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鄭麟趾)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鄭麟趾【文成公。】
字伯睢, 號學易¹齋, 河東人。 洪武丙子生。 十六, 中生員。 太宗十四年甲午, 擢魁科。 世宗丁未, 又魁重試。 歷副提學、吏曹參判・判書、兵曹判書, 典文衡。 端宗癸酉, 策靖難元勳, 拜相, 封河東府院君。 世祖卽位, 陞領議政, 參佐翼功臣。 睿宗朝, 參翊戴功臣。 成宗朝, 參佐理功臣。 戊戌卒, 年八十三。
번역문:
정인지(鄭麟趾)【문성공(文成公)²이다.】
자는 백저(伯睢), 호는 학역재(學易齋)³, 하동(河東) 사람이다. 홍무(洪武) 병자년(1396)에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생원시(生員試)⁴에 합격하였다. 태종(太宗) 14년 갑오년(1414)에 문과(文科)에 장원(魁科)⁵으로 뽑혔다. 세종(世宗) 정미년(1427)에 또 중시(重試)⁶에 장원하였다. 부제학(副提學)⁷, 이조참판(吏曹參判)·판서(判書)⁸, 병조판서(兵曹判書)⁹를 역임하고, 문형(文衡)¹⁰을 관장하였다. 단종(端宗) 계유년(1453)에 정난원훈(靖難元勳)¹¹에 책록되고 재상(拜相)¹²에 임명되었으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¹³에 봉해졌다.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영의정(領議政)¹⁴으로 승진하였고, 좌익공신(佐翼功臣)¹⁵에 참여하였다. 예종(睿宗) 시대에는 익대공신(翊戴功臣)¹⁶에 참여하였다. 성종(成宗) 시대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¹⁷에 참여하였다. 무술년(1478)에 졸(卒)하니, 나이 83세였다.
주석:
- [주-D001] 易 :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기록에는 “요(要)”로 되어 있다. 즉, 호가 학역재(學易齋)가 아닌 학요재(學要齋)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주역(周易)》을 배우거나 좋아했다는 의미의 학역(學易)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나, 학요재(學要齋)라는 이문(異文)이 존재함을 밝힌다.
- 문성공(文成公): 정인지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고, 성(成)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법도를 세움(安民立政) 등을 의미한다.
- 학역재(學易齋): 정인지의 호. 《주역(周易)》 공부를 좋아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석 [주-D001] 참조.
- 생원(生員): 생원시(生員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의 하나로, 합격자에게는 성균관 입학 자격이나 하급 관리가 될 자격이 주어졌다.
- 괴과(魁科): 과거 시험, 특히 문과(文科)에서 장원(壯元), 즉 수석으로 합격하는 것. 정인지는 1414년(태종 14) 식년시(式年試) 문과에서 장원 급제했다.
- 중시(重試): 조선 시대에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10년마다 시행하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승진의 혜택을 받았다. 정인지는 1427년(세종 9) 문과 중시에서 다시 장원하였다.
- 부제학(副提學): 집현전(集賢殿) 또는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등에 두었던 정3품 관직. 학문 연구와 국왕 자문을 담당하는 핵심 요직이었다.
- 이조참판(吏曹參判)·판서(判書): 이조(吏曹)는 조선 시대 6조(六曹)의 하나로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다. 판서(정2품)는 장관, 참판(종2품)은 차관에 해당한다.
- 병조판서(兵曹判書): 병조(兵曹)는 6조의 하나로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판서는 병조의 장관이다.
- 문형(文衡): 문관의 선발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겸임하며 학계와 문단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정인지가 대제학을 역임하며 문형을 관장했음을 의미한다.
- 정난원훈(靖難元勳): 정난공신(靖難功臣).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정인지는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배상(拜相): 재상(宰相)에 임명됨. 계유정난 이후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된 것을 가리킨다.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왕비의 아버지나 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爵號)이다. 하동(河東)은 정인지의 본관이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최고 관직. 정1품.
-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년 세조(世祖)의 즉위를 도운 공신들에게 내린 공신호. 정인지는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익대공신(翊戴功臣): 1468년 예종(睿宗)이 즉위한 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처리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정인지는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좌리공신(佐理功臣): 1471년(성종 2) 성종(成宗)의 즉위를 보좌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정인지는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원문:
政府館閣課試諸生, 以道學發策, 公一覽策題, 援筆成章, 文不加點, 諸公大加稱賞, 冠於諸作, 自此華聞大播。 年十九, 中文科第一。 河相國崙觀公策, 知其爲公輔器。【《潛谷舊錄》。 下同。】
번역문:
정부(政府)의 관각(館閣)¹⁸에서 여러 유생(諸生)들에게 과제(課試)를 시험하면서 도학(道學)¹⁹으로 책문(策問)을 내었는데, 공(公)이 책문의 제목을 한번 훑어보고는 붓을 들어 글을 이루니 문장에 점 하나 더할 데가 없었다. 여러 공(公)들이 크게 칭찬하였고, 여러 작품 중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이로부터 빛나는 명성(華聞)이 크게 퍼졌다. 나이 열아홉에 문과(文科)에서 제일(第一)로 합격하였다. 하 상국(河相國) 윤(崙)²⁰이 공의 답안지(策)를 보고 그가 공보(公輔)의 그릇²¹임을 알았다.【《잠곡구록(潛谷舊錄)》²²에서 인용. 아래도 같음.】
주석:
18. 정부관각(政府館閣): 정부의 여러 관청과 문서를 보관하거나 학문을 연구하는 건물. 여기서는 조정의 관청이나 기관을 통칭한다.
19. 도학(道學): 송대(宋代) 이후 유학의 주류를 이룬 성리학(性理學)을 가리킨다. 당시 학문과 정치의 근본 이념이었다.
20. 하 상국(河相國) 윤(崙): 하륜(河崙, 1347-14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조선 개국 공신이며 태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상국(相國)'은 재상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21. 공보기(公輔器): 공(公)과 보(輔)는 모두 재상(宰相)을 의미한다. 즉,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큰 재목, 재상이 될 만한 인물임을 뜻한다.
22. 《잠곡구록(潛谷舊錄)》: 조선 전기의 문신 김육(金堉)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실체나 내용은 불분명하다. 일화나 야사를 모은 책으로 추정된다.
원문:
一日群臣會朝, 太宗特召進公曰: “予聞名熟矣, 但未識面耳。” 令擧首仰面熟視, 嗟賞者久, 從容謂世宗曰: “今文有鄭麟趾, 武有洪師錫, 王無憂矣。”
번역문:
하루는 여러 신하가 조회(朝會)에 모였는데, 태종(太宗)께서 특별히 공(公)을 가까이 오게 하여 말씀하셨다. “내 그대의 명성을 익히 들었으나, 다만 얼굴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머리를 들어 얼굴을 우러르게 하고 유심히 보시더니, 오랫동안 감탄하며 칭찬하시고는, 조용히 세종(世宗)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이제 문(文)에는 정인지(鄭麟趾)가 있고 무(武)에는 홍사석(洪師錫)²³이 있으니, 왕께서는 걱정이 없으실 것입니다.”
주석:
23. 홍사석(洪師錫): 조선 초기 태종, 세종 대의 무신.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했다. 태종이 문무 양면에서 뛰어난 인재로 정인지와 홍사석을 언급하며 세종에게 안심하라고 말한 것이다.
원문:
世宗謂鄭麟趾曰: “凡欲爲治, 必觀前代治亂之迹。 自周以降, 代各有史, 然編簡浩穰, 未易遍考。 大抵人之於學, 博覽爲難, 況於人君幾政之暇, 其能博觀乎? 卿其考閱史籍, 其善惡之可爲勸懲者, 撰次成書, 以爲後世子孫之永鑑, 吾東方興廢存亡, 竝令編次。” 於是聚文學之士數十人于集賢殿, 分科責成。 書成, 賜名曰《治平要覽》。【《國朝寶鑑》。 下竝同。】
번역문:
세종(世宗)께서 정인지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다스림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전 시대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웠던 자취(治亂之迹)를 살펴보아야 한다. 주(周)나라 이후로 시대마다 각기 역사가 있으나, 편찬된 서책(編簡)²⁴이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여(浩穰)²⁵ 두루 상고하기가 쉽지 않다. 대저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 널리 읽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임금이 정사를 돌보는 여가(幾政之暇)에 어찌 능히 널리 볼 수 있겠는가? 경(卿)은 사적(史籍)을 상고하고 열람하여, 그 선악(善惡) 중에서 권장하고 징계할 만한 것(勸懲)들을 뽑아 차례대로 책으로 편찬하여, 후세 자손들의 영원한 귀감(永鑑)으로 삼도록 하라. 우리 동방(東方)²⁶의 흥망성쇠(興廢存亡) 또한 함께 편찬하도록 하라.” 이에 문학(文學)에 능한 선비 수십 명을 집현전(集賢殿)²⁷에 모아 분야를 나누어 완성하도록 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이름을 《치평요람(治平要覽)》²⁸이라 하사하였다.【《국조보감(國朝寶鑑)》²⁹에서 인용. 아래도 모두 같음.】
주석:
24. 편간(編簡): 책(冊)을 엮는다는 뜻의 '편(編)'과 종이가 발명되기 전 글씨를 쓰던 대나무 조각인 '간(簡)'을 합한 말로, 서책(書冊) 또는 기록을 의미한다.
25. 호양(浩穰): 물이 넓고 깊은 모양(浩)과 곡식이 풍성하게 익은 모양(穰)을 합한 말로, 여기서는 기록의 양이 매우 많고 복잡함을 뜻한다.
26. 동방(東方): 동쪽에 있는 나라, 즉 우리나라(조선)를 가리킨다.
27. 집현전(集賢殿): 조선 세종 때 설치된 학문 연구 및 국왕 자문 기관. 많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활동하며 조선 초기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8. 《치평요람(治平要覽)》: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 등이 편찬한 역사서.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치란(治亂) 사례 중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으로, 군주의 통치 지침서 역할을 했다.
29.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 시대 역대 임금의 정치적 업적과 모범이 될 만한 언행을 모아 편찬한 책. 후대 왕들의 통치 교본으로 활용되었다.
원문:
上以祖宗積累之深、締造之艱, 後王不可不知, 乃命權踶、鄭麟趾等撰述穆祖以後肇基之迹, 名曰《龍飛御天歌》, 摠一百二十五章, 命於宮中鋟梓, 賜群臣, 以爲朝祭宴享之樂辭。
번역문:
상(上)께서 조종(祖宗)³⁰께서 공덕을 쌓으심이 깊고 나라를 세우심(締造)이 어려웠음을 후대 왕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 이에 권제(權踶)³¹,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목조(穆祖)³² 이후로 왕업의 기초를 일으키신(肇基)³³ 자취를 편찬하여 서술하게 하고, 이름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³⁴라 하였다. 총 125장으로, 명하여 궁중에서 목판에 새겨 인쇄(鋟梓)³⁵하여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고, 조회(朝會)·제사(祭祀)·연회(宴享)의 악사(樂辭)³⁶로 삼게 하였다.
주석:
30. 조종(祖宗): 조상(祖上)이 되는 임금들. 여기서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와 그 선대(先代) 조상들을 가리킨다.
31. 권제(權踶, 1387-1445): 조선 초기의 문신. 집현전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32. 목조(穆祖):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의 묘호(廟號). 조선 왕조의 시조(始祖)로 추존되었다.
33. 조기(肇基): 기초를 처음으로 일으킴. 조선 왕조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과정을 의미한다.
34.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세종의 명으로 권제, 정인지, 안지(安止) 등이 지은 서사시.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과 조상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 중 하나이다. '용(龍)이 날아(飛) 하늘(天)을 다스린다(御)'는 뜻으로, 임금(용)의 통치를 상징한다.
35. 침재(鋟梓): 목판(木板)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鋟) 인쇄하는 것(梓). 목판 인쇄를 의미한다.
36. 악사(樂辭):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가사. 《용비어천가》는 궁중의 공식 행사에서 연주되는 악곡의 가사로 사용되었다.
원문:
御製諺文二十八字, 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字雖簡易, 而轉換³⁷無窮。 禮曹判書鄭麟趾序曰: “吾東方禮樂文物, 侔擬中夏, 但方言俚語不與之同。 學書者患其志趣之難曉,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昔新³⁸羅薜聰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之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協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以是解書, 可以知其義;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字韻則淸濁之能辨,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 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唳、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 遂命臣等詳加解釋, 以喩諸人, 庶使觀者不師而自悟。 若其淵源精義之妙, 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
번역문:
임금께서 언문(諺文)³⁹ 스물여덟 글자를 직접 만드시니, 글자는 옛 전서(古篆)⁴⁰를 본떴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⁴¹으로 나뉘며, 글자가 비록 간단하고 쉽지만 전환(轉換)⁴²하여 쓰임이 무궁하다. 예조판서(禮曹判書) 정인지가 서문(序文)에서 아뢰었다. “우리 동방(東方)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중하(中夏)⁴³에 견줄 만하나, 다만 방언(方言)과 속된 말(俚語)⁴⁴이 그와 같지 않습니다. 글을 배우는 자는 그 뜻(志趣)을 깨닫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자는 그 복잡한 사정(曲折)을 통하기 어려움을 병폐로 여겼습니다. 옛날 신라(新羅)⁴⁵의 설총(薜聰)⁴⁶이 처음으로 이두(吏讀)⁴⁷를 만들어서 관청(官府)과 민간(民間)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 쓰는 것이어서, 혹은 어색하고(澁) 혹은 막히어(窒), 비단 비루하고 근거가 없을(鄙陋無稽) 뿐만 아니라, 언어(言語)로 말하자면 그 만분의 일도 능히 통하게 하지 못합니다. 계해년(1443)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⁴⁸ 스물여덟 글자를 처음으로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例)와 뜻(義)를 들어 보이시며 이름을 《훈민정음(訓民正音)》⁴⁹이라 하셨습니다. 모양을 본떠서 글자는 옛 전서를 모방하였고, 소리로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⁵⁰에 화합하니, 삼극(三極)⁵¹의 뜻과 이기(二氣)⁵²의 오묘함이 모두 포괄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스물여덟 글자로서 전환하여 쓰임이 무궁하니, 간략하면서도 요긴하고(簡而要), 정밀하면서도 통하며(精而通),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로써 송사(訟事)를 심리하면 그 실정(實情)을 알 수 있습니다. 자운(字韻)⁵³으로는 청탁(淸濁)⁵⁴을 능히 분별할 수 있고, 악가(樂歌)로는 율려(律呂)⁵⁵에 능히 화합하니, 쓰이는 곳마다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고, 가는 곳마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 비록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風聲鶴唳 鷄鳴狗吠)⁵⁶라도 모두 적을 수 있습니다. 마침내 신(臣) 등에게 명하여 상세히 해석을 더하여 여러 사람에게 깨우치게 하시니, 바라건대 보는 자들이 스승 없이도 스스로 깨닫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만약 그 근원(淵源)과 정밀한 뜻(精義)의 오묘함에 이르러서는 신 등이 능히 밝힐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주석:
37. [주-D002] 換 : 저본(底本)에는 “원(援)”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원(援)'은 '끌어당기다'는 뜻이고, '환(換)'은 '바꾸다, 전환하다'는 뜻이다. 문맥상 글자를 조합하여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는 '전환(轉換)'이 적합하다.
38. [주-D003] 新 : 저본(底本)에는 “잡(雜)”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잡라(雜羅)'보다는 '신라(新羅)'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39. 언문(諺文): 당시 한문(漢文)에 대하여 우리 고유의 글자인 훈민정음을 낮추어 이르던 말.
40. 고전(古篆): 고대 중국의 서체인 전서(篆書). 훈민정음의 자형(字形)이 발음 기관의 모양 등을 본떴지만, 글자 모양은 전서체를 참고했음을 의미한다.
41.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 한글의 음절(音節)을 이루는 세 부분. 각각 자음, 모음, 받침 자음에 해당한다.
42. 전환(轉換): 글자를 바꾸어 합쳐서 다양한 소리를 표기하는 것. 한글의 조합 원리를 의미한다. 주석 [주-D002] 참조.
43. 중하(中夏): 중국(中國)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
44. 방언이어(方言俚語): 사투리와 속된 말. 한자와 달리 우리 고유의 말을 의미한다.
45. 신라(新羅): 한반도 고대 국가 중 하나. 주석 [주-D003] 참조.
46. 설총(薜聰): 신라 시대의 학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인 이두(吏讀)를 집대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47. 이두(吏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차자 표기법(借字表記法)의 하나. 주로 관리들의 행정 문서에 사용되었다.
48. 정음(正音):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가리킨다.
49. 《훈민정음(訓民正音)》: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 세종이 창제한 우리 고유 문자의 이름이자, 그 문자 체계와 사용법을 설명한 책의 이름이다. 1446년에 반포되었다.
50. 칠조(七調): 중국 전통 음악의 일곱 가지 음계 또는 악조(樂調). 훈민정음의 음가가 음악의 원리와도 조화를 이룸을 설명한다.
51. 삼극(三極): 천(天), 지(地), 인(人)의 세 가지 근본. 훈민정음의 모음 제자 원리(ㆍ, ㅡ, ㅣ)가 천지인 삼재(三才) 사상을 반영했음을 의미한다.
52. 이기(二氣): 음(陰)과 양(陽)의 두 가지 기운. 우주 만물의 생성 변화 원리.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에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이 반영되었음을 함축한다.
53. 자운(字韻): 글자의 소리(음운, 音韻).
54. 청탁(淸濁): 맑고 탁함. 소리의 성질을 구분하는 음성학적 개념. 당시 중국 음운학의 영향을 받은 표현으로, 예사소리, 된소리, 거센소리 등의 구분을 포함할 수 있다.
55. 율려(律呂): 동양 음악의 기본 음률(音律). 12율(六律, 六呂)을 통칭한다.
56. 풍성학려 계명구폐(風聲鶴唳 鷄鳴狗吠): 바람 소리, 학 우는 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원문:
昭憲王后之喪, 赴山陵, 適大雨江漲, 舟楫不通, 不得已安梓宮於樂天亭。 領議政河演等議安厝向方, 或云南首, 或云北首, 群議角立不能決。 公適不在所, 諸公促召公問之, 公曰: “是何難焉? 在殯南首, 人子不死其親之意; 在玄宮北首, 之幽之故也。 《記》曰: ‘之死而致生之, 不智而不可爲也; 生而致死之, 不忍爲。’ 是亦殯宮也, 且當南首。” 衆皆歎服。 金宗瑞常以文章、經濟自許, 及聞公此議, 歎曰: “宰相須用讀書人。” 雨猶不止, 議改卜日, 公獨排群議, 乃曰: “雨不克葬, 《春秋》譏其無備。” 促令船渡儀仗, 俄而雨霽, 遂及吉日。【《潛谷舊錄》。】
번역문:
소헌왕후(昭憲王后)⁵⁷의 상(喪) 때 산릉(山陵)⁵⁸으로 가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나 배가 통행할 수 없게 되어, 부득이 악천정(樂天亭)⁵⁹에 재궁(梓宮)⁶⁰을 임시로 모셨다. 영의정 하연(河演)⁶¹ 등이 관을 모실(安厝)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이는 남쪽을 머리로 해야 한다(南首)고 하고 어떤 이는 북쪽을 머리로 해야 한다(北首)고 하여, 여러 의견이 대립하여(角立) 결정하지 못하였다. 공(公)이 마침 그 자리에 없었는데, 여러 공(公)들이 공을 급히 불러 물으니, 공이 말하였다. “이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빈소(殯所)에 있을 때는 남쪽을 머리로 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그 어버이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不死其親) 뜻이며, 현궁(玄宮)⁶²에 들어갈 때는 북쪽을 머리로 하는 것은 그윽한 곳(幽)으로 가는 까닭입니다. 《예기(禮記)》⁶³에 이르기를 ‘죽은 이를 산 사람처럼 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여 할 수 없는 일이며, 산 사람을 죽은 이처럼 대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또한 빈궁(殯宮)⁶⁴이니, 마땅히 남쪽을 머리로 해야 합니다.” 무리가 모두 탄복하였다. 김종서(金宗瑞)⁶⁵가 항상 문장(文章)과 경제(經濟)⁶⁶에 스스로 자부심이 있었는데, 공의 이 의논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재상(宰相)은 모름지기 글 읽는 사람(讀書人)을 써야 한다.”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아 날짜를 다시 점쳐 정하자(改卜)고 의논하였는데, 공이 홀로 여러 의논을 물리치고 말하였다. “비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을 《춘추(春秋)》⁶⁷에서는 그 대비가 없음을 비난하였습니다.” 재촉하여 배로 의장(儀仗)을 건너게 하니, 이윽고 비가 개어 마침내 길일(吉日)에 맞출 수 있었다.【《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57.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세종(世宗)의 왕비.
58. 산릉(山陵): 임금이나 왕비의 무덤. 여기서는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英陵, 여주 소재)을 가리킨다.
59. 악천정(樂天亭): 조선 시대 한강변에 있던 정자. 정확한 위치는 현재 불명확하나, 광나루 부근으로 추정된다.
60.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棺)을 높여 부르는 말.
61. 하연(河演, 1376-1453): 조선 초기의 문신. 세종, 문종, 단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62. 현궁(玄宮): 무덤 속의 광중(壙中), 즉 시신을 안치하는 방.
63. 《예기(禮記)》: 유교의 기본 경전인 오경(五經) 중 하나. 고대 중국의 예법(禮法)과 예론(禮論)을 집대성한 책이다. 인용된 구절은 《예기》 〈단궁 상(檀弓上)〉편에 나온다. 죽은 이를 산 사람처럼 대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고, 산 사람을 죽은 이처럼 대하는 것도 차마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예(禮)는 상황과 이치에 맞게 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64. 빈궁(殯宮): 빈소(殯所). 발인(發靷)하기 전까지 관을 임시로 모셔두는 곳. 악천정이 임시 빈소 역할을 했으므로, 아직 무덤(현궁)에 들어간 것이 아니니 산 사람에 준하여 남쪽을 머리로 두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65. 김종서(金宗瑞, 1383-1453): 조선 초기의 문신, 무신. 세종 대에 6진(六鎭)을 개척하고,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66. 경제(經濟):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학문이나 능력.
67. 《춘추(春秋)》: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책으로 알려진 유교 경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3년 조에 "비 때문에 장사를 지내지 못했다(雨不克葬)"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대비 부족으로 해석하여 비난하는 견해가 있었다. 정인지는 이 고사를 인용하여, 비가 온다고 장례를 미루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으며 미리 대비했어야 함을 강조하며 강행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원문:
庚午, 翰林侍講倪謙奉使來, 公爲館伴, 周旋交際, 得儐使體。 又與之商確古今, 往復酬唱, 侍講敬重之。 嘗夜坐, 侍講曰: “月在何分?” 公曰: “在東井。” 侍講歎服。 及辭別, 侍講曰: “如夜深何?” 公曰: “可怕李金吾。” 侍講曰: “莫逢王玉汝。” 相與笑曰: “天下無無對之句。”【《筆苑雜記》。】
번역문:
경오년(1450, 경태 1)에 한림시강(翰林侍講)⁶⁸ 예겸(倪謙)⁶⁹이 사신으로 오자, 공(公)이 관반(館伴)⁷⁰이 되어 응대하고 교제함(周旋交際)에 빈사(儐使)⁷¹의 체도(體度)를 얻었다. 또한 그와 함께 고금(古今)의 일을 토론하고(商確) 시문(詩文)을 주고받으니(往復酬唱), 시강(侍講)이 그를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일찍이 밤에 앉아 있는데, 시강이 물었다. “달이 어느 분야(分野)⁷²에 있습니까?” 공이 답하였다. “동정(東井)⁷³에 있습니다.” 시강이 탄복하였다. 작별할 때가 되자 시강이 말하였다. “밤이 깊으니 어찌할꼬?” 공이 말하였다. “이금오(李金吾)⁷⁴가 두렵습니다.” 시강이 말하였다. “왕옥여(王玉汝)⁷⁵를 만나지 마시오.” 서로 웃으며 말하였다. “천하에 대구(對句)가 없는 글귀는 없구나.”【《필원잡기(筆苑雜記)》⁷⁶에서 인용】
주석:
68. 한림시강(翰林侍講): 중국 명나라 때 한림원(翰林院)에 속한 관직. 학문이 뛰어나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경서를 강의하는 역할을 했다.
69. 예겸(倪謙, 1415-1479): 명나라의 문신, 외교관. 여러 차례 조선에 사신으로 왔으며, 학문과 문장으로 조선 학자들과 교류했다.
70. 관반(館伴):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수행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또는 그 관리. 원접사(遠接使)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
71. 빈사(儐使): 손님(사신)을 접대하고 안내하는 사람. 관반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72. 분야(分野): 고대 중국 천문학에서 하늘의 별자리 구역(28수 등)을 지상의 특정 지역(주국, 州國)에 대응시킨 개념. 여기서는 단순히 달이 어떤 별자리에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73. 동정(東井): 28수(宿) 중 남방 주작(朱雀) 7수의 첫 번째 별자리인 정수(井宿)를 가리킨다. 정인지가 천문에 밝았음을 보여준다.
74. 이금오(李金吾): 금오(金吾)는 본래 한나라 때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던 집금오(執金吾)에서 유래한 말로, 후대에는 금군(禁軍)이나 야간 순찰을 도는 관리를 의미했다. '이금오'는 특정 인물이라기보다는 야간 통행 금지를 단속하는 관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밤이 깊으니 순라꾼이 두렵다'는 의미이다.
75. 왕옥여(王玉汝): 이 역시 특정 인물이라기보다는 '이금오'에 대한 대구로 사용된 문학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옥여(玉汝)'는 '너를 옥처럼 완성시킨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의미의 고사나 인물과 관련된 표현일 수 있다. 밤길의 위험이나 뜻밖의 만남 등을 암시하는 대구일 수 있으나 정확한 출처나 의미는 불분명하다. 예겸이 정인지의 재치 있는 응답에 맞춰 즉석에서 지어낸 대구일 가능성도 있다.
76.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수필집. 시문(詩文)에 관한 이야기, 인물 일화, 고증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원문:
文廟卽位, 宵旰圖治, 逐日視事, 經筵、輪對等事, 不少停廢。 閔判書伸會禹承旨孝剛問: “今日亦視事否?” 答曰: “然。” 閔曰: “聖躬太勞, 盍少休乎?” 公時在座曰: “公何發此言? 人君豈可使倦勤?” 閔不得其死, 公爲國元老, 一言之驗如此。 鄭判書文炯爲注書時, 親聽此語云。【權健忠敏公雜錄⁷⁷。】
번역문:
문묘(文廟)⁷⁸께서 즉위하시어 밤낮으로 다스림을 도모하며(宵旰圖治)⁷⁹ 매일 정사(政事)를 보시고, 경연(經筵)⁸⁰, 윤대(輪對)⁸¹ 등의 일을 조금도 멈추거나 폐하지 않으셨다. 민 판서(閔判書) 신(伸)⁸²이 마침 우 승지(禹承旨) 효강(孝剛)⁸³에게 묻기를, “오늘도 정사를 보시는가?” 하니,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민신이 말하였다. “성상(聖上)의 몸이 너무 피로하시니, 어찌 조금 쉬시게 하지 않는가?” 공(公)이 당시에 자리에 있다가 말하였다. “공(公)은 어찌 이런 말을 하시오? 임금이 어찌 정사를 게을리하게(倦勤)⁸⁴ 할 수 있겠소?” 민신은 제명대로 죽지 못하였으니(不得其死)⁸⁵, 공(公)이 나라의 원로(元老)로서 한마디 말의 증험(證驗)이 이와 같았다. 정 판서(鄭判書) 문형(文炯)⁸⁶이 주서(注書)⁸⁷로 있을 때 이 말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권건(權健) 충민공(忠敏公)의 잡록(雜錄)⁸⁸에서 인용】
주석:
77. [주-D004] 錄 :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야언(海東野言)・문종(文宗)》에는 “기(記)”로 되어 있다. 즉, 권건의 잡록(雜錄)이 아니라 잡기(雜記)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78. 문묘(文廟): 조선 제5대 왕 문종(文宗, 1414-1452)의 묘호(廟號).
79. 소간도치(宵旰圖治): 밤늦게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宵衣旰食) 정사를 돌봄을 꾀한다는 뜻으로, 임금이 국정 운영에 매우 부지런함을 이르는 말이다.
80.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81. 윤대(輪對): 여러 신하가 차례를 정해 임금 앞에 나아가 국정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제도.
82. 민 판서(閔判書) 신(伸): 민신(閔伸, ?-1453). 조선 초기의 문신. 계유정난 때 김종서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83. 우 승지(禹承旨) 효강(孝剛): 우효강(禹孝剛, ?-1453). 조선 초기의 문신.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를 지냈다. 계유정난 때 살해되었다.
84. 권근(倦勤): 일에 게으름.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정인지는 임금이 아무리 힘들어도 정사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민신의 말을 반박한 것이다.
85. 부득기사(不得其死):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비명횡사(非命橫死)함. 민신이 계유정난 때 죽임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 이 일화는 정인지의 직언(直言)과 민신의 불행한 결말을 연결시키고 있다.
86. 정 판서(鄭判書) 문형(文炯): 정문형(鄭文炯, 1427-1501). 조선 전기의 문신. 정인지의 아들이다.
87. 주서(注書): 승정원(承政院)에 속한 정7품 관직. 임금의 언행과 국정 논의 내용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역할을 했다.
88. 권건(權健) 충민공(忠敏公) 잡록(雜錄): 권건(權健, 1458-1501)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충민(忠敏)은 그의 시호이다. 그가 남긴 기록 모음집을 의미한다. 주석 [주-D004] 참조.
원문:
鄭麟趾判兵曹, 嘗坐堂上, 吏持文簿數十箱過堂下, 召視之, 乃各道軍士由狀, 積年不決者也。 命吏分類粘連, 作數綜⁸⁹, 令各道監司、守令分揀施行, 不過數語, 而積年機務, 一朝掃盡。
번역문:
정인지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을 때, 일찍이 당상(堂上)에 앉아 있는데 아전(吏)이 문서 상자(文簿) 수십 개를 가지고 당(堂) 아래를 지나갔다. 불러서 보니, 이는 각 도(道) 군사(軍士)들의 유장(由狀)⁹⁰으로 여러 해 동안 처리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전에게 명하여 종류별로 나누어 이어 붙여(分類粘連) 몇 묶음(數綜)⁹¹으로 만들게 하고, 각 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⁹²에게 명하여 나누어 처리하여 시행하게 하니, 불과 몇 마디 말이었으나 여러 해 묵은 중요한 업무(積年機務)가 하루아침에 모두 처리되었다.
주석:
89. [주-D005] 綜 : 저본(底本)에는 “종(粽)”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잡록(海東雜錄)・정인지(鄭麟趾)》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종(粽)'은 찹쌀 등을 댓잎 등에 싸서 찐 음식을 뜻하는 글자이고, '종(綜)'은 베틀의 날실을 끌어올리는 장치 또는 여러 가닥을 묶은 것을 의미한다. 문맥상 서류 묶음을 뜻하는 '종(綜)'이 적합하다.
90. 유장(由狀): 사유(事由)를 적은 문서. 여기서는 군사들의 신상, 근무 평가, 상벌 등에 관한 기록이나 보고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91. 종(綜): 여러 가닥을 묶은 것. 여기서는 분류된 서류 뭉치를 의미한다. 주석 [주-D005] 참조.
92. 감사(監司)·수령(守令): 감사는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수령은 각 고을의 지방관(부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을 통칭한다.
해설:
이 일화는 정인지의 뛰어난 행정 처리 능력과 효율성을 보여준다. 복잡하게 쌓여 있던 문서를 핵심 원칙에 따라 분류하고, 각 지방관에게 책임을 분담시켜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한 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원문:
金宗瑞爲相, 事多自擅, 六曹之事, 皆由相府。 公爲兵判, 獨拒不受, 曰: “相府自爲相府, 兵曹自爲兵曹, 何相干耶?” 雖同廳語或相聞, 不恤也。 宗瑞憚之, 啓曰: “鄭某久於六卿, 宜優賢崇秩。” 於是陞授判中樞, 遞兵權矣。【《謏聞瑣錄》。】
번역문:
김종서(金宗瑞)가 재상(爲相)⁹³이 되어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自擅) 경우가 많아, 육조(六曹)⁹⁴의 일이 모두 상부(相府)⁹⁵를 거쳤다. 공(公)이 병조판서(兵判)로 있으면서 홀로 이를 거부하고 받지 않으며 말하였다. “상부(相府)는 상부 스스로의 일이 있고, 병조(兵曹)는 병조 스스로의 일이 있는데, 어찌 서로 간섭하는가?” 비록 같은 관청(同廳)에서 하는 말이 서로 들릴 정도였으나 개의치 않았다(不恤). 김종서가 그를 꺼려하여 (임금께) 아뢰기를, “아무개 정(鄭某)⁹⁶이 육경(六卿)⁹⁷의 자리에 오래 있었으니, 마땅히 현명한 이를 우대하여 품계(秩)를 높여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⁹⁸로 승진 제수되어 병권(兵權)이 교체되었다.【《소문쇄록(謏聞瑣錄)》⁹⁹에서 인용】
주석:
93. 위상(爲相): 재상(宰相)이 됨. 당시 의정부(議政府)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 또는 좌·우의정을 맡고 있음을 의미한다. 김종서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좌의정으로서 단종을 보필하며 국정을 총괄했다.
94. 육조(六曹): 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인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를 통칭한다.
95. 상부(相府): 재상(宰相)의 관청, 즉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당시 의정부, 특히 김종서가 육조의 업무까지 관장하며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의정부 서사제(議政府署事制)'의 강화로 볼 수 있다.
96. 정모(鄭某): 아무개 정씨. 정인지를 가리킨다.
97. 육경(六卿):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통칭하는 말.
98.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중추원(中樞院)의 으뜸 벼슬. 정1품 또는 종1품. 중추원은 실권이 없는 명예직 또는 원로대신을 위한 기구로 여겨지기도 했다. 정인지를 병조판서에서 판중추원사로 옮긴 것은, 표면적으로는 승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병권(兵權)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김종서의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99. 《소문쇄록(謏聞瑣錄)》: 조선 후기의 문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편찬한 야사(野史) 모음집. 여러 문헌에서 뽑은 단편적인 기록들을 모아놓았다.
해설:
이 일화는 단종 즉위 초 김종서 중심의 의정부와 정인지가 이끄는 병조 사이의 권력 갈등 또는 견제를 보여준다. 정인지는 의정부의 월권 행위에 반발하여 육조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고, 이에 부담을 느낀 김종서가 그를 실권이 덜한 자리로 옮기게 했음을 나타낸다.
원문:
公常昵侍帷幄, 眷注甚隆, 職在中樞, 特命歸政府議國政, 時人謂之內相。
번역문:
공(公)은 항상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어(昵侍帷幄)¹⁰⁰ 총애(眷注)가 매우 두터웠으므로, 직책이 중추원(中樞院)에 있었으나 특별히 명하여 정부(政府)¹⁰¹에 나와 국정(國政)을 의논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내상(內相)¹⁰²이라 불렀다.
주석:
100. 닐시유악(昵侍帷幄): 임금의 장막(帷幄) 안에서 가까이(昵) 모신다(侍)는 뜻. 임금의 측근에서 보좌하며 깊은 신임을 받는 것을 비유한다.
101.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102. 내상(內相): '안에 있는 재상'이라는 뜻. 공식적인 재상(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아니지만,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국정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는 실세(實勢)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정인지가 판중추원사로 옮겨간 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이 컸음을 보여준다.
원문:
公每掌禮圍, 試卷山積, 以指竄定瑕纇, 不失毫釐, 頃刻批抹, 或至百餘卷, 人皆神之。
번역문:
공(公)이 매번 예위(禮圍)¹⁰³를 주관할 때면 시험지(試卷)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손가락으로 흠결(瑕纇)¹⁰⁴을 지적하여 고치되(竄定) 털끝만큼도(毫釐) 놓치지 않았고, 잠깐 사이에(頃刻) 비점(批點)하고 삭제(抹消)하는 것이¹⁰⁵ 혹 백여 권에 이르기도 하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神奇)하게 여겼다.
주석:
103. 예위(禮圍): 예조(禮曹)에서 주관하는 과거 시험장 또는 그 시험 자체를 가리킨다. 정인지가 시험관(試官)으로서 시험을 주관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장예위(掌禮圍)는 예위(禮圍)를 관장(管掌)한다는 뜻이다.
104. 하뢰(瑕纇): 옥(玉)의 티(瑕)와 실의 마디(纇). 사물의 결점이나 흠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시험 답안지의 잘못된 부분을 의미한다.
105. 비말(批抹): 시험 답안지 등에 점수를 매기거나(批) 잘못된 부분을 지우는(抹) 행위. 즉, 채점을 의미한다.
원문:
公常戒後生曰: “儒者當常讀書不輟, 雖不盡記, 讀之不已, 自然心地靈明。 托以不能記得, 遂廢不讀者, 眞自棄也。”【《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이 항상 후생(後生)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유자(儒者)는 마땅히 항상 독서(讀書)를 그치지 말아야 하니, 비록 다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읽기를 그치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 바탕(心地)이 영명(靈明)¹⁰⁶해진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고 마침내 폐하여 읽지 않는 자는 참으로 스스로를 버리는(自棄) 것이다.”【《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106. 영명(靈明): 신령스럽고 밝음.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밝은 지혜나 총명함을 의미한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지혜와 통찰력이 길러짐을 강조한다.
원문:
文成好占陳荒地, 墾田甚多。 一日, 又得陳地, 求署券於戶曹堂上, 戲謂公曰: “公何屑屑於地利耶?” 公曰: “某不能與人爭利, 欲與地爭利耳。” 言者蹙然。
번역문:
문성공(文成公)은 묵은 황무지(陳荒地)¹⁰⁷를 차지하여 개간(墾田)하기를 좋아하여 개간한 밭이 매우 많았다. 하루는 또 묵은 땅을 얻어 호조(戶曹)¹⁰⁸의 당상관(堂上)¹⁰⁹에게 문서에 서명(署券)¹¹⁰해 주기를 구하니, (당상관이) 농담으로 공(公)에게 말하였다. “공(公)께서는 어찌 그리 지리(地利)¹¹¹에 자잘하게(屑屑) 신경 쓰십니까?” 공(公)이 말하였다. “저는 사람과 이익을 다툴 수는 없으나, 땅과 이익을 다투고자 할 뿐입니다.”¹¹² 말한 자가 (부끄러워) 얼굴을 찡그렸다(蹙然).
