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동(金壽童)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金壽童【文敬¹公。】
字眉叟, 安東人。 天順丁丑生。 成宗五年甲午生員, 丁酉登第, 授弘文正字。 燕山朝, 歷慶尙、全羅、京畿三道觀察使, 陞右贊成, 拜相²。 中宗反正, 參靖國功臣, 封永嘉府院君。 官至領議政。 壬申卒, 年五十六。
번역문:
김수동(金壽童)【문경공(文敬公)³이다.】
자는 미수(眉叟)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⁴ 천순(天順) 정축년(1457)에 태어났다.⁵ 성종(成宗) 5년 갑오년(1474)에 생원(生員)⁶이 되고, 정유년(1477)에 문과에 급제하여⁷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⁸에 제수되었다. 연산군(燕山君) 시대에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삼도(三道)의 관찰사(觀察使)⁹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¹⁰으로 승진하였으며, 정승(政丞)¹¹에 임명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¹² 때 정국공신(靖國功臣)¹³에 참여하여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¹⁴에 봉해졌다. 관직은 영의정(領議政)¹⁵에 이르렀다. 임신년(1512)에 향년 56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 [주-D001] 敬 : 저본(底本)에는 “경(景)”으로 되어 있다. 《이락정집(二樂亭集)・영가부원군김공신도비명(永嘉府院君金公神道碑銘)》 및 《중종실록(中宗實錄)》 7년 7월 7일 기사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 [주-D002] 相 : 저본에는 없다.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야언(海東野言)・중종(中宗)》 및 《이락정집・영가부원군김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 문경공(文敬公): 김수동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충(忠)은 밤낮으로 공경하고 삼감(夙夜恭敬), 또는 외모와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숙함(貌能莊肅) 등을 의미한다.
- 안동인(安東人):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임을 나타낸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 천순(天順) 정축년(丁丑年): 1457년. 천순은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 생원(生員): 조선 시대 소과(小科)의 하나인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 정유년(丁酉年) 등제(登第): 성종 8년(1477)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홍문관(弘文館)의 정9품 관직. 경적(經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등을 담당했다.
-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 우찬성(右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함께 삼정승(三政丞) 다음가는 재상직이다.
- 배상(拜相): 정승(政丞)에 임명됨. 김수동은 연산군 11년(1505)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 훗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호. 김수동은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공신에게 주던 부원군(府院君)의 봉호(封號). 영가(永嘉)는 그의 본관인 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김수동은 중종 7년(1512)에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7월에 사망하였다.
원문:
甲寅冬, 成廟禮陟。 翌年乙卯, 皇帝遣使弔祭前王, 冊封新君。 朝廷以舊例中朝使到國, 必審問詔勅頒迎之儀, 多往復難定, 擇練達典故、詳於《禮儀》者, 以公充問禮官。 明使見公儀度, 聽言講禮, 彼此意達, 一無疑沮, 蓋心服之也。【申二樂用漑撰碑。】
번역문:
갑인년(1494) 겨울에 성종(成廟)¹⁶께서 예로써 승하하셨다.¹⁷ 이듬해 을묘년(1495)에 황제(皇帝)¹⁸가 사신을 보내 선왕(前王)을 조문하고 제사 지내며 새로운 임금¹⁹을 책봉(冊封)하였다. 조정에서는 예전의 관례에 따라 중국 조정(中朝)의 사신이 나라에 도착하면 반드시 조서(詔書)와 칙서(勅書)를 반포하고 맞이하는 의식(儀式)에 대해 자세히 물었는데, 여러 차례 의견이 오가며 결정하기 어려웠으므로, 전고(典故)²⁰에 익숙하고 《예의(禮儀)》²¹에 상세한 사람을 뽑아 공(公)을 문례관(問禮官)²²으로 충당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공의 위의(儀度)²³를 보고 예(禮)를 설명하는 말을 듣고는 피차의 뜻이 통하여 조금도 의심하거나 막히는 것이 없었으니, 아마도 마음속으로 탄복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신용개(申用漑)²⁴가 지은 비(碑)에서 인용】
주석:
16. 성묘(成廟): 조선 제9대 임금 성종(成宗)의 묘호(廟號).
17. 예척(禮陟): 임금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승하(昇遐).
18. 황제(皇帝): 당시 명(明)나라 효종(孝宗) 홍치제(弘治帝)를 가리킨다.
19. 신군(新君): 새로 즉위한 임금.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조선의 국왕은 즉위 후 명나라 황제의 책봉(冊封)을 받아야 정식으로 국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20. 전고(典故): 이전의 제도나 관례, 고사(故事).
21. 《예의(禮儀)》: 예법(禮法)과 의식(儀式)에 관한 기록. 특정 예서(禮書)를 지칭할 수도 있고, 예법 전반을 의미할 수도 있다.
22. 문례관(問禮官): 의례(儀禮)에 관해 묻고 답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주로 외국 사신 접대 시 의전 절차를 협의하는 역할을 했다.
23. 위의(儀度): 몸가짐과 태도.
24. 신용개(申用漑, 1463-1519): 호는 이락정(二樂亭), 송재(松齋). 조선 전기의 문신. 김수동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원문:
蔡仁川壽爲都承旨時, 公爲注書, 年少登第, 容顔秀美, 處事精敏, 仁川每嘉歎不已。 仁川夫人適懷孕當産, 仁川每仕罷還家, 語夫人曰: “若生子, 當名壽童。” 未幾, 果生子, 遂命名壽童, 卽參判紹權小名也。 其後仁川未免嘉善, 而公已居首相, 宦路翻覆若此, 可笑。【《思齋集》。】
번역문:
인천(仁川) 채수(蔡壽)²⁵가 도승지(都承旨)²⁶로 있을 때 공(公)은 주서(注書)²⁷였는데, 젊은 나이에 급제하여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으며 일 처리가 정밀하고 민첩하여, 채인천(蔡仁川)이 매번 아름답게 여기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마침 인천부인(仁川夫人)이 임신하여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채인천이 매번 퇴청하여 집에 돌아오면 부인에게 말하기를, “만약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이름을 수동(壽童)이라 지어야 하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아들을 낳자 마침내 수동이라 이름 지으니, 이가 바로 참판(參判) 채소권(蔡紹權)²⁸의 아명(小名)이다. 그 후 채인천은 가선대부(嘉善大夫)²⁹를 면치 못하였으나 공은 이미 수상(首相)³⁰의 자리에 있었으니, 관직의 길이 뒤바뀌는 것이 이와 같으니, 우스운 일이다.【《사재집(思齋集)》³¹에서 인용】
주석:
25. 채수(蔡壽, 1449-1515): 본관은 인천(仁川).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나재(懶齋).
26. 도승지(都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으뜸 벼슬.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직책이었다.
27. 주서(注書): 승정원의 정7품 관직. 임금 앞에서 사관(史官)의 역할을 하며 모든 정사를 기록하였다. 김수동은 성종 11년(1480)에 주서로 임명되었다.
28. 채소권(蔡紹權, 1495-1549): 채수의 아들. 자는 백승(伯承). 호조 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했다. 아버지가 김수동의 이름을 따서 아명을 지어준 일화이다.
29.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명. 채수가 도승지(정3품)를 지낸 후 종2품 품계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30. 수상(首相): 정승 중 으뜸인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31. 《사재집(思齋集)》: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문집.
원문:
金壽童端重多智, 自爲儒士, 及至大相, 人莫能議其是非。 當燕山凶殘之時, 被寵任相, 而亦能隨時低仰, 上不獲罪, 下能活人, 搢紳之士多賴以全。 當時在相位者, 競治第宅, 務極華侈, 苞苴成市, 門墻如沸, 壽童獨不然。【《海東野言》。】
번역문:
김수동은 단정하고 신중하며 지혜가 많아, 젊은 유생(儒生) 시절부터 대상(大相)³²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그의 시비(是非)를 능히 평론하지 못하였다. 연산군(燕山)이 흉악하고 잔인하던 시대를 당하여 총애받고 신임받는 정승이었으나, 또한 능히 시세(時勢)에 따라 몸을 낮추고 굽힐 줄 알아 위로는 죄를 얻지 않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으니, 높은 벼슬아치(搢紳)³³들이 많이 그에게 의지하여 온전할 수 있었다. 당시에 재상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경쟁적으로 저택을 지어 사치스러움을 극도로 힘썼고, 뇌물(苞苴)³⁴이 시장을 이루어 문 앞이 시끄럽기(門墻如沸)³⁵가 들끓는 듯하였으나, 수동만은 유독 그렇지 않았다.【《해동야언(海東野言)》³⁶에서 인용】
주석:
32. 대상(大相): 큰 재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三政丞)을 가리킨다.
33. 진신(搢紳): 홀(笏)을 허리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높은 벼슬아치 또는 사대부 계층을 가리킨다.
34. 포저(苞苴): 물건을 싸는 데 쓰는 풀(苞)과 깔개(苴)라는 뜻으로, 뇌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35. 문장여비(門墻如沸): 문과 담장이 들끓는 것 같다는 뜻으로, 권세가의 문전에 청탁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매우 번잡한 모습을 형용한다.
36. 《해동야언(海東野言)》: 조선 중기의 문신 허봉(許篈, 1551-1588)이 지은 야사(野史) 모음집.
원문:
燕山末年政亂, 成希顔等密謀廢立, 時金公壽童爲左相。 成公已與諸人定議, 往白金相于家。 金公聞言, 良久答曰: “豈有一宰相便來, 遽以是爲言哉? 爾須斷吾頭而去。” 仍伸頸出案。 成公惶恐伏地, 更言曰: “宗社已危, 吾輩不得已爲此謀, 實是推戴晉城大君。” 時中廟以介弟居晉邸。 金公曰: “若然則我亦當往, 爾須先去。” 成公起出, 金公徐整衣冠, 辟人而來。 時靖國諸公皆以戎服率軍, 結陣于昌德宮前。 金公到陣, 下馬徑入據上座, 卽召兵曹判書問曰: “爾等遺護衛晉城大君第耶?” 答曰: “未及。” 卽曰: “判書須親率軍人往衛。” 仍入闕廢出燕山, 泣曰: “老臣不死, 忍見此事。 然殿下失人心太甚, 亦復奈何? 好保而往。 云云。” 遂迎立中廟。 其後辭職, 家居而卒。【《海東樂府》。】
번역문:
연산군 말년에 정치가 혼란하자 성희안(成希顔) 등이 폐립(廢立)³⁷을 비밀리에 모의하였는데, 이때 김공(金公) 수동은 좌상(左相)³⁸이었다. 성공(成公)³⁹이 이미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정하고 김상(金相)의 집으로 가서 아뢰었다. 김공이 말을 듣고 한참 있다가 답하였다. “어찌 한 재상이 문득 와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너는 모름지기 내 머리를 베고 가라.” 이어서 목을 내밀어 책상 앞으로 내놓았다. 성공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다시 말하였다. “종묘사직(宗社)이 이미 위태로워 저희들이 부득이하게 이 모의를 하였으니, 실로 진성대군(晉城大君)⁴⁰을 추대하려는 것입니다.” 이때 중종(中廟)께서는 왕의 동생(介弟)⁴¹으로서 진성대군의 사저(晉邸)⁴²에 계셨다. 김공이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나 또한 마땅히 갈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먼저 가라.” 성공이 일어나 나가자, 김공은 천천히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사람들을 물리치고 왔다. 이때 정국(靖國)⁴³의 여러 공(公)들이 모두 군복(戎服) 차림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 앞에 진(陣)을 치고 있었다. 김공이 진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곧바로 들어가 상좌(上座)⁴⁴에 자리 잡고, 즉시 병조판서(兵曹判書)⁴⁵를 불러 물었다. “너희들은 진성대군 댁에 호위병을 보냈는가?” 답하기를 “미처 못했습니다.”라고 하자, 즉시 말하였다. “판서는 모름지기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라.” 이어서 궁궐로 들어가 연산군을 폐위시켜 나오게 하고, 울면서 말하였다. “늙은 신하가 죽지 않고 차마 이런 일을 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인심(人心)을 잃음이 너무 심하시니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잘 보전하여 가십시오. 운운(云云).” 마침내 중종을 맞이하여 세웠다. 그 후에 관직을 사양하고 집에서 지내다가 졸하였다.【《해동악부(海東樂府)》⁴⁶에서 인용】
주석:
37. 폐립(廢立): 임금을 폐하고 새로 세움. 중종반정(中宗反正)을 가리킨다.
38. 좌상(左相): 좌의정(左議政). 당시 김수동은 우의정이었으나, 반정 계획 시 좌의정 허침(許琛)이 병으로 불참하고 우의정 신준(申浚)이 소극적이어서 실질적으로 김수동이 재상 대표격으로 참여하게 된 정황을 반영한 표현일 수 있다. 혹은 단순히 재상을 통칭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1506년 9월 반정 직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39. 성공(成公): 성희안(成希顔, 1461-1513). 중종반정의 핵심 인물.
40.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봉호. 성종의 둘째 아들이다.
41. 개제(介弟): 임금의 동생. 진성대군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다.
42. 진저(晉邸):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43. 정국(靖國): 나라를 안정시킴. 여기서는 중종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을 가리킨다. 정국공신(靖國功臣).
44. 상좌(上座): 윗자리. 좌장(座長)의 자리를 의미하며, 김수동이 반정 세력의 최고 원로로서 주도권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45. 병조판서(兵曹判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 당시 병조판서는 유순정(柳順汀)이었다.
46. 《해동악부(海東樂府)》: 심광세(沈光世, 1577-1624)가 편찬한 시가집. 주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시들을 모았다.
원문:
公資性敏達, 操履恭謹。 簡素自飭, 不敢飾服美。 守心溫恕, 與物無忤。 早捷科第, 敡歷三朝, 莅事精幹, 出入經帷、臺閣, 按節三道, 踐履六卿, 卒登台鉉, 以佐聖主中興之治。 世方倚以爲重, 而年未耳順, 天奪之速, 痛哉!【碑。】
번역문:
공(公)은 자성(資性)이 민첩하고 통달하였으며, 몸가짐(操履)⁴⁷이 공손하고 삼갔다. 간소(簡素)하게 스스로를 단속하여 감히 의복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다. 마음 지키기를 온화하고 너그럽게 하여 다른 사람(物)⁴⁸들과 더불어 거스름이 없었다. 일찍이 과거(科第)에 합격하여 삼조(三朝)⁴⁹를 두루 거치면서 일에 임하여 정밀하고 유능하였으며, 경유(經帷)⁵⁰와 대각(臺閣)⁵¹을 출입하였고, 삼도(三道)에서 안절(按節)⁵²하였으며, 육경(六卿)⁵³을 역임하고 마침내 태현(台鉉)⁵⁴에 올라 성스러운 임금의 중흥(中興)의 다스림⁵⁵을 보좌하였다. 세상이 바야흐로 그에게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는데, 나이가 이순(耳順)⁵⁶에 이르지 못하여 하늘이 그를 빼앗아감이 빨랐으니, 애통하도다!【비(碑)에서 인용】
주석:
47. 조리(操履): 지조(志操)와 행실(行實). 몸가짐, 행실.
48. 물(物): 사물 또는 사람.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을 의미한다.
49. 삼조(三朝): 세 임금의 조정.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의 치세를 가리킨다.
50. 경유(經帷): 경연(經筵)의 장막. 임금 앞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정사를 논하는 자리. 또는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자리를 비유한다.
51. 대각(臺閣): 대간(臺諫)과 각신(閣臣).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통칭한다. 언론과 학술을 담당하는 청요직(淸要職)을 의미한다.
52. 안절(按節): 절(節)은 부절(符節)로, 관찰사(觀察使) 등 지방관에게 주던 신표이다. ‘안절’은 관찰사로서 지방을 순찰하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53. 육경(六卿): 육조(六曹: 이·호·예·병·형·공조)의 판서(判書)를 가리킨다.
54. 태현(台鉉): 삼공(三公), 즉 삼정승(三政丞)을 가리킨다. 솥(鉉)의 세 발(台)처럼 국가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직책이라는 의미이다.
55. 성주중흥지치(聖主中興之治): 성스러운 임금(중종)이 중흥(中興)을 이룬 다스림. 중종반정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를 안정시킨 것을 의미한다.
56. 이순(耳順): 나이 60세를 가리키는 말. 공자(孔子)가 60세에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논어》〈위정〉). 김수동은 56세에 사망했으므로 이순에 이르지 못했다.
송일(宋軼)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宋軼【肅靖公。】
字可仲, 礪山人。 景泰甲戌生。 成宗八年丁酉進士, 仍登第。 選入玉堂, 爲著作, 陞修撰, 歷兩司、春坊、直提學、副提學、承旨、黃海・平安道觀察使、吏曹參判、刑曹・禮曹判書、京畿觀察使。 中宗反正, 參靖國功臣, 拜右贊成、吏曹判書, 封礪原府院君。 壬申拜相, 至領議政。 庚辰卒, 年六十七。
번역문:
송일(宋軼)【숙정공(肅靖公)⁵⁷이다.】
자는 가중(可仲)이고, 여산(礪山) 사람이다.⁵⁸ 경태(景泰) 갑술년(1454)에 태어났다.⁵⁹ 성종(成宗) 8년 정유년(1477)에 진사(進士)⁶⁰가 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옥당(玉堂)⁶¹에 선발되어 들어가 저작(著作)⁶²이 되었고, 수찬(修撰)⁶³으로 승진하였으며, 양사(兩司)⁶⁴, 춘방(春坊)⁶⁵, 직제학(直提學)⁶⁶, 부제학(副提學)⁶⁷, 승지(承旨)⁶⁸, 황해도·평안도 관찰사(觀察使), 이조 참판(吏曹參判)⁶⁹, 형조·예조 판서(刑曹·禮曹判書)⁷⁰, 경기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정국공신(靖國功臣)⁷¹에 참여하여 우찬성(右贊成), 이조 판서에 임명되고,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⁷²에 봉해졌다. 임신년(1512)에 정승(政丞)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경진년(1520)에 향년 67세로 졸하였다.
주석:
57. 숙정공(肅靖公): 송일의 시호. 숙(肅)은 강직하고 과감하며 굳셈(剛德克就), 정(靖)은 너그럽고 공손하며 고요함(寬敬靖民) 등을 의미한다.
58. 여산인(礪山人): 본관이 여산(礪山)임을 나타낸다. 여산 송씨(礪山 宋氏).
59. 경태(景泰) 갑술년(甲戌年): 1454년. 경태는 명나라 대종(代宗) 경태제(景泰帝)의 연호이다.
60. 진사(進士): 조선 시대 소과의 하나인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
61.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62. 저작(著作): 홍문관의 정8품 관직.
63. 수찬(修撰): 홍문관의 정6품 관직.
64.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65.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66. 직제학(直提學): 홍문관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책.
67.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종3품 관직. 제학(提學) 다음가는 직책이다.
68. 승지(承旨):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 도승지 이하 6승지가 있었다.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69.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조(吏曹)의 종2품 버금 벼슬.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다.
70. 형조·예조 판서(刑曹·禮曹判書):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각각 법률·형옥, 의례·외교·과거 등을 담당했다.
71.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송일은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72.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 공신에게 주던 부원군(府院君)의 봉호. 여원(礪原)은 그의 본관인 여산(礪山)을 가리킨다.
원문:
公生歲餘, 外祖嘗抱登樓, 偶失手墮樓下, 倉皇視之, 則已匍匐就行, 無所傷。 及知讀書, 業日進, 有遠大志。 祖贊成公奇之曰: “此兒將大吾門。”
번역문:
공(公)이 태어난 지 한 살 남짓 되었을 때, 외조부께서 일찍이 안고 누각(樓閣)에 올랐다가 우연히 손을 놓쳐 누각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창황히(倉皇)⁷³ 살펴보니 이미 기어서 가고 있었고 다친 곳이 없었다. 글 읽을 줄 알게 되자 학업(學業)이 날로 진보하였고 원대한 뜻(遠大志)이 있었다. 조부(祖父) 찬성공(贊成公)⁷⁴께서 기특하게 여겨 말씀하셨다. “이 아이가 장차 우리 가문(吾門)을 크게 일으키겠구나.”
주석:
73. 창황(倉皇): 매우 당황하고 허둥지둥하는 모양.
74. 찬성공(贊成公): 조부인 송자연(宋自淵)을 가리킨다. 그는 세조 때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원문:
公天資忠愨, 識量宏偉, 胸次豁達。 長不踰中人, 而望之如山岳之重。 其平居談論, 雜以諧謔, 和氣融然。 當大事, 色莊氣肅, 確然不動。 爲文辭, 操筆便就。 涉獵書史, 旁通韜略, 世之論將者, 以公爲首。
번역문:
공(公)은 천성(天資)이 충성스럽고 성실하며(忠愨), 식견과 도량(識量)이 넓고 컸으며(宏偉), 흉금(胸次)⁷⁵이 활달(豁達)하였다. 키는 보통 사람(中人)을 넘지 못하였으나, 바라보면 산악(山岳)의 무게감과 같았다. 평소 거처하며 담론(談論)할 때는 해학(諧謔)⁷⁶을 섞어 화기(和氣)가 넘실거렸다. 큰일을 당해서는 얼굴빛이 장엄하고 기운이 엄숙하여(色莊氣肅) 흔들림이 없었다. 문사(文辭)를 지을 때는 붓을 잡으면 바로 이루었다. 서사(書史)⁷⁷를 널리 읽고 병법(韜略)⁷⁸에도 두루 통달하여, 세상에서 장수감(將材)을 논하는 자들은 공을 첫째로 꼽았다.
주석:
75. 흉차(胸次): 마음속. 흉금(胸襟).
76. 해학(諧謔): 익살스럽고 우스운 말이나 짓.
77. 서사(書史):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78. 도략(韜略):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아울러 이르는 말. 병법(兵法) 또는 군사 전략을 의미한다.
원문:
公性不喜紛華, 自奉甚簡。 自釋褐遇知成廟, 上嘗曰: “得人安得如宋某?” 嘗閱公月課之作曰: “此是⁷⁹宋某忠誠所發。”
번역문:
공(公)은 성품이 화려함(紛華)을 좋아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받드는 것(自奉)⁸⁰이 매우 간소하였다. 처음 관직에 나아간(釋褐)⁸¹ 때부터 성종(成廟)의 알아줌을 받았는데, 상(上)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인재를 얻는 것이 어찌 송모(宋某)⁸²와 같은 이를 얻는 것과 같겠는가?”라고 하셨다. 일찍이 공이 매달 지어 올린 과제(月課之作)⁸³를 열람하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송모의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다.”
주석:
79. [주-D001] 是 : 저본에는 뒤에 “차시(此是)”가 더 있다. 장서각본에 근거하여 삭제하였다.
80. 자봉(自奉): 자기 자신을 대접하거나 생활하는 것. 생활 방식.
81. 석갈(釋褐): 갈옷(褐)을 벗는다는 뜻으로, 평민 신분을 벗어나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82. 송모(宋某): 송일(宋軼)을 가리킨다. ‘모(某)’는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대신 쓰는 말이다.
83. 월과지작(月課之作): 매달 정해진 과제로 지어 올린 글. 조선 시대에는 문신들에게 매달 시(詩), 부(賦), 의(義), 책(策) 등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원문:
公厖眉高準, 狀若微頞。 上嘗因進見, 目送之曰: “宋某有何不快, 乃爾蹙頞?” 蓋量公而戲之也。
번역문:
공(公)은 눈썹이 짙고(厖眉)⁸⁴ 콧대가 높았는데(高準), 모습이 마치 약간 코를 찡그린 듯하였다(微頞)⁸⁵. 상(上)께서 일찍이 공이 들어와 뵙는(進見) 것을 인하여 눈짓으로 보내며 말씀하셨다. “송모는 무슨 불쾌한 일이 있기에 저토록 코를 찡그리는가?” 이는 대개 공을 헤아리며 농담하신 것이다.
주석:
84. 방미(厖眉): 털이 많고 짙은 눈썹.
85. 미알(微頞): 약간 코를 찡그림. ‘알(頞)’은 콧대 또는 이마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축알(蹙頞, 코나 이마를 찡그림)’과 관련지어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
公晩年卜宅於城東, 樂其泉石之趣, 陶然不與世故相涉, 而至其愛君憂國之念, 老而不衰。
번역문:
공(公)은 만년(晩年)에 성(城) 동쪽에 집터를 잡아(卜宅)⁸⁶, 그곳의 샘물과 돌(泉石)의 아취(雅趣)⁸⁷를 즐기며, 도연(陶然)⁸⁸히 세상일(世故)과 서로 관련하지 않았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愛君憂國之念)에 이르러서는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다.
주석:
86. 복택(卜宅): 살 집의 터를 가려 정함.
87. 천석지취(泉石之趣): 샘물과 돌의 아취. 자연 속에서 사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88. 도연(陶然): 술에 취하여 기분이 좋거나 걱정 없이 즐거운 모양. 여기서는 세속을 벗어나 한가롭게 지내는 모습을 나타낸다.
원문:
中廟癸酉, 兩司及玉堂廷爭昭陵事, 逾時得允, 復位號如初, 卜吉遷葬于顯陵同原異塋。 提調宋軼、金應箕等竣事後啓曰: “臣等當初深慮久遠腐朽無餘, 及開審, 則內外梓宮俱存, 斂襲宛然, 年久只有形體, 故改以新梓宮、新衣襨, 凡事無憾。 且改斂時, 宮人及內官雖進去, 而此莫大之事, 不可不親監。 故臣等親監斂襲矣。”【《東閣雜記》。】
번역문:
중종(中廟) 계유년(1513)에 양사(兩司) 및 옥당(玉堂)이 조정에서 소릉(昭陵)⁸⁹의 일로 다투어(廷爭) 시간이 지나서야 윤허를 얻어, 위호(位號)⁹⁰를 처음과 같이 회복하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현릉(顯陵)⁹¹의 같은 산줄기 다른 봉분(同原異塋)⁹²으로 옮겨 장사지냈다. 제조(提調)⁹³ 송일, 김응기(金應箕) 등이 일을 마친 후에 아뢰었다. “신(臣) 등이 당초에 오래되어 썩어 남은 것이 없을까 깊이 염려하였는데, 열어서 살펴보니 내외(內外)의 재궁(梓宮)⁹⁴이 모두 남아 있고 염습(斂襲)⁹⁵이 완연하며, 오래되어 단지 형체만 있었으므로, 새로운 재궁과 새로운 의대(衣襨)⁹⁶로 바꾸었으니, 모든 일에 유감이 없습니다. 또한 다시 염할 때 궁인(宮人)과 내관(內官)이 비록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이는 막대한 일이므로 직접 감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직접 염습을 감독하였습니다.”【《동각잡기(東閣雜記)》⁹⁷에서 인용】
주석:
89. 소릉(昭陵): 문종(文宗)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능. 현덕왕후는 단종(端宗)의 생모로, 세조(世祖) 때 폐위되었다가 중종 때 복위되었다.
90. 위호(位號):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칭호. 폐위되었던 현덕왕후의 왕후로서의 지위를 회복시킨 것을 의미한다.
91. 현릉(顯陵): 문종(文宗)의 능.
92. 동원이영(同原異塋): 같은 산줄기에 각각 다른 봉분으로 능을 조성하는 방식. 즉, 문종의 현릉 곁에 소릉을 이장(移葬)한 것이다.
93. 제조(提調): 조선 시대 각 관청의 으뜸 벼슬. 여기서는 소릉 천장(遷葬)을 주관하는 임시 관직의 책임자를 가리킨다.
94.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족의 관(棺)을 높여 부르는 말. 내외 재궁은 내관(內棺)과 외관(外棺)을 가리킨다.
95. 염습(斂襲): 시신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혀 염포(斂布)로 묶는 일.
96. 의대(衣襨): 임금이나 왕족이 입던 옷을 높여 부르는 말. 수의(壽衣)를 의미한다.
97.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원문:
宰相請罪宗室寧山君, 上不從。 鄭莫介所告有永文欲推戴寧山之語。 宋軼、鄭光弼首唱以爲: “寧山旣涉逆謀, 當竄遐裔。” 其意欲循甄城故事也。 上敎懇惻云: “甄城之事, 反正之初, 事勢蒼黃, 勉從之, 至今傷慟, 豈宜心知無妄, 而反加之罪乎?” 宋軼廷爭不已, 柳洵、盧公弼家居, 軼等劫出共爭, 又屬六曹參議以上、宗室六品以上共請之。【《日月錄》。】
번역문:
재상(宰相)들이 종실(宗室) 영산군(寧山君)⁹⁸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上)께서 따르지 않으셨다. 정막개(鄭莫介)⁹⁹가 고발한 내용 중에 영문(永文)¹⁰⁰이 영산군을 추대하고자 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송일과 정광필(鄭光弼)¹⁰¹이 먼저 주장하며 아뢰기를, “영산군이 이미 역모(逆謀)에 관련되었으니 마땅히 먼 변방(遐裔)으로 유배 보내야 합니다.”라고 하니, 그 뜻은 견성군(甄城君)¹⁰²의 고사(故事)를 따르고자 한 것이다. 상께서 간절하고 측은하게 교서(敎書)를 내려 말씀하셨다. “견성군의 일은 반정(反正) 초기에 사세(事勢)가 창황(蒼黃)하여 마지못해 따랐으나 지금까지도 마음 아프고 슬프니, 어찌 마음에 망령됨이 없음을 알면서 도리어 죄를 더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송일이 조정에서 다투기를 그치지 않았고, 유순(柳洵)¹⁰³과 노공필(盧公弼)¹⁰⁴이 집에 있었는데, 송일 등이 억지로 나오게 하여 함께 다투었으며, 또 육조(六曹)의 참의(參議)¹⁰⁵ 이상, 종실(宗室)의 6품 이상 관리들에게 속하게 하여 함께 청하게 하였다.【《일월록(日月錄)》¹⁰⁶에서 인용】
주석:
98. 영산군(寧山君, ?-1517): 이름은 전(恮). 성종의 서자. 이복형인 연산군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풀려났다.
99. 정막개(鄭莫介): 미상.
100. 영문(永文): 미상.
101.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102. 견성군(甄城君, 1482-1507): 이름은 후(惇).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아들로 성종의 조카이다. 연산군 때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직후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송일 등은 영산군도 견성군의 선례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03. 유순(柳洵, 1441-1517):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104. 노공필(盧公弼, 1445-1516):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105. 참의(參議): 육조(六曹)의 정3품 당상관 벼슬. 판서, 참판 다음가는 직위이다.
106. 《일월록(日月錄)》: 미상. 조선 시대의 기록물로 추정된다.
원문:
巡邊都體察使敎書曰: “卿志氣宏毅, 識慮弘深, 有文武之才、經遠之略, 能爲國家決大策、定大計, 無踰於卿。 特遣卿往巡邊徼。”【金慕齋製。】
번역문:
순변도체찰사(巡邊都體察使)¹⁰⁷ 교서(敎書)¹⁰⁸에 이르기를, “경(卿)은 지기(志氣)가 넓고 굳세며(宏毅), 식견과 사려(識慮)가 넓고 깊으며(弘深), 문무(文武)의 재능과 원대한 계책(經遠之略)이 있으니, 능히 국가를 위하여 큰 정책(大策)을 결단하고 큰 계획(大計)을 정하는 데 경보다 나은 이가 없다. 특별히 경을 보내 변방 국경(邊徼)을 순찰하게 하노라.”라고 하였다.【김모재(金慕齋)¹⁰⁹가 지었다.】
주석:
107. 순변도체찰사(巡邊都體察使): 변방 지역을 순찰하며 군사 및 민정 상황을 총괄하는 임시 최고 지휘관. 국가 비상시에 파견되었다.
108. 교서(敎書):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가르침을 적은 문서. 여기서는 송일을 순변도체찰사로 임명하는 임명장을 가리킨다.
109. 김모재(金慕齋):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김응기(金應箕)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金應箕【文戴公。】
字伯春, 善山人。 高麗尙書澍之玄孫。 成宗八年丁酉登第。
번역문:
김응기(金應箕)【문대공(文戴公)¹¹⁰이다.】
자는 백춘(伯春)이고, 선산(善山) 사람이다.¹¹¹ 고려 상서(尙書) 김주(金澍)¹¹²의 현손(玄孫)이다. 성종(成宗) 8년 정유년(147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¹¹³
주석:
110. 문대공(文戴公): 김응기의 시호.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대(戴)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의로움에 복종함(安民立政 彊義服之) 등을 의미한다.
111. 선산인(善山人): 본관이 선산(善山)임을 나타낸다. 선산 김씨(善山 金氏). 일선 김씨(一善 金氏)라고도 한다.
112. 김주(金澍): 고려 후기의 문신. 상서(尙書)는 고려 시대 상서성(尙書省)의 관직을 가리킨다.
113. 성종 8년 정유년(1477) 등제: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원문:
三公有闕, 朝野皆屬望於領府事金應箕。 上嘗卜相於宰樞, 宋軼薦應箕, 柳洵亦意在應箕, 而重違成希顔之旨, 竝薦鄭光弼。 希顔颺言曰: “今日擇相, 以鄭光弼爲得, 以申用漑爲次。 如應箕, 雖如精金、美玉, 當國家有爲之時, 無能往來。 且已位極樞府, 與聞國政, 不必更登台司。” 實沮其入相之路也。 應箕踐履詳重, 操存誠敬, 平生無疾言遽色, 大爲成廟所器重。 希顔不稽衆論, 妄加譏貶, 取舍顚倒, 朝論惜之。【《陰崖雜記》。】
번역문:
삼공(三公)¹¹⁴에 결원(闕)이 생기자 조정과 재야(朝野)에서 모두 영부사(領府事)¹¹⁵ 김응기를 촉망(屬望)하였다. 상(上)께서 일찍이 재상과 추밀(宰樞)¹¹⁶들에게 정승 후보를 점치게(卜相)¹¹⁷ 하였는데, 송일(宋軼)이 김응기를 추천하였고, 유순(柳洵) 또한 뜻이 김응기에게 있었으나 성희안(成希顔)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정광필(鄭光弼)을 함께 추천하였다. 성희안이 소문을 퍼뜨려 말하기를, “오늘 정승을 뽑는 데는 정광필이 합당하고 신용개(申用漑)가 다음이다. 김응기 같은 이는 비록 순금(精金)이나 아름다운 옥(美玉)과 같더라도 국가가 할 일이 있는 때(有爲之時)¹¹⁸를 당하여 능히 활동(往來)¹¹⁹할 수 없다. 또한 이미 지위가 추부(樞府)¹²⁰에 지극하여 국정(國政)에 참여하여 듣고 있으니, 반드시 다시 태사(台司)¹²¹에 오를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으니, 실로 그가 정승의 자리에 들어서는 길을 막은(沮) 것이다. 김응기는 행동거지(踐履)가 신중하고(詳重), 마음가짐(操存)이 성실하고 공경스러웠으며(誠敬), 평생 성난 말이나 급한 얼굴빛(疾言遽色)¹²²이 없었고, 성종(成廟)께서 크게 기량(器量)을 중히 여기셨다. 성희안이 여러 사람의 의견(衆論)을 상고하지 않고 망령되이 비난하고 깎아내려(譏貶) 사람을 등용하고 버리는 것(取舍)이 뒤바뀌니, 조정의 여론(朝論)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음애잡기(陰崖雜記)》¹²³에서 인용】
주석:
114.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三政丞)을 가리킨다.
