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鄭澈)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鄭澈
字季涵, 號松江, 迎日人。 嘉靖丁酉¹生。 明宗十七年壬戌, 登魁科。 賜暇湖堂, 歷吏郞、玉堂。 宣祖朝, 策光國、平難勳, 封寅城府院君。 官至左議政。 甲午²卒, 年五十八。
번역문:
정철(鄭澈)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영일(迎日) 사람이다.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1537)¹에 태어났다. 명종(明宗) 17년 임술년(1562)에 문과(文科)에 장원(魁科)²으로 급제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³를 하였고, 이조 정랑(吏曹正郞)⁴과 옥당(玉堂)⁵을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시대에 광국공신(光國功臣)⁶과 평난공신(平難功臣)⁷에 책록되었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⁸에 봉해졌다. 관직은 좌의정(左議政)⁹에 이르렀다. 갑오년(甲午年, 1594)²에 졸(卒)하니, 나이는 58세였다.
주석:
- [주-D001] 丁酉 : 《송자대전(宋子大全)・정공신도비명(鄭公神道碑銘)》, 《송강집(松江集)・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鄭公神道碑銘)》 및 《행장(行狀)》에 근거할 때 “병신(丙申)”이 되어야 한다. 즉, 정철의 출생 연도는 1536년(병신년)이다.
- [주-D002] 甲午 : 《송자대전・정공신도비명》, 《송강집・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 및 《행장》에 근거할 때 “계사(癸巳)”가 되어야 한다. 즉, 정철의 졸년은 1593년(계사년)이다.
- 괴과(魁科): 과거(科擧) 시험에서 장원(壯元), 즉 수석으로 합격하는 것. 정철은 1561년 진사시, 1562년 문과 별시(別試)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
- 사가독서(賜暇讀書):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湖堂)에서 학문을 연마하게 하던 제도. '호당(湖堂)'은 독서당의 별칭이다.
-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人事) 실무를 담당하는 요직 중의 요직으로,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다. '이낭(吏郞)'은 이조 정랑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경연(經筵)과 서적 관리, 문한(文翰) 등을 담당하는 중요한 학술 및 언론 기관이었다.
- 광국공신(光國功臣):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기축옥사, 己丑獄事)을 다스린 공으로 책봉된 공신. 정철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평난공신(平難功臣): 1590년(선조 23) 건저(建儲) 문제로 일어난 신축옥사(辛丑獄事) 때 동인(東人) 세력을 제거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그러나 이는 서인(西人) 세력이 날조한 것으로 후에 삭제되었다. 정철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작호(爵號)이다. 정철은 공신으로서 이 작호를 받았다.
- 좌의정(左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관직. 영의정 다음가는 재상이다.
원문:
丙寅, 奸兇退黜, 公始擢拜獻納、持平, 棘棘不阿, 退溪先生稱有古諫臣風。
번역문:
병인년(1566)에 간흉(奸兇)¹¹이 물러나자, 공(公)이 비로소 발탁되어 헌납(獻納)¹², 지평(持平)¹³에 임명되었는데,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으니(棘棘不阿)¹⁴ 퇴계 선생(退溪先生)¹⁵께서 옛 간신(諫臣)¹⁶의 풍모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주석:
11. 간흉(奸兇):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 여기서는 명종 말년에 권력을 잡았던 외척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가리킨다. 명종 사후(1567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하면서 사림(士林) 세력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12. 헌납(獻納): 사간원(司諫院)의 정5품 관직.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언관(言官)이다.
13.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백관(百官)을 규찰하는 언관이다.
14. 극극불아(棘棘不阿): 꼿꼿하여 아첨하지 않음. 강직한 성품을 나타낸다.
15. 퇴계 선생(退溪先生):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16. 간신(諫臣): 임금에게 간언(諫言)하는 신하.
원문:
爲天曹郞, 恢張淸議, 登進士類。 舊宰金鎧、洪曇等深加忌嫉, 退溪亦被譏訕。 鎧於經席進斥士類, 至曰“今日士習幾乎己卯”, 己卯蓋指靜菴諸賢。 公後與鎧同對, 斥鎧邪說。 上厲聲曰: “鄭澈誤矣。” 公曰: “雷霆雖震, 臣言不可不盡。” 極言鎧等紹述衮、貞之狀, 鎧竟削黜。【竝尤菴宋時烈撰神道碑。】
번역문:
천조(天曹)¹⁷의 낭관(郞官)¹⁸이 되어서는 청의(淸議)¹⁹를 크게 펼쳐 사류(士類)²⁰를 등용하였다. 구 재상(舊宰) 김개(金鎧)²¹, 홍담(洪曇)²² 등이 깊이 기피하고 질투하여 퇴계 선생 또한 비방(譏訕)을 받았다. 김개가 경연(經席)에서 나아가 사류를 배척하며 심지어 “오늘날 선비의 풍습이 기묘년(己卯年)과 거의 같다”고 말하였는데, 기묘년은 대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현인²³을 가리킨다. 공이 후에 김개와 함께 임금을 대할 때 김개의 사악한 말을 배척하였다. 상(上)께서 노한 목소리로 “정철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자, 공이 아뢰었다. “벼락(雷霆)이 비록 치더라도 신의 말은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개 등이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²⁴의 행태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실상을 극력 말하니, 김개가 마침내 삭탈관직(削黜)되었다.【이상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인용】
주석:
17. 천조(天曹): 이조(吏曹)의 별칭.
18. 낭관(郞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통칭하는 말. 여기서는 이조 정랑을 가리킨다.
19. 청의(淸議): 사림(士林)의 공론(公論). 사림파는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20. 사류(士類): 사림(士林) 계열의 선비들.
21. 김개(金鎧): 조선 중기의 문신. 훈구파(勳舊派)로 분류되기도 하며, 사림과 대립했다.
22. 홍담(洪曇, 1509-1576): 조선 중기의 문신.
23. 기묘년(己卯年)……정암(靜庵) 제현(諸賢): 1519년(중종 14) 기묘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와 그때 희생된 조광조(趙光祖, 호는 靜庵) 등 신진 사림들을 가리킨다. 김개가 당시 사림의 활동을 기묘사화 직전의 급진적인 개혁 움직임에 비유하며 비판한 것이다.
24.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를 주도하고 명종 대에 권력을 휘두른 대표적인 척신(戚臣) 세력. '곤(衮)'은 윤원형, '정(貞)'은 이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철은 김개 등이 이들의 행태를 답습한다고 비판했다. '정(貞)'의 경우 윤원형의 아들 윤정(尹貞)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맥락상 이기일 가능성이 높다.
원문:
洪曇爲判書, 欲反李鐸之所爲以循流俗, 郞官不從。 曇甚恨之, 尤與佐郞鄭澈相忤。 一日, 當補官, 澈欲擬被郞薦者, 曇曰: “此人未試才。” 澈曰: “若被薦, 雖不試才, 亦得補官, 已成近規矣。” 曇曰: “開此新例, 物論崢嶸, 不可用也。” 澈爭之固, 曇甚怒, 尤忌士類, 思所以逐之。【《石潭日記》。】
번역문:
홍담(洪曇)이 판서(判書)가 되어 이탁(李鐸)이 했던 바²⁵를 뒤집어 세속의 흐름을 따르려 하자 낭관(郞官)들이 따르지 않았다. 홍담이 이를 매우 한스럽게 여겼는데, 특히 좌랑(佐郞) 정철과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하루는 관리를 보충하게 되었는데, 정철이 정랑(正郞)에게 추천받은 자²⁶를 임명하려 하자, 홍담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재능을 시험해 보지 못했다.” 정철이 말하였다. “만약 추천을 받았다면 비록 재능을 시험하지 않았더라도 또한 관직에 보임될 수 있음이 이미 근래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홍담이 말하였다. “이런 새로운 예를 열면 물론(物論)²⁷이 시끄러울 것이니, 쓸 수 없다.” 정철이 굳게 다투니, 홍담이 매우 노하여 더욱 사류(士類)를 꺼려서 그들을 내쫓을 방법을 생각하였다.【《석담일기(石潭日記)》²⁸에서 인용】
주석:
25. 이탁(李鐸)지소위(之所爲): 이탁(李鐸, 1509-1576)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행했던 정책이나 인사 방침. 이탁은 사림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6. 피낭천자(被郞薦者): 정랑(正郞)에게 추천받은 사람. 당시 이조 전랑(吏曹銓郞, 정랑과 좌랑)은 삼사(三司) 관원을 선발하는 통청권(通淸權)과 후임자를 추천하는 자대권(自代權) 등 강력한 인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둘러싼 갈등은 붕당(朋黨) 정치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27. 물론(物論): 세상 사람들의 비평이나 여론. 특히 사림의 여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28. 《석담일기(石潭日記)》: 석담(石潭) 이이(李珥, 1536-1584)가 쓴 일기. 선조 대 정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담고 있다.
원문:
大司諫許曄、司諫金孝元以按獄失體, 請推左相朴淳, 淳乃謝病。 鄭澈謂李珥曰: “諫院挾邪意, 動搖賢相, 玉堂烏可無言?” 珥曰: “此非孝元之論, 乃發於都諫之議過中也。” 澈曰: “許太輝爲近日邪論之主, 至使賢相不安其位, 豈可止言過中乎?” 時鄭宗榮爲吏判。 宗榮鄙俗, 素非人望, 且有付托孝元之誚。 澈又曰: “鄭冢宰亦可存乎?” 珥曰: “論駁非玉堂職也。” 澈慨然作詩曰: “君子辭黃閣, 小人秉東銓。 賢邪進退際, 副學心恬然。” 珥微笑而已。【《休窩雜纂》。】
번역문:
대사간(大司諫) 허엽(許曄)과 사간(司諫) 김효원(金孝元)²⁹이 옥사(獄事)를 처리함에 체모를 잃었다는 이유로 좌상(左相) 박순(朴淳)³⁰을 탄핵할 것을 청하자, 박순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정철이 이이(李珥)에게 말하였다. “간원(諫院)³¹이 사악한 뜻을 품고 어진 재상(賢相)을 동요시키는데, 옥당(玉堂)³²에서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이가 말하였다. “이는 김효원의 주장이 아니라, 도간(都諫)³³의 논의가 중도를 넘어선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정철이 말하였다. “허태휘(許太輝)³⁴가 근래 사악한 여론의 주동자가 되어 어진 재상으로 하여금 그 지위에 불안하게 하니, 어찌 중도를 넘었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때 정종영(鄭宗榮)³⁵이 이조 판서(吏判)였다. 정종영은 비속(鄙俗)하여 평소 인망(人望)이 없었고, 또한 김효원에게 청탁했다는 비난(誚)이 있었다. 정철이 또 말하였다. “정 총재(鄭冢宰)³⁶ 또한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이이가 말하였다. “논박(論駁)은 옥당의 직책이 아니다.” 정철이 개탄하며 시(詩)를 지어 말하였다. “군자(君子)는 황각(黃閣)³⁷을 사양하고, 소인(小人)은 동전(東銓)³⁸을 잡았네. 현명한 이와 사악한 이가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에, 부학(副學)³⁹은 마음이 태연하구나.” 이이가 미소 지을 뿐이었다.【《휴와잡찬(休窩雜纂)》⁴⁰에서 인용】
주석:
29. 허엽(許曄, 1517-1580), 김효원(金孝元, 1532-1590): 둘 다 동인(東人)의 핵심 인물이다. 김효원은 심의겸(沈義謙)과의 갈등으로 동서 분당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30. 박순(朴淳, 1523-1589): 서인(西人)으로 분류되기도 하나, 비교적 온건한 인물이었다.
31. 간원(諫院): 사간원(司諫院)을 가리킨다.
32.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을 가리킨다.
33. 도간(都諫):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허엽을 지칭한다.
34. 허태휘(許太輝): 허엽(許曄)의 다른 이름 혹은 별칭으로 보인다.
35. 정종영(鄭宗榮, 1519-1588): 조선 중기의 문신.
36. 정 총재(鄭冢宰): 총재(冢宰)는 이조 판서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정종영을 지칭한다.
37. 황각(黃閣): 의정부(議政府) 또는 재상의 지위를 비유하는 말. 여기서는 박순의 사직을 의미한다.
38. 동전(東銓): 이조(吏曹)를 가리키는 별칭. 이조가 궁궐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조 판서 정종영을 비판하는 말이다.
39. 부학(副學):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이 직책에 있던 이이(李珥)를 지칭한다. 정철은 이이가 소극적으로 대처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40. 《휴와잡찬(休窩雜纂)》: 휴와(休窩)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지은 잡록.
원문:
鄭澈、具鳳齡、辛應時等皆以金孝元爲小人, 欲深斥之。 澈將南歸, 勸李珥斥孝元, 珥曰: “彼人罪狀無形, 而爲士類所重。 若欲深斥, 則必連累士類, 大致紛紜, 朝廷傷矣。” 終不聽。 澈乃作詩示之, 曰: “君意似山終不動, 我行如水幾時回?” 慨嘆而歸。
번역문:
정철, 구봉령(具鳳齡)⁴¹, 신응시(辛應時)⁴² 등은 모두 김효원(金孝元)을 소인(小人)으로 여겨 깊이 배척하고자 하였다. 정철이 장차 남쪽으로 돌아가려 할 때 이이(李珥)에게 김효원을 배척하라고 권하였으나, 이이가 말하였다. “저 사람의 죄상(罪狀)은 형체가 없는데 사류(士類)에게 중시되고 있다. 만약 깊이 배척하고자 하면 반드시 사류에게 연루(連累)되어 크게 분분(紛紜)해져 조정(朝廷)이 상할 것이다.” 끝내 듣지 않았다. 정철이 이에 시(詩)를 지어 보여주며 말하였다. “그대 뜻은 산과 같아 끝내 움직이지 않으니, 나의 길은 물과 같아 어느 때나 돌아오리오?” 개탄하며 돌아갔다.
주석:
41. 구봉령(具鳳齡, 1526-1586):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서인(西人)으로 분류된다.
42. 신응시(辛應時, 1532-1585):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西人)으로 분류된다.
원문:
時士類尙未協和, 互相猜疑, 咸願李珥勉留, 調劑時論。 鄭澈初被士類疑阻, 今則漸回所見, 頗作持平之論, 勸珥留甚懇。 珥曰: “珥今來此, 非出也, 只是暫來謝恩耳。 無端供職, 於義無據。 尺旣枉矣, 尋亦恐不能直也。 如君則前日退去, 意有所在, 非決一生去就也。 今則所見稍改, 欲調和士林。 當今持平之責, 萃於君身, 君則不可退去也。” 澈終以孤單爲慮矣。
번역문:
이때 사류(士類)가 아직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였으므로, 모두 이이(李珥)가 힘써 머물러 시론(時論)을 조제(調劑)하기를 원하였다. 정철은 처음에 사류에게 의심과 저지를 받았으나, 이제는 점차 소견을 바꾸어 자못 지평(持平)의 논의⁴³를 펴면서, 이이에게 머물기를 매우 간절히 권하였다. 이이가 말하였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벼슬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사은(謝恩)하러 온 것일 뿐이다. 까닭 없이 관직에 나아가면 의리상 근거가 없다. 한 자(尺)가 이미 굽었으니, 한 길(尋)⁴⁴ 또한 곧게 펴지 못할까 두렵다. 그대와 같은 경우는 전일 물러간 것이 뜻하는 바가 있었고 일생의 거취를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소견이 조금 바뀌어 사림(士林)을 조화시키고자 하니, 당금 지평의 책임이 그대 몸에 모였으니, 그대는 물러가서는 안 된다.” 정철은 끝내 고단(孤單)할 것을 염려하였다.
주석:
43. 지평지론(持平之論):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는 논의. 중립적인 입장에서 양측을 조화시키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44. 척(尺), 심(尋): 길이를 재는 단위. 한 자(尺)는 약 30cm, 한 길(尋)은 여덟 자(八尺)이다. 작은 것을 굽히면 큰 것도 바로잡기 어렵다는 비유이다. 이이는 자신이 이미 특정 상황에 얽혔기에 공정하게 처신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원문:
以鄭澈爲同副承旨。 澈以直提學拜命, 勉留欲和士林, 及拜承旨, 再上疏辭職, 不許, 乃出仕。 在政院, 覆逆以正, 甚張士氣。 時沈義謙、金孝元分邊之說益盛, 以義謙儕輩目之謂西, 以孝元儕輩目之謂東⁴⁵, 朝紳苟非特立獨行及碌碌無名者, 則皆入東西指目之中。 澈則人目爲西者也, 故李珥勸澈與年少士類通情, 以破東西之說。
번역문:
정철을 동부승지(同副承旨)⁴⁶로 삼았다. 정철은 직제학(直提學)⁴⁷으로서 명을 받고 힘써 머물러 사림(士林)을 화합시키려 하다가, 승지(承旨)에 제수되자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이에 출사(出仕)하였다. 정원(政院)⁴⁸에 있으면서 잘못된 것을 뒤집어 바르게 하여 크게 사기(士氣)⁴⁹를 떨쳤다. 이때 심의겸(沈義謙)⁵⁰과 김효원(金孝元)이 편을 나누는 말[分邊之說]이 더욱 성하여, 심의겸의 무리를 지목하여 서인(西人)이라 하고, 김효원의 무리를 지목하여 동인(東人)이라 하였는데⁴⁵, 조정 신하들은 진실로 특립독행(特立獨行)⁵¹하거나 녹록하여 이름 없는 자가 아니면 모두 동서(東西)의 지목(指目) 속에 들어갔다. 정철은 사람들이 서인으로 지목하는 자였으므로, 이이(李珥)가 정철에게 연소(年少)한 사류(士類)와 정을 통하여 동서의 설을 깨뜨리라고 권하였다.
주석:
45. [주-D003] 以孝元儕輩目之謂東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 11년 조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동서 분당의 직접적인 계기와 명칭 유래를 설명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46.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승지(承旨) 중 하나이다.
47.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부제학(副提學) 다음가는 직책이다.
48.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 기관이다.
49. 사기(士氣): 선비들의 기풍 또는 기세.
50.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서인(西人)의 영수로 간주되는 인물. 외척이었으나 사림과 교류했다. 김효원과의 갈등이 동서 분당의 계기가 되었다.
51. 특립독행(特立獨行):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함.
원문:
以鄭澈爲大司諫。 澈憤士類誤事, 將退歸, 而有此命, 以書問去就於李珥。 珥答曰: “士類之疑君, 雖是士類之過, 亦是君不愼言, 有以自取, 不可專咎士類也。 今不供職, 則疑阻益甚, 浮言甚鬨, 而士類與君終不得合, 後日攻士類者, 藉君爲重矣。 士類雖有所失, 而攻士類者必小人也。 若小人藉君爲重, 則倒河無以洗其羞辱。 必須今日供職, 持議平和, 以釋士類之疑可也。” 澈乃就職。【竝《石潭日記》。】
번역문:
정철을 대사간(大司諫)⁵²으로 삼았다. 정철이 사류(士類)가 일을 그르치는 것에 분개하여 장차 물러나 돌아가려 하였는데 이 명이 있자, 편지로 거취(去就)를 이이(李珥)에게 물었다. 이이가 답하였다. “사류가 그대를 의심하는 것이 비록 사류의 잘못이기는 하나, 또한 그대가 말을 삼가지 않아 스스로 자초한 바가 있으니 오로지 사류만 탓할 수는 없다. 지금 관직에 나아가지 않으면 의심과 저지가 더욱 심해지고 뜬소문이 매우 시끄러워져서, 사류와 그대가 끝내 합치지 못할 것이며, 후일 사류를 공격하는 자들이 그대를 힘으로 삼을[藉君爲重] 것이다. 사류가 비록 실책이 있으나 사류를 공격하는 자는 반드시 소인(小人)이다. 만약 소인이 그대를 힘으로 삼는다면, 황하(黃河)의 물을 거꾸로 쏟아도 그 치욕을 씻을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오늘 관직에 나아가 의론을 화평하게 가져서 사류의 의심을 풀어주는 것이 옳다.” 정철이 이에 관직에 나아갔다.【이상은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인용】
주석:
52.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원문:
宣廟十三年, 監司鄭澈狀啓: “道內寧越郡有魯山君墓, 樵牧相尋, 行路咨嗟。 臣伏念魯山君曾臨御一邦, 有君道焉。 雖降封爲君, 墓道儀物, 自有其制, 而無異賤夫之瘞, 臣實傷之。 伏願下旨, 改築其墓, 又立標石, 一依禮葬, 則揆以禮法, 亦無愆越矣。 自古帝王之於敗亡之君, 葬必以厚, 仇敵若項羽, 而高皇帝葬以魯王; 革除如建文, 而成祖皇帝葬以天子, 皆帝王盛擧也。 頃在丙子年間, 遣官致祭, 其意甚厚。 今用一品禮, 修魯山墓, 又遣禮官致祭, 援古論今, 實爲允當。” 啓下禮曹。【《朝野記聞》。】
번역문:
선조(宣廟) 13년(1580)에 감사(監司)⁵³ 정철이 장계(狀啓)⁵⁴를 올렸다. “도내(道內) 영월군(寧越郡)에 노산군(魯山君)⁵⁵의 묘가 있는데, 나무하고 가축 치는 이들이 서로 찾아와 행인(行路)들이 탄식합니다. 신(臣)이 엎드려 생각건대 노산군은 일찍이 한 나라에 임금으로 임어(臨御)하여 군주(君主)의 도리가 있었습니다. 비록 강등되어 군(君)으로 봉해졌으나 묘도(墓道)의 의물(儀物)은 스스로 그 제도가 있는데도 천한 지아비의 무덤[瘞]과 다름이 없으니, 신이 실로 마음 아파합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하명(下旨)하시어 그 묘를 개축(改築)하고 또 표석(標石)을 세워 한결같이 예장(禮葬)에 의거하게 하시면, 예법(禮法)으로 헤아려 보아도 또한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패망(敗亡)한 군주에 대해서도 장례를 반드시 후하게 치렀으니, 원수였던 항우(項羽)와 같은 이도 고황제(高皇帝)⁵⁶는 노왕(魯王)의 예로 장사 지냈고, 혁명으로 제거된 건문(建文)⁵⁷과 같은 이도 성조 황제(成祖皇帝)⁵⁸는 천자(天子)의 예로 장사 지냈으니, 모두 제왕의 성대한 조처였습니다. 지난 병자년(丙子年, 1576)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셨으니 그 뜻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이제 1품(一品)의 예(禮)를 써서 노산군의 묘를 수리하고 또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옛것을 끌어와 오늘날을 논하건대 실로 윤당(允當)합니다.” 장계가 예조(禮曹)로 내려졌다.【《조야기문(朝野記聞)》⁵⁹에서 인용】
주석:
53. 감사(監司):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당시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였다.
54. 장계(狀啓): 지방 관찰사나 병마절도사 등이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
55. 노산군(魯山君):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이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등되었을 때의 군호(君號).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56. 고황제(高皇帝):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을 가리킨다. 항우(項羽)를 꺾고 천하를 통일한 후, 항우의 장례를 노공(魯公)의 예로 치러주었다.
57. 건문(建文): 명(明)나라 제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 숙부인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제위를 찬탈당했다(정난의 변).
58. 성조 황제(成祖皇帝):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즉 주체(朱棣). 건문제를 몰아내고 즉위했으나, 건문제의 장례는 황제의 예로 치러주었다고 한다. (실제 건문제의 행방은 불명확하다.)
59. 《조야기문(朝野記聞)》: 조선 후기의 학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편찬한 야사(野史) 모음집.
원문:
上將接見日本使臣于勤政殿, 而故事當用女樂。 三司交章, 請勿用女樂, 以禮視遠人, 爭之累日, 不能得。 諫院先止, 人或尤之。 李珥曰: “爲國有漸, 必先解斯民之倒懸, 然後乃可正禮樂, 豈可先事禮樂乎?” 及於宴日, 用女樂, 備呈妖邪之態。 鄭澈⁶⁰以侍衛兵官見之, 謂李珥曰: “兄爲諫官不能救止, 乃於正殿作妖鬼之戲, 可愧於古人矣。”【《石潭日記》。】
번역문:
상(上)께서 장차 일본 사신을 근정전(勤政殿)에서 접견하려 하는데, 고사(故事)에 마땅히 여악(女樂)⁶¹을 쓰게 되어 있었다. 삼사(三司)⁶²가 번갈아 상소하여 여악을 쓰지 말고 예(禮)로써 먼 나라 사람을 대우할 것을 청하며 여러 날 다투었으나, 뜻을 얻지 못하였다. 간원(諫院)⁶³이 먼저 그만두니 사람들이 혹 허물하였다. 이이(李珥)가 말하였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순서가 있으니, 반드시 먼저 이 백성들의 도현(倒懸)⁶⁴의 고통을 해결한 연후에야 예악(禮樂)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지, 어찌 예악을 먼저 일삼을 수 있겠는가?” 연회 날에 이르러 여악을 사용하여 요사(妖邪)한 행태를 갖추어 보이니, 정철(鄭澈)⁶⁰이 시위(侍衛)하는 병관(兵官)⁶⁵으로서 이를 보고 이이에게 말하였다. “형(兄)께서는 간관(諫官)으로서 능히 막지 못하여 마침내 정전(正殿)에서 요귀(妖鬼)의 놀음을 벌이게 하니,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입니다.”【《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인용】
주석:
60. [주-D004] 澈 : 저본(底本)에는 “철(撤)”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본 인물 전후 서술,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14년 조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61. 여악(女樂): 기녀(妓女)들의 음악과 춤. 성리학적 예법을 중시하는 사림들은 공식적인 국가 행사, 특히 사신 접견에 여악을 사용하는 것을 부도덕하고 예에 어긋난다고 여겨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62.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통칭한다. 조선 시대의 핵심적인 언론 기관이었다.
63. 간원(諫院): 사간원을 가리킨다.
64. 도현(倒懸): 거꾸로 매달린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비유한다. 이이는 민생 안정이 예악의 정비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65. 시위병관(侍衛兵官): 임금을 호위하는 군관.
원문:
栗谷爲憲長, 潑嗾掌令鄭仁弘使論沈義謙。 栗谷欲不從, 則恐其愈激, 遂勉從焉。 公知仁弘意不在義謙而栗谷見欺, 謂栗谷曰: “豈料吾輩死於公手乎?” 栗谷笑謝。 翌日再啓, 仁弘果添入義謙援附士類等語。 上問士類爲誰, 仁弘對以鄭澈等相爲締結。 栗谷見仁弘曰: “季涵曾以時論過激, 故有不平之言, 非護義謙也。 吾嘗稱澈賢, 而今又斥爲義謙之黨, 則我乃反覆人也。 吾當辭避矣。” 仁弘不得已自劾。【神道碑。】
번역문:
율곡(栗谷)⁶⁶이 헌장(憲長)⁶⁷이 되었을 때, 이발(李潑)⁶⁸이 장령(掌令)⁶⁹ 정인홍(鄭仁弘)⁷⁰을 사주하여 심의겸(沈義謙)을 논핵하게 하였다. 율곡이 따르지 않으려 하였으나 더욱 격해질까 염려하여 마침내 힘써 따랐다. 공(公)⁷¹은 정인홍의 뜻이 심의겸에게 있지 않고 율곡이 속는 것임을 알고 율곡에게 말하였다. “어찌 우리 무리가 공(公)의 손에 죽게 될 줄 헤아렸겠습니까?” 율곡이 웃으며 사과하였다. 다음 날 다시 아뢸 때, 정인홍이 과연 심의겸이 사류(士類)를 끌어들여 붙었다는 등의 말을 덧붙였다. 상(上)께서 사류가 누구인지 묻자, 정인홍이 정철 등이 서로 체결(締結)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율곡이 정인홍을 보고 말하였다. “계함(季涵)⁷²은 일찍이 시론(時論)이 과격하다 하여 불평하는 말을 했을 뿐이지 심의겸을 비호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일찍이 정철을 현명하다고 칭찬하였는데 이제 와서 또 심의겸의 무리라고 배척한다면, 나는 곧 말을 뒤집는 사람이 된다. 나는 마땅히 사직하여 피하겠다.” 정인홍이 부득이하여 스스로를 탄핵하였다.【신도비명에서 인용】
주석:
66.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
67. 헌장(憲長): 사헌부의 으뜸 벼슬인 대사헌(大司憲)을 가리킨다.
68. 이발(李潑, 1544-1589): 동인의 핵심 인물. 기축옥사 때 희생되었다.
69.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4품 관직. 지평(持平)과 함께 대관(臺官)으로 불렸다.
70. 정인홍(鄭仁弘, 1535-1623):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北人)의 영수. 광해군 대에 영의정을 지냈으나 인조반정 후 처형되었다.
71. 공(公): 여기서는 정철을 가리킨다.
72. 계함(季涵): 정철의 자(字).
원문:
僉知中樞府事鄭澈棄官歸鄕。 澈自時輩起張世良之獄, 心常不平, 屢形於辭氣。 且喜飮酒, 醉後之談, 多短時輩, 時輩尤疑之。 一日, 與李潑乘醉相詬詈, 交道遂絶。 至是時論詆斥, 故乃歸鄕。 李珥出別于江上, 勉以操存止酒, 澈極言李潑之心不可信。 珥曰: “君見偏矣。 景涵識見不明, 而其心良善矣。” 澈搖首曰: “未也。 如鄭德遠則其心公矣。 雖論我遠竄, 若遇諸路, 則我當酌一盃同飮矣。” 澈又曰: “時輩全不識我。 若時輩皆敗, 則我豈不盡力相救乎? 時輩全不知我矣。” 澈大歸, 而朋友無追別者, 達官中獨珥與李海壽坐餞席。 海壽寡言, 珥戲曰: “季涵之剛介, 文之以大仲【海壽字。】言語, 則無往不達矣。” 珥每謂人曰: “季涵剛潔忠義之士也。 其病只在狹隘而已, 其人終不可棄也。” 時輩多不然之。 一日, 上謂侍臣曰: “鄭澈, 予不知其爲人, 但曾爲承旨時, 略觀其所爲, 乃介潔之人, 而盡心國事者也。” 且顧朴淳曰: “予以澈有才氣, 領相知之耶?” 淳曰: “澈果有才氣矣。” 上曰: “予觀其狹隘, 以爲必與人多不合, 果然矣。 若以澈爲小人, 則渠必不服矣。” 淳曰: “殿下知澈深矣。 知人每如此, 則一時士類, 孰不心服乎?”【《石潭日記》。】
번역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⁷³ 정철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철은 시배(時輩)⁷⁴들이 장세량(張世良)의 옥사⁷⁵를 일으킨 것부터 마음속으로 항상 불평하여 여러 차례 말과 기색에 드러냈다. 또한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취한 후의 이야기에 시배를 헐뜯는 말이 많으니, 시배들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하루는 이발(李潑)과 술에 취하여 서로 꾸짖고 욕하여 교분(交道)이 마침내 끊어졌다. 이에 이르러 시론(時論)이 그를 비난하고 배척하므로,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이(李珥)가 강가에 나와 작별하며 마음을 지키고 술을 끊도록 권면하자, 정철은 이발의 마음을 믿을 수 없다고 극력 말하였다. 이이가 말하였다. “그대의 견해가 치우쳤다. 경함(景涵)⁷⁶은 식견이 밝지 못하나 그 마음은 진실로 선량하다.” 정철이 머리를 저으며 말하였다. “아니다. 정덕원(鄭德遠)⁷⁷과 같은 이라면 그 마음이 공정하다. 비록 나를 멀리 귀양 보내라고 논하더라도 만약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마땅히 술 한 잔을 따라 함께 마실 것이다.” 정철이 또 말하였다. “시배들이 전혀 나를 알지 못한다. 만약 시배들이 모두 패한다면 내가 어찌 힘을 다해 서로 구제하지 않겠는가? 시배들이 전혀 나를 알지 못한다.” 정철이 완전히 돌아가는데 붕우(朋友) 중에 따라와 작별하는 자가 없었고, 달관(達官) 중에는 유독 이이와 이해수(李海壽)⁷⁸만이 전별(餞別) 자리에 앉았다. 이해수가 말이 적으니 이이가 농담으로 말하였다. “계함(季涵)의 강직함[剛介]을 대중(大仲)【해수의 자이다】의 말로 꾸민다면, 가는 곳마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이가 매번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계함은 강직하고 결백하며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이다. 그 병통은 단지 편협[狹隘]한 데 있을 뿐이니, 그 사람은 끝내 버릴 수 없다.” 시배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상(上)께서 시신(侍臣)에게 말씀하셨다. “정철은 내가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하나, 다만 일찍이 승지(承旨)로 있을 때 그 하는 바를 대략 살펴보니, 강직하고 결백한 사람이면서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는 자였다.” 또한 박순(朴淳)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내가 정철에게 재능과 기개가 있다고 여기는데, 영의정(領相)도 이를 아는가?” 박순이 말하였다. “정철은 과연 재능과 기개가 있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편협함을 보고 반드시 사람들과 많이 화합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만약 정철을 소인(小人)이라 한다면 그가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박순이 말하였다. “전하께서 정철을 깊이 아십니다. 사람을 아심이 매번 이와 같으시다면 일시(一時)의 사류(士類) 중에 누가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겠습니까?”【《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인용】
주석:
73.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정3품 당상관. 실권은 없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74. 시배(時輩): 당시의 무리. 여기서는 정철과 대립하던 동인(東人) 세력을 주로 가리킨다.
75. 장세량(張世良)지옥(之獄): 구체적인 내용 확인이 필요하나, 당시 정치적 사건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6. 경함(景涵): 이발(李潑)의 자(字).
77. 정덕원(鄭德遠): 정지연(鄭芝衍, 1526-1593)의 자(字). 서인(西人)으로 분류된다.
78. 이해수(李海壽, 1535-?): 조선 중기의 문신. 정철, 이이 등과 교유했다.
원문:
癸未, 時輩劾栗谷以誤國小人, 栗谷遂遜荒。 牛溪疏辨其誣, 朴相淳亦言朴謹元等狹憾搆陷狀, 於是竝詆朴相及牛溪。 牛溪卽日還山, 太學生四百餘人投疏指辨忠邪。 上乃招二品以上敎曰: “謹元等, 予知其奸, 遠竄何如?” 左右爭爲救解, 公獨進曰: “此等不可不明示好惡, 以定是非。” 於是上自製責詞, 竄謹元等三人, 左補者亦多。 金宇顒等爭以爲“不可取決於失志怏怏, 乘時陰陷之一言”, 因劾公以交搆煽禍, 職爲亂階, 前後儒疏皆出其風旨。 御批: “鄭澈其心也正, 其行也方, 惟其舌也直, 故不容於時, 見憎於人耳。 若其當職盡瘁, 忠淸節義, 草木亦知其名, 眞所謂鵷班之一鶚, 殿上之猛虎。 頃日黨言斥邪, 予已知今日得此謗矣。 若罪鄭澈, 是朱雲可斬也。” 公引咎辭職, 三疏, 不允。
번역문:
계미년(1583)에 시배(時輩)들이 율곡(栗谷)을 나라를 그르친 소인(小人)이라고 탄핵하니, 율곡이 마침내 조정에서 물러났다[遜荒]. 우계(牛溪)⁷⁹가 상소하여 그 무고함을 변론하였고, 박상(朴相) 박순(朴淳) 또한 박근원(朴謹元)⁸⁰ 등이 편협한 감정으로 죄를 얽어 모함한 실상을 말하자, 이에 박상과 우계를 함께 비방하였다. 우계가 즉시 산으로 돌아가고, 태학생(太學生)⁸¹ 4백여 명이 상소를 올려 충(忠)과 사(邪)를 가려 변론하였다. 상(上)께서 이에 2품 이상 관원을 불러 교지(敎曰)를 내렸다. “근원 등은 내가 그 간사함을 아니,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좌우(左右)에서 다투어 구제하려 하였으나, 공(公)⁸²만이 홀로 나아가 아뢰었다. “이 무리들은 좋고 싫음[好惡]을 명백히 보여 시비(是非)를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상께서 직접 꾸짖는 글[責詞]을 지어 박근원 등 세 사람을 귀양 보내고, 그들을 도운[左補] 자들도 또한 많았다. 김우옹(金宇顒)⁸³ 등이 다투어 “뜻을 잃고 불만을 품어[失志怏怏] 때를 타서 몰래 모함하는 한마디 말에 따라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어서 공(公)을 교묘하게 얽어[交搆] 화(禍)를 부추겨 오로지 난리의 계단[亂階]이 되었다고 탄핵하였는데, 전후(前後) 유생(儒生)들의 상소가 모두 그의 지령[風旨]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어비(御批)⁸⁴에 이르기를, “정철은 그 마음이 바르고 그 행실이 방정하며 오직 그 혀가 곧기 때문에 시대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뿐이다. 그 직책을 맡아 심력을 다하고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절개 있고 의로운 점에 있어서는 초목(草木) 또한 그 이름을 아니, 참으로 이른바 조정[鵷班]⁸⁵의 뛰어난 매[鶚]요, 전상(殿上)의 사나운 호랑이이다. 지난날 당파적 언론으로 사악한 자를 배척할 때, 내가 오늘 이런 비방을 받게 될 줄 이미 알았다. 만약 정철에게 죄를 준다면, 이는 주운(朱雲)⁸⁶을 베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공이 허물을 끌어대어 사직하였으나, 세 번 상소하여도 윤허하지 않았다.
