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국조명신언행록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8

諺解 2025. 4. 27. 13:46
반응형

 

 

허종 음성 요약

 

허종(許琮)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許琮【忠貞公。】
字宗卿, 號尙友堂, 陽川人。 宣德甲寅生。 世祖丙子生員, 丁丑登第。 丁亥, 討李施愛, 策敵愾勳, 封陽川君。 成宗朝, 又策佐理勳。 歷大司憲、兵・吏・戶判、贊成, 官至右議政。 甲寅卒, 年六十一。

번역문:
허종(許琮)【시호는 충정공(忠貞公)¹이다.】
자는 종경(宗卿),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며, 양천(陽川) 사람이다. 선덕(宣德)² 갑인년(1434)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병자년(1456)에 생원(生員)³이 되고, 정축년(145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해년(1467)에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여 적개공신(敵愾勳)⁴에 책록되고 양천군(陽川君)⁵에 봉해졌다. 성종(成宗) 조(朝)에는 또 좌리공신(佐理勳)⁶에 책록되었다. 대사헌(大司憲)⁷, 병조ㆍ이조ㆍ호조(戶曹)의 판서⁸, 찬성(贊成)⁹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우의정(右議政)¹⁰에 이르렀다. 갑인년(1494)에 졸(卒)하니, 나이는 61세였다.

주석:

  1. 충정공(忠貞公): 허종의 시호(諡號). 충(忠)은 위험에 임하여 절개를 지킴(危身奉上), 또는 충성스럽고 공정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김(忠純公正) 등을 의미하고,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절개를 지킴(淸白守節)을 의미한다.
  2. 선덕(宣德): 중국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1426-1435).
  3. 생원(生員): 조선시대 소과(小科)인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한 사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4. 적개훈(敵愾勳): 적개공신(敵愾功臣). 조선 세조 13년(1467)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신. 허종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5. 양천군(陽川君): 이시애의 난 평정 후 허종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그의 본관인 양천(陽川)을 딴 것이다.
  6. 좌리훈(佐理勳): 좌리공신(佐理功臣). 조선 성종 즉위(1469년)를 보좌하고 국정을 안정시킨 공로로 책봉된 공신. 허종은 4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7.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8. 병(兵)ㆍ이(吏)ㆍ호조(戶曹) 판서: 병조는 국방, 이조는 문관 인사, 호조는 재정 및 호구(戶口)를 담당하던 육조의 부서. 판서는 각 조의 으뜸 벼슬(정2품)이다.
  9. 찬성(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찬성과 우찬성이 있었다.
  10.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벼슬.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최고위 재상이다.

원문:
公少時奇偉, 不類凡兒。 年十二三時, 與同隊小兒上寺讀書, 一日夜半, 盜來, 盡偸諸兒衣鞋而去。 翌日, 諸兒恐怖, 皆散去, 公獨確然不動, 高枕大臥, 取筆書壁曰: “旣奪我之衣兮, 宜吾鞋之莫偸。 旣奪衣又偸鞋, 竊爲盜先生不取也。”【《思齋摭言》。】

번역문:
공(公)은 어릴 때 기이하고 뛰어나 평범한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나이 12, 3세 때에 동무 아이들과 함께 절에 올라가 글을 읽었는데, 하루는 밤중에 도둑이 와서 모든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훔쳐 가버렸다. 이튿날 아이들은 모두 두려워 흩어져 가버렸으나, 공은 홀로 확고하여 동요하지 않고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누워 붓을 들어 벽에 쓰기를, “이미 나의 옷을 빼앗았으니, 마땅히 내 신발은 훔치지 말았어야지. 이미 옷을 빼앗고 또 신발을 훔쳐가다니, 가만히 생각건대 도둑 선생¹¹답지 못한 행동이로다.”라고 하였다.【《사재摭언(思齋摭言)》¹²에서 인용】

주석:
11. 도선생(盜先生): 도둑 선생. 도둑을 점잖게 부르면서도 그 행위를 비꼬는 표현이다. 어린 나이에도 침착함과 재치를 잃지 않는 허종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12. 《사재摭언(思齋摭言)》: 조선 중기의 문신 조신(曺伸, 1454-1528)이 지은 설화집. ‘사재(思齋)’는 조신의 호이다.


원문:
世祖妙簡文臣, 分習天文地理, 公屬天文學, 硏窮步天之法。 適有日食之變, 公書啓推步, 其末竝論上好佛法、喜游畋、不御經筵、不納諫諍之失。 上以爲有志有才, 命加一資。 其後以兼藝文講書, 上曰: “汝是前日言事者歟?” 公申論前啓之意。 世祖欲試其守, 命捽下, 又取匣劍橫膝, 命力士崔適曰: “候吾拔劍盡匣, 卽斬之。” 徐徐拔之, 劍光閃閃, 末垂露, 旁侍者股慄, 而公確然不動, 隨問而對, 音吐洪暢。 上還納匣中曰: “眞壯夫也。” 大加稱賞, 命進酌。 公徐就尊所酌酒, 進退雍容可觀。

번역문:
세조(世祖)께서 문신(文臣)들을 가려 뽑아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를 나누어 익히게 하였는데, 공은 천문학(天文學)에 속하여 보천(步天)¹³의 법을 연구하여 통달하였다. 마침 일식(日食)의 변고가 있자, 공이 글을 올려 추보(推步)¹⁴하고 그 끝에 아울러 상(上)께서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사냥(游畋)¹⁵을 즐기시며 경연(經筵)¹⁶에 나아가지 않고 간쟁(諫諍)¹⁷을 받아들이지 않는 잘못을 논하였다. 상께서 뜻과 재능이 있다고 여겨 품계(資)¹⁸를 하나 더하도록 명하셨다. 그 후 예문관(藝文館) 강서(講書)¹⁹를 겸하게 되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지난번에 일을 논했던 자인가?” 공이 이전 상소의 뜻을 거듭 아뢰었다. 세조께서 그의 지조(守)를 시험하고자 그를 끌어내리라 명하고, 또 칼집의 칼을 가져다 무릎에 가로 놓고 역사(力士) 최적(崔適)에게 명하기를, “내가 칼집에서 칼을 다 뽑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베어라.” 하였다. 천천히 칼을 뽑으니 칼빛이 번쩍이고 칼끝에 이슬²⁰이 맺히자, 곁에 모신 자들이 다리를 떨었으나 공은 확고하여 동요하지 않고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우렁차고 거침이 없었다. 상께서 칼을 다시 칼집에 넣으며 말씀하셨다. “참으로 장부(壯夫)로다.” 크게 칭찬하고 술을 따라 올리라고 명하였다. 공이 천천히 술동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술을 따르니, 나아가고 물러남이 점잖고 침착하여(雍容) 볼 만하였다.

주석:
13. 보천(步天):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그 운행을 추보(推步)하는 것. 천문학 연구를 의미한다.
14. 추보(推步):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여 예측하는 것.
15. 유전(游畋): 사냥을 나가 즐기는 것.
16. 경연(經筵): 임금이 학문과 덕을 닦기 위해 신하들과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던 자리.
17. 간쟁(諫諍):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고 바로잡도록 논쟁(論諍)하는 것.
18. 자(資): 자급(資級). 관리의 품계. 일자(一資)를 더했다는 것은 한 품계를 올려주었다는 뜻이다.
19. 예문관(藝文館) 강서(講書): 예문관은 궁중의 서적 관리와 문서 작성을 담당하던 관청. 강서는 경서(經書)를 강론하는 직책으로, 주로 젊고 유능한 문신이 맡았다.
20. 말수노(末垂露): 칼끝에 이슬이 맺힘. 칼이 매우 예리하고 서슬이 퍼런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원문:
許琮乙酉, 拜北道兵使, 年三十二。 丙戌, 丁內艱, 以康孝文代之。 明年, 李施愛反, 殺孝文。 上曰: “誰能爲予辦此?” 卽日除公節度使, 公不敢辭, 翌日陛辭。 在途聞觀察使申㴐被害, 倍道至永興, 聞都摠使龜城君浚屯兵不進, 爲書諭之速來。 至北靑, 賊已據蔓嶺, 我軍仰攻, 死傷過當。 公指示魚有沼, 令潛師魚貫而上, 萬衆齊呼, 賊不能支吾。 施愛跳去, 諸將欲急追, 公曰: “自古元兇失勢, 其下必相圖。 施愛之頭將至矣。” 數日賊黨²¹李珠等縛施愛至軍前。【竝《潛谷舊錄》。】

번역문:
허종은 을유년(1465, 세조 11)에 북도 병마절도사(北道兵使)²²에 제수되었는데, 나이가 32세였다. 병술년(1466)에 어머니 상(內艱)²³을 당하여 강효문(康孝文)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다음 해에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켜 강효문을 죽였다. 상(上)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를 위해 이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공을 절도사로 제수하시니, 공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튿날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길을 가던 중 관찰사(觀察使) 신면(申㴐)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재촉하여 영흥(永興)에 이르러, 도총사(都摠使)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군사를 주둔시킨 채 나아가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글을 써서 속히 오도록 타일렀다. 북청(北靑)에 이르니 적이 이미 만령(蔓嶺)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아군이 올려다보며 공격하다가 사상자가 너무 많았다. 공이 어유소(魚有沼)에게 지시하여 몰래 군사를 물고기가 줄지어 가듯²⁴ 올라가게 하고 만중(萬衆)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였다. 이시애가 달아나자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려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원흉(元兇)이 세력을 잃으면 그 아랫사람들이 반드시 서로 도모하는 법이다. 이시애의 머리가 곧 도착할 것이다.” 하였다. 며칠 뒤 적의 무리 이주(李珠) 등이 이시애를 묶어 군문(軍前) 앞으로 왔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²⁵에서 인용】

주석:
21. [주-D002] 黨 : 저본에는 “당(儻)”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대동야승・동각잡기》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22. 북도 병마절도사(北道兵使): 함경도의 군사 책임자.
23. 내간(內艱): 어머니의 상(喪). 아버지는 상은 외간(外艱)이라 한다.
24. 어관(魚貫): 물고기가 줄지어 헤엄치듯 차례대로 나아감.
25.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조상이나 명현들의 유사를 기록한 책으로 추정되나, 현전 여부는 불확실하다.


원문:
南怡之獄, 領中樞府事康純辭連, 亦就訊。 怡受刑, 脛骨中折, 遂引伏曰: “康純敎我也。” 純曰: “年過七十, 位極人臣, 有何利而敎南怡乎?” 怡笑曰: “吾之不服者, 庶幾圖效於後日, 今脛骨皆折, 已作殘疾²⁶無用之人, 生亦何爲? 如我年少者, 尙不惜死, 白首老革²⁷, 死固宜矣。 吾故證之。” 睿廟問曰: “兵曹判書許琮亦知之乎?” 時琮入侍, 惶恐伏地, 怡曰: “琮, 忠臣, 不知也。 願用之勿疑。”【《寄齋雜記》。】

번역문:
남이(南怡)의 옥사(獄事)²⁸ 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강순(康純)이 공초(供招)에 연루되어 또한 신문을 받았다. 남이가 형벌을 받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지자, 마침내 죄를 자백하며 말하기를, “강순이 나를 교사(敎唆)하였다.” 하니, 강순이 말하기를, “나이가 70이 넘었고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에 이르렀는데, 무슨 이익이 있어 남이를 교사하겠는가?” 하였다. 남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자복하지 않은 것은 후일에 공을 세워 보답하기를 바랐기 때문인데, 이제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져 이미 쓸모없는 잔질(殘疾)²⁶의 몸이 되었으니, 살아서 또한 무엇 하겠는가? 나처럼 젊은 자도 오히려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 백발의 늙은이²⁷가 죽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내가 일부러 그를 증언한 것이다.” 하였다. 예종(睿廟)²⁹께서 묻기를, “병조판서 허종도 또한 아는가?” 하니, 이때 허종이 입시(入侍)하여 황공하여 땅에 엎드렸는데, 남이가 말하기를, “허종은 충신이니 알지 못합니다. 원컨대 그를 등용하여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기재잡기(寄齋雜記)》³⁰에서 인용】

주석:
26. [주-D003] 疾 :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질(質)”로 되어 있다. 몸, 신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문맥상 불구, 장애를 뜻하는 '질(疾)'이 자연스럽다.
27. [주-D004] 革 : 《대동야승・기재잡기》에는 “배(輩)”로 되어 있다. '노배(老輩)'는 늙은 무리, 늙은이라는 뜻이다. '노혁(老革)'은 늙고 쇠약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28.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가 역모를 꾀했다는 유자광(柳子光) 등의 고변으로 발생한 옥사. 남이, 강순 등이 처형되었다.
29. 예묘(睿廟):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 1450-1469)의 묘호.
30.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 ‘기재(寄齋)’는 박동량의 호이다.


원문:
成宗癸卯, 貞熹王后薨于溫泉, 攢宮奉安于城外永順君家贊成。 許琮啓曰: “昔河崙死於外, 命入城殯之, 重大臣也。 今以俗忌, 大行王妃在城外, 臣竊痛之。”【《潛谷舊錄》。】

번역문:
성종(成宗) 계묘년(1483)에 정희왕후(貞熹王后)³¹가 온천(溫泉)에서 훙(薨)³²하자, 찬궁(攢宮)³³을 성(城) 밖 영순군(永順君)³⁴의 집에 봉안(奉安)하였다. 찬성 허종이 아뢰기를, “옛날 하륜(河崙)³⁵이 밖에서 죽자 입성(入城)하여 빈소(殯所)를 차리도록 명하셨으니, 중대한신(重大臣)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속된 기휘(俗忌) 때문에 대행왕비(大行王妃)³⁶께서 성 밖에 계시니, 신(臣)은 가만히 통탄합니다.” 하였다.【《잠곡구록》에서 인용】

주석:
31.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세조(世祖)의 왕비 윤씨(尹氏). 세조 사후 예종, 성종 대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32. 훙(薨): 왕족이나 고위 관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33. 찬궁(攢宮): 국상(國喪) 때 왕이나 왕비의 관(棺)을 능(陵)에 안장하기 전까지 임시로 모셔두는 전각. 빈전(殯殿)이라고도 한다.
34. 영순군(永順君, 1440-?):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의 서자인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아들.
35. 하륜(河崙, 1347-14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태종(太宗)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고 조선 초기 국가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36. 대행왕비(大行王妃):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직후 아직 시호(諡號)를 받기 전의 존칭.


원문:
弘治戊申, 董侍講越、王給事敞頒登極詔, 許忠貞公琮以遠迎使, 候于義州。 兩使尙³⁷矜持, 視人蔑如, 左右執事者, 小失尺寸, 則必詬怒, 曰: “我非爾國貂璫, 敢爾無禮耶?” 蓋往時奉使者, 多我國入朝宦寺, 故有是言。 及見公身長玉立, 衣冠偉然, 兩使瞿然相目曰: “堂堂哉若人!” 自是嚴稜漸消, 左右雖或迕意, 皆不問。 每見公必留, 語從容, 相與討論經史, 或至夜分而罷。 一日, 王給事語及嘗奉使游蜀, 公問: “蜀有二路, 陸由褒斜, 水由荊門, 公由何路?” 給事曰: “由江而入。” 公又問曰: “江³⁸出岷濫觴, 至夔束³⁹峽極險, 至夷陵始漫流, 信否?” 因擧江至某某地, 爲某某水, 沿江上下襄、樊、荊、鄂數千里間, 山川遠近, 戶口多寡, 以至古今英雄豪傑幷呑割據, 歷歷縷數, 兩使心服, 前接公手曰: “若非胸藏萬卷, 何能如此?” 公問中朝典故, 雖宮禁隱密, 皆爲公盡言, 略無所諱。 兩使還到江上, 依依不忍別, 至涕出曰: “望公早時來朝, 使中國知海外有此人。” 還朝, 嘖嘖搢紳間曰: “所不知者天上也, 人間則無雙。” 其後艾郞中璞奉使而來, 爲人傲狠, 遇卿相貴人, 皆睥睨不爲禮。 然入境, 首問公起居, 及見公, 斂容屛氣, 送迎鞠躬, 甚禮重之。【《稗官雜記》。】

번역문:
홍치(弘治)⁴⁰ 무신년(1488)에 시강(侍講) 동월(董越)과 급사중(給事中) 왕창(王敞)⁴¹이 등극 조서(登極詔)⁴²를 반포하러 오자, 충정공 허종이 원영사(遠迎使)⁴³가 되어 의주(義州)에서 기다렸다. 두 사신은 자못⁴⁴ 거만하게 행동하며(矜持) 사람 보기를 업신여기듯 하여, 좌우의 집사자(執事者)들이 조금이라도 규격을 어기면 반드시 꾸짖고 노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 초당(貂璫)⁴⁵이 아닌데, 감히 이처럼 무례한가?” 하였으니, 대개 지난 시절 봉사(奉使)한 자들이 대부분 우리나라에 입조(入朝)한 환관(宦寺)이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공이 키가 크고 옥처럼 빼어나며(玉立) 의관(衣冠)이 위엄 있는 것을 보게 되자, 두 사신이 놀라서 서로 쳐다보며 말하기를, “당당하도다, 저 사람이여!” 하였다. 이로부터 엄숙한 위엄(嚴稜)이 점점 사라져, 좌우 사람들이 혹 뜻을 거스르더라도 모두 문제 삼지 않았다. 매번 공을 만나면 반드시 머물게 하여 조용히 이야기하며 서로 경사(經史)를 토론하다가 혹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하루는 왕 급사중이 일찍이 사신으로 촉(蜀)⁴⁶에 유람했던 일을 언급하자, 공이 묻기를, “촉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는데, 육로로는 포사(褒斜)⁴⁷를 통하고 수로로는 형문(荊門)⁴⁸을 통합니다. 공께서는 어느 길로 가셨습니까?” 하니, 급사중이 답하기를, “강(江)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하였다. 공이 또 묻기를, “강은 민산(岷山)에서 발원하여 술잔에 넘칠 정도의 작은 물줄기였다가(濫觴), 기주(夔州)에 이르러 협곡에 갇혀 지극히 험하고, 이릉(夷陵)⁵⁰에 이르러 비로소 넓게 흐른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고는, 이어서 강이 모모한 곳에 이르러 모모한 물이 되고, 강을 따라 상하 수천 리 사이의 양양(襄陽), 번성(樊城), 형주(荊州), 악주(鄂州)⁵¹의 산천(山川)의 멀고 가까움,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 나아가 고금(古今)의 영웅호걸들이 병탄(幷呑)하고 할거(割據)⁵²한 일들까지 역력히 열거하니, 두 사신이 마음으로 탄복하여 앞으로 다가가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을 간직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중국 조정(中朝)의 전고(典故)를 물으니, 비록 궁궐 안의 은밀한 일이라도 모두 공을 위해 남김없이 말하여 조금도 숨기는 바가 없었다. 두 사신이 돌아가 압록강 가에 이르러서는, 아쉬워하며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말하기를, “공께서 조속히 입조(來朝)하시어 중국으로 하여금 해외에 이러한 인물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명나라) 조정에 돌아가서도 신사(搢紳)들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말하기를, “알지 못하는 것은 하늘 위의 일뿐이요, 인간 세상에서는 그와 견줄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 낭중(郎中) 애박(艾璞)⁵³이 사신으로 왔는데, 사람됨이 오만하고 사나워 경상(卿相)이나 귀인(貴人)을 만나면 모두 곁눈질하며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공의 안부를 묻고, 공을 만나자 용모를 단정히 하고 숨을 죽이며, 보내고 맞이할 때 허리를 굽혀 매우 예우하고 존중하였다.【《패관잡기(稗官雜記)》⁵⁴에서 인용】

주석:
37. [주-D005] 尙 : 《대동야승・패관잡기》에는 “상(嘗)”으로 되어 있다. '일찍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문맥상 '자못, 꽤'라는 의미의 '상(尙)'이 더 적절해 보인다.
38. [주-D006] 江 : 《대동야승・패관잡기》 및 《동문선(東文選)・충정공행장(忠貞公行狀)》에 근거할 때 앞에 “문(聞)”이 더 있어야 한다. '듣건대 강은~'으로 해석되어야 자연스럽다.
39. [주-D007] 束 : 《대동야승・패관잡기》 및 《해동야언(海東野言)・성종(成宗)》에는 “동(東)”으로 되어 있다. 기주 동쪽 협곡(夔東束峽)으로 볼 수도 있으나, 장강 삼협(三峽) 중 기협(夔峽)의 험준함을 말하는 것이므로 '물이 협곡에 갇히다'는 의미의 '속(束)'이 문맥상 더 타당하다.
40. 홍치(弘治): 중국 명(明)나라 효종(孝宗)의 연호(1488-1505).
41. 동월(董越), 왕창(王敞): 명나라 효종 때 조선에 사신으로 온 인물들. 동월은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을, 왕창은 이과급사중(吏科給事中)을 지냈다.
42. 등극 조서(登極詔):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음을 알리는 조서.
43. 원영사(遠迎使): 외국 사신을 멀리 국경까지 나가 맞이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44. 상(尙): 자못, 꽤. 주석 [주-D005] 참조.
45. 초당(貂璫): 담비 가죽(貂)과 귀고리(璫)로 장식한 관을 쓴 환관(宦官)을 가리키는 말. 명나라 때 환관의 세력이 강성하여 사신으로 오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들은 종종 거만하게 행동하여 평판이 좋지 않았다.
46. 촉(蜀): 현재의 중국 사천성(四川省) 일대.
47. 포사(褒斜): 중국 섬서성(陝西省)에서 사천성으로 통하는 주요 육로 잔도(棧道).
48. 형문(荊門): 호북성(湖北省) 형문산(荊門山) 부근. 장강(長江) 중류의 중요한 수로이다.
49. 민(岷): 민산(岷山). 사천성과 감숙성(甘肅省) 경계에 있는 산맥으로, 장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 남상(濫觴): 술잔(觴)에 넘칠 정도(濫)의 작은 물줄기. 사물의 시초를 비유한다.
50. 기(夔): 기주(夔州). 현재의 중경시(重慶市) 봉절현(奉節縣). 장강 삼협(三峽)의 시작 지점이다. / 이릉(夷陵): 현재의 호북성 의창시(宜昌市). 장강 삼협이 끝나는 지점이다.
51. 양(襄), 번(樊), 형(荊), 악(鄂): 각각 양양(襄陽), 번성(樊城), 형주(荊州), 악주(鄂州). 모두 현재 호북성 일대의 장강 중류 지역에 위치한 역사적인 도시들이다.
52. 병탄할거(幷呑割據): 다른 세력을 아우르고(幷呑) 땅을 나누어 점거함(割據). 영웅들이 세력을 다투던 상황을 의미한다.
53. 애박(艾璞): 명나라의 관리. 낭중(郎中)은 각 부(部)의 속관(屬官) 벼슬이다.
54. 《패관잡기(稗官雜記)》: 조선 후기의 문인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설화집. 패관(稗官)은 본래 임금이 민간의 풍속이나 이야기를 수집하게 하던 작은 관리인데, 후에는 소설가나 잡록 저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원문:
拜永安觀察使, 摩撫煦庥, 一方寧謐。 公詣學謁聖, 簿領之暇, 執經講讀, 儒風大興, 六鎭之人, 咸重趼來學。 道內大旱, 公齋宿沸流水上, 投文禱雨, 玄應輒至, 闔境大穰。 辛亥秩滿當遞, 將征尼亇車, 故命仍之。 公受命興師, 虜果遁, 登山望我軍, 不見其際, 𢥠然曰: “彼皆人耶? 何如是夥也?” 公之此行, 非徒尼亇車震疊, 建州三衛聞聲亦懼。 上聞師還, 遣都承旨鄭敬祖齎宣醞迎勞, 蓋異數也。

번역문:
영안도 관찰사(永安觀察使)⁵⁵에 제수되자, 어루만지고 따뜻하게 보살펴주니(摩撫煦庥) 한 지방이 편안하고 고요해졌다. 공이 향교(學)에 나아가 공자(聖)를 배알하고, 공무(簿領)⁵⁶의 여가에 경서(經書)를 잡고 강독(講讀)하니 유교 풍속(儒風)이 크게 일어나, 육진(六鎭)⁵⁷의 사람들이 모두 발뒤꿈치가 부르트도록 찾아와 배웠다(重趼來學)⁵⁸. 도내(道內)에 큰 가뭄이 들자, 공이 비류수(沸流水)⁵⁹ 가에서 재계(齋戒)하고 머물며 글을 던져 비 오기를 기도하니(投文禱雨) 신비로운 감응(玄應)이 번번이 이르러 온 경내(境內)가 크게 풍년이 들었다. 신해년(1491)에 임기(秩)가 만료되어 마땅히 교체되어야 했으나, 장차 니마차(尼亇車)⁶⁰를 정벌하려 하였으므로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군사를 일으키니 오랑캐가 과연 달아났는데, 산에 올라 아군을 바라보니 그 끝이 보이지 않자, 놀라서 말하기를, “저들이 모두 사람인가? 어찌 이리도 많은가?” 하였다. 공의 이번 출정은 비단 니마차가 두려워 떨었을(震疊) 뿐만 아니라, 건주삼위(建州三衛)⁶¹도 명성을 듣고 또한 두려워하였다. 상(上)께서 군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승지(都承旨) 정경조(鄭敬祖)를 보내 선온(宣醞)⁶²을 가지고 가서 맞이하고 위로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대우(異數)였다.

주석:
55. 영안도 관찰사(永安觀察使): 함경도 관찰사.
56. 부령(簿領): 장부(簿)와 문서를 처리함(領). 관청의 행정 사무를 의미한다.
57. 육진(六鎭): 조선 세종 때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여섯 개의 진(鎭). 종성(鐘城), 온성(穩城), 회령(會寧),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을 가리킨다. 북방 방어의 최전선이었다.
58. 중견내학(重趼來學): 발뒤꿈치에 각질(趼)이 거듭 생기도록 먼 길을 걸어와 배움. 학문에 대한 열의가 지극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59. 비류수(沸流水): 함경남도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사이를 흐르는 강.
60. 니마차(尼亇車): 함경도 북방에 거주하던 여진족 부락 또는 추장의 이름.
61. 건주삼위(建州三衛): 건주위(建州衛), 건주좌위(建州左衛), 건주우위(建州右衛)를 통칭하는 말. 당시 조선의 북방을 위협하던 주요 여진 세력이었다.
62. 선온(宣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


원문:
公天稟極高, 加之邃學卓識, 神謀默斷, 出人意表。 平生以忠直自許, 論國家大事, 披肝瀝膽, 言不得行, 則繼之流涕。 百行純備, 而孝友尤卓絶。 大度包含, 無物不容, 而至於論人奸邪, 直言無隱。 早貴隆赫, 淸貧如寒畯, 所居湫陋, 人所難堪, 而處之泰然。 嘗曰: “富貴在天, 何用力求? 妄⁶³希非分, 適足爲害。”【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은 천품(天稟)이 지극히 높았고, 거기에 깊은 학문(邃學)과 뛰어난 식견(卓識)을 더하였으며, 신묘한 꾀(神謀)와 과묵한 결단력(默斷)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평생 충직(忠直)함을 자부하였고, 국가의 대사(大事)를 논할 때는 간(肝)을 열고 쓸개를 쏟아내듯(披肝瀝膽)⁶⁴ 하였으며, 말이 행해지지 않으면 이어서 눈물을 흘렸다. 온갖 행실(百行)이 순수하게 갖추어졌으나 효도와 우애(孝友)가 더욱 뛰어났다. 큰 도량으로 포함하여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나, 사람의 간사하고 사악함(奸邪)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숨김없이 직언(直言)하였다. 일찍 귀하게 되어 명성이 높고 혁혁하였으나, 청빈하기가 가난한 선비(寒畯)와 같았고, 사는 곳이 낮고 누추하여(湫陋) 남들이 견디기 어려워하였으나 태연하게 지냈다. 일찍이 말하기를, “부귀(富貴)는 하늘에 달려있으니, 어찌 힘써 구하겠는가? 망령되이⁶³ 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도리어 해로움이 되기에 족하다.” 하였다.【이상 《잠곡구록》에서 인용】

주석:
63. [주-D008] 妄 : 저본에는 “망(忘)”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동문선・충정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분수를 잊고(忘)'보다는 '망령되이(妄)' 분수를 넘는 것을 바란다는 의미가 더 적절하다.
64. 피간력담(披肝瀝膽): 간을 열어 보이고 쓸개즙을 짜내 보인다는 뜻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어 충정을 다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원문:
成廟廢妃尹氏親事紡績。 嘗上朱汞機織絹, 成廟往見之。 妃下機而言曰: “上監, 何身之長也?” 上曰: “又有長於我者, 當召入試觀之。” 遂命召許琮入, 許公蓋身長十一尺。【《謏聞瑣錄》。】

번역문:
성종(成廟)의 폐비 윤씨(廢妃尹氏)⁶⁵가 친히 길쌈(紡績)을 하였다. 일찍이 주홍색 물감으로 무늬를 넣은 베틀(朱汞機)로 짠 비단을 올리자, 성종께서 가서 보셨다. 비(妃)가 베틀에서 내려와 말하기를, “상감(上監), 어찌 몸이 그리도 크십니까?” 하니,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보다 더 큰 자가 있으니, 마땅히 불러들여 시험 삼아 보라.” 하시고는, 마침내 허종을 불러들이라 명하셨는데, 허공(許公)은 대개 신장(身長)이 11척(尺)⁶⁶이었다.【《소문쇄록(謏聞瑣錄)》⁶⁷에서 인용】

주석:
65. 폐비 윤씨(廢妃尹氏, ?-1482): 성종의 계비(繼妃).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이다. 질투심이 강하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사사(賜死)되었다.
66. 십일척(十一尺): 1척(尺)의 길이는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나, 조선 시대의 주척(周尺)은 약 20.8cm였으므로 11척은 약 229cm에 해당한다. 과장된 표현일 수 있으나 허종이 매우 장신이었음을 나타낸다.
67. 《소문쇄록(謏聞瑣錄)》: 조선 후기의 문인 조신(趙愼, 1766-?)이 지은 설화집.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자잘한 이야기를 모아 기록하였다.


원문:
陽川君許琮狀貌魁偉, 風彩嶷然, 一時推爲大人君子。 自少博學能文, 至於天文、律曆、醫卜之技, 無不精通, 而又能弓馬, 國有大事, 必以公爲元帥。 然不治家産, 所居僅蔽風日, 淡如也。【《靑坡劇談》。】

번역문:
양천군 허종은 용모(狀貌)가 뛰어나게 크고(魁偉) 풍채(風彩)가 우뚝하여(嶷然), 한 시대에 대인군자(大人君子)로 추앙받았다. 어려서부터 널리 배우고 글에 능하였으며, 천문(天文), 율력(律曆)⁶⁸, 의복(醫卜)⁶⁹의 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한 궁마(弓馬)⁷⁰에도 능하여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원수(元帥)⁷¹로 삼았다. 그러나 집안 살림(家産)을 돌보지 않아 사는 곳은 겨우 비바람만 가릴 정도였으며 담담하였다.【《청파극담(靑坡劇談)》⁷²에서 인용】

주석:
68. 율력(律曆): 음악(律)과 역법(曆).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천문, 역법, 음악 이론 등이 서로 연관된 학문으로 여겨졌다.
69. 의복(醫卜): 의술(醫術)과 점술(卜術).
70. 궁마(弓馬): 활쏘기와 말타기. 무예(武藝)를 의미한다.
71. 원수(元帥): 전쟁 시 군대를 총지휘하는 최고 사령관.
72. 《청파극담(靑坡劇談)》: 조선 중기의 문신 이륙(李陸, 1438-1498)이 지은 설화집.


원문:
尙友堂病劇。 上遣內官問後事, 公已危, 遂開目喉語曰: “願殿下愼終如始。” 訃聞, 上輟肉膳曰: “於大臣之亡, 伊誰不痛? 如許相盡瘁國事, 深蹂不毛, 侵犯風露, 榮衛損和, 此予尤痛。 忍食肉耶?” 公亡, 朝廷若空, 士林相弔, 至有失聲而哭者。

번역문:
상우당(尙友堂)⁷³의 병이 위독해졌다. 상께서 내관(內官)을 보내 후사(後事)를 묻게 하니, 공이 이미 위태로운 상태에서 마침내 눈을 뜨고 목소리로 말하기를, “원컨대 전하께서는 끝맺음을 처음처럼 신중히 하소서(愼終如始)⁷⁴.” 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께서 고기반찬(肉膳)을 거두며 말씀하시기를, “대신(大臣)의 죽음에 그 누가 애통하지 않겠는가? 허상(許相)⁷⁵처럼 국사(國事)에 심력을 다하고(盡瘁) 불모지(不毛)를 깊이 밟으며 풍로(風露)⁷⁶를 무릅써 영위(榮衛)⁷⁷가 손상되고 조화를 잃었으니, 이것이 내가 더욱 애통한 점이다. 차마 고기를 먹겠는가?” 하였다. 공이 죽자 조정이 텅 빈 듯하였고, 사림(士林)⁷⁸들이 서로 조문하며 소리 내어 우는 자까지 있었다.

주석:
73. 상우당(尙友堂): 허종의 호.
74. 신종여시(愼終如始): 《노자(老子)》에 나오는 구절로, 일을 마칠 때에도 시작할 때처럼 신중해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임금에게 늘 초심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유언이다.
75. 허상(許相): 재상 허종.
76. 풍로(風露): 바람과 이슬. 객지나 야외에서의 고생을 비유한다. 북방에서의 군무(軍務) 등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77. 영위(榮衛): 한의학 용어로, 인체 내의 기혈(氣血) 순환과 생리 기능을 총칭하는 말. 즉, 건강을 의미한다.
78. 사림(士林): 학문과 덕행을 갖춘 선비들의 사회 또는 집단.


원문:
李陰崖《跋尙友堂詩》曰: “國朝名臣, 在英陵曰黃、曰許, 在宣陵曰許。 公諱琮, 字宗卿, 號尙友堂。 初釋褐, 以慢⁷⁹佛見忤, 光陵壓以淫威, 以試其守, 旋命進爵, 從容不失儀範。 自是華聞日著, 躐致靑紫, 不由階級。 儀觀環偉, 風彩凝嚴, 如秋天冬日, 望之也厲, 卽之也溫。 尤好性理之學, 沈潛考究, 多其所自得者, 非銖積寸累, 塗諸耳目者比。 復貫穿諸史, 閱朱文公《通鑑綱目》, 更兩旬而畢, 其精勤俊敏, 多類是。 故其施諸注措者, 皆爲模倣爲可法。 知遇宣陵, 比德元首, 入爲皐、夔, 出爲方、召, 歡欣鼓舞, 期臻大猷, 而遽爾殂殞, 豈非命也歟? 其爲詩文, 類其德焉, 不事雕琢, 而渾厚端愨, 自中聲律。 有德者必有言, 詎不信歟?”

번역문:
이음애(李陰崖)⁸⁰의 《상우당 시 발문(跋尙友堂詩)》에 이르기를, “우리나라 조정의 명신(名臣)으로는 영릉(英陵)⁸¹ 때에는 황희(黃喜)와 허조(許稠)가 있고, 선릉(宣陵)⁸² 때에는 허종(許琮)이 있다. 공의 휘(諱)는 종(琮), 자는 종경(宗卿),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다. 처음 벼슬에 나아갈 때(釋褐)⁸³, 부처를 업신여겨(慢佛)⁸⁴ 미움을 샀고, 광릉(光陵)⁸⁵께서 지나친 위엄(淫威)으로 압박하여 그 지조(守)를 시험하셨으나, 이내 작위를 올려주도록 명하셨고 (공은) 조용하고 침착하여(從容) 위의(儀範)를 잃지 않았다. 이로부터 빛나는 명성(華聞)이 날로 드러나, 계급(階級)을 거치지 않고 뛰어넘어 청자(靑紫)⁸⁶에 이르렀다. 용모(儀觀)가 뛰어나게 크고(環偉) 풍채(風彩)가 엉기듯 엄숙하여(凝嚴) 가을 하늘 겨울 해와 같으니, 멀리서 바라보면 매섭고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하였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깊이 잠겨(沈潛) 연구하고 고찰하여 스스로 터득한 바가 많았으니, 조금씩 쌓고 모아 귀와 눈에 바르는(銖積寸累, 塗諸耳目)⁸⁷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다시 여러 역사서(諸史)를 꿰뚫어, 주문공(朱文公)⁸⁸의 《통감강목(通鑑綱目)》⁸⁹을 열람하여 두 번의 순(旬)⁹⁰ 만에 마치니, 그 정밀하고 부지런하며(精勤) 뛰어나고 민첩함(俊敏)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가 시행하고 조치한(注措) 것들은 모두 모범(模倣)이 되고 본받을 만(可法)하였다. 선릉(宣陵)의 지우(知遇)를 받아 원수(元首)⁹¹와 덕(德)을 나란히 하여, 조정에 들어가서는 고요(皐陶)나 기(夔)⁹²와 같았고, 나가서는 방숙(方叔)이나 소호(召虎)⁹³와 같았으니, 기뻐하고 흔쾌히 분발하여(歡欣鼓舞) 큰 도(大猷)에 이르기를 기약하였는데, 갑자기 돌아가셨으니(殂殞) 어찌 천명(命)이 아니겠는가? 그 시문(詩文)을 지음에는 그 덕(德)과 같아서, 꾸밈(雕琢)을 힘쓰지 않았으나 혼후(渾厚)하고 단정하며 성실하여(端愨) 저절로 성률(聲律)⁹⁴에 맞았다.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는 것⁹⁵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하였다.

주석:
79. [주-D010] 慢 : 《대동야승・음애일기(陰崖日記)》 및 《해동야언・성종》, 《음애집(陰崖集)・발상우당시(跋尙友堂詩)》 등에는 “만(謾)”으로 되어 있다. 속이다, 업신여기다는 의미로 '만(慢)'과 통한다.
80. 이음애(李陰崖):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81. 영릉(英陵):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의 능호. 여기서는 세종 시대를 가리킨다.
82. 선릉(宣陵):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의 능호. 여기서는 성종 시대를 가리킨다.
83. 석갈(釋褐): 갈옷(褐衣, 평민의 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84. 만불(慢佛): 부처를 업신여김. 세조가 불교를 숭상했던 것과 대조되는 허종의 태도를 보여준다. 주석 [주-D010] 참조.
85. 광릉(光陵):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의 능호. 여기서는 세조를 가리킨다.
86. 청자(靑紫): 푸른색과 붉은색. 고위 관료의 관복 색깔을 나타내는 말로, 높은 벼슬을 의미한다.
87. 수적촌루(銖積寸累), 도저이목(塗諸耳目): 조금씩 모으고 쌓아 귀와 눈에 바른다는 뜻으로, 깊은 이해 없이 피상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88. 주문공(朱文公): 주희(朱熹, 1130-1200).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했다. 문공(文公)은 그의 시호이다.
89. 《통감강목(通鑑綱目)》: 주희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성리학적 강목체(綱目體) 형식에 따라 재편찬한 역사서.
90. 순(旬): 10일. 양순(兩旬)은 20일을 의미한다. 20일 만에 방대한 《통감강목》을 읽었다는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과 집중력을 보여준다.
91. 원수(元首): 으뜸 지도자. 임금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성종을 의미한다.
92. 고(皐), 기(夔): 고요(皐陶)와 기(夔). 중국 고대 순(舜)임금 시대의 전설적인 현명한 신하들.
93. 방(方), 소(召):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소목공(召穆公)).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의 명장(名將) 또는 명신(名臣). 안으로는 고요, 기와 같이 임금을 보좌하고 밖으로는 방숙, 소호와 같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이다.
94. 성률(聲律): 시문의 음성적 조화와 운율.
95. 유덕자 필유언(有德者必有言):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한다는 뜻.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
許忠貞公琮磊落有奇節, 不事家人生産作業, 所居之室, 湫隘卑陋, 晏如也。 每受祿俸, 卽分恤族戚之窮寒者, 且聚同宗子弟, 諄諄然勸讀, 敎之不倦。 尤不喜權勢, 門無私謁。 卜相⁹⁶數年, 未盡展施而卒, 豈非天也? 其孫許沆, 阿附頤叔, 行若狗彘, 嘗於經幄, 垂涕言曰: “臣⁹⁷, 許琮之孫也, 庶不欺負。” 甚矣, 小人情態如此。 韓忠獻公不獨有侂胄也。【《丙辰丁巳錄》。】

번역문:
충정공 허종은 마음이 넓고 뜻이 높아(磊落) 뛰어난 절개(奇節)가 있었고, 집안사람들의 생업(生産作業)을 돌보지 않아 사는 집이 좁고 낮고 누추하였으나(湫隘卑陋) 편안하게 지냈다(晏如也). 매번 녹봉(祿俸)을 받으면 즉시 가난하고 헐벗은(窮寒) 일가친척(族戚)들에게 나누어 구휼하였고, 또한 같은 종족(同宗)의 자제들을 모아 간곡하게(諄諄然) 독서를 권하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권세(權勢)를 좋아하지 않아 문에 사사로운 청탁(私謁)이 없었다. 재상(相)으로 점쳐진⁹⁶ 지 수년 만에 포부(展施)를 다 펴지 못하고 졸(卒)하니, 어찌 하늘(天)이 아니겠는가? 그의 손자 허항(許沆)⁹⁸은 이숙(頤叔)⁹⁹에게 아첨하여 붙어 행실이 개돼지(狗彘)와 같았는데, 일찍이 경연(經幄)¹⁰⁰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신(臣)⁹⁷은 허종의 손자이니, 바라건대 속이고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니, 심하도다! 소인(小人)의 행태가 이와 같았다. 한충헌공(韓忠獻公)¹⁰¹만이 탁주(侂胄)¹⁰²를 둔 것이 아니로다.【《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¹⁰³에서 인용】

주석:
96. [주-D009] 相 : 장서각본, 《대동야승・음애일기》, 《음애집・발상우당시》에는 “상(相)”으로 되어 있다. '복상(卜相)'은 재상으로 점쳐지다, 즉 재상이 될 만한 인물로 기대를 모았다는 의미이다.
97. [주-D011] 臣 : 저본에는 “성(成)”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음애일기》 및 《음애집・발상우당시》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자신을 낮추어 '신(臣)'이라고 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98. 허항(許沆, ?-1505): 허종의 손자. 연산군 때 간신 임사홍(任士洪) 등과 결탁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는 데 가담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처형되었다.
99. 이숙(頤叔): 유자광(柳子光, ?-1512)의 자(字). 조선 전기의 문신. 남이의 옥사를 고변한 인물이며, 연산군 대에 권세를 누렸으나 중종반정 후 실각했다. 허항이 유자광에게 아부했음을 의미한다.
100. 경악(經幄): 경연(經筵) 자리.
101. 한충헌공(韓忠獻公): 남송(南宋)의 재상 한탁주(韓侂胄)의 아버지 한성(韓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충헌(忠獻)은 한성의 시호이다. 또는 북송(北宋)의 명재상 한기(韓琦)를 지칭할 수도 있으나, 문맥상 한탁주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102. 탁주(侂胄): 한탁주(韓侂胄, 1152-1207). 남송의 권신.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워 금(金)나라 정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살해되었다. 명망 높은 가문에서 권세를 탐하고 나라를 그르친 인물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허항을 한탁주에 비유하여 그의 불초(不肖)함을 비판한 것이다.
103.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조선 중기의 문신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1556년(명종 11, 병진년)과 1557년(명종 12, 정사년)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


원문:
許忠貞公琮、文貞公琛昆季俱爲相, 而德業俱著, 國朝所無也。 其姊有文行識鑑, 享年百歲, 故門中至今稱之曰百歲祖母焉。 二公事之極恭, 凡朝廷大議, 二公必就問之。 成廟將廢尹妃, 二公咨之, 曰: “豈有子在儲宮, 罪其母, 國家晏然無故者乎?” 於是忠貞稱疾不往, 而文貞公異議遞職。 後廢主荒亂, 悉誅滅議當廢者, 文貞獨免, 人皆服其卓識云。【《識小錄》。】

번역문:
충정공 허종과 문정공(文貞公) 허침(許琛)¹⁰⁴ 형제는 함께 재상(相)이 되었고 덕업(德業)이 모두 드러났으니, 이는 우리 조정(國朝)에 없던 일이다. 그들의 누이는 문행(文行)과 식견(識鑑)이 있었고 향년(享年)이 백 세였으므로, 집안(門中)에서 지금까지 그를 칭하여 백세조모(百歲祖母)라고 한다. 두 공(公)이 그 누이를 섬김이 지극히 공손하여, 무릇 조정의 큰 논의(大議)가 있으면 두 공은 반드시 나아가 물었다. 성종(成廟)께서 장차 윤비(尹妃)를 폐하려 하시자, 두 공이 그 누이에게 자문하니, 답하기를, “어찌 아들이 저궁(儲宮)¹⁰⁵에 있는데 그 어머니에게 죄를 주어 국가가 태평하고 아무 일 없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충정공(허종)은 병을 핑계 대고 (폐비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고, 문정공(허침)은 다른 의견을 내어 체직(遞職)되었다. 후에 폐주(廢主)¹⁰⁶가 황란(荒亂)하여 폐비에 찬성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을 때, 문정공만이 홀로 화를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탁월한 식견(卓識)에 감복하였다고 한다.【《식소록(識小錄)》¹⁰⁷에서 인용】

주석:
104. 문정공(文貞公) 허침(許琛, 1444-1505): 허종의 동생. 조선 전기의 문신. 형과 함께 정승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05. 저궁(儲宮): 왕세자가 거처하는 궁. 즉, 왕세자를 의미한다. 당시 폐비 윤씨의 아들(훗날의 연산군)이 세자였다.
106. 폐주(廢主): 폐위된 임금.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폐위 및 사사(賜死)에 관련된 인물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를 일으켜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107. 《식소록(識小錄)》: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출전 중 하나로 인용되는 서적. 구체적인 내용은 알기 어렵다.