115. 영부사(領府事):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가리킨다. 모두 정1품의 명예직으로, 실권은 없으나 원로 대신을 예우하는 자리였다. 김응기는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116. 재추(宰樞): 재신(宰臣, 의정부의 정승·찬성)과 추신(樞臣, 중추부의 판사·지사 등)을 아울러 이르는 말.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고위 관료들을 의미한다.
117. 복상(卜相): 점을 쳐서 정승을 가림. 실제 점을 쳤다기보다는 여러 신하의 의견을 들어 정승 후보를 추천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다.
118. 유위지시(有爲之時): 국가가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해야 할 때. 성희안은 김응기가 조용하고 신중하여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한 시기에는 맞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한 것이다.
119. 왕래(往來): 오고 감.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120. 추부(樞府): 중추부(中樞府) 또는 돈녕부(敦寧府). 여기서는 김응기가 영돈녕부사였으므로 돈녕부를 가리킨다.
121. 태사(台司): 삼공(三公)의 자리. 즉 정승의 자리를 의미한다.
122. 질언거색(疾言遽色): 빠르게 말하고 급하게 얼굴빛을 바꾸는 것. 성내거나 당황하는 모습.
123. 《음애잡기(陰崖雜記)》: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가 지은 필기잡록.
송일(宋軼)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宋軼【肅靖公。】
字可仲, 礪山人。 景泰甲戌生。 成宗八年丁酉進士, 仍登第。 選入玉堂, 爲著作, 陞修撰, 歷兩司、春坊、直提學、副提學、承旨、黃海・平安道觀察使、吏曹參判、刑曹・禮曹判書、京畿觀察使。 中宗反正, 參靖國功臣, 拜右贊成、吏曹判書, 封礪原府院君。 壬申拜相, 至領議政。 庚辰卒, 年六十七。
번역문:
송일(宋軼)【숙정공(肅靖公)¹이다.】
자는 가중(可仲)이고, 여산(礪山) 사람이다.² 경태(景泰) 갑술년(1454)³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8년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⁴ 옥당(玉堂)⁵에 선발되어 들어가 저작(著作)⁶이 되고 수찬(修撰)⁷으로 승진하였으며, 양사(兩司)⁸, 춘방(春坊)⁹, 직제학(直提學)¹⁰, 부제학(副提學)¹¹, 승지(承旨)¹², 황해도·평안도 관찰사(觀察使)¹³, 이조 참판(吏曹參判)¹⁴, 형조·예조 판서(刑曹·禮曹判書)¹⁵,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¹⁶ 때 정국공신(靖國功臣)¹⁷에 참여하였고, 우찬성(右贊成)¹⁸, 이조 판서(吏曹判書)¹⁹에 제수되었으며,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²⁰에 봉해졌다. 임신년(1512)에 정승(相)²¹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²²에 이르렀다. 경진년(1520)에 나이 67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 숙정공(肅靖公): 송일의 시호(諡號). 숙(肅)은 강직하고 과단성 있음(剛德克就)을, 정(靖)은 너그럽고 공손하며 조용함(寬敬靖恭) 또는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음(恭己鮮言) 등을 의미한다.
- 여산인(礪山人): 본관(本貫)이 여산임을 나타낸다. 여산 송씨(礪山 宋氏)이다.
- 경태(景泰) 갑술년(1454): 경태는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이다. 1454년은 조선 단종(端宗) 2년이다.
- 성종(成宗) 8년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생원시(生員試)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문과 시험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일은 같은 해에 진사시와 문과에 모두 합격하였다.
-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 관리, 문한(文翰) 처리, 왕의 자문 등을 담당한 중요한 기관이었다.
- 저작(著作): 홍문관의 정8품 관직.
- 수찬(修撰): 홍문관의 정6품 관직.
-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던 핵심 기관이다.
-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 직제학(直提學): 홍문관의 종3품 관직. 부제학 다음가는 직위이다.
-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핵심 측근이었다.
- 관찰사(觀察使):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조(吏曹)의 버금 벼슬. 종2품. 이조는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핵심 부서이다.
- 형조·예조 판서(刑曹·禮曹判書):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형조는 법률, 소송, 형옥, 노비 등을, 예조는 의례, 외교, 교육, 과거 등을 담당했다.
-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송일은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 우찬성(右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함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보좌하였다.
-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의 으뜸 벼슬. 정2품.
-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 송일에게 내려진 부원군(府院君)의 봉호(封號). 부원군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작위이다. '여원(礪原)'은 그의 본관인 여산(礪山)에서 따온 것이다.
- 상(相): 재상(宰相), 즉 정승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된 것을 가리킨다. 송일은 1512년(중종 7) 우의정이 되었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위직이다. 송일은 1513년(중종 8) 영의정이 되었다.
원문:
公生歲餘, 外祖嘗抱登樓, 偶失手墮樓下, 倉皇視之, 則已匍匐就行, 無所傷。 及知讀書, 業日進, 有遠大志。 祖贊成公奇之曰: “此兒將大吾門。”
번역문:
공(公)이 태어난 지 한 살 남짓 되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일찍이 안고 누각(樓閣)에 올랐다가 우연히 손을 놓쳐 누각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창황히(倉皇히)²³ 살펴보니 이미 기어서 가고 있었고 다친 곳이 없었다. 장성하여 독서(讀書)할 줄 알게 되자 학업이 날로 진취하였고 원대한 뜻이 있었다. 조부(祖父) 찬성공(贊成公)²⁴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였다. “이 아이가 장차 우리 가문(吾門)을 크게 일으키겠구나.”
주석:
23. 창황(倉皇): 매우 당황하고 허둥지둥하는 모양.
24. 찬성공(贊成公): 송일의 조부 송개(宋愷)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찬성(贊成) 벼슬을 지냈기에 이렇게 칭한 듯하다. 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 관직이다.
원문:
公天資忠愨, 識量宏偉, 胸次豁達。 長不踰中人, 而望之如山岳之重。 其平居談論, 雜以諧謔, 和氣融然。 當大事, 色莊氣肅, 確然不動。 爲文辭, 操筆便就。 涉獵書史, 旁通韜略, 世之論將者, 以公爲首。
번역문:
공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성실하며(忠愨), 식견과 도량(識量)이 넓고 크며(宏偉), 흉금(胸次)이 활달하였다.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않았으나, 바라보면 산악(山岳)처럼 중후함이 있었다. 평소 거처하며 담론(談論)할 때는 해학(諧謔)을 섞어 화기(和氣)가 넘실거렸다. 큰일을 당해서는 안색이 장중하고 기운이 엄숙하여(色莊氣肅) 확고부동하였다. 문사(文辭)를 지을 때는 붓을 잡으면 바로 이루었다. 서사(書史)를 널리 섭렵하고 도략(韜略)²⁵에도 두루 통하여, 세상에서 장수감(將材)을 논하는 자들은 공을 으뜸으로 꼽았다.
주석:
25. 도략(韜略): 병법(兵法)과 전략(戰略).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에서 유래한 말로, 군사를 운용하고 전쟁을 치르는 방략을 의미한다.
원문:
公性不喜紛華, 自奉甚簡。 自釋褐遇知成廟, 上嘗曰: “得人安得如宋某?” 嘗閱公月課之作曰: “此¹¹是宋某忠誠所發。”
번역문:
공은 성품이 화려하고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스스로 몸가짐(自奉)이 매우 간소하였다. 석갈(釋褐)²⁶한 이래 성종(成廟)²⁷의 알아줌을 받았는데, 상(上)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인재를 얻는 것이 어찌 송모(宋某)²⁸와 같은 이를 얻는 것과 같겠는가?” 하셨다. 일찍이 공이 매달 지어 올린 과제(月課之作)²⁹를 열람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송모의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다.”
주석:
26. 석갈(釋褐): 갈옷(褐)을 벗는다는 뜻으로, 평민 신분을 벗어나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27. 성묘(成廟): 성종(成宗)의 묘호(廟號). 여기서는 성종을 가리킨다.
28. 송모(宋某): 송 아무개. 임금이 신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성씨에 '모(某)'를 붙여 부르는 경우이다.
29. 월과지작(月課之作): 신하들이 매달 정기적으로 임금에게 지어 올리던 글. 주로 시(詩), 부(賦), 의(義), 책(策) 등이었다.
30. [주-D001] 是 : 저본(底本)에는 뒤에 “차시(此是)”가 더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에 근거하여 삭제하였다. 원문은 "此是是宋某忠誠所發"이었으나, "此是宋某忠誠所發"로 교정하였다는 의미이다. 번역문에는 교정된 내용을 반영하였다.
원문:
公厖眉高準, 狀若微頞。 上嘗因進見, 目送之曰: “宋某有何不快, 乃爾蹙頞?” 蓋量公而戲之也。
번역문:
공은 눈썹이 짙고 코가 높았으며(厖眉高準), 형상이 코가 약간 낮은 듯하였다(微頞)³¹. 상(上)께서 일찍이 입시(進見)한 공을 눈으로 배웅하며 말씀하셨다. “송모는 무슨 불쾌한 일이 있기에 저리 코를 찡그리는가(蹙頞)?” 이는 대개 공을 헤아리며 농담하신 것이다.
주석:
31. 방미고준(厖眉高準), 미알(微頞): 외모에 대한 묘사. 눈썹(眉)이 짙고(厖) 코(準)가 높았으나(高), 전체적인 인상은 코가 약간 낮은(微頞, 알: 코 낮을 알) 듯 보였다는 의미.
32. 축알(蹙頞): 코를 찡그림. 불쾌하거나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성종이 송일의 표정을 보고 농담한 것이다.
원문:
公晩年卜宅於城東, 樂其泉石之趣, 陶然不與世故相涉, 而至其愛君憂國之念, 老而不衰。
번역문:
공이 만년에 성(城) 동쪽에 집터를 잡아 살면서(卜宅), 그곳의 샘물과 돌(泉石)³³의 정취를 즐기며, 도연(陶然)히³⁴ 세상사(世故)와 서로 관계하지 않았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愛君憂國之念)에 이르러서는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다.
주석:
33. 천석(泉石): 샘물과 돌. 자연 경치를 비유하는 말.
34. 도연(陶然): 기분 좋게 술에 취한 모양, 또는 화락(和樂)한 모양. 세속을 벗어나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나타낸다.
원문:
中廟癸酉, 兩司及玉堂廷爭昭陵事, 逾時得允, 復位號如初, 卜吉遷葬于顯陵同原異塋。 提調宋軼、金應箕等竣事後啓曰: “臣等當初深慮久遠腐朽無餘, 及開審, 則內外梓宮俱存, 斂襲宛然, 年久只有形體, 故改以新梓宮、新衣襨, 凡事無憾。 且改斂時, 宮人及內官雖進去, 而此莫大之事, 不可不親監。 故臣等親監斂襲矣。”【《東閣雜記》。】
번역문:
중종(中廟) 계유년(1513)³⁵에 양사(兩司) 및 옥당(玉堂)이 조정에서 소릉(昭陵)³⁶의 일을 놓고 쟁론하여(廷爭), 여러 날이 지나서야 윤허를 받아 처음과 같이 위호(位號)³⁷를 회복하고, 길지(吉地)를 가려 현릉(顯陵)³⁸과 같은 산줄기 다른 봉분(同原異塋)에 천장(遷葬)하였다. 제조(提調)³⁹ 송일, 김응기(金應箕) 등이 일을 마친 후에 아뢰었다. “신(臣) 등이 당초에 세월이 오래되어 다 썩어 없어졌을까 깊이 염려하였는데, 열어서 살펴보니 내외(內外)의 재궁(梓宮)⁴⁰이 모두 보존되어 있었고 염습(斂襲)⁴¹이 완연하였으나, 오래되어 형체만 남아 있었으므로 새로운 재궁과 새로운 의대(衣襨)⁴²로 바꾸었으니, 모든 일에 유감이 없습니다. 또한 개렴(改斂)⁴³할 때 궁인(宮人)과 내관(內官)이 비록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이는 막대한 일이므로 친히 감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직접 염습하는 것을 감독하였습니다.”【《동각잡기(東閣雜記)》⁴⁴에서 인용】
주석:
35. 중종(中廟) 계유년(1513): 중종 8년.
36. 소릉(昭陵): 조선 문종(文宗)의 비(妃)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능. 현덕왕후는 단종(端宗)의 생모이다. 세조(世祖) 때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폐위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伸寃)되어 복위되었다.
37. 위호(位號): 지위와 칭호. 폐위되었던 현덕왕후의 왕후로서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38. 현릉(顯陵): 조선 문종(文宗)의 능.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내에 있다. 현덕왕후의 능을 이곳으로 옮겨와 문종과 함께 있게 한 것이다.
39. 제조(提調): 조선 시대 각 관서의 으뜸 벼슬. 주로 다른 관직을 가진 사람이 겸임하였다. 여기서는 소릉 천장(遷葬)을 주관하는 임시 직책을 의미한다.
40.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후의 관(棺).
41. 염습(斂襲): 시신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혀 염포(斂布)로 묶는 일.
42. 의대(衣襨): 임금이나 왕족의 옷을 높여 부르는 말.
43. 개렴(改斂): 시신을 다시 염습하는 것. 천장을 위해 관을 열었으므로 다시 염습하여 새 관에 모시는 절차이다.
44.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조정의 여러 가지 사실, 인물 일화 등을 기록하였다.
원문:
宰相請罪宗室寧山君, 上不從。 鄭莫介所告有永文欲推戴寧山之語。 宋軼、鄭光弼首唱以爲: “寧山旣涉逆謀, 當竄遐裔。” 其意欲循甄城故事也。 上敎懇惻云: “甄城之事, 反正之初, 事勢蒼黃, 勉從之, 至今傷慟, 豈宜心知無妄, 而反加之罪乎?” 宋軼廷爭不已, 柳洵、盧公弼家居, 軼等劫出共爭, 又屬六曹參議以上、宗室六品以上共請之。【《日月錄》。】
번역문:
재상(宰相)이 종실(宗室) 영산군(寧山君)⁴⁵에게 죄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上)께서 따르지 않으셨다. 정막개(鄭莫介)⁴⁶가 고발한 내용 중에 영문(永文)⁴⁷이 영산군을 추대하고자 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송일과 정광필(鄭光弼)⁴⁸이 먼저 주장하며 아뢰기를 “영산군이 이미 역모(逆謀)에 관련되었으니 마땅히 먼 변방(遐裔)으로 유배보내야 합니다”라고 하니, 그 뜻은 견성군(甄城君)⁴⁹의 고사(故事)를 따르고자 함이었다. 상께서 간절하고 측은하게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시기를, “견성군의 일은 반정(反正) 초기에 사세(事勢)가 창황(蒼黃)하여 마지못해 따른 것이나 지금까지도 마음 아프고 슬프니, 어찌 마음에 허망함이 없음을 알면서 도리어 죄를 더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셨다. 송일이 조정에서 쟁론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유순(柳洵)과 노공필(盧公弼)이 집에 있었는데 송일 등이 억지로 나오게 하여 함께 쟁론하였으며, 또 육조(六曹)의 참의(參議) 이상, 종실(宗室)의 6품 이상에게 명하여 함께 청하게 하였다.【《일월록(日月錄)》⁵⁰에서 인용】
주석:
45. 영산군(寧山君, 1490-1538): 이름은 전(恮). 성종의 아들. 중종의 이복동생.
46. 정막개(鄭莫介): 실존 인물 여부 및 신원 미상.
47. 영문(永文): 실존 인물 여부 및 신원 미상.
48.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49. 견성군(甄城君, 1482-1507): 이름은 순(恂). 성종의 아들. 중종반정 직후인 1507년, 전 왕조인 연산군을 복위시키려 한다는 무고를 받아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송일 등은 영산군 사건을 이 사례에 비추어 처리하려 한 것이다.
50. 《일월록(日月錄)》: 작자 미상의 조선 시대 야사(野史). 주로 왕실 주변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보인다.
원문:
巡邊都體察使敎書曰: “卿志氣宏毅, 識慮弘深, 有文武之才、經遠之略, 能爲國家決大策、定大計, 無踰於卿。 特遣卿往巡邊徼。”【金慕齋製。】
번역문:
순변도체찰사(巡邊都體察使)⁵¹에게 내리는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경(卿)은 지기(志氣)가 넓고 굳세며(宏毅) 식견과 사려(識慮)가 넓고 깊으며(弘深), 문무(文武)의 재능과 원대한 경륜(經遠之略)이 있어, 능히 국가를 위하여 큰 정책을 결정하고 큰 계획을 정함에 경을 넘을 이가 없다. 특별히 경을 보내 변방 국경(邊徼)을 순찰하게 하노라.” 하였다.【김모재(金慕齋)⁵²가 지었다.】
주석:
51. 순변도체찰사(巡邊都體察使): 조선 시대 변방 지역의 군사 및 행정 상황을 순찰하고 점검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고위 관직.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종종 정승급에서 임명되었다.
52. 김모재(金慕齋):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이 교서는 김안국이 송일을 위해 지은 것이다.
김응기(金應箕)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金應箕【文戴公。】
字伯春, 善山人。 高麗尙書澍之玄孫。 成宗八年丁酉登第。
三公有闕, 朝野皆屬望於領府事金應箕。 上嘗卜相於宰樞, 宋軼薦應箕, 柳洵亦意在應箕, 而重違成希顔之旨, 竝薦鄭光弼。 希顔颺言曰: “今日擇相, 以鄭光弼爲得, 以申用漑爲次。 如應箕, 雖如精金、美玉, 當國家有爲之時, 無能往來。 且已位極樞府, 與聞國政, 不必更登台司。” 實沮其入相之路也。 應箕踐履詳重, 操存誠敬, 平生無疾言遽色, 大爲成廟所器重。 希顔不稽衆論, 妄加譏貶, 取舍顚倒, 朝論惜之。【《陰崖雜記》。】
번역문:
김응기(金應箕)【문대공(文戴公)¹이다.】
자는 백춘(伯春)이고, 선산(善山) 사람이다.² 고려 상서(尙書) 주(澍)의 현손(玄孫)이다.³ 성종(成宗) 8년 정유년(147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⁴
삼공(三公)⁵의 자리에 결원이 생기자, 조정과 재야(朝野)가 모두 영부사(領府事)⁶ 김응기를 촉망하였다. 상(上)께서 일찍이 재추(宰樞)⁷들에게 정승을 의논하게 하시니(卜相), 송일(宋軼)이 김응기를 추천하였고, 유순(柳洵) 역시 뜻이 김응기에게 있었으나 성희안(成希顔)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정광필(鄭光弼)을 아울러 추천하였다. 성희안이 공공연히 말하기를, “오늘 정승을 택함에는 정광필을 얻는 것이 좋고, 신용개(申用漑)를 다음으로 삼는 것이 좋다. 김응기와 같은 이는 비록 정금(精金)이나 미옥(美玉)⁸과 같다 할지라도 국가가 할 일이 있을 때(有爲之時)⁹ 능히 내왕(往來)¹⁰할 수 없다. 또한 이미 지위가 추부(樞府)¹¹에 이르러 국정(國政)에 참여하여 듣고 있으니, 반드시 다시 대사(台司)¹²에 오를 필요는 없다.”라고 하니, 실로 그가 정승에 들어서는 길을 막은 것이었다. 김응기는 몸가짐(踐履)이 신중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마음가짐(操存)이 성실하고 공경스러워(誠敬), 평생 모진 말이나 급한 기색(疾言遽色)이 없어, 성종(成廟)께서 크게 그를 기중(器重)하셨다. 성희안이 여러 사람의 의견(衆論)을 살피지 않고 망령되이 기롱하고 폄하(譏貶)하여 취사(取舍)¹³가 전도(顚倒)되니, 조정의 여론(朝論)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음애잡기(陰崖雜記)》에서 인용】
주석:
- 문대공(文戴公): 김응기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한다. 대(戴)의 의미는 시법(諡法)에서 명확히 찾기 어려우나, '받들다', '우러르다' 등의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선산인(善山人): 본관이 선산임을 나타낸다. 선산 김씨(善山 金氏)이다.
- 고려 상서(尙書) 주(澍)의 현손(玄孫): 고려 시대 상서 벼슬을 지낸 김주(金澍)의 현손이라는 의미이다. 상서는 중앙 관청의 장관급 벼슬이다.
- 성종(成宗) 8년 정유년(147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앞의 송일(宋軼)과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하는 말. 조선 시대 최고위 관직이다.
- 영부사(領府事):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가리킨다. 돈녕부(敦寧府)와 중추부(中樞府)는 실질적인 직무는 없으나 종친(宗親)이나 공신(功臣) 등을 예우하기 위한 명예 관청이었다. 영부사는 정1품의 최고위직이다. 문맥상 영돈녕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 재추(宰樞): 재상(宰相, 의정부)과 추밀(樞密, 중추부)을 아울러 이르는 말. 조정의 최고위 관료들을 의미한다.
- 정금(精金), 미옥(美玉):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인품이 훌륭하고 깨끗함을 비유한다. 성희안은 김응기의 인품은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능력이나 추진력은 부족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 유위지시(有爲之時): 국가가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해야 할 때, 또는 난세(亂世)나 변화의 시기를 의미한다.
- 왕래(往來): 여기서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활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즉,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추부(樞府): 중추부(中樞府)를 가리킨다.
- 대사(台司): 삼공(三公), 즉 의정부의 정승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 취사(取舍): 사람을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 인재 등용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박원종(朴元宗)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朴元宗【武烈公。】
字伯胤, 順天人。 成化丁亥生。 成宗十七年丙午武科。 以訓鍊副正, 超拜同副承旨, 歷吏曹參議、江原・京畿兩道觀察使、咸鏡北道・慶尙・平安三道節度使。 中宗反正, 策靖國元勳, 封平城府院君, 拜相, 至領議政。 庚午卒, 年四十四。 配享中宗廟庭。
번역문:
박원종(朴元宗)【무열공(武烈公)¹이다.】
자는 백윤(伯胤)이고, 순천(順天) 사람이다. 성화(成化) 정해년(丁亥年, 1467)²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17년 병오년(1486)에 무과(武科)³에 급제하였다.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⁴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⁵로 뛰어넘어 제수되었고, 이조 참의(吏曹參議)⁶, 강원도·경기도 양도(兩道)의 관찰사(觀察使)⁷, 함경북도·경상도·평안도 삼도(三道)의 절도사(節度使)⁸를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⁹ 때 정국공신(靖國功臣)¹⁰ 으뜸으로 책록되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¹¹에 봉해졌고, 재상(宰相)¹²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¹³에 이르렀다. 경오년(庚午年, 1510)¹⁴에 졸(卒)하니, 나이 44세였다. 중종(中宗)의 묘정(廟庭)¹⁵에 배향(配享)¹⁶되었다.
주석:
- 무열공(武烈公): 박원종의 시호(諡號). 무(武)는 강하고 과단성 있으며 의로움(彊毅果敢), 또는 형벌로써 악을 바로잡음(刑以詰惡) 등을 의미하고, 열(烈)은 공적이 있음(有功安民), 또는 의로움에 의거하여 일을 결단함(秉義斥佞) 등을 의미한다. 중종반정을 이끈 공적을 나타낸다.
- 성화(成化) 정해년(丁亥年, 1467): 성화는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성화 3년으로 조선 예종(睿宗) 즉위년(-1년)에 해당한다. 다만, 박원종의 출생년은 1467년이 정설이다.
- 무과(武科): 조선 시대에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과거 시험.
-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 훈련원은 조선 시대 군사의 시재(試才), 연병(鍊兵), 무예 교육 등을 담당하던 관청. 부정(副正)은 종3품 관직이다.
-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 기관으로, 동부승지는 부승지(副承旨) 다음가는 직책이었다. 종3품에서 정3품 승지로 발탁된 것이므로 초배(超拜, 차례를 뛰어넘어 임명됨)라고 표현했다.
-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는 문관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던 육조(六曹)의 하나. 참의(參議)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다.
-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 절도사(節度使): 조선 시대 각 도의 병마(兵馬)를 지휘하던 군사 책임자. 종2품. 관찰사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훗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호. 박원종은 1등 공신이었다.
-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공신에게 내리는 작위(爵位).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 또는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봉작(封爵)이다. 평성(平城)은 박원종의 본관인 순천(順天)의 옛 이름이다.
- 재상(宰相): 임금을 보좌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위 관직. 여기서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의정부의 정승을 가리킨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 경오년(庚午年, 1510): 중종 5년.
-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원문:
公美容儀, 風采峻聳, 讀書通大義, 射御絶人。 少時, 韓明澮一見奇之, 曰: “他日必爲大器。”【容齋李荇撰墓誌。】
번역문:
공(公)은 용모와 위의(威儀)가 아름답고 풍채(風采)가 뛰어나게 높았으며, 글을 읽어 대의(大義)¹⁷에 통달했고 활쏘기와 말타기[射御]¹⁸는 남보다 뛰어났다. 젊었을 때 한명회(韓明澮)¹⁹가 한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훗날 반드시 큰 그릇[大器]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용재(容齋) 이행(李荇)²⁰이 지은 묘지(墓誌)²¹에서 인용】
주석:
17. 대의(大義): 큰 도리. 특히 충효(忠孝)나 정의(正義)와 같은 인간의 중요한 도리를 뜻한다.
18. 사어(射御): 활쏘기(射)와 말 몰기(御). 고대에 군자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의 하나로, 무예(武藝)를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19. 한명회(韓明澮, 1415-1487): 조선 전기의 문신.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핵심 인물로 세조(世祖)를 즉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예종·성종 대에 걸쳐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20. 이행(李荇, 1478-1534): 조선 중기의 문신, 문인. 호는 용재(容齋). 박원종의 조카사위(종질서, 從姪婿)이기도 하다.
21.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 본관, 생애, 행적 등을 기록하여 무덤 옆에 묻는 돌이나 도판, 또는 그 글. 이행이 지은 박원종의 묘지명(墓誌銘)을 가리킨다.
원문:
公生長膏粱, 少落拓不羈, 出入屠肆, 學射御, 中武科, 歷淸顯, 遂折節讀書, 通大義, 不隨俗浮沈。 月山大君夫人乃其姊也, 被汚燕山, 染疾而死, 心常怏憤。 燕山亂政日甚, 宗社危急, 成公希顔素多大略, 欲廓淸昏亂, 無與規畫, 悒悒無賴。 意朴公可屬大事, 而本非同好, 難於發言。 有里人辛允武者, 往來兩家甚狎, 昌山遂令試微意, 平城乃奮袂起曰: “是我日夜蓄積也。” 昌山乃暮抵平城家, 各痛哭敍平生忠義: “宜許國以死, 男兒死生有命, 豈有見宗社危在朝夕而不恤乎?” 於是兩公懽甚洽。 居數月, 公等自以孤立難成, 遂以其意通柳順汀。 順汀遲回久之, 不能快從, 然業已同之, 黽勉而已。 遂徧喩朴永文、辛允武、洪景舟等, 令各倡同志。 所糾合者, 率多武夫, 不規義理, 樂因事就功, 不謀而同, 所在踊躍。 九月初二日, 燕山欲遊長湍石壁, 扈從宰臣只許率丘史一人。 公等約是日閉門拒守, 推戴成廟次子晉邸, 區畫已成, 燕山命停是行, 將士思奮, 機事已露, 勢不可止。 公等議初一日夜半, 會將士于訓鍊院, 分令邊脩、崔漢洪守內城東, 沈亨、張珽守內城西, 倉卒無見兵, 驅役夫以衛。 令辛允武率李藻等十餘人, 先擊殺²³愼守英, 次任士洪、愼守勤。 守謙則時爲開城留守, 故欲待事定後, 徐遣人誅之。 守勤等雖憑藉權勢, 怙侈無狀, 而當時迎合亂君, 實傾國本者, 豈無其人, 而獨誅此三人者? 守勤素驕縱不軌, 而又爲國舅, 則將有跋扈難制之勢, 故兼²²除其羽翼耳。 公等初議具壽永有導淫宣惡之醜, 欲幷除之, 其族姪具賢暉者知其謀, 奔告壽永, 壽永詣訓鍊院乞命, 公等貰之。 允武之擊殺四人也, 李藻嘗持鐵椎伏路左, 令別監一人, 持命牌促赴闕, 彼且驚惶詣闕, 藻奮擊墜馬, 頭腦皆出。 守勤被擊墜地, 有一奴人覆諸上, 以身當椎, 藻遂幷擊殺四人, 飛血滿面, 衣服盡赤, 欲見其功, 數日不靧面而易服, 觀者醜之。 平明百官皆會, 而有不知所以者, 入直都摠管閔孝曾、兵曹參知柳涇²⁴先出²⁵, 承旨李堣次出, 尹璋、曺繼衡又出, 入直軍士皆踰城出附。 初禁中聞變, 莫測所由, 燕山坐差備門內, 召承旨等入坐曰: “如此太平之時, 安有他變? 恐是興淸之夫, 相聚爲盜耳。 其亟召政丞及禁府堂上以處置。” 乃命李堣持管鑰巡審闕門, 堣先令人出門, 審知朝廷已有所屬, 遂抽身出門。 燕山聞堣已出門, 遽前把尹璋、曺繼衡袖, 二人佯爲遜辭, 揮而出, 欲從門竇出。 繼衡時所寵弄之臣, 守門將士欲持以邀賞, 掖詣軍門, 公等亦貰之。 闕內宦寺等及諸色人等皆出, 惟後宮、娼流, 相聚號哭, 聲振於外。 於是會議戟門內, 柳子光、李季²⁶男守闕門, 以備廢主奔逸。 公率百官詣景福宮門外, 請命于慈順大妃, 俄而開門引入。 公等詣勤政殿西庭列坐, 令柳順汀、鄭眉壽迎駕于潛邸。 上避寓平市署傍人家, 順汀等坐里門外, 再三勸進。 上以戎服御輦, 備法物以出, 市不易肆, 父老呼萬歲, 有流涕者。 日午入景福宮, 柳子光等欲循霍光廢昌邑王故事, 致前王於殿中, 告大妃以廢立之故, 公等議止²⁷之。 日未晡, 百官班定, 上卽位于勤政殿, 頒敎四方大赦。 大抵廢立之謀, 出於昌山, 而成於公, 轉危爲安, 變禍爲福, 實東方萬世之業也。 但昌山資性果決, 而無學術; 菁川則性寬懦, 而無所執。 公則麤厲無稽, 雖忠義所激, 功在必成, 而施措失宜。 以舊恩容賊臣柳子光, 以基後日之禍, 瑣瑣姻婭, 皆授鐵券, 以賂之多寡, 第功之上下, 連車續狗之譏, 至今爲病。【《陰崖雜記》。】
번역문:
공(公)은 고량(膏粱)²⁸에서 생장하였고, 젊어서는 방탕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며[落拓不羈]²⁹ 도살장[屠肆]³⁰을 드나들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웠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³¹을 두루 거치면서 마침내 절개(節槪)를 꺾고 독서하여 대의(大義)에 통달하였으며, 시속(時俗)을 따라 부침(浮沈)하지 않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³²이 바로 그의 누이였는데, 연산군(燕山君)에게 오욕(汚辱)을 당하고 병을 얻어 죽자 마음에 늘 원통하고 분하게 여겼다. 연산군의 난정(亂政)이 날로 심해져 종묘사직(宗社)³³이 위급해지자, 성공(成公) 희안(希顔)³⁴은 평소 큰 지략(大略)이 많았으므로 혼란한 조정을 숙청하고자 하였으나 함께 계획할 사람이 없어 답답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박공(朴公)³⁵에게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본래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어서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이웃 사람 신윤무(辛允武)³⁶라는 자가 있어 두 집안을 왕래하며 매우 가까웠으므로, 창산(昌山)³⁷이 마침내 그를 시켜 은밀히 뜻을 떠보게 하니, 평성(平城)³⁸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쌓아온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창산이 이에 저물녘에 평성의 집에 이르러 각자 통곡하며 평소의 충의(忠義)를 이야기하였다.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음을 바쳐야 하니, 남아의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에 달렸거늘, 어찌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닥친 것을 보고도 근심하지 않겠는가?” 이에 두 공(公)의 기쁨이 매우 흡족하였다. 몇 달이 지나 공 등은 스스로 고립되어서는 이루기 어렵다고 여겨, 마침내 그 뜻을 유순정(柳順汀)³⁹에게 통하였다. 유순정은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선뜻 따르지 못하였으나, 이미 함께하기로 하였으므로 힘쓸 따름이었다. 마침내 박영문(朴永文)⁴⁰, 신윤무(辛允武), 홍경주(洪景舟)⁴¹ 등에게 두루 알려 각자 동지(同志)를 규합하게 하였다. 규합된 자들은 대부분 무부(武夫)들이라 의리(義理)를 따지지 않고 일을 통하여 공(功)을 이루기를 즐거워하여, 꾀하지 않았으나 뜻이 같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용약(踊躍)하였다. 9월 2일에 연산군이 장단(長湍)의 석벽(石壁)⁴²으로 유람하려 하였는데, 임금을 호종하는 재신(宰臣)에게는 다만 구사(丘史)⁴³ 한 사람만 거느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공 등이 이날 성문을 닫고 막아 지키며 성종(成廟)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邸)⁴⁴을 추대하기로 약속하고 계획을 이미 완성하였는데, 연산군이 이 행차를 멈추라고 명하였다. 장수와 병사들은 분발하고자 하였고 거사 계획[機事]은 이미 드러나 기세를 멈출 수 없었다. 공 등이 9월 1일 밤중에 훈련원(訓鍊院)⁴⁵에서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 변수(邊脩)·최한홍(崔漢洪)을 나누어 시켜 내성(內城) 동쪽을 지키게 하고, 심형(沈亨)·장정(張珽)을 시켜 내성 서쪽을 지키게 하였는데, 창졸간에 동원할 병사가 없어 역부(役夫)들을 몰아 지키게 하였다. 신윤무에게 명하여 이조(李藻) 등 10여 인을 거느리고 먼저 신수영(愼守英)⁴⁶을 공격하여 죽이고, 다음으로 임사홍(任士洪)⁴⁷, 신수근(愼守勤)⁴⁸을 죽이게 하였다. 신수겸(守謙)⁴⁹은 당시 개성 유수(開城留守)였으므로 일이 정해진 뒤를 기다려 서서히 사람을 보내 베려 하였다. 신수근 등이 비록 권세에 의지하여 교만하고 방자함이 무상(無狀)하였으나, 당시에 난군(亂君)에게 영합하여 실제로 국본(國本)을 기울게 한 자가 어찌 그들뿐이었겠는가만, 유독 이 세 사람만 벤 이유는 무엇인가? 신수근은 평소 교만하고 방자하여 정도를 벗어났고 또 국구(國舅)⁵⁰였으므로 장차 발호(跋扈)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형세가 될 것이기에, 그 우익(羽翼)⁵¹까지 아울러 제거했을 뿐이다. 공 등이 처음에는 구수영(具壽永)⁵²이 음란한 짓을 유도하고 악행을 퍼뜨린 추함이 있다고 하여 함께 제거하려 하였는데, 그의 족질(族姪) 구현휘(具賢暉)라는 자가 그 계책을 알고 달려가 구수영에게 고하자, 구수영이 훈련원에 나아가 목숨을 구걸하니 공 등이 그를 용서하였다. 신윤무가 네 사람을 쳐 죽일 때, 이조(李藻)가 일찍이 쇠몽둥이[鐵椎]를 가지고 길 왼쪽에 숨어 있다가, 별감(別監) 한 사람을 시켜 명패(命牌)를 가지고 대궐로 속히 나아가도록 재촉하니, 그들이 또한 놀라 황망히 대궐로 가려 하자, 이조가 힘껏 쳐서 말에서 떨어뜨리니 머리와 뇌가 모두 터져 나왔다. 신수근은 맞아서 땅에 떨어졌는데, 한 노비가 그 위에 엎드려 몸으로 몽둥이를 막자, 이조가 마침내 아울러 네 사람을 쳐 죽였다. 튄 피가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모두 붉어졌으나, 자신의 공을 보이고자 하여 여러 날 동안 얼굴을 씻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 않으니, 보는 자들이 추하게 여겼다. 날이 밝자 백관(百官)이 모두 모였는데, 영문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입직(入直) 중이던 도총관(都摠管)⁵³ 민효증(閔孝曾), 병조 참지(兵曹參知)⁵⁴ 유경(柳涇)이 먼저 나가고, 승지(承旨) 이우(李堣)⁵⁵가 다음으로 나가고, 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⁵⁶이 또 나가니, 입직 군사들도 모두 성을 넘어 나가 붙좇았다. 처음에 금중(禁中)에서 변고를 듣고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연산군은 차비문(差備門)⁵⁷ 안에 앉아 승지 등을 불러 들어와 앉게 하고 말하였다. “이처럼 태평한 때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겠는가? 아마도 흥청(興淸)⁵⁸의 무리가 서로 모여 도둑질하는 것일 뿐이리라. 속히 정승(政丞) 및 금부 당상(禁府堂上)⁵⁹을 불러 처치하도록 하라.” 이에 이우에게 명하여 관약(管鑰)⁶⁰을 가지고 궁궐 문을 순찰하며 살피게 하였는데, 이우가 먼저 사람을 시켜 문밖으로 나가 조정이 이미 귀속된 바가 있음을 살펴 알고는 마침내 몸을 빼어 문밖으로 나갔다. 연산군은 이우가 이미 문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급히 앞으로 나아가 윤장과 조계형의 소매를 잡았으나, 두 사람이 거짓으로 사양하는 체하며 뿌리치고 나가 문구멍[門竇]으로 나가려 하였다. 조계형은 당시 총애를 받던 희롱하는 신하였으므로, 문을 지키던 장수와 병사들이 그를 붙잡아 상을 받으려 하여 군문(軍門)으로 끌고 가니, 공 등이 또한 그를 용서하였다. 궐내의 환관(宦官)·시종(寺從) 등과 여러 관서의 사람들[諸色人等]이 모두 나가고, 오직 후궁(後宮)과 기생[娼流]들만 서로 모여 통곡하니 그 소리가 밖까지 진동하였다. 이에 창칼을 세워놓은 문[戟門]⁶¹ 안에서 회의하여, 유자광(柳子光)⁶², 이계남(李季男)⁶³에게 궁궐 문을 지켜 폐위된 임금이 달아나는 것에 대비하게 하였다. 공이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景福宮) 문밖에 나아가 자신대비(慈順大妃)⁶⁴에게 명을 청하니, 얼마 뒤 문을 열어 들어오게 하였다. 공 등이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 나아가 줄지어 앉아, 유순정(柳順汀), 정미수(鄭眉壽)⁶⁵를 시켜 잠저(潛邸)⁶⁶에 가서 어가(御駕)를 맞이하게 하였다. 상(上)⁶⁷께서는 평시서(平市署)⁶⁸ 옆 민가에 피하여 머물고 계셨는데, 유순정 등이 동네 문밖에 앉아 두세 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상께서 군복(戎服) 차림으로 연(輦)을 타시고 법물(法物)⁶⁹을 갖추어 나오시니, 시장은 가게를 옮기지 않았고 부로(父老)들은 만세를 불렀으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한낮에 경복궁에 들어가니, 유자광 등이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위시킨 고사⁷⁰를 따르고자 하여 이전 왕(연산군)을 전각 안에 데려다 놓고 대비께 폐립(廢立)의 이유를 고하려 하였으나, 공 등이 의논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날이 저물기 전에 백관의 반열(班列)이 정해지고, 상께서 근정전에서 즉위하시어 사방에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대사면령(大赦)을 내렸다. 대체로 폐립의 계책은 창산(성희안)에게서 나왔으나 공(박원종)에게서 이루어졌으니, 위태로움을 돌려 안정으로 만들고 화(禍)를 바꾸어 복(福)으로 만든 것은 실로 동방 만세의 대업(大業)이었다. 다만 창산은 자질과 성품이 과단성이 있었으나 학술(學術)이 없었고, 청천(菁川, 유순정)⁷¹은 성품이 너그럽고 유약하여 고집하는 바가 없었다. 공은 거칠고 사나우며 근거가 없었으니[麤厲無稽]⁷², 비록 충의(忠義)에 격동되어 공(功)을 반드시 이루는 데에 있었으나, 시행하고 조치함[施措]에 마땅함을 잃었다. 옛 은혜 때문에 역적 신하 유자광을 용납하여 뒷날의 화근(禍根)을 만들었고, 자질구레한 인척(姻婭)들에게 모두 철권(鐵券)⁷³을 주었으며,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써 공로의 높고 낮음을 매겨, 수레에 개를 잇는다는[連車續狗]⁷⁴ 비난이 지금까지 병폐가 되고 있다.【《음애잡기(陰崖雜記)》⁷⁵에서 인용】
주석:
22. [주-D001] 兼 : 《대동야승(大東野乘)・음애일기(陰崖日記)》에는 “급(急)”으로 되어 있다. 의미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아울러' 또는 '급히'). 저본을 따라 번역한다.
