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국조명신언행록

국조명신언행록 후집 권2

諺解 2025. 5. 19.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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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朴淳)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朴淳【文忠公。】
字和叔, 號思菴, 忠州人。 嘉靖癸未生。 十八, 陞上庠。 明宗八年癸丑, 魁庭試。 賜暇湖堂, 歷吏郞、校理、舍人、直提學、大司諫、大司憲、吏曹判書, 典文衡。 宣廟壬申拜相, 至領議政。 退居永平, 己丑卒, 年六十七。

번역문:
박순(朴淳)【문충공(文忠公)¹이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², 충주(忠州) 사람이다.³ 가정(嘉靖) 계미년(1523)⁴에 태어났다. 18세에 성균관(上庠)⁵에 들어갔다. 명종(明宗) 8년 계축년(1553)⁶에 정시(庭試)⁷에 장원(魁)하였다. 사가독서(賜暇湖堂)⁸를 하였고, 이조 정랑(吏郞)⁹, 교리(校理)¹⁰, 사인(舍人)¹¹, 직제학(直提學)¹², 대사간(大司諫)¹³, 대사헌(大司憲)¹⁴, 이조 판서(吏曹判書)¹⁵를 역임하였고, 문형(文衡)¹⁶을 관장하였다. 선묘(宣廟)¹⁷ 임신년(1572)에 재상(相)¹⁸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¹⁹에 이르렀다. 영평(永平)²⁰으로 물러나 거처하다가 기축년(1589)에 졸(卒)하니, 나이 67세였다.

주석:

  1. 문충공(文忠公): 박순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충(忠)은 충성스럽고 공정하게 임금을 섬김(忠純公正) 등을 의미한다.
  2. 사암(思菴): 박순의 호.
  3. 충주인(忠州人): 본관이 충주임을 나타낸다. 충주 박씨(忠州 朴氏).
  4. 가정(嘉靖) 계미년(1523): 가정은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1523년(중종 18).
  5. 상庠(상상): 상(庠)은 고대 중국의 학교 이름으로, 여기서는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킨다. ‘승(陞)’은 성균관 유생이 됨을 의미한다.
  6. 명종(明宗) 8년 계축년(1553): 1553년. 명종은 조선 제13대 왕(재위 1545~1567).
  7. 정시(庭試): 조선 시대 국왕이 직접 궁궐 뜰에서 실시하던 비정규 과거 시험.
  8. 사가독서(賜暇湖堂): 조선 시대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주로 호당(湖堂, 독서당)에서 이루어졌다.
  9. 이조 정랑(吏曹正郞):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요직 중 하나였다.
  10. 교리(校理): 홍문관(弘文館)의 정5품 관직.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등을 맡았다.
  11.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 여러 관청에 두었던 관직. 여기서는 의정부(議政府)의 정4품 관직인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2.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13.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14.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에 대한 감찰과 탄핵을 담당했다.
  15.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 인사를 총괄하는 요직이다.
  16. 문형(文衡):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이 겸임하며 문풍(文風)을 주도했다.
  17. 선묘(宣廟):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묘호(廟號).
  18. 재상(相): 정승(政丞).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최고위 관직을 통칭한다. ‘배상(拜相)’은 정승에 임명됨을 의미한다.
  19. 영의정(領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 재상직이다.
  20. 영평(永平): 현재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일동면, 이동면 일대에 해당하던 조선 시대의 현(縣). 박순은 이곳 백운계곡(白雲溪谷)에 은거하였다.

원문:
公生而穎異, 色夷氣淸。 六歲, 金夫人亡, 養於庶母, 與群兒戲, 爲揖讓周旋之容矣。 及知學文, 刃迎縷解, 不煩提諭, 月開日益。 年甫八歲, 開口詠物, 吐辭驚人。 隣有訓蒙者, 却不敎曰: “吾敢爲爾師哉?”

번역문: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나게 달랐고(穎異), 안색은 평온하며(夷) 기운은 맑았다(淸). 6세에 김부인(金夫人)¹⁶이 돌아가시자 서모(庶母)¹⁷에게서 양육되었는데, 뭇아이들과 놀 때 읍(揖)하고 사양하며 빙빙 도는(揖讓周旋)¹⁸ 모습을 하였다. 학문(學文)을 알게 되자 칼날을 맞이하듯(刃迎) 상세히 이해하였고(縷解)¹⁹, 번거롭게 이끌어주고 깨우쳐줄(提諭)²⁰ 필요 없이 나날이 발전하였다(月開日益). 나이 겨우 8세에 입을 열어 사물을 읊으니(詠物), 토해내는 말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웃에 훈몽(訓蒙)²¹하는 자가 있었는데, 도리어 가르치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석:
16. 김부인(金夫人): 박순의 생모.
17. 서모(庶母): 아버지의 첩(妾).
18. 읍양주선(揖讓周旋): 읍(揖)은 손을 마주 잡고 공경의 뜻을 표하는 인사법, 양(讓)은 사양함, 주선(周旋)은 빙빙 돌며 예법에 맞게 행동함을 의미한다. 어린 나이에도 예의범절에 맞는 행동거지를 보였음을 나타낸다.
19. 인영루해(刃迎縷解): 칼날을 맞이하듯(刃迎) 막힘없이 상세하게(縷) 이해하다(解). 어려운 문제도 쉽게 이해하는 총명함을 비유한다. ‘영인이해(迎刃而解)’와 같은 의미이다.
20. 제유(提諭): 손을 이끌어주고(提) 깨우쳐 줌(諭).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고 인도함을 의미한다.
21. 훈몽(訓蒙): 어린아이(蒙)를 가르침(訓).


원문:
丁未, 遭父喪, 公水漿不入口者三日。 過初朞猶餟粥, 盡三年廢書不敢讀。 廬墓之下, 毁瘠疑死, 杖而後起, 弔者大悅。 服闋, 入山讀書, 踰年而返。 癸丑八月, 首選庭試。 明廟親試一經, 公神姿爽朗, 舉止雍容, 辨釋奧義, 應對精敏, 群臣目屬, 即賜第第一。

번역문:
정미년(1547)²²에 부친상(父喪)을 당하여, 공은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지 않은 것이(水漿不入口)²³ 3일이었다. 첫 돌(初朞)²⁴이 지나도록 오히려 죽만 먹었으며(餟粥)²⁵, 3년상을 마칠 때까지 책을 폐하고 감히 읽지 않았다. 여묘살이(廬墓)²⁶를 하는 동안 몸이 상하여 야위어(毁瘠)²⁷ 죽을 것처럼 보이자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일어났으므로, 조문객들이 크게 염려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산에 들어가 독서하다가 해를 넘기고 돌아왔다. 계축년(1553) 8월에 정시(庭試)에 수석(首選)으로 뽑혔다. 명종(明廟)께서 친히 한 경서(一經)²⁸를 시험하시는데, 공의 정신과 모습(神姿)은 상쾌하고 밝았으며(爽朗) 행동거지(舉止)는 조용하고 점잖았고(雍容), 심오한 뜻(奧義)을 분별하여 해석하고 임금의 물음에 응대하는 것이 정밀하고 민첩하여(精敏), 여러 신하들이 주목하였고, 즉시 제1등(第一)의 등급(第)을 하사받았다.

주석:
22. 정미년(1547): 명종 2년.
23. 수장불입구(水漿不入口): 물(水)과 미음(漿)조차 입에 넣지 않음. 극진하게 부모상을 치르는 모습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24. 초기(初朞): 상례(喪禮)에서, 죽은 지 만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인 소상(小祥)을 의미한다.
25. 철죽(餟粥): 죽(粥)을 마시다(餟). 소상 이후에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고 죽으로 연명하며 슬픔을 이어갔음을 의미한다.
26. 여묘(廬墓): 부모의 묘소(墓) 옆에 여막(廬)을 짓고 살며 상을 치르는 것. 효행(孝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27. 훼척(毁瘠): 슬픔으로 몸(體)을 상하게 하고(毁) 야윔(瘠).
28. 일경(一經): 한 종류의 경서(經書). 과거 시험에서 경서의 이해를 묻는 과목을 의미한다.


원문:
在玉堂, 議林百齡諡。 時領議政尹元衡以同盟舊勳, 當路柄用, 乙巳餘孼恃之爲城社, 勢方仇視直言士。 公入館察同僚, 皆劫劫有內顧色。 蓋褒固可羞, 貶輒挑禍, 舉依違兩端, 故延其事。 公奮然議上曰: “恭昭。” 按諡法: 旣過能改曰恭, 容儀²⁹恭美曰昭, 貶之也。 元衡見卽暗噫, 倡言於朝曰: “彼百齡, 國之元勳³⁰, 諡無‘忠’字, 意在叵測。” 遂啓請鞫治公罪。 於是群兇附麗, 方怒目視公, 固已耽耽矣。 中外洶洶, 謂駭機朝夕當發, 賴安玹力救, 只得免官歸。 初, 公聞禍將發, 將待命金吾, 入室更衣, 坦坦而去, 家人不知有事。 及免官歸家, 幼女出迎, 公執手笑曰: “幾不得復見汝矣。” 翌日, 歸羅州。

번역문:
옥당(玉堂)³¹에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³²의 시호(諡號)를 의논하였다. 당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³³이 동맹(同盟)한 옛 공신(舊勳)으로서 요직(當路)에서 권력(柄)을 잡고 있었고,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남은 무리(餘孼)³⁴들이 그를 믿고 나라의 권력을 좌우하고 있었으므로(恃之爲城社)³⁵, 그 기세가 바른말 하는 선비(直言士)들을 바야흐로 원수처럼 보았다. 공이 홍문관에 들어가 동료들을 살피니, 모두 겁내며(劫劫) 뒤를 돌아보는 기색(內顧色)³⁶이 있었다. 대개 포상(褒)하면 진실로 수치스럽고, 폄하(貶)하면 문득 화(禍)를 도발하게 되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依違兩端) 태도를 취하여 그 일을 미루고 있었다. 공이 분연히 일어나 “공소(恭昭)”³⁷라고 의논하여 올렸다. 시법(諡法)³⁸을 살펴보니, ‘허물이 있었으나 능히 고쳤음(旣過能改)’을 공(恭)이라 하고, ‘용모와 위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움(恭美)’을 소(昭)라 하니, 이는 그를 폄하한 것이다. 윤원형이 보고 즉시 속으로 한숨을 쉬더니(暗噫)³⁹, 조정에서 먼저 말하기를 “저 임백령은 나라의 원훈(元勳)인데, 시호에 ‘충(忠)’ 자가 없는 것은 그 의도가 헤아리기 어렵다(叵測).”라고 하였다. 마침내 공의 죄를 국문(鞫問)하여 다스릴 것을 아뢰어 청하였다. 이에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빌붙어(附麗) 바야흐로 눈을 부릅뜨고 공을 엿보며 진실로 이미 탐탐(耽耽)⁴⁰하고 있었다. 안팎(中外)이 흉흉하여 놀라운 사태(駭機)가 조석간에 발생할 것이라고들 하였으나, 안현(安玹)⁴¹의 힘쓴 구원에 힘입어 다만 관직에서 면직되어 돌아가는 데 그쳤다. 처음에 공은 화가 장차 닥칠 것을 듣고 금오(金吾)⁴²에서 명을 기다리려 하여,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태연하게(坦坦) 떠나가니, 집안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면관되어 집에 돌아오자 어린 딸이 나와 맞이하므로, 공이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하기를 “거의 다시 너를 보지 못할 뻔하였구나.”라고 하였다. 이튿날 나주(羅州)⁴³로 돌아갔다.

주석:
29. [주-D001] 儀 : 저본(底本)에는 “의(議)”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백사집(白沙集)・행장(行狀)》, 《사암집(思菴集)・시장(諡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용모와 위의를 뜻하는 ‘용의(容儀)’가 문맥상 자연스럽다.
30. [주-D002] 國 : 저본에는 뒤에 “지(之)”가 더 있다. 《사암집・시장》 및 《백사집・행장》에 근거하여 삭제하였다.
31. 옥당(玉堂): 옥서(玉署)라고도 하며,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32. 임백령(林百齡, ?

1546): 조선 중기의 문신. 을사사화 때 윤원형 등 소윤(小尹) 세력에 가담하여 대윤(大尹) 세력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양군(崇陽君)에 봉해졌다.
33. 윤원형(尹元衡, 1503

1565): 조선 중기의 외척,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누이의 후광을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하였다.
34.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남은 무리(餘孼): 1545년(명종 즉위년) 윤원형 등 소윤 세력이 윤임(尹任) 등 대윤 세력을 제거한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여얼(餘孼)’은 사화 이후에도 남아 권세를 부리던 윤원형 일파를 가리킨다.
35. 시지위성사(恃之爲城社): 성(城)은 성곽, 사(社)는 사직(社稷)으로 국가를 의미한다. 즉, 윤원형을 믿고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말한다.
36. 내고색(內顧色): 안(內)을 돌아보는(顧) 기색(色). 자신의 안위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며 눈치를 보는 태도를 의미한다.
37. 공소(恭昭): 박순이 임백령에게 내리자고 제안한 시호. 아래 설명처럼 겉으로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임백령의 행적을 비판하는 의미가 내포된 시호였다.
38. 시법(諡法): 시호를 정하는 규정. 시호에 쓰이는 각 글자는 특정한 의미를 가지며, 긍정적인 의미(美諡)와 부정적인 의미(惡諡)가 있다. 박순은 시법의 규정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임백령을 비판한 것이다.
39. 암희(暗噫): 속으로(暗) 한숨 쉬거나 탄식함(噫).
40. 탐탐(耽耽): 눈을 내리뜨고 노려보는 모양. 기회를 엿보며 탐내는 모양.
41. 안현(安玹, 1501~1560): 조선 중기의 문신. 윤원형의 전횡에 반대하다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다. 박순을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42. 금오(金吾): 금오위(禁吾衛) 또는 의금부(義禁府)를 가리킬 수 있다. 죄인을 체포하고 심문하는 기관이다. 박순은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43. 나주(羅州): 박순은 면관된 후 잠시 고향인 충주가 아닌 나주로 내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원문:
乙丑, 以吏曹參議, 移長諫院, 慨然曰: “劾冀斬憲, 挽回世道, 吾責也, 死職耳。” 因訪大司憲李鐸曰: “吾欲正元衡罪, 須公贊成。” 鐸縮頸曰: “公欲赤老夫族也?” 公徐譬之, 鐸許之。 公喜甚馳還, 不暇解衣, 取燭草彈辭。 翌日, 兩司竝劾, 明廟不忍於母后, 遲回者月餘。 公爭之愈力, 竟得兪允。 元衡旣逐, 左相沈通源猶居政府, 士心頗鬱, 亦相繼而黜, 百姓歌舞於道, 鄕閭之挾書爲儒者稍益發舒。 始乃公言父子、君臣之道, 咸知順此則爲君子, 逆輒危辱不齒, 沛然有嚮道之志。 於是選六行之士, 復枉死之官, 凡舊政之蠹國病民者, 一皆洗滌, 公之力也。

번역문:
을축년(1565)⁴⁴에 이조 참의(吏曹參議)⁴⁵로 있다가 사간원(諫院)의 수장(長, 대사간)⁴⁶으로 옮겨지자,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간악한 자를 탄핵하고 법(憲)을 어지럽히는 자를 베어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니, 직책을 위해 죽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대사헌(大司憲) 이탁(李鐸)⁴⁷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내가 윤원형의 죄를 바로잡고자 하니, 모름지기 공(公)의 찬성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였다. 이탁이 목을 움츠리며(縮頸) 말하기를 “공은 이 늙은이의 집안을 멸족(赤族)시키려 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천천히 그를 깨우치자(譬之), 이탁이 허락하였다. 공이 매우 기뻐하며 급히 돌아와 옷을 벗을 겨를도 없이 촛불을 가져와 탄핵하는 글(彈辭)을 초(草)하였다. 이튿날 양사(兩司)⁴⁸가 나란히 탄핵하였으나, 명종(明廟)께서 모후(母后, 문정왕후)⁴⁹ 때문에 차마 처리하지 못하고 지체하기(遲回)를 한 달 남짓 하였다. 공이 더욱 힘써 다투니 마침내 윤허(兪允)를 얻었다. 윤원형이 이미 쫓겨났으나 좌상(左相) 심통원(沈通源)⁵⁰이 여전히 정부(政府)에 머물러 있어 선비들의 마음(士心)이 자못 답답하였는데, 또한 서로 이어 내쫓으니 백성들이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시골에서 책을 끼고 유학(儒學)을 하는 자들이 점차 더욱 마음을 펴게 되었다(發舒). 비로소 공이 부자(父子), 군신(君臣)의 도(道)를 말하니, 모두 이를 따르면 군자(君子)가 되고 거스르면 문득 위태롭고 치욕을 당하여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함(不齒)을 알아, 세차게 도(道)를 향하는 뜻(嚮道之志)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육행(六行)⁵¹의 선비를 선발하고, 억울하게 죽은 관리(枉死之官)⁵²를 신원(復)하며, 무릇 옛 정치(舊政) 중에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던(蠹國病民) 것들을 하나같이 모두 깨끗이 씻어내니, 이는 공의 힘이었다.

주석:
44. 을축년(1565): 명종 20년.
45.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 이조 판서, 참판 다음가는 벼슬이다.
46. 간원(諫院)의 수장(長):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을 의미한다.
47. 이탁(李鐸, 1509

1576): 조선 중기의 문신.
48.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과 감찰 기능을 담당하여 권신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49.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 1501

1565). 명종의 어머니이자 윤원형의 누이이다. 명종은 어머니와 외숙부 때문에 윤원형 처리에 소극적이었다. 문정왕후가 이 해(1565년) 4월에 사망하면서 윤원형은 정치적 보호막을 잃었다.
50. 심통원(沈通源, 1499~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윤원형과 함께 권력을 휘둘렀다.
51. 육행(六行): 여섯 가지의 올바른 행실. 효(孝), 우(友), 목(睦), 인(姻), 임(任), 휼(恤) 등을 가리키며, 유교 사회에서 중시되던 덕목이다.
52. 왕사지관(枉死之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관리. 주로 을사사화 때 윤원형 일파에 의해 희생된 대윤(大尹) 세력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명예를 되찾아 주는 조치를 취했다.


원문:
丁卯, 明廟禮陟, 卒哭之前, 公處外不敢居內。 及連遭懿聖、恭懿兩大妃喪, 持是禮不變。 中朝學士歐希稷奉詔而來。 公以禮判儐接, 姿容淸雅, 率禮無愆, 詔使心敬。 及見公詩, 驚曰: “宋人物, 唐詩調也。”【竝白沙撰行狀。】

번역문:
정묘년(1567)⁵³에 명종(明廟)께서 예법에 따라 승하하시자(禮陟)⁵⁴, 졸곡(卒哭)⁵⁵ 전에 공은 외조(外朝)에 머물며 감히 내전(內殿)에 거처하지 않았다. 이어서 의성왕후(懿聖王后)⁵⁶, 공의왕후(恭懿王后)⁵⁷ 양 대비(大妃)의 상(喪)을 연달아 당하였을 때도 이 예(禮)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중조(中朝)⁵⁸의 학사(學士) 구희직(歐希稷)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왔다. 공이 예조 판서(禮判)⁵⁹로서 빈객을 접대(儐接)하는데, 모습(姿容)이 맑고 아담하며(淸雅) 예법을 따름에 허물이 없으니(率禮無愆), 조서(詔書)를 가져온 사신(使)이 마음속으로 공경하였다. 공의 시(詩)를 보게 되자 놀라서 말하기를 “송(宋)나라 인물이요, 당(唐)나라 시풍(詩調)이로다.”라고 하였다.【이상은 백사(白沙)⁶⁰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53. 정묘년(1567): 명종 22년. 이 해 6월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였다.
54. 예척(禮陟): 예법(禮)에 따라 돌아가심(陟). 제왕(帝王)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55. 졸곡(卒哭): 상례(喪禮)에서, 삼우제(三虞祭) 후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던 곡(哭)을 마치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졸곡제(卒哭祭)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56. 의성왕후(懿聖王后):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를 추존한 이름. 1567년 7월(선조 즉위년)에 사망하여 대원군 부인에서 왕후로 추증되었다.
57. 공의왕후(恭懿王后): 명종의 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1532

1575). 명종 승하 후 왕대비가 되었다. 여기서는 의성왕후와 함께 대비로 칭해졌으나, 공의왕후는 1575년에 사망했으므로 이 시점(1567년경)에서는 인순왕후를 가리키는 것이 맞다. 의성왕후와 인순왕후의 상을 연달아 당했다는 의미일 수 있으나, 시기상 차이가 있다. 행장 기록의 착오일 가능성도 있다.
58. 중조(中朝): 중국 조정. 당시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59. 예판(禮判): 예조 판서(禮曹判書).
60.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

1618)의 호. 조선 중기의 명재상. 이항복이 박순의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지었다.


원문:
宣廟元年, 大提學朴淳啓曰: “大提學、提學雖同是館閣之職, 提學之任, 不如大提學之重也。 今臣爲主文, 而李滉爲提學, 高年碩儒反居小任, 而後進初學之士乃處重地, 請遞其任以授之。” 命議于大臣, 皆以淳言爲然, 於是相換。【《朝野記聞》。】

번역문:
선묘(宣廟) 원년(1568)⁶¹에 대제학(大提學) 박순이 아뢰었다. “대제학(大提學)과 제학(提學)⁶²이 비록 같은 관각(館閣)⁶³의 직책이나, 제학의 임무는 대제학의 중함만 못합니다. 지금 신(臣)이 주문(主文)⁶⁴이 되고 이황(李滉)⁶⁵이 제학이 되었으니, 연세 높은 석학(高年碩儒)이 도리어 작은 임무에 있고 후진(後進)으로 처음 배우는 선비(初學之士)가 중요한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하여 그분께 주도록 하소서.”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모두 박순의 말이 옳다고 여겨 마침내 서로 바꾸었다.【《조야기문(朝野記聞)》⁶⁶에서 인용】

주석:
61. 선묘(宣廟) 원년(1568): 선조 1년.
62. 대제학(大提學), 제학(提學): 모두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관직명. 대제학은 정2품으로 양관(兩館)의 최고 책임자이며, 제학은 종2품 또는 정3품으로 그 아래 직책이다.
63.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관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학문 연구, 경연(經筵) 담당, 왕의 자문 등의 역할을 했다.
64. 주문(主文): 문형(文衡)을 잡은 사람. 과거 시험의 시관(試官) 중 가장 높은 책임자, 즉 지공거(知貢擧)를 가리킨다. 대제학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65.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시대의 대학자. 호는 퇴계(退溪).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이다.
66. 《조야기문(朝野記聞)》: 조선 시대 조정(朝)과 민간(野)의 여러 가지 사실이나 소문 등을 듣고(聞) 기록(記)한 책. 작자 미상.


원문:
宣廟頻御經筵, 辨問甚詳, 講官學未博者, 多憚於入侍矣。 朴淳入侍後, 出語人曰: “瞻上玉容, 眞英明之主。” 卒哭前御經筵, 只臨文讀之, 無質問之語, 群臣頗疑闕略。 卒哭後則反復詳論, 出人意表, 是行倚廬不言之禮也。 群下不解上意耳。

번역문:
선묘(宣廟)께서 자주 경연(經筵)⁶⁷에 납시어(御) 자세히 따져 물으시니(辨問甚詳), 학문이 넓지 못한 강관(講官)⁶⁸들은 입시(入侍)하기를 꺼리는 자가 많았다. 박순이 입시한 뒤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상(上)의 옥용(玉容)⁶⁹을 우러러보니 참으로 영명(英明)하신 군주이시다.”라고 하였다. 졸곡(卒哭) 전에 경연에 납시어서는 다만 글에 임하여 읽기만 하시고 질문하는 말씀이 없으시니, 여러 신하들이 자못 빠뜨리고 소홀히(闕略) 여기시는가 의심하였다. 졸곡 후에는 반복하여 상세히 논하시니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났는데(出人意表), 이는 의려불언(倚廬不言)⁷⁰의 예를 행하신 것이었다. 아랫사람들이 상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주석:
67.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68. 강관(講官): 경연에서 경서를 강의하던 관원. 주로 홍문관 관원들이 맡았다.
69. 옥용(玉容): 임금의 얼굴을 높여 부르는 말.
70. 의려불언(倚廬不言): 상중(喪中)에 있는 임금이 여막(廬)에 기대어(倚) 지내며 정사(政事)에 대해 말하지(言) 않음(不). 부모상 중의 예법을 따른 것이다. 선조는 명종 승하 후 졸곡 전까지는 경연에서 질문 없이 듣기만 함으로써 이 예를 지켰던 것이다.


원문:
以朴淳爲吏曹判書。 淳淸介有志操, 爲善類宗主, 惓惓以接引名士爲務, 其於流俗, 視之蔑如也, 大臣頗不悅。 及拜銓長, 物情甚協, 而淳嫌其以新間舊, 累辭不拜命。 李珥見淳曰: “當今時勢, 當裒集淸流, 靜以鎭物, 務積誠意, 以感聖心。 銓衡之任, 不可委之於流俗。 公若固辭, 使小人操柄, 則是誤國也。” 會上不許淳辭, 淳乃供職。 先是, 金繼輝謂李珥曰: “當今朝臣可當大事者爲誰?” 珥曰: “朴和叔【淳字。】爲人表裏潔白, 憂⁷¹國以誠, 朝臣無比。 只恨精神氣魄稟得弱, 恐不能當大事; 白老【仁傑。】心事不凡, 志切愛⁷²君。 只恨氣麤學荒, 無以有爲; 若退溪先生則學精德尊, 上得主上之眷, 下負士林之重望, 可以有爲, 而終無擔當大事意思, 恐是自度才不足耳。” 繼輝曰: “奇明彦【大升。】何如人?” 珥曰: “明彦氣蓋一世, 亦奇士也。 但自許太過, 無溫謙受善底意思, 必不爲士林所歸, 安能當大事乎?” 繼輝曰: “畢竟時望焉歸?” 珥曰: “無已則歸於和叔。” 至是淳果被大用。【竝《石潭日記》。】

번역문:
박순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박순은 청렴하고 강직하며(淸介) 지조(志操)가 있었고, 선류(善類)⁷³의 종주(宗主)가 되어 명망 있는 선비(名士)들을 이끌어 등용하기(接引)를 간절히 힘썼으며(惓惓), 그 유속(流俗)⁷⁴에 대해서는 업신여기듯 하니(蔑如), 대신(大臣)들이 자못 불쾌하게 여겼다. 전장(銓長)⁷⁵에 제수되자 물정(物情)⁷⁶은 매우 부합하였으나, 박순은 새로 등용된 자가 옛사람을 이간질할까 염려하여 여러 차례 사양하고 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이(李珥)⁷⁷가 박순을 만나 말하였다. “지금 시세에는 마땅히 청류(淸流)⁷⁸를 널리 모으고 조용히 만물(백성)을 진정시키며, 힘써 성의(誠意)를 쌓아 성상(聖上)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전형(銓衡)의 임무를 유속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공께서 만약 굳이 사양하여 소인(小人)으로 하여금 권력(柄)을 잡게 한다면, 이는 나라를 그르치는 것입니다.” 마침 상(上)께서 박순의 사양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박순이 마침내 관직에 나아갔다. 이보다 앞서 김계휘(金繼輝)⁷⁹가 이이에게 말하였다. “지금 조정 신하 중에 큰일을 맡을 만한 자는 누구인가?” 이이가 말하였다. “박화숙(朴和叔)【박순의 자이다】은 사람됨이 표리(表裏)가 결백하고 성실하게 나라를 걱정하니(憂國以誠), 조정 신하 중에 견줄 이가 없다. 다만 정신과 기백(精神氣魄)을 약하게 타고난 것이 한스러워 큰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백로(白老)【백인걸(白仁傑)⁸⁰이다】는 마음 씀씀이가 비범하고 임금을 사랑하는(愛君) 뜻이 간절하다. 다만 기질이 거칠고(氣麤) 학문이 미흡하여(學荒) 유위(有爲)⁸¹하기는 어려울 것이 한스럽다. 만약 퇴계(退溪) 선생⁸²이라면 학문이 정밀하고 덕이 높으며, 위로는 주상(主上)의 총애(眷)를 받고 아래로는 사림(士林)의 두터운 신망(重望)을 받고 있어 유위(有爲)할 수 있겠으나, 끝내 큰일을 담당하려는 뜻이 없으니, 아마도 스스로 재주가 부족하다고 헤아리기 때문일 것이다.” 김계휘가 말하였다. “기명언(奇明彦)【기대승(奇大升)⁸³이다】은 어떤 사람인가?” 이이가 말하였다. “명언(明彦)은 기개가 세상을 덮을 만하니 또한 기이한 선비이다. 다만 스스로 자부함(自許)이 지나쳐 온화하고 겸손하게 선(善)을 받아들이려는 마음(溫謙受善底意思)이 없으니, 반드시 사림의 귀의하는 바가 되지 못할 터인데, 어찌 능히 큰일을 감당하겠는가?” 김계휘가 말하였다. “필경 시대의 신망(時望)은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이이가 말하였다. “부득이하다면 화숙(和叔)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때 이르러 박순이 과연 크게 등용되었다.【이상은 《석담일기(石潭日記)》⁸⁴에서 인용】

주석:
71. [주-D003] 愛 : 《대동야승(大東野乘)・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 2년 조에는 “우(憂)”로 되어 있다. ‘나라를 사랑하다’와 ‘나라를 걱정하다’ 모두 의미가 통하나, ‘우국(憂國)’이 더 일반적인 표현이다.
72. [주-D003] 愛 : 주석 71 참조.
73. 선류(善類): 착한 무리. 성리학적 도덕 규범을 따르는 사림(士林)을 가리킨다.
74. 유속(流俗): 세속적인 흐름에 따르는 무리. 원칙 없이 시류에 영합하는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75. 전장(銓長): 전형(銓衡)을 맡은 책임자.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조 판서를 의미한다.
76. 물정(物情): 세상 사람들의 여론이나 민심.
77. 이이(李珥, 1536

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 정치가. 호는 율곡(栗谷).
78. 청류(淸流): 맑은 흐름. 학문과 덕행이 높고 지조가 있는 사림(士林) 관료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79. 김계휘(金繼輝, 1526

1582): 조선 중기의 문신.
80. 백인걸(白仁傑, 1497

157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휴암(休庵).
81. 유위(有爲): 뛰어난 재능과 포부가 있어 큰일을 이룰 만함.
82. 퇴계(退溪) 선생: 이황(李滉, 1501

1570).
83.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호는 고봉(高峯).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84. 《석담일기(石潭日記)》: 이이(李珥)가 지은 일기 형식의 기록. 자신의 행적, 교유 관계, 시사(時事)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문:
壬申, 拜右議政。 新天子卽位, 公進賀朝京, 華人素聞公名, 沿道索題者甚衆。 故事, 外國進奏者, 由挾門入。 公爭曰: “陪臣出入, 旣聞命矣。 若表文則奏御至尊, 豈宜由挾門入?” 禮部不能難, 許入正門, 遂爲定式。

번역문:
임신년(1572)⁸⁵에 우의정(右議政)⁸⁶에 제수되었다. 새로운 천자(天子)⁸⁷가 즉위하자, 공이 하례(賀禮)를 위해 중국 조정(朝京)⁸⁸에 나아갔는데, 중국인(華人)들이 평소 공의 명성을 듣고 길을 따라가며 제명(題名)⁸⁹을 요구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고사(故事)⁹⁰에 외국에서 글을 올리는 자(進奏者)는 협문(挾門)⁹¹으로 들어갔다. 공이 다투어 말하기를 “배신(陪臣)⁹²의 출입은 이미 명을 들었습니다. 만약 표문(表文)이라면 지존(至尊)께 아뢰어 올리는 것인데, 어찌 마땅히 협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라고 하니, 예부(禮部)⁹³에서 어렵게 여기지 못하고 정문(正門)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여 마침내 정해진 규정(定式)이 되었다.

주석:
85. 임신년(1572): 선조 5년.
86.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재상이다.
87. 신천자(新天子): 새로 즉위한 중국 황제. 명(明)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를 가리킨다. 만력제는 1572년에 즉위하였다.
88. 조경(朝京): 중국의 수도(京)에 조회(朝)하러 감. 여기서는 명나라 수도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박순은 만력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진하사(進賀使)로 파견되었다.
89. 제명(題名): 시나 글을 지어 써 달라고 요구하는 것.
90. 고사(故事): 이전부터 내려오는 관례나 규정.
91. 협문(挾門): 정문 양옆에 있는 작은 문. 곁문.
92. 배신(陪臣): 제후국의 신하가 천자국의 조정에 나아갈 때 스스로를 낮추어 이르던 말. 조선 사신이 명나라 황제 앞에서 자신을 칭할 때 사용했다.
93. 예부(禮部): 중국 역대 왕조의 중앙 행정기관인 육부(六部) 중 하나. 예악(禮樂), 제사(祭祀), 외교(外交), 교육, 과거 시험 등을 담당했다.


원문:
仁聖王后喪, 有司議行叔姪之服, 公以爲: “上於慈殿, 有繼體之義, 當服三年。” 宣祖從之。

번역문:
인성왕후(仁聖王后)⁹⁴의 상(喪) 때, 유사(有司)⁹⁵에서 숙질(叔姪)의 복(服)⁹⁶을 행할 것을 의논하자, 공이 아뢰기를 “상(上)께서는 자전(慈殿)⁹⁷께 계체(繼體)⁹⁸의 의(義)가 있으니, 마땅히 삼년복(三年服)을 입으셔야 합니다.”라고 하니, 선조께서 이를 따랐다.

주석:
94. 인성왕후(仁聖王后):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 명종의 비(妃)이자 선조의 법적 어머니(양모). 1575년(선조 8)에 사망하였다.
95. 유사(有司): 맡은 직책이 있는 관리. 여기서는 상례(喪禮)를 주관하는 예조(禮曹) 관리를 가리킨다.
96. 숙질지복(叔姪之服): 작은아버지(叔)가 조카(姪)를 위해 입는 상복. 기년복(朞年服, 1년복)에 해당한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였으므로, 생물학적으로는 명종의 조카뻘이었다. 따라서 예조에서는 선조가 인순왕후를 위해 숙모(叔母)에 대한 복인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97. 자전(慈殿): 대비(大妃) 또는 왕대비(王大妃)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인순왕후를 가리킨다.
98. 계체(繼體): 몸(體)을 이음(繼).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박순은 선조가 명종의 왕위를 이었으므로 인순왕후를 친어머니처럼 여겨 참최삼년(斬衰三年)의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선조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원문:
庚辰, 管內局。 一日, 上暴疾, 公馳詣, 則疾已惟幾。 與左相盧守愼入見, 上執手曰: “不幸病至此, 恐不獲誓言嗣。 諸子皆幼, 煩公等調護。” 守愼悲泣不自勝, 公顧止之曰: “愼勿爾也。” 乃進而徐譬之。 時諸醫環視不敢下藥, 公遽呼藥以進, 遂得徐蘇。

번역문:
경진년(1580)⁹⁹에 내국(內局)¹⁰⁰을 관장하였다. 하루는 상(上)께서 갑자기 병환(暴疾)이 나시어 공이 급히 달려가니(馳詣), 병환이 이미 위급(惟幾)¹⁰¹하였다. 좌상(左相) 노수신(盧守愼)¹⁰²과 함께 들어가 뵈니, 상께서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불행히 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후사(嗣)를 부탁하는 말(誓言)¹⁰³을 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여러 아들들이 모두 어리니, 공들께서 번거롭더라도 잘 보살펴주시오(調護).” 노수신이 슬피 울며(悲泣)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자, 공이 돌아보며 그를 말리며 말하기를 “삼가 그리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어서 나아가 천천히 상을 위로하여 깨우쳤다(徐譬之). 이때 여러 의원(醫員)들이 둘러서서 보기만 할 뿐 감히 약을 올리지 못하자, 공이 급히 약을 불러 올리니 마침내 서서히 깨어나셨다(徐蘇).

