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한국문집총간

0284_농포집_農圃集_번역

諺解 2026. 6. 15. 23:39
반응형


농포집(農圃集)

  • 저자: 정문부(鄭文孚)
  • 생몰년: 1565-1624
  • 원문: 한국고전번역원_한국문집총간
  • 번역: gemma-4-12b-it-qat-hanmun-q4_0 로컬 기계번역 초안

이 글은 기계번역 초안입니다. 인용이나 학술 사용 전에는 원문 대조와 검수가 필요합니다.

1. 農圃集敍[閔遇洙]

문체: 序跋類 / 序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89B, ITKC_MO_0284A_A071_089C ...

원문

農圃鄭公遺集合附錄爲若干編。蓋自公之歿。薦紳學士。誦其忠勳。悲其冤枉。百數十年矣。間嘗聞于朝。洗滌丹書。贈以爵諡。崇報旣備。又其遺文。收拾於禍患之餘。詞藻之美。大爲藝苑所重。公之後孫相點。以序文之闕。嘗以書請於余曰。吾先祖舊有忠勞於國。抱冤以歿。子之王考文貞公。曾爲鏡城通判。虔祀其時義士之墓。子之從祖文忠公。按節北路。與評事畏齋李公。蒐輯吾先祖遺事。凡係表闡之方。靡有餘憾。子之先君子忠文公。旣製先祖諡狀。又爲彰烈祠志弁卷之文。發揮備至。今此序文。亦子之責也。遇洙於是不敢辭。蓋聞公以英偉卓犖之資。有敏妙華贍之文。當□穆廟盛際。擢高科。出爲咸鏡北道評事。未幾島夷來寇。蛇豕荐食。尋又闖入北路。叛民內應。□王子,大臣。避兵在北。俱彼執。帥臣,邊倅。亦皆陷賊。六鎭諸胡。又乘時動擾。摩天以北。蕩爲賊藪。公以眇然一介書生。糾率義旅。旣翦叛民。繼而屢破倭賊。逆拒胡寇。使關北一路。得免淪陷。歷數中興功績。殆無其比。而一時忌功害能之輩。掩蔽而不以實聞。□朝家甄賞不行。公又超然不有其功。浮沈州縣間。而後値昏朝。縱酒自廢。及癸亥□反正。以公有文武全才。且守節不汚。將加大用。顧公急於便養。低回外郡。旋罹旡妄之禍。竟死獄中。此其爲忠冤之實蹟也。嗚呼。莊周有言。子之於親命也。不可解於心。臣之於君義也。無所逃於天地之間。若以君臣之相屬。爲出於事勢之不得已。晦菴先生跋忠嘉集。特擧其言斥其爲爲我無君之邪說。今以是而觀於公之遺事。則出身未久。爲關塞小官。提一隊烏合之衆。戰百萬鴟張之賊。其勢亦極難耳。出萬死。得一生。卒能蕩攘羣兇。訊淸關北。而媒孼者從而議其後。賞不酬勞。一方之人。無不爲之扼腕憤歎。而迺公萬折必東之志。初不以爵賞爲意。唯欲自盡於臣職。苟非君臣之義纏綿固結於人心。必不能若是。況其聲氣所感。義士咸聚。實由於秉彝之所同得。則益信先生之論之爲不可易。夫以公之明於大義如此。而卒罣禍網者。豈非天下之至冤哉。蓋嘗論公之世。想公之爲人。則其起諸生。爲小官。徒以忠義相激厲。善以少擊衆。似唐之張睢陽。當危難之際。以書生掌戎權。收功於板蕩之餘。無愧宋之李伯紀。橫罹幽枉。獄成而無罪名。蔽之以莫須有。又髣髴於岳武穆。斯可以槪公之終始。而其爲忠爲冤。將與古人同歸。然則斯集之行。亦豈不與伯紀奏議,張岳詩篇。同其久遠也歟。

번역

농포 정공(農圃鄭公)의 유고집 부록으로 몇 편을 엮었다. 대개 공이 죽은 뒤로 선비들이 그 충훈을 칭송하고 그 원통함을 슬퍼한 지 백여 년이 되었다. 간혹 조정에서 듣건대, 죄명을 씻어주고 작위와 시호를 내렸다고 하니, 추숭(追崇)하는 보답이 이미 갖추어졌다. 또 그의 유문은 화란(禍亂)의 여파 속에서 수습되었는데, 문장이 아름다워 예원(藝苑)에서 매우 중시하고 있다. 공의 후손인 상점(相點)이 서문의 결함을 채우고자 일찍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청하기를, “우리 선조는 나라에 충성한 노고가 있었으나 원통함을 품은 채 죽었다. 자식의 왕고(王考) 문정공(文貞公)은 일찍이 경성 통판(鏡城通判)으로 그 당시 의사(義士)의 묘를 정성껏 제사 지냈고, 자식의 종조(從祖) 문충공(文忠公)은 북로(北路)에서 안절(按節)을 맡아 평사 위재 이공(李公)과 함께 우리 선조의 유사를 수집하였으니, 표창하고 드러내는 방도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자네의 선군(先君)인 충문공(忠文公)이 이미 선조(先祖)의 시장(諡狀)을 지었으며, 또 창렬사(彰烈祠)의 지변권(志弁卷)의 글을 짓는 데에 그 뜻을 충분히 드러냈네. 지금 이 서문도 자네의 책임이니, 수(洙)를 만나서 감히 사양할 수 없었네. 공은 영위하고 탁월한 자질로 민묘(敏妙)하고 화려한 문장을 지니고 있었네. 묘목(穆廟)이 성대하던 때에 고과(高科)에 뽑혀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가 되었네. 얼마 안 되어 섬 오랑캐들이 침략해 와서 뱀과 돼지 같은 자들이 잇달아 죽어 나갔고, 곧이어 또 북로(北路)에 난입하여 반란한 백성들이 내응하였네. 왕자(王子)와 대신들은 피병(避兵)하여 북쪽에 있었으나 모두 저들에게 잡혔고, 수신(帥臣)과 변방의 고을 수령들도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네. 육진(六鎭)의 여러 오랑캐들도 또 때를 틈타 동요하여 모천(摩天) 이북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네. 공은 보잘것없는 한 명의 서생으로 의로운 군사를 규합하여 먼저 반란한 백성들을 베어 버리고, 이어 누차 왜적을 격파하고 오랑캐를 막아내어 관북(關北) 일로(一路)를 평정하였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면하고 중흥의 공적을 거듭 세운 것은 거의 비할 데 없는데, 한때 공로를 시기하고 유능한 자를 해치려는 무리들이 이를 은폐하여 사실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조정에서 제대로 포상하지도 않았다. 공은 또 그 공로에 대해 초연히 개의치 않고 주현(州縣)을 떠돌다가 혼란스러운 정국을 만나 술에 빠져 스스로 폐인이 되었다. 계해년의 정변 때 공이 문무를 겸비한 재주가 있고 절개를 지켜 더럽히지 않았으므로 크게 등용하려 하였으나, 공은 급히 편안하게 봉양되기를 바라며 외곽 고을로 물러났다가 곧바로 무고한 죄를 입어 끝내 옥중에서 죽었으니, 이것이 충의를 지키다 원통하게 죽은 실제적인 행적이다. 아,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자식은 부모의 명에 따라야 하니 마음으로 거역할 수 없고, 신하는 임금의 의리에 따라야 하니 천지 사이에 피할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만약 군신이 서로 종속되는 것이 사세에 따른 부득이한 일이라고 여긴다면, 회암 선생(晦菴先生)이 《충가집(忠嘉集)》에 쓴 바와 같다. 특별히 그 말을 들어보고 그의 행위가 ‘나에게 임금이 없다’는 사설(邪說)이 되는지를 배척하였습니다. 이제 이것으로 공의 유사를 살펴보면, 벼슬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관새(關塞)의 작은 관리가 되어 한 무리의 오합지졸을 이끌고 백만이나 되는 적과 싸웠으니 그 형세가 또한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만 번 죽을 위기에서 한 번 목숨을 건져내어 마침내 뭇 흉적들을 소탕하고 관북(關北)을 평정하였는데, 그를 매장하는 사람들은 뒤에 의논하기를, “보상이 수고에 보답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분통해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은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가겠다는 뜻을 가지고 애초에 작위나 상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신하로서의 직분을 다하기를 원하였으니, 진실로 군신(君臣)의 의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끈끈하게 맺혀 있지 않았다면 결코 이와 같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기상이 감동시킨 의사들이 모두 모인 것은 실로 타고난 본성이 같은 데서 비롯된 것이니, 선생의 논의가 바꿀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게 됩니다. 대저 공이 대의(大義)에 밝은 것이 이와 같았는데도 끝내 화망(禍網)에 걸려 죽었으니, 어찌 천하의 지극한 원통함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공의 시대를 논하면서 공의 인품을 상상해 보면, 제생(諸生)들을 일으켜 세워 소관(小官)으로 삼아 충의로 서로 격려하고 잘 싸워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물리쳤으니, 당나라 장수 양양(睢陽)과 같았습니다. 위태로운 때에 서생이 군사 지휘권을 맡아 전란이 끝난 뒤 공을 세운 것은 송나라 이백기(李伯紀)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억울하게 죄를 입어 옥사(獄死)하였으나 죄명은 없었고, 모함으로 덮였으니 또 곽무목(郭武穆)과 흡사합니다. 이것으로 공의 시종을 대략 알 수 있으니, 그 충성심과 원통함이 장차 옛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집의 행차가 또한 어찌 이백기의 주의(奏議)나 장무목의 시편과 더불어 오래도록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원문

崇禎紀元後百二十三年庚午仲春。驪興閔遇洙。敍。

번역

숭정(崇禎) 연호 후 123년 경오년 중춘에 여흥 민우수(驪興閔遇洙)는 쓰다.

2. 題北靑畫屛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4B

원문

曝趐坐苔磯。刷毛依蘭渚。日暮蘆風涼。雙飛宿何處。〔原注:右雁〕

번역

뙤약볕에 뗏목을 타고 이끼 낀 바위에 앉아 솔개는 난초 자란 물가에 의지하네 해 저물어 갈대밭 바람 서늘한데 쌍으로 나는 기러기는 어디에서 잠을 자나 〔원주: 위는 기러기이다.〕

원문

鳧鷖浴深水。鳥雀棲高枝。托身雖異處。得地兩相宜。〔原注:右鳧鷖鳥雀〕

번역

물오리는 깊은 물에 목욕하고 새와 참새는 높은 가지에 깃드네 몸을 의탁한 곳은 비록 다르지만 얻은 땅은 둘 다 서로 마땅하구나 〔원주: 위는 물오리와 새, 참새이다.〕

원문

快鶻下雲霄。驚禽落秋水。急回紅錦翎。誤觸靑蓮子。〔原注:右快鶻擊鳧〕

번역

빠른 매가 구름 위에서 내려와 놀란 오리가 가을 물에 떨어지네 붉은 비단 깃을 급히 돌리다가 푸른 연꽃 같은 오리를 잘못 건드렸네 〔원주: 위의 시는 빠른 매가 오리를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원문

衆鳥集高岡。相將欺鳳凰。徘徊日欲暮。遠憶岐山陽。〔原注:右鳳凰鳥雀〕

번역

뭇 새들이 높은 언덕에 모여서 서로 봉황을 흉내 내네 배회하다 해가 저물려 하니 멀리 기산의 양지바른 곳이 생각나네 〔원주: 위는 봉황과 참새이다.〕

3. 次權應寅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漸耀朝陽紅。深添晩樹綠。園陵信有神。國祚齊辰極。〔原注:右園陵瑞靄〕

번역

아침 해는 점점 붉게 빛나고 저녁 나무는 더욱 푸르구나 원릉에 참으로 신령함이 있어 나라의 운수가 천년토록 영원하리라 - 〔원주: 위는 원릉의 상서로운 기운이다.-〕

원문

秋草沒幽宮。瀼瀼零曉露。偏霑孝子衣。感物增哀慕。〔原注:右塋域深露〕

번역

가을 풀이 무덤에 가득하고 시냇물은 새벽 이슬로 넘치네 효자의 옷을 흠뻑 적시니 사물에 감응하여 슬픔과 그리움 더하네 〔원주: 위는 무덤의 영역이다.〕

원문

江氣匝虛樓。山光初沐雨。擧杯邀素娥。已在東林樹。〔原注:右西樓賞月〕

번역

강기운이 빈 누대에 감돌고 산 빛은 막 비를 맞았네 술잔을 들어 소아를 맞이하니 이미 동쪽 숲 나무에 있구나 〔원주: 위는 서루에서 달을 감상한 것이다.〕

4. 蓑翁釣魚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地卽桐江是。人非嚴子誰。羊裘入物色。變着綠蓑衣。

번역

땅은 바로 동강이고 사람은 엄자가 아니면 누구인가 양털 갖옷 입고 풍광에 들어가서 푸른 도롱이로 갈아입었네

5. 往叔正家。坐朝偶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朝日出城東。照君窓牖紅。赤心正如此。報國有餘忠。

번역

아침 해가 성 동쪽에서 떠올라 그대의 창문을 붉게 비추네 정성스러운 마음이 이와 같으니 나라에 보답함에 충성이 넘치리

6. 初月〔原注:八歲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誰斲崑山玉。磨成織女梳。牽牛離別後。愁擲碧空虛。

번역

누가 곤륜산의 옥을 깎아 직녀의 빗으로 만들었나 견우와 직녀가 이별한 뒤에 시름겨워 푸른 하늘에 던져 버렸네

7. 瑤池宴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弱水西邊斷往還。瑤池自在碧桃閑。姬王却遡東流至。悔遣黃河出世間。

번역

약수 서쪽으로 왕래가 끊어졌으니 요지에는 푸른 복숭아만 한가로이 있네 희왕이 도리어 동쪽 물줄기 거슬러 올라와 황하를 세상 밖으로 내보낸 것을 후회하네

8. 假梧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庭有梧桐是假名。不堪留待鳳來鳴。如何客夜聞秋雨。等作蕭蕭腸斷聲。

번역

뜰에 오동나무 있나니 이는 가짜 이름이라 봉황이 와서 울기를 기다릴 수 없네 어찌하여 나그네 밤에 가을비 소리 들으니 쓸쓸히 애끊는 소리로 변하는가

9. 到穩城。追次李德哉〔原注:成吉〕韻。〔原注:以下四首。係北評事時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5A

원문

平臨北極作高城。釣欲連鼇劍斷鯨。容我飮酣靑海渴。爲君談笑白山傾。

번역

북극을 평평히 마주하여 높은 성이 되었으니 낚시질은 자라에 닿으려 하고 칼은 고래를 끊으리 나로 하여금 푸른 바다의 갈증을 술로 달래게 하니 그대와 담소하며 백산이 기울어지네

10. 戲德哉房兒〔原注:名瓊玉〕夜病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飛瓊弄玉是前身。來作巫山夢裏人。別有男兒腸斷處。柳腰纖細不勝春。

번역

옥을 날리고 구슬을 희롱하던 전생에 와서 무산의 꿈속 사람으로 되었네 남아의 애간장 끊어지는 곳이 따로 있으니 가느다란 버들 허리 봄을 견디지 못하네

원문

弱質輕盈不耐身。笑如花艶語知人。紅粧照耀鍾山雪。錯道窮荒已發春。

번역

연약한 자태 가볍고 고와서 몸을 견디지 못하고 웃음은 꽃처럼 아리따워 사람을 알아본다네 화려한 단장은 종산의 눈에 비치니 궁벽한 곳에 벌써 봄이 왔다고 잘못 말하네

11. 次德哉射堂挑戰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5B

원문

負強君似擁函關。取勝吾如據北山。直待晩來爭一戰。黃金爲注亦何慳。

번역

강한 자를 짊어진 그대는 함관을 안은 듯하고 승리를 취하는 나는 북산에 기대어 있는 듯하네 저물녘에 한 번 싸움을 다투기를 기다리니 황금을 내기함에 어찌 인색하겠는가

원문

一自哥舒失潼關。從敎虜馬立吳山。可憐西北重興地。天爲吾東□聖主慳。

번역

한번 고서가 통관을 잃은 뒤로 오산에 오랑캐 말 세워두게 되었네 가련하다, 서북의 중흥지(重興地)여 하늘이 우리 동방 성군에게 아끼셨구나

원문

身如子美臥江關。戀極金輿在蜀山。幸賴元戎輸寸效。爲君殞命我何慳。

번역

몸은 자미처럼 강관에 누웠으나 금여가 촉산에 있는 것이 몹시 그리워라 다행히 원융이 작은 정성이나마 바치니 임금을 위해 목숨을 버림을 어찌 아끼랴

12. 四月一日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5C

원문

病臥茅堂不出遊。閉門風雨滿山頭。有人來問春歸處。已放桃花逐水流。

번역

병으로 초가집에 누워 나가지 못하니 닫힌 문 밖에 비바람이 산머리에 가득하네 어떤 사람이 와서 봄이 간 곳을 묻기에 이미 복사꽃을 풀어 물 따라 흘려보냈다고 하네

13. 林德源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憶曾獵罷元山路。我飮斗巵君彘肩。今日忍看塵壁上。雕弓白羽又龍泉。

번역

생각건대 일찍이 원산 길에서 사냥을 마치고 나는 술잔을 마시고 그대는 돼지 어깨를 뜯었지 오늘 차마 보지 못하겠네, 먼지 쌓인 벽 위에 조각된 활과 흰 화살 그리고 용천검을

14. 登白塔寺樓〔原注:以下十六首。係燕行時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十二危欄倚半空。登臨南北更西東。天連客路三千里。雲隔鄕山一萬重。

번역

열두 층 높은 난간이 허공에 기대고 올라와 바라보니 남북 서동으로 펼쳐지네 하늘은 나그네 길과 삼천 리를 이어졌고 구름은 고향 산과 일만 겹을 가로막았네

15. 追記八渡河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5D

원문

山勢逶迤自北來。迢迢客路此中開。莫言八渡河流曲。不及離腸作九回。

번역

산세가 구불구불 북쪽에서 내려오고 아득한 나그네 길 이곳에서 열리네 팔도하의 물이 굽이진다고 말하지 마라 이별하는 애간장이 아홉 번이나 꺾이는 것만 못하니

16. 追記。次書狀在遼東寄義尹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積漲三河失淺灣。撑舟盡日卸征鞍。朝來寄與家書去。猶道吾行萬萬安。

번역

삼하의 물이 불어나 얕은 물굽이 사라져 배를 타고 온종일 가던 길을 멈추었네 아침에 집으로 편지를 부치며 나의 여정이 만만히 평안하다 하였네

원문

醉中容易解離船。跨馬登途更促鞭。醒後回頭人已遠。不知誰爲作嫣然。

번역

취중에 배를 떠나기 쉬워 말에 올라 길을 재촉했네 깨어 돌아보니 사람은 이미 멀리 가고 누가 저 웃는 얼굴인지 모르겠구나

17. 追記遼城有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一片孤城當落暉。只今殘堞見烏飛。若令仙鶴重來訪。不獨人非城亦非。〔原注:城堞崩頹故云〕

번역

한 조각 외로운 성이 석양을 마주하니 지금은 무너진 성가퀴에 까마귀만 날아든다 만약 선학이 다시 찾아온다면 사람도 아니고 성도 아닌 것이 아니리라 (원래의 주석: 성가퀴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원주: 城堞崩頹故云〕

18. 次書狀韻〔原注:時聞連山警報〕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夜聞楡葉墜蕭蕭。曉起新磨匣裏刀。慣識連山秋草路。虜弦初勁馬初驕。

번역

밤에 들려오는 느릅나무 잎 소리 쓸쓸하고 새벽에 일어나 칼집 속의 칼을 갈아보네 산이 이어져 가을 풀길을 익히 알고 오랑캐 활시위 처음 당기니 말이 처음 날뛰네

19. 八洲河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秋河淸淺正堪憐。更有銀鱗入網鮮。却憶漢濱釣魚侶。幾人乘月上江船。

번역

가을 강물 맑고 얕아 참으로 사랑스러운데 은빛 물고기 그물에 걸려 싱싱하구나 문득 한강 가에서 고기 잡던 이들 생각나니 몇이나 달빛 아래 배를 타고 강에 올랐던가

20. 次書狀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寒雨蕭蕭洒客衣。沙河城外見人稀。不堪回首鄕關隔。萬疊雲山連翠微。

번역

찬 비가 쓸쓸히 나그네 옷에 뿌리는데 사하성 밖에는 보이는 사람 드무네 고개 돌려 고향을 바라볼 수 없으니 만 겹의 구름 산이 푸른 봉우리로 이어졌네

21. 謁夷齊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傷心周是普天尊。擧目殷無尺地存。若使當年東渡海。箕封自有別乾坤。

번역

상심한 주나라가 온 천하를 존중하고 눈을 들어보니 은나라 땅은 한 치도 남지 않았네 만약 그 당시에 동쪽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기봉에 따로 별천지가 있었으리라

22. 玉田途中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遠樹微茫接海關。塞鴻聲在暮雲間。若爲借得南飛翼。千里鄕山一日還。

번역

먼 나무 희미하게 바다 관문과 닿았는데 변방 기러기 소리 저녁 구름 사이에 있네 어찌하면 남쪽으로 나는 날개를 빌려와서 천 리 고향 산천에 하루 만에 돌아갈까

23. 留薊觀虹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一邊殘照一邊雨。忽有長虹掛碧霄。玉皇知我乘槎苦。特許空中架彩橋。

번역

한쪽은 석양빛 한쪽은 빗줄기 갑자기 긴 무지개가 푸른 하늘에 걸렸네 옥황이 내가 뗏목 타고 고생하는 줄 알고 특별히 공중에 채색 다리를 놓아 주었네

24. 憶慈親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裁書爲報慈親道。王事休來兒始歸。莫畏還家落歲暮。行裝猶有密縫衣。

번역

편지를 써서 자모께 알리니 왕사(王事)가 끝나고 아이가 돌아간다네 집에 돌아올 때 늦은 겨울이 두렵지 않으랴 행장에는 여전히 두툼한 옷이 있느니라

25. 次書狀仲秋月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去歲玆辰在故鄕。月明尊酒畫欄傍。兄酬弟勸饒行樂。惆悵今宵是客堂。

번역

지난해 이 날은 고향에서 보냈는데 달 밝은 밤에 화려한 난간 곁에서 술을 마셨네 형과 아우가 서로 권하며 즐거움을 누렸는데 서글프게도 오늘밤은 객당에서 보내네

26. 昭君西子相對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畫得昭君對西子。誰將筆法奪天成。當年不有毛延壽。應使胡兵作越兵。

번역

소군이 서시를 대하는 그림을 그렸으니 누가 붓으로 천연의 필법을 빼앗았나 당시에 모연수가 없었다면 오랑캐 군사를 월나라 군사로 만들었으리라

27. 天壇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對越心常在帝傍。南郊齋沐更壇場。□聖君自與天齊壽。却笑祈靈漢武皇。

번역

대월을 대할 때면 항상 황제 곁에 계시니 남교에서 재목하고 다시 제단에 오르셨네 성군이 스스로 하늘과 수명을 같이하시니 영령을 빌던 한나라 무제는 도리어 우습구나

28. 九月十日。夜坐玉河館。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送盡夕陽如度年。更逢明月奈無眠。不知身在家鄕日。費幾光陰却自然。

번역

저녁 해를 보내니 한 해가 지나간 듯하고 다시 밝은 달을 만나니 잠들지 못하겠네 고향에 있는 날이 어느덧 얼마나 지났는지 세월을 허비한 것이 도리어 자연스럽구나

29. 倩人鑷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朝似靑絲暮白絲。浮生榮悴儘天爲。欲將僞少欺人眼。終奈眞衰我自知。

번역

아침엔 검은 머리 저녁엔 흰머리 덧없는 인생 영고성쇠 모두 하늘의 뜻이라네 젊음을 꾸며 남의 눈을 속이려 해도 늙음은 내 스스로가 잘 알고 있네

30. 風雪夜歸人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雪滿荒村過者稀。如何一犬吠雲扉。定知山後梅花發。溪友尋香冒夜歸。

번역

눈 가득한 황량한 마을 지나는 이 드문데 어찌하여 개 한 마리 구름 문에서 짖는가 산 너머에 매화 피었음을 분명 알겠으니 시냇가 친구 향기 찾아 밤을 무릅쓰고 돌아오네

31. 七夕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銀河橫絶半天流。牛女平分萬古愁。歲歲金風吹不盡。碧梧枝上又驚秋。

번역

은하수가 반공중에 가로질러 흐르니 견우와 직녀는 만고의 시름을 나누네 해마다 가을바람 불어 멈추지 않으니 푸른 오동나무 가지에 또 가을이 놀라네

32. 次三角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此地元來天一角。南樓又是城南角。我來日日登玆樓。望望那能見三角。

번역

이 땅은 본래 하늘의 한 모퉁이고 남루는 또 성 남쪽 모퉁이라네 내가 와서 날마다 이 누각에 올라 바라보고 바라봐도 어찌 삼각을 보랴

33. 狂風願桃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翁憐靑子狎卑枝。兒願狂風拳地吹。半熟正於髫齒好。待他黃落苦遲遲。

번역

늙은이는 푸른 잎이 낮은 가지에 붙은 게 가여운데 아이는 미친 바람이 땅을 치며 부는 걸 원하네 반쯤 익어 어린아이의 이처럼 좋으니 노랗게 떨어지길 기다리기가 참으로 더디구나

34. 次楓溪洞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步步尋幽自不休。夕陽山色惹淸愁。秋深何處無霜着。霜着楓溪分外秋。

번역

걸음마다 그윽한 곳 찾아 쉬지 않으니 석양의 산빛이 맑은 시름을 일으키네 가을 깊어 어디인들 서리 내리지 않았으랴 서리 내린 단풍 든 시내에 가을이 더욱 깊구나

원문

世事紛紛苦未休。重陽滯直更堪愁。令人却憶楓溪洞。赤葉黃花滿意秋。

번역

세상일은 어지러워 쉬지 않고 이어지니 중양절에 당직 서는 것이 더욱 시름겹구나 문득 풍계동이 생각나네 붉은 잎과 노란 꽃으로 가을이 한창인 곳을

35. 題畫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7D

원문

孤雁呼群月欲殘。荻花風細夜生寒。吾人久負江湖約。恫悵虛從畫裏看。

번역

외로운 기러기 우니 달은 저물려 하고 갈대꽃에 바람 부니 밤이 차가워지네 나는 오래도록 강호의 약속 저버리고 서글프게 그림 속만 쳐다보고 있구나

원문

山外風塵兩雄鬪。山中日月四翁閑。誰知秦漢興亡事。已向圍棋局上看。

번역

산 밖은 풍진 속에 두 영웅이 싸우고 산속은 일월 아래 네 노인이 한가롭네 누가 알았으랴 진한의 흥망성쇠가 이미 바둑판 위에서 보게 될 줄을

원문

偶來橋畔聽鳴湍。童子將琴合早還。自是峨洋心與會。不須移向曲中彈。

번역

우연히 다리 가에서 세찬 물소리를 듣노라니 동자가 거문고를 들고 일찍 돌아가네 본래 아양곡의 마음과 같으니 굳이 곡조에 옮겨 타지 않아도 되리라

원문

蘆中一雁不鳴飛。送盡秋風尙未歸。舊侶好爲行陣去。只今應占稻梁肥。

번역

갈대 속의 기러기 울지 않고 날아가니 가을바람 다 보내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옛 친구들 좋이 대열 지어 떠나가니 지금은 응당 벼와 보리 풍성한 곳 차지했으리

원문

池中鷺傍靑蓮葉。葉底魚驚白雪衣。在世孰非求一飽。漁翁肯與爾忘機。

번역

연못 속 백로가 푸른 연잎 곁에 있으니 잎 밑의 물고기는 흰 눈 같은 옷에 놀라네 세상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 이 누구랴만 어옹은 기심(機心)을 잊는 너에게 주려 하겠나

원문

一人吹笛一人聽。知有聲聲入耳淸。澗水松風添意趣。靑天又是月輪明。

번역

한 사람은 피리를 불고 한 사람은 듣는데 맑은 소리 귀에 들어옴을 알겠네 시냇물과 솔바람이 흥취를 더하고 푸른 하늘에는 또 달이 밝구나

원문

本欲窺魚下塘水。若爲回首立多時。秋來漸覺西風緊。怕觸衰荷損頂絲。

번역

본래는 연못 물에 고기나 엿보려 했더니 어찌하여 한참이나 서서 돌아보고 있는가 가을이 오니 서풍이 점점 매서워져 시든 연꽃에 부딪혀 머리털 상할까 두렵구나

36. 嬾婦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蛩寒虛促秋宵織。蠶老同爲春晝眠。不識郞君緣底事。逢人常道別妻賢。

번역

귀뚜라미는 추운 가을밤에 쉴 새 없이 울고 누에는 봄 낮에 함께 잠이 들었네 남편이 무슨 일로 그런지 모르겠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아내의 현숙함을 말하네

37. 次釜浦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淸風弄水月籠秋。漁父騷人醉一舟。濯足濯纓無不可。人生相見卽同遊。

번역

맑은 바람 물결 놀리고 달빛이 가을에 감싸니 어부와 시인이 한 배에 취했네 발 씻고 갓끈 씻는 데 안 될 것 없으니 사람들 서로 만나면 곧 함께 노는 것이라네

38. 次仁叟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無錢得酒常容乞。有客通名不用銜。瓦釜土床貧亦樂。漫然淸世一夫凡。

번역

돈 없어도 술 얻으려고 늘 빌고 손님 오면 통명으로 부르며 빳빳한 명함은 필요치 않네 질그릇 솥과 흙바닥 침상이라도 가난해도 즐거우니 세속을 초탈하여 한낱 평범한 사람일 뿐이네

원문

雲路冥鴻誰可弋。華山歸馬孰能銜。只緣居與人相別。毛羽初非獨脫凡。

번역

구름길에 나는 기러기 뉘라서 잡으랴 화산으로 돌아가는 말 누가 입에 물랴 단지 사람과 떨어져 살게 되었을 뿐 본래부터 범속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네

39. 靑鶴洞感舊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8B

원문

滿庭槐杏綠陰陰。翠壁丹崖洞府深。遙憶昔人觴詠事。落花啼鳥摠傷心。

번역

뜰 가득한 홰나무와 살구나무는 푸른 그늘 드리우고 푸른 절벽과 붉은 벼랑 사이의 동부는 깊어라 멀리 옛사람이 술 마시며 시 읊던 일 생각하니 지는 꽃과 우는 새가 모두 마음을 아프게 하네

40. 靑塚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思漢心惟春草知。嫁胡身奈老天爲。薄緣自絶明天子。拙筆何尤賤畫師。

번역

한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오직 봄풀을 알 뿐이요 오랑캐에게 시집간 몸은 어찌 하늘의 뜻을 거스리랴 박한 인연은 스스로 천자(天子)와 끊었거니 졸렬한 필치로 어찌 화사(畫師)를 탓하리오

원문

黃金解誤百年身。靑冢空留一片春。已是芳心爲漢草。未應香骨化胡塵。

번역

황금으로 백 년의 오해를 풀었으니 푸른 무덤에 한 조각 봄만 남았네 이미 꽃다운 마음은 한나라 풀이 되었으니 향기로운 뼈가 오랑캐 먼지로 변하지 않으리라

원문

女死能令草感衷。世間髥婦儻聞風。李陵不學葵傾日。枯骨堪羞白冢中。

번역

여인의 죽음이 풀을 감동시킬 수 있으니 세상의 늙은 아낙이 이 소식을 들었으리 이릉은 해를 향해 기울어진 해바라기를 배우지 못했으니 마른 뼈가 백총 속에 있는 것이 부끄럽구나

41. 次皇華集松都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聖帝東迎少昊春。百靈奔走逐淸塵。偏邦無路趨方岳。猶覩中朝第一人。

번역

성제께서 동쪽에서 소호를 맞이한 봄에 온갖 신령들이 분주히 맑은 먼지를 쫓았네 변방이라 방악을 향해 달려갈 길 없으나 오히려 중국의 제일인을 볼 수 있네

42. 詠史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8D

원문

楚地靑山有九疑。懷王何事信張儀。商於六百終難割。湘水空流不盡悲。

번역

초나라 땅 푸른 산에 구의산이 있는데 회왕은 무슨 일로 장의를 믿었는가 상어에서 육백 명을 끝내 떼어내지 못하고 상수만 부질없이 흘러 슬픔이 다하지 않네

원문

楚雖三戶亦秦亡。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孱孫何事又懷王。〔原注:右楚懷王〕

번역

초나라가 비록 세 집뿐이라도 진나라가 망했으니 남공의 말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네 한번 무관에 들어가니 백성들의 기대 끊겼는데 어찌하여 약한 후손이 또 왕을 그리워하는가 - 〔원주: 위는 초 회왕(楚懷王)이다.-〕

원문

奉詔班師人或疑。自知亡宋實天爲。假令不下金牌字。星落應回渭水旗。

번역

조서를 받들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니 어떤 이는 의심하네 망한 송나라를 스스로 알았으니 실로 하늘이 위함이라 가령 금패와 글자가 내려오지 않았더라도 별이 떨어져 위수의 깃발을 돌렸으리

원문

武穆精忠草木知。墓前松柏盡南枝。高宗陵上樵無樹。空有悲風自北吹。〔原注:右岳武穆〕

번역

무목의 정충을 초목도 알고 무덤 앞 소나무와 잣나무는 모두 남쪽 가지로 뻗었네 고종릉 위에는 나무를 베어내어 나무가 없고 부질없이 슬픈 바람만 북쪽에서 불어오네 〔원주: 위는 악무목(岳武穆)이다.〕

43. 接桃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東風媒汝一枝春。嫁與他根作態新。花縱不言猶有子。楚宮堪比息夫人。

번역

동풍이 너를 매개로 한 가지 봄을 전해 주어 다른 뿌리에 시집와서 새로운 자태를 이루었네 꽃은 비록 말은 못하나 그래도 자식이 있으니 초나라 궁궐의 섭익부인과 견줄 만하구나

44. 關西路中。逢象村贈別。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嶺北關西客路中。每回相見未從容。不須顏鬢驚衰變。惟有心肝箇箇同。

번역

영북과 관서로 가는 길에 매번 만날 때마다 여유가 없네 얼굴과 머리털이 쇠한 것에 놀라지 말게나 오직 마음만은 하나하나 같으니

45. 贈辨誣使月沙赴京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聖王衷悃□聖皇知。辨使何須再去爲。多事月沙賢相國。一生勤苦誦夫詩。

번역

성왕의 진심을 성황께서 아시니 사신을 보낼 필요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일이 많은 월사에 어진 재상으로 한평생 부지런히 시를 외우셨네

46. 金虜獵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金祖豪華彼一時。千秋圖上見雄姿。書生亦有呑胡志。和汝吳山立馬詩。

번역

김조의 화려함은 저 한때였지만 천추도에 웅장한 자태가 보이네 서생에게도 오랑캐를 삼킬 뜻이 있어 너의 오산에 말을 세운 시에 화답하노라

47. 西施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人言亡國在西施。惟有君王醉不知。臺上已非薪上日。伍胥何事強爭爲。

번역

사람들은 나라 망한 것이 서시 때문이라지만 오직 군왕이 취해 알지 못한 것뿐이네 대 위에는 이미 땔나무가 없는데 오서야 어찌하여 억지로 다투는가

48. 蜃樓呼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登仙無路此生悲。望斷蟾宮斫桂枝。海上蜃樓如可到。坐垂任子釣鼇絲。

번역

신선이 될 길 없어 이 생애가 슬프니 달궁에 올라 계수나무 가지 꺾기를 바라네 바다 위 신기루는 갈 수 있을 듯하니 앉아서 자취를 버리고 자라 낚시줄 드리우네

49. 次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少年欺我白頭翁。我昔韶顏似汝紅。作此凋枯容易事。送迎秋月與春風。

번역

젊은이가 백발의 나를 속였구나 나도 예전에 너처럼 붉은 얼굴이었지 이처럼 시들고 마르는 것은 쉬운 일이라 가을 달과 봄바람에 보내고 맞이하노라

50. 次皇華集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099C

원문

藜腸可與論滋味。俚語安能和正聲。鯉躍龍門眞自幸。此身奚啻識韓荊。

번역

여장으로 맛을 논할 수 있겠는가 속된 말로 어찌 바른 소리에 화답하랴 잉어가 용문에 뛰어오름은 참으로 다행이나 이 몸이 어찌 한나라의 가시나무나 알리요

원문

迎人山送晴嵐色。喚友鸎傳幽谷聲。無限風光惱詩眼。不妨歸路滯班荊。

번역

사람 맞이하는 산은 맑은 안개 빛을 보내고 친구 부르는 꾀꼬리는 깊은 골짝 소리를 전하네 무한한 풍광에 시인의 눈이 즐거우니 돌아가는 길에 행차를 지체해도 무방하리

원문

東韓民物太平痕。聖帝恩光見野村。新婦餉姑翁哺幼。勸耕廉吏過柴門。

번역

동한의 백성들 태평의 흔적을 입었으니 성상의 은혜가 시골 마을에까지 미쳤네 새 신부는 할아버지에게 음식을 올리고 권농하는 청렴한 관리가 사립문을 지나네

원문

落花芳草雨餘痕。紅綠交輝遠近村。方信太平今有象。酒樓詩閣古關門。

번역

꽃은 지고 풀은 푸르러 비 온 뒤의 흔적이고 붉고 푸른 빛이 교차하여 멀고 가까운 마을을 비추네 태평성대가 지금 나타났음을 믿겠으니 술집과 시각에 옛 관문이 있구나

51. 次李德哉見示韻〔原注:在摠府直所〕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禁直分明夢野亭。覺來山色眼中靑。欲將說與龍眠畫。惟有歸心不可形。

번역

금직은 분명히 꿈속의 야정이었는데 깨어나니 산빛이 눈에 푸르구나 용면의 그림으로 말해 주고 싶지만 돌아가고픈 마음을 형언할 수 없네

52. 楊花渡江亭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削立千尋嶂。危亭枕碧流。潮痕晩猶濕。江氣夜生秋。樹綠看黃鳥。沙明失白鷗。明朝京洛去。塵土使人愁。

번역

천 길 깎아지른 절벽에 우뚝한 정자 푸른 물결을 베고 누운 높은 정자 조수 흔적은 저녁에도 아직 축축하고 강기운은 밤이 되니 가을이 생겨나네 나무는 푸르고 노란 새가 보이고 모래는 밝아 흰 갈매기가 안 보이네 내일 아침이면 서울로 떠나야 하니 속세의 먼지가 사람을 시름겹게 하네

53. 迎祥□應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九闕祥雲合。千門瑞旭輝。堯衢聞擊壤。舜殿覩垂衣。催却梅花嫩。消殘臘雪稀。彤庭新賀罷。留醉羽觴飛。

번역

구궐에 상서로운 구름이 모이고 천문에는 상서로운 해가 빛나네 요 임금의 궁궐에서 격양가를 듣고 순 임금의 전각에서 옥의를 보네 매화는 연한 꽃망울을 재촉하고 섣달 눈은 드물게 녹아 사라지네 대궐 뜰에서 하례가 막 끝나니 취기가 남아 날개 달린 술잔이 나네

54. 客堂春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春來何所祝。福祿與時新。親壽岡陵久。□君恩雨露均。淸樽隨處滿。佳客到來頻。歌舞三韓地。相逢盡好人。

번역

봄이 오니 무엇을 축원하랴 복록이 때에 따라 새롭네 어버이 장수하시고 임금의 은혜는 우로처럼 고르네 맑은 술잔은 가는 곳마다 가득하고 좋은 손님은 자주 찾아오네 삼한 땅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만나는 이들 모두 좋은 사람이네

원문

北陸窮陰後。東風淑氣新。庭梅香欲動。門柳綠初均。世道方看泰。春遊不厭頻。滿堂佳客醉。渾是太平人。

번역

북쪽 땅에 몹시 추운 겨울이 지나고 동풍에 화창한 기운 새로워지니 뜰의 매화는 향기를 풍기려 하고 문 앞 버들은 푸른빛이 고르네 세상 형편은 태평을 보게 되었으니 봄놀이는 자주 해도 싫지 않으리 집안 가득 좋은 손님들 취해 있으니 모두가 태평성대의 사람들일세

55. 次富寧客舍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0B

원문

雨雪陰山北。風濤渤海邊。胡天無盡處。漢月幾回圓。旅夢魂猶苦。鄕愁眼欲穿。經年馬上客。今日飮中仙。

번역

눈과 비는 음산의 북쪽에서 내리고 바람과 파도는 발해의 가에 일렁이네 오랑캐 하늘은 끝이 없는 곳에 한나라 달은 몇 번이나 둥글어졌나 나그네 꿈속에도 혼은 여전히 괴롭고 고향 그리움에 눈은 뚫어질 듯하네 해를 넘긴 말 위의 나그네가 오늘 중선주를 마시네

56. 村居詠懷。次李白宮中行樂詞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山城依鳥道。江檻俯蛟宮。問柳宜晴景。看花怯晩風。有時迎客至。不敢道尊空。沽得前村酒。欣然一笑同。

번역

산성은 조도에 의지하고 강가 난간은 교궁을 굽어보네 버들은 맑은 날이 마땅하고 꽃은 저녁 바람에 겁을 내네 때로 손님이 오면 감히 빈 잔을 말하지 못하네 앞마을에서 술을 사와서 기쁘게 한 번 웃으며 함께 마시네

원문

憶昔提長劍。關河爲壯遊。戈鋋明朔雪。笳鼓動邊樓。流落身猶健。蹉跎影可羞。公侯元有命。不必曲如鉤。

번역

생각건대 옛날에 긴 칼을 차고 관하에서 장한 유람을 하였지 창과 방패는 북방의 눈 속에 빛나고 피리와 북은 변방 누각을 울렸네 떠돌아다녀도 몸은 아직 건장하나 어그러진 그림자는 부끄러울 만하네 공후가 되는 것은 원래 운명이니 구부러진 갈고리처럼 굽실댈 필요 없네

57. 次贈孟浩然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牧笛煙中起。漁歌月裏聞。入山行友鹿。閉戶臥棲雲。計拙慙時彥。才微負□聖君。扁舟五湖客。千載慕淸芬。

번역

목동의 피리 소리 안개 속에 일어나고 어부의 노래는 달빛 속에 들려오네 산에 들어가면 친구로 사슴과 함께하고 문을 닫고 누우면 구름 속에 살아가네 계획이 졸렬하여 시대를 벗어나 부끄럽고 재주가 미천하여 성군을 저버렸네 조각배 타고 오호에 노니는 나그네 천 년토록 그 맑은 향기를 사모하노라

58. 次贈秋浦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花壓小窓晩。幽禽啼喚人。呼兒敎換酒。邀客約尋春。芳草踏還綠。淸詩吟轉新。良辰須大醉。莫效獨醒臣。

번역

꽃이 작은 창을 덮는 저녁에 그윽한 새가 사람을 불러 우네 아이를 불러 술을 바꾸게 하고 손님을 맞아 봄을 찾기로 약속하네 향기로운 풀은 밟아도 푸르고 맑은 시는 읊을수록 새로워지니 좋은 날에는 크게 취해야 하니 홀로 깨어 있는 신하를 본받지 말라

59. 次送趙雲卿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0D

원문

顏紅緣嗜酒。髮白坐憂時。同異臧三耳。安危鼎一絲。西朝冠蓋急。南討羽書遲。諸葛躬耕日。誰知可出師。

번역

얼굴이 붉은 것은 술을 즐겨 마신 때문이고 머리털이 센 것은 시국을 근심해서라네 동이와 이가 같고 다름은 세 귀로 알 수 있고 안위는 한 가닥 실에 매달린 것과 같구나 서쪽 조정의 관개는 급박한데 남쪽 정벌의 명령은 더디기만 하니 제갈량이 직접 밭을 갈던 날에 누가 출사할 수 있음을 알았으랴

60. 次寄淮南友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鄕心倚高閣。春思立芳洲。欲往不得往。薄遊成久遊。風塵隔故國。歌舞散靑樓。世事將流水。如何去莫留。

번역

고운 누각에 기대어 고향을 생각하고 꽃다운 물가에 서서 봄을 그리워하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으니 잠깐의 유람이 오랜 유랑이 되었네 풍진 속에 고국은 멀리 떨어져 있고 노래와 춤은 청루에서 흩어지네 세상일은 장차 흐르는 물과 같으니 어찌 가면서 머물지 않을 수 있으랴

61. 次寄王漢陽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1A

원문

南隣與北郭。酒熟解相邀。倒屣主人喜。牽衣兒女嬌。開筵坐碧草。待月望靑霄。大醉歸來暮。柴門隔水遙。

번역

남쪽 이웃과 북쪽 성곽에서 술이 익자 서로 초대하네 신발을 거꾸로 신은 주인이 기뻐하고 옷을 잡아당기는 아녀자들이 어여쁘구나 잔치를 열고 푸른 풀밭에 앉아 달을 기다리며 푸른 하늘 바라보네 몹시 취해 저물녘에 돌아오니 사립문이 물 건너 멀리 있구나

62. 次歐陽公廣陵寺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百戰將軍老。腰間劍尙存。歸來坐一室。風雨掩重門。江近煙初瞑。山深日易昏。丹心憂大國。一一鬢生痕。

번역

백 번 싸운 장군이 늙었어도 허리에는 아직 검이 남아 있네 돌아와 방 안에 앉았노라니 비바람에 두꺼운 문을 닫았네 강은 가까워 안개가 막 어두워지고 산은 깊어 해가 쉽게 저물어가네 충성스런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니 머리칼 하나하나 희어진다

63. 金城贈魯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1B

원문

萬里人歸北。三秋雁向南。鄕心常極目。離思暫停驂。官酒隨多少。山肴雜苦甘。相逢良有數。終日共遊談。

번역

만 리 길을 사람들은 북쪽으로 돌아가고 늦가을 기러기는 남쪽으로 향하네 고향 생각에 항상 눈이 멀어 이별의 슬픔 잠시 말에 멈추었네 관청 술은 많고 적음이 있고 산중 안주는 고소하고 단 것이 섞였네 서로 만남은 참으로 운명이라 종일토록 함께 담소를 나누네

64. 杏山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曠野亦高丘。登臨滿目秋。雲連千里色。月共兩鄕愁。膽氣龍刀在。容華鵲鏡羞。平生四方志。今日始觀周。

번역

넓은 들판에 높은 언덕이 있어 올라보니 눈 가득히 가을이로세 구름은 천 리의 빛과 이어지고 달은 두 고을의 시름을 함께하네 용도 같은 담력은 칼에 있고 비취 같은 용모는 거울이 부끄럽네 평생 사방을 유람할 뜻 품었으니 오늘 비로소 주나라를 보았네

65. 送李尙書赴燕京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1C

원문

朝廷重專對。妙揀大夫賢。夙誦詩三百。重遊路四千。眼明周禮樂。跡慣禹山川。竣事歸須早。宮麻待子宣。

번역

조정에서 전대(專對)를 중시하여 훌륭한 대부를 묘하게 뽑았네 일찍이 시삼백을 외웠고 사천 리 길을 거듭 다녔네 눈은 주나라 예악에 밝고 발길은 우 임금의 산천에 익숙하네 일을 마치고 일찍 돌아오게나 궁중의 마(麻)가 자선을 기다리네

원문

燕京且萬里。半道鬢先蒼。去爲朝天急。歸因懷土忙。憶曾爲客苦。復此送君傷。所賴身猶健。遼寒也不妨。

번역

연경은 아득히 만 리 길이라 중도에 머리 먼저 세었네 떠날 때는 조공 바치기 급했고 돌아올 땐 고향 생각에 바쁘구나 예전에 나그네 되어 고생했던 일 다시 그대 보내며 마음 아프네 몸이 아직 건강한 것이 다행이니 요동의 추위도 상관없으리라

66. 松京懷古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麗王城此護金甌。五百年來霸氣收。故國無人山獨立。荒臺有恨月空留。三韓一統思前烈。艶色妖僧悼末流。靑木至今凋落盡。鷄林黃葉一般秋。

번역

고려의 성은 이 금항아리 같은 산을 보호하니 오백 년 동안 패자의 기운이 거두어졌네 옛 나라에 사람은 없고 산만 홀로 서 있으며 황량한 누대엔 한이 있고 달만 덩그러니 남았네 삼한이 하나 된 옛날의 공적을 생각하고 미색과 요승으로 인한 말세의 흐름을 슬퍼하네 푸른 나무는 지금까지 모두 시들어 떨어지고 계림의 낙엽은 가을에 한결같이 지는구나

67. 贈年友下第還鄕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1D

원문

落魄湖南返舊廬。嗟君此別意何如。去年馬榜連行雁。今回龍門點額魚。腰下靑萍三尺許。眼前黃葉九秋餘。臨岐爲問重來約。細雨桃花三月初。

번역

낙백한 몸으로 호남에서 옛집으로 돌아가니 아, 그대와의 이별에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지난해 마방에는 행안이 연이어 있었고 이번 용문에는 점액어 가 찍혔네 허리 아래 청평은 세 자 남짓하고 눈앞의 누런 잎은 구월이 다 지나갔네 갈림길에서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물으니 보슬비 내리는 복사꽃 피는 삼월이라네

68. 次虛白堂千秋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鷄人唱罷闢金宮。花底龍旌颭曉風。劍佩繽紛光耀日。羽林磨戛氣成虹。春催萬戶垂楊綠。恩浹千官醉面紅。猥側賀班慙薄劣。敢傾丹悃祝如崇。

번역

계인이 노래를 마치고 금궁을 열어젖히니 꽃 아래 용 깃발이 새벽바람에 나부끼네 칼과 패옥은 찬란하여 햇빛보다 빛나고 우림의 칼날은 마찰되어 무지개 기운 이루네 봄은 만호의 수양버들을 재촉해 푸르게 하고 은혜는 천관을 적셔 취한 얼굴 붉게 하네 외람되이 축하하는 반열에 서니 보잘것없어 부끄러우나 감히 진심을 다해 성상처럼 되시길 축원하네

69. 次稼亭早朝奉天殿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2A

원문

春陰薄薄透簾寒。金鴨餘香在博山。鳳殿雲移開寶座。龍墀風引步仙官。淸河共際千年會。晝日三承咫尺顏。朝退歸來花底散。滿城環佩響闌珊。

번역

봄 구름 옅게 드리워 발 사이로 찬 기운 스미는데 금압산에 남은 향기 박산에 머물러 있네 봉전의 구름 옮겨가며 보좌를 드러내고 용지에는 바람 불어 선관들이 걸어가네 청하에서 천년의 모임을 함께하고 낮에도 세 번이나 지척에서 뵈었네 조회 마치고 돌아오니 꽃 아래 흩어지고 성안 가득 패옥 소리 잦아드네

70. 次德哉敬勝韻。別子安。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初度俱當乙丑年。羨君風調獨巍然。詞鋒久避常蛇勢。交道寧疑市虎傳。已喜龍頭超第一。佇看鵬翼擊三千。南歸莫惜相思字。鴻雁春來向北天。

번역

우리 모두 을축년에 태어났지만 그대의 풍모는 유독 우뚝하네 글솜씨는 오래도록 뱀의 기세 피하였고 교분은 어찌 시장의 호랑이 소문 의심하랴 이미 용두가 제일임을 기뻐하니 붕새 날개로 삼천 리를 치는 것 보게나 남쪽으로 돌아갈 때 그리워하는 편지 아끼지 마오 기러기는 봄에 북쪽 하늘을 향해 가네

71. 辛卯七月晦。除北評事。八月念八。發程。暮投樓院。洪而信待以酒果。作四韻三首。贈別。余次其一。酬別。〔原注:以下六首。係北評事時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2B

원문

一見相推意氣豪。情親何必舊同袍。樽前細話雙揮塵。關外行裝獨擁旄。嶺樹經霜吹落葉。塞鴻迷雨下空壕。病來怯殺深杯飮。虛負黃花與白醪。

번역

한 번 만나고 서로 의기투합하니 친밀함이 어찌 옛 동료만 하겠는가 술잔 앞에서 담소 나누며 함께 먼지 털어내고 관문 밖 행장 꾸려 홀로 깃발을 잡았네 산봉우리 나무는 서리 맞아 낙엽을 날리고 변방 기러기는 비에 길을 잃고 빈 구덩이로 내려앉네 병이 들어 깊은 술잔 마시기가 두려워 국화와 막걸리를 저버렸네

72. 在北道巡行時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踏遍關河路不窮。滄溟西畔白山東。五更魂夢迷鄕國。千里戎裝帶朔風。正是客中同病鶴。不堪愁裏聽歸鴻。傍人莫識余心事。錯把醫方勸水雄。〔原注:以疾。服水雄故云。〕

번역

관하를 두루 밟아 길은 끝이 없고 푸른 바다 서쪽 흰 산 동쪽에 있네 오경에 꿈속에서 고향을 헤매고 천 리 먼 곳 군복에 북풍을 띠었네 정녕 객지에서 같은 병 앓는 학이니 시름 속에 돌아가는 기러기 소리 견딜 수 없네 옆 사람은 내 심사 알지 못하고 잘못 약방문으로 수웅을 권하네 〔원주: 병이 나서 수웅(水雄)을 복용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73. 次審藥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2C

원문

經年病裏須良藥。連日樽前怯大杯。華髮漸隨芳草長。衰顏羞對好花開。雲橫秦嶺夕陽盡。雪罷胡山春水來。日暮孤城頻悵望。鄕愁無賴酌金罍。

번역

해를 넘기며 병중이라 좋은 약이 필요하고 연일 술잔 앞에선 큰 잔을 마시기가 겁나네 흰 머리는 점차 방초 따라 자라나고 쇠한 얼굴은 예쁜 꽃 피는 것 마주하기 부끄럽네 구름 낀 진령에 석양이 다 저물고 눈 그친 호산에 봄물이 흘러오네 해 저문 외로운 성에서 자주 슬피 바라보니 향수를 금 술잔으로 달래려 해도 소용없네

74. 在北道避亂時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磨天危嶺鬱嵯峨。鳥道連雲萬里賖。地接胡關霜落早。天連鯨海月明多。孤臣髮白三千丈。故國灰殘百萬家。家在漢濱何日到。秋來空送雁行斜。

번역

하늘 닿은 높은 고개 우뚝 솟아 있고 구름 닿은 좁은 길 만 리나 멀구나 땅은 오랑캐 관문과 접해 서리 일찍 내리고 하늘은 큰 바다와 이어져 달빛이 많구나 외로운 신하는 머리 세어 삼천 장이나 되고 고국엔 재만 남아 백만 집이 무너졌네 집은 한강 가에 있으니 어느 날에나 갈까 가을 들어 부질없이 기러기 줄만 보내노라

75. 富寧李宜臣卜居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2D

원문

卜築何時破鬼慳。層巒斷處控波瀾。三更月照黃金湧。萬里秋涵碧玉寒。世事不禁雙淚下。鄕愁聊借一杯寬。前途若掃豺狼跡。歸路羊腸不道難。

번역

집을 짓는 것이 언제나 귀신의 아끼는 것을 깨뜨릴까 층층이 솟은 산봉우리 끊어진 곳에 물결이 치네 삼경의 달빛이 황금처럼 일렁이고 만 리 가을 하늘은 푸른 옥처럼 차갑구나 세상일은 두 줄기 눈물을 금할 수 없으니 고향 생각 애오라지 한 잔 술로 위로하노라 앞길에 시랑의 자취가 쓸려 나간다면 돌아가는 길 좁은 산길도 어렵다 하지 않으리

76. 次德哉警魯瞻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老杜何時賦北征。故園春色負梅兄。無家久作三年客。有友聊寬萬里情。歸夢每從天外懶。旅程多在雪中行。西方消息憑誰問。惟見關山片月明。

번역

늙은 두보가 어느 때에 북정부를 지었나 고향의 봄빛이 매화 형님을 저버렸네 집도 없이 오래도록 삼 년 객이 되었으니 벗이 있어 애오라지 만 리의 정을 위로하네 돌아갈 꿈은 매번 하늘 밖에서 게으르고 나그네 길은 대부분 눈 속을 지나가네 서쪽 소식을 누구에게 물어볼까 관산에 조각달만 밝게 비치는 것을 보노라

77. 雙城別魯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3A

원문

脈脈幽懷酒一杯。龍興江上日西頹。萬重山送人南去。千里春隨雁北來。節物世情同變換。國恩鄕思共徘徊。時危猶佩雙城印。誰道□明君棄不才。

번역

그윽한 회포를 술 한 잔으로 달래는데 용흥강 가에 해는 서산으로 지네 겹겹의 산은 남쪽 가는 사람을 전송하고 천 리 봄은 기러기 따라 북쪽으로 오네 절기와 세상물정은 똑같이 변해 가고 나라 은혜와 고향 생각은 함께 배회하네 시국이 위태로워도 쌍성부 인장을 차고 있으니 누가 명군이 못난 이를 버렸다고 말하는가

78. 乙未秋七月旣望。龍興江舟中。作用赤壁賦中字。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蘭舟一葉縱西東。正是蒼茫露洗空。萬頃波光虛月下。一天秋色在江中。吹簫客有登仙興。橫槊人爲蓋世雄。往者如今不須問。且將杯酒獨臨風。

번역

한 척의 배를 동서로 가만히 띄우니 정녕 아득한 하늘에 이슬이 비는 때라네 만경창파 물결은 달빛 아래 허공에 떠 있고 온 하늘 가을빛은 강물 속에 들어 있구나 피리 부는 나그네는 신선이 될 흥취가 있고 창을 비껴 든 사람은 세상에 드문 영웅이라 지난 일 지금 어찌 물을 것 있으랴 우선 술잔 들고 홀로 바람을 마주하노라

79. 乙未秋夕。還自穩城。到居山驛。逢李德哉。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3B

원문

梧葉初飛秋夏分。故園消息若爲聞。池塘殘夢吟靑草。嶺海歸心望白雲。囊乏一錢長作客。腰橫三尺舊從軍。滿天風雨關山路。樽酒如何幸見君。

번역

오동잎이 막 날려 가니 여름과 가을이 갈라지는데 고향 소식을 어떻게 들으리오 못가에서 남은 꿈에 푸른 풀을 읊조리고 산과 바다로 돌아갈 마음으로 흰 구름 바라보네 주머니엔 돈 한 푼 없어 늘 나그네 신세이고 허리에는 세 자 칼 차고 예전에 군대에 갔었지 하늘 가득 비바람 치는 관산의 길에서 술잔을 나누며 다행히 그대를 보았네

80. 次唐將韻〔原注:公州時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將軍才調武兼文。說劍論詩兩絶群。玉節遙分遼塞月。金鞭直指錦江雲。□皇家柔遠仁無外。海寇窮兵勢自焚。退却秦軍三寸舌。九重歸奏□聖明君。

번역

장군의 재주는 무예와 문장을 겸비하여 검을 논하고 시를 읊음 모두 뛰어났네 옥절은 멀리 요동의 달과 나누고 금채찍은 곧장 금강의 구름을 가리키네 황실이 먼 곳까지 부드럽게 다스림에 어진 정사 끝이 없고 해적을 궁지로 몰아넣으니 형세가 스스로 타버리네 한 치 혀로 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구중궁궐로 돌아와 성명한 임금께 아뢰네

81. 村居。次朴季吉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3C

원문

茅屋成村結搆同。蕭條煙火亂山中。居人似鶴棲松雪。旅客如鴻怯朔風。門對氷灘暮流急。窓含霜月夜寒通。起來擁褐前簷下。占得朝陽曝背紅。

번역

초가집이 마을을 이루어 집들이 똑같은데 쓸쓸한 연기 불빛은 산중에 어지럽구나 사는 사람은 학이 눈 속의 소나무에 깃든 듯하고 나그네는 기러기가 북풍에 겁내는 듯하네 문은 얼음 여울 마주하여 저녁 물살 급하고 창은 서리 달 머금어 밤 추위가 통하누나 일어나서 털옷 입고 처마 밑으로 나가니 아침 해를 얻어 등 뒤에 붉게 말리노라

원문

我生於世與人同。底事棲棲逆旅中。山野襟懷歌且嘯。乾坤氣色雨兼風。地窮胡塞鄕書斷。路走秦關客夢通。勳業不須頻攬鏡。衰顏無復舊時紅。

번역

나는 세상에 태어나 남들과 똑같이 살았는데 무슨 일로 이리저리 떠돌며 객지에서 지내나 산야의 회포는 노래하고 휘파람 부르며 달래고 천지의 기색은 비와 바람이 함께 불어오네 땅 끝 오랑캐 변방이라 고향 소식 끊기고 길 굽이 진나라 관문이라 나그네 꿈도 통하리 공적을 이루려 거울 자주 볼 필요 없으니 쇠한 얼굴에 옛날의 붉은 빛 다시 없을 테니

원문

百戰歸來一劍同。關河蹤跡夢魂中。當時戎馬衝氷雪。今日荊扉掩朔風。瓦釜土床甘飽暖。天時人事任窮通。村翁載酒來相問。暫借愁顏一醉紅。

번역

백 번 싸우고 돌아오니 한 자루 검만 남았는데 관하의 종적은 꿈속에만 남아 있네 당시에는 군마 타고 얼음과 눈을 뚫었건만 오늘은 사립문 닫아두고 북풍을 막고 있네 질그릇 솥과 흙바닥이 따뜻하고 배불리 먹으니 천시와 인사야 궁통에 맡겨둘 뿐 촌 노인이 술을 싣고 와서 안부를 물으니 잠시 시름겨운 얼굴로 취한 홍색을 빌려보네

82. 永興。次羅克之韻。因贈別。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3D

원문

一見知心蓋已傾。相將玉貌在圍城。吹毛到處人求過。沒羽如何石感誠。鬢上三千驚白髮。胸中十萬仗神兵。自中興後身▒病。歸臥林園羨此行。

번역

한 번 보고 마음을 알아 이미 기울였으니 옥 같은 얼굴이 성을 에워싸고 있네 털을 불어 어디든 허물을 찾으려 하고 깃이 없으니 어찌 돌의 정성을 느끼랴 머리 위의 삼천 가닥은 백발에 놀라고 가슴속의 십만 군사는 신병이라네 중흥 이후로 몸이 병들었기에 돌아와 숲속에 누워 이 행차를 부러워하네

83. 詠雪寄朴季吉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天寒白屋掩柴荊。夜雪終朝尙未晴。高壓山松別有色。平沈氷澗但聞聲。蹇驢㶚水騷人興。羸馬藍關逐客情。不及老農南畝畔。豐徵占得萬家盈。

번역

추운 날씨에 초가집은 띠풀로 문을 가리고 밤새 내린 눈이 아침까지도 개지 않았네 높이 솟은 소나무는 별다른 빛깔이 있고 평평한 얼음 시내는 물소리만 들려오네 절름발이 나귀와 냇물 건너니 시인의 흥취요 여윈 말로 관문 넘으니 쫓겨난 객의 정이로세 남쪽 농부의 밭두둑에 미치지 못하나 풍년의 징조를 얻어 만가에 가득하리라

84. 次季吉韻。寄德哉。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4A

원문

年前多難與君同。沙塞旌旗在眼中。金石心肝猶炳日。萍蓬蹤跡各隨風。關山一望頭俱白。嶺樹重遮信不通。千里相思孤夢罷。五更燈燭伴殘紅。

번역

지난해 고난을 그대와 함께 겪었으니 변방의 깃발이 눈에 선하네 금석 같은 마음은 여전히 해처럼 빛나는데 부평초 같은 종적은 각자 바람을 따르네 관산 바라보니 머리 모두 세었고 고개 나무 겹겹이라 소식도 끊겼네 천 리 멀리 그리워하다 외로운 꿈 깨니 오경의 등불이 지는 꽃과 짝하네