23. [주-D002] 殺 : 저본(底本)에는 뒤에 “지(之)”가 더 있으나, 《대동야승・음애일기》 및 《해동야언(海東野言)・중종(中宗)》에 근거하여 삭제하였다.
24. [주-D003] 涇 : 저본에는 “질(洷)”로 되어 있다. 《음애집(陰崖集)・일록(日錄)》 및 《연산군일기》 2년 8월 17일 기록에 근거하여 경(涇)으로 수정하였다. 유경(柳涇)이 올바른 이름이다.
25. [주-D004] 出 : 저본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음애집・일록》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문맥상 '나갔다'는 의미가 필요하다.
26. [주-D005] 季 : 저본에는 “계(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음애일기》 및 《음애집・일록》에 근거하여 계(季)로 수정하였다. 이계남(李季男)이 올바른 이름이다.
27. [주-D006] 止 : 저본에는 없다. 《대동야승・음애일기》, 《해동야언・중종》, 《음애집・일록》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문맥상 '그만두게 하였다'는 의미가 필요하다.
28. 고량(膏粱): 기름진 고기와 좋은 곡식. 부유한 집안 또는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가리킨다.
29. 낙척불기(落拓不羈): 도량이 넓고 호방하여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음. 때로는 방탕하고 제멋대로 행동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30. 도사(屠肆): 푸줏간, 도살장. 젊은 시절 박원종의 행적이 다소 거칠었음을 보여준다.
31. 청현직(淸顯職): 청요직(淸要職)과 현직(顯職)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학문과 명망이 중요시되는 주요 관직을 의미한다.
32. 월산대군(月山大君) 부인: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이정(李婷)의 부인 박씨(朴氏). 박원종의 누이이다. 연산군이 강제로 궁에 들여 욕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사건이 박원종이 반정을 결심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33. 종묘사직(宗社):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국가 또는 왕조 자체를 상징한다.
34. 성공(成公) 희안(希顔): 성희안(成希顔, 1461-1513). 조선 전기의 문신. 박원종, 유순정과 함께 중종반정을 주도했다. 호는 창산(昌山).
35. 박공(朴公): 박원종을 가리킨다.
36. 신윤무(辛允武, ?-1512): 조선 전기의 무신. 박원종, 성희안과 인척 관계였으며,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37. 창산(昌山): 성희안의 호.
38. 평성(平城): 박원종의 봉호인 평성부원군에서 따온 별칭.
39. 유순정(柳順汀, 1459-1512): 조선 전기의 문신, 무신. 중종반정을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하나. 호는 청천(菁川).
40. 박영문(朴永文, ?-1506): 조선 전기의 무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41. 홍경주(洪景舟, 1458-1521): 조선 전기의 무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42. 장단(長湍) 석벽(石壁): 경기도 장단군(현 파주시) 임진강변의 경승지. 임진강 적벽(赤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43. 구사(丘史): 조선 시대 관청에 속하여 잡역에 종사하던 하인.
44. 진성대군(晉邸): 성종의 둘째 아들 이역(李懌). 훗날의 중종(中宗). 저(邸)는 왕자나 대군이 살던 집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진성대군 자신을 가리킨다.
45. 훈련원(訓鍊院): 조선 시대 군사 훈련 및 무예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 중종반정의 거병 장소였다.
46. 신수영(愼守英, ?-1506):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의 처남(신수근의 동생). 중종반정 때 임사홍, 신수근과 함께 살해되었다.
47. 임사홍(任士洪, 1445-1506):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의 총신(寵臣)으로 국정을 농단하였다. 중종반정 때 살해되었다.
48. 신수근(愼守勤, 1450-1506):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의 왕비 신씨(愼氏)의 오빠이자, 진성대군의 장인(훗날 단경왕후(端敬王后)의 아버지). 국구(國舅)로서 권세를 누렸으나 중종반정 때 살해되었다.
49. 신수겸(愼守謙, ?-1506): 신수근의 동생. 개성 유수로 있다가 중종반정 이후 살해되었다.
50.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
51. 우익(羽翼): 새의 날개. 돕거나 보좌하는 세력을 비유한다. 신수영과 임사홍을 신수근의 우익으로 보아 함께 제거했다는 의미이다.
52. 구수영(具壽永, 1456-1523):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의 총신 중 한 명. 중종반정 때 죽음을 면하고 이후 공신에 책록되었다.
53. 도총관(都摠管):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으뜸 벼슬. 정2품. 오위(五衛)는 조선 전기의 중앙 군사 조직이다.
54. 병조 참지(兵曹參知): 병조(兵曹)는 국방 및 무관 인사 등을 담당하던 육조의 하나. 참지(參知)는 정3품 당상관이다.
55. 이우(李堣, 1469-1517): 조선 전기의 문신. 당시 승정원의 승지였다.
56. 윤장(尹璋), 조계형(曺繼衡): 연산군 대의 문신들.
57. 차비문(差備門): 궁궐 내의 문 이름.
58. 흥청(興淸): 연산군 때 궁중에 두고 가무(歌舞)를 즐기기 위해 뽑아 올린 기녀(妓女).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59. 금부 당상(禁府堂上): 의금부(義禁府)의 정3품 이상 관원을 가리킨다. 의금부는 왕명에 따라 중죄인을 다스리던 사법 기관이다.
60. 관약(管鑰): 문을 잠그는 자물쇠와 열쇠. 궁궐 문의 통제권을 상징한다.
61. 극문(戟門): 창(戟)을 세워 위엄을 보이는 문. 궁궐이나 관청의 정문 또는 그 안의 문을 가리킨다.
62. 유자광(柳子光, ?-1512): 조선 전기의 문신, 무신. 서얼 출신으로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려 공신이 되었고, 연산군 대에 권세를 누렸다. 중종반정에도 참여했으나 이후 탄핵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63. 이계남(李季男, 1459-1510): 조선 전기의 무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64. 자신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繼妃) 윤씨(尹氏). 정현왕후(貞顯王后). 중종의 어머니이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반정 세력은 그녀의 윤허를 받아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65. 정미수(鄭眉壽, 1456-1512):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66.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 여기서는 진성대군(중종)의 사저(私邸)를 가리킨다.
67. 상(上): 임금. 여기서는 즉위 직전의 진성대군(중종)을 가리킨다.
68. 평시서(平市署): 조선 시대 수도의 시전(市廛)과 도량형(度量衡) 등을 관리하던 관청.
69. 법물(法物): 의식(儀式)에 사용하는 물건. 여기서는 국왕의 의장에 쓰이는 물품들을 의미한다.
70. 곽광(霍光) 폐 창읍왕(昌邑王) 고사: 한(漢)나라의 권신 곽광이 황음(荒淫)을 일삼던 창읍왕 유하(劉賀)를 즉위 27일 만에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옹립한 고사. 유자광 등이 연산군을 궁궐 안에서 정식으로 폐위시키려 했음을 시사한다.
71. 청천(菁川): 유순정(柳順汀)의 호.
72. 조려무계(麤厲無稽): 성질이 거칠고 사나우며(麤厲)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음(無稽). 박원종의 성품과 행동이 다소 거칠고 학문적 기반이 부족했음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73. 철권(鐵券): 공신에게 공적을 기록하여 하사하던 증표. 특권의 상징이었다.
74. 연거속구(連車續狗): 한(漢)나라 때 공신을 많이 봉하여 그 인장 끈이 수레에 이어지고(連車) 심지어 개에게까지 이어질 정도였다는 고사에서 유래. 공신 책봉이 남발되었음을 비판하는 말이다.
75. 《음애잡기(陰崖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륙(李陸, 1438-1498)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이륙의 호는 음애(陰崖). 다만 이륙은 중종반정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이 내용은 후대의 기록이거나 《음애잡기》라는 제목의 다른 책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이륙의 기록을 바탕으로 후인이 가필했을 수도 있다. 《음애일기(陰崖日記)》라는 표기도 보인다.
원문:
反正擧事之日, 國人皆曰: “首義者, 必朴令公也。” 雲合景附, 不謀而同。 公指揮若神, 號令如流, 動合機宜, 不終朝, 內外淸明, 神人乂安。 雖遠裔賤甿, 無不贊稱公名姓, 至號爲爺曰: “微朴爺, 我其得有今日乎?” 或指其衣曰: “朴爺衣我。” 食曰: “朴爺食我。” 其順衆心者如此。【墓誌。】
번역문:
반정(反正) 거사(擧事)의 날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맨 먼저 의(義)를 일으킨 자는 반드시 박 영공(朴令公)⁷⁶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름처럼 모여들고 그림자처럼 따라붙어[雲合景附]⁷⁷ 꾀하지 않았으나 뜻이 같았다. 공(公)의 지휘는 신(神)과 같았고 호령은 물 흐르듯 하였으며, 행동은 기미(機微)와 마땅함[機宜]⁷⁸에 부합하여 아침나절이 끝나기도 전에 안팎이 맑게 밝아지고 신(神)과 사람[神人]⁷⁹이 편안해졌다. 비록 먼 후예나 천한 백성[遠裔賤甿]⁸⁰이라도 공의 이름과 성(姓)을 찬양하고 일컫지 않음이 없었으며, 심지어 ‘박야(朴爺)’⁸¹라 부르며 말하기를, “박야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찌 오늘날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혹은 그 옷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박야께서 나에게 옷을 입히셨다” 하고, 음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박야께서 나에게 음식을 먹이셨다”라고 하니, 그가 민심[衆心]에 순응한 것이 이와 같았다.【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76. 박 영공(朴令公): 박원종을 높여 부르는 말. 영공(令公)은 정승(政丞)이나 부원군(府院君) 등 고위 관료에 대한 존칭이다.
77. 운합경부(雲合景附): 구름이 모이듯,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많은 사람들이 모여 따르는 모양. 민심이 반정에 호응했음을 나타낸다.
78. 기의(機宜): 일의 기미(機微)와 마땅함.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79. 신인(神人): 신명(神明)과 인간. 천지신명과 백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80. 원예천맹(遠裔賤甿): 먼 곳의 후손과 천한 백성. 모든 백성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81. 박야(朴爺): 박원종을 친근하게 높여 부르는 호칭. 야(爺)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애칭으로 쓰였다. 백성들이 박원종을 얼마나 지지하고 고마워했는지를 보여준다.
원문:
朴平城元宗、沈靑城順經交道極密, 情義無間, 而方大計未定之日, 猶不敢遽發其端。 平城對靑城, 乘醉言宗社危亡之狀、時政荒亂之事, 以探其意, 靑城亦和之。 平城始慷慨涕泣, 極陳其妹月山夫人臨死必報之托, 靑城又以門禍之慘答之, 乃收淚定議⁸²。【《寄齋雜記》。】
번역문:
평성(平城) 박원종(朴元宗)과 청성(靑城) 심순경(沈順經)⁸³은 교제하는 도(道)가 지극히 긴밀하여 정의(情義)에 간격이 없었으나, 바야흐로 큰 계책이 정해지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감히 갑자기 그 단서를 드러내지 못하였다. 평성이 청성을 대하여 취한 김에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망해가는 상황과 시정(時政)이 황폐하고 혼란한 일을 말하여 그의 뜻을 떠보니, 청성 또한 이에 동조하였다. 평성이 비로소 강개(慷慨)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의 누이 월산대군 부인이 임종 때 반드시 복수해 달라고 부탁한 것을 극력 진술하자, 청성 또한 집안의 화[門禍]⁸⁴가 참혹했던 것으로 답하고는, 이에 눈물을 거두고 의논을 정하였다.【《기재잡기(寄齋雜記)》⁸⁵에서 인용】
주석:
82. [주-D008] 義 : 장서각본 및 《대동야승・해동야언・중종》에는 “의(議)”로 되어 있다. '정의(定議)'는 의논을 정함, '정의(定義)'는 뜻을 정함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맥상 거사하기로 의논을 확정했다는 의미의 '定議'가 더 적절해 보인다.
83. 청성(靑城) 심순경(沈順經, 1462-15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청성(靑城).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84. 문화(門禍): 집안의 화(禍). 심순경의 아버지 심안의(沈安義)는 성종 때 폐비 윤씨(廢妃尹氏, 연산군의 생모)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즉위 후 교살(絞殺)당했다. 심순경 역시 이 사건으로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이러한 집안의 원한이 심순경이 반정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85.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령(柳希齡, 1480-1552)이 지은 필기잡록. 호는 기재(寄齋).
원문:
丁卯夏, 朝廷論斥柳子光, 子光恐動公曰: “吾與公, 幷以武人躋崇品, 文士多不悅。 唇亡齒寒, 我斥, 次及公。” 公笑答曰: “朝廷切齒久矣, 恨公不早退也。” 子光破膽而去。【墓誌。】
번역문:
정묘년(丁卯年, 1507)⁸⁶ 여름, 조정에서 유자광(柳子光)을 논죄하여 배척하자, 유자광이 두려워 공(公)을 동요시키려 말하였다. “나와 공은 함께 무인(武人)으로서 높은 품계[崇品]⁸⁷에 올랐으므로 문사(文士)들이 많이들 기뻐하지 않소.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唇亡齒寒]⁸⁸고 하니, 내가 배척당하면 다음은 공에게 미칠 것이오.” 공이 웃으며 답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절치(切齒)한 지 오래되었으니, 공이 일찍 물러나지 않음을 한스러워할 뿐이오.” 유자광은 크게 낙담[破膽]⁸⁹하여 가버렸다.【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86. 정묘년(丁卯年, 1507): 중종 2년.
87. 숭품(崇品): 높은 품계. 정1품, 종1품 등 최고위 품계를 가리킨다. 유자광은 무공(武功)으로, 박원종은 반정의 공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88. 순망치한(唇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서로 이해관계가 밀접하여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온전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유래했다. 유자광은 자신과 박원종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박원종을 회유하려 한 것이다.
89. 파담(破膽): 쓸개가 깨짐. 몹시 놀라거나 두려워하여 혼비백산하거나 크게 낙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庚午三月, 公固請辭職, 以金壽童爲領議政。 公長於豪貴, 發於武擧, 歷職淸顯, 不拘名檢。 及其遭亂運機, 遂成不世之功, 雖樵童、牧豎, 亦知其姓名。 及其大拜, 自量不厭衆望, 折節謙恭, 黽勉公義, 而不學無術, 麤厲之擧⁹⁰, 發見於外, 雖在上前, 持論者一忤其意, 亦暴露聲色, 不能自戢。 然其天資確實, 去就不苟, 至是力辭, 時論嘉之。【《陰崖雜記》。】
번역문:
경오년(庚午年, 1510) 3월, 공(公)이 굳게 사직(辭職)하기를 청하여 김수동(金壽童)⁹¹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공은 부귀한 집안[豪貴]에서 자라 무과[武擧]를 통해 출세하였고,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면서도 명분이나 예절[名檢]⁹²에 구애받지 않았다. 난세(亂世)를 만나 기회를 움직여[運機] 마침내 세상에 드문 공(不世之功)을 이루니, 비록 나무하는 아이[樵童]나 목동[牧豎]이라도 또한 그의 성명을 알았다. 그가 대상(大拜)⁹³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중망(衆望)을 만족시키지 못함을 헤아려, 절개를 꺾고 겸손하고 공손하며[折節謙恭] 공의(公義)에 힘썼으나, 배우지 못하고 학술(學術)이 없어 거칠고 사나운 행동[麤厲之擧]⁹⁴이 밖으로 드러났으니, 비록 임금 앞[上前]이라도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자[持論者]가 한번 그의 뜻을 거스르면 또한 성난 목소리와 얼굴빛[聲色]을 드러내어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천자(天資)는 확실(確實)하여 거취(去就)⁹⁵를 함부로 하지 않았으니, 이때에 이르러 힘써 사양하자 시론(時論)이 이를 가상히 여겼다.【《음애잡기(陰崖雜記)》에서 인용】
주석:
90. [주-D009] 擧 : 《대동야승・해동야언・중종》에 근거할 때 “기(氣)”가 되어야 한다. '조려지거(麤厲之擧)'는 거칠고 사나운 행동, '조려지기(麤厲之氣)'는 거칠고 사나운 기상/기질을 의미한다. 문맥상 둘 다 가능하나, 저본을 따라 번역한다.
91. 김수동(金壽童, 1457-1512): 조선 전기의 문신. 박원종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92. 명검(名檢): 명분(名分)과 검속(檢束). 예법이나 격식에 맞게 몸가짐을 단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93. 대배(大拜): 정승(政丞)으로 임명되는 것. 특히 영의정에 임명되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94. 조려지거(麤厲之擧): 거칠고 사나운 행동. 박원종의 성품이 다소 거칠었음을 나타낸다. 주석 [주-D009] 참조.
95. 거취(去就): 물러나고 나아감.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계속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四月, 病革, 上遣承旨問所欲言, 公謝曰: “主上勵精圖治, 安有可言之事? 但須愛惜人才。”【墓誌。】
번역문:
4월, 병이 위독해지자 상(上)께서 승지(承旨)를 보내 하고 싶은 말을 물으시니, 공(公)이 사양하며 아뢰었다. “주상(主上)께서 정사(政事)에 힘쓰고 다스림을 도모하시니[勵精圖治], 어찌 아뢸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모름지기 인재(人才)를 아끼소서.”【묘지(墓誌)에서 인용】
원문:
平城以首揆兼判兵曹, 寵權隆重, 思欲引避, 告病在陶山墅, 朝廷有大事, 上必問之。 時鄭湖陰士龍、黃柳村汝獻俱爲兵部郞, 以公務往咨。 平城素豪侈, 大治苑囿、池臺、館宇, 鋪設極其靡麗, 侍妾數十人被羅縠, 善謳彈。 以二君之才, 待之極豐, 珍羞羅列, 奏樂侑觴, 令侍婢各求一詩, 酣暢極驩而散。 二君相約治生得裕, 必效平城之一事。 湖陰晩年侈其饌, 而柳村大起第, 敎婢妾絃歌者, 蓋效其顰也。 寒士拮据, 奚竝勳貴哉!【《識小錄》。】
번역문:
평성(平城)은 수규(首揆)⁹⁶로서 판병조(判兵曹)⁹⁷를 겸하여 총애와 권세[寵權]가 매우 높고 중요하였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자 생각하여 병을 핑계로 도산(陶山)의 별장[墅]⁹⁸에 머물렀으나, 조정에 큰일이 있으면 상(上)께서 반드시 그에게 물으셨다. 그때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⁹⁹과 황유촌(黃柳村) 여헌(汝獻)¹⁰⁰이 모두 병부랑(兵部郞)¹⁰¹이었는데, 공무(公務)로 가서 자문하였다. 평성은 평소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워[豪侈] 원유(苑囿)¹⁰², 지대(池臺)¹⁰³, 관우(館宇)¹⁰⁴를 크게 꾸미고, 장식[鋪設]을 지극히 화려하게 하였으며, 시첩(侍妾) 수십 명이 비단옷[羅縠]¹⁰⁵을 입고 노래와 악기 연주[謳彈]를 잘하였다. 두 군자(君子)의 재능 때문에 그들을 대우함이 지극히 풍성하여, 진기한 음식[珍羞]을 늘어놓고 음악을 연주하며 술잔을 권하고[侑觴], 시비(侍婢)들에게 각각 시(詩) 한 수씩을 구하게 하여, 술에 취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여 헤어졌다. 두 군자가 서로 약속하기를, 살림살이[治生]가 넉넉해지면 반드시 평성의 일 한 가지라도 본받자고 하였다. 호음은 만년(晩年)에 그 음식을 사치스럽게 하였고, 유촌은 집을 크게 짓고 비첩(婢妾)들에게 현악기 연주와 노래[絃歌]를 가르쳤으니, 대개 그(평성)의 행동을 본뜬[效顰]¹⁰⁶ 것이었다. 가난한 선비[寒士]가 힘들게 살아가는데[拮据]¹⁰⁷, 어찌 훈귀(勳貴)¹⁰⁸와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식소록(識小錄)》¹⁰⁹에서 인용】
주석:
96. 수규(首揆): 으뜸 재상.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97. 판병조(判兵曹): 병조판서(兵曹判書). 정2품으로 병조의 으뜸 벼슬. 영의정이 병조판서를 겸하는 것은 막강한 권력을 보여준다.
98. 도산(陶山) 별장[墅]: 도산은 한성부 북부(北部)에 있던 지명. 서(墅)는 교외의 별장을 의미한다.
99.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호음(湖陰).
100. 황유촌(黃柳村) 여헌(汝獻): 황여헌(黃汝獻).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유촌(柳村).
101. 병부랑(兵部郞): 병조(兵曹)의 정5품 정랑(正郎) 또는 정6품 좌랑(佐郎)을 통칭하는 말.
102. 원유(苑囿): 동산과 정원.
103. 지대(池臺): 연못과 누대.
104. 관우(館宇): 크고 작은 집들.
105. 나곡(羅縠): 얇고 고운 비단.
106. 효빈(效顰): 남의 단점을 멋모르고 본뜸. 서시(西施)가 가슴앓이로 눈살을 찌푸리자[顰] 마을의 추녀(醜女)가 이를 아름답다고 여겨 따라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박원종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따라 함을 의미한다.
107. 길거(拮据): 살림이 빈궁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모양.
108. 훈귀(勳貴): 공훈(功勳)이 있어 높은 지위에 오른 귀족. 박원종과 같은 반정 공신을 가리킨다.
109. 《식소록(識小錄)》: 조선 중기의 문신 조신(曺伸, 1473-1549)이 지은 필기잡록.
원문:
平城旣成大功, 卽拜相, 中廟賞賚特厚, 擇甲第以處之, 又以興淸三百給之, 臧獲、寶貨稱是, 服御供奉, 多有僭踰。 鄭湖陰以禮曹佐郞, 持公事投刺, 遽召之入。 歷三門, 至大廳前, 但見鍊石爲砌, 庭有盤松數株, 丹檻、綠窓, 錦席滿鋪, 華麗奪目。 轉入一門, 有小閣如飛, 朱簾垂地, 語聲隱隱, 如自雲霧中來。 閣之東有一女人, 頭戴大首飾, 身穿黃長衫, 紅裳曳塵而出曰: “相公請入。” 湖陰屈身而進, 至女人之前, 又有一門在小堂之外, 淸香逆鼻。 遂入其門, 平城於荷池東畔, 坐於平床之上, 繡枕、華席, 兩叉鬟左右持蠅鞭而立堂上, 簾內女侍坐者, 又不知幾許。 平城起立, 迎謂湖陰曰: “坐坐。” 仍擧袖¹¹⁰引就西畔平床之上。 湖陰拜訖, 起¹¹¹曰: “此公事, 何以處之?” 蓋禮文間事也。 公取公事, 置之坐右, 曰: “僕以武夫, 有何知識¹¹²? 賴宗廟社稷之靈, 乘時崛¹¹³起, 冒此匪據, 惶恐聳身而已, 安敢與議於朝廷上公事哉? 自有本曹判書, 豈不善處之? 觀佐郞年少風采, 前程極遠, 幸飮老人酒。” 遽呼進酒, 群女侍齊聲跪應, 已有四女, 共奉一盤而進, 珍羞交錯, 不知下筯¹¹⁴處。 女工數十, 各持絲竹, 環坐于池上, 淸音、妙曲, 洋洋盈耳。 公頻擧杯勸之曰: “勿以武夫爲嫌。” 湖陰平生大戒, 亦不敢辭, 盡醉而起, 公使諸女侍扶掖, 到門外而止。 湖陰多置第宅, 自奉務極奢侈者, 蓋有慕於平城也。 末年家道大成, 而乃曰: “安得髣髴其萬一哉?”【《寄齋雜記》。】
번역문:
평성(平城)이 이미 큰 공(大功)을 이루자 즉시 재상(宰相)에 임명되었는데, 중종(中宗)의 상과 하사품[賞賚]이 특별히 두터워 좋은 집[甲第]¹¹⁰을 골라 살게 하고, 또 흥청(興淸) 3백 명을 그에게 주니, 노비[臧獲]¹¹¹와 보화(寶貨)도 이에 걸맞았고, 의복과 일상용품[服御供奉]¹¹²도 참람되고 분수에 넘치는[僭踰]¹¹³ 것이 많았다. 정호음(鄭湖陰)이 예조 좌랑(禮曹佐郞)¹¹⁴으로서 공문(公事)을 가지고 명함[刺]¹¹⁵을 넣자, 갑자기 그를 불러들였다. 세 개의 문을 지나 대청(大廳) 앞에 이르니, 다만 다듬은 돌[鍊石]로 섬돌[砌]을 쌓았고 뜰에는 반송(盤松)¹¹⁶ 몇 그루가 있으며, 붉은 난간[丹檻]과 푸른 창[綠窓]에 비단 자리[錦席]가 가득 깔려 있어 화려함이 눈을 빼앗았다. 한 문으로 돌아 들어가니 날아갈 듯한 작은 누각[小閣]이 있고 붉은 발[朱簾]이 땅에 드리웠으며, 말소리가 은은하여 마치 구름과 안개 속[雲霧中]에서 오는 듯하였다. 누각 동쪽에 한 여인이 있는데, 머리에는 큰 머리 장식[大首飾]¹¹⁷을 하고 몸에는 누른 장삼(黃長衫)을 입고 붉은 치마[紅裳]를 땅에 끌며 나와서 말하기를, “상공(相公)¹¹⁸께서는 들어오십시오”라고 하였다. 호음이 몸을 굽혀 나아가 여인 앞에 이르니, 또 작은 당(堂) 밖에 문이 하나 있었는데 맑은 향기[淸香]가 코를 찔렀다. 마침내 그 문으로 들어가니, 평성이 연못[荷池] 동쪽 가의 평상(平床) 위에 앉아 있었는데, 수놓은 베개[繡枕]와 화려한 자리[華席]가 있고,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올린 여종[叉鬟]¹¹⁹이 좌우에서 파리채[蠅鞭]¹²⁰를 가지고 당(堂) 위에 서 있었으며, 발 안에는 여시(女侍)가 앉아 있었는데 또한 몇 명인지 알 수 없었다. 평성이 일어나 서서 호음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앉으시오, 앉으시오” 하고, 이어서 소매를 들어 서쪽 가의 평상 위로 이끌어 나아가게 하였다. 호음이 절을 마치고 일어나 말하였다. “이 공무(公務)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이는 대개 예법 문서[禮文]에 관한 일이었다. 공(公)이 공문을 가져다 앉은 자리 오른쪽에 놓고 말하였다. “복(僕)¹²¹은 무부(武夫)인데 무슨 지식¹²²이 있겠습니까?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때를 타고 우뚝 일어나[崛起]¹²³, 분수에 맞지 않는 이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를 뿐인데, 어찌 감히 조정의 공무에 참여하여 의논하겠습니까? 저절로 본조(本曹)¹²⁴ 판서(判書)가 있을 것이니, 어찌 잘 처리하지 않겠습니까? 좌랑(佐郞)의 젊은 풍채(風采)를 보니 앞길[前程]이 지극히 멀 터이니, 부디 노인[老人]¹²⁵의 술을 마시십시오.” 급히 술을 올리라 부르니, 여러 여시(女侍)들이 일제히 소리 내어 꿇어앉아 응하였고, 이미 네 명의 여인이 함께 쟁반 하나를 받들어 나왔는데, 진기한 음식[珍羞]이 뒤섞여 있어 어디에 젓가락¹²⁶을 대야 할지 몰랐다. 여기(女工)¹²⁷ 수십 명이 각각 사죽(絲竹)¹²⁸을 가지고 연못 위에 둘러앉으니, 맑은 소리와 묘한 곡조[淸音妙曲]가 귀에 넘실거렸다[洋洋盈耳]. 공이 자주 술잔을 들어 권하며 말하였다. “무부라고 꺼리지 마시오.” 호음은 평생의 큰 경계¹²⁹였으나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잔뜩 취하여 일어나니, 공이 여러 여시들을 시켜 부축하게 하여 문밖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호음이 저택[第宅]을 많이 두고 스스로를 받드는[自奉] 데에 지극히 사치스럽게 힘쓴 것은, 대개 평성을 흠모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년(末年)에 집안의 도리[家道]가 크게 이루어졌으나, 이에 말하기를, “어찌 그 만분의 일인들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인용】
주석:
110. [주-D010] 袖 :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수(手)”로 되어 있다. '거수(擧袖)'는 소매를 들어 이끎, '거수(擧手)'는 손을 들어 이끎을 의미한다. 의미상 유사하나, 저본을 따른다.
