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국조명신언행록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11

諺解 2025. 5. 19.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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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한(申光漢) 【문간공(文簡公)³⁵이다.】

원문:
申光漢【文簡公。】
字漢之, 一字時晦, 號企齋。 叔舟之孫。 成化甲辰生。 中宗二年丁卯進士, 庚午登第。 賜暇湖堂, 歷典翰、大司成、吏曹判書, 典文衡。 明宗乙巳, 參衛³⁶社功。 官至左贊成。 乙卯卒, 年七十二。

번역문:
신광한(申光漢)【문간공(文簡公)³⁵이다.】
자는 한지(漢之)이고, 일자(一字)는 시회(時晦)이며, 호는 기재(企齋)이다. 숙주(叔舟)³⁷의 손자이다. 성화(成化) 갑진년(1484)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년 정묘년(1507)에 진사(進士)가 되고, 경오년(151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³⁸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³⁹하였고, 전한(典翰)⁴⁰, 대사성(大司成)⁴¹, 이조판서(吏曹判書)⁴²를 역임하고, 문형(文衡)⁴³을 관장하였다. 명종(明宗) 을사년(1545)에 위사공신(衛社功臣)⁴⁴에 참여하였다. 관직은 좌찬성(左贊成)⁴⁵에 이르렀다. 을묘년(1555)에 졸(卒)하니, 향년 72세였다.

주석:
35. 문간공(文簡公): 신광한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의미하고, 간(簡)은 마음을 바로잡아 게으르지 않음(正心不懈), 또는 간결하고 곧음(簡而易從) 등을 의미한다.
36. [주-D001] 衛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위사공신(衛社功臣)이 정확한 명칭이다.
37. 숙주(叔舟):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조선 초기의 대학자, 문신.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신광한은 신숙주의 셋째 아들 신형(申浻)의 아들이다.
38. 호당(湖堂): 조선 시대에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시행하던 곳. 동호(東湖, 현재의 옥수동 부근) 두모포(豆毛浦)에 있었으므로 호당이라 불렸다.
39.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여기에 선발되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40. 전한(典翰):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하관(堂下官) 관직.
41.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42.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총괄했다.
43. 문형(文衡):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예문관(藝文館) 대제학을 겸임하는 직책으로, 학문과 문한(文翰)의 최고 책임자이자 상징적인 자리였다.
44. 위사공신(衛社功臣):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고 명종을 보호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신광한은 위사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45. 좌찬성(左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이다.


원문:
公少失父母, 鞠於老婢。 年十八, 猶不知書。 與隣兒戲于川, 隣兒踢公仆水中。 公怒叱曰: “汝隷奴, 何敢凌公子?” 兒曰: “如君不知書者, 亦公子耶? 是必無腸公子矣。” 大慙, 始折節讀書, 文藻水涌。 明年, 以《萬里鷗賦》魁禮闈。【《涪溪記聞》。】

번역문:
공(公)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늙은 여종(老婢)에게서 양육되었다. 나이 18세에도 아직 글을 알지 못하였다. 이웃 아이와 냇가에서 놀다가 이웃 아이가 공을 걷어차 물속에 넘어뜨렸다. 공이 노하여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종놈인데 어찌 감히 공자(公子)를 능멸하느냐?” 하니, 아이가 말하기를 “그대처럼 글을 알지 못하는 자도 또한 공자입니까? 이는 필시 속없는 공자(無腸公子)⁴⁶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크게 부끄러워하여 비로소 마음을 다잡고(折節) 글을 읽으니, 문장(文藻)이 물 솟듯 하였다. 다음 해에 〈만리오부(萬里鷗賦)〉⁴⁷로 예관(禮關)⁴⁸에서 장원(魁)하였다.【《부계기문(涪溪記聞)》⁴⁹에서 인용】

주석:
46. 무장공자(無腸公子): 장(腸)이 없는 공자. ‘장’은 보통 생각이나 배짱 등을 의미하므로, '속없는 사람', '줏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여기서는 글도 모르는 주제에 신분만 내세우는 신광한을 조롱하는 말이다.
47. 〈만리오부(萬里鷗賦)〉: '만 리 밖의 갈매기'를 주제로 한 부(賦). 부는 일정한 압운(押韻)이 있는 문체의 하나이다. 신광한이 이 부로 시험에 장원했다는 것은 그의 문재(文才)가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48. 예관(禮關): 과거 시험의 예비 시험인 향시(鄕試), 한성시(漢城試), 또는 소과(小科) 등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문과 복시(覆試)를 주관하는 예조(禮曹)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진사시(進士試)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묘년(1507) 진사시에서 장원하였다.
49.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중기의 문신 이기(李墍, 1476~1552)의 문집 《송와문집(松窩文集)》에 실려 있는 기록. 부계(涪溪)는 이기의 호 중 하나이다.


원문:
丁卯, 擧進士, 金公安國欲以公製爲第一, 參考者以高下通韻深咎之, 竟置乙科。 及見公名, 左右愕然悔之。

번역문:
정묘년(1507)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는데, 김안국(金安國)⁵⁰ 공(公)이 신광한의 글을 장원(第一)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참고관(參考官)⁵¹들이 상성(上聲)과 하성(下聲)을 통운(通韻)⁵²한 것을 깊이 허물 삼아 마침내 을과(乙科)⁵³에 두었다. 공의 이름을 보게 되자 좌우 사람들이 깜짝 놀라 후회하였다.

주석:
50.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추구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었다가 복귀하여 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신광한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51. 참고관(參考官): 과거 시험의 채점관 중 하나. 시관(試官) 아래에서 답안지를 검토하는 역할을 했다.
52. 고하통운(高下通韻): 시부(詩賦) 등에서 압운(押韻)을 할 때, 평성(平聲)의 상평성(上平聲)과 하평성(下平聲)을 구분하지 않고 통용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사성(四聲: 평상거입) 중 상성(上聲)과 거성(去聲)을 구분하지 않거나 통용하는 것 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당시 엄격한 운법(韻法)에서는 이를 잘못으로 여겼다.
53. 을과(乙科): 조선 시대 과거 시험에서 등급을 나눌 때 갑과(甲科) 다음가는 등급. 진사시에서는 보통 1등(5명), 2등(25명), 3등(70명)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는 장원을 놓쳤다는 의미로 쓰인 듯하다.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신광한이 진사시 1등 제1인(장원)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기록과 차이가 있다.


원문:
甲辰, 拜吏曹判書。 乙巳九月, 參衛社功, 文定王后賜衣, 仍傳曰: “此中廟常時所御, 故特賜卿服之, 無忘先王, 以輔後嗣。”【竝《潛谷舊錄》。】

번역문:
갑진년(1544)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을사년(1545) 9월에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참여하자, 문정왕후(文定王后)⁵⁴가 옷을 하사하고 이어서 전교(傳敎)하기를, “이는 중종(中廟)⁵⁵께서 평상시에 입으시던 것이므로 특별히 경(卿)에게 하사하여 입게 하니, 선왕(先王)을 잊지 말고 후사(後嗣)⁵⁶를 보필하라.”라고 하였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54.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

1565):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이자 명종(明宗)의 어머니. 명종 즉위 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했다.
55. 중묘(中廟): 중종(中宗, 재위 1506

1544)의 묘호(廟號).
56. 후사(後嗣): 뒤를 잇는 자손. 여기서는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원문:
乙巳, 錄勳之日, 大提學當製敎書, 而申光漢把筆呻吟, 仍謂提學崔演曰: “老夫自去夜得病, 氣甚不平, 未能搆思, 令公須速製進, 使無窘急之患。” 崔遂代製。 申旣錄勳之後, 所分逆賊子孫及奴婢等, 皆許自便行止, 一切不使應役, 而其時人無得以知之。 平生以歇後得名, 而處事如此, 人所不可及也。

번역문:
을사년(1545)에 녹훈(錄勳)⁵⁷하던 날, 대제학(大提學)⁵⁸이 마땅히 교서(敎書)⁵⁹를 지어야 했는데, 신광한이 붓을 잡고 신음하다가 이내 제학(提學) 최연(崔演)⁶⁰에게 일러 말하기를, “늙은 내가 지난밤부터 병을 얻어 기(氣)가 몹시 고르지 못하여 구상(構思)할 수가 없으니, 영공(令公)⁶¹은 모름지기 속히 지어 올려서 군색하고 급한 우환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최연이 마침내 대신 지었다. 신광한은 녹훈된 뒤에 분배받은 역적(逆賊)⁶²의 자손과 노비 등에 대해 모두 스스로 편리한 대로 거취(行止)를 결정하도록 허락하고 일절 부역(應役)에 응하게 하지 않았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알 수 없었다. 평생 흘후(歇後)⁶³로 이름을 얻었으나, 일을 처리함이 이와 같았으니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바였다.

주석:
57. 녹훈(錄勳): 공신(功臣)을 책록하는 것. 위사공신(衛社功臣) 책록을 가리킨다.
58. 대제학(大提學):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으뜸 벼슬. 문형(文衡)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대제학은 신광한이었다.
59. 교서(敎書):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 공신 책봉 시에는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내렸다.
60. 최연(崔演, 1504~154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연(叔演), 호는 동고(東皐). 당시 홍문관 제학(提學) 등으로 활동했다.
61. 영공(令公):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
62. 역적(逆賊): 을사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제거된 윤임(尹任) 일파를 가리킨다. 공신에게는 죄인의 재산과 노비를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63. 흘후(歇後): 일을 마친 뒤에 쉬는 것. 또는 재치 있는 말이나 행동, 특히 언어유희(pun)를 의미하는 흘후어(歇後語)와 관련될 수도 있다. 여기서는 신광한이 공신 책록이라는 공적인 일에는 명분을 내세워 참여하지 않은 듯하면서도(병을 핑계로 교서 작성을 미룸), 사적으로는 분배받은 노비를 풀어주는 선행을 남몰래 베푼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실제 처신이 다름을 의미하거나, 혹은 공적인 책임은 회피하면서 사적인 이익(명예)은 챙기는 듯한 처신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문맥상 그의 신중하고 속 깊은 처신을 칭찬하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원문:
公酷耽文翰, 不事活計。 有頑奴不修貢, 乃以詩題送曰: “平海郡居奴莫同, 年年身貢聽如聾。 官威捉致非難事, 須趁明年二月中。”【竝《寄齋雜記》。】

번역문:
공(公)은 문한(文翰)⁶⁴을 몹시 즐기고 생계(活計)를 돌보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다. 완악한 노비가 신공(身貢)⁶⁵을 바치지 않자, 이에 시(詩)를 지어 보내며 말하였다. “평해군(平海郡)⁶⁶에 사는 노비 막동(莫同)아, 해마다 신공 바치는 것을 못 들은 체 하는구나. 관(官)의 위엄으로 잡아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나, 모름지기 내년 2월 중에는 서둘러 바치도록 하라.”【이상 《기재잡기(寄齋雜記)》⁶⁷에서 인용】

주석:
64. 문한(文翰): 글을 짓는 일. 문장(文章)과 서찰(書札) 등을 아우른다.
65. 신공(身貢): 노비가 주인에게 몸으로 때우는 대신 바치는 옷감이나 곡물 등의 현물. 공노비(公奴婢)는 국가에, 사노비(私奴婢)는 주인에게 바쳤다.
66. 평해군(平海郡): 현재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일대.
67. 《기재잡기(寄齋雜記)》: 기재(寄齋)는 신광한의 호이므로, 신광한 자신이 기록한 잡록(雜錄)을 의미한다.


원문:
申企齋於正德己卯爲大司成, 尙相公震以上齋色掌出入於明倫堂。 及群賢斥死, 公亦貶爲悉直府使, 因罷黜, 退居忠原之達川二十年。 尙公己卯冬登第。 至嘉靖丁酉, 金安老被罪, 戊戌春, 公還朝, 復爲大司成。 尙公時爲戶曹參判, 相遇於道, 驅軺至公之馬首而謂公曰: “令公不識我乎? 我乃己卯色掌生員尙震也。” 公曰: “其然乎? 令若不言, 楚澤餘生, 豈能記其舊時之面目乎?” 遂相揖而去。 宦路飜覆, 自古猶然, 積薪之喩, 不亦宜乎?【《松窩雜記》。】

번역문:
신기재(申企齋)⁶⁸가 정덕(正德) 기묘년(1519)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었는데, 상공(相公) 상진(尙震)⁶⁹이 상재생(上齋生)⁷⁰ 색장(色掌)⁷¹으로 명륜당(明倫堂)⁷²에 출입하였다. 여러 현인(賢人)들이 배척당하고 죽임을 당함⁷³에 미쳐, 공(公) 또한 실직부사(悉直府使)⁷⁴로 좌천되었다가 이로 인해 파직되어, 충원(忠原)⁷⁵의 달천(達川)에 물러나 살기를 20년 동안 하였다. 상공(尙公)은 기묘년 겨울에 급제하였다. 가경(嘉靖) 정유년(1537)에 이르러 김안로(金安老)가 죄를 입자, 무술년(1538) 봄에 공이 조정에 돌아와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상공은 당시 호조참판(戶曹參判)⁷⁶이었는데, 길에서 서로 만나 수레(軺)를 몰아 공의 말 머리에 이르러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저는 기묘년의 색장 생원 상진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러한가? 자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초택(楚澤)⁷⁷의 여생(餘生)이 어찌 그 옛날의 얼굴 모습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서로 읍(揖)하고 떠나갔다. 환로(宦路)⁷⁸가 뒤집히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니, 적신(積薪)의 비유⁷⁹가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송와잡기(松窩雜記)》⁸⁰에서 인용】

주석:
68. 신기재(申企齋): 신광한. 기재(企齋)는 그의 호이다.
69. 상진(尙震, 1493~156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기부(起夫), 호는 졸재(拙齋).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다.
70. 상재생(上齋生):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중 상급반 유생.
71. 색장(色掌): 성균관에서 재임(齋任)의 하나로, 유생들의 식사 관련 업무 등을 맡아보던 직책.
72. 명륜당(明倫堂): 성균관의 중심 건물로, 유생들이 강학(講學)하던 곳.
73. 군현척사(群賢斥死):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가리킨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많은 신진 사림(士林)들이 훈구파(勳舊派)의 모함으로 숙청되었다. 신광한 역시 이때 파직되었다.
74. 실직부사(悉直府使): 실직(悉直)은 현재의 강원도 삼척(三陟) 지역을 가리킨다. 부사(府使)는 지방관직이다. 중앙의 대사성에서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음을 의미한다.
75. 충원(忠原): 현재의 충청북도 충주(忠州).
76. 호조참판(戶曹參判): 호조(戶曹)의 버금 벼슬. 종2품.
77. 초택(楚澤): 초(楚)나라의 못.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쫓겨나 강가(江潭)를 방황하며 〈어부사(漁父辭)〉를 지은 고사에서 유래하여, 불우한 처지나 귀양살이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신광한이 기묘사화로 벼슬에서 쫓겨나 오랜 세월을 보낸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한 말이다.
78. 환로(宦路): 벼슬길.
79. 적신지유(積薪之喩): 땔나무를 쌓는 것에 대한 비유. 《시경(詩經)》 〈학명(鶴鳴)〉편에 "낙숫물이 바위를 뚫고, 아래에 쌓인 땔나무가 위에 있는 것을 받친다(他山之石 可以攻玉 踧踧周道 […] 樂只君子 福履綏之)"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편의 "땔나무를 쌓는 것과 같으니, 아래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을 받치네(如彼積薪 爨之下體)" 또는 《예기(禮記)》 〈학기(學記)〉편의 '쌓아놓은 땔나무는 뒤에 놓인 것이 앞에 놓인 것을 받쳐준다(如積薪耳 後者居上)'는 구절에서 유래하여, 후배가 선배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능가하는 것, 또는 세상일의 변화무쌍함, 인과응보 등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과거 성균관의 스승(대사성)과 제자(색장 생원)였던 두 사람의 처지가 역전된 상황(신광한은 복직되었고, 상진은 이미 참판의 지위에 오름)을 가리키며 세상사의 변화무쌍함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80. 《송와잡기(松窩雜記)》: 송와(松窩)는 이기(李墍)의 호이므로, 《부계기문》과 마찬가지로 이기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원문:
明廟朝, 申光漢爲判中樞府事, 相臣沈連源、尙震啓以申光漢立朝最久, 年高有學, 而久在從一品, 請陞秩除領經筵, 資其勸講。 於是特陞正一品。 今則時任議政外, 雖原任大臣, 不得兼帶領經筵, 固非舊制也。

번역문:
명종(明廟)⁸¹ 시대에 신광한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⁸²로 있을 때, 상신(相臣) 심연원(沈連源)⁸³,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신광한은 입조(立朝)한 지 가장 오래되었고, 나이가 많고 학문이 있으며, 오랫동안 종1품(從一品)에 있었으니, 품계(品階)를 올려 영경연(領經筵)⁸⁴에 제수하여 그가 권강(勸講)⁸⁵하는 것을 돕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특별히 정1품(正一品)으로 승진시켰다. 지금은 시임(時任) 의정(議政) 외에는 비록 원임대신(原任大臣)이라도 영경연을 겸임할 수 없으니, 진실로 옛 제도가 아니다.

주석:
81. 명묘(明廟): 명종(明宗, 재위 1545

1567)의 묘호.
82.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실권은 없는 명예직이었다.
83. 심연원(沈連源, 1491

155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원(會源), 호는 보암(保庵). 명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84. 영경연(領經筵): 경연(經筵)의 최고 책임자인 영경연사(領經筵事)를 줄인 말. 정1품 관원이 겸임했다. 경연은 임금과 신하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85. 권강(勸講): 경연에서 임금에게 학문을 권하고 강론하는 것.


원문:
申光漢少時夢彩鳥飛入口, 自是才思日進, 及將典文衡, 又夢彩鳥入口。 此猶羅含夢含五色鳥之類也。 華使張承憲時, 公爲遠接使, 有唱和詩, 承憲大加稱賞。 翌年, 華使王鶴見公致辭曰: “覽《皇華集》, 張天使見壓多矣。” 其爲華使所服如此。 然張、王二使, 皆非文章之士, 不足重也。【竝《芝峯類說》。】

번역문:
신광한이 젊었을 때 꿈에 채색 새(彩鳥)가 날아 입으로 들어왔는데, 이로부터 재주와 생각이 날로 진보하였고, 장차 문형(文衡)을 관장하게 될 무렵에 또 꿈에 채색 새가 입으로 들어왔다. 이는 나함(羅含)이 오색조(五色鳥)를 머금는 꿈을 꾼⁸⁶ 것과 같은 종류이다. 중국 사신(華使) 장승헌(張承憲)⁸⁷이 왔을 때 공이 원접사(遠接使)⁸⁸가 되어 창화(唱和)⁸⁹한 시가 있었는데, 장승헌이 매우 칭찬하였다. 다음 해에 중국 사신 왕학(王鶴)⁹⁰이 공을 보고 말을 전하며 이르기를, “《황화집(皇華集)》⁹¹을 보니 장천사(張天使)⁹²가 많이 눌렸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중국 사신에게 탄복 받은 바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장승헌과 왕학 두 사신은 모두 문장(文章)에 뛰어난 선비가 아니었으니 중시할 만한 것은 못 된다.【이상 《지봉유설(芝峯類說)》⁹³에서 인용】

주석:
86. 나함(羅含) 꿈: 중국 진(晉)나라 때의 문인 나함(羅含)이 젊었을 때 꿈에 오색(五色) 깃털의 새가 입으로 들어왔는데, 이후 문장력이 크게 늘었다는 고사. 《진서(晉書)》 〈문원전(文苑傳) 나함(羅含)〉에 나온다. 뛰어난 문재(文才)를 가지게 될 길조(吉兆)로 여겨졌다.
87. 장승헌(張承憲):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인물. 구체적인 행적은 상세하지 않다.
88. 원접사(遠接使): 외국 사신, 특히 중국 사신을 국경에서부터 맞이하여 서울까지 호송하며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89. 창화(唱和): 서로 시(詩)를 주고받는 것.
90. 왕학(王鶴): 명나라 사신. 구체적인 행적은 상세하지 않다.
91. 《황화집(皇華集)》: 조선에 온 중국 사신과 조선 관료들이 주고받은 시문(詩文)을 모아 엮은 책.
92. 장천사(張天使): 장승헌을 가리킨다. 천사(天使)는 중국 황제가 보낸 사신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93.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지봉(芝峯)은 이수광의 호이다.


원문:
申企齋凡有所作, 輒示申直講濩⁹⁴, 得其是正, 方以行於世。 一日, 以洗草宴契軸詩, 令申觀之。 讀至人間遺跡⁹⁵似龍騰, 未契於心, 再三諷詠。 企齋曰: “以爲未洽當耶?” 申曰: “東坡所謂世間遺跡猶龍騰者, 謂蘭亭繭紙眞本殉葬昭陵, 其摸本之傳於世者, 猶如龍騰, 謂摸本雖非眞本, 其筆勢猶似龍騰。 今用此語, 以對天上玉⁹⁶書隨水化, 恐未當。” 企齋曰: “何可作如此看? 龍騰只謂如龍之變化而無跡也。” 不以申語爲然, 不改龍騰之語而傳於世, 今恐申語爲是。【《月汀漫錄》。】

번역문:
신기재(申企齋)는 무릇 지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직강(直講) 신호(申濩)⁹⁷에게 보여 그 옳고 그름을 확인받은 후에야 세상에 발표하였다. 하루는 세초연(洗草宴)⁹⁸ 계축(契軸)⁹⁹의 시를 신호에게 보게 하였다. 읽다가 ‘인간의 유적(遺跡)은 용이 오르는 듯하네(人間遺跡似龍騰)’라는 구절에 이르러 마음에 들지 않아 두세 번 읊조렸다. 기재가 말하기를, “흡족하고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는가?” 하니, 신호가 말하였다. “동파(東坡)¹⁰⁰가 이른바 ‘세상의 유적은 오히려 용이 오르는 듯하다(世間遺跡猶龍騰)’¹⁰¹는 것은, 난정서(蘭亭序) 견지(繭紙)¹⁰² 진본(眞本)이 소릉(昭陵)¹⁰³에 순장(殉葬)되었으나 그 모본(摸本)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오히려 용이 오르는 듯함을 말한 것이니, 모본이 비록 진본은 아니나 그 필세(筆勢)가 오히려 용이 오르는 듯함을 이른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사용하여 ‘천상의 옥서(玉書)가 물 따라 변화하네(天上玉書隨水化)’¹⁰⁴라는 구절에 대(對)하게 하니, 아마도 타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기재가 말하였다. “어찌 이와 같이 볼 수 있겠는가? 용등(龍騰)은 단지 용(龍)이 변화하여 흔적이 없는 것과 같음을 이를 뿐이다.” 신호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아 용등(龍騰)이라는 말을 고치지 않고 세상에 전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신호의 말이 옳은 듯하다.【《월정만록(月汀漫錄)》¹⁰⁵에서 인용】

주석:
94. [주-D002] 濩 : 저본(底本)에는 “호(護)”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월정만필(月汀漫筆)》 및 《오천집(梧川集)・신진사묘표(申進士墓表)》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95. [주-D003] 跡 : 《기재집(企齋集)・이성실록청계회도(二聖實錄廳契會圖)》에는 “사(事)”로 되어 있다. '인간유사(人間遺事)'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96. [주-D004] 玉 : 《대동야승・월정만필》 및 《월정집(月汀集)・만록(漫錄)》에는 “보(寶)”로 되어 있고, 《기재집・이성실록청계회도》에는 “비(秘)”로 되어 있다. 즉, 다른 판본에는 '천상보서(天上寶書)' 또는 '천상비서(天上秘書)'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97. 신호(申濩, 1538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섭(彦涉), 호는 오천(梧川). 신광한의 문인으로, 직강(直講)은 성균관의 종5품 관직이다.
98. 세초연(洗草宴): 실록(實錄) 편찬이 끝난 후, 그 원고(草稿)를 물에 씻어 없애고(洗草) 관련자들이 모여 벌이는 잔치. 실록 편찬의 비밀 유지를 위한 절차였다.
99. 계축(契軸): 계회(契會)의 참석자 명단, 행사 내용, 시문 등을 적은 두루마리.
100.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7

1101).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대문호.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101. 세간유적유룡등(世間遺跡猶龍騰): 소식의 시구. 신호가 인용한 이 구절의 정확한 출처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소식이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를 평한 내용과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102. 견지(繭紙): 누에고치 실로 만든 종이. 매우 귀하고 질긴 종이로, 왕희지의 〈난정서〉 진본이 이 종이에 쓰였다고 전해진다.
103. 소릉(昭陵):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능묘. 당 태종이 왕희지의 〈난정서〉를 매우 좋아하여 죽을 때 함께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04. 천상옥서수수화(天上玉書隨水化): '천상의 옥서(또는 보배로운 책, 비밀스러운 책 - 판본에 따라 다름)가 물을 따라 변화한다'는 뜻. 세초연에서 실록 초고를 물에 씻어 없애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신호는 이 구절과 '인간유적사룡등'이 대구(對句)로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 즉, 물에 씻겨 사라지는 초고와 세상에 남아 필세를 뽐내는 모본은 서로 반대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105. 《월정만록(月汀漫錄)》: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문집 《월정집(月汀集)》에 실린 〈만록(漫錄)〉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
申靈城企齋相公嘗晝寢, 因驟雨過盆荷而覺, 得夢涼荷瀉雨一句, 數年未得眞對, 至於因作近律空其行, 必欲覓奇對以充。 見朴斯文蘭, 語及之, 朴以衣濕石生雲告, 企齋曰: “非也。” 至於終身, 未得其偶云。 詩人覓句之勤如此。【《淸江瑣語》。】

번역문:
영성(靈城)¹⁰⁶ 기재(企齋) 상공(相公)¹⁰⁷이 일찍이 낮잠을 자다가 소나기가 분(盆)의 연꽃(荷)에 쏟아지는 소리에 깨어나, 꿈결에 ‘서늘한 연잎 비를 쏟아내네(涼荷瀉雨)’라는 한 구절을 얻었다. 수년 동안 제대로 된 대구(眞對)¹⁰⁸를 얻지 못하여, 근체율시(近律)¹⁰⁹를 지을 때면 그 행(行)을 비워두고 반드시 기이한 대구를 찾아 채우고자 하였다. 사문(斯文) 박란(朴蘭)¹¹⁰을 만나 이 이야기를 하니, 박란이 ‘옷이 젖으니 돌에서 구름이 피어나네(衣濕石生雲)’¹¹¹라고 대답하자, 기재가 말하기를 “아니다.”라고 하였다. 종신토록 그 짝(대구)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시인(詩人)이 시구(詩句)를 찾는 부지런함이 이와 같다.【《청강쇄어(淸江瑣語)》¹¹²에서 인용】

주석:
106. 영성(靈城):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 신광한을 가리킨다. 신광한은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면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고, 이후 영성부원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07. 상공(相公): 재상(宰相)에 대한 존칭. 신광한은 좌찬성(左贊成)까지 지냈다.
108. 진대(眞對): 참된 대구(對句). 시에서 앞 구절과 완벽하게 짝을 이루는 구절을 말한다.
109. 근율(近律): 근체시(近體詩) 중 율시(律詩)를 가리킨다. 율시는 8구(句)로 이루어지며, 각 연(聯)의 구절들이 평측(平仄)과 대우(對偶) 등 엄격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
110. 박란(朴蘭):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추정되나, 생몰년 등 구체적인 정보는 확인하기 어렵다. 사문(斯文)은 선비나 문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111. 의습석생운(衣濕石生雲): '옷이 젖으니 돌에서 구름이 피어나네'. 비 오는 날의 정경을 묘사한 시구. 신광한은 이 구절이 '량하사우(涼荷瀉雨)'의 대구로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112. 《청강쇄어(淸江瑣語)》: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의 문집 《청강집(淸江集)》에 실린 〈쇄어(瑣語)〉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세양(蘇世讓)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蘇世讓
字彦謙, 號陽谷, 晉州人。 成化丙午生。 燕山甲子進士, 中宗四年己巳登第。 選入玉堂爲正字, 賜暇湖堂, 歷吏郞、舍人、直提學、吏曹參議、海西・湖南觀察使、吏曹判書, 典文衡。 官至左贊成。 明宗壬戌卒, 年七十七。

번역문:
소세양(蘇世讓)
자는 언겸(彦謙)이고 호는 양곡(陽谷)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¹ 성화(成化) 병오년(1476, 성종 7)에 태어났다. 연산군 갑자년(1504)에 진사(進士)²가 되고, 중종 4년 기사년(150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옥당(玉堂)³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⁴가 되었고, 호당(湖堂)⁵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⁶하였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⁷, 사인(舍人)⁸, 직제학(直提學)⁹, 이조 참의(吏曹參議)¹⁰, 해서(海西)¹¹ 및 호남(湖南)¹² 관찰사(觀察使), 이조 판서(吏曹判書)¹³를 역임하고, 문형(文衡)¹⁴을 관장하였다. 관직은 좌찬성(左贊成)¹⁵에 이르렀다. 명종 임술년(1552)에 졸(卒)하니, 나이 77세였다.

주석:

  1. 소세양(蘇世讓, 1476~155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문장과 서예에 능했으며, 이조 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2. 진사(進士): 조선 시대 소과(小科) 중 하나인 진사과(進士科) 합격자에게 주어지던 자격 또는 그 자격을 가진 사람. 주로 시(詩)·부(賦) 등 문예 실력을 평가했다.
  3.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4. 정자(正字): 홍문관의 정9품 관직. 교서관(校書館)의 정9품 관직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홍문관 정자를 가리킨다.
  5.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젊고 재능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곳. 두모포(豆毛浦, 현 옥수동 부근)에 있었기에 호당이라고 불렀다.
  6.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호당에서 이루어졌으므로 ‘호당 선발’이라고도 한다.
  7.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였다. 원문의 ‘이낭(吏郞)’은 정랑(正郞) 또는 좌랑(佐郞)을 통칭하거나 정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소세양은 이조 정랑을 역임했다.
  8.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 주로 문서 작성과 관련된 업무를 보았으며,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중추부 사인 등 다양한 관직에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직책의 사인인지 명시되지 않았으나, 예문관이나 승정원 등의 관직을 거쳤음을 의미할 수 있다.
  9.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책. 부제학(副提學) 다음가는 직위이다.
  10.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 직책. 판서와 참판 다음가는 직위이다.
  11. 해서(海西): 황해도(黃海道)의 별칭.
  12. 호남(湖南): 전라도(全羅道)의 별칭.
  13.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요직이다.
  14. 문형(文衡): 문장(文章)의 대가로서 학계와 문단을 이끌어가는 권위 또는 그 지위.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겸임하여 문형을 관장했다.
  15. 좌찬성(左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직이다.

원문:
公年纔七八, 已好學, 不煩師資。 詩句驚人, 筆法亦得松雪體。 乙丑, 燕山以律詩取士, 公居第一。 丙寅, 匿名書獄起, 公被繫, 不得赴殿試。

번역문:
공(公)은 나이 겨우 7, 8세에 이미 학문을 좋아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시구(詩句)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필법(筆法) 또한 송설체(松雪體)¹⁶를 터득하였다. 을축년(1505, 연산군 11)에 연산군이 율시(律詩)로 선비를 뽑을 때 공이 제1등을 차지하였다. 병인년(1506, 연산군 12)에 익명서(匿名書) 사건¹⁷이 일어나 공이 연루되어 갇혔으므로, 전시(殿試)¹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주석:
16. 송설체(松雪體): 원(元)나라의 문인, 서화가인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호 송설(松雪)에서 유래한 서체. 그의 서체는 우아하고 균형 잡힌 해서(楷書)와 행서(行書)로 유명하며,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크게 유행하여 많은 영향을 미쳤다.
17. 익명서 사건(匿名書獄):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비방하는 익명의 한글 투서가 발견되면서 일어난 옥사. 이 사건으로 많은 선비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8. 전시(殿試): 조선 시대 문과(文科)의 마지막 시험 단계. 임금이 직접 시험관이 되어 궁궐에서 시행하였다.


원문:
辛巳, 嘉靖皇帝卽位, 翰林唐皐頒詔東來, 李荇爲遠接, 辟公及鄭士龍爲從事。 壬午, 日本詩僧大原東堂等來, 公爲宣慰使, 遠人歎伏。【竝《潛谷舊錄》。】

번역문:
신사년(1521, 중종 16)에 가靖皇帝)¹⁹가 즉위하여 한림(翰林)²⁰ 당고(唐皐)²¹가 조서(詔書)를 반포하러 동쪽(조선)으로 오자, 이행(李荇)²²이 원접사(遠接使)²³가 되었는데, 공과 정사룡(鄭士龍)²⁴을 불러 종사관(從事官)²⁵으로 삼았다. 임오년(1522, 중종 17)에 일본의 시승(詩僧)²⁶ 대원(大原) 동당(東堂)²⁷ 등이 오자, 공이 선위사(宣慰使)²⁸가 되었는데, 먼 나라 사람이 탄복하였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²⁹에서 인용】

주석:
19. 가정황제(嘉靖皇帝): 명(明)나라 제11대 황제 세종(世宗) 주후총(朱厚熜, 1507-1567)의 연호. 1521년에 즉위하였다.
20. 한림(翰林): 한림원(翰林院)의 관리를 통칭하는 말. 명나라에서는 문학, 역사, 제도를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21. 당고(唐皐): 명나라의 관리. 가정제의 즉위를 알리는 조서를 가지고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22. 이행(李荇, 1478-153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용재(容齋). 문장과 경학에 뛰어났으며, 대제학, 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23. 원접사(遠接使): 외국 사신, 특히 중국 사신을 국경에서부터 영접하여 서울까지 안내하고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24.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호음(湖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대제학, 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25. 종사관(從事官): 정사(正使)나 부사(副使)를 보좌하여 실무를 담당하던 임시 관직. 원접사의 종사관은 주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난 젊은 관료들이 임명되었다.
26. 시승(詩僧): 시(詩)에 능한 승려.
27. 대원 동당(大原東堂): 일본 승려의 이름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인물 정보는 확인하기 어렵다. ‘대원(大原)’은 성씨나 출신지, ‘동당(東堂)’은 법명이나 호일 수 있다.
28. 선위사(宣慰使): 외국 사신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29.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과 관련된 기록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서지 정보는 불분명하다. 또는 소세양 집안이나 관련 인물의 옛 기록을 의미할 수도 있다.


원문:
時選文學之士七人, 賜暇讀書, 終至典文者五人, 公其一也。

번역문:
이때 문학(文學)에 뛰어난 선비 7명을 선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문형(典文)³⁰에 이른 사람이 5명이었고, 공이 그중 한 명이었다.

주석:
30. 전(典文): 문형(文衡)을 관장함. 즉,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을 의미한다. 사가독서 출신들이 학문과 문장의 최고 영예인 대제학에 많이 올랐음을 보여준다.


