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국조명신언행록

국조명신언행록 후집 권5

諺解 2025. 5. 19.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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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柳成龍【文忠公。】
字而見, 號西厓。 嘉靖壬寅生。 甲子生、進, 丙寅登第。 薦入史局, 賜暇湖堂, 歷吏郞、舍人、直提學、吏・兵判, 再典文衡。 錄光國、扈聖兩勳, 封豐原府院君。 相宣廟朝, 至領議政。 丁未卒, 年六十六。

번역문:
유성룡(柳成龍)【문충공(文忠公)¹이다.】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가정(嘉靖)² 임인년(1542)에 태어났다. 갑자년(1564)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³ 양과(兩科)에 합격하고, 병인년(156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추천되어 사국(史局)⁴에 들어갔고, 호당(湖堂)⁵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⁶하였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⁷,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⁸ 및 사인(舍人)⁹,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¹⁰,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고, 두 차례 문형(文衡)¹¹을 관장하였다. 광국공신(光國功臣)¹²과 호성공신(扈聖功臣)¹³ 양쪽 훈(勳)에 녹훈(錄勳)되어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¹⁴에 봉해졌다. 선묘조(宣廟朝)¹⁵에 재상(宰相)이 되어 영의정(領議政)¹⁶에 이르렀다. 정미년(1607)에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주석:

  1. 문충공(文忠公): 유성룡의 시호(諡號). 조준의 시호와 같다.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충(忠)은 위험에 임하여 절개를 지킴(危身奉上) 등을 의미한다.
  2. 가정(嘉靖):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3. 생원(生員), 진사(進士): 조선 시대 소과(小科) 시험.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진사시는 시부(詩賦) 등 문학적 능력을 시험했다. 양과에 모두 합격하는 것을 생진 양시(生進兩試)라 한다.
  4.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임시 관청.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청(實錄廳) 등을 가리킬 수 있다.
  5. 호당(湖堂): 조선 시대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주로 동호(東湖) 부근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6.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여기에 선발되는 것은 큰 영예였다.
  7. 이조 정랑(吏曹正郞):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인사 행정 실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8.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임금의 교서(敎書) 작성 등을 담당하던 예문관(藝文館)의 정9품 관직. 낮은 품계지만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다.
  9.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 여러 관청에 두었던 관직명. 여기서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4품 사인(舍人)이나 예문관(藝文館)의 관직을 가리킬 수 있다.
  10.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담당하던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부제학(副提學) 다음가는 직위이다.
  11.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겸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2. 광국공신(光國功臣):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유성룡은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3.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유성룡은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작호(爵號). 풍원(豐原)은 유성룡의 본관인 풍산(豐山)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5. 선묘조(宣廟朝):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시대를 가리킨다. 선조의 묘호(廟號)가 선조이므로 '선조조(宣祖朝)'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16. 영의정(領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원문:
生有異稟。 六歲, 受《大學》, 擧止如成人。 嘗出遊江上, 跌足墮水中, 群兒愕眙¹⁷, 莫知所爲。 忽風浪大起, 頃間已見在岸上, 聞者異之。

번역문: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異稟)이 있었다. 6세에 《대학(大學)》¹⁸을 배우는데, 행동거지(擧止)가 어른과 같았다. 일찍이 강가에 나가 놀다가 발을 헛디뎌 물속에 빠졌는데, 여러 아이들이 놀라 쳐다볼¹⁷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갑자기 풍랑이 크게 일었는데, 잠깐 사이에 이미 기슭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보이니, 듣는 자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주석:
17. [주-D001] 眙 : 저본(底本)에는 “이(貽)”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서애집(西厓集)・연보(年譜)》, 《창석집(蒼石集)・서애유선생행상(西厓柳先生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악이(愕眙)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모양을 뜻한다.
18. 《대학(大學)》: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중 하나.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원문:
八歲, 讀《孟子》, 至伯夷目不視惡色, 耳不聽淫聲, 竦然慕其人, 不忘於心, 夢寐或見之。 九歲, 讀《論語》。 十六, 占鄕試, 勝冠。 入冠嶽山讀書, 喜其寺僻, 只留一童僕供炊, 俯讀仰思, 至忘寢食。 夜深或有打墻壁聲, 公若不聞者。 一夕, 有僧遽前謂曰: “讀書空山, 不畏盜乎?” 蓋僧聞公篤學, 乘夜作偸兒狀, 以驗所守也。 公笑曰: “安知汝之非盜耶?” 讀書自若, 僧歎服而去。 旣而從退溪先生于溪上, 受伊洛之學, 切問近思, 講明踐履, 必以聖賢爲指歸, 退溪先生每加稱賞。

번역문:
8세에 《맹자(孟子)》를 읽다가 백이(伯夷)¹⁹가 눈으로는 나쁜 색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대목에 이르러, 송연(竦然)히 그 사람됨을 흠모하여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였고, 자면서 꿈에 혹 그를 보기도 하였다. 9세에 《논어(論語)》를 읽었다. 16세에 향시(鄕試)²⁰에서 장원(壯元, 勝冠)²¹을 차지했다. 관악산(冠嶽山)에 들어가 글을 읽었는데, 그 절이 외진 것을 좋아하여 단지 동복(童僕) 하나만 남겨 밥을 짓게 하고, 고개 숙여 읽고 우러러 생각하기를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밤이 깊어 혹 담벽을 치는 소리가 있어도 공(公)은 마치 듣지 못한 듯하였다. 어느 날 저녁, 한 승려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빈 산에서 글을 읽으면서 도둑이 두렵지 않습니까?” 이는 아마도 승려가 공이 독실하게 학문함을 듣고, 밤을 틈타 도둑의 형상을 꾸며 그 지킴(마음의 동요 없음)을 시험해 본 것이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가 도둑이 아닌 줄 어찌 알겠소?” 글 읽기를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하니, 승려가 탄복(歎服)하고 갔다. 그 뒤에 시냇가(溪上)에서 퇴계 선생(退溪先生)²²을 따라 이락(伊洛)의 학문²³을 배우며,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며(切問近思)²⁴ 강론하여 밝히고 몸소 실천함(講明踐履)에 반드시 성현(聖賢)을 표준(指歸)으로 삼으니, 퇴계 선생께서 매번 칭찬을 더하셨다.

주석:
19. 백이(伯夷): 중국 상(商)나라 말기의 현인(賢人).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부당함을 간(諫)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다. 높은 도덕성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20. 향시(鄕試): 조선 시대 각 도(道)에서 실시하던 과거 시험. 생원, 진사를 뽑는 소과(小科)의 1차 시험 또는 문과(文科)의 1차 시험인 초시(初試)를 가리킬 수 있다.
21. 승관(勝冠): 향시에서 장원(壯元)을 차지하는 것.
22. 퇴계 선생(退溪先生):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성리학의 대가. 유성룡은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다.
23. 이락지학(伊洛之學): 중국 송(宋)나라 시대 성리학(性理學)을 가리킨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 그리고 주희(朱熹) 등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24. 절문근사(切問近思): 《논어》 〈자장(子張)〉편에 나오는 말로,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것(자신의 일)부터 생각한다는 뜻. 학문하는 자세를 이른다.


원문:
以聖節使書狀官赴帝都, 大學生數百人來觀之, 相與論學。 公問: “本朝所宗師者何人?” 有擧王陽明、陳白沙以答。 公曰: “白沙見道未精, 陽明之學專出於禪, 豈若薛文淸粹然一出於正乎?” 有吳京者, 新安人也, 喜而前曰: “陽明致良知之見, 本自佛學換頭面來。 近世學術不明, 認假爲眞, 公宜據正斥之也。” 及還, 退溪李先生有書曰: “陸禪懷襄天下, 公能遇數百諸生, 點檢其迷, 不易得也。”

번역문:
성절사(聖節使)²⁵의 서장관(書狀官)²⁶으로 황제의 도읍(帝都)²⁷에 갔을 때, 태학생(太學生)²⁸ 수백 명이 와서 보더니 서로 더불어 학문을 논하였다. 공(公)이 물었다. “본조(本朝)²⁹에서 종사(宗師)³⁰로 삼는 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왕양명(王陽明)³¹과 진백사(陳白沙)³²를 들어 답하는 이가 있었다. 공이 말하였다. “백사(白沙)는 도(道)를 본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양명(陽明)의 학문은 오로지 선학(禪學)³³에서 나왔으니, 어찌 설문청(薛文淸)³⁴이 순수하게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온 것과 같겠습니까?” 오경(吳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신안(新安) 사람으로, 기뻐하며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양명(陽明)의 치양지(致良知)³⁵ 견해는 본래 불교 학문에서 이름만 바꾸어 나온 것입니다. 근세에 학술이 밝지 못하여 가짜를 진짜로 여기니, 공께서 마땅히 정도(正道)에 근거하여 이를 배척해야 합니다.” 돌아오자 퇴계 이 선생(退溪李先生)이 편지를 보내왔다. “육구연(陸九淵)³⁶과 선학(禪學)이 천하를 휩쓸고 있는데, 공이 수백 명의 여러 학생들을 만나 그 미혹됨을 점검하였으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석:
25. 성절사(聖節使): 조선 시대 중국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신.
26. 서장관(書狀官): 사신 일행의 정사(正使), 부사(副使)를 보좌하며 사행(使行)의 문서 기록 및 관리 등을 담당하던 종6품 또는 정7품의 관직.
27. 제도(帝都): 황제의 수도. 당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28. 태학생(太學生): 명, 청 시대의 국립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학생.
29. 본조(本朝): 자신들의 왕조. 여기서는 명나라를 가리킨다.
30. 종사(宗師): 학문이나 기예 등에서 으뜸으로 받들어 모시는 스승.
31. 왕양명(王陽明, 1472-1529): 명나라의 사상가.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로,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을 주장했다.
32. 진백사(陳白沙, 1428-1500): 명나라의 학자. 이름은 헌장(獻章). 자연(自然)을 중시하는 독자적인 학풍을 열었다.
33. 선학(禪學):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禪宗)의 학문. 주자학에서는 양명학이 선학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34. 설문청(薛文淸, 1392-1464): 명나라 초기의 학자. 이름은 선(瑄). 주자학(朱子學)을 정통으로 삼고 양명학이나 선학을 비판했다. 문청(文淸)은 그의 시호이다.
35. 치양지(致良知): 양명학의 핵심 개념.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된 도덕적 앎(良知)을 발현하고 실현하는 것.
36. 육구연(陸九淵, 1139-1193): 남송(南宋)의 사상가. 호는 상산(象山).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여 주희(朱熹)와 논쟁했다. 그의 학문은 후에 양명학에 영향을 주었다. 퇴계는 육구연의 학문과 선학이 유사하다고 보았다.


원문:
領府事李浚慶臨卒上遺疏, 言朝中朋黨之漸。 上召大臣示之, 曰: “朝臣孰爲朋黨?” 外議洶洶, 以浚慶爲欲禍士類。 三司及湖堂官皆上箚論之, 至欲追削官爵。 公曰: “大臣臨死進言, 有不當則辨之而已, 至於請罪則恐傷朝家待大臣之體。” 諸人從之。

번역문:
영부사(領府事)³⁷ 이준경(李浚慶)³⁸이 죽음에 임하여 유소(遺疏)³⁹를 올려 조정 안에 붕당(朋黨)⁴⁰의 조짐이 있음을 말하였다. 상(上)⁴¹께서 대신들을 불러 이를 보여주며 말씀하셨다. “조정 신하 중에 누가 붕당을 이루는가?” 바깥의 의논이 흉흉하여 이준경이 사류(士類)⁴²에게 화(禍)를 입히려 한다고 여겼다. 삼사(三司)⁴³와 호당(湖堂)의 관원들이 모두 차자(箚子)⁴⁴를 올려 이를 논하며, 관작(官爵)을 추삭(追削)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다. 공(公)이 말하였다. “대신이 죽음에 임하여 올린 말이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변론할 따름이지, 죄를 청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조정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체통(體統)을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 말을 따랐다.

주석:
37. 영부사(領府事):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약칭으로 추정된다. 중추부(中樞府)는 조선 시대에 일정한 직무가 없는 고위 관료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으로, 영중추부사는 그 으뜸 벼슬(정1품)이다.
38.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39. 유소(遺疏): 신하가 죽기 전에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40. 붕당(朋黨): 정치적 이념이나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관리들의 집단. 이준경은 사림(士林) 세력 내의 분열 조짐을 우려하여 이를 경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는 오히려 사림 세력의 반발을 사 붕당 논쟁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1. 상(上): 임금. 당시 임금은 선조(宣祖)이다.
42. 사류(士類): 선비들의 무리. 주로 사림(士林)을 가리킨다.
43.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하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권과 신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44. 차자(箚子): 상소(上疏)보다 격식이 낮은 약식 상소문.


원문:
丁丑冬, 仁聖大妃上仙, 禮官與大臣定議, 請上行期年制。 公時爲應敎, 謂同僚曰“明廟於仁廟爲繼統, 有父子之道。 主上當從嫡孫父沒爲祖母持重服爲是”, 遂力論之。 有旨令禮官更議, 大臣猶執前見, 公曰: “不得請, 不可退。” 徹夜論啓, 至鷄鳴乃允。

번역문:
정축년(1577) 겨울, 인성대비(仁聖大妃)⁴⁵께서 승하(上仙)⁴⁶하시자, 예관(禮官)⁴⁷이 대신들과 의논을 정하여 상(上)께서 기년제(期年制)⁴⁸를 행하실 것을 청하였다. 공(公)이 당시 응교(應敎)⁴⁹였는데,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명종(明宗)⁵⁰께서는 인종(仁宗)⁵¹에게 왕위를 계승하셨으니 부자(父子)의 도리가 있습니다. 주상(主上)⁵²께서는 적손(嫡孫)으로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를 위해 중복(重服)⁵³을 입는 예를 따라야 합니다.” 마침내 힘써 이를 주장하였다. 예관에게 다시 의논하라는 유지(有旨)가 있었으나 대신들이 여전히 이전 견해를 고집하자, 공이 말하였다.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날 수 없다.” 밤새도록 아뢰기를, 닭이 울 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윤허(允許)를 받았다.

주석:
45. 인성대비(仁聖大妃):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朴氏, 1514-1577). 인종(仁宗)의 왕비.
46. 상선(上仙): 왕족이나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승하(昇遐).
47. 예관(禮官): 예조(禮曹)의 관리 또는 예(禮)에 밝은 관리.
48. 기년제(期年制): 1년 상(喪). 인성왕후는 선조의 법적 할머니(인종의 비)이지만, 선조는 인종의 동생인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이에 예관과 대신들은 선조가 인성왕후에 대해 일반적인 조손(祖孫) 관계의 상복인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9.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의 정4품 관직.
50. 명묘(明廟):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조선의 제13대 왕.
51. 인묘(仁廟): 인종(仁宗, 재위 1544-1545). 조선의 제12대 왕. 명종의 이복형.
52. 주상(主上): 당시 임금인 선조(宣祖).
53. 중복(重服): 무거운 상복. 여기서는 3년 상을 의미하는 참최(斬衰)를 가리킨다. 유성룡은 선조가 명종의 양자가 되었지만, 인종의 왕통을 이은 명종의 왕위를 이었으므로, 인종과 부자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적장손(嫡長孫)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인 참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복잡했던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예론(禮論) 논쟁이었다.


원문:
辛巳, 冬無氷。 以副提學, 上箚陳十事: 修實德以答天心, 嚴內外以肅宮禁, 審治體以立規模, 重公論以正朝綱, 覈名實以用人才, 恢公道以杜倖門, 養廉恥以淸濁俗, 明政刑以戢奸濫, 祛積弊以救民生, 倡學術以振士風。

번역문:
신사년(1581),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⁵⁴으로서 차자(箚子)를 올려 열 가지 일을 아뢰었다. 실질적인 덕(實德)을 닦아 하늘의 마음(天心)에 답할 것, 안팎을 엄하게 하여 궁궐의 기강(宮禁)을 바로잡을 것, 정치의 본체(治體)를 살펴 규모(規模)를 세울 것, 공론(公論)을 중히 여겨 조정의 기강(朝綱)을 바로잡을 것, 명분과 실질(名實)을 살펴 인재를 등용할 것, 공도(公道)를 넓혀 요행의 문(倖門)을 막을 것, 염치(廉恥)를 길러 혼탁한 풍속(濁俗)을 맑힐 것, 정치와 형벌(政刑)을 밝혀 간사함과 외람됨(奸濫)을 막을 것, 쌓인 폐단(積弊)을 제거하여 백성의 삶(民生)을 구제할 것, 학술(學術)을 제창하여 선비의 기풍(士風)을 진작시킬 것 등이었다.

주석:
54.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위로, 학문과 문한(文翰)의 중심 역할을 했다.


원문:
甲申, 擢授禮曹判書。 公上章辭, 上賜手札曰: “古之人君於其臣, 有臣之者, 有友之者, 有師之者。 此義雖不傳於後世, 然卿十載經幄, 一德無瑕, 義雖君臣, 情猶師友, 知卿蓋莫如予也。” 再辭, 不許。

번역문:
갑신년(1584), 발탁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⁵⁵에 제수되었다. 공(公)이 글을 올려 사양하자, 상(上)께서 손수 쓰신 편지(手札)를 내려 말씀하셨다. “옛날의 임금이 그 신하에 대해, 신하로 대하는 이가 있고, 벗으로 대하는 이가 있고, 스승으로 대하는 이가 있었다. 이 의리가 비록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나, 경(卿)이 10년간 경악(經幄)⁵⁶에 있으면서 한결같은 덕(德)에 흠이 없으니, 의리는 비록 군신(君臣)이나 정(情)은 스승이나 벗과 같아서, 경을 아는 것은 아마도 나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두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주석:
55. 예조판서(禮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예악(禮樂), 제사(祭祀), 외교, 과거 등을 담당했다.
56. 경악(經幄): 경연(經筵)의 자리. 임금과 신하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하던 자리.


원문:
時有命擇駙馬毋避李姓異貫者, 蓋有所屬意也。 公曰: “禮不娶同姓, 遠嫌也。 劉聰納劉殷女爲妃, 所出絶異, 而《綱目》書犬羊雜糅, 唐、宋以來, 尙公主者皆以異姓。 惟唐昭宗取李茂貞子爲駙馬, 此則迫於强臣, 非可法也。” 事遂寢。

번역문:
이때 부마(駙馬)⁵⁷를 간택하되 이씨(李氏) 성을 가진 다른 본관(異貫)인 자를 피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마음에 둔 사람⁵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公)이 말하였다. “예법에 동성(同姓)과는 혼인하지 않는 것은 의심받을 일(嫌)을 멀리하기 위함입니다. 유총(劉聰)⁵⁹이 유은(劉殷)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다가 낳은 자식들이 모두 괴이하였는데, 《강목(綱目)》⁶⁰에서는 이를 개나 양이 뒤섞인 것(犬羊雜糅)이라 썼습니다. 당(唐), 송(宋) 이래로 공주(公主)에게 장가드는 자는 모두 다른 성씨(異姓)였습니다. 오직 당나라 소종(昭宗)⁶¹이 이무정(李茂貞)의 아들을 부마로 삼은 일이 있으나, 이는 강한 신하에게 핍박받아서 그런 것이니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주석:
57.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
58. 소속의(所屬意): 마음에 두고 있는 바. 선조가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두고 동성이라도 본관이 다르면 괜찮다는 명을 내렸음을 시사한다.
59. 유총(劉聰): 중국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전조(前趙, 漢趙)의 황제. 동성인 유은(劉殷)의 두 딸을 황후로 삼았다.
60. 《강목(綱目)》: 주희(朱熹)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역사를 서술한 편년체 역사서이다.
61. 당 소종(唐昭宗): 당나라의 제21대 황제. 당시 강력한 번진(藩鎭) 세력이었던 이무정(李茂貞)의 압력으로 그의 아들을 부마로 삼았다.


원문:
乙酉, 義州牧使徐益上疏言: “鄭汝立與李珥書曰: ‘三人雖竄, 巨奸尙存。’ 指柳成龍也。” 上下御札曰: “柳成龍君子, 謂之當今大賢可矣。 觀其人與之語, 不覺心服。 何物膽大者敢爲此語耶?” 公疏陳五當退, 上不許。

번역문:
을유년(1585), 의주목사(義州牧使)⁶² 서익(徐益)⁶³이 상소를 올려 말하였다. “정여립(鄭汝立)⁶⁴이 이이(李珥)⁶⁵에게 보낸 편지에 ‘세 사람⁶⁶이 비록 내쫓겼으나, 큰 간신(巨奸)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유성룡을 가리킨 것입니다.” 상(上)께서 어찰(御札)⁶⁷을 내려 말씀하셨다. “유성룡은 군자(君子)이니, 지금 시대의 큰 현인(大賢)이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 사람됨을 보고 더불어 이야기해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복종하게 된다. 어떤 자가 담대하게 감히 이런 말을 하는가?” 공(公)이 상소를 올려 다섯 가지 마땅히 물러나야 할 이유⁶⁸를 아뢰었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주석:
62. 의주목사(義州牧使): 평안도 의주(義州)를 다스리던 정3품 외관직. 국경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종2품 관찰사가 겸임하기도 했다.
63. 서익(徐益, 1542-1587):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東人)에 속했으나 정여립, 이이 등과도 교류했다.
64. 정여립(鄭汝立,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처음에는 서인(西人) 이이의 문하였으나 후에 동인(東人)으로 돌아섰다. 1589년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면서 죽음을 맞았다.
65.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호는 율곡(栗谷).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앙받았다.
66. 세 사람(三人): 누구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당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축출된 인물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익은 정여립이 유성룡을 '거간(巨奸)'으로 지목했다고 주장하여 그를 공격하려 했다.
67. 어찰(御札): 임금이 직접 쓴 편지.
68. 오당퇴(五當退): 다섯 가지 마땅히 물러나야 할 이유.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서익의 모함에 대해 해명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사직을 청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원문:
辛卯春, 特命兼吏判。 公辭曰: “國朝以來, 未有此事。 萬一他日專擅之人以臣藉口, 則國家無窮之禍, 自臣身始矣。” 上答曰: “身居相位, 把弄朝柄者, 豈皆兼吏判而然乎? 宜勿辭, 使用舍得宜, 朝著淸明也。”

번역문:
신묘년(1591) 봄, 특별히 명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하게 하였다. 공(公)이 사양하며 아뢰었다. “국조(國朝) 이래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만일 훗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자(專擅之人)가 신(臣)을 핑계 삼는다면, 국가의 무궁한 화(禍)가 신의 몸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상(上)께서 답하셨다. “재상(宰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정의 권력(朝柄)을 쥐고 희롱하는 자들이 어찌 모두 이조판서를 겸했기 때문이겠는가? 마땅히 사양하지 말라. 사람을 등용하고 내침(用舍)이 마땅함을 얻게 하여 조정(朝著)이 청명(淸明)해지도록 하라.”


원문:
時倭聲日急, 命備邊司各薦將帥之才, 公以權慄、李舜臣應旨。

번역문:
이때 왜(倭)의 성세(聲勢)가 날로 급해지자, 비변사(備邊司)⁶⁹에 명하여 각기 장수(將帥)의 재목을 천거하게 하니, 공(公)이 권율(權慄)⁷⁰과 이순신(李舜臣)⁷¹으로 왕명에 응하였다.

주석:
69. 비변사(備邊司): 조선 중기 이후 군사 및 외교 문제를 총괄하던 최고 회의 기구. 처음에는 임시 기구였으나 점차 상설화되어 국정 전반을 관장하게 되었다.
70. 권율(權慄, 1537-1599): 조선 중기의 명장.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끌었다.
71.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조선 중기의 명장.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서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하여 나라를 구했다.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원문:
壬辰四月, 倭大擧入寇, 命兼兵判摠戎務, 建遣李鎰爲巡邊使; 成應吉、趙儆爲左、右防禦使, 分三路而下; 邊璣、劉克良爲助防將, 分守鳥、竹二嶺。 又以申砬爲巡邊使, 爲李鎰繼援⁷², 且請建儲以繫人望。

번역문:
임진년(1592) 4월, 왜(倭)가 대거 침입(入寇)하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겸하여 군무(戎務)를 총괄하도록 명하고, 건의하여 이일(李鎰)⁷³을 순변사(巡邊使)⁷⁴로, 성응길(成應吉)과 조경(趙儆)⁷⁵을 좌·우방어사(左右防禦使)⁷⁶로 삼아 세 길로 나누어 내려가게 하고, 변기(邊璣)와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助防將)⁷⁷으로 삼아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두 고개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신립(申砬)⁷⁸을 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후원군(繼援)⁷⁹이 되게 하고, 아울러 세자(世子)를 세워(建儲)⁸⁰ 인망(人望)을 붙맬 것을 청하였다.

주석:
72. [주-D004] 援 : 저본(底本)에는 “완(緩)”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창석집(蒼石集)・서애유선생행상(西厓柳先生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후원군(後援軍)의 의미인 '원(援)'이 적합하다.
73. 이일(李鎰, 1538-1601):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초기 상주(尙州) 전투에서 패배했다.
74. 순변사(巡邊使): 변방 지역을 순찰하며 군무를 총괄하던 임시 무관직.
75. 조경(趙儆, 1541-1609):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무신. 임진왜란 때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76. 방어사(防禦使): 군사적 요충지에 파견되어 방어 임무를 총괄하던 무관직.
77. 조방장(助防將): 방어사를 도와 특정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던 무관직.
78. 신립(申砬, 1546-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초기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79. 계원(繼援): 뒤따라가서 돕는 군대. 후원군.
80. 건저(建儲): 저군(儲君), 즉 세자(世子)를 세우는 것. 임진왜란 발발 직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원문:
申砬敗報至, 大駕西狩。 至臨津, 上召公同舟, 仍賜酒曰: “國家中興當賴卿, 須自愛。” 至東坡, 上問駐蹕之所, 李恒福請向義州曰: “若八路俱陷, 便可赴訴天朝。” 公曰: “大駕離東土一步地, 朝鮮非我有。” 上曰: “內附本予意。” 公曰: “今東北兵力如故, 湖、嶺忠義之士不日蜂起, 豈可遽論此事?” 恒福始悟。 及罷, 公謂李誠中曰: “爲我語李承旨! 何輕發棄國之論? 公雖裂裳裹足, 從死於道, 不過婦寺之忠耳。 此言一出, 人皆瓦解, 誰任收復之責者?” 後兩宮分駐, 訛言大播, 人心不可收拾, 然後恒福益服高見。【幷蒼石李埈撰行狀。】

번역문:
신립(申砬)이 패했다는 보고가 이르자, 대가(大駕)⁸¹가 서쪽으로 피난(西狩)⁸²하였다.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러 상(上)께서 공(公)을 불러 같은 배에 타고, 이어서 술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국가의 중흥(中興)은 마땅히 경(卿)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니, 모름지기 스스로 몸을 아끼시오.” 동파(東坡)⁸³에 이르러 상께서 머무를 곳(駐蹕之所)을 물으시니, 이항복(李恒福)⁸⁴이 의주(義州)로 향할 것을 청하며 아뢰었다. “만약 팔도(八路)가 모두 함락되면, 바로 천조(天朝)⁸⁵에 달려가 호소할 수 있습니다.” 공이 말하였다. “대가(大駕)께서 동쪽 땅(東土)⁸⁶에서 한 걸음이라도 떠나시면 조선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내부(內附)⁸⁷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공이 말하였다. “지금 동북(東北) 지방의 병력은 예전과 같고,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충의로운 선비들이 머지않아 벌떼처럼 일어날 터인데, 어찌 갑자기 이 일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항복이 비로소 깨달았다. 파(罷)한 뒤에 공이 이성중(李誠中)⁸⁸에게 일렀다. “나를 위해 이 승지(李承旨)⁸⁹에게 말해주시오! 어찌 가벼이 나라를 버리는 논의를 발설하는가? 공(公)이 비록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 길에서 따라 죽는다 한들, 부녀자나 환관(婦寺)의 충성⁹⁰에 지나지 않을 뿐이오. 이 말이 한번 나오면 사람들이 모두 기왓장 무너지듯 흩어질 터인데(瓦解), 누가 수복(收復)의 책임을 맡을 자이겠소?” 뒤에 양궁(兩宮)⁹¹이 나누어 머물고 그릇된 소문(訛言)이 크게 퍼져 인심을 수습할 수 없게 된 연후에야, 이항복이 더욱 (유성룡의) 높은 견해(高見)에 감복하였다.【이상은 창석(蒼石) 이준(李埈)⁹²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81.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의 행차 또는 임금 자체를 가리킨다.
82. 서수(西狩): 임금이 도성을 떠나 서쪽으로 피난하는 것. 고대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선조의 의주 파천(播遷)을 의미한다.
83. 동파(東坡): 개성(開城) 동쪽에 있는 언덕. 지명.
84.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 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다.
85. 천조(天朝): 하늘 아래의 조정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왕조(당시 명나라)를 높여 부르는 말.
86. 동토(東土): 동쪽의 땅. 조선을 가리킨다.
87. 내부(內附): 속국(屬國)이 종주국(宗主國)의 영토 안으로 들어가 복속하는 것. 여기서는 조선이 명나라에 완전히 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조가 국토를 포기하고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88. 이성중(李誠中): 인물 정보 미상. 당시 관료로 추정.
89. 이 승지(李承旨): 이항복을 가리킨다. 승지(承旨)는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으로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이항복은 당시 도승지(都承旨)였다.
90. 부사지충(婦寺之忠): 부녀자나 환관(寺人)의 충성. 임금 개인에게 충성할 뿐 국가의 대의(大義)나 장래는 고려하지 못하는 좁은 소견의 충성을 비판하는 말이다.
91. 양궁(兩宮): 두 궁궐. 또는 두 분의 왕이나 왕족. 여기서는 선조(宣祖)와 세자 광해군(光海君)이 조정을 둘로 나누어(분조, 分朝) 각각 평안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한 것을 가리킬 수 있다.
92. 이준(李埈, 1560-1635):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창석(蒼石). 유성룡의 문인으로 그의 행장(行狀, 고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글)을 지었다.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至開京, 李山海罷相, 公爲領議政。 申磼白上曰: “山海罷相, 某不宜獨免。” 公卽日罷相。 至平壤, 復論竄山海, 而以公且罪均, 將幷論之。 李恒福語副提學洪麟祥曰: “此百代之望也。 公苟不盡力於此者, 吾自此絶矣。” 麟祥曰: “諾。 亦吾意也。” 遂入而大言之, 其議乃止。

번역문:
개경(開京)에 이르러 이산해(李山海)⁹³가 재상(宰相)에서 파직되자, 공(公)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신잡(申磼)⁹⁴이 상(上)께 아뢰었다. “산해(山海)가 파직되었는데, 저 또한 홀로 면직되지 않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공도 즉일(卽日)로 재상에서 파직되었다. 평양(平壤)에 이르러 다시 산해를 귀양 보낼 것을 논하면서, 공 또한 죄가 같다고 하여 장차 함께 논죄(論罪)하려 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이 부제학(副提學) 홍인상(洪麟祥)⁹⁵에게 말하였다. “이분은 백대(百代)의 희망입니다. 공(公)께서 만약 이 일에 힘을 다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이로부터 (공과) 관계를 끊을 것입니다.” 홍인상(麟祥)이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또한 저의 뜻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들어가서 크게 말하니, 그 의논이 이에 그쳤다.

주석:
93.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東人)의 영수. 임진왜란 발발 직전 영의정이었으나, 전쟁 대비 소홀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94. 신잡(申磼, 1541-1609): 조선 중기의 무신. 이산해와 함께 파직되었다.
95. 홍인상(洪麟祥, 1548-1609): 조선 중기의 문신.

해설:
전쟁 발발의 책임을 물어 이산해가 파직되자 유성룡이 영의정이 되었으나, 곧이어 신잡이 자신도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직하자 유성룡도 파직되었다. 이후 평양에서 이산해를 귀양 보내려 할 때, 유성룡도 함께 죄를 주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항복과 홍인상의 변호로 무마되었다. 이는 당시 조정 내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와 유성룡에 대한 견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원문:
賊已薄平壤。 時有車駕出避之議, 公不可曰: “前阻大江, 人心不散, 莫如堅守。 必有王師助我, 可以制敵。” 尹斗壽亦言守城便。 城中已擾亂, 奉廟社主先出城。 城中男女皆發憤罵詈曰: “宰相竊厚祿, 誤國敗事, 又魚肉我百姓。” 爭執兵刃縱擊之, 神主墮途中, 擾亂及於宮門。 在朝者皆失色起立, 公立於階上, 招父老諭語曰: “汝等竭力死守不去, 固忠矣, 不可驚動宮門。 不戢者罪當無赦。” 亂者卽棄兵叩謝, 皆散去。

번역문:
적(賊)이 이미 평양(平壤)에 다가왔다. 이때 어가(車駕)가 나가 피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으나, 공(公)이 불가하다며 말하였다. “앞에는 대동강(大同江)이 막혀 있어 인심(人心)이 흩어지지 않을 것이니, 굳게 지키는 것만 못합니다. 반드시 왕사(王師)⁹⁶가 우리를 도울 것이니, 적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윤두수(尹斗壽)⁹⁷ 또한 성을 지키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였다. 성안이 이미 소란해져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주(神主)⁹⁸를 받들고 먼저 성을 나갔다. 성안의 남녀들이 모두 분통을 터뜨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재상들이 후한 녹봉(祿俸)을 훔쳐 먹으며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망쳤으며, 또 우리 백성들을 어육(魚肉)⁹⁹으로 만들었다.” 다투어 병기(兵刃)를 잡고 마구 치니, 신주가 길바닥에 떨어지고 소란이 궁문(宮門)에까지 미쳤다. 조정에 있던 자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고 일어섰는데, 공이 섬돌 위에 서서 부로(父老)¹⁰⁰들을 불러 타이르며 말하였다. “너희들이 힘을 다해 죽음으로 지키며 떠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충성스럽다. 그러나 궁문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소란을 그치지 않는 자는 죄를 마땅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난동을 부리던 자들이 즉시 병기를 버리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모두 흩어져 갔다.

주석:
96. 왕사(王師): 임금의 군대. 여기서는 명(明)나라의 구원병을 가리킨다.
97.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西人)의 영수 중 한 명. 영의정을 지냈다.
98. 묘사주(廟社主):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주(神主). 왕조의 정통성과 존엄을 상징한다.
99. 어육(魚肉): 물고기와 고기. 남에게 함부로 죽임을 당하거나 학대받는 처지를 비유한다.
100. 부로(父老): 나이 많은 남자. 고을의 원로들을 가리킨다.


원문:
車駕將出, 議者多言北行便。 公固爭曰: “上西行, 本欲賴大國之力, 以圖恢復。 今旣請救, 而我深入北關, 於義固不可, 北行之後, 爲賊所阻, 勢窮地盡, 將北走胡乎? 計無失於此者也。” 上遂出寧邊。

번역문:
어가(車駕)가 장차 나가려 할 때, 의논하는 자들 중 북쪽(北行)으로 가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공(公)이 굳게 다투며 아뢰었다. “상(上)께서 서쪽으로 행하신 것은 본래 대국(大國)¹⁰¹의 힘에 의지하여 회복을 도모하고자 함입니다. 이제 이미 구원을 청하였는데 우리가 북관(北關)¹⁰²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의리상 진실로 불가하며, 북쪽으로 간 뒤에 적에게 가로막혀 형세가 궁하고 땅이 다하면, 장차 북쪽 오랑캐(胡)¹⁰³에게로 달아나시겠습니까? 이(서쪽으로 가는 것)보다 나은 계책은 없습니다.” 상께서 마침내 영변(寧邊)¹⁰⁴으로 나가셨다.