주석:
99. 경진년(1580): 선조 13년.
100. 내국(內局): 내의원(內醫院)의 별칭. 궁궐 내의 의약(醫藥)을 담당하던 관청. ‘관내국(管內局)’은 내의원의 제조(提調)로서 업무를 총괄함을 의미한다.
101. 유기(惟幾): 거의 죽게 됨. 위독한 상태를 의미한다.
102.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영의정을 지냈다.
103. 서언(誓言): 맹세하는 말. 여기서는 임금이 임종 시 후사를 부탁하는 유언(遺言)을 의미한다.


원문:
公於經筵, 力言北道飢凶, 當先事綢繆, 發數策, 人以爲迂。 及癸未之變, 軍興乏糧, 始服公遠見。 公與李栗谷珥籌猷廟堂, 舉無遺策, 宣廟嘉之, 特命兼判兵曹事。

번역문:
공이 경연(經筵)에서 북도(北道)¹⁰⁴의 기근과 흉년(飢凶)을 힘써 말하며 마땅히 미리 대비(綢繆)¹⁰⁵해야 한다고 여러 계책(數策)을 내놓았으나, 사람들은 현실과 동떨어지다(迂)고 여겼다. 계미년(1583)의 변란(變)¹⁰⁶ 때 군대를 일으켰으나(軍興) 군량(糧)이 부족하게 되자, 비로소 공의 원견(遠見)에 탄복하였다. 공이 이율곡(李栗谷) 이이(珥)¹⁰⁷와 함께 묘당(廟堂)¹⁰⁸에서 계획하고 상의하여(籌猷) 빠뜨리는 계책(遺策)이 없자, 선묘(宣廟)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일을 겸하도록 명하셨다.

주석:
104. 북도(北道): 북쪽 지방. 함경도(咸鏡道)를 가리킨다.
105. 주무(綢繆): 원래는 칭칭 얽어맨다는 뜻으로, 미리 빈틈없이 준비하고 대비함을 비유한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의 “미우주무(未雨綢繆, 비 오기 전에 창문 틈을 얽어매다)”에서 유래했다.
106. 계미지변(癸未之變): 1583년(선조 16)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탕개(尼湯介) 등 여진족의 난을 가리킨다.
107. 이율곡(李栗谷) 이이(珥): 주석 77 참조. 당시 이이는 병조 판서였다.
108. 묘당(廟堂): 종묘(宗廟)와 명당(明堂)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조정(朝廷) 또는 의정부(議政府) 등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곳을 의미한다.


원문:
栗谷被彈歸, 成牛溪渾上章救解。 上問大臣以渾疏是非及珥罪有無, 公首言: “時人與珥不相能, 至欲劾去, 非公論也。” 上命竄言者, 時論大激, 至於兩司交章, 劾公以護黨, 數其十罪。 上曰: “朴某松筠節操, 水月精神。” 執不允。 公因是不安於朝, 退處江舍。 上醫問交道, 命有司官致其所不受祿, 敦諭出仕。 公愍然入城, 臺彈再發, 復歸江上。【竝行狀。】

번역문:
율곡(栗谷, 이이)이 탄핵을 받고 돌아가자, 성우계(成牛溪) 혼(渾)¹⁰⁹이 상소(上章)하여 구원하고 해명하였다. 상께서 대신들에게 성혼의 상소의 시비(是非)와 이이의 죄 유무를 묻자, 공이 가장 먼저 말하기를 “당시 사람들이 이이와 서로 잘 지내지 못하여(不相能) 탄핵하여 내쫓으려 하기에 이른 것이니, 공론(公論)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이이를) 비방한 자들을 유배(竄)보내도록 명하시자, 당시 여론(時論)이 크게 격앙되어 양사(兩司)가 번갈아 상소를 올려 공이 당파를 비호한다(護黨)고 탄핵하며 그 죄 열 가지를 열거하기에 이르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박 아무개는 송균(松筠)¹¹⁰ 같은 절조(節操)요, 수월(水月)¹¹¹ 같은 정신이다.”라 하시고, 끝까지 윤허하지 않으셨다. 공이 이로 인해 조정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강가 집(江舍)¹¹²으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상께서 의원(醫員)을 보내 문병하고(醫問) 도로가 막히지 않게 하였으며(交道)¹¹³, 유사(有司) 관원에게 명하여 그 받지 않은 녹봉(祿)을 보내주게 하고, 간곡히 타일러(敦諭) 출사(出仕)하도록 하였다. 공이 민망히 여겨(愍然) 도성에 들어왔으나, 대간(臺)의 탄핵이 다시 발생하자 다시 강가로 돌아갔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109. 성우계(成牛溪) 혼(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이이와 절친한 친구였다.
110. 송균(松筠): 소나무(松)와 대나무(筠). 둘 다 추위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으므로 변함없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111. 수월(水月): 물과 달. 맑고 깨끗함을 상징한다. ‘수월정신(水月精神)’은 맑고 깨끗하며 티 없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112. 강사(江舍): 강가의 집. 영평(永平) 백운계곡에 있던 박순의 은거지를 가리킨다.
113. 교도(交道): ‘의문교도(醫問交道)’는 임금이 신하에게 의원을 보내 문병하고 오가는 길을 막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임금이 박순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를 보였음을 나타낸다.


원문:
丙戌五月, 前領議政朴淳久在江村, 托浴椒泉, 往永平縣。 上遣中使宣醞于門外, 淳卽席賦詩一絶云: “答恩無路寸心違, 收拾殘骸返野扉。 一點終南看更遠, 西風吹淚薜蘿衣。” 上見其詩, 知已決歸, 乃下旨累召, 皆辭。 上下諭曰: “見卿疏辭, 知卿斂迹不歸。 其於自處得矣, 一時風氣之像不好。 前所以催卿上洛, 不使顚倒于草莽者, 非爲卿也。 有旨到日, 卽上道來居于京。” 淳又辭不至。【《宣廟寶鑑》。】

번역문:
병술년(1586)¹¹⁴ 5월에 전 영의정 박순이 오랫동안 강촌(江村)에 있다가 초천(椒泉)¹¹⁵에서 목욕한다는 핑계로 영평현(永平縣)으로 갔다. 상께서 중사(中使)¹¹⁶를 보내 문밖에서 술(醞)¹¹⁷을 내리니, 박순이 즉석에서 시 한 절구(一絶)를 지어 읊었다. “은혜 갚을 길 없어 작은 마음 어긋나니(答恩無路寸心違), 남은 몸(殘骸)¹¹⁸ 수습하여 사립문(野扉)으로 돌아가네. 한 점 종남산(終南山)¹¹⁹은 볼수록 더욱 멀어지니, 서풍 부는 칡넝쿨 옷(薜蘿衣)¹²⁰에 눈물 흘리네.” 상께서 그 시를 보고 이미 돌아갈 것을 결심했음을 아시고, 이에 교지(旨)를 내려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상께서 유시(諭)를 내리기를 “경(卿)의 사직 상소를 보니, 경이 자취를 거두고 돌아오지 않으려 함을 알겠다. 그 자신의 처신(自處)에는 맞겠지만, 한 시대의 풍기(風氣)¹²¹의 형상이 좋지 않다. 전에 경을 재촉하여 서울(上洛)¹²²로 오게 하여 초야(草莽)에서 넘어지게 하지 않으려 한 것은 경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교지가 도착하는 날 즉시 길을 떠나 서울로 와서 거처하라.”고 하셨다. 박순이 또 사양하고 이르지 않았다.【《선묘보감(宣廟寶鑑)》¹²³에서 인용】

주석:
114. 병술년(1586): 선조 19년.
115. 초천(椒泉): 약수(藥水)가 나는 온천. 구체적인 위치는 미상이나, 영평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6. 중사(中使): 궁중의 내시(內侍).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117. 온(醞): 술.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을 선온(宣醞)이라 한다.
118. 잔해(殘骸): 쇠잔한 몸뚱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119. 종남산(終南山): 중국 장안(長安) 남쪽에 있는 산. 여기서는 임금이 계신 서울(한양) 또는 궁궐을 상징한다.
120. 벽라의(薜蘿衣): 벽려(薜荔)와 여라(女蘿)로 만든 옷이라는 뜻으로, 은자(隱者)의 옷, 또는 검소한 옷을 의미한다.
121. 풍기(風氣): 시대의 기풍이나 분위기. 여기서는 당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정치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22. 상락(上洛): 낙양(洛陽)으로 올라감. 서울로 감을 의미한다.
123. 《선묘보감(宣廟寶鑑)》: 선조 시대의 정치와 주요 사건, 임금의 언행 등을 기록한 책.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원문:
公卜築于永平縣白雲溪上, 絶口不道時事, 蕭然有出塵之想, 日事釣採, 間以吟嘯。 村氓野老挈榼相就, 欣然對飮, 若將爭席。 學子來講, 輒忘寒暑。 所居有拜鵑窩、二養亭、白雲溪、淸泠潭、吐雲床、蒼玉屛及散襟・靑鶴・白鶴臺等名號。 興至或一馬一僕, 放迹山水, 漫遊金剛、白雲等諸山, 傲然忘歸。【行狀。】

번역문:
공이 영평현 백운계(白雲溪)¹²⁴ 위에 터를 잡고 집을 짓고(卜築)는, 입을 다물고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으며, 쓸쓸히(蕭然) 속세(塵)를 벗어나려는 생각(出塵之想)이 있어 날마다 낚시하고 나물 캐는(釣採) 일을 하고, 틈틈이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불었다(吟嘯). 마을 백성(村氓)과 시골 노인(野老)들이 술통(榼)을 들고 서로 찾아오면 흔연히 마주하여 술을 마시며 자리를 다툴 듯하였다. 배우는 자(學子)들이 와서 강론(講)하면 문득 추위와 더위를 잊었다. 거처하는 곳에는 배견와(拜鵑窩), 이양정(二養亭), 백운계(白雲溪), 청령담(淸泠潭), 토운상(吐雲床), 창옥병(蒼玉屛) 및 산금대(散襟臺)・청학대(靑鶴臺)・백학대(白鶴臺) 등의 명호(名號)가 있었다. 흥(興)이 나면 혹 말 한 필과 하인 한 명(一馬一僕)으로 산수(山水)에 자취를 풀어놓고(放迹), 금강산(金剛), 백운산(白雲山) 등 여러 산을 자유로이 노닐며(漫遊), 오연(傲然)히 돌아갈 것을 잊었다.【행장에서 인용】

주석:
124. 백운계(白雲溪): 현재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에 있는 백운계곡을 가리킨다.


원문:
前領議政朴淳卒。 淳自幼, 以文行著聞, 明宗親試賜第, 屬意甚重。 在館閣, 忤權臣意罷免。 末年, 復被擢用, 劾出兩權臣, 士論始伸, 朝廷肅淸。 及與盧守愼竝相, 居位十四年, 二人皆重望, 而人病其無所建明。 然淳自以才短於經濟, 專務薦賢讓能, 故力薦李珥、成渾, 終始協濟。【《宣廟寶鑑》。】

번역문:
전 영의정 박순이 졸(卒)하였다. 박순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文行)로 이름이 알려졌고(著聞), 명종께서 친히 시험하여 등급을 내리시며(親試賜第) 매우 중하게 뜻을 두셨다(屬意甚重). 관각(館閣)에 있을 때 권신(權臣)¹²⁵의 뜻을 거슬러(忤) 파면되었다. 말년에 다시 발탁되어 등용되어 두 권신¹²⁶을 탄핵하여 내쫓으니, 사론(士論)¹²⁷이 비로소 펴지고 조정이 숙청(肅淸)되었다. 노수신과 함께 나란히 재상(相)이 되어 자리에 있은 지 14년 동안 두 사람 모두 신망(望)이 두터웠으나, 사람들은 그들이 건립하고 밝힌 바(建明)가 없음을 비판하였다(病). 그러나 박순은 스스로 재주가 경제(經濟)¹²⁸에 짧다고 여겨 오로지 현명한 이를 추천하고 능력 있는 이에게 양보하는 것(薦賢讓能)에 힘썼으므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힘써 추천하여 시종(終始) 협력하여 돕고 구제하였다(協濟).【《선묘보감》에서 인용】

주석:
125. 권신(權臣): 권력을 잡은 신하. 여기서는 윤원형(尹元衡)을 가리킨다.
126. 양권신(兩權臣): 두 명의 권신. 윤원형과 심통원(沈通源)을 가리킨다.
127. 사론(士論): 선비들의 여론.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의미한다.
128. 경제(經濟):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 즉, 실질적인 정치 운영 능력을 의미한다.


원문:
公早知爲學之方, 及長, 遂大肆力於群書, 以至老・莊・道・佛之語、漢・晉以下百家之書, 靡不貫穿而周知。 尤長於詩, 天格淸婉, 意悟沖邁, 獨得元和正派。 有《思菴集》行于世, 樵廝皆能諷之。

번역문:
공은 일찍이 학문하는 방법(爲學之方)을 알았고, 장성해서는 마침내 여러 서적(群書)에 크게 힘을 쏟아(大肆力), 노자(老子)・장자(莊子)・도가(道家)・불가(佛家)의 말과 한(漢)・진(晉) 이하 백가(百家)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꿰뚫어(貫穿)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靡不周知). 특히 시(詩)에 뛰어나, 천품(天格)¹²⁹이 맑고 아름다우며(淸婉) 뜻과 깨달음(意悟)이 깊고 뛰어나(沖邁), 홀로 원화정파(元和正派)¹³⁰를 터득하였다. 《사암집(思菴集)》¹³¹이 세상에 간행되어 나무꾼과 마부(樵廝)¹³²들까지 모두 능히 욀 정도였다.

주석:
129. 천격(天格): 타고난 품격이나 격조.
130. 원화정파(元和正派): 당(唐)나라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稹) 등이 이끈 시풍(詩風)을 가리킨다. 평이하고 알기 쉬운 언어로 현실을 반영하고 풍자하는 경향을 보였다.
131. 《사암집(思菴集)》: 박순의 문집.
132. 초시(樵廝): 나무꾼(樵)과 마부(廝).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통칭한다. 박순의 시가 널리 알려져 누구나 쉽게 접하고 욀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受學於花潭先生, 得聞性理之說, 尤邃於《易》, 明睿之至, 考索精深, 而其悟透自得之力爲尤多。 中年事退溪先生, 多所啓發。 退溪嘗稱: “與朴某相對, 炯如一條淸氷。” 奇高峯大升亦言: “剖析義理, 明辨剴切, 吾所不及。” 晩與牛、栗兩先生定爲莫逆交。 嘗聞牛溪入城, 喜語人曰: “吾王不亦爲豪傑之主乎? 密密結網, 網得牛翁來矣。” 時傳以爲美談。

번역문:
공은 화담 선생(花潭先生)¹³³에게서 학문을 배워 성리(性理)의 학설을 듣게 되었고, 특히 《주역(易)》에 깊었으며(尤邃), 밝고 예리함(明睿)이 지극하고 고찰하고 탐구함(考索)이 정밀하고 깊었으나, 깨달아 통달하여 스스로 터득하는(悟透自得) 힘이 더욱 많았다. 중년에는 퇴계 선생(退溪先生)¹³⁴을 섬겨 계발(啓發)된 바가 많았다. 퇴계께서 일찍이 칭찬하기를 “박 아무개와 마주하면 밝기가 한 줄기 맑은 얼음(淸氷)과 같다.”라고 하였다. 기고봉(奇高峯) 대승(大升)¹³⁵ 또한 말하기를 “의리(義理)를 분석(剖析)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적절하게(剴切) 밝히는 것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우계(牛溪), 율곡(栗) 두 선생¹³⁶과 막역한 사귐(莫逆交)을 맺었다. 일찍이 우계가 도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또한 호걸(豪傑)의 군주가 아니신가? 빽빽하게 그물을 쳐서(密密結網) 우계 영감(牛翁)을 그물로 잡아 오셨구나.”라고 하니, 당시 미담(美談)으로 전해졌다.

주석:
133. 화담 선생(花潭先生): 서경덕(徐敬德, 1489

1546). 조선 중기의 학자, 사상가. 주기론(主氣論) 철학을 발전시켰다.
134. 퇴계 선생(退溪先生): 이황(李滉, 1501

1570). 주석 65 참조.
135. 기고봉(奇高峯) 대승(大升):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주석 83 참조.
136. 우계(牛溪), 율곡(栗) 두 선생: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원문:
癸未禍起, 論者謂公與牛、栗相善, 至稱淳卽珥, 珥卽渾, 終始三人, 貌異而心一。 上曰: “善類相從, 何傷於道? 昔宋孝宗言‘我是朱熹之黨’, 今以予爲珥、渾之黨可也。” 其見重類此。

번역문:
계미년(1583)¹³⁷의 화(禍)¹³⁸가 일어나자, 논자(論者)들이 공이 우계, 율곡과 서로 잘 지낸다고 하여 심지어 ‘박순이 곧 이이요, 이이가 곧 성혼이니, 시종 세 사람은 모습은 다르나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칭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류(善類)가 서로 따르는 것이 어찌 도(道)에 해롭겠는가? 옛날 송 효종(宋孝宗)¹³⁹이 ‘나는 주희(朱熹)의 당(黨)이다.’라고 말했으니, 지금 나를 이이, 성혼의 당이라고 해도 괜찮다.”라고 하셨다. 그 중히 여김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주석:
137. 계미년(1583): 선조 16년.
138. 계미년의 화(禍): 이 해에 이이(李珥)가 사망한 후, 동인(東人) 세력이 이이와 성혼 등 서인(西人) 세력을 공격하면서 당쟁이 격화된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39. 송 효종(宋孝宗): 중국 남송(南宋)의 제2대 황제(재위 1162~1189). 주희(朱熹) 등 성리학자들을 중용하였다.


원문:
嘗搆小齋, 扁曰雙翠。 終日對案, 正冠帶飾儀容, 儼然對越, 游泳有得, 則便欣然色敷如也。 望之只瑩然氷鑑, 卽之覺和氣襲人, 平坦樂易, 終日不見有崖異之行。 嘗言: “聖人之學, 不可他求, 日用行事, 到底順理, 卽此是道。 然若不先明其理, 又何以得事之正也? 此格致之序, 所以居修身之先也。”

번역문:
일찍이 작은 서재(小齋)를 짓고 쌍취(雙翠)¹⁴⁰라고 편액(扁)하였다. 종일 책상(案)을 마주하고 관대(冠帶)를 바로 하고 용모(儀容)를 단정히 하여, 엄숙하게 신명(神明)을 대하듯(儼然對越)¹⁴¹하였으며, 학문에 깊이 잠겨(游泳)¹⁴² 터득한 것이 있으면 문득 흔연히 얼굴빛이 환하게 펴지는 듯하였다(色敷如也). 멀리서 바라보면 다만 밝은 얼음 거울(瑩然氷鑑) 같고,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한 기운(和氣)이 사람에게 스며듦을 느끼며, 평탄하고 온화하며(平坦樂易) 종일 모나고 이상한 행동(崖異之行)을 볼 수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학문은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니니, 일상생활(日用行事)에서 도저히(到底) 이치에 순응하면(順理) 이것이 바로 도(道)이다. 그러나 만약 먼저 그 이치를 밝히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일의 올바름(事之正)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격물치지(格致)¹⁴³의 차례가 수신(修身)의 앞에 놓이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140. 쌍취(雙翠): 푸른빛(翠)이 쌍(雙)으로 있다는 뜻. 서재 주변의 푸른 산이나 대나무 등을 염두에 둔 이름으로 추정된다.
141. 엄연대월(儼然對越): 엄숙하게(儼然) 마치 신명(神明)이나 조상(祖上)을 마주 대하듯(對越)함. 공경하고 삼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142. 유영(游泳): 헤엄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도(道)의 세계에 깊이 빠져 탐구함을 비유한다.
143. 격치(格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준말.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앎에 이름. 《대학(大學)》에서 제시한 수양의 첫 단계이다.


원문:
公疾文體尙浮薄, 欲力變陋習而澡雪之。 論文章則首以班、馬、韓、柳、李、杜爲本, 道學則又以《小學》、《心經》、《近思錄》爲階梯。

번역문:
공은 문체(文體)가 부박(浮薄)함을 숭상하는 것을 병폐(疾)로 여겨, 누추한 습속(陋習)을 힘써 변화시켜 깨끗이 씻어내고자(澡雪) 하였다. 문장(文章)을 논할 때는 반고(班固)・사마천(馬遷)・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이백(李白)・두보(杜甫)¹⁴⁴를 첫 번째 근본으로 삼았고, 도학(道學)¹⁴⁵에 있어서는 또한 《소학(小學)》¹⁴⁶, 《심경(心經)》¹⁴⁷, 《근사록(近思錄)》¹⁴⁸을 계단(階梯)으로 삼았다.

주석:
144. 반(班)・마(馬)・한(韓)・유(柳)・이(李)・두(杜):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문장가와 시인들.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이백(李白), 두보(杜甫).
145. 도학(道學): 성리학(性理學)의 다른 이름.
146. 《소학(小學)》: 송(宋)나라 주희(朱熹)와 유자징(劉子澄)이 편찬한 아동용 수신서(修身書). 기본적인 윤리 덕목과 예절을 가르친다.
147. 《심경(心經)》: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마음(心) 수양에 관한 경전(經傳)과 제가(諸家)의 학설을 모아 편찬한 책. 성리학의 중요한 수양서이다.
148. 《근사록(近思錄)》: 송(宋)나라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북송(北宋) 시대 성리학자 4명(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어록 중 중요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성리학 입문서.


원문:
公出入相府十五年, 唯謹守世業田, 未嘗增一畝。 州郡問遺, 非親舊, 不敢受, 所識¹⁴⁹問訊, 不過起居而已。 至臨大議定大計, 論議風發, 飾以儒雅, 莫能抗奪。 古云“仁者必有勇”, 其謂公乎!【竝行狀。】

번역문:
공은 재상(相府)¹⁵⁰에 출입한 지 15년 동안 오직 세업(世業)으로 물려받은 밭(田)을 삼가 지킬 뿐, 일찍이 한 이랑(一畝)도 늘리지 않았다. 주군(州郡)에서 보내오는 선물(問遺)¹⁵¹은 친구(親舊)가 아니면 감히 받지 않았고, 아는 사람(所識)의 문안(問訊)은 기거(起居)를 묻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큰 의논(大議)에 임하여 큰 계책(大計)을 정할 때에 이르러서는 논의(論議)가 바람처럼 일어나고(風發) 유아(儒雅)함으로 꾸며져, 능히 대항하여 빼앗을(抗奪) 자가 없었다. 옛말에 “어진 사람(仁者)은 반드시 용기(勇)가 있다.”¹⁵²고 하였으니, 공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겠는가!【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149. [주-D004] 識 : 저본(底本)에는 “직(職)”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사암집・시장》, 《백사집・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아는 사람’이라는 뜻의 ‘소식(所識)’이 문맥에 맞다.
150. 상부(相府): 재상(宰相)이 정무(政務)를 보는 관청.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151. 문유(問遺): 문안(問安)하고 선물(遺)을 보냄. 지방관 등이 중앙의 고관에게 보내는 뇌물성 선물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152. “인자필유용(仁者必有勇)”: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구절.


원문:
書堂學士輩嘗於一日驟雨過後, 夕陽鮮明, 晴景可人, 共賦詩以記之。 朴淳詩曰: “亂流經野入江沱, 滴瀝猶殘檻外柯。 籬掛蓑衣簷曝網, 望中漁屋夕陽多。” 諸公歎美, 以爲眞有聲之畫。【《淸江瑣語》。】

번역문:
서당(書堂)¹⁵³의 학사(學士) 무리들이 일찍이 하루는 소나기(驟雨)가 지나간 뒤 석양(夕陽)이 선명하고 갠 경치(晴景)가 마음에 드니, 함께 시를 지어 이를 기록하였다. 박순의 시는 이러하다. “어지러운 물줄기(亂流) 들을 지나 강 여울(江沱)로 들어가고, 방울져 떨어지는 물(滴瀝) 아직 난간 밖 나뭇가지(檻外柯)에 남아 있네. 울타리엔 도롱이(蓑衣) 걸려 있고 처마엔 그물(網) 널어 말리니, 바라보는 속에 어부의 집(漁屋) 석양이 가득하네.” 여러 공(公)들이 탄미(歎美)하며 참으로 소리 있는 그림(有聲之畫)¹⁵⁴이라고 여겼다.【《청강쇄어(淸江瑣語)》¹⁵⁵에서 인용】

주석:
153. 서당(書堂): 조선 시대 사설 교육 기관. 여기서는 독서당(讀書堂, 호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54. 유성지화(有聲之畫): 소리가 있는 그림. 시(詩)를 그림에 비유한 말이다. 소동파(蘇東坡)가 왕유(王維)의 시를 평하며 “시 속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畫),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畫中有詩)”고 한 데서 유래했다. 박순의 시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생생하게 풍경을 묘사했음을 칭찬하는 말이다.
155. 《청강쇄어(淸江瑣語)》: 조선 중기의 문신 이수광(李睟光)의 문집 《지봉집(芝峯集)》 부록에 실려 있는 잡록(雜錄).


원문:
朴相國淳淸修苦節, 人莫能及, 作相十年, 無闕失。 癸未, 爲醜正者所擠, 引疾退居于永平地。 有水石之勝, 優遊自適, 號思菴。 有一絶曰: “谷鳥時時聞一箇, 匡床寂寂散群書。 每憐白鶴臺前水, 纔出門前¹⁵⁶便帶淤。” 其閑適自在之意, 孤高拔俗之標, 可謂兩備。【《石潭日記》。】¹⁵⁷

번역문:
상국(相國) 박순은 청렴하게 수양하고 고통스럽게 절개를 지킴(淸修苦節)을 사람들이 능히 따르지 못하였고, 재상(相)이 된 지 10년 동안 잘못(闕失)이 없었다. 계미년(1583)에 추정(醜正)¹⁵⁸한 자들에게 배척(擠)당하여, 병을 핑계로 물러나 영평(永平) 땅에 거처하였다. 수석(水石)의 뛰어난 경치가 있는 곳에서 한가로이 노닐며 스스로 만족하니(優遊自適), 호(號)를 사암(思菴)이라 하였다. 한 절구(一絶)가 있으니, “골짜기 새소리(谷鳥) 때때로 하나씩 들려오고, 평상(匡床)엔 고요히 여러 책들 흩어져 있네. 매양 애처로운 건 백학대(白鶴臺) 앞의 물인데, 겨우 문 앞(門前)을 나서자마자 문득 진흙을 띠는구나.” 그 한가롭고 편안하며 거리낌 없는(閑適自在) 뜻과, 외롭고 높으며 세속을 벗어난(孤高拔俗) 표준(標)이 양쪽을 갖추었다고 이를 만하다.【《석담일기》에서 인용】

주석:
156. [주-D005] 門前 : 《사암집・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 및 《상촌고(象村稿)・청창연담(晴窗軟談)》에는 “산문(山門)”으로 되어 있다.
157. [주-D006] 石潭日記 : 《대동야승・석담일기》에는 “박상국순청수고절……가위양비(朴相國淳淸修苦節……可謂兩備)。” 부분이 없다. 즉, 이 단락의 출처가 《석담일기》라는 기록에 의문이 있음을 시사한다.
158. 추정(醜正): 추악하고 바르지 못함. 여기서는 박순을 탄핵했던 반대파(동인)를 비판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원문:
朴思菴容儀美晳, 如氷玉, 詩亦淸峭近唐。 爲遠接使, 年堇四十五, 擧止端雅, 天使亟稱之。 旣免相, 退居永平, 絶意世事, 淸苦一節, 老而彌邵。 近代大臣進退終始如公者尟矣。【《芝峯類說》。】

번역문:
박사암(朴思菴)은 용모와 위의(容儀)가 아름답고 희며(美晳) 얼음과 옥(氷玉)과 같았고, 시(詩) 또한 맑고 빼어나(淸峭) 당(唐)나라 풍에 가까웠다. 원접사(遠接使)¹⁵⁹가 되었을 때 나이 겨우 45세였는데, 행동거지(擧止)가 단정하고 아담하여(端雅) 천자(天子)의 사신(使)¹⁶⁰이 매우 칭찬하였다. 재상(相)에서 면직된 뒤 영평(永平)에 물러나 거처하며 세상 일에 뜻을 끊고(絶意世事) 청렴하고 고생스러운(淸苦) 하나의 절개를 지켜 늙어서 더욱 젊어 보였다(老而彌邵)¹⁶¹. 근대(近代)의 대신(大臣) 중에 나아가고 물러남(進退)의 처음과 끝(終始)이 공과 같은 자는 드물었다(尟).【《지봉유설(芝峯類說)》¹⁶²에서 인용】

주석:
159. 원접사(遠接使): 중국 사신이 왔을 때 국경까지 멀리 나가 맞이하여 서울까지 인도하던 임시 관직.
160. 천사(天使): 천자(天子)의 사신. 명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161. 노이미소(老而彌邵): 늙어서(老) 더욱(彌) 젊어 보이다(邵).
162.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원문:
奇高峯常言: “朴和叔處事疎闊, 殊無持重守文之意, 可慮。” 常以拈出六品可當人若干, 往稟于三公, 皆以爲可。 最後來言其意, 吾以爲“此乃末世好事。 銓曹之意如此, 誰敢有違? 恨公未能洞察祖宗立法本意, 爲此過高之擧, 必有後弊。 以慶延、孝成之行, 成廟朝尙除參奉, 久後出六品; 以趙孝直學問, 亦除初入仕, 衆論歸一, 乃爲六品, 祖宗朝不輕用人, 必有深意。 且無取才者, 不可用, 間有高蹈可用之人, 而寧失一二¹⁶³人, 不可廢法典”云。【《梧陰雜記》。】

번역문:
기고봉(奇高峯)이 항상 말하기를 “박화숙(朴和叔)은 일 처리(處事)가 허술하고 대범하며(疎闊), 자못 신중함(持重)과 전례를 지킴(守文)의 뜻이 없으니, 염려스럽다.”라고 하였다. 항상 육품(六品)¹⁶⁴에 합당한 사람 약간 명을 뽑아서(拈出) 삼공(三公)¹⁶⁵에게 가서 여쭈니(稟), 모두 괜찮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와서 그 뜻을 말하기에, 내가 생각하기를¹⁶⁶ “이는 말세(末世)에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것(好事)이다. 전조(銓曹)¹⁶⁷의 뜻이 이와 같으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공(公)이 조종(祖宗)께서 법을 세우신 본뜻(立法本意)을 능히 통찰하지 못하고 이러한 지나치게 높은 조치(過高之擧)를 하는 것이 유감이니, 반드시 뒷날의 폐단(後弊)이 있을 것이다. 경연(慶延)¹⁶⁸과 효성(孝成)¹⁶⁹의 행실로도 성종(成廟) 시대에 오히려 참봉(參奉)¹⁷⁰에 제수되었다가 오랜 뒤에 육품으로 나아갔고, 조효직(趙孝直)¹⁷¹의 학문으로도 또한 처음 입사(入仕)할 때 제수되었다가 여러 사람의 의견(衆論)이 하나로 돌아간 뒤에야 육품이 되었으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사람을 가벼이 쓰지 않은 것에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다. 또한 재주를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자는 쓸 수 없고, 간혹 세속을 초월하여(高蹈) 쓸 만한 사람이 있더라도 차라리 한두 사람을 잃을지언정 법전(法典)을 폐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오음잡기(梧陰雜記)》¹⁷²에서 인용】

주석:
163. [주-D007] 二三 : 《대동야승・오음잡설(梧陰雜說)》에는 “일이(一二)”로 되어 있다.
164. 육품(六品): 정6품과 종6품 관직을 통칭한다. 조선 시대 관료 체계에서 비교적 낮은 품계에 해당한다. 박순이 능력이 출중한 인재들을 처음부터 6품에 임명하려 한 것에 대해 기대승과 윤두수(《오음잡기》 저자)가 우려를 표한 것이다.
165.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166. 내가 생각하기를(吾以爲): 이 부분은 《오음잡기》의 저자인 윤두수(尹斗壽)가 박순에게 직접 했던 말을 기록한 것이다.
167. 전조(銓曹):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관청.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조를 의미한다.
168. 경연(慶延): 미상. 인명으로 추정되나 확인되지 않는다.
169. 효성(孝成): 미상. 인명으로 추정되나 확인되지 않는다.
170. 참봉(參奉): 여러 관청에 속했던 종9품의 최하위 관직.
171. 조효직(趙孝直): 미상. 인명으로 추정된다.
172. 《오음잡기(梧陰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윤두수(尹斗壽, 1533~1601)의 시문집 《오음집(梧陰集)》에 실린 잡록. 《대동야승》에는 《오음잡설(梧陰雜說)》로 되어 있다.


원문:
鄭介淸因沈義謙、洪仁慶, 求見朴淳。 淳留置廊房, 敎其婿李希幹及子姪等, 介淸亦受學於淳。 淳愛之如親子弟, 幾爲十餘年, 薦爲齋郞。 介淸之於淳, 義則師生, 恩猶父子。 及淳失勢後, 介淸反附時人, 欲掩其迹, 時往淳家, 致其款意, 人無不痛憤。 淳猶不疑, 待之如一。 有言於淳者, 則淳輒怒曰: “鄭介淸豈敢如是乎?” 一日, 介淸往謁淳于永平白雲山下, 淳問曰: “汝自何而來?” 介淸對曰: “自務安本家來矣。” 淳曰: “自此向何處?” 介淸曰: “與鄕人同行, 不可先後。 今日入京, 留數日還家矣。” 淳女, 李希幹妻朴氏, 令女奴問介淸去就於其僕。 其僕曰: “某月某日, 離家來京, 留廿¹⁷³餘日, 今始來此矣。” 女奴曰: “然則以何事而久留京中?” 僕曰: “如我迷劣下人, 不知其由。 側聞谷城有闕, 吏曹判書約以除授, 故昨日午後, 往判書宅, 昏時辭退矣。” 判書卽李山海也。 未幾, 介淸果除谷城, 淳聞之, 曰: “介淸本微賤, 若不乘時附勢, 難以立身, 何足怪乎?”【《混定錄》。】

번역문:
정개청(鄭介淸)¹⁷⁴이 심의겸(沈義謙)¹⁷⁵, 홍인경(洪仁慶)¹⁷⁶을 통하여 박순을 뵙기를 구하였다. 박순이 행랑방(廊房)에 머물게 하고, 그의 사위 이희간(李希幹)¹⁷⁷ 및 아들과 조카(子姪) 등을 가르쳤는데, 정개청 또한 박순에게서 학문을 받았다. 박순이 그를 사랑하기를 친자제(親子弟)처럼 하기를 거의 십여 년 동안 하고는 재랑(齋郞)¹⁷⁸으로 추천하였다. 정개청에게 박순은 의리(義)로는 사제(師生)간이고 은혜(恩)는 부자(父子)와 같았다. 박순이 실세(失勢)한 뒤에 정개청이 도리어 당시 사람들(時人)¹⁷⁹에게 붙어 그 자취를 가리고자 하였으나, 때때로 박순의 집에 가서 그의 간곡한 뜻(款意)을 전하니, 사람들이 통분(痛憤)하지 않음이 없었다. 박순은 오히려 의심하지 않고 대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박순에게 (정개청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박순이 문득 노하여 말하기를 “정개청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하루는 정개청이 영평 백운산 아래로 가서 박순을 뵈니, 박순이 묻기를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라고 하였다. 정개청이 대답하기를 “무안(務安) 본가(本家)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박순이 말하기를 “여기서 어디로 향하느냐?”라고 하니, 정개청이 말하기를 “향인(鄕人)과 동행하여 먼저 가거나 뒤에 갈 수 없습니다. 오늘 입경(入京)하여 며칠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박순의 딸이자 이희간의 처인 박씨(朴氏)가 여종(女奴)을 시켜 정개청의 거취(去就)를 그의 하인(僕)에게 물었다. 그 하인이 말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집을 떠나 서울에 와서 20¹⁸⁰여 일을 머물다가 이제 비로소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여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무슨 일로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렀는가?”라고 하니, 하인이 말하기를 “저처럼 미련하고 졸렬한(迷劣) 하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곁에서 들으니 곡성 현감(谷城)¹⁸¹ 자리가 비어 이조 판서께서 제수(除授)하기로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오후에 판서 댁에 갔다가 저물녘(昏時)에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라고 하였다. 판서는 바로 이산해(李山海)¹⁸²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정개청이 과연 곡성 현감에 제수되니, 박순이 듣고 말하기를 “정개청은 본래 미천(微賤)하니, 만약 시세(時)를 타서 권세(勢)에 붙지 않으면 입신(立身)하기 어려우니,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혼정록(混定錄)》¹⁸³에서 인용】

주석:
173. [주-D008] 廿 : 《대동야승・혼정편록(混定編錄)》에는 “십(十)”으로 되어 있다.
174. 정개청(鄭介淸, 1529

159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고옥(孤玉). 서인(西人) 박순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후에 동인(東人)에 가담하였다.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때 정여립(鄭汝立)과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옥사하였다.
175. 심의겸(沈義謙, 1535

1587):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의 영수. 김효원(金孝元)과의 갈등이 동서 분당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76. 홍인경(洪仁慶): 미상.
177. 이희간(李希幹): 미상.
178. 재랑(齋郞): 성균관(成均館)이나 향교(鄕校) 등에서 제사(祭祀)와 관련된 일을 맡아보던 관직 또는 직임.
179. 시인(時人): 당시 사람들. 여기서는 박순의 정적(政敵)이었던 동인(東人) 세력을 가리킨다.
180. 20여 일(廿餘日): 주석 [주-D008]에 따르면 《혼정편록》에는 10여 일(十餘日)로 되어 있다.
181. 곡성(谷城):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현감(縣監)은 종6품 외관직이다.
182. 이산해(李山海, 1539

1609):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영수.
183. 《혼정록(混定錄)》: 조선 선조 때의 문신 김우옹(金宇顒, 1540

1603)이 지은 책. 당쟁과 관련된 인물들의 언행, 시사(時事) 등을 기록하였다. 《대동야승》에는 《혼정편록(混定編錄)》으로 되어 있다.

