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9년(1683년)에 태조 이성계에게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리는 옥책문(玉冊文), 즉 ‘추상시호옥책문(追上諡號玉冊文)’입니다. 이미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던 태조에게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는 시호를 추가하는 내용입니다.
**계해년 6월 임신 초하루부터 12일 계미까지, 효증손(孝曾孫) 임금 신 (숙종의 휘)은 삼가 다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큰 기틀을 처음 세우시어 하늘과 짝하는 엄숙한 제사를 받으시고, 높고 빛나는 칭호를 더하시어 빛나는 날의 아름다운 문장을 올립니다. 삼가 정성을 펼치오니, 어찌 다 칭송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께서는 자질이 뛰어나게 성스러우시고, 운명을 맡아 천 년을 다스리셨습니다. 고려 말의 혼란을 쓸어 없애시니, 견줄 이 없이 위대하시고, 하늘의 두터운 보살핌을 받으시어 그 성공을 이루셨습니다. 이미 세우신 것이 매우 크시고, 도우심에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이에 당시의 은혜로운 제도를 베푸시어, 후세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돌려드리는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다만 압록강에서 의로운 깃발을 드신 것은 진실로 《춘추경(春秋經)》의 성스러운 기록에 부합합니다. 동쪽 땅의 백성을 구하시어, 머리를 풀어헤친 오랑캐(여진)가 되지 않게 하셨고, 북쪽 하늘(명나라 조정)을 받드시고, 영원히 옥홀(玉笏)을 잡는 나라(제후국)가 되셨습니다. 명성이 천하에 드러나고, 예의와 가르침이 온 세상에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큰 업적이 높은 이름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시호를 추증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바르게 지키시어 왕위에 오르시고, 인륜(人倫)의 떳떳함을 돈독히 펼치셨으며, 일을 처리하시어 마땅함에 부합하게 하시어, 재앙과 어려움을 평정하셨습니다. 온 세상을 비추심은 진실로 해와 달의 빛과 같고, 만물을 기르심은 실로 하늘과 땅의 큼과 같습니다. 오직 이 네 글자의 높고 숭상함을 받드는 것이, 백세(百世)의 빛냄에 부합하기를 바랍니다. 후세에 더함이 있으니, 가까이는 명나라의 융성한 일을 참고하였고, 많음으로써 귀하게 여기시니, 위로는 역대 성왕(聖王)들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위로합니다. 이에 좋은 날을 가리어, 성대한 예를 다시 펼칩니다. 삼가 신 의정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을 보내 옥책을 받들어 높여 올리니 존시(尊諡)를 더하여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밝은 거울과 같은 마음으로 살펴주시고, 밝은 흠향(歆饗, 제물을 받음)을 내려주시옵소서. 아름다운 칭호를 받으시니, 거듭하고 또 거듭하여 어찌 싫어하시겠습니까? 묵묵히 큰 복을 도우시니, 새롭고 또 새로워 끝이 없으리이다. 아, 슬프도다! 삼가 아룁니다.
대제학 신 남구만(南九萬)이 짓다.**
이 옥책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시호 추상의 당위성 강조: 태조의 뛰어난 업적에 비해 시호가 충분히 높지 않다는 여론을 반영하여, 시호 추증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업미게어존명(大業未揭於尊名), 고군정함원기추시(故群情咸願其追諡)”라는 구절은 이러한 여론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 태조의 업적 재조명: 건국, 외적 방어, 백성 구휼, 문물 제도 정비 등 태조의 다양한 업적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압록강에서 의병을 일으킨 일을 《춘추경》에 비유한 것은 태조의 행위를 의로운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명나라의 사례 언급: 명나라의 사례를 언급하며 시호 추증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호 추증이 선례에 따른 정당한 행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 추가된 시호의 의미 부여: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는 시호에 대해 구체적인 의미 부여는 없지만, ‘정의(正義)’는 의로움을 바로 세웠다는 의미로, ‘광덕(光德)’은 덕을 빛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태조의 의로운 행동과 빛나는 덕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왕조의 번영 기원: 추가된 시호로 인해 태조의 은덕이 더욱 빛나고, 이를 통해 왕조가 더욱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이 옥책문은 태조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시호 추증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으며, 숙종 대의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왕권 강화를 위해 태조의 권위를 더욱 높이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명나라의 사례를 언급한 것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명나라의 문화와 제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번역 > 열성지장통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각비 부기 (영종 20년 갑자년 11월) (0) | 2024.12.18 |
---|---|
제릉 신도비명 병서 (태종 3년 계미년 10월) (0) | 2024.12.18 |
문소전 악장 (세종 15년 계축년) (0) | 2024.12.18 |
종묘 악장 (0) | 2024.12.18 |
부묘시 악장 (태종 10년 경인년 7월 26일 신묘일에 거행하다.) (0) | 2024.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