85. 次季吉哀君實旅櫬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堂有孀親室有妻。天涯歸路孰相携。愁連嶺樹黃雲暝。怨入胡天白日低。故里幾思遼鶴返。旅魂應作蜀鵑啼。雙城話別依如昨。唱斷哀些不忍題。

번역

집에는 홀어머니 계시고 방에는 아내 있건만 하늘 끝으로 가는 길에 누가 손을 잡아줄까 시름은 고개 나무에 이어져 누런 구름이 어둡고 원망은 오랑캐 하늘에 들어가 해가 낮게 뜨네 고향에서 요동의 학 돌아오길 몇 번이나 생각했나 나그네 넋은 응당 촉견처럼 울리라 쌍성에서 이별한 말 어제와 같은데 슬픈 노래 끊어지니 차마 쓰지 못하겠네

86. 送隆吉北道評事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昔我磨天嶺外行。歸來鞘劍老龍鳴。柳營自有籌邊手。蓮府空題佐幕名。關塞今爲行樂地。丈夫那作別離情。祗應長白山依舊。寄語無勞送虜兵。

번역

옛날에 내가 마천령 밖을 지나갈 때 돌아올 제 칼집 속의 검은 노룡이 울었지 유영에는 본디 변방을 다스릴 인재가 있고 연부에는 부질없이 좌막의 이름만 적혀 있네 관새는 지금 즐겁게 놀 만한 곳이 되었으니 장부가 어찌 이별의 정을 품겠는가 다만 장백산은 예전 그대로 있을 것이니 수고로이 오랑캐를 보낼 필요 없다고 전하오

87. 次季吉三月三日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相逢何事太遲遲。共把幽懷付酒巵。抱玉君如遊楚國。彈琴我似遇鍾期。詞場戰藝傾三峽。交道論心絶九疑。分占溪山咫尺地。黃冠野服好追隨。

번역

만남이 어찌 이리도 더디었는가 그윽한 회포를 술잔에 부치네 옥을 안은 그대는 초나라를 노니는 듯하고 거문고 타는 나는 종기를 만난 듯하네 시 짓는 재주는 삼협을 압도하고 교유하는 도리는 구의와 단절되었네 지척의 계산과 산천을 나누어 차지하니 황관과 야복으로 서로 따르기 좋으리

88. 又次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山中有約歸何遲。桂酒濃香滿斗巵。百歲茫茫去若夢。三春忽忽來如期。莊周蝴蝶我無別。魚目隋珠人或疑。終日惟須酪酊醉。且將明月淸風隨。

번역

산중에서 약속했는데 어찌 그리 늦으시는가 계주(桂酒)의 진한 향기가 술잔에 가득하네 백 년 세월 아득히 꿈처럼 지나가고 삼춘이 어느덧 기약대로 찾아왔네 장주의 나비와 나는 다를 바 없으니 물고기 눈과 수나라 구슬을 사람들은 의심하네 종일토록 오직 낙령주에 취해야 하니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을 따라가리라

89. 林德源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4C

원문

昂昂落落平生志。不是區區翰墨流。早識虎頭當食肉。誰知猿臂未封侯。老猶裹革將軍健。淸比懸魚太守優。遺恨未抛方寸印。幾回歸夢錦山秋。

번역

당당하고 씩씩한 평생의 뜻은 한묵에 흐르는 구구한 것이 아니었네 호두가 고기를 먹어야 함을 일찍 알았으나 원비가 봉후되지 못함을 누가 알았으랴 늙어도 가죽을 두른 장군처럼 건장하고 맑음은 매달린 물고기 같은 태수보다 낫네 한이 남아 방촌의 인장을 버리지 못하니 몇 번이나 금산의 가을로 돌아가는 꿈 꾸었나

90. 梁榥書堂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梁君眼力破天藏。爲卜林幽作草堂。千載雲煙乘鶴地。一區山水臥龍莊。重茅不怕秋風怒。綠樹偏宜夏日長。除却讀書無一事。燕泥時見落空樑。

번역

양군이 안력으로 천기를 꿰뚫어 보고서 그윽한 숲에 초당을 지었네 천 년의 구름과 안개는 학을 타고 떠나고 한 구역 산수에는 와룡장이 누웠구나 겹겹의 띠풀은 가을바람 거세도 두렵지 않고 푸른 나무는 긴 여름날에 특히 어울리네 책 읽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없으니 때때로 빈 들보에 제비똥이 떨어지는 것을 보네

91. 利城東軒。次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4D

원문

十里喬松簇翠蒼。居人解說百年長。海風傳響喧濤浪。岳氣通寒飽雪霜。老榦久辭斤斧伐。苦心那免蠹蟲藏。終然合有良工用。不作川舟卽廈樑。

〔原注:右松林〕

번역

십 리에 뻗은 소나무들 푸르름이 무성하니 사람들은 백 년을 살았다고 설명하네 바닷바람 소리 전해져 파도 소리 시끄럽고 산의 기운 차가워 눈서리와 서리가 가득하네 늙은 나무는 오래도록 도끼질을 피했으나 괴로운 마음으로 어찌 좀벌레 숨는 것 면하랴 끝내 좋은 장인의 쓰임이 있어야 하니 강물에 띄울 배가 아니면 집의 대들보로 쓰이리 〔원주: 右松林〕

원문

裊裊盈盈不自持。春風多事弄絲絲。漫天白雪疑輕絮。拂地黃金認嫩枝。不與梅爭全盛色。却於松讓後凋姿。可憐北去南來路。只爲情人管別離。

〔原注:右柳堤〕

번역

살랑살랑 흔들리며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니 봄바람이 일 많아 실실거리는 가지 희롱하네 하늘 가득한 흰 눈은 가벼운 솜씨인 듯하고 땅을 스치는 황금빛은 연한 가지인 줄 알겠네 매화와는 전성기의 빛깔 다투지 않고 솔에게는 시든 자태를 양보하네 가련하다 북쪽으로 가고 남쪽으로 오는 길 다만 정인이 이별을 주관하기 때문이라네 〔원주: 원주(原注)에 ‘오른쪽은 유제(柳堤)’라고 하였다.-〕

92. 送金而敬赴原州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5A

원문

邑近名山豈偶然。一麾歸去擺塵緣。使君長物琴書鶴。造化奇功萬二千。春菜登盤饒藥餌。高僧在座足詩篇。仙源出世爲江漢。休惜魚書一再傳。

번역

고을이 명산에 가까운 게 어찌 우연이랴 깃발 하나로 돌아가니 속세 인연 떨치누나 사또의 장물은 거문고와 책과 학이라 조화의 기이한 공력 만 이천 년이라네 봄나물 밥상에 오르니 약과 먹을거리 풍부하고 고승이 자리에 있으니 시편도 족하구나 선원이 세상에 나와 강한이 되었으니 어서 편지 한 번 두 번 전하기를 아끼지 마오

93. 次江界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高樓不盡古今愁。漢虜橫分一水流。靑海亭臨風萬里。白頭山戴雪千秋。將軍自倚長城壯。志士猶爲大國憂。遙望日邊何處是。九重無路借前籌。

번역

높은 누각에 고금의 시름이 다하지 않으니 한과 오랑캐가 한 줄기 물을 사이에 가르네 청해정은 바람 맞으며 만 리를 굽어보고 백두산은 천 년의 눈을 머리에 이고 있네 장군은 장성 의지하여 웅장하고 지사는 오히려 대국을 위해 근심하네 멀리 바라보니 해가 뜨는 곳이 어디인가 구중궁궐에 앞날을 도울 길이 없구나

94. 次書狀七月一日見示韻〔原注:以下十五首。係赴燕時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5B

원문

君懷氷鑑玉壺淸。我視千金萬戶輕。傾蓋掃將塵慮去。披襟說到寸心明。匡衡抗疏稱遺直。東野鳴詩見不平。正値塞鴻南去日。北來同是客燕京。

번역

그대는 옥병에 담긴 얼음처럼 맑은 마음을 품었고 나는 천금 만호의 재물을 가볍게 여긴다오 옷깃을 젖히고 앉아 세속의 근심을 씻어 버리고 가슴을 열어 말하니 한 치의 진심이 밝구나 광형의 항소는 유직이라 일컬어졌고 동야의 시는 불평을 드러냈네 남쪽으로 기러기 날아가는 때를 만났으니 북쪽에서 온 우리 모두 연경의 나그네로세

95. 望海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眼力收將大海來。胸呑萬里有餘恢。靈鼇首戴三山峙。神禹功勞四瀆開。氣蹙乾倪蒸作雨。波搖坤軸怒成雷。扶桑弱水知何在。日月跳丸去却回。

번역

눈동자 거두어 대해를 담아오니 가슴엔 만 리의 여유가 넘치네 신령한 자라 머리에는 삼신산을 이고 있고 신령한 우왕은 사독을 개척하는 공로 세웠네 건니에 기운이 뭉쳐 비가 되고 곤축에 물결 일어 노여움으로 우레 되네 부상과 약수는 어디에 있는지 알겠으니 해와 달이 구슬처럼 튀어 오르며 가고 돌아오네

96. 復用前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萬派朝宗來復來。廣淵包納一何恢。金烏玉兔東西見。蛟室龍宮次第開。蜃氣有時爲活畫。鯨波無日不晴雷。蓬萊指點虛無路。方士求仙去未回。

번역

만 갈래 물줄기 모여들고 다시 오니 넓은 연못 품어 안음이 어찌 그리 넓은가 금오와 옥토는 동서로 나타나고 교실과 용궁은 차례로 열리네 신기(蜃氣)는 때때로 살아있는 그림이 되고 고래 파도는 날마다 맑은 우레를 내뿜네 봉래산 가리키는 허무한 길을 방사가 신선 구하러 떠나 돌아오지 않네

97. 追次書狀練光亭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徙倚高樓俯綠灣。偶因風景暫留歡。佳賓賢主東西美。王賦崔詩伯仲間。此日當筵須盡醉。明朝別路一何漫。燕山館裏如相憶。座上三行桃李顏。

번역

높은 누각에 기대어 푸른 물굽이 굽어보니 우연히 풍경 때문에 잠시 즐거움 머무네 훌륭한 손님과 어진 주인이 동서에서 왔으니 왕부와 최시는 백중지간의 벗이라네 오늘 자리에서는 모름지기 취해야 하리니 내일 아침 이별길이 어찌 그리 멀겠는가 연산관 안에서 혹시라도 그리워한다면 자리에 앉은 세 줄의 도리안을 떠올리게

98. 山海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形勝從來最擅雄。遼燕舊界此交衝。天連渤海三千里。地接陰山一萬重。聖代不勞秦築怨。豐功還陋漢登封。關門鎖鑰今誰是。見說兵藏小范胸。

번역

형승은 예로부터 가장 웅장한 곳이라 요동과 연경의 옛 경계가 여기서 맞닿았네 하늘은 발해와 이어져 삼천 리요 땅은 음산과 접하여 일만 겹이로세 성대에는 진나라 성 쌓은 원망을 수고로이 하지 않고 큰 공적은 도리어 한나라 봉인보다 누추하다네 관문의 자물쇠를 지금 누가 지키는가 듣자니 병사들이 소범의 가슴에 숨겨 있다 하네

99. 觀海樓。次書狀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5D

원문

萬里城頭百尺樓。客來登眺迥添愁。遼燕割據山河在。秦漢經營歲月悠。滄海窮邊惟出日。碧天低處更無洲。酒酣忽起悲秋思。回首西風見木流。

번역

만 리 성 위 백 척의 누각에 올라 객이 와서 바라보니 시름 더욱 깊어지네 요동과 연경은 산하를 할거하고 있고 진한의 경영은 세월이 아득히 흘렀네 푸른 바다 끝에는 오직 해만 뜨고 푸른 하늘 낮은 곳엔 섬 하나 없구나 술기운에 문득 가을 시름 일어나니 고개 돌려 서풍에 나뭇잎 지는 것 보노라

100. 楡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際海連雲一望沙。不知胡騎幾經過。黃楡舊擁防秋路。碧柳今遮賣酒家。布野禾麻均雨露。滿城煙月摠笙歌。邊關饒此昇平樂。待到神京更若何。

번역

바다에 닿은 구름이 모래밭까지 이어져 오랑캐 기병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모르겠네 누런 느릅나무는 예전에 가을길을 호위했고 푸른 버드나무는 지금 술집을 가리고 있네 들판의 벼와 삼은 고루 우로를 입고 성안에 가득한 안개와 달빛 속에 모두 노래하네 변방에 이처럼 태평한 즐거움이 넘치니 도성에 가면 또 어떠할까

101. 入關題主家壁上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6A

원문

遼城西畔薊門東。千里風煙一望通。客路尋常秋色裏。人居大抵柳陰中。酒排心悶愁何在。神助詩才語更工。滿壁淋漓留醉墨。當錢聊謝主家翁。

번역

요동성 서쪽 가에 계문 동쪽에 천 리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네 나그네 길은 평소처럼 가을빛 속에 있고 사람 사는 곳은 대체로 버드나무 그늘 아래 있네 술로 답답한 마음 풀었으니 시름이 어디에 있으며 정신이 시재를 도와 말이 더욱 훌륭하네 벽에 가득 뚝뚝 흐르는 취한 필적 남기니 돈을 내고 주인의 노인에게 감사하네

102. 萬柳莊。次書狀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山河莫道是窮邊。毓秀流芳自古然。扣馬殷仁隣宅里。望夫秦石接風煙。侯家舊業名園記。主婦徽音女則篇。三世一堂遺像在。鐫珉更與後人傳。

번역

산하가 궁벽한 변방이라 말하지 마오 빼어난 풍모와 명성은 예부터 그러했으니 말을 세우고 은나라 인왕의 이웃집에 머물고 남편을 기다리는 진나라 돌은 바람과 연기에 닿아 있네 후가의 옛 가업인 이름난 정원 기록과 주부의 아름다운 소리 여칙 편이 있고 삼대가 한 집에 모여 있는 초상화가 있으니 돌에 새겨서 다시 후세에 전하리라

103. 謁夷齊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6B

원문

玄鳥遺墟黍欲生。岐山已睹鳳來鳴。九州周有三分二。臣節殷餘弟及兄。扣馬孤忠松獨秀。採薇淸操玉雙成。要知扶植綱常力。讓國初頭大義明。

번역

현조가 남긴 터에 기장 자라려 하고 기산에서 봉황이 날아와 우는 것 보았네 구주를 주나라가 삼분 이로 나누고 신하의 절개는 은나라보다 형제에게 미쳤네 말을 두드리며 외로운 충성으로 소나무 홀로 빼어나고 고사리를 캐어 맑은 절개로 옥 쌍으로 이루었네 강상을 부축하는 힘을 알려고 하니 국가를 양보한 처음에 대의가 밝았네

104. 午憩板橋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一聲新雁度南樓。薊樹風高葉欲流。宇宙百年常作客。江山萬里獨悲秋。從知服藥難醫病。只有銜杯可寫憂。誰識匣中雄劍在。猶能夜夜氣干牛。

번역

한 마리 기러기 소리 남쪽 누각을 지나가고 계수의 바람 높아 잎새가 떨어지려 하네 우주 백 년 동안 늘 나그네로 살아가니 강산 만 리에 홀로 가을이 슬프구나 약 먹어도 병 고치기 어려움을 알겠으니 술잔을 입에 물어 근심이나 달랠 뿐이라네 누가 알랴 칼집 속에 웅검이 들어 있어 밤마다 기운이 소를 말할 수 있음을

105. 薊門道中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半歲西遊且未廻。薊門歸路劇悠哉。高秋雁帶鄕心去。薄晩雲將雨意來。嘯志歌懷時自遣。羸驂倦僕日相催。愁中莫用看明鏡。鬢上靑絲一半皚。

번역

반년 동안 서쪽으로 떠돌아 아직 돌아오지 못하니 계문으로 돌아가는 길은 몹시도 멀고도 머네 높은 가을 기러기는 고향 생각하며 날아가고 저녁 구름은 비를 몰고 오려 하네 휘파람 불고 노래 부르며 때때로 스스로 달래지만 지친 말과 노복은 날마다 재촉하네 시름 속에 거울을 보지 말게나 귀밑머리 흰 실이 반이나 되었으니

106. 發薊州。次前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山勢周遭去却廻。雄州形勝信佳哉。幽幷界接風煙古。箕尾星分宇宙來。夾右舟航沿海轉。從東冠蓋望天催。觀周足償平生志。只恨霜凋旅鬢皚。

번역

산세가 주위를 둘러 돌아 나가는 곳, 웅주(雄州)의 빼어난 형승 참으로 아름답구나 유병의 경계는 바람과 안개에 옛스럽고 기미의 별은 우주에서 나누어져 왔네 오른쪽으로는 배들이 바다를 따라 돌고 동쪽으로는 관개가 하늘을 바라보며 재촉하네 주나라를 구경하니 평생의 뜻을 다 이루었건만 서리 내린 나그네 머리 세어짐이 한스럽구나

107. 次千秋使早朝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赭袍高拱殿中央。鴛鷺晨趨作幾行。燈影遙分銀的的。佩聲交戛玉瑲瑲。辰樞電繞知今日。黃道雲開見大陽。鰈域賤臣同百獸。幸陪韶舞舜階傍。

번역

붉은 도포 입고 대궐 중앙에 높이 엎드려 원로와 백관들 아침에 몇 줄로 나아오네 등불 그림자 멀리 은빛으로 반짝이고 패옥 소리 서로 부딪쳐 옥소리가 쟁쟁하네 시간은 번개가 감도는 오늘을 알게 하고 황도에는 구름이 걷혀 큰 해가 보이네 변방의 미천한 신하는 백수와 함께 다행히 순 임금 계단 옆에서 소무를 모시네

108. 皇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6D

원문

天上星辰箕尾躔。寰中彊界冀靑連。被山襟海皇都壯。聖繼神承寶籙綿。壽域謳歌今萬曆。戰場沙雪古三邊。秦城漢塞窮兵地。文物衣冠二百年。

번역

하늘의 별자리 기미성 자리에 위치하고 중원의 강계는 기주와 청주에 이어졌네 산과 바다를 껴안은 황도의 도읍이 웅장하니 성인이 신을 계승하여 보록이 끊이지 않았네 수역에서 만력년에 노래를 부르니 전장의 모래와 눈은 옛날 삼변이었지 진나라 성과 한나라 변방의 궁병지라 문물과 의관이 이백 년이나 이어졌네

109. 頭流山。次僧軸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石門中斷瀉淸溪。磴路崎嶇高復低。靈境不曾容客到。上方猶自有僧棲。湫寒龍未玄冬蟄。谷䆳鵑常白晝啼。緣底入山緣底出。似雲東去復來西。

번역

석문에서 끊겨 맑은 시내 흘러내리고 험준한 돌길은 높았다가 다시 낮아지네 신령한 경지는 일찍이 손님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상방에는 오히려 절로 승려가 살고 있구나 골짜기 차가워 용은 겨울에 칩거하고 계곡 깊어 두견새는 낮에도 늘 우는구나 무엇 때문에 산으로 들어오고 무엇 때문에 나오나 구름처럼 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오네

110. 贈崔魯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7A

원문

老仙筆下古韓文。子又能詩鯉有聞。才調少年名籍籍。蹉跎衰鬢日紛紛。天涯離恨傷春草。關外歸心望白雲。莫道九門千里遠。急賢須恃聖明君。

번역

노선이 붓 아래에 옛 한문을 쓰니 자네도 시를 잘해 명성이 자자하네 소년 시절 재주로 이름이 드높았으나 세월이 흘러 흰머리 날마다 늘어나네 천애의 이별한 한은 봄풀을 상하게 하고 관문 밖 돌아갈 마음은 흰 구름을 바라보네 구중궁궐 천 리 멀다고 말하지 마라 급히 어진 이를 성명한 임금께 의지해야 하니

원문

少日稍爲鄒魯文。行年五十恥無聞。官非謂薄知吾拙。聾亦何傷厭世紛。長物此時惟白髮。舊交中歲盡靑雲。邇來懷抱無多好。關路春風又送君。

번역

젊은 시절에는 조금이나마 추로의 문장 지녔으나 나이 오십에 이름도 없는 것이 부끄럽네 벼슬은 내 부족함 알기에 비루하다 여기고 귀먹음 또한 어찌 세속의 번잡함을 싫어하는 데 해가 되랴 긴 물건이라곤 지금 백발뿐인데 옛 친구는 중년에도 청운이 다했구나 근래에 품은 것은 좋은 것이 많지 않으니 관로의 봄바람에 또 그대를 보내네

111. 洪奉化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三十年前一夢間。交遊興味未全闌。手談但覺冬簷暖。酒戰都忘夜閣寒。中歲干戈無雁鯉。只今庭戶有芝蘭。爲郞作宰才何展。最惜魁星舊彩殘。

번역

삼십 년 전의 일은 한바탕 꿈만 같아 교유하던 흥취가 다 사라지지는 않았네 수담을 나누니 겨울 처마 따스함을 느끼고 술잔을 주고받으니 밤 누각 추위도 잊었네 중년에는 전쟁에 기러기와 잉어 없었지만 지금은 집안에 지초와 난초가 있구나 낭관이 되어 수령 되었으니 재주를 어찌 펼칠까 가장 애석한 건 과거 급제하던 옛 빛 바랜 것이네

112. 次李汝涵秋享後遊奉恩寺舟行往還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7C

원문

塵事牽人苦未閑。不禁愁鬢望秋斑。二陵洒掃仍尋寺。三伏炎蒸強出關。二走淺灘渾白石。岸臨長浦半危巒。今辰逆浪撑舟去。明日乘流弭棹還。

번역

속세의 일에 얽매여 한가할 틈이 없으니 시름겨워 흰머리 가을빛 물드는 것 금치 못하네 두 능을 쓸고 닦은 뒤 절을 찾아가니 삼복더위 무더위에 억지로 관문을 나가네 두 번 건너는 얕은 여울 온통 하얀 돌이요 언덕에 마주한 긴 포구는 반쯤 높은 산이로세 오늘 거슬러 올라가는 물결에 배를 띄워 가고 내일 흐르는 물결 따라 노를 저어 돌아오리라

원문

百丈拖船我自閑。臥看江岸草花斑。出塵方快開湯網。羈宦曾愁閉武關。昨夜商飆動閶闔。一分秋色在林巒。莫嫌明月初生魄。人世難逢壬戌還。

번역

백 장의 배를 끌고 나는 한가로이 누워서 강변에 알록달록한 꽃과 풀을 보네 속세에서 벗어나니 탕망을 열어 기쁘고 벼슬살이할 때는 무관이 닫혀 근심했지 어젯밤 상표가 대궐을 흔드니 산기슭에 가을빛 한 조각 남아 있네 밝은 달이 초승달로 생겨남을 꺼리지 마오 인생에 임술년의 돌아옴을 만나기 어렵다네

원문

出城那得此身閑。詩句關心鬢欲斑。不盡江流吟衮衮。作雙洲鳥詠關關。近憐芳草遙憐樹。晴愛明沙雨愛巒。物色惱人酬未了。來遊此地不知還。

번역

성 밖으로 나와 어찌 이 몸이 한가하랴 시구에 마음을 두니 귀밑머리 세려 하네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은 곤곤이라 읊고 쌍주에 사는 새는 관관이라 노래하네 봄풀은 가깝게도 사랑스럽고 나무는 멀리서도 사랑스럽네 맑은 모래밭은 맑은 날이 좋고 산봉우리는 비 올 때가 좋구나 경치가 사람을 괴롭혀 시로 다 갚지 못하니 이곳에 놀러 와서 돌아갈 줄 모르겠네

원문

昭代無能也自閑。肯勞心目強窺斑。名場遠我三千里。世路難於百二關。良友相逢仍勝地。碧江殊好又蒼巒。蘇仙赤壁何如此。欲駕扁舟一往還。

번역

태평성대라 무능한 나는 한가롭고 어찌 수고롭게 눈으로 얼룩을 엿보랴 명리는 나를 삼천 리 멀리 떨어뜨리고 세상길은 백이관보다 어렵구나 좋은 벗 만나니 좋은 곳에 왔고 푸른 강물 유독 좋고 푸른 산도 좋네 소선이 적벽에서 어찌 이와 같았으랴 조각배 타고 한번 가고 싶구나

113. 送別。次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乾坤萬古浩無終。暫着浮生逆旅中。故國興亡餘夜月。離人去住又春風。吟成謾興詩何力。澆破閑愁酒最工。寄語江南芳草色。莫敎歸日碧連空。

번역

천지는 만고에 끝없이 넓은데 잠시 덧없는 인생을 나그네로 살아가네 고국이 흥하고 망함에 남은 것은 밤달뿐이요 떠나는 사람 머무는 사람 또 봄바람이 부네 흥에 겨워 시를 읊어도 무슨 힘이 되랴만 한가한 시름을 달래기엔 술이 가장 좋구나 강남의 방초에게 말을 전하노니 돌아오는 날 푸른 하늘에 닿지 않게 하라

114. 龍灣。次人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7D

원문

瞻望皇居北極天。萬邦趨賀共爭先。半年持節充觀國。八月乘槎擬化仙。魏闕九重雲裏迥。萊衣五色夢中鮮。壯遊自是男兒事。不負平生誦百篇。

번역

황궁과 북극성 바라보며 만방이 하례하러 앞다투어 가네 반년 동안 사신 되어 나라를 살피고 팔월에 배 타고 신선 되려 하네 구중궁궐은 구름 속에 아득하고 오색의 예복은 꿈속에 선명하네 장대한 유람은 본디 남아의 일이니 평생 외운 백 편 시를 저버리지 않으리

115. 失題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莫說金閨與玉堂。世情容易變炎涼。羊腸已是爲行路。蝸角還能作戰場。可笑夜牛虛喘月。若爲秋雁強隨陽。金裘花馬何須惜。且換春醪醉百觴。

번역

금구와 옥당을 말하지 마라 세상 정은 쉽게 변하는 추위와 더위 같으니 양의 창자는 이미 길을 만들어 주었고 달팽이 뿔은 도리어 전장이 될 수 있네 우습구나, 밤 소는 달빛 아래 부질없이 헐떡이고 가을 기러기는 억지로 해를 따르려 하네 금빛 갖옷과 꽃무늬 말을 어찌 아끼랴 봄 술로 백 잔이나 취해 보리라

116. 申滌哀詞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8A

원문

天上樓成返謫仙。詩魂今在玉皇前。楊州鶴去雲空冷。梧樹鸞孤月獨圓。霧裏幾年韜豹炳。匣中三尺吼龍泉。靈輿駕日吾將送。小少從遊辱世憐。

번역

천상의 누각이 이루어지니 귀양 온 신선 돌아오네 시인의 혼은 지금 옥황상제 앞에 있구나 양주에 학 떠나고 구름만 차갑게 남았는데 오동나무에 난새 외롭고 달만 홀로 둥글구나 안개 속에서 몇 년이나 표범을 감추었나 상자 속에 세 자 길이 용천검이 울리네 신령한 수레가 해를 몰아 가니 내가 전송하노라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 세상에 욕을 당했네

117. 吉州。次客館壁上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歲在龍蛇事可傷。南來兵火爍崑岡。池臺蕪沒成陳迹。羅綺銷沈憶舊香。亂世且爲陶令醉。窮途欲學阮生狂。傍人莫笑吾儒腐。猶帶秋蓮尺許長。

번역

용사년의 일은 참으로 가슴 아프니 남쪽에서 온 병화가 곤륜산까지 태웠네 못과 누대는 황폐해져 옛 자취만 남았고 비단과 옷감은 녹아 없어 옛 향기만 생각나네 어지러운 세상에 도연명처럼 취하고 싶고 궁한 처지에 완생처럼 미치고 싶구나 주변 사람들은 나를 썩었다고 비웃지 마오 여전히 한 자 정도의 연꽃을 지니고 있으니

원문

天涯遊子足悲傷。況乃佳辰陟岵岡。不識弟兄何處會。遙憐茱菊故園香。偶成歸夢愁仍罷。纔得來書喜欲狂。送盡邊鴻人未去。可堪庭樹葉聲長。

번역

하늘 끝 떠도는 나그네 슬픔이 많거늘 더구나 좋은 날에 무덤을 찾아가니 어떠할까 형제들이 어디에서 만날지 모르겠으니 멀리서도 고향의 붉은 수유와 노란 국화 향기 애틋하네 우연히 돌아갈 꿈을 꾸어 시름이 풀리고 겨우 편지를 받아 기쁨에 미칠 듯하네 변방의 기러기를 다 보내고도 사람은 떠나지 않으니 뜰 나무의 낙엽 소리 길어짐을 어찌 견디랴

118. 禁中述懷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聖君恩重此身微。欲報心將事事違。禁裏看花憐向日。山中採藥憶當歸。老吟苦作秋蟲咽。晩計催如夕鳥飛。蘿月松雲夜夜夢。夢時方是覺時非。

번역

성군의 은혜는 무겁고 이 몸은 하찮으니 보답하려 마음먹어도 일마다 어긋나네 궁궐에서 꽃을 보며 해바라기를 가련히 여기고 산중에서 약초 캐며 당귀를 생각하네 늙어 읊조림은 괴로워 가을 벌레가 우는 듯하고 만년의 계획은 서둘러 저녁 새처럼 날아가네 덩굴 달과 소나무 구름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니 꿈속에서야 비로소 깨어 있는 때와 다르구나

원문

柱笏凝思對翠微。吾何違世世吾違。狂圖自信我爲我。拙計云胡歸不歸。許老句吟雲北去。蘇翁心逐鵠南飛。羈人感興無今古。豈獨淵明悟昨非。

번역

서까래에 기대어 푸른 산을 바라보며 나는 어찌 세상을 거스리나 세상이 나를 거스리네 미친 계획은 내 자신을 위해 내가 하였고 졸렬한 계책은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허씨 노인은 구름 따라 북쪽으로 가고 소옹의 마음은 기러기 쫓아 남쪽으로 날았네 나그네의 감흥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어찌 도연명만이 지난날 잘못을 깨달았으랴

119. 昌原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8C

원문

太白山南智異東。還珠勝致似壺蓬。人家籬落千年碧。官舍門庭百日紅。元將候風行省廢。崔仙翫月古臺空。只今留與漁樵唱。一半平分屬醉翁。

번역

태백산 남쪽 지의동에 돌아온 구슬 같은 빼어난 경치 호봉과 같네 민가의 울타리는 천 년이나 푸르고 관사의 문정은 백일 동안 붉구나 원 장군이 바람을 기다리며 행차를 폐하고 최선생이 달을 즐기던 옛 누대 비었네 지금 남아서 어부와 나무꾼과 노래하니 절반은 평분하여 취옹에게 주노라

120. 次昌原野亭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8D

원문

尋幽曾未到林丘。先得楣題入案頭。柳市靑帘知酒熟。桃源紅浪見春浮。彈棋客倦仍看竹。護鶴童閑且牧牛。除却琴書料理外。不知何事惹淸愁。

번역

그윽한 곳 찾아본 적 없었건만 문미(門楣)의 시구 먼저 책상에 들이었네 버드나무 시장 푸른 휘장 술 익은 줄 알겠고 무릉도원 붉은 물결 봄이 온 걸 보겠네 바둑 두는 손님 지쳐 대를 보고 있고 학을 지키는 아이 한가로이 소를 먹이네 거문고와 책으로 일상을 보내는 것 말고는 무슨 일로 맑은 시름 일으키는지 모르겠네

원문

柳家亭子跨高丘。十里平臨遠樹頭。水面日華晴灎灎。山腰嵐氣晩浮浮。穿花飛見將雛鳥。臥草鳴知失犢牛。笑我倥偬無日了。若爲歸去滌煩愁。

번역

버드나무 집이 높은 언덕에 걸쳐 있고 십 리 평야가 먼 나무 끝까지 펼쳐졌네 물 표면엔 햇빛이 맑게 일렁이고 산허리엔 안개가 저녁에 떠다니네 꽃 사이로 나는 새는 새끼를 데려가는 듯하고 풀 속에 누운 소는 송아지를 잃은 줄 아는 듯하네 바쁘기만 하고 끝날 날 없는 나를 비웃으니 돌아가서 번뇌를 씻어내고 싶구나

121. 晴後偶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幽人春惱日高眠。覺後開窓霽色鮮。山聳玉峯褰宿霧。柳搖金線帶朝煙。王孫歸恨年年草。遊女新粧步步蓮。遙憶故園千萬里。不堪回首白雲邊。

번역

은자는 봄날의 괴로움에 날마다 늦게까지 자고 깨어난 뒤 창을 열면 갠 하늘이 선명하네 산은 옥봉처럼 우뚝 솟아 밤 안개를 걷어내고 버들은 금실처럼 흔들리며 아침 안개를 두르네 왕손은 해마다 돌아가지 못함을 한스러워하고 기생은 새로 단장하고 걸음걸음 연꽃을 밟네 멀리 천 리 고향을 생각하니 흰 구름 가로 돌아볼 수 없어 견딜 수 없네

122. 奉別咸鏡監司。次洪同知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臥病無由餞郭門。小牋惟有贈君言。承宣會見民風化。籌策須令國勢尊。此日去留靑鬢改。曩時蹤跡白山存。自憐衰拙終何用。窮巷平居亦□聖恩。

번역

병석에 누워 성문을 떠나보낼 길이 없어 작은 종이에 그대에게 줄 말만 적어 보내네 승지는 백성의 풍속과 교화를 살피고 계책을 세워 나라의 위세를 높여야 하리 오늘 떠나고 머무는 사이에 검은 머리 세었으니 지난날 자취는 백산에 남아 있겠지 가련하게도 늙고 졸렬한 나는 끝내 무슨 쓸모가 있을까 궁벽한 곳에서 평범하게 지내는 것도 성은이로다

123. 李德哉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少年文字爭名日。壯歲干戈倡義時。萬死一生君與我。交情別意酒兼詩。箕城跡半魂先往。灣館盟寒恨獨遺。忍想金郊停使節。三呼聲斷鄭同知。

번역

소년 시절에는 문자로 명예를 다투었고 장년 시절에는 창칼로 의기를 드날렸네 죽음 앞에서도 생명을 아끼지 않은 그대와 나 우정 나누고 이별할 때 술과 시를 곁들였지 기성에서 남은 자취는 반쯤 혼이 먼저 갔고 만관의 맹세는 추운 한을 홀로 남겼네 차마 금교에 사신이 머물던 일 생각하노니 정 동지의 세 번 부르짖음 소리 끊어졌구나

124. 射虎石〔原注:赴燕時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9B, ITKC_MO_0284A_A071_109C

원문

猿臂將軍夜獵歸。馬前何物見依俙。山東羊起初疑是。圯上人行近却非。乍似負嵎寧畏逐。漸成當道可能揮。若令驢見應輸技。卽有狐來定假威。目駭只憑吾手法。膽麤那失此心機。抽來金僕流星閃。彎罷烏號落月輝。霹靂應絃傳谷響。鬼神隨鏑擺林霏。妙穿何用誇徒搏。大獵非關作合圍。但道毛蟲能飮羽。豈知山骨本成磯。三重洞甲人猶鮮。一發連豝古亦稀。勇奪爪牙思卽壯。射開金石理何依。氣通物我元無間。誠貫堅頑故不違。須信揮戈回返景。莫疑流血濺空衣。如何介石精誠在。畢竟分茅命道微。胡塞自裁人共惜。漢恩偏薄史猶譏。蘇卽屬國非羝乳。金虜封侯但馬肥。帝有雄才猶失將。石非神物獨知幾。千秋霧隱留遺跡。一片雲根對夕暉。往事至今如過鳥。行人弔古駐驂騑。若爲化作燕然石。銘記當年漢將飛。

번역

원비장군이 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말 앞에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보이누나 산동의 양인 줄로만 처음에는 의심했더니 이상의 사람인 듯하다가 가까이 보니 아니네 처음엔 등산에서 쫓겨나는 걸 두려워하는 듯하더니 점차 길을 가로막아 휘두를 수 있겠는가 싶구나 만약 나귀가 봤다면 응당 기술을 바쳤으리니 곧바로 여우가 와서 위세를 부렸으리라 눈이 어지러워도 내 솜씨에 의지할 뿐이니 담력이 거칠어 어찌 이 심계(心機)를 잃겠는가 금복을 뽑아 들자 유성이 번쩍이고 활을 당기니 오호가 달빛 속에 떨어지네 피뢰 같은 활시위 소리는 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귀신이 화살 따라 숲의 안개를 흔드누나 묘한 솜씨를 어찌 힘만 과시할 필요 있겠는가 대사냥은 포위망을 치는 것과 관계없네 다만 모충이 날개를 먹을 수 있다 말했을 뿐 산골이 본래 바위가 된다는 걸 어찌 알았으랴 삼중동갑은 사람 중에 드물고 한 발에 연총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었지 용맹하게 발톱과 송곳니를 빼앗으니 생각이 장대하고 금석을 뚫어버리니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기운이 물아와 통하니 본래 간격이 없고 정성이 견고함을 꿰뚫으니 본디 어긋나지 않네 반드시 창 휘두르며 해 저무는 걸 돌려보내야 하니 피가 옷에 튀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어찌하여 석공의 정성이 있었던가 끝내 초막을 나누고 목숨을 바쳐 도를 전했네 오랑캐 땅에서 스스로 다스리니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한나라 은혜가 박하니 역사에서도 비난하네 소국은 속국이라 젖을 먹지 못했고 금로의 봉후는 그저 살진 말뿐이었네 황제에게 큰 재주 있어도 장수를 잃었으니 석공이 신물이 아니면 어찌 알았으랴 천 년의 안개 속에 유적만 남았고 한 조각 구름 뿌리에 석양을 마주하네 지난 일은 지금 지나가는 새와 같아 행인은 옛일을 애도하며 수레를 멈추네 만약 연연석으로 변한다면 당년 한나라 장수의 비행을 기억하리라

125. 白首同夜直〔原注:文臣庭試壯元〕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09D

원문

憶昨南遷我與公。溪山咫尺占西東。襟期共付淸尊美。肝膽同憑古劍雄。浪跡久嘆宣室遠。策名今復紫宸通。南鱗北羽中年別。畫省香爐此夜同。千里外愁談笑裏。十年前事夢魂中。憂時已白千莖髮。戀主猶丹一片衷。奇遇正如披霧隔。生還自是荷天聰。開襟宛對黃樓月。乘興還思赤壁風。御燭分光來玉殿。仙壺賜醞出金宮。皇恩欲報知無路。坐數殘更浪撫躬。

번역

지난날 남쪽으로 옮겨갈 때 공과 함께했으니 계곡 산이 지척에 있어 동서로 차지했네 마음은 맑은 술잔에 함께 부치고 간담은 옛 검의 용맹함에 함께 의지했네 떠도는 자취는 궁궐이 먼 것을 오래 탄식했고 이름을 올리니 이제 다시 황궁과 통하네 남쪽 물고기와 북쪽 새처럼 중년의 이별이었는데 화성에서 향로를 피우며 오늘 밤 함께하네 천 리 밖에서 시름겨워 담소하는 가운데 십 년 전의 일은 꿈속에 있네 시국을 근심하여 머리칼이 온통 세었고 임금을 그리워해 마음 한 조각이 붉네 기이한 만남은 마치 안개를 헤치고 만난 듯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하늘의 총명함 덕분이라네 가슴 열어 황루의 달을 마주하고 흥에 겨워 도리어 적벽의 바람을 생각하네 촛불을 나누어 빛내며 옥전으로 오고 신선 술병에 술을 따라 금궁에서 나오네 황은을 갚으려 하나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앉아 남은 밤을 세며 부질없이 몸을 어루만지네

126. 宣宗大王挽章代述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0A, ITKC_MO_0284A_A071_110B

원문

大德端宜景命膺。飛龍九五覩時乘。迪知先業投艱大。粤自初年倍戰兢。躬御萬機無暇日。身居九闕若春氷。盡忠納誨資帷幄。論道經邦責股肱。致理務令和氣在。措時期見大猷升。宸誠不隔封疆限。帝眷偏承錫賚增。寶典兼宣十行詔。龍袍又下九霄層。三韓均慶彝倫敍。萬姓同欣顯號稱。誰道吉凶惟所召。爭如否泰有相仍。鯨奔暫駭風波動。電掣旋看宇宙澄。聖德玉成休式至。皇恩天覆感何勝。只緣大義尊中夏。竟致丕基有再興。鳳駕不因梧野狩。龍樓已哭杞天崩。有臣誰效金縢卜。遺命昭垂玉几憑。閟殿重修昌德闕。幽宮側近健元陵。微臣譾薄承知遇。禁闥趨蹌記昔曾。銅佩幾年欺老病。銀臺中歲赴恩徵。承宣南服誠非分。奔哭初哀痛未能。殿上載瞻新日月。眼中猶是舊觚棱。幸今聖孝光前烈。惟祝靈圖萬萬承。

번역

큰 덕이 마땅히 성군을 맞이하니 비룡이 구오의 때를 만나 오르네 선대의 업적으로 큰 고난에 투신하여 초년부터 더욱 두려워하며 조심했네 만기를 직접 다스리느라 한가한 날 없고 구궐에 거처함은 봄 얼음과 같구나 충성을 다해 간언을 올리고 도리를 논해 나라를 경영하니 이치를 다해 화기가 있음을 힘쓰고 시기를 잘 살펴 큰 계책을 내었네 성상의 정성은 변방까지 막힘없고 황제의 은총은 특별히 더해 주었네 보전과 함께 열 가지 조서를 선포하고 용포를 또 구천에서 내려주었네 삼한이 균등하게 경사를 누리고 만백성이 똑같이 기뻐하며 칭호 부르네 누가 길흉이 부름에 달렸다고 말했나 어찌 태평과 불행이 서로 이어짐 같으랴 고래가 내달리듯 잠시 바람에 흔들렸으나 번개가 치듯 이내 우주가 맑아졌네 성덕이 완성되어 휴식이 이르렀고 황은이 하늘처럼 덮여 감격이 어찌 크리오 다만 대의가 중화에 존중받아 마침내 큰 터전이 다시 일어났네 봉황 수레는 오야에서 사냥하지 않고 용루에서는 기천이 무너짐을 곡하네 신하 중에 누가 금저의 점을 흉내 내랴 유명은 밝게 옥궤에 드리워졌네 창덕궁에 궁전을 중수하고 건원릉 옆에 궁을 지었네 미천한 신이 총애를 입어 대궐에 달려가 예전 일을 기억하네 동패 차고 몇 해나 노병을 속였던가 은대에 중년에 은총으로 부름받았네 남쪽에서 승지 된 것 참으로 분수에 넘치니 초기에 슬픔이 컸으나 애통해하지 못했네 대궐에서 새 해를 바라보니 눈에는 여전히 옛날 모습이 보이네 다행히 지금 성상의 효성이 선대의 공적을 빛내니 영령의 도모가 만만하게 이루어지길 축원하네

127. 玉顏不及寒鴉色〔原注:七歲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憶妾承恩日。自比雲間月。一朝有凋歇。不及寒鴉色。寒鴉朝復暮。尙帶昭陽日。回光不照妾。淚向西風落。思君君不來。落葉空階夕。

번역

첩이 은총을 입던 날을 생각하니 구름 사이의 달과 같았네 하루아침에 시들고 쇠하여 찬 까마귀 빛만 못하구나 찬 까마귀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여전히 소양의 해를 띠었건만 돌아오는 빛은 나를 비추지 않아 눈물은 서풍을 향해 떨어지네 그대를 생각해도 그대는 오지 않고 낙엽 지는 빈 뜰에 저녁이 깊어 가네

128. 叱石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0C

원문

金華山中牧羊兒。乃在金華山下宅。一朝牧羊山中去。誤飧金光草鍊魄。兄曰嗟余季不歸。羊亦何之日之夕。尋惟見季未見羊。春草阿池自在碧。阿兄不料弟已仙。那識羊今化爲石。山東僵臥是我羊。我羊我叱仍揮策。須臾犖确變長髥。非復從前齒齒白。三百維群一時起。誰謂無羊牛可易。羊初化石但莓苔。石反爲羊更毛革。仙家羊石幻形神。世界日月成今昔。千年遺跡歸亡羊。石耶羊耶竟何擇。圯橋爲人北平虎。一般怪說疑難釋。

번역

금화산 속의 목동 아이가 금화산 아래 집에 살았네 어느 날 양을 치러 산속에 갔다가 우연히 금빛 풀을 먹고 혼이 빠졌네 형이 말하길 아, 내 동생 돌아오지 않으니 양도 어찌 가고 오나 하는 날 저녁 동생은 보이지 않고 양도 보이지 않네 봄풀 우거진 못에 푸르름만 남았는데 아 형은 동생 이미 신선 된 줄 몰랐네 어찌 알았으랴 양이 이제 돌로 변한 것을 산동의 굳은 시체가 바로 내 양이라 내 양을 꾸짖고 채찍 휘두르니 잠시 후 뿔이 자라고 수염이 길어지며 다시 예전처럼 이가 하얗지 않네 삼백 마리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니 누가 양 없다고 소와 바꾸려 했나 양은 처음 돌로 변해 이끼만 끼었는데 돌이 다시 양 되어 가죽과 털 생겼네 신선의 양과 돌은 형체와 정신을 바꾸니 세상의 해와 달이 예전과 같구나 천년의 유적에 망한 양 돌아오니 돌인가 양인가 끝내 무엇을 택할까 무너진 다리 사람으로 북평의 호랑이 되었으니 일반적인 괴이한 말로 의문 풀었네

129. 月明花落又黃昏〔原注:十四歲。陞補壯元。〕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0D, ITKC_MO_0284A_A071_111A

원문

簾垂金屋燕舞罷。日落紗窓初掩門。佳人眉斂薄暮愁。獨倚雕欄含淚痕。思君不忍見明月。落花何更飄黃昏。花辭故條似妾身。月有盈虧同主恩。圓光一虧幾時盈。落紅辭條難可援。離心觸物結長想。脈脈暗銷相思魂。窓前久斷鳳輦來。玉階寥落靑苔繁。今宵還對昨夜月。去年花發今年園。花開無限月明多。幾度孤房悲隻䲮。銀甁誰引斷繩後。晝燭恨殺殘生存。前庭歌吹後庭舞。別有何人隨至尊。看花趁月樂未央。深院誰知孤妾冤。那堪門外度金輿。悵望空自臨高軒。瑤琴彈罷夜又深。落月依依花不言。

번역

금옥의 집 휘장 내리고 제비 춤도 그쳤는데 해 저문 사창에 문을 막 닫았네 미인 눈썹 찌푸리니 저녁이 깊어 시름겨워 홀로 조각 난 난간 기대어 눈물 자국 남기네 그대 생각에 밝은 달 차마 볼 수 없으니 지는 꽃은 어찌 다시 황혼에 날리는가 꽃이 가지를 떠남은 내 처지와 같고 달의 차고 기욺은 임금 은혜와 같네 둥근 빛 한 번 이지러짐에 언제나 차오를까 떨어지는 꽃잎 가지 떠남은 되돌리기 어렵네 이별의 마음 사물에 닿아 긴 생각 이어지고 그리움에 가만히 몰래 혼을 녹이네 창 앞에 봉련이 오지 않은 지 오래라 옥계단 쓸쓸하고 푸른 이끼 무성하네 오늘 밤 다시 어젯밤 달을 마주하니 작년 꽃 피던 곳 올해도 정원이라네 꽃은 한없이 피고 달은 밝기만 한데 몇 번이나 외로운 방에서 슬피 홀로 울었나 은병에 누가 끊어진 줄로 물을 끌어오나 낮에 촛불 태우는 것 남은 생애가 한스럽네 앞뜰엔 노래하고 뒷뜰엔 춤추니 누가 따로 임금을 따르는가 꽃 보고 달 보며 즐거움이 끝없으니 깊은 궁궐에서 외로운 첩의 원통함을 누가 알까 어찌 견딜 수 있나 문밖으로 지나가는 금여를 서글피 바라보며 부질없이 높은 수레에 오르네 거문고 연주 마치니 밤은 더욱 깊고 지는 달은 아련하고 꽃은 말도 없네

130. 代蘇武招李陵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1B, ITKC_MO_0284A_A071_111C

원문

吁嗟吾友李少卿。許國忘身君所能。時乎不利事已謬。往者難追來可懲。招招胡不早歸來。轉禍爲福時宜乘。君家秦隴勁氣饒。況是飛將之雲仍。橫戈萬里入虎穴。有如雲路楊秋鷹。天兵五千負義勇。虜騎十萬誇驍驣。強呑弱肉勢不敵。報國初心空撫膺。寧從衛律保軀命。誓與曺沫同名稱。常刑無奈毋隨坐。聖主何私應見矜。陰山自隔漢日光。杞人已哭皇天崩。忠君孝親兩孤負。歲月坐與羈憂增。無人知子況知心。知子知心惟爾朋。人皆見疑我見招。子如不信吾誰憑。千言不如忠告切。十行何須恩詔徵。君來不來言不再。爲君聊亦陳吾曾。爲俘敢言臣節全。辱命宜將王法繩。殘生不與朝露晞。大牢來謁先皇陵。招降曾蔑陸賈功。爵賞先於雍齒憎。朝廷本非薄功臣。如子何疑雲路登。歸爲漢臣否爲夷。忍荷氈毳遺紈繒。天山自古三丈雪。翰海無春千尺氷。終南渭水夢見未。只今花柳韶光凝。依風馬性固莫奪。向日葵心猶有恒。人情豈可不如物。想子心懷悲不勝。羝羊不乳亦可歸。望鄕高臺君莫升。來時豫將書報我。白雁不阻關山層。相迎重把別時衣。十九年事歸挑燈。與君同慰太史公。尊中有酒深如澠。

번역

아, 나의 벗 이소경이여 나라를 위해 몸을 잊는 것이 그대의 능력인데 불리한 때에 일을 잘못하였으니 지난 일은 되돌리기 어렵고 앞으로 징계할 수 있네 왜 부르는데도 일찍 돌아오지 않는가 화란을 복으로 바꾸기에 적절한 시기이네 그대 집안은 진나라와 농나라의 굳센 기운이 넘치니 더구나 비장(飛將)의 후예임에랴 창을 비껴 들고 만 리를 호랑이 굴로 들어가니 마치 구름 길을 나는 매와 같네 천병 오천은 의로운 용기를 지녔고 오랑캐 기병 십만은 사나움을 자랑하네 약한 고기를 강제로 삼키는 것은 형세가 대적할 수 없으니 나라에 보답하려던 초심을 공연히 가슴만 쓸어내네 차라리 위율(衛律)을 따라 목숨을 보전하겠는가 맹세코 조말과 같은 이름을 지니고 싶네 상형은 어쩔 수 없어 함께 앉지 말아야 하니 성군이 어찌 사사로이 가엾게 여기시겠는가 음산은 한나라의 햇빛을 스스로 막았고 기인은 이미 황천이 무너짐을 곡했네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성을 둘 다 저버렸으니 세월 속에 갇힌 근심만 더해지네 아무도 그대를 모르는데 하물며 내 마음을 알겠는가 그대와 내 마음을 아는 이는 오직 그대뿐이네 사람들은 모두 의심하지만 나는 부르니 그대가 믿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랴 천 마디 말보다 충고가 절실하니 열 줄의 글에 어찌 은혜로운 조서를 요구하겠는가 그대가 오든 안 오든 다시 말하지 않으리니 그대를 위해 내 지난 일을 진술하네 포로가 되어도 감히 신하의 절개 온전하다 말하고 명령을 어기면 마땅히 왕법으로 다스려야 하네 남은 목숨이 아침 이슬에 마르지 않으니 큰 감옥에서 와서 선황릉을 배알하리라 항복을 권한 것은 육가의 공적보다 못하고 작위의 상은 옹치의 증오보다 앞섰네 조정은 본래 공신을 박대하지 않으니 그대 같은 사람이 어찌 구름 길에 오르기를 의심하는가 돌아와 한나라 신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오랑캐가 될 것인가 차마 오랑캐의 털옷과 비단 옷을 입겠는가 천산은 예로부터 세 자나 눈이 쌓였고 한해에는 봄이 없어 천 척이나 얼음이 얼었네 종남산과 위수는 꿈에서 보지 못했는데 지금 꽃과 버들은 화창하게 피었네 바람에 의지하는 말의 성질을 빼앗을 수 없지만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의 마음은 변함이 있네 사람의 정이 어찌 사물만 못하겠는가 그대의 슬픈 심사를 생각하니 견딜 수 없네 숫양은 젖을 내지 않아도 돌아갈 수 있으니 고향을 바라보는 높은 대에 그대는 오르지 말게 올 때 미리 편지로 나에게 알리라 흰 기러기는 관산의 겹겹을 막지 않으니 맞이할 때 거듭 이별할 때 입었던 옷을 입으리라 십구 년의 일을 등불 아래에서 돌이켜보니 그대와 함께 태사공을 위로하네 술잔 속에 술은 깊어 샘물 같네

131. 宋宗正卿士䮍請以百口。保岳飛無他。〔原注:十六歲作〕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1D, ITKC_MO_0284A_A071_112A ...

원문

成績紀于常。四字旣勤於嘉乃。在絏非其罪。百口願保其無他。冀全喪元之忠。敢進瀝肝之說。竊觀元帥之分閫。罕免賊臣之妨功。五月宜陽。甘茂困挾韓之議。三年卽墨。樂毅罹王齊之讒。苟或信譖而受誣。終必殺將而覆國。欽惟皇帝陛下。生當漢厄。志興周衰。痛九廟覆沒腥膻。抱氷握火之匪懈。憤二聖播越沙漠。寢苫枕戈之敢忘。肆切聽鼓之思。益擇授鉞之任。顧惟岳飛爲將。實是國士無雙。密勿心上之六韜。鬼神膽破。磊落胸中之萬甲。戎虜心寒。豈但才略之敻超。抑亦忠節之卓冠。漢賊兩立。生有愧於戴天。夷險一心。死無憾於裹革。爭追六月之薄伐。式總群后而徂征。濯濯靈赫赫聲。功已收於破竹。井井旗堂堂陣。勢有同於建瓴。所復之期。日月可待。何圖賣國之巨慝。竟搆匪躬之孤忠。陷陣摧鋒。岳爺之呼未訖。下機投杼。曾母之惑滋深。尺籍飛詔於天門。寸忱抱冤於牢獄。大義凜凜於敵愾。質神明而無羞。精誠耿耿於勤王。與日星而同炳。兹難掩乎十目。矧敢誣於四聰。故微臣事君勿欺。義當伸其見枉。苟聖上謂余不信。罪罔赦於惟均。肆冒宗族之夷三。庸保忠貞之不二。一言不能悟主。固知口舌之難爭。至誠庶幾回天。敢避骨肉之隨坐。況此良將之存沒。實關宗社之安危。挫銳老師。鄭軍沮右抽之勇。偸安忘戰。漢儀易左袵之風。爲忠寧自謀身。惜賢所以衛國。臣伏望察講和之釋怨。念云亡之殄邦。特錄十世宥之勳。曲從百口保之請。則萬里之長城不毀。何有縮境之憂。五丈之妖星未隳。可期復彊之績。臣謹當忘私徇國。以人事君。荷生死肉骨之恩。竊期隕首而圖報。仗討賊復讎之義。佇見獻馘而伸威。

번역

성적은 항상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니, 네 글자가 이미 아름다움에 부지런히 힘쓰고 있습니다. 밧줄에 매인 것은 그 죄가 아니니, 모든 입이 다른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원나라를 무너뜨린 충성을 온전히 보존하기를 바라며 감히 간담을 다하는 말을 올립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수(元帥)의 분권(分閫)은 적신의 방해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5월에 의양에서 감무(甘茂)는 한나라와 협력하자는 논의로 고생하였고, 3년 동안 즉묵에서 낙의(樂毅)는 제왕의 참소에 걸려들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무함을 믿어 누명을 쓴다면 끝내 반드시 장수를 죽이고 나라를 뒤엎을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한나라의 재앙을 당하여 주나라의 쇠퇴를 일으키고자 하셨습니다. 구묘(九廟)가 무너져 피비린내가 나는 것을 통탄하여 얼음을 안고 불을 잡는 듯한 노고를 게을리하지 않으셨고, 두 성인이 사막에 흩어진 것에 분노하여 잠자리와 베개에 창을 두고 감히 잊지 않으셨습니다. 북소리를 듣는 것을 간절히 생각하시어 더욱 권력을 맡길 임무를 가려 뽑으셨습니다. 돌아보건대, 악비(岳飛)가 장수가 된 것은 실로 나라의 선비 중 둘도 없는 인물입니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육도(六韜)는 귀신조차 두려워할 것입니다. 가슴속에 웅대한 만갑의 기상이 있어 오랑캐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어찌 재략이 뛰어난 것뿐이겠는가. 또한 충절이 우뚝한 것이기도 하다. 한족과 오랑캐가 양립하는 세상에서 살아서는 하늘을 이고 있는 데에 부끄러움이 있었고, 험난한 곳에 마음을 두어 죽어서는 가죽에 싸여도 유감이 없었다. 육월의 박벌(薄伐)을 다투어 추격하여 여러 후예를 총괄하고 정벌에 나갔다. 빛나는 영령과 혁혁한 명성은 파죽지세로 공을 거두었고, 질서 정연한 깃발과 당당한 진영은 건령(建瓴)과 같은 형세였다. 회복할 시기는 일월이 기다릴 만하였는데, 어찌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큰 간사한 무리가 끝내 자신과 상관없는 외로운 충성을 꾸며내어 진영을 함정에 빠뜨리고 창끝을 꺾었는가. 악야의 부름은 끝나지 않았고, 증모의 의혹은 더욱 깊었다. 천문(天門)에 조서를 보내고 감옥에서 원통함을 품었으며, 적의 위협 속에서도 대의를 늠름히 지켜 신명에게 물어도 부끄러움이 없었고, 임금을 구하는 정성이 성실하여 해와 별처럼 빛났다. 이것을 어찌 열 눈으로 가릴 수 있겠으며, 하물며 감히 네 귀로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미천한 신은 임금을 섬기되 속이지 않으니 의리상 굽힌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진실로 성상께서 저를 믿지 않으신다면 죄는 균평함에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감히 종족의 세 가지 잘못을 무릅쓰고 충정의 두 가지를 지키고자 합니다. 한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치지 못하니 참으로 입과 혀로는 다투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돌리려 하니 감히 골육이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 훌륭한 장수의 생사 여부는 실로 종묘사직의 안위에 관계됩니다. 예봉을 꺾은 노사는 정군(鄭軍)이 우추(右抽)를 제압한 용맹이었고, 편안함을 도모하고 싸움을 잊은 것은 한의(漢儀)가 좌석(左袵)을 바꾸어 놓은 풍도였습니다. 충성으로 몸을 보전하려 하니 어진 이를 아끼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바라건대, 화해를 살피고 원한을 풀어 주시며, 죽은 자를 생각하여 나라를 멸망시키지 마시고, 특별히 십세유(十世宥)의 공훈을 기록하고 백구보(百口保)의 청을 곡진히 따르소서. 그러면 만 리의 장성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국토가 줄어들까 걱정하겠습니까. 오장(五丈)이나 되는 요망한 별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니, 나라를 다시 강하게 할 공적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신은 삼가 사사로운 마음을 잊고 나라에 충성하여 임금을 섬기면서 생사를 아끼지 않는 은혜를 입었으니, 머리를 바쳐 보답하기를 꾀하고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의리에 힘써서 머리를 바치고 위엄을 떨치는 것을 바라겠습니다.

132. 擬漢王拜韓信大將制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2D, ITKC_MO_0284A_A071_113A

원문

先入定關中。失吾當王之地。必欲取天下。非爾爲將而誰。肆命摠戎。且與分閫。惟爾腰帶一劍。胸蟠六韜。屠中少年。豈知出袴之勇。城下漂母。早識垂釣之風。當群雄起而亡秦。挺七尺薄言歸楚。莫己知斯可已矣。豎子何足與謀。自遠來不亦樂乎。寡人願安承敎。頃緣項氏之背約。有此漢地之移封。南鄭之道途漸遙。秦塞望千重之樹。西蜀之風土自別。碭山夢五彩之雲。士多思歸于東。爾亦相失在後。方深不予追之歎。賴有爲王留之人。相臣薦其無雙。非因景監而進。將才擢爲第一。合在廉頗之先。念今草創之儀。矧予素慢無禮。幸卜丈人其吉。寧若小兒之呼。契合之深。豈但言聽計從而已。禮遇之盛。當如擁篲推轂者然。玆以吉日。設壇具禮。拜爾爲大將軍。爾其悶予鬱鬱久居。效爾多多益辦。風雲龍虎。以人傑而運神機。士馬財糧。用天府而因地利。待時而動。指日爲期。開玉壘之重關。出金牛之故道。重修函谷。萬全據祖龍之墟。直擣彭城。一擧蕩沐猴之窟。江中之冤可雪。天下之望攸歸。然後仆趙脅燕。擒魏下齊而稱臣。沿江逾洛。浮淮達河而來貢。則爵賞非所惜也。富貴當與共之。漢業億萬年。天子譬北辰之居所。楚地六千里。丈夫卽南面而稱孤。弼予一人。勖哉夫子。嗚呼。殆天所授。得一韓於軍中。莫我敢承。無三秦於眼底。試看今日之拜將。可使永世而賴功。

번역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가서 내 왕이 될 땅을 잃었으니, 반드시 천하를 취하고자 한다면 네가 장수가 아니면 누구겠느냐. 명령을 내려 군사를 총괄하고 또 지방관을 나누어 주노라. 오직 너의 허리에는 한 자루 검이 있고 가슴에는 육도(六韜)가 묶여 있으니, 도살장 속의 소년이 어찌 바지를 벗고 나가는 용기를 알겠으며, 성 아래 떠도는 어머니가 일찍이 낚시하는 풍모를 알았느냐. 군웅들이 일어나 진(秦)을 망치려 할 때에 일곱 자의 가냘픈 몸으로 초(楚)로 돌아갔으니, 스스로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함을 알지 못했구나. 하찮은 자가 어찌 모의를 함께하겠는가. 멀리서 온 것이 또한 즐겁지 않으냐. 과인은 편안히 가르침을 받기를 원한다. 지난번에 항씨(項氏)가 약속을 저버린 일로 인해 이 한나라 땅을 옮겨 봉해 주었으니, 남정(南鄭)의 도로는 점점 멀어지고 진나라 변방은 천 겹이나 되는 나무를 바라보게 되었으며, 서촉(西蜀)의 풍토는 절로 다르고 소산(邵山)에서는 오색구름을 꿈꾸네. 선비들은 돌아갈 곳을 그리워하는데 너 또한 뒤에 남겨져 있으니, 바야흐로 깊은 탄식을 금할 수 없구나. 왕을 위해 남은 사람이 있어 상신이 그를 둘도 없는 인재로 추천하였다. 경감(景監)으로 인해 나아간 것이 아니니, 장수의 재주가 제일이라 함은 염파보다 앞서야 마땅하다. 지금 나라를 개창하는 의식에 더구나 내가 평소 무례한 점이 많으니, 다행히 장인에게 길일을 물어보았는데 어찌 어린아이의 부름과 같으랴. 깊은 계합(契合)이 어찌 말하고 듣고 계획하고 따르는 것뿐이겠는가. 성대한 예우는 마땅히 빗자루를 안고 수레바퀴를 미는 것처럼 해야 하리라. 이에 길일을 택하여 단을 설치하고 예를 갖추어 너를 대장군으로 삼는다. 너는 오랫동안 답답하게 지내던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해내도록 하라. 풍운과 용호(龍虎)는 인걸로써 신기(神機)를 운용하고, 군사와 양식은 천부(天府)를 써서 지리(地理)에 의거한다. 때를 기다려 움직이되 날짜를 정해 기한으로 삼고, 옥루의 중관을 열고 금우의 옛길로 나가 함곡관을 중수하여 조룡의 터에서 만전으로 거처하라. 곧바로 팽성을 쳐서 한 번의 거동으로 몽후의 소굴을 씻어 내면, 강 가운데의 원한이 씻기고 천하의 기대가 돌아올 것이다. 그런 뒤에 조협연(趙脅燕)을 굴복시키고 위하제(魏下齊)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게 하여, 강을 따라 낙양을 지나 회수와 하수를 건너 와서 공물을 바치게 한다면, 작위의 상은 아까울 것이 없으니 부귀는 마땅히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 한나라의 사업이 억만년 이어지리니 천자는 북극성 같은 자리에 계시고, 초나라 땅 육천 리에 장부들은 남쪽을 향해 외로운 임금을 부를 것이다. 나를 도와줄 한 사람으로 그대를 권면하니, 아아, 이는 거의 하늘이 주신 것이라 군중에서 한 명의 한(韓)을 얻었으니 감히 내가 받지 않을 수 없네. 눈앞에 삼진(三秦)이 없으니 오늘날 장군이 된 자를 보게나. 영세토록 공로를 의지할 만한가.