주석:
79.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호. 서인의 영수 중 한 명으로, 이이와 절친했다.
80. 박근원(朴謹元): 동인의 인물로, 이이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81. 태학생(太學生):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을 가리킨다.
82. 공(公): 정철을 가리킨다.
83. 김우옹(金宇顒, 1540-1603): 동인의 학자, 문신.
84. 어비(御批): 임금이 상소문 등에 직접 써서 내리는 비답(批答).
85. 원반(鵷班): 원(鵷)이라는 새가 줄지어 날아가듯 신하들이 조정에 정렬해 있는 모습. 조정을 비유한다.
86. 주운(朱雲):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강직한 신하. 간신 장우(張禹)를 베어야 한다고 청하다가 죽을 뻔했으나, 난간을 붙잡고 부러뜨리면서까지 직간(直諫)하여 목숨을 건졌다. 충성스럽고 강직한 신하의 대명사로 쓰인다.
원문:
趙重峰習聞潑言, 常不悅公。 公按湖南, 重峰先爲都事, 至欲避去。 公謂重峰曰: “請少留, 眞知小人, 然後去未晩也。” 重峰不聽。 公介於栗谷諸賢, 勸重峰還, 則日見公所爲, 乃脫然心服, 反謂潑前言皆誣。 乃馳見潑, 極言公所行無愧神明, 且言汝立可絶。 潑不從, 遂告絶矣。 至是, 上疏論兩先生道學之正、時輩誤國之狀, 而又訟公曰: “某之剛直, 只以一唾潑面, 而積成見鬼之車, 張弧不脫, 俾餓于野。 人或謂其疾惡已甚, 固宜取敗, 而臣獨見其惜潑兄弟, 多般規責, 而潑也不悔, 輾轉椓害。 丁謂懷慙, 必逐寇凖。 漢無汲直, 孰制湖南? 臣恐爲元衡、李樑復讎者, 轉變爲莽、操也。”
번역문:
조중봉(趙重峰)⁸⁷은 이발(李潑)의 말을 익히 들어 항상 공(公)⁸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공이 호남(湖南)을 안찰(按察)할 때 중봉이 먼저 도사(都事)⁸⁹로 있었는데, 심지어 피하여 떠나려 하였다. 공이 중봉에게 말하였다. “청컨대 잠시 머물러 참으로 소인(小人)임을 안 연후에 떠나도 늦지 않다.” 중봉이 듣지 않았다. 공이 율곡(栗谷) 등 여러 현인에게 부탁하여 중봉에게 돌아오도록 권하였는데, 중봉이 날마다 공이 하는 바를 보고는 마침내 초연히 마음으로 복종하여, 도리어 이발의 이전 말이 모두 무고(誣告)라고 하였다. 이에 달려가 이발을 만나 공의 행실이 신명(神明)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극력 말하고, 또 그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발이 따르지 않자 마침내 관계를 끊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여 두 선생⁹⁰의 도학(道學)의 올바름과 시배(時輩)들이 나라를 그르치는 실상을 논하고, 또 공을 변호하여 아뢰었다. “아무개⁹¹의 강직함은 단지 이발의 얼굴에 한 번 침을 뱉은 것⁹²과 같은데, 쌓여서 귀신을 보는 수레⁹³가 되어, 활을 당긴 채 벗어나지 못하고 들에서 굶주리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혹 그 악(惡)을 미워함이 너무 심하여 진실로 패함을 자초함이 마땅하다고 말하나, 신은 유독 그가 이발 형제를 아껴 여러 방식으로 꾸짖고 나무랐으나 이발이 뉘우치지 않고 이리저리 해치려 한 것을 보았습니다. 정위(丁謂)가 부끄러움을 품으면 반드시 구준(寇凖)⁹⁴을 내쫓았고, 한(漢)나라에 급암(汲黯)⁹⁵이 없었다면 누가 흉노(匈奴)⁹⁶를 제압했겠습니까? 신은 윤원형(元衡)과 이량(李樑)⁹⁷의 복수를 하려는 자들이 왕망(王莽)과 조조(曹操)⁹⁸로 변할까 두렵습니다.”
주석:
87. 조중봉(趙重峰): 조헌(趙憲, 1544-1592)의 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서인(西人)으로 분류된다.
88. 공(公): 정철을 가리킨다.
89. 도사(都事): 각 도(道) 관찰사(觀察使) 밑에 속한 종5품 관직. 감찰 업무 등을 보좌했다.
90. 두 선생(兩先生):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가리킨다.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다.
91. 모(某): 정철을 가리킨다.
92. 일타발면(一唾潑面): 얼굴에 침을 뱉음. 강직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의 미움을 사는 것을 비유한다.
93. 견귀지거(見鬼之車): 귀신을 보는 수레. 근거 없는 의심이나 모함에 시달리는 상황을 비유하는 듯하다.
94. 정위(丁謂), 구준(寇凖):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재상들. 정위는 간신으로, 구준은 충신으로 평가받는다. 정위가 구준을 모함하여 내쫓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시배(동인)들이 정철을 모함하는 것을 비판하는 맥락이다.
95. 급암(汲黯):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강직한 신하. 직언(直言)을 잘하여 무제가 어려워하였다.
96. 호남(湖南): 여기서는 한(漢)나라 때 북방의 흉노(匈奴)를 가리킨다. 급암과 같은 강직한 신하가 있어야 외적이나 간신을 제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원문 '湖南'은 '匈奴'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97. 윤원형(元衡), 이량(李樑): 명종 대의 대표적인 외척 권신. 이들이 몰락한 후에도 그 잔당이나 추종 세력이 복수를 꾀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 것이다.
98. 왕망(王莽), 조조(曹操): 각각 신(新)나라와 위(魏)나라를 세워 한(漢) 왕조를 찬탈한 인물들. 반역자의 대명사로 쓰인다. 조헌은 당시 동인 세력의 일부가 이들처럼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원문:
戊子春, 重峰聞有倭釁, 復上疏言: “宋有臘寇, 有人言: ‘今無他策, 只有召劉元城、陳了翁作相, 則寇自平矣。’ 宋帝不省, 惟章、蔡之徒是崇, 故臘寇大熾, 金虜繼至。 今大盜橫行, 南北之憂, 有大於金虜, 而廟謀一無陳、劉之策。 請亟召淳、渾、澈等, 使表正百僚, 强幹固本, 則猶有扶持之望矣。” 上斥以人妖而焚其疏。 後重峰復上疏言: “公之在朝, 專欲尊國庇民, 慷慨直言, 故百僚嚴憚, 如猛虎在山, 藜藿不採。 今若收用, 則庶幾積弊一祛, 朝野淸寧矣。” 三司交章, 竄配北塞, 而世無敢復爲公言者。【竝神道碑。】
번역문:
무자년(1588) 봄에 중봉(重峰) 조헌이 왜적의 침입 조짐[倭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상소하여 아뢰었다. “송(宋)나라에 납구(臘寇)⁹⁹가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다른 계책은 없고 오직 유원성(劉元城)¹⁰⁰과 진료옹(陳了翁)¹⁰¹을 불러 재상으로 삼으면 도적이 저절로 평정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송나라 황제가 살피지 않고 오직 장돈(章惇)과 채경(蔡京)¹⁰²의 무리만을 숭상하였으므로, 납구가 크게 치성하고 금(金)나라 오랑캐가 연이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 큰 도적¹⁰³이 횡행하여 남북의 근심이 금나라 오랑캐보다 더 큰데, 조정의 계책[廟謀]에는 진(陳)과 유(劉)의 계책이 하나도 없습니다. 청컨대 속히 박순(朴淳), 성혼(成渾), 정철(鄭澈) 등을 불러 백관(百僚)을 표창하고 바로잡으며, 줄기를 강하게 하고 근본을 굳건히[强幹固本]하게 하면, 오히려 붙들어 지탱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상(上)께서 인요(人妖)¹⁰⁴라며 배척하고 그 상소를 불태웠다. 후에 중봉이 다시 상소하여 아뢰었다. “공(公)¹⁰⁵이 조정에 있을 때 오로지 나라를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고자 강개(慷慨)하게 직언(直言)하였으므로, 백관들이 엄하게 꺼리기를 마치 사나운 호랑이가 산에 있어 명아주나 콩잎 같은 나물조차 캐지 못하는¹⁰⁶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 만약 거두어 쓰신다면 자못 쌓인 폐단[積弊]이 일소되어 조야(朝野)가 맑고 편안해질 것입니다.” 삼사(三司)가 번갈아 상소하여 북쪽 변방[北塞]으로 귀양 보내니, 세상에 감히 다시 공을 위해 말하는 자가 없었다.【이상은 신도비명에서 인용】
주석:
99. 납구(臘寇): 송나라 휘종(徽宗) 때 절강(浙江) 등지에서 일어난 방랍(方臘)의 난을 가리킨다.
100. 유원성(劉元城): 송나라 철종(哲宗) 때의 학자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키는 듯하다. 강직한 언론 활동으로 유명했다.
101. 진료옹(陳了翁): 송나라 철종, 휘종 때의 학자 진관(陳瓘)을 가리킨다. 간신 채경(蔡京)을 비판하다 유배되었다.
102. 장돈(章惇), 채경(蔡京): 송나라 철종, 휘종 때의 재상들. 신법(新法)을 강행하고 구법당(舊法黨) 인물들을 탄압하여 정치를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103. 대도(大盜): 큰 도적. 여기서는 북방의 여진족(후금)과 남방의 왜구를 가리킨다.
104. 인요(人妖): 사람의 형상을 한 요괴. 조헌의 상소를 극도로 불온하게 여겨 배척한 표현이다.
105. 공(公): 정철을 가리킨다.
106. 맹호재산(猛虎在山), 여곽불채(藜藿不採): 사나운 호랑이가 산에 있으면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명아주나 콩잎 같은 하찮은 나물조차 감히 캐지 못한다는 뜻. 정철의 위엄과 기세가 매우 강하여 관리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음을 비유한다.
원문:
己丑十月, 前弘文修撰鄭汝立謀叛事覺自殺。 時鄭澈在高陽, 聞變欲赴闕, 知舊有勸澈勿入以避形跡者。 澈曰: “逆賊謀害君父, 重臣在外, 觀變不赴, 於義不可。” 遂入城肅拜, 上以忠節奬之。 初八日, 鄭澈拜右相, 仍爲委官。 澈素爲一邊人所疾, 顯有形跡之嫌, 按獄之際, 若不每人而救釋, 則畢竟怨毒皆叢于一身, 是以逡巡辭避, 初不欲擔當。 而成渾時在坡山, 勸起曰: “變生縉紳之間, 未免蔓延之患。 若使他人主治此獄, 則其不能以公心處於嫌疑也明矣。 國事甚重, 奚顧後患?” 澈乃出。【安牛山邦俊《己丑記事》。】
번역문:
기축년(1589) 10월, 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¹⁰⁷ 정여립(鄭汝立)¹⁰⁸이 모반(謀叛)한 일이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이때 정철은 고양(高陽)에 있었는데, 변고를 듣고 대궐로 달려가려 하자 친구[知舊] 중에 정철에게 형적(形跡)¹⁰⁹을 피하기 위해 들어가지 말라고 권하는 자가 있었다. 정철이 말하였다. “역적(逆賊)이 군부(君父)¹¹⁰를 모해(謀害)하였는데 중신(重臣)이 밖에 있으면서 변고를 보고도 달려가지 않는 것은 의리상 불가하다.” 마침내 성(城)에 들어와 숙배(肅拜)¹¹¹하니, 상(上)께서 충절(忠節)이라며 장려하였다. 초팔일(初八日)에 정철이 우상(右相)¹¹²에 제수되고 이어 위관(委官)¹¹³이 되었다. 정철은 평소 한쪽 편 사람들[一邊人]¹¹⁴에게 미움을 받아 현저히 형적의 혐의가 있었으므로, 옥사(獄事)를 처결할 때 만약 사람마다 구제하고 석방하지 않으면 결국 원망과 원한[怨毒]이 모두 한 몸에 모일 것이기에, 주저하며 사양하고 피하여 처음에는 담당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혼(成渾)이 그때 파산(坡山)에 있다가 일어나도록 권하며 말하였다. “변고가 사대부[縉紳] 사이에서 생겨나 만연(蔓延)될 우려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 옥사를 주관하여 다스리게 한다면, 그가 공정한 마음으로 혐의에 대처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국사(國事)가 매우 중하니 어찌 후환(後患)을 돌아보겠는가?” 정철이 이에 나아갔다.【안우산(安牛山) 방준(邦俊)¹¹⁵의 《기축기사(己丑記事)》¹¹⁶에서 인용】
주석:
107.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의 정6품 관직.
108. 정여립(鄭汝立, ?-1589): 선조 때의 문신.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 사후 동인으로 돌아섰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것이 모반으로 고변되어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109. 형적(形跡): 의심받을 만한 행동이나 정황. 정철이 동인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으므로, 정여립 사건 처리에 관여하면 보복한다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110. 군부(君父): 임금과 아버지. 신하가 임금을 아버지처럼 섬겨야 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111. 숙배(肅拜): 임금이나 웃어른 앞에서 공손하게 절함.
112. 우상(右相): 우의정(右議政)을 가리킨다.
113. 위관(委官): 옥사(獄事)의 조사를 위임받은 책임자. 추관(推官)이라고도 한다.
114. 일변인(一邊人): 한쪽 편의 사람들. 여기서는 동인(東人)을 가리킨다.
115. 안우산(安牛山) 방준(邦俊): 안방준(安邦俊, 1573-1654). 조선 중기의 학자, 의병장. 호는 우산(牛山) 또는 은봉(隱峰).
116. 《기축기사(己丑記事)》: 안방준이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전말을 기록한 책.
원문:
鄭彦信、彦智、洪宗祿、鄭昌衍、李潑等出於汝立之姪鄭緝之招。 右相鄭澈曰: “朝紳之交親逆賊, 不過好而不知其惡而已。 天下寧有兩汝立乎?” 彦智、宗祿、潑等遠竄, 彦信中道付處, 昌衍放送, 白惟讓、李洁遠竄。【《朝野記聞》。】
번역문:
정언신(鄭彦信)¹¹⁷, 정언지(鄭彦智), 홍종록(洪宗祿), 정창연(鄭昌衍)¹¹⁸, 이발(李潑) 등이 정여립의 조카 정집(鄭緝)의 공초(供招)에서 나왔다. 우상(右相) 정철이 말하였다. “조정 신하가 역적(逆賊)과 교유하고 친하게 지낸 것은, 좋아하였으나 그 악함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천하에 어찌 두 명의 정여립이 있겠는가?” 정언지, 홍종록, 이발 등은 멀리 귀양 보내고[遠竄], 정언신은 중도부처(中道付處)¹¹⁹시키고, 정창연은 놓아주었으며[放送], 백유양(白惟讓)¹²⁰과 이결(李洁)¹²¹은 멀리 귀양 보냈다.【《조야기문(朝野記聞)》에서 인용】
주석:
117. 정언신(鄭彦信, 1527-1591): 동인의 중진. 기축옥사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받아 사사되었다.
118. 정창연(鄭昌衍, 1552-1636): 동인 계열의 문신.
119. 중도부처(中道付處): 귀양지로 가던 도중 가까운 곳에 유배시키는 형벌.
120. 백유양(白惟讓, ?-1589):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때 처형되었다.
121. 이결(李洁, 1543-1589):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때 처형되었다.
원문:
鄭澈於榻前啓曰: “崔永慶獄事, 了無端緖可尋。 臣之所聞, 渠素尙氣節, 又以孝友著名, 嶺南士論亦極推服, 萬無逆謀同參之理。 臣與永慶素昧平生, 不敢有私, 特以所聞如是, 故敢達。 云云。” 上曰: “予見渠與其弟書於同生, 則果似友愛者矣。”【《癸甲錄》。】
번역문:
정철이 탑전(榻前)¹²²에서 아뢰었다. “최영경(崔永慶)¹²³의 옥사(獄事)는 찾을 만한 실마리[端緖]가 전혀 없습니다. 신(臣)이 들은 바로는 그는 평소 기개와 절조[氣節]를 숭상하고 또한 효성과 우애[孝友]로 이름났으며, 영남(嶺南)의 사론(士論) 또한 극진히 추대하고 복종하니, 만 번 죽어도 역모(逆謀)에 함께 참여했을 리가 없습니다. 신은 최영경과 평소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素昧平生]라 감히 사사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들은 바가 이와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 운운(云云).”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가 그의 아우 및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과연 우애(友愛)하는 자와 같았다.”【《계갑록(癸甲錄)》¹²⁴에서 인용】
주석:
122. 탑전(榻前): 임금이 앉는 평상 앞. 임금의 면전(面前)을 의미한다.
123. 최영경(崔永慶, 1529-1590):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 기축옥사 때 정여립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옥사(獄死)하였다. 그의 죽음은 기축옥사의 대표적인 억울한 사례로 꼽히며,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
124. 《계갑록(癸甲錄)》: 기축옥사(1589)부터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계사년(1593), 갑오년(1594)까지의 기록을 모은 책으로 추정된다.
원문:
澈嘗於省坐指崔永慶, 曰: “彼漢念斫吾頭如此。” 以手畫其頸, 因大笑。 柳成龍曰: “此非戲談之地。” 澈曰: “人皆以而見爲謹愼君子, 季涵爲虛妄君子。 謹愼與虛妄雖不同, 其爲君子則一也。” 顧謂李山海曰: “吾之爲此言, 非戲也。 他日以余爲搆殺永慶之時, 欲以爲口實也。” 成龍微笑, 山海默然。 蓋永慶平日每向人大言曰“朴淳、鄭澈梟示, 然後國事可爲”云, 故澈言如此。【《己丑記事》。】
번역문:
정철이 일찍이 성좌(省坐)¹²⁵에서 최영경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놈[彼漢]이 내 머리를 이렇게 베려는 생각을 한다.” 손으로 자기 목을 그으며 크게 웃었다. 유성룡(柳成龍)¹²⁶이 말하였다. “이곳은 농담하는 자리가 아니다.” 정철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이견(而見)¹²⁷을 삼가는 군자(君子)로 여기고, 계함(季涵)¹²⁸을 허황된 군자(虛妄君子)로 여긴다. 삼감과 허황됨이 비록 같지 않으나 군자라는 점에서는 하나이다.” 이산해(李山海)¹²⁹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다른 날 나를 최영경을 얽어 죽였다고 할 때를 대비하여 구실(口實)로 삼으려는 것이다.” 유성룡은 미소 지었고, 이산해는 잠잠하였다. 대개 최영경이 평소 매번 사람들을 향해 크게 말하기를 “박순(朴淳)과 정철을 효시(梟示)¹³⁰한 연후에야 국사(國事)를 해 볼 만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정철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기축기사(己丑記事)》에서 인용】
주석:
125. 성좌(省坐): 관청의 집무 장소. 문맥상 기축옥사를 다루던 의금부나 관련 회의 장소일 수 있다.
126. 유성룡(柳成龍, 1542-1607): 호는 서애(西厓).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 동인이었으나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다.
127. 이견(而見): 유성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견’은 ‘너의 견해’ 또는 ‘자네’ 정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28. 계함(季涵): 정철의 자(字).
129. 이산해(李山海, 1539-1609): 호는 아계(鵝溪). 동인 및 북인의 영수. 영의정을 지냈다.
130. 효시(梟示):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
원문:
逆獄幾畢, 西厓謂松江曰: “上春秋漸高, 後宮多王子, 國本未有所定。 建儲一事, 非大臣責乎? 吾輩當力爭。” 松江曰: “諾。” 時鵝溪爲領相, 松江爲左相, 西厓爲右相。 松江與鵝溪、西厓期會于闕下, 鵝溪再約而再不來。 後筵中, 松江首先陳啓, 上不悅。 鵝溪、西厓無一言, 惟副提學李誠中、大司諫李海壽進曰: “此非鄭澈之言, 皆臣等所嘗共議者也。” 蓋上意多在信城君矣。 於是讒人乘時以爲鄭澈一隊將不利於信城, 鼓動訛言, 轉入闕中。 又使申砬率宮奴, 守護信城君, 以致上心疑惑, 大惡松江, 必欲罪之。 辛卯二月, 上特出李誠中忠淸監司、李海壽驪州牧使。 於是臺諫揣知上意, 遂請罷松江, 而上特命榜示朝堂。 七月, 兩司合啓, 請竄松江以下數十人, 上特命安置松江於江界, 其餘或定配, 或削奪, 或罷職。【《買還問答》。】
번역문:
역적의 옥사(逆獄)가 거의 끝나자, 서애(西厓)¹³¹가 송강(松江)¹³²에게 말하였다. “상(上)의 춘추(春秋)¹³³가 점차 높아지시고 후궁(後宮)에 왕자가 많은데 국본(國本)¹³⁴이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 세자를 세우는[建儲]¹³⁵ 일은 대신(大臣)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우리 무리가 마땅히 힘써 아뢰어야 한다.” 송강이 말하였다. “알겠다.” 이때 아계(鵝溪)¹³⁶는 영상(領相)¹³⁷이었고, 송강은 좌상(左相)¹³⁸이었으며, 서애는 우상(右相)¹³⁹이었다. 송강이 아계, 서애와 궐하(闕下)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아계가 두 번 약속하고 두 번 다 오지 않았다. 후에 연석(筵席) 중에 송강이 먼저 아뢰니, 상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다. 아계와 서애는 한마디 말도 없었고, 오직 부제학(副提學) 이성중(李誠中)¹⁴⁰과 대사간(大司諫) 이해수(李海壽)만이 나아가 아뢰었다. “이는 정철의 말이 아니라 모두 신(臣) 등이 일찍이 함께 의논했던 바입니다.” 대개 상의 뜻은 신성군(信城君)¹⁴¹에게 많이 있었다. 이에 참소하는 사람들이 때를 타서 정철의 무리가 장차 신성군에게 불리하게 할 것이라고 여겨, 와언(訛言)을 부추겨 퍼뜨려 궁궐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또 신립(申砬)¹⁴²으로 하여금 궁궐의 노비[宮奴]를 거느리고 신성군을 수호하게 하여, 상의 마음이 의혹하게 하고 송강을 매우 미워하여 반드시 죄를 주려 하였다. 신묘년(1591) 2월에 상께서 특별히 이성중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이해수를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내보냈다. 이에 대간(臺諫)¹⁴³이 상의 뜻을 헤아려 마침내 송강을 파직할 것을 청하자, 상께서 특별히 조당(朝堂)에 방(榜)을 내걸어 알리도록 명하였다. 7월에 양사(兩司)¹⁴⁴가 함께 아뢰어 송강 이하 수십 명을 귀양 보낼 것을 청하자, 상께서 특별히 송강을 강계(江界)에 안치(安置)하도록 명하고, 그 나머지는 혹은 정배(定配)하고, 혹은 관작을 삭탈(削奪)하고, 혹은 파직(罷職)하였다.【《매환문답(買還問答)》¹⁴⁵에서 인용】
주석:
131.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호.
132. 송강(松江): 정철의 호.
133. 춘추(春秋):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
134. 국본(國本): 나라의 근본. 세자(世子)를 가리킨다.
135. 건저(建儲): 세자를 세우는 일. 이 사건을 '건저의(建儲議)' 또는 '건저 파동'이라 부른다.
136.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
137. 영상(領相):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138. 좌상(左相): 좌의정(左議政)을 가리킨다.
139. 우상(右相): 우의정(右議政)을 가리킨다.
140. 이성중(李誠中, 1539-1592): 서인 계열의 문신.
141. 신성군(信城君, 1578-1592):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아들. 선조가 광해군 대신 총애하여 세자로 삼으려 했다는 설이 있다.
142. 신립(申砬, 1546-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그는 신성군의 외숙부였다.
143.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의 언관들을 통칭한다.
144.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
145. 《매환문답(買還問答)》: 구체적인 저자나 내용은 확인이 필요하나,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문답 형식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원문:
壬辰, 上御開城府南門樓, 聚民人慰諭, 令各陳所懷。 父老等前言願召鄭丞相, 謂鄭澈也。 上卽命釋澈, 下旨曰: “知卿忠孝大節, 可速赴行在。”【《宣廟寶鑑》。】
번역문:
임진년(1592)에 상(上)께서 개성부(開城府) 남문(南門) 누각에 나아가, 백성들을 모아 위로하고 깨우치며 각자 품은 생각을 아뢰게 하였다. 부로(父老) 등이 앞에 나아가 정승상(鄭丞相)을 부르기를 원한다고 아뢰었는데, 정철을 이른 것이다. 상께서 즉시 정철을 석방하도록 명하고 하교(下旨)하였다. “경(卿)의 충효(忠孝)의 큰 절개를 아니, 속히 행재소(行在所)¹⁴⁶로 달려오라.”【《선묘보감(宣廟寶鑑)》¹⁴⁷에서 인용】
주석:
146.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곳.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는 의주(義州)까지 피난하였다.
147. 《선묘보감(宣廟寶鑑)》: 선조(宣祖) 시대의 주요 사건과 임금의 언행을 기록한 책.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원문:
都體察使鄭澈自行朝發向畿、湖, 船過海西, 夜望延安, 砲聲、火炎震耀天地。 澈思念城中人命, 涕泣不已。 至長淵金沙寺, 以風留一旬。 又聞高敬命、趙憲連敗死, 設位痛哭。 夜在丈室悲吟曰: “十日金沙寺, 三秋故國心。 夜潮¹⁴⁸分爽氣, 歸雁有哀音。 虜¹⁴⁹在頻看劍, 人亡欲斷琴。 平生《出師表》, 臨難更長吟。”【《日月錄》。】
번역문:
도체찰사(都體察使)¹⁵⁰ 정철이 행재소[行朝]¹⁵¹에서 출발하여 경기(畿)와 호서(湖)¹⁵² 지방으로 향하는데, 배가 해서(海西)¹⁵³ 지방을 지날 때 밤에 연안(延安)을 바라보니 포 소리와 불꽃이 천지를 진동하며 빛났다. 정철이 성안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다. 장연(長淵) 금사사(金沙寺)에 이르러 바람 때문에 열흘[一旬]을 머물렀다. 또 고경명(高敬命)¹⁵⁴과 조헌(趙憲)¹⁵⁵이 연이어 패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패(位牌)를 모시고 통곡하였다. 밤에 방장(丈室)¹⁵⁶에서 슬피 읊었다. “열흘 동안 금사사에 머무르니, 삼 년 같은 고국 생각¹⁵⁷이로다. 밤 조수¹⁴⁸는 서늘한 기운 나누어 오고, 돌아가는 기러기는 슬픈 소리 내는구나. 오랑캐¹⁴⁹ 있음에 자주 칼을 보고, 사람 죽으니 거문고 줄 끊고 싶어라. 평생 《출사표(出師表)》¹⁵⁸를, 어려움 임하여 다시 길게 읊노라.”【《일월록(日月錄)》¹⁵⁹에서 인용】
주석:
148. [주-D005] 潮 : 《대동야승・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호(湖)”로 되어 있다. '밤 호수(夜湖)'로 해석될 수 있다.
149. [주-D006] 劍 : 《대동야승・난중잡록》에는 “경(鏡)”으로 되어 있다. '자주 거울을 본다(頻看鏡)'는 의미가 된다. 문맥상 칼을 보며 왜적과 싸울 의지를 다진다는 의미의 '검(劍)'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150. 도체찰사(都體察使): 조선 시대 전쟁 등 비상시에 임명되던 임시 관직. 해당 지역의 군사 및 행정을 총괄하는 최고 지휘관이었다. 정철은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도(三道)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151. 행조(行朝): 임금이 피난하여 임시로 정사를 보는 조정. 행재소(行在所)와 같은 의미이다.
152. 기(畿), 호(湖): 기(畿)는 경기도, 호(湖)는 충청도(호서)를 가리킨다.
153. 해서(海西): 황해도(黃海道)를 가리킨다.
154.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했다.
155. 조헌(趙憲, 1544-1592):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금산(錦山) 전투에서 칠백의총(七百義塚)의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156. 장실(丈室): 사찰에서 주지(住持) 스님이 거처하는 방.
157. 삼추(三秋): 세 번의 가을, 즉 3년. '일일삼추(一日三秋)'처럼 간절한 마음을 나타낼 때 쓰인다.
158. 《출사표(出師表)》: 중국 촉(蜀)나라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북벌(北伐)을 떠나면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 충성심과 비장함이 담긴 명문으로 꼽힌다. 정철이 국난 극복의 의지를 다지며 이를 읊은 것이다.
159. 《일월록(日月錄)》: 임진왜란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 추정된다.
원문:
癸巳正月, 李提督復平壤。 上議遣大臣謝恩, 衆議皆以松江爲可遣。 上疑其圖傳禪, 不欲許。 申砬進曰: “鄭澈豈敢如是? 殿下疑鄭澈, 則他可信者誰也?” 垂涕久之。 砬是砬之兄, 而信城君之妻叔父。 以此上疑稍解, 乃遣之。【《買還問答》。】
번역문:
계사년(1593) 정월에 이 제독(李提督)¹⁶⁰이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상(上)께서 대신(大臣)을 보내 사은(謝恩)하는 것을 의논하였는데, 중의(衆議)가 모두 송강(松江) 정철을 보낼 만하다고 하였다. 상께서는 그가 선위(禪位)¹⁶¹를 전할 것을 도모할까 의심하여 허락하고자 하지 않았다. 신급(申礏)¹⁶²이 나아가 아뢰었다. “정철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정철을 의심하신다면, 달리 믿을 만한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눈물을 흘리기를 오래 하였다. 신급은 신립(申砬)의 형이고, 신성군(信城君) 부인의 숙부(叔父)이다. 이로 인해 상의 의심이 조금 풀려 마침내 그를 파견하였다.【《매환문답(買還問答)》에서 인용】
주석:
160. 이 제독(李提督):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와 조명(朝明)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1. 선위(禪位): 임금이 살아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 선조가 정철이 명나라에 가서 자신을 폐하고 다른 왕자(혹은 자신)를 옹립하도록 요청할 것을 의심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선조가 정철에게 가졌던 깊은 불신감을 보여준다.
162. 신급(申礏, 1541-1598): 조선 중기의 문신. 신립의 형이며, 인빈 김씨의 오빠이다. 즉, 신성군의 외숙부이자 정철과 대립했던 신립의 형이라는 복합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의 변호가 선조의 의심을 푸는 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원문:
公天性疏通峻潔, 事父母至孝, 待兄弟怡愉。 前後居喪, 皆盡情禮, 每朝夕哭泣, 感動隣里, 至有不忍食者。 祭饌必手自割正, 喪制節目, 與諸賢往復辨論, 未嘗放過。 祥後服色因公復古, 一洗俗謬。 讀書不過三遍, 卽成誦。 於《近思錄》、朱子書着力尤多, 雖在憂患流離, 亦課誦不輟。 在江界, 手《大學》一部, 兼誦小註, 於圍籬長木, 白而書之, 以朝夕寓目, 其勵志不懈如此。 詩文俊爽飛動, 有意外趣, 筆法亦遒逸。 胸襟朗徹, 絶無畦畛, 凡有所懷, 必發於言。 見人有過, 雖親友與權貴, 絶不少饒, 竟以是得禍如山, 而剛直之氣老而彌厲焉。 辭受甚嚴, 嘗手書戒子弟曰: “鞭靴不已, 必至裘馬。”
번역문:
공(公)은 천성(天性)이 소통(疏通)하고 준엄하며 결백하였고[峻潔],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였으며, 형제를 대함에 온화하고 즐거워하였다[怡愉]. 전후로 거상(居喪)¹⁶³할 때 모두 정(情)과 예(禮)를 다하였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곡하며 울어[哭泣] 이웃 마을을 감동시켜 차마 밥을 먹지 못하는 자까지 있었다. 제사 음식[祭饌]은 반드시 손수 직접 자르고 바르게 하였으며, 상례(喪禮)의 절목(節目)에 대해 여러 현인(賢人)들과 왕복하며 변론(辨論)하여 일찍이 그냥 넘어간 적이 없었다. 대상(祥祭)¹⁶⁴ 후의 복색(服色)이 공으로 인해 복고(復古)되어 세속의 잘못된 관습을 일소(一洗)하였다. 글을 읽을 때 세 번을 넘지 않아 즉시 암송하였다. 《근사록(近思錄)》¹⁶⁵과 주자(朱子)의 글¹⁶⁶에 더욱 힘을 쏟아, 비록 우환(憂患) 속에 떠도는[流離] 중에도 또한 과업으로 삼아 외우는[課誦]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강계(江界)에 있을 때 《대학(大學)》 한 부(部)를 손에 들고 작은 주석[小註]까지 겸하여 외웠으며, 울타리의 긴 나무에 흰 칠을 하고 이를 써서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았으니, 그 뜻을 격려하여 게을리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시문(詩文)은 준수하고 상쾌하며 생동감 있고[俊爽飛動] 의외의 운치(韻致)가 있었으며, 필법(筆法) 또한 힘차고 빼어났다[遒逸]. 흉금(胸襟)이 밝고 투철하여[朗徹] 전혀 구획이나 경계[畦畛]¹⁶⁷가 없었으며, 무릇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말로 표현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음을 보면 비록 친한 친구나 권세 있고 귀한 자[權貴]라 할지라도 절대로 조금도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으니, 마침내 이 때문에 산더미 같은 화(禍)를 얻었으나, 강직(剛直)한 기개는 늙어서 더욱 강해졌다. 주고받음[辭受]이 매우 엄격하여, 일찍이 손수 글을 써서 자제(子弟)들을 경계하며 말하였다. “채찍과 신발¹⁶⁸을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가죽옷과 말¹⁶⁹에 이를 것이다.”
주석:
163. 거상(居喪): 부모나 조부모 등의 상(喪)을 당하여 일정 기간 상복을 입고 근신하며 슬퍼하는 것.
164. 상(祥): 대상(大祥). 부모가 돌아가신 지 만 2년 만에 지내는 제사. 삼년상(三年喪)의 마지막 절차에 해당한다.
165. 《근사록(近思錄)》: 송(宋)나라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들의 주요 어록을 뽑아 편찬한 성리학 입문서.
166. 주자서(朱子書): 주희(朱熹)의 저술.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문집(朱子文集)》 등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167. 예진(畦畛): 밭두둑과 길의 경계. 사물이나 사람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나 거리감, 또는 마음속의 구애됨을 비유한다. 정철의 마음이 활달하고 거리낌 없었음을 나타낸다.
168. 편화(鞭靴): 채찍과 신발. 하찮거나 작은 물건을 비유한다.
169. 구마(裘馬): 가죽옷과 말. 사치스럽고 값비싼 물건을 비유한다. 작은 뇌물이라도 받기 시작하면 결국 큰 사치에 이르게 된다는 경계의 말이다.