원문:
甲午, 進賀使蘇世讓呈文, 乞罷門禁, 禮部尙書夏言奏曰: “世讓欲行遊觀, 光瞻禮儀, 考質文物, 薰炙遷³¹化, 固見其仰慕上國之誠。” 帝命五日一次, 許令正使以下出館遊觀市街, 給通事一員, 陪侍出入, 以示禮待防衛之意。

번역문:
갑오년(1534, 중종 29)에 진하사(進賀使)³² 소세양이 글을 올려 문금(門禁)³³을 폐지해 줄 것을 청하자, 예부상서(禮部尙書) 하언(夏言)³⁴이 아뢰었다. “세양이 나가서 유람하며 구경하고, 예의(禮儀)를 빛나게 우러러보며, 문물(文物)을 상고하고 질정(質正)하며, 좋은 감화(薰炙遷化)³⁵를 받고자 하니, 진실로 상국(上國)³⁶을 앙모하는 정성을 볼 수 있습니다.” 황제가 5일에 한 번씩 정사(正使) 이하가 숙소를 나가 시가(市街)를 유람하며 구경하는 것을 허락하고, 통사(通事)³⁷ 1명을 지급하여 출입 시 배시(陪侍)하게 함으로써 예우(禮待)와 방위(防衛)의 뜻을 보이도록 명하였다.

주석:
31. [주-D001] 遷 : 《대동야승(大東野乘)・역대요람(歷代要覽)》에 근거할 때 “덕(德)”이 되어야 할 듯하다. '훈자덕화(薰炙德化)'는 '좋은 덕(德)에 감화됨'을 의미한다.
32. 진하사(進賀使): 조선 시대에 중국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하던 사신.
33. 문금(門禁): 조선 사신이 북경(北京)에 도착하면 외부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던 조치. 사신들은 이를 불편하게 여겨 완화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34. 하언(夏言, 1482-1548): 명나라의 저명한 정치가. 가정제 때 예부상서, 수보대학사(首輔大學士) 등을 역임했다.
35. 훈자천화(薰炙遷化): 향기(薰)에 쏘이고 불(炙)에 쬐어 옮겨가 변화함. 좋은 환경이나 가르침에 감화되어 변화함을 비유한다. 주석 [주-D001]에서 지적하듯 '덕화(德化)'가 원형일 가능성이 높다.
36. 상국(上國): 윗나라. 당시 명나라를 가리킨다.
37. 통사(通事): 통역관(通譯官).


원문:
仁廟嗣位, 遭彈, 自是無意仕宦, 爲終老計, 扁其堂曰退休。【竝《紀年通³⁸攷》。】

번역문:
인종(仁廟)³⁹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 탄핵을 받자, 이로부터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노년을 마칠 계획으로 그 집의 당호(堂號)를 퇴휴(退休)⁴⁰라 편액(扁額)하였다.【이상은 《기년통고(紀年通攷)》⁴¹에서 인용】

주석:
38. [주-D002] 紀年通 : 저본(底本)에는 “통기년(通紀年)”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기년통고(紀年通攷)》 권수제(卷首題)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39. 인종(仁廟):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1545). 중종의 맏아들. 재위 기간이 8개월에 불과했다. 소세양은 인종 즉위 후 윤임(尹任) 일파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었다.
40. 퇴휴(退休): 관직에서 물러나 쉬다. 소세양이 자호(自號)를 ‘퇴휴거사(退休居士)’라 하기도 했다.
41. 《기년통고(紀年通攷)》: 유계(兪棨, 1607-1664)가 단군조선부터 인조 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


원문:
公之二兄世恭、世儉, 年皆八十, 接屋而居, 晨夕過從, 有柳公綽之風。 公悶伯氏老而喪室, 常備衣服以進, 爲諸兄先辦供具, 輪日遞行, 次及子侄。 肩輿邀致山椒水涯, 嘯詠徜⁴²徉, 聞者莫不歆艶。【《潛谷舊錄》。】

번역문:
공의 두 형 세공(世恭)과 세검(世儉)은 나이가 모두 80세였는데, 집을 나란히 하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니, 유공작(柳公綽)⁴³의 풍모가 있었다. 공은 맏형[伯氏]이 늙어서 부인을 여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항상 의복을 준비하여 드렸고, 여러 형들을 위해 먼저 공궤(供饋)할 도구를 마련하여 날짜별로 돌아가며 행하게 하고, 차례가 아들과 조카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견여(肩輿)⁴⁴로 산마루나 물가로 맞이하여 모셔 가서 휘파람 불고 시를 읊으며 거니니(嘯詠徜徉)⁴⁵, 듣는 자들이 흠모하고 부러워하지 않음이 없었다.【《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42. [주-D003] 徜 : 저본(底本)에는 “당(倘)”으로 되어 있다. 《양곡집(陽谷集)・유명조선국……소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蘇公神道碑銘)》 및 《인재집(忍齋集)・유명조선국……소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蘇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상徉(徜徉)'이 올바른 표기이다.
43. 유공작(柳公綽, 764-833): 당(唐)나라의 관리.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했다.
44. 견여(肩輿): 사람이 타는 부분을 가마꾼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작은 가마.
45. 소영 상양(嘯詠徜徉):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으며 이리저리 한가로이 거닒.


원문:
蘇退休罷居湖南時, 尙領府在相位, 以金禔《蘆雁》二簇求詠, 蘇以二絶還: “楓落蘋香蘆荻花, 疎翎隨意泛晴波。 塞天昨夜風霜厲, 却愛江南有歲華。” “蕭蕭孤影暮江潯, 紅蓼花殘兩岸陰。 謾向西風呼舊侶, 不知雲水萬重⁴⁶深。” 皆自喩也。 又太逼畫樣, 可謂絶唱。【《淸江瑣語》。】

번역문:
소퇴휴(蘇退休)⁴⁷가 파직되어 호남(湖南)에 살 때, 상진(尙震) 영부사(領府事)⁴⁸가 재상(宰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김제(金禔)⁴⁹의 《노안(蘆雁)》⁵⁰ 두 폭(簇)을 가지고 시를 지어달라고 청하자, 소세양이 두 수의 절구(絶句)로 화답하였다. “단풍잎 지고 마름 향기로운데 갈대꽃 피었네, 성긴 깃털 뜻대로 맑은 물결에 떠 있네. 변방 하늘 지난밤 풍상(風霜) 매서웠건만, 도리어 강남의 좋은 시절 사랑하노라.” “쓸쓸한 외로운 그림자 저문 강가에, 붉은 여뀌꽃 시들고 양 언덕은 그늘졌네.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동료 부르건만, 구름과 물 만 겹이나 깊은 줄 몰랐네.” 이 시들은 모두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그림의 모습에 매우 근접하니, 절창(絶唱)⁵¹이라 할 만하다.【《청강쇄어(淸江瑣語)》⁵²에서 인용】

주석:
46. [주-D004] 重 : 저본(底本)에는 “리(里)”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청강선생호정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양곡집(陽谷集)・제상좌상화안축(題尙左相畫雁軸)》, 《범허정집(泛虛亭集)・제현증시(諸賢贈詩)》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만중(萬重)'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47. 소퇴휴(蘇退休): 소세양을 가리킨다. '퇴휴'는 그의 거처 당호이자 자호이기도 했다.
48. 상진 영부사(尙震 領府事): 상진(尙震, 1493-156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역임했다. '영부사(領府事)'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또는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킬 수 있는데, 당시 상진은 영의정이었다. 원문의 '상영부(尙領府)'는 '상진 영부사' 또는 '상진 영의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49. 김제(金禔, ?-?): 조선 전기의 화가. 호는 양송당(養松堂). 산수화와 영모화(翎毛畫), 특히 기러기 그림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50. 노안(蘆雁):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그림.
51. 절창(絶唱): 매우 뛰어나 다시는 흉내 낼 수 없을 만한 시가(詩歌)나 문장.
52. 《청강쇄어(淸江瑣語)》: 청강(淸江) 이제(李濟, 1590-1639)가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청강선생만고(淸江先生漫藁)》에 실려 있다.


원문:
蘇陽谷與申企齋、鄭湖陰同時, 而李容齋於陽谷, 最所稱許, 屢言於上前曰: “蘇世讓當爲主文之人, 不可置在下位。” 故陽谷自通政陞爲嘉善, 至資憲, 皆容齋所請也。 陽谷乞養, 授洪州牧使, 赴任未數月, 容齋又言: “文章之士, 不宜出外。” 上卽命召還, 前輩之喜奬人如此。 厥後蘇與申、鄭, 皆典文衡, 至崇品, 年⁵³俱八十。 陽谷雖爲士論所斥, 早退家居, 享淸閑之福者殆二十年。 近世詞人考終富貴, 無出其右者。【《芝峯類說》。】

번역문:
소양곡(蘇陽谷)은 신기재(申企齋)⁵⁴, 정호음(鄭湖陰)⁵⁵과 동시대 인물이었는데, 이용재(李容齋)⁵⁶는 양곡에 대해 가장 칭찬하고 허여(許與)하여 여러 차례 임금 앞에서 아뢰기를, “소세양은 마땅히 주문(主文)하는 사람⁵⁷이 되어야 하니, 낮은 지위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양곡이 통정대부(通政大夫)⁵⁸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⁵⁹로 승진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⁶⁰에 이른 것은 모두 용재가 청하였기 때문이다. 양곡이 걸양(乞養)⁶¹하여 홍주 목사(洪州牧使)⁶²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용재가 또 아뢰기를, “문장(文章)에 뛰어난 선비는 외직(外職)에 내보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상(上)께서 즉시 명하여 소환(召還)하게 하셨다. 전배(前輩)들이 인물을 기뻐하고 장려함이 이와 같았다. 그 후에 소세양은 신광한, 정사룡과 함께 모두 문형(文衡)을 관장하였고 숭품(崇品)⁶³에 이르렀으며, 나이는 모두 80세였다. 양곡은 비록 사론(士論)⁶⁴에 배척받아 일찍 물러나 집에 거처하며 청한(淸閑)한 복을 누린 것이 거의 20년이었다. 근세의 사인(詞人)⁶⁵으로서 부귀(富貴)를 누리며 생을 마친 이 중에 그보다 나은 자가 없다.【《지봉유설(芝峯類說)》⁶⁶에서 인용】

주석:
53. [주-D005] 年 : 저본(底本)에는 “무(無)”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지봉유설(芝峯類說)・관직부(官職部)・학사(學士)》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年俱八十'은 '나이가 모두 80세였다'는 의미이나, 실제로는 소세양(77세), 신광한(71세), 정사룡(80세)으로 차이가 있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장수를 누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54. 신기재(申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대제학,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55. 정호음(鄭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의 호. 대제학, 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56. 이용재(李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호. 대제학, 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57. 주문지인(主文之人): 문형(文衡)을 주관하는 사람. 즉 예문관 대제학을 가리킨다.
58.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 시대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
59.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의 품계명.
60.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정2품의 품계명.
61. 걸양(乞養):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外職)을 자청하거나 사직을 청하는 것.
62. 홍주 목사(洪州牧使): 충청도 홍주(洪州)의 지방관. 정3품.
63. 숭품(崇品): 높은 품계. 보통 정1품, 종1품의 재상급 관직을 가리킨다.
64. 사론(士論): 사림(士林)의 공론(公論). 소세양은 인종 사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의해 등용되었으나, 이후 사림 세력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65. 사인(詞人): 시문(詩文)을 짓는 사람. 문인(文人)을 의미한다.
66. 《지봉유설(芝峯類說)》: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


원문:
世祖朝昭陵之廢, 前史但記“后母弟權自愼與成三問等, 謀復魯山見誅, 后當坐廢⁶⁷, 因政府之請, 廢爲庶人”云, 不詳記其始末。 丁丑, 光廟嘗於禁中, 晝魘有怪, 卽命廢昭陵。 其時使臣先剖石室, 欲以曳出梓宮, 重不能勝, 爲文以祭之, 乃出。 暴置三四日, 旋⁶⁸以民禮收葬。 至中宗朝, 經筵檢討蘇世讓首發其論, 上惕然命大臣啓《春秋秘記》, 搜考其時廢之之故, 果出於政府之請。 大會公卿雜議之, 三公以下皆以爲難, 惟申用漑、姜渾、張順孫、金銓議當復, 竟閣不行。【《海東野言》。】

번역문:
세조(世祖) 시대에 소릉(昭陵)⁶⁹이 폐해진 것에 대해, 이전 역사 기록에는 단지 “왕후의 동생 권자신(權自愼)⁷⁰이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노산(魯山)⁷¹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주살(誅殺)되자, 왕후가 마땅히 연좌되어 폐위될 상황이었는데, 정부(政府)⁷²의 요청으로 인하여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그 시말(始末)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정축년(1457, 세조 3)에 광묘(光廟)⁷³께서 일찍이 금중(禁中)에서 낮에 가위에 눌려 괴이한 일을 겪자, 즉시 소릉을 폐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사신(使臣)이 먼저 석실(石室)을 부수고 재궁(梓宮)⁷⁴을 끌어내려 하였으나, 무거워서 이기지 못하자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니 이에 나왔다. 3, 4일간 함부로 놓아두었다가 이내 백성의 예(民禮)로 거두어 장사지냈다. 중종(中宗) 시대에 이르러 경연 검토(經筵檢討)⁷⁵ 소세양이 맨 먼저 그 논의를 발의하자, 상(上)께서 두려워하며 대신에게 명하여 《춘추비기(春秋秘記)》⁷⁶를 열어 그때 폐지한 까닭을 찾아 상고하게 하니, 과연 정부(政府)의 요청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경(公卿)들을 크게 모아 여러 의견을 의논하였는데, 삼공(三公)⁷⁷ 이하가 모두 어렵다고 여겼고, 오직 신용개(申用漑)⁷⁸, 강혼(姜渾)⁷⁹, 장순손(張順孫)⁸⁰, 김전(金詮)⁸¹만이 마땅히 복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끝내 보류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해동야언(海東野言)》⁸²에서 인용】

주석:
67. [주-D006] 后當坐廢 : 저본(底本)에는 없다.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야언(海東野言)・중종(中宗)》 및 《음애일기(陰崖日記)》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68. [주-D007] 旋 : 《대동야승・해동야언・중종》 및 《음애일기》에는 앞에 “명(命)” 자가 더 있다. '명선(命旋)'은 '명령하여 이내 ~하다'는 의미이다.
69. 소릉(昭陵):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의 능. 세조 때 폐위되면서 능이 폐해졌다가, 숙종 때 복위되면서 다시 능으로 정비되었다.
70. 권자신(權自愼, ?-1456): 정순왕후의 동생.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71.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등된 군호(君號) 노산군(魯山君).
72.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
73. 광묘(光廟): 세조(世祖)의 비공식적인 묘호. 일반적으로는 세조라고 칭한다.
74.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棺).
75. 경연 검토(經筵檢討):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던 일)에서 강론할 내용을 미리 검토하던 정5품 관직.
76. 《춘추비기(春秋秘記)》: 어떤 책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춘추(春秋)》와 관련된 비밀 기록이거나, 당시의 정치적 사건을 기록한 비밀 문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77.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한다.
78. 신용개(申用漑, 1463-1519):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이요정(二樂亭), 송계(松溪). 영의정을 역임했다.
79. 강혼(姜渾, 1464-1519):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목계(木溪). 문장으로 이름났으며,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80. 장순손(張順孫, 1459-1529):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애일당(愛日堂). 우의정을 역임했다.
81. 김전(金詮, 1458-152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나헌(懶軒). 영의정을 역임했다.
82. 《해동야언(海東野言)》: 조선 후기의 문신 허봉(許奉, 1551-1588)이 편찬한 야사(野史) 모음집.



심연원(沈連源)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沈連源【忠惠公。】
字孟容, 號保庵。 靑城伯德符之後。 弘治辛亥生。 中宗十一年丙子生員, 壬午登第, 選入史局。 丙戌重試, 歷吏郞、舍人、大司成、吏曹參議、慶尙監司、大司憲、戶曹判書、右贊成。 明宗乙巳, 參衛社功臣。 官至領議政。 丁巳卒, 年六十七。 配享明宗廟庭。

번역문:
심연원(沈連源)【충혜공(忠惠公)¹이다.】
자는 맹용(孟容)이고 호는 보암(保庵)²이다.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³의 후손이다. 홍치(弘治) 신해년(1491, 성종 22)에 태어났다. 중종 11년 병자년(1516)에 생원(生員)⁴이 되고, 임오년(1522, 중종 17)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국(史局)⁵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병술년(1526, 중종 21)에 중시(重試)⁶에 합격하였고, 이조 정랑(吏曹正郞)⁷, 사인(舍人)⁸, 대사성(大司成)⁹, 이조 참의(吏曹參議)¹⁰, 경상 감찰사(慶尙監察使)¹¹, 대사헌(大司憲)¹², 호조 판서(戶曹判書)¹³, 우찬성(右贊成)¹⁴을 역임하였다. 명종 을사년(1545)에 위사공신(衛社功臣)¹⁵에 참여하였다. 관직은 영의정(領議政)¹⁶에 이르렀다. 정사년(1557, 명종 12)에 졸(卒)하니, 나이 67세였다. 명종(明宗)의 묘정(廟庭)¹⁷에 배향(配享)¹⁸되었다.

주석:

  1. 충혜공(忠惠公): 심연원의 시호(諡號). 충(忠)은 충성스러움을, 혜(惠)는 백성을 아끼고 은혜를 베풂을 의미한다.
  2. 심연원(沈連源, 1491~155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맹용(孟容), 호는 보암(保庵), 본관은 청송(靑松). 인종의 국구(國舅, 장인)이며 명종의 외조부이다. 영의정을 지냈다.
  3. 심덕부(沈德符, 1327-140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조선 개국 공신으로 좌정승(左政丞)을 지냈다. 심온(沈溫, 세종의 장인)의 아버지이자, 심연원의 선조이다.
  4. 생원(生員): 소과(小科) 중 하나인 생원과(生員科) 합격자에게 주어지던 자격 또는 그 자격을 가진 사람. 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했다.
  5. 사국(史局): 역사 편찬과 관련된 기관. 춘추관(春秋館) 또는 그 부속 관청을 가리킨다.
  6.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치르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승진시켰다.
  7.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원문의 ‘이낭(吏郞)’은 정랑 또는 좌랑을 통칭하거나 정랑을 가리킬 수 있다. 심연원은 이조 정랑을 역임했다.
  8. 사인(舍人): 앞선 소세양 주석 8 참조. 심연원 역시 여러 관직을 거쳤으므로 구체적인 사인 직책은 불분명하다.
  9.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한다.
  10.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 직책.
  11. 경상 감찰사(慶尙監察使):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12.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13. 호조 판서(戶曹判書): 호조(戶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국가 재정, 조세, 호구 등을 담당했다.
  14. 우찬성(右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직이다.
  15. 위사공신(衛社功臣):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 세력이 대윤(大尹)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고 왕실과 사직(社稷)을 지켰다는 명분으로 책록된 공신. 심연원은 국구로서 여기에 3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16.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조선의 최고위 관직이다.
  17.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18.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심연원은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문:
公自在髫齔, 端重穎¹⁹出, 迥異凡兒。 逮遘家患, 遂失所怙, 賴母夫人提曉義方, 志學不懈。 及長, 質業於慕齋金公, 時慕齋量定籍田于松都, 公樂於從師, 竟歲不返, 才識大進, 聲名藹鬱。

번역문:
공(公)은 초츤(髫齔)²⁰ 시절부터 단정하고 신중하며 뛰어나(穎出) 평범한 아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집안의 우환(家患)²¹을 만나 마침내 의지할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모부인(母夫人)²²께서 올바른 도리(義方)를 가르쳐 주심에 힘입어 학문에 뜻을 두어 게을리하지 않았다. 장성하여 모재(慕齋) 김공(金公)²³에게 나아가 학업을 배웠는데, 당시 모재가 송도(松都)²⁴에서 적전(籍田)²⁵을 측량하여 정할 때 공이 스승 따르기를 즐거워하여 해가 다 가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재주와 식견이 크게 진보하고 명성이 자자하게 퍼졌다.

주석:
19. [주-D001] 穎 : 저본(底本)에는 “례(隷)”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호음잡고(湖陰雜稿)・유명조선국……심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沈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영출(穎出)'은 재능이나 자질이 뛰어남을 의미한다.
20. 초츤(髫齔):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髫) 유치(乳齒)를 가는(齔) 나이. 대략 7, 8세 무렵의 어린 시절을 가리킨다.
21. 가환(家患): 집안의 우환. 부친 심순문(沈順門)이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당한 것을 가리킨다. 이때 심연원은 14세였다.
22. 모부인(母夫人):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23. 모재 김공(慕齋金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성리학의 대가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기묘사림(己卯士林)의 중심인물이었다.
24. 송도(松都): 개성(開城)의 옛 이름.
25. 적전(籍田):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제도로, 천자(天子)나 제후(諸侯)가 직접 농사를 지어 신(神)에게 제사 지내고 농사의 중요성을 보이는 의례를 행하던 토지. 조선에서도 국왕이나 지방관이 적전을 경작하는 의례를 행했다. 김안국이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 적전을 측량하여 정비한 일을 가리킨다.


원문:
嶺南大侵, 餓莩相望, 公受命賑救, 首講便策, 不加威怒, 事竟辦集。 適所至顚連尤甚, 公不俟朝報, 發倉均哺, 一道得以全活。

번역문:
영남(嶺南)²⁶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餓莩]²⁷가 서로 바라볼 정도였는데, 공이 명을 받아 진휼하고 구제하면서 먼저 편리한 방책을 강구하고 위엄을 부리거나 노여움을 더하지 않고서도 일을 마침내 잘 처리하였다. 마침 이르렀던 곳은 곤궁함이 더욱 심하였는데, 공은 조정의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창고를 열어 고르게 먹여주니, 도(道) 전체가 온전히 살아날 수 있었다.

주석:
26. 영남(嶺南): 경상도(慶尙道) 지역을 가리킨다. 심연원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시기(1537-1538)의 일로 추정된다.
27. 아표(餓莩): 굶주려 죽은 사람 또는 그 시체.


원문:
時用事者, 以好惡升黜人物, 公獨介立不屈。 在銓曹時, 所好者不一延薦, 坐誣斥者力加辦釋。 會濟州有缺, 薦公陞秩以行, 其實排擠, 公怡然不設難色。 及過海, 風浪掀簸, 舟人莫不危慄, 公據胡床, 如在齋閣。 至州, 撫禦之外, 兼督農政, 四境大熟。 又能不鄙遠俗, 躬率以禮, 朔望拜闕之儀, 春秋釋菜之奠, 未嘗告替。 大修黌舍, 梓刊《四書》、《古文眞寶》等書, 課習蒙士, 民多嚮學, 至有請入國學者。

번역문:
당시 권력을 잡은 자²⁸가 좋고 싫음에 따라 인물을 올리고 내쫓았으나, 공은 홀로 굳게 서서 굽히지 않았다. 전조(銓曹)²⁹에 있을 때에는, (권력자가) 좋아하는 자라도 일절 끌어들여 추천하지 않았고, 무고를 당해 배척된 자는 힘써 변호하여 풀어주었다. 마침 제주(濟州)³⁰에 결원이 생기자 공을 품계를 올려³¹ 보내도록 추천하였는데, 이는 실은 배척하여 밀어낸 것이었으나, 공은 기꺼이 어려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다를 건널 때 풍랑이 배를 뒤흔들어 뱃사람들이 위태롭게 떨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호상(胡床)³²에 기대앉아 마치 서재[齋閣]³³에 있는 듯하였다. 제주에 이르러서는, 백성을 돌보고 방어하는 일 외에 농사일을 겸하여 감독하니 사방의 경계 안이 크게 풍년이 들었다. 또한 먼 곳의 풍속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몸소 예(禮)로써 거느려,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절하는 의식과 봄가을에 석채(釋菜)³⁴를 올리는 제사를 일찍이 폐한 적이 없었다. 학교[黌舍]³⁵를 크게 수리하고, 《사서(四書)》³⁶, 《고문진보(古文眞寶)》³⁷ 등의 서적을 간행하여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고 익히게 하니, 백성들이 학문을 지향하는 이가 많아 국학(國學)³⁸에 들어가기를 청하는 자까지 있었다.

주석:
28. 용사자(用事者):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행사하는 사람. 중종 대 후반 김안로(金安老)의 집권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9. 전조(銓曹): 인사를 담당하는 관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함께 이르거나, 주로 이조를 가리킨다. 문맥상 이조를 의미하는 듯하다.
30. 제주(濟州): 제주 목사(濟州牧使). 심연원은 1532년(중종 27) 제주 목사로 부임했는데, 이는 김안로의 견제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31. 승질(陞秩): 품계를 올림. 외직으로 좌천시키면서 명목상 품계를 올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32. 호상(胡床):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이 접고 펼 수 있는 의자.
33. 재각(齋閣): 서재나 학문 연구를 하는 건물.
34. 석채(釋菜):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지내는 제사의 한 종류. 봄과 가을에 간소하게 채소(菜)를 올리며 지냈다. 성균관과 향교(鄕校)에서 행해졌다.
35. 홍사(黌舍): 학교. 여기서는 제주 향교(濟州鄕校)를 가리킨다.
36. 《사서(四書)》: 유교의 기본 경전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말한다.
37. 《고문진보(古文眞寶)》: 중국 송(宋)나라 때 황견(黃堅)이 편찬한 시문선집(詩文選集). 조선 시대에 널리 읽혔다.
38. 국학(國學): 나라에서 세운 학교. 여기서는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킨다.


원문:
判度支時, 中、仁兩廟繼陟, 弔冊之使, 前後四起, 支調大屈。 公審度用費, 使公私兩濟, 人皆稱便。 公素解華語, 衣冠趨履, 亦倣華制。 張行人承憲還道黃州, 公受餞慰之命, 酬對之際, 不假舌人, 語皆條暢, 行人歎服。 用是常帶司譯院提調。

번역문:
판도지(判度支)³⁹로 있을 때, 중종(中宗)과 인종(仁宗) 두 임금께서 연이어 승하하시어 조문(弔問)과 책봉(冊封)을 위한 사신⁴⁰이 전후로 네 차례나 왔으므로, 지출과 조달이 크게 부족하였다. 공이 비용의 사용을 잘 살펴 헤아려 공(公)과 사(私)가 모두 이루어지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다고 칭찬하였다. 공은 평소 중국어[華語]⁴¹를 이해하였고, 의관(衣冠)과 신발[趨履]⁴² 또한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다. 행인(行人)⁴³ 장승헌(張承憲)⁴⁴이 돌아가는 길에 황주(黃州)에 이르렀을 때, 공이 전송하고 위로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 통역관[舌人]⁴⁵을 빌리지 않고도 말이 모두 조리 있고 시원스러우니, 행인(行人)이 감탄하며 복종하였다. 이로 인해 항상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⁴⁶를 겸임하였다.

주석:
39. 판도지(判度支):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가리킨다. 도지(度支)는 호조의 별칭이다. 심연원은 1544년(중종 39)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40. 조책지사(弔冊之使): 조문 사절(弔問使)과 책봉 사절(冊封使). 중종 승하(1544)와 인종 즉위(1544), 인종 승하(1545)와 명종 즉위(1545)에 따라 명나라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가리킨다. 짧은 기간에 여러 차례 사신 접대가 이루어져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41. 화어(華語): 중국어.
42. 추리(趨履): 빠른 걸음걸이와 신발. 여기서는 복식과 관련된 예법이나 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43. 행인(行人): 중국에서 사신으로 파견되던 관직명. 여기서는 명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44. 장승헌(張承憲): 명나라 사신. 1545년 명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책봉사(冊封使)로 조선에 왔다.
45. 설인(舌人): 통역관.
46.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 외국어 통역 및 번역 업무를 관장하던 사역원(司譯院)의 책임자. 정2품 이상의 관원이 겸임하는 관직이었다.


원문:
庚戌, 命復立兩宗。 公以異端之興, 大累聖治, 率百官廷爭, 不得。 時公議不無異同, 公獨力爭堅懇, 至於累旬。 雖不回天, 朝野韙之。

번역문:
경술년(1550, 명종 5)에 양종(兩宗)⁴⁷을 다시 세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공은 이단(異端)⁴⁸이 흥기하는 것이 성스러운 정치[聖治]에 크게 누(累)가 된다고 여겨,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조정에서 다투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공론(公議)에 이견(異同)이 없지 않았으나, 공은 홀로 힘써 다투기를 굳고 간절하게 하여 여러 순(旬)⁴⁹에 이르렀다. 비록 하늘(임금의 뜻)을 돌리지는 못하였으나, 조야(朝野)가 이를 옳게 여겼다.

주석:
47. 양종(兩宗): 불교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가리킨다.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비호 아래 보우(普雨) 등이 중심이 되어 억불(抑佛) 정책으로 폐지되었던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승과(僧科)를 다시 시행하려 한 조치를 말한다.
48. 이단(異端): 유교적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적으로 지칭하는 말.
49. 순(旬): 열흘. 누순(累旬)은 수십 일을 의미한다.


원문:
癸丑秋, 景福宮大內災, 上下驚惶。 上命公摠任繕葺, 公務以不廢舊貫, 不侈後觀, 戒督工程, 時僅再閱功, 乃告訖。 上嘉悅, 賞賚之典, 實從異等。 蓋此宮開創之時, 靑城伯實總成之, 公又以首相, 復收重創之功, 祖孫管之, 勞勤茂著, 人皆異之。

번역문:
계축년(1553, 명종 8) 가을, 경복궁(景福宮) 대내(大內)⁵⁰에 화재가 발생하여 상하(上下)가 놀라고 당황하였다. 상(上)께서 공에게 명하여 수리[繕葺]를 총괄하여 맡게 하시니, 공은 옛 관례[舊貫]를 폐하지 않고 후대 관람에 사치스럽지 않게 함을 힘쓰며 공정을 경계하고 감독하여, 겨우 두 해가 지나 공사를 마치고 완료를 보고하였다. 상께서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시어 상을 내리는 의전[賞賚之典]이 실로 특별한 등급을 따랐다. 대개 이 궁궐을 처음 창건할 때 청성백(靑城伯)⁵¹께서 실로 총괄하여 완성하셨는데, 공이 또 수상(首相)⁵²으로서 크게 훼손된 것을 다시 수습하는 공을 이루니, 조상과 손자가 이를 주관하여 노고와 공적이 무성하게 드러나자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주석:
50. 대내(大內): 궁궐 안. 특히 임금이 거처하는 중심 영역을 가리킨다. 1553년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사정전(思政殿) 등에 큰 화재가 있었다.
51.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조선 건국 후 경복궁 창건 공사를 감독했다.
52.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


원문:
丁巳, 冊封春宮。 公監其工²⁰², 儀物之制, 務極講求, 以別等衰, 人皆服其得體, 特賜鞍馬以榮之。 時, 勅使將至, 公已嬰疾, 上狀乞解, 再三瀝懇。 上諭以在平日不宜輕許, 今則勅使所視, 不可使相臣有缺, 故勉從所請。 左議政尙震啓曰: “宿德元老, 其去留足爲朝廷輕重, 請仍任待瘳。” 上遣史臣諭公曰: “昨遞卿職, 予不獲已。 今左、右相同辭啓留, 是乃公議, 卿其仍任調治。” 公每以久病保位爲貪戀, 故釋負則若沈痾²⁰³去體, 冀朝夕可延。 及聞仍任, 病勢頓極, 乃具疏極陳乞骸之情。 上御筆答曰: “頃日許卿辭退, 是予之失。 左相之啓, 亦是衆情, 玆不允所請。”

번역문:
정사년(1557, 명종 12), 춘궁(春宮)⁵³을 책봉하였다. 공이 그 공사[工]를 감독하였는데, 의물(儀物)의 제도에 대해 힘써 극진히 강구하여 등급과 상복의 구별[等衰]⁵⁴을 정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체제를 얻었음에 감복하여 특별히 안장 얹은 말[鞍馬]을 하사하여 영화롭게 하였다. 이때 칙사(勅使)⁵⁵가 장차 이르려 하는데, 공이 이미 병을 앓고 있어 상소(上狀)하여 해직을 빌며 두세 번 간절히 아뢰었다. 상께서 유시(諭示)하시기를, “평일에는 경솔히 허락함이 마땅하지 않으나, 지금은 칙사가 보는 바인데 상신(相臣)⁵⁶에 결원이 있게 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청한 바를 따른다.”라고 하셨다. 좌의정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숙덕원로(宿德元老)⁵⁷는 그 거취가 족히 조정의 경중(輕重)이 되니, 청컨대 그대로 임명해 두고 병이 낫기를 기다리소서.”라고 하였다. 상께서 사관(史臣)을 보내 공에게 유시하시기를, “어제 경의 직책을 교체한 것은 내가 부득이해서였다. 이제 좌상과 우상이 함께 말을 하여 유임시키기를 아뢰니, 이는 바로 공론(公議)이다. 경은 그대로 직임에 있으면서 병을 조리하라.”라고 하셨다. 공은 매번 오래 병을 앓으면서 자리를 보전하는 것을 탐하여 연연하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책임을 벗으면 마치 오랜 병[沈痾]이 몸에서 떠나간 듯하여 조석(朝夕)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기를 바랐다. 유임(仍任)되었다는 말을 듣기에 이르자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져서, 마침내 상소를 갖추어 걸해(乞骸)⁵⁸하는 심정을 극진히 아뢰었다. 상께서 어필(御筆)로 답하시기를, “지난번 경의 사퇴를 허락한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좌상의 아룀 또한 여러 사람의 뜻이니, 이에 청한 바를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주석:
202. [주-D002] 之 : 《호음잡고・유명조선국……심공신도비명》에는 “공(工)”으로 되어 있다. 문맥상 공역(工役), 즉 공사를 감독했다는 의미의 '공(工)'이 자연스럽다.
203. [주-D003] 痾 : 저본(底本)에는 “신(㢌)”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 및 《호음잡고・유명조선국……심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심아(沈痾)'는 오래된 고질병을 의미한다.
53. 춘궁(春宮): 왕세자(王世子). 당시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를 가리킨다. 1557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54. 등쇠(等衰): 신분이나 관계의 멀고 가까움에 따른 등급의 차이. 의례나 복식 등에서 이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55. 칙사(勅使): 황제의 명을 받고 오는 사신. 명나라에서 세자 책봉을 승인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을 가리킨다.
56. 상신(相臣): 재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한다.
57. 숙덕원로(宿德元老): 덕망이 높고 경험 많은 원로대신.
58. 걸해(乞骸): 늙거나 병든 신하가 사직(辭職)을 간청하는 것. ‘해골을 빈다’는 뜻이다.


원문:
先是, 士林有假論推引, 朋附漸廣, 識者憂其害政。 公於經幄婉辭開陳, 摘尤貶斥, 俾不延禍, 人情乃安。

번역문:
이에 앞서 사림(士林)⁵⁹ 중에 거짓된 논의를 내세워 끌어들이는 자들이 있어, 무리지어 붙좇는 이들이 점차 넓어지자 식견 있는 자들이 정치를 해칠까 염려하였다. 공이 경악(經幄)⁶⁰에서 부드러운 말로 개진하여,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비판하여 배척함으로써 화(禍)가 번지지 않게 하니, 인정(人情)이 이에 안정되었다.

주석:
59. 사림(士林):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학자 관료 집단. 을사사화 이후 정권을 장악한 척신(戚臣) 세력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연원은 척신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사림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60. 경악(經幄): 경연(經筵)과 시강(侍講)이 열리는 자리. 임금 앞에서 학문과 정치를 논하는 공식 석상을 의미한다.