 

 

 

어세겸(魚世謙)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魚世謙【文貞公。】
字子益, 孝瞻之子。 宣德壬子¹生, 二十, 登司馬。 世祖二年丙子登第。 賜暇湖堂, 歷吏郞、藝文直提學、承旨。 睿宗朝, 策翼戴功臣, 封咸從君, 又歷平安監司、大司憲、吏曹參判、戶・兵曹判書、贊成, 典文衡。 燕山朝, 拜右議政, 賜几杖。 壬戌²卒, 年七十一。

번역문:
어세겸(魚世謙)【문정공(文貞公)³이다.】
자는 자익(子益)이고, 효첨(孝瞻)⁴의 아들이다. 선덕(宣德) 임자년(壬子年, 1432)⁵에 태어나 스무 살에 사마시(司馬試)⁶에 합격하였다. 세조(世祖) 2년 병자년(1456)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⁷를 하였고, 이조 정랑(吏曹正郎)⁸,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⁹, 승지(承旨)¹⁰를 역임하였다. 예종(睿宗) 조(朝)에 익대공신(翼戴功臣)¹¹에 책록되어 함종군(咸從君)¹²에 봉해졌고, 또 평안도 감사(平安道監司), 대사헌(大司憲)¹³, 이조 참판(吏曹參判)¹⁴, 호조 판서(戶曹判書)¹⁵·병조 판서(兵曹判書)¹⁶, 찬성(贊成)¹⁷을 역임하였으며, 문형(文衡)¹⁸을 관장하였다. 연산군(燕山君) 조(朝)에 우의정(右議政)¹⁹에 제수되었고, 궤장(几杖)²⁰을 하사받았다. 임술년(壬戌年, 1502)²¹에 졸(卒)하니, 향년 71세였다.

주석:

  1. [주-D001] 壬子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및 규장각 소장 《국조방목(國朝榜目)》(奎貴11655)에 근거할 때 “경술(庚戌)”이 되어야 할 듯하다.
  2. [주-D002] 壬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6년(경신) 11월 28일 기록에 근거할 때 “경신(庚申)”이 되어야 할 듯하다.
  3. 문정공(文貞公): 어세겸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절개를 지킴(淸白守節) 등을 의미한다.
  4. 효첨(孝瞻): 어세겸의 아버지인 어효첨(魚孝瞻, 1398~1450)을 가리킨다.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다.
  5. 선덕 임자년(宣德壬子年): 1432년(세종 14). 명나라 선덕제의 연호이다. 주석 [주-D001]에서 지적하듯, 1430년(경술년) 출생설도 있다.
  6. 사마시(司馬試):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합쳐 부르는 말. 소과(小科)라고도 한다.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나 하급 관리가 될 자격을 얻었다.
  7. 사가독서(賜暇讀書): 젊고 유능한 문신(文臣)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주로 호당(湖堂, 독서당)에서 이루어졌다. 문신으로서 큰 영예로 여겨졌다.
  8. 이조 정랑(吏曹正郎):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였다.
  9.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임금의 명령인 교서(敎書) 작성 등을 담당하던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10.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11. 익대공신(翼戴功臣):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세조 말년에 발생한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어세겸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2. 함종군(咸從君): 공신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함종은 어씨(魚氏)의 본관이다.
  13.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종2품 으뜸 벼슬.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탄핵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14.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조(吏曹)의 종2품 차관(次官).
  15. 호조 판서(戶曹判書): 호조(戶曹)의 정2품 장관. 국가의 재정과 경제 업무를 총괄했다.
  16. 병조 판서(兵曹判書): 병조(兵曹)의 정2품 장관.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
  17. 찬성(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었다.
  18. 문형(文衡):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의 별칭. 문운(文運)을 주관하고 문풍(文風)을 이끄는 자리로, 학문과 문장의 최고 권위를 상징했다.
  19.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재상.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최고위 관직이다.
  20. 궤장(几杖): 임금이 나이가 많은 원로대신에게 하사하던 안석(案席, 궤)과 지팡이(장). 신하로서 받을 수 있는 큰 영예 중 하나였다.
  21. 임술년(壬戌年): 1502년(연산군 8). 주석 [주-D002]에서 지적하듯, 《연산군일기》에는 1500년(경신년, 연산군 6) 11월 28일에 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망 연도에 차이가 있다.

원문:
成化己亥, 奉皇勅征建州衛, 大捷。 世謙爲奏聞使, 仍獻俘。 至遼東, 太監及摠兵官、都御史等語之曰: “被擄人及首級, 何必幷獻京師? 首級則付邊鎭, 人口則付親戚, 不亦可乎? 吾等當具由奏聞。” 世謙曰: “獻馘王庭, 古也。 奏捷而無其實, 將何以驗?” 往復數三, 竟不從²²。 主人爲設筵, 公揖而不跪。 御史曰: “何不跪?” 答曰: “我奉殿下之命, 來朝京師, 諸大人特設宴, 以禮²³慰我耳, 焉得跪飮?”【《東閣雜記》。】

번역문:
성화(成化) 기해년(1479)²⁴에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들어 건주위(建州衛)²⁵를 정벌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어세겸이 주문사(奏聞使)²⁶가 되어 이어서 포로(俘虜)를 헌납(獻納)하였다. 요동(遼東)에 이르자, 태감(太監)²⁷과 총병관(摠兵官)²⁸, 도어사(都御史)²⁹ 등이 그에게 말하였다. “사로잡힌 사람과 베어낸 머리[首級]를 어찌 반드시 모두 경사(京師)³⁰에 바치려 하시오? 수급은 변방 진영(邊鎭)에 맡기고, 사람[人口]은 친척에게 맡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소? 우리들이 마땅히 사유를 갖추어 주문(奏聞)하겠소.” 어세겸이 말하였다. “적의 귀를 베어 왕의 뜰에 바치는 것[獻馘王庭]³¹은 옛 법도입니다. 승전을 아뢰면서 그 실물(實物)이 없다면 장차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서너 차례 말이 오갔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³². 주인이 연회(筵會)를 베풀었는데, 공(公)이 읍(揖)³³만 하고 꿇어앉지 않았다. 어사(御史)가 “어찌 꿇어앉지 않는가?”라고 묻자, 답하였다. “나는 전하(殿下)의 명을 받들어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하러 왔는데, 여러 대인(大人)들께서 특별히 연회를 베풀어 예(禮)로써 나를 위로해 주실 뿐이니, 어찌 꿇어앉아 마실 수 있겠습니까?”【《동각잡기(東閣雜記)》³⁴에서 인용】

주석:
22. [주-D003] 竟不從 : 저본(底本)에는 공란(空欄)이다. 《대동야승(大東野乘)・동각잡기(東閣雜記)》 및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연산시이화인(燕山時罹禍人)・어세겸(魚世謙)》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23. [주-D004] 禮 : 저본에는 없다. 《대동야승・동각잡기》 및 《국조인물고・연산시이화인・어세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24. 성화 기해년(成化己亥年): 1479년(성종 10). 명나라 성화제의 연호이다.
25. 건주위(建州衛): 명나라가 만주 지역에 설치한 여진족 위소(衛所) 중 하나. 조선 초기에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조선과 군사적 충돌이 잦았다. 1479년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과 협력 하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건주위를 정벌했다.
26. 주문사(奏聞使): 조선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특정 사실이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파견하던 임시 사신. 여기서는 건주위 정벌의 승전 보고 및 포로 헌납을 위해 파견되었다.
27. 태감(太監): 명나라 환관(宦官)의 최고위직. 황제의 측근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28. 총병관(摠兵官): 명나라의 지방 군사령관.
29. 도어사(都御史): 명나라의 중앙 감찰 기구인 도찰원(都察院)의 장관. 지방 순찰과 감찰 임무를 맡기도 했다.
30. 경사(京師): 수도. 여기서는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31. 헌괵왕정(獻馘王庭): 전쟁에서 벤 적의 왼쪽 귀(馘)를 조정(王庭)에 바치는 고대의 의식. 전공(戰功)을 증명하고 보고하는 절차였다. 어세겸은 이 고사를 들어 수급과 포로를 직접 황제에게 바쳐야 함을 주장했다.
32. 주석 [주-D003] 참조.
33. 읍(揖): 두 손을 마주 잡고 공경의 뜻을 표하는 인사법. 꿇어앉는 것(跪)보다 덜 격식을 갖춘 예이다. 어세겸은 자신이 사신으로서 동등한 입장에서 대접받는 것이므로 꿇어앉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이는 조선 사신의 위신과 자존심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34.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주로 선조 대까지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일화를 기록했다.


원문:
公抵北京, 兩太監問魚有沼放置等事, 公曰: “有沼良將, 常思奮不顧身。 第踰越險遠, 人馬疲極, 江氷³⁵旋解, 芻糧已盡, 罷兵而還, 誠不得已。 我殿下恐失朝廷約束, 直以大義裁之耳。 再遣他將, 終有成績。 我殿下忠勤, 朝廷豈盡知乎?” 是行也, 使事甚重, 公以禮周旋, 中國之人莫不偉之。

번역문:
공(公)이 북경(北京)에 도착하자, 두 태감(太監)이 어유소(魚有沼)³⁶의 방치(放置)³⁷ 등의 일에 대해 묻자, 공이 답하였다. “어유소는 좋은 장수여서 항상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을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험하고 먼 곳을 넘어가느라 사람과 말이 매우 지쳤고, 강의 얼음[氷]³⁸이 금세 녹았으며 꼴과 식량[芻糧]이 이미 다 떨어져, 군대를 파(罷)하고 돌아온 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조정(朝廷)과의 약속을 어길까 염려하시어 바로 대의(大義)로써 그를 처단³⁹하셨을 뿐입니다. 다시 다른 장수를 보낸다면 마침내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전하의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심을 조정에서 어찌 다 아시겠습니까?” 이번 행차에 사신으로서의 임무가 매우 중요하였는데, 공이 예(禮)로써 주선(周旋)하니 중국 사람들이 그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35. [주-D005] 氷 : 저본에는 “수(水)”로 되어 있다. 《국조인물고・연산시이화인・어세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얼음이 녹는 상황이 더 적절하다.
36. 어유소(魚有沼, 1430~1489):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함종. 어세겸의 사촌이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고, 1479년 건주위 정벌 때 우참찬(右參贊)으로 서정대장(西征大將)이 되어 출정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37. 방치(放置): 내버려 둠. 여기서는 어유소가 건주위 정벌에서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38. 주석 [주-D005] 참조.
39. 재지(裁之): 죄를 물어 처단함. 어유소는 실제로 건주위 정벌 실패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했다. 어세겸은 어유소의 실패가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었으며, 국왕이 이미 그 책임을 물었음을 강조하여 명나라 측의 불만을 무마하려 한 것이다.


원문:
夏, 還自京師, 獻所得《五倫書》、《文翰類選》、《律條疏議》、《國子監通志》、趙子昂書簇四軸。 上曰: “前後赴京宰相進籍者多, 而今卿所進, 予甚嘉之。” 賜馬裝、豹皮。【竝行狀。】

번역문:
여름에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얻어 온 《오륜서(五倫書)》⁴⁰, 《문한유선(文翰類選)》⁴¹, 《율조소의(律條疏議)》⁴², 《국자감통지(國子監通志)》⁴³와 조자앙(趙子昂)⁴⁴의 글씨 족자 네 축(軸)을 바쳤다. 상(上)⁴⁵께서 말씀하셨다. “전후로 북경에 갔던 재상(宰相)들이 서적을 바친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 경(卿)이 바친 것을 내 매우 가상(嘉尙)히 여긴다.” 마장(馬裝)⁴⁶과 표피(豹皮)⁴⁷를 하사하였다.【이상 행장(行狀)⁴⁸에서 인용】

주석:
40. 《오륜서(五倫書)》: 오륜(五倫)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교 윤리에 관한 서적일 것이다.
41. 《문한유선(文翰類選)》: 문장(文章)과 서찰(書札) 등에서 뛰어난 글을 뽑아 엮은 책으로 추정된다.
42. 《율조소의(律條疏議)》: 법률 조문(律條)에 대한 해설(疏議)을 담은 책. 당(唐)나라의 《당률소의(唐律疏議)》와 같이 법률과 그 주석을 함께 엮은 서적일 가능성이 있다.
43. 《국자감통지(國子監通志)》: 명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연혁, 제도, 인물 등을 총괄적으로 기록한 책.
44. 조자앙(趙子昂):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자(字). 원(元)나라의 저명한 학자이자 서화가. 송설체(松雪體)라는 독특한 서풍(書風)으로 유명하며, 고려 말 조선 초 서예에 큰 영향을 미쳤다.
45. 상(上): 임금. 여기서는 성종(成宗)을 가리킨다.
46. 마장(馬裝): 말을 꾸미는 장식. 안장, 굴레 등을 포함한다.
47. 표피(豹皮): 표범 가죽. 귀한 물품으로 여겨져 하사품으로 사용되었다.
48.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자, 호, 본관, 관직, 행적, 업적 등을 기록한 글. 시호(諡號)를 받거나 묘지명(墓誌銘),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을 짓는 기초 자료가 된다.


원문:
壬寅, 成廟幸光陵, 仍拜影殿于奉先寺, 魚世謙以大司憲扈從。 寺僧欲饋百官, 世謙諫曰: “以堂堂扈從之臣, 受僧施食, 於國體何? 況百官皆自齎飯, 不患無食。” 上曰: “任爾不食。” 世謙與諸臺諫皆不食。【《東閣雜記》。】

번역문:
임인년(1482)⁴⁹에 성종(成廟)⁵⁰께서 광릉(光陵)⁵¹에 행차하시고, 이어서 봉선사(奉先寺)⁵²의 영전(影殿)⁵³에 참배하실 때, 어세겸이 대사헌(大司憲)으로서 호종(扈從)⁵⁴하였다. 절의 승려들이 백관(百官)에게 음식을 대접하고자 하니, 어세겸이 간언(諫言)하였다. “당당한 호종 신하로서 승려가 베푸는 음식(施食)⁵⁵을 받는 것이 국가의 체면[國體]에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백관들이 모두 스스로 밥을 싸 왔으니, 먹을 것이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대로 먹지 않도록 하라.” 어세겸과 여러 대간(臺諫)⁵⁶들이 모두 먹지 않았다.【《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인용】

주석:
49. 임인년(壬寅年): 1482년(성종 13).
50. 성묘(成廟):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의 묘호(廟號).
51. 광릉(光陵):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능.
52. 봉선사(奉先寺):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사찰.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의 원찰(願刹, 능을 지키고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로 창건되었다.
53. 영전(影殿): 임금의 초상화(御眞)를 모신 건물. 봉선사에는 세조의 어진을 모셨다.
54. 호종(扈從): 임금의 행차를 따라 모시는 것.
55. 시식(施食): 불교에서 음식을 베푸는 행위. 보시(布施)의 일종이다.
56. 대간(臺諫): 사헌부(司憲府, 대)와 사간원(司諫院, 간)의 관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어세겸은 당시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이었다. 이 일화는 조선 시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하에서 유교적 관료들이 불교 및 승려와의 관계에서 엄격한 태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成均儒生以作詩譏師長, 繫獄者多飢。 公啓曰: “法見匿名書焚之, 今有詩無名, 是匿名書也, 在所不問⁵⁷。 且遠方儒生專仰館廩, 今繫獄, 供饋皆闕, 是亦可悶。” 上曰: “宜卽速放。” 又命承旨往檢供饋。

번역문: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이 시(詩)를 지어 스승[師長]⁵⁸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옥(獄)에 갇힌 자 중에 굶주리는 이가 많았다. 공(公)이 아뢰었다. “법(法)에 익명서(匿名書)를 보면 불태우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 시(詩)는 있으나 이름이 없으니 이는 익명서입니다. 불문에 부쳐야 할 바입니다. 또한 먼 지방의 유생들은 오로지 관(館)의 녹봉[廩]⁵⁹에 의지하는데, 지금 옥에 갇혀 음식 공급[供饋]이 모두 끊겼으니, 이 또한 딱한 일입니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즉시 속히 석방하라.” 또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가서 음식 공급 상태를 점검하게 하였다.

주석:
57. [주-D006] 問 : 저본에는 “문(聞)”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묻지 않는다', 즉 '문제 삼지 않는다(不問)'가 자연스럽다.
58. 사장(師長): 스승. 여기서는 성균관의 교수나 관리를 가리킨다.
59. 관름(館廩): 관(館)에서 주는 녹봉(廩).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지급하던 학비나 식량을 의미한다.


원문:
公於經筵進曰: “漢、唐之世, 宦寺專權, 而人主不悟, 終至於亂亡。 大抵救火於焰焰, 止水於涓涓, 則其功易。”

번역문:
공(公)이 경연(經筵)⁶⁰에서 나아가 아뢰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시대에 환관[宦寺]⁶¹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나 임금이 깨닫지 못하여 마침내 난망(亂亡)⁶²에 이르렀습니다. 대저 불은 활활 타오를 때[焰焰] 끄고 물은 졸졸 흐를 때[涓涓] 막으면 그 공(功)이 쉬운 법입니다.”⁶³

주석:
60.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國政)을 논의하던 자리.
61. 환시(宦寺): 환관(宦官). 내시(內侍).
62. 난망(亂亡): 혼란해지고 멸망함.
63. 구화어염염 지수어연연(救火於焰焰 止水於涓涓): 화근(禍根)은 초기에 제거해야 한다는 비유. 작은 폐단이라도 미리 막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됨을 경계하는 말이다.


원문:
丁巳秋, 公於經筵講, 至漢明帝臨雍拜老曰: “人君以誠意、正心爲學, 然後能不惑於他岐。 明帝之學, 章句而已, 未聞大道, 故惑於佛敎, 爲萬世基禍之主。 惟我成宗, 深斥佛敎, 命勿度僧。 今者創寺於宣陵旁, 雖上殿之命, 殿下當擧大義以請止也。 內需司⁶⁴之儲, 無⁶⁵非國之物也。 費於創建寺刹, 而謂此非國家所出, 豈可乎? 成宗闢佛御書, 具在實錄, 實嗣王龜鑑。 殿下以此懇請, 則上殿必不忍違。 有一儒生於試策, 請建寺刹以禳, 大臣皆欲置之, 而成宗命黜遐方, 闢佛之意, 此亦可見。 臣前者祗事宣陵⁶⁶, 見寺在陵上, 金鼓震動, 所當撤去, 豈宜改作?”【竝行狀。】

번역문:
정사년(丁巳年, 1497)⁶⁷ 가을에 공(公)이 경연(經筵)에서 강(講)하다가 한(漢) 명제(明帝)가 벽옹(辟雍)⁶⁸에 임하여 노인을 존경하여 절한 대목⁶⁹에 이르러 아뢰었다. “임금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⁷⁰으로써 학문(學問)을 한 뒤에야 다른 길[他岐]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명제(明帝)⁷¹의 학문은 장구(章句)⁷²에 그쳤을 뿐 대도(大道)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불교(佛敎)에 미혹되어 만세(萬世)에 화(禍)의 기초를 만든 군주가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 성종(成宗)께서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시어 승려를 출가시키지 말라[度僧]⁷³ 명하셨습니다. 지금 선릉(宣陵)⁷⁴ 옆에 절을 창건하는 것은 비록 상대전(上殿)⁷⁵의 명령이라 하시더라도 전하(殿下)⁷⁶께서는 마땅히 대의(大義)를 들어 중지할 것을 청해야 합니다. 내수사(內需司)⁷⁷의 저축은 나라의 물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절을 창건하는 데 비용을 쓰면서 이것이 국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성종께서 불교를 배척하신 어서(御書)⁷⁸가 실록(實錄)에 갖추어져 있으니, 실로 왕위를 이은 임금의 귀감(龜鑑)입니다. 전하께서 이것으로 간절히 청하시면 상대전께서도 반드시 차마 어기지 못하실 것입니다. 어떤 유생(儒生) 하나가 시책(試策)⁷⁹에서 절을 세워 재앙을 물리칠 것[禳]을 청하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그를 그대로 두려 하였으나 성종께서 먼 지방으로 내쫓도록 명하셨으니, 불교를 배척하신 뜻을 이에서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신(臣)이 지난번에 선릉(宣陵)을 삼가 관리할 때⁸⁰, 절이 능(陵) 위에 있어 금고(金鼓)⁸¹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것을 보았으니 마땅히 철거해야 할 터인데, 어찌 고쳐 짓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64. 司 : 底本에는 없다. 《國朝人物考・燕山時罹禍人・魚世謙》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내수(內需)’는 왕실 재정을 뜻하기도 하지만, 관청명으로는 ‘내수사(內需司)’가 맞다.
65. [주-D007] 無 : 저본에는 없다. 《국조인물고・燕山時罹禍人・어세謙》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문맥상 ‘아닌 것이 없다’는 이중 부정이 자연스럽다.
66. 祗事宣陵 : 어세겸이 선릉(宣陵)의 능관(陵官)이나 관련 책임자였음을 시사한다. 혹은 선릉 조성 시 감독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67. 정사년(丁巳年): 1497년(연산군 3).
68. 벽옹(辟雍): 고대 중국 주(周)나라 때 천자(天子)가 세운 대학(大學). 후대에는 국립대학 또는 학문의 전당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69. 한 명제 임옹배로(漢明帝臨雍拜老): 한나라 명제(明帝)가 벽옹에 행차하여 삼로(三老) 오경(五更)과 같은 원로 학자들을 존경하여 직접 절하며 가르침을 청했다는 고사. 군주가 학문과 노인을 존중하는 모범으로 인용된다.
70. 성의(誠意), 정심(正心): 《대학(大學)》에서 제시된 수양의 단계. 뜻을 참되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은 격물(格物), 치지(致知)와 함께 수신(修身)의 기본이 된다.
71. 명제(明帝): 후한(後漢)의 제2대 황제(재위 57~75). 유학을 장려하고 정치를 안정시켰으나, 중국에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받아들인 군주로 알려져 있다. 어세겸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고 있다.
72. 장구(章句): 경서(經書)의 문장을 나누고 구절을 끊어 자구(字句)를 해석하는 학문. 성리학(性理學)에서는 경서의 근본 뜻(義理)을 탐구하는 것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73. 도승(度僧):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는 것. 조선 시대에는 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도승을 엄격히 제한하거나 금지했다. 성종은 특히 억불 정책을 강화했다.
74. 선릉(宣陵): 서울 강남구에 있는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능.
75. 상대전(上殿): 왕대비(王大妃)나 대왕대비(大王大妃)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연산군의 할머니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 한씨)를 가리킨다. 인수대비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76. 전하(殿下): 당시 임금인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77. 내수사(內需司): 조선 시대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관청. 주석 [주-D006] 참조.
78. 어서(御書): 임금이 직접 쓴 글씨나 문서.
79. 시책(試策): 과거 시험의 한 종류인 책문(策問). 국정 현안이나 학문적 문제에 대해 응시자의 견해나 대책을 묻는 시험이다.
80. 주석 66 참조.
81. 금고(金鼓): 징과 북.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악기.

해설:
이 단락은 연산군 3년(1497) 당시 우의정이던 어세겸이 경연에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적 원칙을 지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이다. 특히 성종의 능인 선릉 옆에 인수대비의 명으로 원찰(願刹)인 봉은사(奉恩寺)를 짓는 것에 대해, 성종의 억불 의지를 상기시키며 반대하고 있다. 이는 당시 조정 내 유교 관료들과 불교를 신봉하는 왕실 여성 세력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원문:
李克墩見金馹孫史草, 言於摠裁官魚世謙, 世謙不應, 乃言於柳子光。 子光大喜, 卽乘夕携酒往盧思愼等家, 從容酒酣, 言及光廟受恩之厚, 仍相與涕泣, 以感動其心, 遂言及史事, 共密告。 魚世謙以不告罷相。【《野言別錄》。】

번역문:
이극돈(李克墩)⁸²이 김일손(金馹孫)⁸³의 사초(史草)⁸⁴를 보고 총재관(摠裁官)⁸⁵ 어세겸에게 말하였으나 어세겸이 응하지 않자, 마침내 유자광(柳子光)⁸⁶에게 말하였다. 유자광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저녁 무렵 술을 가지고 노사신(盧思愼)⁸⁷ 등의 집으로 가서, 조용히 술에 취하여 세조(光廟)⁸⁸에게 입은 은혜의 두터움을 언급하고 이어서 서로 함께 눈물을 흘려 그 마음을 감동시키고는, 마침내 사초의 일[史事]을 언급하여 함께 비밀리에 고발하였다. 어세겸은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상(宰相) 자리에서 파면되었다.【《야언별록(野言別錄)》⁸⁹에서 인용】

주석:
82. 이극돈(李克墩, 1435~1503): 조선 전기의 문신.
83.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선 전기의 문신, 사관(史官). 성종 대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며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 사초에 실었다.
84. 사초(史草): 조선 시대에 사관(史官)이 임금의 언행과 조정의 논의 등을 기록한 원고. 실록(實錄)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85. 총재관(摠裁官): 실록청(實錄廳)의 최고 책임자. 실록 편찬 작업을 총괄했다. 어세겸은 성종실록 편찬의 총재관 중 한 명이었다.
86. 유자광(柳子光, ?~1512): 조선 전기의 문신, 공신. 서얼 출신이었으나 세조에게 발탁되어 공을 세웠다. 훈구파(勳舊派)의 입장에서 사림파를 견제했다.
87.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조선 전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이극돈, 유자광 등과 함께 김일손의 사초 문제를 고발하는 데 가담했다.
88. 광묘(光廟): 세조(世祖)의 별칭. 세조의 묘호는 원래 신묘(神廟) 또는 예묘(睿廟)로 정하려 했으나 예종이 광묘(光廟)로 고쳤고, 이후 세조(世祖)로 개칭되었다. 여기서는 세조를 가리킨다. 유자광과 노사신 등은 세조에게 발탁되어 은혜를 입었음을 강조하며 김일손의 사초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89. 《야언별록(野言別錄)》: 작자 미상의 야사(野史) 기록. 무오사화(戊午士禍)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
이 단락은 1498년(연산군 4)에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발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는 이극돈과 유자광 등의 고발로 인해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사림파 인물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어세겸은 사초 내용을 보고받고도 이를 묵인(또는 고발하지 않음)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원문:
公天性樸而不露, 汪汪若萬頃波。 自少恬於進取, 口不出利祿之言, 雖有射御折衝之才, 未嘗自衒。 事親至孝, 與妻子愉愉, 未嘗有慍色。 惡衣服, 而朝服則修整; 菲飮食, 而祭祀則豐潔。 所居之室, 累土爲階, 不加丹堊。 寢房數間, 書室獨坐, 日事披閱, 一飯不休, 無一張琴瑟、一具博奕, 而惟酒無量。 客來輒對飮, 而飣餖草草, 筵席蕭然, 如處士之居焉。 其待人也, 平心下氣, 雖公孤⁹⁰至而未嘗修邊幅, 子弟在而未嘗傲氣色。 常敎子女曰: “吾宗鮮少, 有來見者, 待之以親疎內外, 非余志也。”

번역문:
공(公)은 천성(天性)이 질박(質樸)하면서 드러내지 않았고, 넓고 깊음(汪汪)⁹¹이 만경창파(萬頃波)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나아가 벼슬을 취하는 데 담담하여 입으로 이익과 녹봉[利祿]에 대한 말을 내지 않았으며, 비록 활쏘기[射]와 말타기[御]⁹², 그리고 적진을 꺾는[折衝]⁹³ 재능이 있었으나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처자(妻子)와는 즐겁게 지내며 일찍이 성내는 기색이 없었다. 의복(衣服)은 허름한 것을 싫어하였으나 조복(朝服)⁹⁴은 단정하게 하였고, 음식(飮食)은 박하게 하였으나 제사(祭祀)에는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였다. 거처하는 방은 흙을 쌓아 섬돌[階]을 만들고 단청(丹靑)이나 흰 칠[堊]을 하지 않았다. 침실(寢房) 몇 칸과 서실(書室)에 홀로 앉아, 날마다 책을 읽는[披閱] 일을 하며 한 번 밥 먹는 동안에도 쉬지 않았고, 거문고[琴]나 비파[瑟] 한 장(張), 바둑[博]이나 장기[奕] 기구 하나 없었으나, 오직 술에 대해서는 주량(酒量)이 없었다. 손님이 오면 번번이 마주하여 마셨으나, 안주[飣餖]⁹⁵는 변변찮았고 자리[筵席]는 쓸쓸하여 마치 처사(處士)⁹⁶의 거처와 같았다. 사람을 대함에는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기운을 낮추어, 비록 공고(公孤)⁹⁷가 이르더라도 일찍이 겉모습[邊幅]⁹⁸을 꾸미지 않았고, 자제(子弟)들이 있더라도 일찍이 오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를, “우리 종족(宗族)이 드무니, 찾아와 보는 이가 있거든 친하고 소원함[親疎]과 내외(內外)⁹⁹로써 그들을 대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90. 公孤 : 삼공(三公)과 삼고(三孤)를 아울러 이르는 말. 고위 관직을 의미한다.
91. 왕왕(汪汪): 물이 넓고 깊은 모양. 도량(度量)이 넓고 깊음을 비유한다.
92. 사어(射御): 활쏘기와 말 타기. 무예(武藝)를 통칭하는 말.
93. 절충(折衝): 적의 창끝(衝)을 꺾는다는 뜻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외교적으로 적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뛰어난 군사적, 외교적 능력을 비유한다.
94. 조복(朝服):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관복(官服).
95. 정두(飣餖): 음식을 그릇에 담아 늘어놓은 모양. 여기서는 차려놓은 음식이나 안주를 의미한다.
96. 처사(處士):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97. 공고(公孤): 삼공(三公)과 삼고(三孤).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최고위 관직들을 통칭하는 말. 여기서는 매우 높은 지위의 손님을 의미한다.
98. 변폭(邊幅): 옷의 가장자리. 겉치레나 외모를 의미한다. ‘불수변폭(不修邊幅)’은 겉모습을 꾸미지 않고 소탈함을 뜻한다.
99. 내외(內外): 집안사람과 바깥사람. 친족과 비친족을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居官廉簡嚴明, 所在有績。 又善治劇, 剖決如流, 案無留牘。 爲文章, 操筆立就, 出於胸中, 不拘常格, 自成一家。 嘗從事八道, 凡山川風土, 歷覽遍記, 其文益肆。 平生未嘗作一書爲子弟求恩澤, 深以盛滿爲戒。

번역문:
관직(官職)에 있어서는 청렴하고 간결하며 엄정하고 분명하여, 있는 곳마다 공적(功績)이 있었다. 또한 어려운 일[劇]¹⁰⁰을 잘 다스려 판결(剖決)함이 물 흐르듯 하여 서류함[案]에 미결(未決)된 문서[牘]가 없었다. 문장(文章)을 지음에는 붓을 잡으면 즉시 이루어졌는데, 가슴속에서 나와 상례적인 격식[常格]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일가(一家)¹⁰¹를 이루었다. 일찍이 팔도(八道)¹⁰²에서 종사(從事)하였는데, 무릇 산천(山川)과 풍토(風土)를 두루 살펴보고 두루 기록하여 그 문장(文)이 더욱 호방(浩放)하였다[肆]. 평생 일찍이 글 한 통을 지어 자제(子弟)를 위해 은택(恩澤)을 구하지 않았고, 가득 차는 것[盛滿]¹⁰³을 깊이 경계하였다.

주석:
100. 극(劇): 번거롭고 어려운 일.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나 사건을 의미한다.
101. 일가(一家): 독자적인 경지나 학파, 문파(文派) 등을 이룬 것을 의미한다.
102. 팔도(八道): 조선의 전국 행정 구역.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를 가리킨다. 어세겸이 여러 지방의 관직을 역임했음을 의미한다.
103. 성만(盛滿): 가득 차서 더 이상 찰 수 없는 상태. 권세나 부귀가 극에 달한 상태를 경계하는 말로, 《주역(周易)》 등에서 교만과 몰락의 원인이 된다고 경고한다.


원문:
旣疾, 內醫金興守來診曰: “宜灸。” 公曰: “七十, 稀壽; 政丞, 極品, 二者得兼, 復有何冀? 況先君七十一而逝, 我亦今年七十一, 死且何憾, 而必灸求活哉!”【竝行狀。】

번역문:
병이 들자 내의(內醫)¹⁰⁴ 김흥수(金興守)가 와서 진찰하고 말하였다. “마땅히 뜸[灸]을 떠야 합니다.” 공(公)이 말하였다. “나이 칠십은 희수(稀壽)¹⁰⁵이고, 정승(政丞)은 지극한 품계[極品]인데,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었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물며 선군(先君)¹⁰⁶께서 71세에 돌아가셨는데, 나 또한 올해 71세이니 죽은들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반드시 뜸을 떠서 살기를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이상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04. 내의(內醫): 내의원(內醫院) 소속 의관(醫官). 왕족과 고위 관료의 진료를 담당했다.
105. 희수(稀壽): 70세를 가리키는 말.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106. 선군(先君): 돌아가신 아버지. 어효첨(魚孝瞻)을 가리킨다.


원문:
舊例, 典文衡者, 官至三公則遞。 其意三公則論道經邦, 不可下兼文衡事也。 弘治年, 魚公世謙以大提學陞右議政, 朝議以爲: “當今文章之士, 無出魚右, 遂令仍帶文衡。” 魚公之始爲大提學, 以孫舜孝、許琮辭之, 及其躋相, 亦有成俔、洪貴達, 而魚公之不讓, 朝議之不歸, 未之知也。 中廟朝, 李容齋、金安老, 皆以議政, 而不遞文衡, 蓋援魚公之例也。【《稗官雜記》。】

번역문:
옛 관례에 문형(文衡)¹⁰⁷을 관장하는 자는 관직이 삼공(三公)¹⁰⁸에 이르면 체직(遞職)되었다. 그 뜻은 삼공은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論道經邦] 자리이므로 아래로 문형의 일을 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홍치(弘治) 연간¹⁰⁹에 어공(魚公) 세겸(世謙)이 대제학(大提學)¹¹⁰에서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하자, 조정의 논의[朝議]에서 이르기를, “지금 문장(文章)을 하는 선비 중에 어세겸의 오른쪽에 나올 자가 없다”고 하여 마침내 그대로 문형을 겸대(兼帶)¹¹¹하게 하였다. 어공이 처음 대제학이 되었을 때는 손순효(孫舜孝)¹¹²와 허종(許琮)¹¹³ 때문에 사양하였고, 그가 재상(宰相)의 반열에 올랐을 때에도 또한 성현(成俔)¹¹⁴과 홍귀달(洪貴達)¹¹⁵이 있었는데, 어공이 사양하지 않고 조정의 논의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할 일이다. 중종(中宗) 조(朝)에 이용재(李容齋)¹¹⁶와 김안로(金安老)¹¹⁷가 모두 의정(議政)으로서 문형에서 체직되지 않은 것은 대개 어공의 사례를 원용한 것이다.【《패관잡기(稗官雜記)》¹¹⁸에서 인용】

주석:
107. 문형(文衡): 예문관 대제학. 주석 18 참조.
108.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한다.
109. 홍치(弘治) 연간: 1488년~1505년.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어세겸은 1495년(연산군 1)에 대제학에서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110. 대제학(大提學):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으뜸 벼슬. 문형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111. 겸대(兼帶): 두 가지 이상의 관직을 겸하여 맡음.
112. 손순효(孫舜孝, 1427~1497): 조선 전기의 문신.
113. 허종(許琮, 1434~1494): 조선 전기의 문신.
114. 성현(成俔, 1439~1504):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문장가. 《용재총화(慵齋叢話)》의 저자.
115.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조선 전기의 문신.
116. 이용재(李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을 가리킨다. 호는 용재(容齋).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가.
117.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 대에 권력을 장악했다.
118. 《패관잡기(稗官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필기잡록. 다양한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일화를 담고 있다.

해설:
이 단락은 문형(대제학)을 맡은 자가 삼공(정승)이 되면 문형을 겸직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어세겸의 경우 문장력이 워낙 뛰어나 우의정이 되어서도 예외적으로 문형을 계속 겸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어세겸의 선례가 후대에 이행, 김안로 등이 정승이면서 문형을 겸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필자는 어세겸이 대제학이 될 때나 정승이 되었을 때 다른 유능한 문장가들이 있었음에도 그가 문형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점과 조정에서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은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어세공(魚世恭)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魚世恭【襄肅公。】
字子敬, 世謙之弟。 宣德癸丑生。 世祖二年丙子登第。 丁亥, 以承旨, 特拜咸吉道觀察使, 討李施愛, 參敵愾功臣, 封牙城君。 官至戶曹判書。

번역문:
어세공(魚世恭)【양숙공(襄肅公)¹이다.】
자는 자경(子敬)이니, 세겸(世謙)²의 아우이다. 선덕(宣德) 계축년(癸丑年, 1433)³에 태어났다. 세조(世祖)⁴ 2년 병자년(丙子年, 1456)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467)에 승지(承旨)⁵로서 특별히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⁶에 제수되어, 이시애(李施愛)⁷를 토벌할 때 적개공신(敵愾功臣)⁸에 참여하여 아성군(牙城君)⁹에 봉해졌다. 관직은 호조 판서(戶曹判書)¹⁰에 이르렀다.

주석:

  1. 양숙공(襄肅公): 어세공의 시호(諡號). 양(襄)은 갑주(甲冑)의 공로가 있음(甲冑有勞) 또는 남을 도와 공을 이룸(輔佐有功) 등을 의미하며, 숙(肅)은 강직함을 결단으로 제어함(剛德克就) 또는 법도를 지켜 엄숙함(執心決斷) 등을 의미한다.
  2. 세겸(世謙): 어세겸(魚世謙, 1430~1500). 어세공의 형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3. 선덕(宣德) 계축년(癸丑年, 1433): 선덕은 명나라 선종(宣宗)의 연호(1426~1435). 계축년은 1433년이다.
  4. 세조(世祖):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
  5.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6.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 함길도(현재의 함경도)의 최고 지방관. 종2품.
  7. 이시애(李施愛, ?~1467): 조선 세조 때 함길도에서 반란(이시애의 난)을 일으킨 인물. 당시 회령부사(會寧府使)였다.
  8. 적개공신(敵愾功臣):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에게 내린 공신호. 어세공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9. 아성군(牙城君): 군(君)은 공신이나 왕족에게 내리던 작위. 아성(牙城)은 현재 충청남도 아산(牙山)의 옛 이름이다.
  10. 호조 판서(戶曹判書): 육조(六曹) 중 호조(戶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국가의 재정, 호구, 조세 등을 관장했다.

