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열성지장통기

*행장 (세종 4년 임인년(1422년), 형조판서 이발 등을 보내 행장을 가지고 경사(京師, 명나라 수도)에 가서 부고를 알리고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 지문(誌文, 묘지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集賢堂 2024. 12. 1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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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방원, 자는 유덕이다. 어머니는 왕비 한씨로, 오(吳, 명나라)의 원년 정미년(1367년) 5월 16일 신묘일에 왕을 낳았다.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있었다. 홍무 16년 계해년(1383년) 17세에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무진년(1388년) 10월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문하시중 이색을 따라 황제의 정통(正統) 즉위를 축하하러 갔다. 신미년(1391년) 9월에 어머니 왕비가 돌아가시자, 왕은 묘 옆에서 여막살이를 하며 3년 상(喪)을 마치려 하였다. 이때 고려의 운세는 이미 다하고 임금은 어리석고 정치는 혼란하여, 강헌(康獻, 이성계의 시호)의 공이 높고 덕이 성함을 꺼렸다. 마침 강헌이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해지자, 모함이 매우 급해졌다. 왕은 이를 알고 의를 내세워 결단을 내렸다. 홍무 25년 임신년(1392년) 7월, 여러 장수 및 재상들과 함께 강헌을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 강헌이 왕위에 오르자 왕을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하였다. 갑술년(1394년) 여름, 태조 고황제(명나라 태조)가 친아들을 보내 조현(朝見)하도록 명하자, 강헌은 왕이 경서에 통달하고 예의에 밝아 여러 아들보다 어질다고 여겨, 곧 왕을 보내 조현하게 하였고, 자세하고 명확하게 아뢰니, 황제가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무인년(1398년) 9월, 강헌의 병환이 더욱 위독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자, 장상과 대신들이 모두 왕에게 기대를 걸었다. 왕은 공정왕(恭靖王, 정종)이 적장자이므로 공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청하니, 강헌이 허락하였다. 공정은 스스로 후사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왕에게 덕과 공이 있다고 여겨, 경진년(1400년) 2월에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해 11월에 병으로 왕위를 왕에게 물려주었다. 지금의 황제(명나라 영락제)가 즉위 초에 왕은 사신을 보내 축하하였다. 영락 원년 계미년(1403년) 4월, 황제가 도지휘 고득과 좌통정 조거임을 보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하사하였고, 이어 한림대조 왕연령 등을 보내 곤면(袞冕)과 구장복(九章服)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15년 동안, 은총과 하사품이 잇따라 내려와 천하가 우러러 보았다. 무자년(1408년) 5월, 강헌이 세상을 떠나자, 왕은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어, 여막에서 5개월을 지내며 상복을 마쳤다. 무술년(1418년) 6월, 왕은 세자 제(禔, 양녕대군)가 덕을 잃었다 하여 폐하고, 지금의 왕(세종)을 후사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 해 8월, 또 노병(老病)을 이유로 지금의 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청하였다. 기해년(1419년) 7월, 대마도 왜적이 변방을 침범하자,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전선으로 그 섬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광동, 절강 등지의 남녀 포로로 섬에 잡혀 있던 140명을 구출하여 모두 경사로 보냈다. 8월, 황제가 태감 황엄을 보내 칙서와 함께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영락 20년 임인년(1422년) 4월 22일, 왕이 병을 느껴, 5월 10일 병인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6세이고, 재위 기간은 19년이며, 물러나서 편안히 지낸 기간은 4년이다. 왕은 근검하고 너그러우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아꼈다. 학문을 숭상하고 제사를 신중히 하였으며, 현명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선행을 즐겼다. 정사를 보는 틈틈이 경서와 역사를 보았는데, 매번 밤늦게까지 하였다. 의식과 법도는 옛것을 따라 모두 갖추었다. 세상을 떠난 날, 신하와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찬진(撰進, 글을 지어 올린) 신하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분석 및 설명:

시대적 배경: 이 글은 조선 건국 초기의 혼란과 태종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그리고 태종의 왕위 계승 과정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태종의 업적: 태종의 과단성 있는 성격과 정치적 능력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결단, 명나라와의 외교, 왜구 토벌 등이 주요 업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태종의 인품에 대해서도 근검, 인자, 학문 숭상 등의 면모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명나라와의 관계: 명나라 황제의 조칙, 고명, 인장 하사 등의 기록을 통해 조선이 명나라의 책봉 체제 아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료적 가치: 이 행장은 태종의 삶과 업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입니다. 특히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장 특징: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로 사실을 전달하고 있으며, 의례적인 표현과 찬양의 어구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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