주석:
101. 대국(大國): 큰 나라.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102. 북관(北關): 함경도(咸鏡道) 지방을 가리킨다.
103. 호(胡): 북방 민족을 통칭하는 말. 여기서는 여진족(女眞族) 등을 가리킨다.
104. 영변(寧邊): 평안북도 영변군. 당시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가 있었다. 선조는 평양을 떠나 영변을 거쳐 의주(義州)로 향했다.


원문:
至義州, 上戰守十策。 時中國疑我與倭連謀, 遼東移咨, 有責我語。 公上疏曰: “中國疑我者非一, 而又我有七失: 臨亂不急告變, 一也; 不早乞兵, 二也; 漢兵探我者, 令困乏而返, 三也; 旣乞兵, 無兵食, 四也; 漢人求我嚮導, 而無一卒立於前, 五也; 乘輿所止, 無兵衛之備, 晏然如平日, 六也; 國勢危急, 而氣像徐緩, 事多後時, 七也。 此皆來人之疑者也。 請令該司登時速報, 明白自陳。”【竝眉叟許穆撰遺事。】

번역문:
의주(義州)에 이르러, 싸움과 수비에 관한 열 가지 계책(戰守十策)¹⁰⁵을 올렸다. 이때 중국(中國)¹⁰⁶에서는 우리가 왜(倭)와 연합하여 공모(連謀)한다고 의심하였는데, 요동(遼東)¹⁰⁷에서 보내온 자문(移咨)¹⁰⁸에 우리를 질책하는 말이 있었다. 공(公)이 상소를 올려 아뢰었다. “중국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또한 우리에게 일곱 가지 실책(失策)이 있습니다. 난리(亂)에 임하여 급히 변고(變故)를 알리지 않은 것이 첫째요, 일찍 군사를 청하지 않은 것이 둘째요, 우리를 정탐하러 온 한병(漢兵)¹⁰⁹을 곤궁하고 궁핍하게 하여 돌려보낸 것이 셋째요, 이미 군사를 청하고서도 군량(兵食)이 없는 것이 넷째요, 한인(漢人)이 우리에게 향도(嚮導)¹¹⁰를 구하는데도 한 명의 병졸도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 다섯째요, 어가(乘輿)가 머무는 곳에 군사 호위의 준비가 없어 태평한 때와 같이 편안한 것이 여섯째요, 나라 형세가 위급한데도 기상(氣像)이 느긋하여 일이 때보다 늦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일곱째입니다. 이것이 모두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들입니다. 청컨대 해당 관사(該司)¹¹¹로 하여금 즉시 빨리 보고하여 명백하게 스스로 진술하게 하소서.”【이상은 미수(眉叟) 허목(許穆)¹¹²이 지은 유사(遺事)¹¹³에서 인용】

주석:
105. 전수십책(戰守十策): 전쟁 수행과 방어에 관한 열 가지 계책.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106. 중국(中國):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107. 요동(遼東): 만주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108. 이자(移咨): 관청 사이에 주고받는 공문서의 일종.
109. 한병(漢兵): 한(漢)나라 군사라는 뜻으로, 명나라 군사를 가리킨다.
110. 향도(嚮導): 길을 안내하는 사람.
111. 해당사(該司): 해당 업무를 맡은 관청. 비변사(備邊司) 등을 가리킬 수 있다.
112. 허목(許穆, 1595-168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호는 미수(眉叟). 남인(南人)의 영수였다.
113. 유사(遺事): 앞 시대의 기록에서 빠진 사실이나 일화 등을 모아 기록한 것. 허목이 유성룡에 관한 일화를 기록한 글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원문:
七月, 副摠兵祖承訓以兵五千人來援。 時公病篤, 上命尹斗壽出治糧餉, 公以行在大臣, 只有一人, 不可出, 請自力以行。 馳至所串驛, 村落一空。 公令軍校搜得數人來, 諭之曰: “國家平日, 撫養汝輩甚至, 今何忍逃匿? 天兵方至, 國事政急, 乃汝等效勞立功之秋也。” 出一冊錄其姓名曰: “後日當以此論賞, 名不錄者有誅。” 旣而來請書名者相續。 公知人心可合, 卽行文各處, 令別置考功冊, 課其勞績。 於是民勸趨之, 不旬日, 館穀諸具悉辦。 承訓攻平壤賊不利, 而公留安州, 以鎭人心, 且待後軍之至。【行狀。】

번역문:
7월, 부총병(副摠兵)¹¹⁴ 조승훈(祖承訓)¹¹⁵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이때 공(公)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상(上)께서 윤두수(尹斗壽)에게 명하여 나가서 군량(糧餉)을 조달하게 하셨다. 공이 행재소(行在)¹¹⁶의 대신(大臣)은 단지 한 사람뿐이니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며, 스스로 힘써 갈 것을 청하였다. 말을 달려 소곶역(所串驛)¹¹⁷에 이르니 촌락이 텅 비어 있었다. 공이 군교(軍校)¹¹⁸에게 명하여 몇 사람을 찾아 데려오게 하고, 그들을 타일러 말하였다. “국가가 평소에 너희 무리를 지극히 무휼하고 길렀는데(撫養), 지금 어찌 차마 도망하여 숨는가? 천병(天兵)¹¹⁹이 바야흐로 도착하여 국사(國事)가 자못 급하니, 이야말로 너희들이 노고를 바치고 공을 세울 때이다.” 책(冊) 하나를 꺼내 그들의 성명을 기록하며 말하였다. “훗날 마땅히 이것으로 상(賞)을 논할 것이며,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주벌(誅罰)이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이름을 써넣기를 청하는 자들이 서로 이어졌다. 공은 인심(人心)을 합칠 수 있음을 알고, 즉시 각처에 공문(行文)을 보내어 별도로 고공책(考功冊)¹²⁰을 두어 그 노고와 공적을 헤아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서로 권하며 나아가니, 열흘이 안 되어 관곡(館穀)¹²¹ 등 여러 가지 준비물들이 모두 갖추어졌다. 조승훈(承訓)이 평양(平壤)의 적(賊)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였는데, 공은 안주(安州)에 머물면서 인심을 진정시키고 또한 후속 군대(後軍)가 이르기를 기다렸다.【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14. 부총병(副摠兵): 명나라의 군사 직책. 총병관(總兵官) 다음가는 지휘관.
115. 조승훈(祖承訓): 명나라의 장수.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구원군의 지휘관이었으나,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116. 행재(行在): 임금이 행차하여 머무는 곳. 임시 수도. 당시 의주(義州)를 가리킨다.
117. 소곶역(所串驛): 평안도 안주(安州) 부근에 있던 역(驛).
118. 군교(軍校): 군대의 하급 장교나 부사관.
119. 천병(天兵): 하늘의 군대라는 뜻으로, 명나라 군대를 높여 부르는 말.
120. 고공책(考功冊): 공로를 심사하여 기록하는 장부.
121. 관곡(館穀): 관아에서 쓰는 곡식. 군량(軍糧)이나 관청의 경비로 쓰이는 곡식을 의미한다.


원문:
十二月, 拜關西都體察使。 提督李如松以精兵四萬至安州。 公請見, 以平壤地圖, 指示形勢。 提督大悅曰: “賊在目中矣。” 先是, 我被擄者受賊厚賄, 探報我事殆無遺。 公得首諜者, 按問其黨數十輩, 皆斬之, 以故提督兵大至, 而賊不知也。 提督召我兵合六萬人。 正月, 克平壤, 賊大敗。 行將義智、玄蘇急收餘兵, 夜遁去。 公令海西諸將邀其歸路, 急躡其後, 諸將皆不出, 惟李時言踵其後, 亦兵少不敢逼, 賊已過矣。

번역문:
12월, 관서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¹²²에 제수되었다. 제독(提督)¹²³ 이여송(李如松)¹²⁴이 정예병 4만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이르렀다. 공(公)이 만나보기를 청하여 평양(平壤) 지도를 가지고 형세를 가리켜 보이니, 제독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적이 눈앞에 있는 듯하오.” 이보다 먼저, 우리나라의 포로가 된 자들이 적(賊)에게 후한 뇌물을 받고 우리의 사정을 정탐하여 보고하는 것이 거의 빠짐이 없었다. 공이 첩자(諜者) 우두머리를 잡아 그 무리 수십 명을 문초(按問)하여 모두 목 베었으므로, 제독의 군대가 크게 이르렀는데도 적은 알지 못하였다. 제독이 우리 군사를 불러 합쳐 6만 명¹²⁵이 되었다. 정월, 평양을 함락하니 적이 크게 패하였다. 행장(行長)¹²⁶, 의지(義智)¹²⁷, 현소(玄蘇)¹²⁸ 등이 급히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밤에 달아났다. 공이 해서(海西)¹²⁹의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급히 그 뒤를 추격하게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나가지 않았다. 오직 이시언(李時言)¹³⁰만이 그 뒤를 따랐으나 또한 군사가 적어 감히 다가가지 못하였는데, 적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주석:
122. 관서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 관서 지방(평안도)의 군무를 총괄하던 임시 최고 지휘관.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전쟁 시 의정(議政)급 인물이 임명되어 군사, 행정 전반을 지휘했다.
123. 제독(提督): 명나라의 고급 군사 지휘관 직책. 여기서는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원군 총사령관을 가리킨다.
124. 이여송(李如松, 1549-1598): 명나라 말기의 명장.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총사령관으로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25. 6만 명: 명나라 군사 4만과 조선 군사 2만을 합한 병력으로 추정된다.
126.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1군의 지휘관.
127. 의지(義智): 소 요시토시(宗義智). 쓰시마(對馬島) 도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서 함께 참전했다.
128. 현소(玄蘇): 겐소(玄蘇). 일본의 승려 외교관.
129. 해서(海西): 황해도(黃海道)를 가리킨다.
130. 이시언(李時言, 1550-1624): 조선 중기의 무신.


원문:
提督進兵至坡州, 聞副摠兵査大受追賊至碧蹄戰少利, 領千餘騎馳赴之。 敗折而還, 卽趨開城, 公爭之曰: “大軍一退, 賊勢益强, 遠近驚懼。 請少留, 觀釁而動。” 提督佯應曰“諾”, 卽跨馬還至開城, 諸營悉退。 提督聲言: “淸正自咸興將襲平壤, 急還軍以救之。” 且令我兵在臨津南者皆渡江拒守。 公遣從事辛慶晉見提督, 言不可退兵者五: 其一先王墳墓皆在畿甸, 陷爲賊所, 義不可棄; 其二奔竄遺民日望王師伐賊, 今聞退兵, 無復固志, 相率而歸賊; 其三將士方倚重王師, 以圖興復, 大軍一退, 人心怨憤, 皆思散去; 其四封疆之內尺地不可棄; 其五兵退之後, 賊乘其後, 臨津以北亦不可保也。 提督默然。【竝遺事。】

번역문:
제독(提督)이 군사를 진격시켜 파주(坡州)에 이르렀는데, 부총병(副摠兵) 사대수(査大受)¹³¹가 적을 추격하여 벽제(碧蹄)¹³²에 이르러 싸웠으나 약간 불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달려갔다. 패하여 꺾여 돌아와서는 즉시 개성(開城)으로 달려가니, 공(公)이 이를 말리며 아뢰었다. “대군(大軍)이 한번 물러나면 적의 기세가 더욱 강해져서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청컨대 잠시 머물러 틈을 보아 움직이십시오.” 제독이 거짓으로 “알겠소”라고 응답하고는, 즉시 말을 타고 돌아가 개성에 이르니 여러 군영이 모두 물러났다. 제독이 소리 높여 말하였다. “청정(淸正)¹³³이 함흥(咸興)에서 장차 평양(平壤)을 습격하려 하니, 급히 군사를 돌려 구원해야 한다.” 또한 우리 군사 중 임진강 남쪽에 있는 자들을 모두 강을 건너 막아 지키도록 명하였다. 공이 종사(從事)¹³⁴ 신경진(辛慶晉)¹³⁵을 보내 제독을 만나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되는 이유 다섯 가지를 말하게 하였다. 첫째는 선왕(先王)의 분묘(墳墓)가 모두 기전(畿甸)¹³⁶에 있는데, 함락되어 적의 소유가 되면 의리상 버릴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달아나 숨은 유민(遺民)들이 날마다 왕사(王師)가 적을 치기를 바라는데 이제 군사를 물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다시 굳은 뜻이 없어져 서로 이끌고 적에게 귀순할 것이라는 것이고, 셋째는 장수와 병사들이 바야흐로 왕사를 의지하여 중흥(興復)을 도모하려 하는데 대군이 한번 물러나면 인심이 원망하고 분개하여 모두 흩어질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이고, 넷째는 봉강(封疆) 안의 한 자 땅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이고, 다섯째는 군사가 물러난 뒤에 적이 그 뒤를 타면 임진강 북쪽 또한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독이 잠잠하였다.【이상은 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131. 사대수(査大受): 명나라의 장수.
132. 벽제(碧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이곳에서 벌어진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133.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2군의 지휘관. 주로 함경도 방면에서 활동했다.
134. 종사(從事): 종사관(從事官). 조선 시대 임시 관직으로, 주로 군무(軍務)나 사행(使行) 등에서 주관자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135. 신경진(辛慶晉, 1574-1643): 조선 중기의 문신.
136. 기전(畿甸): 경기(京畿) 지역. 수도와 그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조선 왕릉 대부분이 경기 지역에 있었다.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時賊據京城已二年, 百姓不得耕種, 餓死殆盡。 餘民聞公駐東坡, 扶携就哺者繈屬於道。 先生令前郡守南宮悌爲監賑官, 多方救活。 適湖南粟數千石至, 先生卽馳啓以賑之。 賊投書乞和, 提督遣沈惟敬入賊中, 令還王子、陪臣, 退兵釜山, 然後許和。 卽領兵進開城, 先生呈文言: “和好非計, 不如擊之。” 提督批曰: “此先得我心之所同然, 然實無聽用意。” 又遣游擊陳弘謨入賊營。 先生時與都元帥金命元在坡州。 弘謨至, 令入參旗牌, 先生曰: “此是入倭營旗牌, 不干我事。 且有宋侍郞《禁殺賊牌文》, 尤不可入參。” 弘謨强之三四, 先生終不參, 徑還東坡。 提督聞之, 大怒曰: “旗牌乃皇命, 何得不拜? 我當行軍法撤兵。” 接伴使李德馨急報先生, 朝日不可不來謝, 先生不得已, 與命元往詣門上謁。 提督怒不見, 先生兩人門外, 良久許入。 先生謝曰: “小的雖愚劣, 豈不知旗牌爲可敬? 但旗牌傍有牌文, 不許我國人殺賊, 私心切痛之, 不敢參拜。 罪無所逃。” 提督色慙曰: “此言果是。 乃宋侍郞令, 非我所知。” 後數日, 又遣游擊戚金、錢世禎來說許和便, 先生執不可。 世禎怒罵曰: “然則爾國王何以棄城逃耶?” 先生徐曰: “遷國圖存, 亦一道也。” 世禎等旣去, 先生又貽書曰: “賊以甘言誘我, 一投書於東萊, 再投書於尙州, 三投書於平壤。 小邦勢甚危迫而終不許者, 不過爲天下大義, 寧死不辱耳。”

번역문:
이때 적(賊)이 경성(京城)¹³⁷을 점거한 지 이미 2년이 되어,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굶어 죽는 이가 거의 다하였다. 남은 백성들이 공(公)께서 동파(東坡)¹³⁸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부축하고 이끌며 밥을 얻어먹으려는 자들이 길에 포대기처럼 이어졌다. 선생(先生)¹³⁹께서 전(前) 군수(郡守) 남궁제(南宮悌)¹⁴⁰를 감진관(監賑官)¹⁴¹으로 삼아 여러 방면으로 구제하여 살렸다. 마침 호남(湖南)의 곡식 수천 석(石)이 도착하자, 선생께서 즉시 치계(馳啓)¹⁴²하여 이를 나누어 주었다. 적이 화의(和議)를 청하는 글을 보내오자, 제독(提督)이 심유경(沈惟敬)¹⁴³을 적진(賊中)에 보내어 왕자(王子)¹⁴⁴와 배신(陪臣)¹⁴⁵을 돌려보내고 군대를 부산(釜山)으로 물린 연후에야 화의를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개성(開城)으로 진격하였는데, 선생께서 글을 올려 아뢰었다. “화친(和好)은 좋은 계책이 아니니,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제독이 비답(批答)¹⁴⁶하여 말하였다. “이는 먼저 내 마음에 같다고 여긴 바이나, 실로 들어줄 뜻은 없소.” 또 유격(游擊)¹⁴⁷ 진홍모(陳弘謨)를 보내 적의 군영에 들어가게 하였다. 선생은 당시 도원수(都元帥)¹⁴⁸ 김명원(金命元)¹⁴⁹과 함께 파주(坡州)에 있었다. 진홍모가 도착하여 기패(旗牌)¹⁵⁰에 참여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말하였다. “이는 왜(倭)의 군영에 들어가는 기패이니,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또한 송 시랑(宋侍郞)¹⁵¹의 〈금살적패문(禁殺賊牌文)〉¹⁵²이 있으니, 더욱 참여할 수 없습니다.” 진홍모가 서너 차례 강요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참여하지 않고 곧바로 동파(東坡)로 돌아왔다. 제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기패는 곧 황명(皇命)인데, 어찌 절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마땅히 군법(軍法)을 시행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겠다.” 접반사(接伴使)¹⁵³ 이덕형(李德馨)¹⁵⁴이 급히 선생에게 알려 아침 일찍 와서 사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선생이 부득이하여 김명원과 함께 가서 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하였다. 제독이 노하여 만나주지 않다가, 선생 두 사람이 문밖에서 한참을 기다리자 들어오도록 허락하였다. 선생이 사죄하며 말하였다. “소인(小的)¹⁵⁵이 비록 어리석고 졸렬하나, 어찌 기패가 공경해야 할 것임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기패 곁에 패문(牌文)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이 적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사사로운 마음으로 매우 마음이 아파 감히 참여하여 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피할 곳이 없습니다.” 제독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말하였다. “이 말이 과연 옳다. 이는 송 시랑의 명령이지 내가 알던 바가 아니다.” 며칠 뒤, 또 유격 척금(戚金)¹⁵⁶과 전세정(錢世禎)을 보내 화의를 허락하는 것이 편하다고 설득하였으나, 선생은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전세정이 노하여 욕하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너희 국왕은 어찌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가?” 선생이 천천히 말하였다. “나라를 옮겨 보존을 도모하는 것(遷國圖存) 또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전세정 등이 떠나간 뒤, 선생이 또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적이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하여, 첫 번째는 동래(東萊)에 글을 보내고, 두 번째는 상주(尙州)에 글을 보내고, 세 번째는 평양(平壤)에 글을 보냈습니다. 소방(小邦)¹⁵⁷의 형세가 심히 위급하고 절박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은 것은, 천하의 대의(大義)를 위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욕됨을 당하지 않으려 했을 뿐입니다.”

주석:
137. 경성(京城): 수도. 한성(漢城, 현재의 서울)을 가리킨다.
138. 동파(東坡): 개성(開城) 부근의 지명.
139. 선생(先生): 여기서는 유성룡을 가리킨다.
140. 남궁제(南宮悌, 1530-?): 조선 중기의 문신.
141. 감진관(監賑官): 진휼(賑恤,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것) 업무를 감독하는 임시 관직.
142. 치계(馳啓): 급히 말을 달려 임금에게 아뢰는 것.
143. 심유경(沈惟敬): 명나라의 유격(游擊).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을 주도했으나, 일본을 속이고 허위 보고를 하여 결국 교섭을 결렬시키고 처형당했다.
144. 왕자(王子):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가리킨다.
145. 배신(陪臣): 사신을 따라가는 신하.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포로로 잡힌 조선 관료들을 의미할 수 있다.
146. 비답(批答): 임금이나 상급자가 아랫사람의 글에 답하여 써 주는 것.
147. 유격(游擊): 명나라의 군사 직책. 참장(參將) 다음가는 직위.
148. 도원수(都元帥): 전쟁 시 여러 도(道)의 군대를 총지휘하던 최고 군직.
149. 김명원(金命元, 1534-1602):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를 맡아 한성 방어 등을 지휘했다.
150. 기패(旗牌): 군대의 깃발과 신분이나 명령을 나타내는 패(牌). 군대의 위엄과 명령 체계를 상징한다. ‘입참기패(入參旗牌)’는 명령을 받들고 군례(軍禮)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151. 송 시랑(宋侍郞):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가리킨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경략(經略, 군무 총괄 책임자)이었다.
152. 금살적패문(禁殺賊牌文): 적(일본군)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패문(牌文). 명나라가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하면서 일본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내린 조치로 보인다. 유성룡은 이를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적인 명령으로 여겼다.
153. 접반사(接伴使): 외국 사신이나 장수를 맞이하여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154.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한음(漢陰). 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의 외교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5. 소적(小的):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156. 척금(戚金): 명나라의 유격 장수.
157. 소방(小邦): 작은 나라라는 뜻으로,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자국을 낮추어 부르는 말.


원문:
在松都, 聞賊犯宣、靖二陵, 率元帥以下諸官, 登滿月臺望哭, 遣軍官李弘國等往尋, 又遣朴惟仁, 移靖陵屍柩安于松山里。 四月, 先生隨天兵入京城, 哭臨宗廟, 同諸臣往審靖陵所得屍柩眞假。 時朝臣惟同知宋贊嘗逮事中廟, 所驗玉體與平日同, 而背後腫痕尤分明, 獨成渾所見不同, 先生常以爲慟。

번역문:
송도(松都)¹⁵⁸에 있을 때, 적(賊)이 선정릉(宣陵)과 정릉(靖陵)¹⁵⁹ 두 능(陵)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원수(元帥) 이하 여러 관리들을 거느리고 만월대(滿月臺)¹⁶⁰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통곡하고, 군관(軍官) 이홍국(李弘國) 등을 보내 찾아보게 하고, 또 박유인(朴惟仁)을 보내 정릉(靖陵)의 시신(屍柩)을 송산리(松山里)로 옮겨 안치하게 하였다. 4월, 선생(先生)이 천병(天兵)을 따라 경성(京城)에 들어가 종묘(宗廟)에서 곡림(哭臨)¹⁶¹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정릉에서 수습한 시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피러 갔다. 당시 조정 신하 중 오직 동지(同知)¹⁶² 송찬(宋贊)이 일찍이 중종(中宗)¹⁶³을 가까이에서 모셨었는데, 그가 확인한 옥체(玉體)¹⁶⁴가 평소와 같았고 등 뒤의 종기 흔적(腫痕)이 더욱 분명하였다. 유독 성혼(成渾)¹⁶⁵의 소견만 달랐는데, 선생은 늘 이를 통탄스럽게 여겼다.

주석:
158. 송도(松都): 개성(開城)의 옛 이름.
159. 선정릉(宣靖陵): 서울 강남구에 있는 조선 왕릉. 선릉(宣陵)은 성종(成宗)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靖陵)은 중종(中宗)의 능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160. 만월대(滿月臺): 고려 시대 개성의 궁궐터.
161. 곡림(哭臨): 왕이나 왕족, 혹은 존경하는 이의 상(喪)을 당하여 곡(哭)하는 의식.
162. 동지(同知):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약칭일 수 있다. 종2품의 명예직.
163. 중묘(中廟):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조선의 제11대 왕.
164. 옥체(玉體): 임금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
165. 성혼(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호는 우계(牛溪). 서인(西人)의 주요 인물 중 한 명.


원문:
賊兵雖退, 而東萊、釜山之間, 猶屯據自如, 無渡海意。 先生上狀言: “此賊盤據腹內, 天兵又不可恃。 宜及此時上下戮力, 以爲自强之計。 急抄精兵與賊慣戰心膽已堅者, 分配猛將, 常加操鍊, 以備不時調用。 且賊之所恃以全勝者, 惟鳥銃耳。 我國亦日夜訓鍊, 使軍士無不學習, 則賊之長技, 我亦有之矣。” 又言: “及此浙兵未還之前, 大砲、狼筅、鎗劍、器械, 一一傳習, 以一敎十, 以十敎百, 以百敎千, 則數年之間, 可得精卒數萬, 賊來可以待之矣。 仍擇丁壯者, 送浙江參將駱尙志, 習火砲諸技。” 時飢荒日甚, 餓莩相枕。 先生請煮鹽賑飢。 又請諸島如江華、紫燕等處, 勸民耕種, 以廣得粟之路。 又請設互市於遼界, 綿布一疋直米二十斗, 其用銀銅者, 尤得十倍之利。 京城之民, 從水路貿遷, 數年之間, 賴以全活者不可勝數。【竝行狀。】

번역문:
적병(賊兵)이 비록 물러났으나,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사이에는 여전히 태연하게 주둔하며 점거하고 있어 바다를 건너갈 뜻이 없었다. 선생(先生)이 글(狀)¹⁶⁶을 올려 아뢰었다. “이 적들이 배 속(腹內)¹⁶⁷에 웅크리고 있고, 천병(天兵) 또한 믿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이때를 맞이하여 상하(上下)가 힘을 합쳐(戮力) 자강(自强)의 계책을 삼아야 합니다. 급히 정예병(精兵)과 적과 싸움에 익숙하여 심담(心膽)이 이미 굳건한 자들을 뽑아, 맹장(猛將)에게 분배하고 항상 조련(操鍊)을 더하여 때에 맞지 않는 조용(調用)¹⁶⁸에 대비해야 합니다. 또한 적이 믿고서 온전히 승리하는 바는 오직 조총(鳥銃)¹⁶⁹뿐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밤낮으로 훈련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배우지 않음이 없게 한다면, 적의 장기(長技)를 우리 또한 가지게 될 것입니다.” 또 아뢰었다. “이 절강병(浙兵)¹⁷⁰이 아직 돌아가기 전에 대포(大砲), 낭선(狼筅)¹⁷¹, 창검(鎗劍), 기계(器械)를 하나하나 전수받아 익혀서, 한 명이 열 명을 가르치고 열 명이 백 명을 가르치고 백 명이 천 명을 가르친다면, 수년 사이에 정예 병졸 수만 명을 얻을 수 있어 적이 오더라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장정(丁壯)들을 뽑아 절강 참장(浙江參將) 낙상지(駱尙志)¹⁷²에게 보내 화포(火砲) 등 여러 기술을 익히게 하소서.” 이때 기근(飢荒)이 날로 심하여 굶어 죽은 시체(餓莩)가 서로 베고 누웠다. 선생이 소금을 구워(煮鹽)¹⁷³ 굶주린 백성을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 또 강화(江華), 자연(紫燕)¹⁷⁴ 등 여러 섬에서 백성들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여 곡식을 얻는 길을 넓힐 것을 청하였다. 또 요동(遼東) 경계에 호시(互市)¹⁷⁵를 설치하여, 면포(綿布) 한 필(疋)의 값이 쌀 20두(斗)가 되게 하고, 은(銀)이나 동(銅)을 사용하는 경우는 더욱 열 배의 이익을 얻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경성(京城)의 백성들이 수로(水路)를 따라 무역하니, 수년 사이에 이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이상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66. 장(狀): 조선 시대 관청이나 관원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167. 복내(腹內): 배 속. 몸의 중심부. 여기서는 조선 영토의 핵심부, 특히 남부 해안 지역을 가리킨다.
168. 불시조용(不時調用): 때를 가리지 않고 필요할 때 즉시 동원하여 쓰는 것.
169. 조총(鳥銃): 화승총(火繩銃).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력 무기였다.
170. 절강병(浙兵): 명나라 절강성(浙江省) 출신의 병사들. 당시 남방 병사들은 왜구와의 전투 경험이 많아 조총 등 화기 사용에 능숙했다. 척계광(戚繼光)이 이들을 중심으로 기효신군(紀效新軍)을 조직했다.
171. 낭선(狼筅): 대나무 가지를 그대로 붙인 채 끝에 창날을 단 무기.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고안했다. 적의 접근을 막고 진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172. 낙상지(駱尙志): 명나라 절강성 출신의 장수. 화포 제작과 운용에 능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되어 화포 기술을 전수했다.
173. 자염(煮鹽):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것. 당시 소금은 중요한 국가 재원이었고, 기근 시 백성 구휼에도 활용되었다.
174. 자연(紫燕): 황해도 서쪽 바다에 있는 섬. 현재의 백령도(白翎島)로 추정된다.
175. 호시(互市): 국경 지대에서 이루어지던 공식적인 무역. 당시 조선은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요동 지역과의 호시를 통해 곡물을 확보하고자 했다.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初, 中原憂我國不振, 遂爲賊乘, 論議甚多。 有給事中魏學堂者, 上本處置我國, 至有分割易置等語。 下兵部, 尙書石星持不可。 於是遣行人司憲, 奉勅宣諭, 且察我國事。 時宋經略在遼東, 海平君尹根壽以伺候陪臣, 在經略門下。 一日, 經略出魏給事題本, 示根壽曰: “朝議如此, 汝國將何以自謀耶? 歸告汝國王。” 根壽回自遼東, 且持來宋經略諭本國陪臣箚付, 先訪柳成龍, 發聲哭曰: “有宋侍郞箚付, 明日將投于朝堂。 公等何以處之?” 成龍不爲動, 曰: “箚付不知何語。 然令公不合持來?” 翌日, 根壽以箚付呈備局, 成龍却而不視曰: “箚付中事, 恐非朝臣所處, 見之何爲?” 諸宰皆以爲開見無妨, 成龍厲聲曰: “經略若公言國事, 則當移咨, 今無咨而獨有箚付, 其中所論, 非意料所測, 何可開見耶?” 根壽還收箚付而出。

번역문:
처음에 중원(中原)¹⁷⁶에서는 우리나라가 떨치지 못하여 마침내 적(賊)에게 기회를 타게 되었다고 염려하여 논의가 매우 많았다. 급사중(給事中)¹⁷⁷ 위학증(魏學曾)¹⁷⁸이라는 자가 있어, 우리나라를 처치(處置)하는 것에 대한 글(本)¹⁷⁹을 올렸는데, 나라를 분할(分割)하고 (왕을) 바꾸어 둔다(易置)는 등의 말까지 있었다. 병부(兵部)¹⁸⁰에 내려지자 상서(尙書)¹⁸¹ 석성(石星)¹⁸²이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행인사(行人司)¹⁸³ 사헌(司憲)¹⁸⁴을 보내 칙서(勅書)를 받들어 선유(宣諭)¹⁸⁵하고 또한 우리나라의 사정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송 경략(宋經略)¹⁸⁶이 요동(遼東)에 있었는데,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¹⁸⁷가 시후배신(伺候陪臣)¹⁸⁸으로서 경략의 문하(門下)에 있었다. 하루는 경략이 위 급사중(魏給事中)의 제본(題本)¹⁸⁹을 꺼내어 윤근수에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너희 나라가 장차 어떻게 스스로 도모하겠는가? 돌아가 너희 국왕에게 고하라.” 윤근수가 요동에서 돌아오면서 또한 송 경략이 본국 배신(陪臣)에게 효유(曉諭)하는 차부(箚付)¹⁹⁰를 가지고 와서, 먼저 유성룡(柳成龍)을 방문하여 소리 내어 울며 말하였다. “송 시랑(宋侍郞)의 차부(箚付)가 있는데, 내일 장차 조정(朝堂)에 제출하려 합니다. 공(公) 등은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유성룡은 동요하지 않고 말하였다. “차부에 무슨 말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공(令公)¹⁹¹께서 가져오지 않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날, 윤근수가 차부를 비변사(備邊司)에 내놓자, 유성룡이 물리치고 보지 않으며 말하였다. “차부 안의 일은 아마도 조정 신하가 처리할 바가 아닐 듯하니, 그것을 보아 무엇 하겠습니까?” 여러 재상(宰相)들이 모두 열어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기자, 유성룡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경략께서 만약 공적으로 나라 일을 말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문(咨文)을 보내야 하는데, 지금 자문은 없고 유독 차부만 있으니, 그 안에 논한 바가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닐 터인데, 어찌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 윤근수가 다시 차부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다.

주석:
176. 중원(中原): 중국의 중심부. 여기서는 명(明)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177. 급사중(給事中): 명나라 때 육과(六科: 이, 호, 예, 병, 형, 공)에 소속된 정7품 언관(言官). 황제의 잘못을 간하고 백관을 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178. 위학증(魏學曾):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의 관리. 조선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179. 본(本):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 문서. 상주문(上奏文)의 일종인 제본(題本)을 가리킨다.
180. 병부(兵部): 중국 역대 왕조의 중앙 행정기관인 육부(六部) 중 하나. 국방 및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181. 상서(尙書): 육부(六部)의 장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가리킨다.
182. 석성(石星, ?-1599): 명나라의 병부상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파병을 주도했으나, 강화 교섭 실패의 책임을 지고 투옥되어 옥사했다. 위학증의 강경론에 반대하고 조선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83. 행인사(行人司): 명나라 때 황제의 조칙(詔勅) 전달, 책봉(冊封), 제사(祭祀)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관청.
184. 사헌(司憲): 행인사(行人司)의 관리. 구체적인 인물은 미상.
185. 선유(宣諭): 황제의 뜻을 선포하고 타이르는 것.
186. 송 경략(宋經略): 송응창(宋應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경략(經略, 군무 총괄 책임자).
187. 윤근수(尹根壽, 1537-1616):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월정(月汀).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참여했다. 해평군(海平君)은 그의 봉호(封號)이다.
188. 시후배신(伺候陪臣): (상국의 관청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모시는 속국의 신하. 조선에서 명나라 요동 관청 등에 파견되어 연락 및 보고 임무를 맡았던 관리를 가리킨다.
189. 제본(題本): 명청 시대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던 공식 문서의 한 종류. 주로 정무(政務) 보고에 사용되었다.
190. 차부(箚付): 상관이 하급 관청이나 관리에게 내리는 공문서의 일종. 자문(咨文)보다 격식이 낮다. 유성룡은 명나라 경략이 조선 조정에 공식적인 자문이 아닌 비공식적인 차부를 보낸 것의 의도를 의심하고 그 수령을 거부했다.
191. 영공(令公):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윤근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맥상 '공께서' 또는 '대감께서'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원문:
上引見柳成龍, 出魏學堂題本示之。 大槪以爲: “朝鮮不能禦倭賊, 貽中國之憂。 當分其國爲二三, 視其能禦倭賊者而付之, 爲中國藩籬。” 上曰: “予久知有此事, 故欲退避, 今果然矣。” 成龍視題本畢, 啓曰: “此乃無理之妄說。 皇朝豈爲此論所撓? 願殿下勿疑。 惟益盡吾之所當爲者。” 旣而天使至, 成龍往迎碧蹄, 司行人與語, 且曰: “俺入藩京, 有新擧措。” 成龍不敢問。 是日, 使事禮畢, 上夜還宮, 召成龍下敎曰: “予之見卿只有今日。 雖夜深, 欲與卿面別, 故召之。” 且嘆曰: “卿之才學, 無愧古人, 而但所事者寡昧, 故不能有爲矣。” 成龍惶恐對曰: “臣無狀, 誤蒙任使, 使國事至此, 皆臣之罪。” 上曰: “不然。 子思居衛, 而衛未免削弱。 孔明猶不能復漢室, 何可以成敗論人耶?” 因顧內侍曰: “取酒來。” 內官以香醞一沙鉢來, 賜成龍飮之, 曰: “以此相訣。 明日, 予將於天使前辭位耳。” 成龍曰: “天朝憂我國不振, 勅旨所言, 無非勸勉策勵之意, 豈有他哉? 臣願聖意無動。 明日之事, 千萬不可如此, 幸乞斟酌。 臣敢以死請。” 上默然。

번역문:
상(上)께서 유성룡(柳成龍)을 인견(引見)하시고, 위학증(魏學曾)의 제본(題本)을 꺼내 보여주셨다. 대개 이르기를, “조선이 왜적(倭賊)을 막아내지 못하여 중국에 근심을 끼쳤다. 마땅히 그 나라를 둘이나 셋으로 나누어, 왜적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자를 보아 그에게 맡겨 중국의 번리(藩籬)¹⁹²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오래전부터 알았기에 물러나 피하려 하였는데, 이제 과연 그렇구나.” 유성룡이 제본 보기를 마치고 아뢰었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망령된 말입니다. 황조(皇朝)¹⁹³께서 어찌 이런 논의에 흔들리시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더욱 다할 뿐입니다.” 얼마 뒤 천사(天使)¹⁹⁴가 도착하자, 유성룡이 벽제(碧蹄)로 가서 맞이하였는데, 사행인(司行人)이 더불어 이야기하며 또 말하였다. “우리가 번방의 도성(藩京)¹⁹⁵에 들어가면 새로운 조치(新擧措)가 있을 것이오.” 유성룡이 감히 묻지 못하였다. 이날, 사신을 맞는 예(使事禮)가 끝나자, 상께서 밤에 궁궐로 돌아와 유성룡을 불러 하교(下敎)하셨다. “내가 경(卿)을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오늘뿐이다. 비록 밤이 깊었으나 경과 얼굴을 마주하고 작별하고자 하여 불렀다.” 또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경의 재주와 학문은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나, 다만 섬기는 자(임금)가 어리석고 어두워(寡昧), 이룬 바가 있을 수 없었다.” 유성룡이 황공(惶恐)하여 대답하였다. “신(臣)이 못나 잘못 임명받아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모두 신의 죄입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자사(子思)¹⁹⁶가 위(衛)나라에 있었으나 위나라가 쇠약해짐을 면치 못하였고, 공명(孔明)¹⁹⁷조차도 한(漢)나라 왕실을 회복시키지 못하였으니, 어찌 성공과 실패로 사람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이어서 내시(內侍)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술을 가져오라.” 내관(內官)이 향기로운 술(香醞) 한 사발(沙鉢)을 가져오자, 유성룡에게 내려 마시게 하며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서로 작별하노라. 내일 나는 장차 천사(天使) 앞에서 왕위를 사양(辭位)할 것이다.” 유성룡이 아뢰었다. “천조(天朝)께서 우리나라가 떨치지 못함을 염려하시니, 칙지(勅旨)에서 말씀하신 바는 권면(勸勉)하고 책려(策勵)하는 뜻이 아님이 없을 터인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옵건대 성상(聖上)의 뜻이 흔들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의 일은 천만번 이와 같이 하셔서는 안 되니, 부디 헤아려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신이 감히 죽음으로 청합니다.” 상께서 잠잠하셨다.