111. [주-D011] 起 :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궤(跪)”로 되어 있다. '기왈(起曰)'은 일어나 말함, '궤왈(跪曰)'은 꿇어앉아 말함을 의미한다. 절을 한 뒤이므로 일어나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나, 저본을 따른다.
112. [주-D012] 識 :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의(義)”로 되어 있다. '지식(知識)'은 학문과 식견, '지의(知識)'는 앎과 의리(義理)로 해석될 수 있다. 박원종이 무부임을 강조하는 맥락에서는 '지식'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저본을 따른다.
113. [주-D013] 崛 : 저본에는 “굴(堀)”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대동야승・기재잡기》에 근거하여 굴(崛)로 수정하였다. 굴기(崛起)는 산이 우뚝 솟음, 또는 세력을 얻어 갑자기 일어섬을 의미한다.
114. [주-D014] 筯 : 저본에는 “근(筋)”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대동야승・기재잡기》에 근거하여 저(筯)로 수정하였다. 저(筯)는 젓가락을 의미한다.
110. 갑제(甲第): 첫째가는 좋은 집. 크고 화려한 저택을 의미한다.
111. 장획(臧獲): 옛날 노비(奴婢)를 천하게 이르던 말.
112. 복어공봉(服御供奉): 의복, 수레 등 몸에 지니거나 사용하는 물품과 일상적으로 쓰는 물건들을 통칭한다.
113. 참유(僭踰): 분수에 넘치게 사치함. 신분에 맞지 않게 호화로운 생활을 함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114. 예조 좌랑(禮曹佐郞): 예조(禮曹)는 의례, 외교, 교육, 과거 등을 담당하던 육조의 하나. 좌랑(佐郞)은 정6품 관직이다. 앞의 《식소록》 인용문에서는 정사룡을 병조의 낭관으로 기록했으나, 여기서는 예조 좌랑으로 기록되어 차이가 있다. 정사룡은 예조와 병조의 낭관을 모두 역임했을 수 있으나, 시기적으로 어느 쪽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115. 자(刺): 명함(名銜). 관리가 다른 관청이나 관리를 방문할 때 자신의 이름과 관직을 적어 내던 종이쪽지.
116. 반송(盤松):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나무줄기가 밑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우산처럼 퍼진 소나무. 정원수로 많이 심었다.
117. 대수머리(大首飾): 조선 시대 후기 왕족이나 상류층 부인들이 예장(禮裝)할 때 머리에 쓰던 큰 장식. 가체(加髢)의 일종이다.
118. 상공(相公): 정승(政丞)에 대한 존칭. 여기서는 박원종을 가리킨다.
119. 차환(叉鬟):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 둥글게 땋아 올린 머리 모양, 또는 그런 머리를 한 어린 여종.
120. 승편(蠅鞭): 파리채.
121. 복(僕): 남자가 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말.
122. 지식(知識): 학문과 식견. 박원종이 스스로를 낮추며 하는 말이다. 주석 [주-D012] 참조.
123. 굴기(崛起): 산이 우뚝 솟음, 또는 세력을 얻어 갑자기 일어섬. 주석 [주-D013] 참조.
124. 본조(本曹):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조(曹). 여기서는 예조(禮曹)를 가리킨다.
125. 노인(老人): 박원종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 당시 40대 초반이었으나, 젊은 정사룡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표현한 것이다.
126. 저(筯): 젓가락. 주석 [주-D014] 참조.
127. 여공(女工):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기녀(妓女) 또는 여악사(女樂師).
128. 사죽(絲竹): 실(絲)로 만든 현악기와 대나무(竹)로 만든 관악기. 즉, 각종 악기를 통칭하는 말이다.
129. 평생대계(平生大戒): 평생 동안 굳게 지켜온 큰 경계. 정사룡이 평소 술을 경계했음을 시사한다.
유순정(柳順汀)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柳順汀【文成公¹。】
字智翁, 文化人。 天順己卯生。 成宗十八年丁未擢魁科, 歷咸鏡・平安評事、校理²、應敎、義州府尹、平安兵使・監司、吏曹參判・判書。 中廟反正, 策靖國元勳, 封菁川府院君。 丁卯拜相, 至領議政。 壬申卒, 年五十四, 配享中宗廟庭。
번역문:
유순정(柳順汀)【시호는 문성공(文成公)¹이다.】
자는 지옹(智翁)이고 문화(文化) 사람이다. 천순(天順) 기묘년(1459)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18년 정미년(1487)에 과거 시험에서 장원(魁科)으로 선발되었고, 함경도·평안도 평사(評事), 교리(校理)², 응교(應敎), 의주부윤(義州府尹),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使)·감사(監司), 이조 참판(吏曹參判)·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원훈(元勳)에 책록되어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정묘년(1507)에 재상[相]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임신년(1512)에 졸(卒)하니, 나이 54세였고, 중종(中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석:
- [주-D001] 文成 : 《중종실록》 7년 12월 20일 기록에 “시호를 문정(文定)이라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고,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중종조 문정(文定). 문정은 뒤에 나라에서 내린 시호와 중복되어 성렬(成烈)로 고쳤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근거할 때 “문정(文定)” 또는 “성렬(成烈)”이 되어야 할 듯하다. 저본(底本)에는 '문성(文成)'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들을 참고할 때 시호에 대한 이견이 있었거나 후에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는 저본을 따른다.
- [주-D002] 敎 : 저본(底本)에는 “교(校)”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조항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교리(校理)는 홍문관(弘文館)의 정5품 관직이다.
원문:
公天性沈厚寬洪, 自髫齔時, 常不勸而好讀書。 及長, 爲文章汪汪然。 嘗受業於金宗直門下, 甚見推奬。 又猿臂善射, 彎弓百斤, 雖號武夫之雄, 莫敢與較。 旣中司馬, 游太學, 才名益振, 有當路者欲白成廟授宣傳官, 公不應。 歲丁未, 上視學, 臨軒策士, 擢公對第一。 爲咸鏡道評事, 虜見公射, 皆歎服歸, 而名其子, 多用公名, 蓋祝其子如公之才也。 尋坐邊將失備禦, 配義州。 未久, 朝議以爲不當坐, 召拜司僕寺主簿。
번역문:
공(公)은 천성이 침착하고 후덕하며 너그럽고 넓었으며, 어릴 때[髫齔]³부터 항상 권하지 않아도 독서하기를 좋아하였다. 장성해서는 문장을 지음이 왕왕(汪汪)하였다⁴.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업을 배워 매우 추대되고 칭찬받았다. 또한 팔이 길어 활쏘기를 잘하여⁵ 백 근짜리 활⁶을 당기니, 비록 무부(武夫)의 영웅이라 불리는 자라도 감히 그와 겨루지 못하였다. 이미 사마시(司馬試)⁷에 합격하고 태학(太學)⁸에서 공부하자 재능과 명성이 더욱 떨쳤는데, 어떤 당로자(當路者)⁹가 성종(成廟)께 아뢰어 선전관(宣傳官)¹⁰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정미년(1487)에 상(上)께서 성균관에 거둥하시어[視學]¹¹, 임헌책(臨軒策)¹²으로 선비를 시험할 때 공을 발탁하여 대책(對策) 제1등으로 삼으셨다. 함경도 평사(評事)¹³가 되었을 때, 오랑캐[虜]들이 공이 활 쏘는 것을 보고 모두 감탄하고 복종하며 돌아가서 그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공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그 아들이 공과 같은 재능을 갖기를 축원한 것이었다. 얼마 안 되어 변방 장수가 방비를 소홀히 한 죄에 연좌되어 의주(義州)로 유배되었다. 오래지 않아 조정의 의논으로 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 불러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¹⁴에 임명하였다.
주석:
3. 초츤(髫齔): 땋은 머리(髫)와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날 때(齔)를 가리키는 말로, 7~8세 무렵의 어린 나이를 뜻한다.
4. 왕왕연(汪汪然): 물이 깊고 넓은 모양. 문장의 기세가 넓고 깊으며 막힘이 없음을 형용한다.
5. 원비선사(猿臂善射): '원숭이 팔처럼 길어 활을 잘 쏜다'는 뜻. 팔이 길면 활을 쏘는 데 유리하다고 여겨졌다.
6. 백근궁(百斤弓): 약 백 근(斤)의 힘으로 당겨야 하는 강한 활. 당시 활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상당한 무예 실력을 의미한다.
7. 사마시(司馬試):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아울러 이르는 말. 소과(小科)에 해당한다.
8. 태학(太學): 국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9. 당로자(當路者): 요직에 있는 사람. 권력자를 의미한다.
10. 선전관(宣傳官):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한 무관(武官). 왕명의 전달, 국왕 호위 등의 임무를 맡았다. 문관이 아닌 무관직을 제수하려 한 것은 그의 무예 실력을 높이 샀기 때문일 수 있다.
11. 시학(視學):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유생들의 학업을 살피고 시험을 보이는 일.
12. 임헌책(臨軒策): 임금이 대궐 앞 난간(軒)에 임하여 선비들에게 보이는 책문(策問) 시험. 정미년(1487)의 시험은 알성시(謁聖試)였다.
13. 평사(評事): 고려 말 조선 초의 관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나 절도사(節度使) 아래에서 실무를 보좌했다.
14.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사복시(司僕寺)의 종6품 관직. 사복시는 궁중의 말[馬]과 목장 등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원문:
辛亥, 北虜犯邊。 上以右議政許琮爲北征都元帥, 往問其罪, 許公簡公爲幕佐, 甚器重之, 常稱之曰: “他日濟世安民宰相, 必此人也。”
번역문:
신해년(1491)에 북쪽 오랑캐[北虜]가 변방을 침범하였다. 상(上)께서 우의정(右議政) 허종(許琮)을 북정 도원수(北征都元帥)¹⁵로 삼아 가서 그 죄를 묻게 하였는데, 허공(許公)이 공(公)을 선발하여 막좌(幕佐)¹⁶로 삼아 매우 그릇으로 여기고 중히 여겨¹⁷, 항상 칭찬하여 말하기를 “뒷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재상(宰相)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15. 북정 도원수(北征都元帥):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 임명된 군대의 최고 지휘관.
16. 막좌(幕佐): 막료(幕僚) 또는 참모(參謀). 원수(元帥)나 장수(將帥)를 보좌하는 역할.
17. 기중(器重): 그릇[器]으로 여기고 중(重)하게 여김. 인물의 재능과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중요하게 생각함을 의미한다.
원문:
大臣交口薦公曰: “柳某文武全, 材將相之器, 今世少比, 不宜久屈卑官, 乞加擢用。” 俄出爲平安道評事, 人皆稱屈, 公曰: “爲人臣, 尙可擇官乎? 顧不忍遠離老母耳。” 詣闕上疏, 請免者三, 上曰: “今須汝往, 故玆遣汝。 予將大用汝, 汝其無辭。” 仍御筆書公姓名于硯匣, 人皆憫其去而榮知遇也。 濯纓子金公馹孫以序送之, 擬諸宋之大韓、小范, 其一時期待, 類如此。
번역문:
대신(大臣)들이 입을 모아 공(公)을 추천하며 아뢰었다. “유 아무개[柳某]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의 재목이니, 지금 세상에 견줄 만한 이가 적습니다.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굽혀 있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청컨대 발탁하여 써 주소서.” 얼마 후 평안도 평사(評事)로 나가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말하였으나, 공은 말하였다. “남의 신하가 되어서 어찌 관직을 가릴 수 있겠는가? 다만 차마 늙은 어머니를 멀리 떠나지 못할 뿐이다.” 대궐에 나아가 상소(上疏)를 올려 면직을 청하기를 세 번 하니,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반드시 네가 가야 하므로 이에 너를 보내는 것이다. 내가 장차 너를 크게 쓸 것이니, 너는 사양하지 말라.” 이어서 어필(御筆)로 공의 성명을 연갑(硯匣)¹⁸에 쓰시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지우(知遇)¹⁹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탁영자(濯纓子) 김공(金公) 일손(馹孫)²⁰이 서문(序文)을 지어 그를 전송하며 송(宋)나라의 대한(大韓)²¹과 소범(小范)²²에 비유하였으니, 그 당시의 기대가 이와 같았다.
주석:
18. 연갑(硯匣): 벼루 상자. 임금이 신하의 이름을 벼루 상자에 적어두는 것은 그를 잊지 않고 중용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는 특별한 신임의 표시다.
19. 지우(知遇): 자신의 재능과 가치를 알아주는 대우. 임금이나 윗사람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발탁되는 것을 의미한다.
20. 탁영자(濯纓子) 김공(金公) 일손(馹孫):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김종직의 제자로 사림파의 중요 인물이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희생되었다.
21. 대한(大韓): 송나라의 명신 한기(韓琦, 1008-1075). 재상으로서 국방과 내치에 큰 공을 세웠다.
22. 소범(小范): 송나라의 명신 범중엄(范仲淹, 989-1052).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문학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소범’이라 불린 것은 같은 시대에 범진(范鎭)이라는 인물이 있어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김일손이 유순정을 한기와 범중엄에 비견한 것은 그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원문:
燕山初年, 公卿又交薦公拜獻納, 手疏極論任士洪奸狀。 其後士洪售奸誤國, 果如公言。 遷訓鍊院僉正, 時有關西邊氓, 潛往虜中, 指畫本道山川阨塞, 誘與爲寇, 虜喜爲奇貨。 朝廷購求, 不肯與, 大臣患之, 皆曰: “唯柳某可往。” 公往, 果以計購得之。 未還, 遭戊午之禍, 發卒追捕, 公方在外, 其來最後, 由是獲免, 蓋亦天也。
번역문:
연산군(燕山君) 초년에 공경(公卿)들이 또 번갈아 공을 추천하여 헌납(獻納)²³에 제수되자, 직접 상소하여 임사홍(任士洪)²⁴의 간사한 행태를 극력으로 논하였다. 그 후 임사홍이 간사함을 팔아 나라를 그르치니 과연 공의 말과 같았다.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²⁵으로 옮겼는데, 이때 관서(關西) 지방 변방의 백성 중에 몰래 오랑캐 땅으로 가서 본도(本道)의 산천과 요새[阨塞]를 알려주며 오랑캐를 유인하여 함께 도적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오랑캐가 기화(奇貨)²⁶로 여겨 기뻐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사서 데려오려 하였으나 오랑캐가 주려 하지 않자, 대신들이 이를 걱정하며 모두 말하기를 “오직 유 아무개[柳某]만이 갈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가서 과연 계책으로 그를 사서 데려왔다. 돌아오기 전에 무오사화(戊午之禍)를 만나 군사를 풀어 추포(追捕)하였는데, 공은 마침 외방에 있었고 돌아오는 것이 가장 늦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화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아마 하늘의 뜻이었을 것이다.
주석:
23. 헌납(獻納): 사간원(司諫院)의 정5품 관직.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24. 임사홍(任士洪, 1445-1506):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 대에 간신으로 활동하며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25.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훈련원(訓鍊院)의 종3품 관직. 훈련원은 조선 시대 무예 훈련과 병서 강습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26. 기화(奇貨): 진기한 재화. 이용 가치가 높은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한다. 《사기(史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의 ‘기화가거(奇貨可居)’ 고사에서 유래했다.
원문:
自甲子以來, 燕山失道滋甚, 日事殺戮, 朝之碩老名臣, 相繼誅夷, 至於小民, 殄於刑役, 中外僵屍, 塡積溝壑, 穢德日彰, 無告籲³天, 宗社幾傾。 公與平城朴公元宗、昌山成公希顔, 灼知天命、人心之所在, 倡率義徒, 奉大妃敎, 具鹵簿, 迎中宗於潛邸, 入卽位, 指揮整理, 不崇朝而國步大定。 開囹圄放無辜, 洗冤籍歸收孥, 誅竄奸佞, 登進忠賢, 遠邇大小, 樂於更生, 歌呼於路。 大事甫定, 公內籌廟算, 外理兵政, 人望之若長城, 恃以無恐。
번역문:
갑자년(1504) 이래로 연산군이 도(道)를 잃음이 더욱 심해져 날마다 살륙을 일삼아, 조정의 석로(碩老)와 명신(名臣)들이 서로 잇달아 주살되고, 소민(小民)에 이르기까지 형벌과 부역[刑役]으로 죽어, 중앙과 지방에 넘어진 시체들이 도랑과 골짜기를 메웠으며, 더러운 덕[穢德]²⁷이 날로 드러나 하소연할 곳 없는 이들이 하늘에 부르짖으니[籲天]²⁸, 종묘사직(宗社)이 거의 기울어졌다. 공(公)은 평성(平城) 박공(朴公) 원종(元宗)²⁹, 창산(昌山) 성공(成公) 희안(希顔)³⁰과 함께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있는 곳을 환히 알고 의로운 무리[義徒]를 이끌 것을 제창하여, 대비(大妃)의 교지(敎旨)를 받들어 의장(鹵簿)³¹을 갖추고 중종(中宗)을 잠저(潛邸)에서 맞이하여 들어와 즉위하게 하였다. 지휘하고 정리하여 짧은 시간 안에[不崇朝]³² 나라의 운명[國步]이 크게 안정되었다. 감옥[囹圄]을 열어 무고한 자들을 풀어주고, 원통한 죄인의 명부[冤籍]를 씻어주고 거두어들인 처자[收孥]³³를 돌려보내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주살하거나 유배 보내고 충성스럽고 현명한 이들을 등용하여 나아가게 하니, 멀고 가까운 곳의 크고 작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즐거워하며 길에서 노래하고 환호하였다. 큰일이 겨우 안정되자, 공은 안으로는 조정의 계책[廟算]³⁴을 헤아리고 밖으로는 군정(兵政)을 처리하니, 사람들이 그를 만리장성(長城)처럼 바라보며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었다.
주석:
27. 예덕(穢德): 더러운 덕행. 임금의 부도덕한 행실을 비판하는 말이다.
28. [주-D003] 籲 : 저본(底本)에는 “𮨣”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유천(籲天)’은 하늘에 부르짖어 호소함을 의미한다.
29. 평성(平城) 박공(朴公) 원종(元宗): 박원종(朴元宗, 1467-1510). 조선 전기의 무신. 중종반정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평성(평산)은 그의 본관이다.
30. 창산(昌山) 성공(成公) 희안(希顔): 성희안(成希顔, 1461-1513). 조선 전기의 문신. 박원종, 유순정과 함께 중종반정을 주도했다. 창산(창녕)은 그의 본관이다.
31. 로부(鹵簿): 임금의 행차 때 갖추는 의장(儀仗) 행렬. 여기서는 반정을 통해 새로운 임금을 옹립하는 정당성과 위엄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32. 불숭조(不崇朝): ‘숭조(崇朝)’는 해가 뜨고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즉,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일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33. 수노(收孥): 죄인의 처자(妻子)를 거두어 관노비(官奴婢)로 삼는 형벌. 갑자사화 등으로 억울하게 죄를 받은 이들의 가족을 신원(伸冤)시켜 주었음을 의미한다.
34. 묘산(廟算): 종묘(廟)에서 헤아리는 계책(算)이라는 뜻으로, 국가의 중대한 정책이나 전략을 의미한다.
원문:
公常與平城、昌山二公語曰: “我輩今就成功, 事定之後, 凡可料理, 當一歸諸朝廷, 己無與也。” 方擧義之日, 凡所指揮, 皆稟於公, 時朝貴名在除去中者頗多, 賴公全活者不少, 而人反不知, 或有怨公者, 公竟不自言, 人服其洪量。
번역문:
공(公)이 항상 평성(平城), 창산(昌山) 두 공(公)과 함께 말하였다. “우리들이 이제 성공을 이루었으니, 일이 안정된 뒤에는 무릇 처리할 만한 일은 마땅히 모두 조정(朝廷)에 돌리고 자신은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바야흐로 의거(義擧)를 일으킨 날에 무릇 지휘하는 바는 모두 공에게 품의하였는데, 당시 조정의 고관(朝貴) 중에 이름이 제거 대상 명단에 오른 자가 자못 많았으나 공에게 힘입어 목숨을 온전히 보전한 자가 적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알지 못하고 혹 공을 원망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공은 끝내 스스로 변명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넓은 도량[洪量]에 감복하였다.
원문:
庚午春, 三浦倭爲變, 攻陷薺浦城, 殺擄邊將。 事聞, 上擧公爲南征都元帥, 戎車啓途, 捷書已報。 上以南邊騷擾, 遂命公仍往南方, 巡審邊事之可罷立者以聞, 且欲以鎭靜人心。 公還啓便宜策, 上皆嘉納。
번역문:
경오년(1510) 봄에 삼포(三浦)³⁵의 왜인(倭人)들이 변란을 일으켜 제포성(薺浦城)³⁶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변방 장수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일이 알려지자 상(上)께서 공을 남정 도원수(南征都元帥)로 삼으니, 군수레[戎車]가 길을 떠나자 승전 보고[捷書]가 이미 올라왔다. 상께서 남쪽 변방이 소란스러운 까닭에 마침내 공에게 명하여 그대로 남쪽 지방으로 가서 변방의 일 중에 폐지하거나 새로 세울 만한 것을 살펴서 아뢰게 하셨고, 또한 인심(人心)을 진정시키고자 하셨다. 공이 돌아와 편의(便宜)로운 방책³⁷을 아뢰니, 상께서 모두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셨다.
주석:
35. 삼포(三浦): 조선 시대에 왜인(倭人)들의 거주와 무역을 허락했던 세 곳의 포구. 부산포(富山浦, 현 부산), 내이포(乃而浦) 또는 염포(鹽浦, 현 울산), 제포(薺浦, 현 창원시 진해구)를 가리킨다.
36. 제포성(薺浦城):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던 성.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왜구에 의해 함락되었다.
37. 편의책(便宜策):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 편리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책.
원문:
公平居喜慍不形, 口不言人過失。 長身有風儀, 持論公平純正, 出於自然, 務持大體, 不爲崖異。 遇國家大事, 不動聲色, 而處置咸得其宜。 博通經史, 爲詩文雄健豪逸, 尤長於四六。 好讀《朱子綱目》, 至於名臣賢士嘉言善行, 尋繹體認, 或書諸窓壁, 以自檃括。 晩節愈恭儉, 不事生産, 若有贏餘, 常賑施其親友。 心常不樂曰: “安得釋重負, 優遊適意, 以盡吾餘日乎?”【竝湖陰鄭士龍撰碑。】
번역문:
공(公)은 평소에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고,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키가 크고 풍채와 위의[風儀]가 있었으며, 주장을 폄[持論]이 공평하고 순정(純正)하여 자연스러움에서 나왔고, 대체(大體)³⁸를 지키는 데 힘쓰고 모나고 특이한 행동[崖異]³⁹을 하지 않았다. 국가의 큰일을 당해서는 얼굴빛과 목소리[聲色]를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처치가 모두 마땅함을 얻었다. 경서(經書)와 역사서(史書)에 널리 통달하였고, 시문(詩文)을 지음이 웅건(雄健)하고 호방하며 뛰어났으며[豪逸], 특히 사륙문(四六文)⁴⁰에 뛰어났다. 《주자강목(朱子綱目)》⁴¹ 읽기를 좋아하였고, 명신(名臣)과 현사(賢士)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嘉言善行]에 이르러서는 찾아서 풀어보고 몸소 체험하여 깨달았으며[尋繹體認], 혹은 창문이나 벽에 써 붙여 스스로 행실을 단속하였다[檃括]⁴². 만년의 절개[晩節]는 더욱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생산(生産)⁴³에 힘쓰지 않았고, 만약 남는 것이 있으면 항상 친한 벗들에게 나누어 구제하였다[賑施]. 마음속으로 항상 즐거워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어찌하면 무거운 짐[重負]을 벗고 한가로이 노닐며[優遊] 뜻에 맞게 나의 남은 날을 다할 수 있을까?”【이상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⁴⁴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38. 대체(大體): 일의 큰 줄거리나 중요한 원칙.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큰 흐름을 중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39. 애이(崖異): 언행이 모가 나고 남과 다르게 하려는 것. 괴팍하거나 과시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40. 사륙문(四六文): 변려문(駢儷文)의 한 형식. 네 글자(四)와 여섯 글자(六)로 이루어진 구(句)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對句)와 음률(音律)을 맞추어 쓰는 문체. 화려하고 장식적인 특징이 있다.
41. 《주자강목(朱子綱目)》: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바탕으로 편찬한 역사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 성리학적 정통론과 포폄(褒貶)의 원칙에 따라 역사를 기술했다.
42. 은괄(檃括): '은(檃)'은 굽은 것을 바로 펴는 틀, '괄(括)'은 묶는다는 뜻이다. 마음이나 행실을 바로잡고 단속함을 비유한다.
43. 생산(生産): 재산을 늘리는 일. 생업(生業) 또는 이재(理財)를 의미한다.
44.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호음(湖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원문:
中廟壬申年, 時議將復昭陵, 柳順汀以首相, 獨以爲不可。 當廣收廷議之日, 有一人夢見海平府院君鄭眉壽與柳相爲角抵之戲以相較, 柳相不勝。 時鄭海平捐館, 未及葬矣。 天將明, 柳相冠帶將詣闕, 忽中風, 竟不起。 昭陵阻擋之議不得行, 竟得復之云。【《月汀漫錄》。】
번역문:
중종(中廟) 임신년(1512)에 당시의 의논이 장차 소릉(昭陵)⁴⁵을 복위(復位)하려고 하였는데, 유순정(柳順汀)이 수상(首相)⁴⁶으로서 유독 불가하다고 여겼다. 널리 조정의 의논[廷議]을 수렴하던 날, 어떤 사람이 꿈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⁴⁷가 유상(柳相, 유순정)과 각저(角抵)⁴⁸ 놀이를 하며 서로 겨루는데 유상이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이때 정해평(鄭海平, 정미수)은 세상을 떠나[捐館]⁴⁹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했을 때였다. 날이 밝으려 할 때 유상이 관대(冠帶)를 갖추고 장차 대궐로 나아가려다 갑자기 중풍(中風)을 맞아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소릉 복위를 막으려던 의논이 행해지지 못하고 마침내 복위하게 되었다고 한다.【《월정만록(月汀漫錄)》⁵⁰에서 인용】
주석:
45. 소릉(昭陵): 문종(文宗)의 비(妃)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능.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세조(世祖) 때 폐위되었다가 중종 대에 복위되었다.
46.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47.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 1456-1512): 조선 전기의 문신. 해평(海平)은 본관, 부원군(府院君)은 작위이다. 소릉 복위를 주장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48. 각저(角抵): 씨름과 비슷한 고대의 놀이. 서로 힘을 겨루는 것을 의미한다. 꿈속에서 정미수가 유순정을 이긴 것은 소릉 복위를 둘러싼 논쟁에서 정미수 측의 의견이 관철될 것을 암시한다.
49. 연관(捐館): 객관(客館, 여관)을 버린다는 뜻으로, 사람이 객지에서 죽거나 또는 일반적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50. 《월정만록(月汀漫錄)》: 조선 중기의 문신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호는 월정(月汀). 인물 일화, 고증, 시화(詩話) 등을 담고 있다.
성희안(成希顔)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成希顔【忠定公¹。】
字愚翁, 昌寧人。 天順辛巳生。 成宗十六年乙巳登第。 中宗反正, 策靖國元勳, 封昌山府院君。 官至領議政。 癸酉卒, 年五十三, 配享中宗廟庭。
번역문:
성희안(成希顔)【시호는 충정공(忠定公)¹이다.】
자는 우옹(愚翁)이고 창녕(昌寧) 사람이다. 천순(天順) 신사년(1461)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16년 을사년(1485)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원훈(元勳)에 책록되어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계유년(1513)에 졸(卒)하니, 나이 53세였고, 중종(中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석:
- [주-D001] 定 : 저본(底本)에는 “정(貞)”으로 되어 있다. 《이락정집(二樂亭集)》의 〈창산부원군 성공 신도비명(昌山府院君 成公 神道碑銘)〉 및 《중종실록》 8년 7월 27일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그의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원문:
公旣生, 啼視異凡, 纔知識, 聰悟機警, 已有弘毅致遠之氣。 常遊戲, 自稱大將, 布陣申令以指揮, 群兒皆趨順無敢違。
번역문:
공(公)이 태어나서 울고 보는 것이 평범한 아이와 달랐으며, 겨우 사물을 알게 되자 총명하고 슬기로우며[聰悟] 기민하고 민첩하여[機警], 이미 도량이 넓고 의지[弘毅]가 굳세어 원대한 경지에 이를 기상[致遠之氣]²이 있었다. 항상 놀이를 할 때면 스스로 대장(大將)이라 칭하며 진(陣)을 치고 명령을 내려 지휘하니, 여러 아이들이 모두 따르고 순종하여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주석:
2. 홍의치원지기(弘毅致遠之氣): 도량이 넓고[弘] 의지가 굳세며[毅], 원대한 목표를 이루어낼[致遠] 기상.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의 “선비는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어려서부터 큰 인물의 자질을 보였음을 나타낸다.
원문:
戊午史獄甚急, 善人多挂非辜。 柳子光參鞫, 捃摭羅織, 猶恐網疎。 公爲郞僚, 多有解救。 子光惡其右善, 厲聲詆責, 至指公爲黨, 欲幷陷之。 公慷慨辨解, 辭氣正直, 諸推官皆是公, 子光竟不能行臆。【竝申二樂用漑撰碑。】
번역문:
무오사화(戊午史禍)³ 때 사옥(史獄)이 매우 급박하여 어진 사람들이 죄 없이 많이 걸려들었다. 유자광(柳子光)⁴이 국문(鞫問)에 참여하여 죄를 긁어모으고 엮어 만들면서도[捃摭羅織] 오히려 법망[網]이 성기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공(公)이 낭료(郎僚)⁵로서 많이 해결하고 구제해 주었다. 유자광이 그가 선(善)한 이를 편드는 것을 미워하여,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고 책망하며 공을 당(黨)⁶으로 지목하여 함께 죄에 빠뜨리려 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강개(慷慨)하게 변론하고 해명하는데 말과 기운[辭氣]이 정직하니, 여러 추관(推官)⁷들이 모두 공을 옳게 여겨 유자광이 끝내 제멋대로 하지 못하였다.【이상은 신이락(申二樂) 용개(用漑)⁸가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3.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연산군 4)에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림(士林) 세력이 유자광(柳子光) 등 훈구(勳舊) 세력에게 화를 입은 사건.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4. 유자광(柳子光, ?-1512): 조선 전기의 문신, 무신.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을 세웠고,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사림 세력을 탄압했다.
5. 낭료(郎僚): 정랑(正郎)이나 좌랑(佐郎) 등 낭관(郎官) 직위의 관료. 당시 성희안은 형조 좌랑(刑曹佐郎)이었다.
6. 당(黨): 여기서는 김종직, 김일손 등 사림 세력의 일파를 의미한다.
7. 추관(推官): 죄인을 심문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 의금부(義禁府)나 형조(刑曹) 등의 관리가 해당되었다.
8. 신이락(申二樂) 용개(用漑): 이락정(二樂亭) 신용개(申用漑, 1463-1519).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이락정(二樂亭), 송계(松溪). 성희안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원문:
公爲小官時, 已自剛果不撓。 其參判刑曹時, 館儒士見辱於賤隷, 聯名請誅, 而其隷乃時首揆愼相奴, 爲左相李廣陵之婢婿也。 判書韓致亨難於決, 治病不出。 廣陵之弟克墩, 造公第者再, 稱疾不見, 兩相方怒。 一日, 赴朝堂, 兩相語侵公, 公卽於會中出白曰: “衆儒士見歐於一賤奴, 罪當誅也。 此乃國法不當貸, 豈敢爲相公饒改乎? 不然則當啓知自退也。” 兩公愧而遜謝, 四座咸悚懼, 公色不動, 退而杖斃之。 其果斷若是。【《識小錄》。】
번역문:
공(公)이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이미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어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있을 때, 성균관 유생[館儒士]들이 천한 종[賤隷]에게 모욕을 당하자 연명(聯名)하여 그를 벨 것을 청하였는데, 그 종은 바로 당시 수규(首揆)⁹ 신상(愼相)¹⁰의 종이었고 좌상(左相) 이광릉(李廣陵)¹¹의 비녀(婢婿)¹²였다. 판서(判書) 한치형(韓致亨)¹³이 결정하기 어려워 병을 치료한다며 나오지 않았다. 광릉(廣陵)의 아우 극돈(克墩)¹⁴이 공의 집에 두 번이나 찾아왔으나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으니, 두 재상[兩相]이 바야흐로 노하였다. 하루는 조정(朝堂)¹⁵에 나아가니 두 재상이 말로써 공을 공격하자, 공이 즉시 모임 가운데서 나와 아뢰었다. “여러 유생들이 한 천한 종에게 구타를 당하였으니, 죄가 마땅히 베어야 합니다. 이는 바로 국법(國法)이니 용서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 감히 상공(相公)들을 위해 너그러이 고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아뢰고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 두 공이 부끄러워하며 겸손히 사과하니, 사방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러나 그 종을 장(杖)으로 쳐서 죽였다. 그의 과단성이 이와 같았다.【《식소록(識小錄)》¹⁶에서 인용】
주석:
9. 수규(首揆): 으뜸 정승.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10. 신상(愼相):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등에 따르면 당시 영의정은 신승선(愼承善, 1436-1502)이었다.
