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李浚慶)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浚慶【忠正公。】
字原吉, 號東皐。 潤慶之弟。 弘治己未生。 中宗十七年壬午司馬, 辛卯登第, 歷弘文著作、吏曹佐郞、直提學。 癸卯, 魁文臣庭試, 出按關西, 又歷吏、兵判。 明宗戊午拜相, 至領議政。 宣廟朝, 賜几杖。 壬申卒, 年七十四。 配享宣朝廟庭。
번역문:
이준경(李浚慶)【충정공(忠正公)¹이다.】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이다. 윤경(潤慶)²의 아우이다. 홍치(弘治)³ 기미년(1499)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17년 임오년(1522)에 사마시(司馬試)⁴에 합격하고, (중종 26년) 신묘년(1531)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⁵, 이조 좌랑(吏曹佐郞)⁶, 직제학(直提學)⁷을 역임하였다. (중종 38년) 계묘년(1543)에 문신 정시(文臣庭試)⁸에서 장원하여 관서(關西)⁹의 안찰사(按察使)¹⁰로 나갔고, 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吏兵判)¹¹를 역임하였다. 명종(明宗) 무오년(1558)에 재상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¹²에 이르렀다. 선조(宣廟)¹³ 대에 궤장(几杖)¹⁴을 하사받았다. (선조 5년) 임신년(1572)에 졸(卒)하니, 나이 74세였다. 선조(宣祖)의 묘정(廟庭)¹⁵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석:
- 충정공(忠正公): 이준경의 시호(諡號). 충(忠)은 충성스러움, 정(正)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절개를 지킴(淸白守節) 등을 의미한다.
- 윤경(潤慶): 이윤경(李潤慶, 1498-1562). 이준경의 형. 호는 서경(西坰). 대사헌, 판서 등을 역임했다.
- 홍치(弘治):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1488-1505). 기미년은 1499년(연산군 5)이다.
-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일종으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를 말한다.
-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 홍문관(弘文館)의 정8품 관직.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 및 문한(文翰)의 처리 등을 담당했다.
-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조(吏曹)의 정6품 관직.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요직 중 하나였다.
-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제학(提學) 다음 가는 관직으로 경연(經筵) 등에 참여했다.
- 문신 정시(文臣庭試): 조선 시대에 문신들을 대상으로 궁궐 뜰에서 시행하던 시험. 주로 승진이나 요직 등용을 위해 실시되었다.
- 관서(關西): 평안도(平安道) 지역을 가리킨다.
- 안찰사(按察使): 고려·조선 초기에 도(道)에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관리를 감찰하던 임시직. 조선 시대에는 관찰사(觀察使)로 바뀌었다. 여기서는 평안도 관찰사를 의미한다.
- 이·병판(吏兵判):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병조판서(兵曹判書). 각각 문관 인사와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정2품 장관직이다.
- 영의정(領議政):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 선묘(宣廟): 선조(宣祖)의 묘호(廟號).
- 궤장(几杖): 조선 시대에 70세 이상의 원로 대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안석(案席, 궤)과 지팡이(장). 큰 영예로 여겨졌다.
-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선조 대에 큰 공을 세운 신하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學於從兄灘叟, 年十七八, 行成德立, 乃遊學宮。 不屑於擧子業, 專¹⁶務爲己, 禮法自持。 壬午, 上上庠, 不但學業著聞, 德望已爲多士所推, 人已知其遠到。
번역문:
공(公)은 종형(從兄) 탄수(灘叟)¹⁷에게서 배우다가, 나이 17, 18세에 행실이 이루어지고 덕(德)이 확립되자 비로소 성균관(學宮)¹⁸에서 공부하였다. 과거 공부(擧子業)¹⁹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²⁰에 힘썼으며, 예법(禮法)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임오년(1522)에 성균관(上庠)²¹에 입학하니, 학업으로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덕망(德望) 또한 이미 많은 선비들에게 추대되어, 사람들이 그가 장차 크게 될 것임을 알았다.
주석:
16. [주-D002] 專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동고유고(東皐遺稿)·영의정증시충정동고선생이공행장(領議政贈諡忠正東皐先生李公行狀)》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오로지 전(專)'자가 있어야 의미가 분명해진다.
17. 탄수(灘叟): 이항(李沆, 1499-1576). 이준경의 종형(사촌 형). 호는 탄수(灘叟) 또는 수졸당(守拙堂). 성리학자로,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18. 학궁(學宮): 나라에서 세운 학교. 여기서는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킨다.
19. 거자업(擧子業): 과거(科擧) 시험을 준비하는 공부.
20.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爲人之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학문 태도이다.
21. 상상(上庠): 상(庠)은 고대 중국의 학교 이름. 성균관(成均館)의 별칭으로 쓰였다. '상상(上上庠)'은 '성균관에 입학하다'는 의미이다.
원문:
公天性至孝, 事大夫人, 色養備至, 每有不安節, 躬親湯藥, 進必先嘗。 甲申春, 丁憂, 執喪盡禮, 毁瘠幾不勝。 厥後宰相沈彦光聞公名, 饋之肉, 乃瞰亡投刺而返。
번역문: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대부인(大夫人)²²을 섬김에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 봉양함[色養]²³을 극진히 하였으며, 매번 편찮으실 때마다 몸소 탕약(湯藥)을 달여 올릴 때 반드시 먼저 맛보았다. (중종 39년) 갑신년(1544) 봄에 부친상[丁憂]²⁴을 당하여 상례(喪禮)를 극진히 치르느라 몸이 상하여[毁瘠]²⁵ 거의 견뎌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 후 재상 심언광(沈彦光)²⁶이 공의 명성을 듣고 고기를 보내주었으나, 이에 돌아보지도 않고 명함[刺]²⁷만 두고 돌아갔다.
주석:
22.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이준경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23. 색양(色養):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말로, 부모를 모실 때 항상 온화한 얼굴빛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24. 정우(丁憂): 부모의 상(喪)을 당하는 것. 조선 시대 관리는 부모상을 당하면 관직을 사직하고 3년간 상례를 치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준경은 이때 부친상을 당했다.
25. 훼척(毁瘠): 슬픔으로 몸이 상하고 여윔. 상례를 극진히 치르는 모습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26. 심언광(沈彦光, 1487-154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어촌(漁村). 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이 일화는 심언광이 죽기 전의 일이거나, 혹은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이준경이 부친상을 당한 해(1544)에 심언광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다만, 상중에 고기를 보내준 행위 자체가 상대를 위로하고 기운을 차리도록 배려하는 의미가 있었을 수 있다.
27. 감망투자이반(瞰亡投刺而返): '瞰亡'은 '돌아보지 않다', '투자(投刺)'는 명함을 남기는 행위이다. 즉, 상중(喪中)에 고기를 보내온 것에 대해 예를 갖추면서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상중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이를 거절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 행동이었다.
원문:
壬辰, 生員李宗翼上疏, 詆金宗直之學, 且斥時事, 執政大怒請鞫。 上召對二品、三司官議, 俱曰: “當死。” 公獨言: “此人論議乖僻, 誠可罪也。 然以言獲罪, 恐非美事。” 金安老、許沆等深惡之。
번역문:
(중종 27년) 임진년(1532)에 생원(生員) 이종익(李宗翼)²⁸이 상소하여 김종직(金宗直)²⁹의 학문을 비방하고 또 시사(時事)를 배척하자, 집정(執政)³⁰이 크게 노하여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다. 상(上)이 2품 이상 관원과 삼사(三司)³¹의 관원을 불러 접견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홀로 말하였다. “이 사람의 논의가 괴팍하니 진실로 죄를 줄 만합니다. 그러나 말 때문에 죄를 얻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김안로(金安老)³², 허항(許沆)³³ 등이 이를 매우 미워하였다.
주석:
28. 이종익(李宗翼): 생몰년 미상. 중종 때의 생원. 그의 상소 내용은 당시 정국과 관련하여 김종직 및 사림(士林) 세력을 비판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9.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초기의 문신, 성리학자. 호는 점필재(佔畢齋). 영남 사림의 종조(宗祖)로 추앙받았다.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실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가 일어났다.
30. 집정(執政):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 당시 실권자였던 김안로 등을 가리킨다.
31.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한다. 이들은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권과 신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32.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의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많은 사림 인사를 축출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사사(賜死)되었다.
33. 허항(許沆, 1478-1532):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로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권력을 남용했다.
원문:
癸巳, 以副修撰赴夜對, 與具壽聃啓言: “安處謙之獄無情, 被謫者多, 宜釋之以應天變。” 時方斥己卯人, 謂公爲李延慶從弟受業人也, 摘以成罪, 乃罷。 安老銜公不已, 朝夕且得禍。 公杜門讀書, 日有程課, 而不事文詞, 用力於性理之學, 口絶言時, 足不出於門者, 凡五載矣。
번역문:
(중종 28년) 계사년(1533)에 부수찬(副修撰)³⁴으로서 야대(夜對)³⁵에 나아가 구수담(具壽聃)³⁶과 함께 아뢰었다. “안처겸(安處謙)³⁷의 옥사(獄事)가 무정(無情)하여 귀양 간 자가 많으니, 마땅히 석방하여 하늘의 변고[天變]³⁸에 응해야 합니다.” 이때 한창 기묘사화(己卯士禍) 관련 인물[己卯人]³⁹들을 배척하고 있었는데, 공이 이연경(李延慶)⁴⁰의 종제(從弟)로서 그에게서 학업을 받은 사람이라 하여 죄를 엮어 파직시켰다. 김안로가 공에게 원한을 품기를 그치지 않아 조석으로 또 화(禍)를 입을까 염려되었다. 공은 문을 닫고 독서하며 매일 일정 분량의 공부[程課]를 하였는데, 문장 공부[文詞]에는 힘쓰지 않고 성리학(性理學) 공부에 힘썼으며, 입으로는 시사(時事)에 대한 말을 끊고 발이 문밖을 나가지 않은 것이 무릇 5년이었다.
주석:
34. 부수찬(副修撰): 홍문관(弘文館)의 정6품 관직. 수찬(修撰) 다음 가는 벼슬이다.
35. 야대(夜對): 임금이 밤에 신하들을 불러 경서(經書)를 강론하거나 정사를 논의하던 일.
36. 구수담(具壽聃, 1488-1544): 조선 중기의 문신.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사사되었다.
37. 안처겸(安處謙, ?-1533): 안처순(安處順)의 동생. 형과 함께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다가, 김안로를 비방하는 익명서 사건(가작인두옥사)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기묘사림 인물들이 다시 화를 입었다.
38. 천변(天變):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고. 일식, 월식, 혜성 출현,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를 포함한다. 당시에는 천변을 군주의 부덕(不德)이나 정치적 실정(失政)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여겨, 억울하게 옥에 갇힌 자를 풀어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다.
39. 기묘인(己卯人):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 세력을 가리킨다.
40. 이연경(李延慶, 1488-155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물재(勿齋). 기묘사화 관련 인물로 분류되기도 했다. 이준경과는 11촌 숙질(叔姪) 관계로 종제는 아니다. 다만 같은 문중 사람으로서 학문적 교류가 있었을 수 있다.
원문:
中廟以儲學日進, 博選僚屬, 知公優於經學, 善於講義, 擢置講院最久。 時仁廟在東宮, 學問優造聖域。 公久侍筵席, 三接之禮, 顧問之寵, 非他僚屬比。 而讀書凡有疑難, 雖夜不時召對, 輒賜咨訪, 其知遇之眷, 寔出尋常。 公亦自以爲君臣知己之遇。 公老後, 每奉翫賜物, 未嘗不流涕嗚咽也。
번역문:
중종(中宗)께서 세자[儲]⁴¹의 학문이 날로 진전함에 따라 널리 동료 관료[僚屬]⁴²들을 선발하였는데, 공이 경학(經學)에 뛰어나고 강의(講義)를 잘함을 아시고 발탁하여 강원(講院)⁴³에 가장 오래 두셨다. 이때 인종(仁廟)⁴⁴께서 동궁(東宮)⁴⁵에 계셨는데, 학문이 뛰어나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셨다. 공이 오랫동안 경연(經筵) 자리[筵席]⁴⁶에 모시니, 삼접(三接)의 예우⁴⁷와 고문(顧問)의 총애가 다른 동료 관료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독서하다가 무릇 의심나고 어려운 점이 있으면 비록 밤이라도 때를 가리지 않고 불러 접견하시고 문득 자문(咨訪)하시니, 그 지우(知遇)의 돌보심이 실로 심상함을 넘어섰다. 공 또한 스스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알아주는 만남[君臣知己之遇]이라고 여겼다. 공이 노년(老年)이 된 후, 매번 하사하신 물건을 받들어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오열(嗚咽)하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41. 저(儲): 저군(儲君). 왕세자(王世子)를 가리킨다. 당시 세자는 훗날 인종(仁宗)이 되는 이호(李峼)였다.
42. 요속(僚屬): 동료 관료. 여기서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료들을 가리킨다.
43. 강원(講院):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
44. 인묘(仁廟): 인종(仁宗)의 묘호. 조선의 제12대 왕(재위 1544-1545).
45. 동궁(東宮): 왕세자 또는 왕세자가 거처하는 곳.
46. 연석(筵席):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의 자리. 서연은 왕세자에게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던 일이다.
47. 삼접지례(三接之禮): 한(漢)나라 문제가 가의(賈誼)를 등용하여 정사에 대해 논할 때 밤늦도록 자리를 옮겨가며 세 번이나 가까이 마주 앉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임금이 신하를 극진히 예우하고 신임함을 비유한다.
원문:
甲辰, 中廟賓天, 將告訃中朝, 以有難處事, 遴公爲副使, 還拜刑曹參判。 寔當仁廟初服, 公言於朝曰: “宜早封太弟, 以定人心。” 當時若如公言, 則其有乙巳、己酉之禍耶? 厥後人莫不服公之先見, 且惜其時之不見採也。 公之見事類如此。【竝盧穌齋守愼撰碑。】
번역문:
(인종 즉위년) 갑진년(1544), 중종께서 빈천(賓天)⁴⁸하시자 장차 중국 조정[中朝]⁴⁹에 부고(訃告)를 알리려는데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 공을 뽑아 부사(副使)⁵⁰로 삼았고, 돌아와 형조 참판(刑曹參判)⁵¹에 제수되었다. 실로 인종께서 막 즉위하신 때[初服]⁵²를 당하여, 공이 조정에 말하였다. “마땅히 일찍 태제(太弟)⁵³를 봉하여 인심(人心)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당시에 만약 공의 말과 같이 하였다면 어찌 을사사화(乙巳士禍)⁵⁴와 기유옥사(己酉獄事)⁵⁵가 있었겠는가? 그 후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先見)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 그때 공의 말이 채택되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공이 사리를 보는 것이 이와 같았다.【이상 노수신(盧守愼)⁵⁶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48. 빈천(賓天): 임금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49. 중조(中朝): 중국의 조정. 당시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조선은 사대(事大) 관계에 따라 왕의 승하와 즉위를 명나라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
50. 부사(副使): 사신단의 부책임자. 정사(正使)를 보좌한다.
51. 형조 참판(刑曹參判): 형조(刑曹)의 버금 벼슬. 종2품. 형조는 법률, 소송, 형옥, 노비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52. 초복(初服): 임금이 막 즉위한 때를 의미한다.
53. 태제(太弟): 왕의 아우로서 왕위 계승자로 정해진 사람. 인종은 병약하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을 후계자로 삼아 인심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54.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 일파(대윤, 大尹)와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尹元衡) 일파(소윤, 小尹)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 및 많은 사림 인사를 숙청한 사건.
55. 기유옥사(己酉獄事): 1549년(명종 4)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으로 일어난 옥사. 많은 종친과 사림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56.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소재(穌齋).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오랜 유배 생활을 했으나, 선조 때 복권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준경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원문:
兵曹佐郞尹春年上疏, 請早除尹元老, 以安國家, 命會大臣二品以上於賓廳議之。 公以工曹參判在二品之末, 或言: “具法正刑可也。” 或言: “不可緩也, 卽於諸會處, 撲殺之可也。” 或言: “刑物預具可也。” 公曰: “安有國母在上, 而無端殺其弟乎? 況未有顯罪, 而撲殺士大夫可乎? 決不可爲也。” 蓋國論已定於外, 而公之言如此, 衆議遂沮, 只論以賜死而罷。 然諸宰相莫不歸咎於公曰: “使宗社罪人失刑。” 面面相視, 爲公甚危之。 公望見一宰相, 呼與同行, 乃若不聞, 終亦避去。 公言: “平生無所懼, 當日氣色懔懔然, 殊可懼也。”【《寄齋雜記》。】
번역문:
병조 좌랑(兵曹佐郞) 윤춘년(尹春年)⁵⁷이 상소하여 윤원로(尹元老)⁵⁸를 일찍 제거하여 국가를 안정시킬 것을 청하자, 명하여 빈청(賓廳)⁵⁹에 대신(大臣)과 2품 이상 관원을 모아 의논하게 하였다. 공이 공조 참판(工曹參判)⁶⁰으로서 2품의 말석에 있었는데, 어떤 이는 “법을 갖추어 형벌을 바로잡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늦추어서는 안 되니, 즉시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때려죽이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형벌 도구를 미리 갖추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어찌 국모(國母)⁶¹께서 위에 계신데 까닭 없이 그 아우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드러난 죄가 없는데 사대부(士大夫)를 때려죽이는 것이 옳겠습니까?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다.” 대개 국론(國論)이 이미 밖에서 정해져 있었는데 공의 말이 이와 같으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마침내 꺾여 단지 사사(賜死)⁶²하는 것으로 논의하고 끝냈다. 그러나 여러 재상들이 공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음이 없어 말하기를 “종사(宗社)의 죄인으로 하여금 형벌을 잃게 하였다.”라고 하며, 서로 얼굴만 마주 보고 공을 위해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 공이 멀리 한 재상을 보고 불러서 함께 가려 하였으나, 마치 듣지 못한 듯이 끝내 또한 피하여 가버렸다. 공이 말하였다. “평생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는데, 그날의 기색은 매우 차가워(懍懔然) 자못 두려웠다.”【《기재잡기(寄齋雜記)》⁶³에서 인용】
주석:
57. 윤춘년(尹春年, 1514-1567): 조선 중기의 문신. 윤원형의 인척으로 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58. 윤원로(尹元老, ?-1547): 윤원형의 형. 문정왕후의 오빠. 동생 윤원형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59. 빈청(賓廳): 조선 시대 관청 안에 신하들이 모여 의논하거나 대기하던 장소.
60. 공조 참판(工曹參判): 공조(工曹)의 버금 벼슬. 종2품. 공조는 산택(山澤), 공장(工匠), 건축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61. 국모(國母): 임금의 어머니. 여기서는 명종의 어머니이자 윤원로·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가리킨다.
62. 사사(賜死): 임금이 죄인에게 독약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던 형벌.
63.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호는 기재(寄齋). 인물 일화, 시문(詩文) 비평, 고증 등이 실려 있다.
원문:
乙巳, 李芑、林百齡忌公, 出爲平安道觀察使。 爲治簡嚴, 黜陟公明, 一路畏服。 丁未秩滿, 秋, 大水懷襄, 公以爲: “變異非常, 咎在道主。” 卽上章請辜祈罷。 上賜優答, 特仍一年。 歲遂歉, 益薄自奉, 減去衙口, 盡心荒政, 民賴以蘇。
번역문:
(명종 즉위년) 을사년(1545), 이기(李芑)⁶⁴, 임백령(林百齡)⁶⁵이 공을 꺼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내보냈다. 다스림이 간결하고 엄정하며, 관리의 출척(黜陟)⁶⁶이 공명정대하니 온 도(道)가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명종 12년) 정미년(1547)에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가을에 큰 홍수[大水懷襄]⁶⁷가 나자, 공이 생각하기를 “변고가 심상치 않으니 허물은 도백(道主)⁶⁸에게 있다.” 하고, 즉시 상소하여 죄를 받고 파직되기를 청하였다. 상께서 우대하는 답을 내리고 특별히 1년 더 유임시켰다. 그해가 마침내 흉년이 들자 더욱 스스로의 봉양을 박하게 하고 관아의 식구[衙口]⁶⁹를 줄이며, 구황(救荒) 정책[荒政]⁷⁰에 마음을 다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소생하였다.
주석:
64. 이기(李芑, 1476-1552): 조선 중기의 문신. 을사사화를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영의정을 지냈다.
65. 임백령(林百齡, ?-1546): 조선 중기의 문신. 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66. 출척(黜陟): 관리를 내치거나(黜) 올리는(陟) 것. 즉, 관리의 임면(任免)과 승진, 강등을 공정하게 처리함을 의미한다.
67. 대수회양(大水懷襄): 큰 홍수가 나서 물이 산을 감싸고 언덕을 넘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를 의미한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오는 표현이다.
68. 도주(道主): 도백(道伯). 관찰사(觀察使)를 가리킨다.
69. 아구(衙口): 관아에 소속되어 일하는 하인이나 식솔.
70. 황정(荒政):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
원문:
庚戌五月, 李芑、陳復昌交搆誣罔, 謫公報恩縣, 朝野駭之。 沈議政連源嘆曰“斯人名重, 乃遭此患”云。
번역문:
(명종 5년) 경술년(1550) 5월, 이기(李芑)와 진복창(陳復昌)⁷¹이 서로 얽어 무고(誣告)하여, 공을 보은현(報恩縣)으로 귀양 보내니 조야(朝野)가 놀랐다. 의정(議政) 심연원(沈連源)⁷²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명망이 중한데, 마침내 이러한 환란을 만났구나.”라고 하였다.
주석:
71. 진복창(陳復昌, ?-1563): 조선 중기의 문신. 이기의 심복으로, 이준경을 모함하는 데 가담했다.
72. 심연원(沈連源, 1491-155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보암(保庵). 영의정을 지냈다.
원문:
甲寅, 判吏曹。 裁抑僥倖, 凡所選進, 皆從一時公議, 雖在故舊, 不敢以除拜相干, 時稱得人, 百職咸擧。 以久專²銓柄, 懼而謝病。 德興大院夫人, 公之異姓再從妹也。 大院以除拜來干, 公只言王子不可臨士大夫家, 而無他答焉, 大院起而去。【竝碑。】
번역문:
(명종 9년) 갑인년(1554), 이조판서(判吏曹)가 되었다. 요행(僥倖)을 바라는 자들을 억제하고, 무릇 선발하여 등용하는 인물은 모두 당대의 공론(公議)을 따랐으며, 비록 옛 친구[故舊]라 하더라도 감히 관직 제수[除拜]로써 서로 청탁하지 못하니, 당시에 인재를 얻었다고 칭송하였고 모든 관직의 일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전선(銓選)⁷³의 권한을 오로지[專] 맡게 되자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⁷⁴의 부인⁷⁵은 공의 이성 재종매(異姓再從妹)⁷⁶였다. 대원군 부인이 관직 제수를 청탁하러 오자, 공은 다만 “왕자(王子)는 사대부의 집에 임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대답이 없자, 대원군 부인이 일어나 가버렸다.【이상 비문에서 인용】
주석:
73. 전선(銓選): 관리를 뽑아 임명하는 일. 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권한에 속했으며, 전선권을 가진 관직을 전랑(銓郞)이라 하여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조판서는 문관 전선의 최고 책임자였다.
74.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 이름은 이초(李岹). 중종의 아들이자 명종의 이복형이며, 선조(宣祖)의 친아버지이다. 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75. 대원군 부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 1522-1567). 정인지(鄭麟趾)의 증손녀이다.
76. 이성 재종매(異姓再從妹): 고종사촌 누이. 이준경의 고모가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鄭顯祖)에게 시집갔고, 정현조의 손녀가 바로 하동부대부인 정씨이다.
원문:
李浚慶爲兵曹判書, 李無彊劾之, 至以才兼文武, 不可使掌兵權爲辭。 後浚慶爲巡邊使, 到慶源, 郵卒指城中矮屋曰: “此無彊所舍也。” 浚慶厚遺食物。 或哂其以德報怨, 浚慶曰“非欲施惠也。 見其困窮, 矜愍之心, 自不能不爾”云。【《東閣雜記》。】
번역문:
이준경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을 때 이무강(李無彊)⁷⁷이 그를 탄핵하면서, 심지어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비하였으니 병권(兵權)을 잡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후에 이준경이 순변사(巡邊使)⁷⁸가 되어 경원(慶源)에 도착했을 때, 역졸(郵卒)⁷⁹이 성안의 낮은 집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곳이 무강(無彊)이 사는 곳입니다.” 이준경이 음식을 후하게 보내주었다. 어떤 이가 그가 원수를 덕으로 갚는다고 비웃자, 이준경이 말하였다. “은혜를 베풀고자 함이 아니다. 그 곤궁함을 보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矜愍之心]이 절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동각잡기(東閣雜記)》⁸⁰에서 인용】
주석:
77. 이무강(李無彊):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78. 순변사(巡邊使): 조선 시대 변방 지역의 방어 상태를 순찰하고 군무(軍務)를 처리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관직.
79. 우졸(郵卒): 역(驛)에 소속된 하급 관리나 심부름꾼.
80.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
원문:
金鎧爲大司憲, 大言曰: “當今士類妄欲有爲, 不可不抑制也。” 蓋指奇大升、沈義謙、李後白等也。 乃於經席白上曰: “爲士者, 當自飭其躬, 而口不言人過失。 今之所謂士者, 自顧缺然, 而妄談是非, 詆毁大臣, 此風不可長也。 己卯之時, 朝多浮薄之士, 推引同己, 擊異己。 趙光祖之得罪, 皆浮薄之徒釀成其禍也。 願聖明抑制此習。” 於是, 士林疑鎧欲逐之, 或問于李浚慶, 浚慶曰: “且止。 一金鎧, 安能害士林? 此非獨鎧意也, 不可輕發, 爲患滋大矣。”【《日月錄》。】
번역문:
김개(金鎧)⁸¹가 대사헌(大司憲)⁸²이 되어 큰소리로 말하였다. “지금 선비 무리[士類]들이 망령되이 무언가 하려고 하니, 억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대개 기대승(奇大升)⁸³, 심의겸(沈義謙)⁸⁴, 이후백(李後白)⁸⁵ 등을 가리킨 것이다. 이에 경연(經筵) 자리에서 상(上)께 아뢰었다. “선비 된 자는 마땅히 스스로 그 몸을 삼가고 입으로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이른바 선비라는 자들은 스스로를 돌아봄에는 부족함이 있으면서 망령되이 시비(是非)를 이야기하고 대신(大臣)을 헐뜯으니, 이 풍조는 조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묘년(己卯年) 때에는 조정에 부박(浮薄)한 선비들이 많아 자기와 같은 무리를 끌어들이고 자기와 다른 무리를 공격하였습니다. 조광조(趙光祖)⁸⁶가 죄를 얻은 것은 모두 부박한 무리들이 그 화(禍)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성상(聖明)께서는 이 습속을 억제하소서.” 이에 사림(士林)⁸⁷이 김개를 의심하여 내쫓고자 하여, 어떤 이가 이준경에게 물으니, 이준경¹⁶³이 말하였다. “우선 그만두시오. 김개 한 사람이 어찌 사림을 해칠 수 있겠소? 이는 단지 김개의 뜻만이 아니니, 가벼이 행동하여 화(患)가 더욱 커지게 해서는 안 되오.”【《일월록(日月錄)》⁸⁸에서 인용】
주석:
81. 김개(金鎧, 1510-?): 조선 중기의 문신.
82.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83.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호는 고봉(高峯). 이황(李滉)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유명하다.
84.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손암(巽庵). 서인(西人)의 영수로 지목되었으며, 동인(東人)의 영수로 여겨진 김효원(金孝元)과의 갈등은 붕당(朋黨) 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85. 이후백(李後白, 1520-1578): 조선 중기의 문신.
86.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호는 정암(靜庵).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여 사사되었다. 김개의 발언은 기묘사화의 책임을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림에게 돌리는 것으로, 당시 사림 세력의 반발을 살 만한 내용이었다.
87. 사림(士林): 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삼아 정계에 진출한 선비 세력. 주로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88. 《일월록(日月錄)》: 저자 미상의 조선 시대 기록.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인물들의 언행이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63. 이준경(李浚慶): 원문에는 호칭 없이 '浚慶'으로만 표기되어 있으나, 문맥상 이준경을 가리킨다.
원문:
癸亥, 順懷世子夭無嗣。 乙丑, 明廟久失豫, 中外憂懼。 領議政李浚慶與藥房提調沈通源相議, 自藥房啓于中殿, 請豫定繼嗣, 以係人心。 中殿書德興君第三子名下之, 卽今上也。 未幾病瘳。 丙寅閏月, 領相李浚慶上疏極諫時政闕失, 且請建儲, 蓋前有命而未有名號故也。 答曰: “予以否德, 遇災修省, 方切求言之時, 卿以首相, 進藥石之言, 予嘉卿愛君憂國之誠也。 儲副久虛, 予爲宗社, 豈不深念哉?” 先是, 有白其前事, 請早定名號者, 上甚惡聞之。 浚慶持《大學衍義》入對, 極陳豫定之意, 至是上疏不納, 遂因此見忤。【《紀年通攷》。】
번역문:
(명종 18년) 계해년(1563), 순회세자(順懷世子)⁸⁹가 후사(後嗣) 없이 요절(夭折)하였다. (명종 20년) 을축년(1565), 명종(明廟)께서 오래 병환[失豫]⁹⁰을 앓으시니 중외(中外)⁹¹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영의정 이준경이 약방 제조(藥房提調)⁹² 심통원(沈通源)⁹³과 서로 의논하여, 약방에서 중전(中殿)⁹⁴에게 아뢰어 미리 후계자[繼嗣]를 정하여 인심을 매어둘 것을 청하였다. 중전이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이름을 써서 내리니, 이분이 바로 지금의 상(上)⁹⁵이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으셨다. (명종 21년) 병인년(1566) 윤10월, 영상(領相) 이준경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잘못을 극력 간(諫)하고, 또 세자 책봉[建儲]⁹⁶을 청하였으니, 대개 이전에 명이 있었으나 아직 명호(名號)가 없었기 때문이다. 답하기를, “내가 부덕(否德)하여 재앙을 만나 몸을 닦고 반성하며 바야흐로 간절히 말을 구하는 때에, 경(卿)이 수상(首相)으로서 약석(藥石)⁹⁷의 말을 올리니, 내가 경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저부(儲副)⁹⁸가 오래 비어 있으니 내가 종사(宗社)를 위하여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이보다 앞서, 그 이전의 일⁹⁹을 아뢰며 일찍 명호를 정하기를 청한 자가 있었는데, 상께서 듣기를 매우 싫어하셨다. 이준경이 《대학연의(大學衍義)》¹⁰⁰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여 미리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진술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마침내 이로 인해 미움을 받게 되었다.【《기년통고(紀年通攷)》¹⁰¹에서 인용】
주석:
89.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 명종의 맏아들. 이름은 이부(李暊).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요절했다.
90. 실예(失豫): 임금이나 왕족이 병을 앓는 것을 높여 이르는 말.
91. 중외(中外): 조정 안팎, 즉 온 나라.
92. 약방 제조(藥房提調):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인 약방(藥房)의 책임자. 의정(議政)이나 6조 판서 등이 겸임하였다.
93. 심통원(沈通源, 1499-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심연원의 아우. 명종의 외숙부인 윤원형과 가까웠으며, 좌의정을 지냈다.
94. 중전(中殿): 왕비(王妃). 여기서는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를 가리킨다. 심통원의 조카이기도 하다.
95. 지금의 상(上): 이 글이 쓰여질 당시의 임금, 즉 선조(宣祖)를 가리킨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이다.
96. 건저(建儲): 저군(儲君), 즉 왕세자를 세우는 것. 을축년에 후계자로 내정되었으나 아직 공식적인 세자 책봉(명호 부여)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를 정식으로 행할 것을 청한 것이다.
97. 약석(藥石): 병을 고치는 약과 침. 병에 대한 약처럼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는 간언(諫言)을 비유한다.
98. 저부(儲副): 저군(儲君)과 같은 말로, 왕세자를 의미한다.
99. 이전의 일: 을축년(1565)에 후계자를 내정한 일을 가리킨다.
100. 《대학연의(大學衍義)》: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의 8조목(條目)을 풀이한 책.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중시되었다.
101. 《기년통고(紀年通攷)》: 조선 후기의 학자 유계(兪棨, 1607-1664)가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다루었다. 본문 내용은 후대의 기록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원문:
丁卯五月, 領議政李浚慶辭職, 凡三啓, 上許之。 玉堂上箚請留, 乃命仍任。 是時, 群小雖退, 流言未息, 人心疑危, 恐有乘時釀禍者。 若浚慶罷相, 相非其人, 則無以鎭物, 故玉堂之論如此。 浚慶雖浮沈取容, 而中心常存扶護善類念, 故爲時議所重。
번역문:
(선조 즉위년) 정묘년(1567) 5월, 영의정 이준경이 사직(辭職)을 청하는 계(啓)¹⁰²를 모두 세 번 올리니 상께서 허락하셨다. 옥당(玉堂)¹⁰³에서 차자(箚子)¹⁰⁴를 올려 유임(留任)시키기를 청하자, 이에 그대로 임명하도록 명하셨다. 이때 군소배(群小)¹⁰⁵들이 비록 물러났으나 뜬소문[流言]이 그치지 않아 인심이 의심하고 위태로워하며, 시기를 틈타 화(禍)를 일으키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만약 이준경이 재상직을 그만두고 재상이 그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사물(세상)을 진정시킬 수 없을 것이므로, 옥당의 논의가 이와 같았다. 이준경이 비록 시세에 따라 처신하며 용납되기를 구하는 듯[浮沈取容]¹⁰⁶ 하였으나, 마음속에는 항상 선한 무리[善類]를 붙들어 보호하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여론[時議]에 중시되었다.
주석:
102. 계(啓): 조선 시대에 왕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주로 보고나 청원의 내용을 담았다.
103.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104. 차자(箚子): 조선 시대에 왕에게 올리던 약식 상소문.
105. 군소(群小): 무리를 지어 남을 해치는 간사한 사람. 주로 정치적 반대파나 부도덕한 관료들을 비판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았던 윤원형 일파 등 척신(戚臣) 세력을 가리킬 수 있다.
106. 부침취용(浮沈取容): 물에 떴다 잠겼다 하듯 일정한 주관 없이 시세에 따라 행동하며 남에게 잘 보이려 함. 이준경이 척신 세력이 득세하던 시기에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것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말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그의 신중한 처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六月二十七日。 上疾猝重, 不省人事。 醫官問于藥房提調沈通源曰: “欲用野乾水, 不敢自擅。” 通源使¹⁰⁷問于領議政李浚慶, 曰: “疾病用藥, 豈有上下? 當隨症用之。” 問于左議政李蓂, 曰: “豈無他藥, 用此陋¹⁰⁸物?” 議不一。 時右議政權轍奉使往京師, 大臣只有二相及通源而已。 中殿禱于上下神祗, 且疏放罪人。 日午, 上疾尤篤, 雖覓野乾入內, 未及進御。 夜三更, 中殿急召大臣, 浚慶等與承旨、史官入寢殿, 上已不能言, 且不能視, 內人以冠帶置于臥內而已。 浚慶等進前, 大聲曰: “臣等來。” 終不應。 浚慶等使史官大書其名, 擧于上前, 亦不視, 無如之何。 浚慶等乃啓中殿曰: “事已無可奈何, 當定¹⁰⁹社稷之計。 主上不能顧命, 中殿當有指揮。” 中殿答曰: “乙丑年危急時, 曾以王命下一封書, 當以其人爲嗣。” 浚慶等拜伏地曰: “社稷之計定¹⁰⁶矣。” 浚慶等出會賓廳, 俄聞哭聲, 已昇遐矣。 浚慶等使都承旨李陽元、同副承旨朴素立、注書黃大受及侍衛將士, 迎嗣子于德興邸。【竝《石潭日記》。】
번역문:
6월 27일. 상(上)¹¹⁰의 병이 갑자기 위중해져 인사(人事)를 차리지 못하셨다. 의관(醫官)이 약방 제조(藥房提調) 심통원(沈通源)에게 묻기를 “야건수(野乾水)¹¹¹를 쓰고자 하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심통원이 영의정 이준경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질병에 약을 쓰는 데 어찌 상하(上下)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증세에 따라 써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좌의정 이명(李蓂)¹¹²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어찌 다른 약이 없어서 이 천한 물건을 쓰겠습니까?”라고 하여,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때 우의정 권철(權轍)¹¹³은 사신으로 경사(京師)¹¹⁴에 가 있었으므로, 대신(大臣)은 두 재상과 심통원만 있을 뿐이었다. 중전(中殿)이 상하(上下)의 신기(神祇)¹¹⁵에게 기도하고, 또 죄인을 석방하였다. 한낮이 되자 상의 병이 더욱 위독해져서, 비록 야건(野乾)을 찾아 궁궐 안으로 들였으나 미처 올리지 못했다. 밤 삼경(三更)¹¹⁶에 중전이 급히 대신들을 부르니, 이준경 등이 승지(承旨)¹¹⁷, 사관(史官)¹¹⁸과 함께 침전(寢殿)에 들어갔으나, 상께서는 이미 말을 할 수도, 볼 수도 없으셨고 내인(內人)이 관대(冠帶)¹¹⁹를 침전 안에 놓아두었을 뿐이었다. 이준경 등이 앞으로 나아가 큰 소리로 “신(臣) 등이 왔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끝내 응답이 없었다. 이준경 등이 사관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크게 써서 상의 앞에 들어 보이게 하였으나 또한 보지 않으시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준경 등이 이에 중전께 아뢰었다. “일이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사직(社稷)의 계책을 정해야 합니다. 주상(主上)께서 고명(顧命)¹²⁰하실 수 없으니 중전께서 마땅히 지휘하셔야 합니다.” 중전이 답하였다. “을축년(1565) 위급했을 때 일찍이 왕명(王命)으로 봉서(封書) 하나를 내렸으니, 마땅히 그 사람으로 후사를 삼아야 합니다.” 이준경 등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말하였다. “사직의 계책이 정해졌습니다.” 이준경 등이 나와 빈청(賓廳)에 모였는데, 얼마 안 되어 곡성(哭聲)이 들리니 이미 승하(昇遐)¹²¹하신 것이었다. 이준경 등이 도승지(都承旨) 이양원(李陽元)¹²², 동부승지(同副承旨) 박소립(朴素立)¹²³, 주서(注書) 황대수(黃大受) 및 시위(侍衛) 장사(將士)들로 하여금 후계자[嗣子]를 덕흥군(德興君)의 사저[邸]에서 맞이하게 하였다.【이상 《석담일기(石潭日記)》¹²⁴에서 인용】
주석:
107. [주-D005] 使 : 저본(底本)에는 “사(事)”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대동야승(大東野乘)·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 2년, 《율곡전서(栗谷全書)·경연일기(經筵日記)》 명종 22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使'는 '~에게 물어보게 하다'는 사동의 의미로 쓰였다.
108. [주-D004] 陋 : 《대동야승·석담일기》 명종 20년에는 뒤에 “약(藥)”이 더 있다. 이 경우 표점(標點)은 “‘어찌 다른 약이 없어서 이 천한 약[陋藥]을 쓰겠습니까?’ 물의(物議)가 일치하지 않았다.”가 된다. 저본을 따라 '陋物'로 번역하였다.
109. [주-D006] 定 : 저본(底本)에는 “지(之)”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대동야승·석담일기》 명종 20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10. 상(上): 임금. 여기서는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111. 야건수(野乾水): 야건(野乾)은 너구리 또는 살쾡이를 가리키는 말로 추정되며, 야건수는 그 오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민간요법에서 약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112. 이명(李蓂, 1500-157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동 L(東 L). 좌의정을 지냈다.
113. 권철(權轍, 1503-1578): 조선 중기의 문신, 무신. 호는 쌍취헌(雙翠軒). 우의정을 지냈다. 권율(權慄) 장군의 아버지이다.
114. 경사(京師): 수도. 당시 명(明)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115. 신기(神祇): 천신(天神)과 지기(地祇). 하늘과 땅의 모든 신령을 의미한다.
116. 삼경(三更):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세 번째 시간.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다.
117.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118.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119. 관대(冠帶): 관(冠)과 띠(帶). 관리의 복장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임금의 의복을 뜻한다.
120. 고명(顧命): 임금이 임종 시에 후계자나 원로 대신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명령.
121. 승하(昇遐): 임금이나 왕족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122. 이양원(李陽元, 1526-159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노저(鷺渚).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다.
123. 박소립(朴素立, 1535-1592): 조선 중기의 문신.
124. 《석담일기(石潭日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이(李珥)가 지은 일기. 호는 석담(石潭). 선조 즉위 초의 정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원문:
李東皐旣受顧命, 出賓廳, 令兵曹整部伍, 禮曹修迎立儀。 李陽元時爲都承旨, 請召三司長官參預, 東皐厲色曰: “我以首相承遺敎, 君招三司, 將欲何爲?” 李公惶恐失措。 宣廟卽祚, 有欲罪李公者, 東皐絶之曰: “李公敬愼大事而已, 豈有他意?” 議遂沮。【《涪溪記聞》。】
번역문:
이동고(李東皐)¹²⁵가 이미 고명(顧命)을 받고 빈청(賓廳)에서 나와 병조(兵曹)에 명하여 부대 대오[部伍]를 정비하게 하고, 예조(禮曹)에 명하여 영립(迎立)¹²⁶ 의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이양원(李陽元)이 이때 도승지(都承旨)였는데, 삼사(三司)의 장관(長官)¹²⁷을 불러 참여하게 하기를 청하자, 동고가 얼굴빛을 엄하게 하며 말하였다. “내가 수상(首相)으로서 유교(遺敎)¹²⁸를 받들었거늘, 그대가 삼사를 부르는 것은 장차 무엇을 하려 함인가?” 이양원이 황공하여 어쩔 줄 몰랐다. 선조(宣廟)께서 즉위하시자 이양원을 죄주려는 자가 있었는데, 동고가 이를 막으며 말하였다. “이공(李公)은 큰일을 공경하고 삼갔을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의논이 마침내 중단되었다.【《부계기문(涪溪記聞)》¹²⁹에서 인용】
주석:
125. 이동고(李東皐): 이준경의 호를 사용하여 지칭한 것이다.