주석:
192. 번리(藩籬): 울타리. 제후국이 중앙 왕조를 보호하는 것을 비유한다. 즉, 조선을 분할하여 명나라를 방어하는 완충 지대로 삼겠다는 의미이다.
193. 황조(皇朝): 황제의 조정.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194. 천사(天使): 천자(天子, 황제)의 사신. 명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195. 번경(藩京): 번방(藩邦, 제후국)의 수도. 조선의 수도 한성을 가리킨다.
196.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 공자(孔子)의 손자. 이름은 급(伋). 유학의 중요한 경전인 《중용(中庸)》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노(魯)나라와 위(衛)나라 등에서 활동했으나 그의 경륜을 펼치지 못했다.
197.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 181-234).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승상. 뛰어난 지략가이자 정치가였으나, 한나라 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원문:
明日, 上幸南別宮, 暫御門內小室, 召成龍問外事。 成龍啓請如去夜所達, 上不答。 小頃, 天使出座, 上乃入。 宴半, 上袖出御書帖, 送天使。 帖中陳: “疾病不敢御國, 請傳位世子。 願天使主張。” 行人卽以紅帖自書以答曰: “今此復國, 雖云天兵之力, 實王福隆焉, 未艾也。 王欲辭位, 有唐肅宗故事, 當奏聞, 以待天朝處置。 憲一行人, 何能爲力?” 宴罷, 上還宮, 卽以御帖及紅帖, 下于成龍知之。 成龍附啓曰“此大事, 臣極陳請停, 而未蒙允兪, 且不得與聞, 殊失大臣之道。 極爲惶恐”云。

번역문:
다음 날, 상(上)께서 남별궁(南別宮)¹⁹⁸에 행차하시어 잠시 문 안의 작은 방에 머무르며 유성룡(成龍)을 불러 바깥의 일을 물으셨다. 유성룡이 간밤에 아뢴 바와 같이 아뢰고 청하였으나, 상께서 답하지 않으셨다. 잠시 후, 천사(天使)가 나와 자리에 앉자 상께서 이에 들어가셨다. 연회(宴)가 중간쯤 되었을 때, 상께서 소매에서 어서첩(御書帖)¹⁹⁹을 꺼내 천사에게 보냈다. 첩(帖) 가운데에는 “질병으로 감히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겠으니, 세자(世子)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합니다. 원컨대 천사께서 주장하여 주십시오.”라고 진술되어 있었다. 행인(行人)이 즉시 홍첩(紅帖)²⁰⁰에 직접 써서 답하여 말하였다. “이번에 나라를 회복한 것은 비록 천병(天兵)의 힘이라 하나, 실로 왕의 복이 융성하여 아직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왕께서 왕위를 사양하고자 하시는 것은 당(唐)나라 숙종(肅宗)²⁰¹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마땅히 아뢰어 천조(天朝)의 처치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헌(司憲) 저 행인(行人) 한 사람이 어찌 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연회가 파하자, 상께서 궁궐로 돌아와 즉시 어첩(御帖)과 홍첩(紅帖)을 유성룡에게 내려 알게 하였다. 유성룡이 덧붙여 아뢰었다. “이는 큰일인데, 신(臣)이 극력 진언하여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允兪)를 받지 못하였고, 또한 더불어 듣지 못하였으니 자못 대신(大臣)의 도리를 잃었습니다. 지극히 황공합니다.”

주석:
198. 남별궁(南別宮): 조선 시대 한성에 있던 별궁(別宮) 중 하나. 주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199. 어서첩(御書帖): 임금이 직접 쓴 글씨를 엮은 첩. 여기서는 선조가 양위 의사를 적은 글을 의미한다.
200. 홍첩(紅帖): 붉은 종이로 만든 첩지. 명나라 사신이 사용하던 문서 양식 중 하나였을 수 있다.
201. 당 숙종(唐肅宗): 당 현종(玄宗)의 아들. 안사의 난(安史之亂) 때 현종이 피난 간 사이 영무(靈武)에서 스스로 즉위하였다. 선조가 양위의 선례로 숙종의 고사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
時天將皆已西還, 惟遊擊戚金在, 性最機警, 日在司行人館所, 與論議。 是夕, 遊擊邀成龍相見, 屛左右, 中置一卓, 張雙燭於上。 卓北置椅許坐, 手書十餘條, 其第三條曰: “國王傳位當早。” 他皆軍務事也。 書畢, 令成龍見之。 成龍視至第三條, 不覺起立, 正色取筆書曰: “此非陪臣所忍聞。 大人讀書萬卷, 豈不聞天下古今之事? 小邦國勢方危, 若又於君臣父子之間處置失宜, 是重其禍也。” 因拱手而立。 遊擊瞪目直視良久, 取筆書其下曰: “是是是。” 遂取其紙就燭焚之。 翌日, 成龍率百僚呈文於天使, 歷陳本國遭變以後事狀, 皆由於不從倭賊犯順之謀, 以致狼狽而不悔, 及主上卽位以來, 至誠事大, 憂勤勵精之實。 累千百言, 行人頗信納。 是夜, 遊擊又呼成龍言: “天使之意大回, 國王可無慮。” 成龍拱手謝。【竝《休窩雜纂》。】

번역문:
이때 천장(天將)²⁰²들은 모두 이미 서쪽으로 돌아갔고, 오직 유격(游擊) 척금(戚金)만 남아 있었는데, 성품이 가장 기민하고 경계심이 많아(機警) 날마다 사행인(司行人)의 관사(館所)에 있으면서 더불어 논의하였다. 이날 저녁, 유격이 유성룡(成龍)을 청하여 서로 만났는데, 좌우를 물리치고 가운데 탁자 하나를 두고 그 위에 쌍촛불을 밝혔다. 탁자 북쪽에 의자를 놓고 앉도록 허락한 뒤, 손수 십여 조목을 썼는데, 그 세 번째 조목에 “국왕의 전위(傳位)는 마땅히 일찍 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다른 것은 모두 군무(軍務)에 관한 일이었다. 쓰기를 마치고 유성룡에게 보게 하였다. 유성룡이 세 번째 조목에 이르러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정색(正色)하고 붓을 들어 쓰기를, “이는 배신(陪臣)이 차마 들을 바가 아닙니다. 대인(大人)께서 독서를 만 권 하셨는데, 어찌 천하 고금(古今)의 일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소방(小邦)의 국세(國勢)가 바야흐로 위태로운데, 만약 또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처치가 마땅함을 잃는다면, 이는 그 화(禍)를 더하는 것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공수(拱手)²⁰³하고 섰다. 유격이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똑바로 보다가 붓을 들어 그 아래에 “옳다, 옳다, 옳다(是是是).”라고 썼다. 마침내 그 종이를 가져다 촛불에 태워버렸다. 다음 날, 유성룡이 백관(百僚)을 거느리고 천사(天使)에게 글을 올려, 본국이 변고를 만난 이후의 사정을 조목조목 진술하였는데, 모두 왜적(倭賊)이 순리(順理)를 거스르는 모의(犯順之謀)를 따르지 않은 데서 기인하여 낭패(狼狽)에 이르렀으나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과, 주상(主上)께서 즉위하신 이래 지극한 정성으로 사대(事大)하고 우려하고 부지런하며 정력을 다한(憂勤勵精) 실상을 아뢰었다. 수천백 마디 말을 하니, 행인(行人)이 자못 믿고 받아들였다. 이날 밤, 유격이 또 유성룡을 불러 말하였다. “천사의 뜻이 크게 돌아섰으니, 국왕께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유성룡이 공수(拱手)하고 사례하였다.【이상은 《휴와잡찬(休窩雜纂)》²⁰⁴에서 인용】

주석:
202. 천장(天將): 하늘의 장수라는 뜻으로, 명나라 장수를 가리킨다.
203. 공수(拱手): 두 손을 마주 잡고 가슴 높이로 올리는 예법. 공경의 표시이다.
204. 《휴와잡찬(休窩雜纂)》: 조선 중기의 학자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 호는 휴와(休窩).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一日, 詔使招執政數人議事, 獨呼先生謂曰: “尹斗壽兄弟用事誤國, 信乎?” 先生曰: “是我同朝共事者, 各效其勞, 豈有此哉?” 詔使曰: “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公曰: “假使事有得失, 只可告于吾君。” 詔使笑之。 及歸, 移咨申飭, 又以箚付付先生, 有再造河山之語。

번역문:
하루는 조사(詔使)²⁰⁵가 집정(執政)²⁰⁶ 몇 사람을 불러 일을 의논하면서, 유독 선생(先生)만을 불러 일러 말하였다. “윤두수(尹斗壽) 형제²⁰⁷가 용사(用事)²⁰⁸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데, 정말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이들은 나와 같은 조정에서 함께 일하는 자들로, 각기 그 노고를 바쳤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조사(詔使)가 말하였다. “군자(君子)는 편당(偏黨)을 짓지 않는다는데, 군자도 또한 편당을 짓는가?” 공(公)이 말하였다. “가령 일에 잘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다만 우리 임금께 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조사(詔使)가 웃었다. 돌아갈 때가 되자, 자문(咨文)을 보내 신칙(申飭)²⁰⁹하고, 또 차부(箚付)를 선생에게 보냈는데, 하산(河山)을 재조(再造)²¹⁰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주석:
205. 조사(詔使): 조서(詔書, 황제의 명령서)를 가지고 온 사신. 명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206. 집정(執政): 정사를 맡아보는 중신. 주로 의정부의 재상들을 가리킨다.
207. 윤두수 형제: 윤두수(尹斗壽)와 그의 동생 윤근수(尹根壽)를 가리킨다. 이들은 서인(西人)의 주요 인물로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명나라 사신이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유성룡에게 확인하려 한 것이다.
208. 용사(用事):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함.
209. 신칙(申飭): 거듭 타이르고 경계함.
210. 재조하산(再造河山): 강과 산, 즉 나라를 다시 만들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다시 일으킨 공로를 칭찬하는 말이다. 명나라 사신이 유성룡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十一月, 陳時務, 且請參商一年經費, 量減列邑貢物, 使朝廷惠澤得以下究。 又言: “臣久在東坡, 粗觀形便。 秋間, 自慶尙道取道原州, 由砥平、楊根, 渡龍津入京城, 其間地形要害, 亦頗親見。 若於上流沿江列柵, 多設器械, 以死拒守, 則賊兵必不能容易經進。 今宜急遣重臣有計慮者, 巡視忠原以下水勢淺深, 得要緊之處而爲之經略, 以求善後之圖。 至於漢江以南, 則利川、驪州、廣州爲京都左輔, 水原、南陽、富平、仁川爲右拒。 若將收兵峙糧, 擇守要險, 則京城之勢稍有捍蔽, 而緩急庶有所恃矣。 廣州南漢山城, 乃扶餘始祖溫祚城, 而中有井有田, 可以修葺保守。 此外水原之禿城、衿川之衿芝、仁川之仁城, 皆係險阨必守之地。 若隨便繕治, 屯兵據險, 互爲形援, 則襟袍固密, 人心有恃而不恐, 縱有敵兵, 亦首尾牽掣, 不敢輕突也。 嶺南賊勢日急, 今聞中朝已絶通貢之請, 其咆怒決裂之禍在於朝夕。 諸將聚烏合飢嬴之卒, 隱處山谷, 無意交戰。 更一二月, 食益乏而軍益散, 雖欲收拾, 其勢難矣。 臣請於湖、嶺三道, 別遣重臣主管調軍給饋, 爲天兵後繼, 如張浚之開督府, 蕭何之補葺關中, 庶幾人心不至渙散, 號令有所歸宿矣。”

번역문:
11월, 시무(時務)²¹¹를 아뢰고, 또한 1년 경비(經費)를 참작하여 헤아려(參商) 여러 고을의 공물(貢物)을 양을 헤아려 줄여서 조정의 은택(惠澤)이 아래까지 미치게(下究) 할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었다. “신(臣)이 오랫동안 동파(東坡)에 있으면서 대략 형편(形便)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을 사이에 경상도(慶尙道)에서 길을 잡아 원주(原州)를 거쳐 지평(砥平),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²¹²을 건너 경성(京城)으로 들어왔는데, 그 사이의 지형 요해처(地形要害)를 또한 자못 직접 보았습니다. 만약 상류(上流)에서 강을 따라 목책(柵)을 벌여 세우고 기계(器械)를 많이 설치하여 죽음으로 막아 지킨다면, 적병(賊兵)이 반드시 쉽게 거쳐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급히 계책과 사려(計慮)가 있는 중신(重臣)을 보내 충주(忠州)와 원주(原州)²¹³ 이하의 물 형세의 깊고 얕음을 순시(巡視)하여, 요긴한 곳을 얻어 경략(經略)²¹⁴을 하여 선후책(善後之圖)을 구해야 합니다. 한강(漢江) 이남에 이르러서는, 이천(利川), 여주(驪州), 광주(廣州)가 경도(京都)의 좌측 보좌(左輔)가 되고, 수원(水原), 남양(南陽), 부평(富平), 인천(仁川)이 우측 방어(右拒)가 됩니다. 만약 장차 군사를 거두고 군량을 쌓아(峙糧) 요충지와 험한 곳(要險)을 택하여 지킨다면, 경성의 형세가 조금이나마 막아 가림(捍蔽)이 있을 것이고, 위급할 때(緩急) 거의 믿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바로 부여(扶餘) 시조(始祖) 온조(溫祚)²¹⁵의 성인데, 안에 우물과 밭이 있어 수리하여 지킬(修葺保守)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수원의 독성(禿城)²¹⁶, 금천(衿川)의 금지(衿芝)²¹⁷, 인천의 인성(仁城)²¹⁸은 모두 험하고 막힌 반드시 지켜야 할 땅(險阨必守之地)입니다. 만약 형편에 따라 수리하고 다스려(繕治) 군사를 주둔시키고 험한 곳에 의거하여 서로 형세의 도움(形援)이 되게 한다면, 옷깃과 옷자락(襟袍)²¹⁹이 견고하고 빽빽해져 인심이 믿는 바가 있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적병이 있더라도 또한 머리와 꼬리가 서로 끌어당겨(首尾牽掣) 감히 가볍게 돌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남(嶺南)의 적의 형세가 날로 급한데, 지금 들으니 중조(中朝)²²⁰에서 이미 통공(通貢)²²¹의 요청을 끊었다고 하니, 그들이 으르렁거리며 노하여 관계를 끊는(咆怒決裂) 화(禍)가 아침저녁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오합(烏合)의 굶주리고 여윈 병졸들을 모아 산골짜기에 숨어 지내며 교전(交戰)할 뜻이 없습니다. 다시 한두 달이 지나면 식량이 더욱 부족해지고 군사가 더욱 흩어져, 비록 수습하고자 해도 그 형세가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청컨대 호서(湖西), 영남(嶺南), 호남(湖南)의 삼도(三道)²²²에 별도로 중신(重臣)을 보내 군사를 조발(調軍)하고 군량을 지급(給饋)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여 천병(天兵)의 후속 부대(後繼)가 되도록 하소서. 마치 장준(張浚)²²³이 독부(督府)²²⁴를 연 것과 같고, 소하(蕭何)²²⁵가 관중(關中)을 보수하고 정비(補葺)한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인심이 흩어지는 데 이르지 않고 호령(號令)이 돌아갈 곳(歸宿)이 있을 것입니다.”

주석:
211. 시무(時務): 당시에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
212. 용진(龍津): 현재의 서울 광진구 광나루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강의 주요 나루터 중 하나였다.
213. 충원(忠原): 충주(忠州)와 원주(原州). 충주는 당시 충청도의 중심지였고, 원주는 강원도의 중심지였다.
214. 경략(經略): 장기적인 안목으로 계획을 세워 다스리는 것.
215. 부여 시조 온조(扶餘始祖溫祚): 백제(百濟)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을 가리킨다.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한산성이 그곳이라는 설이 있다.
216. 독성(禿城): 경기도 오산시에 있는 독산성(禿山城)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217. 금지(衿芝):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금천(衿川, 현재 서울 금천구 및 경기 시흥시, 안양시 일부) 지역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218. 인성(仁城): 인천(仁川)의 문학산성(文鶴山城) 또는 계양산성(桂陽山城) 등으로 추정된다.
219. 금포(襟袍): 옷깃과 옷자락. 매우 가깝고 중요한 관계 또는 지역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수도 방어 체계가 긴밀하고 견고함을 의미한다.
220. 중조(中朝): 중국 조정. 명나라를 가리킨다.
221. 통공(通貢): 조공(朝貢) 무역을 통하여 교류하는 것. 명나라가 일본과의 강화 교섭 결렬 후 조공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222. 호령삼도(湖嶺三道): 호서(湖西, 충청도), 영남(嶺南, 경상도), 호남(湖南, 전라도).
223. 장준(張浚, 1097-1164): 중국 남송(南宋) 초기의 재상. 금(金)나라의 침입에 맞서 강회(江淮) 지역에 독부(督府)를 설치하고 군사를 총괄하여 항전했다.
224. 독부(督府): 군사 및 행정을 총괄하는 임시 관청.
225. 소하(蕭何, ?-기원전 193): 중국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천하를 다툴 때 관중(關中) 지역을 안정시키고 군수 물자를 보급하여 승리의 기반을 닦았다.


원문:
湖西賊宋儒眞起, 上命公入宿禁中。 公曰: “當此危疑之際, 遽命入衛, 恐人心益駭。” 上以密旨敎曰: “予倚卿將有爲, 而卿殊不自愛, 獨不見武元衡之事乎?” 一夕, 上遣內豎覵公, 深夜明燈端坐閱古史, 命煖酒賜之。 時外寇內訌, 衛士單弱, 京師震驚, 莫保朝夕。 公鎭定危疑, 酬酢不爽, 朝野倚以爲重。【竝行狀。】

번역문:
호서(湖西)의 도적 송유진(宋儒眞)²²⁶이 일어나자, 상(上)께서 공(公)에게 명하여 금중(禁中)²²⁷에 들어와 숙직(入宿)하게 하셨다. 공이 아뢰었다. “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갑자기 들어와 호위하라고 명하시면, 인심(人心)이 더욱 놀랄까 두렵습니다.” 상께서 밀지(密旨)²²⁸로 하교하셨다. “내가 경(卿)에게 의지하여 장차 하려는 바가 있는데, 경은 자못 스스로를 아끼지 않으니, 유독 무원형(武元衡)²²⁹의 일을 보지 못하였는가?” 어느 날 저녁, 상께서 내시(內豎)를 보내 공을 엿보게 하니, 깊은 밤에 등불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고사(古史)를 읽고 있었다. 술을 데워 내리라고 명하셨다. 이때 외적(外寇)의 침입과 내분(內訌)이 있고 호위 군사(衛士)는 수효가 적고 약하여, 경사(京師)²³⁰가 크게 놀라 아침저녁을 보전하기 어려웠다. 공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진정시키고 안정시키며, 응대(酬酢)²³¹함에 착오가 없으니, 조정과 재야(朝野)가 그를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이상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226. 송유진(宋儒眞, ?-1596): 임진왜란 중 충청도 홍산(鴻山) 등지에서 일어난 반란(이몽학의 난)의 주모자 중 한 명. 이몽학(李夢鶴)의 부장으로 활동했다.
227. 금중(禁中): 궁궐 안. 대궐.
228. 밀지(密旨): 비밀리에 내리는 임금의 명령.
229. 무원형(武元衡, 758-815): 중국 당(唐)나라 헌종(憲宗) 때의 재상. 번진(藩鎭) 세력을 억제하려다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신변의 위험을 경고하며 궁궐에 머물도록 권유한 것이다.
230. 경사(京師): 수도. 한성을 가리킨다.
231. 수작(酬酢):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것. 전하여, 서로 응대하고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甲午二月, 設訓鍊都監, 以柳成龍爲都提調。 初, 平壤之復也, 上詣謝都督李如松, 問天兵前後勝敗之異, 都督曰: “前來北方之將, 恒習防胡戰法, 故戰不利。 今來所用, 乃戚將軍《紀效新書》, 禦倭之法, 所以全勝也。” 上請見戚書, 都督秘之不出。 上密令譯²³²官購得於都督麾下人。 上在海州, 以示柳成龍, 曰: “予觀天下書多矣, 此書實難曉。 卿爲我講解, 使可效法。” 成龍與從事官李時發等討論, 又得儒生韓嶠爲郞, 專掌質問於天將衙門。 及上還都, 命設訓鍊都監, 成龍爲都提調, 武臣趙儆爲大將, 兵曹判書李德馨爲有司堂上, 文臣辛慶晉、李弘胄爲郞屬。 募飢民爲兵, 應者頗集。 趙儆設法以限之, 能擧一巨石、能超越一丈墻者入格。 旬日得數千人, 敎以戚氏三手練技之法, 置把摠、哨官, 部分演習, 悉如戚制, 數月而成軍容。 上親臨習陣, 此後都監軍常宿衛扈從, 國家賴之。 成龍仍請: “措置糧餉, 加募兵一萬, 於京城置五營, 營置二千, 每年半留城中鍊習, 半出城外, 擇閑廣之地爲屯田。 輪還替代, 以厚兵食之源, 而益固根本。” 上皆從之, 事竟不行。【《宣廟寶鑑》。】

번역문:
갑오년(1594) 2월, 훈련도감(訓鍊都監)²³³을 설치하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제조(都提調)²³⁴로 삼았다. 처음에 평양(平壤)을 수복했을 때, 상(上)께서 나아가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사례하고 천병(天兵)²³⁵의 이전과 이후 승패가 다른 점을 묻자, 제독이 말하였다. “이전에 온 북방(北方)의 장수들은 항상 오랑캐를 막는 전법(防胡戰法)²³⁶을 익혔기 때문에 전투에 불리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사용한 것은 바로 척 장군(戚將軍)²³⁷의 《기효신서(紀效新書)》²³⁸이니, 왜(倭)를 막는 방법(禦倭之法)이라 온전히 승리한 것입니다.” 상께서 척 장군의 책을 보기를 청하였으나, 제독이 비밀에 부치고 내놓지 않았다. 상께서 비밀리에 역관(譯官)²³⁹에게 명하여 제독 휘하(麾下)의 사람에게서 구입하게 하였다. 상께서 해주(海州)²⁴⁰에 계실 때 유성룡에게 이를 보여주며 말씀하셨다. “내가 천하의 책을 많이 보았으나, 이 책은 실로 깨닫기 어렵다. 경(卿)이 나를 위해 강해(講解)하여 본받을 수 있게 하라.” 유성룡이 종사관(從事官) 이시발(李時發)²⁴¹ 등과 토론하고, 또 유생(儒生) 한교(韓嶠)²⁴²를 낭관(郞)으로 얻어 오로지 천장(天將)의 아문(衙門)²⁴³에 질문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상께서 도성으로 돌아오시자(還都),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도록 명하여 유성룡을 도제조(都提調)로, 무신(武臣) 조경(趙儆)을 대장(大將)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 이덕형(李德馨)을 유사당상(有司堂上)²⁴⁴으로, 문신(文臣) 신경진(辛慶晉)과 이홍주(李弘胄)²⁴⁵를 낭속(郎屬)²⁴⁶으로 삼았다. 굶주린 백성을 모집하여 병사로 삼으니 응하는 자가 자못 모였다. 조경(趙儆)이 법을 만들어 제한하였는데, 큰 돌 하나를 들 수 있거나 담장 한 장(丈)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가 격식에 들었다. 열흘 만에 수천 명을 얻어, 척씨(戚氏)의 삼수련기법(三手練技之法)²⁴⁷으로 가르치고 파총(把摠)²⁴⁸과 초관(哨官)²⁴⁹을 두어 부대를 나누어 연습시키니, 모두 척 장군의 제도(戚制)와 같았으며, 수개월 만에 군대의 위용(軍容)을 이루었다. 상께서 친히 습진(習陣)²⁵⁰에 임하시니, 이 뒤로 도감군(都監軍)이 항상 숙위(宿衛)하고 호종(扈從)²⁵¹하여 국가가 이에 힘입었다. 유성룡이 이어서 청하였다. “군량(糧餉)을 조치하고 병사 1만 명을 더 모집하여, 경성(京城)에 5영(營)을 두되 각 영에 2천 명을 두어, 매년 절반은 성안에 머물며 훈련하고 절반은 성 밖에 나가 한가하고 넓은 땅을 택하여 둔전(屯田)²⁵²을 하게 하소서. 윤번(輪番)으로 교대하여 병량(兵食)의 근원을 두텁게 하고 근본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합니다.” 상께서 모두 따랐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는 못하였다.【《선묘보감(宣廟寶鑑)》²⁵³에서 인용】

주석:
232. [주-D005] 譯 : 저본에는 “역(驛)”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규장각본,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조(宣祖朝)》 갑오(27년)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외국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역관(譯官)'이 문맥에 맞다.
233. 훈련도감(訓鍊都監):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8월에 설치되어 1882년(고종 19)까지 존속했던 조선 후기의 중앙 군영(軍營).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 체제를 갖추고 수도 방어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유성룡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234. 도제조(都提調): 조선 시대 각 관서의 으뜸 벼슬. 주로 현직 의정(議政)이 겸임하였다. 훈련도감 도제조는 군무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235. 천병(天兵): 하늘의 군대라는 뜻으로, 명나라 군대를 높여 부르는 말.
236. 방호전법(防胡戰法): 북방 오랑캐(胡), 즉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유목 민족을 방어하는 전술. 주로 기병 중심의 전술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237. 척 장군(戚將軍): 척계광(戚繼光, 1528-1588). 중국 명나라의 명장. 왜구(倭寇) 토벌과 북방 방어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기효신서(紀效新書)》, 《연병실기(練兵實紀)》 등 중요한 병서(兵書)를 저술했다.
238. 《기효신서(紀效新書)》: 척계광이 남방에서 왜구를 토벌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병서. 보병의 편제, 무기 사용법, 진법(陣法), 군율 등을 상세히 다루었다. 특히 절강(浙江) 지역의 병사들을 중심으로 개발한 원앙진(鴛鴦陣)과 삼수병(三手兵) 운용법은 왜구 격퇴에 큰 효과를 발휘했으며, 조선의 군제 개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239. 역관(譯官): 통역을 담당하는 관리. 사역원(司譯院) 소속이었다.
240. 해주(海州): 황해도(黃海道)의 감영(監營) 소재지. 선조는 임진왜란 중 의주(義州)로 피난 갔다가 환도(還都)하는 길에 잠시 해주에 머물렀다.
241. 이시발(李時發, 1569-1626):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유성룡을 따라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242. 한교(韓嶠, 1556-1627):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막하에서 활동하며 명나라 장수들과의 소통을 도왔다.
243. 천장아문(天將衙門): 천장(天將), 즉 명나라 장수의 관청(衙門).
244. 유사당상(有司堂上): 해당 업무를 주관하는 당상관(堂上官). 훈련도감의 실무를 담당하는 책임자를 의미한다.
245. 이홍주(李弘胄, 1562-1638): 조선 중기의 문신.
246. 낭속(郎屬): 중앙 관서의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 낭관(郎官)과 그 아래 관원들을 통칭한다.
247. 척씨삼수련기법(戚氏三手練技之法): 척계광(戚繼光)이 창안한 삼수병(三手兵), 즉 포수(砲手, 화기 담당), 사수(射手, 활 담당), 살수(殺手, 칼이나 창 등 근접 무기 담당)가 각자의 기술을 연마하고 협동하는 훈련법. 훈련도감 군사 훈련의 기본이 되었다.
248. 파총(把摠): 조선 후기 군영의 종4품 무관직. 초(哨)의 지휘관인 초관(哨官)을 지휘했다.
249. 초관(哨官): 조선 후기 군영의 하급 지휘관. 대략 100명 내외의 병력을 지휘하는 초(哨)의 책임자였다.
250. 습진(習陣): 진법(陣法)을 익히는 군사 훈련.
251. 숙위호종(宿衛扈從): 궁궐에서 숙직하며 임금을 호위하고(宿衛), 임금의 행차를 따라 모시는(扈從) 일.
252. 둔전(屯田): 군인이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동원되는 제도, 또는 그 경작지. 군량미를 확보하고 군대의 유지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253. 《선묘보감(宣廟寶鑑)》: 선조(宣祖) 시대의 중요한 사실과 임금의 모범적인 언행을 기록한 책.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원문:
啓請設防於鳥嶺曰: “京都, 前後長江, 左負高山, 右環大海, 天下之險無過於此, 而忠州居上流, 爲國門戶, 欲保忠州, 當把截鳥嶺。 鳥嶺若失險, 則忠州雖有良將勁卒, 不可守矣。 鳥嶺之上, 有岐路傍出, 不可防守。 自東嶺下十餘里, 兩厓斗絶, 名曰鷹巖, 中有溪水, 行人往來者, 橫木爲橋, 凡二十四處。 若此處設機, 當賊之至, 撤去橋梁, 又橫斷流水, 使兩峽之間, 盡爲洪流, 人不能着足。 因以弓弩、菱鐵、火砲等器守之, 不過百餘勁卒, 而嶺路之把守自固。 自聞慶西出延豐之東, 此路亦險絶, 使數十人守之, 賊不敢逾入。 嶺路旣斷, 則賊雖出於他道, 我軍可以專力把守。 此利害之較然明著者也。”

번역문:
조령(鳥嶺)²⁵⁴에 방어 시설을 설치할 것을 아뢰며 청하였다. “경도(京都)는 앞뒤로 긴 강(長江)²⁵⁵이 있고, 왼쪽으로는 높은 산을 등지고 오른쪽으로는 큰 바다를 두르고 있어 천하의 험준함이 이보다 더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충주(忠州)가 상류(上流)에 위치하여 나라의 문호(門戶)가 되니, 충주를 보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조령을 막아 끊어야(把截) 합니다. 조령이 만약 험준함을 잃으면, 충주에 비록 좋은 장수와 강한 병졸(良將勁卒)이 있더라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조령 위에는 샛길(岐路)이 곁으로 나 있어 방어하여 지키기가 불가능합니다. 동쪽 고개 아래 10여 리부터 양쪽 언덕이 가파르게 끊어져(斗絶) 있는데, 이름이 응암(鷹巖)입니다. 가운데 계곡물이 있어 행인(行人)이 왕래하는 자들이 나무를 가로질러 다리(橋)를 놓은 곳이 무릇 24곳입니다. 만약 이곳에 시설(機)²⁵⁶을 설치하여 적이 도착했을 때 다리를 철거하고 또 흐르는 물을 가로막아 끊어서 양쪽 골짜기 사이가 모두 큰 물줄기(洪流)가 되어 사람이 발붙일 수 없게 만드십시오. 이어서 궁노(弓弩), 마름쇠(菱鐵)²⁵⁷, 화포(火砲) 등의 무기로 지킨다면 백여 명의 강한 병졸에 지나지 않아도 영로(嶺路)의 수비는 저절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문경(聞慶)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연풍(延豐)²⁵⁸의 동쪽으로 가는 이 길 또한 험준하게 끊어져 있으니, 수십 명을 시켜 지키게 하면 적이 감히 넘어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영로(嶺路)가 이미 끊어지면 적이 비록 다른 길로 나오더라도 우리 군대는 오로지 힘을 다해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利害) 관계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는 점입니다.”

주석:
254. 조령(鳥嶺):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 영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 중 하나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문경새재.
255. 장강(長江): 긴 강. 여기서는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56. 기(機): 계책, 시설, 장치. 여기서는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한 방어 시설이나 장애물 등을 의미한다.
257. 능철(菱鐵): 마름쇠. 날카로운 가시가 여러 개 달린 쇠붙이. 땅에 뿌려 적의 보병이나 기병의 접근을 막는 데 사용되었다.
258. 연풍(延豐):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조령 부근에 위치한다.