원문:
成化丁亥, 吉州人前會寧府使李施愛謀叛, 殺節度使康孝文等, 遣其黨來達。 命龜城君浚爲都摠使, 右贊成曺錫文爲副, 往討之。 余祖襄肅公諱世恭, 時爲左承旨, 命超嘉靖, 代申㴐爲咸吉道觀察使。 公在途, 咸興人又作亂, 殺前觀察使申㴐, 亦施愛之謀也。 公入安邊府, 人民逃散者什九, 至咸興府, 無一人迎候者。 出巡野外, 民家皆空, 往往逢人, 皆走伏草間, 輒招呼曉諭曰: “朝廷討賊¹¹施愛而已, 於汝人民無預也。 其各安業如故。” 仍給農糧, 使相曉解。 或謂公曰: “刺客可畏, 不可不備。” 公曰: “若設兵衛, 益生民疑。” 只率吏輩數人而行。 一日, 獲賊黨韓崇智, 諸將欲稟朝廷, 公抗議曰: “軍中之事, 制在主將。 且咸人如崇智者非一, 莫若速斬, 以孤其心, 以斷群疑。” 遂斬于大門外, 咸之軍民欲免其罪, 爭寫首亂者姓名, 投于都摠使, 公曰: “不可盡誅。” 遂焚其書軍中, 反側者乃安。 官軍鎭洪原縣, 夜聞賊來襲, 都摠使欲移陣避之, 公曰: “今入賊境, 人心危疑, 主將若動, 無敵自破。 我軍雖少, 皆精銳, 安可示弱乎?” 乃止。 明日, 都摠使又聞賊要夜襲, 欲退陣咸關嶺, 公不可曰: “大軍在賊後, 賊必不來, 縱使之來, 彼此夾攻, 爲我擒矣。 今若夜行, 賊必來截, 其敗必矣。” 遂止。 明日, 踰嶺, 賊果伏兵, 欲截輜重, 官軍逐之, 乃遁。 其臨危料事如此。 賊平, 分咸吉道爲南北, 而移公爲北道觀察使, 遂安北方, 時年三十六。【《稗官雜記》。】

번역문:
성화(成化)¹² 정해년(丁亥年, 1467)에 길주(吉州) 사람 전 회령부사(會寧府使) 이시애가 모반하여 절도사(節度使)¹³ 강효문(康孝文) 등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보내 (조정에) 알렸다. 구성군(龜城君) 준(浚)¹⁴을 도총사(都摠使)¹⁵로, 우찬성(右贊成)¹⁶ 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副摠使)¹⁷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명하였다. 나의 조부 양숙공 휘 세공(襄肅公 諱 世恭)¹⁸은 당시에 좌승지(左承旨)¹⁹였는데, 자급(資級)을 뛰어넘어²⁰ 신숙(申㴐)²¹을 대신하여 함길도 관찰사로 삼으라는 명을 받았다. 공(公)이 부임하는 도중에 함흥(咸興) 사람이 또 난을 일으켜 전 관찰사 신숙(申㴐)을 죽였는데, 이 또한 시애(施愛)의 계략이었다. 공이 안변부(安邊府)에 들어가니 인민 중에 도망하여 흩어진 자가 십중팔구였고, 함흥부(咸興府)에 이르러서는 맞이하여 문후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들 밖에 나가 순찰하니 민가(民家)는 모두 비어 있었고, 왕왕 사람을 만나면 모두 달아나 풀 사이에 엎드리므로, 그때마다 불러서 효유(曉諭)²²하여 말하였다. “조정에서는 역적²³ 이시애만을 토벌할 뿐이니, 너희 인민과는 관계가 없다. 각자 예전처럼 생업에 안착하라.” 이어서 농사지을 식량을 지급하고 서로 깨우쳐 이해시키도록 하였다. 어떤 이가 공에게 말하였다. “자객(刺客)이 두려우니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이 말하였다. “만약 군사로 호위하면 백성들의 의심만 더할 뿐이다.” 단지 아전(吏輩) 몇 사람만 거느리고 다녔다. 하루는 적의 무리 한숭지(韓崇智)를 잡았는데, 여러 장수들이 조정에 품의(稟議)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강하게 주장하며 말하였다. “군중(軍中)의 일은 제재(制裁)가 주장(主將)에게 있다. 또한 함흥 사람 중에 한숭지와 같은 자가 한둘이 아니니, 속히 베어 그들의 마음을 외롭게 하고 여러 의심을 끊는 것만 못하다.” 마침내 대문 밖에서 베니, 함흥의 군민(軍民)들이 그 죄를 면하고자 하여 다투어 난을 처음 일으킨 자들의 성명을 써서 도총사에게 던졌다. 공이 말하였다. “모두 죽일 수는 없다.” 마침내 군중에서 그 글들을 불태우니, 반측(反側)²⁴하던 자들이 이에 안심하였다. 관군(官軍)이 홍원현(洪原縣)에 진(鎭)을 치고 있었는데, 밤에 적이 습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도총사가 진(陣)을 옮겨 피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지금 적의 경계에 들어와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데, 주장이 만약 움직이면 적이 없어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모두 정예(精銳)인데, 어찌 약함을 보이겠습니까?” 이에 그만두었다. 다음 날, 도총사가 또 적이 밤에 습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함관령(咸關嶺)으로 진을 물리고자 하였다. 공이 불가하다며 말하였다. “대군(大軍)이 적의 뒤에 있으니 적은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며, 설사 온다 하더라도 피차 협공(夾攻)하면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지금 만약 밤에 행군하면 적이 반드시 와서 길을 끊을 것이니, 그 패배는 필연적입니다.” 마침내 그만두었다. 다음 날, 고개를 넘는데 적이 과연 복병(伏兵)을 두어 치중(輜重)²⁵을 끊으려 하였으나, 관군이 추격하니 이에 달아났다. 그의 위기에 임하여 일을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 적이 평정되자 함길도를 남북으로 나누고 공을 북도 관찰사(北道觀察使)로 옮기니, 마침내 북방(北方)을 안정시켰다. 당시 나이 36세였다.【《패관잡기(稗官雜記)》²⁶에서 인용】

주석:
11. [주-D001] 賊 : 저본(底本)에는 없다. 《대동야승(大東野乘)·패관잡기(稗官雜記)》 및 《해동야언(海東野言)·세조(世祖)》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문맥상 ‘역적 이시애(賊施愛)’가 자연스럽다.
12. 성화(成化):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1465~1487).
13. 절도사(節度使): 함길도의 군사 책임자.
14. 구성군(龜城君) 준(浚): 이준(李浚, 1441~1479).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아들. 세조 대에 군사적 공을 세웠다.
15. 도총사(都摠使): 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
16. 우찬성(右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17. 부총사(副摠使): 도총사를 보좌하는 부사령관.
18. 휘 세공(諱 世恭): 휘(諱)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 앞에 써서 높이는 말이다.
19. 좌승지(左承旨): 승정원의 정3품 관직. 도승지 다음 자리이다.
20. 초가정(超嘉靖): 자급(資級), 즉 관리의 품계나 경력을 뛰어넘어 특별히 임명됨을 뜻한다.
21. 신숙(申㴐): 조선 전기의 문신. 이시애 난 때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했다가 살해당했다.
22. 효유(曉諭): 타이르고 깨우침.
23. 역적(賊):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를 가리킨다. 주석 11 참조.
24. 반측(反側): 모반할 마음을 품었다가 마음이 편치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며 불안해 함. 또는 그런 사람.
25. 치중(輜重): 군대의 보급 물자와 수송 부대.
26. 《패관잡기(稗官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일부 내용 등을 포함하는 야사(野史) 모음집. 조선 후기에 여러 야사, 수필 등을 모아 엮은 《대동야승(大東野乘)》 등에 수록되어 전한다.

 

 

 

정난종(鄭蘭宗)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鄭蘭宗【翼惠公。】
字國馨, 號虛白堂, 東萊人。 宣德癸丑生。 世祖二年丙子登第。 賜暇湖堂, 選入史局。 丙戌重試, 連登拔英、登俊兩科。 成宗朝, 策佐理功臣, 封東萊君。 歷北兵使、咸鏡監司、全羅監司、平安兵使、右參贊、吏曹判書。 己酉卒, 年五十七。

번역문:
정난종(鄭蘭宗)【익혜공(翼惠公)²⁷이다.】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이며, 동래(東萊) 사람이다. 선덕(宣德) 계축년(癸丑年, 1433)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2년 병자년(丙子年, 1456)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²⁸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사국(史局)²⁹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병술년(丙戌年, 1466) 중시(重試)³⁰에서 발영과(拔英科)와 등준과(登俊科)³¹ 양과(兩科)에 연달아 급제하였다. 성종(成宗)³² 시대에 좌리공신(佐理功臣)³³에 책록되어 동래군(東萊君)³⁴에 봉해졌다. 북병사(北兵使)³⁵, 함경감사(咸鏡監司)³⁶, 전라감사(全羅監司), 평안병사(平安兵使)³⁷, 우참찬(右參贊)³⁸, 이조 판서(吏曹判書)³⁹를 역임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489)에 졸(卒)하니, 나이 57세였다.

주석:
27. 익혜공(翼惠公): 정난종의 시호. 익(翼)은 부드럽고 어질며 자혜로움(溫仁慈惠) 또는 생각을 깊이하고 멀리 도모함(思慮深遠) 등을 의미하며, 혜(惠)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함(愛民好與) 또는 너그럽고 어질며 자애로움(柔質慈仁) 등을 의미한다.
28. 호당(湖堂): 조선 시대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두모포(豆毛浦) 근처의 호숫가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에게 학문 연구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29.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기관. 춘추관(春秋館)이나 실록 편찬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實錄廳) 등을 가리킬 수 있다.
30.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던 특별 시험.
31. 발영과(拔英科), 등준과(登俊科): 세조 때 시행된 특별 과거 시험. 발영과는 문신을, 등준과는 무신을 대상으로 하였다. 정난종은 문신이었으므로 발영과에 합격하고, 이후 등준과에도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무(文武)를 겸비했음을 보여준다.
32.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33. 좌리공신(佐理功臣): 성종 즉위를 보좌한 공신에게 내린 공신호. 정난종은 4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34. 동래군(東萊君): 정난종의 봉호(封號). 본관인 동래(東萊)를 따서 봉해졌다.
35. 북병사(北兵使):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별칭. 함경도의 군사 책임자이다.
36. 함경감사(咸鏡監司):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37. 평안병사(平安兵使): 평안도 병마절도사.
38. 우참찬(右參贊): 의정부의 정2품 관직. 좌참찬과 함께 삼정승(三政丞)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다.
39. 이조 판서(吏曹判書): 육조 중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다.


원문:
公美風儀襟度, 豁然無畦畛。 早爲世廟器重, 屢試以事, 無不稱旨。 一日, 引對便殿, 問《周易》、《圓覺經》優劣, 公對曰: “佛氏妖書, 何得與三聖經比幷乎?” 上僞若震怒, 命力士捽下撞之, 公神色自若, 竟不問。

번역문:
공(公)은 풍채와 의용(風儀)⁴⁰과 도량(襟度)⁴¹이 아름다웠고, 활달하여(豁然) 구애됨(畦畛)⁴²이 없었다. 일찍이 세조(世廟)⁴³께서 그를 그릇으로 중히 여겨 여러 차례 일로써 시험하였는데, 왕의 뜻에 맞지 않음(稱旨)이 없었다. 하루는 편전(便殿)⁴⁴에서 인견(引見)⁴⁵하고 《주역(周易)》⁴⁶과 《원각경(圓覺經)》⁴⁷의 우열(優劣)을 물으시니, 공이 대답하였다. “불씨(佛氏)의 요사스러운 글이 어찌 삼성이 지은 경서(三聖經)⁴⁸와 나란히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상(上)께서 거짓으로 크게 노한 체하며 역사(力士)에게 명하여 끌어내려 부딪치게 하였으나, 공은 신색(神色)이 태연자약(自若)하였고, 끝내 죄를 묻지 않으셨다.

주석:
40. 풍의(風儀): 풍채(風采)와 위의(威儀). 사람의 겉모습과 위엄 있는 태도.
41. 금도(襟度): 옷깃(襟)과 법도(度). 마음속의 생각이나 도량(度量)을 의미한다.
42. 활연무규진(豁然無畦畛): 마음이 넓고 시원스러워 밭두둑(畦畛)처럼 명확히 구분 짓거나 막힘이 없음. 즉, 성격이 활달하고 거리낌이 없음을 뜻한다.
43. 세묘(世廟): 세조(世祖)의 묘호(廟號). 세조를 가리킨다.
44. 편전(便殿):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보는 전각.
45. 인견(引見): 임금이 신하를 가까이 불러 만남.
46. 《주역(周易)》: 육경(六經)의 하나. 우주 자연의 원리와 인간 사회의 변화를 음양(陰陽)과 팔괘(八卦)로 설명한 유교 경전.
47. 《원각경(圓覺經)》: 불교 경전의 하나. 원명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원각(圓覺), 즉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한 경전이다. 세조는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다.
48. 삼성경(三聖經): 삼성이 지은 경서. 보통 복희씨(伏羲氏), 문왕(文王), 주공(周公) 또는 공자(孔子)를 《주역》과 관련하여 삼성(三聖)으로 칭한다. 여기서는 《주역》을 불경보다 우위에 두는 유학자의 입장을 드러낸다.

해설:
세조는 불교를 숭상했지만, 정난종은 유학자로서 《원각경》을 '요사스러운 글(妖書)'이라 폄하하며 유교 경전인 《주역》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세조가 거짓으로 노한 척하며 위협했음에도 정난종이 태연하자, 세조는 그의 강직함과 소신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
以衛將勒所部環侍殿庭。 上命小臣揮羽扇以召諸將, 餘人爭奔恐後。 公念此非召將之道, 獨不應。 上更令宗臣直擧公名以召之, 凡三召, 竟不動。 上常意公可任爲將, 至是見其持重, 益奇之, 恩顧日隆。

번역문:
위장(衛將)⁴⁹으로서 거느린 부하들로 하여금 궁궐 뜰을 둘러서서 모시게 하였다. 상(上)께서 소신(小臣)⁵⁰에게 명하여 우선(羽扇)⁵¹을 휘둘러 여러 장수들을 부르시니, 다른 사람들은 뒤처질까 두려워 다투어 달려갔다. 공은 이것이 장수를 부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홀로 응하지 않았다. 상께서 다시 종신(宗臣)⁵²에게 명하여 직접 공의 이름을 들어 부르게 하였는데, 무릇 세 번을 불렀으나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상께서 평소에 공을 장수로 임명할 만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신중함(持重)을 보고 더욱 기특하게 여겨, 은총(恩顧)이 날로 두터워졌다.

주석:
49. 위장(衛將): 궁궐을 지키는 장수.
50. 소신(小臣): 임금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 또는 낮은 벼슬의 신하. 여기서는 임금의 명을 전달하는 내관이나 하급 관리를 가리킬 수 있다.
51. 우선(羽扇): 깃털로 만든 부채. 의전용으로 사용되거나, 여기서는 장수를 부르는 신호로 사용된 듯하다.
52. 종신(宗臣): 종친(宗親)이면서 신하인 사람. 왕족을 의미한다.

해설:
임금이 정식 절차(이름을 부르는 것)가 아닌 방식(부채를 흔드는 것)으로 장수들을 불렀을 때, 다른 이들은 앞다투어 달려갔으나 정난종은 장수를 부르는 합당한 방식이 아니라며 움직이지 않았다. 임금이 다시 정식으로 이름을 부르자 응했을 것이다(본문에는 생략됨). 임금은 이를 통해 정난종의 신중하고 원칙을 지키는 면모를 높이 평가했다는 일화이다.


원문:
守北門, 急患風眩, 不理軍務者逾月。 僚佐欲聞于朝, 公止之曰: “藩鎭帥臣亟以病聞, 則上必驚憂。 且北道分閫, 人皆憚之, 迹類規避, 吾所不敢。 諸君姑觀我病勢, 必不可爲, 然後馳啓未晩。” 俄而病療。 于時北狄尼麻車之部聞公病, 謀欲入寇。 公詗知之, 力疾而起, 與僚佐籌之曰: “兵有先事攻心之法, 此可以計撓之。” 乃聚城底胡酋數十人, 語之曰: “有朝旨, 令節度使將五鎭兵討尼麻車, 以懲前日寇邊之罪。 爾等亦當從軍。” 因與約爲期日而遣之, 尼麻車聞之怖, 以爲大軍將至, 逃竄山谷, 遂失耕穫, 馬畜多斃, 數歲不敢窺邊。 僚佐服公機智, 欲具由以啓, 又止之曰: “職所當爲, 何煩聞爲?”

번역문:
북문(北門)⁵³을 지킬 때, 갑자기 풍현증(風眩)⁵⁴을 앓아 군무(軍務)를 돌보지 못한 것이 한 달이 넘었다. 보좌관(僚佐)들이 조정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공이 이를 말리며 말하였다. “변방 진(鎭)의 수장(帥臣)⁵⁵이 자주 병을 아뢰면 상께서 반드시 놀라고 걱정하실 것이다. 또한 북도(北道)의 군권(分閫)⁵⁶은 사람들이 모두 맡기를 꺼리는데, (병을 핑계로) 규피(規避)⁵⁷하려는 듯한 흔적이 될 것이니, 나는 감히 그럴 수 없다. 제공(諸君)들은 우선 나의 병세를 보아, 반드시 (일을) 할 수 없게 된 연후에 빨리 아뢰어도 늦지 않다.”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았다. 그때 북쪽 오랑캐(北狄) 니마차(尼麻車)⁵⁸의 부(部)가 공이 병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침입(入寇)하고자 꾀하였다. 공이 염탐하여 이를 알고, 병든 몸을 힘써 일으켜 보좌관들과 상의하며 말하였다. “병법(兵法)에 사전에 상대의 마음을 공격하는(攻心) 법이 있으니, 이것은 계책으로 그들을 교란시킬 수 있다.” 이에 성(城) 아래의 오랑캐 추장(胡酋) 수십 명을 모아 말하였다. “조지(朝旨)가 있어, 절도사(節度使)로 하여금 오진(五鎭)⁵⁹의 군사를 거느리고 니마차를 토벌하여 전날 변방을 침략한 죄를 징벌하게 하였다. 너희들도 또한 종군(從軍)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기일(期日)을 약속하고 그들을 보내주었다. 니마차가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군(大軍)이 장차 이를 것이라 여기고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어, 마침내 농사를 짓고 거두는 시기를 놓치고 말과 가축이 많이 죽으니, 몇 년 동안 감히 변방을 엿보지 못하였다. 보좌관들이 공의 기지(機智)에 감복하여 사유를 갖추어 아뢰고자 하였으나, 또 이를 말리며 말하였다. “직책상 마땅히 해야 할 바인데, 어찌 번거롭게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주석:
53. 북문(北門): 북쪽 변방. 함경도 지역을 가리킨다.
54. 풍현(風眩): 어지럼증. 중풍(中風)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55. 번진수신(藩鎭帥臣): 변방 진(鎭)의 장수. 병마절도사 등을 가리킨다.
56. 분곤(分閫): 군권을 나누어 맡음. 변방 지역의 군사 지휘권을 의미한다.
57. 규피(規避): (책임이나 의무 등을) 꾀를 내어 피함.
58. 북적(北狄) 니마차(尼麻車): 북쪽 오랑캐, 즉 여진족(女眞族)의 한 부류 또는 그 추장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59. 오진(五鎭): 구체적으로 어느 진(鎭)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나, 북방의 주요 군사 거점들을 의미한다.

해설:
정난종은 병이 깊었음에도 국가에 대한 걱정과 책임감으로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또한 적의 침입 기미를 알자, 실제 군사 동원 없이 거짓 정보(공심책, 攻心策)를 흘려 적을 교란시켜 물리치는 기지를 발휘했다. 공을 세우고도 이를 내세우지 않는 겸양의 미덕도 보여준다.


원문:
關北距京師敻遠, 人不知學。 監司李繼孫始立學規, 聚道內子弟之穎秀者, 敎之經史。 公繼其後, 以爲人不學, 則無以知親上死長之義, 乃因前法而益修之, 豐其餼廩, 嚴其程課。 暇日則躬詣學舍, 閱其藝業, 能者奬之。 自是列邑之人皆興於學, 登第者輩出, 詩書之習, 至今不衰, 公之力也。

번역문:
관북(關北)⁶⁰ 지방은 서울(京師)⁶¹과의 거리가 매우 멀어 사람들이 학문을 알지 못하였다. 감사(監司) 이계손(李繼孫)⁶²이 처음으로 학규(學規)⁶³를 세우고 도내(道內) 자제 중 영특하고 빼어난 자들을 모아 경사(經史)⁶⁴를 가르쳤다. 공이 그 뒤를 이어,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윗사람과 친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의리(親上死長之義)⁶⁵를 알 수 없다고 여겨, 이에 이전의 법을 따라 더욱 발전시켜, 그 식량 지급(餼廩)⁶⁶을 풍족하게 하고 그 과정과 시험(程課)⁶⁷을 엄격하게 하였다. 한가한 날이면 몸소 학사(學舍)⁶⁸에 나아가 그 학업(藝業)을 살펴보고 잘하는 자는 장려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흥기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자가 연이어 나왔으니, 시서(詩書)⁶⁹를 익히는 풍습이 지금까지 쇠하지 않음은 공의 힘이다.

주석:
60. 관북(關北): 철령관(鐵嶺關)의 북쪽 지방. 함경도를 가리킨다.
61. 경사(京師): 수도. 당시 조선의 수도인 한양(漢陽, 서울)을 의미한다.
62. 이계손(李繼孫): 조선 전기의 문신. 함경도 감사 재직 시 학문 진흥에 힘썼다.
63. 학규(學規): 학교의 규칙. 교육 과정이나 운영 방침 등을 포함한다.
64. 경사(經史): 유교 경전(經)과 역사서(史). 전통 시대의 기본 학문 내용을 의미한다.
65. 친상사장지의(親上死長之義): 윗사람(임금)과 가까이 지내고 어른(상관)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 의리. 유교적 충효(忠孝) 사상과 상하 관계의 의리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66. 희름(餼廩): 학생들에게 지급하는 음식이나 곡식. 학업 지원책을 의미한다.
67. 정과(程課): 학업의 과정 및 평가. 교육 과정을 엄격히 관리했음을 보여준다.
68. 학사(學舍): 학교 건물. 향교(鄕校) 등을 가리킬 수 있다.
69. 시서(詩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넓게는 문학(詩)과 경학(書) 등 학문 전반을 의미한다.


원문:
公好讀書, 或夜分不輟, 其難解者, 不甚講究。 至於理道所關及治亂興亡所由判處, 未嘗不反復紬繹, 徹首徹尾然後已。【竝碑。】

번역문:
공은 독서(讀書)를 좋아하여 혹 밤이 깊어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그중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심하게 연구하지 않았다. 이치와 도리(理道)에 관계된 것이나 치란흥망(治亂興亡)⁷⁰의 연유(所由)와 판결(判處)⁷¹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반복하여 실마리를 풀어 깊이 음미하지(反復紬繹)⁷² 않은 적이 없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파악한 연후에야 그만두었다.【이상은 비석(碑石)⁷³에서 인용】

주석:
70. 치란흥망(治亂興亡):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며 흥하고 망하는 것. 즉, 역사적 사건과 국가 운영의 원리.
71. 판처(判處): 판단하고 처리함.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정책 등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의미할 수 있다.
72. 반복주역(反復紬繹): 되풀이하여 실마리를 찾아내고 깊이 생각함. 학문 탐구의 깊이 있는 자세를 보여준다.
73. 비(碑): 비석(碑石). 정난종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나 묘비(墓碑) 등을 가리킨다.

 

이종생(李從生)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從生【莊襄公。】
字繼之, 咸平人。 永樂癸卯生。 世祖六年庚辰, 登武科。 歷寧邊府使、平安東西中三⁷⁴道節度使、忠淸・慶尙兵使。 策敵愾勳, 封咸城君。 燕山乙卯卒, 年七十三。

번역문:
이종생(李從生)【장양공(莊襄公)⁷⁵이다.】
자는 계지(繼之), 함평(咸平) 사람이다. 영락(永樂)⁷⁶ 계묘년(癸卯年, 1423)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6년 경진년(庚辰年, 1460)에 무과(武科)⁷⁷에 급제하였다. 영변부사(寧邊府使)⁷⁸, 평안 동·서·중삼도(平安東西中三)⁷⁹ 절도사(節度使), 충청(忠淸)·경상병사(慶尙兵使)⁸⁰를 역임하였다. 적개훈(敵愾勳)⁸¹에 책록되어 함성군(咸城君)⁸²에 봉해졌다. 연산(燕山)⁸³ 을묘년(乙卯年, 1495)에 졸(卒)하니, 나이 73세였다.

주석:
74. [주-D001] 中三 : 《금남집(錦南集)·이장양공묘비명(李莊襄公墓碑銘)》에 “무자년(1468) 정월에 평안 동서도 절도사가 마땅히 교체되어야 하는데[戊子正月, 平安東西道節度使當遞]”라는 기록이 있고, 《예종실록》 1년 윤2월 10일 조에 “마침내 평안 동서도 절도사에게 유시하기를[遂諭平安東西道節度使曰]”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근거할 때 삭제해야 할 듯하다. 즉, '평안 동서도 절도사(平安東西道節度使)'가 맞는 표기로 보인다.
75. 장양공(莊襄公): 이종생의 시호. 장(莊)은 위엄과 무용이 적을 이김(威而不猛) 또는 무용으로 공을 세움(武功並作) 등을 의미하며, 양(襄)은 갑주(甲冑)의 공로가 있음(甲冑有勞) 등을 의미한다.
76. 영락(永樂):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연호(1403~1424).
77. 무과(武科): 무관(武官)을 선발하는 과거 시험.
78. 영변부사(寧邊府使): 평안도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의 수령. 종3품 무관직이다.
79. 평안 동·서·중삼도(平安東西中三) 절도사(節度使): 평안도의 군사 지휘관. 주석 74에서 지적하듯, ‘중삼(中三)’은 잘못된 표기일 가능성이 높으며, 평안도를 동·서로 나누어 관할하던 절도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80. 충청(忠淸)·경상병사(慶尙兵使):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경상도 병마절도사. 각 도의 군사 책임자이다.
81. 적개훈(敵愾勳): 적개공신(敵愾功臣)과 같은 말. 이시애의 난 평정 공신. 이종생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82. 함성군(咸城君): 이종생의 봉호. 함성(咸城)은 함평(咸平)의 옛 이름 또는 별칭이다.
83. 연산(燕山): 연산군(燕山君). 조선 제10대 왕(재위 1494~1506).


원문:
少有器宇, 及長, 善射御。 甲申, 世祖選武士, 觀射于禁苑, 公三發皆中鵠, 上大加褒奬, 拜潼關僉使。

번역문: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器宇)이 있었고, 자라서는 활쏘기와 말타기(射御)⁸⁴를 잘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464)에 세조께서 무사(武士)를 선발하면서 금원(禁苑)⁸⁵에서 활쏘기를 보셨는데, 공이 세 발을 쏘아 모두 과녁(鵠)⁸⁶에 맞히자, 상(上)께서 크게 포상하고 격려하시며 동관 첨사(潼關僉使)⁸⁷에 제수하셨다.

주석:
84. 사어(射御): 활쏘기(射)와 말 몰기(御). 무관의 기본 기예를 의미한다.
85. 금원(禁苑): 궁궐 안의 정원. 임금이 활쏘기 등을 관람하던 장소로 쓰였다.
86. 곡(鵠): 활쏘기 과녁의 중심에 있는 점. 정곡(正鵠).
87. 동관 첨사(潼關僉使): 동관진(潼關鎭)의 첨절제사(僉節制使). 종3품 무관직이다. 동관진은 평안도 의주(義州) 부근의 군사 요충지였다.


원문:
丁亥, 李施愛叛, 上命將討之, 公爲先鋒, 至蔓嶺, 賊甚盛, 左右皆褫魄不敢進, 大軍亦不至。 公乃下馬拔樹, 左右揮之, 軍皆股栗, 鼓譟而進。 公躍馬奮擊, 賊披靡。 大軍繼至, 望見曰: “彼黑面大頂玉者誰?” 軍中告曰: “李衛將也。” 凱還策勳。 是年, 以皇帝命助征建州衛, 擣其巢穴而還。

번역문:
정해년(丁亥年, 1467)에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상께서 장수를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공이 선봉(先鋒)이 되었다. 만령(蔓嶺)⁸⁸에 이르렀을 때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하여 좌우의 군사들이 모두 넋을 잃고(褫魄)⁸⁹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고, 대군(大軍) 또한 이르지 않았다. 공이 이에 말에서 내려 나무를 뽑아 좌우로 휘두르니 군사들이 모두 다리를 떨며(股栗)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鼓譟) 나아갔다. 공이 말을 몰아 힘껏 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듯(披靡) 흩어졌다. 대군이 뒤이어 이르러 멀리서 바라보며 말하였다. “저 검은 얼굴에 머리 위에 큰 옥(玉)⁹⁰을 단 자는 누구인가?” 군중에서 아뢰었다. “이 위장(李衛將)⁹¹입니다.” 개선(凱旋)하여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이해에 황제의 명으로 건주위(建州衛)⁹² 정벌을 도와 그 소굴을 쳐부수고 돌아왔다.

주석:
88. 만령(蔓嶺): 함경남도 북청(北靑) 부근의 고개로 추정된다. 이시애의 난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다.
89. 치백(褫魄): 넋을 빼앗김. 몹시 놀라 정신을 잃을 정도임을 의미한다.
90. 대정옥(大頂玉): 머리 위에 단 큰 옥 장식. 투구 장식의 일종으로 보인다. 이종생을 특정하는 외양 묘사이다.
91. 위장(衛將): 직책명이라기보다는 이종생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쓰인 듯하다. 궁궐 수비나 호위 관련 직책을 역임했거나, 혹은 단순히 '이 장군' 정도의 의미일 수 있다.
92. 건주위(建州衛): 명나라가 만주 지역에 설치한 여진족 위소(衛所) 중 하나. 조선 초기에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조선과 군사적 충돌이 잦았다. 세조는 1467년 건주위 정벌을 단행했다.


원문:
己亥, 尹弼商征建州時, 公爲衛將。 江路氷滑, 馬顚墜傷, 元帥驚救曰: “若非公, 誰爲先鋒乎?” 公卽上馬, 直入賊穴, 焚燒廬帳而還。 元帥勞之曰: “是役之捷, 皆公力也。”

번역문:
기해년(己亥年, 1479)⁹³에 윤필상(尹弼商)⁹⁴이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공이 위장(衛將)이 되었다. 강 길이 얼어 미끄러워 말이 넘어지고 떨어져 다쳤는데, 원수(元帥)⁹⁵가 놀라 구하며 말하였다. “만약 공이 아니면 누가 선봉(先鋒)이 되겠는가?” 공이 즉시 말에 올라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 여장(廬帳)⁹⁶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원수가 그를 위로하며 말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모두 공의 힘이다.”

주석:
93. 기해년(己亥年, 1479): 성종(成宗) 10년.
94. 윤필상(尹弼商, 1427~1504): 조선 전기의 문신. 1479년 건주위 정벌 때 도원수(都元帥)를 맡았다.
95. 원수(元帥): 전쟁 시 군대를 총지휘하는 최고 사령관. 여기서는 도원수 윤필상을 가리킨다.
96. 여장(廬帳): 여진족의 집과 천막. 적의 근거지를 의미한다.


원문:
公天資質直, 稟性寬厚, 居官莅事, 務遵大體, 待人接物, 和氣藹如。 嗜酒無量, 亦無酒失, 朋舊謂之酒德。

번역문:
공은 천자(天資)가 질박하고 곧았으며(質直), 품성(稟性)이 너그럽고 후덕하였다(寬厚). 관직에 있거나 일에 임할 때에는 힘써 대체(大體)⁹⁷를 따랐고,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에는 온화한 기운(和氣)이 넘실거리는 듯하였다(藹如). 술을 즐겨 마심이 한량이 없었으나 또한 술로 인한 실수(酒失)는 없었으므로, 친구(朋舊)들이 그를 주덕(酒德)⁹⁸이 있다고 일컬었다.

주석:
97. 대체(大體): 일의 큰 줄거리나 중요한 원칙.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큰 흐름을 따랐음을 의미한다.
98. 주덕(酒德): 술을 마시는 데 있어 지켜야 할 덕목. 술을 좋아하되 절제할 줄 알고 실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乙卯, 當國恤, 悲毁成疾而終。【竝《潛谷舊錄》。】

번역문:
을묘년(乙卯年, 1495)에 국휼(國恤)⁹⁹을 당하여 슬퍼하고 몸을 상하여(悲毁) 병이 들어 세상을 마쳤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¹⁰⁰에서 인용】

주석:
99. 국휼(國恤): 나라의 큰 슬픔. 왕이나 왕비 등의 죽음을 의미한다. 1494년 12월에 성종(成宗)이 승하하였으므로, 이듬해인 1495년 을묘년은 성종의 국상(國喪) 기간이었다.
100.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편찬한 책으로 추정되나, 현존 여부나 정확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가문의 기록이나 관련 인물들의 행적을 모은 책일 수 있다. 이종생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로 인용되었다.

 

이덕량(李德良)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德良
字君擧, 全城人。 年二十三擢武科。 世祖丁亥, 以會寧府使, 討李施愛, 策敵愾勳, 封全義君。 歷四道觀察使、三曹參判、工・刑曹判書、大司憲。 卒年五十三。

번역문:
이덕량(李德良)
자는 군거(君擧)이고, 전성(全城)¹ 사람이다. 나이 23세에 무과(武科)²에 발탁되었다. 세조(世祖)³ 정해년(丁亥年, 1467)⁴에 회령부사(會寧府使)⁵로서 이시애(李施愛)⁶를 토벌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⁷에 책록되고 전의군(全義君)⁸에 봉해졌다. 사도 관찰사(四道觀察使)⁹, 삼조 참판(三曹參判)¹⁰, 공조판서(工曹判書)¹¹, 형조판서(刑曹判書)¹², 대사헌(大司憲)¹³을 역임하였다. 졸년(卒年)은 53세였다.

주석:

  1. 전성(全城): 본관(本貫)을 나타낸다. 전주(全州)의 옛 이름 중 하나로, 전주 이씨(全州 李氏)임을 알 수 있다.
  2. 무과(武科): 조선 시대에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과거 시험.
  3. 세조(世祖): 조선 제7대 임금(재위 1455-1468). 이름은 유(瑈).
  4. 정해년(丁亥年, 1467): 세조 13년. 이 해에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다(이시애의 난).
  5. 회령부사(會寧府使): 함경도 회령(會寧) 지역의 행정 및 군사 책임자. 종3품.
  6. 이시애(李施愛, ?-1467): 조선 세조 때 함경도 길주 출신의 토호(土豪). 1467년 중앙 정부의 북방민 차별 정책과 지방관의 학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7. 적개공신(敵愾功臣): ‘적개(敵愾)’는 적에 대한 분노를 의미한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들에게 내린 공신호. 이덕량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8. 전의군(全義君): 공신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조선 시대에는 정1품에서 종2품의 문무관 및 공신, 왕의 사위(부마) 등에게 군(君)의 봉작(封爵)을 내렸다.
  9. 사도 관찰사(四道觀察使): 네 개 도(道)의 관찰사를 역임했다는 의미. 관찰사는 각 도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하는 종2품의 외관직(外官職)이다.
  10. 삼조 참판(三曹參判): 세 개 조(曹, 육조 중)의 참판(參判, 종2품 차관)을 역임했다는 의미. 구체적으로 어떤 조(曹)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11. 공조판서(工曹判書): 공조(工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국가의 공장(工匠), 토목, 건축, 도량형 등을 관장했다.
  12. 형조판서(刑曹判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법률, 소송, 형벌, 노비 등을 관장했다.
  13.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관리 감찰, 탄핵, 풍속 교정 등을 담당했다.

원문:
公身長八尺, 俊偉不常, 嶷然有遠到氣象。 幼時, 議政成公奉祖見而奇之, 曰: “是所謂千里駒。” 妻以外孫女。 及長, 善射御, 擢武科, 世祖召見, 深器之。 爲刑曹正郞, 判書曺公錫文初以年少易之, 及試其能, 甚嘉歎。

번역문:
공(公)은 신장(身長)이 8척(尺)¹⁴으로 준수하고 위풍당당함(俊偉)이 비범하였으며, 의연(嶷然)¹⁵하여 장래가 유망한(遠到) 기상이 있었다. 어릴 때 의정(議政)¹⁶ 성공 봉조(成公 奉祖)¹⁷가 보고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가 이른바 천리마(千里駒)¹⁸로다.” 하고, 외손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장성하여 활쏘기(射)와 말타기(御)¹⁹에 능하여 무과(武科)에 발탁되자, 세조(世祖)께서 불러 보시고 매우 그릇으로 여기셨다(器之)²⁰. 형조 정랑(刑曹正郞)²¹이 되었을 때, 판서(判書) 조공 석문(曺公 錫文)²²이 처음에는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았으나(易之), 그의 능력을 시험해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였다.

주석:
14. 척(尺): 길이의 단위. 조선 시대의 1척은 시대나 용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략 20~30cm 내외였다. 8척이면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장신이다.
15. 의연(嶷然): 산이 높고 험준한 모양. 사람에게 쓰이면 재능이나 기개가 높고 뛰어남을 의미한다.
16. 의정(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하는 말.
17. 성공 봉조(成公 奉祖): 성봉조(成奉祖, 1403-147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수(敬叟).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관리를 거쳐 대사성, 예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했다.
18. 천리마(千里駒):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다는 준마(駿馬). 재능이 매우 뛰어난 젊은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19. 사어(射御): 활쏘기와 말타기. 예로부터 동아시아에서 군자(君子) 또는 무인(武人)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육예(六藝)의 하나로 여겨졌다.
20. 기지(器之): 그릇으로 여기다. 재목(材木)이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고 중히 여김을 의미한다.
21. 형조 정랑(刑曹正郞): 형조(刑曹)의 정5품 관직.
22. 조공 석문(曺公 錫文): 조석문(曺錫文, 1413-147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백응(伯膺).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를 거쳐 예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했다.


원문:
上凡有駕幸, 必以公爲大將。 嘗謂公曰: “汝爲大將, 年少位卑。 官高者多隷焉, 汝得無嚴憚耶?” 對曰: “臣雖卑, 旣受命爲將, 何敬憚之有?” 上笑曰: “異日汝必良將。”

번역문:
상(上)께서 무릇 거둥(駕幸)²³하실 때에는 반드시 공을 대장(大將)²⁴으로 삼으셨다. 일찍이 공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네가 대장(大將)이 되었으나 나이가 어리고 지위가 낮다. 관직이 높은 자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는데, 네가 엄숙히 여기고 꺼리는 마음(嚴憚)²⁵이 없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미천하나 이미 명(命)을 받아 장수가 되었으니, 어찌 공경하고 꺼리는 마음(敬憚)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훗날 너는 반드시 좋은 장수가 될 것이다.” 하셨다.

주석:
23. 가행(駕幸): 임금이 타는 수레인 어가(御駕)가 행차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거동(擧動)이나 행차를 의미한다.
24. 대장(大將): 여기서는 임금의 행차 시 호위를 총지휘하는 장수를 의미한다.
25. 엄탄(嚴憚)/경탄(敬憚): 두렵고 어려워서 꺼림.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대할 때 가질 수 있는 부담감을 의미한다. 이덕량은 왕명을 받은 장수로서 그러한 사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공적인 자세를 보였다.


원문:
公嘗入侍于內, 上命草招撫野人諭書。 公謝曰: “臣武人, 不敢。” 上曰: “第爲之。” 及製進, 上嘉之曰: “雖文士, 何以加此?” 遂用之。 居無何, 慶源府使缺, 代以公, 階加通政。 蓋將欲大授²⁶, 故試使之臨民制敵, 而高其秩也。

번역문:
공이 일찍이 내전(內殿)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상께서 야인(野人)²⁷을 초무(招撫)²⁸하는 유서(諭書)²⁹를 초안(草案)하라고 명하셨다. 공이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은 무인(武人)이라 감히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해보라.” 하셨다. 지어 올리자 상께서 가상히 여기며 말씀하시기를, “비록 문사(文士)라도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하시고, 마침내 그것을 사용하셨다. 얼마 있지 않아 경원부사(慶源府使)³⁰ 자리가 비자 공으로 대신하게 하고 품계(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³¹로 올려주었다. 이는 장차 크게 쓰고자(大授)³² 하셨기에, 시험 삼아 백성을 다스리고 적을 제압하게 하면서 그 품계(秩)를 높여준 것이다.

주석:
26. [주-D001] 授 : 저본(底本)에는 “수(受)”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허백정집(虛白亭集)・호조판서전의군이공신도비명(戶曹判書全義君李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수(受)’는 ‘받다’는 뜻이고 ‘수(授)’는 ‘주다, 임명하다’는 뜻이다. 문맥상 임금이 장차 이덕량을 크게 등용하려 했다는 의미이므로 ‘수(授)’가 적절하다.
27. 야인(野人):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 북쪽 국경 너머에 거주하던 여진족(女眞族) 등 북방 민족을 통칭하던 말이다.
28. 초무(招撫): 불러서 위무하고 달램. 주로 변방의 이민족을 대상으로 회유하거나 귀순을 권유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29. 유서(諭書): 임금이 신하나 백성, 또는 외국 사신이나 번국(藩國)의 왕에게 타이르거나 알리는 글.
30. 경원부사(慶源府使): 함경도 경원(慶源) 지역의 책임자. 경원은 북방 국경 지역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31.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 시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명.
32. 대수(大授): 큰 벼슬을 줌. 중요한 직책에 임명함.