126. 영립(迎立): 임금을 맞이하여 즉위시키는 것.
127. 삼사 장관(三司長官):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대제학(또는 부제학).
128. 유교(遺敎): 임금이 죽으면서 남긴 명령이나 가르침. 고명(顧命)과 유사한 의미이다.
129.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후기의 학자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아들 이재(李栽, 1657-1730)가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후대에 편찬된 책으로 추정된다. 이현일의 호가 부계(涪溪)이다. 주로 인물 일화와 견문 등을 담고 있다.
원문:
詔使翰林院檢討許國、兵科給事中魏時亮, 以頒新皇帝登極詔事東來, 至安州, 聞大行王之訃, 疑國中有變, 問譯官曰: “前王有嗣子否?” 曰: “無矣。” 又問首相爲誰, 曰: “李浚慶也。” 曰: “國人以爲賢而信之乎?” 曰: “賢相也, 國人信之。” 兩使曰: “然則無虞矣。”
번역문:
조서(詔書)를 가지고 온 사신인 한림원 검토(翰林院檢討) 허국(許國)¹³⁰과 병과 급사중(兵科給事中) 위시량(魏時亮)¹³¹이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반포하는 조서를 가지고 동쪽으로 오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러 대행왕(大行王)¹³²의 부고(訃告)를 듣고, 나라 안에 변고가 있을까 의심하여 역관(譯官)에게 물었다. “전왕(前王)에게 후사(嗣子)가 있었는가?” 답하기를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수상(首相)이 누구인지 물으니, 답하기를 “이준경입니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나라 사람들이 그를 현명하다고 여기고 신임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현명한 재상이며, 나라 사람들이 그를 신임합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신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겠구나.”
주석:
130. 허국(許國, 1528-1591): 명(明)나라의 관리.
131. 위시량(魏時亮): 명(明)나라의 관리.
132. 대행왕(大行王): 임금이 승하한 후 시호(諡號)를 받기 전까지 일컫는 말. 여기서는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원문:
明宗之喪, 當以十月葬, 而日官以爲不吉, 大臣與日官定議, 以九月卜葬, 乃第四月也。 生員李愈¹³³上疏, 譏其渴葬。 王大妃下敎曰: “凡吉凶在於天命。 日官之言, 何足取信? 定于十月可也。” 大臣以爲難, 大妃乃命於十月十五日下玄宮曰: “雖不吉亦可用也。” 領議政李浚慶、左議政李蓂啓¹³⁴曰: “葬日不擇吉凶, 雖是盛意, 但安厝先靈而用凶日, 則恐在天之靈亦未安也。” 大妃乃從其請。
번역문:
명종(明宗)의 상(喪)에 마땅히 10월에 장사 지내야 했으나 일관(日官)¹³⁵이 불길(不吉)하다고 여겼으므로, 대신(大臣)이 일관과 의논을 정하여 9월에 장사 지내기로 택하니, 이는 곧 네 번째 달¹³⁶이었다. 생원(生員) 이유(李愈)가 상소하여 갈장(渴葬)¹³⁷이라고 비난하였다. 왕대비(王大妃)¹³⁸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무릇 길흉(吉凶)은 천명(天命)에 달려 있으니, 일관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10월로 정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셨다. 대신들이 어렵다고 여기자, 대비께서 이에 10월 15일에 현궁(玄宮)¹³⁹을 내리기로 명하며 말씀하시기를 “비록 불길하더라도 또한 쓸 수 있다.”라고 하셨다. 영의정 이준경과 좌의정 이명이 아뢰었다. “장사 지내는 날에 길흉을 가리지 않는 것이 비록 매우 좋은 뜻이오나, 다만 선왕의 영혼[先靈]을 편안히 모시면서 흉한 날을 쓴다면 하늘에 계신 영혼 또한 편안하지 못하실까 염려됩니다.” 대비께서 이에 그 청을 따르셨다.
주석:
133. [주-D007] 愈 : 저본(底本)에는 “유(兪)”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석담일기》 명종 22년, 《율곡전서·경연일기》 명종 22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즉위년 9월 22일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34. [주-D008] 請 : 저본(底本)에는 없다. 《대동야승·석담일기》 명종 22년 및 《율곡전서·경연일기》 명종 22년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啓' 앞에 '請'이 있어야 문맥이 자연스럽다.
135. 일관(日官): 날짜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상감(觀象監)의 관리.
136. 네 번째 달: 왕이 승하한 달로부터 네 번째 달. 당시 장례는 보통 5개월장(月葬)으로 치렀으므로, 9월에 장례를 치르는 것은 관례보다 빠른 것이었다.
137. 갈장(渴葬): 예법에 정해진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서둘러 지내는 장례.
138. 왕대비(王大妃): 선왕(先王)의 비(妃). 여기서는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를 가리킨다.
139. 현궁(玄宮): 왕이나 왕비의 관(棺)을 가리킨다. '하현궁(下玄宮)'은 관을 능(陵)에 묻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大臣以冬雷辭職, 大妃下敎曰: “大臣何辜? 過在君上。 若有賢士沈滯者、無故被罪者, 則悉皆疏解敍用。” 於是, 大臣以乙巳以來羅織者, 列錄以上, 或請放還, 或請復職, 宋麟壽等還給職牒, 人心大悅。 時領議政李浚慶主論甚力。 僚議有言“作事無漸, 恐有後患”者, 浚慶亦不顧, 識者多之。【竝《石潭日記》。】
번역문:
대신(大臣)이 겨울철 우레[冬雷]¹⁴⁰를 이유로 사직하자, 대비께서 하교하시기를 “대신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가? 허물은 군상(君上)¹⁴¹에게 있다. 만약 현명한 선비로서 침체되어 있는 자나 까닭 없이 죄를 입은 자가 있다면 모두 죄를 풀어주고 서용(敍用)¹⁴²하라.”라고 하셨다. 이에 대신이 을사사화(乙巳士禍) 이래로 죄를 엮어 만든[羅織]¹⁴³ 자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올리고, 혹은 석방[放還]을 청하고 혹은 관직 복구[復職]를 청하니, 송인수(宋麟壽)¹⁴⁴ 등에게 직첩(職牒)¹⁴⁵을 돌려주자 인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준경이 이 논의를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동료들의 의논 중에 “일을 함에 점진적이 아니면 후환(後患)이 있을까 염려됩니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준경은 또한 돌아보지 않으니, 식견 있는 자들이 이를 가상히 여겼다.【이상 《석담일기》에서 인용】
주석:
140. 동뢰(冬雷): 겨울철에 치는 천둥. 당시에는 비정상적인 자연 현상으로 여겨 재앙의 징조로 받아들여졌으며, 임금이나 대신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경우가 있었다.
141. 군상(君上): 임금. 여기서는 갓 즉위한 어린 선조를 대신하여 대비가 말하는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책임을 군주에게 돌리는 표현이다.
142. 서용(敍用): 죄가 풀린 사람에게 다시 벼슬을 줌.
143. 나직(羅織): 죄 없는 사람에게 거짓 죄를 꾸며 얽어 넣음. 을사사화와 그 이후 척신 정권 하에서 많은 사림들이 무고하게 죄를 입었음을 가리킨다.
144. 송인수(宋麟壽, 1499-1547):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규암(圭庵).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145. 직첩(職牒): 관직 임명장. 직첩을 돌려준다는 것은 관직과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領議政李浚慶於經筵白上曰: “主上新服厥命, 此億兆傾心之日也。 凡所施爲, 一切不可放過。 人主一語一默、一動一靜, 莫不係於國家興亡, 不可以一動靜、一語默之微, 而有所自逸。 人心之難制, 莫甚於慾。 匹夫不是無欲, 而或畏法有制, 或所遇不豐, 不甚爲慾所使。 然猶有喪身亡家者, 惟其難制故也。 至於人君, 則所效¹⁴⁶於前者, 莫非豐亨豫大之事, 而無法制之可畏, 故雖明易溺, 雖安易危, 惟慾易放故也。 自古人君, 以欲致亂者多矣。 當此卽位之初, 願先以此爲戒¹⁴⁷, 以爲保宗社、保生民之本焉。 況言者¹⁴⁸, 國家元氣, 不可一日無也。 言雖合道, 以逆于心而怒其人, 則治亂之所由分也。 又必親近儒臣, 誠心講學, 先正本源之地, 可以爲措¹⁴⁹事出治之本矣。” 上動容聽納。【《宣廟寶鑑》。】
번역문:
영의정 이준경이 경연(經筵)에서 상께 아뢰었다. “주상(主上)께서 새로 그 명(命)을 받으셨으니, 이때는 억조창생(億兆)¹⁵⁰이 마음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무릇 시행하는 바는 일절 소홀히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군주[人主]의 한마디 말과 침묵, 한 번의 움직임과 멈춤이 국가의 흥망(興亡)에 관계되지 않음이 없으니, 한 번의 동정(動靜)과 한마디의 어묵(語默)이 미미하다 하여 스스로 안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 욕심(慾)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필부(匹夫)¹⁵¹도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혹 법을 두려워하여 제어함이 있거나 혹 처지가 풍족하지 못하여 욕심에 심하게 부림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하게 하는 자가 있으니, 오직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군주에 이르러서는 앞에서 본받는 바¹⁴⁶가 풍요롭고 형통하며 안락하고 큰일¹⁵²이 아님이 없으며, 법제의 두려워할 만함이 없으므로, 비록 밝더라도 빠지기 쉽고 비록 편안하더라도 위태로워지기 쉬우니, 오직 욕심은 방종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군주가 욕심으로 혼란을 초래한 자가 많았습니다. 이 즉위하신 초기를 당하여 원컨대 먼저 이로써 경계¹⁴⁷를 삼으시어, 종사(宗社)를 보전하고 생민(生民)을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물며 언로(言路)¹⁴⁸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비록 도(道)에 합치하더라도 마음에 거슬린다 하여 그 사람에게 노한다면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이 말미암는 바가 갈리게 됩니다. 또 반드시 유신(儒臣)¹⁵³을 가까이하여 성심(誠心)으로 학문을 강론하시고, 먼저 근본[本源]의 자리를 바르게 하시면, 일을 처리하고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상께서 용모를 가다듬고 귀 기울여 받아들이셨다.【《선묘보감(宣廟寶鑑)》¹⁵⁴에서 인용】
주석:
146. [주-D009] 效 :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조(宣祖朝)》 정묘(즉위년) 및 《동고유고·영의정증시충정동고선생이공행장》에는 “교(交)”로 되어 있다. '交於前者'는 '이전에 사귄 것' 정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문맥상 군주가 보고 듣는 것을 의미하는 '效'가 더 적절해 보인다. 저본을 따라 '效'로 번역하였다.
147. [주-D010] 戒 : 저본(底本)에는 “융(戎)”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국조보감·선조조》 정묘(즉위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戎'은 병장기, 군사 등을 의미하므로 문맥에 맞지 않다.
148. [주-D011] 言 : 《국조보감·선조조》 정묘(즉위년) 및 《동고유고·영의정증시충정동고선생이공행장》에 근거할 때 앞에 “직(直)”이 더 있어야 할 듯하다. '直言'은 바른 말, 즉 간언(諫言)을 의미한다. 본문은 저본을 따라 '言'으로 표기하고 '언로(言路)'로 번역하였다.
149. [주-D012] 措 : 저본(底本)에는 “구(搆)”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국조보감·선조조》 정묘(즉위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措事'는 일을 처리함, '搆事'는 일을 엮음, 일으킴의 의미이다. 문맥상 '措事'가 적절하다.
150. 억조(億兆): 억과 조. 매우 많은 수효를 의미하며, 온 백성을 가리킨다.
151. 필부(匹夫): 평범한 남자. 일반 백성을 의미한다.
152. 풍형예대지사(豐亨豫大之事): 풍요롭고(豐), 형통하며(亨), 안락하고(豫), 큰(大) 일. 군주가 누리는 부귀와 권세를 의미한다.
153. 유신(儒臣): 유학(儒學)을 공부한 신하. 경연관(經筵官) 등을 포함한다.
154. 《선묘보감(宣廟寶鑑)》: 《국조보감(國朝寶鑑)》 중 선조(宣祖) 대의 기록을 가리킨다. 《국조보감》은 조선 시대 역대 왕들의 모범적인 언행과 정치적 업적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원문:
領議政李浚慶進曰: “朝廷之上, 當守體統。 頃日承旨請面對之事, 非近規也, 恐壞¹⁵⁵體統也。 假使有可畏¹⁵⁶之機, 自有臺諫及論思之臣, 何必承旨請對耶?” 李珥曰: “此言不然。 只在所言之如何耳。 若所言是, 則何妨於體統? 承旨亦經筵參贊之官也, 請對言事, 亦其職也。 浚慶之言太執也。 今者善政不擧, 百度廢弛。 若不奮然振作, 以新一代之規矩, 而徒欲拘常守舊, 則安能祛積弊而大有爲哉? 大臣不能引君當道, 而惟遵守近規是務, 殊非群下所望也。”【《石潭日記》。 下竝同。】
번역문:
영의정 이준경이 나아가 아뢰었다. “조정(朝廷)에서는 마땅히 체통(體統)을 지켜야 합니다. 요즈음 승지(承旨)가 면대(面對)¹⁵⁷를 청하는 일은 근래의 규범[近規]이 아니니, 체통을 무너뜨릴까¹⁵⁵ 염려됩니다. 가령 두려워할 만한¹⁵⁶ 기미가 있다면 저절로 대간(臺諫)¹⁵⁸ 및 논사(論思)¹⁵⁹의 신하가 있는데, 어찌 반드시 승지가 면대를 청하겠습니까?” 이이(李珥)¹⁶⁰가 말하였다. “이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말하는 바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말하는 바가 옳다면 어찌 체통에 방해가 되겠습니까? 승지 또한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¹⁶¹이니, 면대를 청하여 일을 말하는 것 또한 그 직분입니다. 이준경의 말씀은 너무 고집스럽습니다. 지금 선정(善政)이 거행되지 않고 모든 법도[百度]가 폐지(廢弛)되었습니다. 만약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대의 새로운 규범[規矩]을 세우지 않고 한갓 상례에 얽매이고 옛것만 지키려 한다면, 어찌 쌓인 폐단[積弊]을 제거하고 크게 하는 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신이 임금을 인도하여 올바른 도리[當道]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고 오직 근래의 규범 준수만을 힘쓰니, 자못 여러 신하[群下]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석담일기》. 아래도 이와 같다.】
주석:
155. [주-D013] 壞 : 저본(底本)에는 “괴(瓌)”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2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瓌'는 기이하다는 뜻으로 문맥에 맞지 않다. '壞'는 무너뜨리다는 뜻이다.
156. [주-D014] 畏 :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2년에는 “대(對)”로 되어 있다. '對'는 대처하다, 대응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문맥상 '畏'(두려워하다)가 더 자연스럽다. 저본을 따른다.
157. 면대(面對): 임금과 얼굴을 마주하여 아뢰는 것. 주로 승지가 긴급하거나 비밀스러운 일을 보고할 때 청했다. 이준경은 이것이 격식에 맞지 않다고 본 것이다.
158.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의 관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들은 공식적으로 간쟁(諫諍)과 탄핵(彈劾)을 담당했다.
159. 논사(論思): 경연(經筵)에서 임금과 학문과 정사를 논의하는 것. 또는 그 역할을 하는 신하.
160.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당시 홍문관 부제학 등으로 경연에 참여했다.
161.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경연에 참여하여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관직. 승지, 홍문관 관원 등이 겸임하였다.
원문:
李浚慶侍上, 語及乙巳之事曰: “衛社之時, 善士或有坐死者, 其瘡痍未合矣。” 李珥曰: “大臣言, 何可含糊不明乎? 衛社是僞勳也, 其得罪者, 皆善士也。 仁廟禮陟, 中宗嫡子只有明宗一人而已。 天命人心, 豈歸他哉? 奸兇乃敢貪天之功, 斬伐士林, 以錄僞功, 神人之憤久矣。 今當聖上新政之初, 當削勳正名, 以定國是, 不可緩也。” 浚慶曰: “此言則然矣。 但先朝之事, 不可猝改。” 珥曰: “不然。 明宗幼沖卽祚, 雖不免奸兇之欺蔽, 今則在天之靈, 洞照其奸矣。 雖曰先朝之事, 豈可不改乎?” 先是, 白仁傑每見浚慶, 稱李珥才且賢, 可薦用。 及珥於經席再折¹⁶², 浚慶不悅, 謂仁傑曰: “爾之李珥, 何其輕乎?”
번역문:
이준경이 상(上)을 모시고 을사사화(乙巳之事)에 대해 언급하며 말하였다. “사직을 보위할[衛社]¹⁶² 때, 선한 선비[善士]로서 혹 연좌되어 죽은 자가 있었으니, 그 상처[瘡痍]가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이이가 말하였다. “대신(大臣)의 말씀이 어찌 함부로하고 불분명할 수 있습니까? 위사(衛社)는 거짓 공훈[僞勳]이며, 그때 죄를 얻은 자들은 모두 선한 선비들입니다. 인종(仁廟)께서 예로 즉위하셨으니, 중종(中宗)의 적자(嫡子)는 오직 명종(明宗) 한 분뿐이었습니다.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어찌 다른 데로 돌아가겠습니까? 간흉(奸兇)¹⁶³들이 이에 감히 하늘의 공을 탐내어 사림(士林)을 베고 쳐서 거짓 공훈을 기록하니, 신(神)과 사람의 분노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성상(聖上)의 새로운 정치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위사공훈(僞勳)을 삭제하고 명분(名分)을 바로잡아 국시(國是)¹⁶⁴를 정해야 하니,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준경이 말하였다. “이 말은 그러합니다. 다만 선조(先朝)¹⁶⁵의 일이니 갑자기 고칠 수는 없습니다.” 이이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명종께서 어린 나이[幼沖]로 즉위하시어 비록 간흉의 속임[欺蔽]을 면하지 못하셨으나, 지금은 하늘에 계신 영혼께서 그 간사함을 환히 비추어 보실 것입니다. 비록 선조의 일이라고 하나 어찌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보다 먼저 백인걸(白仁傑)¹⁶⁶이 매번 이준경을 만나면 이이를 재주 있고 또 현명하니 추천하여 쓸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이가 경연 자리에서 두 번 이준경의 말을 꺾자¹⁶², 이준경이 기뻐하지 않으며 백인걸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이이는 어찌 그리 경솔한가?”
주석:
162. [주-D015] 折 : 장서각본 및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2년에는 뒤에 “준경지언(浚慶之言)”이 더 있다. 이 경우 "이이가 경연 자리에서 두 번 이준경의 말을 꺾자"로 번역된다. 의미상 명확하므로 저본대로 번역하였다.
162. 위사(衛社): 사직(社稷), 즉 국가를 보위한다는 뜻. 을사사화 때 윤원형 등 소윤 세력은 윤임 등 대윤 세력을 제거한 것을 '사직을 보위한 공'으로 내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다.
163. 간흉(奸兇):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 윤원형 등 을사사화를 주도한 척신 세력을 가리킨다.
164. 국시(國是): 나라의 근본 이념이나 정책 방향. 여기서는 을사사화의 잘못을 바로잡고 사림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65. 선조(先朝): 이전의 조정. 여기서는 명종(明宗)의 조정을 가리킨다.
166. 백인걸(白仁傑, 1497-157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휴암(休巖).
원문:
李浚慶請以仁廟不入文昭殿, 三司駁正之。 初, 仁廟禫後, 權奸當國, 以仁廟爲未踰年之君, 不安¹⁶⁷于文昭殿, 祀于延恩殿,【德宗位版所安。 德宗未卽位, 故別祀于延恩殿。】 國人悲憤。 至是, 輿議欲於明廟禫後, 與仁廟同祔文昭殿, 浚慶以爲: “仁廟旣祀于延恩殿, 不必祔文昭。” 於是衆議蜂起, 三司交章, 至比浚慶於乙巳權奸。 浚慶亦自服過, 遂寢其議。
번역문:
이준경이 인종(仁廟)을 문소전(文昭殿)¹⁶⁸에 모시지 말 것을 청하자, 삼사(三司)가 이를 반박하여 바로잡았다. 처음에 인종의 담제(禫祭)¹⁶⁹ 후에 권간(權奸)¹⁷⁰이 정권을 잡고서, 인종이 재위 1년을 넘기지 못한 군주라 하여 문소전에 신주를 모시는 것¹⁶⁷을 불안하게 여겨 연은전(延恩殿)¹⁷¹【덕종(德宗)¹⁷²의 위판(位版)을 모신 곳이다. 덕종은 즉위하지 못하였으므로 연은전에 따로 제사 지냈다.】에서 제사 지내니,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분개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여론[輿議]은 명종(明廟)의 담제 후에 인종과 함께 문소전에 부묘(祔廟)¹⁷³하고자 하였는데, 이준경이 생각하기를 “인종은 이미 연은전에서 제사 지내고 있으니 반드시 문소전에 부묘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의논이 벌떼처럼 일어나 삼사(三司)가 번갈아 상소를 올려, 심지어 이준경을 을사사화 때의 권간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이준경 또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중지시켰다.
주석:
167. [주-D016] 安 : 저본(底本)에는 없다.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2년 및 《율곡전서·경연일기》 선조 2년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不安于文昭殿'은 '문소전에 (신주를) 모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168. 문소전(文昭殿): 조선 시대에 역대 왕과 왕비의 어진(御眞)이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전각. 종묘(宗廟)와는 별도로 운영되었다.
169. 담제(禫祭):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 지내는 제사. 상례(喪禮)의 마지막 절차이다.
170. 권간(權奸): 권세를 잡은 간신. 윤원형 등을 가리킨다.
171. 연은전(延恩殿): 조선 시대에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추존(追尊)된 왕(대원군 포함)이나 일찍 죽은 세자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곳.
172. 덕종(德宗): 조선 세조(世祖)의 맏아들이자 성종(成宗)의 아버지인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1457). 일찍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나 아들 성종이 즉위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173. 부묘(祔廟): 종묘(宗廟)나 다른 사당에 신주(神主)를 옮겨 함께 모시는 것. 여기서는 인종의 신주를 문소전에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壬申夏, 疾亟, 却藥, 語子曰: “天祿已終, 豈可服此延生? 第欲貢一言, 其草之。 一曰帝王之務, 惟學爲大; 二曰待下有威儀; 三曰卞君子小人; 四曰破朋黨之私。” 餘不及家事。【碑下竝同。】
번역문:
(선조 5년) 임신년(1572) 여름, 병이 위독해지자 약을 물리치고 아들에게 말하였다. “하늘이 준 녹(祿)이 이미 끝났으니 어찌 이 약을 복용하여 생명을 연장하겠는가? 다만 한마디 말을 올리고자 하니, 그 초안을 잡으라. 첫째, 제왕(帝王)의 임무는 오직 학문(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둘째, 아랫사람을 대함에 위엄과 몸가짐[威儀]이 있어야 한다. 셋째,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해야 한다. 넷째, 붕당(朋黨)¹⁷⁴의 사사로움을 타파해야 한다.” 나머지는 집안일[家事]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비문 아래 부분도 이와 같다.】
주석:
174. 붕당(朋黨): 정치적 이념이나 학문적 경향을 같이하는 양반 관료들이 이루는 집단. 또는 그러한 집단 간의 대립. 이준경의 유언은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하던 붕당 정치의 폐해를 경계한 것으로 해석된다.
원문:
公資稟旣高, 學問有方, 處心正直寬平, 行己光潔峻整, 好善誠以明, 惡惡嚴而恕。 少從黃公孝獻受《小學》, 比長, 就從兄灘叟先生, 得聞趙靜菴餘論。 日用動靜, 恒加存省, 以致¹⁷⁵力於不欺之域, 惰慢鄙倍, 不形于外。 守儉約, 絶玩好, 惟以讀書爲樂。 淨掃一室, 焚香端坐, 《小學》、《近思錄》常置几上, 將聖賢格言及讀史有契于心者, 亦必貼諸壁而觀之。 倦則隷書, 曰: “不欲使此心弛放也。” 或時觀德, 曰: “不可使四支安逸也。” 素喜古文, 尤愛左氏、兩漢, 韓子以後之文卑弱不取, 且曰: “文章直工匠事耳。 及纂辭奮筆, 渙若不思, 渾浩疏通, 非雕篆者所及。” 書畫、音律, 無不曉暢, 恐其易流, 不以著意。 惟致美朝服, 如衣冠、飮食, 亦皆慕倣華制。 凡人有喪, 竭力救之, 俸布賙急, 無餘蓄。 不肯起第宅, 置田園, 凡紛華名勢, 避之若將浼焉。 人不敢干以私, 門庭蕭然, 有同寒素。
번역문:
공은 자품(資稟)이 이미 높고 학문(學問)에 방법이 있었으며, 마음가짐이 정직(正直)하고 너그러우며[寬平], 몸가짐이 깨끗하고[光潔] 엄정하였다[峻整]. 선(善)을 좋아하기를 정성스럽고 분명하게 하였고, 악(惡)을 미워하기를 엄격하면서도 너그럽게[恕] 하였다. 어려서는 황공 효헌(黃公孝獻)¹⁷⁶에게서 《소학(小學)》¹⁷⁷을 배웠고, 장성해서는 종형(從兄) 탄수 선생(灘叟先生)에게 나아가 조광조[趙靜菴]¹⁷⁸의 남은 학설[餘論]을 들을 수 있었다. 일상생활의 동정(動靜)¹⁷⁹에 항상 마음을 보존하고 반성함[存省]¹⁸⁰을 더하여, 속이지 않는 경지[不欺之域]¹⁸¹에 힘쓰니, 게으르고 오만하며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남[惰慢鄙倍]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검약(儉約)을 지키고 완호(玩好)¹⁸²를 끊었으며, 오직 독서(讀書)로써 즐거움을 삼았다. 한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향(香)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 《소학》과 《근사록(近思錄)》¹⁸³을 항상 책상 위에 두었고, 성현(聖賢)의 격언(格言) 및 역사를 읽다가 마음에 맞는[契] 것이 있으면 또한 반드시 벽에 붙여 놓고 보았다. 피곤하면 예서(隷書)¹⁸⁴를 쓰며 말하기를 “이 마음을 해이하고 방종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다.”라고 하였고, 혹 때때로 활쏘기[觀德]¹⁸⁵를 하며 말하기를 “사지(四支)를 안일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평소 고문(古文)¹⁸⁶을 좋아하였고 특히 《좌전(左氏)》¹⁸⁷과 양한(兩漢)¹⁸⁸ 시대의 글을 아꼈으며, 한유(韓子)¹⁸⁹ 이후의 글은 비루하고 약하여 취하지 않았고, 또 말하기를 “문장(文章)은 바로 공장(工匠)의 일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글을 짓고 붓을 휘두를 때에는 시원스러움이 생각하지 않는 듯하고, 크고 넓으며[渾浩] 막힘없이 통하여[疏通], 글자나 다듬는[雕篆] 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서화(書畫), 음률(音律)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쉽게 빠져들까 염려하여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직 조복(朝服)¹⁹⁰을 아름답게 갖추는 데 힘썼고, 의관(衣冠)이나 음식(飮食) 같은 것도 또한 모두 중국 제도[華制]¹⁹¹를 본받기를 사모하였다. 무릇 상(喪)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힘을 다해 구휼하고, 봉급으로 받은 베[俸布]로 위급한 자를 구제하여[賙急] 남은 저축이 없었다. 저택(第宅)을 짓거나 전원(田園)을 마련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으며, 무릇 화려함과 명예와 권세[紛華名勢]는 장차 더럽혀질 듯이 피하였다.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하지 못하여 문정(門庭)이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寒素]와 같았다.
주석:
175. [주-D017] 致 : 저본(底本)에는 “지(之)”로 되어 있다. 《동고유고·영의정……이공신도비명》 및 《영의정……이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致力'은 '힘쓰다'는 의미이다.
176. 황공 효헌(黃公孝獻): 황효헌(黃孝獻). 생몰년 미상. 이준경의 외삼촌이다.
177. 《소학(小學)》: 송(宋)나라 유자징(劉子澄)이 주희(朱熹)의 명을 받아 편찬한 수신서(修身書). 어린이들의 기본 교양과 예절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다.
178. 조광조[趙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 호는 정암(靜庵).
179. 동정(動靜): 움직임과 고요함. 일상적인 모든 행동거지를 의미한다.
180. 존성(存省): 마음을 보존하고[存心] 자신을 반성함[省察]. 성리학의 중요한 수양 방법이다.
181. 불기지역(不欺之域): 속이지 않는 경지. 《중용(中庸)》에서 강조하는 성(誠)의 경지를 의미한다.
182. 완호(玩好): 장난감이나 기호품. 사치스러운 물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183. 《근사록(近思錄)》: 송(宋)나라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북송(北宋) 시대 성리학자들의 주요 논설을 뽑아 편찬한 책. 성리학 입문서로 널리 읽혔다.
184. 예서(隷書): 한자 서체 중 하나.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85. 관덕(觀德): 활쏘기. 유교에서는 활쏘기를 통해 심신을 수양하고 덕(德)을 기를 수 있다고 보았다.
186. 고문(古文): 진(秦)·한(漢) 이전의 문체 또는 당송(唐宋) 시대의 산문 문체. 변려문(駢儷文)과 대비된다.
187. 《좌씨(左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공자(孔子)가 지은 《춘추(春秋)》에 대해 좌구명(左丘明)이 해설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 사실과 문장이 뛰어나 고문의 전범(典範)으로 꼽힌다.
188. 양한(兩漢):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이 시대의 산문 역시 고문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189. 한자(韓子): 당(唐)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 고문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이준경이 한유 이후의 글을 낮게 평가했다는 것은 그의 문학적 취향이 매우 고풍스러웠음을 보여준다.
190. 조복(朝服):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
191. 화제(華制): 중화(中華), 즉 중국의 제도. 당시 조선은 많은 문물 제도를 명(明)나라의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원문:
公自少負重名, 大爲鄭文翼公、金慕齋所重。 操履無玷痕, 評論無偏詖, 雖以安老、沆之毒, 復¹⁷⁶昌之兇, 樑、通源之猜, 能使之憂畏困橫, 而終不敢有以加害。 正色獨立, 開誠布公, 文武隨用, 謀行功從, 鎭人心培元氣, 以一身爲一國安危, 眞所謂社稷之臣。 顧以東方士禍數起, 不免爲之調劑, 人或不知, 反有情外之謗, 乃歎曰: “寧人負我, 我無負人。” 厥心靡不向王室, 益可想已。
번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중한 명망을 지녀, 정문익공(鄭文翼公)¹⁹²과 김모재(金慕齋)¹⁹³에게 크게 중시되었다. 지조와 행실[操履]에 허물[玷痕]이 없었고, 평론(評論)에 치우치거나 간사함[偏詖]이 없었으며, 비록 김안로(安老)와 허항(沆)의 모진 마음과 진복¹⁷⁶창(復昌)의 흉악함, 이량(樑)¹⁹⁴과 심통원(通源)의 시기심이 있었으나, 능히 그들로 하여금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곤궁하고 비뚤어지게 하였고, 끝내 감히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홀로 서서[正色獨立], 정성을 열어 공평함을 폈으며[開誠布公], 문무(文武)를 따라 쓰임에 따라 계책이 행해지고 공(功)이 따랐으며, 인심(人心)을 안정시키고 원기(元氣)¹⁹⁵를 북돋아, 한 몸으로 한 나라의 안위(安危)를 책임지니, 참으로 이른바 사직(社稷)의 신하였다. 다만 동방(東方)¹⁹⁶에 사화(士禍)가 여러 차례 일어나자 그 사이에서 조정[調劑]¹⁹⁷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혹 알지 못하고 도리어 뜻밖의 비방[情外之謗]을 하니,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나는 남을 저버리지 않겠다.” 그 마음이 왕실(王室)을 향하지 않음이 없었음을 더욱 생각할 수 있다.
주석:
176. [주-D018] 復 : 《소재집(穌齋集)·유명조선국……이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李公神道碑銘)》, 《동고유고·영의정……이공신도비명》 및 《영의정……이공행장》에는 앞에 “기(芑)”가 더 있다. 이 경우 '이기(李芑), 진복창(陳復昌)의 흉악함'으로 해석된다. 저본을 따라 '진복창의 흉악함'으로 번역하였다.
192. 정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수부(守夫). 영의정을 지냈으며,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 사림을 변호하다 파직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93.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모재(慕齋). 조광조와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했으며,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194. 이량(李樑, 1519-1563): 조선 중기의 문신. 명종의 외척으로 권세를 누리다가 사림 세력과의 갈등 끝에 몰락했다.
195. 원기(元氣): 사물의 근본이 되는 기운. 국가의 근본적인 힘이나 기강을 의미한다.
196. 동방(東方): 동쪽 나라. 우리나라(조선)를 가리킨다.
197. 조제(調劑): 약을 조제하듯 여러 요소를 알맞게 조절함. 여기서는 사화 등으로 인해 대립하는 정치 세력들 사이에서 중재하고 갈등을 완화시키려 노력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七月, 領中樞府事李浚慶卒。 浚慶字元吉, 自少磊磈不群, 儀貌雄偉, 有名多士間。 立朝淸嚴自持, 與兄潤慶同有時望, 但潤慶外和而內立, 浚慶外毅而內怯。 方權奸用事也, 浚慶不敢崖異, 而心護士類, 故時望不衰。 元¹⁷⁷衡旣敗, 乃得當國。 今上之初, 士林顒望有爲, 而浚慶無經濟之才, 性又高亢, 不能下士, 且以膠守舊轍導上, 因循架漏, 無相業可觀, 於是士林短之。 奇大升尤發侵語, 浚慶聞而銜之, 遂與士類不協。 疾病, 上箚論朝臣有朋黨之私, 請破之。 上驚問曰: “若有朋黨, 則朝廷亂矣。” 大臣和解之, 而語甚糢糊, 上亦不窮問, 得無事。 由是, 士林指浚慶爲醜正之人, 不能全其名望。【《石潭日記》。】
번역문:
7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¹⁹⁸ 이준경이 졸(卒)하였다. 이준경의 자(字)는 원길(原吉)인데,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평범하지 않았으며[磊磈不群], 용모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어[儀貌雄偉] 많은 선비들 사이에 명성이 있었다. 조정에 서서는 청렴하고 엄정하게 스스로를 지켰으며, 형 윤경(潤慶)과 함께 당시의 명망이 있었으나, 다만 윤경은 겉으로는 온화하나 안으로는 강직했고[外和而內立], 이준경은 겉으로는 굳세나 안으로는 겁이 많았다[外毅而內怯]¹⁹⁹. 바야흐로 권간(權奸)²⁰⁰이 권력을 행사할 때, 이준경은 감히 모나게 다르게 행동하지는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선비 무리[士類]를 보호하였으므로 당시의 명망이 쇠하지 않았다. 윤원¹⁷⁷형(元衡)²⁰¹이 패망하자 마침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금상(今上)²⁰² 초기에 사림(士林)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었으나, 이준경은 경제(經濟)²⁰³의 재능이 없었고 성품이 또 고고하고 거만하여[高亢]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지 못했으며, 또 고루하게 옛 관례만 지키는 것[膠守舊轍]으로 상(上)을 인도하여, 옛 관습을 따르고 임시방편으로 처리할 뿐[因循架漏] 재상으로서의 업적[相業]으로 볼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이에 사림이 그를 비난하였다. 기대승(奇大升)이 특히 침해하는 말을 하니, 이준경이 듣고 원망을 품어[銜之] 마침내 선비 무리와 화합하지 못하였다. 병이 들자 차자(箚子)를 올려 조정 신하들에게 붕당(朋黨)의 사사로움이 있다고 논하며 이를 타파하기를 청하였다. 상께서 놀라 물으시기를 “만약 붕당이 있다면 조정이 혼란스러울 것이다.”라고 하셨다. 대신(大臣)이 이를 화해시켰으나 말이 매우 모호하였고, 상께서도 끝까지 묻지 않아 무사히 넘어갔다. 이로 말미암아 사림이 이준경을 추정(醜正)²⁰⁴한 사람으로 지목하여 그 명망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였다.【《석담일기》에서 인용】
주석:
177. [주-D019] 元 :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6년에도 “원(元)”으로 되어 있다. 본 인물의 전후 서술, 《소재집·유명조선국……이공신도비명》, 《동고유고·영의정……이공신도비명》 등에 근거할 때 “원(原)”이 되어야 한다. 윤원형(尹元衡)이 올바른 표기이다.
198.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특별한 실무 없이 명예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준경은 선조 즉위 후 영의정에서 물러나 이 직함을 받았다.
199. 외의이내겁(外毅而內怯): 이이(李珥)가 이준경을 평가한 말. 겉으로는 강직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소심한 면이 있다는 의미이다.
200. 권간(權奸): 권세를 잡은 간신. 윤원형(尹元衡) 등을 가리킨다.
201. 윤원형(尹元衡, 1509-1565): 조선 중기의 문신. 문정왕후의 동생.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다가 문정왕후 사후 실각하여 자결하였다.
202.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 여기서는 선조(宣祖)를 가리킨다.
203. 경제(經濟):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능력.
204. 추정(醜正): 추악한 것을 바르다고 함. 또는 바르지 못한 사람을 바르다고 함. 여기서는 이준경이 붕당의 폐해를 지적한 것을 사림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부당하게 비난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원문:
李相公浚慶嚴毅峻直, 孝友忠信, 出於天性。 聲音如洪鍾, 眼光如紫電。 廉潔無私, 人莫敢干。 學問該博, 遇事立斷。 當明廟昇遐之日, 椒親用事, 人心疑懼, 公毅然不動, 朝野賴以無憂焉。 本朝賢相, 黃喜、許稠之外, 鄭光弼之後, 惟公一人而已。
번역문:
이상공(李相公) 이준경은 엄숙하고 굳세며[嚴毅] 엄정하고 정직하며[峻直], 효도와 우애, 충성과 신의[孝友忠信]가 천성(天性)에서 나왔다. 목소리는 큰 종(洪鍾)과 같고, 눈빛은 자줏빛 번개[紫電]와 같았다. 청렴결백하고 사사로움이 없어 사람들이 감히 청탁하지 못하였다. 학문이 널리 통하고[該博], 일을 당하면 즉시 결단하였다. 명종(明廟)께서 승하하시던 날, 외척[椒親]²⁰⁵들이 권력을 행사하여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으나, 공이 의연(毅然)히 동요하지 않아 조야(朝野)가 이에 힘입어 근심이 없었다. 본조(本朝)의 현명한 재상으로는 황희(黃喜)²⁰⁶, 허조(許稠)²⁰⁷ 외에 정광필(鄭光弼)²⁰⁸ 이후로는 오직 공 한 사람뿐이다.
주석:
205. 초친(椒親): 황후나 왕비의 친척. 외척(外戚)을 의미한다. 명종 말, 선조 초에는 윤원형 세력이 제거되었으나 여전히 외척의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6. 황희(黃喜, 1363-145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호는 방촌(厖村). 세종 대에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내며 태평성대를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으로 꼽힌다.
207. 허조(許稠, 1369-1439):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경암(敬庵). 세종 대에 좌의정을 지내며 법제 정비와 공정한 관리 등용에 힘썼다.
208.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주석 192 참조.
원문:
退溪入來時, 卿士大夫朝夕候其門, 爭相現謁。 最後往見李相原吉, 李相曰: “公之入城已久, 何不早爲相見耶?” 退溪答以接遇無閑歇。 李相顰蹙曰“往在己卯, 士習如是, 其間亦有羊質虎皮, 終有媒禍之端。 如趙靜菴外, 吾不取也”云。【《梧陰雜說》。】
번역문:
퇴계(退溪)²⁰⁹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경(卿)²¹⁰, 사(士)²¹¹, 대부(大夫)²¹²들이 조석으로 그의 문에서 기다리며 다투어 찾아뵈었다. 마지막으로 이상(李相) 원길(原吉)²¹³을 찾아가니, 이상이 말하였다. “공(公)께서 입성(入城)하신 지 이미 오래인데, 어찌 일찍 서로 만나보려 하지 않았는가?” 퇴계가 손님 접대에 한가할 겨를이 없었다고 답하였다. 이상이 얼굴을 찡그리며[顰蹙] 말하였다. “지난 기묘년(己卯年)에 선비들의 습속이 이와 같았는데, 그 사이에 또한 양의 탈을 쓴 호랑이[羊質虎皮]²¹⁴가 있어 마침내 화(禍)를 불러올 단서가 되었소. 조광조[趙靜菴] 외에는 내 취하지 않소.”라고 하였다.【《오음잡설(梧陰雜說)》²¹⁵에서 인용】
주석:
209.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대학자. 호는 퇴계(退溪). 영남학파의 종조로 추앙받는다.
210. 경(卿): 조선 시대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을 통칭하는 말.
211. 사(士): 선비. 하급 관료나 학자를 가리킨다.
212. 대부(大夫): 조선 시대 종2품 이상의 관원을 통칭하는 말. 여기서는 고위 관료들을 의미한다.
213. 이상 원길(李相原吉): 재상 이준경을 자(字)로 지칭한 것이다.
214. 양질호피(羊質虎皮): 본질은 양처럼 약하면서 겉모습은 호랑이 가죽처럼 꾸밈. 외양과 실질이 다름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겉으로는 도학(道學)을 표방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선비들을 비판하는 말이다.
215. 《오음잡설(梧陰雜說)》: 조선 중기의 문신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지은 필기잡록. 호는 오음(梧陰).
원문:
退溪之乞退也, 上曰: “卿於朝臣, 無可薦者乎?” 對曰: “今日在大臣之位者皆淸愼, 六卿無邪慝之人。 至於首相李浚慶, 當危疑之際, 不動聲色, 而措國勢於泰山之安, 誠柱石之臣。 所當倚重者, 無出於此人也。”【《東閣雜記》。】
번역문:
퇴계(退溪)가 물러가기를 청하자,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경(卿)은 조정 신하 중에 추천할 만한 자가 없는가?” 퇴계가 대답하였다. “오늘날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청렴하고 신중하며[淸愼], 육경(六卿)²¹⁶ 중에 사특(邪慝)한 사람이 없습니다. 수상(首相) 이준경에 이르러서는,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危疑之際]를 당하여 동요하는 기색 없이[不動聲色] 국세(國勢)를 태산(泰山)과 같은 안정된 상태에 두었으니, 진실로 주석지신(柱石之臣)²¹⁷입니다. 마땅히 의지하고 중히 여겨야 할 자로는 이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습니다.”【《동각잡기》에서 인용】
주석:
216. 육경(六卿):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가리킨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장관이다.