133. 集賢殿進八駿圖箋

문체: 公車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3B, ITKC_MO_0284A_A071_113C ...

원문

在天飛龍。仰聖祖之啓運。應圖駿馬。思神物之效勞。敢作新圖。庸徹睿鑑。竊惟祿去麗季。天生聖人。濟世安民。久有待於眞主。化家爲國。終能集乎大勳。玆因睿智之有臨。亦賴人物之協力。豈但攀鱗附翼之士。爭輸汗馬之功。所貴神行電邁之駒。能贊逐鹿之業。大小數百餘戰。出入千萬中軍。履險若平。向煩造父之爲御。惟意所向。不勞王良之執鞭。是與人爲一心。故收功於三捷。金軀玉體。保萬全於危途。鳳臆龍鬐。豈同腐於凡馬。不但稱美於當世。可使昭示於來今。矧惟地用之良。亦關天數而出。則知馬上功業。爲漢家四百年之傳。宜乎櫪下權奇。與煙閣廿八將爲列。猗歟顯楊之擧。屬兹繼述之朝。斯可緩乎。蓋有待矣。恭惟〔原注:主上殿下〕躬膺駿命。思纂鴻圖。持盈守成。用朽索而御六馬。賞功崇德。買死骨而捐千金。深惟創始之艱。益思股肱之美。遂於麒麟圖畫之日。亦推犬馬蓋帷之恩。爰命儒臣。俾擧繪事。伏念臣手乏弓馬之技。身忝文翰之官。馳騁戰場。縱眛射人先射馬之法。鋪張聖烈。庶免畫肉不畫骨之譏。叨此龍光。稱其驥德。丹靑雖倩於畫手。贊詠不遺於膚公。倘在燕閑。時賜乙覽。數叶羲皇之畫卦。永爲瑞世之珍光。增武帝之作歌。益紹序績之意。

번역

하늘을 나는 용이 성조(聖祖)의 계운(啓運)에 응답하고, 준마가 신물(神物)의 공로를 갚는 것을 생각하여 감히 새로운 그림을 그려서 성상의 안목을 밝히려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복록은 요순 시대 이후로 끊어지고 하늘이 성인을 내시니,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진주(眞主)를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이며, 가정을 교화하여 나라를 만드는 것은 마침내 큰 공을 모으는 것입니다. 이에 성상의 지혜가 임하고 또한 인물들의 협력이 있어 어찌 비늘을 붙잡고 날개를 타는 선비들만이 힘써 한마(汗馬)의 공을 바치겠습니까. 귀한 것은 신행전매(神行電邁)하는 준마가 쫓아 사슴을 잡는 일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수백 번의 전투에서 천만 중군(中軍)으로 출입하면서 험한 길을 평지처럼 다녔으니, 조부(造父)의 마부 노릇을 하듯 마음 가는 대로 가고 왕량(王良)이 채찍질하는 것처럼 애쓰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람과 한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세 번의 승리에서 공을 거두었고, 금빛 몸과 옥 같은 체구로 위태로운 길에서도 온전함을 보존하였으니, 봉황의 가슴과 용의 갈기가 어찌 범상한 말처럼 썩겠습니까. 당세에 미담으로 일컬어질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밝게 보이게 할 것입니다. 더구나 땅에서 쓰이는 좋은 말이 또한 천수(天數)에 관계되어 나오는 것이니, 준마의 공업이 한나라 400년의 전승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구간 아래의 뛰어난 말은 연각(煙閣)의 28장과 나란히 해야 하니, 아, 성상을 드러내고 빛내는 일이 이 계승하는 조정에 속했으니 어찌 늦출 수 있겠습니까. 대개 기다린 바가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원주: 주상 전하〕 준마의 명을 받들어 큰 계획을 세우시니, 성취한 것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낡은 밧줄로 여섯 마리의 말을 부리시고, 공을 상과 덕으로 높이기 위해 죽은 뼈를 사서 천금을 내어 주셨습니다. 창업의 어려움을 깊이 생각하시고 더욱 팔뚝 같은 준마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셔서, 마침내 기린도(麒麟圖)를 그리는 날에 또한 견마가 휘장을 덮어주는 은혜를 미루시어 유신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손이 궁마의 기술에 서툴고 몸은 문한(文翰)의 관직에 있으니, 전장에서 치달리면서 사람보다 말을 먼저 쏘는 법을 가르치거나 성렬을 포장하면서 살만 그리고 뼈는 그리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외람되이 용광(龍光)을 받들어 준마의 덕을 일컬으니, 그림은 비록 화공에게 맡기지만 찬양하는 것은 피부공(膚公)에게 남겨두지 않겠습니다. 혹시 한가한 때에 여러 번 보시고 희황(羲皇)의 획괘(畫卦)를 영원히 세상의 진귀한 보배로 삼으시고, 무제(武帝)의 작곡을 더하여 더욱 공적을 이어가는 뜻을 전하소서.

134. 孟軻謝問疾醫來箋

문체: 公車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4A, ITKC_MO_0284A_A071_114B

원문

固將朝也。調劑遽失於微軀。庶無疾歟。問視兼荷於殊眷。自天有命。無地措躬。伏念臣母遷敎。成師傳業就。乃所願學孔子。將爲聖人之徒。如或夢見周公。奈處戰國之世。人惟功利是尙。士皆楊,墨之流。何以聘幣爲哉。雖安貧賤於畎畝。亦惟仁義而已。乃欲堯舜其君民。滕公之問井徒勤。魏王之罪歲何責。君心足以王矣。齊國其庶幾乎。今樂古樂之言。深勸同好於百姓。小勇大勇之說。實欲匹休於三王。數問夜如何。其方待朝旣盈矣。詎意散樗之質。載罹采薪之憂。自公召之。行敢緩於俟駕。今日病矣。入莫遂於鞠躬。自懼宿命之誅。反紆欲生之愛。煩訊問於專价。能忘一人之尊。委診視於良醫。俾效三世之術。玉音一下。龍光倍增。豈惟弟子門生之驚惶。實爲大夫國人之矜式。矧惟已瘳之疾。不得祗承于家。鬼豎不入膏肓。非敢忌醫而諱疾。君命虛委草芥。正恐逾分而招尤。玆蓋伏遇大王。以父母憂疾之心。體天地好生之德。元首股肱爲一體。若痌瘝于乃身。爵位齒德通三尊。惟交際之必敬。至於勿藥喜之微恙。謬加不世有之異恩。臣敢不爲下克忠。事君盡禮。敬其主以及其使與坐。未效於宣尼。人無恒不可作醫承羞。常戒於易卦。

번역

본디 아침에 몸이 갑자기 조금 편치 않으시니, 병이 없으신지 여쭙고 여러 가지 일도 겸하여 부탁드립니다. 하늘의 명을 받아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의 어머니께서 전수받은 가르침을 이루어 공자를 배우기를 원하시어 성인의 무리가 되려 하셨습니다. 만약 꿈에서 주공을 뵙더라도 어찌 전국의 세상을 다스리겠습니까. 사람들은 오직 공리만을 숭상하고 선비들은 모두 양자(楊子)와 묵자(墨子)의 유파이니, 어떻게 예물을 바치겠습니까. 비록 가난한 생활을 편안히 여기더라도 또한 오직 인의뿐입니다. 요순처럼 군신이 되려 하니, 정공(滕公)이 우물을 파는 것만 부지런하고 위왕(魏王)이 세금을 거두는 것을 죄로 삼았으니, 임금의 마음으로 충분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제나라는 거의 그럴 듯합니다. 지금 고사를 즐기는 말은 백성들과 같은 취향을 깊이 권면하는 것이고, 소용과 대용에 관한 설은 실로 세 왕과 짝할 만큼 훌륭한 것입니다. 밤마다 몇 번씩 여쭙는 것은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어찌 초라한 자질이 채신(采薪)의 근심을 당할 줄 알았겠습니까. 공께서 부르시니 감히 수레를 기다리며 늦출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병이 들어 몸을 굽힐 힘도 없습니다. 숙명에 따른 벌이 두려워 도리어 살고자 하는 사랑으로 번거롭게 전인(專人)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존엄함을 잊고 좋은 의사에게 진찰을 맡겨 삼세의 의술을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성상의 말씀이 내려오니 용광이 배로 더해졌습니다. 어찌 제자들의 놀람뿐이겠습니까, 실로 대부와 나라 사람들의 본받음입니다. 더구나 이미 나은 병을 집에서 받들지 못하고 밖에서 치료받으니, 귀신이 고황(膏肓)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감히 의사를 꺼려 병을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의 명은 초개와 같아 분수를 넘는 일로 허물을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이는 대왕께서 부모의 근심하는 마음으로 천지의 생명을 아끼는 덕을 체득하여, 임금과 신하가 한 몸이 되어 내 몸에 가시가 돋은 듯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작위와 나이는 삼존(三尊)에 통하고 교제의 예절은 반드시 공경해야 하니, 약을 먹지 않아도 기뻐하는 작은 병에 세상에 없는 특별한 은혜를 잘못 베푸셨습니다. 신이 감히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기며 주군과 사신과 좌중에게 공경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니(宣尼)께 효험을 보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항구한 의술을 행할 수 없으니, 항상 《주역》의 괘에 경계합니다.

135. 倡義起兵。入守鏡城。後擊斬倭賊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4D, ITKC_MO_0284A_A071_115A ...

원문

自鐵嶺失守。西路阻絶。未聞□朝命爲白有如乎節。都巡察使兼觀察使金命元關字及□有旨段。路塞不通次。慶源府使吳應台,朱乙溫萬戶李希唐,玉連萬戶安沃,吾村權管具滉等。以持德萬洞村氓傳書。來到爲白有去乙。臣伏見□有旨。始知□行在萬安。七道倭賊幾盡勦滅。不勝感泣欣抃。罔極爲白齊。當初北方事段。去六月十二日。鐵嶺兵潰後。南道列邑軍民。罔有固志。望風奔散。仍致長驅之勢爲白去乙。上洛府院君臣金貴榮。徵兵北道爲白良在乙。北兵使韓克諴。亦所當領兵親赴事是白乎矣。適音六鎭諸胡伺釁嘯聚。將有腹背受敵之患乙仍于。兵使段。留鎭吉州。以爲南北聲援爲白遣。卽令斜卩洞權管高敬民。率精兵二百名。馳赴咸興。又令會寧府使李瑛。率精兵四百名。繼往北靑爲白有如乎。賊勢益熾。不能防遏。李瑛等兵。退踰磨天嶺。與北兵使合。兵一千餘名。軍于吉州臨溟地。接戰斬倭七級。富寧府使元喜。戰沒。妖言流聞。軍情益搖。北地精銳之兵。太半宵遁。翌朝。賊兵來襲。餘軍一時自潰。兵使以下僅以身免。欲退守鏡城爲白良置。人心已散。城內如掃。不得已李瑛段。欲守會寧。韓克諴段。欲守鍾城次。去七月二十三日分。會寧驛子李忠卿,親軍衛金世彥,鄕吏鞠景仁等。唱首作亂。□王子君兩分及上洛府院君金貴榮,長溪府院君黃廷彧,前承旨黃赫,宣□傳官趙仁徵,南兵使李瑛,會寧府使文夢軒,咸興判官李蕙等乙。捉給倭賊。自會寧作變之後。鍾城以北人心。幷爲離叛。至於北道虞候李範,穩城府使李銖,兵使韓克諴等。亦爲本道人所捉給乙仍于。其餘守令鎭將。爲其下所圖。不能自保。僅以身免。臣段置。亦爲土人所射。幾死得免。來在鏡城海村爲白有如乎。

번역

철령(鐵嶺)이 함락된 뒤로 서쪽의 길이 막혀서 조정의 명령을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순찰사 겸 관찰사 김명원(金命元)의 관문과 ○○의 뜻이 담긴 단자(段子)에, “길이 막혀 통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원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주을온(朱乙溫) 만호(萬戶) 이희당(李希唐), 옥련(玉連) 만호 안옥(安沃), 오촌(吾村) 권관(權管) 구황(具滉) 등이 지덕만동(持德萬洞)의 촌민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신이 ○○의 뜻이 담긴 단자를 보고서야 비로소 ○○께서 만안(萬安)에 계시며 일곱 도의 왜적을 거의 다 소탕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감사합니다. 당초 북방의 일은 지난 6월 12일 철령이 함락된 뒤로 남도(南道)의 여러 고을 군민들이 굳게 버티지 못하고 바람만 보고 달아나서, 그대로 장구(長驅)하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 김귀영(金貴榮)은 북도(北道)에 병사를 징집하여 백량(白良)이 을미년에 북병사(北兵使) 한극통(韓克諴)을 임명하였는데, 그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일을 처리해야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육진(六鎭)의 여러 오랑캐들이 틈을 노려 모여들어 앞뒤로 적을 맞이할 근심이 생겼습니다. 이에 병사 단(段)은 길주(吉州)에 머물러 북도와 남도가 서로 호응하도록 하고, 즉시 사필동(斜巓洞) 권관 고경민(高敬民)에게 정예병 200명을 거느리고 함흥으로 달려가게 하였으며, 또 회령부사 이영(李瑛)에게 정예병 400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북청(北靑)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적의 세력이 더욱 성하여 막을 수 없자 이영 등의 군사가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북병사와 합쳐서 1천여 명의 군사로 길주 임명(臨溟)에서 싸워 왜적 7급을 베었습니다. 부령부사 원희(元喜)는 전투 중에 전사하였습니다. 요망한 말이 퍼져 군심이 더욱 흔들렸습니다. 북쪽 지방의 정예병이 태반이 밤중에 도망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적병이 쳐들어오자 남은 군사들이 일시에 자중지란을 일으켰고, 병사 이하의 관원들은 겨우 목숨만 건져서 경성(鏡城)으로 물러나 백량치(白良置)를 지키려 하였으나 인심이 이미 흩어져 성안이 텅 비어 버렸습니다. 부득이하게 이영(李瑛)은 회령(會寧)을 지키고 한극(韓克)은 종성(鍾城)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7월 23일에 회령역자(會寧驛子) 이충경(李忠卿),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향리(鄕吏) 곡경인(鞠景仁) 등이 앞장서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 왕자군(王子君)과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승지 황혁(黃赫), 선전관 조인징(趙仁徵), 남병사 이영, 회령 부사 문몽헌(文夢軒), 함흥 판관(咸興判官) 이혜(李蕙) 등이 잡혀 왜적에게 넘겨졌습니다. 회령에서 변고가 일어난 이후입니다. 종성(鍾城) 이북의 인심이 모두 반역에 가담하였고, 북도 우후(北道虞候) 이범(李範),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주(李銖), 병사(兵使) 한극통(韓克諴) 등도 본도의 사람들에게 붙잡혀 윤영(乙仍)에게 넘겨졌습니다. 그 나머지 수령과 진장들은 아랫사람들의 모의에 의해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신하로 배치되었습니다. 또한 토착민들에게 총을 맞아 죽을 뻔하다가 면하여 경성(鏡城) 해촌(海村)으로 와서 백유여(白有如)와 함께 있습니다.

원문

鍾城府使鄭見龍前座首徐遂,時座首李麒壽,本府人安原,權管姜文祐,及第朴銀柱,前權管姜壽延,幼學崔配天,正兵姜壽遐,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訓戎僉使金磁,柔遠僉使李希良,美錢僉使金範,茂山萬戶李蘭,玉連萬戶安沃,朱乙溫萬戶李希唐,黃柘坡權管咸以良,吾村權管具滉,兵使軍官前監察吳命壽,前萬戶金龜長,訓鍊奉事許大任,內禁衛李彭齡,忠義李應雲,李貴瑞,定虜衛孫傑,羽林衛李應鸞,保人洪大連,鍾城府使軍官前萬戶崔慶元,忠義衛魚起瀛,前司僕嚴俊億,定虜衛鄭春氣,別侍衛李壽根,保人鄭時龍,保人李宗信,保人郭俟,鏡城軍官前內禁衛李鉉,穩城判官軍官定虜衛李光辰李天龍,柔遠僉使軍官前內禁衛金大寬,申士崔命玉申九鶴,訓戎僉使軍官定虜衛鄭勵,別侍衛李長亨金興福高永珍朴從禮,校生韓得朱德男,美錢僉使軍官別侍衛安德壽,甲士方仁鶴,忠順衛張鵬,甲士李贊,黃柘坡權管軍官別侍衛田興漑,保人崔龍潭,甲士李夢福,京來避亂人成均館權知學諭李成吉,前直長申石潾,生員申櫓,幼學李精瓈,幼學申桴申格,入居林廷彥,幼學申楣,書吏崔彥鵬,保人吳慶男吳應男等。遠近來會與臣共謀倡義。今九月十六日。入守鏡城。倉穀城池。倭賊久留板蕩之餘。徐遂,李麒壽及官奴等。收其餘燼。封閉修輯。以待臣等爲白有齊。本月十八日巳時量。吉州留屯倭賊九十二名。奄至城下。有一倭將意謂如前。突入城門爲白去乙。美錢僉使金範所領官奴鞠生。以劍斫臂。其父官奴世弼。扶執下馬。仍爲生擒。梟示軍中爲白遣。其餘段。列立城底爲白有去乙。金範及朱乙溫萬戶李希唐。多數發射。中賊中馬爲白良沙。始爲退還爲白去乙。安原權管姜文佑倡首。吾村權管具滉,朱乙溫萬戶李希唐等十五名。自願追擊。與本土及第前萬戶金大振。中路相逢。幷力追至一息餘程。合戰十餘度。多數射中倭賊。載屍奔北。流血濺道。馬匹及衣服雜物乙。幷爲棄走。姜文佑斬首二級。因日昏未得窮追爲白有齊。同斬馘割耳二級段。由山路。觀察使道以己爲上使爲白有齊。本府土兵前別侍衛庾億壽,入居甲士李泰玉等。當初倭賊據城時。奮不顧身。射殺倭賊。埋置爲白有如可。臣入城後。庾億壽段。二級。李泰玉一級。正兵姜得璜一級。幷其所奪環刀。來納爲白齊。道內慶興,慶源等地藩胡與深處諸酋。一時傳箭。慶興府及所管四堡。全數陷掠。民人殆盡爲白是沙餘良。慶源所管阿山,乾元二堡及古阿山,古乾元倉,有信倉,海倉,穩城德明倉,德山倉,海倉,鍾城俯溪長豐里方山里鹿野倉,造山里海倉,會寧櫟山倉,古卽巨里倉等。亦盡爲搶掠爲白有去等。新集散卒。

번역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전 좌수 서수(徐遂), 시좌수 이기수(李麒壽), 본부 사람 안원(安原), 권관 강문우(姜文祐), 급제 박은주(朴銀柱), 전 권관 강수연(姜壽延), 유학 최배천(崔配天), 정병 강수하(姜壽遐), 온성 판관 이눌(李訥), 경원 판관 오언량(吳彥良), 훈융 첨사 김자(金磁), 유원 첨사 이희량(李希良), 미전 첨사 김범(金範), 무산 만호 이란(李蘭), 옥련 만호 안옥(安沃), 주을온 만호 이희당(李希唐), 황작파 권관 함이량(咸以良), 오촌 권관 구황(具滉), 병사 군관 전 감찰 오명수(吳命壽), 전 만호 김귀장(金龜長), 훈련 봉사 허대임(許大任), 내금위 이팽령(李彭齡), 충의군 이응운(李應雲), 이귀서(李貴瑞), 정로위 손걸(孫傑), 우림위 이응란(李應鸞) 보인(保人) 홍대련(洪大連), 종성부사 군관 전 만호 최경원(崔慶元), 충의위 어기영(魚起瀛), 전 사복시 엄준억(嚴俊億), 정로위 정춘기(鄭春氣), 별시위 이수근(李壽根), 보인 정시룡(鄭時龍), 보인 이종신(李宗信), 보인 곽사(郭俟), 경성 군관 전 내금위 이현(李鉉), 온성 판관 군관 정로위 이광진(李光辰)ㆍ이천룡(李天龍), 유원 첨사 군관 전 내금위 김대관(金大寬), 신사 최명옥(崔命玉)ㆍ신구학(申九鶴), 훈융 첨사 군관 정로위 정려(鄭勵), 별시위 이장형(李長亨)ㆍ김흥복(金興福)ㆍ고영진(高永珍)ㆍ박종례(朴從禮), 교생 한득(韓得)ㆍ주덕남(朱德男), 미전 첨사 군관 별시위 안덕수(安德壽), 갑사 방인학(方仁鶴), 충순위 장붕(張鵬), 갑사 이찬(李贊) 황작파(黃柘坡) 권관군관 별시위(別侍衛) 전흥개(田興漑), 보인(保人) 최용담(崔龍潭), 갑사(甲士) 이몽복(李夢福), 서울에서 피란 온 사람인 성균관 권지학 유(權知學諭) 이성길(李成吉), 전 직장 신석린(申石潾), 생원 신여(申櫓), 유학(幼學) 이정리(李精瓈), 유학 신봉(申桴)ㆍ신격(申格), 입거(入居) 임정언(林廷彥), 유학 신미(申楣), 서리 최언붕(崔彥鵬), 보인 오경남(吳慶男)ㆍ오응남(吳應男) 등이 원근에서 모여들어 나와 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꾀하였습니다. 이제 9월 16일에 경성(鏡城)에 들어가 성곽과 창고를 지켰습니다. 왜적들이 오랫동안 판당(板蕩)한 뒤에 서수(徐遂), 이기수(李麒壽) 및 관노(官奴) 등이 그 잔당을 수습하여 봉쇄하고 정리하여 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달 18일 사시경에 길주(吉州)에 머물러 있던 왜적 92명이 성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왜장(倭將)이 이전과 같은 뜻으로 성문을 갑자기 들이닥쳐서 백을 거을 때, 미전첨사(美錢僉使) 김범(金範)이 거느린 관노(官奴) 굴생(鞠生)이 칼로 팔을 베어 버리자 그의 아버지인 관노 세필(世弼)이 부축하여 말에서 내리게 한 다음 그대로 생포하여 군중(軍中)에 시신을 훼손해 보여 주었습니다. 그 나머지 무리는 성 밑에 줄지어 서서 백을 거두었고, 김범과 주을온 만호 이희당(李希唐) 등이 다수 활을 쏘아 적군과 말을 맞추어 백을 많이 거두고 양사(良沙)를 처음으로 물리쳤습니다.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가 앞장서고, 우리 마을 권관 구황(具滉), 주을온 만호 이희당 등 15명이 자원하여 추격하였는데, 토박이 급제 전 만호 김대진(金大振)과 중도에서 서로 만나 힘을 합쳐 한 호흡 남은 거리를 추격하여 10여 차례 합전(合戰)하여 다수 왜적을 맞추었습니다. 시신을 싣고 북쪽으로 달아나면서 피가 길에 뿌려지고 말과 옷가지 등 잡물까지 모두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강문우(姜文佑)는 목을 베어 2급으로 삼았습니다. 해가 저물어서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여 백유제(白有齊)로 삼았습니다. 같은 무리는 머리를 자르고 귀를 베어 2급으로 삼았습니다. 산길을 통해 관찰사 도이기(道以己)는 상사(上使)로서 백유제로 삼았습니다. 본부의 토병(土兵)인 전 별시위 유억수(庾億壽)와 입거 갑사 이태옥(李泰玉) 등은 당초 왜적이 성을 점거했을 때 몸을 아끼지 않고 왜적을 쏘아 죽여 백유로(白有如)로 삼았습니다. 신이 성에 들어온 뒤 유억수는 2급, 이태옥은 1급, 정병 강득황(姜得璜)은 1급으로 삼고 그들이 빼앗은 환도(環刀)를 함께 바치게 하였습니다. 도내의 경흥(慶興), 경원(慶源) 등의 번호(藩胡)와 깊은 곳의 여러 추장들이 일시에 화살을 쏘아 경흥부 및 관할하는 4개 보(堡)에 피해를 주었습니다. 전량을 약탈당하여 백성들은 거의 다 도망가고 남은 자는 10명뿐입니다. 경원(慶源)이 관할하는 아산(阿山), 건원(乾元)의 두 보루 및 고아산(古阿山), 고건원창(古乾元倉), 신창(信倉), 해창(海倉), 온성(穩城)의 덕명창(德明倉), 덕산창(德山倉), 해창(海倉), 종성(鍾城)의 부계장풍리(俯溪長豐里), 방산리(方山里), 녹야창(鹿野倉), 조산리(造山里)의 해창, 회령(會寧)의 률산창(櫟山倉), 고즉거리창(古卽巨里倉) 등도 모두 약탈당하여 백성들은 도망가고 남은 자는 10명뿐입니다. 신집산졸(新集散卒).

원문

以南圖吉州之倭。北捍充斥之胡。極爲悶慮叱分不喩。鏡城府。亦六鎭要衝之地。距吉州二日之程。距會寧。亦二日之程是白去等。介於兩賊之間。兵無徵發之處。糧無繼運之策。加于悶慮爲白齊。大槪賊數多少。雖不詳知爲白良置。利城,端川,嶺東,吉州四處留在之數。各四千餘名是如爲白臥乎等用良。攻守便宜。與諸將相議。盡力措置。妄料爲白乎旀。臣亦無印信官。以當此變亂之時。白文封□啓。似無符驗乙仍于。權用富寧府印信。至爲惶恐爲白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九月二十日。

번역

남쪽으로는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오랑캐를 막는 것이 매우 걱정스럽고 분통하여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경성부(鏡城府) 역시 육진의 요충지로서 길주(吉州)에서 이틀 거리이고 회령(會寧)에서도 이틀 거리입니다. 그런데 백거등(白去等)이 두 적 사이에 끼어 있어 군사를 징발할 곳도 없고 양식을 계속 운반할 방책도 없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백거등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적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략 백량치(白良置)와 이성(利城), 단천(端川), 영동(嶺東), 길주 네 곳에 남아 있는 군사가 각각 4천여 명입니다. 백거등은 방어하기에 편리한 지형을 고려하여 여러 장수와 상의해서 전력을 다해 조치하였습니다. 망료(妄料)는 백거등에게 맡겼습니다. 신은 인신관(印信官)이 없는데 이런 변란의 때에 백문봉(白文封)의 계문에 부험(符驗)이 없는 듯하여 임시로 부령부(富寧府)의 인신을 사용하였으니, 매우 황공한 일입니다. 이 내용을 정리하여 올리니 가르침을 주소서. 만력 20년 임진년 9월 20일.

136. 誅叛賊會寧鞠景仁,明川末秀等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17B, ITKC_MO_0284A_A071_117C ...

원문

臣與鍾城府使鄭見龍。共謀集兵緣由。已爲由水路。狀□啓爲白有在果。風濤盜賊之間。恐未得達爲白乎去。更良陳達爲白在果。狀□啓未盡辭緣及近日措置事段。臣初與李聖仁及慶源府使吳應台等入鏡城。曉喩軍民。以爲共守之計爲白良置。民惑已甚。百不一信叱分不喩。京來將士。亦無固志。多欲南出乙仍于。不得已各散。或向山路。或向海道。欲達官軍。臣來在海村。欲爲乘舟次。適聞道路傳言。具滉等持巡察使關字。北還之奇爲白遣。臣卽通于鄭見龍。謀與土人及諸鎭將。入據鏡城。庭集城中軍民。諭以國家中興。回心討賊之義。帖召遠近兵馬。以爲討叛滅倭之計爲白良置。賊勢方張。人心疑懼。非但應募無幾叱分不喩。會寧叛吏鞠景仁段。受倭官稱判刑。威制一府。以塞六鎭徵兵之路。潛通倭賊。常爲挾擊鏡城之計爲白遣。明川寺奴末秀段。稱大將用傳令。輸載絡繹。締結吉州之倭。屠殺土豪。以遏義旅之興爲白乎等以。鏡城守禦孤弱不振。胡倭挾勢。南北有叛。僅僅支保。死守是計爲白有如乎。本月初二日。會寧鄕所牒呈內。本府居鄕吏鞠景仁。亦本是頑惡之人。以平時用事之日。多般作惡爲白良置。非大段事是乎等用良。置而不治爲如乎次節。倭賊猝發。衣冠顚倒。京外遑遑。本道乙山川險高。道路隔遠是去。凡干士大夫是沙餘良。□王子君兩分及陪來領府事,府院君,承旨等。欲避倭變。委入此城爲有去乙。倭賊自富寧直入之奇乙。上項鞠景仁。亦聞知爲遣。欲媚倭將。使其徒立功於倭賊爲乎矣。陰令親軍衛金世彥,驛子李忠卿,官奴承水,官奴京伊及其矣所知雜類等率良厼。同□王子兩分及夫人與領府事,府院君,承旨等夫人敎是等乙。各其所在處。乘夜突入。不意執捉結縛。堅囚軍營爲遣。其時府使,判官以使不得下手。盛陳軍威府使軍官前萬戶李涵,內禁衛金德新,判官軍官崔德興及府助防將虞候軍官張應鱉鄭仁信等及府下人。前日有嫌爲在。鄕吏貢億福,官奴靑龍等。斬首示威後。倭賊到古豐山爲有去乙。同叛吏鞠景仁。亦□王子執捉拘留是如。倭將處。其矣所厚鄕吏林岷。以馳告爲乎矣。其時段。城中軍民。竝只避亂入山乙仍于。鄕所等段置。上無官員。下無軍民是乎等用良。亦爲入山爲有如可。倭賊入城後。還來爲乎亦中。軍民等徐徐還來爲良置。向前叛吏鞠景仁。亦要名於倭將。受判刑二字之名。擅權於城內。逞一己嘯聚之計。又立威權。恣斬無辜軍民十餘名。使生存之民。不得下手。日增道路耳目是乎等用良。鄕所校生軍民等。雖有痛憤之志。亦怯於積威。莫敢下手爲有如乎次。金世彥,李忠卿,承水,京伊,漢福等段。乘機斬首爲有乎矣。同賊首鞠景仁。亦威勢堂堂。族類如麻。

번역

신이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과 함께 군사를 모으기로 꾀한 연유는 이미 수로를 통해 장계로 보고하였으나, 풍랑과 도적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잘 진달하여 보고했으나 장계에 모든 사정을 다 말하지 못하고 근일의 조치에 관한 일만 언급하였습니다. 신이 처음 이성인(李聖仁) 및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과 함께 경성(鏡城)에 들어가 군민을 깨우쳐 함께 지킬 계책을 세웠으나 백성들이 매우 의혹스러워하여 전혀 믿지 않고 꾸짖으며 분산하고, 서울에서 온 장사들도 굳은 뜻이 없어 대부분 남쪽으로 나가려 하였습니다. 부득이 각자 산길이나 해로를 통해 관군에게 도달하고자 하였는데, 신이 해촌(海村)에 와서 배를 타려고 할 때 마침 도로에 전해지는 말을 들으니 구황(具滉) 등이 순찰사(巡察使)의 관문(關文)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북쪽으로 돌아온 기이한 자는 백견(白遣)입니다. 신은 즉시 정견룡(鄭見龍)에게 통지하여 토착민 및 여러 진장(鎭將)과 함께 경성(鏡城)에 들어가 거처하였습니다. 성안의 군민을 모아 국가가 중흥할 것이니 마음을 돌려 도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따르라고 유시하고, 원근의 병마를 소집하여 반적을 토벌하고 왜적을 멸망시킬 계책을 세웠습니다. 백량치(白良置)는 적의 형세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민심이 의구심에 빠져 응모하는 자가 거의 없고 분부한 대로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회령(會寧)의 반리(叛吏)인 굴경인(鞠景仁)이 왜관(倭官)의 판형(判刑)을 자처하여 한 부(府)를 위협하고 육진(六鎭)에 병력을 징발하는 길을 막으며 몰래 왜적과 내통하여 항상 경성을 협공할 계책을 꾸몄습니다. 명천사(明川寺)의 노복인 말수(末秀)가 대장(大將)이라 자칭하고 전령을 보내어 왜적과 결탁한 길주(吉州)를 잇달아 수송하며 토호(土豪)들을 도륙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습니다. 경성의 수비가 외롭고 약해 진작되지 못하였습니다. 왜구가 세력을 쥐고 남북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겨우 지탱하여 죽기로 지키는 것이 계책이 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이달 초 2일 회령향소(會寧鄕所)의 첩정(牒呈)에 ‘본부 거향리(居鄕吏)鞠景仁(김경인)은 본래 완악한 사람으로 평소 일을 처리할 때마다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질렀는데, 백량치(白良置)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여 그대로 내버려 두고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왜적이 갑자기 일어나 의관이 뒤집히고 서울과 지방이 어수선해졌습니다. 본도 을산천(乙山川)은 험준하고 길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대부와 여사량(餘沙良), □왕자군(王子君) 두 사람 및 배래영부사(陪來領府事), 부원군, 승지 등이 왜변을 피하려고 이 성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적이 부령(富寧)에서 곧장 쳐들어오는 기이한 일이 생겼습니다. 상기 김경인이 또한 이를 듣고서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왜장(倭將)을 아첨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위해 공을 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은밀히 친군위(親軍衛) 김세언(金世彥), 역자(驛子) 이충경(李忠卿), 관노(官奴) 승수(承水), 관노 경이(京伊) 및 그가 아는 잡류 등에게 명하여 양민들을 거느리게 하고, 동궁 왕자 두 분과 부인 및 영부사(領府事), 부원군(府院君), 승지 등의 부인에게 각각 있는 곳에서 밤을 틈타 돌입하게 하였는데, 뜻밖에 붙잡혀 결박되어 군영에 굳게 갇혀 보내졌습니다. 그 당시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이 사신이 손을 쓰지 못하도록 성대히 군위(軍威)를 진술하였으니, 부사의 군관인 전 만호 이함(李涵), 내금위 김덕신(金德新), 판관 군관 최덕흥(崔德興) 및 부조(府助) 방장 우후(虞候) 군관 장응벽(張應鱉)ㆍ정인신(鄭仁信) 등과 부하 인물들이 전날부터 혐의가 있었습니다. 향리 공억복(貢億福)은 관노(官奴) 청룡(靑龍) 등이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인 뒤에 왜적들이 고풍산(古豐山)으로 도망갔습니다. 동반리(同叛吏) 곡경인(鞠景仁)도 왕자(王子)를 잡아 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왜장(倭將)의 처소에는 그곳의 후향리(厚鄕吏) 임민(林岷)이 급히 알려 주었습니다. 그 당시 성안의 군민들이 모두 피란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향소(鄕所) 등지에 머물렀는데, 위로는 관원이 없고 아래로는 군민이 없었으므로 이들을 위해 또한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왜적들이 성에 들어온 뒤에 다시 돌아왔으므로 군민들이 서서히 돌아와 머물렀습니다. 앞의 반리 곡경인은 또한 왜장에게 이름을 올려 판형(判刑)이라는 칭호를 받아 성안에서 권한을 휘두르며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모으는 계책을 부리고, 또 위세를 세워 무고한 군민 10여 명을 멋대로 베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백성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으니, 날마다 도로의 이목(耳目)이 늘어날 뿐입니다. 향소(鄕所)의 교생과 군민 등은 비록 통분한 뜻이 있더라도 적의 위세에 겁을 먹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는데, 김세언(金世彥), 이충경(李忠卿), 승수(承水), 경이(京伊), 한복(漢福) 등은 기회를 틈타 목을 베었습니다. 같은 적의 우두머리인 곡경인(鞠景仁)도 위세가 당당하고 친족들이 많았습니다.

원문

乘機無隙是置有等以。上項金世彥等斬首乙。梟示列鎭。不得爲有如乎。道關內義兵抄送事。再再分付爲有乎矣。上項鞠景仁。亦道關乙。置之度外。一不擧行爲去乙。一邑軍民。憤其義兵不送。咸聚一處。大陳軍威。向前叛吏鞠景仁及同謀作亂爲如乎。其矣妻娚內奴朴林,金林。其矣義子崔麟水是沙餘良。金允福,吳福水,奴彥俊等。一時相戰射殺。同日斬首爲乎矣。鞠景仁段。處斬手足。朴林等段。斬首。合七首乙。品官色吏等準授。竝只函送爲遣。義兵段置。來明日。抄送爲在果。叛吏鞠景仁執捉時功勞人等乙。秩秩分等成冊。上道爲白臥乎味。牒呈是白有亦。背後劇賊。雖已就戮。目前叛豎。尙挾倭勢乙仍于。先定明川。次圖吉州計料次。明川品官及村民等。相聚數百。分道掩襲爲白如乎。叛賊據城。多放火炮。烏合之衆。旋卽潰散是如爲白去乙。臣遣吾村權管具滉,安原權管姜文佑。各率精騎三十名。臣矣軍官慶源前別監鄭應福,鏡城親軍衛全德龍及鍾城府使鄭見龍,軍官鏡城土及第朴銀柱,庶孼鄭時龍等。自願往討。晝夜幷行。比到明川。則同末秀亦自知勢窮。身佩戎器。竄據山谷爲白有去乙。追至深山。鏡城土兵全德仁。先得其蹤。本府營軍士金千年執縛生擒。幷捉其黨鏡城內奴論孫,明川官奴文亨,定配人張應豪等斬首。梟示軍中爲白遣。餘黨四散。或投倭賊。或竄山間。時未盡捕爲白有齊。向前會寧所誅鞠景仁及明川末秀段頭及手足。竝只函送爲白遣。自餘斬馘十三級段。山路氷雪。輸送甚難乙仍于。不得已左耳割取。小牌書名。上送爲白齊。逆賊財產。法當籍沒。所當錄□啓處置事是白乎矣。唯只府庫板蕩之餘。召募散民。勸勵慰悅次。以權用於軍中賞格。不勝惶恐爲白乎旀。田民家舍段。從當□啓聞。給付捕討人爲乎乙去。計料爲白在果。向前兩賊。特一幺麽小豎良中。討賊人分等錄功。恐涉煩瑣爲乎矣。新集之卒。若無聳動之擧。則響應甚難。弦如冒瀆上□聞爲白齊。兩逆授首之後。南北始通。穩城以南鎭堡徵兵。稍稍來到。唯只慶源軍。時未到防爲白齊。鎭堡諸將等聞鏡城守禦之奇。或自北關南出。或自南程北還。皆入鏡城。受臣節制爲白在果。防垣萬戶韓仁濟,潼關僉使李應星,永建萬戶鄭禮國,甫老知權管柳大男,高嶺僉使柳擎天,寶化堡權管李彥祥,森森坡萬戶韓大防,將軍坡萬戶吳大另,造山萬戶印元忱,魚游澗萬戶方佑周,細川權管朴禮範等。次次來會爲乎旀。斜卩洞權管高敬民段。持巡察使關字。自別害來到爲白遣。兵曹佐郞徐渻,定配人羅德明。在外村。曉喩村居軍丁爲白如乎節段。竝只入城爲白有齊。六鎭一經倭賊之後。軍器倉穀。僅餘十分之一二爲白良置。

번역

기회를 틈타 빈틈없이 처리하는 것은 등급을 두는 것이니, 위의 김세언(金世彥) 등을 참수하여 여러 진에 시신을 내걸어 보여주어 ‘그럴듯하게’ 하지 말라. 도관(道關)의 의병을 뽑아 보내라는 일은 거듭 분부하였는데도, 위의 곡경인(鞠景仁)은 또한 도관에서 이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전혀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한 고을 군민들이 의병을 보내지 않은 것에 분개하여 모두 한곳에 모여 군대의 위엄을 크게 떨치니, 앞서 반란을 일으킨 이 곡경인과 동모(同謀)들을 ‘그럴듯하게’ 처단하였습니다. 그의 처와 첩, 내노비 박림(朴林), 김림(金林), 그의 의자(義子) 최린수(崔麟水)는 사여량(是沙良), 김윤복(金允福), 오복수(吳福水), 노예 윤준(彥俊) 등이 한꺼번에 서로 싸워 쏘아 죽이고 같은 날 참수하였습니다. 곡경인 일당은 손발을 자르고, 박림 등 일당은 참수하여 모두 일곱 머리를 베었습니다. 품관과 색리는 준수(準授)합니다. 함께 봉함하여 보내어 보냅니다. 의병은 단지 배치해 두었으니, 내일 아침에 뽑아서 보내겠습니다. 반리(叛吏) 굴경인(鞠景仁)을 체포할 때 공로를 세운 사람들을 등급을 나누어 책으로 만들어서 상도(上道)로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뒤에서 극악한 역적이 비록 이미 처형되었으나, 눈앞의 반역자들은 여전히 왜적의 세력을 끼고 있습니다. 먼저 명천(明川)을 정하고 다음으로 길주(吉州)를 도모할 계획입니다. 명천의 품관 및 촌민 등 수백 명이 모여서 길을 나누어 매복하여 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반적(叛賊)이 성에 거처하면서 화포를 많이 쏘아대니, 오합지졸들이 곧바로 흩어졌습니다. 신은 우리 마을 권관 구황(具滉), 안원 권관 강문우(姜文佑)에게 각각 정예 기병 30명을 거느리게 하고, 신의 군관인 경원 전 별감 정응복(鄭應福), 경성 친군위 전덕룡(全德龍), 종성 부사 정견룡(鄭見龍)을 보냅니다. 군관(軍官)인 경성토(鏡城土) 및제 박은주(朴銀柱)와 서얼 정시룡(鄭時龍) 등이 스스로 원해서 토벌하러 갔다가 밤낮으로 함께 이동하여 명천에 이르렀습니다. 동말수(同末秀)도 형세가 궁박함을 알고 무기를 차고 산골짜기로 도주하였는데, 추격하여 깊은 산속에서 경성토병 전덕인(全德仁)이 먼저 그 종적을 찾아내고 본부 영군사(營軍士) 김천년(金千年)이 포박하여 생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리인 경성 내노론손(內奴論孫), 명천 관노 문형(文亨), 정배인 장응호(張應豪) 등을 잡아 목을 베어 군중에서 시신을 훼손하고, 남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어떤 자는 왜적에게 투항하고 어떤 자는 산속으로 도주하였는데, 이때 모두 잡지 못하였습니다. 앞서 회령소(會寧所)에서 죽인 굴경인(鞠景仁) 및 명천 말수의 단두(段頭)와 수족(手足)을 모두 함에 담아 보냈으며, 나머지 자들은 목을 베어 13급으로 나누었습니다. 산길에 얼음과 눈이 쌓여 운송하기가 매우 어려워 부득이 왼쪽 귀를 잘라내고 작은 패에 이름을 써서 위로 올려 보냅니다. 역적의 재산을 법에 따라 몰수해야 하니, 마땅히 기록하여 아뢰어 처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부고(府庫)가 탕진된 나머지 백성을 불러 모아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해 임시로 군중의 상격(賞格)으로 사용하겠습니다. 황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전민과 가사(家舍)에 대해서는 마땅히 아뢰어 보고한 뒤 포토인에게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계산해 보니 과연 앞서 두 역적을 잡은 자 중 한 명의 어린아이와 양식(良士)이 있었는데, 토적인을 등급을 나누어 공로를 기록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될까 염려됩니다. 신집(新集)의 군졸들은 만약 감동시키는 조치가 없으면 호응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거문고 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야 합니다. 아뢰겠습니다. 두 역적의 수괴를 잡은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할 것입니다. 온성(穩城) 이남의 진보(鎭堡)에서 징병한 군사들이 차례차례 도착하였습니다. 오직 경원군(慶源軍)만 아직 방어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백제(白齊)가 되어 진보의 여러 장수 등이 경성(鏡城)을 수비하는 기이함을 듣고, 어떤 이는 북관(北關)에서 남쪽으로 나와서 혹은 어떤 이는 남쪽 길에서 북쪽으로 돌아와 모두 경성에 들어와 신의 지휘를 받아 백제가 되었으니 과연 사실입니다. 방원(防垣) 만호 한인제(韓仁濟), 통관 첨사 이응성(李應星), 영건 만호 정예국(鄭禮國), 보로지 권관 유대남(柳大男), 고령 첨사 유경천(柳擎天), 보화보 권관 이언상(李彥祥), 삼삼파 만호 한대방(韓大防), 장군파 만호 오대별(吳大別), 조산 만호 인원침(印元忱), 어유간 만호 방우주(方佑周), 세천 권관 박예범(朴禮範) 등이 차례차례 모여드니 참으로 기쁩니다. 사필동 권관 고경민(高敬民)은 순찰사 관자(關字)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별해(自別害)가 와서 백견(白遣)이 되었고, 병조 좌랑 서지(徐渻)는 정배인(定配人) 나덕명(羅德明)을 외촌(外村)에 정배하였습니다. 묘유촌(曉諭村)의 군정(軍丁)은 백여절(白如節)과 같은 단락으로, 모두 성안에 들어가서 백유제(白有齊)가 되었습니다. 육진(六鎭)은 한번 왜적을 겪은 뒤로 군기창(軍器倉)의 곡식이 겨우 10분의 1이나 2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원문

各自封閉叱分是白遣。馬匹盡歸倭賊乙仍于。無有轉運相通之勢爲白齊。鏡城段。幸有長片箭各七百餘部。千人半年之糧爲白乎等以。聚軍千七百餘名內。他官軍段。官給散料。本府人段。竝只自備以食爲白齊。大槪前後使士人。再三入吉州城中。覘賊虛實爲白乎矣。賊徒萬餘。分據公私廨城內。別作深溝高壘。晝夜候望巡更爲白去等。輕擧見辱爲白乎去。百分詳量。某條觀勢出奇。先挫銳氣。然後一擧盡殲爲白遣。次及嶺東,端川計料爲白臥乎事是良旀。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

번역

각자 봉폐(封閉)하여 분부한 것은 백제(白齊)입니다. 말은 모두 왜적에게 돌아가고, 이응우(乙仍于)는 없습니다. 전운(轉運)이 서로 통하는 형세가 없음을 백제가 알았습니다. 경성단(鏡城段)에는 다행히 장편전(長片箭) 각 700여 부와 1천 인의 반년 치 양식이 있습니다. 백제는 군사 1,700여 명을 모으고 다른 관청의 군사는 관에서 산료(散料)를 지급하며 본부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마련하여 먹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전후로 사신과 선비들이 재삼 길주성 안으로 들어가 적의 허실을 살피는 것을 백제가 알았습니다. 왜적 1만여 명이 공사청(公私廳)과 성안에 나누어 거처하며 별도로 깊은 도랑과 높은 성벽을 쌓고 밤낮으로 호망하고 순찰하는 것을 백제가 알았습니다. 가벼운 행동으로 욕을 당한 것을 백제가 알고서, 100% 상세히 헤아려 어떤 조항으로 형세를 보고 기이하게 나가 먼저 예기를 꺾은 뒤에 한꺼번에 모두 섬멸할 것을 백제가 명령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영동과 단천의 계량(計料)을 마련하는 일이 매우 좋으니, 차례로 선(善)□를 가지고 아뢰는 것이 일입니다. 만력 20년 임진년 10월 14일.

137. 誅叛賊鏡城鞠世弼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20B, ITKC_MO_0284A_A071_120C ...

원문

北道。自倭寇之後。南路阻絶。不復知有□國家。亂民縛其守宰。叛卒逐其鎭帥。各自稱將。以迎倭賊爲白有如乎。鏡城官奴鞠世弼。亦以會寧叛吏鞠景仁同姓三寸叔父。通謀會寧之變。因受倭賊體伯之官。與倭同處。相爲表裏。威制一府。供奉倭奴叱分不喩。諸鎭將及京來士人避亂山谷者乙。通文六鎭。捉致倭賊爲乎旀。倭退吉州之後。臣及李聖任等來入本府。謀欲擧義次。同世弼尙假倭威。黨與寔繁。逞其反側之謀。沮敗倡義之擧乙仍于。臣等孤立勢單。不能顯戮。各散南出。圖赴官軍爲白如乎節。巡察使關字。自別害來到。李聖任段。遇於山路爲白遣。臣段。來在海汀。得見道路傳書爲白齊。品官徐遂,李麒壽等。爲先響應。謀與京來將士及土兵數十人。同入鏡城。以爲攻守之計爲白良置。當此人心已惑。□王化不究之日。南有明川逆豎。近挾倭勢。北有會寧叛吏。威行六鎭。世弼以聲勢相倚之賊。隱然爲舟中之敵是白去等。若非權謀紿說。先釋其反側之心爲白在如中。盤據老賊。不無逞手之虞乙仍于。溫辭開諭。曉以棄過滌垢之意。父子綠功。示以立功免罪之端。一以定群下疑懼之心。一以絶會寧陰伺之路爲白有如乎節。會寧,明川兩逆授首。軍勢稍振。紀律漸張爲白有去等。覆載難容之賊。恐有他日網漏之患。絃如卽於軍中。處斬梟示。函送頭級手足爲白遣。其子鞠生段。斬首割耳。上送爲白齊。大槪經亂以來。民無防禁。或有連引倭賊。殺掠村家。或有嘯聚山藪。白晝殺越者不知其數。今聞國家再造。典刑維新爲白遣。人懷自疑。頗有顧望之端叱分不喩。京來將士及本土良民等。嫉其旣往之惡。或發指斥之言爲白乎等乙以。六鎭徵兵。或有畏罪而不來者。至爲可慮爲白昆。臣以幕下小官。擅便爲難爲白在果。最只當事之臣。以不得已權行蕩滌之令。除其首惡。捨其脅從。以廣應募之路爲白乎旀。凡干□啓聞事段置。當此路塞之時。上達甚難。陪持人寺乙。募其願往者起送爲白去乎。□恩賞重事。非自下所敢擅請是白良置。其矣徒等功勞段。不敢不達爲白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月日。

번역

북도(北道)는 왜구(倭寇)가 침입한 뒤로 남쪽 길이 막혀서 다시 국가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난민(亂民)은 수령을 포박하고, 반역하는 군졸들은 진장(鎭將)을 쫓아내고 각자 장수라고 자칭하며 왜적을 맞이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경성(鏡城)의 관노(官奴)인鞠世弼(곡세필)은 또한 회령(會寧)의 반역한 관리 곡경인(鞠景仁)과 같은 성씨를 가진 삼촌의 사촌 형제로서, 회령의 변란을 함께 도모하고 왜적의 체백(體伯)이 되는 관직을 받아 왜적과 한곳에 살면서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한 부(府)를 위협하여 다스렸습니다. 왜노(倭奴)에게 공물을 바치고 꾸짖거나 나누어 주는 것이 매우 심했습니다. 여러 진장 및 서울에서 와서 산골짜기에 피난해 있는 선비들은 통문(通文)을 보내 6개 진(鎭)에서 왜적을 잡아오도록 하였습니다. 왜적이 길주(吉州)로 물러간 뒤에 신과 이성임(李聖任) 등이 본부(本府)로 들어와 의병을 일으키려고 모의하였으나, 곡세필은 여전히 왜적의 위세를 빌려 당여가 많아 반역할 모의를 꾀하고 있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일이 실패하여 신들은 고립되어 세력이 약해져서 뚜렷하게 죽지 못하고 각자 남쪽으로 흩어져 관군에 항복하는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보낸 편지가 별도로 도착했는데, 이성임(李聖任)은 산길에서 만나 백견(白遣)이 되었고, 신은 해안가에 와서 도로를 통해 전해지는 편지를 보고 백제(白齊)가 되었습니다. 품관 서수(徐遂), 이기수(李麒壽) 등이 먼저 응하여 서울에서 온 장사들과 토병 수십 명과 함께 경성(鏡城)으로 들어가 공격하고 방어할 계책을 도모하였습니다. 지금 인심이 이미 어지러워 왕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날에 남쪽에는 명천(明川)의 역적들이 와세(倭勢)를 끼고 있고, 북쪽에는 회령(會寧)의 반리(叛吏)들이 위세를 떨치며 6진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세필(世弼)은 그 기세를 의지하는 적이 은연중에 배 안의 적이 되었습니다. 만약 권모술수가 아니었다면 먼저 그 반측(反側)의 마음을 없애고 백재여중(白在如中)을 평정시키고, 노적(老賊)이 버티고 있는 데 대해서는 득심할 우려가 없음을 인지하고, 온화한 말로 열어 깨우쳐서 허물을 버리고 때를 씻어 내는 뜻을 밝히며, 부자 녹공(綠功)에게는 공을 세워 죄를 면하는 단서를 보여 주어 한편으로는 신하들의 의구심과 두려운 마음을 안정시키고, 한편으로는 회령(會寧)과 음사(陰伺)의 길을 끊도록 하였습니다. 백유여절(白有如節), 회령(會寧)과 명천(明川) 두 역적은 수괴로 삼고 군세가 조금 진작되고 기율이 점차 엄정해지자, 백유거등(白有去等)은 천하를 뒤엎을 적이므로 훗날 그물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하여 즉시 군중에서 처참하게 베어 죽여서 시신을 함에 담아 머리와 손발을 보내고, 그 아들 곡생단(鞠生段)은 목을 베고 귀를 잘라 올려 보냈습니다. 대개 난리를 겪은 이래로 백성들을 방비하는 금령이 없어서 혹시라도 왜적을 연루시켜 마을을 약탈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었습니다. 혹 산림에 모여 백주에 월나라를 죽인 자가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나라가 다시 세워져 법도가 새로워졌다고 하니, 사람들은 스스로 의심하여 돌아보는 단서가 있습니다. 징벌이 분명하지 않으니 서울에서 온 장수와 본토의 양민 등이 지난날의 악행을 미워하여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말을 내뱉습니다. 육진(六鎭)에 군사를 징집할 때 죄를 두려워하여 오지 않는 자가 있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신은 막하의 작은 관원으로 편의대로 하기 어려운 데다, 가장 당사자인 신하들이 부득이하게 권한으로 죄를 씻어주는 명령을 시행하여 우두머리 악인만 제거하고 협박에 따라 온 자는 내버려 두어 모집하는 길을 넓혀야 합니다. 모든 일은 계문(啓聞)에 관계되니, 이처럼 길이 막힌 때에는 위로 보고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가고자 하는 자를 모집하여 보내십시오. 은상(恩賞)에 관한 중대한 일은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청할 수 없으므로, 백량(白良)을 그대로 둔 채 그 부하들의 공로를 아뢰지 않을 수 없어서 이 일을 백와(白臥)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선계(善啓)가 임금께 아뢴 일입니다. 만력 20년 임진 10월 일.

138. 吉州長坪破倭賊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21B, ITKC_MO_0284A_A071_121C ...

원문

自臣入據鏡城之後。會寧,川南北有叛。坐守孤城。未卽擧事爲白有如乎節。兩逆授首。六鎭徵兵。稍稍來集爲白良沙。去十月二十一日。潼關僉使李應星乙用良。留鎭將差定。率軍七百餘名。使守鏡城爲白遣。臣率軍千餘。進住明川縣爲白乎如中。吉州牧使鄭煕績,輸城察訪崔東望。幷爲來會爲白齊。倭賊千餘段。據吉州城內。三百餘段。在吉州南八十里嶺東地。相爲往來。聲勢相倚。或十百爲群。樵採山谷。或分兵四出。殺掠村家。姿意橫行。略不顧忌爲白齊。臣與中衛將鍾城府使鄭見龍。率鏡城以北軍千餘。留明川抄出精兵四百。分二運。進屯古驂地。設伏要路爲白遣。左衛將高嶺僉使柳擎天乙用良。領吉州軍千餘。屯海汀。以伺摽掠之賊爲白遣。右衛將慶源府使吳應台段。率吉州兩里及西北堡土兵與本堡將。據堡抄出精兵。設伏洞口。以斷樵採之路。臣從事官前引儀土及第元忠恕段。率精兵二百餘。屯吉州北三十里阿間倉登山。覘賊次。同月三十日早朝。倭賊可千餘名。張旗出城。向海汀加坡里爲白去乙。同元忠恕。亦卽卽馳報各處伏兵將爲白遣。率其部下。直要歸路次。倭賊焚蕩村舍。劫掠財畜。虜其婦女。午後回還爲白去乙。元忠恕與賊接戰。斬其先導兩賊。倭賊北退爲白去乙。乘勢追擊。遇倭賊大軍。令其步卒。登山據險。身率精銳捍。後退保次。右驂伏兵將坊垣萬戶韓仁濟聞報卽時。率諸將士三百餘騎。馳往二息程。與元忠恕合擊倭賊。狃於屢勝。以爲誰何。先驅所掠卜馱。向吉州。巨魁政丞稱號名直正者,監司稱號名都關汝文者及節度使稱號名不知將等五人。率精勇軍四百餘名。敢死突戰。多放鐵丸爲白去乙。左斥候將吾村權管具滉,右斥候將安原權管姜文佑,別將玉連萬戶安沃,臣從事官造山萬戶印元忱,軍官慶源土及第黃嗣元,鍾城府使軍官土及第朴銀柱等。各率所部。一時突陳。廝徒下卒。無不鼓勇。射矢如雨。倭賊等。皆下馬地鬪爲白如乎。猝遇突騎。自申初至日昏。兩軍出沒交兵。力屈。始爲登山北走爲白去乙。適音左衛伏兵將斜卩洞權管高敬民。亦率所部。遮截山上爲白遣。我軍精勇。左右夾馳。直上峻山。追至十餘里。一賊背上矢中十數。幾盡殲戮。將帥五名。幷爲射斬。中箭墜崖。不知其數。所擄人畜。全數還奪。軍裝雜物。幷以獲得爲白齊。斬割左耳捌百貳拾伍箇段。監封上送。馬壹百拾捌匹段。各授所奪人爲白遣。環刀段。亂軍各自佩持。時未盡推爲白有齊。旗貳拾玖。甲伍拾部。胄捌部。槍拾陸柄。銃筒貳拾陸柄。鐵丸陸百肆拾陸箇。藥桶拾伍箇等物段。留上爲白在果。大槪酣戰日昏。未能一一斬馘爲白良置。中箭入城。逃竄山谷以死者。不知其數爲白齊。城中餘賊。

번역

신이 경성(鏡城)에 부임한 뒤 회령(會寧), 천남(川南)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고립된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즉시 거사하지 않은 것은 절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역적이 목숨을 바치자 육진(六鎭)에서 군사를 징집하여 조금씩 모여온 것이 양사(良沙)입니다. 지난 10월 21일,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이 양사로 머물러 진장(鎭將)으로 차정되어 군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경성을 지키게 하였고, 신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현(明川縣)에 나아가 주둔하여 중이 되었습니다.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희적(鄭煕績), 수성 찰방(守城察訪) 최동망(崔東望)도 모두 와서 합류하였습니다. 왜적 1천여 명은 길주 성내에 있고, 300여 명은 길주 남쪽 80리 고개 동쪽 지역에 있어 서로 왕래하며 세력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10명이나 100명씩 무리를 지어 산골짝에서 나무를 베고, 때로는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나갑니다. 살육하고 약탈하는 마을의 집들을 제멋대로 횡행하며 거침없이 행동하는 백제(白齊)를 막기 위해, 신은 중위장(中衛將) 종성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과 함께 경성(鏡城)의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明川)에 머물러 정예병 400명을 뽑아 두 운로(運路)로 나누어 고첨지(古驂地)에 진을 치고 요로(要路)에 매복하여 백제를 막았습니다. 좌위장(左衛將) 고령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은 양질의 군사를 거느리고 길주군(吉州軍) 1천여 명을 이끌고 해정(海汀)에 진을 치고 약탈하는 도적을 매복하여 지켜 백제를 막았습니다. 우위장(右衛將) 경원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는 길주 양리(兩里) 및 서북보(西北堡)의 토병(土兵)과 본보(本堡)의 장수를 거느리고 정예병을 뽑아 동구(洞口)에 매복하여 나무를 베고 땔감을 채취하는 길을 차단하였습니다. 신은 종사관(從事官) 전인의(前引儀) 토지원충서(土地元忠恕)와 함께 정예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길주 북쪽 30리 아간창(阿間倉)에 진을 치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적을 정찰하였습니다. 같은 달 30일 이른 아침에 왜적 1천여 명이 깃발을 펼치고 성을 나와 바닷가 가리(加里)를 향해 나갔습니다. 동원충서(同元忠恕)도 즉시 각처의 복병장에게 급히 보고하여 그 부하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귀로를 막으라고 하였습니다. 왜적은 마을과 집을 불태우고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며 여자를 납치하였습니다. 오후에 돌아왔습니다. 동원충서가 왜적과 접전하여 선도(先導)인 왜적 2명을 베자, 왜적이 북쪽으로 물러갔습니다. 기세를 몰아 추격하다가 왜적의 대군을 만나니, 보졸들에게 산에 올라 요새를 차지하게 하고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후퇴하여 성을 지켰습니다. 우승복병장 방원(坊垣) 만호 한인제(韓仁濟)가 보고를 듣고 즉시 장수와 군사 300여 기를 거느리고 말을 달려 두 시진 거리에서 동원충서와 합세하여 왜적을 공격하였습니다. 여러 번 승리한 데에 익숙해져서 누구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선구(先驅) 소략복타(所掠卜馱)가 길주(吉州)를 향하여 거괴 정승(巨魁政丞) 칭호 명 직정자(直正者), 감사 칭호 명 도관여(都關汝) 문자(文者), 절도사 칭호 명 모지장(不知將) 등 다섯 사람이 정예 용사 400여 명을 거느리고 감히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하여 싸웠습니다. 철환(鐵丸)을 많이 쏘아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좌척후장(左斥候將) 오촌 권관 구황(吾村權管具滉), 우척후장 안원 권관 강문우(安原權管姜文佑), 별장(別將) 옥련만호(玉連萬戶) 안옥(安沃), 신종사관(臣從事官) 조산만호(造山萬戶) 인원침(印元忱), 군관(軍官) 경원토급제(慶源土及第) 황사원(黃嗣元), 종성부사(鍾城府使) 군관 토급제 박은주(土及第朴銀柱) 등이 각각 소속 부대를 거느리고 일시에 돌격하여 진을 쳤습니다. 하졸(下卒)들도 모두 용기를 발휘하여 화살을 비처럼 쏘았습니다. 왜적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땅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배하였습니다. 갑자기 돌격해 오는 기병을 만났는데, 신시(申時) 초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양군이 출몰하며 교전하였습니다. 힘이 부족하여 비로소 산에 올라 북쪽으로 달아나서 백기(白旗)를 내렸습니다. 마침 좌위(左衛)의 복병장인 사필동(斜弼洞) 권관고경민(權管高敬民)도 부대를 거느리고 산 위에서 가로막아 백기를 내렸습니다. 우리 군사가 정예롭고 용맹하여 좌우에서 협공하며 곧바로 험준한 산을 올라가 10여 리를 추격하니, 적군 한 명의 등에 화살이 수십 발이나 박혀 거의 모두 죽었고 장수 5명은 모두 화살에 맞아 잘려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그 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사로잡은 사람과 가축은 전수를 되찾아 왔고 군장(軍裝)과 잡물은 모두 획득하여 백기를 내렸습니다. 잘라낸 왼쪽 귀는 825개이고, 말 118필을 각각 빼앗은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환도(環刀)는 난군이 각자 차고 있으므로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기(旗) 29개, 갑오부(甲伍部) 50개, 주(胄) 8개, 창(槍) 16자루, 총통(銃筒) 26자루, 철환(鐵丸) 646개, 약통(藥桶) 15개 등의 물품은 남겨 두었습니다. 백(白)이 있습니다. 대략 싸움이 한창일 때가 저물어서 일일이 목을 베어 백으로 만들지 못하고 중간에 화살을 맞고 성안으로 들어와 산골짝으로 도망쳐 죽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므로 백으로 삼았습니다. 성안에 남은 적은

원문

厥數不多叱分不喩。率皆殘弱是如爲白乎等乙以。來明日間。一擧盡蕩計料爲白有旀。人心叛散之餘。始此破賊。所當分等錄功。聳動軍情是白乎矣。事未畢定之前。先錄小功以聞朝廷。事體未安乙仍于。一一置簿。事定後□啓聞事。妄料爲白有在果。惟只今去□啓本陪持人鏡城儒生崔配天段。當初倡義時。始叱盡力周旋叱分不喩節段置。自願赴戰。斬馘一級爲白有旀。浦港之間。零賊充斥。公私往來之際。或被擒獲。人不樂行乙仍于。自募能射良人李長春,董義節校奴億俊乙。幷爲發送爲白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年壬辰十一月初一日。

번역

그 수효가 많지 않아 분수(分數)를 나누기 어렵고, 대부분이 잔약한 자들이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내일쯤 한꺼번에 다 소탕할 계획입니다. 인심이 반란으로 흩어진 나머지 이제야 적을 깨뜨렸으니 마땅히 공적을 등급을 나누어 기록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해야 합니다.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먼저 작은 공적을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것이 사체상 온당하지 않으나, 그대로 두면 일일이 장부에 기록하고 일이 끝난 뒤에 보고할 것입니다. 짐작건대 과연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가는 길에 본배지(本陪持)인 경성 유생 최배천(崔配天)은 당초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힘을 다해 주선하였고, 자원하여 전쟁에 나가 적의 목을 베어 1급이 되었습니다. 포구 사이에 도적이 가득하여 공사 간에 왕래할 때 혹시라도 붙잡힐까 봐 사람들이 즐겨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활을 잘 쏘는 양인(良人) 이장춘(李長春), 동의절(董義節)과 교노(校奴) 억준(億俊)을 모집하여 함께 보내게 한 일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이에 순서대로 기록하여 성상께 아룁니다. 만력 20년 임진년 11월 1일.