원문:
爲大司憲, 朝綱肅, 坐義禁府, 議獄平。 歷事三朝, 終始一心, 所之有聲。 平生不屑屑於財利, 亦無心於聲色。 但愛酒, 每對客飮, 見天眞乃已。【竝洪虛白貴達撰碑。】

번역문:
대사헌(大司憲)이 되어서는 조정의 기강(朝綱)이 엄숙해졌고, 의금부(義禁府)³³에 앉아서는 옥사(獄事)를 공평하게 처리(議獄平)³⁴하였다. 삼조(三朝)³⁵를 거쳐 섬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이었고, 가는 곳마다 명성(聲)이 있었다. 평생 재물과 이익(財利)에 연연하지(屑屑)³⁶ 않았고, 또한 성색(聲色)³⁷에도 마음이 없었다. 다만 술을 좋아하여 매번 손님을 대하여 마실 때면 천진(天眞)³⁸한 모습이 드러나야 그만두었다.【이상은 홍허백(洪虛白) 귀달(貴達)³⁹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하였다.】

주석:
33. 의금부(義禁府): 조선 시대 왕명(王命)을 받아 중죄인을 심문하던 사법 기관. 판사(判事, 정1품), 지사(知事, 종1품), 동지사(同知事, 종2품) 등의 관직이 있었다. ‘좌의금부(坐義禁府)’는 의금부 판사 또는 지사 등의 직책을 맡았음을 의미할 수 있다.
34. 의옥평(議獄平): 옥사(獄事)를 논의함이 공평함. 죄인을 심문하고 판결하는 과정이 공정했음을 의미한다.
35. 삼조(三朝): 세 임금의 조정을 의미한다. 이덕량은 세조(世祖), 예종(睿宗, 재위 1468-1469),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의 세 임금을 섬겼다.
36. 설설(屑屑): 자질구레함, 하찮게 여김. 재물이나 이익 같은 세속적인 것에 개의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37. 성색(聲色): 음악 소리(聲)와 여색(色). 감각적인 향락을 의미한다.
38. 천진(天眞):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타고난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 술을 마시면 격식 없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39. 홍허백(洪虛白) 귀달(貴達):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덕량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성현(成俔)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成俔【文戴公。】
字磬叔, 號慵齋。 任之弟。 正統己未生。 世祖五年己卯進士, 壬午登第。 薦入史局, 兼弘文正字。 又登拔英試, 丙申重試。 賜暇湖堂, 歷直提學、副提學、承旨、大司成、關東・西・北三道觀察使、禮曹判書, 典文衡。 燕山甲子卒, 年六十六。

번역문:
성현(成俔)【문대공(文戴公)¹이다.】
자는 경숙(磬叔)이고, 호는 용재(慵齋)²이다. 임(任)³의 아우이다. 정통(正統)⁴ 기미년(己未年, 1439)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5년 기묘년(己卯年, 1459)에 진사시(進士試)⁵에 합격하였고, 임오년(壬午年, 1462)에 문과(文科)에 급제(登第)⁶하였다. 추천되어 사국(史局)⁷에 들어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⁸를 겸하였다. 또 발영시(拔英試)⁹에 합격하였고, 병신년(丙申年, 1476)¹⁰에 중시(重試)¹¹에 합격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¹²를 하였고, 직제학(直提學)¹³, 부제학(副提學)¹⁴, 승지(承旨)¹⁵, 대사성(大司成)¹⁶, 관동(關東)¹⁷·서(西)¹⁸·북(北)¹⁹ 삼도(三道)의 관찰사(觀察使), 예조판서(禮曹判書)²⁰를 역임하였고, 문형(文衡)²¹을 관장하였다. 연산군(燕山君)²² 갑자년(甲子年, 1504)에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주석:

  1. 문대공(文戴公): 성현의 시호(諡號). 이덕량과 시호가 같다. 시호가 반드시 고유한 것은 아니며, 공덕에 따라 같은 시호를 받는 경우가 있다.
  2. 용재(慵齋): 성현의 호. '용(慵)'은 '게으르다'는 뜻이지만, 세속적인 일에 얽매이지 않고 한가롭게 지낸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3. 임(任): 성현의 형인 성임(成任, 1421-1484)을 가리킨다. 성임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4. 정통(正統): 중국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첫 번째 연호(1436-1449).
  5. 진사시(進士試):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예비 시험 중 하나인 소과(小科)의 한 종류. 시(詩), 부(賦), 책(策) 등을 시험하여 합격자에게 진사(進士) 칭호를 주었다. 생원시(生員試)와 함께 양시(兩試)라고도 불렀다.
  6. 등제(登第): 과거 시험, 특히 문과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7.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기관. 춘추관(春秋館) 또는 실록 편찬 시 임시로 설치되는 실록청(實錄廳) 등을 가리킬 수 있다.
  8.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홍문관(弘文館)의 정9품 관직.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 관리, 문한(文翰) 처리, 왕의 자문 등을 담당한 핵심 학술 기관이었다. 정자는 가장 낮은 품계였으나 명예로운 자리로 여겨졌다.
  9. 발영시(拔英試): 성종(成宗) 4년(1473)에 문신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특별 시험. 우수한 인재를 발탁(拔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10. 병신년(丙申年, 1476): 성종 7년.
  11.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품계를 올려주었다.
  12. 사가독서(賜暇讀書):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賜暇)를 주어 독서당(湖堂)에서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매우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13.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위. 제학(提學)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14.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위.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15.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직위.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왕의 핵심 측근이었다.
  16.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국립 최고 교육기관의 책임자였다.
  17. 관동(關東): 강원도 지역을 가리킨다.
  18. 서(西): 평안도 지역을 가리킨다. (또는 황해도)
  19. 북(北): 함경도 지역을 가리킨다.
  20. 예조판서(禮曹判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예악(禮樂), 제사(祭祀), 교육, 외교 등을 관장했다.
  21. 문형(文衡):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의 기준 또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대제학은 문형을 관장하여 문풍(文風)을 이끌었다. 성현은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다.
  22. 연산군(燕山君): 조선 제10대 임금(재위 1494-1506). 폭정으로 인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었다.

원문:
公聰秀異常, 十餘歲, 恭惠公卒, 與兩兄廬于墓側三年。 學業、讀書不輟, 伯仲視其學日進, 大奇之, 曰: “能繼吾家者, 必是兒也。”

번역문:
공은 총명하고 빼어남이 비상하였는데, 10여 세에 공혜공(恭惠公)²³이 졸(卒)하자 두 형과 함께 묘(墓) 옆에서 3년간 여묘(廬墓)²⁴살이를 하였다. 학업과 독서를 그치지 않으니, 형들이 그 학문이 날로 발전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능히 우리 가문(家門)을 이을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주석:
23. 공혜공(恭惠公): 성현의 아버지 성염조(成念祖) 또는 할아버지 성억(成抑)의 시호로 추정되나, 정확한 기록 확인이 필요하다. 성현의 부친은 성염조(成念祖, 1402-1451)이고 조부는 성개(成槪)이다. 성현의 조부 성개(成槪)의 형제인 성억(成抑)의 시호가 공혜(恭惠)이다. 따라서 공혜공은 성현의 종조부(從祖父) 성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맥상 부친의 죽음을 의미할 가능성도 있어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만약 부친 성염조를 지칭한다면, 공혜공은 잘못된 표기일 수 있다.
24. 여묘(廬墓):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자식이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묘를 돌보는 유교적 상례(喪禮) 중 하나. 삼년상(三年喪) 기간 동안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문:
睿宗卽位, 抄選經筵官, 只置六人, 公其一也。 常引入臥內, 講論經史, 時人榮之。

번역문:
예종(睿宗)²⁵께서 즉위하시자 경연관(經筵官)²⁶을 초선(抄選)하였는데 단지 6명을 두었으며, 공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항상 침전(臥內)²⁷으로 불러들여 경사(經史)²⁸를 강론(講論)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주석:
25. 예종(睿宗): 조선 제8대 임금(재위 1468-1469).
26. 경연관(經筵官):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의하던 관료.
27. 와내(臥內): 임금의 침소(寢所). 임금의 사적인 공간으로, 이곳에서 경연을 열었다는 것은 그만큼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시사한다.
28. 경사(經史):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통칭하는 말로, 학문의 기본이 되었다.


원문:
乙未, 隨上黨府院君韓明澮朝京, 與李瓊仝、崔淑精同行, 二人皆有才名。 公相與唱和, 應答如響, 滔滔不竭, 二人皆服。

번역문:
을미년(乙未年, 1475)²⁹에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³⁰를 수행하여 중국 조정(朝廷)에 갈 때, 이경동(李瓊仝)³¹, 최숙정(崔淑精)³²과 함께 갔는데, 두 사람 모두 재능과 명성이 있었다. 공이 서로 더불어 시(詩)를 창화(唱和)³³하는데, 응답하기를 메아리처럼 하고 도도하게 마르지 않으니(滔滔不竭), 두 사람이 모두 감복하였다.

주석:
29. 을미년(乙未年, 1475): 성종 6년.
30.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1415-1487):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공신이자 권신.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상당부원군에 봉해졌다. 성종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31. 이경동(李瓊仝, 1434-149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윤보(潤夫).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성현과 함께 한명회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32. 최숙정(崔淑精, 1433-148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사결(士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역시 성현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33. 창화(唱和): 시회(詩會) 등에서 한 사람이 먼저 시를 지어 부르면(唱), 다른 사람이 그 시의 운자(韻字)나 주제에 맞추어 시를 지어 화답(和)하는 것.


원문:
陞副提學。 成宗方尙文雅, 公嘗上《八條封事》, 上大加稱賞, 賜宴于內, 御書褒之。 又命公製《宋朝群臣請黜³⁴五鬼表》, 旣進, 上歎賞, 命貼坐壁, 因加褒賜。

번역문: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성종(成宗)께서 문아(文雅)³⁵를 숭상하시던 때에, 공이 일찍이 《팔조봉사(八條封事)》³⁶를 올리자 상께서 크게 칭찬하고 상을 내리시며, 내전(內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어서(御書)³⁷로 포상하셨다. 또 공에게 명하여 《송조군신청출오귀표(宋朝群臣請黜五鬼表)》³⁸를 짓게 하시니, 이미 올리자 상께서 감탄하고 칭찬하시며 어좌(御座)의 벽에 붙이라고 명하시고, 이로 인해 포상과 하사품을 더하셨다.

주석:
34. [주-D001] 黜 : 《허백당집(虛白堂集)・의송조군신청파오귀표(擬宋朝群臣請罷五鬼表)》에는 “파(罷)”로 되어 있다. ‘출(黜)’은 ‘내쫓다’, ‘파(罷)’는 ‘파면하다, 그만두게 하다’는 뜻으로 의미상 유사하다. 성현이 송나라 신하들을 대신하여 간신(五鬼)을 내치도록 청하는 글을 지은 것이다.
35. 문아(文雅): 문학(文學)과 아정(雅正)한 풍류.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는 기풍을 의미한다. 성종은 학문을 장려하고 문치를 중시했다.
36. 팔조봉사(八條封事): 여덟 개 조항으로 된 봉사(封事). 봉사는 신하가 임금에게 밀봉하여 올리는 상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당시의 정치 현안에 대한 건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7. 어서(御書): 임금이 직접 쓴 글씨나 편지.
38. 《송조군신청출오귀표(宋朝群臣請黜五鬼表)》: ‘송나라 조정의 여러 신하가 오귀(五鬼)를 내치도록 청하는 표(表)’. 여기서 오귀(五鬼)는 송나라 신종(神宗) 때의 왕안석(王安石) 신법(新法)을 지지했던 여혜경(呂惠卿), 증포(曾布), 이정(李定), 장돈(章惇), 채확(蔡確) 등 간신으로 지목된 인물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성현이 송나라 역사를 바탕으로 글을 지어 올린 것이다. 표(表)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형식이다.


원문:
戊申, 董越、王敞奉詔來, 公應接盡禮, 相與唱和, 兩公歎服。 後見本國人赴京者, 必問公安否。

번역문:
무신년(戊申年, 1488)³⁹에 동월(董越)⁴⁰과 왕창(王敞)⁴¹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자, 공이 응접(應接)하며 예를 다하고 서로 더불어 창화(唱和)하니, 두 공(公)이 감탄하고 감복하였다. 후에 본국 사람으로 북경(北京)에 가는 자를 보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물었다.

주석:
39. 무신년(戊申年, 1488): 성종 19년.
40. 동월(董越, 1430-1502): 명나라의 문신이자 학자. 자는 시망(時望). 1488년(성종 19) 정조사(正朝使) 부사(副使)로 조선에 왔다. 《조선부(朝鮮賦)》를 남겼다.
41. 왕창(王敞, ?-?): 명나라의 관리. 동월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42. 응접(應接): 사신이나 손님을 맞이하여 대접함.


원문:
特拜嶺伯。 時方刪定樂律, 朝議以公專掌其事, 不宜外任, 命遞之, 特拜禮曹判書。 公以濫超辭, 上曰: “卿知禮樂, 故特授之。 予久欲授卿此職, 今亦晩矣, 何濫之有?”

번역문:
특별히 영백(嶺伯)⁴³에 제수되었다. 이때 마침 악률(樂律)⁴⁴을 산정(刪定)하고 있었는데, 조정의 논의(朝議)에서 공이 그 일을 전담해야 하므로 외직(外任)에 임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교체하도록 명하고, 특별히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하였다. 공이 분에 넘치게 뛰어넘었다(濫超)고 사양하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경(卿)이 예악(禮樂)을 알기 때문에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경에게 이 직책을 주고자 하였는데, 지금 또한 늦었으니, 어찌 분에 넘침이 있겠는가?”

주석:
43. 영백(嶺伯): 영남(嶺南), 즉 경상도 관찰사를 가리킨다. 백(伯)은 방백(方伯), 즉 관찰사를 의미한다.
44. 악률(樂律): 음악(音樂)과 율려(律呂). 음악 이론과 제도를 의미한다. 성종은 음악 정비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성현은 유자광(柳子光), 박곤(朴坤)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 편찬을 주도했다.
45. 산정(刪定): 불필요한 것을 삭제하고 체계를 정비함.
46. 남초(濫超): 분수에 넘치게 뛰어넘음. 자신의 자격이나 경력에 비해 과분한 직책을 받았다고 겸양하는 표현이다.


원문:
嘗以承旨見罷, 與蔡仁川壽約遊金剛, 野服蕭然, 探奇窮勝, 戒諸僕勿言名職, 郡邑莫知爲誰也。 少時學琴, 通曉律呂, 對月鼓琴, 翛然遐想, 望之如神仙中人。

번역문:
일찍이 승지(承旨)로 있다가 파직되었을 때, 인천(仁川) 채수(蔡壽)⁴⁷와 함께 금강산(金剛山)⁴⁸ 유람을 약속하고, 평복(野服) 차림으로 쓸쓸히(蕭然) 기이한 경치를 찾아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며, 여러 종들에게 이름과 관직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니, 군읍(郡邑)에서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젊었을 때 거문고(琴)⁴⁹를 배워 율려(律呂)⁵⁰에 통달하였는데, 달을 마주하여 거문고를 타면 숙연(翛然)⁵¹히 아득한 생각에 잠기니, 바라보면 신선(神仙) 속의 사람 같았다.

주석:
47. 인천(仁川) 채수(蔡壽, 1449-15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성현과 절친한 사이였다.
48. 금강산(金剛山): 한반도 동부에 있는 명산.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49. 금(琴): 현악기의 총칭으로 쓰이기도 하나, 주로 7현금 또는 거문고를 가리킨다. 선비들의 대표적인 악기로 여겨졌다.
50. 율려(律呂): 동양 음악의 기본 음률(音律). 12율(律)을 양률(陽律)인 6률(六律)과 음률(陰律)인 6려(六呂)로 나눈 것이다. 율려에 통달했다는 것은 음악 이론에 정통했음을 의미한다.
51. 숙연(翛然):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산뜻한 모습.


원문:
遺書曰: “凡關喪葬, 務從簡約, 門前駕牛, 挽章只十, 以表我儉素之意。 蒙上恩, 官至六卿, 無德可述, 只用表石, 勿用碑。”【竝行狀。】

번역문:
유서(遺書)에서 말하였다. “무릇 상장(喪葬)에 관한 일은 힘써 간략(簡約)하게 따르고, 문 앞에 소가 끄는 수레(駕牛)⁵²를 쓰며, 만장(挽章)⁵³은 단지 열 개만 하여 나의 검소(儉素)한 뜻을 나타내라. 상(上)의 은혜를 입어 관직이 육경(六卿)⁵⁴에 이르렀으나 기록할 만한 덕(德)이 없으니, 단지 표석(表石)⁵⁵만 사용하고 비(碑)⁵⁶는 세우지 말라.”【이상은 행장(行狀)⁵⁷에서 인용】

주석:
52. 가우(駕牛): 소가 끄는 수레. 장례 행렬에 쓰이는 상여(喪輿)를 소가 끌게 하라는 의미로, 말을 쓰는 것보다 검소하게 하라는 뜻이다.
53. 만장(挽章):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기(旗)처럼 만든 것. 장례 행렬에 사용된다. 만장의 수를 제한한 것도 검소함을 강조한 것이다.
54. 육경(六卿):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통칭하는 말. 최고위 관직을 역임했음을 의미한다.
55. 표석(表石): 묘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 주로 이름이나 간단한 사항만 기록한다.
56. 비(碑): 묘 앞에 세우는 비석. 표석보다 크고 보통 공적을 기록한 비문(碑文)을 새긴다. 공적이 없으니 비를 세우지 말라는 겸양의 표현이다.
57.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본관, 생애, 업적, 성품 등을 기록한 글. 묘비명(墓碑銘), 묘지명(墓誌銘), 시장(諡狀) 등을 작성하는 기본 자료가 된다.


원문:
公作《鵲巢說》云: “諺傳‘鵲巢午地, 則其家主得美官’。 吾家南園有栗樹一株, 鵲巢其顚, 數年養雛。 未幾, 擢重試, 陞銀臺, 按察關東、西兩界, 人皆云鵲巢之所致也。 近者鵲又來巢, 隣族盈門來賀。 頃之, 自樞府降爲行職, 蹇躓困頓之餘, 又得風痒, 臥席數月, 僅賴藥餌而愈。 家中僮僕, 相繼得疾, 卒使仲子背逝, 棲棲治喪, 萬事瓦裂, 何前後得失之有異如是? 以今思之, 前鵲之來, 適値余昌運發揚之時, 後鵲之至, 又遭余衰老消縮之日。 夫治亂, 運也; 窮達, 命也; 貴賤, 時也。 鵲之微物, 焉能作爲於其間?”

번역문:
공이 《작소설(鵲巢說)》⁵⁸을 지어 이르기를, “속언(諺傳)에 ‘까치집(鵲巢)이 오지(午地)⁵⁹에 있으면 그 집 주인이 좋은 관직을 얻는다’고 전한다. 우리 집 남쪽 동산에 밤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까치가 그 꼭대기에 집을 짓고 수년간 새끼를 길렀다.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중시(重試)에 발탁되고 은대(銀臺)⁶⁰로 승진하였으며 관동(關東)과 서쪽 변방(西界)⁶¹을 안찰(按察)하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까치집 때문이라고 하였다. 근래에 까치가 또 와서 집을 짓자 이웃과 친족들이 문에 가득 와서 축하하였다. 얼마 후에 내가 추부(樞府)⁶²에서 행직(行職)⁶³으로 강등되고, 불운하고 곤궁(蹇躓困頓)⁶⁴한 나머지 또 풍양(風痒)⁶⁵을 얻어 수개월을 자리에 누웠다가 겨우 약이(藥餌)에 의지하여 나았다. 집안의 동복(僮僕)들이 서로 이어 병을 얻고, 마침내 둘째 아들(仲子)이 세상을 떠나니(背逝), 허둥지둥(棲棲) 상(喪)을 치르며 만사가 깨진 기와처럼 어그러졌는데, 어찌하여 이전과 이후의 득실(得失)이 이처럼 다를 수 있는가? 지금 생각해보니, 이전의 까치가 온 것은 마침 나의 창성(昌盛)한 운(運)이 발양(發揚)하던 때를 만난 것이고, 이후의 까치가 이른 것은 또 나의 쇠로(衰老)하고 위축(消縮)되는 날을 만난 것이다. 무릇 치란(治亂)은 운(運)이고, 궁달(窮達)⁶⁶은 명(命)이며, 귀천(貴賤)은 시(時)이다. 까치 같은 미물(微物)이 어찌 그 사이에 작위(作爲)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주석:
58. 《작소설(鵲巢說)》: 성현이 지은 수필. 까치집과 자신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연관 짓는 세속의 믿음에 대해 성찰하며 운명론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실려 있다.
59. 오지(午地): 정남(正南) 방향. 십이지(十二支)의 오(午)가 가리키는 방위이다.
60.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61. 관동(關東), 서량계(西兩界): 관동은 강원도, 서량계는 평안도와 황해도(또는 평안도와 함경도 서부) 등 서쪽과 북쪽의 변방 지역을 의미한다. 관찰사로 부임한 지역을 가리킨다.
62. 추부(樞府): 중추부(中樞府)의 별칭. 실직(實職)이 없는 고위 관료들을 우대하기 위한 명예 관청이었다.
63. 행직(行職): 실무를 담당하는 관직. 추부와 같은 명예직에서 실무직으로 옮겨간 것을 강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64. 건치곤돈(蹇躓困頓): 발을 절고 넘어지며 몹시 곤궁함.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려운 처지에 놓임을 비유한다.
65. 풍양(風痒): 풍병(風病)으로 인한 가려움증. 또는 중풍(中風)과 같은 마비성 질환을 동반한 피부병일 수도 있다.
66. 궁달(窮達): 곤궁함과 영달함. 인생의 불우한 처지와 성공한 처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원문:
公性疏豁不拘, 樂易無競, 君子人也。 文章如水涌而山出。 少時, 行至典牲署南, 時微雨, 馬噴沫不能進, 忽覺暖氣射面如火, 又有醜氣不可堪。 見路上東谷, 有人着蓑笠, 長數十丈, 面如藍⁶⁷, 目如炬⁶⁸。 公自念若失心, 必墮彼計, 遂控馬縱目視之, 其人便回首登空⁶⁹而去。 公曰: “信乎, 心定則怪不入也!”

번역문:
공은 성품이 트여 거리낌이 없고(疏豁不拘), 편안하고 화평하여 다투지 않으니(樂易無競) 군자(君子)다운 사람이었다. 문장(文章)은 물이 솟고 산이 솟아나듯 하였다. 젊었을 때 전생서(典牲署)⁷⁰ 남쪽을 지나가는데, 그때 가랑비가 내려 말이 거품을 뿜으며 나아가지 못하였다.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불처럼 얼굴에 쏘는 것을 느꼈고, 또한 견딜 수 없는 추한 냄새가 났다. 길 위의 동쪽 골짜기를 보니 어떤 사람이 도롱이(蓑)와 삿갓(笠)을 쓰고 있는데 키가 수십 장(丈)⁷¹이나 되고, 얼굴은 쪽빛[藍]⁷² 같고 눈은 횃불[炬]⁷³ 같았다. 공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약 정신을 잃으면 반드시 저 계책에 빠질 것이다’ 하고, 마침내 말을 제어하고 눈을 부릅떠 그를 바라보니, 그 사람이 문득 머리를 돌려 공중(空中)⁷⁴으로 올라가 사라졌다. 공이 말하기를, “진실하구나, 마음이 안정되면 괴이(怪異)한 것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 하였다.

주석:
67. [주-D002] 藍 : 《대동야승(大東野乘)・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반(盤)”으로 되어 있다. ‘반(盤)’은 ‘쟁반’을 뜻하므로, ‘얼굴이 쟁반 같다’는 의미가 된다. ‘남(藍)’은 ‘쪽빛’을 의미하므로, ‘얼굴이 쪽빛처럼 푸르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기괴한 모습을 묘사한다. 저본을 따라 ‘남(藍)’으로 번역한다.
68. [주-D003] 炬 : 저본(底本)에는 “구(矩)”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대동야승・용재총화》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구(矩)’는 ‘곱자, 법도’를 뜻하고, ‘거(炬)’는 ‘횃불’을 뜻한다. 문맥상 ‘눈이 횃불 같다’는 표현이 자연스럽다.
69. [주-D004] 空 : 저본에는 “공(公)”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대동야승・용재총화》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등공(登公)’은 의미가 통하지 않으며, ‘등공(登空)’ 즉 ‘공중으로 올라가다’가 문맥에 맞다.
70. 전생서(典牲署): 조선 시대 종묘(宗廟), 사직(社稷) 등 국가 제사에 쓰일 희생(犧牲, 제물로 바치는 짐승)을 관리하던 관청.
71. 장(丈): 길이의 단위. 1장은 10척(尺)이다. 수십 장이면 엄청난 거인임을 과장한 표현이다.
72. 남(藍): 쪽빛. 짙푸른 색. 주석 [주-D002] 참조.
73. 거(炬): 횃불. 주석 [주-D003] 참조.
74. 공(空): 공중, 허공. 주석 [주-D004] 참조.


원문:
公與蔡耆之作遊山之行, 約以互相爲僕。 蔡爲僕, 則主人輒善待, 求無不獲; 公爲僕, 則輒遭主人之怒, 多被驅逐之辱。 公謂蔡曰: “君以何術能致主人懽?” 蔡答曰: “入主家, 凡有所見之物, 無不贊美。” 公依其言, 偶見主人之妻跣足汲井, 乃曰: “婦人之足, 甚白晢美好也。” 主翁怒, 持杖逐之曰: “吾妻之足雖白, 何與客耶?” 公見辱而還, 謂蔡曰: “吾依公言, 贊主婦之足, 而反逢其怒, 何也?” 蔡曰: “君譽其妻, 彼必妬, 其有意逢辱, 固也。” 相與大噱。

번역문:
공이 채기지(蔡耆之)⁷⁵와 함께 산 유람을 떠나면서 서로 번갈아 종(僕)이 되기로 약속하였다. 채수가 종이 되면 주인이 번번이 잘 대해주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 없었으나, 공이 종이 되면 번번이 주인의 노여움을 만나 쫓겨나는 욕(辱)을 많이 당하였다. 공이 채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무슨 재주로 주인의 환심(懽心)을 살 수 있는가?” 하니, 채수가 답하기를, “주인의 집에 들어가 무릇 보이는 물건이 있으면 칭찬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공이 그 말에 따라 우연히 주인의 아내가 맨발(跣足)로 우물물을 긷는 것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부인의 발이 매우 희고(白晢) 아름답습니다.” 하였다. 주인이 노하여 지팡이를 들고 쫓아내며 말하기를, “내 아내의 발이 비록 희지만, 손님과 무슨 상관인가?” 하였다. 공이 욕을 당하고 돌아와 채수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말에 따라 주인 부인의 발을 칭찬하였는데 도리어 그의 노여움을 만났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채수가 말하기를, “그대가 그의 아내를 칭찬하니 그가 반드시 질투(妬)했을 것이네. 그가 욕을 당할 만하니, 당연하다(固也).” 하였다. 서로 더불어 크게 웃었다(大噱).

주석:
75. 채기지(蔡耆之): 채수(蔡壽)를 가리킨다. 기지(耆之)는 채수의 자(字)이다.


원문:
廢主末年, 追罪言者皆置重典, 公亦以首諫寵倖之事, 被泉壤之禍, 二子流竄。【行狀。】

번역문:
폐주(廢主)⁷⁶ 말년에 죄를 소급하여 언관(言者)들을 모두 중한 형벌(重典)에 처하였는데, 공 또한 총애받는 신하(寵倖)⁷⁷에 대해 앞장서 간(諫)한 일로 인하여 천양(泉壤)의 화(禍)⁷⁸를 입고, 두 아들이 유배(流竄)되었다.【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76. 폐주(廢主): 폐위된 임금. 연산군(燕山君)을 가리킨다.
77. 총행(寵倖):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 연산군 때의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성현은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다 화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78. 천양지화(泉壤之禍): 천양(泉壤)은 황천(黃泉)과 같은 말로 저승을 의미한다. 즉, 죽음의 화(禍)를 당했음을 뜻하는 완곡한 표현이다. 성현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이미 죽었으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79. 유찬(流竄): 죄인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형벌. 성현의 아들 성세정(成世貞), 성세경(成世卿) 등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원문:
洪正⁷⁹公與成右相世昌相許爲友, 嘗於正月雪後, 乘夕訪之, 就東園別室, 閉窓穩話。 夜半, 有琴韻出於庭際, 潛穴窓視之, 有老翁就梅花下, 掃雪而坐, 露白髮橫短琴, 淸音響指⁸⁰, 殊極奇絶。 成公曰: “吾大人也。” 俄知有客在堂, 輒顚倒輟之以入。 後洪公每謂人曰: “方其月色如晝, 梅花盛開, 白髮飄然, 淸徽間發, 縹緲若眞仙下降, 不覺爽氣滿身, 慵齋可謂仙風道骨。”

번역문:
홍정공(洪正公)⁸¹이 성우상(成右相) 세창(世昌)⁸²과 서로 벗하기를 허락하였는데, 일찍이 정월 눈 온 뒤 저녁 무렵을 타서 그를 방문하여 동쪽 동산의 별실(別室)로 나아가 창문을 닫고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밤중에 거문고 소리(琴韻)가 뜰 가에서 흘러나오기에, 몰래 창문에 구멍을 뚫고 보니 늙은이가 매화나무 아래로 나아가 눈을 쓸고 앉아, 흰 머리를 드러낸 채 짧은 거문고(短琴)를 비껴 안고 맑은 소리를 손가락 끝에서 울려내는데(淸音響指)⁸³, 자못 지극히 기이하고 절묘하였다. 성공(成公)이 말하기를, “우리 대인(大人)⁸⁴이시다.” 하였다. 잠시 후 당(堂)에 손님이 있는 것을 알고는 문득 거꾸로 연주하다가 그치고 들어왔다. 후에 홍공이 매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달빛이 대낮 같고 매화가 활짝 피었으며, 흰 머리가 나부끼고 맑은 소리(淸徽)⁸⁵가 간간이 울려 퍼져, 아득하기(縹緲)가 참된 신선(眞仙)이 내려온 듯하여, 나도 모르게 상쾌한 기운(爽氣)이 온몸에 가득하였으니, 용재(慵齋)는 가히 선풍도골(仙風道骨)⁸⁶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주석:
79. [주-D005] 正 : 저본에는 앞에 “사(寺)”가 더 있다. 《대동야승・기재잡기(寄齋雜記)》에 근거하여 삭제하였다. '홍정사공(洪正寺公)'보다는 '홍정공(洪正公)'이 자연스럽다.
80. [주-D006] 響指 : 저본에는 공란(空欄)이다. 《대동야승・기재잡기》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청음(淸音)' 뒤에 '향지(響指)'가 와서 '손가락 끝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소리'라는 의미를 완성한다.
81. 홍정공(洪正公): 홍응(洪應, 1428-1492)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지(應之).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다. '정(正)'은 그의 시호 정효(靖孝)의 일부이거나 다른 존칭일 수 있다.
82. 성우상(成右相) 세창(世昌): 성준(成俊, 1436-1504)을 가리킨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세창(世昌), 호는 송재(松齋). 우상(右相)은 우의정(右議政)을 의미한다.
83. 청음향지(淸音響指): 맑은 거문고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울려 퍼짐.
84. 대인(大人):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성준이 자신의 아버지인 성현을 가리킨다.
85. 청휘(淸徽): 맑은 소리. 거문고 소리를 아름답게 표현한 말이다.
86. 선풍도골(仙風道骨): 신선(神仙)과 같은 풍채(風采)와 도인(道人)과 같은 골격(骨格). 세속을 벗어난 고상하고 탈속적인 모습과 기품을 형용하는 말이다.


원문:
四佳之後, 虛白極大, 古今衆體無不作。 其所著述之富, 諸公無與爲比。 《樂學軌範》、《慵齋叢話》、《桑楡備覽》、《太平通載》皆其所述, 一時推爲文府。 其中《桑楡備覽》六十餘卷, 皆紀國朝故實, 最關世道, 而亂中見失。【《晴窓軟談》。】

번역문:
사가(四佳)⁸⁷ 이후로 허백(虛白)⁸⁸이 극히 위대하였으나, 고금(古今)의 여러 문체(衆體)를 짓지 않음이 없었다. 그 저술(著述)의 풍부함은 여러 공(公)들이 더불어 비교할 이가 없었다. 《악학궤범(樂學軌範)》⁸⁹, 《용재총화(慵齋叢話)》⁹⁰, 《상유비람(桑楡備覽)》⁹¹, 《태평통재(太平通載)》⁹²가 모두 그가 저술한 것으로, 한 시대의 문부(文府)⁹³로 추앙받았다. 그중 《상유비람》 60여 권은 모두 본조(國朝)의 고실(故實)⁹⁴을 기록하여 세도(世道)⁹⁵에 가장 관계가 깊었으나, 난리(亂) 중에 잃어버렸다.【《청창연담(晴窓軟談)》⁹⁶에서 인용】

주석:
87.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호.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학자.
88. 허백(虛白): 홍귀달(洪貴達)의 호. 서거정 이후 성현과 홍귀달이 문단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극대(極大)'는 문장이나 명성이 매우 높았음을 의미한다.
89. 《악학궤범(樂學軌範)》: 성종의 명으로 성현, 유자광 등이 편찬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악서(樂書). 궁중 음악의 악기, 악보, 의물(儀物), 복식, 무용 등을 집대성하였다.
90. 《용재총화(慵齋叢話)》: 성현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조선 초기의 인물, 제도, 풍속, 문물, 고사, 일화 등을 폭넓게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
91. 《상유비람(桑楡備覽)》: 성현이 편찬한 백과사전적 저술. ‘상유(桑楡)’는 저녁 무렵 해가 뽕나무와 느릅나무에 걸리는 것을 뜻하며, 노년(老年)을 비유한다. 노년에 대비하여 편람(備覽)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전하지 않는다.
92. 《태평통재(太平通載)》: 성현이 편찬한 역사서 또는 문헌집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93. 문부(文府): 문장(文章)의 창고라는 뜻으로, 학문이 깊고 저술이 많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94. 국조고실(國朝故實): 본 왕조, 즉 조선 시대의 옛 사실이나 제도, 관례 등을 의미한다.
95. 세도(世道): 세상의 도리나 풍속.
96. 《청창연담(晴窓軟談)》: 작자 미상의 필기잡록. 조선 시대 인물들의 일화 등을 담고 있다.

 

 

유순(柳洵)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柳洵【文僖公。】
字希明, 文化人, 號老圃堂。 正統壬戌¹生。 十九, 魁司馬。 世祖八年壬午登第。 丙戌, 擢重試, 又登拔英試。 燕山末年, 爲領議政。 中宗反正, 策靖國功臣, 封文城府院君。 甲戌, 再入相。 丁丑卒, 年七十七。

번역문:
유순(柳洵)【문희공(文僖公)²이다.】
자는 희명(希明)이고, 문화(文化) 사람³이며, 호는 노포당(老圃堂)이다. 정통(正統) 임술년(壬戌年, 1442)⁴에 태어났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⁵에 장원(魁)하였다. 세조(世祖) 8년 임오년(1462)에 문과에 급제(登第)하였다. 병술년(1466)⁶에 중시(重試)⁷에 발탁되었고, 또 발영시(拔英試)⁸에 합격하였다. 연산군(燕山君) 말년에 영의정(領議政)⁹이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¹⁰ 때 정국공신(靖國功臣)¹¹에 책록(策)되어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¹²에 봉해졌다. 갑술년(1514)¹³에 다시 재상(相)¹⁴이 되었다. 정축년(1517)에 졸(卒)하니, 나이 77세였다.

주석:

  1. [주-D001] 壬戌 : 《이락정집(二樂亭集)・문성부원군유공묘지명(文城府院君柳公墓誌銘)》 및 《목계일고(木溪逸藳)・영의정유문희공묘비(領議政柳文僖公墓碑)》에 “정통 신유년에 공이 태어났다(正統辛酉生公)”가 있고, 아래에 “정축년에 졸하니, 나이 77세였다(丁丑卒, 年七十七。)”가 있으므로, 이에 근거할 때 “신유(辛酉)”(1441년)가 되어야 한다. 정축년(1517)에 77세로 졸하려면 신유년(1441)생이어야 한다.
  2. 문희공(文僖公): 유순의 시호(諡號)이다.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충신하고 부지런히 배움(忠信愛學) 등을 의미하고, 희(僖)는 잘못이 있었으나 뉘우침(有過能改), 조심하고 두려워함(小心畏忌) 등을 의미한다.
  3. 문화인(文化人): 본관이 문화(文化)임을 나타낸다. 문화 유씨(文化 柳氏)이다.
  4. 정통(正統) 임술년(壬戌年): 1442년.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인 정통 7년에 해당한다. 주석 1에서 지적하듯, 신유년(辛酉年, 1441)이 맞다.
  5.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를 합하여 이르는 말. 소과(小科)라고도 한다.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고, 대과(大科)인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순은 생원시에 장원한 것으로 보인다.
  6. 병술년(丙戌年): 1466년 (세조 12년).
  7. 중시(重試): 조선 시대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보이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승진시켰다.
  8. 발영시(拔英試): 세조 12년(1466)에 시행된 문과 중시의 별칭.
  9. 영의정(領議政):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10.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훗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1.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호. 유순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2.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순에게 내려진 작위. 부원군(府院君)은 왕비의 아버지나 1등 공신에게 주던 봉작(封爵)이다.
  13. 갑술년(甲戌年): 1514년 (중종 9년).
  14. 상(相): 재상(宰相). 여기서는 영의정을 가리킨다.

원문:
成宗朝, 爲副提學, 上命召下美人圖, 令賦詩以進。 結聯曰: “君王自是疎聲色, 展畫猶應寄一嚬。” 上稱善, 命工粧䌙爲簇。

번역문:
성종(成宗) 시대에 부제학(副提學)¹⁵이 되었는데, 상(上)¹⁶께서 명하여 미인도(美人圖)를 내려보내고 시(詩)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결련(結聯)¹⁷에서 이르기를, “군왕(君王)께서 본래 성색(聲色)¹⁸을 멀리하시지만, 그림을 펼쳐 보시고는 오히려 응당 한 번 찡그림¹⁹을 부치시리라.”라고 하였다. 상께서 좋다고 칭찬하시고, 공장(工匠)에게 명하여 비단으로 장식하여 족자(簇子)를 만들게 하였다.

주석:
15.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16. 상(上): 임금. 여기서는 성종(成宗)을 가리킨다.
17. 결련(結聯): 한시(漢詩)에서 마지막 두 구(句)를 가리킨다. 절구(絶句)에서는 전(轉)·결(結), 율시(律詩)에서는 경련(頸聯)·미련(尾聯) 중 마지막 미련을 가리킨다.
18.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女色). 임금이 빠지기 쉬운 향락을 의미한다.
19. 일빈(一嚬): 한 번 찡그림. 미인을 보고도 경계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군왕이 성색을 멀리하지만 그림 속 미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마음이 흔들릴 수 있음을 표현하면서도, 결국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여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동시에 경계하는 뜻을 담았다.


원문:
燕山時爲首相, 欲去位, 不得辭; 欲匡救, 徒觸忌, 常憂煎自傷。

번역문:
연산군 때 수상(首相)²⁰이 되었는데,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사직할 수 없었고, 잘못을 바로잡아 구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꺼림(忌)을 건드릴 뿐이어서, 늘 근심으로 애태우며 스스로 마음 아파하였다.

주석:
20.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을 가리킨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유순은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원문:
公耽翫書籍, 雖職務煩劇, 未嘗廢。 至於字學, 頗極精微, 醫方、地理, 無不用功。 性又節儉, 不好華侈, 不喜宴游聲樂。 友愛兄弟, 兄渭居抱川, 窮窶, 每時節製衣遺之, 弟沈抱疾, 親考方書, 迎醫別劑以救, 衣具施贈, 視兄如一。【竝《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은 서책(書籍)을 탐독하고 즐겨, 비록 직무(職務)가 번거롭고 심할(煩劇) 때라도 일찍이 폐한 적이 없었다. 자학(字學)²¹에 이르러서는 자못 정밀하고 미묘함(精微)을 다하였고, 의방(醫方)²², 지리(地理)²³에도 공력을 들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품 또한 절검(節儉)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러움(華侈)을 좋아하지 않았고, 잔치하고 노닐며 음악을 즐기는 것(宴游聲樂)을 기뻐하지 않았다. 형제를 우애(友愛)하여, 형인 유위(柳渭)가 포천(抱川)에 살면서 궁핍하고 가난(窮窶)하자 매번 시절마다 옷을 지어 보내주었고, 아우 유침(柳沈)이 병을 앓자 친히 의방서(方書)를 상고하고 의원을 맞이하여 별도로 약을 지어 구해주었으며, 옷과 기물을 베풀어 증여하기를 형에게 하듯이 똑같이 하였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²⁴에서 인용】

주석:
21. 자학(字學): 글자의 형(形)·음(音)·의(義)를 연구하는 학문. 훈고학(訓詁學) 또는 문자학(文字學)을 포함한다.
22. 의방(醫方): 의술(醫術)과 약방문(藥方文).
23. 지리(地理): 지리학. 풍수지리(風水地理)를 포함할 수도 있다.
24.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의 저술로 추정되나, 현전 여부는 불분명하다. 혹은 김육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기록일 수도 있다.