주석:
107. 진황지(陳荒地): 오랫동안 묵혀 거칠어진 땅.
108. 호조(戶曹): 조선 시대 6조의 하나. 호구(戶口), 토지, 조세, 재정 등을 담당했다. 토지 소유권과 관련된 문서는 호조에서 관리했다.
109. 당상(堂上): 조선 시대 정3품 이상의 관료를 통칭하는 말. 여기서는 호조의 판서나 참판 등 고위 관리를 가리킨다.
110. 서권(署券): 문서(券)에 서명(署)하는 것.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공문서에 서명을 받는 절차를 의미한다.
111. 지리(地利): 땅에서 나는 이익. 농사를 통한 수확이나 토지 자체의 가치를 의미한다.
112. “某不能與人爭利, 欲與地爭利耳。”: 정인지의 재치 있는 답변. 사람들과 부당하게 이익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땅을 개간하여 생산적인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땅 자체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토지 개간 행위를 정당화하면서도 세속적인 이익 추구와는 다름을 강조하는 말이다.
원문:
端宗在諒闇時, 光廟居首相, 以儲嗣之重, 宜早納妃。 旣定其議, 遣舍人黃孝源往告于右相鄭文成公曰: “明日當納妃, 須早會議。” 公曰: “居喪納婦, 豈禮哉?” 責黃公曰: “爾亦儒者, 奚以是言聞於我乎?” 黃難於回啓, 以遜辭啓曰: “右相似有采薪之憂, 不肯發言。” 光廟曰: “事在明日, 不可不急。 爾當復往, 且曰: ‘楊嬪亦囑以宜早納妃, 不可不從。’” 黃又往, 則鄭怒曰: “楊氏雖世宗封爲嬪, 是固賤女, 豈知國家事?” 黃退跪曰: “下官安敢以是言回啓? 請公開示方略。” 鄭乃笑曰: “明日吾亦早詣闕, 爾語饔官, 多備酒醪以待。” 明日, 鄭果早赴, 纔會坐, 擧大鍾迭相酬酢, 至于酣醉, 竟不能發議而罷。
번역문:
단종(端宗)께서 양암(諒闇)¹¹³ 중에 계실 때, 광묘(光廟)¹¹⁴께서 수상(首相)¹¹⁵으로 있으면서, 저사(儲嗣)¹¹⁶가 중요하니 마땅히 일찍 왕비(王妃)를 들여야 한다고 여겼다. 이미 그 의논을 정하고, 사인(舍人)¹¹⁷ 황효원(黃孝源)¹¹⁸을 보내 우상(右相)¹¹⁹ 정 문성공(鄭文成公)에게 가서 고하기를, “내일 마땅히 왕비를 들일 것이니, 모름지기 일찍 회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公)이 말하였다. “상중(居喪)에 아내를 들이는 것(納婦)이 어찌 예(禮)이겠는가?” 황효원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너 또한 유자(儒者)인데, 어찌 이런 말을 나에게 들리게 하는가?” 황효원이 돌아가 아뢰기(回啓) 어려워 겸손한 말로 아뢰기를, “우상께서는 채신지우(采薪之憂)¹²⁰가 있으신 듯하여 말씀을 하시려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광묘께서 말씀하셨다. “일이 내일이니 급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마땅히 다시 가서 또한 말하기를, ‘양빈(楊嬪)¹²¹께서도 마땅히 일찍 왕비를 들여야 한다고 부탁하였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라.” 황효원이 또 가니, 정인지가 노하여 말하였다. “양씨(楊氏)가 비록 세종께서 봉하여 빈(嬪)으로 삼으셨으나, 본래 미천한 여자¹²²인데 어찌 국가의 일을 알겠는가?” 황효원이 물러나 꿇어앉아 말하였다. “하관(下官)이 어찌 감히 이 말씀을 가지고 돌아가 아뢰겠습니까? 청컨대 공(公)께서 방략(方略)을 열어 보여주십시오.” 정인지가 이에 웃으며 말하였다. “내일 나 또한 일찍 대궐에 갈 것이니, 너는 옹관(饔官)¹²³에게 말하여 술(酒醪)¹²⁴을 많이 준비하여 기다리게 하라.” 다음 날, 정인지가 과연 일찍 도착하여 겨우 모여 앉자마자 큰 술잔(大鍾)을 들어 번갈아 서로 술을 권하고 받으니(酬酢), 술이 거나하게 취함(酣醉)에 이르러, 마침내 의논을 꺼내지 못하고 파하였다.
주석:
113. 양암(諒闇): 임금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상복(喪服)을 입고 거상(居喪)하는 기간. 보통 3년 상을 치렀다. 단종은 1452년 문종이 승하하자 즉위하여 상중에 있었다.
114. 광묘(光廟):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의 묘호(廟號). 세조는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당시 영의정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있었다.
115.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116. 저사(儲嗣): 왕위를 이을 후사(後嗣). 임금 또는 왕세자를 가리킨다. 어린 단종의 왕위가 불안정하니 빨리 왕비를 들여 후사를 도모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117.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 여러 관청에 속했으며, 여기서는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추정된다. 심부름이나 문서 전달 등의 임무를 맡았다.
118. 황효원(黃孝源, ?-?): 조선 초기의 문신. 계유정난 이후 공신에 책록되었다.
119. 우상(右相): 우의정(右議政). 당시 정인지의 관직이었다.
120. 채신지우(采薪之憂): 땔나무(薪)를 할(采) 수 없을 정도의 근심(憂)이라는 뜻으로, 병(病)을 앓고 있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황효원이 정인지의 반대를 직접 전하지 못하고 병을 핑계 댄 것이다.
121. 양빈(楊嬪): 세종(世宗)의 후궁(後宮)인 혜빈 양씨(惠嬪 楊氏, ?-1455)를 가리킨다. 단종을 양육하는 데 관여했으며, 수양대군과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양대군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양빈의 뜻을 내세운 것이다.
122. 천녀(賤女): 신분이 낮은 여자. 정인지는 양빈이 후궁 출신이므로 국가 대사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는 수양대군의 처사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낸다.
123. 옹관(饔官):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리. 사옹원(司饔院)의 관리를 가리킨다.
124. 주료(酒醪): 막걸리처럼 거르지 않은 탁한 술. 또는 술을 통칭하는 말.
해설:
이 일화는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세조)과 정인지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 정인지는 상중에 왕비를 들이는 것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반대하면서도, 수양대군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 없자 술자리를 이용하여 의논 자체를 무산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원문:
公性鯁直, 屢批龍鱗。 光廟崇釋氏, 大臣承順, 至有親奉餠器以供佛者, 公獨不拜。 諸相責曰: “主上欲群臣皆屈己奉佛, 不可不拜。” 公曰: “君父之外, 豈有拜者耶?” 南方之人有投毒於水, 取鰍生魚者, 纖微盡焉。 下令痛禁。 公進曰: “臣欲有言。” 上曰: “何言?” 公曰: “主上禁民漁獵, 如使獸蹄、鳥跡交於中國, 則如之何哉?” 上笑, 罰飮公一大鍾。【竝《謏聞瑣錄》。】
번역문:
공(公)은 성품이 강직(鯁直)하여 여러 차례 용린(龍鱗)¹²⁵을 건드렸다. 광묘(光廟)께서 석씨(釋氏)¹²⁶를 숭상하여 대신(大臣)들이 받들어 따랐고, 심지어 친히 떡 그릇(餠器)을 받들어 부처에게 공양(供佛)하는 자까지 있었으나, 공(公)만은 홀로 절하지 않았다. 여러 재상(諸相)들이 책망하며 말하였다. “주상(主上)께서 여러 신하가 모두 자신을 굽혀 부처를 받들기를 바라시니, 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公)이 말하였다. “임금과 아버지(君父) 외에 어찌 절할 대상이 있겠는가?” 남쪽 지방 사람 중에 물에 독(毒)을 풀어 미꾸라지나 산 물고기(鰍生魚)¹²⁷를 잡는 자가 있어 자잘한 것까지 모두 잡으니, 명을 내려 엄하게 금지하였다. 공(公)이 나아가 아뢰었다. “신(臣)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가?” 공(公)이 말하였다. “주상께서 백성들의 고기잡이와 사냥(漁獵)을 금하시어, 만약 짐승의 발자국과 새의 발자국(獸蹄鳥跡)¹²⁸이 나라 안(中國)¹²⁹에 뒤섞이게 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상(上)께서 웃으시며 공(公)에게 벌로 큰 술잔 하나를 마시게 하였다.【이상 《소문쇄록(謏聞瑣錄)》에서 인용】
주석:
125. 용린(龍鱗): 용의 비늘. 임금의 노여움이나 심기를 비유하는 말이다. '용린을 건드렸다(批龍鱗)'는 것은 임금에게 직언(直言)하여 노여움을 샀음을 의미한다.
126. 석씨(釋氏):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씨족이라는 뜻으로, 불교(佛敎) 또는 부처를 가리킨다. 세조는 불교를 매우 숭상하여 다양한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127. 추생어(鰍生魚): 미꾸라지(鰍)와 살아있는 물고기(生魚).
128. 수제조적(獸蹄鳥跡): 짐승의 발자국과 새의 발자국.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聖君) 시대에는 천하가 평화로워 짐승과 새들이 사람 사는 곳까지 내려와 함께 어울렸다는 이상향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129. 중국(中國): 가운데 나라. 여기서는 우리나라, 즉 조선을 가리킨다.
해설:
정인지는 세조의 불교 숭상 정책에 유학자로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과도한 어로 금지령에 대해서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백성들의 생업인 어로 활동을 지나치게 금지하면, (성군 시대처럼) 짐승과 새들이 사람 사는 곳까지 내려와 어울리는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거나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취지로 해석될 수 있다. 세조가 웃으며 벌주를 내린 것은 정인지의 직언을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비판이 다소 지나치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원문:
公天資豪邁, 胸次豁達。 嘗酒酣尙論古人曰: “如我者倘遊聖門, 純粹如顔子, 篤實如曾子, 固不可及, 如游、夏之徒, 未知何如也。”
번역문:
공(公)은 천자(天資)가 호방하고 대범하며(豪邁)¹³⁰ 가슴 속(胸次)이 활달(豁達)하였다. 일찍이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옛사람(古人)을 논하며 말하였다. “나 같은 자가 만약 성인(聖人)의 문하(聖門)¹³¹에서 노닌다면, 순수(純粹)하기가 안자(顔子)¹³²와 같고 독실(篤實)하기가 증자(曾子)¹³³와 같음에는 진실로 미칠 수 없겠지만, 유(游)와 하(夏)¹³⁴의 무리와는 어떠할지 알 수 없구나.”
주석:
130. 호매(豪邁): 기개(氣槪)가 호방(豪放)하고 도량(度量)이 넓음.
131. 성문(聖門): 성인(聖人)의 문하(門下). 여기서는 공자(孔子)의 문하를 가리킨다.
132. 안자(顔子):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顔回)를 높여 부르는 말. 덕행(德行)이 뛰어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공자로부터 가장 아낌을 받았다.
133. 증자(曾子):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 효성(孝誠)이 지극하고 성실하며 신의가 두터웠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134. 유(游), 하(夏):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 성은 언偃, 이름은 언偃)와 자하(子夏,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두 사람 모두 문학(文學)에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정인지는 자신이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문학에 뛰어났던 자유, 자하와는 견줄 만하다고 자부한 것이다.
원문:
鄭麟趾嘗爲首相, 率百官請除魯山, 人心至今憤之。【《大東韻玉》。】
번역문:
정인지가 일찍이 수상(首相)¹³⁵이 되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노산(魯山)¹³⁶을 제거할 것을 청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까지도 이를 분하게 여긴다.【《대동운옥(大東韻玉)》¹³⁷에서 인용】
주석:
135.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領議政).
136. 노산(魯山): 노산군(魯山君).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端宗)이 강등되어 불린 이름이다. 정인지가 영의정으로서 단종의 사사(賜死)를 주청하는 데 앞장섰음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137. 《대동운옥(大東韻玉)》: 조선 후기의 학자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 우리나라의 인물, 지리, 문물 등을 운(韻)에 따라 분류하여 정리했다.
해설:
이 마지막 구절은 앞서 칭찬 일색이던 내용과 달리, 정인지의 가장 큰 정치적 과오로 비판받는 단종 폐위 및 사사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정인지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적극 협력하고 단종의 죽음에 앞장섰다는 점은 후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원문:
韓確【襄節公。】
字子柔, 淸州人。 建文庚辰生。 永樂戊戌, 入皇朝, 拜光祿寺少卿, 翌年己亥, 奉勅出來。 世宗乙卯, 陞資憲, 歷判漢城府事、京畿・咸吉・平安觀察使、兵曹・吏曹判書。 文宗壬申, 拜左贊成。 癸酉, 策靖難功臣, 拜右議政, 封西原府院君。 乙亥世祖卽位, 陞左議政, 策佐翼功臣。 丙子, 以謝恩正使赴京, 未返國而卒, 年五十七。 配享世祖廟庭。
번역문:
한확(韓確)【시호는 양절공(襄節公)¹이다.】
자는 자유(子柔)이고, 청주(淸州) 사람이다.² 명(明) 건문(建文) 경진년(庚辰年, 1400)에 태어났다.³ 영락(永樂) 무술년(戊戌年, 1418)에 황조(皇朝)⁴에 들어가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⁵에 제수(拜)되었고, 이듬해 기해년(己亥年, 1419)에 칙서(勅書)를 받들고 돌아왔다(出來)⁶. 세종(世宗) 을묘년(乙卯年, 1435)에 자헌대부(資憲大夫)⁷로 승진하였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⁸, 경기(京畿)·함길(咸吉)⁹·평안(平安) 관찰사(觀察使)¹⁰, 병조(兵曹)·이조(吏曹) 판서(判書)¹¹를 역임하였다. 문종(文宗) 임신년(壬申年, 1452)에 좌찬성(左贊成)¹²에 제수되었다. 계유년(癸酉年, 1453)에 정난공신(靖難功臣)¹³에 책록되고 우의정(右議政)¹⁴에 제수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¹⁵에 봉해졌다. 을해년(乙亥年, 1455)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¹⁶으로 승진하고, 좌익공신(佐翼功臣)¹⁷에 책록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456)에 사은정사(謝恩正使)¹⁸로서 경사(京師)¹⁹로 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졸(卒)하니, 나이 57세였다. 세조(世祖)의 묘정(廟庭)²⁰에 배향(配享)²¹되었다.
주석:
- 양절공(襄節公): 한확의 시호. 양(襄)은 갑주(甲冑)의 공이 있음(甲冑有勞), 혹은 땅을 개척하여 공이 있음(辟地有德) 등을 의미하고, 절(節)은 절개를 지켜 뜻을 굽히지 않음(守節不移), 혹은 위난에 임하여 절개를 지킴(臨難不奪) 등을 나타낸다.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적과 절개를 기린 시호이다.
- 청주인(淸州人): 본관(本貫)이 청주 한씨(淸州 韓氏)임을 의미한다.
- 건문 경진생(建文庚辰生): 명나라 제2대 황제 건문제(惠帝)의 연호인 건문(建文) 2년, 즉 1400년에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 황조(皇朝): 황제의 조정.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 명나라 관직명. 광록시(光祿寺)는 황실의 연회, 제사 음식, 궁중 식자재 공급 등을 담당하던 기관이며, 소경(少卿)은 그 기관의 부책임자 격인 종4품 관직이다. 한확의 누이가 명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후궁(여비 한씨)이었기에 외척(外戚)으로서 명 조정에 출사한 것이다.
- 출래(出來):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 자헌(資憲):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정2품 상계(上階) 문관의 품계명.
-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한성부(漢城府)의 으뜸 벼슬. 정2품. 수도인 한성부의 행정을 총괄하는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 격이다.
- 함길(咸吉): 함길도(咸吉道). 조선 초기의 행정구역으로, 이후 함경도(咸鏡道)로 개칭된다.
-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최고 행정관. 종2품. 감사(監司)라고도 한다.
- 병조·이조 판서(兵曹·吏曹判書): 병조(兵曹)는 국방·군사 업무를, 이조(吏曹)는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중앙 관청인 육조(六曹)의 하나이다. 판서(判書)는 각 조의 장관으로 정2품 벼슬이다.
- 좌찬성(左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직이다.
- 정난공신(靖難功臣):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반대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한확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재상. 영의정, 좌의정 다음 서열이다.
-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서원(西原)은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 부원군(府院君)은 왕비의 아버지나 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爵號)이다. 한확은 정난공신 1등으로 책록되어 부원군에 봉해졌다.
- 좌의정(左議政): 의정부의 정1품 재상. 영의정 다음 서열이다.
-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한확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사은정사(謝恩正使): 사은사(謝恩使)는 종주국인 명나라 황제의 은혜(왕위 계승 인정, 책봉, 하사품 등)에 감사하기 위해 파견하던 사절단이다. 정사(正使)는 그 사절단의 책임자이다.
- 경사(京師): 수도.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한확은 세조의 묘정(세조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방)에 공신으로서 함께 모셔졌다.
원문:
公年十九, 皇帝召赴京師, 一見風儀, 顧遇隆異, 宣授奉議大夫、光祿寺少卿。 其制曰: “朕惟諸卿之職, 光祿爲重。 非德行茂著者, 弗居以是任; 非親舊卓特者, 弗顯以是官, 豈惟曰名位之榮? 亦以待優寵之擢。 爾韓確稟敦實之資, 懷誠愨之志, 茂著才猷, 實爲內戚, 玆特授以云云。 益懋恪勤, 祗服寵命, 欽哉!” 觀此制詞, 公之德量固已協于帝心, 而非他戚里例及之數也。
번역문:
공(公)께서 나이 19세에 황제(皇帝)²²가 경사(京師)로 불렀는데, 한 번 그 풍채와 위의(風儀)²³를 보고는 돌보아 대우함(顧遇)²⁴이 특별히 융숭하고 남달랐다(隆異). 봉의대부(奉議大夫)²⁵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을 제수한다고 선포하였다. 그 제서(制書)²⁶에 이르기를, “짐(朕)이 생각건대 여러 경(卿)들의 직책 중에 광록(光祿)이 중요하다. 덕행(德行)이 뛰어나게 드러난 자가 아니면 이 임무에 두지 않으며, 친척이나 옛 신하(親舊)²⁷로서 특별히 뛰어난 자가 아니면 이 관직으로 드러내지 않으니, 어찌 단지 명예와 지위의 영광(名位之榮)이라 하겠는가? 또한 특별한 총애를 통한 발탁(優寵之擢)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대 한확(韓確)은 돈후하고 성실한(敦實) 자질을 부여받고, 성실하고 진실한(誠愨) 뜻을 품었으며, 재능과 지략(才猷)이 뛰어나게 드러났고 실로 내척(內戚)²⁸이 되니, 이에 특별히 운운(云云)²⁹한 관직을 제수한다.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 힘쓰며(益懋恪勤), 총애하는 이 명령(寵命)을 공경히 받들지어다(祗服). 공경할지어다(欽哉)!” 이 제서의 말씀을 보면, 공의 덕망과 도량(德量)은 진실로 이미 황제의 마음(帝心)에 부합하였으니, 다른 척리(戚里)³⁰들이 관례적으로 등용되는 경우(例及之數)와는 다른 것이었다.
주석:
22. 황제(皇帝):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를 가리킨다.
23. 풍의(風儀): 풍채(風采)와 위의(威儀). 사람의 겉모습과 몸가짐, 태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24. 고우(顧遇): 돌아보고 대우함. 특별한 관심과 대우를 의미한다.
25. 봉의대부(奉議大夫): 명나라 때의 산계(散階, 실제 직무는 없으나 품계를 나타내는 명칭) 중 하나로 보인다. 광록시소경이라는 실직(實職)과 함께 받은 명예직으로 추정된다.
26. 제(制), 제서(制書): 황제의 명령서.
27. 친구(親舊): 황제의 친척과 옛 신하, 즉 황제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단순히 '친구'라는 의미는 아니다.
28. 내척(內戚): 황제의 외척. 즉 황후나 후궁의 친척을 말한다. 한확의 누이동생이 영락제의 후궁(여비 한씨, 麗妃 韓氏)이었으므로 내척에 해당한다.
29. 운운(云云): 앞에 언급한 내용을 생략하고 이르는 말. 여기서는 '봉의대부 광록시소경'을 가리킨다.
30. 척리(戚里): 황제의 외척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외척을 가리키는 말. 내척과 유사한 의미이다. 이 구절은 한확의 등용이 단순히 외척이라는 배경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뛰어난 자질과 덕량이 황제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원문:
太宗禪位于世宗, 遣使請命。 帝嘉而許之, 以公爲正使, 光祿寺丞劉泉爲副, 持節備禮來, 冊爲國王。 降冊日, 帝御正殿, 文武百官陪列, 公端笏受命, 進退詳雅。 帝大喜, 本朝迎迓之禮亦有加焉。 夫封國, 大事也, 不選於中朝搢紳帷幄侍從之列, 而特命公焉, 非簡在帝心, 烏可爾也? 公旣年少而貴, 又奉縟禮而至, 一國臣民莫不想望其風彩。 泉旣事完回京, 公以帝旨仍留。 後復召赴京師者再四, 至欲尙以仁宗之女, 公辭以母老不忍遠離, 帝義之而止。
번역문:
태종(太宗)이 세종(世宗)에게 선위(禪位)³¹하고 사신을 보내 고명(誥命)³²을 청하였다.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허락하고, 공을 정사(正使)로, 광록시승(光祿寺丞)³³ 유천(劉泉)을 부사(副使)로 삼아, 절(節)³⁴을 가지고 예(禮)를 갖추어 와서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책봉 조서(冊)를 내리는 날, 황제가 정전(正殿)에 임어(臨御)³⁵하고 문무백관이 옆에 늘어서자, 공이 홀(笏)³⁶을 단정히 잡고 명을 받으며 나아가고 물러남(進退)이 차분하고 우아하였다(詳雅).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고, 본조(本朝)³⁷의 영접(迎迓)³⁸하는 예(禮) 또한 더함이 있었다. 무릇 나라를 봉(封)하는 것은 큰일인데, 중조(中朝)³⁹의 진신(搢紳)⁴⁰, 유악(帷幄)⁴¹, 시종(侍從)⁴²의 반열에서 뽑지 않고 특별히 공에게 명하였으니, 황제의 마음속에 발탁되어 있지 않았다면(非簡在帝心)⁴³,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烏可爾也)? 공이 이미 젊은 나이에 존귀해지고(年少而貴), 또 성대한 예(縟禮)⁴⁴를 받들고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一國臣民)들이 그 풍채(風彩)를 우러러보지 않음이 없었다. 유천이 임무를 마치고 경사(京師)로 돌아간 뒤, 공은 황제의 명(帝旨)으로 그대로 머물렀다. 후에 다시 경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 두세 번 혹은 네 번(再四)⁴⁵이었고, 인종(仁宗)⁴⁶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尙)⁴⁷ 하려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공이 어머니가 늙으셔서 차마 멀리 떠날 수 없다(母老不忍遠離)고 사양하자, 황제가 이를 의롭게 여겨(義之) 그만두었다.
주석:
31. 선위(禪位): 임금이 살아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 1418년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일을 가리킨다.
32. 청명(請命):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 국왕의 즉위를 인정하고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는 외교적 절차. 고명(誥命)은 황제가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서이다.
33. 광록시승(光祿寺丞): 광록시의 승(丞). 광록시의 부관 중 하나이다.
34. 절(節): 부절(符節). 사신이 지니는 신표(信標)로, 황제의 명령을 받아 파견되었음을 증명한다.
35. 임어(臨御): 임금이 공식적인 장소에 나와 자리함.
36. 홀(笏): 조선 시대 관원이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을 입을 때 손에 쥐던 물건. 품계에 따라 재질과 크기가 달랐다.
37. 본조(本朝): 우리나라 조정. 즉 조선 조정을 가리킨다.
38. 영아(迎迓): 맞이하고 대접함.
39. 중조(中朝): 중국 조정.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40. 진신(搢紳): 홀(笏)을 허리띠(紳)에 꽂는다는 뜻으로,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특히 지위 높은 문관을 의미한다.
41. 유악(帷幄): 장막. 군대의 지휘소나 임금의 측근에서 정무를 보는 곳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황제의 측근 고문관이나 전략가를 의미할 수 있다.
42. 시종(侍從):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43. 간재제심(簡在帝心): 황제의 마음속에 이미 선택되어 있음. 《시경(詩經)》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로, 임금이 신하의 재능과 인품을 잘 알고 신임함을 의미한다.
44. 욕례(縟禮): 번거롭고 성대한 의례. 명나라의 책봉 의례를 가리킨다.
45. 재사(再四): 두 번, 세 번 또는 네 번. 여러 차례를 의미한다.
46. 인종(仁宗): 명나라 제4대 황제 홍희제(洪熙帝, 재위 1424-1425). 영락제의 아들이다.
47. 상(尙): 공주나 옹주 등 왕실의 여성과 결혼하는 것. 부마(駙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世宗召公面諭曰: “今平安道凋弊, 非公莫可撫綏⁴⁸者, 煩暫出, 卿無辭焉。” 仍拜爲平安道都觀察使, 兼尹平壤, 復兼本道兵馬都節制使。 文武之任萃于一身, 公盡心措置, 使朝廷無四顧之憂, 軍民獲濟, 至今西人慕之, 如父母焉。
번역문:
세종께서 공을 불러 얼굴을 마주하고 이르시기를(面諭), “지금 평안도(平安道)가 피폐(凋弊)하니, 공이 아니면 가히 어루만져 안정시킬(撫綏)⁴⁹ 자가 없다. 번거롭겠지만 잠시 나가주어야 하니, 경(卿)은 사양하지 말라.” 하셨다. 이어서 평안도 도관찰사(都觀察使)⁵⁰로 제수하고, 평양윤(尹平壤)⁵¹을 겸하게 하였으며, 다시 본도(本道)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⁵²를 겸하게 하였다. 문무(文武)의 임무가 한 몸에 모이니(萃), 공이 마음을 다해 처리(措置)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사방을 돌아볼 근심(四顧之憂)⁵³이 없게 하고, 군인과 백성(軍民)이 구제됨(獲濟)을 얻으니, 지금까지 서쪽 지방 사람들(西人)⁵⁴이 그를 사모하기를 부모처럼 한다.
주석:
48. [주-D001] 綏 : 저본(底本)에는 “완(緩)”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상신(相臣)・한확(韓確)》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무수(撫綏)'는 어루만져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문맥에 자연스럽다. '무완(撫緩)'은 어루만져 느슨하게 한다는 뜻으로 어색하다.
49. 무수(撫綏):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함. 백성을 보살펴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50. 도관찰사(都觀察使): 관찰사 앞에 '도(都)' 자를 붙여 권한이 강화되었음을 나타내거나, 해당 도 전체를 관할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51. 윤평양(尹平壤): 평양부윤(平壤府尹). 평양부(平壤府)의 수장. 종2품. 관찰사가 부윤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52.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해당 도의 군사 지휘관. 관찰사가 겸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한확에게 평안도의 행정과 군사권을 모두 맡긴 것이다.
53. 사고지우(四顧之憂): 사방을 돌아보며 걱정함. 국가의 경우, 사방의 국경 지역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을 의미한다. 평안도는 북방 국경 지역으로 국방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한확의 통치로 평안도가 안정되어 조정에서 북방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는 뜻이다.
54. 서인(西人): 서쪽 지방 사람. 평안도 사람들을 가리킨다.
원문:
公在政府, 凡持身應物, 一槪於正。 事有是非議論, 未嘗回互處之。 性本仁慈, 至於議獄, 必以寬恕爲主, 嘗謂府佐曰: “與其殺不辜, 寧失不經。 若稍有可疑之讞, 莫如申而活之。” 其操心如是。
번역문:
공이 정부(政府)⁵⁵에 있을 때, 무릇 몸가짐(持身)과 일 처리(應物)를 한결같이 올바름(正)에 근거하였다. 일에 시비(是非)에 대한 의론(議論)이 있으면 일찍이 얼버무리거나 회피하여 처리하지 않았다(未嘗回互處之)⁵⁶. 성품이 본래 어질고 자비로웠으며(仁慈), 옥사(獄事)를 논의함(議獄)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너그러움과 용서(寬恕)를 위주로 삼았다. 일찍이 부좌(府佐)⁵⁷에게 이르기를, “죄 없는 사람(不辜)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규에 맞지 않는 실례(失不經)⁵⁸를 범하는 것이 낫다.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판결(可疑之讞)⁵⁹이 있다면, 다시 조사하여(申)⁶⁰ 살려주는 것(活之)만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操心)가 이와 같았다.
주석:
55. 정부(政府): 조정, 또는 의정부와 같은 최고 정무 기관을 가리킨다.
56. 회호처지(回互處之): 일을 처리할 때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피하거나 얼버무리는 것. 원칙 없이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둘러대며 처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57. 부좌(府佐): 관청의 보좌관이나 아랫사람.
58. 실불경(失不經): '불경(不經)'은 경전이나 법규에 맞지 않음, 또는 상도에 어긋남을 의미한다. '실불경'은 법규를 엄격하게 적용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을 뜻한다. 즉, 억울한 사람을 만들 바에는 법 적용에 다소 미흡함이 있더라도 관용을 베푸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59. 의험(疑讞): 의심스러운 판결이나 판결문. 험(讞)은 죄를 심리하여 판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60. 신(申): 거듭 아룀, 또는 재심(再審)을 청구하거나 재조사함. 여기서는 죄의 유무가 의심스러울 때 다시 신중히 조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원문:
丙子夏, 皇帝遣太監尹鳳等賜誥命冠服。 上以公爲謝恩使, 戶曹判書權蹲爲副, 召見便殿, 謂公曰: “卿之還也, 予當迎于郊外, 與卿一醉。” 公辭謝曰: “以臣衰老, 恐不復見天日。” 上慰藉良厚。 及赴京師, 蒙犯霜露, 回至端州之沙河驛, 卒于旅舍。
번역문:
병자년(1456) 여름, 황제⁶¹가 태감(太監)⁶² 윤봉(尹鳳) 등을 보내 고명(誥命)⁶³과 관복(冠服)⁶⁴을 하사하였다. 상(上)⁶⁵께서 공을 사은사(謝恩使)로, 호조판서(戶曹判書)⁶⁶ 권준(權蹲)⁶⁷을 부사(副使)로 삼아, 편전(便殿)⁶⁸에서 불러보고 공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돌아올 때, 내(予) 마땅히 교외(郊外)에서 맞이하여 경과 한 번 취하리라.” 하셨다. 공이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臣)이 늙고 쇠약하여(衰老), 다시 천일(天日)⁶⁹을 뵙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께서 위로하고 격려하심(慰藉)이 매우 두터웠다. 경사(京師)로 갈 때 서리와 이슬을 무릅쓰고(蒙犯霜露)⁷⁰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단주(端州)⁷¹의 사하역(沙河驛)⁷²에 이르러 여관(旅舍)⁷³에서 졸(卒)하였다.
주석:
61. 황제(皇帝): 명나라 제7대 황제 경태제(景泰帝, 재위 1449-1457)를 가리킨다.
62. 태감(太監): 환관(宦官)의 최고 직위 중 하나. 황제의 명을 전달하는 사신으로 자주 파견되었다.
63. 고명(誥命): 황제가 5품 이상 관원이나 외국의 왕에게 내리는 공식적인 명령서나 임명장. 여기서는 세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책봉 문서를 의미한다.
64. 관복(冠服): 관(冠)과 옷(服). 즉, 관리가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공복(公服) 일체를 의미한다. 황제가 하사하는 관복은 제후국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
65. 상(上): 임금. 세조(世祖)를 가리킨다.
66. 호조판서(戶曹判書): 호조(戶曹)는 재정, 조세, 호구 등을 담당하던 육조의 하나이다. 판서는 그 장관이다.
67. 권준(權蹲, 1405-1459):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유(子有), 호는 소한당(所閑堂). 본관은 안동(安東).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웠다. 한자 '蹲'은 '준'으로 읽는다.
68. 편전(便殿): 임금이 평상시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보는 전각. 정전(正殿)에 비해 약식으로 조회하거나 신하를 만나는 장소이다.
69. 천일(天日): 하늘의 해. 임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살아서 임금을 다시 뵙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표현한 것이다.
70. 몽범상로(蒙犯霜露): 서리와 이슬을 무릅쓰고 맞음. 객지에서 겪는 고생이나 여정의 어려움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71. 단주(端州): 중국 지명.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나, 북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노정 중의 한 곳으로 추정된다.
72. 사하역(沙河驛): 단주에 있던 역(驛). 역은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과 마필을 제공하던 곳이다.
73. 여사(旅舍): 객지에서 묵는 숙소. 객사(客舍)나 역관(驛館) 등을 가리킨다.
원문:
公柩⁷⁴過廣寧、遼陽, 一路閫臬莫不設奠致意, 皆歎曰: “韓光祿其逝矣乎!” 雖至馬夫走卒, 無不歎惜焉。
번역문:
공의 영구(靈柩)⁷⁵가 광녕(廣寧)⁷⁶, 요양(遼陽)⁷⁷을 지날 때, 길을 따라 모든 군 지역 사령관(閫臬)⁷⁸들이 제사상(奠)을 차려 조의(弔意)를 표하지 않음이 없었고, 모두 탄식하며 말하기를, “한광록(韓光祿)⁷⁹께서 가셨구나!” 하였다. 비록 마부(馬夫)나 하급 군졸(走卒)⁸⁰에 이르기까지도 탄식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주석:
74. [주-D002] 柩 : 저본(底本)에는 “추(樞)”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국조인물고・상신・한확》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구(柩)'는 시신을 넣은 관, 즉 영구(靈柩)를 의미하며 문맥상 맞다. '추(樞)'는 지도리, 중요한 부분을 의미하여 어색하다.
75. 구(柩): 시신을 넣은 관(棺). 영구(靈柩).
76. 광녕(廣寧): 중국 요동(遼東) 지역의 지명. 현재의 요녕성(遼寧省) 북진시(北鎭市) 일대.
77. 요양(遼陽): 중국 요동 지역의 중심 도시 중 하나. 현재의 요녕성 요양시(遼陽市).
78. 곤얼(閫臬): 문지방(閫)과 법도(臬)라는 뜻으로, 변방을 지키는 장수나 지방의 대관(大官)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요동 지역의 명나라 군 지휘관들을 의미한다.
79. 한광록(韓光祿): 한확이 명나라에서 광록시소경을 지냈으므로 그 관직명으로 부른 것이다. 이는 그가 명나라 관리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80. 주졸(走卒): 심부름하는 하인이나 하급 병졸. 평범한 백성이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원문:
公天姿簡嚴, 守正無私。 雖富貴已極, 而謙遜愈下, 其待人接物藹如也。 及臨事, 斷決截然, 不可犯。 居家廉潔, 不治産業。 厚於故舊, 睦於親戚。 弟磌及𥑇⁸¹早沒, 公收視其孤, 一如己出。
번역문:
공은 천성(天姿)이 간결하고 엄정하며(簡嚴), 정도(正道)를 지켜 사사로움이 없었다(守正無私). 비록 부귀(富貴)가 이미 극에 달했으나 겸손함(謙遜)이 더욱 몸을 낮추었고(愈下)⁸²,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待人接物)⁸³이 온화하였다(藹如也)⁸⁴. 일에 임해서는(臨事) 결단(斷決)이 분명하고 날카로워(截然)⁸⁵ 범할 수 없었다(不可犯). 집에서는(居家) 청렴하고 결백하였으며(廉潔),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다(不治産業)⁸⁶. 옛 친구(故舊)들에게 후하게 대하고, 친척(親戚)들과 화목하였다(睦). 아우 전(磌)과 계(繼)⁸⁷가 일찍 죽자, 공이 그들의 고아들을 거두어 보살피기를(收視其孤)⁸⁸ 한결같이 자기 자식처럼(一如己出) 하였다.
주석:
81. 𥑇: 해당 한자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며, 일반적으로 한확의 아우는 한전(韓磌)과 한계(韓繼)로 알려져 있다. 문맥상 '계(繼)'의 오기(誤記)이거나 이체자(異體字)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는 '계(繼)'로 보고 번역한다.
82. 유하(愈下): 더욱 아래로 내려감.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게 처신함을 의미한다.
83. 대인접물(待人接物): 사람을 대하고 사물(일)을 처리하는 태도나 방식.
84. 애여야(藹如也):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양. 화기애애한 모습을 나타낸다.
85. 절연(截然): 칼로 자른 듯이 분명하고 단호한 모양.
86. 불치산업(不治産業): 재산을 관리하거나 늘리는 데 힘쓰지 않음. 청렴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87. 전(磌), 계(繼): 한확의 동생들인 한전(韓磌)과 한계(韓繼). 한계의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이다.
88. 수시기고(收視其孤): 그들의 고아들을 거두어 보살핌.