217. 주석지신(柱石之臣): 기둥(柱)과 주춧돌(石)과 같은 신하.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는 매우 중요한 신하를 비유한다.
원문:
在前三司之官, 不爲投謁於三公, 蓋所以自重, 而亦以重體貌也。 李浚慶爲相時, 副提學沈義謙以歲時來謁, 浚慶曰“三司長官來見三公, 則人必聞而駭之, 後勿來見”云。 前輩風采, 槪可見矣。【《芝峯類說》。】
번역문:
예전에는 삼사(三司)의 관원이 삼공(三公)²¹⁸에게 찾아가 뵙지[投謁] 않았으니, 대개 스스로를 중히 여기는 까닭이었고 또한 체모(體貌)²¹⁹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준경이 재상으로 있을 때, 부제학(副提學)²²⁰ 심의겸(沈義謙)이 세시(歲時)²²¹ 인사차 찾아뵙자, 이준경이 말하였다. “삼사 장관(三司長官)이 삼공을 찾아보면 사람들이 반드시 듣고 놀랄 것이니, 이후로는 찾아보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전배(先輩)들의 풍채(風采)를 대개 볼 수 있다.【《지봉유설(芝峯類說)》²²²에서 인용】
주석:
218.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한다.
219. 체모(體貌): 체면과 외모. 여기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맞는 격식과 품위를 의미한다. 삼사 관원은 언론 기능을 담당하므로 재상에게 사사로이 찾아가는 것을 삼가 체통을 지켰다는 뜻이다.
220.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 가는 관직으로, 실질적인 홍문관의 책임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221. 세시(歲時): 설, 추석 등 명절.
222.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호는 지봉(芝峯).
원문:
宣廟朝, 內璫李鳳庭²²³常昵侍龍光, 供奉筆²²⁴硯間, 頗得宸翰餘法。 李東皐時爲首相, 牌召鳳庭責之曰: “汝以內侍, 摸習御筆, 將欲何爲乎? 不改, 當有重刑。” 鳳庭大懼, 效松雪體以變之, 宣廟聞而喜焉。【《公私見聞》。】
번역문:
선조(宣廟) 시대에 내시[內璫]²²⁵ 이봉정(李鳳庭)²²³이 항상 임금[龍光]²²⁶ 곁에서 가까이 모시며 필묵(筆硯)을 받드는 사이에 자못 임금의 글씨[宸翰]의 남은 법도를 터득하였다. 이동고(李東皐)가 이때 수상(首相)이었는데, 패(牌)²²⁷로 이봉정을 불러 꾸짖어 말하였다. “네가 내시로서 어필(御筆)을 모방하여 익히니, 장차 무엇을 하려 하느냐?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중형(重刑)이 있을 것이다.” 이봉정이 크게 두려워하여 송설체(松雪體)²²⁸를 본받아 글씨체를 바꾸니, 선조께서 듣고 기뻐하셨다.【《공사견문(公私見聞)》²²⁹에서 인용】
주석:
223. [주-D021] 鳳庭 : 《선조실록》 17년 3월 11일 등에는 “봉정(奉貞)”으로 되어 있고, 《광해군일기》 3년 10월 14일 등에는 “봉정(鳳禎)”으로 되어 있다. 이름 표기에 이견이 있음을 보여준다.
224. [주-D022] 硯 : 저본(底本)에는 “현(現)”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명종조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명종조상신(明宗朝相臣)》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筆硯'은 붓과 벼루를 의미한다.
225. 내당(內璫): 내시(內侍). 환관(宦官)을 가리킨다.
226. 용광(龍光): 임금의 용안(龍顔)에서 나오는 빛. 임금을 비유하는 말이다.
227. 패(牌): 조선 시대에 관원을 부르거나 명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던 표지.
228. 송설체(松雪體): 원(元)나라의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호인 송설(松雪)에서 유래한 서체. 우아하고 균형 잡힌 해서체(楷書體)로 조선 초기에 크게 유행했다.
229. 《공사견문(公私見聞)》: 저자 미상의 조선 시대 기록 모음집으로 추정된다.
원문:
《家禮》六親之喪, 各有等衰之服。 我國雖遵行, 而常用於父母而已, 自親兄弟以外, 皆着布帶, 日月久近, 循國典給暇之限而已。 壬戌年, 李相浚慶爲其兄觀察使潤慶服衰, 自後士類頗有服其祖父母、兄弟, 以及伯叔父母者, 遂爲近世厚風。【《淸江瑣語》。】
번역문:
《가례(家禮)》²³⁰에 육친(六親)²³¹의 상(喪)에는 각각 등급에 따른 상복[等衰之服]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이를 준수하여 행하나, 항상 부모에게만 사용할 뿐이고, 친형제(親兄弟) 외에는 모두 베 두건[布帶]²³²만 착용하고, 날짜의 길고 짧음은 국전(國典)²³³에 따라 휴가를 주는 기한을 따를 뿐이었다. 임술년(壬戌年, 1562)에 이상(李相) 이준경이 그의 형 관찰사 윤경(潤慶)을 위해 최복(衰服)²³⁴을 입으니, 이후로 선비 무리[士類]들이 자못 그 조부모, 형제 및 백숙부모(伯叔父母)를 위해 상복을 입는 자가 있게 되어, 마침내 근세(近世)의 두터운 풍속[厚風]이 되었다.【《청강쇄어(淸江瑣語)》²³⁵에서 인용】
주석:
230. 《가례(家禮)》: 주희(朱熹)가 편찬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법에 관한 책.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기본 예절 규범이 되었다.
231. 육친(六親): 아버지, 어머니, 형, 아우, 아내, 아들. 또는 부(父), 자(子), 형(兄), 제(弟), 부(夫), 부(婦)를 가리키기도 한다. 넓게는 가까운 친척을 통칭한다.
232. 포대(布帶): 상복(喪服) 대신 머리에 두르던 베로 만든 띠나 두건. 간소화된 상례의 표현이다.
233. 국전(國典): 나라의 법전이나 규정. 여기서는 상례(喪禮)에 따른 휴가 규정을 의미한다.
234. 최복(衰服):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 부모상이나 조부모상 등 가까운 친족의 상에 입는 정식 상복이다. 이준경이 형을 위해 정식 상복을 입은 것이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235. 《청강쇄어(淸江瑣語)》: 조선 후기의 문신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후손 이휘일(李徽逸, 1619-1672) 등이 조상의 언행과 집안의 일화를 기록한 책으로 추정된다. 이휘일의 호가 청강(淸江)이다.
원문:
近世名卿, 以友愛見稱, 惟安相公玹、李相公浚慶兩家而已。 安相以敬爲主, 於兄判書瑋, 事之如嚴父, 乘則下馬, 坐則必趨, 拜於床下, 唯諾惟謹。 李相以愛爲主, 於其兄判書潤慶, 友之如親朋, 坐則接膝, 臥則聯枕, 相對言笑, 爾汝爲戲。 兩相家風雖不同, 而皆爲一時搢紳之所欽慕。 然潤慶之卒, 相公制服悲痛, 終始如一。 安相之卒, 瑋之弔哭, 無異平人, 似負相公平生之厚。 瑋以此未免識者之譏。【《松窩雜記》。】
번역문:
근세(近世)의 이름난 경상(卿相)²³⁶ 중에 우애(友愛)로 칭송받은 이는 오직 안상공 현(安相公玹)²³⁷과 이상공 준경(李相公浚慶) 두 집안뿐이다. 안상(安相)은 공경[敬]을 위주로 하여 형 판서 위(瑋)²³⁸를 엄한 아버지처럼 섬겨, (형이) 타면 말에서 내리고 앉으면 반드시 종종걸음으로 나아가며 평상 아래에서 절하고 오직 응답하고 승낙하기를 삼갔다. 이상(李相)은 사랑[愛]을 위주로 하여 그의 형 판서 윤경(潤慶)을 친한 벗처럼 대하여, 앉으면 무릎을 맞대고 누우면 베개를 나란히 하며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웃으며 너나들이[爾汝]하며 장난쳤다. 두 재상의 가풍(家風)이 비록 같지는 않으나, 모두 한 시대 신사(搢紳)²³⁹들의 흠모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윤경이 졸(卒)하자 상공(相公)이 상복을 입고 슬퍼하고 통곡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안상이 졸하자 위(瑋)의 조문하고 곡함이 평범한 사람과 다름이 없어, 상공의 평생 두터운 정을 저버린 듯하였다. 위(瑋)는 이로 인해 식견 있는 자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송와잡기(松窩雜記)》²⁴⁰에서 인용】
주석:
236. 경상(卿相): 높은 벼슬아치. 경(卿)과 재상(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237. 안상공 현(安相公玹): 안현(安玹, 1501-156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퇴휴당(退休堂). 좌의정을 지냈다.
238. 위(瑋): 안위(安瑋). 안현의 형.
239. 신사(搢紳): 홀(笏)을 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높은 벼슬아치나 사대부를 가리킨다.
240. 《송와잡기(松窩雜記)》: 조선 후기의 문신 이기진(李箕鎭, 1687-1755)이 지은 필기잡록. 호는 송와(松窩).
원문:
李東皐浚慶爲領相, 當都堂弘文錄圈點時, 以筆抹其子德悅名曰: “吾子之不合玉堂, 吾知之詳也。” 人皆服其無私, 得大臣體。 其後柳永慶以領相, 當都堂弘文錄圈點時, 亦抹其子𢢜之名, 時𢢜已入東銓爲佐郞。 公論以爲: “銓郞淸顯, 優於玉堂而權重。 旣許其入銓, 而獨抹於堂錄, 雖欲效嚬東皐, 人誰許之?”【《涪溪記聞》。】
번역문:
이동고(李東皐) 이준경이 영상(領相)으로 있을 때, 도당(都堂)²⁴¹에서 홍문록(弘文錄)²⁴²을 권점(圈點)²⁴³할 때 붓으로 그 아들 덕열(德悅)²⁴⁴의 이름을 지우며 말하였다. “내 아들이 옥당(玉堂)에 합당하지 않음을 내가 상세히 안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사사로움 없음에 감복하여 대신(大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 후 유영경(柳永慶)²⁴⁵이 영상으로 있을 때, 도당에서 홍문록을 권점할 때 또한 그 아들 심(𢢜)²⁴⁶의 이름을 지웠는데, 이때 심(𢢜)은 이미 동전(東銓)²⁴⁷에 들어가 좌랑(佐郞)이 되어 있었다. 공론(公論)이 말하기를, “전랑(銓郞)²⁴⁸은 청요직(淸顯)으로 옥당보다 낫고 권한이 중요하다. 이미 전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고서 유독 당록(堂錄)²⁴⁹에서만 지우니, 비록 동고를 흉내 내려고 하나[效嚬]²⁵⁰ 사람들이 누구를 인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부계기문》에서 인용】
주석:
241. 도당(都堂):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키는 별칭. 또는 재상들의 회의를 뜻하기도 한다.
242. 홍문록(弘文錄): 홍문관(弘文館) 관원을 선발하기 위해 예비 후보자들의 명단을 적은 장부. 도당록(都堂錄)이라고도 한다.
243. 권점(圈點): 명단에 점을 찍어 선발하거나 제외하는 행위.
244. 덕열(德悅): 이덕열(李德悅). 이준경의 아들.
245. 유영경(柳永慶, 1550-160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춘호(春湖). 선조 말년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다가 광해군 즉위 후 사사되었다.
246. 심(𢢜): 유심(柳𢢜). 유영경의 아들.
247. 동전(東銓): 이조(吏曹)의 별칭.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여 '동쪽의 전선 기관'이라 불렸다. 병조는 서전(西銓)이라 하였다.
248. 전랑(銓郞):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통칭하는 말. 비록 품계는 낮으나 후임자 천거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졌던 핵심 요직이었다.
249. 당록(堂錄): 도당록(都堂錄), 즉 홍문록(弘文錄)을 가리킨다.
250. 효빈(效嚬): 서시(西施)가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못생긴 여자가 따라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분별없이 남을 흉내 내는 것을 비유한다. 유영경이 이준경의 행동을 흉내 냈으나 진정성이 없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홍섬(洪暹)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洪暹
字退之, 號忍齋。 彦弼之子。 中宗二十六年辛卯登第。 選補弘文正字, 賜暇湖堂, 歷吏郞、副學、大司憲、吏・禮曹判書, 典文衡。 宣祖朝拜相, 至領議政, 賜几杖。 卒年八十二。
번역문:
홍섬(洪暹)
자는 퇴지(退之)이고 호는 인재(忍齋)이며, 언필(彦弼)¹의 아들이다. 중종(中宗) 26년 신묘년(1531)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²에 선발 보임되었고, 호당(湖堂)³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⁴하였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 부제학(副提學),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 및 예조판서, 문형(文衡)⁵을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시대에 재상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⁶에 이르렀고, 궤장(几杖)⁷을 하사받았다. 향년 82세에 졸(卒)하였다.
주석:
- 언필(彦弼): 홍언필(洪彦弼, 1476~154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미(子美), 호는 묵재(默齋). 영의정을 지냈다. 홍섬의 아버지이다.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홍문관(弘文館)의 정9품 관직.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및 문한(文翰)의 처리,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정자는 교서(校書)를 담당했다.
- 호당(湖堂):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문신들이 독서하던 곳. 주로 젊고 재능있는 문신들을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및 그 장소를 이른다. 동호(東湖) 부근에 위치하여 호당이라 불렸다.
-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도록 하던 제도. 세종 때 시작되어 조선 시대 문풍 진작에 크게 기여했다.
-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 및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직책. 주로 예문관(藝文館)·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이 겸임하며 문단과 학계를 영도하는 상징적인 지위였다.
- 영의정(領議政): 조선 시대 최고 행정 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 궤장(几杖): 궤(几, 안석)와 장(杖, 지팡이). 조선 시대에 나이가 많고 덕망 높은 70세 이상의 정1품 문관 공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의례용 물품이다. 이를 하사받는 것은 신하로서 큰 영예였다.
원문:
乙巳, 拜大司憲。 時議定垂簾之儀, 明廟坐于簾內, 公啓曰: “人君當正位南面, 萬目咸睹。 今者慈殿在簾內, 殿下縱不得坐北, 宜出坐簾外, 以臨群臣。” 卽允之。
번역문:
을사년(1545)⁸에 대사헌(大司憲)⁹에 임명되었다. 이때 수렴청정(垂簾聽政)¹⁰의 의식을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명종(明宗)¹¹께서 발〔簾〕 안에 앉으시자 공(公)이 아뢰었다. “임금은 마땅히 정위(正位)에 남면(南面)¹²하여 만백성이 모두 우러러보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자전(慈殿)¹³께서 발 안에 계시니, 전하(殿下)께서 비록 북쪽을 향해 앉으실 수는 없더라도¹⁴ 마땅히 나와서 발 밖에 앉으시어 여러 신하를 대하셔야 합니다.” 즉시 이를 윤허하였다.
주석:
8.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이 해에 윤임(尹任) 일파와 윤원형(尹元衡) 일파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9.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았다.
10. 수렴청정(垂簾聽政): 왕이 나이가 어려 정사를 직접 돌볼 수 없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어린 왕을 대신하여 발〔簾〕을 치고 뒤에서 정사를 돌보던 일. 명종 즉위 당시 12세였으므로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1. 명종(明宗): 조선 제13대 왕(재위 1545~1567).
12. 정위남면(正位南面): 임금이 정전(正殿)의 용상(龍床)에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앉는 것. 임금이 정사를 보는 바른 자세를 의미한다.
13. 자전(慈殿): 대비(大妃) 또는 왕대비(王大妃)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가리킨다.
14. 종부득좌북(縱不得坐北): 신하가 북쪽을 향하여 임금을 뵙는 것이 일반적인 예법이나, 수렴청정 시 어린 왕은 발 안의 대비 곁에 있으므로 신하들을 향해 남면하기 어려웠다. 홍섬은 비록 대비와 함께 북쪽을 향해 앉지는 못하더라도, 발 밖에 나와 신하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원문:
壬子, 選廉謹之臣, 僉擧公名, 錫宴闕庭, 以奬臣庶。 戊午, 以右贊成遷禮判, 俄判吏曹兼大提學。 庚午, 掌試發策, 擧歷代戚里、宦寺之禍, 讒口交搆, 公引疾杜門謝客, 悉遞見任。 癸亥, 權奸屛黜, 復判禮曹, 再典文衡。
번역문:
임자년(1552)¹⁵에 염근리(廉謹吏)¹⁶를 선발할 때 모든 사람이 공의 이름을 천거하여, 궁궐 뜰에서 연회를 베풀어 신하와 백성들을 장려하였다. 무오년(1558)에 우찬성(右贊成)¹⁷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옮겼다가 얼마 안 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대제학(大提學)¹⁸에 임명되었다. 경오년(1570)¹⁹에 시험을 주관하며 책문(策問)²⁰을 내면서 역대 외척(戚里)²¹과 환관(宦寺)²²의 화(禍)를 거론하였는데, 참소하는 말들이 서로 얽혀들자 공이 병을 핑계로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맡고 있던 관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계해년(1563)²³에 권세 있는 간신(權奸)이 축출되자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재차 문형(文衡)을 관장하였다.
주석:
15. 임자년(1552): 명종 7년.
16. 염근리(廉謹吏): 청렴하고 삼가는 관리. 조선 시대에는 청렴한 관리를 선발하여 포상하는 제도가 있었다.
17. 우찬성(右贊成):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영의정, 좌ㆍ우의정 다음가는 재상이다.
18. 대제학(大提學):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으뜸 벼슬. 문형(文衡)을 겸임하며 학계와 문단의 최고 영수 역할을 했다.
19. 경오년(1570): 선조 3년.
20. 책문(策問): 과거 시험, 특히 문과 전시(殿試)에서 임금이 시사(時事)나 학문에 관해 묻는 문제. 응시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나 의견을 글로 써서 답했다.
21.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가문을 의미한다.
22. 환사(宦寺): 환관(宦官), 내시(內侍).
23. 계해년(1563): 명종 18년. 이 해에 권신(權臣) 이량(李樑)이 사림(士林)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축출되었다. 경오년(1570)의 일은 시기적으로 계해년(1563)보다 뒤인데, 본문 서술 순서에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오년(1570)에 홍섬이 시험관으로서 외척과 환관의 폐단을 거론한 것이 당시 권력자들을 자극하여 사직하게 되었고, 이후 다시 복귀한 것으로 이해된다.
원문:
宣廟卽位, 御筆拜右相。 明年, 升左議政, 以年至請致仕, 不允, 賜几杖, 復以疾辭, 遞領中樞。 時大夫人年垂九袠, 尙康强, 公受几杖, 賜酒樂以侈之, 咸以爲近古所未有也。 公再爲首相, 復爲左揆, 疾病漸加, 母年亦深, 力辭章八上。 上賜御札, 略曰: “卿元老耆德, 爲邦家柱石, 又有九十偏母, 特賜卿母米豆酒肉, 以示予意。” 公力疾謝恩, 懇辭相職, 上不得已從之。 其後, 復爲首相, 十箚得遞。 大夫人辭堂, 上遣都承旨諭曰: “聞卿哀毁過禮, 《禮》八十不及齋¹¹¹喪之事。 況元老大臣, 不可自輕。 卿從禮文, 勿爲居廬。” 服闋, 又領樞府奉朝¹¹²請, 不許。 及病革, 上遣承旨問所欲言, 已不能言矣。
번역문:
선조(宣祖)께서 즉위하시자 어필(御筆)¹¹³로 우의정(右議政)¹¹⁴에 임명하셨다. 다음 해에 좌의정(左議政)¹¹⁵으로 승진하였는데,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치사(致仕)¹¹⁶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시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셨다. 다시 병으로 사직하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¹¹⁷로 체직되었다. 이때 대부인(大夫人)¹¹⁸의 나이가 90세(九袠)¹¹⁹에 가까웠으나 여전히 건강하시니, 공이 궤장을 받고 술과 음악을 하사받아 이를 성대하게 하니, 모두 근래에는 보기 드문 일이라고 여겼다. 공이 다시 수상(首相)¹²⁰이 되고 또 좌의정(左揆)¹²¹이 되었으나, 질병이 점점 심해지고 어머니의 연세 또한 깊어지자 간절히 사직하는 상소를 여덟 차례나 올렸다. 상(上)께서 어찰(御札)¹²²을 내려 대략 말씀하셨다. “경(卿)은 원로(元老)이자 기덕(耆德)¹²³으로 국가의 주춧돌(柱石)이며, 또한 90세의 편모(偏母)¹²⁴가 있으니, 특별히 경의 어머니께 쌀, 콩, 술, 고기를 하사하여 나의 뜻을 보이노라.” 공이 병든 몸을 이끌고 은혜에 감사드리고 재상 직책을 간절히 사양하니, 상께서 부득이 이를 따르셨다. 그 후 다시 수상(首相)이 되었다가 상소 10번 만에 체직될 수 있었다. 대부인(大夫人)이 세상을 떠나자¹²⁵, 상께서 도승지(都承旨)¹²⁶를 보내 유시(諭示)하셨다. “경이 슬픔으로 몸을 상하게 함(哀毁)이 예를 넘는다고 들었다. 《예기(禮記)》¹²⁷에 80세에는 제쇠(齊衰)¹²⁸ 상복을 입는 상사(喪事)에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물며 원로대신(元老大臣)이니 스스로 몸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경은 예법(禮文)을 따라 거려(居廬)¹²⁹하지 말라.” 상복을 벗은(服闋) 후, 또 영중추부사로서 조정에 나와 봉조청(奉朝請)¹³⁰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상께서 승지(承旨)를 보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으셨으나, 이미 말을 할 수 없었다.
주석:
111. [주-D001] 齋喪 : 《인재집(忍齋集)・행장(行狀)》 및 《비명(碑銘)》에는 “제쇠(齊衰)”로 되어 있다. 제쇠는 오복(五服) 중 두 번째 상복으로, 부모상 등에 입는다. 80세 이상 노인은 상례(喪禮)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아 슬픔을 지나치게 표현하지 않도록 규정한 것이다.
112. [주-D002] 朝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인재집・행장》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봉조청(奉朝請)이 올바른 용어이다.
113. 어필(御筆): 임금이 직접 쓴 글씨.
114.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버금 재상.
115. 좌의정(左議政): 의정부의 정1품 버금 재상. 우의정보다 서열이 높다.
116. 치사(致仕):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 보통 70세가 되면 치사를 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117.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실질적인 직무는 없고, 주로 원로대신을 예우하기 위해 제수하던 명예직이다.
118.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홍섬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119. 구질(九袠): 90세. 질(袠)은 10년을 의미한다.
120. 수상(首相): 영의정을 가리킨다.
121. 좌규(左揆): 좌의정을 가리킨다. 규(揆)는 재상을 뜻한다.
122. 어찰(御札): 임금이 직접 써서 내리는 편지.
123. 기덕(耆德):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사람.
124. 편모(偏母): 홀어머니. 홍섬의 아버지 홍언필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125. 사당(辭堂): 세상을 떠남. 사거(死去)와 같은 의미이다.
126. 도승지(都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으뜸 벼슬.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다.
127. 《예기(禮記)》: 유교의 오경(五經) 중 하나. 고대 중국의 예법과 사상에 관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인용된 내용은 《예기》 〈곡례 상(曲禮上)〉편에 보인다.
128. 제쇠(齊衰): 오복(五服) 중 두 번째 상복. 상복의 가장자리를 가지런히 꿰맨 것에서 유래했다. 부모상, 조부모상 등에 입는다.
129. 거려(居廬): 상주(喪主)가 상중에 묘소 옆이나 집 밖에 짚으로 지은 여막(廬幕)에서 거처하는 것. 극진한 효도의 표현이었으나, 80세 이상 노인에게는 면제되었다.
130. 봉조청(奉朝請): 나이가 많아 실무 관직에서 물러난 원로대신이 조회(朝會)에만 참석하도록 허락받는 것. 국가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는 명예로운 대우였다. 홍섬이 상복을 벗고 봉조청하려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은 것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고 쉬도록 배려한 것이다.
원문:
文僖公家法甚嚴, 客至, 輒使公候之。 公冠服如寒士, 執子弟禮甚謹, 或有不知其爲公者。 文僖旣卒, 公執喪盡禮, 三年不出廬外, 朔望奠獻, 一不令子弟代之。 喪畢之後, 子弟遇公生日, 欲以絲竹娛之, 公止之曰: “前者爲親設也, 何忍聞此!” 因泣下沾襟, 子弟不敢更言。 每以盛滿爲懼, 嘗於經席, 文僖以領事, 公以知事入侍, 人以爲榮, 而公常懔懔也。 常以節儉戒子弟, 位冠百僚, 而客坐蕭然。【竝《潛谷舊錄》。】
번역문:
문희공(文僖公)¹³¹은 가법(家法)이 매우 엄하여, 손님이 오면 번번이 공(公)으로 하여금 맞이하게 하였다. 공은 관복(冠服)¹³²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고 자제(子弟)의 예를 매우 삼가 행하니, 혹 그가 공임을 알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문희공이 돌아가시자 공이 상례(喪禮)를 극진히 치러, 3년 동안 여막(廬)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朔望奠獻)¹³³를 한 번도 자제들에게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상(喪)을 마친 후, 자제들이 공의 생일을 맞아 사죽(絲竹)¹³⁴으로 즐겁게 해드리려 하자, 공이 이를 말리며 말하였다. “전에 것은 어버이를 위해 베푼 것이었는데, 어찌 차마 이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이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니, 자제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매번 성만(盛滿)¹³⁵을 두려워하여, 일찍이 경연(經席)¹³⁶에서 문희공은 영사(領事)¹³⁷로, 공은 지사(知事)¹³⁸로 입시(入侍)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영광으로 여겼으나 공은 항상 두려워하였다(懔懔). 항상 절검(節儉)으로 자제들을 경계하였고, 지위는 백관(百僚)의 으뜸이었으나 객좌(客坐)¹³⁹는 쓸쓸하였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¹⁴⁰에서 인용】
주석:
131.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의 시호(諡號).
132. 관복(冠服): 관(冠)과 옷(服). 벼슬아치의 복장을 의미할 수도 있고, 여기서는 의관(衣冠)을 갖춘 모습을 가리킨다. 홍섬이 검소했음을 보여준다.
133. 삭망전헌(朔望奠獻): 음력 초하루(朔)와 보름(望)에 신위(神位)에 음식 등을 올리는 제사.
134. 사죽(絲竹): 현악기(絲)와 관악기(竹)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음악 또는 풍류를 의미한다.
135. 성만(盛滿): 가득 차서 넘침. 권세나 부귀가 극에 달한 상태를 경계하는 말이다.
136. 경석(經席):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강론하고 국정(國政)을 논의하던 자리.
137. 영사(領事):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홍언필을 지칭한다.
138. 지사(知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가리킬 수 있다. 종2품. 여기서는 홍섬을 지칭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경연에 참여하는 드문 영광을 누렸으나, 홍섬은 오히려 이를 두려워하고 조심했다는 의미이다.
139. 객좌(客坐): 손님을 맞는 자리 또는 사랑방. 집안의 규모나 생활상을 보여준다.
140.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편찬한 문헌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실체는 확인하기 어렵다. 옛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일 수 있다.
원문:
朴啓賢於經席, 因論成三問之忠, 啓賢曰: “《六臣傳》是南孝溫所著, 願上取覽, 則可知其詳。” 上乃取《六臣傳》觀之, 驚憤下敎曰: “言多謬妄, 誣辱先祖, 予將搜探而悉焚之, 且治偶語其傳者之罪。” 賴領議政洪暹因入侍, 極言六臣之忠, 辭甚懇切, 侍臣多有墮淚者, 上乃感悟而止。
번역문:
박계현(朴啓賢)¹⁴¹이 경연(經席)에서 성삼문(成三問)¹⁴²의 충절(忠節)을 논하다가 아뢰었다. “《육신전(六臣傳)》¹⁴³은 남효온(南孝溫)¹⁴⁴이 지은 것이니, 원컨대 상(上)께서 가져다 보시면 그 상세한 내용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상께서 이에 《육신전》을 가져다 보시고는 놀라고 분개하여 하교(下敎)하셨다. “말이 잘못되고 망령된 것이 많아 선조(先祖)¹⁴⁵를 무고(誣告)하고 욕되게 하였으니, 내 장차 수색하여 모조리 불태우고, 또한 그 전(傳)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偶語)¹⁴⁶의 죄를 다스릴 것이다.” 영의정 홍섬이 마침 입시(入侍)하여 육신(六臣)의 충절을 극력 아뢰었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여 시신(侍臣) 중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많으니, 상께서 이에 감동하여 깨닫고 그만두셨다.
주석:
141. 박계현(朴啓賢, 1524
158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성(師聖), 호는 존재(存齋).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142. 성삼문(成三問, 1418
1456): 조선 초기의 문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단종(端宗) 복위 운동을 벌이다 처형되었다.
143. 《육신전(六臣傳)》: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책. 남효온이 지었다.
144.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조선 초기의 문인.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호는 추강(秋江). 《육신전》을 지어 사육신의 충절을 기렸다.
145. 선조(先祖): 여기서는 세조(世祖)를 가리킨다. 《육신전》은 단종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을 충신으로 기리고 세조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선조가 격분한 것이다.
146. 우어(偶語): 두 사람 이상이 모여 몰래 이야기하는 것. 여기서는 《육신전》의 내용을 퍼뜨리거나 이야기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하겠다는 의미이다.
원문:
義州牧使郭越上疏陳時弊, 而疏中論李浚慶之非, 且論白仁傑欲嫁禍士林, 而秘謀不掩, 羞愧自退云云。 上命召三公, 敎曰: “李浚慶是柱石元老, 而越乃敢追詆; 白仁傑精忠貫日, 而乃指爲圖禍士林, 其情叵測。 予欲拿來窮問, 其於卿等意何如?” 領議政洪暹進曰: “不根之說, 乃敢上達, 可謂疏脫。 然不可窮問, 當優容以廣言路。” 上乃不拿鞫。【竝《石潭日記》。】
번역문:
의주목사(義州牧使)¹⁴⁷ 곽월(郭越)¹⁴⁸이 상소(上疏)를 올려 시폐(時弊)¹⁴⁹를 진술하였는데, 상소 가운데 이준경(李浚慶)¹⁵⁰의 잘못을 논하고, 또 백인걸(白仁傑)¹⁵¹이 사림(士林)¹⁵²에게 화(禍)를 전가하려 하였으나 비밀스러운 모의가 가려지지 않아 부끄러워 스스로 물러났다고 운운(云云)하였다. 상께서 삼공(三公)¹⁵³을 부르도록 명하고 하교하셨다. “이준경은 국가의 주춧돌 같은 원로(柱石元老)인데 곽월이 감히 지난 일을 들추어 비방하였고, 백인걸은 지극한 충성심이 해를 꿰뚫을 정도(精忠貫日)인데 도리어 사림에게 화를 꾀하였다고 지목하니, 그 속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叵測). 내 잡아다 철저히 신문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영의정 홍섬이 나아가 아뢰었다. “근거 없는 말(不根之說)을 감히 임금께 아뢰었으니 소홀하고 경솔하다(疏脫)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철저히 신문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너그럽게 받아들여(優容) 언로(言路)¹⁵⁴를 넓혀야 합니다.” 상께서 이에 잡아다 국문(拿鞫)하지 않으셨다.【이상 《석담일기(石潭日記)》¹⁵⁵에서 인용】
주석:
147. 의주목사(義州牧使): 평안도 의주(義州)를 다스리던 정3품 외관직.
148. 곽월(郭越, 1518
1586): 조선 중기의 무신.
149. 시폐(時弊): 당시의 폐단. 정치, 사회의 잘못된 점을 의미한다.
150. 이준경(李浚慶, 1499
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151. 백인걸(白仁傑, 1497
157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152. 사림(士林): 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삼아 정치에 참여한 조선 시대의 학자 관료 집단.
153.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한다.
154. 언로(言路): 임금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길. 신하들의 자유로운 비판과 건의를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홍섬은 곽월의 주장이 근거 없더라도 처벌하기보다는 너그럽게 받아들여 다른 신하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5. 《석담일기(石潭日記)》: 석담(石潭) 이이(李珥, 1536
1584)가 선조 대의 정치 상황과 경연(經筵) 내용을 기록한 일기.
원문:
嘉靖乙未, 洪忍齋暹爲吏曹佐郞。 許沆、蔡無擇等方與金安老締結作威福, 沆力圖安老之子祺, 薦銓郞, 暹不從, 語觸沆, 沆搆捏成獄, 鞫于殿庭, 杖幾死, 長流興陽。 金吾卒押行到公州錦江, 杖瘡甚, 鮮血糢糊於衣裾, 見者避之。 時有科擧, 南方士子騈闐上京, 相値於津頭。 有一士年最少, 相貌堂堂, 揚言於衆中曰: “吾聞洪暹乃士類, 今者無罪杖流, 是必小人當國亂政也。 吾輩安用應擧於此時? 盍相與從此回鞭乎?” 暹在臥輿呻痛中, 聞此言, 不覺心神灑然, 徐問其姓名, 乃林亨秀也。【《東閣雜記》。】
번역문:
가정(嘉靖) 을미년(1535)¹⁵⁶에 인재(忍齋) 홍섬이 이조 좌랑(吏曹佐郞)¹⁵⁷으로 있었다. 허항(許沆)¹⁵⁸, 채무택(蔡無擇)¹⁵⁹ 등이 당시 김안로(金安老)¹⁶⁰와 결탁하여 위복(威福)¹⁶¹을 부리고 있었는데, 허항이 김안로의 아들 김기(金祺)를 강력히 천거하여 전랑(銓郞)¹⁶²으로 삼으려 하자 홍섬이 따르지 않고 말로 허항의 비위를 거슬렀다. 허항이 죄를 엮어 옥사(獄事)를 만들어 조정 뜰에서 국문(鞫問)하니, 곤장을 맞고 거의 죽게 되어 흥양(興陽)¹⁶³으로 멀리 유배되었다. 금오(金吾)¹⁶⁴의 병졸이 압송하여 공주(公州) 금강(錦江)에 이르렀는데, 곤장 맞은 상처(杖瘡)가 심하여 옷자락에 선혈이 낭자하니 보는 자들이 피하였다. 이때 과거(科擧)가 있어 남쪽 지방의 선비들이 줄지어 서울로 올라가다가 나루터(津頭)에서 서로 마주쳤다. 한 선비가 있었는데 나이가 가장 젊고 용모가 당당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서 소리 높여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홍섬은 사류(士類)¹⁶⁵라 하는데, 지금 죄 없이 곤장을 맞고 유배를 가니, 이는 반드시 소인(小人)이 나라를 맡아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우리 무리가 어찌 이러한 때에 과거에 응시하겠는가? 어찌 서로 함께 여기에서 말고삐를 돌리지 않겠는가?” 홍섬이 누워 가는 수레(臥輿) 안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심신(心神)이 상쾌해져서(灑然) 천천히 그 성명을 물으니, 바로 임형수(林亨秀)¹⁶⁶였다.【《동각잡기(東閣雜記)》¹⁶⁷에서 인용】
주석:
156. 가정(嘉靖) 을미년(1535): 명(明)나라 가정 연간, 조선 중종 30년.
157.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조(吏曹)의 정6품 관직. 정랑(正郞)과 함께 전랑(銓郞)이라 불리며 인사 행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58. 허항(許沆, ?
1537):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김안로와 결탁하여 권세를 누렸다.
159. 채무택(蔡無擇, ?
1537):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허항과 함께 김안로에게 아부하여 권세를 잡았다.
160. 김안로(金安老, 1481
1537): 조선 중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전횡을 일삼다가 사사(賜死)되었다.
161. 위복(威福): 위세(威勢)와 복록(福祿)을 마음대로 함. 권력을 남용하여 상벌(賞罰)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162. 전랑(銓郞): 이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삼사(三司) 관원 선발권과 후임자 추천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163. 흥양(興陽):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164. 금오(金吾): 의금부(義禁府)의 별칭. 또는 의금부의 관원을 가리킨다. 의금부는 왕명에 따라 중죄인을 다스리던 사법 기관이다.
165. 사류(士類): 선비의 무리. 사림(士林)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166. 임형수(林亨秀, 1514
154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을사사화 때 윤원형 일파에 의해 사사되었다.
167.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주로 조선 초부터 선조 대까지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일화를 담고 있다.
원문:
洪領相暹以吏曹正郞, 乘醉往見吏曹參判許洽, 言間頗侵安老, 且曰: “《秦檜傳》, 不¹⁶⁸可不使見之。” 洽亟止之曰: “正郞醉矣, 何言之率爾? 吾雖聞, 寧忍漏之? 然公大醉, 須速還家。” 洪曰: “歸路且欲見季令公大憲也。” 洽愕然曰: “老夫忝公堂上, 醉而來見, 猶之可也, 與吾弟旣無分, 且是法官之長, 或少失禮, 所關非輕, 切勿往也。” 仍呼洪下人, 戒令直還本家, 勿得他往。 洪辭出, 直向沆家, 下人不得止之。 洽使人探之, 果已到矣。 洽曰: “吾過也。 使人勒還本家, 則必無大事, 大禍今起矣。” 急馳馬去, 則洪已還矣。 洽曰: “洪正郞大醉, 不省人事, 到此有何言? 令公亦見而止之耶¹⁶⁹?” 沆遽曰: “顔如白玉, 有何醉也? 但無所言耳。” 洽曰: “外雖如此, 其實大醉, 雖有所言, 何足與較?” 沆不答, 洽無可奈何而還。 沆夜抵安老家, 翌早獨啓之, 鞫之省獄。 一日受一百二十棍, 氣息奄奄將絶, 乃流海邊。 方未出獄, 骨節盡碎, 呼吸不出, 謂之已死, 置之墻下, 覆以草¹⁷⁰, 群雅下瞰, 引頸而還飛。 公亦昏昏似睡, 忽聞呼委¹⁷¹官聲者三, 判府事以下奔走下迎, 公開目視之, 乃公也。 公暗謂: “寧有是耶?” 其後三十年, 公旣入相, 以委官坐禁府, 其時執杖者尙在云。 人之死生, 本在於天, 雖有百許沆, 其能殺一忍齋哉? 洽之於沆, 其可以魯、衛視哉?【《寄齋雜記》。】
번역문:
영의정(領相) 홍섬이 이조 정랑(吏曹正郞)¹⁷²으로 있을 때, 술에 취한 채 이조 참판(吏曹參判)¹⁷³ 허흡(許洽)¹⁷⁴을 찾아가 만났는데, 말하는 중에 자못 김안로(金安老)를 공격하며 또 말하였다. “《진회전(秦檜傳)》¹⁷⁵을 그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소.” 허흡이 급히 말리며 말하였다. “정랑(正郞)께서는 취하셨습니다. 어찌 그리 말을 경솔하게 하십니까? 제가 비록 들었으나 어찌 차마 누설하겠습니까? 그러나 공(公)께서 크게 취하셨으니 모름지기 속히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홍섬이 말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또한 계령공(季令公)¹⁷⁶ 대헌(大憲)¹⁷⁷을 뵙고자 하오.” 허흡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노부(老夫)는 외람되이 공의 당상관(堂上官)이므로 취하여 찾아오시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내 아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또한 법관(法官)의 우두머리이니, 혹 조금이라도 예를 잃으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을 것이니,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이어서 홍섬의 하인을 불러 곧장 본가로 돌아가고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경계시켰다. 홍섬이 작별하고 나와서는 곧장 허항(許沆)의 집으로 향하니, 하인이 말릴 수 없었다. 허흡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과연 이미 도착해 있었다. 허흡이 말하였다. “내 잘못이다. 사람을 시켜 억지로 본가로 돌려보냈더라면 반드시 큰일이 없었을 텐데, 큰 화가 이제 일어나겠구나.” 급히 말을 달려 가보니 홍섬은 이미 돌아갔다. 허흡이 (허항에게) 말하였다. “홍정랑이 크게 취하여 인사불성(人事不省)이었는데, 여기에 와서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영공(令公)께서도 보고 말리셨습니까?” 허항이 갑자기 말하였다. “얼굴이 백옥(白玉) 같은데 어찌 취했겠습니까? 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허흡이 말하였다. “겉은 비록 그러하나 실은 크게 취했으니, 비록 무슨 말을 했더라도 어찌 따질 만하겠습니까?” 허항이 답하지 않자, 허흡은 어찌할 수 없이 돌아왔다. 허항이 밤에 김안로의 집에 가서 다음 날 아침에 홀로 (임금께) 아뢰니, 그를 성옥(省獄)¹⁷⁸에서 국문하였다. 하루에 곤장 120대를 맞고 숨이 가물가물 끊어지려 하자, 이에 바닷가로 유배 보냈다. 막 옥(獄)에서 나오지 못했을 때, 뼈마디가 모두 부서지고 숨을 내쉬지 못하여 이미 죽었다고 여겨져 담장 아래에 놓이고 풀¹⁷⁹로 덮였는데, 까마귀 떼가 내려다보다가 목을 빼고 다시 날아갔다. 공 또한 혼미하여 잠든 듯한데, 갑자기 위관(委官)¹⁸⁰을 부르는 소리가 세 번 들리더니 판부사(判府事)¹⁸¹ 이하가 분주히 내려와 맞이하는 것을 공이 눈을 뜨고 보니, 바로 (자신의 아버지인) 문희공(文僖公)이었다. 공이 속으로 생각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후 30년이 지나 공이 재상(宰相)이 되어 위관(委官)으로서 금부(禁府)¹⁸²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곤장을 쳤던 자가 아직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본래 하늘에 달려 있으니, 비록 허항 같은 자가 백 명 있다 한들 어찌 한 사람의 인재(忍齋)를 죽일 수 있겠는가? 허흡이 허항에게 한 것을 어찌 노(魯)나라와 위(衛)나라¹⁸³에 비할 수 있겠는가?【《기재잡기(寄齋雜記)》¹⁸⁴에서 인용】
주석:
168. [주-D003] 不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기재잡기(寄齋雜記)》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불가불(不可不)'은 '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169. [주-D004] 止之耶 :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지지(知之)의(矣)”로 되어 있다. '보고 말렸는가?' 와 '알고 있었는가?' 로 의미 차이가 발생한다.