김계휘(金繼輝)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金繼輝
字重晦, 號黃崗, 光山人。 嘉靖丙戌生。 明宗四年己酉登第。 選入史局, 賜暇湖堂, 歷弘正、吏郞、舍檢、典翰、直提學、吏議、大憲。 壬午卒, 年五十七。 追錄光國勳, 贈吏判。

번역문:
김계휘(金繼輝)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崗)이며, 광산(光山) 사람이다.¹ 가정(嘉靖) 병술년(1526)에 태어났다. 명종(明宗) 4년 기유년(1549)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²에 선발되어 들어갔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³ 하였으며,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이조 정랑(吏曹正郎), 사헌부 집의 또는 사간원 사간(舍檢)⁴, 예문관 봉교 또는 승문원 교검(典翰)⁵,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조 참의(吏曹參議), 대사헌(大司憲)⁶을 역임하였다. 임오년(1582)에 57세의 나이로 졸(卒)하였다. 광국공신(光國功臣)⁷에 추록(追錄)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⁸에 추증(追贈)되었다.

주석:

  1. 광산인(光山人): 본관이 광산(光山) 김씨임을 나타낸다.
  2.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 또는 예문관(藝文館) 등 역사 기록 편찬과 관련된 관청.
  3. 사가독서(賜暇讀書):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주로 호당(湖堂, 독서당)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문신에게 큰 영예였다.
  4. 사검(舍檢):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종3품) 또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정3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두 관직 모두 간쟁(諫諍)과 탄핵(彈劾)을 담당하는 중요한 언관직(言官職)이었다. 원문에 '사검(舍檢)'으로 되어 있으나, 해당 관직은 조선시대 관직표에 보이지 않는다. 글자의 모양이나 의미상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집의(執義)나 사간(司諫)을 잘못 표기했거나 별칭일 가능성이 있다. 문맥상 언관직을 역임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5. 전한(典翰):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정7품) 또는 승문원 교검(承文院敎檢, 정8품)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주로 문한(文翰), 즉 문서 작성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던 관직이다.
  6.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수장이었다.
  7. 광국공신(光國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거나 왜적 토벌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김계휘는 임진왜란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에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추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아들 김장생(金長生) 등의 공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8.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文官)의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핵심 요직이다. 추증(追贈)은 죽은 뒤에 관직을 높여주는 것이다.

원문:
四歲, 自知讀書。 八歲, 文理大通。 十一歲, 參京畿都會試。 十五, 博極經史諸子。 二十三, 連魁庭試、課試, 特命直赴殿試, 臺諫以課試許第, 必有後弊, 遂改正。

번역문:
네 살에 스스로 글 읽을 줄 알았고, 여덟 살에 문리(文理)⁹에 크게 통달하였다. 열한 살에 경기(京畿) 도회시(都會試)¹⁰에 참가하였다. 열다섯 살에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을 널리 통달하였다. 스물세 살에 정시(庭試)¹¹와 과시(課試)¹²에서 연달아 장원(魁)하자, 특별히 명하여 바로 전시(殿試)¹³에 응시하게 하였으나, 대간(臺諫)¹⁴이 과시(課試) 합격자에게 (바로 전시 응시를) 허락하면 반드시 뒷날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마침내 (명령을) 개정(改正)하였다.¹⁵

주석:
9. 문리(文理): 글의 이치. 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
10. 도회시(都會試): 조선 시대 과거 시험 중 하나로, 각 도(道) 단위에서 실시하던 향시(鄕試)의 일종.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의 1차 시험에 해당한다.
11. 정시(庭試): 조선 시대 비정기적으로 시행되던 과거 시험. 주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되었다.
12. 과시(課試): 관리들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실시하던 시험. 또는 과거 시험의 예비 시험 성격을 띤 시험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정시와 함께 장원했다고 하므로, 다른 종류의 시험에서 연이어 장원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13. 전시(殿試): 임금이 직접 궁궐에서 주관하던 과거 시험의 최종 단계. 대과(大科)의 복시(覆試)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등급을 결정했다.
14.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이나 조정의 잘못을 비판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 관여했다.
15. 과시허제 필유후폐(課試許第 必有後弊): 과시(課試)는 정규 과거 시험 절차가 아니므로, 여기서 장원했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전시(殿試) 응시 자격을 주는 것은 절차상의 문제가 있고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대간의 지적이다.


원문:
癸丑, 尹元衡議通庶孼仕路。 蓋元衡以其妾蘭貞爲妻, 又欲其所生通籍, 故有是議。 公以玉堂參下, 箚論其不可, 事遂已, 論者韙之。 又還給沈貞職牒, 貞是己卯奸臣, 斬伐趙文正諸賢者也。 時頗有紹述其餘論者, 故有是命。 公以正言, 極論其奸兇之狀, 復削所復官職。

번역문:
계축년(1553)¹⁶에 윤원형(尹元衡)¹⁷이 서얼(庶孼)¹⁸의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논의하였다. 대개 윤원형이 그의 첩 정난정(鄭蘭貞)¹⁹을 아내로 삼고, 또 그가 낳은 자식들이 관직에 나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공(公)이 옥당(玉堂)²⁰의 참하관(參下官)²¹으로서 차자(箚子)²²를 올려 그 불가함을 논하니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고, 논자(論者)들이 이를 옳다고 하였다. 또 심정(沈貞)²³에게 직첩(職牒)²⁴을 돌려주었는데, 심정은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²⁵ 때의 간신(奸臣)으로 조문정공(趙文正公)²⁶ 등 여러 현인들을 참혹하게 해친 자였다. 당시에 자못 그의 남은 주장을 이어받아 말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공이 정언(正言)²⁷으로서 그의 간악하고 흉악한 행적을 극력으로 논하여, 회복시켜 주었던 관직을 다시 삭탈하게 하였다.

주석:
16. 계축년(癸丑年): 1553년(명종 8).
17. 윤원형(尹元衡, 1509-1565): 조선 중기의 외척,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8. 서얼(庶孼): 서자(庶子)와 얼자(孽子)를 아울러 이르는 말. 양반의 첩이 낳은 자식으로, 조선 사회에서 차별을 받아 관직 진출 등에 제한이 있었다. 통청(通淸) 또는 허통(許通)은 이러한 제한을 풀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19. 정난정(鄭蘭貞, ?-1565): 윤원형의 첩이었으나 본처 김씨를 내쫓고 정실 부인이 되었다. 윤원형과 함께 권세를 누리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0.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21. 참하관(參下官): 정3품 하(下)계 이하의 관원. 당시 김계휘는 홍문관 정자(정9품) 또는 저작(정8품) 등 낮은 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주로 정책이나 현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때 사용되었다.
23. 심정(沈貞, 1471-1531): 조선 중기의 문신. 기묘사화 때 남곤(南袞) 등과 함께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 세력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간신으로 지목된다.
24. 직첩(職牒): 관직 임명장. 직첩을 돌려준다는 것은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25.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조광조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제거한 사건.
26. 조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가리킨다. 문정(文正)은 그의 시호이다. 기묘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27.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언관이다. 김계휘가 이 시기에 정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時權奸當國, 以言爲諱, 經筵進講, 唯以分章析句, 泛然塞責而已, 無啓沃之實。 及公登筵, 援引經傳, 出入古今, 專以格君心爲務, 見者嘉歎, 稱之以直學士。 時當乙巳士禍之餘, 人心斁敗, 不復知有淸議。 公在銓曹, 與金弘度、金虬諸人爲友, 激濁揚淸, 分別是非, 以爲通塞之權衡, 自是人始知邪正之辨矣。

번역문:
당시 권력을 잡은 간신(權奸)²⁸이 나라를 맡아 직언(直言)을 꺼렸으므로, 경연(經筵)²⁹의 진강(進講)³⁰에서는 오직 장(章)을 나누고 구(句)를 분석하며(分章析句)³¹ 형식적으로 책임만 때울 뿐이어서, 임금의 마음을 열어 깨우쳐주는(啓沃)³² 실효가 없었다. 공이 경연에 나아가서는 경전(經傳)을 인용하고 고금(古今)의 사례를 넘나들며 오로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格君心)³³을 임무로 삼으니, 보는 자들이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며 직학사(直學士)³⁴라 칭찬하였다. 때는 을사사화(乙巳士禍)³⁵의 여파로 인심이 무너지고 패하여 다시는 청의(淸議)³⁶가 있음을 알지 못하던 때였다. 공이 전조(銓曹)³⁷에 있을 때 김홍도(金弘度)³⁸, 김규(金虬)³⁹ 등 여러 사람과 벗하며, 탁(濁)한 것을 몰아내고 청(淸)한 것을 드날리며(激濁揚淸)⁴⁰ 시비(是非)를 분별하여, 등용과 배척의 저울(通塞之權衡)⁴¹로 삼으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사(邪)와 정(正)의 분별을 알게 되었다.

주석:
28. 권간(權奸): 권력을 잡은 간신. 윤원형(尹元衡)을 가리킨다.
29.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30. 진강(進講): 경연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경서나 사서를 강의하는 것.
31. 분장석구(分章析句): 글의 장(章)을 나누고 구절(句節)을 분석하는 것. 즉, 경전의 자구(字句) 해석에만 치중하고 현실 정치나 군주의 도리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피하는 형식적인 강의 태도를 비판하는 말이다.
32. 계옥(啓沃): 막힌 것을 열어주고 마른 것을 적셔준다는 뜻으로, 신하가 임금의 마음을 열어 깨우쳐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비유한다.
33. 격군심(格君心):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음. 성리학에서 신하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로 여겼다.
34. 직학사(直學士): 직제학(直提學) 등 '직(直)' 자가 붙은 학사(學士) 관직을 가리키거나, 또는 강직한 학사라는 의미로 쓰인 별칭일 수 있다. 홍문관(弘文館)이나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을 가리킨다.
35.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년) 윤원형 등 소윤(小尹) 세력이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 세력을 제거하면서 많은 사림(士林)이 희생된 사건.
36. 청의(淸議): 공정하고 깨끗한 논의. 사리사욕 없이 국가와 백성을 위한 바른 여론이나 주장을 의미한다.
37. 전조(銓曹): 인사권을 담당하는 관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아울러 이른다. 김계휘는 이조 정랑(吏曹正郎) 등을 역임했다.
38. 김홍도(金弘度):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는 동명이인이다. 김계휘, 김규 등과 교유하며 당시 사림의 명망을 얻었던 인물로 보인다.
39. 김규(金虬): 조선 중기의 문신. 김계휘 등과 함께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인사 행정을 공정하게 처리하려 노력했던 인물로 보인다.
40. 격탁양청(激濁揚淸): 흐린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드날린다는 뜻. 악한 것을 배척하고 선한 것을 장려함, 또는 부정한 것을 제거하고 공정한 기풍을 진작시키는 것을 비유한다.
41. 통색지권형(通塞之權衡): 통하게 하고 막는 저울. 즉, 인재를 등용하고 배척하는 기준 또는 권한을 의미한다. 공정한 인사 행정을 비유하는 말이다.


원문:
公始與金汝孚、柳塤同在槐院。 時汝孚每侵塤曰: “汝之險, 類汝兄堪也。” 公言于金鎭曰: “柳堪見忤乙巳權奸, 有何罪惡, 而必擧其名, 辱其弟也? 汝孚非慕齋之子乎?” 汝孚銜之, 以公與弘度痛斥元衡之語, 告於元衡。 元衡恚甚, 必欲報之。 汝孚以檢詳, 欲亟陞舍人, 請於吏郞金虬, 謂其母病將死, 願爲舍人以濟喪事, 因涕泣以示急切之狀, 而歸輒宿於娼家。 公與諸公共斥其惡, 汝孚乃行膚受之讒於元衡, 以嫁禍士林, 蓋元衡之黨判書權纘爲之謀主也。 由是一隊名流, 或竄或罷, 而公則門外黜送。 公遂退居于連山先墓下, 蕭然一室, 只以經史自娛而已。

번역문:
공(公)이 처음에 김여부(金汝孚)⁴², 유훈(柳塤)⁴³과 함께 괴원(槐院)⁴⁴에 있었다. 당시 여부(汝孚)가 매번 훈(塤)을 공격하며 말하기를, “너의 험악함이 네 형 감(堪)⁴⁵과 유사하다.”라고 하였다. 공이 김진(金鎭)⁴⁶에게 말하였다. “유감(柳堪)이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권간(權奸)의 미움을 받았을 뿐 무슨 죄악이 있기에, 반드시 그 이름을 들어 그 아우를 욕되게 하는가? 여부(汝孚)는 모재(慕齋)⁴⁷의 아들이 아니던가?” 여부(汝孚)가 이에 앙심을 품고, 공이 홍도(弘度)와 함께 윤원형(元衡)을 통렬히 배척한 말을 원형에게 고하였다. 원형이 매우 노하여 반드시 보복하고자 하였다. 여부(汝孚)가 검상(檢詳)⁴⁸으로서 속히 사인(舍人)⁴⁹으로 승진하고자 하여 이랑(吏郞) 김규(金虬)에게 청하면서, 그의 어머니가 병들어 장차 죽게 되었으니 사인(舍人)이 되어 상사(喪事)를 치르게 해달라고 원하며 눈물을 흘려 절박한 상황을 보였으나, 돌아가서는 번번이 창가(娼家)에서 잠을 잤다. 공이 여러 공(公)들과 함께 그의 악행을 배척하자, 여부(汝孚)는 마침내 윤원형에게 부수지참(膚受之讒)⁵⁰을 행하여 사림(士林)에게 화(禍)를 전가하였는데, 대개 원형의 무리인 판서 권찬(權纘)⁵¹이 계책을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일단(一隊)의 명류(名流)들이 혹은 유배되거나 혹은 파직되었고, 공은 문외출송(門外黜送)⁵²되었다. 공은 마침내 연산(連山)의 선영(先塋) 아래로 물러나 거처하였는데, 쓸쓸한(蕭然) 단칸방에서 다만 경사(經史)로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주석:
42. 김여부(金汝孚): 조선 중기의 문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아들. 이 일화에서는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43. 유훈(柳塤): 조선 중기의 문신. 유감(柳堪)의 동생.
44.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의 별칭. 외교 문서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45. 감(堪): 유감(柳堪). 을사사화 때 윤원형에게 미움을 받아 화를 입은 인물이다.
46. 김진(金鎭): 김계휘와 동시대 인물로 추정되나 자세한 정보는 미상.
47.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호하다 파직되기도 했다. 김계휘가 김여부의 아버지인 김안국의 행실과 비교하며 김여부의 언행을 비판하는 맥락이다.
48. 검상(檢詳): 승문원(承文院)의 정5품 관직.
49.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 여러 관청에 두었으나, 보통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4품)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50. 부수지참(膚受之讒): 살갗에 스며드는 듯 은밀하고 교묘하게 하는 참소.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는 것처럼 꾸며 남을 모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51. 권찬(權纘): 조선 중기의 문신. 윤원형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권세를 누렸다.
52. 문외출송(門外黜送): 성문 밖으로 내쫓음. 관직에서 파면하고 도성 밖으로 추방하는 형벌이다.


원문:
時明廟無嗣, 至于末年, 尙未建儲, 朝野憂之, 而大臣以下皆莫敢言。 公將上箚請之, 而長官托病巧避。 公與他僚陳疏建白, 時論嘉歎。

번역문:
당시 명종(明廟)⁵³께서 후사(後嗣)가 없어 말년(末年)에 이르도록 아직 세자(儲貳)를 세우지 못하자 조야(朝野)가 이를 근심하였으나, 대신(大臣) 이하가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공이 장차 차자(箚子)를 올려 이를 청하려 하였으나, 장관(長官)⁵⁴이 병을 핑계 대고 교묘히 피하였다. 공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소(疏)를 올려 건의하니(建白)⁵⁵, 당시 여론(時論)이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였다.

주석:
53. 명묘(明廟):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을 가리킨다.
54. 장관(長官): 소속 관청의 으뜸 벼슬. 당시 김계휘가 소속된 관청의 장관이 책임을 회피했음을 의미한다.
55. 건백(建白): 임금이나 윗사람에게 의견이나 계획을 아뢰는 것.


원문:
萬曆癸酉, 朝廷將行軍籍, 陞公嘉善, 拜慶尙監司。 嶺南地大物衆, 簿牒如山, 公口酬手題, 剖決如流, 嶺南之人至今稱之以神明。 論者謂劉穆之無以加之。

번역문:
만력(萬曆) 계유년(1573)⁵⁶에 조정에서 장차 군적(軍籍)⁵⁷을 시행하려 하여, 공을 가선대부(嘉善大夫)⁵⁸로 승진시키고 경상도 감사(慶尙監司)⁵⁹에 제수하였다. 영남(嶺南)은 땅이 넓고 물산이 많아 장부(簿牒)가 산과 같았으나, 공은 입으로는 답하고 손으로는 써주며(口酬手題)⁶⁰ 판단하고 처리함(剖決)⁶¹이 물 흐르듯 하니, 영남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신명(神明)⁶²이라 칭송한다. 논자들은 유목지(劉穆之)⁶³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하였다.

주석:
56.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선조 6). 만력은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57. 군적(軍籍): 군역(軍役) 대상자의 명부. 군역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58.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명.
59. 경상감사(慶尙監司):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도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하는 으뜸 벼슬이다.
60. 구수수제(口酬手題): 입으로는 응대하고 손으로는 써 줌. 많은 일을 동시에 막힘없이 처리하는 능력을 비유한다.
61. 부결(剖決): 일을 분석하여 결정하고 처리함.
62. 신명(神明): 귀신같이 영묘하고 밝음. 뛰어난 능력이나 지혜를 칭송하는 말이다.
63. 유목지(劉穆之, 360-417): 중국 동진(東晉) 말, 유송(劉宋) 초의 정치가. 유유(劉裕, 송 무제)를 도와 송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행정 처리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원문:
仁順王后昇遐, 上下敎曰: “大妃當臨朝聽政, 群臣似可行三年喪。 令大臣、禮官議。” 公以大司諫謂大司憲柳希春曰: “此事誤定之後, 則爭之甚難, 不如固爭於初也。” 乃率兩司伏閤以爲: “王妃之喪, 自有定制, 今不可更有他議。” 其議遂寢。

번역문:
인순왕후(仁順王后)⁶⁴께서 승하(昇遐)⁶⁵하시자, 상(上)⁶⁶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대비(大妃)께서 마땅히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들으셨으니(臨朝聽政)⁶⁷, 여러 신하가 3년 상(三年喪)⁶⁸을 행할 수 있을 듯하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⁶⁹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공이 대사간(大司諫)⁷⁰으로서 대사헌(大司憲) 유희춘(柳希春)⁷¹에게 말하였다. “이 일이 잘못 결정된 뒤에는 다투기가 매우 어려우니, 처음에 굳게 다투는 것만 못합니다.” 이에 양사(兩司)⁷²를 거느리고 합문(閤門)⁷³에 엎드려 아뢰기를, “왕비(王妃)의 상(喪)은 본래 정해진 제도(定制)가 있으니, 지금 다시 다른 논의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그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다.

주석:
64.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1575): 명종(明宗)의 비(妃). 심씨(沈氏). 선조(宣祖)에게는 법적으로 숙모(叔母)가 되지만, 명종의 유언으로 선조 즉위 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65. 승하(昇遐): 임금이나 왕족 등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66. 상(上): 임금. 선조(宣祖)를 가리킨다.
67. 임조청정(臨朝聽政): 임금이 직접 조회(朝會)에 나아가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는 것. 인순왕후가 명종 사후 선조 즉위 초기에 수렴청정을 했으므로, 이를 근거로 선조와 신하들이 3년 상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제기된 것이다.
68. 삼년상(三年喪): 부모상(父母喪)에 3년(실제로는 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유교의 상례(喪禮). 신하가 왕후를 위해 3년 상을 입는 것은 일반적인 예법에 맞지 않았다.
69. 예관(禮官): 예조(禮曹)의 관리. 의례(儀禮)를 담당했다.
70.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71.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미암(眉巖). 당시 대사헌이었다.
72.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73. 복합(伏閤):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임금에게 상소하거나 의견을 아뢰는 것.


원문:
持平閔純上疏請: “於卒哭後, 依宋孝宗例, 以白衣冠視事。” 論者以爲: “卒哭後, 玄冠、烏帶載於《五禮儀》, 祖宗朝所定, 行之已久, 非後王所可輕變。” 公與栗谷先生建議曰: “喪禮之不古久矣。 因此幾會, 所當變通, 以從近古之禮。” 左相朴公淳、右相盧公守愼亦以爲然。 大司憲柳希春難之曰: “當守祖宗舊典。 且人君居喪, 與士大夫不同。” 公曰: “父母之喪, 無貴賤一也。 所謂不同者, 出於何傳紀乎?” 希春曰: “權德輿之言也。” 公曰: “讀書萬卷, 乃無所見, 而反從權德輿之言乎?” 希春默然無以應。 於是公之議遂行, 因爲國朝定制。 時卿大夫有識見者少, 徒守俗論, 見公之議, 多發慍言, 至有泣下者。 公不復顧籍, 輒引經傳以譬曉之, 必得歸正而後已。 識者以爲重, 而流俗則側目矣。

번역문:
지평(持平)⁷⁴ 민순(閔純)⁷⁵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졸곡(卒哭)⁷⁶ 후에는 송(宋) 효종(孝宗)⁷⁷의 예(例)에 의거하여 백의관(白衣冠)⁷⁸으로 정사를 보소서.”라고 하였다. 논자들은 “졸곡 후에는 현관(玄冠)과 오대(烏帶)⁷⁹를 착용하는 것이 《오례의(五禮儀)》⁸⁰에 실려 있고 조종조(祖宗朝)에서 정한 바로서 시행된 지 이미 오래이니, 후대 왕이 가볍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율곡 선생(栗谷先生)⁸¹과 함께 건의하여 말하였다. “상례(喪禮)가 옛 법도를 따르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마땅히 변통(變通)하여 근고(近古)⁸²의 예(禮)를 따라야 합니다.” 좌상(左相) 박공 순(朴公淳)⁸³, 우상(右相) 노공 수신(盧公守愼)⁸⁴ 또한 그렇다고 여겼다. 대사헌 유희춘(柳希春)이 이를 어렵게 여기며 말하였다. “마땅히 조종(祖宗)의 옛 법전(舊典)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임금이 상(喪)을 치르는 것은 사대부(士大夫)와 같지 않습니다.” 공이 말하였다. “부모의 상은 귀천(貴賤) 없이 하나입니다. 이른바 같지 않다는 것은 어느 전(傳)·기(紀)⁸⁵에서 나온 것입니까?” 희춘이 말하였다. “권덕여(權德輿)⁸⁶의 말입니다.” 공이 말하였다. “만 권의 책을 읽고도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면서, 도리어 권덕여의 말을 따르려 하십니까?” 희춘이 잠잠히 응답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의 의논이 마침내 시행되어 나라의 정해진 제도(國朝定制)가 되었다. 당시 경대부(卿大夫)⁸⁷ 중에 식견 있는 자가 적어 한갓 속된 의논(俗論)만 지키면서 공의 의논을 보고 성내는 말을 하는 자가 많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공은 다시 돌아보거나 꺼리지 않고 번번이 경전(經傳)을 인용하여 깨우쳐주어,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식자(識者)들은 이를 중하게 여겼으나, 세속의 무리(流俗)들은 곁눈질하며 미워하였다.

주석:
74. 지평(持平): 사헌부의 정5품 관직.
75. 민순(閔純): 조선 중기의 문신.
76. 졸곡(卒哭): 상례(喪禮) 절차 중 하나. 상을 당한 지 석 달 만에 처음으로 곡(哭)을 그치는 의식이다. 졸곡 이후에는 상복의 등급을 조금 낮추거나 일상 업무를 일부 재개하기도 했다.
77. 송 효종(宋孝宗, 1127-1194): 중국 남송(南宋)의 제2대 황제. 부모상을 당했을 때 졸곡 후 흰 옷을 입고 정사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78. 백의관(白衣冠): 흰 옷과 흰 관. 상중에 입는 소복(素服)을 의미한다. 민순은 졸곡 후에도 계속 소복 차림으로 정사를 볼 것을 건의한 것이다.
79. 현관(玄冠), 오대(烏帶): 검은색 관(冠)과 검은색 띠(帶). 졸곡 이후 착용하는, 평상복보다는 격식을 낮추었지만 완전한 상복은 아닌 복장이다.
80. 《오례의(五禮儀)》: 국가의 다섯 가지 기본 의례인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에 대한 규정을 담은 책. 조선에서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여 사용했다.
81. 율곡 선생(栗谷先生): 이이(李珥, 1536-1584)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82. 근고(近古): 가까운 옛날. 여기서는 송(宋)나라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의 예를 따라 기존의 《국조오례의》 규정을 바꾸자는 주장이다.
83. 좌상(左相) 박공 순(朴公淳): 좌의정 박순(朴淳, 1523-1589)을 가리킨다. 서인(西人)의 영수였다.
84. 우상(右相) 노공 수신(盧公守愼):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을 가리킨다. 동인(東人)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85. 전(傳), 기(紀): 역사 기록을 의미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사기(史記)》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임금과 사대부의 상례가 다르다는 주장의 근거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이다.
86. 권덕여(權德輿, 759-818): 중국 당(唐)나라의 문인, 정치가. 그가 임금과 사대부의 상례가 다르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7. 경대부(卿大夫): 높은 벼슬아치들을 통칭하는 말.


원문:
左相朴淳爲士流所倚重, 而年少喜事者忌之。 會殺主獄起而涉於疑, 上命左相治之, 而以無驗釋之。 忌之者挾此圖去左相, 至發彈論。 公斥其過中, 而握風論者, 皆喜事者黨友, 移怒於公, 箚遞公憲職, 仍出爲平安道觀察使。 副提學李珥以公練達時務, 明習典故, 不可令去朝, 上章請留公, 竟不能得, 而擠公者亦不容於公議。【此一條, 用象村所撰。】

번역문:
좌상 박순(朴淳)이 사류(士流)⁸⁸들이 의지하고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으나, 나이 젊고 일 벌이기 좋아하는 자(年少喜事者)⁸⁹들이 그를 시기하였다. 마침 살주옥(殺主獄)⁹⁰이 일어나 의심스러운 점이 있자, 상께서 좌상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증험(證驗)이 없다 하여 석방하였다.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이를 빌미로 좌상을 제거하려 꾀하여 마침내 탄핵하는 의논(彈論)을 일으켰다. 공이 그 지나침을 배척하였으나, 풍문(風聞)⁹¹을 잡아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일 벌이기 좋아하는 자들의 당여(黨友)여서, 노여움을 공에게 옮겨 차자(箚子)로 공의 헌직(憲職)⁹²을 교체시키고, 이어서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내보냈다.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가 공은 시무(時務)에 익숙하고 뛰어나며 전고(典故)⁹³를 밝게 익혔으므로 조정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상장(上章)하여 공을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고, 공을 밀어낸 자들 또한 공론(公議)에 용납되지 못하였다.【이 한 조항은 상촌(象村)⁹⁴이 지은 것을 사용하였다.】

주석:
88. 사류(士流): 사림(士林)의 흐름. 선비들의 집단 또는 그들의 여론을 의미한다.
89. 연소희사자(年少喜事者): 나이가 젊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 당시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거나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반대파를 공격하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동인(東人) 강경파를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
90. 살주옥(殺主獄): 주인을 살해한 사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 이 내용만으로는 알기 어려우나,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옥사(獄事)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순이 이 사건 처리에 연루되어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91. 풍론(風論): 풍문(風聞)에 근거한 탄핵이나 비판. 명확한 증거 없이 소문이나 의혹만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92. 헌직(憲職): 사헌부(司憲府)의 관직. 당시 김계휘는 대사헌 또는 그 이하의 사헌부 관직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93. 전고(典故): 옛날의 제도, 문물, 고사(故事) 등. 정치나 학문에서 선례(先例)나 근거로 인용되는 지식을 의미한다.
94.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이 기록이 신흠이 지은 글에서 인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원문:
恭懿大妃薨, 禮官議定服制于大臣, 領議政權轍援引宋高宗服元祐皇后孟氏之例, 定主上服爲齊衰杖朞。 公倡言曰: “明廟承仁廟之統, 主上又承明廟之統, 當爲承重服三年。” 轍猶執迷不回。 公力主三年之議, 而大臣朴淳等又是公議, 故事遂行。

번역문:
공의대비(恭懿大妃)⁹⁵가 훙(薨)⁹⁶하자, 예관(禮官)이 대신(大臣)에게 복제(服制)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영의정 권철(權轍)⁹⁷이 송(宋) 고종(高宗)⁹⁸이 원우황후(元祐皇后) 맹씨(孟氏)⁹⁹를 위해 복(服)을 입은 예(例)를 끌어와 주상(主上)¹⁰⁰의 복(服)을 자최장기(齊衰杖朞)¹⁰¹로 정하였다. 공이 앞장서서 말하였다. “명묘(明廟)께서 인묘(仁廟)¹⁰²의 계통을 이으셨고, 주상께서 또 명묘의 계통을 이으셨으니, 마땅히 승중(承重)¹⁰³하여 3년 복(三年服)을 입어야 합니다.” 권철이 여전히 미혹(迷惑)에 집착하여 돌이키지 않았다. 공이 3년 복의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대신 박순(朴淳) 등이 또한 공의 의논을 옳다고 여겨, 마침내 이 예법(故事)이 시행되었다.

주석:
95. 공의대비(恭懿大妃): 인종(仁宗)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 1514-1577) 박씨(朴氏)를 가리킨다. 선조에게는 큰어머니(伯母)가 된다.
96. 훙(薨): 왕족이나 고위 관료의 죽음을 이르는 말.
97. 권철(權轍, 1503-1578):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역임했다.
98. 송 고종(宋高宗, 1107-1187): 중국 남송(南宋)의 초대 황제.
99. 원우황후 맹씨(元祐皇后孟氏): 송 철종(哲宗)의 황후였으나 폐위되었다가, 북송 멸망 후 고종(高宗)에 의해 복위되고 높여졌다. 고종은 그녀를 위해 자최장기(齊衰杖朞) 복을 입었다. 고종과 맹씨는 직접적인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권철은 이를 선조와 인성왕후의 관계에 적용하려 한 것이다.
100. 주상(主上): 임금. 선조(宣祖)를 가리킨다.
101. 자최장기(齊衰杖朞): 오복(五服)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상복. 아랫단[衰]을 꿰맨[齊] 거친 삼베옷을 입고 대나무 지팡이[杖]를 짚으며 1년[朞] 동안 입는 복이다. 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가 살아계시면 아들이 입거나, 할아버지, 백숙부 등을 위해 입었다.
102. 인묘(仁廟): 인종(仁宗, 재위 1544-1545)을 가리킨다.
103. 승중(承重): 종가(宗家)의 대를 잇는 맏아들이나 맏손자로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 여기서는 선조가 인종과 명종을 거쳐 왕통을 이었으므로, 큰어머니인 인성왕후를 위해 3년 상복(참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계휘는 왕통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여 상례를 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원문:
戊寅, 上親政之日, 下敎吏曹曰: “勿用矯激者, 專取醇厚之人。” 公曰: “主上此敎是矣。 然人君偏主此意, 則柔佞者得醇厚之名, 剛直者受矯激之謗, 爲害不測矣。” 是時仕路溷濁, 貪官汚吏接跡於朝。 公爲大司憲謂曰“若無別樣擧措, 難祛宿弊”, 遂汰去數十人, 皆大家子弟, 怨嫉者益多。

번역문:
무인년(1578)¹⁰⁴, 상(上)께서 친정(親政)¹⁰⁵하신 날에 이조(吏曹)에 하교하시기를, “교격(矯激)¹⁰⁶한 자를 쓰지 말고, 오로지 순후(醇厚)¹⁰⁷한 사람을 취하라.”라고 하셨다. 공이 말하였다. “주상의 이 하교는 옳습니다. 그러나 임금께서 이 뜻에 치우치시면, 유순하고 아첨하는 자(柔佞者)는 순후하다는 이름을 얻고 강직(剛直)한 자는 교격하다는 비방을 받아, 그 해(害)가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벼슬길(仕路)이 혼탁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조정에 연이어 있었다. 공이 대사헌(大司憲)으로서 말하기를 “만약 별다른 조처가 없으면 오래된 폐단(宿弊)을 제거하기 어렵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수십 명을 도태시켜 제거하니 모두 대가(大家)¹⁰⁸의 자제들이어서, 원망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주석:
104. 무인년(戊寅年): 1578년(선조 11).
105. 친정(親政): 임금이 직접 정사를 돌보는 것. 선조는 즉위 후 약 10년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院相) 정치를 거쳐 이 해부터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했을 수 있다.
106. 교격(矯激): 언행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편벽됨. 강직함을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쓰이기도 한다.
107. 순후(醇厚): 성품이 순수하고 인정이 두터움. 온건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리킨다.
108. 대가(大家): 세력이 크고 지위가 높은 집안.


원문:
時王子衆多, 而儲嗣未定, 人皆憂之, 而不敢以爲言。 公入侍經筵, 進言: “王子已長, 不可無輔導之助。 乞擇經明行修之人, 以爲師傅。” 公非不知此言大觸諱惡, 而所關甚重, 故自不能已也。 南彦經貽書于公曰: “此不須强執。” 公抵其書于地曰: “鄙夫誠不可與事君也。”

번역문:
당시 왕자(王子)가 많았으나 저사(儲嗣)¹⁰⁹가 정해지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공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아뢰었다. “왕자께서 이미 장성하셨으니 보도(輔導)¹¹⁰의 도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경서에 밝고 행실을 닦은 사람(經明行修之人)을 가려 사부(師傅)¹¹¹로 삼으소서.” 공이 이 말이 크게 휘악(諱惡)¹¹²에 저촉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관계된 바가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남언경(南彦經)¹¹³이 공에게 글을 보내 말하였다. “이는 모름지기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이 그 글을 땅에 내던지며 말하였다. “비루한 사내(鄙夫)와는 진실로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없구나!”

주석:
109. 저사(儲嗣): 왕위 계승자. 세자(世子)를 가리킨다. 선조는 후궁에게서 많은 아들을 두었으나 오랫동안 정비(正妃)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해 세자 책봉이 늦어졌다. 이는 정치적 불안 요인이 되었다.
110. 보도(輔導): 곁에서 가르치고 이끌어 줌.
111. 사부(師傅): 왕자나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 시강원(侍講院)의 관원 등을 가리킨다.
112. 휘악(諱惡): 임금이나 윗사람이 언급하기를 꺼리고 싫어하는 일. 세자 책봉 문제는 당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113. 남언경(南彦經): 조선 중기의 문신.