원문:
公之伯姊爲仁廟貴人。 公幼, 嘗出入東宮, 明廟爲大君時, 仍與遊處, 情好甚篤。 及公擢第, 明廟賜酒饌以助宴需。 洎爲臺諫, 宗室景陽君以罪係獄, 明廟私囑曰: “吾兄將死, 請少寬之。” 公不奉旨。 當乙亥棄官而南也, 上私謂公曰: “公勿下鄕。 吾且大用。” 公竟不留。 及長憲府, 市人皆言: “李某、鄭某二大夫持憲, 獨無各司橫斂也。” 後隨駕定州, 座有宰臣結姻王室者, 自內送酒食, 宰臣以讓公, 公曰“此饌非外臣所宜食”, 卽起避之。 雖平日仇公者, 亦嗟歎以爲難。【竝神道碑。】
번역문:
공(公)의 맏누이가 인종(仁廟)¹⁷⁰의 귀인(貴人)¹⁷¹이었다. 공이 어려서 일찍이 동궁(東宮)¹⁷²에 출입하였고, 명종(明廟)¹⁷³께서 대군(大君) 시절에 이로 인해 함께 교유하며 지내 정(情)과 우호(友好)가 매우 두터웠다. 공이 과거에 급제하자 명종께서 술과 음식을 하사하여 연회 비용[宴需]을 도왔다. 대간(臺諫)¹⁷⁴이 되었을 때, 종실(宗室) 경양군(景陽君)¹⁷⁵이 죄로 옥(獄)에 갇히자, 명종께서 사사로이 부탁하여 말씀하셨다. “나의 형이 장차 죽게 되었으니, 청컨대 조금 너그럽게 처리해 달라.” 공이 왕지(王旨)를 받들지 않았다. 을해년(1575)에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갈 때, 상(上)께서 사사로이 공에게 말씀하셨다. “공은 시골로 내려가지 말라. 내가 장차 크게 쓰겠다.” 공이 끝내 머무르지 않았다. 사헌부의 수장[長憲府]¹⁷⁶이 되자, 시전(市廛) 사람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 아무개¹⁷⁷, 정 아무개 두 대부(大夫)가 사헌부를 관장하니, 유독 각 관사(各司)의 횡령과 수렴[橫斂]이 없다.” 후에 임금을 따라 정주(定州)¹⁷⁸에 갔을 때, 자리에 왕실과 혼인[結姻]한 재신(宰臣)이 있었는데, 안[內]에서 술과 음식을 보내오자 재신이 공에게 양보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이 음식은 외신(外臣)이 마땅히 먹을 바가 아니다.” 즉시 일어나 피하니, 비록 평소에 공을 원수처럼 여기던 자라도 또한 탄식하며 어렵다고 여겼다.【이상은 신도비명에서 인용】
주석:
170. 인종(仁宗, 1515-1545): 조선 제12대 왕. 재위 기간이 8개월에 불과했다.
171. 귀인(貴人): 내명부(內命婦) 정1품 빈(嬪) 다음의 종1품 빈(貴人). 정철의 맏누이 귀인 정씨(貴人 鄭氏)를 가리킨다.
172. 동궁(東宮): 왕세자가 거처하는 곳. 여기서는 인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곳을 의미한다.
173. 명종(明宗, 1534-1567): 조선 제13대 왕. 인종의 이복동생으로, 즉위 전에는 경원대군(慶源大君)이었다.
174.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을 통칭한다.
175. 경양군(景陽君, ?-1568): 이름은 이수환(李壽環). 성종(成宗)의 서자인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손자. 명종 대에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176. 장헌부(長憲府): 사헌부의 수장, 즉 대사헌(大司憲)을 가리킨다.
177. 이모(李某): 이이(李珥)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이와 정철이 함께 사헌부에서 활동하며 기강을 바로잡았음을 보여준다.
178. 정주(定州): 평안북도의 지명. 당시 선조가 북방 지역을 순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원문:
公嘗涉江, 有客同舟, 儼然起敬曰: “公是成牛溪乎? 是閔持平乎?” 公詩以答之曰: “我非成、閔卽狂生, 半百人間醉得名。 欲向新知說平素, 靑山送罵白鷗驚。”
번역문:
공(公)이 일찍이 강을 건너는데, 어떤 나그네가 같은 배에 있다가 엄숙하게 공경심을 일으키며 말하였다. “공(公)은 성우계(成牛溪)¹⁷⁹이십니까? 아니면 민지평(閔持平)¹⁸⁰이십니까?” 공이 시(詩)로 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씨도 민씨도 아닌 바로 미친 선비[狂生]인데, 반백 살에 인간 세상에서 취하여 이름 얻었네. 새로 알게 된 이에게 평소 생각을 말하려 하니, 청산(靑山)은 욕설 보내고 백구(白鷗)는 놀라는구나.”
주석:
179.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을 가리킨다.
180. 민지평(閔持平):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나, 당시 명망 있는 지평(持平) 벼슬의 민씨 성을 가진 인물일 수 있다. 혹은 단순히 당시 명망 높은 인물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181. 광생(狂生): 세상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선비. 정철 스스로를 낮추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시 내용은 자신의 강직함과 거침없는 언행으로 인해 세상과 불화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문:
公少受業於金河西之門。 公旣受其提誨, 觀感者深, 平生尊慕, 以爲其出處大節, 雖退陶莫及云。 又從奇高峯大升學《近思錄》, 晩年同賜暇湖堂, 常於書札稱先生。 及高峯沒後, 常致問其家屬, 至晩年不衰。【竝年譜。】
번역문:
공(公)은 젊어서 김하서(金河西)¹⁸²의 문하(門下)에서 학업을 받았다. 공이 이미 그의 가르침[提誨]을 받아 보고 느낀 바[觀感]가 깊어, 평생 존경하고 사모하여[尊慕] 그의 출처(出處)¹⁸³의 큰 절개는 비록 퇴계(退溪)나 도암(陶菴)¹⁸⁴이라도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한다. 또 기대승(奇大升) 고봉(高峯)¹⁸⁵을 따라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는데, 만년에 함께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 항상 서찰(書札)에서 선생(先生)이라 칭하였다. 고봉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항상 그의 가족에게 문안하여 만년(晩年)에 이르도록 쇠하지 않았다.【이상은 연보(年譜)에서 인용】
주석:
182.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정철은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3. 출처(出處):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出)과 물러나 은거하는 것(處). 선비가 처신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184. 퇴도(退陶):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를 함께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나, 도암 이재는 정철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이므로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다른 '도암'이라는 호를 가진 인물이거나, '퇴계(退溪)'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 문맥상 퇴계 이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철이 스승 김인후를 이황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가 된다.
185. 기대승(奇大升) 고봉(高峯, 1527-1572):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원문:
奇高峯嘗遇水石淸絶處, 或問: “世人有可以比如此者乎?” 高峯曰: “惟鄭澈乎!” 重峰謂公氷淸玉潔, 赤心奉公。 粟谷、牛溪終始友善, 白其心事。 蓋古所謂“特立獨行, 柔不茹¹⁸⁶, 剛不吐¹⁸⁷, 惡不仁, 而不使不仁加乎其身”者, 公實其人也歟!
번역문:
기고봉(奇高峯)이 일찍이 물과 돌이 맑고 빼어난 곳을 만나자, 어떤 이가 묻기를, “세상 사람 중에 이와 같다고 비유할 만한 자가 있습니까?” 하니, 고봉이 말하였다. “오직 정철이로다!” 중봉(重峰) 조헌은 공(公)을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며[氷淸玉潔], 붉은 마음[赤心]으로 공무(公務)를 받든다고 하였다. 율곡(粟谷) 이이, 우계(牛溪) 성혼과 시종(始終) 우호적이고 선량하게 지내며 그 마음속 일을 밝혔으니¹⁸⁸, 대개 옛말에 이른바 “세속을 벗어나 홀로 행하고[特立獨行], 부드러우나 먹히지 않고[柔不茹]¹⁸⁶, 강하나 뱉어내지 않으며[剛不吐]¹⁸⁷,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여 어질지 못한 것이 자기 몸에 더해지지 않게 하는”¹⁸⁹ 자는 공이 실로 그러한 사람이었도다!
주석:
186. [주-D007] 茹 : 저본(底本)에는 “가(茄)”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송강집・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 《송자대전・송강정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유불여(柔不茹)'는 부드러우면서도 남에게 휘둘리거나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187. [주-D008] 公 : 저본(底本)에는 “심(心)”으로 되어 있다. 《송강집・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 및 《송자대전・송강정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백기공사(白其公事)' 즉 공적인 일을 밝혔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본 번역에서는 저본을 따라 '심사(心事)'로 번역하였다.
188. 백기심사(白其心事): 그 마음속의 일을 밝힘. 이이, 성혼과 정철이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냈음을 의미한다. 주석 [주-D008] 참조.
189. 특립독행(特立獨行)……가호기신(加乎其身): 《예기(禮記)》 〈유행(儒行)〉편에 나오는 구절. 유학자의 이상적인 덕목을 묘사한 말이다.
원문:
銘曰: 翼翼松翁, 相我宣廟。 於皇宣廟, 天大日耀。 方其初政, 罔不淸明。 惟彼無良, 紹述衮、貞。 公炳其微, 折其尾毒。 衆正安意, 群邪側目。 元豐旣沮, 川、洛分朋。 互有得失¹⁹⁰, 公獨口憎。 公迺¹⁹¹南歸, 匪我忘時。 我湖空明, 我竹猗猗。 上哀東民, 畀以使節。 庶展吾蘊, 以庇惸獨。 卒事于東, 又南而北。 上眷其忠, 恩顧日隆。 擢之亞卿, 長于秩宗。 癸未之歲, 大賢疐跋。 重瞳下詢, 誰善誰惡? 滿庭媕娿, 口呑膠漆。 公在上前, 秋天一鶚。 曰君有道, 旌別淑慝。 誅四擧八, 舜所以聖。 退惡不遠, 《大學》所警。 上曰兪哉, 公言可省。 迺黜其奸, 迺慰其賢。 群言營營, 聖心俄遷。 朝焉加膝, 夕已墜淵。 東京部黨, 膺也疑亂。 元祐奸籍, 劉是鐵漢。 逆豎釀禍, 震驚天闕。 陞公右揆, 付以大戛。 豈不盡心? 群怨蝟集。 謂公殺之, 實公所活。 公所出之, 乃謂公入。 況彼憸人, 內援是托。 貝錦南箕, 成之倏忽。 圍以栫棘, 禦彼魑魅。 南警忽起, 公起于謫。 難平者事, 矧肘其掣? 出視南師, 謗書盈篋。 倉皇北歸, 乞身而退。 讎虜未滅, 貞臣先萎。 公忘怨恩, 人滋忿毒。 疵骴詆柩, 奪官除爵。 急攻者榮, 緩則便辱。 神孫御世, 群兇翦滅。 昭幽伸枉, 公冤遂白。 循¹⁹²始訖終, 凡幾伸屈。 公之伸也, 世道昌明; 公之屈也, 國步壞傾。 然後而見, 嗟爾群昏。 孰爲公案, 有覺文元。 小子狂簡, 敢述而論。【竝神道碑。】
번역문:
명(銘)하여 이른다. 공경하고 공경할 송옹(松翁)¹⁹³께서 우리 선묘(宣廟)를 도우셨네. 아, 황제 같으신 선묘께서는 하늘처럼 크고 해처럼 빛나셨네. 그 처음 정사하실 때 청명(淸明)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오직 저 불량한 무리들이 윤원형과 이기의 행태를 이어받아 서술하였네. 공(公)께서 그 미미함을 밝히고 그 꼬리의 독을 꺾으니, 여러 바른 이들은 마음을 편안히 하고 뭇 사악한 자들은 곁눈질하였네. 원풍(元豐)¹⁹⁴이 이미 꺾이니, 사천(四川)과 낙양(洛陽)¹⁹⁵처럼 붕당이 나뉘었네. 서로 득실(得失)¹⁹⁰이 있었으나 공(公)만이 유독 입으로 미움을 받았네. 공께서 이에¹⁹¹ 남쪽으로 돌아가시니, 때를 잊은 것이 아니었네. 나의 호수¹⁹⁶는 비고 밝으며, 나의 대나무¹⁹⁷는 무성하도다. 상(上)께서 동쪽 백성¹⁹⁸을 불쌍히 여겨 사절(使節)¹⁹⁹을 맡기시니, 자못 나의 쌓은 바를 펼쳐서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이[惸獨]²⁰⁰를 보호하고자 하였네. 동쪽에서 일을 마치고 또 남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갔네. 상께서 그 충성을 돌보시어 은혜로운 돌봄[恩顧]이 날로 융성하였네. 아경(亞卿)²⁰¹에 발탁하시고 질종(秩宗)²⁰²의 장(長)으로 삼으셨네. 계미년(1583)에 큰 현인(大賢)²⁰³이 넘어지고 자빠지니[疐跋], 중동(重瞳)²⁰⁴께서 아래로 물으시길,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 뜰에 가득한 자들 우물쭈물[媕娿]하며 입에 아교와 옻칠[膠漆]을 삼킨 듯하네. 공(公)께서는 상(上)의 앞에 가을 하늘의 외로운 매[秋天一鶚]²⁰⁵ 같았네. 아뢰기를, “임금께서 도(道)가 있으시면 선악(淑慝)을 드러내어 구별해야 합니다. 사흉(四凶)을 베고 팔원팔개(八元八愷)를 등용한 것은 순(舜)임금이 성인(聖人)이 된 까닭입니다. 악(惡)한 자를 물리치기를 멀리하지 않는 것은 《대학(大學)》에서 경계한 바입니다.” 상께서 말씀하시길, “옳다[兪哉], 공의 말을 살펴볼 만하다.” 이에 그 간사한 자들을 내쫓고 그 현명한 자들을 위로하였네. 뭇 말들 파리처럼 윙윙거리니[營營], 성스러운 마음[聖心]이 이내 변하였네. 아침에는 무릎에 올렸다가 저녁에는 이미 연못에 떨어뜨렸네. 동인(東人)의 무리[東京部黨]²⁰⁶는 응당히 난리를 의심하였네. 원우(元祐) 연간 간신 명부[奸籍]²⁰⁷에 유씨(劉氏)²⁰⁸는 바로 철한(鐵漢)²⁰⁹이었네. 역적(逆豎)²¹⁰이 화(禍)를 빚어내어 대궐[天闕]을 진동시키니, 공을 우의정[右揆]으로 승진시키고 큰 형벌[大戛]²¹¹을 맡기셨네.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았겠는가? 뭇 원망이 고슴도치 털처럼 모여들었네[蝟集]. 공이 죽였다고 말하나 실은 공이 살린 바였고, 공이 내보낸 것을 도리어 공이 들였다고 하네. 하물며 저 간사한 사람들[憸人]이 안의 도움[內援]을 의지하였네. 조개껍질 무늬 비단과 남쪽 하늘 키[貝錦南箕]²¹²를 순식간에 이루었네. 울짱과 가시나무[栫棘]로 둘러싸서 저 도깨비[魑魅]를 막았네. 남쪽의 경보[南警]²¹³가 갑자기 일어나니, 공께서는 귀양지에서 일어나셨네. 평정하기 어려운 것이 일이거늘, 하물며 팔꿈치를 잡아당기는가[肘掣]?²¹⁴ 나가서 남쪽 군대를 시찰하니, 비방하는 글[謗書]이 상자에 가득하였네. 황급히 북쪽으로 돌아와 몸을 사양하고 물러났네. 원수 오랑캐[讎虜]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곧은 신하[貞臣]가 먼저 시들었네. 공께서는 원망과 은혜를 잊었으나 사람들은 더욱 분노와 원한[忿毒]을 품었네. 시신[柩]을 헐뜯고 깎아내리며[疵骴詆] 관직을 빼앗고 작위(爵位)를 제거하였네. 급히 공격하는 자는 영화롭고, 느리면 곧 욕됨을 당하였네. 신손(神孫)²¹⁵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매, 뭇 흉악한 무리들이 베어져 멸망하였네. 그윽한 것을 밝히고 굽은 것을 펴서, 공의 원통함이 마침내 밝혀졌네. 처음을 따라²¹⁶ 마침에 이르기까지 무릇 몇 번이나 펴지고 굽혀졌는가? 공께서 펴질 때는 세도(世道)가 창성하고 밝았으며, 공께서 굽혀질 때는 나라의 운명[國步]이 무너지고 기울었네. 그러한 연후에 보았노라, 아! 너희 뭇 어리석은 자들아. 누가 공(公)의 공안(公案)²¹⁷을 위하겠는가? 문원공(文元公)²¹⁸을 깨달음이 있도다. 소자(小子) 미치고 간략하나[狂簡], 감히 서술하고 논하노라.【이상은 신도비명에서 인용】
주석:
189. [주-D009] 得失 : 《송강집・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 및 《송자대전・송강정공신도비명》에는 “실득(失得)”으로 되어 있다. 의미는 같다.
190. [주-D010] 迺 : 《송강집・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 및 《송자대전・송강정공신도비명》에는 “반(反)”으로 되어 있다. '도리어 남쪽으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191. [주-D011] 循 : 저본(底本)에는 “순(詢)”으로 되어 있다. 《송강집・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 및 《송자대전・송강정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순(循)'은 '따르다'는 의미이다.
192. 송옹(松翁): 송강(松江) 정철을 높여 부르는 말.
193. 원풍(元豐): 송(宋)나라 신종(神宗)의 연호(1078-1085).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시행되던 시기이다. 구법당(舊法黨)을 지지하는 송시열의 입장에서 신법을 부정적으로 보고 '꺾였다'고 표현한 듯하다.
194. 천(川), 락(洛): 송나라 때 성리학의 주요 학파인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낙학, 洛學)와 소식(蘇軾) 등(촉학, 蜀學 또는 사천학파, 川學派)을 비유하는 말로, 학문적·정치적 대립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조선의 동서 분당을 이에 비유한 것이다.
195. 아호(我湖): 정철이 은거했던 전라도 창평(昌平)의 송강(松江)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다.
196. 아죽(我竹): 정철의 시조 〈훈민가(訓民歌)〉에 나오는 대나무처럼 굳건한 절개를 상징하는 듯하다.
197. 동민(東民): 동쪽 백성. 함경도 백성을 가리킨다. 정철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98. 사절(使節): 관찰사(觀察使) 직책을 의미한다.
199. 경독(惸獨):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惸)와 어려서 아버지가 없는 고아(獨).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을 통칭한다.
200. 아경(亞卿): 차관급에 해당하는 벼슬. 여기서는 도승지(都承旨) 등을 가리킬 수 있다.
201. 질종(秩宗): 예조(禮曹) 판서를 가리키는 별칭.
202. 대현(大賢): 큰 현인. 여기서는 이이(李珥)를 가리킨다.
203. 중동(重瞳): 눈동자가 두 개라는 뜻으로, 고대 중국의 성군(聖君) 순(舜)임금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선조(宣祖) 임금을 비유한다.
204. 추천일악(秋天一鶚): 가을 하늘의 외로운 매. 뛰어난 기상과 절개를 가진 인물을 비유한다.
205. 동경부당(東京部黨): 동인(東人) 무리를 가리키는 말. '동경(東京)'은 동인들이 많이 살던 서울의 동쪽 지역을 의미할 수 있다.
206. 원우간적(元祐奸籍): 송나라 철종(哲宗) 때 장돈(章惇) 등이 소동파(蘇東坡) 등 구법당(舊法黨) 인사 309명을 간신(奸臣)으로 규정하여 명단을 작성한 사건. 이를 통해 억울하게 탄압받은 충신들을 암시한다.
207. 유(劉): 송나라 철종 때의 강직한 언관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08. 철한(鐵漢): 쇠처럼 강직한 사나이. 절개가 굳은 사람을 비유한다.
209. 역수(逆豎): 역적 놈. 정여립(鄭汝立)을 가리킨다.
210. 대알(大戛): 큰 창(戛) 또는 형벌. 국가의 큰 형벌권 또는 옥사를 다스리는 권한을 의미한다.
211. 패금남기(貝錦南箕): 조개껍질 무늬 비단과 남쪽 하늘의 키(별자리).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교묘하게 말을 꾸며 남을 참소하는 것을 비유한다.
212. 남경(南警): 남쪽의 경보. 임진왜란 발발을 의미한다.
213. 주체(肘掣): 팔꿈치를 잡아당김. 어떤 일을 하려는데 방해를 받거나 제약을 받는 것을 비유한다.
214. 신손(神孫): 성스러운 임금의 자손. 여기서는 광해군(光海君) 또는 인조(仁祖)를 가리킬 수 있다. 신도비가 쓰인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철의 신원(伸寃)은 선조 사후 광해군 때 이루어졌고, 관작 회복은 인조 때 이루어졌다.
215. 공안(公案): 공적인 안건 또는 평가. 여기서는 정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의미한다.
216. 문원공(文元公): 시호(諡號). 학문에 뛰어나고[文] 행실이 으뜸[元]이라는 뜻. 여기서는 송시열(宋時烈) 자신을 가리키거나, 혹은 정철의 공적을 제대로 평가해 줄 후대의 현명한 인물을 기대하는 의미일 수 있다.
217. 소자(小子):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여기서는 신도비명을 지은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218. 광간(狂簡): 뜻은 높으나 행동이 소략함. 송시열이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한 말이다.
원문:
鄭松江之爲吏部郞中, 鄭公芝衍爲員外。 其後辛巳年, 鄭公爲鼎軸, 松江醉贈一絶曰: “塵中豈識今丞相? 醉後猶疑舊佐郞。” 按湖南節, 辭於鄭公曰: “目今南徼多聳, 戎事甚殷。 某以白面書生, 不解軍旅方面之重, 豈其任也?” 鄭公曰: “議者皆以苦節許令公, 以苦節何往不可?” 松江笑曰: “功名富貴, 相公爲之, 獨以苦士之節, 委一鄭某, 某何堪之?” 時以爲名言。【《五山說林》。】
번역문:
정송강(鄭松江)이 이조 정랑(吏部郞中)²¹⁹으로 있을 때, 정공(鄭公) 지연(芝衍)²²⁰은 원외랑(員外)¹²¹이었다. 그 후 신사년(辛巳年, 1601)²²²에 정공이 정승[鼎軸]²²³이 되자, 송강이 취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주었다. “티끌 속에서 어찌 지금의 승상(丞相)을 알아보리오? 취한 뒤에도 오히려 옛 좌랑(佐郞)인가 의심하네.” 호남(湖南) 절도사(節度使)²²⁴로 나갈 때 정공에게 사양하며 말하였다. “지금 남쪽 변경[南徼]에 소란함이 많고 군사[戎事]가 매우 급합니다. 아무개(某)는 백면서생(白面書生)²²⁵으로 군대[軍旅]와 방면(方面)²²⁶의 중책을 알지 못하니, 어찌 그 임무를 맡겠습니까?” 정공이 말하였다. “논의하는 자들이 모두 고절(苦節)²²⁷로 영공(令公)²²⁸을 인정하니, 고절로 어디 간들 불가하겠습니까?” 송강이 웃으며 말하였다. “공명(功名)과 부귀(富貴)는 상공(相公)께서 하시고, 유독 고생하는 선비의 절개[苦士之節]만 한 명의 정 아무개에게 맡기시니, 아무개가 어찌 이를 감당하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이 명언(名言)이라고 여겼다.【《오산설림(五山說林)》²²⁹에서 인용】
주석:
219. 이부낭중(吏部郞中):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가리킨다.
220. 정공(鄭公) 지연(芝衍): 정지연(鄭芝衍, 1543-1600). 자는 덕원(德遠). 서인(西人)으로 분류된다.
221. 원외(員外): 원외랑(員外郞). 정6품 좌랑(佐郞)을 가리킨다. 정랑과 좌랑은 함께 전랑(銓郞)으로 불리며 인사권을 행사했다.
222. 신사년(辛巳年): 1601년. 그러나 정지연은 1600년에 사망하였고, 정철은 1593년에 사망하였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내용이다. 정지연이 정승이 된 적도 없다. 《오산설림》의 기록에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다른 '정공 지연'이거나, '신사년'이 다른 해를 지칭할 가능성도 있으나 확인이 어렵다.
223. 정축(鼎軸): 솥(鼎)의 세 발과 수레의 굴대(軸)처럼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인물. 정승(政丞), 특히 영의정(領議政)을 비유한다.
224. 안호남절(按湖南節): 호남 절도사(湖南節度使) 혹은 전라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절(節)'은 절도사 또는 관찰사의 직함을 상징한다.
225. 백면서생(白面書生): 얼굴이 하얀 서생. 세상 물정에 어둡고 경험이 없는 선비를 이르는 말. 정철이 자신을 낮추어 표현한 것이다.
226. 방면(方面): 한 지방의 군사 및 행정을 책임지는 직책.
227. 고절(苦節):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지키는 절개.
228. 영공(令公): 다른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정철을 가리킨다.
229. 《오산설림(五山說林)》: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가 지은 설화집.
원문:
松江治獄時, 常有酒氣, 着帽不正, 語聲凌厲。 秋浦自鞫廳詣牛溪, 曰: “委官常醉失儀, 極爲未安。” 牛溪卽書小紙邀之。 松江馳至, 先生曰: “聞此友之言, 兄多有所失, 何不制酒?” 松江卽旋席摧謝曰: “賦性輕淺, 有時妄作。 余亦自覺, 宜乎見咎於少友, 不勝慙歎。” 仍與論詩, 少無滯芥, 亦可見松江之氣像。【金楦所記。】
번역문:
송강(松江) 정철이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 항상 술기운[酒氣]이 있었고, 모자를 바르게 쓰지 않았으며, 목소리가 매서웠다[凌厲]. 추포(秋浦)²³⁰가 국청(鞫廳)²³¹에서 우계(牛溪) 성혼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위관(委官)께서 항상 취하여 의례(儀禮)를 잃으시니, 지극히 미안(未安)합니다.” 우계가 즉시 작은 종이에 글을 써서 그를 불렀다. 송강이 달려 이르자, 선생(先生)²³²께서 말씀하셨다. “이 친구의 말을 들으니, 형(兄)께서 잃는 바가 많으신데, 어찌 술을 절제하지 않으십니까?” 송강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꺾여 사죄하며[摧謝] 말하였다. “타고난 성품[賦性]이 경솔하고 천박하여[輕淺] 때로 망령되이 행동합니다. 저 또한 스스로 깨닫고 있으니, 젊은 친구[少友]에게 허물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끄럽고 탄식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어서 함께 시(詩)를 논하는데 조금도 마음에 걸림[滯芥]²³³이 없었으니, 또한 송강의 기상(氣像)을 볼 수 있다.【김현(金楦)²³⁴이 기록한 바이다.】
주석:
230. 추포(秋浦): 황신(黃愼, 1562-1617)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231. 국청(鞫廳): 죄인을 국문(鞫問)하는 곳. 의금부(義禁府) 등에 설치되었다. 기축옥사를 다루던 임시 관청일 수 있다.
232. 선생(先生): 여기서는 우계 성혼을 가리킨다.
233. 체개(滯芥): 마음에 걸리거나 꺼림칙한 것. '개체(芥滯)'라고도 한다. 정철이 비판을 받고도 거리낌 없이 시를 논할 만큼 도량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234. 김현(金楦): 구체적인 인물 정보 확인이 필요하다. 당시 인물의 기록일 수 있다.
원문:
寅城善詼諧, 亂離亦不廢。 嘗與西厓、功彦、澄源父子及余諸人會于練光亭, 遙見賊火明滅於松樹間, 礮聲不絶。 西厓泣曰: “吾輩死生只在朝夕, 此會未必非永訣。” 寅城曰: “不然。 畢竟同歸於盡, 何謂永訣?” 西厓拭淚笑曰: “新亭之上, 豈可無淸談乎?”【《寄齋雜記》。】
번역문:
인성부원군(寅城) 정철은 익살[詼諧]을 잘하여 난리 통[亂離]에도 또한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서애(西厓) 유성룡, 공언(功彦)²³⁵, 징원(澄源)²³⁶ 부자(父子) 및 나[余]²³⁷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연광정(練光亭)²³⁸에 모였는데, 멀리 소나무 사이에서 적(賊)의 불빛이 밝았다 꺼졌다 하고 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애가 울며 말하였다. “우리 무리의 죽고 사는 것이 단지 아침저녁 사이에 달렸으니, 이 모임이 반드시 영원한 이별[永訣]이 아니라고 할 수 없소.” 인성부원군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필경(畢竟) 함께 죽음으로 돌아갈 뿐인데[同歸於盡], 어찌 영결이라 하겠소?” 서애가 눈물을 닦고 웃으며 말하였다. “신정(新亭)²³⁹ 위에서 어찌 청담(淸談)²⁴⁰이 없을 수 있겠소?”【《기재잡기(寄齋雜記)》²⁴¹에서 인용】
주석:
235. 공언(功彦):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자(字). 호는 한음(漢陰).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외교와 국정 수습에 큰 공을 세웠다.
236. 징원(澄源): 이여규(李如圭, 1583-1612)의 자(字). 이덕형의 아들.
237. 여(余): 나. 이 글의 저자인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을 가리킨다.
238. 연광정(練光亭): 평양(平壤) 대동강(大同江) 변에 있던 유명한 누정(樓亭). 임진왜란 당시 평양 근처에서 모였음을 시사한다.
239. 신정(新亭): 중국 진(晉)나라 때 명사들이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신정(신정루)에 모여 시국을 탄식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의 모임을 비유한다.
240. 청담(淸談): 속되지 않고 고상한 이야기. 진(晉)나라 때 유행했던 노장(老莊) 사상 등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초연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241. 《기재잡기(寄齋雜記)》: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잡록. 선조, 광해군 대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원문:
壬辰變初, 松江自江界謫所, 蒙恩入行朝。 十月, 受下三道體察之任, 自行朝出來, 與西厓相遇於安州, 語及獄事, 松相謂西厓曰: “李潑母, 公何不能救也?” 西厓曰: “吾豈不盡力? 勢無可奈何矣。” 公其時擔當獄事, 曲折無不洞知, 其言如此, 則他尙何說? 松相曰: “然。 曺大中, 吾亦極力周旋而未能, 不得已請用次律矣。” 西厓曰: “其時事, 公與吾數人知之, 非外人所能知也。” 尹氏之死, 西厓尙不敢諱, 而他人欲掩之, 至於史草, 闕而不書云。 然則他人之愛惜西厓, 反有甚於西厓之自愛其身乎?【牛山簡牘。】
번역문:
임진년(1592) 변란 초기에 송강(松江) 정철이 강계(江界)의 귀양지[謫所]에서 은혜를 입어 행재소[行朝]로 들어왔다. 10월에 하삼도(下三道)²⁴² 체찰(體察)의 임무를 받고 행재소에서 나와 서애(西厓) 유성룡과 안주(安州)에서 서로 만났는데, 이야기가 옥사(獄事)에 미치자 송상(松相)²⁴³이 서애에게 말하였다. “이발(李潑)의 어머니를 공(公)께서는 어찌 구하지 못하였습니까?” 서애가 말하였다. “내가 어찌 힘을 다하지 않았겠습니까? 형세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공(公)은 그때 옥사를 담당하여 곡절(曲折)을 환히 알지 못함이 없었는데, 그 말이 이와 같으니, 다른 것을 어찌 더 말하겠는가? 송상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조대중(曺大中)²⁴⁴은 나 또한 극력 주선(周旋)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하여, 부득이 차율(次律)²⁴⁵을 적용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서애가 말하였다. “그때의 일은 공과 나 몇 사람만이 알 뿐이지, 외부 사람이 능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윤씨(尹氏)²⁴⁶의 죽음에 대해 서애는 오히려 감히 숨기지 못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덮으려 하여 심지어 사초(史草)에 빠뜨리고 쓰지 않았다²⁴⁷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서애를 아끼는 것이 도리어 서애가 스스로 그 몸을 아끼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우산(牛山) 안방준의 간독(簡牘)에서 인용】
주석:
242. 하삼도(下三道): 아래쪽의 세 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가리킨다.
243. 송상(松相): 송강(松江) 정철을 재상(相)으로 높여 부르는 말.
244. 조대중(曺大中, ?-1589):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때 정여립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245. 차율(次律): 죄를 한 등급 낮추어 적용하는 법률. 사형(死刑)에 해당하나 한 등급 감하여 유배(流配) 등에 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철이 조대중의 사형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음을 시사한다.
246. 윤씨(尹氏): 이발(李潑)의 어머니 윤씨를 가리킨다. 기축옥사 때 아들들과 함께 연좌되어 고문받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47. 사초(史草)……궐이불서(闕而不書): 사관(史官)이 기록한 역사 초고에서 해당 내용을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았다는 의미. 기축옥사의 참혹함이나 특정 인물에게 불리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누락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원문:
松江爲委官, 余爲問事郞廳。 一日, 松江退坐前廡, 招余問崔獄。 余素憤其獄, 對曰: “自起獄以來, 何嘗有一人指永慶爲三峯? 今無端以道聽, 拿囚處士, 不幸而死, 則相公何得而辭其責乎?” 松江大驚曰: “我與永慶平日雖以論議相角, 豈至於欲相害也? 此出於本道訛傳, 於我何干?” 余曰: “非謂相公陷之也。 知其無根, 而坐視不救, 此豈推官之體乎?” 松江曰: “我當極力救解。” 其後再鞫之日, 松江坐後廡急招余, 余往見, 則色頗怫然曰: “君觀其供辭? 君之崔公不好也。”【永慶之供, 略陳與牛溪異論之由。】 余笑曰: “我與永慶無平生之分, 相公何得言君之崔公? 第相公之不悅者, 以其言及時事耶?” 松江曰: “然。” 余曰: “然則松公初不知永慶也。 若於嚴鞫之下, 盡喪前日所守, 强爲諂媚之辭, 豈可曰崔永慶也? 以永慶言之, 則此其所以爲高處。 今之所鞫者, 只鞫三峯與否而已。 論議異同, 何干於獄乎?” 松翁卽釋然曰: “公言正是。 我未及思也。” 後數日, 松江又曰: “一朝刑推命下, 則恐未及救。 我汨於獄事, 意思耗竭, 君爲我搆箚草以待之。” 余曰: “此大事, 何可借人代草?” 又數日, 松翁大悅曰: “我已得救崔之妙策。” 余問: “何耶?” 松江曰: “箚草已搆, 且與柳而見約, 以若下刑推之命, 令我急通, 詣闕聯名箚救, 事已諧矣。” 余曰: “柳相果有是耶?” 松翁曰: “已成金石矣。” 其後余因公事, 往柳相家, 極論崔冤, 且言大臣不可不救。 柳相曰: “如我者何敢救解?” 余欲問松翁之約, 而事體未安而止。 松翁則余以崔事始終論難, 無一毫陷害意。 其欲救解而恐得罪於後世, 顯有遑悶之意, 溢於辭色。 余之所見如是, 故不敢以崔死爲松翁之罪, 或於談論間, 極言不已。 後生聞余言, 多信之。【白沙記崔永慶事首末。】
번역문:
송강(松江) 정철이 위관(委官)이었고, 나[余]²⁴⁸는 문사랑청(問事郞廳)²⁴⁹이었다. 하루는 송강이 물러나 앞 행랑[前廡]에 앉아 나를 불러 최영경(崔永慶)의 옥사(獄事)에 대해 물었다. 나는 평소 그 옥사에 분개하였으므로, 대답하여 말하였다. “옥사를 일으킨 이래로 어찌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최영경을 삼봉(三峯)²⁵⁰으로 지목한 자가 있었습니까? 이제 까닭 없이 뜬소문[道聽]으로 처사(處士)를 잡아 가두어, 불행히 죽게 된다면 상공(相公)께서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송강이 크게 놀라 말하였다. “내가 최영경과 평소 비록 논의(論議)로 서로 다투었으나[相角], 어찌 서로 해치려 하는 데까지 이르렀겠는가? 이는 본도(本道)²⁵¹의 와전(訛傳)에서 나온 것이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상공께서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가 없음을 알면서도 좌시(坐視)하고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추관(推官)²⁵²의 체모(體貌)이겠습니까?” 송강이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극력 구제하겠다.” 그 후 다시 국문(鞫問)하는 날, 송강이 뒷 행랑[後廡]에 앉아 급히 나를 불렀다. 내가 가서 보니, 안색이 자못 불쾌한 듯[怫然] 말하였다. “그대가 그의 공사(供辭)를 보았는가? 그대의 최공(崔公)은 좋지 못하다.”【최영경의 공초에 대략 우계 성혼과 의견이 달랐던 이유를 진술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최영경과 평생의 교분이 없는데, 상공께서 어찌 ‘그대의 최공’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다만 상공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가 시사(時事)를 언급했기 때문입니까?” 송강이 말하였다. “그렇다.” 내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송공(松公)께서는 처음부터 최영경을 알지 못하신 것입니다. 만약 엄한 국문 아래에서 전날 지켜오던 바를 모두 잃고 억지로 아첨하는[諂媚] 말을 한다면, 어찌 최영경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최영경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그가 높다고 할 만한 점입니다. 지금 국문하는 바는 단지 삼봉인지 아닌지만 국문할 뿐입니다. 논의가 같고 다른 것이 옥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송옹(松翁)이 즉시 환하게 풀리며[釋然] 말하였다. “공(公)의 말이 바로 옳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며칠 뒤에 송강이 또 말하였다. “하루아침에 형추(刑推)²⁵³의 명이 내려지면 미처 구하지 못할까 두렵다. 내가 옥사에 골몰하여 마음과 생각이 소진되었으니[耗竭], 그대가 나를 위해 차자(箚子)²⁵⁴ 초안을 작성하여[搆箚草] 그것을 가지고 기다리라.” 내가 말하였다. “이것은 큰일인데, 어찌 사람을 빌려 대신 초안을 작성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며칠 뒤에 송옹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이미 최영경을 구할 묘책(妙策)을 얻었다.” 내가 묻기를, “무엇입니까?” 하니, 송강이 말하였다. “차자 초안을 이미 작성하였고, 또 유이견(柳而見)²⁵⁵과 약속하여, 만약 형추의 명이 내려지면 나에게 급히 통지하게 하여 대궐에 나아가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구제하기로 하였으니, 일이 이미 잘 되었다[諧].” 내가 말하였다. “유상(柳相)²⁵⁶이 과연 그러하였습니까?” 송옹이 말하였다. “이미 금석(金石)처럼 굳게 약속하였다.” 그 후 내가 공사(公事)로 인하여 유상의 집에 가서 최영경의 원통함을 극력 논하고, 또 대신(大臣)이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유상이 말하였다. “나 같은 자가 어찌 감히 구제하겠는가?” 내가 송옹과의 약속을 묻고자 하였으나, 일의 형편[事體]상 편안하지 못하여 그만두었다. 송옹에 대해서는 내가 최영경의 일로 시종(始終) 논란하였으나 털끝만큼도 함정에 빠뜨리려는 뜻은 없었다. 그가 구제하고자 하면서도 후세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는, 드러나게 당황하고 번민하는[遑悶] 뜻이 말과 얼굴빛에 넘쳐흘렀다. 나의 소견이 이와 같았으므로, 감히 최영경의 죽음을 송옹의 죄로 삼지 못하였고, 혹 담론(談論)하는 사이에 극력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후생(後生)들이 내 말을 듣고 대부분 믿었다.【백사(白沙)²⁵⁷가 최영경 사건의 시말(始末)을 기록한 데서 인용】
주석:
248. 여(余): 나. 이 글의 저자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가리킨다.