170. [주-D005] 草 :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뒤에 “석(席)” 자가 더 있다. 즉, '풀자리(草席)'로 덮었다는 의미이다.
171. [주-D006] 委 : 저본(底本)에는 “왜(倭)”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대동야승・기재잡기》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위관(委官)은 임시로 임명된 관리를 뜻하며, 여기서는 옥사(獄事)를 주관하는 관리를 가리킨다.
172.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좌랑(佐郞)과 함께 전랑(銓郞)으로 불렸다.
173.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조(吏曹)의 종2품 버금 벼슬. 판서(判書) 다음가는 직위이다.
174. 허흡(許洽): 허항(許沆)의 형. 당시 이조 참판이었다.
175. 《진회전(秦檜傳)》: 송(宋)나라 때의 간신 진회(秦檜, 1090
1155)의 전기(傳記). 진회는 주전파(主戰派)인 악비(岳飛)를 모함하여 죽이고 금(金)나라와 굴욕적인 화의를 맺은 인물로, 간신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홍섬이 김안로를 진회에 빗대어 비판한 것이다.
176. 계령공(季令公): 남의 아우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허흡이 자신의 아우인 허항을 가리킨다.
177. 대헌(大憲):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으뜸 벼슬. 당시 허항이 대사헌이었다.
178. 성옥(省獄): 관아(官衙) 안에 설치된 감옥. 여기서는 의금부(義禁府)의 감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79. 초(草): 풀. 주석 [주-D005]에 따르면 '초석(草席)' 즉 풀자리일 가능성이 있다.
180. 위관(委官): 사건 처리를 위임받은 관리. 옥사(獄事)를 처리하는 임시 담당관을 의미한다.
181. 판부사(判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정1품 벼슬. 여기서는 홍섬의 아버지인 홍언필(洪彦弼)을 가리킨다. 홍섬이 혼수상태에서 환상을 본 것으로 해석된다.
182. 금부(禁府): 의금부(義禁府)의 별칭.
183. 노(魯), 위(衛): 춘추시대의 형제 국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인 주공(周公) 단(旦)과 강숙(康叔) 봉(封)이 각각 노나라와 위나라에 봉해졌다. 두 나라는 형제국으로서 서로 도왔다. 허흡이 동생 허항의 잘못을 막으려 노력했으나 결국 막지 못한 것을, 형제애가 돈독했던 노·위 관계에 비유하며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184. 《기재잡기(寄齋雜記)》: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 조선 중기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일화, 제도, 풍속 등을 기록하였다.
원문:
洪相國暹少時爲金安老所陷, 受庭刑, 竄興陽。 安老敗, 遂光顯。 其刑也, 有人言于蘇贊成世讓曰: “惜夫退之之止於斯也。” 贊成曰: “必有前程, 豈遽死耶?” 其人曰: “何以知之?” 贊成曰“曩日課製《灩澦堆¹⁸⁵》詩云: ‘淸猿啼不盡, 送我上危灘。’ 如此詩句, 可知人休咎”云。 竟入相黃閣二十年, 八十二卒, 詩亦可以占人窮達, 如是哉!【《晴窓軟談》。】
번역문:
상국(相國)¹⁸⁶ 홍섬이 젊었을 때 김안로에게 모함을 받아 정형(庭刑)¹⁸⁷을 받고 흥양(興陽)으로 내쳐졌다(竄). 김안로가 패망하자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 현달(光顯)하였다. 그가 형벌을 받을 때, 어떤 사람이 찬성(贊成) 소세양(蘇世讓)¹⁸⁸에게 말하였다. “아깝도다, 퇴지(退之)¹⁸⁹가 여기에서 그치는구나.” 찬성이 말하였다. “반드시 앞날(前程)이 있을 터인데, 어찌 갑자기 죽겠는가?” 그 사람이 말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 찬성이 말하였다. “지난날 과제(課題)로 지은 《염예퇴(灩澦堆)》¹⁹⁰ 시에 이르기를, ‘맑은 잔나비 울음 그치지 않고, 나를 위태로운 여울로 보내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시구(詩句)를 보면 사람의 길흉화복(休咎)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재상이 되어 황각(黃閣)¹⁹¹에 있은 지 20년이었고, 82세에 졸(卒)하니, 시(詩)로도 사람의 곤궁함과 영달함(窮達)을 점칠 수 있음이 이와 같구나!【《청창연담(晴窓軟談)》¹⁹²에서 인용】
주석:
185. [주-D007] 灩澦堆 : 《인재집・유사록(遺事錄)》에는 “삼협탄(三峽灘)”으로 되어 있다. 염예퇴와 삼협탄은 모두 중국 장강(長江)의 험한 여울을 가리킨다.
186. 상국(相國): 재상(宰相)을 높여 부르는 말. 영의정, 좌ㆍ우의정을 통칭한다.
187. 정형(庭刑): 죄인을 궁궐 뜰에서 국문하고 형벌을 가하는 것. 매우 중한 벌로 여겨졌다.
188. 소세양(蘇世讓, 1486~156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우찬성을 지냈다.
189. 퇴지(退之): 홍섬의 자(字).
190. 염예퇴(灩澦堆): 중국 쓰촨성(四川省) 동쪽 장강(長江) 삼협(三峽)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여울. 물살이 매우 험하여 예로부터 뱃길의 큰 장애물로 여겨졌다. 시에서 험난한 상황이나 위태로운 처지를 비유하는 소재로 자주 쓰였다. 주석 [주-D007] 참조. 소세양은 홍섬의 시 구절 '위태로운 여울로 보낸다(送我上危灘)'는 표현에서 그가 위험을 겪겠지만 결국 헤쳐나가 더 높은 곳(재상)에 오를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이다.
191. 황각(黃閣): 재상(宰相)이 정무(政務)를 보는 곳.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192. 《청창연담(晴窓軟談)》: 조선 중기의 문인 성여학(成汝學)이 지은 설화집. 작자 미상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주로 인물 일화와 시화(詩話) 등을 담고 있다.
권철(權轍)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權轍
字景由, 安東人。 弘治癸亥生。 中宗二十三年戊子生、進, 甲午登第。 歷翰注、三司、吏郞、舍檢, 官至領議政。 宣祖戊寅卒, 年七十六。
번역문:
권철(權轍)¹
자는 경유(景由)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 홍치(弘治) 계해년(1493)²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3년 무자년(1528)에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³, 갑오년(1534)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한림(翰林)⁴, 주서(注書)⁵, 삼사(三司)⁶,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⁷, 검상(檢詳)⁸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선조(宣祖) 무인년(1578)에 향년 76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 권철(權轍, 1493~157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 홍치(弘治) 계해년(1493):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인 홍치 6년, 조선 성종 24년. 권철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503년(연산군 9)이라는 기록도 있으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본문은 홍치 계해년(1493) 설을 따르고 있다. 졸년(1578)과 향년(76세)을 고려하면 1503년생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본 번역에서는 원문의 기록을 따른다.
-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 생원시와 진사시를 아울러 이르는 말. 소과(小科)에 해당하며,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고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었다. 무자년(1528)은 중종 23년이다.
- 한림(翰林):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을 통칭하는 말. 특히 예문관 봉교(奉敎), 대교(待敎), 검열(檢閱) 등 하위 관직을 가리키기도 한다. 문장이 뛰어난 젊은 관료들이 제수되었다.
- 주서(注書): 승정원(承政院)의 정7품 관직. 왕명의 기록과 전달, 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여 사초(史草) 작성에도 참여했다.
-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권과 신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권철이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 사인(舍人): 여러 관청에 속했던 정4품 관직. 의정부 사인, 중추부 경력(經歷) 등이 있었다. 문한(文翰)이나 실무를 담당했다.
- 검상(檢詳): 의정부(議政府)의 정4품 관직. 의정부 사인(舍人)과 함께 의정부의 실무를 담당했다.
원문:
選入翰林, 修秘史, 不曲筆, 爲金安老所惡, 寘之下考。 中廟使人問曰: “權翰林何事見貶?” 同列以權辭對。 安老敗, 復入翰苑, 遷注書。 中廟甚器之, 每文義有疑, 輒使問之。【谿谷張維撰行狀。】
번역문: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들어가 비사(秘史)⁹를 편수(編修)할 때 붓을 굽히지 않았으므로(不曲筆)¹⁰ 김안로(金安老)¹¹의 미움을 받아 하고(下考)¹²에 두어졌다. 중종(中宗)께서 사람을 시켜 물으셨다. “권 한림은 무슨 일로 평가 절하되었는가?” 동료들이 권철의 말로 대답하였다. 김안로가 패망하자 다시 한원(翰苑)¹³에 들어가 주서(注書)로 옮겼다. 중종께서 매우 그를 그릇으로 여겨(器之)¹⁴, 매번 글의 뜻(文義)에 의문이 있으면 번번이 사람을 시켜 그에게 물었다.【계곡(谿谷) 장유(張維)¹⁵가 지은 행장(行狀)¹⁶에서 인용】
주석:
9. 비사(秘史): 비밀스러운 역사 기록. 왕실이나 국가의 중요한 사건 중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을 기록한 것을 가리킬 수 있다. 또는 비각(祕閣), 즉 규장각(奎章閣)이나 예문관 등에서 편찬하는 사서를 의미할 수도 있다.
10. 불곡필(不曲筆):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기록함. 역사가나 기록자의 직필(直筆) 정신을 강조하는 말이다.
11. 김안로(金安老, 1481
1537): 조선 중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12. 하고(下考): 근무 성적이나 자질 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는 것. 이로 인해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13. 한원(翰苑): 한림원(翰林院), 즉 예문관(藝文館)을 달리 이르는 말.
14. 기지(器之): 그를 큰 그릇으로 여김. 인물의 재능과 도량을 높이 평가함을 의미한다.
15.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
163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16.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자, 호, 본관, 세계(世系)와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 시호(諡號)를 받거나 비석을 세울 때 기초 자료가 된다.
원문:
仁廟大漸之日, 公以舍人持公事詣二相尹任, 則方於大明殿上脫團領臥寢, 不覺竦然而退也。【《寄齋雜記》。】
번역문:
인종(仁宗)¹⁷께서 위독(大漸)¹⁸하시던 날, 공(公)이 사인(舍人)¹⁹으로서 공무(公事) 문서를 가지고 이상(二相)²⁰ 윤임(尹任)²¹에게 나아갔는데, 마침 대명전(大明殿)²² 위에서 단령(團領)²³을 벗고 누워 자고 있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송구스러워하며(竦然) 물러났다.【《기재잡기(寄齋雜記)》²⁴에서 인용】
주석:
17. 인종(仁宗):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
1545). 중종의 맏아들.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18. 대점(大漸): 임금이나 왕족의 병이 매우 위독한 상태를 이르는 말.
19. 사인(舍人): 여기서는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4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0. 이상(二相): 두 재상. 당시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우의정 유관(柳灌)을 가리킬 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두 번째 재상' 즉 좌의정이나 우의정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뒤에 윤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윤임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윤임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아니었으므로, '이상'의 의미는 불명확하다. 혹은 영의정 윤인경과 우의정 유관에게 함께 가려 했으나 윤임에게 먼저 들렀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문맥상 윤임에게 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21. 윤임(尹任, 1487
1545): 조선 중종, 인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인종의 외숙부로서 대윤(大尹) 세력의 영수였다. 인종 사후 을사사화 때 소윤(小尹)의 영수 윤원형(尹元衡)에게 패하여 사사되었다. 당시 유력한 권력자였다.
22. 대명전(大明殿): 창경궁(昌慶宮)의 정전(正殿)인 명정전(明政殿)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경복궁(景福宮)의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임금이 거처하거나 정사를 보는 중요한 전각이다.
23. 단령(團領): 깃이 둥근 관복(官服). 관리들이 평상시 집무할 때 입던 옷이다. 이를 벗고 누워 있었다는 것은 예를 갖추지 않은 무례한 행동이다.
24. 《기재잡기(寄齋雜記)》: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
원문:
初, 金安老用事, 而公忤安老; 陳復昌張甚, 而公又忤復昌。 及李樑敗, 而公代掌銓; 尹元衡黜, 而公旋入相。 君子以是知公之見重於士論也。
번역문:
처음에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잡았을 때 공(公)이 김안로의 뜻을 거스르고, 진복창(陳復昌)²⁵이 매우 기세를 부릴 때 공이 또 진복창의 뜻을 거슬렀다. 이량(李樑)²⁶이 패망하자 공이 대신 전선(銓選)²⁷을 관장하게 되었고, 윤원형(尹元衡)²⁸이 축출되자 공이 이내 재상(宰相)의 반열에 들어갔다. 군자(君子)는 이로써 공이 사론(士論)²⁹에게 중히 여김을 받았음을 알았다.
주석:
25. 진복창(陳復昌, ?
?):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김안로의 심복으로 권세를 부렸으나, 김안로 실각 후 유배되었다.
26. 이량(李樑, 1519
1563): 조선 명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심통원(沈通源) 등과 결탁하여 권력을 잡고 사림(士林)을 탄압하려다 발각되어 축출되었다.
27. 전선(銓選): 관리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일. 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담당했다. '장전(掌銓)'은 이조판서나 병조판서 등의 직책을 맡아 인사권을 행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28. 윤원형(尹元衡, 1509~1565): 조선 명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소윤(小尹) 세력을 이끌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문정왕후 사후 실각하여 자결했다.
29. 사론(士論): 사림(士林)의 공론(公論). 선비들의 공적인 의견이나 평가를 의미한다. 권철이 권신들에게 밉보였으나 결국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것은 그가 사림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평가이다.
원문:
宣廟入紹大統, 公入對, 首陳正君心、嚴宮禁之說, 上爲傾聽嘉納焉。 陞左議政, 時百官煖帽, 制甚不典, 公建請悉從華制, 論者美之。
번역문:
선조(宣祖)께서 대통(大統)³⁰을 이어받아 즉위하시자, 공(公)이 입대(入對)³¹하여 가장 먼저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할 것(正君心)과 궁중의 기강을 엄하게 할 것(嚴宮禁)을 진술하니, 상(上)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고 아름답게 받아들이셨다.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였을 때, 당시 백관(百官)의 난모(煖帽)³² 제도가 매우 법도에 맞지 않자(不典), 공이 건의하여 모두 화제(華制)³³를 따르도록 청하니, 논자(論者)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주석:
30. 대통(大統): 왕위 계승의 정통성. 선조는 명종의 뒤를 이어 방계(傍系)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31. 입대(入對): 신하가 궁궐에 들어가 임금을 직접 뵙고 정사를 아뢰거나 논의하는 것.
32. 난모(煖帽): 겨울철에 쓰는 방한용 모자. 사모(紗帽) 안에 털이나 솜을 넣어 만들었다.
33. 화제(華制): 중국(中華)의 제도. 당시 조선은 명(明)나라의 제도를 표준으로 삼았다. 백관의 난모 제도가 중국의 제도와 달라 예법에 어긋난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도록 건의한 것이다.
원문:
左議政權轍稱病不出, 上敦諭乃出。 初, 轍於經席, 聞白仁傑進言曰: “君臣相和, 如父子兄弟, 然後乃成事功。 今日可謂相和如父子兄弟乎?” 轍誤聞其語, 以爲仁傑斥轍與李浚慶不和, 退而語人曰: “吾被白君重駁, 不可復出。” 時浚慶以病辭職, 轍又引疾, 時論囂然。 洪暹聞之啓曰: “仁傑之言, 未知何意。 權轍與李浚慶, 素無纖芥之嫌, 不可因人言而動大臣。” 上答曰: “仁傑性本朴直, 有古人風。 雖有過言, 不可介意。” 遂諭轍出視事。 仁傑聞暹言驚怪, 到政院請考日記, 則別無斥轍之言, 乃上疏自解, 然後轍覺其誤, 乃出。
번역문:
좌의정 권철이 병을 핑계로 출사(出仕)하지 않자, 상(上)께서 간곡히 타이르니(敦諭) 이에 나왔다. 처음에 권철이 경연(經席)에서 백인걸(白仁傑)³⁴이 아뢰는 말을 들었는데, “임금과 신하가 서로 화합하기를 부자(父子) 형제(兄弟)와 같이 한 연후에야 성공(事功)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서로 화합함이 부자 형제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권철이 그 말을 잘못 듣고, 백인걸이 권철과 이준경(李浚慶)³⁵이 불화(不和)함을 질책(斥責)한 것이라 여겨,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백군(白君)에게 심하게 반박당했으니, 다시 나갈 수 없다.” 이때 이준경이 병으로 사직하자 권철 또한 병을 핑계 대니, 당시의 여론(時論)이 떠들썩하였다(囂然). 홍섬(洪暹)이 이를 듣고 아뢰었다. “백인걸의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권철과 이준경은 평소 털끝만큼의 작은 혐의(纖芥之嫌)도 없으니, 남의 말로 인해 대신(大臣)을 동요시켜서는 안 됩니다.” 상께서 답하셨다. “백인걸은 성품이 본래 소박하고 정직(朴直)하여 옛사람의 풍모가 있다. 비록 지나친 말이 있었더라도 마음에 둘 필요는 없다(不可介意).” 마침내 권철에게 유시(諭示)하여 나와서 정사를 보게 하였다. 백인걸이 홍섬의 말을 듣고 놀랍고 괴이하게 여겨, 정원(政院)³⁶에 가서 일기(日記)³⁷를 살펴보기를 청하니 별달리 권철을 질책한 말이 없었다. 이에 상소를 올려 스스로 해명한 연후에야 권철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에 출사하였다.
주석:
34. 백인걸(白仁傑, 1497
157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35. 이준경(李浚慶, 1499
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36.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37. 일기(日記): 여기서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또는 《경연일기(經筵日記)》를 가리킨다. 경연이나 조정의 회의 내용을 기록한 공식 기록이다.
원문:
設正供都監。 李浚慶等欲救民弊, 別設都監, 以三公領之, 選朝士之有才識者充其郞, 將以利民。 而上意只在循例, 大臣亦憚於更張, 徒以文簿筆削而已, 別無革弊之事, 識者笑之。 客有語於權轍曰: “正供都監, 將以均列邑之貢進也。 州郡或昔饒而今乏, 物産或昔有而今無, 民戶或昔衆而今寡, 田野或昔闢而今荒, 爲今之計, 當觀州郡物産之有無, 民戶之多寡, 田野之荒闢, 錢穀之豐嗇, 改定貢進之數, 各得其当, 則貢進均平, 而八路猶一家, 民受實惠矣。 今也不然, 小縣不當大州十分一, 而其所定貢物, 略有差等而已, 無大分別, 小縣之民尤苦役重, 此不可不改者也。” 轍曰: “如此之事, 必待命世之才, 非人人所能也。 但州郡之凡百所需爲官用者, 一切不賦於民, 皆以倉穀自備, 則民可休息。” 客曰: “州郡貧富不同, 大邑則或可支持, 小邑倉穀無幾, 守令必不免憑公營私, 巧立名目, 以取於民矣。 假使不取於民, 若倉穀已盡, 而經用不可支, 則將何以處之?” 轍不以爲然。
번역문:
정공도감(正供都監)³⁸을 설치하였다. 이준경 등이 백성의 폐해를 구제하고자 별도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삼공(三公)으로 하여금 총괄하게 하고, 재능과 식견이 있는 조신(朝士)들을 선발하여 그 낭관(郞官)으로 충원하여 장차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上)의 뜻은 단지 전례(循例)를 따르는 데 있었고, 대신(大臣) 또한 개혁(更張)³⁹을 꺼려, 한갓 문서(文簿)를 수정(筆削)할 뿐이어서 별다른 폐단 개혁(革弊)의 일이 없으니, 식견 있는 자들이 이를 비웃었다. 어떤 손님(客)이 권철에게 말하였다. “정공도감은 장차 여러 고을의 공물(貢物) 납부(貢進)⁴⁰를 균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군(州郡)은 혹 예전에는 풍요로웠으나 지금은 궁핍하고, 물산(物産)은 혹 예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으며, 민호(民戶)는 혹 예전에는 많았으나 지금은 적고, 전야(田野)는 혹 예전에는 개간되었으나 지금은 황폐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주군의 물산 유무, 민호의 다소(多寡), 전야의 황폐함과 개간됨, 전곡(錢穀)의 풍요함과 궁핍함을 살펴서 공물 납부의 수량을 다시 정하여 각각 마땅함을 얻게 하면, 공물 납부가 균등하고 공평해져서 팔도(八路)가 한 집안과 같아지고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작은 현(縣)은 큰 주(州)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그 정해진 공물은 대략 차등만 있을 뿐 큰 구별이 없으니, 작은 현의 백성들은 부역(役)이 무거움을 더욱 괴로워하니, 이는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권철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반드시 세상을 구할 뛰어난 인재(命世之才)를 기다려야 하니, 모든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다만 주군에서 관청의 용도(官用)로 필요한 모든 것을 일절 백성에게 부과하지 않고 모두 창고의 곡식(倉穀)으로 스스로 마련하게 하면 백성들이 쉴 수 있을 것이오.” 손님이 말하였다. “주군은 가난하고 부유함이 같지 않으니, 큰 고을은 혹 지탱할 수 있겠지만 작은 고을은 창고의 곡식이 얼마 없어 수령(守令)이 반드시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이익을 꾀하고(憑公營私)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백성에게서 취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가령 백성에게서 취하지 않는다 해도, 만약 창고의 곡식이 이미 다하여 경비(經用)를 지탱할 수 없게 되면 장차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권철은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다.
주석:
38. 정공도감(正供都監): 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서 중앙에 바치는 공물(貢物)의 수량과 종류를 조정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관청. 공납(貢納) 제도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39. 경장(更張): 해이해진 기강이나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 개혁(改革)과 유사한 의미이다.
40. 공진(貢進):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 공물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치던 세금의 일종이다.
원문:
恭懿王大妃薨。 禮官稟服制于大臣, 領議政權轍不議于他相, 自以其意, 援引宋高宗服元祐皇后孟氏之例, 定主上之服, 爲齊⁴¹衰杖期。 於是兩司、玉堂及廷臣參判以下皆爭之, 以爲: “明廟承仁廟之統, 主上承明廟之統, 承統爲重, 當服三年之喪。” 轍猶執迷不回。【竝《石潭日記》。】
번역문: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⁴²가 훙서(薨逝)하였다. 예관(禮官)⁴³이 복제(服制)⁴⁴를 대신에게 여쭙자, 영의정 권철이 다른 재상들과 의논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송(宋) 고종(高宗)이 원우황후(元祐皇后) 맹씨(孟氏)⁴⁵를 위해 복(服)을 입었던 예를 끌어와, 주상(主上)의 복을 제쇠장기(齊衰杖期)⁴⁶로 정하였다. 이에 양사(兩司)⁴⁷, 옥당(玉堂)⁴⁸ 및 조정 신하 참판(參判) 이하가 모두 이를 다투며 아뢰었다. “명종(明宗)께서는 인종(仁宗)의 대통(大統)을 이으셨고, 주상께서는 명종의 대통을 이으셨으니, 대통을 이은 것을 중하게 여겨 마땅히 삼년상(三年之喪)을 입어야 합니다.” 권철은 여전히 미혹(迷)됨을 고집하며 돌이키지 않았다.【이상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인용】
주석:
41. [주-D002] 齊 : 저본(底本)에는 “재(齋)”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10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제쇠(齊衰)가 올바른 표기이다.
42.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朴氏, 1514~1577). 조선 인종(仁宗)의 왕비. 선조(宣祖)에게는 법적으로 큰어머니뻘(백모)에 해당한다. 선조 10년(1577)에 승하하였다.
43. 예관(禮官): 예조(禮曹)의 관리. 또는 예법(禮法)에 밝은 관리.
44. 복제(服制): 상례(喪禮)에서 상복(喪服)을 입는 제도. 죽은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상복의 종류와 입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45. 송(宋) 고종(高宗)이 원우황후(元祐皇后) 맹씨(孟氏)를 위해 복(服)을 입었던 예: 송 고종은 휘종(徽宗)의 아들이다. 원우황후 맹씨는 휘종의 아버지인 철종(哲宗)의 황후였으나 폐위되었다가 복위했고, 고종 즉위 후 고종에 의해 존숭받았다. 고종은 맹씨를 위해 제쇠기년복(齊衰期年服)을 입었다. 이는 적모(嫡母)나 조모(祖母)를 위한 복이 아니라 서모(庶母)나 그 외 가까운 친족 여성에게 입는 복에 해당한다. 권철은 선조가 명종의 양자(법적인 아들)가 되어 대통을 이었으므로, 명종의 생모(인종비 인성왕후)가 아닌 인종의 왕비(공의왕대비)는 적모(嫡母)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 예를 적용하려 한 것이다.
46. 제쇠장기(齊衰杖期): 오복(五服) 중 제쇠복(齊衰服)을 1년(期) 동안 입고 지팡이(杖)를 짚는 상례. 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가 살아계시면 아들이 입는 복,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 백숙부모 등의 상에 입었다.
47.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48.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49. 삼년상(三年之喪): 부모(父母)의 상(喪)에 자식이 입는 상복. 실제로는 만 2년(25개월 또는 27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다. 대간(臺諫)과 옥당 등은 선조가 명종의 대통을 이었으므로 공의왕대비(명종의 법적 어머니)에게 마땅히 적모(嫡母)의 예로서 삼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예법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원문:
公資性忠醇嚴毅, 自幼有公輔器度。 立朝四十五年, 歷事四朝, 四領台鼎, 而人不敢議其疵。 憂勞國事, 或明燈達曙, 每以安民備邊爲重, 有從四方來者, 必問民物衰盛、邊防得失。 平生不喜奢靡, 不通人問遺。 其爲相也, 議大政斷大事, 必稽古典, 擇善而從之, 遵守成憲, 不事紛更。 尤致謹於刑法, 嘗曰: “先人每見戒曰: ‘口不道殺字。’ 故我屢執刑柄, 久處相位, 而不敢輕用人命, 論囚必求其生道。”
번역문:
공(公)은 자품과 성품이 충성스럽고 순수하며 엄격하고 굳세어(忠醇嚴毅), 어려서부터 공보(公輔)⁵⁰의 기국과 도량(器度)이 있었다. 조정에 선 지 45년 동안 네 왕조(四朝)⁵¹를 거쳐 섬기며 네 차례 재상(台鼎)⁵²의 자리에 있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그 흠(疵)을 논하지 못하였다. 나라 일을 근심하고 애쓰며(憂勞) 혹 등불을 밝히고 새벽에 이르렀으며, 매번 백성을 안정시키고 변방을 방비하는 것(安民備邊)을 중히 여겨, 사방에서 온 자가 있으면 반드시 백성과 물산(民物)의 쇠퇴함과 번성함, 변방 방비(邊防)의 잘잘못을 물었다. 평생 사치(奢靡)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선물(問遺)⁵³을 주고받지 않았다.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큰 정책을 의논하고 큰일을 결단할 때 반드시 고전(古典)을 상고(稽考)하여 좋은 것을 택하여 따랐고, 이미 정해진 법(成憲)을 준수하며 함부로 변경(紛更)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특히 형법(刑法)에 신중함을 다하여, 일찍이 말하였다. “선인(先人)⁵⁴께서 매번 경계하며 말씀하시기를 ‘입으로 살(殺) 자를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 차례 형벌의 권한(刑柄)을 잡고 오랫동안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감히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쓰지 않았고 죄수를 논할 때는 반드시 살릴 방도(生道)를 구하였다.”
주석:
50. 공보(公輔): 삼공(三公)과 사보(四輔)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임금을 보좌하는 최고위 재상들을 의미한다.
51. 사조(四朝):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선조(宣祖)의 네 왕조.
52. 태정(台鼎): 삼공(三公)의 자리. 즉 재상의 지위를 비유하는 말이다. 정(鼎)은 발이 셋 달린 솥으로, 고대에 삼공을 정(鼎)의 세 발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
53. 문유(問遺): 안부를 묻고 물건을 보내는 것. 선물이나 뇌물을 의미한다.
54. 선인(先人): 돌아가신 아버지. 권철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원문:
公篤於內行, 奉先甚謹。 宗子貧不能修廟, 公以家財營之。 文忠公祠宇頹廢, 公爲修葺之, 每月朔, 集諸孫參奠。 撫養宗族, 恩意周徧, 貧不能嫁娶者, 爲嫁娶之。
번역문:
공(公)은 가정에서의 행실(內行)이 돈독하여 조상 섬김(奉先)을 매우 삼갔다. 종자(宗子)⁵⁵가 가난하여 사당(廟)을 수리하지 못하자, 공이 집안 재산으로 이를 영위(營爲)하였다. 문충공(文忠公)⁵⁶의 사당(祠宇)이 퇴락하고 폐허가 되자, 공이 이를 수리하고 지붕을 이었으며(修葺), 매월 초하루(朔)에는 여러 손자들을 모아 제사(奠)에 참여하게 하였다. 종족(宗族)들을 보살펴 기르며(撫養) 은혜로운 마음(恩意)이 두루 미치니, 가난하여 시집가고 장가들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시집보내고 장가들여 주었다.
주석:
55. 종자(宗子): 종가(宗家)의 맏아들. 가문의 제사를 받드는 역할을 한다.
56. 문충공(文忠公): 권부(權溥, 1262~1346). 고려 후기의 문신, 학자. 권철의 선조이다. 시호가 문정(文正)이었다가 후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원문:
公卒之歲, 政府庭中大槐樹爲風雨所折, 公曰: “我其死矣。” 謂諸子曰: “吾不才, 致位上相, 無功德可紀。 我死無所事碑, 惟於墓表書某官姓名足矣。” 寢疾近一月, 無一語及家。 惟諄諄說國事, 至屬纊⁵⁷乃已。 年德兼尊, 福祿俱備, 人論近代賢相以功名終無玷缺者, 公必居甲乙焉。【竝行狀。】
번역문:
공(公)이 졸(卒)하던 해에 정부(政府)⁵⁸ 뜰 안의 큰 회화나무(大槐樹)⁵⁹가 비바람에 부러지자, 공이 말하였다. “내가 아마 죽겠구나.” 여러 아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부재(不才)하여 윗 재상(上相)의 지위에 이르렀으나 기록할 만한 공덕(功德)이 없다. 내가 죽으면 비석(碑)을 세울 필요가 없으니, 오직 묘표(墓表)⁶⁰에 아무 관직 아무개라고 성명만 쓰는 것으로 족하다.” 병석에 누운 지 거의 한 달 동안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직 간곡하게(諄諄) 나라 일을 말하다가 숨을 거둘 때(屬纊)⁶¹가 되어서야 그쳤다. 나이와 덕망(年德)을 함께 갖추어 존경받았고 복(福)과 녹(祿)을 모두 갖추었으니, 사람들이 근래의 현명한 재상(賢相)으로서 공명(功名)에 끝내 오점(玷缺)이 없는 자를 논할 때 공이 반드시 갑을(甲乙)⁶²에 속하였다.【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57. 촉광(屬纊): 숨이 끊어지려 할 때 코앞에 솜(纊)을 놓아 숨 쉬는지를 확인하는 것. 임종(臨終)을 의미한다.
58.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59. 대괴수(大槐樹): 큰 회화나무.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학자나 큰 인물을 상징했으며, 조정(朝廷)이나 관청 뜰에 많이 심었다. 삼공(三公)의 자리를 괴위(槐位)라고도 했다. 큰 회화나무가 부러진 것을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킨 것이다.
60. 묘표(墓表):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 주로 이름, 관직, 생몰년 등을 간략히 기록한다.
61. 촉광(屬纊): 주석 57 참조.
62. 갑을(甲乙): 첫째와 둘째.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하나로 꼽혔음을 의미한다.
원문:
權轍自在小官, 恪職擧事, 已有宰相望。 中年爲陳復昌所忌, 淹滯散秩者累年, 復昌敗, 復登庸, 敡歷中外。 及入相, 李浚慶方在端揆, 頗倚轍, 有事必咨之。 居相班十三年, 與洪暹、朴淳、盧守愼迭出入, 時中外無事, 朝廷稱治, 人稱福相。 子慄, 有功於壬辰倭亂, 爲元帥。
번역문:
권철은 젊어서 낮은 관직(小官)에 있을 때부터 맡은 직분에 삼가고(恪職) 일을 처리함에 이미 재상(宰相)의 기망(望)이 있었다. 중년에 진복창(陳復昌)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해 동안 승진하지 못하고 한직(散秩)에 머물렀는데(淹滯), 진복창이 패망하자 다시 등용되어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敭歷). 재상(宰相)의 반열에 들어가자 이준경(李浚慶)이 마침 재상(端揆)⁶³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못 권철에게 의지하여,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재상의 반열에 있은 지 13년 동안 홍섬(洪暹), 박순(朴淳)⁶⁴, 노수신(盧守愼)⁶⁵ 등과 번갈아 출입하였는데, 이때 중앙과 지방에 별다른 일이 없어 조정이 잘 다스려진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사람들이 복상(福相)⁶⁶이라 칭하였다. 아들 율(慄)⁶⁷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功)이 있어 원수(元帥)가 되었다.
주석:
63. 단규(端揆): 정승, 재상. 특히 영의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64. 박순(朴淳, 1523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65. 노수신(盧守愼, 1515
1590):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66. 복상(福相): 복이 있는 재상. 그가 재상으로 있을 때 나라가 태평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67. 율(慄): 권율(權慄, 1537~1599). 조선 중기의 명장.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끌었으며, 도원수(都元帥)를 지냈다.
임호신(任虎臣), 조언수(趙彦秀), 조사수(趙士秀) 전기 번역 및 주석
임호신 (任虎臣)
원문:
任虎臣【貞簡公。】
字武伯, 樞之子。 正德丙寅生。 中宗二十三年戊子司馬, 辛卯登第。 薦入史局, 歷吏郞、校理、典翰、直提學, 官至戶曹判書。 明宗丙辰卒, 年五十一。
번역문:
임호신(任虎臣)【시호는 정간공(貞簡公)¹이다.】
자는 무백(武伯)이고, 임추(任樞)²의 아들이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³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3년 무자년(1528)에 사마시(司馬試)⁴에 합격하고, 신묘년(1531)에 문과에 급제(登第)⁵하였다. 추천되어 사국(史局)⁶에 들어갔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⁷, 교리(校理)⁸, 전한(典翰)⁹, 직제학(直提學)¹⁰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호조 판서(戶曹判書)¹¹에 이르렀다. 명종(明宗) 병진년(1556)¹²에 졸(卒)하니, 나이 51세였다.
주석:
정간공(貞簡公): 임호신의 시호(諡號).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함(淸白守節)을, 간(簡)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음(平易不訾) 등을 의미한다. 조언수(趙彦秀)의 시호와 같다.
임추(任樞, 1482-1534): 임호신의 아버지. 자는 중기(重機), 호는 귀봉(龜峰).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형조·호조 판서,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 정덕은 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1506-1521). 1506년은 조선 중종(中宗) 원년이다.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 여기에 합격해야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文科)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등제(登第): 과거 시험, 특히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국(史局): 사초(史草)를 바탕으로 실록(實錄) 편찬 등 역사 기록을 담당하던 임시 기관. 또는 춘추관(春秋館)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였다.
교리(校理): 홍문관(弘文館)의 정5품 관직. 경연(經筵) 참여, 문한(文翰) 처리 등을 담당했다.
전한(典翰):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임금의 명령인 교서(敎書) 등을 짓는 일을 맡았다.
직제학(直提學): 홍문관 또는 예문관의 정3품 당상관. 제학(提學) 다음가는 관직으로, 학문 연구와 문한을 담당했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호조(戶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국가의 재정, 조세, 호구 등을 담당했다.
명종(明宗) 병진년(1556): 명종은 조선의 제13대 왕(재위 1545-1567).
원문:
父觀察公以冬至使如京, 公以書狀官隨之, 名流贈詩, 以鳳將雛比之。 還未出上國界, 遭喪, 扶櫬萬里, 號擗毁戚, 華人嘆服。
번역문:
아버지 관찰공(觀察公)¹³이 동지사(冬至使)¹⁴로 경사(京師)에 갈 때¹⁵, 공(公)이 서장관(書狀官)¹⁶으로 따라갔는데, (중국의) 명사(名流)들이 시를 지어 보내며 봉황이 병아리를 거느린 것에 비유하였다.¹⁷ 돌아오는 길에 아직 상국(上國)¹⁸의 경계를 벗어나기 전에 부친상(喪)을 당하였는데, 만 리 길에 부친의 관(櫬)을 메고 돌아오며¹⁹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슬픔으로 몸을 상하게 하니(號擗毁戚)²⁰, 중국인들이 감탄하며 탄복하였다.
주석:
13. 관찰공(觀察公): 아버지가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므로 높여 부르는 말. 임추(任樞)는 여러 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 관찰사는 각 도의 최고 행정관이다.
14. 동지사(冬至使): 동지(冬至)를 맞아 중국 황제에게 표문(表文)과 예물을 가지고 가던 사신.
15. 여경(如京): 경사(京師), 즉 중국의 수도(당시 북경)에 감.
16. 서장관(書狀官): 사신 행차 시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여 외교 문서 작성 및 실무를 담당하던 종3품 또는 정5품의 관직.
17. 봉장추비지(鳳將雛比之): 봉황(鳳)이 병아리(雛)를 거느린 것에 비유함. 아버지 임추와 아들 임호신 부자(父子)의 뛰어난 재능과 명성을 봉황과 그 새끼에 비유하여 칭찬한 것이다.
18. 상국(上國): 윗나라. 당시 조선이 사대하던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19. 부츤만리(扶櫬萬里): ‘츤(櫬)’은 시신을 넣는 관(棺)을 의미하며, ‘부츤(扶櫬)’은 관을 운반하는 것을 말한다. ‘만리(萬里)’는 매우 먼 거리를 상징한다. 즉, 중국에서 부친의 관을 모시고 매우 먼 길을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임추는 1534년(중종 29) 동지사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에서 병사했다.
20. 호벽훼척(號擗毁戚): ‘호(號)’는 크게 울부짖음, ‘벽(擗)’은 슬픔에 겨워 가슴을 치는 것, ‘훼(毁)’는 슬픔으로 인해 몸이 상할 정도로 수척해지는 것, ‘척(戚)’은 슬픔을 의미한다. 부모상(喪)을 당했을 때 극진히 슬퍼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원문:
拜戶曹判書, 內殫心計, 量入爲出。 治劇盡瘁之餘, 激成脹病, 遞拜知敦寧。 禁其家毋得受祿, 蓋不欲無事而食也。
번역문:
호조 판서에 임명되자, 안으로 마음과 계획을 다하였고(內殫心計),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정하였다(量入爲出).²¹ 어려운 일을 다스리느라 심신을 다한(治劇盡瘁)²² 나머지, 창병(脹病)²³이 심해져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²⁴로 옮겨 임명되었다. 그의 집안에 녹봉(祿)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니, 대개 일 없이 먹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²⁵
주석:
21. 양입위출(量入爲出): 수입을 헤아려 그 범위 안에서 지출을 계획하는 것. 건전한 재정 운영의 원칙을 의미한다.
22. 치극진췌(治劇盡瘁): ‘치극(治劇)’은 어렵고 힘든 일을 처리함, ‘진췌(盡瘁)’는 심신을 다하여 애씀을 뜻한다. 고된 업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음을 보여준다.
23. 창병(脹病): 몸이 붓는 병. 현대 의학의 부종(浮腫) 또는 고창증(鼓脹症) 등에 해당할 수 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24.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돈녕부(敦寧府)의 정2품 관직. 돈녕부는 왕의 친인척 관련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지돈녕부사는 실질적인 직무가 없는 명예직, 한직(閑職)의 성격이 강했다. 병으로 인해 실무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25. 개불욕무사이식야(蓋不欲無事而食也): 실무를 맡지 않게 되자 녹봉(祿俸) 받기를 거부한 것으로, 그의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보여준다.
원문:
公外若坦率, 而內有定力, 臨事毅然不撓, 遇事急, 常自靜暇。 壬子, 朝廷選廉謹, 公與其弟參議輔臣, 俱與其選, 人以爲榮, 公愀然曰: “安得無忝此二字?”
번역문:
공은 겉으로는 소탈한(坦率) 듯했으나 안으로는 정력(定力)²⁶이 있었고, 일에 임해서는 의연(毅然)하여 흔들리지 않았으며(不撓), 급한 일을 만나면 항상 스스로 차분하고 여유가 있었다(靜暇). 임자년(1552)에 조정에서 염근(廉謹)한 인물을 선발하였는데, 공이 그의 아우 참의(參議) 임보신(任輔臣)²⁷과 함께 그 선발에 포함되자,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으나, 공은 근심스러운 표정(愀然)²⁸으로 말하였다. “어찌하면 이 두 글자[廉謹]를 욕되게(忝)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²⁹
주석:
26. 정력(定力): 마음이 안정되어 외부의 동요에 흔들리지 않는 힘. 정신적인 수양과 의지력을 의미한다.
27. 임보신(任輔臣, 1519-1558): 임호신의 동생.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 정3품 당상관) 등을 역임했다.
28. 초연(愀然): 얼굴빛이 변하며 근심하거나 수심에 잠긴 모습.
29. 안득무첨차이자(安得無忝此二字): 염근(廉謹, 청렴하고 신중함)이라는 명예로운 칭호에 누가 될까 염려하는 말로, 그의 겸손함과 높은 책임감을 보여준다.
원문:
上揀宰相中學行者, 號爲東宮輔養官, 安玹、李浚慶、趙士秀及公與焉, 極一時之選也。【竝《潛谷舊錄》。】
번역문:
상(上)께서 재상(宰相) 중에서 학문과 행실(學行)이 뛰어난 자를 뽑아 동궁 보양관(東宮輔養官)³⁰으로 삼았는데, 안현(安玹), 이준경(李浚慶), 조사수(趙士秀) 및 공이 여기에 참여하니, 당대의 지극한 선발이었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³¹에서 인용】
주석:
30. 동궁 보양관(東宮輔養官): 동궁(東宮), 즉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고 교양(敎養)하는 임무를 맡은 관직.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신하 중에서 선발되었다.