원문:
時以珍島郡守李銖載米行賂事, 臺諫竝劾尹斗壽、尹根壽、尹晛。 公爲大司諫, 受暇在外聞之, 曰: “士類處事, 當十分明白, 豈可以曖昧之事, 遽起大獄乎? 年少輩處事不公, 不可與同事, 寧得罪於此輩而退可也。” 及至還朝, 乃啓曰: “尹斗壽等或以學行, 或以材器, 竝被擢用, 久在銓曹, 臧否人物, 仇敵滿國。 今其受賂虛實, 未可知, 安知非陰中者之所造言乎? 徐待獄事之成, 治罪未晩, 而今乃以意徑先拈出三人之名, 泛請治罪, 非公正之道。 士類進退, 所繫非輕也。” 於是年少輩群起而咆𠷺, 指以爲亡國之言, 臺諫避嫌, 而玉堂劾遞公。

번역문:
당시 진도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가 쌀을 싣고 와 뇌물을 바친 일로 대간(臺諫)이 아울러 윤두수(尹斗壽)¹¹⁴, 윤근수(尹根壽)¹¹⁵, 윤현(尹晛)¹¹⁶을 탄핵하였다. 공이 대사간(大司諫)으로서 휴가를 받아 밖에 있다가 이를 듣고 말하였다. “사류(士類)가 일을 처리함에는 마땅히 아주 명백해야 하거늘, 어찌 애매한 일로 갑자기 큰 옥사(大獄)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연소배(年少輩)들이 일을 처리함이 공정하지 못하니 더불어 함께 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이 무리에게 죄를 얻고 물러나는 것이 옳다.” 조정에 돌아와서 아뢰었다. “윤두수 등은 혹은 학행(學行)으로, 혹은 재능과 기량(材器)으로 아울러 발탁되어 오랫동안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인물을 좋고 나쁨을 평가(臧否)¹¹⁷하여, 원수지고 적대하는 자(仇敵)가 나라에 가득합니다. 지금 그들이 뇌물을 받았는지의 허실(虛實)은 알 수 없으니, 어찌 음험하게 중상하는 자(陰中者)가 꾸며낸 말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서서히 옥사(獄事)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죄를 다스려도 늦지 않은데, 지금 이에 마음대로 곧바로 먼저 세 사람의 이름을 집어내어 널리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는 것은 공정한 도리가 아닙니다. 사류(士類)의 진퇴(進退)는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에 연소배(年少輩)¹¹⁸들이 무리 지어 일어나 울부짖고 꾸짖으며(咆𠷺)¹¹⁹ 망국(亡國)의 말이라고 지목하였고, 대간(臺諫)은 혐의를 피하였으나 옥당(玉堂)¹²⁰이 공을 탄핵하여 교체시켰다.

주석:
114.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西人)의 중진이었다.
115. 윤근수(尹根壽, 1537-1616): 윤두수의 동생. 역시 서인의 중진이었다.
116. 윤현(尹晛): 조선 중기의 문신.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17. 장부(臧否): 좋고 나쁨을 평가함. 인사 행정에서 인물을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118. 연소배(年少輩): 나이 젊은 무리. 당시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거나 당파성이 강했던 동인(東人)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서인(西人)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두수 형제 등을 공격하고 있었다.
119. 포효(咆𠷺):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성내는 것. 극렬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120.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홍문관 관원들이 김계휘를 탄핵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旣大忤東人, 人皆尤之。 公曰: “我旣失時輩之心, 時輩必不容我, 而我亦不忍爲其所用矣。 我之銘旌, 書以大司憲, 不亦可乎?”

번역문:
공이 이미 동인(東人)¹²¹에게 크게 미움을 받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탓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시배(時輩)¹²²의 마음을 잃었으니 시배들이 반드시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차마 그들에게 쓰임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나의 명정(銘旌)¹²³에 ‘대사헌(大司憲)’이라고 쓰는 것이 또한 괜찮지 않겠는가?”

주석:
121. 동인(東人): 조선 선조 때 형성된 사림(士林)의 정치 세력. 김효원(金孝元)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서인(西人)과 대립했다. 김계휘는 서인으로 분류되거나 최소한 동인과는 대립적인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2. 시배(時輩): 당시의 사람들. 여기서는 동인 세력을 가리킨다.
123. 명정(銘旌):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등을 적어 상여(喪輿) 앞에 세우는 기(旗). 자신이 죽으면 대사헌을 지낸 것을 가장 중요한 이력으로 내세우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원문:
國家有宗系之誣, 久而未雪, 皇上雖有修改《會典》之命, 而未蒙頒降, 輿情鬱抑。 栗谷慨然請擇專對之才, 上允之。 朝廷以栗谷與公文章學識爲一代所推, 而栗谷經學不可一日不在左右, 竟以公應命。 上特使公自擇能文之士爲書狀、質正, 而拜辭之日, 解御衣衣之, 親執爵而勞其行, 實希世異數也。

번역문:
국가에 종계(宗系)의 무고(誣告)¹²⁴가 있어 오랫동안 설욕(雪辱)되지 못하였는데, 황상(皇上)¹²⁵께서 비록 《회전(會典)》¹²⁶을 수정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아직 반포(頒降)되지 않아 여정(輿情)¹²⁷이 울분하고 억눌려 있었다. 율곡(栗谷)이 개연(慨然)히 전대(專對)¹²⁸의 재능을 가진 이를 가릴 것을 청하자 상께서 윤허하셨다. 조정에서는 율곡과 공의 문장과 학식이 한 시대에 추앙받는 바이지만, 율곡은 경학(經學)으로 하루라도 (임금의) 좌우에 있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마침내 공으로 하여금 명(命)에 응하게 하였다. 상께서 특별히 공으로 하여금 스스로 글 잘하는 선비를 가려 서장관(書狀官)¹²⁹과 질정관(質正官)¹³⁰으로 삼게 하시고, 하직 인사를 올리는 날에는 어의(御衣)¹³¹를 벗어 입혀 주시고 친히 술잔을 잡고 그 길을 위로하시니, 실로 세상에 드문 특별한 대우(異數)였다.

주석:
124. 종계지무(宗系之誣):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사건. 조선 조정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오랫동안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25. 황상(皇上): 중국 황제. 당시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를 가리킨다.
126. 《회전(會典)》: 《대명회전(大明會典)》. 명나라의 국가 법전.
127. 여정(輿情): 세상 사람들의 여론이나 민심.
128. 전대(專對): 외국 사신에 대해 임금을 대신하여 홀로 응대하는 것. 외교적 수완과 담판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인물을 가리킨다.
129. 서장관(書狀官): 사신을 따라가는 종3품~종6품의 문관. 주로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130. 질정관(質正官): 사신의 자문에 응하거나 학문적인 문제를 담당하던 임시 관직.
131. 어의(御衣): 임금의 옷. 임금이 자신의 옷을 벗어 신하에게 입혀주는 것은 최고의 영예와 신임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원문:
公天稟超卓, 不拘小節, 容貌坦率, 不事檢束。 言語豪放, 間以詼諧, 而德量閎深, 恢然有不可涯者。 與栗谷先生、奇高峯大升爲道義交。 栗谷嘗稱“重晦學識該通, 德量恢弘, 可任經濟”, 屢以言于執政大臣, 而竟不能用, 識者恨之。 公雖不盡循下學規範, 而能先立其大者, 其操履見識, 自有人不可企及者。 臨事決疑, 率口發言, 動合古誼。 朝有大議論, 雖老師宿儒, 必讓公, 莫能或之先。

번역문:
공은 천품(天稟)이 뛰어나고 작은 예절(小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용모는 솔직하고 거리낌 없어(坦率) 몸가짐을 단속하는(檢束) 데 힘쓰지 않았다. 언어는 호방(豪放)하고 때로 해학(詼諧)을 섞었으나, 덕량(德量)¹³²이 넓고 깊어(閎深) 헤아릴 수 없는 바가 있었다. 율곡 선생(栗谷先生), 기고봉 대승(奇高峯大升)¹³³과 도의(道義)의 교유¹³⁴를 하였다. 율곡이 일찍이 “중회(重晦)는 학식이 널리 통하고 덕량이 넓고 커서 경제(經濟)¹³⁵를 맡길 만하다.”라고 칭찬하며 여러 차례 집정대신(執政大臣)에게 말하였으나, 끝내 등용되지 못하니 식자(識者)들이 한스러워했다. 공이 비록 하학(下學)¹³⁶의 규범을 다 따르지는 않았으나 능히 먼저 큰 것(大者)¹³⁷을 세웠으니, 그 지조와 행실(操履)과 견식(見識)은 자연히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바가 있었다. 일에 임하여 의문스러운 것을 결정할 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여도 행동이 옛 의리(古誼)에 부합하였다. 조정에 큰 의논이 있을 때 비록 노사(老師)나 숙유(宿儒)¹³⁸라도 반드시 공에게 양보하여, 감히 그보다 앞서는 이가 없었다.

주석:
132. 덕량(德量): 덕(德)과 도량(度量).
133. 기고봉 대승(奇高峯大升):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가리킨다. 호는 고봉(高峯).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이황(李滉)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으로 유명하다.
134. 도의교(道義交): 도(道)와 의(義)를 바탕으로 한 사귐. 학문과 덕행을 추구하는 군자(君子)들의 교제를 의미한다.
135. 경제(經濟):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 즉, 국가 경영 능력을 의미한다.
136. 하학(下學): 낮은 단계의 학문 또는 구체적인 실천 공부.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에서 온 말로, 일상적인 규범이나 예절 공부를 가리킬 수 있다.
137. 대자(大者): 큰 것. 근본적인 도리나 원칙을 의미한다. 즉, 지엽적인 규범보다는 근본적인 의리를 중시했음을 뜻한다.
138. 노사숙유(老師宿儒):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스승과 학식이 깊고 명망 있는 유학자.


원문:
平生不以家事經心, 只守先業, 不增一口之籍、數畝之莊, 常處朴陋之室。 至於衣服、飮食, 無少營爲, 案几什具, 一不收拾, 隨所遇而安焉。 姊氏與姊夫得心恙, 處事顚妄, 且欲專家財, 多行乖戾之事, 公盡從其所欲, 竟得其歡心焉。 幼時, 伯父庶尹公取而養之, 擬以爲後。 至于二十餘年, 而公開陳義理曰: “禮爲人後者必以支子, 國法亦然。 吾是吾家長子而出後, 則與矍相之所擯何異?” 庶尹公感悟而聽之。 然依國典, 服喪三年, 以報其養育之恩。

번역문:
평생 집안일(家事)에 마음을 쓰지 않고 다만 선대(先代)의 산업(産業)을 지킬 뿐, 한 사람의 노비 문서(一口之籍)¹³⁹나 몇 묘(畝)의 농장(莊)¹⁴⁰도 늘리지 않았으며, 항상 박루(朴陋)한 집에 거처하였다. 의복과 음식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영위(營爲)함이 없었으며, 책상(案), 안석(几), 집기(什具)¹⁴¹ 등을 하나도 수습하지 않고, 처하는 대로 편안히 여겼다. 누이(姊氏)와 매부(姊夫)가 심양(心恙)¹⁴²을 얻어 일을 처리함이 전도되고 망령되며 또한 집안 재물을 독차지하려 하여 괴려(乖戾)¹⁴³한 일을 많이 행하였으나, 공은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다 따름으로써 마침내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어릴 때 백부(伯父) 서윤공(庶尹公)¹⁴⁴이 데려다 길러서 후사(後嗣)로 삼으려 하였다. 20여 년에 이르러 공이 의리(義理)를 열어 말하였다. “예법에 남의 후사가 되는 자는 반드시 지자(支子)¹⁴⁵로 하며 국법 또한 그러합니다. 제가 이 집안의 장자(長子)로서 출후(出後)¹⁴⁶하면, 확상(矍相)¹⁴⁷이 배척한 바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서윤공이 감동하여 깨닫고 이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국전(國典)¹⁴⁸에 의거하여 3년 동안 복상(服喪)함으로써 그 양육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주석:
139. 일구지적(一口之籍): 한 식구의 호적. 여기서는 노비 한 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40. 수묘지장(數畝之莊): 몇 이랑의 농장. 작은 규모의 토지를 의미한다.
141. 안궤십구(案几什具): 책상, 안석(팔걸이 의자), 기타 여러 가구 및 집기.
142. 심양(心恙): 마음의 병. 정신 질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43. 괴려(乖戾): 사리에 어긋나고 성질이 비뚤어짐.
144. 서윤공(庶尹公): 서윤(庶尹) 벼슬을 지낸 백부. 서윤은 한성부(漢城府)의 종4품 관직이다.
145. 지자(支子): 맏아들(宗子) 이외의 아들.
146. 출후(出後): 다른 집의 양자(養子)로 들어가는 것.
147. 확상(矍相): 한(漢)나라 때 승상(丞相)을 지낸 위현(韋賢)을 가리킨다. 그는 아들 위관(韋寬)이 장자(長子)이면서 남의 후사가 되려 하자 예법에 어긋난다 하여 의절(義絕)하였다.
148. 국전(國典): 나라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가리킨다. 양부모(養父母)를 위해서도 3년 상을 입는 규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문:
公於人雖小善, 必揚而稱之, 其過失則必放過而不甚非之, 善善長而惡惡短。 所與交竝第一名流, 皆以才俊自喜, 而獨公好賢下士若飢渴。 苟有學行者, 則必與爲友, 誠心許與, 接引親賓, 門無停客。 有識者服其義, 不肖者懷其惠。

번역문:
공은 다른 사람에게 비록 작은 선(善)이라도 반드시 드러내어 칭찬하고, 그 과실(過失)은 반드시 너그러이 보아 넘겨 심하게 비난하지 않으니, 선한 것은 장려하고 악한 것은 막는 데 능하였다(善善長而惡惡短)¹⁴⁹. 더불어 교유하는 이들은 모두 제일의 명류(名流)로서 다 재주와 준수함으로 자부하였으나, 유독 공은 현자(賢者)를 좋아하고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기(下士)¹⁵⁰를 굶주리고 목마른 듯하였다. 진실로 학문과 행실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더불어 벗으로 삼아, 성심(誠心)으로 허여(許與)¹⁵¹하고 친척과 손님을 접인(接引)하여 문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식견 있는 자는 그 의(義)에 감복하고, 불초(不肖)한 자는 그 은혜를 마음에 품었다.

주석:
149. 선선장이악악단(善善長而惡惡短): 선(善)을 선(善)하게 여겨[좋아하여] 장려하고, 악(惡)을 악(惡)하게 여겨[미워하여] 막는다는 뜻. 맹자(孟子)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도자의 덕목 중 하나이다.
150. 하사(下士): 윗사람이 아랫사람이나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대하는 것.
151. 허여(許與):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임. 진심으로 대하고 사귐.


원문:
聰明邁倫, 眼力絶人, 看書人一行, 已過十行, 凡一經於目、一過於耳者, 終身不忘。 《左傳》列國事實、人名、地名, 最號繁絮難記, 而公少時一閱, 至老暸然。 自係我東以至天下之廣, 山川・道里・城邑・兵食之形勢、名實與夫法令典故、人物顯晦, 無不羅列心胸, 人有來問, 其答如響, 至曰此在某書幾卷幾板第幾行。 他人姓出族派, 亦皆存識, 人或問之, 則曰: “某是某人之子孫, 某是某人之祖先。” 有人偶得成廟朝官案, 歷指而問之, 則曰: “某是文, 某是武, 某是才, 某是不才, 今其子孫有某某。” 拈出其中二人曰: “此則不知, 必是卑微之人, 以雜術偶升堂上者也。” 後驗之則果然矣。 按節嶺南時, 列邑所上簿籍, 公一閱便了。 有營下典吏失一邑軍籍, 請符其縣更上, 公命吏執筆, 口授其名, 盡厥數, 一不爽焉。 又識見高明, 先處來物, 百不失一。 嘗曰: “某人執政, 則必用某人, 大爲國家害。” 又言: “某人之害雖深, 不若某人之害爲尤重。” 人有疑之者, 公曰: “不須多言, 過八九年, 君必見之矣。” 皆如合符節。

번역문:
총명함은 무리에서 뛰어났고 안력(眼力)¹⁵²은 남보다 월등하여, 책을 볼 때 남들이 한 행을 읽으면 이미 열 행을 지나갔으며, 무릇 한 번 눈에 익히거나 한 번 귀에 스친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좌전(左傳)》¹⁵³의 열국(列國) 사실(事實), 인명(人名), 지명(地名)은 가장 번잡하고 기억하기 어렵다고 일컬어지는데, 공은 젊었을 때 한 번 읽고 늙어서까지 명료하게 기억하였다. 우리나라로부터 천하의 넓은 곳에 이르기까지, 산천(山川)·도리(道里)·성읍(城邑)·병식(兵食)¹⁵⁴의 형세(形勢)와 명실(名實), 그리고 법령(法令)·전고(典故)·인물(人物)의 드러남과 숨음(顯晦)까지 마음속에 나열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사람이 와서 물으면 그 대답이 메아리 같았고, 심지어 “이는 아무 책 몇 권 몇 판(板) 몇째 줄에 있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다른 사람의 성씨(姓)가 나온 유래와 족파(族派)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어서, 사람이 혹 물으면 “아무개는 아무개의 자손이고, 아무개는 아무개의 조상이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성묘(成廟)¹⁵⁵ 때의 관안(官案)¹⁵⁶을 얻어 하나하나 가리키며 묻자, “아무개는 문관(文官)이고, 아무개는 무관(武官)이며, 아무개는 재주가 있고, 아무개는 재주가 없으며, 지금 그의 자손으로는 아무개가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중 두 사람을 집어내어 말하기를, “이들은 알지 못하는데, 반드시 비미(卑微)한 사람으로서 잡술(雜術)¹⁵⁷로 우연히 당상(堂上)¹⁵⁸에 오른 자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확인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영남(嶺南)을 안찰(按節)¹⁵⁹할 때 여러 고을에서 올린 부적(簿籍)을 공이 한 번 보고는 곧바로 파악하였다. 감영(營) 아래 전리(典吏)¹⁶⁰가 한 고을의 군적(軍籍)을 잃어버리고 해당 현(縣)에 부신(符信)을 보내 다시 올리도록 청하자, 공이 아전에게 명하여 붓을 잡게 하고는 입으로 그 이름을 불러주어 그 수를 다 채웠는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또한 식견이 높고 밝아 다가올 일을 미리 처리함에 백에 하나도 실수가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아무개가 집정(執政)하면 반드시 아무개를 쓸 것이니, 크게 국가의 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아무개의 해(害)가 비록 깊으나 아무개의 해가 더욱 심한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의심하는 자가 있자, 공이 말하였다. “모름지기 말을 많이 할 필요 없이, 8~9년이 지나면 그대가 반드시 이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부절(符節)을 맞춘 듯이 들어맞았다.

주석:
152. 안력(眼力):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능력. 통찰력.
153. 《좌전(左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역사를 기록한 책.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이 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해석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내용이 방대하고 복잡하여 기억하기 어려운 책으로 알려져 있다.
154. 병식(兵食): 군사와 식량.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의미한다.
155. 성묘(成廟):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을 가리킨다.
156. 관안(官案): 관원들의 명부.
157. 잡술(雜術): 기술(技術), 의술(醫術), 역술(譯術) 등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 이외의 분야의 기술.
158. 당상(堂上): 당상관(堂上官). 정3품 상계 이상의 품계를 가진 고위 관료.
159. 안절(按節): 관찰사(觀察使)나 안렴사(按廉使) 등이 관할 구역을 순행하며 민정을 살피는 것. 여기서는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를 가리킨다.
160. 전리(典吏):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 등에 소속된 아전.


원문:
戊辰間, 忽嘆曰: “洪曇爲吏曹判書, 金判書殆哉!” 所謂金判書, 卽公從叔父鎧也。 人問其故, 公曰:“洪與金判書極相親, 必引爲大憲。 爲大憲則必斥士類而自敗矣。” 金判書後果以大憲白上曰: “今日所謂士類, 幾爲己卯矣。” 擧朝驚駭, 竟以臺論被門黜。

번역문:
무진년(1568)¹⁶¹ 무렵에 홀연히 탄식하며 말하였다. “홍담(洪曇)¹⁶²이 이조판서가 되면 김 판서(金判書)가 위태롭겠구나!” 이른바 김 판서는 곧 공의 종숙부(從叔父) 김개(金鎧)¹⁶³이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였다. “홍담과 김 판서는 지극히 서로 친하니, 반드시 끌어들여 대헌(大憲)으로 삼을 것이다. 대헌이 되면 반드시 사류(士類)를 배척하여 스스로 패망할 것이다.” 김 판서가 뒤에 과연 대헌으로서 상에게 아뢰기를, “오늘날 이른바 사류는 거의 기묘년(己卯年)¹⁶⁴과 같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니, 온 조정이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마침내 대론(臺論)¹⁶⁵으로 문외출송(門黜)¹⁶⁶을 당하였다.

주석:
161. 무진년(戊辰年): 1568년(선조 1).
162. 홍담(洪曇, 1509-1576): 조선 중기의 문신.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63. 김개(金鎧): 김계휘의 종숙부. 대사헌을 지냈다.
164. 기묘년(己卯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해를 가리킨다. 당시 사림(士林) 세력이 훈구파에게 크게 탄압받았다. 김개가 현재의 사류들을 기묘사화 때의 사림에 비유하며 비판했음을 의미한다.
165. 대론(臺論): 대간(臺諫)의 탄핵이나 비판.
166. 문출(門黜): 문외출송(門外黜送). 관직에서 파면하고 도성 밖으로 추방하는 것.


원문:
少與朴啓賢、李俊民、李遴談話於槐院, 諸公謂曰: “試言吾等之前程。” 公笑曰: “君沃、子修爲兵曹判書, 而子修後於君沃矣。” 君沃, 啓賢字; 子修, 俊民字也。 又曰: “叔膺則與魚瑄之同矣。” 叔膺, 李遴字; 瑄之, 魚瑄字也。 其後朴與李先後爲兵判, 魚與李皆以守陵官, 陞爲判書。 李心甚服之, 至老而言之不已。

번역문:
젊어서 박계현(朴啓賢)¹⁶⁷, 이준민(李俊民)¹⁶⁸, 이린(李遴)¹⁶⁹과 괴원(槐院)¹⁷⁰에서 담화(談話)하는데, 제공(諸公)들이 말하였다. “시험 삼아 우리들의 전정(前程)을 말해보시오.”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군옥(君沃)과 자수(子修)는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될 것이나, 자수(子修)는 군옥(君沃)보다 뒤질 것이오.” 군옥(君沃)은 계현(啓賢)의 자(字)이고, 자수(子修)는 준민(俊民)의 자이다. 또 말하였다. “숙응(叔膺)은 어선지(魚瑄之)와 같을 것이오.” 숙응(叔膺)은 이린(李遴)의 자이고, 선지(瑄之)는 어선(魚瑄)¹⁷¹의 자이다. 그 뒤에 박계현과 이준민은 선후로 병조판서가 되었고, 어선과 이린은 모두 수릉관(守陵官)¹⁷²에서 판서(判書)로 승진하였다. 이린은 마음속으로 매우 감복하여 늙어서까지 그 일을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주석:
167. 박계현(朴啓賢, 1524-158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옥(君沃).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168. 이준민(李俊民, 1524-159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수(子修).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169. 이린(李遴, 1525-158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응(叔膺). 수릉관을 거쳐 판서에 이르렀다.
170.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의 별칭.
171. 어선(魚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선지(瑄之). 수릉관을 거쳐 판서에 이르렀다.
172. 수릉관(守陵官): 왕릉(王陵)을 지키고 관리하는 임시 관직. 종종 한직(閑職)으로 여겨졌으나, 이를 거쳐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문:
公與沈靑陽義謙比屋, 情分甚厚。 自戊寅以後, 沈甚孤危, 詆之者取顯仕, 救之者斥不容。 如李山海, 最所相好者, 而匿其往還之迹, 反倒戈以擊之。 公歎曰: “沈在朝行事, 別無罪過, 而有扶護士林之功, 何可以人言而有間於平日乎?” 待之如初。 此雖於公爲末節, 而其不以榮辱動其心可見矣。

번역문:
공은 심청양 의겸(沈靑陽義謙)¹⁷³과 이웃하여 살면서 정부(情分)가 매우 두터웠다. 무인년(1578) 이후로 심의겸이 매우 고립되고 위태로워져서, 그를 비방하는 자는 드러나게 벼슬을 얻고 그를 구원하는 자는 배척되어 용납되지 못하였다. 이산해(李山海)¹⁷⁴ 같은 이는 가장 서로 좋아하던 자였으나, 그 왕래한 흔적을 숨기고 도리어 창을 거꾸로 겨누어(倒戈)¹⁷⁵ 그를 공격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심의겸이 조정에 있으면서 행한 일에 별다른 죄과가 없고 사림(士林)을 부호(扶護)한 공이 있는데, 어찌 남의 말 때문에 평소의 관계에 틈이 생기게 할 수 있겠는가?” 그를 대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것이 비록 공에게는 지엽적인 일(末節)이지만, 그 영욕(榮辱)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주석:
173. 심청양 의겸(沈靑陽義謙):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을 가리킨다. 호는 청양(靑陽), 손암(巽庵) 등.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동인(東人)과 극심하게 대립했다. 무인년(1578) 이후 정치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174.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東人)의 영수로서 서인과 대립했다. 처음에는 심의겸과 가까웠으나 후에 정치적으로 갈라섰다.
175. 도과(倒戈): 창을 거꾸로 겨눔. 동지(同志)를 배반하고 적과 함께 공격하는 것을 비유한다.


원문:
朴思菴簡潔少許可, 而公沒後言及公, 必亟稱而歎之曰: “重晦少與金重遠齊名。 重遠亦氣槪脫凡, 而重晦則學識高邁, 處事明達, 實是當代第一人物, 而止於斯, 寧不爲國深痛乎?” 安判書季弘亦每追思公曰: “重晦, 吾儕中超出人物也。 昔者遇事而問議焉, 則後未嘗有悔。” 尹月汀根壽嘗言: “庚辰、辛巳間, 栗谷欲以公更擬三司長官之望, 則柳相成龍止之曰: ‘姑徐可也。’ 未幾, 公下世矣。” 又曰: “戊寅, 公爲大司憲, 洪可臣爲特平, 洪發論欲劾吏曹佐郞趙瑗, 公不能止, 將呈告遞職。 李山海來見公, 力勸出仕。 李旣去, 公謂人曰: ‘此人如老狐, 不知此後幾番捉了多少人也。’” 又曰: “丁丑、戊寅間, 歷訪栗谷于花石亭。 栗谷謂余曰: ‘今也相位有闕, 時論皆歸子膺、季眞。 然必欲求眞宰相, 則重晦其人也。’ 嗚呼! 栗谷眞公知己也哉!”【竝公子長生撰行狀。】

번역문:
박사암(朴思菴)¹⁷⁶은 간결(簡潔)하고 남을 허여(許可)함이 적었으나, 공이 몰(沒)한 후 공에 대해 언급할 때면 반드시 극구 칭찬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중회(重晦)는 젊어서 김중원(金重遠)¹⁷⁷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중원 또한 기개(氣槪)가 범상함을 벗어났으나, 중회는 학식이 높고 뛰어나며 일 처리가 밝고 통달하여 실로 당대의 제일가는 인물이었는데, 이에 그쳤으니 어찌 나라를 위해 깊이 통탄하지 않겠는가?” 안 판서(安判書) 계홍(季弘)¹⁷⁸ 또한 매번 공을 추모하며 말하였다. “중회는 우리들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었다. 옛날 일을 당하여 그에게 물어 의논하면 뒤에 후회하는 일이 있지 않았다.” 윤월정 근수(尹月汀根壽)¹⁷⁹가 일찍이 말하였다. “경진년(1580)과 신사년(1581) 사이에 율곡이 공을 다시 삼사(三司)¹⁸⁰ 장관(長官)의 물망(望)에 올리고자 하였는데, 유 상국(柳相國) 성룡(成龍)¹⁸¹이 이를 말리며 ‘우선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하세(下世)하였다.” 또 말하였다. “무인년(1578)에 공이 대사헌(大司憲)이었고 홍가신(洪可臣)¹⁸²이 지평(持平)이었는데, 홍가신이 발론(發論)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 조원(趙瑗)을 탄핵하고자 하니 공이 막지 못하고 장차 정고(呈告)¹⁸³하고 체직(遞職)되려 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와서 공을 보고 힘써 출사(出仕)하기를 권하였다. 이산해가 떠나자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늙은 여우 같으니, 이 뒤로 몇 번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잡아들일지 알 수 없다.’” 또 말하였다. “정축년(1577)과 무인년(1578) 사이에 화석정(花石亭)¹⁸⁴에서 율곡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율곡이 나에게 말하였다. ‘지금 상위(相位)¹⁸⁵가 비어 시론(時論)이 모두 자응(子膺)¹⁸⁶과 계진(季眞)¹⁸⁷에게 돌아가지만, 반드시 진정한 재상(宰相)을 구하고자 한다면 중회(重晦)가 바로 그 사람이다.’ 아! 율곡이야말로 진실로 공의 지기(知己)로구나!”【이상은 공의 아들 장생(長生)¹⁸⁸이 지은 행장(行狀)¹⁸⁹에서 인용하였다.】

주석:
176. 박사암(朴思菴): 박순(朴淳)을 가리킨다. 사암(思庵)은 그의 호이다.
177. 김중원(金重遠): 미상. 김계휘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178. 안 판서(安判書) 계홍(季弘): 안자유(安自裕, 1517-1587)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 자는 계홍(季弘)이며 판서를 역임했다.
179. 윤월정 근수(尹月汀根壽): 윤근수(尹根壽, 1537-1616)를 가리킨다. 호는 월정(月汀).
180.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아울러 이르는 말. 조선 시대 언론 기능을 담당하던 핵심 기관이다.
181. 유 상국(柳相國) 성룡(成龍):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가리킨다. 호는 서애(西厓). 영의정을 역임하여 상국(相國)이라 칭했다. 동인의 영수였다.
182. 홍가신(洪可臣, 1541-1615): 조선 중기의 문신.
183. 정고(呈告): 관원이 병이나 사고(事故)로 출사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사유를 보고하는 것. 여기서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의사 표시로 해석될 수 있다.
184. 화석정(花石亭):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에 있는 정자. 이이(李珥)가 자주 찾던 곳이다.
185. 상위(相位): 재상(宰相)의 지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자리를 의미한다.
186. 자응(子膺): 유성룡(柳成龍)의 자(字)로 알려져 있으나, 다른 기록에는 자를 이견(而見)으로 전한다. 여기서는 유성룡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87. 계진(季眞): 미상. 당시 재상 물망에 올랐던 인물로 추정된다.
188. 장생(長生): 김장생(金長生, 1548-1631). 김계휘의 아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예학(禮學)의 대가이다.
189.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자, 호, 본관, 생년월일, 세계(世系), 행적, 업적 등을 기록한 글.


원문:
先王朝, 金公繼輝博學能文, 負一時重望, 而官至參判。 孫公軾別無履歷聲稱, 而驟陞嘉善。 金公謂人曰: “孫軾亦嘉善, 吾亦嘉善。” 聞者大笑。 蓋金公非媢嫉者, 乃慨歎之言也。【《芝峯類說》。】

번역문:
선조(先王朝)¹⁹⁰ 때 김공(金公) 계휘(繼輝)는 학식이 넓고 글에 능하여 한 시대의 중망(重望)을 지녔으나, 관직은 참판(參判)¹⁹¹에 이르렀다. 손공(孫公) 식(軾)¹⁹²은 별다른 이력(履歷)이나 명성(聲稱)이 없었는데 갑자기 가선대부(嘉善)¹⁹³에 올랐다. 김공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손식도 가선이요, 나도 가선이다.” 듣는 자들이 크게 웃었다. 대개 김공은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가 아니라, 바로 개탄(慨歎)하는 말이었던 것이다.【《지봉유설(芝峯類說)》¹⁹⁴에서 인용】

주석:
190. 선왕조(先王朝): 선조(宣祖) 시대를 가리킨다.
191. 참판(參判): 육조(六曹)의 버금 벼슬. 종2품. 김계휘는 최종 관직이 대사헌(종2품)이었고 사후에 이조판서(정2품)로 추증되었으므로, 이 기록은 다소 부정확하거나 그의 생전 최고 관직 중 하나를 언급하는 것일 수 있다.
192. 손공(孫公) 식(軾): 손식(孫軾). 조선 중기의 문신.
193. 가선(嘉善):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품계이다.
194.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지봉(芝峯)은 이수광의 호이다. 이 일화는 이수광이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박응남(朴應男)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朴應男
字柔仲, 號退菴, 又號南逸, 潘南人。 嘉靖丁亥生。 壬子司馬, 明宗八年癸丑登第。 選入史局, 賜暇湖堂, 歷吏郞、舍人、直提學, 官至大司憲。 壬申卒, 年四十六。

번역문:
박응남(朴應男)
자는 유중(柔仲), 호는 퇴암(退菴), 또 호는 남일(南逸)이며, 반남(潘南) 사람이다.¹ 가정(嘉靖)² 정해년(丁亥年, 1527)에 태어났다. 임자년(1552)에 사마시(司馬試)³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8년 계축년(155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⁴ 사국(史局)⁵에 선발되어 들어가고, 호당(湖堂)⁶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⁷하였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⁸, 사인(舍人)⁹, 직제학(直提學)¹⁰을 역임하고, 관직은 대사헌(大司憲)¹¹에 이르렀다. 임신년(1572)에 졸(卒)¹²하니, 나이 46세였다.

주석:

  1. 반남인(潘南人): 본관(本貫)이 반남 박씨(潘南朴氏)임을 나타낸다.
  2. 가정(嘉靖):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3.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소과(小科)라고도 한다.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나 하급 관리가 될 자격을 얻었다.
  4. 등제(登第): 문과(文科)에 급제한 것을 가리킨다. 대과(大科)라고도 하며, 주로 고위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5.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관청. 여기서는 예문관(藝文館) 또는 춘추관(春秋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 호당(湖堂): 조선 시대에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동호(東湖)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7.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유능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여기에 선발되는 것은 큰 영예였다.
  8. 이조 정랑(吏曹正郞): 육조(六曹)의 하나인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였다.
  9.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 주로 문한(文翰, 문서 작성)을 담당했으며, 예문관(藝文館)이나 승정원(承政院) 등에 속했다.
  10.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학문 연구와 경연(經筵) 등을 담당하는 중요한 학자 관료였다.
  11.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종2품 으뜸 벼슬.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탄핵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등 감찰 기능을 총괄했다.
  12. 졸(卒): 벼슬아치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

원문:
幼不喜狎弄, 儼然若成人, 人已知其爲遠器。 甫八歲而孤, 服闋, 隨大夫人至都下寺正公館, 柳斯文祖訒使敎公兄弟, 日有課程。 稍長, 游於成東洲悌元、李履素仲虎之門, 遂自力于學, 不專以科擧爲務。 圭菴宋公麟壽適到東洲第, 見公歎曰: “司諫可謂有子矣。” 弱冠, 學益成, 游泮宮, 屢魁其試, 聲聞藹蔚, 尤以次退之《南山》詩、《弔伍子胥》文稱于時。

번역문:
어려서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엄연(儼然)히 어른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미 그가 큰 인물(遠器)¹³이 될 것을 알았다. 겨우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상복(喪服) 입는 기간을 마치자(服闋)¹⁴ 대부인(大夫人)¹⁵을 따라 도성 아래 시정 공(寺正公)¹⁶의 집에 이르렀는데, 유학자[斯文]¹⁷ 유조인(柳祖訒)¹⁸이 공의 형제를 가르치게 되어 날마다 과정(課程)이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¹⁹과 이소(履素) 이중호(李仲虎)²⁰의 문하(門下)에서 노닐며 마침내 학문에 스스로 힘써 오로지 과거(科擧)만을 일삼지는 않았다. 규암(圭菴) 송공(宋公) 인수(麟壽)²¹가 마침 동주(東洲)의 집에 왔다가 공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사간(司諫)²²께서는 아들을 두었다고 할 만하다.” 약관(弱冠)²³에 학문이 더욱 이루어져 반궁(泮宮)²⁴에서 노닐며 여러 차례 그 시험에서 장원(魁)하여 명성(聲聞)이 자자하였는데, 특히 차퇴지(次退之)의 〈남산(南山)〉 시와 〈오자서(伍子胥)를 조문하는 글[弔伍子胥]〉²⁵로 당시에 칭송받았다.

