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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 신도비명 (머리말과 함께 씀. ○ 세종 6년 갑진년 5월)

集賢堂 2024. 12. 1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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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덕 있는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과 신령한 손자를 내어 밝은 운수를 열고 영원한 큰 복을 누리게 한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의 흥성함은 우리 태종을 아들로, 우리 전하(세종)를 손자로 두었기 때문이다. 아, 얼마나 성대한가! 어찌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하늘의 뜻이다. 그가 은나라의 현명하고 성스러운 임금들의 계속된 출현, 주나라의 태왕, 왕계, 문왕, 무왕의 서로 이어진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이 삼가 왕실의 계보를 살펴보니 이씨는 전주(全州)의 명문 성씨이다. 사공(司空) 휘(諱) 한(翰)은 신라에서 벼슬하였고, 왕족의 여인과 혼인하여 6세에 휘(諱) 경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서 벼슬하였고, 13세에 황현조(皇玄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호(千夫)가 되었고, 4세 동안 작위를 세습하여 모두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었다. 원나라의 정치가 이미 쇠약해지자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고려 공민왕에게 돌아와 벼슬하였으니, 공을 쌓고 인을 베푼 지 오래되었다.

우리 신의왕태후(신의왕후)는 지정(至正) 정미년 5월 신묘일에 함흥부 후주 사저에서 태종을 낳았으니, 우리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신이한 기운이 있었고, 자라면서 더욱 뛰어나게 영특하였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당시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흩어져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웠으므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들과 달리 그를 아꼈다. 일찍이 서장관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함께 명나라 수도에 가서 조현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사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 9월, 신의왕태후가 돌아가시자 제릉(齊陵)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치려 하였다. 임신년 봄, 태조가 서쪽으로 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와 약을 올리며 모셨다. 공양왕의 신하들이 틈을 타서 모함을 꾀하니 형세가 매우 급박하였는데, 태종이 기회를 보아 변란에 대처하여 우두머리를 토벌하니 여러 모의가 무너졌다. 가을 7월, 여러 장수 및 재상들과 함께 대의를 내세워 태조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니,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졌다. 갑술년 여름, 명나라 고황제(주원장)가 친아들을 보내 입조하라는 명을 내리자, 태조는 우리 태종이 경서에 통달하고 예의에 밝아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 곧 명을 받들어 보냈다. 이미 (명나라에) 이르러 상황을 상세히 아뢰니 황제가 후하게 대우하여 돌려보냈다.

추가 설명:

  •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함.
  • 강헌대왕(康獻大王): 태조 이성계의 시호
  • 태종: 이방원
  • 전하(殿下): 임금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세종을 가리킴)
  • 신의왕태후(神懿王后): 태조 이성계의 비, 태종의 어머니
  • 공양왕(恭讓王): 고려의 마지막 왕

이 비문은 태종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과 함께 이씨 왕조의 기원과 태종의 출생, 성장 과정, 그리고 조선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종의 뛰어난 능력과 결단력을 강조하며, 그가 하늘의 뜻을 받아 조선 건국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 비문은 세종 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세종의 입장에서 태종을 높이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무인년 가을 8월, 태조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권신들이 당파를 이루어 어린 군주를 끼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자들이 있었으니, 화가 일어날 지경에 이르렀다. 태종이 밝은 지략으로 그들을 제거하였다. 당시 종친과 장상들이 모두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으나, 태종은 굳이 사양하고 공정왕(정종)을 높여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9월 정축일, 태조는 (어떤 책에는 “以”자가 없다.) 병이 낫지 않아 공정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 역신 박포가 동기를 해치려 모의하고 은밀히 방간 부자를 꾀어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켰다.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평정하고 박포를 처형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고 방간을 안치하여 인척 관계를 끊지 않았다. 공정왕은 후사가 없었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은 모두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고 여겨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겨울 11월, 역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 이를 알렸다. 명년 신사년 6월,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사승 장근 등을 보내 고명과 인장을 가지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으로 봉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행인 반문규를 보내 면복을 하사하였는데, 친왕의 예에 따랐다. 임오년, 지금의 황제(영락제)가 즉위하자 좌정승 신하 하륜을 보내 즉위를 하례하게 하니, 황제가 충성스러움을 가상히 여겼다. 명년 계미년 4월, 고명과 인장을 하사하고 도지휘사 고득 등을 보내 왔으며, 여전히 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는 한림대조 왕연령을 보내 곤면 구장복, 비단과 명주, 서적, 태조의 비단과 명주, 원경왕태후의 관복과 비단과 명주를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이후로 황제의 하사품이 거듭 이르러 빈 해가 없었다.