원문:
三月, 啓請修鎭管之制。 略曰: “祖宗之制, 八道各官皆有鎭管, 謂之兵馬節制使。 平時則鎭管之邑爲主鎭, 而檢勅其屬邑, 訓鍊軍伍之事, 皆可治之; 有事則鎭管率其所屬之軍, 鱗次整齊, 以聽主將約束, 其勢如身之使臂, 臂之使指, 操縱伸縮, 惟將之爲。 一鎭管之軍雖或奔潰, 而他鎭管之軍各以大兵次第堅守, 或扼其前, 或躡其後, 或撓其左右。 姑以嶺南言之, 東萊鎭所屬, 勿論公私賤、雜頉, 盡發爲兵, 則其數將至七八萬。 不幸而敗, 又有大丘鎭管之軍, 居中遮截, 而慶州、晉州之軍爲左右翼, 可以禦賊; 不幸而大丘之軍又不利, 尙州鎭管又以重兵堅守, 而忠州鎭管率屬邑之軍, 把截鳥嶺, 爲其後繼。 淸州鎭管又率屬邑之軍, 進守黃澗、永同、秋風嶺之間, 以爲左右翼, 以及京畿等邑, 一皆嚴兵整待。 國家形勢如重門複墻, 賊雖透得一重, 又有一重, 何至於一旬之間橫行千里, 徑造都城, 如蹈無人之境乎? 祖宗經遠之圖, 其詳如此, 而中世以後, 一切廢隳。 又有輕慮淺謀之人自任己意, 做出新規, 名曰《制勝方略》。 國事之所以至此, 大槪《制勝方略》誤之也。 臣請言其《制勝方略》大要, 以一道之軍, 預爲分屬於是巡邊使、防禦使、助防將、兵・水使, 纔聞賊報, 不察賊衆多寡、地勢險夷, 一例徵發, 皆聚境上。 旣而朝廷遣將於千里之外, 不能朝聞夕發, 而無將之軍處處屯聚, 無約束無紀律, 紛紜暴露於原野之中。 一日二日, 待將不至, 以至於三日四日之久, 而賊鋒已迫, 飢渴繼之, 則如鳥驚獸駭, 相率而潰, 土崩瓦解, 不可收拾, 然後所謂京將帥等單騎馳下。 已散之軍, 藏匿山谷, 其誰招集? 而賊之先驅已迫, 不敗何待? 壬辰, 李鎰到聞慶而聞慶已空, 到尙州而尙州已空。 散卒來集者僅數百, 部伍未分之前, 賊已至十里地矣。 懲前, 所以毖後; 鑑古, 所以圖今也。”【竝行狀。】

번역문:
3월, 진관(鎭管)의 제도²⁵⁹를 수리할 것을 아뢰며 청하였다. 대략 아뢰기를, “조종(祖宗)의 제도에는 팔도(八道)의 각 관청에 모두 진관이 있었으니, 이를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²⁶⁰라 일컬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진관이 있는 고을이 주진(主鎭)이 되어 그 속읍(屬邑)을 검칙(檢勅)²⁶¹하고 군오(軍伍)를 훈련하는 일을 모두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유사시(有事)에는 진관이 그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로 정제(整齊)하여 주장(主將)의 약속(約束)을 따르니, 그 형세가 마치 몸이 팔을 부리고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아, 조종(操縱)하고 신축(伸縮)하는 것이 오직 장수의 뜻대로였습니다. 한 진관의 군대가 비록 혹 달아나 무너지더라도 다른 진관의 군대가 각기 큰 병력으로 차례로 굳게 지키거나, 혹은 그 앞을 막거나, 혹은 그 뒤를 밟거나, 혹은 그 좌우를 교란하였습니다. 우선 영남(嶺南)으로 말하자면, 동래진(東萊鎭) 소속의 군사를 공사천(公私賤)과 잡역(雜役)에 종사하는 자(雜頉)²⁶²를 막론하고 모두 징발하여 병사로 삼으면 그 수가 장차 7, 8만에 이를 것입니다. 불행히 패하더라도 또 대구진관(大丘鎭管)의 군대가 가운데에서 가로막고, 경주(慶州)와 진주(晉州)의 군대가 좌우 날개(左右翼)가 되어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불행히 대구의 군대가 또 불리하더라도, 상주진관(尙州鎭管)이 또 중병(重兵)으로 굳게 지키고, 충주진관(忠州鎭管)이 속읍의 군대를 거느리고 조령(鳥嶺)을 막아 그 뒤를 잇습니다. 청주진관(淸州鎭管)이 또 속읍의 군대를 거느리고 황간(黃澗), 영동(永同), 추풍령(秋風嶺) 사이로 나아가 지켜 좌우 날개가 되고, 경기도(京畿道) 등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모두 군사를 엄히 하고 정비하여 기다립니다. 국가의 형세가 마치 겹문(重門)과 이중 담장(複墻)과 같아, 적이 비록 한 겹을 뚫더라도 또 한 겹이 있으니, 어찌 열흘 사이에 천 리를 가로질러 행하고 곧바로 도성(都城)에 이르기를 아무도 없는 지경을 밟듯 할 수 있었겠습니까? 조종(祖宗)의 멀리 내다보는 계획(經遠之圖)이 그 상세함이 이와 같았는데, 중세(中世) 이후로 일절 폐지되고 무너졌습니다. 또 생각이 가볍고 꾀가 얕은 사람(輕慮淺謀之人)이 스스로 자기 뜻을 내세워 새로운 규정(新規)을 만들어 내어 이름을 《제승방략(制勝方略)》²⁶³이라 하였습니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른 까닭은 대개 《제승방략》이 그르친 것입니다. 신(臣)이 그 《제승방略》의 대요(大要)를 말씀드리기를 청합니다. 한 도(道)의 군대를 미리 나누어 순변사(巡邊使),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병사(兵使)·수사(水使)²⁶⁴에게 소속시켜 두었다가, 겨우 적의 보고를 듣자마자 적의 많고 적음과 지세의 험하고 평탄함을 살피지 않고 일률적으로 징발하여 모두 국경 위에 모읍니다. 그러고 나서 조정에서 장수를 천 리 밖으로 보내니 아침에 듣고 저녁에 출발할 수 없는데, 장수 없는 군대가 곳곳에 주둔하여 모여 약속도 없고 기율도 없이 어지럽게 들판 가운데 드러나 있습니다. 하루 이틀 장수를 기다려도 이르지 않고, 3일 4일의 오랜 시간에 이르렀는데 적의 칼끝(賊鋒)이 이미 닥치고 굶주림과 목마름이 이어지면, 마치 새가 놀라고 짐승이 달아나듯 서로 이끌고 무너져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土崩瓦解)하여 수습할 수 없게 된 연후에야, 이른바 경장(京將帥)²⁶⁵ 등이 단기(單騎)로 말을 달려 내려옵니다. 이미 흩어진 군대는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니 그 누가 모집하겠으며, 적의 선봉(先驅)은 이미 닥쳤으니 패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임진년(壬辰)에 이일(李鎰)이 문경(聞慶)에 도착하니 문경은 이미 비었고, 상주(尙州)에 도착하니 상주는 이미 비었습니다. 흩어진 병졸 중 와서 모인 자가 겨우 수백 명이었는데, 부대(部伍)를 나누기도 전에 적이 이미 10리 밖에 이르렀습니다. 앞선 일을 징계하여 뒷날을 삼가고(懲前毖後), 옛것을 거울삼아 오늘을 도모(鑑古圖今)해야 합니다.”【이상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259. 진관 체제(鎭管體制): 조선 초기에 확립된 지방 방어 체제. 각 도(道)의 주요 거점(主鎭)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나 첨절제사(僉節制使) 등을 파견하고, 그 아래 주변 군현(屬邑)을 몇 개의 진관(鎭管)으로 묶어 유사시에 각 진관 단위로 군대를 동원하여 방어하는 시스템이다. 각 지역 실정에 맞게 방어 전략을 세우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260.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조선 초기에 각 도 및 주요 진(鎭)에 파견된 군사 지휘관.
261. 검칙(檢勅): 단속하고 감독함.
262. 공사천(公私賤), 잡척(雜頉): 공노비와 사노비, 그리고 여러 잡다한 역(役)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통칭. 진관 체제에서는 이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263. 《제승방략(制勝方略)》: 조선 중기에 진관 체제를 대신하여 시행된 방어 전략. 유사시에 각 도의 병력을 한곳에 모아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도록 하는 방식(분군법, 分軍法)이다. 병력을 집중시켜 대규모 적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병력 동원에 시간이 걸리고 지휘 체계가 비효율적이며 지역 방어가 취약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초기의 연패 원인을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점에서 찾았다.
264. 병사(兵使)·수사(水使): 각 도의 육군과 수군을 지휘하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가리킨다.
265. 경장(京將帥): 서울(중앙)에서 파견된 장수.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參將胡澤還, 奏請使許頊齎請封倭奏文隨去。 時皇朝之議, 多以許倭款爲非。 惟石星及經略宋、顧二人未得勝算, 欲遷就完事, 極力主張, 而科官輒持之, 故要我國隨而奏請以伸²⁶⁶其計。 上知讎賊欺詐反覆, 和必不成, 故欲守義請兵, 前後下旨痛快嚴切, 至命傳位世子, 然後任行許和事。 柳成龍連啓, 以國勢如此, 當詳具事情, 以聽中朝處置。 上初不許, 只許咨報衙門, 而備局請議皆如成龍言, 上不得已從之。【《宣廟寶鑑》。】

번역문:
참장(參將)²⁶⁷ 호택(胡澤)²⁶⁸이 돌아가면서, 청컨대 사신 허욱(許頊)²⁶⁹이 왜(倭)를 책봉하기를 청하는 주문(奏文)²⁷⁰을 가지고 따라가게 해달라고 아뢰었다. 이때 황조(皇朝)²⁷¹의 의논은 왜(倭)와의 화의(款)²⁷²를 허락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는 의견이 많았다. 오직 석성(石星)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 고양겸(顧養謙)²⁷³ 두 사람만이 승산(勝算)을 얻지 못하자 일을 미봉(遷就)하여 마무리 지으려 하여 극력 주장하였으나, 과관(科官)²⁷⁴들이 번번이 이를 저지하였으므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따라 주문(奏文)을 올려 그들의 계책을 펴도록(伸)²⁷⁵ 요구한 것이다. 상(上)께서 원수 같은 적(讎賊)의 속임수와 반복무상함을 아시고 화의가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으므로, 의리를 지켜 군사를 청하고자 하여 전후로 하신 하교(下旨)가 통쾌하고 엄격하고 간절하였으며, 세자(世子)에게 전위(傳位)하라고 명한 뒤에야 화의를 허락하는 일을 행하겠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유성룡(柳成龍)이 연이어 아뢰기를, 국세(國勢)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사정을 상세히 갖추어 중조(中朝)²⁷⁶의 처치를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상께서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고 단지 아문(衙門)²⁷⁷에 자문(咨文)으로 보고하는 것만 허락하였으나, 비변사(備邊司)에서 청하여 의논한 것이 모두 유성룡의 말과 같았으므로, 상께서 부득이 따르셨다.【《선묘보감(宣廟寶鑑)》에서 인용】

주석:
266. [주-D006] 伸 : 저본(底本)에는 “신(紳)”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창석집(蒼石集)・서애유선생행상(西厓柳先生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계책을 펴다'라는 의미의 '신(伸)'이 문맥에 맞다.
267. 참장(參將): 명나라의 군사 직책. 부총병(副總兵) 다음가는 직위.
268. 호택(胡澤): 명나라의 참장.
269. 허욱(許頊, 1548-1611): 조선 중기의 문신.
270. 주문(奏文): 황제에게 올리는 글. 여기서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명나라 황제에게 청하는 글을 의미한다.
271. 황조(皇朝): 황제의 조정. 명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272. 관(款): 성의, 정성. 여기서는 화의(和議) 또는 항복의 의미로 쓰였다.
273. 고양겸(顧養謙): 명나라의 관리.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함께 일본과의 강화 교섭을 추진했다.
274. 과관(科官): 육과급사중(六科給事中)을 가리킨다. 명나라 때 언론 기능을 담당하던 관리들로, 강화 교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275. 신(伸): 펴다, 주장하다. 명나라의 강화 주도파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동의를 얻어 황제에게 보고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276. 중조(中朝): 중국 조정. 명나라를 가리킨다.
277. 아문(衙門): 관청. 여기서는 명나라의 관련 부서, 예를 들어 병부(兵部)나 요동(遼東)의 군사 기관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원문:
九月, 啓請廣取人才, 以爲撥²⁷⁸亂之用, 以切於時用者, 分爲十條, 令宰臣、三司各擧所知, 勿論貴賤, 惟務實才, 其有抱負而不見知者, 令監、兵使、守令搜訪啓聞。 如此而又有見遺者, 許令自擧。 又請預備糧餉, 略曰: “今日危亡之勢多端, 而就其中拱手無策者, 惟糧餉一事而已。 京城積粟僅支數月, 外方倉庫匱竭, 公私之勢, 懔懔如此。 今之議者, 或以爲採銀貿穀, 求其實用, 則有同捕風。 蓋銀雖我國所産, 而産出不多, 用力多而所得甚少, 生財之道, 別無他法。 前此所陳, 以各道貢物盡爲作米, 又用上番軍士價布、各司奴婢身貢, 皆作米聚諸京司, 可得十萬石。 此外又有煮鹽一策爲理財要務, 其切於需用, 與五穀相等, 八道之界, 處處皆産。 興起鹽利, 別無他方, 只是招集鹽戶, 使之安集, 除其雜役, 不得侵撓, 隨時販賣如古時之法, 軍糧及種子可得千萬石之多。 此外又有屯田, 尤當及時講究, 力行勸課之政, 勿使遲延, 以失機會。”

번역문:
9월, 널리 인재를 뽑아 난리(亂)를 평정(撥)²⁷⁹하는 데 쓰도록 청하였는데, 당시의 쓰임에 절실한 자들을 열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재신(宰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각기 아는 바를 천거하게 하되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오직 실질적인 재능(實才)에 힘쓰며, 포부(抱負)를 가졌으나 알려지지 않은 자는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찾아내어 아뢰게(搜訪啓聞) 하였다. 이와 같이 하고도 또 빠진 자가 있으면 스스로 천거(自擧)하도록 허락하게 하였다. 또 군량(糧餉)을 미리 준비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아뢰기를, “오늘날 위태롭게 망해가는 형세(危亡之勢)가 여러 갈래인데, 그중에서 팔짱만 끼고(拱手) 대책이 없는 것은 오직 군량 한 가지 일뿐입니다. 경성(京城)에 쌓인 곡식은 겨우 수개월을 지탱할 뿐이고, 외방(外方)의 창고는 텅 비어(匱竭) 공사(公私)의 형세가 위태롭기(懔懔)가 이와 같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혹 은(銀)을 캐서 곡식을 사들이면(採銀貿穀) 그 실용(實用)을 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바람을 잡는 것(捕風)과 같습니다. 대개 은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만 생산량이 많지 않고 힘은 많이 드는데 얻는 것은 매우 적으니, 재물을 생산하는 방법(生財之道)은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전에 아뢴 바대로 각 도(道)의 공물(貢物)을 모두 쌀로 만들고, 또 상번군(上番軍)²⁸⁰의 몸값으로 내는 베(價布)와 각 관사(各司) 노비(奴婢)의 신공(身貢)²⁸¹을 모두 쌀로 만들어 여러 경사(京司)²⁸²에 모으면 10만 석(石)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밖에 또 소금을 굽는(煮鹽) 한 가지 계책이 재물을 다스리는 요긴한 일(理財要務)인데, 그 쓰임에 절실함이 오곡(五穀)과 서로 같고 팔도(八道)의 경계에 곳곳마다 모두 생산됩니다. 소금의 이익(鹽利)을 일으키는 데는 별다른 방법이 없고, 다만 염호(鹽戶)²⁸³를 불러 모아 안정되게 살게 하고(安集) 그들의 잡역(雜役)을 없애주어 침해하고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며, 때에 따라 옛날의 법처럼 판매한다면, 군량(軍糧)과 종자(種子)로 천만 석의 많은 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밖에 또 둔전(屯田)이 있으니, 더욱 마땅히 시기에 맞추어 강구(講究)하고 권과(勸課)²⁸⁴의 정치를 힘써 행하여, 지체하여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석:
278. [주-D009] 撥 : 저본(底本)에는 “발(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창석집(蒼石集)・서애유선생행상(西厓柳先生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난리를 평정하다'라는 의미의 '발란(撥亂)'이 문맥에 맞다.
279. 발(撥): 다스리다, 바로잡다, 평정하다.
280. 상번군(上番軍): 조선 시대 중앙군에 일정 기간 번갈아 올라와 근무하던 지방 군인.
281. 노비 신공(奴婢身貢): 노비가 국가나 주인에게 몸값으로 바치던 베(布)나 돈.
282. 경사(京司):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
283. 염호(鹽戶): 소금 생산에 종사하는 가구.
284. 권과(勸課): 권장하고 장려함. 농사 등을 권장하고 부과하는 정책.


원문:
進《軍國機務》一冊。 其目: 曰斥候, 曰長短, 曰束伍, 曰約束, 曰重壕, 曰設柵, 曰守灘, 曰守城, 曰迭射, 曰統論形勢也。

번역문:
《군국기무(軍國機務)》²⁸⁵ 한 책을 올렸다. 그 목차는, 척후(斥候)²⁸⁶, 장단(長短)²⁸⁷, 속오(束伍)²⁸⁸, 약속(約束)²⁸⁹, 중호(重壕)²⁹⁰, 설책(設柵)²⁹¹, 수탄(守灘)²⁹², 수성(守城)²⁹³, 질사(迭射)²⁹⁴, 통론형세(統論形勢)²⁹⁵이다.

주석:
285. 《군국기무(軍國機務)》: 유성룡이 임진왜란 중에 군사 및 국가의 중요한 사무에 관해 저술하여 선조에게 올린 책. 현재 전하지 않는다.
286. 척후(斥候): 적의 동정을 살피는 정찰 활동 또는 정찰병.
287. 장단(長短): 장점과 단점. 아군과 적군의 전력, 무기, 전술 등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288. 속오(束伍): 군대의 편제(編制) 방식. 오(伍, 5명), 속(束, 50명 추정) 등의 단위로 부대를 편성하는 것. 훈련도감의 편제와 관련된 내용일 수 있다.
289. 약속(約束): 군대 내의 규율이나 명령 체계, 신호 등을 의미한다.
290. 중호(重壕): 여러 겹으로 깊게 판 참호나 해자(垓字). 방어 시설의 일종이다.
291. 설책(設柵): 목책(木柵)이나 녹채(鹿砦) 등 방어용 울타리를 설치하는 것.
292. 수탄(守灘): 여울목(灘)을 지키는 것. 강이나 하천의 건너기 쉬운 지점을 방어하는 전략이다.
293. 수성(守城): 성(城)을 지키는 것. 농성(籠城) 전략.
294. 질사(迭射): 번갈아 쏘는 사격 방식. 화살이나 총탄을 지속적으로 발사하여 화망(火網)을 구성하는 전술이다.
295. 통론형세(統論形勢): 전반적인 형세를 종합적으로 논함.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과 전략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乙未, 上箚辭職, 又請經理沿江屯堡。 略曰: “東晉與南宋, 其立國江左則一也, 而晉猶能以長江禦劉、石, 宋不能以禦蒙古, 何也? 蓋晉有藩鎭之制, 合數郡而置一大鎭, 使大將領之, 兵力不分, 故其勢足以當一方之賊。 如桓冲、陶侃之類皆控制千里。 宋於立國之初, 懲創唐末、五季尾大之患, 罷藩鎭之權而悉爲郡縣, 其衰也, 兵分勢弱, 賊至一郡, 一郡破; 至一縣, 一縣破, 不足以制戎虜內侵之患。 故汪立信建議, 請以江、淮諸郡合爲四大鎭, 而盡出內地之兵, 幷力禦胡, 時不能用之。 我朝鎭管之制, 大槪有此意, 以其權不重, 不能行其號令, 昇平已久, 懈弛滋甚, 無以振起故耳。 我國形勢無有如都城之險, 蓋漢江與臨津環繞前後, 而東北有高山大嶺之阻, 西有大海環之, 則所謂天險也。 京畿有四鎭, 水原、廣州在漢江之南, 爲門戶。 楊州在右, 專蔽東北; 長湍在後, 專備北方。 江華、喬桐, 以在海中, 故無所隷而專力於防海, 其布置規摸亦略可見。 推之他道, 莫不皆然, 實軍政之大綱, 禦侮之良策也。 苟使此制不墜, 鎭管得人, 各率其屬, 各守信地, 以聽大將之令, 以戰以守, 則內外之勢安如盤石, 豈有土崩、瓦解之變哉?”

번역문:
을미년(1595),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하고, 또 강(江)을 따라 둔보(屯堡)²⁹⁶를 설치하여 관리(經理)할 것을 청하였다. 대략 아뢰기를, “동진(東晉)²⁹⁷과 남송(南宋)²⁹⁸은 그 강좌(江左)²⁹⁹에 나라를 세운 점은 같지만, 동진은 오히려 장강(長江)으로 유씨(劉氏)와 석씨(石氏)³⁰⁰를 막아낼 수 있었으나 남송은 몽골(蒙古)³⁰¹을 막아내지 못하였으니, 어째서입니까? 대개 동진에는 번진(藩鎭)³⁰²의 제도가 있어 여러 군(郡)을 합쳐 하나의 대진(大鎭)을 두고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게 하여 병력이 나뉘지 않았으므로, 그 형세가 족히 한 방면의 적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환충(桓沖)³⁰³이나 도간(陶侃)³⁰⁴과 같은 부류는 모두 천 리를 제압(控制)하였습니다. 남송은 나라를 세운 초기에 당(唐)나라 말기와 오대(五季)³⁰⁵의 미대(尾大)³⁰⁶의 걱정을 징계(懲創)하여, 번진의 권한을 폐지하고 모두 군현(郡縣)으로 만들었더니, 그 쇠약해짐에 병력이 나뉘고 형세가 약해져 적이 한 군(郡)에 이르면 한 군이 격파되고, 한 현(縣)에 이르면 한 현이 격파되어, 융로(戎虜)³⁰⁷가 안으로 침입하는 걱정을 제압하기에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왕립신(汪立信)³⁰⁸이 건의하여 강회(江淮)³⁰⁹의 여러 군(郡)을 합쳐 네 개의 대진(大鎭)으로 만들고 내지(內地)의 병력을 모두 내어 힘을 합쳐 오랑캐(胡)를 막기를 청하였으나, 당시에는 이를 쓰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의 진관(鎭管) 제도는 대개 이러한 뜻이 있었으나, 그 권한이 중요하지 않아 그 호령(號令)을 행할 수 없었고, 태평성대(昇平)가 이미 오래되어 해이함과 느슨함(懈弛)이 심해져서 떨쳐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형세는 도성(都城)의 험준함과 같은 곳이 없으니, 대개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앞뒤를 둘러싸고 동북쪽에는 높은 산과 큰 고개(高山大嶺)의 막힘이 있으며 서쪽에는 큰 바다가 둘러싸고 있으니, 즉 이른바 천험(天險)입니다. 경기(京畿)에는 네 개의 진(鎭)이 있는데, 수원(水原)과 광주(廣州)는 한강 남쪽에 있어 문호(門戶)가 됩니다. 양주(楊州)는 오른쪽에 있어 오로지 동북쪽을 가리고 막으며(專蔽), 장단(長湍)은 뒤에 있어 오로지 북방을 대비합니다. 강화(江華)와 교동(喬桐)은 바다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소속된 곳이 없어 오로지 바다를 방어하는 데 힘쓰니, 그 배치(布置)와 규모(規摸) 또한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다른 도(道)에 미루어 보아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실로 군정(軍政)의 큰 강령(大綱)이요, 외적을 막는 좋은 계책(禦侮之良策)입니다. 만약 이 제도가 떨어지지 않게 하여 진관(鎭管)이 적임자를 얻어 각기 그 소속을 거느리고 각기 믿을 만한 땅(信地)을 지키며 대장(大將)의 명령을 들어 싸우고 지킨다면, 안팎의 형세가 반석(盤石)과 같이 안정될 터인데, 어찌 토붕와해(土崩瓦解)의 변고가 있었겠습니까?”

주석:
296. 둔보(屯堡): 군대가 주둔하는 요새나 보루.
297. 동진(東晉, 317-420):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조. 서진(西晉)이 북방 민족에게 멸망한 후 강남(江南) 지역에 세워졌다.
298. 남송(南宋, 1127-1279): 중국 송(宋)나라가 금(金)나라의 침입으로 북쪽 영토를 잃고 강남(江南)으로 옮겨 세운 왕조.
299. 강좌(江左): 장강(長江, 양자강)의 동쪽 지역. 강남(江南)을 가리킨다.
300. 유씨(劉氏), 석씨(石氏): 동진(東晉) 시대 북방을 침략했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왕조들을 가리킨다. 유씨는 전조(前趙, 漢趙)의 유연(劉淵), 유총(劉聰) 등을, 석씨는 후조(後趙)의 석륵(石勒), 석호(石虎) 등을 의미한다.
301. 몽골(蒙古): 13세기에 칭기즈 칸이 통일하여 세운 제국. 남송(南宋)을 멸망시켰다.
302. 번진(藩鎭): 지방의 군사 및 행정권을 장악한 절도사(節度使)가 다스리던 구역. 동진은 방어 전략상 번진을 활용했으나, 남송은 당나라 말기 번진의 폐단을 우려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번진을 약화시켰다. 유성룡은 이를 남송 패망의 원인 중 하나로 보았다.
303. 환충(桓沖, 328-384): 동진(東晉)의 명장. 형주(荊州) 지역을 맡아 전진(前秦)의 침입을 막아냈다.
304. 도간(陶侃, 259-334): 동진(東晉)의 명장. 여러 차례 반란을 평정하고 형주(荊州), 광주(廣州) 등 여러 지역을 안정시켰다.
305. 오계(五季): 오대(五代). 당나라 멸망 후 송나라 건국 전까지 화북(華北) 지방에 존재했던 다섯 왕조(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시대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번진(藩鎭) 세력의 할거로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다.
306. 미대(尾大): 꼬리가 커서 흔들기 어려움. 신하나 지방 세력의 힘이 너무 강해져 중앙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를 비유한다.
307. 융로(戎虜): 서쪽(戎)과 북쪽(虜)의 오랑캐. 외적을 통칭하는 말이다.
308. 왕립신(汪立信, 1203-1261): 남송(南宋) 말기의 장수. 몽골의 침입에 맞서 양양(襄陽) 등지에서 항전했다.
309. 강회(江淮):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사이의 지역. 남송의 주요 방어선이었다.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先時, 天朝以李宗誠、楊方亨爲冊封使出來, 將卽封平秀吉以爲日本國王, 沈遊擊常往來倭營, 彌縫其事。 至是, 冊使將過海, 遊擊移咨我國, 令遣重臣跟冊使同渡, 朝議不知所處。 公啓曰: “今此調信之回, 形色可疑。 如使秀吉欣迎天使, 只要我使同行而已, 則調信何可以連日與其類密議然後始遣? 遊擊亦何以稱病閉門, 不面見天使, 而但使下人傳報耶? 臣每疑此賊末稍必有難從之請, 以起釁端。 今之事勢, 駸駸近之, 恐其所要不止於通信, 亦或欲爲敗約, 而假此爲辭。 遊擊亦自知其事不了, 計窮欲歸咎於我, 以爲自免之計, 殆不可知。 今若直辭拒之, 則政墮於作弄之中, 若欲順其所言, 則又非人情義理之所可忍爲, 而遣使之後, 賊之去留, 又不可必。 無已則當答之曰: ‘弊邦與日本初無毫髮怨隙, 不意日本逆天悖理, 無故興兵, 虔劉我生民, 焚夷我廟社, 拔掘我丘陵。 弊邦之人, 無不沫血飮泣, 以爲有死而已, 豈敢言和? 今天朝兼愛南北之民, 勞勳戚大臣, 涉不測之地, 要以解棼息兵。 大人當事銜命, 敎戒小邦, 至以禮義當然見責, 此亦實關天朝大體。 第以日本人所在反覆, 不可憑信, 雖詔使以皇靈臨之, 尙未得其要領。 機張、竹島、安骨之倭, 屯結如舊, 更亦何有於小邦而以一使爲重輕哉? 若是則小邦徒益恥辱, 爲天下笑, 而大人之終始擔當者亦歸虛地。 切望更査彼中情形, 竝與冊使商確, 無苟完目前, 而爲長遠之圖。’ 如此措辭, 以觀其答, 不可於一言之間輕爲許與不許, 使難收殺也。” 上從之。

번역문:
이보다 먼저, 천조(天朝)에서 이종성(李宗誠)³¹⁰과 양방형(楊方亨)³¹¹을 책봉사(冊封使)³¹²로 삼아 나오게 하여, 장차 즉시 평수길(平秀吉)³¹³을 봉하여 일본 국왕(日本國王)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심 유격(沈游擊)³¹⁴이 항상 왜(倭)의 군영을 왕래하며 그 일을 미봉(彌縫)³¹⁵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봉사가 장차 바다를 건너려 하자, 유격이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중신(重臣)을 보내 책봉사를 따라 함께 건너가게 하라고 명하니, 조정의 의논(朝議)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公)이 아뢰었다. “이번에 조신(調信)³¹⁶이 돌아온 형색(形色)이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수길(秀吉)로 하여금 기쁘게 천사(天使)를 맞이하게 하면서 다만 우리 사신이 동행하기만을 요구할 뿐이라면, 조신이 어찌하여 연일(連日) 그 무리들과 비밀리에 의논한 뒤에야 비로소 보낼 수 있었겠으며, 유격 또한 어찌하여 병을 핑계 대고 문을 닫은 채 천사를 대면하지 않고 다만 아랫사람을 시켜 전하여 보고하게 하였겠습니까? 신(臣)은 매번 이 적(賊)이 결국에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하여 분쟁의 실마리(釁端)를 일으킬까 의심합니다. 지금의 사태 형세가 점점(駸駸) 그에 가까워지니, 그 요구하는 바가 통신(通信)³¹⁷에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혹 약속을 깨뜨리고자(敗約) 하면서 이것을 핑계로 삼으려는 것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유격 또한 스스로 그 일이 마무리되지 못할 것을 알고 계책이 궁해지자 우리에게 허물을 돌려(歸咎於我) 스스로 면책(免責)할 계책으로 삼으려 하니, 거의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만약 바로 사양하여 거절한다면 바로 농락(作弄) 속에 빠지는 것이고, 만약 그 말하는 바를 따르고자 한다면 또한 인정(人情)과 의리(義理)상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사신을 보낸 뒤에 적이 떠나가고 머무름(去留) 또한 반드시 그러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득이하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답해야 합니다. ‘폐방(弊邦)³¹⁸은 일본과 처음에 털끝만큼의 원한(怨隙)도 없었는데, 뜻밖에 일본이 하늘을 거스르고 도리를 어겨(逆天悖理)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백성을 살육(虔劉)하고 우리 종묘사직(廟社)을 불태워 없애며 우리 구릉(丘陵)을 파헤쳤습니다. 폐방의 사람들은 피를 머금고 눈물을 삼키지(沫血飮泣) 않음이 없어 죽음이 있을 뿐이라 여기니, 어찌 감히 화의(和議)를 말하겠습니까? 이제 천조(天朝)께서 남북(南北)³¹⁹의 백성을 함께 사랑하시어 훈척(勳戚) 대신(大臣)³²⁰을 수고롭게 하여 예측할 수 없는 땅을 건너시니, 얽힌 것을 풀고 전쟁을 쉬게(解棼息兵) 하고자 하심입니다. 대인(大人)³²¹께서 당사자로서 명을 받들어(銜命) 소방(小邦)을 가르치고 경계하시며 예의(禮義)상 당연한 것으로 꾸짖으심에 이르니, 이 또한 실로 천조의 대체(大體)에 관계됩니다. 다만 일본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반복무상(反覆)하여 가히 믿을(憑信) 수 없으니, 비록 조사(詔使)께서 황제의 위엄(皇靈)으로 임하시더라도 아직 그 요령(要領)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기장(機張), 죽도(竹島)³²², 안골(安骨)³²³의 왜(倭)가 예전처럼 주둔하여 결집(屯結)하고 있으니, 다시 또한 소방에 무엇이 있기에 한 명의 사신으로 중함과 가벼움을 삼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다면 소방은 한갓 치욕(恥辱)만 더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대인께서 시종(始終) 담당하신 일 또한 헛된 지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다시 저쪽(彼中)의 형편을 살펴 아울러 책봉사와 상의(商確)하시어, 구차하게 목전(目前)만 마무리하지 마시고 장구(長遠)한 계책을 도모하십시오.’ 이와 같이 말을 하여 그 답을 보아야 하니, 한마디 말 사이에 가벼이 허락하거나 허락하지 않아 수습하기 어렵게(難收殺) 해서는 안 됩니다.” 상(上)께서 그 말을 따랐다.

주석:
310. 이종성(李宗誠): 명나라의 관리. 정사(正使)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311. 양방형(楊方亨): 명나라의 관리. 부사(副使)로서 이종성과 함께 파견되었다.
312. 책봉사(冊封使): 황제의 명으로 제후나 외국 군주 등을 책봉(冊封)하는 임무를 띤 사신.
313. 평수길(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당시 일본의 실권자. 평(平)은 그의 성씨 중 하나이다.
314. 심 유격(沈游擊): 심유경(沈惟敬). 명나라의 유격(游擊) 장수. 강화 교섭을 주도했다.
315. 미봉(彌縫): 잘못된 곳이나 부족한 부분을 임시변통으로 꾸며 맞춤. 심유경이 강화 교섭 과정에서 양측을 속이며 일을 무마하려 했음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316. 조신(調信): 명나라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인물. 구체적인 정보는 미상.
317. 통신(通信): 사신을 보내어 소식을 전하고 교류함. 여기서는 강화 교섭을 위한 기본적인 사신 파견을 의미한다.
318. 폐방(弊邦): 피폐한 나라라는 뜻으로, 조선이 자국을 낮추어 부르는 말.
319. 남북(南北): 명나라(북쪽)와 조선(남쪽)을 가리킬 수도 있고, 혹은 천하의 모든 백성을 포괄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320. 훈척 대신(勳戚大臣): 공훈(勳)이 있거나 황실과 인척(戚) 관계에 있는 대신. 여기서는 책봉사 일행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321. 대인(大人): 높은 지위의 사람을 존칭하는 말. 여기서는 심유경을 가리킨다.
322. 죽도(竹島): 현재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가덕도(加德島) 부근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323. 안골(安骨):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성을 쌓고 주둔했던 곳이다.


원문:
倭將平行長紿右兵使金應瑞曰: “吾與淸正有隙, 封事之不成, 亦淸正敗之也。 淸正近自日本出來, 若以舟師要之, 可擒而吾仇可復也。” 蓋李統制舜臣曾大捷閑山島, 威震日本, 行長患之, 欲覘其舟師虛實也。 應瑞上其事, 遂命舜臣邀擊於大洋, 則淸正已回泊矣。 時有元均者, 忌舜臣功高, 嘗媚事權貴, 以搆陷舜臣爲事。 舜臣是公所薦, 忠直不阿。 以此時宰之忌公者欲擠舜臣, 仍及於公。 至是, 誣以逗撓, 交口毁之。 上欲置舜臣於法, 以元均代之。 公在備局論啓以爲: “閑山失守, 則湖南不可保, 國事無奈何矣。” 上愈怒, 謂備局依阿不直。 公猶力爭之, 以國家存亡所係也。 上命公出巡畿邑, 引宰臣於內, 論舜臣之罪, 崔滉等贊其決。 其後均果大敗而湖南瓦解, 悉如公言。

번역문:
왜장(倭將) 평행장(平行長)³²⁴이 우병사(右兵使)³²⁵ 김응서(金應瑞)³²⁶를 속여 말하였다. “나는 청정(淸正)과 틈(隙)이 있는데, 봉(封)하는 일³²⁷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또한 청정이 그르쳤기 때문이다. 청정이 근래 일본에서 나왔는데, 만약 주사(舟師)³²⁸로 요격(要擊)한다면 사로잡을 수 있어 나의 원수(怨讐)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 통제사(李統制使) 순신(舜臣)³²⁹이 일찍이 한산도(閑山島)에서 크게 이겨 위엄이 일본을 진동시키자, 행장(行長)이 이를 걱정하여 그 주사(舟師)의 허실(虛實)을 엿보고자 한 것이었다. 김응서가 그 일을 상주(上奏)하자, 마침내 순신에게 명하여 대양(大洋)에서 요격하게 하였으나, 청정은 이미 돌아가 정박한 뒤였다. 이때 원균(元均)³³⁰이라는 자가 있어 순신의 공이 높은 것을 시기하여 일찍이 권세가(權貴)에게 아첨하며 순신을 모함(搆陷)하는 것을 일삼았다. 순신은 공(公)이 천거한 바로, 충직(忠直)하고 아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재상 중에 공을 시기하는 자들이 순신을 밀어내어 제거(擠)하고 이어서 공에게까지 미치게 하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순신이 명령을) 지체하고 따르지 않았다(逗撓)고 무고(誣告)하며, 입을 모아 헐뜯었다. 상(上)께서 순신을 법으로 다스리고 원균으로 그를 대신하고자 하였다. 공이 비변사(備邊司)에서 논하여 아뢰기를, “한산(閑山)을 잃으면 호남(湖南)을 보전할 수 없어 국사(國事)를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더욱 노하여 비변사가 의지하고 아첨하며 정직하지 못하다고(依阿不直)³³¹ 일렀다. 공이 오히려 국가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일이라 하여 힘써 다투었다. 상께서 공에게 명하여 기읍(畿邑)³³²을 나가 순찰하게 하고, 재신(宰臣)들을 안으로 불러들여 순신의 죄를 논하니, 최황(崔滉)³³³ 등이 그 결정을 찬성하였다. 그 뒤에 원균이 과연 크게 패하여 호남이 와해(瓦解)되니, 모두 공의 말과 같았다.