139. 吉州臨溟破倭賊及六鎭叛黨搜誅。藩胡招服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23A, ITKC_MO_0284A_A071_123B ...

원문

前年十一月初一日。成貼爲白在。吉州留倭接戰斬馘辭緣書狀。十二月初九日得達□行在所。受到付及備邊司□啓下成貼關五度。今年正月初九日。齎還本道爲白有去乙。相考爲白乎矣。吉州留賊一敗之後。入據堅城。縮頭不出爲白去乙。鍾城府使鄭見龍,慶源府使吳應台,高嶺僉使柳擎天。各率所部合兵三千餘。再度圍城。終日接戰爲白乎矣。倭賊四百餘名。列立城頭。抵死防備。鐵丸射矢。彼我俱傷。勢難猝拔乙仍于。分兵設伏城外數里許四五處。晝夜候伺。出則勦捕爲白乎旀。三衛將幷以移兵嶺東。先滅柵內之賊。次及城中之寇計料爲白如乎。適音移兵之日。嶺東倭賊四百餘名。出來臨溟村舍。焚蕩擄掠之際。左衛將柳擎天。定送爲白在。伏兵將吉州土兵金國信。爲先接戰爲旀。一邊以馳報大軍爲白良在乙。三衛一時馳突其中。六鎭精兵爲先接刃。倭賊敗奔。三衛射斬及城中留賊出沒時捕斬。合百餘級。左耳函封。軍功幷以磨鍊狀□啓計料次。都巡察使尹卓然。亦擅自狀□啓是如。出公緘推考爲白乎旀。巡察使節制一一擧行不冬。軍中機務趁不馳報。北道胡亂。亦不這這馳報是如。連四度推考叱分不喩。某條以傳聞爲白乎喩。兵皆吉州牧使鄭煕績召募之兵。功皆斜卩洞權管高敬民之功是去乙。敗軍將元忠恕。亦參錄功。鄭煕績,高敬民。不以專功上□聞是如。明川縣監張應祥乙用良。評事失誤軍機樣。以捧侤音。上使亦爲白臥乎在亦。臣以年少迷劣。白面書生。不閑軍旅叱分不喩。文報間曲折。專不閑習爲白如可。一朝臨戎。誤蒙重罪爲白乎去。彷徨悶迫之際。巡察使節制內。評事自稱大將。兼率從事官。至爲駭怪是如。遞臣大將之任。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改定大將關字。前年十一月二十一日。成貼到付爲白良在乙。卽依巡察使節制。專以手下將士三千餘名。鄭見龍處交付。臣段。退答推考爲白如乎。北兵使節制內。評事亦巡行六鎭。鎭定人心。兼鎭虜情亦爲白有去乙。臣已遞大將之任。不敢不從乙仍于。率軍官及麾下五十餘人。北行六鎭。至慶源。曉諭人民。兼饋藩胡爲白乎矣。人心段。當初倭賊長驅之時。不復知有□國家。軍民逐其守將衢路。恣行攘奪。京來將士及避亂士人等。或被捉致倭賊。或被赤脫衣裝爲白有如可。自臣入城之後。歷擧土人前日過惡。使無所容叱分不喩。急於推得失物。因致人心不安爲白去乙。臣以謂鎭定反側之初。如此擧措。甚非事宜是如。一切痛禁爲白如乎節段。憑藉□王靈。禁不能抑。反側之輩。疑懼日深。至於臣到會寧之日。本府人民。恐爲叛賊連累。太半逃走爲白有去乙。臣以權辭溫諭。諭以已殲巨魁。罔治脅從之意爲白良沙。稍稍還集爲白乎旀。

번역

지난해 11월 1일, 성첩(成貼)이 백재(白在)에 “길주(吉州)에 남아 있는 왜적과 접전하여 머리를 베고 사퇴하는 내용의 서장(書狀)을 12월 9일에 행재소(行在所)에서 받아 보고, 비변사에서 하교를 받아 성첩 관문 5통을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9일, 지환(齎還)이 본도에 백유거을(白有去乙)로 상고하였습니다. “길주에 남아 있는 왜적이 한 번 패배한 뒤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 머리를 처박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이 각각 소부(所部)를 거느리고 합병 3천여 명으로 다시 성을 포위하여 종일 접전하였습니다. 왜적 400여 명이 성 위에 줄지어 서서 죽기로 방비하고 철환(鐵丸)과 화살을 쏘아 피아 양쪽이 모두 다쳤으므로, 형세가 갑자기 성을 빼앗기 어려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 밖 몇 리 되는 곳에 군사를 나누어 4, 5곳에 매복을 설치하고 밤낮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적이 나오면 섬멸하여 포획하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세 명의 위장이 모두 영동(嶺東)으로 병력을 옮겨 먼저 성 안의 도적들을 소탕하고, 다음으로 성안의 도적을 처리할 계획이었습니다. 마침 병력을 옮기던 날에 영동 왜적 400여 명이 나와서 바닷가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습니다. 좌위장 유경천(柳擎天)이 정찰을 나갔다가 매복 장수 길주 토병(吉州土兵) 김국신(金國信)이 먼저 접전하여 싸웠습니다. 한편으로 대군에 급보를 보내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세 위장이 일제히 그 가운데로 달려들어 들이치자, 육진의 정예 병사가 먼저 칼을 맞대어 싸웠습니다. 왜적이 패주하자 세 위장이 활로 쏘아 베고 성안에 남은 도적들이 출몰할 때 포획하여 베었으니, 합계가 100여 명이었습니다. 좌위장에게 함봉(函封)하고 군공을 모두 마련한 장계에 따라 계산하였습니다. 도순찰사(都巡察使) 윤탁연(尹卓然)이 또한 멋대로 장계하여 보고한 것이 이와 같고, 공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추고(推考)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순찰사의 절제는 하나하나 거행함에 어긋남이 없고 군중의 기무(機務)는 신속하게 보고하지 않았으며 북도의 오랑캐의 난동도 이처럼 신속하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연이어 네 차례 추고를 받아 꾸짖음이 심하였는데, 어떤 조항은 전문(傳聞)으로 보고한 것이 분명하고 병사들이 모두 길주 목사 정희적(鄭煕績)이 모집한 군사인데 공은 모두 사필동 권관 고경민(高敬民)의 공이라 하였고 패군장(敗軍將) 원충서(元忠恕)도 공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정희적과 고경민은 전공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명천 현감 장응상(張應祥)은 양심으로 한 일인데 평사(評事)가 군기(軍機)를 잘못 다루어 포폄(褒貶)하는 글을 올렸으니, 상사가 또한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신은 나이가 젊고 어리석어서 백면서생(白面書生)이 군사들을 부리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문서를 보고하는 일에 곡절이 많고 전적으로 일에 익숙하지 않아 어리석은 듯합니다. 하루아침에 군사를 거느리는 일을 맡게 되어 중죄를 입어 떠나게 되었습니다. 방황하고 답답한 때에 순찰사(巡察使)의 절제 내(節制內)에서 평사(評事)가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고 종사관을 겸하여 거느리니, 참으로 놀랍고 괴이합니다. 신은 대장의 임무를 바꾸어 회령 부사 정견룡(鄭見龍)에게 맡겼습니다. 을용량(乙用良)이 대장의 관문(關文)을 고쳐 정하였는데, 전년 11월 21일에 성첩(成貼)을 보내 부쳤으니, 즉시 순찰사의 절제에 따라 수하의 장사 3천여 명을 정견룡에게 넘겨주고 신은 물러나 답신하고 추고를 받겠습니다. 북병사(北兵使)의 절제 내에서 평사도 육진(六鎭)을 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오랑캐의 기세를 진압하는 일도 맡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미 대장(大將)의 직임을 바꾸었으니, 감히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관 및 휘하의 50여 명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육진(六鎭)에 가서 경원(慶源)에 이르러 백성들을 깨우쳐서 안심시키고 겸하여 오랑캐를 먹여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당초 왜적(倭賊)이 맹렬히 몰아칠 때에는 다시 국가가 있는 줄도 모르고 군민들이 그 수장(守將)을 쫓아 거리로 나와 멋대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서울에서 온 장사들과 피란 온 선비 등이 혹 포로로 잡혀 왜적에게 끌려가거나 혹은 옷을 벗겨서 백성들처럼 하였습니다. 신이 성에 들어온 뒤로는 토착민들의 전날의 죄를 하나하나 거론하여 용서하지 않고 꾸짖어 분별할 줄 모르게 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내기에 급급하여 인심이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진정시키고 반역을 막는 초기에는 이러한 조치가 매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체 통렬히 금지하였습니다. 왕령(王靈)을 빙자하여 금지할 수 없게 되니, 반역하는 무리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날로 깊어졌습니다. 신이 회령에 도착한 날에는 본부의 백성들이 반적(叛賊)에게 연루될까 두려워 태반이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이에 신이 권도(權道)를 써서 온화하게 유시하기를, “이미 거괴(巨魁)를 섬멸하였으니 협박에 따라 종속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조금씩 돌아와 모였습니다.

원문

鍾城,穩城人心段置。亦未翕然鎭定。頗有持疑顧望之端叱分不喩。慶源座首鄭士麒及其弟士鳳段。當初倭賊入北之時。謀捉兵使以下。欲爲迎降之計爲白如可。臣入據鏡城之後。八度徵兵。拒逆不送爲白乎旀。人心虜變鎭定防禦次。以吉州赴戰爲白如乎。富寧府使金範段。會寧兼官。以入送會寧爲白遣。潼關僉使李應星,柔遠僉使李希良,訓戎僉使金磁,穩城判官李訥,慶源判官吳彥良。入送本鎭爲白乎矣。人心虜情。太半鎭定。而鄭士麒耳亦。道內巨惡。以多植族黨。奴使判官。莫敢措手爲白去乙。臣到本府。捉致士麒,士鳳及其黨魁。慶興土兵崔松于行營。竝只斬首梟示爲白遣。鍾城通事安億壽段。自前始叱侵虐藩胡爲白如乎節。倭變之後。□國無紀律爲白乎去。向入侵徵雜物。無所不至爲白乎矣。眼前通事。以胡人告訴乙。變詐誣傳爲白去乙。臣觀其氣色詭祕。親引中樞下良介問。答以我國言語爲白乎矣。六鎭倭變之後。土兵侵虐。釀成邊患。大槪同然。其中安億壽爲甚是如爲白去乙。卽欲斬徇。懲一勵百爲白乎矣。唯只下良介段置。桀驁難側之胡。以來訴我人爲白去等。諸胡所見處。輕易行刑。恐妨□國體爲白乎去。卽加枷杻。移囚富寧府。以待巡察使處置爲白有齊。虜情段。會寧所管時無叛狀。鍾城段。外親內疏。所爲叵測爲白良置。亦無顯然作賊之事。穩城段。當初倭變時。始叱接置我國散民。一不擄掠叱分不喩。判官還鎭聞奇。他胡所掠人物乙。爲先刷還。極爲可嘉爲白乎等以。臣到本府。依他鎭例饋酒肉。給鹽斗外。別引有功胡人。退床饋酒。加給鹽斗。諭以倭賊盡平之後。賞職上京。各別施行。亦擧理開喩爲白有齊。慶源段。頭頭酋長十餘人。間間進告。佯示向國之狀爲白良置。府境諸胡。皆已叛國乙仍于。乍去乍來。同心作賊。判然無疑爲白乎矣。臣北行時。開喩聽令。次以來到爲在。酋長學生竝二百餘名段。自我招來叱分不喩。彼亦應招歸順爲白有去等。摘發隱惡。治罪不當乙仍于。依前饋贈。喩以賊胡。自汝等所居處。由入爲在如中。□國家問罪之時。恐有俱焚之患。守護進告等事。各別盡心。亦嚴辭開喩爲白有齊。慶興段。西水羅一堡。疊入造山散民。土兵咸德厚領率守城。賊胡四度圍城。不勝退兵叱分不喩。賊胡部落一處乙。乘虛焚蕩爲白有臥乎所。孤軍越境。不出將令。如此擧措。雖似乖當。蕞爾孤城。大盜隔絶。勢未能及期節制事良中。全城斬賊。不失軍機。實爲可嘉乙仍于。同咸德厚。因爲定將。會寧海倉。運米一百石。輸送本堡。使爲城守之糧爲白有齊。慶興府及所管造山,撫夷,阿吾地。慶源所管乾元,阿山堡段。自初不守。賊胡恣意焚蕩。往來不忌。因爲賊路。或自慶興海汀。

번역

종성(鍾城)은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 또한 화답하여 진정하지 못하고 의심을 품고 돌아보는 기미가 상당히 있었습니다. 징토(徵討)를 명하는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원(慶源) 좌수 정사기(鄭士麒)와 그 아우 정시봉(鄭士鳳)은 당초 왜적이 북쪽으로 들어왔을 때 병사(兵使) 이하를 포획하여 항복을 맞이할 계책을 세웠으나, 신이 경성(鏡城)에 입거한 뒤로는 여덟 차례나 군사를 징발하였는데도 거역하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민심이 왜적의 변란으로 진정되지 않고 방어하는 데에 급급하여 길주(吉州)로 가서 싸우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부령부사(富寧府使) 김범(金範)은 회령 겸관(會寧兼官)으로서 회령으로 입송하기를 바랐고, 통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희량(李希良), 훈융 첨사(訓戎僉使) 김자(金磁), 온성 판관(穩城判官) 이눌(李訥), 경원 판관 오언량(吳彥良)은 본진으로 입송하기를 바랐습니다. 인심은 사로잡힌 정에 굴복하여 태반이 진정되었으나, 정사기(鄭士麒)는 도내의 큰 악당으로 많은 친족과 당파를 심어 놓고 노비와 판관을 부려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백발(白發)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신이 본부에 도착하여 정사기와 사봉(士鳳) 및 그 당괴들을 잡아다 경흥(慶興)의 토병(土兵) 최송(崔松)에게 행영(行營)에서 넘겨주어 모두 목을 베고 효시(梟示)하게 하였으며, 종성 통사 안억수(安億壽)는 전부터 호인의 침략과 학정을 꾸짖었으므로 백발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왜변(倭變) 이후에는 □국에 기율이 없어서 백발을 버리고 떠났는데, 지난번 침입하여 잡다한 물품을 징수할 때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눈앞의 통사는 호인으로 고발하였으나 변괴를 꾸며내어 거짓으로 전하였으므로 백발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신이 그 기색이 수상함을 보고 직접 중추부에서 내린 양객(良介)을 불러 물으니, 우리말을 답하였으므로 백발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6진의 왜변 이후에는 토착 병사들이 침략하고 포학을 부려 변방의 환란을 일으킨 것은 대체로 마찬가지입니다. 그중 안억수(安億壽)는 매우 심하여 마치 백거을(白去乙)과 같으니, 즉시 참형을 집행하여 한 명을 징벌함으로써 백 명을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용맹한 무사들이 있는 단치호(段置胡)와 거칠고 오만하여 측량하기 어려운 호인들이 와서 우리 사람들을 고발하는 곳에서는, 여러 호인들이 보는 곳에서 가볍게 형을 집행하면 나라의 체모를 손상할까 염려되니, 즉시 칼을 채우고 부령부(富寧府)로 옮겨 가두어 순찰사(巡察使)가 처리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호인들의 정황으로 볼 때 회령(會寧)을 관할할 때는 반역한 정상이 없었고, 종성(鍾城)은 밖으로는 친근하고 안으로는 소홀하여 그 행동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또한 뚜렷하게 죄를 지은 일이 없고, 온성(穩城)은 당초 왜변(倭變) 때부터 우리 나라의 산민(散民)들을 받아들여 주었으며 한 명도 납치하거나 약탈하지 않았으니, 판관이 진영으로 돌아와서 기이한 일을 들었습니다. 다른 오랑캐가 약탈한 인물들을 먼저 찾아내어 돌려보낸 것은 매우 가상합니다. 신이 본부에 도착하여 다른 진(鎭)의 예에 따라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 소금 한 말 외에 별도로 공로가 있는 오랑캐를 불러내어 상에서 내려 술을 대접하고 소금을 더 주며, 왜적을 모두 평정시킨 뒤에는 관직을 주어 상경하게 하겠다고 유시하여 각별히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이치를 열어 깨우쳐 주었습니다. 경원단(慶源段)의 두두 추장(頭頭酋長) 10여 명이 간간이 와서 고하기를, “나라에 귀순하려는 상황을 꾸며 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경(府境)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이미 나라를 배반하고 도망가거나 왔다 갔다 하며 한마음으로 도적이 되려 함은 판연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신이 북쪽으로 갈 때 이치를 열어 깨우쳐 주며, “명령을 들으라. 다음으로 이곳에 온 자들이 있으니 추장과 학생 등 200여 명을 불러다가 꾸짖고 나누어 주지 않으면 너희도 응당 부름에 응하여 귀순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숨은 악행을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는 데 마땅하지 않음이 있어, 예전처럼 벼슬을 내리고 선물을 주어 도적의 행위를 꾸짖었습니다. 너희들이 사는 곳에서부터 들어오는 길에 있는 □국가가 죄를 물을 때 모두 불타버릴 우려가 있으니, 지키고 보호하고 보고하는 등의 일에 각별히 마음을 다하십시오. 또한 엄한 말로 깨우쳐 주어 백유제(白有齊)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경흥단(慶興段) 서수라(西水羅)의 1보(堡)에 도적이 겹겹이 들어와 산을 만들고 백성을 흩어 놓았는데, 토병(土兵) 함덕후(咸德厚)가 영솔하여 성을 지키니, 도적들이 네 차례나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퇴각할 때 군사를 나누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으나, 도적이 한 곳에 몰려 있을 때 틈을 타서 불태워 없애고 백유와(白有臥)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고립된 군사가 국경을 넘었으나 장령(將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비록 마땅하지 않은 듯하나, 작은 고립된 성에 큰 도적이 격절되어 있어 기한 내에 절제할 수 없는 형세였으니, 일 처리가 훌륭합니다. 온 성에서 적을 베어 죽여 군사적 계책을 잃지 않았으니 실로 가상합니다. 함덕후(咸德厚)와 함께 정장(定將)이 되어 회령(會寧)의 해창(海倉)에서 쌀 100섬을 운반하여 본보(本堡)로 수송하여 성을 지키는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백유제(白有齊)는 경흥부(慶興府) 및 소관인 조산(造山), 무이(撫夷), 아오(阿吾) 지역과 경원(慶源)의 소관인 건원(乾元), 아산보(阿山堡) 구간을 초기에 지키지 않아 도적들이 멋대로 불태우고 왕래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도적의 길로 인하여 혹시라도 경흥 해안가에서부터

원문

或自慶源地境入來。橫行作賊。擄掠山谷人畜。極爲痛憤爲白良置。六鎭精兵二百餘名。至吉州赴戰。加以倭寇之餘。馬群一空。前日馳射之士。今爲無馬之軍叱分不喩。軍器段置。盡爲倭人焚蕩。至以長片箭。束作火炬爲白乎旀。避亂人民等持弓箭者。盡爲倭賊殺戮乙仍于。民間軍器。幾盡埋置腐敗爲白乎等以。據城防禦。猶患不足。涉遠追擊。事勢極難乙仍于。村居人民全數。知委疊入城內。俾免擄掠之患爲白如乎節段。吉州倭勢已縮。六鎭胡亂漸熾。不得已赴戰諸將中。間間入送。各其鎭將抄率精兵。要路伏兵。以絶橫行之路爲白有齊。大槪北道。亦道里絶遠。氷雪積塞之地。距巡察使所在處。十餘日程是白去等。軍中機務。一日萬變。一依節制施行爲白在如中。恐非兵家制變之道乙仍于。其間急務段。或有不報巡察使施行。從後牒報爲白如乎節段。巡察使節制內。大將遞改。捕亡將定體。磨天嶺及端川等地。率軍官進駐。捕捉亡卒亦爲白有在果。臣以幺麽小官。未有寸功。遽陞堂上。□天恩罔極。尤不知死所。蹀血鋒刃。有所不辭是白在果。唯只吉州,嶺東未掃蕩前段。我軍北地亡卒。似無逃向南關之理乙仍于。先可留住軍中爲白有齊。臣以去年十一月二十一日。遞大將爲白在如中。十二月十四日。備邊司移文內。評事方行主將之令是如爲白有臥乎所。其間日數二十四日之久是白去等。巡察使請罪狀□啓。時未達□行在爲白有臥乎喩。事涉可疑爲白乎旀。會寧府使鄭見龍段置。爲大將未滿一月。遞易以兼節度使。巡行六鎭爲白遣。更以慶源府使吳應台。爲大將臣段。只據北兵使節制。任意北巡是如。推考爲白乎旀。各鎭將如茂山萬戶李蘭等。無慮數十人。各率本鎭土兵。來會討賊事乙。巡察使處當初始叱再再。名錄牒報爲白有矣。各堡鎭將乙。幾盡遞易。或一鎭堡將。疊差二三人。使將不知本任。卒不知其將。軍情搖漾。士氣怠惰。未知其由。至爲悶慮。欲報稟□朝廷爲白良置。擅自狀□啓是如。獲罪弦如。不敢以聞爲白有如乎節。前狀□啓回送辭緣及備邊司關字五度。不敢不答乙仍于。自募軍功一等土及第車應轔乙用良。依前由海路狀□啓爲白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二日。

번역

혹은 경원(慶源) 지역에서 들어와서 멋대로 날뛰며 도적이 되어 산골의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였는데, 매우 통분하여 백량치(白良置)에 6진(六鎭)의 정예병 200여 명을 보내 길주(吉州)로 가서 싸우게 하였습니다. 왜구의 잔당이 말들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전날 말을 타고 활을 쏘던 군사들이 지금은 말이 없는 군사가 되어 분부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무기 또한 모두 버려져 왜적에게 불태워졌으며, 심지어는 긴 화살대를 묶어서 횃불로 만들어 백량치에 두었습니다. 피란민 가운데 활을 가진 자들은 모두 왜적에게 살육당하였고 민간의 무기도 거의 다 묻어두거나 썩어 버려져서 백량치에서 성을 지키는 데도 오히려 부족하여 멀리 추격하기에는 형세가 매우 곤란하였습니다. 마을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성안으로 들어와 약탈당하는 근심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길주(吉州) 왜적의 세력은 이미 줄어들고, 육진(六鎭)의 오랑캐가 일으키는 난동은 점차 치성해지고 있습니다. 부득이하게 전쟁에 나가는 장수들 가운데 간간이 입송(入送)하여 각기 그 진장(鎭將)으로 삼아 정예 병사를 뽑아 요로(要路)에 복병을 배치함으로써 함부로 날뛰는 길을 끊어야 합니다. 대개 북도(北道)는 또한 도리가 매우 멀고 얼음과 눈이 쌓여 막힌 곳으로 순찰사 소재지에서 10여 일의 여정을 거쳐야 합니다. 군중(軍中)의 기무(機務)는 하루에도 만 가지 변화가 있으니, 한결같이 절제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사이에 급한 일이 있으면 혹시라도 순찰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시행하고 나중에 첩보로 보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순찰사의 절제 안에서 대장이 바뀌면 포망장(捕亡將)을 정체(定體)하고, 마천령(磨天嶺) 및 단천(端川) 등지에 군관을 거느리고 진주하며 포망졸(捕亡卒)을 포획하는 것도 마땅합니다. 신은 하찮은 소관으로서 조금의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갑자기 당상으로 승진하였으니, 하늘의 은혜가 망극하여 더욱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피를 흘리며 칼날에 맞더라도 마다하지 않음이 마땅합니다. 오직 길주(吉州)와 영동(嶺東)을 소탕하기 전까지 우리 군대의 북쪽에서 패배한 병졸들이 남관으로 도망할 리가 없으니, 우선은 군중에 머물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작년 11월 21일에 대장으로 체차된 후 12월 14일 비변사의 이문(移文)에서 평사(評事)가 주장이 되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사이 24일 동안 순찰사가 죄상을 계본하지 않은 것이 행재소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이 의심스럽습니다.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견룡(鄭見龍)이 대장(大將)에 임명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절도사를 겸임하는 직책으로 체차되었고, 순행(巡行)한 육진(六鎭)은 백발(白髮)이었습니다. 다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를 대장신(大將臣)에 임명하였는데, 북병사(北兵使)의 절제권만 가지고 마음대로 북쪽을 순행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추고(推考)하여 백발이 되었습니다. 각 진(鎭)의 장수로는 무산 만호(茂山萬戶) 이란(李蘭) 등 수십 명이 없어서 각각 본진(本鎭)의 토병(土兵)을 거느리고 와서 도적을 토벌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처음에는 마땅히 꾸짖었어야 하는데, 명록(名錄)과 첩보(牒報)를 백발로 보고하였고, 각 보(堡)의 진장(鎭將)은 거의 모두 체차되었으며, 혹은 한 진(鎭)의 보장(堡將)이 두세 사람에게 거듭 차임되어 장수들은 본래의 임무를 모르고 병졸들은 그 장수를 알지 못하여 군정(軍情)이 흔들리고 사기(士氣)가 나태해졌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조정에 보고하고자 합니다. 멋대로 장계(狀啓)를 올린 것은 이와 같습니다. 죄를 얻은 것이 현(弦)과 같으니, 감히 말씀드리는 것을 가식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앞선 장계가 돌아온 사유 및 비변사의 관문(關文) 5통에 대해서는 감히 답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에 이어합니다. 자모군공(自募軍功) 1등 토지급제차(土地及第車) 응당을 양량(用良)은 전과 같이 해로(海路)를 통해 장계를 올려 말씀드리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선계(善啓)의 향교에 관한 일입니다. 만력 21년 계사년 1월 12일.

140. 穩城,鍾城,行營三鎭伏兵擊走賊胡及請徵還六鎭精兵本道。依他道設科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26D, ITKC_MO_0284A_A071_127A ...

원문

前年十二月十三日。巡察使節制。據遞大將後。又以北兵使節制。巡行六鎭。安集散民。鎭定虜情。次以行到慶源。還由鍾城境浮溪里爲白如乎。同里亦四通五達。賊路要衝之地是白去乙。穩城,鍾城,行營三鎭軍。各抄五十名。同處伏兵。要擊亦爲白有如乎節。穩城判官李訥牒呈內節該。三鎭軍各五十名。依評事節制。分三處設伏爲白有如乎。正月初七日。胡賊不知其數。穩城軍伏兵處。圍犯爲去乙。多數射中。勝戰追擊。土兵朴彥柱,吳得沈。各斬一級。胡馬具鞍二匹。胡弓一張。胡矢九箇。入羅韜一部。竝以上道爲旀。府通事都莫同段。逢箭身死是如爲白有去乙。同馬匹段。所奪人還給。弓矢雜物段。鏡城營上胡馘二級段。監封上送爲白齊。行營及鍾城伏兵將馳報內。同日賊胡百餘名。伏兵處來犯。接戰兩軍。同力追擊。多數射中。賊胡擄去爲如乎。男女幷三十三名。馬一匹。釜鼎各二等物。還奪爲旀。前日被擄驛子朴世貞,金億壽段。胡賊同心。變服爲胡爲有如可。賊胡不勝退兵時生擒。鍾城府囚禁是如。馳報爲白有齊。上項伏兵將土兵李雲老。鍾城伏兵將討倭軍功一等。土及第姜彥壽。行營伏兵將討倭倡義時。爲先響應功。以□安陵參奉空名告身良中。塡差爲白有在。辛衡等登時追擊。或斬胡馘。或奪我人之功乙良。□朝廷以磨鍊施行爲白只爲。○自臣遞大將後。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代爲大將爲白有如可。前年十二月晦間。鄭見龍差兼節度使。巡行六鎭亦爲白遣。更以慶源府使吳應台。改定大將爲白有如乎。今年正月十三日。到付爲白在。巡察使關內。吳應台大將遞改。依前評事。以還定大將亦爲白臥乎在亦。本月初十日。到付爲白在。前大將吳應台牒呈內。兼節度使鄭見龍遞將入北之時。盡率六鎭精兵百餘名。入歸是如爲有臥乎所。節度使稱云。討倭精兵乙。自己所率是如。任意率去。不爲出送爲白在如中。當此日氣向暖。倭勢漸張之時。討賊之事。極爲可慮爲白昆。臣段置。通關徵兵爲良音可爲白在果。□朝廷以各別授事目依數徵兵事。防禦使稱號爲白在。鄭見龍處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節。仄聞爲白乎矣。入道南道。至亦已爲科擧是如爲白去等。獨此北道未得赴擧。似乖聳動之本意爲白良置。巡察使不爲□啓請處置事良中。幺麽小官。□啓請爲難爲白齊。道內倡義首人鏡城居前訓導李鵬壽,座首徐遂李麒壽,鏡城定配蒙宥前都事羅德明,富寧座首金銓等。極力奔走。曉喩愚頑。到今擧事。實賴其功。前日論賞之時。擧業儒生內。禁衛差下。似爲冤悶。不敢不聞爲白乎旀。鏡城判官段置。宋安廷差下是如爲白乎矣。某處留在爲白有臥乎喩。迄未赴任。本府亦都會大處。

번역

전년 12월 13일 순찰사(巡察使)가 절제(節制)하여 대장(大將)을 체차한 뒤에 또 북병사(北兵使)로 절제되어 육진(六鎭)을 순행하며 백성을 안심시키고 도적의 기세를 진정시켰습니다. 다음으로 행차가 경원(慶源)에 이르러 종성(鍾城) 경계 부계리(浮溪里)를 거쳐 돌아올 때, 같은 마을이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인 것을 알고는, 온성(穩城), 종성, 행영(行營) 세 진의 군사 50명씩을 각기 뽑아 같은 곳에 매복시켜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온성 판관 이눌첩(李訥牒)이 올린 내용에 따르면, 세 진의 군사 50명씩을 평사의 절제대로 세 곳에 나누어 매복시켰습니다. 정월 7일, 수많은 오랑캐 도적들이 온성의 군사가 매복한 곳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다수가 화살에 맞아 패배하였습니다. 토병(土兵) 박언주(朴彥柱), 오득심(吳得沈)은 각각 1급을 베고, 호마(胡馬)는 안장 두 필과 호궁(胡弓) 한 자루와 호시(胡矢) 아홉 개를 빼앗았으며, 나도(羅韜) 한 부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상은 모두 도(盜)로 처리합니다. 부통사(府通事) 도막동단(都莫同段)이 화살을 맞아 죽었으니 이는 백유거(白有去)가 한 것입니다. 말과 같은 단락은 빼앗은 사람에게 돌려주고, 활과 화살 및 잡물 단락은 경성영(鏡城營)에 호구(胡馘) 2급으로 올려보내고, 행영(行營) 및 종성(鍾城)의 복병장(伏兵將)이 급히 보고한 내용입니다. 같은 날 적 호인(胡人) 백여 명이 복병이 있는 곳으로 와서 침범하여 양군과 접전하였는데, 힘을 합쳐 추격하여 다수가 화살에 맞았으나 도망간 적 호인은 남녀를 포함하여 33명이고 말 한 필과 부디(釜鼎) 각 2등의 물품을 되찾아 왔습니다. 전날 납치당한 역자 박세정(朴世貞), 김억수(金億壽) 단락입니다. 오랑캐 도적들이 한마음이 되어 변복을 하고 오랑캐가 된 것은 어찌할 수 없었으며, 도적이 오랑캐를 이기지 못해 퇴각할 때 생포한 것은 종성부(鍾城府)에 가두어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급히 보고한 백유재(白有齊)와 상항복병장(上項伏兵將) 토병(土兵) 이운로(李雲老), 종성복병장(鍾城伏兵將) 도왜군공(討倭軍功) 1등, 토급제(土及第) 강언수(姜彥壽), 행영복병장(行營伏兵將) 도왜창의시(討倭倡義時) 선선응응공(先先應應功)으로 □ 안릉 참봉(安陵參奉) 공명고신 양중(空名告身良中)을 채워 차임하여 백유재로 삼았습니다. 신형(辛衡) 등이 즉시 추격하여 오랑캐의 머리를 베거나 우리 사람의 공을 빼앗은 것은 □ 조정에서 마련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 신이 대장으로 체차된 뒤 회령부사(會寧府使) 정견룡(鄭見龍)이 대신 대장이 된 이후, 지난해 12월 그믐쯤에 정견룡을 겸절도사로 차임하였습니다. 순행(巡行)한 육진(六鎭)도 백여(白遣)입니다. 다시 경원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를 대장으로 고쳐 정한 것이 백유여(白有如)입니다. 금년 1월 13일에 도부(到付)된 것이 백재(白在)입니다. 순찰사 관내(關內)에 오응태 대장이 체차되어 개정되었는데, 이전 평사(評事)대로 환정대장(還定大將)도 백와(白臥)가 있습니다. 이달 10일에 도부된 것이 백재입니다. 전 대장 오응태의 첩정(牒呈)에, 겸절도사 정견룡(鄭見龍)이 장수로서 북쪽으로 들어갈 때에 자신이 거느린 육진의 정예병 100여 명을 모두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절도사가 말하기를, “왜적을 토벌할 정예병은 내가 거느리는 것이니, 마음대로 데리고 가고 내보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왜적의 기세가 점차 커지는 이때에 왜적을 토벌하는 일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백곤(白昆)은 신 단치(段置)가 통관징병(通關徵兵)을 한 것이 좋은 소식이라며 백재과(白在果)를 위해 하였습니다. □ 조정에서 각별히 수사목(授事目)에 따라 수효대로 징병하는 일로 방어사(防禦使)의 칭호를 백재(白在)라 하였고, 정견룡(鄭見龍)이 처하(處下)하여 보낸 것이 백허거망(白乎去望)과 양백호절(良白乎旀節)에 해당하며, 삐딱하게 들은 것은 백허의(白乎矣)로, 도남도(道南道)에 들어가서는 이미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와 같은데, 유독 이 북도(北道)에서만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으니 이는 격려하는 본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백량치(白良置)는 순찰사(巡察使)가 □ 계청(啓請)하여 처치한 일로, 하찮은 소관이 □ 계청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제(白齊)는 도내에서 창의를 주도한 사람으로 경성(鏡城)에 사는 전 훈도 이붕수(李鵬壽), 좌수(座首) 서수(徐遂)ㆍ이기수(李麒壽), 경성 정배(定配)에서 용서받은 전 도사 나덕명(羅德明), 부령(富寧) 좌수 김전(金銓) 등입니다. 지극정성으로 분주히 움직여 어리석은 사람을 깨우쳐 주었으니, 지금 일의 성취는 실로 그 공덕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지난날 상을 논할 때 거업 유생(旀業儒生) 가운데 금위영 차하(禁衛營差下)를 받은 것이 원통하고 답답한 듯하니, 감히 듣고서도 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성 판관 단치(段置)와 송안정(宋安廷)을 차하한 것은 어떠한지 해명해 주십시오. 모처에 머물러 있는 자는 해명이 있으면 가겠다고 하였으나 아직까지 부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부 또한 도회(都會)의 큰 곳입니다.

원문

以討賊諸具太半辦出爲白去等。留鎭假將前監察吳命壽叱分。以策應齟齬爲白昆。同宋安廷乙。催促赴任敎是去乃。□朝廷以別樣處置爲白乎去望良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十六日。〔原注:疑非一□啓係圈下〕

번역

적을 토벌하는 데 필요한 물품들을 대부분 마련해 내고, 백거등(白去等)은 진영에 머물러 가장(假將)으로 있던 전 감찰 오명수(吳命壽)를 꾸짖어 분부하고, 책응(策應)이 어긋난 것을 백곤(白昆)에게 말하였습니다. 송안정(宋安廷)과 함께 재촉하여 부임하도록 하였고, 교시를 받으러 가고 있습니다. □ 조정에서 별도로 처치하기를 바라고, 양와(良臥)의 일을 잘 처리해 주기를 바랍니다. ◯ 선계(善啓)가 교시를 받으러 가는 일에 대해 차례대로 적습니다. 만력 21년 계사년 1월 16일. 〔원주: □는 아마도 한 번의 계(啓)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141. 端川破倭賊緣由及請軍器崔東望,李成吉從事官差定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28B, ITKC_MO_0284A_A071_128C ...

원문

前年十二月分。臣北行六鎭。今年正月十三日。回還吉州次。以在鏡城朱村道中。得巡察使關字。以臣還定大將爲白有去乙。進到吉州城外十餘里許右衛將韓仁濟軍中。餉勞將士。本月十八日。進到本州多信里。餉勞左衛將柳擎天,中衛將吳應台所率將士。因爲留駐本處。欲爲吉城,嶺東兩處相機策應爲白如乎。端川郡守姜燦親到軍中言內。端川留賊。恣意橫行爲良置。兵皆步卒。怯懶先潰。下手不得。分軍馳射。亦懇懇說道爲白齊。吉州段。置兩處分兵。與賊相持。移兵他道。勢似非便乙仍于。自前諸將論議不一。未果出兵爲白有如乎節。思量爲白乎矣。吉州兩賊。勢挫縮頭爲白有去等。坐休強兵。不討一國一道之賊。事理乖當爲白乎去。卽抄精兵二百騎。分四隊。一隊將具滉。二隊將朴銀柱。三隊將印元忱。四隊將高敬民。岐如定體。各率五十名。同月二十日。多信里離發。由山路二十二日到端川翌朝四隊藏兵於城外二十里許使端川軍三十名。進次城外五里許。挑戰爲白乎矣。城中留賊狃於屢勝。略不顧忌。二百餘名。一時出城。直追端軍爲白去乙。佯敗還走之際。疲馬之卒。爲賊所殺。賊又乘勝遠追。直至伏處爲白去乙。四隊伏兵。一時突出。或遮其前。或截其腰。或斷其後。射矢如雨爲白乎矣。倭賊猝遇突騎。倉皇失措。多放鐵筒爲白良置。皆爲虛放不中。奔走無暇。莫敢相抗。追至城底。幾盡射斬。僅餘三十餘名。箇箇中箭入城爲白齊。大槪殺賊之數。小不下百餘名是白良置。北軍騎兵。專以騎射。未得一一斬馘。轉戰二十餘里。端川步卒。從後拾得耳級是如爲白良置。未知厥數幾何是白在果。四隊所斬段。一隊左耳二十一。二隊十四。三隊十五。四隊十一。合六十一箇。監封上送爲白齊。本月十九日。吉州城外。伏兵將元忠恕馳報內。倭賊百餘名。南門外一里許出屯。有一倭將。挾兩倭雙牽馬。向南出來。至二里許。牽馬二倭乙。落後隱置。單騎至三里許爲有去乙。同元忠恕。亦親率精騎十餘名。潛伏伺候爲白有如可。一時高聲突出。賊將蒼黃不能制馬。因爲墜落爲白去乙。元忠恕射中。鍾城甲士申守斬頭。步倭一名中箭顚仆爲白有去乙。門外諸倭。扶曳入城。斬頭不得。同賊將左耳割取。亦爲監封上送爲白乎旀。所着錦衣三件。環刀一柄。錦鞍甲鞍馬段。接戰有功人。論賞分給爲白有旀。吉州牧使鄭煕績牒呈內。州民私奴思郞金。斬納一級。伏兵軍寺奴尹煕。亦斬一級。又元忠恕馳報內。富寧定虜衛車德弘。斬一級。合四耳。亦爲上送。都合六十五級是白齊。凡此些少破賊事良中。一一錄功啓□聞爲白在果。爵賞有限。倭耳無窮。□朝廷施報有所難處爲白乎去。私自妄料乙仍于。前日加夫,臨溟兩處戰功乙。

번역

지난해 12월에 신이 북쪽의 6진(六鎭)을 순찰하였습니다. 올해 1월 13일에 길주(吉州)로 돌아오다가 경성(鏡城) 주촌(朱村) 도중에 순찰사 관문(關文)을 얻었는데, ‘신이 대장으로 정해져 돌아가는 것은 백유거(白有去)와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길주성 밖 10여 리쯤에 이르러 우위장(右衛將) 한인제(韓仁濟)의 군중(軍中)에 도착하여 장사들을 위로하고, 이달 18일에 본주(本州) 다신리(多信里)에 이르러 좌위장(左衛將) 유경천(柳擎天), 중위장(中衛將) 오응태(吳應台)가 거느리는 장사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곳에 머물면서 길주와 영동 두 곳에서 서로 기회를 엿보며 협력하기를 백여(白如)라고 하였습니다. 단천 군수 강찬(姜燦)이 직접 군중으로 와서 ‘단천에 남아 있는 적들이 제멋대로 횡행하고 있으며, 병사들은 모두 보졸(步卒)이라 겁을 먹고 게으르며 먼저 무너지니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여, 군사를 나누어 치달리게 하였습니다. 또한 간곡하게 말하기를, “백제(白齊)를 위해 길주(吉州)에 두 곳에 분병하여 적과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병력을 다른 도(道)로 옮기는 것은 형세가 편하지 않을 듯합니다. 전부터 여러 장수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끝내 출병을 하지 못하였으니, 백제를 위해 어찌할 것입니까? 길주의 두 적은 형세가 꺾여 머리를 숙이고 있으니, 백제를 위해 앉아서 강병(強兵)을 쉬게 하고 한 나라와 한 도의 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은 사리에 어긋납니다. 즉시 정예병 200기를 뽑아 4개 대대로 나누어 1대장은 구황(具滉), 2대장은 박은주(朴銀柱), 3대장은 인원침(印元忱), 4대장은 고경민(高敬民)으로 기로정체(岐如定體)를 삼고 각각 50명을 거느리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같은 달 20일 다신리(多信里)에서 출발하여 산길을 통해 22일에 단천(端川)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4개 대대는 성 밖 20리쯤에 병력을 숨기고 단천 군사 30명을 시켜…… 성 밖 5리쯤 되는 곳에서 적군과 맞붙어 싸웠습니다. 성안에 남아 있던 도적들이 여러 번 승리하자 대략 거리낌 없이 200여 명을 한꺼번에 성 밖으로 내보내 곧장 단군(端軍)을 추격하여 섬멸하러 갔습니다. 거짓으로 패배한 척하며 돌아올 때 지친 말에 탄 병사들이 도적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적이 또 승세를 타고 멀리까지 추격해 와서 복병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네 대의 복병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허리를 끊기도 하고 뒤를 차단하기도 하며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습니다. 왜적은 갑자기 돌격하는 기병을 만나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라 철통(鐵筒)을 마구 쏘았으나 모두 헛방이 되어 맞지 않았습니다. 도적들은 정신없이 달아나며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성 밑까지 추격해 왔는데, 거의 다 죽거나 베였고 겨우 30여 명만 화살을 맞은 채 성으로 들어왔습니다. 대략 도적을 죽인 수가 적어도 100여 명 이상이었습니다. 북군 기병은 오로지 말 타고 활 쏘는 데만 전념하여 하나하나 잘라내지 못하고 20여 리를 돌며 싸웠고, 단천 보졸(步卒)이 뒤따라가서 귀를 주워 모았으니, 이것을 백량치(白良置)라고 하는데 그 수가 얼마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백량이 과연 몇 개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대에서 잘라낸 것은 왼쪽 귀 21개, 2대에서 14개, 3대에서 15개, 4대에서 11개로 모두 61개입니다. 감봉(監封)이 올려보내어 백량치에 맞추었습니다. 이달 19일 길주성 밖에서 복병장 원충서가 급히 내부로 보고하기를, “왜적 100여 명이 남문 밖 1리쯤에 나와 주둔하고 있습니다. 왜장 한 명이 두 명의 왜졸을 거느리고 말을 몰고 남쪽으로 나오다가 2리쯤에서 말과 왜졸 두 명은 뒤처지게 하고 혼자서 3리쯤까지 갔습니다.” 하였습니다. 원충서도 친히 정예 기병 10여 명을 거느렸습니다.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적이 틈을 보이고서 한꺼번에 큰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오니, 적장(賊將)이 당황하여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습니다. 원충서(元忠恕)가 활로 맞추고 종성(鍾城)의 갑사(甲士) 신수(申守)가 목을 베었습니다. 보도(步徒) 왜인 1명이 화살에 맞아 쓰러져 죽었고, 성문 밖에 있던 여러 왜인들은 부축받아 성안으로 들어왔으나 목을 베지 못하고 적장과 함께 왼쪽 귀를 잘라 봉하여 올려 보냈습니다. 입고 있던 비단옷 3벌, 환도(環刀) 1자루, 비단 안장과 갑옷, 말의 다리 등은 접전에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길주 목사 정희적(鄭煕績)이 장계로 보고하기를, “주민인 사노(私奴) 사랑(思郞) 김(金)을 1급으로 참형에 처하고, 복병 군사 노비 윤희(尹煕)도 1급으로 참형에 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원충서가 급히 보고하기를, “부령 정로위(定虜衛) 차덕홍(車德弘)이……” 하였습니다. 1급을 베어 4개의 귀를 합쳐서 또한 위로 보냈으니, 모두 합하여 65급이 이 백제(白齊)입니다. 무릇 이런 적을 파괴한 일은 참으로 좋으니 하나하나 공적을 기록하여 보고하니, 듣는 이는 과연 기뻐할 것입니다. 작위와 상은 한계가 있고 왜적의 귀는 끝이 없으니 조정에서 보답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사사로이 망령되게 생각하여 전일 가부(加夫)와 임명(臨溟) 두 곳의 전공을 더합니다.

원문

皆不錄□啓爲白有去乎。臣遞大將之後會寧府使鄭見龍代將時。巡察使關據竝只分等。巡察使處牒報是如爲白去等。今此端川戰功。不爲□上聞爲白在如中。非徒有乖前規。士卒缺望。一己淺見。擅自沮抑。亦爲未安乙仍于。依例錄功報□聞爲白齊。所奪物件。亦爲錄□啓爲白良置。當此軍需板蕩之時。軍賞用下次以上送不得。極爲惶恐。其中倭銃筒段。前日備邊司關據破件二十箇。已爲上送爲白有如乎節。所奪二十箇。追于上送爲白齊。本道軍器蕩盡。措備急急。魚膠,弓絃,弓箭,帽最關爲白乎矣。辦出無路。極爲悶慮。□朝廷以措置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許多軍馬戎務似煩。迷劣下吏專掌文書。事多乖錯弦如。輸城察訪崔東望,軍資直長兼成均權知學諭李成吉。方在軍中爲白乎等以。從事官稱號帶率文書次知。亦計料爲白良置。臣以幺麽幕下之官。不少同列文官乙。任爲幕佐。事甚乖當。不敢擅便爲白乎旀。書狀陪持人段。鏡城定配人鎭撫金貴謙。當初倡義時。自募從軍。接戰鋒刃。參錄軍功爲白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正月二十七日。

번역

모두 공적을 기록하지 않고 비워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이 대장(大將)에서 체차된 뒤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견룡(鄭見龍)이 대장을 대신하고 있을 때 순찰사가 관문과 근거를 아울러 등급을 나누었는데, 순찰사가 첩보를 보고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이 단천의 전공은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으니, 이는 전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한 개인의 얕은 견해로 멋대로 억제하는 것도 온당치 않으므로 규례대로 공적을 기록하여 보고하는 것이 옳습니다. 빼앗은 물건도 공적을 기록하여 비워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군수품이 바닥난 이때에 군상(軍賞)으로 10개 이상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매우 황공합니다. 그중 왜총통의 대나무 통은 지난번 비변사의 관문과 근거로 파손된 20개를 이미 올려 보냈으니, 빼앗은 20개는 추후에 올려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본도의 군기(軍器)가 다 떨어져 마련하는 것이 급하니 어교(魚膠), 활시위, 활, 화살, 모자 등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련할 길이 없어 몹시 걱정입니다. 조정에서 조치하여 내려보내기를 바라는바, 많은 군마와 군무는 번거로울 듯합니다. 미련한 하리(下吏)가 문서 업무를 전담하면 일이 어긋나기 쉬우니,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과 군자 직장 겸 성균관 권지학 유 이성길(李成吉)은 지금 군중에 있으니 종사관의 칭호를 가지고 문서를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신은 하찮은 막하의 관원이지만 문관들과 같은 반열에 끼어 막좌(幕佐)를 맡고 있는 것은 매우 온당치 않으니 감히 멋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서장(書狀)을 받들고 갈 사람은 경성 정배인 진무사 김귀겸(金貴謙)으로, 당초 창의할 때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여 종군하고 전선에서 싸웠으므로 군공에 기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내용을 잘 정리하여 상께 아뢰는 것입니다. 만력 21년 계사년 1월 27일.

142. 與倭賊大軍戰白塔郊及倭賊退走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30B, ITKC_MO_0284A_A071_130C ...

원문

端川倭賊勦捕次。以分四隊。定將起送爲白有如乎。訓鍊正具滉等達夜奔馳。正月二十七日。還到吉州言內。南道倭賊千餘名。已越磨天嶺是如爲白去乙。臣卽領三衛兵。屯駐吉州臨溟地。抄發精騎六百。伏兵待候爲白有如乎。同倭賊嶺東留倭合勢。二十八日早朝。始叱瀰滿臨溟野中。入向吉州爲白去乙。伏兵將訓鍊正具滉,僉正朴銀柱,僉使姜文佑,判官印元忱高敬民,定虜衛金國信。各率所部。尾擊接戰。三衛段。遮前截腰。進退接戰。自辰初至酉時。追至六十餘里。訓鍊判官元忠恕段。吉州城外二十里許。伏兵爲白有如可。亦爲突出接戰。射矢鐵丸。彼我俱發爲白乎等以。未得短兵相接。只以輕騎馳逐。地廣則挾擊。地窄則尾擊。從事官學諭李成吉給傳令。迫至賊陣。使之督戰。與賊相距十數步。終日馳射。流血滿道。中箭死者不知其數爲白良置。倭賊載屍而去乙仍于。未得一一斬馘爲白齊。大槪本道軍民。爲倭賊積威所劫。猝遇大賊。多懷自沮。不敢交雜快戰乙仍于。使賊入城。極爲痛憤爲白乎旀。同日端川郡守簡通內。倭賊二千餘名。又到利城是如爲有去等。先來之賊。與嶺東吉州相合。少不下二萬餘名。又有利城二千繼至爲白在如中。賊謀難測。不無深入肆毒之患弦如。三衛相會約束中。衛左衛段。據明川。右衛段。守西北堡。吉州牧使段。除出左衛不精軍。移轉多信倉穀于海島。臣段。率麾下百餘名。入向鏡城。欲爲鎭定城守之計爲白如乎。中衛右衛所率軍段。各隨衛將來到陣所。左衛軍段。皆是吉州軍是白乎等以。托稱與牧使起義兵盡入海島乙仍于。左衛將。亦僅率斥候及左部幷百餘名。入向明川爲白臥乎在亦。經年赴戰。已爲官軍爲白有如可。一遇大賊。謀避城守。便生避亂之計。民心如此。極爲寒心爲白齊。倭賊等血戰入城。收取死者。積置官廳。燒其屍身。翌日。盡燒城內公私廨。乘夜潛遁爲白去乙。右衛將虞候韓仁濟。領軍馳到。卽入城內。滅火爲白乎矣。城中留穀。太半全在爲白齊。三衛將一時追擊。到嶺東爲白乎矣。倭賊等晝夜奔忙。不暇炊飯。南向出歸爲白乎等以。追不及擊爲白齊。賊退之後。所當急急追擊。勿論晝夜遠近。尾到賊到處爲白良音可爲白乎矣。惟只精兵等往來端川。倍日幷行之際。不得秣馬。盡日苦戰。人極馬疲。不能運步。又此追擊。日行百五十里爲白有去等。磨天大嶺。末由踰越叱分不喩。端川以南段。倭賊自前恣意橫行。閭家穀草。焚蕩一空。軍無依接之處。馬無喂飼之草。不爲預備。輕自越去爲白有如可。軍行大事。猝未進退。坐見饑乏絃如。端川郡守處移文。蒭糧準備與否。探聽爲白乎旀。一邊以北卩尙船輸運糧草。選精兵南向計料爲白在果。

번역

단천(端川) 왜적을 소탕하기 위해 4개 대대로 나누어 정장(定將)을 정하여 보냈는데, 백유여(白有如)입니다. 훈련대장 구황(具滉) 등이 밤새도록 달려 1월 27일에 길주(吉州)에 도착했습니다. 남도 왜적 1천여 명이 이미 마천령(磨天嶺)을 넘었다고 하기에, 신이 즉시 삼위병(三衛兵)을 거느리고 길주의 임명(臨溟) 지역에 주둔하고 정예 기병 600명을 뽑아 복병으로 대기시켰습니다. 왜적과 동령(東嶺)에 머물던 왜적이 합세하여 28일 이른 아침에 처음으로 임명 들판에 가득 차 길주로 들어왔습니다. 복병인 훈련대장 구황, 첨정 박은주(朴銀柱), 첨사 강문우(姜文佑), 판관 인원침(印元忱)ㆍ고경민(高敬民), 정로위 김국신(金國信)이 각각 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찔러 접전을 벌였습니다. 삼위단(三衛段). 앞을 가로막고 허리를 끊어버리며,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진시(辰時) 초부터 유시(酉時)까지 쫓아온 거리가 60여 리였습니다. 훈련판관 원충서(元忠恕) 단(段)이 길주성(吉州城) 밖 20리쯤에서 복병을 쳤는데, 백유여가(白有如可)도 역시 튀어나와 싸웠습니다. 화살과 철환(鐵丸)을 쏘았는데, 우리와 적군이 모두 발사하여 백허등(白乎等)으로 되었습니다. 단병(短兵)을 서로 맞대어 싸우지는 못하고 다만 경기(輕騎)로 치쫓았는데, 땅이 넓으면 협공을 하고 땅이 좁으면 후방을 공격하였습니다. 종사관 학유 이성길(李成吉)이 전령을 받아 적진에 다다라 독전(督戰)하게 하였는데, 적과 거리가 10여 보였습니다. 온종일 치고 쏘아 피가 길에 가득하였고 화살에 맞아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백량치(白良置)는 왜적의 시체를 실어 가고 이내 떠났으며, 일일이 목을 베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본도의 군민들은 왜적의 위세에 겁을 먹어 약탈당하였습니다. 갑자기 큰 적을 만나니, 스스로 억제하는 마음이 많아 감히 뒤섞여 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은 매우 통분한 일입니다. 같은 날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보낸 내부의 편지에 ‘왜적 2천여 명이 또 이성(利城)에 도착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앞서 온 왜적들이 영동 길주(吉州)와 합세하여 적은 수라도 2만여 명 이상이고, 또 이성의 2천이 뒤이어 도착한 것이니, 적의 모의를 헤아리기 어려워 깊숙이 들어와서 악행을 저지를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삼위(三衛)가 서로 만나 약속하기로 한 가운데 좌위(左衛)는 명천(明川)에 거처하고 우위(右衛)는 서북보(西北堡)를 지키며 길주 목사는 좌위의 정예 군사를 빼내어 다신창고(多信倉庫)의 곡식을 해도로 옮겨 보내고, 신은 휘하의 100여 명을 거느리고 경성으로 들어가 성을 진정시킬 계획입니다. 중위와 우위가 거느린 군단은 각각 위장을 따라 진영으로 왔고, 좌위의 군단은 모두 길주(吉州)의 군사들로 백호 등과 함께 목사와 함께 기병을 일으켰다가 병사가 다 바다 섬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좌위장 또한 겨우 척후와 좌부 및 백여 명을 거느리고 명천(明川)으로 향했는데, 백와호가 거기에서 해를 넘기며 싸움에 나갔으나 이미 관군이 되었습니다. 백유여는 큰 적을 만나면 성을 지키기보다 피란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민심이 이와 같으니 매우 한심하였습니다. 백제와 왜적 등이 혈전을 벌이며 성안으로 들어와 죽은 자를 거두어 관청에 쌓아 두고 그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다음 날에는 성안의 공사(公私) 관청과 집을 모두 불태우고 밤을 틈타 몰래 도망갔습니다. 우위장 우후 한인제(韓仁濟)가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즉시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불을 끄고 백성들을 구제하였습니다. 성안에 남은 곡식은 태반이 온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삼위장(三衛將)이 한꺼번에 추격하여 영동(嶺東)에 이르렀습니다. 왜적들은 밤낮으로 분주하여 밥을 지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남쪽을 향해 출입하는 것을 백성들이 보고서, 추격하지 못하고 공격하였습니다. 적이 물러간 뒤에는 밤낮과 거리를 막론하고 급히 추격하여 적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오직 정예병 등은 단천(端川)을 왕래하며 며칠 동안 함께 행군하면서 말에게 먹이를 주지 못하고 종일토록 고전하다가 사람도 지치고 말도 피로해져서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또 추격할 때 하루에 150리를 가는데, 마천령(磨天嶺)은 넘을 길이 없어 분부한 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단천 이남의 구간은 왜적들이 앞에서 제멋대로 횡행하여 민가와 곡식과 풀이 군대가 의지할 곳도 없고 말에게 먹일 풀도 없으니,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가벼운 군사들이 저절로 넘어가 버릴 것입니다. 군대의 행군은 큰일인데 갑자기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면 굶주리고 지쳐서 무너지게 됩니다. 단천 군수(端川郡守)에게 문서를 보내 양식을 준비했는지 여부를 탐지하여 보고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북쪽의 상선(尙船)에 양식과 풀을 실어 나르게 하고 정예병을 선발하여 남쪽으로 향할 계획이 실제로 있는지 보고하게 하소서.

원문

惟只倭賊急於南走。至於鐵嶺爲白在如中。北道軍馬糧草辦出無路事良中。勢難窮追。未知何如爲白乎旀。臣在北道時段。北兵使時未到界乙仍于。權行主將之事爲白如乎節。北兵使在南道爲白有去等。幕下之官。擅率道內軍馬。事體甚乖爲白乎等以。所率軍馬乙。移屬兵使計料爲白齊。二十八日戰亡人段。朱乙溫萬戶李希唐。極力死鬪。日暮時。中鐵丸身死。鏡城居前訓導李鵬壽。自初倡義時。盡誠奔走。出入賊中。窺覘虛實。忘身徇國爲白有如可節。奮願先登。中鐵丸身死。其餘士卒死者。二十五名是白遣。倭賊段。斬馘九級。監封上送爲白乎旀。奪馬十五匹爲白有齊。中箭載屍入城。官廳燒屍段。無慮百餘名是白良置。割耳上送不得爲白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二日。

번역

오직 왜적들이 남쪽으로 도망치기에 급급하여 철령(鐵嶺)에 이르러서는 마치 텅 빈 듯하였고, 북도(北道)의 군마와 양초를 마련할 길이 없어서 일의 형세가 막다른 데 이르렀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북도에 있을 때 북병사(北兵使)가 아직 경계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임시로 주장(主將)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북병사가 남도에 있을 때에는 가고 있는 등의 막하 관원이 도내의 군마를 멋대로 거느렸으니 일의 체모가 매우 어긋났습니다. 따라서 거느린 군마를 병사에게 옮겨 소속시키는 것이 합당합니다. 28일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은 주온(朱乙溫) 만호와 이희당(李希唐)이 극력 싸우다가 해가 저물 무렵에 중철환(中鐵丸)을 맞고 죽었고, 경성(鏡城)의 전 훈련도사 이붕수(李鵬壽)는 처음 창의할 때부터 정성을 다해 분주히 움직이며 왜적의 진영을 드나들며 허실을 엿보았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한 것이 매우 가상합니다. 그는 앞장서서 싸우다 중철환을 맞고 죽었고, 그 나머지 사졸 중에 죽은 자는 25명입니다. 왜적은 목을 베어 9급으로 나누어 봉하여 올려 보냈으며, 말 15필을 빼앗아 중철환을 맞고 시신을 실은 채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관청에서 시신을 불태운 사람은 100여 명이고, 귀를 베어 올려 보내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잘 정리하여 아뢰니, 가르침을 주소서. 만력(萬曆) 21년 계사년 2월 2일.

143. 倭賊退走後將士軍功磨鍊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32A, ITKC_MO_0284A_A071_132B ...