을유년, 한양은 태조가 도읍한 곳이므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 황제가 조선의 정사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지극히 정성으로 대국을 섬긴다.”라고 하였다. 이후 매번 사신이 이를 때마다 항상 지성이라고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 태조가 세상을 떠나니 슬픔이 극심하여 여막에서 지내며 상례를 치렀다. 사신을 보내 부고를 알리니, 황제가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멈추고 예부낭중 임관 등을 보내 제사와 태뢰를 하사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내렸으며, 또 태종에게 후한 부의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임진년 겨울, 왕씨의 후손으로 민간에 숨어 있던 자가 상언하니, 담당 관청에서 그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의 흥망은 스스로 천명이 있는 것이니, 왕씨의 후손을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뜻이 아니다.”라고 하고, 이에 교지를 내려 말하기를 “왕씨의 후손으로 살아 있는 자는 모두 각자 생업을 편안히 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갑오년 6월, 감로(甘露)가 함흥부 월광구미리와 정평 백운산에 내렸다. 명년 을미년 4월,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에 내렸으니, 우리나라 역사상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정부에서 모두 표문을 올려 하례하였으나 (태종은) 받지 않았다.

주요 내용 정리:

  • 태종의 즉위 과정과 정통성 확보 과정
  •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및 사대 정책
  • 태조의 죽음과 그에 대한 명나라의 예우
  • 태종의 어진 정치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 감로라는 상서로운 현상

이 부분은 태종의 통치 초기를 다루며, 특히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또한 태종의 인자함과 백성을 위한 마음, 그리고 상서로운 징조까지 기록함으로써 그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술년 6월, 세자 제(양녕대군)가 덕을 잃었으므로 폐하고 양녕대군으로 봉하였으며, 우리 전하(세종)가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며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기대를 걸어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명나라에) 알리니, 황제가 윤허하였다. 이 해 8월, (태종이) 우리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 이를 알렸다. 11월, 우리 전하는 책보(冊寶)를 받들고 (태종에게)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명년 기해년 정월, 황제가 홍려시승 유천 등을 보내 고명을 가지고 와서 우리 전하를 왕으로 봉하였다. 5월, 대마도 왜적이 변방을 침범하여 군사들을 죽이고 약탈하자, 영의정 유정현과 장천군(혹은 ‘찬성’이라고도 함) 이종무 등에게 명하여 전선으로 가서 토벌하게 하니, 섬의 왜적들이 이전처럼 항복하였다.

8월, 황제가 사신을 보내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칙서에 대략 이르기를 “왕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돈후하여 조정을 공경히 섬기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고 덕 있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어 종묘사직을 맡기니, 온 나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한다.”라고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칙서에 대략 이르기를 “너의 아비(태종)는 돈후하고 노성하여 하늘의 도를 공경히 받드니, 충성스럽고 순순한 정성이 더욱 오래되어도 변치 않는다.”라고 하였다. 9월,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자 참최(斬衰)의 상복을 입고 한 달 만에 상복을 벗는 제도를 따랐으며, 사신을 보내 부고를 알렸다. 명년 4월, 황제가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시호를 공정(恭靖)이라 내렸다. 이 해 봄,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상왕의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7월, 원경왕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우리 전하의 슬픔이 지나치게 심하다고 하여 한 달 만에 상복을 벗는 제도를 따르도록 명하였으나, 전하가 눈물을 흘리며 굳이 사양하니, 이에 장례 후에 상복을 벗고 흰 옷으로 상제를 마치도록 명하였다. 9월 임오일, 태후를 광주 치소의 대모산에 장사지냈으니, 능을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신축년 가을 9월, 우리 전하가 책보를 받들고 태상왕의 칭호를 올렸다. 10월, 태종에게 아뢰어 원자(문종의 휘)를 세자로 책봉하도록 명하였다.