11. 좌상(左相) 이광릉(李廣陵): 좌의정 이극균(李克均, 1437-1504)을 가리킨다.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12. 비서(婢婿): 여자 종의 남편. 즉 사위 종.
13. 판서(判書) 한치형(韓致亨, 1434-1502): 당시 형조 판서(刑曹判書).
14. 극돈(克墩): 이극돈(李克墩, 1435-1503). 이극균의 동생으로, 당시 우의정이었다.
15. 조당(朝堂): 조정의 당상관(堂上官) 이상이 모여 정사를 논의하는 곳.
16. 《식소록(識小錄)》: 조선 중기의 문신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별집(別集)에 수록된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는 다른 동명의 문헌일 수도 있다. 정확한 출처 확인이 필요하다.
원문:
燕山幸楊花渡, 令從臣賦詩, 成希顔詩有聖心元不愛淸流之句, 燕山怒之, 以吏曹參判, 遞付副司勇, 數年不遷。 希顔見燕山淫虐日甚, 宗社將危, 慨然有撥亂反正之志, 顧無可與計事者。 朴元宗乃月山大君之婦弟也, 傑魁早貴, 爲武士所推仰。 希顔欲與之同事, 而無交分。 隣有武士辛允武者, 與元宗親密, 希顔使允武微諷之, 元宗躍起曰: “此吾素所蓄積也。” 卽與希顔定議。 又以吏曹判書柳順汀有時望, 不可不使知之, 乃喩其意, 順汀從之。 丙寅九月, 燕山將遊長湍石壁, 希顔擬於其日閉城門, 推戴晉城, 猶反掌也, 適停其行。 時預謀者漸衆, 皆踊躍思奮, 不可沮止。 且恐日久謀泄, 乃於某日夜, 約會于訓鍊院, 其同約者與風聞者爭趨之, 乃進陣于敦化門洞口, 分遣力士撲殺慫慂爲惡者任士洪、愼守勤等。 宮中守衛、承旨及將士等, 或由水口, 或縋城而下, 爭赴陣前, 宮中一空。 乃啓于大妃尹氏, 奉晉城大君, 卽位于景福宮, 廢主爲燕山君, 放于喬桐縣。 市不易肆, 中外帖然, 宗社再安, 希顔等之力也。【《東閣雜記》。】
번역문:
연산군(燕山君)이 양화도(楊花渡)¹⁷에 행차하여 따르는 신하들에게 시(詩)를 짓게 하였는데, 성희안의 시에 “성스러운 마음[聖心] 원래 맑은 흐름[淸流]¹⁸을 사랑하지 않으시네”라는 구절이 있자 연산군이 그에게 노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에서 체직시켜 부사용(副司勇)¹⁹에 제수하고 수년 동안 승진시키지 않았다. 성희안은 연산군의 음란하고 포학함이 날로 심해져 종묘사직(宗社)이 장차 위태롭게 될 것을 보고, 개연(慨然)히 난리를 바로잡고 정치를 바르게 돌리려는[撥亂反正]²⁰ 뜻을 가졌으나, 돌아보아도 함께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박원종(朴元宗)은 바로 월산대군(月山大君)²¹의 부인의 동생인데, 재주와 풍채가 뛰어나[傑魁] 일찍 귀하게 되어 무사(武士)들에게 추앙받고 있었다. 성희안이 그와 함께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교분(交分)이 없었다. 이웃에 무사 신윤무(辛允武)²²라는 자가 있어 박원종과 친밀하였으므로, 성희안이 신윤무로 하여금 은근히 그의 뜻을 떠보게 하니, 박원종이 벌떡 일어나며 말하였다. “이는 내가 평소에 쌓아두었던 생각이다.” 즉시 성희안과 함께 의논을 정하였다. 또한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당시의 명망[時望]이 있어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마침내 그 뜻을 알리니 유순정도 이를 따랐다. 병인년(1506) 9월에 연산군이 장차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서 놀려고 하자, 성희안이 그날 성문(城門)을 닫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계획하였으나, 마침 그 행차가 중지되었다. 이때 미리 모의한 자들이 점점 많아져 모두 기뻐 뛰며 분발할 것을 생각하여 막거나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또한 날이 오래되면 모의가 누설될까 두려워, 마침내 어느 날 밤에 훈련원(訓鍊院)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니, 함께 약속한 자들과 풍문(風聞)으로 들은 자들이 다투어 달려왔다. 이에 돈화문(敦化門) 어귀에 진(陣)을 치고 나아가, 역사(力士)들을 나누어 보내 악행을 하도록 부추긴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²³ 등을 때려 죽였다. 궁중의 수비(守衛), 승지(承旨) 및 장수와 병졸[將士] 등이 혹은 수구문(水口門)을 통하거나 혹은 성벽을 타고 내려와 다투어 진(陣) 앞으로 달려오니 궁중이 텅 비었다. 이에 대비(大妃) 윤씨(尹氏)²⁴에게 아뢰어 진성대군(晉城大君)²⁵을 받들어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하게 하고, 폐위된 임금[廢主]은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현(喬桐縣)으로 내쫓았다. 시장의 가게[肆]가 바뀌지 않았고 중앙과 지방[中外]이 안정되니, 종묘사직(宗社)이 다시 편안해진 것은 성희안 등의 힘이었다.【《동각잡기(東閣雜記)》²⁶에서 인용】
주석:
17. 양화도(楊花渡):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던 나루.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다워 왕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18. 성심원불애청류(聖心元不愛淸流): 연산군이 맑은 물(淸流)처럼 곧고 깨끗한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풍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로 인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19. 부사용(副司勇): 오위(五衛)에 속한 정7품의 무관직. 이조 참판(종2품)에서 매우 낮은 관직으로 좌천되었음을 의미한다.
20. 발란반정(撥亂反正):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올바른 상태로 되돌림. 쿠데타를 미화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21.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 성종(成宗)의 형. 박원종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승평부대부인 박씨)의 남동생이다.
22. 신윤무(辛允武, ?-1513): 조선 전기의 무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23. 신수근(愼守勤, 1450-1506):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의 비(妃) 신씨의 오빠이자 진성대군(중종)의 장인. 반정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24. 대비(大妃) 윤씨(尹氏):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1418-1483)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연대가 맞지 않다. 중종반정 당시 생존해 있던 대비는 성종의 계비(繼妃)인 자순대비(慈順大妃) 윤씨(1462-1530)이다. 반정 세력은 자순대비의 지지를 얻어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25.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中宗, 1488-1544)의 왕자 시절 봉호.
26.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 주로 선조(宣祖) 대의 정치, 인물, 사건 등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원문:
當燕山退²⁷廢之日, 成昌山寔首其謀, 平城預之, 而菁川晩始聞知, 其位次先朴、柳而終成者, 乃爵秩也。 然此實昌山推遜, 而自居第三者。 凡事謙讓乃諧, 矧此反正大事乎? 能讓而克成大勳, 昌山之識, 不可及也。【《識小錄》。】
번역문:
연산군이 퇴위[退廢]²⁸되던 날에 성창산(成昌山, 성희안)이 실로 그 모의를 주도하였고, 평성(平城, 박원종)이 이에 참여하였으며, 청천(菁川, 유순정)은 늦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그 공신 책록의 위차(位次)가 박원종, 유순정이 먼저이고 성희안이 마지막인 것은 바로 작위와 품계[爵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실로 창산(昌山, 성희안)이 미루어 사양하여[推遜] 스스로 세 번째에 머무른 것이다. 모든 일은 겸양(謙讓)해야 이에 화합되는 것인데, 하물며 이 반정(反正)과 같은 큰일에 있어서랴! 능히 사양하여 큰 공훈(大勳)을 이루었으니, 창산(昌山)의 식견은 따라갈 수 없다.【《식소록(識小錄)》에서 인용】
주석:
27. [주-D002] 退 : 저본(底本)에는 없다. 《대동야승(大東野乘)》의 〈부계기문(涪溪記聞)〉 및 《지퇴당집(知退堂集)》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28. 퇴폐(退廢): 임금이 자리에서 물러나 폐위됨.
원문:
公資稟通明, 器宇宏豁, 明白正大, 不爲威怵, 不爲私撓。 立朝三十年, 所莅皆著聲績, 卒建不世之勳, 以濟屯艱, 厝國祚於盤石, 眞古人所謂社稷臣也。 治家簡, 不殖貨利, 不廣田園, 雖位冠台鼎, 而不有富貴, 常以淸素自守。【碑。】
번역문:
공(公)은 자질(資稟)이 통명(通明)하고 기량과 도량[器宇]이 넓고 활달하며[宏豁], 명백(明白)하고 정대(正大)하여 위엄에 두려워하지[威怵] 않고 사사로움에 흔들리지[私撓] 않았다. 조정에 선 지 30년 동안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명성과 공적[聲績]을 드러냈고, 마침내 세상에 드문 공훈(不世之勳)을 세워 어려운 시국[屯艱]을 구제하여 나라의 복[國祚]을 반석(盤石) 위에 두었으니, 진실로 옛사람들이 이른바 사직(社稷)의 신하²⁹였다. 집안 살림[治家]은 간소하였고 재화와 이익[貨利]을 늘리지 않았으며 전원(田園)을 넓히지 않아, 비록 지위가 삼공(台鼎)³⁰ 중 으뜸이었으나 부귀(富貴)를 누리지 않고 항상 청렴하고 소박함[淸素]으로 스스로를 지켰다.【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29. 사직지신(社稷臣): 나라의 안위를 자기 몸처럼 여기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중신(重臣).
30. 태정(台鼎): 태(台)는 삼태성(三台星)을, 정(鼎)은 발이 셋 달린 솥을 의미하며, 모두 삼공(三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즉 최고위 재상을 상징한다.
원문:
成領相希顔由弘文正字丁憂去, 制闋復敍, 例謝恩命。 上召至閤門外勞之, 命中官臂一鷹以賜曰: “爾有老母, 公退有暇, 可以郊獵, 助供滋味。” 又入夜對, 賜酒果, 公袖柑橘十數枚, 因醉伏不省。 中官負出之, 不覺袖柑墮散于地。 明日, 下柑橘一盤于玉堂, 敎曰: “昨日希顔袖橘, 意欲遺親, 故賜。” 公鏤骨忘死, 卒倡靖國之擧, 以爲報效地。 成廟待士之誠、知人之明, 固有以盡人忠也, 而公之革危措安, 勳在社稷, 亦可謂不負知遇矣。【《龍泉談寂記》。】
번역문:
영상(領相) 성희안이 홍문관 정자(弘文正字)³¹로 있다가 부모상[丁憂]으로 관직을 떠났다가, 상제(喪制)를 마치고[闋] 다시 서용(敍用)되자 관례에 따라 은명(恩命)에 감사하였다. 상(上)께서 합문(閤門)³² 밖으로 불러 위로하시고, 중관(中官)³³에게 명하여 매[鷹] 한 마리를 팔에 올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으니, 공무에서 물러나 한가한 때에 교외에서 사냥하여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하라.” 또 밤에 입시하여 독대[夜對]하고 술과 과일을 내려주셨는데, 공이 감귤(柑橘) 십여 개를 소매에 넣었다가 취하여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중관이 그를 업고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소매 속 감귤이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다음 날 감귤 한 쟁반을 옥당(玉堂)³⁴에 내려주시며 교지(敎)를 내리셨다. “어제 성희안이 감귤을 소매에 넣은 것은 어버이께 드리고자 한 뜻이었기에 이를 하사한다.” 공이 뼈에 새기듯 은혜를 느끼고 죽음을 잊고서, 마침내 정국(靖國)의 의거³⁵를 제창하여 보답하고 효험을 나타낼 바탕[報效地]으로 삼았다. 성묘(成廟, 성종)께서 선비를 대우하는 정성과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知人之明]이 진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충성을 다하게 함이 있었고, 공이 위태로움을 바꾸어 편안하게 조치하여[革危措安] 공훈이 사직(社稷)에 있었으니, 또한 지우(知遇)³⁶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³⁷에서 인용】
주석:
31. 홍문관 정자(弘文正字): 홍문관(弘文館)의 정9품 관직. 가장 낮은 품계의 관직이다.
32. 합문(閤門): 대궐 안의 문.
33. 중관(中官): 내시(內侍). 궁궐 안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환관(宦官)이다.
34.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35. 정국지거(靖國之擧): 나라를 안정시킨 의거. 중종반정(中宗反正)을 가리킨다.
36. 지우(知遇): 자신의 재능과 가치를 알아주는 대우. 성종이 성희안의 효심과 능력을 알아보고 특별히 대우해 준 것을 의미한다.
37.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지은 수필집. 호는 용천(龍泉), 희락당(希樂堂). 인물 일화, 시화(詩話), 고사(故事) 등을 담고 있다.
원문:
朴元宗、成希顔、柳順汀等靖亂之後, 相繼輔政, 世謂三大臣。 中廟禮待異常, 朝退則爲之起, 出門然後復位, 三大臣未之知也。 希顔老病, 一日自公委蛇甚, 從容自得, 至中門, 檢³⁸言曰: “相公不知上起立耶? 何行之緩也?” 希顔流汗滿面曰: “老夫不知死所矣。” 昔霍³⁹氏之禍萌於驂乘, 人臣有震主之威, 而能保始終⁴⁰者, 未之有也。 三大臣皆得令終, 我中廟可謂至德也已。【《涪溪記聞》。】
번역문: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난리를 평정한[靖亂] 뒤에 서로 이어 정치를 보좌하니, 세상에서 삼대신(三大臣)이라 일컬었다. 중종(中廟)께서 예우(禮待)하심이 비상하여, 조정에서 물러나면 그들을 위해 일어나셨다가 문을 나간 뒤에야 자리로 돌아오셨으나, 삼대신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성희안이 늙고 병들어, 하루는 공무를 마치고 매우 느긋하게[委蛇甚] 조용히 자득(自得)하며 중문(中門)에 이르자, 검열(檢閱)⁴¹이 말하였다. “상공(相公)께서는 상(上)께서 일어나 서 계시는 것을 모르십니까? 어찌 걸음이 그리 느리십니까?” 성희안이 땀을 흘려 얼굴에 가득하며 말하였다. “이 늙은이가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구나!” 옛날 곽씨(霍氏)⁴²의 화(禍)가 참승(驂乘)⁴³에서 싹텄으니, 남의 신하로서 임금을 위협할 만한 위세[震主之威]를 가지고 있으면서 처음과 끝을 온전히 보전[保始終]한 자는 있지 않았다. 삼대신이 모두 좋은 죽음[令終]⁴⁴을 얻었으니, 우리 중종께서는 지극한 덕(至德)이라 이를 만하다.【《부계기문(涪溪記聞)》⁴⁵에서 인용】
주석:
38. [주-D003] 檢 : 《대동야승》 〈부계기문〉에는 앞에 “문(門)” 자가 더 있다. 문검열(門檢閱)일 가능성이 있다. 검열(檢閱)은 춘추관(春秋館)의 정9품 관직이다.
39. [주-D004] 霍 : 저본에는 “蒮”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대동야승》 〈부계기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한(漢)나라의 권신 곽광(霍光)을 가리킨다.
40. [주-D005] 終 : 저본에는 “종(從)”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대동야승》 〈부계기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41. 검열(檢閱): 춘추관(春秋館)의 정9품 관직. 또는 문(門)을 지키는 관리일 수도 있다(주석 [주-D003] 참조).
42. 곽씨(霍氏)의 화(禍): 한(漢)나라의 권신 곽광(霍光)은 선제(宣帝)를 옹립하는 등 큰 공을 세웠으나, 그 세력이 너무 강성하여 사후에 그의 가문이 역모로 몰려 멸족당한 일을 가리킨다.
43. 참승(驂乘): 임금의 수레에 함께 타는 것. 곽광이 수레에 함께 탈 때 위세가 임금을 능가할 정도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신하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성함을 비유한다.
44. 영종(令終): 천수(天壽)를 다하고 편안히 맞는 죽음.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비명횡사(非命橫死)하는 것과 대비된다. 반정 공신들이 권세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 않은 것은 중종의 덕(德) 덕분이라는 의미이다.
45.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령(柳希齡, 1480-1552)이 지은 필기잡록. 호는 부계(涪溪). 인물 일화, 시화, 고사 등을 담고 있다.
원문:
領議政成希顔卒。 希顔性坦率, 多大節。 立朝忼慨, 志尙不苟, 而不學無術。 又不能下人受過, 悻悻自好, 相業草草, 功名⁴⁶大損。 舊時卜相之日, 攘臂大言曰: “金應箕一千, 不能易一申用漑; 申用漑一千, 不能易一鄭光弼。” 其妄言不顧, 多此類也。 其力薦光弼, 非但用私款, 亦以逢迎光弼, 嘗有葭莩之重故爾。
번역문:
영의정 성희안이 졸(卒)하였다. 성희안은 성품이 솔직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며[坦率], 큰 절개[大節]가 많았다. 조정에 서서는 강개(忼慨)하였고 뜻과 지향[志尙]이 구차하지 않았으나, 배우지 않아 학술(學術)이 없었다. 또한 남에게 자신을 낮추어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성내며 스스로 잘난 체하니[悻悻自好]⁴⁷, 재상으로서의 공업[相業]이 변변치 못하여[草草] 공명(功名)⁴⁸이 크게 손상되었다. 옛날 재상을 점칠[卜相] 때 팔을 걷어붙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김응기(金應箕)⁴⁹ 일천 명이라도 신용개(申用漑)⁵⁰ 한 명과 바꿀 수 없고, 신용개 일천 명이라도 정광필(鄭光弼)⁵¹ 한 명과 바꿀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그 망령된 말을 돌아보지 않음이 이러한 종류가 많았다. 그가 정광필을 힘써 추천한 것은 단지 사사로운 정[私款]을 써서가 아니라, 또한 정광필에게 영합(逢迎)하여 일찍이 가벼운 인척 관계[葭莩之重]⁵²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석:
46. [주-D006] 功名 : 저본에는 없다. 《대동야승》 〈음애일기(陰崖日記)〉 및 《해동야언(海東野言)》 중종조 기록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47. 행행자호(悻悻自好): 불만을 품고 성내는 모양[悻悻]을 하며 스스로를 좋게 여김.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의미한다.
48. 공명(功名): 공적(功績)과 명예(名譽).
49. 김응기(金應箕, 1455-1519): 조선 전기의 문신.
50. 신용개(申用漑, 1463-1519): 조선 전기의 문신.
51.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52. 가부지중(葭莩之重): '가(葭)'는 갈대, '부(莩)'는 갈대 속의 얇은 막을 뜻한다. 매우 엷고 먼 인척 관계를 비유한다. 성희안의 딸이 정광필의 아들 정사룡(鄭士龍)에게 시집갔으므로 사돈 관계였다.
원문:
成公希顔嘗鍾愛平壤妓申哥者, 强情致病, 實是厲階云。 服喪之日, 妓則被髮跣足, 逃隱人家, 復爲法司所追捕。 人曰: “成公之明, 足見一女之情狀, 而蠱惑已甚, 至於將死之日, 亦以是妓托其子瑮。 吁! 可怪也。”【竝《陰崖雜記》。】
번역문:
성공(成公) 희안(希顔)이 일찍이 평양 기생 신가(申哥)라는 자를 매우 사랑하여[鍾愛], 억지로 정을 통하다 병을 얻었으니⁵³, 실로 이것이 재앙의 계단[厲階]⁵⁴이었다고 한다. 상(喪)을 입은 날에 기생은 머리를 풀고 맨발[被髮跣足]로 남의 집에 도망하여 숨었으나, 다시 법사(法司)⁵⁵에게 추포(追捕)되었다. 사람들이 말하였다. “성공(成公)의 총명함으로 충분히 한 여자의 실정(實情)과 상태[情狀]를 알 수 있었을 터인데, 고혹(蠱惑)됨이 이미 심하여 장차 죽을 날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 기생을 그 아들 연(瑮)⁵⁶에게 부탁하였다. 아! 괴이하도다.”【이상은 《음애잡기(陰崖雜記)》에서 인용】
주석:
53. 강정치병(强情致病): 억지로 정을 통하다 병을 얻음.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불분명하나, 기생과의 관계가 그의 건강 악화나 평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한다.
54. 여계(厲階): 재앙으로 오르는 계단. 화(禍)의 시초나 원인을 의미한다.
55. 법사(法司): 법을 집행하는 관청. 형조(刑曹)나 사헌부(司憲府) 등을 가리킬 수 있다.
56. 연(瑮): 성연(成瑮). 성희안의 아들이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鄭光弼【文翼公。】
字士勛, 蘭宗之子。 天順壬午生。 成宗二十三年壬子進士, 仍擢大科。 初補成均學諭, 選入玉堂。 燕山朝, 謫牙山。 中宗反正, 歷副提學、大司憲、吏曹參判、禮曹判書、咸鏡監司、右贊成, 官至領議政致仕。 賜几杖。 戊戌卒, 年七十七。 配享中宗廟庭。
번역문: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¹이다.】
자는 사훈(士勛)이고, 난종(蘭宗)²의 아들이다. 천순(天順)³ 임오년(壬午年, 1462)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23년 임자년(壬子年, 1492)에 진사시(進士試)⁴에 합격하고, 이어서 대과(大科)⁵에 발탁되었다. 처음에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⁶에 보임되었다가 옥당(玉堂)⁷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연산군(燕山君) 때에는 아산(牙山)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⁸ 이후 부제학(副提學)⁹, 대사헌(大司憲)¹⁰, 이조 참판(吏曹參判)¹¹, 예조 판서(禮曹判書)¹²,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¹³, 우찬성(右贊成)¹⁴을 거쳐, 관직이 영의정(領議政)¹⁵에 이르러 치사(致仕)¹⁶하였다. 기장(几杖)¹⁷을 하사받았다. 무술년(戊戌年, 1538)에 나이 77세로 졸(卒)하니, 중종(中宗)의 묘정(廟庭)¹⁸에 배향(配享)¹⁹되었다.
주석:
-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을, 익(翼)은 생각과 행동이 조심스럽고 공경스러움(思慮深遠) 또는 부드러움과 정직함으로 공경히 섬김(溫柔聖善)을 의미한다.
- 난종(蘭宗): 정난종(鄭蘭宗, 1433~148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정광필의 아버지이다.
- 천순(天順): 중국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두 번째 연호(1457~1464).
- 진사시(進士試):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하나로, 생원시(生員試)와 함께 소과(小科)에 해당한다. 주로 시(詩), 부(賦), 책(策) 등을 시험하여 문장 능력을 평가했다. 합격자에게는 진사(進士) 칭호가 주어지고 성균관 입학 자격이나 하급 관리가 될 자격을 얻었다.
- 대과(大科): 문과(文科)를 이르는 말. 조선 시대 관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다.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조선 시대 국립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의 종9품 관직. 유생(儒生)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하며 왕의 자문에 응하던 기관이다. 이곳의 관원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인재 중에서 선발되어 청요직(淸要職)으로 꼽혔다.
-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관직으로, 학문 연구와 경연(經筵) 등을 담당했다.
-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았다.
- 이조 참판(吏曹參判): 육조(六曹)의 하나인 이조(吏曹)의 버금 벼슬. 종2품. 문관(文官)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다.
- 예조 판서(禮曹判書): 육조의 하나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예악(禮樂), 제사(祭祀), 교육, 외교 등을 담당했다.
-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 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 우찬성(右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다. 좌찬성(左贊成)과 함께 삼정승(三公)을 보좌했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최고 관직. 정1품. 국정을 총괄하는 수상(首相)이다.
- 치사(致仕):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것.
- 기장(几杖): 궤장(几杖)이라고도 한다.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원로대신에게 왕이 하사하던 안석(案席, 팔걸이 의자)과 지팡이. 큰 영예로 여겨졌다.
-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정광필은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문:
公幼有氣度, 大異凡兒, 翼惠奇愛之。 常對饌案, 諸子滿前, 獨以美味與公曰: “此爾他日之食也。” 少從伯姑受業, 乃翼惠公之姊, 而女中大家也。 有識鑑, 知公遠到, 以子孫爲托。【《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은 어려서부터 기상과 도량이 있어 보통 아이들과 크게 달랐으므로, 익혜공(翼惠公)²⁰이 특별히 사랑하였다. 항상 반찬이 놓인 상을 마주할 때 여러 아들이 앞에 가득하였으나, 유독 맛있는 음식을 공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네가 뒷날 먹을 음식이다.”라고 하였다. 젊어서 백고(伯姑)²¹에게서 학업을 배웠는데, 그는 바로 익혜공의 누이로 여자 중의 대가(大家)²²였다. 식견과 감식안이 있어 공이 장차 크게 될 것을 알고 자손들을 그에게 부탁하였다.【《잠곡구록(潛谷舊錄)》²³에서 인용】
주석:
20.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시호. 정광필의 아버지이다.
21. 백고(伯姑): 아버지의 누이, 즉 고모. 여기서는 정난종의 누이를 가리킨다.
22. 대가(大家): 학문이나 예술 등에 뛰어나 일가를 이룬 사람. 여기서는 여성으로서 학식과 덕망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23. 《잠곡구록(潛谷舊錄)》: 김육(金堉, 1580~1658)의 문집인 《잠곡유고(潜谷遺稿)》에 수록된 「잠곡선생구록(潜谷先生舊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김육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실학자로, 정광필의 후손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정광필의 외손녀가 김육의 증조모이다.)
원문:
公有一同贅生, 見其婦姑之出, 隨其轎後, 東扶西擧, 高聲檢飭, 至家¹而止。 後日公亦隨其行, 任其傾側, 寂無一語。 旣下轎, 姑氏責其不如某公, 亦無慍色, 但唯唯而已。 又與韓判書亨允、成大憲世純爲同榻友, 旣同中進士初試, 又同中文科初試。 共山上寺, 約: “當取大科, 如進士試不足赴也。 如有違者, 衆攻²之。” 一日, 公辭曰: “明日吾之生辰, 當謁伯氏³而回。” 諸公許之, 且曰: “公無忘前約。” 公曰: “諾。” 旣下山, 伯氏勉之: “明日乃會試, 名紙筆墨, 亦已準備, 不可徑還。” 公告以有約, 則又責之, 公遂黽勉而入。 旣出卽上寺, 諸公實不知也。 越三日, 家人奔告進士居末云。 諸公大噪, 依約衆攻之, 如今所謂擧風者。 公徐起而嚬曰: “負約非吾本意, 故走筆免不作, 豈知居末以取困侮哉?” 其年諸公與公幷登大科, 卒爲名臣之冠。 語曰: “大賢若愚, 大德若疎。” 公近之矣。【《寄齋雜記》。】
번역문:
공에게 한 동췌생(同贅生)²⁴이 있었는데, 그 부인과 고모²⁵가 외출하는 것을 보고는 그 가마 뒤를 따르며 동쪽으로 부축하고 서쪽으로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단속하고 주의를 주어 집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뒷날 공 또한 그 행차를 따랐는데, 가마가 기울어지거나 한쪽으로 쏠려도 내버려 두고 조용히 한마디 말도 없었다. 이미 가마에서 내리자 고모가 아무개 공만 못하다고 꾸짖었으나, 또한 성내는 기색 없이 다만 “예, 예.” 할 뿐이었다. 또 한 판서(韓判書) 형윤(亨允)²⁶, 성 대헌(成大憲) 세순(世純)²⁷과 동갑계 친구(同榻友)²⁸였는데, 함께 진사시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또 함께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다. 함께 산속 절에 머물며 약속하기를, “마땅히 대과(大科)에 합격할 것이니, 진사시 같은 것은 응시할 가치도 없다.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여러 사람이 그를 공격하자.”라고 하였다. 하루는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내일이 나의 생신이니, 마땅히 백씨(伯氏)²⁹를 뵙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니, 여러 공들이 허락하며 또한 말하기를, “공은 이전의 약속을 잊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알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미 산에서 내려오니, 백씨가 권하기를, “내일이 바로 회시(會試)³⁰인데, 답안지와 필묵도 이미 준비되었으니, 바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공이 약속이 있다고 고하니, 또 꾸짖으므로 공이 마침내 마지못해 들어갔다. 시험장에서 나오자마eterminate
죄송합니다. 생각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중간에 끊겼습니다. 이어서 번역과 주석을 완료하겠습니다.
원문:
公有一同贅生, 見其婦姑之出, 隨其轎後, 東扶西擧, 高聲檢飭, 至家¹而止。 後日公亦隨其行, 任其傾側, 寂無一語。 旣下轎, 姑氏責其不如某公, 亦無慍色, 但唯唯而已。 又與韓判書亨允、成大憲世純爲同榻友, 旣同中進士初試, 又同中文科初試。 共山上寺, 約: “當取大科, 如進士試不足赴也。 如有違者, 衆攻²之。” 一日, 公辭曰: “明日吾之生辰, 當謁伯氏³而回。” 諸公許之, 且曰: “公無忘前約。” 公曰: “諾。” 旣下山, 伯氏勉之: “明日乃會試, 名紙筆墨, 亦已準備, 不可徑還。” 公告以有約, 則又責之, 公遂黽勉而入。 旣出卽上寺, 諸公實不知也。 越三日, 家人奔告進士居末云。 諸公大噪, 依約衆攻之, 如今所謂擧風者。 公徐起而嚬曰: “負約非吾本意, 故走筆免不作, 豈知居末以取困侮哉?” 其年諸公與公幷登大科, 卒爲名臣之冠。 語曰: “大賢若愚, 大德若疎。” 公近之矣。【《寄齋雜記》。】
번역문:
공(公)에게 한 동췌생(同贅生)²⁴이 있었는데, 그 부인과 시어머니[婦姑]²⁵가 외출하는 것을 보고는 그 가마 뒤를 따르며 동쪽으로 부축하고 서쪽으로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단속하고 주의를 주어 집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뒷날 공 또한 그 행차를 따랐는데, 가마가 기울어지거나 한쪽으로 쏠려도 내버려 두고 조용히 한마디 말도 없었다. 이미 가마에서 내리자, 고모[姑氏]가 아무개 공만 못하다고 꾸짖었으나, 또한 성내는 기색 없이 다만 “예, 예.” 할 뿐이었다. 또 한 판서(韓判書) 형윤(亨允)²⁶, 성 대헌(成大憲) 세순(世純)²⁷과 동갑계 친구(同榻友)²⁸였는데, 이미 함께 진사시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또 함께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다. 함께 산속 절에 머물며 약속하기를, “마땅히 대과(大科)에 합격할 것이니, 진사시 같은 것은 응시할 가치도 없다.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여러 사람이 그를 공격하자.”라고 하였다. 하루는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내일이 나의 생신이니, 마땅히 백씨(伯氏)²⁹를 뵙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니, 여러 공들이 허락하며 또한 말하기를, “공은 이전의 약속을 잊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알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미 산에서 내려오니, 백씨가 권하기를, “내일이 바로 회시(會試)³⁰인데, 답안지와 필묵도 이미 준비되었으니, 바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공이 약속이 있다고 고하니, 또 꾸짖으므로 공이 마침내 마지못해 들어갔다. 시험장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절로 올라갔는데, 여러 공들은 실로 알지 못하였다. 사흘이 지나 집안사람이 달려와 진사시에 말석(末席)으로 합격했다고 고하였다. 여러 공들이 크게 떠들며 약속에 따라 그를 공격하였으니, 지금 이른바 거풍(擧風)³¹이라는 것과 같았다. 공이 천천히 일어나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약속을 어긴 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었기에, 글을 대강 써서 낙방을 면하려 했는데, 어찌 말석으로 합격하여 이러한 곤욕과 모욕을 당할 줄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해에 여러 공들과 공은 나란히 대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명신(名臣) 중 으뜸이 되었다. 옛말에 “매우 현명한 사람은 어리석은 듯하고, 매우 덕이 높은 사람은 소탈한 듯하다.”³²라고 하였는데, 공이 이에 가까웠다.【《기재잡기(寄齋雜記)》³³에서 인용】
주석:
24. 동췌생(同贅生): 함께 처가살이를 하는 동서 사이. 췌생(贅婿)은 데릴사위를 뜻한다.
25. 부고(婦姑):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앞의 ‘동췌생’ 이야기와 연결하면, 동서의 부인과 그 시어머니(즉, 동서에게는 어머니, 공에게는 장모뻘)의 외출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문맥상 ‘고모’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부(婦)’와 함께 쓰였으므로 ‘시어머니’가 더 적절해 보인다. 바로 다음 문장의 ‘고씨(姑氏)’는 문맥상 시어머니 또는 집안의 여성 어른으로 보인다.
26. 한형윤(韓亨允, 147015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 자는 중목(仲穆), 호는 월탄(月灘). 정광필과 동년(1492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판서를 역임했다.15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粹夫, 호는 休翁. 정광필과 동년(1492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대사헌을 역임했다.
27. 성세순(成世純, 1470
28. 동탑우(同榻友): 한 방에서 함께 잠자고 공부하는 가까운 친구. 또는 동갑계 친구.
29. 백씨(伯氏): 맏형. [주-D002]에 따르면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부모(父母)”로 되어 있다고 한다.
30. 회시(會試): 조선 시대 문과(文科)의 두 번째 시험. 초시(初試) 합격자들이 서울에 모여 치렀다. 여기서는 진사시의 회시(복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1. 거풍(擧風): 일종의 신고식이나 벌칙. 과거 합격자나 특정 집단 내에서 약속을 어기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행하는 집단적인 희롱이나 징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32. 대현약우 대덕약소(大賢若愚 大德若疎):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지 않아 어리석어 보이고, 진정으로 덕이 높은 사람은 꾸밈이 없어 소탈해 보인다는 뜻. 노자(老子)의 사상과 통한다.
33. 《기재잡기(寄齋雜記)》: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 조선 중기의 여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일화를 담고 있다.
* [주-D001] 家 : 《대동야승・기재잡기(大東野乘・寄齋雜記)》에는 “하교(下轎)”로 되어 있다.
* [주-D002] 伯氏 :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부모(父母)”로 되어 있다. 아래 “伯氏勉之”의 “伯氏”도 동일하다.