원문:
公性雅靜詳愼, 行己接物, 簡約平恕, 濟之以剛柔。 平居, 人樂其寬和; 遇事, 畏其勁正, 故皆不敢干以私。 宿尙儉素, 聲色之娛, 奢靡之習, 痛加屛絶, 雖貴顯已極, 罕見候謁車馬之鬧, 淸約一如未貴時。 燕坐一室, 未嘗去書不觀, 言笑又寡, 不許侍女近前。 居常樂善愛士, 必欲奬與²⁰⁴培植, 故士論倚以爲重。

번역문:
공의 성품은 아정(雅靜)하고 상세하며 신중하였고, 몸가짐과 사물 접함이 간결하고 평이하며 너그러웠으며, 강(剛)과 유(柔)로써 이를 조절하였다.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그의 너그럽고 온화함을 즐거워하였고, 일을 당해서는 그의 굳세고 바름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모두 감히 사사로움으로 간섭하지 못하였다. 평소 검소함을 숭상하여 음악과 여색의 즐거움, 사치스러운 습관을 통렬히 물리쳤으며, 비록 귀하고 드러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나 찾아와 뵙는 거마(車馬)의 시끄러움을 보기 드물었으니, 청렴하고 검약함이 귀하게 되기 이전과 한결같았다. 한 방에 편안히 앉아 일찍이 손에서 책을 놓고 보지 않은 적이 없었고, 말과 웃음 또한 적었으며, 시녀(侍女)가 앞에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에 선(善)을 즐거워하고 선비를 아껴 반드시 장려하고 북돋아주고자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그에게 의지하여 중요하게 여겼다.

주석:
204. [주-D004] 與 : 저본(底本)에는 “흥(興)”으로 되어 있다. 《호음잡고・유명조선국……심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장여(奬與)'는 장려하고 도와준다는 의미이다.


원문:
公當官雖不憚勞, 務盡其職, 至於權要之地, 輒避不居。 近來兩銓缺長, 則必謀諸台鼎, 然後乃定。 有來咨稟, 公輒艴然曰: “自當擇可注擬, 吾何敢言?” 雖固請, 終不言。 爲首相, 主張廟謨, 心無適莫, 動必主善, 衆論競陳, 委己從善, 略無吝色。 議所難斷, 能以一言折衷, 聞者莫不帖服。

번역문:
공은 관직에 있을 때 비록 노고를 꺼리지 않고 힘써 그 직책을 다하였으나, 권력 있는 요직[權要之地]에 이르러서는 번번이 피하고 머무르지 않았다. 근래 양전(兩銓)⁶¹의 장관(長官)이 비게 되면 반드시 태정(台鼎)⁶²에 물어서 상의한 후에야 정하였다. 와서 자문하고 여쭙는 이가 있으면, 공은 번번이 발끈하며 말하기를, “스스로 마땅히 적합한 자를 가려 추천 후보[注擬]⁶³를 정해야 할 터인데, 내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간절히 청하여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수상(首相)이 되어서는 조정의 정책[廟謨]을 주장함에 마음에 좋고 싫음[適莫]⁶⁴이 없었고, 행동함에 반드시 선(善)을 위주로 하였으며, 여러 논의가 다투어 나오면 자신을 맡겨 선(善)을 따르고 조금도 아끼는 기색이 없었다. 의논하여 결단하기 어려운 바는 능히 한마디 말로 절충(折衷)하니, 듣는 자들이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61. 양전(兩銓):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함께 이르는 말.
62. 태정(台鼎): 삼공(三公),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의정부의 재상들을 의미한다.
63. 주의(注擬): 관직 후보자를 추천하여 올리는 것. 전조(銓曹)의 중요한 권한이었다. 심연원은 영의정이었음에도 인사 추천에 직접 관여하려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64. 적막(適莫): 좋아함(適)과 싫어함(莫). 사사로운 호오(好惡)나 편견을 의미한다.


원문:
公於事必深究强記, 中朝彊域, 我國封界, 瞭然如目擊身履, 人或問質, 辨答無礙。 耽羅山川、險夷、要害, 靡不圖寫, 作爲一軸。 乙卯, 倭奴寇擾南邊, 多陷城陣²⁰⁵, 耽羅尤當衝要, 公按圖策應, 如指諸掌, 人皆服其先見。

번역문:
공은 일에 대해 반드시 깊이 연구하고 힘써 기억하여, 중국[中朝]의 강역(彊域)과 우리나라의 봉계(封界)⁶⁵를 마치 눈으로 보고 몸소 가본 것처럼 명확히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혹 와서 질문하면 분별하여 답함에 막힘이 없었다. 탐라(耽羅)⁶⁶의 산천(山川), 험하고 평탄한 곳[險夷], 요해처(要害處)를 모두 그림으로 그려서 하나의 축(軸)으로 만들었다. 을묘년(1555, 명종 10)에 왜노(倭奴)가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소란을 피워 많은 성진(城陣)⁶⁷을 함락시켰는데, 탐라가 더욱 충요(衝要)⁶⁸한 곳에 해당하자, 공이 도면을 살펴 대책을 세워 대응하는 것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先見)에 감복하였다.

주석:
205. [주-D005] 陣 : 《호음잡고・유명조선국……심공신도비명》에는 “진(鎭)”으로 되어 있다. 성진(城鎭)은 성과 진(鎭, 군사 주둔지)을 의미하며, 성진(城陣)은 성과 진지(陣地)를 의미한다. 문맥상 둘 다 가능하다.
65. 봉계(封界): 봉토(封土)의 경계. 나라의 경계를 의미한다.
66. 탐라(耽羅): 제주도(濟州道)의 옛 이름.
67. 성진(城陣): 성(城)과 진지(陣地). 군사적 방어 시설을 통칭한다. 주석 [주-D005] 참조.
68. 충요(衝要): 군사적으로나 교통상으로 매우 중요하여 방비해야 할 요충지.


원문:
公爲文辭, 典實贍敏, 每遇咨議, 務以約言取裁, 不喜費辭。 入侍講章, 必求道理, 引喩時宜。 人始知其長於文而深於學也。

번역문:
공이 문사(文辭)를 지음에 전고(典故)가 확실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민첩하였고, 매번 자문하고 의논할 때를 만나면 힘써 간략한 말로써 재결(裁決)을 구하고 말을 많이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입시(入侍)하여 강론하는 글[講章]에서는 반드시 도리(道理)를 탐구하고 시의(時宜)에 맞는 것을 인용하여 비유하였다. 사람들이 비로소 그가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음을 알았다.


원문:
公自少恬默, 不喜趨營。 自辛卯以後, 國是靡定, 朝廷人物, 進退不常, 而毁譽未嘗及公, 故自號曰保庵, 蓋亦寓意也。

번역문:
공은 젊어서부터 조용하고 말이 적어 명리(名利)를 따라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묘년(1531, 중종 26)⁶⁹ 이후로 국론[國是]이 정해지지 않고 조정 인물들의 진퇴(進退)가 일정하지 않았으나, 헐뜯거나 칭찬하는 말이 일찍이 공에게 미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호(號)를 보암(保庵)⁷⁰이라 하였으니, 이 또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주석:
69. 신묘년(1531): 이 시기는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잡고 전횡을 부리던 때이다.
70. 보암(保庵): '보전하는 암자'라는 뜻. 심연원이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보전하려는 의지를 담아 지은 호로 해석된다.


원문:
公病中欲陳疏具草, 子弟以勞傷諫止。 公答曰: “吾雖病不入侍, 未嘗一日忘君。 一朝奄忽, 雖欲效其微誠, 得乎? 我曾睹大臣病劇, 遣官問疾, 兼訪後事, 則只稱上恩至重, 無一言及於時政, 豈病不可爲, 欲言而不得歟? 吾所以惓²⁰⁶惓不已者, 欲及心神未亂, 庶盡平昔之抱也。” 條上六事: 勤學, 從諫, 親賢, 遠佞, 恤民, 愼賞, 語甚諄切。 上遣中使賜御札曰: “觀卿六條陳戒, 予甚嘉焉。” 又遣承旨問所欲言, 公書啓曰: “臣之所懷, 前於六條, 已盡之矣。 但願政事之際, 存心忠厚, 務從寬大, 使人心固結, 國祚靈長。” 公病後, 以不仕受祿, 於義未安, 故戒家人勿受。 至是, 兩相請令有司具送其第。

번역문:
공이 병중에 상소를 올리고자 초안을 갖추려 하자, 자제(子弟)들이 노고로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간하여 말렸다. 공이 답하여 말하였다. “내가 비록 병들어 입시(入侍)하지 못하나, 일찍이 하루도 임금을 잊은 적이 없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으면, 비록 나의 미미한 정성을 바치려 한들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대신(大臣)이 병이 위독할 때 관리를 보내 문병(問疾)하고 겸하여 후사(後事)를 물으면, 단지 상(上)의 은혜가 지극히 무겁다고만 칭송하고 시정(時政)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언급함이 없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병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말하고자 하나 하지 못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이처럼 권권(惓惓)⁷¹하여 마지않는 것은, 심신(心神)이 아직 혼란하지 않을 때에 평소의 포부(抱負)를 거의 다하고자 함이다.” 여섯 가지 일을 조목별로 올렸는데, 학문에 힘쓸 것[勤學], 간언(諫言)을 따를 것[從諫], 현명한 이를 가까이할 것[親賢], 간사한 이를 멀리할 것[遠佞], 백성을 구휼할 것[恤民], 상(賞)을 신중히 할 것[愼賞]이었으며, 말이 매우 간곡하고 절실하였다. 상께서 중사(中使)⁷²를 보내 어찰(御札)을 하사하며 말씀하시기를, “경이 여섯 조목으로 아뢰어 경계한 것을 보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라고 하셨다. 또 승지(承旨)를 보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물으시니, 공이 글로 써서 아뢰기를, “신의 품은 바는 앞서 여섯 조목에서 이미 다하였습니다. 다만 원하옵건대 정사를 행하실 때 마음을 충후(忠厚)하게 가지시고 힘써 관대(寬大)함을 따르시어, 인심(人心)이 굳게 결속되고 국운[國祚]이 영원히 길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공은 병이 든 후에 벼슬하지 않으면서 녹봉(祿俸)을 받는 것이 의리상 편안하지 않다고 여겨, 집안사람들에게 받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에 이르러 양상(兩相)⁷³이 유사(有司)⁷⁴로 하여금 갖추어 그 집으로 보내도록 청하였다.

주석:
206. [주-D006] 惓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호음잡고・유명조선국……심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권권(惓惓)'은 정성스럽고 간절한 모양을 나타낸다.
71. 권권(惓惓):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힘쓰는 모양.
72. 중사(中使): 임금의 명을 전달하는 내관(內官).
73. 양상(兩相):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右議政).
74. 유사(有司): 담당 관청 또는 관리. 여기서는 녹봉 지급을 담당하는 관청을 가리킨다.


원문:
沈忠惠公出爲濟州, 安老擠之也。 拜辭之日, 安老以壺酒送之於漢江上, 執盃歎嗟, 以示難別之色, 且曰: “君之此行, 吾實不知。 君有弟幾人可堪作官者乎?” 公曰: “雖有二弟, 通源業科, 逢源多病, 不堪任矣。” 未數日, 拜逢源爲金吾郞, 病不能出, 遂移拜副率。 公曰: “平生所不知者也。” 旣黜其兄, 又用其弟, 何心也?【《寄齋雜記》。】

번역문:
심충혜공(沈忠惠公)이 제주(濟州)로 나간 것은 김안로(金安老)⁷⁵가 그를 밀어낸 것이다. 하직 인사를 올리는 날, 김안로가 호주(壺酒)⁷⁶를 가지고 한강 가에서 그를 전송하며 잔을 잡고 탄식하여 이별하기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이번 행차는 내가 실로 알지 못하였소. 그대에게 관직을 감당할 만한 아우가 몇 사람이나 있소?”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두 아우가 있으나, 통원(通源)⁷⁷은 과거 공부를 하고 있고 봉원(逢源)⁷⁸은 병이 많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봉원을 금오랑(金吾郞)⁷⁹에 제수하였는데,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마침내 부솔(副率)⁸⁰로 옮겨 제수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평생 알지 못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그 형을 내쫓고 또 그 아우를 등용하니, 무슨 마음인가?【《기재잡기(寄齋雜記)》⁸¹에서 인용】

주석:
75.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76. 호주(壺酒): 병에 담긴 술.
77. 통원(通源): 심달원(沈達源). 심연원의 동생.
78. 봉원(逢源): 심봉원(沈逢源). 심연원의 동생.
79. 금오랑(金吾郞): 의금부(義禁府)의 종6품 관직인 도사(都事)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80. 부솔(副率):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종6품 관직. 세자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81. 《기재잡기(寄齋雜記)》: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


원문:
靑川府院君沈連源, 乃靑陵之父, 於中殿祖也。 公在時, 自內已有靖陵遷卜之計, 而公止之, 故終公之世而不敢發。 凡宮人私情, 一切不聽, 蓋亦難也。 常以門族盛滿爲戒, 故諸孫之名, 皆以謙字命之, 其氣勢不甚張。 及公之卒, 而他戚里招權, 然後人始知公之賢。 以父順門被禍燕山, 死於軍器寺前路, 公終身不由云。【《淸江瑣語》。】

번역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⁸² 심연원은 바로 청릉(靑陵)⁸³의 아버지요, 중전(中殿)⁸⁴에게는 할아버지가 된다. 공이 살아있을 때, 안(內, 궁중)으로부터 이미 정릉(靖陵)⁸⁵을 옮겨 정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공이 이를 막았으므로, 공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감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무릇 궁인(宮人)의 사사로운 정(私情)을 일절 듣지 않았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다. 항상 문족(門族)이 성하고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였으므로, 여러 손자들의 이름을 모두 겸(謙) 자로 지어 그 기세가 심하게 떨치지 않게 하였다. 공이 졸(卒)하자 다른 척리(戚里)⁸⁶들이 권력을 부르니,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비로소 공의 현명함을 알았다. 부친 순문(順門)⁸⁷이 연산군 때 화를 입어 군기시(軍器寺)⁸⁸ 앞길에서 죽었으므로, 공은 종신토록 그 길을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청강쇄어(淸江瑣語)》에서 인용】

주석:
82.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의 부원군(府院君) 봉호. 왕비의 아버지를 봉하는 작위이다. 심연원은 인종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아버지이다.
83. 청릉(靑陵):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 1514-1577, 심연원의 딸)의 능호가 효릉(孝陵)이므로, '청릉지부(靑陵之父)'는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인성왕후를 가리키려 했거나 다른 인물과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84. 중전(中殿): 왕비. 여기서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를 가리킨다. 심연원은 인순왕후의 할아버지이다.
85. 정릉(靖陵):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의 능.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풍수지리설을 이유로 중종의 능을 희릉(禧陵, 제1계비 장경왕후의 능) 곁에서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위치로 옮기려 했으나, 심연원 등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심연원 사후에 천장(遷葬)되었다.
86. 척리(戚里): 왕의 외척(外戚)들이 사는 마을 또는 외척 세력. 심연원 사후 윤원형(尹元衡) 등 다른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잡은 것을 의미한다.
87. 순문(順門): 심순문(沈順門). 심연원의 아버지.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88. 군기시(軍器寺): 병기(兵器)의 제조를 담당하던 관청.


원문:
祔明宗大王于太廟。 上親祭後還宮, 大赦, 受百官賀。 以李彦迪、沈連源配享明宗廟庭。 連源, 王大妃祖父也。 雖無學術, 頗知愛士。 乙巳之難, 尹元衡等欲援連源以固僞勳之勢, 强錄連源于三等, 連源雖不能辭, 而心傷善類之死, 且慙錄勳, 至於涕泣, 至是配享。【《石潭日記》。】

번역문:
명종대왕(明宗大王)을 태묘(太廟)⁸⁹에 부묘(祔廟)⁹⁰하였다. 상(上)⁹¹께서 친히 제사를 지낸 후 환궁하여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리고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이언적(李彦迪)⁹²과 심연원(沈連源)을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연원은 왕대비(王大妃)⁹³의 할아버지이다. 비록 학문과 식견[學術]은 없었으나 자못 선비를 아낄 줄 알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연원을 끌어들여 거짓 공훈[僞勳]의 세력을 굳건히 하고자 하여 억지로 연원을 3등 공신에 기록하였는데, 연원이 비록 사양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 선류(善類)⁹⁴가 죽은 것을 슬퍼하고 또한 공신에 기록된 것을 부끄러워하여 눈물을 흘리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이르러 배향된 것이다.【《석담일기(石潭日記)》⁹⁵에서 인용】

주석:
89. 태묘(太廟): 종묘(宗廟)의 다른 이름.
90. 부묘(祔廟):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것.
91. 상(上): 임금. 이 기록은 선조(宣祖) 때의 일이다. 명종의 부묘와 배향은 1569년(선조 2)에 이루어졌다.
92.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호는 회재(晦齋).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선조 때 신원(伸冤)되어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93. 왕대비(王大妃): 선조의 할머니뻘이 되는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를 가리킨다. 인순왕후는 명종의 비이며, 심연원의 손녀이다. '왕대비 조부'라는 표현은 정확하다. (앞선 주석 84와 연결됨)
94. 선류(善類): 선량한 무리.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士林) 인물들을 가리킨다.
95. 《석담일기(石潭日記)》: 석담(石潭)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일기 형식의 기록.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재 전하지 않으나, 다른 문헌에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남아 있다.

상진(尙震)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尙震【成安公。】
字起夫, 號泛虛亭, 木川人。 弘治癸丑生。 中宗十一年丙子生員, 己卯登第。 爲弘文正字, 薦入翰苑, 歷典翰、大司諫、副提學、兵・吏曹判書。 明宗朝拜相, 至領議政, 賜几杖。 甲子卒, 年七十二。
번역문:
상진(尙震)【성안공(成安公)¹이다.】
자는 기부(起夫), 호는 범허정(泛虛亭)이며, 목천(木川)² 사람이다. 홍치(弘治) 계축년(1493)³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11년 병자년(1516)에 생원(生員)⁴이 되고, 기묘년(1519)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⁵가 되고 천거되어 한원(翰苑)⁶에 들어가, 전한(典翰)⁷, 대사간(大司諫)⁸, 부제학(副提學)⁹, 병조판서(兵曹判書)¹⁰, 이조판서(吏曹判書)¹¹를 역임하였다. 명종(明宗) 시대에 재상(宰相)¹²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¹³에 이르렀고, 궤장(几杖)¹⁴을 하사받았다. 갑자년(1564)에 졸(卒)하니, 나이 72세였다.
주석:
성안공(成安公): 상진의 시호(諡號).
목천(木川):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일대. 본관(本貫)이 목천(木川)임을 나타낸다.
홍치(弘治) 계축년(1493): 홍치는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이다. 1493년은 조선 성종(成宗) 24년에 해당한다.
생원(生員):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 홍문관(弘文館)의 정9품 관직.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 관리, 문한(文翰) 처리, 왕의 자문 등의 기능을 담당한 기관이다. 정자는 교서(校書)·저작(著作)과 함께 홍문관의 실무 관원이었다.
한원(翰苑):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학사(學士)들이 모여 있는 곳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을 함께 이르기도 하였으나, 여기서는 주로 홍문관을 가리킨다.
전한(典翰):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직책. 부제학(副提學) 다음가는 벼슬이다.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직제학(直提學) 위에 있으며, 대제학(大提學)을 보좌하고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병조판서(兵曹判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文官)의 인사 행정을 총괄했다.
배상(拜相): 재상(宰相)에 임명됨. 조선 시대에는 의정부(議政府)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재상이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궤장(几杖): 궤(几, 안석)와 장(杖, 지팡이). 조선 시대에 나이가 많고 덕망 높은 원로대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물건이다. 70세 이상의 정1품 관료에게 주로 내렸으며, 이를 하사받는 것은 큰 영예였다.

원문:
公自少氣度沈遲, 飢寒俱不言, 雖病甚苦, 不以呻吟作形, 人已服其非淺。 年過成童, 尙不志學, 馳馬試射, 被慢於儕流, 卽發憤策勵學業。 居五月, 已達文義, 但從人質疑, 未十朔, 理無滯阻, 自是刻意益篤。 成夏山夢井, 公之妹兄也, 欲見公志, 勸就蔭仕, 固問不對, 强之, 乃曰: “丈夫當讀書樹業耳。” 夏山喜曰: “吾亦試汝耳。” 壬申, 公年始弱冠, 夏山稱其文才已成。 蓋四年向學, 所造如此。 若金慕齋、李容齋及諸鉅公之來, 必以公文示之, 無不嘆奬。 自此華聲大聞。 夏山深服其德器, 亟稱不置曰: “尙某之質, 雖在孔門, 無讓於諸弟子矣。”
번역문:
공(公)은 어려서부터 기품과 도량이 침착하고 진중하여(沈遲), 굶주림과 추위를 모두 말하지 않았고, 비록 병이 심하여 괴로워도 신음(呻吟)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미 그 깊이가 얕지 않음을 인정하였다. 성동(成童)¹⁵의 나이를 지났어도 아직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말을 달리며 활쏘기를 하다가 동배(儕流)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즉시 분발하여 학업에 힘썼다. 5개월이 지나자 이미 글의 뜻에 통달하였고, 다만 다른 사람을 따라 질의(質疑)하였으나 10개월이 되지 않아 이치에 막힘이 없었으니, 이로부터 학문에 뜻을 둠이 더욱 돈독해졌다. 성하산(成夏山) 몽정(夢井)¹⁶은 공의 매형(妹兄)¹⁷이었는데, 공의 뜻을 알아보고자 음사(蔭仕)¹⁸로 벼슬에 나아가기를 권하며 간절히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자, 억지로 권하니 이에 말하였다. “대장부는 마땅히 글을 읽어 공업(功業)을 세울 뿐입니다.” 하산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나 또한 너를 시험해 보았을 뿐이다.” 임신년(1512)에 공의 나이가 비로소 약관(弱冠)¹⁹이었는데, 하산은 그의 문재(文才)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칭찬하였다. 대개 4년간 학문에 힘써 이룬 바가 이와 같았다. 김모재(金慕齋)²⁰, 이용재(李容齋)²¹ 및 여러 거공(鉅公)²²들이 오면, 반드시 공의 글을 보여주었는데, 탄복하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로부터 훌륭한 명성(華聲)이 크게 알려졌다. 하산은 그의 덕과 그릇(德器)에 깊이 감복하여 자주 칭찬해 마지않으며 말하였다. “상모(尙某)²³의 자질은 비록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에 있더라도 여러 제자들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주석:
15. 성동(成童): 15세 전후의 나이.
16. 성하산(成夏山) 몽정(夢井): 하산(夏山)은 성몽정(成夢井)의 호이다. 성몽정(생몰년 미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7. 매형(妹兄): 누이의 남편.
18. 음사(蔭仕):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 음직은 조상의 공덕이나 문벌에 의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고 맡게 되는 벼슬이다.
19.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를 가리킨다.
20. 김모재(金慕齋):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21. 이용재(李容齋):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22. 거공(鉅公): 명망 높고 지위가 높은 인물.
23. 상모(尙某): 상(尙) 아무개. 상진(尙震)을 가리킨다.

원문:
公聞成公守琛、守琮兄弟有學行, 乃以全紙大書以簡曰: “聞公之名, 切有願交之志。” 二成亦以大字許之。 自是連榻, 實多講磨。 中丙子生員, 入泮課藝, 連三製入高等。 柳公雲時長皐比, 大加褒稱, 至訪于家曰: “見君議論, 知有經綸之才。” 公見儕類有忌色, 遂有時晦之意, 不復屑意於館試。 柳公覺之, 深恨其不能容人之才也。
번역문:
공은 성공(成公) 수침(守琛)²⁴, 수종(守琮)²⁵ 형제가 학문과 행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에 전지(全紙)에 큰 글씨로 편지를 써서 말하였다. “공의 이름을 듣고 간절히 교유(交遊)하기를 원하는 뜻이 있습니다.” 두 성씨(二成) 또한 큰 글씨로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잠자리를 나란히 하며 실로 많이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병자년(1516)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²⁶에 들어가 과예(課藝)²⁷에 참여하였는데, 세 차례 연달아 지은 글이 고등(高等)에 들었다. 유공(柳公) 운(雲)²⁸이 당시 고비(皐比)²⁹의 장(長)이었는데, 크게 포상하고 칭찬하며 집에까지 찾아와 말하였다. “그대의 의론(議論)을 보니 경륜(經綸)³⁰의 재능이 있음을 알겠다.” 공은 동료들이 시기하는 기색이 있음을 보고 마침내 때때로 재능을 감추려는(時晦)³¹ 뜻을 두어, 다시는 관시(館試)³²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유공이 이를 알아차리고, 그 재능을 용납하지 못함을 매우 한탄하였다.
주석:
24. 성공(成公) 수침(守琛): 성수침(成守琛, 1493-156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복원(復元), 호는 청송(聽松). 상진과 동갑이며 절친한 사이였다.
25. 수종(守琮): 성수종(成守琮, 1497-1533). 성수침의 동생.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온(子溫), 호는 어숙헌(語默軒).
26. 입반(入泮): 성균관(成균관)에 들어감. 반궁(泮宮)은 성균관의 별칭이다.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
27. 과예(課藝):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시험.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28. 유공(柳公) 운(雲): 유운(柳雲, 1459-153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종룡(從龍), 호는 청파(靑坡).
29. 고비(皐比): 학교의 스승 또는 교육 책임자를 의미한다. 호피(虎皮)를 깔고 앉아 강의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大司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유운은 1515-1516년에 대사성을 역임했다.
30. 경륜(經綸): 세상을 다스리는 포부나 방책.
31. 시회(時晦): 때때로 재능이나 뜻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
32. 관시(館試):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

원문:
一日在泮, 聞韓忠奉使嶺北, 有一人出自山谷, 披寬博之衣, 立道上呼韓之字, 袖出陳弊一書以授曰“歸告殿下”云。 一泮莫不唶唶曰: “三代以下, 乃有此等偉人!” 公獨不應。 坐中詰其故, 公徐曰: “若果賢者, 焉有自衒之理?” 衆共誹之曰: “外若矜嚴, 內必如之。” 公曰: “豈無象恭者乎?” 衆益攻之, 公竟不答。 朝廷¹問得其人, 則乃燕山嬖孼家書題有罪長流者, 然後知公之識見高矣。
번역문:
하루는 성균관에 있는데, 한충(韓忠)³³이 영북(嶺北)³⁴에 사신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사람 하나가 산골짜기에서 나와 넓은 옷을 입고 길 위에 서서 한충의 자(字)를 부르며, 소매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주면서 “돌아가 전하(殿下)께 아뢰라”고 하였다. 온 성균관 사람들이 감탄하며(唶唶)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삼대(三代)³⁵ 이후로 이에 이런 위인(偉人)이 있구나!” 공만이 홀로 응하지 않았다. 좌중(坐中)에서 그 까닭을 묻자, 공이 천천히 말하였다. “만약 참으로 현명한 자라면 어찌 스스로를 과시할 리가 있겠는가?” 무리가 함께 비방하며 말하였다. “겉으로 점잔을 빼고 엄숙한 체하면, 속마음도 반드시 그럴 것이다.” 공이 말하였다. “어찌 겉모습만 공손한 체하는 자(象恭者)³⁶가 없겠는가?” 무리가 더욱 공격하였으나, 공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그 사람을 물어 찾아보니,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총애받던 서얼(嬖孼)³⁷ 집안의 서제(書題)³⁸로서 죄를 짓고 멀리 유배된 자였다. 그런 뒤에야 공의 식견이 높음을 알게 되었다.
주석:
33. 한충(韓忠, 1486-152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서경(恕卿).
34. 영북(嶺北): 대관령 북쪽, 즉 강원도 북부 지역을 가리킨다.
35. 삼대(三代): 중국 고대의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를 가리킨다. 이상적인 시대의 상징으로 쓰인다.
36. 상공자(象恭者): 겉으로만 공손한 체하는 사람.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색려이내임(色厲而內荏), 비제소인, 비유천유지사지여야(譬諸小人, 其猶穿窬之盜也與)" (겉모습은 위엄이 있으나 속마음은 유약한 자는 소인에 비유하건대, 담 구멍을 뚫고 넘어가는 도둑과 같을 것이다)나 "향원, 덕지적야(鄕原, 德之賊也)" (사이비 군자는 덕을 해치는 자이다) 등의 구절과 통하는 의미이다.
37. 폐얼(嬖孼): 임금의 총애를 받는 첩이 낳은 서자(庶子).
38. 서제(書題): 글을 써서 관청에 제출하는 사람. 또는 그런 직책. 문맥상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서얼 집안에 속하여 글씨 쓰는 일을 하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원문:
公初釋褐歸鄕, 有崔弘濟者, 不爲士類所齒, 乘靜菴貶謫, 上疏力詆, 至請其死。 朝廷適加重罪, 弘濟喜語稠中曰: “果用吾言, 已命斬光祖于謫所矣。” 公自少恥言人過, 而聞之大惡, 屢與所親斥崔之爲人。 其見遞於翰林, 再駁於持平, 皆此也。【竝淸江李濟臣撰行狀。】
번역문:
공이 처음 관복을 벗고³⁹ 고향에 돌아왔을 때, 최홍제(崔弘濟)⁴⁰라는 자가 있었는데, 사류(士類)⁴¹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가 정암(靜庵)⁴²이 폄적(貶謫)⁴³된 것을 기회로 삼아 상소(上疏)하여 힘써 비방하며 그를 죽일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조정에서 마침 중죄를 더하자, 홍제가 기뻐하며 많은 사람들 속에서 말하였다. “과연 내 말을 사용하여, 이미 광조(光祖)를 귀양지에서 베라고 명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의 허물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였으나, 이 말을 듣고 매우 미워하여, 여러 차례 가까운 이들과 함께 최씨의 사람됨을 배척하였다. 공이 한림(翰林)⁴⁴에서 체직(遞職)되고, 지평(持平)⁴⁵에서 두 차례 논박 받은 것이 모두 이 때문이었다.【이상은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⁴⁶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39. 석갈(釋褐): 갈옷(褐)을 벗는다는 뜻으로, 벼슬길에 처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문맥상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시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40. 최홍제(崔弘濟): 생몰년 미상.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탄핵한 인물 중 하나로 보인다.
41. 사류(士類): 선비의 무리. 사림(士林)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42.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개혁 정치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賜死)되었다.
43. 폄적(貶謫): 관직을 깎아내리고 멀리 귀양 보내는 형벌. 조광조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능주(綾州)에 유배되었다.
44. 한림(翰林): 예문관(藝文館)의 봉교(奉敎), 대교(待敎), 검열(檢閱) 등 한림관(翰林官)을 통칭하는 말. 상진은 1519년 문과 급제 후 홍문관 정자, 저작 등을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45.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감찰 업무를 담당했다. 상진은 1521년(중종 16)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46.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청강(淸江). 상진의 행장을 지었다.

원문:
筵臣金世弼論趙光祖曰: “初甚尊寵, 一朝賜死, 氣色慘惔。” 公出曰: “邇來經席, 未有此論, 金某之言, 正爲得之。” 旣而金被謫, 公亦坐遞。【《紀⁴⁷年通攷》。】
번역문:
경연(經筵)의 신하 김세필(金世弼)⁴⁸이 조광조에 대해 논하며 말하였다. “처음에는 매우 존경하고 총애하시다가 하루아침에 사사(賜死)하시니, 기색이 참담하였습니다.” 공이 나와서 말하였다. “근래 경연 자리에서 이런 논의가 없었는데, 김모(金某)의 말이 바로 요점을 얻었습니다.” 얼마 뒤 김세필이 폄적되자, 공 또한 연좌(坐)되어 체직(遞)되었다.【《기년통고(紀年通攷)》⁴⁹에서 인용】
주석:
47. [주-D002] 紀 : 저본(底本)에는 “기(記)”로 되어 있다. 《기년통고(紀年通攷)》 권수제(卷首題)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48. 김세필(金世弼, 1473-15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거(公巨), 호는 십청헌(十淸軒).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두둔하다 파직되었다.
49. 《기년통고(紀年通攷)》: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원문:
爲江原道觀察使, 將行, 請敎於尹相殷輔, 尹相爲陳《方伯政要》。 公遵行不違, 事無積滯, 常曰: “吾屢膺當道, 常遵尹相之敎。” 後有爲方伯請敎於公者, 必擧尹相之言以送之。
번역문: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⁵⁰가 되었을 때, 장차 떠나려 하면서 윤상(尹相) 은보(殷輔)⁵¹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윤상이 《방백정요(方伯政要)》⁵²를 설명해 주었다. 공은 이를 준수하여 행하고 어기지 않아 맡은 일에 쌓여 막힘(積滯)이 없었으며, 항상 말하였다. “내가 여러 번 해당 도(當道)⁵³의 직책을 맡았는데, 항상 윤상의 가르침을 준수하였다.” 뒤에 방백(方伯)⁵⁴이 되어 공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윤상의 말을 들어 보내주었다.
주석:
50.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 강원도의 최고 지방관. 상진은 1530년(중종 25)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51. 윤상(尹相) 은보(殷輔): 윤은보(尹殷輔, 1468-154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여(子汝), 호는 칠휴(七休), 이우당(二憂堂). 영의정을 지냈다. '윤상(尹相)'은 재상 윤씨라는 의미이다.
52. 《방백정요(方伯政要)》: 방백(方伯, 관찰사)이 정사를 하는 데 중요한 요점. 특정 서적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관찰사의 직무 요강이나 지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53. 당도(當道): 해당 도(道). 관찰사가 관할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54.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원문:
江原有一嫗, 告義子欲烝己。 公審嫗貌, 皤頭爛瘡, 面如猿猴。 公詰之曰: “惡少不勝淫情, 以色故也。 爾子亦有本妻, 必不犯極惡奸汝明矣。 若不直承, 必先訊汝。” 嫗服曰: “子果不順, 欲搆重治耳。” 公卽治其子不順之罪。 其度事深詣類此。
번역문:
강원도에 어떤 할멈이 있었는데, 의붓아들이 자기를 증(烝)⁵⁵하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공이 할멈의 용모를 살펴보니, 흰머리에 부스럼이 문드러졌고 얼굴은 원숭이 같았다. 공이 힐문하여 말하였다. “나쁜 젊은이가 음탕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미색(美色) 때문인데, 너의 아들은 또한 본처(本妻)가 있으니 반드시 지극히 악한 짓을 저질러 너를 간음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곧바로 실토하지 않으면 반드시 너를 먼저 신문할 것이다.” 할멈이 자복하며 말하였다. “아들이 과연 불순(不順)하여, 중하게 다스려지도록 얽어 넣으려 했을 뿐입니다.” 공은 즉시 그 아들의 불순한 죄를 다스렸다. 그의 일 처리의 깊고 뛰어남(深詣)이 이와 같았다.
주석:
55. 증(烝): 자식이 서모(庶母)나 장모(丈母) 등 부모 항렬의 여자와 간통하는 것. 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간통하는 것. 유교 윤리상 극악한 범죄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는 의붓아들이 계모(할멈)를 범하려 했다는 의미이다.