태종은 뛰어난 자질로 성인의 학문을 이어받고,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는 신명에 통하였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사직에 감동을 주었다. 큰 나라를 섬김에는 천자가 그 지성스러움을 칭찬하였고, 이웃 나라와 교류함에는 왜국이 그 도의에 복종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어여삐 여겼으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였다. 선왕의 예법을 숭상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간사하고 사악한 사람을 내쫓았으며, 이단을 배척하고 음란한 제사를 금지하였다. 옛 제도와 현재의 제도를 참작하여 법도를 정하고, 문치(文治)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히 하였다. 묵은 폐단을 모두 개혁하니 모든 일이 잘 이루어졌고, 온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하며 물자가 풍족하였다. 제왕의 도가, 아, 얼마나 성대한가! 마땅히 황제의 두터운 은총을 받고 또 감로라는 상서로운 징조를 다시 얻을 만하다.

핵심 내용:

  • 세종의 즉위와 명나라의 책봉
  • 대마도 왜구의 침입과 토벌
  • 명나라 황제의 태종과 세종에 대한 평가
  • 태종의 효심과 검소한 생활
  • 태종의 업적과 이상적인 군주로서의 모습
  • 감로라는 상서로운 징조

이 부분은 세종의 즉위와 태종의 업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종의 뛰어난 통치 능력과 덕망을 강조하며, 그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통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면서 사대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임인년 4월, 처음으로 병환을 앓기 시작하여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전하(세종)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사흘 동안 식사를 거르니, 여러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며 식사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3년 상을 지내기로 정하고, 한 달 만에 상복을 벗는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의 나이는 56세, 왕위에 있은 지 19년, 물러나 편안히 지낸 지 5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크고 작은 신하와 아랫사람에 이르기까지 소리 내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슬퍼하며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아, 얼마나 통탄스러운가! 이 해 9월 초이틀 병진일에 존호를 올려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하였고, 묘호는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어떤 책에는 “초”부터 “종”까지 스물세 글자가 없다.) 초엿새 경신일, 원경왕태후의 능에 합장하였으니, 이는 유언이었다. 부고가 전해지자 황제는 슬퍼하며 조회를 멈추고 특별히 예부낭중 양선 등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제문에는 대략 이르기를 “오직 왕은 돈후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명하며, 조정을 공경히 섬기니, 충성스러운 마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았다. 부고 소식이 멀리까지 들리니, 참으로 깊이 슬프고 애통하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또 고명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 하였고, 또 전하에게 후한 부의를 내렸다. 대개 우리 태종의 공덕의 성대함과 우리 전하의 효성과 정성의 지극함이 전후로 이어져 하늘의 마음을 능히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과 끝의 시기에 은총과 특별한 예우가 이와 같았으니, 그 극진함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중궁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이고, 여흥(驪興)의 명문가이다. 고려 문하시랑 평장사 문경공(文景公) 휘(諱) 영모(令謨)로부터 6세에 황고조(皇高祖) 휘(諱)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의 재상이 되었고, 벼슬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은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諱) 유(頔)를 낳았고, 문순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諱) 변(抃)을 낳았고, 대광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諱) 제(霽)를 낳았다. 어머니(어떤 책에는 “皇妣”라고 되어 있다.) 송씨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으니,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諱) 선(璿)의 딸이다. 선행을 쌓아 복을 후세에까지 흘려보내니, 이로 인해 아름다운 덕을 낳았고, 총명함과 지혜가 남달랐다. 갓을 쓰게 될 나이가 되어 배필을 고르다가 우리 태종에게 시집왔다. 태종은 젊어서부터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었고, 경서와 역사를 탐구하며 집안의 재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태후는 집안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고 음식을 주관하는 데 신중하여 그 노력을 격려하였고, 여러 아들을 가르쳐 의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며, 첩들을 예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다하였다. 홍무 임신년,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다.