31. 《잠곡구록(潛谷舊錄)》: 구체적으로 어떤 문헌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잠곡(潛谷) 김육(金堉) 또는 그와 관련된 인물의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다른 잠곡이라는 호를 쓴 인물의 기록일 수도 있다. 해당 기록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을 통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원문:
各衙門跟隨代立者, 徵價布於本身甚濫。 朝廷議令該曹收直分給, 公啓曰: “此非所以養廉也。 其待士大夫, 不已薄乎?”
번역문:
각 아문(衙門)의 근수(跟隨)와 대립자(代立者)³²들이 본신(本身)에게서 값으로 받는 베[價布]³³를 징수하는 것이 매우 지나쳤다. 조정에서 해당 조(曹)³⁴로 하여금 직접 거두어 나누어 주도록 명령할 것을 논의하자, 공이 아뢰었다. “이는 염치(廉恥)를 기르는 방법(所以養廉)이 아닙니다.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함이 너무 박(薄)하지 않습니까?”³⁵
주석:
32. 근수(跟隨)와 대립자(代立者): 근수는 관원을 따라다니는 하인이나 수행원, 대립자는 관청의 서리(胥吏)나 군인 등이 자신의 근무를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대신 시키는 경우 그 대리인을 말한다.
33. 가포(價布): 대가로 받는 베(布). 당시 베는 화폐처럼 통용되었다. 대립자들이 원래 근무자에게 과도한 대가를 요구하는 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4. 해조(該曹): 해당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 문맥상 호조(戶曹)나 병조(兵曹) 등일 수 있다.
35. 기대사대부 불이박호(其待士大夫, 不已薄乎): 국가가 나서서 대립(代立)의 대가까지 직접 관리하는 것은 사대부의 체면과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는 박한 처사라는 비판이다. 즉, 폐단 시정의 방법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원문:
任判書虎臣疾病, 其友洪忍齋暹往問之, 見其病重, 不覺出涕。 虎臣抽《唐音》一帙授之曰: “爲我快吟一篇。” 其達於死生如此。【竝《東閣雜記》。】
번역문:
임 판서(任判書) 호신(虎臣)이 질병에 걸리자, 그의 친구 홍인재(洪忍齋) 섬(暹)³⁶이 가서 문병하였는데, 그의 병이 위중함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호신이 《당음(唐音)》³⁷ 한 질(帙)을 뽑아 그에게 주며 말하였다. “나를 위해 시 한 편을 상쾌하게 읊어주게.” 그의 사생(死生)에 대한 달관(達觀)이 이와 같았다.【이상 《동각잡기(東閣雜記)》³⁸에서 인용】
주석:
36. 홍인재(洪忍齋) 섬(暹): 홍섬(洪暹, 1504-1585).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다. 임호신과 절친한 사이였다.
37. 《당음(唐音)》: 중국 남송(南宋)의 양사언(楊士彦)이 편찬한 당시선집(唐詩選集).
38.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조언수 (趙彦秀)
원문:
趙彦秀【貞簡公。】
字伯高, 末生之五代孫。 弘治丁巳生。 中宗二十六年辛卯司馬, 乙未登第。 選入翰院, 歷吏郞、承旨、副提學、咸鏡・江原兩道觀察使, 官至刑曹判書。 宣祖甲戌卒, 年七十八。
번역문:
조언수(趙彦秀)【시호는 정간공(貞簡公)³⁹이다.】
자는 백고(伯高)이고, 조말생(趙末生)⁴⁰의 5대손이다. 홍치(弘治) 정사년(1497)⁴¹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6년 신묘년(153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미년(1535)에 문과에 급제(登第)하였다. 한원(翰院)⁴²에 선발되어 들어가, 이조 정랑(吏曹正郞), 승지(承旨)⁴³, 부제학(副提學)⁴⁴, 함경도 및 강원도 양도(兩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형조 판서(刑曹判書)⁴⁵에 이르렀다. 선조(宣祖) 갑술년(1574)⁴⁶에 졸(卒)하니, 나이 78세였다.
주석:
39. 정간공(貞簡公): 조언수의 시호. 임호신(任虎臣)의 시호와 같다.
40. 조말생(趙末生, 1370-144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근초(謹初), 호는 화산(花山). 세종 대에 병조 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며 문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41. 홍치(弘治) 정사년(1497): 홍치는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1488-1505). 1497년은 조선 연산군(燕山君) 3년이다.
42. 한원(翰院): 한림원(翰林院)의 별칭. 주로 예문관(藝文館)을 가리키며, 문한(文翰)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43.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44.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종3품 관직.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위로,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담당했다.
45. 형조 판서(刑曹判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법률, 소송, 형벌 등을 담당했다.
46. 선조(宣祖) 갑술년(1574): 선조는 조선의 제14대 왕(재위 1567-1608).
원문:
天曹郞。 時本曹堂上缺一, 長官欲擬以非人, 公陽不聞, 强之猶不應。 長官戲曰: “正郞聾耶?” 聞者服其有守。
번역문:
천조(天曹)의 정랑(正郞)⁴⁷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본 조(曹)의 당상관(堂上官)⁴⁸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는데, 장관(長官)⁴⁹이 부적합한 인물(非人)을 추천(擬)하고자 하였다. 공(公)이 거짓으로(陽)⁵⁰ 듣지 못한 체하였고, 강요하여도 여전히 응하지 않았다. 장관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정랑은 귀머거리인가?” 하니, 듣는 자들이 그의 지조 있음(有守)⁵¹에 감복하였다.
주석:
47. 천조(天曹)의 정랑(正郞): 천조는 이조(吏曹)의 별칭이다. 이조 정랑은 문관 인사를 담당하는 요직이었다.
48. 당상관(堂上官): 정3품 상계 이상의 품계를 가진 관원. 정책 결정 등에 참여하는 고위 관료를 의미한다.
49. 장관(長官): 해당 부서의 으뜸 벼슬. 여기서는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가리킨다.
50. 양(陽): 거짓으로 ~하는 체함.
51. 유수(有守): 지조(志操)가 있음.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태도를 의미한다. 부당한 인사를 막으려는 조언수의 강직함을 보여준다.
원문:
戊申夏, 以聖節使如京師, 賜宴罷, 禮部尙書邀公私第曰: “人臣義無私交, 愛君德容, 越禮相見。” 因贈以所著《四書口訣》⁵², 還國。【竝栗谷撰碑。】
번역문:
무신년(1548) 여름에 성절사(聖節使)⁵³로 경사(京師)에 갔는데, 하사받은 연회가 끝나자 (중국의) 예부상서(禮部尙書)가 공(公)을 사사로운 저택(私第)으로 초청하여 말하였다. “남의 신하 된 자는 의리상 사사로운 교제가 없어야 하지만, 그대의 덕스러운 용모(德容)를 사모하여 예를 넘어(越禮) 서로 뵙는 것입니다.” 이어서 자신이 지은 《사서구결(四書口訣)》⁵⁴을 증정하였고, (공은) 본국으로 돌아왔다.【이상 율곡(栗谷)⁵⁵이 지은 비문에서 인용】
주석:
52. [주-D001] 訣 : 저본(底本)에는 “결(缺)”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율곡전서(栗谷全書)·좌참찬조공신도비명(左參贊趙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구결(口訣)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53. 성절사(聖節使):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던 사신.
54. 《사서구결(四書口訣)》: 《사서(四書)》, 즉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내용을 쉽게 풀이한 책으로 추정된다. 당시 명나라 예부상서가 누구였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55. 율곡(栗谷):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호.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조언수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원문:
己未, 陞判尹, 固辭, 明廟批以御筆曰: “卿純宰也, 陞卿亦晩矣。”
번역문:
기미년(1559)에 판윤(判尹)⁵⁶으로 승진하자 굳게 사양하였는데, 명종(明廟)⁵⁷께서 어필(御筆)⁵⁸로 비답(批答)하여 말씀하셨다. “경(卿)은 순수한 재상(純宰)이니, 경을 승진시키는 것도 또한 늦었다.”
주석:
56. 판윤(判尹): 한성부(漢城府)의 으뜸 벼슬. 정2품. 수도인 한성부의 행정을 총괄했다.
57. 명묘(明廟): 조선 제13대 왕 명종(明宗)의 묘호(廟號).
58. 어필(御筆): 임금이 직접 쓴 글씨.
원문:
時有獄涉權貴, 久未決, 公以刑判折以片言, 大忤權貴。 自己巳春, 杜門養疾, 至是卒。【竝《紀年通攷》⁵⁹。】
번역문:
당시에 권세가(權貴)와 관련된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판결되지 못하였으나, 공이 형조 판서(刑判)로서 한마디 말(片言)⁶⁰로 판결하여 권세가들의 뜻을 크게 거슬렀다. 기사년(1569) 봄부터 두문(杜門)하고 병을 조리하다가⁶¹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다.【이상 《기년통고(紀年通攷)》⁶²에서 인용】
주석:
59. [주-D002] 紀 : 저본(底本)에는 “기(記)”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기년통고(紀年通攷)》 권수제(卷首題)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60. 편언(片言): 한 마디 말.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결정적인 말을 의미한다. 공정한 판결을 내렸음을 시사한다.
61. 두문양질(杜門養疾): 문을 닫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병을 돌봄.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권세가들의 반발로 인해 정계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62. 《기년통고(紀年通攷)》: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원문:
公資質眞淳, 器度寬厚, 平生無疾言遽色, 不喜交遊。 公退還家, 身若無官, 且不爲崖異以取名於世, 故有文有行, 而人鮮克知。 其於《四書》、《三經》, 讀之精熟, 故晩年誨兒孫, 猶口誦不錯。 愛土向善是素志, 故自號信善堂。 花潭徐先生於公爲同年, 每歎曰: “吾榜有徐某, 可謂榮矣。” 其於勢利, 有所不屑, 見人脅肩諂笑, 若將浼焉。
번역문:
공은 자질(資質)이 참되고 순수하며(眞淳) 기량(器度)이 너그럽고 두터웠으며(寬厚), 평생 동안 성난 말(疾言)이나 급한 기색(遽色)이 없었고, 교유(交遊)를 즐기지 않았다. 공직에서 물러나 집에 돌아오면 몸가짐이 벼슬 없는 사람 같았고, 또한 괴팍하고 이상하게(崖異)⁶³ 행동하여 세상에 이름을 얻으려 하지 않았으므로, 문장(文)과 행실(行)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능히 아는 이가 드물었다. 《사서(四書)》와 《삼경(三經)》⁶⁴에 대해서는 정밀하게 읽고 익혔으므로(精熟), 만년에 자손들을 가르칠 때에도 여전히 입으로 외움(口誦)에 틀림이 없었다. 선비(士)를 아끼고 선(善)을 지향하는 것(愛士向善)⁶⁵이 본래의 뜻이었으므로, 스스로 호(號)를 신선당(信善堂)이라 하였다. 화담(花潭) 서 선생(徐先生)⁶⁶은 공과 동년(同年)⁶⁷이었는데, 매번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방(榜)에 조 아무개[趙某]⁶⁸가 있으니 영광이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권세와 이익(勢利)에 대해서는 불만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었고(有所不屑),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하며 웃는 것(脅肩諂笑)⁶⁹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浼)⁷⁰ 듯이 여겼다.
주석:
63. 애이(崖異): 언행이 모나고 괴팍하여 남들과 다름.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일부러 기이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64. 《사서(四書)》, 《삼경(三經)》: 사서는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삼경은 보통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을 가리킨다. 유학의 핵심 경전이다.
65. 애사향선(愛士向善): 원문의 '애토(愛土)'는 '애사(愛士)'의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높다. '선비를 아끼고 선을 지향함'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66. 화담(花潭) 서 선생(徐先生):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저명한 성리학자. 호가 화담이다.
67. 동년(同年): 같은 해에 과거(科擧)에 합격한 사람. 조언수와 서경덕은 1531년(중종 26) 신묘년에 함께 사마시에 합격했다.
68. 조 아무개[趙某]: 원문에는 '서 아무개(徐某)'로 되어 있으나, 화담 서경덕이 동년인 조언수를 칭찬하는 문맥이므로 '조 아무개(趙某)'가 되어야 자연스럽다. 원문의 오기 또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
69. 협견첨소(脅肩諂笑):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깨를 움츠리고 아양을 떨며 웃는 모습. 권세에 아부하는 비굴한 태도를 의미한다.
70. 매(浼): 더럽히다, 오염시키다.
원문:
公薄業在楊州, 欲引退而未遂初心, 嘗次陶靖節《歸去來辭》以寓懷。 旣老, 多詠趙元鎭“白首何歸, 丹心未泯”之句, 喟然者良久。
번역문:
공은 변변찮은 산업(薄業)이 양주(楊州)에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려(引退) 하였으나 본래의 마음(初心)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일찍이 도정절(陶靖節)⁷¹의 〈귀거래사(歸去來辭)〉⁷²에 차운(次韻)⁷³하여 회포를 부쳤다. 늙어서는 조원진(趙元鎭)⁷⁴의 “백수(白首)에 어디로 돌아가리오, 단심(丹心)⁷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白首何歸, 丹心未泯)”라는 시구를 많이 읊으며, 오랫동안 깊이 탄식(喟然)하였다.
주석:
71. 도정절(陶靖節): 도연명(陶淵明, 365-427).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자는 원량(元亮), 시호가 정절(靖節)이다. 전원생활과 음주를 노래한 시로 유명하며, 관직을 버리고 귀거래(歸去來)한 인물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72. 〈귀거래사(歸去來辭)〉: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은 유명한 사(辭).
73. 차운(次韻): 다른 사람의 시에 사용된 운자(韻字)와 그 순서를 그대로 따라서 시를 짓는 것.
74. 조원진(趙元鎭):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고려 또는 조선 시대의 인물일 수 있다.
75. 단심(丹心): 붉은 마음. 변치 않는 참된 마음이나 충성심을 비유한다. 늙도록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공존하는 복잡한 심경을 나타낸다.
원문:
公立朝四十年, 官至六卿, 未嘗搆一間屋, 買一頃田。 先人舊宅, 亦未嘗修葺, 曰: “此足以終吾身。” 自奉儉素, 身沒之後, 家無遺財, 淸白一節, 不讓於古人矣。【竝碑。】
번역문:
공이 조정에 선 지 40년 동안 관직이 육경(六卿)⁷⁶에 이르렀으나, 일찍이 집 한 칸(間)을 짓거나 밭 한 경(頃)⁷⁷을 사지 않았다. 선인(先人)의 옛집 또한 일찍이 수리하거나 깁지(修葺) 않고 말하기를, “이것으로 내 몸을 마치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스스로 생활하기를 검소(儉素)하게 하여 몸이 죽은 뒤에 집에 남은 재산(遺財)이 없었으니, 청백(淸白)⁷⁸한 절개는 옛사람에게도 뒤지지 않았다.【이상 비문에서 인용】
주석:
76. 육경(六卿): 여섯 명의 경(卿). 조선 시대에는 보통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조 판서(六曹判書)를 가리킨다. 최고위 관직을 역임했음을 의미한다.
77. 경(頃): 토지 면적의 단위. 1경은 약 100묘(畝)에 해당하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78. 청백(淸白): 청렴결백(淸廉潔白). 재물에 욕심이 없고 행실이 깨끗함. 청백리(淸白吏)는 조선 시대 관료에게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다.
조사수 (趙士秀)
원문:
趙士秀【文貞公。】
字季任, 號松岡⁷⁹。 彦秀之弟。 中宗二十六年辛卯登第, 賜暇湖堂。 官至吏曹判書。
번역문:
조사수(趙士秀)【시호는 문정공(文貞公)⁸⁰이다.】
자는 계임(季任)이고, 호는 송강(松岡)⁸¹이다. 조언수(趙彦秀)의 아우이다. 중종(中宗) 26년 신묘년(1531)에 문과에 급제(登第)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⁸²하였다. 관직은 이조 판서(吏曹判書)⁸³에 이르렀다.
주석:
79. [주-D001] 岡 : 저본(底本)에는 “망(罔)”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아래 “조송강(趙松岡)”의 “강(岡)”도 동일하다.
80. 문정공(文貞公): 조사수의 시호.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함(淸白守節) 등을 의미한다.
81. 송강(松岡): 조사수의 호.
82. 사가호당(賜暇湖堂): 호당(湖堂)은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이다. 여기에 선발되는 것은 큰 영예였다. 조사수는 형 조언수가 사마시에 합격한 해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가독서까지 하였다.
83.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공훈, 봉작 등을 담당하는 핵심 요직이다.
원문:
公登文科一等, 初授內資直長。 時和歲豐, 各司之員, 用庫藏之物, 任意多少, 不復顧忌。 公之直宿之夜, 二三友生步月而來, 求嘗香醞酒味, 公與之坐談良久, 蒼頭自本家載肉崇酒而來, 酬酢歡洽而罷。 公之平生廉潔不苟之節, 凜然於發軔之初, 吁! 可尙。【《朝野雜記》。】
번역문:
공은 문과에 1등(一等)⁸⁴으로 급제하여 처음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⁸⁵에 제수되었다. 당시 세상이 평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자, 각 사(司)의 관리들이 고장(庫藏)의 물건을 임의로 많든 적든 사용하면서 다시 거리낌이 없었다. 공이 직숙(直宿)⁸⁶하는 밤에 친구 두세 명이 달빛 아래 거닐며(步月) 와서 향기로운 술(香醞) 맛보기를 청하자, 공이 그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창두(蒼頭)⁸⁷가 본가(本家)에서 고기와 많은 술(崇酒)을 싣고 와서,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酬酢)⁸⁸ 즐겁게 마시고 헤어졌다. 공의 평생 염결(廉潔)하고 구차하지 않은(不苟)⁸⁹ 절개가 벼슬길에 처음 나설(發軔)⁹⁰ 때부터 늠름(凜然)하였으니, 아! 가히 숭상할 만하다.【《조야잡기(朝野雜記)》⁹¹에서 인용】
주석:
84. 문과 일등(文科一等): 문과 시험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했음을 의미한다.
85.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 내자시(內資寺)는 궁궐 내의 술, 기름, 면포 등 물품 공급을 담당하던 관청. 직장(直長)은 종7품의 실무 관직이다. 장원 급제자에게 처음 제수되는 관직으로는 다소 낮아 보일 수 있으나, 관례였을 수 있다.
86. 직숙(直宿): 관청이나 궁궐에서 숙직하는 것.
87. 창두(蒼頭): 푸른 수건을 머리에 두른 하인. 노복(奴僕)을 가리킨다.
88. 수작(酬酢):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酬) 손님이 주인에게 잔을 돌리는(酢) 것.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정답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89. 불구(不苟): 조금도 구차하거나 소홀함이 없음. 원칙을 지키고 행동이 반듯함을 의미한다.
90. 발인(發軔): 수레가 멈추도록 괴어 놓은 나무(軔)를 빼냄. 즉, 출발함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벼슬길에 처음 나서는 것을 비유한다.
91. 《조야잡기(朝野雜記)》: 조선 시대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모은 야사(野史) 또는 잡록(雜錄)류의 책으로 추정된다.
원문:
趙松岡⁸¹士秀爲大司成, 至於三年之久, 每仕新館, 路經陳復昌之家, 絶不歷訪。 復昌置陪吏門外, 凡過門不入者輒告。 松岡聞之, 自後不從梨峴⁹²路, 改路從於義洞。 復昌又知之, 置人於於義洞而詗之, 松岡終不一訪。 前輩砥礪名節, 視小人若將浼焉。 絶不一見, 可敬也。
번역문:
조송강(趙松岡) 사수(士秀)가 대사성(大司成)⁹³이 되어 3년 동안이나 있었는데, 매번 신관(新館)⁹⁴으로 출사(仕)할 때 진복창(陳復昌)⁹⁵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으나, 절대로 들러 찾아보지 않았다. 진복창이 문밖에 배리(陪吏)⁹⁶를 두어, 무릇 문 앞을 지나면서 들어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보고하게 하였다. 송강이 이를 듣고는, 그 후부터 이현(梨峴)⁹⁷ 길로 다니지 않고 길을 바꾸어 의동(於義洞)⁹⁸으로 다녔다. 진복창이 또 이를 알고는 의동에 사람을 두어 엿보게(詗)⁹⁹ 하였으나, 송강은 끝내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전배(前輩)들이 명예와 절조(名節)를 갈고 닦으며(砥礪)¹⁰⁰ 소인(小人) 보기를 마치 자신을 더럽힐 듯이 여겼으니, 절대 한 번도 만나지 않음이 가히 공경스럽다.
주석:
92. [주-D002] 峴 : 저본(底本)에는 “현(現)”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월정만필(月汀漫筆)》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지명(梨峴)이므로 峴이 맞다.
93.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한다.
94. 신관(新館):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95. 진복창(陳復昌):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당시 권세가 있거나 부도덕하여 조사수가 가까이하기를 꺼렸던 인물로 추정된다.
96. 배리(陪吏): 곁에서 모시는 아전(衙前)이나 하인.
97. 이현(梨峴): 현재 서울 중구 인현동(仁峴洞) 부근의 고개 이름.
98. 의동(於義洞): 현재의 서울 종로구 어의동(於義洞) 또는 의동(義洞) 부근으로 추정된다.
99. 형(詗): 엿보다, 정탐하다.
100. 지려(砥礪): 숫돌(砥)에 갈고(礪) 닦음. 학문이나 인격을 수양하는 것을 비유한다.
원문:
明廟朝, 沈忠惠【連源】以首相領經筵, 趙松岡¹⁰¹以知經筵, 同入侍, 因論第舍過制, 松岡直斥忠惠妾家翼廊過大, 忠惠縮蹙背汗沾衣。 此後忠惠深鎖妾家翼廊, 不以對客, 只對客於小斜廊。 然而擬松岡吏判受點, 忠惠服義, 松岡秉直, 皆可敬也。【竝《月汀漫錄》。】
번역문:
명종(明廟) 시대에 심충혜(沈忠惠) 【연원(連源)】¹⁰²가 수상(首相)¹⁰³으로서 경연(經筵)¹⁰⁴을 영솔(領率)하고 조송강(趙松岡)이 지경연(知經筵)¹⁰⁵으로서 함께 입시(入侍)하였는데, 이로 인해 가사(第舍)가 제도를 넘음(過制)¹⁰⁶을 논하다가, 송강이 충혜의 첩(妾) 집 익랑(翼廊)¹⁰⁷이 지나치게 크다고 직설적으로 질책(直斥)하자, 충혜가 움츠러들고(縮蹙)¹⁰⁸ 등에서 흐른 땀이 옷을 적셨다. 이 뒤로 충혜는 첩 집의 익랑을 굳게 잠가 놓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으며, 단지 작은 사랑(斜廊)¹⁰⁹에서만 손님을 대하였다. 그러나 송강을 이조 판서(吏判)로 추천(擬)하여 수점(受點)¹¹⁰할 때, 충혜가 의(義)에 복종하고 송강이 정직(直)을 지켰으니, 모두 가히 공경스럽다.【이상 《월정만록(月汀漫錄)》¹¹¹에서 인용】
주석:
101. [주-D003] 岡 : 저본(底本)에는 “강(江)”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월정만필(月汀漫筆)》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조사수의 호는 송강(松岡)이다.
102. 심충혜(沈忠惠) 【연원(連源)】: 심연원(沈連源, 1491-155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보암(保庵), 시호는 충혜(忠惠). 영의정을 지냈다.
103.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104.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영경연사(領經筵事)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다.
105. 지경연(知經筵): 지경연사(知經筵事)의 줄임말. 정2품 이상의 관원이 겸임하며 경연의 실무를 주관했다.
106. 제사과제(第舍過制): 신분에 따라 가옥의 규모를 제한하는 제도(家舍制度)를 어긴 것을 말한다.
107. 익랑(翼廊): 본채의 양옆으로 덧붙여 지은 행랑(行廊).
108. 축축(縮蹙): 두려워하거나 민망하여 몸을 움츠리는 모양.
109. 사랑(斜廊): 비스듬히 지은 행랑. 또는 작은 행랑채.
110. 수점(受點): 임금이 관직 후보자 명단(망단자, 望單子)에서 적임자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 임명을 결정하는 것. 심연원이 개인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조사수의 능력과 정직함을 인정하여 이조 판서 임명에 동의했음을 보여준다.
111. 《월정만록(月汀漫錄)》: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지은 수필집. 《월정만필(月汀漫筆)》이라고도 한다.
원문:
洪公曇拜兵判, 趙大憲士秀謂臺諫曰: “洪是我之心友, 然洪之才, 優於吏曹¹¹², 而不合於主兵, 盍論之?” 遂啓遞之。 卽往見洪曰: “玆事於君意如何?” 洪曰: “我忝主兵, 決非所堪, 隱憂多矣。 顧君秉國論, 故恃而無憂。” 人皆服趙之不私, 而多洪之自知。 祖宗朝公卿如是, 安得不治?【《涪溪記聞》。】
번역문:
홍공 담(洪公曇)¹¹³이 병조 판서(兵判)에 임명되자, 조대헌(趙大憲)¹¹⁴ 사수(士秀)가 대간(臺諫)¹¹⁵에게 일러 말하였다. “홍 아무개는 나의 심우(心友)이지만, 홍 아무개의 재능은 이조(吏曹)¹¹⁶에 뛰어나지만 군사를 주관하는(主兵) 데는 부합하지 않으니, 어찌 그를 교체하도록 논하지(論) 않겠는가(盍)?” 마침내 아뢰어 그를 교체시켰다. 즉시 홍 아무개를 찾아가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홍 아무개가 말하였다. “내가 외람되이(忝) 군사를 주관하게 되었으나 결코 감당할 바가 아니어서 숨은 근심이 많았는데, 그대가 국론(國論)을 잡고 있음을 돌아보고, 그러므로 믿고서 근심하지 않았네.” 사람들이 모두 조 아무개의 사사롭지 않음(不私)에 감복하고 홍 아무개의 스스로를 아는 것(自知)을 칭찬(多)¹¹⁷하였다. 조종(祖宗) 시대 조정의 공경(公卿)들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았겠는가?【《부계기문(涪溪記聞)》¹¹⁸에서 인용】
주석:
112. [주-D004] 曹 : 《대동야승(大東野乘)·부계기문(涪溪記聞)》에는 “서(書)”로 되어 있다. 문맥상 이조(吏曹)가 병조(兵曹)와 대비되므로 曹가 합당하다.
113. 홍공 담(洪公曇): 홍담(洪曇, 1509-157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휘(公晦), 호는 하의(荷衣). 병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114. 조대헌(趙大憲): 대헌(大憲)은 대사헌(大司憲)의 별칭. 사헌부의 으뜸 벼슬이다. 조사수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115.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의 관원들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간쟁(諫諍)과 탄핵(彈劾)을 담당했다.
116. 이조(吏曹):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 홍담의 재능이 군사보다는 행정 인사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다.
117. 다(多): 여기서는 '많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하다', '훌륭하게 여기다'는 의미로 쓰였다.
118. 《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涪溪)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의 다른 이름 또는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원문:
嘉靖丙午四月, 政府、禮曹同議抄啓淸白行護軍朴守良、大諫趙士秀、正郞金珣等, 加資除職有差。【《紀年通攷》。】
번역문:
가정(嘉靖) 병오년(1546)¹¹⁹ 4월에 정부(政府)와 예조(禮曹)가 함께 의논하여 청백(淸白)한 행실이 있는 호군(護軍) 박수량(朴守良)¹²⁰, 대간(大諫) 조사수(趙士秀)¹²¹, 정랑(正郞) 김순(金珣)¹²² 등을 초계(抄啓)¹²³하여, 자급(資級)을 더하고 관직을 제수(除職)함에 차등이 있게 하였다.【《기년통고(紀年通攷)》에서 인용】
주석:
119. 가정(嘉靖) 병오년(1546): 가정은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1546년은 조선 명종(明宗) 원년이다.
120. 호군(護軍) 박수량(朴守良): 박수량(朴守良, 1495-1554). 조선 중기의 문신. 청렴결백하기로 이름 높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호군(護軍)은 오위(五衛)에 속한 정4품의 무관직이다.
121. 대간(大諫) 조사수(趙士秀): 대간(大諫)은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을 가리킨다. 정3품 당상관.
122. 정랑(正郞) 김순(金珣): 김순(金珣, 1514-1551).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퇴휴당(退休堂).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정랑(正郞)은 육조(六曹)의 정5품 관직이다.
123. 초계(抄啓): 여러 후보자 중에서 선발하여 임금에게 아뢰는 것. 청백리 후보로 추천되었음을 의미한다.
민기(閔箕)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閔箕【文景公。】
字景說, 號觀物齋, 驪興人。 弘治甲子生。 中宗二十六年辛卯生員, 己亥登第。 薦入翰苑, 賜暇湖堂, 歷吏郞、舍人、直提學、大司成、湖西觀察使、大司憲、吏曹判書。 宣祖卽位, 拜右議政。 丁卯卒¹, 年六十四。
번역문:
민기(閔箕)【문경공(文景公)²이다.】
자는 경설(景說)이고, 호는 관물재(觀物齋)이며, 여흥(驪興) 사람이다.³ 홍치(弘治) 갑자년(1504)⁴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6년 신묘년(1531)에 생원(生員)⁵이 되고, 기해년(153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거되어 한원(翰苑)⁶에 들어갔고, 호당(湖堂)⁷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⁸하였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⁹, 직제학(直提學)¹⁰, 대사성(大司成)¹¹,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¹², 대사헌(大司憲)¹³, 이조 판서(吏曹判書)¹⁴를 역임하였다.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우의정(右議政)¹⁵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567)에 졸(卒)하니,¹⁶ 나이는 64세였다.
주석:
- [주-D001] 丁卯卒年六十四 : 《잠곡유고(潛谷遺稿)・우의정민문경공신도비명(右議政閔文景公神道碑銘)》 및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1년(무진) 2월 1일 기록에 근거할 때 “무진졸, 년육십오(戊辰卒, 年六十五)。”가 되어야 한다. 즉, 무진년(1568)에 졸하였고 향년 65세라는 것이다. 본 번역은 저본을 따르되 이견을 밝힌다.
- 문경공(文景公): 민기의 시호(諡號).
- 여흥인(驪興人): 본관이 여흥(驪興, 현재의 여주)임을 나타낸다. 여흥 민씨(驪興 閔氏)이다.
- 홍치(弘治) 갑자년(1504): 홍치는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이다. 홍치 17년, 조선 연산군(燕山君) 10년에 해당한다.
- 생원(生員):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 한원(翰苑): 문한(文翰)을 다루는 관청, 즉 예문관(藝文館)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 호당(湖堂): 조선 시대 젊고 재능 있는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주로 동호(東湖, 현재의 옥수동 부근) 가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며 학문을 연마하도록 배려하던 제도. 호당에서 이루어졌다.
- 사인(舍人): 여러 관청에 속했던 정4품 관직. 여기서는 예문관 검열(檢閱) 등을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역임했을 가능성이 있다.
-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위.
-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 호서(湖西), 즉 충청도(忠淸道)의 관찰사.
-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총괄했다.
- 우의정(右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삼정승 중 하나. 정1품.
-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 주석 [주-D001]에서 지적하듯, 무진년(1568, 선조 1)에 졸했다는 기록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원문:
公生而穎異¹, 五歲, 學《千字文》, 至晉、楚二字, 問於父曰: “未有晉國、楚國之前, 字義云何?” 聞者大奇之。 六七歲, 儼若成人, 不與群兒遊戲, 惟喜讀書, 不勞指敎, 自解文義。 讀《小學》、《大學》之書, 已略知爲學之方。
번역문: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남달랐는데¹⁷, 다섯 살에 《천자문(千字文)》¹⁸을 배우다가 진(晉)과 초(楚) 두 글자에 이르러 아버지에게 묻기를, “진(晉)나라와 초(楚)나라가 있기 전에는 글자의 뜻이 어떠하였습니까?” 하니, 듣는 자들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예닐곱 살에는 엄연히 성인(成人)과 같아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지 않고 오직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가르침을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글의 뜻을 이해하였다. 《소학(小學)》¹⁹과 《대학(大學)》²⁰의 책을 읽고는 이미 대략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다.
주석:
17. [주-D002] 異 : 장서각본(藏書閣本)에는 “오(悟)”로 되어 있다. '영오(穎悟)'는 '총명하고 깨달음이 빠름'을 뜻하며, '영이(穎異)'는 '재능이 뛰어나고 남다름'을 뜻한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18. 《천자문(千字文)》: 중국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책. 한자(漢字) 1000자를 사언 고시(四言古詩) 250구로 엮어 만든 한자 학습서이다.
19. 《소학(小學)》: 중국 남송(南宋)의 유자징(劉子澄)이 주희(朱熹)의 지도를 받아 편찬한 아동용 유학 입문서. 수신(修身)과 윤리 규범을 강조한다.
20. 《대학(大學)》: 사서(四書) 중 하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유교 경전이다.
원문:
自己卯諸賢被禍, 人皆以學問爲祟, 莫肯從事。 公慨然發憤, 遂携《四書》往棲山房, 俯讀仰思, 沈潛理會, 幾六七年。 嘗謂: “古人之讀聖賢書, 必熟講深思而後乃解, 所以多得力於讀書。 今則先儒訓釋昭然, 寓目知其文義, 有何自得於心上之功乎?” 遂手書《四書》大文, 究尋領會, 以驗其所見與先儒之論合與未合。 如是功多, 而後旁及他書, 欲以參驗發明, 而自秘不出, 故人莫得而知焉。 嘗就質於慕齋, 大加歎異曰: “閔生之學, 非世儒所及。” 觀文章, 學韓愈而爲者也。
번역문:
기묘년(己卯年, 1519)²¹에 여러 현인(賢人)들이 화(禍)를 입은 후부터 사람들이 모두 학문(學問)을 재앙거리(祟)로 여겨 기꺼이 종사하려 하지 않았다. 공은 개연(慨然)히 분발하여 마침내 《사서(四書)》²²를 가지고 산방(山房)에 머물며, 고개 숙여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침잠(沈潛)하여 이치를 깨닫기를(理會) 거의 6, 7년 동안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이 성현(聖賢)의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익숙히 강론하고 깊이 생각한 뒤에야 이해하였으므로, 글 읽기에서 힘을 얻는 바가 많았다. 지금은 선유(先儒)들의 훈고(訓詁)와 해석(解釋)이 명백하여 눈으로 보면 그 글의 뜻을 알 수 있으니, 마음에 스스로 터득하는 공부(自得於心上之功)가 어찌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사서(四書)》의 대문(大文)을 손수 베껴 쓰고 궁구(究尋)하고 영회(領會)하여, 자신의 견해가 선유(先儒)의 논설과 부합하는지 부합하지 않는지를 시험하였다. 이와 같이 공부하기를 많이 한 뒤에 다른 서적까지 널리 섭렵하여 참고하고 증험하여 밝히고자 하였으나, 스스로 비밀로 하고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 일찍이 모재(慕齋)²³에게 나아가 질문하자, 모재가 크게 감탄하며 남다르게 여겨 말하기를, “민생(閔生)의 학문은 세상의 유학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장(文章)을 보면, 한유(韓愈)²⁴를 배워서 지은 것이었다.
주석:
21. 기묘제현피화(己卯諸賢被禍):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년(1519)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勳舊派)가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제거한 사건. 이 사건 이후 사림은 큰 타격을 입고 학문 활동이 위축되었다.
22. 《사서(四書)》: 유교의 기본 경전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말한다.
23.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파직되기도 했다. 사림의 중진으로 명망이 높았다.
24. 한유(韓愈, 768-824): 중국 당(唐)나라의 문학가, 사상가. 고문(古文) 운동을 제창하여 문장의 개혁을 이끌었다. 그의 문장은 논리가 정연하고 기세가 뛰어나 후대 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원문:
尹左相漑頗主張時事, 公諷以亢龍有悔之說, 尹相悅而不能繹。 上意不悅尹相, 仍下不合大臣之敎。 公製箚極言待大臣以禮, 納諫諍有容, 言甚切至, 大忤於權貴。
번역문:
좌상(左相) 윤개(尹漑)²⁵가 자못 시사(時事)를 주장하자, 공은 항룡유회(亢龍有悔)²⁶의 설(說)로써 풍자하였는데, 윤상(尹相)은 기뻐하였으나 그 뜻을 풀어내지 못하였다. 상(上)²⁷의 뜻이 윤상을 기쁘게 여기지 않아, 이어서 대신(大臣)과 화합하지 못한다는 교지(敎)를 내렸다. 공은 차자(箚子)²⁸를 지어 대신을 예(禮)로써 대우하고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는 도량(有容)이 있어야 함을 극진히 말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여 권력 있고 지위 높은 자(權貴)들에게 크게 거슬림을 받았다.
주석:
25. 윤개(尹漑, 1494-1566): 조선 중기의 문신. 좌의정을 역임했다.
26. 항룡유회(亢龍有悔): 《주역(周易)》 건괘(乾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함이 있다'는 뜻으로, 극에 달하면 반드시 쇠퇴하게 되므로 과도한 욕심이나 권세를 경계해야 함을 비유한다. 민기가 윤개의 지나친 권력 행사나 독주를 에둘러 경계한 말이다.
27. 상(上): 임금. 여기서는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28. 차자(箚子): 조선 시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상소(上疏)의 한 종류. 주로 격식이 간략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에 대해 올렸다.
원문:
時尹元衡藉元舅之勢, 脅君擅權, 公與一二宰臣極論必去之義, 放逐大奸, 朝廷淸明。
번역문:
이때 윤원형(尹元衡)²⁹이 원구(元舅)³⁰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임금을 위협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자, 공은 한두 재신(宰臣)과 함께 반드시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리(義)를 극력 주장하여, 큰 간신(大奸)을 내쫓으니 조정이 맑고 밝아졌다.
주석:
29. 윤원형(尹元衡, 1509-1565): 조선 중종, 명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문정왕후 사후 탄핵을 받아 몰락했다.
30. 원구(元舅): 임금의 외삼촌 중 으뜸가는 사람. 여기서는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을 가리킨다.
원문:
公天姿夷曠, 儀容修整, 雖當倉卒, 無疾言遽色。 見善無過譽, 見不善能有容。 恥言人之過失, 或有攻人之短者, 必曰: “全人豈易得也? 舍短取長可也。”
번역문:
공은 천성(天姿)이 평탄하고 넓으며(夷曠) 위의(儀容)가 단정하였고, 비록 창졸간(倉卒間)을 당하더라도 빠른 말씨나 급한 기색(疾言遽色)이 없었다. 선(善)을 보아도 지나치게 칭찬하지 않았고, 불선(不善)을 보아도 능히 포용함이 있었다. 남의 과실(過失)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였고, 혹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온전한 사람(全人)을 어찌 쉽게 얻겠는가?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원문:
公善自韜晦, 不求人知。 常灑掃一室, 整理冠巾, 不觀非聖之書, 名其所居齋曰觀物。 最好《周易》、《孟子》, 晩年喜讀《綱目》, 手不釋卷。 嘗自歎曰: “少時家貧親老, 僥倖科第, 若平生之志, 則不在此。 欲究性命之源, 探孔、顔之樂, 而悠悠風塵, 日暮途遠, 玆可謂命也耶!”【竝退溪撰行狀。】
번역문:
공은 스스로 재능이나 학식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음(韜晦)을 잘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항상 방 하나를 물 뿌리고 청소하며 관(冠)과 건(巾)을 정돈하였고, 성인(聖人)의 글이 아닌 것은 보지 않았으며, 자신이 거처하는 재(齋)의 이름을 관물(觀物)³¹이라 하였다. 《주역(周易)》³²과 《맹자(孟子)》³³를 가장 좋아하였고, 만년(晩年)에는 《강목(綱目)》³⁴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스스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셔서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만약 평생의 뜻이라면 여기에 있지 않다. 성명(性命)의 근원³⁵을 궁구하고 공자(孔子)와 안자(顔子)의 즐거움³⁶을 탐구하고자 하였으나, 아득한 풍진(風塵)³⁷ 속에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머니(日暮途遠)³⁸, 이를 운명(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이상은 퇴계(退溪)³⁹가 지은 행장(行狀)⁴⁰에서 인용】
주석:
31. 관물(觀物): 만물의 이치를 관찰하고 탐구함. 송(宋)나라 성리학자 소옹(邵雍)의 저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편명(篇名) 중 하나인 〈관물내편(觀物內篇)〉, 〈관물외편(觀物外篇)〉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호 ‘관물재(觀物齋)’는 이러한 학문적 지향을 보여준다.
32. 《주역(周易)》: 육경(六經) 중 하나. 우주 자연과 인간 사회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 점서(占書)이자 철학서.
33. 《맹자(孟子)》: 사서(四書) 중 하나. 맹자(孟子)의 언행과 사상을 기록한 책. 성선설(性善說)과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했다.
34. 《강목(綱目)》: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바탕으로 편찬한 역사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 강(綱)과 목(目)의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하여 편년체(編年體) 역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35. 성명지원(性命之源): 인간의 본성(性)과 천명(命)의 근원. 성리학(性理學)의 핵심적인 탐구 주제이다.
36. 공안지락(孔顔之樂):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 안회(顔回)가 추구하고 누렸던 정신적인 즐거움. 가난 속에서도 도(道)를 즐기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를 의미한다.
37. 풍진(風塵): 바람과 먼지. 속세(俗世)의 번거롭고 어지러운 일을 비유한다.