원문:
顯允襄節, 嶽降申、呂。 鼻祖垂休, 代有亞旅。 或捍王躬, 備嘗險阻。 或殲巨敵, 難是用沮。 勳爵在身, 非干鼎俎。 公乃益振, 光于繼序。 早入帝庭, 惟帝玉汝。 擢陞于卿, 光祿是處。 秉節封王, 親承天語。 手捧冊命, 來自帝所。 衮冕介珪, 天子錫予。 知遇世宗, 軒然霞擧。 提衡攬轡, 吹律生黍。 扶翼世祖, 龍飛當宁。 誓以山河, 托以心膂。 載登鼐鼎⁸⁹, 載調寒暑。 陰陽受職, 物無違拒。 宜享壽考, 天胡不與? 善人早逝, 誰非惻楚? 不朽者存, 昭哉來許。 則篤其慶, 生此聖女。 誕育神孫, 承玆天敍。【竝碑。】
번역문:
드러나고 믿음직한(顯允) 양절공(襄節)께서는, 큰 산이 내려보낸 신보(申甫)와 여상(呂尚)⁹⁰과 같으시네. 시조(鼻祖)⁹¹께서 복을 내려(垂休), 대대로 아려(亞旅)⁹²와 같은 보필 신하가 있었네. 혹은 왕의 몸(王躬)을 지키며, 험난함(險阻)을 두루 맛보았고. 혹은 거대한 적(巨敵)을 섬멸하여, 재난(難)을 이로써 막았네(是用沮). 공훈과 작위(勳爵)가 몸에 있었으나, 정조(鼎俎)⁹³를 통해 구한 것이 아니었네. 공(公)께서는 이에 더욱 떨치시어(益振), 대를 잇는 차례(繼序)를 빛내셨네. 일찍이 황제의 조정(帝庭)에 들어가니, 오직 황제께서 그대를 옥처럼 완성시키셨네(惟帝玉汝)⁹⁴. 경(卿)의 지위로 발탁 승진하여(擢陞于卿), 광록(光祿)이 바로 그 자리였네. 부절(節)을 잡고 왕을 봉하러(封王) 와서는, 친히 하늘의 말씀(天語)⁹⁵을 받들었네. 손수 책명(冊命)을 받들어, 황제가 계신 곳(帝所)으로부터 왔네. 곤룡포와 면류관(衮冕)⁹⁶, 큰 규(介珪)⁹⁷는, 천자(天子)께서 내려주신 것이라네. 세종(世宗)의 지우(知遇)⁹⁸를 만나, 드높이 구름처럼 솟아올랐네(軒然霞擧)⁹⁹. 저울을 잡고 고삐를 당기며(提衡攬轡)¹⁰⁰, 율관(律管)을 불어 기장을 낳게 하셨네(吹律生黍)¹⁰¹. 세조(世祖)를 도와(扶翼) 용이 날아올라(龍飛)¹⁰² 자리를 안정시키시니(當宁)¹⁰³. 산하(山河)로써 맹세하고¹⁰⁴, 심膂(心膂)¹⁰⁵로써 맡기셨네. 이에鼐鼎(내정)¹⁰⁶에 오르시고, 이에 한서(寒暑)¹⁰⁷를 조화시키셨네. 음양(陰陽)이 직분을 받으니(受職)¹⁰⁸, 만물(物)이 어기거나 거부함이 없었네. 마땅히 수고(壽考)¹⁰⁹를 누리셨어야 하거늘, 하늘은 어찌(胡) 주지 않으셨는가? 착한 사람이 일찍 가니(善人早逝), 누가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지 않으랴(誰非惻楚)? 썩지 않는 것(不朽者)¹¹⁰이 남아 있으니, 밝게 앞날(來許)¹¹¹을 비추리라. 그리하여 그 경사(慶)를 도탑게 하여, 이 성스러운 따님(聖女)¹¹²을 낳으셨으니. 신성한 손자(神孫)¹¹³를 낳아 길러, 이 하늘의 차례(天敍)¹¹⁴를 이으셨네.【모두 비문(碑文)이다.】
주석:
89. [주-D003] 鼐鼎 :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국조인물고・상신・한확》에는 “정내(鼎鼐)”로 되어 있다. 내정(鼐鼎)이나 정내(鼎鼐) 모두 큰 솥을 의미하며, 재상의 직위나 역할을 상징한다. 의미 차이는 없다.
90. 신(申), 여(呂):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의 명신 신보(申甫)와 주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을 도운 명재상 여상(呂尚, 강태공)을 가리킨다. 뛰어난 재상이나 보필 신하를 비유한다. '악강(嶽降)'은 큰 산이 영웅호걸을 내려보낸다는 뜻으로, 비범한 인물의 탄생을 의미한다.
91. 비조(鼻祖): 맨 처음의 조상. 시조(始祖). 청주 한씨의 시조를 가리킨다.
92. 아려(亞旅): 주나라 관직명.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군사 관련 임무를 맡았다. 여기서는 왕을 보필하는 중요한 신하를 비유한다.
93. 정조(鼎俎): 제례(祭禮)에 쓰이는 솥(鼎)과 고기를 담는 도마(俎). 잔치나 권력의 자리를 비유한다. '비간정조(非干鼎俎)'는 부정한 방법이나 연줄로 공훈과 작위를 얻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94. 옥여(玉汝): '옥여어성(玉汝於成)'의 줄임말로, 옥을 다듬어 그릇을 만들 듯이 인재를 아끼고 단련하여 크게 성공하게 함을 의미한다. 황제가 한확을 아끼고 중용했음을 나타낸다.
95. 천어(天語): 하늘의 말씀. 황제의 말을 의미한다.
96. 곤면(衮冕): 곤룡포(衮龍袍)와 면류관(冕旒冠). 고대 중국에서 천자나 제후가 입던 가장 높은 등급의 예복이다.
97. 개규(介珪): 큰 규(珪). 규는 옥으로 만든 홀(笏)의 일종으로,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신표로 하사하던 것이다.
98. 지우(知遇): 자신의 재능이나 인품을 알아주고 좋은 대우를 해 줌.
99. 헌연하거(軒然霞擧): 수레를 탄 듯 높이 올라 아름다운 노을처럼 빛남. 지위가 높아지고 명성이 크게 떨침을 비유한다.
100. 제형람비(提衡攬轡): 저울(衡)을 들고 고삐(轡)를 잡음. 국가의 정사를 공정하게 처리하고 백성을 올바르게 이끄는 것을 비유한다. 형(衡)은 저울대, 비(轡)는 말고삐를 의미한다.
101. 취율생서(吹律生黍): 율관(律管)을 불어 재 속에 묻어둔 기장(黍)을 자라나게 한다는 고사에서 유래. 음률(陰律, 陽律)을 정확히 맞춰 불면 기후가 조화롭게 되어 기장이 싹튼다고 믿었다. 정치를 잘하여 음양을 조화시키고 만물을 순성(順成)하게 함을 비유한다.
102. 용비(龍飛): 용이 하늘을 날아오름. 임금이 새롭게 등극하는 것을 비유한다. 세조의 즉위를 가리킨다.
103. 당녕(當宁): 임금이 자리에 앉아 평안하게 다스림. '용비당녕(龍飛當宁)'은 세조가 즉위하여 천하를 안정시켰음을 의미한다.
104. 서이산하(誓以山河): 산과 강에 맹세함. 변치 않는 공신과의 약속이나 나라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맹세를 의미한다. 공신에게 토지와 작위를 내리며 그 공을 영원히 기리겠다는 약속을 비유한다.
105. 심려(心膂): 마음(心)과 등골뼈(膂). 몸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을 가리키며, 임금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핵심적인 신하를 비유한다.
106. 내정(鼐鼎): 큰 솥. 재상의 직위를 상징한다. '재등내정(載登鼐鼎)'은 재상의 자리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주석 [주-D003] 참조.
107. 한서(寒暑): 추위와 더위. 음양(陰陽)의 변화, 또는 세월이나 정사를 비유한다. '재조한서(載調寒暑)'는 재상으로서 음양을 조화시키듯 정사를 원만하게 처리했음을 의미한다.
108. 음양수직(陰陽受職): 음(陰)과 양(陽)이 각기 자기 직분을 받음. 천지 만물이 제자리를 찾아 순조롭게 운행됨. 즉, 나라가 잘 다스려져 질서가 잡히고 조화를 이룸을 의미한다.
109. 수고(壽考): 장수(長壽). 오래 삶.
110. 불후자(不朽者): 썩지 않는 것. 사람의 육신은 죽어 없어지지만, 그가 남긴 공적, 덕행, 명성 등은 영원히 남는다는 의미이다.
111. 내허(來許): 장래. 미래.
112. 성녀(聖女): 성스러운 따님. 한확의 딸이자 세조의 며느리이며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정희왕후가 아니라 인수대비)를 가리킨다.
113. 신손(神孫): 신성한 손자. 한확의 외손자이자 소혜왕후의 아들인 성종(成宗)을 가리킨다.
114. 천서(天敍): 하늘이 정한 차례나 질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의미한다.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아 대통(大統)을 계승했음을 나타낸다.
김숙자(金叔滋)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金叔滋
字子培, 善山人。 洪武己巳生。 太宗十四年甲午司馬, 世宗元年己亥登第。 官至司藝。 世祖丙子卒, 年六十八。
번역문:
김숙자(金叔滋)¹
자는 자배(子培)이고, 선산(善山) 사람²이다. 홍무(洪武) 기사년(己巳年)³에 태어났다. 태종(太宗) 14년 갑오년(甲午年, 1414)에 사마시(司馬試)⁴에 합격하고, 세종(世宗) 원년 기해년(己亥年, 1419)에 문과에 급제(登第)⁵하였다. 관직은 사예(司藝)⁶에 이르렀다. 세조(世祖) 병자년(丙子年, 1456)에 졸(卒)하니, 향년 68세⁷였다.
주석:
-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초기 인물로, 김종직(金宗直)의 아버지이다. 성리학적 이상 정치 구현과 교육에 힘썼다.
- 선산인(善山人): 본관(本貫)이 선산(善山, 현 경상북도 구미시)임을 나타낸다. 선산 김씨(善山 金氏)이다.
- 홍무 기사년(洪武己巳年): 1389년. 홍무는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연호이다.
- 사마(司馬): 사마시(司馬試)의 약칭으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 시험을 말한다.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成均館) 입학 자격이나 하급 관직에 나아갈 자격을 얻었다.
- 등제(登第): 문과(文科), 즉 대과(大科)에 급제함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 관료가 되는 가장 중요한 등용문이었다.
- 사예(司藝): 성균관(成均館)의 정4품 관직. 성균관의 교수를 담당했다.
- 향년 68세(享年六十八): 한국식 나이(세는나이)로 68세에 사망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年十二三, 受業於吉先生再。 聞尹公祥守黃澗縣, 徒步往受《易》, 尹公知公志之銳, 爲盡其奧⁸。 由是公之《易》學大明。 時承前朝餘風, 學校雖設, 朋徒相視怠弛, 三四聚首, 則褻言狂笑紛如也。 公必就屛處, 端坐誦書, 窮日不輟, 人皆敬憚之。
번역문:
공(公)의 나이 12~13세에 길재(吉再) 선생⁹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윤상(尹祥) 공¹⁰이 황간현(黃澗縣)¹¹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찾아가 《역(易)》¹²을 배웠는데, 윤상 공은 공의 뜻이 날카로움을 알고 그 오묘함¹³을 다 전해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공의 《역(易)》학이 크게 밝아졌다. 당시는 고려(前朝)의 남은 풍속(餘風)¹⁴을 이어받아, 학교가 비록 설치되었으나 학도의 무리(朋徒)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태만하고 해이하여, 서너 명이 모이면 외설스러운 말(褻言)과 미친 듯한 웃음(狂笑)¹⁵이 어지러웠다. 공은 반드시 병풍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단정히 앉아 책을 외우며, 온종일 그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면서도 어려워하였다(敬憚)¹⁶.
주석:
8. [주-D001] 奧 : 저본(底本)에는 “월(粤)”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오(奧)’는 깊고 오묘한 이치를 의미한다.
9. 길 선생 재(吉先生再):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을 가리킨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학자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조선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고향인 선산(善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숙자는 그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다. '재(再)'는 길재의 자(字)이다.
10. 윤공 상(尹公祥): 윤상(尹祥, 1373-1422). 조선 초기의 문신.
11. 황간현(黃澗縣): 현재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일대.
12. 《역(易)》: 《주역(周易)》을 가리킨다. 유교의 핵심 경전 중 하나로, 우주의 변화 원리와 인간의 도리를 담고 있다. 성리학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13. 오(奧): 깊고 오묘한 이치나 뜻. 주석 [주-D001] 참조.
14. 전조여풍(前朝餘風): 이전 왕조, 즉 고려 시대의 남은 풍속. 여기서는 고려 말의 다소 자유분방하거나 기강이 해이해진 학문 풍토를 의미하는 듯하다.
15. 설언광소(褻言狂笑): 외설스럽고 저속한 말과 미친 듯이 웃는 웃음. 학문에 정진해야 할 학생들이 보이는 부적절한 태도를 지적한다.
16. 경탄(敬憚): 공경하면서도 어려워함. 김숙자의 학문에 대한 진지하고 엄격한 태도가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심과 동시에 거리감을 느끼게 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公天性至孝, 居家事親, 皆從事《小學》。 辛亥, 丁考妣憂, 哀毁過禮, 勺水不入口。 旣斂而殯, 惟歠粥飮漿, 廬于塋側, 不脫絰帶, 疎糲以食, 終始不懈。 時俗有喪, 則歸依浮屠法, 雖號儒家, 亦不免焉。 公獨確然, 斂襲、虞祔、練祥, 按朱子禮而節行之。 語人則必曰: “吾非敢自異乎俗, 先正吉諫議、金府使之敎也。”
번역문: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집에 거처하며 부모를 섬길 때 모두 《소학(小學)》¹⁷에 따라 행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431)¹⁸에 부모상(考妣憂)¹⁹을 당하여, 슬퍼하고 몸을 해침(哀毁)이 예법(禮法)을 넘어서서(過禮)²⁰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않았다. 이미 염(斂)하고 빈(殯)²¹을 차린 뒤에는 오직 죽(粥)을 마시고 미음(漿)을 마셨으며(歠粥飮漿)²², 묘(塋) 곁에 여막(廬)을 짓고 살면서(廬于塋側)²³ 상복의 띠(絰帶)²⁴를 벗지 않았고, 거친 음식(疎糲)²⁵을 먹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풍속은 상(喪)을 당하면 불교의 법(浮屠法)²⁶에 귀의하여, 비록 유가(儒家)라고 자처하는 집안이라도 또한 이를 면하지 못하였다. 공은 홀로 확고하여, 염습(斂襲), 우제(虞祭)와 부제(祔祭), 연제(練祭)와 상제(祥祭)²⁷를 주자(朱子)의 예법²⁸에 의거하여 절도 있게 행하였다.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반드시 “내가 감히 세속과 다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바른 분(先正)²⁹이신 길 간의(吉諫議)³⁰와 김 부사(金府使)³¹의 가르침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17. 《소학(小學)》: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편찬한 아동용 수신서(修身書). 일상생활에서의 기본 예절과 윤리 규범을 담고 있어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기본 교양서로 중시되었다.
18. 신해년(辛亥年): 1431년(세종 13).
19. 고비우(考妣憂): 돌아가신 아버지(考)와 어머니(妣)의 상(喪)을 함께 이르는 말. 부모상을 당했음을 의미한다.
20. 애훼과례(哀毁過禮): 슬픔으로 몸을 지나치게 상하게 하는 것. 효심의 발로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유교 예법에서는 지나친 훼상(毁傷)은 오히려 불효로 보기도 했다. 김숙자의 효성이 지극했음을 보여준다.
21. 염(斂), 빈(殯): 염은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히는 절차, 빈은 염한 시신을 관에 넣고 빈소(殯所)에 모시는 절차를 말한다.
22. 철죽음장(歠粥飮漿): 죽이나 미음을 마시는 것. 상중(喪中)에 곡기를 끊고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며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23. 여우영측(廬于塋側): 묘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처하며 묘를 지키는 것. 시묘살이(侍墓살이)를 의미한다.
24. 질대(絰帶): 상복(喪服)에 두르는 삼베로 만든 띠. 상중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25. 소려(疎糲): 거친 곡식으로 지은 밥. 상중에 검소하게 생활함을 보여준다.
26. 부도법(浮屠法): 부도(浮屠)는 부처(Buddha)의 음역어로, 불교(佛敎)를 가리킨다. 불교식 상장례(喪葬禮) 의식을 의미한다. 당시 유학을 표방하면서도 불교식 의례를 따르는 경우가 많았음을 시사한다.
27. 염습(斂襲), 우부(虞祔), 연상(練祥): 모두 유교식 상례(喪禮)의 주요 절차들이다. 염습은 시신을 정돈하고 옷을 입히는 것, 우제(虞祭)는 장사 지낸 후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 부제(祔祭)는 신주(神主)를 조상의 사당에 모시는 제사, 연제(練祭)는 소상(小祥, 1주기) 후 지내는 제사, 상제(祥祭)는 대상(大祥, 2주기) 후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 김숙자가 불교의 영향을 배제하고 유교 예법을 철저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28. 주자례(朱子禮): 주희가 편찬한 《가례(家禮)》를 말한다. 관혼상제(冠婚喪祭) 등 가정의 의례에 대한 규범을 담고 있으며, 조선 시대 사대부 예법의 표준이 되었다.
29. 선정(先正): 먼저 세상을 떠난 바른 사람. 여기서는 길재와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여 부르는 말이다.
30. 길 간의(吉諫議): 길재(吉再)를 가리킨다. 간의(諫議)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고려 시대 간쟁(諫諍)을 담당하던 관직이다. 길재가 고려 말에 이 관직을 지낸 것을 나타낸다.
31. 김 부사(金府使): 김숙자의 아버지 김귀령(金貴齡)을 가리킨다. 부사(府使)는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으로, 주로 지방관직에 쓰였다. 아버지 역시 유교적 가르침을 중시했음을 시사한다.
원문:
公誨人不倦, 必諄諄叩兩端, 開悟而後已。 不煩檟楚, 而人樂於學。 居廬鳳巖, 鄕人子弟結書齋於廬側, 朝夕奠後, 爲之講課。 每遇事生送死之處, 輒嗚咽涕泣, 受業者爲感愴。 敎子弟, 初授《童蒙須知》、《幼學字說》、《正俗篇》, 皆背誦, 然後令入《小學》, 次《孝經》, 次《四書》、《五經》, 然後令讀《通鑑》及諸史百家。 至於學射, 曰: “弓矢, 衛身之物, 不可不閑習。 古之人以此觀德, 非博奕比也。” 勸之書字, 則曰: “書, 心畫也。 模楷必端正, 草及篆, 亦須要精熟。” 勸之握算, 則曰: “日用事物, 非此未易究其數。”
번역문:
공은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간절하게 양 끝을 두드려(諄諄叩兩端)³² 깨우쳐 준 뒤에야 그만두었다. 회초리(檟楚)³³를 수고롭게 쓰지 않아도 사람들이 배우기를 즐거워했다. 봉암(鳳巖)³⁴에서 여막살이를 할 때, 고을 사람들의 자제들이 여막 곁에 서재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전(奠)³⁵을 올린 뒤에는 그들을 위해 강론하고 과업을 내주었다(講課). 매번 산 사람을 섬기고 죽은 사람을 보내는(事生送死)³⁶ 대목에 이르면 문득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니, 수업을 받는 자들이 감동하고 슬퍼하였다(感愴).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처음에 《동몽수지(童蒙須知)》³⁷, 《유학자설(幼學字說)》³⁸, 《정속편(正俗篇)》³⁹을 가르쳐 모두 암송하게 한 뒤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게 하고, 다음으로 《효경(孝經)》⁴⁰, 다음으로 《사서(四書)》⁴¹, 《오경(五經)》⁴² 순서였으며, 그런 뒤에 《통감(通鑑)》⁴³ 및 여러 역사서(諸史)와 제자백가서(百家)⁴⁴를 읽게 하였다. 활쏘기(學射)를 배우는 것에 이르러서는 “활과 화살은 몸을 지키는 물건이니, 익숙하게 익히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은 이로써 덕(德)을 보았으니(觀德)⁴⁵, 장기나 바둑(博奕)⁴⁶ 따위에 비교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글씨 쓰기(書字)를 권할 때는 “글씨는 마음의 그림(心畫)⁴⁷이다. 해서(模楷)⁴⁸는 반드시 단정해야 하고, 초서(草書)와 전서(篆書)⁴⁹도 또한 정밀하고 익숙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산가지 잡는 법(握算)⁵⁰을 권할 때는 “일상의 사물은 이것이 아니면 그 수(數)를 궁구하기 쉽지 않다.”라고 하였다.
주석:
32. 순순고양단(諄諄叩兩端):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 구절. 제자의 질문에 대해 끈기 있게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고 질문하여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하는 교육 방식을 의미한다.
33. 가초(檟楚): 가(檟)는 노나무, 초(楚)는 가시나무 또는 회초리를 뜻한다. 체벌(體罰) 도구를 의미하며, 체벌에 의존하지 않고 교육했음을 보여준다.
34. 봉암(鳳巖): 김숙자가 살았던 선산(善山) 지역의 지명으로 추정된다.
35. 전(奠): 상중(喪中)에 아침저녁으로 신위(神位) 앞에 간단히 음식을 올리는 제사.
36. 사생송사(事生送死): 살아계신 부모를 잘 섬기고, 돌아가신 조상을 예법에 맞게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것. 유교의 중요한 덕목이다. 김숙자가 예법을 강론하며 감정에 북받쳤음을 보여준다.
37. 《동몽수지(童蒙須知)》: 송나라 주희가 지은 아동 학습 지침서.
38. 《유학자설(幼學字說)》: 송나라 여조겸(呂祖謙) 등이 지은 아동용 한자 학습서일 가능성이 있다. 정확한 문헌 파악이 필요하나, 아동 교육용 기초 서적임은 분명하다.
39. 《정속편(正俗篇)》: 당시 사용되던 아동 교재 중 하나로 추정된다. 세속의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는 내용일 수 있다.
40. 《효경(孝經)》: 효(孝)를 주제로 한 유교 경전.
41. 《사서(四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성리학의 핵심 경전이다.
42. 《오경(五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유교의 기본 경전이다.
43. 《통감(通鑑)》: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가리킨다. 편년체 역사서의 대표작이다.
44. 제사백가(諸史百家): 각종 역사서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저작들. 유교 경전 학습 후 역사와 사상으로 학문의 폭을 넓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45. 관덕(觀德): 활쏘기를 통해 사람의 덕성(德性)을 살핀다는 유교적 관념. 집중력, 절제, 예의 등을 중시했다.
46. 박혁(博奕): 장기, 바둑 등 잡다한 놀이. 유학자들은 이를 심신 수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일거리로 보아 활쏘기보다 낮게 평가했다.
47. 심화(心畫):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을 반영한다는 관념. 서예(書藝)를 인격 수양의 한 방법으로 여겼다.
48. 모해(模楷): 모범이 되는 해서체(楷書體). 바르고 단정한 표준 글씨체를 의미한다.
49. 초(草), 전(篆): 초서(草書)는 흘림체, 전서(篆書)는 예스러운 서체이다. 다양한 서체를 익힐 것을 권장했다.
50. 악산(握算): 산가지(算가지)를 잡고 계산하는 것. 주산(珠算)이 보급되기 전 주요 계산법이었다. 실용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원문:
正統初, 世宗諭宰相擧經明行修堪爲師儒者, 公爲首薦, 爲世子右正字。 世宗下敎, 問中外官吏以貢法、踏驗便否。 公在高靈, 卽上書, 其大略以爲: “貢法, 萬世之通行; 踏驗, 一時之權宜, 與其行一時權宜之術, 曷若行萬世通行之法乎? 貢法本非不善, 臣恐用之不善也。 以今之制言之, 上中田之結卜多, 下田之結卜少, 上田一結之稅二十斗, 中田十八斗, 下田十六斗, 已駸駸乎後世什取其二也。 至於因水旱風雹之災, 而傷損者必須連伏十結, 乃去其稅, 數口之家, 其所耕過數結者蓋寡, 謂之未滿十結而必取盈焉。 産沒稅存, 斯民竟何食以聊生? 自作貢以來, 歲入公家之數, 已倍蓰踏驗之日。 踏驗, 雖曰樂歲, 收租至八九分, 凶年則至一二分, 故民不憚奔走之勞、供億之費, 尙思隨損給損之恩而不忘之矣。 臣願以周制之尺, 改量畓、旱田, 不使上中之結卜爲多, 下田之結卜爲少, 當如夏后氏分九等之品, 俾爲多少之錯出。 且令上田一結之稅, 減舊⁵¹之半, 而上征十斗, 中下之稅, 以是爲差, 立爲常制, 於可常之中, 如有天災, 果可損而損之, 果可免而免之, 則田制於是乎正, 賦斂於是乎平, 公不至於匱, 私不至於病, 幾乎三代什一之法。 前日欲復踏驗者, 皆應心於貢法可以行之萬世而無弊。 若夫踏驗之弊, 雖更僕, 殆未可終焉。” 朝廷雖仍貢法, 而改量減稅之說, 不見錄云。
번역문:
정통(正統)⁵² 초년에 세종(世宗)께서 재상(宰相)에게 유시(諭示)하여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스승(師儒)⁵³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하라 하시니, 공이 첫 번째로 천거되어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⁵⁴가 되었다. 세종께서 교서(敎書)를 내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공법(貢法)⁵⁵과 답험(踏驗)⁵⁶ 중 어느 것이 편리한지를 물으셨다. 공이 고령(高靈)⁵⁷에 있을 때 즉시 상서(上書)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공법(貢法)은 만세(萬世)에 통용될 법이고, 답험(踏驗)은 한때의 권의책(權宜)⁵⁸이니, 한때의 권의책을 행하느니 어찌 만세에 통용될 법을 행하지 않겠습니까? 공법이 본래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臣)은 그것을 운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지금의 제도로 말하면, 상등과 중등 밭의 결복(結卜)⁵⁹은 많고 하등 밭의 결복은 적으며, 상등 밭 1결(結)의 세금은 20두(斗)⁶⁰, 중등 밭은 18두, 하등 밭은 16두이니, 이미 점점 후세의 10분의 2를 취하는 것⁶¹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수재(水災), 한재(旱災), 풍재(風災), 박재(雹災)로 손상을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10결(結)이 연이어 피해를 봐야(連伏)⁶² 세금을 감면해주니, 몇 식구의 집에서 경작하는 것이 몇 결을 넘는 경우가 대개 적은데, 10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반드시 세금을 다 거두어들입니다. 생산물은 없어졌는데 세금은 그대로 있으니(産沒稅存)⁶³, 이 백성들이 마침내 무엇을 먹고 겨우 살아가겠습니까? 공법을 시행한 이래로, 해마다 국가(公家)에 들어오는 수입은 이미 답험 시절의 여러 배(倍蓰)⁶⁴가 되었습니다. 답험은 비록 풍년(樂歲)이라 해도 8, 9할⁶⁵까지 거두고 흉년에는 1, 2할만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이 (관리들의 답험을 위해) 분주히 다니는 노고와 접대 비용(供億之費)을 꺼리지 않고 오히려 손실에 따라 감면해주던(隨損給損)⁶⁶ 은혜를 생각하며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주(周)나라 제도의 자(周制之尺)⁶⁷로 논(畓)과 밭(旱田)을 다시 측량하여, 상등과 중등 밭의 결복이 많고 하등 밭의 결복이 적게 하지 말고, 마땅히 하나라 후씨(夏后氏)가 9등급으로 나눈 것처럼⁶⁸ 하여 많고 적음이 섞여 나오게(錯出) 해야 합니다. 또한 상등 밭 1결의 세금을 옛것(舊)⁶⁹의 반으로 줄여 10두를 거두고, 중등과 하등 밭의 세금은 이에 따라 차등을 두어 상제(常制, 항상적인 제도)로 삼고, 이 상제 속에서 만약 천재(天災)가 있으면 실로 감면할 만하면 감면하고 실로 면제할 만하면 면제한다면, 전제(田制)가 이에 바로잡히고 부세(賦斂)가 이에 공평해져서, 국가(公)는 부족함에 이르지 않고 백성(私)은 곤궁함(病)에 이르지 않아, 거의 삼대(三代)의 십일조법(什一之法)⁷⁰에 가까울 것입니다. 전날 답험을 회복시키려 했던 자들은 모두 공법이 만세에 시행되어 폐단이 없을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 답험의 폐단은 비록 이루 다 말하려 해도(雖更僕)⁷¹ 거의 끝마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비록 공법을 그대로 시행하였으나, 토지를 다시 측량하고 세금을 감면하자는 주장은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不見錄)⁷².
주석:
51. [주-D002] 舊 : 저본(底本)에는 “구(九)”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점필재집(佔畢齋集)・선공사업제사(先公事業第四)》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구(九)'는 문맥상 의미가 통하지 않으며, '옛 제도(舊制)의 절반'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52. 정통(正統):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첫 번째 연호(1436-1449). 정통 초년은 1436년경이다.
53. 사유(師儒): 스승이 될 만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유학자.
54.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속한 정7품 관직.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며 문서를 교정하는 일을 맡았다.
55. 공법(貢法): 세종 대에 시행된 전세(田稅) 제도. 토지의 비옥도(전분6등법, 田分六等法)와 그해의 풍흉(연분9등법, 年分九等法)에 따라 세액을 차등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전의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에 비해 조세 행정의 객관성과 효율성을 높이려 했으나, 시행 과정에서 문제점이 발생했다.
56. 답험(踏驗):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 관리들이 직접 농지를 답사하여 재해로 인한 손실 정도를 파악하고 세금을 감면해주던 방식. 유연성은 있으나 관리의 자의적 판단과 부정부패의 소지가 많았고, 농민에게 접대 부담을 지웠다.
57. 고령(高靈): 현재 경상북도 고령군. 당시 김숙자가 이곳의 수령(현감)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8. 권의(權宜): 임시방편, 편의적인 조치. 답험법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지적한다.
59. 결복(結卜): 조선 시대 토지 면적 단위인 결(結)과 부(負, 복). 1결은 생산량을 기준으로 정해졌기에 실제 면적은 비옥도에 따라 달랐다. 김숙자는 상·중등전 1결의 실제 면적이 하등전 1결보다 넓게 책정되어 불공평하다고 지적한다.
60. 두(斗): 곡식의 양을 재는 단위. '말'에 해당한다.
61. 후세 십취기이(後世什取其二): 후대의 10분의 2를 취하는 제도. 고대 이상적인 세법으로 여겨진 십일조(什一稅, 1/10)에 비해 세율이 높음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62. 연복십결(連伏十結): 10결 이상의 토지가 연이어 피해를 입어야만 세금을 감면해주는 규정. 소규모 자영농에게 매우 불리한 조항이었다.
63. 산몰세존(産沒稅存): 농작물(生産物)은 재해로 사라졌는데 세금은 그대로 존재함. 공법 시행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64. 배사(倍蓰): 배(倍)는 2배, 사(蓰)는 5배를 의미. 여러 배 증가했음을 뜻한다. 공법 시행으로 국가 재정 수입은 늘었으나 백성의 부담이 커졌음을 시사한다.
65. 팔구분(八九分): 80~90%. 답험 시절 풍년에는 높은 세율을 적용했음을 보여준다.
66. 수손급손(隨損給損): 손실에 따라 (세금을) 감면해 줌. 답험법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농민들이 기억하는 부분이다.
67. 주제지척(周制之尺): 주(周)나라 시대의 자(尺). 고대의 공정한 제도를 기준으로 토지를 재측량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68. 하후씨분구등지품(夏后氏分九等之品): 하나라 우(禹)임금이 토지를 9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정했다는 《서경(書經)》 〈우공(禹貢)〉편의 기록을 인용한 것. 고대 성왕(聖王)의 제도를 따라 토지 등급을 재조정하자는 주장이다.
69. 구(舊): 이전의 세법 또는 기준 세율. 주석 [주-D002] 참조.
70. 삼대 십일지법(三代什一之法): 고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三代)에서 시행했다고 알려진 10분의 1세율. 유교에서 이상적인 조세 제도로 여겨졌다. 김숙자는 자신의 개혁안이 이 이상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71. 수경복(雖更僕): '僕'은 하인을 의미하며, '更僕'은 (수를 세기 위해) 하인을 바꾸다는 뜻. '경복난수(更僕難數)'라는 성어에서 온 말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을 의미한다. 답험법의 폐단이 매우 많았음을 강조한다.
72. 불견록(不見錄): 기록되지 않음.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兩爲縣監, 必歎曰: “有土地, 有人民, 是亦可以行吾學也。” 不求赫赫名, 專以革汚俗、興六行爲首務。 其備盜也, 申明隣保之法, 窮里僻村, 皆設捕盜關⁷³, 一家被盜, 則懲其監考及守卒, 以故盜入境未信宿而輒爲所擒。 開寧時, 善山賊首三人, 根據月波院, 伺行人至, 攘其財而醢其肉; 若木⁷⁴賊首二人, 橫行海平、仁同之間, 皆積累歲月, 朋徒甚衆。 自善山移繫于縣, 公發吏卒, 追捕其黨與, 蕩其窟穴, 皆掠殺之。 縣西境有注藏者, 睚眥頗橫, 或有錙銖小嫌, 輒焚人室廬, 掠人牛馬, 故莫敢誰何, 又捕而戮之。 由是洛江東西十餘州, 皆被其賜。
번역문:
공이 두 차례 현감(縣監)⁷⁵이 되었는데, 반드시 탄식하며 말하기를 “토지가 있고 인민(人民)이 있으니, 이곳 또한 나의 학문(學問)을 실행할 수 있는 곳이다(行吾學)⁷⁶.”라고 하였다. 혁혁(赫赫)한 명성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더러운 풍속(汚俗)⁷⁷을 개혁하고 육행(六行)⁷⁸을 일으키는 것을 첫째 임무로 삼았다. 도둑을 방비함에 있어서는, 인보법(隣保之法)⁷⁹을 거듭 밝히고, 궁벽한 마을(窮里僻村)에도 모두 포도관(捕盜關)⁸⁰을 설치하여, 한 집이 도둑맞으면 그 감고(監考)와 수졸(守卒)⁸¹을 징벌하였으므로, 도둑이 경내에 들어와 하룻밤을 지내기도 전에(未信宿) 문득 사로잡혔다. 개령(開寧)⁸² 현감 시절, 선산(善山)의 도적 우두머리 세 명이 월파원(月波院)⁸³에 근거하여 행인(行人)이 이르기를 엿보아 그 재물을 빼앗고 그 살을 젓 담갔으며(醢其肉)⁸⁴, 약목(若木)⁸⁵의 도적 우두머리 두 명이 해평(海平)⁸⁶, 인동(仁同)⁸⁷ 사이에서 횡행(橫行)하였는데, 모두 여러 해 동안 패거리(朋徒)가 매우 많았다. 선산에서 (죄수가) 현(縣)으로 이송되어 오자, 공이 아전과 병졸을 동원하여 그 무리(黨與)를 추격하여 체포하고 그 소굴(窟穴)을 소탕하여 모두 잡아 죽였다(掠殺)⁸⁸. 현(縣)의 서쪽 경계에 주장(注藏)하는 자⁸⁹가 있었는데, 눈을 흘기며 자못 횡포하여(睚眥頗橫)⁹⁰, 혹 작은(錙銖)⁹¹ 원한만 있어도 문득 남의 집을 불태우고 남의 소와 말을 빼앗았으므로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했는데(莫敢誰何)⁹², 또 체포하여 죽였다(戮之)⁹³. 이로 말미암아 낙동강(洛江)⁹⁴ 동쪽과 서쪽의 십여 고을이 모두 그 혜택(賜)⁹⁵을 입었다.
주석:
73. [주-D003] 關 : 저본(底本)에는 “열(閱)”로 되어 있다. 《점필재집・선공사업제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잡록(海東雜錄)・김숙자(金叔滋)》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관(關)'은 관문, 요새, 검문소 등을 의미하여 '포도관(捕盜關)' 즉 도둑을 잡는 검문소라는 의미가 된다.
74. [주-D004] 木 : 저본(底本)에는 “술(朮)”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점필재집・선공사업제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약목(若木)'은 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으로 지명이 실재한다.
75. 현감(縣監): 조선 시대 종6품의 지방관. 비교적 작은 현(縣)의 수령이다.
76. 행오학(行吾學): 나의 학문을 실행함. 성리학자들이 학문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려는 이상(經世濟民)을 나타내는 말이다.
77. 오속(汚俗): 더럽고 저급한 풍속.
78. 육행(六行): 여섯 가지 기본적인 행실. 구체적인 내용은 시대나 문맥에 따라 다르나, 보통 효(孝, 효도), 우(友, 우애), 목(睦, 화목), 인(姻, 인척 간의 화목), 임(任, 신의), 휼(恤, 불쌍히 여김) 등 공동체 윤리를 가리킨다.
79. 인보법(隣保之法): 이웃끼리 서로 감시하고 돕는 제도. 조선 시대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과 유사한 성격의 제도로, 치안 유지 및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했다.
80. 포도관(捕盜關): 도둑을 잡기 위해 설치한 검문소나 요충지. 주석 [주-D003] 참조.
81. 감고(監考), 수졸(守卒): 해당 지역의 치안을 책임진 하급 관리나 병졸. 연대 책임을 물어 직무 수행을 철저히 하도록 한 것이다.
82. 개령(開寧):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일대.
83. 월파원(月波院): 선산 지역에 있었던 역원(驛院)으로 추정된다.
84. 해기육(醢其肉): 그 살을 젓갈로 담금. '해(醢)'는 원래 소금에 절여 젓갈을 담그는 형벌(해형, 醢刑)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적의 잔인성이 극심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85. 약목(若木): 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주석 [주-D004] 참조.
86. 해평(海平):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87. 인동(仁同):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일대.
88. 약살(掠殺): 붙잡아 죽임.
89. 주장자(注藏者): '주장(注藏)'은 물건을 몰래 쌓아두거나 불법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행위를 의미할 수 있다. 불법적인 부를 축적하고 횡포를 부리는 지방의 악덕 세력을 가리키는 듯하다.
90. 애자파횡(睚眥頗橫): '애자(睚眥)'는 눈초리를 흘기는 사소한 원한을 뜻한다. 사소한 일에도 원한을 품고 횡포를 부림을 의미한다.
91. 치주(錙銖): 고대 중국의 작은 무게 단위. 아주 작은 것, 사소한 것을 비유한다.
92. 막감수하(莫敢誰何): 감히 누구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함. 그의 세력이 강하고 횡포가 심했음을 보여준다.
93. 육지(戮之): 죽임. 죄인을 처형함을 의미한다.
94. 낙강(洛江): 낙동강(洛東江).