무인년 태종이 나라의 기틀을 정할 때,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로웠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보좌하여 큰일을 이루었다. 경진년 봄, 정빈(貞嬪)으로 봉해졌고, 그해 겨울, 태종이 즉위하자 정비(靜妃)로 봉해졌다. 영락 계미년, 황제가 관복을 하사하였고, 이때부터 정유년까지 여러 차례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으니 모두 다섯 번이다. (옛 책에는 “여섯”이라고 되어 있다.) 무술년 겨울, 우리 전하가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라는 존호를 올렸고, 경자년 9월, (어떤 책에는 “추”라고 되어 있다.) 시호를 올려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 하였으니, 나이는 56세였다.

주요 내용 정리:

  • 태종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명나라의 애도
  • 태종의 시호와 묘호
  • 원경왕후의 가계와 내조
  • 태종의 즉위 과정에서의 원경왕후의 역할
  • 원경왕후의 생애와 시호

이 부분은 태종의 죽음과 그에 따른 예우, 그리고 원경왕후의 생애와 업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태종의 죽음에 대한 명나라의 애도와 원경왕후의 내조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태후(원경왕후 민씨)는 깊고 조용한 정숙한 덕을 품고 태종과 배필이 되어 오로지 안의 정치를 맡으니, 20년 동안 집안의 위엄이 엄숙하였다. 또 성스러운 아들(세종)을 낳아 종묘사직의 주인이 되게 하였으니,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게 하였다. 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빈(嬪)과 첩(妾), 시녀들이 모두 마음을 다해 슬퍼하였으니, 부인으로서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았는데, 우리 전하(세종)는 셋째이다. 맏이는 제(양녕대군)이고, 다음은 부(효녕대군)이며, 다음은 (이름이 빠짐, 성녕대군)으로 먼저 죽었다. 딸 중 맏이는 정순공주로 청평부원군 이백강에게 시집갔으니,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로 평양부원군 조대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경안공주로 길창군 권거이에게 시집갔으나 역시 먼저 죽었다. 다음은 정선공주로 의산군 남휘에게 시집갔다. 의빈 권씨는 딸 하나 정혜옹주를 낳았는데, 운성군 박종우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 노씨는 딸 하나를 낳았으나 어리다. 신녕궁주 신씨는 세 아들과 일곱 딸을 낳았는데, 아들 중 맏이는 인(恭寧君)으로 봉해졌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 중 맏이는 정신옹주로 영평군 윤계동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정옹주로 한원군 조선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숙정옹주로 일성군 정효전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궁인 안씨는 아들 하나와 세 딸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김씨는 아들 하나를 낳아 경녕군으로 봉해졌다. 고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최씨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이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김씨는 딸 하나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 심씨는 문하시중 휘 덕부의 넷째 아들 온의 딸이다.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는데, 맏이는 세자(문종)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양녕은 김한로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효녕은 전 판중군도총제부사 정역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을 낳았으니 (어떤 책에는 “딸 하나” 두 글자가 있다.), 모두 어리다. 성녕은 전 전라도도관찰사 성억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는 딸 하나를 낳아 용양시위사 호군 이계린에게 시집갔으니, 역시 같은 이씨가 아니다. 경정공주는 네 딸을 낳았는데, 맏이는 돈녕부승 안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 김중엄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담(어떤 책에는 “담”자가 없다.)으로 한성소윤 정연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경녕은 호조참의 김관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공녕은 병조참판 최사강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핵심 내용:

  • 원경왕후의 덕행과 자녀
  • 태종의 후궁들과 그 자녀
  • 세종의 비(공비 심씨)와 자녀
  • 왕자들의 혼인 관계 및 자녀

이 부분은 태종의 가족 관계, 특히 원경왕후와 후궁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왕실의 혈통 관계를 명확히 하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공주들의 혼인 상대를 기록함으로써 외척 세력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왕자들의 혼인과 자녀 관계를 통해 후대의 왕실 계보를 엿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같은 이씨 성을 피하여 혼인한 사실을 명시하는 것은 근친혼을 피하려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이 가만히 우리 태종의 성대한 덕과 높은 공적을 보니, 진실로 이미 여러 왕들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리고 배필의 현명함과 내조의 공 또한 촉나라, 도산씨, 신씨, 지씨와 더불어 부합하고 아름다움을 겨룰 만합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에 글을 새겨 영원한 세상에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전하(세종)께서 신 계량에게 명하시니, 신 계량이 명을 받들어 삼가 두려워하며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손을 모아 머리를 조아려 명문을 바칩니다. 명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해동을 돌보시어 우리 태종을 내리셨네. 굳세고 굳센 우리 태종, 성대한 덕이 몸에 있네. 성스러운 아버지를 추대하여 큰 공을 이루셨네. 이에 조정에 나아가시니, 말씀을 차분히 아뢰셨네. 뛰어난 은혜를 입어 우리 백성을 보호하셨네. 밝은 지략으로 난을 평정하시니, 적장자를 높이셨네. 비록 형제간의 다툼을 만났으나, 우애는 오히려 돈독하였네.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시니, 예로부터 드물게 들었네. 덕의 두터움이여, 공의 큼이여. 하늘의 감찰이 분명히 밝으니, 이에 큰 복을 내리셨네. 빛나는 금보(金寶)여, 전후를 비추네. 황제의 조서가 거듭 이르니, 우리(혹은 ‘용’으로 되어 있기도 함)는 이에 은총을 받았네. 조상의 가르침을 오로지 받들어, 한북(漢北)으로 돌아오셨네. 제도를 만들고 예악을 정하시니, 빛나고도 성대하네. 상을 당하여 여막에 거하시니, 슬픔과 그리움이 끝이 없네. 장례와 제사를 지내시니, 옛 법식을 따르셨네. 조정을 공경히 섬기시니, 황제가 지성이라고 칭찬하였네. 엄숙히 제사를 받드시니, 신명도 감동하였네.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 도리가 있으니, 왜국이 와서 조정을 찾았네. 왕씨의 후손을 보존하고 돌보시니, 그들로 하여금 삶을 마치게 하셨네. 나라 안팎이 모두 편안하니, 거의 20년이로세. 촉촉한 감로가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네. 어두운 이를 폐하고 덕 있는 이를 등용하시니,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셨네. 영원한 수명을 누리시기를 바라셨는데, 어찌 갑자기 하늘로 돌아가셨는가? 하나의 병환도 낫지 못하였네. 슬프고 슬픈 성스러운 아들이여, 슬픔과 애통함이 비할 데 없네. 사흘 동안 식사를 거르시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셨네. 모든 상례를, 예법에 따라 행하였네. 황제가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네. 시호를 올려 칭송하고, 부의를 후하게 내렸네. 은휼의 예가 갖추어지니, 신하들이 기쁨에 넘쳤네. 태후를 생각하니, 진실로 엄숙하고 화목하셨네. 은밀히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을 도우시니, 진실로 현명함에 어울리셨네. 성스럽고 현명한 이를 낳으시니, 종묘사직의 주인이 되게 하셨네. 하늘의 굳건함과 밝음이여, 공정하신 덕이네. 땅의 두터움과 부드러움과 정숙함이여, 원경의 법이네. 금슬처럼 화목하시니, 같은 곳에 묻히셨네. 자손이 번성하니, 아, 그 훌륭함이여! 면면한 종묘사직이 만억 년 봄까지 이어지리. 신이 말씀을 받들어 바치니, 굳건한 돌에 새기나이다. 만세토록 닳지 않고, 우리 동쪽 땅을 비추리라.

대제학 신 변계량이 짓다.

핵심 내용:

  • 태종의 뛰어난 덕과 공적에 대한 찬양
  • 원경왕후의 현명함과 내조의 공에 대한 찬양
  • 태종의 효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 태종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통치였음을 강조
  • 명나라와의 관계 및 외교적 성과
  • 감로라는 상서로운 징조
  • 태종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
  • 후대에 길이 남을 명문임을 강조

이 부분은 비문에 담긴 찬사를 통해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총괄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특히 태종의 뛰어난 능력과 덕망, 그리고 원경왕후의 현명함을 함께 칭송하며, 이들의 결합이 조선 왕조의 번영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 백성을 위한 정치, 상서로운 징조 등을 언급하며 태종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통치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문이 후대에 길이 남을 명문임을 강조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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