* [주-D003] 攻 : 저본(底本)에는 “공(恐)”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대동야승・기재잡기》,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정문익공사적부록(鄭文翼公事蹟附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公宏厚有量, 李相克均一見, 以公輔期之。 時開史局, 克均爲摠裁官, 公官纔學正, 擢授都廳之任, 一委編摩。 燕山時, 謫牙山, 尋又拿來, 罪在叵測。 親舊涕泣送餞, 忽有以廢立來告者, 坐中皆懽呼失次, 公夷然曰: “此乃爲宗社計也。” 仍郤肉楪曰: “未知故主生死也。” 見者歎服。
번역문:
공(公)은 도량이 넓고 깊었는데, 이극균(李克均) 상(相)³⁴이 한번 보고는 공보(公輔)³⁵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당시에 사국(史局)³⁶이 열렸는데, 이극균이 총재관(摠裁官)³⁷이었고 공의 관직은 겨우 학정(學正)³⁸이었으나, 발탁하여 도청(都廳)³⁹의 임무를 맡기고 편찬과 교정(編摩)⁴⁰의 일을 온전히 위임하였다. 연산군(燕山君) 때 아산(牙山)으로 유배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또 잡혀 와서 죄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송별연을 열어 주었는데, 홀연히 폐립(廢立)⁴¹의 소식을 알리는 자가 나타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질서를 잃었으나, 공은 태연하게 말하기를, “이는 종사(宗社)를 위한 계책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고기가 담긴 접시를 물리치며 말하기를, “옛 임금의 생사를 아직 알지 못한다.”라고 하니, 보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주석:
34. 이극균(李克均, 1437~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방형(邦衡). 영의정을 지냈다.
35. 공보(公輔): 공(公)과 보(輔)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삼공(三공)과 같은 최고 재상을 의미한다. 즉, 장차 나라의 중책을 맡을 인물로 기대했다는 뜻이다.
36. 사국(史局): 역사 편찬을 담당하던 임시 관청. 주로 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되었다.
37. 총재관(摠裁官): 사국(史局)의 최고 책임자. 실록 편찬 등을 총괄하였다.
38. 학정(學正): 성균관(成均館)의 정9품 관직. 학유(學諭)와 함께 유생 교육을 담당했다.
39. 도청(都廳): 조선 시대 각종 관청이나 임시 기구에서 실무를 총괄하던 자리. 여기서는 사국(史局)의 실무 책임자를 의미한다.
40. 편마(編摩): 글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일. 주로 서적 편찬과 관련된 업무를 가리킨다.
41. 폐립(廢立): 임금을 폐하고 새로 임금을 세우는 것. 여기서는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中宗反正)을 가리킨다.
원문:
丁卯正月壬戌, 上御夜對, 講《大學衍義》, 至漢元優遊、唐代姑息, 參贊官鄭光弼曰: “優遊、姑息, 乃人君之失政。 漢、唐之亡, 皆由優遊、姑息也。 在聖治之世, 一小人在位, 一君子在野, 若不關於治體, 或至陵夷, 則一小人可以亡國, 一君子足以興復。 進退、賢邪, 所關甚重, 尤不可不愼也。 大抵人君好學, 宗社之福也。 然徒學其文, 不體其實, 則終無益也。 必擇其善者而從之, 不善者而改之, 然後爲得也。”
번역문:
정묘년(丁卯年, 1507년 중종 2년) 정월 임술일(壬戌日)에 상(上)께서 야대(夜對)⁴²에 납시어 《대학연의(大學衍義)》⁴³를 강론하는데, 한(漢) 원제(元帝)의 우유부단함(優遊)⁴⁴과 당(唐)나라 시대의 고식적임(姑息)⁴⁵에 이르자, 참찬관(參贊官)⁴⁶ 정광필이 아뢰었다. “우유부단함과 고식적임은 바로 임금의 실정(失政)입니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멸망은 모두 우유부단함과 고식적임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성스러운 다스림의 시대에도 한 소인(小人)이 관직에 있고 한 군자(君子)가 재야(在野)에 있을 때, 만약 다스림의 본체에 관여하지 못하거나, 혹은 (국운이) 능멸당하고 쇠퇴하는 지경에 이르면, 한 소인이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고 한 군자가 족히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현명한 이와 사악한 이의 등용과 퇴출(進退賢邪)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니, 더욱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임금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그러나 한갓 그 글만 배우고 그 실질을 체득하지 못하면 끝내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선한 것을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것을 고쳐야만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주석:
42. 야대(夜對): 임금이 밤에 신하들을 불러 경서(經書)를 강론하거나 정사를 논의하던 일.
43. 《대학연의(大學衍義)》: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의 내용을 부연하여 편찬한 책으로, 제왕학(帝王學)의 교재로 널리 읽혔다.
44. 우유(優遊): 한가롭게 노닐거나 결단력이 없이 머뭇거리는 태도를 의미한다. 한 원제(漢元帝)는 우유부단하여 외척과 환관의 발호를 막지 못해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45. 고식(姑息): 당장의 편안함만 꾀하는 안일한 태도. 또는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임시방편으로 대처하는 것. 당나라 후기의 정치적 혼란과 쇠퇴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곤 한다.
46. 참찬관(參贊官):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정책을 논의하던 관직. 주로 홍문관 관원들이 겸임했다.
원문:
十一月甲辰, 上御朝講。 鄭光弼以同經筵入侍, 至《春秋》齊桓公事, 奏曰: “桓公用管仲而齊國理, 用豎刁、易牙而亂。 君子、小人進退, 實關國家治亂。” 是日拜禮曹判書。
번역문:
11월 갑진일(甲辰日)에 상(上)께서 조강(朝講)⁴⁷에 납시었다. 정광필이 동경연(同經筵)⁴⁸으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춘추(春秋)》의 제(齊) 환공(桓公)⁴⁹의 일에 이르자 아뢰었다. “환공은 관중(管仲)⁵⁰을 등용하여 제나라가 다스려졌고, 수조(豎刁)와 역아(易牙)⁵¹를 등용하여 어지러워졌습니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등용과 퇴출은 실로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에 관계됩니다.” 이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주석:
47. 조강(朝講): 임금이 아침 일찍 신하들을 불러 경서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의하던 일.
48. 동경연(同經筵): 경연관(經筵官)의 하나. 함께 경연에 참여하는 관리를 뜻한다.
49. 제 환공(齊桓公):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군주. 관중을 등용하여 춘추오패(春秋五霸)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말년에 수조, 역아 등 간신을 가까이하여 나라를 어지럽혔다.
50. 관중(管仲):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환공을 도와 패업(霸業)을 이루게 했다.
51. 수조(豎刁), 역아(易牙): 제 환공 말년에 총애를 받은 간신들. 이들의 전횡으로 제나라 정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원문:
先是, 壼位未定, 淑儀朴氏, 寵冠後宮, 欲援章敬之例, 自陞中位。 上欲從之, 而不知大臣之意如何, 令懇辭求之於鄭光弼、金應箕、申用漑等, 試觀其意。 光弼獨奮然不許曰: “正位, 當更求淑德名門, 不可以側微陞。” 遂以眞西山《大學衍義》齊家之要、范祖禹擇后之事進諫。 朴氏之意遂沮, 上意亦定於納新妃。 士林聞之, 相語曰: “光弼此擧, 雖宋韓、富⁵², 無以過也。”
번역문:
이에 앞서 곤위(壼位)⁵³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숙의 박씨(淑儀朴氏)⁵⁴가 후궁(後宮) 중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왕후(章敬王后)⁵⁵의 예를 끌어들여 스스로 중전(中殿)의 지위로 오르고자 하였다. 상(上)께서 이를 따르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뜻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여, 간곡한 말로 정광필, 김응기(金應箕)⁵⁶, 신용개(申用漑)⁵⁷ 등에게 알아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해 보았다. 정광필만이 홀로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정위(正位, 왕비)는 마땅히 다시 숙덕(淑德)을 갖춘 명문가에서 구해야 하며, 측미(側微)⁵⁸한 신분에서 승격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진서산(眞西山)의 《대학연의(大學衍義)》 중 제가(齊家)의 요체와 범조우(范祖禹)⁵⁹가 왕후를 간택한 일을 들어 간언하였다. 박씨의 뜻이 마침내 꺾이고, 상의 뜻 또한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으로 정해졌다. 사림(士林)⁶⁰이 이를 듣고 서로 말하기를, “정광필의 이번 거사는 비록 송(宋)나라의 한기(韓琦)와 부필(富弼)⁶¹이라도 이보다 낫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52. [주-D005] 富 : 《중종실록(中宗實錄)》 12년 7월 22일에는 “범(范)”으로 되어 있다. 즉,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기와 부필 또는 한기와 범중엄 모두 송나라의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53. 곤위(壼位): 왕비(王妃)의 자리. 곤전(壼殿), 중궁(中宮)이라고도 한다.
54. 숙의 박씨(淑儀朴氏):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가리킨다. 아들 복성군(福城君) 미(嵋)를 낳고 왕비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작서의 변(灼鼠之變)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55.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윤여필(尹汝弼)의 딸.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후궁에서 왕비가 된 사례는 아니다. 여기서 '장경지례(章敬之例)'가 구체적으로 어떤 예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나, 아마도 왕비가 공석일 때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있다는 전례를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후궁이 왕비로 승격하는 경우가 드물었다.15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백춘(伯春), 호는 정안(靜安).
56. 김응기(金應箕, 1451
57. 신용개(申用漑, 1463151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1098): 북송(北宋)의 역사가, 학자. 자는 순보(淳甫).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편찬에 참여했으며, 《당감(唐鑑)》 등을 저술했다. 그가 왕후 간택에 대해 어떤 주장을 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이 필요하나, 현명하고 덕 있는 여인을 왕후로 삼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58. 측미(側微): 신분이나 지위가 낮고 미미함. 여기서는 후궁의 신분을 가리킨다.
59. 범조우(范祖禹, 1041
60. 사림(士林): 조선 시대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선비 집단. 주로 재야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정치에 참여했다.
61. 한기(韓琦, 10081075), 부필(富弼, 10041083): 북송 시대의 명재상들. 강직함과 뛰어난 정치 능력으로 이름이 높았다. 주석 [주-D005]에서 언급된 범중엄(范仲淹, 989~1052) 역시 송나라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문학가이다. 정광필의 행동을 이들에 비견한 것은 그의 강직함과 나라를 위한 충정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원문:
成希顔、宋軼議啓曰: “三人中鄭光弼, 則自少沈重, 喜怒不形, 倚望甚重, 光弼當先用也。 金應箕爲人雅重, 持身雖無異於聖人, 若國家大事, 則非光弼不能爲也。 申用漑, 有才人也, 然豈以十用漑, 而易一光弼乎? 今日上至誠卜相, 不可不以實啓。”【竝《遺事》。】
번역문:
성희안(成希顔)⁶²과 송질(宋軼)⁶³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세 사람⁶⁴ 중에서 정광필은 젊어서부터 침착하고 신중하며 희로(喜怒)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아, 기대와 신망이 매우 두터우니 정광필을 마땅히 먼저 등용해야 합니다. 김응기는 사람됨이 고상하고 신중하여 몸가짐은 비록 성인(聖人)과 다름이 없으나, 만약 국가의 대사(大事)라면 정광필이 아니면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신용개는 재주 있는 사람이지만, 어찌 열 명의 신용개로 한 명의 정광필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오늘 상(上)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재상(宰相)을 점지하시니, 사실대로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이상 《유사(遺事)》⁶⁵에서 인용】
주석:
62. 성희안(成希顔, 1461151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 중종반정의 핵심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15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과지(寡之), 호는 계산(稽山). 우의정을 지냈다.
63. 송질(宋軼, 1454
64. 세 사람: 앞서 언급된 정광필, 김응기, 신용개를 가리킨다. 이들은 중종반정 이후 중용된 인물들이다.
65. 《유사(遺事)》: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일화나 기록을 모은 책을 통칭하는 말일 수 있다.
원문:
以咸鏡道觀察使鄭光弼爲右議政, 乃領議政成希顔之薦也。 希顔嘗服其度, 謂: “如光弼, 可謂聽於無聲, 視於無形, 敬之如神明。” 至是力薦之, 由監司而加階爲贊成, 贊成而政丞, 皆希顔之力也。【《陰崖雜記》。】
번역문:
함경도 관찰사 정광필을 우의정(右議政)⁶⁶으로 삼으니, 이는 영의정 성희안의 추천 때문이었다. 성희안은 일찍이 그의 도량에 감복하여 이르기를, “정광필 같은 이는 소리 없는 데서 듣고 형체 없는 데서 본다고 이를 만하니, 그를 신명(神明)처럼 공경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그를 강력히 추천하여, 감사(監司)에서 품계(品階)를 더하여 찬성(贊成)이 되고, 찬성에서 정승(政丞)이 된 것은 모두 성희안의 힘이었다.【《음애잡기(陰崖雜記)》⁶⁷에서 인용】
주석:
66.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벼슬.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재상이다.
67. 《음애잡기(陰崖雜記)》: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의 문집 또는 그가 남긴 기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광필과 동시대 인물이다.
원문:
上諭鄭光弼曰: “予嘉卿器醇而深, 猷遠而博。 玆以寵陟, 以示殊恩, 毋煩遜辭, 益加忠輔。” 又諭之曰: “卿有⁶⁸局量弘毅, 謀猷深遠, 輔之以學力, 持之以謹愼, 故擢之。”【遺事。】
번역문:
상(上)께서 정광필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내가 경(卿)의 그릇이 순수하고 깊으며, 계획이 원대하고 넓은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이에 특별한 총애로 관직을 승진시켜 남다른 은혜를 보이니, 번거롭게 사양하는 말을 하지 말고 더욱 충성스럽게 보좌하라.”고 하였다. 또 유시하기를, “경은 국량(局量)이 넓고 굳세며, 꾀하는 바가 깊고 원대하고, 학력(學力)으로 이를 보좌하며 근신(謹愼)함으로 이를 지니고 있기에 발탁하였다.”라고 하였다.【《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68. [주-D006] 有 : 《중종실록》 8년 4월 3일에 근거할 때 삭제해야 할 듯하다. 즉, '卿局量弘毅'가 되어 '경의 국량이 넓고 굳세며'로 해석된다. 본문은 저본을 따라 '有'를 포함하여 번역하였다.
(이하 나머지 부분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진행됩니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右議政鄭光弼嘗於經筵, 極論選上奴子、各府皁隷、各鎭水軍, 丁單役重, 將不能支, 請料理疎數、勞逸, 使安業。 旋命收議宰相, 皆以循舊爲便, 光弼亦依違無所建明, 識者譏之。【《陰崖雜記》。】
번역문:
우의정 정광필이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선상노자(選上奴子)⁶⁹, 각 부(府)의 조례(皁隷)⁷⁰, 각 진(鎭)의 수군(水軍)⁷¹은 정해진 인원은 적고 부역은 무거워 장차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극력으로 논하며, 그 많고 적음과 힘들고 편안함을 잘 헤아려 생업에 안정하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다. 곧 재상들에게 명하여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으나, 모두 옛 관례를 따르는 것이 편하다고 하였고, 정광필 또한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식견 있는 자들이 이를 비판하였다.【《음애잡기(陰崖雜記)》에서 인용】
주석:
69. 선상노자(選上奴子): 중앙 관청에 선발되어 올라와 사역하던 관노비(官奴婢)의 자녀.
70. 조례(皁隷): 조선 시대 각 관청에 소속되어 잡역에 종사하던 하급 관속. 검은 옷을 입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71. 수군(水軍): 조선 시대 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군대. 복무 조건이 고되고 처우가 열악하여 기피 대상이었다.
원문:
章敬王后於乙亥二月二十六日誕元子, 七日而上賓。 是時, 金冲庵、朴訥齋抗疏請復愼氏, 大司憲權敏手指爲邪論, 擬於死罪, 力請究治, 遣禁府郞官拿推, 事幾不測。 左議政鄭公率朝廷救解曰: “言雖不中, 不可罪之以防言路。”【《己卯黨籍補》。】
번역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을해년(乙亥年, 1515년 중종 10년) 2월 26일에 원자(元子)⁷²를 낳고, 7일 만에 승하(上賓)⁷³하였다. 이때 김충암(金冲庵)⁷⁴, 박눌재(朴訥齋)⁷⁵가 상소를 올려 신씨(愼氏)⁷⁶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자, 대사헌 권민(權敏)⁷⁷이 손가락질하며 사론(邪論)이라 하고 사죄(死罪)에 해당한다고 하여 강력히 조사하여 처벌할 것을 청하고 금부낭관(禁府郎官)을 보내 잡아다 국문하니, 일이 장차 어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좌의정 정공(鄭公)이 조정을 이끌고 구원하여 해명하며 말하기를, “말이 비록 적절하지 않더라도, 언로(言路)를 막을 수 있으니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기묘당적보(己卯黨籍補)》⁷⁸에서 인용】
주석:
72. 원자(元子): 임금의 맏아들. 여기서는 훗날 인종(仁宗)이 되는 이호(李峼)를 가리킨다.
73. 상빈(上賓): 왕이나 왕비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74. 김충암(金冲庵): 김정(金淨, 14861521)을 가리킨다.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庵).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1530)을 가리킨다.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75. 박눌재(朴訥齋): 박상(朴祥, 1474
76. 신씨(愼氏):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 14871557). 중종의 첫 번째 비였으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중종반정 직후 폐위되었다.152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강(而剛), 호는 둔암(鈍庵).
77. 권민(權敏, 1468
78. 《기묘당적보(己卯黨籍補)》: 기묘사화(己卯士禍)와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을 보충한 책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편찬자와 시기는 미상이다.
원문:
嘗失原廟神版一位, 人皆疑下輩欲陷殿官而爲之, 囚參奉及守僕等鞫之, 竟不得端緖。 鄭光弼爲推官以爲: “此乃疑獄, 若期於得情, 則嚴刑之下, 必多冤濫。” 啓緩之, 無枉死者。 後刑曹偶捕賊人, 問前後所犯, 自服偸取位版, 藏諸某山巖下。 依其言尋得之。 人咸服光弼識見之神。【《東閣雜記》。】
번역문:
일찍이 원묘(原廟)⁷⁹의 신주(神版) 한 위(位)를 잃어버렸는데, 사람들이 모두 아랫것들이 전관(殿官)⁸⁰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짓이라 의심하여, 참봉(參奉)⁸¹과 수복(守僕)⁸² 등을 가두고 국문하였으나 끝내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 정광필이 추관(推官)⁸³이 되어 아뢰기를, “이는 의옥(疑獄)⁸⁴이니, 만약 실정을 알아내려고 기필코 한다면 엄한 형벌 아래 반드시 원통하고 무고한 희생이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수사를 늦출 것을 아뢰니, 억울하게 죽은 자가 없었다. 후에 형조(刑曹)에서 우연히 도적을 잡았는데, 이전과 이후에 저지른 죄를 묻자 스스로 신주를 훔쳐 아무 산 바위 아래에 숨겼다고 자복하였다. 그 말에 따라 찾아내니, 사람들이 모두 정광필의 신묘한 식견에 감복하였다.【《동각잡기(東閣雜記)》⁸⁵에서 인용】
주석:
79. 원묘(原廟): 종묘(宗廟) 외에 선대 왕이나 왕비를 모시기 위해 세운 별도의 사당.
80. 전관(殿官): 궁궐이나 종묘 등의 건물 관리를 맡은 관리.
81. 참봉(參奉): 조선 시대 여러 관청에 속했던 종9품의 잡직. 원묘 관리직 중 하나였을 수 있다.
82. 수복(守僕): 관청이나 능묘 등을 지키고 잡무를 담당하던 하인.
83. 추관(推官): 죄인을 심문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
84. 의옥(疑獄): 범죄 사실이나 범인이 명확하지 않아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사건.
85. 《동각잡기(東閣雜記)》: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 조선 중기의 여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일화를 담고 있다.
원문:
丙子十月庚午, 御夕講。 參贊官金硡曰: “燕山君得罪宗社, 屬籍當絶, 然若絶祀, 則似妨親親之道。 臣意非止廢主, 魯山亦無後, 此亦可祀。 今日延訪時, 竝議何如?” 奇遵曰: “魯山罪不如廢主, 今若祀之, 則於聖德厚矣。” 上曰: “見《武定寶鑑》, 魯山事, 關係且已久矣, 不可議也。” 御宣政殿, 延訪鄭光弼、金應箕、申用漑等, 光弼曰: “魯山事, 今日自上下問, 此美事也。 然世祖初卽位時事, 在後世未可輕改。” 上曰: “魯山事, 予意亦以爲不可輕議。” 金安國曰: “魯山、燕山被廢均也。 宜竝考古例而爲之。” 丁丑, 御宣政殿, 延訪大臣, 議燕山立後事。 鄭光弼曰: “燕山、魯山立後事, 前日因講論《禮記》而發⁷, 臣意欲自上使之不絶其祀耳。 魯山自先王朝無神主, 今作神主, 又造墓宅, 勢甚難矣。 雖好, 恐不可爲也。 使禮官磨鍊, 不絶其祀, 則國家之意厚矣。”【《金石一斑》。】
번역문:
병자년(丙子年, 1516년 중종 11년) 10월 경오일(庚午日)에 석강(夕講)⁸⁶에 납시었다. 참찬관 김굉(金硡)⁸⁷이 아뢰었다. “연산군(燕山君)은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 속적(屬籍)⁸⁸을 마땅히 끊어야 하나, 만약 제사를 끊는다면 친족을 친애하는 도리(親親之道)에 방해가 될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폐주(廢主)뿐만 아니라 노산(魯山)⁸⁹ 또한 후사가 없으니, 이 또한 제사를 지낼 수 있습니다. 오늘 연방(延訪)⁹⁰ 때 함께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준(奇遵)⁹¹이 아뢰었다. “노산의 죄는 폐주만 못하니, 지금 만약 그를 제사 지낸다면 성덕(聖德)에 두터울 것입니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무정보감(武定寶鑑)》⁹²을 보니, 노산의 일은 관계된 바가 또한 이미 오래되었으니 의논할 수 없다.”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정광필, 김응기, 신용개 등을 연방하시자, 정광필이 아뢰었다. “노산의 일은 오늘 상께서 직접 하문하시니, 이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조(世祖)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의 일이니, 후세에서 가볍게 고칠 수 없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노산의 일은 나의 뜻 또한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김안국(金安國)⁹³이 아뢰었다. “노산과 연산이 폐위된 것은 똑같습니다. 마땅히 함께 옛 관례를 상고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정축일(丁丑日)에 선정전에 납시어 대신들을 연방하고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을 의논하였다. 정광필이 아뢰었다. “연산과 노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은, 전날 《예기(禮記)》를 강론하다가 나왔는데, 신의 뜻은 상께서 그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일 뿐입니다. 노산은 선조(先王朝) 때부터 신주(神主)가 없었으니, 지금 신주를 만들고 또 묘와 사당을 조성하는 것은 형세가 매우 어렵습니다. 비록 좋은 일이나 아마도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그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국가의 뜻이 두터울 것입니다.”【《금석일반(金石一斑)》⁹⁴에서 인용】
주석:
86. 석강(夕講): 임금이 저녁에 신하들을 불러 경서를 강론하거나 정사를 논의하던 일.
87. 김굉(金硡):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88. 속적(屬籍): 종친(宗親)의 명부. 종친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89. 노산(魯山): 단종(端宗)을 가리킨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가 사사되었다.
90. 연방(延訪):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들여 국정을 자문하는 일.
91. 기준(奇遵, 1492152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고(子羔), 호는 물재(勿齋).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154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92. 《무정보감(武定寶鑑)》: 조선 세조 때 편찬된 책으로 추정되며, 무(武)와 관련된 정사(政事)의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전 여부는 불확실하다.
93. 김안국(金安國, 1478
94. 《금석일반(金石一斑)》: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으나, 금석문(金石文)이나 역사 기록의 일부를 모은 책일 가능성이 있다.
* [주-D007] 發 : 저본에는 “폐(廢)”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중종실록》 11년 10월 29일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이하 나머지 부분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진행됩니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己卯, 公爲首相。 中廟因災異延訪于思政殿, 左右迭進, 各陳弭災之策。 韓亨允⁹⁵進曰: “聖上雖礪精求治, 鄙夫敢據首相之位, 災變之作, 必有所由, 而治道之成, 不可望矣。” 及退賓廳, 右相申用漑作色大言曰: “新進之士, 面斥相臣, 此習不可長也。” 公顔色自若, 揮手止之曰: “渠知吾輩之不怒, 發此言也。 若小有忌憚, 雖勸之, 必不肯也。 於吾固無所害, 而年少敢言之風, 不宜摧抑之也。” 用漑服其言, 而聞者以爲有大臣之量。【《松窩雜記》。】
번역문: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공(公)이 수상(首相)⁹⁶이 되었다. 중종께서 재이(災異)⁹⁷로 인하여 사정전(思政殿)⁹⁸에서 연방(延訪)하시자, 좌우의 신하들이 번갈아 나아가 각기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을 아뢰었다. 한형윤(韓亨允)⁹⁹이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비록 정력을 다하여 다스림을 구하시나, 비루한 자¹⁰⁰가 감히 수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재앙과 변고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말미암은 바가 있을 것이고, 다스림의 도(道)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빈청(賓廳)¹⁰¹으로 물러나오자, 우상(右相) 신용개가 얼굴색을 바꾸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새로 관직에 나온 선비가 재상을 면전에서 질책하니, 이러한 풍습은 조장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안색이 태연자약하며 손을 흔들어 그를 막으며 말하기를, “그가 우리들이 노여워하지 않을 것을 알고 이런 말을 한 것이오. 만약 조금이라도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면 비록 권하더라도 반드시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오. 나에게는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으나, 젊은이가 감히 말하는 풍조는 꺾고 억눌러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다. 신용개가 그 말에 감복하였고, 듣는 자들은 대신(大臣)의 도량이 있다고 여겼다.【《송와잡기(松窩雜記)》¹⁰²에서 인용】
주석:
95. [주-D008] 亨允 : 《대동야승・송와잡설(大東野乘・松窩雜說)》 및 《정문익공유고・정문익공사적부록》에 근거할 때 “충(忠)”이 되어야 할 듯하다. 즉, 한충(韓忠, 14871521)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한충은 기묘사화 때 처형된 인물이다. 그러나 본문의 한형윤은 이미 앞에서 언급된 인물로, 정광필과 동년배이자 친구이다. 문맥상 한형윤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1552)의 문집인 《송와문집(松窩文集)》에 수록된 잡록으로 추정된다. 이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96.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을 이르는 말.
97. 재이(災異): 가뭄, 홍수, 지진, 역병 등과 같은 자연재해와 천문 현상의 이상 변화를 통틀어 이르는 말. 전통적으로 군주의 부덕(不德)이나 정치의 잘못으로 인해 나타난다고 여겨졌다.
98. 사정전(思政殿): 조선 시대 궁궐의 편전(便殿) 중 하나. 임금이 평상시에 정사를 보고 경연(經筵)을 열던 곳이다.
99. 한형윤(韓亨允): 앞서 언급된 정광필의 친구. 당시 어떤 관직에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연방에 참여할 정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100. 비부(鄙夫): 비루한 사내. 여기서는 한형윤이 정광필을 지칭하며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정광필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즉, '비루한 자가 수상의 자리에 있다'며 정광필의 책임을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101. 빈청(賓廳):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나 비변사(備邊司) 등에서 재상들이 모여 정사를 논의하던 곳.
102. 《송와잡기(松窩雜記)》: 이기(李璣, 1476
원문:
南衮與洪景舟由神武門有密啓事, 人不之知。 夜半, 命遣宣傳官領禁衛軍, 拿致金凈、趙光祖等七人于闕庭。 翌日未明, 衮以微服着草笠、麤布衣, 足穿破屨, 步至鄭相光弼家, 呼門者曰: “急入告于內, 但言客來。” 門者認其貌, 知其爲南相, 入告曰: “有客到門, 觀其貌, 是南判書。 但衣冠草草如賤人。” 鄭相大驚, 顚倒出見, 則乃衮也。 怪問曰: “公何爲此耶?” 衮俱道其所以, 仍曰: “此輩若遺一人, 其害無窮。 上今日必招公議之, 公可勉從上意, 除去無遺, 然後國勢得安。 不然, 多有後悔, 不可不深思處之。” 或以危言恐動, 或以甘言誘之。 鄭相正色曰: “公以大相爲賤服, 歷都市而來, 大是可愕事也。 謀害士林, 本非余心, 可忍爲此乎?” 衮大怒, 拂衣起去。【《思齋摭言》。】
번역문:
남곤(南衮)¹⁰³과 홍경주(洪景舟)¹⁰⁴가 신무문(神武門)¹⁰⁵을 통해 비밀리에 아뢴 일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한밤중에 선전관(宣傳官)¹⁰⁶을 보내 금위군(禁衛軍)¹⁰⁷을 거느리고 김정(金淨), 조광조(趙光祖)¹⁰⁸ 등 일곱 사람을 궁궐 뜰로 잡아들이도록 명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기 전에 남곤이 평복(微服)에 초립(草笠)을 쓰고 거친 베옷을 입고 해진 신을 신은 채 걸어서 정승(鄭相) 정광필의 집에 이르러, 문지기를 불러 말하기를, “급히 안에 들어가 아뢰되, 다만 손님이 왔다고만 말하라.”고 하였다. 문지기가 그 모습을 알아보고 남 상(南相)임을 알고 들어가 아뢰기를, “손님이 문에 이르렀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남 판서(南判書)입니다. 다만 의관(衣冠)이 초라하기가 천한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정 상이 크게 놀라 허둥지둥 뛰어나가 보니, 바로 남곤이었다. 괴이하게 여겨 묻기를, “공은 어찌하여 이런 모습이오?”라고 하니, 남곤이 그 까닭을 모두 말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이 무리들 중 만약 한 사람이라도 빠뜨린다면 그 해가 무궁할 것입니다. 상(上)께서 오늘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하실 것이니, 공께서는 힘써 상의 뜻을 따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제거하여야만 그런 뒤에 국세(國勢)가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가 많을 것이니,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혹은 위태로운 말로 두렵게 하고, 혹은 달콤한 말로 유혹하였다. 정 상이 얼굴색을 바로 하고 말하기를, “공이 대상(大相)으로서 천한 옷을 입고 도성을 거쳐 왔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오. 사림(士林)을 모해하는 것은 본래 나의 마음이 아닌데,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소?”라고 하니, 남곤이 크게 노하여 옷을 떨치고 일어나 가버렸다.【《사재척언(思齋摭言)》¹⁰⁹에서 인용】
주석:
103. 남곤(南衮, 1471152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 기묘사화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1541)이 지은 필기잡록. 김정국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관련 내용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104. 홍경주(洪景舟, ?1521): 조선 중기의 무신. 중종반정에 참여했으며, 기묘사화 때 남곤 등과 함께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1519):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중종 때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
105.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
106. 선전관(宣傳官): 조선 시대 왕명을 전달하거나 의전(儀典) 등을 담당하던 무관직.
107. 금위군(禁衛軍): 궁궐을 수비하고 임금을 호위하던 군대.
108. 조광조(趙光祖, 1482
109. 《사재척언(思齋摭言)》: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
원문:
十一月十五日, 南衮、沈貞等密告趙光祖等, 幷拿致闕庭, 或有言不可不使首相知之, 乃命召光弼入對, 使定光祖等罪。 光弼曰: “重事不可輕裁, 收群議以定之可也。” 上命南衮草傳旨, 衮稍前秉筆而伏, 寫訖, 進于上前。 覽訖, 傳曰: “案已就, 只囚光祖等八人, 餘悉放之。” 其案曰: “趙光祖、金凈、金湜、金絿等, 附己者進之, 異己者斥之, 聲勢相倚, 盤據權要, 引誘後進, 詭激成習, 使國論顚倒, 朝廷日非。 在朝之臣, 畏其勢焰, 莫敢開口。 尹自任、奇遵、朴世熹、朴薰¹¹⁰等交相和附云云。” 案中初有誣上行私之言, 光弼啓而去之; 李耔罪名在金湜之上, 光弼亦啓而脫之。 是夜, 吏曹判書南衮、承旨金謹思・成雲皆以特旨除之, 仍命盡遞兩司、玉堂。 光弼請勿遞, 再三啓之, 只許勿遞玉堂官。【《東閣雜記》。】
번역문:
11월 15일에 남곤, 심정(沈貞)¹¹¹ 등이 조광조 등을 비밀리에 고발하여, 아울러 궁궐 뜰로 잡아들였는데, 어떤 이가 수상(首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자, 이에 정광필을 불러 입대(入對)하게 하여 조광조 등의 죄를 정하게 하였다. 정광필이 아뢰기를, “중대한 일은 가볍게 재단할 수 없으니, 여러 사람의 의논을 수렴하여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남곤에게 명하여 전지(傳旨)¹¹²를 초안하게 하니, 남곤이 조금 앞으로 나아가 붓을 잡고 엎드려 쓰기를 마치고 상의 앞에 올렸다. 열람을 마치자 전교하기를, “안(案)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조광조 등 8명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라.”고 하였다. 그 안(죄목)은 이러하였다. “조광조, 김정, 김식(金湜)¹¹³, 김구(金絿)¹¹⁴ 등은 자기에게 붙는 자는 등용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며, 성세(聲勢)에 서로 의지하여 권력의 요직에 웅거하고, 후진(後進)을 끌어들여 속이고 과격함이 습성이 되어 국론(國論)을 뒤엎고 조정을 날로 그르치게 하였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그 세력과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윤자임(尹自任)¹¹⁵, 기준(奇遵), 박세희(朴世熹)¹¹⁶, 박훈(朴薰)¹¹⁷ 등이 서로 화합하고 붙좇았다 운운.” 그 안(案) 가운데 처음에 상을 속이고 사사로운 일을 행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나 정광필이 아뢰어 이를 삭제하였고, 이자(李耔)¹¹⁸의 죄명은 김식의 위에 있었으나 정광필이 또한 아뢰어 벗어나게 하였다. 이날 밤, 이조 판서 남곤, 승지(承旨) 김근사(金謹思)¹¹⁹, 성운(成雲)¹²⁰이 모두 특별한 명령으로 제수되고, 이어서 양사(兩司)¹²¹와 옥당(玉堂)의 관원을 모두 교체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정광필이 교체하지 말 것을 청하며 두세 번 아뢰었으나, 다만 옥당 관원을 교체하지 않는 것만 허락받았다.【《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인용】
주석:
110. [주-D009] 薰 : 저본에는 “훈(熏)”으로 되어 있다. 《중종실록》 14년 11월 15일, 《대동야승・동각잡기》,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아래 “薰, 遠方付處。”의 “薰”도 동일하다.