원문:
三大將擧事日, 以文城柳洵爲舊相召之。 文城馳赴之, 未三鼓也, 道逢辟除, 問曰: “誰也?” 下人對曰: “都承旨姜渾也。” 必錯聞更點而詣闕矣。 公使謂曰: “今日太早, 非詣闕時也。 吾之所往, 令公必隨來。 不然, 不可說也。” 姜訝之, 仍踵其後, 到南小門洞口, 遠見訓鍊院, 人馬騈闈, 燈燭煇煌, 猶不知爲何事。 文城駐馬謂曰: “今日跟老夫, 不可造次離也。 大事至矣。” 姜始懼甚, 旣下馬, 緊隨文城而進。 三大將見文城而起, 讓席再三, 坐初定, 平城瞪目指之曰: “此何人?” 文城曰: “乃姜渾也。 老夫帶來矣。” 平城曰: “前有約必先殺之, 今不可留也。” 文城悚蹙無²⁵言。 菁川察文城之色, 急謂平城曰: “目今擾攘之際, 書記無人, 姑使掌之, 後殺之, 猶未晩也。” 平城咆哮而止。 姜遂搴手執筆, 左承右奉, 能得其機, 遂皆稱善, 竟策勳爲晉川君。 自此事文城如父兄, 朝夕必謁, 新味必薦, 至於內外奴僕, 亦皆傾心厚施。 公沒之後, 事夫人未嘗少怠, 治²⁶其喪, 尤加意焉。【《寄齋雜記》。】

번역문:
삼대장(三大將)²⁷이 거사(擧事)한 날, 문성(文城) 유순(柳洵)을 구상(舊相)²⁸으로 삼아 그를 불렀다. 문성이 말을 달려가니 삼고(三鼓)²⁹가 되기 전이었는데, 길에서 벽제(辟除)³⁰하는 것을 만나 물었다. “누구인가?” 아랫사람이 대답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강혼(姜渾)³¹입니다.” 필시 경점(更點)³²을 잘못 듣고 대궐로 나아가는(詣闕) 것이리라. 공이 사람을 시켜 말하였다. “오늘은 너무 이르니, 대궐에 나아갈 때가 아니오. 내가 가는 곳으로 영공(令公)³³은 반드시 따라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말할 수 없소.” 강혼이 이를 의아하게 여겼으나, 이내 그 뒤를 따라 남소문동(南小門洞) 입구에 도착하여 멀리 훈련원(訓鍊院)³⁴을 보니, 사람과 말이 나란히 가득하고(人馬騈闐) 등불과 촛불이 휘황찬란(燈燭煇煌)하였으나, 여전히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다. 문성이 말을 멈추고 말하였다. “오늘 노부(老夫)를 따라왔으니, 경솔하게(造次) 떠나서는 안 되오. 큰일이 이르렀소.” 강혼이 비로소 매우 두려워하며, 말을 내린 뒤 문성을 바짝 따라 나아갔다. 삼대장이 문성을 보고 일어나 자리를 두세 번 사양하고, 자리가 처음 정해지자 평성(平城)³⁵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자는 어떤 사람인가?” 문성이 말하였다. “바로 강혼입니다. 노부가 데려왔습니다.” 평성이 말하였다. “전에 반드시 먼저 죽이기로 약속했으니, 지금 살려둘 수 없다.” 문성이 두려워 움츠리고(悚蹙) 말이 없었다. 청천(菁川)³⁶이 문성의 기색을 살피고 급히 평성에게 말하였다. “지금 소란스러운(擾攘) 때에 서기(書記)³⁷할 사람이 없으니, 우선 그에게 일을 맡게 하고 뒤에 죽여도 아직 늦지 않을 것입니다.” 평성이 고함치고(咆哮) 그만두었다. 강혼이 마침내 손을 걷고 붓을 잡아(搴手執筆), 왼쪽으로 받들고 오른쪽으로 받들어(左承右奉)³⁸ 그 기미(機)를 잘 얻으니, 마침내 모두 좋다고 칭찬하였고, 결국 공신에 책록되어 진천군(晉川君)³⁹이 되었다. 이로부터 문성을 부형(父兄)처럼 섬겨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찾아뵙고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올렸으며, 안팎의 노복(奴僕)들에게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마음을 기울여 후하게 베풀었다. 공이 몰(沒)한 뒤에는 부인 섬기기를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상(喪)을 치름에 더욱 마음을 썼다.【《기재잡기(寄齋雜記)》⁴⁰에서 인용】

주석:
25. [주-D003] 無 : 《대동야승(大東野乘)・음애일기(陰崖日記)》에는 “이지(而知)”로 되어 있다. 문맥상 두려워 말이 없었다는 뜻의 '무언(無言)'이 자연스럽다.
26. [주-D004] 治 : 《대동야승・음애일기》에는 “후(後)”로 되어 있다. '치기상(治其喪)'은 '그 상을 치르다'라는 뜻으로 문맥상 자연스럽다.
27. 삼대장(三大將):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세 사람을 가리킨다.
28. 구상(舊相): 전임 재상. 유순은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29. 삼고(三鼓): 밤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 중 세 번째. 대략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를 가리킨다. 아직 깊은 밤 시간임을 의미한다.
30. 벽제(辟除): 고관이 행차할 때 앞에서 사람이 외치며 길을 치우던 일.
31. 강혼(姜渾, 1464-1519):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중종반정 당시 도승지였다.
32. 경점(更點): 밤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치는 종이나 북소리.
33. 영공(令公):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
34. 훈련원(訓鍊院): 조선 시대 군사의 시재(試才)와 무예 연마 등을 관장하던 관청. 중종반정의 거사 장소였다.
35. 평성(平城):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을 가리킨다. 반정의 핵심 인물이었다.
36. 청천(菁川): 청천군(菁川君) 유순정(柳順汀, 1459-1512)을 가리킨다. 반정 삼대장의 한 사람이다.
37. 서기(書記): 글씨를 쓰고 기록하는 일, 또는 그 사람. 반정 과정에서 발표할 격문이나 교서 등을 작성할 사람이 필요했음을 의미한다.
38. 좌승우봉(左承右奉): 왼쪽으로 받들고 오른쪽으로 받듦. 임금의 좌우에서 정성을 다해 보필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강혼이 반정 세력의 요구에 맞추어 문서를 능숙하게 처리했음을 나타낸다.
39. 진천군(晉川君): 강혼이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면서 받은 군호(君號).
40. 《기재잡기(寄齋雜記)》: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선조, 광해군, 인조 대의 여러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원문:
中宗四年二月, 命追削反正之日入直承旨尹璋、曺繼衡、李堣等。 靖國功臣, 大抵皆姻婭請囑, 權鈞高臥門外, 姜渾、韓珣⁴¹朝服詣闕, 被拘軍門, 皆錄功籍。 特此三人見廢主窮困, 投身托命, 而反誑誘走出, 物論所嗤。 至是上以節義責臣下, 命政府、六曹收議。 柳洵少氣節, 無⁴²是非, 獨啓曰: “臣是反正日首相, 聞變蒼黃, 莫知所出, 而亦與勳籍, 靦然治⁴³世, 臣與三人實同形迹, 不敢獻議。” 聞者是之。

번역문:
중종 4년(1509) 2월에, 반정(反正) 당일 입직승지(入直承旨)였던 윤장(尹璋), 조계형(曺繼衡), 이우(李堣) 등을 추삭(追削)⁴⁴하라고 명하였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은 대체로 모두 인척(姻婭)⁴⁵의 청탁(請囑)이었고, 권균(權鈞)은 문밖에 높이 누워 있었으며⁴⁶, 강혼(姜渾)과 한순(韓珣)⁴⁷은 조복(朝服)을 입고 대궐로 나아가다가 군문(軍門)에 구금되었는데, 모두 공신 명부(功籍)에 기록되었다. 유독 이 세 사람(윤장, 조계형, 이우)은 폐주(廢主)⁴⁸가 궁지에 몰리고 곤궁해지자 몸을 던져 목숨을 맡겼는데도, 도리어 속여 꾀어 달아나게 하였으니⁴⁹, 물론(物論)⁵⁰이 비웃는 바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上)께서 절의(節義)로써 신하들을 책망하시며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 명하여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다. 유순(柳洵)은 기개와 절개(氣節)가 적고 시비(是非)를 따지지 않아⁵¹, 홀로 아뢰었다. “신(臣)은 바로 반정일의 수상(首相)으로서, 변고를 듣고 창황(蒼黃)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도 또한 훈적(勳籍)에 참여하여, 뻔뻔스럽게(靦然) 세상에 있사오니⁵², 신은 세 사람과 실로 형적(形迹)이 같습니다. 감히 의논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듣는 자들이 이를 옳게 여겼다.

주석:
41. [주-D002] 韓珣 : 《대동야승・해동야언(海東野言)・중종(中宗)》에도 “한순(韓珣)”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음애일기(陰崖日記)》에 근거할 때 “유순(柳洵)”이 되어야 한다. 문맥상 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된 인물을 나열하는 것이므로, 강혼과 함께 반정 당일의 행적이 기록된 유순(柳洵)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순(韓珣)이라는 인물도 실존했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저본을 따라 한순으로 번역한다.
42. [주-D003] 無 : 《대동야승・음애일기》에는 “이지(而知)”로 되어 있다. '무시비(無是非)'는 시비를 가리지 못하거나 분명히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지시비(而知是非)'는 시비를 안다는 뜻이다. 앞 구절 '소기절(少氣節)'과 이어지는 내용으로는 '무시비'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글의 저자는 유순을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므로, 기개와 절개가 부족하여 시비 판단도 흐리다고 본 것일 수 있다.
43. [주-D004] 治 : 《대동야승・음애일기》에는 “후(後)”로 되어 있다. '치세(治世)'는 '세상에 있다' 또는 '세상을 다스리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문맥상 뻔뻔스럽게 세상에(벼슬길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후세(後世)'는 문맥에 맞지 않는다.
44. 추삭(追削): 이미 내린 관작이나 공훈 등을 나중에 다시 빼앗는 것.
45. 인아(姻婭): 인척과 사돈. 반정 공신 선정에 사적인 관계가 작용했음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46. 고와문외(高臥門外): 문밖에 편안히 누워있음. 권균(權鈞)은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공신에 책록된 것을 비판하는 의미이다.
47. 한순(韓珣): 생몰년 미상. 중종반정 이후 정국공신 4등에 책록되었다. 주석 41 참조.
48. 폐주(廢主): 폐위된 임금. 연산군을 가리킨다.
49. 광유주출(誑誘走出): 반정 당일, 연산군을 모시고 있던 입직승지 윤장, 조계형, 이우 등이 연산군에게 반정 세력이 침입했으니 피하라고 거짓으로 권하여 궁궐 밖으로 달아나게 한 일을 가리킨다. 이는 임금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하고 기만한 행위로 비판받았다.
50. 물론(物論): 세상 사람들의 비평이나 여론.
51. 소기절 무시비(少氣節 無是非): 유순의 성품을 평가하는 말. 기개와 절개가 부족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리지 못한다는 다소 부정적인 평가이다. 주석 42 참조.
52. 치세(治世): 세상에 있음. 또는 세상을 다스림. 뻔뻔스럽게 세상에 나와 벼슬하고 있다는 자조적인 표현이다. 주석 43 참조.


원문:
己巳閏九月, 領議政柳洵罷。 洵起自布衣, 以文墨出身, 歷職淸顯, 無迕於世, 遂至台輔。 燕山之朝, 以首相, 專事唯諾, 及反正之後, 例加功臣之號。 自度被汚已甚, 亦無所建明, 而復事依違, 臺諫、侍從交章論罷, 亦不自牢讓。 至是因天變更論, 而洵亦固辭, 命罷之。【竝《陰崖雜記》。】

번역문:
기사년(1509) 윤9월에 영의정 유순이 파직되었다. 유순은 포의(布衣)⁵³에서 일어나 문묵(文墨)⁵⁴으로 출신(出身)하여, 청현(淸顯)⁵⁵한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세상에 거스름이 없어 마침내 태보(台輔)⁵⁶의 지위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之朝)에는 수상(首相)으로서 오로지 유약(唯諾)⁵⁷하기만 힘썼고, 반정 이후에는 관례에 따라 공신의 호(號)를 더하였다. 스스로 더럽혀짐(被汚)이 이미 심하다고 헤아려 또한 건명(建明)⁵⁸하는 바가 없었고, 다시 일을 처리함에 이리저리 눈치만 보며 분명하지 않자(依違)⁵⁹, 대간(臺諫)과 시종(侍從)⁶⁰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 파직을 논하였으나 또한 스스로 굳게 사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천변(天變)⁶¹을 이유로 다시 논의되자, 유순 또한 굳게 사양하였으므로 파직을 명하였다.【이상은 《음애잡기(陰崖雜記)》⁶²에서 인용】

주석:
53. 포의(布衣): 베옷. 벼슬하지 않은 선비 또는 평민을 가리킨다.
54. 문묵(文墨): 글과 먹. 학문 또는 문과(文科)를 의미한다.
55. 청현(淸顯): 청요직(淸要職)과 현직(顯職). 맑고 중요한 직책과 드러나고 높은 직책을 아울러 이른다.
56. 태보(台輔): 삼공(三公)과 같은 최고위 재상직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영의정을 의미한다.
57. 유낙(唯諾): 예하고 응함. 윗사람의 말에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산군의 폭정에도 유순이 영의정으로서 제대로 간언하거나 저지하지 못하고 순응하기만 했음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58. 건명(建明): 의견이나 사실을 분명하게 세워 밝힘.
59. 의위(依違):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모호하게 행동함.
60. 대간(臺諫), 시종(侍從): 대간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을, 시종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경연관, 승지 등을 가리킨다. 이들이 유순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파직을 주장했다.
61. 천변(天變):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괴. 지진, 홍수, 가뭄, 혜성 출현 등. 당시에는 천변을 임금의 부덕(不德)이나 정치적 실정(失政)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여겨, 재변이 일어나면 재상 등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경우가 있었다.
62. 《음애잡기(陰崖雜記)》: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가 지은 필기잡록. 중종 대의 정치, 사회, 인물 등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이 글은 유순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륙(李陸)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陸
字放翁, 號靑坡居士。 原之孫。 正統戊午生。 世祖五年己卯生進。 甲申, 登魁科。 丙戌, 參拔英試, 又擢重試。 歷藝文應敎¹、大司成、慶尙・江原觀察使、大司憲。 戊午卒, 年六十一。

번역문:
이륙(李陸)
자는 방옹(放翁)이고, 호는 청파거사(靑坡居士)이다. 이원(李原)¹의 손자이다. 정통(正統) 무오년(戊午年, 1438)²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5년 기묘년(1459)에 생원진사시(生進)³에 합격하였다. 갑신년(1464)⁴에 문과(文科)에 장원(魁)으로 급제하였다. 병술년(1466)⁵에 발영시(拔英試)⁶에 참여하였고, 또 중시(重試)⁷에 발탁되었다. 예문관 응교(藝文應敎)⁸, 대사성(大司成)⁹, 경상도·강원도 관찰사(觀察使)¹⁰, 대사헌(大司憲)¹¹을 역임하였다. 무오년(1498)¹²에 졸(卒)하니, 나이 61세였다.

주석:

  1. 이원(李原, 1368-1429):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재(容齋). 태종, 세종 대에 걸쳐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했다.
  2. 정통(正統) 무오년(戊午年): 1438년.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인 정통 3년에 해당한다.
  3. 생진(生進):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사마시(司馬試) 합격자를 가리킨다.
  4. 갑신년(甲申年): 1464년 (세조 10년).
  5. 병술년(丙戌年): 1466년 (세조 12년).
  6. 발영시(拔英試): 세조 12년(1466)에 시행된 문과 중시의 별칭.
  7.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보이던 시험.
  8. [주-D001] 敎 : 저본(底本)에는 “교(校)”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청파집(靑坡集)・청파비명(靑坡碑銘)》, 《경국대전(經國大典)・이전(吏典)・경관직(京官職)》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예문관 응교(藝文應敎)가 올바른 관직명이다. 응교는 종4품 관직이다.
  9.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10.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11.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12.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 이 해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원문:
公少時倜儻不羈, 年二十二中生進, 擺棄家事, 南入智異山, 三年不出, 聞風從游者雲集。 人有誚其不習擧子業者, 公曰: “士之榮悴有命, 豈可留心於雕篆小技?” 遂探子史諸書, 矻矻忘倦。 甲申, 世祖幸溫陽取士, 公自嶺南至, 揚言於衆曰: “不占巍科, 誓不入洛。” 果擢第一, 名聞騰翥。

번역문:
공(公)은 젊었을 때 뜻이 높고 기개가 있어 거리낌이 없었으며(倜儻不羈)¹³, 나이 22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일(家事)을 내던지고 남쪽으로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 나오지 않으니, 풍모(風)를 듣고 따라 노니는(從游)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그가 과거 공부(擧子業)¹⁴를 익히지 않는다고 꾸짖자(誚), 공이 말하였다. “선비의 영화로움과 쇠락함(榮悴)은 천명(命)이 있는 것이니, 어찌 조각하고 새기는(雕篆)¹⁵ 작은 기예에 마음을 둘 수 있겠는가?” 마침내 자사(子史)¹⁶의 여러 서적들을 탐구하며 부지런히 힘써(矻矻) 권태로움을 잊었다. 갑신년(1464)에 세조께서 온양(溫陽)에 행차하여 선비를 뽑을 때, 공이 영남(嶺南)에서부터 와서 여러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하였다. “높은 과거(巍科)¹⁷에 차지하지 못하면, 맹세코 낙양(洛陽)¹⁸에 들어가지 않겠다.” 과연 제1인자로 뽑히니, 명성(名聞)이 치솟아 올랐다(騰翥).

주석:
13. 척당불기(倜儻不羈): 재주와 기개가 뛰어나고 활달하여 세속의 속박을 받지 않음.
14. 거자업(擧子業):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공부.
15. 조전(雕篆): 글자를 새기거나 조각하는 것. 여기서는 시문(詩文)의 자구를 다듬는 기교나 과거 답안 작성 기술 등 형식적인 기예를 비유하는 말이다.
16. 자사(子史):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과 역사서(歷史書). 경서(經書) 이외의 광범위한 학문 분야를 의미한다.
17. 외과(巍科): 높고 뛰어난 과거 시험. 문과(文科) 급제를 미화하여 이르는 말이다.
18. 낙양(洛陽): 중국의 옛 수도 이름. 여기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漢陽)을 가리킨다.


원문:
丁酉夏, 出爲忠淸觀察使。 時公之父守槐山郡, 有旨宣召曰: “父爲郡守, 子爲監司, 交代之際, 授受甚難, 其速上來。” 時論榮之。

번역문:
정유년(1477)¹⁹ 여름에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공의 아버지 이인(李堙)이 괴산군수(槐山郡守)로 있었는데, 임금의 분부(旨)를 내려 불러 말하였다. “아버지는 군수(郡守)가 되고 아들은 감사(監司)²⁰가 되었으니, 교대(交代)할 즈음에 주고받음(授受)²¹이 매우 어려울 것이니, 속히 올라오라.” 당시 여론(時論)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주석:
19. 정유년(丁酉年): 1477년 (성종 8년).
20. 감사(監司):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21. 수수(授受): 직무를 인계하고 인수하는 것. 부자(父子) 사이에 관찰사와 군수로서 공무를 인수인계하는 것이 공정성 시비를 낳거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성종이 이륙의 부친을 소환한 것이다. 이는 부자간의 예우를 고려한 조치이기도 하다.


원문:
甲寅, 成宗賓天, 公爲請諡承襲副使。 公有宿疾, 親戚皆以跋涉之苦止之, 公曰: “人臣分義, 當夷險一節。 況値國之大事, 其敢顧一己之私?” 遂行。 禮部問本朝世系, 人無對者, 公歷敍本末無少差, 華人歎服, 以爲識事宰相。

번역문:
갑인년(1494)²²에 성종(成宗)께서 승하(賓天)²³하시자, 공은 시호(諡號)를 청하고 세자(世子)의 즉위를 허락받는(承襲)²⁴ 부사(副使)가 되었다. 공에게 숙질(宿疾)²⁵이 있었으므로 친척들이 모두 멀고 험한 길을 가는(跋涉) 고통을 이유로 말렸으나, 공이 말하였다. “남의 신하 된 분의(分義)는 마땅히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나(夷險) 한결같아야(一節) 한다. 하물며 나라의 큰일을 만났음에, 어찌 감히 한 몸의 사사로움(一己之私)을 돌아보겠는가?” 마침내 길을 떠났다. (중국) 예부(禮部)²⁶에서 본조(本朝)의 세계(世系)²⁷에 대해 묻자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그 본말(本末)을 차례로 서술함에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 화인(華人)²⁸들이 감탄하고 탄복하여 식견 있는 재상(識事宰相)이라고 여겼다.

주석:
22.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년).
23. 빈천(賓天): 임금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24. 청시승습(請諡承襲):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청하고 왕위 계승을 승인받는 것.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왕의 죽음을 알리고 새 왕의 즉위에 대한 승인(고명, 誥命)과 죽은 왕의 시호를 청했다. 이륙은 이때 부사(副使)로 북경에 갔다.
25. 숙질(宿疾): 오랫동안 낫지 않는 병. 고질병.
26. 예부(禮部): 중국 역대 왕조의 중앙 행정기관인 육부(六部)의 하나. 예악(禮樂), 제사(祭祀), 교육, 외교 등을 담당했다.
27. 세계(世系): 조상 때부터 대대로 이어 내려온 계통. 조선 왕실의 계보를 물은 것이다.
28. 화인(華人): 중국인을 가리킨다.


원문:
公天性明敏, 端嚴正直, 一心奉國, 終始不渝。 博通群書, 尤長於史, 所著有《靑坡劇談》。【竝虛白成俔撰碑。】

번역문:
공은 천성(天性)이 명민(明敏)하고 단정하고 엄하며 정직(端嚴正直)하였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奉國)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終始不渝). 여러 서적에 널리 통달하였고(博通群書) 특히 역사(史)에 뛰어났으며, 저술(所著)로는 《청파극담(靑坡劇談)》²⁹이 있다.【이상은 허백(虛白) 성현(成俔)³⁰이 지은 비문(碑)에서 인용】

주석:
29. 《청파극담(靑坡劇談)》: 이륙이 지은 설화집. 고려 말부터 조선 초, 중기에 걸친 인물들의 일화와 기이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30. 허백(虛白) 성현(成俔, 1439-1504):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음악가. 호는 허백당(虛白堂), 부휴자(浮休子) 등. 이륙과 동시대 인물이다. 《용재총화(慵齋叢話)》의 저자로 유명하다.

 

 

허침(許琛)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許琛【文貞公。】
字獻之, 琮之弟。 正統甲子生。 世祖八年壬午進士, 成宗六年乙未登第。 賜暇湖堂, 歷校理、弼善、直提學、承旨、全羅・慶尙兩道觀察使、大司憲、吏曹判書。 燕山甲子, 拜右議政。 乙丑卒, 年六十二。

번역문:
허침(許琛)【문정공(文貞公)¹이다.】
자는 헌지(獻之)이고, 허종(許琮)²의 아우이다. 정통(正統) 갑자년(甲子年, 1444)³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8년 임오년(1462)에 진사(進士)⁴가 되었고, 성종(成宗) 6년 을미년(1475)에 문과에 급제(登第)하였다. 호당(湖堂)⁵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⁶하였고, 교리(校理)⁷, 필선(弼善)⁸, 직제학(直提學)⁹, 승지(承旨)¹⁰, 전라도·경상도 양도(兩道)의 관찰사(觀察使)¹¹, 대사헌(大司憲)¹², 이조 판서(吏曹判書)¹³를 역임하였다.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¹⁴에 우의정(右議政)¹⁵에 제수되었다. 을축년(1505)¹⁶에 졸(卒)하니, 나이 62세였다.

주석:

  1. 문정공(文貞公): 허침의 시호(諡號)이다.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절개를 지킴(淸白守節) 등을 의미한다.
  2. 허종(許琮, 1434-1494): 허침의 형. 자는 종경(宗卿), 호는 상우당(尙友堂). 시호는 충정(忠貞). 성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3. 정통(正統) 갑자년(甲子年): 1444년.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인 정통 9년에 해당한다.
  4. 진사(進士):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 합격자.
  5. 호당(湖堂): 조선 시대 젊은 문신들이 임금의 명으로 휴가를 얻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곳. 주로 동호(東湖, 현재의 옥수동 부근) 주변에 설치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독서당(讀書堂)이라고도 한다.
  6.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호당에서 이루어졌다.
  7. 교리(校理): 홍문관(弘文館)의 정5품 관직. 또는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는 교서관(校書館)의 정5품 관직을 가리키기도 한다. 문맥상 홍문관 교리로 보인다.
  8. 필선(弼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4품 관직.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9.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하관.
  10.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11.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12.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13. 이조 판서(吏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총괄했다.
  14.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 이 해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난 해이다.
  15. 우의정(右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재상.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자리이다.
  16. 을축년(乙丑年): 1505년 (연산군 11년).

원문:
公幼而聰穎端秀, 迥異凡兒。 旣長就學, 博聞强記, 經史子集, 過目未嘗忘, 大爲時輩所推服。 與兄忠貞公琮齊名, 忠貞公奇偉卓犖, 公則溫粹精敏, 雖所造不同, 而士林翕然皆景仰, 莫能相上下焉。

번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단정하며 빼어나(聰穎端秀) 보통 아이들과 크게 달랐다. 이미 자라 학문에 나아가서는, 널리 듣고 잘 기억하여(博聞强記)¹⁷ 경(經)·사(史)·자(子)·집(集)¹⁸을 한 번 보면 일찍이 잊지 않으니, 당시 동배(時輩)들에게 크게 추앙받고 탄복받았다. 형인 충정공(忠貞公) 허종(琮)과 나란히 명성이 있었는데, 충정공은 기이하고 위대하며 탁월하고 걸출(奇偉卓犖)하였고, 공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정밀하고 민첩(溫粹精敏)하여, 비록 이룬 바(所造)¹⁹는 같지 않았으나 사림(士林)²⁰이 모두 일치하여 경모하고 우러러보며(景仰)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주석:
17. 박문강기(博聞强記):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남.
18. 경사자집(經史子集): 중국 전통 시대의 서적 분류법인 사부(四部) 분류. 경부(經部, 유교 경전), 사부(史部, 역사서), 자부(子部, 제자백가), 집부(集部, 문집)를 통칭한다. 모든 분야의 학문에 통달했음을 의미한다.
19. 소조(所造): 학문이나 인격 등에서 이룬 경지나 수준.
20. 사림(士林): 선비 사회. 또는 성리학을 신봉하는 학자, 관료 집단을 가리킨다.


원문:
時成廟銳意文治, 重文學之士, 思有以作成之, 乃敎曰: “業不專不成, 宜如世宗朝故事, 其擇文臣, 賜暇于山房, 以專其業。” 遂命公及蔡壽、權健、曺偉、兪好仁、楊熙止等就藏義寺講習, 供給之具, 錫賚之豐, 出於尋常, 以示寵渥之隆。 未幾, 更命入侍經幄, 朝夕論思, 分番迭休, 休日則肄業如故。 如是者數年, 天眷尤注, 士林皆榮之, 以比登瀛州。

번역문:
이때 성종(成廟)²¹께서 문치(文治)²²에 뜻을 두어 문학(文學)의 선비들을 중히 여기시고, 그들을 육성(作成)할 방도를 생각하여 마침내 교지(敎)를 내려 말씀하셨다. “학업(業)은 전념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못하니, 마땅히 세종조(世宗朝)의 고사(故事)²³와 같이 하여, 문신(文臣)들을 뽑아 산방(山房)²⁴에서 휴가를 주어 그 학업에 전념하게 하라.” 마침내 공 및 채수(蔡壽), 권건(權健), 조위(曺偉), 유호인(兪好仁), 양희지(楊熙止) 등에게 명하여 장의사(藏義寺)²⁵로 나아가 강습(講習)하게 하였는데, 공급(供給)하는 물품과 하사하는 상(錫賚)의 풍성함이 보통 수준을 넘어서(出於尋常) 총애(寵渥)의 융숭함을 보이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명하여 경악(經幄)²⁶에 입시(入侍)하여 아침저녁으로 학문을 강론하고 생각하게(論思) 하고, 번(番)을 나누어 교대로 쉬게 하되, 쉬는 날에는 예전과 같이 학업을 익히게(肄業) 하였다. 이와 같기를 수년 동안 하니, 임금의 보살핌(天眷)이 더욱 두터웠고, 사림(士林)이 모두 이를 영광스럽게 여겨 영주(瀛州)²⁷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주석:
21. 성공(成廟): 성종(成宗)을 가리킨다. '廟'는 묘호(廟號)를 의미한다.
22. 문치(文治): 무력(武力)이 아닌 학문과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다스림. 성종은 조선 초기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23. 세종조 고사(世宗朝故事): 세종(世宗) 때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학자들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시키는 등 학문을 장려했던 일을 가리킨다.
24. 산방(山房): 산속의 집. 여기서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장소인 호당(湖堂)을 가리킨다.
25. 장의사(藏義寺): 서울 북교(北郊)에 있던 절. 성종 6년(1475)에 이곳을 사가독서의 장소로 삼았다.
26. 경악(經幄): 경연(經筵)의 자리. 임금과 신하가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강론하고 국정(國政)을 논의하던 자리이다.
27. 영주(瀛州): 전설상의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로, 신선이 사는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여기서는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 또는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것을 비유한다. 한(漢)나라 때 학사(學士)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던 곳을 영주라고 칭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원문:
己亥春, 特拜驪州判官, 有宰相啓曰: “某文學行誼, 當常在侍從、獻納之地, 不宜補外。” 成廟曰: “予豈不知? 但爲此者, 欲暫屈試治民耳。” 請之益固, 乃命遞。

번역문:
기해년(1479)²⁸ 봄에 특별히 여주 판관(驪州判官)²⁹에 제수되자, 어떤 재상(宰相)이 아뢰었다. “아무개(某)³⁰는 문학(文學)과 행의(行誼)³¹가 있으니 마땅히 항상 시종(侍從)³²과 헌납(獻納)³³의 자리에 있어야지, 외직(外職)에 보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성종께서 말씀하셨다. “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이렇게 하는 것은 잠시 지위를 낮추어(暫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시험해보고자 할 뿐이다.” 그 재상이 더욱 굳게 청하자, 마침내 체직(遞)³⁴시키도록 명하였다.

주석:
28. 기해년(己亥年): 1479년 (성종 10년).
29. 여주 판관(驪州判官): 여주목(驪州牧)의 버금 벼슬. 종5품. 중앙의 촉망받는 젊은 관료를 지방관으로 보내는 것은 수령(守令) 경험을 쌓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당시에는 좌천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30. 모(某): 아무개. 여기서는 허침을 가리킨다.
31. 행의(行誼): 품행과 의리.
32. 시종(侍從):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등의 관원을 가리킨다.
33. 헌납(獻納): 사간원(司諫院)의 정5품 관직. 간쟁(諫諍)을 담당했다. 시종과 헌납은 모두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다.
34. 체(遞): 관직을 갈아 바꿈. 여기서는 여주 판관에서 다른 직책으로 옮기게 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癸卯春, 始設侍講院, 遴擇朝臣之有德行、文學兼備者充之, 乃以公爲弼善。 時公所交游如申從濩、權健、曺偉、兪好仁、金訢等, 皆以文章見重於世, 上尤眷注, 命公及從濩等, 每於歲終, 繕寫一年所著詩文以進, 以備淸燕之覽, 儒林藉藉, 以爲曠世之榮。

번역문:
계묘년(1483)³⁵ 봄에 처음으로 시강원(侍講院)³⁶을 설치하고, 조정 신하 중 덕행(德行)과 문학(文學)을 겸비(兼備)한 자를 가려 뽑아(遴擇) 채우면서, 이에 공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이때 공이 교유(交游)하던 신종호(申從濩), 권건(權健), 조위(曺偉), 유호인(兪好仁), 김흔(金訢) 등은 모두 문장(文章)으로 세상의 중시(見重)를 받았는데, 상(上)께서 더욱 돌보아 주목하시어(眷注), 공 및 신종호 등에게 명하여 매년 연말(歲終)에 한 해 동안 지은 시문(詩文)을 정성껏 써서(繕寫) 올려 청연(淸燕)³⁷의 때에 보실 것에 대비하게 하시니, 유림(儒林)³⁸이 자자하게(藉藉)³⁹ 이야기하며 보기 드문(曠世) 영광이라고 여겼다.

주석:
35.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 14년).
36. 시강원(侍講院):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조선 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
37. 청연(淸燕): 맑고 한가함. 임금이 정무(政務)를 보지 않고 한가롭게 쉬는 시간을 의미한다.
38. 유림(儒林): 유학자들의 사회. 선비 사회.
39. 자자(藉藉):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떠들썩함.


원문:
壬子夏, 特授嘉善, 拜全羅道觀察使。 冬, 憲府啓曰: “爲監司者, 徵斂郡縣, 以應人求者或有之, 請禁之。” 成廟曰: “如某廉正, 必不爲此。”

번역문:
임자년(1492)⁴⁰ 여름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⁴¹를 제수받고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사헌부(憲府)⁴²에서 아뢰었다. “감사(監司)된 자가 군현(郡縣)에서 재물을 거두어들여(徵斂) 남의 요구에 응하는 자가 혹 있으니, 이를 금하기를 청합니다.” 성종께서 말씀하셨다. “아무개와 같이 청렴하고 바른(廉正)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러지 않을 것이다.”

주석:
40. 임자년(壬子年): 1492년 (성종 23년).
41.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명.
42. 헌부(憲府): 사헌부(司憲府).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


원문:
拜大司憲, 遇事敢言, 朝綱頓肅。 然持心平正, 不容私意於其間。 故人愈信服, 而罔有怨者, 皆以爲: “近來任風憲得體, 無有如公者。”

번역문: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자 일을 당하면 감히 말하여 조정의 기강(朝綱)이 갑자기 엄숙해졌다. 그러나 마음가짐을 공평하고 바르게 하여(持心平正)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私意)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더욱 신뢰하고 복종하였으며 원망하는 자가 없었고, 모두 말하였다. “근래에 풍헌(風憲)⁴³의 임무를 맡아 체통에 맞게(得體) 한 사람으로는 공과 같은 이가 없었다.”

주석:
43. 풍헌(風憲):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일, 또는 그 관직. 주로 사헌부 관원을 가리킨다.


원문:
公赴朝, 行李蕭然。 帶行通事等相語曰: “宰相之心, 我皆知⁴⁴之, 未見有如公之淸者。” 至大都, 牙儈細人, 不得貿賣, 皆笑公爲貧宰相。 將還, 遼東大人疑貿弓角而歸, 密令搜索, 公謂其人曰: “此出於聖旨乎? 抑大人所自爲乎? 弊邦敬事皇朝, 出於至誠, 故朝廷亦待之無外, 異於他國。 今疑而欲搜行橐, 於外人視聽何如? 恐非⁴⁵所以示天下也。 且我國前承聖勅, 屢征野人, 因此搆怨, 爲我世讎。 若聞此事, 則亦必指笑, 以謂: ‘朝鮮麗附上國, 而反爲所疑。’ 此亦無乃有妨於事體乎?” 遼東大人聞公語, 愧悟曰: “宰相言是也。 我不及此。” 遂止。

번역문:
공이 (중국에) 조회하러 갈(赴朝) 때, 행장(行李)⁴⁶이 쓸쓸하였다(蕭然). 데리고 간 통사(通事)⁴⁷ 등이 서로 말하였다. “재상들의 마음을 내가 모두 아는데, 공처럼 청렴한 분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 대도(大都)⁴⁸에 이르자 아쾌(牙儈)⁴⁹와 같은 자들이 매매(貿賣)하지 못하게 되자, 모두 공을 비웃어 가난한 재상(貧宰相)이라고 하였다. 장차 돌아오려 할 때, 요동(遼東)의 대인(大人)⁵⁰이 활과 뿔(弓角)⁵¹을 몰래 사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비밀리에 수색(搜索)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것이 성지(聖旨)⁵²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대인께서 스스로 하시는 것입니까? 폐방(弊邦)⁵³이 황조(皇朝)⁵⁴를 공경하여 섬김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조정에서도 또한 외방(外方)으로 대하지 않고(無外)⁵⁵ 다른 나라와 다르게 대우합니다. 지금 의심하여 행장(行橐)⁵⁶을 수색하고자 하니, 외인(外人)들의 시청(視聽)에 어떻겠습니까? 천하에 (위엄과 신의를) 보이는 방도가 아닐까 염려됩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전에 성칙(聖勅)⁵⁷을 받들어 여러 차례 야인(野人)⁵⁸을 정벌하여 이로 인해 원한(搆怨)을 맺어 우리의 대대로 원수(世讎)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 일을 듣는다면 또한 반드시 손가락질하며 비웃으며 말하기를 ‘조선이 상국(上國)에 붙좇았는데 도리어 의심을 받는다’고 할 것이니, 이 또한 사체(事體)⁵⁹에 방해가 있지 않겠습니까?” 요동 대인이 공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깨닫고(愧悟) 말하였다. “재상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여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만두었다.

주석:
44. [주-D001] 通 : 저본(底本)에는 “개(皆)”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모재집(慕齋集)・허문정공행장(許文貞公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개지지(皆知之)'는 '모두 안다'는 뜻으로 문맥상 자연스럽다.
45. [주-D002] 非 : 저본(底本)에는 “소(所)”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모재집・허문정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비소이시천하(非所以示天下)'는 '천하에 보이는 방도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문맥상 자연스럽다. '소소이시천하(所所以示天下)'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46. 행리(行李): 여행에 필요한 물품. 여장(旅裝).
47. 통사(通事): 통역관(通譯官). 사신 행차를 수행했다.
48. 대도(大都): 큰 도읍. 명(明)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49. 아쾌(牙儈): 물건을 중개하는 거간꾼. 이들이 허침이 청렴하여 뇌물을 주거나 부정한 거래를 할 수 없음을 알고 접근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50. 대인(大人): 높은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요동 지방의 고위 관리를 가리킨다.
51. 궁각(弓角): 활과 활을 만드는 데 쓰는 뿔. 당시 명나라는 군수물자인 활과 뿔의 유출을 엄격히 통제했다.
52. 성지(聖旨): 황제의 명령.
53. 폐방(弊邦): 자기 나라를 낮추어 부르는 말. 조선을 가리킨다.
54. 황조(皇朝): 황제의 조정.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55. 무외(無外): 외방(外方)으로 취급하지 않음. 즉, 가깝게 대우함을 의미한다.
56. 행탁(行橐): 여행용 짐 꾸러미.
57. 성칙(聖勅): 황제의 칙서(勅書).
58. 야인(野人): 주로 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킨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여러 차례 여진족 정벌에 나섰다.
59. 사체(事體): 일의 체면이나 도리. 국가 간의 관계나 위신을 의미한다.


원문:
己未, 拜戶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都摠府副摠管。 知成均館事洪貴達啓曰: “學校, 師表之任, 所係重大。 請專委某以成均之事, 以責作成之效。” 燕山曰: “戶曹掌賦, 摠府典禁兵, 所係尤重, 不可人人而授之。 其遞成均同知。”

번역문:
기미년(1499)⁶⁰에 호조 참판(戶曹參判)⁶¹,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⁶²·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⁶³에 제수되었다.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⁶⁴ 홍귀달(洪貴達)⁶⁵이 아뢰었다. “학교는 사표(師表)의 임무이니, 관계된 바가 중대합니다. 청컨대 아무개에게 성균관의 일을 오로지 맡겨 인재를 육성(作成)하는 효과를 책임지게 하소서.” 연산군이 말하였다. “호조(戶曹)는 부세(賦)를 관장하고 총부(摠府)는 금병(禁兵)⁶⁶을 맡으니,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하여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 성균관 동지(同知)의 직책을 체차(遞)하라.”

주석:
60. 기미년(己未年): 1499년 (연산군 5년).
61. 호조 참판(戶曹參判): 육조 중 하나인 호조(戶曹)의 버금 벼슬. 종2품. 국가 재정을 담당했다.
62.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성균관(成均館)의 종2품 관직. 성균관 운영에 참여했다.
63.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종2품 관직. 군무(軍務)를 관장했다.
64.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성균관의 정2품 관직. 성균관의 운영을 총괄하는 책임자 중 하나이다. 다른 관직을 가진 사람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65.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조선 전기의 문신.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66. 금병(禁兵): 궁궐을 지키는 군대. 오위도총부는 오위(五衛)의 군무를 총괄하는 기관이었다. 연산군은 허침이 재정과 군사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니,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직책까지 겸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동지성균관사 직책에서 해임시킨 것이다.


원문:
特拜吏曹判書曰: “用人以賢, 古今通⁶⁷論。 特超一資, 以行吏判之任。” 命下之日, 朝野相慶, 以爲得賢判書。 公廉方公正, 復有藻鑑, 掄選注擬, 咸適其才。 人莫敢干以私, 亦無怨其屈滯者, 門庭蕭然, 無異平昔。 前後掌銓衡者, 物論翕然, 皆以公爲首。

번역문:
특별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하며 말하였다. “사람을 등용함에 현명함을 따르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논의(通論)이다. 특별히 한 자급(一資)⁶⁸을 뛰어넘어 이조 판서의 임무를 행하게 하라.” 명이 내려진 날, 조야(朝野)⁶⁹가 서로 경축하며 현명한 판서(判書)를 얻었다고 여겼다. 공은 청렴하고 방정하며 공평하고 정직(廉方公正)하였고, 다시 조감(藻鑑)⁷⁰이 있어 사람을 뽑아 관직 후보로 올림(掄選注擬)⁷¹에 모두 그 재능에 적합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움으로 간여(干)하지 못하였고, 또한 그 억울하게 막힘(屈滯)을 원망하는 자도 없었으며, 문정(門庭)이 쓸쓸하여(蕭然)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이전과 이후에 전형(銓衡)⁷²을 맡았던 자들 중에서 물론(物論)이 한결같이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주석:
67. [주-D001] 通 : 저본(底本)에는 “개(皆)”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모재집(慕齋集)・허문정공행장(許文貞公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고금통론(古今通論)'은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논의'라는 뜻으로 문맥상 자연스럽다. '고금개론(古今皆論)'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68. 일자(一資): 한 등급의 자급(資級). 허침이 당시 이조 판서(정2품)보다 낮은 품계에 있었으나, 특별히 승진시켜 임명했음을 의미한다.
69.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 온 나라를 의미한다.
70. 조감(藻鑑): 인물을 식별하는 능력. 문장의 아름다움을 감식하는 안목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을 의미한다.
71. 윤선주의(掄選注擬): 인재를 골라 뽑아 적합한 관직의 후보자로 기록하여 올리는 것. 이조 전랑(吏曹銓郎)의 주요 임무였으나, 이조 판서가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
72. 전형(銓衡): 저울(衡)로 무게를 달 듯(銓) 인재를 공정하게 헤아려 등용하는 일. 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인사권을 가리킨다.


원문:
時三公缺位, 滿朝想望。 一日, 燕山命召右議政柳洵等議置相, 仍傳曰: “三公之任, 燮理陰陽, 所係非輕。 以一家言之, 屋雖傾危, 棟梁若良, 則可以久存。 君雖庸暗, 苟能相臣執德, 輔導匡救, 則可以長久而不亡。 今欲以某作相, 謀諸卿等, 而卿等亦以爲然, 是臣主之意皆協卽, 當拜之也。” 洵等啓曰: “臣等備員而已, 如某名望所在, 今日卜相得人, 臣等不勝大賀。” 燕山卽命召公, 敎曰: “朝臣非不多, 擢用卿者, 予意有在, 卿其知之。” 公辭曰: “夫所以擢用, 必才德特出而後可以當之。 臣於朝臣之中, 德望最下, 庸劣無似, 今蒙拔擢, 不次已甚, 請辭。” 燕山曰: “雖小官, 必人器相當而後可授也。 況台鼎之任乎? 物論皆以卿爲可, 故授之也。” 公又辭曰: “朝廷官爵, 當以次遷轉。 臣觀祖宗⁷³以來, 未有二品陞三公者。 三公之職, 所任重大, 以臣庸才, 恐不能堪。 臣之所以固辭者, 出於誠心, 非爲虛文也。” 燕山曰: “古云: ‘爵人於朝, 與衆⁷⁴共之。’ 苟可用也, 何計資級? 擢卿爲相, 衆論所歸, 其無辭, 但以赤心輔予一人。” 仍賜犀帶一腰。

번역문:
이때 삼공(三公)⁷⁴의 자리가 비어 있어, 온 조정(滿朝)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우의정 유순(柳洵) 등을 불러 재상(相)을 임명하는 것을 의논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전교(傳)하였다. “삼공의 임무는 음양(陰陽)을 조화롭게 다스리는(燮理) 것이니,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다. 한 집안으로 말하자면, 집이 비록 기울고 위태로워도 동량(棟梁)⁷⁵이 만약 좋다면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다. 임금이 비록 용렬하고 어두워도(庸暗), 만약 재상(相臣)이 덕(德)을 굳게 지켜 보좌하고 이끌며 바로잡아 구원(輔導匡救)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아무개(某)를 재상으로 삼고자 하여 경(卿) 등과 상의하는데, 경 등 또한 그렇다고 여기니, 이는 신하와 임금의 뜻이 모두 합치된 즉, 마땅히 제수해야 할 것이다.” 유순 등이 아뢰었다. “신 등은 인원수만 채울(備員) 뿐입니다. 아무개와 같이 명망(名望)이 있는 분이라면, 오늘 재상을 점지하여(卜相) 사람을 얻었으니, 신 등은 큰 하례(大賀)를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연산군이 즉시 공을 부르도록 명하고, 교지(敎)를 내렸다. “조정 신하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경을 발탁하여 쓰는 것은 나의 뜻이 있는 바이니, 경은 그것을 알라.” 공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무릇 발탁하여 쓰는 까닭은 반드시 재주와 덕(才德)이 특별히 뛰어난 뒤에야 그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신은 조정 신하들 중에서 덕망(德望)이 가장 낮고 용렬(庸劣)하여 보잘것없는데, 지금 발탁됨을 입었으니 차례를 뛰어넘음(不次)이 이미 심합니다. 사양하기를 청합니다.” 연산군이 말하였다. “비록 작은 벼슬이라도 반드시 사람과 그릇(人器)이 서로 맞은 뒤에야 제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태정(台鼎)⁷⁶의 임무이겠는가? 물론(物論)이 모두 경이 옳다고 여기므로 제수하는 것이다.” 공이 또 사양하며 말하였다. “조정의 관작(官爵)은 마땅히 차례대로 옮겨가야(遷轉) 합니다. 신이 보건대 조종조(祖宗朝)⁷⁷ 이래로 2품에서 삼공으로 승진한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⁷⁸. 삼공의 직책은 맡은 바가 중대하니, 신의 용렬한 재주로는 감당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신이 굳이 사양하는 까닭은 진실한 마음(誠心)에서 나온 것이지, 헛된 형식(虛文)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연산군이 말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조정에서 벼슬을 줌에는 여러 사람(士)⁷⁹과 함께한다’고 하였다. 진실로 쓸 만하다면 어찌 자급(資級)을 따지겠는가? 경을 발탁하여 재상으로 삼는 것은 중론(衆論)이 돌아가는 바이니, 사양하지 말고 다만 충성된 마음(赤心)으로 나 한 사람을 보좌하라.” 이어서 서대(犀帶)⁸⁰ 한 띠를 하사하였다.