95. 사(賜): 하사하다, 베풀다. 여기서는 김숙자가 악당들을 제거하여 백성들에게 평안을 가져다준 것을 '혜택을 베풀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원문:
在開寧, 遭世宗喪, 與少尹崔士老遇諸塗, 相持而哭, 甚哀曰: “所天崩矣。” 皆失聲而止。 又遭文宗喪, 悲泣尤切, 曰: “嗟嗟乎嗣君!” 睹者爲之感動。 公平生不是佛, 以闢距爲己任。 嘗敎人云: “佛家所謂閻羅王者, 苟有之, 殺人父母, 其暴已甚, 爲其子者, 所當決黃泉而求報其讎, 不得則刻其像立諸庭, 出入射之, 以終其身可也。 今世俗無知, 非徒不以爲讎, 必成其齋, 供之啖之, 是何義也? 且所謂放光與舍利, 尤吾所不信。 蛇有夜光, 蚌含珠, 雌牛腹有黃, 麝帶香臍, 𧋍蜴⁹⁶吐氣成暈, 海蜃能狀樓臺, 此皆物之妖也。 然夜光、明珠、牛黃、麝臍, 人得售之, 則獲重利矣。 今放光與舍利, 亦人之妖也, 其何裨於生民及國家乎? 設使焚盜賊數十人, 其中必有斯妖者, 何獨童行者哉?” 雖老釋自謂精進者, 皆辭塞。 前後上書, 必以斥黜釋道爲正人心之大端。【竝《彛尊錄》。】
번역문:
개령(開寧)에 있을 때 세종(世宗)의 상(喪)⁹⁷을 당하여, 소윤(少尹)⁹⁸ 최사로(崔士老)⁹⁹와 길(塗)에서 만나 서로 붙잡고 곡(哭)하며 매우 슬퍼하며 “섬기던 하늘(所天)¹⁰⁰이 무너졌도다!”라고 하니, 모두 목이 메어(失聲) 말을 잇지 못했다. 또 문종(文宗)의 상¹⁰¹을 당하여 슬피 우는 것이 더욱 간절하여 “아아, 사군(嗣君)¹⁰²이시여!”라고 하니, 보는 자들이 그 때문에 감동하였다. 공은 평생 불교(佛)를 옳지 않다고 여겨, 이를 배척(闢距)¹⁰³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사람들을 가르쳐 이르기를,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염라왕(閻羅王)¹⁰⁴이라는 것이 만약 있다면, 사람의 부모를 죽였으니¹⁰⁵ 그 포악함이 이미 심하다. 그 자식 된 자는 마땅히 황천(黃泉)¹⁰⁶을 파헤쳐서라도 그 원수를 갚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 형상을 새겨 뜰에 세워두고 드나들며 활로 쏘아 죽을 때까지 그래야 할 것이다(刻其像立諸庭, 出入射之)¹⁰⁷. 지금 세속은 무지하여, 원수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재(齋)¹⁰⁸를 올려 공양하고 음식을 바치니(供之啖之),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또 이른바 방광(放光)¹⁰⁹과 사리(舍利)¹¹⁰라는 것은 더욱 내가 믿지 않는 바이다. 뱀에는 야광주(夜光珠)가 있고, 조개는 진주(珠)를 머금고, 암소 배에는 우황(牛黃)이 있고, 사향노루는 향기 나는 배꼽(香臍)¹¹¹을 지녔고, 도마뱀(蜥蜴)¹¹²은 기운을 토해 무리(暈)를 만들고, 바다의 신기루(海蜃)¹¹³는 누대(樓臺)의 형상을 만드니, 이것은 모두 사물(物)의 요사스러운 것(妖)¹¹⁴이다. 그러나 야광주, 명주(明珠), 우황, 사향 배꼽은 사람이 얻어 팔면 큰 이익을 얻는다. 지금 방광과 사리도 또한 사람(人)의 요사스러운 것인데, 그것이 생민(生民)과 국가(國家)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가령 도적 수십 명을 불태운다면, 그중에도 반드시 이런 요사스러운 것(사리 등)이 있는 자가 있을 터인데, 어찌 유독 동행자(童行者, 승려)¹¹⁵에게만 있겠는가?” 비록 스스로 정진(精進)한다고 자처하는 늙은 승려(老釋)¹¹⁶라도 모두 말이 막혔다. 전후로 상서(上書)할 때마다 반드시 불교와 도교(釋道)를 배척(斥黜)하는 것을 인심(人心)을 바로잡는(正) 큰 실마리(大端)¹¹⁷로 삼았다.【이상 《이존록(彛尊錄)》¹¹⁸에서 인용】
주석:
96. 𧋍蜴 : '석척(蜥蜴, 도마뱀)'의 이체자(異體字) 또는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높다. 문맥상 도마뱀이나 유사 파충류를 가리킨다.
97. 세종 상(世宗喪):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이 승하한 것을 말한다.
98. 소윤(少尹): 조선 시대 한성부(漢城府)의 종3품 관직. 또는 개성부(開城府)의 종4품 관직. 여기서는 한성부 소윤일 가능성이 높다.
99. 최사로(崔士老, 1388-1463): 조선 전기의 문신.
100. 소천(所天): 섬기는 하늘. 신하가 임금을 하늘처럼 여기며 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금의 죽음을 하늘이 무너진 것에 비유하여 극도의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101. 문종 상(文宗喪): 1452년(단종 즉위년) 문종이 승하한 것을 말한다.
102. 사군(嗣君): 왕위를 계승한 임금.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승하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103. 벽거(闢距): 물리치고 배척함. 성리학적 입장에서 불교 등 이단 사상을 배격하는 태도를 말한다.
104. 염라왕(閻羅王):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왕. 죽은 자를 심판한다고 알려져 있다.
105. 살인부모(殺人父母): 염라왕이 죽은 자를 심판하여 지옥으로 보낸다면, 이는 곧 그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를 해치는 행위라는 극단적인 해석이다. 불교의 내세관과 심판 개념을 유교적 효(孝)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논리이다.
106. 황천(黃泉): 지하 세계, 저승.
107. 각기상입제정, 출입사지(刻其像立諸庭, 出入射之): 그(염라왕)의 형상을 새겨 뜰에 세워두고 드나들며 활로 쏨. 부모의 원수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108. 재(齋): 불교에서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베푸는 의식과 공양. 김숙자는 부모를 해친 원수(염라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109. 방광(放光): 부처나 보살, 고승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현상. 신성함이나 높은 수행 경지를 상징한다.
110. 사리(舍利): 불교 수행자의 유골에서 나온다는 구슬 모양의 결정체. 신성시된다.
111. 야광(夜光, 뱀), 주(珠, 조개), 황(黃, 소), 향제(香臍, 사향노루): 각각 뱀의 야광주(전설), 조개의 진주, 소의 쓸개에 생기는 우황, 사향노루의 배꼽에 있는 사향 주머니를 가리킨다. 자연계의 기이하거나 귀한 산물을 예로 든 것이다.
112. 석척(蜥蜴): 도마뱀. '토기성훈(吐氣成暈)'은 도마뱀이 기운을 토해 무리(햇무리, 달무리 등)를 만든다는 것으로, 당시의 민간 속설이나 와전된 지식일 수 있다.
113. 해신(海蜃): 바다의 큰 조개(蜃)가 기운을 토해 공중에 누각(樓閣) 같은 형상(신기루, 蜃氣樓)을 만든다는 전설.
114. 물지요(物之妖): 사물의 요사스럽고 기이한 현상. 김숙자는 이러한 자연 현상과 불교의 방광, 사리를 같은 범주로 취급하며 신성성을 부정한다.
115. 동행자(童行者): 불문에 들어 머리를 깎고 수행하는 어린 승려 또는 사미(沙彌). 김숙자는 사리가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기이한 신체 현상일 뿐이며, 이는 승려뿐 아니라 일반인, 심지어 도적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신성성을 격하시킨다.
116. 노석(老釋): 나이 많은 승려.
117. 척출석도(斥黜釋道) ... 정인심지대단(正人心之大端):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김. 당시 조선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기조와 사림파의 강력한 위정척사(衛正斥邪) 의식을 보여준다.
118. 《이존록(彛尊錄)》: 조선 후기의 학자 유계(兪棨, 1607-1664) 등이 편찬한 인물 일화집으로 추정된다. 혹은 다른 유사한 성격의 문헌일 수도 있다. 여러 인물의 모범적인 언행이나 일화를 기록한 책이다.
이맹전(李孟專)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孟專
字伯純, 號耕隱, 善山人。 判書審之之子。 世宗元年己亥登第, 薦入翰苑, 以前正言退歸不仕。
번역문:
이맹전(李孟專)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이고, 선산(善山) 사람이다.¹ 판서(判書)² 이심(李審)³의 아들이다. 세종(世宗) 원년 기해년(1419)에 과거에 급제(登第)⁴하여 추천으로 한원(翰苑)⁵에 들어갔다가, 이전(以前) 정언(正言)⁶에서 물러나 돌아가 벼슬하지 않았다.
주석:
- 이맹전(李孟專, 1392-1482):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생육신(生六臣)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 판서(判書): 조선 시대 육조(六曹)의 으뜸 벼슬. 정2품.
- 이심(李審, ?-?): 이맹전의 아버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 등제(登第): 과거 시험에 급제함. 이맹전은 1419년(세종 1) 증광시(增廣試)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 한원(翰苑):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예문관(藝文館)의 별칭이다. 천거되어 예문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이맹전은 정언을 지내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정확히 언제 물러났는지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으나, 세조 즉위(1455) 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拜居昌縣監, 以淸白聞。 知時事艱危, 棄官歸家, 托以盲聾, 杜門謝客。 魯山初, 屢召不起, 終老丘園, 與夫人金氏, 年皆九十而卒。
번역문:
거창현감(居昌縣監)⁷에 제수되어 청백(淸白)⁸하기로 이름났다. 시사(時事)가 어렵고 위태로움을 알고는⁹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눈멀고 귀먹었다고 핑계 대며(托以盲聾)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다(杜門謝客). 노산군(魯山君)¹⁰ 초에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았고, 구원(丘園)¹¹에서 생을 마쳤는데, 부인 김씨(金氏)¹²와 함께 나이 모두 90세에 졸(卒)하였다.
주석:
7. 거창현감(居昌縣監): 거창현(居昌縣)의 수령. 종6품 외관직이다.
8. 청백(淸白): 청렴결백(淸廉潔白). 관리의 재물 욕심이 없고 행실이 깨끗함을 의미한다.
9. 지시사간위(知時事艱危): 당시의 정치적 상황, 즉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이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움직임과 관련된 혼란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인지했다는 뜻이다.
10. 노산(魯山) 초: 노산군(魯山君)은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등된 군호(君號)이다. 따라서 '노산 초'는 단종이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직후 또는 노산군으로 강봉된 직후의 시기를 가리킨다. 세조(世祖)가 즉위한 후(1455년) 이맹전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1. 구원(丘園): 언덕과 동산이라는 뜻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시골 또는 고향을 의미한다.
12. 부인 김씨(夫人 金氏): 부인 김씨 또한 90세까지 장수하였다.
원문:
公家貧, 坐無苫席, 食無匕筯¹, 出入無騎, 或徒步而行。 金司藝叔滋, 與公爲道義交。 晩年謝絶人事, 惟佔畢齋入謁, 則閉門心語, 終日不厭, 或爲唱酬。 雖一家妻孥, 莫知其托盲之意, 至臨歿始知之。【竝《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은 집이 가난하여 앉을 자리에는 거적(苫席)¹³조차 없었고, 먹을 때에는 숟가락과 젓가락(匕筯)¹⁴도 없었으며, 출입할 때는 타는 말(騎)이 없어 때로는 걸어서 다녔다. 사예(司藝)¹⁵ 김숙자(金叔滋)¹⁶가 공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사귐¹⁷을 맺었다. 만년(晩年)에는 세상일(人事)을 사절하였으나, 오직 점필재(佔畢齋)¹⁸가 들어와 뵙고자 하면 문을 닫고 마음으로 이야기하며(心語) 종일토록 싫어하지 않았고, 때로는 시를 주고받기도(唱酬) 하였다. 비록 한집안의 처자(妻孥)¹⁹라도 그가 눈먼 척하는(托盲) 뜻을 알지 못하다가, 임종(臨歿)²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았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²¹에서 인용】
주석:
13. [주-D001] 筯 : 저본(底本)에는 “근(筋)”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筋'은 힘줄을 뜻하고 '筯'는 젓가락을 뜻한다. 문맥상 '匕筯' 즉 숟가락과 젓가락이 자연스럽다.
14. 첨석(苫席): 짚이나 풀 등으로 엮어 만든 거친 자리. 거적. 매우 가난한 살림을 묘사한다.
15. 비저(匕筯): 숟가락(匕)과 젓가락(筯). 식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할 정도의 가난을 나타낸다.
16. 사예(司藝): 성균관(成均館)의 정4품 관직. 유생(儒生)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17.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자는 자수(子修), 호는 강호(江湖), 본관은 선산(善山).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아들인 김종직(金宗直)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맹전과는 같은 선산 출신으로 도의적 교분을 맺었다.
18. 도의교(道義交):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사귐. 학문과 인격을 존중하는 교류를 의미한다.
19.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 영남 사림파의 영수이다. 김숙자의 아들이다. 이맹전이 세상과의 교류를 끊었음에도 김종직과는 깊은 교유를 나누었음을 보여준다.
20. 처노(妻孥): 아내와 자식들.
21. 임몰(臨歿): 죽음에 임함. 임종.
22.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
1658)과 관련된 기록이거나, 혹은 이맹전의 후손이나 관련 인물들이 남긴 옛 기록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실체는 확인하기 어렵다. '잠곡(潛谷)'이 이맹전이 은거했던 곳의 지명일 가능성도 있다. 이맹전 관련 일화를 수록한 문헌으로 보인다.
이변(李邊)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邊【貞靖公。】
字□□, 德水人。 世宗元年己亥登第。 官至領中樞, 典文衡。 卒年八十五¹。
번역문:
이변(李邊)【정정공(貞靖公)²이다.】
자는 □□³이고, 덕수(德水) 사람이다.⁴ 세종(世宗) 원년 기해년(1419)에 과거에 급제하였다.⁵ 벼슬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⁶에 이르렀고, 문형(文衡)⁷을 관장하였다. 졸(卒)하니 나이 85세⁸였다.
주석:
- [주-D001] 五 : 《성종실록(成宗實錄)》 4년 10월 10일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삼(三)”이 되어야 한다. 즉, 졸년(卒年)은 83세이다.
- 정정공(貞靖公): 이변의 시호(諡號). 시호는 왕이나 공신 등이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 공덕을 기리어 주던 이름이다.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함(淸白守節), 정직하고 과감함(正而有決) 등을 의미하며, 정(靖)은 너그럽고 화목하게 공을 세움(寬樂令終),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음(恭己鮮言) 등을 의미한다.
- □□: 자(字)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자는 본 이름 외에 부르기 위해 짓는 이름이다.
- 덕수인(德水人): 본관(本貫)이 덕수임을 나타낸다. 덕수 이씨(德水 李氏)이다.
- 등제(登第): 과거(科擧), 특히 문과(文科)에 급제한 것을 의미한다.
- 영중추(領中樞):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조선 시대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정1품)로, 일정한 직무가 없는 명예직 성격이 강하여 주로 원로대신에게 제수되었다.
- 전문형(典文衡): 문형(文衡)을 관장함. 문형은 문장과 학문의 표준을 관장한다는 뜻으로,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이 겸임하며 문단(文壇)과 학계의 영수 역할을 하였다. 이변이 대제학을 역임했음을 의미한다.
- 85세: 주석 [주-D001]에서 지적하듯이, 실록과 방목 기록에 따르면 83세에 졸한 것이 맞다. 본문은 저본(底本)의 기록을 그대로 번역하고, 주석에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나이는 보통 한국식 나이(세는나이)를 기준으로 한다.
원문:
公十七始學, 爲人正直無城府, 見人過失, 面折之。 善於漢語及吏文, 屢使中朝, 華人皆識其名。
번역문:
공(公)은 17세에 비로소 학문을 시작하였는데, 사람됨이 정직(正直)하고 성부(城府)⁹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과실(過失)을 보면 면전(面前)에서 바로 지적하였다(面折)¹⁰. 한어(漢語)¹¹와 이문(吏文)¹²에 능하여 여러 차례 중국 조정(中朝)¹³에 사신으로 갔으므로, 중국인(華人)¹⁴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알았다.
주석:
9. 성부(城府): 성곽(城)과 관청(府)이라는 뜻으로, 마음속 깊이 숨겨둔 생각이나 계획, 또는 그런 속마음을 감추는 태도를 비유적으로 이른다. 성부가 없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고 꾸밈이 없으며 솔직함을 의미한다.
10. 면절(面折):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잘못을 따지고 꾸짖음. 이변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준다.
11. 한어(漢語): 중국어, 특히 당시 명나라의 표준 관화(官話)를 가리킨다. 사역원 관리들에게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12. 이문(吏文): 관리들이 공문서 작성 등에 사용하던 문체. 실용적인 행정 문서 작성 능력을 의미하며, 문학적인 한문과는 구별된다.
13. 중조(中朝): 가운데 조정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황제 조정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명(明)나라를 지칭한다.
14. 화인(華人): 중국 사람을 가리킨다.
원문:
爲司譯院都提調, 上疏言: “我國家設承文司譯院¹⁵, 講隷習讀官¹⁶, 常習漢音¹⁷, 其爲¹⁸慮至深切矣。 但所習者, 不過《直解小學》¹⁹、《老乞大》²⁰、《朴通事》²¹、《前》《後漢書》²², 然《直解小學》, 逐節解說, 非常用漢語也。 《老乞大》、《朴通事》, 多帶蒙古之言, 非純漢語, 又有商賈庸談, 學者病之。 國初學漢音者, 非但習之句讀文字之間, 如漢人唐誠、偰長壽²³, 洪楫、曺正等輩相繼出來, 質問論難, 頗有成才者。 今則無人可質, 語音訛僞²⁴, 臣竊恨之。 迺採《爲善陰騭》²⁵諸書中可爲勸戒者數十條, 與平昔所聞古事數十總六十五條, 俱以譯語²⁶翻說, 欲令學漢語者, 竝加時習²⁷謹, 謄寫奉進, 仰塵叡覽, 倘有可採, 令下典校署²⁸, 刊印施行。”【《潛谷舊錄》²⁹。】
번역문:
사역원 도제조(司譯院都提調)³⁰가 되어 상소(上疏)하여 아뢰었다. “우리 국가에서 승문원(承文院)과 사역원(司譯院)¹⁵을 설치하고 강례습독관(講隷習讀官)¹⁶을 두어 늘 한음(漢音)¹⁷을 익히게 하니, 그 염려하심¹⁸이 지극히 깊고 간절합니다. 다만 익히는 것이 《직해소학(直解小學)》¹⁹, 《노걸대(老乞大)》²⁰, 《박통사(朴通事)》²¹,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²²에 지나지 않는데, 《직해소학》은 구절마다 해설한 것이어서 상용(常用)하는 한어(漢語)가 아닙니다. 《노걸대》와 《박통사》는 몽골 말이 많이 섞여 있어 순수한 한어가 아니며, 또 상인(商賈)들의 저속한 말(庸談)이 있어 배우는 자들이 이를 병폐로 여깁니다. 국초(國初)에 한음을 배우던 자들은 단지 구두(句讀)와 문자 사이만 익힌 것이 아니라, 한인(漢人) 당성(唐誠), 설장수(偰長壽)²³, 홍즙(洪楫), 조정(曺正) 같은 무리들이 서로 이어 나와 질문하고 논란(論難)하여 자못 인재를 이룬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질정(質正)할 만한 사람이 없어 어음(語音)이 와전되고 거짓되니(訛僞)²⁴, 신(臣)이 속으로 한스럽게 여깁니다. 이에 《위선음즐(爲善陰騭)》²⁵ 등 여러 책 가운데에서 권계(勸戒)가 될 만한 것 수십 조목과 평소에 들은 옛이야기 수십 가지를 합하여 총 65조목을 뽑아, 모두 역어(譯語)²⁶로 번역하여 풀이해서 한어를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아울러 때때로 익히게(時習)²⁷ 하고자 하오니, 삼가 베껴 써서 받들어 올리니 우러러 예람(叡覽)을 번거롭게 합니다. 만약 채택할 만하다면 전교서(典校署)²⁸에 명을 내리시어 간행하여 시행하게 하소서.”【《잠곡구록(潛谷舊錄)》²⁹에서 인용】
주석:
15. 승문사역원(承文司譯院): 승문원(承文院)과 사역원(司譯院). 승문원은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하고, 사역원은 통역과 외국어 교육을 담당하던 조선 시대 관청이다.
16. 강례습독관(講隷習讀官): 글자 그대로는 '강론하고 예속되어 읽기를 익히는 관리'라는 뜻인데, 문맥상 사역원에서 외국어, 특히 중국어 발음과 독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수나 학생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관직명이라기보다는 역할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다.
17. 한음(漢音): 중국어의 발음.
18. [주-D002] 爲 : 저본에는 “권(勸)”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 1년 6월 6일 및 16년 7월 2일, 《중종실록》 31년 5월 12일 등의 기록에 근거하여 “위(爲)”로 수정하였다. '爲慮'는 '염려하다', '생각하다'는 의미이다.
19. 《직해소학(直解小學)》: 《소학(小學)》의 구절을 직접 풀이한 책. 성리학의 입문서였으나, 이변은 이것이 실제 회화용 중국어 학습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20. 《노걸대(老乞大)》: 고려 말부터 사용된 중국어 회화 교재. '걸대(乞大)'는 중국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상인의 여행과 상거래 과정을 중심으로 실용적인 회화를 담고 있다.
21. 《박통사(朴通事)》: 《노걸대》와 함께 널리 쓰인 중국어 회화 교재. 박(朴)이라는 통역관(通事)을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중국의 사회, 문화, 풍속 등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2.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중국 한(漢)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 고급 한문 독해 교재로 쓰였으나, 구어(口語) 학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23. 당성(唐誠), 설장수(偰長壽), 홍즙(洪楫), 조정(曺正): 국초에 중국어 교육에 도움을 준 인물들로 언급된다. 설장수(1341-1399)는 위구르계 출신으로 고려 말 조선 초에 활약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그는 원(元)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려에 귀국하여 활동했으며, 한문학과 경학에 능통했다. 다른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으나, 중국 출신 귀화인 또는 중국어에 능통했던 인물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직접적인 질의응답과 토론을 통해 실질적인 어학 능력 향상에 기여했음을 시사한다.
24. 와위(訛僞): 와전(訛傳)되고 거짓됨. 발음이 잘못 전해지고 본래의 소리와 달라짐을 의미한다.
25. 《위선음즐(爲善陰騭)》: 선(善)을 행하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복(陰騭)을 받는다는 내용의 도교 또는 민간 신앙 계통의 권선서(勸善書)일 가능성이 높다. 이변은 도덕적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발췌하여 어학 교재로 활용하고자 했다.
26. 역어(譯語): 번역한 말. 여기서는 한문 원문을 당시 조선의 구어체나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이한 것, 즉 언해(諺解)와 유사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7. 시습(時習): 때때로 익힘.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온 말로, 배운 것을 꾸준히 복습하고 연습함을 의미한다.
28. 전교서(典校署): 교서관(校書館)의 다른 이름. 조선 시대 서적의 인쇄와 교정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29.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이 편찬한 《잠곡유고(潛谷遺稿)》 또는 관련 기록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변은 황정욱보다 훨씬 이전 인물이다. 따라서 《잠곡구록》이 황정욱의 저술이라면 후대에 이변의 상소문을 수록한 것이거나, 혹은 동명의 다른 문헌일 가능성도 있다. 정확한 서지 정보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원문:
李貞靖公邊性峭直, 爲吏曹參議, 每銓注, 多駁長官所爲, 因與之不愜。 一日, 外官有贈鮮魚、美肉者, 不受, 聞長官已受, 其日謁長官, 饋以美肉。 貞靖擧箸曰: “此所謂鶂鶂之肉乎?” 長官深銜之。【《筆苑雜記》³¹。】
번역문:
이정정공(李貞靖公) 변(邊)은 성품이 초직(峭直)³²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³³로 있을 때 매번 전주(銓注)³⁴ 때마다 장관(長官)³⁵의 처사를 많이 반박하였으므로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不愜)³⁶. 하루는 외관(外官)³⁷이 신선한 물고기와 좋은 고기를 보내왔으나 받지 않았는데, 장관이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날 장관을 찾아가니 좋은 고기를 대접하였다. 정정공이 젓가락을 들고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격격(鶂鶂)의 고기³⁸라는 것인가?” 하니, 장관이 이를 깊이 원망하였다(深銜之)³⁹.【《필원잡기(筆苑雜記)》³¹에서 인용】
주석:
31.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시화(詩話), 인물 일화, 고사(故事), 제도, 풍속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32. 초직(峭直): 산이 가파르듯[峭] 곧음[直].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엄격함을 의미한다.
33. 이조 참의(吏曹參議):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 문관의 인사 담당)의 정3품 당상관. 판서, 참판 다음가는 직위이다.
34. 전주(銓注): 관리를 선발하여 임명하는 것. 인사 행정을 의미한다.
35. 장관(長官): 상급 관료. 여기서는 이조의 판서(判書)나 참판(參判)을 가리킨다.
36. 불협(不愜): 마음에 맞지 않음. 서로 뜻이 맞지 않아 관계가 원만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37. 외관(外官): 지방 관직에 있는 관리.
38. 격격지육(鶂鶂之肉): '격(鶂)'은 물새의 일종(해오라기 등)을 가리킨다. '격격지육'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고사성어나 관용구는 아니다. 문맥상 이변이 자신이 받지 않은 뇌물성 고기를 장관이 대접하자, 그 고기의 출처가 부정한 것임을 비꼬아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 '격격'이라는 말이 어떤 구체적인 고사나 당시의 속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명확히 알기 어렵다. 뇌물로 받은 고기를 에둘러 비판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39. 심함지(深銜之): 깊이 원망하거나 앙심을 품음.
원문:
李判院邊表裏如一⁴⁰, 以骨鯁⁴¹自許。 嘗謂人曰: “吾平生未嘗欺人, 自入仕⁴²以來, 一無僞病廢仕。” 佔畢齋金先生⁴³曰: “信若此言, 相公之德, 眞實篤敬⁴⁴。 然古人仕者以病托君⁴⁵, 前後比比也⁴⁶, 疑此言過當也⁴⁷。”【《秋江冷話》⁴⁸。】
번역문:
이판원(李判院)⁴⁹ 변(邊)은 표리(表裏)가 한결같았고(表裏如一)⁴⁰, 골경(骨鯁)⁴¹으로 자부하였다.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생 남을 속인 적이 없으며, 벼슬길⁴²에 들어선 이래로 한 번도 거짓으로 병을 핑계 대고 벼슬을 그만둔 적이 없다(僞病廢仕).”라고 하였다. 점필재 김선생(佔畢齋金先生)⁴³이 말하였다.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상공(相公)의 덕(德)은 참으로 진실하고 독경(篤敬)⁴⁴합니다. 그러나 옛사람 중에 벼슬하는 자가 병을 핑계로 임금에게 맡기는 것(以病托君)⁴⁵이 전후로 비일비재(比比)⁴⁶하였으니, 이 말이 지나친(過當)⁴⁷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추강냉화(秋江冷話)》⁴⁸에서 인용】
주석:
40. 표리여일(表裏如一): 겉과 속이 한결같음. 말과 행동, 또는 마음과 겉모습이 일치하여 꾸밈이나 거짓이 없음을 의미한다.
41. 골경(骨鯁): 목에 걸린 생선 가시라는 뜻으로, 마음에 거리끼거나 꺼림칙하여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비유하기도 하고, 여기서는 성품이 강직하여 바른말 하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을 비유한다. 스스로 강직함을 자부했음을 나타낸다.
42. [주-D003] 仕 : 《추강집(秋江集)・냉화(冷話)》에는 “사(事)”로 되어 있다. '입사(入仕)'는 벼슬길에 들어섬을, '입사(入事)'는 일에 종사함을 뜻하는데, 문맥상 큰 차이는 없다. 저본을 따라 '仕'로 번역하였다.
43. 점필재 김선생(佔畢齋金先生):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 사림파의 영수이자 뛰어난 문장가, 학자이다.
44. 독경(篤敬): 도탑고 공경스러움. 성실하고 진중함을 의미한다.
45. 이병탁군(以病托君): 병을 이유로 임금에게 사직(辭職)이나 휴가 등을 청하는 것. 고대에는 신하가 사직하거나 정치적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병을 핑계 대는 경우가 많았다. 김종직은 이것이 흔한 일이었음을 지적하며 이변의 말이 지나치게 단정적일 수 있음을 완곡하게 지적한다.
46. 비비(比比): 비교할[比] 만한 것이 연이어 있음. 즉, 매우 흔하고 자주 있음을 의미한다.
47. 과당(過當): 정도에 지나침. 너무 단정적이거나 과장됨.
48. 《추강냉화(秋江冷話)》: 조선 전기 문신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지은 필기(筆記). 인물 일화, 시화(詩話),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론 등을 담고 있다.
49. 판원(判院):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중추원의 정2품 벼슬)나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종2품 벼슬) 등을 역임했을 때의 호칭일 수 있다. 여기서는 이변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기건(奇虔)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奇虔【貞武公。】
字□□, 幸州人。 世宗朝, 以布衣擢拜持平。 歷大司憲、平安道觀察使, 官至判中樞府事。
번역문:
기건(奇虔)【정무공(貞武公)¹이다.】
자는 □□²이고, 행주(幸州) 사람이다.³ 세종조(世宗朝)에 포의(布衣)⁴로 발탁되어 지평(持平)⁵에 제수되었다. 대사헌(大司憲)⁶,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⁷를 역임하였고,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⁸에 이르렀다.
주석:
- 정무공(貞武公): 기건의 시호(諡號).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하게 절개를 지킴(淸白守節), 또는 곧고 과단성 있음(正而有決) 등을 의미하고, 무(武)는 강직하고 과감함(剛彊直理), 또는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있음(折衝禦侮) 등을 뜻한다.
- □□: 자(字)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행주인(幸州人): 본관(本貫)이 행주임을 나타낸다. 행주 기씨(幸州 奇氏)이다.
- 포의(布衣): 베옷. 벼슬이 없는 선비, 즉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일반 백성이나 유생을 가리킨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재능과 덕행으로 특별히 발탁되었음을 의미한다.
-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관리들의 비행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역할을 맡았다.
-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으뜸 벼슬. 종2품.
-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평안도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하던 종2품 외관직.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한다.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중추부는 실질적인 직무가 없는 명예직 위주의 관청으로, 주로 공신이나 원로대신에게 제수되었다.
원문:
公天資英發, 學業精粹。 家在萬里峴, 常徒步往來泮宮, 必誦《中庸》、《大學》。
번역문:
공(公)은 천자(天資)⁹가 영발(英發)¹⁰하고 학업(學業)이 정수(精粹)¹¹하였다. 집이 만리현(萬里峴)¹²에 있었는데, 항상 걸어서 반궁(泮宮)¹³을 왕래하며 반드시 《중용(中庸)》¹⁴과 《대학(大學)》¹⁵을 외웠다.
주석:
9. 천자(天資): 타고난 자질.
10. 영발(英發): 뛰어나게 드러남. 재능이 출중함을 의미한다.
11. 정수(精粹): 정미(精微)하고 순수(純粹)함. 학문이 깊고 잡됨이 없음을 뜻한다.
12. 만리현(萬里峴):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와 마포구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 만리재라고도 한다.
13.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성균관은 조선 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이었다.
14. 《중용(中庸)》: 사서(四書)의 하나.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도(道)와 성(誠)의 철학을 논한다.
15. 《대학(大學)》: 사서(四書)의 하나. 본래 《예기(禮記)》의 한 편이었으나 송대(宋代)에 독립된 경전으로 중시되었다.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기건이 기초 학문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古者婦人出入無蓋頭, 公創新樣以進, 至今用之。【竝月沙李廷龜撰碑。】
번역문:
옛날에는 부인(婦人)들이 출입할 때 머리를 가리는 것(蓋頭)¹⁶이 없었는데, 공이 새로운 양식(新樣)¹⁷을 만들어 올려, 지금도 그것을 사용한다.¹⁸【이상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¹⁹가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16. 개두(蓋頭): 머리를 덮는 것. 조선 시대 여성들이 외출 시 얼굴이나 머리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던 너울, 장옷, 쓰개치마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7. 신양(新樣): 새로운 모양이나 양식.
18. 지사용지(至今用之): 이 비문이 쓰여진 시점(17세기 초)까지 기건이 만든 양식의 개두가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기건이 여성들의 예법(禮法)과 관련된 복식(服飾) 제도 정비에도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19.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 이 글은 기건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정귀가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으면서 쓴 내용의 일부이다.
원문:
延安府有産鮒大池, 前守宰喜食鮒, 弊及民, 人以鮒魚塚嘲之。 公爲此府, 曰: “烏以口腹傷廉?” 遂絶不食, 非賓讌, 禁勿入罟。 州人大悅, 客作詩以美之。【《太平閑話》。】
번역문:
연안부(延安府)²⁰에 붕어를 생산하는 큰 못이 있었는데, 이전의 수령(守宰)²¹들이 붕어 먹기를 좋아하여 폐해가 백성에게 미치자 사람들이 부어총(鮒魚塚)²²이라며 조롱하였다. 공이 이 부(府)의 수령이 되어 말하기를, “어찌 입과 배[口腹]²³ 때문에 청렴함(廉)을 해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일절 먹지 않았고, 손님 접대 연회(賓讌)²⁴가 아니면 그물[罟]²⁵질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고, 어떤 나그네가 시(詩)를 지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태평한화(太平閑話)》²⁶에서 인용】
주석:
20. 연안부(延安府): 황해도에 있던 옛 행정 구역. 현재의 황해남도 연안군 일대이다.
21. 수재(守宰): 지방의 수령, 즉 목민관(牧民官)을 통칭하는 말.
22. 부어총(鮒魚塚): 붕어 무덤. 수령의 탐욕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풍자하는 말이다.
23. 구복(口腹): 입과 배. 음식에 대한 욕심이나 식욕을 의미한다.
24. 빈연(賓讌): 손님을 대접하는 잔치.
25. 고(罟): 물고기를 잡는 그물.
26. 《태평한화(太平閑話)》: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와 사회상을 담고 있다.
원문:
公平生不食鰒, 人問其故, 曰: “曾爲濟州牧, 見民苦於採捕, 故不忍也。”
번역문:
공은 평생 전복(鰒)²⁷을 먹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일찍이 제주목사(濟州牧)²⁸로 있을 때 백성들이 채취(採捕)²⁹하느라 고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차마 먹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27. 복(鰒): 전복. 예로부터 귀한 식재료이자 진상품(進上品)이었으며, 특히 제주도의 주요 특산물이었다.
28. 제주목(濟州牧): 제주목사(濟州牧使). 조선 시대 제주도의 최고 행정 책임자.
29. 채포(採捕): (주로 해산물을) 따고 잡는 것. 전복 채취는 잠수 등 위험하고 고된 노동이었기에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기건이 백성의 고통을 헤아리는 애민(愛民) 정신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원문:
濟州舊俗, 不葬其親, 死輒委之壑。 公未上任, 先勅州使備棺槨, 敎以斂葬。 州之葬其親, 自公始, 一境歎服, 敎化大行。 一日, 公夢見三百餘人拜於庭下, 叩謝曰: “賴公之惠, 得免暴骸, 無以報恩。 公應於今年, 生育賢孫。” 先是, 公之子³⁰三人皆無嗣, 果是歲, 公之子掌令軸生子曰襸, 官至應敎。 襸五子曰逈、适、遠、進、遵。 逈, 持平; 遵, 應敎, 人稱服齋先生。 進之子大升, 稱高峯先生, 皆以道德、文章名於世。 适之子大鼎, 掌令; 服齋之子大恒, 判尹。【竝《慵齋叢話》。】
번역문:
제주(濟州)의 옛 풍속에는 그 부모를 장사 지내지 않고, 죽으면 매번 골짜기[壑]³¹에 버렸다. 공이 부임하기 전에 먼저 주리(州吏)³²에게 명하여 관곽(棺槨)³³을 갖추게 하고 염하여 장사 지내는 법(斂葬)³⁴을 가르쳤다. 고을에서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니, 온 지역[一境]이 감탄하고 복종하여 교화(敎化)³⁵가 크게 행해졌다. 하루는 공이 꿈에 300여 명이 뜰 아래에서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며 말하기를, “공의 은혜에 힘입어 드러난 해골[暴骸]³⁶ 신세를 면하게 되었으니,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공께서는 응당 올해에 현명한 손자(賢孫)를 낳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의 아들³⁰ 세 사람이 모두 후사(嗣)³⁷가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공의 아들 장령(掌令)³⁸ 축(軸)³⁹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전(襸)⁴⁰이고, 벼슬은 응교(應敎)⁴¹에 이르렀다. 전(襸)의 다섯 아들은 형(逈), 활(适), 원(遠), 진(進), 준(遵)⁴²이다. 형(逈)은 지평(持平)이고, 준(遵)은 응교(應敎)이며 사람들이 복재선생(服齋先生)⁴³이라 칭하였다. 진(進)의 아들 대승(大升)⁴⁴은 고봉선생(高峯先生)⁴⁵이라 칭하는데, 모두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활(适)의 아들 대정(大鼎)⁴⁶은 장령(掌令)이고, 복재(服齋)의 아들 대항(大恒)⁴⁷은 판윤(判尹)⁴⁸이다.【이상은 《용재총화(慵齋叢話)》⁴⁹에서 인용】
주석:
30. [주-D001] 子 : 저본(底本)에는 없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월사집(月沙集)・판중추부사정무기공신도비명(判中樞府事貞武奇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아래 “适之子大鼎”의 “子”도 동일하다.
31. 학(壑): 골짜기, 구렁텅이.
32. 주리(州吏): 고을의 아전.
33. 관곽(棺槨): 시신을 넣는 속널(棺)과 겉널(槨). 장례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이다.
34. 염장(斂葬): 시신을 염습(斂襲)하여 장사(葬事) 지냄. 유교 예법에 따른 장례 절차를 의미한다.
35. 교화(敎化): 가르치고 이끌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 기건이 제주의 풍속을 유교 예법에 맞게 개선했음을 보여준다.
36. 폭해(暴骸): 뼈가 드러남.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하고 버려져 훼손된 상태를 의미한다.
37. 사(嗣): 뒤를 이을 자식, 후사.
38.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4품 관직. 지평과 함께 대관(臺官)으로서 감찰 업무를 담당했다.
39. 축(軸): 기건의 아들 이름.
40. 전(襸): 기건의 손자 이름. 기축(奇軸)의 아들이다.
41.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의 정4품 관직. 경연(經筵)에서 강독하거나 문한(文翰)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42. 형(逈), 활(适), 원(遠), 진(進), 준(遵): 기전(奇襸)의 다섯 아들 이름.
43. 복재선생(服齋先生): 기건의 증손자인 기준(奇遵, 1492-1521)의 호(號) 또는 존칭.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희생되었다.
44. 대승(大升): 기건의 증손자인 기대승(奇大升, 1527-1572). 기준의 조카이다. 조선 중기의 저명한 성리학자.
45. 고봉선생(高峯先生): 기대승(奇大升)의 호. 이황(李滉)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46. 대정(大鼎): 기활(奇适)의 아들. 기건의 증손자.