111. 심정(沈貞, 147115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기묘사화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152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태초(太初), 호는 정수(靜叟). 조광조의 측근으로 기묘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112. 전지(傳旨):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문서 또는 그 명령 자체.
113. 김식(金湜, 1482
114. 김구(金絿, 14881534): 조선 중기의 문신, 서예가. 자는 자상(子裳), 호는 자암(自庵). 기묘사화 때 유배되었다.15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회(汝晦), 호는 야천(野川). 기묘사화 때 유배되었다.
115. 윤자임(尹自任, ?1519): 조선 중기의 문신. 조광조 일파로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151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숙(晦叔), 호는 수재(守齋).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
116. 박세희(朴世熹, 1481
117. 박훈(朴薰, 1484
118. 이자(李耔, 148015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153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열경(悅卿), 호는 취옹(醉翁).
119. 김근사(金謹思, 1479
120. 성운(成雲, 1497~157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종원(從遠), 호는 대곡(大谷).
121.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하 나머지 부분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진행됩니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是時, 朝著殆空, 上命鄭光弼爲政。 光弼退至賓廳, 熟視衮而不言。 衮退語人曰: “鄭光弼之目也。” 光弼以柳雲爲大司憲, 李思鈞爲副提學, 斯兩人, 內有志槪, 外無拘檢, 見輕於光祖等者也。 衮等以兩人忤光祖, 不疑也。 時人服光弼之識鑑。【《石潭日記》。】
번역문:
이때 조정이 거의 텅 비게 되자, 상(上)께서 정광필에게 정사를 맡도록 명하였다. 정광필이 물러나 빈청(賓廳)에 이르러 남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으나 말을 하지 않았다. 남곤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광필의 눈이다.”라고 하였다. 정광필은 유운(柳雲)¹²²을 대사헌으로, 이사균(李思鈞)¹²³을 부제학으로 삼았는데, 이 두 사람은 안으로는 지조와 기개가 있고 밖으로는 거리낌과 단속함이 없어 조광조 등에게 가벼이 여겨졌던 인물들이었다. 남곤 등은 두 사람이 조광조의 뜻을 거스른 것으로 여겨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정광필의 식견에 감복하였다.【《석담일기(石潭日記)》¹²⁴에서 인용】
주석:
122. 유운(柳雲, 147115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종룡(從龍), 호는 수동(壽洞).153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평중(平仲), 호는 묵재(默齋).
123. 이사균(李思鈞, 1471
124. 《석담일기(石潭日記)》: 이이(李珥, 1536~1584)의 저술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이의 문인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한 책으로 추정된다. 석담(石潭)은 이이가 만년에 머물던 곳의 지명이다.
원문:
趙光祖等旣下獄, 取招入啓, 傳曰: “此事, 朝廷已定議, 不可用刑杖, 照律可也。” 禁府照啓光祖、凈、湜、絿等四人以死罪, 上呼承旨金謹思至榻前, 判¹²⁵付曰: “光祖、凈賜死; 湜、絿杖一百, 遠方安置; 自任、遵、世熹、薰, 遠方付處。” 謹思聞命逡巡, 史官蔡世英啓曰: “大臣處, 乞更議處之。” 上曰: “果然。 可更議也。” 鄭光弼時在賓廳, 謹思出傳上旨。 時夜張燭, 光弼聽敎, 捫燭驚顧左右, 卽請入對, 啓曰: “小臣在職亦久, 豈料今日有如此事? 此人等但以愚戇, 不識事理, 以致如此, 若干重罪, 則臣等豈不請之乎?” 淚緣白鬚交滴。 上曰: “此重事, 當更思爲之。” 召成雲, 敎曰: “光祖等四人決杖, 遠方安置; 自任等四人, 遠方付處。” 雲書判付而退。 光弼退賓廳, 又啓曰: “此人等旣免死, 是天地之仁也。 但皆病弱, 若杖而遠去, 則死於中道, 未可知也。 恐朝廷得殺士之名, 無減死之實也。” 上不允。 五啓, 皆不聽。【《東閣雜記》。】
번역문:
조광조 등이 이미 옥에 갇히자, 초사(招辭)¹²⁶를 받아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조정에서 이미 의논이 정해졌으니, 형장(刑杖)을 쓸 수 없고, 법률에 비추어 처리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 네 사람을 사죄(死罪)로 판결하여 아뢰자, 상께서 승지 김근사를 침상 앞으로 불러 판결하여 하교하기를,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賜死)¹²⁷하고, 김식과 김구는 곤장 100대에 먼 곳으로 안치(安置)¹²⁸하며,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먼 곳으로 부처(付處)¹²⁹하라.”고 하였다. 김근사가 명을 듣고 머뭇거리자, 사관(史官) 채세영(蔡世英)¹³⁰이 아뢰기를, “대신(大臣)을 처벌하는 것이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과연 그렇다. 다시 의논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정광필이 이때 빈청에 있었는데, 김근사가 나와 상의 뜻을 전하였다. 이때는 밤이라 촛불을 켜고 있었는데, 정광필이 교지를 듣고는 촛불을 만지며 놀라 좌우를 돌아보고, 즉시 입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관직에 있은 지 또한 오래되었으나, 어찌 오늘 이런 일이 있을 줄 헤아렸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다만 어리석고 고지식하여 사리를 알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중죄에 해당한다면 신들이 어찌 청하지 않았겠습니까?”라고 하며, 눈물이 흰 수염을 타고 흘러내렸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중대한 일은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처리하겠다.”라고 하였다. 성운을 불러 교지를 내리기를, “조광조 등 네 사람은 곤장을 치고 먼 곳으로 안치하고, 윤자임 등 네 사람은 먼 곳으로 부처하라.”고 하였다. 성운이 판결을 적어 하교하고 물러났다. 정광필이 빈청으로 물러나와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이미 죽음을 면하였으니, 이는 천지(天地)의 인자함입니다. 다만 모두 병약하니, 만약 곤장을 치고 멀리 보낸다면 길에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조정이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고, 죽음을 감해준 실효는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윤허하지 않았다. 다섯 번 아뢰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인용】
주석:
125. [주-D010] 判 : 《대동야승・동각잡기》 및 《국조문과방목》에는 앞에 “서(書)”가 더 있다. 즉, ‘서판부(書判付)’는 판결 내용을 적어 하교한다는 의미이다.
126. 초사(招辭): 죄인이 심문을 받고 자백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127. 사사(賜死): 임금이 죄인에게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형벌. 형식상으로는 임금의 은혜를 나타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형의 일종이다.
128. 안치(安置): 죄인을 먼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일정 기간 동안 지정된 곳에 머물게 하던 형벌.
129. 부처(付處): 죄인을 먼 지방으로 보내 일정한 곳에 가두어 두던 형벌. 안치보다 가벼운 형벌이다.
130. 채세영(蔡世英, 1490~156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일장(日章), 호는 귀봉(龜峯). 예문관 검열(檢閱)로서 사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원문:
己卯擧事夜, 當事宰相等啓罷藝文館, 招吏曹郞爲卽日政。 具斯文壽福時爲郞, 承牌至闕, 抗辭以爲: “若盡罷史官, 則今日記注, 誰當修之?” 不署敎下, 當事輩大怒, 欲治以承傳拒逆之罪。 時夜曉鍾, 鄭領相光弼始入闕庭, 斯文逆告以故, 領相曰: “諾。” 亦無一言。 領相入賓廳, 當事輩首擧是事, 哮怒咆勃, 領相亦大怒呵呵, 彼輩之心, 固亦少洩。 天明又議¹³¹抄啓, 領相曰: “主上方震怒, 此等事則從容¹³²治罪未晩。” 因以遷延, 不卽被斥, 亦無大罪, 幸¹³³也。 領相臨機處變, 佑賢輔國, 濟物布德, 包荒擾暴如此。【《前言往行錄》。】
번역문:
기묘년 거사(擧事)¹³⁴가 있던 날 밤, 당시의 재상 등이 예문관(藝文館)¹³⁵을 파할 것을 아뢰고, 이조 좌랑(吏曹佐郞)¹³⁶을 불러 즉시 정사(政事)를 처리하게 하였다. 구수복(具壽福)¹³⁷ 사문(斯文)¹³⁸이 당시에 좌랑이었는데, 패(牌)¹³⁹를 받고 궁궐에 이르러, 항변하며 말하기를, “만약 사관(史官)을 모두 파한다면 오늘의 기주(記注)¹⁴⁰를 누가 마땅히 편수하겠습니까?”라고 하며 교지(敎旨)에 서명하지 않고 내리니, 당시의 무리들이 크게 노하여 명령을 받고 전달하는 것을 거부하고 거역한 죄로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때 밤 새벽종이 울릴 무렵, 정영상(鄭領相) 정광필이 비로소 궁궐 뜰에 들어서자, 구수복이 미리 그 까닭을 고하니, 영상이 “알겠소.”라고 하고 또한 한마디 말도 없었다. 영상이 빈청에 들어가자, 당시의 무리들이 이 일을 먼저 거론하며 소리치고 노하며 펄펄 뛰자, 영상 또한 크게 노하며 하하 웃으니, 저 무리들의 마음이 진실로 또한 조금 누그러졌다. 날이 밝자 또 초계(抄啓)¹⁴¹를 의논하였는데, 영상이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바야흐로 크게 노하시니, 이런 일들은 조용히 죄를 다스려도 늦지 않소.”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체되어 즉시 배척당하지 않았고 또한 큰 죄도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영상이 기회에 임하여 변화에 대처하고, 현명한 이를 돕고 나라를 보필하며, 만물을 구제하고 덕을 베풀며, 거친 것을 포용하고 사나움을 너그럽게 함이 이와 같았다.【《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¹⁴²에서 인용】
주석:
131. [주-D011] 又議 : 《대동야승・해동잡록(大東野乘・海東雜錄)・정광필(鄭光弼)》에는 “대의(大義)”로 되어 있고, 《해동야언(海東野言)・중종(中宗)》에는 “대의(大議)”로 되어 있다.
132. [주-D012] 此等事則從容 : 《대동야승・해동잡록・정광필》에는 “종이(從以)”로 되어 있고, 《해동야언・중종》에는 “此等事則從而”로 되어 있다.
133. [주-D013] 幸 : 《대동야승・해동야언・중종》에는 “고(辜)”로 되어 있다. '고(辜)'는 '죄, 허물'이라는 뜻으로, 문맥상 '다행'이라는 의미의 '행(幸)'이 더 자연스럽다.
134. 거사(擧事): 중대한 일을 일으킴. 여기서는 기묘사화를 지칭한다.
135. 예문관(藝文館): 조선 시대 왕명(王命)을 작성하고 사초(史草)를 기록하며 경연(經筵)에 참여하던 관청.
136.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조(吏曹)의 정6품 관직. 실무를 담당했다.
137. 구수복(具壽福, 148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보(景甫), 호는 눌재(訥齋).
138. 사문(斯文): 문관(文官)을 높여 부르는 말.
139. 패(牌): 관청에서 발급하는 신분증이나 명령서.
140. 기주(記注):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 주로 사관이 담당했다.
141. 초계(抄啓): 중요한 내용만 뽑아서 임금에게 아뢰는 것.
142.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이전 시대의 모범적인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특정 서적을 지칭하기보다는 그러한 성격의 기록물을 통칭하는 말일 수 있다.
(이하 나머지 부분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진행됩니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議罷賢良科。 領相鄭光弼曰: “初設此科之時, 臣意以爲不可以不能止之, 及取之, 果多賢能之人。 大抵我國人心, 不如中國人之淳朴, 後弊必多, 故不欲開端。 然薦擧不公之事, 臣未之聞也。 謂安瑭主之者, 不然也。 申用漑、崔淑生力主其議, 安瑭於其子參選之時, 以爲無顯行而避嫌矣, 豈有爲其子而設此科乎? 其後用漑亦悔之, 語臣曰: ‘吾之初計, 誤矣。’” 特進官韓亨允曰: “此科初欲廣取, 故自上信而從之, 終乃抄略其數, 乃趨附之人也。 其建議者, 皆盛氣焰, 張順孫、曺繼商因言時事, 竝斥去, 在朝者皆愛其身而不敢言。 大臣初誤建議, 今知其弊, 宜速啓罷, 而言不可罷, 安有如此痛憤之事乎?” 光弼曰: “初設時, 非祖宗之規, 又有後弊, 故謂不可爲也。 及旣取之, 多有可用之人, 故惜其人才而謂不可罷, 此臣之意也。 論議豈可苟同乎?” 大司憲李沆曰: “金湜等初非厭科擧者也。 才學短淺, 必不能及, 故數少抄¹⁴³選而試取也。 今不罷此科, 則權臣之欲植奸黨者, 必藉此也。” 柳灌曰: “湜全不知書。” 承旨金希壽曰: “豈可云湜全不知書? 臣見其古文最難解處, 必能剖釋之。” 修撰李芄¹⁴⁴【後改薇, 乃芑¹⁴⁵之弟。】曰: “祖宗陰佑, 聖心開悟, 知爲亂政而治之, 大臣無一爲殿下子孫萬世之計。 頃者靖國功臣抄削, 本非大關, 至率百官請追改, 而今者社稷大計, 危亡所係之事, 不力爲之。” 光弼曰: “臣迷劣, 不知何以則國事好也, 必罷賢良科而後可乎? 今者率百官諫爭之事, 臣未能料也。 其欲使率百官而請加彼人等之罪乎? 聖明之世, 安可如此?” 上初命勿罷科, 只勿敍顯職, 竟罷之。
번역문:
현량과(賢良科)¹⁴⁶를 폐지하는 것을 의논하였다. 영상 정광필이 아뢰기를, “처음 이 과거를 설치할 때, 신의 생각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여겼는데, 뽑고 보니 과연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저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은 중국 사람처럼 순박하지 못하여 뒷날의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므로, 그 단서를 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거가 공정하지 못한 일은 신이 듣지 못했습니다. 안당(安瑭)¹⁴⁷이 이를 주도했다고 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용개와 최숙생(崔淑生)¹⁴⁸이 그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안당은 그 아들이 선발될 때 드러난 행적이 없다 하여 혐의를 피하였으니, 어찌 그 아들을 위하여 이 과거를 설치하였겠습니까? 그 후에 신용개 또한 이를 후회하며 신에게 말하기를, ‘나의 처음 계획이 잘못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특진관(特進官)¹⁴⁹ 한형윤이 아뢰기를, “이 과거는 처음에 널리 뽑고자 하였으므로 상께서 믿고 따르셨으나, 마침내 그 수를 줄여 뽑으니, 이는 아부하는 자들입니다. 그 건의한 자들은 모두 기세가 등등하여, 장순손(張順孫)¹⁵⁰과 조계상(曺繼商)¹⁵¹이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아울러 배척당하니, 조정에 있는 자들이 모두 제 몸을 아껴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이 처음에 잘못 건의하였고 지금 그 폐단을 아니, 마땅히 속히 아뢰어 폐지해야 하는데, 폐지할 수 없다고 말하니, 어찌 이토록 통분한 일이 있겠습니까?” 정광필이 아뢰기를, “처음 설치할 때 조종(祖宗)의 규범이 아니고 또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옳지 않다고 하였으나, 이미 뽑고 보니 쓸 만한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 인재를 아까워하여 폐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논의를 어찌 구차하게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대사헌 이항(李沆)¹⁵²이 아뢰기를, “김식 등은 처음에 과거를 싫어한 자들이 아닙니다. 재주와 학문이 짧고 얕아 반드시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적은 수를 뽑아 시험하여 취한 것입니다. 지금 이 과거를 폐지하지 않으면, 권력을 잡은 신하로서 간사한 무리를 심고자 하는 자가 반드시 이를 이용할 것입니다.” 유관(柳灌)¹⁵³이 아뢰기를, “김식은 전혀 글을 알지 못합니다.” 승지 김희수(金希壽)¹⁵⁴가 아뢰기를, “어찌 김식이 전혀 글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그는 고문(古文)의 가장 풀기 어려운 곳도 반드시 분석하여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수찬(修撰) 이완(李芄)【뒤에 미(薇)로 고쳤으며, 기(芑)의 아우이다.】¹⁵⁵이 아뢰기를, “조종께서 그늘에서 도우시고 성상의 마음이 열려 깨달으시어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리시는데, 대신 중에는 한 사람도 전하의 자손 만세의 계책을 위하는 이가 없습니다. 얼마 전 정국공신(靖國功臣)¹⁵⁶을 줄여 뽑은 것은 본래 크게 관계되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백관을 거느리고 추후 개정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면서, 지금 사직의 큰 계책으로 위망(危亡)이 달린 일에는 힘써 하지 않습니다.” 정광필이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고 용렬하여 어떻게 해야 국사가 좋아질지 알지 못하니, 반드시 현량과를 폐지한 뒤에야 옳겠습니까? 지금 백관을 거느리고 간쟁하는 일은 신이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저 사람들의 죄를 더해줄 것을 청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성명(聖明)한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 처음에 과거를 폐지하지 말고 다만 현직(顯職)에 임명하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마침내 폐지하였다.
주석:
143. [주-D016] 抄 : 저본에는 “청(請)”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동각잡기》 및 《지퇴당집(知退堂集)・동각잡기곤(東閣雜記坤)》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44. [주-D014] 芄 : 저본에는 “봉(芃)”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동각잡기》, 《연헌잡고(蓮軒雜稿)・홍주목사이부군행장(洪州牧使李府君行狀)》, 《중종실록》 14년 12월 11일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45. [주-D015] 芑 : 저본에는 “포(包)”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동각잡기》, 《지퇴당집・동각잡기곤》, 《연헌잡고・홍주목사이부군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46. 현량과(賢良科): 중종 때 조광조 등의 건의로 실시된 특별 과거 시험.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를 통해 선발하려 했으나,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다.
147. 안당(安瑭, 1460152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언보(彦寶), 호는 동고(東皐). 현량과 실시에 관여했다.152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숙(文叔), 호는 일재(逸齋).
148. 최숙생(崔淑生, 1457
149. 특진관(特進官): 경연(經筵)에 참여하던 관직. 정2품 이상의 관원 중에서 임명되었다.
150. 장순손(張順孫, 1458152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영(子永), 호는 물재(勿齋).154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윤(景胤), 호는 압구(狎鷗).
151. 조계상(曺繼商, 1467
152. 이항(李沆, 1460152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청(叔淸), 호는 용재(慵齋).154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巖).
153. 유관(柳灌, 1484
154. 김희수(金希壽, 1488153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인수(仁叟), 호는 묵재(默齋).152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방(子芳), 호는 몽란(夢蘭). 이기(李芑)의 아우. 기묘사화 때 사사되었다.
155. 이완(李芄, 1488
156.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원문:
乙酉, 因慈殿未寧, 上召大臣, 諭復立昭格署之意。 鄭光弼等議以旣罷, 不可復立。 上令更議。 光弼等再三以爲不可, 最後啓曰: “自上非不知其不可, 而爲慈殿如是下敎, 臣等不敢獻議。” 遂復立。【竝《東閣雜記》。】
번역문:
을유년(乙酉年, 1525년 중종 20년)에 자전(慈殿)¹⁵⁷께서 편찮으시자, 상께서 대신들을 불러 소격서(昭格署)¹⁵⁸를 다시 설치하라는 뜻을 유시하였다. 정광필 등이 이미 폐지하였으니 다시 설치할 수 없다고 의논하였다. 상께서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정광필 등이 두세 번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마지막에 아뢰기를, “상께서 그 불가함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나, 자전을 위하여 이와 같이 하교하시니, 신들이 감히 의논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다시 설치하였다.【이상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인용】
주석:
157. 자전(慈殿): 대비(大妃)나 대왕대비(大王大妃)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가리킨다.
158. 소격서(昭格署): 조선 시대 도교(道敎)의 초제(醮祭)를 지내던 관청. 성리학적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광조 등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잠시 복구되었다.
(이하 나머지 부분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진행됩니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有人告童蒙敎官某率其弟子, 將起兵謀反, 遂命分捕之。 勝冠者數十餘人, 十五六歲者又數十人, 十二三歲者六七十人, 而十歲以上亦數十人。 禁府桎梏、鐵鎖, 過半未足, 皆以藁索繫項, 坐之於鍾樓下。 鄭林塘年方十歲, 隨同門諸兒而去, 經日不還, 父母尋之, 則亦在其中。 公啓曰: “臣之孫玉壽【林塘, 小字。】, 年十歲, 亦在囚中, 敢來待罪。 但此皆無知小兒, 請審其獄。” 上使推官案之, 群小兒等, 於南山上, 脫衣爲旗, 折松枝爲槍, 爲習陣之戲, 竝無他端, 遂反坐之。【《寄齋雜記》。】
번역문:
어떤 사람이 동몽교관(童蒙敎官)¹⁵⁹ 아무개가 그 제자들을 이끌고 장차 군사를 일으켜 모반하려 한다고 고발하자, 마침내 나누어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성인(勝冠者)¹⁶⁰이 수십여 명, 열다섯 여섯 살 된 자가 또 수십 명, 열두세 살 된 자가 예순일곱 명이었고, 열 살 이상 된 자도 또한 수십 명이었다. 금부(禁府)의 질곡(桎梏)¹⁶¹과 철쇄(鐵鎖)¹⁶²가 절반도 채우지 못하여, 모두 짚으로 만든 노끈으로 목을 묶어 종루(鍾樓) 아래에 앉혔다. 정임당(鄭林塘)¹⁶³이 나이 겨우 열 살이었는데, 동문(同門)의 여러 아이들을 따라갔다가 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부모가 찾아보니 또한 그 가운데 있었다. 공(公)이 아뢰기를, “신의 손자 옥수(玉壽)【임당은 소자(小字)이다.】가 나이 열 살인데 또한 죄수들 가운데 있으니, 감히 와서 죄를 기다립니다. 다만 이들은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니, 그 옥사(獄事)를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추관(推官)에게 명하여 안핵(按覈)하게 하니, 여러 어린아이들이 남산(南山) 위에서 옷을 벗어 깃발을 만들고 소나무 가지를 꺾어 창을 만들어 진법(陣法)을 익히는 놀이를 하였을 뿐, 모두 다른 단서는 없었으므로 마침내 무고(誣告)한 자에게 죄를 돌렸다.【《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인용】
주석:
159.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교관.
160. 승관자(勝冠者): 관례(冠禮)를 치른 성인 남자. 보통 1520세에 관례를 치렀다.1588)을 가리킨다.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소자(小字)는 옥수(玉壽). 영의정을 지냈다.
161. 질곡(桎梏): 죄인의 발에 채우는 차꼬(桎)와 손에 채우는 수갑(梏).
162. 철쇄(鐵鎖): 쇠사슬.
163. 정임당(鄭林塘): 정광필의 손자 정유길(鄭惟吉, 1515
원문:
壬辰, 東宮近處有灼鼠詛呪之事, 且作假像懸木牌, 書不道之言。 捕可疑人鞫之, 指以朴嬪所爲, 賜朴嬪及福城君嵋死, 兩翁主廢爲庶人, 唐城尉洪礪死杖下, 光川尉金仁慶竄外。 左議政沈貞以交結朴嬪, 亦賜自盡, 自餘被罪者甚多。 鄭光弼鞫獄時, 以爲涉於疑獄, 且王室至親, 不可拷掠, 欲緩之而不能得。 時, 金安老主此事, 鍛鍊成獄, 因以擠陷平生有隙之人, 貞惡積罪盈, 天道好還, 雖其自取, 而以此成罪, 人有不服者。 翌年癸巳, 又於闕內臺諫廳, 懸假像掛木牌, 書兇悖之言。 掌令蔡無擇、正言鄭從濩等見之, 卽啓以洪礪餘黨尙在, 又試前日之謀, 因欲發明前事。 上命招三公、兩司、禁府堂上入對, 又以老成之人, 不可不使知之, 竝召領府事鄭光弼。 上曰: “今見牌書, 字畫及凡施爲, 與前牌相似。 臺諫所啓, 兇類欲發明前事之言, 亦似不遠矣。 但前者洪家自服我書而死。 此筆畫與前無異, 豈死者更來而書之乎? 其欲亂朝廷者所爲乎? 前牌書, 其時推官亦皆見之矣, 其各言之。” 左右或以爲字體相似, 或以爲未知相同。 上曰: “此與匿名書無異。 前則於東宮爲之, 故驚異而推之, 今予意燒破則朝廷自靜也。” 光弼曰: “大獄不可數興, 燒破之敎至當。 人心如此, 而大獄累起, 近來天變甚多, 未必不由於此也。” 領相張順孫、左相韓效元、右相金謹思等含糊, 只請自上裁斷。 禮判金安老曰: “今見書體不如前書之熟, 與前不同也。” 大司憲沈彦光曰: “自上以書體相似生疑, 甚不可也。 上意如此, 則下人必揣度, 以前獄爲虛事也。 洪礪、福城君、兩翁主定罪, 皆斷自聖衷。 父子之間, 至情所在, 易爲動搖, 此必朴氏及兩翁主家人所爲, 欲使混殽而疑前獄也。 前者鞫獄, 脫漏者甚多, 其時推官, 物議至今非之。” 大諫尙震曰: “見其牌, 則布置施爲, 與前如一。 臣之意, 若他人則雖與千金, 豈忍書之乎? 兩翁主皆在都下, 僕隷根據。 若使歸鄕, 而僕屬隨去, 則禍稍息矣。” 無擇曰: “頃者旣得罪人, 快施王法, 今又爲之, 掛在兩司所見處, 其欲混跡之計明矣。 自上疑其與前牌相似, 臣詳見前後所書, 其生熟頓不相似。 雖玉石俱焚, 必窮推而後已也。” 安老、無擇等之必以爲不同者, 以其前日已有服我書就死者也。 執義金希說、司諫尹豐亨、掌令柳世¹⁶⁴麟、持平平安玹・金亹、獻納林鵬、正言鄭從濩・崔輔漢等啓以不可不窮鞫, 上不從, 只令懸賞購捕, 金仁慶妻從夫往配所, 洪礪妻使之門外居住。 彦光、震等合司請鞫兩翁主家奴僕, 五啓不允而退。 副提學權輗、直提學南世健、典翰趙仁圭、應敎李任、副應敎許沆、校理成倫・河繼先、副校理黃琦、副修撰洪春卿、博士洪暹等上疏論“鄭光弼以爲: ‘累起大獄, 天變由於此。’ 其言至爲悖理。 光弼於朴氏, 托以親戚, 交結甚密, 物論鄙之。 及權奸之敗, 往來救護, 洪礪之獄, 曲爲逢迎, 今者復引天災, 欺誑殿下, 不幾於一言喪邦?”云云。 光弼之言, 眞得大臣告君之體, 而醜正之輩, 公肆詆斥如此, 其古所謂明欺者乎?
번역문:
임진년(壬辰年, 1532년 중종 27년)에 동궁(東宮)¹⁶⁵ 근처에서 쥐를 불에 지져 저주하는 작서(灼鼠)의 일이 있었고, 또 가짜 형상을 만들어 나무패를 매달고 불경한 말을 써 놓았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잡아 국문하니, 박빈(朴嬪)¹⁶⁶의 소행이라고 지목하여, 박빈과 복성군(福城君) 미(嵋)¹⁶⁷에게 사사(賜死)하고, 두 옹주(翁主)¹⁶⁸는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으며,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¹⁶⁹는 장형(杖刑) 아래 죽고,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¹⁷⁰은 외방으로 귀양 보냈다. 좌의정 심정(沈貞)은 박빈과 교결(交結)하였다 하여 또한 자진(自盡)을 명받았고, 그 나머지 죄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정광필이 옥사를 국문할 때, 의옥(疑獄)에 해당하고 또 왕실의 지친(至親)이므로 고문할 수 없다고 여겨, 이를 늦추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김안로(金安老)¹⁷¹가 이 일을 주도하여 옥사를 날조하여 만들고, 이로써 평소 틈이 있던 사람들을 모함하였는데, 심정은 악행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 하늘의 도가 돌아온 것이니 비록 그 자신이 자초한 것이나, 이로써 죄가 이루어지니 사람들이 불복하는 자가 있었다. 이듬해 계사년(癸巳年, 1533)에 또 궁궐 안 대간청(臺諫廳)에 가짜 형상을 매달고 나무패를 걸어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써 놓았다. 장령(掌令) 채무택(蔡無擇)¹⁷², 정언(正言) 정종호(鄭從濩)¹⁷³ 등이 이를 보고 즉시 홍여의 남은 무리가 아직 있어 또 전날의 꾀를 시험하여 이전의 일을 밝히고자 한다고 아뢰었다. 상께서 삼공(三公), 양사(兩司),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불러 입대(入對)하게 하고, 또 노성(老成)한 사람이므로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영부사(領府事) 정광필을 함께 불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패에 쓰인 글을 보니, 글자 모양과 모든 행위가 이전의 패와 비슷하다. 대간이 아뢴 바, 흉악한 무리가 이전 일을 밝히고자 한다는 말 또한 크게 틀리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전에는 홍씨 집안에서 스스로 내가 썼다고 자복하고 죽었다. 이 필획이 이전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죽은 자가 다시 와서 썼겠는가? 조정을 어지럽히려는 자의 소행인가? 이전 패에 쓰인 글은 그때 추관들도 모두 보았으니, 각자 말해보라.”고 하였다. 좌우에서 혹은 글자체가 비슷하다고 하고, 혹은 같은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익명서(匿名書)와 다름이 없다. 이전에는 동궁을 위하여 한 것이므로 놀랍고 괴이하여 추국하였으나, 지금 나의 뜻은 불태워 없애면 조정이 저절로 조용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광필이 아뢰기를, “대옥(大獄)을 자주 일으킬 수 없으니, 불태워 없애라는 교지는 지극히 마땅합니다. 인심이 이와 같은데 대옥이 여러 번 일어나니, 근래 천변(天變)이 매우 많은 것이 반드시 이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영상 장순손(張順孫), 좌상 한효원(韓效元)¹⁷⁴, 우상 김근사(金謹思) 등은 얼버무리며 다만 상께서 재단하시기를 청할 뿐이었다. 예조 판서 김안로가 아뢰기를, “지금 보니 글씨체가 이전 글처럼 익숙하지 않아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사헌 심언광(沈彦光)¹⁷⁵이 아뢰기를, “상께서 글씨체가 비슷하다고 하여 의심을 품으시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상의 뜻이 이와 같으면 아랫사람들이 반드시 헤아려 이전 옥사를 헛된 일로 여길 것입니다. 홍여, 복성군, 두 옹주의 죄를 정한 것은 모두 성상의 마음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부자(父子) 사이는 지극한 정이 있는 곳이라 쉽게 동요되니, 이는 반드시 박씨와 두 옹주의 집안사람들 소행으로, 뒤섞이게 하여 이전 옥사를 의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전에 옥사를 국문할 때 빠뜨린 자가 매우 많아, 그때 추관들은 지금까지도 여론이 그들을 비난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상진(尙震)¹⁷⁶이 아뢰기를, “그 패를 보니, 배치하고 행한 것이 이전과 한결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비록 천금을 준다 한들 어찌 차마 쓰겠습니까? 두 옹주가 모두 도성에 있고 종들이 근거하고 있으니, 만약 시골로 돌려보내고 종들을 따라가게 한다면 화가 조금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채무택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이미 죄인을 얻어 통쾌하게 왕법(王法)을 시행하였는데, 지금 또 이런 짓을 하여 양사에서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두었으니, 그 자취를 흐리려는 계책이 분명합니다. 상께서 이전 패와 비슷하다고 의심하시는데, 신이 이전과 이후에 쓰인 것을 자세히 보니, 그 익숙하고 서툰 정도가 전혀 비슷하지 않습니다. 비록 옥석(玉石)이 함께 불타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추국한 뒤에야 그만두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안로, 채무택 등이 반드시 다르다고 한 것은, 이전에 이미 자신이 썼다고 자복하고 죽은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의(執義) 김희열(金希說)¹⁷⁷, 사간(司諫) 윤풍형(尹豐亨)¹⁷⁸, 장령 유세린(柳世麟), 지평(持平) 안현(安玹)¹⁷⁹・김미(金亹)¹⁸⁰, 헌납(獻納) 임붕(林鵬)¹⁸¹, 정언 정종호・최보한(崔輔漢)¹⁸² 등이 끝까지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상께서 따르지 않으시고 다만 현상을 걸어 체포하도록 명하고, 김인경의 아내는 남편을 따라 귀양지로 가게 하고, 홍여의 아내는 문밖에서 거주하게 하였다. 심언광, 상진 등이 합사(合司)¹⁸³하여 두 옹주 집의 노복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다섯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물러났다. 부제학 권의(權輗)¹⁸⁴, 직제학(直提學) 남세건(南世健)¹⁸⁵, 전한(典翰) 조인규(趙仁圭)¹⁸⁶, 응교(應敎) 이임(李任)¹⁸⁷, 부응교(副應敎) 허항(許沆)¹⁸⁸, 교리(校理) 성윤(成倫)¹⁸⁹・하계선(河繼先)¹⁹⁰, 부교리(副校理) 황기(黃琦)¹⁹¹, 부수찬(副修撰) 홍춘경(洪春卿)¹⁹², 박사(博士) 홍섬(洪暹)¹⁹³ 등이 상소를 올려 논하기를, “정광필이 ‘여러 차례 대옥을 일으켜 천변이 이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지극히 도리에 어긋납니다. 정광필은 박씨에게 친척이라 핑계 대고 매우 긴밀하게 교결하여 여론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권간(權奸)이 패하자 왕래하며 구원하고 보호하며, 홍여의 옥사에는 교묘하게 영합하더니, 지금 또 천재(天災)를 끌어들여 전하를 기만하고 속이니,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치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운운하였다. 정광필의 말은 진실로 대신이 임금에게 고하는 체통을 얻었으나, 추악하고 바르지 못한 무리들이 공공연히 이처럼 헐뜯고 배척하니, 그 옛날 이른바 명백히 속이는 자[明欺者]인가?
주석:
164. [주-D017] 世 : 저본에는 “서(瑞)”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동각잡기》 및 《중종실록》 28년 7월 20일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65. 동궁(東宮): 왕세자(王世子) 또는 그가 거처하는 궁궐. 당시 세자는 훗날 인종(仁宗)이 되는 이호(李峼)였다.
166. 박빈(朴嬪): 경빈 박씨. 작서의 변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167. 복성군 미(福城君嵋): 경빈 박씨의 아들.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168. 두 옹주(兩翁主): 경빈 박씨의 딸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혜정옹주(惠靜翁主).