원문

正月二十八日。南道倭賊與嶺東合勢。入向吉州之際。自臨溟野至吉州城底。終日接戰。無數射殺。力戰將士。所當軍功磨鍊。分等啓□聞事是白在果。唯只未能快戰大捷。使賊入城。致有夜遁。終始所斬只有九級。餘皆載屍火燒爲白有去等。斬馘九級叱分以。論功上報。實爲未安乙仍于。所斬人叱分分等除良。列書磨鍊。臣段。伏鑕待罪爲白乎旀。萬一此賊。不分晝夜。直向南路爲白在如中。端川以南段。一路人家全數焚蕩。軍馬露宿是白乎乙去爲白在果。蒭糧準備極難。次次措置爲白良沙。始爲行軍事是白去等。出送境內之賊。安坐不追。極爲痛憤。肝膽如裂爲白齊。本道經年爲盜賊之窟。男丁赴戰。老弱轉輸。將有自斃之患是白良置。軍民皆知不可與賊俱生乙仍于。儒生等至亦徵發。隅無亦當初始叱自募赴戰。至於立功爲白有去等。□朝廷事目內。自募人等論功有差亦爲白乎等以。自募各人等乙。成冊。各其名下。論功上送爲白乎旀。土及第安原,權管姜文佑。自初倡義首功叱分不喩。累次赴戰。極力先登。輒有大功爲白有如乎節。前年十一月初七日。□下批建功將軍。美錢僉使差送。十二月初八日。又差彰信校尉,訓鍊判官降資除受爲白有臥乎所。未知其由。敢此報稟。極爲惶恐爲白齊。狀□啓陪持人段。主簿崔配天。當初倡義及軍功賞職。以再次自願陪持叱分不喩。節南倭入來時段置。終日力戰。至爲可嘉乙仍于。依願再送爲白有臥乎事是良厼。詮次以善□啓向敎是事。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三日。

번역

정월 28일 남도 왜적과 영동(嶺東)이 세력을 합쳐 길주(吉州)를 향해 들어왔는데, 임명야(臨溟野)에서부터 길주성 아래에 이르기까지 종일 접전을 벌여 무수히 쏘아 죽였습니다. 힘을 다해 싸운 장사들의 군공(軍功)을 마련하여 등급을 나누어 보고하는 일은 사실입니다. 다만 신속하게 대첩을 거두어 왜적을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 못하고 밤중에 도망치게 한 것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참수된 자는 9급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시체를 실어다가 불태웠습니다. 참수된 9급은 그 공로를 논하여 상보(上報)하는 것이 실로 온당하지 않으니,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참수된 사람의 등급을 나누어 양호한 자들을 열거하여 마련합니다. 신은 삼가 죄를 받겠습니다. 만일 이 왜적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곧장 남쪽 길로 향한다면 단천(端川) 이남의 한 줄기 마을이 모두 불타버릴 것입니다. 군마(軍馬)를 노숙(露宿)시키는 것은 백후(白狐)가 가고 백호(白虎)가 있는 것과 같고, 군량(軍糧)을 준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차차 조치하는 것은 백양사(白良沙)와 같고, 처음으로 군사를 행하는 것은 백거등(白去等)과 같습니다. 경내의 도적을 내보내어 보내면서도 편안히 앉아 추격하지 않는 것은 몹시 분통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본도는 해마다 도적의 소굴이 되어 남정(男丁)은 전쟁에 가고 노약자들은 번갈아 끌려가니, 스스로 죽을 근심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군민들이 모두 도적과 함께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으므로 유생(儒生) 등도 징발하였습니다. 구석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마땅히 처음부터 호령하여 자원해서 전쟁에 나가게 해야 합니다. 공을 세우는 데 이르러서는 백유등(白有去等)과 같습니다. □ 조정의 사목(事目)에, 자원한 사람들의 공적을 논할 때 차등이 있는 것은 백후와 같으니, 자원한 각인의 성명을 책으로 만들어 각각 그 이름 아래에 공적을 논하여 올려야 합니다. 토급제 안원(安原) 권관(權管) 강문우(姜文佑)는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수공(首功)으로 분수 밖의 일을 해냈습니다. 누차 전투에 나가서 극력 앞장서서 올라갔으므로 번번이 큰 공로가 있었고 절개도 백유와 같았습니다. 지난해 11월 7일에 하비(下批)로 건공장군(建功將軍)을 삼고 미전첨사(美錢僉使)를 차출하여 보냈습니다. 12월 8일에 또 창신교위(彰信校尉)와 훈련판관(訓鍊判官)으로 자급을 낮추어 제수되니, 백유와 같은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감히 이렇게 보고드리니 매우 황공합니다. 장계(狀啓)를 받든 사람 단(段)과 주부 최배천(崔配天)은 당초 의병을 일으키고 군공으로 직책에 오를 때 두 번이나 자원하여 받들었으므로 분수 밖의 일을 해냈습니다. 절 남왜(南倭)가 침입했을 때 단이 종일토록 힘껏 싸워 매우 가상하였으므로, 그 소원을 따라 다시 보내는 일은 참으로 마땅합니다. 선(善)과 □(□는 훼손됨)로써 계향교(啓向敎)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만력 21년 계사년 2월 3일.

144. 巡營牒報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32D, ITKC_MO_0284A_A071_133A ...

원문

兵馬評事爲相考事。本月十七日。到付端川倭賊斬馘啓□聞辭緣牒報書目回送內。評事亦十一月十九日見敗之後。欲爲北巡。則順受兵使節制。而獻馘之時。兵使乙未到界是如。斥而黜之。使不得與聞於其間爲旀。正月二十八日之後敗。則非大將節制是喩。亦爲水路狀□啓爲喩。相考馳報爲旀。以一國之軍。討一國之賊爲在如中。端川討賊之兵。實非評事私物之見處者是去等。端川亦有水路。端川所獲之馘乙。端川郡守。亦可狀□啓是去乙。全數奪去。以爲己功爲有臥乎所。殊非不伐君子之所爲是齊。韓伯謙討捕將定體差帖乙良置。急速收取。爲先上使爲齊。各社成冊段置。備邊司關字乙。謄送已久爲有昆。急速施行爲旀。責送倭馬之說。必非偶然是昆。更良相考吉州所獲倭馬。各名之下。某馬段。某某人許給。某馬段。某使道上使是如。一一懸錄。斯速牒報向事爲等如良置。回送是置有亦。相考爲乎矣。十一月十九日段。評事在明川。中衛將鄭見龍,左衛將柳擎天,右衛將吳應台。分三衛。發送嶺東館倉。圍抱拔柵亦爲乎矣。軍卒等狃於累勝。輕進逢丸。仍致死傷叱分是遣。別無敗走之事爲旀。假說以敗受罪爲良置。一道名將鄭見龍爲先受罪事是旀。獻馘狀□啓事段。八道起兵削髮僧人至亦亦爲直□啓。別無□朝廷禁斷事良中。評事耳亦直□啓獻馘。仍陷死罪爲乎乙所知不得爲旀。正月二十八日段置。依南關例。觀光致送爲在如中。不傷一卒是乎事是去乙。評事段妄意接戰乙仍于。彼此俱傷。別無敗軍之事乙仍于。亦爲昧死狀□啓爲有旀。端川留賊勦捕時段置。端川人實爲先登斬馘爲在如中。不必請來北軍事是旀。各人所斬乙。仍各持歸乙仍于。端川郡守處耳級乙。進排不得爲旀。奪人所斬。以爲己功事段。吮癰舐痔者之所不忍是去等。評事雖無狀。白日之下。不敢爲此事爲旀。韓伯謙討捕將差帖段。非但目所不見。實爲耳亦不聞乙仍于。上使不得爲旀。各社成冊段。件件催促。各官時未牒報爲有旀。倭馬所奪數段。無慮數百是良置。隱匿不現。一一搜覓不得。置簿爲在百餘匹內。或以軍功永給所奪人叱分是遣。徐佐郞傳言段。自前始叱知不得是如。已爲牒報爲有齊。大槪□宗社爲墟。□乘輿蒙塵。爲臣子者少有功利之心。不以討賊爲急爲在如中。雖免人禍。必有天殃乙仍于。一心討賊外。世情人事間曲折乙。有不暇顧。直行不疑爲如乎節。爲人所搆。終陷重律。使讒奸之輩。貍笑於暗壁之間爲乎乙可。至爲悶慮爲臥乎事是良厼。牒報兼都巡察使使道。癸巳二月十九日。

번역

병마평사(兵馬評事)가 상고한 일입니다. 이달 17일에 단천(端川) 왜적을 참수하고 머리를 베었다는 계문사연첩보서목(啓聞辭緣牒報書目)이 돌아왔습니다. 평사도 11월 19일 패배한 뒤에 북쪽을 순찰하려고 하였는데, 순수 병사(順受兵使)의 절제(節制)를 받아 머리를 바칠 때 병사가 아직 경계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습니다. 내쫓아 두어 그 사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것은 잘못입니다. 1월 28일 이후에 패배한 것은 대장이 절제한 것이 아니니, 또한 수로(水路)의 장계로 삼는 것도 잘못입니다. 상고하여 급히 보고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한 나라의 군대로 한 나라의 왜적을 토벌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단천에서 왜적을 토벌한 병사는 실로 평사의 사적인 소견이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단천에도 수로가 있고, 단천에서 얻은 머리는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또한 장계한 것은 지난번을 핑계로 전수를 빼앗아 자기의 공으로 삼으려 한 것이니, 이는 결코 군자가 할 바가 아닙니다. 한백겸(韓伯謙)을 토포장(討捕將)에 정체(定體)하여 차임하고, 속히 수찰하게 하소서. 각 사(社)의 성책(成冊)은 비변사 관문(關文)에 등송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속히 시행하소서. 왜마를 책송하라는 말은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이니, 다시 길주(吉州)에서 얻은 왜마를 각 명칭 아래에 ‘어느 말은 누구에게 주었다’, ‘어느 말은 어느 사신에게 도상에서 주었다’는 식으로 하나하나 기록하여 속히 첩보(牒報)할 것을 명하소서. 회송하는 것은 또한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평사(評事)가 명천(明川)에 있습니다. 중위장 정견룡(鄭見龍), 좌위장 유경천(柳擎天), 우위장 오응태(吳應台)가 세 위로 나누어 영동관창(嶺東館倉)으로 출발하여 포위하고 성문을 뚫은 것도 사실입니다. 군졸들이 연승에 익숙해져서 가볍게 진격하다가 탄환을 맞아 죽거나 다친 자가 많아 분부대로 떠나보냈고, 별도로 패주한 일은 없었습니다. 패배했다고 하여 죄를 받는 것이 좋다고 가설을 세웠는데, 도의 명장인 정견룡이 먼저 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머리를 깎은 승려들이 8도에서 일어나 병사를 일으킨 것도 사실로 보고해야 합니다. 별도로 조정에서 금지한 일이 없었으나 평사 또한 직접 보고해야 하고, 머리를 깎은 승려들이 죽었다는 죄를 입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1월 28일에는 남관(南關)의 예에 따라 관광을 위해 보내야 합니다. 한 명의 병사도 다치지 않는 것이 바로 일의 본질입니다. 평사(評事) 단망(段妄)이 접전(接戰)에 대해 말하기를, “피차(彼此)가 모두 다친다면 별로 패군(敗軍)할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계급을 올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단천(端川)에 남은 도적을 토벌하여 잡을 때 단천 사람들은 실로 먼저 올라가 적의 머리를 베었으니, 북군(北軍)을 청해올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베어낸 것을 각자 가지고 돌아가게 하고 단천 군수에게 진배(進排)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남이 베어낸 것을 빼앗아 자신의 공으로 삼는 것은 옹저를 빨고 종기를 핥는 자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평사 비록 형편없으나 대낮에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한백겸(韓伯謙)을 토벌하고 잡으러 보낼 장교를 차임하는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귀로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상사(上使)가 궐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각 사(社)의 책자 작성 건을 건건이 재촉하는데, 각 관청에서 아직 장계로 보고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왜마(倭馬)를 빼앗은 수십 단락은 대략 수백 필이 될 것인데 숨겨서 드러내지 않아 하나하나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장부에 기록된 것은 100여 필 안팎이고, 혹 군공으로 영구히 지급한 것을 빼앗은 사람에게 꾸짖어 나누어 주라고 보낸 것입니다. 서좌랑(徐佐郞)이 전한 단락은 이전부터 처음부터 꾸짖어 알지 못했던 것이 이와 같고 이미 장계로 보고된 것이 있습니다. 대개 종묘사직이 황폐해지고 승여(乘輿)가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었는데, 신하 된 자로서 조금이라도 공리심(功利心)이 있다면 적을 토벌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비록 인화(人禍)는 면할지라도 반드시 천재의 재앙이 잇따를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적을 토벌하는 것 외에 세상의 정세나 사람들의 일에 관한 곡절은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곧장 의심 없이 행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 꾸며진 것이니 끝내 중한 법률에 빠져 참소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어두운 벽 사이에서 비웃게 되었으니, 이것이 옳겠는가. 지극히 근심스럽고 걱정되어 누워서 이 일을 생각하노라. 첩보 겸 도순찰사(牒報兼都巡察使) 사도(使道)는 계사년 2월 19일에 씁니다.

145. 倡義討倭諭咸鏡道列邑守宰及士民檄〔原注:初無此題。今以檄文辭意。如是追成。○此文。自初見佚。文集開刊後。始得於忠州許昶家。蓋許之高祖府使秭善書。嘗寫此文及農圃所製拜韓信大將制。其子孫珍藏流傳矣。文末書云鄭某再檄。其有初檄明矣。且尤庵宋先生答畏齋李公書曰。嘗讀其壬辰檄文。想像其爲人。老峯閔公。亦曰。以壬辰旣誅鞠賊後。諭衆之辭觀之。其忠義見識。卓犖如彼云爾則此檄之前。又有一檄益驗。無由求得竝刊而傳後。殊可恨也。〕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34B, ITKC_MO_0284A_A071_134C ...

원문

蓋聞忠臣。捐軀而報主。智者。相時而圖功。試觀□聖朝之臣民。孰效亂日之忠智。洪惟立國二百載。傳序十一君。多殷先哲王。世無失德。右周家文敎。人不知兵。禮樂文哉。干戈休只。豈意海寇敢侮我邦。始有通信之甘言。終發借途之難請。交隣猶可爲也。犯上其能從乎。非我召兵。自彼生毒。乃擧其國。乃侵于疆。萬艘連環。長戈耀日。交鋒未浹于旬朔。禍慘永嘉之南渡。破竹已及於都城。事迫天寶之西幸。都亭有委師之夷甫。雍丘無起兵之張巡。房太尉陳衆建之謀。分王子於諸道。岳少保獻早定之策。係民望於東宮。惟我北方。王業攸基。天險之地。民生懷子惠之德。應知戴商。蕃種感卯育之仁。豈能忘漢。地利則高山峻嶺。物產則健馬勇夫。今者長君來臨。老相保護。郭子儀擁朔方之精卒。敢怠勤王。种師道領山西之健兒。宜先赴敵。一自北嶺失險。西路不通。邵陵無糾合。諸侯誰則同恤。河陽絶奔問。官守我之何求。陳宜中有今日之逃。宋華元告半夜之病。言之可哭。彼其何心。□聖上簡賢任能。崇文尙武。其亡之戒。尙軫於豐豫之時。克詰之謨。恒講於恬嬉之日。將天意欲絶我寶命。抑人性自失其秉彝。擧目魏國之山河。誠知非寶。痛心唐家之藩鎭。何用爲臣。公等或王室之親。或勳閥之曹。或自宰列而建節。或由侍從而佩符。寵以高官。非狼瞫之見黜。食以厚祿。異柱厲之不知。橫黃金。建紅旗。榮亦莫大。披赤心。冒白刃。死何敢辭。諭爾軍民曁厥父老。□祖宗之遺澤不斬。必欲一擧以殲之。君臣之大義猶存。自有同聲而應者。孟明得功於三敗。後事可掩其前愆。少康興業於一成。大勳庶圖於小邑。惟彼倭賊。以其無道。讎我有仁。較其勢則彼爲之賓。軌其辭則我爲之直。雖肆蛇虺之毒。必受鯨鯢之誅。以天道言之。飄風驟雨。不終朝。沍寒陽春。自有序。以人道言。阻兵安忍亡之道。懸軍深入敗之形。究諸天人。卜玆勝敗。飛吾片幅。告我同盟。□乘輿何歸。未見天祥之入衛。王城誰守。不聞宗澤之過河。□朝廷之待臣子者何如。臣子之報□朝廷者若是。所貴惟義。可愛非君。窮谷深林。或可偸一時之命。靑天白日。其能容百年之身。嗟汝父老。國破家可全。父在子焉往。敦諭爾子弟。毋負我□國家。功業可以成。將相寧有種。矧今皇天悔禍。蓐收行秋。北地早寒。南風不競。馬肥弓勁。士奮賈勇之心。鶴唳風聲。敵摧狃勝之氣。某等鳩忠信於十室。激義烈於一方。力弱城孤。雖無萬全之勢。名正言順。可期一捷之勳。勿以賀蘭之猜疑。願察傅燮之慷慨。諸公各領兵馬。克期掃淸。軍賞等差。□朝旨詳實。莫以兒女之戀。終誤丈夫之圖。於乎。審輕重於泰山鴻毛。定取舍於河魚,熊掌。罔貽妻孥之戮。永遺子孫之榮。□國典□嚴。余言不再。咸一心力。無違檄文。

번역

대체로 듣건대 충신은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보답하고, 지자는 때를 살펴 공을 도모한다고 합니다. 한번 우리 성조의 신민들을 살펴보면 누가 난세의 충성과 지혜를 본받았는가. 나라를 세운 지 200년이 되고 열한 분의 군주가 전해 내려오니, 선왕들의 덕이 두터워 세상에 실덕(失德)이 없었습니다. 주나라 집안의 문교(文敎)로 인하여 백성들은 병법을 모르고 예악은 화려하며 전쟁은 그치었으니, 어찌 바다의 도적이 감히 우리 나라를 업신여길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처음에는 통신(通信)이라는 달콤한 말로 시작하여 끝내 길을 빌려달라는 어려운 청을 하였으니, 이웃 나라와 교류하는 것은 가능하나 임금을 범하는 것을 능히 따르겠는가. 우리가 군사를 부른 것이 아니라 저들이 스스로 독기를 품어 나라를 일으켜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수많은 배가 쇠사슬로 연결되고 긴 창이 햇빛에 번쩍이니, 전투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화란(禍亂)은 영가(永嘉)의 남쪽으로 건너갔고 파죽지세로 도성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일이 천보(天寶) 연간의 서행(西幸)을 재촉하니, 도성 정자에 사신을 위임한 이보(夷甫)가 있었습니다. 옹구(雍丘)에는 군사를 일으킨 장순(張巡)이 없고, 방 태위(房太尉)는 진중건(陳衆建)의 계책을 펴서 왕자를 여러 도에 나누어 주었으며, 악 소보(岳少保)는 일찍 정벌할 방책을 바쳐 동궁에 민심을 붙였네. 오직 우리 북방은 왕업의 터전이고 천혜의 요새로서 백성들이 임금의 은덕을 생각하여 당연히 상(商)나라를 숭상해야 하고, 번종(蕃種)이 모육(卯育)의 인자함을 감격하여 어찌 한(漢)나라를 잊겠는가. 지리적으로는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로 요새가 되고 물산으로는 건장한 말과 용맹한 사내들이 나네. 이제 장군이 오셔서 노신이 보호하니, 곽자의(郭子儀)는 북방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감히 왕을 위해 힘쓰기를 게을리할 수 없으며, 종사도(種師道)는 산서(山西)의 건장한 사내들을 거느리고 마땅히 먼저 적진으로 달려가야 하네. 일찍이 북쪽 고개에서 요새를 잃고 서쪽 길이 막혀 소릉(邵陵)에 결집할 곳이 없으니, 제후들은 누가 함께 구제해 줄 것이겠습니까? 하양(河陽)은 소식을 전할 길이 끊겼으니 관수(官守)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진의(陳宜)가 오늘날 도망친 것이 마땅하네. 송 화원이 한밤중에 병을 고한 말이 슬프기 그지없으니, 저들은 무슨 마음이겠는가. 성상께서는 어진 이를 간택하여 임용하고 문치를 숭상하면서도 무력을 중시하시니, 망할 경계는 풍요로울 때에 더욱 삼가고, 바로잡을 계책은 한가로울 때에 항상 강구하셨습니다. 하늘이 우리 보배로운 목숨을 끊으려 하시는지, 아니면 사람의 본성이 스스로 그 바른 도리를 잃어버린 것인지, 위나라의 산하를 바라보면 참으로 보배가 아님을 알겠고, 당나라의 번진(藩鎭)을 생각하면 어찌 신하 노릇을 하겠는가. 공들은 왕실의 친척이거나 혹은 훈벌의 일원이며, 재상 반열에서 절도사가 되거나 시종으로 부절을 차게 되었습니다. 높은 관직으로 총애를 받고 주려(柱厲)처럼 녹봉을 많이 받으며, 황금으로 장식하고 붉은 깃발을 세우니 영광이 또한 큽니다. 그러나 진심을 드러내고 칼날을 무릅쓰는 죽음이야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그대 군민과 부모에게 고하십시오. 조종의 유택을 끊지 않고 반드시 한 번 들어서 멸하고자 하니, 군신의 대의가 아직 남아 있어 저절로 같은 소리로 응답하는 자가 있습니다. 맹명은 세 번 패배한 데서 공을 얻었으니 후일의 일로 전날의 허물을 덮을 수 있고, 소강은 한 번 성공한 데서 사업을 일으켰으니 큰 공적은 작은 고을에서 도모할 수 있습니다. 저 왜적은 무도하기 때문에 우리를 원수로 여기지만, 형세를 비교하면 저들은 우리의 손님이 되고, 그 말을 따져보면 우리는 곧은 자가 됩니다. 비록 뱀과 전갈의 독을 부리더라도 반드시 고래와 상어의 벌을 받을 것입니다. 천도로 말하자면 거센 바람과 소나기는 아침 내내 계속되지 않고 추운 겨울과 따뜻한 봄은 절로 차례가 있으며, 인도(人道)로 말하면 군사를 막고 어찌 차마 죽을 길을 가겠으며, 군대를 배치하고 깊이 침투하여 패배할 형세를 만들겠습니까. 천인(天人)의 도리를 궁구하고 승패를 점쳐서 나의 편지 한 조각을 날려 우리 동맹에게 고합니다. □ 수레를 타고 어디로 돌아가시렵니까. 천상의 상서가 입위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왕성을 누가 지키겠는가. 종택이 황하를 건넜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조정이 신하를 대우하는 것이 어떠한가. 신하가 조정에 보답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귀하게 여길 것은 오직 의리이지 임금이 아니네. 궁벽한 골짜기와 깊은 숲속이라면 혹시 한때의 목숨을 훔칠 수 있겠지만, 푸른 하늘과 밝은 해 아래에서 어찌 백 년의 몸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아, 너의 부친이여, 나라가 망해도 집안은 온전할 수 있으나 아버지가 계시는데 자식은 어디로 가겠는가. 너의 자제들에게 돈독히 유시하여 우리 국가를 저버리지 말게 하십시오. 공업을 이룰 수 있다면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가 없겠는가. 더구나 지금 하늘이 재앙을 뉘우쳐 가을을 거두어들이니, 북쪽 땅은 일찍 추워지고 남풍은 불지 않네. 말은 살지고 활은 팽팽하니, 선비들은 장사꾼의 용기를 분발하고, 학의 울음소리는 바람 소리 같으니 적들은 승세가 무너졌네. 우리들은 충신을 십실(十室)에 모으고 의열을 한 지방에 격발시켰네. 힘은 약하고 성은 외로워 비록 만전의 형세는 없으나, 명분이 정당하고 말이 순조로우니 한 번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네. 하란(賀蘭)의 시기심을 가지고 부섭(傅燮)의 강개함을 살피지 말라. 제군들은 각각 병마를 거느리고 기필코 적을 소탕하십시오. 군사에게 주는 상은 차등이 있으니, 조정의 상세한 뜻을 잘 살펴서 아녀자의 연모 때문에 끝내 장부의 계책을 그르치지 말라. 태산과 깃털처럼 경중을 살피고, 물고기와 곰 발바닥처럼 취사(取捨)를 정하여 처자식의 죽음을 초래하지 말고 자손에게 영원한 영광을 남기라. 국법은 엄하니 내 말을 거듭 하지 않겠습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힘써서 격문과 어긋남이 없도록 하십시오.

146. 諡狀[閔鎭厚]

문체: 傳記類 / 行狀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36B, ITKC_MO_0284A_A071_136C ...

원문

□宣廟朝名臣全州府尹農圃鄭公旣歿之八十年。其曾孫前主簿杉上疏言。臣之曾祖父文孚。當壬辰板蕩之際。以北評事。倡義起兵。誅土賊。破倭寇。以克定關北。而臬司掩蔽。功賞未稱□仁祖反正之初。不幸橫罹獄援。卒以詩案枉死於桁楊。及至□先王朝。雪其冤枉。而贈爵錄後。又從而特□宣祠額。崇報之典大備。唯是□贈諡一事尙未之擧。豈非□聖朝之一闕事也。事下。該曹覆奏曰。文孚功烈節義。前輩名臣多言之。無復可議。□國家故事。非實職正二品以上。例不得諡。而有所取而諡之者。亦不拘此限。杉之言。是也。□上亟許之。又其後十年。杉之再從弟構袖公文集及家狀一通。來謁于鎭厚曰。先祖易名。旣蒙□聖允。而未幾而兄杉病死。太常之狀。至于今未就。世之知吾祖事蹟者。莫如子詳。敢以爲托。鎭厚再拜而受之曰。然。昔我先君子文貞公通判鏡城。聞公之風。而慕義特至。至操文致酹於與公同事諸人之墓。先仲父議政公嘗按北藩。立公之遺祠。以永樹風聲。而使民有所興勵。鎭厚雖甚不肖。猶知樂有賢父兄。則今於公文字之役。其烏敢辭之哉。謹按。公字子虛。農圃。其號也。系出海州。高麗侍中肅之後。入我□朝。有贊成事貞度公易。最顯。其子同知忠碩。以孝友聞。同知之子曰參議忱。參議之子曰府使延慶。自府使三世。而至公之考愼。文科正。□贈禮曹判書。妣貞夫人金氏。將仕郞興禮之女。公以嘉靖乙丑二月十九日生。幼而嶷然有大志。其遊戲。必分曹布陣。爲對敵相戰狀。公居中號令。而群兒皆奉其約束。嘗往視捕虎。咆哮之聲振天地。群兒無不顚仆辟易。而公獨安坐自若。見者異之。又聰穎絶人。讀書。過目成誦。七八歲時。所綴詩句。已膾煮一世。間習射藝。有穿楊之妙。如天文,算數。亦皆通曉焉。乙酉。中生員,進士兩試。戊子。登明經甲科第二名。例付漢城參軍。萬曆辛卯。除北評事。評事實兼學校表率之任。公至則敎之有法。而待之以禮。甚得諸生之心。翌年夏。倭寇陸梁。□乘輿西狩。賊將淸正長驅入北。北兵使韓克諴欲守磨天嶺。軍潰而走。賊遂入。瀰滿沿江諸郡。人心壞亂。兇徒竊發。明川之末秀,木男。會寧之鞠景仁。鏡城之鞠世弼。皆叛賊之魁。而世弼至受倭署。置有官號。聲埶尤張。時臨海,順和兩□王子及大臣金貴榮,府院君黃廷彧,其子承旨赫。避兵在北。景仁縛之以給倭。南北兵使,諸邑守宰,鎭堡邊將。幾盡陷於叛賊。公遂潛匿於山中。路遇叛卒。將執之以去。賴有一書生。以所持農器。擊殺叛卒。脫公而送之。又爲土人所射。幾死而免。公聞前監司李聖任。亦在奔逬中。窮尋往見。共謀倡義。仍與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彥,輸城察訪崔東望。謫人韓百謙羅德明等。起兵入鏡城。衆畏世弼威脅。俄皆潰散。

번역

선조 때 명신(名臣)인 전주 부윤 농포 정공이 죽은 지 80년이 되었는데, 그의 증손자인 전 주부(主簿) 서상(杉上)이 상소하기를, “신의 증조부 문부(文孚)는 임진왜란 때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을 죽이고 왜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이를 은폐하여 공로에 대한 보상이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인조가 정권을 잡은 초기에 불행히도 옥사(獄事)에 휘말려 시안(詩案)으로 인해 항양(桁楊)에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선조 때 이르러 그 억울함을 씻어 주고 후사에 녹봉을 주었으며, 또 특별히 선조의 사당에 편액을 써서 보답하는 전례를 크게 갖추었습니다. 다만 시호를 내리는 한 가지 일만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어찌 성조(聖朝)의 한 가지 빠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해당 조가 의견을 갖추어 아뢰기를, “문부의 공렬과 절의에 대해서는 선배 명신들이 많이 말하였으니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 국가의 고사(故事)에 실직 정2품 이상이 아니면 예사로 시호를 내리지 못하는데, 특별히 취하여 시호를 내리는 경우에는 이 한도에 구애받지 않는다. 杉의 말이 이것이다. □ 상이 속히 허락하였다. 또 그 후 10년 뒤에 杉의 재종제(再從弟) 고수(構袖)가 공문집과 가상(家狀) 1통을 가지고 진후를 찾아와서 아뢰기를, “선조의 시호를 이미 □ 성상께 허락받았는데 얼마 안 되어 형 杉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태상의 장문(狀文)이 지금까지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우리 선조의 사적을 잘 아는 사람은 자상(子詳)만 같으니, 감히 부탁합니다.” 하였다. 진후가 재배하고 받으며 말하기를, “그렇다. 옛날 우리 선군(先君) 자문정공(子文貞公) 통판 경성(鏡城)이 공의 풍모를 듣고 의리를 흠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직접 글을 지어 공과 함께 일했던 여러 사람의 묘소에 치제(致祭)하였다. 선중부(先仲父) 의정공(議政公)이 일찍이 북번(北藩)을 안찰할 때 공의 유사(遺祠)를 세웠다.” 하였다. 영수(永樹)의 바람 소리를 들어보며 백성들을 흥려(興勵)하게 하소서. 진후(鎭厚)가 비록 매우 불초하지만, 그래도 현명한 부형이 계심을 알았으니, 지금 공문서(公文字)를 작성하는 일에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자는 자허(子虛)이고 농포(農圃)는 그 호이다.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는데 고려 시중 숙(肅)의 후예이다. 우리 □조에 들어와서 찬성사 정도공(貞度公) 이(易)가 가장 현달하였고, 그의 아들 동지 충석(忠碩)은 효우로 알려졌으며, 동지의 아들은 참의 침(忱), 참의의 아들은 부사 연경(延慶)이다. 부사 3대째에 이르러 공의 고조 신(愼)이 문과 정과를 거쳐 □ 증 예조 판서가 되었고, 비는 정부인 김씨로 장사랑 흥례(興禮)의 딸이다. 공은 가정 을축년 2월 19일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큰 뜻을 품었다. 그 놀이는 반드시 군사를 나누고 진을 치는 것이었다. 적과 싸우는 형편을 대조해 보면, 공은 가운데에서 호령을 내리면 무리들은 모두 그 명령을 받들었다. 일찍이 포호(捕虎)를 보러 갔을 때 사자의 포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자 무리들은 모두 넘어지고 달아났는데, 공만은 홀로 편안히 앉아 태연자약하였다. 이를 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또 총명함이 남달라 책을 읽으면 눈으로 훑는 대로 외웠고, 7~8세 때 지은 시구(詩句)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간혹 활쏘기를 익혀 화살로 버드나무를 뚫는 묘기가 있었으며, 천문과 산술도 모두 통달하였다. 을유년에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무자년에는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2등을 차지하자 관례대로 한성 참군(漢城參軍)에 부임하였다. 만력 신묘년에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어 평사(評事)의 실무와 학교의 표본이 되는 임무를 겸하게 되었다. 공이 부임하자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고 대우하는 데 예의가 있어 매우 제생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듬해 여름 왜구(倭寇)가 육량(陸梁)에 들이닥쳤다. □ 임금께서 서쪽으로 사냥을 떠나셨는데, 적장 청정(淸正)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쳐들어왔다. 북병사 한극통(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에서 지키려 하였으나 군사가 무너져 도망하였고, 적은 마침내 들어와 연강(沿江)의 여러 고을에 가득 찼다. 인심이 어지러워지고 흉악한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명천(明川)의 말수(末秀), 목남(木男), 회령(會寧)의鞠景仁(국경인), 경성(鏡城)의 국세필(鞠世弼)이 모두 반적의 우두머리였는데, 특히 국세필은 왜관에 이르러 관직을 받아 그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때 임해(臨海)와 순화(順和) 두 왕자와 대신 김귀영(金貴榮), 부원군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승지 혁(赫)이 피난하여 북쪽에 있었고, 남북병사와 여러 고을의 수령과 진보(鎭堡)의 변방 장수들이 거의 모두 반적에게 함락되었다. 공은 마침내 산속에 숨어 있다가 길에서 반적의 병사를 만나 잡혀갈 뻔하였는데, 다행히 한 서생이 가지고 있던 농기구로 반역한 군졸을 쳐서 죽이고 공을 탈출시켜 보냈는데, 또 토착민에게 총을 맞아 거의 죽을 뻔하다가 면하였다. 공이 듣건대 전 감사 이성임(李聖任)도 도망 중이라고 하여 궁구하여 찾아가 만나 함께 창의를 도모하고, 이어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 나정언(羅廷彥), 수성 찰방 최동망(崔東望), 귀양 온 한백겸(韓百謙)ㆍ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경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무리가 세필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이내 모두 흩어졌다.

원문

公不得已亦從間道南走。至龍城。投宿巫覡韓仁侃之家。仁侃心知爲公。待之甚厚。世弼遣人搜括。而終匿不告。居數日。適遇鏡城儒生崔配天,池達源。俱行至漁郞里李鵬壽家。鵬壽。義士也。見公至大喜。傾家以奉之。公遂與鵬壽等。謀再擧義兵。於是傳相號召。稍稍響應。壯士姜文佑最先至。鍾城府使鄭見龍及各鎭守將及避亂朝士徐渻,李成吉等。亦來會。衆皆推公主盟。公自以年少位卑。讓於見龍。見龍不敢當。諸將士亦願屬公。於是公爲大將。見龍爲副將。鵬壽爲別將。文佑爲斥候將。部署略定。先送人於世弼。報以□國家中興之慶。諭以立功自效之意。九月十二日。勒兵向府城。世弼懸門而拒之。公且脅且諭。始乃迎納。公見世弼兵勢甚盛。而略無怖意。徐以逆順之辨。反復譬曉。賊畏服不敢動。世弼使其親屬。侍公左右。凡諸文書。輒皆偸視。公將馳□啓而於世弼事。故作婉辭。以其草本置之案上。世弼見之果喜。公命世弼。仍管官事。人有勸公早除世弼者。世弼聞而懼。公夜屛人獨坐。招世弼與語。示以不疑之色。適會倭兵九十餘薄城下。公命將士擊退之。世弼與其子。擒一倭將。公一體錄功而□啓之。世弼乃自安。公又赦嘗射己者罪。以爲褊裨。於是六鎭人聞公釋反側。爭相送款。會寧吏士斬景仁及其黨六人。獻馘軍門。明川人。亦欲誅末秀。反敗於賊。公遣姜文佑,具滉。率精騎掩擊斬之。兩逆授首之後。南北始通。徵兵稍集。而高嶺僉使柳擎天等諸鎭將。亦皆受公節制。公號令嚴肅。賞罰明信。軍中無敢有犯法者。一日。忽有兩驛卒無端大呼。公知其出於世弼之兇計。卽斬兩卒。而仍下令登城習戰。夜分乃罷。翌朝。又如之。公建大將旗。坐南門樓。世弼與諸將行軍禮。公命姜文佑。拿下斬之以徇。其脅從。竝赦勿治。俾立後功。於是軍聲大振。公與諸將議出兵擊倭。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公曰。今但自守。豈當初起義兵之意耶。然當謀于衆以決之。明日。聚衆于南門外。詢其可否。咸以公言爲是。乃使潼關僉使李應星留鎭。鏡城鄭見龍爲中衛將。柳擎天爲左衛將。吳應台爲右衛將。防垣萬戶韓仁濟,斜卩洞權管高敬民爲左右伏兵將。十月廿一日。率三衛兵。出城行數里。有人迎告於公曰。賊勢甚盛。戰必不利。宜且守城自保。公曰。汝敢爲賊沮吾軍耶。卽斬其首。懸旗竿。進次明川。指授諸將方略。晦日。遌倭於吉州長坪。諸軍挾擊。伏兵迭出。廝徒下卒。無不鼓勇。賊潰而奔北。追擊大破之。殺其巨魁五人。斬馘八百二十餘級。其逃竄山谷者。四面縱火而盡燒之。中箭墜厓而死者。亦不知其數。得馬一百十八匹。奪其所擄人畜及軍器等物甚多。論者謂中興以來。未有此捷比云。吉州留倭據城堅守。諸衛將累圍而不得拔。

번역

공은 부득이 간도(間道) 남쪽으로 도망쳐 용성(龍城)에 이르러 무당 한인관(韓仁侃)의 집에 투숙하였다. 한인관은 공을 알아보고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세필이 사람을 보내 수색했으나 끝내 숨겨 주고 고하지 않았다. 며칠을 지내던 중 마침 경성(鏡城) 유생 최배천(崔配天)과 지달원(池達源)을 만났는데, 모두 어랑리(漁郞里) 이붕수(李鵬壽)의 집에 이르렀다. 이붕수는 의사(義士)로서 공이 온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집안의 재물을 털어 대접하였다. 이에 공은 이붕수 등과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고, 이때 서로 호소하고 불러 모으니 조금씩 응답하는 자들이 있었다. 장사(壯士) 강문우(姜文佑)가 가장 먼저 왔고, 종성 부사 정견룡(鄭見龍) 및 각 진의 수장과 피란 온 조정의 선비 서지(徐渻), 이성길(李成吉) 등도 와서 모였다. 모두가 공을 추대하여 맹서를 하였으나, 공은 스스로 나이가 젊고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정견룡에게 양보하였는데, 정견룡은 감히 맡지 못하였다. 장수들도 공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였다. 이에 공이 대장이 되고, 견룡(見龍)이 부장이 되었으며, 붕수(鵬壽)가 별장이 되었고, 문우(文佑)가 척후장이 되었다. 군대를 배치하는 것을 대략 정하고 먼저 사람을 세필에게 보내어 나라가 중흥할 경사를 알리고 공을 세워 스스로 공을 세우라는 뜻을 유시하였다. 9월 12일 군사를 몰아 부성(府城)으로 향하니, 세필이 문을 걸어 잠그고 거부하였다. 공이 협박도 하고 유시도 하자 비로소 맞이하여 들였다. 공은 세필의 병세가 매우 성대한데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음을 보고는 천천히 역심과 순심의 차이를 반복해서 설명해 주었다. 적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세필이 자기 친속을 공의 좌우에 모시게 하고 모든 문서들을 번번이 훔쳐 보았다. 공은 장차 -원문 빠짐-을 급히 아뢰려고 하였으나 세필에게는 말할 수 없었으므로 완곡한 말을 지어 초본을 책상 위에 두었다. 세필이 보고 과연 기뻐하였다. 공은 세필에게 관사(官事)를 맡기라고 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일찍 세필(世弼)을 제거하라고 권하였다. 세필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자, 공은 밤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홀로 앉아 세필을 불러 대화하면서 의심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마침 왜병 90여 명이 성 아래를 포위하였는데, 공이 장수와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격퇴하게 하였다. 세필과 그의 아들이 왜장 한 명을 사로잡자 공은 똑같이 공적을 기록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세필은 이에 안심하였다. 공은 또 일찍이 자신을 쏜 자의 죄를 사면하고 말단 신하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육진(六鎭) 사람들이 공이 반역자를 풀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다투어 선물을 보냈다. 회령(會寧)의 아전과 군사가 경인(景仁)과 그 무리 6명을 베어 목을 잘라 군문에 바쳤다. 명천(明川) 사람들도 말수(末秀)를 죽이려 하였으나 도리어 적에게 패하였다. 공이 강문우(姜文佑)와 구황(具滉)을 보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매복하여 습격해 베게 하였다. 두 역적이 목을 내준 뒤에 남북이 비로소 통하고 군사를 징집하기 시작하였는데, 고령 첨사 유경천(柳擎天) 등 여러 진의 장수들이 또한 모두 공의 절제를 받았다. 공은 호령이 엄숙하고 상벌이 명확하여 군중에서 감히 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갑자기 두 역졸(驛卒)이 아무 이유 없이 크게 소리치니, 공은 그것이 세필(世弼)의 흉계임을 알고 즉시 두 역졸을 참수하고 이어 성에 올라 전투 연습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도 또 그렇게 하였다. 공은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 누각에 앉았는데, 세필과 여러 장수가 행군례(行軍禮)를 행하자 공은 강문우에게 명하여 그를 잡아다 참수하고, 그 협종(脅從)들은 모두 사면해 주어 처벌하지 말고 후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군사들의 기세가 크게 진작되어 공과 여러 장수가 의논하여 출병하여 왜적을 치기로 하였다. 정견룡은 경성(鏡城)을 지키면서 화란이 생기기를 기다리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지금 다만 스스로를 지킬 뿐이니 어찌 처음 의병을 일으킨 뜻에 합당하겠는가. 그러나 마땅히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결단해야 한다.” 하였다. 다음 날 남문 밖에 군사를 모았다. 그 가부를 물으니 모두 공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통관 첨사(潼關僉使) 이응성(李應星)을 주둔시키고, 경성(鏡城) 정견룡(鄭見龍)을 중위장(中衛將), 유경천(柳擎天)을 좌위장(左衛將), 오응태(吳應台)를 우위장(右衛將)으로 삼았으며, 방원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와 사필동(斜屛洞) 권관 고경민(權管高敬民)을 좌우 복병장(伏兵將)으로 삼았다. 10월 21일, 세 위병(衛兵)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 몇 리를 가니 어떤 사람이 공을 맞이하여 고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성대하여 싸움에서 필시 불리하니 마땅히 성을 지키고 스스로 보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감히 적을 위해 우리 군사를 저지하려 하느냐.” 하고는 즉시 그 목을 베어 깃발에 매달아 놓고 명천(明川)으로 진격하였다. 장수들에게 방략을 지시하고, 그믐날 길주(吉州) 장평(長坪)에서 왜적을 만났다. 여러 군사가 협공하고 복병이 번갈아 나와서 하졸(下卒)까지 모두 용기를 북돋웠다. 적들이 패배하여 북쪽으로 도망치니,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그 우두머리 5명을 죽이고, 머리를 베어낸 것이 820여 명이다. 산골짜기로 도망친 자들은 사방에 불을 놓아 모두 태워 죽였고, 화살을 맞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자는 그 수도 알 수 없다. 말 118필을 얻었고, 그들이 포로로 잡은 사람과 가축 및 군기 등의 물품을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다. 논자들은 중흥(中興) 이래로 이와 같은 승리는 없었다고 한다. 길주(吉州)에 남아 있는 왜적은 성을 점거하고 굳게 지키고 있는데, 여러 위장(衛將)이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원문

公以謂今若急取。多傷士卒。不如移兵嶺東。先擊柵內之賊。柵內之賊旣平。則城中之賊。勢孤援絶。取之如籠中鳥耳。卽日移向嶺東。到臨溟之雙浦。適遇柵內賊出掠者。三衛精騎一時奮擊。斬首百餘級。剖腹露腸。列之路傍。連亘十餘里。仍進圍賊柵。以檄書投倭將。有曰。長坪之斬耳無數。應作死後之逃奴。雙浦之割勢甚多。只是生前之男子云。先是。避亂士夫。多爲土民所掠奪。及公討叛賊。皆從公請推還。公一切不聽。鄭見龍以此事擾民。公又呵止。而仍下令。見龍本忌公成功。乃與諸士夫。共造飛語。使入於觀察使尹卓然之耳。卓然固嫉公聲績掩己。乃移文數公罪。而遞大將。以見龍代之。因以前後戰功。誣歸於見龍而聞于□朝。見龍遂大被陞擢。而公只以誅鞠賊。授堂上階。卓然又以公爲捕亡將。使住磨天嶺。公辭不行曰。吉州之賊。尙不掃蕩。北地之卒。豈有南逃之理乎。北兵使在南道遙。令公巡行六鎭。以定民心。鎭虜情。公乃率麾下若干人。發向六鎭。褒有功。誅有罪。撫禦戰守。咸得其宜。民夷畏愛。不敢更謀爲亂。鄭見龍爲大將未滿一月。卓然移授兼節度使。而以吳應台代之。又月餘。還以公爲大將。蓋軍中自失公。憤惋不平。義士多散去。而倭賊狺然伺釁。叛民餘黨。亦有復起之幾。識者皆歸咎於卓然。故有是擧。或謂公曰。公未可辭歟。公曰。始吾出萬死起義兵。只欲爲□國家效忠耳。今得死所。其何可顧小嫌。而不念國事之危急哉。癸巳正月。遂馳到吉州。餉勞三衛將之軍。將士見公來。勇氣自倍。散去者。亦還集。端川郡守姜燦。馳謁公曰。端之留倭恣意橫行。願分兵以擊之。公曰。吾方坐休強兵。而端是同道。何可不爲之相救乎。卽抄精兵二百。使具滉等四將。各將五十。逾嶺而去。伏於城外二十里許。使端軍三十。挑戰佯敗。賊二百餘名。乘勝遠追。至伏兵處。四隊齊出。左右馳突。追亡逐北。幾盡射斬。其帶傷入城者。僅餘三十矣。俄聞南道倭一大隊。與嶺東倭合勢。由磨天北來。公還住臨溟。抄精兵六百。潛伏於要衝處。倭果蔽野而至。伏兵盡起鏖戰。公亦麾三衛兵。策馬而進曰。今日吾當爲□國一死。將士從之。莫有退者。轉鬪六十餘里。至白塔郊。射矢如雨。流血滿道。斬馘九級。奪馬十五匹。其中箭而死者。賊皆載屍而入城。收聚燒燼。蓋亦百數矣。淸正盡撤其衆。乘夜逃迍。逾嶺南奔。不暇炊飯。公追至嶺東而還。於是關北遂淸。蓋公慮事精明。料敵如神。尤善於知人。用各當才。故人皆忘死而樂爲用。卒能以數千孤軍。擊却方張之銳寇。雖古名將。何以過此哉。尹卓然怒公擅自錄功。移文詰責。語多無倫。公辨析甚明而不爲屈。卓然益大恚。欲以軍法殺公。拿致公將佐。至加榜掠。而終不得搆罪之端。乃作誣語。

번역

공이 지금 만약 급히 군사를 취한다면 사졸(士卒)을 많이 상하게 할 것이니, 차라리 군사를 영동으로 옮겨 먼저 성 안의 적을 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성 안의 적을 평정하고 나면 성안에 있는 적은 세력이 고립되고 원군이 끊어질 것이니, 마치 새장을 덮어 놓은 새를 잡듯이 쉽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바로 영동으로 옮겨가 임명(臨溟)의 쌍포(雙浦)에 이르렀는데, 마침 성 안의 적들이 약탈하러 나온 자들을 만났다. 세 위(衛)의 정예 기병이 한꺼번에 맹렬히 공격하여 백여 명의 목을 베어 배를 갈라 창자를 드러내고 길가에 늘어놓았으니, 그 길이가 열 리나 되었다. 이어 적의 성을 포위하고 왜장에게 격문(檄文)을 던졌는데, “장평(長坪)에서 베어진 귀는 무수하니 응당 죽은 뒤에 도망친 노예가 될 것이고, 쌍포에서 훼손된 것은 매우 많으니 다만 생전의 남자들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전에 피란한 사대부들이 대부분 토착민들에게 약탈을 당했는데, 공이 반적(叛賊)을 토벌할 때 모두 공에게 추급(推給)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공은 일체 들어주지 않았다. 정견룡(鄭見龍)이 이 일로 백성을 소란하게 하자, 공이 또 이를 꾸짖고 그치게 하였다. 정견룡은 본래 공의 성공을 시기하여 여러 사대부들과 함께 거짓말을 지어내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의 귀에 들어가게 하였다. 탁연은 진실로 공의 성적이 자신을 가리는 것을 시기하여, 공의 죄를 여러 가지로 적어 문서를 보내고 대장(大將)에서 체차한 뒤 정견룡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의 전공(戰功)을 정견룡에게 덮어씌워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정견룡은 마침내 크게 승진하였고, 공은 다만 적을 토벌한 공로로 당상급에 제수되었다. 탁연이 또 공을 포망장(捕亡將)으로 삼아 마천령(磨天嶺)에 머물게 하였는데, 공이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길주의 적들이 아직 소탕되지 않았으니 북쪽 지방의 군사가 어찌 남쪽으로 도망갈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북병사(北兵使)가 남도에 멀리 있으므로 공에게 6진을 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오랑캐를 진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휘하의 약간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육진(六鎭)으로 출발하여 공이 있는 자는 포상하고 죄가 있는 자는 처벌하며, 다스리고 막고 싸우고 지키는 데 모두 적절하게 대처하였다. 백성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여 감히 다시 반란을 꾀하지 못하였다. 정견룡(鄭見龍)이 대장이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탁연(卓然)이 겸절도사로 옮겨 가고 오응태(吳應台)가 대신하였는데, 또 한 달여 만에 공을 다시 대장으로 삼았다. 이는 군중(軍中)에서 공을 스스로 잃은 것에 대해 분개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많아 의사(義士)들이 많이 흩어지고 왜적(倭賊)이 기회를 엿보며 반란한 백성들의 잔당도 다시 일어날 기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식자들은 모두 탁연에게 책임을 돌렸으므로 이러한 조치가 있었다. 어떤 이가 공에게 “공은 사양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 만사의 위태로움 속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단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고자 해서였다.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어찌 작은 혐의를 돌아보고 나라의 위급한 일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계사년 정월에 마침내 길주(吉州)에 도착하였다. 세 군위장(軍位將)에게 군량과 노고를 보상하니, 장수와 병사들이 공이 온 것을 보고 용기가 절로 배가되어 흩어졌던 자들도 다시 모였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급히 공을 찾아와 아뢰기를, “단지(端之)가 남은 왜적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니, 군사를 나누어 가서 쳐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바야흐로 앉아서 쉬고 있고 강병(強兵)을 쓰지 않고 있는데, 단지는 같은 도(道)의 사람이니 어찌 구제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정예병 200명을 뽑아 구황(具滉) 등 4명의 장수에게 각각 50명씩 맡겨 고개를 넘어 가서 성 밖 20리쯤에 매복하게 하였다. 단지의 군사 30명으로 적을 도발하여 일부러 패한 체하자, 왜적 200여 명이 승세를 타고 멀리 추격해 오다가 매복한 곳에 이르자 네 대가 일제히 튀어나와 좌우에서 치달아 추격하고 포위하니, 거의 다 죽거나 베였다. 상처를 입고 성으로 들어온 자는 겨우 30명뿐이었다. 잠시 후 남도(南道)의 왜적 한 대대가 영동(嶺東)의 왜적과 합세하여 마천(磨天) 북쪽에서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공이 임명(臨溟)에 돌아와 머물면서 정예병 600명을 뽑아 요충지에 잠복시켰다. 왜적들이 들판을 뒤덮으며 쳐들어오자, 매복한 병사들이 모두 일어나 치열하게 싸웠다. 공 또한 삼위군(三衛軍)을 거느리고 말을 채찍질하며 나아가며 말하기를, “오늘 내 반드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하니, 장사들이 이를 따르며 물러나는 자가 없었다. 60여 리를 돌며 싸우다가 백탑(白塔) 교외에 이르자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고 피가 길에 가득하였다. 아홉 등급의 목을 베고 열다섯 필의 말을 빼앗았으며, 그중 화살에 맞아 죽은 적병은 모두 시체를 실어 성안으로 들어가 모아 불태웠는데, 대략 백여 명이었다. 청정(淸正)이 군사를 모두 철수하고 밤을 틈타 도망쳐 영남으로 달아나느라 밥을 지을 겨를도 없었다. 공이 영동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이로써 관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대개 공은 일을 치르는 것이 정밀하고 명철하며 적을 헤아리는 것이 신묘하였고, 특히 사람을 알아보는 데 능하여 각자 재능에 맞게 등용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잊고 기꺼이 부림을 받았던 것이다. 졸(卒)이 수천의 고립된 군사로 방장(方張)의 날카로운 도적을 물리쳤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윤탁연(尹卓然)은 공이 제멋대로 공을 기록한 것에 노하여 문서를 보내 꾸짖었는데, 말이 무리한 것이 많았다. 공은 매우 명쾌하게 변론하면서도 굴하지 않았고, 탁연은 더욱 크게 성을 내어 군법으로 공을 죽이려고 하였다. 공의 장수와 좌장을 잡아다 심문하고 심지어 매질까지 하였으나 끝내 죄를 지어낼 단서를 찾지 못하자, 마침내 거짓말을 지어냈다.

원문

反其實以□啓。公本孤立。又無爲之一言者。是以。公之前後所成就。如彼卓爾。而□朝廷皆莫之知也。道旣通。兵使始北來。公乃以所率軍馬。屬之以歸。三月。除永興府使。乙未。移穩城。丙申。移吉州牧使。丁酉。御史上公治行。□賜表裏以褒之。移安邊府使。又移公州牧使。時方修外方鎭管之制。西厓柳相公成龍。請先使公整頓軍政。使列邑取效。戊戌春。赴任。秋。遞還。是後五六年。連出宰郡邑。而入則或付軍銜。或爲判決事。甲辰。丁外憂。服闋。除長湍府使。庚戌。以謝恩副使朝□京。辛亥。南原府使。壬子。因北路人上疏頌公之功。陞嘉善階。再牧吉州。是時。光海昏亂。而凶人鄭造。又公之至親也。公杜門屛跡。見造來則或托醉沈眠。或閉目不語。及乙卯廢母之論起。則居常縱酒。人不得見其面。除副摠管。分兵曹參判。而皆不就。戊午。爲昌原府使。癸亥三月。□仁祖大王御極圖治。□朝議欲大用。公旣被元帥薦。而又將置之通顯。顧公急於便養。求爲全州府尹。未數月。大夫人歿於官舍。公奉喪歸洛。因毀成疾。又生大腫。久阽於危。甲子正月。李适叛。□上將幸公山。□命起復公。爲副摠管。使出戰。聞其病劇而止。賊平。許終喪。是歲。朴來章等謀不軌。以公有將才。因醫人李大儉。要令言及。而大儉對公不敢發。公實不聞。及事發獄成。公以名出逆招。被逮。諸囚以實供無異辭。公冤狀自白。例當見原。而詩案之禍。又出矣。公曾在昌原。公餘。偶作詠史十絶。其一曰。楚雖三戶亦秦亡。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孱孫何事又懷王。仍置之休紙軸。至是塗壁於廬幕。有一勳臣來訪。就壁熟視而去。傳播儕友間。臺官以詩意有指。□啓請鞠問。澤堂李公植,浦渚趙公翼。時爲問事郞。言於委官曰。詩人詠史之作。非有深意。何可爲罪也。力爭而不能得。終至栲死於獄中。卽十一月十九日也。遠近聞者。莫不冤之。蓋公平居簡默。未嘗論人長短。而性本嚴毅。雖所親善。見其有不正處。不復與之相款。月沙李文忠公素與公厚。嘗謂人曰。鄭子虛人物才器。誠不可易得。而獨恨其剛直太過。蓋以取禍爲慮。而其言卒驗云。光海時有權臣。欲引爲己援。見公而諷之曰。君之貧苦。令人傷心。其何以自堪。公卽應曰。吾將帶弓矢。入深山射猛虎以資生。匪分富貴。非吾願也。其人慙而去。李爾瞻隔洞而居。慕公文才。因人累致意於公。而公終不答。有相識者。受簡於鄭仁弘。欲以藉重。公杖而逐之。凡勳貴請囑。一切無所聽施。公之峭直類如此。而此其所以招禍之道也。公孝友出天。事父母極其愛敬。判書公敎子弟甚嚴。少失意。輒撻之。及大故之後。公常曰。吾雖欲復受杖。尙可得乎。每嗚咽不自勝。伯兄喪耦獨居。公撫視諸姪若己出。持身淸約。聞世之貪利嗜貨者。常唾鄙之。

번역

그 반대되는 실상은 □에게 고하였으나, 공은 본래 고립되어 있었고 또 이를 위해 한마디 말해 줄 사람도 없었다. 이 때문에 공이 전후로 성취한 것이 저렇게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 조정에서는 모두 알지 못하였다. 도가 이미 통하여 병사(兵使)가 처음 북쪽에서 오자, 공은 거느린 군마를 속부(屬付)하여 돌려보냈다. 3월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제수되었고, 을미년에 온성(穩城)으로 옮겨 갔으며, 병신년에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옮겨 갔고, 정유년에 어상(御史)으로 공을 다스리러 갔다. □ 표리(表裏)를 내려 포상하고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옮겼으며, 또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옮겨 갔는데, 이때 바야흐로 지방의 진영을 관리하는 제도를 정비하고 있었다. 서애(西厓) 유 상공(柳相公) 성룡(成龍)이 먼저 공으로 하여금 군정(軍政)을 정돈하여 여러 고을에서 효과를 거두게 할 것을 청하였다. 무술년 봄에 부임하였고, 가을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이 후 5~6년 동안 연달아 고을 수령으로 나갔는데, 들어오면 군함(軍銜)을 주거나 판결하는 일을 맡기기도 하였다. 갑진년 정외우(丁外憂)는 상복을 마치고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제수되었다. 경술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서울에 갔다가, 신해년에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임자년에 북도(北道)의 사람이 상소하여 공의 공적을 칭송한 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였고, 길주 목사(吉州牧使)를 두 번 지냈다. 이때 광해군이 혼란스럽고 흉악한 정조(鄭造)가 또 공의 지친이었는데, 공은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었다가 정조가 오면 취해서 잠든 체하거나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을묘년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평소 술을 마시며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고 병조 참판에 분직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무오년에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되었다. 계해년 3월에 인조 대왕이 즉위하여 정치를 펼치자 조정에서 크게 등용하고자 하였다. 공은 이미 원수(元帥)에게 천거되었고 또 통현대부(通顯大夫)에 두려고 하였으나, 공은 편안히 지내기를 급히 구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기를 청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대부인이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공은 상을 받들고 낙양으로 돌아왔는데, 그로 인해 병이 생기고 또 큰 종기가 생겨 오랫동안 위독하였다. 갑자년 1월에 이적(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이 공산(公山)으로 행차할 때 □공을 기복(起復)하라고 명하여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아 출전하게 하였으나,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적이 평정되자 상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에 박내장(朴來章) 등이 불온한 모의를 꾸몄는데, 공에게 장수의 재주가 있다는 이유로 의원 이대검(李大儉)을 시켜 공에게 언급하게 하였으나 대검은 공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공도 실로 듣지 못하였다. 일이 드러나 옥사가 성립되자 공은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오게 되어 체포되었는데, 다른 죄수들은 사실대로 자백하여 말이 다름이 없었으나 공은 억울한 정상을 스스로 고하였으므로 예법상 당연히 무죄로 판결되어야 했으나, 시안(詩案)의 화가 또 일어났다. 공이 일찍이 창원(昌原)에 있을 때 여가에 우연히 역사에 대해 읊은 절구시 열 수를 지었는데, 그중 하나에 이르기를, “초나라가 세 집밖에 없어도 진나라가 망했으니, 반드시 남공의 말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한 번 무관에 들어간 뒤로 백성들의 기대가 끊어졌는데, 자손이 무슨 일로 또 왕을 그리워하는가. 이어서 휴지축(休紙軸)을 놓아두고, 이때에 이르러 막사 벽에 시를 썼다. 어떤 훈신이 와서 방문했다가 벽을 자세히 보고 떠났는데, 그 내용이 친구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대관(臺官)이 시의 뜻에 지적할 바가 있다고 하여 □에게 고하여 국문(鞠問)하기를 청하였다. 택당 이공식(李公植)과 포저 조공익(趙公翼)은 이때 문사랑(問事郞)으로, 위관(委官)에게 말하기를 “시인이 역사를 읊은 작품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힘껏 다투었으나 얻어내지 못하고 마침내 옥중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는데, 바로 11월 19일이다. 원근의 사람들이 듣고 모두 그를 불쌍히 여겼다. 대개 평소 공정하게 살며 말수가 적어 남의 장단(長短)을 논한 적이 없었으나, 성품이 본래 엄격하고 굳세서 비록 친한 사람이라도 바르지 못한 곳을 보면 다시는 그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월사 이 문충공(李文忠公)은 평소 공과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자허(鄭子虛)의 인물과 재주는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유독 그의 강직함이 너무 지나친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대개 화를 당할까 염려해서 하는 말인데, 그의 말이 마침내 증명되었다.” 하였다. 광해군 때 권신(權臣)이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공을 만나서 풍자하기를, “그대의 가난함이 사람을 상심케 하니 어떻게 스스로 견디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은 즉시 대답하기를, “나는 활과 화살을 지니고 깊은 산에 들어가 맹수를 사냥하여 생계를 꾸릴 것이다. 분수에 넘치는 부귀는 내 소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떠났다. 이이첨(李爾瞻)이 다른 마을에 살면서 공의 문재를 흠모하여 여러 사람을 통해 공에게 뜻을 전하였으나, 공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어떤 지인이 정인홍(鄭仁弘)에게서 편지를 받아 공의 권세를 빌려 쓰고자 하였는데, 공은 지팡이로 그를 때려 쫓아버렸다. 무릇 벼슬과 명예를 구하는 부탁에 대해서는 일체 들어주지 않았으니, 공의 곧고 강직함이 이와 같았다. 이것이 바로 화를 부르는 길이었다. 공은 효우(孝友)가 하늘에서 타고난 사람으로, 부모를 섬기는 데는 지극히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판서 공이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이 매우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뜻을 어기면 곧바로 매질을 하였다. 큰일이 생긴 뒤에는 공이 항상 “내가 비록 다시 매를 맞고 싶어도 오히려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매번 흐느껴 울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백형(伯兄)이 죽은 뒤에 홀로 지내면서도 공은 여러 조카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어루만져 주었다. 몸가짐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하여 세상에서 이익을 탐하고 재물을 좋아하는 자들이 항상 비웃고 침을 뱉었다.

원문

平生未嘗爲經營產業計。其罷官而歸。行李蕭然。至家之日。亦不免假貸而爲食。尤嚴於家法。閨門雖雍睦。而內外截然有別。至今子孫世守不墜。而搢紳家。亦皆傳誦焉。始澤堂公嘗爲北評事。採訪遺民之言。記公討賊始末甚詳。而未有以褒顯之。□顯廟甲辰間。李相公端夏以澤堂之胤。繼先躅。出佐北幕。感公忠義。而心傷其冤。恨之未暴。旣倡議建祠而俎豆之。歸又上封章。爲公伸辨甚力。且請□褒贈崇秩。□上下廟堂議大臣。鄭公太和諸人。咸一辭贊之。乃□贈公議政府左贊成。兼如式。而又□命錄用子孫。其祠額之宣。則用呂相公聖齊之言也。鎭厚。亦曾忝爲評事。旣還朝而告于□上曰。以鄭文孚,李鵬壽之忠節。其子孫無一立朝者。甚非所以酬功興勸之道。宜令銓曹。別爲調用。□上卽賜頷可。而今幾二十年。尙未有奉承者。殊可旣然耳。竊惟公之豐功偉烈。至冤深痛。昭在人耳目。而又自有石室之良筆。顧奚暇區區贊歎而揄揚之哉。玆敢觕錄其事行履歷之表著者。敬告有司。以備採擇。而餘皆略之。蓋亦古人請諡之體然也。幷冀垂察焉。崇政大夫行禮曹判書閔鎭厚。謹狀。

번역

평생에 경영하고 산업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다.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 행장(行裝)이 쓸쓸하였으며, 집에 도착한 날에도 빌려 먹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집안의 법도에 더욱 엄격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긴 하였으나 안팎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지금까지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서 실추되지 않았고, 진신(搢紳)의 집안에서도 모두 전해 듣는다. 시택당공(始澤堂公)이 일찍이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유민들의 말을 채집하였는데, 공이 적을 토벌한 시말에 대해 매우 상세히 기록하였으나 포상하여 드러내지 않았다. □ 현묘 갑진년에 이상공 단하(李相公端夏)가 시택당공의 후손으로서 선조의 자취를 이어 북막(北幕)에 나가 보좌하면서 공의 충의에 감동하고 그 억울함에 마음 아파하며 한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낼 것을 건의하고 돌아와서 또 봉장(封章)을 올려 공을 변호하는 데 힘을 다하였으며, □ 포상하여 높은 품계를 추증할 것을 청하였다. □ 상하 묘당과 대신들이 정공 태화(鄭公太和) 등 여러 사람이 모두 한결같이 찬성하자, □ 공에게 의정부 좌찬성을 증직하고 겸여식(兼如式)을 주며, 또 □ 자손들을 녹용할 것을 명하였다. 사액(賜額)은 여상공 성제(呂相公聖齊)의 말을 쓴 것이다. 진후도 일찍이 평사가 되었는데, 조정에 돌아와 □ 상에게 고하기를, “정문부(鄭文孚)와 이붕수(李鵬壽)의 충절로 볼 때 그 자손 중에 조정에 선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공을 갚고 권면하는 도리가 매우 아닙니다. 전조에서 별도로 조용(調用)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 상이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였다. 그런데 지금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도 봉행한 자가 없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공의 큰 공과 위대한 공적, 지극한 원통함과 깊은 아픔이 사람들의 이목에 환히 드러나 있고 또 석실(石室)의 훌륭한 필력이 있으니, 어찌 구구하게 찬탄하고 선양할 겨를이 있겠는가. 이에 감히 그 행적 중 두드러진 것을 대략 기록하여 삼가 유사에게 고하여 채택에 대비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하니, 이는 또한 옛사람들이 시호를 청하던 체모이다. 아울러 굽어살피시기를 바란다. 숭정대부 행 예조판서 민진후는 삼가 장문(狀文)을 올린다.

