心, 死而不死也歟? 吁亦異矣!【《昇平志》。】
번역문:
승려(僧侶) 옥동(玉洞)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이 통제 순신을 따라 수군[舟師]에 있으면서 잠시도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통제가 죽자 그대로 충민사(忠愍祠)에 거처하며 그 곁에 정사(精舍)¹⁸⁰를 짓고 수직(守直)¹⁸¹을 폐하지 않았으며, 매번 손수 제사 음식[祭膳]을 갖추어 그를 제사 지내니, 나이가 이제 80여 세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능히 좌우 콧구멍으로 숨을 출입시켜 시각(時刻)을 정함에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시험해보니 과연 그러하였으니, 대개 평범한 승려가 아니었다. 또 말하기를 해상(海上)에 만약 경보(警報)가 있으면 통제께서 반드시 기약하기 전에 꿈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어찌 공의 영혼(靈魂)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어, 한 조각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겠는가? 아, 또한 기이하도다!【《승평지(昇平志)》¹⁸²에서 인용】
주석:
180. 정사(精舍): 학문이나 수도(修道)를 위해 조용히 거처하는 집. 여기서는 충민사 옆에 지은 승려의 거처를 의미한다.
181. 수직(守直): 능(陵), 묘(廟), 사당(祠堂) 등을 지키는 일.
182. 《승평지(昇平志)》: 순천(順天)의 옛 이름인 승평(昇平) 지역의 지리지(地理志).
원문:
忠武公當積衰諱兵之後, 遇天下莫强之寇, 大小數十戰, 皆以全取勝, 蔽遮西海, 使賊不得水陸竝進, 以爲中興根本。 至其立身之節、死難之忠、行師用兵之妙、綜務辦事之智, 已試而可見者, 雖古之名將賢帥, 無以過也。【《澤堂集》。】
번역문:
충무공(忠武公)은 오랫동안 쇠미하여 군사를 기피하던¹⁸³ 뒤를 당하여, 천하에 더없이 강한 도적[寇]을 만나,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전투에서 모두 온전히 승리를 거두고, 서해(西海)를 가로막아 적이 수륙(水陸)으로 함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여 중흥(中興)의 근본(根本)이 되게 하였다. 그 입신(立身)의 절개, 죽음으로 어려움에 임하는 충성[死難之忠], 군사를 행하고 용병(用兵)하는 묘(妙)함, 업무를 총괄하고 일을 처리하는 지혜[綜務辦事之智]에 이르러서는, 이미 시험하여 볼 수 있는 바로서 비록 옛 명장(名將)과 현명한 장수[賢帥]라 하더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택당집(澤堂集)》¹⁸⁴에서 인용】
주석:
183. 적쇠휘병(積衰諱兵): 오랫동안 쇠미하여 군사(軍事)를 기피함. 조선 중기 200여 년간 큰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되면서 국방력이 약화된 상황을 가리킨다.
184. 《택당집(澤堂集)》: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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