주석:
324. 평행장(平行長):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325. 우병사(右兵使):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가리킨다. 종2품의 무관직.
326. 김응서(金應瑞, 1564-1624):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경상우병사로 활동했다.
327. 봉사(封事):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일.
328. 주사(舟師): 수군(水軍).
329. 이 통제사 순신(李統制使舜臣):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 통제사는 종2품의 무관직으로, 삼도의 수군을 총지휘했다.
330. 원균(元均, 1540-1597):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과의 불화로 유명하며,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했다.
331. 의아부직(依阿不直): 남에게 의지하여 아첨하며 정직하지 못함.
332. 기읍(畿邑): 경기(京畿) 지역의 고을.
333. 최황(崔滉, 1529-1603): 조선 중기의 문신.


원문:
丁酉八月, 命公禦賊于畿、湖之境。 公承命卽行, 譖者謂搬家以行。 一日, 下敎曰: “聞大臣携家屬自跳出城, 而臺諫無一言。” 大司憲李憲國歷擧公及他大臣家屬所在以辨之, 上意乃解, 卽召還公。 未及被命, 上箚自劾, 上下書溫諭。 時賊勢寢迫, 人心渙散, 遂徵公所管四道兵入衛, 至者數萬人。 用畿兵分守江灘, 以三道兵守城堞, 紀律明肅, 無敢參差。 九月, 上出巡江灘, 所至慰勞將士, 卽引見公曰: “軍容井井, 緩急可恃, 卿之力也。”

번역문:
정유년(1597) 8월, 공(公)에게 명하여 경기(畿)와 호서(湖) 지방의 경계에서 적(賊)을 막게 하였다. 공이 명을 받들어 즉시 떠나자, 참소(譖)하는 자들이 집안 살림을 옮겨(搬家) 가지고 떠났다고 말하였다. 하루는 하교(下敎)하시기를, “듣건대 대신(大臣)이 가솔(家屬)을 이끌고 스스로 성(城)을 뛰쳐나갔다는데, 대간(臺諫)³³⁴은 한마디 말이 없다.” 대사헌(大司憲) 이헌국(李憲國)³³⁵이 공과 다른 대신들의 가솔이 있는 곳을 일일이 들어 변론(辨)하니, 상(上)의 뜻이 이에 풀려 즉시 공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아직 명을 받기 전에 차자(箚子)를 올려 스스로 탄핵(自劾)하자, 상께서 글을 내려 온화하게 타이르셨다(溫諭). 이때 적의 형세가 점점 다가오고(寢迫) 인심(人心)이 흩어지자, 마침내 공이 관할하는 사도(四道)³³⁶의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호위(入衛)하게 하니, 도착한 자가 수만 명이었다. 경기(畿)의 군사로 강 여울(江灘)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삼도(三道)³³⁷의 군사로 성가퀴(城堞)를 지키게 하니, 기율(紀律)이 밝고 엄숙(明肅)하여 감히 들쭉날쭉함(參差)이 없었다. 9월, 상께서 강 여울을 나가 순시(巡視)하시어, 이르는 곳마다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고, 즉시 공을 인견(引見)하여 말씀하셨다. “군대의 위용(軍容)이 정연(井井)하여 위급할 때(緩急) 믿을 만하니, 경(卿)의 힘이다.”

주석:
334.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는 관리들.
335. 이헌국(李憲國, 1542-1602): 조선 중기의 문신.
336. 사도(四道): 정확히 어느 도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나, 당시 유성룡이 군무를 관장하던 지역(예: 경기, 충청, 전라, 경상 등)을 의미할 수 있다.
337. 삼도(三道): 충청, 전라, 경상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十一月, 承命下嶺南, 措置糧餉, 蓋爲經理楊鎬將出師也。 經理始至, 論人曰: “汝國事, 當使柳某輔之, 何患難理?” 後有搆於經理曰: “柳某短公謂無濟事才, 因多爲誣捏, 至貼謗書於經理館門。” 一日, 經理與接伴使李德馨私語曰: “柳某得罪於邢軍門, 聞軍門將至, 逃避來此。 運糧等事, 可專委於尹承勳也。” 公因驛官聞之, 未敢信, 以問德馨則曰: “無是語矣。” 是夕, 都司白璜亦以經理意分付於南以恭, 一如此言, 公始知非誤傳, 遂馳啓言狀, 請鐫削職名, 不許。【竝行狀。】

번역문:
11월, 명을 받들어 영남(嶺南)으로 내려가 군량(糧餉)을 조치(措置)하였으니, 이는 경리(經理)³³⁸ 양호(楊鎬)³³⁹가 장차 출사(出師)³⁴⁰하려 했기 때문이다. 경리가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을 논하며 말하였다. “너희 나라 일은 마땅히 유모(柳某)³⁴¹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면, 어찌 다스리기 어려움을 걱정하겠는가?” 뒤에 경리에게 모함(搆)하는 자가 있어 말하였다. “유모가 공(公)³⁴²을 단점 잡아 일 처리할 재능이 없다고 말하였고, 이로 인해 많이 무고하고 날조(誣捏)하였으며, 경리의 관사(館) 문에 비방하는 글(謗書)을 붙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루는 경리가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과 사사로이 이야기하며 말하였다. “유모가 형 군문(邢軍門)³⁴³에게 죄를 얻었는데, 군문이 장차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피하여 이곳으로 왔다. 군량 운반(運糧) 등의 일은 오로지 윤승훈(尹承勳)³⁴⁴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 공(公)이 역관(驛官)을 통해 이를 듣고 감히 믿지 못하여 이덕형에게 물으니,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날 저녁, 도사(都司)³⁴⁵ 백황(白璜) 또한 경리의 뜻을 남이공(南以恭)³⁴⁶에게 분부(分付)하였는데 한결같이 이 말과 같았으므로, 공이 비로소 잘못 전해들은 것이 아님을 알고 마침내 치계(馳啓)하여 상황을 아뢰고 직명(職名)을 깎아 없애(鐫削)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이상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338. 경리(經理): 명나라 때 파견된 군무 총괄 책임자. 송응창(宋應昌)의 후임으로 파견되었다.
339. 양호(楊鎬, ?-1629): 명나라 말기의 장수. 임진왜란 때 경리(經理)로서 조선에 파견되어 울산성(蔚山城) 전투 등을 지휘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후에 사르후(Sarhū) 전투에서 후금(後金)에게 대패하여 처형당했다.
340. 출사(出師): 군대를 내어 출정하는 것.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군대가 다시 출병하는 것을 의미한다.
341. 유모(柳某): 아무개 유씨. 유성룡을 가리킨다.
342. 공(公): 여기서는 경리 양호를 가리킨다.
343. 형 군문(邢軍門):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를 가리킨다. 군문(軍門)은 병부상서나 총독(總督) 등 고위 군사 책임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양호가 형개에게 미움을 샀다는 소문을 이용하여 유성룡을 모함한 것이다.
344. 윤승훈(尹承勳, 1549-1611): 조선 중기의 문신.
345. 도사(都司): 명나라의 군사 직책.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의 약칭일 수도 있고, 혹은 경리(經理)의 막료 직책일 수도 있다.
346. 남이공(南以恭, 1566-1640): 조선 중기의 문신.


원문:
戊戌, 丁應泰劾: “經理剝卒多怨, 掩敗爲功, 與軍門、監軍共爲瞞上。” 帝大怒, 遣給事中徐觀瀾, 同應泰抵王京閱實。 經理免歸河南, 萬世德來代之。 上追思稷山之戰, 欲遣大臣一人爲經理卞誣。 上意蓋在公, 而以內外多事持之, 卒遣左議政李元翼。 至則應泰又誣論我與倭通, 壬辰, 要犯遼東, 反受兵云。 上憤憤不快, 言避位事, 不臨朝數日, 公率百官爭之。 持平李爾瞻首劾公當辨誣事, 不請燕行, 以激怒上心, 而執柄者又陰令其客數輩, 上疏斥之, 以爲士論。 仁弘素深怒於公, 其客文弘道爲正言, 詆誣萬狀, 專以主和爲言。 公連上箚自劾, 旣罷相, 又削奪官爵。【遺事。】

번역문:
무술년(1598), 정응태(丁應泰)³⁴⁷가 탄핵하였다. “경리(經理)가 병졸들을 착취(剝卒)하여 원망이 많고, 패배를 가리고 공으로 삼으며(掩敗爲功), 군문(軍門), 감군(監軍)³⁴⁸과 함께 위를 속였습니다(瞞上).” 황제(帝)³⁴⁹가 크게 노하여 급사중(給事中) 서관란(徐觀瀾)을 보내 정응태와 함께 왕경(王京)³⁵⁰에 도착하여 실상을 조사하게(閱實) 하였다. 경리(양호)는 면직되어 하남(河南)으로 돌아가고, 만세덕(萬世德)³⁵¹이 와서 그를 대신하였다. 상(上)께서 직산(稷山) 전투³⁵²를 추념(追思)하시어 대신(大臣) 한 사람을 보내 경리(양호)를 위해 무고(誣告)를 변명(卞誣)하게 하고자 하였다. 상의 뜻은 아마도 공(公)에게 있었으나, 안팎으로 일이 많아 미루다가 마침내 좌의정(左議政) 이원익(李元翼)³⁵³을 보냈다. 도착하니 정응태가 또 무고하기를, 우리가 왜(倭)와 내통(通)하여 임진년(壬辰)에 요동(遼東)을 침범할 것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공격을 받았다(反受兵)고 하였다. 상께서 분하고 불쾌하여 왕위를 피할(避位) 일을 말씀하시고 며칠 동안 조회(臨朝)에 나오지 않으시니, 공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간쟁(爭)하였다. 지평(持平)³⁵⁴ 이이첨(李爾瞻)³⁵⁵이 맨 먼저 공이 마땅히 무고를 변명하는 일로 연행(燕行)³⁵⁶을 청하지 않아 상의 마음을 격노(激怒)하게 하였다고 탄핵하였고, 집권자(執柄者)³⁵⁷ 또한 몰래 그 식객(客) 두어 명에게 명하여 상소를 올려 그를 배척하여 사론(士論)³⁵⁸으로 삼게 하였다. 인홍(仁弘)³⁵⁹이 평소 공에게 깊이 노하였는데, 그의 식객 문홍도(文弘道)가 정언(正言)³⁶⁰이 되어 온갖 상태로 헐뜯고 무고(詆誣萬狀)하며, 오로지 화의를 주장했다(主和)는 것으로 말을 삼았다. 공이 연이어 차자(箚子)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니, 이미 재상(宰相)에서 파직되고 또 관작(官爵)이 삭탈(削奪)되었다.【유사(遺事)에서 인용】

주석:
347. 정응태(丁應泰): 명나라의 관리. 양호를 탄핵했으며, 조선이 일본과 내통했다고 무고하는 등 조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의 무고는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적 갈등을 야기했다(정응태의 무고사건).
348. 감군(監軍): 군대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
349. 제(帝): 황제.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를 가리킨다.
350. 왕경(王京): 임금의 도성. 한성을 가리킨다.
351. 만세덕(萬世德): 명나라의 장수. 양호의 후임으로 조선에 경리(經理)로 파견되었다.
352. 직산 전투(稷山戰鬪): 정유재란 중인 1597년 9월 충청도 직산(稷山, 현재 천안시 직산읍)에서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한 전투.
353.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오리(梧里). 영의정을 지냈다. 청렴하고 강직한 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354.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관리 감찰 및 탄핵 등의 임무를 맡았다.
355.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光海君) 때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권력을 장악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처형되었다. 당시 유성룡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356. 연행(燕行): 연경(燕京, 북경)으로 사신 가는 것.
357. 집병자(執柄者): 권력의 자루를 쥔 사람. 당시 조정의 실권자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유성룡에게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세력을 의미한다.
358. 사론(士論): 선비들의 공론(公論). 때로는 특정 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명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359. 인홍(仁弘):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북인(北人)의 영수. 유성룡과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360.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임금에게 간언(諫言)하는 임무를 맡았다.


원문:
公南行, 到渡迷峽, 望見三角山, 下馬四拜而行, 蓋過此則不復見京山也。 有詩曰: “田園歸路三千里, 帷幄深恩四十年。 立馬渡迷回首望, 終南山色故依然。” 徑由雲巖, 有《丹陽行》一篇。 行李涼薄, 子弟皆徒步, 歷十餘日而始至, 道路艱楚不可言。

번역문:
공(公)이 남쪽으로 가면서 도미협(渡迷峽)³⁶¹에 이르러 삼각산(三角山)³⁶²을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네 번 절하고 떠났으니, 대개 이곳을 지나면 다시는 서울의 산(京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시(詩)가 있다.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는 길 삼천 리인데, 장막 안(帷幄)³⁶³ 깊은 은혜 사십 년이었네. 도미협에 말 세우고 머리 돌려 바라보니, 종남산(終南山)³⁶⁴ 산 빛은 옛 모습 그대로일세.” 곧바로 운암(雲巖)³⁶⁵을 경유하였는데, 〈단양행(丹陽行)〉 한 편이 있다. 행장(行李)이 쓸쓸하고 변변찮아(涼薄) 자제(子弟)들이 모두 걸어서 갔는데, 십여 일을 지나서야 비로소 도착하니, 길에서의 어려움과 괴로움(艱楚)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석:
361. 도미협(渡迷峽):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 사이에 있는 고개로 추정된다.
362. 삼각산(三角山): 북한산(北漢山)의 옛 이름.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한양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363. 유악(帷幄): 임금의 장막.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정사를 보좌하는 것을 비유한다.
364. 종남산(終南山): 중국 장안(長安) 남쪽에 있는 산. 여기서는 삼각산(북한산)을 비유적으로 이른 것이다.
365. 운암(雲巖):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부근의 지명으로 추정된다. 유성룡의 고향이자 낙향 후 거처한 곳이다.


원문:
己亥六月, 命還職牒。 三司又論之, 上答曰: “論事過情, 則非但其人不服, 傍觀者亦不服矣。 以‘主和’二字, 爲執言之地, 至比柳成龍於秦檜。 檜受虜人之旨, 保全妻子而潛來于宋, 所以爲金人謀, 力主和議, 殺岳飛等。 今成龍亦有潛通陰謀之事乎? 是說足以服人心而定國是乎? 蓋其心悶宗社之將亡, 天朝旣令許和, 故權就其事, 本情不過如此。”

번역문:
기해년(1599) 6월, 직첩(職牒)³⁶⁶을 돌려주라는 명이 있었다. 삼사(三司)가 또 그를 논핵(論劾)하자, 상(上)께서 답하셨다. “일을 논함이 실정(實情)에 지나치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곁에서 보는 자 또한 불복(不服)할 것이다. ‘주화(主和)’ 두 글자를 가지고 주장하는 근거(執言之地)로 삼아, 유성룡을 진회(秦檜)³⁶⁷에 비하기까지 한다. 진회는 오랑캐(虜人)의 뜻을 받아 처자(妻子)를 보전하고 몰래 송(宋)나라로 와서 금(金)나라 사람을 위해 꾀하여 화의(和議)를 힘써 주장하고 악비(岳飛)³⁶⁸ 등을 죽였다. 지금 유성룡 또한 몰래 내통(潛通)하고 음모(陰謀)한 일이 있는가? 이 말이 족히 인심(人心)을 복종시키고 국시(國是)³⁶⁹를 정할 수 있겠는가? 대개 그 마음은 종묘사직(宗社)이 장차 망할 것을 걱정하고 천조(天朝)가 이미 화의를 허락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임시 방편(權)으로 그 일에 나아간 것이니, 본래의 실정(本情)은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는다.”

주석:
366. 직첩(職牒): 관직 임명장. 직첩을 돌려준다는 것은 면직되었던 관직을 회복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367. 진회(秦檜, 1090-1155): 중국 남송(南宋)의 재상. 금(金)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며 주전파(主戰派)인 악비(岳飛) 등을 살해하여 매국노의 대명사로 불린다. 유성룡을 진회에 비유한 것은 그가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했다고 모함하며 극도로 비난한 것이다.
368. 악비(岳飛, 1103-1142): 중국 남송(南宋) 초기의 명장. 금(金)나라에 맞서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화의를 추진하던 진회(秦檜)의 모함으로 옥사했다.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369. 국시(國是): 나라의 기본 방침이나 정책.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壬寅, 朝廷錄廉謹。 領議政李恒福首擧公名, 顧同僚曰: “此老不可以一善名, 但欲洗郿塢之誣耳。” 文弘道戊戌啓辭語也。

번역문:
임인년(1602), 조정에서 청렴하고 근신한(廉謹) 인물을 기록하였다.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맨 먼저 공(公)의 이름을 들고,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노인(老)³⁷⁰을 한 가지 선행(一善)으로 이름할 수는 없으나, 다만 미오(郿塢)³⁷¹의 무고(誣告)를 씻어주고자 할 뿐이다.” 이는 문홍도(文弘道)가 무술년(1598)에 올린 계사(啓辭)³⁷²의 말이었다.

주석:
370. 노(老): 노인. 여기서는 유성룡을 존경하는 의미를 담아 부르는 말일 수 있다.
371. 미오(郿塢): 중국 후한(後漢) 말 동탁(董卓)이 장안(長安) 근처 미현(郿縣)에 재물을 쌓아두고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던 성(城). 권력자의 탐욕과 사치, 전횡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문홍도가 유성룡을 탄핵하면서 그를 동탁에 비유하며 모함했던 것을 가리킨다. 이항복은 유성룡이 청렴했음을 강조하여 이러한 무고를 반박하고자 한 것이다.
372. 계사(啓辭): 임금에게 아뢰는 글. 문홍도가 유성룡을 탄핵하며 올렸던 상소 내용을 가리킨다.


원문:
丁未二月, 有召命。 時公久已病, 辭不赴。 上命內醫看病。 病中猶冠帶而坐, 與子弟講論經史, 或觸景吟詩, 名曰《觀化錄》, 皆存順沒寧意也。 病革, 遺疏以修德立政、公聽竝觀、養民用賢、修軍政擇良將爲言, 遺戒勿禮葬, 勿立碑, 仍謝客曰: “欲安靜以就化耳。” 五月丁卯, 不待扶掖而坐, 神氣了然, 如未始有病, 因誦《洪範》終篇。 戊辰辰初, 促內醫於前, 握手與訣曰: “遠來治病, 天恩罔極。 幾日可達京城耶?” 語纔畢, 命侍者整枕於堂中, 北向正坐, 恬然而逝。

번역문:
정미년(1607) 2월, 부르는 명령(召命)이 있었다. 이때 공(公)은 오랫동안 이미 병이 들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상(上)께서 내의(內醫)³⁷³에게 명하여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병중(病中)에도 오히려 관대(冠帶)³⁷⁴를 하고 앉아 자제(子弟)들과 경사(經史)³⁷⁵를 강론(講論)하고, 혹은 경치에 따라 시(詩)를 읊었는데, 이름하기를 《관화록(觀化錄)》³⁷⁶이라 하였으니, 모두 삶을 따르고 죽음을 편안히 여기는(存順沒寧)³⁷⁷ 뜻이었다. 병이 위독(病革)해지자 유소(遺疏)를 올려 덕(德)을 닦고 정치(政事)를 세우며, 널리 듣고 아울러 보며(公聽竝觀), 백성을 기르고 현자(賢者)를 등용하며, 군정(軍政)을 닦고 좋은 장수(良將)를 택할 것을 말씀드리고, 예장(禮葬)³⁷⁸하지 말고 비석(碑)을 세우지 말라고 유계(遺戒)하였으며, 이어서 손님을 사절하며 말하였다. “안정하여 조화(造化)에 나아가고자(就化)³⁷⁹ 할 뿐이다.” 5월 정묘일(丁卯日), 부축(扶掖)함을 기다리지 않고 앉았는데, 신기(神氣)가 깨끗하고 분명(了然)하여 마치 애초에 병이 없었던 듯하였고, 이어서 《홍범(洪範)》³⁸⁰ 마지막 편을 외웠다. 무진일(戊辰日) 진시(辰時) 초, 내의(內醫)를 앞으로 재촉하여 손을 잡고 작별하며 말하였다. “멀리 와서 병을 치료해주니 천은(天恩)이 망극(罔極)합니다. 며칠이면 경성(京城)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겨우 끝나자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당(堂) 가운데에 베개를 정돈하게 하고 북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편안하게(恬然) 세상을 떠났다(逝).

주석:
373. 내의(內醫): 궁궐 안에서 임금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던 의원. 내의원(內醫院) 소속이다.
374. 관대(冠帶): 관(冠)을 쓰고 띠(帶)를 두르는 것. 예복(禮服)을 갖추어 입는 것을 의미한다. 병중에도 예를 잃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여준다.
375. 경사(經史):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유학의 기본 학문이다.
376. 《관화록(觀化錄)》: 유성룡이 말년에 병중에 지은 시를 모은 책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관화(觀化)'는 자연과 세상의 변화를 관조(觀照)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77. 존순몰녕(存順沒寧): 삶(存)에는 순응(順)하고 죽음(沒)에는 편안(寧)하다는 뜻. 생사(生死)를 초탈한 달관의 경지를 나타낸다.
378. 예장(禮葬): 국가에서 예우를 갖추어 치르는 장례. 주로 고위 관료나 공신에게 행해졌다. 유성룡은 검소한 장례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379. 취화(就化): 조화(造化)의 이치에 따라 돌아감.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380. 《홍범(洪範)》: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우(禹)임금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칙(洪範九疇)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유성룡이 임종 직전에 이를 외운 것은 평생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문을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원문:
公神彩精明, 如秋空皎月, 望之非塵埃中人。 穎悟絶倫, 早歲, 喜看象山語, 旣而知其學之出於佛, 乃篤信師說, 卓然有立。 探索往訓, 切己深思。 常謂: “聖門之學以思爲本, 不思則罔。” 病世之學者就文義上說, 不知反求諸心, 只作空言解會。 其語《易》、《大學》、《中庸》皆辨析精微, 銖分粒剖。 治經之暇, 亦肆力於史學, 就古人事迹而表出其幽隱者, 爲觀史蠡測, 多先儒所未發。 至於書法之抑揚、人物之出處, 挈其綱而振其目, 如把一稱子, 權其輕重。 其爲治道則必以明天理淑人心爲本。 每入對之際, 必沐浴齋戒, 精白一心, 開陳義理, 委曲懇惻。 凡修己用人之道、存心出治之法, 出入經訓, 論說亹亹, 玉音稱賞, 屢有望之起敬之歎。 遭時不辰, 灑血攘袂。 出入內外, 條陳利害, 事無不言, 言必合理, 其精神辭氣皆足以動一世之聽矣。

번역문:
공(公)의 정신과 풍채(神彩)는 정밀하고 밝기가 가을 하늘의 밝은 달과 같아, 바라보면 진애(塵埃) 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영특하고 깨달음(穎悟)이 뛰어나(絶倫), 젊은 시절(早歲)에는 상산(象山)³⁸¹의 말을 즐겨 보았으나, 얼마 뒤 그 학문이 불교(佛)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는 스승(퇴계 이황)의 학설(師說)을 독실히 믿어 탁월하게 자립(卓然有立)하였다. 지난날의 가르침(往訓)을 탐구하고 찾으며 자신에게 절실하게 깊이 생각하였다(切己深思). 항상 말하기를, “성문(聖門)³⁸²의 학문은 생각(思)을 근본으로 삼으니,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罔)³⁸³.”라고 하였다. 세상의 학자들이 글의 뜻(文義)에 나아가 설명하면서 마음(心)에 돌이켜 구(反求諸心)³⁸⁴할 줄 모르고 단지 빈 말(空言)로 이해(解會)하는 것을 병폐로 여겼다. 그가 《역(易)》,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설명한 것은 모두 분석이 정밀하고 미묘(辨析精微)하여 아주 작은 단위까지 나누고 쪼개었다(銖分粒剖)³⁸⁵. 경서(經書)를 다스리는 여가(治經之暇)에는 또한 역사학(史學)에도 힘을 쏟아(肆力), 옛사람의 사적(事迹)에 나아가 그 깊이 숨겨진 것(幽隱)을 드러내어, 〈관사蠡측(觀史蠡測)〉³⁸⁶을 지었는데 선유(先儒)들이 미처 발명(發明)하지 못한 바가 많았다. 서법(書法)³⁸⁷의 억양(抑揚)³⁸⁸과 인물(人物)의 출처(出處)³⁸⁹에 이르러서는, 그 강령(綱)을 잡고 그 조목(目)을 펼쳐(挈其綱而振其目)³⁹⁰, 마치 저울대(稱子) 하나를 잡고 그 경중(輕重)을 다는 것과 같았다. 그 다스리는 도리(治道)에 있어서는 반드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선하게 하는 것(明天理淑人心)을 근본으로 삼았다. 매번 입대(入對)³⁹¹할 때에는 반드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한마음으로 정신을 깨끗이 하며(精白一心), 의리(義理)를 열어 진술(開陳)함에 곡진(委曲)하고 간절(懇惻)하였다. 무릇 자신을 닦고 사람을 쓰는 도리(修己用人之道)와 마음을 보존하고 다스림을 내는 법(存心出治之法)에 대해 경서의 가르침(經訓)에 근거하여(出入) 끊임없이(亹亹) 논설(論說)하니, 옥음(玉音)³⁹²으로 칭찬하고 감상하시며 여러 차례 바라보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望之起敬) 탄식이 있었다. 때를 만나지 못하자(遭時不辰), 피를 뿌리고 소매를 걷어붙였다(灑血攘袂)³⁹³. 안팎으로 드나들며 이해(利害)를 조목조목 진술(條陳)하여,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은 반드시 이치에 합당하였으니, 그 정신(精神)과 사기(辭氣)³⁹⁴가 모두 족히 한 시대의 듣는 이들을 움직일 만하였다.

주석:
381.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 1139-1193). 남송(南宋)의 사상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다.
382. 성문(聖門): 성인(聖人)의 문하. 공자(孔子)의 가르침 또는 유학(儒學)을 의미한다.
383. 불사즉망(不思則罔): 《논어》 〈위정(爲政)〉편의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에서 온 말이다.
384. 반구제심(反求諸心): 마음에서 돌이켜 구함. 외적인 지식 습득에만 치중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 성찰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385. 수분입부(銖分粒剖): 매우 작은 무게 단위인 수(銖)와 곡식 낟알(粒)까지 나눈다는 뜻.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게 분석함을 비유한다.
386. 관사蠡측(觀史蠡測): 역사를 보고 표주박(蠡)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듯 한다는 뜻. 유성룡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겸손하게 표현한 제목으로 보인다. 혹은 역사 기록을 심도 있게 분석하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387. 서법(書法): 역사 서술의 원칙이나 방식. 특히 《춘추(春秋)》에서 공자가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포폄(褒貶, 칭찬하고 비판함)의 필법(筆法)을 가리키기도 한다.
388. 억양(抑揚): 누르고(抑) 드날리는(揚) 것. 역사 서술에서 인물이나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서술의 비중이나 논조를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389. 출처(出處):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出)과 은거하여 물러나 있는 것(處). 선비의 처신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다.
390. 철기강이진기목(挈其綱而振其目): 그물의 벼리(綱)를 잡고 그물눈(目)을 펼친다는 뜻. 사물의 요점을 파악하고 세부적인 사항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함을 비유한다.
391. 입대(入對): 임금 앞에 나아가 정사(政事)를 아뢰거나 질문에 답하는 것.
392. 옥음(玉音): 임금의 목소리나 말씀을 높여 부르는 말.
393. 쇄혈양몌(灑血攘袂): 피를 뿌리고 소매를 걷어붙임. 나라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나 결연한 의지로 대처하는 모습을 비유한다.
394. 사기(辭氣): 말과 기상(氣像). 말하는 태도나 어조를 의미한다.


원문:
公天性篤孝, 嘗曰: “人子一刻忘親, 非孝也。” 宦遊時, 念定省日曠, 倩工畫桑鄕, 出入瞻仰。 親沒, 作《愼終錄》、《永慕錄》, 敬奉遺體, 擧足不忘。 事君如事親, 一飯不忘。 晩節罹讒, 雖在廢斥, 而每稱臣罪當死, 雖所以語乎子弟, 當欿然有不足之意, 無怨尤之見於辭色。 或見睿旨有及於憂民, 則揭壁莊誦曰: “大哉王言!” 凡其發於吟詠者, 無非愛君憂國之語。 方其病革, 聞朝廷之失, 憂形於色, 累日而不解。

번역문:
공(公)은 천성(天性)이 효성스럽고 돈독(篤孝)하여, 일찍이 말하였다. “사람의 자식으로서 한 순간이라도 어버이를 잊으면 효도가 아니다.” 벼슬살이(宦遊)할 때에는 정성(定省)³⁹⁵을 날마다 폐(曠)함을 염려하여, 장인(工)을 고용하여 고향(桑鄕)³⁹⁶을 그리게 하여 드나들며 우러러보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신종록(愼終錄)》³⁹⁷과 《영모록(永慕錄)》³⁹⁸을 짓고 유체(遺體)³⁹⁹를 공경히 받들어 걸음걸음 잊지 않았다. 임금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 하여 한 끼 밥 먹을 때도 잊지 않았다. 만년(晩節)에 참소(讒)를 당하여 비록 폐척(廢斥)된 상태에 있었으나, 매번 신(臣)의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칭하며, 비록 자제(子弟)들에게 말하는 바일지라도 마땅히 겸허하게 부족하다는 뜻(欿然有不足之意)⁴⁰⁰이 있었고, 원망하고 허물하는(怨尤) 기색(辭色)⁴⁰¹이 나타나지 않았다. 혹 예지(睿旨)⁴⁰² 중에 백성을 걱정하는(憂民) 내용이 있음을 보면, 벽에 써 붙이고(揭壁) 엄숙하게 외우며(莊誦) 말하였다.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王言)이여!” 무릇 그가 읊은 것(吟詠)에서 나온 것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愛君憂國) 말이 아님이 없었다. 바야흐로 병이 위독할 때 조정의 실책(失)을 듣고는 근심이 얼굴에 드러나 여러 날 동안 풀리지 않았다.

주석:
395. 정성(定省): 자식이 부모의 잠자리를 보살피고(定) 아침에 문안을 드리는(省) 효도의 예법.
396. 상향(桑鄕): 뽕나무가 있는 고향. 고향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다.
397. 《신종록(愼終錄)》: ‘신종(愼終)’은 부모의 장례를 신중히 치른다는 뜻. 유성룡이 부모의 상(喪)을 치르면서 기록한 글로 추정된다.
398. 《영모록(永慕錄)》: ‘영모(永慕)’는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 유성룡이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며 쓴 글로 추정된다.
399. 유체(遺體): 돌아가신 분이 남긴 몸. 부모님의 시신 또는 그로부터 받은 자신의 몸을 의미할 수 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신체를 소중히 여기는 효(孝)의 관념을 나타낸다.
400. 감연유부족지의(欿然有不足之意): 겸허하여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 벼슬에서 쫓겨났음에도 자신을 탓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欿'은 '겸허할 감'.
401. 원우지견어사색(怨尤之見於辭色): 원망하고 허물하는 것이 말과 얼굴빛에 드러남.
402. 예지(睿旨): 임금의 지혜로운 뜻이나 명령.


원문:
文辭流出胸襟, 初若不經於意, 而旣成, 雲行水流, 藹然道德之言。 間出其餘爲詩章, 沖澹渾成, 不事雕繢, 其機軸多從陶、韋來。 雅好山水, 所居屋西, 有蒼壁臨江直立千仞, 仍自號曰西厓。 每歸休, 燕坐一室, 其自得之趣, 蓋有人不得而知者。 常以仕宦奪志爲平生恨, 名其堂曰遠志, 以見其微意。 一日, 出遊見桃花爛發, 謂曰: “此物關我何事? 心體澄虛, 有着都不可也。” 於外物無嗜好, 衣服飮食, 但期粗適, 不求鮮美。 視財利如垢膩, 恐近則汚人。 暮年家食, 饘粥不充, 而處之泰然。

번역문:
문사(文辭)는 흉금(胸襟)에서 흘러나와, 처음에는 마음에 두지 않은 듯하나(不經於意)⁴⁰³, 이미 이루어지면 구름이 가고 물이 흐르듯(雲行水流)⁴⁰⁴ 온화한(藹然) 도덕(道德)의 말이었다. 간간이 그 나머지로 시(詩)와 문장(章)을 지었는데, 충담(沖澹)하고 혼성(渾成)⁴⁰⁵하여 꾸밈(雕繢)⁴⁰⁶을 일삼지 않았고, 그 기축(機軸)⁴⁰⁷은 많이 도연명(陶淵明)과 위응물(韋應物)⁴⁰⁸에게서 나왔다. 평소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는데, 거처하는 집 서쪽에 푸른 절벽(蒼壁)이 강(江)에 임하여 천 길(千仞)이나 곧게 서 있어, 인하여 스스로 호(號)를 서애(西厓)⁴⁰⁹라 하였다. 매번 벼슬에서 물러나 쉴(歸休) 때면 한 방에서 편안히 앉아(燕坐) 있었는데, 그 스스로 만족하는(自得) 정취(趣)는 아마도 남들이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항상 벼슬살이(仕宦)가 뜻을 빼앗은 것을 평생의 한(恨)으로 여겨, 그 당(堂)의 이름을 원지(遠志)⁴¹⁰라 하였으니, 그 은미(微)한 뜻을 보인 것이다. 하루는 나가 노닐다가 복사꽃(桃花)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말하였다. “이 물건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마음 본체(心體)가 맑고 비어(澄虛) 있으니, 집착(着)함이 있으면 모두 불가하다.” 외물(外物)에 대해 기호(嗜好)가 없었고, 의복(衣服)과 음식(飮食)은 다만 거칠고 수수함에 만족(粗適)하기를 바랐고, 신선하고 아름다움(鮮美)을 구하지 않았다. 재물과 이익(財利) 보기를 때나 기름(垢膩)처럼 여겨, 가까이하면 사람을 더럽힐까 두려워하였다. 만년(暮年)에 집에 있을(家食) 때 된죽과 묽은 죽(饘粥)⁴¹¹도 채우지 못하였으나, 태연(泰然)하게 처하였다.