249. 문사랑청(問事郞廳): 옥사(獄事)에서 죄인을 심문하는 일을 맡은 낭청(郎廳).
250.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호.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면서 정도전을 언급했다는 설이 있었고, 이로 인해 정도전의 후손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최영경이 정도전을 흠모했다는 소문이 연루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251. 본도(本道): 해당 도(道). 여기서는 최영경이 살던 경상도를 가리킬 수 있다.
252. 추관(推官): 죄인을 심문하는 관리. 위관(委官)이라고도 한다.
253. 형추(刑推): 형신(刑訊)과 추국(推鞫)을 아울러 이르는 말. 형벌을 가하며 죄상을 캐묻는 것을 의미한다.
254. 차자(箚子): 조선 시대 왕에게 올리던 약식 상소문.
255. 유이견(柳而見): 유성룡(柳成龍)을 가리킨다. '이견'은 유성룡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256. 유상(柳相): 유성룡을 재상(相)으로 높여 부르는 말.
257.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호.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국난 극복에 힘썼다.
원문:
鄭澈之按獄也, 前後拷掠徒死者, 豈盡一二無枉? 而澈受任廷平, 或不能堅執奏讞, 一夫銜冤, 誰任其咎? 人心之未厭, 不可謂之全無矣。 又震懾於專輒之一敎, 如曺大中、鄭介淸、柳夢井、金憑、申湜、李黃鍾、尹起莘之徒, 終不能原情蔽決、引法力爭。 故成渾以書責之曰: “安知公一朝臨事, 反出沈公下乎? 始知張釋之不可輕議也。” 蓋沈守慶代澈爲委官, 頗能論執, 侃然不移, 故成渾韙之, 而以此規澈也。 蓋其出入門庭如梁千頃之輩, 固不足責也, 其號爲善士者, 亦未免落於一邊, 僴然自得, 笑侮公議者不無其人, 而此等論議, 澈雖斥其非, 而亦不能大言以折之也。 鄭介淸之平生心事, 雖無足可觀, 而訊鞫之際, 澈只問與賊親厚與否而已可也, 反以不平之辭氣發之於口, 又比之於汝立, 何也? 白惟讓之書札, 自上抹去而下, 當時士夫雖不得見, 至墨淡所見, 上自朝紳, 下至閭巷, 人人無不知之。 以此推之, 其他不足道之言, 槪可想矣。 爲臣子所當請討之不暇, 而澈反以爲“以書札間事, 遽加刑戮, 殊非美事”, 獨倡論啓, 此不過欲免其因嫌不救之責也。 自爲計則得矣, 其於君臣大義, 差有愧焉, 專輒之敎, 澈固不得辭矣。 至若李潑八十歲老母, 壓膝而死, 慘酷之狀, 冤痛之情, 古今天下之所未嘗聞也。 其時委官恬然坐視, 無一言救之, 然則澈是沈守慶之罪人也, 柳成龍是澈之罪人也。 以此推之, 謂澈因嫌搆殺者, 非公論也; 謂澈爲無一事可議者, 非公論也。 公論所在, 子不得以溢父之美, 臣不得以飾君之非。 是非雖混於一時, 公論乃定於萬世, 可不懼哉? 可不懼哉?【《己丑記事》。】
번역문:
정철이 옥사(獄事)를 처결할 때, 전후로 고문하고 매질하여[拷掠] 죽은 자들이 어찌 한두 명이라도 원통함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정철은 조정의 공평한 처결[廷平]의 임무를 받고서도 혹 견고하게 주장하여 아뢰고 판결[奏讞]하지 못하였으니, 한 지아비[一夫]라도 원통함을 품는다면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지겠는가? 인심(人心)이 만족하지 못함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멋대로 하는[專輒] 하나의 하교(敎)에 두려워 위축되어[震懾], 조대중(曺大中), 정개청(鄭介淸)²⁵⁸, 유몽정(柳夢井)²⁵⁹, 김빙(金憑)²⁶⁰, 신식(申湜)²⁶¹, 이황종(李黃鍾)²⁶², 윤기신(尹起莘)²⁶³의 무리와 같은 이들을 끝내 사정을 헤아려[原情] 판결을 덮어주고[蔽決] 법을 인용하여 힘써 다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성혼(成渾)이 편지로 그를 꾸짖어 말하였다. “어찌 알았으랴, 공(公)이 하루아침에 일에 임하여 도리어 심공(沈公)²⁶⁴보다 아래로 나갈 줄을! 비로소 장석지(張釋之)²⁶⁵를 가벼이 논할 수 없음을 알겠다.” 대개 심수경(沈守慶)이 정철을 대신하여 위관(委官)이 되어 자못 능히 논하여 주장하며 강직하게[侃然] 뜻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성혼이 그를 옳다고 여겨 이로써 정철을 경계한 것이다. 대개 그의 문정(門庭)에 출입하는 양천경(梁千頃)²⁶⁶과 같은 무리야 진실로 꾸짖을 것도 없지만, 선한 선비[善士]라고 불리는 자들 또한 한쪽 편에 떨어짐을 면치 못하여, 의젓하게 스스로 만족하며[僴然自得] 공론(公議)을 비웃고 모욕하는 자가 없지 않았는데, 이러한 의론(論議)에 대해 정철이 비록 그 잘못을 배척하였으나 또한 큰 소리로 꺾지는 못하였다. 정개청의 평생 마음 씀씀이[心事]가 비록 볼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신문하고 국문할 때 정철은 단지 역적과 친하고 두터웠는지 아닌지만 물으면 될 것을, 도리어 불평하는 말과 기색[辭氣]을 입으로 내고 또 그를 정여립에 비유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백유양(白惟讓)의 서찰(書札)은 상(上)께서 직접 지워버리고 내려 보냈는데, 당시 사대부들이 비록 보지는 못하였으나 먹이 옅어진 데까지 이른 것을 보면, 위로는 조정 신하로부터 아래로는 여염집 골목[閭巷]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알지 못함이 없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 외 말할 것도 없는 말들은 대개 상상할 수 있다. 신자(臣子)된 자로서 마땅히 토벌할 것을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정철은 도리어 “서찰 사이의 일로 갑자기 형벌을 가하는 것은 자못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여겨 홀로 주창하여 논하여 아뢰었으니, 이는 그가 혐의로 인해 구제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면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위한 계책으로는 얻음이 있었으나,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자못 부끄러움이 있으니, 멋대로 한 하교에 대해 정철은 진실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발(李潑)의 80세 늙은 어머니가 무릎을 눌려 죽어 그 참혹한 모습과 원통한 심정은 고금 천하에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바이다. 그때 위관이 태연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한마디 말로 구제함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정철은 심수경의 죄인이고, 유성룡은 정철의 죄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정철이 혐의로 인해 얽어 죽였다고 말하는 것은 공론(公論)이 아니며, 정철이 한 가지 일도 의논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공론이 아니다. 공론이 있는 바이니, 아들은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넘치게 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꾸며서는 안 된다. 시비(是非)가 비록 한 시대에 뒤섞이더라도 공론은 마침내 만세(萬世)에 정해지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기축기사(己丑記事)》에서 인용】
주석:
258. 정개청(鄭介淸, 1529-1590): 동인 계열의 학자. 기축옥사 때 정여립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옥사했다.
259. 유몽정(柳夢井, ?-1589):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때 처형되었다.
260. 김빙(金憑, ?-1589):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때 처형되었다.
261. 신식(申湜, 1551-1623):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때 연루되었으나 후에 풀려났다.
262. 이황종(李黃鍾, ?-1589):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때 처형되었다.
263. 윤기신(尹起莘, ?-1589):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때 처형되었다.
264. 심공(沈公):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을 가리킨다. 서인으로 분류되나 비교적 중립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철의 후임으로 기축옥사 위관을 맡았다.
265. 장석지(張釋之):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의 정위(廷尉, 법무 장관). 법을 공정하고 엄격하게 집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혼은 심수경의 공정한 처리를 보면서 장석지를 가벼이 평가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정철이 그보다 못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266. 양천경(梁千頃): 구체적인 인물 정보 확인이 필요하다. 정철의 문객이나 추종 세력을 지칭하는 듯하다.
267. 자사(疵骴): 흠을 잡아 헐뜯음. 저(詆): 비방함.
268. 신손(神孫): 성스러운 임금의 자손. 여기서는 광해군(光海君) 또는 인조(仁祖)를 가리킬 수 있다. 신도비가 쓰인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철의 신원(伸寃)은 선조 사후 광해군 때 이루어졌고, 관작 회복은 인조 때 이루어졌다.
269. 문원공(文元公): 시호(諡號). 학문에 뛰어나고[文] 행실이 으뜸[元]이라는 뜻. 여기서는 송시열(宋時烈) 자신을 가리키거나, 혹은 정철의 공적을 제대로 평가해 줄 후대의 현명한 인물을 기대하는 의미일 수 있다.
270. 광간(狂簡): 뜻은 높으나 행동이 소략함. 송시열이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한 말이다.
원문:
松江之忠淸剛介, 栗谷所許, 嫉惡如讎, 乃其素性也。 癸未之搆怨旣如許, 而及當己丑治獄之任, 善善惡惡, 不少假借, 乘醉放言, 有若快意者然, 不厭衆心, 正坐於此。 其所入告救解之實, 人孰知而信之? 逮夫庚寅建儲之議, 釀成辛卯之禍, 罪狀松江, 悉出上旨, 兩司之論, 特奉行上旨而已。 然自上深罪松江而不明其案, 自下積怨松江而不得其辭, 乃執崔永慶而爲言, 則是松江以建儲獲罪而殺士爲名也。 於是永慶之論大張於一時, 洪汝諄欲免渠啓聞之責, 遂諉三峯之說, 俑於千頃, 請拿嚴訊, 使之必引松江而後已, 童孺亦知其誣矣。【《魯西集・雜著》。】
번역문:
송강(松江) 정철의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강직하고 절개 있음[忠淸剛介]은 율곡(栗谷) 이이가 인정한 바이니, 악(惡)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여기는[嫉惡如讎] 것은 바로 그의 본래 성품이다. 계미년(1583)에 원한을 맺은[搆怨] 것이 이미 그와 같았는데, 기축년(1589) 옥사를 다스리는[治獄] 임무를 맡음에 이르러, 선(善)을 선하게 여기고 악(惡)을 악하게 여겨 조금도 용서함[假借]이 없었고, 취한 김에 함부로 말하여[放言] 마치 통쾌하게 여기는 자와 같았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正坐於此]. 그가 들어가 아뢰어 구제한 실상을 사람들이 누가 알고 믿겠는가? 무릇 경인년(1590) 건저(建儲)의 의논에 이르러 신묘년(1591)의 화(禍)를 빚어내니, 송강의 죄상(罪狀)은 모두 상(上)의 지시[上旨]에서 나왔고, 양사(兩司)의 논의는 특별히 상의 지시를 받들어 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위[上]에서는 송강에게 깊이 죄를 주면서도 그 안건(案件)을 밝히지 않았고, 아래[下]에서는 송강에게 쌓인 원한이 있으면서도 그 빌미[辭]를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최영경(崔永慶)을 붙잡아 말을 만드니, 이는 바로 송강이 건저 문제로 죄를 얻고 선비를 죽였다는 명분[名]을 삼은 것이다. 이에 최영경에 대한 논의가 한 시대에 크게 떨쳐지고, 홍여순(洪汝諄)²⁷¹이 자신이 아뢰어 듣게 한 책임을 면하고자 마침내 삼봉(三峯)의 설을 양천경(梁千頃)²⁷²에게 떠넘기며, 잡아다가 엄하게 신문하여 반드시 송강을 끌어들인 연후에야 그만두도록 청하니, 어린아이[童孺]라도 그 무고(誣告)함을 알았다.【《노서집(魯西集)・잡저(雜著)》²⁷³에서 인용】
주석:
271. 홍여순(洪汝諄, 1542-1609): 동인 계열의 문신. 기축옥사 당시 최영경을 무고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72. 양천경(梁千頃): 앞 주석 266 참조. 홍여순이 최영경이 삼봉(정도전)을 추숭했다는 설을 양천경에게서 들었다고 책임을 전가했다는 의미이다.
273. 《노서집(魯西集)・잡저(雜著)》: 노서(魯西)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문집 《남계집(南溪集)》 중 잡저 부분. 박세채는 서인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원문:
沙溪先生嘗曰: “君以鄭松江爲何如人?” 對曰: “小子父兄常言其淸直狹隘之人。” 先生曰: “是矣。 此公自恃淸白無瑕, 眼下無人, 終爲一世所仇嫉。 程子曰‘識高則量大’, 此公亦是識不高之致也。”【《尤菴集・沙溪語錄》。】
번역문:
사계 선생(沙溪先生)²⁷⁴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그대는 정송강(鄭松江)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여기는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소자(小子)의 아버지와 형이 항상 그를 청렴하고 강직하나 편협한[淸直狹隘]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옳다. 이 공(公)은 스스로 청렴하고 결백하여 흠이 없다[淸白無瑕]고 자부하여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으니, 마침내 한 세상에 미움과 질투[仇嫉]를 받았다. 정자(程子)²⁷⁵께서 ‘식견(識見)이 높으면 도량(度量)이 크다’고 하셨으니, 이 공 또한 식견이 높지 못한 소치이다.”【《우암집(尤菴集)・사계어록(沙溪語錄)》²⁷⁶에서 인용】
주석:
274.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호. 서인의 대학자이자 예학(禮學)의 대가. 송시열의 스승이다.
275. 정자(程子): 송(宋)나라 성리학자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킨다.
276. 《우암집(尤菴集)・사계어록(沙溪語錄)》: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에 실린, 스승 사계 김장생의 어록.
홍성민(洪聖民)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洪聖民
字時可, 號拙翁, 南陽人。 嘉靖丙申生。 辛酉, 進士壯元。 明宗十九年甲子登第。 賜暇湖堂, 歷三司, 官至吏判, 典文衡。 宣廟朝, 參光國功臣, 封益城君。 萬曆甲午卒, 年五十九。
번역문:
홍성민(洪聖民)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¹ 명(明) 가정(嘉靖) 병신년(1536)에 태어났다. 신유년(1561)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²하였고, 명종(明宗) 19년 갑자년(156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여 호당(湖堂)³에 선발되었고, 삼사(三司)⁴를 거쳐 관직이 이조 판서(吏曹判書)⁵에 이르렀으며, 문형(文衡)⁶을 관장하였다. 선조(宣祖) 시대에 광국공신(光國功臣)⁷에 참여하여 익성군(益城君)⁸에 봉해졌다. 만력(萬曆)⁹ 갑오년(1614)¹⁰에 졸(卒)하니, 나이 59세였다.
주석:
- 남양(南陽) 사람이다: 본관이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임을 의미한다.
-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 진사시는 조선 시대 소과(小科)의 하나로,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장원은 과거 시험에서 수석 합격자를 말한다.
- 사가독서(賜暇讀書)하여 호당(湖堂): 사가독서는 젊고 재능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 별칭 湖堂)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하는 말. 조선 시대 언론과 학술을 담당하던 핵심 기관이다.
- 이조 판서(吏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약칭으로 '이판(吏判)'이라고도 한다.
- 문형(文衡): 문장과 학예(學藝)의 대가(大家)라는 뜻으로,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을 가리킨다. 문풍(文風)을 주도하고 문과 시험을 관장하는 등 학술과 문예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상징했다.
- 광국공신(光國功臣):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홍성민은 정여립 사건 수습에 참여한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 익성군(益城君): 공신 책봉과 함께 내려진 군호(君號).
-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1573-1620).
- 만력 갑오년(1614): 홍성민의 졸년. 그러나 1536년생이 59세에 졸했다면 1594년(만력 갑오년은 맞음)이 되어야 한다. 《선조실록》 등 다른 기록에 따르면 홍성민은 1594년(선조 27)에 졸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59세'는 오류일 가능성이 높으며, 1594년이 맞다면 향년 59세(만 58세)가 된다.
원문:
九歲, 隨祖母夫人于安城郡, 郡人遺以時果, 公嫌其無辭, 却不食。 夫人聞之, 詑曰: “吾有孫矣。” 觀察公捐館舍, 公能以禮自持, 受業伯兄承旨公。 一日, 公甚悲泣, 承旨怪問之, 對曰: “吾受學數月, 未蒙笞楚, 此哀吾之孤而不以笞楚加我, 吾是以悲。” 承旨感泣, 誘掖不倦, 業日進。
번역문:
9세 때 조모(祖母)인 부인(夫人)을 따라 안성군(安城郡)에 있었는데, 군(郡) 사람이 제철 과일을 보내오자 공(公)은 예의에 맞는 말이 없다 하여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부인께서 이를 듣고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내게 손자가 있구나!” 관찰사(觀察使)¹¹이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공은 능히 예법에 맞게 스스로를 지켰으며, 맏형인 승지공(承旨公)¹²에게서 학업을 받았다. 하루는 공이 몹시 슬피 우니, 승지께서 이상히 여겨 물으시자 대답하였다. “제가 학문을 배운 지 수개월이 되었으나 아직 매질(笞楚)¹³을 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저의 고아됨을 슬퍼하시어 매질을 가하지 않으시는 것이니, 저는 이 때문에 슬퍼합니다.” 승지께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끌고 도와주기를(誘掖) 게을리하지 않아 학업이 날로 진전되었다.
주석:
11. 관찰사(觀察使) 공(公): 홍성민의 아버지 홍담(洪曇)을 가리킨다. 홍담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연관사(捐館舍)'는 관직에 있다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12. 승지공(承旨公): 홍성민의 맏형 홍성범(洪聖範)을 가리킨다.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를 지냈다.
13. 태초(笞楚): 가는 회초리(笞)와 가시나무(楚)로 만든 매. 즉, 체벌을 의미한다. 엄한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다는 일화로, 어릴 때부터 학문에 대한 열의와 올바른 자세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원문:
公資稟絶人, 淸操出倫, 簡素澹泊, 雍容恬靜, 不假修爲, 自得乎天。 於世浮華侈靡、聲利貨財, 漠然無一動於中者, 棟宇欹傾, 甁甖懸磬, 而居之泰然。
번역문:
공(公)은 자질과 품성이 남보다 뛰어나고, 맑은 지조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간소하고 담박하며, 온화하고 점잖으며 고요하여(雍容恬靜), 굳이 닦고 행하기를 빌리지 않아도(不假修爲) 저절로 하늘로부터 얻은 듯하였다. 세상의 겉치레와 사치스러움(浮華侈靡), 명성이나 이익과 재물(聲利貨財)에 대해 담담하여 마음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으니, 집 기둥이 기울고 병과 항아리가 비어 경쇠처럼 매달린 듯¹⁴ 가난한 형편에도 태연하게 거처하였다.
주석:
14. 병앵현경(甁甖懸磬): 병(甁)과 항아리(罌)가 비어 마치 경쇠(磬)처럼 매달려 있다는 뜻으로,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살림살이가 거의 없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국어(國語)》 〈노어(魯語) 상(上)〉에 나오는 공자(孔子) 제자 원헌(原憲)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원문:
河陵君, 宣祖大王之母兄, 而於公爲姻從, 求見甚至, 公終不許一接。 平生不以關節加人, 人亦不敢干公以爲私。 爲文章, 淸麗拔越, 其當製誥, 操筆立就。 所著述, 亡於兵火, 公能暗記不一差, 遂秩而藏於家。
번역문:
하릉군(河陵君)¹⁵은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외삼촌인데 공에게는 인척(姻戚)의 종형제뻘¹⁶이 되었으므로, 만나보기를 매우 간절히 구하였으나 공은 끝내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평생 동안 관절(關節)¹⁷로 남에게 청탁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 또한 감히 공에게 사사로운 일로 간청하지 못하였다. 문장(文章)을 지음에 맑고 아름다우며(淸麗) 뛰어나서, 제고(製誥)¹⁸를 맡았을 때는 붓을 잡으면 즉시 이루어냈다. 저술(著述)한 바가 병화(兵火)¹⁹에 소실되었는데, 공은 능히 이를 암기하여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차례대로 정리하여 집에 보관하였다.
주석:
15. 하릉군(河陵君): 정원(鄭㳳, 1519-1570). 선조의 생모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오빠이다. 즉 선조의 외숙이다.
16. 인종(姻從): 인척 관계에 있는 종형제. 홍성민의 아들 홍영(洪榮)이 하릉군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사돈 관계였다. 이 경우 인척 관계는 맞으나 '종형제뻘'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원문 '어공위인종(於公爲姻從)'은 '공에게 인척 관계의 종씨(같은 성씨의 친척)가 되었다' 또는 폭넓게 '인척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하릉군은 정씨이고 홍성민은 홍씨이므로 성씨는 다르다. 다만 넓은 의미의 인척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17. 관절(關節): 원래는 뼈마디를 뜻하나, 여기서는 부정한 청탁이나 연줄을 이용한 부탁을 의미한다.
18. 제고(制誥): 임금의 명령서인 제서(制書)와 고명(誥命). 중요한 왕명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의미한다.
19. 병화(兵火): 전쟁으로 인한 화재.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원문:
宣祖大王嘗論唐太宗心術不正, 公進言曰: “太宗固不正, 然能容直諫致太平。 今殿下誠無讓於三代之君, 而若好問之德則或愧於唐宗矣。”
번역문:
선조대왕께서 일찍이 당 태종(唐太宗)은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하다고 논하시자, 공이 나아가 아뢰었다. “태종은 진실로 바르지 못한 점이 있었으나, 능히 직간(直諫)을 용납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진실로 삼대(三代)의 군주²⁰에 견주어 손색이 없으시나, 만약 묻기를 좋아하는 덕(好問之德)²¹에 있어서는 혹 당 태종에게 부끄러우실 것입니다.”
주석:
20. 삼대(三代)의 군주: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왕조로 꼽히는 하나라(夏), 상나라(商, 은나라), 주나라(周)의 어진 임금들을 가리킨다.
21. 호문지덕(好問之德): 묻기를 좋아하는 덕. 신하들에게 자문하고 그 의견을 경청하는 군주의 미덕을 의미한다. 선조를 삼대의 군주에 비유하며 칭찬하면서도, 간언 수용 면에서는 당 태종보다 못할 수 있다고 에둘러 간언하는 홍성민의 강직함을 보여준다.
원문:
自帝京還, 宣祖問: “中朝有何事?” 公曰: “皇帝於會朝日, 杖言者, 而言者繼踵。 我朝則雖名優待言者, 而未見有直言。 人君之於言者, 面容而心誅之, 則其害甚於杖矣。” 聞者縮頸。
번역문:
제경(帝京)²²에서 돌아오자 선조께서 물으셨다. “중조(中朝)²³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공이 아뢰었다. “황제께서는 조회(朝會)하는 날에 간언하는 자를 장(杖)으로 치시는데도, 간언하는 자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비록 간언하는 자를 우대한다고 이름은 나 있으나, 직언(直言)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께서 간언하는 자에 대해 얼굴로는 용납하면서 마음으로는 벌하신다면(面容而心誅之), 그 해(害)가 장형(杖刑)보다 심할 것입니다.” 듣는 자들이 목을 움츠렸다(縮頸).²⁴
주석:
22. 제경(帝京): 황제의 수도.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홍성민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23. 중조(中朝): 중국 조정.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24. 축경(縮頸): 두려워서 목을 움츠림. 홍성민의 말이 매우 직설적이고 임금 앞에서 하기 어려운 발언이었음을 보여준다.
원문:
宗系之改實繇公, 而口不言功。 曁《會典》之頒, 皇帝降勅, 朝廷始知之。 其論功定封也, 宣祖欲以公爲元勳, 令群下雜議。 公謂議者曰: “以宗系往請者, 冠蓋相望。 先乎我者不必不如我, 後乎我者不必不如我。 我但遇其時爾, 安敢貪天功爲己力也?” 卒辭而不居。【竝申象村撰墓誌。】
번역문:
종계(宗系)의 개정²⁵은 실로 공에게서 말미암았으나, 입으로 공(功)을 말하지 않았다. 《회전(會典)》²⁶이 반포되고 황제가 칙서(勅書)를 내리자 조정에서 비로소 이를 알았다. 그 공을 논하여 봉작(封爵)을 정할 때, 선조께서 공을 원훈(元勳)²⁷으로 삼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공이 논의하는 자들에게 말하였다. “종계 문제로 가서 청한 자들이 관개(冠蓋)²⁸가 서로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나보다 먼저 간 자들이 반드시 나보다 못하지 않았고, 나보다 뒤에 간 자들이 반드시 나보다 못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그때를 만났을 뿐인데, 어찌 감히 하늘의 공(天功)²⁹을 탐내어 자신의 공로로 삼겠습니까?”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이상은 신상촌(申象村)³⁰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에서 인용】
주석:
25. 종계(宗系)의 개정: 조선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가계(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됨)를 바로잡는 문제. 이를 '종계변무(宗系辨誣)'라 한다.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청원하였으나 해결되지 않다가, 홍성민이 사신으로 갔을 때(1584년) 명 신종에게 직접 아뢰어 허락을 얻었고, 마침내 1588년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수정된 내용이 실리게 되었다. 이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26. 《회전(會典)》: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리킨다.
27. 원훈(元勳): 으뜸가는 공신. 가장 높은 등급의 공신을 의미한다.
28. 관개(冠蓋): 갓(冠)과 수레 덮개(蓋). 관리나 사신들의 행렬을 의미한다. 종계변무를 위해 수많은 사신들이 명나라를 방문했음을 나타낸다.
29. 천공(天功): 하늘이 이룬 공. 여기서는 종계 개정이 여러 사람의 노력과 시운(時運)이 맞아 이루어진 것이지 자신만의 공이 아님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30. 신상촌(申象村):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
원문:
乙亥八年十二月, 是歲遣謝恩使洪聖民, 兼奏請宗系、弑逆已辨誣, 增入《會典》新書。 禮部尙書萬士和等題曰: “朝鮮國王痛其祖之冤, 而奏辨至於再三。 但前旣奉有明旨, 王言一出, 昭揭宇宙, 信如四時。 誰敢輒爲增損? 宜將該國前後奏詞, 纂入實錄, 俟修《會典》, 爲之許載爲便。” 奉聖旨。 是禮部欲以此意請降勅宣諭, 順付使臣, 聖民聞之, 因辭于禮部曰: “事未完了, 徑奉諭旨以回, 使臣所不敢爲也。” 禮部從之。【《宣廟寶鑑》。】
번역문:
을해년(1575, 선조 8) 12월, 이해에 사은사(謝恩使) 홍성민을 파견하여, 종계(宗系)와 시역(弑逆)³¹에 대해 이미 변무(辨誣)되었으니 《회전(會典)》 신판(新版)에 추가로 실어줄 것을 겸하여 주청(奏請)하였다. 예부 상서(禮部尙書) 만사화(萬士和) 등이 제(題)³²하여 아뢰었다. “조선 국왕이 그 할아버지의 원통함을 통탄하여 주청하여 변무한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이전에 이미 명확한 유지(諭旨)를 받들었으니, 왕의 말씀이 한번 나오면 우주에 밝게 내걸려 믿음직하기가 사계절과 같으므로, 누가 감히 함부로 내용을 더하거나 덜겠습니까? 마땅히 해당 국가의 전후 주청 내용을 실록(實錄)에 편찬해 넣었다가, 《회전》을 수찬할 때를 기다려 싣도록 허락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성지(聖旨)³³를 받들었다. 이에 예부(禮部)에서는 이러한 뜻으로 칙서를 내려 선유(宣諭)하고 그대로 사신에게 주려고 하였는데, 성민(聖民)이 이를 듣고 예부에 사양하며 말하였다. “일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는데 바로 유지(諭旨)를 받들고 돌아가는 것은 사신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부에서 그 말을 따랐다.【《선묘보감(宣廟寶鑑)》³⁴에서 인용】
주석:
31. 시역(弑逆): 임금이나 부모를 죽이는 큰 죄악. 여기서는 명나라 기록에 공민왕(恭愍王) 시해 사건의 주모자로 이성계가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는 문제를 가리킨다. 종계변무와 함께 주청되었다.
32. 제(題):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의 한 형식.
33. 성지(聖旨): 황제의 명령이나 뜻.
34. 《선묘보감(宣廟寶鑑)》: 선조(宣祖) 시대의 중요한 사실과 임금의 모범적인 언행을 기록한 책.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원문:
大司諫洪聖民謂李珥曰: “李誠中爲持平, 物論欲劾遞, 何如?” 珥曰: “是何言也? 誠中別無過惡, 亦非異衆作畦畛者也。 但與仁伯爲深交耳。 仁伯尙不可攻, 況可攻其黨友乎? 若然則尤至紛紜, 決不可劾也。” 聖民初是珥言, 後被時輩力勸, 乃劾誠中, 士類益驚駭。【《石潭日記》。】
번역문:
대사간(大司諫) 홍성민이 이이(李珥)³⁵에게 말하였다. “이성중(李誠中)³⁶이 지평(持平)³⁷이 되었는데, 여론(物論)³⁸이 그를 탄핵하여 교체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이이가 말하였다. “이 무슨 말인가? 성중은 별다른 잘못이 없고 또한 남들과 다르게 경계를 만드는(作畦畛)³⁹ 자도 아니다. 다만 인백(仁伯)⁴⁰과 깊이 교유할 뿐이다. 인백도 아직 공격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그 당우(黨友)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더욱 분분해질 것이니, 결코 탄핵해서는 안 된다.” 성민은 처음에 이이의 말을 옳다고 여겼으나, 뒤에 당시 무리들의 강력한 권유를 받고 마침내 성중을 탄핵하니, 사류(士類)들이 더욱 놀라고 경악하였다.【《석담일기(石潭日記)》⁴¹에서 인용】
주석:
35.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36. 이성중(李誠中, 1539-1592): 조선 중기의 문신.
37.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관리 감찰과 탄핵을 담당했다.
38. 물론(物論): 세상 사람들의 비평이나 여론. 주로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의미한다.
39. 작휴진(作畦畛): 밭두둑(畦)과 길 경계(畛)를 만듦. 즉, 남들과 구별되는 경계를 만들어 편 가르기를 하는 행위를 비유한다.
40. 인백(仁伯):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자(字). 당시 서인(西人)의 영수로 지목되던 인물이다. 이성중은 심의겸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 대화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의 상황을 보여준다. 홍성민은 동인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이는 처음에는 동서 양측을 조정하려 했다.
41. 《석담일기(石潭日記)》: 율곡 이이가 남긴 일기. 당시 정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원문:
被誣出城, 上而士夫, 下而胥徒, 莫不潛相抆淚, 至有送行於路左者。 遇一人負米而饋, 曰: “我昔者金海囚也。 十年抱枉, 賴公爲方伯直之。 今日之來, 爲報德也。” 公竟不受。【墓誌。】
번역문:
무고(誣告)를 당하여 도성을 나갈 때, 위로는 사대부(士夫)로부터 아래로는 서리(胥吏)와 노비(徒)⁴²에 이르기까지 남몰래 서로 눈물을 닦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길가에서 송행(送行)하는 자까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쌀을 짊어지고 와서 주며 말하였다. “저는 옛날 김해(金海)의 죄수였습니다. 10년 동안 원통함을 품고 있었는데, 공께서 방백(方伯)⁴³이 되시어 이를 바로잡아 주신 덕분입니다. 오늘 온 것은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은 끝내 받지 않았다.【묘지명에서 인용】
주석:
42. 서도(胥徒): 관청의 아전(胥吏)과 심부름꾼이나 노비 등 아랫사람(徒)을 통칭한다.
43. 방백(方伯): 지방 장관. 주로 관찰사(觀察使)를 가리킨다. 홍성민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적이 있다. 이 일화는 홍성민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으며, 그가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음을 보여준다.
이해수(李海壽)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海壽
字大仲, 鐸之子, 號藥圃。 嘉靖丙申生。 乙卯司馬, 明宗十八年癸亥登第。 選入史局, 賜暇湖堂, 歷玉堂、吏郞、大諫, 官至大司成。 己亥卒, 年六十四。
번역문:
이해수(李海壽)
자는 대중(大仲), 탁(鐸)¹의 아들이며, 호는 약포(藥圃)이다. 명(明) 가정(嘉靖) 병신년(1536)에 태어났다. 을묘년(1555)에 사마시(司馬試)²에 합격하였고, 명종(明宗) 18년 계해년(156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³에 선발되어 들어갔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여 호당(湖堂)⁴에 선발되었으며, 옥당(玉堂)⁵, 이랑(吏郞)⁶, 대간(大諫)⁷을 거쳐 관직이 대사성(大司成)⁸에 이르렀다. 기해년(1599)에 졸(卒)하니, 나이 64세였다.