주석:
73. [주-D003] 宗 : 《모재집・허문정공행장》에는 뒤에 “조(朝)”가 더 있다. '조종조(祖宗朝)'는 역대 임금들의 시대를 의미한다.
74. [주-D004] 衆 : 《예기(禮記)・왕제(王制)》에는 “사(士)”로 되어 있다. “爵人於朝 與士共之(조정에서 사람에게 벼슬을 줌에는 선비들과 함께한다)”가 원문이다. 벼슬을 제수할 때는 공론을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75.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한다. 국가의 최고위 재상직이다.
76. 동량(棟梁): 마룻대와 들보. 집의 가장 중요한 구조물로,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인재를 비유한다.
77. 태정(台鼎): 삼공(三公)의 별칭. 정(鼎)은 발이 셋 달린 솥으로, 삼공의 지위를 상징했다.
78. 조종조(祖宗朝): 역대 임금들의 시대. 주석 73 참조.
79. 2품에서 삼공(정1품)으로 승진한 전례가 없다는 허침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사례가 있었다. 이는 허침이 극구 사양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일 수 있다.
80. 사(士): 《예기》 원문에는 '士'로 되어 있어 '선비'를 의미한다. 연산군은 이를 '衆'으로 바꾸어 '여러 사람' 또는 '대중'의 뜻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결정이 공론에 부합함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주석 74 참조.
81. 서대(犀帶): 무소뿔로 만든 허리띠 장식. 고위 관료가 착용하던 사치품이다.


원문:
乙丑春, 患風疾, 漸至彌留。 燕山遣內侍金子猿⁸¹問候曰: “三公之任, 不可輕遞, 望速調保, 以匡不逮。” 因賜內廚珍羞甚優。 公對曰: “小臣無似, 特蒙上德, 待罪三事, 常欲竭犬馬之力, 庶報萬一。 今至於斯, 恐未復睹天顔也。” 公於病中勅子弟曰: “我疾定不起矣。 然年踰六十, 位登三事, 固無遺憾矣。 平生雖蒙上恩, 得至於此, 無勳業可記, 愼勿樹碑。 喪事務遵儉約, 勿用豐侈以重余過。 生必有死, 理所必至, 如斯而已。 爾輩亦無慟也。” 疾革, 妻子哭泣, 公聞而止之曰: “汝輩不讀《家禮》⁸²耶⁸³?” 醫來診脈曰: “六脈俱順。” 公曰: “脈順乎? 予不喜也, 惟欲其速絶耳。” 遂不進藥, 略無留人世之意, 蓋憂時事而然也。

번역문:
을축년(1505) 봄에 풍질(風疾)⁸⁴을 앓아 점점 위독(彌留)⁸⁵한 지경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내시(內侍) 김자원(金子猿)⁸⁶을 보내 문후(問候)하며 말하였다. “삼공의 임무는 가벼이 체직시킬 수 없으니, 속히 조리하고 보전(調保)하여 나의 부족함(不逮)을 바로잡아주기를(匡) 바란다.” 이어서 내주(內廚)⁸⁷의 진귀한 음식(珍羞)을 매우 후하게 하사하였다. 공이 대답하였다. “소신(小臣)이 보잘것없는데 특별히 상(上)의 덕(德)을 입어 삼사(三事)⁸⁸의 자리에 있으면서(待罪)⁸⁹, 항상 견마지로(犬馬之勞)⁹⁰를 다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천안(天顔)⁹¹을 뵙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공이 병중에 자제(子弟)들에게 경계하여(勅) 말하였다. “나의 병은 반드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60을 넘었고 지위가 삼사(三事)에 올랐으니, 진실로 유감(遺憾)이 없다. 평생 비록 임금의 은혜를 입어 여기에 이르렀으나 기록할 만한 훈업(勳業)이 없으니, 삼가 비석(碑)을 세우지 말라. 상사(喪事)는 반드시 검약(儉約)을 따르고, 풍성하고 사치스럽게(豐侈) 하여 나의 허물(過)을 무겁게 하지 말라.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은 이치(理)가 반드시 이르는 바이니, 이와 같을 뿐이다. 너희들도 또한 통곡(慟)하지 말라.” 병이 위독해지자 처자(妻子)가 곡하고 우니, 공이 듣고 말리며 말하였다. “너희들은 《가례(家禮)》를 읽지 않았느냐⁹²?” 의원(醫)이 와서 진맥(診脈)하고 말하였다. “육맥(六脈)⁹³이 모두 순조롭습니다.” 공이 말하였다. “맥이 순조로운가? 나는 기쁘지 않네, 오직 빨리 끊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마침내 약을 들지 않아 세상에 머무를(留人世) 뜻이 전혀 없었으니, 대개 시사(時事)를 근심하여 그러했던 것이다.

주석:
81. [주-D005] 猿 : 저본(底本)에는 “원(遠)”으로 되어 있다. 《모재집・허문정공행장》 및 《연산군일기》 4년 7월 29일 등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김자원(金子猿)이 올바른 이름이다.
82. [주-D006] 耶 : 《모재집・허문정공행장》에는 “이(耳)”로 되어 있다. '야(耶)'는 의문형 종결사이고, '이(耳)'는 한정 또는 단정의 종결사이다. 여기서는 《가례》를 읽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므로 '耶'가 더 적절해 보인다.
83. 《가례(家禮)》: 주자(朱子)가 편찬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가리킨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법을 다룬 책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생활 규범이 되었다. 상례(喪禮) 규정에 따르면 임종 시에 곡을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84. 풍질(風疾): 중풍(中風). 뇌혈관 질환으로 인한 마비, 언어 장애 등을 통칭한다.
85. 미류(彌留): 병이 위독하여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상태.
86. 김자원(金子猿, ?-1506): 연산군 때의 환관. 임사홍(任士洪) 등과 함께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데 가담했으며, 중종반정 때 살해되었다.
87. 내주(內廚): 대궐 안의 주방. 임금의 음식을 만들던 곳.
88. 삼사(三事):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킨다.
89. 대죄(待罪): 죄를 지어 처벌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신하가 임금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90. 견마지로(犬馬之勞): 개나 말의 하찮은 힘이라는 뜻으로, 임금이나 나라를 위해 들이는 자신의 노력을 낮추어 이르는 말.
91. 천안(天顔): 하늘의 얼굴. 임금의 얼굴을 높여 부르는 말.
92. "여배불독가례야(汝輩不讀家禮耶)?": 너희는 《가례》를 읽지 않았느냐? 《가례》의 상례 규정에 따르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을 때는 곡을 하지 않아야 한다. 허침이 죽음을 앞두고 초연하게 예법을 지키려 했음을 보여준다.
93. 육맥(六脈): 한의학에서 진맥하는 부위인 촌(寸), 관(關), 척(尺)의 좌우 맥을 합하여 이르는 말. 맥이 순조롭다는 것은 아직 생명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天性恬靜寡欲, 從容溫粹, 純和之氣, 達於面目, 語默動靜, 端詳閑泰, 不露圭角, 口未嘗言人過失。 平居怡怡, 無疾言遽色, 雖子弟、婢僕, 未嘗見其有喜慍之色。 及其臨事處決, 毅然不可犯。 治家淡泊, 生産作業, 略不經意, 入則惟終日讀書而已。 雖貴爲三公, 四方無田園之殖⁹⁴, 惟祖業所傳數頃而已。 一家百口, 取給祿俸, 而他無長物焉。 平生孝友, 尤出至性, 事慈闈以色, 奉寡姊以誠, 日相聚會, 嬉笑飮食, 以盡歡意。 交朋友接人物, 亦淡然無僞, 故莫不敬而愛焉。 性不喜榮進, 無汲汲之意, 常以漁釣爲樂, 每往來林泉, 必休告信宿而返, 其沖澹雅趣如此。 至於居官莅職, 守正不撓, 終始一節, 處事精簡, 不爲煩擾而自理。 雖久操權柄, 而門無私謁, 淸約如寒素之家。 卒之日, 家無餘財, 僅辦喪具, 親戚、故舊來見者, 尤服公之淸德, 以爲不可及。

번역문:
공은 천성이 고요하고 욕심이 적었으며(恬靜寡欲), 몸가짐이 조용하고 차분하며(從容) 성품이 온화하고 순수(溫粹)하여, 순수하고 온화한 기운(純和之氣)이 얼굴 모습(面目)에 드러났고,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멈춤(語默動靜)이 단정하고 자세하며 한가롭고 태연(端詳閑泰)하여 규각(圭角)⁹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입으로 일찍이 남의 과실(過失)을 말하지 않았다. 평소 거처할 때는 온화하고 기뻐하여(怡怡)⁹⁶ 빠른 말이나 급한 얼굴빛(疾言遽色)⁹⁷이 없었으며, 비록 자제(子弟)나 비복(婢僕)에게도 일찍이 기뻐하거나 성내는(喜慍)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일에 임하여 처리하고 결단할 때에는 의연(毅然)하여 범할 수 없었다. 집안 살림(治家)은 담박(淡泊)하여 재산을 늘리는 일(生産作業)에는 거의 마음을 쓰지 않았고(略不經意), 집에 들어오면 오직 종일토록 독서할 뿐이었다. 비록 귀하게 삼공(三公)이 되었으나 사방에 전원(田園)의 재산 증식(殖)⁹⁸이 없었고, 오직 조상 대대로의 가업(祖業)으로 전해진 몇 경(頃)⁹⁹의 토지가 있을 뿐이었다. 한 집안의 백여 식구(一家百口)가 녹봉(祿俸)을 받아 생활하였고, 그 외에 남는 물건(長物)¹⁰⁰이 없었다. 평생 효도하고 우애로움(孝友)이 더욱 지극한 성품(至性)에서 나와, 어머니(慈闈)¹⁰¹를 섬김에 얼굴빛(色)¹⁰²으로 하였고, 과부가 된 누이(寡姊)를 받듦에 정성(誠)으로 하여, 날마다 서로 모여 즐겁게 웃고 음식을 먹으며(嬉笑飮食) 기쁜 뜻을 다하였다. 친구를 사귀고 인물을 접할(交朋友接人物) 때에도 또한 담담(淡然)하여 거짓(僞)이 없었으므로,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성품이 영달하여 나아감(榮進)을 좋아하지 않아 조급해하는(汲汲) 뜻이 없었고, 항상 낚시질(漁釣)을 낙(樂)으로 삼았으며, 매번 임천(林泉)¹⁰³을 왕래할 때면 반드시 휴가를 얻어(休告) 하룻밤을 자고(信宿) 돌아오니, 그 맑고 담박하며 아담한 멋(沖澹雅趣)이 이와 같았다. 관직에 거하여 직무에 임함(居官莅職)에 이르러서는, 정도(正)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不撓)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지켰으며(終始一節), 일을 처리함이 정밀하고 간결(精簡)하여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不爲煩擾) 저절로 다스려졌다. 비록 오랫동안 권력(權柄)을 잡았으나 문에는 사사로운 청탁(私謁)이 없어, 청렴하고 검약(淸約)하기가 가난한 선비(寒素)¹⁰⁴의 집과 같았다. 졸(卒)한 날에 집에 남은 재물(餘財)이 없어 겨우 상례(喪禮) 도구를 마련하니, 친척과 옛 친구(故舊)로서 와서 본 자들이 더욱 공의 청렴한 덕(淸德)에 감복하여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주석:
94. [주-D007] 殖 : 《모재집・허문정공행장》에는 “식(植)”으로 되어 있다. '식(殖)'과 '식(植)' 모두 '심다, 늘리다'는 뜻이 있어 재산 증식을 의미할 수 있다. 문맥상 큰 차이는 없다.
95. 규각(圭角): 홀(圭)의 모서리. 재능이나 성격 등이 날카롭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비유한다. ‘불로규각(不露圭角)’은 성격이 원만하여 다른 사람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음을 의미한다.
96. 이이(怡怡): 기뻐하고 화락한 모양.
97. 질언거색(疾言遽色): 빠르고 거친 말씨와 급하고 당황한 얼굴빛.
98. 식(殖): 재산을 늘림. 주석 94 참조.
99. 경(頃): 토지 면적의 단위. 1경은 약 100묘(畝)에 해당하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많지 않은 토지를 의미한다.
100. 장물(長物): 여분의 물건. 쓸데없는 물건.
101. 자위(慈闈): 어머니가 거처하는 곳. 어머니를 가리킨다.
102. 색(色): 얼굴빛. 부모를 섬길 때 항상 부드럽고 공손한 얼굴빛을 하는 것.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색난(色難)”이라 하여, 부모 섬김에 있어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103. 임천(林泉): 숲과 샘. 자연 또는 은거지를 비유한다.
104. 한소(寒素):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선비.


원문:
公之舊第, 茅茨湫隘, 無旋馬之地。 或言太隘, 曰: “在公則安, 而妻子可憐, 可治第以遺後也。” 公曰: “吾非不知, 素性疎懶, 固未能也。” 一日棟折, 夫人橫木於棟, 以繩縛之, 戒子弟勿言, 以試公。 公經數月, 終不知也。 夫人以語公, 因謂曰: “吾夫婦今食厚祿, 不至貧乏, 亦已足矣。 然他日子孫何以自振乎?” 公笑曰: “吾身且不敢恤, 況爲子孫經營乎?” 其不屑意於家事類如此。

번역문:
공의 옛집(舊第)은 띠풀로 이엉을 엮은 지붕(茅茨)¹⁰⁵이 낮고 좁아(湫隘) 말을 돌릴(旋馬)¹⁰⁶ 만한 땅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좁다고 말하며, “공께서는 편안하시겠지만 처자(妻子)가 가련하니, 집을 지어(治第) 후세에 남겨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내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본래 성품이 소탈하고 게을러(疎懶) 진실로 능히 하지 못할 뿐이다.” 하루는 마룻대(棟)가 부러지자, 부인(夫人)이 마룻대에 나무를 가로대고 노끈으로 묶은 뒤, 자제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며 공을 시험하였다. 공이 수개월이 지나도록 끝내 알지 못하였다. 부인이 이를 공에게 말하고, 이어서 말하였다. “우리 부부가 지금 후한 녹(厚祿)을 먹어 빈궁하고 궁핍(貧乏)함에 이르지 않으니 또한 이미 만족합니다. 그러나 다른 날 자손(子孫)들이 어떻게 스스로 떨쳐 일어나겠습니까(自振)?”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내 몸도 또한 감히 돌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자손을 위해 경영(經營)하겠는가?” 그가 집안일(家事)에 개의치 않아(不屑意) 함이 이와 같았다.

주석:
105. 모자(茅茨): 띠풀로 인 지붕. 검소한 집을 상징한다.
106. 선마(旋馬): 말을 돌림. 집이 매우 좁아 말을 타고 드나들기도 어려움을 나타낸다. '선마지지(旋馬之地)'는 매우 좁은 땅을 의미하는 관용구이다.


원문:
公爲詩文, 淵深精確, 斥去浮靡, 閑淡簡遠, 追于大雅。 然不事表襮, 恒若不足焉。【竝金慕齋撰行狀。】

번역문:
공이 시문(詩文)을 지음에 깊고(淵深) 정밀하고 확실(精確)하였으며, 들뜨고 화려함(浮靡)을 물리치고 한가롭고 담박하며 간결하고 심원(閑淡簡遠)하여 대아(大雅)¹⁰⁷에 가까웠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어 자랑(表襮)¹⁰⁸하는 일에 힘쓰지 않아, 항상 부족한 듯이 하였다.【이상은 김모재(金慕齋)¹⁰⁹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07. 대아(大雅):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정대(正大)하고 아정(雅正)한 시풍(詩風)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08. 표박(表襮): 겉으로 드러내어 자랑함.
109. 김모재(金慕齋):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허침의 문인이다.

 

 

노공필(盧公弼)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盧公弼【交城君。】
字希亮, 思愼之子, 號菊逸齋。 正統乙丑生。 世祖八年壬午司馬, 丙戌登第。 歷典翰、副提學、六曹長官、右參贊, 官至領中樞府事。 賜几杖。 中宗丙子卒, 年七十二。

번역문:
노공필(盧公弼)【교성군(交城君)¹이다.】
자는 희량(希亮)이고, 사신(思愼)²의 아들이며, 호는 국일재(菊逸齋)이다. 정통(正統) 을축년(1445)³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8년 임오년(1462)에 사마시(司馬試)⁴에 합격하고, 병술년(1466)에 문과에 급제(登第)⁵하였다. 전한(典翰)⁶, 부제학(副提學)⁷, 육조(六曹)의 장관(長官)⁸, 우참찬(右參贊)⁹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¹⁰에 이르렀다. 궤장(几杖)¹¹을 하사받았다. 중종(中宗) 병자년(1516)¹²에 졸(卒)¹³하니, 나이 72세였다.

주석:

  1. 교성군(交城君): 노공필의 봉군호(封君號). 군(君)은 정1품, 종1품 문무관 및 공신에게 주던 작위이다.
  2. 사신(思愼):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응(子膺), 호는 소재(蘇齋)·희현당(希賢堂) 등이며,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세조연산군 대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한 명재상이다. 노공필은 그의 아들이다.
  3. 정통(正統) 을축년(1445): 정통은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첫 번째 연호(1436~1449)이다. 을축년은 1445년에 해당한다.
  4.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 생원·진사시라고도 한다.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나 하급 관리가 될 자격을 얻었다.
  5. 등제(登第): 문과(文科)나 무과(武科) 등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것. 여기서는 문과 급제를 의미한다.
  6. 전한(典翰): 조선 시대 예문관(藝文館) 또는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위. 주로 문한(文翰)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7. 부제학(副提學): 조선 시대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위.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책으로 학문적 권위가 높았다.
  8. 육조 장관(六曹長官): 육조(六曹: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으뜸 벼슬인 판서(判書, 정2품)를 통칭한다. 노공필은 병조, 이조, 형조, 호조 판서를 역임했다.
  9. 우참찬(右參贊):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참찬(左參贊)과 함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보좌했다.
  10.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조선 시대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실질적인 직무는 없고, 주로 원로대신을 예우하기 위해 제수하던 명예직이었다.
  11. 궤장(几杖): 조선 시대에 나이가 70세 이상인 정1품, 종1품 원로대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안석(案席)과 지팡이. 공로와 덕망이 높은 원로대신을 예우하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다.
  12. 중종(中宗) 병자년(1516): 중종은 조선의 제11대 왕(재위 1506~1544). 병자년은 1516년에 해당한다.
  13. 졸(卒): 벼슬아치의 죽음을 이르는 말.

원문:
燕山甲子, 杖配茂長, 非其罪也。 秋, 丁外憂。 時方短喪制, 雖士大夫, 畏罪怵禍, 鮮守古禮。 公於配所設神位, 哭行朝夕奠, 服終三年。

번역문: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¹⁴에 장형(杖刑)을 받고 무장(茂長)¹⁵으로 유배되었는데, 그의 죄가 아니었다. 가을에 어머니 상(丁外憂)¹⁶을 당하였다. 당시 마침 단상제(短喪制)¹⁷가 시행되던 때라 비록 사대부라 할지라도 죄를 두려워하고 화를 겁내어 옛 예법¹⁸을 지키는 이가 드물었다. 공(公)은 유배지(配所)¹⁹에서 신위(神位)²⁰를 설치하고 곡(哭)하며 아침저녁으로 전(奠)²¹을 올렸으며, 3년 상(喪)을 마쳤다.

주석:
14.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 연산군은 조선의 제10대 왕(재위 1494~1506). 갑자년은 1504년으로, 이 해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노공필은 폐비 윤씨(廢妃 尹氏) 사사(賜死)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 장배무장(杖配茂長): 장형(杖刑), 즉 곤장을 맞고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현재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으로 유배된 것을 의미한다.
16. 정외우(丁外憂):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는 것. 아버지는 내(內), 어머니는 외(外)로 구분하여 부친상은 정내우(丁內憂), 모친상은 정외우(丁外憂)라 한다.
17. 단상제(短喪制): 상기(喪期)를 짧게 줄인 상례 제도. 연산군은 사대부들에게 부모상에 대한 복상 기간을 3년에서 100일 또는 수개월로 단축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유교적 예법에 어긋나는 조치였다.
18. 고례(古禮): 옛 예법. 여기서는 유교 경전에 규정된 부모상에 대한 3년 복상(服喪) 제도를 가리킨다.
19. 배소(配所): 유배(流配)된 곳. 귀양지.
20. 신위(神位): 죽은 사람의 위패(位牌).
21. 조석전(朝夕奠): 아침저녁으로 신위 앞에 음식을 올리고 곡하는 상례(喪禮) 의식. 노공필이 유배 중 어려운 상황과 단상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3년 상을 철저히 지켰음을 보여준다.


원문:
中宗卽位, 請承襲, 未蒙允。 朝廷擧公更遣, 禮部猶執前議。 公陳請誠切, 竟得權署勅而還。

번역문:
중종(中宗)이 즉위하여 승습(承襲)²²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조정(朝廷)에서 공(公)을 천거하여 다시 보냈으나, 예부(禮部)²³에서는 여전히 이전의 논의를 고집하였다. 공이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아뢰어 청하니, 마침내 권서(權署)²⁴의 칙서(勅書)²⁵를 얻어 돌아왔다.

주석:
22. 승습(承襲): 왕위 계승에 대해 종주국인 명(明)나라 황제의 승인(고명, 誥命)을 받는 것. 조선은 사대(事大) 관계에 따라 새 국왕이 즉위하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즉위를 알리고 고명과 인장(印章)을 받아오는 절차를 밟았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명나라에서는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즉각적인 승인을 보류했다.
23. 예부(禮部): 명나라의 육부(六部) 중 하나. 외교, 의례, 과거 시험 등을 담당했다. 조선의 왕위 계승 승인 문제는 예부에서 주관하였다.
24. 권서(權署): 임시로 국왕의 직무를 처리함. 명나라에서 정식 고명을 내리기 전에 임시로 국정 운영을 허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권서국사(權署國事)'라고도 한다.
25. 칙서(勅書): 황제의 명령을 담은 문서. 여기서는 중종에게 임시로 국정을 처리하도록 허락하는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의미한다.


원문:
公事親誠孝, 老而彌篤。 每遇節日, 躬詣先塋, 掃墳祭, 收恤宗戚, 周救婚喪。 不喜紛華, 弊衣惡食, 晏如也。【竝《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은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스럽고 효성스러웠으며, 늙어서 더욱 돈독해졌다. 매번 명절(節日)을 맞으면 몸소 선영(先塋)²⁶에 나아가 분묘를 소제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종척(宗戚)²⁷들을 거두어 구휼하고 혼례와 상례(婚喪)를 두루 도와주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해진 옷과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편안한 모습이었다(晏如也)²⁸.【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²⁹에서 인용】

주석:
26.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 선산(先山).
27. 종척(宗戚): 같은 성씨의 일가친척(宗)과 외가 및 처가의 친척(戚)을 아울러 이르는 말.
28. 안여(晏如): 마음이 평온하고 편안한 모습. 검소한 생활에도 만족하며 태연자약함을 나타낸다.
29.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엮은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이나, 정확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혹은 다른 인물의 기록일 수도 있다. 조선 시대 인물들의 일화나 기록을 모은 책으로 보인다.


원문:
正德二年, 盧公弼回自京師, 帝降勅曰: “惟³⁰爾署理本國大小庶務, 以國王體統行事, 益敦孝睦, 以係群望, 朕將有後命。” 時金應箕等請誥于京師, 禮部題准以爲: “須待一國衆論之公, 庶名正言順, 而群情允愜。” 故盧公弼、崔淑生將王親文武官共一千三百餘員會定³¹之奏以聞, 禮部又題准姑令權署國事。 公弼卽具題以進, 其略曰: “竊惟署國事者, 蓋因國內無主, 未受命於天子時, 從權假爲之事也, 安有權道久處王位, 上應藩屛之重寄, 下從一國之民志乎? 且聞危病, 邪之伺也; 大位, 奸之窺也。 國王之痼疾彌留, 新王之爵命未加, 國事無統, 人心未定。 脫有不逞之徒, 煽動其間, 使國內不靖, 豈不貽朝廷之憂乎? 蓋天子之鎭撫四海也, 近者懷之, 遠者柔之, 使四方得安其職, 至於匹夫匹婦, 亦莫不各獲其所。 今我弊邦, 王位虛曠, 已踰一年, 擧國遑遑, 無所控告。 一歲之中, 使价再來, 請恩命, 而猶未蒙允, 使弊邦名分未定, 國勢危疑, 非聖明綏遠之道也。” 禮部又題准以爲: “今若允許, 則王位之定, 在於一二陪臣之手。 家事任長, 再具王大妃奏本以來。” 至明年春, 乃賜誥命。【《日月錄》。】

번역문:
정덕(正德) 2년(1507)³²에 노공필이 경사(京師)³³에서 돌아오자, 황제가 칙서(勅書)를 내려 말하였다. “너³⁴는 본국(本國)의 크고 작은 모든 업무를 서리(署理)하고 국왕의 체통(體統)으로 일을 행하며, 효성과 화목(孝睦)을 더욱 돈독히 하여 여러 사람의 기대를 받들라. 짐(朕)이 장차 후명(後命)을 내릴 것이다.” 이때 김응기(金應箕) 등이 경사(京師)에서 고명(誥命)³⁵을 청하였으나, 예부(禮部)에서 제준(題准)³⁶하여 이르기를, “모름지기 한 나라 중론(衆論)의 공정함을 기다려야 거의 명분(名分)이 바르고 말이 순리에 맞아(名正言順)³⁷ 여러 사람의 마음(群情)이 진실로 만족할(允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노공필과 최숙생(崔淑生)³⁸이 왕의 친족과 문무 관원 총 1,300여 명을 거느리고 회의하여 결정(會定)³⁹한 것을 주문(奏文)으로 보고하였으나, 예부에서는 또 제준하여 우선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權署國事)하라고 명하였다. 공필이 즉시 제본(題本)⁴⁰을 갖추어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국사를 서리(署國事)한다는 것은 대개 국내에 임금이 없고 천자(天子)에게 명을 받지 못했을 때 임시 방편(權)으로 잠시 하는 일입니다. 어찌 임시 방편의 도리(權道)로 오랫동안 왕위(王位)에 있으면서, 위로는 번병(藩屛)⁴¹으로서의 중대한 임무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한 나라 백성의 뜻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한 듣건대, 위태로운 병에는 사악한 자가 엿보고, 큰 자리에는 간사한 자가 노린다고 합니다. 국왕(연산군)의 고질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고 신왕(중종)에게 작위와 명령(爵命)이 아직 내려지지 않아, 국사(國事)에 통솔이 없고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불령한 무리(不逞之徒)가 있어 그 사이에서 선동하여 국내를 불안하게 만든다면, 어찌 조정(朝廷, 명나라 조정)에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대개 천자께서 사해(四海)를 진무(鎭撫)하심에, 가까이 있는 자는 품어주고 멀리 있는 자는 회유하여 사방이 그 직분을 편안히 얻게 하시며,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또한 각기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이가 없습니다. 지금 저희 폐방(弊邦)⁴²은 왕위가 비어 있은 지(王位虛曠) 이미 1년이 넘어, 온 나라가 불안해하며(遑遑)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한 해 동안 사신(使价)⁴³이 두 번이나 와서 은명(恩命)을 청하였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여, 폐방의 명분(名分)이 정해지지 못하고 국세(國勢)가 위태로우니, 이는 성명(聖明)께서 먼 곳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綏遠之道)가 아닙니다.” 예부에서 또 제준하여 이르기를, “지금 만약 윤허한다면 왕위의 결정이 한두 배신(陪臣)⁴⁴의 손에 달리게 된다. 집안일은 가장(家事任長, 여기서는 왕대비)에게 맡기니, 다시 왕대비(王大妃)⁴⁵의 주본(奏本)⁴⁶을 갖추어 오라.”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고명(誥命)을 하사하였다.【《일월록(日月錄)》⁴⁷에서 인용】

주석:
30. [주-D001] 惟 : 《대동야승(大東野乘)・역대요람(歷代要覽)》 및 《강한집(江漢集)・서리국무칙(署理國務勅)》에는 “준(准)”으로 되어 있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오직 너', '너에게 허락하노니').
31. [주-D002] 定 :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야언(海東野言)・중종(中宗)》에는 “본(本)”으로 되어 있다. '회본(會本)'은 '회의하여 보고하다' 정도의 의미가 될 수 있다. '회정(會定)'은 '회의하여 결정하다'는 의미이다. 문맥상 '회정'이 더 적절해 보인다.
32. 정덕(正德) 2년(1507): 정덕은 명(明)나라 무종(武宗)의 연호(15061521)이다. 정덕 2년은 1507년에 해당한다.
33. 경사(京師): 수도. 여기서는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34. 유(惟)/준(准): 주석 [주-D001] 참조. 황제가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에서 쓰이는 표현이다.
35. 고명(誥命): 황제가 신하에게 내리는 임명장 또는 작위 증서. 여기서는 조선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명나라 황제의 공식 문서를 의미한다.
36. 제준(題准): 황제의 재가를 얻어 승인함. 신하가 올린 안건에 대해 황제의 허락을 받아 시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37. 명정언순(名正言順): 명분(名分)이 바르면 말(言)도 순리(順理)에 맞음.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서 유래한 말로, 명분이 정당해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38. 최숙생(崔淑生, 1457~1520):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문백(文伯), 본관은 전주(全州). 노공필과 함께 중종의 고명을 받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39. 회정(會定): 회의하여 결정함. 주석 [주-D002] 참조.
40. 제본(題本): 명나라 때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한 형식.
41. 번병(藩屛): 제후국(藩)으로서 종주국(중국)을 지키는 울타리(屛) 역할을 한다는 의미. 제후국의 의무를 가리킨다.
42. 폐방(弊邦): '피폐한 나라'라는 뜻으로, 자기 나라를 낮추어 부르는 외교적 겸양어이다.
43. 사개(使价): 사신. '개(价)'는 사신을 수행하는 하급 관리를 의미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사신 일행을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44. 배신(陪臣): 제후국의 신하를 가리키는 말. 명나라 입장에서 조선의 사신들을 지칭한다.
45. 왕대비(王大妃): 선왕(先王)의 비(妃)로서 왕의 어머니뻘 되는 이에게 올리는 존호. 당시 중종의 즉위를 주도하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던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가리킨다. 명나라 예부에서는 국왕의 즉위는 국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왕실의 문제이므로, 왕실의 가장 어른인 왕대비의 공식적인 요청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46. 주본(奏本):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 문서의 한 종류.
47. 《일월록(日月錄)》: 작자 미상의 편년체 역사서. 조선 시대의 주요 사건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안침(安琛)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安琛
字子珍。 正統乙丑生。 世祖八年壬午生進, 丙戌登第。 賜暇湖堂, 歷修撰、獻納、應敎、副提學、大司成、忠淸・全羅・平安三道觀察使, 官至工曹判書。 中宗乙亥卒, 年七十一。

번역문:
안침(安琛)
자는 자진(子珍)이다. 정통(正統) 을축년(1445)¹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8년 임오년(1462)에 생원·진사시(生進)²에 합격하고, 병술년(1466)에 문과에 급제(登第)하였다.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³하였고, 수찬(修撰)⁴, 헌납(獻納)⁵, 응교(應敎)⁶, 부제학(副提學)⁷, 대사성(大司成)⁸, 충청·전라·평안 3도의 관찰사(觀察使)⁹를 역임하였으며, 관직은 공조 판서(工曹判書)¹⁰에 이르렀다. 중종(中宗) 을해년(1515)¹¹에 졸(卒)하니, 나이 71세였다.

주석:

  1. 정통(正統) 을축년(1445):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1445년.
  2. 생진(生進):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아울러 이르는 말. 사마시(司馬試) 합격자.
  3. 사가독서(賜暇讀書) / 호당(湖堂): 사가독서는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이다. 사가독서하는 곳을 호당(湖堂) 또는 독서당(讀書堂)이라 불렀다. 이는 문신으로서 큰 영예였다.
  4. 수찬(修撰): 조선 시대 홍문관(弘文館) 또는 춘추관(春秋館)의 정6품 관직.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의 편찬 및 관리, 왕의 자문 등의 역할을 했다.
  5. 헌납(獻納): 조선 시대 사간원(司諫院)의 정5품 관직.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6. 응교(應敎): 조선 시대 홍문관(弘文館) 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4품 관직.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에서 왕이나 세자를 가르치고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했다.
  7.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8. 대사성(大司成): 조선 시대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성균관의 교육과 운영을 총괄했다.
  9.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10.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선 시대 공조(工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공조는 국가의 공공 토목공사, 건축, 공예품 제작, 교통, 통신 등을 담당했다.
  11. 중종(中宗) 을해년(1515): 1515년.

원문:
成宗乙未¹², 拜獻納。 一日, 因朝對, 極論公主第宅踰制, 時任士洪爲諫長, 其子光載尙公主, 甚恨之。 卽會兩司于朝房, 士洪揚言曰: “臺諫須議同乃啓, 獨啓非宜。” 公曰: “言官當各盡抱蘊, 若有所待, 必礙言路。” 士洪愈執不迴, 具以啓, 上卽召對令陳狀, 知不可相容, 竝許遞之。

번역문:
성종(成宗) 을미년(1475)¹³에 헌납(獻納)에 제수되었다. 하루는 조대(朝對)¹⁴를 통해 공주(公主)의 집(第宅)이 제도(制度)를 넘었음을 극력히 논하였는데, 당시 임사홍(任士洪)¹⁵이 간원(諫院)의 수장(諫長)¹⁶이었고 그의 아들 광재(光載)가 공주에게 장가들었으므로¹⁷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즉시 양사(兩司)¹⁸를 조방(朝房)¹⁹에 모이게 하여, 임사홍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대간(臺諫)은 모름지기 의논을 같이 한 뒤에 아뢰어야지, 혼자 아뢰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공(公)이 말하였다. “언관(言官)은 마땅히 각자 품은 생각을 다해야 하니, 만약 기다리는 바가 있다면 반드시 언로(言路)를 막게 될 것이다.” 임사홍이 더욱 고집을 부리고 돌이키지 않자, (안침이) 이를 갖추어 아뢰었다. 상(上)께서 즉시 불러들여 대면하여 그 실상을 진술하게 하시고는 서로 용납할 수 없음을 아시고, 함께 체직(遞職)시키도록 허락하셨다.

주석:
12. [주-D001] 乙未 : 《용재집(容齋集)・공조판서안공신도비명(工曹判書安公神道碑銘)》에 “을미(乙未, 1475)년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제수되고, 정유(丁酉, 1477)년에 다시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근거할 때 “정유(丁酉)”가 되어야 한다.
13. 성종(成宗) 을미년(1475): 성종은 조선의 제9대 왕(재위 14691494). 을미년은 1475년이다. 주석 [주-D001]에 따르면 헌납 제수는 정유년(1477)이다.
14. 조대(朝對):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 만나 정사를 논하던 일.
15. 임사홍(任士洪, 1445
1506):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간신. 연산군 대에 권력을 잡고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6. 간장(諫長):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 정3품)을 가리킨다.
17. 상공주(尙公主): 공주에게 장가드는 것. 즉, 임금의 사위(부마, 駙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성종의 딸 숙혜공주(淑惠公主)와 혼인했다. 안침이 공주의 집이 규정보다 사치스럽다고 비판하자, 사돈 관계였던 임사홍이 이를 불쾌하게 여긴 것이다.
18.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19. 조방(朝房): 궁궐 안에 각 관청의 관리들이 모여 대기하거나 업무를 보던 방.


원문:
應敎時, 任士洪爲都承旨, 勢焰頗熾, 公與同列論發其姦, 上震怒, 同官皆見罷。 賴宗室朱溪正深源極諫陳士洪陰邪狀, 上大悟, 卽斥士洪而復公等職。

번역문:
응교(應敎) 시절에 임사홍이 도승지(都承旨)²⁰가 되어 세력과 기세(勢焰)가 자못 치성(熾盛)하자, 공(公)이 동료들과 함께 그의 간악함을 논하여 드러내니, 상(上)께서 크게 노하여 동료 관리들이 모두 파직되었다. 종실(宗室)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²¹이 임사홍의 음흉하고 사악한 실상을 극력히 간언(諫言)하여 진술한 덕분에, 상께서 크게 깨닫고 즉시 임사홍을 내치고 공 등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셨다.

주석:
20. 도승지(都承旨): 조선 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21.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 성종의 서제(庶弟)인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의 아들. 이름은 심원(深源)이고, 주계정(朱溪正)은 그의 작위이다. 정(正)은 왕의 서자(庶子)의 아들에게 주던 종3품 작위이다.


원문:
公性端雅簡靜, 自少爲儕輩所推許, 所與遊皆一世知名士。 爲文章以達意爲尙, 遇物措思, 音韻皆諧。 筆跡典重, 得松雪遺法, 求書碑碣、屛障者日相繼。 成廟大加奬異, 屢下內紙, 命書進, 其見賞遇如此。

번역문:
공(公)의 성품은 단정하고 아담하며(端雅) 간결하고 고요하였다(簡靜). 어려서부터 동배(儕輩)들에게 추허(推許)를 받았고, 함께 교유한 이들은 모두 한 시대에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뜻을 통달시키는 것을 숭상하였고, 사물을 접하여 생각을 표현하면 음운(音韻)이 모두 조화로웠다. 필적(筆跡)은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典重) 송설(松雪)²²의 남은 필법(遺法)을 터득하였으므로, 비갈(碑碣)이나 병풍(屛障)에 글씨 써주기를 구하는 자들이 날마다 이어졌다. 성종(成廟)께서 크게 장려하고 기특하게 여겨, 여러 차례 내지(內旨)²³를 내려 글씨를 써서 올리도록 명하시니, 그 상찬(賞讚)과 대우(待遇)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주석:
22. 송설(松雪): 원(元)나라의 서예가이자 화가인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호. 그의 서체를 송설체(松雪體)라고 하며, 고려 말 조선 초에 크게 유행하였다. 안침의 글씨가 조맹부의 서풍을 따랐음을 의미한다.
23. 내지(內旨):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을 통하지 않고 직접 내리는 명령이나 편지.


원문:
公以敎化自養士始, 所至必以興學爲務。 其爲大司成, 敎養誘掖, 皆有課程, 患諸生食堂陋隘, 斥以爲廣, 又患學宮與閭閻相溷, 收買洞口民居, 撤之, 西泮水爲限。 及爲平安道觀察使, 設作成庫, 以贍學廩, 至今猶遵不廢。

번역문:
공(公)은 교화(敎化)는 선비를 기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여겨,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학문 진흥(興學)을 힘썼다. 그가 대사성(大司成)이 되어서는 가르치고 길러 이끌어주는(敎養誘掖) 데 모두 과정(課程)을 두었고, 여러 유생(諸生)들의 식당이 누추하고 좁은 것을 걱정하여 이를 넓혔으며, 또 학궁(學宮)²⁴이 민가(閭閻)와 서로 섞여 있는 것을 염려하여 동구(洞口)의 민가들을 사들여 철거하고 서쪽의 반수(泮水)²⁵를 경계로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작선고(作善庫)²⁶를 설치하여 학름(學廩)²⁷을 보충하게 하니, 지금까지도 여전히 준수되어 폐지되지 않았다.

주석:
24. 학궁(學宮): 학교. 여기서는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킨다.
25. 반수(泮水): 성균관을 둘러 흐르던 개천. 성균관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성균관 영역과 민가 영역을 구분했음을 의미한다.
26. 작선고(作善庫): 조선 시대 지방의 향교(鄕校) 운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설치했던 금고. 이자 수입 등으로 향교의 재정을 지원했다.
27. 학름(學廩):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정이나 물품.