주석:
403. 불경어의(不經於意): 마음에 얽매이지 않음. 의식적으로 꾸미거나 계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404. 운행수류(雲行水流): 구름이 가고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문체를 비유한다.
405. 충담혼성(沖澹渾成): 속이 비고 담박하며(沖澹) 전체가 조화롭게 이루어짐(渾成).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담백한 시의 경지를 나타낸다.
406. 조궤(雕繢): 새기고(雕) 그림(繢) 그리는 것. 인위적인 기교나 화려한 수식을 의미한다.
407. 기축(機軸): 베틀의 중요한 장치. 사물의 중심이 되는 요체나 골격, 또는 시문의 구성이나 착상을 의미한다.
408. 도(陶), 위(韋):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위응물(韋應物, 737?-792?). 두 시인 모두 자연을 노래하고 담백하며 평이한 시풍으로 유명하다. 유성룡의 시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409. 서애(西厓): 유성룡의 호. 집 서쪽(西)의 절벽(厓)이라는 뜻이다.
410. 원지(遠志): 뜻을 멀리 둠. 세속적인 명리를 떠나 고상한 이상을 추구하려는 뜻을 나타낸다. 한약재 이름이기도 하다.
411. 전죽(饘粥): 된죽(饘)과 묽은 죽(粥). 가난한 살림을 의미한다.


유성룡(柳成龍) 전기 번역 및 주석 (계속)

원문:
鑑識絶人, 鄭汝立嘗踵門求見, 辭以疾; 李爾瞻以太學生, 請撰靜菴碑銘, 屢要納拜, 終不見。 始以辨奸之明, 而免己丑之禍, 終以此見擠於戊戌。 其所以見擠者, 實公之幸, 而乃世道之不幸也。【竝行狀。】

번역문: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鑑識)이 남보다 뛰어나, 정여립(鄭汝立)⁴¹²이 일찍이 문(門)에 찾아와 뵙기를 구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절하였고, 이이첨(李爾瞻)⁴¹³이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정암(靜庵)⁴¹⁴의 비명(碑銘) 찬술(撰述)을 청하며 여러 차례 찾아뵙고 절하기(納拜)를 요구하였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처음에 간사한 자를 분별하는 밝음(辨奸之明)으로 기축년(己丑年)의 화(禍)⁴¹⁵를 면하였으나, 마침내 이 때문에 무술년(戊戌年)에 배척당하였다(見擠). 그 배척당한 까닭은 실로 공(公)에게는 다행이었으나, 바로 세도(世道)의 불행이었다.【이상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412. 정여립(鄭汝立,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원인이 된 인물. 유성룡이 그의 방문을 거절한 것은 그의 위험성을 미리 간파했음을 시사한다.
413.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光海君) 때 대북(大北)의 영수. 유성룡과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41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 호가 정암(靜庵)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되었다.
415. 기축지화(己丑之禍):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인해 동인(東人) 세력이 큰 타격을 입은 사건. 유성룡은 정여립과의 관계를 미리 끊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 서인(西人)과 동인(후에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 간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유성룡은 결국 정적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원문:
柳成龍以母老乞得近邑歸養, 上曰: “爾出則我失一臣, 固可惜矣。 但母子情切, 亦不可不聽。” 乃命拜尙州牧使, 士類皆惜其出矣。 成龍有才識, 善敷奏, 經席啓辭, 人皆稱美。 但不能一心奉公, 時有顧瞻利害之意, 君子以爲短焉。【《石潭日記》。】

번역문:
유성룡(柳成龍)이 어머니가 늙었음을 이유로 가까운 고을을 얻어 돌아가 봉양(歸養)하기를 빌자,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나가면 내가 한 명의 신하를 잃는 것이니 진실로 애석하다. 다만 모자(母子)의 정(情)이 간절하니 또한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명하여 상주목사(尙州牧使)⁴¹⁶에 제수하니, 사류(士類)들이 모두 그가 나가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유성룡은 재주와 식견(才識)이 있고 부주(敷奏)⁴¹⁷를 잘하여 경연(經席)에서의 계사(啓辭)⁴¹⁸를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칭찬하였다. 다만 한마음으로 공무에 힘쓰지(一心奉公) 못하고 때로 이해(利害)를 돌아보는(顧瞻) 뜻이 있었으니, 군자(君子)들은 이를 단점(短)으로 여겼다.【《석담일기(石潭日記)》⁴¹⁹에서 인용】

주석:
416. 상주목사(尙州牧使): 경상도 상주(尙州)를 다스리던 정3품 외관직. 유성룡은 1580년(선조 13) 모친 봉양을 위해 상주목사로 부임했다.
417. 부주(敷奏): 임금에게 상세하게 아뢰는 것.
418. 계사(啓辭):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나 글.
419. 《석담일기(石潭日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이(李珥)의 일기. 호가 석담(石潭)이다. 이 기록은 유성룡에 대한 이이의 평가를 보여준다. 이이는 유성룡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때때로 이해관계를 따지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적으로 보았다. 이는 당시 서인과 동인(남인)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원문:
尹海平在明廟初, 請印布《六臣傳》, 上震怒, 命曳出之。 李栗谷宣廟朝又有是請, 上怒曰: “家藏《六臣傳》, 以叛逆論。” 左右震恐。 柳西厓成龍曰: “國家不幸而有難, 欲臣等爲申叔舟乎? 爲成三問乎?” 上爲之霽怒。 古人有以片言回天者, 其近之矣。

번역문:
윤해평(尹海平)⁴²⁰이 명종(明廟) 초에 《육신전(六臣傳)》⁴²¹을 인쇄하여 반포(印布)할 것을 청하자, 상(上)께서 크게 노하여(震怒) 끌어내라고 명하셨다. 이율곡(李栗谷)⁴²²이 선조(宣廟) 때 또 이러한 청을 하자, 상께서 노하여 말씀하셨다. “집에 《육신전》을 소장한 자는 반역(叛逆)으로 논죄하겠다.” 좌우(左右)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유서애(柳西厓) 성룡(成龍)이 말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어려움이 있다면, 신(臣) 등으로 하여금 신숙주(申叔舟)⁴²³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성삼문(成三問)⁴²⁴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상께서 이 때문에 노여움을 푸셨다(霽怒). 옛사람 중에 한마디 말로 하늘(임금의 마음)을 돌이킨 자가 있다더니, 그에 가깝도다.

주석:
420. 윤해평(尹海平): 윤임(尹任, 1487-1545)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해평(海平). 대윤(大尹)의 영수였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사사되었다. 육신(六臣)에 대한 동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21. 《육신전(六臣傳)》: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여섯 신하의 행적을 기록한 책. 세조 이후 이들에 대한 평가는 금기시되었으나, 사림(士林) 세력이 집권하면서 점차 복권 논의가 이루어졌다.
422. 이율곡(李栗谷): 이이(李珥).
423.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조선 초기의 문신. 세종(世宗) 때 집현전(集賢殿)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세조(世祖)의 즉위를 도와 좌의정에 올랐다. 후대에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424.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되었다.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유성룡은 신숙주와 성삼문을 대비시켜, 임금이 신하에게 어떤 충성을 기대하는지를 물음으로써 선조의 노여움을 풀었다.


원문:
柳西厓自少文章學行, 爲一時所推, 雖久爲三公⁴²⁵, 淸貧如寒士, 爲政公明, 人不敢干以私。 壬辰大亂之後, 公以首相當國, 拮据經營, 焦心竭誠, 凡可以利國家, 不顧人言。 創都監, 通融軍籍, 改定貢案, 至今賴之。 激濁揚淸, 稍存形迹。 卒以此爲奸人所譖去國, 歸安東舊莊, 家食十載而卒, 朝野惜之。 然素性謙遜, 言語溫公⁴²⁶, 未嘗失色於人, 故少骨鯁風, 責備君子者不能無恨焉。【竝《涪溪記聞》。】

번역문:
유서애(柳西厓)는 젊어서부터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으로 한 시대의 추앙(推)을 받았으며, 비록 오랫동안 삼공(三公)⁴²⁵의 지위에 있었으나 청빈(淸貧)하기가 가난한 선비(寒士)와 같았고, 정사(爲政)를 공명(公明)하게 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움으로 간여(干)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壬辰大亂) 이후 공(公)이 수상(首相)⁴²⁷으로서 나라를 맡아, 어렵게 꾸려나가며(拮据經營) 마음을 태우고 정성을 다하여(焦心竭誠), 무릇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의 말을 돌아보지 않았다. 훈련도감(都監)을 창설하고, 군적(軍籍)을 통융(通融)⁴²⁸하고, 공안(貢案)⁴²⁹을 개정(改定)한 것은 지금까지도 힘입고 있다. 탁(濁)한 것을 몰아내고 맑은(淸) 것을 드날려(激濁揚淸)⁴³⁰ 조금이나마 형적(形迹)⁴³¹을 보존하였다. 마침내 이 때문에 간사한 사람(奸人)에게 참소(譖)를 받아 나라를 떠나 안동(安東)의 옛집(舊莊)으로 돌아가 집에 머문 지(家食) 십 년 만에 졸(卒)하니, 조정과 재야(朝野)가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평소 성품이 겸손(謙遜)하고 언어(言語)가 온화하고 공손(溫恭)⁴²⁶하여 일찍이 사람에게 얼굴빛을 잃은 적이 없었으므로, 골경(骨鯁)⁴³²한 풍모(風)가 적었으니, 군자(君子)에게 책선(責善)⁴³³하는 자들이 한(恨)이 없을 수 없었다.【이상은 《부계기문(涪溪記聞)》⁴³⁴에서 인용】

주석:
425.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최고위 재상직을 통칭한다.
426. [주-D010] 公 : 《대동야승(大東野乘)・부계기문(涪溪記聞)》에 근거할 때 “공(恭)”이 되어야 할 듯하다. '온공(溫恭)'은 '온화하고 공손하다'는 뜻으로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
427. 수상(首相): 재상 중 으뜸. 영의정을 가리킨다.
428. 통융(通融): 막힘없이 서로 통하게 함. 군역(軍役) 대상자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군적 제도를 정비하고 유연하게 운영했음을 의미한다.
429. 공안(貢案): 각 지방에서 중앙에 바치는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정한 장부. 유성룡은 불합리하고 과중했던 공물 제도를 개혁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대동법의 초기 형태).
430. 격탁양청(激濁揚淸): 흐린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드날림. 악(惡)을 물리치고 선(善)을 장려하며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우는 것을 비유한다.
431. 형적(形迹): 형체와 자취. 실질적인 내용이나 결과.
432. 골경(骨鯁): 뼈다귀나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것. 거리낌 없이 직언(直言)하는 강직한 성품이나 태도를 비유한다. 유성룡이 온화하고 겸손하여 강직함이 부족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433. 책선(責善): 선(善)을 행하도록 요구하고 권면함. 군자에게 기대하는 바를 의미한다.
434.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지은 야사(野史) 모음집. 호가 부계(涪溪)이다.


원문:
壬辰之亂, 上冒雨西行, 中宮以下乘馬, 見者掩淚。 百官鳥竄, 從者僅百餘人。 五月三日, 到開城府, 治山海誤國之罪, 竄平海。 上命竝黜柳成龍, 朝論不可, 上亦不從。 上欲薄山海之罪, 故黜成龍, 以分其罪, 所以抑朝議也。

번역문:
임진왜란(壬辰之亂) 때, 상(上)께서 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행차(西行)하시는데, 중궁(中宮)⁴³⁵ 이하가 말을 타니 보는 자들이 눈물을 가렸다. 백관(百官)들이 새처럼 달아나(鳥竄), 따르는 자가 겨우 백여 명이었다. 5월 3일, 개성부(開城府)에 도착하여 산해(山海)가 나라를 그르친 죄를 다스려 평해(平海)⁴³⁶로 귀양 보냈다. 상께서 유성룡(柳成龍)도 함께 내쫓으라고 명하셨으나, 조정의 여론(朝論)이 불가하다고 하였고 상께서도 또한 따르지 않으셨다. 상께서 산해의 죄를 가볍게 하고자 하였으므로 유성룡을 내쫓아 그 죄를 나누려 하셨으니, 조정의 의논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주석:
435. 중궁(中宮): 중전(中殿). 왕비(王妃)를 가리킨다. 당시 왕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이다.
436. 평해(平海):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원문:
壬辰變初, 賊逼尙州, 以公爲都體察使。 未發, 忠州敗報聞, 卽日下敎西狩。 時余以都承旨在政廳, 聞命入政院。 闕中已擾亂, 無復官序, 議與同僚, 出政院, 進詣宣政門下, 以便啓事。 俄有內敎, 命公守京城。 余對中使, 顧謂盧君士馨曰: “駕命一下, 宮中已空, 出城之日, 從行者必少。 若西行不止, 盡塞而止, 則一水之外, 卽上國之疆, 到此應有酬酢處變之事。 方今廷臣, 明敏練達, 識古誼善辭命, 柳某一人而已。 今大駕一移, 則京城無可守之勢, 柳某留之, 不過爲敗績之臣, 扈駕必有裨益之勢, 啓請從行如何?” 士馨頷之, 諸僚應聲曰: “諾。” 余卽搆草, 不暇整寫, 仍以草紙授中使以啓。 上卽允之, 改命李公陽元留守。 後有聖旨, 頗以公受命不行爲言, 豈蒼皇間事亦無能記起居注者耶? 可歎!【鰲城手記。】

번역문:
임진년(壬辰) 변란(變) 초, 적(賊)이 상주(尙州)에 핍박해오자 공(公)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았다. 출발하기 전에 충주(忠州) 패배의 보고를 듣고, 즉일(卽日)로 서쪽으로 피난(西狩)하라는 하교(下敎)가 내렸다. 이때 나(余)⁴³⁷는 도승지(都承旨)로서 정청(政廳)⁴³⁸에 있었는데, 명을 듣고 정원(政院)⁴³⁹에 들어갔다. 궁궐 안은 이미 소란하여 다시 관리들의 차례(官序)가 없었으므로, 동료들과 의논하여 정원을 나와 선정문(宣政門)⁴⁴⁰ 아래로 나아가 일을 아뢰기(啓事) 편하게 하였다. 얼마 후 안으로부터의 하교(內敎)가 있어 공에게 경성(京城)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내가 중사(中使)⁴⁴¹를 대하며 노군(盧君) 사형(士馨)⁴⁴²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어가(駕)의 명이 한번 내려지자 궁중이 이미 비었고, 성을 나가는 날에는 따라가는 자가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만약 서쪽으로 가기를 그치지 않아 변방 끝(盡塞)에 이르러 멈춘다면, 한 줄기 물(一水)⁴⁴³ 밖은 바로 상국(上國)의 강역(疆)이니, 이곳에 이르면 응당 응대하고 변고에 대처(酬酢處變)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조정 신하(廷臣) 중에 명민(明敏)하고 연달(練達)하며 옛 의리(古誼)를 알고 사명(辭命)⁴⁴⁴에 능한 이는 유모(柳某) 한 사람뿐입니다. 이제 대가(大駕)께서 한번 옮기시면 경성은 지킬 만한 형세가 없을 것이니, 유모를 남겨두는 것은 패전(敗績)한 신하가 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고, 어가를 모시는(扈駕) 것이 반드시 보탬(裨益)이 되는 형세이니, 따라가도록 청(啓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사형(士馨)이 고개를 끄덕이니, 여러 동료들이 소리에 응하여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즉시 초안(草)을 잡아(搆草) 정돈하여 쓸 겨를도 없이 그대로 초고(草紙)를 중사에게 주어 아뢰게 하였다. 상께서 즉시 윤허(允)하시고, 이공(李公) 양원(陽元)⁴⁴⁵에게 명을 바꾸어 유수(留守)⁴⁴⁶로 삼으셨다. 뒤에 성지(聖旨)가 있어 자못 공이 명을 받고도 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삼았는데, 어찌 창황(蒼皇)한 사이의 일 또한 기거주(起居注)⁴⁴⁷를 기록할 능력이 없는 자가 있었던 것인가? 탄식할 만하다!【오성수기(鰲城手記)⁴⁴⁸에서 인용】

주석:
437. 여(余): 나. 이 글의 저자인 이항복(李恒福)을 가리킨다.
438. 정청(政廳): 정사를 보는 관청. 승정원(承政院)을 가리킬 수 있다.
439.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다른 이름.
440. 선정문(宣政門): 창덕궁(昌德宮)의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 동쪽에 있는 편전(便殿)의 문. 임금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던 곳이다.
441. 중사(中使): 궁중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등의 일을 맡은 내시(內侍).
442. 노군 사형(盧君士馨): 노직(盧稙, 1555-1631)을 가리킨다. 호는 옥계(玉溪). 당시 승정원 주서(注書)로 이항복과 함께 있었다. 사형(士馨)은 그의 자(字)이다.
443. 일수(一水): 한 줄기 물. 압록강(鴨綠江)을 가리킨다.
444. 사명(辭命): 외교적인 말이나 문서.
445. 이양원(李陽元, 1526-1592):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발발 직후 한성 유수를 맡았으나, 성을 지키지 못하고 순절했다.
446. 유수(留守): 임금이 도성을 떠났을 때 도성의 방어와 행정을 책임지는 임시 관직.
447. 기거주(起居注): 임금의 언행과 동정을 매일 기록하던 일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초 자료가 된다. 이항복은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기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유성룡을 변호하고 있다.
448. 오성수기(鰲城手記): 이항복(李恒福)이 직접 쓴 기록. 오성(鰲城)은 그의 봉호(封號)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서 따온 것이다.


원문:
梧陰受留守箕都之命, 西厓受迎接天使之命。 而西厓遷延不發, 後駕而行, 至於祖⁴⁴⁹、史⁴⁵⁰諸將亦不迎見。 及到龍灣, 上命西厓先往定州等處, 收拾軍糧, 以爲天朝兵食之資, 亦緣病久未發。 上屢促之, 梧陰曰: “柳某有病, 不能登途, 請代往。 云云。” 然後西厓始啓程, 人以此疑其避事。 一日, 子常曰: “當變初, 上命西厓留守京都, 我以爲若與上國交接, 則應對之間, 非此人不可。 累獨啓之, 終以李伯春代之, 平壤亦力救焉。 今見大頭腦, 有不是處也。” 余曰: “無乃迎接天將、收拾軍糧事乎?” 曰: “非也。” 終不言。【《寄齋雜記》。】

번역문:
오음(梧陰)⁴⁵¹은 기도(箕都)⁴⁵²를 유수(留守)하라는 명을 받았고, 서애(西厓)는 천사(天使)를 영접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서애가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遷延不發) 어가(駕)보다 뒤에 떠났으며, 조승훈(祖承訓)⁴⁴⁹과 사대수(史大受)⁴⁵⁰ 등 여러 장수들에 이르러서도 또한 영접하여 만나보지 않았다. 용만(龍灣)⁴⁵³에 도착하자, 상(上)께서 서애에게 명하여 먼저 정주(定州) 등지로 가서 군량(軍糧)을 수습(收拾)하여 천조(天朝)의 병량(兵食)의 밑천(資)으로 삼게 하였으나, 또한 병 때문에 오랫동안 출발하지 못하였다. 상께서 여러 차례 재촉하시자 오음(梧陰)이 말하였다. “유모(柳某)가 병이 있어 길에 오를(登途) 수 없으니, 대신 가기를 청합니다. 운운.” 그런 뒤에야 서애가 비로소 길을 떠나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가 일을 피한다고(避事) 의심하였다. 하루는 자상(子常)⁴⁵⁴이 말하였다. “변란 초에 상께서 서애에게 명하여 경도(京都)를 유수하게 하셨는데, 내가 생각하기를 만약 상국(上國)과 교섭한다면 응대(應對)하는 사이에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다고 여겼소. 여러 차례 홀로 아뢰어 마침내 이백춘(李伯春)⁴⁵⁵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고, 평양에서도 또한 힘써 구원하였소. 지금 대두뇌(大頭腦)⁴⁵⁶를 보니 옳지 않은 점이 있소.” 내가(余)⁴⁵⁷ 말하였다. “천장(天將)을 영접하고 군량을 수습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답하기를, “아니오.” 하고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기재잡기(寄齋雜記)》⁴⁵⁸에서 인용】

주석:
449. [주-D011] 祖 : 저본(底本)에는 “조(租)”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기재사초(寄齋史草)》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명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을 가리킨다.
450. [주-D012] 史 : 저본(底本)에는 “사(使)”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명나라 장수 사대수(史大受)를 가리킨다.
451.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 호가 오음(梧陰)이다.
452. 기도(箕都): 기자(箕子)의 도읍. 평양(平壤)을 가리킨다.
453.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다른 이름.
454. 자상(子常): 이항복(李恒福)의 자(字)이다. 이 글의 저자인 박동량(朴東亮)이 이항복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455. 이백춘(李伯春): 이양원(李陽元)의 자(字)이다.
456. 대두뇌(大頭腦): 큰 두뇌. 뛰어난 재능이나 지략을 가진 사람. 여기서는 유성룡을 가리킨다. 이항복은 유성룡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당시 그의 행동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457. 여(余): 나. 이 글의 저자인 박동량(朴東亮)을 가리킨다.
458.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문집. 호가 기재(寄齋)이다.


원문:
甲午五月二十六日, 命招備局堂上, 議奏本大旨。 西厓約牛溪同入對。 時全羅監司李廷馣狀啓, 請姑許倭和, 以爲緩兵之計。 登對初, 左右爭陳可斬。 牛溪素知廷馣忠信大節, 恐得重罪, 乃啓曰: “廷馣之意實出於盡忠報國, 作此難言之說, 似不必重加罪責也。” 上不悅。 及對奏本之問, 牛溪曾與西厓議合, 陳不可不奏請之意, 一如西厓箚辭, 上尤不悅。 西厓終不敢發一言而退。【《涪溪記聞》。 亦錄此事入於《成牛溪傳》。】

번역문:
갑오년(1594) 5월 26일, 비변사 당상(備局堂上)을 부르도록 명하여 주문(奏本)의 대지(大旨)를 의논하게 하였다. 서애(西厓)가 우계(牛溪)⁴⁵⁹와 함께 입대(入對)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정암(李廷馣)⁴⁶⁰이 장계(狀啓)를 올려, 우선 왜(倭)와의 화의(和)를 허락하여 군사를 늦추는 계책(緩兵之計)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입대(登對) 초에 좌우(左右)에서 다투어 베어야 한다고(可斬) 아뢰었다. 우계는 평소 이정암의 충성스럽고 신의 있으며 큰 절개(忠信大節)를 알았으므로 중죄(重罪)를 얻을까 두려워, 이에 아뢰었다. “이정암의 뜻은 실로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盡忠報國)하려는 데서 나와 말하기 어려운 이런 주장을 한 것이니, 중하게 죄책(罪責)을 더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상(上)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다. 주문(奏本)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때, 우계가 일찍이 서애와 의논하여 합의한 대로 주문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아뢰니, 한결같이 서애의 차자(箚辭) 내용과 같았으므로 상께서 더욱 기뻐하지 않으셨다. 서애는 끝내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부계기문(涪溪記聞)》에서 인용. 또한 이 일을 《성우계전(成牛溪傳)》에도 기록함】

주석:
459.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호가 우계(牛溪)이다.
460. 이정암(李廷馣, 1541-1600):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전라감사로서 군량미 조달과 의병 지원에 힘썼다. 현실적인 판단에서 일시적인 화의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문:
西厓之於牛溪, 人多以爲不相得, 此乃不知者言也。 玄風人朴惺上疏, 托以陳時務, 末言栗、牛爲奸黨之魁。 小人之難辨者, 至謂牛溪搆殺崔永慶, 欲爲將來誣陷之計。 西厓見疏, 謂其幕下士韓嶠曰: “朴惺爲人, 君知之乎? 非失性, 安得爲此言?” 慨歎久之。 松江削奪後, 時人以牛溪爲松江之黨, 欲加之罪, 問于西厓, 西厓曰: “成某本以山野之人, 聖上破格待之, 屈己下之。 如使成某出於世用, 則未知爲君子耶? 小人耶? 今朝廷未嘗試用, 而遽以重罪加之, 則於成某少無虧損, 而其於傷國體、累聖德何?” 其議遂寢。【竝《買還問答》。】

번역문:
서애(西厓)와 우계(牛溪)에 대해, 사람들은 많이 서로 좋지 않게 지냈다(不相得)고 여기나, 이는 알지 못하는 자의 말이다. 현풍(玄風) 사람 박성(朴惺)⁴⁶¹이 상소를 올려 시무(時務)를 아뢴다는 핑계를 대고 끝에는 율곡(栗谷)과 우계(牛溪)를 간사한 무리(奸黨)의 우두머리(魁)라고 말하였다. 소인(小人)으로서 분별하기 어려운 자는 심지어 우계가 최영경(崔永慶)⁴⁶²을 모함하여 죽이고(搆殺) 장래에 무함(誣陷)할 계책으로 삼으려 한다고까지 말하였다. 서애가 상소를 보고 그 막하(幕下)의 선비 한교(韓嶠)에게 일러 말하였다. “박성의 사람됨을 그대는 아는가? 본성(性)을 잃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오래도록 개탄(慨歎)하였다. 송강(松江)⁴⁶³이 삭탈관직(削奪)된 후, 당시 사람들이 우계를 송강의 무리(黨)로 여겨 죄를 더하고자 하여 서애에게 물으니, 서애가 말하였다. “성모(成某)⁴⁶⁴는 본래 산야(山野)의 사람인데 성상(聖上)께서 파격적(破格)으로 대우하시고 자신을 낮추어 대하셨다. 만약 성모로 하여금 세상에 나아가 쓰이게 하였다면 군자(君子)가 될지 소인(小人)이 될지 알지 못한다. 이제 조정에서 아직 시험 삼아 써보지도 않고 갑자기 중죄(重罪)를 더한다면, 성모에게는 조금도 손상됨이 없겠으나, 국체(國體)를 손상시키고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침에는 어떠하겠는가?” 그 의논이 마침내 그쳤다.【이상은 《매환문답(買還問答)》⁴⁶⁵에서 인용】

주석:
461. 박성(朴惺, 154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462.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조선 중기의 학자.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옥사했다. 우계 성혼이 그를 구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463.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호가 송강(松江)이다. 서인(西人)의 영수였으나, 세자 건저(建儲) 문제로 파직되었다(건저의 사건).
464. 성모(成某): 아무개 성씨. 성혼을 가리킨다.
465. 《매환문답(買還問答)》: 책 이름으로 보이나,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문답 형식의 기록일 수 있다.


원문:
吏才乃刀筆之業, 不足貴, 然爲宰相而有吏才者, 亦難得。 余少通籍朝端, 以郞僚遊巨公間, 惟柳西厓成龍、李漢陰德馨、李白沙恒福三相國優於吏才。 方壬辰、癸巳倭寇充斥、天兵滿城之日, 羽書旁午, 文移動如山積。 西厓到省, 則以余疾書, 必命余執筆, 口呼成文, 聯篇累牘, 迅如風雨, 而筆不停寫, 文不加點, 煥然成章。 雖咨奏之文亦然, 詞臣奉敎撰進者, 不得有所加減於其間, 眞奇才也。 漢陰、白沙其亞也。【《象村稿》。】

번역문:
이재(吏才)⁴⁶⁶는 바로 도필(刀筆)⁴⁶⁷의 업(業)이라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되지만, 재상(宰相)이 되어 이재(吏才)를 가진 자 또한 얻기 어렵다. 내(余)⁴⁶⁸가 젊어서 조정(朝端)에 이름(籍)을 통하고(通籍) 낭료(郞僚)⁴⁶⁹로서 거공(巨公)⁴⁷⁰들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오직 유서애(柳西厓) 성룡(成龍), 이한음(李漢陰) 덕형(德馨), 이백사(李白沙) 항복(恒福) 세 상국(相國)⁴⁷¹이 이재(吏才)에 뛰어났다. 바야흐로 임진년(壬辰, 1592), 계사년(癸巳, 1593) 왜구(倭寇)가 가득하고 천병(天兵)이 성(城)에 가득했던 날에는, 우서(羽書)⁴⁷²가 어지럽게 오가고(旁午) 공문서(文移)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서애가 성(省)⁴⁷³에 도착하면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는 이유로 반드시 나에게 명하여 붓을 잡게 하고 입으로 불러 문장을 이루었는데(口呼成文), 여러 편(聯篇累牘)이 빠르기가 비바람 같았고, 붓은 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글은 점 하나 더하지 않아도(文不加點) 환하게 문장을 이루었다. 비록 자문(咨文)이나 주문(奏文)이라도 또한 그러하여, 사신(詞臣)⁴⁷⁴이 교지(敎)를 받들어 지어 올린(撰進) 자라도 그 사이에 더하거나 뺄(加減) 바가 없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재주(奇才)였다. 한음(漢陰)과 백사(白沙)가 그 다음이었다.【《상촌고(象村稿)》⁴⁷⁵에서 인용】

주석:
466. 이재(吏才): 행정 실무 능력. 문서를 처리하고 사무를 관장하는 재능.
467. 도필(刀筆): 칼(刀)과 붓(筆). 고대에 글씨를 잘못 쓰면 칼로 긁어 지웠다는 데서 유래하여, 문서를 작성하고 처리하는 아전(衙前)의 일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468. 여(余): 나. 이 글의 저자인 신흠(申欽)을 가리킨다.
469. 낭료(郞僚): 낭관(郎官)과 동료. 젊은 시절의 하급 관료를 의미한다.
470. 거공(巨公): 지위가 높고 명망 있는 대신.
471. 상국(相國): 재상(宰相)을 높여 부르는 말.
472. 우서(羽書): 깃털을 꽂은 긴급 군사 문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격문(檄文) 등을 의미한다.
473. 성(省): 관청. 비변사(備邊司)나 의정부(議政府) 등을 가리킬 수 있다.
474. 사신(詞臣): 문장을 짓는 일을 맡은 신하. 주로 예문관(藝文館)이나 승문원(承文院)의 관리를 가리킨다.
475. 《상촌고(象村稿)》: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申欽, 1566-1628)의 문집. 호가 상촌(象村)이다.


원문:
我國外方人中生、進者, 各其官門近地, 建司馬所, 儼然一衙門, 壓倒留鄕所, 憑藉武斷, 至凌駕土主者。 兩南尤甚, 皆非古也。 癸酉間, 柳成龍啓于經筵革之。【《鯸鯖瑣語》。】

번역문:
우리나라 외방(外方) 사람들 중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된 자들이 각기 그 관문(官門)⁴⁷⁶ 가까운 땅에 사마소(司馬所)⁴⁷⁷를 세우니, 엄연히 하나의 아문(衙門)⁴⁷⁸이 되어 유향소(留鄕所)⁴⁷⁹를 압도(壓倒)하고, (세력을) 빙자(憑藉)하여 무단(武斷)⁴⁸⁰으로 처리하며 심지어 토주(土主)⁴⁸¹를 능가(凌駕)하기까지 하였다. 양남(兩南)⁴⁸²이 더욱 심하였는데, 모두 옛날 법도가 아니었다. 계유년(1603) 사이에 유성룡(柳成龍)이 경연(經筵)에서 아뢰어 이를 혁파(革)하였다.【《후청쇄어(鯸鯖瑣語)》⁴⁸³에서 인용】

주석:
476. 관문(官門): 관아(官衙)의 문. 관청.
477. 사마소(司馬所): 조선 시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도모하고 향촌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기 위해 자치적으로 설립한 기구. 사마(司馬)는 생원, 진사를 합격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478. 아문(衙門): 관청. 사마소가 관청처럼 위세를 부렸음을 의미한다.
479. 유향소(留鄕所): 조선 시대 지방의 전직 관료나 덕망 있는 선비들이 향촌의 풍속 교화, 향리(鄕吏) 규찰 등을 위해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기구.
480. 무단(武斷): 위력이나 권세를 이용하여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함.
481. 토주(土主): 그 지역의 토착 세력가 또는 유력자.
482. 양남(兩南): 영남(嶺南, 경상도)과 호남(湖南, 전라도).
483. 《후청쇄어(鯸鯖瑣語)》: 조선 후기의 문인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별집(別集)에 수록된 내용으로 보인다. 후청(鯸鯖)은 복어와 고등어를 뜻하며, 하찮은 이야기나 잡담을 의미한다.

이산보(李山甫)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山甫【忠簡公。】
字仲擧, 號鳴谷。 嘉靖己亥生。 隆慶丁卯, 中司馬。 宣祖元年戊辰, 登第。 選入史局, 歷吏郞、舍人、典翰、直提學、大司成、大諫、大憲、慶尙監司, 再按海西節。 官至吏曹判書。 甲午卒, 年五十六。 甲辰, 追錄扈聖功, 贈領議政。

번역문:
이산보(李山甫)【충간공(忠簡公)¹이다.】
자는 중거(仲擧)이고, 호는 명곡(鳴谷)이다. 가정(嘉靖) 기해년(1539)에 태어났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에 사마시(司馬試)²에 합격하였다. 선조(宣祖) 원년 무진년(156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³에 선발되어 들어갔고, 이조 정랑(吏曹正郞)⁴, 사인(舍人)⁵, 전한(典翰)⁶, 직제학(直提學)⁷, 대사성(大司成)⁸, 대사간(大司諫)⁹, 대사헌(大司憲)¹⁰,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¹¹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海西節)¹²를 두 차례 맡았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¹³에 이르렀다. 갑오년(1594)에 나이 56세로 졸(卒)하였다. 갑진년(1604)에 호성공신(扈聖功臣)¹⁴에 추록(追錄)되고 영의정(領議政)¹⁵에 추증(追贈)되었다.

주석:

  1. 충간공(忠簡公): 이산보의 시호(諡號). 충(忠)은 충성스러움을, 간(簡)은 간결하고 소탈함을 의미할 수 있다.
  2.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 시험.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거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다.
  3.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임시 관청. 춘추관(春秋館)과 관련이 깊으며, 실록 편찬 등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이조 정랑(吏曹正郞):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였다.
  5.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여러 관청에 두었던 관직. 여기서는 예문관(藝文館)의 관직 또는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 등을 두루 거쳤음을 나타낼 수 있다.
  6. 전한(典翰):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하관. 경연(經筵) 참여 및 문한(文翰) 관련 업무를 맡았다.
  7. 직제학(直提學): 홍문관 또는 예문관의 정3품 당상관. 학문 연구와 왕의 자문을 담당했다.
  8.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국립대학 총장 격이다.
  9.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10.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11.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 경상도의 관찰사(觀察使).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12. 해서절(海西節):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를 가리킨다. 해서(海西)는 황해도의 별칭이며, 절(節)은 관찰사를 의미하는 절도사(節度使)에서 온 말이다.
  13.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 인사를 총괄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14.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이산보는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5. 영의정(領議政):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최고위 관직이다. 추증(追贈)은 죽은 뒤에 관직을 내리는 것이다.

원문:
兒時與群兒戲氷上, 跌足折齒。 群兒懼爲父母所譴責, 謀所以飾辭者, 公曰: “叔父嘗以不欺見敎, 吾當以實對。” 叔父卽土亭先生之菡也。 後土亭聞公與群兒語者, 稱歎不已。 土亭嘗指路傍石佛曰: “此物亦有父母否?” 公曰: “父天母地。” 土亭大奇之, 曰: “此兒當作大人君子。”

번역문: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얼음 위에서 놀다가 발을 헛디뎌 이[齒]가 부러졌다. 여러 아이들이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워하여 둘러댈 말을 꾸미려 하자, 공(公)¹⁶이 말하였다. “숙부(叔父)께서 일찍이 속이지 말라고 가르치셨으니, 나는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하겠다.” 숙부는 바로 토정(土亭) 선생 이지함(李之菡)¹⁷이다. 후에 토정 선생이 공이 여러 아이들과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칭찬하며 감탄하기를 마지않았다. 토정 선생이 일찍이 길가의 석불(石佛)을 가리키며 묻기를, “이 물건도 부모가 있는가?” 하니, 공이 답하였다. “하늘이 아버지이고 땅이 어머니입니다[父天母地].” 토정 선생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말하였다. “이 아이는 마땅히 대인군자(大人君子)¹⁸가 될 것이다.”