주석:
- 탁(鐸): 이탁(李鐸). 이해수의 아버지.
-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를 통칭하는 말. 합격하면 생원(生員) 또는 진사(進士)가 되었다.
- 사국(史局): 역사 편찬 기관. 춘추관(春秋館)을 가리키거나, 실록 편찬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實錄廳) 등을 의미할 수 있다.
- 사가독서(賜暇讀書)하여 호당(湖堂): 앞의 홍성민 주석 3 참조.
-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던 기관.
- 이랑(吏郞): 이조(吏曹)의 정랑(正郞, 정5품)과 좌랑(佐郞, 정6품)을 통칭하는 말. 실무 관료로서 인사 행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직이었다.
- 대간(大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 정3품)을 가리킨다. 임금에게 간쟁(諫諍)하는 역할을 맡았다.
-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국립 최고 교육기관의 장이다.
원문:
少時, 詩格、筆法超絶流輩, 而未嘗以此自居。 與月汀、栢潭、松江、栗谷、高峯、白麓諸賢定爲道義之交, 情意甚篤。 及其同在湖堂, 日與酬唱。
번역문:
젊을 때 시(詩)의 품격과 필법(筆法)이 동배(同輩)들보다 매우 뛰어났으나, 일찍이 이를 내세우며 자처하지 않았다. 월정(月汀)⁹, 백담(栢潭)¹⁰, 송강(松江)¹¹, 율곡(栗谷)¹², 고봉(高峯)¹³, 백록(白麓)¹⁴ 등 여러 현인(賢人)들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어 정의(情意)가 매우 두터웠다. 그들과 함께 호당(湖堂)에 있을 때에는 날마다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酬唱).
주석:
9.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 조선 중기의 문신.
10. 백담(栢潭): 구사맹(具思孟, 1531-1604). 조선 중기의 문신.
11.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가사 문학의 대가.
12.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13.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14.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1532-1585). 조선 중기의 문신. 이들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인 관료들이었다.
원문:
癸未, 拜大司諫。 時宋應漑、許篈、朴謹元等竄逐, 特命栗谷爲吏曹判書, 牛溪爲吏曹參判。 公目見朝著潰裂, 論議益激, 三奸旣去, 兩賢還朝, 而一番之人疑懼未已。 務爲鎭定之論, 上箚曰: “聖心欲爲鎭定, 而擧措失其中; 衆論欲其和平, 而疑阻未盡釋。 君臣之間, 情意未孚; 朝著之上, 議論不一, 以致人心靡定, 而調劑無期。 凡此數者, 莫非危亡之兆。”
번역문:
계미년(1583)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이때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 박근원(朴謹元) 등이 축출되었고, 특별히 율곡 이이를 이조 판서로, 우계(牛溪)¹⁵를 이조 참판으로 임명하였다. 공은 조정(朝著)¹⁶이 무너지고 분열되는 것을 목격하고 논의가 더욱 격렬해짐에, 세 간신(奸臣)¹⁷이 이미 제거되고 두 현인(賢人)¹⁸이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일단(一番)의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를 그치지 않자, 힘써 진정시키는 의논을 하여 차자(箚子)¹⁹를 올려 아뢰었다. “성상(聖上)의 마음은 진정시키고자 하시나 거조(擧措)가 중도(中道)를 잃었고, 여러 의논은 화평하기를 바라나 의심하고 막히는 마음(疑阻)이 다 풀리지 않았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정의(情意)가 미덥지 못하고, 조정 위에서는 의논이 하나가 아니어서, 이로 인해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조제(調劑)²⁰할 기약이 없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는 위망(危亡)의 징조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주석:
15.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이이와 함께 서인(西人)의 대표적인 학자로 꼽힌다.
16. 조저(朝著): 조정 또는 조정의 관리들을 의미한다.
17. 삼간(三奸): 송응개, 허봉, 박근원 등 당시 동인(東人)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서인 측에서 비난하여 부른 말. 이 사건은 동서 분당 이후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18. 양현(兩賢):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가리킨다. 서인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19. 차자(箚子): 조선 시대 왕에게 올리던 상소문의 한 형식. 주로 현안에 대한 의견이나 대책을 제시할 때 사용되었다.
20. 조제(調劑): 여러 가지를 알맞게 조절하여 화합시킴. 분열된 조정을 통합하고 인심을 수습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辛卯正月, 三公入對, 請建儲。 松江首發其議, 上不悅。 領、右相【李山海, 柳成龍。】無一言。 公與副提學李誠中進曰: “此非獨鄭澈之言也, 乃臣等之所共議者也。” 以此忤旨, 出補驪州牧使。 六月, 兩司合啓, 請竄配鍾城。
번역문:
신묘년(1591) 정월, 삼공(三公)²¹이 입대(入對)²²하여 세자 건저(建儲)를 청하였다. 송강(松江) 정철이 맨 먼저 그 의논을 발의하였는데, 상(上)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다. 영의정(領議政)과 우의정(右相)【이산해(李山海)²³, 유성룡(柳成龍)²⁴이다】은 한마디 말도 없었다. 공이 부제학(副提學)²⁵ 이성중(李誠中)과 함께 나아가 아뢰었다. “이는 정철 혼자만의 말이 아니라, 바로 신(臣) 등이 함께 의논한 것입니다.” 이로써 왕의 뜻을 거슬러(忤旨),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가 보임되었다. 6월에 양사(兩司)²⁶가 함께 아뢰어 종성(鍾城)으로 유배(竄配)할 것을 청하였다.
주석:
21. 삼공(三公): 삼정승(三政丞).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킨다. 당시 영의정은 이산해, 좌의정은 정철(우의정 겸임), 우의정은 유성룡이었다.
22. 입대(入對): 신하가 궁궐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정사를 아뢰거나 논의하는 것.
23.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영수였다.
24.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힘썼다. 동인이었으나 온건파에 속했다.
25.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책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 임명되었다.
26.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함께 이르는 말.
해설: 이 사건은 '건저의(建儲議)' 사건으로,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이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실각하고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된 사건이다. 이는 훗날 임진왜란 발발과 맞물려 큰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도 불린다. 이해수는 이때 정철을 두둔하다가 함께 화를 입었다.
원문:
壬辰, 倭寇犯境, 大駕去邠, 至松京, 命放被謫諸公。 公行至咸興, 聞大駕西幸, 踰薛罕嶺, 間道達于義州行在所, 卽拜大司諫。 首論行朝宮市事, 繼請洪汝諄、宋言愼、李弘老等內通之罪。 李相德馨時爲憲長, 抵公書曰: “昨見貴院箚本, 令人斂衽。 每聞令監風旨, 專事協濟, 鄙生雖蒙騃, 豈不以國事爲念? 第一家之人方爲罪首, 論議之間, 隨參多礙, 自外肝膈, 敢不隨事共吐?” 漢陰卽李山海之婿也。【竝年譜。】
번역문:
임진년(1592), 왜구(倭寇)²⁷가 국경을 침범하자 대가(大駕)²⁸가 도성을 떠나(去邠)²⁹ 송경(松京)³⁰에 이르러, 귀양 가 있던 여러 공(公)들을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공은 길을 가 함흥(咸興)에 이르렀을 때,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차(西幸)했다는 소식을 듣고 설한령(薛罕嶺)³¹을 넘어 샛길(間道)로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³²에 도착하여, 즉시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맨 먼저 행조(行朝)³³의 궁시(宮市)³⁴ 문제³⁵를 논하였고, 이어서 홍여순(洪汝諄), 송언신(宋言愼), 이홍로(李弘老) 등이 (왜적과) 내통(內通)한 죄를 청하였다. 이 상공(相公) 덕형(德馨)³⁶이 당시 헌장(憲長)³⁷이었는데, 공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였다. “어제 귀원(貴院)³⁸의 차자(箚子) 초본을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斂衽)³⁹ 합니다. 매번 영감(令監)⁴⁰의 풍지(風旨)⁴¹를 들으니 오로지 협력하고 구제하는 일에 힘쓰시니, 비생(鄙生)⁴²이 비록 어리석으나 어찌 국사(國事)를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일가(一家)의 사람이 바야흐로 죄수(罪首)가 되어 있어, 의논하는 사이에 따라 참여하기가 매우 거리껴지니, 간격(肝膈)⁴³을 터놓는 것 외에 감히 일에 따라 함께 토로하지 않겠습니까?” 한음(漢陰)은 바로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이상은 연보(年譜)에서 인용】
주석:
27. 왜구(倭寇): 일본의 침략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가리킨다.
28.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의 행차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선조(宣祖)를 가리킨다.
29. 거빈(去邠): 빈(豳) 땅을 떠난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七月)〉에서 주(周)나라의 시조인 고공단보(古公亶父)가 훈육(獯鬻, 흉노)의 침입을 피해 빈 땅을 떠나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간 고사에서 유래했다.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성을 떠나는 것을 비유한다.
30. 송경(松京):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 현재의 개성)을 가리킨다.
31. 설한령(薛罕嶺): 함경남도 북청군과 신흥군 사이에 있는 고개. 마천령(摩天嶺)의 일부이다.
32.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행차하여 머무는 곳. 임시 수도를 의미한다.
33. 행조(行朝): 임금이 피난하여 임시로 정무를 보는 조정.
34. 궁시(宮市): 궁궐에서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들이는 것.
35. 궁시사(宮市事): 피난 중인 행재소에서 궁중 물품 조달을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폐단을 일으킨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6. 이 상공(相公) 덕형(德馨):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외교와 국정 운영에 큰 공을 세웠다. '상공(相公)'은 재상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37. 헌장(憲長): 사헌부의 으뜸 벼슬인 대사헌(大司憲)을 가리킨다.
38. 귀원(貴院): 상대방이 속한 관청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이해수가 대사간으로 있던 사간원(司諫院)을 가리킨다.
39. 염임(斂衽): 공경하는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다.
40. 영감(令監): 종2품 이상의 당상관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대사간 이해수를 가리킨다.
41. 풍지(風旨): 윗사람의 의향이나 지시. 또는 풍문으로 들은 취지. 여기서는 이해수의 의견이나 지시를 의미할 수 있다.
42. 비생(鄙生):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43. 간격(肝膈): 간(肝)과 횡격막(膈). 마음속 깊은 곳을 비유한다.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44. 한음(漢陰) 즉 이산해(李山海) 지서야(之婿也): 이덕형이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의 사위임을 밝히는 구절이다. 이덕형은 장인의 당파적 입장을 떠나 이해수의 공정한 처사에 경의를 표하고 국사에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원문:
公事親至孝, 執喪盡禮, 守制在家, 非喪祭不言。 洪公聖民與公同里閈, 爲大憲時, 退食之暇, 輒日造公, 欲議國事, 而到口不敢發, 蓋敬公之執禮也。 公天性剛正, 言事不避, 而持論和平, 進退取舍, 一從公正, 人多心服。 金相應南每與公言, 歎其無偏係之心, 事必就議。
번역문: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상(喪)을 치를 때는 예(禮)를 다하였으며, 상제(喪制)⁴⁵를 지키며 집에 있을 때는 상례(喪禮)나 제례(祭禮)에 관한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홍공(洪公) 성민(聖民)⁴⁶이 공과 같은 마을(里閈)⁴⁷에 살았는데, 대헌(大憲)⁴⁸으로 있을 때 퇴청(退食)⁴⁹한 여가에 문득 날마다 공을 찾아와 국사(國事)를 의논하고자 하였으나, 입에 이르러서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니, 대개 공이 예를 지킴을 공경했기 때문이다. 공은 천성이 강직하고 올발라 일을 말함에 피하지 않았으나, 주장은 화평함을 지녔고, 나아가고 물러나며 취하고 버림(進退取舍)에 한결같이 공정함을 따르니,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는 이가 많았다. 김 상공(相公) 응남(應南)⁵⁰은 매번 공과 말할 때마다 치우쳐 얽매이는 마음(偏係之心)이 없음을 감탄하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아가 의논하였다.
주석:
45. 상제(喪制): 부모나 조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일정 기간 관직을 쉬고 근신하며 복상(服喪)하는 제도.
46. 홍공(洪公) 성민(聖民): 앞서 전기가 나온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을 가리킨다.
47. 리한(里閈): 마을 입구의 문. 마을, 동네를 의미한다.
48. 대헌(大憲): 사헌부의 으뜸 벼슬인 대사헌(大司憲)을 가리킨다.
49. 퇴식(退食): 관청에서 물러나 식사함. 즉, 퇴근 후의 여가 시간을 의미한다.
50. 김 상공(相公) 응남(應南):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
원문:
公擧止端重, 人不見惰容, 雅不喜聲色、技藝。 家業淸貧, 絶不營産, 敎子弟, 唯以淸潔勉之, 親戚故舊莫敢干以私。 牧驪之日, 盜賊大熾, 行劫殺越, 在處相報, 而公能安集撫摩, 不專⁵¹勦捕, 一境晏然。 麥有兩穗之瑞, 民來獻而欲其上聞, 公笑却之。【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은 거동(擧止)이 단정하고 신중하여 사람들이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고, 평소 성색(聲色)⁵²과 기예(技藝)를 좋아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은 청빈하여 전혀 재산을 경영하지 않았고, 자제(子弟)들을 가르침에 오직 청렴하고 결백함(淸潔)으로 힘쓰게 하였으며, 친척과 옛 친구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 간청하지 못하였다. 여주(驪州)를 다스릴 때 도적이 크게 성하여 행겁(行劫)하고 살인하며 월경(越境)하는 일이 곳곳에서 보고되었으나, 공은 능히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모아 어루만져 주고(安集撫摩) 오로지 토벌하고 체포하는 데만(專勦捕) 힘쓰지 않으니, 온 고을이 편안하였다. 보리 이삭이 두 개씩 나온 상서로운 일(兩穗之瑞)⁵³이 있자, 백성이 와서 바치며 상(上)께 아뢰기를 바랐으나, 공은 웃으며 물리쳤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⁵⁴에서 인용】
주석:
51. [주-D001] 專 : 저본(底本)에는 “보(甫)”로 되어 있다. 《잠곡유고(潛谷遺稿)・도승지증이조판서약포이공묘갈명(都承旨贈吏曹判書藥圃李公墓碣銘)》 및 《약포유고(藥圃遺稿)・증자헌대부……이공묘갈명(贈資憲大夫……李公墓碣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오로지 ~만 하다'는 뜻의 '전(專)'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52.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 향락적인 생활을 의미한다.
53. 양수지서(兩穗之瑞): 한 줄기에 보리 이삭이 두 개가 나오는 상서로운 징조. 풍년이 들거나 태평성대가 올 길조로 여겨졌다.
54. 《잠곡구록(潛谷舊錄)》: 편찬자와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으나, '잠곡(潛谷)'이라는 지명이나 호와 관련된 옛 기록으로 추정된다. 또는 김육(金堉)의 호가 잠곡(潛谷)이므로 그와 관련된 기록일 수도 있으나, 이해수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불분명하다.
원문:
倭情叵測, 大亂將作, 漢季, 必殺黨錮諸賢; 唐亡, 必投淸流於濁河, 此是聖世之所不願聞者也。 請屛去致疑之端, 以杜讒賊之口, 汲汲收用李海壽、李山甫等, 使得展布施爲, 則庶可𦇯縫事機, 終不至於危亡。【趙重峰辛卯封事。】
번역문:
왜(倭)의 동정을 헤아리기 어렵고 큰 난리가 장차 일어나려 하는데, 한(漢)나라 말기에는 반드시 당고(黨錮)의 여러 현인(賢人)들을 죽였고, 당(唐)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청류(淸流)들을 탁하(濁河)에 던졌으니⁵⁵, 이는 성스러운 세상(聖世)에서는 원하지 않는 바입니다. 청컨대 의심을 초래하는 단서를 물리쳐 제거하여 참소하는 적(讒賊)들의 입을 막으시고, 급급히 이해수(李海壽), 이산보(李山甫)⁵⁶ 등을 거두어 써서 그들로 하여금 포부를 펴고 일을 하게 하신다면, 거의 시급한 사태(事機)를 봉합(補縫)하여 마침내 위망(危亡)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조중봉(趙重峰)⁵⁷의 신묘년(1591) 봉사(封事)⁵⁸에서 인용】
주석:
55. 한계(漢季)... 당망(唐亡)...: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환관 세력이 청렴한 사대부들을 탄압한 당고의 화(黨錮之禍)와, 당나라 말기에 환관 주전충(朱全忠)이 명망 높은 조정 신료(청류파)들을 황하(黃河, 濁河)에 던져 죽인 백마의 화(白馬之禍)를 가리킨다. 어진 신하들을 내치고 탄압하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징조임을 경고하는 것이다.
56. 이산보(李山甫, 1539-1594): 조선 중기의 문신. 이해수와 함께 건저의 문제로 파직되었다.
57. 조중봉(趙重峰): 중봉(重峰) 조헌(趙憲, 1544-1592).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다.
58. 봉사(封事): 봉함(封緘)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주로 비밀스러운 내용이나 시급한 정사를 아뢸 때 사용되었다. 이 글은 건저의 문제로 이해수 등이 파직된 직후,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조헌이 올린 상소의 일부이다.
원문:
牛溪先生謂“大仲之淸愼操執, 自少至老, 較若畫一, 眞金玉肝腸。 吾常欲坐之高足床上, 敬行再拜之禮”云。【遺事。】
번역문:
우계(牛溪) 선생⁵⁹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중(大仲, 이해수)의 청렴하고 신중하며 지조를 지킴(淸愼操執)이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비교해 보건대 한결같으니(較若畫一), 참으로 금옥(金玉) 같은 간장(肝腸)⁶⁰이다. 내가 항상 그를 높은 제자의 자리(高足床)⁶¹에 앉히고 공경히 재배(再拜)의 예를 행하고 싶었다”라고 하였다.【유사(遺事)⁶²에서 인용】
주석:
59. 우계(牛溪) 선생: 성혼(成渾)을 가리킨다.
60. 금옥(金玉) 간장(肝腸): 금이나 옥처럼 맑고 깨끗하며 변치 않는 마음씨나 속마음을 비유한다.
61. 고족상(高足床): 높은 제자, 즉 뛰어난 제자가 앉는 자리. 스승이 제자의 인품과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오히려 스승처럼 존경하고 싶다는 극찬의 표현이다.
62. 유사(遺事): 전해 내려오는 일화나 기록.
원문:
成均館儒生作年齒坐, 流俗多非之。 李海壽謂李珥曰: “齒坐非館中所宜也。 榜中尊敬壯元, 此亦禮俗也, 豈可坐於壯頭之上乎?” 珥曰: “壯元之尊, 施于榜會可也。 若館中乃明倫之地, 長幼之序, 不可亂也。 且壯元之尊, 何如王世子乎? 古者王世子入學, 尙以齒坐, 則壯元非所論也。” 海壽默然。【《石潭日記》。】
번역문: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이 연치좌(年齒坐)⁶³를 만들자, 세속에서는 이를 그르다고 여기는 이가 많았다. 이해수가 이이(李珥)에게 말하였다. “치좌(齒坐)는 성균관에서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방회(榜會)⁶⁴에서는 장원(壯元)을 존경하는 것이 또한 예속(禮俗)인데, 어찌 장원 머리 위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이이가 말하였다. “장원의 존귀함은 방회에서 베푸는 것은 가능하나, 성균관은 바로 인륜(人倫)을 밝히는 곳이니 장유(長幼)의 차례를 어지럽힐 수 없다. 또한 장원의 존귀함이 왕세자(王世子)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옛날 왕세자가 입학할 때도 오히려 나이 순서대로 앉았으니, 장원은 논할 바가 아니다.” 이해수가 잠잠하였다.【《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인용】
주석:
63. 연치좌(年齒坐): 나이 순서대로 자리를 정하는 것. '치좌(齒坐)'라고도 한다.
64. 방회(榜會): 과거 합격자들의 모임. 동기회와 유사하다. 방회에서는 급제 성적, 특히 장원을 존중하는 관례가 있었다. 이 대화는 성균관 내에서의 서열을 나이(長幼之序)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 성적(장원 존중)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보여준다. 이이는 인륜을 밝히는 학교의 원칙상 나이 순서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삼익(裵三益)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裵三益
字汝友, 興海人, 號臨淵。 嘉靖甲午生。 戊午司馬, 明宗十九年甲子登第。 歷兩司、玉堂、承旨、大司成, 官至黃海觀察使。 戊子卒, 年五十五。
번역문:
배삼익(裵三益)
자는 여우(汝友)이고 흥해(興海) 사람이며, 호는 임연(臨淵)이다.¹ 가정(嘉靖) 갑오년(1534)에 태어났다.² 무오년(1558)에 사마시(司馬試)³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19년 갑자년(156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양사(兩司)⁴, 옥당(玉堂)⁵, 승지(承旨)⁶, 대사성(大司成)⁷을 거쳐, 관직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⁸에 이르렀다. 무자년(1588)에 졸(卒)하니, 나이 55세였다.
주석:
- 배삼익(裵三益, 1534~158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해(興海).
- 가정(嘉靖) 갑오년(甲午年): 가정은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가정 갑오년은 1534년(중종 29)이다.
-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 소과(小科)라고도 한다. 배삼익은 1558년(명종 13) 식년시(式年試) 진사과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기관이다.
-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경연(經筵)과 서적 관리, 문한(文翰) 등을 담당한 기관이다.
-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황해도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하는 종2품 외관직.
원문:
年十一, 遊學京師, 見者咸稱偉器。 拜退溪先生, 受《心經》、《詩傳》, 得聞爲學之方。
번역문:
나이 11세에 서울[京師]⁹에서 유학(遊學)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위대한 인물[偉器]¹⁰이라고 칭찬하였다. 퇴계(退溪) 선생¹¹께 배알(拜謁)하여 《심경(心經)》¹²과 《시전(詩傳)》¹³을 배우고, 학문하는 방법[爲學之方]을 듣게 되었다.
주석:
9. 경사(京師): 수도. 당시 조선의 수도인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을 가리킨다.
10. 위기(偉器): 위대한 인물이 될 만한 자질 또는 그런 사람.
11. 퇴계(退溪) 선생: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을 가리킨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12. 《심경(心經)》: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성리학의 심성(心性) 수양에 관한 경전과 학자들의 학설을 모아 편찬한 책.
13. 《시전(詩傳)》: 송나라 주희(朱熹)가 편찬한 《시경(詩經)》의 주석서. 《시집전(詩集傳)》이라고도 한다.
원문:
公天性至孝。 稚¹⁴年喪母, 庶母待少恩, 父將逐之。 公爲作詩書座隅, 冀以感悟, 不果逐。 後遭父喪, 廬于墓側, 三年一不到家。 喪畢分産, 以所分田歸庶母。 平居以禮法自飭, 至老如一日。 待子弟嚴而有禮, 不敢以華衣美食見。 常戒見朝報曰: “爲士者當讀書求志, 與聞朝政, 非爾事也。”
번역문:
공(公)은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린 나이[稚年]¹⁵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서모(庶母)¹⁶의 대우에 은혜가 적자 아버지가 장차 그녀를 내쫓으려 하였다. 공이 시(詩)를 지어 자리 옆[座隅]에 써놓아 (아버지가) 감동하여 깨닫기를 바랐기에, 끝내 내쫓지 못하였다. 후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묘소(墓所)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이르지 않았다. 상(喪)을 마치고 재산을 나누자, 나누어 받은 밭[田]을 서모에게 돌려주었다. 평소 거처할 때 예법(禮法)으로 스스로를 단속하여 늙어서까지 한결같았다. 자제(子弟)를 대할 때는 엄격하면서도 예(禮)가 있었으며, 감히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¹⁷ 차림으로 만나보지 못하게 하였다. 항상 조보(朝報)¹⁸를 보는 것을 경계하며 말하였다. “선비 된 자는 마땅히 글을 읽어 뜻을 구할 것이요, 조정의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듣는 것은 너희의 일이 아니다.”
주석:
14. [주-D002] 稚 : 저본(底本)에는 “아(雅)”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 및 《택당집(澤堂集)・영의정경림부원군김공시장(領議政慶林府院君金公諡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편집자주: 해당 교감 정보는 아래 김명원(金命元)의 행장에 대한 것이므로, 배삼익의 이 부분과는 관련이 없다. 원문의 '稚'를 그대로 따름.]
15. 치년(稚年): 어린 나이.
16. 서모(庶母): 아버지의 첩(妾).
17. 화의미식(華衣美食):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 사치스러운 생활을 의미한다.
18. 조보(朝報): 조선 시대에, 관보(官報)로서 매일 아침 승정원(承政院)에서 발행하여 중앙과 지방에 배포하던 소식지.
원문:
在豐基, 將積歲逋負文簿, 悉令塗之官壁, 曰: “非不知聚民而焚之, 棄有用以取虛名, 吾不爲也。”
번역문:
풍기(豐基)¹⁹에 있을 때, 여러 해 동안 쌓인 체납 문서[逋負文簿]²⁰를 가져다가 모두 관청 벽에 바르게 하며 말하였다. “백성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것²¹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쓸모 있는 것(문서)을 버리고 헛된 명예를 취하는 것을 나는 하지 않겠다.”
주석:
19. 풍기(豐基): 경상북도 풍기군(豐基郡). 배삼익은 1572년(선조 5) 풍기군수로 부임했다.
20. 포부문부(逋負文簿): 세금이나 관곡(官穀) 등을 기한 내에 내지 못하고 체납한 것을 기록한 장부.
21. 취민이분지(聚民而焚之): 체납 문서를 백성들 앞에서 불태워 빚을 탕감해 주는 행위. 백성들의 환심을 살 수는 있으나, 문서를 없애 버리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대신 벽에 발라 재활용함으로써 실리를 취하고 헛된 명성을 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원문:
襄陽俗右鬼多淫祠, 公悉撤以焚之。 如祀典所當祭, 則必虔誠躬執事, 雖風雨不廢。 故水旱災癘, 凡有禱必應, 民蒙其惠。
번역문:
양양(襄陽)²²의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음사(淫祠)²³가 많았는데, 공이 모두 철거하여 불태웠다. 사전(祀典)²⁴에 의거하여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몸소 일을 집행하였으며, 비바람이 불어도 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해나 가뭄, 재앙과 전염병[災癘]이 있을 때마다 무릇 기도하면 반드시 감응(感應)이 있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주석:
22. 양양(襄陽):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배삼익은 1574년(선조 7)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부임했다.
23. 음사(淫祠): 예법에 맞지 않는 부정한 제사나 사당. 유교적 기준에서 정당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민간 신앙의 사당을 가리킨다.
24. 사전(祀典): 나라에서 제정하여 지내는 제사의 의식이나 법규. 또는 그 대상 신(神).
원문:
在臺省論事, 不以利害動其中。 宋祀連誣告賢相安瑭, 誅陷主家。 安氏子孫抗憤庭訟, 弱不能伸, 人皆規避不斷, 公卽啓削冒勳而決之, 輿情咸快。
번역문:
대성(臺省)²⁵에 있을 때 일을 논함에 이해(利害)로써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송사련(宋祀連)²⁶이 어진 재상 안당(安瑭)²⁷을 무고(誣告)하여 주가(主家)를 죽이고 함정에 빠뜨렸다. 안씨(安氏) 자손들이 분개하여 조정에 송사(訟事)하였으나, (세력이) 약하여 뜻을 펴지 못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송사련을) 피하며 결단하지 못했는데, 공이 즉시 아뢰어 거짓 공훈[冒勳]²⁸을 삭탈(削奪)하게 하여 이를 해결하니, 여론[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주석:
25. 대성(臺省): 사헌부(臺)와 사간원(省)을 아울러 이르는 말.
26. 송사련(宋祀連, 14961579): 조선 중기의 문신. 그의 고모부가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었는데,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 사건(丁未士禍) 때 안처겸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여 안당의 가문을 몰락시키고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1521): 조선 전기의 문신. 좌의정을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등을 변호하다 파직되었고,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27. 안당(安瑭, 1460
28. 모훈(冒勳): 거짓으로 꾸미거나 합당하지 않게 받은 공훈. 송사련이 안당 가문을 무고하여 얻은 위사공신(衛社功臣) 훈작을 가리킨다. 배삼익은 사헌부 등에서 송사련의 죄를 탄핵하고 그의 공신 훈작을 삭탈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원문:
海西飢, 擇方伯, 朝廷以爲非公莫可, 遂起公爲觀察使。 人或勸之辭, 公慨然曰: “臣起草萊, 榮位至此。 上憂民飢, 臣子敢言病乎?” 遂輿病而行。 理荒政, 晝夜焦勞, 病亟猶不懈。 子弟勸歸, 公曰: “何必死於妻子之手乎? 吾旣委質於朝, 死於職, 職也。 況死生有命, 雖遞職, 可逃命乎?” 至死, 諄諄惟國事, 無一言及家私。【竝李月沙廷龜撰碑。】
번역문:
해서(海西)²⁹가 굶주리자 방백(方伯)³⁰을 선발하는데, 조정에서 공이 아니면 불가하다고 여겨 마침내 공을 기용하여 관찰사(觀察使)로 삼았다. 어떤 사람이 사양하기를 권하자, 공이 개연(慨然)히 말하였다. “신(臣)이 초야(草萊)³¹에서 일어나 영화로운 지위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상(上)께서 백성의 굶주림을 걱정하시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병을 말하겠습니까?” 마침내 가마에 실려 병든 채로 부임하였다. 황정(荒政)³²을 처리하느라 밤낮으로 애태우며 수고하였고, 병이 위독해져도 오히려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제(子弟)들이 돌아가기를 권하자, 공이 말하였다. “어찌 반드시 처자(妻子)의 손에서 죽어야 하겠는가? 내가 이미 몸을 조정에 맡겼으니, 직책을 수행하다 죽는 것이 직분[職]이다. 하물며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으니, 비록 직책이 바뀌더라도 명(命)을 피할 수 있겠는가?” 죽을 때에 이르러서도 간곡하게 오직 나라 일만을 말하였고, 한마디도 집안의 사사로운 일에는 언급하지 않았다.【이상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³³가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29. 해서(海西): 황해도(黃海道)의 별칭.
30.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의 별칭.
31. 초래(草萊): 풀과 명아주. 미천한 백성이나 시골, 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상태를 비유한다.
32. 황정(荒政):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구제하는 행정.
33.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호는 월사(月沙).
원문:
病甚, 子龍吉以牛肉能補羸, 得之以進。 公却之曰: “吾持一方風憲, 先食禁肉可乎? 無陷爾父爲也。”【西厓柳成龍撰碑。】
번역문:
병이 심해지자, 아들 용길(龍吉)³⁴이 소고기가 능히 허약한 몸을 보할 수 있다고 여겨 그것을 구해 올렸다. 공이 물리치며 말하였다. “내가 한 지방의 풍헌(風憲)³⁵을 맡고 있는데, 먼저 금지된 고기³⁶를 먹는 것이 가하겠는가? 네 아비를 (죄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지 말라.”【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³⁷이 지은 비문에서 인용】
주석:
34. 배용길(裵龍吉, 15561609): 배삼익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1607):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서애(西厓).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국정을 총괄했다.
35. 풍헌(風憲): 풍속(風俗)과 법률(憲法). 또는 이를 단속하는 직책이나 관리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지방관으로서 풍속과 법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 책임을 맡고 있음을 의미한다. 관찰사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였다.
36. 금육(禁肉): 금지된 고기. 당시 조선에서는 농사에 필수적인 소의 도축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牛禁). 따라서 관찰사로서 법을 어기고 소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37. 류성룡(柳成龍, 1542
김명원(金命元)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金命元【忠翼公。】
字應順, 號酒隱, 慶州人。 嘉靖甲午生。 戊午生員, 明宗十六年辛酉登第。 錄玉堂南床, 以持平陞鍾城府使, 歷義州牧使、平安兵使、全羅監司、六曹判書、左右參贊・贊成。 壬辰, 拜都元師, 策平難功臣, 封慶林府院君。 宣廟庚子拜相, 至左議政。 壬寅卒, 年六十九。
번역문:
김명원(金命元)【충익공(忠翼公)¹이다.】
자는 응순(應順)이고 호는 주은(酒隱)이며, 경주(慶州) 사람이다.² 가정(嘉靖) 갑오년(1534)에 태어났다.³ 무오년(1558)에 생원시(生員試)⁴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16년 신유년(156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옥당(玉堂)⁵ 남상(南床)⁶에 기록되었고, 지평(持平)⁷에서 종성부사(鍾城府使)⁸로 승진하였으며, 의주목사(義州牧使),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 육조(六曹)의 판서(判書)⁹, 좌우참찬(左右參贊)¹⁰, 찬성(贊成)¹¹을 역임하였다. 임진년(1592)¹²에 도원수(都元帥)¹³에 제수되었고, 평난공신(平難功臣)¹⁴에 책록되어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¹⁵에 봉해졌다. 선조(宣祖) 경자년(1600)에 재상(宰相)에 제수되어 좌의정(左議政)¹⁶에 이르렀다. 임인년(1602)에 졸(卒)하니, 나이 69세였다.
주석:
- 충익공(忠翼公): 김명원의 시호(諡號). 충(忠)은 충성스러움을, 익(翼)은 생각하고 계획함이 원대함(思慮深遠) 등을 의미한다.
- 김명원(金命元, 1534~160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 가정(嘉靖) 갑오년(甲午年): 1534년(중종 29). 배삼익과 동갑이다.
- 생원시(生員試): 사마시(司馬試)의 하나로, 합격자를 생원이라 한다.
-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 남상(南床):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 이하 관원의 자리를 가리킨다.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관리 감찰과 탄핵 등을 담당했다.
- 종성부사(鍾城府使): 함경도 종성(鍾城)의 부사(府使). 정3품 외관직이다.
-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으뜸 벼슬. 정2품.
- 좌우참찬(左右參贊):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 찬성(贊成): 의정부의 정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우찬성(右贊成)이 있었다.
- 임진년(壬辰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한 해이다.
- 도원수(都元帥): 전쟁 시 여러 군대를 총지휘하는 임시 최고 군직.
- 평난공신(平難功臣):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기축옥사)을 평정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김명원은 3등에 책록되었다.
-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 김명원에게 내려진 부원군(府院君) 봉호. 부원군은 왕비의 아버지나 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위이다.
- 좌의정(左議政): 의정부의 정1품 재상. 영의정 다음가는 관직이다.
원문:
戊辰, 以金命元爲鍾城府使。 命元以持平爲御史, 出巡關北, 多奏覆弛張, 朝廷稱其幹局。 會鍾城缺, 朝議薦之, 有是拜。 命元本儒臣, 久在近密, 忽有外除, 人疑有中傷者。
번역문:
무진년(1588)에 김명원을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삼았다. 김명원은 지평(持平)으로서 어사(御史)¹⁷가 되어 관북(關北)¹⁸ 지방을 순찰하며 이완된 것을 바로잡고 확장해야 할 것을 많이 아뢰어 보고하니, 조정에서 그의 재능과 도량[幹局]¹⁹을 칭찬하였다. 마침 종성(鍾城)의 자리가 비자 조정의 의논이 그를 추천하여 이 임명이 있게 되었다. 김명원은 본래 유학자 출신 신하[儒臣]로서 오랫동안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요직[近密]²⁰에 있었는데, 갑자기 외직(外職)에 제수되니, 사람들이 혹 중상(中傷)²¹한 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주석:
17. 어사(御史):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거나 특정 사안을 조사하던 임시 관직.
18. 관북(關北): 함경도(咸鏡道) 지방을 가리킨다.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19. 간국(幹局): 일 처리에 필요한 재능과 도량.
20. 근밀(近密):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비밀스러운 직책. 홍문관, 승정원 등의 요직을 가리킨다.