38.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멂. 늙고 쇠약해졌으나 아직 할 일이 많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39.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호.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40.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자, 호, 본관, 세계(世系) 및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
원문:
乙丑, 明廟不豫, 而儲嗣未定, 中外遑遑, 閔公箕時在卿位, 密謂首相李浚慶曰: “上疾彌留, 公當國, 何無社稷之憂?” 李公大悟, 入請繼嗣, 天語已不可辨。 仁順王后曰: “順懷世子卒, 上見德興君第三子歎曰: ‘眞人已出, 我子宜死。’” 浚慶曰: “天意在此矣。” 遂命將扈衛于宣廟潛邸, 明廟不知也。 疾間開筵, 閔公自請以特進官入侍, 李公頓首於上前曰: “玉候違豫, 擧國恐懼, 皆以國本爲憂。 臣待罪大臣, 不得不爲宗社計。” 玉色不悅曰: “予病豈至於死, 大臣豫爲此事歟?” 閔公自袖中出《大學衍義》定國本卷進曰: “大臣謀國, 豈顧身計? 古今亂亡, 恒由繼嗣不定。 若觀此書, 則聖人當自知之。” 明廟諦觀, 色始康曰: “首相以身殉國, 可謂社稷之臣矣。” 仍命經筵講《大學衍義》, 賜閔公豹皮。 《衍義》進講自此始。 宣廟登極, 閔公首入相府。【《涪溪記聞》。】
번역문:
을축년(乙丑年, 1565)⁴¹에 명종(明廟)⁴²께서 편찮으신데 후사(儲嗣)가 정해지지 않아 조정 안팎이 불안해하니(遑遑), 민공(閔公) 기(箕)가 당시 경(卿)의 지위⁴³에 있으면서 몰래 수상(首相)⁴⁴ 이준경(李浚慶)⁴⁵에게 말하였다. “상(上)의 병환이 위독하신데, 공(公)께서 국정(國政)을 담당하면서 어찌 사직(社稷)⁴⁶을 걱정함이 없으십니까?” 이공(李公)이 크게 깨닫고 들어가 후사를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의 말씀(天語)은 이미 분별할 수 없었다. 인순왕후(仁順王后)⁴⁷가 말하였다. “순회세자(順懷世子)⁴⁸가 졸(卒)하였을 때, 상께서 덕흥군(德興君)⁴⁹의 셋째 아들⁵⁰을 보시고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진인(眞人)⁵¹이 이미 나왔으니, 내 아들은 마땅히 죽었구나.’ 하셨습니다.” 이준경이 말하였다.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침내 장수에게 명하여 선조(宣廟)⁵²의 잠저(潛邸)⁵³를 호위하게 하였으나, 명종께서는 알지 못하셨다. 병환이 잠시 나아 경연(經筵)⁵⁴을 열자, 민공이 스스로 특진관(特進官)⁵⁵으로서 입시(入侍)하기를 청하고, 이공이 상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옥후(玉候)⁵⁶께서 편찮으시어 온 나라가 두려워하며 모두 국본(國本)⁵⁷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臣)은 죄를 기다리는 대신(大臣)으로서 종사(宗社)⁵⁸를 위해 계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옥색(玉色)⁵⁹이 기뻐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셨다. “나의 병이 어찌 죽음에 이르렀겠는가? 대신이 미리 이 일을 도모하는가?” 민공이 소매 속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⁶⁰ 정국본(定國本)의 권(卷)을 꺼내어 올리며 아뢰었다. “대신이 나라를 위해 꾀하는데 어찌 자신의 안위를 돌보겠습니까? 고금(古今)의 혼란과 멸망은 항상 후사를 정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았습니다. 만약 이 책을 보시면 성인(聖人)께서 마땅히 스스로 아실 것입니다.” 명종께서 자세히 보시고 안색이 비로소 편안해지시며 말씀하셨다. “수상(首相)이 몸으로써 나라에 순직(殉國)하니, 가히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할 만하다.” 이어서 경연(經筵)에 명하여 《대학연의》를 강론하게 하고, 민공에게 표범 가죽(豹皮)⁶¹을 하사하였다. 《대학연의》의 진강(進講)⁶²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선조께서 등극하시자 민공이 첫 번째로 상부(相府)⁶³에 들어갔다.【《부계기문(涪溪記聞)》⁶⁴에서 인용】
주석:
41. 을축년(1565): 명종 20년.
42. 명묘(明廟):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의 묘호(廟號).
43. 경위(卿位): 높은 벼슬자리. 당시 민기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였다.
44.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
45.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역임했다.
46. 사직(社稷): 토지신과 곡식신. 국가 또는 왕조를 상징한다.
47.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1575): 명종의 왕비. 심강(沈鋼)의 딸.
48.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의 맏아들. 일찍 죽어 명종의 후사가 끊겼다.
49. 덕흥군(德興君, 1530-1559): 중종의 서자(庶子)이자 명종의 이복형. 이름은 이초(李岹). 선조의 생부이다. 사후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존되었다.
50.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 훗날의 선조(宣祖)이다.
51. 진인(眞人): 참된 사람. 비범한 인물, 또는 천명을 받은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명종이 어린 하성군에게서 왕재(王材)를 보았음을 의미한다.
52. 선묘(宣廟):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묘호.
53. 잠저(潛邸):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54.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55. 특진관(特進官): 경연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직책이 없는 고위 관료 중에서 임금이 특별히 지명하여 경연에 참석하게 한 관원.
56. 옥후(玉候): 임금의 안후(安候), 즉 건강 상태를 높여 부르는 말.
57. 국본(國本): 나라의 근본. 왕위 계승자, 즉 세자(世子)를 의미한다.
58. 종사(宗社):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국가 또는 왕조를 의미한다.
59.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을 높여 부르는 말.
60. 《대학연의(大學衍義)》: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의 내용을 부연하여 편찬한 제왕학(帝王學) 교재.
61. 표피(豹皮): 표범 가죽. 귀한 물품으로, 임금이 공이 있는 신하에게 상으로 내렸다.
62. 진강(進講): 신하가 임금 앞에서 경서나 역사 등을 강론하는 것.
63. 상부(相府): 재상(宰相)의 관청, 즉 의정부(議政府)를 의미한다. 선조 즉위 후 민기가 우의정으로 임명된 것을 말한다.
64.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중기의 학자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지은 일기 형식의 기록. 호는 미암(眉巖) 또는 부계(涪溪)이다.
원문:
閔箕之判銓曹也, 李珥爲郞, 每欲銓選以公, 防請托之路, 箕輒戒以勿過越生事。 珥語人曰: “閔公固賢相, 但畏小人, 而不畏君子。” 人問其故, 珥曰: “使閔公得罪於⁶⁵君子, 不過不置顯班而已。 小人性刻, 若相忤則或有滅族之禍, 故閔公畏之。” 識者以閔箕工於涉世, 不取重焉。
번역문:
민기(閔箕)가 전조(銓曹)⁶⁶를 관장할 때, 이이(李珥)⁶⁷가 정랑(正郞)으로 있었는데, 매번 전선(銓選)⁶⁸을 공정하게 하여 청탁(請托)의 길을 막으려 하자, 민기가 번번이 지나치게 일을 만들어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이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민공(閔公)은 진실로 현명한 재상(賢相)이지만, 다만 소인(小人)을 두려워하고 군자(君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이이가 말하였다. “민공으로 하여금 군자에게 죄를 짓게 한다면, 현달한 반열(顯班)에 두지 않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소인(小人)은 성품이 각박하여 만약 서로 거스르면 혹 멸족(滅族)의 화(禍)가 있을 수 있으므로, 민공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식자(識者)들은 민기가 세상살이(涉世)에 능숙하다고 여겨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주석:
65. [주-D003] 於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대동야승(大東野乘)・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 1년 기록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득죄어군자(得罪於君子)'로 '군자에게 죄를 짓다'는 의미가 된다.
66. 전조(銓曹): 관원의 선발과 임명을 담당하던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통틀어 이르는 말. 여기서는 이조(吏曹)를 가리킨다. 민기는 이조 판서를 역임했다.
67.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호는 율곡(栗谷).
68. 전선(銓選): 관원을 가려서 뽑음. 인사 행정을 의미한다.
원문:
右議政閔箕雖爲時論所許, 而貪財好色, 無行可觀。 旣登相位, 外若扶植善類, 而內實瞻前顧後, 不知者皆以賢相稱之。 許曄謁李浚慶, 浚慶曰: “今人皆以道學推趙公光祖, 而朴英、鄭鵬, 世無識者, 何歟?” 曄曰: “不特朴英、鄭鵬也, 近日閔公箕學行俱備, 人無知者。” 浚慶曰: “子欲比閔箕於朴英、鄭鵬乎?” 曄曰: “閔公居卿相之位, 故人不推仰。 若以閔公學行, 居于淸涼山或智異山, 則一代尊敬, 豈此而已乎?” 浚慶不以爲然。【竝《石潭日記》。】
번역문:
우의정 민기(閔箕)가 비록 당시의 여론(時論)에 인정받았으나, 재물을 탐하고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볼 만한 행실(行實)이 없었다. 이미 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르자, 밖으로는 선량한 무리(善類)를 붙들어 세우는 듯하였으나 안으로는 실로 앞뒤를 재며 눈치만 살피니(瞻前顧後)⁶⁹, 알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현명한 재상(賢相)이라고 칭찬하였다. 허엽(許曄)⁷⁰이 이준경(李浚慶)을 찾아뵙자, 이준경이 말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조공(趙公) 광조(光祖)⁷¹를 도학(道學)⁷²으로 추대하는데, 박영(朴英)⁷³, 정붕(鄭鵬)⁷⁴은 세상에 아는 자가 없으니 어째서인가?” 허엽이 말하였다. “비단 박영과 정붕뿐만이 아닙니다. 근래의 민공(閔公) 기(箕)도 학문과 행실(學行)을 모두 갖추었으나 사람들이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이준경이 말하였다. “그대는 민기를 박영, 정붕에 비유하고자 하는가?” 허엽이 말하였다. “민공은 경상(卿相)⁷⁵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추대하고 우러르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민공의 학행(學行)으로써 청량산(淸涼山)이나 지리산(智異山)에 거처한다면 온 시대의 존경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이준경은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다.【이상은 《석담일기(石潭日記)》⁷⁶에서 인용】
주석:
69. 첨전고후(瞻前顧後): 앞을 보고 뒤를 돌아봄. 앞뒤를 재며 망설이거나 눈치를 살피는 태도를 의미한다.
70. 허엽(許曄, 1517-158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초당(草堂).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허균(許筠)의 아버지이다.
71.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개혁 정치가. 호는 정암(靜庵).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희생되었다. 사림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았다.
72. 도학(道學): 성리학(性理學)의 다른 이름.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고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
73. 박영(朴英, 1471-1540):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학자. 호는 송당(松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74. 정붕(鄭鵬, 1467-1512): 조선 연산군, 중종 때의 문신, 학자. 호는 신당(莘堂).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복귀했다. 박영과 정붕은 조광조 이전에 덕행으로 이름났으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림 학자들을 예로 든 것이다.
75. 경상(卿相): 높은 벼슬아치. 재상(宰相)을 의미한다.
76. 《석담일기(石潭日記)》: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이이(李珥)가 지은 일기 형식의 기록. 호는 석담(石潭) 또는 율곡(栗谷). 당대의 정치, 사회, 인물 등에 대한 기록과 평가를 담고 있다.
원문:
閔文景箕淸修好善, 殆明、宣間名相也。 花潭每歎其賢, 及沒而退溪狀其行, 稱道亦盛。 其定國本時, 以袖進《大學衍義》得力, 以啓宣廟四十年之治, 又爲東皐相之所讓功也。 《石潭野史》論貶大過, 至引婢妾事以著之, 此殆當時諸賢所不免, 何可以是律之耶? 世稱閔公家與白休庵家對門, 二婦人相失, 聞見註誤, 以致如此云, 其或然歟?【《南溪雜著》。】
번역문:
문경공(文景公) 민기(閔箕)는 청렴하게 행실을 닦고 선(善)을 좋아하여, 거의 명종(明宗), 선조(宣祖) 연간의 이름난 재상(名相)이었다. 화담(花潭)⁷⁷은 매번 그의 현명함을 감탄하였고, 그가 죽자 퇴계(退溪)⁷⁸가 그 행장(行狀)을 지어 칭송함이 또한 성대하였다. 그가 국본(國本)을 정할 때 소매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꺼내 올려 힘을 얻어 선조(宣廟) 40년의 다스림을 열었으니, 또한 동고(東皐) 재상⁷⁹이 공(功)을 양보한 바가 되었다. 《석담야사(石潭野史)》⁸⁰에서 논하여 폄하함이 너무 지나쳐, 비첩(婢妾)의 일까지 끌어와 기록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거의 당시의 여러 현인(賢人)들도 면하지 못했던 바이니, 어찌 이것으로써 그를 재단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일컫기를, 민공(閔公)의 집과 백휴암(白休庵)⁸¹의 집이 문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두 부인(婦人)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고 들은 것에 잘못 기록함이 있어 이와 같음에 이르렀다고 하니, 혹 그러한가?【《남계잡저(南溪雜著)》⁸²에서 인용】
주석:
77.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호. 조선 중기의 학자. 기(氣) 철학으로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했다.
78.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호.
79. 동고 상(東皐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을 가리킨다. 국본을 정하는 데 있어 민기의 공이 컸지만,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의 결단과 역할도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양공(讓功)'은 공을 민기에게 돌렸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80. 《석담야사(石潭野史)》: 이이(李珥)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야사(野史). 《석담일기》와 동일한 책을 가리키거나 혹은 별개의 책일 수 있다. 민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81. 백휴암(白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82. 《남계잡저(南溪雜著)》: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지은 저술 모음집. 박세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그는 《석담일기》 등에 나타난 민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 변호하며, 당시의 풍문이나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탁(李鐸)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鐸【景¹肅公。】
字善鳴, 全義人。 正德己巳生。 中宗二十六年辛卯進士, 乙未登第。 選入翰苑, 歷吏郞、舍人、直提學、大司諫、副提學、湖西觀察使、大司憲、禮・吏曹判書。 宣祖辛未拜相, 至領議政。 丙子卒, 年六十八。
번역문:
이탁(李鐸)【경숙공(景肅公)²이다.】
자는 선명(善鳴)이고, 전의(全義) 사람이다.³ 정덕(正德) 기사년(1509)⁴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6년 신묘년(1531)에 진사(進士)⁵가 되고, 을미년(153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발되어 한원(翰苑)⁶에 들어갔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⁷, 직제학(直提學)⁸, 대사간(大司諫)⁹, 부제학(副提學)¹⁰,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¹¹, 대사헌(大司憲)¹²,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조 판서(吏曹判書)¹³를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신미년(1571)에 재상(宰相)에 제수되어 영의정(領議政)¹⁴에 이르렀다. 병자년(1576)¹⁵에 졸(卒)하니, 나이는 68세였다.
주석:
- [주-D001] 景 : 《약포유고(藥圃遺稿)・고조고……약포선생가장(高祖考……藥圃先生家狀)》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정(貞)”이 되어야 한다. 즉, 시호는 정숙공(貞肅公)이다.
- 경숙공(景肅公): 이탁의 시호. 주석 [주-D001]에서 지적하듯 정숙공(貞肅公)이 맞다.
- 전의인(全義人): 본관이 전의(全義,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임을 나타낸다. 전의 이씨(全義 李氏)이다.
- 정덕(正德) 기사년(1509): 정덕은 명(明)나라 무종(武宗)의 연호이다. 정덕 4년, 조선 중종 4년에 해당한다.
- 진사(進士):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생원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의 별칭.
- 사인(舍人): 여기서는 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가리킬 수 있다.
-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위.
-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간쟁(諫諍)을 담당했다.
-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벼슬.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위이다.
-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 충청도 관찰사.
-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조 판서(吏曹判書): 각각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 병자년(1576): 선조 9년.
원문:
公自幼氣度不凡, 見者奇之。 議政公嘗曰: “此兒終必大吾家。” 年十五¹⁶, 陪叔母下南鄕, 於逆旅, 僮僕與人鬨, 隣人稱被歐者將死, 到寓舍作亂, 一行喪氣。 公出踞繩床, 招問其由, 卽縛其奴付隣人曰: “殺人者, 法當償命, 恐其逃, 故今付汝告官。 但歐不至傷, 而汝敢作亂, 則汝亦有罪。” 言已杜門, 戒僮僕不言。 夜半, 隣人潛還其奴。 議政公聞之, 喜曰: “此非厥兄所能爲, 吾所以必遣此兒也。”
번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기상과 도량(氣度)이 평범하지 않아 보는 자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의정공(議政公)¹⁷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끝내 반드시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셨다. 나이 15세¹⁸에 숙모(叔母)를 모시고 남쪽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여관(逆旅)에서 동복(僮僕)이 어떤 사람과 떠들썩하게 다투자 이웃 사람이 구타당한 자가 장차 죽게 되었다고 일컬으며, 머물던 숙소에 와서 난동을 부리니 일행이 기가 꺾였다(喪氣). 공이 나가 승상(繩床)¹⁹에 걸터앉아 불러서 그 연유를 묻고, 즉시 그 종을 묶어 이웃 사람에게 넘겨주며 말하였다. “사람을 죽인 자는 법에 따라 마땅히 목숨으로 갚아야 하니, 그가 도망할까 염려되므로 지금 너에게 맡겨 관가에 고하게 한다. 다만 때렸으나 상해에 이르지 않았는데 네가 감히 난동을 부렸다면 너 또한 죄가 있다.” 말을 마치고 문을 닫고 동복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한밤중에 이웃 사람이 몰래 그 종을 돌려보냈다. 의정공께서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그 형이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내가 반드시 이 아이를 보낸 까닭이다.”라고 하셨다.
주석:
16. [주-D002] 五 : 《율곡전서(栗谷全書)・영의정이공행장(領議政李公行狀)》에는 “칠(七)”로 되어 있다. 즉, 17세 때의 일이라는 기록이다.
17. 의정공(議政公): 아버지 이효조(李孝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효조는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아들이 영의정이 되면서 높여 부른 표현일 수 있다.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18. 15세(十五): 주석 [주-D002] 참조.
19. 승상(繩床): 노끈이나 줄로 엮어 만든 걸상. 호상(胡床) 또는 교의(交椅)라고도 한다.
원문:
爲舍人, 與陳復昌同僚, 竟日相對, 無一語及世務, 只事杯酌戲謔。 復昌語人曰: “某也佯狂外我。” 聞者危之。
번역문: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진복창(陳復昌)²⁰과 동료였는데, 온종일 서로 마주하고도 세상 돌아가는 일(世務)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술잔을 주고받으며 희롱하고 농담하는 일만 하였다. 진복창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무개(某)가 거짓 미친 체하며 나를 외면한다.”고 하니, 듣는 자들이 위태롭게 여겼다.
주석:
20. 진복창(陳復昌, ?-1563): 조선 중종, 명종 때의 문신. 이기와 함께 권력을 휘둘렀으나, 명종 말년에 사림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원문:
戊申, 陞司憲府執義。 時大司憲具公壽聃欲劾李芑貪縱, 議于私第, 公韙其言從之。
번역문:
무신년(戊申年, 1548)²¹에 사헌부 집의(執義)²²로 승진하였다. 이때 대사헌 구공(具公) 수담(壽聃)²³이 이기(李芑)²⁴의 탐욕스럽고 방자함(貪縱)을 탄핵하고자 사저(私第)에서 의논하자, 공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겨 따랐다.
주석:
21. 무신년(1548): 명종 3년.
22. 집의(執義): 사헌부의 정3품 관직. 대사헌, 집의 다음가는 직위이다.
23. 구수담(具壽聃, 1490-1549): 조선 중종, 명종 때의 문신. 호는 이요당(二樂堂).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을사사화 관련자로 몰려 사사되었다.
24. 이기(李芑, 1476-1552): 조선 중종, 명종 때의 문신. 을사사화를 주도하여 권력을 잡고 영의정에 올랐다. 탐욕스럽고 전횡을 일삼아 비판을 받았다.
원문:
癸丑赴京, 淸愼律己, 行橐蕭然, 從者畏戢。 到一驛館, 館人曰: “此舍有妖。” 使臣皆不寓, 公强宿焉。 其夜適患霍亂, 從者疑恐, 請移他舍, 公執不聽。 自後邪說始息。
번역문:
계축년(癸丑年, 1553)²⁵에 서울로 갈 때, 청렴하고 신중하게 자신을 단속하여(淸愼律己) 행장(行橐)이 쓸쓸하였고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하며 조심하였다(畏戢). 한 역관(驛館)에 도착하니, 관리가 말하기를, “이 집에 요사스러운 기운이 있습니다.” 하여 사신(使臣)들이 모두 묵지 않으려 하였으나, 공이 굳이 그곳에서 묵었다. 그날 밤 마침 곽란(霍亂)²⁶을 앓자 따르는 자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다른 집으로 옮기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고집하며 듣지 않았다. 이로부터 요사스러운 말이 비로소 그쳤다.
주석:
25. 계축년(1553): 명종 8년.
26. 곽란(霍亂): 급성 위장병의 일종. 갑작스러운 구토와 설사를 동반한다.
원문:
尹元衡以妾爲妻, 倡起庶孼許通之論²⁷, 大司憲尹春年助成之, 人莫敢言者。 公以副提學, 上箚論之。
번역문:
윤원형(尹元衡)이 첩(妾) 정난정(鄭蘭貞)을 아내로 삼고, 서얼(庶孼)의 관직 등용을 허락하는(許通) 의논²⁸을 앞장서 일으키자, 대사헌 윤춘년(尹春年)²⁹이 이를 조장하였는데, 사람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공이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차자(箚子)를 올려 이를 논박하였다.
주석:
27. [주-D003] 論 : 《율곡전서・영의정이공행장》에는 “로(路)”로 되어 있다. '서얼허통지로(庶孼許通路)'는 '서얼에게 관직 등용의 길을 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28. 서얼허통지론(庶孼許通之論): 서얼(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에게 관직 진출을 허용하자는 주장. 윤원형은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이를 추진하려 했으나,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사림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29. 윤춘년(尹春年, 1514-1567):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윤원형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원문:
李樑用事, 公笑謂同志曰: “君與我不知權門。” 或問曰: “樑炙手可熱, 公一不踵門, 無乃太露形跡乎?” 公笑曰: “如我老病之腰, 豈可屈於昔日郞屬乎?”
번역문:
이량(李樑)³⁰이 권력을 잡자, 공이 웃으며 동지(同志)에게 말하였다. “그대와 나는 권세 있는 집안(權門)을 알지 못하오.” 어떤 이가 묻기를, “이량의 권세가 손을 데일 정도로 뜨거운데(炙手可熱)³¹, 공께서 한 번도 그 문을 찾지 않으시니 너무 속마음을 드러내는(露形跡) 것이 아닙니까?”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나처럼 늙고 병든 허리를 어찌 지난날의 부하(郞屬)³²에게 굽힐 수 있겠는가?”
주석:
30. 이량(李樑, 1519-1563): 조선 명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심의겸(沈義謙) 등 사림 세력과 대립하다가 탄핵을 받고 몰락했다.
31. 자수가열(炙手可熱): 손을 갖다 대면 데일 정도로 뜨겁다는 뜻으로, 권세가 매우 왕성함을 비유한다.
32. 낭속(郞屬): 정랑(正郞)과 좌랑(佐郞) 등 육조(六曹)의 실무 관료. 이탁이 이량보다 관직 경력이 위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원문:
乙丑, 尹元衡罪盈惡稔, 公論激發。 公時爲憲長, 與大司諫朴公淳率同僚伏閤請遠竄, 三公繼發。 至於擧朝立廷, 乃命削爵放歸田里。 元衡之奴有怙勢爲民害者, 自府拿致杖殺之。 權奸旣去, 出入其門者, 多不自安。 公曰: “一時相識, 豈盡其黨乎? 但當治其甚者而已。” 持論甚平, 要在鎭靖, 人服其量。
번역문:
을축년(乙丑年, 1565)에 윤원형의 죄가 가득 차고 악이 무르익자 공론(公論)이 세차게 일어났다. 공이 당시 헌장(憲長)³³으로서 대사간 박공(朴公) 순(淳)³⁴과 함께 동료들을 이끌고 궁궐 문 앞에 엎드려(伏閤)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하니, 삼공(三公)³⁵이 잇달아 나섰다. 온 조정이 뜰에 늘어서기에 이르자, 마침내 관작(爵)을 삭탈하고 고향(田里)으로 내쫓으라는 명이 내려졌다. 윤원형의 종 중에 세력을 믿고 백성에게 해를 끼친 자가 있었는데, 부(府)³⁶에서 스스로 잡아다가 장(杖)으로 쳐 죽였다. 권세 있는 간신(權奸)이 제거되자 그 문을 드나들던 자들이 대부분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한때 서로 알던 사이인데 어찌 모두 그의 무리(黨)이겠는가? 다만 마땅히 그 심한 자만 다스려야 한다.” 하니, 주장이 매우 공평하고 요점은 안정시키는(鎭靖) 데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도량(量)에 탄복하였다.
주석:
33. 헌장(憲長): 사헌부의 으뜸 벼슬, 즉 대사헌(大司憲)을 가리킨다.
34. 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사암(思庵). 영의정을 역임했다.
35.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당시 영의정은 이준경(李浚慶), 좌의정은 권철(權轍), 우의정은 민기(閔箕)였다.
36. 부(府): 사헌부(司憲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拜禮曹判書。 時, 穆宗皇帝登極, 翰林院檢討許國、給事中魏時亮以詔使入境。 明廟昇遐, 宣祖以權知國事, 將迓詔使, 兩使皆知禮者, 乃謂問禮官曰: “權知國事, 未受命爲王, 當與群臣同服。” 事出變禮, 典故無據, 往復未定。 公乃以世子七章服爲請, 詔使許之。 又謂: “迎詔時, 不宜乘輦。” 擧朝憂憫, 公善辭得請。 相禮之際, 容止可觀, 領議政李浚慶乃歎曰: “某當大事, 風力過人, 不可及也。”【竝栗谷撰行狀。】
번역문: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때 목종 황제(穆宗皇帝)³⁷가 등극하여 한림원 검토(翰林院檢討) 허국(許國)과 급사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사신으로 국경에 들어왔다. 명종(明廟)께서 승하(昇遐)하시고 선조께서 권지국사(權知國事)³⁸로서 장차 조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詔使)을 맞이하려 하는데, 두 사신이 모두 예를 아는 자들이라 예(禮)를 묻는 관리(問禮官)에게 일러 말하였다. “권지국사(權知國事)는 아직 명(命)을 받아 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여러 신하와 같은 복장을 해야 합니다.” 일이 변례(變禮)³⁹에서 나왔고 전거(典故)에 근거가 없어, 의견이 오가며 정해지지 못하였다. 공이 이에 세자(世子)의 칠장복(七章服)⁴⁰으로 할 것을 청하니, 조서 사신이 이를 허락하였다. 또 이르기를, “조서를 맞이할 때 연(輦)⁴¹을 타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온 조정이 근심하고 안타까워하였으나, 공이 좋은 말로 설득하여 허락을 얻었다. 예를 집행할 때(相禮之際) 용모와 거동(容止)이 볼 만하니,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무개(某)는 큰일을 당하여 풍채와 능력(風力)이 남보다 뛰어나니 따라갈 수가 없다.”【이상은 율곡(栗谷)이 지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37. 목종 황제(穆宗皇帝): 명(明)나라 제13대 황제 융경제(隆慶帝, 재위 1567-1572).
38. 권지국사(權知國事): 국왕이 죽고 다음 왕이 즉위하기 전, 또는 세자가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볼 때 임시로 국정을 맡는 것을 의미한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로서 왕위를 계승했기에 즉위 초 '권지국사' 칭호를 사용했다.
39. 변례(變禮): 평상시의 예법이 아닌, 특수한 상황에 적용되는 예법.
40. 칠장복(七章服): 왕세자의 예복(禮服). 용(龍), 산(山), 화(火), 화충(華蟲), 종이(宗彝), 조(藻), 분미(粉米)의 일곱 가지 문양(章)이 그려져 있다. 국왕의 구장복(九章服)보다는 격이 낮지만, 신하의 복장보다는 높아 절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41. 연(輦): 임금이 타는 가마.
원문:
三年春正月, 吏曹判書朴淳辭疾免, 以李鐸爲吏曹判書。 鐸時望雖不及淳, 而愛士有局量, 及居銓部, 務張公道, 政事比淳爲優矣。
번역문:
3년(선조 3년, 1570) 봄 정월에 이조 판서 박순(朴淳)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면직되자, 이탁(李鐸)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탁은 당시의 명망(時望)이 비록 박순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선비를 아끼고 국량(局量)⁴²이 있었으며, 전부(銓部)⁴³에 거(居)하여서는 공정한 도리(公道)를 펼치기를 힘써, 정사(政事)는 박순보다 나았다.
주석:
42. 국량(局量): 도량(度量). 사물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마음과 재능.
43. 전부(銓部):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 즉 이조(吏曹)를 가리킨다.
원문:
自中廟朝, 權奸例⁴⁴執國柄, 賄賂成風, 仕路淆濁。 元衡、通源相繼得罪, 朝野拭目, 佇見淸明之政, 而居銓衡者, 未能盡革舊習, 閔箕雖有時望, 亦不免以干請除官。 及李鐸爲吏曹判書, 務張公道, 以爲: “初入仕者, 若非上舍生, 例試蔭才, 賢者豈屑於就試乎?” 乃使郞僚薦知名之士啓請, 被郞薦者, 雖不試才, 亦得補官。 於是仕路稍淸, 流俗群非以爲: “輕毁舊規, 創開新例。” 鐸與正郞具鳳齡被謗而不撓。
번역문:
중종(中宗) 시대부터 권세 있는 간신(權奸)들이 으레 국정(國柄)을 잡고 뇌물(賄賂)이 풍조를 이루어 벼슬길(仕路)이 어지럽고 혼탁하였다. 윤원형(元衡)과 이량(通源, 이량의 자)이 서로 잇달아 죄를 얻자 조정과 민간(朝野)이 눈을 씻고 맑고 밝은 정치를 보기를 기다렸으나, 전형(銓衡)⁴⁵을 맡은 자가 옛 습속(舊習)을 다 혁파하지 못하여, 민기(閔箕)가 비록 당시의 명망이 있었으나 또한 청탁(干請)으로 관직을 제수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탁(李鐸)이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공정한 도리(公道)를 펼치기를 힘쓰며 생각하기를,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는 자가 만약 상사생(上舍生)⁴⁶이 아니면 으레 음관(蔭官)의 재능을 시험하니⁴⁷, 현명한 자가 어찌 시험에 나아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이에 낭료(郞僚)⁴⁸로 하여금 이름난 선비(知名之士)를 천거하여 아뢰어 청하게 하니, 낭료에게 천거된 자는 비록 재능을 시험하지 않더라도 또한 관직에 보임될 수 있었다. 이에 벼슬길이 조금 맑아졌으나, 세속에서는 여럿이 비난하며 말하기를, “가벼이 옛 규정(舊規)을 헐고 새로운 규례(新例)를 처음 열었다.”라고 하였다. 이탁은 정랑(正郞) 구봉령(具鳳齡)⁴⁹과 함께 비방을 받았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주석:
44. [주-D004] 例 : 저본(底本)에는 “도(倒)”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2년 및 《율곡전서・경연일기》 선조 2년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예집국병(例執國柄)'은 '으레 국정을 잡다'는 의미이다.
45. 전형(銓衡): 저울대(衡)로 무게를 달 듯이(銓) 인재를 공정하게 헤아려 뽑는다는 뜻으로, 인재 등용 및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책이나 기관(이조)을 가리킨다.
46. 상사생(上舍生): 성균관 유생 중 학업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주던 명칭. 상사생은 특별 시험을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47. 예시음재(例試蔭才): 으레 음관(蔭官)의 재능을 시험함. 음관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이나 가문에 힘입어 관직에 나아가는 사람 또는 그 벼슬을 말한다. 음관을 임용할 때 형식적인 시험을 치렀음을 의미한다. 이탁은 이러한 형식적인 시험을 통해 현자를 얻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48. 낭료(郞僚): 정랑(正郞), 좌랑(佐郞) 등 이조의 실무 관리.
49. 구봉령(具鳳齡, 1526-1586): 조선 중기의 문신. 이조 정랑 등을 역임했다.
원문:
以李鐸爲右議政。 鐸雖短於學術, 淳厚有器度, 且有好善之量, 故時望歸之。 但無風節, 臨難不能無屈撓, 居相位, 謹飭無他而已。【竝《石潭日記》。】
번역문:
이탁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탁은 비록 학술(學術)에는 부족하였으나, 순박하고 돈후하며(淳厚) 기량과 도량(器度)이 있었고, 또한 선(善)을 좋아하는 도량(好善之量)이 있었으므로 당시의 명망(時望)이 그에게 돌아갔다. 다만 풍절(風節)⁵⁰이 없어 어려움에 임하여 굽히고 꺾임(屈撓)이 없지 못하였고,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삼가고 단속(謹飭)하며 다른 것이 없을 뿐이었다.【이상은 《석담일기》에서 인용】
주석:
50. 풍절(風節): 바람과 절개. 꿋꿋한 기개와 절조를 의미한다.
원문:
時朝廷設正供都監, 欲矯貢物防納之弊。 公爲提調, 夙夜憂勞, 思善規畫, 而上志不欲更張, 衆論不一。 公謂人曰: “先王成憲, 雖不可變, 法久弊生, 不可無損益。 今拘仍舊, 不能變通, 豈今日救焚拯溺之意乎?”
번역문:
이때 조정에서 정공도감(正供都監)⁵¹을 설치하여, 공물(貢物)을 방납(防納)⁵²하는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공이 제조(提調)⁵³가 되어 밤낮으로 근심하고 수고하며(夙夜憂勞) 좋은 계획(規畫)을 생각하였으나, 상(上)의 뜻이 제도를 고치려(更張) 하지 않았고 여러 의논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선왕(先王)의 정해진 법(成憲)은 비록 바꿀 수 없으나,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니 덜고 더함(損益)이 없을 수 없다. 지금 옛것에 얽매여 변통(變通)하지 못하니, 어찌 오늘날 불을 끄고 물에 빠진 이를 건지는(救焚拯溺)⁵⁴ 뜻이겠는가?”
주석:
51. 정공도감(正供都監): 공물 제도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선조 때 임시로 설치되었던 관청으로 추정된다. 공물 제도를 정비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
52. 방납(防納): 조선 시대 공물(貢物) 납부를 중간에서 대신해주고 폭리를 취하던 행위. 공납(貢納) 제도의 대표적인 폐단이었다.
53. 제조(提調): 조선 시대 여러 관청에 설치되었던 임시 또는 겸임 관직. 해당 업무를 총괄, 감독했다.
54. 구분증닉(救焚拯溺): 불타는 것을 끄고 물에 빠진 이를 건져냄.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비유한다. 공물 방납의 폐해가 그만큼 심각했음을 나타낸다.
원문:
時侍臣有建白, 請依祖宗故事, 以未出身有學行者, 參補臺職, 上命議于諸大臣。 公獻議曰: “帝王之用人, 惟在於得人, 何關出身與否乎? 苟有力行踐履, 恬靜自守, 無意衒玉者, 則雖置之公輔可也, 何獨臺職乎? 近來專以科第用人, 才德之士, 多沈而不揚。 至如曺植, 乃一時遺逸, 而除拜不過宂官, 終不得吐一言而死, 此賢者所以不至也。 自今臺官, 參用未出身人, 一以復祖宗之規, 一以恢用人之路, 則豈不有光於聖治乎?”
번역문:
이때 시신(侍臣)⁵⁵ 중에 건의(建白)하는 자가 있어,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출신(出身)⁵⁶하지 않았으나 학문과 행실(學行)이 있는 자를 대직(臺職)⁵⁷에 참여시켜 보임할 것을 청하니, 상께서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의논을 올리며 아뢰었다. “제왕(帝王)의 인재 등용은 오직 인재를 얻는 데 있으니, 어찌 출신(出身) 여부와 관련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힘써 행하고 몸소 실천하며(力行踐履)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스스로 지키며(恬靜自守)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려(衒玉)⁵⁸ 뜻이 없는 자라면, 비록 삼공(三公)과 사보(四輔)⁵⁹의 자리에 두더라도 옳거늘, 어찌 유독 대직(臺職)뿐이겠습니까? 근래 오로지 과거 급제(科第)로써 사람을 등용하여 재능과 덕행이 있는 선비(才德之士)가 대부분 침체되어 드러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식(曺植)⁶⁰과 같은 이는 바로 한 시대의 유일(遺逸)⁶¹인데도 제수된 벼슬이 용관(宂官)⁶²에 지나지 않아, 끝내 한마디 말도 내뱉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것이 현명한 자가 조정에 이르지 않는 까닭입니다. 지금부터 대관(臺官)에 출신하지 않은 사람을 참여시켜 등용하여, 한편으로는 조종(祖宗)의 규범을 회복하고 한편으로는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면, 어찌 성스러운 다스림(聖治)에 빛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주석:
55. 시신(侍臣):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56. 출신(出身):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감. '미출신(未出身)'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를 가리킨다.
57. 대직(臺職): 대관(臺官)의 직책.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을 가리킨다.
58. 현옥(衒玉): 구슬을 내보이며 자랑함. 자신의 재능이나 학식을 뽐내며 관직을 구하는 것을 비유한다.
59. 공보(公輔):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사보(四輔: 좌보(左輔), 우필(右弼), 전의(前疑), 후승(後丞)). 임금을 보좌하는 최고위 관직을 통칭한다.
60. 조식(曺植, 1501-1572): 조선 중기의 저명한 처사(處士). 호는 남명(南冥).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 사림의 정신적 지주였다.
61. 유일(遺逸): 재능과 덕행이 있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숨어사는 선비.
62. 용관(宂官): 중요하지 않은 한산한 벼슬. 조식은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했고, 잠시 맡았던 벼슬도 실권이 없는 직책이었다.
원문:
時西海坪胡人梗我驅逐伐穀之師, 我軍奔北。 議者欲擧兵窮其巢穴, 以刷其恥。 公曰: “興師動衆, 必稽天時人事, 不可輕擧。 今者天災疊現, 兵力不完, 只可固守待變, 非擧兵深入之時也。” 軍竟不發。
번역문:
이때 서해평(西海坪)⁶³의 오랑캐(胡人)⁶⁴가 곡식을 베는 우리 군대(伐穀之師)를 몰아내는 것을 가로막아 우리 군대가 패주(奔北)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군사를 일으켜 그 소굴(巢穴)을 끝까지 공격하여 그 치욕을 씻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동원하는 것(興師動衆)은 반드시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상고해야 하니 가벼이 일으킬 수 없습니다. 지금 천재(天災)가 거듭 나타나고 병력(兵力)이 완전하지 못하니, 다만 굳게 지키며 변화를 기다릴 수 있을 뿐, 군사를 일으켜 깊이 들어갈 때가 아닙니다.” 군대가 마침내 출동하지 않았다.
주석:
63. 서해평(西海坪): 황해도 서쪽 해안 지역의 평야 지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64. 호인(胡人): 오랑캐. 북방 민족을 통칭하는 말이다. 당시 여진족(女眞族)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원문:
甲戌春, 以白虹貫日之變, 上下手敎, 自責求言。 一日, 上御丕顯閣, 引見大臣侍從, 以災異爲憂。 公進曰: “君王所當克念者, 敬天勤民玆兩事耳。 伏見求言手敎, 出於至誠, 成湯六責, 蔑以尙玆。 古人曰: ‘非言⁶⁵之艱, 行之惟艱。’ 又曰: ‘敬天以實, 不以文。’ 苟能終始至誠, 無一毫私僞雜於其間, 則敬天勤民, 克盡其實矣。 張南軒曰: ‘人君不可以蒼蒼者爲天, 當求之念慮之間, 一念纔不是, 便是上帝震怒。’ 以此見之, 災異由於人君之一念, 可不畏哉? 念玆在玆, 無或少忽焉。”
번역문:
갑술년(甲戌年, 1574)⁶⁶ 봄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고(白虹貫日之變)⁶⁷로 인하여 상께서 직접 쓴 교서(手敎)를 내려 스스로를 책망하며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였다(求言). 하루는 상께서 비현각(丕顯閣)⁶⁸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시종(侍從)들을 인견(引見)하고 재이(災異)를 걱정하였다. 공이 나아가 아뢰었다. “군왕(君王)께서 마땅히 깊이 생각하셔야 할 바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힘쓰는(敬天勤民) 이 두 가지 일뿐입니다. 삼가 보건대, 의견을 구하는 수교(手敎)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六責)⁶⁹이라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하기가 오직 어렵다⁷⁰.’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실질로써 해야지 형식(文)으로써 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진실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한 정성으로 하여 한 터럭만큼이라도 사사로움과 거짓됨(私僞)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경천근민(敬天勤民)을 능히 그 실질을 다할 것입니다. 장남헌(張南軒)⁷¹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저 푸른 것(蒼蒼者)만을 하늘로 여겨서는 안 되고, 마땅히 생각(念慮) 사이에서 하늘을 찾아야 하니, 한 생각이 겨우 바르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상제(上帝)께서 크게 노하시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재이(災異)는 인군의 한 생각에서 말미암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생각하고 여기에 마음을 두어(念玆在玆), 혹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게 하소서.”
주석:
65. [주-D005] 言 : 《율곡전서・영의정이공행장》에도 “언(言)”으로 되어 있다. 《서경(書經)・설명중(說命中)》 및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7년 기록에 근거할 때 “지(知)”가 되어야 한다. 즉, '알기는 어렵지 않으나 행하기는 어렵다(非知之艱 行之惟艱)'는 구절이다.
66. 갑술년(1574): 선조 7년.
67. 백홍관일지변(白虹貫日之變):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현상. 고대에는 천하에 큰 변란이 일어날 징조나 임금의 부덕(不德)을 나타내는 재이(災異) 현상으로 여겼다.
68. 비현각(丕顯閣): 경복궁 안에 있던 전각. 주로 임금의 서재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69. 성탕육책(成湯六責): 상(商)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이 가뭄이 들었을 때 여섯 가지 일(정치가 절제 없었는가, 백성이 직업을 잃었는가, 궁실이 화려한가, 여알(女謁)이 성행하는가, 뇌물이 행해지는가, 참소하는 말이 성한가)을 들어 스스로를 책망하며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는 고사. 임금의 자기반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말로 쓰인다.
70. 비언지간 행지유간(非言之艱 行之惟艱): 《서경(書經)》 〈열명(說命) 중(中)〉편에 나오는 구절. 주석 [주-D005]에서 지적하듯 원문은 '비지지간(非知之艱)'이다.