47. 대항(大恒): 기준(奇遵)의 아들. 기건의 증손자.
48. 판윤(判尹): 한성부(漢城府, 조선 시대 수도)의 으뜸 벼슬. 정2품.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 격이다.
49.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선 전기 문신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필기잡록. 인물 일화, 제도, 풍속, 문학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문:
公自魯山朝⁵⁰, 休官杜門, 謝絶人事, 手抄《四書》、《三經》、《左傳》、《綱目》。 光廟⁵¹在邸時, 三訪公於私第, 公托以靑盲。 光廟一日持針擬刺以試之, 公瞪視不目逃, 竟不能起公, 而亦免於禍。
번역문:
공은 노산군(魯山君)⁵⁰ 때부터 벼슬을 쉬고 문을 닫은 채(杜門)⁵² 인사(人事)⁵³를 사절하고, 손수 《사서(四書)》⁵⁴, 《삼경(三經)》⁵⁵, 《좌전(左傳)》⁵⁶, 《강목(綱目)》⁵⁷을 베껴 썼다. 광묘(光廟)⁵¹께서 잠저(邸)⁵⁸에 계실 때 세 번이나 공을 사저(私第)로 찾아왔으나, 공은 청맹(靑盲)⁵⁹을 핑계 댔다. 광묘께서 하루는 침(針)을 가지고 찌를 듯이 하여 시험하였는데, 공이 눈을 부릅뜨고(瞪視)⁶⁰ 눈동자를 피하지 않으니(不目逃)⁶¹, 끝내 공을 기용할 수 없었고, 또한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
주석:
50. [주-D002] 廟 : 저본에는 “조(朝)”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월사집・판중추부사정무기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노산군은 왕이 아니었으므로 '조(朝)'를 쓰지 않고 '군(君)'으로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산군 때부터'로 번역한다.
51. [주-D002] 廟 : 아래 “광묘(光廟)”의 “廟”도 동일하다. 광묘는 세조(世祖)의 묘호이다. 저본의 '朝'를 '廟'로 수정한 것을 반영한다.
52. 두문(杜門): 문을 닫고 외출하지 않음.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은거함을 의미한다.
53. 인사(人事): 사람들과의 교제나 방문 등 세상사.
54. 《사서(四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유학의 기본 경전이다.
55. 《삼경(三經)》: 일반적으로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을 가리킨다.
56. 《좌전(左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춘추(春秋)》에 대한 좌구명(左丘明)의 주석서. 역사적 사실과 인물 평이 풍부하다.
57. 《강목(綱目)》: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 원칙에 따라 재구성한 역사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의 대표작이다.
58. 저(邸): 저택. 왕위에 오르기 전의 왕자나 왕족이 살던 집을 가리키는 잠저(潛邸)의 의미로 쓰였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기 전후의 시기를 가리킨다.
59. 청맹(靑盲): 눈은 뜨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눈병. 또는 그런 사람. 백내장, 녹내장 등으로 인한 실명을 포함한다. 기건이 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기 위해 눈이 먼 척한 것이다.
60. 등시(瞪視):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봄.
61. 불목도(不目逃): 눈동자를 움직여 피하지 않음. 세조의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거짓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我朝人才莫盛英廟⁶²朝, 而公不由科第, 擢置臺憲⁶³, 則公之拔萃⁶⁴高名, 負一世重⁶⁵者, 爲如何哉? 明良際遇⁶⁶, 身旣自致, 而及乎時事艱危⁶⁷, 度不可有爲, 則視棄官如弊屣⁶⁸, 托疾屛跡⁶⁹, 以終天年⁷⁰, 卒能不變節而名亦完, 玆其所謂“守死善道⁷¹, 明哲保身⁷²”者非耶?【竝碑。】
번역문:
우리 조정(我朝)의 인재(人才)는 영묘(英廟)⁶² 때보다 성한 적이 없었는데, 공이 과거(科第)를 거치지 않고 발탁되어 대헌(臺憲)⁶³에 임명되었으니, 공의 발췌(拔萃)⁶⁴한 높은 명망이 한 시대의 중망(重望)⁶⁵을 지녔음이 어떠하였겠는가! 명군(明君)과 현신(良臣)의 만남(明良際遇)⁶⁶으로 몸소 이미 그 지위에 이르렀으나, 시사(時事)가 어렵고 위태로움(艱危)⁶⁷에 이르러 더는 할 수 있는 바가 없다(不可有爲)고 헤아리자, 벼슬 버리기를 해진 신발(弊屣)⁶⁸처럼 여기고 병을 핑계 대고 자취를 감추어(屛跡)⁶⁹ 천년(天年)⁷⁰을 마쳤으니, 마침내 능히 절개를 변치 않고 이름 또한 온전하게 하였으니, 이야말로 이른바 ‘죽음으로 도(道)를 지키고(守死善道)⁷¹, 밝게 사리를 판단하여 몸을 보전한다(明哲保身)’⁷²는 것이 아니겠는가!【이상은 비문(碑)에서 인용】
주석:
62. 영묘(英廟): 세종(世宗)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능호는 영릉(英陵)이며, 묘호 자체는 아니지만 세종 시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다.
63. 대헌(臺憲): 사헌부(司憲府) 또는 그 관직(지평, 대사헌 등)을 가리킨다.
64. 발췌(拔萃): 여럿 가운데에서 특별히 뛰어남.
65. 부일세중(負一世重): 한 시대의 무거운 기대나 중망(重望)을 짊어짐.
66. 명량제우(明良際遇):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남.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의미한다. 기건과 세종의 관계를 나타낸다.
67. 간위(艱危): 어렵고 위태로움. 세조의 왕위 찬탈과 같은 정치적 격변기를 가리킨다.
68. 폐사(弊屣): 해지고 낡은 신발. 가치 없는 것을 비유한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의리를 지켰음을 강조한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온다.
69. 병적(屛跡): 자취를 감춤. 은둔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음을 의미한다.
70. 천년(天年): 하늘이 정해 준 수명. 자연 수명을 다함.
71. 수사선도(守死善道): 죽음으로써 좋은 도(道), 즉 올바른 도리를 지킴.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구절로, 굳은 절개를 비유한다.
72. 명철보신(明哲保身): 사리에 밝고 분별력이 있어 몸을 안전하게 보전함.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혜롭게 처신하여 화를 피하고 자신을 지킴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기건이 절개를 지키면서도 화를 면한 지혜로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미로 쓰였다.
강석덕(姜碩德)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姜碩德【戴敏公。】
字子明, 號玩易齋, 晉州人。 世宗朝, 以學行薦, 爲楊根郡守。 歷執義、承旨、開城留守、大司憲、吏曹參判。 以知敦寧, 退居西郊, 卒年六十五。 有二子: 長曰希顔, 次曰希孟。
번역문:
강석덕(姜碩德)【대민공(戴敏公)¹이다.】
자는 자명(子明)이고, 호는 완역재(玩易齋)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² 세종조(世宗朝)에 학문과 행실[學行]³로 천거(薦擧)되어 양근군수(楊根郡守)⁴가 되었다. 집의(執義)⁵, 승지(承旨)⁶, 개성유수(開城留守)⁷, 대사헌(大司憲)⁸, 이조참판(吏曹參判)⁹을 역임하였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¹⁰로서 서쪽 교외[西郊]¹¹로 물러나 거처하다가, 65세의 나이로 졸(卒)하였다.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장남은 희안(希顔)¹²이고 차남은 희맹(希孟)¹³이다.
주석:
- 대민공(戴敏公): 강석덕의 시호(諡號). 대(戴)는 받들다, 이다(머리에) 등의 의미가 있고, 민(敏)은 민첩하다, 총명하다, 학문에 힘쓰다 등의 의미가 있다. 시호법에서 ‘옛것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음(好古不怠)’을 민(敏)이라 하였으므로, 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기린 것으로 보인다. (뒤 《필원잡기》 인용 부분 참조)
- 진주인(晉州人): 본관(本貫)이 진주임을 나타낸다. 진주 강씨(晉州 姜氏)이다.
- 학행(學行): 학문(學問)과 품행(品行). 조선 시대에 과거 시험 외에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가 있었다. 강석덕은 이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
- 양근군수(楊根郡守): 양근군(현재 경기도 양평군 일부)의 수령. 종4품직.
- 집의(執義):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관직.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 왕명을 출납하는 핵심 직책이었다.
- 개성유수(開城留守): 고려의 옛 수도였던 개성부(開城府)를 관리하던 종2품 외관직.
-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을 규찰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 이조참판(吏曹參判): 육조(六曹) 중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던 이조(吏曹)의 버금 벼슬. 종2품.
- 지돈녕(知敦寧):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돈녕부(敦寧府)의 벼슬(정1품 또는 종1품). 돈녕부는 왕실의 친인척 관련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지돈녕부사는 주로 공신이나 전직 정승 등 원로대신에게 주어지는 명예직 성격이 강했다.
- 서교(西郊): 수도(한양)의 서쪽 교외 지역.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했음을 의미한다.
- 희안(希顔): 강희안(姜希顔, 1417?~1464). 강석덕의 장남.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능했던 삼절(三絶)로 유명하며, 특히 산수화와 화훼화에 뛰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다.
- 희맹(希孟): 강희맹(姜希孟, 1424~1483). 강석덕의 차남.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등. 문과에 급제하여 좌찬성 등을 지냈으며, 문장과 경학에 뛰어났다.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의 저술을 남겼다.
원문:
公八歲而孤, 就學外傅, 一擧不中, 歎曰: “自有道義可樂, 何用科目爲?” 遂不復就試。 蔭補啓聖殿直。 師事李文節公行, 百家諸書, 靡不通究。
번역문:
공(公)은 여덟 살에 아버지¹⁴를 여의고, 외부(外傅)¹⁵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한 번 과거 시험[一擧]¹⁶에 합격하지 못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스스로 즐길 만한 도의(道義)¹⁷가 있는데, 어찌 과목(科目)¹⁸을 쓰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다시는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음보(蔭補)¹⁹로 계성전직(啓聖殿直)²⁰에 임명되었다. 이문절공 행(李文節公 行)²¹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백가(百家)와 여러 서적(諸書)에 대해 두루 통달하여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靡不通究)¹³.
주석:
14. 고(孤): 아버지를 여읨.
15. 외부(外傅): 가문 밖의 스승. 정식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6. 일거(一擧): 한 번의 과거 시험 응시.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 등의 과거 절차 중 어느 단계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나, 과거에 한 번 낙방했음을 뜻한다.
17. 도의(道義):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올바른 길과 의리. 학문과 수양을 통해 얻는 내면적 가치를 의미한다.
18. 과목(科目): 과거 시험 과목, 또는 과거 시험 자체를 의미한다.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과거 공부보다 내면의 도의를 추구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19. 음보(蔭補): 조상의 공덕이나 문벌에 힘입어 과거 시험 없이 관직에 나아가는 제도. 음서(蔭敍)라고도 한다.
20. 계성전직(啓聖殿直): 계성전(啓聖殿)의 직(直). 계성전은 문묘(文廟) 내에 공자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이다. 직(直)은 그곳을 지키거나 관리하는 낮은 관직으로 추정된다.
21. 이문절공 행(李文節公 行): 문절공(文節公) 이행(李行, 1352~143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 성리학에 밝았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청렴함으로 명망이 높았다. 강석덕이 이행에게 학문을 배웠음을 나타낸다.
22. 백가제서(百家諸書):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책들. 폭넓은 학문적 탐구를 했음을 의미한다.
23. 미불통구(靡不通究): 하나도 빠짐없이 통달하고 깊이 연구함.
원문:
爲開城留守, 赴愬者必造門干謁, 或投匿名書。 公得²⁴猾吏尤無良者, 斥逐之, 旬月之間, 豪猾知禁, 流亡盡復。 修殿廟・官廨之頹圮者、先聖肖像²⁵之漫漶者, 役不煩民而事用集。
번역문: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을 때, 하소연하러 오는[赴愬]²⁶ 자들은 반드시 문을 찾아와 청탁[干謁]²⁷해야 했고, 혹은 익명서(匿名書)를 던지기도 하였다. 공이 교활한 관리[猾吏]²⁸ 중 특히 불량한 자들을 찾아내어²⁴ 내쫓으니, 한두 달[旬月] 사이에 호족과 교활한 자들[豪猾]²⁹이 금지하는 바를 알게 되었고 유망민(流亡民)³⁰들이 모두 돌아왔다. 무너진 전각과 사당[殿廟] 및 관아 건물[官廨]³¹, 그리고 훼손되어 희미해진[漫漶]³² 선성(先聖)³³의 초상(肖像)²⁵을 수리하였는데, 백성들에게 번거롭게 역(役)을 시키지 않고도 일이 이루어졌다(事用集)³⁴.
주석:
24. [주-D001] 得 : 《사숙재집(私淑齋集)・선고 자헌대부……강공 행장(先考資憲大夫……姜公行狀)》에는 앞에 “탐(探)” 자가 더 있다. '탐득(探得)'은 '찾아내다', '탐지하여 알아내다'는 의미로, 공이 적극적으로 부패한 관리들을 색출했음을 강조한다. 저본에는 '探'이 없으나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25. [주-D002] 像 : 저본에는 “상(象)”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사숙재집・선고 자헌대부……강공 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초상화의 의미로는 '像'이 옳다.
26. 부소(赴愬): 하소연하거나 송사(訟事)를 제기하기 위해 관청에 나아감.
27. 간알(干謁): 벼슬이나 이익을 얻기 위해 권력자에게 청탁하는 것. 여기서는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백성들조차 정상적인 절차를 밟기 어려워 사사로운 연줄이나 청탁에 의존해야 했음을 보여준다.
28. 활리(猾吏): 교활하고 간사한 관리. 부정부패한 관리를 의미한다.
29. 호활(豪猾):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는 호족(豪族)과 교활한 자들. 기득권 세력 또는 불법을 저지르는 무리를 가리킨다.
30. 유망(流亡): 난리나 재해, 또는 가혹한 정치로 살던 곳을 떠나 떠돌아다님. 또는 그런 백성.
31. 전묘(殿廟): 궁궐의 전각(殿)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廟). 개성에는 고려 시대의 궁궐 터와 사당들이 있었을 것이다. 관해(官廨): 관청 건물.
32. 만환(漫漶): 물에 번져 형체가 희미해지거나 지워짐. 오래되어 훼손된 상태를 의미한다.
33. 선성(先聖): 옛 성인(聖人). 여기서는 문묘(文廟)에 모셔진 공자(孔子) 등 유교 성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4. 사용집(事用集): 일이 그것으로 인해[用] 이루어짐[集]. 효율적으로 일이 처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天性豪邁, 貞白慷慨, 事母至孝, 處兄弟、待朋友, 一出於誠。 常戒二子曰: “人之富貴榮達在天, 非求之可得。 所自盡者, 孝悌忠信、禮義廉恥而已。 有愧於是, 餘不足觀。”【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의 천성(天性)은 호매(豪邁)³⁵하고 정백(貞白)³⁶하며 강개(慷慨)³⁷하였고,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며, 형제들과 지내고 친구를 대함에 한결같이 성실함[誠]³⁸에서 나왔다. 항상 두 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부귀영달(富貴榮達)은 하늘에 달려 있어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힘써야 할 바는 효제충신(孝悌忠信)³⁹과 예의염치(禮義廉恥)⁴⁰일 뿐이니, 여기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35. 호매(豪邁): 기개가 활달하고 도량이 넓음.
36. 정백(貞白): 곧고 깨끗함. 마음과 행실이 바르고 청렴결백함.
37. 강개(慷慨): 의롭지 못한 일이나 잘못되어 가는 세태를 보고 의기가 북받쳐 원통해하고 슬퍼함. 또는 마음이 크고 넓으며 의기가 높음.
38. 성(誠): 참되고 거짓이 없는 마음. 정성.
39. 효제충신(孝悌忠信): 효(孝, 부모 섬김), 제(悌, 형제간 우애), 충(忠,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 신(信, 벗 사이의 믿음). 유교의 핵심적인 실천 덕목이다.
40. 예의염치(禮義廉恥): 예(禮, 예절), 의(義, 의로움), 염(廉, 청렴), 치(恥,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 기본 도덕. 관중(管仲)이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기강[四維]으로 제시한 바 있다.
원문:
二子登第, 請開榮親宴, 公不許曰: “榮非吾好, 榮則必辱。”
번역문: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⁴¹하여 영친연(榮親宴)⁴² 열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영예(榮)는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며, 영예로우면 반드시 욕됨(辱)이 따른다.”⁴³라고 하였다.
주석:
41. 등제(登第): 과거, 특히 문과에 급제함.
42. 영친연(榮親宴): 자식이 과거 급제나 높은 벼슬에 오르는 등 영예로운 일을 이루었을 때 부모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열던 잔치.
43. 영즉필욕(榮則必辱): 영예로우면 반드시 욕됨이 따른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등에 보이는 사상과 유사하게, 세속적인 명예나 성공에 집착하지 않고 겸허하게 처신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원문:
公守身以忿欲爲戒, 謹於大節, 不遺細行。 文章高古, 以淡泊爲宗。 精於篆隷, 奉敎書昭憲大妃石誌。【竝遺事。】
번역문:
공은 몸을 지킴에 분노와 욕심[忿欲]⁴⁴을 경계하였고, 큰 절의[大節]⁴⁵에 신중하였으며 사소한 행실[細行]⁴⁶도 빠뜨리지 않았다. 문장(文章)은 고고(高古)⁴⁷하고 담박(淡泊)⁴⁸함을 으뜸으로 삼았다. 전서(篆書)와 예서(隷書)⁴⁹에 정통하여, 교지(敎旨)를 받들어 소헌대비(昭憲大妃)⁵⁰의 석지(石誌)⁵¹를 썼다.【이상은 유사(遺事)⁵²에서 인용】
주석:
44. 분욕(忿欲): 분노와 욕심. 수양(修養)의 대상이 되는 감정이다.
45. 대절(大節): 사람이 지켜야 할 큰 절의나 원칙.
46. 세행(細行): 사소한 품행이나 언행. 큰 원칙뿐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중했음을 의미한다.
47. 고고(高古): 격조가 높고 예스럽다. 문장의 품격이 높고 고풍스러움을 의미한다.
48. 담박(淡泊): 욕심 없고 마음이 깨끗함. 꾸밈이나 기교 없이 소박하고 자연스러움을 문장의 이상으로 삼았음을 나타낸다.
49. 전례(篆隷): 전서(篆書)와 예서(隷書). 고대의 서체(書體)로, 이를 잘 썼다는 것은 서예에 조예가 깊었음을 의미한다.
50. 소헌대비(昭憲大妃): 조선 제4대 임금 세종(世宗)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1446). 대비(大妃)는 왕비 사후에 추존된 호칭일 수 있다.
51. 석지(石誌): 능묘(陵墓) 앞에 세우는 지석(誌石) 또는 신도비(神道碑) 등의 비석에 새기는 글. 왕명으로 왕비의 석지를 썼다는 것은 그의 서예 실력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52. 유사(遺事): 남아 있는 일화나 기록.
원문:
姜公碩德性⁵³好古, 風流文雅, 近代無比。 作詩最高古, 書畫亦妙絶, 諡之曰敏, 宜矣。 諡法好古不怠曰敏, 此元朝學士趙文敏之敏也。 世之人以公不於紅紙上題名, 輕之, 甚非也。【《筆苑雜記》。】
번역문:
강공(姜公) 석덕(碩德)은 천성적으로 옛것을 좋아하였고[性好古]⁵³, 풍류(風流)와 문아(文雅)⁵⁴함이 근래에 견줄 이가 없었다. 시(詩)를 짓는 것이 가장 고고(高古)하였고 서화(書畫)⁵⁵ 또한 묘절(妙絶)⁵⁶하였으니, 시호를 ‘민(敏)’이라 한 것이 마땅하다. 시법(諡法)⁵⁷에 ‘옛것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음(好古不怠)’을 민(敏)이라 하는데, 이는 원(元)나라 학사(學士) 조문민(趙文敏)⁵⁸의 ‘민(敏)’ 자와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공이 홍패(紅牌)에 이름 올리지 못한 것[不於紅紙上題名]⁵⁹으로 그를 가볍게 여기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필원잡기(筆苑雜記)》⁶⁰에서 인용】
주석:
53. [주-D003] 性 : 저본에는 “시(詩)” 뒤에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필원잡기(筆苑雜記)》 및 《해동잡록(海東雜錄)・강석덕(姜碩德)》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성호고(性好古)'로 읽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54. 풍류문아(風流文雅): 멋스럽고 품위가 있으며 글과 학문이 아담하고 우아함. 예술과 문학에서의 높은 경지를 나타낸다.
55. 서화(書畫): 글씨와 그림.
56. 묘절(妙絶): 매우 뛰어나고 절묘함.
57. 시법(諡法): 시호를 정하는 규정.
58. 조문민(趙文敏): 원나라의 저명한 학자이자 서화가인 조맹부(趙孟頫, 12541322). 그의 시호가 문민(文敏)이다. 강석덕을 조맹부에 비견하여 그의 예술적, 학문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1488)의 저술. 이 평가는 서거정이 강석덕에 대해 내린 것이다. 서거정은 과거 급제 여부로만 인물을 평가하는 세태를 비판하며 강석덕의 진정한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59. 불어홍지상제명(不於紅紙上題名): 붉은 종이 위에 이름을 쓰지 않음. 문과(文科) 최종 합격자 명단을 붉은 종이에 써서 발표하던 것에서 유래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60.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
원문:
法典禮曹、四館⁶¹, 以文官除授, 而玩易齋姜碩德不由科第以進, 而爲大司成⁶²及知禮曹事⁶³。 蓋祖宗朝爲官擇人⁶⁴, 故如此, 而自《大典》頒降後, 無此例矣。【《芝峯類說》。】
번역문:
법전(法典)에 예조(禮曹)와 사관(四館)⁶¹은 문관(文官)으로 제수(除授)한다고 되어 있는데,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은 과거(科第)를 거치지 않고 진출하여 대사성(大司成)⁶² 및 지예조사(知禮曹事)⁶³가 되었다. 이는 아마도 조종조(祖宗朝)⁶⁵에는 관직에 따라 사람을 가려서[爲官擇人]⁶⁴ 임명하였기 때문에 그러하였으나, 《대전(大典)》⁶⁶이 반포(頒降)된 뒤로는 이러한 사례가 없어졌다.【《지봉유설(芝峯類說)》⁶⁷에서 인용】
주석:
61. 예조(禮曹), 사관(四館): 예조는 육조의 하나로 의례, 교육, 외교 등을 담당했다. 사관은 성균관(成均館), 예문관(藝文館), 교서관(校書館), 승문원(承文院) 등 학문과 관련된 네 기관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기관의 관직은 학문적 소양이 중요시되어 문과 급제자로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62.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의 으뜸 벼슬. 정3품. 국립 최고 교육기관의 책임자이다.
63. 지예조사(知禮曹事): 예조의 업무를 겸임하여 관장하는 직책. 보통 판서나 참판 등 고위 관리가 겸직했다.
64. 위관택인(爲官擇人): 관직을 위해 사람을 선택함. 즉, 해당 관직에 적합한 인물을 능력과 자질에 따라 임명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이는 과거 제도라는 형식적 절차보다 실질적인 능력을 중시했던 초기 조선의 인사 정책 경향을 반영한다.
65. 조종조(祖宗朝): 태조(太祖)와 태종(太宗) 등 조선 건국 초기의 임금들의 시대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세종대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쓰였다.
66. 《대전(大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성종(成宗) 때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경국대전》은 관료 임용 절차를 포함한 국가의 모든 제도를 성문화하여, 이전 시대에 비해 능력 위주의 파격적인 인사가 어려워졌음을 시사한다.
67.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천문, 지리, 역사, 제도, 문물, 인물, 종교, 동식물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망라하고 있다.
신석조(辛碩祖)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辛碩祖【文僖公。】
初名石堅, 號淵氷堂, □□¹人。 世宗八年丙午登第, 賜暇湖堂。 歷集賢副提學、吏曹參判、京畿監司, 官至提學。
번역문:
신석조(辛碩祖)【문희공(文僖公)²이다.】
초명(初名)은 석견(石堅)이고, 호(號)는 연빙당(淵氷堂)이며, 영산(靈山)³ 사람이다. 세종(世宗) 8년 병오년(1426)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⁴하였다.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⁵, 이조 참판(吏曹參判)⁶, 경기 감사(京畿監司)⁷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제학(提學)⁸에 이르렀다.
주석:
- [주-D001] □□ : 《세조실록》 5년 11월 13일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영산(靈山)”이 되어야 한다. 신석조의 본관은 영산(靈山)이다.
-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 1407~1459)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희(僖)는 잘못된 것을 경계하여 조심함(小心畏忌) 등을 의미한다.
- 영산(靈山):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일대. 영산 신씨(靈山 辛氏)의 본관이다.
- 사가독서(賜暇讀書): ‘호당(湖堂)’은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사가독서는 젊고 재능있는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이다. 주로 동호(東湖, 현재 옥수동 부근) 주변에 있던 독서당에서 이루어져 호당이라고도 불렸다. 신석조는 세종 11년(1429)에 사가독서를 하였다.
-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 집현전은 세종 때 설치된 학술 연구 및 국왕 자문 기관. 부제학(副提學)은 정3품 당상관으로,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책이다.
-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조(吏曹)는 문관의 인사, 공훈, 포상 등을 담당하던 육조(六曹)의 하나. 참판(參判)은 종2품 차관직이다.
- 경기 감사(京畿監司): 경기도의 관찰사(觀察使). 종2품 외관직으로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 제학(提學): 정확히 어떤 관청의 제학인지 명시되지 않았으나, 집현전 제학(集賢殿 提學, 정2품)이나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종2품) 등을 역임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석조는 집현전 부제학을 거쳐 제학에 이르렀다.
원문:
公祖武節公有定性太急, 見人不可, 必極口怒罵而後止。 公每曰: “鑑祖性急, 佩韋自警。” 嘗修史春秋館, 與下僚同事筆硯, 下僚悤遽間顧吏高聲語曰: “辛碩祖將硯水來!” 旋卽慙赧低頭, 不能仰視。 公遽⁹前執手曰: “我輩少時失言於先生長者前, 豈止於此耶?” 卽呼酒來, 滿酌對飮, 人服其弘量。
번역문:
공(公)의 조부(祖父) 무절공(武節公)¹⁰은 성품이 너무 급하여, 사람의 옳지 못함을 보면 반드시 입을 다하여 성내어 꾸짖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공이 매번 말하기를, “조부의 성급함을 거울삼아,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스스로 경계한다(佩韋自警)¹¹.”라고 하였다. 일찍이 춘추관(春秋館)¹²에서 사서(史書)를 편수할 때 아랫사람들과 함께 필연(筆硯)¹³의 일을 하였는데, 아랫사람 하나가 총망결에 서리(吏)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신석조(辛碩祖), 연수(硯水)¹⁴ 가져오게!”라고 하였다. 곧바로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숙여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공이 급히¹⁵ 앞으로 나아가 손을 잡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젊었을 때 선생이나 어른 앞에서 실언(失言)한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는가?” 하고는, 즉시 술을 가져오라 하여 잔을 가득 채워 마주 마시니,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弘量)에 감복하였다.
주석:
9. [주-D002] 遽 : 저본(底本)에는 “거(據)”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據(거)'는 '의거하다', '차지하다' 등의 의미이고, '遽(거)'는 '급히', '갑자기'의 의미이다. 문맥상 '遽'가 자연스럽다.
10. 무절공(武節公): 신석조의 조부를 지칭하나,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신석조의 조부는 신우덕(辛于德) 혹은 신포시(辛包翅)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이 무절공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신석조의 증조부 신예(辛裔)가 무절공 시호를 받았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이 필요하다.
11. 패위자경(佩韋自警): 성질이 급한 사람이 유순한 소가죽(韋) 끈을 몸에 차고 다니며 스스로 경계한다는 고사. 《한비자(韓非子)》 〈관행(觀行)〉 등에 보인다. 조부의 성급함을 본받지 않으려는 신석조의 노력을 보여준다.
12. 춘추관(春秋館): 조선시대 역사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던 관청.
13. 필연(筆硯): 붓과 벼루. 문방구 또는 글 쓰는 일을 의미한다.
14. 연수(硯水): 벼루에 먹을 갈기 위해 붓는 물.
15. 급히(遽): 주석 [주-D002] 참조.
원문:
公與柳義孫、權採、南秀文同在集賢殿, 文章齊名一時, 而諸君皆不大達, 惜也!
번역문:
공(公)은 유의손(柳義孫)¹⁶, 권채(權採)¹⁷, 남수문(南秀文)¹⁸과 함께 집현전(集賢殿)에 있었는데, 문장(文章)으로 한 시대에 나란히 명성(齊名)을 떨쳤으나, 여러 군자(君子)들이 모두 크게 현달(顯達)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주석:
16. 유의손(柳義孫,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다.144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택(子擇).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문명이 높았으나 요절했다.
17. 권채(權採, 1414
18. 남수문(南秀文, 1408~144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질부(質夫), 호는 경재(敬齋).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촉망받았으나 요절했다.
원문:
自國初有三公相傳犀帶, 不輕傳授。 河公演傳於公, 公位纔正二品, 官至開城留守而卒, 帶遂不傳。
번역문:
나라 초부터 삼공(三公)¹⁹ 사이에 서로 전해오는 서대(犀帶)²⁰가 있었는데, 가벼이 전수(傳授)하지 않았다. 하공(河公) 연(演)²¹이 공에게 전하였으나, 공의 품계(品階)가 겨우 정2품이었고 관직이 개성 유수(開城留守)²²에 이르러 졸(卒)하였으므로, 서대는 마침내 전해지지 못하였다.
주석:
19. 삼공(三公): 최고위 관직인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을 통칭한다.
20. 서대(犀帶): 무소 뿔로 장식한 허리띠. 조선시대 종1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이 착용하던 것으로, 고위 관직과 높은 지위를 상징했다.
21. 하공 연(河公演): 하연(河演, 1376~145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옹(新稀翁). 영의정을 지냈다.
22. 개성 유수(開城留守):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開城府)를 다스리던 종2품 외관직.
해설:
서대는 최고위 관직인 삼공(三公)이 대대로 물려주던 귀한 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연이 신석조에게 이를 물려주었으나, 신석조가 정2품(개성 유수)에 그치고 사망하여 더 이상 후임자에게 전해지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이는 신석조가 더 높은 관직에 오를 만한 인물이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원문:
辛進士永禧家有文僖公詩集, 友人曰: “子之家集, 可以印行乎?” 永禧曰: “我祖雖有能文名, 而家集所載無一可傳者, 嘗挽一門生詩曰: ‘三十二而卒, 不幸同顔回。’ 此句外無佳詩。” 秋江以爲孝。【竝《潛谷舊錄》。】
번역문:
신 진사(辛進士) 영희(永禧)²³의 집에 문희공(文僖公)의 시집(詩集)이 있었는데, 친구가 묻기를, “그대의 가집(家集)을 간행(印行)할 만한가?” 하니, 영희가 답하기를, “우리 조부께서 비록 문장에 능하다는 명성은 있었으나, 가집에 실린 것 중에 전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일찍이 한 문생(門生)을 만(挽)하는²⁴ 시에 이르기를, ‘서른둘에 졸(卒)하니, 불행히 안회(顔回)와 같구나.²⁵’라고 한 이 시구 외에는 좋은 시가 없다.”라고 하였다. 추강(秋江)²⁶은 이를 효성스럽다고 여겼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²⁷에서 인용】
주석:
23. 신영희(辛永禧): 신석조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 진사(進士)는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의 진사과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24. 만(挽): 만사(挽詞)를 짓는 것. 만사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이나 시를 말한다.
25. 안회(顔回): 공자(孔子)의 제자. 자는 자연(子淵). 덕행(德行)이 뛰어났으나 가난하였고 32세(혹은 29세, 41세 설도 있음)에 요절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이 요절한 것을 안타까워할 때 자주 인용된다.
26.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호. 조선 전기의 문인.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1658)이 지은 수필집.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27.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
해설:
후손인 신영희가 조부 신석조의 문집 간행에 대해 겸손하게 답하는 일화이다. 조부의 명성을 내세우기보다 문집의 내용이 부족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남효온은 오히려 조상의 허물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효성으로 보았다는 내용이다.
유의손(柳義孫)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柳義孫
字□□¹, 文化人。 世宗八年丙午司馬, 仍登第。 丙辰重試。 官至吏曹參判。
번역문:
유의손(柳義孫)
자는 □□¹이고, 문화(文化) 사람이다.² 세종(世宗) 8년 병오년(1426)에 사마시(司馬試)³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병진년(1436)에 중시(重試)⁴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이조참판(吏曹參判)⁵에 이르렀다.
주석:
- □□ : 《문종실록(文宗實錄)》 즉위년 6월 9일 조에는 “효숙(孝叔)”으로 되어 있다. 자(字)가 누락되었으나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문화인(文化人): 본관(本貫)이 문화 유씨(文化 柳氏)임을 나타낸다.
- 사마(司馬):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 시험인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험을 통칭한다. 여기에 합격해야 대과(大科)인 문과(文科)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 중시(重試): 조선 시대 문과(文科)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보이던 시험. 주로 승진에 반영되었다.
- 이조참판(吏曹參判):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버금 벼슬. 종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권채(權採)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權採
字用之, 梅軒遇之子。 太宗十七年丁酉, 生員魁, 仍登第。 世宗丁未重試, 賜暇湖堂。 官至右承旨。
번역문:
권채(權採)
자는 용지(用之)이고, 매헌(梅軒) 권우(遇)¹의 아들이다. 태종(太宗) 17년 정유년(1417)에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魁)²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세종(世宗) 정미년(1427)에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³하였다. 관직은 우승지(右承旨)⁴에 이르렀다.
주석:
- 매헌(梅軒) 우(遇): 매헌(梅軒)은 권우(權遇, 1363~1419)의 호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 생원괴(生員魁): 생원시(生員試)에서 수석 합격자(장원)를 의미한다.
- 사가호당(賜暇湖堂): 호당(湖堂)은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이며,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조선 시대에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이다. 뛰어난 인재에게 주어지는 영예였다.
- 우승지(右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의 보고를 임금에게 전달하는 왕의 비서 기관의 차석에 해당한다.
남수문(南秀文)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南秀文
字□□¹, 固城人。 世宗八年丙午登第。 丙辰, 重試魁, 賜暇湖堂。 官集賢殿學士。
번역문:
남수문(南秀文)
자는 □□¹이고, 고성(固城) 사람이다.² 세종(世宗) 8년 병오년(1426)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병진년(1436)에 중시(重試)에서 장원(魁)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관직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³에 이르렀다.
주석:
- □□ : 《경재유고(敬齋遺稿)・묘갈명(墓碣銘)》 및 《역천집(櫟泉集)・집현전직제학남공묘갈명(集賢殿直提學南公墓碣銘)》에 근거할 때 “경질(景質)” 또는 “경소(景素)”가 되어야 한다. 자(字)가 누락되었으나 다른 문헌에서 확인 가능하다.
- 고성인(固城人): 본관(本貫)이 고성 남씨(固城 南氏)임을 나타낸다.
-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집현전(集賢殿)에 소속된 학자 관료들을 통칭하는 말로 볼 수 있다. 남수문은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했다. 집현전은 세종 시대 학문 연구와 정책 개발의 중심 기관이었다.
원문:
柳公以文章儒雅, 仕于世宗朝, 爲一世所宗。 與權公採、南公秀文等, 文章齊名, 而同在集賢殿, 一時稱謂集賢殿三先生。 而諸公皆不大達意, 其不能享壽歟? 惜也!
번역문:
유공(柳公)¹은 문장(文章)이 유아(儒雅)²하여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여 한 시대의 존경받는 바가 되었다. 권공(權公) 채(採), 남공(南公) 수문(秀文) 등과 문장으로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齊名)³, 함께 집현전(集賢殿)에 있었으므로 한때 집현전 삼선생(集賢殿三先生)이라 일컬어졌다. 그러나 여러 공(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顯達)하지는 못하였으니, 아마도 수를 누리지 못해서일까? 애석하도다!
주석:
- 유공(柳公), 권공(權公), 남공(南公): 각각 유의손(柳義孫), 권채(權採), 남수문(南秀文)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 유아(儒雅): 학식이 깊고 품행이 단정하며 아담함. 선비로서의 높은 교양과 품격을 의미한다.
- 제명(齊名): 명성을 나란히 함. 비슷한 수준의 명성을 누림을 뜻한다.
원문:
戊午, 以直提學應製, 製《綱目序》以進, 又作《戒酒文》, 而載於《東文選》。
번역문:
무오년(1438)에 직제학(直提學)¹으로서 응제(應製)²하여 《강목서(綱目序)》를 지어 올렸고, 또 《계주문(戒酒文)》³을 지었는데, 《동문선(東文選)》⁴에 실려 있다.
주석:
- 직제학(直提學): 집현전(集賢殿)의 정3품 관직. 학사(學士)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 응제(應製): 임금의 명에 응하여 글을 지음.
- 《강목서(綱目序)》, 《계주문(戒酒文)》: 유의손이 지은 글의 제목들.
- 《동문선(東文選)》: 조선 성종(成宗)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시문선집(詩文選集). 삼국 시대부터 조선 초까지의 뛰어난 시문을 모았다.
원문:
敬齋河演賀公拜承旨詩云: “乾坤造化好栽培, 聲價元¹從翰苑²來。 喜溢曉窓批³目見, 奎星炳煥照銀臺。”【竝柳公行跡。】
번역문:
경재(敬齋) 하연(河演)¹이 공(公)이 승지(承旨)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는 시에 이르기를, “천지 조화가 잘 배양하였으니, 명성(聲價)은 원래 한원(翰苑)²에서 왔네. 기쁨 넘치는 새벽 창에 임명장(批目)³을 보니, 규성(奎星)⁴이 찬란하게 은대(銀臺)⁵를 비추네.”라고 하였다.【이상은 유공(柳公)의 행적(行跡)에서 인용】
주석:
- [주-D002] 元 : 《경재유고(敬齋遺稿)・하유의손배승지(賀柳義孫拜承旨)》에는 “원(原)”으로 되어 있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으나(근원, 원래), 저본을 따른다.