147. 諡號擬望〔原注:以首擬批下〕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42A

원문

忠毅〔原注:臨患不忘國曰忠。致果殺賊曰毅。〕□忠愍〔原注:忠上同。在國逢難曰愍。〕□忠壯〔原注:忠上同。勝敵志強曰壯。肅廟癸未。曾孫杉上疏請□諡蒙□允。後十年壬辰。製諡狀。翌年癸巳。擬號承□批。其後三十五年丁卯三月。始設宴于昭格洞憱舍。延□敎旨。〕

번역

충의(忠毅)〔원주: 환란을 당해도 나라를 잊지 않음이 충이고, 과감하게 적을 죽이는 것이 의이다.〕□ 충민(忠愍)〔원주: 충은 위와 같다. 나라에 있으면서 어려움을 만나 슬퍼함이 민이다.〕□ 충장(忠壯)〔원주: 충은 위와 같다. 적을 이기려는 뜻이 굳센 것이 장이다. 숙묘(肅廟) 계미년에 증손 서상(徐杉)이 상소하여 시호를 청하니 윤허를 받았다. 그 후 10년인 임진년에 시장(諡狀)을 지었다. 이듬해 계사년에 시호를 의논하니 비답을 받았다. 그 후 35년인 정묘년 3월에 처음으로 소격동(昭格洞)의 초사(憱舍)에서 연회를 베풀고 교지(敎旨)를 내렸다.〕

148. 遺事

문체: 傳記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42B, ITKC_MO_0284A_A071_142C ...

원문

公少著文名。早登科第。其詩章騈語。膾炙人口。迄于今不已焉。公旣出身立朝。常以效忠盡節。爲平生志。萬曆辛卯。出拜北評事。壬辰。倭寇旣覆三都。賊將淸正長驅入北道。列邑瓦解。會寧賊鞠景仁,鏡城賊鞠世弼等。作亂導倭。兩□王子及陪臣。皆就擒於賊。而官守竄伏。莫敢出氣。公於是始售報國之志。其方略機宜事功顚末。非徒垂載國乘。北人立傳爲記。以爲不忘不泯之地。至欲立祠俎豆之。以公冤死不敢焉。閔應敎維重。頃在鏡府時。詳聞公當時之事。且得其傳敍而來。故兹寫一通于後矣。至於國乘。則澤堂大學士釐正□宣廟實錄。於公平定北關事。特筆立綱敍目。著公忠勤甚詳。亦嘗稱道於人云。公之臨亂宣力。若是其彰明。而伊時咸鏡監司尹卓然。惡公聲績掩己。誣啓以聞□行朝。故公之大功。不被顯賞。只以誅鞠賊功。陞拜吉州牧使。厥後。北人爲公陳疏訟功。褒美始到。復陞嘉善階。公則終始不伐。對人。未嘗話北事。知公者。尤服公焉。公素性恬退。不曾趨向時好。故竟未大顯於淸朝。及光海壬子後。目見時事大乖。兇人鄭造。又不幸近出門族。故因杜門屛跡。若見造來。則或沈醉不省。或瞑目不語。以是大爲其黨所擠。且與李爾瞻隔洞而居。爾瞻許公文才。常欲納交。而公一不造其門。故邅廻不調者。凡十餘年。其間。或佣郡紱。而亦未曾一年淹於任所。己未後。廢母之變旣發。廷請收議之時。公每出避在外。一無隨參之累。自是。縱酒沈湎。雖族人。罕得見其面。蓋欲以酒自汚自廢也。洪鶴谷相公。卽公中表兄弟也。癸亥春間。數訪公居。輒値公醉臥。語公子弟曰。大令公後勿過飮。待我更來云。則可見鶴谷之意。而公竟不省悟。是年三月。□仁廟改玉。廟堂以公有文武才。被元帥薦。且以公昏朝時屛斥人。將大用而公爲親乞養。四月。拜全州府尹。七月。丁大夫人喪。歸洛居廬。草土之中。疾病連綿。大腫發於下部。久未完合。甲子正月。李适叛。□上將幸公山。命起復公爲副摠管。公力疾載曳。追到龍仁。腫勢添劇。不得運身。未果參執靮之列。公痛恨。不進粥飮者累日。俄而賊平。得終喪制。是年十月。朴來章等謀逆。私相議曰。鄭某有將才。可合大將。聞醫人李大儉以治腫事。往來鄭某家。可使大儉言及云云。及事覺後。此言出於賊招。公被逮。仍與大儉面質。則大儉曰。此言果聞於來章等。而一番治腫下針之醫。安得發此言於鄭某乎云爾。則公之冤至此乃白。將爲放釋。而臺論詩案繼發。則公竟未免梧棘之冤矣。蓋公於戊午年間。在昌原任所。官閑無事。賦詠史十絶。其一。乃楚懷王事也。詩曰。楚雖三戶亦秦亡。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孱孫何事又懷王。一時諷詠之作。置在亂稿中。甲子居憂時。搜出休紙。塗背廬幕。

번역

공은 젊어서 문장을 지어 이름을 떨치고 일찍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그 시문이 구절구절 훌륭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공은 출신하여 조정에 서서 항상 충성을 다하고 절의를 다하는 것을 평생의 뜻으로 삼았다. 만력 신묘년에 북평사(北評事)로 제수되었고, 임진년에 왜구가 이미 삼도(三都)를 함락하자 적장 청정(淸正)이 북도로 맹렬히 진격해 들어와 여러 고을이 와해되었다. 회령의 적鞠景仁(국경인)과 경성의 적 鞠世弼(국세필) 등이 난을 일으켜 왜구를 인도하였는데, 두 왕자와 배신들이 모두 적에게 잡혔고 관원들은 도망쳐 숨어 감히 기운을 내지 못하였다. 공은 이때 비로소 나라에 보답하려는 뜻을 실천하였다. 그 방략과 기미와 사공의 전말은 단순히 국사(國史)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북도 사람들도 전기로 세워 잊지 않고 영원히 전하고자 하였고, 심지어는 사당을 세우고자까지 하였다. 그러나 공이 원통하게 죽었으므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민응교는 매우 중시한다. 지난번 경상도에 있을 때 공이 당시에 겪은 일을 자세히 들었고, 또 그 전해지는 이야기를 얻어 왔으므로 이에 한 통을 써서 후세에 남깁니다. 《국승(國乘)》에 이르러서는 택당(澤堂) 대학사(大學士)가 선묘실록(宣廟實錄)을 바로잡을 때 공평하게 북관(北關)의 일을 정한 일에 대해 특별히 강목(綱目)을 세워 기록하였는데, 공의 충성심과 부지런함이 매우 상세하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칭찬하기도 하였습니다. 공이 난리를 당하여 힘을 다한 것이 이처럼 분명하게 밝혀졌는데, 그 당시 함경 감사 윤탁연(尹卓然)은 공의 명성이 자신을 가리는 것을 싫어하여 거짓으로 아뢰어 조정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공의 큰 공로가 드러난 상을 받지 못하고 다만 적을 죽인 공로만 인정받아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승진되었습니다. 그 후 북관 사람들이 공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여 공적을 진달하자 비로소 포폄이 내려져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습니다. 공은 시종일관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대할 때 북관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공을 아는 자들은 더욱 공에게 감복하였습니다. 공은 본래 성품이 조용하고 물러나 있어 한때 유행하는 것을 좇지 않았으므로 결국 청조(淸朝)에서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광해군 임자년 이후로 시국이 크게 어그러지는 것을 목격하였고, 흉인 정조(鄭造)가 또 불행하게도 가까운 문중에서 나왔으므로 문을 닫고 자취를 숨겼다. 만약 정조가 찾아오면 혹 술에 취해 정신을 잃거나 눈을 감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그 당파에게 배척당하였다. 또한 이이첨(李爾瞻)과 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이이첨은 공의 문재를 인정하여 항상 사귀기를 원하였으나 공은 한번도 그의 집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이나 서로 왕래하지 못하였다. 그동안 혹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기도 하였으나 한 해라도 임지에 머문 적이 없었다. 기미년 이후 어머니의 상이 일어났고 조정에서 의논을 거두자 공은 매번 나와서 피신하여 참여하는 번거로움이 전혀 없었다. 이로부터 술에 취해 빠져 지내면서 친척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대체로 술로 스스로 더럽히고 폐기하려 한 것이다. 홍학곡 상공(相公)은 공의 표형제이다. 계해년 봄에 몇 번 공의 집을 방문했을 때마다 공이 취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공자들에게 “대령공께서는 앞으로 과음하지 마시고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라.”라고 말하였으니, 이를 통해 학곡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은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이해 3월에 인묘(仁廟)의 옥좌를 고치게 되었는데, 묘당에서 공이 문무의 재주가 있다고 하여 원수(元帥)로 천거하였다. 또 공이 조정에 있을 때 사람들을 배척한 일 때문에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으나, 공이 친히 양로(養老)를 청하였다. 4월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 7월에 정 대부인(丁大夫人)의 상이 나서 낙양의 거처로 돌아왔는데, 초토지에서 질병이 계속되어 하부에 큰 종기가 생겨 오랫동안 아물지 않았다. 갑자년 1월에 이적(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 상이 공산(公山)으로 행차할 때 공을 부총관(副摠管)으로 복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공은 병을 무릅쓰고 수레에 실려 갔다. 용인(龍仁)에 도착했을 때 종기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집전(執靮)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공은 몹시 한스러워하며 며칠 동안 죽도 먹지 않았다. 얼마 후 적이 평정되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해 10월 박내장(朴來章) 등이 모의하여 사적으로 의논하기를, “정모(鄭某)는 장수의 재주가 있으니 대장(大將)에 합당하다. 듣건대 의인 이대검(李大儉)이 종기를 치료하는 일로 정모의 집에 왕래한다고 하니, 이대검으로 하여금 그 말을 언급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이 발각된 뒤 이 말이 적의 공초에서 나왔다. 공은 체포되어 이대검과 대질하였는데, 이대검이 “이 말은 과연 내장 등에게 들었으나, 한 번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침을 놓은 의원이 어찌 이런 말을 정모에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공의 억울함이 이에 밝혀져 풀려날 뻔하였다. 그러나 대간(臺諫)들의 논박과 시안(詩案)이 계속해서 나오자, 공은 끝내 오극(梧棘)의 억울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대개 공이 무오년에 창원(昌原)의 임소(任所)에 있을 때 관직이 한가하여 일이 없어서 사십절(史十絶)을 읊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초나라 회왕(懷王)의 일이다. 시에 이르기를, “초나라가 비록 세 집뿐이라도 진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남공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무관으로 들어가니 백성들의 기대가 끊어졌는데, 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을 그리워하는가.”라고 하였다. 한때 읊었던 시작(詩作)이 난고(亂稿) 속에 들어 있었는데, 갑자년에 근심스러운 때를 만나 휴지(休紙)를 찾아내어 여막(廬幕)의 뒷면에 써서 붙였다.

원문

此作亦爲背帖壁間矣。崔判書來吉。卽公連家之人。而亦無所嫌郤者也。一日來訪公。坐久因見其詩。近面詳視而去。乃爲傳誦於其兄弟親友間矣。及是。臺諫謂詩意有所指。論啓刑訊。其時澤堂李相公及浦渚趙相公。爲門事郞。執其詩就委官前曰。此乃詩人詠史之作。且無包藏底意思。何可以此詩罪此人也云。而安得見施於衆咻中耶。澤堂每誦公置對時元情文字。哀其抱冤而死。修史時。亦發明公之忠烈功業也。噫。公以忠孝立心。恬靜爲操。素有才略。早建功業。而曾不趨附時勢。故當時知公者少。不知公者多。終無論救伸理之事。而其冤枉則人到于今傷之也。丙丁亂後。凡在丹書之類。遍蒙宥澤。則公亦必在於其中。而公之子孫。禍變之後。流落嶺外。□朝家霈典。不得考明。而第公殞於刑訊。別無斷定罪案矣。

번역

이 시는 또한 벽에 걸어 두기 위해 지은 것이다. 최 판서(崔判書) 내길(來吉)은 공의 친척으로 역시 혐의할 만한 점이 없는 사람이다. 어느 날 공을 찾아와 오래 앉아 있다가 그 시를 보고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고는 돌아가서 그 형제와 친구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때 대간(臺諫)이 시의 뜻에 지목된 바가 있다고 하여 논핵하여 형신(刑訊)을 청하였다. 그때 택당(澤堂) 이 상공(李相公)과 포저(浦渚) 조 상공(趙相公)이 문사랑(門事郞)으로서 그 시를 가지고 관원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는 시인이 역사를 읊은 작품이고 또한 숨겨 둔 뜻이 없으니 어찌 이 시로 이 사람을 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처벌을 받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택당은 매번 공이 대답한 원정(元情)의 글을 외우며, 억울함을 품고 죽은 것을 슬퍼하였다. 역사를 편찬할 때에도 공의 충렬과 공업을 밝혀 내었다. 아, 공은 충효로 마음을 세우고 고요하고 차분함을 지조로 삼아 평소 재주와 계략이 있어 일찍부터 공업을 세웠으나 일찍이 시세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공을 아는 자는 적고 모르는 자가 많아서 끝내 구원하고 펴 줄 일이 없었지만, 그 원통함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져 슬픔을 자아낸다. 병자호란과 정묘반란 이후 단서(丹書)에 이름이 올라 있던 부류들은 두루 용서받았으니 공도 반드시 그중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자손은 화변(禍變) 이후 영남으로 유락(流落)하여 조정의 은택을 입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공은 형신을 당해 죽었을 뿐 별도로 단정된 죄안(罪案)은 없었다.

원문

松澗李公爲北評事時。因北地公論。欲爲公立祠。以書訪公遺事於西河李公。西河公求見公事蹟於子孫。故略記顚末以送。因載西河集中。

번역

송간 이공(松澗李公)이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북쪽 지방의 공론으로 인해 공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자 하여 서하 이공에게 공의 유사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서하공은 자손들에게 공의 사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으므로 대략 전말을 기록하여 보냈는데, 이것이 《서하집(西河集)》에 실려 있다.

149. 記壬辰擧義事〔原注:澤堂〕[李植]

문체: 雜著類 / 記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44A, ITKC_MO_0284A_A071_144B ...

원문

萬曆二十年〔原注:宣宗二十六年〕壬辰六月。倭將淸正長驅寇北。兵馬使韓克諴欲守磨天嶺。以保關北。軍潰而走。賊遂入吉,明,鏡,富等鎭。入曾寧。擄王子。從渡江。攻掠老土部落。還由鍾城門巖渡江。歷入穩城,慶源,慶興,沿海路。還趨鏡城。於是鎭堡叛兵。爭縛守將。擧城附賊。鏡城則寺奴鞠世弼。〔原注:世弼。乃是官奴。寺字。或誤。疑卽寺奴。而移屬官奴。〕爲酋。受倭署。置有官號。聲勢尤張。八月。淸正使一偏將。分領數千步兵。據吉州。以總攝諸鎭。身歸南道。北靑,安邊。各置重兵。以爲聲援。當此時。自大將以下至士夫。避亂落北者。陷賊殆盡。獨評事鄭文孚。以故與土居儒生相善。故累窘迫獲脫免。遂與前監司李聖任,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彥,輸城察訪崔東望,謫人韓伯謙羅德明等。起義兵。入據府城。世弼挾賊勢恐喝。皆潰散。或從間道南奔。文孚復窘。匿禦亂里民家。儒生等聞而赴之。文孚欲由海道南還。儒生要與復興義兵。文孚察其有忱懇。強而後許。乃使數輩。號召近境。吳應台等及鍾城府使鄭見龍,高嶺僉使柳擎天。皆來會。文孚讓見龍主盟。見龍固辭。士民亦願屬文孚。遂推爲大將。見龍,應台爲次將。散亡稍集。幷三百餘人。九月十五日。引兵到府城。世弼懸門不納。叱曰。爾輩欲耗我糧耶。亟去。文孚且脅且誘。世弼遽迎納。諸將欲先斬世弼。文孚曰。遽也。非計也。仍命世弼句管官事。又用叛兵嘗射傷己者。爲裨將。〔原注:裨將二字。本草以墨抹去。而無改下字。故姑此仍存。〕未幾。倭賊百餘人。掠至城南。文孚命軍士開門擊斬數人。賊退走。六鎭聞文孚且釋反側。爭相送款。人情稍定。始發遣將士。追討反魁。明川末秀。會寧鞠景仁。連次就執。遂幷世弼等十三人。斬以徇。諸鎭兵頗應募。衆至六千人。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文孚曰。本興義兵。國耳。今但自守。不進擊賊。欲效叛徒爲耶。請聽于輿人。詰朝集衆南門外。諭以兩人所爭孰可。衆皆是文孚。十月二日。進兵明吉界。自是。連與賊遇。大蹂于長德山。再捷于雙介浦。屢圍吉州城及嶺東栅。踰嶺救端川郡。與淸正戰白塔郊。前後斬千餘級。語在吉州事蹟。是時。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嘖言文孚。本一將幕佐。不當自爲大將。違已節度。文孚不爲遜。卓然大怒。反其實以聞□行在。盡抄其首級。分與麾下人。以謀賂遺。又殷見龍等主文孚軍。六易將。軍人輒散去。不得已起文孚領之。其間誤戰機多。以此故。見龍初恇怯。不欲爲標首。及有功。又與文孚相郤。先是。被掠士大夫多就文孚。求搜還財寶。文孚慮擾民不許。又求於見龍。見龍聽許。文孚又訶止之。遂與造飛語。觀察使陰主之。每欲以軍法殺文孚。文孚將佐往往被追。榜掠危死。然軍情益激。不以無功受毒。

번역

만력 20년(원주: 선종 26년) 임진년 6월에 왜장 청정(淸正)이 군사를 몰고 북쪽으로 침입하였다. 병마사 한극통(韓克諴)은 마천령(磨天嶺)을 지켜 관북(關北)을 보전하고자 하였으나, 군사가 무너져 도망가자 적이 곧바로 길진(吉鎭), 명진(明鎭), 경진(鏡鎭), 부진(富鎭) 등을 함락하고 증녕(曾寧)에 들어가 왕자를 납치하여 강을 건너갔다. 그리고 노토(老土)의 부락을 공격하고 약탈한 뒤 종성(鍾城)의 문암(門巖)을 거쳐 강을 건너고, 연해로를 거쳐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에 들어갔다가 다시 경성으로 향하였다. 이때 진보(鎭堡)의 반병(叛兵)들이 다투어 수장(守將)을 포박하고 성 전체가 적에게 붙었다. 경성에서는 절노(寺奴) 굴세필(鞠世弼) - 원주: 세필은 바로 관노(官奴)이다. ‘사(寺)’ 자는 오기인 듯하니, 아마도 절노였는데 관노로 옮겨 소속된 것일 것이다. - 가 우두머리가 되어 왜의 지휘를 받았고 관호(官號)까지 두어 그 세력이 더욱 팽창하였다. 8월에 청정이 편장(偏將) 한 명을 시켜 수천 명의 보병을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길주(吉州)에 의거하여 여러 진(鎭)을 총괄하고 몸은 남도(南道)로 돌아갔다. 북청(北靑)과 안변(安邊)에는 각각 중병(重兵)을 배치하여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대장 이하부터 사대부까지 피란을 떠나 북쪽으로 간 자들은 적에게 함락되어 거의 다 죽었으나, 유독 평사 정문부(鄭文孚)는 고향의 유생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곤경에 처했으나 탈출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전 감사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 나정언(羅廷彥), 수성 찰방 최동망(崔東望), 유배객 한백겸(韓伯謙)ㆍ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성(府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세필(世弼)이 적의 세력을 끼고 위협하자 모두 흩어져 도망갔는데, 어떤 자는 간도를 통해 남쪽으로 달아났다. 정문부가 다시 곤경에 처하여 난리 중인 민가에 숨어 지내자 유생들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정문부는 바닷길을 통해 남쪽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유생들은 복흥 의병과 함께하자고 요구하였다. 문부(文孚)는 그가 정성스럽게 간청하는 것을 살피고 억지로 허락한 뒤에 몇몇 사람에게 시켜 근처를 호소하게 하였다. 오응태(吳應台) 등과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이 모두 모였다. 문부는 견룡에게 맹주가 되도록 양보하였으나 견룡은 굳이 사양하고 백성들도 문부에게 속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문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견룡과 응태를 차장으로 삼았다. 흩어져 죽고 조금 모인 자들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 9월 15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부성(府城)에 이르렀다. 세필(世弼)이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꾸짖기를, “너희들은 내 양식을 축내려고 하는가? 속히 떠나라.” 하였다. 문부가 협박하고 유혹하자 세필이 갑자기 맞이하여 들여보냈다. 장수들이 먼저 세필을 베려 하자 문부가 말하기를, “갑작스럽다. 계획된 것이 아니다.” 하고는 이어 세필에게 관청의 일을 구관(句管)하게 하였다. 또 반란군으로 일찍이 자신을 쏜 자를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원주(原注): ‘비장’ 두 글자는 본초에서 먹으로 지워 버렸다. ‘하(下)’ 자를 고치지 않았으므로 우선 그대로 두었다.』 얼마 안 되어 왜적 100여 명이 성 남쪽으로 약탈해 왔는데, 문부가 군사들에게 문을 열고 몇 명을 베어 죽이라고 명하자 적들이 물러가 버렸다. 육진(六鎭)에서 문부가 반역의 의도를 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보내어 권면하여 인심이 조금 안정되자 비로소 장수와 병사를 보내 반란의 우두머리를 추적하여 토벌하였다.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회령(會寧)의 곡경인(鞠景仁)을 연달아 체포하고 마침내 세필 등 13명을 베어 죽였다. 여러 진에서 병사를 모집한 것이 꽤 많아 명이나 모였는데, 정견룡은 경성(鏡城)을 지키고 기회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단지 스스로를 지킬 뿐 적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반역자의 행태를 본받으려는 것인가? 여론에 맡기겠다.” 하고 이튿날 아침에 남쪽 성문 밖에 모인 군중에게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하문하니, 모두가 문부의 편이었다. 10월 2일에 명길(明吉) 경계로 진군하였다. 이때부터 연이어 적과 만나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짓밟고, 쌍개포(雙介浦)에서 두 번이나 승리하였으며, 길주성(吉州城)과 영동참(嶺東柵)을 여러 차례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원하였으며, 청정(淸正)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싸워 전후로 천여 명을 베었다. 그 일은 길주성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문부의 성적이 자신을 가리는 것을 시기하여, 문부는 본래 한 장수의 막료인데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고 절도사의 명령을 어겼다고 비난하였다. 문부가 굽히지 않자 탁연이 크게 노하여 도리어 사실을 왜곡하여 행재사(行在使)에게 보고하고, 그의 수급을 모두 베어 휘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을 바치게 하려고 모의하였다. 또 은견룡(殷見龍) 등이 문부의 군대를 주관하면서 여섯 번이나 장수를 바꾸니 군인들이 차례로 흩어져 떠나갔다. 부득이하게 문부가 일어나 그들을 거느렸으나, 그 사이에 전황을 잘못 판단한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은견룡은 처음에 겁을 먹고 수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공을 세우게 되자 또 문부(文孚)와 서로 어긋났다. 이보다 앞서 포로가 된 사대부들이 문부를 찾아가 재물을 수색해 돌려주기를 청하였는데, 문부는 백성을 소란하게 할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고, 또 견룡에게 청하니 견룡은 들어주고 허락하였다. 문부가 또 이를 꾸짖어 말리자 마침내 조비(造飛)와 함께 말을 나누었는데, 관찰사 음주(陰主)가 매번 군법으로 문부를 죽이려고 하였다. 문부는 장차 그를 도우려다 번번이 추격을 당하여 포로가 되어 위태로운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나, 군정은 더욱 격렬해져서 공이 없다고 독을 받는 일이 없었다.

원문

貳於文孚。明年。□朝廷擢見龍防禦使。俄遷節度使。文孚始釋兵。北行六鎭。招服藩胡。搜誅反黨。關北卒就平定。大抵皆其力也。嗚呼。關北俗。本戎羯。地深阻。自爲一區域。古所稱甁項塞。而淸正以勝兵。扼其口。叛賊連帶城邑。雌雄合勢。一人尺土。已非我有。而數三儒生。能知推擧一介。從事於逋竄之中。抵觸危險。以少擊衆。使邠,岐舊疆。免淪於左袵。其功有足談者。我□國家修文變俗之效。亦可覩矣。然文孚僅以誅鞠賊功。與會寧人。同陞三品秩。從難之士。未得一告身。反被僇辱。至于今。人情憤惋。以爲王事不可成也。豈不惜哉。顧當初朝問隔遠。只據一二誣啓爲信。厥後二十年間。非無原濕諮詢。而例不以前事爲意。或爲內朝浮聞所惑。終未有紀其實者。頃於從役之假。竊好問老校退卒。深山窮塞。耳目殆遍。而所聞知如一。雖爲卓然。見龍輩所左右者。亦不敢有所增飾。然後斷然不疑。略書其槪。僭付于事蹟之末。凡同文孚起兵者。京人權管高敬民,奉事吳大男,鏡城出身權管姜文佑,訓導李生鵬壽〔原注:戰死〕朴銀柱,儒生崔配天池達源朴惟▣金麗光〔原注:戰死〕吳允迪,富寧出身車應麟朴克謹,儒生金銓金鏡車得道,慶源人鄭允傑應聖父子,鏡城出身金嗣朱崔敬守南繼仁〔原注:本官奴〕,穩城余貞。〔原注:本官奴。癸未從申砬有戰功。至是。死於嶺東之戰。〕

번역

문부(文孚)가 2년 뒤에 조정에서 용방어사(龍防禦使)로 발탁되어 곧바로 절도사(節度使)로 옮겨갔다. 문부가 비로소 군사를 풀고 북쪽의 육진(六鎭)으로 가서 번호(藩胡)를 불러 복종시키고 반역하는 무리를 찾아 죽였다. 관북(關北)이 평정된 것은 대체로 모두 그의 힘이었다. 아, 관북의 풍속은 본래 융갈(戎羯)인데 땅이 깊고 막혀서 스스로 하나의 구역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 병항새(甁項塞)라고 일컬었던 곳이다. 청정(淸正)이 정예병으로 그 입구를 막았는데, 반적(叛賊)들이 연달아 성읍을 차지하고 있고 적군과 아군이 합세하여 한 사람의 척토(尺土)도 이미 우리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몇몇 유생이 능히 한 명의 장수를 천거할 줄 알아서 도망가고 쫓겨난 처지에서 그를 종사(從事)하게 하였다. 위태로운 상황에 맞서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쳐서 빈기(邠岐)의 옛 영토를 되찾아 좌총(左袵)에 함락되는 것을 면하게 하였으니, 그 공이 충분히 말할 만하다. 우리 나라가 문물을 닦고 풍속을 변화시킨 효과도 또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부는 단지 적을 죽인 공로만으로 이회령(李會寧)과 함께 3품의 품계에 올랐으나, 어려운 일을 따르기를 꺼리는 선비는 한 번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모욕을 당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사람들의 분개와 안타까움으로 왕사(王事)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긴다.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돌아보면 당초 조정의 물음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다만 한두 가지 무고한 계사만을 믿었었다. 그 후 20년 동안에 원습(原濕)을 자문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으레 이전 일을 의식하지 않았고 혹시 내조(內朝)의 떠도는 소문에 현혹되어 끝내 사실을 기록한 것이 없었다. 지난번 종역(從役)하는 기회에 은퇴한 노교(老校)와 퇴졸(退卒)에게 물어보니, 깊은 산과 궁벽한 변방까지 귀와 눈이 두루 미쳐서 들은 바가 하나같이 정확하였다. 비록 탁월하긴 하였으나 용배(龍輩)의 좌우를 받는 자들이라 또한 감히 덧붙여 꾸미는 것이 없었다. 그런 뒤에 단연 의심하지 않고 대략 그 개요를 써서 사적(事蹟)의 끝에 함부로 붙인다. 무릇 동문부(同文孚)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서울 사람 권관(權管) 고경민(高敬民), 봉사 오대남(吳大男), 경성 출신 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도 이생붕(李生鵬) 수(壽)-원주(原注): 전사하였다.-박은주(朴銀柱), 유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박유-원문 빠짐-, 김리광(金麗光)-원주: 전사하였다.-오윤적(吳允迪), 부령 출신 차응린(車應麟), 박극근(朴克謹), 유생 김전(金銓), 김경(金鏡), 차득도(車得道), 경원 사람 정윤걸(鄭允傑), 응성부(應聖父) 부자, 경성 출신 김사주(金嗣朱), 최경수(崔敬守), 남계인(南繼仁)-원주: 본관의 노비이다.-, 온성 여정(穩城余貞)- 〔원주: 본관의 노비이다. 계미년에 신조(申砬)를 따라 전공이 있었고, 이때 영동 전투에서 죽었다.-〕

원문

右先府君記事末端。同鄭公起兵人姓名。僅辨於草稿中。且余貞名小註下。列書吉州,明川四字。而其下缺。蓋必採錄兩邑義士而無可攷。又聞鏡城及六鎭。亦有闕漏之人。不肖追加採訪。有別錄。見于下。〔原注:見下報巡察使閔公討賊義士別錄中。〕男端夏。拜手謹識。

번역

위 선부군(先府君)의 기사 말단에 정공(鄭公)과 함께 군사를 일으킨 사람들의 성명을 초고에서 겨우 분별하였다. 또 내가 정명(貞名)의 소주 아래에 길주(吉州)와 명천(明川) 네 글자를 나열하였는데 그 아래가 빠진 것은 필시 두 고을 의사들을 채록하면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듣건대 경성(鏡城) 및 육진(六鎭)에도 누락된 사람이 있다고 하기에 불초가 추가로 채택하여 조사한 별록이 아래에 보인다. 〔원주: 아래 보순찰사 민공(閔公)의 토적의사별록(討賊義士別錄)에서 보라.〕 남단하는 절하고 삼가 기록한다.

150. 義旅錄[典籍朴興宗]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46B, ITKC_MO_0284A_A071_146C ...

원문

壬辰七月。倭賊長驅。入咸鏡道。逾磨天嶺。兵勢甚盛。節度使韓克諴戰敗。列郡從而瓦解。十四日。賊入鏡城界。遂引而北。瀰滿沿江諸郡。人民避亂入山。無復有恢復之望。兇徒竊發。往往與賊爲黨。明川之末秀,木男。鏡城之鞠世弼。會寧之鞠景仁。皆賊黨魁首也。鞠世弼擁兵據城。與倭結爲聲援。威脅人民。將欲搜括山林。屠戮其不從令者。衣冠士子縮首潛匿而不敢出。儒生李鵬壽慨然發憤曰。邦國板蕩。未知興亡。兇徒之乘隙作亂。乃至此乎。於是遂謀擧義討賊。求文武才有人望者爲主將。而未得其人。初。北評事鄭文孚陷賊中。脫身逃走。弊衣行乞於富寧淸巖境。〔原注:時有詩曰。宇宙中間七尺身。蒼茫獨立影無隣。惟有靑山能借路。夕陽長作往來人。〕飢乏不能行。或食野菜。至龍城。投巫人韓仁侃之家。仁侃熟視曰。豈評事公耶。評事惕然曰。我乃京商人。遭亂不得歸。丐乞至此。子何妄言耶。仁侃心知之。卽引入其家而厚遇之。秋夕日。仁侃祭其祖。先以祭饌。進於評事。評事曰。禮不可如此。仁侃曰。吾祖賤人。假令生存。有評事在。則固不敢先嘗其食。其致敬盡禮類如此。〔原注:評事後爲吉州牧。迎仁侃夫妻。置衙內。而厚報其德。〕居五六日。評事從間道南行。遇書生崔配天,池達源。此二人。皆好義者也。或負或携而行。恐人物色之。竄身草間。而人或見之。則必以鄭書房呼之。遂與之同行。至漁郞武溪李鵬壽家。鵬壽出見大喜。遂傾家奉之。仍推爲主將。稟其指揮。而與配天,達源等協謀。引其同類。傳相招喩。則境內之人稍稍赴集。而姜文佑最先至。鍾城府使鄭見龍。亦來會。住武溪者幾一月矣。鵬壽身自負糧。從山路間行。趨吉州。密觀倭兵出入形勢。如是者凡再度。而倭人與鞠世弼相通。往來不絶。使姜文佑等。邀於路。盡殺之。於是遂以評事。爲倡義大將。李鵬壽爲倡義別將。鍾城府使鄭見龍爲倡義中衛將。姜文佑爲斥候將。當是時。北狄入寇內地。至富寧古縣劫掠人民。卽遣使于鞠世弼。喩以協力禦狄。至九月初十日。倡義大將鄭文孚起兵入鏡城。結陣于柳亭。〔原注:卽鏡城五里程〕又遣使于世弼。觀形勢則世弼盛陳兵威以待之。而倡義兵。僅百餘人。衆寡懸絶。形勢甚危。而倡義大將略不動容。遂領兵入城。與世弼相見。語其利害。言辭贍敏。而順於理。以此能戢其兇鋒。而不敢動。世弼以親屬。夾侍左右。伺其動靜。倡義大將。乃使其屬幷士卒登城。分立城堞。依軍法習戰。至夜乃罷。翌日平明。又使登城。如昨夕焉。評事建大將旗。上南門樓。正位而坐。飮二巵酒。俄而諸將官以下。皆入鞠躬行禮。而鞠世弼先入。使姜文佑等執之。奪其弓劍。縛出南門外。列數其罪。先斷四肢。然後斬其頸以徇。赦其脅從者。而責立後功。

번역

임진년 7월 왜적이 대거 함경도에 들어와 마천령을 넘으니, 병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절도사 한극통(韓克諴)이 패배하자 열군(列郡)이 줄줄이 와해되었다. 14일에 왜적이 경성(鏡城)의 경계에 들어오자 마침내 북쪽으로 끌고 가 연강(沿江)의 여러 고을에 가득 메웠다. 백성들은 피란하여 산으로 들어가니 다시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흉도들이 몰래 일어나 왕왕 왜적과 당여가 되었는데, 명천(明川)의 말수(末秀), 목남(木男), 경성의 곡세필(鞠世弼), 회령(會寧)의 곡경인(鞠景仁)이 모두 왜적의 당두였다. 곡세필은 병사를 거느리고 성을 점거하고 왜적과 결탁하여 서로 호응하며 백성들을 위협하였고, 장차 산림을 수색하여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도륙하려 하였다. 사대부들은 머리를 숙이고 숨어 지내며 감히 나오지 못하였는데, 유생 이붕수(李鵬壽)가 개탄하며 분개하기를, “나라가 멸망하여 흥망을 알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흉악한 무리가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키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마침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로 계획하고 문무의 재주가 있으며 사람들의 신망이 있는 자를 주장이 되도록 구했으나,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가 도적의 수중에 빠졌다가 몸을 빼내어 도망쳐 왔는데, 낡은 옷차림으로 부령(富寧) 청암(淸巖) 근처에서 구걸하였다.〔원주에 “우주 가운데 일곱 자의 몸이 아득히 홀로 서 있어 그림자도 이웃이 없네. 오직 푸른 산만이 길을 빌려 주니, 석양 속에 오래도록 왕래하는 사람이 되었네.”라는 시가 있다.〕 굶주리고 지쳐서 갈 수 없어서 간혹 산나물을 먹으며 가다가 용성(龍城)에 이르러 무당 한인관(韓仁侃)의 집에 투숙하였다. 한인관이 익숙하게 보고 말하기를, “어찌 평사공이십니까?” 하니, 정문부가 깜짝 놀라 대답하기를, “나는 서울 상인인데 난리를 만나 돌아가지 못하고 구걸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대는 어찌 함부로 말을 하는가.” 하였다. 한인관은 속으로 알고는 즉시 집으로 들여와 후하게 대접하였다. 추석날에 인간(仁侃)이 그 조부의 제사를 지내려고 제수를 평사(評事)에게 바쳤다. 평사가 말하기를, “예법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인간이 대답하기를, “우리 할아버지는 천한 사람입니다. 가령 살아 계셔서 평사가 계셨다면 진실로 감히 그 음식을 먼저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경을 다하고 예법을 다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원주(原注): 평사는 나중에 길주목(吉州牧)이 되어 인간 부부를 맞이하여 관아 안에 머물게 하고 그 덕에 후하게 보답하였다.〕 5, 6일 동안 평사가 간도(間道) 남쪽으로 가다가 서생 최배천(崔配天)과 지달원(池達源)을 만났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의로운 사람이다. 어떤 이는 등에 지고 어떤 이는 손에 들고 가면서 인물이나 색색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몸을 숨기고 풀숲 사이에 있었는데, 사람이 혹시라도 보면 반드시 정 서방이라 부를 것이기에 마침내 그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어랑(漁郞) 무계(武溪) 이붕수(李鵬壽)의 집에 이르니 붕수가 나와서 크게 기뻐하고는 집안의 재물을 다 내어 봉양하고, 이어 주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지휘를 받아 배천(配天)ㆍ달원(達源) 등과 협력하여 같은 부류를 끌어들여 서로 불러 모으니, 경내의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는데 강문우가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종성부사 정견룡도 와서 모였는데 무계에 머문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다. 이붕수는 스스로 양식을 짊어지고 산길을 따라 길주로 가서 왜병이 출입하는 형세를 자세히 살폈다. 이렇게 두 번이나 했더니 왜인들이 곡세필과 서로 통하여 왕래를 끊지 않고 강문우 등을 길에서 불러내어 모두 죽였다. 이에 마침내 평사(評事)가 창의대장이 되고 이붕수가 창의별장이 되고 종성부사 정견룡이 창의중위장이 되고 강문우가 척후장이 되었다. 이때 북적(北狄)이 내지로 침입하여 부령 고현에 이르러 백성을 약탈하였다. 즉시 굴세필에게 사신을 보내어 힘을 합쳐 오랑캐를 막으라고 일렀다. 9월 10일에 창의대장 정문부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에 들어가 유정(柳亭)에서 진을 쳤다. - 원래 주석: 즉 경성에서 5리 거리이다. - 또 굴세필에게 사신을 보내니, 형세를 살펴보니 굴세필이 병력을 성대히 진열하고 위엄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창의병은 겨우 백여 명뿐이라 적은 수가 많은 수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여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다. 그런데도 창의대장은 대략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 굴세필과 서로 만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말하였는데, 그 말이 풍부하고 민첩하며 이치에 합당하였다. 이로써 능히 그 흉포한 기세를 억제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굴세필은 친속들을 좌우에 끼고 배치하여 그의 동정을 살폈다. 창의대장은 마침내 자기 부하들과 군사들을 성에 올라가 성가퀴에 나누어 서게 하고 군법에 따라 전투를 연습하게 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그만두었다. 다음 날 새벽에 또 성에 오르니 어제 저녁과 같았다. 평사(評事)가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남문 누각에 올라 정위(正位)에 앉아 두 잔의 술을 마셨다. 잠시 후 장관(將官) 이하가 모두 들어와 읍하고 예를 행하였는데, 김세필이 먼저 들어가서 강문우 등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에게서 활과 칼을 빼앗고 남문 밖에 결박해 두고 죄를 열거한 뒤에 먼저 사지를 절단하고 나서 목을 베어 순절하게 하였다. 그리고 협종(協從)한 자들은 사면하고 후공(後功)을 세우도록 책임을 지웠다.

원문

於是軍聲遂振。將士氣倍。遂領其衆。卽日。引而南屯于明川。斬末秀,木男等。募兵南北。人皆響應。衆至數千人。十一月十五日。與倭合戰于吉州長坪石乙古介。我軍乘勝大捷。斬馘不可勝計。倭將退入壁。十二月初十日。又戰于吉州雙浦。我軍以鐵騎。疾入衝突其陣。倭兵一番放火後。不及措手。皆辟易散亂。我軍遂乘勝大破之。〔原注:倡義大將以檄書投倭將曰。長平之斬耳無數。應作死後之逃奴。雙浦之割勢甚多。只是生前之男子云。〕越明年癸巳正月二十六日。戰于端川地馬屹境。三戰三勝。遂還軍吉州。休其士馬。俄聞倭將遣大兵。迎吉州所駐倭。撤還南道。大將帥師。且戰且追。至白塔郊南潻木下。別將李鵬壽射一倭將。應弦而倒。鵬壽卽挺出大將馬前而立。忽中丸死。朱乙溫萬戶李希唐。亦同日死。時則二十八日也。〔原注:大將及羅德明。幷爲詩以哀。其後察訪李成吉。亦爲製長篇一首。評事詩曰。入門魂魄想依依。有老兄存母亦違。千載張巡與許遠。九重泉路倘同歸。李詩曰。惟公幸遇丈人吉。慷慨期同誅賊魁。投身虎口試衆寡。阿睹賊徒如嬰孩。又曰。人皆後殿于先登。憤惋彌中難自裁。無端鳥丸散英槐。始覺忠誠爲禍媒。又曰。將軍錄節奏九重。褒贈要令傳後來。書生戰死武夫全。列鎭紛紛良可咍。公無顯典將無賞。也知世路多嫌猜。此其大略也。〕乃使崔配天。懷捷書。從間路奏□行在所。〔原注:時□乘輿播越永柔縣。〕□宣祖大王引見流涕。加配天朝散大夫。而賜帛一疋。追贈李鵬壽司憲府監察。評事初起兵時。以孤軍入虎穴。臨危豦變。出人意表。能使賊不敢動。而斂手就戮。又善於用人。各盡其才。而號令嚴明。人不敢犯法。以此能得人死力。而恢復疆土。崔配天,池達源。終始參謀。宣力最多。姜文佑亦豪健丈夫。能立然諾。重意氣。每爲先鋒將。能冒死赴敵。而戰必有功。

번역

이에 군사들의 기세가 드디어 떨쳐지고 장수와 병사의 사기가 배가 되었다. 이에 그 무리를 거느리고 즉일 명천(明川)으로 끌고 가서 남쪽 진영에 주둔하고 말수(末秀), 목남(木男) 등을 참수하였다. 남북으로 군사를 모집하니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여 모인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11월 15일에 길주(吉州) 장평석을 을고개(乙古介)와 함께 합전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참수하고 목을 베는 것이 셀 수 없었다. 왜장(倭將)은 물러나 성벽으로 들어갔다. 12월 10일에 또 길주 쌍포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이 철기(鐵騎)로 빠르게 들어가 그 진영과 충돌하였다. 왜병이 한 차례 불을 놓은 뒤에는 손쓸 겨를도 없이 모두 패주하여 산란해졌고, 우리 군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크게 격파하였다. 〔원주: 창의대장이 檄書(격서)를 왜장에게 던지며 말하기를, “장평에서 참수당한 자가 무수하니 응당 죽은 뒤에 도망치는 노예가 될 것이다. 쌍포에서 세력을 나누는 것이 매우 많다.”라고 하였다.〕 단지 생전에 남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 계사년 1월 26일 단천(端川)의 마흘경(馬屹境)에서 싸워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마침내 군사를 길주(吉州)로 돌려보내 병사와 말을 쉬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왜장이 대군을 보내 길주에 주둔한 왜군을 맞이하여 남쪽으로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장과 장수가 싸우면서 추격하여 백탑(白塔) 교외의 유목(潻木) 아래에 이르렀는데, 별장 이붕수(李鵬壽)가 왜장 한 명을 쏘아 화살이 박히자 그 왜장이 쓰러졌다. 이붕수는 즉시 대장의 말 앞에 나아가 서 있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죽었다. 주을온(朱乙溫)과 만호 이희당(李希唐)도 같은 날 죽었는데, 이때는 28일이었다. 〔원주: 대장과 나덕명(羅德明)은 모두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그 뒤에 찰방 이성길(李成吉)도 장편 시 한 수를 지었다. 평사시(評事詩)에 이르기를, “문으로 들어오는 혼백이 아련히 떠오르니, 노형이 계신 곳에 어머니 계심도 어긋났네.”라고 하였다.〕 천 년 전의 장순과 허원처럼 구중궁궐의 저승길을 함께 가리라 이시(李詩)에 이르기를, “다행히 공은 길한 어른을 만나서, 분개하여 적괴를 처단하기를 기약했네. 호랑이 입에 몸 던져 다수와 소수를 시험하니, 적의 무리가 어린아이 같았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들은 모두 먼저 오르는 자를 뒤따르니, 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스스로 억제하기 어렵네. 까닭 없이 새알이 영괴에 흩어지니, 충성이 화근이 됨을 비로소 알겠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장군이 절차를 기록하여 구중궁궐에 아뢰니, 포상과 증직은 후세에 전해지게 해야 하네. 서생은 싸우다 죽고 무부는 온전하니, 분분한 진영의 모습 참으로 우습구나. 공에게는 현달한 관직이 없고 상도 없으니, 세상살이가 시기와 의심이 많음을 알겠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이에 최배천(崔配天)을 시켜 첩서를 가지고 간접적인 길을 통해 행재소에 아뢰게 하니, 원주(原注): 이때 □가 수레를 타고 영유현(永柔縣)을 지나고 있었다. □에서 선조대왕이 인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배천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의 작위를 더해 주었다. 이에게는 비단 한 필을 하사하고, 이붕수(李鵬壽)를 추증하여 사헌부 감찰로 삼았다. 평사(評事)가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고립된 군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갔는데, 위급한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뜻밖의 행동을 함으로써 적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항복하여 죽음을 받아냈다. 또 사람을 잘 등용하여 각자 재능을 다하게 하였고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사람들이 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사람들의 사력을 얻어 강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최배천(崔配天)과 지달원(池達源)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모로서 힘을 많이 썼고, 강문우(姜文佑)는 또한 호걸스러운 장부로서 능히 선뜻 결단하고 의기를 중시하여 매번 선봉장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나아가 싸워 반드시 공을 세웠다.

151. 加資□敎書〔原注:北道儒生陳疏頌公之功。遂命加資。〕[徐渻行]

문체: 公車類 / 敎書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48B, ITKC_MO_0284A_A071_148C

원문

□王若曰。獨任朔方功。久著敵愾之節。特陞亞卿秩。庸施懋賞之恩。斯豈私榮。實惟公議。惟卿嚼鐵之剛。蹈刃其勇。五經腹。百步技。文武備具之才。六尺身。萬夫雄。尊俎折衝之略。早應書記之選。昔着從事之衫。幕府少年。豈但倚馬之檄。軍中一范。爭誇破膽之威。逮東土之大艱。惟北路爲尤慘。士卒塗草。或爲蟲而爲沙。衆庶奔波。不投胡則投賊。朝廷之威令久斷。豐沛之城邑已殘。雖智者。亦無如何。計將安出。惟忱臣。可識板蕩。卿獨奮然倡率義徒。先誅亂賊。誓師於危疑之際。咸懷至誠。成軍於灰燼之餘。所恃惟義。一鼓而兇徒敗折。三戰而勁寇遁逃。豈徒一路士民。免爲左袵。其於中興功業。實多爾勞。一節已昭於險夷。殊勳可銘於鍾鼎。圖形漢閣。反遺殉國之人。懸書晉門。宜有志過之客。行賞誠歉於常典。念功實慙於中心。勳旣勘於往時。已無及矣。事始著於今日。何以與之。兹加卿嘉善大夫。職如故。於戲。大功出儒生。可竝美於古昔。盤根別利器。庶輸忠於始終。故兹敎示。想宜知悉。

번역

왕이 이르노라. 홀로 북방의 공을 맡아 오랫동안 적과 맞서 싸우는 절개를 드러내었기에 특별히 아경(亞卿)의 품계에 올려 상을 베푸는 은혜를 시행하노라. 이것이 어찌 개인적인 영광이겠는가. 실로 공론이기 때문입니다. 경은 쇠를 씹는 듯한 강인함과 칼날을 밟는 듯한 용기를 지녔으며, 오경(五經)의 학문과 백보(百步)의 무예를 갖추어 문무(文武)의 재주가 겸비되었고, 육척의 몸으로 만부(萬夫)에 필적하는 웅장함을 지녀, 높은 자리에 올라 적을 제압하는 계책을 펼치니 일찍이 서기(書記)의 선발에 응했었습니다. 옛날 종사관(從事官)의 옷을 입고 막부(幕府)의 소년으로 있었으니 어찌 말에 기대어 격문만 보내는 군중의 한 범주였겠는가. 파담(破膽)의 위엄을 다투어 자랑하였는데, 동방이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북로(北路)가 더욱 참혹하였습니다. 사졸들이 흙먼지 속에 뒤섞여 벌레가 되거나 모래가 되었고, 백성들은 도망하여 오랑캐에게 투항하거나 도적에게 투항하였으며, 조정의 위엄과 명령은 오래도록 끊어지고 풍패(豐沛)의 성읍은 이미 무너져 지혜로운 자라도 어찌할 바를 몰라 계책을 어떻게 내야 할지 고민하였습니다. 오직 참신한 신하만이 판도(板蕩)를 알 수 있었습니다. 경이 홀로 분연히 의로운 무리를 이끌어 먼저 난적을 주벌하고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에 군사를 일으켜 모두가 지극한 정성을 품고 재가 된 폐허에서 군대를 이루었으니, 믿은 것은 오직 의리뿐이었습니다. 한 번 북을 치자 흉악한 무리가 패배하였고 세 차례 싸우니 강한 도적이 달아났습니다. 어찌 일로(一路)의 사민이 좌편(左袵)이 되는 것을 면했을 뿐이겠는가. 중흥의 공업에 실로 경의 노고가 많았습니다. 한 번의 절개는 험난한 상황에서 이미 밝혀졌고 특별한 공훈은 종정에 새겨질 만합니다. 한각(漢閣)에 초상화를 그리려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에게 도리어 남기는 것이 되고, 진문(晉門)에 글을 걸어두려니 뜻이 지나친 객이 있게 됩니다. 상을 베푸는 것은 정전(正典)에 비하면 부족하고 공을 생각하면 내 마음에 부끄럽습니다. 공훈은 지난 일이라 이미 미칠 수 없으나 일이 시작된 것이 오늘이니 어찌하지 않겠는가. 이에 경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더해 주되 직책은 예전대로 하노라. 아, 큰 공이 유생에게서 나왔으니 옛날에 비견될 만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별도의 날카로운 무기처럼 충성을 시종일관 바치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이로써 가르쳐 보이니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152. 北評事李公端夏上巡察使閔公鼎重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48D, ITKC_MO_0284A_A071_149A ...

원문

端夏自赴戎幕以來。不惟才識昏滯。不能有所措畫。適値主將見罷。坐待拿□命。彼以旣罷。故牢守前規。而一事不欲變通。然猶佩密符而擁將號。佐幕之官。雖有不得已代察之事。亦不可凌掩而出號發令。失上下之體統也。軍民弊瘼。可以變通者似非一二。而權柄旣不在手。欲事事而正之。則近於侵官而不可得矣。此有一事。有評事稍可以容力者。先人曾莅此任時。以方伯指。述北關誌而見失。端夏之來。有意於此事。鏡城誌。業已草定。九官事。欲一樣編撰。行關列邑。書送鏡城誌條件凡例。使之逐條記實以送。若來則亦欲刪定而續編耳。端夏於先人文字收拾。不遺片隻。而惟是鏡城事蹟一冊。本自本府以吏文記錄者。而束在亂稿箱籠中。端夏受此任後。暫往故山。搜取此冊。而不料其中。有先人手草雜記數紙挾置而不見收也。今以別紙錄呈。蓋鄭評事文孚事。先人嘗稱道而惜之。今見此記。又躬訪於此處人士。則其功大矣。而生旣被誣。不遇於世。沒又無人表章者。誠可惜也。此有尹文肅公瓘之遺廟。鄙意以爲金宗瑞,鄭文孚。其功俱不下於尹公。蓋收復國家旣失之土地。則三人均也。欲以金,鄭兩公。幷享於尹廟。尹廟雖不加創。可容三位之享。以此而議于此處人士將校。則衆議如一。而但聞鄭公死於癸亥後逆獄杖下。且其生時。爲人峭直。固多嫉之者云。未知世議爲如何也。先人賦鏡城十絶。其一曰。詩命書帥金宗瑞。勳戚專征尹侍中。遺廟卽今難幷祀。史家那得獨褒功。下句之意未詳。而蓋似惜其不能竝祀也。一絶曰。申公一箭解重圍。鄭子三麾破敵歸。關外雙忠懸日月。空令壯士涕交揮。申似指申公砬。而鄭必指文孚也。此則偶然對擧之辭。而此乃先人丙辰年所作也。鄭公若有失身於昏朝之事。則先人必不以忠許之矣。鄭公死於柳夢寅之獄。而夢寅引之云。然耶。夢寅常時人事。有同失性者。其承服被誅。亦似可笑。況其援引乎。以鄭公忠智。平生所樹立如此。則反正後必無詿誤於兇徒之理。然此處之人。以此爲疑。玆以奉稟於閤下。兼議於朝中親舊。伏未知閤下之意如何也。卽今陖春靈古之勢日以強盛。日後不虞之變。有不可測。前代立大功業之人。無以昭揭而樹之風聲。則將何以責後來忠義之繼出乎。此事恐非今日北關第二件事。而其在軍政之修。亦有本末之序也。如何如何。如此事。人或不樂聞。朝議或有不深惟鄭公之心跡。而執其死時事而沮之者。此事恐歸於不能成。閤下之意如以爲可。則決欲擧而行之耳。此事從前觀風守土之人。亦有意而未果云。非獨端夏之愚見也。且其從難之士。不得一告身。實爲國家之欠典。如李生鵬壽。卽儒生之首倡義謀者。而終又戰亡。今其子孫。

번역

단하(端夏)가 스스로 융막(戎幕)에 부임한 이후로 재주와 식견이 어두워져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침 주장이 파직되는 것을 당하여 나포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들은 이미 파직되었다고 하여 전례를 고수하며 한 가지 일도 변통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밀부(密符)를 차고 장수의 칭호를 쓰고 있으니, 좌막(佐幕)의 관원은 비록 부득이하게 대신 살피는 일이 있더라도 또한 함부로 나가서 호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는 상하의 체통을 잃는 일입니다. 군민의 폐단은 변통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듯하나, 권한이 이미 손에 없으므로 모든 일을 바로잡으려 하면 관직을 침범하는 것에 가까워져서 할 수 없습니다. 이 일 가운데 평사(評事)가 조금 힘을 쓸 만한 일이 하나 있는데, 선인이 일찍이 이 직임을 맡았을 때 방백(方伯)의 지시로 북관지(北關誌)를 기술하다가 잘못된 점이 있었습니다. 단하가 온 것은 이 일에 뜻이 있어서입니다. 경성지(鏡城誌)는 이미 초안이 정해졌습니다. 구관사(九官事)도 똑같이 편찬하고자 합니다. 관내 고을에 관문을 보내 경성지의 조건과 범례를 써서 보내어 조목조목 사실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고, 오면 또한 삭제하고 정정하여 이어서 편찬하고자 합니다. 단하(端夏)가 선인의 문적을 수습하면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으나, 유독 이 경성사적(鏡城事蹟) 한 책은 본래 본부에서 아전의 글로 기록한 것인데 난고함 속에 묶여 있었습니다. 단하가 이 일을 맡은 뒤 잠시 고향에 가서 이 책을 찾아왔는데, 그 속에 선인이 손수 초록한 잡기 몇 장이 끼워져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별지에 기록하여 올립니다. 정 평사 문부(文孚)의 일에 대해 선인께서 일찍이 칭찬하며 아까워하셨는데, 지금 이 기록을 보고 또 직접 이곳 인사에게 찾아가 보니 그 공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이미 무함을 받고 세상에서 만나지 못하였고, 죽어서도 또 그 공적을 표창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윤 문숙공(尹文肅公)의 유묘(遺廟)가 있으니, 제 생각에 김종서와 정문부는 그 공이 모두 윤공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대개 국가에서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세 사람의 공은 똑같습니다. 김공과 정공 두 분을 윤공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고자 합니다. 윤묘가 비록 새로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세 분을 배향할 만합니다. 이 내용으로 이곳의 인사(人士)와 장교(將校)들에게 의논하니, 여론이 한결같았습니다. 다만 정공이 계해년 역적의 옥사에서 매를 맞고 죽었고, 또 생전에 성품이 강직하여 시기하는 자가 많았다고 하니, 세상의 의론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선인(先人)이 지은 《경성십절(鏡城十絶)》에 “시명서수 김종서, 훈척전정 윤시중”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유묘(遺廟)를 지금 함께 제사 지내기 어려우니 사가가 어찌 공적만 홀로 포상하겠는가 -아래 구절의 뜻은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함께 제사 지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는 듯하다.-한 절구에 이르기를, 신공(申公)이 화살 하나로 중포위에서 벗어나고 정자(鄭子)는 세 깃발로 적을 격파하고 돌아왔네 관문 밖의 두 충신은 해와 달처럼 걸려 있어 부질없이 장사들 눈물만 줄줄 흘리게 하네 -신공은 신공(申公)을 가리키고 정자는 문부(文孚)를 가리킨 듯하다. 이는 우연히 대구로 지은 말인데, 이것은 선인이 병진년에 지은 것이다. 정공이 만약 혼조의 일에 연루되었다면 선인은 반드시 충성으로 허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공은 유몽인(柳夢寅)의 옥사에서 죽었는데, 몽인이 그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몽인의 평소 행실은 성질을 잃은 자와 같으니, 그가 복을 입고 처벌을 받은 것도 우스운 일인데 하물며 정공의 충성과 지혜를 끌어다 인용했단 말인가.- 평생에 수립한 바가 이와 같으시다면, 반정(反正) 뒤에는 반드시 흉도들의 계략에 속아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고 있으므로 이에 합하께 여쭈고 아울러 조정의 친한 벗들과 상의하고자 합니다. 삼가 합하의 뜻이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요동(遼東)과 춘천(春川)의 영고(靈古)한 기세가 날로 강성해져서 앞으로 예측할 수 없는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전대에 큰 공업을 세운 사람이 그 공적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풍성을 세우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후대의 충의로운 자들이 나오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이 일은 오늘날 북관(北關)의 두 번째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고, 군정(軍政)을 바로잡는 데에도 본말의 순서가 있습니다. 어떠하신지요? 이런 일은 어떤 사람은 듣기 싫어하고 조정의 의론 중에는 정공(鄭公)의 마음과 행적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당시의 일만 가지고 저지하려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합하께서 만약 가하다고 여기신다면 결단코 거행하고자 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종전에 풍속을 관찰하고 지방을 지키던 사람들도 뜻은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고 하니, 단하(端夏)의 어리석은 견해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그 난을 따르던 선비들이 한 번도 몸을 바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은 실로 국가의 결함입니다. 이생 붕수(李生鵬壽)는 유생으로서 의로운 계책을 앞장서서 주장하였으나 끝내 전사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자손은

원문

亦有俊秀之士。如此之人。□朝廷亦次第錄用。則關北人心。庶有興起之效。而日後得力。必不淺也。徐監司元履欲爲當時立功諸義士。立廟於列邑而未果云。此見則如何也。鄙意別立廟未易。姑以鄭公祀於尹廟。以俟他日變通。亦可也。如何如何。持叔兄爲半刺時。致祭於戰亡之士云。而鄭公事蹟。則想或未及深悉如先人之所採訪也。末由奉陪。盡攄懷抱。玆敢縷縷於書札。病痼神茫。辭不達意。惟恃閤下恕量。有以裁敎焉耳。

번역

또한 준수한 선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조정에서 차례로 녹용(錄用)한다면 관북의 인심이 흥기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훗날에 힘을 얻는 것도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서 감사 원리(元履)는 당시 공을 세운 의사(義士)들을 위해 여러 고을에 사당을 세우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떠하십니까? 저의 생각에는 별도로 사당을 세우기는 쉽지 않으니 우선 정공(鄭公)을 윤묘(尹廟)에 배향하고 훗날 변통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숙형(持叔兄)이 반차(半刺) 때 전사한 선비들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공의 사적은 아마도 선인들이 채택하여 조사한 것만큼 깊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직접 모시고 회포를 다 펴지 못하고 이렇게 서찰에 자세히 적습니다. 고질병으로 정신이 혼미하여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하니 오직 합하께서 양해하시어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153. 巡察使閔公答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0B, ITKC_MO_0284A_A071_150C

원문

所示鄭評事。遺事弟實聞見孤陋。而至於東史。尤所昧昧。今承來敎。感慨難勝。發前人之潛德韜輝。立後世之懿範令則。實吾朱夫子之所嘗眷眷者。而尤致意於忠孝節義之間。豈非遭時不幸。有所感而然耶。吾兄之言。乃及於此。亦惟吾朱夫子之遺意。此誠北方二十年來所未聞之說。益令人慽慽於心也。敢不樂聞而從命。然以事體言之。必須聞諸□朝廷。然後方爲增重光耀。從義諸人。亦可次第追褒。兄須爲弟。草作一狀。甚悉顚末。使□朝廷。明知其時實蹟如何。鄭評事末年事。亦可竝及也。如何如何。謹以先相國詩語。追想其指意所向。則金之詩書。不當竝祀於尹之勳戚。又似有尹有廟。而金無祠者。亦出於詩書勳戚之勢不同之意。得非譏諷世人之作耶。弟意則得請之後。立金廟於六鎭中。立鄭廟於禦亂里首事之地。以之褒功示後可也。

번역

말씀하신 정 평사(鄭評事)의 유사에 대해서는, 아우가 실로 듣고 본 것이 부족하고 동방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어두운 바 있습니다. 지금 보내신 말씀을 받으니 감개무량함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선인(先人)의 숨은 덕과 빛나는 공적을 드러내어 후세의 아름다운 모범과 법도를 세우는 것은 실로 우리 주 부자(朱夫子)께서 일찍이 애정을 쏟으신 바이고, 특히 충효와 절의에 대해 더욱 뜻을 두셨으니, 어찌 시대의 불행을 만나서 감동한 바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의 말씀이 마침 여기에 미쳤으니, 또한 오직 우리 주 부자께서 남기신 뜻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북방에서 20년 동안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이니 더욱 마음이 슬퍼집니다. 감히 기꺼이 듣고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일의 체모로 말하자면 반드시 조정에 보고한 뒤에야 비로소 광영을 더할 수 있고, 의리를 따른 사람들도 차례로 추증하여 포상할 수 있습니다. 형은 아우를 위하여 한 장의 상소를 초안하여 그 전말을 상세히 적어 조정이 당시의 실적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정 평사의 말년 일도 함께 언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선상국(先相國)의 시어를 가지고 그 지향하는 뜻을 추측해 보면, 김씨의 시서(詩書)는 윤씨의 훈척(勳戚)과 함께 제사 지내서는 안 되고, 또 윤씨는 사당이 있는데 김씨는 사당이 없는 듯하니, 이 또한 시서와 훈척은 그 형세가 같지 않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세상을 풍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우의 생각으로는 청이 이루어진 뒤에 김씨의 사당을 육진(六鎭) 가운데 세우고 정씨의 사당을 어란리(禦亂里) 수사(首事)의 자리에 세워 공적을 포상하고 후세에 보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54. 李評事再上巡察使閔公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0D, ITKC_MO_0284A_A071_151A ...