71. 장남헌(張南軒): 장식(張栻, 1133-1180). 중국 남송(南宋)의 성리학자. 호는 남헌(南軒). 주희(朱熹), 여조겸(呂祖謙)과 교유하며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원문:
公資稟醇厚, 體貌豐偉, 當官處事, 必思盡職, 謹嚴自持, 少無干進之意, 而淸望自歸。 凡有君賜, 必感激起敬, 待使者盡其誠禮, 雖病中不衰。 常謂: “厚倫之道, 莫先於明世系。” 乃與同志族人, 立譜鋟梓, 分于一門, 徧及疎遠, 曰: “此於睦族, 不無少補。” 居家尙儉約, 服飾器用無金玉、綾段。 敎子弟, 每勉以淸素, 於物無所玩好, 公退, 只對客看棋而已。 家業素貧, 只資祿俸, 絶無他營。 或至乏絶, 猶以盛滿爲戒, 對子弟歎曰: “不德而致高位, 無功而享厚祿, 此招禍之道也。 汝等勿喜。” 嘗曰: “司馬溫公曰: ‘平生所爲, 未嘗有不可對人言者。’ 此則地位甚高, 人不能及。 吾於一家事, 亦未嘗有隱於人, 此吾平生用力處也。”
번역문:
공은 자질(資稟)이 순박하고 돈후하며(醇厚) 체모(體貌)가 풍채 있고 위엄 있었으며, 관직에 임하여 일을 처리함에 반드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고, 근엄(謹嚴)하게 스스로를 지켜 조금도 벼슬을 구하는(干進) 뜻이 없었으나 맑은 명망(淸望)이 저절로 돌아왔다. 무릇 임금의 하사품(君賜)이 있으면 반드시 감격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고, 사자(使者)를 대함에 그 정성과 예(誠禮)를 다하여 비록 병중(病中)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인륜(人倫)을 두텁게 하는 도리는 세계(世系)를 밝히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하고, 이에 동지(同志)인 족인(族人)들과 함께 족보(譜)를 만들어 판각(鋟梓)하여 온 집안(一門)에 나누어 주고 소원(疎遠)한 이들에게까지 두루 미치게 하며 말하였다. “이것이 종족(宗族) 간의 화목(睦族)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집에 거처할 때는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의복과 기물(服飾器用)에 금옥(金玉)이나 능단(綾段)⁷²이 없었다. 자제(子弟)들을 가르침에 매번 청렴하고 소박함(淸素)으로 힘쓰게 하였고, 물건에 대해 완호(玩好)⁷³하는 바가 없었으며, 공무에서 물러나서는 다만 손님을 대하여 바둑 두는 것을 볼 뿐이었다. 가업(家業)이 본래 빈곤하여 다만 녹봉(祿俸)에 의지하였고 다른 생업(營)은 전혀 없었다. 혹 결핍함에 이르더라도 오히려 성만(盛滿)⁷⁴을 경계하며 자제들을 마주하고 탄식하여 말하였다. “덕(德) 없이 높은 지위에 이르고 공(功) 없이 두터운 녹(祿)을 누리는 것은, 이것이 화(禍)를 부르는 길이다. 너희들은 기뻐하지 말라.” 일찍이 말하였다. “사마온공(司馬溫公)⁷⁵이 말하기를, ‘평생 행한 바 중에 일찍이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는 경지가 매우 높아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 나는 한 집안의 일에 대해서도 또한 일찍이 남에게 숨긴 것이 없으니, 이것이 내가 평생 힘쓴 부분이다.”
주석:
72. 능단(綾段): 무늬 있는 얇은 비단(綾)과 두꺼운 비단(段). 고급 옷감.
73. 완호(玩好): 좋아하여 즐김. 특히 물건을 수집하거나 감상하는 취미.
74. 성만(盛滿): 가득 차서 넘침. 가득 차면 기울게 된다는 '월만즉휴(月滿則虧)'의 경계와 통한다.
75.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 1019-1086).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역사가. 호는 우수(迂叟),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에 사마온공이라 불린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유명하다.
원문:
公晩年好看書, 終日不輟曰: “吾不幸早第, 身且有病, 不曾讀古人書, 到今面墻, 雖悔⁷⁶可追。” 公雖以不學自謙, 而愛人好士, 其中毅然自守, 故士林倚以爲重, 而沈痾⁷⁷作祟, 不享遐壽, 識者咸悼惜之。【竝行狀。】
번역문:
공은 만년(晩年)에 책 보기를 좋아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않으며 말하였다. “내가 불행히 일찍 급제하고 몸에 또 병이 있어 일찍이 옛사람의 글을 읽지 못하여 지금에 이르러 면장(面墻)⁷⁸한 듯하니, 비록 후회한들⁷⁹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공이 비록 배우지 못했다고 스스로 겸양하였으나, 사람을 아끼고 선비를 좋아하며 그 속마음은 굳세어(毅然) 스스로를 지켰으므로 사림(士林)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는데, 고질병(沈痾)이 재앙을 일으켜 높은 수명(遐壽)을 누리지 못하니, 식견 있는 자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하였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76. [주-D006] 悔 : 저본(底本)에는 “괴(愧)”로 되어 있다. 《율곡전서・영의정이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수회하추(雖悔何追)'는 '비록 후회한들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이다.
77. [주-D007] 痾 : 저본(底本)에는 “신(㢌)”으로 되어 있다. 《율곡전서・영의정이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침아(沈痾)'는 오래되어 잘 낫지 않는 고질병을 의미한다.
78. 면장(面墻):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처럼 아는 것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서 유래했다.
79. 수회(雖悔): 비록 후회한들. 주석 [주-D006] 참조.
원문:
行⁸⁰判⁸¹中樞府事李鐸卒。 鐸雖乏矯矯風節, 而寬厚有德量, 愛士能容其直。 其長銓曹, 力恢公道, 士望甚重, 佐郞鄭澈每於銓除之時, 必欲以公論注擬, 多有所違覆, 鐸無言不從。 旣而笑謂澈曰: “惟我能容君, 後人必有所不堪者矣。” 厥後洪曇判吏曹, 澈執論如此, 曇果大怒。 澈語人曰: “李公之量, 人不可及。” 鐸位居台司, 只資俸祿, 不別治産, 僅繼朝夕而已。 郡⁸²邑或遺食物, 則必分諸隣里親舊, 廚無餘積。 臨死, 謂其子海壽曰: “我死, 棺槨必用君賜, 無易也。” 鐸卒, 士林惜之, 以爲“近日銓曹政事, 無最於鐸”云。【《石潭日記》。】
번역문:
행⁸³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⁸⁴ 이탁(李鐸)이 졸(卒)하였다. 이탁은 비록 교교(矯矯)⁸⁵한 풍절(風節)은 부족하였으나, 너그럽고 두터우며(寬厚) 덕량(德量)이 있었고, 선비를 아끼며 능히 그들의 직언(直言)을 용납하였다. 그가 전조(銓曹)를 관장할 때 공도(公道)를 회복하기를 힘써 선비들의 신망(士望)이 매우 두터웠는데, 좌랑(佐郞) 정철(鄭澈)⁸⁶이 매번 관원을 제수(銓除)할 때마다 반드시 공론(公論)으로써 후보자를 정하려(注擬) 하여 어긋나고 뒤집히는 바가 많았으나, 이탁은 말없이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정철에게 말하기를, “오직 나만이 능히 그대를 용납할 수 있으니, 뒷사람은 반드시 견디지 못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홍담(洪曇)⁸⁷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정철이 이와 같이 의논을 주장하자 홍담이 과연 크게 노하였다. 정철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공(李公)의 도량은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탁은 지위가 재상(台司)⁸⁸에 있었으나 다만 봉록(俸祿)에 의지하고 별도로 재산을 마련(治産)하지 않아 겨우 아침저녁 끼니를 이을 뿐이었다. 군읍(郡邑)⁸⁹에서 혹 음식을 보내오면 반드시 이웃과 친척, 친구(隣里親舊)들에게 나누어 주어 부엌에 남은 저장물이 없었다. 죽음에 임하여 그 아들 해수(海壽)⁹⁰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관곽(棺槨)은 반드시 임금께서 하사하신 것을 사용하고 바꾸지 말라.” 하였다. 이탁이 졸하자 사림(士林)이 애석하게 여기며 이르기를, “근래 전조(銓曹)의 정사(政事)에 있어 이탁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하였다.【《석담일기》에서 인용】
주석:
80. [주-D008] 判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9년 기록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81. 판(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정1품 으뜸 벼슬.
82. [주-D009] 郡 : 저본(底本)에는 “군(群)”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석담일기》 선조 9년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군읍(郡邑)'은 지방의 고을을 의미한다.
83. 행(行): 조선 시대 관직 앞에 붙이는 용어. 품계(品階)는 높으나 관직은 낮은 경우에 사용한다. 판중추부사는 정1품이지만, 이탁이 사망 당시 영의정(정1품)을 지낸 후 판중추부사로 전직되었기에 '행'이 붙었을 수 있다. 또는 영의정에서 물러나 품계만 유지한 채 명예직인 판중추부사를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84.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중추부는 실무적인 역할보다는 주로 원로대신을 예우하기 위한 관청이었다.
85. 교교(矯矯): 남보다 뛰어나게 굳센 모양. 강직한 기개를 의미한다.
86.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 호는 송강(松江). 서인(西人)의 영수였다.
87. 홍담(洪曇, 1509-1576):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한중(閑中). 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88. 대사(台司): 재상(宰相). 삼공(三公)을 가리킨다.
89. 군읍(郡邑): 지방의 고을.
90. 해수(海壽): 이탁의 아들 이해수(李海壽)를 가리킨다.
심봉원(沈逢源)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沈逢源
字希容, 號曉窓, 連源之弟。 弘治丁巳生。 弱冠, 登上庠。 中宗三十二年丁酉登第, 明年, 又捷擢英試。 歷舍人、典翰、直提學、承旨, 官至參判。 宣祖甲戌卒, 年七十八。
번역문:
심봉원(沈逢源)
자는 희용(希容), 호는 효창(曉窓)이며, 심연원(沈連源)¹의 아우이다. 홍치(弘治)² 정사년(1497)에 태어났다. 약관(弱冠)³에 성균관(上庠)⁴에 들어갔다. 중종(中宗) 32년 정유년(1537)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다음 해에 또 발영시(擢英試)⁵에 합격하였다. 사간원 정언(舍人)⁶, 예문관 전한(典翰)⁷, 홍문관 직제학(直提學)⁸, 승정원 승지(承旨)⁹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참판(參判)¹⁰에 이르렀다. 선조(宣祖) 갑술년(1574)에 졸(卒)하니, 나이 78세였다.
주석:
- 심연원(沈連源, 1491~155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윤(仲潤), 호는 보암(保庵). 본관은 청송(靑松). 심봉원의 형이다. 영의정을 지냈다.
- 홍치(弘治):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1488~1505). 홍치 10년 정사년은 1497년이다.
- 약관(弱冠): 남자가 스무 살이 된 것을 가리키는 말.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上)에 "20세를 약(弱)이라 하며 관(冠)을 쓴다(二十曰弱 冠)."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 상상(上庠):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고대 중국의 교육기관 명칭에서 유래했다. '등상상(登上庠)'은 성균관 유생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 발영시(擢英試): 조선 시대 문관(文官) 등용 시험의 하나. 문과(文科) 급제자 중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관직에 임명하기 위해 실시하던 시험이다.
- 사인(舍人): 고려·조선 시대의 관직. 여기서는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인 정언(正言)의 별칭으로 쓰인 듯하다. 또는 중서사인(中書舍人) 등 다른 관직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문맥상 정언일 가능성이 높다.
- 전한(典翰):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관직. 왕의 교서(敎書)나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관직.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관직. 왕명 출납(出納)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 참판(參判): 육조(六曹)의 종2품 관직. 판서(判書) 다음가는 벼슬이다. 어느 조(曹)의 참판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원문:
公早丁家禍, 不能就外傅, 母夫人授以《小學》等書, 略通大義。 年十四五, 能治古文, 爲詩章。 自以受氣不厚, 省嗜欲定心氣, 務養眞元, 衣必稱兩, 食必計匙, 動息節宣, 各有常度, 故能勿藥有喜。 季年神氣, 勝於中身, 聰明, 能記少日所讀書不差。
번역문:
공(公)은 일찍이 집안의 화(家禍)¹¹를 당하여 외부(外傅)¹²에게 나아가 배우지 못하였고, 모부인(母夫人)께서 《소학(小學)》¹³ 등의 책을 가르쳐 주시어 대의(大義)를 대략 통달하였다. 나이 14, 5세에 능히 고문(古文)¹⁴을 익히고 시(詩)를 지었다. 스스로 타고난 기운(受氣)이 두텁지 못하다고 여겨, 기욕(嗜欲)을 줄이고 심기(心氣)를 안정시키며 진원(眞元)¹⁵을 기르는 데 힘써, 옷은 반드시 무게를 헤아려 입고 음식은 반드시 숟가락 수를 헤아려 먹으며, 움직이고 쉬는 것(動息)을 절제하고 조절함(節宣)에 각각 일정한 법도가 있었으므로, 능히 약을 쓰지 않고도 건강하였다(勿藥有喜)¹⁶. 만년(季年)의 정신과 기운(神氣)이 중년 시절(中身)보다 나았고 총명하여, 젊은 시절 읽었던 책을 틀림없이 기억할 수 있었다.
주석:
11. 가화(家禍): 집안의 재앙이나 불행. 심봉원의 집안이 어떤 화를 당했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조선 시대 사화(士禍) 등 정치적 사건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형 심연원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직되었다가 복관된 바 있다.
12. 외부(外傅): 아버지 외의 스승. 또는 외가(外家)의 스승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식으로 스승을 모시고 학업을 잇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13. 《소학(小學)》: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유안례(劉安禮) 등과 함께 편찬한 유교의 초학 교과서. 어린이들에게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4. 고문(古文): 본래 진(秦)·한(漢) 이전의 문체를 가리키나, 당송(唐宋) 시대 한유(韓愈) 등이 제창한 변려문(駢儷文)에 반대되는 산문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옛글 또는 한문 문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5. 진원(眞元):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인체의 근본이 되는 원기(元氣). 양생(養生)을 통해 이를 보존하고 기르고자 했다.
16. 물약유희(勿藥有喜): 《주역(周易)》 〈무망괘(无妄卦)〉 육삼효(六三爻)의 "무망의 재앙이니, 혹 소를 매어 놓았는데 길 가던 사람이 가져가니 읍인의 재앙이다(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라는 효사(爻辭)에 대한 《상전(象傳)》의 풀이 중 일부인 "길 가던 사람이 소를 얻은 것은 읍인의 재앙이요, 하늘의 재앙을 어찌하랴(行人之得 邑人之災 无妄之災 何可瘳也)"라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원래 '瘳(병 나을 추)'는 병이 낫는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약 없이도 병이 낫거나 건강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무망의 재앙을 약 없이도 병이 나으니 경사라 하겠는가(無妄之災 勿藥可謂喜乎)"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건강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원문:
公恬於勢利芬華, 築室華山之麓, 寓興花卉, 尤愛老松, 扁其堂曰友松。 日嘯傲其中, 杜門謝客, 人罕見其面。 有時杖屨苔階竹逕間, 白鬚蒼顔, 宛若山澤之臞。 家貧, 仰哺於祿, 每慙無事而食, 言及, 若無所容。 著說深得理趣, 雖自謂廢學, 其靜養之效, 亦不誣也。
번역문:
공은 권세와 이익(勢利), 화려함(芬華)에 담담하여 화산(華山)¹⁷ 기슭에 집을 짓고 꽃과 풀(花卉)에 흥취를 붙였으며, 특히 늙은 소나무(老松)를 사랑하여 그 집의 당호(堂號)를 우송(友松)¹⁸이라 편액(扁額)하였다. 날마다 그 속에서 소요하며 지내고(嘯傲)¹⁹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니,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기 드물었다. 때때로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 이끼 낀 섬돌과 대나무 오솔길 사이를 거닐면, 흰 수염과 푸른빛 도는 얼굴(白鬚蒼顔)²⁰이 완연히 산림과 못가에 사는 야윈 선비(山澤之臞)²¹와 같았다. 집이 가난하여 녹봉(祿)에 의지하여 살아가면서(仰哺於祿), 매번 하는 일 없이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無事而食)²² 이 말이 나오면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하였다. 학설(說)을 저술함에 이치(理)의 깊은 뜻(趣)을 깊이 터득하였으니, 비록 스스로 학문을 폐하였다고 말하였으나 그 정양(靜養)²³의 효과는 또한 헛되지 않았다.
주석:
17. 화산(華山):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심봉원이 거처하던 곳 근처의 산 이름으로 보인다.
18. 우송(友松): '소나무를 벗 삼는다'는 뜻의 당호. 소나무는 예로부터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했다. 그의 호인 효창(曉窓)과 함께 자연 친화적이고 은일(隱逸)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19. 소오(嘯傲): 휘파람 불며 거만하게 행동한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속세를 벗어나 자유롭고 호방하게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20. 백수창안(白鬚蒼顔): 흰 수염과 푸른빛이 도는 얼굴. 늙었지만 건강하거나, 또는 청빈하고 고결한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인다.
21. 산택지구(山澤之臞): 산림과 못가에 사는 야윈 선비.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 묻혀 지내는 은사(隱士)나 가난한 선비를 가리킨다. '구(臞)'는 '야위다'는 뜻이다.
22. 무사이식(無事而食):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으며 지내는 것. 관직에 있으면서도 국가에 기여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선비의 겸양 표현이다.
23. 정양(靜養): 고요히 심신(心身)을 기름. 학문 수양과 더불어 정신 수양, 건강 관리에 힘썼음을 보여준다.
원문:
公質愨無機關, 倉卒不形驚遽之色。 常慕卓子康、劉文饒之爲人。
郭司諫珣死直於乙巳, 僚友畏累無顧者, 公脫衣以襚, 談者義之。【竝栗谷撰碑。】
번역문:
공은 자질이 성실하고 꾸밈(機關)²⁴이 없었으며, 창졸간(倉卒間)에도 놀라고 당황하는(驚遽)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탁자강(卓子康)과 유문요(劉文饒)²⁵의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사간(司諫) 곽순(郭珣)²⁶이 을사년(乙巳年, 1545)에 직언(直言)하다 죽었을 때(死直)²⁷, 동료들이 연루될 것을 두려워하여 돌아보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옷을 벗어 부의(襚)²⁸하니, 이야기하는 자들이 이를 의롭게 여겼다.【이상은 모두 율곡(栗谷)²⁹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24. 기관(機關): 기교(技巧), 꾸밈, 속임수.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됨을 의미한다.
25. 탁자강(卓子康), 유문요(劉文饒): 자강(子康)은 후한(後漢) 사람 탁무(卓茂)의 자(字)이고, 문요(文饒)는 후한 사람 유총(劉寵)의 자이다. 두 사람 모두 청렴하고 강직하며 인자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심봉원이 이들을 흠모했다는 것은 그의 지향하는 바를 보여준다.
26. 곽순(郭珣, ?
154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배(彦培). 본관은 현풍(玄風).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사간(司諫)으로서 윤임(尹任) 등을 변호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27. 사직(死直): 직언(直言)을 하다가 죽임을 당함. 또는 직무를 수행하다가 죽음. 여기서는 을사사화 때 간언하다 죽은 것을 의미한다.
28. 수(襚): 죽은 사람에게 옷을 보내는 것. 부의(賻儀)의 일종이다. 당시 을사사화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료의 죽음을 애도한 심봉원의 의리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29. 율곡(栗谷): 율곡 이이(李珥, 1536
1584)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이 글의 상당 부분이 이이가 지은 심봉원의 비문에서 인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택(李澤)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澤
字澤之, 陸之孫。 正德己巳生。 中宗二十六年辛卯司馬, 戊戌登第, 歷三司、承旨、七道監司、禮曹參判。 宣祖癸酉卒, 年六十五。
번역문:
이택(李澤)
자는 택지(澤之)이며, 이륙(李陸)¹의 손자이다. 정덕(正德)² 기사년(1509)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6년 신묘년(1531)에 사마시(司馬試)³에 합격하였고, 무술년(153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사(三司)⁴, 승정원 승지(承旨)⁵, 칠도(七道)의 감사(監司)⁶, 예조 참판(禮曹參判)⁷을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계유년(1573)에 졸(卒)하니, 나이 65세였다.
주석:
- 이륙(李陸, 1438~1498):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륙(子陸), 호는 행촌(杏村), 청파(靑坡). 본관은 한산(韓山). 《청파극담(靑坡劇談)》의 저자이다. 이택의 조부이다.
- 정덕(正德): 명(明)나라 무종(武宗)의 연호 (1506~1521). 정덕 4년 기사년은 1509년이다.
- 사마(司馬): 사마시(司馬試)의 약칭. 조선 시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이다.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 생진과(生進科) 또는 사마시라고 불렀다.
- 삼사(三司): 조선 시대 언론 기능을 담당했던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기관들의 관직을 두루 거쳤음을 의미한다.
-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 감사(監司):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인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종2품으로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칠도(七道)'는 당시 조선의 행정 구역 중 함경도를 제외한 7개 도를 가리키거나, 또는 여러 도의 감사를 역임했음을 의미한다.
- 예조 참판(禮曹參判): 예조(禮曹)의 버금 벼슬. 종2품. 예조는 의례, 외교, 교육, 과거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원문:
乙巳、丙午之間, 不傅時議, 遷置宂局者數年。 北方凶歉, 以公有撫禦才, 由軍器副正, 授通政、穩城府使。 以病遞, 頗有去後思。
번역문:
을사년(乙巳年, 1545)과 병오년(丙午年, 1546)⁸ 사이에 시의(時議)⁹에 영합하지 않아 여러 해 동안 한직(宂局)¹⁰에 옮겨져 있었다. 북방(北方)에 흉년이 들자 공에게 백성을 위무하고 외적을 막는(撫禦) 재능이 있다 하여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¹¹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¹², 온성부사(穩城府使)¹³에 제수되었다. 병으로 체직(遞)¹⁴되니, 자못 떠난 뒤에 그를 생각하는 마음(去後思)¹⁵이 있었다.
주석:
8. 을사(乙巳), 병오(丙午): 각각 1545년과 1546년. 1545년은 인종(仁宗)이 즉위한 해이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해이다. 이 시기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택이 소신을 지켰음을 시사한다.
9. 시의(時議): 당시의 여론이나 정치적 논의. 특히 권력을 잡은 세력의 주장을 의미할 수 있다.
10. 용국(宂局): 중요하지 않은 한가한 관직.
11.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 군기시(軍器寺)의 종3품 관직. 군기시는 군수 물품의 제조와 관리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12.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 시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명.
13. 온성부사(穩城府使): 함경도 온성(穩城) 지역을 다스리던 종3품 외관직. 북방의 중요한 국경 지역이었다.
14. 체(遞): 관직이 갈림. 체직(遞職).
15. 거후사(去後思):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선정을 베풀었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賦性溫平, 制行和易, 待人處事, 不設畦畛。 莅官尙廉謹, 在家崇儉約。 公退還家, 不喜交遊。 官登亞卿, 巷無車馬, 如寒士家。 人或戲嘲無客, 公曰: “無客眞吾樂也。”
번역문: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평탄하며(溫平), 행동거지(制行)가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和易),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구분(畦畛)¹⁶을 두지 않았다. 관직에 임해서는 청렴과 신중함(廉謹)을 숭상하였고, 집에서는 검소함(儉約)을 숭상하였다. 공무에서 물러나 집에 돌아오면 교유(交遊)를 좋아하지 않았다. 벼슬이 아경(亞卿)¹⁷에 올랐으나, 길거리에 찾아오는 수레와 말이 없어 마치 가난한 선비(寒士)의 집과 같았다. 사람들이 혹 손님이 없는 것을 희롱하며 조롱하자, 공이 말하였다. “손님이 없는 것이 참으로 나의 즐거움이다.”
주석:
16. 휴진(畦畛): 밭두둑과 길. 경계, 구분, 차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람을 차별 없이 대했음을 의미한다.
17. 아경(亞卿): 경(卿)에 버금가는 벼슬. 조선 시대에는 보통 참판(參判, 종2품)이나 참찬(參贊, 정2품) 등을 가리켰다. 높은 벼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교제를 삼가고 검소하게 살았음을 보여준다.
원문:
杏村之後, 多以善書知名, 公筆勢豪健, 自成一家, 詩亦典雅, 而少與人酬唱, 世無傳焉。 射藝得妙, 武夫莫敢爭。 常戒諸子曰: “勿爲惡德, 以忝先祖。”
번역문:
행촌(杏村)¹⁸의 후손들은 글씨를 잘 써서 이름난 이가 많은데, 공의 필세(筆勢)는 호방하고 강건(豪健)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시(詩) 또한 전아(典雅)¹⁹하였으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酬唱) 일이 적어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다. 활쏘는 기예(射藝)는 묘(妙)를 터득하여 무부(武夫)들도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항상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악덕(惡德)을 행하여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지 말라.”
주석:
18. 행촌(杏村): 이륙(李陸)의 호. 조부인 이륙을 비롯하여 가문에 서예에 능한 이가 많았음을 시사한다.
19. 전아(典雅): 품격이 높고 아담함.
원문:
自珥省事以來, 當國之宰非一二, 吹噓之力, 可奪造化, 病于夏畦者, 肩相接也。 未嘗聞公游其門以求捷徑, 故雖無煥赫聲, 不至蹈禍機, 非恬澹自守, 能如是乎?【竝栗谷撰碑。】
번역문:
이이(李珥)가 성사(省事)²⁰한 이래로 나라를 담당한 재상(宰)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들의 입김(吹噓)의 힘은 조화(造化)의 권능을 빼앗을 만하였으며, 권세가에게 아첨하는 자(病于夏畦者)²¹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공이 그 문하(門下)에 드나들며 지름길(捷徑)을 구했다는 말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비록 혁혁한 명성은 없었으나 화(禍)의 빌미를 밟는 데 이르지 않았다. 담담하게 스스로를 지키는(恬澹自守) 것이 아니었다면, 능히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이상은 모두 율곡(栗谷)²²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20. 성사(省事): 국정을 살핌. 여기서는 이이(李珥)가 정계에서 활동하며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이(1536~1584)가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활동한 것은 선조(宣祖) 대 중반 이후이다.
21. 병우하휴자(病于夏畦者): 여름 밭두둑에서 일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자라는 뜻으로, 힘든 일을 싫어하고 권세에 아부하여 편안함을 구하는 사람을 비유한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하(下)〉에 나온다.
22. 율곡(栗谷): 이이(李珥). 이 글 역시 이이가 지은 이택의 비문에서 인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이는 이택의 처족(妻族) 조카뻘이 된다.
남치근(南致勤)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南致勤
字勤之, 忠簡公智曾孫。 中宗二十三年戊子, 擢武科魁。 歷五道節度使, 官至漢城判尹。 宣祖庚午卒。
번역문:
남치근(南致勤)
자는 근지(勤之)이고,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¹의 증손이다. 중종(中宗) 23년 무자년(1528)에 무과(武科)²에 장원(魁)³으로 발탁되었다. 오도(五道)의 절도사(節度使)⁴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한성판윤(漢城判尹)⁵에 이르렀다. 선조(宣祖) 경오년(1570)에 졸(卒)하였다.
주석:
- 남지(南智, 1405~1454): 조선 전기의 문신. 남치근의 증조부이다. 자는 지숙(知叔), 호는 휴암(休庵). 본관은 의령(宜寧).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무과(武科): 조선 시대에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과거 시험.
- 괴(魁): 으뜸, 첫째. 과거 시험의 장원(壯元)을 의미한다.
- 절도사(節度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병마(兵馬)를 지휘하던 종2품 무관직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약칭.
- 한성판윤(漢城判尹): 조선 시대 수도인 한성부(漢城府)의 으뜸 벼슬. 정2품.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 격이다.
원문:
公早孤, 能自刻勵, 律身甚嚴。 嚴先生用恭, 己卯名儒也。 公從游爲學, 甚爲器重。
번역문:
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早孤) 능히 스스로 힘쓰고 노력하여(刻勵) 몸가짐을 매우 엄격하게 하였다. 엄선생(嚴先生) 용공(用恭)⁶은 기묘(己卯) 명유(名儒)⁷인데, 공이 따라 노닐며 학문을 하여 매우 그릇으로 중히 여겨졌다(器重)⁸.
주석:
6. 엄용공(嚴用恭, 1480~152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부(敬夫), 호는 동애(東崖). 본관은 영월(寧越). 조광조(趙光祖) 등과 교유하였으며,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사(賜死)되었다.
7. 기묘명유(己卯名儒): 1519년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이름난 선비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 세력을 가리킨다. 남치근이 기묘 명유인 엄용공에게 배웠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배경과 성향을 짐작하게 한다.
8. 기중(器重): 재능이나 인물을 그릇으로 비유하여 중하게 여기는 것. 큰 인물이 될 재목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원문:
島夷襲耽羅, 其守請名將自代, 僉曰: “公哉! 起家促行, 備賊安黎, 靡有遺策。” 後牧使金秀文資其所成算¹, 却敵保城, 上章歸功於公。
번역문:
섬 오랑캐(島夷)⁹가 탐라(耽羅)¹⁰를 습격하자, 그 수령(守)¹¹이 명장(名將)을 청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하니, 모두 말하기를 “공(公)이 적임자이다!”라고 하였다. 집에서 일어나(起家)¹² 서둘러 부임하여, 적을 방비하고 백성(黎)을 안정시키는 데 남김없이 계책을 다하였다(靡有遺策). 후에 목사(牧使) 김수문(金秀文)¹³이 그가 이루어 놓은 계책(成算)¹⁴에 힘입어 적을 물리치고 성(城)을 보전하였는데, 상소(上章)를 올려 공(功)을 공에게 돌렸다.
주석:
9. 도이(島夷): 섬 오랑캐. 왜구(倭寇)를 가리킨다.
10. 탐라(耽羅): 제주도(濟州島)의 옛 이름.
11. 수(守): 수령(守令). 여기서는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2. 기가(起家): 관직에 있지 않던 사람을 불러 벼슬을 줌. 또는 처음 관직에 나아감. 여기서는 관직이 없던 상태에서 긴급히 임명되어 부임했음을 의미한다.
13. 김수문(金秀文, 150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방(彦邦). 본관은 김해(金海). 남치근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14. [주-D001] 算 : 저본(底本)에는 “능(能)”으로 되어 있다. 《겸재집(謙齋集)・한성부판윤남공시장(漢城府判尹南公諡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성산(成算)'은 이미 이루어 놓은 계책이나 방책을 의미한다.
원문:
乙卯, 倭大擧寇湖南, 縱兵殺元戎, 連陷五城, 諸將無不奔潰, 京城荷擔戒嚴。 公以防禦使先嘗賊于南平破之, 聞者皆氣倍, 遂得驅攘出境。 數日, 犯鹿島, 圍城急, 公自興陽馳救, 賊望旗而遁, 以舟師追擊, 多所殺獲。 元帥李浚慶奏捷曰: “是役也, 使賊亦知舟師之可用, 水戰之可畏, 比之靈巖之勝, 尤有光焉。” 時將士多被罪誅, 公獨以能拜其道節度使。
번역문:
을묘년(乙卯年, 1555)¹⁵에 왜(倭)가 대거 호남(湖南)을 침략하여, 병사를 풀어 원융(元戎)¹⁶을 죽이고 연달아 다섯 성(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장수들이 달아나 흩어지지 않음이 없었고, 서울(京城)에서는 짐을 지고(荷擔)¹⁷ 경계 태세를 엄히 하였다. 공이 방어사(防禦使)¹⁸로서 먼저 남평(南平)¹⁹에서 적을 시험하여 격파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사기가 배가되었고, 마침내 적을 몰아 국경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며칠 뒤, 적이 녹도(鹿島)²⁰를 침범하여 성을 급히 포위하자, 공이 흥양(興陽)²¹에서 달려가 구원하니, 적이 깃발을 보고 달아나므로 수군(舟師)²²으로 추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많았다. 원수(元帥) 이준경(李浚慶)²³이 승첩(捷)을 아뢰며 말하였다. “이 싸움은 적들로 하여금 또한 수군(舟師)을 쓸 만하고 수전(水戰)이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영암(靈巖)의 승리²⁴에 비하여 더욱 빛남이 있습니다.” 이때 장수와 사졸들이 죄를 입어 주살(誅殺)된 자가 많았으나, 공은 홀로 능력을 인정받아 그 도(道)의 절도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주석:
15. 을묘년(乙卯年): 1555년(명종 10). 이 해에 왜구가 대규모로 전라도 해안을 침범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다.
16. 원융(元戎): 군대의 총사령관. 도원수(都元帥)를 가리킨다.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元積)이 전사하고,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이 원수로 임명되었다.
17. 하담(荷擔): 짐을 짊어짐. 피난 준비를 하거나,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함을 의미한다.
18. 방어사(防禦使): 조선 시대 변방이나 군사 요충지에 파견되던 임시 무관직. 종2품 또는 정3품.
19. 남평(南平):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일대.
20. 녹도(鹿島):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 앞바다에 있던 섬. 당시 수군 만호진(萬戶鎭)이 있었다.
21. 흥양(興陽):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당시 현(縣)이었으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위치하기도 했다.
22. 주사(舟師): 수군(水軍). 배를 타고 싸우는 군대.
23.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남당(南堂). 본관은 성주(星州). 을묘왜변 당시 도순찰사(都巡察使)로서 군무를 총괄했다. 영의정을 지냈다.
24. 영암(靈巖)의 승리: 을묘왜변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윤경(李允慶) 등이 영암 앞바다에서 왜구를 격퇴한 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湖南兵火之餘, 公私赤立, 掃灰燼, 立營府, 招流亡, 撫遺孑, 選將卒, 精訓鍊, 振紀律, 敎陣書, 繕器械, 完城塹, 竭心殫力, 戴星出入, 夜不安枕。 不數月, 富强反爲諸道最。
번역문:
호남(湖南)이 병화(兵火)를 겪은 뒤끝이라 공사(公私)가 모두 아무것도 없는 상태(赤立)²⁵였는데, 불탄 재(灰燼)를 쓸어내고 영부(營府)²⁶를 세우며, 흩어져 떠도는 백성(流亡)을 불러 모으고 남은 이(遺孑)²⁷들을 위무하며, 장수와 사졸(將卒)을 선발하여 정예하게 훈련시키고, 기율(紀律)을 진작시키며, 진법서(陣書)²⁸를 가르치고, 무기(器械)를 수리하고 성과 해자(城塹)를 완전하게 하는 등,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竭心殫力) 별을 이고 드나들며(戴星出入)²⁹ 밤에도 편안히 잠자리에 들지 못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부강(富强)함이 도리어 여러 도(道) 가운데 최고가 되었다.
주석:
25. 적립(赤立): 벌거벗고 서 있다는 뜻으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매우 가난한 상태를 의미한다.
26. 영부(營府): 군영(軍營)과 관청(官廳). 전쟁으로 파괴된 기반 시설을 복구했음을 의미한다.
27. 유혈(遺孑): 전쟁이나 재난 등에서 살아남은 사람.
28. 진서(陣書): 진법(陣法)에 관한 책. 병법서(兵法書).
29. 대성출입(戴星出入): 별을 머리에 이고 드나듦. 즉, 새벽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며, 매우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원문:
戊午, 倭寇聲息益急, 命公自擇, 廷臣毋憚臺幄。 以二佐、三十褊裨巡海邊, 得節制觀察使以下, 兵馬水軍節度, 皆具櫜鞬, 郊迎先驅。 凡百備禦, 精彩一新。 賊適不來, 蓋懲於前昔敗沒也。【竝侄彦紀撰碣銘。】
번역문:
무오년(戊午年, 1558)에 왜구(倭寇)의 성세와 소식(聲息)³⁰이 더욱 급해지자, 공에게 스스로 (보좌관을) 선택하게 명하고 조정 신하들은 대각(臺閣)³¹과 장막(幄)³²을 가리지 말고 (보좌하게 하였다). 두 명의 보좌관(二佐)과 서른 명의 편비(褊裨)³³를 거느리고 해변(海邊)을 순찰하게 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 이하를 절제(節制)할 권한을 얻었으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가 모두 갑옷과 무기(櫜鞬)³⁴를 갖추고 성 밖에서 맞이하며 길을 인도하였다. 모든 방비(備禦)가 그 정채(精彩)가 일신(一新)되었다. 마침 적이 오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전의 패배(敗沒)를 징계(懲戒)했기 때문일 것이다.【이상은 모두 조카 남언기(南彦紀)³⁵가 지은 갈명(碣銘)에서 인용】
주석:
30. 성식(聲息): 성세(聲勢)와 소식(消息).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침입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31. 대(臺): 대각(臺閣). 조선 시대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비롯한 주요 관청 또는 그 관리를 의미한다.
32. 악(幄): 장막.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宰相)이나 대신(大臣)을 의미한다. '무탄대악(毋憚臺幄)'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남치근의 지휘를 따르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33. 편비(褊裨): 편장(偏將)과 비장(裨將). 장수를 보좌하는 부장(副將)들을 가리킨다.
34. 고건(櫜鞬): 활과 화살을 넣는 주머니(고, 櫜)와 칼집(건, 鞬). 무장(武裝)을 의미한다.
35. 남언기(南彦紀): 남치근의 조카. 그의 행적을 기록한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원문:
强賊林巨正, 楊州白丁也。 性狡黠且驍勇, 與其徒數十, 皆極趫捷, 起而爲賊, 焚燒民居, 亂搶牛馬, 若有抗之者, 則剮裂屠翦, 極其殘酷。 自畿甸至海西, 一路吏民, 與之密結, 官欲捕捉, 輒先漏通。 以是橫行無忌, 官不能禁。 朝廷使宣傳官哨探, 賊倒着麻鞋, 使見者入則謂之出, 出則謂之入, 以亂其蹤跡。 宣傳官往九月山見其跡, 以爲出而徑還, 賊在後射殺之。 朝廷又使長淵、瓮津、豐川等四五官武臣、守令, 領兵往捕, 聚于瑞興, 吏民已通之, 賊夜率六十餘騎, 乘高俯瞰, 亂矢如雨, 五官軍不能支, 潰而歸, 尤橫無忌。 以南致勤爲討捕使, 出鎭于載寧郡, 賊²領衆入于九月山, 只率親切驍健者, 餘皆散遣, 分據險阨, 爲拒捕之計。 致勤盛集軍馬, 漸逼于山下, 使一賊不敢下山。 賊之謀主徐林, 知其終不免, 遂下山來降, 盡言其虛實情形, 乃進軍, 搜林剔藪而上, 諸賊皆降, 五六賊終始相隨。 使徐林往誘之, 旣來, 盡斬之。 巨正越壑而逃, 致勤令自黃州至海州, 盡發民丁作人城, 自文化至載寧, 一戶一幕, 箇箇搜探。 賊始計窮, 投入一村家, 致勤進圍之。 巨正劫其家主老嫗曰: “汝不急呼而出, 則當殺之。” 遂呼賊而走出門, 則巨正帶弓矢, 爲軍人狀, 拔劍逐其嫗出, 曰: “賊已走矣。” 諸軍不知彼爲賊魁, 一時齊呼賊走, 擾攘喧聒之中, 扶下一軍人而奪其騎馬, 馳入衆中, 亦不知何人奪去也。 俄有一人徐出陣向山後去曰: “卒病, 欲臥治。” 一人曰: “汝雖病, 安可離陣一步? 此可疑也。” 五六騎追之。 徐林遙呼曰: “賊也。” 亂箭射之。 賊創甚, 乃曰: “吾之爲此計, 皆徐林也。 徐林, 終能投順乎?” 蓋憤其先投降, 欲以計見戮也。【《寄齋雜記》。】
번역문:
강적(强賊) 임거정(林巨正)³⁶은 양주(楊州) 백정(白丁)³⁷이다. 성품이 교활하고(狡黠) 또 날래고 용감하며(驍勇), 그 무리 수십 명과 함께 모두 매우 날쌔어(趫捷), 일어나 도적이 되어 민가(民居)를 불태우고 소와 말[牛馬]³⁸을 마구 빼앗았으며, 만약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살을 베고 도륙(屠戮)하여(剮裂屠翦) 그 잔혹함이 극에 달하였다. 기전(畿甸)³⁹에서 해서(海西)⁴⁰에 이르기까지, 일로(一路)의 관리와 백성(吏民)들이 그와 비밀리에 결탁하여, 관(官)에서 잡으려 하면 번번이 먼저 누설하여 통하였다. 이 때문에 거리낌 없이 횡행(橫行)하여 관에서도 금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선전관(宣傳官)⁴¹을 시켜 정탐(哨探)하게 하였는데, 적은 마혜(麻鞋)⁴²를 거꾸로 신어 보는 자로 하여금 들어간 것을 나갔다고 여기게 하고 나간 것을 들어갔다고 여기게 하여 그 종적(蹤跡)을 어지럽혔다. 선전관이 구월산(九月山)⁴³에 가서 그 종적을 보고는 나갔다고 여겨 곧바로 돌아오자, 적이 뒤에서 활을 쏘아 죽였다. 조정에서 또 장연(長淵), 옹진(甕津), 풍천(豐川) 등 네다섯 고을의 무신(武臣) 수령(守令)을 시켜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게 하였는데, 서흥(瑞興)에 모이자 관리와 백성들이 이미 적과 통하여, 적이 밤에 60여 기(騎)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며 마구 쏘는 화살이 비 오듯 하니, 다섯 고을의 군사가 지탱하지 못하고 궤멸하여 돌아오니, 더욱 거리낌 없이 횡행하였다. 남치근을 토포사(討捕使)⁴⁴로 삼아 재령군(載寧郡)에 나가 진(鎭)을 치게 하니, 적(賊)⁴⁵이 무리를 거느리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다만 친근하고 날랜 자들만 거느리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 보내어, 험준한 요새(險阨)에 나누어 점거하고 체포에 저항할 계책을 세웠다. 남치근이 군마(軍馬)를 성대히 모아 점차 산 아래로 핍박하여 한 명의 적도 감히 산을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적의 모주(謀主)⁴⁶ 서림(徐林)이 마침내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마침내 산을 내려와 항복하여 그 허실(虛實)과 정형(情形)을 다 말하니,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숲을 뒤지고 수풀을 헤치며(搜林剔藪) 올라가자 여러 적들이 모두 항복하였고, 대여섯 명의 적만이 끝까지 서로 따랐다. 서림을 시켜 가서 그들을 유인하게 하여, 이미 오자 모두 베었다. 임거정이 골짜기를 넘어 달아나자, 남치근이 황주(黃州)에서 해주(海州)에 이르기까지 민정(民丁)⁴⁷을 모두 징발하여 인성(人城)⁴⁸을 만들고, 문화(文化)에서 재령(載寧)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一戶一幕) 하나하나 수색하여 찾게 하였다. 적이 비로소 계책이 다하자(計窮) 한 촌가(村家)에 뛰어드니, 남치근이 나아가 포위하였다. 임거정이 그 집 주인인 늙은 할멈(老嫗)을 겁박하며 말하였다. “네가 급히 (도적이 달아났다고) 외치며 나가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다.” 마침내 (할멈이) 도적이라 외치며 문밖으로 달려 나가자, 임거정은 활과 화살을 차고 군인의 형상을 하고는 칼을 뽑아 그 할멈을 쫓아 나가며 말하였다. “적이 이미 달아났다.” 여러 군사들이 그가 적의 괴수(魁首)임을 알지 못하고 일시에 모두 적이 달아났다고 외치니, 소란스럽고 시끄러운(擾攘喧聒) 와중에 한 군인을 부축하여 넘어뜨리고 그가 탄 말을 빼앗아 타고는 무리 속으로 달려드니, 또한 누가 빼앗아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천천히 진(陣)을 나와 산 뒤쪽으로 가며 말하였다. “병졸이 병이 나서 누워서 치료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비록 병들었으나 어찌 진을 한 걸음이라도 떠날 수 있겠는가? 이는 의심스럽다.” 대여섯 기병이 그를 쫓았다. 서림이 멀리서 외쳤다. “적이다!” 어지러이 화살을 쏘았다. 적이 상처가 심해지자 이에 말하였다. “내가 이런 꾀를 쓴 것은 모두 서림 때문이다. 서림아, 마침내 투항할 수 있었느냐?”⁴⁹ 아마도 그가 먼저 투항한 것에 분개하여, 계책으로 죽임을 당하게 하려 한 것이다.【《기재잡기(寄齋雜記)》⁵⁰에서 인용】
주석:
36. 임거정(林巨正, ?