- [주-D003] 苑 : 《경재유고・하유의손배승지》에는 “원(院)”으로 되어 있다. 한원(翰院)은 한림원(翰林院) 즉 예문관(藝文館) 등을 가리키며 문한(文翰) 기관을 뜻한다. 한원(翰苑)도 비슷한 의미로 문단(文壇)이나 학문 기관을 뜻한다.
- [주-D004] 批 : 《경재유고・하유의손배승지》에는 “개(揩)”로 되어 있다. 개목(揩目)은 관직 임명자 명단을 본다는 의미이고, 비목(批目)은 임명에 대한 왕의 재가 문서를 본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문맥상 임명을 확인한다는 의미는 통한다.
-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 조선 초기의 명재상.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세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 규성(奎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중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로 여겨졌다. 문장가나 학자를 상징한다.
-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승지를 제수받은 것을 축하하는 시이므로 승정원을 지칭한다.
원문:
權公自少文章妙絶一時, 年三十四, 特拜成均大司成, 物望也。 世宗擢置喉舌, 將擬大用, 年未四十早逝, 人皆惜之。
번역문:
권공(權公)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한 시대를 풍미하였으며, 나이 34세에 특별히 성균관 대사성(成均大司成)¹에 제수되니 물망(物望)² 때문이었다. 세종께서 발탁하여 후설(喉舌)³의 자리에 두어 장차 크게 쓰려 하였으나, 나이 40세가 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주석:
- 성균관 대사성(成均大司成): 조선 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 물망(物望):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신망.
-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 임금의 뜻을 전달하고 신하의 말을 아뢰는 중요한 직책을 비유한다. 주로 승지(承旨)와 같은 왕의 측근 비서직을 가리킨다.
원문:
世宗賜祭文, 略曰: “惟卿稟資純粹, 操心忠直, 家傳詩禮, 學窮典籍。 予嘗引置, 昵從經幄, 討論道腴, 多所警沃。 俾長成均, 爲士類式, 譽洽菁莪, 英才以育。”【竝權公遺事。】
번역문:
세종께서 제문(祭文)을 내려 대략 말씀하시기를, “오직 경(卿)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마음가짐이 충성스럽고 정직하였으며, 집안에서는 시례(詩禮)¹를 전수받았고 학문은 전적(典籍)²을 궁구하였다. 내 일찍이 경을 이끌어 경악(經幄)³에 가까이 두고 도(道)의 정수(道腴)⁴를 토론함에 경계하고 일깨워 주는 바(警沃)⁵가 많았다. 성균관(成均)의 장(長)⁶이 되게 하여 선비들의 본보기(士類式)⁷가 되게 하니, 명예는 〈청아(菁莪)〉⁸ 시(詩)에 부합하여 영재(英才)들이 육성되었다.”라고 하였다.【이상은 권공(權公)의 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 시례(詩禮): 《시경(詩經)》과 《예기(禮記)》. 유교의 기본 교양과 가르침을 의미한다.
- 전적(典籍): 경전(經典)과 서적(書籍).
- 경악(經幄): 임금이 경서(經書)를 강론하던 자리. 즉, 경연(經筵)을 의미한다.
- 도유(道腴): 도(道)의 기름지고 맛있는 부분. 즉, 도의 정수(精髓)나 깊은 이치를 의미한다.
- 경옥(警沃): 경계하여 깨우쳐 주고 마음을 적셔 줌. 즉, 학문이나 도덕적으로 유익한 가르침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 성균(成均)의 장(長):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인 대사성(大司成)을 가리킨다.
- 사류식(士類式): 선비 무리들의 본보기.
- 청아(菁莪):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 인재를 육성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이다. 권채가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인재 양성에 힘썼음을 비유한다.
정창손(鄭昌孫)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鄭昌孫
字孝仲, 甲孫之弟。 建文壬午生。 世宗五年癸卯司馬, 丙午登第, 授集賢著作。 丁卯重試, 歷直提學、大司憲、吏曹判書。 世祖卽位, 擢左贊成, 參佐翼功臣, 封蓬原府院君。 丙子拜相, 至領議政。 睿宗朝, 參翊戴功臣。 成宗朝, 參佐理功臣。 壬辰, 賜几杖。 丁未卒, 年八十六。 配享成宗廟庭。
번역문:
정창손(鄭昌孫)
자는 효중(孝仲)이고, 갑손(甲孫)¹의 아우이다. 건문(建文) 임오년(1402)에 태어났다. 세종(世宗) 5년 계묘년(142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병오년(1426)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저작(集賢殿著作)²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427)에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직제학(直提學), 대사헌(大司憲)³, 이조판서(吏曹判書)⁴를 역임하였다. 세조(世祖)⁵가 즉위하자 좌찬성(左贊成)⁶에 발탁되었고, 좌익공신(佐翼功臣)⁷에 참여하여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⁸에 봉해졌다. 병자년(1456)에 재상(拜相)⁹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¹⁰에 이르렀다. 예종조(睿宗朝)에 익대공신(翊戴功臣)¹¹에 참여하였고, 성종조(成宗朝)에 좌리공신(佐理功臣)¹²에 참여하였다. 임진년(1472)에 궤장(几杖)¹³을 하사받았다. 정미년(1487)에 86세로 졸(卒)하였다. 성종(成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석:
- 갑손(甲孫): 정갑손(鄭甲孫, 1398~1451). 정창손의 형으로, 호는 사우당(四友堂),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역시 문신으로 대사헌 등을 지냈다.
- 집현전 저작(集賢殿著作): 집현전(集賢殿)의 정9품 관직. 교서(校書) 등 문한(文翰) 업무를 담당했다.
-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관리 감찰과 풍속 교정 등을 담당했다.
-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를 총괄하는 핵심 요직이다.
- 세조(世祖): 조선의 제7대 왕(재위 1455~1468).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 좌찬성(左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의정을 보좌하는 재상급이다.
- 좌익공신(佐翼功臣):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정창손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공신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작위이다.
- 배상(拜相): 재상에 임명됨. 여기서는 영의정에 임명된 것을 가리킨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최고 재상이다.
- 익대공신(翊戴功臣): 예종(睿宗) 즉위 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처리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정창손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좌리공신(佐理功臣): 성종(成宗) 즉위를 돕고 초기 국정 운영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정창손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궤장(几杖): 안석(几)과 지팡이(杖).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원로대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물건으로, 큰 영예로 여겨졌다.
원문:
世宗設集賢殿, 置員二十人, 妙選一時文學之士充之, 公與焉。 備顧問, 演綸綍, 高步花磚, 昵承睿眷, 時人擬之登瀛洲。
번역문:
세종께서 집현전(集賢殿)¹을 설치하고 정원 20명을 두어, 당대의 문학(文學)에 뛰어난 선비들을 정묘하게 선발하여 채웠는데, 공(公)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고문(顧問)에 대비하고 임금의 말씀(綸綍)²을 찬술(演)하며, 궁궐(花磚)³을 높은 걸음으로 다니며 가까이서 임금의 총애(睿眷)⁴를 받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영주(瀛洲)⁵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주석:
- 집현전(集賢殿): 조선 세종 때 설치된 학술 연구 및 정책 자문 기관.
- 윤필(綸綍): 임금의 말을 뜻한다. 임금의 명령이나 교서 등을 작성하는 일을 비유한다.
- 화전(花磚): 꽃무늬가 새겨진 벽돌. 아름답게 꾸민 궁궐 뜰이나 마루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궁궐 또는 조정을 가리킨다.
- 예권(睿眷): 임금의 특별한 관심과 총애.
- 영주(瀛洲): 전설상의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졌으며, 여기서는 학문적 명예가 높은 경지 또는 높은 관직을 비유한다.
원문:
世宗嘗留意於《資治通鑑》, 謂其箋釋未盡, 句讀不明, 命文士撰訓義, 皆才學識鑑之士, 分科責成, 繙閱紬復, 各盡所長, 而纂修之功, 公實居多。 又命文士聚於集賢殿, 撰上自唐、虞、三代下至宋、元及我東國聖帝明王、名臣碩輔善政善敎可爲後世法者, 編爲巨帙, 凡數百卷, 名曰《治平要覽》, 纂修之功, 公亦居多。
번역문:
세종께서 일찍이 《자치통감(資治通鑑)》¹에 뜻을 두시고, 그 주석(箋釋)이 미진하고 구두(句讀)가 분명하지 않다고 여겨 문사(文士)들에게 명하여 훈의(訓義)²를 찬술하게 하셨다. 모두 재주와 학문, 식견과 감식안(才學識鑑)이 있는 선비들이 분야를 나누어(分科) 책임을 맡아(責成)³ 번역하고 열람하며(繙閱) 반복하여 연구하여(紬復) 각기 장점(長點)을 다하였는데, 찬수(纂修)⁴의 공(功)은 공(公)이 실로 많았다. 또 문사들에게 명하여 집현전에 모여 위로는 당우(唐虞)⁵와 삼대(三代)⁶로부터 아래로는 송(宋)·원(元) 및 우리 동국(東國)⁷의 성스러운 제왕(聖帝明王)과 명신(名臣)·석보(碩輔)⁸의 선한 정치와 좋은 가르침(善政善敎)으로서 후세의 본보기(法)가 될 만한 것을 찬술하게 하여, 거질(巨帙)⁹ 수백 권으로 편찬하고 이름을 《치평요람(治平要覽)》¹⁰이라 하였는데, 찬수의 공은 공이 또한 많았다.
주석:
- 《자치통감(資治通鑑)》: 중국 북송(北宋) 시대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제왕의 통치에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서술되었다.
- 훈의(訓義): 글자의 뜻을 풀이하고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
- 분과책성(分科責成): 분야를 나누어 맡기고 완성을 책임지게 함.
- 찬수(纂修): 자료를 모아 책을 편찬하고 수정함.
- 당우(唐虞):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군주로 꼽히는 요(堯)임금(도당씨, 陶唐氏)과 순(舜)임금(유우씨, 有虞氏)의 시대를 가리킨다.
- 삼대(三代): 중국 고대의 하나라(夏), 상나라(商, 은殷), 주나라(周)를 가리킨다.
- 동국(東國): 동쪽 나라. 우리나라(조선)를 가리킨다.
- 석보(碩輔):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임금을 잘 보좌하는 신하.
- 거질(巨帙): 매우 방대한 책.
- 《치평요람(治平要覽)》: 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책. 역대 군주와 신하들의 모범적인 정치 사례를 모아 후대 왕들의 통치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원문:
世宗末年稍違豫, 文宗在東邸視事, 朝官言事者, 必上封章乃達。 時公與李文烈公季甸在集賢殿, 屢封章, 極論時政得失, 有一二同列止之曰: “自古善論事者, 終必陷禍。 況侍從講論德義, 啓沃輔導而已, 至於諫諍非職。” 公與文烈大笑曰: “人各有心, 論事之敗之榮, 不如含默之恥之深。” 遂率下僚抗疏極陳, 餘數十上, 世宗嘉之。
번역문:
세종 말년에 다소 편찮으시어 문종(文宗)¹께서 동궁(東邸)²에서 정사를 돌보실 때, 조정 관리로서 일을 아뢰는 자는 반드시 봉장(封章)³을 올려야 전달되었다. 이때 공(公)이 문렬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⁴과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봉장(封章)을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극력 논하였는데, 한두 명의 동료가 말리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일을 잘 논하는 자는 마침내 반드시 화(禍)에 빠졌다. 하물며 시종(侍從)⁵은 덕의(德義)를 강론(講論)하여 임금의 마음을 열어주고 보좌(啓沃輔導)⁶할 뿐이니, 간쟁(諫諍)⁷에 이르는 것은 직분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公)이 문렬공(文烈公)과 함께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마음이 있으니, 일을 논하다가 실패하여 받는 욕됨(敗之辱)⁸은 입을 다물고 있는 부끄러움(含默之恥)의 깊음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아래 관료들을 이끌고 상소(抗疏)⁹하여 극력 진술하기를 수십 차례 더 올리니, 세종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셨다.
주석:
- 문종(文宗): 조선의 제5대 왕(재위 1450~1452). 세종의 맏아들.
- 동저(東邸): 동궁(東宮). 세자(世子)가 거처하는 곳. 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하는 것을 의미한다.
- 봉장(封章): 봉함(封緘)한 상소문. 중요한 사안이나 비밀스러운 내용에 대해 올리는 상소 형식이다.
- 문렬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 1404~1459):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백고(伯固), 호는 존양재(存養齋), 시호는 문렬(文烈).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 시종(侍從): 임금의 곁에서 모시는 신하. 집현전 학사 등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관료들을 가리킬 수 있다.
- 계옥보도(啓沃輔導): 임금의 마음을 열어주고(啓沃) 올바른 길로 이끌어 보좌함(輔導). 시종 신하의 중요한 임무로 여겨졌다.
- 간쟁(諫諍):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 바로잡으려 하는(諍) 것. 주로 대간(臺諫)의 직무로 인식되었다.
- 번역 수정: 원문의 ‘敗之榮’은 문맥상 ‘실패하여 받는 욕됨’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므로 ‘敗之辱’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원문을 그대로 ‘영광’으로 해석하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 항소(抗疏): 뜻을 굽히지 않고 강하게 올리는 상소.
원문:
乙丑, 擢司憲府執義, 慷慨骨骾, 知無不言。 前此, 公之伯氏貞節公甲孫長憲府, 激濁揚淸, 直道不撓, 風節凜然, 人比之獨擊鶻。 今公正色立朝, 謇諤亮直, 有乃兄風, 一時物論多之。
번역문:
을축년(1445)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¹에 발탁되었는데, 강개(慷慨)²하고 강직(骨骾)³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공(公)의 형님인 정절공(貞節公) 갑손(甲孫)⁴이 사헌부의 수장(長憲府)⁵으로 있을 때, 탁(濁)한 것을 몰아내고 청(淸)한 것을 드날리며(激濁揚淸)⁶ 곧은 도리(直道)를 굽히지 않아 풍절(風節)⁷이 늠름(凜然)하니, 사람들이 그를 홀로 공격하는 매(獨擊鶻)⁸에 비유하였다. 이제 공(公)이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서 충직하게 간언하고(謇諤)⁹ 믿음직하고 정직하여(亮直) 바로 형님의 풍모가 있으니, 당시의 물론(物論)¹⁰이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주석:
-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사헌부의 정4품 관직. 대사헌, 집의와 함께 사헌부의 핵심 관료였다.
- 강개(慷慨): 의롭지 못한 일이나 잘못되어 가는 세태를 보고 의분이 북받쳐 한탄함.
- 골경(骨骾): 뼈대가 굳셈. 성품이 매우 강직함을 비유한다.
- 정절공(貞節公) 갑손(甲孫): 정창손의 형 정갑손(鄭甲孫)의 시호와 이름.
- 장헌부(長憲府):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즉 대사헌(大司憲)을 의미한다.
- 격탁양청(激濁揚淸): 흐린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드날림. 부정을 제거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을 비유한다.
- 풍절(風節): 바람과 절개. 꿋꿋한 기개와 절조를 의미한다.
- 독격골(獨擊鶻): 홀로 사냥감을 낚아채는 매. 용맹하고 과감한 기상을 비유한다.
- 건악(謇諤):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음. 바르고 곧게 간언하는 모양.
- 물론(物論): 세상 사람들의 평판이나 여론.
원문:
世宗命鄭麟趾等撰修《高麗史》, 公以編修官專掌編次, 不幸書未進御而陟遐。 文宗命史局畢撰, 公益勤不怠。
번역문:
세종께서 정인지(鄭麟趾)¹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²를 찬수(撰修)하게 하시자, 공(公)은 편수관(編修官)³으로서 편차(編次)⁴를 오로지 맡았는데, 불행히도 책이 임금께 올려지기(進御) 전에 세종께서 승하(陟遐)⁵하셨다. 문종께서 사국(史局)⁶에 명하여 편찬을 마치게 하시니, 공(公)은 더욱 부지런히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석:
-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집현전 대제학,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고려사》, 《용비어천가》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 《고려사(高麗史)》: 조선 초기에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
- 편수관(編修官): 역사서나 서적 편찬을 담당하던 관직.
- 편차(編次): 책의 내용을 차례대로 배열하고 편집하는 일.
- 척하(陟遐): 멀리 가다.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승하(昇遐)와 같은 의미이다.
- 사국(史局): 역사서 편찬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관청.
원문:
癸酉十月, 世祖炳幾靖亂, 謂左右曰: “當今之時, 直亮簡正, 無如鄭某者。” 擢爲吏曹判書, 陞資憲。 公之藻鑑淸識, 甄別品題, 皆得其宜。 性又廉潔, 雖權勢赫然, 而門庭蕭索, 關節不到, 士林歎服。
번역문:
계유년(1453) 10월에 세조(世祖)께서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난(亂)을 평정(靖亂)¹하시고 좌우(左右)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때에 정직하고(直亮) 간결하며 바른(簡正) 사람으로는 정모(鄭某)²만한 이가 없다.”라고 하셨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발탁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³로 품계를 올렸다. 공(公)의 뛰어난 감식안과 맑은 식견(藻鑑淸識)⁴으로 인물을 판별하고 품평(甄別品題)⁵함이 모두 마땅함을 얻었다. 성품이 또한 염결(廉潔)하여 비록 권세(權勢)가 혁혁(赫然)하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였고, 청탁(關節)⁶이 이르지 못하니 사림(士林)⁷이 탄복하였다.
주석:
- 정란(靖亂): 난(亂)을 평정함. 여기서는 세조가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가리킨다. 세조 측의 입장에서 미화한 표현이다.
- 정모(鄭某): 정창손(鄭昌孫)을 가리킨다.
- 자헌(資憲):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정2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 조감청식(藻鑑淸識): 아름다운 거울과 맑은 식견. 사물을 분별하는 뛰어난 능력과 맑은 식견을 의미한다. 특히 인물 평가 능력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 견별품제(甄別品題): 사람이나 사물의 우열, 선악, 등급 등을 살펴서 구별하고 평가함.
- 관절(關節): 원래는 뼈마디를 뜻하나, 비유적으로 요직이나 권력자와의 연줄을 이용하여 부정한 청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 사림(士林): 선비들의 사회. 학문과 덕행을 중시하는 학자, 관료 집단을 가리킨다.
원문:
大夫人年高九袠, 公至誠榮養, 雖隆冬盛暑, 不廢定省。 朝謁之暇, 必具冠帶, 陪侍左右, 歡欣怡悅。 大夫人平反一笑, 然後退, 一國皆稱其孝。 戊寅丁憂, 哀毁過節, 世祖遣近臣弔慰, 賻贈有加, 特停朝市一日。 前此, 婦人無停朝之例, 此所以重公示異恩也。 及葬, 廬墓不至私第, 上遣官慰喩: “五十後氣力漸衰, 愼勿廬墓。”
번역문:
대부인(大夫人)¹이 나이가 많아 90세(九袠)²가 되자, 공(公)이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榮養)³하여 비록 한겨울(隆冬)과 한여름(盛暑)이라도 정성(定省)⁴을 폐하지 않았다. 조회(朝謁)⁵를 마치고 틈이 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좌우에서 모시며(陪侍)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대부인이 평소와 달리 한 번 웃으신 연후에야 물러가니, 온 나라가 모두 그의 효(孝)를 칭송하였다. 무인년(1458)에 어머니 상(丁憂)⁶을 당하여 슬퍼하고 몸을 상함(哀毁)⁷이 예법에 지나치자, 세조께서 근신(近臣)을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며 부의(賻儀)와 증여(贈與)를 더하였고, 특별히 하루 동안 조회와 저자(朝市)를 정지하였다. 이보다 앞서 부인(婦人)의 상(喪)에 조회를 정지한 예(例)가 없었으니, 이는 공(公)을 중히 여겨 남다른 은혜를 보인 것이다. 장례(葬禮)를 치르자 사가(私第)에 가지 않고 여묘(廬墓)⁸하려 하니, 상(上)께서 관리를 보내 위로하고 타이르시기를, “50세 이후에는 기력이 점점 쇠하니, 삼가 여묘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주석:
- 대부인(大夫人): 높은 벼슬아치의 어머니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정창손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 구질(九袠): 나이 90세를 가리킨다. 질(袠)은 10년을 뜻한다.
- 영양(榮養): 부모를 영광스럽게 잘 봉양함.
- 정성(定省): 자식이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는 것.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이다.
- 조알(朝謁):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뵙는 것.
- 정우(丁憂): 부모상을 당하는 것.
- 애훼(哀毁): 슬픔으로 몸을 상하게 함. 부모상 중에 자식 된 도리로서 슬픔을 극진히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 여묘(廬墓): 부모의 묘소 곁에 초막(廬)을 짓고 살면서 묘를 지키는 것. 효행의 하나로 여겨졌다.
원문:
公三爲首相, 以盛滿屢乞辭, 上曰: “三公之重, 非如卿老成, 無以鎭之。” 不允。 公居廟堂, 垂紳正笏, 不動聲色, 屹如山嶽。 年俯九袠, 朝廷耆老無出其右者, 人比之宋丞相文彦博云。
번역문:
공(公)이 세 번 수상(首相)¹이 되었는데, 성만(盛滿)²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상(上)께서 말씀하시기를, “삼공(三公)³의 중책은 경(卿)과 같은 노성(老成)⁴한 인물이 아니면 진정(鎭定)⁵시킬 수 없다.”라고 하시며 윤허하지 않으셨다. 공(公)이 묘당(廟堂)⁶에 있을 때에는 큰 띠(紳)⁷를 늘어뜨리고 홀(笏)⁸을 바로 잡고 성색(聲色)⁹을 드러내지 않아 우뚝하기가 산악(山嶽)과 같았다. 나이가 90세(九袠)에 가까워 조정의 기로(耆老)¹⁰ 중에 그를 능가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송(宋)나라 승상(丞相) 문언박(文彦博)¹¹에 비유하였다고 한다.
주석:
-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 백관(百官)의 우두머리이다.
- 성만(盛滿): 지위나 명예 등이 극에 달하여 가득 참. 겸양의 표현으로, 극에 달하면 쇠할 것을 염려하여 물러나고자 하는 이유로 삼는다.
-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한다. 국가의 최고 재상직이다.
- 노성(老成): 경험이 많고 원숙함. 또는 그런 사람.
- 진지(鎭之): 그것을 안정시키거나 위엄 있게 누름. 삼공의 중책을 맡아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감을 의미한다.
- 묘당(廟堂): 종묘(宗廟)와 명당(明堂). 조정(朝廷) 또는 최고 정무 기관(의정부)을 가리킨다.
- 신(紳): 예복에 두르는 큰 띠.
- 홀(笏): 조선 시대 관리가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을 입을 때 손에 쥐던 물건. 품계에 따라 재질이 달랐다.
- 성색(聲色): 목소리와 얼굴빛. 감정이나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 기로(耆老): 나이가 많고 덕망과 지위가 높은 신하.
- 문언박(文彦博, 1006~1097):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명재상.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며 오랫동안 재상직에 있었고 장수하여 명망이 높았다.
원문:
公資性簡嚴高邁, 廉公正直, 學問該博, 文章典雅, 筆法妙絶, 爲一代之冠。 平生不事産業, 雖位極人臣, 居家索然。 居官履事, 明白正大, 贈遺無所受, 請謁不得行, 人不敢干以私。 友於兄弟, 信於朋友, 親戚故舊, 喪葬婚姻, 無不賑¹恤。 接人以恭, 雖下士之賤, 有來候者, 必於門外送迎, 天性然也。
번역문:
공(公)은 자성(資性)이 간결하고 엄정하며(簡嚴) 고상하고 뛰어나며(高邁), 청렴하고 공정하며 정직하고(廉公正直), 학문이 해박(該博)하고 문장이 전아(典雅)하며 필법(筆法)이 묘절(妙絶)하여 한 시대의 으뜸(冠)이었다. 평생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아 비록 지위가 신하로서 극에 달했으나 집안 살림은 쓸쓸하였다(索然). 관직에 있으며 일을 처리함에 명백(明白)하고 정대(正大)하여 주고받는 선물(贈遺)을 받지 않았고 청탁(請謁)이 행해지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간여하지 못하였다. 형제에게 우애롭고(友於) 친구에게 신의가 있었으며(信於), 친척(親戚)과 고구(故舊)¹의 상례(喪葬)와 혼례(婚姻)에 구휼(賑恤)²하지 않음이 없었다. 사람을 대하기를 공손(恭)하게 하여 비록 낮은 신분(下士)의 천한 이라도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문밖에서 보내고 맞이하니(送迎), 천성(天性)이 그러하였다.
주석:
- [주-D001] 賑 : 저본(底本)에는 “판(販)”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사가집(四佳集)・수충경절……정공신도비명(輸忠勁節……鄭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판휼(販恤)’은 의미가 통하지 않으며, 문맥상 ‘진휼(賑恤)’ 즉 구제하고 도와준다는 의미가 적절하다.
- 고구(故舊): 옛 친구나 오랜 교분이 있는 사람.
원문:
世祖深加眷注, 嘗曰: “予之敬卿, 無異叔父。” 公如進爵, 上必改容下御座曰: “此非君臣大義, 乃展私禮也。” 仍宣諭在座群臣。 公性不能酒, 座上爲設醴, 必親嘗賜之。 至年深, 難於趨拜, 或命免拜上殿, 其尊禮敬重如此。
번역문:
세조께서 깊이 권념하고 주목하여(眷注)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경(卿)을 공경함이 숙부(叔父)와 다름이 없다.”라고 하셨다. 공(公)이 술잔을 올리면 상(上)께서 반드시 용모를 고쳐(改容) 옥좌(御座)에서 내려와 말씀하시기를, “이는 군신(君臣)의 대의(大義)가 아니라 사사로운 예(私禮)를 펴는 것이다.”라고 하시고, 이어서 자리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알려주셨다(宣諭). 공(公)의 성품이 술을 잘 마시지 못하므로 자리 위에서 단술(醴)¹을 마련해 주실 때에는 반드시 친히 맛보고 하사하셨다. 나이가 깊어짐에 이르러 종종걸음으로 절하기(趨拜)²가 어려워지자, 혹 절을 면제하고 전(殿)에 오르도록 명하시니, 그 존경하고 예우하며 중히 여김(尊禮敬重)이 이와 같았다.
주석:
- 예(醴): 단술. 술을 잘 못하는 사람을 배려하여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 추배(趨拜):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절하는 것. 신하가 임금 앞에서 취하는 공손한 예법이다.
원문:
公立朝六十二年, 主試圍者數十, 掌銓衡者四年, 三爲首相, 係國家輕重者三十餘年。 居寵思危, 克全終始, 功名、福祿之盛, 今古無比。 擧國皆稱道德之首。【竝徐四佳居正撰碑。】
번역문:
공(公)이 조정에 선 지 62년 동안, 시험을 주관(主試圍)¹한 것이 수십 차례였고, 전형(銓衡)²을 관장한 것이 4년이었으며, 세 번 수상(首相)이 되어 국가의 경중(輕重)³에 관계된 것이 30여 년이었다. 총애를 받을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여(居寵思危)⁴ 처음과 끝을 능히 온전히 하였으니(克全終始), 공명(功名)과 복록(福祿)의 성대함이 고금(古今)에 비할 바가 없었다. 온 나라가 모두 도덕(道德)의 으뜸(首)이라고 칭송하였다.【이상은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⁵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 주시위(主試圍): 과거 시험의 시험관(시관, 試官)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는 것.
- 전형(銓衡): 저울대와 저울추. 인물을 저울질하여 등용하고 평가하는 일, 즉 인사 행정을 비유한다. 주로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인사권을 의미한다.
- 경중(輕重): 가볍고 무거움.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이나 운영을 의미한다.
- 거총사위(居寵思危): 총애를 받는 자리에 있을 때 위태로움을 생각함. 권세가 있을 때 교만하지 않고 신중하게 처신함을 의미한다.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호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사가(四佳). 대제학 등을 역임했으며 《동문선》, 《경국대전》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계전(李季甸)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季甸【文烈公。】
字屛甫, 韓山人。 世宗九年丁未登第。 癸酉, 參靖難功臣。 世祖朝, 參佐翼功臣, 封韓城府院君。 典文衡。 官至領中樞府事。
번역문:
이계전(李季甸)【문렬공(文烈公)¹이다.】
자는 병보(屛甫)이고, 한산(韓山) 사람이다.² 세종(世宗)³ 9년 정미년(1427)에 과거에 급제하였다.⁴ 계유년(1453)⁵에 정난공신(靖難功臣)⁶에 참여하였다. 세조(世祖)⁷ 시대에 좌익공신(佐翼功臣)⁸에 참여하였고,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⁹에 봉해졌다. 문형(文衡)¹⁰을 관장하였다. 관직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¹¹에 이르렀다.
주석:
- 문렬공(文烈公): 이계전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며, 열(烈)은 공적이 뚜렷하게 드러남(有功安民), 강직하고 과감함(剛克爲伐) 등을 의미한다.
- 한산인(韓山人): 본관(本貫)이 한산(韓山)임을 나타낸다. 한산 이씨(韓山 李氏)이다.
-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조선의 제4대 왕.
- 등제(登第): 과거 시험에 합격함. 이계전은 1427년(세종 9)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 계유년(癸酉年): 1453년. 이 해에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다.
- 정난공신(靖難功臣):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와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이계전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조선의 제7대 왕.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계유정난을 통해 실권을 잡고 단종(端宗)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 좌익공신(佐翼功臣):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책봉된 공신. 이계전은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 조선 시대 종친(宗親) 또는 공신(功臣)에게 주던 작위(爵位)인 부원군(府院君)의 하나. 본관이나 연고지를 따서 봉호를 정하는데, 이계전은 한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부원군은 정1품의 품계를 가졌다.
- 전문형(典文衡): 문형(文衡)을 관장함. 문형은 문관(文官)의 선발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을 의미하며,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겸임하여 문단(文壇)의 종주(宗主) 역할을 했다. 이계전은 1457년(세조 3)부터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겸하며 문형을 관장했다.
-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중추부는 조선 시대 군사 기밀, 왕명 출납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었으나 점차 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 변했다. 영중추부사는 최고위 관직 중 하나였다.
원문:
侍從封章, 始盛於公。 公在集賢殿, 屢欲封章論事, 有一二同列官居上, 每沮之曰: “自古喜論事, 終受禍。 況我侍從者, 講論德義, 啓沃輔導而已。 至於諫諍, 非職也, 君勿好事。” 公曰: “人各有心, 論事之敗之榮, 不如含默之恥之深耶?” 遂率下僚抗疏極陳者, 非一再矣, 而上官終不署名, 物論譏之。 每進封章, 世宗曰: “季甸之疏又來矣。” 遂有大用之志, 尋擢同副承旨。【《筆苑雜記》。】
번역문:
시종(侍從)¹²의 봉장(封章)¹³이 공(公)에게서 비롯되어 성행하였다. 공이 집현전(集賢殿)¹⁴에 있을 때, 여러 차례 봉장(封章)을 올려 일을 논하고자 하였는데, 한두 명의 동료 관리가 윗자리에 있으면서 매번 그를 막으며 말하였다. “예로부터 일을 논하기 좋아하는 자는 마침내 화(禍)를 당한다. 하물며 우리 시종(侍從)하는 자들은 덕의(德義)를 강론(講論)하고 임금의 마음을 열어 깨우쳐(啓沃)¹⁵ 보좌하고 인도할(輔導) 뿐이다. 간쟁(諫諍)¹⁶에 이르는 것은 우리의 직분이 아니니, 그대는 일 만들기 좋아하지 말라(勿好事)¹⁷.” 공이 말하였다. “사람마다 각기 마음이 있는 법인데, 일을 논하다가 실패하거나 영화롭게 되는 것이, 입 다물고 있는(含默) 치욕의 깊음만 하겠는가?”¹⁸ 마침내 아랫사람들을 이끌고 상소(抗疏)¹⁹하여 극력 진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윗사람 관리는 끝내 서명하지 않아 세간의 평판(物論)²⁰이 그를 비난하였다. 매번 봉장(封章)을 올릴 때마다 세종께서 말씀하셨다. “계전(季甸)의 상소가 또 왔구나.” 마침내 그를 크게 쓰려는(大用) 뜻을 두시고, 이윽고 동부승지(同副承旨)²¹로 발탁하셨다.【《필원잡기(筆苑雜記)》²²에서 인용】
주석:
12. 시종(侍從):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여기서는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경연(經筵) 참여, 서적 편찬, 왕의 자문 등의 역할을 맡았다.
13. 봉장(封章): 봉인(封印)한 상소(上疏).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로, 중요한 사안이나 비밀스러운 내용을 담아 봉하여 올렸다. 일반적인 상소보다 격식이 높고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14. 집현전(集賢殿): 조선 세종 때 설치된 학문 연구 및 정책 자문 기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이 모여 경전(經傳)과 역사(歷史)를 연구하고 서적을 편찬하며 세종의 문치(文治)를 보좌했다.
15. 계옥(啓沃): 임금의 마음을 열어 깨우쳐 줌. 신하가 임금에게 학문과 도덕을 강론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16. 간쟁(諫諍): 임금의 잘못이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간(諫)하고 바로잡도록 힘써 주장하는 것. 주로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의 관리가 담당했다.
17. 물호사(勿好事): 일을 만들기 좋아하지 말라는 뜻. 불필요하게 문제를 일으키거나 분란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이다.
18. 이 구절은 봉장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침묵하는 치욕보다 낫다는 이계전의 강직한 신념을 보여준다.
19. 항소(抗疏): 뜻을 굽히지 않고 강하게 올리는 상소. 주로 반대 의견이나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상소를 의미한다.
20. 물론(物論): 세상 사람들의 평판이나 여론. 당시 집현전 내에서도 적극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의견이 갈렸음을 보여준다.
21.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비서 기관으로, 동부승지는 6승지 중 하나이다. 집현전 학사에서 왕의 핵심 측근으로 발탁된 것은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의미한다. 이계전은 1445년(세종 27) 동부승지가 되었다.
22.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수필집. 시문(詩文)에 얽힌 일화, 인물평, 고증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원문:
都承旨李季甸啓曰: “褒奬節義, 爲政之所當先。 高麗五百年間, 鄭夢周、吉再, 忠節卓然, 太宗追諡夢周, 復吉再戶, 皆爵其子。 世宗又贈再左司諫大夫, 所以砥礪名節, 爲後世計也。 請加再爵諡。” 上曰: “追加爵諡, 實是虛文。” 遂命官其子孫。【《國朝寶鑑》。】
번역문:
도승지(都承旨)²³ 이계전이 아뢰었다. “절의(節義)를 포상하고 장려하는(褒奬) 것은 정치에서 마땅히 먼저 해야 할 바입니다. 고려(高麗) 500년 동안 정몽주(鄭夢周)²⁴와 길재(吉再)²⁵는 충절(忠節)이 탁월했습니다. 태종(太宗)²⁶께서 정몽주에게 시호(諡號)를 추증하시고 길재의 가호(家戶)를 복구시켜 주셨으며, 모두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셨습니다. 세종께서 또 길재에게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²⁷를 증직(贈職)하신 것은 명분과 절의(名節)를 갈고 닦게 하여(砥礪)²⁸ 후세를 위한 계책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청컨대 길재에게 작위(爵位)와 시호(諡號)를 더하여 주소서.” 상(上)²⁹께서 말씀하셨다. “작위와 시호를 추가하는 것은 실로 헛된 형식(虛文)이다.” 마침내 그 자손에게 관직을 주도록 명하셨다.【《국조보감(國朝寶鑑)》³⁰에서 인용】
주석:
23. 도승지(都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고 모든 정사를 왕에게 보고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계전은 1455년(세조 1) 도승지가 되었다.
24.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말의 충신, 학자. 호는 포은(圃隱).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이방원(李芳遠, 훗날 태종)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조선 건국 후 태종 때 시호 '문충(文忠)'이 추증되고,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25. 길재(吉再, 1353-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호는 야은(冶隱). 고려 멸망 후 벼슬을 거부하고 절의를 지켰으며, 김숙자(金叔滋) 등을 통해 김종직(金宗直)에게 학문이 이어져 사림(士林)의 연원을 이루었다.
26.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조선의 제3대 왕. 정몽주를 죽이는 데 관여했지만,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충절을 기려 시호를 추증하고 절의를 지킨 길재의 가호를 복구하는 등 충절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27.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관직인 대사간(大司諫)의 고려 시대 명칭 또는 이칭. 여기서는 조선 시대의 대사간에 해당하는 벼슬을 증직했음을 의미한다.
28. 지려(砥礪): 숫돌(砥)과 칼 가는 돌(礪)이라는 뜻으로, 학문이나 덕행, 명절 등을 갈고 닦아 연마하는 것을 비유한다.
29. 상(上): 임금. 이계전이 도승지로 있던 시기이므로 세조(世祖)를 가리킨다.
30.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 시대 역대 임금의 정치적 업적과 모범이 될 만한 언행을 모아 편찬한 책. 후대 왕들의 통치 교본으로 활용되었다. 이 기록은 세조가 실리적인 관점에서 작위나 시호보다는 자손에게 관직을 주는 것이 더 실질적인 포상이라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구치관(具致寬)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具致寬【忠烈公。】
字而栗。 永樂丙戌生。 世宗十一年己酉司馬, 甲寅登第。 世祖朝, 策佐翼功臣, 封綾城君, 拜平安道節度使, 又拜咸吉道體察使。 壬午拜相, 至領議政。 成宗朝, 參佐理功臣。 庚寅卒, 年六十五。
번역문:
구치관(具致寬)【충렬공(忠烈公)¹이다.】
자는 이률(而栗)이다. 영락(永樂) 병술년(1406)에 태어났다. 세종(世宗) 11년 기유년(1429)에 사마시(司馬試)²에 합격하고, 갑인년(1434)에 문과(文科)에 급제(登第)³하였다. 세조(世祖) 때에 좌익공신(佐翼功臣)⁴에 책록되어 능성군(綾城君)⁵에 봉해졌고,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⁶에 제수되었다가 또 함길도 체찰사(咸吉道體察使)⁷에 제수되었다. 임오년(1462)에 재상(宰相)⁸에 제수되어 영의정(領議政)⁹에 이르렀다. 성종(成宗) 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¹⁰에 참여하였다. 경인년(1470)에 향년 65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 충렬공(忠烈公): 구치관의 시호(諡號). 충(忠)은 충성스러움을, 렬(烈)은 공적이나 업적이 현저함을 의미한다.
- 사마(司馬):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거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다.
- 등제(登第): 문과(文科) 등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것.
-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책봉된 공신. 구치관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능성군(綾城君): 공신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군(君)은 조선 시대 종친과 공신에게 주던 작위이다. 능성(綾城)은 현재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일대이다.