주석:
13. 원기(遠器): 큰 그릇. 장래에 큰 인물이 될 재목을 비유한다.
14. 복결(服闋): 부모상(父母喪) 등의 상기(喪期)를 마치는 것.
15.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박응남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16. 시정 공(寺正公): 시정(寺正) 벼슬을 지낸 분. 박응남의 아버지 박소(朴紹)를 가리킨다. 박소는 돈녕부(敦寧府) 시정(종3품)을 지냈다.
17. 사문(斯文): 유학자(儒學者) 또는 유학(儒學) 자체를 높여 이르는 말.
18. 유조인(柳祖訒, 1513-157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숙(士淑).
19. 성제원(成悌元, 1497-155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동주(東洲).
20. 이중호(李仲虎, 1512-155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이소(履素).
21. 송인수(宋麟壽, 1489-154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규암(圭菴).
22. 사간(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장관. 여기서는 박응남의 아버지 박소(朴紹)가 역임한 벼슬을 가리킨다.
23.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를 가리킨다.
24.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25. 차퇴지(次退之)의 〈남산(南山)〉 시와 〈오자서(伍子胥)를 조문하는 글[弔伍子胥]〉: 차퇴지(次退之)는 당(唐)나라 문장가 한유(韓愈)의 자(字)이다. 〈남산시(南山詩)〉와 〈조오자서문(弔伍子胥文)〉은 한유의 유명한 작품으로, 당시 문인들이 이를 본받아 글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박응남이 이 제목들로 지은 시와 문장이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원문:
拜直提學。 時群小耽耽善類, 顧亡以發。 會應敎朴公淳議林百齡諡, 宜贈以恭昭。 尹元衡謂“百齡故元勳, 而諡無‘忠’字, 意可知”, 乃訐之。 文定王后震怒, 命朴公詔獄, 其禍將波及士林。 公爲之周旋得宜, 事遂已。

번역문: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다. 이때 소인배 무리[群小]가 선비들[善類]을 호시탐탐 노리면서도 일을 일으킬 계기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응교(應敎)²⁶ 박공(朴公) 순(淳)²⁷이 임백령(林百齡)²⁸의 시호(諡號)를 논의하며 공소(恭昭)라는 시호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윤원형(尹元衡)²⁹이 “백령은 옛 원훈(元勳)³⁰인데 시호에 ‘충(忠)’ 자가 없으니 그 의도를 알 만하다”라고 하며 마침내 그를 헐뜯어 고하였다. 문정왕후(文定王后)³¹가 크게 노하여 박공(朴公)을 조옥(詔獄)³²에 가두도록 명하니, 그 화(禍)가 장차 사림(士林)³³에 미치려 하였다. 공이 이를 잘 주선(周旋)하여 원만하게 해결하니 일이 마침내 종결되었다.

주석:
26.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의 정4품 관직.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담당했다.
27. 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사암(思菴). 박응남과 교유했다.
28. 임백령(林百齡, 1498-1546): 조선 중기의 문신. 윤원형 등과 함께 소윤(小尹) 세력을 이루었다.
29. 윤원형(尹元衡, 1503-1565): 조선 중기의 외척, 권신.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30. 원훈(元勳): 으뜸가는 공신. 임백령은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31.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이자 명종(明宗)의 어머니. 명종 즉위 후 수렴청정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32. 조옥(詔獄): 임금의 명으로 죄인을 가두고 심문하던 옥(獄). 주로 의금부(義禁府)에서 관장했으며, 중대한 정치범을 다루었다.
33. 사림(士林): 조선 시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학자 관료 집단. 주로 지방에 기반을 두고 학문과 교육에 힘쓰다가 중앙 정치에 진출했다.


원문:
拜大司諫, 劾李樑專擅之罪。 初, 樑夤緣戚里, 市寵貪權, 無所不至, 淸議鄙之。 及秉銓衡, 氣勃勢張, 乃引李戡爲大司憲, 尹百源爲司諫, 遂誣一時士類, 謂假托爲善, 實訕國政, 將以次第翦去。 而尤忌公, 先致慇懃意, 冀一過門, 門長者亦皆言: “大夫人年高, 宜少爲屈。” 公終不往。 樑蓄憾彌深, 首書名怨籍, 公聞之, 怡然不爲變。 至是, 與大司憲奇大恒悉陳其罪, 請遠竄, 竝論支黨有差, 明廟卽允許。 士林爲之增氣。

번역문:
대사간(大司諫)³⁴에 제수되어 이량(李樑)³⁵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 죄를 탄핵하였다. 처음에 이량이 외척(戚里) 관계를 빌미로 연줄을 만들어 총애를 구하고 권력을 탐하여 못 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청의(淸議)³⁶가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그가 전형(銓衡)³⁷을 잡게 되자 기세가 드세지고 세력이 커져서, 마침내 이감(李戡)³⁸을 끌어들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삼고 윤백원(尹百源)³⁹을 사간(司諫)으로 삼아, 마침내 한 시대의 사림(士類)을 무고(誣告)하여 ‘선을 행하는 체 거짓으로 꾸미면서 실제로는 국정(國政)을 비방한다’고 말하며 장차 차례로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면서 특히 공을 꺼려 먼저 은근한 뜻을 보여 한 번 자기 집 문을 방문하기를 바랐고, 문하(門下)의 연장자들도 모두 말하기를 “대부인(大夫人)께서 연세가 높으시니 마땅히 조금 굽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끝내 가지 않았다. 이량이 원한을 품음이 더욱 깊어져 맨 먼저 원망하는 대상의 명부[怨籍]에 이름을 적었는데, 공은 이를 듣고도 태연(怡然)히 동요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헌 기대항(奇大恒)⁴⁰과 함께 그의 죄를 모두 진술하여 먼 곳으로 유배 보낼 것[遠竄]을 청하고, 아울러 그 일당[支黨]도 차등을 두어 죄를 논할 것을 청하니, 명종(明廟)께서 즉시 윤허하셨다. 사림(士林)이 이로 인해 기세를 얻었다.

주석:
34.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으뜸 벼슬.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백관에 대한 탄핵을 주도했다.
35. 이량(李樑, 1519-1563): 조선 중기의 외척, 권신.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부이다. 1563년(명종 18) 사림 세력을 제거하려다 기대항, 박응남 등의 탄핵을 받아 몰락했다.
36. 청의(淸議): 맑은 논의. 사림(士林)과 같이 바른 도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공론(公論)을 가리킨다.
37. 전형(銓衡): 저울대와 저울추. 인재를 헤아려 등용하는 권한, 즉 인사권(人事權)을 비유한다. 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판서(判書)가 담당했다.
38. 이감(李戡, ?-?): 조선 중기의 문신. 이량의 심복이었다.
39. 윤백원(尹百源, ?-1563): 조선 중기의 문신. 이량의 심복이었다.
40. 기대항(奇大恒, 1519-156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존재(存齋).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이량의 전횡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박응남과 교유했다.


원문:
明廟猝有疾, 迨大漸之夕, 而領議政李公浚慶尙未及入闕。 公手爲書, 以宋朝文彦博直宿禁中故事責之, 李公大驚卽至, 是夜受顧命。 當是時, 詔使檢討許國、給事中魏時亮已壓境, 宣廟以旁支入承大統, 國勢扤捏, 機務轇轕, 人不知所措。 而公方在政院, 旣分掌禮科, 復兼察知申之任, 遇事處變, 上爭下規, 曲盡情禮。 及陪上迎詔使于郊外, 兩使聳歎不已曰: “國王以如彼妙年, 動必中禮, 得此賢君, 豈非東方之福?” 是蓋宣廟禮敬天至, 足以動華人。 乃其臨時稟啓揖讓進退, 無少違者, 大抵公之力也。

번역문:
명종(明廟)께서 갑자기 병환이 나시어 병이 위독해진(大漸)⁴¹ 날 저녁에 이르렀는데도 영의정(領議政)⁴² 이공(李公) 준경(浚慶)⁴³은 아직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공이 직접 글을 써서 송(宋)나라 조정의 문언박(文彦博)이 금중(禁中)에서 직숙(直宿)했던 고사⁴⁴를 들어 그를 책망하니, 이공(李公)이 크게 놀라 즉시 이르러 이날 밤에 고명(顧命)⁴⁵을 받았다. 이때 마침 조사(詔使)⁴⁶인 검토(檢討)⁴⁷ 허국(許國)⁴⁸과 급사중(給事中)⁴⁹ 위시량(魏時亮)⁵⁰이 이미 국경에 와 있었고, 선조(宣廟)⁵¹께서는 방계(旁支)로서 대통(大統)⁵²을 이어받아 나라 형세가 위태롭고 어지러우며(扤捏) 기밀 사무가 뒤얽혀(轇轕)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공이 마침 정원(政院)⁵³에 있으면서 이미 예과(禮科)⁵⁴를 나누어 맡고 다시 지신사(知申)⁵⁵의 임무까지 겸하여 살피면서, 일을 당하여 변화에 대처함에 위로는 (임금께) 아뢰어 바로잡고 아래로는 (동료나 하급자를) 타이르며 실정과 예법[情禮]을 다하였다. 상(上)을 모시고 교외(郊外)에서 조사(詔使)를 맞이함에 이르러서는 두 사신이 놀라 감탄하며 마지않기를 “국왕께서 저토록 젊은 나이에 행동이 반드시 예(禮)에 맞으니, 이러한 현명한 군주를 얻은 것이 어찌 동방(東方)의 복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선조(宣廟)께서 예를 공경함이 하늘처럼 지극하여 족히 중국 사람[華人]을 감동시킬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그때 여쭈어 아뢰고[稟啓] 읍(揖)하고 사양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揖讓進退] 절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던 것은 대체로 공의 힘이었다.

주석:
41. 대점(大漸): 병이 매우 위독하여 죽음에 이름. 임금이나 왕족의 위독한 병세를 가리킬 때 쓴다.
42. 영의정(領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으뜸 벼슬. 삼정승(三政丞) 중 최고위직이다.
43.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동고(東皐), 남당(南堂). 명종 말~선조 초에 영의정을 지냈다.
44. 송조 문언박 직숙 금중 고사(宋朝文彦博直宿禁中故事): 송(宋) 인종(仁宗)이 후사 없이 위독해지자 재상 문언박(文彦博)이 궁중에 숙직하며 후계자 영립 등 중대사를 처리했던 고사를 가리킨다. 명종 승하 시 영의정 이준경이 즉시 입궐하여 국정 공백을 막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45. 고명(顧命): 임금이 임종 시에 후사(後嗣)나 뒷일을 부탁하는 명령. 또는 그 명령을 받은 신하.
46. 조사(詔使): 황제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는 사신. 여기서는 명(明)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선조의 즉위를 승인(고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47. 검토(檢討): 명(明)나라 한림원(翰林院)의 관직.
48. 허국(許國, 1527-1598): 명나라의 문신. 자는 유공(維功).
49. 급사중(給事中): 명나라 육과(六科: 이, 호, 예, 병, 형, 공)에 속했던 정7품 관직. 황제의 잘못을 간하거나 백관을 규찰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50. 위시량(魏時亮): 명나라의 문신.
51. 선조(宣廟): 조선의 제14대 왕(재위 1567-1608). 이름은 이연(李昖).
52. 방지입승대통(旁支入承大統): 왕위 계승에서 직계(直系)가 아닌 방계(傍系) 혈족이 왕통(王統)을 이어받음. 선조는 중종의 서손자(덕흥대원군의 아들)로, 아들이 없던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53.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비서 기관이다.
54. 예과(禮科): 승정원의 업무 분장 중 하나. 예조(禮曹)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55. 지신(知申): 지신사(知申事). 고려 말, 조선 초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의 옛 이름. 왕명 출납을 총괄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박응남이 당시 승정원 승지로서 도승지의 임무까지 겸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復長諫院, 大行王發引, 禮官議以爲: “因山日尙遠, 宜令從官還都, 及期以出。” 又議: “虞祭亞、終獻, 其間稍久, 宜自上設幕次少休。” 公啓曰: “惟大行王在位二十年, 仁深德厚, 擧國臣庶, 孰不被其恩澤? 而一朝弓劍遽遺, 群臣攀號悲痛莫及。 況當今日, 欲使梓宮獨留於喬山風露之地, 其爲臣子者乃敢偃然還處於廈屋, 是豈可忍爲? 而亦豈有是理哉? 請勿令從官還都。 虞祭時幕次, 蓋慮玉體勞動而設也。 然竊伏念奠獻之間, 儀節無多, 祭享重事, 不宜苟簡。 況當嗣服之初, 宜從禮制, 以服民心。 請勿許出休。” 答曰: “所啓甚當。” 禮官議非是, 其允之。 時論莫不歎賞, 至或有讀之掩涕者。

번역문:
다시 간원(諫院)⁵⁶의 수장(대사간)이 되었다. 대행왕(大行王)⁵⁷의 발인(發引)⁵⁸ 때 예관(禮官)⁵⁹이 의논하기를 “산릉(山陵)에 모시는 날(因山日)이 아직 멀었으니 마땅히 시종하는 관리[從官]들을 도성으로 돌려보냈다가 기일이 되면 나오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우제(虞祭)⁶⁰의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은 그 사이가 조금 오래 걸리니, 마땅히 상(上)께서 막차(幕次)⁶¹에 나가 잠시 쉬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아뢰었다. “오직 대행왕께서 재위 20년에 인(仁)이 깊고 덕(德)이 두터우시어 온 나라 신하와 백성[臣庶] 중에 누가 그 은택을 입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궁검(弓劍)⁶²을 갑자기 남기시니 여러 신하들이 울부짖으며 슬퍼함[攀號]⁶³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오늘날 재궁(梓宮)⁶⁴을 홀로 교산(喬山)⁶⁵의 비바람 맞는 땅에 머물게 하려 하는데, 그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편안히 돌아가 큰 집[廈屋]에 거처하겠습니까? 이를 어찌 차마 할 수 있으며, 또한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시종하는 관리들을 도성으로 돌려보내지 마소서. 우제(虞祭) 때의 막차(幕次)는 대개 옥체(玉體)⁶⁶의 노고를 염려하여 설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건대 제물 바치고 술잔 올리는[奠獻] 사이의 의식 절차는 많지 않으며, 제향(祭享)은 중대한 일이니 구차하고 간략하게[苟簡] 해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상을 이으신[嗣服] 초기이니 마땅히 예제(禮制)를 따라 백성의 마음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청컨대 나가서 쉬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답하기를 “아뢴 바가 매우 마땅하다”라고 하고, 예관(禮官)의 의논이 옳지 않다며 이를 윤허하였다. 당시의 여론[時論]이 감탄하고 칭송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그 글을 읽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다.

주석:
56. 간원(諫院): 사간원(司諫院)의 별칭.
57. 대행왕(大行王): 임금이 승하(昇遐)한 후 시호(諡號)를 정하기 전까지 부르는 칭호. 여기서는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58. 발인(發引):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떠나는 절차.
59. 예관(禮官): 예조(禮曹)의 관리 또는 의례를 담당하는 관리.
60. 우제(虞祭): 장례 후 처음 지내는 제사.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가 있으며, 혼령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지낸다. 아헌(亞獻)은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 종헌(終獻)은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61. 막차(幕次): 장례나 제사 때 상주(喪主) 등이 잠시 쉬거나 머무는 임시 막사.
62. 궁검(弓劍): 활과 칼. 임금이 생전에 쓰던 물건을 뜻하며, 임금의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63. 반호(攀號): 관(棺)이나 상여를 붙잡고 울부짖음.
64.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후의 관(棺)을 높여 부르는 말.
65. 교산(喬山): 높고 큰 산. 중국 황제(黃帝)가 묻혔다는 교산(橋山)을 연상시켜 왕릉이 있는 곳을 비유하기도 한다.
66. 옥체(玉體): 임금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새로 즉위한 선조(宣祖)의 몸을 가리킨다.


원문:
還長銀臺。 宣廟初御經筵, 進講《蔡氏書傳》, 公遂進曰: “筵臣請講是書, 實非偶然計。 第聖學工程, 自有次第。 先讀《大學》, 以立其規摹; 次及《論》、《孟》, 以究其蘊奧, 要以統會歸趣於《中庸》, 則尺度權衡, 無不各有定理。 然後進講經典, 兼讀《大學衍義》爲當, 仍達修己治人之要, 本末明備。” 復陳列聖好學成就之效曰: “今內藥房, 卽古之集賢殿也。 臣聞文廟與諸學士討論日昃, 或乘月步至直廬相難, 至夜深不倦。 以此諸臣朝退不敢解帶, 其勤學好賢, 千載所罕。 伏願殿下, 深體此意, 日與儒臣討論, 以進聖學。” 後上改講《大學》, 其次第, 一視公所進言。

번역문:
은대(銀臺)⁶⁷의 수장(도승지)으로 돌아왔다. 선조(宣廟)께서 처음 경연(經筵)⁶⁸에 나아가 《채씨서전(蔡氏書傳)》⁶⁹을 진강(進講)⁷⁰하자, 공이 마침내 나아가 아뢰었다. “경연 신하[筵臣]가 이 책을 강론하기를 청한 것은 실로 우연한 계획이 아닙니다. 다만 성학(聖學)⁷¹의 공정(工程)에는 스스로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대학(大學)》을 읽어 그 규모(規摹)를 세우고, 다음으로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에 미쳐 그 깊은 뜻[蘊奧]을 궁구하며, 요점은 《중용(中庸)》에서 통합하여 귀결시키면 척도(尺度)와 권형(權衡)⁷²이 각각 정해진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경전(經典)을 진강하고 겸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⁷³를 읽는 것이 마땅하며, 이어서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修己治人] 요체를 통달하면 근본과 말단[本末]이 분명하게 갖추어질 것입니다.” 다시 역대 성군(聖君)들이 학문을 좋아하여 성취한 효과를 진술하며 아뢰었다. “지금의 내약방(內藥房)⁷⁴은 바로 옛날의 집현전(集賢殿)⁷⁵입니다. 신이 듣건대 문묘(文廟)⁷⁶께서 여러 학사(學士)들과 해가 기울도록 토론하시고, 혹은 달밤에 걸어서 직려(直廬)⁷⁷에 이르러 서로 질의하며 밤 깊도록 게을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조회에서 물러나 감히 허리띠를 풀지 못하였으니, 그 학문에 힘쓰고 현명한 이를 좋아함은 천 년 동안 드문 일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뜻을 깊이 체득하시어 날마다 유신(儒臣)들과 토론하여 성학(聖學)을 진전시키소서.” 뒤에 상(上)께서 《대학(大學)》으로 바꾸어 강론하게 하셨는데, 그 차례는 한결같이 공이 아뢴 말을 따랐다.

주석:
67.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68.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고 국정(國政)을 논의하던 자리.
69. 《채씨서전(蔡氏書傳)》: 송(宋)나라 채침(蔡沈)이 주희(朱熹)의 설을 바탕으로 《서경(書經)》을 주석한 책. 《서전(書傳)》 또는 《서집전(書集傳)》이라고도 한다.
70. 진강(進講): 경연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경서(經書)나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것.
71. 성학(聖學): 성인(聖人)의 학문. 특히 임금이 배우고 익혀야 할 제왕(帝王)의 학문을 가리킨다.
72. 척도권형(尺度權衡): 자, 저울대, 저울추. 사물을 재거나 판단하는 기준, 표준을 비유한다.
73. 《대학연의(大學衍義)》: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 8조목(條目)에 관한 경전과 역사서의 내용을 뽑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편찬한 책. 제왕학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74. 내약방(內藥房): 궁궐 내에 약을 보관하고 조제하던 곳.
75. 집현전(集賢殿): 조선 세종(世宗) 때 설치된 학문 연구 및 정책 자문 기관.
76. 문묘(文廟): 세종(世宗)의 묘호(廟號)는 세종이지만, 학문을 숭상하고 집현전을 통해 문치를 크게 일으켰으므로 문종(文宗)처럼 문(文) 자를 넣어 존숭의 의미로 '문묘'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는 시호가 '장헌(莊憲)'인데 '문(文)'을 포함한 다른 존칭일 수도 있으나, 세종을 지칭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77. 직려(直廬): 궁궐 안이나 관청에 마련된 숙직실 또는 관리들의 거처.


원문:
屢拜大司憲。 時德興大院君夫人練日迫, 上欲遣官致祭, 禮官以國恤凡享祀宜廢, 執不可。 大司諫白公仁傑獨啓請之, 至以陵廟行禮爲據, 且有越視秦瘠之語, 冀其感動上聽。 公廣考《禮經》, 啓曰: “禮爲人後者, 不得顧私親。 殿下入纂大統, 其不得遣祭甚明。 且陵廟所行, 是先王不可廢之祀, 而至引此爲言, 不亦謬乎? 仁傑, 忠直人, 保無他心, 竊恐希恩固寵之徒, 未必不以此爲藉口, 異日之憂, 有不可勝言者。” 上竟從仁傑。

번역문:
여러 차례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이때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⁷⁸ 부인의 연제(練祭)⁷⁹ 날짜가 임박하자, 상(上)께서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려 하였는데, 예관(禮官)은 국휼(國恤)⁸⁰ 중에는 모든 향사(享祀)를 마땅히 폐해야 한다며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백공(白公) 인걸(仁傑)⁸¹이 홀로 이를 청하며, 심지어 능묘(陵廟)에서 행례(行禮)하는 것을 근거로 삼고, 또한 진(秦)나라의 메마름을 넘겨본다는 말[越視秦瘠之語]⁸²까지 하여 상의 청취를 감동시키려 하였다. 공이 《예경(禮經)》⁸³을 널리 상고하여 아뢰었다. “예법에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사사로운 어버이[私親]를 돌볼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이어받으셨으니, 그 제사를 보낼 수 없음이 매우 분명합니다. 또한 능묘(陵廟)에서 행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폐할 수 없는 제사인데, 이에 이르러 이것을 끌어다 근거로 삼으니 또한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인걸(仁傑)은 충직한 사람이니 다른 마음이 없음은 보증하지만, 가만히 염려하건대 은혜를 바라고 총애를 굳히려는 무리가 반드시 이것을 빌미로 삼지 않을 리 없으니, 뒷날의 근심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上)께서 마침내 인걸(仁傑)의 의견을 따랐다.

주석:
78.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 조선 선조(宣祖)의 사친(私親, 생부). 이름은 이초(李岹). 중종의 서자이다.
79. 연제(練祭): 대상(大祥, 2년째 기일) 전 달에 지내는 제사. 소상(小祥, 1년째 기일) 후 13개월째에 해당한다.
80. 국휼(國恤): 나라의 상사(喪事). 임금이나 왕비 등의 상(喪)을 말한다. 여기서는 명종(明宗)의 상중 기간을 가리킨다.
81. 백인걸(白仁傑, 1497-157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휴암(休庵).
82. 월시진척지어(越視秦瘠之語): 진(秦)나라가 메마른 것을 멀리서도 본다는 뜻으로, 남의 불행이나 약점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것을 경계하는 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30년 조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백인걸이 이 말을 인용한 정확한 의도는 불분명하나, 국휼 중 사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법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하거나, 또는 이를 빌미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로 사용했을 수 있다. 혹은 선조가 사친 제사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83. 《예경(禮經)》: 예(禮)에 관한 경전. 주로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을 가리킨다.


원문:
初, 邊上捕得一船, 朝議疑其爲賊, 遂殺之。 或曰“是漢人也”, 亦不能明。 至是, 復獲同來者, 始審其實狀。 禁府啓以爲: “此人悉知前事, 若還之上國, 必生他虞, 不如竝除以絶口。” 公纔入府, 聞之愕然, 責同僚。 翌日, 入對筵中, 極陳其不可, 有曰: “初以爲水賊而殺之猶可, 今乃明知其漢人, 而復欲殺之, 殿下平日至誠事大之意安在? 雖使明天子知之, 邊上設鎭禦寇⁸⁴, 有國常事。 其人犯禁, 出入海中, 爲邊將所捕, 初以爲水賊而殺之, 今乃明知其漢人, 故還送云爾, 則言順事直, 雖天子豈不以爲然? 夫以上國爲不知而殺之, 尤未安。 請命更議, 移咨以還之。” 大臣持之, 竟不得行。

번역문:
처음에 변방[邊上]에서 배 한 척을 나포하였는데, 조정의 의논[朝議]이 그들을 도적[賊]으로 의심하여 마침내 죽였다. 어떤 이는 “이들은 한인(漢人)⁸⁵이다”라고 하였으나 또한 밝혀내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함께 왔던 다른 자를 다시 잡아서 비로소 그 실상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금부(禁府)⁸⁶에서 아뢰기를 “이 사람이 이전 일을 모두 알고 있으니, 만약 상국(上國)⁸⁷으로 돌려보내면 반드시 다른 우려가 생길 것이므로, 함께 제거하여 입을 막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막 부(府, 사헌부)에 들어가서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동료들을 꾸짖었다. 다음 날, 경연(經筵)에 입대(入對)하여 그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며 아뢰었다. “처음에 수적(水賊)이라 여겨 죽였다면 오히려 괜찮지만, 이제 한인(漢人)임을 분명히 알고서 다시 죽이려 하시니, 전하께서 평소 지극한 정성으로 사대(事大)⁸⁸하시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설령 명(明)나라 천자(天子)께서 아시게 되더라도, 변방에서 진(鎭)을 설치하여 왜구를 막는 것[禦寇]은 나라가 있는 이상 늘 있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금령(禁令)을 어기고 바다를 출입하다가 변방 장수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수적(水賊)이라 여겨 죽였으나 이제 한인(漢人)임을 분명히 알았으므로 돌려보냅니다’라고 말한다면, 말이 순리[言順]에 맞고 일이 정당[事直]하니 비록 천자(天子)인들 어찌 그렇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상국(上國)이 모를 것이라 여기고 죽이는 것은 더욱 편안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다시 의논하도록 명하시고, 자문(咨文)⁸⁹을 보내 돌려보내소서.” 대신(大臣)이 이를 반대하여[持之]⁹⁰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주석:
84. [주-D001] 寇 : 저본(底本)에는 “관(冠)”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남계집(南溪集)・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퇴암박공행상(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退菴朴公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왜구를 막다'는 의미의 '어구(禦寇)'가 되어야 자연스럽다.
85. 한인(漢人): 중국 사람. 당시 명(明)나라 사람을 가리킨다.
86. 금부(禁府): 의금부(義禁府)의 별칭. 임금의 명을 받아 중죄인을 심문하던 사법 기관이다.
87. 상국(上國): 윗나라. 당시 조선이 사대(事大)하던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88. 사대(事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외교 정책.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나라에 대해 사대 정책을 취했다.
89. 자문(咨文): 동등하거나 하급 관청에 보내는 공식 외교 문서. 여기서는 명나라에 보내는 문서를 의미한다.
90. 지지(持之): ‘그것을 잡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고집하다’, ‘반대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즉, 대신들이 박응남의 의견에 반대하여 시행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원문:
明宗禫畢, 始祔文昭殿。 先是, 元衡秉國, 謂仁宗未踰年之君, 別祀延恩殿。 至是, 輿議悲憤, 欲與明宗竝祔。 首相李浚慶以爲: “文昭七位已滿, 仁宗不必祔。” 於是三司交章請罪, 其鋒甚銳。 公搖手止之曰: “原吉厚德重望, 國家賴以安, 不可因一失而遽肆大攻。 我則斷不可爲, 必欲論此, 先去我可也。” 衆論益激, 會李公亦自伏其非, 議遂以寢。

번역문:
명종(明宗)의 담제(禫祭)⁹¹를 마치고 비로소 문소전(文昭殿)⁹²에 부묘(祔廟)⁹³하였다. 이보다 먼저 윤원형(元衡)이 나라 권력을 잡고서 인종(仁宗)⁹⁴은 재위 1년을 넘기지 못한 군주라 하여 연은전(延恩殿)⁹⁵에 따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여론(輿議)이 슬퍼하고 분개하여 명종과 함께 나란히 부묘(竝祔)하고자 하였다. 수상(首相)⁹⁶ 이준경(李浚慶)이 “문소전의 7위(位)가 이미 찼으니, 인종은 부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삼사(三司)⁹⁷가 번갈아 상소를 올려 죄를 청하니 그 기세[鋒]가 매우 날카로웠다. 공이 손을 흔들어 이를 말리며 말하였다. “원길(原吉)⁹⁸은 덕이 두텁고 명망이 높아 국가가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니, 한 번의 실수로 인해 갑자기 크게 공격을 가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단연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이를 논하려면 먼저 나를 내쫓는 것이 옳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더욱 격렬해졌는데, 마침 이공(李公) 또한 스스로 그 잘못을 인정하여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주석:
91. 담제(禫祭): 대상(大祥) 다음 달, 즉 부모가 죽은 지 27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이 제사를 지내면 상복(喪服)을 벗고 평상으로 돌아간다.
92. 문소전(文昭殿): 조선 시대 종묘(宗廟)에 모시기 전의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임시로 모시던 별묘(別廟).
93. 부묘(祔廟): 임금이나 왕후가 죽은 뒤 삼년상(三年喪)을 마치고 그 신주(神主)를 종묘(宗廟)나 별묘(別廟)에 모시는 것.
94. 인종(仁宗): 조선의 제12대 왕(재위 1544-1545). 중종의 맏아들로, 명종의 이복형이다.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95. 연은전(延恩殿): 인종(仁宗)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임시로 지었던 전각으로 추정된다.
96.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97.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하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권과 신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98. 원길(原吉): 이준경(李浚慶)의 자(字).


원문:
庚午, 久在憲府, 欲少祛宿弊, 以厲人心。 如四館侵虐新來監察朱衣爲戲, 其他各司痼習, 皆隨事論啓革罷。 國俗, 市上男女雜坐, 公每以爲恥。 及是亦設法使分左右, 以達于行旅, 及公去職, 卒不行。

번역문:
경오년(1570)에 오랫동안 헌부(憲府)⁹⁹에 있으면서 오래된 폐단[宿弊]을 조금 제거하여 인심(人心)을 가다듬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사관(四館)¹⁰⁰에서 새로 부임한 감찰(監察)¹⁰¹에게 붉은 옷[朱衣]¹⁰²을 입히고 침학(侵虐)하며 희롱하는 것과, 기타 각사(各司)의 고질적인 습관[痼習]들을 모두 사안에 따라 논하여 아뢰어 혁파(革罷)하였다. 나라의 풍속에 시장에서 남녀가 섞여 앉는[雜坐] 것을 공이 매번 부끄럽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또한 법을 만들어 좌우로 나누게 하여 길 가는 행인[行旅]에게까지 미치게 하려 하였으나, 공이 관직을 떠나자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주석:
99. 헌부(憲府): 사헌부(司憲府)의 별칭.
100. 사관(四館): 성균관(成均館)과 동·서·남·중의 사학(四學)을 통칭하거나, 또는 예문관(藝文館),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 승문원(承文院)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신임 관리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신고식(신래침학, 新來侵虐)이 행해지던 기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01. 감찰(監察): 사헌부의 정6품 관직. 백관을 규찰하는 실무를 담당했다.
102. 주의(朱衣): 붉은색 관복. 감찰의 관복 색깔이다. 신임 감찰에게 붉은 옷을 입혀 희롱하는 악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원문:
嶺南有上舍生河沆, 以同鄕婦女失行, 首率州人焚其廬而黜之, 及按驗, 久無實狀。 公在憲府時, 以爲: “此事本晻昧, 至士人私自擅治, 其漸不可長。 文移本道, 將囚治, 而一時薦紳名流, 率多右沆者。” 復入對筵中, 遂及之, 咸曰: “此儒生狂狷, 不可罪。” 公極論其罪狀, 仍啓曰: “臣跡此輩所爲, 實乃無賴之行, 非復儒者擧止。 何則? 士族失行非薄, 故誠欲正其罪, 鄕告于州, 州聞于朝廷, 盡得其情而處之未晩。 今乃不然, 私自結黨焚黜, 無所稟畏, 是果儒者之事乎? 且聖門所謂狂狷, 豈爲此輩而發也? 不治必有後患。” 上亦駭允之。

번역문:
영남(嶺南)에 상사생(上舍生)¹⁰³ 하항(河沆)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같은 고향 부녀자(婦女子)가 행실을 잃었다[失行] 하여 앞장서서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그 집을 불태우고 내쫓았으나, 안험(按驗)¹⁰⁴해 보니 오랫동안 실상(實狀)이 없었다. 공이 헌부(憲府)에 있을 때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일은 본래 사실이 어둡고 모호한데, 선비[士人]가 사사로이 멋대로 처리함[擅治]에 이르렀으니, 그 조짐은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 본도(本道)에 공문을 보내 장차 가두어 다스리려 하였는데, 당시의 높은 벼슬아치와 이름난 인사[薦紳名流]들이 대부분 하항을 편드는 자가 많았다. 다시 경연(經筵)에 입대(入對)하여 마침내 이 일에 언급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유생(儒生)의 광狷(광견)¹⁰⁵이니 죄줄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이 그 죄상(罪狀)을 극력 논하고 이어서 아뢰었다. “신(臣)이 이 무리들의 행위를 살펴보니 실로 무뢰(無賴)한 행동이지 다시는 유자(儒者)의 거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족(士族)이 행실을 잃은 것은 잘못이 가볍지 않으므로, 진실로 그 죄를 바로잡으려면 향(鄕)에서 주(州)에 고하고 주(州)에서 조정(朝廷)에 아뢰어 그 실정을 다 파악한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고, 사사로이 무리를 지어 불태우고 내쫓으며 아뢰거나 두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과연 유자(儒者)의 일이겠습니까? 또한 성문(聖門)¹⁰⁶에서 말하는 바 광견(狂狷)이 어찌 이런 무리들을 위해 나온 말이겠습니까? 다스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을 것입니다.” 상(上)께서도 놀라며 이를 윤허하셨다.

주석:
103. 상사생(上舍生):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을 가리킨다.
104. 안험(按驗):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증험함.
105. 광견(狂狷):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 광자(狂者)는 이상은 높으나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사람, 견자(狷者)는 지조는 굳으나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고지식한 선비의 행동 정도로 해석하여 하항을 변호하는 논리로 쓰였다.
106. 성문(聖門): 성인(聖人)의 문하(門下). 공자(孔子)의 가르침 또는 유교(儒敎)를 가리킨다.