원문:
公在銀臺, 當奏覆, 囚案盈抱, 諸宰相顧曰: “今日必暮。” 公擧條要, 敷啓甚詳, 晷不移刻, 情僞畢露。 旣出, 無不稱之。
번역문:
공이 은대(銀臺)⁵⁶에 있을 때, 주복(奏覆)⁵⁷을 맡았는데 죄수 안건(囚案)이 품에 가득하자 여러 재상들이 돌아보며 말하였다. “오늘은 반드시 날이 저물 것이다.” 공이 조목별 요점(條要)을 들어 매우 상세하게 아뢰니, 해 그림자가 한 시각(刻)⁵⁸도 옮기기 전에 실정과 거짓(情僞)이 모두 드러났다. 마치고 나오자,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주석:
56.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상진은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했다.
57. 주복(奏覆): 임금에게 아뢰어 재가(裁可)를 받음.
58. 각(刻): 시간의 단위.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었으므로, 1각은 약 14.4분에 해당한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일을 처리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丁酉, 拜大司諫。 有一同僚將禧陵水石之說, 議于圓⁵⁹席, 公曰: “玆事極重, 當十分廣諮⁶⁰, 然後乃可斟酌, 不可容易。” 力止之。 不數日, 其人入經筵獨啓之, 時, 金安老方忌鄭文翼公光弼, 正欲搆陷而難其名, 以山陵時文翼實監其事故。 乘其隙, 乃發遷卜之議, 因置之不測, 聲勢甚張。 公閉門謝客, 究思可救之方, 自第具諫草, 率同僚以啓, 俄得輕論。
번역문:
정유년(1537)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어떤 동료 하나가 희릉(禧陵)⁶¹의 수석(水石)⁶² 설을 가지고 원좌(圓席)⁶³에서 의논하려 하자, 공이 말하였다. “이 일은 지극히 중요하니, 마땅히 충분히 널리 자문한(廣諮) 뒤에야 비로소 참작(斟酌)할 수 있고, 쉽게 해서는 안 된다.” 힘써 이를 막았다. 며칠이 되지 않아 그 사람이 경연(經筵)에 들어가 홀로 아뢰었다. 그때 김안로(金安老)⁶⁴가 정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⁶⁵을 마침 꺼려서, 바로 모함하고자 하였으나 그 명분(名)을 만들기 어려웠는데, 산릉(山陵) 조성 당시에 문익공이 실로 그 일을 감독했기 때문이다. 그 틈을 타서 마침내 능을 옮겨 길지를 가릴(遷卜) 의논을 일으켜, 그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리니, 성세(聲勢)가 매우 커졌다. 공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구제할 수 있는 방도를 깊이 생각하여, 집에서 간언(諫言)의 초고(草稿)를 갖추어 동료들을 이끌고 아뢰니, 얼마 안 되어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주석:
59. [주-D003] 圓 : 《범허정집(泛虛亭集)・유사(遺事)》에는 “도(圖)”로 되어 있다. '원석(圓席)'은 둥글게 모여 앉는 자리, 즉 동료들과의 회의 석상을 의미한다. '도석(圖席)'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60. [주-D004] 諮 : 저본(底本)에는 “자(𧫎)”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 및 《범허정집・행장(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61. 희릉(禧陵): 중종의 제2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 내에 있다.
62. 수석(水石): 풍수지리에서 물과 돌. 능 자리의 길흉(吉凶)을 판단하는 요소이다. 희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63. 원석(圓席): 둥글게 둘러앉는 자리. 사간원 동료들과의 회의 자리를 의미한다.
64.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종 때의 권신. 작서(灼鼠)의 변(變) 등을 일으켜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후에 사사(賜死)되었다.
65. 정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 문익(文翼)은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시호이다.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 김안로와 대립하다 유배되었다. 정광필은 희릉 조성 당시 총호사(摠護使)를 맡았었다.

원문:
爲京畿觀察使, 管邑人士有連名狀曰: “某人不孝繼母。” 公悉招持狀人諭之曰: “繼母子不孝, 得名最易, 爾等十分審察而來言耶?” 衆曰: “人理不祥, 不忍形諸文字, 實烝之也。” 公訪其家人, 不用刑杖, 一言得情, 上讞明白。 朝廷不復究訊, 卽處以律, 朝中大相有素服公者, 嘉而戲之曰: “令公寬柔, 讞獄甚猛。”【竝行狀。】
번역문:
경기 관찰사(京畿 觀察使)⁶⁶가 되었을 때, 관할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연명(連名)하여 소장(狀)을 올려 말하였다. “아무개가 계모(繼母)에게 불효합니다.” 공이 소장을 가져온 사람들을 모두 불러 깨우쳐 말하였다. “계모와 자식 간에 불효하다는 평판을 얻기는 가장 쉬우니, 너희들이 충분히 살펴보고 와서 말하는 것이냐?” 무리가 말하였다. “인륜(人倫)에 있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차마 문자로 드러내지는 못하였으나, 실은 증(烝)한 것입니다.” 공이 그 집 사람들을 방문하여 형장(刑杖)을 쓰지 않고 한마디 말로 실정(實情)을 알아내어, 명백하게 상언하여 판결(上讞)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깊이 신문하지 않고 즉시 법률에 따라 처결하니, 조정의 대상(大相)⁶⁷ 중에 평소 공을 탄복하던 이가 있어, 이를 가상히 여겨 농담하며 말하였다. “영공(令公)⁶⁸께서는 너그럽고 부드러우시면서도, 옥사(獄事)를 판결함은 매우 매서우시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66. 경기 관찰사(京畿 觀察使): 경기도의 최고 지방관. 상진은 1539년(중종 34)에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67. 대상(大相): 큰 재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을 가리킨다.
68. 영공(令公): 다른 사람의 아버지나 조부, 또는 지위 높은 인물에 대한 존칭. 여기서는 상진을 가리킨다.

원문:
貞顯王后薨, 公掌都監事, 金謹思爲提調, 頗以葬物私施, 公謂⁶⁹國事未襄, 大觸其怒。 後屢被中傷, 拜判書、贊成, 皆被論。【《紀年通攷》。】
번역문:
정현왕후(貞顯王后)⁷⁰가 훙(薨)⁷¹하자 공이 도감(都監)⁷²의 일을 맡았는데, 김근사(金謹思)⁷³가 제조(提調)⁷⁴가 되어 자못 장례 물품(葬物)을 사사로이 베풀자, 공이 국사(國事)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여⁷⁵ 그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 뒤에 여러 차례 중상(中傷)을 입어 판서(判書), 찬성(贊成)⁷⁶에 임명될 때마다 모두 논박을 받았다.【《기년통고》에서 인용】
주석:
69. [주-D005] 爲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위(謂)'가 있어야 '공이 ~라고 말하다'는 의미가 된다.
70.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조선 성종(成宗)의 제2계비이며 중종(中宗)의 생모. 1530년(중종 25)에 승하했다.
71. 훙(薨): 왕족이나 고위 관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72. 도감(都監): 국가의 큰일이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던 관청. 여기서는 정현왕후의 국상(國喪)을 치르기 위해 설치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가리킨다. 상진은 국장도감의 당상관(堂上官) 중 하나였을 것이다.
73. 김근사(金謹思, 1477-15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근사(謹思), 호는 고봉(孤峯).
74. 제조(提調): 각 관청의 으뜸 벼슬. 도감의 책임자를 의미한다.
75. 공위국사미양(公謂國事未襄): 국장(國葬)이라는 국가의 큰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사사로이 물품을 나누어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으로 김근사를 비판한 것이다.
76. 찬성(贊成):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우찬성(右贊成)이 있었다.

원문:
公在相府, 緇徒有不法事, 僚相忿其放縱, 謂公曰: “此輩無所統, 故如此。 若依祖宗朝舊例, 使有糾攝之地, 則不乃有益乎?” 公曰: “疾之已甚, 亂也。 此屬當治以不治。 今若糾檢而復立統屬之規, 則無識之徒, 反謂之崇佛而然, 則事尤大關, 固不可爲也。” 未幾, 公以事詣闕, 內旨下議曰: “僧徒無統, 欲復兩宗治之, 何如?” 公啓曰: “僧徒雖無統攝, 然起廢重難, 故前日同僚亦有此議, 恐反有害, 遂止耳。” 公實未知其漸將大, 自以爲事幾之初, 微言諷止, 得大臣啓事之體。
번역문:
공이 상부(相府)⁷⁷에 있을 때, 치도(緇徒)⁷⁸ 중에 불법(不法)한 일이 있자, 동료 재상(僚相)이 그 방종(放縱)함에 분개하여 공에게 말하였다. “이 무리는 통솔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습니다. 만약 조종조(祖宗朝)의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규찰하고 통솔하는(糾攝) 곳을 두게 한다면,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말하였다. “미워함이 이미 심하면 혼란해집니다. 이 무리는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려야 합니다. 이제 만약 규찰하고 검속하며 다시 통솔 관계의 규정(統屬之規)을 세운다면, 무식한 무리들이 도리어 불교를 숭상하여 그렇다고 말할 것이니, 일이 더욱 크게 관계되므로 진실로 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일 때문에 대궐에 나아가니 내지(內旨)⁷⁹로 하문하여 의논하기를, “승도(僧徒)들을 통솔함이 없으니, 양종(兩宗)⁸⁰을 회복하여 다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뢰었다. “승도들을 비록 통솔함이 없으나, 폐지된 것을 일으키기는 매우 어려우므로, 전날 동료 또한 이런 의논이 있었으나 도리어 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마침내 그만두었을 뿐입니다.” 공은 실로 그 일이 점차 장차 커지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일이 시작되는 기미(事幾之初)라 여겨 은근한 말로 풍자하여 그만두게 하였으니, 대신(大臣)이 일을 아뢰는 체통(體統)을 얻었다.
주석:
77. 상부(相府): 재상(宰相)이 정무(政務)를 보는 곳.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78. 치도(緇徒): 검은 옷을 입은 무리라는 뜻으로, 승려(僧侶)를 가리킨다.
79. 내지(內旨): 임금이 은밀히 내리는 명령이나 하문.
80. 양종(兩宗): 조선 초기 불교계를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양종으로 나누어 관리하던 제도.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불교 중흥 정책에 따라 일시적으로 부활했다.

원문:
大王大妃之同聽政也, 公奏事簾前, 大妃傳曰: “相公致此, 不獨未亡人與殿下之意也。 先王常稱卿可大用, 至於書名屛障以識之, 不幸未及。 今之用卿, 實先王意也。” 公感激進曰: “小臣蒙先王恩寵罔極, 用特旨除官, 殆過十餘度, 時人至疑臣以他道進也。” 答曰: “卿豈以他道進? 特知遇深耳。”
번역문:
대왕대비(大王大妃)⁸¹께서 함께 청정(聽政)⁸²하실 때, 공이 발(簾) 앞에서 일을 아뢰자, 대비께서 전교하시기를, “상공(相公)께서 이 자리에 이른 것은, 단지 미망인(未亡人)⁸³과 전하(殿下)의 뜻만이 아닙니다. 선왕(先王)⁸⁴께서 항상 경(卿)을 크게 쓸 만하다고 칭찬하시며, 병풍(屛障)에 이름을 써서 표시해 두기에 이르셨으나, 불행히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경을 등용한 것은 실로 선왕의 뜻입니다.” 하였다. 공이 감격하여 나아가 아뢰었다. “소신(小臣)이 선왕의 망극한 은총을 입어, 특지(特旨)로 관직에 제수된 것이 거의 십여 차례가 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신이 다른 방도(他道)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답하시기를, “경이 어찌 다른 방도로 진출하였겠는가? 특별히 지우(知遇)⁸⁵가 깊었을 뿐이다.” 하였다.
주석:
81. 대왕대비(大王大妃): 선왕(先王)의 비(妃)로서 왕의 할머니뻘이 되는 이에게 붙이는 칭호. 여기서는 명종(明宗)의 생모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를 가리킨다.
82. 청정(聽政): 임금이 어려서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 왕대비(王大妃)나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임금을 도와 정사를 듣고 처리하던 일.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도 한다. 문정왕후는 명종 즉위(1545년) 후 8년간 수렴청정했다.
83. 미망인(未亡人):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과부(寡婦)가 자신을 낮추어 이르던 말. 여기서는 문정왕후 자신을 가리킨다.
84. 선왕(先王): 돌아가신 임금. 여기서는 중종(中宗)을 가리킨다.
85. 지우(知遇): 자신의 재능이나 인격을 알아주는 대우. 임금의 특별한 신임과 발탁을 의미한다.

원문:
國家設別科, 公爲讀卷官。 其時主文柄者, 欲擧中朝事發策, 公止之曰: “此大事, 可廟議, 不可策士。” 猶以其意爲問目。 旣而公議譁然, 論罷主題試官, 擧子亦削科, 公自以首官不能力止, 詣闕請自坐不爭之罪。 上曰: “不聽公言, 過在於彼也。” 初, 公自試所歸, 語子弟頗有未愜之恨, 旣而果然。
번역문:
국가에서 별과(別科)⁸⁶를 설치하였는데, 공이 독권관(讀卷官)⁸⁷이 되었다. 그때 문병(文柄)⁸⁸을 주관하던 자가 중조(中朝)⁸⁹의 일을 들어 책문(策問)⁹⁰으로 출제하고자 하니, 공이 말리며 말하였다. “이는 큰일이므로 묘당(廟堂)에서 의논할 수는 있으나, 선비에게 책문으로 물을 수는 없다.” 그래도 그 뜻대로 문제(問目)를 삼았다. 얼마 뒤 공론(公議)이 시끄러워져, 문제를 주관한 시관(試官)을 논박하여 파직하고 응시자(擧子) 또한 합격을 취소하니, 공은 스스로 수석 시관(首官)으로서 힘써 말리지 못한 것에 대해, 대궐에 나아가 다투지 않은 죄(不爭之罪)로 자처하여 처벌받기를 청하였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공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허물은 저들에게 있다.” 처음에 공이 시험 장소에서 돌아와 자제(子弟)들에게 자못 마음에 들지 않는 한스러움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얼마 뒤 과연 그렇게 되었다.
주석:
86. 별과(別科): 정기적인 식년시(式年試) 외에 국가에 경사가 있거나 필요에 따라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던 과거 시험. 증광시(增廣試), 알성시(謁聖試) 등이 있다.
87. 독권관(讀卷官): 과거 시험에서 답안지를 채점하던 시험관.
88. 문병(文柄): 문운(文運)을 주재하는 권세. 과거 시험의 출제나 선발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를 의미한다.
89. 중조(中朝): 중국 조정을 가리킨다. 당시 명(明)나라를 의미한다.
90. 책문(策問): 과거 시험의 한 과목. 시무(時務)나 경사(經史)에 관해 임금이 묻고 응시자가 대책(對策)을 논술하는 방식이다. 민감한 외교 문제를 과거 시험 문제로 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 것이다.

원문:
上御翠露亭, 簡召諸宰及賜暇儒臣, 講其所讀書。 仍命諸宰, 各製詩進爵, 賜燭以榮之。 公以首相入侍, 上親爲侑爵, 公不覺醺醉, 伏苑中, 上乘小輿, 將還大內, 下問爲誰, 左右以領相對。 上曰: “老相在此, 不可輦過。” 命設行帳, 然後乃入, 繼命中人護歸。 翌日, 與諸公上箋陳謝, 旋以失禮待罪。 御批曰: “昨見公醉, 甚洽予意, 有何失禮?”
번역문:
상께서 취로정(翠露亭)⁹¹에 거둥하시어 여러 재상 및 휴가를 받은 유신(儒臣)⁹²들을 간략히 불러 그 읽는 책을 강론하게 하셨다. 이어서 여러 재상에게 명하여 각각 시(詩)를 지어 올리고 술잔을 올리게 하셨으며, 촛불을 하사하여 영화롭게 하셨다. 공이 수상(首相)⁹³으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상께서 친히 잔을 권하시니(侑爵), 공은 어느덧 취하여(醺醉) 정원 안에 엎드렸다. 상께서 작은 가마(小輿)를 타고 장차 대내(大內)로 돌아가려 하시다가 누구인지 내려다보고 물으시니, 좌우에서 영의정이라고 대답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노상(老相)께서 여기에 계시니, 가마를 타고 지나갈 수 없다.” 행장(行帳)⁹⁴을 설치하도록 명한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시고, 이어서 중관(中官)⁹⁵에게 명하여 호송하여 돌아가게 하셨다. 다음 날 여러 공들과 함께 전문(箋文)을 올려 사죄하고, 이어서 실례(失禮)한 것으로 죄를 기다렸다. 어비(御批)⁹⁶에 이르기를, “어제 공이 취한 것을 보니 매우 나의 뜻에 흡족하였는데, 무슨 실례가 있었는가?” 하였다.
주석:
91. 취로정(翠露亭): 경복궁 후원에 있던 정자 이름.
92. 유신(儒臣): 유학자 출신의 신하. 주로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등에 속한 문신들을 가리킨다.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예처럼 임금이 특별히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기도 했다.
93.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을 가리킨다.
94. 행장(行帳): 임금이 거둥할 때 길가에 임시로 치는 장막. 임금이 영의정이 누워 있는 곳을 피하기 위해 임시 장막을 치고 그 안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95. 중인(中人): 궁궐 안에서 일하는 사람. 내시(內侍) 등 중관(中官)을 가리킨다.
96. 어비(御批): 임금이 신하의 상소문이나 보고서 등에 직접 써서 내리는 비답(批答).

원문:
上又御閱武亭, 召公卿侍從, 如瑞蔥故事, 因出御軸, 各製寫以進。 公末句云: “忘言醉飽鈞天裏, 敬德唯關獻曝誠。” 雖文字之末, 不忘箴規, 見者皆曰: “得大臣進戒之體。”【竝行狀。】
번역문:
상께서 또 열무정(閱武亭)⁹⁷에 거둥하시어 공경(公卿)과 시종(侍從)들을 불러 서총(瑞蔥)⁹⁸의 고사(故事)처럼 하시고, 이어서 어축(御軸)⁹⁹을 내어 각각 시를 지어 써서 올리게 하셨다. 공의 마지막 구절(末句)에 이르기를, “말 잊고 취하여 배부른 하늘 음악 속¹⁰⁰에서, 덕을 공경함은 오직 햇볕 쬐는 정성¹⁰¹에 달려 있네.”라고 하였으니, 비록 문자(文字)의 말단이지만 잠규(箴規)¹⁰²를 잊지 않았으므로, 보는 자들이 모두 말하였다. “대신(大臣)이 경계(警戒)를 올리는 체통을 얻었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97. 열무정(閱武亭): 경복궁 안에 있던 정자. 군사 훈련을 참관하거나 활쏘기 등을 하던 곳이다.
98. 서총(瑞蔥): 상서로운 파.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궁궐 뜰에 상서로운 파가 자라났는데, 마디가 세 개이고 잎이 아홉 개였다. 재상 부필(富弼)이 이를 보고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간언했다는 고사가 있다. 임금이 상서로운 일을 계기로 신하들과 함께하며 교훈을 나누는 자리를 비유한 듯하다.
99. 어축(御軸): 임금이 내린 족자. 여기에 신하들이 시를 써서 올렸다.
100. 균천리(鈞天裏): 균천(鈞天)은 하늘 중심에 있다는 상제(上帝)의 궁궐 또는 그곳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임금이 베푼 성대한 잔치 자리를 비유한다.
101. 헌폭성(獻曝誠): 햇볕을 쬐는 정성. 《열자(列子)》 〈양주(楊朱)〉편에 나오는 고사로, 시골 노인이 따뜻한 햇볕을 쬐는 것을 임금에게 바치려 했다는 이야기이다.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정성을 다해 임금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비유한다.
102. 잠규(箴規): 잘못을 경계하고 바로잡도록 타이르는 말이나 글.

원문:
箭串爲國家牧場, 在前設木柵, 輪定於畿邑, 以民結造排, 逐年修改, 吏緣爲奸, 弊甚不貲。 公爲司僕提調, 建白償布募役, 築之以石, 其弊遂絶。 當川流未築處, 設鐵索開閉, 皆其規畫。 時癸丑、甲寅年間, 歲頗飢, 或以時屈爲言, 公曰: “與其徒賑以糜穀, 不若因就以立事。” 此乃《春秋》“興功役, 以聚失業”之意也。
번역문:
전관(箭串)¹⁰³은 국가의 목장(牧場)인데, 예전에 나무 울타리(木柵)를 설치하여 기읍(畿邑)¹⁰⁴에서 차례를 정해 맡아 백성들의 결(結)¹⁰⁵에 따라 조배(造排)¹⁰⁶하고 해마다 수정(修改)하였는데, 아전들이 이를 빌미로 간사한 짓을 하여 폐단이 매우 심하여 헤아릴 수 없었다. 공이 사복시 제조(司僕提調)¹⁰⁷가 되어, 베(布)를 보상으로 주어 역군을 모집하여(募役) 돌로 쌓을 것을 건의하니, 그 폐단이 마침내 끊어졌다. 냇물이 흘러 미처 쌓지 못한 곳에는 쇠사슬(鐵索)을 설치하여 열고 닫게 하니, 모두 그의 계획이었다. 이때가 계축년(1553), 갑인년(1554) 간으로 해마다 자못 굶주렸으므로, 혹자가 시기가 어렵다고 말하자, 공이 말하였다. “한갓 미곡(糜穀)으로 진휼(賑恤)하기보다는, 이를 인하여 나아가 일을 세우는 것이 낫다.” 이는 바로 《춘추(春秋)》¹⁰⁸의 “공역(功役)을 일으켜 실업자(失業者)를 모은다”는 뜻이다.
주석:
103. 전관(箭串): 현재 서울특별시 성동구 살곶이(箭串) 벌판. 조선 시대 국가의 말을 기르던 목장이 있던 곳이다.
104. 기읍(畿邑): 경기도의 고을들.
105. 결(結): 토지 면적의 단위이자 세금 부과의 기준.
106. 조배(造排): 만들어서 배치함. 목책 설치 및 관리에 동원되는 부역(賦役)을 의미한다.
107. 사복시 제조(司僕提調): 사복시(司僕寺)의 책임 관직. 사복시는 궁중의 말(馬), 목장, 마구(馬具) 등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상진은 1553년(명종 8)에 사복시 제조를 겸임했다.
108. 《춘추(春秋)》: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역사를 편수했다고 전해지는 경서(經書). 여기서 인용된 구절의 정확한 출처는 확인이 필요하나, 진휼(賑恤)과 공역(功役)을 연계하여 백성 구제를 도모하는 고대의 지혜를 인용한 것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2년 조에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원문:
公爲相十六年, 當尹元衡用事之時, 內外掣肘, 不能行其志。 每一念至, 或中夜布席於中庭, 仰面獨臥, 歎咤良久曰: “這翁今番行次, 甚爲中間矣。”【竝《淸江瑣語》。】
번역문:
공이 재상으로 있은 지 16년 동안, 윤원형(尹元衡)¹⁰⁹이 권력을 잡고 있던 때를 당하여, 안팎으로 견제(掣肘)¹¹⁰를 받아 그 뜻을 행할 수 없었다. 매번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혹 한밤중에 뜰 가운데 자리를 펴고 얼굴을 우러르며 홀로 누워 한참 동안 탄식하다가 말하였다. “이 늙은이(這翁)가 이번 행차(行次)¹¹¹는 매우 중간(中間)¹¹²이 되었구나.”【이상은 《청강쇄어(淸江瑣語)》¹¹³에서 인용】
주석:
109. 윤원형(尹元衡, ?~1565): 조선 명종 때의 외척, 권신. 문정왕후의 동생.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문정왕후 사후 몰락하여 자결했다.
110. 체주(掣肘): 팔꿈치를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옆에서 간섭하여 행동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을 비유한다.
111. 행차(行次): 길을 가는 차례. 여기서는 자신의 인생 행로 또는 관직 생활을 비유하는 말이다.
112. 중간(中間): 어중간함.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113. 《청강쇄어(淸江瑣語)》: 이제신(李濟臣)이 지은 필기집. 주로 인물 일화, 시화(詩話) 등을 담고 있다.

원문:
公求退十餘年, 始蒙兪允。 遞相之日, 身氣輕健, 始若無疾者。 常曰: “天馽已收, 無往不適。 約與兒輩, 隨處命駕, 水曲山傍, 閑往閑來, 作聖世無事物, 祝聖算以終天期耳。” 有時取酒微醺, 緩歌起舞以自樂。 或問: “前日未嘗歡娛, 今何如此?” 答曰: “昔負重任, 唯力不支是憂, 今旣釋之, 云胡不樂?”
번역문:
공이 물러나기를 구한 지 십여 년 만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재상에서 체직되던 날, 몸과 기운이 가볍고 건강하여 마치 병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항상 말하였다. “하늘의 수레(天馽)¹¹⁴가 이미 거두어졌으니, 가는 곳마다 편안하지 않음이 없다. 아이들과 약속하여 곳에 따라 수레를 내어 물 굽이와 산기슭을 한가로이 오가며, 성스러운 시대(聖世)에 일 없는 사람(無事之物)이 되어 성상(聖上)의 만수무강(聖算)¹¹⁵을 빌며 천수(天期)를 마치려 할 뿐이다.” 때로는 술을 가져와 조금 취하여(微醺) 느릿하게 노래하고 일어나 춤추며 스스로 즐겼다. 어떤 이가 묻기를, “전날에는 일찍이 즐거워하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어찌 이와 같으십니까?” 하니, 답하였다. “옛날에는 중임(重任)을 맡아 오직 힘이 지탱하지 못할까 이것을 근심하였는데, 이제 이미 벗어났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주석:
114. 천질(天馽): 하늘이 매어놓은 굴레. 임금이 맡긴 중책, 즉 재상의 임무를 비유한다.
115. 성산(聖算): 성상(聖上), 즉 임금의 나이. 임금의 만수무강을 의미한다.

원문:
公燕居無事, 頗有自樂之時, 謂子弟曰: “爲善最樂, 非樂不足以語君子。 汝試以《論語》中‘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之語, 永言之, 似若歌調, 而長詠之, 則古人之氣象, 可得矣。 箕子過故殷墟, 亡國之懷如何, 而欲哭則不可, 欲泣則爲近婦人, 乃作《麥秀》之歌, 古人之不輕用性情, 可見矣。”
번역문:
공이 한가로이 거처하며 일이 없을 때, 자못 스스로 즐거워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자제들에게 말하였다.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거우니, 즐겁지 않으면 군자(君子)를 말하기에 부족하다. 너희는 시험 삼아 《논어(論語)》¹¹⁶ 속의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 쓴 자(冠者) 대여섯 명, 동자(童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¹¹⁷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는 말을 길게 읊조려 보아라. 마치 노래 가락 같지만 길게 읊으면 옛사람의 기상(氣象)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기자(箕子)¹¹⁸가 옛 은(殷)나라의 폐허(墟)를 지나면서 망국(亡國)의 회포가 어떠하였겠는가마는, 곡(哭)하고자 하면 불가하고 읍(泣)하고자 하면 부녀자(婦人)에 가깝게 되므로, 이에 〈맥수(麥秀)〉¹¹⁹의 노래를 지었으니, 옛사람들이 성정(性情)을 가벼이 쓰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주석:
116. 《논어(論語)》: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유교 경전. 인용된 구절은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증점(曾點)의 말이다.
117. 무우(舞雩):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제단.
118. 기자(箕子): 중국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숙부. 주왕의 폭정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미친 체하였고, 상나라가 멸망한 뒤 주(周) 무왕(武王)이 그를 조선(朝鮮)에 봉했다고 전해진다.
119. 〈맥수(麥秀)〉: 기자가 은나라의 폐허에 보리가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보고 망국의 슬픔을 노래한 시.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전한다.

원문:
公容色愉和, 動止中適, 雖在倉卒, 未嘗疾言遽色, 喜怒不形。 雅不喜聲色、技藝, 待人開懷, 不作町畦, 必以忠信爲主。 相對接話, 亹¹²⁰亹忘倦, 人有觸犯, 必自降屈。 不喜聞人過, 聞之必先探其心, 究其可恕¹²¹之道, 又必求其長處。 聞人之善, 必揚譽不已。 雖婢僕之愚, 有一小善, 必謂子弟曰: “某爲此言, 行此事, 可善也, 汝輩勿小也。” 有所陳善, 必假色頷許曰: “汝敎我矣。” 有過則諭誨不已。 或有偸盜者, 必反憐之曰: “迫於飢寒, 不得已也。” 還給其贓曰: “汝若飢寒, 須來告我, 愼勿復然。” 如欲任使, 必再三詳命, 使之不迷, 然後授之。 他人若言公過云, 則雖至微者所道, 必思所以致謗之由而反己曰: “吾果有之, 民固至愚而神矣。” 或告曰: “時人慢易¹²²甚。” 或有因事而慍告者, 公纔聞輒喜, 至於笑倒曰: “彼人是矣, 安有畏我者乎?” 慍者亦解, 畢竟諧¹²³笑而去。
번역문:
공은 얼굴빛이 온화하고(愉和) 행동거지(動止)가 중정(中正)하고 알맞아(中適), 비록 창졸(倉卒)간이라도 일찍이 빠른 말씨나 급한 기색(疾言遽色)을 보이지 않았고 희로(喜怒)를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 성색(聲色)¹²⁴이나 기예(技藝)¹²⁵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마음을 열어 구획(町畦)¹²⁶을 짓지 않았으며, 반드시 충성(忠)과 신의(信)를 위주로 하였다.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할 때는 힘써 말하며(亹亹)¹²⁷ 지칠 줄 몰랐고, 사람이 촉범(觸犯)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스스로를 낮추어 굽혔다. 남의 허물 듣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듣게 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헤아려 용서할 만한(可恕) 방도를 궁구하고, 또 반드시 그 장점(長處)을 찾으려 하였다. 남의 선행(善)을 들으면 반드시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비록 비복(婢僕)의 어리석은 자라도 작은 선행 하나가 있으면, 반드시 자제들에게 말하였다. “아무개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훌륭하다. 너희들은 작다고 여기지 말라.” 진선(陳善)¹²⁸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안색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여 말하였다. “네가 나를 가르쳐 주었다.” 허물이 있으면 타이르고 가르쳐 마지않았다. 혹 도둑질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도리어 불쌍히 여기며 말하였다. “굶주림과 추위에 절박하여 부득이했을 것이다.” 그 훔친 물건(贓)을 돌려주며 말하였다. “네가 만약 굶주리고 춥거든 반드시 와서 나에게 고하라. 삼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 만약 일을 맡겨 부리고자 하면 반드시 두세 번 자세히 명하여 그로 하여금 혼동하지 않게 한 뒤에 맡겼다. 다른 사람이 만약 공의 허물을 말한다고 하면, 비록 지극히 미천한 자가 말한 것이라도 반드시 비방을 초래한 이유를 생각하여 자신을 돌이켜보며 말하였다. “내게 과연 그런 점이 있다. 백성은 진실로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묘(神妙)하다.” 어떤 이가 고하기를 “요즘 사람들이 (공을) 매우 업신여깁니다.”라고 하거나, 혹 어떤 일로 인해 성내어 고하는 자가 있으면, 공은 겨우 듣자마자 문득 기뻐하며 웃어 넘어지기까지 하며 말하였다. “그 사람이 옳다. 어찌 나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겠는가?” 성냈던 자도 풀리어, 필경에는 화해하고 웃으며(諧笑) 돌아갔다.
주석:
120. [주-D006] 亹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 《범허정집・행장》, 《청강집(淸江集)・대광보국……상공행장(大匡輔國……尙公行狀)》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미미(亹亹)'는 '힘쓰는 모양, 지치지 않는 모양'을 뜻한다.
121. [주-D007] 恕 : 저본(底本)에는 “노(怒)”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범허정집・행장》,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용서할 만한(恕)' 도리를 찾는 것이 자연스럽다.
122. [주-D008] 易 : 《범허정집・행장》 및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는 뒤에 “공(公)”이 더 있다. '만역공(慢易公)' 즉 '공을 업신여긴다'는 의미이다.
123. [주-D009] 諧 : 《범허정집・행장》 및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는 “해(偕)”로 되어 있다. '해소(偕笑)'는 '함께 웃음'을 뜻하며, '해소(諧笑)'는 '익살스럽게 웃음, 또는 화해하고 웃음'을 뜻한다. 문맥상 둘 다 가능하나, 화해의 의미가 있는 '諧笑'가 더 적절해 보인다.
124.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女色).
125. 기예(技藝): 재주와 예술.
126. 정畦(정규): 밭두둑. 일정한 구획이나 틀을 의미한다. 사람을 대할 때 격식이나 차별을 두지 않았음을 뜻한다.
127. 미미(亹亹): 부지런히 힘쓰는 모양. 여기서는 지치지 않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128. 진선(陳善): 선(善)한 것을 아뢰거나 말함.

원문:
公之爲學, 不屑¹²⁹屑於規矩繩墨, 而以不愧怍矯揉氣質, 涵養德性, 自得應用爲貴。 故居止常處, 必以謹勤和緩四字及輕當矯之以重、急當矯之以緩、偏當矯之以寬、躁當矯之以靜、暴當矯之以和、麤當矯之以細等語, 題在窓壁¹³⁰以寓目¹³¹。 常謂: “一身所主, 神明不測者, 莫貴於天君, 不可以些子塵物點着其上。 凡遇事來, 爲之則已, 却復掃除, 以全本然虛靈可也。”
번역문:
공의 학문함은 규구(規矩)와 승묵(繩墨)¹³²에 자잘하게 얽매이지(屑屑) 않고, 부끄러움이 없도록 기질(氣質)을 바로잡고(矯揉) 덕성(德性)을 함양(涵養)하며 스스로 터득하여 응용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거처하는 곳에는 반드시 근(謹), 근(勤), 화(和), 완(緩) 네 글자와 및 ‘가벼움은 마땅히 무거움으로 바로잡고, 급함은 마땅히 느긋함으로 바로잡고, 치우침은 마땅히 너그러움으로 바로잡고, 조급함은 마땅히 고요함으로 바로잡고, 사나움은 마땅히 온화함으로 바로잡고, 거칠음은 마땅히 세밀함으로 바로잡는다’는 등의 말을 창문과 벽(窓壁)에 써 붙여 항상 눈여겨보았다(寓目). 항상 말하였다. “한 몸에서 주재(主宰)하는 바로서 신묘하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천군(天君)¹³³보다 귀한 것이 없으니, 작은 티끌 같은 것으로 그 위에 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 무릇 일이 닥쳐오면 처리하고 나서는, 물리쳐 다시 쓸어버려 본연(本然)의 허령(虛靈)¹³⁴함을 온전히 함이 옳다.”
주석:
129. [주-D010] 屑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 《범허정집・행장》,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설설(屑屑)'은 '자잘하게, 하찮게 여겨'의 의미이다.
130. [주-D011] 壁 : 장서각본에는 “간(間)”으로 되어 있다. '창벽(窓壁)'은 창문과 벽, '창간(窓間)'은 창문 사이를 의미한다. 둘 다 가능하나, 좌우명 등을 써 붙이는 곳으로는 '창벽'이 더 일반적이다.
131. [주-D012] 目 : 《범허정집・행장》 및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는 앞에 “상(常)”이 더 있다. '상우목(常寓目)' 즉 '항상 눈여겨보다'는 의미이다.
132. 규구승묵(規矩繩墨): 그림쇠(規), 곱자(矩), 먹줄(繩墨). 법도나 표준을 비유하는 말이다. 형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33. 천군(天君): 하늘과 같은 임금. 마음(心)을 가리킨다. 맹자(孟子)는 마음을 인체의 가장 존귀한 기관으로 보았다.
134. 허령(虛靈): 비어 있으면서 신령함. 잡념 없이 맑고 밝은 마음의 본체(本體)를 의미한다.