21. 중상(中傷): 없는 사실을 꾸며 남을 해롭게 함. 당시 정치적 갈등 속에서 김명원이 누군가의 모함으로 외직으로 밀려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원문:
己卯, 以金命元爲義州牧使, 加階嘉善。 臺諫論請改正, 上曰: “將用命元爲西帥, 不可改也。” 命元之出外, 由忤於李山海, 故雖外職, 亦不能保。 十二月, 以義州牧使金命元爲平安道兵馬節度使。【竝遺事。】
번역문:
기묘년(1579)에 김명원을 의주목사(義州牧使)²²로 삼고, 가선대부(嘉善大夫)²³ 품계를 더하였다. 대간(臺諫)²⁴이 논하여 이를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장차 김명원을 서쪽의 장수[西帥]²⁵로 쓰려 하니, 고칠 수 없다.” 김명원이 외직으로 나간 것은 이산해(李山海)²⁶에게 거슬렸기 때문이었으므로, 비록 외직이었으나 또한 보전할 수 없었다. 12월에 의주목사 김명원을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²⁷로 삼았다.【이상은 《유사(遺事)》²⁸에서 인용】
주석:
22. 의주목사(義州牧使): 평안도 의주(義州)의 지방관. 정3품 외관직이다.
23.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 정3품인 목사(牧使)에게 종2품 품계를 더한 것은 이례적인 대우였다.
24.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의 관리들을 아울러 이르는 말.
25. 서수(西帥): 서쪽 지방(평안도)의 군사 지휘관.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의미한다. 선조는 김명원을 장차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할 계획이었기에 미리 품계를 높여준 것이다.
26.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東人)의 영수였으며 영의정을 지냈다. 김명원이 서인(西人)으로 분류되었기에 동인인 이산해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외직을 전전했음을 시사한다.
27.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평안도의 군사를 총괄하는 종2품 무관직.
28. 《유사(遺事)》: 어떤 책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을 모은 책으로 추정된다. 김명원의 행적과 관련된 기록일 것이다.
원문:
癸未五月, 全羅監司金命元辭職, 因薦全州府尹沈義謙, “智慮長遠, 曾爲本道監司, 熟知弊瘼, 請移授。” 傳曰: “自薦其代, 偃然狀啓, 此非藩臣所敢爲。 殊無忌憚, 事甚可駭, 後日亦必有弊。 然姑置之。” 兩司啓: “金命元不識事體, 輕侮朝廷, 請罷。” 答曰: “此習後日必有藩臣跋扈之漸, 當鞠問其情。 第今南方防禦方緊, 姑置之, 已而拿來。”【《休窩雜纂》。】
번역문:
계미년(1583) 5월에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 김명원이 사직하면서, 이로 인하여 전주부윤(全州府尹) 심의겸(沈義謙)²⁹을 추천하며, “지혜와 생각이 장기적이고, 일찍이 본도(本道)의 감사를 지내 폐단[弊瘼]을 잘 아니, 옮겨 임명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전교(傳敎)하기를, “스스로 그 후임자를 추천하며 거만하게[偃然] 장계(狀啓)³⁰를 올리니, 이는 번신(藩臣)³¹이 감히 할 바가 아니다. 자못 기탄(忌憚)함이 없으니 일이 매우 해괴하며, 후일에도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대로 둔다.”라고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아뢰기를, “김명원이 사체(事體)³²를 알지 못하고 조정을 가벼이 여겨 모욕하였으니, 파직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답하기를, “이러한 습관은 후일에 반드시 번신이 발호(跋扈)³³하는 조짐이 될 것이니, 마땅히 그 실정을 국문(鞠問)해야 한다. 다만 지금 남방(南方)의 방어(防禦)가 바야흐로 긴급하니 우선 그대로 두고, (일이 끝난) 뒤에 잡아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휴와잡찬(休窩雜纂)》³⁴에서 인용】
주석:
29.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西人)의 영수로 지목되었다.1588)이 지은 잡록.
30. 장계(狀啓): 지방 관찰사나 병마절도사 등이 임금에게 올리던 보고서.
31. 번신(藩臣): 제후국의 신하. 또는 지방의 신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지방관을 의미한다.
32. 사체(事體): 일의 체면이나 격식. 신하로서의 예의와 분수를 의미한다. 감사가 자신의 후임자를 직접 추천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월권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33. 발호(跋扈):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며 제멋대로 행동함.
34. 《휴와잡찬(休窩雜纂)》: 휴와(休窩) 홍언충(洪彦忠, 1536
원문:
壬辰, 倭變作, 上卽命起復拜右參贊, 充巡檢使, 旋拜都元帥。 不旬日, 賊已內逼, 大駕西幸, 都人大潰。 公出屯漢江, 無兵可戰。 乃退守臨津, 號召近道兵, 防灘列柵, 形勢稍張。
번역문:
임진년(1592)에 왜변(倭變)³⁵이 일어나자, 상(上)께서 즉시 기복(起復)³⁶시켜 우참찬(右參贊)에 제수하고 순검사(巡檢使)³⁷를 채우게 하였으며, 이내 도원수(都元帥)에 제수하였다. 열흘이 되지 않아 적(賊)이 이미 안으로 핍박해오니, 대가(大駕)³⁸가 서쪽으로 행차하고 도성 사람들이 크게 무너졌다. 공(公)이 나가 한강(漢江)에 주둔하였으나 싸울 병사가 없었다. 이에 임진강(臨津江)으로 물러나 지키면서, 인근 도(道)의 병사를 불러 모으고 여울을 방어하며 울타리를 설치하니, 형세가 조금 확장되었다.
주석:
35. 왜변(倭變):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가리킨다.
36.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있는 관리를 특별히 기용하여 관직에 복귀시키는 것. 김명원은 당시 상중이었으나 국가 위기 상황으로 인해 기복되었다.
37. 순검사(巡檢使): 조선 시대에 변란이 있을 때 군사를 동원하고 지휘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관직.
38.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의 행차를 의미한다.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해오자 선조는 의주(義州)로 피란길에 올랐다.
원문:
五月十二日, 都元帥金命元馳啓曰: “臣率李薲・劉克良以下諸將二十餘人、軍士七千餘人, 把住臨津, 設伏碧蹄等處, 多斬獲。 李陽元亦率李鎰・申恪以下諸將十餘人、軍士五千³⁹餘人, 駐兵大灘, 方圖進取。” 上下聞之, 莫不歡喜, 皆以爲不久當回鑾。 十三日, 京畿監司權徵馳啓曰: “此賊孤軍深入, 足腫氣疲, 其勢已挫。 請勅元帥, 乘此機急擊。” 朝廷信其說, 連降旨于金命元, 嚴責其翫寇不討之狀。 十四日, 上諭韓應寅曰: “今賊勢已摧, 而都元帥金命元久無所爲。 卿可刻日討賊, 不可坐受命元節制, 以誤軍機。” 十七日, 應寅盡其軍渡江。 申硈統左軍, 先薄賊壘, 樵採之賊望見奔回。 檢察使朴忠侃及督陣官洪鳳祥以爲我師必勝, 歡呼踊躍。 已而賊七八赤身舞釰而出, 直衝我陣。 左右軍一時大潰, 申硈以下四散奔走, 盡投江而死。 時命元、應寅、忠侃具着靑段衣, 忠侃見事不成, 遂騎馬據鞍而走。 江上之軍見其走, 一時呼曰: “元帥走矣。” 遂潰去。 命元、應寅親出呼曰: “我在此! 我在此!” 始得還集, 軍士餘者僅千人。
번역문:
5월 12일에 도원수 김명원이 급히 아뢰기를, “신(臣)이 이빈(李薲), 유극량(劉克良) 이하 여러 장수 20여 명과 군사 7천여 명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점거하여 지키면서 벽제(碧蹄) 등지에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많이 베어 사로잡았습니다. 이양원(李陽元)⁴⁰ 역시 이일(李鎰), 신각(申恪) 이하 여러 장수 10여 명과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대탄(大灘)⁴¹에 주둔하며 바야흐로 진격할 것을 도모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하(上下)가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두 오래지 않아 환궁(回鑾)⁴²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13일에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급히 아뢰기를, “이 적들은 외로운 군대로 깊숙이 들어와 발이 붓고 기운이 피로하니, 그 기세가 이미 꺾였습니다. 칙명(勅命)을 내려 원수(元帥)로 하여금 이 기회를 타서 급히 공격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그 말을 믿고 연달아 김명원에게 지시를 내려, 적을 가벼이 보고 토벌하지 않는 상황을 엄하게 꾸짖었다. 14일에 상(上)께서 한응인(韓應寅)⁴³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지금 적의 기세가 이미 꺾였는데 도원수 김명원이 오랫동안 하는 바가 없다. 경(卿)은 날짜를 정하여 적을 토벌하고, 앉아서 김명원의 절제(節制)를 받아 군사 기밀[軍機]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17일에 한응인이 그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강을 건넜다. 신할(申硈)⁴⁴이 좌군(左軍)을 통솔하여 먼저 적의 보루에 육박하니, 땔나무를 하던 적병들이 바라보고 달아나 돌아갔다. 검찰사(檢察使) 박충간(朴忠侃) 및 독진관(督陣官) 홍봉상(洪鳳祥)이 우리 군사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 여겨 환호하며 뛰었다. 얼마 뒤에 적병 일곱 여덟 명이 붉은 옷을 입고 칼춤을 추며 나와 바로 우리 진(陣)으로 돌격하였다. 좌우군(左右軍)이 일시에 크게 무너지니, 신할 이하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 모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때 김명원, 한응인, 박충간이 모두 푸른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박충간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마침내 말을 타고 안장에 의지하여 달아났다. 강 위의 군사들이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일시에 외치기를, “원수(元帥)가 달아난다!”라고 하며 마침내 흩어져 갔다. 김명원과 한응인이 직접 나가 외치기를,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라고 하여 비로소 다시 모을 수 있었으나, 남은 군사는 겨우 천 명이었다.
주석:
39. [주-D001] 千 : 저본(底本)에는 “십(十)”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기재사초(寄齋史草)》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40. 이양원(李陽元, 15261592): 조선 중기의 문신. 당시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한양 방어를 맡았으나 왜군에 패하고 임진강 전투에서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1614): 조선 중기의 문신. 당시 순찰사(巡察使)였다.
41. 대탄(大灘): 임진강의 여울 이름.
42. 회란(回鑾): 임금이 타던 수레가 돌아옴. 임금이 피란지에서 궁궐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43. 한응인(韓應寅, 1554
44. 신할(申硈, 1538~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원문:
六月, 都元帥金命元、巡察使韓應寅只率軍官五六千來, 李聖任、李薦等逃。 上召對命元謂曰: “今日之事, 夫復奈何?” 命元曰: “屢敗之將, 免誅足矣。 然成敗天也, 臣則有死而已。” 上曰: “將帥之言也。”【竝《寄齋雜記》。】
번역문:
6월에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한응인이 단지 군관(軍官) 오륙천 명⁴⁵을 거느리고 오니, 이성임(李聖任), 이천(李薦) 등은 도망갔다. 상(上)께서 김명원을 불러 대면하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일을 장차 다시 어찌하겠는가?” 김명원이 아뢰었다. “여러 번 패한 장수이니, 죽음을 면한 것으로도 족합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렸으니, 신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장수다운 말이로다.”【이상은 《기재잡기(寄齋雜記)》⁴⁶에서 인용】
주석:
45. 오륙천(五六千) 명: 군관(軍官)의 수가 이렇게 많을 수는 없으므로, 군사(軍士)의 오기이거나 과장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군관과 군사를 합한 수일 수도 있다.
46. 《기재잡기(寄齋雜記)》: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임진왜란 전후의 기록.
원문:
七月, 命都元帥金命元等, 屯順安縣以拒賊。 賊初入平壤, 兵約六七千, 招諭亂民, 作兵守城, 更不出問西路。 蓋因列屯兵分, 所領不多, 畏爲漢兵所薄也。 由是命元與元翼召募散卒及江邊土兵, 復成軍容, 與韓應寅進次順安, 防守釜山院峴界。 自此順安以上列邑吏民還集。【《宣廟寶鑑》。】
번역문:
7월에 도원수 김명원 등에게 명하여 순안현(順安縣)⁴⁷에 주둔하여 적을 막게 하였다. 적이 처음에 평양(平壤)에 들어왔을 때 병력은 약 육칠천이었는데, 난민(亂民)⁴⁸을 불러 달래어 병사로 삼아 성을 지키게 하고는 다시 서쪽 길[西路]⁴⁹로 나와 묻지 않았다. 이는 대개 주둔 병력을 나누어 열둔(列屯)하였기 때문에 거느린 수가 많지 않아 한병(漢兵)⁵⁰에게 공격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명원이 원익(元翼)⁵¹과 함께 흩어진 군졸[散卒] 및 강변의 토병(土兵)⁵²을 모집하여 다시 군대의 용모를 갖추고, 한응인과 함께 순안으로 나아가 주둔하며 부산원(釜山院) 고개 경계를 방수(防守)하였다. 이때부터 순안 이상의 여러 고을 관리와 백성들이 돌아와 모였다.【《선묘보감(宣廟寶鑑)》⁵³에서 인용】
주석:
47. 순안현(順安縣): 평안도 평양 근처의 현.
48. 난민(亂民): 난리를 피해 흩어진 백성, 또는 난리에 편승하여 소란을 피우는 백성.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에 가까우나, 왜군에 협력한 백성들을 포함할 수도 있다.
49. 서쪽 길[西路]: 평양 서쪽, 즉 의주(義州) 방면으로 향하는 길을 의미한다.
50. 한병(漢兵): 한족(漢族)의 군대. 당시 명(明)나라 원군(援軍)을 가리킨다.
51. 원익(元翼):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다.
52. 토병(土兵): 그 지역 출신의 병사. 향토군(鄕土軍)과 유사한 의미이다.
53. 《선묘보감(宣廟寶鑑)》: 선조(宣祖) 시대의 정치와 임금의 언행 중 모범이 될 만한 것을 뽑아 엮은 책.
원문:
天將史儒等敗於平壤, 一路洶洶, 言賊兵且至。 或請亟傳奏行在, 公曰: “行在聞此報, 易以驚撓, 徐待的耗, 未爲晩也。” 旣而聞之, 賊果不出。 防禦使金應瑞功勇最著, 朝廷戒勿輕動, 欲待天兵俱進。 應瑞知之, 屢牒公請戰, 詞甚亢厲。 公厭之, 一日手署曰: “依牒施行。” 巡察使李元翼在旁愕曰: “相公何不稟裁于上而卒然及此?” 公不答。 旣而應瑞出兵徘徊, 不見賊而還, 公亦不之責, 但私戒李公曰: “此子心術不中, 君等愼勿輕信。” 李公始乃大服。【行狀。】
번역문:
천장(天將) 사유(史儒)⁵⁴ 등이 평양에서 패하자, 온 길이 흉흉하여 적병이 또 이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어떤 이가 급히 행재(行在)⁵⁵에 전주(傳奏)하기를 청하였으나, 공(公)이 말하였다. “행재에서 이 보고를 들으면 쉽게 놀라 소란스러워질 것이니, 천천히 정확한 소식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 얼마 뒤에 들으니, 적이 과연 나오지 않았다. 방어사(防御使) 김응서(金應瑞)⁵⁶는 공과 용맹이 가장 뛰어났는데, 조정에서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고 경계하며 천병(天兵)⁵⁷을 기다려 함께 진격하고자 하였다. 김응서가 이를 알고 여러 차례 공에게 공문(牒)을 보내 싸우기를 청하는데, 말이 매우 거세고 사나웠다. 공이 이를 싫어하여, 하루는 손수 서명하며 “첩(牒)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 순찰사 이원익이 곁에 있다가 놀라서 말하였다. “상공(相公)⁵⁸께서는 어찌 상(上)께 품의하여 재가(裁可)를 받지 않고 갑자기 이에 이르셨습니까?” 공이 답하지 않았다. 얼마 뒤 김응서가 출병하여 배회하다가 적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공이 또한 이를 책망하지 않고 다만 사사로이 이공(李公, 이원익)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의 마음 씀씀이[心術]가 올바르지 못하니, 그대들은 삼가 가벼이 믿지 마시오.” 이공이 비로소 크게 탄복하였다.【행장(行狀)⁵⁹에서 인용】
주석:
54. 사유(史儒): 명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 휘하로 평양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패배했다.
55. 행재(行在):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곳. 당시 의주(義州)의 행궁(行宮)을 가리킨다.
56. 김응서(金應瑞, 1564~1624):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쳤다.
57. 천병(天兵): 천자(天子)의 군대. 명나라 원군을 가리킨다.
58. 상공(相公): 정승(政丞)이나 판서(判書) 등 고위 관료에 대한 존칭. 여기서는 도원수인 김명원을 가리킨다.
59.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글.
원문:
癸巳三月, 都元帥金命元來按慶尙道, 行李蕭然, 號令便簡, 雖無成效, 人心便之。【李時發倭亂聞見錄。】
번역문:
계사년(1593) 3월에 도원수 김명원이 와서 경상도를 안찰(按察)⁶⁰하였는데, 행장(行李)⁶¹이 쓸쓸하고 호령(號令)이 간편하여, 비록 이룬 공효(功效)는 없었으나 사람들이 마음으로 편안하게 여겼다.【이시발(李時發)의 《왜란문견록(倭亂聞見錄)》⁶²에서 인용】
주석:
60. 안찰(按察): 지방을 순찰하며 민정이나 군정 등을 살피는 것.
61. 행리(行李): 여행할 때의 차림새나 짐. 수행원의 규모 등을 포함한다. 소박하고 간소했음을 의미한다.
62. 이시발(李時發, 1569~1626): 조선 중기의 문신. 《왜란문견록》은 그가 임진왜란 당시에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이다.
원문:
金命元南下時, 歷景福宮基址, 作詩曰: “蒲芽初嫩柳眉分, 太液傷春帶夕曛。 却羨當時杜陵老, 江頭猶見鎖千門。”【《日月錄》。】
번역문:
김명원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 경복궁(景福宮) 터를 지나며 시를 지어 말하였다. “부들 싹 처음 돋고 버들 눈썹 갈라지는데, 태액지(太液池)⁶³의 상심한 봄 경치 저녁노을 띠었네. 도리어 부럽구나, 당시 두릉(杜陵)의 늙은이⁶⁴는 강가에서 오히려 천 개의 문 잠긴 것을 보았는데.”【《일월록(日月錄)》⁶⁵에서 인용】
주석:
63. 태액지(太液池):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앞의 연못. 중국 궁궐의 연못 이름에서 따왔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은 불타 없어졌다.
64. 두릉(杜陵)의 늙은이: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는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 장안(長安)이 함락된 후 곡강(曲江) 가에서 폐허가 된 궁궐을 보며 〈애강두(哀江頭)〉라는 시를 지었다. 이 시에 "강두의 궁전은 천 개의 문이 잠겼는데(江頭宮殿鎖千門)"라는 구절이 있다. 김명원은 불타버린 경복궁 터를 보며, 그래도 궁궐의 형태라도 남아있던 것을 보았던 두보를 부러워하며 전란으로 인한 폐허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65. 《일월록(日月錄)》: 어떤 책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이나 시문집일 가능성이 있다.
원문:
李忠武舜臣被拿時, 有一御史欲陷之, 來自閑山啓曰: “聞淸賊渡來, 掛嶼七日, 不能運動, 而舜臣未克討捕。” 是日, 慶林君金命元入侍經筵曰: “倭賊慣於舟楫, 掛嶼七日之言似虛。” 上曰: “予意亦然。” 其後元均之敗也, 忠武再爲統制, 立大功。【李忠武公年譜。】
번역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⁶⁶이 잡혀왔을 때, 한 어사(御史)가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여 한산(閑山)⁶⁷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듣건대 청나라 적[淸賊]⁶⁸이 건너와 걸서(掛嶼)⁶⁹에 7일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이순신이 토벌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날 경림군(慶林君) 김명원이 경연(經筵)⁷⁰에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왜적(倭賊)은 배 부리는 데 익숙하니, 걸서에서 7일이나 머물렀다는 말은 허위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생각도 또한 그러하다.” 그 뒤 원균(元均)⁷¹이 패하자, 충무공이 다시 통제사(統制使)가 되어 큰 공을 세웠다.【《이충무공연보(李忠武公年譜)》⁷²에서 인용】
주석:
66.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서 수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충무(忠武)는 그의 시호이다.1597):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이 파직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하고 전사했다.
67. 한산(閑山):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당시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던 곳이다.
68. 청적(淸賊): 청나라 오랑캐.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임진왜란은 일본(倭)과의 전쟁이었고, 당시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청정(淸正)’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여기서 ‘청(淸)’ 자를 따와 왜적을 ‘청적’으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일본군(왜적)을 의미한다. 혹은 후대의 기록자가 오해하여 잘못 기록했을 수도 있다.
69. 괘서(掛嶼): 부산 앞바다의 섬 이름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70.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하던 자리.
71. 원균(元均, 1540
72. 《이충무공연보(李忠武公年譜)》: 이순신의 생애와 행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책.
원문:
八月, 閑山敗報至, 朝野震駭。 上引見備邊諸臣問之, 群臣惶惑不知所對。 慶林君金命元、兵曹判書李恒福從容啓曰: “此元均之罪。 惟當起李舜臣爲統制使耳。” 上從之。 復起李舜臣爲三道水軍統制使, 破倭兵于珍島碧波亭。【《懲毖錄》。】
번역문:
8월에 한산(閑山)에서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조야(朝野)⁷³가 진동하고 경악하였다. 상(上)께서 비변사(備邊司)⁷⁴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여 이를 물으시니, 여러 신하들이 황공하고 당혹하여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⁷⁵이 조용히 아뢰기를, “이는 원균의 죄입니다. 오직 마땅히 이순신을 기용하여 통제사로 삼아야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이를 따랐다.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으니,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⁷⁶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징비록(懲毖錄)》⁷⁷에서 인용】
주석:
73. 조야(朝野): 조정(朝廷)과 재야(在野). 온 나라를 의미한다.
74. 비변사(備邊司): 조선 중기 이후 군사 및 외교 문제를 총괄하던 최고 의결 기관.
75.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다.
76. 벽파정(碧波亭):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던 정자. 명량해전(鳴梁海戰)이 벌어진 울돌목 근처이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77. 《징비록(懲毖錄)》: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의 원인, 경과, 자신의 잘못 등을 기록하여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저술한 책.
원문:
宣祖庚子六月戊子, 傳于政院曰: “左、右相命招卜相。” 左議政李恒福、右議政李憲國卜相單子, 崔興源、鄭琢、李元翼、尹斗壽、李德馨入啓, 答曰: “改卜。” 以沈喜壽加薦。 傳曰: “相臣之職難矣。 古有相德、相才、相量等語, 蓋用非其人, 成敗係焉。 況此時乎? 今見卜相, 崔、鄭則老病, 尹斗壽、李元翼則有物議, 李德馨則年少, 姑未合首揆。 大槪若未有恰當之人, 則不如姑闕之。 《書》曰: ‘官不必備, 惟其人。’ 祖宗朝或有獨相之時矣。” 左、右相回啓曰: “伏承聖敎, 其難愼之意至矣, 臣等不敢更有所議。 人之才德不在於老少, 故臣等謹以原任相臣等薦之矣。 惟在聖裁。” 答曰: “金命元雖似乏擔當之才, 然寬厚有容, 白首勤勞王事; 韓應寅有大勳; 尹承勳性簡, 頗盡心國事, 而才亦有之。 此數人亦在可議之中, 第未知其可合否也。” 回啓曰: “上敎所及三人, 皆一時德望, 正是知臣莫如君也。” 答曰: “是不然。 或以予所見, 一時問之, 而不可遽爾爲定。 《書》曰: ‘枚卜功臣。’ 又曰: ‘稽于衆。’ 今日姑退去, 廣聞物議, 更爲來啓可矣。” 又啓曰: “命元、應寅非但職秩相當, 人望亦屬, 故果欲薦之, 而第原任大臣俱係衆望, 而新薦似多爲未安, 故未及論議矣。 上敎至此, 實是輿情所在, 而與臣等私相論議者相符, 故啓之矣。 雖他日來啓, 無過於此故敢啓。” 答曰: “然則上下之見相符, 深喜。 更書單子以入。” 有政: 以李恒福爲領議政, 李憲國爲左議政, 金命元爲右議政。【遺事。】
번역문:
선조(宣祖) 경자년(1600) 6월 무자일에 정원(政院)⁷⁸에 전교하기를, “좌의정, 우의정에게 명하여 복상(卜相)⁷⁹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좌의정 이항복과 우의정 이헌국(李憲國)이 복상 단자(卜相單子)에 최흥원(崔興源), 정탁(鄭琢), 이원익(李元翼), 윤두수(尹斗壽), 이덕형(李德馨)을 써서 입계(入啓)하니, 답하기를, “다시 복상하라.”고 하였다. 심희수(沈喜壽)를 더하여 추천하였다. 전교하기를, “상신(相臣)의 직책은 어렵다. 옛말에 상덕(相德), 상재(相才), 상량(相量) 등의 말이 있으니, 대개 그 사람이 아니면 등용하지 않는 것은 성공과 실패가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때임에랴? 지금 복상 후보를 보니, 최흥원과 정탁은 늙고 병들었고, 윤두수와 이원익은 물의(物議)⁸⁰가 있으며, 이덕형은 나이가 적어 우선 수규(首揆)⁸¹에 합당하지 않다. 대개 만약 꼭 맞는 사람이 없다면 우선 공석으로 두는 것만 못하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관직은 반드시 다 갖추려 하지 말고 오직 그 적임자를 구하라.’고 하였다. 조종조(祖宗朝)에도 간혹 독상(獨相)⁸²의 때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좌의정과 우의정이 회계(回啓)하기를, “삼가 성교(聖敎)를 받드니, 그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시는 뜻이 지극하십니다. 신 등은 감히 다시 의논할 바가 없습니다. 사람의 재능과 덕망은 늙고 젊음에 있지 않으므로, 신 등이 삼가 원임(原任) 상신(相臣) 등을 추천한 것입니다. 오직 성상(聖上)의 재결(裁決)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김명원은 비록 일을 담당할 재능은 부족한 듯하나 너그럽고 후하며 용납함이 있고, 백수(白首)⁸³가 되도록 왕의 일에 힘썼다. 한응인은 큰 공훈이 있다. 윤승훈(尹承勳)은 성품이 소탈하고 자못 국사에 마음을 다하며 재능 또한 있다. 이 몇 사람도 또한 의논할 만한 대상에 있으나, 다만 그들이 합당한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회계하기를, “상교(上敎)에서 언급하신 세 사람은 모두 한 시대의 덕망(德望) 있는 이들이니, 바로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혹 나의 소견으로 잠시 물어본 것이니, 갑자기 그렇게 결정할 수는 없다. 《서경》에 이르기를, ‘공신(功臣)들을 매복(枚卜)⁸⁴하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여러 사람에게 물으라.’고 하였다. 오늘은 우선 물러가서 널리 물의를 듣고 다시 와서 아뢰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명원과 한응인은 직책과 품계가 상응할 뿐만 아니라 인망(人望) 또한 속해 있으므로, 과연 추천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원임 대신들이 모두 여러 사람의 기대를 받고 있어 새로 추천하는 것이 자못 많이 불안한 듯하여 미처 논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교가 여기에 이르시니 실로 여론[輿情]이 있는 바이고 신 등이 사사로이 서로 논의한 바와 부합하므로 아뢴 것입니다. 비록 다른 날에 와서 아뢰더라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기에 감히 아뢰옵니다.”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그렇다면 상하(上下)의 견해가 서로 부합하니 매우 기쁘다. 다시 단자(單子)를 써서 들여오라.”고 하였다. 정사(政事)가 있어, 이항복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이헌국을 좌의정으로, 김명원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이상은 《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78.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기관.
79. 복상(卜相): 새로 임명할 정승(政丞) 후보자를 여러 명 추천하는 일. 또는 그 추천된 후보자. 임금이 이 중에서 최종적으로 임명했다.
80. 물의(物議): 여러 사람의 비판적인 의논.
81. 수규(首揆): 으뜸 재상. 영의정을 가리킨다.
82. 독상(獨相): 영의정 한 사람만 두거나, 혹은 좌의정이나 우의정 없이 영의정만 있는 상태.
83. 백수(白首): 흰 머리. 노년을 의미한다.
84. 매복(枚卜): 점을 쳐서 가리거나, 여러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가려 뽑는 것. 여기서는 정승 후보를 신중하게 선택함을 의미한다.
원문:
淸州人朴以儉承仁弘旨, 上疏攻李文忠公恒福, 以爲鄭澈腹心尙據台鉉。 後數日, 上御講席, 特進官宋言愼啓曰: “辛卯歲, 鄭澈謫江界, 有詩曰: ‘生涯薛罕嶺, 心事弼雲山。’ 弼雲, 李恒福號也。” 左相金命元曰: “鄭澈雅喜李恒福, 所以有是作也。 李恒福平生無一畝之宮, 贅居婦翁權慄家, 以其在弼雲山背, 意者以爲號也。 恒福與澈年位懸絶, 素無情分。 臣則與澈自少相過從, 如以交澈爲罪, 臣固當先伏法。” 宋色沮而退。【李文忠公年譜。】
번역문:
청주(淸州) 사람 박이검(朴以儉)이 인홍(仁弘)⁸⁵의 뜻을 받들어 상소(上疏)를 올려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⁸⁶을 공격하며, 정철(鄭澈)⁸⁷의 복심(腹心)⁸⁸으로서 여전히 태현(台鉉)⁸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며칠 뒤 상(上)께서 강석(講席)⁹⁰에 납시자, 특진관(特進官) 송언신(宋言愼)이 아뢰기를, “신묘년(1591)에 정철이 강계(江界)로 귀양 갔을 때 지은 시에 ‘생애는 설한령(薛罕嶺)이요, 마음속 일은 필운산(弼雲山)이라.’⁹¹는 구절이 있습니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號)입니다.”라고 하였다. 좌상(左相) 김명원이 말하였다. “정철이 평소 이항복을 좋아하였으므로 이러한 시를 지은 것입니다. 이항복은 평생 한 이랑의 집도 없이 부인의 아버지인 권율(權慄)⁹²의 집에 데릴사위[贅居]로 살았는데, 그 집이 필운산(弼雲山) 뒤에 있었으므로 아마도 그것으로 호를 삼은 듯합니다. 이항복은 정철과 나이와 지위가 현격히 차이 나고 평소 정분(情分)이 없었습니다. 신(臣)은 정철과 어릴 때부터 서로 왕래하며 사귀었으니, 만약 정철과 교유한 것을 죄로 삼는다면 신이 진실로 마땅히 먼저 법에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송언신이 얼굴빛이 풀이 죽어 물러갔다.【《이문충공연보(李文忠公年譜)》에서 인용】
주석:
85. 인홍(仁弘): 이이첨(李爾瞻)의 호. 광해군 때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권세를 누렸다. 박이검은 이이첨 계열의 인물로 보인다.
86.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문충(文忠)은 그의 시호이다.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서인(西人)의 영수였다. 1591년(선조 24) 세자 책봉 문제(건저의 사건)로 파직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87. 정철(鄭澈, 1536
88. 복심(腹心): 마음속 깊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 심복(心腹).
89. 태현(台鉉): 정승의 별칭. 태(台)는 삼태성(三台星)에서 유래하여 삼공(三公), 즉 정승을 의미한다.
90. 강석(講席): 경연(經筵) 자리.
91. 생애설한령 심사필운산(生涯薛罕嶺 心事弼雲山): 자신의 신세는 멀리 변방인 설한령(강계 부근의 고개)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필운산(이항복의 거처)에 가 있다는 뜻. 이항복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를 표현한 구절이다.
92. 권율(權慄, 1537~1599):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끌었다. 이항복은 그의 사위이다.
원문:
公天資豪爽, 宅心平坦, 能以寬弘濟物。 自幼稚⁹³時, 已有成人局度, 雖家人至親, 未嘗見疾言遽色。 內無防畛, 外絶修飾, 凡世所謂毁譽得失、榮辱禍福, 一切付之度外。 早踐華要, 聲譽藹蔚, 不事交游, 怡然自守。 中年以來, 放跡州鎭, 數爲後輩所籍躪, 旁觀者亦爲之嗟惋, 而公了不置喜慍於其間。 平生口不言人過失, 亦不欲與人爭辨。 至於臨事應變, 沛然有餘, 察能督奸, 人不敢欺, 所至綽有聲績。
번역문:
공(公)은 천품(天資)이 호탕하고 상쾌하며, 마음가짐[宅心]이 평탄하여 능히 너그럽고 넓은 마음[寬弘]으로 만물(사람)을 구제하였다. 어릴 때[幼稚]부터 이미 성인(成人)의 국량(局量)과 도량(度量)이 있었으며, 비록 집안사람이나 지극히 친한 이라도 일찍이 노여운 말[疾言]이나 급한 얼굴빛[遽色]을 보지 못하였다. 안으로는 막거나 경계함[防畛]이 없고 밖으로는 꾸밈[修飾]을 끊어, 무릇 세상에서 이르는 헐뜯음과 칭찬[毁譽], 얻음과 잃음[得失], 영화와 치욕[榮辱], 화와 복[禍福]을 일체 도외시(度外視)하였다. 일찍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華要]을 역임하여 명성[聲譽]이 무성하였으나, 교유(交游)를 일삼지 않고 온화하게 스스로를 지켰다. 중년 이후로 자취를 주(州)나 진(鎭) 등 외직에 두어 여러 차례 후배들에게 짓밟히는[籍躪] 바가 되어, 곁에서 보는 자들도 또한 이를 위해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였으나, 공은 그 사이에 기쁨이나 노여움을 전혀 두지 않았다. 평생 입으로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고, 또한 남과 더불어 다투거나 변론하려 하지 않았다. 일에 임하여 변화에 대응함에 있어서는 왕성하여 여유가 있었고, 능히 간악함을 살피고 감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여, 이르는 곳마다 여유롭게 명성과 공적[聲績]이 있었다.
주석:
93. [주-D002] 稚 : 저본(底本)에는 “아(雅)”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 및 《택당집(澤堂集)・영의정경림부원군김공시장(領議政慶林府院君金公諡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원문:
公自小官時, 居職甚恪, 及遭兵禍, 尤以盡悴自任。 凡朝會衙仕, 必早往暮罷, 至老不倦。 家世淸白, 素無臧獲、土田。 及公立朝四十年, 出入將相, 勳伐最盛, 然未嘗經紀生産。 性好儉素, 雖接貴客, 不過蔬魚數器, 居家飮食, 翛然如寒士。 惟篤於親戚故舊, 恤貧周急, 下逮微陋。 表叔安瀚年老孤獨, 奉養于家, 勅家人曰: “先妣兄弟, 只有此舅, 宜以事先妣者事之。” 其死葬也亦然。
번역문:
공은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직책을 수행함에 매우 삼가고 공경하였으며, 병화(兵禍)⁹⁴를 만나서는 더욱 심력을 다함[盡悴]을 자임(自任)하였다. 무릇 조회(朝會)나 아문(衙門)에서의 근무[衙仕]에 반드시 일찍 가고 늦게 파하였으며, 늙어서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안 대대로 청백(淸白)하여 평소 노비[臧獲]⁹⁵나 토지[土田]가 없었다. 공이 조정에 선 지 40년에 장수와 재상[將相]의 지위를 드나들고 공훈(勳伐)이 가장 성대하였으나, 일찍이 생산(生産)을 경영(經紀)하지 않았다. 성품이 검소(儉素)함을 좋아하여 비록 귀한 손님을 접대하더라도 채소와 생선 두어 그릇에 지나지 않았고, 집에 있을 때의 음식은 쓸쓸하기[翛然]가 가난한 선비[寒士]와 같았다. 오직 친척(親戚)과 옛 친구[故舊]에게 돈독하여 가난한 이를 구휼하고 위급한 이를 도와줌이 미천하고 비루한 이에게까지 미쳤다. 표숙(表叔)⁹⁶ 안한(安瀚)이 늙고 외롭자 집에서 봉양하며, 집안사람들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선비(先妣)⁹⁷의 형제로는 다만 이 외삼촌이 계실 뿐이니, 마땅히 돌아가신 어머니를 섬기던 것처럼 그를 섬겨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가 죽어 장사 지내는 것 또한 그렇게 하였다.