주석:
16. 공(公): 이산보(李山甫)를 가리킨다.
17. 토정(土亭) 선생 이지함(李之菡, 1517-1578):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奇人). 호가 토정이며, 《토정비결(土亭祕訣)》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저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산보의 아버지 이치(李致)의 동생, 즉 이산보의 숙부이다. ‘불기(不欺)’ 즉 속이지 않음을 강조한 가르침은 그의 성품과 학문 경향을 보여준다.
18. 대인군자(大人君子): 덕(德)과 학식(學識)이 높고 행실이 바른 사람.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낸다.


원문:
年十七, 娶婦于京, 土亭戒之曰: “須惜寸陰。” 公奉敎惟謹。 嘗在江榭讀書, 諸友共拉公登舟, 抵奉恩寺。 諸友先入寺, 日暮還舟, 則公在舟中讀書。 諸友共嘲之, 公曰: “父兄有敎, 不敢違也。” 公屢魁鄕擧。 後將入場, 同業生忽被錮, 公惻然曰: “我不忍獨赴。” 遂與同歸, 人以爲難。

번역문:
나이 17세에 서울에서 장가들었는데, 토정 선생이 경계하며 말하기를, “모름지기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야 한다[惜寸陰].”¹⁹라고 하였다. 공은 가르침을 오직 삼가 받들었다. 일찍이 강가 정자(江榭)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여러 친구들이 함께 공을 끌어 배에 태워 봉은사(奉恩寺)²⁰에 이르렀다. 여러 친구들이 먼저 절에 들어갔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돌아와 보니, 공은 배 안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여러 친구들이 함께 조롱하자, 공이 말하였다. “부형(父兄)의 가르침이 있어 감히 어기지 못한다.” 공은 여러 차례 향시(鄕試)²¹에서 장원(魁)하였다. 후에 (과거 시험장에) 장차 입장하려는데, 동문(同業生)²² 중 한 명이 갑자기 금고(禁錮)²³를 당하자, 공이 측은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나는 차마 홀로 나아가지 못하겠다.” 마침내 함께 돌아가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주석:
19. 석촌음(惜寸陰):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아까워함.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학문에 힘쓰라는 가르침이다.
20. 봉은사(奉恩寺):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유명한 사찰.
21. 향시(鄕試): 조선 시대 각 도(道)에서 실시하던 과거 시험의 예비 시험. 또는 지방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던 시험을 통칭하기도 한다.
22. 동업생(同業生): 함께 학업을 하는 동료 학생.
23. 금고(禁錮):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벼슬길을 막거나 활동을 제한하는 형벌. 여기서는 과거 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당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원문:
栗谷旣歿, 金宇顒爲副提學入對, 毁文成所爲。 公以承旨入侍, 盛稱文成行誼之高, 上擊節嘉歎。 宇顒有所言, 上輒問公曰: “此言何如?” 公輒盡言不諱, 益觸時忌。 無何, 特授大司憲, 爲忌嫉者所中, 出爲慶尙道觀察使。

번역문:
율곡(栗谷) 이이(李珥)²⁴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김우옹(金宇顒)²⁵이 부제학(副提學)²⁶으로 입대(入對)²⁷하여 문성공(文成公)²⁸께서 하신 바를 헐뜯었다. 공이 승지(承旨)²⁹로서 입시(入侍)³⁰하여 문성공의 행실과 의리(行誼)가 높음을 극력 칭송하니, 상(上)³¹께서 무릎을 치며(擊節)³² 아름답게 여기고 감탄하셨다. 김우옹이 말하는 바가 있으면, 상께서 번번이 공에게 묻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셨다. 공은 번번이 거리낌 없이 말을 다하여(盡言不諱), 더욱 당시 꺼리는 자들의 미움을 받았다(觸時忌).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으나,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에게 중상(中傷)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주석:
24.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호는 율곡.
25.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동인(東人)의 영수 중 한 명. 율곡 이이와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26.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책이다.
27. 입대(入對): 신하가 임금 앞에 나아가 정책 등을 아뢰고 질문에 답하는 것.
28. 문성공(文成公): 율곡 이이의 시호.
29.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30. 입시(入侍): 임금을 모시고 곁에 있는 것. 경연(經筵)이나 정사(政事) 논의 시에 이루어졌다.
31. 상(上): 임금. 당시 임금은 선조(宣祖)이다.
32. 격절(擊節): 무릎을 치며 감탄하거나 찬성함.


원문:
士禍大起, 一時名公卿多被竄逐。 論者欲彈公, 無毫髮可擧, 只以怨天尤人劾公。 公官罷居閑, 唯日讀書不輟。 所親或唁公, 公笑曰: “彈辭謂我怨尤, 可謂不知我者。”

번역문:
사화(士禍)³³가 크게 일어나 한 시대의 이름난 공경(公卿)³⁴들이 많이 축출되었다. 논하는 자³⁵들이 공을 탄핵하고자 하였으나 털끝만큼도 내세울 것이 없자, 단지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怨天尤人]³⁶는 이유로 공을 탄핵하였다. 공은 관직에서 파면되어 한가로이 지내면서, 오직 날마다 독서를 그치지 않았다. 가까이 지내는 이가 혹 공을 위문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탄핵하는 글에서 나를 원망하고 탓한다고 하니, 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 이를 만하다.”

주석:
33. 사화(士禍):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사건. 여기서는 선조 때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나 그 이후의 정치적 혼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산보는 서인(西人)으로 분류되며, 당시 동인(東人)과의 당쟁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34. 공경(公卿): 높은 벼슬아치.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아울러 이르거나, 일반적으로 고위 관료를 지칭한다.
35. 논자(論者): 당시 정국을 주도하며 비판과 탄핵을 일삼던 이들. 주로 반대 당파인 동인(東人) 세력을 가리킬 수 있다.
36. 원천우인(怨天尤人):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함.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평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실제 잘못이 없던 이산보를 억지로 탄핵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분으로 보인다.


원문:
壬辰, 倭寇深入, 公自保寧赴都。 居數日, 敍命下, 公晨詣闕, 則大駕已西幸矣。 公不復還家, 單馬追駕扈行, 至東坡。 拜大司諫, 尋以吏曹參判陞判書。 時賊鋒漸逼, 上議渡遼, 問群臣誰肯從我, 公與李公恒福數三人請從。 天朝旣發援¹師, 李提督如松駐軍遼陽, 不肯前。 公承命馳詣軍門, 請亟濟師, 辭氣懇切, 淚隨言發。 提督欲具酒食待之, 公曰: “君父在草莽, 義不忍當盛禮。” 遂下庭痛哭, 提督感動, 卽趣師渡江。

번역문:
임진년(1592)에 왜적(倭寇)이 깊이 침입하자, 공이 보령(保寧)³⁷에서 도성(都城)으로 달려왔다. 며칠 머무르자 서용(敍用)³⁸하라는 명이 내려왔는데, 공이 새벽에 대궐로 나아갔으나 어가(大駕)³⁹는 이미 서쪽으로 행차(西幸)⁴⁰한 뒤였다. 공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홀로 말을 타고 어가를 뒤쫓아 호종(扈從)하여 동파(東坡)⁴¹에 이르렀다.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고, 얼마 뒤 이조 참판(吏曹參判)⁴²을 거쳐 판서(判書)로 승진하였다. 이때 적의 예봉(賊鋒)이 점점 다가오자, 상께서 요동(遼東)으로 건너갈 것을 의논하며 여러 신하들에게 누가 기꺼이 나를 따르겠는가 물으시니, 공이 이항복(李恒福)⁴³ 공 등 두세 사람과 함께 따르기를 청하였다. 천조(天朝)⁴⁴에서 이미 원¹군(援軍)을 보냈는데,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⁴⁵이 요양(遼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공이 명을 받들어 군문(軍門)으로 달려가서 속히 군대를 건너게 해달라고 청하니, 말과 기색이 간절하였고 눈물이 말을 따라 흘러내렸다. 제독이 주식(酒食)을 갖추어 대접하려 하자, 공이 말하였다. “임금께서 초야(草莽)⁴⁶에 계시니, 의리상 차마 성대한 예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마침내 뜰 아래로 내려가 통곡하니, 제독이 감동하여 즉시 군대를 재촉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주석:
37. 보령(保寧): 현재의 충청남도 보령시. 이산보는 이곳에서 은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8. 서용(敍用): 죄나 벌로 인해 파직되었던 사람을 다시 관직에 임명하는 것.
39.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의 행차를 의미한다.
40. 서행(西幸): 임금이 도성을 떠나 서쪽으로 피난 감.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 간 것을 말한다.
41. 동파(東坡): 황해도 토산군(兎山郡)에 있는 역(驛) 이름. 선조의 피난길 경로상에 있는 곳이다.
42.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조의 버금 벼슬. 종2품.
43.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정승. 호는 백사(白沙).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다.
44. 천조(天朝): 하늘 아래의 조정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왕조, 즉 당시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45. 이여송(李如松, 1549-1598): 명나라의 장수.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원군의 총사령관이었다.
46. 초망(草莽): 풀이 우거진 곳. 임금이 궁궐을 떠나 피난처의 어려운 환경에 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47. [주-D001] 援 : 저본(底本)에는 “완(緩)”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계곡집(谿谷集)・고자헌대부……이공행장(故資憲大夫……李公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원군(援軍)'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원문:
天兵旣復平壤, 進薄京城, 與賊持久, 糧且盡。 上憂之曰: “海西新中兵, 公私赤立, 括粟飛輓, 民必不堪。 將奈何?” 僉曰: “李某曾按此道有遺惠, 命往必濟。” 遂拜公都檢察使。 公比抵境, 老少咸加額曰: “李監司至矣。” 傾儲輸粟, 負戴繈屬, 軍餉大集。 竣事還, 又命往莅三南。 士民聞其至, 爭趨集如海西。 大軍南征, 軍興未嘗乏, 公之力也。

번역문:
천병(天兵)⁴⁸이 이미 평양(平壤)을 회복하고 진격하여 서울에 육박하였으나, 적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여 군량(軍糧)이 거의 떨어졌다. 상께서 이를 걱정하며 말씀하셨다. “황해도(海西)는 새로이 병화(兵禍)를 겪어 공사(公私)가 모두 빈곤(赤立)⁴⁹하니, 곡식을 거두어 급히 수송(括粟飛輓)⁵⁰하면 백성들이 필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장차 어찌할 것인가?” 모두 아뢰었다. “아무개 이씨(李某)⁵¹가 일찍이 이 도(道)를 안찰(按察)⁵²할 때 남긴 은혜(遺惠)가 있으니, 명하여 가게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마침내 공을 도검찰사(都檢察使)⁵³에 제수하였다. 공이 국경에 도착하자 노소(老少)가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加額)⁵⁴ 말하기를, “이 감사(李監司)께서 오셨다.”라고 하였다. 저축한 것을 기울여 곡식을 수송하는데, 등에 지고 머리에 인 행렬이 끊이지 않아(負戴繈屬) 군량이 크게 모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또 명하여 삼남(三南)⁵⁵으로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사민(士民)들이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투어 모여드는 것이 황해도에서와 같았다. 대군(大軍)이 남쪽으로 정벌갈 때 군수품 조달(軍興)⁵⁶이 일찍이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공의 힘이었다.

주석:
48. 천병(天兵): 천자(天子)의 군대. 명나라 군대를 가리킨다.
49. 적립(赤立): 벌거벗고 섬.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매우 가난한 상태를 의미한다.
50. 괄속비만(括粟飛輓): 곡식을 긁어모으고 수레로 급히 운반함. 군량미를 긴급하게 조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51. 이모(李某): 아무개 이씨. 이산보를 가리킨다.
52. 안찰(按察): 지방관이 되어 그 지역의 민정을 살피고 다스림. 이산보는 이전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바 있다.
53. 도검찰사(都檢察使): 조선 시대 임시로 두었던 관직. 주로 군량 조달이나 민정 수습 등의 임무를 맡았다.
54. 가액(加額): 이마에 손을 얹음. 기쁘거나 다행스러울 때 하는 행동.
55. 삼남(三南):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통칭한다.
56. 군흥(軍興):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 일.


원문:
甲午大饑, 親戚之窮餓者皆扶携歸公。 公分俸賑救, 至輟盤飧以哺之, 每食未嘗飽。 子弟請加飧, 公歎曰: “此何時也? 喫飯幸矣, 敢望飽乎?” 東宮命公管賑, 早夜焦勞, 日昃忘食, 勞憊成疾。 東宮遣醫視疾, 醫陽言疾可爲也。 公曰: “吾病已自知之。 豈以死生關念?” 疾亟, 命夫人出, 語不及家事, 但問今日邊報何如而已。

번역문:
갑오년(1594)에 큰 흉년이 들자, 친척 중에 궁핍하고 굶주린 자들이 모두 서로 부축하고 이끌며 공에게 귀의하였다. 공은 봉록(俸祿)을 나누어 진휼하고 구제하며, 상에 차린 음식(盤飧)을 덜어 먹이기까지 하여 매번 식사 때마다 배불리 먹지 못하였다. 자제(子弟)들이 음식을 더 드시기를 청하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밥을 먹는 것만도 다행인데, 감히 배부르기를 바라겠는가?” 동궁(東宮)⁵⁷께서 공에게 명하여 진휼을 관장하게 하시니, 아침저녁으로 애태우고 수고하며(焦勞) 해가 기울도록 식사를 잊어, 노고와 피로로 병이 들었다. 동궁께서 의원(醫員)을 보내 병을 살피게 하니, 의원이 거짓으로 병이 나을 만하다고 말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내 병은 이미 스스로 알고 있다. 어찌 죽고 사는 것에 마음을 두겠는가?” 병이 위독해지자 부인(夫人)을 나가게 명하고, 말은 집안일에는 미치지 않고 단지 “오늘의 변방 보고(邊報)는 어떠한가?”라고 물을 뿐이었다.

주석:
57. 동궁(東宮): 왕세자(王世子)를 가리킨다. 당시 왕세자는 광해군(光海君)이었다.


원문:
公少從土亭學, 語默坐立, 一遵其敎。 土亭嘗稱公曰: “孝悌忠信, 雖出於孔門, 可以無愧。” 又曰: “惟大人不失赤子之心。 世人雖有美質, 稍長, 漸失其本心。 惟某也庶幾此言。” 又曰: “可以托六尺之孤, 毅然有不可奪之節。” 其見許如此。 急於濟物, 見人厄窮, 猶飢渴之在身。 聞人有一善, 喜而稱道之, 或言人過惡, 恒若不聞也者。 雖僮僕有過, 亦不輕加詬罵。 尤篤於宗族, 撫愛存恤, 恩意周遍。 立朝三十年, 孤忠朴直, 不顧衆咻, 未嘗以得失利害動其中。 至施諸政事, 則竭心盡力, 要以澤物利人行之, 出於至誠, 故德惠所孚, 人皆感悅, 急難之日, 多賴其力。

번역문:
공은 젊어서 토정 선생을 따라 배우며, 말하고 침묵하고 앉고 서는 것을 모두 그 가르침을 따랐다. 토정 선생이 일찍이 공을 칭찬하여 말하였다. “효제충신(孝悌忠信)⁵⁸은 비록 공자(孔子)의 문하(孔門)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만하다.” 또 말하였다. “오직 대인(大人)이라야 어린아이의 마음[赤子之心]⁵⁹을 잃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도 조금 자라면 점점 그 본심(本心)을 잃는데, 오직 아무개⁶⁰야말로 이 말에 가깝다.” 또 말하였다. “육척지고(六尺之孤)⁶¹를 맡길 만하며, 의연(毅然)하여 빼앗을 수 없는 절개가 있다.” 그에게 인정받음이 이와 같았다. 남을 구제하는 데 급하여, 다른 사람의 액운과 곤궁함을 보면 마치 굶주림과 목마름이 내 몸에 있는 듯이 여겼다. 다른 사람에게 한 가지 선행이라도 있음을 들으면 기뻐하며 칭찬하여 말하고, 혹 다른 사람의 과실과 악행을 말하는 이가 있으면 항상 듣지 못한 듯이 하였다. 비록 동복(僮僕)⁶²에게 잘못이 있어도 또한 가벼이 꾸짖거나 욕하지 않았다. 특히 종족(宗族)에게 돈독하여, 어루만져 사랑하고 돌보며 구휼하여(撫愛存恤) 은혜로운 마음이 두루 미쳤다. 조정에 선 지 30년에, 외로운 충성심과 소박한 정직함(孤忠朴直)으로 여러 사람의 비방(衆咻)⁶³을 돌아보지 않았고, 일찍이 얻고 잃음과 이해(利害)로써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정사를 시행함에 이르러서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반드시 만물에 혜택을 주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澤物利人)으로 행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덕과 은혜가 미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고 기뻐하여, 위급하고 어려운 날에 그의 힘에 의지한 경우가 많았다.

주석:
58. 효제충신(孝悌忠信): 효도, 우애, 충성, 신의. 유교의 기본적인 덕목이다.
59. 적자지심(赤子之心): 갓난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 나오는 말이다.
60. 모(某): 아무개. 이산보를 가리킨다.
61. 육척지고(六尺之孤): 아버지를 여읜 어린 아들.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서 증자(曾子)가 군자의 조건으로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고[可以托六尺之孤], 백 리 땅의 제후국 운명을 맡길 만하며[可以寄百里之命], 큰 절개에 임하여 빼앗을 수 없는[臨大節而不可奪也]’ 덕목을 든 데서 유래했다. 임금의 후사를 맡길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극찬이다.
62. 동복(僮僕): 나이 어린 남자 종. 하인.
63. 중휴(衆咻): 여러 사람이 떠들어대며 비방함.


원문:
公於經傳及濂、洛諸書, 靡不精熟, 而尤深於《易學啓蒙》, 蓋得之土亭。 又洞曉象緯, 當辛卯年間, 仰觀俯察, 深以國事爲憂, 及倭變之作, 其言果驗云。【竝張谿⁶⁴谷撰行狀。】

번역문:
공은 경전(經傳)⁶⁵과 염락(濂洛)⁶⁶의 여러 서적에 정통하고 익숙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특히 《역학계몽(易學啓蒙)》⁶⁷에 깊었으니, 대개 토정 선생에게서 얻은 것이다. 또한 상위(象緯)⁶⁸에도 밝게 통하여, 신묘년(1591) 무렵에 하늘의 형상을 우러러보고 땅의 이치를 굽어살피며(仰觀俯察)⁶⁹ 깊이 나라 일을 걱정하였는데, 왜변(倭變)⁷⁰이 일어나자 그 말이 과연 증험되었다고 한다.【이상은 모두 장계곡(張谿谷)⁷¹이 지은 행장(行狀)⁷²에서 나왔다.】

주석:
64. [주-D002] 谿 : 저본(底本)에는 “계(溪)”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 및 《송자대전(宋子大全)・계곡장공신도비명(谿谷張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장유(張維)의 호는 보통 '谿谷'으로 쓴다.
65. 경전(經傳): 유교 경서(經書)와 그 주석서(傳書)를 통칭한다.
66. 염락(濂洛): 중국 송(宋)나라 시대의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性理學)을 대표하는 학파.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67. 《역학계몽(易學啓蒙)》: 송나라 주희(朱熹)가 《주역(周易)》의 입문서로 저술한 책.
68. 상위(象緯): 천문(天文, 象)과 위서(緯書, 緯). 즉 천문학과 점성술 분야를 의미한다. 토정 이지함은 이 분야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9. 앙관부찰(仰觀俯察):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살핌. 천문과 지리를 관찰하여 세상의 이치를 파악함을 의미한다.
70. 왜변(倭變):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을 가리킨다. 이산보가 신묘년(1591)에 이미 전쟁의 조짐을 예견했다는 의미이다.
71. 장계곡(張谿谷):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장유(張維, 1587-1638)를 가리킨다. 호가 계곡(谿谷)이다.
72.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생애 동안의 행적(行跡)과 성품(性狀)을 기록한 글. 보통 묘비명(墓碑銘)이나 신도비명(神道碑銘)의 기초 자료가 된다.

이정암(李廷馣)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廷馣【忠穆公。】
字仲薰, 慶州人。 嘉靖辛丑生。 明宗十四年己未, 中進士。 辛酉登第。 選入史局, 歷正言、持平、承旨、大諫、吏議、全羅・忠淸・黃海三道監司。 階資憲, 錄宣武勳, 封月川君。 庚子卒, 年六十。

번역문:
이정암(李廷馣)【충목공(忠穆公)¹이다.】
자는 중훈(仲薰)이고, 경주(慶州) 사람이다. 가정(嘉靖) 신축년(1541)에 태어났다. 명종(明宗) 14년 기미년(1559)에 진사시(進士試)²에 합격하였다. 신유년(156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³에 선발되어 들어갔고, 정언(正言)⁴, 지평(持平)⁵, 승지(承旨)⁶, 대사간(大司諫)⁷, 이조 참의(吏曹參議)⁸, 전라도·충청도·황해도 세 도(道)의 감사(監司)⁹를 역임하였다. 품계(階)는 자헌대부(資憲大夫)¹⁰에 이르렀고, 선무공신(宣武功臣)¹¹에 녹훈(錄勳)되어 월천군(月川君)¹²에 봉해졌다. 경자년(1600)에 나이 60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1. 충목공(忠穆公): 이정암의 시호. 충(忠)은 충성스러움을, 목(穆)은 덕이 빛나고 외경스러움(布德執義曰穆) 등을 의미한다.
  2. 진사시(進士試): 사마시(司馬試)의 하나로, 여기에 합격하면 진사가 된다.
  3. 사국(史局): 이산보 주석 3 참조.
  4.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을 담당했다.
  5.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감찰 업무를 담당했다.
  6. 승지(承旨): 이산보 주석 29 참조.
  7. 대사간(大司諫): 이산보 주석 9 참조.
  8.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 이조판서, 참판 다음가는 직책이다. 이의(吏議)는 이조 참의의 별칭이다.
  9. 감사(監司):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 이산보 주석 11 참조.
  10.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문관의 종2품 상계(上階) 품계명.
  11.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이정암은 연안성(延安城) 전투의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2. 월천군(月川君): 이정암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공신에게 내려지는 봉작(封爵)이다.

원문:
未娶, 有醜而貴者, 求以妻之, 公不許。 尹元衡居比隣, 要相見, 亦不肯。 又知鄭汝立兇悖, 擧世推許, 而公痛絶之, 坐枳仕途而不悔也。

번역문:
장가들기 전에, 용모는 추하지만 신분이 귀한 자¹³가 있어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윤원형(尹元衡)¹⁴이 이웃에 살면서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또한 응하지 않았다. 또 정여립(鄭汝立)¹⁵이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남을 알고 온 세상이 그를 추앙하며 허여하였으나, 공은 그와 관계를 통렬히 끊어 이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으나(坐枳仕途) 후회하지 않았다.

주석:
13. 추이귀자(醜而貴者): 용모는 보잘것없으나 신분이나 권세가 높은 사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14. 윤원형(尹元衡, 1509-1565): 조선 명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이정암이 그와의 만남을 거부한 것은 그의 불의함을 용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5. 정여립(鄭汝立,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처음에는 서인(西人)에 속했으나 동인(東人)으로 돌아섰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는 등 혁신적인 사상을 가졌으나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역모 혐의로 죽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정여립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정암은 그의 사상이나 행실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하고 교류를 끊었다는 것이다.


원문:
朝廷以倭奴爲憂, 拜公東萊府使, 秀吉遣使來。 先是, 倭人之來, 官吏多賂賄, 公與邊將約束痛絶。 又所給倭人稅米, 例和水使脹, 以足其數, 過海則爛不堪食, 公以爲此非誠信交隣之道, 卽禁切之。

번역문:
조정에서 왜노(倭奴)¹⁶를 걱정하여 공을 동래부사(東萊府使)¹⁷로 제수하였는데, 히데요시(秀吉)¹⁸가 사신을 보내왔다. 이보다 앞서 왜인이 오면 관리들이 대부분 뇌물을 주었으나, 공은 변방의 장수들과 약속하여 이를 통렬히 근절하였다. 또 왜인에게 지급하는 세미(稅米)¹⁹를 관례적으로 물에 섞어 불려서 그 수량을 채웠는데, 바다를 건너가면 썩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공은 이것이 성실과 신의로 이웃 나라와 교류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즉시 엄금하였다.

주석:
16. 왜노(倭奴): 왜인(倭人)을 낮추어 부르는 말. 일본인을 가리킨다.
17. 동래부사(東萊府使): 동래부(현재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의 수령. 정3품. 당시 대일 외교 및 국방의 최전선이었다. 이정암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1년 12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했다가 1592년 2월에 이조 참의로 옮겨갔다.
18. 히데요시(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일본 센고쿠 시대를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당시 조선에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고 있었다.
19. 세미(稅米): 세금으로 거둔 쌀. 여기서는 왜인에게 교역의 대가나 선물 등으로 지급하던 쌀을 의미한다.


원문:
壬辰, 倭寇猝至。 公時爲吏曹參議, 語夫人曰: “國事至此, 不如自盡。” 遂經于房裏, 賴救者不死。 時大駕已西幸, 公追及於松都。 公弟廷馨爲松都留守, 請曰: “臣兄無職事, 願與同事。” 許之。

번역문:
임진년(1592)에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공은 당시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는데,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방 안에서 목을 매었으나, 구해주는 사람 덕분에 죽지 않았다. 이때 어가(大駕)는 이미 서쪽으로 행차하였는데, 공은 송도(松都)²⁰에서 따라잡았다. 공의 아우 이정형(李廷馨)이 송도 유수(松都留守)²¹로 있었는데, (임금께) 청하여 아뢰기를, “신의 형이 직책이 없으니, 원컨대 함께 일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주석:
20. 송도(松都): 개성(開城)의 옛 이름. 고려의 수도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선조의 피난 경로 상에 있었다.
21. 송도 유수(松都留守): 개성부(開城府)의 으뜸 벼슬. 종2품. 수도 방위 및 행정을 담당했다.


원문:
大駕旣向關西, 公知松都難守, 負母夫人過延安。 延安人喜迎, 曰: “是我舊使君也。” 時賊入海西, 通誘列邑曰: “迎者賞, 逃者斬。” 以是吏民牛酒市歸。 公遂傳檄遠近, 諭以逆順, 仍招集義旅, 金公德諴、趙公廷堅等來會, 遂得數千官兵, 建大將旗, 書“奮忠討賊”四字。 賊乘未備, 悉收諸屯賊來攻, 煙焰漲天。 人皆勸公避去, 公奮曰: “經幄老臣, 旣不執靮從君, 則當乘一障以效死, 豈可苟活? 況諭民入城, 何忍棄之?” 遂下令曰: “不願留者皆去。” 城中皆感奮。【幷尤菴宋時烈撰碑。】

번역문:
어가가 이미 관서(關西)²² 지방으로 향하자, 공은 송도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모부인(母夫人)을 등에 업고 연안(延安)²³으로 갔다. 연안 사람들이 기쁘게 맞이하며 말하였다. “이 분은 우리의 옛 사군(使君)²⁴이시다.” 이때 적이 황해도(海西)로 들어와 여러 고을에 통문(通文)을 보내 유인하며 말하기를, “맞이하는 자는 상을 주고, 도망치는 자는 목을 벤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관리와 백성들이 소와 술을 시장에서 사서 (적에게) 귀순하였다. 공은 마침내 원근(遠近)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역순(逆順)의 이치를 깨우치고, 이어서 의병(義旅)을 모집하니, 김덕함(金德諴) 공, 조정견(趙廷堅) 공 등이 와서 합류하여 마침내 수천 명의 관병(官兵)을 얻었다.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충성을 다해 적을 토벌한다[奮忠討賊]’ 네 글자를 썼다. 적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틈을 타 여러 주둔지의 적병을 모두 거두어 와서 공격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찼다.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공이 분연히 말하였다. “경연(經筵)과 임금의 장막(幄)을 모시던 늙은 신하²⁵가 이미 말고삐를 잡고 임금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하나의 장벽(障壁)에 의지하여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해야지, 어찌 구차하게 살 수 있겠는가? 하물며 백성들을 타일러 성(城)으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어찌 차마 그들을 버리겠는가?” 마침내 명령을 내리기를, “머무르기를 원치 않는 자는 모두 가라.” 하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분발하였다.【이상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나왔다.】

주석:
22. 관서(關西): 철령관(鐵嶺關)의 서쪽 지방. 평안도와 황해도를 통칭한다. 여기서는 선조의 피난 경로인 평안도를 가리킨다.
23. 연안(延安):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대의 옛 지명. 이정암은 이곳에서 관찰사를 지낸 적이 있어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24. 사군(使君): 다른 사람의 부친이나 지방관(감사, 부사 등)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이정암이 이전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음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25. 경악노신(經幄老臣): 경연(經筵)과 임금의 장막(帷幄)에서 오랫동안 모신 늙은 신하. 임금의 측근에서 학문과 정사를 보좌해 온 중신임을 자처하는 말이다.


원문:
賊據海州, 將進攻延安, 人民率皆荷擔而立。 及聞前參議李廷馣自開城至, 遂迎入曰: “令公若爲我等守此城, 我等亦當死守。” 廷馣遂得武士四百餘名, 共城中人約數千, 晝夜治城, 爲防守計。 粗²⁶完, 賊引兵至。 城中人謂廷馣曰: “我等之盡死力, 爲令公也; 令公之不出去, 爲我等也。 今賊已迫, 令公心若一毫不堅, 城中數千命皆斷送矣。” 廷馣曰: “爾等尙猶未信我耶?” 遂令人建一草屋於城中高絶處, 四面積薪, 下令曰: “城不守, 爾等速火此。 我當死於此。” 民咸曰: “令公若如此, 我等亦當死。” 賊分兵進薄城下, 冒死仰攻。 城上矢石如雨, 老者運石以投之, 婦人汲水以灌之。 賊或乘雲梯, 或冒木板, 或頂²⁷屍, 攀城築土, 蟻附而上。 城中束火投之, 煙氣大盛, 賊不能登。 又於城外起三重屋, 俯視城中放鐵丸。 城中又建板屋, 四面對起。 賊晝夜分番迭入, 百計攻之, 城中亦隨機應之。 大戰五日, 賊解圍而去, 城中人曰: “賊衆分²⁸軍而戰, 有休息之時, 而我軍晝夜苦戰, 目不交睫, 氣力垂盡。 少遲一晝夜, 安得抵當? 非令公忠義所感, 我輩已爲丸下鬼。” 自此賊據白川一日程, 更不躡延安之境, 蓋有所憚也。 由江華渡延安, 西達于行在, 南通于湖、嶺, 皆延安保障之力也。 朝廷特陞廷馣嘉善。 世子賜敎書, 稱以招討使, 尋稱巡察使。【《寄齋雜記》。】

번역문:
적이 해주(海州)를 점거하고 장차 연안을 공격하려 하자, 인민들이 모두 짐을 메고 (피난 갈 채비로) 서 있었다. 전 참의(前參議) 이정암이 개성으로부터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맞이하여 들어오게 하고 말하였다. “영공(令公)²⁷께서 만약 우리들을 위해 이 성을 지켜주신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죽음으로 지킬 것입니다.” 정암이 마침내 무사(武士) 400여 명을 얻어 성안 사람들과 합쳐 약 수천 명이 되었는데, 밤낮으로 성을 정비하여 방수(防守)할 계책을 세웠다. 대략²⁸ 완성되자 적이 군대를 이끌고 이르렀다. 성안 사람들이 정암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죽을힘을 다하는 것은 영공을 위해서이고, 영공께서 나가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적이 이미 닥쳐왔으니, 영공의 마음이 만약 조금이라도 견고하지 못하다면 성안 수천 명의 목숨이 모두 끊어질 것입니다.” 정암이 말하였다. “너희들이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가?” 마침내 사람을 시켜 성안의 높고 외딴 곳에 초가집 한 채를 짓게 하고 사방에 땔나무를 쌓아놓고는 명령을 내렸다. “성이 지켜지지 못하면, 너희들은 속히 여기에 불을 질러라.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을 것이다.” 백성들이 모두 말하였다. “영공께서 만약 이와 같이 하신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죽겠습니다.” 적이 군대를 나누어 성 아래로 진격하여 육박하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공격하였다. 성 위에서는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하였고, 늙은이들은 돌을 날라 던지고 부인들은 물을 길어 부었다. 적은 혹은 운제(雲梯)²⁹를 타고, 혹은 목판(木板)을 무릅쓰고, 혹은 시체를 머리에 이고³⁰, 성벽을 기어오르고 흙을 쌓으며 개미처럼 붙어 올라왔다. 성안에서는 횃불 묶음을 던지니 연기가 크게 일어나 적이 능히 오르지 못하였다. 또 성 밖에 삼중(三重)의 누각을 세워 성안을 내려다보며 철환(鐵丸)³¹을 쏘아댔다. 성안에서도 또한 판자집(板屋)을 세워 사방에서 마주 보며 대응하였다. 적이 밤낮으로 번(番)을 나누어 교대로 들어와 온갖 계책으로 공격하였고, 성안에서도 또한 기미에 따라 대응하였다. 닷새 동안 크게 싸우자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는데, 성안 사람들이 말하였다. “적군은 군대를 나누어³² 싸워서 휴식할 시간이 있었지만, 아군은 밤낮으로 고전(苦戰)하여 눈도 붙이지 못해 기력이 거의 다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하루 낮밤을 지체했다면 어찌 능히 막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영공의 충의(忠義)에 감동되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이미 철환 아래의 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적이 하루 거리인 배천(白川)에 주둔하면서 다시는 연안 땅을 밟지 않았으니, 아마도 꺼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화도(江華島)를 거쳐 연안을 지나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³³에 도달하고, 남쪽으로 호서(湖西)·영남(嶺南) 지방과 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연안이 막아 지켜준 힘이었다. 조정에서 특별히 정암을 가선대부(嘉善大夫)³⁴로 승진시켰다. 세자(世子)³⁵가 교서(敎書)를 내려 초토사(招討使)³⁶라 칭하였고, 얼마 뒤에는 순찰사(巡察使)³⁷라 칭하였다.【《기재잡기(寄齋雜記)》³⁸에서 인용】

주석:
26. [주-D001] 完 : 저본(底本)에는 “안(安)”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기재사초(寄齋史草)》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대략 완성되다(粗完)'가 문맥에 맞다.
27. [주-D002] 頂 : 《대동야승・기재사초》에는 “항(項)”으로 되어 있다. '머리에 이다(頂)'가 일반적인 용례이다.
28. [주-D003] 軍 : 저본(底本)에는 “운(運)”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기재사초》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군대를 나누다(分軍)'가 의미상 옳다.
29. 영공(令公): 다른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 주로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쓴다.
30. 운제(雲梯): 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높은 사다리.
31. 정시(頂屍): 시체를 머리에 이거나 방패 삼아 화살이나 돌을 막으며 성벽에 접근하는 모습.
32. 철환(鐵丸): 쇠로 만든 탄환. 조총(鳥銃)이나 포(砲)의 탄환을 의미한다.
33.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행차하여 머무는 곳. 당시 선조의 피난처인 의주(義州)를 가리킨다.
34.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명.
35. 세자(世子): 당시 왕세자인 광해군(光海君). 분조(分朝)를 이끌며 전쟁을 독려하고 있었다.
36. 초토사(招討使): 난리가 났을 때, 군대를 이끌고 적을 치거나 백성을 위무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관직.
37. 순찰사(巡察使): 민정을 살피고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파견하던 임시 관직. 관찰사(觀察使)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38.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기록. 호가 기재(寄齋)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사실들을 기록하였다.