원문:
公常以古人行事, 將來己身上料理, 於宋朝名臣, 多慕效之。 最喜開襟下問, 至訪於微賤, 如得其善, 必稱好而采用之。 人有被薦者來謝, 輒不悅曰: “君才可用, 何謝之有? 爵祿, 人主之柄, 非私門所有, 愼勿復然。”
번역문:
공은 항상 옛사람의 행적(行事)을 가지고 와서 자기 몸 위에서 헤아려 처리하였고, 송조(宋朝)의 명신(名臣)들에 대해 사모하고 본받는 이가 많았다. 가장 즐겨 가슴을 열고 아랫사람에게 묻기(開襟下問)를 좋아하여 미천(微賤)한 이에게까지 찾아갔고, 만약 그 좋은 점을 얻으면 반드시 좋다고 칭찬하며 채용하였다. 천거된 사람이 와서 감사하면 문득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그대의 재능이 쓸 만하니, 무슨 감사가 있는가? 작위(爵位)와 봉록(俸祿)은 임금의 권한(人主之柄)이지, 사사로운 가문(私門)이 소유한 것이 아니니, 삼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

원문:
公於文藝筆札, 才品雖高, 而不屑以此得名, 至於嶢嶢之行, 皎皎之事, 皆欲掩蔽而韜晦。 故公之才藝、行實, 多爲德量所蘊, 人有不及知者。
번역문:
공은 문예(文藝)와 필찰(筆札)¹³⁵에 재능과 품격(才品)이 비록 높았으나, 이것으로 명성을 얻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높고 뛰어난 행실(嶢嶢之行)과 빛나고 깨끗한 공적(皎皎之事)에 이르러서는 모두 덮어 가리고 숨기고자(掩蔽而韜晦) 하였다. 그러므로 공의 재주와 기예(才藝), 행실(行實)은 대부분 덕량(德量)에 쌓여 있어,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주석:
135. 필찰(筆札): 붓과 서찰(書札). 글씨와 문장을 의미한다.

원문:
公奉先祀, 一遵《瓊山儀節》, 必致誠敬。 或有故不得與, 或設於他家而攝之, 則必候其當事之時, 衣服¹³⁶而坐, 如當祭者然。 時過乃復常, 雖劇疾不¹³⁷廢。
번역문:
공은 선조의 제사(先祀)를 받듦에 한결같이 《경산의절(瓊山儀節)》¹³⁸을 따랐고,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혹 연고가 있어 참여하지 못하거나, 혹 다른 집에서 설행하여 대신 지내게(攝) 하면, 반드시 그 제사 지내는 때를 기다려 의복(衣服)을 갖추고 앉아 있기를 마치 제사를 지내는 사람처럼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에 평상시로 돌아왔으며, 비록 심한 병이라도 폐하지 않았다.
주석:
136. [주-D013] 服 : 《범허정집・행장》에는 뒤에 “관대(冠帶)”가 더 있고,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는 뒤에 “관(冠)”이 더 있다. '의복관대(衣服冠帶)' 또는 '의관(衣冠)'은 의복과 관모를 갖추어 입는 것을 의미한다.
137. [주-D014] 廢 : 저본(底本)에는 “폐(癈)”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범허정집・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의미는 동일하나(폐하다, 그만두다), '廢'가 더 일반적인 표기이다.
138. 《경산의절(瓊山儀節)》: 송(宋)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 호는 西山 또는 瓊山)가 지은 《서산선생진문충공주의(西山先生眞文忠公奏議)》 중의 〈제의(祭儀)〉 부분을 따로 떼어 간행한 책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비롯한 예법 관련 서적을 통칭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원문:
公居第在松峴之傍, 自號松峴翁。 或有故不得陪扈, 而大駕過峴, 則必具朝服出伏於中門外。 或言宜伏於大門之外, 公曰: “處室則吾心不寧, 所以伏地。 若更出門, 人必有見知者, 是沽名也。” 常時出入, 不敢當路, 以避輦迹, 雖居深室旋便, 必避日月。 族屬貧窮, 必力濟之, 婚喪, 尤主焉以資之, 常曰: “先祖之餘氣, 托在於玆, 事雖難易, 恝然者薄也。” 凡爲人謀, 每曰: “當設以身處其地, 乃可以盡得其情, 不可以非吾事而少忽之也。” 凡蟲獸可爲庭翫者, 則必放之, 曰: “飮啄自如, 物我同情。” 滋味可供者, 則必求生道, 曰: “豈忍對生而思食乎?” 人有所饋, 雖小物, 必有酬謝, 若稍多則必曰: “吾爲宰相, 豈不得食? 當留什一, 餘可自供。 若其誠意, 則已領之矣。” 人來求取, 有則必從¹³⁹。 若取於人, 則雖花卉之微, 必曰: “彼亦珍翫, 吾今取來, 得無不¹⁴⁰可乎?”
번역문:
공의 집(居第)은 송현(松峴)¹⁴¹ 곁에 있었으므로, 스스로 송현옹(松峴翁)이라 호(號)하였다. 혹 연고가 있어 임금을 모시고 호종(陪扈)하지 못하는데 대가(大駕)¹⁴²가 고개를 지나가면, 반드시 조복(朝服)을 갖추고 나와 중문(中門) 밖에 엎드렸다. 어떤 이가 대문(大門) 밖에 엎드려야 마땅하다고 말하자, 공이 말하였다. “방 안에 있으면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땅에 엎드리는 것이다. 만약 다시 문밖으로 나간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보고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이는 명예를 구하는(沽名) 것이다.” 평상시 출입할 때 감히 길 가운데로 가지 않아 연적(輦迹)¹⁴³을 피하였고, 비록 깊은 방에 거처하며 용변(旋便)¹⁴⁴을 볼 때라도 반드시 해와 달을 피하였다. 족속(族屬) 중에 빈궁한 이가 있으면 반드시 힘써 구제하였고, 혼인(婚)과 상사(喪)에는 더욱 주관하여 자금을 대주며(資之), 항상 말하였다. “선조(先祖)께서 남기신 기운(餘氣)이 여기에 의탁되어 있으니, 일이 비록 어렵고 쉽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恝然) 자는 박(薄)한 것이다.” 무릇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할 때는 매번 말하였다. “마땅히 몸소 그 처지에 처해 본다고 설정해야, 이에 그 실정(實情)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니, 내 일이 아니라고 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무릇 벌레나 짐승 중에 뜰에서 완상(庭翫)할 만한 것이면 반드시 놓아주며 말하였다. “마시고 쪼는 것을 자유롭게 하니, 사물과 나의 정(情)이 같다.” 맛있는 음식(滋味)으로 제공될 만한 것이면 반드시 살 길(生道)을 구해주며 말하였다. “어찌 차마 살아있는 것을 마주하고 먹을 것을 생각하겠는가?” 사람이 무언가 보내오면(饋)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답례(酬謝)하였고, 만약 조금 많으면 반드시 말하였다. “내가 재상이 되었으니 어찌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겠는가? 마땅히 십분의 일(什一)만 남기고, 나머지는 스스로 가져가 쓰도록 하라. 만약 그 성의(誠意)라면 이미 받았다.” 사람이 와서 구하여 가져가려 하면, 가진 것이 있으면 반드시 따랐다. 만약 남에게서 가져올 때는 비록 화초(花卉)같이 미미한 것이라도 반드시 말하였다. “저것 또한 진귀하게 완상하는 것인데, 내가 지금 가져오면 불가함이 없겠는가?”
주석:
139. [주-D015] 從 : 《범허정집・행장》 및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 근거할 때 뒤에 “왈 불가이외물해오본심지무루(曰 不可以外物害吾本心之無累)” 즉 “말하기를, 외물(外物)로써 나의 본심(本心)의 누가 없음(無累)을 해쳐서는 안 된다.”가 더 있어야 할 듯하다.
140. [주-D016] 不可 : 저본(底本)에는 “가불(可不)”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범허정집・행장》,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득무불가호(得無不可乎)'는 '불가함이 없겠는가?' 즉 '안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염려하는 뜻이다.
141. 송현(松峴):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현동 일대. 소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이다.
142.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의 행차를 의미한다.
143. 연적(輦迹): 임금이 탄 수레가 지나간 자취.
144. 선편(旋便):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것.

원문:
公自奉甚薄, 朝夕所供, 不過數器, 味若疊進, 則必捨一器, 曰: “古之賢相, 食不重肉, 況我乎?” 有時廚肉不繼, 家人欲貿諸市, 則止之曰: “我家若買, 則近於矯僞, 況我本不多食, 而又不嗜之耶?” 衣服之飾, 不喜綾段, 故朝襮之外, 絶不用之。 平居好穿舊澤, 不嗜新鮮。 每謂子弟曰: “丈夫之志, 不累外飾, 服美于人, 可恥之甚也。” 家居, 未嘗言器用陋惡, 家人欲試之, 當對客之座, 置一陋席, 候之數月, 不言易之。 家人知終不言, 代以新者, 公又不言。 其儉素不事致飾, 所性然也。
번역문:
공은 스스로를 받듦(自奉)이 매우 박하여,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것(所供)이 몇 그릇에 지나지 않았고, 만약 맛있는 음식이 겹쳐 올라오면 반드시 한 그릇을 버리며 말하였다. “옛날의 현명한 재상은 식사 때 고기를 중복하지 않았는데¹⁴⁵, 하물며 나이겠는가?” 때로는 부엌에 고기가 이어지지 않아 집안사람이 시장에서 사 오고자 하면, 말리며 말하였다. “우리 집에서 만약 산다면 교활하게 속이는(矯僞) 것에 가까우니, 하물며 나는 본래 많이 먹지 않고 또 즐기지도 않는데 그러겠는가?” 의복의 꾸밈에 능단(綾段)¹⁴⁶을 좋아하지 않아, 조복(朝服)과 제복(襮)¹⁴⁷ 외에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는 낡은 옷(舊澤) 입기를 좋아하고 신선한 것을 즐기지 않았다. 매번 자제들에게 말하였다. “대장부의 뜻은 외적인 꾸밈(外飾)에 얽매이지 않으니, 남에게 옷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집에서 거처할 때, 일찍이 기물(器用)이 누추하고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집안사람이 시험해 보고자 하여, 손님을 마주하는 자리에 누추한 자리 하나를 두고 여러 달을 기다렸으나 바꾸라고 말하지 않았다. 집안사람이 끝내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새것으로 대신하니, 공은 또 말하지 않았다. 그의 검소함과 치장(致飾)에 힘쓰지 않음은 타고난 성품(所性)이 그러하였다.
주석:
145. 식부중육(食不重肉): 식사 때 두 가지 이상의 고기반찬을 먹지 않음. 검소한 생활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 등에 보인다.
146. 능단(綾段): 무늬 있는 얇은 비단(綾)과 두꺼운 비단(段). 고급 옷감을 의미한다.
147. 조복(朝服), 제복(襮): 조정에 나갈 때 입는 관복(朝服)과 제사 때 입는 제복(祭服). 제복을 '襮'으로 표기한 것은 흔하지 않다. '백(襮)'은 보통 '옷깃'이나 '드러내다'는 의미로 쓰인다. 혹시 다른 글자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

원문:
家人嘗買貧人男口於十年之前, 後奴率良妻之子來, 公問其年, 乃買一歲前所生也, 卽招本主而與之。 主以貧故, 願復受直, 而感公德, 輕其數。 公曰: “畜物價尙高, 況人口乎?” 遂倍數而歸之。
번역문:
집안사람이 일찍이 10년 전에 가난한 사람의 남자 종(男口)¹⁴⁸을 샀는데, 후에 그 종이 양인(良人) 아내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 공이 그 나이를 물으니, 바로 사기 1년 전에 낳은 아이였다. 즉시 본래 주인(本主)을 불러 그에게 돌려주었다. 주인이 가난 때문에 다시 값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공의 덕에 감동하여 그 액수를 가볍게 하려 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가축(畜物) 값도 오히려 높은데, 하물며 사람 값이겠는가?” 마침내 액수를 배로 하여 돌려주었다.
주석:
148. 남구(男口): 남자 노비(奴婢).

원문:
常讀《大學衍義》, 或至夜分, 旣而歎曰: “吾讀此書, 將以致用, 而邇來謀議, 動見齟齬, 何也?” 爲政務存大綱, 不用明察, 惟以得事體爲先。 遵守成憲, 不喜紛更, 持撫盈成, ¹⁴⁹靜而安之者, 乃其志也。 嘗曰: “祖宗與先臣, 經歷多, 思慮深, 後人遵之無敗足矣。 作小聰明, 要勝於祖宗之上, 於義安乎? 故凡論人才, 必以持重不變更舊章爲首。” 嘗讀書, 至人徒知有功之爲功, 不知無功之爲功, 三復喟然曰: “知此者鮮矣。”
번역문:
항상 《대학연의(大學衍義)》¹⁵⁰를 읽어 혹 밤중(夜分)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이윽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이 책을 읽어 장차 쓰임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데, 근래의 논의(謀議)가 걸핏하면 어긋남(齟齬)을 보니, 어찌된 일인가?” 정사를 함에 힘써 대강(大綱)을 보존하고 명찰(明察)¹⁵¹을 쓰지 않았으며, 오직 일의 체통(事體)을 얻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성헌(成憲)¹⁵²을 준수하고 분분하게 고치는(紛更)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가득히 이루어진 것(盈成)을 유지하고 어루만져¹⁵³ 고요히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그의 뜻이었다. 일찍이 말하였다. “조종(祖宗)과 선신(先臣)은 경험이 많고 사려가 깊으니, 후인(後人)이 이를 준수하여 실패함이 없으면 족하다. 작은 총명(聰明)을 부려 조종의 위에서 이기려 하는 것이 의리(義理)에 어찌 편안하겠는가? 그러므로 무릇 인재를 논할 때는 반드시 신중함을 지키고 옛 법도(舊章)를 변경하지 않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일찍이 책을 읽다가 ‘사람들이 한갓 공(功)이 있는 것을 공으로 알 뿐, 공이 없는 것이 공이 됨¹⁵⁴을 알지 못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세 번 반복하여 읽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를 아는 자가 드물구나.”
주석:
149. [주-D017] 靜而安之者 : 저본(底本)에는 없다. 《범허정집・행장》 및 《청강집・대광보국……상공행장》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고요히 안정시키는 것(靜而安之者)'이라는 구절이 있어야 문맥이 자연스럽다.
150. 《대학연의(大學衍義)》: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의 뜻을 부연하여 편찬한 책.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널리 읽혔다.
151. 명찰(明察): 작은 일까지 밝게 살피는 것. 지나치게 세세한 것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쓰였다.
152. 성헌(成憲): 이미 이루어진 법규나 제도.
153. 지무영성(持撫盈成): 이미 이루어져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어루만짐. 현상 유지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정치관을 보여준다.
154. 무공지위공(無功之爲功): 공이 없는 것이 공이 됨. 《노자(老子)》 등의 도가(道家) 사상과 통하는 말로, 드러나는 공적을 세우기보다 자연스럽게 다스려 공이 없는 듯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공이라는 의미이다. 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역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원문:
公性不喜事, 不喜建白立條, 久居相位, 不欲以皎皎之事立名。 人或稱公之美, 輒應之曰: “汝欲面諛我耶?” 必多方掩匿而韜晦之。 故人鮮知其所爲之迹, 而或謂之不事事者, 非知公者也。 若國有難處之事, 或災變異常, 形於言色, 悒悒若無所容, 夜不成寐, 起而開窓視天者屢矣。 每當經筵, 必思程子齋宿之事, 先日致敬, 言動不敢放。 入臨講章, 必從容委曲, 雜引經史, 反覆陳啓。 及退家, 移時靜默, 思其所啓之當否。【竝行狀。】
번역문:
공은 성품이 일을 벌이기(事)를 좋아하지 않았고, 건의하여 조목을 세우기(建白立條)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재상 지위(相位)에 있으면서 빛나는 일(皎皎之事)로써 이름을 세우고자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공의 훌륭한 점을 칭찬하면 문득 응답하며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면전에서 아첨(面諛)하고자 하는가?” 반드시 여러 방도로 덮어 숨기고 감추었다(韜晦).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행한 자취(所爲之迹)를 아는 이가 드물어, 혹 일을 하지 않는다고(不事事)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는 공을 아는 자가 아니다. 만약 나라에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나 혹 재변(災變)이 이상하면, 말과 얼굴빛에 드러나 근심하며(悒悒)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였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쳐다본 것이 여러 번이었다. 매번 경연(經筵)에 임할 때면 반드시 정자(程子)¹⁵⁵가 재계하고 머문(齋宿) 일을 생각하여, 전날부터 공경을 다하고 말과 행동을 감히 함부로 하지 않았다. 들어가 강론할 장(講章)에 임하면 반드시 조용하고 자상하게(從容委曲)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섞어 인용하며 반복하여 아뢰었다. 집에 물러나와서는 한참 동안 조용히 침묵하며 그 아뢴 바의 옳고 그름(當否)을 생각하였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155. 정자(程子): 송(宋)나라의 성리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킨다. 이들이 경연에 임하기 전 재계하고 밤새 준비하며 공경을 다했다는 일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원문:
公每憂: “義州界連夷漢, 而襟抱疏闊。 自古中原有難, 我國必與受其害, 遠則衛滿, 近則紅巾可見矣。 故前古有懲於此, 一境設巨鎭三四以防之, 若麟州、抱州、義州等是也。 今則只置義州, 而防禦虛弱, 又無城塹以閡之, 若鐵騎乘氷, 其將奚以? 國家設長城價布, 專爲是也。 吾之築城箭串, 爲江邊而爲之兆也。 有志未就, 尋常恨之。”
번역문:
공이 매번 걱정하였다. “의주(義州)는 경계가 오랑캐(夷)와 중국(漢)에 연이어 있는데, 금포(襟抱)¹⁵⁶가 트여 막힘이 없다. 예로부터 중원(中原)에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나라가 반드시 함께 그 해(害)를 받았으니, 멀리는 위만(衛滿)¹⁵⁷, 가까이는 홍건적(紅巾)¹⁵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전에 이에 징계함이 있어, 한 국경에 큰 진(巨鎭) 서너 곳을 설치하여 방어하였으니, 인주(麟州)¹⁵⁹, 포주(抱州)¹⁶⁰, 의주(義州)¹⁶¹ 등이 이것이다. 지금은 다만 의주만 두었는데 방어가 허약하고, 또 성(城)과 해자(塹)가 없어 막지 못하니, 만약 철기(鐵騎)¹⁶²가 얼음을 타고 온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국가에서 장성가포(長城價布)¹⁶³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이를 위해서이다. 내가 전관(箭串)에 성을 쌓은 것은 강변(江邊)¹⁶⁴을 위하여 그 조짐(兆)을 만든 것이다. 뜻이 있어 이루지 못함을 늘 한스럽게 여겼다.”
주석:
156. 금포(襟抱): 옷깃과 품. 산천으로 둘러싸여 지세가 중요하고 험한 곳을 비유한다. '금포소활(襟抱疏闊)'은 의주 지역의 지리적 방어 취약성을 의미한다.
157. 위만(衛滿): 중국 한(漢)나라 초기에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
158. 홍건(紅巾): 홍건적(紅巾賊). 중국 원(元)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군. 고려 공민왕 때 두 차례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는 등 큰 피해를 주었다.
159. 인주(麟州): 고려 시대 압록강 하류 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사 요충지. 현재의 의주 부근으로 추정된다.
160. 포주(抱州): 고려 시대 압록강 중류 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사 요충지. 현재의 북한 창성군 일대로 추정된다.
161. 의주(義州):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중요한 국경 도시이자 군사 요충지.
162. 철기(鐵騎): 철갑(鐵甲)으로 무장한 기병(騎兵). 강력한 기마 부대를 의미한다.
163. 장성가포(長城價布): 장성(長城) 축조 비용으로 거두던 베(布).
164. 강변(江邊): 압록강 변방, 즉 북방 국경 지역을 의미한다.

원문:
公嘗敎子弟曰: “士之立志, 不可少容邪曲。 至於科場發軔, 尤不可不以正出身。 若或暗相代借, 終至於竊名, 則卽是終身玷累, 不可改悔之過。 自後雖有忠言讜論, 皆誣而已矣。 古人曰: ‘欲事君而先欺君可乎?’ 此言甚好。 且代借者固不論, 設使試院掛題, 而若渠輩所嘗宿搆者, 則倩人請改, 若不能改, 則便置而更製可也。 如不能更製, 則雖至曳白, 吾心正矣。 擧場皆新製, 吾安敢隱默欺人? 自幸宿搆, 以賊吾心, 以欺君父乎?”
번역문:
공이 일찍이 자제들을 가르쳐 말하였다. “선비가 뜻을 세움에 조금이라도 사악하고 그릇됨(邪曲)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과장(科場)¹⁶⁵에서 출발(發軔)¹⁶⁶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바르게 출신(出身)¹⁶⁷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혹 몰래 서로 대신해주고 빌려주어(暗相代借) 마침내 이름을 훔치는(竊名) 데 이른다면, 이는 곧 종신(終身)토록 허물이 되고(玷累) 고쳐 뉘우칠 수 없는 잘못이다. 이후로는 비록 충언(忠言)과 정론(讜論)이 있더라도 모두 속이는 것일 뿐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려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이 가한가?’ 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좋다. 또한 대신해주고 빌려주는 자는 진실로 논할 것도 없거니와, 설사 시원(試院)¹⁶⁸에서 문제를 내걸었는데(掛題) 만약 그 무리가 일찍이 미리 지어 놓은 것(宿搆)이라면, 남을 시켜 고쳐달라고 청하고, 만약 고칠 수 없다면 곧바로 놓아두고 다시 짓는 것이 옳다. 만약 다시 지을 수 없다면 비록 백지(曳白)¹⁶⁹를 내는 데 이르더라도 내 마음은 바르다. 과거 시험장에서는 모두 새로 짓는 것인데, 내 어찌 감히 숨기고 잠자코 사람을 속이며, 스스로 미리 지어 놓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내 마음을 해치고 임금과 아버지를 속이겠는가?”
주석:
165. 과장(科場): 과거 시험장.
166. 발인(發軔): 수레가 멈추도록 받쳐 놓은 나무(軔)를 빼내어 출발함. 일의 시작을 비유한다.
167. 출신(出身):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됨.
168. 시원(試院): 과거 시험을 관장하는 곳.
169. 예백(曳白): 백지(白紙)를 끌다. 과거 시험에서 답안을 쓰지 못하고 백지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公謂子弟落第者: “擧子飮墨¹⁷⁰眊矂, 雖曰常事, 然若充其類, 則其弊馴至於鄙夫之患失。 古人云: ‘豈有決得失於一夫之目, 而爲之憂樂哉?’ 若於小小科擧之得失, 猶以爲欣戚, 則他日立朝, 當大段立落, 其不爲失性之歸者, 幾希矣。”【竝《淸江瑣語》。】
번역문:
공이 낙제(落第)한 자제에게 말하였다. “과거 응시자(擧子)가 먹물 마시고 눈 어둡고 떠드는 것(飮墨眊矂)¹⁷¹은 비록 늘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만약 그 부류를 채운다면 그 폐단이 길들여져 비루한 자(鄙夫)의 환실(患失)¹⁷²에 이를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찌 한 사내(一夫)¹⁷³의 눈으로 득실(得失)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즐거워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만약 작은 과거 시험의 득실에 오히려 기뻐하고 슬퍼한다면, 다른 날 조정에 섰을 때 마땅히 크게 좌절(立落)할 것이니, 그 본성(性)을 잃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다.”【이상은 《청강쇄어》에서 인용】
주석:
170. [주-D019] 眊矂 : 《대동야승・청강선생후청쇄어》에는 “조괄(噪聒)”로 되어 있다. '모조(眊矂)'는 '눈이 어둡고 떠듦'을, '조괄(噪聒)'은 '시끄럽게 떠듦'을 의미한다. 문맥상 둘 다 가능하나, '음묵(飮墨)'과 함께 쓰여 낙방 후의 실의와 혼란스러운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171. 음묵모조(飮墨眊矂): 먹물을 마시고 눈이 어둡고 떠듦.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실의에 빠져 정신없이 구는 모습을 묘사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172. 환실(患失): 얻지 못했을 때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근심함. 이해득실에 연연하는 소인배의 태도를 의미한다. 《논어》 〈양화(陽貨)〉편에 나온다.
173. 일부(一夫): 한 사내. 여기서는 과거 시험관 한 사람을 가리킨다.

원문:
公儀貌似若遲鈍, 而其處事, 剛克有勇, 詳愼周備, 卽始慮終, 每欲萬全, 然後乃擧。 不但大者, 雖尋常細事如簡札之末, 莫不皆然。
번역문:
공은 의용(儀貌)이 마치 더디고 둔한(遲鈍) 듯하였으나, 그 일 처리는 강직하고 과단성 있으며(剛克) 용기가 있었고, 상세하고 신중하며(詳愼) 두루 갖추어(周備), 시작에 나아가 끝을 염려하여 매번 만전(萬全)을 기하고자 한 뒤에야 이에 실행하였다. 단지 큰일뿐만 아니라, 비록 평범하고 자잘한 일(尋常細事)인 간찰(簡札)의 말미 같은 것에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었다.

원문:
自公郞潛, 益城與鄭相光弼、尹相殷輔, 皆以公輔期之。 鄭相嘗修家垣, 稍移舊址曰: “吾爲尙某後日之行而廣此路也。”【竝行狀。】
번역문:
공이 아직 미미한 관직(郞潛)¹⁷⁴에 있을 때부터 익성(益城)¹⁷⁵과 정승(鄭相) 광필(光弼), 윤승(尹相) 은보(殷輔)가 모두 공보(公輔)¹⁷⁶로써 그를 기대하였다. 정승이 일찍이 집의 담장(家垣)을 수리하면서 조금 옛터(舊址)를 옮기며 말하였다. “내가 상모(尙某)의 후일의 행차(行)를 위하여 이 길을 넓히는 것이다.”【이상은 행장에서 인용】
주석:
174. 낭잠(郞潛): 낭관(郎官)으로 미미하게 있을 때. 즉, 아직 높은 관직에 오르기 전을 의미한다.
175. 익성(益城):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을 가리킨다. 본관이 남양(南陽)이며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영의정을 지냈다.
176. 공보(公輔): 삼공(三公)과 사보(四輔). 임금을 보좌하는 최고위 재상들을 의미한다.

원문:
公嘗語子弟曰: “吾死而若請諡, 則必有行狀矣。 我行蹟無他可記, 若曰公晩好鼓琴, 微醺, 輒彈《感君恩》一曲以自娛, 則當矣。”【《淸江瑣語》。】
번역문:
공이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고 만약 시호(諡號)를 청한다면 반드시 행장(行狀)이 있을 것이다. 나의 행적(行蹟)은 달리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공이 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조금 취하면 문득 〈감군은(感君恩)〉¹⁷⁷ 한 곡조를 타며 스스로 즐겼다’고 한다면 마땅할 것이다.”【《청강쇄어》에서 인용】
주석:
177. 〈감군은(感君恩)〉: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곡조 이름.

원문:
卜者洪繼灌¹⁷⁸算公造化, 一生吉凶禍福, 纖毫不差, 至於棄世之年月, 亦皆言之。 公以所經之事無不吻合, 至其年, 豫爲身後之具以待。 洪卜適以事往湖南, 逢人自京來者, 必問公安否, 一年已過, 公固無恙。 洪大異之, 還京卽往公宅, 公曰: “吾信爾卜, 自分命盡, 今年何以不驗?” 洪曰: “推公之命, 盡其心力, 宜無差謬, 而古之人有以陰德延壽者, 公之厚德必有是也。” 公曰: “豈有是哉? 但修撰時, 脫直還家, 路上有紅袱, 取而見之, 乃純金盞一雙也。 默而藏之, 掛榜闕門曰: ‘某日有失物者, 訪我來。’ 翌日, 一人來謁曰: ‘小人乃大殿水剌間別監也。 子侄有婚禮, 竊借御廚金盞而失之。 已犯死罪, 後日現露, 則必伏法而誅矣。 公之所得, 無乃此物乎?’ 答曰: ‘然。’ 出而給之。” 洪曰: “公之延壽, 必以此也。”【《潛谷舊錄》。】
번역문:
복자(卜者) 홍계관(洪繼灌)¹⁷⁹이 공의 조화(造化)¹⁸⁰를 계산하여 일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터럭만큼도 틀리지 않았고, 세상을 떠날(棄世) 연월(年月)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말하였다. 공은 겪은 바의 일이 들어맞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그 해에 이르러 미리 신후(身後)¹⁸¹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홍복(洪卜)¹⁸²이 마침 일 때문에 호남(湖南)으로 갔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물었는데, 일 년이 이미 지났으나 공은 진실로 무恙(무양)하였다. 홍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서울로 돌아와 즉시 공의 댁으로 가니, 공이 말하였다. “내가 너의 점괘(卜)를 믿어 스스로 목숨이 다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금년에는 어찌하여 들어맞지 않았는가?” 홍이 말하였다. “공의 명(命)을 추산(推算)함에 마음과 힘을 다하였으니 마땅히 차오(差謬)가 없을 것이나, 옛사람 중에 음덕(陰德)으로 수명을 연장한 자가 있으니, 공의 두터운 덕(厚德)이 반드시 이런 점이 있을 것입니다.” 공이 말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다만 수찬(修撰)¹⁸³ 시절에 당직(脫直)¹⁸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 위에 붉은 보자기(紅袱)가 있어 가져다 보니 바로 순금 잔(純金盞) 한 쌍이었다. 말없이 감추어 두고, 궐문(闕門)에 방(榜)을 걸어 말하기를 ‘모일(某日)에 실물(失物)한 자는 나를 찾아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한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소인(小人)은 바로 대전(大殿) 수라간(水剌間)의 별감(別監)¹⁸⁵입니다. 자질(子侄)의 혼례(婚禮)가 있어 몰래 어주(御廚)¹⁸⁶의 금잔을 빌렸다가 잃어버렸습니다.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후일 드러나면 반드시 법에 엎드려 주살(誅殺)될 것입니다. 공께서 얻으신 것이 혹 이 물건이 아닙니까?’ 하였다. ‘그렇다’고 답하고, 꺼내어 주었다.” 홍이 말하였다. “공의 수명 연장은 반드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잠곡구록(潛谷舊錄)》¹⁸⁷에서 인용】
주석:
178. [주-D020] 繼灌 : 《범허정집・유사》에는 “계관(啓寬)”으로 되어 있다.
179. 홍계관(洪繼灌): 조선 중기의 유명한 점술가.
180. 조화(造化): 타고난 운명, 사주팔자(四柱八字).
181. 신후(身後): 죽은 뒤의 일. 장례 준비 등을 의미한다.
182. 홍복(洪卜): 점술가 홍씨라는 뜻으로 홍계관을 가리킨다.
183. 수찬(修撰): 춘추관(春秋館)의 정6품 관직. 역사 편찬 실무를 담당했다.
184. 탈직(脫直): 당직 근무를 마침.
185. 별감(別監): 궁중의 잡역(雜役)을 맡아보던 하급 관리. 액정서(掖庭署) 등에 소속되었다.
186. 어주(御廚): 임금의 음식을 만들던 주방. 수라간(水剌間).
187.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필집. 여러 인물들의 일화와 견문을 기록하였다.

원문:
尙相先世居林川, 家業饒富。 公曾祖英孚嘗貸與貧戶, 契券甚多, 悉取以焚之, 曰: “吾後世必有昌貴者乎!” 植三槐于庭, 以擬王晉公故事, 至公果登台輔。 自公貴, 不營産業, 先世庫廩漸皆頹毁。 有奴建請修葺, 公笑曰: “汝雖欲修完, 將以何物實之?” 竟至頹圮無餘。
번역문:
상상(尙相)¹⁸⁸의 선대(先世)는 임천(林川)¹⁸⁹에 살았는데 가업(家業)이 풍족하였다. 공의 증조(曾祖) 영부(英孚)¹⁹⁰가 일찍이 가난한 집에 빌려주고 받은 계약 문서(契券)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가져다가 불태우며 말하였다. “나의 후세에 반드시 창성하고 귀하게 될 자가 있을 것이다!” 뜰에 세 그루 회화나무(三槐)¹⁹¹를 심어 왕진공(王晉公)¹⁹²의 고사(故事)에 비기니, 공에 이르러 과연 태보(台輔)¹⁹³에 올랐다. 공은 귀하게 된 뒤로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아, 선대의 창고(庫廩)가 점점 모두 무너져 훼손되었다. 어떤 종이 수리할 것을 건의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네가 비록 수리하여 완비하고자 하나, 장차 무슨 물건으로 채우겠느냐?” 마침내 무너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주석:
188. 상상(尙相): 재상 상씨라는 뜻으로 상진을 가리킨다.
189. 임천(林川):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일대.
190. 영부(英孚): 상영부(尙英孚). 상진의 증조부. 생몰년 미상.
191. 삼괴(三槐): 회화나무 세 그루. 송(宋)나라 왕단(王旦)의 아버지가 뜰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후손 중에 삼공(三公)이 나올 것이라 예언했는데, 과연 왕단이 재상(宰相)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자손의 번창과 높은 벼슬을 상징한다.
192. 왕진공(王晉公): 송(宋)나라의 명재상 왕단(王旦, 957-1017).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졌다.
193. 태보(台輔): 태(台)는 삼태성(三台星)을 의미하며, 재상(宰相)의 자리를 상징한다. 보(輔)는 보필(輔弼)한다는 뜻이다. 즉, 재상을 의미한다.

원문:
尙成安公震忠厚寬裕, 度量宏大, 平生無疾言遽色。 好看《自警編》, 《度量》、《韜晦》等篇有得力。 嘗自言: “若韓魏公玉盞等事, 如某亦可及也。”
번역문:
상성안공(尙成安公) 진(震)은 충후(忠厚)하고 관유(寬裕)하며 도량(度量)이 넓고 커서(宏大), 평생 빠른 말씨나 급한 기색(疾言遽色)이 없었다. 《자경편(自警編)》¹⁹⁴ 보기를 좋아하여, 〈도량(度量)〉, 〈도회(韜晦)〉 등의 편(篇)에서 힘을 얻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였다. “만약 한위공(韓魏公)¹⁹⁵의 옥잔(玉盞)¹⁹⁶ 등의 일이라면, 나 같은 이도 또한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94. 《자경편(自警編)》: 송(宋)나라 조선손(趙善璙)이 편찬한 책. 역대 인물들의 모범적인 언행과 경계할 만한 사례들을 모아 수양(修養)의 지침으로 삼게 한 책이다.
195. 한위공(韓魏公): 송(宋)나라의 명재상 한기(韓琦, 1008-1075).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196. 한위공 옥잔 고사(韓魏公玉盞故事): 한기가 아끼던 옥잔을 하인이 실수로 깨뜨렸으나,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인을 위로하며 태연하게 대처했다는 일화. 한기의 넓은 도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사이다.