- 절도사(節度使): 조선 초기 각 도의 군사 지휘관. 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해당한다.
- 체찰사(體察使): 조선 시대 국방·민정 등을 살피기 위해 지방에 임시로 파견하던 관직. 특히 변방 지역의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경우가 많았다.
- 배상(拜相): 재상(宰相)에 임명됨. 조선 시대에는 의정부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중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치관은 1462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최고위직. 정1품.
- 좌리공신(佐理功臣):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1471년(성종 2)에 책봉된 공신. 구치관은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원문:
公性方嚴公正, 嘗判吏曹, 關節不行。 前此長銓曹者, 例於除授之際, 親執官案, 恣行胸臆, 亞官以下, 袖手傍觀。 公嘗憤之, 思欲矯其弊, 凡進退人物, 博採群議, 雖小官卑職, 未嘗獨薦。 又不以私恩貸親舊, 嫉人干請, 有或干請者, 當遷, 不敍。 時居正以參議, 一日在政房, 適醉睡。 公厲聲曰: “參議謂致寬注擬人物, 恣行胸臆, 不欲與聞耶? 他日有用人之失, 參議其曰在家不知耶?” 嘗擬一文士知名者爲臺官, 駁之者曰: “此子滑稽不可。” 公曰: “若然則漢武帝何取於東方朔耶?” 竟擬臺官。 又一文士調外郡敎官, 十年不遷, 公欲擬縣職, 駁者曰: “此子迂闊不可。” 公曰: “天道十年當復, 安可使人久屈如是?” 遂擬縣職, 果有治效。 公之用舍, 一出至公如此。【《筆苑雜記》。】
번역문:
공(公)의 성품은 방정(方正)하고 엄격하며 공정하여, 일찍이 이조판서(吏曹判書)¹¹로 있을 때 청탁(關節)¹²이 통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전조(銓曹)¹³의 장(長)이 된 자가 관례적으로 관리를 제수(除授)할 때 직접 관안(官案)¹⁴을 잡고 마음대로(恣行胸臆) 처리하였고, 아관(亞官)¹⁵ 이하는 팔짱만 끼고 곁에서 보기만 하였다. 공이 일찍이 이를 분하게 여겨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 생각하여, 무릇 인물을 등용하거나 물리칠 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널리 수렴하였고, 비록 작은 관직이나 낮은 직책이라도 일찍이 혼자서 천거한 적이 없었다. 또한 사사로운 은혜로 친구나 옛 지인을 봐주는 일이 없었고, 남이 벼슬을 청탁(干請)¹⁶하는 것을 미워하여, 혹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승진할 차례가 되어도 서용(敍用)하지 않았다. 당시 서거정(徐居正)¹⁷이 참의(參議)¹⁸로 있었는데, 하루는 정방(政房)¹⁹에서 마침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공이 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참의는 나 치관(致寬)이 인물을 추천할 때 마음대로 처리하여 함께 듣고자 하지 않는 것인가? 훗날 사람을 잘못 쓰는 실책이 있게 되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몰랐다고 말할 것인가?” 일찍이 이름난 한 문사(文士)를 대관(臺官)²⁰으로 추천하려 하자, 반박하는 자가 말하였다. “이 자는 너무 익살스러워(滑稽)²¹ 불가합니다.” 공이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한 무제(漢武帝)는 어찌 동방삭(東方朔)²²을 등용하였겠는가?” 마침내 대관으로 추천하였다. 또 한 문사가 외방 군(郡)의 교관(敎官)²³으로 조용(調用)된 지 10년이 지나도 승진하지 못하자, 공이 현(縣)의 직책²⁴에 추천하려 하니, 반박하는 자가 말하였다. “이 자는 현실에 어두워(迂闊)²⁵ 불가합니다.” 공이 말하였다. “천도(天道)도 10년이면 마땅히 회복되거늘²⁶, 어찌 사람을 이처럼 오래도록 굽히게 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현의 직책에 추천하니, 과연 다스림의 공효(治效)가 있었다. 공이 사람을 등용하고 내치는 것은 한결같이 지극한 공정함(至公)에서 나온 것이 이와 같았다.【《필원잡기(筆苑雜記)》²⁷에서 인용】
주석:
11. 판이조(判吏曹): 이조판서(吏曹判書). 조선 시대 문관(文官)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던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12. 관절(關節): 부정한 청탁이나 뇌물.
13. 전조(銓曹): 인사를 담당하는 관청.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아울러 이르거나, 주로 이조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조를 의미한다.
14. 관안(官案): 관직 임명에 관한 문서나 장부.
15. 아관(亞官): 버금가는 관직. 이조의 경우 참판(參判), 참의(參議), 정랑(正郎), 좌랑(佐郎) 등을 가리킨다.
16. 간청(干請): 벼슬이나 이익을 얻기 위해 청탁하는 것.
17.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호는 사가정(四佳亭).
18. 참의(參議): 육조(六曹)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벼슬. 판서, 참판 다음 직위이다.
19. 정방(政房): 정사를 보는 방. 이조의 집무실을 가리킨다.
20. 대관(臺官):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의 관직. 감찰과 간쟁을 담당하는 언관(言官)을 통칭한다.
21. 활계(滑稽):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움. 언행이 진중하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22. 동방삭(東方朔):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인물. 해학과 기지로 유명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구치관은 재능이 있다면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등용해야 한다는 논리로 동방삭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23. 교관(敎官): 지방의 향교(鄕校)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관직. 교수(敎授) 또는 훈도(訓導)를 가리킨다.
24. 현직(縣職): 현(縣)의 수령인 현령(縣令) 또는 현감(縣監).
25. 우활(迂闊):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함.
26. 천도십년당복(天道十年當復): 하늘의 도는 10년이면 회복된다는 말. 오랫동안 불운했던 사람도 때가 되면 운이 트인다는 의미로,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한 문사를 등용해야 한다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27.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수필집. 인물 일화, 시화(詩話), 고증 등을 담고 있다.
원문:
世祖卽位, 歎曰: “文武全才, 何患無人於將相乎?” 拜平安節度使。 丁亥, 帝徵兵討李滿住, 上命公爲鎭西大將軍, 曰: “吾之萬里長城也。”【《潛谷舊錄》。】
번역문:
세조께서 즉위하여 탄식하며 말하였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가 있다면, 어찌 장수와 재상이 될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겠는가?” 이윽고 평안도 절도사에 제수하였다. 정해년(1467)에 황제(帝)가 이만주(李滿住)²⁸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징발하자, 상(上)께서 공을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²⁹으로 삼으며 말씀하셨다. “나의 만리장성(萬里長城)³⁰이다.”【《잠곡구록(潛谷舊錄)》³¹에서 인용】
주석:
28. 이만주(李滿住): 명(明)나라 초기의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명나라 변경을 자주 침범하여, 1467년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제(帝)'는 당시 명나라 황제 성화제(成化帝)를 가리킨다.
29.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서쪽(조선에서 볼 때 압록강 너머의 여진족 지역)을 진압하는 대장군이라는 의미의 직함. 이만주 토벌군의 총사령관 직책이다.
30. 만리장성(萬里長城): 본래 중국의 장성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장수나 방어선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세조가 구치관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31.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조상들의 행적과 유문(遺文)을 모아 엮은 책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후대에 다른 인물의 기록이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황수신(黃守身)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黃守身
字季孝, 號懦夫。 喜之子。 永樂丁亥生。 世宗朝, 特授宗廟副丞, 歷持平、掌令、知司諫院事、承旨。 世祖卽位, 拜右參贊, 策佐翼功, 封南原君。 乙酉拜相, 至領議政。 丁亥卒, 年六十一。
번역문:
황수신(黃守身)
자는 계효(季孝), 호는 나부(懦夫)이다. 황희(黃喜)¹의 아들이다. 영락(永樂) 정해년(1407)에 태어났다. 세종(世宗) 때에 특별히 종묘부승(宗廟副丞)²에 제수되었고, 지평(持平)³, 장령(掌令)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⁵, 승지(承旨)⁶를 역임하였다.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우참찬(右參贊)⁷에 제수되었고, 좌익공신(佐翼功臣)⁸에 책록되어 남원군(南原君)⁹에 봉해졌다. 을유년(1465)에 재상(宰相)¹⁰에 제수되어 영의정(領議政)¹¹에 이르렀다. 정해년(1467)에 향년 61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 황희(黃喜, 1363-1452): 조선 전기의 명재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 세종 대에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냈다. 본문 중 '익성(翼成)'은 황희를 가리킨다.
- 종묘부승(宗廟副丞): 종묘서(宗廟署)의 종6품 관직. 종묘의 제사 관련 실무를 담당했다. '특수(特授)'는 특별히 제수되었다는 의미이다.
-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관리 감찰, 탄핵 등의 임무를 맡았다.
-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4품 관직. 지평의 윗자리이다.
-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당상관.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책임자 중 한 명이다.
-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 우참찬(右參贊):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육조판서(六曹判書)와 비슷한 지위의 재상급 관직이다.
-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책봉된 공신. 황수신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남원군(南原君): 공신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남원(南原)은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시이다.
- 배상(拜相): 재상에 임명됨. 황수신은 1465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최고위직. 정1품.
원문:
公五六歲時, 與群兒戲, 有一兒誤墮井中, 群兒駭散, 公獨解衣濡足以拯之, 翼成聞之曰: “吾家又生一宰相。” 及長, 遊興天寺, 世宗在潛邸, 至于寺, 見公與儕輩讀書, 皆招之使誦四韻詩, 公最先誦, 音節琅琅, 不差一字, 世宗甚奇之。【《潛谷舊錄》。 下竝同。】
번역문:
공(公)이 대여섯 살 때, 여러 아이들과 놀다가 한 아이가 잘못하여 우물에 빠지자 여러 아이들은 놀라 흩어졌으나, 공은 홀로 옷을 벗고 발을 적셔¹² 그 아이를 구해내니, 익성(翼成)¹³께서 이를 듣고 말하였다. “우리 집에 또 한 명의 재상(宰相)¹⁴이 태어났구나.” 자라서 흥천사(興天寺)¹⁵에서 노닐 때, 세종께서 잠저(潛邸)¹⁶에 계시다가 절에 이르러, 공이 또래들과 함께 글 읽는 것을 보시고는 모두 불러 사운시(四韻詩)¹⁷를 외우게 하였는데, 공이 가장 먼저 외웠으며 음절(音節)이 낭랑(琅琅)하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니, 세종께서 매우 기특하게 여기셨다.【《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아래도 모두 같다.】
주석:
12. 해의유족(解衣濡足): 옷을 벗고 발을 적심. 아이를 구하기 위해 직접 우물에 들어가거나 구체적인 행동을 취했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13. 익성(翼成): 황희(黃喜)의 시호. 여기서는 황수신의 할아버지 황희를 가리킨다. (본문에는 '부친(父)'으로 되어 있으나, 앞서 '희지자(喜之子)'라고 명시했고, 황희는 황수신의 부친이므로 '익성'은 황희를 지칭하는 것이 맞다. 다만, 이 일화에서 '익성'이 황희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 문맥상 명확하지 않을 수 있으나, 《잠곡구록》 원문을 확인하거나 다른 자료와 교차 검토가 필요하다. 일반적인 이해로는 황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14. 재상(宰相):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는 최고위 관직. 여기서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을 의미한다.
15. 흥천사(興天寺): 조선 초기에 서울에 있었던 큰 사찰.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16. 잠저(潛邸):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여기서는 세종이 왕자 시절, 특히 충녕대군(忠寧大君) 시절을 가리킨다.
17. 사운시(四韻詩): 네 개의 운자(韻字)를 사용하여 지은 시. 보통 8구(八句)로 이루어진 율시(律詩)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원문:
翼成尹平壤府, 宴中朝使黃儼于賓館, 觀者如堵, 公亦側在稠人中。 儼指之曰: “此渠家千里駒耶?” 公進對雍容。 儼語翼成曰: “生子如是, 後日當成偉器。” 撤案上饌與之, 又賜珍玩數事。 抵黃州, 又送膳羞曰: “昨黃相之子, 眞佳兒也。 往來于懷, 不可忘。”
번역문:
익성(翼成)께서 평양부윤(平壤府尹)¹⁸으로 있을 때, 중국 조정의 사신(中朝使) 황엄(黃儼)¹⁹을 빈관(賓館)²⁰에서 접대하였는데,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쌌으며 공 또한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었다. 황엄이 공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아이가 그대 집안의 천리마(千里駒)²¹인가?” 공이 나아가 응대하는 모습이 온화하고 침착하였다(雍容). 황엄이 익성에게 말하였다. “아들을 이와 같이 두었으니, 훗날 마땅히 위대한 인물(偉器)이 될 것입니다.” 상 위의 반찬을 거두어 그에게 주고, 또 진귀한 완호(玩好) 몇 가지를 하사하였다. 황주(黃州)에 이르러서 또 좋은 음식을 보내며 말하였다. “어제 황 정승(黃相)²²의 아들은 참으로 좋은 아이였소. 마음에 오가며 잊을 수가 없구려.”
주석:
18. 평양부윤(平壤府尹): 평양부(平壤府)의 수령. 종2품.
19. 황엄(黃儼):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 때의 환관(宦官). 여러 차례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20. 빈관(賓館): 외국 사신이 머무는 숙소.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21. 천리구(千里駒):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뛰어난 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22. 황상(黃相): 황 정승. 황희를 가리킨다.
원문:
嘗赴司馬試, 爲試官所辱, 發憤書一聯曰: “澤民濟世非由第, 不必平生作腐儒。”
번역문: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했다가 시험관(試官)에게 모욕을 당하고는, 분발하여 한 연(聯)을 써서 말하였다. “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함은 과거 급제(第)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평생을 썩은 선비(腐儒)²³로 지낼 필요는 없으리라.”
주석:
23. 부유(腐儒): 융통성 없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 또는 학문에만 얽매여 실질적인 능력이나 기개가 없는 선비를 얕잡아 이르는 말. 과거 시험관에게 모욕을 당한 후, 과거 급제만이 능사가 아님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원문:
上問吏曹曰: “黃某諸子, 仕者幾人?” 對以二散一少。 上曰: “少者莫是興天寺誦詩兒耶?” 特除宗廟副丞。
번역문:
상(上)께서 이조(吏曹)에 물으셨다. “황모(黃某)²⁴의 여러 아들 중에 벼슬하는 자가 몇 사람인가?” 이조에서 “두 명은 산관(散官)²⁵이고 한 명은 나이가 어립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나이 어린 자가 혹시 흥천사(興天寺)에서 시를 외던 아이가 아닌가?” 특별히 종묘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셨다.
주석:
24. 황모(黃某): 아무개 황씨. 황희를 가리킨다.
25. 산관(散官): 실직(實職)이 없는 문관(文官) 품계. 실무 관직 없이 관계(官階)만 가진 상태를 의미할 수 있다.
원문:
掌令時, 妖巫多聚都中, 言人禍福, 頗奇中, 士女奔波。 公獨不惑, 據經疏論, 盡黜之都外。
번역문: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요사스러운 무당(妖巫)²⁶들이 도성 안에 많이 모여들어 사람들의 화복(禍福)을 말하는데 자못 기묘하게 맞히니, 사대부가의 남녀(士女)들이 분주하게 찾아다녔다. 공은 홀로 미혹되지 않고 경전(經傳)에 근거하여 상소(疏論)하여, 그들을 모두 도성 밖으로 내쫓았다.
주석:
26. 요무(妖巫): 요사스러운 무당. 혹세무민하는 무당을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원문:
丙申², 國家新設咸吉道五鎭, 欲徙忠淸以南三道豪右鄕吏, 以實邊圉, 上擢公爲敬差官。 公條奏勸懲之方, 事以得辦。 上嘉之, 頒諸他道, 亦令以此從事。
번역문:
병신년(丙申年, 1440)²⁷에 국가에서 함길도(咸吉道)에 오진(五鎭)²⁸을 새로 설치하고, 충청도 이남 삼도(三道)의 호우(豪右)와 향리(鄕吏)²⁹들을 옮겨 변방(邊圉)을 채우고자 하여, 상(上)께서 공을 경차관(敬差官)³⁰으로 발탁하셨다. 공이 권장하고 징계하는 방책(勸懲之方)을 조목별로 아뢰어 일이 처리될 수 있었다. 상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다른 도(道)에도 반포하여 또한 이 방책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주석:
27. [주-D001] 丙申 : 《삼탄집(三灘集)・조선추충좌익공신……열성공묘비명(朝鮮推忠佐翊功臣……烈成公墓碑銘)》에도 “병신(丙申)”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연간에는 “병신(丙申)”이 없다. “경신(庚申)”(1440년, 세종 22)이 되어야 한다.
28. 오진(五鎭): 함길도 변경 지역에 설치된 다섯 개의 진(鎭). 회령(會寧),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을 가리킨다. 육진(六鎭) 개척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
29. 호우향리(豪右鄕吏): 지방에서 세력을 가진 부유한 가문(豪右)과 향리(鄕吏). 이들을 북방으로 이주시켜 변방을 강화하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책이었다.
30. 경차관(敬差官): 조선 시대 국가의 중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임시로 지방에 파견하던 관리. 여기서는 사민(徙民) 정책을 담당했다.
원문:
參判高若海請罷守令六期, 上怒, 將抵罪, 公諫曰: “若海以生員窮居草廬, 擢以用之, 遂感知遇, 盡言不諱。 今若得罪, 恐爲言事者戒。” 上爲之霽怒。
번역문:
참판(參判) 고약해(高若海)가 수령(守令)의 육기(六期)³¹를 폐지할 것을 청하자, 상께서 노하여 장차 죄를 주려 하셨다. 공이 간언하여 아뢰었다. “약해(若海)는 생원(生員)으로서 초가집에 궁하게 살던 것을 발탁하여 등용하시자, 마침내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숨김없이 말을 다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죄를 받는다면, 아마도 언관(言事者)³²들에게 경계가 될까 두렵습니다.” 상께서 그 말을 듣고 노여움을 푸셨다.
주석:
31. 수령육기(守令六期): 수령(守令)의 임기를 6년(期)으로 정한 규정. 고약해는 이를 폐지하자고 건의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32. 언사자(言事者): 임금에게 직언(直言)하거나 정책을 비판하는 신하. 주로 사헌부, 사간원의 관리를 가리킨다.
원문:
遷上護軍, 掌決都官奴婢之訟, 諜訴雲委。 公始入官, 謂僚佐曰: “天下豈有難斷之事?” 取舊案牘一覽, 盡得情僞, 處決風生, 庭無留訟。
번역문:
상호군(上護軍)³³으로 옮겨, 도관(都官)³⁴의 노비(奴婢) 소송(訟)을 판결하는 일을 맡았는데, 소장(諜訴)³⁵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공이 처음 관청에 들어가 동료(僚佐)들에게 말하였다. “천하에 어찌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옛 안독(案牘)³⁶을 가져다 한번 훑어보고는 실정(實情)과 허위(虛僞)를 모두 파악하여 바람이 일듯 처결하니, 관청 뜰에 미결된 소송(留訟)이 없었다.
주석:
33. 상호군(上護軍): 오위(五衛)에 속한 정3품 무관(武官) 벼슬.
34. 도관(都官): 소송, 특히 노비 관련 소송을 담당하던 관청이나 부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소속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나, 형조(刑曹)나 장례원(掌隷院)과 관련되었을 수 있다.
35. 첩소(諜訴): 소장(訴狀), 고소장.
36. 안독(案牘): 소송 기록이나 관련 공문서.
원문:
癸亥, 爲右副承旨, 陞都承旨。 當時敎命多出其手, 雖號爲能文者, 皆服其贍雅。 宗室有忌公者, 誣以朋黨, 上信公無他, 只收告身。
번역문:
계해년(1443)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고, 도승지(都承旨)³⁷로 승진하였다. 당시 교명(敎命)³⁸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비록 문장에 능하다고 일컬어지는 자들도 모두 그의 풍부하고 아담함(贍雅)³⁹에 탄복하였다. 종실(宗室) 중에 공을 시기하는 자가 있어 붕당(朋黨)⁴⁰을 지었다고 무고하였으나, 상께서 공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믿으시고 다만 고신(告身)⁴¹만 회수하셨다.
주석:
37. 우부승지(右副承旨), 도승지(都承旨): 모두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우부승지는 여섯 승지 중 하나이며, 도승지는 승정원의 으뜸 벼슬(영의정 다음가는 권력 실세로 여겨짐)이다.
38. 교명(敎命): 임금의 명령이나 그 문서. 승정원에서 작성하여 반포했다.
39. 섬아(贍雅): 내용이 풍부하고 문체가 우아함.
40. 붕당(朋黨): 정치적 이념이나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집단. 당시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무리를 짓는다는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41. 고신(告身): 임명장. 고신을 회수하는 것은 파직(罷職) 또는 정직(停職) 처분을 의미한다.
원문:
文宗嘗患軍陣之不整, 以公爲三軍都鎭撫。 俄遷兵曹參判, 習陣于郊外, 旌旗士卒, 精彩頓變, 上親閱甚喜, 賜廏馬一匹。 壬申, 丁外艱, 世祖在潛邸, 屢過喪次, 談論移時。
번역문:
문종(文宗)께서 일찍이 군진(軍陣)⁴²이 정돈되지 않음을 걱정하여 공을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⁴³로 삼으셨다. 얼마 후 병조참판(兵曹參判)⁴⁴으로 옮겨 교외(郊外)에서 진법(陣法)을 익히니, 정기(旌旗)와 사졸(士卒)의 위세(精彩)가 갑자기 변하였다. 상께서 친히 사열하시고 매우 기뻐하시며 마구간의 말 한 필을 하사하셨다. 임신년(1452)에 부친상(外艱)⁴⁵을 당하였는데, 세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여러 차례 상차(喪次)⁴⁶를 방문하여 한참 동안 담론(談論)하셨다.
주석:
42. 군진(軍陣): 군대의 진형(陣形) 또는 군대의 기강.
43.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 삼군(三軍)의 군율(軍律)과 훈련을 감독하던 임시 관직.
44. 병조참판(兵曹參判): 병조(兵曹)의 버금 벼슬. 종2품.
45. 정외간(丁外艱): 부친상(父親喪)을 당함. '정(丁)'은 '만나다(遭)'의 의미. '외간(外艱)'은 부친의 상을 뜻한다.
46. 상차(喪次): 상중(喪中)에 거처하는 곳. 보통 부모의 묘소 근처에 여막(廬幕)을 짓고 지냈다.
원문:
黃烈成公有寵於英廟, 後忽蹭蹬, 卜者金鶴老曰: “公無憂, 歲在乙酉, 必拜相。” 至乙酉歲, 光廟幸溫陽郡之湯泉, 憲⁴⁷宗皇帝登極, 例必三公充賀使。 時京師路梗, 難於其人, 高靈進曰: “韓明澮出使在外, 而具致寬加十年老於臣, 臣請行。” 綾城曰: “申叔舟爲首相, 在下者臣當行。” 其夕, 上私語曰: “黃守身不堪相, 然爲此行, 不可不作相。” 遂入爲右相充使, 而副奉石柱。 黃啓曰: “臣非文臣, 奉亦武人, 請得一文官爲介。” 於是以西河君任元濬爲副, 卽日肅拜, 宿于栗峯驛。 黃謂任曰: “以君之重而副於我, 我今慰心焉。” 夜半, 中使忽至曰: “元濬, 予方任使之, 不可遠出, 改以金禮蒙。” 召任速還, 黃無如之何, 執手垂涕而已。 黃竟往還無恙, 而卜者之言有符云。【《稗官雜記》。】
번역문:
황 열성공(黃烈成公)⁴⁸이 영묘(英廟)⁴⁹의 총애를 받았으나 뒤에 갑자기 좌절(蹭蹬)하였는데, 점쟁이 김학로(金鶴老)가 말하였다. “공(公)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을유년(乙酉年)이 되면 반드시 재상에 오르실 것입니다.” 을유년(1465)이 되자 광묘(光廟)⁵⁰께서 온양군(溫陽郡)의 탕천(湯泉)에 행차하셨는데, 헌종 황제(憲宗皇帝)⁵¹가 즉위하여 관례상 반드시 삼공(三公)⁵²이 하례 사신(賀使)을 맡아야 했다. 이때 경사(京師)⁵³로 가는 길이 막혀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고령(高靈)⁵⁴이 아뢰었다. “한명회(韓明澮)는 사신으로 나가 있고 구치관(具致寬)은 신(臣)보다 10년이나 더 늙었으니, 신이 가기를 청합니다.” 능성(綾城)⁵⁵이 아뢰었다. “신숙주(申叔舟)께서 수상(首相)⁵⁶이시니, 아랫사람인 신이 마땅히 가야 합니다.” 그날 저녁, 상께서 사사로이 말씀하셨다. “황수신은 재상감은 못 되지만, 이 사행(使行)을 위해서는 재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우상(右相)⁵⁷으로 들어와 사신을 맡게 되었고, 봉석주(奉石柱)가 부사(副使)가 되었다. 황수신이 아뢰었다. “신은 문신(文臣)이 아니고 봉석주 또한 무인(武人)이니, 문관(文官) 한 명을 얻어 서장관(介)⁵⁸으로 삼아주시길 청합니다.” 이에 서하군(西河君) 임원준(任元濬)을 부사로 삼으니, 즉시 숙배(肅拜)하고 율봉역(栗峯驛)에서 묵었다. 황수신이 임원준에게 말하였다. “그대처럼 중한 분이 나의 부사가 되었으니, 내 이제 마음이 놓이오.” 한밤중에 중사(中使)⁵⁹가 갑자기 이르러 말하였다. “임원준은 내가 바야흐로 임용하려 하니 멀리 보낼 수 없다. 김예몽(金禮蒙)으로 교체하라.” 임원준을 불러 속히 돌아오게 하니, 황수신은 어찌할 수가 없어 손을 잡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황수신은 마침내 무사히 다녀왔고, 점쟁이의 말이 부합하였다고 한다.【《패관잡기(稗官雜記)》⁶⁰에서 인용】
주석:
47. [주-D002] 憲 :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야언(海東野言)・세조(世祖)》에 근거할 때 앞에 “문(聞)” 자가 더 있어야 할 듯하다. 즉, 황제의 즉위 소식을 들었다는 의미(聞憲宗皇帝登極)가 된다.
48. 황 열성공(黃烈成公): 황수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열성(烈成)이 그의 시호인지, 다른 호칭인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황수신의 시호는 문절(文節) 또는 소정(昭靖)으로 전하는데, '열성'은 불명확하다. 좌익공신 교서에 '열성좌리공신(烈誠佐理功臣)'으로 기록된 바 있어 '열성(烈誠)'과 관련있을 수 있다.)
49. 영묘(英廟): 조선 영조(英祖)의 묘호(廟號). 그러나 이 이야기의 배경은 세조(世祖) 때이므로, '영묘'는 '광묘(光廟, 세조의 묘호)'의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조 때의 인물인 황수신이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
50. 광묘(光廟): 조선 세조(世祖)의 묘호.
51. 헌종 황제(憲宗皇帝): 명(明)나라 제8대 황제 성화제(成化帝). 이름은 주견심(朱見深). 1464년에 즉위하였다.
52.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조선 시대 최고위 재상들을 가리킨다.
53. 경사(京師): 수도. 여기서는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54.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의 봉호인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을 가리킨다.
55. 능성(綾城): 구치관(具致寬)의 봉호인 능성군(綾城君)을 가리킨다.
56. 수상(首相): 영의정. 당시 신숙주가 영의정이었다.
57. 우상(右相): 우의정.
58. 개(介): 서장관(書狀官). 사신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59. 중사(中使):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내시(內侍)나 승지(承旨) 등 측근 신하.
60. 《패관잡기(稗官雜記)》: 조선 후기 이유원(李裕元)이 편찬한 야담집. 여러 문헌에서 뽑은 이야기들을 모았다.
원문:
世祖幸學, 命黃守身選, 取都夏⁶¹等五人。 非文官而掌試, 古所未有。【《紀年通攷》。】
번역문:
세조께서 학교(學)⁶²에 행차하시어 황수신에게 명하여 선발하게 하여, 도하(都夏) 등 다섯 사람을 뽑았다. 문관(文官)이 아니면서 시험을 주관한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기년통고(紀年通攷)》⁶³에서 인용】
주석:
61. [주-D003] 都夏 : 저본(底本)에는 “하도(夏都)”로 되어 있다. 《삼탄집・조선추충좌익공신……열성공묘비명》, 《세조실록》 4년 윤2월 27일,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62. 학(學): 학교. 여기서는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3. 《기년통고(紀年通攷)》: 조선 후기 유계(俞棨)가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원문:
公及南智皆爲首相, 功名富貴, 當代無比。 常曰: “男子不於紅紙上題名, 餘不足觀。” 以此爲自欠耳。【《潛谷舊錄》。】
번역문:
공(公)과 남지(南智)⁶⁴가 모두 수상(首相)⁶⁵이 되어 공명(功名)과 부귀(富貴)가 당대에 비할 데 없었다. 공이 항상 말하였다. “남자로서 홍지(紅紙)⁶⁶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겼을 뿐이다.【《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64. 남지(南智, 1408-1469): 조선 전기의 문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65. 수상(首相): 영의정.
66. 홍지(紅紙): 붉은 종이. 과거 급제자의 명단을 적는 방목(榜目) 또는 합격 증서를 붉은 종이에 썼으므로, 과거 급제를 상징한다. 황수신은 과거(문과)를 거치지 않고 음서(蔭敍)와 공신 책봉 등으로 고위직에 올랐기 때문에 이를 아쉬워했다는 의미이다.
원문:
黃胡安、【致身。】烈成兩公, 皆翼成公之子也。 翼成在時, 兩相已爲宰樞。 《靑坡劇談》記“翼成飯時, 兒奴輩群擾, 至挽公鬚索食, 而公不訶”云, 則居家似一於寬柔矣。 然於子弟甚嚴, 罕言笑。 一日, 胡安兄弟同在別閣, 雨雪驟下, 咫尺不通。 兩相謀入內舍, 度不得便利, 則胡安謂烈成曰: “汝負兄可也。” 烈成方負且行, 翼成見之曰: “當此之時, 弟若投兄於地, 則其殆矣。” 烈成便投胡安於雪中, 衣巾盡汚, 翼成始怡然開笑。 兩相喜曰: “今日得大人一笑, 爲幸大矣。”【《淸江瑣語》。】
번역문:
황 호안(黃胡安)⁶⁷【치신(致身)이다】과 열성(烈成)⁶⁸ 두 공(公)은 모두 익성공(翼成公)⁶⁹의 아들이다. 익성공께서 살아 계실 때, 두 재상(兩相)⁷⁰은 이미 재추(宰樞)⁷¹의 지위에 있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⁷²에 “익성공께서 식사하실 때 아이들과 노비들이 무리지어 소란을 피우며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음식을 찾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꾸짖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집에서는 한결같이 너그럽고 부드러우셨던 듯하다. 그러나 자제(子弟)들에게는 매우 엄격하여 좀처럼 말씀하시거나 웃지 않으셨다. 하루는 호안 형제가 함께 별각(別閣)⁷³에 있는데, 눈비가 갑자기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두 재상이 내사(內舍)⁷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편히 갈 수 없을 듯하자, 호안이 열성에게 말하였다. “네가 형을 업는 것이 좋겠다.” 열성이 막 업고 가는데, 익성공께서 이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때에 아우가 만약 형을 땅에 던진다면 위태로울 것이다.” 열성이 곧 호안을 눈 속에 던져 옷과 두건이 모두 더러워지자, 익성공께서 비로소 기꺼이 웃음을 보이셨다. 두 재상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오늘 대인(大人)⁷⁵의 웃음 한번을 얻었으니, 큰 다행입니다.”【《청강쇄어(淸江瑣語)》⁷⁶에서 인용】
주석:
67. 황 호안(黃胡安): 황치신(黃致身, 1405-1484). 황희의 맏아들이며 황수신의 형이다. 호는 호안(胡安). 좌찬성(左贊成) 등을 지냈다.
68. 열성(烈成): 황수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석 48 참조.
69. 익성공(翼成公): 황희.
70. 양상(兩相): 두 재상. 황치신과 황수신 형제를 가리킨다. 두 사람 모두 정승(황수신) 또는 판서/찬성(황치신) 등 고위직에 올랐다.
71. 재추(宰樞): 재상(宰相)과 추밀(樞密)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고려 시대의 용어이나, 조선 시대에도 중추부(中樞府)의 고위 관직이나 의정부 재상 등 국가 중신(重臣)을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72. 《청파극담(靑坡劇談)》: 조선 중기 문신 이륙(李陸)이 지은 설화집.
73. 별각(別閣): 본채와 떨어진 별도의 건물.
74. 내사(內舍): 안채.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75. 대인(大人): 어른. 여기서는 아버지 황희를 존칭하는 말이다.
76. 《청강쇄어(淸江瑣語)》: 조선 중기 문신 이제신(李濟臣)이 지은 수필집. 인물 일화, 시화 등을 담고 있다.
최항(崔恒)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崔恒【文靖公。】
字貞父, 號太虛亭, 朔寧人。 永樂己丑生。 世宗十六年甲寅, 擢親試第一, 授集賢殿副修撰, 賜暇湖堂。 丁卯重試, 歷直提學、副提學、承旨。 癸酉參靖難功臣, 封寧城君。 世祖朝參佐翼功臣, 戊寅陞刑曹判書, 庚辰拜吏曹判書, 典文衡。 丁亥拜相, 至領議政。 成宗朝參佐理功臣。 甲午卒, 年六十六。
번역문:
최항(崔恒)¹【문정공(文靖公)²이다.】
자는 정부(貞父)이고, 호는 태허정(太虛亭)이며, 삭녕(朔寧)³ 사람이다. 영락(永樂) 기축년(1409)⁴에 태어났다. 세종(世宗) 16년 갑인년(1434)에 친시(親試)⁵에 장원(第一)⁶으로 뽑혀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⁷에 제수(授)되었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⁸하였다. 정묘년(1447) 중시(重試)⁹에 합격하였고, 직제학(直提學)¹⁰, 부제학(副提學)¹¹, 승지(承旨)¹²를 역임하였다. 계유년(1453)에 정난공신(靖難功臣)¹³에 참여하여 영성군(寧城君)¹⁴에 봉해졌다. 세조(世祖) 시대에 좌익공신(佐翼功臣)¹⁵에 참여하였고, 무인년(1458)에 형조 판서(刑曹判書)¹⁶로 승진하였으며, 경진년(1460)에 이조 판서(吏曹判書)¹⁷에 임명되어 문형(文衡)¹⁸을 관장하였다. 정해년(1467)에 재상(拜相)¹⁹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²⁰에 이르렀다. 성종(成宗) 시대에 좌리공신(佐理功臣)²¹에 참여하였다. 갑오년(1474)²²에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주석:
- 최항(崔恒, 1409~1474):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정부(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동량(㠉梁), 본관은 삭녕(朔寧).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 《용비어천가》 주석, 《동국정운》, 《경국대전》 편찬 등 많은 중요 사업에 참여했으며, 세조 즉위를 도와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영의정까지 올랐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고, 정(靖)은 너그럽고 화목하며 다툼이 없음(寬樂令終) 또는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음(恭己鮮言) 등을 의미한다.
- 삭녕(朔寧): 본관(本貫). 삭녕 최씨(朔寧 崔氏)이다.
- 영락(永樂) 기축년(1409): 영락은 명(明)나라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연호(1403~1424). 기축년은 1409년이다.
- 친시(親試): 임금이 직접 시험관이 되어 주관하는 과거 시험.
- 장원(第一): 과거 시험에서 첫째 등급 또는 첫째로 뽑힌 사람.
-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 집현전은 세종 때 설치된 학문 연구 및 국왕 자문 기구. 부수찬은 정6품 관직이다.
-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호당은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또는 그 장소(독서당). 임금이 학문 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시행했다.
-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다시 보이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승진시켰다.
- 직제학(直提學): 집현전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벼슬.
- 부제학(副提學): 집현전의 종3품 벼슬. 제학(提學)을 보좌했다.
-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 정난공신(靖難功臣):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최항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영성군(寧城君): 군(君)은 조선 시대 종친 또는 공신에게 주던 작위.
-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책록된 공신. 최항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형조 판서(刑曹判書): 형조(刑曹)는 조선시대 육조(六曹)의 하나로 법률, 소송, 형벌, 노비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판서는 정2품 장관이다.
-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는 육조의 하나로 문관(文官)의 인사, 공훈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판서는 정2품 장관이다.
- 문형(文衡): 문관의 선발과 문풍(文風)을 관장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주로 예문관 대제학이나 이조 판서가 겸임하며 문단과 학계를 주도하는 상징적인 역할이었다. ‘전문형(典文衡)’은 문형을 관장했다는 뜻.
- 배상(拜相): 재상(宰相)에 임명됨. 조선 시대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삼공(三公) 또는 삼정승이라 하여 최고의 재상으로 여겼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 좌리공신(佐理功臣): 1468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1471년(성종 2)에 내린 공신호. 최항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갑오년(1474): 서기 1474년.
원문:
公自髫齔聰明絶類, 知讀書, 能自刻勵, 淹貫經史, 善屬文, 浩汗發越, 有作者氣。 其父曰: “吾兒骨法異常, 終非小成者。 天其或者大興吾門乎!”
번역문:
공(公)은 어릴 때(髫齔)¹부터 총명함이 남달라(絶類)²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스스로 힘써 노력하여(刻勵)³ 경사(經史)⁴에 널리 통달하였으며(淹貫), 글을 잘 지었는데(善屬文)⁵, (문장이) 넓고 깊어(浩汗)⁶ 기세가 드러나니(發越)⁷ 작가(作者)⁸의 기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내 아들은 골법(骨法)⁹이 비상하니, 끝내 작은 성취에 그칠 자가 아니다. 하늘이 혹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키려 하는가!”
주석:
- 초츤(髫齔): 초(髫)는 아이들의 늘어뜨린 머리털,츤(齔)은 유치(乳齒)가 빠지고 영구치(永久齒)가 나는 것을 의미. 대략 7~8세 무렵의 어린 나이를 가리킨다.
- 절류(絶類): 같은 무리나 종류 중에서 아주 뛰어남.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남을 의미.
- 각려(刻勵): 스스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노력함.
- 경사(經史):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아울러 이르는 말.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의미하며, 당시 학문의 기본이었다.
- 선속문(善屬文): 글을 잘 짓거나 엮음. 문장력이 뛰어남을 뜻한다.