원문

日者。伏承下復書。伏審隆寒。台體履萬安。區區無任伏慰之至。且伏悉敎意。曾所陳達之事。不惟快蒙頷可。至欲別立金,鄭兩廟。而又從而啓□聞。以增重光耀。此地人士聞此。已皆聳動。咸仰振作風敎之至意也。第聞人士所言。此中欲爲鄭公謀此擧久矣。而至今未成。今幸公議齊發。而閤下亦已許之。則此誠千載一時之會也。若復請抱□朝廷。待其許否。則其許有未可必。而又有不能成之慮。玆以呈文於閤下。欲先立廟宇。願閤下。追聞于□朝而賁飾之。蓋此等事。根於士論之公。則雖無□朝命。亦可爲之。而其所慮。亦有意見。伏望俯從所請。▒▒如何。諸生等欲躬進呈文。而遠地往復之間。事漸稽遲。玆依文狀付撥之例。收捧以上矣。物力無出處。本府營穀。若蒙優數題給。則今冬。可以料理。明春。卽可營造。閤下北巡廻還之日。端夏陪侍往觀。見其就事而出去。則豈非千古一快耶。且夫有祠而金無祠者。鄙意則必是緣金公死時事。而有難於竝祀也。今承下示。以詩書勳戚不當竝祀爲疑。則先人詩語。雖未知果出於此意否也。然來敎之意自好。又何必竝祀也。若別立於六鎭中如行營近處。則尤有顏光矣。但金公事。端夏所疑。則所關係非止一道事。此係一國倫常之大者。此事若得請。於一國有光矣。而但□朝廷之許。有未可必也。別紙有所稟。幸關聽而敎之如何。狀□啓草搆上。而似多有可改處。且先人記事。若收入於狀中。則狀辭似太宂。別錄於狀後。未知如何。當時從義之人。亦別錄。以備裁擇。蓋廟享人當否。先賜下敎。且或啓□聞。錄用子孫。或自本道加恤典。如何。六鎭義士事蹟。未及盡訪。從當加錄以上。姑以此爲稟議之地耳。狀□啓則伏望姑遲之。以待更有所達。如何。

번역

며칠 전에 보내신 답서를 받고 추운 날씨에 대감의 체후가 만안하심을 살피고 나니, 무척이나 위로되는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뜻을 살펴보건대, 일찍이 진달한 일을 기꺼이 허락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별도로 김씨와 정씨 두 분의 사당을 세우고자 하시고 또 그에 따라 궐문(闕門)에 아뢰어 더욱 빛나게 하려고 하시니, 이곳 인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이미 모두 감동하여 교화가 진작되는 지극한 뜻을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인사들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정공(鄭公)을 위해 이런 일을 도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다행히 공론이 일제히 일어나고 합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기회이다. 만약 다시 조정에 청하여 허락을 기다린다면 허락받을 것이 확실치 않고 또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있다.”라고 합니다. 이에 합하께 글을 올려 먼저 사당을 세우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붕당을 따지지 않는 조정에 가서 꾸미기를 청하십시오. 대개 이러한 일은 사론(士論)의 공정함에 근거한다면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걱정되는 바도 의견이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청한 대로 하심이 어떠하신지요? 제생들이 직접 문서를 올리려고 하나 먼 곳을 왕복하는 사이에 일이 점점 지체되고 있습니다. 이에 문장(文狀)에 따라 부발(付撥)하는 예에 의거하여 수봉(收捧)합니다. 물력은 출처가 없으니 본부의 영곡(營穀)에서 넉넉히 몇 가지를 제급해 주신다면 올겨울에는 마련할 수 있고 내년 봄에는 즉시 건축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붕당이 없는 조정에 돌아오시는 날 단오에 모시고 가서 구경하고,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떠나신다면 어찌 천고에 한 번의 통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사당은 있으나 김씨(金氏)의 사당이 없는 것은 제 생각에는 필시 김공(金公)이 죽었을 때의 일로 인하여 함께 모시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보내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시서(詩書)와 훈척(勳戚)을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문에 대해서는, 선인께서 하신 말씀이 과연 이런 뜻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내신 편지의 뜻이 좋으니 또 어찌 반드시 함께 제사를 지내야겠습니까. 만약 육진(六鎭) 가운데 행영(行營) 근처와 같은 곳에 별도로 세운다면 더욱 빛날 것입니다. 다만 김공의 일은 단하(端夏)가 의심하는 바가 있으니 관계된 것이 한 가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라 전체의 윤리상 큰 일입니다. 이 일을 청하여 얻어낸다면 온 나라에 빛이 될 것입니다. 다만 조정에서 허락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별지에 아뢸 말이 있으니 살펴보고 어떻게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장계 초고를 올려 보냈는데 고칠 곳이 많을 듯합니다. 그리고 선인의 기사를 장계 안에 넣으면 장계의 말이 너무 엉성해질 것 같으니, 장계 뒤에 별도로 기록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들도 별도로 기록하여 재택(裁擇)에 대비해야 합니다. 묘향(廟享)의 적합 여부에 대해서는 먼저 하교를 내리시고, 혹시라도 보고받으시면 자손을 녹용(錄用)하거나 본도에서 가휼(加恤)하는 은전을 베푸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육진 의사들의 사적은 아직 다 조사하지 못하였으니, 나중에 더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이것으로 품의를 올립니다. 장계는 우선 늦추고 다시 알려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55. 從義人別錄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1D, ITKC_MO_0284A_A071_152A ...

원문

贈司憲府監察李鵬壽。鏡城人。自少時有志槪。氣宇不凡。壬辰鞠賊之亂。鵬壽首謀擧義。求文武才有人望者爲主將。而未得其人。鄭評事與池達源,崔配天兩人。同至鵬壽家。鵬壽出見大喜。傾家奉之。推爲主將。留一月。進誅鞠賊。爲倡義別將。轉討倭寇。凡三捷立功。白塔之戰。中丸而死。追□贈司憲府監察。鄭公牧吉州。以白塔郊哀李殿中出題試士。鏡城人著義旅錄。詳錄其倡義討寇之功。閔判官維重。爲文致祭。洪判官如河。撰墓碣銘。蓋鄭公非鵬壽。無以擧義。鵬壽非鄭公。無以成功。當時之士。鵬壽當爲第一。若爲鄭公立廟。當以此人配享。今有曾孫七十餘人。其中儒士之俊秀者。李東白李東榮,李震英,李發榮。而東榮則曾經□順陵參奉云。

번역

사헌부 감찰 이붕수(李鵬壽)를 추증하였다. 경성(鏡城)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뜻이 있었고 기상이 비범하였다. 임진년 왜적의 난리 때 붕수가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주도하여 문무의 재주가 있고 인망이 있는 자를 주장이 되도록 구하였으나 적임자를 찾지 못하였다. 정 평사(鄭評事)와 지달원(池達源), 최배천(崔配天) 두 사람이 함께 붕수의 집에 이르자, 붕수가 나와서 크게 기뻐하며 집안의 재산을 다 내어주고 그들을 주장에 추대하였다.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왜적을 진압하고 의병의 별장이 되어 왜구를 토벌하여 세 차례 승리하여 공을 세웠다. 백탑(白塔)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죽자, 추증하여 사헌부 감찰로 삼았다. 정공(鄭公)이 목길주(牧吉州)에 있을 때 백탑 교외에서 이전중(李殿中)이 출제한 시험을 보았는데, 경성 사람이 《의려록(義旅錄)》을 지어 그가 의병을 일으켜 왜구를 토벌한 공적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민 판관(閔判官) 유중(維重)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고, 홍 판관(洪判官) 여하(如河)는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대개 정공이 아니면 붕수가 의병을 일으킬 수 없었고, 붕수가 아니면 정공이 성공할 수 없었으니 당시의 선비들 가운데 붕수가 제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정공을 위해 사당을 세운다면 이 사람을 배향해야 할 것이다. 지금 증손자 70여 명이 있는데 그중 유시(儒士)로서 준수한 자는 이동백(李東白), 이동영(李東榮), 이진영(李震英), 이발영(李發榮)이다. 이동영은 일찍이 순릉 참봉을 지냈다고 한다.

원문

判官崔配天,參奉池達源兩人。鏡城人。皆好義者也。鄭評事初遇兩人。同至李鵬壽家。協謀擧義。誅鞠賊。討倭寇。終始宣力最多。配天懷捷書奏行在。□宣祖大王引見。賜帛。給軍器寺判官職帖。時觀察使尹卓然。嫉鄭公聲績掩己。加以搆捏二事交上。故旌賞格不行。從難之士。不得一告身。坐此故也。達源。後爲璿源殿參奉。此由□朝廷有所親。知其賢而擧之。非以戰功也。此兩人及姜文佑。有竝爲配享之議。而又有疑難之議。未知如何如何。但三人之功。俱在義旅錄。閔判官維重。皆爲文致祭。其功實出尋常。而配天以躬往□行在。故僅得影職五品帖。達源全未蒙賞。此三人子孫。雖難錄用。亦宜加恤。達源則無嫡子。有妾子兩人成海,學海。皆能文有識。有乃父風。而以其母內婢故。從賤役。可惜可惜。達源軍功固當追褒。若免其兩子。使之奉祀。則可無遺憾。配天子孫。閔判官時。報使免講。而都事或有擧論之時。伏聞。閤下秋巡時。下敎凡倡義人子孫。當爲別樣處置云。而未有明白指揮。若蒙成給其帖文。則當爲實惠耳。配天之孫瀷。以儒士。方治經云耳。

번역

판관 최배천(崔配天)과 참봉지달원(池達源) 두 사람은 경성 사람으로 모두 의로운 자들입니다. 정 평사(鄭評事)가 처음 이 두 사람을 만나 이붕수(李鵬壽)의 집에 함께 가서 협력하여 의리를 펴고, 곡적(鞠賊)을 주벌하고 왜구(倭寇)를 토벌하는 데에 시종일관 가장 많은 힘을 보탰습니다. 최배천은 승전보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에 아뢰어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인견(引見)을 받고 백(帛)을 하사받고 군기시 판관직의 첩문(帖文)을 받았습니다. 당시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정공(鄭公)의 명성이 자신을 가리는 것을 시기하여 두 가지 일을 꾸며내어 교상(交上)하였으므로, 정당한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헌신적인 선비가 한 번도 고신(告身)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달원은 나중에 선원전 참봉이 되었는데, 이는 조정에서 그를 친밀하게 여겨 그의 어짊을 알고 등용한 것이지 전공 때문은 아닙니다. 이 두 사람과 강문우(姜文佑)는 모두 배향(配享)할 의논이 있었으나 또 의난(疑難)의 논의가 있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 사람의 공적은 모두 《의려록(義旅錄)》에 실려 있습니다. 민 판관 유중(閔判官維重)은 모두 문치제(文致祭)를 받았는데, 그 공적이 실로 평범한 수준입니다. 최배천은 직접 행재소에 가서 아뢰었으므로 겨우 5품의 그림자 직책인 첩문을 받았고, 지달원은 전혀 포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기는 어렵지만 또한 가휼(加恤)해야 합니다. 지달원은 적자가 없고 첩자 두 명인 성해(成海)와 학해(學海)가 있는데, 모두 문장에 능하고 식견이 있어 그 아버지의 풍모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내비(內婢)였기 때문에 천한 일을 하고 있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지달원의 군공은 진실로 추후에 포상해야 합니다. 만약 그의 두 아들을 면직하고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최배천의 자손은 민 판관이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강(講)을 면제해 주었고, 도사(都事)가 혹시 거론할 때가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합하께서 가을에 순행하실 때 하교하시기를 “모든 창의인의 자손은 별도로 처치해야 한다.”라고 하셨다고 하는데 아직 명백한 지휘가 없습니다. 만약 그 첩문을 만들어 주신다면 실질적인 혜택이 될 것입니다. 최배천의 손자 최연(崔瀷)은 유사(儒士)로서 현재 경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원문

僉使姜文佑。鏡城人。以前權管。從鄭公起兵。縛鞠賊。以先鋒將討賊。能冒死赴敵。而戰必有功。爲人豪健丈夫。能立然諾。重意氣。詳在義旅錄。其孫有世望者。有識儒生耳。又有賤孫敏興,敏仁兩人。爲府奴。

번역

첨사 강문우(姜文佑)는 경성 사람이다. 전에는 권관(權管)으로 정공(鄭公)이 군사를 일으킬 때에 곡적(鞠賊)을 포박하였고, 선봉장으로서 적을 토벌할 때에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나아가서 싸움마다 반드시 공을 세웠다. 사람됨이 호걸스럽고 씩씩한 장부로서 약속을 지키고 의기를 중시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의려록(義旅錄)》에 있다. 그의 손자 중에 명망 있는 자는 식자(識者)인 유생뿐이다. 또 천한 손자 민흥(敏興)과 민인(敏仁) 두 사람이 있는데, 부노(府奴)가 되었다.

원문

李麒壽。鏡城人。鵬壽之兄。鄭公倡義時。以座首。共謀倡義。且鞠賊迎倭。城池府庫板蕩之餘。收其餘燼。封閉修輯。以待義兵。

번역

이기수(李麒壽)는 경성(鏡城) 사람으로, 이붕수(李鵬壽)의 형이다. 정공(鄭公)이 의병을 일으킬 때 좌수(座首)로서 함께 의병을 도모하였다. 또한 적을 포위하고 왜적을 맞이하여 성과 치소와 창고를 짓밟은 뒤에 남은 불씨를 수습하여 봉폐(封閉)하고 수집하여 의병을 기다렸다.

원문

徐遂。鏡城人。以前座首。與李麒壽同事有功。有賤孫胄。方爲行營官奴。

번역

서수(徐遂)는 경성(鏡城) 사람이다. 전 좌수(前座首)로서 이기수(李麒壽)와 함께 일한 공이 있다. 천한 손자 주(胄)가 지금 행영관의 노비가 되어 있다.

원문

忠義許珍。武士金國信。吉州人。珍。敵愾功臣惟禮之曾孫。與國信當壬辰之亂。忠憤激烈。潛行山谷。募義兵。從鄭公誅叛賊。珍爲右斥候將。國信爲左斥候將。討倭立功。詳在吉州事蹟。此兩人戰功。如鏡城之姜文佑。徐巡使元履時。欲爲此等人。亦立廟於吉州而未果云。此兩人若廟享。則鏡城之崔,池,姜三人。亦宜廟享。但未知右兩人廟享合當否也。珍孫喆。有識儒生。國信曾孫衡。業武。其父起男。再度勤王。終始從軍。牧使崔有海陳疏。請收用義兵將子孫。□上命監司。採訪遺孫。以裨錄用。而該曹尙不施云。珍,國信兩人子孫。若被錄用。鵬壽子孫固當先用。如配天,達源,文佑子孫。亦當錄用矣。大槪有海之疏。旣被□先朝允許。則該曹之至今不施。實爲欠典。況今國家方軫北邊事。此等人子孫。尤當特爲錄用。以示奬勸也。

번역

충의 허진(許珍)과 무사 김국신(金國信)은 길주(吉州) 사람이다. 허진은 적개공신(敵愾功臣) 유례(惟禮)의 증손이고, 김국신과 함께 임진왜란 때에 충분(忠憤)이 격렬하여 산골짜기에 숨어 의병을 모집하고 정공(鄭公)을 따라 반적(叛賊)을 주벌하였다. 허진은 우척후장(右斥候將)이 되고 김국신은 좌척후장(左斥候將)이 되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길주의 사적에 실려 있다. 이 두 사람의 전공은 경성(鏡城)의 강문우(姜文佑)와 같다. 서순사(徐巡使) 원리(元履)가 이때 이 같은 사람들을 위해 길주에 사당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에게 사당을 세운다면 경성의 최(崔), 지(池), 강(姜) 세 사람도 사당을 세워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두 사람에게 사당을 세우는 것이 합당한지는 모르겠다. 허진의 손자 허철은 식견 있는 유생이고, 김국신의 증손 김형은 무예를 닦았다. 그 아버지 김기남(金起男)은 두 번이나 근왕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를 따랐다. 목사 최유해(崔有海)가 상소하여 의병장 자손을 수용할 것을 청하자, 주상이 감사에게 명하여 남은 자손들을 찾아내어 비록(裨䆃)에 녹용(錄用)하게 하였으나 해당 조(曹)에서 아직까지 시행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허진과 김국신 두 사람의 자손이 녹용된다면 붕수(鵬壽)의 자손을 우선적으로 써야 하고, 배천(配天), 달원(達源), 문우(文佑)의 자손도 녹용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최유해의 상소가 이미 선왕 때 허락을 받았는데 해당 조에서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는 것은 실로 전례에 어긋난다. 더구나 지금 국가가 북변(北邊)의 일을 염려하고 있으니, 이 같은 사람들의 자손은 더욱 특별히 녹용하여 장려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다.

원문

金麗光。鏡城人。忠義許大成。吉州人。此兩人戰亡。而無事功可考文字。不可只以戰亡故。廟享如鵬壽也。但戰亡子孫。亦不可不加恤。而兩人子孫俱無復戶之事。此爲冤痛。宜行關本府本州。使之復戶也。如何。大成則以功臣後裔。其子孫例爲免講云。而麗光子孫。則無免講帖。亦宜成給也。如何如何。

번역

김여광(金麗光)은 경성(鏡城) 사람이고 충의 허대성(忠義許大成)은 길주(吉州) 사람인데, 이 두 사람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나 공적을 상고할 만한 문자가 없으니, 단지 전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묘당에 배향하는 것은 붕수(鵬壽)와 같은 일입니다. 다만 전사한 자손에게도 구휼하지 않을 수 없는데, 두 사람의 자손은 모두 복호(復戶)되지 않은 일이 있으니 이것이 원통하고 슬픈 일입니다. 마땅히 본부(本府)와 본주(本州)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복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허대성의 경우 공신 후예로서 그 자손은 으레 면강(免講)이 되는데, 김여광의 자손은 면강첩이 없으니 또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문

僉正朴銀柱,守門將朴銀澄,部將朴連柱三兄弟。鏡城人也。從鄭公有戰功。參宣武三等。子孫免講。姜文佑。亦參二等。而其他儒生。則皆未參原從。必是武人。則錄功時。上京自訴。儒生則不能上京而漏落也。

번역

첨정 박은주(朴銀柱), 수문장 박은징(朴銀澄), 부장 박련주(朴連柱) 세 형제는 경성 사람이다. 정공(鄭公)을 따라 전공이 있어 선무관 3등에 참여하였다. 자손들은 강경(講經)을 면제받았다. 강문우(姜文佑)도 2등에 참여하였는데, 그 외의 유생들은 모두 원종(原從)에 참여하지 못했다. 반드시 무인이라면 녹공(錄功)할 때 상경하여 스스로 호소할 수 있지만, 유생은 상경할 수 없어서 누락된 것이다.

원문

朴惟一。鏡城人。□王子被執時。有救解之功。□王子問其名則答曰。吾哀□王子救之。名則不必問也。因不答而去。蓋其爲人。有孝行。一鄕稱之。從鄭公起兵云。而無可考事實。然如此人。亦不可無褒賞。若給子孫免講帖。則如何如何。

번역

박유일(朴惟一)은 경성(鏡城) 사람이다. ○ 왕자(王子)가 체포되었을 때 그를 구출한 공이 있다. ○ 왕자가 그의 이름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왕자를 불쌍히 여겨 구출한 것이니, 이름은 물을 필요가 없다.” 하고는 대답하지 않고 떠났다. 대체로 그 사람은 효행이 있어 온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정공(鄭公)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을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포상이 없어서는 안 되니, 자손들에게 강첩(講帖)을 면제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문

吳允迪。會寧人。本以儒生。鞠景仁之亂。倡謀聚會儒品於鄕校。景仁圍鄕校。脅出首倡。允迪自首而出。適軍人申世俊。竊取鐃角。吹于客舍門外。叛徒疑景仁出令。齊會。儒生輩仍勒率。斬其不從者。進攻景仁。儒生誑謂若給允迪。當罷戰。景仁從之。遂窮討景仁斬之。允迪本首倡。而無成功。只授軍器主簿職帖。其孫鐏,鎰。方爲鄕任。

번역

오윤적(吳允迪)은 회령(會寧) 사람이다. 본래 유생이었는데, 김경인(金景仁)의 난 때에 꾀를 내어 향교(鄕校)에 유생들을 모았다. 경인이 향교를 포위하자 위협을 가해 앞장서서 주도하였는데, 오윤적은 자수하고 나왔다. 마침 군인 신세준(申世俊)이 뿔피리[鐃角]를 훔쳐 객사 문밖에서 불자, 반도(叛徒)들이 경인이 명령을 내린 것으로 의심하고 일제히 모였다. 유생들은 그대로 앞장서서 따르지 않는 자들을 죽이고 경인을 공격하였다. 유생들이 오윤적에게 주면 싸움을 그칠 것이라고 속였고, 경인이 이를 따랐다. 마침내 경인을 궁토(窮討)하여 베어 죽였다. 오윤적은 본래 앞장서서 주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군기주부(軍器主簿)의 직첩만 받았다. 그의 손자 오준(吳鐏)과 오연(吳鐰)이 지금 향임(鄕任)을 맡고 있다.

원문

出身車應麟。已行權管。養孫地行。曾經鄕任。

번역

출신(出身) 차응린(車應麟)은 이미 권관(權管)을 행하였고, 양손(養孫) 지행(地行)은 일찍이 향임(鄕任)을 지냈다.

원문

出身朴克勤子希悅,希發。曾經鄕任。

번역

출신(出身) 박극근(朴克勤)의 아들 희열(希悅)과 희발(希發)은 일찍이 향임(鄕任)을 지냈다.

원문

儒生金銓養孫尙仁。老品官。子汝益。業儒。

번역

유생 김전양(金銓養)의 아들 손상인(孫尙仁)은 늙은 품관이고, 아들 여익(汝益)은 유학을 공부하였다.

원문

金鏡孫柱玄,柱宇。老品官。

번역

김경손(金鏡孫)은 주현(柱玄)과 주우(柱宇)로, 늙은 품관이다.

원문

儒生車得道孫柄。方爲座首。子天遵。儒生。

번역

유생 차득도(車得道)와 손병(孫柄)이 방금 좌수(座首)가 되었다. 자천준(子天遵)은 유생이다.

원문

出身黃垂孫重瓊。方爲鄕任。

번역

출신(出身) 황수손중경(黃垂孫重瓊)은 지금 고을 수령으로 있다.

원문

吳允迪以下。皆會寧人。

번역

오윤적(吳允迪) 이하는 모두 회령 사람이다.

원문

出身金嗣朱,都訓導崔敬守。皆鍾城人。從鄭評事而無功賞。兩人。後以討胡功。皆陞堂上。嗣朱妾孫金銖。敬守子得禮。出身云。

번역

출신(出身) 김시주(金嗣朱)와 도훈도(都訓導) 최경수(崔敬守)는 모두 종성(鍾城) 사람이다. 정 평사(鄭評事)를 따랐으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오랑캐를 토벌한 공으로 모두 당상(堂上)으로 올랐다. 김시주의 첩의 손자 김주(金銖)와 최경수의 아들 최득례(崔得禮)는 출신이라고 한다.

원문

元忠恕。慶興人。從鄭評事戰功特異。受原從功券。官至萬戶。曾孫自明。方爲鄕任。忠恕妾子時發時得,時吉,時末。以其母內婢故。方從母役。

번역

원충서(元忠恕)는 경흥(慶興) 사람이다. 정 평사(鄭評事)를 따라 전공이 특이하여 원종공권(原從功券)을 받았고, 관직은 만호에 이르렀다. 증손 자명(自明)은 현재 향임(鄕任)이다. 충서의 첩자 시발시득(時發時得)은 시길(時吉)과 시말(時末)의 딸이다. 그 어머니가 내비(內婢)였기 때문에 방종모역(方從母役)이다.

원문

鄭允傑,鄭應聖父子。鏡城人。

번역

정윤걸(鄭允傑)과 정응성(鄭應聖) 부자는 경성 사람이다.

원문

余貞。本穩城官奴。癸未。從申砬有戰功。從鄭評事死於嶺東之戰。只有一子而今死。有孫松鶴。方爲官奴。有功戰亡之子孫。雖難免賤。復戶,恤典。亦不及。可歎。

번역

나 정(貞)은 본래 온성(穩城)의 관노(官奴)였다. 계미년에 신정(申砬)을 따라 전공(戰功)이 있었고, 정 평사(鄭評事)를 따라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죽었다. 자식은 하나뿐인데 지금 죽었고, 손자 송학(松鶴)이 관노가 되어 있다. 공을 세우고 전사한 자손이라도 비천한 신분은 면하기 어렵고, 호구(戶口)를 회복해 주거나 휼전(恤典)을 베푸는 것도 미치지 못하니 탄식할 만하다.

원문

右人等。皆從鄭公討賊。而時未採得事實。今方行關各邑。使之求覓以送。若來則當追錄以上矣。噫。自有北關以來。開拓土境擊胡。有功之人何限。而當時皆蒙旌賞。獨鄭公以卑官立大功。爲其時監,兵使妬忌。誣啓掩功。以致從難之士。旌賞闕然。先人記事曰。至今人情憤惋。以爲王事不可成。又曰。當初朝聞隔遠。只據一二誣啓爲信。厥後二十年間。非無原濕咨詢。而例不以前事爲意。終未有記其實者云。先人記事時。距今五十年矣。其間。惟有閔判官爲文致祭。且使子孫免講。徐監司元履。以其先世避亂此地。賴義兵脫禍。故留意當時事。欲爲立廟而未果。世間好古慕義之人。何其鮮也。噫。不以前事爲意。此乃流俗人之事。古之賢人君子。未嘗不以如此等事。爲汲汲表章之地。先人之記事。閔判官之致祭。卽出於此意。而端夏今持先人記事而來此。幸遇閤下巡宣之日。而不復着力於此事。使之永歸於泯沒。則其於事理。當如何也。玆以縷縷至此。伏惟閤下諒此意。有所褒揚。不勝幸甚。

번역

저희들은 모두 정공(鄭公)이 적을 토벌한 일에 따랐으나, 당시에는 사실을 채집하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각 고을에 관문을 보내어 사실을 찾아 보내게 하였으니, 온다면 마땅히 위로 추록해야 할 것입니다. 아, 북관(北關) 이래로 개척하고 토지를 넓히며 오랑캐를 격퇴한 공이 있는 사람이 어찌 한정되겠습니까. 당시에는 모두 정상을 받아야 했으나, 유독 정공은 낮은 관직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도 그 당시의 감영(監營)과 병사(兵使)가 시기하여 거짓 보고로 공적을 덮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충성스러운 선비들이 정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선인의 기사(記事)에 이르기를, “지금까지 사람들의 분개하는 마음이 왕사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깁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당초에는 조정에서 소식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한두 건의 거짓 보고만을 믿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에 사실을 물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례가 이전 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끝내 그 사실을 기록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인의 기사를 지은 때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입니다. 그동안 오직 민 판관(閔判官)이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고, 또 자손들이 강론하는 것을 면제받았습니다. 서 감사 원리(徐監司元履)는 그의 선세가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왔다가 의병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기 때문에 당시의 일에 유의하여 사당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옛일을 좋아하고 의로운 일을 흠모하는 사람이 어찌 그리 드문 것입니까. 아, 이전 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바로 세속적인 사람들의 일입니다. 옛날의 현인과 군자는 이러한 일을 표창하는 데에 힘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선인의 기사와 민 판관의 제사는 바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하(端夏)에 지금 선인의 기사를 가지고 이곳에 왔는데, 다행히 합하께서 순시하시는 날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 일에 힘쓰지 않아 영원히 묻혀버리게 한다면 사리에 어찌 되겠습니까. 이에 자세하게 말씀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이러한 뜻을 헤아려 포양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56. 李公敏敍答李公端夏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5B

원문

別紙所敎鄭公事。弟亦耳目所未逮及。未詳其何等人。且得罪之故。亦未知其如何。而槪聞其人先輩長者。亦多見許。向拜白軒。亦言其磊落人。且朴來章之獄。其所連引。□朝廷亦辨其虛枉。而其時適以詩案。有臺諫深論者。杖死云。果爾則冤死之人。所坐罪名雖重。後來公議。不可棄其人。且其邊上倡義之功。在人耳目者。有不可掩。則立祠以享。似無所嫌。此等擧措。聳動邊民。爲益非細。兄與方伯令公。更加商量爲妙。其中戰亡子孫錄用事。非私力所可辦。兄或與主將相議。直請於□朝廷。似合事宜。未知如何。鄙家適與鄭家子孫有相識者。其人略書曲折以示之。故其紙幷送耳。所坐詩案。亦在紙端。覽此則可詳矣。

번역

별지에 말씀하신 정공(鄭公)의 일은 저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적이 없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또한 죄를 지은 까닭도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대략 들으니 그 사람은 선배이자 장자로서 허락을 받은 이가 많았다고 합니다. 지난번 백헌(白軒)에 배알했을 때에도 호탕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박내장(朴來章)의 옥사에서 연루된 일은 조정에서도 허망하게 죄를 입었다고 변론하였으나, 그 당시에 마침 시안(詩案)으로 대간(臺諫)이 심각하게 논핵하여 장형을 받아 죽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원통하게 죽은 사람의 죄명이 비록 무겁더라도 후대의 공의(公議)로 볼 때 그 사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 주변에서 창의(倡義)한 공로는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난 것이 있어 덮어둘 수 없으니, 사당을 세워 제향하는 것은 꺼릴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러한 조치는 변방 백성들을 고무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형과 방백 영공(令公)이 다시 상의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중 전사한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형께서 혹 주장(主將)과 상의하여 조정에 직접 청하시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희 집안에 마침 정씨 가문의 자손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게 대략 곡절을 써서 보여주었으므로 그 종이를 함께 보냅니다. 시안에 관한 일도 종이 끝에 있으니 이것을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57. 尤齋宋公答李公端夏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5C

원문

鄭評事事。兒時嘗讀其壬辰檄文。想像其爲人矣。不料其事業如此也。古書。有抗大難則祀之之文。今以此俎豆於首事之地。何疑何疑。鄙見如此。未知輿情如何也。

번역

정 평사(鄭評事)의 일에 대해, 어릴 적에 그의 임진년 격문(檄文)을 읽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해 보았는데, 그의 사업이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옛 책에 ‘큰 어려움에 맞서면 제사를 지낸다.’라는 글이 있으니, 이제 이로써 일의 중심에서 제사를 지내도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여론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158. 鏡城士人等呈巡察使書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5D, ITKC_MO_0284A_A071_156A ...

원문

鏡城居前察訪朴興宗等。謹齋沐百拜。上書于□閤下。伏以除兇靖亂。臣子之大義。顯忠旌烈。□國家之令典。而如或被誣一時。兇旣除。亂旣靖。而大義未彰。抱冤九泉。忠未顯。烈未旌。而令典永闕。則此仁人君子之所以永歎深悲。必欲其昭揭而後己者也。今我巡相閤下與評事閤下相議。欲爲故評事鄭公文孚。立廟於本府禦亂里。兼以同時倡義死事之儒生配之。此政所謂仁人君子之心。而關係風敎莫大之盛擧也。某等生在邊陲。無所知識。然秉彝之天。有不容昧者。每念鄭公事不大彰著於世。未嘗不歎息痛恨。思欲立廟享祀。以寓景慕之誠。有素矣。而往者觀風之使。亦有欲就此事而未果者矣。今我閤下斷然爲此擧。至欲聞于□朝廷。以增重光耀。某等何幸。今日得覩盛事而副宿願也。仍竊伏念。凡爲前代忠賢。建立祠宇之擧。多由於鄕土人士公議齊發。或方伯邑宰之好義慕善者。有所主張。則其事便就矣。初不必稟命于□朝廷。待其許而後方就其事也。蓋□朝廷者。賢否雜進。議論多岐。如此等事。未易歸一。必欲待其許而就其事。則某等恐天下國內。古今祠院。未有許多之盛也。今時則□聖朝也。固無如此之慮。而第竊聞鄭公平生。爲人峭直。世人多有媢嫉者云。其所就功業。亦被掩覆於人者。爲此故也。況其末年。絓於逆獄。終於冤死。其不能自免。又安知其不由於媢嫉者多。而救護者鮮而然耶。然則今日閤下之以此事聞于□朝廷也。或有異議生焉。則□朝廷之準斯請。有未可必。而□朝廷若不許。則未知將何以處之耶。其勢恐不能違□朝命。而強擧其事。然則某等平生蘊畜而不能發。幸遇閤下而得遂其願者。又恐墮於虛地。而永爲一邦千載之恨也。此雖某等之過計。然作事貴於謀始。不可不念及於此也。某等竊聞。評事閤下之先相國澤堂公。曾秉太史之筆。刊正□宣廟朝誣史。世議咸稱其公云。而曾爲評事時。遍行一道。採訪公議。記鄭公事甚詳。而於鄭公邈然無相知之分云。吳爲至公之筆可知。而某等亦嘗以此事。有所記錄。今以澤堂所記比較。則無不合。而但有彼此詳略之殊耳。至於崔公有海曾牧吉州時。亦採本府事蹟。記鄭公及境內從義人事頗詳。閤下若取而觀之。可知當時功烈之偉而物論之公也。只是公論鬱於人心。久而未發。發於今日閤下巡宣之日。此豈非天意有俟而然耶。此事得之於吾土耳目。質之於先輩記錄。驗之於他州事蹟。不啻如符契之合。而一道物論之公。亦可以詳悉而無疑耳。邊地未能常安。日後不虞之變。有不可測。而前代立大功業之人。使之被誣枉而無所表章。時代漸遠。父老盡喪。消沈泯沒。歸於永熄而已。則北關一道事。有不足言。其於□國家勵世磨鈍。樹立風聲之道。

번역

경성(鏡城)에 사는 전 찰방 박흥종(朴興宗) 등이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배례를 올린 다음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흉악한 자를 제거하고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신하의 큰 의리이고, 충성을 드러내고 공렬을 기리는 것은 국가의 법령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한때 무고를 당하여 흉악한 자는 제거되고 난리는 평정되었으나 큰 의리가 드러나지 않아 원통함을 품은 채 구천에 가 있고 충성이 드러나지 않고 공렬이 기려지지 않으며 국가의 법령이 영원히 빠진다면, 이것이 바로 인인군자가 길이 탄식하고 깊이 슬퍼하며 반드시 밝게 드러내고야 말고자 하는 바입니다. 지금 우리 순상 합하께서 평사 합하와 상의하여 고(故) 평사 정공 문부(鄭公文孚)를 본부 어란리(禦亂里)에 사당을 세우고, 동시에 의병을 일으켜 죽은 유생들을 배향하고자 하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인인군자의 마음이며 풍교에 관계된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저희들은 변방에서 태어나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양심에는 어둡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매번 정공의 일이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마다 탄식하고 통한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서 경모(景慕)의 정성을 표하고자 평소 바랐습니다. 지난번에 관풍사(觀風使)가 이 일을 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붕당(閤下)께서 단호하게 이 일을 추진하여 심지어 □조정에도 알려서 그 영광을 더하려 하시니, 저희들은 오늘날 다행히 성대한 일을 보고 오랜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대체로 전대의 충현(忠賢)을 위하여 사우를 세우는 일은 대부분 향토 인사들의 공의(公議)가 일제히 일어나거나 혹은 의로운 마음으로 선인을 흠모하는 방백이나 고을 수령이 주장하여 그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애당초 □조정에 명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허락을 받은 뒤에야 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대개 조정에는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섞여 있고 논의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으므로, 이와 같은 일은 하나로 귀결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허락을 기다린 뒤에 그 일을 하려 한다면, 우리네는 천하 국내 고금의 사원(祠院) 중에 이처럼 많은 곳이 없다고 두렵게 여깁니다. 지금은 성조(聖朝)이니 진실로 이런 염려가 없습니다. 다만 삼가 듣건대 정공평(鄭公平)은 평생에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세상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가 이룬 공업(功業)도 사람들에게 가려진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더구나 말년에 역옥(逆獄)에 휘말려 끝내 원통하게 죽었으니, 스스로 면하지 못한 것이 또한 시기하는 자는 많고 구호해 주는 자는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합하께서 이 일을 조정에 아뢰시면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조정에서 이 청을 허락해 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형세상 조정의 명을 어기고 억지로 일을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평생 품어 온 뜻을 발휘하지 못한 채 다행히 합하를 만나 그 소원을 이루려던 것이 또 허사가 되어 영원히 나라와 천년의 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저희들의 지나친 생각이지만 일을 할 때는 처음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니 이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가 듣건대, 평사 합하의 선상국(先相國)인 택당공(澤堂公)께서 일찍이 태사(太史)의 붓을 잡고 선조(宣祖) 때의 무고한 역사를 바로잡으셨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정하다고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사로 계실 때 도내를 두루 다니며 공론을 수집하여 정공(鄭公)의 일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였으나, 정공과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吳)는 지극히 공정한 필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일찍이 이 일에 대해 기록한 바가 있는데, 지금 택당(澤堂)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맞지 않는 것이 없고 다만 피차 간에 상세함과 대략적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최공(崔公)이 해(海)에서 목사로 부임하여 길주(吉州)를 다스릴 때에도 본부(本府)의 사적을 채집하여 정공(鄭公) 및 경내(境內)에서 의리를 따른 사람들의 일을 꽤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합하께서 가져다 보신다면 당시 공렬이 위대하고 물론이 공정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공론이 인심에 막혀 오래도록 드러나지 못하다가 오늘 합하께서 순시하여 선포하시는 날에 드러났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기다렸다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은 우리 고을의 사람들의 말과 선배들의 기록에서 얻고 다른 고을의 사적에 대조해 보아도 부합하는 정도가 매우 높으며, 한 도의 공정한 물론입니다. 또한 자세히 살피면 의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변방이 항상 편안하지 못하여 훗날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길지 알 수 없는데, 전대에 큰 공업을 세운 사람이 무고를 당해 표창받지 못한 채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부로(父老)들이 모두 죽어 사라져 영원히 잊혀진다면 북관 일대의 일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국가가 세상 사람들을 권면하고 단련하여 풍속을 수립하는 도리에 있어서……

원문

何如也。玆以某等愚慮。莫如乘此公論齊奮之日。亟擧其事。先立廟宇於禦亂里。閤下從而聞于□朝廷。或請廟額。或請追褒從義之人。則事有次第。而無不成之慮矣。某等皆是窮儒。不能收合財力。以給功費。若蒙閤下捐給本府營米如干石。穀三百石。以資其需用。則巍然廟宇。將不日而成矣。且北路之民。苦於倉積之太多。糶糴之際。反爲病民之資也久矣。今於此等事。有所施給。想惟閤下之無所惜也。某等所嘗著義旅錄一編。幷此呈納。以備參考。某等無任惶恐激昂之至。謹百拜上書。某等抑又伏念。廟宇旣成之後。無以守護。數間屋舍。寥落於荒野之中。則無乃反爲傷心之歸乎。此擧非如享祀儒賢之比。雖不可設爲書院。若置書堂於廟宇近處。使里中儒生。讀書其中。而仍置廟直二三戶。使之兼護書堂。則廟字書堂。可以相賴。而無不謹守護之慮矣。此里士子衆多。而距邑治一日程而遠。常時不能來處鄕校而隷業。今因廟享之擧。兼謀此事。則實爲兩幸。閤下以爲如何也。

번역

어떻습니까? 이에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공론이 일제히 분발하는 이때를 이용하여 속히 그 일을 거행하여 먼저 어란리에 사당을 세우고, 합하께서 조정에 아뢰어 혹 사당의 편액을 청하거나 혹은 의로운 행적을 따라 한 사람들을 추증하기를 청하신다면 일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모두 궁핍한 선비라 재력을 모아 공사 비용을 대지 못합니다. 만약 합하께서 본부의 영미(營米) 몇 섬과 곡식 300섬을 내주어 그 비용에 보태 주신다면 우뚝한 사당이 머지않아 완성될 것입니다. 또한 북로(北路)의 백성들은 창고에 쌓인 곡식이 너무 많아 환곡을 분급할 때 도리어 백성을 괴롭히는 근거가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이러한 일에 곡식을 나누어 주신다면 합하께서는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희들이 일찍이 저술한 《의려록(義旅錄)》 1편을 이와 함께 바쳐 참고하시게 합니다. 저희들은 황공하고 격앙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삼가 백배 절하고 글을 올립니다. 저희들은 또한 사당이 완성된 뒤에 지킬 사람이 없어서 몇 칸의 건물만 황량한 들판에 쓸쓸히 서 있게 된다면 도리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제사를 받드는 유현(儒賢)에 비할 바가 아니니, 비록 서원을 세울 수는 없으나 사당 근처에 서당을 설치하여 마을의 유생들이 그곳에서 글을 읽게 하고, 이어 사당을 지킬 두세 호를 배치하여 서당까지 겸하여 보호하게 한다면 사당과 서당이 서로 의지하여 제대로 지키고 보호하지 못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마을에는 선비가 많으나 고을 중심부와는 하루 거리로 멀어서 평상시 향교에 와서 공부하지 못하고 생업에 종사합니다. 지금 사당을 세우는 일로 인하여 겸하여 이 일을 도모한다면 실로 두 가지 다행이 될 것입니다. 합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59. 巡察使題辭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7C

원문

鄭評事忠節功業。宜受百世之報。而至今泯沒無表章之擧。豈惟北方義士所嘗鬱抑。實亦中朝縉紳之所共慨惜者也。受命北來。先欲追請褒愍之典。以之樹風聲而勵忠義。忽見儒狀之來。尤可見一脈士論之有在。令人感歎不已。立廟一款。無預於□啓聞先後。早爲營建於立功之地。誠合事理。後學之讀古書。師慕古人。莫不以忠孝爲本。則使北方學者。設塾講習於廟傍。惟評事忠義。是師是法。亦豈有違於儒者之敎也。役費米布。當於巡過時從優相助。宜循群情。急擧無疑。

번역

정 평사(鄭評事)의 충절과 공업은 백세에 보답을 받아야 마땅한데, 지금까지도 묻혀서 표창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북방 의사(義士)들만 답답해할 일인가. 실로 중국의 진신(縉紳)들도 모두 개탄하고 애석해하는 바이다. 명을 받고 북쪽으로 내려와 먼저 포민(褒愍)의 은전을 청하여 풍성(風聲)을 세우고 충의를 격려하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유생들의 상소를 보니 한 줄기 사론(士論)이 있음을 더욱 알 수 있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당을 세우는 일은 계문(啓聞)의 선후에 구애받지 말고 공을 세운 곳에 조속히 영건하는 것이 진실로 사리에 합당하다. 후학들이 옛글을 읽고 옛사람을 본받을 때 충효를 근본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으니, 북방의 학자들로 하여금 사당 곁에 학교를 세워 강습하게 하고 오직 평사의 충의를 스승과 법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찌 유자의 가르침에 어긋나겠는가. 공사에 드는 비용은 순시할 때 넉넉히 도와서 군중(群衆)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니, 서둘러 거행함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160. 祠宇奉安祭文

문체: 哀祭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7D, ITKC_MO_0284A_A071_158A

원문

維歲次乙巳九月甲申朔二十五日戊申。禦侮將軍行咸鏡北道兵馬評事李端夏。謹以醴粢牲幣。敢昭告于義兵大將鄭公。伏以猗歟我公。允文允武。經濟之材。廊廟之具。粤在壬辰。出佐戎幕。遭時孔艱。島夷寇北。叛民幷起。助厥威毒。竊據城鎭。忘順稱逆。□王子大臣。元戎長吏。陷賊殆盡。獨有公在。竄身草莽。密結義士。義士之首。其姓曰李。惟崔惟池。曁姜協力。先誅逆豎。繼討狂賊。夷凶靖亂。再奠北方。功存百世。俾也可忘。鄕邦追慕。爲建祠宇。于此武溪。首事之所。當時主人。寔惟李公。邀我公至。肇基大功。勞績最多。竟死于忠。義配于公。無出其上。二三同志。追竢論定。祠墻之外。別設小齋。里中學子。爰處爰居。仰止景行。樹之風聲。從此遐荒。大義揭明。玆捐吉辰。設位妥靈。魂兮歸來。是憑是依。章甫咸集。禮秩無虧。庶垂欽格。永世啓佑。恭伸明薦。用表虔告。尙□饗。

번역

을사년 9월 갑신삭(甲申朔) 25일 무신일에 어무장군 행 함경북도 병마평사 이단하가 삼가 예물과 제물을 갖추어 의병대장 정공께 고합니다. 아, 우리 공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조정의 요직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셨습니다. 임진년에 군막에 나가 보좌할 때 시국이 매우 험악하여 섬 오랑캐가 북쪽을 침략하고 반역하는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들의 위세와 독기를 도와 성과 진을 빼앗고 순종하지 않고 역적이라 자칭하였습니다. 왕자, 대신, 원수, 장리(長吏) 등은 거의 다 적에게 당하였는데 오직 공만 남아 초야로 몸을 피하여 의사들과 은밀히 결탁하였습니다. 의사들의 우두교는 성이 이씨였고 최씨와 지씨 및 강씨가 힘을 보태어 먼저 역적들을 죽이고 이어 미친 도적들을 토벌하여 섬 오랑캐를 평정하고 난리를 안정시켰습니다. 북방에 두 번이나 제사를 드리니 공은 백세토록 기억될 것입니다. 고향에서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곳 무계(武溪)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일을 주도한 곳이 바로 이곳이고 당시의 주인은 이공이었는데, 우리 공을 초청하여 큰 공업을 시작하였으니 그 노고와 업적이 가장 많았습니다. 마침내 충성으로 죽었으므로 의로운 배필로서 공과 짝이 되어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두세 명의 동지들이 뒤따라 와서 논의하여 정하고 사당 담장 밖에 별도로 작은 재실을 설치하였습니다. 마을의 학자들이 이곳에서 살며 우러러 경행(景行)을 지향하고 풍성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먼 변방에 큰 의리가 밝혀졌습니다. 이에 길일을 택하여 위패를 세우고 영령을 모시니, 혼령이여 돌아오소서. 이곳에 의지하고 이곳에 머무소서. 유생들이 모두 모여 예의가 부족함이 없으니 부디 흠향하시어 영원히 보우하소서. 공경히 제물을 바치며 정성스레 고합니다. 흠향하소서.

161. 巡察使閔公鼎重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8B, ITKC_MO_0284A_A071_158C ...

원문

臣受任北來已過一年。三巡列邑。審察本道形勢爲白乎矣。目前緊急之慮。不出於修治軍政。固結人心而已。然於二者之中。人心又爲之本。而邊土絶遠。王化難及。風氣強悍。習俗愚蠢。易惑於亂。難曉以理。以已往之事言之。昔在□世祖朝。李施愛謀叛。誘以□朝廷遣兵。盡殺北民。則人皆驚惑。一道從逆。□國家悉發五道之兵。僅討平之。至于壬辰之變。倭寇入北。土人幷起爲亂。㓚縛將吏。擧城附賊。時左議政金貴榮,府院君黃廷彧及其子承旨赫等。奉臨海,順化兩王子。皆被叛賊縛執與賊。南北兵使。諸鎭守宰。陷賊殆盡。獨評事鄭文孚。曾與土居儒生相善。故賴其捄護。僅以身免。將由海道南還。儒生輩要與共起義兵。先誅叛賊。繼討倭寇。南道義士。幷起合勢。每戰必捷。平定大難。咸鏡一道。復爲我有。當時。倭胡交亂。腹背受敵。逆民中起。旣爲叛賊。倭賊雖退。其勢當附於胡。而數三儒生。能知推擧一箇從事。以少擊衆。卒就大功。使邠岐舊疆。免淪於左袵。其義烈如此。而適被按道之臣恥其功不出已。誣啓掩功。遂使糾義之士。未獲顯被旌賞。至今人心憤惋。以爲王事不可成。其在□國家酬報激勵之道。豈非大段欠典是白乎旀。況今北方深憂方在。北道脫有事變。出於意外。則道內人心之難恃。恐有甚於前日。旣往義士之功若是其掩蔽。則將何以責後來忠義之繼出乎。言念及此。心膽俱寒。其時義士。雖盡作故。不可無追恤之道。故今臣採訪列邑。得其表著立功死事者十數姓名。開錄于後。謹此上□聞爲白乎矣。各人名下。略註事實。以備□朝廷裁處爲白去乎。或追贈官職。或錄用子孫。或田結復戶。或子孫免賤。分輕重擧行恤典。以爲固結人心之本。則實爲今日北方第一急務是白乎乙可。敢此妄料惶恐馳□啓爲白臥乎事。乙巳十一月日。

번역

신이 북쪽으로 부임한 지 이미 1년이 지나 세 차례나 여러 고을을 순행하며 본도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니, 현재의 긴급한 걱정은 군정을 수리하고 인심을 단단히 결속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운데 인심이 또 근본이 되는데, 변방이 너무 멀어 임금의 교화가 미치기 어렵고 풍속이 강인하며 습속이 어리석어서 쉽게 미혹되고 이치로 이해시키기 어렵습니다. 지난 일로 말하자면, 옛날 □ 세조(世祖) 때에 이시애(李施愛)가 반역을 꾀하여 □ 조정에서 병사를 보내 북쪽 백성을 모두 죽일 것이라고 유혹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미혹되어 온 도가 역적을 따랐습니다. □ 국가가 오도(五道)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겨우 토벌하였고, 임진년의 변고 때 왜구가 북쪽에 들어오자 토착민들이 일제히 일어나 난을 일으켜 장교들을 포박하고 성 전체를 도적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때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부원군 황정욱(黃廷彧) 및 그 아들 승지 황혁(黃赫) 등은 봉림(奉臨)과 순화(順化) 두 왕자가 모두 반적(叛賊)에게 붙잡혀서 적의 포로가 되었는데, 남북의 병사(兵使)와 여러 진수(鎭守)와 수령들이 함락된 적을 거의 다 소탕하였습니다. 다만 평사 정문부(鄭文孚)만은 일찍이 토거(土居)의 유생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들의 보호를 힘입어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장차 해로를 통해 남쪽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유생들이 함께 의병을 일으켜 먼저 반적을 죽이고 이어 왜구를 토벌하자고 요구하였습니다. 남도의 의사(義士)들이 모두 일어나 세력을 합쳐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승리하여 큰 난을 평정하였고, 함경도 일대가 다시 우리 땅이 되었습니다. 당시 왜와 오랑캐가 번갈아 난을 일으켜 앞뒤로 적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반역하는 백성들이 일어나서 이미 반적이 되었으므로 왜적이 물러가더라도 그 세력은 마땅히 오랑캐에 붙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유생이 능히 한 명의 종사(從事)를 추켜세워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쳐서 마침내 큰 공을 이루어, 필기(邠岐)의 옛 강토가 좌석(左袵)에게 넘어가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 의열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마침 도(道)를 안찰하는 신하가 그 공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거짓으로 아뢰어 그 공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의로운 선비들이 정당한 포상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은 분개하고 탄식하며 나라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보답하고 격려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큰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북방에 깊은 근심이 있는 상황에서 만약 북도에 뜻밖의 사변이 일어난다면, 도내 사람들의 신뢰하기 어려운 점이 전날보다 더욱 심할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의사(義士)의 공이 이처럼 덮여 버렸으니 장차 어떻게 후세에 충의가 계속 나오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그 당시의 의사들은 비록 모두 죽었지만 추후에 보살펴 줄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신이 여러 고을을 조사하여 공로를 드러내고 목숨을 바친 자 10여 명의 성명을 얻었습니다. 후일에 개록(開錄)할 것이니, 삼가 이에 보고를 올립니다. 각 사람의 이름 아래에 사실을 대략 주석하여 조정에서 재결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은 관직을 추증하거나, 혹은 자손을 녹용하거나, 혹은 전답과 호구를 회복시키거나, 혹은 자손을 면천(免賤)시키는 등 경중을 나누어 휼전(恤典)을 거행하여 인심을 견고히 하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 실로 오늘날 북방의 제일 급선무입니다. 감히 이렇게 망령되이 헤아려 황공한 마음으로 급히 아룁니다. 을사년 11월 일.

162. 備邊司回□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9B

원문

壬辰倭亂時。北邊之人。背國迎賊。至於□王子被執。其時倡義討平評事鄭文孚爲首功。而本道同事效忠之士。雖蒙□國家褒賞之典。或有功鉅而賞輕者。或有見漏而未霑者。朝紳之間。亦多以此爲言。監司巡歷邊上。採訪公論。有此啓□聞。欲爲追奬激勸之擧。其意有在。後錄中□贈監察李鵬壽等七人。□贈參判柳應秀等三人乙良。令該曹贈職。其奉祀子孫可用者。指名啓□聞爲白乎旀。儒生金麗光等五人及出身朱應武等五人復戶事。自本道擧行。其子孫之爲賤役中奉祀一人。亦爲指名啓□聞後。稟處宜當。以此回移。何如。□啓依□允。乙巳十二月二十日。

번역

임진왜란 때 북변(北邊) 사람들이 나라를 배반하고 왜적을 맞이하여 심지어 □ 왕자까지 붙잡혔습니다. 그 당시에 창의(倡義)하여 토벌한 평사 정문부(鄭文孚)가 수공(首功)을 세웠고, 본도의 동료로서 충성을 바친 선비들은 비록 국가로부터 포상하는 은전을 받았으나 공이 크면서도 상이 가벼운 자가 있고 혹은 누락되어 혜택을 입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감사가 변방을 순행하여 공론을 수집한 결과 이러한 계□를 보고하였으니, 추후에 포상하고 격려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후록(後錄) 중 □ 증감찰 이붕수(李鵬壽) 등 7인과 □ 증참판 유응수(柳應秀) 등 3인을 해당 조에서 증직하게 하고, 그 봉사자(奉祀者) 자손으로 쓸 만한 자는 지명하여 계□로 보고해 알리며, 유생 김여광(金麗光) 등 5인과 출신 주응무(朱應武) 등 5인의 복호(復戶) 일은 본도에서 거행하고 그 자손 중에 천역(賤役)으로 봉사하는 한 사람을 또한 지명하여 계□로 보고한 뒤에 품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와 같이 회답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 계본(啓本)은 □ 윤허(允許)합니다. 을사년 12월 20일.

163. 狀啓初本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59C, ITKC_MO_0284A_A071_159D ...

원문

臣於九月初九日。自北關巡歷回還時。與北評事臣李端夏相遇於吉州城津鎭爲在如中。端夏語臣曰。先父曾於丙辰歲。爲北評事。以萬伯指。博採南北道事跡。述北關志。厥後。家藏一本。燼於火。留咸營一本。亦見失。先父常以爲惜。今吾適復爲是任。欲述此事。以成先志云。臣答以甚好。且爲勉之矣。頃日端夏與臣書曰。先父北關志本草數紙。適不見燼。端夏於今行。搜取以來。蓋故評事鄭文孚。當壬辰之亂。誅叛賊。討倭寇之事實也。今以別紙錄呈云云。且曰。持此文字。而躬訪於北地父老。則所聞果如先父所記。將校士庶大小之人。至于今稱誦不衰。咸欲立廟享祀。以同時倡義死事之人配之。顧未有力主其事者。故監司徐元履有意營立。未就而卒云云。蓋文孚當時平定關北之功。可謂大矣。而旣被主閫臬者掎扢。誣罔□朝廷。酬報之典。不稱其功。從難之士。亦不得一告身。文孚沒後。亦無人表章者。實爲□國家之欠典。而風敎之闕事也。願閤下有以圖之。使終不至於落莫也。且此地有尹文肅公瓘之遺廟。愚意以爲。金宗瑞,鄭文孚。其功俱不下於尹公。蓋收復□國家旣失之土地。則三人均也。欲以金,鄭兩人。竝享於尹廟。或各爲立廟。未知如何云云爲白去乙。臣覽此書辭。且觀其別紙所記。則臣不勝感慨于中心也。端夏之父。卽故大提學臣植也。植聰明博學。論議無偏。生於黨論之世。而獨不入於指目中。終乃自請刊正□宣廟朝實錄奸臣誣筆。以正一代之是非。世人咸稱其公。則植之一生。存心於良史之筆。可知也。今見所記鄭文孚事。其訪問之周詳。有如末端所云。則其爲直筆。斷可識矣。今其子端夏。繼爲評事於五十年之後。持此所記。以證北路人士至今稱說之公言。欲爲立廟。以遂其人士所願欲。則豈非天意有俟而然耶。且其士人等呈文于臣。方議刱立廟宇。臣已許之矣。然以事體言之。必須聞于□朝廷。方爲增重光耀。如蒙□國家特許。褒贈文孚以隆爵。仍賜廟額。竝將同時倡義死事之士。或追贈官職。或錄用子孫。則其爲聳動邊塞。樹立風聲。以爲勸後來忠義之地。夫豈淺淺哉。且聞文孚於癸亥反正後。出於賊招。死於杖下。國人莫不傷其冤云。蓋以壬辰旣誅鞠賊後諭衆之辭觀之。其忠義見識。卓犖如彼。而又聞文孚。是鄭造之親族。造之兇議時。文孚大斥之。仍佯聾自廢云。此則北路人。亦有聞知而能言之者。以如此之人。豈於反正後。全昧大義。有詿誤於兇徒之理乎。第聞其爲人峭直。在世固多見嫉者云。豈其不免於禍。亦以此故耶。文孚旣不服而死。到今固無緣此難於立廟之事。而然恐□朝議或以此爲疑。竝此陳達是乎旀。且金宗瑞之尙不得立廟如尹瓘者。亦豈以宗瑞末終事爲疑耶。宗瑞之死。

번역

신이 9월 9일에 북관(北關)을 순력하고 돌아올 때 길주성 진(吉州城津)에서 북평사 이단하(李端夏)와 만났습니다. 이단하가 신에게 말하기를, “선친께서 일찍이 병진년에 북평사가 되셨을 때 만백의 지휘를 받아 남북도의 사적을 널리 수집하여 《북관지(北關志)》를 서술하셨습니다. 그 후 집안에 보관하던 한 권은 불에 타서 없어졌고 함경도 감영(咸鏡道監營)에 두었던 한 권도 분실되었습니다. 선친께서는 항상 이를 아쉬워하셨는데, 지금 내가 다시 이 직임을 맡게 되어 이 일을 서술하여 선친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매우 좋은 일입니다. 또한 힘쓰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며칠 전 이단하가 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선친의 《북관지》 본초(本草) 몇 장이 다행히 불에 타지 않았는데, 내가 이번 길에 찾아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고(故) 평사 정문부(鄭文孚)가 임진년의 난리 때 반적(叛賊)을 처단하였습니다. 왜구를 토벌한 사실입니다. 지금 별지(別紙)로 기록하여 올립니다. …… 또 말하기를, 이 글을 가지고 직접 북쪽 지방의 부로(父老)들을 찾아가 보니, 들은 바는 과연 선부(先父)께서 기록하신 것과 같아서 장교와 사졸 등 대소 인물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것이 줄지 않고 모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자 하며, 같은 때에 의리를 내세워 죽은 사람들을 배향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으므로 감사 서원리(徐元履)가 사당을 세울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 대개 문부(文孚)는 당시 관북(關北)을 평정한 공로가 크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지역의 수령에게 훼방을 당하여 조정에 거짓으로 보고되었으므로, 보답하는 은전이 그 공로에 걸맞지 않아, 뒤를 따르려던 선비들도 한 번도 몸을 바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문부가 죽은 뒤에도 표창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실로 국가의 결점이고 풍교(風敎)의 흠입니다. 바라건대 붕당을 도모하는 일이 없게 하여 끝내 낙목(落莫)에 이르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소서. 또 이곳에는 윤문숙공(尹文肅公)의 유묘(遺廟)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김종서와 정문부도 그 공이 모두 윤공보다 못하지 않으니, 대개 국토를 수복한 것은 세 사람 모두 똑같습니다. 그러니 김과 정 두 사람을 윤묘에 함께 배향하거나 혹은 각각 사당을 세우는 것이 어찌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써서 백거을(白去乙)에게 보냈습니다. 신이 이 서신을 보고 또 별지에 기록된 것을 보니, 신은 마음속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단하(端夏)의 아버지는 바로 고 대제학 신식(臣植)입니다. 신식은 총명하고 박학하며 논의에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당론이 성행하던 세상에 태어났으나 유독 지목을 받지 않았고, 마침내 스스로 청하여 선묘조(宣廟朝)의 실록(實錄)에서 간신들이 무함한 글을 삭제하고 바로잡아 한 시대의 시비를 바로잡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공을 칭송하니, 이식(李植)이 일생 동안 양사(良史)의 붓에 마음을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기록된 정문부(鄭文孚)의 일을 보니, 방문한 것이 주밀하여 말단에서 언급한 것과 같으니 그가 곧은 필치로 글을 썼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 단하(端夏)가 50년 뒤에 다시 평사(評事)가 되어 이 기록을 가지고 북도(北道) 인사들이 지금까지 공이라고 칭송하는 말을 증명하여 사당을 세워 인사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니, 어찌 하늘의 뜻이 기다렸다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선비들이 신에게 정문(呈文)하여 사당을 세울 것을 의논하고 있으므로 신은 이미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의 체모로 말하자면 반드시 조정에 보고하여야 광영이 더해질 것입니다. 만약 국가에서 특별히 허락하여 문부에게 융숭한 작호를 내리고 이어 사당의 편액을 하사하며, 동시에 의병을 일으켜 죽은 선비들을 함께 모신다면 어찌 좋겠는가. 혹 관직을 추증하거나 자손을 녹용(錄用)함으로써 변방을 진작시키고 풍성(風聲)을 세워 후세의 충의를 권면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어찌 얕은 것이겠는가. 또 듣건대 문부는 계해년 정반(反正) 후에 적의 공초에서 나오고 장(杖) 아래에서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원통함을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임진년에 이미 율곡(栗谷)을 주벌한 뒤에 유중(諭衆)한 말을 보면, 그의 충의와 견식이 저와 같이 탁월하였는데, 또 듣건대 문부는 정조(鄭造)의 친족으로서 조가 흉악한 의론을 내세울 때 문부가 크게 배척하고 이어서 귀머거리인 척하며 스스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이는 북로(北路) 사람들도 알고 말할 수 있는 바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정반 후에 대의를 완전히 모른 채 흉도에게 미혹될 리가 있겠는가. 다만 듣건대 그가 성격이 강직하여 세상에 시기하는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찌 재앙을 면할 수 없었겠습니까. 또한 이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문부(文孚)가 이미 복종하지 않고 죽었으니, 지금에 와서 이 묘를 세우는 일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참으로 인연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에서 혹시라도 이를 의심할까 염려되어 아울러 이렇게 진달합니다. 또한 김종서(金宗瑞)가 윤관(尹瓘)처럼 아직 묘를 세우지 못한 것이 어찌 종서가 말년에 일을 그르친 것을 의심해서이겠습니까. 종서의 죽음은

원문

正與鄭夢周相類。□國初史記。以夢周稱爲奸臣。而後來公議大定。□列聖漸加褒奬。至今從祀於文廟。則況於今日於宗瑞。又何疑於邊塞一祀宇之享。而掩其旂常之大烈乎。六臣之死。非如宗瑞比。而後來□國論。亦漸加奬。至錄用其裔孫。則於宗瑞立廟一事。又焉有可疑乎。邊地未能常安。日後不虞之變。有不可測。則其於前代立大功業之人。特加顯隆之典。以爲振作之方。此非今日北關第二件事明矣。而其在軍政之修。亦有本末先後之序也。噫。發前人之潛德韜輝。立後世之懿範令則。實朱夫子之所嘗眷眷者。而尤致意於忠孝節義之間。則豈非遭時不幸。有所感而然耶。臣恐今日國家。亦當以是爲急務。則臣之所請金,鄭兩人事。不惟有關於一道風敎而已。實有關於一國民彝物則之重也。李植記事。粘連別錄於狀後爲白遣。同時死事有功之人。亦列錄其名。各註事實及子孫於名下。以爲該曹收錄之地爲白去乎。詮次以□善啓向敎是事。〔原注:此是初本。以其委折詳備。故幷見于此。〕

번역

정몽주(鄭夢周)와는 정히 서로 비슷합니다. □국초(國初)의 사기(史記)에는 몽주를 간신이라고 일컬었으나, 후대에 공론이 크게 정해지자 □열성(列聖)께서 점차 포장(褒奬)을 더하셨고, 지금은 문묘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늘날의 종서(宗瑞)가 변방 한 곳의 사당에 제향되는 것을 가지고 어찌 그 평소의 큰 공렬을 가리시겠습니까. 육신(六臣)이 죽은 것은 종서와 같지 않으나, 후대의 □국론(國論)에서도 점차 포장을 더하여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기에 이르렀으니, 종서에게 사당을 세우는 일에 또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변방이 항상 편안하지 못해 훗날 뜻밖의 변고가 생길지 예측할 수 없으니, 전대에 큰 공업을 세운 사람에게 특별히 현륭(顯隆)한 예전을 더하여 진작하는 방도로 삼는 것은 오늘날 북관(北關)의 두 번째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군정(軍政)을 바로잡는 데에도 본말과 선후의 차례가 있습니다. 아, 전인의 숨은 덕성과 빛나는 공적을 드러내고 후세의 아름다운 모범과 법도를 세우는 것은 실로 주부자(朱夫子)께서 항상 염두에 두신 바이며, 특히 충효와 절의에 뜻을 두셨으니, 어찌 시운이 불행하여 감동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오늘날 국가도 마땅히 이를 급무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청하는 김씨와 정씨 두 사람의 일은 한 도(道)의 풍교(風敎)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실로 온 국민의 떳떳한 도리에 관한 중대한 일입니다. 이식(李植)의 기사(記事)를 장계 뒤에 별록(別錄)으로 붙여서 백발(白發)을 보내고, 동시에 죽어 공이 있는 사람도 그 이름을 나열하여 각각 사실과 자손을 이름 아래 주석하여 해당 조에서 수록할 수 있도록 하소서. ◯선계(善啓)를 향교에 올리는 일로 순서를 정함. 〔원주: 이것은 초본입니다. 그 곡절이 상세하기 때문에 여기에도 함께 보입니다.〕

164. 李公端夏還朝陳北事疏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61C, ITKC_MO_0284A_A071_161D ...