원문:
守城之功, 世人獨稱李廷馣, 而不及晉州金時敏, 此亦倒置。 廷馣之功, 固可嘉奬, 至與時敏竝論, 則亦不無差等。 蓋廷馣之所敵者長政, 而兵不滿萬, 廷馣所領又過數千, 義兵諸將來會者亦多可與頡頏³⁹。 當此之時, 本道諸將皆不能立功, 唯廷馣獨能如此。 陣中且多士子, 易以鋪張, 行在不遠, 聲問易達。 廷馣平生聲望亦足以服人心, 故其功大著。【《白沙雜記》。】

번역문:
성(城)을 지킨 공(功)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유독 이정암만 칭송하고 진주(晉州)의 김시민(金時敏)⁴⁰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또한 뒤바뀐 것이다. 정암의 공은 진실로 가상하고 장려할 만하지만, 김시민과 나란히 논하는 데 이르러서는 또한 차등(差等)이 없지 않다. 대개 정암이 대적한 자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⁴¹였는데 병력이 만 명에 미치지 못했고, 정암이 거느린 병력 또한 수천 명이 넘었으며, 의병장들 중에 와서 합류한 자도 많아 더불어 대항(頡頏)⁴²할 만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본도(本道)⁴³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오직 정암만이 홀로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다. 진중(陣中)에는 또한 사대부 자제(士子)들이 많아 쉽게 과장하여 퍼뜨릴 수 있었고, 행재소(行在所)가 멀지 않아 명성과 소문이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정암의 평소 명망 또한 족히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만하였으므로, 그 공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백사잡기(白沙雜記)》⁴⁴에서 인용】

주석:
39. [주-D004] 頏 : 저본(底本)에는 “완(頑)”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힐항(頡頏)'은 서로 맞서 겨룸을 의미한다.
40.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순국하였다.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다.
41.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 일본의 다이묘(大名).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제2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했다. 연안성 전투 당시 왜군 지휘관이었다.
42. 힐항(頡頏): 새가 위아래로 날며 서로 다투는 모습에서 유래하여, 세력이 비슷하여 서로 지지 않고 맞서 겨룸을 의미한다.
43. 본도(本道): 해당 도. 여기서는 황해도를 가리킨다.
44. 《백사잡기(白沙雜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임진왜란 전후의 여러 사실들을 기록한 책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이 글은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에는 실려 있지 않다.


원문:
壬辰, 賊兵三千猝至延安, 前守李公廷馣, 適在城中, 以孤城弱卒, 血戰却賊, 尤爲奇績。 且其報捷之啓, 無一夸張語, 只曰: “賊以某日至城下, 某日解去, 官軍無死亡者。” 先輩長老論李公此事曰: “守城却賊, 猶可爲也, 有功不伐, 人所難及。” 髣髴曹國華奉使南中, 幹當公事回版語矣。【《公私見聞》。】

번역문:
임진년에 적병 3천 명이 갑자기 연안에 이르렀는데, 전 수령(前守) 이정암 공이 마침 성안에 있다가 외로운 성(孤城)과 약한 군졸(弱卒)로 혈전(血戰)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니, 더욱 기이한 공적(奇績)이 되었다. 또한 승리를 보고하는 계문(啓聞)⁴⁵에는 과장하는 말이 하나도 없고 단지 “적이 아무 날 성 아래에 이르렀다가 아무 날 포위를 풀고 물러갔으며, 관군(官軍) 중에 사망한 자는 없습니다.”라고만 하였다. 선배 장로(長老)들이 이공의 이 일을 논하며 말하였다. “성을 지켜 적을 물리치는 것은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는 것(有功不伐)⁴⁶은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이다.” 조국화(曹國華)⁴⁷가 남중(南中)⁴⁸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적인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한 말과 비슷하다.【《공사견문(公私見聞)》⁴⁹에서 인용】

주석:
45. 계문(啓聞):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글.
46. 유공불벌(有功不伐):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음. 겸양(謙讓)의 미덕을 나타낸다.
47. 조국화(曹國華): 명나라 말기의 관리. 벼슬은 공부시랑(工部侍郎)에 이르렀다.
48. 남중(南中): 중국 남방 지역. 여기서는 명나라 때 소수 민족의 반란이 잦았던 운남(雲南), 귀주(貴州) 등지를 가리킬 수 있다. 조국화가 이곳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 간결하게 보고한 고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9. 《공사견문(公私見聞)》: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공적인 기록과 사적인 견문을 모은 책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원문:
公之在兵, 車駕西狩龍灣, 隆景持重兵據松京, 列營黃、鳳, 連綴江陰, 危動浿江, 直撓關西。 長政猖⁵⁰狂海濱, 放兵四劫, 南路阻絶。 公一戰而翦其觜距, 賊喘汗自戢, 芻牧不敢近公城下, 海西十三州皆復爲我有。 二南勤王之士, 由牙山、江華渡龍岡, 達行在, 奔問有路, 漕輓無礙, 公之力也。【李白沙恒福撰延安碑。】

번역문:
공(公)이 군중에 있을 때, 어가(車駕)는 서쪽 용만(龍灣)⁵¹으로 사냥하듯 피난 가시고, (고니시) 유키나가[隆景]⁵²는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송경(松京)⁵³을 점거하고 황주(黃州)와 봉산(鳳山)에 진영(陣營)을 벌여 강음(江陰)⁵⁴까지 이어 붙여 패강(浿江)⁵⁵을 위태롭게 움직이고 바로 관서(關西) 지방을 어지럽혔다. (구로다) 나가마사[長政]는 해변에서 미쳐 날뛰며⁵⁶ 군사를 풀어 사방을 노략질하여 남쪽 길이 막히고 끊겼다. 공이 한 번의 전투로 그 부리와 발톱[觜距]⁵⁷을 잘라버리자, 적이 헐떡이며 땀 흘리고 스스로 움츠러들어(自戢) 풀 베고 가축 치는 자(芻牧)⁵⁸들이 감히 공의 성 아래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황해도(海西) 13주(州)가 모두 다시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이남(二南)⁵⁹의 근왕(勤王)⁶⁰하는 선비들이 아산(牙山)과 강화(江華)를 거쳐 용강(龍岡)⁶¹을 건너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달려가 문안할 길이 있었고 조운(漕運)과 수송(輓)에 막힘이 없었던 것은 공의 힘이었다.【이백사(李白沙) 항복(恒福)이 지은 연안비(延安碑)에서 인용】

주석:
50. [주-D005] 狂 : 저본(底本)에는 “광(𦍕)”으로 되어 있다. 《사류재집(四留齋集)・연성대첩비명(延城大捷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창광(猖狂)'이 일반적인 표기이다.
51.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다른 이름. 선조의 피난처이다. 서수(西狩)는 임금의 피난을 ‘서쪽으로 사냥 감’에 비유한 표현이다.
52. 융경(隆景):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1군 사령관. 평양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隆景'은 그의 법명(法名) 또는 아호(雅號)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53. 송경(松京): 개성(開城).
54. 강음(江陰):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의 옛 이름.
55. 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의 다른 이름.
56. 창광(猖狂): 미쳐 날뛰며 매우 사나운 모습.
57. 취거(觜距): 새의 부리와 며느리발톱. 적의 날카로운 기세나 주력 부대를 비유한다.
58. 추목(芻牧): 꼴을 베고 가축을 기르는 사람. 즉, 일반 백성이나 비전투 인력을 의미한다.
59. 이남(二南): 호남(湖南, 전라도)과 영남(嶺南, 경상도). 삼남(三南)에서 충청도를 제외한 두 도를 가리킨다.
60. 근왕(勤王): 왕을 위해 힘써 싸움. 또는 임금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감.
61. 용강(龍岡): 평안남도 서남쪽에 있는 군.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이곳을 통해 의주로 가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이정암(李廷馣)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廷馣【忠穆公。】
字仲薰, 慶州人。 嘉靖辛丑生。 明宗十四年己未, 中進士。 辛酉登第。 選入史局, 歷正言、持平、承旨、大諫、吏議、全羅・忠淸・黃海三道監司。 階資憲, 錄宣武勳, 封月川君。 庚子卒, 年六十。

번역문:
이정암(李廷馣)【시호는 충목공(忠穆公)¹이다.】
자는 중훈(仲薰)이고, 경주(慶州) 사람이다.² 가정(嘉靖) 신축년(1541)³에 태어났다. 명종(明宗) 14년 기미년(1559)에 진사시(進士試)⁴에 합격하고, 신유년(1561)에 문과(文科)⁵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⁶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정언(正言)⁷, 지평(持平)⁸, 승지(承旨)⁹, 대간(大諫)¹⁰, 이조 참의(吏曹參議)¹¹, 전라도·충청도·황해도 세 도(道)의 감사(監司)¹²를 역임하였다. 품계(階)¹³는 자헌대부(資憲大夫)¹⁴에 이르렀고, 선무공신(宣武功臣)¹⁵에 녹훈(錄勳)되어 월천군(月川君)¹⁶에 봉해졌다. 경자년(1600)에 나이 60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1. 충목공(忠穆公): 이정암의 시호(諡號). 충(忠)은 충성스러움을, 목(穆)은 덕이 널리 퍼짐을 나타내는 등의 의미가 있다.
  2. 경주인(慶州人): 본관(本貫)이 경주(慶州)임을 나타낸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3. 가정(嘉靖) 신축년(1541): 가정은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이다. 가정 20년 신축년은 1541년이다.
  4. 진사시(進士試):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하나로, 생원시(生員試)와 함께 소과(小科)에 해당한다. 주로 시(詩), 부(賦), 책(策) 등을 시험하여 문학적 재능을 평가했다. 여기에 합격하면 진사(進士)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나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5. 문과(文科): 조선 시대 과거 시험 중 가장 중요시된 시험으로, 대과(大科)라고도 한다. 합격자는 관료로 진출하는 주요 통로였다. 신유년은 명종 16년(1561)이다.
  6.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기관. 춘추관(春秋館) 또는 예문관(藝文館) 등을 가리킬 수 있으며, 여기서는 사관(史官)으로 선발되었음을 의미한다.
  7.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8.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일을 맡았다. 정언과 지평은 모두 대간(臺諫)에 속하는 중요한 언관직(言官職)이다.
  9.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0. 대간(大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을 가리킨다. 정3품 당상관으로 간쟁을 총괄했다.
  11. 이의(吏議):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줄임말.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으로 문관(文官)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다.
  12. 감사(監司): 각 도(道)의 으뜸 벼슬인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종2품으로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13. 계(階): 품계(品階). 관원의 등급을 나타내는 체계.
  14.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정2품 상계(上階) 문관의 품계명.
  15.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이정암은 연안성(延安城) 방어의 공으로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6. 월천군(月川君): 이정암이 선무공신에 책록되면서 받은 군호(君號). 군(君)은 공신이나 왕족에게 주던 작위이다.

원문:
未娶, 有醜而貴者, 求以妻之, 公不許。 尹元衡居比隣, 要相見, 亦不肯。 又知鄭汝立兇悖, 擧世推許, 而公痛絶之, 坐枳仕途而不悔也。

번역문:
장가들기 전에, 용모는 추하나 신분이 귀한 자¹⁷가 있어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공(公)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원형(尹元衡)¹⁸이 이웃에 살면서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또한 응하지 않았다. 또 정여립(鄭汝立)¹⁹이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남을 알고 온 세상이 그를 추대하며 허여하였으나 공은 그와 관계를 통렬히 끊었으니, 이로 인해 벼슬길이 막혔으나(坐枳仕途) 후회하지 않았다.

주석:
17. 추이귀자(醜而貴者): 용모는 추하지만 신분이 귀한 사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정암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18. 윤원형(尹元衡, 1509-1565): 조선 중기의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정암이 그와의 교류를 거절한 것은 그의 불의(不義)를 멀리하려는 뜻에서였다.
19. 정여립(鄭汝立,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처음에는 서인(西人)에 속했으나 이이(李珥) 사후 동인(東人)으로 돌아섰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역모 혐의로 죽음을 당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정여립을 추종했으나 이정암은 그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교류를 끊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정암의 선견지명과 강직함을 보여준다.
20. 좌지사도(坐枳仕途): 이로 말미암아(坐) 벼슬길(仕途)이 막히다(枳). '지(枳)'는 탱자나무를 뜻하나 여기서는 '막히다', '방해받다'는 의미로 쓰였다. 권력자와의 관계를 거부하거나 시류에 영합하지 않아 출세에 지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원문:
朝廷以倭奴爲憂, 拜公東萊府使, 秀吉遣使來。 先是, 倭人之來, 官吏多賂賄, 公與邊將約束痛絶。 又所給倭人稅米, 例和水使脹, 以足其數, 過海則爛不堪食, 公以爲此非誠信交隣之道, 卽禁切之。

번역문:
조정(朝廷)에서 왜노(倭奴)²¹를 근심하여 공을 동래 부사(東萊府使)²²로 제수하였는데, 히데요시(秀吉)가 사신을 보내왔다. 이보다 앞서 왜인(倭人)이 오면 관리들이 대부분 뇌물을 주었으나, 공은 변방의 장수들과 약속하여 이를 통렬히 근절하였다. 또한 왜인에게 지급하는 세미(稅米)²³는 관례적으로 물을 섞어 불려서 그 수량을 채웠는데, 바다를 건너가면 썩어서 먹을 수 없게 되자, 공은 이것이 성신(誠信)으로 이웃 나라와 교류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즉시 엄금(嚴禁)하였다.

주석:
21. 왜노(倭奴): 왜인(倭人), 즉 일본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22. 동래 부사(東萊府使): 동래부(東萊府, 현재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의 수령. 종3품. 동래는 대일(對日) 외교 및 국방의 최전선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이정암은 1590년(선조 23)에 동래 부사로 부임했다.
23. 세미(稅米): 왜인에게 지급하던 쌀. 조선은 일본과의 교린(交隣) 정책의 일환으로 왜관(倭館)을 통해 내왕하는 일본인들에게 식량 등을 지급했는데, 일부 관리들이 부정을 저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정암은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아 신의를 지키려 했다.


원문:
壬辰, 倭寇猝至。 公時爲吏曹參議, 語夫人曰: “國事至此, 不如自盡。” 遂經于房裏, 賴救者不死。 時大駕已西幸, 公追及於松都。 公弟廷馨爲松都留守, 請曰: “臣兄無職事, 願與同事。” 許之。

번역문:
임진년(壬辰年, 1592)에 왜구(倭寇)가 갑자기 쳐들어왔다. 공은 당시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는데, 부인(夫人)에게 말하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방 안에서 목을 매었으나, 구해주는 사람 덕분에 죽지 않았다. 이때 대가(大駕)²⁴는 이미 서쪽으로 행차(西幸)하였으므로, 공은 송도(松都)²⁵에서 뒤쫓아 따라잡았다. 공의 아우 정형(廷馨)이 송도 유수(松都留守)²⁶였는데, 청하여 말하기를 “신의 형은 맡은 직책이 없으니, 원컨대 함께 일하게 해주십시오.”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주석:
24.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여기서는 임금의 행차, 즉 선조(宣祖)의 피란 행렬을 가리킨다.
25. 송도(松都): 개성(開城)의 옛 이름. 당시 선조는 한양을 떠나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 방면으로 피란 중이었다.
26. 송도 유수(松都留守): 개성부(開城府)의 으뜸 벼슬. 종2품. 수도 방위 및 행정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원문:
大駕旣向關西, 公知松都難守, 負母夫人過延安。 延安人喜迎, 曰: “是我舊使君也。” 時賊入海西, 通誘列邑曰: “迎者賞, 逃者斬。” 以是吏民牛酒市歸。 公遂傳檄遠近, 諭以逆順, 仍招集義旅, 金公德諴、趙公廷堅等來會, 遂得數千官兵, 建大將旗, 書“奮忠討賊”四字。 賊乘未備, 悉收諸屯賊來攻, 煙焰漲天。 人皆勸公避去, 公奮曰: “經幄老臣, 旣不執靮從君, 則當乘一障以效死, 豈可苟活? 況諭民入城, 何忍棄之?” 遂下令曰: “不願留者皆去。” 城中皆感奮。【幷尤菴宋時烈撰碑。】

번역문:
대가(大駕)가 이미 관서(關西)²⁷로 향하자, 공은 송도(松都)를 지키기 어려움을 알고 모부인(母夫人)을 업고 연안(延安)²⁸을 지나갔다. 연안 사람들이 기쁘게 맞이하며 말하기를 “이분은 우리의 옛 사군(使君)²⁹이시다.” 하였다. 이때 적(賊)이 해서(海西)³⁰ 지방에 들어와 여러 고을에 통문(通文)을 보내 유인하며 말하기를 “맞이하는 자는 상을 주고, 도망하는 자는 목을 벤다.”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관리와 백성들이 소와 술을 가지고 저자거리로 돌아갔다. 공이 마침내 원근(遠近)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역순(逆順)³¹의 도리를 깨우치고, 이어서 의병(義旅)을 모집하니, 김공 덕함(金公德諴)³², 조공 정견(趙公廷堅) 등이 와서 모여 마침내 수천 명의 관병(官兵)을 얻게 되었다.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분충토적(奮忠討賊)’³³ 네 글자를 썼다. 적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여러 주둔지의 적들을 모두 모아 공격해 오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찼다.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피할 것을 권하자, 공이 분연히 말하였다. “경악(經幄)³⁴의 늙은 신하가 이미 말고삐를 잡고 임금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하나의 보루(堡壘)에 의지하여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할 것인데, 어찌 구차하게 살겠는가? 하물며 백성들을 타일러 성(城)으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어찌 차마 그들을 버리겠는가?” 마침내 명령을 내리기를 “남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모두 가라.” 하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분발하였다.【이상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³⁵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함께 인용함.】

주석:
27. 관서(關西): 철령관(鐵嶺關) 서쪽 지방, 즉 평안도(平安道)를 가리킨다.
28. 연안(延安): 황해도 연안부(延安府). 이정암은 이전에 연안 부사(延安府使)를 지낸 적이 있다.
29. 사군(使君): 남을 높여 그의 부친을 이르던 말이나, 여기서는 고을의 원님, 즉 부사(府使)를 가리킨다. 이정암이 연안 부사 시절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30. 해서(海西): 황해도(黃海道)의 별칭.
31. 역순(逆順): 순리(順理)를 거스름과 따름. 즉, 적에게 항복하는 것은 역(逆)이고 의병을 일으켜 싸우는 것은 순(順)임을 깨우친 것이다.
32. 김공 덕함(金公德諴): 김덕함(金德諴, 1560-?). 임진왜란 때 연안성 전투에 참여한 의병장. 공(公)은 존칭이다.
33. 분충토적(奮忠討賊): 충성을 다하여 분발하여 적을 토벌한다. 의병의 결의를 나타내는 구호이다.
34. 경악(經幄): 경연(經筵)과 시강(侍講)을 아울러 이르는 말.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이정암이 문신으로서 오랫동안 임금을 보좌했음을 나타낸다.
35.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대학자, 정치가. 서인의 영수.


원문:
賊據海州, 將進攻延安, 人民率皆荷擔而立。 及聞前參議李廷馣自開城至, 遂迎入曰: “令公若爲我等守此城, 我等亦當死守。” 廷馣遂得武士四百餘名, 共城中人約數千, 晝夜治城, 爲防守計。 粗完³, 賊引兵至。 城中人謂廷馣曰: “我等之盡死力, 爲令公也; 令公之不出去, 爲我等也。 今賊已迫, 令公心若一毫不堅, 城中數千命皆斷送矣。” 廷馣曰: “爾等尙猶未信我耶?” 遂令人建一草屋於城中高絶處, 四面積薪, 下令曰: “城不守, 爾等速火此。 我當死於此。” 民咸曰: “令公若如此, 我等亦當死。” 賊分兵進薄城下, 冒死仰攻。 城上矢石如雨, 老者運石以投之, 婦人汲水以灌之。 賊或乘雲梯, 或冒木板, 或頂³⁷屍, 攀城築土, 蟻附而上。 城中束火投之, 煙氣大盛, 賊不能登。 又於城外起三重屋, 俯視城中放鐵丸。 城中又建板屋, 四面對起。 賊晝夜分番迭入, 百計攻之, 城中亦隨機應之。 大戰五日, 賊解圍而去, 城中人曰: “賊衆分軍³⁸而戰, 有休息之時, 而我軍晝夜苦戰, 目不交睫, 氣力垂盡。 少遲一晝夜, 安得抵當? 非令公忠義所感, 我輩已爲丸下鬼。” 自此賊據白川一日程, 更不躡延安之境, 蓋有所憚也。 由江華渡延安, 西達于行在, 南通于湖、嶺, 皆延安保障之力也。 朝廷特陞廷馣嘉善。 世子賜敎書, 稱以招討使, 尋稱巡察使。【《寄齋雜記》。】

번역문:
적이 해주(海州)³⁹를 점거하고 장차 연안(延安)을 공격하려 하자, 인민(人民)들이 모두 짐을 메고 서 있었다. 전 참의(前 參議) 이정암(李廷馣)이 개성(開城)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그를 맞이하여 말하였다. “영공(令公)⁴⁰께서 만약 우리들을 위해 이 성을 지켜주신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죽음으로 지킬 것입니다.” 이정암이 마침내 무사(武士) 400여 명을 얻어 성안 사람들과 합쳐 약 수천 명으로 밤낮으로 성을 수리하며 방수(防守)할 계책을 세웠다. 대략 완성되자(粗完)⁴¹, 적이 군사를 이끌고 이르렀다. 성안 사람들이 이정암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죽을힘을 다하는 것은 영공을 위해서이고, 영공께서 나가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적이 이미 닥쳐왔으니, 영공의 마음이 만약 조금이라도 견고하지 못하다면 성안의 수천 명 목숨이 모두 끊어질 것입니다.” 이정암이 말하였다. “너희들이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가?” 마침내 사람을 시켜 성안의 높고 외딴 곳에 초가집 한 채를 짓게 하고 사방에 땔나무를 쌓아놓고 명령을 내리기를, “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너희들은 속히 이곳에 불을 질러라.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을 것이다.” 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말하였다. “영공께서 이와 같이 하신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죽을 것입니다.” 적이 군사를 나누어 성 아래로 육박해 와서 죽음을 무릅쓰고 쳐들어왔다. 성 위에서는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하였고, 늙은이들은 돌을 날라 던지고 부인들은 물을 길어 퍼부었다. 적은 혹은 운제(雲梯)⁴²를 타고, 혹은 목판(木板)을 머리에 이고, 혹은 시체(屍體)를 머리에 이고⁴³,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흙을 쌓으며 개미처럼 붙어 올라왔다. 성안에서는 횃불 묶음을 던지니 연기가 크게 일어나 적이 능히 오르지 못하였다. 또 성 밖에 삼중(三重) 누각을 세워 성안을 내려다보며 철환(鐵丸)⁴⁴을 쏘아댔다. 성안에서도 또한 판옥(板屋)⁴⁵을 세워 사방에서 마주보며 대응하였다. 적이 밤낮으로 번(番)을 나누어 교대로 들어와 온갖 계책으로 공격하였고, 성안에서도 기미(機微)에 따라 대응하였다. 닷새 동안 크게 싸우자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성안 사람들이 말하였다. “적군은 군사를 나누어 싸워서 휴식할 때가 있었지만, 아군(我軍)은 밤낮으로 고통스럽게 싸워 눈을 붙이지 못하여 기력이 거의 다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하루 낮밤을 지체했더라면 어찌 능히 막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영공의 충의(忠義)에 감동되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이미 탄환 아래의 귀신⁴⁶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적이 하루 거리인 백천(白川)⁴⁷에 주둔하면서 다시는 연안 땅을 밟지 않았으니, 아마도 꺼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江華)를 거쳐 연안을 지나 서쪽으로는 행재소(行在所)⁴⁸에 도달하고, 남쪽으로는 호서(湖西)와 영남(嶺南)⁴⁹에 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연안이 보장(保障)⁵⁰한 힘이었다. 조정에서 특별히 이정암을 가선대부(嘉善大夫)⁵¹로 승진시켰다. 세자(世子)⁵²께서 교서(敎書)를 내려 초토사(招討使)⁵³라 칭하였고, 이어서 순찰사(巡察使)⁵⁴라 칭하였다.【《기재잡기(寄齋雜記)》⁵⁵에서 인용】

주석:
36. [주-D001] 完 : 저본(底本)에는 “안(安)”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대동야승(大東野乘)・기재사초(寄齋史草)》에 근거하여 ‘완(完)’으로 수정하였다. 문맥상 성 수리가 '완성되자'는 의미가 자연스럽다.
37. [주-D002] 頂 : 《대동야승・기재사초》에는 “항(項)”으로 되어 있다. '항(項)'은 목덜미를 뜻하므로 문맥상 어색하다. '정(頂)'은 정수리 또는 머리에 임을 뜻하므로, '시체를 머리에 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38. [주-D003] 軍 : 저본(底本)에는 “운(運)”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기재사초》에 근거하여 ‘군(軍)’으로 수정하였다. '군사를 나누다(分軍)'가 문맥에 맞다.
39. 해주(海州): 황해도(黃海道)의 감영(監營) 소재지. 당시 일본군 제4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40. 영공(令公):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나, 여기서는 상대를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쓰였다. 특히 지위가 높은 관리를 부를 때 사용되었다.
41. 조완(粗完): 대략 완성됨.
42. 운제(雲梯): 성(城)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높은 사다리.
43. 정시(頂屍): 시체를 머리에 이거나 시체로 방패 삼아 공격함. 적의 공격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44. 철환(鐵丸): 쇠로 만든 탄환. 조총(鳥銃) 등의 화기(火器)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45. 판옥(板屋): 판자로 지은 집이나 구조물.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임시로 세운 방어 시설로 보인다.
46. 환하귀(丸下鬼): 탄환 아래의 귀신. 즉, 총탄에 맞아 죽은 귀신. 적의 화력에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47. 백천(白川): 황해도 백천군. 연안 남쪽에 위치한다.
48.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행차하여 머무는 곳. 당시 의주(義州)에 있던 선조의 임시 행궁을 가리킨다.
49. 호(湖), 영(嶺): 호서(湖西, 충청도)와 영남(嶺南, 경상도). 연안성 확보로 남쪽 지방에서 의주 행재소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음을 의미한다.
50. 보장(保障):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함. 연안성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51.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상계(上階) 문관의 품계명.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상계) 바로 아래이다. 이전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상계) 또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하계)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52. 세자(世子): 당시 세자는 광해군(光海君)이었다.
53. 초토사(招討使): 난리가 났을 때 군대를 모으고 적을 토벌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하던 관직.
54. 순찰사(巡察使):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전란 중에는 군사적 권한이 강화되었다.
55.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사초(史草) 형식의 기록. 호는 기재(寄齋). 임진왜란을 비롯한 당대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원문:
守城之功, 世人獨稱李廷馣, 而不及晉州金時敏, 此亦倒置。 廷馣之功, 固可嘉奬, 至與時敏竝論, 則亦不無差等。 蓋廷馣之所敵者長政, 而兵不滿萬, 廷馣所領又過數千, 義兵諸將來會者亦多可與頡頏⁵⁶。 當此之時, 本道諸將皆不能立功, 唯廷馣獨能如此。 陣中且多士子, 易以鋪張, 行在不遠, 聲問易達。 廷馣平生聲望亦足以服人心, 故其功大著。【《白沙雜記》。】

번역문:
성(城)을 지킨 공(功)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유독 이정암(李廷馣)만을 칭찬하고 진주(晉州)의 김시민(金時敏)⁵⁷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倒置). 이정암의 공은 진실로 가상하고 장려할 만하지만, 김시민과 나란히 논하는 데 이르러서는 또한 차등(差等)이 없지 않다. 대개 이정암이 대적한 자는 나가마사(長政)⁵⁸였는데 병력이 만 명에 미치지 못했고, 이정암이 거느린 병력 또한 수천 명이 넘었으며, 의병(義兵) 여러 장수들 중 와서 합류한 자도 많아 더불어 대항할 만하였다(頡頏)⁵⁹. 이러한 때를 당하여 본도(本道)⁶⁰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오직 이정암만이 유독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다. 진중(陣中)에 또한 사족(士子)⁶¹들이 많아 공적을 과장하기(鋪張) 쉬웠고, 행재소(行在所)가 멀지 않아 명성과 소문(聲問)이 도달하기 쉬웠다. 이정암의 평소 성망(聲望) 또한 족히 인심(人心)을 복종시킬 만하였으므로, 그 공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백사잡기(白沙雜記)》⁶²에서 인용】

주석:
56. [주-D004] 頏 : 저본(底本)에는 “완(頑)”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에 근거하여 ‘항(頏)’으로 수정하였다. '힐항(頡頏)'은 서로 맞서 겨룸, 또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움을 뜻하는 고사성어이다. '완(頑)'은 완고하다는 뜻이므로 문맥에 맞지 않다.
57.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왜군 대군을 격퇴하였으나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순절하였다. 이정암과 함께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수성장(守城將)으로 꼽힌다.
58. 장정(長政): 일본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3군의 지휘관이었다. 연안성을 공격한 것은 나가마사의 부대였다.
59. 힐항(頡頏): 새가 목을 빼고 위아래로 다투는 모습에서 유래하여, 서로 대등하게 맞서 겨루거나 우열을 가리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석 [주-D004] 참조.
60. 본도(本道): 해당 도. 여기서는 황해도(黃海道)를 가리킨다.
61. 사자(士子): 글 읽는 선비. 또는 사족(士族)의 자제. 이들이 이정암의 공적을 기록하고 알리는 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62. 《백사잡기(白沙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지은 잡록(雜錄). 호는 백사(白沙). 임진왜란을 비롯한 당대의 정치, 사회, 인물 등에 대한 기록과 견문을 담고 있다. 이항복은 이정암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김시민의 공과 비교하며 당시 상황과 여론 형성 과정에 대한 분석을 덧붙이고 있다.


원문:
壬辰, 賊兵三千猝至延安, 前守李公廷馣, 適在城中, 以孤城弱卒, 血戰却賊, 尤爲奇績。 且其報捷之啓, 無一夸張語, 只曰: “賊以某日至城下, 某日解去, 官軍無死亡者。” 先輩長老論李公此事曰: “守城却賊, 猶可爲也, 有功不伐, 人所難及。” 髣髴曹國華奉使南中, 幹當公事回版語矣。【《公私見聞》。】

번역문:
임진년(壬辰年, 1592)에 적병(賊兵) 3천 명이 갑자기 연안(延安)에 이르렀는데, 전 수령(前守) 이공(李公) 정암(廷馣)이 마침 성안에 있다가, 외로운 성(孤城)과 약한 군사(弱卒)로 혈전(血戰)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니, 더욱 기이한 공적(奇績)이 되었다. 또한 그 승첩(勝捷)을 보고하는 계문(啓聞)⁶³에는 과장하는 말이 하나도 없고, 단지 “적이 아무 날 성 아래에 이르렀다가 아무 날 포위를 풀고 물러갔으며, 관군(官軍) 중에는 사망자가 없습니다.”라고만 하였다. 선배 장로(長老)들이 이공의 이 일을 논하며 말하기를 “성을 지키고 적을 물리치는 것은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功)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이다.” 하였으니, 조국화(曹國華)⁶⁴가 남중(南中)⁶⁵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무(公務)를 처리하고 돌아와 보고한 말과 비슷하다.【《공사견문(公私見聞)》⁶⁶에서 인용】

주석:
63. 계(啓): 계문(啓聞).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주로 보고하는 내용을 담는다.
64. 조국화(曹國華): 명나라 말기의 인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행적이나 관련 고사는 확인하기 어렵다. 공을 세우고도 겸손하게 보고했던 인물의 사례로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65. 남중(南中): 중국 남방의 중간 지역.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66. 《공사견문(公私見聞)》: 저자 미상의 기록으로 보이며, 공적(公的)인 일과 사적(私的)인 일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이다.


원문:
公之在兵, 車駕西狩龍灣, 隆景持重兵據松京, 列營黃、鳳, 連綴江陰, 危動浿江, 直撓關西。 長政猖狂⁶⁷海濱, 放兵四劫, 南路阻絶。 公一戰而翦其觜距, 賊喘汗自戢, 芻牧不敢近公城下, 海西十三州皆復爲我有。 二南勤王之士, 由牙山、江華渡龍岡, 達行在, 奔問有路, 漕輓無礙, 公之力也。【李白沙恒福撰延安碑。】

번역문:
공(公)이 군중에 있을 때, 어가(車駕)⁶⁸는 서쪽 용만(龍灣)⁶⁹으로 수자리(狩)⁷⁰하였고, 융경(隆景)⁷¹은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송경(松京)⁷²을 점거하여 황주(黃州)와 봉산(鳳山)⁷³에 군영(軍營)을 벌여놓고 강음(江陰)⁷⁴까지 이어 붙어 패강(浿江)⁷⁵을 위태롭게 하고 바로 관서(關西)⁷⁶를 어지럽혔다. 나가마사(長政)⁷⁷는 해변(海濱)에서 미쳐 날뛰며(猖狂) 군사를 풀어 사방을 노략질하여 남쪽 길이 막혀 끊어졌다. 공이 한 번 싸워 그 부리와 발톱(觜距)⁷⁸을 자르니, 적이 숨을 헐떡이며 스스로 단속하여(自戢), 풀 베고 가축 치는 자(芻牧)⁷⁹들이 감히 공의 성 아래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해서(海西) 13주(州)⁸⁰가 모두 다시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이남(二南)⁸¹의 근왕(勤王)⁸² 선비들이 아산(牙山)과 강화(江華)를 거쳐 용강(龍岡)⁸³을 건너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달려가 문안(問安)할 길이 있게 되었고 조운(漕運)⁸⁴이 막힘이 없었으니, 공의 힘이었다.【이백사(李白沙) 항복(恒福)이 지은 연안비(延安碑)에서 인용】

주석:
67. [주-D005] 狂 : 저본(底本)에는 “광(𦍕)”으로 되어 있다. 《사류재집(四留齋集)・연성대첩비명(延城大捷碑銘)》에 근거하여 ‘광(狂)’으로 수정하였다. '창광(猖狂)'은 미쳐 날뛰는 모양을 의미한다.
68. 거가(車駕): 임금이 타는 수레. 여기서는 선조 임금을 가리킨다.
69. 용만(龍灣): 의주(義州)의 옛 이름. 선조가 피란하여 머물던 곳이다.
70. 수(狩): 임금의 사냥을 뜻하나, 천자가 도성을 떠나 밖으로 나가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선조의 피란을 의미한다.
71. 융경(隆景):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명나라식 이름인 심유경(沈惟敬)을 잘못 표기한 것일 수도 있으나, 문맥상 평양성에 주둔했던 고니시 유키나가 또는 다른 일본 장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니시의 군대는 개성을 점령하고 황해도,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72. 송경(松京): 개성(開城).
73. 황(黃), 봉(鳳):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황해도 북부의 주요 지역이다.
74. 강음(江陰): 황해도 강음현. 개성 서쪽에 위치한다.
75. 패강(浿江): 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 평양 일대를 가리킨다.
76. 관서(關西): 평안도.
77. 장정(長政):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연안성을 공격했던 장수이다.
78. 취거(觜距): (새의) 부리와 발톱. 적의 날카로운 기세나 주력 부대를 비유한다.
79. 추목(芻牧): 풀을 베고 가축을 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적군이 약탈이나 보급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80. 해서십삼주(海西十三州): 황해도(海西)에 속한 13개 고을. 연안성 승리로 황해도 일대가 안정되었음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일 수 있다.
81. 이남(二南): 호남(湖南, 전라도)과 영남(嶺南, 경상도).
82. 근왕(勤王): 왕을 위해 힘써 일함. 임금을 구원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83. 용강(龍岡): 평안남도 용강군.
84. 조운(漕運): 세곡(稅穀)이나 군량(軍糧) 등을 배로 실어 나르는 것. 남쪽 지방에서 의주 행재소까지 물자 수송로가 확보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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