원문:
平生未嘗言人過失, 然國事亦不爲避。 其斥士洪也, 公主之甚力, 故士洪銜公尤甚。 及燕山末年, 士洪平日所睚眥, 或至闔門遭禍, 公常恐不免, 惟務與世浮沈而已。 聖朝中興, 公已告病, 而上猶以耆舊, 特擢爲六卿, 亦異數也。【竝容齋李荇撰碑。】

번역문:
평생 남의 과실(過失)을 말한 적이 없었으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또한 피하지 않았다. 그가 임사홍을 배척할 때 공주(公主)가 매우 힘썼으므로²⁸, 임사홍은 공(公)에게 원한을 품음(銜)이 더욱 심했다. 연산군 말년에 이르러 임사홍이 평소에 눈을 흘기던(睚眥)²⁹ 이들은 혹 온 집안(闔門)이 화를 당하기에 이르렀으므로, 공은 늘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오직 세상과 함께 뜨고 가라앉으며(與世浮沈)³⁰ 지낼 뿐이었다. 성조(聖朝)³¹가 중흥(中興)³²하자 공은 이미 병을 고(告)하였으나, 상(上)께서는 오히려 기구(耆舊)³³라 하여 특별히 육경(六卿)³⁴으로 발탁하시니, 이 또한 특별한 대우(異數)였다.【이상 용재(容齋) 이행(李荇)³⁵이 지은 비(碑)에서 인용】

주석:
28. 공주지심력(公主之甚力): 이 부분의 해석이 모호하다. '공주가 (안침을) 매우 힘써 도왔다' 또는 '공주(의 집 문제)에 대해 (안침이) 매우 힘써 간언했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앞선 문맥(안침이 공주의 집 문제를 비판함)을 고려하면 후자의 해석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나, 임사홍이 원한을 품은 이유를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전자의 해석, 즉 공주가 안침을 비호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혹은 '斥士洪也'를 '임사홍을 배척하는 데 있어서'로 보고, '公主之甚力'을 '공주의 힘이 매우 컸다' (즉, 공주와 부마 임광재의 배경 때문에 임사홍을 배척하기 어려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번역문은 '공주가 (임사홍을 배척하는 데) 매우 힘썼다'는 의미로 해석하였으나, 재검토가 필요하다. 또는 '公主之' 를 '공주의 일에 대해'로 해석하여 '임사홍을 배척하는 일과 공주의 일에 대해 매우 힘썼다'로 볼 수도 있다.
29. 애자(睚眥): 눈을 흘겨봄. 사소한 원한이나 불만을 품는 것을 비유한다.
30. 여세부침(與世浮沈):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며 좋고 나쁨을 함께 겪으며 살아감. 연산군 치하의 공포 정치 속에서 몸을 낮추고 화를 피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31. 성조(聖朝): 성스러운 조정. 여기서는 중종(中宗)의 조정을 가리킨다.
32. 중흥(中興): 쇠퇴하였던 것이 중간에 다시 일어남. 여기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여 국정이 정상화된 것을 의미한다.
33. 기구(耆舊): 나이가 많고 경험과 덕망이 높은 원로 신하.
34. 육경(六卿):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통칭하는 말. 최고위 관직을 의미한다. 안침은 중종반정 이후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35.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용재(容齋). 안침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원문:
蔡壽
字耆之, 仁川人。 正統己巳生。 世祖十四年戊子司馬。 睿宗元年己丑, 登魁科。 成宗七年丙申重試。 歷吏郞、典翰、承旨、湖西・關西兩道觀察使、大司憲。 中廟反正, 參靖國功臣, 封仁川君。 乙亥卒, 年六十七。

 

 

채수(蔡壽)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蔡壽
字耆之, 仁川人。 正統己巳生。 世祖十四年戊子司馬。 睿宗元年己丑, 登魁科。 成宗七年丙申重試。 歷吏郞、典翰、承旨、湖西・關西兩道觀察使、大司憲。 中廟反正, 參靖國功臣, 封仁川君。 乙亥卒, 年六十七。

번역문:
채수(蔡壽)
자는 기지(耆之)이고, 인천(仁川) 사람이다. 정통(正統) 기사년(1449)¹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14년 무자년(1468)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예종(睿宗) 원년 기축년(1469)에 문과에 장원(魁科)²으로 급제하였다. 성종(成宗) 7년 병신년(1476)에 중시(重試)³에 합격하였다. 이조 정랑(吏郞)⁴, 전한(典翰), 승지(承旨)⁵, 호서(湖西)⁶·관서(關西)⁷ 양도(兩道)의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⁸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廟反正)⁹ 때 정국공신(靖國功臣)¹⁰에 참여하여 인천군(仁川君)¹¹에 봉해졌다. 을해년(1515)에 졸(卒)하니, 나이 67세였다.

주석:

  1. 정통(正統) 기사년(1449):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1449년.
  2. 괴과(魁科): 과거 시험에서 장원(壯元), 즉 수석으로 급제하는 것.
  3.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치르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품계를 올려주었다.
  4. 이랑(吏郞):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였다.
  5. 승지(承旨): 조선 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는 임금의 핵심 비서진이었다. 도승지(都承旨),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의 여섯 승지가 있었다.
  6. 호서(湖西): 충청도(忠淸道)의 별칭.
  7. 관서(關西): 평안도(平安道)의 별칭.
  8. 대사헌(大司憲): 조선 시대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탄핵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9. 중묘반정(中廟反正):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훗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0.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채수는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1. 인천군(仁川君): 채수의 봉군호(封君號).

원문:
公超拜同副承旨。 至是釋褐適十年, 人榮之以爲: “‘一擧首登龍虎榜, 十年身到鳳凰池’, 正爲公道也。” 公以不次乞辭, 御筆狀尾曰: “予觀明鏡, 妍蚩自露。 莫鋪區區之辭, 更竭斷斷之誠。” 至左承旨, 坐事當遷, 命降左副。 政院啓曰: “院中上下之間, 禮分甚嚴, 當遞, 不當降。” 答曰: “如某不可不在喉舌。 卿等安知予有何意?” 不數月¹², 超授都承旨。 再三懇辭, 御札答之, 辭旨丁寧, 至引古名臣以勉之。 且曰: “一身榮辱、禍福, 皆在欽之一字。” 其器遇之隆如此。 嘗入對, 因天變極論丙子之獄¹³: “連坐多濫, 久竄遐裔, 豈無冤枉?” 上大感悟, 疏放凡數十人。

번역문:
공(公)이 동부승지(同副承旨)¹⁴에 파격적으로 제수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벼슬길에 나온 지(釋褐)¹⁵ 꼭 10년이 되니, 사람들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겨 말하기를, “‘한 번에 장원하여 용호방(龍虎榜)¹⁶에 오르고, 십 년 만에 몸이 봉황지(鳳凰池)¹⁷에 이르렀네’라는 말이 바로 공(公)을 두고 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차례를 뛰어넘은 임명이라 하여 사양할 것을 청하자, 임금께서 상소문 끝에 어필(御筆)로 쓰기를, “내가 밝은 거울을 보니 아름답고 추한 것이 저절로 드러난다. 구구한 말을 늘어놓지 말고, 다시금 간절한 정성을 다하라.”라고 하셨다.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러 사건에 연루되어 마땅히 전임(轉任)되어야 했는데,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강등시키라는 명이 내려졌다. 정원(政院)¹⁸에서 아뢰기를, “원(院) 안에서는 상하 간의 예절과 분수가 매우 엄격하니, 마땅히 체직시켜야지 강등시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답하시기를, “아무개(채수) 같은 이는 후설(喉舌)¹⁹에 있지 않을 수 없다. 경(卿)들이 내게 무슨 뜻이 있는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셨다. 몇 달²⁰이 지나지 않아 도승지(都承旨)에 파격적으로 제수되었다. 두세 번 간절히 사양하자, 어찰(御札)²¹로 답하셨는데, 말씀의 뜻(辭旨)이 정녕(丁寧)하였고 옛 명신(名臣)을 인용하여 힘쓰게 하기까지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일신(一身)의 영욕(榮辱)과 화복(禍福)이 모두 흠(欽)²²이라는 한 글자에 달려 있다.”라고 하시니, 그를 중히 여기고 대우하심(器遇)의 융성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입대(入對)²³하였을 때 천변(天變)²⁴을 계기로 병자년(丙子年)의 옥사(獄事)²⁵에 대해 극력히 논하기를, “연좌(連坐)된 이가 너무 많고 오랫동안 먼 변방에 유배되어 있으니, 어찌 원통하고 억울한 이가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크게 감동하여 깨닫고, 풀어준 이가 무릇 수십 명이었다.

주석:
12. [주-D001] 月 : 저본(底本)에는 “일(日)”로 되어 있다. 《나재집(懶齋集)・지문(誌文)》 및 《용재집(容齋集)・인천군채공묘지(仁川君蔡公墓誌)》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불수일(不數日)'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라는 뜻이고, '불수월(不數月)'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라는 뜻이다.
13. [주-D002] 獄 : 저본(底本)에는 없다. 《나재집・지문》 및 《용재집・인천군채공묘지》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병자(丙子)'는 연도(1486년)를 가리키므로 뒤에 '옥(獄)'을 보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4.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 승지 중 하나.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다음가는 직책이다.
15. 석갈(釋褐): 갈옷(褐衣, 평민의 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선비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16. 용호방(龍虎榜): 문과 급제자 명단(방목, 榜目)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7. 봉황지(鳳凰池): 중서성(中書省)이나 문하성(門下省) 등 재상들이 근무하는 관청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여기서는 승정원(承政院)을 가리킨다. 승정원은 임금의 비서 기관으로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18.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19.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의 의견을 전달하는 중요한 직책을 비유한다. 승정원의 역할을 가리킨다.
20. 몇 달: 주석 [주-D001] 참조.
21. 어찰(御札): 임금이 직접 쓴 편지.
22. 흠(欽): 공경할 흠. 임금이 신하에게 당부할 때 쓰는 말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신중히 직무를 수행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23. 입대(入對): 신하가 궁궐에 들어가 임금을 뵙는 것.
24. 천변(天變):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괴. 일식, 월식, 혜성 출현, 지진, 홍수, 가뭄 등 비정상적인 자연 현상을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군주의 부덕(不德)이나 실정(失政)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여겨졌다.
25. 병자년(丙子年)의 옥사(獄事): 성종 17년(1486) 병자년에 발생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으로 어떤 옥사를 지칭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관련 기록을 더 찾아볼 필요가 있다.


원문:
大司憲闕, 上適幸後苑, 命入侍大臣薦堪職者, 公亦在薦中。 上擢拜之, 召公敎曰: “憲長, 須用慷慨人。 卿爲承旨久, 予知卿心, 是以命卿。” 命都承旨李吉甫取金帶帶之。

번역문:
대사헌(大司憲) 자리가 비자, 상(上)께서 마침 후원(後苑)에 행차하셨다가 입시(入侍)한 대신(大臣)들에게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명하셨는데, 공(公) 또한 천거된 사람 중에 있었다. 상께서 발탁하여 제수하시고, 공을 불러 교지(敎)를 내려 말씀하셨다. “헌장(憲長)²⁶은 모름지기 강개(慷慨)²⁷한 사람을 써야 한다. 경(卿)이 오랫동안 승지(承旨)를 지냈으므로 내가 경의 마음을 아니, 이 때문에 경에게 명하는 것이다.” 도승지 이길보(李吉甫)에게 명하여 금대(金帶)²⁸를 가져다가 띠게 하였다.

주석:
26. 헌장(憲長): 사헌부(司憲府)의 우두머리, 즉 대사헌(大司憲)을 가리킨다.
27. 강개(慷慨): 의롭지 못한 일이나 잘못되어 가는 세태를 보고 의기가 북받쳐 원통해하고 슬퍼함. 대사헌은 백관을 규찰하고 기강을 세우는 직책이므로 강직하고 의로운 성품이 요구되었다.
28. 금대(金帶): 금으로 장식한 허리띠. 종1품 이상의 당상관이 착용했다. 대사헌은 종2품이지만, 왕이 특별히 금대를 하사하여 그를 중용하고 격려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원문:
一日, 侍經筵, 與校理權景祐同啓: “尹氏雖坐廢, 曾配至尊, 而今處閭閻, 奉養亦窘。 請別置一室, 官給廩餼。” 上震怒鞫問, 壽對不屈。 又下禁府鞫之, 壽對如前。 竟赦不加罪, 三年始敍。

번역문:
하루는 경연(經筵)²⁹에 시강(侍講)하다가 교리(校理)³⁰ 권경우(權景祐)와 함께 아뢰었다. “윤씨(尹氏)³¹가 비록 죄를 짓고 폐위되었으나 일찍이 지존(至尊)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여염(閭閻)에 거처하여 봉양(奉養) 또한 궁색합니다. 청컨대 별도로 거처(一室)를 마련해주고 관(官)에서늠름(廩餼)³²을 지급하게 하소서.” 상(上)께서 크게 노하여 국문(鞫問)하시니, 채수(壽)가 굴하지 않고 대답하였다. 또 금부(禁府)³³에 내려보내 국문하게 하였으나 채수가 이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마침내 용서하고 죄를 더하지 않았으나, 3년 만에야 비로소 서용(敍用)³⁴되었다.

주석:
29.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모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의하던 자리.
30. 교리(校理): 조선 시대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5품 관직. 경연 참여, 문한(文翰) 담당 등의 역할을 했다.
31. 윤씨(尹氏): 성종의 계비(繼妃)였던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82).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이다.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사가(私家)에 머물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채수와 권경우가 폐비 윤씨의 처우 개선을 건의한 것은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32. 늠름(廩餼): 녹봉으로 주는 곡식과 음식물. 국가에서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33. 금부(禁府): 의금부(義禁府)의 별칭. 임금의 명을 받아 중죄인을 다루던 특별 사법 기관.
34. 서용(敍用): 죄로 인해 파직되었던 관리를 다시 등용하는 것.


원문:
初, 公在侍從, 察任士洪父子奸狀, 倡同僚上章力辨, 且言: “不去, 將敗國。” 人且怪之, 以爲太甚。 後士洪果敗, 始服其先識。 士洪怨公至骨, 至是當國, 凡平生所嫉惡者, 必置死地乃已。 人皆爲公悚懼, 公曰: “死生在天。” 略不爲意, 雖在遷謫中, 言笑怡然, 無異平昔。

번역문:
처음에 공(公)이 시종(侍從)³⁵으로 있을 때 임사홍(任士洪) 부자(父子)의 간악한 실상을 살펴, 동료들을 이끌고 상소(上章)하여 강력히 변론하고 또 말하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또 이를 괴이하게 여겨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였다. 후에 임사홍이 과연 몰락하자 비로소 그의 앞선 식견(先識)에 감복하였다. 임사홍은 공(公)에게 원한을 품음이 뼈에 사무쳤는데, 이때(연산군 대)에 이르러 국정(國政)을 담당하게 되자 평소에 질투하고 미워하던 자들을 모두 반드시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송구(悚懼)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라고 하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비록 좌천되어 유배 중에 있을 때에도 태연하게(怡然) 웃고 말하며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주석:
35. 시종(侍從):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승지(承旨) 등 근시(近侍) 관직을 가리킨다.


원문:
中宗卽位, 參靖國勳, 進階封君。 公見一時朋儕凋謝殆盡, 卿相以下皆後進晩輩, 班行無可省識, 乃嘆曰: “少年知遇, 食祿已四十餘年, 榮幸已極, 不去何爲?” 遂退歸咸寧村舍老焉。 舍南有斷峯臨流斗起, 就其頂搆小亭, 名曰快哉, 日與子侄群從, 觴詠爲樂。 搢紳間往往爲詩文, 贊詠其事而稱慕之, 以爲: “名遂身退, 今俗³⁶一人而已。”

번역문: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정국공신(靖國勳)에 참여하고 품계(階)가 오르고 군(君)에 봉해졌다. 공(公)이 한 시대의 동료(朋儕)들이 거의 다 죽거나 사라지고(凋謝殆盡), 경상(卿相)³⁷ 이하가 모두 후진(後進)의 만배(晩輩)들이어서 조정의 반열(班行)³⁸에 알아볼 만한 사람이 없음을 보고,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젊어서 지우(知遇)³⁹를 받아 녹(祿)을 먹은 지 이미 40여 년이요, 영화(榮)와 행운(幸)이 이미 지극하니, 물러가지 않고 무엇 하겠는가?” 마침내 함녕(咸寧)⁴⁰의 시골집으로 물러나 노년을 보냈다. 집 남쪽에 흐르는 물가에 임하여 우뚝 솟은 외딴 봉우리(斷峯)가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작은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을 쾌재(快哉)⁴¹라 하였다. 날마다 자질(子侄)과 여러 종족(群從)들과 함께 술 마시고 시 읊는 것(觴詠)을 낙으로 삼았다. 진신(搢紳)⁴²들 사이에서 왕왕 시문(詩文)을 지어 그 일을 찬미하고 읊으며 칭송하고 사모하여 이르기를, “‘공명을 이루고 나면 몸은 물러난다(名遂身退)’⁴³는 말은 지금 세속(世俗)⁴⁴에서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36. [주-D003] 俗 : 장서각본(藏書閣本), 《나재집・지문》, 《용재집・인천군채공묘지》에는 “세(世)”로 되어 있다. '금세(今世)'는 '지금 세상'이라는 뜻이다. '금속(今俗)'은 '지금의 세속'이라는 뜻으로 의미상 큰 차이는 없으나, '今世'가 더 일반적인 표현이다.
37. 경상(卿相): 높은 벼슬아치. 재상(宰相)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38. 반행(班行): 조정에서 신하들이 품계에 따라 늘어서는 줄. 조관(朝官)들의 서열 또는 조정 자체를 의미한다.
39. 지우(知遇): 자신의 재능이나 인품을 알아주는 대우. 주로 임금이나 윗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발탁되는 것을 의미한다.
40. 함녕(咸寧): 채수의 고향인 인천(仁川) 지역의 옛 지명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그가 은거한 곳의 지명일 수 있다.
41. 쾌재(快哉): '매우 유쾌하고 시원하다'는 뜻.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쾌재정기(快哉亭記)〉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초연하게 자연을 즐기며 만족하는 심경을 나타낸다.
42. 진신(搢紳): 홀(笏)을 허리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높은 벼슬아치 또는 사대부 계층을 가리킨다.
43. 명수신퇴(名遂身退):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분수를 알고 물러날 때를 아는 지혜로운 처신을 의미한다.
44. 금속(今俗) / 금세(今世): 주석 [주-D003] 참조.


원문:
公天性疏宕不拘, 與物無忤, 唯好讀書, 雖疾病, 未嘗釋卷, 不過數遍成誦。 平生酷愛山水, 罷承旨後, 與成公俔游金剛, 大憲後, 游俗離, 行具草草, 如布衣時。 惟以琴酒自隨, 人莫有知者, 山僧亦以老措大目之。【竝容齋李荇撰墓誌。】

번역문:
공(公)은 천성(天性)이 트여 거리낌 없고(疏宕) 구애받지 않았으며, 남들과 더불어 거스름(忤)이 없었다. 오직 독서(讀書)를 좋아하여 비록 질병 중에도 일찍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두어 번만 읽어도 외웠다(成誦). 평생 산수(山水)를 매우 사랑하여, 승지(承旨)를 그만둔 후에는 성공 현(成公俔)⁴⁵과 함께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였고, 대사헌(大憲)을 그만둔 후에는 속리산(俗離山)을 유람하였는데, 행장(行具)이 매우 간소하여(草草) 포의(布衣)⁴⁶ 시절과 같았다. 오직 거문고와 술(琴酒)만 가지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알아보는 이가 없었고, 산승(山僧) 또한 늙은 초췌한 선비(老措大)⁴⁷로 여겼다.【이상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지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45. 성공 현(成公俔): 성현(成俔, 1439~1504).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음악가. 호는 용재(慵齋), 허백당(虛白堂) 등. 채수와 절친한 사이였다.
46. 포의(布衣): 베옷. 벼슬이 없는 평민이나 선비를 가리킨다.
47. 노조대(老措大): 늙고 초라한 선비. ‘조대(措大)’는 가난하고 불우한 선비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채수가 검소하고 소탈하게 여행하여 사람들이 그의 높은 신분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蔡仁川壽嘗爲都承旨時, 金相壽童爲注書, 年少登第, 容顔秀美, 處事精敏, 仁川公每嘉歎不已。 仁川夫人適懷孕當産, 仁川每仕罷還家, 語夫人曰: “君若生子, 當名壽童。” 未幾, 果生子, 遂命名壽童, 卽參判公紹權小名也。 其後仁川未免嘉善, 而金公已居首相, 宦路翻覆若此, 可笑。【《謏聞瑣錄》。 又見《金相壽童傳》。】

번역문:
인천(仁川) 채수(蔡壽)가 일찍이 도승지(都承旨)로 있을 때, 재상(相) 김수동(金壽童)⁴⁸이 주서(注書)⁴⁹였는데, 젊은 나이에 급제하였고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일 처리가 정밀하고 민첩하여, 인천공(仁川公)이 매번 아름답게 여기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인천공의 부인이 마침 임신하여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인천공이 매번 퇴청하여 집에 돌아오면 부인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이름을 수동(壽童)이라 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아들을 낳으니, 마침내 이름을 수동(壽童)이라 지었으니, 바로 참판공(參判公) 소권(紹權)⁵⁰의 아명(小名)이다. 그 후 인천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⁵¹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김공(金公)은 이미 수상(首相)⁵²의 자리에 있었으니, 환로(宦路)⁵³의 뒤바뀜(翻覆)이 이와 같으니, 가소롭다.【《소문쇄록(謏聞瑣錄)》⁵⁴에서 인용. 또한 《김상수동전(金相壽童傳)》에도 보인다.】

주석:
48. 김상 수동(金相壽童): 김수동(金壽童, 14571520).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미수(眉叟), 호는 운재(雲齋). 채수와 동시대 인물로, 영의정까지 올랐다.
49. 주서(注書): 조선 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정7품 관직. 임금과 신하의 말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역할을 했다.
50. 참판공(參判公) 소권(紹權): 채소권(蔡紹權). 채수의 아들로, 자는 백승(伯承). 참판(參判, 종2품) 벼슬을 지냈다. 아명(어릴 때 이름)이 수동(壽童)이었다는 일화이다.
51. 가선(嘉善):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명. 채수가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될 때 받은 품계이다. '면하지 못했다'는 표현은 그 이상의 고위직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52.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 백관의 으뜸 벼슬.
53. 환로(宦路): 벼슬길.
54. 《소문쇄록(謏聞瑣錄)》: 조선 후기의 학자 조신준(曺莘俊, 1752
1817 이후)이 지은 필기잡록집. 여러 가지 자잘한 이야기를 모아 기록한 책이다.


원문:
蔡仁川壽爲壯元, 而壻金頤叔、李次野俱壯元。 一日, 爲龍頭會, 中壻金延昌勘亦欲與之, 以非魁拒之。 金公令其夫人往告之曰: “小壻三十五爲大提學, 乞以此入參也。” 仁川笑曰: “此不可不許參也。” 遂召而與宴云。【《識小錄》。】

번역문:
인천(仁川) 채수(蔡壽)는 장원(壯元)이었고, 사위 김이숙(金頤叔)⁵⁵과 이차야(李次野)⁵⁶도 모두 장원이었다. 하루는 용두회(龍頭會)⁵⁷를 여는데, 가운데 사위 김연(金延)⁵⁸ 창감(昌勘)⁵⁹ 또한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장원이 아니라 하여 거절하였다. 김공(金公, 김연)이 그의 부인(채수의 딸)을 시켜 가서 고하기를, “작은 사위는 서른다섯에 대제학(大提學)⁶⁰이 되었으니, 청컨대 이것으로써 참여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인천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참여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하고는, 마침내 불러서 함께 잔치하였다고 한다.【《식소록(識小錄)》⁶¹에서 인용】

주석:
55. 김이숙(金頤叔):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채수의 맏사위로, 1501년(연산군 7)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56. 이차야(李次野): 이자(李耔, 1480
15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 채수의 사위로,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57. 용두회(龍頭會): 장원 급제자들의 모임. 용두(龍頭)는 장원을 비유하는 말이다.
58. 김연(金延): 김연(金碾, 1487154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명중(明仲), 호는 낙봉(洛峯). 채수의 사위이다. 장원 급제는 아니었으나 문과에 급제하였다.
59. 창감(昌勘): 김연의 다른 이름이나 호, 또는 관직명일 수 있으나 확인이 필요하다. 문맥상 김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0. 대제학(大提學):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으뜸 벼슬. 문형(文衡)이라고도 하며, 학문과 문장의 최고 영예직이었다. 김연은 35세(1521년)에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61. 《식소록(識小錄)》: 조선 중기의 문신 김성일(金誠一, 1538
1593)이 지은 필기잡록집.


원문:
尹氏之廢也, 成廟嘗以諺書書其罪, 遣中使及承旨一員, 逐日隔帳諷讀, 冀其改過而復壼位。 尹氏終不改, 竟賜死。 燕山臨朝, 盡殺其時承旨, 而蔡壽以不解諺文, 獨免死。【野史之類。】

번역문:
윤씨(尹氏)가 폐위될 때, 성종(成廟)께서 일찍이 언서(諺書)⁶²로 그 죄를 써서 중사(中使)⁶³와 승지(承旨) 한 명을 보내, 날마다 장(帳)을 사이에 두고 풍독(諷讀)⁶⁴하게 하여, 그가 잘못을 고쳐 곤위(壼位)⁶⁵를 회복하기를 바라셨다. 윤씨가 끝내 고치지 않자 마침내 사사(賜死)하셨다. 연산군(燕山君)이 임조(臨朝)⁶⁶하자 그때의 승지들을 모두 죽였는데, 채수(蔡壽)는 언문(諺文)⁶⁷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독 죽음을 면하였다.【야사(野史) 종류의 기록이다.】

주석:
62. 언서(諺書): 언문(諺文)으로 쓴 글. 즉, 한글로 쓴 글을 의미한다.
63. 중사(中使): 궁궐 안에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등의 일을 맡아보던 내시(內侍).
64. 풍독(諷讀): 소리를 내어 읽음. 여기서는 폐비 윤씨에게 죄목을 읽어주어 반성하도록 촉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65. 곤위(壼位): 왕비의 자리. 곤전(壼殿)이라고도 한다.
66. 임조(臨朝): 임금이 조회에 나와 정사를 봄. 즉,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친정(親政)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67. 언문(諺文): 한글을 낮추어 부르던 이름. 채수가 한글을 몰랐기 때문에 폐비 윤씨의 죄목을 읽어줄 수 없었고, 이

 

 

이손(李蓀)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蓀【胡簡公。】
字子芳, 廣陵人。 正統己未生。 己卯進士。 世祖朝, 以善弓馬, 命補宣傳官。 成宗元年庚寅, 登文科。 歷副提學、忠淸・黃海・全羅三道觀察使、吏・兵曹判書。 中宗反正, 參靖國功臣, 封漢山君。 官至左贊成, 賜几杖。 庚辰卒, 年八十二。 配享太祖廟庭。

번역문:
이손(李蓀)【호간공(胡簡公)¹이다.】
자는 자방(子芳)이고, 광릉(廣陵)² 사람이다. 정통(正統)³ 기미년(1439)에 태어났다. 기묘년(1459)에 진사(進士)⁴가 되었다. 세조(世祖)⁵ 때에 활쏘기와 말타기[弓馬]⁶를 잘하여 선전관(宣傳官)⁷에 보임(補任)하라는 명을 받았다. 성종(成宗)⁸ 원년 경인년(1470)에 문과(文科)⁹에 급제하였다. 부제학(副提學)¹⁰, 충청·황해·전라 삼도(三道)의 관찰사(觀察使)¹¹, 이조(吏曹)¹²·병조(兵曹)¹³ 판서(判書)¹⁴를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¹⁵ 때 정국공신(靖國功臣)¹⁶에 참여하여 한산군(漢山君)¹⁷에 봉해졌다. 관직은 좌찬성(左贊成)¹⁸에 이르렀고, 궤장(几杖)¹⁹을 하사받았다. 경진년(1520)²⁰에 졸(卒)하니, 나이 82세였다. 태조(太祖)²¹의 묘정(廟庭)²²에 배향(配享)²³되었다.

주석:

  1. 호간공(胡簡公): 이손의 시호(諡號).
  2. 광릉(廣陵): 본관(本貫). 광릉 이씨(廣陵 李氏) 또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로 알려져 있다.
  3. 정통(正統) 기미년(己未年): 1439년. 정통은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1436~1449)이다.
  4. 진사(進士): 조선 시대 과거(科擧)의 소과(小科) 중 하나인 진사시(進士試) 합격자에게 주던 칭호. 주로 문장력을 시험했다.
  5. 세조(世祖): 조선의 제7대 왕(재위 1455-1468).
  6. 궁마(弓馬): 활쏘기와 말타기. 무예(武藝)를 통칭하는 말이다.
  7. 선전관(宣傳官): 조선 시대 왕명을 전달하고 의장(儀仗)을 담당하던 관청인 선전관청(宣傳官廳)의 관원. 무예가 뛰어난 자를 선발하였다.
  8. 성종(成宗): 조선의 제9대 왕(재위 1469-1494).
  9. 문과(文科): 조선 시대 과거의 대과(大科). 문관(文官)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10.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벼슬.
  11.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12. 이조(吏曹): 육조(六曹)의 하나로,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관청.
  13. 병조(兵曹): 육조의 하나로, 무관의 인사 및 군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14. 판서(判書): 육조의 으뜸 벼슬. 정2품.
  15.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燕山君)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6.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이손은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7. 한산군(漢山君): 이손이 정국공신으로 책록되면서 받은 봉작(封爵). 군(君)은 종친(宗親)이나 공신에게 주던 작위이다.
  18. 좌찬성(左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벼슬. 영의정, 좌·우의정 다음가는 재상이다.
  19. 궤장(几杖): 임금이 나이가 많은(보통 70세 이상) 원로대신에게 하사하던 안석(案席)과 지팡이. 큰 영예로 여겨졌다.
  20. 경진년(庚辰年): 1520년 (중종 15).
  21. 태조(太祖):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의 묘호.
  22.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23.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원문:
公性稟寬厚, 心存敬謹。 其居家, 事親以孝, 處兄弟以友, 恩育諸族, 不間疎遠。 疾病死喪, 護救備至, 常食于家者, 亦不下數十人, 家儲屢空, 略不爲意。 居官, 務持大體, 不事細察, 至決大議, 未嘗少撓。 其聽訟, 剔繁撮要, 剖斷如神, 吏莫容奸, 民莫隱情。 其治民, 寬不至縱, 威不至苛, 蘇羸馭梗, 納之大軌。 故所至必有聲績, 盡可稱述。 聰明之性, 出於天賦, 一經耳目, 終身不忘。 國家典故、文物, 以至山川道里¹、民情物狀, 纖悉究到, 凡有疑質, 應答如響, 少無遺失。 後進者倚以爲蓍蔡焉。

번역문:
공(公)은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寬厚), 마음에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敬謹)을 지녔다. 집에 있을 때는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들에게 우애롭게 대하였으며, 여러 친족들을 은혜로 보살피되 소원(疎遠)한 이들을 가리지 않았다. 질병이나 사망, 상사(喪事)가 있으면 두루 보살피고 구제하였으며, 항상 그의 집에서 식객(食客)으로 지내는 자 또한 수십 인 아래가 아니어서 집안의 저축이 여러 번 비었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는 대체(大體)를 지키는 데 힘쓰고 자잘한 것을 살피는 일에 힘쓰지 않았으며, 큰 논의를 결정함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송사(訟事)를 처리할 때는 번잡한 것을 가려내고 요점(要點)을 잡아 신(神)처럼 명쾌하게 판결하니, 아전들은 간사한 짓을 할 수 없었고 백성들은 사정을 숨기지 못하였다. 백성을 다스릴 때는 너그러우면서도 방종(放縱)에 이르지 않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가혹함(苛)에 이르지 않았으며, 약한 자를 구휼하고 강퍅한 자를 제어하여(蘇羸馭梗)²⁴ 큰 궤도(大軌)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명성과 공적(聲績)이 있어 모두 칭송하고 서술할 만하였다. 총명한 성품은 타고난 것이어서, 한 번 귀와 눈을 거치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국가의 전고(典故)와 문물(文物), 산천(山川)과 도리(道里)²⁵, 민정(民情)과 물태(物狀)에 이르기까지 자잘한 것까지 모두 깊이 연구하였고, 무릇 의문이 있어 질문하면 메아리처럼 응답하여 조금도 빠뜨리거나 잃는 것이 없었다. 후진(後進)들이 그에게 의지하여 시귀(蓍龜)와 채귀(蔡龜)²⁶처럼 여겼다.

주석:
24. 소리 어경(蘇羸馭梗): 약한 자를 살리고(蘇羸) 강하고 뻣뻣한 자를 제어함(馭梗).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25. [주-D001] 里 : 저본(底本)에는 “리(理)”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 및 《용재집(容齋集)・병충분의……증시호간공신도비명(秉忠奮義……贈諡胡簡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도리(道里)는 거리, 길의 과정을 의미한다.
26. 시채(蓍蔡): 시(蓍)는 시초(蓍草) 점, 채(蔡)는 귀갑(龜甲) 점을 의미. 고대의 점치는 도구로, 미래를 예측하거나 의문을 해결하는 데 쓰였다. 후진들이 이손을 학문과 식견이 깊어 의지할 만한 현인으로 여겼음을 비유한다.


원문:
旣老, 與柳領相洵、安判書琛及諸老之少時同遊南庠者, 結爲九老會, 每良辰佳節, 扶携子侄, 迭相往來爲娛, 一世稱美事。【竝容齋李荇撰²碑。】

번역문:
이미 늙어서 영의정(領相) 유순(柳洵), 판서(判書) 안침(安琛) 및 젊은 시절 남상(南庠)²⁷에서 함께 교유했던 여러 노인들과 더불어 구로회(九老會)²⁸를 결성하여, 매번 좋은 날과 아름다운 명절이면 자제와 조카들을 부축하고 이끌며 서로 번갈아 왕래하며 즐기니, 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로 칭송받았다.【이상은 모두 용재(容齋) 이행(李荇)²⁹이 지은(撰)³⁰ 비문(碑)에서 인용³¹】

주석:
27. 남상(南庠):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상(庠)은 고대 중국의 학교 이름이다. 서울 남쪽에 있었기에 남상이라고도 불렸다.
28. 구로회(九老會): 나이 많은 명망 있는 노인 아홉 명이 모여 풍류를 즐기던 모임.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 등이 향산(香山)에서 아홉 노인의 모임을 가진 고사에서 유래했다.
29. 이행(李荇, 1478~153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이손의 아들. 호는 용재(容齋).
30. [주-D002] 撰 : 저본(底本)에는 “선(選)”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 및 장서각본(藏書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찬(撰)은 글을 짓는다는 의미이다.
31.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지은 비문: 《용재집(容齋集)》에 실려 있는 〈유명조선국자의대부한산군행병조판서증시호간이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資義大夫漢山君行兵曹判書贈諡胡簡李公神道碑銘 幷序)〉를 가리킨다.

 

 

권경우(權景祐)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權景祐
字□□¹, □□²人。 成宗元年庚寅登第。 選入翰苑, 歷正言、校理, 官至戶曹參判。

번역문:
권경우(權景祐)
자는 자수(子綏)³이고, 안동(安東)⁴ 사람이다. 성종(成宗) 원년 경인년(1470)에 급제하였다. 한원(翰苑)⁵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언(正言)⁶, 교리(校理)⁷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호조 참판(戶曹參判)⁸에 이르렀다.

주석:

  1. [주-D001] □□ : 《성재집(惺齋集)・대사헌권공신도비명(大司憲權公神道碑銘)》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자수(子綏)”가 되어야 한다.
  2. [주-D002] □□ : 《성재집・대사헌권공신도비명》 및 《국조문과방목》에 근거할 때 “안동(安東)”이 되어야 한다.
  3. 자수(子綏): 권경우의 자(字). 주석 1 참조.
  4. 안동(安東): 권경우의 본관(本貫).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다. 주석 2 참조.
  5.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의 별칭. 문한(文翰)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6.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을 담당했다.
  7. 교리(校理): 홍문관(弘文館)의 정5품 관직.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했다.
  8. 호조 참판(戶曹參判): 육조(六曹) 중 하나인 호조(戶曹)의 버금 벼슬. 종2품. 호조는 재정, 세금, 호구 등을 담당했다.

원문:
成廟朝, 以監察充書狀官, 赴燕。 譯官濫齎物貨, 馹路騷然, 其屬托之家, 多聯權貴。 公一切探索以聞, 苟托一布者, 皆鞫于詔獄, 命超公三級。

번역문:
성종(成廟)⁹ 때에 감찰(監察)¹⁰로서 서장관(書狀官)¹¹에 충원되어 연경(燕京)¹²에 갔다. 역관(譯官)¹³들이 함부로 물화를 가지고 가서 역로(馹路)¹⁴가 소란하였는데, 그들이 속하여 부탁한 집들은 권세가들과 연줄이 닿은 경우가 많았다. 공(公)이 일체를 탐색하여 아뢰니, 구차하게 베 한 필이라도 부탁한 자들은 모두 조옥(詔獄)¹⁵에서 국문(鞫問)당하였고, 공에게는 3등급을 뛰어넘어 승진시키라는 명이 내려졌다.

주석:
9. 성묘(成廟): 성종(成宗)의 묘호(廟號).
10. 감찰(監察): 사헌부(司憲府)의 정6품 관직. 백관을 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11. 서장관(書狀官): 조선 시대 중국에 보내는 사신단(使臣團)의 정3품 관직. 주로 문서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12. 연경(燕京): 중국 북경(北京)의 옛 이름. 당시 명(明)나라의 수도였다.
13. 역관(譯官): 통역을 담당하는 관리. 사역원(司譯院) 소속이었다.
14. 일로(馹路): 역참(驛站)을 통해 여행하는 길. 공무 여행 경로를 의미한다.
15. 조옥(詔獄): 명나라 때 황제의 명으로 죄인을 가두고 심문하던 감옥. 황제의 직속기관인 금의위(錦衣衛) 등이 관할했다. 매우 엄격하게 다스려졌다.


원문:
爲正言, 倡臺諫請黜任士洪, 言甚抗直。 士洪乘夕抵公, 陽爲不知者曰: “誰敢爲此論者?” 公直答曰: “唯我敢爾。” 士洪氣沮, 不敢出一言而退。

번역문: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대간(臺諫)¹⁶을 이끌고 임사홍(任士洪)¹⁷을 내쫓을 것을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경하고 정직하였다. 임사홍이 저녁 무렵 공에게 이르러,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며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런 논의를 하는 자인가?” 하였다. 공이 바로 대답하기를 “오직 내가 감히 그리하였소.” 하니, 임사홍이 기가 꺾여 감히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물러갔다.

주석:
16. 대간(臺諫): 사헌부(司憲府, 臺)와 사간원(司諫院, 諫)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과 감찰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17. 임사홍(任士洪, 1445~1506): 조선 전기의 문신, 간신.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폐비 윤씨 사건 등에 연루되어 비판을 받았다. 연산군 대에 다시 등용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원문:
在弘文館, 論廢妃雖有罪, 不宜褻處閭閻。 上震怒, 以爲陰附世子, 爲後日地, 命下牢獄, 責詰備至。 公略不沮挫, 開陳誠悃, 援據歷代人主待廢妃事, 益剴切, 上乃霽威, 只罷其職。【竝《稗官雜記》。】

번역문:
홍문관(弘文館)¹⁸에 있을 때 폐비(廢妃)¹⁹가 비록 죄가 있으나 여염(閭閻)²⁰에 함부로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논하였다. 상(上)께서 크게 노하시어, 몰래 세자(世子)²¹에게 붙어 후일의 발판(後日地)을 마련하려 한다고 여겨 감옥(牢獄)에 가두도록 명하고, 책망하고 문책함이 극진하였다. 공은 조금도 꺾이거나 좌절하지 않고 정성스러운 마음(誠悃)을 열어 진술하며, 역대 임금들이 폐비를 대우한 사례를 인용하여 더욱 간절히 아뢰니(剴切), 상께서 이에 노여움을 거두시고 단지 그의 관직만 파면하셨다.【이상은 모두 《패관잡기(稗官雜記)》²²에서 인용】

주석:
18. 홍문관(弘文館): 조선 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하며 임금의 자문에 응하던 기관. 옥당(玉堂)이라고도 한다.
19. 폐비(廢妃): 폐위된 왕비. 여기서는 성종의 계비(繼妃)였던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1482)를 가리킨다. 연산군의 생모이다.
20. 여염(閭閻):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나 집. 폐비 윤씨를 사가(私家)로 내쫓은 것을 의미한다.
21. 세자(世子): 당시 세자는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燕山君)이었다. 성종은 권경우가 연산군을 등에 업고 훗날을 도모하려 한다고 의심한 것이다.
22. 《패관잡기(稗官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설화집.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와 사회상을 담고 있다.

 

 

김흔(金訢)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金訢
字君節, 號顔樂堂, □□¹人。 正統戊辰生。 成宗二年辛卯, 登魁科。 賜暇湖堂, 選入玉堂, 歷直提學、藝文應敎, 官至工曹參議。 壬子卒, 年四十五。

번역문:
김흔(金訢)
자는 군절(君節)이고, 호는 안락당(顔樂堂)이며, 연안(延安)² 사람이다. 정통(正統) 무진년(1448)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2년 신묘년(1471)에 괴과(魁科)³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⁴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⁵하고 옥당(玉堂)⁶에 선발되어 들어가, 직제학(直提學)⁷, 예문 응교(藝文應敎)⁸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공조 참의(工曹參議)⁹에 이르렀다. 임자년(1492)¹⁰에 졸(卒)하니, 나이 45세였다.

주석:

  1. [주-D001] □□ : 《용재집(容齋集)・안락당김공신도비명(顔樂堂金公神道碑銘)》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연안(延安)”이 되어야 한다.
  2. 연안(延安): 김흔의 본관. 연안 김씨(延安 金氏)이다. 주석 1 참조.
  3. 괴과(魁科): 문과(文科) 시험에서 수석(首席), 즉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것을 의미한다.
  4. 호당(湖堂): 조선 시대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시행하던 곳. 독서당(讀書堂)이라고도 한다.
  5.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특별히 유능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큰 영예로 여겨졌다.
  6.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7.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 벼슬. 부제학(副提學) 아래이다.
  8. 예문 응교(藝文應敎): 예문관(藝文館)의 정4품 관직. 임금의 교서(敎書) 등을 짓는 일을 담당했다.
  9. 공조 참의(工曹參議): 육조(六曹) 중 하나인 공조(工曹)의 정3품 당하관 벼슬. 공조는 공장(工匠), 공예, 건축, 도량형 등을 담당했다.
  10. 임자년(壬子年): 1492년 (성종 23).

원문:
胡簡有三子: 長文貞公, 季今領相公, 公其仲也。 少與文貞俱受業於佔畢齋之門, 大被稱賞, 在儒冠, 名動搢紳間。

번역문:
호간공(胡簡公, 이손)¹¹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문정공(文貞公, 이집)¹²이고 막내는 지금의 영의정공(領相公, 이행)¹³이며, 공(公)은 그 둘째이다. 어려서 문정공과 함께 점필재(佔畢齋)¹⁴의 문하(門下)에서 학업을 받아 크게 칭찬과 상찬을 받았으며, 유관(儒冠)¹⁵ 시절에 이미 명성이 진신(搢紳)¹⁶ 사이에 알려졌다.

주석:
11. 호간공(胡簡公): 이손(李蓀, 14391520). 김흔의 장인(丈人).
12. 문정공(文貞公): 이집(李諿, 1469
1504). 이손의 맏아들. 김흔의 처남. 시호는 문정(文貞).
13. 영의정공(領相公): 이행(李荇, 14781534). 이손의 막내아들. 김흔의 처남. 영의정을 지냈다. 이 글이 쓰여질 당시 영의정이었음을 나타낸다.
14.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
1492)의 호.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사림파(士林派)의 영수.
15. 유관(儒冠): 유생(儒生)의 관(冠). 성균관 등에서 공부하던 젊은 유생 시절을 의미한다.
16. 진신(搢紳): 홀(笏)을 허리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조정의 관리 또는 사대부 계층을 가리킨다.