주석:
94. 병화(兵禍): 임진왜란을 가리킨다.
95. 장획(臧獲): 남자 종(臧)과 여자 종(獲)을 아울러 이르는 말. 노비를 통칭한다.
96. 표숙(表叔): 외숙(外叔). 어머니의 남자 형제.
97. 선비(先妣): 돌아가신 어머니.
원문:
文詞贍富, 省庭制策, 士子傳誦。 在臺閣, 一時章箚多出手, 儕流莫及。 然公早習兵書, 頗事弓馬, 不務雕篆之技。 時或感遇記事, 如亂後入京之作, 至今傳詠, 亦可見其忠義之志矣。【竝行狀。】
번역문:
문사(文詞)가 풍부하여 성정(省庭)⁹⁸에서의 제책(制策)⁹⁹은 선비들이 전하며 암송하였다. 대각(臺閣)¹⁰⁰에 있을 때 한 시대의 장(章)¹⁰¹과 차(箚)¹⁰²가 많이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동료[儕流]들이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은 일찍이 병서(兵書)를 익히고 자못 궁마(弓馬)¹⁰³에 힘써, 글자를 새기고 꾸미는 기예[雕篆之技]¹⁰⁴에는 힘쓰지 않았다. 때때로 감회가 있어 일을 기록한 것으로 난리 후에 서울에 들어와 지은 작품 같은 것은 지금까지 전하여 읊어지니, 또한 그 충의(忠義)의 뜻을 볼 수 있다.【이상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98. 성정(省庭): 문하성(門下省)의 뜰. 또는 관청의 뜰. 여기서는 조정이나 과거 시험장 등을 의미할 수 있다.
99. 제책(制策): 임금이 과거 시험에서 내리는 책문(策問) 또는 그에 대한 답안. 뛰어난 문장력을 요구했다.
100. 대각(臺閣): 대성(臺省)과 관각(館閣)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 조정의 중요 기관을 통칭한다.
101. 장(章):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상소(上疏)와 비슷하다.
102. 차(箚): 차자(箚子). 상소보다 격식이 간략한 형태로, 주로 어떤 일에 대해 아뢰거나 자신의 의견을 진술할 때 썼다.
103. 궁마(弓馬): 활쏘기와 말타기. 무예(武藝)를 의미한다.
104. 도전지기(雕篆之技): 글자를 새기거나(雕) 전서(篆書)를 쓰는(篆) 기예.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기교를 비유한다. 김명원이 문장력은 뛰어났으나, 문예 자체보다는 실용적인 학문(병학)이나 무예에 더 관심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원문:
少受業於退陶門下, 學《易》頗詳敏, 先生嘉之, 許以大器, 貽書勸學問。 旣以詞華, 名擅場屋, 釋褐卽選玉堂, 八年經幄, 恩遇日渥。 自巡按還, 委公邊事, 知其有將相才也。 北憂虜則公北, 南急倭則公南。 衡人物, 掌邦政, 非公不可, 則公入判兩銓; 宣王化, 鎭邊民, 非公不可, 則公出秉閫鉞。 國家以公輕重者殆四十年。 及其忠勞著於中外, 望實孚於朝野, 則金甌之卜, 乃出於特簡, 此尤異數也。【李月沙廷龜撰神道碑。】
번역문:
젊어서 퇴도(退陶)¹⁰⁵ 문하(門下)에서 학업을 받아 《주역(易)》을 배움에 자못 상세하고 민첩하니, 선생께서 가상히 여겨 큰 그릇[大器]으로 인정하시고 글을 보내 학문(學問)을 권하셨다. 이미 문장의 화려함[詞華]으로 과거 시험장[場屋]에서 명성을 떨쳤고, 벼슬길에 오르자[釋褐]¹⁰⁶ 즉시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8년간 경악(經幄)¹⁰⁷에 있었으니, 임금의 은혜와 대우[恩遇]가 날로 두터웠다. 순안어사(巡按御史)¹⁰⁸로 다녀온 뒤로는 공에게 변방의 일을 맡기시니, 그에게 장수와 재상의 재능[將相才]이 있음을 아신 것이다. 북쪽으로 오랑캐를 걱정하면 공이 북쪽으로 갔고, 남쪽으로 왜적을 염려하면 공이 남쪽으로 갔다. 인물을 저울질하고[衡人物]¹⁰⁹ 나라의 정사[邦政]를 관장함에 공이 아니면 불가하면 공이 들어가 양전(兩銓)¹¹⁰을 관장하였고, 임금의 교화[王化]를 펴고 변방 백성을 안정시킴에 공이 아니면 불가하면 공이 나가 군권[閫鉞]¹¹¹을 잡았다. 국가가 공을 경중(輕重)으로 여긴 것이 거의 40년이었다. 그 충성(忠)과 노고(勞)가 안팎[中外]에 드러나고 명망(望)과 실력(實)이 조야(朝野)에 미더움을 얻자, 금구(金甌)의 복상(卜相)¹¹²이 마침내 특별한 간택[特簡]에서 나왔으니, 이는 더욱 특별한 대우[異數]였다.【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신도비(神道碑)에서 인용】
주석:
105. 퇴도(退陶): 퇴계 이황(李滉)의 호.
106. 석갈(釋褐): 갈옷(褐衣, 평민의 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107. 경악(經幄): 경연(經筵)과 시강(侍講)을 아울러 이르는 말.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
108. 순안어사(巡按御史): 어사의 한 종류. 지방을 순찰하며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명원은 지평 시절 함경도 순안어사로 파견되었다.
109. 형인물(衡人物): 인물을 저울질함. 인재를 평가하고 등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110. 양전(兩銓):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아울러 이르는 말. 문관과 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핵심 부서였다. 판서(判書) 직을 맡았음을 의미한다.
111. 곤월(閫鉞): 문지방(閫)과 큰 도끼(鉞). 장수의 지휘권을 상징한다. 군사 지휘권을 의미한다.
112. 금구지복(金甌之卜): 금 항아리처럼 완전무결한 나라의 정승을 뽑는 복상(卜相). 김명원이 영의정 후보로 추천된 것을 의미한다. 앞의 기록에 따르면 김명원은 최종적으로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원문:
壬寅十二月丁酉, 左議政金命元卒。 史臣曰: 命元性善良, 與物無違, 知與不知, 無不悅其爲人。 少壯登朝, 以將才顯, 其所踐歷, 武職居多。 壬辰之亂, 身任元師, 雖無成功, 上之駐義州也, 收合餘燼, 弊甲凋兵, 鎭于順安, 與李元翼協力, 以備平壤之賊。 及登台輔, 雖無建白, 而其心休休, 不欲害人, 風儀儁爽, 咸稱宰相之器。【遺事。】
번역문:
임인년(1602) 12월 정유일에 좌의정 김명원이 졸(卒)하였다. 사신(史臣)¹¹³은 논평한다. “김명원은 성품이 선량(善良)하여 남들과 어그러짐이 없었으니, 아는 이와 모르는 이를 막론하고 그 사람됨을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젊은 나이에 조정에 올라 장수의 재능[將才]으로 드러났으며, 그가 역임한 바는 무관직(武官職)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몸소 원수(元帥)를 맡아 비록 성공은 없었으나, 상(上)께서 의주(義州)에 주둔하실 때 남은 무리[餘燼]를 수습하고 해진 갑옷과 지친 병사[弊甲凋兵]들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진을 쳐서 이원익(李元翼)과 협력하여 평양의 적에 대비하였다. 태보(台輔)¹¹⁴에 오르자, 비록 건의하여 아뢴 것[建白]은 없었으나 그 마음이 너그럽고[休休]¹¹⁵ 남을 해치려 하지 않았으며, 풍채와 거동[風儀]이 뛰어나고 시원하여[儁爽] 모두 재상(宰相)의 그릇이라고 칭찬하였다.”【《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113. 사신(史臣):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 주로 사관(史官)을 가리킨다. 실록(實錄) 등 역사 기록에 첨부된 논평을 의미한다.
114. 태보(台輔): 정승, 재상.
115. 휴휴(休休): 마음이 너그럽고 여유 있는 모양.
이제신(李濟臣)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濟臣
字夢應, 全義人, 號淸江。 嘉靖丙申生。 戊午, 中¹生員。 明宗十九年甲子登第。 薦入翰苑, 歷正言、持平、蔚山、晉州、淸州、江界。 壬午, 拜北兵使。 癸未, 謫麟山鎭, 卒於配所, 年四十八。
번역문:
이제신(李濟臣)
자는 몽응(夢應)이고,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호는 청강(淸江)이다. 가정(嘉靖)² 병신년(1536)에 태어났다. 무오년(1558)에 생원시(生員試)³에 합격하였다. 명종(明宗) 19년 갑자년(1564)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추천받아 한원(翰苑)⁴에 들어가 정언(正言)⁵, 지평(持平)⁶을 거쳐 울산(蔚山), 진주(晉州), 청주(淸州), 강계(江界)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임오년(1582)에 북병사(北兵使)⁷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에 인산진(麟山鎭)으로 귀양 가 배소(配所)⁸에서 졸(卒)하니, 나이 48세였다.
주석:
- [주-D001] 中 : 저본(底本)에는 “중(仲)”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선조조명신(宣祖朝名臣)》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중생원(中生員)’은 생원시에 합격했다는 의미이다.
- 가정(嘉靖):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 생원시(生員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의 하나. 합격자에게는 생원(生員) 칭호를 부여하고 성균관 입학 자격 및 대과(大科) 응시 자격을 주었다.
-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의 별칭. 임금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맡던 관청이다.
-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임금에게 간언(諫言)하는 일을 맡았다.
-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관리들의 비행을 감찰하는 일을 맡았다.
- 북병사(北兵使):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의 약칭. 함경북도의 군사 책임자이다.
- 배소(配所): 귀양살이하는 곳. 유배지(流配地).
원문:
始學文字, 便自嗜好, 不易以他弄。 七歲, 作句語, 往往驚人。 八歲, 大人在邊郡, 而王父見背, 則獨當喪, 入承諸內, 出應客, 辦治哀盡, 一如成人之爲。 十歲, 隨大人任于昌原也, 行遇水石稍淸致處, 輒卸馬吟賞。 及監司入府, 觀者甚盛, 獨不肯觀曰: “吾復不當如是耶?” 旣而益喜讀書, 不釋手, 大人顧懼其傷, 夜則爲不設燈火, 然不可禁。 曺南冥植一見異焉, 期以遠大。
번역문:
처음 글자를 배우자마자 바로 스스로 좋아하여 다른 놀이와 바꾸지 않았다. 7세에 시구(詩句)를 지어 때때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8세에 아버지(大人)⁹가 변방 고을에 계실 때 조부(王父)께서 돌아가시자(見背)¹⁰, 홀로 상(喪)을 주관하여 안으로는 집안의 여러 일을 받들고 밖으로는 손님을 응대하며, 슬픔을 다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한결같이 성인이 하는 것과 같았다. 10세에 아버지를 따라 창원(昌原)에 부임할 때, 길에서 물과 돌이 조금 맑고 운치 있는 곳을 만나면 번번이 말에서 내려 읊조리며 감상하였다. 감사(監司)¹¹가 부(府)에 들어올 때 구경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나, 홀로 구경하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라고 장차 이와 같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더욱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니, 아버지가 도리어 그의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여 밤에는 등불을 켜 주지 않았으나, 그래도 막을 수 없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¹²이 한 번 보고 비범하게 여겨 장차 크게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주석:
9. 대인(大人):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10. 왕부견배(王父見背): 조부(祖父)께서 돌아가심. ‘견배(見背)’는 윗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쓰는 완곡한 표현이다.
11. 감사(監司):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각 도(道)의 최고 행정관이다.
12. 조식(曺植, 1501-1572): 조선 중기의 저명한 학자. 호는 남명(南冥). 영남학파의 거두로 실천적인 학문을 강조하였다.
원문:
蔚山郡缺守, 朝議以郡多土豪難治, 須遣才望文臣, 三易而適公。 旣至, 立法號令, 期月而逋糴輸恐後, 帖然無敢爲橫。 民有兄弟爭財者, 公不問曲直, 諭以友愛之理, 言下卽已。 有欲專婦家財者, 不嫁婦妹年幾卌。 公繫治其人而資其婚, 析其産俾業焉。 公之剛明聞一道, 訟小大歸之, 庭亦無留。 例得紙布甚贏, 悉以付幹事吏, 方便取息, 以代徭賦, 民得二十年比兵前無一事。
번역문:
울산군(蔚山郡)의 수령 자리가 비자, 조정의 논의에서 군에 토호(土豪)¹³가 많아 다스리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재능과 명망 있는 문신(文臣)을 보내야 한다 하여 세 번을 바꾸다가 마침내 공에게 맡겨졌다. 부임하자 법과 명령을 세우니, 기월(期月)¹⁴ 만에 밀린 곡식(逋糴)¹⁵을 다투어 내고 조용해져(帖然)¹⁶ 감히 횡포를 부리는 자가 없었다. 백성 중에 형제가 재산을 다투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그들의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우애(友愛)의 도리로 타이르니,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그쳤다. 어떤 자가 아내 집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그 처제를 시집보내지 않아 나이가 마흔(卌)¹⁷에 가까웠다. 공이 그 사람을 가두어 다스리고는 그 처제의 혼인 비용을 대주고, 그 재산을 나누어 주어 생업을 삼게 하였다. 공의 강직하고 명철함이 도(道) 전체에 알려져, 소송이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공에게 돌아왔으나 관아에도 미결된 사건이 없었다. 관례로 받는 종이와 베가 매우 많이 남자, 모두 일을 주관하는 아전(幹事吏)¹⁸에게 맡겨 방편으로 이자를 취하여 요역(徭役)과 부세(賦稅)¹⁹를 대신하게 하니, 백성들이 20년간 병란 이전처럼 아무 일이 없었다.
주석:
13. 토호(土豪): 그 지방에 뿌리박고 세력을 부리는 호족.
14. 기월(期月): 만 한 달. 또는 일 년. 여기서는 문맥상 한 달을 의미하는 듯하다.
15. 포적(逋糴): 나라에 내야 할 곡식을 연체하거나 내지 않은 것. 또는 그 곡식.
16. 첩연(帖然): 명령에 잘 따라서 소란스럽지 않고 잠잠한 모양.
17. 삽(卌): 숫자 40.
18. 간사리(幹事吏): 어떤 일을 맡아 처리하는 아전.
19. 요역(徭役), 부세(賦稅): 백성에게 부과되던 노동력 동원과 세금.
원문:
晉州, 地大物衆, 豪橫爲患, 什倍於蔚。 公拜牧使, 旣下車, 首訪弊之在民者, 一釐革之。 糶糴之際, 右戶百計毋受, 使下戶獨困, 而粟積於陳。 公按佃簿以爲給, 無敢頡²⁰者。 削鄕社司馬所賸占田奴, 歸之書院, 且觸事折偃, 强者不饒。 鼠輩害公之爲, 與下吏謀, 竊公兵符, 以冀坐免。 事聞, 上命鞫尤者數人, 其黨散抵輦下, 大肆誣謗。 公卽疏陳不可在任狀, 踵而去官, 行奉批旨勉留, 已無奈矣。 歸則扁其居曰歸愚, 圖書、花竹以自娛, 不與人往還, 若將終身焉。
번역문:
진주(晉州)는 땅이 넓고 물산이 많았으나, 호족의 횡포가 폐단이 됨이 울산보다 열 배나 심했다. 공이 목사(牧使)²¹에 제수되어 부임하자마자(下車)²², 먼저 백성에게 폐단이 되는 것을 찾아 하나하나 개혁하였다. 환곡(糶糴)²³ 때에 부유한 집(右戶)²⁴들이 온갖 꾀로 받지 않으려 하여 가난한 집(下戶)²⁵들만 곤궁하게 되고 곡식은 창고에 쌓여 묵었는데, 공이 소작 장부(佃簿)²⁶를 살펴 지급하니 감히 맞서는(頡)²⁷ 자가 없었다. 향사(鄕社)²⁸와 사마소(司馬所)²⁹가 부당하게 점유한 전답과 노비를 삭감하여 서원(書院)³⁰에 돌려주었고, 또한 일마다 강자를 꺾어 굴복시키되 용서하지 않았다. 좀도둑 같은 무리(鼠輩)³¹들이 공의 처사를 해치려고 하급 아전과 모의하여 공의 병부(兵符)³²를 훔쳐서, 공을 죄에 연루시켜 파면시키려 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상(上)께서 주모자 몇 사람을 국문하도록 명하셨는데, 그 무리들이 흩어져 서울(輦下)³³로 가서 크게 무고하고 비방하였다. 공은 즉시 재임할 수 없다는 상황을 상소로 아뢰고, 뒤이어 관직을 떠나니, 가는 도중에 만류하는 비지(批旨)³⁴를 받았으나 이미 어쩔 수 없었다. 돌아와서는 그 거처에 편액을 걸어 귀우(歸愚)³⁵라 하고, 도서와 화초, 대나무로 스스로 즐기며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으니, 마치 종신토록 그럴 것처럼 하였다.
주석:
20. [주-D002] 州 : 저본에는 “천(川)”으로 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선조조고사본말・선조조명신》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21. 목사(牧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주요 부(府)나 목(牧)에 파견된 정3품 외관직.
22. 하차(下車): 수레에서 내린다는 뜻으로, 관리가 임지에 부임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3. 조적(糶糴): 곡식을 내다 팔고(糶) 사들임(糴). 여기서는 주로 관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거두어들이는 환곡(還穀) 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4. 우호(右戶): 부유한 집.
25. 하호(下戶): 가난한 집.
26. 전부(佃簿): 소작인 명부 또는 토지 대장.
27. 힐(頡): 새가 위아래로 날다. 여기서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맞서거나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28. 향사(鄕社): 지방의 유력자들이 모여 향촌의 일을 논의하던 기구 또는 그들이 차지한 토지.
29. 사마소(司馬所): 생원, 진사들이 모여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기구. 향교(鄕校) 부근에 설치되었다.
30. 서원(書院): 조선 시대에 선현(先賢)을 제사하고 지방의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사설 교육 기관.
31. 서배(鼠輩): 쥐새끼 같은 무리.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남을 모함하는 비열한 자들을 경멸하여 이르는 말.
32. 병부(兵符): 군대를 동원하거나 지휘하는 권한을 상징하는 신표(信標).
33. 연하(輦下): 임금이 타는 수레 아래라는 뜻으로, 임금이 있는 곳, 즉 수도(서울)를 가리킨다.
34. 비지(批旨): 임금이 신하의 상소 등에 대해 직접 처결하여 내리는 명령이나 의견.
35. 귀우(歸愚): '어리석음으로 돌아간다'는 뜻. 노자(老子) 사상이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歸去來) 사상과 연결되어, 세속적인 영달을 버리고 본연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원문:
庚辰, 以江界西塞重鎭而凋甚, 有用儒帥之議, 起廢公, 超通政階, 拜府使。 至則撫摩爬搔, 氓卒大蘇, 然後從事版築, 復自運石以倡用, 能不閱歲, 而城池、器械噲然改觀。 御史上其最, 賜表裏一襲, 寵嘉之。 沿江諸帥, 亦化於公, 不敢爲非, 曰: “得無公聞乎?” 壬午, 復用議者, 陞嘉善, 拜咸鏡北道兵馬節度使。 其卽政一如在西時, 而體統加大, 規設自殊矣。【竝簡易崔岦撰神道碑。】
번역문:
경진년(1580)에 강계(江界)가 서쪽 변방의 중요한 진(鎭)이면서 매우 쇠잔하였으므로, 문신 장수(儒帥)³⁶를 등용하자는 논의가 있어 폐척되었던 공을 기용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³⁷의 품계를 뛰어넘어 부사(府使)³⁸에 제수하였다. 부임하자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살펴 주니(撫摩爬搔)³⁹ 백성과 병졸들이 크게 소생하였고, 그런 후에야 성벽 쌓는 일(版築)⁴⁰에 종사하였는데, 다시 스스로 돌을 운반하며 솔선하니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성지(城池)⁴¹와 무기(器械)가 상쾌하게 면모를 일신하였다(噲然改觀)⁴². 어사(御史)⁴³가 그 실적을 최고로 보고하자, 옷 안팎 한 벌(表裏一襲)⁴⁴을 하사하며 총애하고 가상히 여기셨다. 압록강 변의 여러 장수들 또한 공에게 감화되어 감히 비행을 저지르지 못하며 말하기를, “공께서 아시게 되지 않을까?”라고 하였다. 임오년(1582)에 다시 추천한 사람의 의견을 따라 가선대부(嘉善大夫)⁴⁵로 승진시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북병사)⁴⁶에 제수하였다. 정사에 임하는 것은 서쪽(강계)에 있을 때와 한결같았으나, 체통(體統)⁴⁷은 더욱 커지고 계획하고 실행함이 스스로 남달랐다.【이상은 간이(簡易) 최립(崔岦)⁴⁸이 지은 신도비(神道碑)⁴⁹에서 인용】
주석:
36. 유수(儒帥): 학식 있는 문관 출신의 장수.
37.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 시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
38. 부사(府使): 조선 시대 도호부(都護府)에 파견된 종3품 외관직. 강계는 도호부였다.
39. 무마파소(撫摩爬搔): 어루만지고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뜻으로, 백성의 고통과 어려움을 잘 보살펴 주는 것을 비유한다.
40. 판축(版築): 성벽이나 담을 쌓을 때 판자 틀 안에 흙을 넣고 다져 쌓는 방식. 또는 그 일.
41. 성지(城池): 성곽(城郭)과 해자(垓字). 성(城)은 성벽, 지(池)는 성 주위에 판 못(해자)을 가리킨다.
42. 쾌연개관(噲然改觀): 모습이 상쾌하게 확 바뀌어 볼 만하게 됨.
43. 어사(御史):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관리의 잘잘못이나 백성의 사정을 살피던 임시 벼슬. 여기서는 관찰사(觀察使)나 순찰사(巡察使) 등을 가리킬 수 있다.
44. 표리일습(表裏一襲): 옷의 겉감과 안감 한 벌.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상 중 하나이다.
45.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
46.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선 시대 각 도의 군사력을 총괄하던 종2품 무관직. 병사(兵使)라고도 한다.
47. 체통(體統): 지위나 격식에 맞는 위엄이나 질서.
48. 최립(崔岦, 1539-1612):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호는 간이(簡易).
49.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
원문:
癸未春, 北虜尼湯介聯結隣部酋于乙其乃、栗甫里等, 乘我不虞, 猝寇慶源鎭陷之。 府使金璲敗走, 賊連陷阿山、安原等堡, 進圍鍾城。 公裒兵指授, 令鍾城府使申砬、富寧府使張義賢、鍾城判官元熹、麾下士申尙節・金遇秋・卞國幹・李宗仁・金俊民・權洪・柳重榮等, 或撇其隘, 或嘬其鋒, 或梏其穴, 以絼賊而掎之。 於是群帥着職, 遵公計畫, 無敢後者。 遂破賊, 逐之疆外, 仍進兵薄其巢。 砬、國幹等焚金得灘、安豆里、古中道、中島部落四百五十餘窟, 斬獲百餘級; 尙節、熹等焚麻田島, 斬獲五十餘級; 遇秋、義賢、宗仁、重榮、洪等焚尙加巖、于乙其車、汝邑浦島、于乙其乃、多通介洞八十餘窟, 斬獲亦數百級。 賊之資糧、器械盡, 而甌脫空矣。 無何, 氈毳革面, 款關請附, 不南牧者數十祀。【申象村欽撰墓誌。】
번역문:
계미년(1583) 봄, 북쪽 오랑캐 니탕개(尼湯介)⁵⁰가 이웃 부락 추장인 을기내(于乙其乃)⁵¹, 율포리(栗甫里)⁵² 등과 연합하여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不虞)⁵³ 틈을 타서 갑자기 경원진(慶源鎭)⁵⁴을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부사(府使) 김수(金璲)⁵⁵는 패주하였고, 적은 연이어 아산보(阿山堡), 안원보(安原堡)⁵⁶ 등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종성(鍾城)⁵⁷을 포위하였다. 공이 병사를 모아 지휘하며, 종성부사(鍾城府使) 신립(申砬)⁵⁸, 부령부사(富寧府使) 장의현(張義賢), 종성판관(鍾城判官) 원희(元熹), 휘하의 군관 신상절(申尙節)·김우추(金遇秋)·변국간(卞國幹)·이종인(李宗仁)·김준민(金俊民)·권홍(權洪)·유중영(柳重榮) 등에게 명하여, 혹은 적의 요충지를 치고(撇)⁵⁹, 혹은 그 예봉을 꺾고(嘬)⁶⁰, 혹은 그 소굴을 제압하여(梏)⁶¹ 적을 묶어 끌어당기게(絼…掎)⁶² 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직무에 나아가 공의 계획을 따르며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적을 격파하고 국경 밖으로 쫓아낸 뒤, 이어서 진격하여 그 소굴에 육박하였다. 신립, 변국간 등은 금득탄(金得灘), 안두리(安豆里), 고중도(古中道), 중도(中島)의 부락 450여 굴(窟)⁶³을 불태우고 100여 급(級)⁶⁴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신상절, 원희 등은 마전도(麻田島)를 불태우고 50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김우추, 장의현, 이종인, 유중영, 권홍 등은 상가암(尙加巖), 우을기차(于乙其車), 여읍포도(汝邑浦島), 우을기내(于乙其乃), 다통개동(多通介洞)의 80여 굴을 불태우고 베거나 사로잡은 것 또한 수백 급이었다. 적의 자량(資糧)과 기계(器械)가 모두 소진되고 소굴(甌脫)⁶⁵이 텅 비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오랑캐들이 복장을 바꾸고(氈毳革面)⁶⁶ 관문(關門)을 두드리며 귀순을 청하여(款關)⁶⁷, 수십 년(祀)⁶⁸간 남쪽으로 내려와 노략질하지 못하였다.【신상촌(申象村) 흠(欽)⁶⁹이 지은 묘지(墓誌)⁷⁰에서 인용】
주석:
50. 니탕개(尼湯介, ?-1588): 조선 선조 때 함경도 경원(慶源)·종성(鍾城)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여진족 추장.
51. 을기내(于乙其乃): 니탕개와 연합한 여진족 추장 중 한 명.
52. 율포리(栗甫里): 니탕개와 연합한 여진족 추장 중 한 명.
53. 불우(不虞): 미리 헤아리거나 대비하지 못함.
54. 경원진(慶源鎭): 함경북도 경원 지역에 설치된 군사 진영.
55. 김수(金璲, ?-1583): 조선 중기의 무신. 니탕개의 난 때 경원부사로 있다가 패전하고 처형되었다.
56. 아산보(阿山堡), 안원보(安原堡): 함경북도 경원 근처의 작은 성(보루).
57. 종성(鍾城): 함경북도 북단 두만강 연안에 있던 고을.
58. 신립(申砬, 1546-1592): 조선 중기의 명장. 니탕개의 난 때 종성부사로 공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하였다.
59. 별(撇): 비껴 치다, 물리치다. 여기서는 적의 요충지를 공격하여 제압함을 의미.
60. 취(嘬): 씹다, 물다. 여기서는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는 것을 의미.
61. 곡(梏): 수갑을 채우다, 속박하다. 여기서는 적의 근거지를 제압함을 의미.
62. 시(絼), 기(掎): 묶다, 끌어당기다. 적을 포위하거나 유인하여 제압하는 전술을 의미.
63. 굴(窟): 적의 소굴, 거처.
64. 급(級): 전쟁에서 적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수효를 세는 단위.
65. 구탈(甌脫): 오랑캐의 거주지, 소굴. 원래는 국경 밖에 설치한 망루나 토굴을 가리켰다.
66. 전취혁면(氈毳革面): 모직(氈毳) 옷을 입고 얼굴빛을 바꾼다는 뜻으로, 오랑캐가 복종의 표시로 복장을 바꾸고 귀순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67. 관관(款關): 성의나 정성을 다하여 관문을 두드림. 귀순이나 항복을 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68. 사(祀): 제사. 1년을 단위로 세는 말로도 쓰인다. 수십 년.
69. 신흠(申欽, 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호는 상촌(象촌), 현헌(玄軒) 등.
70.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등을 돌이나 도판 등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 기록.
원문:
命拿鞫北兵使李濟臣, 從兩司之啓也。 後四日, 濟臣捷報至。 上傳于備局曰: “李濟臣, 予固已料其如此, 而衆皆非之, 予亦不能自守。 今者旣已立功, 拿來未穩。 議啓。” 回啓曰: “都事已發, 中路還止, 亦爲顚倒。 請拿來後睿斷。” 上從之。 後十二日, 濟臣之報繼到。 備邊司啓曰: “卓頭部落, 首惡所居, 而金遇秋等乘勢進蕩, 斬獲居多, 全軍而還, 國恥可雪。 濟臣設策, 實合事宜。 請待都巡察使啓聞, 行賞。”【《日月錄》。】
번역문:
북병사(北兵使) 이제신(李濟臣)을 잡아다 국문(拿鞫)⁷¹하라고 명한 것은 양사(兩司)⁷²의 계청(啓請)을 따른 것이었다. 4일 뒤에 이제신의 승전 보고(捷報)⁷³가 도착하였다. 상(上)께서 비변사(備局)⁷⁴에 전교하시기를, “이제신은 내가 진실로 이미 그가 이럴 줄 헤아렸으나, 여러 사람이 모두 그를 비난하여 나 또한 스스로 (내 뜻을) 지키지(自守)⁷⁵ 못하였다. 이제 이미 공을 세웠으니, 잡아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未穩)⁷⁶. 의논하여 아뢰라.”라고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도사(都事)⁷⁷가 이미 출발하였으니, 중도에서 돌려보내 멈추게 하는 것도 또한 뒤죽박죽(顚倒)⁷⁸이 됩니다. 잡아온 후에 예단(睿斷)⁷⁹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이를 따랐다. 그 후 12일 뒤에 이제신의 보고가 연이어 도착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탁두(卓頭)⁸⁰ 부락은 수괴(首惡)가 거처하는 곳인데, 김우추(金遇秋) 등이 기세를 타고 나아가 소탕(蕩)⁸¹하여 참획(斬獲)⁸²한 것이 많고 군대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으니, 나라의 치욕을 씻을(雪)⁸³ 만합니다. 이제신이 계책을 세운 것이 실로 사의(事宜)⁸⁴에 합당합니다. 도순찰사(都巡察使)⁸⁵의 계문(啓聞)⁸⁶을 기다려 상(賞)을 시행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일월록(日月錄)》⁸⁷에서 인용】
주석:
71. 나국(拿鞫): 죄인을 잡아다가 심문함.
72.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조선 시대 대표적인 언론 및 감찰 기관.
73. 첩보(捷報): 싸움에서 이겼다는 보고. 승전 보고.
74. 비국(備局): 비변사(備邊司)의 약칭. 조선 중기 이후 국방 및 외교 등 주요 국정을 총괄하던 회의 기구.
75. 자수(自守): 스스로 자기의 지조나 신념을 지킴.
76. 미온(未穩): 온당하지 못함. 적절하지 못함.
77. 도사(都事): 조선 시대 여러 관청에 속했던 종5품 관직. 여기서는 죄인을 체포하러 가는 임무를 맡은 관리.
78. 전도(顚倒): 넘어짐, 거꾸로 됨. 일의 순서나 상태가 뒤죽박죽이 됨.
79. 예단(睿斷): 임금의 슬기로운 판단이나 결정.
80. 탁두(卓頭): 여진족 부락 이름. 니탕개의 근거지 중 하나였을 수 있다.
81. 탕(蕩): 쓸어버리다, 소탕하다.
82. 참획(斬獲): 적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음.
83. 설(雪): 눈. 여기서는 원한이나 치욕을 씻어 없앤다는 의미로 쓰였다.
84. 사의(事宜): 일의 마땅함. 사리에 합당함.
85. 도순찰사(都巡察使): 조선 시대 변방이나 특정 지역에 군사적 목적으로 파견되던 임시 관직.
86. 계문(啓聞): 임금에게 아뢰어 듣게 함.
87. 《일월록(日月錄)》: 조선 중기의 학자 황정욱(黃廷彧)이 선조 대의 정치, 사회, 외교 등에 관한 사실들을 기록한 책.
원문:
府使金璲、判官梁士毅以失守坐斬, 兵使李濟臣拿鞫流配。 濟臣之獲罪, 非但喪師也。 宣傳官持標信莅刑璲等, 適璲有追斬賊胡之功, 馳啓其由。 濟臣意朝廷凖罪末減, 援律文“讞覆應死者, 過三日乃刑”之文, 勸留宣傳官三日, 以待後命, 而終不至, 乃刑之。 兩司論濟臣擅止君命, 擬以死律, 上特減死。 然外議以爲原其情, 罪不相稱也。【《東閣雜記》。】
번역문:
부사(府使) 김수(金璲)와 판관(判官) 양사의(梁士毅)는 성(城)을 잃은(失守)⁸⁸ 죄로 참형(坐斬)⁸⁹에 처해졌고, 병사(兵使) 이제신(李濟臣)은 체포되어 국문(拿鞫)받고 유배(流配)⁹⁰되었다. 이제신이 죄를 얻은 것은 단지 군대를 잃었기(喪師)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전관(宣傳官)⁹¹이 표신(標信)⁹²을 가지고 김수 등의 형을 집행하러 임했는데(莅刑)⁹³, 마침 김수가 적 오랑캐를 추격하여 벤 공이 있었으므로 그 사유를 급히 아뢰었다(馳啓)⁹⁴. 이제신은 조정에서 죄를 참작하여 감형(凖罪末減)⁹⁵할 것이라 생각하고, 율문(律文)의 “사형에 해당하는 자를 심리하여 보고할 경우(讞覆)⁹⁶, 3일이 지난 후에야 형을 집행한다”는 조문을 끌어대어 선전관에게 3일간 머물도록 권하며 후명(後命)을 기다렸으나, 끝내 명이 이르지 않자 이에 형을 집행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이제신이 멋대로 군명(君命)을 중지시켰다(擅止君命)⁹⁷고 논하여 사형에 해당한다(擬以死律)⁹⁸고 하였으나, 상(上)께서 특별히 사형을 감해(特減死)⁹⁹ 주셨다. 그러나 외부의 여론(外議)¹⁰⁰은 그 정상(情狀)¹⁰¹을 참작하면 죄가 처벌에 상응하지 않는다(不相稱)¹⁰²고 여겼다.【《동각잡기(東閣雜記)》¹⁰³에서 인용】
주석:
88. 실수(失守): 지키던 곳을 적에게 빼앗김.
89. 좌참(坐斬): 죄에 연루되어 참형(목 베는 형벌)을 당함.
90. 유배(流配):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정해진 기간 동안 거주하게 하던 형벌.
91. 선전관(宣傳官): 조선 시대 왕명 전달, 의장(儀仗), 호위 등을 담당하던 무관직.
92. 표신(標信): 명령이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던 신표(信標). 여기서는 사형 집행 명령을 증명하는 물건일 수 있다.
93. 이형(莅刑): 형벌 집행 장소에 임함. 형을 집행함.
94. 치계(馳啓): 말을 달려가서 임금에게 아룀. 긴급한 보고를 의미한다.
95. 준죄말감(凖罪末減): 죄를 헤아리고 참작하여 감형함.
96. 언복(讞覆): 사형과 같은 중죄에 대해 신중을 기하기 위해 다시 심리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던 절차.
97. 천지군명(擅止君命): 함부로 임금의 명령을 중지시킴. 이는 매우 중한 죄로 여겨졌다.
98. 의이사율(擬以死律): 죄를 헤아려 사형에 해당한다고 함.
99. 특감사(特減死): 특별히 사형을 감면해 줌.
100. 외의(外議): 조정 밖의 여론. 재야(在野)의 의견.
101. 정상(情狀): 범죄나 사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정과 상황.