1562): 흔히 임꺽정(林巪正)으로 알려진 인물. 조선 명종(明宗) 때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한 도적의 두목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37. 백정(白丁): 조선 시대 천민(賤民) 계층의 하나. 주로 도살업(屠殺業)이나 유기(柳器) 제조업 등에 종사했다. 사회적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
38. [주-D004] 馬 : 장서각본(藏書閣本)에는 “민(民)”으로 되어 있다. '우마(牛馬)'는 소와 말, '우민(牛民)'은 소와 백성을 의미할 수 있으나, 도적의 약탈 대상을 고려할 때 '우마'가 더 일반적이다. 본문은 저본을 따라 '우마'로 표기하고 번역하였다.
39. 기전(畿甸): 수도와 그 주변 지역. 경기도 일대를 가리킨다.
40. 해서(海西): 황해도(黃海道)를 가리킨다.
41. 선전관(宣傳官): 조선 시대 왕명을 전달하고 의장(儀仗) 등을 담당하던 무관직. 때로는 정탐이나 체포 등의 임무를 맡기도 했다.
42. 마혜(麻鞋): 삼베로 만든 신.
43. 구월산(九月山): 황해도에 있는 명산. 임거정 무리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다.
44. 토포사(討捕使): 조선 시대 도적을 토벌하고 체포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하던 관직.
45. [주-D002] 賊 : 저본(底本)에는 없다. 《약천집(藥泉集)・오대종조……도총관공묘지명(五代從祖……都摠管公墓誌銘)》 및 《겸재집(謙齋集)・한성부판윤남공시장(漢城府判尹南公諡狀)》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문맥상 주어인 '적'이 필요하다.
46. 모주(謀主): 꾀를 내는 주된 사람. 참모, 모사(謀士).
47. 민정(民丁): 일반 백성 중 장정(壯丁).
48. 인성(人城): 사람으로 성벽을 만듦. 촘촘하게 인원을 배치하여 포위망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49. 서림, 종능투순호?(徐林, 終能投順乎?): 서림에게 하는 말로, "네가 결국 투항해서 잘 되었구나!"라는 반어적인 원망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즉, 네가 항복하여 나를 배신했기에 내가 이렇게 죽게 되었다는 뜻이다.
50.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
1635)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호는 기재(寄齋). 임진왜란 전후의 여러 가지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원문:
公爲慶尙兵使, 踰鳥嶺, 驛卒擁馬向山坡曰: “此地自古有國祀神堂, 奉石彌勒, 往來使客、商賈, 皆拜跪祈禱, 然後乃行。 不然則未下嶺底, 人馬必仆死。” 公曰: “唯唯。” 直到祠前, 命悉撤毁祠宇, 撞碎彌勒。 又命聚嶺底村家千手, 鍤掘瀦祠宇基址爲池澤, 頃刻而畢。 遂作行上營, 竟無病。 後巡列邑時, 凡非禮神祀及路傍聚石叢祠, 掛紙錢懸馬鬃處, 一皆夷之, 無片石, 淫祀之風遂變。
번역문:
공이 경상 병사(慶尙兵使)⁵¹가 되어 조령(鳥嶺)⁵²을 넘을 때, 역졸(驛卒)이 말을 에워싸고 산비탈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신당(國祀神堂)이 있어 돌미륵(石彌勒)⁵³을 모시고 있는데, 왕래하는 사객(使客)⁵⁴과 상인(商賈)들이 모두 절하고 꿇어앉아 기도한 뒤에야 길을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개 밑에 이르기도 전에 사람과 말이 반드시 쓰러져 죽습니다.” 공이 “알았다, 알았다(唯唯).” 하고는 곧바로 사당 앞에 이르러, 명하여 사당 건물을 모두 철거하여 헐어버리고 미륵을 쳐서 부수게 하였다. 또 명하여 고개 밑 마을의 천 명의 인부(千手)⁵⁵를 모아, 사당 터를 삽으로 파서 모아 못(池澤)으로 만들게 하니, 잠깐 사이에 끝마쳤다. 마침내 길을 떠나 군영(營)으로 올라갔으나 끝내 아무 탈이 없었다. 후에 여러 고을을 순찰할 때, 무릇 예(禮)에 맞지 않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非禮神祀) 및 길가에 돌을 모아 놓은 무더기 사당(聚石叢祠)이나 지전(紙錢)을 걸고 말갈기(馬鬃)를 매달아 놓은 곳을 하나같이 모두 평평하게 만들어 돌조각 하나 없게 하니, 음사(淫祀)⁵⁶의 풍속이 마침내 변하였다.
주석:
51. 경상 병사(慶尙兵使):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경상도의 군사 책임자이다.
52. 조령(鳥嶺): 현재의 문경새재.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고개였다.
53. 석미륵(石彌勒): 돌로 만든 미륵불(彌勒佛). 미륵 신앙과 토착 신앙이 결합된 형태로 보인다.
54. 사객(使客): 사신(使臣)과 나그네.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나 일반 여행객을 통칭한다.
55. 천수(千手): 천 명의 손. 많은 인부(人夫)를 의미한다.
56. 음사(淫祀): 예법에 맞지 않는 부정한 제사나 미신 행위. 유교적 관점에서 합리적이지 않거나 사회 질서를 해친다고 여겨지는 민간 신앙을 배척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원문:
公在關西時, 到百祥樓大會諸將, 設宴歡樂。 然而待妓輩甚嚴。 公有一寵姬, 極有姿色, 妓輩謂姬: “令公性極嚴, 汝能戲批其頰, 吾輩當爲爾設大宴, 凡事唯命是從。” 是夕, 公宿於樓房, 將寢滅燭, 妓進妖媚百態, 公亦戲笑。 妓因其戲, 微犯頰輔, 公卽以覆衾裹妓, 開窓而投之江, 妓輩膽慄。【竝遺事。】
번역문:
공이 관서(關西)⁵⁷에 있을 때, 백상루(百祥樓)⁵⁸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크게 모아 잔치를 베풀고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기생(妓)의 무리를 대하는 것은 매우 엄격하였다. 공에게 총애하는 첩(寵姬)이 하나 있었는데 자색(姿色)이 매우 뛰어났다. 기생 무리가 그 첩에게 말하였다. “영공(令公)⁵⁹께서는 성품이 지극히 엄하시니, 네가 만약 장난삼아 그 뺨을 칠 수 있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너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모든 일에 오직 명을 따를 것이다.” 이날 저녁 공이 누각 방에서 유숙하는데, 장차 잠자리에 들려 촛불을 끄자 기생(첩)이 온갖 요염하고 아리따운(妖媚) 자태를 보이니, 공 또한 장난치며 웃었다. 기생(첩)이 그 장난을 틈타 살짝 뺨(頰輔)을 건드리자, 공이 즉시 덮고 있던 이불(覆衾)로 기생(첩)을 싸서 창문을 열고 강물에 던져버리니, 기생 무리들이 간담이 서늘해졌다(膽慄).【이상은 유사(遺事)⁶⁰에서 인용】
주석:
57. 관서(關西): 평안도(平安道) 지역을 가리키는 별칭.
58. 백상루(百祥樓): 평안북도 안주(安州)에 있던 유명한 누각.
59. 영공(令公): 남을 높여 그의 아버지나 주군을 이르는 말. 또는 지위 높은 사람에 대한 존칭. 여기서는 남치근을 가리킨다.
60. 유사(遺事):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일화나 기록.
원문:
公沈毅詳重, 孝友忠直, 周恤親舊, 近遠不遺; 勤敏職務, 小大必謹。 其爲將也, 致命綏鼓, 無所顧慮, 重惜名節, 不畏强禦。 預定號令, 申申明肅; 立決賞罰, 斷斷信果。 誠於禮士, 而好問能用, 急於撫卒, 而推恩盡情。 是故所至皆有聲績, 無所敗衄, 晩年朝野倚重如長城, 麾下多擁閫節, 趨走稟承如子弟。
번역문:
공은 침착하고 굳세며(沈毅) 상세하고 신중하며(詳重), 효성스럽고 우애 있고(孝友) 충성스럽고 정직하며(忠直), 친구(親舊)들을 두루 구휼하여(周恤) 가깝고 먼 것을 가리지 않았고(不遺), 직무(職務)에 부지런하고 민첩하여(勤敏) 크고 작은 일에 반드시 신중하였다. 그 장수(將) 됨에 있어서는, 명령을 내리고 북을 치는 데(致命綏鼓)⁶¹ 고려하는 바가 없었고, 명분과 절개(名節)를 중히 여기고 아껴 강한 적이나 권세가(强禦)⁶²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리 호령(號令)을 정하여 거듭거듭 밝고 엄숙하게 하였고(申申明肅), 상벌(賞罰)을 즉시 결정하여 단호하고 믿음직하며 과감하였다(斷斷信果). 선비를 예우하는 데(禮士) 정성스러워 묻기를 좋아하고 능히 등용하였으며, 병졸을 위무하는 데(撫卒) 힘써 은혜를 미루어 정성을 다하였다(推恩盡情). 이런 까닭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명성과 공적(聲績)이 있었고 패배(敗衄)하는 바가 없었으며, 만년(晩年)에는 조야(朝野)에서 장성(長城)⁶³처럼 의지하고 중히 여겼고, 휘하(麾下)에는 군권(閫節)⁶⁴을 가진 이가 많았는데 자제(子弟)처럼 달려와 명을 받들었다(趨走稟承).
주석:
61. 치명수고(致命綏鼓): 명령을 내리고 북을 움직임.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62. 강어(强禦): 강한 적 또는 횡포한 권세가.
63. 장성(長城): 만리장성.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인물을 비유한다.
64. 곤절(閫節):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의 신표(信標)인 부절(符節). 군권(軍權) 또는 군 지휘관을 의미한다. 남치근의 휘하에서 많은 장수들이 배출되었음을 나타낸다.
원문:
當乙丙之間, 太平日久, 巨寇猝發, 兵民逃潰恐後, 將相相顧無計。 公唱爲戰船之策, 曰: “此韓信背水之意也。” 人皆莫曉, 笑且危之。 公不怒不沮, 大造蒙衝, 飛樓三層, 高楯四圍, 輜糧載於下, 棹櫓運於中, 弓矢發於上, 大炮電擊於前, 撞碎懸舂于後, 雲帆馳逐, 一瞬萬里, 觸碎犯焦, 煙沈焰沒。 彼雖有良、平、賁、育, 不及爲智勇焉。 其他如蒺藜發火, 交投賊船, 動則洞足, 焚溺莫救。 公所創爲, 而至今賴之者, 不可勝紀也。 島嶼遠近, 海曲險夷, 郡邑强弱, 鎭戍虛實, 賊船止泊之處, 往來之路, 公皆身歷心思, 畫爲擊救追邀之律, 如指諸掌, 明有成效。 雖云柱不可膠, 要之未出範圍。 邇來三十餘歲, 恬憘益甚, 鮮有知者, 深可惜也。 且倭奴鐵丸, 習於大明海賊, 極其巧妙, 人穿四五, 甲貫二三, 鐵片爲楯, 亦不能禦。 公擁以眞木之板, 始得無虞, 亦一奇也。【竝碣銘。】
번역문:
을묘년(乙卯年, 1555)과 병오년(丙午年, 1556) 사이에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큰 도적(巨寇)⁶⁵이 갑자기 일어나자, 병사와 백성(兵民)들이 달아나 흩어지며 뒤처질까 두려워하고 장수와 재상(將相)이 서로 돌아보며 계책이 없었다. 공이 전선(戰船)의 계책을 제창하며 말하기를 “이는 한신(韓信)이 배수진(背水陣)을 친 뜻⁶⁶이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깨닫지 못하고 비웃으며 또 위태롭게 여겼다. 공은 노여워하지 않고 꺾이지 않아, 몽충(蒙衝)⁶⁷을 크게 만드니, 비루(飛樓)⁶⁸는 삼층(三層)이고 높은 방패(高楯)는 사방을 둘렀으며, 군수물자(輜糧)는 아래에 싣고 노(棹櫓)는 가운데서 젓고 활과 화살(弓矢)은 위에서 쏘며, 대포(大炮)는 앞에서 번개처럼 치고 부딪쳐 부수는 현종(懸舂)⁶⁹은 뒤에 매달았으며, 구름 같은 돛(雲帆)으로 빠르게 달려가니 한 순간에 만 리를 가고, 부딪치면 부서지고 타버리니(觸碎犯焦) 연기에 잠기고 불길에 사라졌다. 저들(적)이 비록 장량(張良), 진평(陳平), 맹분(孟賁), 하육(夏育)⁷⁰과 같은 이가 있더라도 지혜와 용맹을 발휘할 겨를이 없었다. 그 외에 질려발화(蒺藜發火)⁷¹와 같은 것은 적선(賊船)에 서로 던지면 발을 꿰뚫어(洞足)⁷² 불타고 물에 빠져 구할 수 없게 하였다. 공이 창안한 것들로 지금까지 힘입고 있는 것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섬들의 멀고 가까움, 해안 굴곡(海曲)의 험하고 평탄함, 군읍(郡邑)의 강하고 약함, 진수(鎭戍)의 허실(虛實), 적선(賊船)이 머무는 곳, 왕래하는 길을 공이 모두 몸소 겪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공격하고 구원하며 추격하고 맞이하는 법칙(擊救追邀之律)을 계획하니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아(如指諸掌) 분명히 성공적인 효과가 있었다. 비록 ‘거문고 기둥은 아교로 붙이면 안 된다(柱不可膠)’⁷³고 말하지만, 요컨대 (공이 정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근래 30여 년 동안 안일함(恬憘)⁷⁴이 더욱 심해져 아는 자가 드무니, 매우 애석하다. 또한 왜노(倭奴)의 철환(鐵丸)⁷⁵은 명(明)나라 해적(海賊)에게서 익혀 그 교묘함이 극에 달하여, 사람을 너덧 꿰뚫고 갑옷을 두셋 관통하며, 철판(鐵片)으로 방패를 삼아도 또한 막을 수 없었다. 공이 통나무 판자(眞木之板)로 막음으로써 비로소 근심이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나의 기이한 점이다.【이상은 모두 갈명(碣銘)에서 인용】
주석:
65. 거구(巨寇): 큰 도적. 여기서는 을묘왜변 때의 왜구를 가리킨다.
66. 한신(韓信) 배수진(背水陣): 한나라의 명장 한신이 조(趙)나라를 공격할 때 강을 등지고 진을 쳐 병사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게 하여 승리한 고사. 남치근이 전선을 건조하여 수군(水軍)을 강화하는 것이 육지에서의 방어와 달리 배수의 진과 같은 효과가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67. 몽충(蒙衝):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군함의 한 종류. 소가죽 등으로 배를 덮어 적의 화살이나 돌을 막으며 빠르게 돌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68. 비루(飛樓): 배 위에 높이 세운 망루(望樓).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69. 현종(懸舂): 몽충선 뒤에 매달아 적선을 부딪쳐 부수는 데 사용된 충각(衝角) 또는 공성퇴(攻城槌)와 유사한 무기로 추정된다.
70. 양(良), 평(平), 분(賁), 육(育): 각각 한(漢)나라의 명신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의 용사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을 가리킨다. 뛰어난 지략가와 용사를 비유한다.
71. 질려발화(蒺藜發火): 쇠蒺藜(쇠로 만든 마름쇠 모양의 무기)에 불을 붙여 던지는 무기.
72. 동족(洞足): 발을 꿰뚫음. 쇠蒺藜를 밟아 발을 다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73. 주불가교(柱不可膠): 거문고나 비파 등의 현악기에서 줄을 받치는 기둥(柱)을 아교로 고정시키면 음조를 조절할 수 없다는 뜻으로, 규칙이나 방법은 상황에 따라 변통해야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는 한 번 정한 원칙을 고수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남치근이 정한 방비책이 기본 원칙으로서 유효함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인 듯하다.
74. 염희(恬憘): 편안하고 즐거워함. 안일함, 나태함을 의미할 수 있다.
75. 철환(鐵丸): 쇠구슬. 조총(鳥銃)의 탄환을 가리킨다.
장필무(張弼武)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張弼武
字武夫, 求禮人。 正德庚午生。 中宗三十八年癸卯, 登武科。 歷江界・會寧府使、慶尙左・右道兵使、咸鏡北道兵使。 宣祖甲戌卒, 年六十五。
번역문:
장필무(張弼武)
자는 무부(武夫)이고, 구례(求禮) 사람¹이다. 정덕(正德)² 경오년(1510)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38년 계묘년(1543)에 무과(武科)³에 급제하였다. 강계(江界) 및 회령부사(會寧府使)⁴, 경상좌도(慶尙左道) 및 우도(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⁵,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갑술년(1574)⁶에 향년 65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 구례인(求禮人): 본관(本貫)이 구례(求禮)임을 나타낸다. 구례 장씨(求禮 張氏)이다.
- 정덕(正德): 중국 명(明)나라 무종(武宗)의 연호(1506-1521). 정덕 경오년은 1510년이다.
- 무과(武科): 조선 시대에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과거 시험.
- 부사(府使): 조선 시대 부(府)의 으뜸 벼슬. 종3품 또는 정3품 외관직(外官職). 강계와 회령은 북방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 병사(兵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약칭. 각 도(道)의 군사 책임자. 종2품의 외관직 무관이다. 경상좌도와 우도, 함경북도 등 변방 지역의 병사를 역임하며 군사적 경력을 쌓았다.
- 선조(宣祖) 갑술년(甲戌年): 1574년.
원문:
公生而奇偉, 寡言語, 不喜戲。 母敎諸子甚¹嚴, 公最幼。 嘗有失當撻, 泣曰: “兒罪當笞, 願勿傷肩臂, 欲以此孝親。” 父母異之, 曰: “是必起吾門也。” 旣長, 慨然有求學之志, 從師受《大學》、《通鑑》, 略通大義, 復自奮曰: “男兒生, 要立功名光祖先。” 遂學武藝, 孜孜不廢, 躬漁獵以供甘旨。
번역문: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골(奇骨)이 뛰어나고 위엄이 있었으며, 말이 적고 장난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여러 아들을 가르치는 것이 매우⁷ 엄했는데, 공이 가장 어렸다. 일찍이 잘못 맞아 매를 맞게 되자 울면서 말하였다. “아이의 죄는 매를 맞는 것이 마땅하나, 원컨대 어깨와 팔은 다치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으로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자 합니다.” 부모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말하였다.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 장성해서는 개연(慨然)히 학문을 구할 뜻이 있어 스승을 따라 《대학(大學)》⁸과 《통감(通鑑)》⁹을 배우며 대략 그 큰 뜻을 통달하였고, 다시 스스로 분발하여 말하였다. “남아로 태어났으니 공명(功名)¹⁰을 세워 조상을 빛내야 한다.” 마침내 무예(武藝)를 배우며 부지런히 힘써 그만두지 않았고, 몸소 고기 잡고 사냥하여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供甘旨)¹¹.
주석:
7. [주-D001] 甚 : 저본(底本)에는 “其”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8. 《대학(大學)》: 사서(四書)의 하나. 유학의 기본 경전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설명하고 있다.
9. 《통감(通鑑)》: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가리킨다. 중국 전국시대부터 오대(五代)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10. 공명(功名): 공을 세워 이름을 드날림. 주로 관직에 나아가거나 무공(武功)을 세워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을 의미한다.
11. 공감지(供甘旨): ‘甘旨’는 맛있는 음식을 뜻하며,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는 효행(孝行)을 의미한다.
원문:
戊申, 從朝天使之行, 諸人見市廛物貨, 莫不歆羨。 公獨臥館舍, 以所受賞賜, 盡買書冊而歸, 人皆敬憚。
번역문:
무신년(戊申年, 1548)¹²에 조사천사(朝天使)¹³의 행차를 따라갔는데, 여러 사람들은 시장 가게의 물건들을 보고 흠모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公)만 홀로 관사(館舍)에 누워 있으면서, 받은 상사(賞賜)로 모두 서책(書冊)만 사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면서도 어려워하였다(敬憚)¹⁴.
주석:
12. 무신년(戊申年): 문맥상 중종 43년(1548)으로 추정된다.
13. 조사천사(朝天使): 명(明)나라 황제를 배알(拜謁)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의 사신. 천자(天子)의 사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14. 경탄(敬憚): 공경하면서도 외경(畏敬)심을 가지고 어려워함.
원문:
出爲明川縣監, 愛民如子, 官庫盈溢, 民有以海産來獻者, 令坐前而盡啖之。 時有惡虎爲患, 北兵使喩邊將及守令擧兵圍捕。 公獨持一箭往, 有白額者伏於¹⁵巖上, 相距幾二百步, 公持滿而發之, 虎卽墜下, 其害遂息。
번역문:
외직(外職)으로 나가 명천현감(明川縣監)¹⁶이 되어서는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니 관고(官庫)가 가득 찼고, 백성 중에 해산물(海産)을 가져와 바치는 자가 있으면 앞에 앉혀 놓고 모두 먹게 하였다. 그때 사나운 호랑이가 해를 끼치자, 북병사(北兵使)¹⁷가 변방의 장수 및 수령들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포위하여 잡도록 하였다. 공이 홀로 화살 하나를 가지고 가니, 흰 이마의 호랑이(白額者)¹⁸가 바위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거의 2백 보(步)¹⁹였다. 공이 활을 가득 당겨 쏘자 호랑이가 즉시 떨어지니, 그 피해가 마침내 그쳤다.
주석:
15. [주-D002] 於 : 저본(底本)에는 “外”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6. 현감(縣監): 조선 시대 종6품 외관직. 작은 현(縣)의 수령이다.
17. 북병사(北兵使):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가리킨다.
18. 백액자(白額者): 이마가 흰 것. 호랑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9. 보(步): 거리의 단위. 시대나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조선 시대 1보는 약 1.2
1.8m 정도였다. 200보면 대략 240
360m 정도의 거리이다.
원문:
拜穩城判官。 乙卯正月, 城底胡誘引深處諸胡抗沙衛等, 入長城門內, 公卽率牙兵八名先馳赴之。 賊見其兵單騎, 長驅直前, 公連發三矢, 應弦而倒, 賊少退, 作左右翼而進, 爲圍抱之狀。 公顧謂八卒曰: “爾等愼勿發射, 所帶之箭, 節次與我。” 先向左翼而射, 又向右翼而射。 賊倒斃者甚多。 俄而府兵追到, 賊大敗而走。 乘勝追之, 出長城外, 斬二十五級。 兵戈器械之委棄者, 不可勝計。 歸而計功, 府使辛敬輿曰: “今日之功, 公獨辦也。” 公曰: “下官受主將敎而往擊, 何敢言功?” 辛喜曰: “果若君言。” 朝廷以敬輿報功不實, 弼武大搆邊釁, 只治辛不實之罪, 竟不賞功。 御史趙光彦啓褒公功, 上特賜表裏。 抗沙衛等各以長箭一枝束、貂皮三領, 以示心服之意, 亦歸於府伯。
번역문:
온성판관(穩城判官)²⁰에 제수되었다. 을묘년(乙卯年, 1555)²¹ 정월에 성저(城底)의 오랑캐(胡)²²가 깊은 곳의 여러 오랑캐 항사위(抗沙衛)²³ 등을 꾀어 이끌고 장성문(長城門) 안으로 들어오자, 공이 즉시 아병(牙兵)²⁴ 8명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 나갔다. 적(賊)이 그 병력이 단출한 것을 보고 말을 몰아 곧바로 앞으로 나오자, 공이 연달아 세 발의 화살을 쏘아 시위를 떠나자마자 (적이) 쓰러지니, 적이 조금 물러나 좌우익(左右翼)을 만들어 진격하며 포위하려는 형세를 취하였다. 공이 8명의 병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너희들은 함부로 쏘지 말고, 가지고 있는 화살을 차례로 나에게 넘겨라.” 먼저 좌익을 향해 쏘고, 또 우익을 향해 쏘았다. 적 중에 쓰러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얼마 후 부(府)의 군대가 뒤따라 도착하자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장성문 밖으로 나가 적의 목 25급(級)을 베었다. 버려진 병장기와 기계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와 공을 따지는데, 부사(府使) 신경여(辛敬輿)가 말하였다. “오늘의 공은 공이 홀로 해낸 것이다.” 공이 말하였다. “하관(下官)은 주장(主將)의 가르침을 받고 가서 친 것이니, 어찌 감히 공을 말하겠습니까?” 신(辛)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과연 그대의 말과 같소.” 조정에서는 신경여가 공을 보고한 것이 사실과 다르고 장필무가 크게 변방의 분쟁(邊釁)을 일으켰다 하여, 단지 신(辛)의 불실(不實)한 죄만 다스리고 끝내 공을 포상하지 않았다. 어사(御史)²⁵ 조광언(趙光彦)이 공의 공로를 기릴 것을 아뢰자, 상(上)께서 특별히 표리(表裏)²⁶를 하사하셨다. 항사위 등은 각각 긴 화살 한 묶음과 담비 가죽(貂皮) 세 벌을 보내 마음으로 복종한다는 뜻을 보이면서, 또한 부백(府伯)²⁷에게 바쳤다.
주석:
20. 판관(判官): 조선 시대 각 관아에 속했던 종5품 관직. 부(府)에서는 부사(府使) 다음가는 벼슬이었다.
21. 을묘년(乙卯年): 명종(明宗) 10년, 1555년. 이 해에 남쪽에서는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다.
22. 성저호(城底胡): 성(城) 아래에 사는 오랑캐. 두만강 건너편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킨다.
23. 항사위(抗沙衛): 여진족의 부락 또는 그 추장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24. 아병(牙兵): 장수의 기(旗) 아래에 소속된 직속 부하 또는 친위병.
25. 어사(御史):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관리의 감찰이나 민정 시찰 등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
26.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안감 한 벌. 임금이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리는 상 중 하나였다.
27. 부백(府伯): 부사(府使)를 달리 이르는 말. 여기서는 온성부사 신경여를 가리킨다. 항사위 등이 장필무에게 직접 보내지 않고 부사에게 보낸 것은 공식적인 외교 절차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원문:
丁巳, 閔應瑞爲濟州牧使, 以公爲偏裨。 時倭寇十餘艘來泊州境, 牧使下海攻捕, 賊已遁去。 問計於公, 公曰: “船遠風逆, 追之有悔。” 閔不聽。 追及尾後, 一船有一倭, 潛泳水底, 躍入我船, 揮劍擊之, 我軍驚惶, 奔逬落水, 死者甚多。 有一卒以長槍刺賊而斃之, 閔始悔不用公言。 及論獲船殺倭之功, 閔欲以公爲首, 公固辭不聽, 稱病歸家。
번역문:
정사년(丁巳年, 1557)²⁸에 민응서(閔應瑞)가 제주목사(濟州牧使)²⁹가 되자 공을 편비(偏裨)³⁰로 삼았다. 이때 왜구(倭寇)³¹ 10여 척이 주의 경계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목사가 바다로 내려가 공격하여 잡으려 했으나 적은 이미 달아나 버렸다. 공에게 계책을 묻자, 공이 말하였다. “배는 멀고 바람은 역풍이니, 추격하면 후회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민응서가 듣지 않았다. 추격하여 배의 꽁무니에 이르자, 한 배에 있던 왜인 하나가 물 밑으로 잠수해 헤엄쳐 와서 우리 배로 뛰어들어 칼을 휘둘러 공격하니, 아군이 놀라 허둥지둥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한 병졸이 긴 창으로 적을 찔러 죽이니, 민응서가 비로소 공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배를 노획하고 왜적을 죽인 공을 논할 때 민응서가 공을 으뜸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공이 굳이 사양하고 듣지 않으며 병을 칭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주석:
28. 정사년(丁巳年): 명종 12년, 1557년.
29. 제주목사(濟州牧使): 제주목(濟州牧)의 수령. 정3품 외관직.
30. 편비(偏裨): 주장(主將)을 보좌하는 부장(副將). 또는 비장(裨將).
31. 왜구(倭寇):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침략한 일본 해적.
원문:
爲梁山郡守。 梁介於兵、水兩營之間, 凡所徵求, 苟在法外, 一切不從, 兩營皆銜之。 一日, 兵、水使會於郡舍, 同聲問曰: “營門之令, 拒而不行, 何恃而敢如是乎?” 公曰: “吾無所恃, 只有草屋數間, 惟恃此耳。” 兩人相視失色。 幾盡六期, 辭病徑歸, 移構小廬, 覆以橡皮, 僅蔽風雨。
번역문:
양산군수(梁山郡守)³²가 되었다. 양산(梁山)은 병영(兵營)³³과 수영(水營)³⁴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무릇 징발하여 요구하는 것이 만약 법규 밖에 있는 것이면 일절 따르지 않으니, 양쪽 영문(營門)에서 모두 그에게 원한을 품었다(銜之)³⁵. 하루는 병사(兵使)와 수사(水使)³⁶가 군청(郡舍)에 모여 함께 소리 높여 물었다. “영문(營門)의 명령을 거부하고 행하지 않으니, 무엇을 믿고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공이 말하였다. “나는 믿는 바가 없고, 다만 초가집 몇 칸이 있을 뿐이니, 오직 이것을 믿을 뿐이오.” 두 사람이 서로 쳐다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거의 6년의 임기(六期)³⁷를 마치려 할 때,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곧바로 돌아와 작은 오두막을 옮겨 짓고 상수리나무 껍질(橡皮)로 지붕을 덮어 겨우 비바람만 가렸다.
주석:
32. 양산군수(梁山郡守): 경상도 양산군(梁山郡)의 수령. 종4품 외관직.
33. 병영(兵營):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주둔하는 군영. 당시 경상좌도 병영은 울산(蔚山)에 있었다.
34. 수영(水營):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주둔하는 군영. 당시 경상좌도 수영은 동래(東萊, 현 부산)에 있었다. 양산은 이 두 군영 사이에 위치하여 각종 요구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다.
35. 함지(銜之): 마음에 품고 원망하거나 미워함.
36. 수사(水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약칭. 각 도의 수군 책임자. 정3품 무관이다.
37. 육기(六期): 임기 6년. 조선 시대 수령의 임기는 보통 1800일(약 5년) 또는 6년이었다.
원문:
甲子, 拜滿浦³⁸僉使。 時皇朝有逆寇, 據我邊陲, 皇帝命我國征之, 朝議皆以爲非某莫可, 命爲西征大將。 公卽以猛士百餘人, 深入賊穴, 設伏以敗之, 生擒數百送于皇朝。 帝命鑄銀三斤, 刻公姓名而歸之。
번역문:
갑자년(甲子年, 1564)³⁹에 만포첨사(滿浦僉使)⁴⁰에 제수되었다. 이때 황조(皇朝)⁴¹에 역적(逆寇)이 있어 우리나라 변방(邊陲)을 점거하자, 황제가 우리나라에 명하여 이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모두 아무개(某)⁴²가 아니면 불가하다고 여겨 서정대장(西征大將)으로 임명하였다. 공이 즉시 용맹한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적의 소굴 깊숙이 들어가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패배시키고, 수백 명을 사로잡아 황조에 보냈다. 황제가 명하여 은(銀) 3근(斤)을 주조하여 공의 성명을 새겨 보내주었다.
주석:
38. [주-D003] 浦 : 저본(底本)에는 “蒲”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39. 갑자년(甲子年): 명종 19년, 1564년.
40. 만포첨사(滿浦僉使): 만포진(滿浦鎭)의 첨절제사(僉節制使). 종3품 무관직. 만포는 평안도 북쪽 압록강 변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41. 황조(皇朝): 명(明)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42. 모(某): 아무개. 여기서는 장필무를 가리킨다.
원문:
己巳, 特陞嘉善, 爲會寧府使, 辭不赴, 拜慶尙兵使, 下敎曰: “卿淸勤可嘉, 而不惜人命⁴³, 此甚有妨於爲將之道。 卿宜警飭。” 公拜辭赴鎭, 以上敎作軸, 掛諸壁上, 拱手仰對。
번역문:
기사년(己巳年, 1569)⁴⁴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⁴⁵로 승진하여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경상병사(慶尙兵使)에 제수되자 하교(下敎)하시기를, “경(卿)은 청렴하고 부지런함(淸勤)은 가상하나, 사람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니⁴⁶, 이는 장수가 되는 도리(爲將之道)에 매우 방해가 된다. 경은 마땅히 경계하고 삼가라(警飭).” 공이 절하고 하직하며 진(鎭)으로 부임하여, 상의 하교를 족자(軸)로 만들어 벽 위에 걸어두고 공수(拱手)하고 우러러보았다.
주석:
43. [주-D004] 不惜人命 : 《성담집(性潭集)・병사증판서장공묘갈명(兵使贈判書張公墓碣銘)》에는 “단지 도를 넘는 일이 있을 뿐이다(但有過越之事)”로 되어 있다. 이는 임금의 하교 내용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 장필무의 성격이나 지휘 방식에 대한 평가의 뉘앙스 차이를 보여준다.
44. 기사년(己巳年): 선조 2년, 1569년.
45.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에게 주던 품계(品階). 정3품에서 종2품으로 특진했음을 의미한다.
46. 불석인명(不惜人命): 사람의 목숨을 아끼지 않음. 주석 [주-D004]에서 보듯 다른 기록에는 '도를 넘는 일이 있다(但有過越之事)'고 되어 있어, 엄격한 군율 적용이나 전투에서의 과감성 등을 지적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임금의 하교는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단점을 경계시킨 것이다.
원문:
壬申, 拜北道兵使, 復加嘉善, 公深欲辭之, 而時有北邊聲息, 卽決以行。 諸胡相戒曰: “張將軍來鎭, 愼毋犯邊生事。” 民夷畏服, 戴之如父母, 畏之如鬼神。
번역문:
임신년(壬申年, 1572)⁴⁷에 북도병사(北道兵使)⁴⁸에 제수되고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가 더해지자, 공이 깊이 사양하고자 하였으나, 이때 북쪽 변방에 변고의 소식(聲息)이 있어 즉시 가기로 결정하였다. 여러 오랑캐(諸胡)들이 서로 경계하며 말하였다. “장 장군(張將軍)이 진(鎭)에 오셨으니, 삼가 변방을 침범하여 일을 일으키지 말라.” 백성과 오랑캐(民夷)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여, 받들기를 부모처럼 하고 두려워하기를 귀신처럼 하였다.
주석:
47. 임신년(壬申年): 선조 5년, 1572년.
48. 북도병사(北道兵使):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가리킨다.
원문:
公雖以武藝爲業, 手不釋卷, 又取《自警編》, 摘其語以自省。 嘗銘於劍曰: “惟存報國之心, 永絶憂家之念。” 日日新, 又日新。 每傾慕南冥, 在梁山, 去山海亭纔三十里, 馳往謁之, 請受一言。 南冥見而奇之, 且嘉向道之誠, 歎曰: “百世之下, 復見夷、齊。” 開襟相語, 一如舊識。 公在西北累歲, 只以一紙通信而歸鄕, 御款段, 率山衲往謁, 信宿而返。 及聞其訃, 爲文哭奠, 徘徊惆悵, 情不自勝。
번역문:
공은 비록 무예(武藝)를 업(業)으로 삼았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또 《자경편(自警編)》⁴⁹을 가져다 그 말을 발췌하여 스스로 반성하였다. 일찍이 칼에 새겨 말하였다. “오직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만 간직하고, 집안을 걱정하는 생각은 영원히 끊으리라.”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였다. 매번 남명(南冥)⁵⁰을 흠모하였는데, 양산(梁山)에 있을 때 산해정(山海亭)⁵¹과의 거리가 겨우 30리(里)여서 말을 달려가 그를 뵙고 한 말씀 받기를 청하였다. 남명이 보고는 기특하게 여기고 또한 도(道)를 향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겨 감탄하며 말하였다. “백세(百世) 뒤에 다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⁵²를 보는구나.” 마음을 열고 서로 이야기하니,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공이 서북(西北) 지방에 여러 해 있을 때 단지 편지 한 장으로 소식을 통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느릿한 말(款段)⁵³을 타고 산승(山衲)⁵⁴을 데리고 가서 뵈었는데, 하룻밤이나 이틀 밤을 묵고 돌아왔다. 그의 부고(訃告)를 듣고는 글을 지어 곡하고 제사 지내며, 배회하고 슬퍼하며 정(情)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주석:
49. 《자경편(自警編)》: 스스로 경계하는 내용의 글 모음.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지칭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송(宋)나라 조선선(趙善璙)의 저작 등이 있다. 혹은 스스로 경계하기 위한 글귀들을 모아 편찬했을 수도 있다.
50. 남명(南冥): 조선 중기의 저명한 학자 조식(曺植, 1501-1572)의 호.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으로 영남학파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51. 산해정(山海亭): 남명 조식이 만년에 강학하던 곳.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천강변에 있었다.
52. 이(夷), 제(齊):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중국 상(商)나라 말기의 형제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상나라 정벌을 비판하며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었다.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높은 절개의 상징이다. 남명이 장필무의 강직함과 지조를 이에 비유한 것이다.
53. 관단(款段): 느릿느릿 걷는 말.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 태도를 보여준다.
54. 산납(山衲): 산에 사는 승려. 또는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여기서는 남명 조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性疾惡, 與惡人坐, 若將浼焉。 貪汚不潔之人, 則爵位雖尊, 視之蔑如也。 臨怒恐傷人, 治民恒用榎楚, 故人無傷者。 至其敗倫、亂俗、贓盜之人, 輒加威怒, 如轟雷烈火, 必快治而後已。 見者無不股栗, 御下卒以嚴, 無一毫容貸。 或曰: “得無過當乎?” 公曰: “夫好生惡死, 人之常情也。 驅惡死之人, 以赴死地, 而人不敢逗遛者, 知退而必死, 故寧進而或生也。 平日不嚴, 人不知畏, 而心亦怠矣。 到此而雖行斬伐, 顧何益哉?” 聞者心服。 晩年自覺嚴急, 欲濟以和平, 務從寬柔, 遇人接物, 曲盡情意, 無敢少忽焉。【竝《潛谷舊錄》。】
번역문:
성품이 악(惡)을 미워하여, 악한 사람과 함께 앉으면 마치 더럽혀질 것처럼 하였다. 탐욕스럽고 더러우며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비록 벼슬이 높더라도 얕보았다. 노여움에 임해서는 사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여 백성을 다스릴 때 항상 박달나무 회초리(榎楚)⁵⁵를 사용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없었다. 윤리(倫理)를 무너뜨리고 풍속(風俗)을 어지럽히며 뇌물을 받고 도둑질하는(贓盜) 사람에 이르러서는 문득 위엄과 노여움을 더하기를 마치 우레가 치고 사나운 불길이 타는 듯하여, 반드시 통쾌하게 다스린 뒤에야 그만두었다. 보는 자들이 다리를 떨지 않음이 없었고, 아랫사람과 병졸을 대하기를 엄하게 하여 한 터럭만큼도 용서함이 없었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지나치지 않은가?” 공이 말하였다. “무릇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보통 마음이다. 죽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몰아 죽을 곳으로 나아가게 할 때 사람들이 감히 머뭇거리지 못하는 것은, 물러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라리 나아가서 혹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평소에 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두려움을 알지 못하여 마음 또한 해이해진다. 이 지경에 이르러 비록 베는 형벌을 행한들 돌아보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듣는 자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만년(晩年)에는 스스로 엄하고 급함을 깨닫고 화평(和平)함으로 이를 구제하고자 하여, 힘써 너그럽고 부드러움을 따르며, 사람을 만나고 사물을 대함에 정의(情意)를 곡진히 하여 감히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⁵⁶에서 인용】
주석:
55. 가초(榎楚): 박달나무(榎)로 만든 회초리(楚). 비교적 가벼운 형벌 도구로, 백성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다스리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56.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의 문집인 《잠곡유고(潛谷遺稿)》의 일부로 추정되거나, 혹은 김육과 관련된 집안의 기록일 수 있다. 이 글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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