원문:
公資稟甚高, 志氣超邁, 表裏洞澈, 無一點査滓。 爲文章, 簡古精到。 嘗侍經筵, 論事觸諱¹, 天威震怒, 左右爲之恐, 公徐徐辨析不少動。 及奉使海洋, 卒遇風濤, 舟中皆叫號失措, 公獨端坐吟嘯自若, 其不以死生、利害撓其中如此。 公之所自得者, 不但文章然也。【竝容齋李荇撰碑。】

번역문:
공은 자품(資稟)이 매우 높고 지기(志氣)가 뛰어나며, 표리(表裏)가 명백하게 통하여 한 점의 티끌(査滓)도 없었다. 문장을 지으면 간결하고 예스러우며(簡古) 정밀하고 심오하였다(精到). 일찍이 경연(經筵)¹⁷에 시종(侍從)하여 일을 논하다가 임금의 비위(諱)¹⁸를 거스르자 천위(天威)가 진노하여 좌우의 신하들이 그를 위해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천천히 변론하고 분석하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신으로 바다를 건널 때 갑자기 풍랑(風濤)을 만나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공만은 홀로 단정히 앉아 시를 읊조리며(吟嘯) 태연자약하였으니, 그가 죽음과 삶, 이해(利害) 때문에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스스로 터득한 바는 단지 문장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이상은 모두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지은 비문에서 인용】

주석:
17.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강론하고 국정(國政)을 논의하던 자리.
18. [주-D002] 思 :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야언(海東野言)・성종(成宗)》 및 《성종실록(成宗實錄)》 17년 7월 12일에는 “점(漸)”으로 되어 있다. 원문의 '觸諱'는 임금의 비위나 꺼리는 바를 건드렸다는 의미이다. '漸'으로 볼 경우, 점차 임금의 뜻에 어긋나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문맥상 '觸諱'가 더 자연스럽다. 저본의 '思'는 오자로 보인다.


원문:
丙午, 直提學金訢以命進獻其外曾祖成槪所書魏徵《十思疏》, 兼進箚子, 以寓規儆之意。 上乃賜經御白綃帖裏、黍¹⁹皮靴, 且手札金牋以賜曰: “省所上箚子與魏徵疏軸, 深用嘉焉。 徵之此言, 實萬世之蓍龜也。 爾父勸汝以魏相自許, 爾又勸余以唐、虞同治, 可謂父愛其子, 臣愛其君者也。 予雖不淑, 其敢忘之? 嘉汝之誠, 賞以褒之, 常置左右, 以自警焉。 書之楷正, 固無所取。” 特陞訢爲工曹參議, 陞其父友臣爲丹陽郡守。【《忠敏公雜記》。】

번역문:
병오년(1486)²⁰에 직제학 김흔이 명(命)에 따라 그의 외증조(外曾祖) 성개(成槪)²¹가 쓴 위징(魏徵)의 《십사소(十思疏)》²²를 진헌(進獻)하고, 아울러 차자(箚子)²³를 올려 규간하고 경계하는(規儆) 뜻을 담았다. 상(上)께서 이에 경연(經筵)에서 입는 흰 명주 첩리(白綃帖裏)²⁴, 검은 사슴 가죽신(黍皮靴)²⁵을 하사하시고, 또 금전(金牋)²⁶에 직접 글씨를 써서(手札) 하사하며 말씀하셨다. “올린 차자와 위징의 소(疏) 두루마리를 살펴보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위징의 이 말은 실로 만세(萬世)의 시귀(蓍龜)이다. 너의 아버지가 너에게 위징과 같은 재상(魏相)이 되기를 스스로 기대하라고 권하였고, 너는 또 나에게 당(唐)·우(虞)²⁷와 같은 다스림을 이루도록 권하니, 아비가 그 자식을 사랑하고 신하가 그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이를 만하다. 내가 비록 불민(不淑)하나 어찌 감히 그것을 잊겠는가? 너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상(賞)으로써 이를 포상하니, 항상 좌우에 두고 스스로 경계하겠다. 글씨의 해서(楷書)가 바른 것은 진실로 취할 바가 없다²⁸.” 특별히 김흔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승진시키고, 그의 아버지 김우신(金友臣)²⁹을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승진시켰다.【《충민공잡기(忠敏公雜記)》³⁰에서 인용】

주석:
19. [주-D003] 黍 : 《대동야승・해동야언・성종》에는 앞에 “흑(黑)”이 더 있고, 《성종실록》 17년 7월 12일에는 “흑사(黑斜)”로 되어 있다. 서피화(黍皮靴)는 일반적으로 검은 사슴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의미하므로, '흑' 또는 '흑사'가 첨가된 기록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저본을 따라 번역하되 이문을 참고한다.
20. 병오년(丙午年): 1486년 (성종 17).
21. 성개(成槪): 조선 초기의 문신. 김흔의 외증조부.
22. 《십사소(十思疏)》: 당(唐)나라 명재상 위징(魏徵)이 당 태종(太宗)에게 올린 상소문. 임금이 경계해야 할 열 가지 사항(見可思廉, 將作思止, 念高思謙, 懼滿思沖, 樂盤思節, 憂懈思愼, 慮壅思虛, 賞賜思公, 忿怒思難, 見善思敬)을 담고 있다. 제왕학(帝王學)의 중요한 문헌으로 여겨졌다.
23.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주로 자신의 의견이나 건의 사항을 적었다.
24. 백초첩리(白綃帖裏): 흰 명주로 만든 첩리(帖裏). 첩리는 조선 시대 관리들이 입던 공복(公服)의 일종이다. 경연 시복(時服)으로 사용되었다.
25. 서피화(黍皮靴): 검은 사슴 가죽으로 만든 신발. 주석 19 참조.
26. 금전(金牋): 금가루를 뿌리거나 금박을 입힌 종이. 귀한 문서 작성에 사용되었다.
27. 당(唐)·우(虞):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성군(聖君)인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가리킨다. 요임금의 국호가 당(唐), 순임금의 국호가 우(虞)였다. 태평성대를 비유한다.
28. 글씨의 해서(楷書)가 바른 것은 진실로 취할 바가 없다: 성개가 쓴 《십사소》의 글씨체가 해서체로 매우 반듯하여 훌륭하다는 칭찬의 말이다. '취할 바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완벽하다는 반어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29. 김우신(金友臣): 김흔의 아버지.
30. 《충민공잡기(忠敏公雜記)》: 충민공(忠敏公)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의 문집 《망헌집(忘軒集)》 등에 실린 잡록(雜錄)일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출처 확인이 필요하다. 또는 다른 인물의 기록일 수도 있다.


원문:
公早升堂於佔畢齋, 得其淵源。 今觀其詩, 簡正古雅, 削其世俗華艶, 一主於精深, 如冠冕佩玉, 聲容節度, 可敬而儀也。 余謂公之詩, 非東方之詩也。 觀其所用力, 直欲寫出性情之蘊, 遠追古人意趣, 所謂“敻越常情, 卓然有見”者也。【《顔樂堂集跋》。】

번역문:
공은 일찍이 점필재(佔畢齋)의 당(堂)에 올라 그 학문의 연원(淵源)을 얻었다. 지금 그의 시(詩)를 보니, 간결하고 바르며(簡正) 예스럽고 아담하며(古雅), 세속의 화려하고 요염함(華艶)을 깎아내고 한결같이 정밀하고 깊음(精深)을 위주로 하니, 마치 관면(冠冕)을 쓰고 패옥(佩玉)을 찬 듯 그 소리와 용모, 절도(聲容節度)가 공경하고 본받을 만하다. 내가 이르기를, 공의 시는 동방(東方)의 시가 아니다. 그 힘쓴 바를 보면, 바로 성정(性情)의 깊은 속뜻(蘊)을 써내어 멀리 옛사람의 의취(意趣)를 따르고자 하니, 이른바 “상정(常情)을 멀리 뛰어넘어 탁월한 견해가 있다”³¹는 것이다.【《안락당집발(顔樂堂集跋)》³²에서 인용】

주석:
31. 형월상정 탁연유견(敻越常情 卓然有見): 평범한 감정을 멀리 뛰어넘어 탁월한 식견이나 견해가 있다는 뜻. 김흔의 시가 단순한 기교나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깊은 철학적 경지와 독창성을 지녔음을 칭찬하는 말이다.
32. 《안락당집발(顔樂堂集跋)》: 김흔의 문집인 《안락당집(顔樂堂集)》의 발문(跋文)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원문:
壬寅, 余誤恩西淸, 一時魁傑雄俊之士林立, 而心所敬服者, 獨吾君節耳。 嘗欲剡³³章論事, 締思數日, 過君節質之, 則微笑若有所思¹, 索筆盡抹去, 命易他紙, 颯颯風馳而雨驟, 筆不暫停, 須臾已盈數紙。 從傍睨之, 出入古今, 援據精³⁴切, 文彩爛然, 如從濩者, 雖磬終身之力, 其敢望其髣髴耶?【申從濩撰墓誌。】

번역문:
임인년(1482)³⁵에 내가 잘못된 은혜로 서청(西淸)³⁶에 있었는데, 한 시대의 괴걸(魁傑)하고 영웅(雄俊)한 선비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었으나, 마음으로 경복(敬服)하는 자는 오직 나의 군절(君節, 김흔)뿐이었다. 일찍이 글(章)을 올려³⁷ 일을 논하고자 하여 며칠 동안 생각을 엮다가 군절에게 가서 질정(質正)하니,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붓을 찾아 모두 지워버리고 다른 종이로 바꾸라고 명하고는, 삽삽(颯颯)하게 바람이 달리고 비가 몰아치듯 붓을 잠시도 멈추지 않아 잠깐 사이에 이미 여러 장을 채웠다. 곁에서 엿보니, 고금(古今)을 넘나들고 인용과 논거(援據)가 정밀하고 간절하며³⁸, 문채(文彩)가 찬란하여 마치 조화(造化)를 따르는 듯하니, 비록 종신토록 힘을 다한다 한들 그 비슷하게나마 바라볼 수 있겠는가?【신종호(申從濩)³⁹가 지은 묘지(墓誌)⁴⁰에서 인용】

주석:
33. [주-D004] 剡 : 저본(底本)에는 “점(郯)”으로 되어 있다. 《안락당집(顔樂堂集)・묘지명(墓誌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섬(剡)은 '깎다', '쓰다', '날카롭다' 등의 뜻이 있으며, 여기서는 상소문 등을 '써서 올리다'는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34. [주-D005] 精 : 저본(底本)에는 “청(淸)”으로 되어 있다. 《안락당집・묘지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정절(精切)은 '정밀하고 간절하다'는 뜻으로, 논거나 설명이 매우 정확하고 핵심을 찌름을 의미한다.
35.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 13).
36. 서청(西淸):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홍문관이 경복궁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은(誤恩)'은 '잘못된 은혜'라는 겸양의 표현으로, 자신이 홍문관에 제수된 것을 낮추어 말하는 것이다.
37. 글(章)을 올려: 원문의 섬장(剡章)은 상소문(上疏文)과 같은 격식을 갖춘 글을 써서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38. 정밀하고 간절하며: 원문의 정절(精切)의 의미. 주석 34 참조.
39. 신종호(申從濩, 1456~1497):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졸재(拙齋). 이 글의 필자이다.
40.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 옆에 묻는 돌이나 도판, 또는 거기에 새긴 글. 묘지명(墓誌銘)이라고도 한다.

 

 

유호인(兪好仁)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兪好仁
字克己, 號㵢溪, 高靈人。 正統乙丑生。 世祖八年壬午生、進, 成宗五年甲午登第, 賜暇湖堂。 歷校理、掌令。 甲寅卒, 年五十。

번역문:
유호인(兪好仁)
자는 극기(克己)이고, 호는 희계(㵢溪)이며, 고령(高靈)¹ 사람이다. 정통(正統) 을축년(1445)에 태어났다. 세조(世祖) 8년 임오년(1462)에 생원(生員)·진사(進士)²시에 합격하였고, 성종(成宗) 5년 갑오년(1474)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교리(校理), 장령(掌令)³을 역임하였다. 갑인년(1494)⁴에 졸(卒)하니, 나이 50세였다.

주석:

  1. 고령(高靈): 유호인의 본관. 고령 유씨(高靈 兪氏).
  2. 생원(生員)·진사(進士): 조선 시대 소과(小科) 시험인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함께 통칭하는 말. 생원시는 주로 경서(經書) 이해 능력을, 진사시는 문장력을 평가했다.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는 것을 '양시(兩試)에 합격했다'고 한다.
  3. 장령(掌令): 사헌부(司憲府)의 정4품 관직. 감찰과 탄핵을 담당했다.
  4.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

원문:
公幼而聰睿, 器宇天成, 年纔踰紀, 華聞已播。 壬午, 俱中司馬兩試。 佔畢齋金先生爲咸陽郡守, 一見奇之, 許以忘年。

번역문:
공은 어려서 총명하고 예지로우며(聰睿) 기량과 도량(器宇)이 하늘로부터 이루어져, 나이가 겨우 1기(紀, 12년)⁵를 넘었을 때 화려한 명성(華聞)이 이미 퍼졌다. 임오년(1462)에 사마시(司馬試) 양시(兩試)⁶에 모두 합격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⁷이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망년지교(忘年之交)⁸를 허락하였다.

주석:
5. 기(紀): 12년을 의미한다. 즉, 12세가 갓 넘었을 때를 말한다.
6. 사마시(司馬試) 양시(兩試):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 부르는 말. 주석 2 참조.
7.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 1431~1492).
8. 망년지교(忘年之交): 나이 차이를 잊고 맺는 사귐. 김종직이 젊은 유호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公忠孝淸白, 居家不事産業, 妻孥不免有窘, 晏如也。 性沈重簡嚴, 常不動聲色, 而子弟、僕妾畏之如神明。【竝林葛川薰撰行狀。】

번역문:
공은 충효(忠孝)하고 청백(淸白)하였으며, 집에 거처할 때는 산업(産業)을 돌보지 않아 처자(妻孥)가 곤궁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태연하였다(晏如).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하며(沈重) 간결하고 엄격하여(簡嚴) 항상 성색(聲色)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자제(子弟)와 복첩(僕妾)들이 그를 신명(神明)처럼 두려워하였다.【이상은 모두 갈천(葛川) 임훈(林薰)⁹이 지은 행장(行狀)¹⁰에서 인용】

주석:
9. 갈천(葛川) 임훈(林薰, 1453~1505):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갈천(葛川).
10.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품, 행적, 공적 등을 기록한 글. 주로 자손이나 문인(門人)이 짓는다.


원문:
公詩文高古, 筆力遒勁, 時稱三絶。 佔畢公文行冠一時, 公不讓焉。 公臨終, 語其子進士瑍曰: “君子須要不欺君, 汝若得一命, 當思我言。” 家于㵢溪, 因以爲號。【《潛谷舊錄》。】

번역문:
공은 시문(詩文)이 고아하고 예스러우며(高古) 필력(筆力)이 굳세고 힘차서(遒勁), 당시에 삼절(三絶)¹¹이라 일컬어졌다. 점필공(佔畢公, 김종직)의 문장과 행실(文行)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으나, 공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不讓). 공이 임종(臨終)할 때 그의 아들 진사(進士) 유환(兪瑍)¹²에게 말하였다. “군자(君子)는 모름지기 임금을 속이지 않아야 하니, 네가 만약 일명(一命)¹³이라도 얻거든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하라.” 희계(㵢溪)에 집을 두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호(號)를 삼았다.【《잠곡구록(潛谷舊錄)》¹⁴에서 인용】

주석:
11. 삼절(三絶): 시(詩), 서(書), 화(畫) 세 가지 분야에 모두 뛰어나거나, 또는 특정 세 가지 분야에서 절묘한 경지에 이른 것을 칭찬하는 말. 여기서는 시문과 필력을 포함하여 뛰어난 점을 통칭한 것으로 보인다.
12. 유환(兪瑍): 유호인의 아들. 진사시에 합격했다.
13. 일명(一命): 낮은 관직이라도 얻게 되면. 명(命)은 관직 임명을 의미한다.
14.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의 저술과 관련된 기록일 수 있으나, 정확한 서명과 내용은 확인이 필요하다. 다른 인물의 기록일 가능성도 있다.


원문:
姜私淑希孟《送公歸養序》曰: “金侯宗直爲郡守【咸陽。】, 尙文敎, 傍近子弟嬴糧而就學者, 毋慮數十人。 若夏山曺公偉大虛氏、高靈兪公好仁克己氏, 皆使君所陶鑄, 而雄文鉅筆, 馳譽南州者也。 一日, 使君與兪公克己氏偕¹⁵來, 景醇出迎于座, 目其貌沈靜而簡默, 耳其言暢達而若訥, 乃知非凡士也。 徐觀其爲人, 則學問精博, 詞藻雄渾, 不規規於事爲之末, 而超然有薄榮利而崇道德者矣。”

번역문:
강희맹(姜希孟)¹⁶이 사사로이 지은(私淑) 《송공귀양서(送公歸養序)》¹⁷에 이르기를, “김후(金侯) 종직(宗直)이 군수【함양(咸陽)】로 있을 때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부근의 자제들이 양식을 싸 가지고 나아가 배우는 자가 수십 인에 이르렀다. 하산(夏山) 조공(曺公) 위(偉) 대허씨(大虛氏)¹⁸, 고령(高靈) 유공(兪公) 호인(好仁) 극기씨(克己氏)와 같은 이들은 모두 사군(使君, 김종직)이 도야하고 육성한(陶鑄) 바로서, 뛰어난 문장과 큰 필력(雄文鉅筆)으로 남주(南州)¹⁹에 명성을 떨친 자들이다. 하루는 사군이 유공 극기씨와 함께¹⁵ 오니, 경순(景醇, 강희맹)이 나가 자리에서 맞이하였는데, 그 용모가 침정(沈靜)하고 간묵(簡默)함을 보고, 그 말이 창달(暢達)하면서도 어눌한 듯함(若訥)을 듣고는, 이에 범상치 않은 선비임을 알았다. 천천히 그의 사람됨을 보니,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며(精博) 사조(詞藻)²⁰가 웅혼(雄渾)하였고, 자잘한 일(事爲之末)에 구애되지(規規) 아니하고 초연(超然)히 영화와 이익(榮利)을 가벼이 여기고 도덕(道德)을 숭상하는 면이 있었다.”

주석:
15. [주-D001] 偕 : 저본(底本)에는 “해(諧)”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동문선(東文選)・송유수찬귀양서(送兪修撰歸養序)》, 《사숙재집(私淑齋集)・송유수찬귀양서(送兪修撰歸養序)》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해(偕)는 '함께'라는 의미이다.
16.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호는 사숙재(私淑齋), 국오(菊塢) 등. '사숙(私淑)'은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학문이나 덕행을 본받아 따름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강희맹 자신 또는 그의 글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였다.
17. 《송공귀양서(送公歸養序)》: 유호인이 귀양(歸養,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봉양함)하는 것을 전송하며 쓴 글의 서문.
18. 하산(夏山) 조공(曺公) 위(偉) 대허씨(大虛氏): 조위(曺偉, 1454
1503).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매계(梅溪). 김종직의 문인이다. 대허(大虛)는 그의 자(字)이다.
19. 남주(南州): 남쪽 지방. 영남(嶺南) 지방을 가리킨다.
20. 사조(詞藻): 시부(詩賦) 등의 문학 작품이나 아름답게 꾸민 문장.


원문:
鄭一蠧《祭公文》曰: “惟靈大氣鵬擧, 奇姿²¹豹蔚。 雲煙千紙, 風雨一筆。 早擢蓮榜, 晩登桂籍。 儒林宗匠, 玉堂巨擘。 王用玉汝, 儲養文局。 爲親而屈, 再製錦縠。 才非百里, 豈可小邑? 玆承綸命, 宜侍帷²²幄。 文章緖餘, 忠義奮激。 竟入烏臺, 庶振邦國。 西山日薄²³, 烏鳥情切。 特授江陽, 五鼎何榮? 鶴髮在闈, 未及軺迎。 安知微恙, 遽至易簀? 遠近聞訃, 孰不痛惜?”

번역문:
정일두(鄭一蠹)²⁴의 《제공문(祭公文)》²⁵에 이르기를, “오직 영령(惟靈)께서는 큰 기상이 붕새처럼 날아오르고(鵬擧), 기이한 자태는 표범처럼 무늬가 아름다웠네(豹蔚)²⁶. 구름과 연기 같은 천 장의 종이요, 비바람 같은 한 자루 붓일세. 일찍이 연방(蓮榜)²⁷에 뽑히고, 늦게 계적(桂籍)²⁸에 올랐네. 유림(儒林)의 종장(宗匠)²⁹이요, 옥당(玉堂)의 거벽(巨擘)³⁰일세. 임금께서 그대를 옥처럼 여겨 문국(文局)³¹에서 저축하고 길렀네. 어버이를 위해 몸을 굽혀 다시 금곡(錦縠)³²을 지었으니, 재주가 백 리에 그칠 이 아닌데 어찌 작은 고을에 둘 수 있으랴? 이에 임금의 명(綸命)³³을 받들어 마땅히 유악(帷幄)³⁴을 모셔야 하리. 문장(文章)은 서여(緖餘)³⁵요, 충의(忠義)는 분발하고 격려되었네. 마침내 오대(烏臺)³⁶에 들어가 거의 방국(邦國)을 진작시켰네. 서산(西山)에 해는 저물어 가고(日薄) 오조(烏鳥)³⁷의 정은 간절하네. 특별히 강양(江陽)³⁸을 제수하니 오정(五鼎)³⁹이 어찌 영화로우랴? 학발(鶴髮)⁴⁰ 어버이 규문(闈)에 계시어 미처 초거(軺車)로 맞이하지 못하였네. 어찌 알았으랴, 작은 병환(微恙)으로 갑자기 역책(易簀)⁴¹에 이를 줄을? 원근(遠近)에서 부고(訃)를 듣고 누가 애통하고 애석해하지 않으리오?”

주석:
21. [주-D002] 姿 : 《일두집(一蠹集)・제유희계문(祭兪㵢溪文)》에는 “재(才)”로 되어 있다. 기자(奇姿)는 '기이한 자태', 기재(奇才)는 '기이한 재주'를 의미한다.
22. [주-D003] 帷 : 《일두집・제유희계문》에는 “경(經)”으로 되어 있다. 시유악(侍帷幄)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심을, 시경악(侍經幄)은 경연(經筵)에서 모심을 의미한다. 문맥상 둘 다 가능하다.
23. [주-D004] 薄 : 《일두집・제유희계문》에는 “박(迫)”으로 되어 있다. 일박(日薄)이나 일박(日迫) 모두 '해가 서산에 지려하다'는 의미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비유한다.
24. 정일두(鄭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호.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김종직의 문인.
25. 《제공문(祭公文)》: 유호인의 제사 때 읽은 제문(祭文).
26. 표울(豹蔚): 표범의 무늬가 아름답게 빛남. 문채(文彩)가 뛰어남을 비유한다.
27. 연방(蓮榜): 생원시(生員試) 합격자 명단. 방목(榜目)에 연꽃 무늬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
28. 계적(桂籍): 문과(文科) 급제자 명단. 월궁(月宮)의 계수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29. 종장(宗匠): 학문이나 예술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 여러 사람의 추앙을 받는 사람.
30. 거벽(巨擘): 어떤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엄지손가락(擘)에 비유한 것이다.
31. 문국(文局): 글을 다루는 관청. 홍문관(弘文館)이나 예문관(藝文館) 등을 가리킨다.
32. 금곡(錦縠): 비단 옷. 아름다운 문장이나 시를 비유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으로 나가는 것을, 아름다운 옷을 다시 지어 입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33. 윤명(綸命): 임금의 명령.
34. 유악(帷幄): 임금의 장막.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주석 22 참조.
35. 서여(緖餘): 주된 일 외의 나머지 일. 문장은 그의 본업인 도덕 실천이나 정치 외의 부차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36. 오대(烏臺): 사헌부(司憲府)의 별칭. 한(漢)나라 때 어사대(御史臺) 관청에 까마귀가 많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유호인이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음을 의미한다.
37. 오조(烏鳥): 까마귀. 반포지효(反哺之孝)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효심(孝心)을 상징한다. 어버이를 봉양하려는 마음을 뜻한다.
38. 강양(江陽): 진주(晉州)의 옛 이름 또는 별칭. 다음 문단에서 진주 목사 제수 논의가 나오므로 진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9. 오정(五鼎): 다섯 개의 솥. 고대에 제후(諸侯)나 경대부(卿大夫)가 사용하던 예기(禮器)로, 높은 벼슬이나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40. 학발(鶴髮): 학처럼 하얗게 센 머리털. 늙은 어버이를 의미한다.
41. 역책(易簀): 자리를 바꾼다는 뜻으로, 죽음이 임박했거나 죽음을 의미한다. 증자(曾子)가 죽기 전에 누워 있던 자리가 신분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자리를 바꾸게 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원문:
魚得江銘公曰: “久矣黃壤, 埋此白璧。 四十年來, 但一片石。 淸廟之器, 藍田之出。 一團和氣, 溫而有栗。 德行旣備, 文章餘事。 漢郭有道, 宋陳處士。 石雖爛矣, 萬古香名, 我不諛墓, 無愧於銘。”

번역문:
어득강(魚得江)⁴²이 공을 명(銘)하기를, “오래되었네, 황양(黃壤)⁴³에 이 백옥(白璧)⁴⁴ 묻힌 지. 사십 년래 다만 한 조각 돌일세. 청묘(淸廟)의 그릇⁴⁵이요, 남전(藍田)의 소출⁴⁶일세. 한 덩이 화기(和氣)여, 온화하면서도 위엄(栗)이 있었네. 덕행(德行)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문장은 여사(餘事)⁴⁷일세. 한(漢)나라 곽유도(郭有道)⁴⁸요, 송(宋)나라 진처사(陳處士)⁴⁹로다. 돌은 비록 썩을지라도 만고(萬古)에 향기로운 이름이여, 내가 무덤에 아첨하지 않으니 명(銘)에 부끄러움 없으리.”

주석:
42. 어득강(魚得江, 1470~1524):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관포(灌圃).
43. 황양(黃壤): 누런 흙. 무덤 또는 저승을 의미한다.
44. 백옥(白璧): 흰 옥. 결백하고 뛰어난 인물이나 재능을 비유한다.
45. 청묘지기(淸廟之器): 종묘(宗廟)의 제기(祭器).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비유한다.
46. 남전지출(藍田之出): 남전(藍田)에서 나는 옥(玉). 남전은 중국의 유명한 옥 산지이다. 뛰어난 인재나 귀한 물건을 비유한다.
47. 여사(餘事): 주된 일 외의 부차적인 일. 문장은 덕행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라는 의미.
48. 곽유도(郭有道): 후한(後漢)의 학자 곽태(郭泰)의 자(字). 덕행과 학문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49. 진처사(陳處士): 송(宋)나라의 학자 진단(陳摶). 도학(道學)에 뛰어나고 처사(處士)로 지냈다.


원문:
兪好仁在成廟朝, 以文章最承恩寵。 親老乞養, 由修撰除居昌, 由校理除義城, 最後以掌令, 又乞歸養, 上使之輦母來京, 以病不能致。 御札下銓曹曰: “好仁事親日短, 可除其隣晉州牧使。” 銓曹辭以不可無故徑遷, 以毁成憲, 乃待陜川⁵⁰之闕除之。 好仁雖在外任, 上令歲抄錄進所著詩文, 輒褒美, 賜母食物。 時曺梅溪偉亦乞養補外, 與好仁同被睿渥, 迥出常數, 人皆榮之。【《東閣雜記》。】

번역문:
유호인이 성종(成廟) 때에 문장(文章)으로 가장 은총(恩寵)을 받았다. 어버이가 늙어 봉양하기를 빌어(乞養) 수찬(修撰)⁵¹에서 거창 현감(居昌縣監)으로 제수되었고, 교리(校理)에서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제수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장령(掌令)으로서 또 귀양(歸養)을 빌자, 상(上)께서 그로 하여금 어머니를 수레에 태워 서울로 오게 하였으나 병으로 모셔오지 못하였다. 어찰(御札)⁵²을 이전(吏曹)⁵³에 내려 이르기를, “호인의 어버이를 섬길 날이 짧으니, 그 이웃 고을인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제수함이 옳다.” 하였다. 이전에서 까닭 없이 곧바로 옮기는 것은 성헌(成憲)⁵⁴을 훼손하는 것이라 불가하다고 사양하고, 이에 합천 군수(陜川郡守)⁵⁵의 결원(闕)을 기다려 제수하였다. 호인이 비록 외임(外任)에 있었으나, 상께서 해마다 그가 지은 시문(詩文)을 초록(抄錄)하여 올리게 하고 번번이 포상하고 아름답다 칭찬하며 어머니에게 음식을 하사하셨다. 이때 조매계(曺梅溪) 위(偉)⁵⁶ 또한 귀양(乞養)하여 외직(外職)에 보임되었는데, 호인과 함께 임금의 두터운 은혜(睿渥)를 입음이 보통의 경우를 훨씬 뛰어넘어,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동각잡기(東閣雜記)》⁵⁷에서 인용】

주석:
50. [주-D005] 川 : 저본(底本)에는 “주(州)”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대동야승(大東野乘)・동각잡기(東閣雜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51. 수찬(修撰): 홍문관(弘文館) 또는 춘추관(春秋館)의 정6품 관직. 경연(經筵) 참여, 문한(文翰) 처리, 사초(史草) 작성 등을 담당했다.
52. 어찰(御札): 임금이 직접 쓴 글이나 편지.
53. 전조(銓曹): 이조(吏曹)의 별칭. 관리의 인사(銓選)를 담당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54. 성헌(成憲): 이미 정해진 법규나 제도.
55. 합천 군수(陜川郡守): 경상도 합천군의 수령. 주석 50 참조.
56. 조매계(曺梅溪) 위(偉): 조위(曺偉). 주석 18 참조.
57.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동각(東閣)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원문:
兪公好仁在玉堂, 恩顧特優, 非他學士比。 每月夜, 從宦者數人, 遊慶會樓, 池中小舟僅受五六人, 獨命好仁從之, 有若唐玄宗之待李謫仙也。 好仁以校理豹直, 上從小宦侍一人, 夜臨直宿之房, 好仁驚起, 上命只着紗帽而坐, 從容談論。 上見其紬衾露敗絮, 黃染色退, 上曰: “爾歷官淸要, 儉素如此, 可尙也。” 卽命宦者持御被來, 因以覆之而去。 此正與唐文⁵⁸宗幸韋澳同一恩寵也。 上愛好仁之詩才, 惠渥日隆, 終不至大官, 蓋察其器不堪爲宰輔也。 時人以是服上之用人之各因其才也。

번역문:
유공 호인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은혜와 돌보심(恩顧)이 특별히 우대되어 다른 학사(學士)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매달 밤에 환관(宦者) 두어 명을 데리고 경회루(慶會樓)⁵⁹에서 노니셨는데, 연못의 작은 배가 겨우 대여섯 사람을 태울 만하였으나 홀로 호인에게 명하여 따르게 하시니, 마치 당(唐) 현종(玄宗)⁶⁰이 이적선(李謫仙)⁶¹을 대우한 것과 같았다. 호인이 교리(校理)로서 표직(豹直)⁶²을 설 때, 상께서 작은 환관 시종 한 사람을 데리고 밤에 직숙(直宿)하는 방에 임하시니, 호인이 놀라 일어나자 상께서 명하여 다만 사모(紗帽)⁶³만 쓰고 앉으라 하시고 조용히 담론하셨다. 상께서 그의 명주 이불(紬衾)에 해진 솜(敗絮)이 드러나고 누런 염색이 바랜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네가 청요직(淸要)을 두루 거쳤는데도 검소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숭상할 만하다.” 즉시 환관에게 명하여 어피(御被)⁶⁴를 가져오게 하여, 이로써 덮어주고 가셨다. 이는 바로 당(唐) 문종(文宗)⁶⁵이 위오(韋澳)⁶⁶에게 행차한 것과 같은 은총이었다. 상께서 호인의 시재(詩才)를 아껴 은혜와 대우(惠渥)가 날로 융성하였으나, 끝내 대관(大官)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 그릇이 재보(宰輔)가 되기에는 감당하지 못함을 살피셨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로써 상께서 사람을 등용함에 각기 그 재능에 따라 하심에 탄복하였다.

주석:
58. [주-D006] 文 : 《대동야승・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도 “문(文)”으로 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위오전(韋澳傳)》에 근거할 때 “선(宣)”이 되어야 한다. 당 문종이 아니라 선종(宣宗) 때의 일이다.
59. 경회루(慶會樓): 경복궁(景福宮) 안에 있는 누각. 주로 외국 사신 접대나 임금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60. 당 현종(唐玄宗): 당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61. 이적선(李謫仙):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별칭. 신선(神仙)이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사람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62. 표직(豹直): 홍문관 관원들이 서는 숙직(宿直). 또는 숙직 근무 자체를 의미한다.
63. 사모(紗帽): 조선 시대 관리들이 평상시 쓰던 관모(冠帽).
64. 어피(御被): 임금이 사용하는 이불.
65. 당 문종(唐文宗): 당나라 제14대 황제(재위 827
840). 주석 58에서 보듯, 실제로는 선종(宣宗)의 고사이다.
66. 위오(韋澳): 당나라 선종(宣宗) 때의 재상. 선종이 그의 청렴함을 알고 격려했다는 고사가 《신당서(新唐書)》 등에 전한다.


원문:
兪好仁家在南中, 每乞歸省老母, 成廟不許。 一日, 好仁辭歸, 成廟親餞, 中酣作歌以歌之, 好仁感泣, 左右亦爲之感激。 異日, 好仁不辭而去, 成廟密遣人跡其行曰: “予念未忘于懷, 渠亦念我乎?” 受命者追及之, 至一驛亭, 見好仁登樓北望, 夷猶久之, 遂書壁上一律曰: “北望君臣隔, 南來母子同。” 還奏其狀, 上曰: “然。 渠亦念我。” 好仁乞縣, 便養老母, 成廟初不許, 血誠頻年, 命除義城。 密諭監司曰: “好仁, 予之友也。 爲親屈百里, 善視之。” 未幾, 監司考下下。 上怒之, 問監司曰: “予曾有命, 何以殿好仁也?” 監司對曰: “國家設守宰, 非爲榮其身, 爲其親民而軌物也。 今好仁吟風弄月, 不治官事, 是以謫之。”【竝《五山說林》。】

번역문:
유호인의 집이 남중(南中)⁶⁷에 있어 매번 늙은 어머니를 성묘(省墓)하기 위해 돌아가기를 빌었으나, 성종(成廟)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호인이 작별하고 돌아가려 하자, 성종께서 친히 전별연(餞別宴)을 베푸시고 술이 거나해지자 노래를 지어 부르시니, 호인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좌우의 신하들도 그를 위해 감격하였다. 다른 날 호인이 작별 인사 없이 떠나자, 성종께서 몰래 사람을 보내 그의 행적을 추적하게 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그를 마음에 잊지 못하는데, 그 또한 나를 생각하겠는가?” 명을 받은 자가 그를 추격하여 한 역참(驛亭) 정자에 이르러 보니, 호인이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머뭇거리다가(夷猶) 마침내 벽 위에 율시(律詩) 한 수를 쓰기를,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신하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 오니 어머니와 아들 함께하네.”⁶⁸라고 하였다. 돌아와 그 상황을 아뢰니, 상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 또한 나를 생각하는구나.” 호인이 고을 수령직을 빌어 늙은 어머니를 편히 봉양하고자 하였으나, 성종께서 처음에 허락하지 않으시다가, 혈성(血誠)으로 여러 해 동안 빌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제수하도록 명하셨다. 몰래 감사(監司)에게 유시(諭示)하시기를, “호인은 나의 벗이다. 어버이를 위해 백 리 길을 굽혀 갔으니, 잘 보살펴 주라.”고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사가 근무평가(考課)⁶⁹를 최하(下下)로 매겼다. 상께서 노하시어 감사에게 묻기를, “내가 일찍이 명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호인을 최하위로 두었는가?” 하시니, 감사가 대답하기를, “국가에서 수재(守宰)를 설치한 것은 그 몸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백성을 가까이하고 만물을 법도에 맞게 다스리게(親民而軌物)⁷⁰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호인은 음풍농월(吟風弄月)⁷¹하며 관아의 일을 다스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그를 책망한 것입니다.” 하였다.【이상은 모두 《오산설림(五山說林)》⁷²에서 인용】

주석:
67. 남중(南中): 남쪽 지방. 유호인의 고향인 고령(高靈)이 있는 영남 지방을 가리킨다.
68. 북망군신격 남래모자동(北望君臣隔 南來母子同): 북쪽(서울)을 바라보니 임금과 신하가 떨어져 있고, 남쪽(고향)으로 오니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한다.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어머니에 대한 효심 사이의 갈등과, 결국 효를 택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구이다.
69. 고과(考課):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제도.
70. 친민이궤물(親民而軌物): 백성을 가까이하고(親民) 만물을 법도에 맞게 함(軌物). 수령(守令)의 중요한 임무를 나타내는 말이다.
71. 음풍농월(吟風弄月): 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한다는 뜻으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관아의 일은 돌보지 않고 풍류만 즐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72. 《오산설림(五山說林)》: 조선 중기의 문신 차천로(車天輅)의 시화(詩話) 및 잡록집. 오산(五山)은 차천로의 호이다.


원문:
兪㵢溪乞養爲山陰縣監, 拙於吏治, 尋常文簿, 不能裁斷。 有一民呈狀, 久無決語, 乃訴之曰: “決給不敢望, 唯欲還推本狀而去。” 㵢溪無以答, 通引在旁謂曰: “出官日所呈尙未決, 汝呈狀纔五日, 何遽爲言? 可謂過甚。” 㵢溪喜其捷, 對曰: “此通引英邁矣。” 嶺南方伯拜辭, 成廟引見曰: “予故人兪好仁見任山陰縣監, 卿其斗頓。” 方伯不奉旨, 竟以不恤民隱, 哦詩不輟, 罷黜云。 祖宗朝好氣像, 於此可見。【《芝峯類說》。】

번역문:
유희계(兪㵢溪)가 귀양(乞養)하여 산음 현감(山陰縣監)⁷³이 되었는데, 이치(吏治)⁷⁴에 졸렬하여 평범한 문부(文簿)⁷⁵도 재단(裁斷)하지 못하였다. 한 백성이 정장(呈狀)⁷⁶을 올렸는데 오래도록 결재하는 말이 없자, 이에 호소하기를 “결재해 주시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고, 오직 본래의 소장(狀)을 돌려받아 가고자 합니다.” 하였다. 희계가 답할 말이 없자, 곁에 있던 통인(通引)⁷⁷이 말하기를, “출관(出官)⁷⁸하시는 날 올린 것도 아직 결재되지 않았는데, 네가 정장(呈狀)을 올린 지 겨우 닷새 만에 어찌 서둘러 말하는가? 과심하다 이를 만하다.” 하였다. 희계가 그 민첩함에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이 통인이 영특하고 뛰어나구나(英邁).” 하였다. 영남 방백(嶺南方伯)⁷⁹이 배사(拜辭)할 때 성종(成廟)께서 인견(引見)하시고 말씀하셨다. “나의 옛 친구 유호인이 현재 산음 현감으로 임명되어 있으니, 경(卿)은 그를 잘 보살펴 주라(斗頓)⁸⁰.” 방백이 분부(旨)를 받들지 않고, 마침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지 않고 시 읊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출(罷黜)시켰다고 한다. 조종조(祖宗朝)⁸¹의 좋은 기상(氣像)을 이에서 볼 수 있다.【《지봉유설(芝峯類說)》⁸²에서 인용】

주석:
73. 산음 현감(山陰縣監): 경상도 산음현(현재 경남 산청군 일부)의 수령. 종6품.
74. 이치(吏治): 관리로서 행정 실무를 처리하는 능력이나 방식.
75. 문부(文簿): 관아의 문서나 장부.
76. 정장(呈狀): 관아에 올리는 소장(訴狀)이나 청원서.
77. 통인(通引): 조선 시대 관아에 속해 잔심부름 등을 하던 남자 하인.
78. 출관(出官):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나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
79. 영남 방백(嶺南方伯): 영남 지방, 즉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를 가리킨다. 방백(方伯)은 관찰사의 별칭이다.
80. 두돈(斗頓): 잘 보살펴 주거나 도와줌.
81. 조종조(祖宗朝): 역대 임금들의 시대를 통칭하는 말. 여기서는 조선 초기부터 성종 대까지의 시대를 가리키며, 당시의 기풍이나 기상을 의미한다.
82.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지봉(芝峯)은 이수광의 호이다.


원문:
兪㵢溪好仁天性醇謹, 文章富贍。 便養乞郡, 而疎於吏治, 日與諸生討論經史。 有一村民號訴於墻外曰: “投狀已久, 迄無黑白, 極爲悶望。” 案前小吏擧頭而問曰: “汝之所呈, 在幾日乎?” 氓曰: “今已三日矣。” 吏叱曰: “五六日已前者, 尙無究決, 汝何汲汲乎? 姑退而待令可也。” 諸生相顧而笑, 公曰: “人各有可笑, 汝輩笑我之政事, 我亦笑汝輩之製述矣。”【《松窩雜記》。】

번역문:
유희계 호인은 천성이 순박하고 삼갔으며(醇謹) 문장이 풍부하고 뛰어났다(富贍). 편히 봉양하기 위해 군(郡)을 빌었으나, 이치(吏治)에는 소홀하여 날마다 제생(諸生)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한 촌민(村民)이 담장 밖에서 부르짖으며 호소하기를, “소장(狀)을 올린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지금까지 흑백(黑白)이 없으니, 지극히 답답하고 바라옵니다.” 하였다. 안석(案) 앞의 아전(小吏)이 머리를 들고 묻기를, “네가 올린 것이 며칠이나 되었는가?” 하니, 백성(氓)이 말하기를, “이제 이미 사흘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아전이 꾸짖기를, “대엿새 이전에 올린 것도 아직 판결(究決)이 없는데, 네가 어찌 그리 급급하게 구는가? 우선 물러가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제생(諸生)들이 서로 돌아보며 웃자, 공이 말하였다. “사람마다 각기 웃을 만한 것이 있으니, 너희 무리가 나의 정사(政事)를 웃지만, 나 또한 너희 무리의 제술(製述)⁸³을 웃는다.”【《송와잡기(松窩雜記)》⁸⁴에서 인용】

주석:
83. 제술(製述): 시(詩), 부(賦), 책(策) 등 과거 시험에서 요구하는 형식의 글을 짓는 것. 유호인은 자신이 행정 실무에는 서툴지만 학문과 문장에는 뛰어나며, 제생들은 제술은 잘할지 몰라도 실제 정사에는 미숙할 수 있다는 점을 재치있게 표현한 것이다.
84. 《송와잡기(松窩雜記)》: 조선 후기의 문신 이기(李墍)가 지은 필기잡록집. 송와(松窩)는 이기의 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