원문:
成安公嘗與子弟坐月設小酌, 微醺, 令各賦詩, 因自吟一絶曰: “誰謂月輪天上到¹⁹⁷? 醉看盃底分明倒。 盃傾月亦入吾腸¹⁹⁸, 表裏淸光交更好。”【竝《淸江瑣語》。】
번역문:
성안공이 일찍이 자제들과 달 아래 앉아 작은 술자리(小酌)를 베풀고 조금 취하자, 각자 시를 짓게 하고, 이어서 스스로 한 수의 절구(絶句)를 읊었다. “누가 달덩이 하늘 위에 이르렀다 하는가? 취하여 보니 잔 밑에 분명히 거꾸로 있네. 잔 기울이니 달 또한 내 창자에 들어오니, 표리(表裏)의 맑은 빛이 서로 어울려 더욱 좋구나.”【이상은 《청강쇄어》에서 인용】
주석:
197. [주-D021] 倒 : 《대동야승・청강선생후청쇄어》에는 “도(到)”로 되어 있다. '거꾸로 있다(倒)'와 '이르렀다(到)'의 차이인데, 술잔 밑에 비친 달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이므로 '倒'가 더 적절해 보인다.
198. [주-D022] 腸 : 《범허정집・여자제좌월……인음일절(與子弟坐月……因吟一絶)》에는 “복(腹)”으로 되어 있다. '창자(腸)'와 '배(腹)' 모두 술을 마시는 행위를 표현한 것이므로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원문:
尙政丞震器宇洪大, 未嘗言人長短。 吳判書祥有詩曰: “羲皇樂俗今如掃, 只在春風杯酒間。” 尙公見之曰: “何言之薄也? 改以‘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杯酒間’。 改下數字, 而渾然不露。 二人氣象可見矣。”【《芝峯類說》。】
번역문:
상정승(尙政丞) 진(震)은 기상(器宇)이 넓고 커서(洪大), 일찍이 남의 장단(長短)을 말하지 않았다. 오판서(吳判書) 상(祥)¹⁹⁹의 시에 이르기를, “복희씨 시절 즐거운 풍속 지금은 쓸어버린 듯, 다만 봄바람 술잔 사이에 있네.”라고 한 것이 있었다. 상공이 이를 보고 말하였다. “어찌 말이 그리 박한가? ‘복희씨 시절 즐거운 풍속 지금도 오히려 있으니, 봄바람 술잔 사이에서 보라’고 고치라.” 아래 몇 글자를 고쳤으나 혼연(渾然)하여 드러나지 않으니, 두 사람의 기상(氣象)을 볼 수 있다.【《지봉유설(芝峯類說)》²⁰⁰에서 인용】
주석:
199. 오판서(吳判書) 상(祥): 오상(吳祥, 1497-154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상지(祥之), 호는 만취당(晩翠堂).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200.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광해군 때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원문:
尙成安以檢閱罷歸, 秣馬於衿川地壟上。 有翁牧二牛, 公問曰: “二牛孰優?” 翁不對。 再三問之, 終不對, 公深怪之。 公旣上馬, 翁²⁰¹隨而後數十步, 密復於公曰: “嚮有問卽未奉對者, 緣二牛服役歲久, 不忍斥言故也。 其實小者爲優。” 公下馬謝曰: “是隱君子也, 其敎我以處世法矣。” 遂服膺而勿失。 自筮仕至懸車, 未嘗忤於人云。【《涪溪記聞》。 ○此事又入於《黃翼成傳》, 松窩所記, 未知孰是。】
번역문:
상성안(尙成安)이 검열(檢閱)²⁰²에서 파직되어 돌아올 때, 금천(衿川)²⁰³ 땅의 밭두둑 위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 어떤 노인이 소 두 마리를 치고 있었는데, 공이 묻기를 “두 소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하니, 노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두세 번 물어도 끝내 대답하지 않으니, 공이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말을 타고 나자, 노인이 뒤따라와 수십 보 뒤에서 은밀히 공에게 회답하였다. “아까 물으셨을 때 즉시 받들어 대답하지 못한 것은, 두 소가 부린 지 여러 해가 되어 차마 배척하여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은 작은 놈이 낫습니다.” 공이 말에서 내려 사례하며 말하였다. “이는 숨어사는 군자(隱君子)로다. 그가 나에게 처세(處世)의 법을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가슴에 새겨(服膺) 잃지 않았다. 벼슬에 처음 나아갈 때(筮仕)부터 벼슬을 그만둘 때(懸車)²⁰⁴까지, 일찍이 남에게 거슬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부계기문(涪溪記聞)》²⁰⁵에서 인용. ○이 일은 또한 《황익성전(黃翼成傳)》²⁰⁶에도 들어가 있는데, 송와(松窩)²⁰⁷가 기록한 것이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주석:
201. [주-D023] 是 : 장서각본, 《대동야승・부계기문》, 《범허정집・유사》에 근거할 때 앞에 “옹(翁)”이 더 있어야 할 듯하다. 즉, '이 노인은 숨어사는 군자이다(翁是隱君子也)'가 되어야 문맥이 자연스럽다.
202. 검열(檢閱): 예문관(藝文館)의 정9품 관직.
203. 금천(衿川): 현재 서울특별시 금천구, 관악구, 경기도 안양시, 광명시 일부에 해당하던 지역.
204. 현차(懸車): 수레를 매달아 둔다는 뜻으로,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남을 의미한다. 보통 70세를 전후하여 관직에서 은퇴하는 것을 가리킨다.
205.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중기의 문신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 지은 설화집.
206. 《황익성전(黃翼成傳)》: 황희(黃喜, 1363-1452)의 전기(傳記). 익성(翼成)은 황희의 시호이다.
207. 송와(松窩): 이기(李墍, 1476-1552)의 호.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송와잡설(松窩雜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윤행임이 《부계기문》을 지을 때 이기의 기록을 참고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옥형(丁玉亨)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丁玉亨
字□□¹, 靈光人。 中宗□□²年登第。 官至贊成。
번역문:
정옥형(丁玉亨)
자는 가중(嘉仲)³이고, 영광(靈光) 사람이다. 중종(中宗) 계유년(癸酉年, 1513)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찬성(贊成)⁵에 이르렀다.
주석:
[주-D001] □□ : 《인재집(忍齋集)・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丁公神道碑銘)》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가중(嘉仲)”이 되어야 한다.
[주-D002] □□ : 《인재집・유명조선국……정공신도비명》 및 《국조문과방목》에 근거할 때 “계유(癸酉)”가 되어야 한다.
가중(嘉仲): 정옥형(丁玉亨, 1486~1549)의 자(字).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중종(中宗) 계유년(癸酉年): 1513년. 정옥형은 이 해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찬성(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관직인 좌찬성(左贊成) 또는 우찬성(右贊成)을 가리킨다. 재상(宰相)의 반열에 해당한다.

원문:
公爲直提學時, 於路中逢一使酒者, 謂執鞚者嘗搏己, 曳其髮批頰無數。 其丘⁶雖見曳而猶不釋鞚, 公隨其鞚者見曳, 而或東或西良久, 終不怒。 使酒者力疲乃解去, 五六步復來, 拜於馬前曰: “大人當作政丞。” 公唯唯不問。
번역문:
공(公)이 직제학(直提學)⁷으로 있을 때 길에서 술주정하는 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가 (공의) 말고삐를 잡은 자[執鞚者]⁸가 일찍이 자기를 때렸다고 하며 그의 머리채를 끌고 뺨을 수없이 때렸다. 그 종[丘]⁹은 비록 머리채를 끌리면서도 오히려 말고삐를 놓지 않았고, 공은 말고삐 잡은 자가 끌려다니는 대로 따라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한참을 갔으나 끝내 노여워하지 않았다. 술주정꾼이 힘이 빠져 마침내 놓고 가더니, 대여섯 걸음 만에 다시 와서 말 앞에 절하며 말하였다. “대인(大人)께서는 마땅히 정승(政丞)¹⁰이 되실 것입니다.” 공은 그저 ‘예, 예’ 할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주석:
6. 丘(구): 《잠곡구록(潛谷舊錄)》 원문 확인이 필요하나, 문맥상 말을 모는 하인이나 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丘는 종종 하인이나 낮은 신분의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7.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관직.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8. 집공자(執鞚者): 말고삐를 잡은 사람. 말을 모는 하인이나 마부(馬夫)를 가리킨다.
9. 종[丘]: 주석 6 참조. '執鞚者'와 동일 인물을 가리킨다.
10. 정승(政丞):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하는 말. 최고위 관직이다. 술주정꾼이 정옥형의 인내심과 인품에 감탄하여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원문:
公當與尙相震同監仁廟胎峯于嶺南。 咸昌倅, 兩相舊知也。 欲勸酒而先醉, 因失溺流于座。 公指尙相, 使見之, 相視而笑, 主倅因入衙而罷。 其後公無一戲言及其事, 尙相亦喜其量而默識之, 返慶尙之路而終不說。 常歎服以爲: “不戲人小事如此, 況言人大過乎?”【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이 상진(尙震) 상상(尙相)¹¹과 함께 영남(嶺南)에서 인종(仁宗)의 태봉(胎峯)¹²을 감독하게 되었다. 함창(咸昌) 수령[倅]¹³은 두 재상[兩相]¹⁴의 옛 친구였다. (함창 수령이) 술을 권하고자 하다가 먼저 취하여 그만 자리에 소변을 실례하였다. 공이 상진 상상을 가리켜 보게 하니, 서로 보고 웃자, 주인인 수령은 아문(衙門)으로 들어가 버리고 자리는 파하였다. 그 후 공은 그 일에 대해 농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상진 상상 또한 그의 도량(度量)을 기뻐하여 마음속으로 알아주었으며, 경상도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상진이) 항상 탄복하며 말하였다. “사람의 작은 일에 대해서도 농담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의 큰 잘못을 말하는 데 있어서랴?”【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¹⁵에서 인용】
주석:
11. 상진(尙震, 14931564) 상상(尙相): 상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이다. 정옥형과 함께 인종의 태봉을 감독했다. '상상(尙相)'은 상씨(尙氏) 성을 가진 재상이라는 뜻으로, 상진을 존칭하는 말이다.
12. 인종(仁宗) 태봉(胎峯): 인종(仁宗, 15151545, 조선 제12대 왕)의 태(胎)를 봉안(奉安)한 곳.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그 태를 길지(吉地)에 묻어 태실(胎室)을 만들고 왕위에 오르면 가봉(加封)하여 태봉(胎峯)이라 하였다. 이를 관리하는 것은 중요한 임무였다.
13. 함창(咸昌) 수령[倅]: 함창현(咸昌縣,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일대)의 수령. '췌(倅)'는 수령을 뜻하는 말이다.
14. 두 재상[兩相]: 정옥형과 상진을 가리킨다. 당시 두 사람의 관직이 재상급이었음을 시사한다.
15.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남긴 기록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서지 정보는 확인이 필요하다. 조선 시대 인물들의 일화를 모은 책일 가능성이 있다. 이 일화는 정옥형의 신중함과 남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인품을 보여준다.

임권(任權)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任權【貞憲公。】
字士經, 樞之弟。 成化丙午生。 中宗八年癸酉登第。 歷春坊、兩司、吏郞、舍人、典翰、直提學、慶尙・全羅觀察使, 官至兵曹判書。 明宗丁巳卒, 年七十二。
번역문:
임권(任權)【정헌공(貞憲公)¹이다.】
자는 사경(士經)이고, 임추(任樞)²의 아우이다. 성화(成化) 병오년(丙午年, 1486)³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8년 계유년(癸酉年, 1513)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춘방(春坊)⁴, 양사(兩司)⁵, 이랑(吏郞)⁶, 사인(舍人)⁷, 전한(典翰)⁸, 직제학(直提學)⁹, 경상도 및 전라도 관찰사(觀察使)¹⁰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병조 판서(兵曹判書)¹¹에 이르렀다. 명종(明宗) 정사년(丁巳年, 1557)에 졸(卒)하니, 나이 72세였다.
주석:
정헌공(貞憲公): 임권(任權, 1486~1557)의 시호(諡號).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함(淸白守節), 충간(忠諫)하고 과감함(忠諫讜決) 등을 의미하고, 헌(憲)은 학문을 널리 앎(博聞多記), 상벌이 법도에 맞음(賞罰有法) 등을 의미한다.
임추(任樞): 임권의 형. 역시 문신이다.
성화(成化) 병오년(丙午年): 1486년. 성화는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과 감찰 기능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이랑(吏郞): 이조(吏曹)의 정랑(正郎, 정5품) 또는 좌랑(佐郎, 정6품)을 가리킨다. 인사를 담당하는 핵심 실무직이었다.
사인(舍人): 여러 관청에 소속된 관직명. 여기서는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이나 중추부(中樞府)의 경력(經歷) 등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문맥상 문한(文翰) 관련 직책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에는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 등을 이르기도 했다.
전한(典翰):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관직. 직제학(直提學)과 함께 홍문관의 주요 직책이다.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관직.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병조 판서(兵曹判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국방 및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

원문:
幼而穎異, 讀書知大義, 未及志學, 已遍誦《四書》、《三經》¹²。 與其兄樞攻苦力學, 殆忘寢食, 雖父母亦或勸輟。 昭簡有五子, 皆富才業, 而公與兄樞實白眉之秀。 兄嘗稱曰: “吾弟學問正大, 操守剛果, 眞吾家千里駒也。”
번역문: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알았고, 지학(志學)¹³의 나이가 되기 전에 이미 《사서(四書)》¹⁴와 《삼경(三經)》¹⁵을 두루 암송하였다. 그의 형 임추(任樞)와 함께 고생하며 학문에 힘써 거의 잠자고 먹는 것도 잊을 정도여서, 비록 부모님이라도 혹 그만두기를 권할 정도였다. 소간(昭簡)¹⁶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모두 재주와 학업이 풍부하였으나, 공과 형 임추가 실로 백미(白眉)¹⁷ 중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형이 일찍이 칭찬하여 말하였다. “내 아우는 학문이 올바르고 크며, 지조(操守)가 굳세고 과단성이 있으니, 참으로 우리 집안의 천리구(千里駒)¹⁸로다.”
주석:
12. [주-D001] 三 : 저본(底本)에는 없다. 《양곡집(陽谷集)・의정부좌참찬임정헌공신도비명(議政府左參贊任貞憲公神道碑銘)》 및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기묘당적인(己卯黨籍人)・임권(任權)》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13. 지학(志學): 15세를 가리키는 말.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의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14. 《사서(四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유교의 기본 경전이다.
15. 《삼경(三經)》: 일반적으로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을 가리킨다. 《사서》와 함께 유학의 핵심 경전이다. 어린 나이에 이를 통달했다는 것은 임권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
16. 소간(昭簡): 임권과 임추의 아버지인 임유겸(任由謙)의 시호로 추정되나, 확인이 필요하다. 또는 그들의 아버지 자체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 있다. (검색 결과 임권의 부친은 임유겸이며, 시호는 소간공이 맞다.)
17. 백미(白眉):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하는 말. 중국 촉(蜀)나라 마량(馬良)의 형제 다섯이 모두 재주가 있었는데, 그중 눈썹에 흰 털이 난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18. 천리구(千里駒):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뛰어난 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인재를 비유한다.

원문:
仁宗在儲位, 學就高明, 春坊左右, 皆極一時之選。 公講說詳暢, 音吐淸亮, 仁宗每注聽焉。 書筵論難之辭, 日必錄啓, 中宗見公勸戒語曰: “輔導之任, 顧不當如是耶?”
번역문:
인종(仁宗)¹⁹께서 저위(儲位)²⁰에 계실 때 학문이 고명(高明)한 경지에 나아가셨는데, 춘방(春坊)의 좌우 신하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인물로 선발된 이들이었다. 공의 강설(講說)은 상세하고 명쾌하며 음성(音吐)은 맑고 또렷하여, 인종께서 매번 귀 기울여 들으셨다. 서연(書筵)²¹에서 논란(論難)²²한 내용을 날마다 반드시 기록하여 아뢰었는데, 중종(中宗)께서 공의 권면하고 경계하는 말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보도(輔導)²³하는 임무가 돌아보건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석:
19. 인종(仁宗):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1545). 중종의 맏아들이다.
20. 저위(儲位): 왕세자의 자리를 의미한다.
21. 서연(書筵): 왕세자에게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던 자리.
22. 논란(論難): 경전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고 토론하며 따지는 것. 학문 수양의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다.
23. 보도(輔導): 곁에서 도와주고 이끌어 줌. 왕세자를 보필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말한다.

원문:
丙戌, 拜典翰。 嘗於經席, 歷論時宰貪黷之狀, 上詰其姓名, 指斥不諱, 中外聳懼。 久處論思之地, 知無不言, 言無不盡, 理義剖釋, 表裏洞澈, 一時講官, 皆自以爲不及。
번역문:
병술년(1526, 중종 21)에 전한(典翰)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경석(經席)²⁴에서 당시 재상[時宰]²⁵들의 탐욕스럽고 부패한 실상(貪黷之狀)을 조목조목 논하자, 상(上)께서 그 성명을 캐물으시니 (이름을) 지적하여 비판하며 꺼리지 않아, 조야(朝野)가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오랫동안 논사(論思)²⁶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은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이치와 의리(理義)를 분석하고 해석함이 안팎으로 명확히 통달하여, 당시의 강관(講官)²⁷들은 모두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주석:
24. 경석(經席): 경연(經筵). 임금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
25. 시재(時宰): 당시의 재상(宰相). 정승이나 판서 등 고위 관료들을 가리킨다.
26. 논사(論思): 임금 앞에서 경서나 역사에 대해 강론하고 토론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직책. 주로 홍문관 관원들의 임무였다.
27. 강관(講官): 경연이나 서연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관원.

원문:
丁亥秋, 爲執義。 吏曹判書張公順孫新承銓衡, 忌公鯁直, 乃擬司贍寺正。 有一名宰往責云: “宜居諫諍, 何欲移外?” 張大怒, 卽往啓云: “某乃淸流之人, 不宜在言地, 故擬于他官, 而時論有以咎臣者, 敢來啓。” 弘文館卽疏陳險詖之狀, 上皆置而不問。 人或勸公辭避, 且往見張自解, 公曰: “頃以淸流見敗者, 皆我之朋儕。 我自不爲非, 何用避? 又何往見?” 貞顯王后之喪, 三都監供用之物, 一切取辦於市, 而不償價, 民甚怨咨²⁸。 公乃啓請, 悉歸其直。
번역문:
정해년(1527, 중종 22) 가을에 집의(執義)²⁹가 되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장순손(張順孫)³⁰ 공(公)이 새로 전형(銓衡)³¹을 맡게 되자 공의 강직함(鯁直)을 꺼려, 이에 공을 사섬시 정(司贍寺正)³²으로 임명하려 하였다. 어떤 한 명망 있는 재상[名宰]이 가서 꾸짖으며 말하였다. “마땅히 간쟁(諫諍)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외직(外職)으로 옮기려 하는가?” 장순손이 크게 노하여 즉시 나아가 아뢰었다. “아무개(임권을 가리킴)는 청류(淸流)³³의 사람이니 언론을 담당하는 자리[言地]³⁴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므로 다른 관직으로 임명하려 하였는데, 시론(時論)이 신(臣)을 허물하는 자가 있기에 감히 와서 아룁니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즉시 상소하여 (장순손의) 음험하고 비뚤어진(險詖) 실상을 아뢰었으나, 상께서는 모두 그대로 두고 묻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혹 공에게 사직하고 피하거나 또는 장순손을 찾아가 스스로 해명하라고 권하였으나, 공이 말하였다. “지난번에 청류(淸流)라 하여 패척(敗斥)된 자들은 모두 나의 동료들이다. 내가 스스로 그릇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피할 것이며, 또 어찌 찾아가서 만나보겠는가?” 정현왕후(貞顯王后)³⁵의 상(喪) 때 삼도감(三都監)³⁶에서 쓰는 물건을 모두 시장에서 가져다 쓰면서 값을 치르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怨咨]이 심하였다. 공이 이에 아뢰어 청하여 모두 그 값을 돌려주게 하였다.
주석:
28. [주-D002] 咨 : 저본(底本)에는 “자(恣)”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양곡집・의정부좌참찬임정헌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원자(怨恣)'는 '원망하고 방자함'이고, '원자(怨咨)'는 '원망하고 탄식함'을 의미한다. 문맥상 백성들의 반응으로는 '원자(怨咨)'가 더 적절하다.
29. 집의(執義): 사헌부(司憲府)의 종3품 관직. 대사헌(大司憲), 사간(司諫) 다음가는 직책으로, 감찰과 탄핵을 담당했다.
30. 장순손(張順孫, 14591535): 조선 중기의 문신.
31. 전형(銓衡): 인재를 저울질하여 등용한다는 뜻으로, 관리 임용에 관한 권한, 즉 인사권을 의미한다. 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가 담당했으며, 특히 이조 판서는 인사권의 핵심이었다.
32. 사섬시 정(司贍寺正): 사섬시(司贍寺)의 정3품 으뜸 벼슬. 사섬시는 조선 시대에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의 제조와 출납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집의(執義)와 같은 종3품이지만, 언론직에서 재정 실무직으로 옮기는 것은 좌천의 성격이 있었다.
33. 청류(淸流): 맑은 흐름이라는 뜻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고 강직하여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는 인물이나 세력을 가리킨다. 반대 개념은 탁류(濁流).
34. 언지(言地): 언론 활동을 하는 직책이나 위치. 주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을 가리킨다.
35.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의 계비(繼妃)이자 중종(中宗)의 생모.
36. 삼도감(三都監):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던 세 개의 도감(都監). 여기서는 정현왕후의 국상(國喪)을 치르기 위해 설치된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가리킨다.

원문:
是時, 金安老放還, 漸見柄用, 浮薄喜功名者, 攀援締結, 互相朋比。 公爲執義, 時兩司交章陳弊, 疏內有附己者進之, 異己者斥之之語。 大司諫沈彦光見之, 艴然曰: “時豈有此習?” 公曰: “今之大患, 正在於是, 不可謂無也。” 彦光搆陷罪罟, 必欲遠竄, 中宗竟原之, 只遞其職。 公怡然不以爲意, 携妻子退居于禮山村舍。【竝《潛谷舊錄》。】
번역문:
이때 김안로(金安老)³⁷가 유배에서 풀려 돌아와 점점 권세[柄用]³⁸를 잡게 되자, 경박하고 공명(功名)을 좋아하는 자들이 (김안로에게) 매달려 관계를 맺고 서로 편당(朋比)³⁹을 이루었다. 공이 집의(執義)로 있을 때 당시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상소를 올려 폐단을 아뢰었는데, 상소 안에 ‘자기에게 붙는 자는 등용하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한다’는 말이 있었다. 대사간(大司諫) 심언광(沈彦光)⁴⁰이 이를 보고 발끈하며 말하였다. “지금 세상에 어찌 이런 풍습이 있단 말인가?” 공이 말하였다. “지금의 큰 걱정거리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심언광이 죄를 엮어 모함하여(搆陷罪罟) 반드시 멀리 유배 보내려 하였으나, 중종께서 마침내 용서하시고 단지 그 직책만 교체하셨다. 공은 기꺼이 개의치 않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예산(禮山)의 시골집으로 물러나 살았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37.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정권을 장악하여 많은 사람을 숙청했으나, 후에 사사(賜死)되었다.
38. 병용(柄用): 권력을 잡고 등용됨.
39. 붕비(朋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무리를 지어 서로 아첨하고 감싸주는 것.
40. 심언광(沈彦光, 14871540):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로 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대사간(大司諫)은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정3품)이다. 이 사건은 김안로 집권기의 정치적 갈등을 보여준다.

원문:
戊戌, 禮議任權啓於經席曰: “方安老在朝, 小人之無狀者, 黨附爲惡, 固其宜也。 殿下亦黨此, 使縱其惡, 何也?” 上曰: “予不得辭其責。” 大哉王言! 眞萬世帝王之法也。 容人之直, 歸己之罪, 一擧而兩美具焉。【《紀年通攷》。】
번역문:
무술년(1538, 중종 33)⁴¹에 예의(禮議)⁴² 임권이 경석(經席)에서 아뢰었다. “바야흐로 김안로가 조정에 있을 때, 소인(小人)으로서 무상(無狀)한 자들이 당파를 이루어 붙어서 악행을 저지른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전하(殿下)께서도 이들을 편당(黨)하시어 그 악행을 멋대로 저지르게 하셨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내(予)가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다.” 위대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참으로 만세 제왕(帝王)의 법도로다. 남의 곧은 말을 용납하고 죄를 자기에게 돌리시니, 한 번의 행동으로 두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셨다.【《기년통고(紀年通攷)》⁴³에서 인용】
주석:
41. 무술년(1538): 이 해는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다음 해이다. 임권은 김안로의 악행뿐 아니라 이를 방치한 군주의 책임까지 직언하고 있다.
42. 예의(禮議): 예조 참의(禮曹參議, 정3품)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당시 임권의 관직명에 대한 다른 표기일 수 있다. (검색 결과, 임권은 1538년에 예조참의를 역임했다.)
43. 《기년통고(紀年通攷)》: 유계(兪棨, 1607~1664)가 단군조선부터 인조 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

원문:
己亥, 以冬至使赴京, 與宗系奏請使偕行, 中路下書曰: “卿等使事雖殊, 宜相諳委。 若一人有故, 可以代行。” 及到京, 奏請使以疾不出, 公獨詣禮部, 辨明敷陳, 言意誠款, 乃蒙允兪。 使還行賞, 竟不及公, 公略無片言出於口, 初若不與知者。 人以此益多公, 而嗤彼之不讓焉。 公將還, 病不辭朝, 令子弟挾扶, 北向五拜而出, 華人嘆其知禮。
번역문:
기해년(1539, 중종 34)에 동지사(冬至使)⁴⁴로 북경(北京)에 가는데, 종계 주청사(宗系奏請使)⁴⁵와 함께 가게 되었다. 중도(中路)에 (임금께서) 글을 내려 말씀하셨다. “경(卿)들의 사행(使行) 임무가 비록 다르나, 마땅히 서로 상세히 알아 맡겨서, 만약 한 사람에게 사고가 있으면 대신 행할 수 있도록 하라.” 북경에 도착하자 주청사가 병으로 나오지 못하므로, 공이 홀로 예부(禮部)⁴⁶에 나아가 명백히 밝히고 자세히 아뢰니(辨明敷陳), 말과 뜻이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마침내 윤허(允兪)를 받았다. 사신이 돌아와 상을 시행할 때 끝내 공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나, 공은 조금도 입 밖에 내는 말이 없어 처음부터 그 일을 알지 못했던 사람 같았다. 사람들이 이로써 공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저쪽(주청사 측)이 (공을) 사양하지 않음을 비웃었다. 공이 장차 돌아오려 할 때 병이 들어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자제(子弟)들에게 명하여 부축하게 하고 북쪽을 향해 다섯 번 절하고 나오니, 중국인[華人]들이 그가 예를 안다고 감탄하였다.
주석:
44. 동지사(冬至使): 동지(冬至)를 전후하여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 보내던 정기 사신. 동지를 축하하고 다음 해의 달력을 받아오는 임무 등을 수행했다.
45. 종계 주청사(宗系奏請使): 조선 왕실의 계통(宗系)에 관한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아 줄 것을 명나라에 청원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 당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해 달라는 주청(奏請)이었다.
46. 예부(禮部): 중국 역대 왕조에서 예악(禮樂), 제사(祭祀), 교육, 외교 등을 담당하던 중앙 관청. 조선의 예조(禮曹)에 해당한다. 종계 문제는 외교 사안이었으므로 예부에서 담당했다.

원문:
明宗朝, 中殿嘗爲省親, 出幸本第, 是日有風災。 公於經筵, 極陳窮閻委巷, 非國母降臨之地。 戚里之人, 希望恩賚, 致此過擧, 變異昭昭, 天意可知。 沈相連源適入侍, 悚慄帖息, 左右聞者, 無不爲公危之。
번역문:
명종(明宗) 시대에 중전(中殿)⁴⁷께서 일찍이 성친(省親)⁴⁸하기 위해 본가[本第]⁴⁹로 거둥하셨는데, 이날 풍재(風災)⁵⁰가 있었다. 공이 경연(經筵)에서, 궁벽한 마을과 누추한 거리[窮閻委巷]는 국모(國母)께서 강림하실 곳이 아니며, 외척[戚里]⁵¹ 사람들이 은혜와 하사품[恩賚]을 바라고 이러한 지나친 거동(過擧)을 하도록 하였으니 변고(變異)가 명백하게 드러나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극력 아뢰었다. 마침 재상 심연원(沈連源)⁵²이 입시(入侍)하였는데, 두려워서 숨을 죽였고, 좌우에서 듣는 자들도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47. 중전(中殿): 왕비(王妃). 당시 명종의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였다.
48. 성친(省親): 부모나 친척을 찾아뵙는 것. 여기서는 왕비가 친정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
49. 본제(本第): 본가. 왕비의 친정집을 가리킨다.
50. 풍재(風災): 바람으로 인한 재난. 당시에는 자연재해를 군주의 부덕(不德)이나 잘못된 정치와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51.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外戚)들이 사는 마을. 또는 외척 세력 자체를 가리킨다.
52. 심연원(沈連源, 1491~1558): 조선 중기의 문신. 인순왕후의 친척으로, 당시 영의정이었다. 임권의 직언은 왕비와 외척, 그리고 최고 재상까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긴 것이다.

원문:
公久居大官, 家無贏貲, 扁所居室曰靜容。 黎明而起, 正衣冠, 終日危坐。 語子弟曰: “吾豈有過人者? 但獨處無自欺, 對人無諱事而已。” 晩年築第于南山麓, 左圖右書, 養花蒔竹, 超然有物外之想, 若無經世慮者。【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이 오랫동안 높은 관직[大官]에 있었으나 집에 남는 재물[贏貲]이 없었고, 거처하는 방에 편액(扁額)을 걸어 정용(靜容)⁵³이라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危坐] 있었다. 자제(子弟)들에게 말하였다. “내 어찌 남보다 나은 점이 있겠는가? 다만 홀로 있을 때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無自欺], 사람을 대할 때 숨기는 일이 없을[無諱事] 뿐이다.” 만년(晩年)에 남산(南山) 기슭에 집을 짓고, 왼쪽에는 그림[圖]을 두고 오른쪽에는 책[書]⁵⁴을 두었으며, 꽃을 기르고 대나무를 심으며 초연(超然)히 세상 밖의 생각[物外之想]⁵⁵을 가져, 마치 세상을 다스릴 걱정[經世慮]이 없는 사람 같았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53. 정용(靜容): 고요하고 단정한 용모 또는 태도를 의미한다. 임권의 청렴하고 단정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당호(堂號)이다.
54. 좌도우서(左圖右書): 왼쪽에는 지도나 그림을, 오른쪽에는 서적을 둔다는 뜻. 서재의 일반적인 배치나 학문에 몰두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55. 물외지상(物外之想): 세상의 속된 일을 벗어난 생각. 탈속(脫俗)적인 경지를 의미한다.

안현(安玹)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安玹【文僖公。】
字仲珍, 順興人。 弘治辛酉生。 中宗十六年辛巳登第。 薦入史局, 歷校理、舍人、直提學、副提學、全羅・慶尙觀察使、大司憲、兵・吏曹判書。 明宗戊午, 拜右議政。 己未卒, 年五十九。
번역문:
안현(安玹)【문희공(文僖公)¹이다.】
자는 중진(仲珍)이고, 순흥(順興) 사람이다. 홍치(弘治) 신유년(辛酉年, 1501)²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16년 신사년(辛巳年, 1521)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천거되어 사국(史局)³에 들어갔고, 교리(校理)⁴, 사인(舍人)⁵, 직제학(直提學)⁶, 부제학(副提學)⁷, 전라도 및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⁸, 병조 및 이조 판서(判書)⁹를 역임하였다. 명종(明宗) 무오년(戊午年, 1558)에 우의정(右議政)¹⁰에 제수되었다. 기미년(己未年, 1559)에 졸(卒)하니, 나이 59세였다.
주석:
문희공(文僖公): 안현(安玹, 1501~1559)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의미하고, 희(僖)는 잘못을 경계하고 뉘우침(小心畏忌), 또는 온화하고 즐거움(溫柔恭 ){color:red}하며 즐거움(樂) 등을 의미한다. (僖의 의미 확인 필요: 《逸周書·諡法解》에 따르면 "小心畏忌曰僖", "質淵受諫曰僖", "有過為僖" 등 여러 의미가 있으나, '온화하고 즐거움'은 釐에 가깝다. '조심하고 경계함' 또는 '과오가 있었음' 등이 일반적이다.)
홍치(弘治) 신유년(辛酉年): 1501년. 홍치는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이다.
사국(史局): 역사 기록을 편찬하는 기관. 춘추관(春秋館)이나 실록청(實錄廳) 등을 가리킨다.
교리(校理): 홍문관(弘文館)의 정5품 관직. 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겸교리(兼校理)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사인(舍人): 주석 임권 7 참조.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관직.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종3품 관직. 직제학 다음가는 직책이다.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병조(兵曹) 및 이조 판서(判書): 병조와 이조의 으뜸 벼슬. 각각 정2품이다.
우의정(右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재상.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자리이다.

원문:
公沈厚端重, 寡言笑, 獨處靜室, 如對神明。 惡衣菲食, 微顯一致。 伯氏年齒差長, 少同筆硯, 敬之如嚴父, 日趨庭拜, 雨雪不廢。 精於醫術, 嘗領內外醫局, 敎以隨症用藥之方, 輒有神效。
번역문:
공(公)은 침착하고 중후하며 단정하고 신중하여[沈厚端重] 말과 웃음이 적었고, 조용한 방에 홀로 있을 때에도 신명(神明)을 대하는 듯하였다. 허름한 옷을 입고 변변찮은 음식을 먹으니[惡衣菲食], 미천할 때나 현달할 때나 한결같았다. 백씨(伯氏)¹¹는 나이가 조금 더 많았는데, 어려서 필硯(필연)¹²을 함께 하였으나 엄한 아버지처럼 공경하여 날마다 뜰에 나아가 절하기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폐하지 않았다.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일찍이 내외(內外)의 의국(醫局)¹³을 관장하면서 증상에 따라 약을 쓰는 방법[隨症用藥之方]을 가르치니 문득 신묘한 효험이 있었다.
주석:
11. 백씨(伯氏): 맏형. 안현의 형은 안위(安瑋)이다.
12. 필연(筆硯): 붓과 벼루. 함께 글공부했음을 의미한다.
13. 내외(內外)의 의국(醫局): 내의원(內醫院)과 전의감(典醫監) 또는 혜민서(惠民署) 등 궁궐 안팎의 의료 기관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현은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 의료 행정을 관장하기도 했다.