102. 불상칭(不相稱): 서로 걸맞지 않음. 죄에 비해 처벌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움을 의미한다.
103.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이 편찬한 야사(野史) 모음집.
원문:
公狀貌魁傑, 器局俊整, 恬於勢利, 臨事不苟。 文章草隷, 時儕稱雄, 而尤長於行文。 性又剛果, 當官抗議, 未嘗挫抑於人, 人亦不敢干以私, 皆側目而避之。 至與親戚故舊, 私相燕語, 諄諄不倦, 或雜以調笑, 咸得其歡心。 性喜施與, 嘗爲兵部郞官, 騶直到門, 不入於室, 而先與窮族, 久久成例, 故親戚亦習以爲常。 或時催促曰: “期日已晩, 老爺何不分騶直耶?” 常爲晉州, 罷還居家, 杜門息交, 日以文籍自娛。 有勸公以交歡時望者, 公正色曰: “虛受人爵, 而實獲天譴, 孰爲利害?” 其人大慙。 持身淸謹, 擺脫家累, 位至宰列, 妻子常假貸於人。 然不爲皎厲之行, 以沽於世, 而世或有知之者。 壬午, 爲北道兵使, 臨行, 余作詩以戲之曰: “約束羆熊老黃卷, 推移文字作長城。” 蓋以羆熊自況, 而文字調公也。 公見詩, 呵詰曰: “你小儒何敢乃爾!” 遂極謔而別。 及拿下禁府, 時論勃鬱, 罪將不測, 親戚子弟皆潛泣隨行。 論者謂公曰: “必無生理。” 余於道次候之, 公握手莞爾而戲曰: “今日遂成小儒之先見也。” 又問曰: “聞讀《綱目》, 已到幾篇。” 因論讀史節目數語, 略無戚容。 頃之, 顧謂獄吏曰: “此非我久留地, 可速就囚。” 乃與親舊歡笑而別。 此可見其氣像也。【李白沙恒福撰遺事。】
번역문:
공은 용모가 뛰어나고(魁傑)¹⁰⁴ 기국(器局)¹⁰⁵이 준수하고 단정하였으며, 권세와 이익에 담담하고(恬) 일에 임하여 구차하지 않았다(不苟). 문장과 초서·예서(草隷)¹⁰⁶에 당대 동료들이 으뜸이라 칭송하였고, 특히 행문(行文)¹⁰⁷에 뛰어났다. 성품 또한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어(剛果), 관직에 있을 때 의론(議論)을 내세우며 일찍이 남에게 꺾이거나 억눌리지(挫抑)¹⁰⁸ 않았으므로, 사람들도 감히 사사로이 간섭하지 못하고 모두 곁눈질하며(側目)¹⁰⁹ 그를 피하였다. 그러나 친척이나 옛 친구들과 사사로이 편안히 이야기할 때는 자상하게 가르치며(諄諄)¹¹⁰ 게을리하지 않았고, 혹은 농담을 섞어 말하여 모두 그의 환심을 샀다. 성품이 베풀기(施與)¹¹¹를 좋아하여, 일찍이 병부(兵部) 낭관(郎官)¹¹²으로 있을 때 추직(騶直)¹¹³이 문 앞에 도착해도 집안으로 들이지 않고 먼저 가난한 친족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오래되어 관례가 되었으므로 친척들도 익숙하게 여겨 예사로 알았다. 어떤 때는 (친척이) 재촉하며 말하기를 “기일이 이미 늦었는데, 노야(老爺)¹¹⁴께서는 어찌 추직을 나누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일찍이 진주(晉州) 목사로 있다가 파직되어 돌아와 집에 머물 때는 문을 닫고 교류를 끊으며(杜門息交) 날마다 문적(文籍)¹¹⁵으로 스스로 즐겼다. 어떤 이가 공에게 당시 명망 있는 이들(時望)¹¹⁶과 교제하여 환심을 사라고 권하자, 공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헛되이 남의 벼슬(人爵)¹¹⁷을 받고 실로 하늘의 꾸짖음(天譴)¹¹⁸을 받는다면, 어느 것이 이롭고 해롭겠는가?” 하니, 그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몸가짐이 맑고 삼갔으며(淸謹) 집안의 누(累)를 벗어 던져,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어도 처자(妻子)는 항상 남에게서 돈을 빌려야(假貸)¹¹⁹ 했다. 그러나 세상에 명예를 구하기(沽)¹²⁰ 위해 일부러 깨끗하고 엄격한 행동(皎厲之行)¹²¹을 하지는 않았으나, 세상에 혹 이를 아는 자가 있었다. 임오년(1582)에 북도(北道) 병사(兵使)가 되어 떠나려 할 때, 내가 시를 지어 그를 놀리며 말하기를, “늙은 서책(黃卷, 문관)으로 비웅(羆熊, 무관)¹²²을 단속하고, 문자를 옮겨 만리장성(長城)¹²³을 삼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내가 비웅으로 자처하고 문자로 공을 조롱한 것이었다. 공이 시를 보고 꾸짖으며 묻기를 “너 소유(小儒)¹²⁴가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더니, 마침내 한바탕 농담을 하고 헤어졌다. 금부(禁府)¹²⁵에 잡혀갈 때 시론(時論)¹²⁶이 들끓어 죄가 장차 어찌 될지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不測)¹²⁷ 친척과 자제들이 모두 몰래 울며 따라갔다. 어떤 이는 공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살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길가(道次)¹²⁸에서 그를 기다리니, 공이 손을 잡고 빙그레 웃으며(莞爾)¹²⁹ 농담하기를 “오늘 마침내 소유(小儒)의 선견지명(先見)¹³⁰이 이루어졌구나.” 하고, 또 묻기를 “《강목(綱目)》¹³¹을 읽는다고 들었는데, 이미 몇 편까지 이르렀는가?” 하며, 이어서 역사책 읽는 절목(節目)¹³² 몇 마디를 논하는데 조금도 근심하는 기색(戚容)¹³³이 없었다. 잠시 후, 옥리(獄吏)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오래 머물 땅이 아니니, 속히 감옥으로 가자.” 하고는, 마침내 친구들과 웃으며 헤어졌다. 이것으로 그의 기상(氣像)¹³⁴을 볼 수 있다.【이백사(李白沙) 항복(恒福)¹³⁵이 지은 유사(遺事)¹³⁶에서 인용】
주석:
104. 괴걸(魁傑): 모습이나 풍채가 뛰어나게 크고 훌륭함.
105. 기국(器局): 사람의 재능과 도량, 국량.
106. 초례(草隷): 초서(草書)와 예서(隸書). 서예에 능했음을 의미한다.
107. 행문(行文): 산문(散文)을 쓰는 것. 또는 그 글.
108. 좌억(挫抑): 꺾이고 억눌림.
109. 측목(側目): 곁눈질함.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여 바로 보지 못함을 의미한다.
110. 순순(諄諄): 자상하고 간곡하게 타이르는 모양.
111. 시여(施與): 남에게 물건을 베풀어 줌.
112. 병부 낭관(兵部郎官): 병조(兵曹)의 정5품(낭중) 또는 정6품(정랑) 관직.
113. 추직(騶直): 조선 시대에 녹봉(祿俸)의 일부로 지급되던 옷감(베).
114. 노야(老爺): 나리. 하인이 주인을 높여 부르거나, 일반적으로 관리를 높여 부르는 말.
115. 문적(文籍): 글과 서적.
116. 시망(時望): 당대의 명망. 또는 명망 있는 사람.
117. 인작(人爵): 사람이 주는 벼슬. 맹자(孟子)는 하늘이 주는 천작(天爵, 仁義忠信 등)과 대비하여 설명했다.
118. 천견(天譴): 하늘의 꾸짖음. 천벌(天罰).
119. 가대(假貸): 돈이나 물건을 빌림. 칭대(稱貸)와 같은 말.
120. 고(沽): 팔다. 명예나 명성을 얻으려 하다. 고명(沽名).
121. 교려지행(皎厲之行): 유난히 깨끗하고 엄격하게 처신하는 행동. 남에게 보이기 위해 지나치게 결백한 척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122. 비웅(羆熊): 큰 곰. 용맹한 장수를 비유한다. 주(周) 문왕(文王)이 강태공(姜太公)을 얻을 때 꾸었던 꿈에 나온 데서 유래하여 현명한 신하를 얻을 징조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이제신이 문관 출신이지만 무관직(병사)을 맡은 것을 가리킨다.
123. 황권(黃卷), 장성(長城): 황권은 누렇게 변한 오래된 서책으로 문관(文治)을, 장성은 만리장성으로 무관(국방)을 상징한다. 이 시는 문관인 이제신이 북방의 국방을 맡게 된 것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24. 소유(小儒): 보잘것없는 선비.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125. 금부(禁府): 의금부(義禁府)의 약칭. 임금의 명을 받아 중죄인을 다스리던 관청.
126. 시론(時論): 당시 사람들의 여론이나 비판.
127. 불측(不測): 헤아릴 수 없음. 예측할 수 없음.
128. 도차(道次): 길가. 도중(道中).
129. 완이(莞爾): 빙그레 웃는 모양.
130. 선견(先見):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앎. 또는 그런 지혜. 이항복이 농담으로 지은 시의 내용(문관이 무관 일을 맡아 고생할 것)이 이제신이 실제로 어려움을 겪게 된 상황과 맞아떨어졌다는 뜻.
131. 《강목(綱目)》: 주희(朱熹)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역사 공부를 상징한다.
132. 절목(節目): 조목(條目). 중요한 내용이나 골자.
133. 척용(戚容): 근심하는 얼굴빛.
134. 기상(氣像): 사람의 타고난 기개와 모습.
135.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다. 이제신과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136. 유사(遺事): 죽은 사람이 남긴 행적이나 일화.
원문:
自少不俯仰隨俗, 不骩骳循人。 見人有冒竊虛聲誑世取利祿者、貪邪姦佞煬竈求媚悅者, 必顯攻面數乃已。 惟許以氣槪者, 吐肝肺相視, 急其急憂其憂, 不以炎寒隆替貳之也。 常敎子弟曰: “人有富貴利達之心, 不如不學也。 財物視之, 當如糞土。” 故生公家者, 雖童孺婦女之微, 無不貴義賤財, 儋石無儲, 而植志不撓。 公沒之後, 其訓猶不斬。【墓誌。】
번역문:
젊어서부터 세속에 따라 고개 숙이고 우러르지 않았으며(俯仰隨俗)¹³⁷, 남을 따라 비위를 맞추며 구부리지 않았다(骩骳循人)¹³⁸. 남이 헛된 명성을 도둑질하고(冒竊虛聲)¹³⁹ 세상을 속여(誑世) 이록(利祿)을 취하는 자나, 탐욕스럽고 사악하며 간사하고 아첨하며(貪邪姦佞) 권력자에게 아첨하여(煬竈)¹⁴⁰ 환심을 사려는 자를 보면, 반드시 드러내 공격하고 면전에서 꾸짖고서야(面數)¹⁴¹ 그만두었다. 오직 기개(氣槪)¹⁴²가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간과 폐를 토해내듯 서로 대하며(吐肝肺相視)¹⁴³, 그의 급한 일을 나의 급한 일로 여기고 그의 근심을 나의 근심으로 여겨, 세태의 성쇠(炎寒隆替)¹⁴⁴에 따라 두 마음(貳)¹⁴⁵을 품지 않았다. 항상 자제들을 가르치기를 “사람에게 부귀와 영달(利達)¹⁴⁶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배우지 않음만 못하다. 재물을 보기를 마땅히 똥과 흙(糞土)¹⁴⁷처럼 여겨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의 집안에서 자란 이는 비록 어린아이나 부녀자 같은 미천한 이라도 의(義)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한 섬 두 섬의 저축(儋石之儲)¹⁴⁸도 없었으나 뜻을 세워 흔들리지 않았다(不撓)¹⁴⁹. 공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가르침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不斬)¹⁵⁰.【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137. 부앙수속(俯仰隨俗): 세속의 눈치를 보며 따라감. 자신의 주관 없이 시류에 영합함.
138. 위미순인(骩骳循人): 몸을 굽혀 남의 비위를 맞춤. 아첨하며 남을 따름.
139. 모절허성(冒竊虛聲): 헛된 명성을 함부로 훔침. 실력 없이 명예를 도둑질함.
140. 양조(煬竈): 부뚜막 신에게 제사 지내 아첨함.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 나오는 고사로,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을 비유한다.
141. 면수(面數): 얼굴을 마주하고 잘못을 따지며 꾸짖음.
142. 기개(氣槪):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
143. 토간폐상시(吐肝肺相視): 간과 폐를 토해내듯 서로 봄.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고 진심으로 사귐을 비유한다.
144. 염한융체(炎寒隆替): 뜨거움과 차가움, 성함과 쇠함. 세상 인심이나 세력의 변화를 의미한다.
145. 이(貳): 두 마음. 변심하거나 배신함.
146. 이달(利達): 이익을 얻고 영달함. 출세하여 부귀를 누림.
147. 분토(糞土): 똥과 흙. 매우 더럽고 천하며 가치 없는 것을 비유한다.
148. 담석지저(儋石之儲): 한 섬(儋)이나 두 섬(石) 정도의 적은 곡식 저장량. 집안이 매우 가난함을 의미한다.
149. 불요(不撓):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음.
150. 불참(不斬): 베어지지 않음. 끊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음.
원문:
前兵使李濟臣歿于謫所。 經筵官李友直啓請還給職牒。 上問于大臣, 皆曰: “濟臣持身有淸操, 死後家無甔石之儲。 且變起倉卒, 乃能率殘兵焚蕩賊巢, 軍律嚴明, 士卒用命。 雖有差誤之罪, 合蒙寬宥也。” 上曰: “濟臣淸操出常云, 極爲可嘉。 人臣有淸節, 雖大罪, 猶當曲赦, 況其身已死者乎? 可還職牒。” 是冬, 又下敎曰: “李濟臣之貶, 非坐軍機, 只留標信三日耳。 當慶源之變, 能驅策諸將, 藩胡部落, 幾行誅滅, 藩胡至今殘破奄奄, 國威少伸。 當此廷臣欲效和議之日, 尤有以起予之思也。 況濟臣淸節可尙? 予欲追贈兵曹判書, 遣官致祭, 官其子一人, 其令大臣議之。” 大臣議皆如敎, 而獨盧守愼以爲贈職大過。 上又敎曰: “北變之作, 如癰疽積年內蓄, 一夕潰決, 大命隨之, 莫非奸臣弄權掊克之致, 而朝廷置邊事於度外, 此變之作晩矣。 濟臣如恇㥘者, 其能策羸卒數百, 盡誅胡落耶? 指濟臣退縮云者, 欲使爲元績耶? 今乃曰‘無前之變, 作於其身’, 不亦冤乎? 予謂朝廷失慶源, 濟臣復之。 此人討叛滅賊, 不世之勳也。 濟臣若在, 必能使君父紓憂。 此予中夜以起, 撫髀歎息, 欲加褒贈者也。 其令二品以上覆議。” 宰臣多以爲不可, 上猶遣禮官祭其墓。【《宣廟寶鑑》。】
번역문:
전(前) 병사(兵使) 이제신(李濟臣)이 적소(謫所)¹⁵¹에서 몰(歿)하였다. 경연관(經筵官)¹⁵² 이유직(李友直)¹⁵³이 계청(啓請)하여 직첩(職牒)¹⁵⁴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상(上)께서 대신(大臣)들에게 물으시니, 모두 아뢰기를 “제신(濟臣)은 몸가짐에 맑은 지조(淸操)¹⁵⁵가 있었고, 죽은 후에는 집에 한 섬 두 섬의 저축(甔石之儲)¹⁵⁶도 없었습니다. 또한 변란이 창졸간(倉卒)¹⁵⁷에 일어났으나, 능히 남은 병사를 이끌고 적의 소굴을 불태워 소탕(焚蕩)¹⁵⁸하였으며, 군율(軍律)이 엄하고 밝아 사졸(士卒)들이 명을 따랐습니다. 비록 잘못(差誤)의 죄가 있으나, 마땅히 너그러이 용서(寬宥)¹⁵⁹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신의 청렴한 지조가 보통을 넘어선다고 하니, 지극히 가상하다. 신하가 청렴한 절개(淸節)가 있으면 비록 큰 죄라도 오히려 마땅히 곡진(曲盡)히 용서해야 하는데, 하물며 그 몸이 이미 죽은 자이겠는가? 직첩(職牒)을 돌려주도록 하라.”라고 하셨다. 이해 겨울, 또 교서(敎書)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이제신의 유배는 군기(軍機)¹⁶⁰ 문제로 연좌된 것이 아니라, 단지 표신(標信)을 3일간 머물게 했을 뿐이다. 경원(慶源)의 변란 때 능히 여러 장수들을 몰아 부려 변방 오랑캐(藩胡)¹⁶¹ 부락을 거의 주멸(誅滅)¹⁶²하였으니, 변방 오랑캐가 지금까지 잔파(殘破)되어 숨이 끊어질 듯하여(奄奄)¹⁶³ 국위(國威)가 조금 펴졌다. 이때 조정 신하들이 화의(和議)¹⁶⁴를 본받으려 하는 때를 당하여, 더욱 나를 분발시키는 생각(起予)¹⁶⁵이 있다. 하물며 이제신의 청렴한 절개를 숭상(尙)¹⁶⁶할 만함에랴? 내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追贈)하고 관리를 보내 제사(致祭)를 지내주며, 그의 아들 한 사람에게 벼슬(官)을 주고자 하니, 대신에게 명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대신들의 의논은 모두 교서와 같았으나, 유독 노수신(盧守愼)¹⁶⁷만이 증직(贈職)이 너무 과하다고 여겼다. 상께서 또 교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북쪽 변란의 발생은 마치 종기(癰疽)¹⁶⁸가 여러 해 동안 안에 쌓였다가 하룻저녁에 터져(潰決) 큰 운명(大命)¹⁶⁹이 따르는 것과 같다. 이는 간신(奸臣)이 권력을 농단하고 가혹하게 수탈(掊克)¹⁷⁰한 소치가 아님이 없으며, 조정이 변방의 일을 도외시(度外)¹⁷¹하였으니, 이 변란의 발생이 늦었던 것이다. 이제신이 만약 겁내는 자(恇㥘者)¹⁷²였다면, 어찌 능히 약한 병졸(羸卒)¹⁷³ 수백을 지휘하여 오랑캐 부락(胡落)을 다 죽일 수 있었겠는가? 이제신을 가리켜 퇴축(退縮)했다고 말하는 자는 원균(元績)¹⁷⁴으로 만들고자 하는가? 이제 와서 ‘전례 없는 변란이 그에게서 일어났다’고 말하니, 또한 원통하지 않은가? 내가 이르기를, 조정이 경원을 잃었으나 이제신이 회복(復之)¹⁷⁵하였다. 이 사람은 반역을 토벌하고 적을 멸했으니(討叛滅賊), 세상에 드문 공훈(不世之勳)¹⁷⁶이다. 이제신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임금(君父)의 근심을 덜어줄(紓憂)¹⁷⁷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한밤중에 일어나 넓적다리를 치며(撫髀)¹⁷⁸ 탄식하고 포증(褒贈)¹⁷⁹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2품 이상에게 명하여 다시 의논(覆議)¹⁸⁰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재신(宰臣)¹⁸¹들이 대부분 불가하다고 여겼으나, 상께서는 그래도 예관(禮官)¹⁸²을 보내 그의 묘에 제사 지내게 하셨다.【《선묘보감(宣廟寶鑑)》¹⁸³에서 인용】
주석:
151. 적소(謫所): 유배지.
152. 경연관(經筵官):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던 일)에 참여하는 관리.
153. 이유직(李友直): 선조 때의 문신.
154. 직첩(職牒): 관직 임명장. 죄를 지어 면직될 때 회수되기도 한다.
155. 청조(淸操): 맑고 깨끗한 지조.
156. 담석지저(甔石之儲): 주석 148 참조. 집안이 매우 가난함.
157. 창졸(倉卒): 미처 손쓸 사이 없이 갑작스러움.
158. 분탕(焚蕩): 불태워 소탕함.
159. 관유(寬宥): 너그럽게 용서함.
160. 군기(軍機): 군사에 관한 기밀. 또는 군사 행동의 기회. 여기서는 군사 작전상의 중대한 과실이나 기밀 누설 등을 의미할 수 있다.
161. 번호(藩胡): 변방의 오랑캐.
162. 주멸(誅滅): 죄 있는 자를 베어 없앰.
163. 엄엄(奄奄): 숨이 끊어지려는 듯 미약한 모양. 세력이 크게 약화됨.
164. 화의(和議): 전쟁 중인 양측이 서로 화해하기로 의논함. 당시 조선 조정 내에 여진족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165. 기여(起予): 나를 분발시킴.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제자 자하(子夏)의 역량에 감탄하며 한 말에서 유래.
166. 상(尙): 숭상하다, 높이 평가하다.
167.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영의정을 지냈다.
168. 옹저(癰疽): 등이나 목 등에 나는 큰 부스럼. 곪아 터지면 위험할 수 있는 병이다. 오랫동안 쌓인 문제가 갑자기 터져 큰 위기를 초래하는 것을 비유한다.
169. 대명(大命): 큰 운명. 국가의 존망이나 중대한 사태를 의미할 수 있다.
170. 부극(掊克): 재물을 탐하여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함.
171. 도외(度外): 고려하거나 생각하는 범위의 밖. 도외시함.
172. 광구(恇㥘): 두려워하고 겁냄.
173. 이졸(羸卒): 약하고 지친 병졸.
174. 원적(元績): 원균(元均, 1540-1597)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임진왜란 때의 무장으로, 이순신(李舜臣)과 대립했으며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조선 수군을 거의 전멸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선조가 이제신을 변호하면서, 그를 비판하는 것은 마치 그를 (실패한 장수인) 원균처럼 만들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맥락으로 이해된다.
175. 복지(復之): 그것을 회복함.
176. 불세지훈(不世之勳): 세상에 드문 큰 공훈.
177. 서우(紓憂): 근심을 풀어줌.
178. 무비(撫髀): 넓적다리를 치다. 영웅이 공을 세울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세월이 덧없이 흐름을 한탄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179. 포증(褒贈): 공적을 기리어 사후에 관직이나 시호를 추증하는 것.
180. 복의(覆議):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해 다시 논의함.
181. 재신(宰臣): 재상(宰相)인 신하.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최고위 관료.
182. 예관(禮官): 예조(禮曹)의 관리. 또는 나라의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
183. 《선묘보감(宣廟寶鑑)》: 조선 선조(宣祖) 시대의 중요한 사실과 임금의 언행 등을 모아 편찬한 책. 후대 왕들의 귀감이 되도록 한 것이다.
원문:
邊協
字和中, 原州人。 嘉靖戊子生。 戊申, 登武科, 拜宣傳官。 歷慶尙左水使、全羅兵使、南・北兵使、平安兵使、兵曹參判、判尹、工判。 庚寅卒, 年六十三。
번역문:
변협(邊協)
자는 화중(和中)이고, 원주(原州) 사람이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에 태어났다. 무신년(1548)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병조참판(兵曹參判), 판윤(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경인년(1590)에 졸(卒)하니, 나이 63세였다.
원문:
公自幼遊戲不凡。 六歲, 走墮深井中, 攀井石不溺, 至曉, 見隣人汲水, 徐曰: “我是主家兒。 取大索來。” 一家驚奔, 公恬不爲懼。
번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노는 모습이 평범하지 않았다. 6세 때 달려가다가 깊은 우물 속에 빠졌으나, 우물 돌을 붙잡고 빠지지 않고 새벽이 되자 이웃 사람이 물 길으러 오는 것을 보고 천천히 말하기를, “나는 이 집 아이다. 큰 동아줄을 가져오너라.”라고 하였다. 온 집안이 놀라 달려왔으나, 공은 태연히 두려워하지 않았다.
원문:
乙卯, 海南縣監。 時倭寇猝至, 湖南大駭。 公獨保海南, 徐徐治守具不色動, 屢出奇以遌賊, 遂設伏邀擊, 一戰大捷, 殺獲無數, 國朝以來未嘗有也。 又擒天朝人在擄者奏解, 天子嘉奬, 賞銀錦以美之, 曰: “縣監邊協嬰孤城獨全。” 是時公年二十八, 提一障殘兵, 建不世之勳, 名聞天下, 書于國乘。
번역문:
을묘년(1555)에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있었다. 이때 왜구(倭寇)가 갑자기 쳐들어와 호남(湖南)이 크게 놀랐다. 공만이 홀로 해남을 보전하였는데, 천천히 수비 도구를 정비하며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기책(奇策)을 내어 적을 맞이하여 싸웠으며, 마침내 복병을 설치하여 맞아 싸워 한 번의 전투로 크게 승리하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무수하여 본조(國朝)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또한 포로로 잡혀 있던 천조(天朝, 명나라) 사람을 사로잡아 조정에 보고하여 보내니, 천자(天子, 명나라 황제)가 가상히 여겨 상으로 은(銀)과 비단(錦)을 주어 아름답게 여기며 말하기를, “현감 변협이 외로운 성을 안고 홀로 온전히 지켰다.”라고 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28세였는데, 하나의 진영(障)의 남은 병사를 이끌고 세상에 드문 공훈(不世之勳)을 세우니,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고 나라의 역사책(國乘)에 기록되었다.
원문:
守坡州時, 訪栗谷先生, 講論《周易》、《啓蒙》, 頗有獨得之妙, 以至天文、地理、數學、算學, 無不精詣。
번역문:
파주(坡州)를 다스릴 때 율곡(栗谷) 선생¹⁸⁴을 방문하여 《주역(周易)》과 《계몽(啓蒙)》¹⁸⁵을 강론하였는데, 자못 홀로 터득한 오묘함이 있었으며, 천문(天文), 지리(地理), 수학(數學)¹⁸⁶, 산학(算學)¹⁸⁷에 이르기까지 정통하고 조예가 깊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184. 율곡 선생(栗谷先生):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185. 《계몽(啓蒙)》: 주희(朱熹)가 《역경(易經)》의 점법(占法)을 해설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가리킨다.
186. 수학(數學): 여기서는 상수학(象數學), 즉 《주역》의 괘(卦)와 효(爻)의 형상(象)과 수(數)를 연구하는 학문을 의미할 수 있다.
187. 산학(算學): 산술(算術)과 관련된 학문.
원문:
爲濟州牧使, 妖僧普雨謫在州, 公因事杖殺之, 儒林快之。 或移書賀則曰: “國人誅之, 非我也。”
번역문: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요승(妖僧) 보우(普雨)¹⁸⁸가 제주에 유배 와 있었는데, 공이 어떤 일로 인하여 그를 장(杖)으로 쳐서 죽이니 유림(儒林)이 통쾌하게 여겼다. 어떤 이가 글을 보내 축하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그를 죽인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188. 보우(普雨, 1515-1565): 조선 명종 때의 승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불교 중흥을 꾀했으나, 문정왕후 사후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에게 장살(杖殺)당했다.
원문:
初按西閫, 巡邊上十餘郡, 一過目, 盡知山川、道路形勢, 按舊圖指示, 一水一石, 瞭瞭不差。 嘗閱軍簿, 一覽盡記其名, 人以爲神。
번역문:
처음 서쪽 변방(西閫, 평안도)을 안찰(按察)할 때, 10여 개 군을 순찰하며 한 번 훑어보고는 산천과 도로의 형세를 모두 알았으며, 옛 지도를 살펴 지시하는데 물 하나 돌 하나까지도 분명하여(瞭瞭) 틀림이 없었다. 일찍이 군적(軍簿)을 열람할 때 한 번 보고 그 이름을 모두 기억하니, 사람들이 신기(神奇)하다고 여겼다.
원문:
丁亥, 倭賊陷鹿島, 京師震動, 命公爲防禦使。 公入對曰: “此賊風至, 初無入寇計。 想今已退矣。” 未到界, 賊果遁。 筵中嘗白: “朝倭熟知三路形勢, 日本强甚, 馬島變詐, 他日之虞, 不可言也。”
번역문:
정해년(1587)에 왜적(倭賊)이 녹도(鹿島)¹⁸⁹를 함락시키자 서울(京師)이 진동하였는데, 공에게 명하여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공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이 적들은 바람결에 온 것이지, 처음부터 침략할 계획은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지금 이미 물러갔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경계에 이르기도 전에 적이 과연 달아났다. 연석(筵席)¹⁹⁰에서 일찍이 아뢰기를, “조선에 오는 왜인(朝倭)들이 삼로(三路)¹⁹¹의 형세를 잘 알고 있으며, 일본의 세력이 매우 강하고 대마도(馬島)는 변덕스럽고 속임수가 많으니, 훗날의 우려를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189. 녹도(鹿島):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속한 섬. 정해왜변(丁亥倭變) 때 왜구의 침입을 받아 만호(萬戶) 이대원(李大源) 등이 전사하였다.
190. 연중(筵中): 경연(經筵)이나 차대(次對) 등 임금과 신하가 마주 앉아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
191. 삼로(三路): 왜적이 조선으로 침입하는 세 길. 부산포(釜山浦), 염포(鹽浦, 울산), 제포(薺浦, 진해)의 삼포(三浦)를 가리키거나, 경상·전라·충청의 삼남(三南) 지방을 가리킬 수 있다.
원문:
甲申, 嘗觀天文, 推算太乙, 謂子侄曰: “不出十年, 國家且苦兵矣。” 後皆驗。
번역문:
갑신년(1584)에 일찍이 천문(天文)을 관측하고 태을(太乙)¹⁹²을 추산(推算)하여 자질(子侄)들에게 말하기를, “10년이 지나지 않아 국가가 장차 병란(兵亂)으로 고통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후에 모두 증험되었다.
주석:
192. 태을(太乙): 태을수(太乙數). 고대 중국의 술수(術數) 중 하나로, 천문과 역법을 이용하여 국가의 길흉화복이나 군사 행동의 성패 등을 예측하는 점법(占法)이다.
원문:
公資稟和易, 氣宇峻整, 善弓馬, 才勇絶人。 平居恂恂儒雅長者, 而遇事接物, 英采動人, 凜然不可犯。 涉獵文史, 然略知不肯竟, 獨慕古人奇節、偉行。 內行淳備, 孝友出天, 事親色養, 至老不畜私財, 祿俸未嘗自用。 居兩喪盡禮, 廬墓三年。 飭躬貞白, 雅好淸素, 屢典雄藩, 而家故立壁, 妻子不免稱貸。 常曰: “自先世世稱淸儉, 此乃傳家之寶。 食貧, 幸少安耳, 何敢經營忝家風乎?” 惟以書籍、琴、棋自娛。
번역문:
공은 자품(資稟)이 온화하고 화목하며 기개(氣宇)가 높고 단정하였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재주와 용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평소에는 온순하고 공손하며(恂恂) 학식과 품행이 바른(儒雅) 어른(長者) 같았으나, 일을 당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영특한 풍채(英采)가 사람을 감동시키며 위엄이 있어(凜然) 감히 범할 수 없었다. 문사(文史)를 섭렵(涉獵)하였으나 대략 알 뿐 끝까지 파고들려 하지는 않았고, 유독 옛사람들의 뛰어난 절개(奇節)와 위대한 행실(偉行)을 흠모하였다. 집안에서의 행실(內行)이 순박하고 갖추어졌으며, 효도와 우애(孝友)가 천성에서 나와, 어버이를 섬김에 늘 온화한 얼굴빛으로 봉양하였고(色養), 늙도록 사사로운 재산을 모으지 않아 녹봉(祿俸)을 일찍이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두 번의 상(喪)을 당해서는 예를 다하였고, 3년간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몸가짐을 삼가고 곧고 깨끗하였으며(飭躬貞白), 평소 맑고 소박함(淸素)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큰 번진(雄藩)¹⁹³을 맡았으나 집안은 예전처럼 벽만 서 있을(立壁)¹⁹⁴ 뿐이어서 처자(妻子)가 빚(稱貸)을 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선대(先世)로부터 대대로 청렴하고 검소하다(淸儉)고 일컬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보배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다행히 조금 편안하게 여길 뿐인데, 어찌 감히 살림을 경영하여 가풍(家風)을 더럽히겠는가?”라고 하였다. 오직 서책(書籍)과 거문고(琴), 바둑(棋)으로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주석:
193. 웅번(雄藩): 중요하고 큰 제후의 나라. 또는 중요한 지방 관청이나 그 책임자. 여기서는 중요한 지방의 병사(兵使)나 수사(水使) 등의 직책을 의미한다.
194. 입벽(立壁): 벽만 서 있다는 뜻으로,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비유한다. 사면입벽(四面立壁).
원문:
壬辰, 日本大勢兵渡海, 上遣申砬禦之。 行日, 臨軒召見, 問賊如何, 砬意輕之。 上曰: “邊協每言倭最難敵, 卿何易言也?” 旣出, 上亟稱之曰: “協誠良將, 予常不忘。 此人若在, 吾豈憂倭賊哉?” 嗟惜久之。 未旬日, 砬果敗死。 時公之歿僅三年, 朝野恨不能起公泉下。【竝月沙李廷龜撰碑。】
번역문:
임진년(1592)에 일본이 대규모 병력으로 바다를 건너오자, 상(上)께서 신립(申砬)을 보내 막게 하셨다. 떠나는 날, 임금이 행차하여(臨軒) 불러 보고 적이 어떠한지 물으니, 신립은 가볍게 여기는 듯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변협은 매번 왜적이 가장 대적하기 어렵다고 말하였는데, 경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라고 하셨다. 신립이 나간 후, 상께서 자주 그(변협)를 칭찬하며 말씀하시기를, “변협은 진실로 좋은 장수이니, 내가 항상 잊지 않는다. 이 사람이 만약 살아 있다면, 내 어찌 왜적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시며 오랫동안 탄식하며 애석해하셨다. 열흘이 되지 않아 신립이 과연 패하여 죽었다. 이때 공이 돌아가신 지 겨우 3년이었는데, 조야(朝野)에서는 공을 저승(泉下)에서 일으켜 세우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이상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¹⁹⁵가 지은 비(碑)에서 인용】
주석:
195.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호는 월사(月沙). 한문 사대가(四大家)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원문:
宣廟二十二年, 日本國使平義智來, 通信之議久未決。 西厓以太學士, 將撰國書, 請速定議, 勿致生釁。 知事邊協亦啓: “宜遣使報答, 且見彼中動靜以來, 非失計也。” 於是朝議始定, 乃遣黃允吉、金誠一、許筬等報聘, 仍探賊情。【《紀年通攷》。】
번역문:
선조(宣廟) 22년(1589)에 일본국 사신 평의지(平義智, 다이라 요시토모)¹⁹⁶가 오자, 통신(通信)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결정되지 못하였다. 서애(西厓)¹⁹⁷가 태학사(太學士)¹⁹⁸로서 장차 국서(國書)를 지으려 하니, 속히 의논을 정하여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勿致生釁)¹⁹⁹ 해달라고 청하였다. 지사(知事)²⁰⁰ 변협 또한 아뢰기를, “마땅히 사신을 보내 답하고 또한 저쪽의 동정을 살피고 오는 것이 계책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가 비로소 정해져, 마침내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허성(許筬) 등을 보내 답방(報聘)하고 이어서 적의 정세를 탐지하게 하였다.【《기년통고(紀年通攷)》²⁰¹에서 인용】
주석:
196. 평의지(平義智): 다이라 요시토모(橘康廣, ?~?).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가신(家臣).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명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197. 서애(西厓):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명재상, 학자.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힘썼다.
198. 태학사(太學士): 성균관(成均館, 태학)의 관직인 대사성(大司成) 등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또는 문형(文衡)을 맡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일 수도 있다.
199. 물치생흔(勿致生釁): 틈(釁)이 생기게 하지 말라. 분쟁이나 불화의 빌미를 만들지 말라는 뜻.
200. 지사(知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의 약칭일 수 있다. 변협은 당시 병조참판 또는 판윤 등을 역임하고 있었다.
201. 《기년통고(紀年通攷)》: 조선 후기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이 단군조선부터 인조 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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