원문:
李相浚慶臨終上箚, 以破朋黨爲說。 繇此上下疑阻, 公卽啓論其未安之意, 竝寫朱子與留正書以上。 復因召對進曰: “自古人主, 惡聞朋黨之言, 故小人欲禍士林者, 必以此爲嚆矢。 近來一二年少之人, 欲爲聖朝恢公論格君心, 以展布其所學。 顧大臣專務安靖, 以此展轉相激, 至于今日, 遂使人主孤立於上, 自生惑亂, 而亦莫知恤。 惟殿下察焉。” 上曰: “私相朋比, 故乃孤立無助耳。” 對曰: “君子以同志爲黨, 其引進善類, 將欲共圖國事, 期臻至理。 是以聖主不患其爲黨, 而惟患其黨之不多, 不惟患其黨之不多, 必引其賢臣以自爲之黨。 然則何憂乎孤立?” 仍陳小人情狀, 且引時事, 反覆不已。 又曰: “呂大防初以楊畏爲善, 進用於朝。 未久, 畏首叛大防, 盡傾善類, 此亦不可不知。” 宣廟爲之虛心傾聽, 稍稍釋其疑。 及退, 日已報午矣。

번역문: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임종(臨終) 시에 차자(箚子)¹⁰⁷를 올려 붕당(朋黨)¹⁰⁸을 깨뜨릴 것을 설(說)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상하(上下)가 서로 의심하고 막히게 되자[疑阻], 공이 즉시 그 옳지 못함[未安]을 아뢰어 논하고, 아울러 주자(朱子)¹⁰⁹가 유정(留正)¹¹⁰에게 보낸 편지를 베껴 올렸다. 다시 소대(召對)¹¹¹로 인하여 나아가 아뢰었다. “예로부터 군주[人主]는 붕당(朋黨)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였으므로, 소인(小人)으로서 사림(士林)에게 화(禍)를 입히려는 자는 반드시 이것을 효시(嚆矢)¹¹²로 삼았습니다. 근래 한두 명의 젊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조정[聖朝]을 위하여 공론(公論)을 넓히고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格君心] 그 배운 바를 펼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신(大臣)은 오로지 안정(安靖)만을 힘쓰는 것을 돌아보니, 이 때문에 서로 번갈아 격해져 오늘에 이르러 마침내 군주로 하여금 위에서 고립(孤立)되어 스스로 의혹과 혼란을 일으키게 하였으나 또한 돌볼 줄 아는 이가 없습니다. 오직 전하께서 살피소서.”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사사로이 서로 편을 가르기 때문에[朋比] 고립되어 도움이 없을 뿐이다.” 대답하여 아뢰었다. “군자(君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으로 당(黨)을 이루니, 그 선한 무리[善類]를 이끌어 들여 장차 함께 국사(國事)를 도모하여 지극한 이치에 이르기를 기약합니다. 이 때문에 성스러운 군주[聖主]는 그들이 당(黨)을 이루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오직 그 당(黨)이 많지 않음을 걱정하며, 그 당(黨)이 많지 않음을 걱정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현명한 신하들을 이끌어 스스로 그들의 당(黨)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 고립됨을 걱정하겠습니까?” 이어서 소인(小人)의 실상[情狀]을 진술하고, 또한 당시의 일[時事]을 인용하며 반복하여 그치지 않았다. 또 아뢰었다. “여대방(呂大防)¹¹³이 처음에 양외(楊畏)¹¹⁴를 선(善)하다고 여겨 조정에 등용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양외가 맨 먼저 여대방을 배반하고 선한 무리[善類]를 모두 기울게 하였으니, 이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조(宣廟)께서 이를 위해 마음을 비우고 경청하시어 조금씩 그 의심을 푸셨다. 물러날 때에는 해가 이미 정오(正午)를 알렸다.

주석:
107.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형식. 상소(上疏)보다 격식이 간략하다.
108. 붕당(朋黨): 정치적인 뜻을 같이하는 관료들의 집단. 조선 시대에는 선조 때부터 사림(士林)이 분화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했으나, 점차 정치 운영의 현실적인 형태로 인식되었다.
109. 주자(朱子):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했다.
110. 유정(留正, 1129-1206): 남송(南宋)의 재상. 주희(朱熹)가 유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자와 소인의 붕당을 구분하고 군자의 붕당은 장려해야 함을 역설했다. 박응남은 이 편지를 인용하여 이준경의 '파붕당설(破朋黨說)'이 소인배에게 이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군자들의 공론 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111. 소대(召對): 임금이 신하를 불러 만나보는 것.
112. 효시(嚆矢): 맨 처음 쏘는 소리 나는 화살. 어떤 일의 시작이나 시초를 의미한다.
113. 여대방(呂大防, 1027-1097): 북송(北宋)의 재상. 구법당(舊法黨)의 영수 중 한 명이었다.
114. 양외(楊畏): 북송(北宋)의 인물. 처음에는 여대방에게 등용되었으나 후에 신법당(新法黨)에 붙어 구법당을 공격했다. 박응남은 이 고사를 들어 소인배의 변절과 배신을 경계해야 함을 강조했다.


원문:
公天性勁直, 持心峻潔, 風神凝遠, 不露圭角。 而志慮精深, 是非自著, 質愨而不迂, 莊重而不滯。

번역문:
공(公)은 천성(天性)이 강직(勁直)하고 마음가짐이 준엄하고 결백[峻潔]하며, 풍채와 정신[風神]이 고요하고 원대(凝遠)하여 규각(圭角)¹¹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뜻과 생각이 정밀하고 깊어[精深] 시비(是非)가 스스로 드러났으며, 바탕이 성실[質愨]하면서도 우활(迂闊)하지 않았고 장중(莊重)하면서도 막히지[滯] 않았다.

주석:
115. 규각(圭角): 홀(圭)의 모서리. 날카로운 재능이나 성격의 모가 난 부분을 비유한다. '불로규각(不露圭角)'은 재능이나 성품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원만함을 의미한다.


원문:
初, 司諫公從游松堂朴先生, 方用力於爲己之學, 不幸未究厥志。 公自少聞其說, 及事履素李先生, 誘掖不多, 已闖其門戶。 於是公益服膺, 所以誦玩經義持養本源者, 交致其功, 日有開益。 當時李先生篤學力行, 尤以善訓迪名, 學者游其門, 亡慮數百人。 至論其終身向善, 任重致遠, 則咸推公以爲首焉。

번역문:
처음에 사간공(司諫公)¹¹⁶이 송당(松堂) 박선생(朴先生)¹¹⁷을 따라 노닐며 바야흐로 위기지학(爲己之學)¹¹⁸에 힘쓰다가 불행히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공이 어려서부터 그 학설을 듣고, 이소(履素) 이선생(李先生)¹¹⁹을 섬김에 이르러서는 이끌어주고 도와줌[誘掖]이 많지 않았는데도 이미 그 문호(門戶)¹²⁰에 들어섰다. 이에 공이 더욱 마음에 새겨두고 실천하여[服膺], 경전의 뜻[經義]을 외우고 익히며[誦玩] 본원(本源)¹²¹을 지키고 기르는[持養] 것을 함께 공(功)을 이루어 날마다 열리고 유익함[開益]이 있었다. 당시에 이선생(李先生)은 학문에 독실하고 행실에 힘썼으며[篤學力行] 특히 잘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것[善訓迪]으로 이름나,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노닌 자가 무려 수백 명이었다. 그들이 종신토록 선(善)을 지향하고 무거운 임무를 맡아 원대한 목표를 이루는[任重致遠] 것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모두 공을 첫째로 꼽았다.

주석:
116. 사간공(司諫公): 아버지 박소(朴紹)를 가리킨다.
117. 송당 박선생(松堂朴先生): 호가 송당(松堂)인 박선생. 박소의 스승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118.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爲人之學]과 대비된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학문의 자세이다.
119. 이소 이선생(履素李先生): 이중호(李仲虎)를 가리킨다. 박응남의 스승이었다.
120. 문호(門戶): 학문이나 어떤 분야로 들어가는 입구. 학문의 요체나 방법을 터득했음을 의미한다.
121. 본원(本源): 근본이 되는 원천.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본성(本性) 또는 마음의 본체(本體)를 가리킨다.


원문:
平居晨起入書齋, 危坐寡言, 未嘗有惰容, 觀書終日, 或到鷄鳴不止。 案上喜置《易啓蒙》、《通鑑綱目》、《朱子大全》《語類》等書, 循環玩味。 天文算數亦多精通。 至於自治嚴正, 警省切至, 芬華聲色, 一無所近。 如遇疾風迅雷, 雖寢必起, 具衣帶以坐。 性不喜交游, 所善思菴朴公淳、南峯鄭公芝衍、存齋奇公大升, 相磨以道義, 終始不貳。 聞一善言及過失, 必移書以致勉戒。 比諸公至, 必閉戶講論, 信宿乃罷。 一日, 於朱子書得格言, 走告南峯, 讀書有得, 不可獨見, 欲與故人共之。 嘗曰: “吾與柳眉¹²²巖語, 博聞强識則有之, 義理深處, 終未見釋然之論。 惟明彦終日言, 少無礙滯, 而至其精微, 亦多相發。 往李退溪入都時, 雖屢往來質疑, 拘於公務, 未克盡吾意。 當一得休沐南歸, 極論於陶山之下, 竟未果也。” 存齋亦曰: “吾友中唯柔仲讀書多有所得, 非流輩之可及。” 又稱唯柔仲可堪相業。

번역문:
평소 거처할 때 새벽에 일어나 서재(書齋)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危坐] 말이 적었으며, 일찍이 게으른 기색[惰容]이 없었고, 종일 책을 보다가 혹 닭이 울 때[鷄鳴]¹²³에 이르러서야 그치기도 하였다. 책상 위에는 《역계몽(易啓蒙)》¹²⁴, 《통감강목(通鑑綱目)》¹²⁵, 《주자대전(朱子大全)》¹²⁶, 《어류(語類)》¹²⁷ 등의 책을 놓아두기를 좋아하여 순환하며 음미[玩味]하였다. 천문(天文)과 산수(算數) 또한 매우 정통하였다. 자신을 다스림[自治]이 엄정(嚴正)하고 경계하고 반성함[警省]이 간절하며 지극하여, 화려함[芬華]이나 성색(聲色)¹²⁸은 일절 가까이하는 바가 없었다. 만약 세찬 바람과 빠른 번개[疾風迅雷]를 만나면 비록 자다가도 반드시 일어나 의대(衣帶)를 갖추고 앉았다. 성품이 교유(交游)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친하게 지낸 이는 사암(思菴) 박공(朴公) 순(淳)¹²⁹, 남봉(南峯) 정공(鄭公) 지연(芝衍)¹³⁰, 존재(存齋) 기공(奇公) 대승(大升)¹³¹이었는데,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相磨]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不貳]이 없었다. 한 가지 선한 말이나 과실(過失)에 대해 들으면 반드시 편지를 보내 힘쓰고 경계하도록 하였다. 이 여러 공(公)들이 이르면 반드시 문을 닫고 강론(講論)하여, 연이틀 묵고서야[信宿] 마쳤다. 하루는 주자(朱子)의 글에서 격언(格言)을 얻고는 달려가 남봉(南峯)에게 알리며, “독서하다 얻은 것이 있으면 홀로 볼 수 없어 옛 친구[故人]와 함께 나누고 싶다”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였다. “내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¹³²과 이야기해보면 박문강식(博聞强識)¹³³은 있으나 의리(義理)의 깊은 곳에서는 끝내 시원하게 풀리는[釋然] 논의를 보지 못하였다. 오직 명언(明彦)¹³⁴은 종일 말해도 조금도 걸리고 막힘[礙滯]이 없으나, 그 정미(精微)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또한 서로 드러내는[相發] 바가 많았다. 지난번에 이퇴계(李退溪)¹³⁵가 도성에 들어왔을 때 비록 여러 차례 왕래하며 질의(質疑)하였으나, 공무(公務)에 얽매여 내 뜻을 다하지 못하였다. 마땅히 한 번 휴가[休沐]를 얻어 남쪽으로 돌아가 도산(陶山)¹³⁶ 아래에서 극진히 논하려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존재(存齋) 또한 말하였다. “나의 벗 중에 오직 유중(柔仲)¹³⁷이 독서하여 얻은 바가 많아 동년배[流輩]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또 오직 유중(柔仲)만이 재상(宰相)의 임무[相業]를 감당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주석:
122. [주-D002] 巖 : 저본(底本)에는 “암(庵)”으로 되어 있다. 《면암집(勉菴集)・미암선생유공신도비명(眉巖先生柳公神道碑銘)》, 《연재집(淵齋集)・미암선생유공희춘신도비명(眉巖先生柳公希春神道碑銘)》, 《남계집(南溪集)・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퇴암박공행상(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退菴朴公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유희춘의 호는 미암(眉巖)이다.
123. 계명(鷄鳴): 닭이 우는 새벽녘. 새벽까지 책을 읽었음을 의미한다.
124. 《역계몽(易啓蒙)》: 주희(朱熹)가 《주역(周易)》의 입문서로 지은 책.
125. 《통감강목(通鑑綱目)》: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편찬한 역사서.
126. 《주자대전(朱子大全)》: 주희(朱熹)의 시문(詩文)과 서간(書簡) 등을 모아 엮은 문집.
127. 《어류(語類)》: 《주자어류(朱子語類)》. 주희(朱熹)의 제자들이 그의 강론과 문답을 기록하여 분류, 편집한 책.
128.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女色). 감각적인 즐거움을 의미한다.
129. 사암 박공 순(思菴朴公淳): 박순(朴淳, 1523-1589).
130. 남봉 정공 지연(南峯鄭公芝衍): 정지연(鄭芝衍, 1525-1583). 호는 남봉(南峯).
131. 존재 기공 대승(存齋奇公大升): 기대승(奇大升, 1527-1572). 호는 존재(存齋), 고봉(高峯).
132. 미암 유희춘(眉巖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미암(眉巖).
133. 박문강식(博聞强識): 널리 듣고 잘 기억함. 학식이 넓고 기억력이 좋음을 의미한다.
134. 명언(明彦): 기대승(奇大升)의 자(字).
135. 이퇴계(李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호는 퇴계(退溪).
136. 도산(陶山):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산. 이황(李滉)이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137. 유중(柔仲): 박응남(朴應男)의 자(字).


원문:
敎諸子一以禮義, 耳提面諭諄諄, 不知其倦。 每朔三旬, 必聚于一室, 通讀《小學》、《近思錄》, 要以及《西山衍義》、《晦菴書節要》, 因辨問其義理, 以究精微。 或使各言其志, 以發歸趣, 旁及經史, 古人出處言行, 靡不精熟。 授書之際, 雖値赴朝, 必親爲正句讀, 如務爲詞章, 泛看雜書, 必加峻責。 其言曰: “君子處心行事, 當如靑天白日, 使人皆得以仰之可也。” 又擧古語曰: “學者涵養本原, 一意窮格, 則氣味滋長, 蹊徑不差, 而義理自明矣。” 又因讀《論語》, 貽書戒之曰: “嘉言善行盡在此書, 汝等若勉勉習熟, 潛心體認, 則聖賢事業, 從此可尋。 至於富貴在天, 非吾所切望也。”

번역문:
여러 아들을 가르침에 한결같이 예의(禮義)로써 하였으며, 귀에 대고 끌어당기며 얼굴을 마주하고 타이르기를[耳提面諭]¹³⁸ 간곡하고 자상하게[諄諄] 하여 그 지겨움을 몰랐다. 매달 초하루[朔]와 그믐[旬]¹³⁹에는 반드시 한 방에 모여 《소학(小學)》¹⁴⁰, 《근사록(近思錄)》¹⁴¹을 통독(通讀)하고, 요점은 《서산연의(西山衍義)》¹⁴²,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¹⁴³에까지 미치게 하였으며, 이어서 그 의리(義理)를 변별하고 질문하여 정미(精微)한 부분을 궁구하였다. 혹은 각자 그 뜻을 말하게 하여 귀착점[歸趣]을 드러내게 하였고, 곁들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미쳐 옛사람의 출처(出處)¹⁴⁴와 언행(言行)을 정밀하게 익히지 않음이 없었다. 책을 가르쳐 줄 때에는 비록 조정에 나가야 할 때를 만나더라도 반드시 직접 구두(句讀)¹⁴⁵를 바로잡아 주었으며, 만약 사장(詞章)¹⁴⁶을 일삼거나 잡다한 책[雜書]을 대충 보면 반드시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의 말이 이러하였다. “군자(君子)는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함에 마땅히 푸른 하늘의 밝은 해[靑天白日]와 같이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우러러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옛말을 들어 말하였다. “학자(學者)는 본원(本原)을 함양(涵養)하고 한 뜻으로 궁구하고 격물(格物)하면 기미(氣味)¹⁴⁷가 자라나고 경로[蹊徑]가 어긋나지 않아 의리(義理)가 저절로 밝아질 것이다.” 또 《논어(論語)》를 읽다가 편지를 보내 경계하며 말하였다.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동[嘉言善行]이 모두 이 책에 있으니, 너희들이 만약 힘쓰고 힘써 익히고 익숙해져서 마음을 잠그고 체득[潛心體認]한다면 성현(聖賢)의 사업(事業)을 이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귀(富貴)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가 아니다.”

주석:
138. 이제면유(耳提面諭): 귀를 잡아당겨 일러주고 얼굴을 마주하여 타이른다는 뜻으로, 간절하고 자상하게 가르침을 이르는 말.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편에서 유래했다.
139. 삭순(朔旬): 초하루(朔)와 그믐(旬). 매월 초하루와 그믐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40. 《소학(小學)》: 주희(朱熹)가 유청지(劉淸之) 등과 함께 편찬한 아동용 유교 윤리 교과서.
141. 《근사록(近思錄)》: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북송(北宋)의 네 학자(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글을 뽑아 편찬한 성리학 입문서.
142. 《서산연의(西山衍義)》: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진덕수의 호가 서산(西山)이다.
143.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 주희(朱熹, 호 晦庵)의 편지글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 이황(李滉)이 편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144. 출처(出處): 세상에 나아가 벼슬함[出]과 물러나 은거함[處]. 선비의 처신을 의미한다.
145. 구두(句讀): 글을 읽을 때 의미에 따라 끊어 읽는 구(句)와 두(讀).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기초가 된다.
146. 사장(詞章): 시(詩), 부(賦), 문장(文章) 등 주로 문학적인 글쓰기를 가리킨다. 성리학에서는 의리(義理) 탐구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147. 기미(氣味): 기운과 맛. 학문이나 덕성이 무르익어 풍기는 분위기나 경지를 의미한다.


원문:
手抄司馬氏《居家雜儀》, 參以己意, 釐爲七十條, 名曰家範。 將稟于伯兄, 先行一家, 仍推之於宗子家。 每謂: “廬墓, 吾東方盛制。 自鄭圃隱以後, 從《文公家禮》反哭, 若歸家奉奠, 飮食起居, 一遵古制則已。 世有名爲從禮, 而手執朝論, 車馬塡門, 妻兒混處, 託疾飮酒者踵相接。 君子思欲救其弊, 莫如遵舊俗爲愈也。”

번역문:
손수 사마씨(司馬氏)¹⁴⁸의 《거가잡의(居家雜儀)》¹⁴⁹를 베끼고 자신의 뜻을 참고하여 70조(條)로 정리하여 이름을 《가범(家範)》이라 하였다. 장차 큰형[伯兄]에게 여쭈어 먼저 집안에서 시행하고, 이어서 종가(宗子家)¹⁵⁰에도 미루어 시행하려 하였다. 매번 말하였다. “여묘(廬墓)¹⁵¹는 우리나라 동방(東方)의 성대한 제도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¹⁵² 이후부터 《문공가례(文公家禮)》¹⁵³를 따라 반곡(反哭)¹⁵⁴하고, 만약 집으로 돌아와 봉전(奉奠)¹⁵⁵하고 음식(飮食)과 기거(起居)를 한결같이 옛 제도[古制]를 따른다면 그만이다. 세상에는 예(禮)를 따른다고 이름하면서 손으로는 조론(朝論)¹⁵⁶을 잡고 수레와 말이 문에 가득하며 처자(妻兒)가 섞여 거처하고, 병을 핑계 대고 술 마시는 자가 발뒤꿈치를 이어 잇따른다. 군자(君子)가 그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옛 풍속을 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주석:
148. 사마씨(司馬氏):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을 가리킨다.
149. 《거가잡의(居家雜儀)》: 사마광(司馬光)이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의식에 대해 쓴 책.
150. 종자가(宗子家): 종가(宗家). 한 가문의 맏이로 대를 잇는 집안.
151. 여묘(廬墓):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묘소(墓所)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묘를 지키는 것.
152.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1337-1392): 고려 말의 충신, 성리학자. 호는 포은(圃隱).
153. 《문공가례(文公家禮)》: 주희(朱熹, 시호 文公)가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행해야 할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법을 정리한 책. 《주자가례(朱子家禮)》라고도 한다.
154. 반곡(反哭): 장례를 지내고 돌아와 곡(哭)하는 것. 《주자가례》에는 장례 후 신주(神主)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곡하는 절차가 있다.
155. 봉전(奉奠): 신위(神位) 앞에 제물(祭物)을 바치는 것.
156. 조론(朝論): 조정의 의논.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정치에 관여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말이다.


원문:
登對之日, 必齋心宿戒。 及其進講, 出入諸書, 明白典則。 論事慷慨直截, 不避忌諱, 知無不言, 言無不盡。 嘗於筵中上問吏部: “近日承傳者, 不除職何由?” 吏部尙書對以由不持置簿。 公進言曰: “是咫尺欺殿下, 奚必指鹿而後爲然? 臣前待罪吏部, 頗識故事, 此皆先期輸紙筒中, 入政廳以待其取視, 何謂不持?” 其人戰栗不能起。 後以寶劍侍上, 諸大夫終日迭休, 公獨鵠立不少動。 以是値朝會, 衆或喧譁無禮, 及公在坐, 垂紳正笏, 不加聲色, 而班列肅然, 同輩皆憚之, 若芒刺背。 見人雖獲時名, 心知其不正, 則曰他日必行某事; 雖衆所不與, 如有可取, 則曰是長不可棄, 俱爲之抑揚甚力。 諸公初不信, 後皆一一符契, 人益服其遠識。

번역문:
임금을 만나는[登對] 날에는 반드시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미리 경계[宿戒]하였다. 진강(進講)할 때에는 여러 서적을 넘나들어[出入] 명백(明白)하고 전칙(典則)¹⁵⁷에 맞았다. 일을 논함에는 강개(慷慨)하고 직설적[直截]이어서 기휘(忌諱)¹⁵⁸를 피하지 않았으며,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은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경연(筵) 중에 상(上)께서 이조(吏部)에 묻기를 “근자에 승전(承傳)¹⁵⁹한 자에게 제직(除職)¹⁶⁰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시니, 이조 판서(吏曹尙書)¹⁶¹가 치부(置簿)¹⁶²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이 나아가 말하였다. “이는 지척(咫尺)에서 전하를 속이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지록위마(指鹿爲馬)¹⁶³한 뒤에야 그렇다고 하겠습니까? 신(臣)이 전에 이조(吏部)에서 대죄(待罪)¹⁶⁴할 때 자못 고사(故事)¹⁶⁵를 알았는데, 이는 모두 미리 종이통[紙筒] 속에 넣어 정청(政廳)¹⁶⁶에 들여보내 그 취하여 보기를 기다리니, 어찌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합니까?” 그 사람이 전율(戰慄)하며 일어나지 못하였다. 뒤에 보검(寶劍)¹⁶⁷을 차고 상(上)을 모실 때, 여러 대부(大夫)들이 종일 번갈아 쉬었으나 공은 홀로 고니처럼 우뚝 서서[鵠立]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회를 당하여 무리가 혹 시끄럽게 떠들고 무례(無禮)해도, 공이 자리에 있으면 신(紳)¹⁶⁸을 드리우고 홀(笏)¹⁶⁹을 바로잡고 성색(聲色)을 더하지 않아도 반열(班列)이 숙연(肅然)하여 동배(同輩)들이 모두 그를 꺼리기를 마치 가시가 등에 닿은 듯[芒刺背]¹⁷⁰하였다. 사람을 봄에 비록 당시의 명성[時名]을 얻었더라도 마음속으로 그 바르지 않음을 알면 “뒷날 반드시 아무 일을 행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비록 여러 사람이 함께하지 않더라도 만약 취할 만한 점이 있으면 “이 장점은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모두 그를 위해 매우 힘껏 억누르거나 찬양[抑揚]하였다. 여러 공(公)들이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뒤에는 모두 하나하나 부합[符契]하니, 사람들이 더욱 그의 원대한 식견[遠識]에 감복하였다.

주석:
157. 전칙(典則): 전범(典範)과 법칙(法則). 모범이 될 만하고 법도에 맞음.
158. 기휘(忌諱): 꺼리고 피하는 것. 특히 임금이나 권세가의 비위를 거스를까 염려하여 말이나 행동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159. 승전(承傳):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전함. 또는 그 명령.
160. 제직(除職): 관직을 임명함.
161. 이조 상서(吏曹尙書):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의 으뜸 벼슬(정2품).
162. 치부(置簿): 임명할 관리 후보자들의 명단 등을 적어놓은 장부.
163.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 윗사람을 속이고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진(秦)나라 조고(趙高)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164. 대죄(待罪): 죄를 지었거나 잘못이 있을 때 처벌을 기다림. 관리가 직무상의 과오 등으로 인해 근신(謹愼)하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165. 고사(故事):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례나 규정.
166. 정청(政廳): 정사를 보는 관청. 여기서는 승정원(承政院)이나 의정부(議政府) 등 인사 관련 논의가 이루어지는 곳을 가리킬 수 있다.
167. 보검(寶劍): 임금이 하사하거나 의식 때 차는 귀한 칼. 여기서는 임금을 호위하는 무관의 역할을 겸했음을 시사할 수 있다.
168. 신(紳): 관복(官服)에 두르는 넓은 허리띠.
169. 홀(笏): 조선 시대 관리들이 조복(朝服)이나 공복(公服)을 입을 때 손에 들던 물건.
170. 망자재배(芒刺背): 등에 가시가 닿은 듯 불편하고 불안함.


원문:
嘗語從子某曰: “仰觀天象, 兼察人事, 大亂不久當作。 吾已老, 庶不及見, 恐汝輩終不得免。” 對曰: “方今聖明在上, 寧有此?” 公曰: “此不可恃。 近日人心漸惡, 國綱漸解, 隱憂已多。 況朝著漸有不平之端, 而歷求其至誠徇國之人, 亦未有指的, 此尤可懼。 吾雖欲退居田里, 若當斯世有媒蘖兆朕, 必赴闕力論, 冀先塞其源, 而或復不幸, 則當以一死相隨。” 從子問: “時事若至此, 大人安能獨爲?” 公答曰: “古人有隻手擎天衛日者, 有一言而能逆折奸謀止百萬師者, 是在吾誠之如何而已。 大抵愛身則惜死, 惜死則爲國事不得盡其心。 吾旣不顧此, 惟當鞠躬盡瘁以答君恩。 若其此身先死則天也。”【竝朴玄石世采撰行狀。】

번역문:
일찍이 종자(從子) 아무개에게 말하였다. “우러러 천상(天象)을 관찰하고 겸하여 인사(人事)를 살피니, 큰 난리[大亂]가 오래지 않아 마땅히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니 거의 보지 못하겠지만, 아마도 너희들은 끝내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 대답하기를 “지금 성명(聖明)하신 임금께서 위에 계시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였다. “이를 믿어서는 안 된다. 근래 인심(人心)이 점점 악해지고 국강(國綱)이 점점 해이해져 숨은 근심[隱憂]이 이미 많다. 하물며 조정에 점점 불평(不平)의 단서(端)가 있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徇國之人]을 두루 찾아보아도 또한 지적할 만한 이가 없으니, 이것이 더욱 두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물러나 시골[田里]에 거처하고자 하나, 만약 이 세상을 당하여 재앙의 빌미[媒蘖]¹⁷¹가 될 조짐(兆朕)이 있으면 반드시 대궐로 달려가 힘써 논하여 그 근원을 먼저 막기를 바라며, 혹 다시 불행하다면 마땅히 한 번 죽음으로써 따를 것이다.” 종자(從子)가 묻기를 “시사(時事)가 만약 이에 이르면 대인(大人)께서 어찌 홀로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답하였다. “옛사람 중에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고 해를 지킨[隻手擎天衛日] 자가 있었고, 한마디 말로 능히 간사한 꾀를 미리 꺾고 백만 군사를 멈추게 한 자가 있었으니, 이는 나의 정성[誠]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대저 몸을 아끼면 죽음을 아끼게 되고, 죽음을 아끼면 나라 일을 위해 그 마음을 다할 수 없다. 나는 이미 이것을 돌아보지 않으니, 오직 마땅히 몸을 굽혀 수고로움을 다함으로써[鞠躬盡瘁]¹⁷²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만약 이 몸이 먼저 죽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다.”【이상은 모두 박현석(朴玄石) 세채(世采)¹⁷³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71. 매얼(媒蘖): 누룩(蘖)을 만드는 매개체(媒). 화근(禍根)이나 재앙의 빌미를 비유한다.
172. 국궁진췌(鞠躬盡瘁):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함.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구절로, 국가나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173. 박현석 세채(朴玄石世采):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호는 현석(玄石), 남계(南溪). 박응남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원문:
一日到書樓, 携二小紙, 一書“劉元城曰‘子弟可使終歲不讀書, 不可使一日近小人’”, 一書“不讀書, 願勿入此堂”, 付東西壁上, 人不敢近。

번역문:
하루는 서루(書樓)에 이르러 작은 종이 두 장을 가지고 와서, 하나에는 “유원성(劉元城)¹⁷⁴이 말하기를 ‘자제(子弟)는 일 년 내내 글을 읽지 않게 할 수는 있어도, 단 하루라도 소인(小人)을 가까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쓰고, 다른 하나에는 “글을 읽지 않으려거든 원컨대 이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써서 동쪽과 서쪽 벽 위에 붙이니,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주석:
174. 유원성(劉元城): 당(唐)나라 문장가 유종원(柳宗元, 773-819)을 가리킨다. 자는 자후(子厚). 하동(河東) 사람이나 원주자사(袁州刺史)를 지냈기에 원성(袁城) 선생이라 불리기도 했다. '元'은 '袁'의 오기일 수 있으나, 원문의 표기를 따른다.


원문:
嘗擧“李及知杭州, 市《白集》, 爲終身之恨; 張詠守成都三年, 聲妓滿前, 一不面顧”等語敎子姪。

번역문:
일찍이 “이급(李及)¹⁷⁵이 항주(杭州) 지사(知事)가 되었을 때 시중에서 《백씨문집(白氏文集)》¹⁷⁶을 산 것을 종신(終身)의 한(恨)으로 삼았고, 장영(張詠)¹⁷⁷이 성도(成都)를 3년간 지킬 때 성기(聲妓)¹⁷⁸가 앞에 가득하였으나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는 등의 말을 들어 자질(子姪)을 가르쳤다.

주석:
175. 이급(李及, 962-1006): 북송(北宋)의 관리.
176. 《백씨문집(白氏文集)》: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문집. 이급은 항주 지사 시절 백거이의 시집을 사서 읽은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는데, 이는 관리로서 문학에 탐닉하여 직무를 소홀히 할 것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된다.
177. 장영(張詠, 946-1015): 북송(北宋)의 관리.
178. 성기(聲妓):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


원문:
硯匣書“措心於中正和平之地, 以義理浸灌培養之”之語, 又書“見得思義”四字。

번역문:
벼루 상자[硯匣]에 “마음을 중정(中正)하고 화평(和平)한 경지에 두어 의리(義理)로써 적시고 북돋아 배양(培養)한다”는 말을 써 놓았고, 또 “이득을 보면 의(義)를 생각한다[見得思義]”¹⁷⁹ 네 글자를 써 놓았다.

주석:
179. 견득사의(見得思義): 이익을 보면 그것이 의리에 맞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나온다.


원문:
平生於色淡然, 嘗曰: “我則雖西子在前, 猶無意也。” 奉使關西, 方伯以房妓追送, 同處月餘, 終不變。

번역문:
평생 여색(女色)에 담담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나 같으면 비록 서시(西施)¹⁸⁰가 앞에 있더라도 오히려 마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관서(關西)¹⁸¹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방백(方伯)¹⁸²이 방기(房妓)¹⁸³를 보내 따라오게 하였는데, 한 달 남짓 함께 거처하였으나 끝내 변하지 않았다.

주석:
180. 서시(西施):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녀. 미인의 대명사로 쓰인다.
181. 관서(關西): 평안도(平安道) 지방을 가리킨다.
182.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의 별칭.
183. 방기(房妓): 관청에 소속되어 수령이나 사신의 수발을 들던 기생.


원문:
九月, 都承旨朴應男卒。 應男戇直敢言, 外若不曉是非, 而內實有權衡。 累主風憲, 駁擊無顧忌, 人多怨者。 第以好善, 故士類推許, 而且以中殿叔父被上眷重, 士林恃賴。 及卒, 士類惜之。【《栗谷外集》。】

번역문:
9월에 도승지(都承旨)¹⁸⁴ 박응남(朴應男)이 졸(卒)하였다. 응남은 성품이 우직[戇直]하고 과감하게 말하여, 밖으로는 시비(是非)를 모르는 듯하나 안으로는 실로 저울질[權衡]¹⁸⁵이 있었다. 여러 차례 풍헌(風憲)¹⁸⁶을 주관하며 반박하고 공격함에 거리낌[顧忌]이 없어 사람들이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다만 선(善)을 좋아하였으므로 사림(士類)이 추허(推許)하였고, 또한 중전(中殿)¹⁸⁷의 숙부(叔父)로서 상(上)의 두터운 총애[眷重]를 입었으므로 사림(士林)이 의지하고 믿었다. 졸(卒)함에 미쳐 사림(士類)이 그를 애석하게 여겼다.【《율곡외집(栗谷外集)》¹⁸⁸에서 인용】

주석:
184. 도승지(都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으뜸 벼슬. 왕명 출납을 총괄하는 핵심 측근이다.
185. 권형(權衡): 저울대와 저울추. 사리를 헤아려 판단하는 능력을 비유한다.
186. 풍헌(風憲): 풍속(風俗)과 법(憲). 사헌부(司憲府)의 직무를 가리킨다. ‘누주풍헌(累主風憲)’은 여러 차례 사헌부의 장관(대사헌)을 맡았음을 의미한다.
187. 중전(中殿): 임금의 정비(正妃), 즉 왕비(王妃)를 가리킨다. 박응남은 선조의 비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의 숙부이다.
188. 《율곡외집(栗谷外集)》: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문집인 《율곡전서(栗谷全書)》에 포함되지 않은 글들을 모아 엮은 책.


원문:
先王朝壬申年, 朴謹元爲都承旨, 以親耕時賞加陞品。 大司憲朴應男與謹元相切, 而廣坐中謂謹元曰: “不宜以此有賞典。” 卽請改正, 允之。 今則賞典太濫, 而臺官罕有糾正, 與故事異矣。【《芝峯類¹⁸⁹說》。】

번역문:
선왕조(先王朝)¹⁹⁰ 임신년(1572)에 박근원(朴謹元)¹⁹¹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는데, 친경(親耕)¹⁹² 때의 상(賞)으로 품계(品階)가 가자(加資)되었다. 대사헌(大司憲) 박응남(朴應男)이 박근원과 서로 친밀하였으나, 넓은 좌석 가운데서 박근원에게 말하기를 “이것으로 상전(賞典)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고, 즉시 개정(改正)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지금은 상전(賞典)이 너무 남발되는데도 대관(臺官)¹⁹³이 규정(糾正)하는 일이 드물어 옛 관례[故事]와 다르다.【《지봉유설(芝峯類說)》¹⁹⁴에서 인용】

주석:
189. [주-D003] 說 : 저본(底本)에는 “기(記)”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지봉유설(芝峯類說)・잡사부(雜事部)・고사(故實)》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90. 선왕조(先王朝): 이전 왕조 또는 이전 임금의 시대. 여기서는 선조(宣祖) 시대를 가리킨다.
191. 박근원(朴謹元, 1526-158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구암(久庵).
192. 친경(親耕): 임금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의례. 농업을 장려하는 의미를 지닌다.
193. 대관(臺官):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의 관리를 통칭하는 말.
194. 《지봉유설(芝峯類說)》: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백과사전적 저술.


원문:
公旣久出入風議之地, 每公退, 未嘗爲交游, 造請常若寒士然。 人問其故, 公答曰: “吾以無似, 待罪三司。 凡遇朝廷賢邪是非, 必當一視公議之所在, 無所撓屈, 然後黜陟褒貶, 方能不愧於吾心。 今若廣交朝士, 商論之際, 不無浸漸牽掣之弊, 是使吾不得盡事君之道也。” 一時咸歎其遠識。【記聞。】

번역문:
공(公)이 이미 오랫동안 풍의(風議)¹⁹⁵의 자리에 출입하였는데, 매번 공무에서 물러나면 일찍이 교유(交游)하지 않았고, 찾아가 청하는 것[造請]¹⁹⁶이 항상 한미한 선비[寒士]와 같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답하였다. “내가 무능(無似)한 사람으로서 삼사(三司)¹⁹⁷에서 대죄(待罪)하고 있다. 무릇 조정의 현명함과 사악함[賢邪], 시비(是非)를 만날 때마다 반드시 한결같이 공론[公議]이 있는 바를 보아 흔들리거나 굽힘[撓屈]이 없은 연후에야 출척(黜陟)¹⁹⁸과 포폄(褒貶)¹⁹⁹을 하여 바야흐로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만약 조정 선비[朝士]들과 널리 교유한다면 서로 논의할 때 점차 끌려가고 제약받는[浸漸牽掣]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나로 하여금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원대한 식견[遠識]에 감탄하였다.【들은 것을 기록함[記聞]】

주석:
195. 풍의(風議): 바람처럼 일어나 세상을 바로잡는 논의. 주로 언론(言論) 활동이나 탄핵(彈劾)을 담당하는 삼사(三司)의 역할을 가리킨다.
196. 조청(造請): 찾아가서 만나기를 청함.
197.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198. 출척(黜陟): 관리를 내치거나[黜] 올리는[陟] 것. 즉, 임면(任免)과 승진(昇進).
199. 포폄(褒貶): 칭찬하거나[褒] 나무라는[貶] 것. 인물이나 행적에 대한 평가를 의미한다.