원문:
公忠淸謹儉, 一代之名臣也。 不受私與, 不通關節。 布衣惡食, 以守平生。 一日, 有客候其座, 公進飯, 唯黃藿, 以麤醬爲湯, 公不嘗而和飯。 客曰: “羹若不好, 奈何而不嘗先和乎?” 公曰: “羹若不好, 容得已乎?” 及病腫, 醫言當取蚯蚓汁調之, 公止之曰: “方春萬物生生, 彼雖微物, 豈可以爲吾病, 而殺有命耶?”【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은 충성스럽고 청렴하며[忠淸] 근신하고 검소하여[謹儉]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었다. 사사로이 주는 것을 받지 않았고, 관절(關節)¹⁴을 통하지 않았다. 베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布衣惡食] 평생을 지켰다. 하루는 어떤 손님이 그의 자리에 찾아왔는데, 공이 밥을 내니 오직 누런 미역[黃藿]뿐이었고 거친 된장[麤醬]으로 국[湯]을 만들었다. 공이 맛보지도 않고 밥을 말자, 손님이 말하였다. “국이 만약 좋지 않다면 어찌하여 맛보지도 않고 먼저 밥을 마십니까?” 공이 말하였다. “국이 만약 좋지 않다고 해서 용납하여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¹⁵ 병으로 종기[腫]가 나자 의원[醫]이 마땅히 지렁이 즙[蚯蚓汁]을 취하여 (약에) 타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공이 이를 말리며 말하였다. “바야흐로 봄이라 만물이 생동하는데[生生], 저것이 비록 미물(微物)이나 어찌 나의 병을 위하여 생명 있는 것을 죽일 수 있겠는가?”【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14. 관절(關節): 관문(關門)과 마디(節)라는 뜻으로, 권세 있는 사람에게 청탁하는 통로나 연줄을 의미한다. 부정한 청탁이나 뇌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가리킨다.
15. 국이 만약 좋지 않다고 해서 용납하여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羹若不好, 容得已乎?): 이 말은 해석이 다소 모호할 수 있다. ① ‘(이미 차려진 음식이니) 국 맛이 좋지 않다고 해서 어찌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는 ② ‘(나의 검소한 생활 방식이 이러하니) 국 맛이 좋지 않다고 해서 어찌 (이런 생활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맥상 ①의 의미로, 음식 투정을 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먹는다는 안현의 검소함과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원문:
與兄瑋同登辛巳科。 入經席則讀說詳亮, 在言地則遇事敢言, 輔儲宮則啓迪開悟, 聲聞藹然。 出典二南, 人思慕之。
번역문:
형 안위(安瑋)와 함께 신사년(1521) 과거에 등제하였다. 경석(經席)에 들어가면 읽고 설명하는 것이 상세하고 명료하였고, 언지(言地)에 있으면 일을 당하여 감히 말하였으며, 저궁(儲宮)¹⁶을 보필함에는 도리를 깨우쳐 열어주니[啓迪開悟]¹⁷ 명성(聲聞)이 자자하였다[藹然]. 나가서 두 남쪽 지방[二南]¹⁸을 맡아 다스리니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였다.
주석:
16. 저궁(儲宮): 동궁(東宮), 즉 왕세자를 가리킨다.
17. 계적개오(啓迪開悟): 열어주고[啓] 이끌어주어[迪] 깨우침을 열어줌[開悟]. 왕세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학문과 덕성을 함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8. 이남(二南): 남쪽의 두 지방.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리킨다. 안현은 두 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

원문:
病篤, 承旨問疾, 力疾而起, 具冠帶拜曰: “但願聖上愛民從諫。” 上曰: “卿之格言, 予當佩服。” 舍人聞命及門, 公已逝矣。【竝《紀年通攷》。】
번역문:
병이 위독해지자 승지(承旨)¹⁹가 문병(問病)하니, 병든 몸을 힘써 일으켜 관대(冠帶)를 갖추고 절하며 말하였다. “다만 원하옵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백성을 사랑하시고 간언(諫言)을 따르소서.”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경(卿)의 격언(格言)을 내(予) 마땅히 패복(佩服)²⁰하겠다.” 사인(舍人)²¹이 명을 듣고 문에 이르렀을 때는 공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이상은 《기년통고(紀年通攷)》에서 인용】
주석:
19.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임금의 명을 받고 문병 온 것이다.
20. 패복(佩服):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음. 허리에 차고[佩] 몸에 지닌다[服]는 뜻에서 유래했다.
21. 사인(舍人): 여기서는 임금의 명을 전달하는 관리를 가리킬 수 있다. 또는 승지(承旨)가 다시 와서 임금의 말을 전하려 했을 수도 있다. 안현이 죽는 순간까지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임금에게 간언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장언량(張彦良)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張彦良【恭武公。】
字子房, 豐德人。 靖國功臣河源君珽之子也。 弘治辛亥生。 中宗九年甲戌武科, 丙子重試。 官至正憲、漢城判尹。 明宗庚申卒, 年七十。

번역문:
장언량(張彦良)【공무공(恭武公)¹이다.】
자는 자방(子房)²이고, 풍덕(豐德)³ 사람이다. 정국공신(靖國功臣)⁴ 하원군(河源君) 장정(張珽)⁵의 아들이다. 홍치(弘治) 신해년(1491)⁶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9년 갑술년(1514) 무과(武科)⁷에 급제하였고, 병자년(1516) 중시(重試)⁸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정헌대부(正憲大夫)⁹ 한성판윤(漢城判尹)¹⁰에 이르렀다. 명종(明宗) 경신년(1560)에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주석:

  1. 공무공(恭武公): 장언량의 시호(諡號). 공(恭)은 공경하고 순하며 예를 지킴(敬順事上)을, 무(武)는 강직하고 과감하며 의를 지킴(剛彊直理) 등을 의미한다.
  2. 자방(子房): 장량(張良)의 자(字). 장량은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개국 공신으로, 지략이 뛰어난 명신(名臣)이다. 장언량의 자를 자방이라 한 것은 그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다.
  3. 풍덕(豐德): 본관(本貫)이 풍덕임을 나타낸다. 현재 경기도 개풍군 일대이다.
  4. 정국공신(靖國功臣):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호.
  5. 하원군(河源君) 장정(張珽, 1450-1515): 장언량의 아버지. 자는 자규(子圭). 성종(成宗) 때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하원군에 봉해졌다.
  6. 홍치(弘治) 신해년(1491): 홍치는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1488-1505). 신해년은 간지(干支)이다. 그러나 1491년은 신해년이 맞지만 홍치 4년이고, 홍치 신해년은 없다. 원문의 기록에 오류가 있는 듯하다. 1491년(성종 22)이 출생년이다.
  7. 무과(武科): 조선 시대에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과거 시험.
  8. 중시(重試): 조선 시대에 이미 문과나 무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승진시켰다.
  9. 정헌대부(正憲大夫): 조선 시대 문무관의 정2품 상계(上階) 품계명.
  10. 한성판윤(漢城判尹): 조선 시대 수도인 한성부(漢城府)의 으뜸 벼슬. 정2품. 현재의 서울특별시장 격이다.

원문:
母金氏抱置膝上, 公以手指雲曰: “我長當樹如雲旗纛。” 母心異之。 七八歲, 與群兒戲, 爲戰陣之狀, 出號令, 群兒莫敢違。 父嘗往宰相家, 公隨之, 中門外見十餘歲服喪童子遊走, 叱之曰: “汝服喪, 不當如是!” 喪童慙哭, 宰相問其故, 召入與語, 大奇之, 名以彦良, 字子房。

번역문:
어머니 김씨(金氏)가 안아 무릎 위에 올려놓자, 공(公)이 손가락으로 구름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제가 자라면 마땅히 구름 같은 기독(旗纛)¹¹을 세울 것입니다.” 어머니가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7, 8세에 여러 아이들과 놀 때 전쟁놀이(戰陣之狀)를 하면서 호령(號令)을 내리니, 여러 아이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재상(宰相)의 집에 가는데 공이 따라갔다가, 중문(中門) 밖에서 10여 세 된 상복(喪服) 입은 동자(童子)가 놀며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꾸짖어 말하였다. “너는 상복을 입었으니,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상복 입은 동자가 부끄러워 울자, 재상이 그 까닭을 묻고는 공을 불러들여 함께 이야기하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겨, 이름을 언량(彦良)이라 하고 자(字)를 자방(子房)이라 지어 주었다.¹²

주석:
11. 기독(旗纛): 군대에서 쓰는 여러 가지 깃발. 특히 대장기(大將旗)를 의미하기도 한다. 장차 큰 장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나타낸다.
12. 이름을 언량(彦良)이라 하고 자(字)를 자방(子房)이라 지어 주었다: 이 기록은 장언량의 이름과 자의 유래를 설명한다. 재상이 어린 장언량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이름과 자를 지어주었다는 일화이다.


원문:
甲申, 爲大將曹潤孫軍官, 擊逐閭延、茂昌之胡, 規畫措置, 多有所補。 諸將士要功自伐, 公默不一言, 目之以大樹將軍。

번역문:
갑신년(1524)¹³에 대장(大將) 조윤손(曹潤孫)¹⁴의 군관(軍官)¹⁵이 되어 여연(閭延)¹⁶, 무창(茂昌)¹⁷의 오랑캐(胡)¹⁸를 격퇴하여 쫓아낼 때, 계획하고 조치함에 보탬이 된 바가 많았다.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공을 다투며 스스로 자랑하였으나, 공은 잠잠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¹⁹이라 지목하였다.

주석:
13. 갑신년(1524): 중종 19년.
14. 조윤손(曹潤孫): 조선 중기의 무신.
15. 군관(軍官): 조선 시대 군영(軍營)이나 지방의 진영(鎭營)에 속하여 장수를 보좌하던 무관.
16. 여연(閭延): 조선 초기 압록강 북쪽에 설치했던 6진(六鎭) 중 하나.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 부근으로 추정된다.
17. 무창(茂昌): 조선 초기 두만강 북쪽에 설치했던 6진(六鎭) 중 하나. 현재 함경북도 경원(慶源) 북쪽 지역으로 추정된다.
18. 호(胡): 오랑캐. 주로 북방 민족, 여기서는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킨다.
19. 대수장군(大樹將軍): 후한(後漢)의 명장 풍이(馮異)의 별명. 그는 항상 여러 장수들이 공을 다툴 때 큰 나무 밑으로 피하여 다툼에 끼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별명을 얻었다. 공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장수를 비유한다.


원문:
拜義州牧使。 丁酉, 龔太史用卿賚詔而來, 見公儀觀偉然, 請射以爲歡。 公腰五矢連中, 龔嗟賞不已, 作詩贈之, 有“義州節制張中郞, 身長九尺鬚眉蒼”之句。

번역문:
의주목사(義州牧使)²⁰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37)²¹에 태사(太史) 공용경(龔用卿)²²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왔다가, 공의 용모와 풍채(儀觀)가 위엄 있는 것을 보고 활쏘기를 청하여 즐거움을 삼았다. 공이 허리에 찬 화살 다섯 개를 연달아 맞히자, 공용경이 감탄하고 칭찬하기를 마지않으며 시(詩)를 지어 주었는데, 거기에 “의주 절제사(節制使)²³ 장중랑(張中郞)²⁴은 키가 구척(九尺)²⁵이요 수염과 눈썹이 푸르구나”라는 구절이 있었다.

주석:
20. 의주목사(義州牧使): 평안도 의주목(義州牧)의 지방관. 정3품. 의주는 국경 지역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21. 정유년(1537): 중종 32년.
22. 태사(太史) 공용경(龔用卿): 명나라 사신. 태사는 사관(史官)의 직책 또는 천문(天文)을 맡은 관직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학식이 높은 관료에 대한 존칭으로 쓰였을 수 있다. 공용경은 명나라의 문신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온 기록이 있다.
23. 절제사(節制使): 조선 시대 각 도의 병마(兵馬)를 지휘하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약칭. 종2품 이상의 무관이 맡았다. 의주목사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24. 중랑(中郞): 중랑장(中郎將)의 약칭. 원래 중국의 관직명이나, 여기서는 무관인 장언량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였다.
25. 구척(九尺): 척(尺)은 시대마다 길이가 달랐으나, 보통 성인 남자의 큰 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당시 1척을 약 30cm로 보면 270cm에 달하는데, 이는 과장된 표현으로 장언량의 건장한 체격을 나타낸다.


원문:
壬寅, 出爲慶尙左道兵使。 是時, 皇朝以獺子侵邊, 將欲徵兵征討, 謂公堪爲副元帥, 遞兵使。

번역문:
임인년(1542)²⁶에 나가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²⁷가 되었다. 이때 황조(皇朝)²⁸에서 달자(獺子)²⁹가 변방을 침입하였으므로 장차 군사를 징발하여 정벌하고자 하여, 공이 부원수(副元帥)³⁰가 될 만하다고 여겨 병마절도사 직을 교체하였다.

주석:
26. 임인년(1542): 중종 37년.
27.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경상좌도(낙동강 동쪽 지역)의 군사를 통솔하던 최고 군직. 종2품.
28. 황조(皇朝):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29. 달자(獺子): 여진족(女眞族)의 한 부류인 올량합(兀良哈)을 낮추어 부르던 말. 명나라 북쪽 변방을 자주 침입하였다.
30. 부원수(副元帥): 원수(元帥)를 보좌하는 장수. 명나라가 여진족 정벌을 위해 조선에 군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장언량을 부원수로 삼으려 했다는 내용이다.


원문:
乙巳, 崔知事輔漢訪公于第, 至再欲與李芑等同事曰: “若從吾計, 將得大勳。” 公辭曰: “先人曾有靖國功, 亦已足矣。” 固拒不從, 聞者賢之。

번역문:
을사년(1545)³¹에 지사(知事) 최보한(崔輔漢)³²이 공의 집을 방문하여 두 번이나 이기(李芑)³³ 등과 함께 일할 것을 권하며 말하였다. “만약 나의 계획을 따른다면 장차 큰 공훈(大勳)을 얻을 것이오.” 공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선친(先人)께서 일찍이 정국(靖國)의 공(功)이 있으셨으니, 또한 이미 충분합니다.” 굳게 거절하고 따르지 않으니, 듣는 자들이 그를 현명하다고 여겼다.

주석:
31. 을사년(1545): 인종(仁宗) 원년 또는 명종(明宗) 즉위년. 이 해에 윤임(尹任) 일파와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대립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32. 지사(知事) 최보한(崔輔漢): 최보한은 을사사화 때 윤원형 일파에 가담한 인물이다. 지사(知事)는 여러 관청의 직책명에 쓰였으나, 여기서는 구체적인 관직보다는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다. 또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등을 가리킬 수 있다.
33. 이기(李芑, 1476-1552): 조선 중기의 문신.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 영의정을 지냈다. 최보한이 장언량에게 이기 등과 함께 을사사화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으나 장언량이 거절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公姿狀魁梧, 美鬚髥, 善談笑。 其處身行事, 常以謙遜儉約自將, 惡言不出於口, 擧人之長, 未嘗言其過。 奢靡之物, 不加於身, 至老, 猶跨馬不乘軺。 執親之喪, 廬墓三年, 足不到家。 服闋, 見父母手澤之物, 若不忍近。 屢臨方鎭, 裝橐蕭然, 饋遺不及於人, 人亦不以爲怒。 遭世昇平, 輕裘緩帶, 退然若無能者。 喜讀書, 每以書史自娛, 對人語未嘗及之, 人不知公之爲文也。 賓佐輩未嘗見其喜慍。 敬禮儒賢, 愛惜武才, 有識咸謂近世將帥無如公者。【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은 모습(姿狀)이 괴오(魁梧)³⁴하고 수염(鬚髥)³⁵이 아름다웠으며, 담소(談笑)를 잘하였다. 그 처신하고 행동함에 항상 겸손(謙遜)과 검약(儉約)으로써 스스로를 지켰고, 나쁜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남의 장점(長點)을 들어 말하고 일찍이 그 과실(過失)을 말하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물건을 몸에 더하지 않았고, 늙어서도 오히려 말을 탈 뿐 수레(軺)³⁶를 타지 않았다. 어버이의 상(喪)을 당해서는 여묘(廬墓)³⁷ 삼 년 동안 발이 집에 이르지 않았다. 복(服)을 마치고 나서는 부모의 손때 묻은 물건을 보면 차마 가까이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여러 차례 지방의 진(鎭)³⁸에 부임하였으나 행장(裝橐)³⁹이 쓸쓸하였고, 선물을 남에게 주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또한 노여워하지 않았다. 태평성대(昇平)를 만나서는 가벼운 갖옷과 느슨한 허리띠(輕裘緩帶)⁴⁰ 차림으로 물러나 마치 무능한 사람 같았다. 독서(讀書)를 좋아하여 매번 서사(書史)⁴¹로 스스로 즐겼으나, 사람들을 대할 때는 일찍이 이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이 문(文)에 능함을 알지 못하였다. 빈객(賓客)과 보좌관(補佐官)들은 일찍이 그의 기뻐하고 성내는(喜慍)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유현(儒賢)⁴²을 공경하고 예우하며 무재(武才)⁴³를 아끼니, 식견 있는 이들이 모두 근세의 장수(將帥) 중에 공만한 이가 없다고 말하였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⁴⁴에서 인용】

주석:
34. 괴오(魁梧): 체격이 크고 건장한 모습.
35. 수염(鬚髥): 구레나룻(鬚)과 턱수염(髥)을 아울러 이르는 말.
36. 초(軺): 한 필의 말이 끄는 가벼운 수레. 보통 사신이나 지위가 높은 관리가 탔다. 말을 타는 것을 선호한 것은 무인다운 기질과 검소함을 보여준다.
37. 여묘(廬墓):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묘를 지키는 것. 효행(孝行)의 상징이다.
38. 방진(方鎭): 지방의 군사 요충지에 설치된 진영(鎭營).
39. 장탁(裝橐): 행장을 꾸린 전대(纏帶)나 자루. 여행 시의 짐을 의미한다. 행장이 쓸쓸했다는 것은 재물을 탐하지 않고 청렴했음을 보여준다.
40. 경구완대(輕裘緩帶): 가벼운 갖옷을 입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맨다는 뜻으로, 부귀(富貴)하고 안락(安樂)한 생활 또는 그러한 차림새를 비유한다. 여기서는 태평성대에 무관으로서 긴장하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음을 의미한다.
41. 서사(書史): 책과 역사 기록.
42. 유현(儒賢):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유학자.
43. 무재(武才): 무예와 용병술 등 무관으로서의 재능.
44.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기록집. 주로 조선 중기의 인물들에 대한 일화와 평을 담고 있다.


원문:
張彦良, 武將也。 以淸白, 官至正二品。 中廟時, 聞皇朝將討建州衛, 徵兵於我國, 以李芑爲都元帥, 彦良爲副元帥, 林亨秀以吏曹佐郞爲從事官。 亨秀往見李芑, 以親老辭, 芑答以言于副元帥, 亨秀乃投謁於彦良。 彦良戎服出廳事, 據交椅而坐, 亨秀急具戎服, 與他從事偕立行禮, 不交一言而退。 未幾, 事寢不行。 後亨秀往見, 則彦良出迎于中門, 揖讓上坐, 設酒盡歡而罷, 可謂有古將之風矣。【《芝峯類說》。】

번역문:
장언량은 무장(武將)이다. 청렴결백(淸白)하여 벼슬이 정2품에 이르렀다. 중종(中宗) 때 황조(皇朝)⁴⁵에서 장차 건주위(建州衛)⁴⁶를 토벌하려고 우리나라에 군사를 징발하면서, 이기(李芑)를 도원수(都元帥)⁴⁷로, 장언량을 부원수(副元帥)로 삼고, 임형수(林亨秀)⁴⁸는 이조좌랑(吏曹佐郞)⁴⁹으로서 종사관(從事官)⁵⁰이 되었다. 임형수가 가서 이기를 뵙고 어버이가 늙었음을 이유로 사양하니, 이기가 부원수에게 말하겠다고 답하였다. 임형수가 이에 장언량에게 찾아가 명함(謁)⁵¹을 올렸다. 장언량은 군복(戎服) 차림으로 청사(廳事)⁵²에 나와 교의(交椅)⁵³에 의지해 앉아 있었고, 임형수는 급히 군복을 갖추어 입고 다른 종사관들과 함께 서서 예를 행하고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명나라의 징병 요청)이 중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다. 후에 임형수가 가서 뵈니, 장언량이 중문(中門)까지 나와 맞이하여 읍(揖)하고 사양하며 윗자리에 앉히고 술을 베풀어 환락을 다하고 파하였으니, 옛 장수(古將)의 풍모(風貌)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지봉유설(芝峯類說)》⁵⁴에서 인용】

주석:
45. 황조(皇朝):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46. 건주위(建州衛): 명나라가 만주 지역에 설치했던 여진족 위소(衛所) 중 하나. 후에 청(淸)나라를 세우는 누르하치의 기반이 되었다.
47. 도원수(都元帥): 전쟁 시 여러 군대를 총지휘하는 임시 최고 군직.
48. 임형수(林亨秀, 1514-154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의 편에 섰다가 후에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
49. 이조좌랑(吏曹佐郞): 이조(吏曹)의 정6품 관직. 문관의 인사(人事) 실무를 담당하는 요직 중 하나였다.
50. 종사관(從事官): 전쟁이나 사행(使行) 때 주장을 보좌하던 임시 관직.
51. 알(謁): 명함(名銜). 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뵙는 것을 의미한다.
52. 청사(廳事): 관청의 건물. 일을 처리하는 곳.
53. 교의(交椅):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고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의자.
54.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천문, 지리, 역사, 제도, 문물, 풍속, 고증, 설화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다.


심광언(沈光彦)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沈光彦【胡安公。】
字彦之, 號鈍庵, 靑松人。 弘治庚戌生。 中宗十四年己卯生、進。 乙酉, 登魁科。 歷應敎、承旨、大司諫、全羅監司、吏曹參議・參判, 官至刑曹判書。 宣祖戊辰卒, 年七十九。

번역문:
심광언(沈光彦)【호안공(胡安公)¹이다.】
자는 언지(彦之), 호는 둔암(鈍庵)이고, 청송(靑松)² 사람이다. 홍치(弘治) 경술년(1490)³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14년 기묘년(1519)⁴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양과(兩科)⁵에 합격하였고, 을유년(1525)에 문과(文科)에서 장원(魁科)⁶으로 급제하였다. 응교(應敎)⁷, 승지(承旨)⁸, 대사간(大司諫)⁹, 전라도 감사(全羅監司)¹⁰, 이조참의(吏曹參議)¹¹·참판(參判)¹²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형조판서(刑曹判書)¹³에 이르렀다. 선조(宣祖) 무진년(1588)¹⁴에 졸(卒)하니, 나이 79세였다.

주석:

  1. 호안공(胡安公): 심광언의 시호. 호(胡)는 나이가 많아 오래 삶(年考長壽)을, 안(安)은 온화하고 선량하며 다툼이 없음(溫良無爭) 등을 의미한다.
  2. 청송(靑松): 본관이 청송임을 나타낸다. 청송 심씨(靑松 沈氏)이다.
  3. 홍치(弘治) 경술년(1490):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1490년(성종 21)이다.
  4. 기묘년(1519): 중종 14년. 이 해에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士林) 세력이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勳舊) 세력에 의해 축출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5. 생원(生員), 진사(進士):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를 합쳐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 한다. 생원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진사과는 시(詩)·부(賦) 등 문예 창작 능력을 시험했다.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거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심광언은 생원과 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다.
  6. 괴과(魁科): 문과 시험에서 장원(壯元), 즉 수석으로 급제한 것을 말한다.
  7.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의 정4품 관직.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문서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8.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9.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임금에 대한 간쟁(諫諍)과 백관에 대한 탄핵을 담당했다.
  10. 전라도 감사(全羅監司):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종2품. 전라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11.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다.
  12. 참판(參判): 육조(六曹)의 버금 벼슬. 종2품. 판서(判書) 다음가는 직위이다. 심광언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13. 형조판서(刑曹判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법률, 형벌, 노비 등에 관한 일을 맡았다.
  14. 선조(宣祖) 무진년(1588): 선조 21년.

원문:
年十五, 連丁艱, 時短喪法嚴, 人莫敢違。 公雖在童年, 一無所顧, 秉禮不渝。 及長力學, 通究經傳, 以及國典、明律, 無不通曉, 人知其遠大器。

번역문:
나이 15세에 연달아 부모의 상(丁艱)¹⁵을 당하였는데, 당시 단상법(短喪法)¹⁶이 엄하여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공은 비록 동년(童年)¹⁷이었으나 전혀 돌아보는 바 없이 예(禮)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장성하여서는 학문에 힘써 경전(經傳)¹⁸을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국전(國典)¹⁹과 명률(明律)²⁰까지 통달하여 통효(通曉)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가 장래가 원대한 큰 그릇(遠大器)임을 알았다.

주석:
15. 정간(丁艱): 부모의 상(喪)을 당하는 것.
16. 단상법(短喪法): 상기(喪期)를 줄이는 법. 조선 초기에는 예법상 3년 상(三年喪)을 지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상기를 단축하려는 논의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예법이 강조되면서 3년 상이 점차 정착되었다. 심광언이 15세였던 1504년(연산군 10) 무렵에는 3년 상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풍조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중종반정 이후에는 다시 예법 준수가 강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법이 엄하여 사람들이 감히 (3년 상을) 어기지 못했다는 표현은 문맥상 어색하다. 오히려 예를 중시하는 심광언이 당시 (단축된) 법을 따르지 않고 3년 상의 예를 지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또는 당시 (3년 상을 지키도록 하는) 법이 엄하여 어기지 못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17. 동년(童年): 어린 나이. 15세.
18. 경전(經傳): 유교의 경서(經書)와 그 주석서(注釋書)인 전(傳).
19. 국전(國典): 나라의 법전(法典)이나 제도.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가리킨다.
20. 명률(明律): 명나라의 법률인 《대명률(大明律)》. 조선은 《경국대전》과 함께 《대명률》을 기본 법전으로 사용했다.


원문:
時趙靜菴以禮樂贊化, 未幾北門禍發, 公慷慨憂傷, 無當世之念。 乙酉, 以兄敎赴擧, 擢文科壯元。 鄭公光弼以領相掌試, 爲之喜曰: “此人爲魁, 可賀得人。” 未唱榜, 銓曹擬正言望, 從士望也。

번역문:
당시 조 정암(趙靜菴)²¹이 예악(禮樂)²²으로 교화(敎化)를 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문(北門)의 화(禍)²³가 발생하자, 공이 강개(慷慨)하고 근심하며 상심하여 세상에 나설 뜻이 없었다. 을유년(1525)에 형의 가르침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에 장원(壯元)으로 뽑혔다. 정광필(鄭光弼) 공(公)²⁴이 영상(領相)²⁵으로서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그를 위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장원이 되었으니, 인재를 얻은 것을 축하할 만하다.” 방(榜)을 발표하기도 전에 전조(銓曹)²⁶에서 정언(正言)²⁷ 후보(望)로 추천하니, 이는 선비들의 여망(士望)을 따른 것이었다.

주석:
21. 조 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조선 중기의 문신, 사림파의 영수. 중종 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내세우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賜死)되었다.
22. 예악(禮樂): 예(禮)와 악(樂). 유교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23. 북문(北門)의 화(禍):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를 가리킨다. 사림파 인사들이 주로 북문(창의문)을 통해 출입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다. 또는 조광조 등 핵심 인물들이 의금부 북쪽 문을 통해 압송되었다는 설도 있다.
24.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온건한 성품으로 기묘사화 때 사림을 변호하려 했으나 막지 못했다.
25. 영상(領相): 영의정(領議政)의 다른 이름.
26. 전조(銓曹): 인사권을 담당하는 관청.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가리키나, 주로 이조를 지칭한다.
27.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임금에게 간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과거 급제자 중 명망 있는 인물을 바로 요직에 임명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丙戌, 選入玉堂, 爲修撰, 日侍經幄, 精白一心, 積其誠意, 開陳義理, 委曲懇惻, 上甚重之。 己丑, 見忤於金安老, 落職。 時安老方顓柄張甚, 稍忤意, 輒中奇禍, 公卿以下, 皆重足脅息, 公棲遲郊墅, 杜門讀書, 得免於禍。

번역문:
병술년(1526)에 옥당(玉堂)²⁸에 선발되어 들어가 수찬(修撰)²⁹이 되었고, 날마다 경악(經幄)³⁰에 시강(侍講)하며 한마음으로 정백(精白)하게 성의(誠意)를 쌓아 의리(義理)를 진술함이 자세하고 간절하니(委曲懇惻), 상(上)³¹께서 매우 중하게 여기셨다. 기축년(1529)³²에 김안로(金安老)³³에게 거슬림을 보여 관직에서 물러났다(落職). 이때 김안로가 바야흐로 권력을 오로지하여(顓柄) 기세가 매우 심하여, 조금이라도 뜻을 거스르면 문득 기이한 화(奇禍)를 당하였으므로 공경(公卿) 이하가 모두 발을 겹쳐 서고 숨을 죽였는데(重足脅息)³⁴, 공은 교외의 별장(郊墅)에 머물며 문을 닫고 독서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주석:
28.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29. 수찬(修撰): 홍문관의 정6품 관직.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는 일을 맡았다.
30. 경악(經幄): 경연(經筵)의 자리. 임금과 신하가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31. 상(上): 임금. 중종(中宗)을 가리킨다.
32. 기축년(1529): 중종 24년. 기축옥사(己丑獄事)와 직접적인 관련보다는 김안로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보인다.
33.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책봉 문제 등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아들 김희(金禧)와 함께 전횡을 일삼다가 사사(賜死)되었다.
34. 중족협식(重足脅息): 발을 포개고 숨을 죽임. 극도로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모양을 이른다.


원문:
乙巳, 尹元衡得志顓權, 出公爲全羅監司。 威行惠敷, 一道洽然。 丙午, 入爲銀臺, 公見國事不靖, 傷心撫腕, 志在退避, 仍成一絶曰: “薇垣三長欲無言, 承旨一年誤聖恩。 參議四曹何事議? 不如還入護軍番。”

번역문:
을사년(1545)³⁵에 윤원형(尹元衡)³⁶이 뜻을 얻어 권력을 오로지하자, 공을 내보내 전라도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위엄을 행하고 은혜를 베푸니 온 도(道)가 흡족해하였다(洽然). 병오년(1546)에 들어와 은대(銀臺)³⁷가 되었으나, 공은 국사(國事)가 안정되지 못함을 보고 상심하여 팔을 어루만지며(傷心撫腕)³⁸ 물러나 피할 뜻을 두어, 마침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말하였다. “미원(薇垣)³⁹의 세 장관(三長)⁴⁰은 말이 없으려 하고, 승지(承旨) 일 년은 성은(聖恩)을 그르쳤네. 사조(四曹)⁴¹의 참의(參議)는 무슨 일을 의논하랴? 호군(護軍)⁴²의 차례로 다시 들어감만 못하리.”

주석:
35. 을사년(1545): 인종 원년 또는 명종 즉위년. 이 해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윤원형 등 소윤(小尹) 세력이 대윤(大尹)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36. 윤원형(尹元衡, ?-1565): 조선 중기의 문신. 명종(明宗)의 외숙부.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며, 온갖 전횡을 일삼다가 문정왕후 사후 사사(賜死)되었다.
37.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심광언은 승지(承旨)가 되었다.
38. 상심무완(傷心撫腕): 마음 아파하며 팔뚝을 어루만짐. 매우 분개하거나 슬퍼함을 나타낸다.
39. 미원(薇垣): 자미원(紫微垣)의 약칭. 궁궐 또는 조정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킬 수 있다.
40. 삼장(三長): 세 명의 으뜸. 삼정승(三政丞: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킨다.
41. 사조(四曹): 육조(六曹) 중 중요한 네 조(曹).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심광언은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지냈다.
42. 호군(護軍): 오위(五衛)에 속한 정4품 무관직. 또는 오위의 군사를 통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한직(閑職)에 있거나 관직 없이 지내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 시는 윤원형의 집권 하에서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환멸을 담고 있다.


원문:
辛酉, 上御禁苑, 試士製述、講經, 特幷賜第, 而外戚多中, 頗有不公之譏。 適有天變, 延訪宰臣, 一無言及是者。 公獨直斥不諱, 上爲之動容, 命罷其榜。 物論多之, 以爲鳳鳴朝陽。

번역문:
신유년(1561)⁴³에 상(上)⁴⁴께서 금원(禁苑)⁴⁵에 거둥하여 선비들에게 제술(製述)⁴⁶과 강경(講經)⁴⁷을 시험하고 특별히 급제(賜第)⁴⁸를 함께 내렸는데, 외척(外戚)⁴⁹들이 많이 합격하여 자못 불공정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마침 천변(天變)⁵⁰이 있어 재신(宰臣)들을 불러 물었으나, 아무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없었다. 공만이 홀로 거리낌 없이 곧바로 지적(直斥)하니, 상께서 이로 인해 용모가 변하시며⁵¹ 그 방목(榜目)을 폐지하도록 명하였다. 세평(物論)⁵²이 이를 훌륭하게 여겨, 봉황이 아침 해를 향해 우는 것(鳳鳴朝陽)⁵³과 같다고 하였다.

주석:
43. 신유년(1561): 명종 16년.
44. 상(上): 임금.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45. 금원(禁苑): 궁궐 안의 동산. 임금이나 왕족이 휴식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
46. 제술(製述): 시(詩), 부(賦), 책(策) 등 문장을 짓는 것.
47. 강경(講經): 경서(經書)의 뜻을 강론하는 것.
48. 사제(賜第): 임금이 특별히 과거 급제를 내리는 것.
49. 외척(外戚): 임금의 외가 쪽 친척. 당시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외척 세력이 강성했다.
50. 천변(天變):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괴. 일식, 월식, 혜성 출현, 지진, 홍수, 가뭄 등. 옛날에는 이를 군주의 부덕(不德)이나 정치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여겼다.
51. 동용(動容): 얼굴빛이나 표정이 변함. 임금이 신하의 직언에 감동하거나 놀라움을 나타내는 모습.
52. 물론(物論): 세상 사람들의 비평이나 여론.
53. 봉명조양(鳳鳴朝陽): 봉황이 아침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운다는 뜻. 성군(聖君)의 출현이나 현사(賢士)가 좋은 시대를 만남을 비유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권아(卷阿)〉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는 심광언의 직간(直諫)이 어진 신하의 용기 있는 행동임을 칭송하는 의미로 쓰였다.


원문:
時有附勢喜事者, 多變舊章。 公於經席極陳時弊曰: “《書》云‘毋作聰明亂舊章’, 又曰‘遵先王之法而過者未之有也’。 老臣則朝暮入地矣, 他日弊作, 必思臣言。” 未幾果敗, 人皆服公先見之明。

번역문:
당시 권세에 빌붙어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자(附勢喜事者)들이 옛 법도(舊章)를 많이 바꾸었다. 공이 경연(經筵) 자리에서 당시의 폐단(時弊)을 극력으로 진술하며 아뢰었다. “‘총명(聰明)을 부려 옛 법도를 어지럽히지 말라’고 《서경(書經)》⁵⁴에 이르렀고, 또한 ‘선왕(先王)의 법을 따르다가 잘못되는 경우는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늙은 신하(老臣)는 조만간 땅속에 들어갈 것입니다만, 다른 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신의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폐단이 드러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복하였다.

주석:
54. 《서경(書經)》: 유교의 오경(五經) 중 하나. 고대 중국의 요(堯), 순(舜) 임금부터 주(周)나라 때까지의 정치 기록과 문서를 모은 책. ‘毋作聰明亂舊章’ 구절은 〈반경(盤庚)〉 편에 나온다.


원문:
公不喜出入, 諸子居屋相接, 日夕環侍, 兒孫滿前, 獻笑供歡。 每佳辰令節, 遊衍江榭⁵⁵, 鶴髮康强, 親屬擁道, 觀者指爲畫圖中人。

번역문:
공은 출입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여러 아들의 집이 서로 이어져 있어 저녁이면 둘러앉아 모시니(環侍) 아들과 손자들이 앞에 가득하여 웃음을 드리고 즐거움을 바쳤다. 매번 좋은 날과 명절(佳辰令節)⁵⁶에는 강가 정자(江榭)⁵⁷에서 한가로이 노니(遊衍)는데, 학처럼 흰 머리(鶴髮)⁵⁸에 건강하고(康强) 친척들이 길을 에워싸니, 보는 자들이 그림 속의 사람(畫圖中人)⁵⁹이라고 가리켰다.