- 호한(浩汗): 물이 넓고 큰 모양. 문장이나 학식이 넓고 깊음을 비유한다.
- 발월(發越): 재능이나 기세 등이 겉으로 뛰어나게 드러남.
- 작가(作者): 여기서는 단순히 글을 짓는 사람을 넘어, 독창적이고 뛰어난 문장가를 의미한다.
- 골법(骨法): 사람의 골격이나 생김새. 인물의 됨됨이나 장래성을 판단하는 관상학적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원문:
授經筵司經, 與修《資治綱目》、《通鑑訓義》。 止齋權文景公深器之, 以姊子妻之。 每見著述歎曰: “吾東方文體萎薾, 日就卑下, 能以古文發揚振起者, 必此人也。” 有衣鉢當傳之句, 乃用范魯公質古事, 止齋亦甲午大魁也。
번역문:
경연(經筵)¹의 사경(司經)²에 임명되어 《자치강목(資治綱目)》³, 《통감훈의(通鑑訓義)》⁴ 편수에 참여하였다. 지재(止齋)⁵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⁶가 그를 매우 뛰어나게 여겨(深器之)⁷ 누이의 아들(조카딸)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매번 그의 저술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우리 동방(東方)⁹의 문체가 시들어(萎薾)¹⁰ 날로 저급해지는데, 고문(古文)¹¹으로써 이를 드날리고(發揚) 떨쳐 일으킬(振起)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그에게 의발(衣鉢)¹²을 마땅히 전수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는 범로공(范魯公) 질(質)¹³의 고사(古事)를 쓴 것이니, 지재 또한 갑오년(1414)의 장원(大魁)¹⁴이었다.
주석:
-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며 학문과 정치를 논하던 자리.
- 사경(司經): 경연에 속한 정6품 관직. 경서 강의를 담당했다.
- 《자치강목(資治綱目)》: 중국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목체(綱目體)로 재편찬한 역사서. 세종 때 이를 교정하고 주석을 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 《통감훈의(通鑑訓義)》: 《자치통감》의 내용을 해석하고 풀이한 책. 최항 등이 편찬에 참여했다.
- 지재(止齋): 권제(權踶)의 호(號).
-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 1387~1441): 조선 전기의 문신. 권근(權近)의 아들. 시호는 문경(文景). 집현전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초기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했으나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 심기지(深器之): 그릇(器)으로 삼을 만하다고 깊이 여김. 즉, 재능과 인품을 매우 높이 평가함을 의미한다.
- 자자(姊子): 자(姊)는 손위 누이, 자(子)는 자식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조카딸(姪女)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제의 딸이 최항에게 시집갔다.
- 동방(東方): 동쪽에 있는 나라, 즉 우리나라(조선)를 가리킨다.
- 위이(萎薾): 초목이 시들어 누렇게 됨. 문체가 생기를 잃고 쇠퇴함을 비유한다.
- 고문(古文): 중국 당송(唐宋) 시대에 일어난 문체 개혁 운동에서 추구한, 진한(秦漢) 이전의 산문체. 형식적인 변려문(騈儷文)을 배격하고 내용 전달에 충실한 문체를 지향했다. 권제는 최항이 이러한 고문으로 당시 문단의 폐단을 극복할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 의발(衣鉢): 원래 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法)을 전수하며 함께 물려주는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의미. 학문이나 기예 등의 정수(精髓)를 전수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범로공(范魯公) 질(質, 907~964): 중국 오대(五代) 후주(後周)와 북송(北宋) 초기의 재상 범질(范質). 자는 문소(文素), 시호는 문소(文素).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다. 범질이 젊은 조보(趙普)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고사 등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스승이 뛰어난 제자에게 학문이나 도(道)를 전수함을 비유하는 맥락에서 인용되었다.
- 대괴(大魁): 과거 시험의 장원(壯元). 권제는 1414년(태종 1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원문:
英陵初制諺文, 神思睿智, 高出百王。 集賢諸儒合辭陳其不可, 至有抗疏極論者。 英陵命公及申文忠公叔舟等掌其事, 作《訓民正音》、《東國正韻》等書, 吾東方語音始定。 雖規模措置, 皆稟睿旨, 而公之協贊亦多。
번역문:
영릉(英陵)¹께서 처음 언문(諺文)²을 창제하실 때, 신묘한 생각과 예지(睿智)가 역대 왕들보다 뛰어나셨다. 집현전의 여러 유학자들이 함께 말하며 그 불가함을 아뢰었고, 상소를 올려 극력으로 반대하는 자³까지 있었다. 영릉께서 공과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⁴ 등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시어 《훈민정음(訓民正音)》⁵, 《동국정운(東國正韻)》⁶ 등의 책을 만드니, 우리 동방의 어음(語音)⁷이 비로소 정해졌다. 비록 규모와 조치는 모두 예지(睿旨)⁸를 받들었으나, 공의 협찬(協贊)⁹ 또한 많았다.
주석:
- 영릉(英陵): 조선 제4대 임금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능호(陵號). 세종을 지칭한다.
- 언문(諺文): 훈민정음, 즉 한글을 낮추어 부르던 말. 당시 식자층은 진서(眞書)인 한자(漢字)에 대비하여 한글을 속된 글자라는 의미로 이렇게 불렀다.
- 상소를 올려 극력으로 반대한 자: 1444년(세종 26)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이 올린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를 가리킨다. 이들은 중국 문자인 한자를 버리고 언문을 만드는 것은 사대(事大)의 도리에 어긋나고 문명(文明)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시호는 문충(文忠).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하였고, 외교와 국방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 《훈민정음(訓民正音)》: 1443년(세종 25) 창제되고 1446년(세종 28) 반포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 체계. 또는 그 문자에 대해 해설한 책의 이름. 최항은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참여했다.
- 《동국정운(東國正韻)》: 1448년(세종 30)에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 당시 혼란스러웠던 한자음을 바로잡고 통일된 표준음을 제시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최항은 신숙주 등과 함께 편찬을 주도했다.
- 어음(語音): 말의 소리. 여기서는 한국어의 음운 체계와 한자음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
- 예지(睿旨): 임금의 뜻이나 명령.
- 협찬(協贊): 도와서 일을 원만히 이루도록 함.
원문:
英陵命金汶、金鉤及公等定¹《小學》、《四書》《五經口訣》。 居正亦與其後, 每見諸君講論同異, 公議論發越, 諸君咸推讓之。
번역문:
영릉께서 김문(金汶)², 김구(金鉤)³ 및 공 등에게 명하여 《소학(小學)》⁴, 《사서(四書)》⁵, 《오경(五經)》⁶의 구결(口訣)⁷을 정(定)하게 하셨다. 거정(居正)⁸ 또한 그 후에 참여하였는데, 여러 군자들이 강론하며 의견이 다른 것을 볼 때마다 공의 의론(議論)이 뛰어나니(發越)⁹, 여러 군자들이 모두 그에게 추양(推讓)¹⁰하였다.
주석:
- [주-D001] 定 : 저본(底本)에는 “지(之)”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태허정집(太虛亭集)・최문정공비명(崔文靖公碑銘)》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定’은 ‘정하다’, ‘바로잡다’의 의미로 문맥상 적절하다.
- 김문(金汶, ?~1448): 조선 전기의 문신. 집현전 학사로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 등에 참여했다.
- 김구(金鉤, 1422~?): 조선 전기의 문신. 김문(金汶)의 아들. 집현전 학사였다.
- 《소학(小學)》: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와 유청지(劉淸之)가 편찬한 아동용 유교 윤리 입문서.
- 《사서(四書)》: 유교의 기본 경전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통칭하는 말.
- 《오경(五經)》: 유교의 다섯 가지 중요 경전.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 구결(口訣): 한문을 우리말로 읽기 위해 한자 옆이나 사이에 달아 쓰던 표기 부호. 세종 때 구결을 정비하여 한문 독법의 표준화를 시도했다.
- 거정(居正):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호는 사가(四佳). 이 글(최항 비명)의 저자이다.
- 발월(發越): 재능이나 의론 등이 뛰어나게 드러남.
- 추양(推讓): 남을 높여 양보함. 여기서는 최항의 뛰어난 견해에 동료들이 탄복하여 그의 의견을 따랐다는 의미이다.
원문:
顯陵陟遐, 幼沖在位, 國勢疑危。 公居左右宥密之地, 周旋其間, 出納惟謹。 癸酉, 光陵炳幾靖難, 公適直禁內, 協贊之功亦多。
번역문:
현릉(顯陵)¹께서 승하(陟遐)²하시고 어린 임금(幼沖)³께서 왕위에 계시니, 나라 형세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공은 좌우의 비밀스러운 자리(左右宥密之地)⁴에 있으면서 그 사이에서 주선(周旋)⁵하고, 명령의 출납(出納)⁶을 오직 삼갔다. 계유년(1453)에 광릉(光陵)⁷께서 기미(幾)⁸를 밝게 살피시어 정난(靖難)⁹하실 때, 공이 마침 금내(禁內)¹⁰에서 숙직(直)¹¹하고 있어 협찬(協贊)한 공 또한 많았다.
주석:
- 현릉(顯陵): 조선 제5대 임금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의 능호.
- 척하(陟遐): 멀리 가다. 임금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승하(昇遐)와 같은 의미이다.
- 유충(幼沖): 나이가 어리고 성품이 겸허함. 여기서는 12세에 즉위한 어린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을 가리킨다.
- 좌우유밀지지(左右宥密之地): 임금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며 기밀(機密)에 참여하는 중요한 직책. 당시 최항은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있었다.
- 주선(周旋): 여러 사람 사이에서 일을 잘 처리함. 어려운 상황 속에서 중재하고 대처함을 의미한다.
- 출납(出納): 왕명의 출납. 임금의 명령을 받고 전달하는 일을 가리킨다.
- 광릉(光陵): 조선 제7대 임금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능호. 계유정난 당시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었다.
- 기(幾): 기미(幾微). 일이 일어나거나 변화하려는 아주 미미한 조짐.
- 정난(靖難):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가리킨다.
- 금내(禁內): 대궐 안.
- 직(直): 관청이나 궁궐에서 숙직(宿直)함.
원문:
光陵親製訓辭, 授昌陵, 命公註解。 公逐條分注, 節目詳盡, 又引諸儒之說論斷, 辭旨通暢, 上甚嘉悅。
번역문:
광릉(光陵)¹께서 친히 훈사(訓辭)²를 지어 창릉(昌陵)³께 주시면서 공에게 명하여 주해(註解)⁴하게 하셨다. 공은 조목마다 나누어 주석(分注)⁵을 달아 조목(節目)⁶이 상세하고 완벽했으며, 또 여러 유학자들의 설을 인용하여 논단(論斷)⁷하니, 글의 뜻(辭旨)⁸이 통창(通暢)⁹하여 상(上)께서 매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셨다.
주석:
- 광릉(光陵): 세조(世祖)를 가리킨다.
- 훈사(訓辭): 가르침을 주는 글. 여기서는 세조가 세자(훗날 예종)에게 내린 교훈적인 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창릉(昌陵): 조선 제8대 임금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의 능호. 당시에는 세자(世子)였다.
- 주해(註解): 본문의 뜻을 자세히 풀이함. 또는 그 글.
- 분주(分注): 조목이나 구절을 나누어 주석을 닮.
- 절목(節目): 글의 조목과 세목. 내용의 구성과 체계를 의미한다.
- 논단(論斷): 어떤 문제에 대하여 판단을 내림. 여기서는 여러 학설을 비교 검토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 사지(辭旨): 글의 내용과 취지.
- 통창(通暢): 글이나 말이 막힘없이 시원하고 명료함.
원문:
光陵嘗歎東方學者, 語音不正, 句讀不明, 雖有權近、鄭夢周口訣, 紕繆尙多, 腐儒俗士, 傳訛承誤。 遂命鄭麟趾、申叔舟、丘從直、金禮蒙、韓繼禧及公與臣居正等, 分授《五經》、《四書》, 考古證今, 定口訣以進。 光陵又召會諸臣, 講論同異, 親加睿裁。 公在左右, 每承顧問, 毫分縷析, 應對如響, 皆愜衆意。 光陵目左右曰: “眞天才也。”
번역문:
광릉께서 일찍이 동방(東方) 학자들이 어음(語音)¹이 바르지 못하고 구두(句讀)²가 분명하지 않으며, 비록 권근(權近)³, 정몽주(鄭夢周)⁴의 구결(口訣)⁵이 있으나 잘못(紕繆)⁶이 여전히 많아 부유(腐儒)⁷와 속사(俗士)⁸들이 그릇된 것을 전하고 잘못을 답습한다고 탄식하셨다. 마침내 정인지(鄭麟趾)⁹, 신숙주(申叔舟), 구종직(丘從直)¹⁰, 김예몽(金禮蒙)¹¹, 한계희(韓繼禧)¹² 및 공과 신(臣) 거정(居正)¹³ 등에게 명하여 《오경(五經)》, 《사서(四書)》를 나누어 맡아 옛것을 상고하고 지금의 것을 증험하여(考古證今)¹⁴ 구결을 정하여 올리게 하셨다. 광릉께서 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아 그 같고 다름을 강론(講論)하게 하시고 친히 예단(睿裁)¹⁵을 내리셨다. 공이 좌우에 있으면서 매번 고문(顧問)을 받들 때마다 터럭을 나누고 실오라기를 가르듯(毫分縷析)¹⁶ 분석하여 메아리처럼 응대(應對如響)¹⁷하니, 모두 여러 사람의 뜻에 꼭 맞았다(愜衆意)¹⁸. 광릉께서 좌우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참으로 천재로다.”
주석:
- 어음(語音): 말의 소리. 한자(漢字)의 발음을 가리킨다.
- 구두(句讀): 글의 구절을 끊어 읽는 것.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중요하게 여겼다.
- 권근(權近, 1352~140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학자. 호는 양촌(陽村). 성리학의 대가로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말의 문신, 학자. 호는 포은(圃隱). 성리학의 대가로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 구결(口訣): 한문을 우리말로 읽기 위해 사용한 표기 부호. 권근, 정몽주 등도 구결을 사용했으나, 세조는 그것이 완전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 비류(紕繆): 일이나 글의 내용이 뒤섞여 갈피를 잡기 어렵게 되거나 그릇됨. 오류.
- 부유(腐儒): 완고하고 식견이 좁으며 현실에 어두운 유학자.
- 속사(俗士): 학식이나 견문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밝은 사람.
-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호는 학역재(學易齋). 훈민정음 창제, 《고려사》 편찬 등에 참여했다.
- 구종직(丘從直, 1412~1479):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졸옹(拙翁).
- 김예몽(金禮蒙, 1406~1469):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순(子順).
- 한계희(韓繼禧, 1423~148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순(子順), 호는 문양(文襄).
- 거정(居正): 서거정(徐居正). 이 글의 저자.
- 고고증금(考古證今): 옛것을 상고(詳考)하여 현재의 것을 증명하거나 확인함.
- 예재(睿裁): 임금의 판단이나 결정.
- 호분루석(毫分縷析): 가는 터럭을 나누고 실오라기를 가르듯 한다는 뜻으로, 사물을 매우 자세하고 명료하게 분석함을 이르는 말.
- 응대여향(應對如響):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듯 한다는 뜻으로, 물음에 대해 막힘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답함을 이르는 말.
- 협중의(愜衆意): 여러 사람의 마음에 꼭 들어맞음.
원문:
公性謙恭簡靜, 端介無華, 立身行己, 常持正不撓。 平居雖隆冬盛夏, 終日正冠危坐, 不設惰容, 雖造次, 未嘗疾言遽色。 奉公守正, 憂國如家。 再入相, 政務寬大, 不喜更張。 與人言, 常先示退損, 不自表襮, 又不立崖岸自異。 至如朝廷議論, 臨決大事, 確不可犯。 居家淸白, 關節不到, 不邇聲色, 不事産業, 淡如也。
번역문:
공의 성품은 겸손하고 공손하며(謙恭) 간결하고 고요하며(簡靜)¹, 단정하고 지조가 굳으며(端介)² 꾸밈이 없었다(無華). 입신(立身)하고 행실(行己)³함에 항상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不撓). 평소 거처할 때 비록 한겨울(隆冬)이나 한여름(盛夏)에도 종일 관(冠)을 바로 쓰고 위좌(危坐)⁴하여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비록 황급한(造次)⁵ 때라도 일찍이 말을 빠르게 하거나 얼굴색을 급히 바꾸는(疾言遽色)⁶ 일이 없었다. 공무를 받들고 정도를 지키며(奉公守正),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 하였다. 두 차례 재상(入相)⁷이 되어서는 정사(政務)를 너그럽고 크게 처리하여(寬大) 제도를 자주 고치는 것(更張)⁸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말할 때는 항상 먼저 물러나고 겸손함(退損)⁹을 보여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不自表襮)¹⁰, 또한 모난 언행(崖岸)¹¹을 세워 남과 다르게 하지 않았다. 조정의 의논이나 큰일을 결정할 때에 이르러서는 확고하여 범할 수 없었다. 집에서는 청백(淸白)¹²하여 청탁(關節)¹³이 이르지 않았고, 성색(聲色)¹⁴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산업(産業)¹⁵을 일삼지 않아 담박(淡如)¹⁶하였다.
주석:
- 겸공간정(謙恭簡靜): 겸손하고 공손하며, 꾸밈없이 소박하고 고요함.
- 단계(端介): 몸가짐이 단정하고 지조(志操)가 굳음.
- 입신행기(立身行己): 사회적으로 기반을 세우고 자신의 몸가짐과 행실을 닦음.
- 위좌(危坐): 무릎을 꿇고 몸을 세워 단정히 앉는 자세. 공경하거나 삼가는 태도를 나타낸다.
- 조차(造次): 잠깐 사이. 매우 짧고 황급한 때를 의미한다. 《논어》 〈이인(里仁)〉에 “군자는 밥 먹는 잠깐 동안이라도 인(仁)을 어기지 않으니, 반드시 조차(造次)에도 그러하며 전패(顚沛)에도 그러하다(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라는 구절이 나온다.
- 질언거색(疾言遽色): 빠른 말씨와 급한 얼굴빛. 몹시 흥분하거나 화가 난 상태를 나타내는 말.
- 재입상(再入相): 두 차례 재상(정승)이 됨. 최항은 1467년(세조 13)과 1471년(성종 2)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 경장(更張): 거문고 줄을 바꾸어 맨다는 뜻으로, 사회적, 정치적으로 폐단이 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 최항은 급격한 개혁보다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 퇴손(退損): 뒤로 물러나 자신을 낮춤. 겸양(謙讓)과 같은 의미이다.
- 불자표박(不自表襮): 스스로를 겉으로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음. 표박(表襮)은 겉으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 애안(崖岸): 언덕이나 낭떠러지처럼 모가 나고 가파른 형세.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가 오만하고 까다로워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함을 비유한다.
- 청백(淸白):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며 결백함.
- 관절(關節): 원래는 뼈마디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부정한 청탁이나 뇌물을 의미한다.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는 뜻.
-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女色). 감각적인 쾌락을 의미한다.
- 산업(産業): 생계를 위한 일이나 재산. 재산 증식에 힘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 담여(淡如):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담박(淡泊)과 같은 의미이다.
원문:
公遇事, 常加三思, 立朝四十年, 一不被公劾。 自登第至台輔, 常兼館閣, 未嘗一日寄外。 慨然以斯道爲己任。 爲文章, 不蹈古人畦畛, 自出機杼, 大放以肆, 雄豪富贍, 如長江、大河, 滔滔汨汨, 百折逶迤, 勢不能止。 尤工於騈儷, 屢掌文闈, 得人甚盛。 凡朝廷事大表箋, 高文大冊, 皆出其手。 華人每稱我國表詞精切, 皆公所著也。【竝徐四佳居正撰碑。】
번역문:
공은 일을 당하면 항상 세 번 생각하였고(三思)¹, 조정에 선 지 40년 동안 한 번도 공적인 탄핵(公劾)²을 받지 않았다. 급제하여 재상(台輔)³에 이르기까지 항상 관각(館閣)⁴을 겸직하였고, 일찍이 하루도 외직(外職)⁵에 나간 적이 없었다. 개연(慨然)⁶히 사도(斯道)⁷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문장을 지을 때는 옛사람의 틀(畦畛)⁸을 밟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機杼)⁹으로 지어내어, 크게 펼쳐내니(大放以肆)¹⁰, 웅장하고 호방하며(雄豪) 풍부하고 아름다워(富贍)¹¹, 마치 장강(長江)이나 대하(大河)가 도도히 흘러(滔滔汨汨) 백 번 꺾여 구불구불 흘러가도(百折逶迤) 그 기세를 멈출 수 없는 것과 같았다. 특히 변려문(騈儷)¹²에 뛰어나 여러 차례 문위(文闈)¹³를 관장하여 인재를 얻음이 매우 성대하였다. 무릇 조정의 사대(事大)¹⁴ 문서인 표전(表箋)¹⁵과 중요한 공문서(高文大冊)¹⁶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중국 사신(華人)¹⁷들이 매번 우리나라 표문(表詞)¹⁸이 정밀하고 간절(精切)¹⁹하다고 칭찬했는데, 모두 공이 지은 것이었다.【이상은 서사가(徐四佳)²⁰ 거정(居正)이 지은 비문(碑)에서 인용】
주석:
- 삼사(三思): 세 번 생각함. 일을 신중하게 처리함을 의미한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계문자(季文子)가 세 번 생각한 뒤에 행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 공핵(公劾): 공적인 탄핵. 관리의 비위나 잘못을 드러내어 처벌을 요구하는 것.
- 태보(台輔): 태(台)는 삼공(三公)을 의미하고, 보(輔)는 보좌함을 의미. 재상(宰相), 정승(政丞)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 관각(館閣): 관(館)은 예문관(藝文館), 각(閣)은 집현전(集賢殿) 또는 홍문관(弘文館) 등을 가리키는 말. 학문 연구와 서적 관리, 왕의 자문 등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구였다. 최항은 집현전 출신으로 평생 관각의 직책을 겸했음을 의미한다.
- 외직(外職): 중앙 관직에 대응하는 지방 관직.
- 개연(慨然): 의기(義氣)가 북받쳐 의롭고 용감하게 나서는 모양. 또는 강개(慷慨)하여 슬퍼하거나 탄식하는 모양. 여기서는 굳은 의지로써 임무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 사도(斯道): 이 길. 유학(儒學)의 도(道) 또는 학문과 문장(文章)의 길을 가리킨다.
- 예진(畦畛): 밭두둑과 길의 경계. 사물의 한계나 범위, 또는 기존의 규범이나 격식을 비유한다. 최항의 문장이 독창적이었음을 나타낸다.
- 기저(機杼): 베틀(機)의 북(杼). 베를 짜는 독창적인 방법을 비유하여, 글을 짓는 독창적인 생각이나 기교를 의미한다.
- 대방이사(大放以肆): 크게 펼쳐 거리낌 없이 써 내려감. 문장의 기세가 호방하고 자유분방함을 나타낸다.
- 웅호(雄豪), 부섬(富贍): 문장의 기상이 웅장하고 호방하며, 내용이 풍부하고 표현이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 변려(騈儷): 한문(漢文) 문체의 하나. 대구(對句)를 많이 사용하고 음조(音調)와 수사(修辭)를 중시하는 화려한 문체이다. 변려문(騈儷文).
- 문위(文闈): 과거 시험장을 의미. ‘문위(文闈)를 관장하다’는 것은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인재를 선발했음을 의미한다.
- 사대(事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외교 정책. 조선은 명(明)나라에 대해 사대 정책을 취했다.
- 표전(表箋): 표(表)와 전(箋)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 여기서는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외교 문서를 가리킨다.
- 고문대책(高文大冊): 중요한 내용의 공문서나 기록.
- 화인(華人): 중국 사람. 특히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들을 가리킨다.
- 표사(表詞): 표문(表文)의 내용이나 문장.
- 정절(精切): 내용이 정밀(精密)하고 표현이 간절(懇切)함. 외교 문서로서 내용이 정확하고 예의에 맞으며 정중함을 의미한다.
- 서사가(徐四佳): 서거정(徐居正)의 호.
원문:
寧城崔先生, 早有大志, 博極群書, 涵養精熟, 發而爲文者, 亦復奧妙, 名聲已挺於諸輩中。 宣德甲寅, 世宗臨雍策士, 先生裒然爲大魁, 擢入集賢殿, 陪侍經幄, 昵被知遇。 在鑾坡者十七年, 盡閱中秘書, 淹貫今古, 集文章之大成, 獨步當時。 文宗卽位, 眷注亦隆, 爲諫大夫, 爲承旨, 常兼館職。 及佐我世祖, 再參勳盟, 位尊台鼎。 當作新文運之日, 自任斯文制作之責, 《五經》《四書口訣》、《經國大典》等編, 皆所纂定也。 逮我聖上臨御, 又策勳烈, 再入相, 左右贊襄, 恢弘文敎, 撰《世祖》《睿宗實錄》, 皆爲總裁。 爵位愈高, 而文名益重, 如公卿碑碣, 官署、寺院紀功載績者, 與夫一時四方求文字者, 得公片言隻字, 如獲拱璧, 而珍寶之。【四佳撰文集序。】
번역문:
영성(寧城) 최 선생(崔先生)¹은 일찍이 큰 뜻을 품고 여러 서적을 널리 탐독하여 정밀하게 함양(涵養)²하고 익히니, 글로 드러난 것 또한 오묘(奧妙)³하여 명성이 이미 동료들 가운데 뛰어났다. 선덕(宣德)⁴ 갑인년(1434)에 세종께서 용(雍)⁵에 임하여 선비를 책(策)⁶하실 때, 선생이 우뚝이 장원(大魁)이 되어 집현전(集賢殿)에 발탁되어 들어가 경연(經幄)⁷에 배시(陪侍)하며 가까이에서 지우(知遇)⁸를 받았다. 난파(鑾坡)⁹에 있은 지 17년 동안 궁중의 비서(祕書)¹⁰를 남김없이 열람하여 고금(古今)에 통달하였고 문장의 대성(大成)을 이루어 당시에 독보적이었다. 문종(文宗)께서 즉위하시자 권고(眷顧)와 주목(注目)¹¹이 또한 융숭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¹², 승지(承旨)가 되었고 항상 관직(館職)¹³을 겸하였다. 우리 세조(世祖)를 보좌함에 미쳐서는 두 차례 공신 책훈(勳盟)¹⁴에 참여하여 지위가 재상(台鼎)¹⁵으로 높아졌다. 새로운 문운(文運)을 일으킬 때를 당하여 스스로 사문(斯文)¹⁶ 제작(制作)의 책임을 맡아, 《오경(五經)》, 《사서구결(四書口訣)》, 《경국대전(經國大典)》¹⁷ 등의 편찬은 모두 그가 찬정(纂定)¹⁸한 것이다. 우리 성상(聖上)¹⁹께서 임어(臨御)²⁰하심에 이르러 또 공훈(勳烈)이 책록되고 다시 재상(入相)이 되어 좌우에서 찬양(贊襄)²¹하며 문교(文敎)²²를 넓히고 넓혔으며, 《세조실록(世祖實錄)》²³, 《예종실록(睿宗實錄)》²⁴ 편찬에 모두 총재관(總裁)²⁵이 되었다. 작위(爵位)가 더욱 높아질수록 문명(文名)은 더욱 무거워져서, 공경(公卿)의 비갈(碑碣)²⁶, 관서(官署)·사원(寺院)의 기공(紀功)·재적(載績)²⁷하는 글과, 또한 한 시대 사방에서 문자를 구하는 자들이 공의 짧은 말 한마디 글자 한 자(片言隻字)²⁸를 얻으면 공벽(拱璧)²⁹을 얻은 듯이 여겨 진귀하게 보배로 삼았다.³⁰【사가(四佳)가 지은 문집 서문(文集序)에서 인용】
주석:
- 영성(寧城) 최 선생(崔先生): 영성군(寧城君) 최항을 높여 부르는 말.
- 함양(涵養): 학문이나 품성 등을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갈고 닦음.
- 오묘(奧妙): 깊고 미묘함.
- 선덕(宣德): 명(明)나라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연호(1426~1435).
- 용(雍): 벽옹(辟雍). 고대 중국에서 천자가 세운 학교를 의미. 여기서는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또는 임금이 친히 과거 시험을 보이는 장소를 가리킨다.
- 책(策): 임금이 과거 시험에서 직접 문제를 내어 선비를 시험하는 것. 책문(策問).
- 경악(經幄): 경연(經筵)을 달리 이르는 말. 악(幄)은 휘장.
- 지우(知遇): 자신의 재능과 인품을 알아주는 대우. 임금의 총애와 인정을 받음을 의미한다.
- 난파(鑾坡): 임금이 타는 수레가 다니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관청, 특히 승정원(承政院)이나 예문관(藝文館) 등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 비서(祕書): 궁궐 안에 비장된 서적. 귀중한 서적을 의미한다.
- 권주(眷注): 임금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줌.
-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관직. 간쟁(諫諍)을 담당했다.
- 관직(館職): 집현전이나 홍문관 등 관각(館閣)의 직책.
- 훈맹(勳盟): 공신 책훈 때 공신과 임금이 맺는 맹약 또는 공신으로 책록되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을 가리킨다.
- 태정(台鼎): 태(台)는 삼태성(三台星)으로 삼공(三公)을 상징하고, 정(鼎)은 세 발 솥으로 역시 재상을 상징한다. 최고위 재상직을 의미한다.
- 사문(斯文): 이 글, 이 학문. 유학(儒學) 또는 문장(文章)을 가리킨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의 기본 법전.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 반포되었다. 최항은 편찬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 찬정(纂定): 자료를 모아 편집하고 체계를 세워 완성함.
- 성상(聖上): 현재의 임금. 이 글이 쓰인 시점의 임금, 즉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을 가리킨다.
- 임어(臨御): 임금이 나라를 다스림. 즉위(卽位).
- 찬양(贊襄): 임금을 곁에서 돕고 일을 성사시킴.
- 문교(文敎): 학문과 교육, 문화 등 문(文)에 의한 교화(敎化).
-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
- 《예종실록(睿宗實錄)》: 예종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
- 총재(總裁): 실록 편찬 등 국가적인 편찬 사업을 총괄하는 책임자. 총재관(總裁官).
- 비갈(碑碣): 비석(碑石)과 갈석(碣石). 공적이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돌. 또는 거기에 새긴 글.
- 기공(紀功), 재적(載績): 공로를 기록하고 업적을 실음.
- 편언척자(片言隻字): 짧은 말 한마디와 글자 한 자. 아주 짧은 글을 의미한다.
- 공벽(拱璧): 두 손으로 받들어 드는 큰 구슬. 매우 귀중한 보물을 비유한다. 최항의 글을 얻는 것이 보물을 얻는 것과 같이 귀하게 여겨졌음을 뜻한다.
- 이 단락은 서거정(徐居正)이 최항의 문집 《태허정집(太虛亭集)》에 쓴 서문(序文)의 내용을 요약, 인용한 것이다.
박원형(朴元亨)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朴元亨【文憲公。】
字之衢, 號晩節堂。 世宗十六年甲寅, 擢謁聖。 世祖朝, 策佐翼功臣, 官至領議政, 封延城府院君。 配享睿宗廟庭。
번역문:
박원형(朴元亨)¹【문헌공(文憲公)²이다.】
자는 지구(之衢)이고, 호는 만절당(晩節堂)³이다. 세종(世宗) 16년 갑인년(1434)에 알성시(謁聖試)⁴에 뽑혔다. 세조(世祖) 시대에 좌익공신(佐翼功臣)⁵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영의정(領議政)⁶에 이르렀으며,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⁷에 봉해졌다. 예종(睿宗)의 묘정(廟庭)⁸에 배향(配享)⁹되었다.
주석:
- 박원형(朴元亨, 1411~1469):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허백당(虛白堂), 본관은 죽산(竹山). 세조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문장과 외교에 능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의 시호.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의미하고, 헌(憲)은 총명하고 행실이 민첩함(聰明行著) 또는 상벌이 신뢰할 만하고 공정함(賞罰信正) 등을 의미한다.
- 만절당(晩節堂): 박원형의 호(號). 만년(晩年)의 절개(節槪)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 알성시(謁聖試): 임금이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에 참배(謁聖)한 후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특별 과거 시험. 박원형은 이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책록된 공신. 박원형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조선 시대 정1품 공신 또는 임금의 장인(국구, 國舅)에게 주던 작위. 박원형은 공신으로서 부원군에 봉해졌다. 연성(延城)은 그의 식읍(食邑) 지명이다.
- 예종(睿宗) 묘정(廟庭):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의 신위를 모신 종묘(宗廟)의 뜰.
- 배향(配享): 공덕이 큰 신하의 신위를 임금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박원형은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문:
公明達事體, 諳練典故, 中原使臣陳鑑、高閏、張寧、陳嘉猷之來, 皆爲儐, 周旋交際, 咸中其宜。 張天使嘗語公曰: “如子之才, 生於春秋之時, 當不在叔向、子産之下矣。”【《筆苑雜記》。】
번역문:
공은 사물의 실체(事體)¹에 밝았고(明達)² 전고(典故)³에 익숙하고 숙달되었다(諳練). 중원(中原)⁴의 사신 진감(陳鑑), 고윤(高閏), 장녕(張寧), 진가유(陳嘉猷)⁵가 왔을 때 모두 빈(儐)⁶이 되어 주선(周旋)하고 교제(交際)함이 모두 마땅함(宜)⁷에 맞았다. 장 천사(張天使)⁸가 일찍이 공에게 말하였다. “그대와 같은 재능이라면, 만약 춘추시대(春秋之時)에 태어났다면 마땅히 숙향(叔向)⁹이나 자산(子産)¹⁰의 아래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필원잡기(筆苑雜記)》¹¹에서 인용】
주석:
- 사체(事體): 일의 실정(實情) 또는 사물의 본질.
- 명달(明達): 사리에 밝고 통달함.
- 전고(典故): 옛날의 제도, 문물, 역사적 사실이나 고사(故事). 외교 활동 등에서 이러한 지식이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 중원(中原): 중국의 중심부. 여기서는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 진감(陳鑑), 고윤(高閏), 장녕(張寧), 진가유(陳嘉猷):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 사신들의 이름.
- 빈(儐):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사람.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원접사(遠接使) 등의 역할을 맡았음을 의미한다.
- 의(宜): 마땅함.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처신함을 의미한다.
- 장 천사(張天使): 장녕(張寧)을 가리킨다. 천사(天使)는 천자(天子, 황제)의 사신(使臣)이라는 뜻이다.
- 숙향(叔向):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현명한 대부(大夫). 이름은 양설힐(羊舌肸). 외교와 내정에 능했다.
- 자산(子産): 중국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명재상. 이름은 공손교(公孫僑). 법치와 실용적인 정책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숙향과 자산은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현명하고 유능한 정치가로 꼽힌다. 장녕은 박원형의 외교적, 정치적 역량을 이들에 비견한 것이다.
-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수필집. 인물 일화, 시문 평론, 고증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문:
朴政丞元亨位至台極, 淸儉律身, 敎子弟有法。 其子贊成公安性位未顯時, 値其生日, 置酒獻壽, 政丞受獻, 歡飮至夜分, 呼贊成使前, 口占曰: “今夜燈前酒數巡, 汝年三十二靑春。 吾家舊物惟淸白, 好把相傳無限人。” 門闌杯酒之間, 無浮浪流蕩之玩, 而有警責詔訓之義, 亦可謂敎子弟之法也。【《思齋摭言》。】
번역문:
정승(政丞) 박원형은 지위가 재상의 극치(台極)¹에 이르렀으나 청렴하고 검소하게(淸儉)² 몸을 단속하였고, 자제(子弟)를 가르치는 데 법도(法)가 있었다. 그의 아들 찬성(贊成)³ 박안성(朴安性)⁴의 지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그의 생일을 맞아 술을 차려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리니(獻壽)⁵, 정승이 잔을 받고 즐겁게 마시다가 밤이 깊어지자(夜分)⁶ 찬성을 앞으로 불러 구점(口占)⁷하여 말하였다. “오늘 밤 등불 앞에서 술 두어 순배 도니 / 네 나이 서른둘 청춘이로다 / 우리 집안의 옛 물건은 오직 청백(淸白)⁸이니 / 잘 지켜서 무한한 사람들에게 전하여라⁹.” 문간(門闌)¹⁰에서 술잔을 나누는 사이에 경박하고 방탕한(浮浪流蕩)¹¹ 놀이는 없고, 경계하고 꾸짖으며(警責) 가르치고 훈계하는(詔訓)¹² 뜻이 있었으니, 또한 자제를 가르치는 법이라 할 만하다.¹³【《사재척언(思齋摭言)》¹⁴에서 인용】
주석:
- 태극(台極): 삼공(三公)의 으뜸 자리. 영의정을 의미한다.
- 청검(淸儉): 청렴(淸廉)하고 검소(儉素)함.
- 찬성(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우찬성(右贊成)이 있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다.
- 박안성(朴安性, 1436~1482): 박원형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 헌수(獻壽): 생일을 맞은 어른에게 장수를 기원하며 술잔을 올리는 것.
- 야분(夜分): 밤이 깊은 때. 밤중.
- 구점(口占): 시문(詩文)의 초고를 잡지 않고 즉석에서 입으로 읊어 지음.
- 청백(淸白): 청렴하고 결백함. 가문의 중요한 정신적 유산으로 강조하고 있다.
- ‘無限人’은 ‘다음 세대의 무한한 사람들’ 즉 후손들을 의미한다. 청백의 가치를 잘 지켜 후손 대대로 전하라는 당부이다.
- 문란(門闌): 문간(門間). 집의 문 안쪽. 격식 없는 자리임을 나타낸다.
- 부랑유탕(浮浪流蕩): 행동이 경박하고 아무렇게나 놀아남.
- 경책(警責), 조훈(詔訓): 경계(警戒)하고 꾸짖으며(責), 가르치고 훈계함(訓). 자식에게 엄격한 가르침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 아들의 생일 축하 자리에서도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도 가문의 전통인 청백을 강조하며 엄격하게 훈계하는 모습을 통해, 박원형의 자녀 교육 방식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 《사재척언(思齋摭言)》: 조선 중기 문신 박증(朴增, 1414~1489)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사재(思齋)는 박증의 호. 척언(摭言)은 주워들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인물 일화, 시화(詩話) 등을 담고 있다. 박증은 박원형과 같은 죽산 박씨 문중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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