원문:
沙溪金先生以公與先黃崗公爲同德彙征, 故素服其風義, 推爲當時善類之冠。 及後或論朝紳之讜直敢言者, 輒曰與古朴某何如云。

번역문: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²⁰⁰은 공(公)과 선친(先親) 황강공(黃崗公)²⁰¹이 덕(德)을 함께하여[同德] 모이고 나아갔다[彙征]²⁰²고 여겼으므로, 평소 그 풍채와 의리[風義]에 감복하여 당시 선한 무리[善類]의 으뜸[冠]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에 혹 조정 신하[朝紳] 중에 정직하고 곧으며 과감하게 말하는 자[讜直敢言者]를 논할 때면 문득 “옛날의 박 아무개[朴某]와 비교하여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주석:
200. 사계 김선생(沙溪金先生):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 중기의 문신, 예학(禮學)의 대가. 호는 사계(沙溪).
201. 선황강공(先黃崗公):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 황강(黃崗) 김계휘(金繼輝, 1526-1582)를 가리킨다. 박응남과 교유하였다.
202. 동덕휘정(同德彙征): 덕(德)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나아감. 박응남과 김계휘가 도의(道義)로써 교유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與同志諸公特相親厚, 目爲十友, 專以道義講磨, 幾於無日不會。 十友卽許草堂曄、朴思菴淳、奇高峯大升、鄭南峯芝衍、柳參議祖訒、洪益城聖民、辛白麓應時, 而餘二人不能記。 每會, 柳公後至, 輒高聲說義理, 一座皆喜。 及公歿, 此會遂罷, 聞者歎之。

번역문:
공(公)은 뜻을 같이하는[同志] 여러 공(公)들과 특별히 서로 친하고 두터워 십우(十友)²⁰³라 지목되었는데, 오로지 도의(道義)로써 강론하고 연마[講磨]하여 모이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십우(十友)는 바로 초당(草堂) 허엽(許曄)²⁰⁴, 사암(思菴) 박순(朴淳)²⁰⁵,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²⁰⁶,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²⁰⁷, 참의(參議) 유조인(柳祖訒)²⁰⁸, 익성(益城) 홍성민(洪聖民)²⁰⁹,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²¹⁰이며, 나머지 두 사람은 기록할 수 없다. 매번 모일 때마다 유공(柳公)²¹¹이 늦게 도착하면 문득 큰 소리로 의리(義理)를 설파하여 온 좌석이 모두 기뻐하였다. 공이 몰(歿)하자 이 모임이 마침내 파(罷)하니, 듣는 자들이 탄식하였다.

주석:
203. 십우(十友): 열 명의 벗. 구체적인 명칭이나 성격은 불분명하나, 박응남을 중심으로 도의를 강론하던 학문적 교유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04. 초당 허엽(草堂許曄, 1517-158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초당(草堂).
205. 사암 박순(思菴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사암(思菴).
206. 고봉 기대승(高峯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호는 고봉(高峯), 존재(存齋).
207. 남봉 정지연(南峯鄭芝衍, 1525-158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남봉(南峯).
208. 참의 유조인(參議柳祖訒, 1513-1573): 조선 중기의 문신. 육조(六曹)의 참의(參議, 정3품) 벼슬을 지냈다.
209. 익성 홍성민(益城洪聖民, 1536-159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졸옹(拙翁).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210. 백록 신응시(白麓辛應時, 1532-1585):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백록(白麓).
211. 유공(柳公): 유조인(柳祖訒)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백(李後白)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後白¹【文淸²公。】
字季眞, 號靑蓮, 延安人。 明宗八年癸丑³登第。 歷玉堂、吏郞, 賜暇湖堂。 官至吏曹判書。 庚寅, 追策光國勳, 贈府院君。

번역문:
이후백(李後白)¹【문청공(文淸公)²이다.】
자는 계진(季眞)이고 호는 청련(靑蓮)이며 연안(延安) 사람이다. 명종(明宗) 8년 계축년(1553)³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옥당(玉堂)⁴, 이조 정랑(吏曹正郞)⁵을 거쳤고, 호당(湖堂)⁶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⁷하였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⁸에 이르렀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광국공신(光國功臣)⁹으로 추록(追錄)되어 부원군(府院君)¹⁰에 추증(追贈)되었다.

주석:

  1. 이후백(李後白, 1520~157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청련거사(靑蓮居士)·동고(東皐)·묵병(墨兵).
  2. [주-D001] 淸 : 저본(底本)에는 “정(靖)”으로 되어 있다. 《강한집(江漢集)》의 〈자헌대부……이공신도비명(資憲大夫……李公神道碑銘)〉, 《숙종실록(肅宗實錄)》 22년 7월 24일,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청(文淸)이 이후백의 시호이다.
  3. [주-D002] 八年癸丑 : 《청련집(靑蓮集)》의 〈청련선생이공행장(靑蓮先生李公行狀)〉,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청련이공행장(靑蓮李公行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10년 을묘(十年乙卯)”가 되어야 한다. 즉, 이후백은 명종 10년(1555) 을묘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4.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 관리, 문한(文翰) 처리, 왕의 자문 등의 기능을 담당한 기관으로, 이곳의 관원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인재 중에서 선발되어 청요직(淸要職)으로 여겨졌다.
  5.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이조는 문관의 인사, 공훈, 봉작 등을 담당하던 육조(六曹)의 하나로, 이조 정랑은 전랑(銓郞)의 하나로서 인사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6.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조선 시대에 문흥(文興)을 위해 유능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기관. 동호(東湖)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호당이라고도 불렸다.
  7.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특별히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 사가독서에 선발되는 것은 문신으로서 큰 영예였다.
  8.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 인사를 총괄하는 핵심 요직이다.
  9. 광국공신(光國功臣):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이후백은 사후인 1590년에 3등 공신으로 추록되었다.
  10. 부원군(府院君): 조선 시대에 정1품 문무관이나 왕비의 아버지 등에게 주던 작위. 이후백은 사후에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원문:
少時犯路於方伯, 方伯令製詩, 公卽呈一絶曰: “遠郊斜日眩西東, 撲眼塵沙困北風。 誤觸牙旌知不恨, 浪仙從此識韓公。” 方伯大加驚歎, 禮而遣之。 或言此乃古人所作而公借用云。

번역문:
젊었을 때 방백(方伯)¹¹의 행차 길을 침범하자, 방백이 시(詩)를 짓게 하였는데, 공(公)이 즉시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바쳤다. “먼 교외 지는 해는 서쪽 동쪽 눈부시고, 눈을 때리는 흙먼지 북풍에 시달리네. 잘못하여 아정(牙旌)¹²을 건드렸으나 한(恨)이 되지 않음은 아노니, 낭선(浪仙)¹³이 이로부터 한공(韓公)¹⁴을 알게 되었네.” 방백이 크게 놀라고 감탄하여 예(禮)를 갖추어 보내주었다. 어떤 이는 이것이 옛사람이 지은 것을 공이 빌려 쓴 것이라고도 한다.

주석:
11.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의 별칭.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최고 행정관이다.
12. 아정(牙旌): 아기(牙旗). 깃대 꼭대기를 상아(象牙)로 장식한 깃발로, 장수나 고관의 위엄을 나타내는 의장(儀仗)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관찰사의 행차를 상징한다.
13. 낭선(浪仙):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호. 여기서는 이후백 자신을 가도에 비유한 것이다.
14. 한공(韓公): 당나라 문장가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한유는 가도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인물이다. 이후백은 이 시에서 자신을 가도에, 방백을 한유에 비유하여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달라는 뜻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원문:
爲咸鏡監司, 莅政淸明, 務祛宿弊, 一道稱頌。 然蠲減太甚, 郡邑凋弊, 科外誅求, 民始苦之。 林悌有詩曰: “蕙折霜風玉委塵, 一時淸德動簪紳。 可憐貊道終難繼, 相國醫民是病民。”【竝《芝峯類說》。】

번역문:
함경도 감사(咸鏡監司)¹⁵가 되어서는 정사(政事)를 맑고 분명하게 처리하며 오래된 폐단(宿弊)을 제거하기에 힘쓰니 온 도(道)가 칭송하였다. 그러나 조세 감면(蠲減)이 너무 심하여 군읍(郡邑)이 피폐해지고 규정 외의 수탈(科外誅求)¹⁶이 있자 백성들이 비로소 고통스러워하였다. 임제(林悌)¹⁷가 지은 시에 이르기를, “혜란(蕙蘭)은 서릿바람에 꺾이고 옥(玉)은 먼지에 버려졌으니¹⁸, 한 시대의 맑은 덕망(淸德)이 잠신(簪紳)¹⁹을 움직였네. 가련하다, 맥도(貊道)²⁰는 끝내 잇기 어려우니, 상국(相國)²¹의 백성 치료가 바로 백성을 병들게 함이네.”【이상 《지봉유설(芝峯類說)》²²에서 인용】

주석:
15. 함경감사(咸鏡監司): 함경도 관찰사.
16. 과외주구(科外誅求): 규정된 세금 외에 부당하게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것.
17. 임제(林悌, 1549

1587): 조선 중기의 문인. 호는 백호(白湖). 풍류와 기개로 유명하였다.
18. 혜절상풍 옥위진(蕙折霜風玉委塵): 혜란이 서릿바람에 꺾이고 옥이 먼지에 버려졌다는 뜻으로, 청렴하고 재능 있는 인물(이후백)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비유한 것일 수 있다. 또는 이후백의 정치가 처음에는 좋았으나 결과적으로 백성을 힘들게 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19. 잠신(簪紳): 비녀(簪)와 큰 띠(紳). 예전에 벼슬아치들이 하던 차림으로, 벼슬아치 또는 사대부 계층을 가리킨다.
20. 맥도(貊道): 맥(貊)은 북방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맥도는 함경도 지방을 의미한다. 즉, 함경도에서의 선정이 지속되기 어려움을 나타낸다.
21. 상국(相國): 재상(宰相)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이후백을 존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 있으나, 이후백은 재상(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오르지 못했다. 감사를 지낸 고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22.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

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고증, 견문을 담고 있다.


원문:
李後白以特旨拜刑曹判書。 後白淸勤奉公, 大臣薦之, 故有是除。 先是, 上問朴淳曰: “刑曹長官, 每患不得其人, 請卿勿論職次高下, 薦其可堪者。 雖在郞僚, 亦可擢用。” 淳對曰: “上敎如此, 不勝感激。 臣請出與同僚議薦。” 旣出, 乃薦後白, 故以特旨拜官。

번역문:
이후백이 특별한 임금의 명령(特旨)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²³에 제수되었다. 후백은 청렴하고 부지런히 공무(公務)에 힘썼으므로 대신(大臣)이 그를 천거하였기에 이러한 제수(除授)가 있었다. 이보다 앞서 상(上)께서 박순(朴淳)²⁴에게 묻기를, “형조 장관(刑曹長官)은 매번 적임자를 얻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니, 경(卿)은 직위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말고 감당할 만한 자를 천거하라. 비록 낭료(郞僚)²⁵에 있더라도 또한 발탁하여 쓸 수 있다.” 하니, 박순이 대답하기를, “상교(上敎)가 이와 같으시니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臣)이 나가서 동료들과 의논하여 천거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나가서는 마침내 후백을 천거하였으므로, 특별한 임금의 명령으로 관직에 제수된 것이다.

주석:
23. 형조판서(刑曹判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형조는 법률, 소송, 형벌, 노비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육조의 하나이다.
24. 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사암(思庵). 영의정을 지냈다.
25. 낭료(郞僚): 정랑(正郞, 정5품)과 좌랑(佐郞, 정6품) 등 비교적 낮은 관직의 관료들을 통칭하는 말.


원문:
吏曹判書李後白辭疾免。 後白爲銓長, 務崇公論, 不受請托, 政事可觀。 雖親舊, 若頻往候之, 則深以爲不韙。 一日有族人往見, 語次示求官之意, 後白變色, 示以一小冊, 字多記人姓名, 將以除官者也, 其族人姓名亦在錄中。 後白曰: “吾錄子名, 將以擬望。 今子有求官之語, 若求者得之, 則非公道也。 惜乎! 子若不言, 可以得官矣。” 其人大慙而退。 後白每除一官, 必遍問其人之可仕與否, 若除不合之人, 則輒終夜不眠, 曰: “我誤國事。” 時論以後白之公心, 近世無比。

번역문:
이조판서 이후백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후백은 전장(銓長)²⁶이 되어서 공론(公論)을 숭상하기에 힘쓰고 청탁(請托)을 받지 않아 정사(政事)가 볼 만하였다. 비록 친구라도 만약 자주 찾아와 안부를 물으면 매우 옳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한 족인(族人)²⁷이 찾아와 만났는데, 말하는 중에 관직을 구하는 뜻을 내비치자, 후백이 안색을 바꾸며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니, 글자는 대부분 사람의 성명을 기록한 것으로 장차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이었는데, 그 족인의 성명 또한 기록 중에 있었다. 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장차 의망(擬望)²⁸에 올리려 함이었다. 이제 그대가 관직을 구하는 말을 하였으니, 만약 구하는 자가 그것을 얻는다면 공정한 도리가 아니다. 애석하구나! 그대가 만약 말하지 않았다면 관직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니, 그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후백은 매번 한 관직을 제수할 때마다 반드시 그 사람이 벼슬할 만한지 아닌지를 두루 물었고, 만약 부적합한 사람을 제수하면 문득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말하기를, “내가 국사(國事)를 그르쳤다.” 하였다. 시론(時論)에서는 후백의 공정한 마음(公心)은 근세에 비할 바가 없다고 여겼다.

주석:
26. 전장(銓長): 전조(銓曹), 즉 이조(吏曹)의 장관인 이조판서를 가리킨다. '전(銓)'은 관리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27. 족인(族人): 일가친척.
28. 의망(擬望): 조선 시대에 관리를 임명할 때 이조나 병조에서 세 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던 제도 또는 그 후보자 명단.


원문:
李後白居官盡職, 律身淸苦, 位至六卿, 霜素如儒生, 賄賂一切不受, 客至盃盤冷淡, 人服其潔。 只是局量狹隘, 非廟堂之器。 金孝元常曰: “季眞只是六卿之才, 若至作相, 我當論劾。” 人以後白與沈義謙相知, 故孝元嗛義謙而發此云。 李珥獨曰: “季眞果非相器, 孝元不爲無見。 但無人勝於季眞, 則安能劾其爲相乎?”【竝《石潭日記》。】

번역문:
이후백은 관직에 있으면서 직무를 다하고 자신을 다스림(律身)에 청렴하고 검소하여(淸苦), 지위가 육경(六卿)²⁹에 이르렀으나 서리처럼 깨끗하기(霜素)가 유생(儒生)과 같았고, 뇌물(賄賂)은 일절 받지 않았으며, 손님이 이르러도 술상(杯盤)이 냉담(冷淡)하여 사람들이 그의 청렴결백함(潔)에 탄복하였다. 다만 국량(局量)³⁰이 좁아 묘당(廟堂)³¹의 그릇³²은 아니었다. 김효원(金孝元)³³이 항상 말하기를, “계진(季眞)은 다만 육경의 재목일 뿐이니, 만약 재상(作相)³⁴이 되는 데 이른다면 내가 마땅히 논핵(論劾)³⁵할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은 이후백이 심의겸(沈義謙)³⁶과 서로 잘 알았기 때문에, 김효원이 심의겸을 싫어하여(嗛) 이런 말을 한다고 하였다. 이이(李珥)³⁷가 유독 말하기를, “계진은 과연 재상의 그릇이 아니니, 효원의 말에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계진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면 어찌 그가 재상이 되는 것을 탄핵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이상 《석담일기(石潭日記)》³⁸에서 인용】

주석:
29. 육경(六卿): 육조(六曹: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判書)를 통칭하는 말. 고위 관직을 의미한다.
30. 국량(局量): 사물을 포용하는 도량이나 능력의 정도.
31. 묘당(廟堂): 종묘(宗廟)와 조정(朝廷)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조정을 뜻하거나, 의정부(議政府)와 같은 최고 정무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32. 기(器): 그릇. 재능이나 도량을 비유하는 말이다. '묘당지기(廟堂之器)'는 재상(宰相)의 재목을 의미한다.
33. 김효원(金孝元, 1532

1590):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東人)의 영수.
34. 작상(作相): 재상(宰相)이 됨.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킨다.
35. 논핵(論劾): 죄나 잘못을 들어 탄핵함.
36. 심의겸(沈義謙, 1535

1587):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西人)의 영수.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은 붕당(朋黨) 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37.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 정치가. 호는 율곡(栗谷).
38. 《석담일기(石潭日記)》: 이이(李珥)의 문인인 이정(李楨)이 쓴 일기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주로 이이의 언행과 당시의 정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원문:
北方是豐沛之地, 而在要荒之外, 風俗獷悍, 與胡貊無異。 宣廟初, 李靑蓮後白爲方伯, 作文會書院于咸興, 以文敎道之。 州縣小民有能誦詩書、作文辭者, 親與之爲主客之禮, 人皆競勸, 文風藹然, 策名登朝者相繼。 壬辰之亂, 能撥亂反正, 皆自號儒生者始, 若李公可謂眞方伯矣。

번역문:
북방(北方)은 풍패지지(豐沛之地)³⁹이지만 요황(要荒)⁴⁰의 밖에 있어 풍속이 거칠고 사나워(獷悍) 오랑캐(胡貊)와 다름이 없었다. 선조(宣祖) 초기에 이청련(李靑蓮) 후백이 방백(方伯)이 되어 함흥(咸興)에 문회서원(文會書院)⁴¹을 짓고 문교(文敎)⁴²로써 그들을 인도하였다. 주현(州縣)의 낮은 백성(小民) 중에 시서(詩書)⁴³를 외우고 문사(文辭)를 지을 수 있는 자가 있으면, 친히 그와 더불어 주객(主客)의 예(禮)⁴⁴를 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힘쓰고 권장하여 문풍(文風)이 성하게 일어나(藹然), 이름을 올려(策名)⁴⁵ 조정에 오르는 자가 서로 이어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난(亂)을 다스려 정도(正道)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스로 유생(儒生)이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공(李公)과 같은 분은 참된 방백(方伯)이라 이를 만하다.

주석:
39. 풍패지지(豐沛之地):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고향인 풍현(豐縣)과 패현(沛縣)을 가리키는 말로, 제왕(帝王)의 고향 또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땅을 비유한다.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함경도 지역을 미화하여 이르는 말이다.
40. 요황(要荒): 고대 중국의 구복(九服) 제도에서 수도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나눈 행정 구역 중 바깥쪽 지역을 가리키는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을 아울러 이르는 말. 변방 또는 문화가 미치지 못하는 미개한 지역을 의미한다.
41. 문회서원(文會書院): 이후백이 함경감사 재직 시 함흥에 세운 서원. 지방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했다.
42. 문교(文敎): 학문과 교육을 통한 교화.
43. 시서(詩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유교 경전을 통칭하는 말로, 학문과 교양을 의미한다.
44. 주객지례(主客之禮): 주인과 손님의 예. 신분이 높은 관찰사가 낮은 백성이라도 학문하는 자를 동등하게 예우했음을 보여준다.
45. 책명(策名): 이름이 장부(帳簿)에 오름. 즉,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李靑蓮爲冢宰, 門不受私謁, 雖名稱堪爲百執事者, 人或私托, 則必絶之, 惜人才者多病。 多病誠是也, 其視惟貨其吉而門如市者, 亦不可同日而語矣。【竝《涪溪記聞》。】

번역문:
이청련이 총재(冢宰)⁴⁶가 되었을 때, 문으로는 사사로운 청탁(私謁)⁴⁷을 받지 않았으니, 비록 명칭(名稱)⁴⁸이 백집사(百執事)⁴⁹가 될 만한 자라도 남들이 혹 사사로이 청탁하면 반드시 이를 끊어버렸으므로, 인재(人才)를 아끼는 자들이 이를 많이 비판하였다(多病)⁵⁰. 많이 비판하는 것이 진실로 옳기는 하지만, 오직 그 길(吉)⁵¹을 팔아 문이 저잣거리 같은 자⁵²들에 비하면 또한 같은 날에 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상 《부계기문(涪溪記聞)》⁵³에서 인용】

주석:
46. 총재(冢宰): 백관(百官)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정승(政丞)을 가리키는 말. 특히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이후백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47. 사알(私謁): 사사로운 목적으로 찾아와 청탁하는 것.
48. 명칭(名稱): 명성(名聲)과 칭예(稱譽). 즉, 평판이나 자격.
49. 백집사(百執事): 모든 관리. 모든 관직.
50. 다병(多病): 병통으로 여기다, 비판하다.
51. 길(吉): 길하다, 좋다. 여기서는 관직이나 이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52. 유화기길 이문여시자(惟貨其吉而門如市者): 오직 관직이나 이권을 팔아(뇌물을 받고 자리를 주어) 집 문 앞이 시장처럼 번잡한 자. 즉, 청탁을 받고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부패한 관리를 가리킨다. 이후백이 비록 인재 등용에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부패한 관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청렴했음을 강조한다.
53.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문집 《백헌집(白軒集)》에 실려 있는 야사(野史) 모음. 주로 인물 일화와 견문을 기록했다.


정탁(鄭琢)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鄭琢【貞簡公。】
字子精, 號藥圃, 淸州人。 嘉靖丙戌生。 壬子司馬, 明宗十三年戊午登第。 歷三司、吏郞、舍人、承旨、大司成、江原監司、吏曹參判・判書、兵曹判書。 錄扈聖勳, 封西原府院君。 官至左議政, 後致仕還鄕。 乙巳卒, 年八十。

번역문:
정탁(鄭琢)¹【정간공(貞簡公)²이다.】
자는 자정(子精)이고 호는 약포(藥圃)이며 청주(淸州) 사람이다. 가정(嘉靖)³ 병술년(1526, 중종 21)에 태어났다. 임자년(1552, 명종 7)에 사마시(司馬試)⁴에 합격하고, 명종 13년 무오년(1558)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삼사(三司)⁵,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⁶, 승지(承旨)⁷, 대사성(大司成)⁸,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조참판(吏曹參判)·판서(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⁹에 녹훈(錄勳)되어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¹⁰에 봉해졌다. 관직은 좌의정(左議政)¹¹에 이르렀고, 후에 치사(致仕)¹²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을사년(1605, 선조 38)에 졸(卒)하니, 나이 80세였다.

주석:

  1. 정탁(鄭琢, 1526~160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2. 정간공(貞簡公): 정탁의 시호.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함(淸白守節), 간(簡)은 간결하고 소탈함(平易不訾) 등을 의미한다.
  3. 가정(嘉靖):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4. 사마시(司馬試):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합쳐 부르는 말. 조선 시대 소과(小科)에 해당한다. 여기에 합격하면 생원 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거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다.
  5.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하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권과 신권을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 여러 관청에 두었으나, 주로 문한(文翰)이나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청요직이었다. 예문관 검열, 승문원 교리, 사간원 정언 등이 포함될 수 있다.
  7.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등이 있었다.
  8.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국립 최고 교육기관의 장이었다.
  9.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정탁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0.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에게 내려진 작위. 서원(西原)은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
  11. 좌의정(左議政): 의정부의 버금 벼슬. 정1품. 영의정 다음가는 재상이다.
  12. 치사(致仕): 벼슬아치가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

원문:
登科初, 入校書館, 人皆以爲屈, 而公略不介意, 勤供職, 物議優之。 拜正言, 首劾尹元衡等專權誤國之罪, 謇然有古直臣風。

번역문:
과거에 급제한 초기에 교서관(校書館)¹³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모두 영전하지 못한 것(屈)¹⁴이라 여겼으나 공은 전혀 개의치 않고 부지런히 직무에 힘쓰니, 세간의 평판(物議)이 그를 좋게 평가하였다. 정언(正言)¹⁵에 제수되자, 윤원형(尹元衡)¹⁶ 등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나라를 그르친 죄를 가장 먼저 탄핵하니, 강직하여(謇然) 옛 직신(直臣)¹⁷의 풍모가 있었다.

주석:
13. 교서관(校書館): 조선 시대에 경적(經籍)의 인쇄와 향축(香祝), 인전(印篆)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정9품 부정자(副正字) 등의 관직이 있었다. 당시 과거 급제자들이 선호하는 청요직에 비해 한직으로 여겨졌다.
14. 굴(屈): 굽히다, 억울하다. 여기서는 재능에 비해 낮은 자리에 임명된 것을 의미한다.
15.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왕에게 간쟁(諫諍)하는 임무를 맡았다.
16. 윤원형(尹元衡, ?~1565): 조선 명종 때의 외척,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했다.
17. 직신(直臣): 임금 앞에서 거리낌 없이 직언(直言)하는 신하.


원문:
壬辰, 海寇猝發, 直向京城, 宣祖大王蒼黃西幸, 公以內醫提調, 扈駕至平壤。 賊鋒已逼, 朝議以鐵甕爲歸。 公以爲“京城旣不守, 所恃者浿江天塹, 而又棄入深僻, 非計也。 中路脫有潰散之患, 悔之無及”, 涕泣爭不得。 旣至寧邊, 吏民果先潰, 無可爲者。 於是分朝之議決矣, 公以貳師從分朝, 急趨伊川, 路梗不克達, 轉向義州。 一行危懼, 多變服顧望, 公笑曰: “天若祚我東, 必無此事。 設有不幸, 豈以私智免?”

번역문:
임진년(1592)에 왜적(海寇)¹⁸이 갑자기 일어나 바로 경성(京城)¹⁹으로 향하자,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황급히 서쪽으로 행차(西幸)²⁰하셨는데, 공은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²¹로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적의 칼날(賊鋒)이 이미 핍박해오자, 조정의 의논은 철옹(鐵甕)²²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공은 “경성을 이미 지키지 못했으니 믿는 것은 패강(浿江)²³의 천연 요새(天塹)인데, 이마저 버리고 깊고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중도(中路)에서 만약 군사가 흩어지는(潰散) 우환이 있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라고 여겨, 눈물을 흘리며 다투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영변(寧邊)에 이르자 아전과 백성들이 과연 먼저 흩어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분조(分朝)²⁴의 의논이 결정되자, 공은 이사(貳師)²⁵로서 분조를 따라 급히 이천(伊川)²⁶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능히 도달하지 못하고 의주(義州)로 방향을 돌렸다. 일행(一行)이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대부분 변복(變服)하고 눈치만 살피자(顧望),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하늘이 만약 우리 동방(東方)을 돕는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설령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어찌 사사로운 지혜로 면할 수 있겠는가?”

주석:
18. 해구(海寇): 바다 도적. 여기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을 가리킨다.
19. 경성(京城): 수도 서울. 한양(漢陽)을 가리킨다.
20. 서행(西幸): 임금이 서쪽으로 행차함.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란 간 것을 말한다.
21.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내의원(內醫院)의 일을 총괄하는 당상관 직책. 내의원은 궁중의 의약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정탁은 당시 병조판서로서 내의원 제조를 겸하고 있었다.
22. 철옹(鐵甕): 평안북도 철산(鐵山)의 옛 이름.
23. 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 평양을 끼고 흐르는 강으로,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할 수 있었다.
24. 분조(分朝): 조정을 둘로 나눔. 임진왜란 때 선조는 의주에 머무르고, 세자 광해군(光海君)에게 조정을 나누어(分朝) 함경도, 강원도 등지에서 항전 활동을 독려하게 했다.
25. 이사(貳師): 부사(副師). 여기서는 분조를 이끌게 된 광해군의 스승 또는 보좌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탁은 당시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고 있었다.
26. 이천(伊川): 강원도 이천군. 광해군의 분조가 활동 거점으로 삼으려 했던 곳 중 하나이다.


원문:
向寧邊時, 同行諸宰猶不忘舊時習, 議論多不愜。 公以爲: “天下之義理無窮, 人之所見, 容或不同, 當此國事危急之日, 要當協心殫慮, 共濟時艱, 何不協之爲?” 於是作《異同辨》以示²⁷沈忠謙。

번역문:
영변으로 향할 때, 동행한 여러 재상(宰相)들이 오히려 옛 습관(舊時習)을 잊지 못하고 의논이 대부분 맞지 않았다(不愜). 공이 생각하기를, “천하의 의리(義理)는 무궁하고 사람의 소견은 혹 같지 않을 수 있으니, 이 국사가 위급한 날을 당하여 중요한 것은 마땅히 마음을 합하고 생각을 다하여(協心殫慮) 함께 시대의 어려움(時艱)을 구제하는 것인데, 어찌 화합하지 못하는가?” 하였다. 이에 《이동변(異同辨)》을 지어 심충겸(沈忠謙)²⁸에게 보여주었다.

주석:
27. [주-D001] 示 : 저본(底本)에는 없다. 《약포집(藥圃集)》의 〈정간공서원부원군정공묘지명(貞簡公西原府院君鄭公墓誌銘)〉 및 《동계집(桐溪集)》의 〈정간공서원부원군정공묘지명(貞簡公西原府院君鄭公墓誌銘)〉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28. 심충겸(沈忠謙, 1545~1594): 조선 중기의 문신. 심의겸(沈義謙)의 동생.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였다.


원문:
初, 上命諸宰各擧所知, 公薦郭再祐、李舜臣、金德齡等才可將。 至是, 再祐、舜臣捍禦一方, 立偉功, 皆爲鉅人名將, 而德齡以勇力聞, 賊甚畏之。 及當德齡被刑時, 公極言“其臨敵殺名將以自弱, 甚無謂”, 上亟命殺之, 賊果酌酒相賀云。【竝桐溪鄭蘊撰墓誌。】

번역문:
처음에 상(上)께서 여러 재상들에게 각기 아는 인물을 천거하라고 명하시자, 공이 곽재우(郭再祐)²⁹, 이순신(李舜臣)³⁰, 김덕령(金德齡)³¹ 등의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하다고 천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곽재우와 이순신은 한 지방을 막아 지키며(捍禦) 위대한 공(偉功)을 세워 모두 거인(鉅人)이자 명장(名將)이 되었고, 김덕령은 용맹과 힘(勇力)으로 이름나 적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김덕령이 형벌을 받게 되었을 때에 이르러, 공이 “적을 눈앞에 두고 명장을 죽여 스스로 약해지는 것은 매우 무의미합니다.”라고 극력 말하였으나, 상께서 즉시 그를 죽이라고 명하시니, 적들이 과연 술을 따라 서로 축하하였다고 한다.【이상 동계(桐溪) 정온(鄭蘊)³²이 지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29. 곽재우(郭再祐, 1552

1617): 조선 중기의 의병장. 호는 망우당(忘憂堂). 임진왜란 때 경상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다. 붉은 옷을 입고 싸워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렸다.
30. 이순신(李舜臣, 1545

1598): 조선 중기의 명장. 자는 여해(汝諧).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서 뛰어난 전략과 리더십으로 수군을 이끌어 왜군을 격파하고 나라를 지켰다. 시호는 충무(忠武).
31. 김덕령(金德齡, 1567

1596):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경수(景樹). 임진왜란 때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나,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아 옥사하였다.
32. 정온(鄭蘊, 1569

1641):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정탁의 조카이다.


원문:
丙申夏, 上朝陵卜日, 而雷震禁內。 公進言曰: “魯以鼷鼠示災止不郊。 今譴告非常, 宜克謹天戒, 深惟非時不擧之義。” 上爲寢行。 其秋, 湖西賊李夢鶴就擒, 支黨招款, 約以拜陵日慝作而不果。 聞者寒心。

번역문:
병신년(1596, 선조 29) 여름, 상(上)께서 능(陵)에 참배(朝陵)³³할 날짜를 점쳤는데, 금내(禁內)³⁴에 벼락이 쳤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노(魯)나라에서는 작은 쥐(鼷鼠)가 재앙을 보여 교제(郊祭)³⁵를 중지하였습니다³⁶. 지금 하늘의 견책(譴告)이 비상하니, 마땅히 하늘의 경계(天戒)를 극진히 삼가시고 때가 아니면 거행하지 않는다는 의의를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상께서 그 행차를 중지하셨다. 그해 가을, 호서(湖西)의 역적 이몽학(李夢鶴)³⁷이 사로잡히자, 그 잔당(支黨)들이 자백(招款)하였는데, 능에 참배하는 날에 몰래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듣는 자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寒心).

주석:
33. 조릉(朝陵): 임금이 능에 가서 참배하는 것.
34. 금내(禁內): 대궐 안.
35. 교제(郊祭): 교사(郊祀). 도성 밖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 국가의 중요한 제례 중 하나이다.
36. 노이혜서시재지불교(魯以鼷鼠示災止不郊):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24년 조에 나오는 고사. 노나라 장공이 교제를 지내려 할 때 작은 쥐 여러 마리가 제단의 기둥을 갉아먹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 교제를 중지했다는 내용이다. 정탁은 이 고사를 인용하여 벼락이라는 비상한 재앙이 있었으니 능행을 중지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37. 이몽학(李夢鶴, ?~1596): 조선 선조 때의 서얼(庶孽) 출신 무신. 임진왜란 중 혼란을 틈타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원문:
丁酉, 賊躪湖南, 羽報蜂午。 公上箚請自行邊曰: “民罹大創, 勢將土崩, 朝廷命令, 遠邇不通, 烏可以祖宗二百年基業付之一擲, 而束手待亡? 臣奉哀痛之音, 往布德意, 慰諭軍民父老, 率勵子弟, 相度形便, 控扼賊路要衝, 庶幾萬一天幸。 臣愚朝夕老死, 馳突行間, 誠難自力, 顧先士卒一死報效, 無負素蓄耳。” 朝廷憫其老不許。

번역문:
정유년(1597, 선조 30)³⁸에 적(賊)이 호남(湖南)을 짓밟으니(躪) 우보(羽報)³⁹가 벌떼처럼 빗발쳤다(蜂午). 공이 차자(箚子)⁴⁰를 올려 스스로 행변(行邊)⁴¹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백성들이 큰 상처(大創)를 입어 형세가 장차 토붕와해(土崩瓦解)할 지경이고, 조정의 명령이 멀고 가까운 곳에 통하지 않으니, 어찌 조종(祖宗) 200년의 기업(基業)을 일거에 내던져(付之一擲)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신(臣)이 애통해하시는 분부(哀痛之音)를 받들어 가서 임금의 덕의(德意)를 널리 펴고, 군민(軍民)의 부로(父老)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며,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 격려하며, 형세와 편의(形便)를 살펴서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을 제압(控扼)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하늘의 다행(天幸)이 있기를 바랍니다. 신은 어리석어 아침저녁으로 늙어 죽을 몸이라 전쟁터(行間)를 치달리기(馳突)는 진실로 스스로 힘쓰기 어렵지만, 사졸(士卒)보다 먼저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여(報效) 평소 쌓아온 바(素蓄)를 저버리지 않을 뿐입니다.” 하니, 조정에서 그가 늙었음을 안타깝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주석:
38. 정유년(丁酉年):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난 해이다.
39. 우보(羽報): 깃털을 꽂아 급함을 표시한 보고. 매우 위급한 보고를 의미한다.
40. 차자(箚子): 조선 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상소(上疏)의 한 형식. 격식이 비교적 간단했다.
41. 행변(行邊): 변방(邊方)으로 나아가 군무(軍務)를 살피거나 지휘하는 것.