주석:
55. [주-D001] 江榭 : 《이암유고(頤庵遺稿)・의정부좌참찬……심공신도비명(議政府左參贊……沈公神道碑銘)》 및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경재(卿宰)・심광언(沈光彦)》에는 “교서(郊墅)”로 되어 있다. '강사(江榭)'는 강가의 정자, '교서(郊墅)'는 교외의 별장을 의미한다. 어느 쪽이든 한가롭게 풍류를 즐기는 장소를 나타낸다.
56. 가신영절(佳辰令節): 좋은 날과 좋은 명절.
57. 강사(江榭): 강가에 있는 정자. 주석 [주-D001] 참조.
58. 학발(鶴髮): 학의 깃처럼 센 머리털. 장수(長壽)를 상징한다.
59. 화도중인(畫圖中人): 그림 속의 인물. 풍경이나 인물상이 매우 아름다워 마치 그림 같음을 비유한다. 심광언의 노년 생활이 평화롭고 복되었음을 묘사한다.


원문:
公器局峻整, 氣象光明, 和而不流, 寬而有制, 和氣薰盎, 擧止凝重, 人望之知其爲盛德大業。 明廟御世, 需賢共理, 偉人正士, 左右治化, 一時彙征之盛, 輿論美之, 而數其和厚長德, 公必與焉。 都人望公入相, 宸情亦注意公, 而阨於群小, 不得大拜, 兩銓之長, 亦見阨焉。

번역문:
공은 기국(器局)⁶⁰이 준엄하고 반듯하며(峻整), 기상(氣象)이 밝고 환하며(光明), 온화하나 흐르지 않고(和而不流)⁶¹, 너그러우나 절제가 있었으며(寬而有制)⁶², 온화한 기운(和氣)이 넘쳐흐르고(薰盎) 거동(擧止)이 무게가 있었다(凝重). 사람들이 그를 보면 성대한 덕(盛德)과 큰 공업(大業)을 이룰 인물임을 알았다. 명종(明廟)⁶³께서 세상을 다스릴 때 어진 이를 필요로 하여 함께 다스리니, 위인(偉人)과 정사(正士)들이 좌우에서 교화를 도와, 한 시대에 인재들이 모여든 성대함(彙征之盛)을 여론이 아름답게 여겼는데, 그 온화하고 두터우며 오래가는 덕(和厚長德)을 꼽을 때면 공이 반드시 거기에 참여하였다. 도성 사람들이 공이 재상(宰相)의 반열에 들기를 바랐고, 임금의 마음(宸情)⁶⁴ 또한 공에게 주목하였으나, 여러 소인(群小)⁶⁵에게 막혀(阨) 정승에 임명되지 못하였고(不得大拜)⁶⁶, 양전(兩銓)⁶⁷의 장(長) 또한 막힘을 당하였다.

주석:
60. 기국(器局): 사람의 재능과 도량.
61. 화이불류(和而不流):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말로, 남과 화합하면서도 줏대 없이 함부로 휩쓸리지는 않음을 의미한다.
62. 관이유제(寬而有制): 너그러우면서도 법도나 절제가 있음.
63. 명묘(明廟): 명종(明宗)의 묘호(廟號).
64. 신정(宸情): 임금의 마음이나 생각. '宸'은 임금이 거처하는 곳, 또는 임금과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65. 군소(群小): 무리를 지어 남을 해치는 소인배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윤원형 일파를 가리킬 수 있다.
66. 대배(大拜): 정승(政丞)으로 임명되는 것. 임금이 직접 임명장을 수여하는 의식에서 유래했다.
67. 양전(兩銓): 이조(吏曹)와 병조(兵曹). 문관과 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핵심 부서이다. 양전의 장(長)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의미한다. 심광언이 소인들의 견제로 정승뿐 아니라 인사권을 쥔 이조판서나 병조판서에도 임명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원문:
公立心忠信, 持身謹愼, 至若臨政處事, 剖判是非, 毅然有不可奪者, 雖愚夫, 知其爲君子; 雖媢嫉, 不敢指爲邪人。 嘗訓子弟, 動引趙靜菴, 使爲表準。 立朝四十年, 位至宰輔, 而淸修一節, 終始不渝。【竝碑。】

번역문:
공은 마음가짐이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었으며(忠信), 몸가짐을 삼가고 신중히 하였다(謹愼). 정치에 임하고 일을 처리함에 이르러서는 시비(是非)를 분석하여 판단함에 의연(毅然)하여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가 군자(君子)임을 알았고, 비록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媢嫉)⁶⁸라도 감히 사악한 사람(邪人)이라고 지목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자제(子弟)들을 훈계할 때마다 조 정암(趙靜菴)⁶⁹을 인용하여 표준(表準)으로 삼게 하였다. 조정에 선 지 40년 동안 지위가 재상과 보좌관(宰輔)⁷⁰에 이르렀으나, 청렴하게 몸을 닦는 한결같은 절개(淸修一節)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이상은 비석(碑石)에서 인용】

주석:
68. 모질(媢嫉): 남을 시기하고 질투함.
69. 조 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심광언이 조광조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를 높이 평가하고 자제들에게 본받도록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70. 재보(宰輔): 재상(宰相)과 보상(輔相). 임금을 보좌하는 최고위 신료들을 의미한다. 형조판서 등 판서직을 역임했으므로 재보의 반열에 이르렀다고 표현한 것이다.


조광원(曺光遠)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曺光遠
字晦甫, 昌寧人。 贊成繼商之子。 弘治壬子生。 中宗十七年壬午司馬, 戊子登第。 歷弼善、掌令、承旨、北兵使、慶尙・平安兩道觀察使, 官至判中樞府事。 宣祖癸酉卒, 年八十二。

번역문:
조광원(曺光遠)
자는 회보(晦甫), 창녕(昌寧)¹ 사람이다. 찬성(贊成)² 조계상(曺繼商)³의 아들이다. 홍치(弘治) 임자년(1492)⁴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17년 임오년(1522) 사마시(司馬試)⁵에 합격하였고, 무자년(1528)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필선(弼善)⁶, 장령(掌令)⁷, 승지(承旨)⁸, 북병사(北兵使)⁹, 경상도(慶尙道)·평안도(平安道) 양도(兩道)의 관찰사(觀察使)¹⁰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¹¹에 이르렀다. 선조(宣祖) 계유년(1573)¹²에 졸(卒)하니, 나이 82세였다.

주석:

  1. 창녕(昌寧): 본관이 창녕임을 나타낸다. 창녕 조씨(昌寧 曺氏)이다.
  2. 찬성(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우찬성(右贊成)이 있었다.
  3. 조계상(曺繼商, 1466-154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치경(致卿), 호는 눌재(訥齋). 김안로(金安老)의 전횡 시기에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여 우찬성 등을 지냈다.
  4. 홍치(弘治) 임자년(1492):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1492년(성종 23)이다.
  5.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를 통칭하는 말.
  6. 필선(弼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4품 관직.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7. 장령(掌令): 사헌부(司憲府)의 정4품 관직.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았다.
  8.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9. 북병사(北兵使):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가리킨다. 함경도는 북쪽 변방이므로 북병사라고 칭했다. 종2품.
  10.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11.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중추부는 일정한 직무가 없는 고위 문무관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었다.
  12. 선조(宣祖) 계유년(1573): 선조 6년.

원문:
公幼而峻拔, 沈深有度。 甫成童, 雄健不羈, 當街賈勇, 射藝絶人, 左右俱發, 百不失一。 稍長, 刮磨豪習, 折節力學。

번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뛰어나며(峻拔), 침착하고 깊이가 있었다(沈深有度). 막 성동(成童)¹³이 되었을 때는 웅장하고 건장하며 거리낌이 없어(雄健不羈), 길거리에서 용기를 자랑하고(當街賈勇)¹⁴ 활 쏘는 재주(射藝)가 남보다 뛰어나 좌우 양쪽으로 모두 쏘아도(左右俱發)¹⁵ 백 번에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호방한 습성(豪習)을 갈고 닦아(刮磨) 절개를 굽혀(折節) 학문에 힘썼다.

주석:
13. 성동(成童): 15세 전후의 나이. 또는 8세 이상의 남자아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14. 당가고용(當街賈勇): 길거리에서 용기를 내보임. 젊은 시절 혈기 왕성하고 대담했음을 보여준다.
15. 좌우구발(左右俱發): 좌우 양쪽으로 번갈아 활을 쏘거나, 양손으로 동시에 활을 쏨. 뛰어난 활쏘기 솜씨를 나타낸다.


원문:
中廟展謁齊陵, 遂幸松京, 公以開城都事供頓諸具, 倉卒立辦, 人至今稱之。 金安老當國, 父子竝爲所陷, 贊成公遠竄珍原, 公屛居南陽。 安老伏辜, 皆釋免。

번역문:
중종(中宗)께서 제릉(齊陵)¹⁶을 전알(展謁)¹⁷하고 마침내 송경(松京)¹⁸에 행차하셨는데, 공이 개성도사(開城都事)¹⁹로서 모든 물품 공급(供頓諸具)²⁰을 창졸간(倉卒間)에 즉시 마련하니(立辦),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찬한다. 김안로(金安老)²¹가 국정을 담당했을 때 부자(父子)가 함께 그에게 모함당하여, 찬성공(贊成公)²²은 진원(珍原)²³으로 멀리 유배되었고, 공은 남양(南陽)²⁴에 물러나 살았다(屛居). 김안로가 죄를 받아 죽자(伏辜)²⁵ 모두 석방되고 면죄되었다.

주석:
16. 제릉(齊陵):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비(妃)인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의 능. 개성(開城)에 있다.
17. 전알(展謁): 능(陵)이나 묘(廟)를 찾아가 참배하는 것.
18. 송경(松京):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開城)의 다른 이름.
19. 개성도사(開城都事): 개성부(開城府)의 종5품 관직.
20. 공돈제구(供頓諸具): 임금의 행차 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고 숙식을 준비하는 것.
21.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기의 문신. 권력을 잡고 많은 사람을 축출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22. 찬성공(贊成公): 조광원의 아버지인 조계상(曺繼商)을 가리킨다. 그는 김안로에 의해 파직, 유배되었다.
23. 진원(珍原): 현재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 일대.
24. 남양(南陽): 현재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일대.
25. 복고(伏辜): 죄에 대한 벌을 받음. 죽임을 당함을 의미한다. 김안로는 1537년(중종 32)에 사사(賜死)되었다.


원문:
公居官莅職, 務存大體, 平生不喜紛華, 不饒權貴。 立朝四十餘年, 屢典雄藩, 出入將相, 而先業之外, 不長尺寸, 自奉疎淡, 盤無重肉。

번역문:
공은 관직에 나아가 직무를 수행함에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썼고, 평생 화려함(紛華)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권세 있고 귀한 자(權貴)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조정에 선 지 4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중요한 번(藩)²⁶을 맡았고 장수와 재상(將相)²⁷의 지위에 드나들었으나, 선대(先代)의 산업(産業) 외에는 조금도 재산을 늘리지 않았으며(不長尺寸)²⁸, 스스로 생활함이 소박하고 담백하여(自奉疎淡) 밥상에 고기반찬을 겹쳐 놓지 않았다(盤無重肉)²⁹.

주석:
26. 웅번(雄藩): 중요하고 큰 번(藩). 번은 제후국 또는 중요한 지방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평안도, 경상도 등 중요하고 큰 도(道)를 가리킨다. 관찰사직을 역임했음을 의미한다.
27. 장상(將相): 장수(將帥)와 재상(宰相). 높은 무관직과 문관직을 두루 거쳤음을 의미한다.
28. 불장척촌(不長尺寸): 한 자 한 치도 늘리지 않음. 재산을 전혀 늘리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29. 반무중육(盤無重肉): 밥상에 고기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않음. 검소한 생활을 의미한다.


원문:
沿江屯胡搶掠民畜, 以公爲平安監司。 公至, 則不煩兵威, 相率遠徙, 特加資憲。

번역문:
강가에 주둔한 오랑캐(沿江屯胡)³⁰가 백성과 가축을 노략질하자, 공을 평안감사(平安監司)³¹로 삼았다. 공이 이르자 군대의 위엄을 번거롭게 쓰지 않았는데도 (오랑캐들이) 서로 이끌고 멀리 옮겨가니,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³² 품계를 더하였다.

주석:
30. 연강둔호(沿江屯胡): 압록강 변에 주둔하며 노략질하던 여진족을 가리킨다.
31. 평안감사(平安監司): 평안도 관찰사.
32.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문무관의 정2품 하계(下階) 품계명.


원문:
拜判中樞。 公數年以來, 行步艱澁, 不能供仕, 日就羸憊, 子弟進藥, 則却之曰: “人生八十二, 位躋一品, 此而不足, 復求活爲?” 病革, 神志不亂而卒。【竝《潛谷舊錄》。】

번역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공이 수년 전부터 걸음걸이(行步)가 어렵고 힘들어(艱澁) 관직에 나아가 일할 수 없었고, 날로 여위고 지쳐갔다(羸憊). 자제(子弟)들이 약(藥)을 올리자 물리치며 말하였다. “인생 팔십이 세에 지위가 1품(一品)에 올랐으니, 이것으로 부족하여 다시 살기를 구하겠는가?” 병이 위독해졌으나 정신(神志)은 혼란하지 않은 채 졸(卒)하였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오겸(吳謙)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吳謙【文忠公。】
字敬夫, □□¹人。 弘治丙辰生。 中宗十七年壬午進士。 壬辰, 以南平縣監登第。 入玉堂, 歷大司憲、吏・兵曹判書。 宣祖朝, 以贊成退歸羅州。 壬午卒, 年八十七。

번역문:
오겸(吳謙)【문충공(文忠公)²이다.】
자는 경부(敬夫)이고, 나주(羅州)³ 사람이다. 홍치(弘治) 병진년(1496)⁴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17년 임오년(1522)에 진사시(進士試)⁵에 합격하였다. 임진년(1532)에 남평 현감(南平縣監)⁶으로서 문과(文科)⁷에 급제하였다. 옥당(玉堂)⁸에 들어가 대사헌(大司憲)⁹, 이조판서(吏曹判書)¹⁰, 병조판서(兵曹判書)¹¹를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때 찬성(贊成)¹²으로서 나주(羅州)로 퇴임하여 돌아갔다. 임오년(1582)¹³에 졸(卒)하니, 향년 87세였다.

주석:

  1. [주-D001] □□ : 《율곡전서(栗谷全書)·좌찬성오공묘지명(左贊成吳公墓誌銘)》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나주(羅州)”가 되어야 한다. 원문 결락 부분을 보충하였다.
  2. 문충공(文忠公): 오겸의 시호(諡號). 시호는 왕이나 공신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기리어 나라에서 내려주던 이름이다.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고, 충(忠)은 위험에 임하여 절개를 지킴(危身奉上), 또는 충성스럽고 공정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김(忠純公正) 등을 의미한다.
  3. 나주(羅州): 본관(本貫)을 나타낸다. 나주 오씨(羅州 吳氏)이다.
  4. 홍치(弘治) 병진년(1496): 홍치는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1488-1505). 병진년은 1496년이다.
  5. 진사시(進士試): 조선 시대 과거(科擧)의 예비 시험 격인 소과(小科) 중 하나. 합격자에게는 진사(進士) 칭호를 주었다. 임오년은 1522년이다.
  6. 남평 현감(南平縣監): 전라도 남평현(현재 나주시 남평읍)의 수령. 종6품.
  7. 문과(文科): 조선 시대 관리 선발 시험인 과거(科擧) 중 문관(文官)을 뽑는 시험. 대과(大科)라고도 한다. 임진년은 1532년이다.
  8.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 관리 및 문한(文翰) 처리, 왕의 자문 등의 기능을 담당하던 관청.
  9.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관장했다.
  10. 이조판서(吏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文官)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다.
  11. 병조판서(兵曹判書): 육조 중 하나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무관(武官)의 인사 및 군사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12. 찬성(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우찬성(右贊成)이 있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보좌하는 재상급 관직이다.
  13. 임오년(1582): 오겸이 사망한 해. 그러나 《율곡전서》의 오겸 묘지명에는 임진년(壬辰年, 1592)에 향년 97세로 졸(卒)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본문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본 번역은 원문에 제시된 정보를 따랐다.

원문:
公幼而穎悟, 材氣夙成, 受業柳君藕。 舅申判書鏛才公之質, 亟稱許焉。

번역문:
공(公)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총명하여 재능과 기개가 일찍 이루어졌으며, 유군우(柳君藕)¹⁴에게서 수학(受學)하였다. 외숙부인 판서(判書) 신상(申鏛)¹⁵이 공의 자질을 재능 있다 여겨, 매우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주석:
14. 유군우(柳君藕):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군우(君藕)는 그의 또 다른 자(字)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5. 신상(申鏛, 1480-153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윤(公潤).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오겸의 외숙부이다.


원문:
公天資溫雅, 處事詳愼, 長於吏才, 剖決如流。 平生不喜發人過失, 謇諤雖不外形, 內有所守。 大被尹元衡所忌, 屢欲中之而不售。 丁巳爲都憲時, 同僚有誣擠士林者, 公不克抑, 以此淸望少減, 至於卜相被劾。 然知公者謂公心事無佗, 必有能辨之者。 家食頤神, 閉戶看書, 自以多疾, 博涉醫方, 常以簡靜自樂, 飮食起居, 皆中節宣, 享淸閑之福者十有三年。【竝栗谷撰碑。】

번역문:
공은 천품(天稟)이 온화하고 아담하며 일 처리가 상세하고 신중하였고, 이재(吏才)¹⁶에 뛰어나 일 처리가 물 흐르듯 하였다. 평생 남의 과실 들추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직언(直言)하는 강직함[謇諤]¹⁷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안으로는 지키는 바가 있었다. 윤원형(尹元衡)¹⁸에게 크게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모함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정사년(1557)¹⁹에 도헌(都憲)¹⁹⁻¹으로 있을 때 동료 중에 사림(士林)²⁰을 무고하여 내쫓으려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이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청망(淸望)²¹이 다소 깎여, 재상 후보로 거론될 때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을 아는 자들은 공의 마음 씀씀이에 다른 뜻이 없었으니 반드시 능히 변호해 줄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집에 머물며 정신을 기르고[頤神]²² 문을 닫고 책을 보았으며, 스스로 병이 많았으므로 의방(醫方)²³을 널리 섭렵하였다. 항상 간소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즐겼으며, 음식과 기거(起居)가 모두 절도에 맞고 조화로워[節宣]²⁴, 13년 동안 청한(淸閑)²⁵한 복을 누렸다.【이상은 율곡(栗谷)²⁶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16. 이재(吏才): 행정 실무 능력. 관료로서의 재능을 의미한다.
17. 건악(謇諤): 거리낌 없이 바른 말을 하는 것. 강직한 성품을 나타낸다.
18. 윤원형(尹元衡, 1509-1565): 조선 중기의 외척이자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적(政敵)인 사림(士林)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9. 정사년(1557): 명종(明宗) 12년.
19-1. 도헌(都憲): 대사헌(大司憲)의 별칭.
20. 사림(士林): 조선 시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학자 관료 집단. 주로 지방에 기반을 두고 학문과 교육에 힘쓰다가 중앙 정치에 진출하여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였다.
21. 청망(淸望): 청렴하고 결백하여 얻은 명망. 주로 사림(士林) 사이에서의 명성을 의미한다.
22. 이신(頤神): 정신을 기름. 편안히 쉬면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뜻한다.
23. 의방(醫方): 의술에 관한 방법이나 처방.
24. 절선(節宣): 절도(節度)와 선화(宣和). 음식, 기거 등의 생활 습관이 적절한 정도를 지키고 조화롭게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25. 청한(淸閑): 맑고 한가함. 속세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26.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원문:
宣祖四年, 爲右議政。 謙立朝, 外雖勤幹, 內乏淳實, 久爲贊成, 不得拜相。 知士類不與, 乃乞骸歸羅州, 至是拜右相, 憲府以非人望劾之, 乃免。【《石潭日記》。】

번역문:
선조 4년(1571)²⁷에 우의정(右議政)²⁸이 되었다. 오겸이 조정에 서서 밖으로는 비록 부지런하고 유능하였으나 안으로는 순수함과 성실함이 부족하여, 오랫동안 찬성(贊成)으로 있었으나 재상(宰相)에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사류(士類)²⁹들이 따르지 않음을 알고 마침내 걸해(乞骸)³⁰하여 나주(羅州)로 돌아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상(右相)³¹에 임명되자, 사헌부(憲府)³²에서 인망(人望)³³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하니 마침내 면직되었다.【《석담일기(石潭日記)》³⁴에서 인용】

주석:
27. 선조 4년(1571): 오겸이 우의정에 임명된 해.
28.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벼슬.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재상직이다.
29. 사류(士類): 사림(士林)과 유사한 의미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 집단, 또는 그들의 정치 세력을 가리킨다.
30. 걸해(乞骸): 늙거나 병든 신하가 사직(辭職)을 간청하던 일. ‘자신의 해골을 거두어 가도록 임금께 빈다’는 의미이다.
31. 우상(右相): 우의정(右議政)의 다른 명칭.
32. 헌부(憲府): 사헌부(司憲府)의 약칭.
33. 인망(人望): 사람들의 신망(信望) 또는 기대.
34. 《석담일기(石潭日記)》: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1634)가 이이의 언행과 시사를 기록한 일기. 그러나 이 기록은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나 《석담일기》 원본에는 보이지 않아 출처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다른 기록에는 이 내용이 이이의 저술로 인용되기도 한다.



이윤경(李潤慶)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潤慶【正獻公。】
字重吉, 廣州人。 弘治戊午生。 中宗二十六年辛卯進士, 甲午登第。 薦入翰院, 歷弘文著作・校理、吏曹佐郞、大司諫、義州・全州府尹、全羅監司, 官至兵曹判書。 明宗壬戌, 以平安監司卒于任所, 年六十五。

번역문:
이윤경(李潤慶)【정헌공(正獻公)¹이다.】
자는 중길(重吉)이고, 광주(廣州)² 사람이다. 홍치(弘治) 무오년(1498)³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6년 신묘년(1531)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갑오년(1534)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천거되어 한원(翰苑)⁵에 들어가,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⁶·교리(校理)⁷, 이조 좌랑(吏曹佐郞)⁸, 대사간(大司諫)⁹, 의주 부윤(義州府尹)¹⁰·전주 부윤(全州府尹),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¹¹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병조판서(兵曹判書)¹²에 이르렀다. 명종(明宗) 임술년(1562)¹³에 평안도 감사(平安道監司)로서 임지(任所)¹⁴에서 졸(卒)하니, 향년 65세였다.

주석:

  1. 정헌공(正獻公): 이윤경의 시호(諡號). 정(正)은 정직하고 강직함(正直接諫) 등을, 헌(獻)은 총명하고 예지(睿智)가 있음(聰明睿智) 등을 의미한다.
  2. 광주(廣州): 본관(本貫)을 나타낸다. 광주 이씨(廣州 李氏)이다.
  3. 홍치(弘治) 무오년(1498): 홍치는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1488-1505). 무오년은 1498년이다.
  4. 신묘년(1531), 갑오년(1534): 각각 진사시 합격 연도와 문과 급제 연도이다.
  5. 한원(翰苑): 문한(文翰)을 다루는 관청, 즉 홍문관(弘文館)이나 예문관(藝文館) 등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6.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 홍문관의 정8품 관직.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및 문한(文翰) 처리를 담당했다.
  7. 교리(校理): 홍문관 또는 춘추관(春秋館)의 정5품 관직. 왕의 자문에 응하고 경연(經筵)에 참여하며 문서를 찬술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8.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조(吏曹)의 정6품 관직. 정랑(正郞)과 함께 전랑(銓郞)이라 불리며 문관의 인사 행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9.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10. 부윤(府尹): 조선 시대 부(府)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지역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의주(義州)와 전주(全州)는 당시 중요한 행정 구역이었다.
  11. 감사(監司): 각 도(道)의 으뜸 벼슬인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종2품.
  12. 병조판서(兵曹判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무관(武官)의 인사 및 군사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13. 임술년(1562): 명종(明宗) 17년. 이윤경이 사망한 해이다.
  14. 임지(任所): 임무를 맡아 나가 있는 곳.

원문:
七歲, 家覆配遠郡, 及中廟靖國, 始得歸洛。 大夫人親授《孝經》、《大學》曰: “汝輩不振惕勤謹, 不名爲人。” 公入奉敎訓, 專意讀書。【《潛谷舊錄》。】

번역문:
일곱 살 때 집안이 화(禍)를 입어 먼 군(郡)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¹⁵에 이르러 비로소 서울[洛]¹⁶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부인(大夫人, 어머니)께서 친히 《효경(孝經)》¹⁷과 《대학(大學)》¹⁸을 가르쳐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분발하고 경계하며 부지런하고 삼가지 않으면 사람이라 이름할 수 없다.’고 하셨다. 공(公)은 가르침을 받들어 오로지 뜻을 독서에 두었다.【《잠곡구록(潛谷舊錄)》¹⁹에서 인용】

주석:
15.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燕山君)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晉城大君, 후의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이윤경의 아버지가 연산군 때 화를 입었음을 시사한다.
16. 낙(洛): 낙양(洛陽). 조선 시대에는 수도인 한양(漢陽, 서울)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17. 《효경(孝經)》: 유교의 기본 경전 중 하나로, 효(孝)의 원리와 실천 방법을 설명한 책.
18. 《대학(大學)》: 사서(四書) 중 하나로, 유교의 수양론(修養論)과 정치 철학의 기본 원리를 제시한 책.
19. 《잠곡구록(潛谷舊錄)》: 이윤경 가문이나 관련 인물의 기록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서명이나 저자는 확인하기 어렵다. 잠곡(潛谷) 김육(金堉)과는 시대가 맞지 않는다.


원문:
中廟御思政殿視銓注時, 公以銓郞入侍, 御筆題公名爲校理。【《紀年通攷》。】

번역문:
중종께서 사정전(思政殿)²⁰에 납시어 전주(銓注)²¹를 보실 때, 공이 전랑(銓郎)²²으로서 입시(入侍)²³하였는데, 임금께서 직접 공의 이름을 써서 교리(校理)²⁴로 삼으셨다.【《기년통고(紀年通攷)》²⁵에서 인용】

주석:
20. 사정전(思政殿): 경복궁(景福宮)의 편전(便殿)으로, 국왕이 평상시 정사를 보던 곳.
21. 전주(銓注): 관리 임명 후보자의 명단[注]을 살펴 임명[銓]하는 일. 즉 인사 행정을 의미한다.
22. 전랑(銓郎): 이조(吏曹)의 정랑(正郞, 정5품)과 좌랑(佐郞, 정6품)을 통칭하는 말. 인사 행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윤경은 당시 이조 좌랑이었다.
23. 입시(入侍): 신하가 임금을 모시고 그 앞에 나아가는 것.
24. 교리(校理): 홍문관 또는 춘추관의 정5품 관직.
25. 《기년통고(紀年通攷)》: 서명으로 보아 편년체 역사서로 추정된다. 홍봉한(洪鳳漢)의 《동국기년(東國紀年)》 등 유사 서명과의 관련성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원문:
公嘗駁李芑麤險, 出爲星州牧使, 士民心服, 有雲間李使君之謠。

번역문:
공이 일찍이 이기(李芑)²⁶의 조잡하고 음험함을 반박하다가 성주 목사(星州牧使)²⁷로 나가게 되었는데, 사민(士民)²⁸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여 ‘운간(雲間) 이사군(李使君)’²⁹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주석:
26. 이기(李芑, 1476-1552): 조선 중기의 권신. 윤원형(尹元衡) 등과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사림(士林)을 탄압했다.
27. 성주 목사(星州牧使): 경상도 성주목(星州牧)의 수령. 정3품.
28. 사민(士民): 선비와 일반 백성.
29. 운간(雲間) 이사군(李使君): ‘운간’은 이윤경의 본관인 광주(廣州)의 옛 이름 또는 별칭으로 추정된다. ‘사군(使君)’은 목사(牧使)나 부사(府使) 등 지방관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즉, ‘광주 출신 이 목사님’ 정도의 의미로,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부른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원문:
甲寅, 出尹完山。 乙卯, 倭迫靈巖, 觀察使牒公爲守城將, 公急調精銳入據之。 季公爲都巡察, 住牙錦城, 檄公曰: “防禦使旣入城, 假將還守本城。” 公答書曰: “我動且不測, 常恐不得死所, 吾不可去。” 已而賊拘提俘虜, 直至城下, 斬斫擲首, 踊躍吹唇, 爲登陴狀, 人思奔潰。 公自巡視, 厲以忠義, 士卒激勸無反意。 麾下請出兵嘗賊, 公知其可用, 乃犒遣之, 多所馘獻, 無不立賞。 有被創者, 爲之垂泣, 人益感奮, 卒全孤城。 上奬諭陞秩, 拜爲監司。

번역문:
갑인년(1554)³⁰에 완산 부윤(完山府尹)³¹으로 나갔다. 을묘년(1555)³²에 왜구(倭寇)가 영암(靈巖)을 핍박하자, 관찰사(觀察使)가 공에게 공문(牒)³³을 보내 수성장(守城將)³⁴으로 삼으니, 공이 급히 정예병을 징발하여 성(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계공(季公, 이계(李季))³⁵이 도순찰사(都巡察使)³⁶가 되어 아금성(牙錦城)³⁷에 머무르면서 공에게 격문(檄文)³⁸을 보내 말하기를, ‘방어사(防禦使)³⁹가 이미 성에 들어왔으니, 가수(假守)⁴⁰는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 지키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답서(答書)하여 말하기를, ‘내가 움직이면 또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항상 죽을 곳을 얻지 못할까 두려우니, 나는 떠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얼마 후 적(賊)이 포로를 끌고 와 성 아래에 바로 이르러 목을 베어 머리를 던지고, 뛰면서 입술을 불며 성가퀴[陴]⁴¹에 오르려는 형세를 보이니,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날 생각을 하였다. 공이 직접 순시(巡視)하며 충의(忠義)로써 독려하니, 사졸(士卒)들이 격려되어 배반할 뜻이 없었다. 휘하(麾下)⁴²에서 출병(出兵)하여 적을 시험해 볼 것[嘗賊]⁴³을 청하자, 공이 그들을 쓸 만하다고 여겨 마침내 음식을 먹여[犒]⁴⁴ 내보내니, 목 베어 바친 것[馘獻]⁴⁵이 많았고 즉시 상(賞)을 내리지 않음이 없었다. 부상당한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더욱 감격하고 분발하여 마침내 외로운 성(孤城)을 온전히 지켰다. 상(上)께서 장려하고 타이르며 품계(品階)를 올려주시고[陞秩]⁴⁶ 감사(監司)로 임명하셨다.

주석:
30. 갑인년(1554): 명종 9년.
31. 완산 부윤(完山府尹): 완산은 전주(全州)의 옛 이름. 전주 부윤을 의미한다.
32. 을묘년(1555): 명종 10년. 이 해에 대규모 왜구가 전라도 연안을 침입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다.
33. 첩(牒): 관청에서 보내는 공문서의 일종.
34. 수성장(守城將): 성을 지키는 장수.
35. 계공(季公): 이계(李季, 150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36. 도순찰사(都巡察使): 조선 시대 변방이나 군사적 요충지에 임시로 파견되던 군사 지휘관. 관찰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37. 아금성(牙錦城):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전라도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8. 격문(檄文): 어떤 일을 널리 알리거나 촉구하기 위해 쓰는 글. 군사적으로는 적을 성토하거나 아군을 독려하는 데 쓰였다.
39. 방어사(防禦使): 조선 시대 각 도의 주요 군사 요충지에 파견되어 방어 임무를 맡던 무관직.
40. 가수(假守): 임시로 성을 지키는 장수. 여기서는 이윤경을 가리킨다.
41. 비(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성가퀴. ‘등비(登陴)’는 성가퀴에 오르는 것, 즉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42. 휘하(麾下): 장수의 지휘 아래 있는 부하.
43. 상적(嘗賊): 적의 형세나 전투력을 시험해 보는 것.
44. 호(犒): 군사들에게 음식이나 술을 주어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
45. 객헌(馘獻): 적의 목을 베어 바치는 것.
46. 승질(陞秩): 품계(品階)나 관등(官等)을 올리는 것.


원문:
公之子中悅, 與李輝有私語, 犯時忌。 乙巳之禍, 中悅欲以輝言告變, 稟于公, 公曰: “身死雖可惜, 朋友豈可背乎?” 中悅問于叔父浚慶, 浚慶曰: “不可爲朋友, 而自就死地。” 中悅乃告, 亦不免死。 乙卯倭變, 浚慶爲元帥, 貽書于公曰: “賊鋒甚銳, 願兄勿進。” 答曰: “受國厚恩, 當以死報。” 遂赴靈巖得捷, 浚慶頗有逗撓之狀, 顯被人譏, 人皆知弟劣於兄。【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의 아들 중열(中悅)이 이휘(李輝)⁴⁷와 사사로이 나눈 말이 당시의 기휘(時忌)⁴⁸에 저촉되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⁴⁹ 때 중열이 이휘의 말을 가지고 고변(告變)⁵⁰하려 하여 공에게 여쭈니, 공이 말하기를, ‘몸이 죽는 것이 비록 애석하나, 어찌 친구를 배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중열이 숙부(叔父) 준경(浚慶)⁵¹에게 물으니, 준경이 말하기를, ‘친구를 위해 스스로 죽을 곳에 나아갈 수는 없다.’고 하였다. 중열이 마침내 고변하였으나, 역시 죽음을 면하지는 못하였다.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준경이 원수(元帥)⁵²가 되어 공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적의 칼날이 매우 날카로우니, 원컨대 형님께서는 나아가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영암(靈巖)으로 달려가 승첩(捷)을 거두었으나, 준경은 자못 지체하고 머뭇거리는[逗撓]⁵³ 모습이 있어 드러내놓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아우가 형보다 못함을 알았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47. 이휘(李輝, ?-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의 아들.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48. 시기(時忌): 당시에 꺼리던 일. 을사사화 직후의 살벌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반대파로 몰릴 수 있는 언행을 삼가던 상황을 가리킨다.
49.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尹元衡) 일파(소윤, 小尹)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인종(仁宗)의 외척 윤임(尹任) 일파(대윤, 大尹) 및 사림(士林)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
50. 고변(告變): 반역이나 모반을 고발하는 것.
51. 준경(浚慶):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이윤경의 동생.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52. 원수(元帥): 전쟁 시 군대를 총지휘하는 최고 사령관.
53. 두뇨(逗撓): 머뭇거리며 지체함. 결단력 없이 꾸물거리는 모양.


원문:
上以關西爲重, 選公出鎭, 時大病羸瘁, 乃曰: “一息尙存, 曷敢求安?” 八月, 卒于公館。【《紀年通攷》。】

번역문:
상(上)께서 관서(關西)⁵⁴ 지방을 중시하여 공을 선발하여 출진(出鎭)⁵⁵시키셨는데, 이때 크게 병들어 몸이 여위고 지쳤으나, 이에 말하기를, ‘한 숨이라도 아직 붙어있으니, 어찌 감히 편안함을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8월에 공관(公館)⁵⁶에서 졸(卒)하였다.【《기년통고(紀年通攷)》에서 인용】

주석:
54. 관서(關西): 철령관(鐵嶺關) 서쪽 지방, 즉 평안도(平安道)를 가리키는 말.
55. 출진(出鎭): 지방의 중요한 곳에 파견되어 다스리거나 지키는 것. 여기서는 평안도 감사로 부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56. 공관(公館): 관리가 공무(公務)로 머무는 관사(官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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