169. 홍여(洪礪): 혜순옹주의 남편.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죽었다.
170. 김인경(金仁慶): 혜정옹주의 남편.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귀양 갔다.
171.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 작서의 변을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154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택지(擇之), 호는 부훤(負暄).
172. 채무택(蔡無擇, 1496
173. 정종호(鄭從濩):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74. 한효원(韓效元, 1467153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원(伯源), 호는 유재(裕齋).15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형(士瑩), 호는 어촌(漁촌).
175. 심언광(沈彦光, 1487
176. 상진(尙震, 1487156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기부(起夫), 호는 동애(東崖).154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온(士溫), 호는 송강(松岡).
177. 김희열(金希說):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78. 윤풍형(尹豐亨):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79. 안현(安玹, 1490
180. 김미(金亹):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81. 임붕(林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82. 최보한(崔輔漢):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83. 합사(合司): 여러 관청이 함께 모여 의논하거나 일을 처리하는 것. 여기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이 함께 한 것을 의미한다.
184. 권의(權輗, 1475154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정의(正儀), 호는 수헌(睡軒).154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서(公瑞), 호는 낙금헌(樂琴軒).
185. 남세건(南世健):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86. 조인규(趙仁圭, 1485
187. 이임(李任):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88. 허항(許沆, 1480153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진(伯振), 호는 관포(灌圃).154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숙(仲淑), 호는 묵재(默齋).
189. 성윤(成倫, 1497
190. 하계선(河繼先):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191. 황기(黃琦, 1480154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온(公溫), 호는 휴암(休庵).154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원길(元吉), 호는 석벽(石壁).
192. 홍춘경(洪春卿, 1491
193. 홍섬(洪暹, 1504~158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이하 나머지 부분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진행됩니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金安老憑藉公主之勢, 欲割受壺串牧場爲田。 鄭光弼爲司僕提調, 執不可曰: “國家牧馬之地, 決難割給勢家, 待老夫死後爲之。” 安老深銜之。 時議遷禧陵, 以光弼曾爲摠護使, 奉安先后於不吉之地, 搆捏請置重典, 中廟命減死流金海。 光弼先已譴罷, 歸懷德村舍, 不意金吾郞馳至, 家人皆驚惶涕泣, 光弼方對客六博, 呼盧不輟。 俄審末減流配, 稽首曰: “上恩至矣。” 逮夜寢睡, 鼻息如雷。 明日束¹⁹⁴擔登道, 無一毫見於辭色。 未幾安老敗, 召還。 安老竟受牧場, 及被罪, 還收之。【竝《東閣雜記》。】
번역문:
김안로가 공주(公主)¹⁹⁵의 세력을 등에 업고 호곶목장(壺串牧場)¹⁹⁶을 나누어 받아 밭으로 삼고자 하였다. 정광필이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¹⁹⁷로서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말하기를, “국가의 목마지(牧馬之地)를 결코 세력가에게 나누어 줄 수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뒤에나 하시오.”라고 하였다. 김안로가 이를 깊이 원망하였다. 당시에 희릉(禧陵)¹⁹⁸을 옮기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정광필이 일찍이 총호사(摠護使)¹⁹⁹로서 선후(先后)를 불길한 땅에 모셨다는 이유로 죄를 꾸며 만들어 중벌에 처할 것을 청하자, 중종께서 사형을 감하여 김해(金海)로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정광필은 이미 먼저 견책되어 파직당하고 회덕(懷德)의 시골집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뜻밖에 금오랑(金吾郞)²⁰⁰이 달려오자 집안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당황하여 눈물을 흘렸으나, 정광필은 마침 손님과 육박(六博)²⁰¹을 두며 ‘노(盧)’²⁰²를 외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사형을 감하여 유배한다는 것을 알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성은(上恩)이 지극하십니다.”라고 하였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드니 코 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다음 날 짐을 꾸려 길을 떠나는데, 조금도 말과 얼굴빛에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안로가 패망하자 소환되었다. 김안로는 끝내 목장을 받았으나, 죄를 입게 되자 다시 회수되었다.【이상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인용】
주석:
194. [주-D019] 束擔 : 저본에는 “담속(擔束)”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동각잡기》 및 《지퇴당집・동각잡기곤》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95. 공주(公主): 여기서는 중종의 딸이자 김안로의 며느리인 효혜공주(孝惠公主)를 가리킨다. 김안로는 효혜공주의 시아버지라는 점을 이용하여 권세를 휘둘렀다.
196. 호곶목장(壺串牧場):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던 국영 목장.
197.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사복시(司僕寺)의 일을 관장하던 당상관. 사복시는 궁궐의 말과 수레 등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198. 희릉(禧陵):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高陽)에 있었으나, 후에 파주(坡州) 삼릉(三陵)의 하나로 옮겨졌다.
199. 총호사(摠護使): 국장(國葬)이나 능의 조성 및 이장 등 국가의 큰 장례 행사를 총괄하던 임시 관직.
200. 금오랑(金吾郞): 의금부(義禁府)의 관원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아 중죄인을 심문하고 다스리던 사법기관이다.
201. 육박(六博): 고대 중국에서 유행했던 보드게임의 일종. 주사위와 말을 사용한다.
202. 호로(呼盧): 육박 놀이를 할 때 말을 부르는 소리. 또는 주사위를 던지며 외치는 소리.
원문:
公在懷德, 朝夕甘滑, 有所未具。 一日, 官人獵於前山, 脫死之鹿, 投入於公所寓之籬, 子弟等以爲天賜而共逐捕之, 設饌進之。 主倅聞以爲: “罪人偸食進上之物, 亦有罪也。” 發差徵之, 立門督促, 旣不能山行而得之, 亦不能貿之於場市, 擧家遑遑, 莫知所爲。 適公之親族, 作宰於隣邑者, 偶送一肩, 從其所持之人, 納之於官而解其怒。 及公還朝, 朝廷聞之, 斥黜其倅。 公以爲: “門蔭之官, 怵於權勢, 亦出偶然, 非其情也, 不宜深責。” 力護復敍, 而終不得也。
번역문:
공(公)이 회덕(懷德)에 있을 때,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하루는 관인(官人)이 앞산에서 사냥을 하는데, 죽음을 면한 사슴 한 마리가 공이 머무는 곳의 울타리 안으로 뛰어들자, 자제(子弟) 등이 하늘이 주신 것이라 여겨 함께 쫓아 잡아 음식을 차려 올렸다. 고을 수령[主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죄인이 진상할 물건을 훔쳐 먹었으니 또한 죄가 있다.”라고 하며, 차인(差人)을 보내 그것을 징수하고 문에 서서 독촉하였다. 이미 산행을 하여 그것을 얻을 수도 없었고, 또한 장시(場市)에서 사 올 수도 없어, 온 집안이 허둥지둥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침 공의 친족으로 이웃 고을에서 수령 노릇을 하는 자가 우연히 사슴 한 마리²⁰³를 보내왔는데,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을 따라 관아에 납부하여 그 노여움을 풀었다. 공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조정에서 이를 듣고 그 수령을 내쫓았다. 공이 이르기를,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된 자가 권세에 두려워한 것이 또한 우연에서 나온 것이지 그의 본심이 아니니, 깊이 꾸짖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라고 하며 힘써 변호하여 다시 서용되도록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주석:
203. 일견(一肩): 한쪽 어깨. 여기서는 사슴 한 마리를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보인다.
원문:
公蓍龜德望蓋於一世, 而安老特惡之, 其遷改禧陵, 專爲殺公而發也。 擧朝爭之, 請置重典, 中廟聚會群臣於闕庭, 各獻議, 一二²⁰⁴臣外皆曰可殺。 中廟特原之, 遠竄于金海府。 府與東萊縣接境, 乃公之本貫, 而始祖墓在焉。 公略備酒果, 令子弟往而拜掃。 時武夫爲縣令者聞之, 欲取媚安老, 乃大言曰: “鄭某以罪謫居, 是乃庶人, 只可祭其考妣而已。 豈可遣其子弟, 祭遠祖於越境之地乎?” 多發健卒擧杖驅逐, 使不得接迹。 公之子弟等在境上望而祭之而還。 縣令以鄕所等與罪人同心, 容護子弟, 其罪亦重, 搆以他事, 送關于京在所, 請遞其任。 其冬安老死, 公乃還朝, 復爲京在所堂上, 而縣令之論關猶在。 公以爲城主關文, 不可久滯, 卽令從其所指而遞送。 縣令之奸譎, 有甚於懷德之倅, 而公略無辭色, 子弟等亦不發言, 故朝廷不能聞知。 至於改品陞職, 終保爵祿, 公之盛德, 眞不可及也。【竝《松窩雜記》。】
번역문:
공(公)의 시귀(蓍龜)²⁰⁵와 같은 덕망(德望)이 한 시대에 으뜸이었으나, 김안로가 특별히 그를 미워하여 희릉(禧陵)을 옮기고 고치는 일을 오로지 공을 죽이기 위해 일으켰다. 온 조정이 이를 다투어 중벌에 처하기를 청하니, 중종께서 여러 신하를 궁궐 뜰에 모아 각자 의논을 올리게 하였는데, 한두 신하 외에는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중종께서 특별히 용서하여 김해부(金海府)로 멀리 귀양 보냈다. 김해부는 동래현(東萊縣)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는데, 바로 공의 본관(本貫)이며 시조(始祖)의 묘가 있는 곳이었다. 공이 대략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자제들에게 가서 성묘하도록 하였다. 당시 무부(武夫)로서 현령(縣令)이 된 자가 이를 듣고 김안로에게 아첨하고자 하여, 이에 크게 말하기를, “정 아무개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하는 자로, 이는 바로 서인(庶人)이니 다만 그 부모에게 제사 지낼 수 있을 뿐이다. 어찌 그 자제들을 보내어 경계를 넘어선 땅에 있는 먼 조상에게 제사 지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건장한 병졸들을 많이 보내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의 자제 등은 경계 위에서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현령이 향소(鄕所)²⁰⁶ 등이 죄인과 한마음으로 자제들을 용납하고 보호하였으니 그 죄 또한 무겁다고 하여 다른 일로 엮어 경재소(京在所)²⁰⁷에 공문을 보내 그 임무를 교체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해 겨울 김안로가 죽자, 공이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경재소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현령을 논핵한 공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공이 성주(城主)의 관문(關文)이 오래 지체될 수 없다 하여, 즉시 그 지적한 바에 따라 교체하여 보냈다. 현령의 간사하고 교활함이 회덕 수령보다 심하였으나, 공은 전혀 말이나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고 자제 등 또한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 능히 듣고 알지 못하였다. 품계를 고치고 관직을 승진함에 이르러 끝까지 작위와 봉록을 보전하였으니, 공의 성대한 덕은 진실로 미칠 수 없는 것이다.【이상 《송와잡기(松窩雜記)》²⁰⁸에서 인용】
주석:
204. [주-D020] 一二 : 저본에는 “삼(三)”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송와잡설(松窩雜說)》 및 《정문익공유고・정문익공사적부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205. 시귀(蓍龜): 시초(蓍草)와 거북 등딱지(龜甲). 고대에 점을 치는 데 사용되었으므로, 사물의 이치를 잘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 또는 존경받는 모범을 비유한다.
206. 향소(鄕所): 조선 시대 지방의 유력자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기구. 유향소(留鄕所)라고도 한다.
207. 경재소(京在所): 조선 시대 지방의 유향소와 연락하며 중앙 정부와 지방 사이의 업무를 중개하던 기구. 서울에 설치되었다.
208. 《송와잡기(松窩雜記)》: 이식(李植, 1584~1647)의 문집인 《택당집(澤堂集)》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송와잡설(松窩雜說)」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송와(松窩)는 이식의 아버지 이정(李霆)의 호이거나, 혹은 이식 자신과 관련된 기록일 수 있다.
(이하 나머지 부분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진행됩니다.)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鄭文翼公, 近代名相。 中廟朝, 頤叔用事, 公謫嶺南, 李相擇之亦謫關西。 頤叔貽書二公曰: “觀朝廷意, 必不相貸, 莫如早自決也。” 擇之卽放飮成疾而卒。 公笑曰: “朝廷以老臣有罪, 朝夕誅殛, 則當伏國典, 以一礪百可也。 況死生有命, 彼焉能殺我哉!” 略不動心。 及頤叔敗, 召公還朝, 洛中僮僕持朝報倍途而往, 中夜至謫所, 足繭口燥, 僵臥不能言。 子弟惶恐, 探橐中消息, 乃吉語也。 卽白之, 公曰: “然乎?” 雷鼻酣寢, 明朝見其書。【《丙辰丁巳錄》。】
번역문:
정문익공(鄭文翼公)은 근대의 명재상이다. 중종(中宗) 시대에 이숙(頤叔)²⁰⁹이 권력을 잡자 공은 영남(嶺南)으로 귀양 갔고, 이상(李相) 택지(擇之)²¹⁰ 또한 관서(關西)로 귀양 갔다. 이숙이 두 공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조정의 뜻을 보건대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일찍 자결(自決)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택지는 즉시 술을 마구 마셔 병이 들어 죽었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늙은 신하가 죄가 있다 하여 아침저녁으로 죽이려 한다면 마땅히 국법(國典)에 엎드려, 한 사람을 경계 삼아 백 사람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물며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에 달려 있는데, 저들이 어찌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조금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숙이 패망하자 공을 불러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니, 낙중(洛中)의 종이 조보(朝報)를 가지고 배도(倍道)²¹¹로 달려가 한밤중에 귀양지에 이르렀는데, 발에 물집이 잡히고 입이 말라 쓰러져 누워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자제들이 황공하여 주머니 속의 소식을 살펴보니 바로 길한 소식이었다. 즉시 아뢰니, 공이 말하기를, “그러한가?”라고 하고, 코를 골며 깊이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야 그 글을 보았다.【《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²¹²에서 인용】
주석:
209. 이숙(頤叔): 김안로(金安老)의 자(字).
210. 택지(擇之): 채무택(蔡無擇)의 자(字). 앞선 작서의 변 관련 기록에서는 김안로와 함께 정광필을 공격하는 입장이었으나, 이 일화에서는 김안로에 의해 함께 핍박받는 대상으로 묘사되어 내용상 모순이 있다. 다른 인물이거나, 기록의 착오일 가능성이 있다.
211. 배도(倍道): 보통 때보다 두 배의 속도로 길을 감. 매우 서둘러 감을 의미한다.
212.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정온(鄭蘊, 1569~1641)이 인조 14년(1636, 병자년)과 15년(1637, 정사년)에 있었던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전말을 기록한 책. 이 일화가 이 책에 실려 있다는 것은 다소 의외이며, 다른 기록에서 인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원문:
領中樞府事鄭光弼卒。 史官曰: “光弼宇量宏遠, 休休有容, 似若不露圭角, 至於當國大事, 凜然有氣節。 再爲首相, 多有匡輔之力, 朝野倚焉。 己卯之禍, 將被重典, 叩頭極陳, 至於夜深, 手自秉燭, 再進力救, 冀回天意, 士林之禍, 不至於慘酷, 國家元氣, 賴以維持。 厥後三凶用事, 搆三逕之說, 啓遷陵之謀, 必欲置諸重典而不得, 竟竄于外。 金安老因光弼之族, 恐動之曰: ‘朝廷必加大禍²¹³, 莫如自盡。’ 光弼聞之曰: ‘死生在天, 豈以人言自殞性命? 朝廷雖加誅戮, 余所不惜。 祗俟上命而已。’ 及安老伏罪, 首被徵還, 朝野相慶。 入京之日, 至於市童、馬卒, 望其來曰: ‘鄭相還矣。’ 莫不欣忭, 間有泣下者。 將擬復相, 未幾而卒, 時論惜之。”【《實錄》。】
번역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광필이 졸(卒)하였다. 사관(史官)이 논평하기를, “정광필은 도량이 넓고 원대하며,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어 마치 재능을 드러내지 않는 듯하였으나, 국가의 큰일에 이르러서는 늠름하게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두 차례 수상(首相)이 되어 바로잡고 보필한 공이 많아 조야(朝野)가 그에게 의지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장차 중벌을 받게 되자, 머리를 조아리며 극력 진술하고, 밤이 깊어 손수 촛불을 잡고 다시 나아가 힘써 구원하여 천심(天心)을 돌리기를 바라니, 사림(士林)의 화(禍)가 참혹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고 국가의 원기(元氣)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그 후 삼흉(三凶)²¹⁴이 권력을 잡아 삼경(三逕)의 설²¹⁵을 꾸며내고 천릉(遷陵)의 계책을 아뢰어, 반드시 중벌에 처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외방으로 귀양 보냈다. 김안로가 정광필의 친족을 통하여 두렵게 하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반드시 큰 화를 더할 것이니, 자진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정광필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어찌 남의 말로 스스로 목숨을 끊겠는가? 조정에서 비록 주륙(誅戮)을 가한다 해도 나는 아끼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상명(上命)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김안로가 죄에 엎드리자, 가장 먼저 불려 돌아오니 조야가 서로 경하하였다. 서울에 들어오던 날, 시골 아이와 마부들까지도 그가 오는 것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정승께서 돌아오셨다.’고 하며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간혹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장차 다시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졸하니, 당시의 여론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고 하였다.【《실록(實錄)》에서 인용】
주석:
213. [주-D021] 禍 : 《중종실록》 33년 12월 6일 기록에 근거할 때 “인(人)”이 되어야 한다. 즉, '조정필가대인(朝廷必加大)'은 '조정에서 반드시 큰 인물을 더할 것이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정에서 반드시 큰 화를 더할 것이다(朝廷必加大禍)'가 문맥상 자연스럽다. 본문은 저본을 따랐다.
214. 삼흉(三凶): 보통 특정 시기에 악행을 저지른 세 명의 간신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김안로와 그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15. 삼경지설(三逕之說): 진(晉)나라 때 도잠(陶潛)의 고사에 나오는 말로,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세속과의 교류를 끊는 것을 비유한다. 김안로 등이 정광필을 모함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왜곡하여 이러한 주장을 펼쳤을 가능성이 있다.
원문:
公風骨奇偉, 胸次恢曠, 外和內剛, 早負公輔之望。 有器局而善應接, 言貌休休而畦畛甚嚴。 自處巖廊, 務得衆心, 先事而猷, 炳幾而憂, 安危之機, 邪正之分, 屹然有奔波砥柱之力, 人稱有古宰相風焉。【《己卯錄》。】
번역문:
공(公)은 풍채와 골격이 뛰어나고 훌륭하며, 흉금(胸襟)이 넓고 시원하며, 겉으로는 온화하나 안으로는 강직하여 일찍부터 정승[公輔]의 명망을 지녔다. 기국(器局)이 있고 응접(應接)을 잘하며, 말과 모습은 너그러우나 경계와 구분이 매우 엄격하였다. 스스로 조정[巖廊]에 처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힘쓰고, 일이 있기 전에 꾀하며 기미를 밝혀 근심하고, 안위(安危)의 기틀과 사정(邪正)의 구분에 있어서는 우뚝하게 거센 물결 속의 기둥[奔波砥柱]²¹⁶과 같은 힘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옛 재상의 풍모가 있다고 칭찬하였다.【《기묘록(己卯錄)》²¹⁷에서 인용】
주석:
216. 분파지주(奔波砥柱): 거세게 흐르는 물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뚝 솟아 있는 기둥. 험난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인물을 비유한다. 지주(砥柱)는 중국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산 이름으로, 물살이 매우 세찬 곳에 우뚝 솟아 있다.
217. 《기묘록(己卯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한 기록. 여러 종류가 전해지는데, 정확히 어떤 문헌을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원문:
公長身美鬚, 神淸而骨秀, 沈厚寡言笑, 自奉儉素如寒士。 公退則坐一室, 讀書史。 不事營殖, 不通關節, 尤不喜聲色。 局量恢恢, 光明正大, 非意挫辱, 曾不少撓。 忠君憂國之心, 老而愈篤, 以身繫安危輕重者殆三十年。【《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은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정신이 맑고 골격이 빼어났으며, 침착하고 후덕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고, 스스로 생활하기를 검소하게 하여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공무에서 물러나면 한 방에 앉아 글과 역사를 읽었다. 재산을 늘리는 일을 하지 않았고, 뇌물을 통한 청탁[關節]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성색(聲色)²¹⁸을 좋아하지 않았다. 국량(局量)이 넓고 넓으며, 공명정대(光明正大)하여 뜻하지 않은 좌절과 모욕에도 일찍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늙어서 더욱 두터워졌으니, 몸으로 나라의 안위와 경중(輕重)을 매고 있은 지가 거의 30년이었다.【《잠곡구록(潛谷舊錄)》²¹⁹에서 인용】
주석:
218.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女色). 즉, 향락적인 생활을 의미한다.
219.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남긴 기록이나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옛 기록을 의미할 수 있다.
원문:
公有識鑑, 薦用人必先觀其容貌, 故所擧多至大官。 黃政丞憲初第, 以承文正字詣公邸, 公款待而饋以食, 辭去, 起送之, 視其背, 良久還坐。 子弟問其故, 公曰: “此人貌豐²²⁰, 必至卿相。 觀其飮啖, 必速升而早敗, 背不及面, 當無子也。” 黃未幾登庸, 纔入政府而削官, 又無子, 皆如公言。
번역문:
공(公)은 식견과 감식안이 있어 사람을 천거하여 등용할 때 반드시 먼저 그 용모를 살폈으므로, 천거한 사람 중에 대관(大官)에 이른 자가 많았다. 황정승(黃政丞) 헌(憲)²²¹이 처음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서 공의 저택에 찾아오니, 공이 환대하고 음식을 대접하였다. (황헌이) 작별하고 떠나자 일어나 전송하며 그의 등을 보다가 한참 만에 돌아와 앉았다.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용모가 풍후하니 반드시 경상(卿相)에 이를 것이다. 그가 마시고 먹는 것을 보니, 반드시 빨리 승진하겠지만 일찍 실패할 것이며, 등이 얼굴에 미치지 못하니 마땅히 아들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용되어 겨우 정부(政府)에 들어갔다가 벼슬을 삭탈당하였고, 또 아들이 없었으니, 모두 공의 말과 같았다.
주석:
220. [주-D022] 豐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성옹식소록(惺翁識小錄)》에는 뒤에 “이수(而秀)”가 더 있다. 즉, '모풍이수(貌豐而秀)'는 용모가 풍만하고 빼어나다는 의미이다.
221. 황정승 헌(黃政丞憲): 황헌(黃憲, 1499~155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장경(章卿), 호는 한벽당(寒碧堂). 우의정을 지냈다.
원문:
公每食, 以其餘只令孫惟吉、曾孫芝衍食之, 他子弟不得與。 李完城憲國少時以族孫往省, 方飯, 二公適不在。 食訖, 熟視完城, 呼侍婢輟而與之。 完城食而辭退, 侍婢相目笑曰: “彼亦有台鼎之相耶?” 其後完城登第, 官至左相, 以忠直受知於宣廟, 八十而卒, 公蓋知之也。
번역문:
공(公)은 매번 식사할 때 남은 음식을 오직 손자 유길(惟吉)과 증손 지연(芝衍)²²²에게만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은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완성(李完城) 헌국(憲國)²²³이 어렸을 때 족손(族孫)으로서 찾아가 뵈었는데, 마침 식사 중이었으나 두 공(유길, 지연)이 자리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완성(完城)을 유심히 보더니, 시비(侍婢)를 불러 (남은 음식을) 덜어 그에게 주었다. 완성이 먹고 물러가자, 시비들이 서로 눈짓하며 웃으며 말하기를, “저 아이도 또한 재상[台鼎]이 될 관상인가?”라고 하였다. 그 후 완성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상(左相)에 이르렀고, 충직함으로 선조(宣祖)의 지우(知遇)를 받아 80세에 졸하였으니, 공은 아마도 이를 알았던 것이다.
주석:
222. 손惟吉, 曾孫芝衍: 정유길(鄭惟吉)은 정광필의 손자이고, 정지연(鄭芝衍, 15401583)은 정유길의 아들이므로 정광필의 증손이다.160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징(景徵), 호는 간옹(艮翁).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223. 이완성 헌국(李完城憲國): 이헌국(李憲國, 1530
원문:
鄭湖陰士龍少日無檢, 不爲公所賞, 士類多短之, 擯於外。 己卯禍起, 召爲司諫, 人皆憂之曰: “彼積憤久矣, 必將甘心。” 公曰: “吾知姪雖持己不愼, 而必無害人之事也。” 及入, 果辭避不與時議。 人以是多湖陰, 而稱公之能料人焉。【竝《識小錄》。】
번역문: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²²⁴이 젊었을 때 단속함이 없어 공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선비들이 많이 그를 헐뜯어 배척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불려 사간(司諫)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며 말하기를, “그가 쌓인 분노가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통쾌하게 여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조카를 아는데, 비록 몸가짐이 신중하지 못하나 반드시 남을 해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들어오자, 과연 사양하고 피하며 당시의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로써 호음(湖陰)을 훌륭하게 여겼고, 공이 능히 사람을 헤아린다고 칭찬하였다.【이상 《식소록(識小錄)》²²⁵에서 인용】
주석:
224. 정호음 사룡(鄭湖陰士龍):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정광필의 조카이다.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이나,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서포만필(西浦漫筆)》 등에 인용된 일화를 모은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특정한 인물의 저술을 지칭할 수도 있다.
225. 《식소록(識小錄)》: 유몽인(柳夢寅, 1559
정광필(鄭光弼)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尙成安震世居林川, 其先不大顯, 其父筮仕, 僑居于長興洞口。 成安兒時率群兒嬉戲於街上, 公爲首揆時, 見而異之, 令小吏挈來至其第, 啖以飮食, 亟加稱曰: “此兒異日當坐吾座, 但避事少建白耳。” 成安果登元輔, 在相位者十六年, 享太平之樂, 雍²²⁶容養重, 一如公言。 異哉!【《樂全堂漫錄》。】
번역문:
상성안(尙成安) 진(震)²²⁷은 대대로 임천(林川)에 살았는데, 그 선조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가 처음 벼슬을 하여 장흥동(長興洞) 입구에 임시로 거주하였다. 성안(成安)이 어릴 때 여러 아이들을 이끌고 길 위에서 장난치며 놀았는데, 공이 수상[首揆]으로 있을 때 보고 남다르게 여겨, 아전[小吏]에게 명하여 데려와 그의 집에 이르러 음식을 먹이고 급히 칭찬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뒷날 마땅히 내 자리에 앉을 것이나, 다만 일을 피하고 건의하는 바가 적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성안이 과연 수상[元輔]에 올라 재상의 자리에 있은 지 16년 동안 태평의 즐거움을 누렸으며, 몸가짐을 조용히 하고 신중함을 길렀으니, 모두 공의 말과 같았다. 기이하도다!【《악전당만록(樂全堂漫錄)》²²⁸에서 인용】
주석:
226. [주-D023] 雍 : 《정문익공유고・정문익공사적부록》에는 앞에 “이여주임조 고(而女主臨朝 故)”가 더 있다. 즉, '여주(女主)가 조정에 임하여 조용하고 신중함을 길렀다'는 의미가 된다.
227. 상성안 진(尙成安震): 상진(尙震, 1487156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기부(起夫), 호는 동애(東崖). 성안(成安)은 그의 봉군호인 성안부원군(成安府院君)을 가리킨다. 영의정을 지냈다.1708)의 문집 《농암집(農巖集)》에 실려 있는 수필. 악전당(樂全堂)은 김창협의 형 김창집(金昌集)의 호이다.
228. 《악전당만록(樂全堂漫錄)》: 김창협(金昌協, 1651
원문:
戊戌謁聖, 鄭林塘登壯元及第, 中廟卽遣中使馳諭于公曰: “卿之孫爲壯元, 予爲國家喜, 爲卿又賀也。” 仍賜宴需, 卽日唱榜, 拜爲正言, 賜一等樂。 林塘騎司僕馬, 天童前導, 妓數十擁馬首而來, 閭里觀者, 闐咽門巷。 公方痛瘧苦吟, 亟起而視之, 不勝大喜, 集客大醉, 侈上之賜, 不覺沈痾頓愈, 撫林塘背曰: “眞孝孫也。” 滿座稱賀。【《寄齋雜記》。】
번역문: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 알성시(謁聖試)²²⁹에서 정임당(鄭林塘)이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자, 중종께서 즉시 중사(中使)²³⁰를 보내 공에게 유시(諭示)하여 말씀하시기를, “경(卿)의 손자가 장원이 되었으니, 내가 국가를 위하여 기뻐하고, 경을 위하여 또한 하례하오.”라고 하였다. 이어서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고, 즉시 방(榜)을 발표하여 정언(正言)으로 제수하고 일등 풍악(一等樂)을 하사하였다. 임당이 사복시(司僕寺)의 말을 타고 천동(天童)²³¹이 앞에서 인도하며 기생 수십 명이 말머리를 에워싸고 오니, 마을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문과 골목을 가득 메웠다. 공이 마침 학질(瘧疾)을 심하게 앓아 신음하고 있었는데, 급히 일어나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함을 이기지 못하여 손님들을 모아 크게 취하고, 상께서 하사하신 것을 풍족하게 쓰니, 오래된 병이 갑자기 나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임당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참으로 효손(孝孫)이로다.”라고 하였다. 자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칭하(稱賀)하였다.【《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인용】
주석:
229. 알성시(謁聖試): 조선 시대 국왕이 문묘(文廟)에 나아가 제사를 지낸 뒤에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보이던 특별 과거 시험.
230. 중사(中使): 궁중의 일을 맡아보던 내시(內侍).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231. 천동(天童): 과거 급제자의 행렬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어린아이.
원문:
我國名相, 以黃、許爲首, 或以前朝科第病之, 厥後無聞。 中廟朝鄭文翼公光弼, 不愧前人。【《鶴山樵談》。】
번역문:
우리나라 명재상으로는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으뜸으로 꼽는데, 혹은 이전 왕조[前朝]²³²의 과거 급제를 문제 삼기도 하고, 그 후로는 들리는 바가 없다. 중종조(中宗朝)의 정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은 앞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다.【《학산초담(鶴山樵談)》²³³에서 인용】
주석:
232. 전조(前朝): 이전 왕조. 여기서는 고려를 가리킨다. 황희와 허조는 고려 말에 급제하여 조선 초에 활동했다.
233. 《학산초담(鶴山樵談)》: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지은 야담집. 학산(鶴山)은 남용익의 호이다.
원문:
談者論國朝名臣, 以黃翼成、鄭文翼爲稱首。 翼成當國家休明昌大之會, 世宗以神聖臨乎上, 不下巖廊, 坐享太平, 蓋得順風之勢焉。 文翼身遘臲卼, 志業不大展, 其炳炳表見者, 惟己卯一節耳。 然皆足爲一代宗臣。【《谿谷集》。】
번역문:
이야기하는 자들이 우리나라[國朝]의 명신(名臣)을 논할 때 황익성(黃翼成)²³⁴과 정문익(鄭文翼)을 으뜸으로 꼽는다. 익성(翼成)은 국가가 아름답고 밝으며 창대하던 때를 만나 세종(世宗)께서 신성(神聖)함으로 위에 임하시어 조정[巖廊]을 떠나지 않고 앉아서 태평을 누렸으니, 아마도 순풍(順風)의 기세를 얻었던 것이다. 문익(文翼)은 몸소 위태로운 때[臲卼]²³⁵를 만나 뜻과 공업(功業)을 크게 펴지 못하였으니, 그 빛나게 드러난 것은 오직 기묘년의 한 절개뿐이다. 그러나 모두 족히 한 시대의 으뜸가는 신하[宗臣]가 될 만하다.【《계곡집(谿谷集)》²³⁶에서 인용】
주석:
234. 황익성(黃翼成): 황희(黃喜)의 시호.
235. 얼올(臲卼): 위태롭고 불안정한 모양.
236. 《계곡집(谿谷集)》: 장유(張維, 1587~1638)의 문집. 계곡(谿谷)은 장유의 호이다.
원문:
朴汝龍問劉忠定公能前知來事, 而且不動心事。 栗谷答曰: “我朝鄭光弼, 非學問之人, 亦有可取。 在謫時, 京奴忽到, 僵于門外, 氣急不能言, 家人洶懼以爲自上賜死。 其奴氣定, 然後問之, 則金安老已貶黜矣。 一家轉懼爲喜。 時光弼方寢, 伺其覺以告, 答以還宿, 別無喜色。 其在廢朝時, 將戮于京, 係械至驛亭, 人以反正告, 輒泣曰: ‘下無導之以正者, 乃至於此, 悲夫!’ 如此人, 亦不易得。”【《栗谷別集》。】
번역문:
박여룡(朴汝龍)²³⁷이 유충정공(劉忠定公)²³⁸이 능히 앞일을 미리 알고 또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 묻자, 율곡(栗谷)이 답하기를, “우리 조정의 정광필은 학문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또한 취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귀양 가 있을 때, 서울에서 온 종이 갑자기 도착하여 문밖에 쓰러져 숨이 차서 말을 하지 못하니, 집안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며 상께서 사사(賜死)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 종이 기운을 차린 뒤에 물어보니, 김안로가 이미 폄출(貶黜)되었다는 것이었다. 온 집안이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 이때 정광필은 마침 잠들어 있었는데, 그가 깨기를 기다려 알리니, 다시 잠자리에 들라고 답할 뿐 별다른 기쁜 기색이 없었다. 그가 폐조(廢朝)²³⁹ 때 서울에서 장차 주륙(誅戮)을 당하게 되어 형틀에 묶여 역정(驛亭)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반정(反正)을 알리자 문득 울면서 말하기를, ‘아랫사람들이 바른길로 인도하는 자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슬프도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은 또한 얻기 쉽지 않다.”라고 하였다.【《율곡별집(栗谷別集)》²⁴⁰에서 인용】
주석:
237. 박여룡(朴汝龍): 생몰년 미상. 율곡 이이의 제자로 추정된다.
238. 유충정공(劉忠定公): 유관(劉觀, 13461433). 조선 초기의 문신. 시호는 충정(忠定).1584)의 문집인 《율곡전서(栗谷全書)》에 포함된 별집.
239. 폐조(廢朝): 폐위된 왕조 또는 임금. 여기서는 연산군(燕山君) 때를 가리킨다. 정광필은 연산군 때 아산으로 유배된 적이 있다.
240. 《율곡별집(栗谷別集)》: 이이(李珥,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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