원문:
時廣募軍丁, 欲許私賤贖免, 且患軍餉乏興, 議以功券收之。 公執不可, 曰: “自箕子設法以來, 奴主分定猶君臣也, 安有叛主而忠國者? 是將道之叛上而國不爲國矣。 賣爵本漢時弊政, 今又壞販勳格, 安坐販穀之徒, 與出萬死犯矢石者竝列帶礪, 奚以勸鬪士哉?” 議者無以難。【竝東州李敏求撰諡狀。】

번역문:
이때 널리 군정(軍丁)을 모집하면서 사천(私賤)⁴²이 속량(贖良)하여 군역을 면제받는 것을 허락하고자 하였고, 또한 군량(軍餉)이 부족함을 걱정하여 공권(功券)⁴³으로 이를 거두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공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말하기를, “기자(箕子)께서 법을 설치하신 이래로 노비와 주인의 분수(分)가 정해짐이 임금과 신하와 같았는데, 어찌 주인을 배반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는 장차 윗사람을 배반하도록 인도하여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관작을 파는 것(賣爵)은 본래 한(漢)나라 때의 폐정(弊政)인데, 이제 또 공훈을 파는 격식(販勳格)마저 무너뜨려, 편안히 앉아 곡식을 파는 무리(販穀之徒)⁴⁴를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화살과 돌(矢石)⁴⁵을 무릅쓴 자와 나란히 대려(帶礪)⁴⁶의 반열에 두면, 어찌 싸우는 병사(鬪士)를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반박하지 못하였다.【이상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⁴⁷가 지은 시호 행장(諡狀)⁴⁸에서 인용】

주석:
42. 사천(私賤):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奴婢).
43. 공권(功券): 공로를 인정하여 발행하는 증서. 여기서는 군량미를 납부한 대가로 주는 증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신분 상승이나 군역 면제의 혜택을 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4. 판곡지도(販穀之徒): 곡식을 파는 무리. 여기서는 돈이나 곡식을 내고 공권(功券)을 사려는 부유한 상인이나 평민들을 가리킨다.
45. 시석(矢石): 화살과 돌. 전쟁 또는 전투를 비유하는 말이다.
46. 대려(帶礪): 황하(黃河)가 띠(帶)처럼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처럼 작아진다는 뜻으로, 나라가 영원히 변치 않음을 비유하는 말. 여기서는 공신(功臣)의 서훈(敍勳)을 의미하는 '대려지맹(帶礪之盟)'을 가리키며, 공신 반열을 의미한다.
47. 이민구(李敏求, 1589~1670):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
48. 시장(諡狀): 시호(諡號)를 내려주도록 청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예조(禮曹)에 올리던 글. 행장(行狀)의 일종이다.


원문:
己亥, 上命錄臨亂遺君輩姓名榜示朝堂。 公以爲: “此輩固可罪, 但抄啓之日, 聞見或不能無失, 間有枉被者。 當此大霈, 滌瑕殆盡, 而此輩獨廢錮終身, 恐非與物同慶之意。” 上以爲然, 竟釋之。【墓誌。】

번역문:
기해년(1599, 선조 32)에 상(上)께서 난리(亂)에 임하여 임금을 버리고 도망간 무리(遺君輩)의 성명을 기록하여 조당(朝堂)⁴⁹에 게시(榜示)하라고 명하셨다. 공이 생각하기를, “이 무리들은 진실로 죄를 줄 만하지만, 다만 명단을 뽑아 아뢰던 날(抄啓之日)에 듣고 본 것에 혹 실수가 없을 수 없어 간혹 원통하게 포함된 자가 있습니다. 이 큰 은택(大霈)⁵⁰을 내리시는 때를 당하여 허물을 씻어주는 것(滌瑕)이 거의 다하였는데, 이 무리들만 유독 폐고(廢錮)⁵¹되어 종신토록 금고되면, 만물과 더불어 함께 경축하는 뜻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께서 그렇다고 여겨 마침내 그들을 석방하였다.【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49. 조당(朝堂): 조정의 건물. 신하들이 모여 정사를 논의하는 곳.
50. 대패(大霈): 큰 비가 널리 내림. 임금의 크고 넓은 은택을 비유한다. 사면령(赦免令) 등을 의미할 수 있다.
51. 폐고(廢錮): 관직 등용의 길을 막고 내쫓는 형벌.


원문:
癸卯五月, 行判中樞府事鄭琢上疏乞致仕, 上下其議。 禮曹啓曰“大夫七十而致仕者, 乃是《禮經》, 而有德則君不許, 亦是《禮經》。 蓋人臣筋力已衰之後, 不可强縻職事, 而人君之不忍遽從其請, 亦終始優老之盛意。 我國古制, 雖未詳知, 參以見聞, 亦有所傳。 文武官致仕者, 有陞秩、給俸、賜勅之典, 又有給驛還鄕、月給食米之敎。 前者右相沈守慶致仕, 而加‘致仕’二字於本銜上。 引年請老, 是雖古禮, 今無可據之例”云。 上答曰: “《禮經》有致仕之文, 國典有致仕之法, 前代有致仕之制, 惟我國獨不行之, 似乖優老之意。 老者安之, 大夫懸車, 古之道也。 今琢退去其鄕, 仍乞致仕, 從其願恐無不可。” 遂議于大臣, 竟從其請。【《宣廟寶鑑》。】

번역문:
계묘년(1603, 선조 36) 5월에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⁵² 정탁이 상소를 올려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자, 상께서 그 의논을 아래로 내렸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부(大夫)가 70세에 치사하는 것은 바로 《예경(禮經)》⁵³에 있는 내용이지만, 덕(德)이 있으면 임금이 허락하지 않는 것 또한 《예경》에 있습니다. 대개 신하가 근력(筋力)이 이미 쇠한 뒤에는 억지로 직무(職事)에 얽매이게 할 수 없지만, 임금이 차마 갑자기 그 청을 따르지 못하는 것 또한 노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우대하는(優老) 성대한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옛 제도(古制)는 비록 상세히 알지는 못하나 견문(見聞)을 참고하면 또한 전해오는 바가 있습니다. 문무관(文武官)으로 치사한 자에게는 품계를 올려주고(陞秩) 봉록(俸)을 지급하며 칙서(勅書)를 하사하는 법전(典)이 있었고, 또한 역마(驛)를 지급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매달 식량(食米)을 지급하는 교지(敎)도 있었습니다. 전(前) 우상(右相) 심수경(沈守慶)⁵⁴이 치사하였을 때 본래의 관직명 위에 ‘치사(致仕)’ 두 글자를 더하였습니다. 나이를 이유로 은퇴를 청하는 것(引年請老)은 비록 옛 예법(古禮)이지만 지금은 근거할 만한 사례(例)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답하기를, “《예경》에 치사에 대한 글이 있고, 국전(國典)⁵⁵에 치사의 법이 있으며, 전대(前代)에 치사의 제도가 있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 유독 이를 행하지 않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뜻에 어긋나는 듯하다. 노인을 편안하게 해주고(老者安之) 대부가 수레를 매다는 것(懸車)⁵⁶은 옛 도리이다. 이제 정탁이 그 고향으로 물러가서 인하여 치사를 청하니, 그 원을 따르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하다.” 하셨다. 마침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결국 그 청을 따랐다.【《선묘보감(宣廟寶鑑)》⁵⁷에서 인용】

주석:
52.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행(行)은 관계(官階)가 높고 관직이 낮은 경우 관직명 앞에 붙이는 말이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는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로 정1품이다. 중추부는 일정한 소관 사무 없이 고위 관료들을 우대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정탁은 당시 좌의정(정1품)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로 있었다.
53. 《예경(禮經)》: 《예기(禮記)》를 가리킨다. 《예기》 〈곡례(曲禮)〉 상(上) 편에 “대부(大夫)는 70세에 치사한다(大夫七十而致仕).”라는 구절이 있다.
54. 심수경(沈守慶, 1516~1599): 조선 중기의 문신. 우의정을 지냈다. 1591년(선조 24)에 76세의 나이로 치사하였다.
55. 국전(國典): 나라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가리킨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조에 70세가 되면 치사하는 규정이 있다.
56. 노자안지(老者安之):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편에서 공자(孔子)가 자신의 포부를 밝힌 말의 일부. 노인들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57. 현거(懸車): 수레를 매달아 둔다는 뜻으로,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 《예기》 〈곡례〉 상 편 주석에 “수레를 매달아 두고 타지 않으니, 벼슬하지 않음을 말한다(懸其車而不乘, 言不復仕也).”라고 하였다.
58. 《선묘보감(宣廟寶鑑)》: 조선 선조(宣祖)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기록한 책.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원문:
李議政浚慶善知人, 一見公, 深器之曰: “貌類雌龍, 他日必大貴。” 在京師, 有相者見之, 曰: “君眞仁人, 當濟萬命。”【墓誌。】

번역문:
의정(議政) 이준경(李浚慶)⁵⁸은 사람 알아보기를 잘했는데, 한번 공을 보고는 매우 그릇으로 여겨(深器之) 말하기를, “용모가 자룡(雌龍)⁵⁹과 비슷하니, 다른 날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경사(京師)⁶⁰에 있을 때, 관상 보는 자(相者)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어진 사람(仁人)이니, 마땅히 만 명의 목숨(萬命)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58.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59. 자룡(雌龍): 암컷 용.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비범한 인물이 될 상으로 본 것으로 추정된다.
60. 경사(京師): 수도. 서울을 가리킨다.


원문:
藥圃相公言: “少時見南冥, 臨別, 南冥忽曰: ‘我有一隻牛贈君, 君可牽去。’ 某不省所謂, 南冥笑曰: ‘君辭氣太敏銳, 歷塊之足易於一蹶, 參以遲鈍, 乃能致遠。 此吾所以贈牛也。’ 某拜謝受敎。 今數十年, 幸無大過, 先生之賜也。”【李璣玉日記。】

번역문:
약포 상공(藥圃相公)⁶¹이 말하였다. “젊었을 때 남명(南冥)⁶² 선생을 뵈었는데, 헤어짐에 임하여 남명 선생께서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내게 소 한 마리가 있어 그대에게 주니, 그대는 끌고 갈 수 있겠는가?’ 하셨다. 나는 그 말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남명 선생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과 기운(辭氣)이 너무 민첩하고 예리하니(敏銳), 흙덩이를 지나는 발걸음(歷塊之足)⁶³이 한 번 넘어지기 쉽다. 여기에 더디고 둔함(遲鈍)을 더해야 능히 멀리 이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소를 주는 까닭이다.’ 하셨다. 나는 절하고 사례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 수십 년 동안 다행히 큰 허물이 없었던 것은 선생께서 주신 덕분이다.”【이기옥(李璣玉)⁶⁴의 일기에서 인용】

주석:
61. 약포 상공(藥圃相公): 정탁을 높여 부르는 말. 상공(相公)은 재상을 지낸 이에 대한 존칭이다.
62.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호. 조선 중기의 저명한 처사(處士), 학자. 경상우도 학파의 거두였다.
63. 역괴지족(歷塊之足): 흙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발. 즉, 세상을 살아가는 행보를 비유한다. 재능이 뛰어나고 지나치게 앞서 나가려 하면 쉽게 좌절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64. 이기옥(李璣玉):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의 일기에 정탁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문:
少孤篤志, 學問精粹, 登第歷揚臺閣。 時朝野稱第一名臣, 必曰吳健、鄭琢。 至老以左議政、西原君致仕, 然愛君憂國之心, 與在朝日無異。【《儒先錄》。】

번역문: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뜻이 돈독하였고 학문이 정미하고 순수하였으며(精粹), 과거에 급제하여 대각(臺閣)⁶⁵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당시 조야(朝野)⁶⁶에서 제일가는 명신(名臣)을 칭할 때는 반드시 오건(吳健)⁶⁷과 정탁을 꼽았다. 노년에 이르러 좌의정 서원군(西原君)으로 치사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조정에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유선록(儒先錄)》⁶⁸에서 인용】

주석:
65. 대각(臺閣): 대성(臺省)과 내각(內閣)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와 의정부, 승정원 등 중요한 관청을 통칭한다. 조정의 요직을 의미한다.
66. 조야(朝野): 조정(朝廷)과 재야(在野). 온 나라를 의미한다.
67. 오건(吳健, 1521~157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일재(一齋).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68. 《유선록(儒先錄)》: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서지 정보는 알기 어렵다.


원문:
鄭政丞琢以草莽奮起登第。 拜校書正字, 直宿香室, 文定稱制將供佛, 命取香於香室。 公曰“此是供郊社之物”, 拒不從, 文定大怒命下吏。 物議多之, 名聲藹然。 歷揚淸顯, 竟至鼎鉉。 爲人溫恭, 雖奴僕, 未嘗以惡言罵之。 其厚德足以致高位, 然有足恭之誚。【《涪溪記聞》。】

번역문:
정 정승(鄭政丞) 탁은 초망(草莽)⁶⁹에서 분연히 일어나 과거에 급제하였다. 교서관 정자(校書正字)⁷⁰에 제수되어 향실(香室)⁷¹에서 직숙(直宿)⁷²하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⁷³가 칭제(稱制)⁷⁴하며 장차 부처에게 공양(供佛)하려고 향실에서 향(香)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이것은 교사(郊社)⁷⁵에 바치는 물건입니다.”라고 하며 거절하고 따르지 않자, 문정왕후가 크게 노하여 아랫사람에게 넘기라고 명하였다. 세간의 평판(物議)이 그를 칭찬하였고 명성이 자자하였다(藹然). 청현직(淸顯職)⁷⁶을 두루 거쳐 마침내 정현(鼎鉉)⁷⁷의 지위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여(溫恭) 비록 노복(奴僕)이라도 일찍이 악담(惡言)으로 꾸짖지 않았다. 그 두터운 덕(厚德)은 족히 높은 지위에 이를 만하였으나, 족공(足恭)⁷⁸의 꾸짖음이 있었다.【《부계기문(涪溪記聞)》에서 인용】

주석:
69. 초망(草莽): 풀이 우거진 곳. 시골 또는 민간을 의미한다. 미천한 출신에서 입신했음을 나타낸다.
70. 교서관 정자(校書正字): 교서관의 정9품 관직. 서적의 교정과 필사 등을 담당했다.
71. 향실(香室): 국가 제례에 사용되는 향(香)과 축문(祝文) 등을 보관하는 방.
72. 직숙(直宿): 관청에서 숙직(宿直)하는 것.
73.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조선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이자 명종(明宗)의 어머니. 명종 즉위 후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며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불교를 숭상했다.
74. 칭제(稱制): 왕후나 대비 등이 왕을 대신하여 명령을 내리는 것. 수렴청정을 의미한다.
75. 교사(郊社): 교제(郊祭)와 사직제(社稷祭). 교제는 하늘에, 사직제는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지내는 국가의 중요한 제사이다. 즉, 국가의 정식 제례에 쓰는 신성한 물건임을 강조한 것이다.
76. 청현직(淸顯職): 청요직(淸要職)과 현직(顯職). 명망 있고 중요한 관직을 의미한다.
77. 정현(鼎鉉): 솥(鼎)과 솥귀(鉉). 솥은 국가를, 솥귀는 재상(宰相)을 비유하는 말로, 정승의 지위를 의미한다.
78. 족공(足恭): 지나치게 공손함.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편에 “교묘한 말과 꾸미는 얼굴빛과 지나친 공손함을 좌구명(左丘明)은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라는 구절이 있다. 정탁의 온화하고 공손한 성품이 때로는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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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鄭芝衍)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鄭芝衍【文忠公。】
字衍之, 號南峯, 東萊人。 嘉靖丁亥生。 隆慶丁卯, 以退溪先生薦, 授王子師傅。 宣祖二年己巳登第, 用舊學恩, 不次超陞。 官至右議政。 癸未卒, 年五十七。

번역문:
정지연(鄭芝衍)【문충공(文忠公)¹이다.】
자는 연지(衍之), 호는 남봉(南峯), 동래(東萊) 사람²이다. 가정(嘉靖) 정해년(1527)³에 태어났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⁴에 퇴계(退溪) 선생⁵의 추천으로 왕자사부(王子師傅)⁶에 제수(除授)되었다. 선조(宣祖) 2년 기사년(1569)⁷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옛 학문의 은혜⁸를 입어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⁹하였다. 관직은 우의정(右議政)¹⁰에 이르렀다. 계미년(1583)¹¹에 졸(卒)¹²하니, 나이 57세였다.

주석:

  1. 문충공(文忠公): 정지연의 시호(諡號).
  2. 동래인(東萊人): 본관이 동래임을 나타낸다. 동래 정씨(東萊 鄭氏).
  3. 가정(嘉靖) 정해년(1527): 가정은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정해년은 서기 1527년이다.
  4. 융경(隆慶) 정묘년(1567): 융경은 명나라 목종(穆宗)의 연호. 정묘년은 서기 1567년이다.
  5. 퇴계(退溪) 선생: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6. 왕자사부(王子師傅):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스승. 정6품 관직이다.
  7. 선조(宣祖) 2년 기사년(1569): 서기 1569년. 정지연은 이 해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8. 구학은(舊學恩): 옛 학문의 은혜. 이전에 왕자사부를 지낸 경력을 인정받아 특별히 대우받은 것을 의미한다. 왕자사부는 비록 품계는 낮으나 왕자들의 스승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예우를 받았다.
  9. 불차초승(不次超陞): 정상적인 관계(官階) 순서를 따르지 않고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함.
  10. 우의정(右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재상직.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자리이다.
  11. 계미년(1583): 선조 16년.
  12. 졸(卒): 관직에 있던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

원문:
弱冠, 受業於履素齋, 或遊於徐花潭、成笑仙之門, 終以履素爲歸。 門徒七百餘人畏公如先生, 每相遇輒悚然不敢放。

번역문:
약관(弱冠)¹³에 이소재(履素齋)¹⁴에게서 학업을 받았고, 혹은 서화담(徐花潭)¹⁵과 성소선(成笑仙)¹⁶의 문하(門下)에서 교유하였으나, 마침내 이소재를 귀착점¹⁷으로 삼았다. 문도(門徒) 700여 명이 공(公)¹⁸을 선생처럼 경외(敬畏)하여, 매번 서로 만나면 문득 송구스러워하며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주석:
13.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를 가리킨다.
14. 이소재(履素齋):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5.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호. 조선 중기의 저명한 성리학자, 주기론(主氣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16. 성소선(成笑仙):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17. 귀착점(歸着點): 최종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대상. 여러 스승에게 배웠으나 이현보를 주된 스승으로 삼았다는 의미이다.
18. 공(公): 여기서는 정지연을 가리킨다.


원문:
公自少手不釋卷, 晩喜《大學衍義》及《宋鑑》, 爲其宋時人才節義可尙, 而先儒旨訣, 亦自此可尋也。

번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¹⁹와 《송감(宋鑑)》²⁰을 좋아하였으니, 송(宋)나라 시대 인재들의 절의(節義)를 숭상할 만하고 선유(先儒)들의 요지(要旨)와 비결(祕訣) 또한 이로부터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석:
19. 《대학연의(大學衍義)》: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의 격물(格物)부터 평천하(平天下)까지 8조목(條目)에 관한 경전(經傳)과 사서(史書)의 내용을 뽑아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편찬한 책.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널리 읽혔다.
20. 《송감(宋鑑)》: 《자치통감속편(資治通鑑續編)》 또는 《자치통감후편(資治通鑑後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 시대의 역사를 다룬 편년체(編年體) 사서이다.


원문:
在玉堂, 因求言, 極陳時弊, 其略曰“聖學雖勤, 而少涵養本源之功; 求治雖切, 而無奮迅有爲之志, 以直道迂闊而莫爲, 以讜言過激而不納。 事關貴近, 則未免屈法而循私; 心有偏繫, 則雖以公論而見拒”云。【竝柳泛愛撰行狀。】

번역문:
옥당(玉堂)²¹에 있을 때 구언(求言)²²으로 인하여 당시의 폐단(時弊)을 극력 진술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성학(聖學)²³에 비록 부지런하시나 근원(本源)을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적으시고, 다스림을 구하는 것이 비록 간절하시나 분발하여 떨치고 적극적으로 행하려는(奮迅有爲) 의지가 없으시며, 직도(直道)를 우활(迂闊)²⁴하다 하여 행하지 않고 당언(讜言)²⁵을 과격하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일이 귀근(貴近)²⁶과 관련되면 법을 굽혀 사사로움을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하고, 마음에 편벽되게 매인 바가 있으면 비록 공론(公論)이라도 거절당합니다.”라고 하였다.【이상은 유범애(柳泛愛)²⁷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21.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경연(經筵)·서적 관리·문한(文翰)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22. 구언(求言): 임금이 널리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
23. 성학(聖學): 임금이 배우는 학문. 주로 유교 경학과 치국(治國)의 도리를 가리킨다.
24. 우활(迂闊):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함. 곧고 바른 도리가 현실과 맞지 않다고 여겨짐을 비판하는 말이다.
25. 당언(讜言): 바르고 곧은 말. 충직한 간언(諫言).
26. 귀근(貴近): 왕의 친척이나 측근 등 권세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27. 유범애(柳泛愛):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자(字).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미암(眉巖).
28.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자, 호, 본관, 행적 등을 기록한 글.


원문:
右副承旨鄭芝衍、同副承旨辛應時以言事罷。 時靑松府使朴愼元是吏曹參判謹元之弟也, 族盛頗有勢力, 曾爲遂安郡守, 貪饕無厭。 及拜靑松, 厭其邑殘, 欲不往而又恐被罪, 陰囑諫官啓曰: “愼元病重, 不可赴邑, 請遞。” 芝衍等曾見愼元無疾, 明知諫官被囑, 不勝其憤, 乃啓曰: “諫官雖啓以有病, 而愼元實無病矣。” 於是兩司譁然攻芝衍等曰: “承旨豈可沮抑臺諫之言乎?” 獨大司諫李後白曰: “雖是諫官之言, 若有失誤, 則豈可不矯乎?” 兩司以議不同引嫌, 竟請罷芝衍等職。

번역문:
우부승지(右副承旨)²⁹ 정지연과 동부승지(同副承旨)³⁰ 신응시(辛應時)³¹가 언사(言事)³²로 파직되었다. 당시 청송부사(靑松府使) 박신원(朴愼元)은 이조참판(吏曹參判) 박근원(朴謹元)의 아우였는데, 가문이 번성하여 자못 세력이 있었으며, 일찍이 수안군수(遂安郡守)로 있을 때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만족할 줄 몰랐다. 청송부사에 제수되자 그 고을이 잔폐(殘弊)함을 싫어하여 부임하지 않으려 하다가 또 죄를 입을까 두려워, 몰래 간관(諫官)³³에게 부탁하여 아뢰기를 “신원(愼元)이 병이 중하여 읍(邑)에 부임할 수 없으니 체직(遞職)시켜 주십시오.”라고 하게 하였다. 정지연 등은 일찍이 박신원이 병이 없는 것을 보았고 간관이 부탁받은 것을 분명히 알았으므로,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아뢰었다. “간관이 비록 병이 있다고 아뢰었으나, 신원(愼元)은 실로 병이 없습니다.” 그러자 양사(兩司)³⁴가 시끄럽게 정지연 등을 공격하여 말하기를 “승지(承旨)가 어찌 대간(臺諫)³⁵의 말을 저지하고 억누를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오직 대사간(大司諫) 이후백(李後白)³⁶만이 “비록 간관의 말이라도 만약 잘못이 있다면 어찌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양사(兩司)는 의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인혐(引嫌)³⁷하고, 마침내 정지연 등의 관직을 파면할 것을 청하였다.

주석:
29. 우부승지(右副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승정원의 6승지 중 하나로, 주로 예조(禮曹)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30.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 6승지 중 하나로, 주로 공조(工曹)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31. 신응시(辛應時, 1532-1585): 조선 중기의 문신.
32. 언사(言事): 말과 관련된 일. 여기서는 대간의 발언을 반박한 일로 인해 문제가 된 것을 가리킨다.
33. 간관(諫官): 사간원(司諫院)의 관원. 임금에게 간쟁(諫諍)하는 일을 맡았다.
34.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35.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을 아울러 이르는 말.
36. 이후백(李後白, 1520-1578): 조선 중기의 문신.
37. 인혐(引嫌): 어떤 사안과 관련이 있거나 공정성을 잃을 염려가 있을 때 스스로 그 직무에서 물러나는 것. 여기서는 대사간 이후백과 다른 양사 관원들의 의견이 달라 공정한 논의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함께 사직을 청한 것을 의미한다.


원문:
時沈義謙、金孝元角立之說日益盛, 朝論紛紜。 大司諫鄭芝衍問于李珥曰: “議論橫潰, 將何處置?” 珥曰: “此由銓曹不得其人故也, 但當靜以鎭之, 終不可駁擊。 唯朴一初【謹元之字。】所爲, 不厭衆心, 此可啓遞, 而銓郞有闕矣。 若得公平之人補之, 政事得體, 而仁伯自求補外, 則庶可無事。” 芝衍深然之, 欲只駁朴謹元, 而僚議欲悉駁銓官, 其論甚盛, 芝衍不能抑。【竝《石潭日記》。】

번역문:
이때 심의겸(沈義謙)³⁸과 김효원(金孝元)³⁹이 대립한다는 말이 날로 성하여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정지연이 이이(李珥)⁴⁰에게 묻기를 “의론(議論)이 마구 터져 나오니(橫潰), 장차 어떻게 처치해야 합니까?” 하니, 이이가 답하였다. “이는 전조(銓曹)⁴¹가 적임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니, 다만 마땅히 조용함으로써 진정시켜야 하고 끝내 박격(駁擊)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박일초(朴一初)⁴²【근원(謹元)의 자(字)이다】의 소행이 뭇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는 아뢰어 체직시킬 수 있지만, 전랑(銓郞)⁴³ 자리에 결원이 생길 것입니다. 만약 공평한 사람을 얻어 보임시킨다면 정사(政事)가 제대로 될 것이고, 인백(仁伯)⁴⁴이 스스로 외직(外職)에 보임되기를 구한다면, 아마도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지연이 매우 그렇다고 여겨, 다만 박근원만을 논박하고자 하였으나, 동료들의 의논은 전랑(銓官) 모두를 논박하고자 하여 그 주장이 매우 성하였으므로 정지연이 억누를 수 없었다.【이상은 《석담일기(石潭日記)》⁴⁵에서 인용】

주석:
38.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西人)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외척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39. 김효원(金孝元, 1532-1590):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東人)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신진 사림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동서 분당(東西分黨)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40.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호는 율곡(栗谷). 동서 분당을 조정하려 노력했다.
41. 전조(銓曹): 이조(吏曹)의 별칭. 문관(文官)의 인사를 담당하던 부서이다.
42. 박일초(朴一初): 박근원(朴謹元)의 자(字).
43. 전랑(銓郞): 이조(吏曹)의 정랑(正郞, 정5품)과 좌랑(佐郞, 정6품)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삼사(三司) 관원 선발권과 후임자 천거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졌기에 당쟁의 핵심적인 자리가 되었다.
44. 인백(仁伯): 김효원(金孝元)의 자(字).
45. 《석담일기(石潭日記)》: 이이(李珥)가 자신의 행적과 당시의 정치 상황 등을 기록한 일기. 호 석담(石潭)을 따서 명명되었다.


원문:
右相鄭芝衍病重, 上遣承旨問病, 且使陳其所欲言, 擧所知以自代。 芝衍書啓: “李山海早有公輔之望, 可大用。” 又曰: “無係好惡之私, 永享和平之福。” 卒逝後, 家人進遣啓有曰: “李珥志大才敏, 其心亦欲爲國效忠, 而率易疎闊, 喜於變更, 偏執己見, 若獨任則必有誤事之患。” 又曰: “臺諫之言過激不中, 則但當斟酌不用而已。 至比於乙巳奸兇, 將加重譴, 則人心益激, 衆怒難犯。 此非但有累聖德, 抑恐珥亦無以自立於世也。” 備忘記: “此啓辭, 荒亂無倫, 不足備觀。 況旣已起草, 則何不卽啓而至於卒逝數旬後始啓耶? 其間之事, 有難盡知, 姑置之。”【《休窩雜纂》。】

번역문:
우상(右相)⁴⁶ 정지연이 병이 위중하자, 상(上)께서 승지(承旨)를 보내 문병하고, 또한 하고 싶은 말을 진술하고 아는 인물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다. 정지연이 글로 아뢰었다. “이산해(李山海)⁴⁷는 일찍부터 공보(公輔)⁴⁸의 기대를 받고 있으니, 크게 등용할 만합니다.” 또 아뢰었다. “좋고 싫어하는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마시고 영원히 화평(和平)의 복을 누리소서.” 졸서(卒逝)한 후, 집안사람이 보낸 글(遣啓)⁴⁹을 올렸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이이(李珥)는 뜻이 크고 재주가 민첩하며 그 마음 또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자 하나, 경솔하고 소활(疎闊)하며 변경하기를 좋아하고 자기 의견을 편협하게 고집하니, 만약 단독으로 중임을 맡기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습니다.” 또 아뢰었다. “대간(臺諫)의 말이 과격하여 적중하지 못하면 다만 마땅히 참작하여 쓰지 않으면 될 뿐입니다. 을사(乙巳)⁵⁰의 간흉(奸兇)에 비유하며 장차 무거운 견책을 더하려고 하신다면, 인심이 더욱 격앙되고 뭇사람의 노여움을 범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는 단지 성덕(聖德)에 누(累)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이 역시 세상에 자립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비망기(備忘記)⁵¹에 이르기를, “이 계사(啓辭)는 황당하고 문란하여 조리가 없어 볼만한 것이 못 된다. 하물며 이미 기초(起草)하였다면 어찌 즉시 아뢰지 않고 졸서한 지 수십 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아뢰었는가? 그 사이의 일은 자세히 알기 어려우니 우선 그대로 둔다.”라고 하였다.【《휴와잡찬(休窩雜纂)》⁵²에서 인용】

주석:
46. 우상(右相): 우의정(右議政)을 가리킨다.
47.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영수격 인물이다.
48. 공보(公輔): 공(公)과 보(輔)는 모두 재상(宰相)을 뜻하는 말로, 국가의 중임을 맡을 만한 재목을 의미한다.
49. 견계(遣啓): 죽은 재상(宰相)이 임금에게 올리는 마지막 글. 보통 생전에 미리 작성해 두었다가 사후에 가족이 올린다. 유계(遺啓)라고도 한다.
50. 을사(乙巳):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년)에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 세력이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 세력을 제거한 사건. 당시 많은 사림(士林)이 피해를 입었다. 이이를 사림을 해친 간흉에 비유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미이다.
51. 비망기(備忘記): 임금이 신하의 상소나 보고 등에 대해 처리 지침이나 의견을 간단히 적어 승정원(承政院)에 내려 보내던 문서. 또는 임금이 그때그때 보고 들은 일이나 자신의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 글. 여기서는 선조(宣祖) 임금이 정지연의 유계 내용과 그 제출 과정에 대해 의구심과 불쾌감을 표한 기록이다.
52. 《휴와잡찬(休窩雜纂)》: 휴와(休窩)는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호 중 하나이다. 이항복이 지은 잡록(雜錄) 형태의 저술로 추정된다.


원문:
明廟擇宗室子三人, 特選師儒授書, 鄭政丞芝衍爲敎官。 未久宣廟卽祚, 越明年, 鄭始釋褐, 不次超陞, 十三年驟秉鈞軸。 鄭叔父林塘惟吉以贊成主文衡, 朝夕入相, 而鄭方在場屋。 及鄭大拜, 林塘猶在卿列, 鄭相二年旣卒, 而林塘始入政府。【《涪溪記聞》。】

번역문:
명종(明廟)⁵³께서 종실(宗室)의 자제 세 사람을 뽑아 특별히 사유(師儒)⁵⁴를 선발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정승(政丞) 정지연이 교관(敎官)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선조(宣廟)께서 즉위하시고, 이듬해를 넘어서 정지연이 비로소 석갈(釋褐)⁵⁵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하더니, 13년 만에 갑자기 균축(鈞軸)⁵⁶을 잡았다. 정지연의 숙부 임당(林塘) 유길(惟吉)⁵⁷은 찬성(贊成)⁵⁸으로서 문형(文衡)⁵⁹을 주관하며 조석으로 재상의 반열에 들었는데, 이때 정지연은 바야흐로 장옥(場屋)⁶⁰에 있었다. 정지연이 재상에 제수되었을 때 임당은 아직 경(卿)의 반열⁶¹에 있었고, 정지연이 재상이 된 지 2년 만에 이미 졸하였는데, 임당은 그제야 비로소 정부(政府)⁶²에 들어왔다.【《부계기문(涪溪記聞)》⁶³에서 인용】

주석:
53. 명묘(明廟):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의 묘호(廟號).
54. 사유(師儒): 유학(儒學)에 밝은 스승. 왕자나 종실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원을 가리킨다.
55. 석갈(釋褐): 갈옷(褐衣, 평민의 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56. 균축(鈞軸): 저울대(鈞)와 수레바퀴의 굴대(軸). 나라의 정치를 맡아보는 중요한 직책, 즉 재상(宰相)의 자리를 비유한다.
57. 임당(林塘) 유길(惟吉):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의 호와 이름. 정지연의 숙부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58. 찬성(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의정(議政) 다음가는 벼슬이다.
59.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겸임하며 문단(文壇)과 학계(學界)의 종주(宗主) 역할을 했다.
60.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 여기서는 정지연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거나 하위 관직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61. 경(卿)의 반열: 판서(判書) 등 정2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가리킨다. 재상보다는 아래 등급이다.
62.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재상(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지위를 의미한다.
63. 《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涪溪)는 이식(李植, 1584-1647)의 호 중 하나이다. 이식이 지은 견문록(記聞錄) 형태의 저술로 보인다. 이식은 정지연의 손자인 정경세(鄭經世)와 교유하였다.


원문:
公光弼之曾孫, 淸介有德量, 有乃祖風。 以司馬嘗爲王子師傅。 穆廟朝登第。 歷揚⁶⁴臺侍十餘年, 驟陞崇品, 而物議翕然, 公愈謙抑不自安。 官至右議政, 未幾卒。【《海東文獻錄》。】

번역문:
공(公)은 광필(光弼)⁶⁵의 증손(曾孫)으로, 청렴하고 지조가 굳으며(淸介) 덕량(德量)이 있어 할아버지의 풍모⁶⁶가 있었다. 사마(司馬)⁶⁷로서 일찍이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목묘(穆廟)⁶⁸ 시대에 급제하였다. 대시(臺侍)⁶⁹를 10여 년간 두루 거치고 갑자기 높은 품계(崇品)⁷⁰로 승진하였으나, 물의(物議)⁷¹가 흡연(翕然)⁷²하자 공은 더욱 겸손하고 억제하며 스스로 편안해하지 않았다. 관직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졸(卒)하였다.【《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⁷³에서 인용】

주석:
64. [주-D001] 揚 : 저본(底本)에는 “척(剔)”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역척(歷剔)'보다는 '역양(歷揚)'이 '두루 거치다'는 의미로 문맥상 자연스럽다.
65. 광필(光弼):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 정지연의 증조부이다.
66. 내조풍(乃祖風): 그의 할아버지[祖]의 풍모(風貌). 여기서는 증조부 정광필의 덕망과 기풍을 이어받았음을 의미한다.
67. 사마(司馬): 사마시(司馬試), 즉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킨다. 정지연은 1558년(명종 13)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68. 목묘(穆廟): 선조(宣祖)의 초諡(初諡). 선조의 묘호와 시호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여기서는 선조 시대를 가리킨다.
69. 대시(臺侍): 대관(臺官, 사헌부 관리)과 시종신(侍從臣, 홍문관·예문관 관리 등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을 아울러 이르는 말. 주로 청요직(淸要職)을 의미한다.
70. 숭품(崇品): 높은 품계. 종1품 이상의 재상급 관직을 가리킨다.
71. 물의(物議): 여러 사람의 비평이나 논의. 여기서는 정지연의 빠른 승진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의미한다.
72. 흡연(翕然): 여러 사람의 의견이나 행동이 일치하는 모양. 여기서는 정지연의 승진에 대해 사람들이 대체로 수긍하고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73.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조선 후기 김휴(金烋)가 편찬한 역대 인물의 저술 목록 및 간략한 전기 모음집. 본문의 표기는 《海東文獻錄》이나, 일반적으로 《해동문헌총록》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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