원문

臣竊觀北路。纔經重臣採訪民弊。又今按道之臣咨諏殆無所遺。列邑大段弊瘼。槪已啓□聞。臣今不敢毛擧細故。更瀆於□宸聽也。惟是□國家今日之憂。正在北邊。而人心最可憂。軍政次之。今見道臣狀□啓。請追褒壬辰義士。以爲固結人心之本。此正臣所欲陳者。而亦嘗與道臣而商礭者也。人心可憂之狀。已悉於其狀□啓中。不須臣更達。而第惟鄭文孚事。臣最詳顚末。蓋臣父臣植。曾於萬曆丙辰歲。爲北評事。博採南北道事實。述北關志而見佚。適手草雜記數紙見遺。卽記文孚倡義討賊事者也。當此時。北道城邑。悉爲叛賊所據。元戎以下將吏。陷賊殆盡。獨文孚脫免。乃與儒生謀起義兵。先復鏡城。誅叛賊。却倭寇。又發遣將士。追討列邑反魁。倂斬十三人以徇。遂進兵明,吉界。連與賊遇。大輮于長德山。再捷于雙介浦。屢圍吉州城及嶺東柵。踰嶺救端川郡。與淸正戰白塔郊。前後斬千餘級。是時。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反其實以聞□行在。每欲以軍法殺文孚。文孚將佐往往被追。榜掠危死。然軍情愈奮。不以無功受毒。貳於文孚也。文孚又北行六鎭。招服藩胡。搜誅叛黨。關北卒就平定。大抵皆其力也。然文孚僅以誅鞠賊功。與會寧人同陞三品秩。從難之士。不得一告身。至于今。人情憤惋。以爲王事不可成。臣父所記大略如此。臣入北後。聽於道內輿論。咸誦文孚功烈。嘖嘖不已。又北人欲爲文孚立祠宇。以當時倡義死節之儒生配之。而聞文孚死於逆獄杖下。以此不敢云。臣以書求訪于朝中親舊。得文孚死時實狀而來。其死誠爲至冤痛矣。文孚忠節。素著於危亂之際。其在昏朝。雖或從仕。皆是外任。少無染汚之事。反正後被元帥薦。□朝廷將大用。而朴來章之獄。適被誣引。置對辨明。將見釋。而適又臺諫。有以詩案深論者。竟不免梧棘之冤。所謂詩案。卽文孚曾爲昌原府使時。有詠史十絶。其一卽楚懷王事。而其詩曰。楚雖三戶亦秦亡。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孱孫何事又懷王云云。此本昏朝時所作。而適發於是時耳。又況反覆其詩意。未見其有可疑者。其死之冤。國人莫不傷之。丁丑亂後。凡名在丹書之類。悉加蕩滌。文孚亦必在其中。而別無顯典云矣。北人得此實狀。群議益激。呈文于監司。監司仍通議于大臣而後許之。仍採訪道內義士事蹟。有此啓□聞。請加恤典。庶可慰一道人心。而獨念文孚大功。旣被掩蔽於當時。又抱冤而死。未有伸雪之典。則亦何以大慰北人追慕之誠。而激勸於方來也。伏願□殿下特將此議。下詢于廟堂。先伸文孚之冤。仍命褒贈崇秩。與諸義士追恤之典。一時擧行。則將見風聲樹立於北方。愚民之心。有所鎭服。志士之氣。有所感勵。其爲固結根本之圖。非少補也。

번역

신이 북도(北道)를 살펴보건대, 방금 중신(重臣)이 민폐를 채집해 보고하였고 또 지금 도신(道臣)의 자문(咨文)에 거의 빠뜨린 것이 없어서 여러 고을의 큰 폐단은 대개 이미 아뢰어 들었으므로 신이 이제 감히 사소한 일을 일일이 거론하여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국가의 오늘날 근심은 북변(北邊)에 있고, 인심이 가장 걱정스럽고 군정이 그 다음입니다. 지금 도신의 장계(狀啓)를 보니, 임진년 의사(義士)들을 추증하여 인심을 굳게 결속할 근본으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신이 진달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일찍이 도신과 상의한 바입니다. 인심이 걱정스러운 상황은 이미 그 장계에 다 적혀 있으니 신이 다시 아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다만 정문부(鄭文孚)의 일은 신이 전말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대개 신의 부친인 신식(臣植)이 만력 병진년에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남북도의 사실을 널리 채집하였습니다. 《북관지(北關志)》를 기술하다가 빠진 것을 발견했는데, 마침 손에 잡히는 《잡기(雜記)》 몇 장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문부(文孚)가 의병을 일으켜 도적을 토벌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때 북도(北道)의 성읍은 모두 반적(叛賊)들이 점거하고 있었고, 원융(元戎) 이하의 장교들은 거의 다 적에게 함락되었는데, 유독 문부만은 화를 면하였습니다. 이에 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먼저 경성(鏡城)을 탈환하여 반적을 죽이고 왜구를 물리쳤습니다. 또 장사들을 보내어 여러 고을의 괴수들을 추적하여 토벌하고 13명을 한꺼번에 베어 순절시켰습니다. 마침내 병사를 진격시켜 명주(明州)와 길계(吉界)를 점령하였고, 연이어 도적과 맞붙어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승리하고 쌍개포(雙介浦)에서 거듭 승리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길주성(吉州城)과 영동책(嶺東柵)을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원하였으며, 청정(淸正)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싸워 전후로 천여 명을 베었습니다. 이때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문부의 성적에 시기하여 도리어 그 사실을 덮어씌워 황제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매번 군법으로 문부를 죽이려 하였으나, 문부가 장수로서 보좌하는 일에 종종 추격을 당해 목숨을 위태롭게 하였지만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분발하여 공로가 없다고 독을 받지 않았으니, 이는 문부와 둘이 한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문부가 또 북쪽의 육진(六鎭)으로 가서 번호(藩胡)를 불러 복종시키고 반역당을 소탕하고 관북(關北)의 군졸들을 평정하였는데, 대체로 모두 그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부는 겨우 곡적(鞠賊)을 처단한 공로만으로 회령인과 함께 3품에 올랐으니, 어려운 일을 따르는 선비들은 한 번도 고신(告身)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사람들의 마음은 분개하고 탄식하여 왕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아버지가 기록한 대략이 이와 같습니다. 신이 북쪽으로 들어온 뒤 도내 여론을 들어보니 모두 문부의 공렬을 칭송하며 연신 감탄하였습니다. 또 북쪽 사람들이 문부를 위해 사우(祠宇)를 세우고 당시 의병을 일으키다 죽은 유생들을 배향하고자 하는데, 듣건대 문부가 역옥(逆獄)에서 장을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편지로 조정의 친한 벗을 찾아가 문부(文孚)가 죽었을 때의 실상을 알아내어 왔는데, 그가 죽은 것은 참으로 지극히 원통합니다. 문부의 충절은 평소 위태롭고 혼란한 때에 드러났습니다. 그는 혼조(昏朝)에 비록 벼슬길에 올랐으나 모두 외직이었으므로 더럽혀진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난 뒤 원수(元帥)의 추천을 받아 조정에서 크게 쓰일 예정이었는데, 박래장(朴來章)의 옥사로 인해 마침 무고하게 끌려갔습니다. 대질하여 변명하면 장차 석방될 것이었는데, 마침 또 대간이 시안(詩案)으로 깊이 논한 일이 있어 끝내 오극(梧棘)의 원통함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시안은 문부가 일찍이 창원 부사로 있을 때 지은 ‘영사십절(詠史十絶)’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초 회왕(楚懷王)의 일인데, 그 시에 이르기를 “초나라가 비록 세 집밖에 없어도 진나라는 망할 것이니, 남공(南公)의 말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네. 한번 무관(武關)으로 들어가면 백성들의 기대가 끊어지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또 왕을 그리워하는가.”라고 한 것은 본래 혼조(昏朝) 때 지은 것인데, 마침 이때에 발각된 것입니다. 게다가 시의 뜻을 반복해서 살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으니, 그가 죽은 원통함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습니다. 정축년 난리 이후로 명단이 단서(丹書)에 있는 부류는 모두 씻어 주었는데, 문부도 반드시 그중에 있었을 것이나 별다른 현전(顯典)이 없었다고 합니다. 북쪽 사람들이 이 실상을 알게 되자 여론이 더욱 격렬해져 감사에 상소하였고, 감사가 이어 대신에게 통의하여 허락받은 뒤 도내 의사들의 사적을 채집하여 이 계문을 보고하고 가휼전(加恤典)을 청하였으니, 그렇게 하면 도내의 인심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문부의 큰 공이 당시에는 덮여 있었고 또 원통함을 품은 채 죽었는데 억울함을 풀어 주는 은전이 없으면 어찌 북쪽 사람들의 추모하는 정성을 크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올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이 의논을 가지고 묘당에 하문하시어, 먼저 문부의 원통함을 풀어 주시고 이어 포상과 증직(贈職)을 명하여 여러 의사(義士)를 추휼하는 은전과 함께 한꺼번에 거행하신다면, 장차 풍성한 소문이 북방에 세워져 어리석은 백성의 마음이 진정되고 지사의 기운이 감격하고 격려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근본을 굳건히 다지는 방책으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165. 筵說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63A, ITKC_MO_0284A_A071_163B ...

원문

乙巳十二月二十七日引見時。領相鄭太和所□啓。修撰李端夏上疏中鄭文孚事。不可以文字循例回□啓。今當陳達於□榻前矣。曾因咸鏡監司閔鼎重狀□啓。與鄭文孚同事諸人。或□贈職。或錄用其子孫。其中子孫之爲賤役者。免賤等事。已爲定奪。則文孚獨無崇奬之典。果似欠缺。壬辰之亂。北道之民。執□王子,大臣。投賊之後。因據州郡。其時文孚以北評事。倡義討賊。復其郡縣。其功大矣。而見忤於當路之人。而功不大顯。及至昏朝。棲遲州縣。反正之後。卽除全州府尹。未幾遭其母喪。居廬之時。有一勳臣往見其壁間所塗文孚曾所賦詠史詩。傳說於人矣。及其被逮逆獄。將釋之時。臺諫以其詩意有所指。論啓刑訊。死於杖下。故相臣趙翼爲問事郞廳。嘗知其冤枉之狀。常常言之矣。副提學趙復陽曰。臣父常言其冤狀。臣亦聞之矣。文孚名出賊招。不免被逮。此是朴弘耇獄事也。朴知章等招辭中。亦言知文孚之有將材。故有意往見。而不得發言云云。臣父爲問事郞廳。力言其冤狀於鞫廳堂上。而竟以昏朝時所賦之詩。因臺□啓冤死矣。右相許積曰。文孚壬辰之功。赫赫在人耳目。死於非罪之狀。亦人所共知也。設令其詩作於反正之後。不過詠史而已。有何指斥之意乎。特爲□贈職。勸激北路之人。似不可已也。領相曰文孚死於杖下而已。不在罪籍中。別無伸冤之事。但同事之人。旣□贈判書。則文孚以首功。尤當□贈職。子孫亦宜錄用矣。□上曰。超品贈職。錄用其子孫可也。

번역

을사년 12월 27일 인견(引見)할 때 영의정 정태화가 아뢴 내용에, 수찬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한 내용 중 정문부(鄭文孚)의 일은 문자로 통상적인 절차를 거쳐 답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지금 당장 어탑 앞에서 진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장계한 일로 인하여 정문부와 동료들이 혹 직책을 증직(贈職)받거나 자손을 녹용하거나, 그중에 천역(賤役)이 된 자는 면천(免賤)하는 등의 일을 이미 결정하였는데, 문부만은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이 없으니 과연 결함이 있는 듯합니다. 임진년의 난리 때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왕자(王子)와 대신(大臣)을 붙잡아 적에게 던진 뒤에 그 자리에 의거하여 주군(州郡)을 차지하였는데, 그때 문부가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그 군현을 회복하였으니 그 공이 큽니다. 그러나 당시의 관원들에게 미움을 받아 그 공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서지(棲遲)의 주현(州縣)에 머물다가, 역적이 정벌된 뒤 즉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되어 그의 모친 상을 당하였는데, 거처할 때 벽에 문부(文孚)가 일찍이 읊은 사시(史詩)를 그려 놓은 것을 한 훈신(勳臣)이 가서 보고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그가 역적의 옥에 잡혀 들어갔다가 석방될 때 대간(臺諫)이 그의 시의 뜻이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논핵하여 형신(刑訊)을 받아 장형(杖刑)을 당하다 죽었다. 고 상신 조익(趙翼)은 문사랑청(問事郞廳)으로 있을 때 그가 억울한 정상을 알고서 항상 말하였다. 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말하기를, “신부께서 항상 그의 억울한 정상을 말씀하셨고 신도 들었습니다. 문부라는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으므로 체포되는 것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는 박홍구(朴弘耇)의 옥사이다. 박지장(朴知章) 등의 공초 내용에도 “문부가 장재(將材)가 있음을 알고 일부러 가서 만나 보았으나 말을 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신부(臣父)가 문사랑청(問事郞廳)이 되어 국문당(鞫問堂)의 당상에게 그 억울한 정상을 힘껏 말하였으나, 결국은 혼조(昏朝) 때 지은 시로 인하여 대간의 계사(啓辭)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우상(右相)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문부(文孚)가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은 사람들의 이목에 혁혁히 남아 있으니, 죄가 없는 상태로 죽었다는 사실 또한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설령 그 시를 반정 이후에 지었더라도 이는 역사를 읊은 것에 불과할 뿐 어찌 지척(指斥)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직을 추증하여 북도(北道) 사람들을 권면하고 격려하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영의정이 아뢰기를, “문부는 장(杖) 아래에서 죽었을 뿐 죄적(罪籍)에 들어 있지 않으니 별도로 억울함을 풀어 줄 일이 없습니다. 다만 동료가 이미 판서에 추증되었으니 문부도 수공(首功)으로 더욱 □직에 추증해야 하고 자손 또한 녹용(錄用)해야 합니다.” 하니, □ 상이 이르기를, “품계를 뛰어넘어 추증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는 것은 가하다.” 하였습니다.

166. 贈職敎旨

문체: 公車類 / 敎書類

원문

嘉善大夫,全州府尹,全州鎭兵馬節制使鄭文孚。□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者。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전주 부윤(全州府尹) 전주진 병마절제사(全州鎭兵馬節制使) 정문부(鄭文孚) □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자.

원문

丙午正月二十三日。超品□贈職事。承傳。

번역

병오년 1월 23일 초품(超品)을 증직(贈職)하는 일에 관한 승전(承傳).

167. 禮曹請額□啓辭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64A

원문

今九月十一日。大臣,兵曹判書,疏決廳堂上。引見時。司諫呂聖齊所□啓贈贊成鄭文孚倡義事蹟。已悉於咸鏡監司閔鼎重啓□聞及前評事李端夏陳疏中。臣不必更瀆。而□朝廷旣下追褒之典。特施寵章。甚盛擧也。北方士子向慕尊奉。營立祠宇於倡義之地。以其時同事李鵬壽,姜文佑,崔配天,池達源配享。以爲香火之所。欲爲請額。而遠方之人。無路上□聞。故敢此仰達。自□上若特爲□賜額。則可以樹立風聲。固結人心矣。□上曰。言于該曹稟處事。□傳敎矣。鄭文孚倡義之功。久而不泯。至於七十餘年之後。始蒙□朝家追褒之典。北方人心。大有所聳動。而立祠宇。以其時同事諸人配享者。尤可見尊慕之誠。特賜恩額。以副遠人之望。誠合激勸之道。而事係□恩典。自下不得擅便。□上裁何如。□啓依所啓施行。丙午九月十一日。

번역

금년 9월 11일 대신(大臣)과 병조 판서가 소결청 당상(疏決廳堂上)을 인견할 때,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가 아뢰어 증찬성 정문부(鄭文孚)의 창의(倡義)한 사적에 대해 이미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아뢴 것을 듣고 전 평사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한 내용에서 알았으니, 신은 다시 번거롭게 아뢸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추증하는 은전을 내려 특별히 칭송하는 글을 내리신 것은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북방의 선비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창의한 곳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그 당시에 함께 일했던 이붕수(李鵬壽), 강문우(姜文佑),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을 배향하여 향화(香火)를 올리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편액을 청하고자 하나 먼 지방에 있는 사람이라 길에서 들은 바가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만약 주상께서 특별히 편액을 내려 주신다면 풍성한 명성을 세우고 인심을 굳게 결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상께서 “해당 조(曹)에 말하여 내게 물어 처리하게 하십시오.”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정문부의 창의한 공로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아 7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조정에서 추증하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북방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감동하였고, 그 당시에 함께 일했던 여러 사람을 배향하여 사우를 세운 것은 더욱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편액을 내려 주어 먼 지방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것이 진실로 격려하고 권면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은전에 관계된 일이라 아래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주상께서는 어떻게 재결하십니까?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병오년 9월 11일.

168. 額號擬望。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彰烈□表忠□旌烈〔原注:以首擬。批下。〕

번역

창렬(彰烈)과 표충(表忠)과 정렬(旌烈)을 〔 〔원주: 원주에 “수령으로 의망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답이 내려왔습니다.〕

169. 禮曹□啓辭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贈左贊成鄭文孚祠宇□賜額致祭事。當爲擧行。而値此荒歲。京官下送有弊。本道都事。今方辭□朝。香,祭文下送。使之設行。何如。□啓依允。

번역

좌찬성 정문부(鄭文孚)의 사우(祠宇)에 액을 하사하고 치제하는 일을 거행해야 하는데, 지금 이런 흉년을 만나 서울 관원이 내려보내면 폐단이 있으니, 본도의 도사가 지금 막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향과 제문을 내려보내서 설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아뢰니, 윤허합니다.

170. 致祭官姓名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都事鄭華齊□典祀官。鏡城判官李之馨□大祝。輸城察訪金振漢□贊者。前察訪朴興宗□謁者。前參奉池天錫。實來行祭。

번역

도사 정화제(鄭華齊)는 전사관(典祀官), 경성 판관 이지형(李之馨)은 대축(大祝), 수성 찰방 김진한(金振漢)은 찬자(贊者), 전 찰방 박흥종(朴興宗)은 알자(謁者), 전 참봉 지천석(池天錫)이 실제로 와서 제사를 지냈다.

171. 賜額致祭文[知製□敎李行]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64C, ITKC_MO_0284A_A071_164D ...

원문

維歲次丁未十月壬申朔初六日丁丑。□國王遣臣咸鏡道都事鄭華齊。諭祭于卒□贈左贊成鄭文孚之靈。惟靈竭忠悍賊。臣節攸宜。褒義象賢。王化所基。歷代相因。可鑑可師。邦運昔否。瘼矣亂離。卉服陸梁。兵連北陲。三嶺失險。入若康逵。凶鋒所觸。土崩難支。戰無對壘。守無登陴。叛民乘亂。從逆滅彝縛執長吏。據有城池。結賊爲援。勢成雄雌。俘獲□王子。與賊爲貲。有恇有餌。民胥危疑。環城十數。無一男兒。鳥竄偸生。取熊者誰。卿時佐幕。志在死綏。脫身行乞。慷慨猷爲。文武之略。爲衆所推。爰有四士。協心相隨。俱是遐荒。俊髦之姿。同聲一呼。遂擧義旗。遠近響應。感奮涕洟。登壇揷血。指天爲辭。先討逆豎。孤軍冒危。相機周旋。倉卒出奇。巨魁授首。腹敗枝披。軍聲遂振。士氣不衰。乘勢賈勇。目無島夷。大鏖全勝。且戰且追。長平雙浦。枕籍賊屍。從玆關北。賊不復窺。復我邠岐。全我藩維。捷聞□行宮。載喜載悲。功高見猜。忤于臬司。狀不以實。天聽是欺。賞不稱勞。名位猶卑。恥自矜伐。不見色辭。中遭昏濁。玉絶瑕疵。末罹栫棘。命也非詩。冤氛未銷。掘劍可期。忠魂鬱結。歲月幾移。原濕之臣。奏厥詢諮。厥功始彰。予乃得知。篤嘉其忠。旌賞詎遲。嗟哉偉績。顯晦關時。所樹卓異。宜受報施。伸其幽枉。贈以崇資。推及同事。盛典靡遺。倡義之地。妥靈有祠。參佐竝享。禮秩無虧。一堂義烈。芳名共垂。牲醴是奠。華扁揭楣。事光荒裔。百世攸儀。不昧者存。庶幾格思。

번역

정미년 10월 임신삭 초엿샛날 정축일에 국왕이 신 함경도 도사 정화제를 보내어 졸필(卒畢) 증 좌찬성 정문부의 영령에게 유제(諭祭)한다. 오직 영령은 충성을 다하여 사나운 적을 막았으니, 신하의 절개는 마땅히 칭송받아야 하고, 의로운 행적은 현인을 본받게 하니, 이는 왕도의 교화가 근간이 되는 바이다. 역대부터 서로 이어져서 거울로 삼고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나라의 운수가 예전에 잘못되어 고통과 혼란이 있었으니, 짐승의 가죽을 입고 육량(陸梁)에 살았고, 군사들이 북쪽 변방에 연달아 있었다. 세 산봉우리의 험준함을 잃고 강규(康逵)로 들어갔다. 흉포한 칼날이 닿는 곳마다 땅이 무너져 지탱하기 어려웠다. 싸울 적이 없어 대항할 수 없었고, 지킬 성벽이 없어 올라갈 수 없었다. 반역하는 백성이 혼란을 틈타 역적을 따르고, 법도를 멸시하며 장리(長吏)를 잡아다가 성과 치지를 차지하고, 적과 결탁하여 세력을 이루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포획하여 적의 노예로 삼았다. 공포와 미끼가 있어 백성들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웠으며, 성을 에워싼 십여 개 고을에 한 명의 사내도 없었다. 새들은 도망쳐 살아가는데 곰을 잡는 자 누구인가. 경이 막부의 보좌관으로 있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구하려 하였네 몸을 빼내어 행걸이 되어 강개한 마음으로 도모하였으니 문무의 계책은 뭇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네 이에 네 명의 선비가 있어 마음을 합쳐 서로 따랐는데 모두 먼 변방에서 온 준수한 자질이었네 한목소리로 외쳐 드디어 의로운 깃발을 들었으니 원근이 호응하여 감격과 분노로 눈물을 흘렸네 단에 올라 피를 뿌리며 하늘을 가리켜 말하기를 먼저 역적들을 토벌하자고 하였네 외로운 군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기회를 보아 주선하며 창졸간에 기이한 계책을 내었네 거두가 항복하고 배는 터지고 가지는 꺾이니 군대의 소리가 드디어 진동하고 사기는 쇠하지 않았네 형세를 타고 용맹을 떨치며 섬 오랑캐를 두려워하지 않았네 큰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싸우면서 추격하니 장평의 두 포구에 적들의 시체가 쌓였네 이로부터 관북 지역은 적이 다시 엿보지 못하고 우리 빈기와 기를 회복하여 우리의 번방을 온전히 하였네 승전 소식이 궁궐에 전해지니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네 공로가 높으니 시기가 생겨 관찰사에게 거슬렸네 장계는 사실대로 쓰지 않았으니 하늘의 귀를 속인 것이네 상이 노고에 합당하지 못하고 지위도 오히려 낮았네 부끄러움은 스스로 뽐내어 꾸짖었으니 색사(色辭)를 보지 못했네 중간에 혼탁함을 만나 옥은 흠결을 끊었으나 말년에 형벌을 당하니 운명이라 시로 읊을 수 없네 원통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아 칼을 캐낼 날을 기약하는데 충성스러운 혼이 울체되어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원습의 신하가 그 물음을 아뢰니 그 공이 비로소 드러나서 내가 비로소 알게 되었네 그 충성을 굳게 가상히 여기니 정려를 어찌 늦추겠는가 아, 위대한 업적은 현휘함과 어두움이 때에 달려 있네 탁월하게 세운 바는 마땅히 보답을 받아야 하니 그 그윽한 억울함을 펴서 높은 자리를 추증하네 동료들에게 미루어 성대한 전례를 빠뜨리지 않으리니 의병을 일으킨 곳에 영령이 모실 사당을 짓고 참좌도 함께 배향하여 예법에 부족함이 없게 하리라 한 집안의 의열과 아름다운 이름이 함께 드리우니 희생과 술로 제사를 지내고 화려한 편액을 문미에 걸리라 그 일이 황량한 후손을 빛나게 하여 백세토록 모범이 되리니 잊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바라건대 그 뜻을 헤아릴 것이라

172. 春秋釋菜祝文

문체: 哀祭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65B, ITKC_MO_0284A_A071_165C

원문

贈議政府左贊成,義兵大將鄭公。文武全才。幕府小官。糾義靖亂。關北再安。

번역

의병대장 정공(鄭公)을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하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막부의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의리를 바로잡고 난리를 평정하여 관북 지역을 두 번이나 안정시켰다.

원문

贈通善郞,司憲府持平李公。倡義之功。捐軀之節。一方永賴。百世餘烈。

번역

통선랑(通善郞) 사헌부 지평 이공에게 추증한다. 의병을 일으킨 공로와 목숨을 바친 절개는 한 지방이 영원히 의지할 것이요, 백세토록 남은 공렬이다.

원문

贈通政大夫,掌隷院判決事姜公。姿挺武勇。志奮忠義。誅叛殲寇。功烈卓爾。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예부 판결사(判決事)를 맡긴 강공(姜公)은 자태는 씩씩하고 용맹하며 뜻은 충의에 불타서 반역을 처단하고 도적을 섬멸하였으니, 그 공렬이 탁월하다.

원문

贈朝奉大夫,司僕寺僉正崔公。一介書生。九合義旅。誅討叛賊。肅淸邊圉。

번역

조봉대부(朝奉大夫)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최공(崔公)에게 추증한다. 일개 서생이 구합의 의병을 이끌고 반적을 주벌하고 변방을 숙청하였다.

원문

贈宣務郞,戶曹佐郞池公。跡奮布韋。身袵金革。除凶禁暴。奠此疆域。

번역

선무랑(宣務郞)을 추증하는 일은 호조 좌랑 지공(池公)이 하였다. 그 자취는 포위(布韋)에 널리 퍼졌고, 몸은 금갑(金革)을 입었으며, 흉악한 범죄를 제거하고 폭력을 막아 이 강역을 안정시켰다.

173. 彰烈祠志[李端夏]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65D, ITKC_MO_0284A_A071_166A ...

원문

□聖上之五年甲辰。復設咸鏡北道評事。余從近侍。首當差遣。維時□朝廷有北顧憂。將修擧廢墜。而顧余才識劣昏。入幕周年。無所籌畫。第有一事所經營者。蓋於萬曆丙辰歲。惟我先君爲北評事。以方伯指。博採南北道事蹟。述北關志。而一本留咸營。見失。一本燼於家火。惟手草雜記數紙。見遺於休稿中。旣記故評事鄭公文孚。當壬辰之亂。與土居儒生。倡義誅叛賊。討倭寇事者也。鄭公及諸義士樹此大功。而爲當時道臣掩蔽。未蒙甄賞。誠爲道內人心所共憤惋。其在□國家激勸之道。不可以事在旣往置之。而先人文字。適復見遺。爲今之公案者。似有天意存焉。故余入北後。卽與鏡城儒生輩相議。思欲表章其事。欲以鄭公。祀享于尹文肅之廟。以書稟議于方伯閔公鼎重。閔公樂聞而復之。使別立祠宇於禦亂里首事之地。而欲啓□聞于□朝廷。以增重光耀。顧念鄭公坐詩案以死。國人咸稱其冤。而未有伸雪之典。今若遽請立祠于□朝廷。而朝議或不之許。則事終難諧。故於是士人等呈文于方伯。欲以此地公論。先立祠宇。方伯通議于大臣。得其報可而後許之。且捐營捧。爲工役費。時余執友洪斯文錫龜。守端川郡。素多藝。旁通堪輿術。余約會于禦亂里。遂定祠基於茂溪湖之上。茂溪。卽故贈監察李公鵬壽所居。而鵬壽實邀致鄭公。仍謀起義兵於此地也。四山環擁如盤中。而一面兩山合襟處。有湖水。山之內外皆成湖。而內湖之上。有丘林焉。丘之西南數百步許。山麓平曠地。卽祠基也。禦亂里。一名漁郞。風氣凝聚。爲北土名勝之區。而茂溪又里中之最勝處也。基用某坐某向。乙巳四月二十六日。開基始役。九月功告訖。以其月二十五日。行奉安祭。鄭公位主壁。以監察李公配之。崔公配天,池公達源,姜公文佑。俱是倡義之人。亦有幷享之議。初未敢輕擧。僉議咸以爲屈。余議于方伯。使之追配。且念祠宇旣成之後。恐無以守護。於是別營書堂于祠墻之外。名以燭龍。爲里中士子群居修業之所。而祭時則爲祭官齋宿之處。祠宇凡幾間。書堂凡幾間。監董其事者。儒生李純郁,玄以機也。又選儒士之望。爲書堂有司。李發英其人也。伐材于明川府境。府使南令公淑。力幹其役。兵使李令公汝發,鏡城判官李公奎鎭,富寧府使林君商儒,輸城察訪趙君相漢,吉州牧使姜公鎬,鍾城府使李公之馧及端川。竝有所助。時當農節。重煩民力。役用鏡,明,吉三邑僧軍。役糧用餘。有皮穀五十石。仍付書堂有司。使之取息。如古社倉之制。以備諸生學糧。方伯聞之。又捐營穀一百石以贍之。且給贖公奴婢五口。爲廟直兼護書堂。兵使又割給屯田。以爲祭田。判官又給漁船一隻。俾爲祭需及諸生之供。余又與方伯相議。

번역

성상(聖上)의 5년 갑진년에 함경북도 평사(北道評事)를 다시 두셨다. 내가 근시(近侍)로 처음으로 차출되었는데, 그때 조정에는 북쪽을 돌아볼 근심이 있어 폐지된 제도를 수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여 막부에 들어간 지 1년이 넘도록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였다. 다만 한 가지 경영한 일이 있었으니, 대개 만력(萬曆) 병진년에 우리 선군께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셨을 때 방백(方伯)의 지시로 남북도의 사적을 널리 채집하여 《북관지(北關志)》를 편찬하셨다. 그런데 한 본은 함경도 감영에 남아 있다가 분실되었고, 다른 한 본은 집안에서 불에 타버렸다. 오직 손으로 쓴 잡기(雜記) 몇 장이 휴고(休稿) 속에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이미 고(故) 평사 정공 문부(鄭公文孚)가 임진년의 난리 때 토지에서 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반적(叛賊)을 주벌하고 왜구(倭寇)를 토벌한 일을 기록해 놓았다. 정공과 여러 의사(義士)들이 이 큰 공을 세웠으나 당시 도신(道臣)이 이를 덮어 버렸다. 정공의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참으로 도내 사람들의 공통된 분노와 안타까움이 되는 일입니다. 나라에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로 볼 때 이미 지난 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선인의 문자가 마침 다시 발견되었으니, 지금의 공안(公案)에 천의(天意)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내가 북쪽으로 온 뒤에 즉시 경성(鏡城) 유생들과 상의하여 그 일을 표창하고자 하였습니다. 정공을 윤문숙(尹文肅)의 사당에 배향하고 방백 민공 정중(閔公鼎重)에게 서면으로 여쭈니, 민공이 기꺼이 듣고서 다시 어란리(禦亂里)에서 사건이 일어난 곳에 별도로 사우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알려서 그 영광을 더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공이 시안(詩案) 때문에 죽은 것을 생각하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말하면서도 아직까지 억울함을 풀어 주는 은전이 없었습니다. 지금 갑자기 □조정에 사당을 세우기를 청했다가 조정의 의논이 허락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일이 끝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림들이 방백에게 글을 올려 이 지역의 공론으로 먼저 사당을 세우고자 하였다. 방백이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어 허락을 받은 뒤에야 이를 허가하였다. 그리고 군영에서 돈을 받아 공역과 비용을 마련하였다. 이때 나는 친구 홍사문(洪斯文) 석귀(錫龜)와 함께 단천군(端川郡)을 지키고 있었는데, 평소 재주가 많고 풍수지리에도 해박하였다. 내가 어란리(禦亂里)에서 모임을 가졌다가 마침내 무계호(茂溪湖) 위에 사당의 터를 정하였다. 무계는 바로 고(故) 증 감찰 이공 붕수(李公鵬壽)가 살던 곳인데, 붕수가 실제로 정공을 초청하여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바 있다. 사방의 산이 소반처럼 둘러싸고 있고 한쪽 면에는 두 산이 맞닿은 곳에 호수가 있다. 산 안팎이 모두 호수를 이루고 있는데, 내호(內湖) 위에는 언덕과 숲이 있다. 그 언덕의 서남쪽으로 수백 보쯤 되는 산기슭의 평평하고 트인 땅이 있다. 이곳은 사당의 터이다. 어란리(禦亂里)는 다른 이름으로 어랑(漁郞)이라고도 하는데, 풍기가 응집되어 북쪽 지방의 명승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무계(茂溪)가 가장 빼어난 곳이다. 사당은 모좌모향(某坐某向)에 세웠다. 을사년 4월 26일에 터를 닦고 공사를 시작하여 9월에 공사가 끝났다. 그달 25일에 봉안제를 지냈다. 정공(鄭公)을 벽면의 주신으로 모시고 감찰 이공(李公)을 배향하였으며, 최공(崔公)은 천(天), 지공(池公)은 달원(達源), 강공(姜公)은 문우(文佑)를 배향하였다. 이들은 모두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어서 함께 배향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처음에는 감히 가볍게 거행하지 못하였고,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두 굽혀질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방백에게 의논하여 추후에 배향하게 하였으며, 또한 사당이 완공된 뒤에 지킬 사람이 없을까 염려되어 별도로 사당 담장 밖에 서당을 세우고 ‘촉룡(燭龍)’이라 이름 붙여 마을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다. 제사 때에는 제관이 재숙하는 곳을 마련하였다. 사우(祠宇)는 모두 몇 칸이고, 서당은 모두 몇 칸이다. 그 일을 감독한 자는 유생 이순욱(李純郁)과 현이기(玄以機)이다. 또 유생 중에서 선발하여 서당의 유사로 삼았는데, 그 사람이 이발영(李發英)이다. 명천부(明川府) 경내에서 재목을 베었는데, 부사 남령공숙(南令公淑)이 힘써 그 일을 주관하였고, 병사 이령공여발(李令公汝發), 경성 판관 이공규진(李公奎鎭), 부령부사 임군상유(林君商儒), 수성 찰방 조군상한(趙君相漢), 길주 목사 강공호(姜公鎬), 종성 부사 이공지협(李公之馧) 및 단천(端川)이 모두 도움을 주었다. 이때가 농번기여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였으므로, 경성ㆍ명천ㆍ길주 세 고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일하고, 역량(役糧)은 남은 것을 사용하였다. 피곡(皮穀) 50섬이 있었는데, 이를 서당 유사에게 맡겨서 이자를 취하게 하였으니, 옛날 사창(社倉)의 제도와 같다. 제생들의 학량(學糧)을 마련하기 위해 방백이 이 소식을 듣고 또 군영의 곡식 100섬을 내어 보충해 주었다. 또한 공노비 5구를 속전(贖錢)으로 주고, 사당의 직인과 호서당(護書堂)을 겸임하게 하였다. 병사(兵使)는 또 둔전(屯田)을 떼어 주어 제전(祭田)으로 삼게 하였고, 판관은 또 어선 한 척을 주어 제수(祭需)와 제생들의 양식으로 쓰게 하였다. 나 또한 방백과 상의하였다.

원문

採訪南北道壬辰義士事蹟。凡得二十人姓名。方伯啓□聞于朝。請追加褒典。下廟堂議。悉如所請。其未與啓□聞者。方伯又給子孫免講帖。且給食物。余又承□召還朝。上疏請伸鄭公之冤。褒□贈崇職。□上亦許之。與道內義士□贈職之典。一時擧行。獨惟祠宇賜額。幷欲上請。而朝議以爲太遽無漸。故姑徐以俟耳。仍念壬辰倭寇創殘八路。而叛民幷起。爭縛長吏者。惟北路爲然。其人心可見也。若非忠志之士糾義之擧。關北一道。當不爲我有。而功業旣就之後。又被掩覆於人。迄兹七十年間。聲烈翳然。此余所以有所感發於先人文字。而惓惓於是事者也。適會時憂方軫北邊。其所以昭揭義烈。樹立風聲者。實爲目今第一急務。故聞者不以爲迂。而事竟得就。然非方伯閔公身任世道。素用力於此等事。又非兵相以下諸公好義協助之力。又安能就此之亟也。余旣裒集鄭公倡義時狀□啓及經營祠宇時凡干文字。編爲一冊。付之書堂。且記事之首末。俾爲後考云。丙午暮春下澣。弘文館副校理李端夏。志。

번역

남북도(南北道)에서 임진년 의사들의 사적을 채집하여 20인의 성명을 얻어 방백이 조정에 아뢰니, 추증하고 포상할 것을 청하였다. 묘당의 논의가 모두 청한 대로 되었고, 계문(啓聞)하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방백이 또 그 자손에게 강첩(講帖)을 면제해 주고 음식물을 주었다. 내가 또한 □에 따라 조정으로 돌아와 상소하여 정공(鄭公)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를 포상하며 숭직(崇職)을 추증할 것을 청하니, □ 상도 허락하였다. 도내 의사들에게 관직을 추증하는 은전과 함께 일시에 거행하였으나, 사우에 액호를 하사하는 것만은 아울러 상청하고자 했으나 조정의 논의가 너무 갑작스럽고 단계가 없다고 하여 우선 천천히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어 생각건대 임진년 왜구의 창궐로 팔도가 훼손되었는데 반란이 일어난 백성들이 장리를 붙잡아 다툰 것은 오직 북도(北道)에서 그러하였으니, 그 인심을 알 만하다. 충의를 지닌 선비가 의로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관북(關北) 일대가 우리에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업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 또 사람들에게 덮여 버려 지금까지 70년 동안 그 명성이 어두웠다. 이것이 내가 선인의 글에서 감발된 바가 있고 이 일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까닭이다. 마침 시국이 근심스러워 북쪽 변방을 걱정하고 있으니, 의열(義烈)을 밝히고 풍성(風聲)을 수립하는 것이 실로 지금의 제일 급무이다. 그러므로 듣는 자들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러나 방백 민공(閔公)이 세도(世道)를 맡아 평소 이런 일에 힘쓰지 않았고, 병상 이하 여러 공이 의리를 좋아하여 협조하는 힘이 없었다면 어찌 이 일을 속히 이룰 수 있었겠는가. 내가 정공이 의병을 일으킬 때의 장계와 사우를 경영할 때의 모든 문서를 모아 한 책으로 엮어 서당에 부치고, 또 기사(記事)의 처음과 끝을 후세의 참고가 되게 하였다. 병오년 늦은 봄에 하렴(下澣)하다. 홍문관 부교리 이단하 지음.

174. 燭龍書堂記[李敏敍]

문체: 雜著類 / 記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67C, ITKC_MO_0284A_A071_167D ...

원문

北關。古爲肅愼,靺鞨之墟。於京師最遠。□列聖之所顧憂。謀臣之所經營。莫不以固邊守。捍外侮爲急。而封疆城郭之臣。率皆選用武人。固未遑於節義名敎之方也。是以。□國家有此土。迨將二百年矣。而土俗之陋未盡變。而俊造不興。愚民無所觀感而化。則往往負其桀黠之氣。反側於危亂之時。夫天之降才。非有內外遠近之殊也。豈北之人士。獨無長才異能文學行義。與他州比者哉。特以敎導之無其具耳。營度北方之事者。觀於此。豈不可以長慮却顧。而少爲之圖也。北評事之不置久矣。□上之四年。始更置之。李侯端夏以弘文館修撰。首膺是選。而又得閔公鼎重爲觀察使。二君相得甚驩於北方事。事有可擧。必與之咨度而後行之。於是相與謀曰。人未知方。武備不足恃也。乃圖所以表節義。立名敎者。訪於父老。得鄭公文孚倡義討賊之事。聞于朝而表章之。又立祠於其起事之地。與同事者義士若干人。而幷祀焉。又置學舍於其傍。名之曰燭龍書堂。以處其士人之讀書慕義者。李君實主其事。而終始有成者。亦觀察公之力也。嗚呼。今之居方州者。鮮克置心於敎化。況評事之爲職。只可以戎事。佐節度。非二君之眞知本末。爲□國家深長思者。誰肯出力於文法之外。勤勤而爲此哉。且夫方鄭公羈旅竄伏。奮奇計。抗大難。內鋤賊黨。外殲方張之寇。其功謀可謂壯矣。而抑塞湮鬱。不克彰徹於世。今乃得二君而大顯。事之顯晦。固自有時哉。而荒遐僻絶之域。人不知禮義之訓。士不習詩書之敎。蠢愚羯羠。自絶於上國。而今乃暴之以烈士之風聲。進之於文行講習之塗。導其迷而牖其冥。廓然如燭龍之爲明於日月之所不及。敎之興廢。抑亦有待於其人乎。然則二君之意。其欲使夫此邦之人。因此發端。講習古訓。鼓舞奮振。以至於善風俗。易其陋。而學者皆爲才且良。庶□國家文敎之澤。被於遐遠也。則二君之嘉惠此邦。敎成於來世。使後之人。覽其跡。服其敎。追思頌歎而不能忘者。亦豈有窮也哉。而其敎之所由興。將自此書堂始。故余樂爲之書焉。其名堂之義。評事君蓋有所受云爾。□聖上之七年丙午暮春下澣。弘文館應敎李敏敍。記。

번역

북관(北關)은 옛날 숙신(肅愼)과 말갈(靺鞨)의 터전으로,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이다. 역대 임금들이 근심하고 모신들이 계획한 바가 모두 변방을 굳건히 지키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므로, 국경과 성곽을 맡은 신하들은 대부분 무인(武人) 중에서 선발하여 임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절의(節義)와 명교(名敎)를 닦는 방도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국가가 이 땅을 소유한 지 어느덧 200년이나 되었으나 토속의 누추함은 다 변하지 않았고, 뛰어난 인재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보고 배울 만한 것이 없어 교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종종 사나운 기질을 품고 있다가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때를 만나면 도리어 반역을 꾀하기도 한다. 하늘이 재능을 내릴 때에 안팎이나 원근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북쪽의 인사(人士)들만 유독 뛰어난 재주와 특별한 능력, 문학, 행의가 다른 고을 사람들에 비해 없겠는가. 다만 가르치고 인도하는 데 그만한 인물이 없을 뿐이다. 북방의 일을 경영하는 자는 이것을 보면 어찌 장구한 생각을 가지고 돌아보아 조금이라도 도모할 수 없겠는가. 북평사(北評事)를 오래 두지 않다가 □ 상(上)의 4년째에 비로소 다시 두었다. 이후단하(李侯端夏)가 홍문관 수찬으로서 처음으로 이 자리에 뽑혔는데, 또 민공정중(閔公鼎重)이 관찰사가 되어 두 사람이 북방의 일에 매우 즐겁게 서로 어울렸다. 거행할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와 상의하고 나서 행하였다. 이에 서로 의논하기를, “사람들이 방도를 모르고 무비(武備)도 믿을 수 없으니, 절의를 표하고 명교(名敎)를 세우는 방도를 도모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로들에게 물어보니 정공 문부(鄭公文孚)가 의리를 내세워 적을 토벌한 일이 있었다고 하기에 조정에서 듣고서 표문(表文)을 올렸다. 또 그가 일을 일으킨 곳에 사당을 세우고, 함께 일했던 의사(義士) 몇 사람도 함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그 곁에 학사(學舍)를 세우고 ‘촉룡서당(燭龍書堂)’이라 이름하였다. 그곳의 선비들 가운데 글을 읽고 의리를 사모하는 자들을 다스리는 일은 이군실(李君實)이 주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성취를 이루었으니, 또한 관찰사 공의 힘이기도 하다. 아, 지금 방주(方州)에 사는 자들은 교화에 마음을 두는 자가 드문데, 하물며 평사의 직무는 군사적인 일로 절도사를 보좌하는 것일 뿐이니, 이 두 분이 본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국가를 위해 깊고 장구하게 생각한 자로서 누가 기꺼이 문법(文法) 외에 힘을 써서 부지런히 이 일을 하였겠는가. 또 방정공(方鄭公)은 타향에서 쫓겨나 숨어 지내면서도 기발한 계책을 세워 큰 어려움에 맞섰다. 안으로는 적당(賊黨)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방장(方張)의 도적을 소탕하였으니, 그 공과 계책이 장대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막혀서 묻혀 있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다가 이제 두 분을 얻어 크게 드러났으니, 일의 현저함과 어두움은 참으로 때가 있는 것이다. 황량하고 외진 지역이라 사람들이 예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 선비가 시서의 가르침을 익히지 않으면 짐승처럼 어리석어 스스로 상국(上國)과 단절되는데, 이제 열사들의 풍성을 드러내어 문행을 강습하는 길로 나아가게 하여 미혹된 것을 인도하고 어두운 것을 깨우치니, 마치 촛룡이 해와 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르침의 흥폐(興廢)가 또한 그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두 분의 뜻은 이 나라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고훈(古訓)을 강습하고 고무되어 선풍(善風)에 나아가 누추함을 바꾸고 학자들이 모두 재주와 덕망을 갖추게 함으로써 국가의 문교(文敎)의 은택이 먼 곳까지 미치기를 바라는 것이니, 두 분이 이 나라를 가르쳐 주신 공덕은 후세에 이루어져서 후인들이 그 자취를 보고 그 가르침에 감복하여 추억하고 칭송하며 잊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그 가르침이 일어나는 곳은 장차 이 서당에서 시작될 것이기에, 내가 즐거이 이를 기록한다. 그 당(堂)의 이름에 담긴 뜻은 평사군(評事君)이 받으신 바가 있다고 한다. □ 성상 7년 병오년 늦봄 하욕(下澣) 때 홍문관 응교 이민서가 기록하다.

175. 請□諡疏[曾孫前主簿杉]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68C, ITKC_MO_0284A_A071_168D ...

원문

臣伏以酬功顯忠。勵世之大方。節惠易名。崇終之盛典。苟有樹立卓異。聲烈表著者。則有司之議。不限於常格。子孫之請。毋拘於親嫌者。亦古今之通誼也。臣之曾祖父□贈左贊成臣文孚。早以文藝著名。擢第登仕。當□宣廟壬辰板蕩之際。以北評事。倡義起兵。誅土賊鞠世弼等。破倭將淸正兵。關北以定。而被臬司掩蔽。功賞未稱。復値昏亂。屛斥於外。反正之後。卽拜全州府尹。時議大用。而不幸橫罹獄援。卒以詩案。枉死於桁楊。此臣祖本末大致也。然而臣不敢輒以一家私言有所揄揚。請略擧近代名臣先輩衆所崇信之說。以證其一二焉。其關北討賊事。則故判書臣李植。曾爲評事於北幕。多所採訪。最得其詳。有曰。壬辰六月。倭將淸正長驅寇北。兵馬使軍潰而走。賊遂入吉,明,鏡,富等境。入會寧。擄□王子。還趨鏡城。鎭堡叛兵。爭縛守將。擧城附賊。而評事鄭文孚獨脫免。與儒生數輩。號召近境。鍾城府使鄭見龍等皆來會。衆推文孚爲大將。斬叛賊鞠世弼等十三人。以徇諸鎭。進兵明,吉界。連與賊遌。大蹂于長德。再捷于雙浦。屢圍吉州城及嶺東柵。踰嶺捄端川郡。與淸正戰白塔郊。前後斬千餘級。北行六鎭。招服藩胡。搜討叛黨。關北卒就平定。大抵皆其力也。故相臣閔鼎重按察北路時。□啓請褒贈立祠。有曰。當時。倭胡交亂。腹背受敵。逆民中起。旣爲叛賊。倭雖退。其勢當附於胡。而數三儒生。能知推擧一介從事。以小擊衆。卒就大功。使邠岐舊疆。免淪於左袵。其義烈如此。而適被按道之臣恥其功不出已。誣□啓掩功。未獲顯被旌賞。至今人心憤惋。以爲王事不可成。其詩案枉死事。則□先王朝乙巳年。儒臣李端夏疏卞其冤。有曰。文孚忠節。素著於危亂之際。其在昏朝。少無染汚之事。反正後。被元帥薦。將大用。而朴來章之獄。適被誣引。置對辨明。將見釋。而適又臺諫。有以詩案深論者。文孚曾爲昌原府使時。有詠史十絶。其一卽楚懷王事。而其詩曰。楚雖三戶亦秦亡。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孱孫何事又懷王。此本昏朝時所作。而適發於是時耳。又況反復其詩意。未見其有可疑者。其死之冤。國人莫不傷之。請伸冤□贈爵。其時大臣鄭太和等。因登對。同辭極陳。以明臣祖有功無罪。枉死委折。且引故相臣趙翼爲其時問事郞廳。常言其冤狀。□先王命超品贈職。錄用子孫。先是。北人爲臣祖。立祠於起義之地。而配以同事之人。相與俎豆之。又因司諫呂聖齊□啓請。特令賜額致祭。嗚呼。□國家之於臣祖。所以酬報之者何其備歟。旣已雪其冤枉矣。加其爵秩矣。錄其子孫矣。又從而旌其祠而永樹風聲矣。四方觀聽。莫不聳動。九原有知。其必感泣。而惟是□贈諡一事。迄未上請。此雖後嗣殘微之致。而亦豈非□聖朝之一闕事也。

번역

신이 삼가 아룁니다. 공을 갚아 충성을 드러내고 세상을 권면하는 것은 큰 도리이며, 절의를 기리고 은혜를 베풀어 종묘사직을 높이는 것은 성대한 의례입니다. 만약 탁월하게 수립한 공적과 드러난 명성이 있다면, 유사(有司)의 논의는 일반적인 격식에 한정되지 않으며 자손의 청구도 친척이라는 혐의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또한 고금의 통의(通誼)입니다. 신의 증조부 □ 좌찬성 문부(文孚)는 일찍이 문예로 명성을 떨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습니다. □ 선묘 임진년 판도(板蕩) 때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土賊)인 굴세필(鞠世弼) 등을 주벌하고 왜장 청정(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찰사의 비호로 공로에 대한 포상이 합당하지 않았고, 다시 혼란한 때를 만나 외척으로 배척되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난 뒤 즉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어 당시 크게 등용될 예정이었으나 불행히도 옥사(獄事)에 휘말려 결국 시안(詩案) 때문에 형틀에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이것은 신의 조부의 본말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곧바로 한 집안의 사사로운 말로써 칭송할 수 없기에, 근대 명신(名臣) 선배들에 대해 뭇사람이 숭상하는 설을 대략 들어 그중 한두 가지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관북에서 도적을 토벌한 일에 대해서는 고 판서 이식(李植)이 북막(北幕)의 평사(評事)로 있을 때 많은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가장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임진년 6월 왜장 청정(淸正)이 도적들을 거침없이 몰아 북쪽으로 왔는데, 병마사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자 도적이 마침내 길주(吉州), 명성(明城), 경성(鏡城), 부안(富安) 등의 경계에 들어와 회령(會寧)에 들어가 왕자를 납치하고 다시 경성으로 달려갔습니다. 진보(鎭堡)의 반병(叛兵)이 다투어 수장(守將)을 포박하고 성 전체가 도적 편에 붙었는데, 평사 정문부(鄭文孚)만 홀로 탈출하여 유생 몇 명과 함께 근경(近境)을 호소하니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등이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문부를 대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반적(叛賊) 굴세필(鞠世弼) 등 13인을 참형에 처하였습니다. 이는 여러 진(鎭)을 순찰하고 명(明), 길계(吉界)로 군사를 진격하여 연달아 적과 맞붙어 장덕(長德)에서 크게 유린하였고, 쌍포(雙浦)에서 거듭 승리하였으며, 길주성(吉州城) 및 영동책(嶺東柵)을 여러 번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에 이르러 청정(淸正)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싸워 전후로 천여 명을 베었습니다. 북쪽으로 6진(六鎭)을 행차하여 오랑캐를 불러 복종시키고 반적들을 소탕하여 관북(關北)의 군사를 평정하였으니, 대체로 모두 그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신 민정중(閔鼎重)이 북로(北路)를 안찰할 때에 아뢰어 포상하고 증직하며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당시 왜적과 오랑캐가 번갈아 난을 일으켜 앞뒤에서 적을 맞았고 반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반적이 되었으니 왜구가 물러간다 해도 그 형세는 오랑캐에게 붙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삼 명의 유생이 능히 한 명의 종사관(從事官)을 추켜세워 소수를 다수에 맞서 싸우게 하여 마침내 큰 공을 이루어, 예전의 빈기(邠岐) 땅이 좌석(左袵)에 함락되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의열이 이와 같았는데, 마침 도(道)를 안찰하는 신하가 그의 공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무고한 계사(啓辭)를 올려 그 공을 덮어 버렸으므로, 현창(顯彰)하여 상을 내리는 은혜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이 분개하고 안타까워하며 왕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의 시안(詩案)에 억울하게 죽은 일에 대해 말하기를, “□ 선왕조(先王朝) 을사년에 유신(儒臣)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변론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문부의 충절은 평소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에 드러났으며, 혼조(昏朝)에 있을 때에도 조금도 물들거나 더럽혀진 일이 없었습니다. 정권이 바로잡힌 뒤에는 원수(元帥)가 천거하여 크게 등용하려 하였으나 박내장(朴來章)의 옥사(獄事)에 마침 무고하게 끌려들어 대질하여 변명하고 장차 석방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또 대간이 시안을 가지고 깊이 논의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부가 일찍이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 사십 절구의 시를 읊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초 회왕(楚懷王)의 일에 관한 것으로, 그 시에 ‘초나라가 비록 세 집뿐이라도 진나라가 망할 것이니, 반드시 남공(南公)의 말이 타당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한 번 무관에 들어가자 백성들의 기대가 끊어졌으니, 어찌하여 쇠약한 자손이 또 왕을 그리워하는가. 이 시는 혼조(昏朝) 때 지은 것인데 마침 이때에 발각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의 뜻을 반복해서 살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원통함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으므로, 억울함을 풀어주고 관작을 추증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 대신 정태화(鄭太和) 등이 연이어 어전(御前)에 나아가 함께 말을 올려 극진히 진술하여 신의 조부가 공은 있으나 죄는 없음을 밝히고 억울하게 죽은 곡절을 아뢰었습니다. 또 고 상신 조익(趙翼)이 그 당시 문사랑청(問事郞廳)으로 있을 때 항상 그의 원통한 정상을 말하였던 것을 인용하니, 선왕께서 품계를 뛰어넘어 관작을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북쪽 사람들이 신의 조부를 위해 의병이 일어난 곳에 사당을 세우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또 사간 吕聖齊(여성제)가 □ 계청(啓請)하여 특별히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하게 하였습니다. 아, 국가가 신의 조부에 대하여 □ 그 보답이 어찌 그리도 완벽합니까. 이미 그 억울함을 풀어 주었고, 관작을 더해 주었으며, 자손들을 녹용(錄用)하였고, 또 이어 사당에 정려하여 명성을 영원히 세워 주었습니다. 사방에서 듣는 이들 모두가 감동하지 않음이 없으니, 저승에서도 알게 되어 반드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다만 시호를 내리는 한 가지 일은 아직까지 상청(上請)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후손들이 미약한 탓이라 할지라도 또한 어찌 성조(聖朝)의 한 가지 소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원문

臣聞□國朝故事。實職正二品以上。乃得諡。然有所取而諡之者。亦不係此限。有道學則諡。若參奉臣徐敬德之諡文康。是也。有節義則諡。若提督臣趙憲之諡忠烈。招討使臣高敬命之諡文烈。是也。至如崔震立之力戰死事。則以水使而諡焉。鄭蘊,金權之勁直敢言。抗節扶倫。則皆以參判而諡焉。然則□祖宗彰善之規。初不拘於爵秩之高下也。今臣祖於國典例諡之秩。未準一階。視儒賢崇奬之體。蜼或差異。而乃若爲國忘身。倡義抗難。則其精忠勳烈。豈必多讓於前數人哉。世或以死事爲重。而自古徇國之臣。或死或不死者。特係一時之幸與不幸耳。其心則一也。夫萬死不顧一生之計。已決於其初。則畢竟事之成敗。身之存亡。蓋有不必論其輕重矣。倘蒙□聖明。嘉臣祖之功。愍臣祖之冤。追累□朝奬飾之意。亟□命所司。議易名之典。則足以昭勸方來。激勵頹俗。豈獨泉塗之榮耀。子孫之私幸而已哉。臣以螻蟻微懇。仰瀆□宸嚴。狂僭之罪。實無所逃。臣不勝惶隕感激涕泣祈懇之至。謹昧死以□聞。

번역

신이 듣건대, □나라의 고사(故事)에 실직(實職) 정2품 이상이어야 시호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취하여 시호를 내리는 것이 또한 이 한계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학(道學)이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데, 참봉 신 서경덕(徐敬德)의 시호 문강(文康)이 바로 이것입니다. 절의가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데, 제독 신 조헌(趙憲)의 시호 충렬(忠烈)과 조토사 신 고경명(高敬命)의 시호 문렬(文烈)이 바로 이것입니다. 최진립(崔震立)이 힘을 다해 싸우다 죽은 일 같은 경우는 수사(水使)로서 시호를 받았고, 정온(鄭蘊)과 김권(金權)이 굳세고 곧게 감히 말을 하고 절의를 지키며 윤리를 붙든 경우에는 모두 참판으로서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조종(祖宗)께서 선을 드러내어 시호하는 규정은 애당초 작질(爵秩)의 고하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신의 조부께서는 나라의 전례로 시호를 내리는 품계가 한 단계도 미치지 못하여 유현(儒賢)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체제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잊고 의리를 앞세워 난에 맞섰으니, 그 정충과 공훈이 어찌 앞서 언급한 몇 사람에게 뒤지겠습니까. 세상에서는 혹 죽은 일을 중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들은 죽거나 죽지 않은 것이 단지 한때의 다행이나 불행에 관계될 뿐 그 마음은 똑같습니다. 만번 죽어도 돌아보지 않고 일생의 계획을 처음부터 결단했다면, 결국 일이 성패하고 몸이 존망하는 것은 굳이 그 경중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성명(聖明)께서 신 조부의 공을 가상히 여기시고 신 조부의 원통함을 불쌍히 여겨 추후에 □조(朝)에서 장려하고 꾸미는 뜻으로 속히 소사(所司)에게 명하여 시호를 고치는 전례를 의논하게 하신다면, 충분히 앞으로 올 사람들을 밝게 권면하고 쇠퇴한 풍속을 격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다만 저승의 영광과 자손들의 사적인 다행뿐이겠습니까. 신은 개미 같은 미천한 정성으로 우러러 □성상의 엄숙함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광선(狂煽)하는 죄를 실로 피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황공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비는 지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에 아룁니다.

원문

答曰。省疏具悉。疏辭。令該曹稟處。

번역

답하기를, “상소 내용을 잘 보았습니다. 상소의 내용은 해당 조(曹)에서 주상께 여쭈어 처리하게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176. 禮曹回□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70C, ITKC_MO_0284A_A071_170D ...

원문

前主簿鄭杉上疏。據□啓目。粘連□啓下是白有亦。觀此前主簿鄭杉疏辭則以爲。臣之曾祖父□贈左贊成文孚。早以文藝著名。擢第登仕。當□宣廟壬辰板蕩之際。以北評事。倡義起兵。誅土賊鞠世弼等。破倭將淸正兵。關北以定。被臬司掩蔽。功賞未稱。逮□仁廟反正之後。卽拜全州府尹。時議大用。而不幸橫罹獄援。卒以詩案。冤死於桁楊。此臣祖本末大致也。在後。判書臣李植。曾爲評事於北幕。多所採訪。故相臣閔鼎重。按察北路時。□啓請褒贈立祠。及至乙巳年。儒臣李端夏疏卞其冤。有曰。文孚忠節。素著於危亂之際。□先王命超品□贈職。錄用其子孫。又因司諫呂聖齊□啓請。特令□贈額致祭。而惟是□贈諡一事。迄未上請伏願□聖明亟命所司。議易名之典亦爲白有臥乎所。文孚忠節。以其子孫揄揚之言。雖不可取信。而前輩名臣或陳其義烈。或訟其枉死。或請贈秩錄其子孫。又令立祠而□贈額致祭。其功烈節義。無復可議者矣。□國家故事。實職正二品以上。乃合得諡。然有所取而諡之者。亦不拘此限。有節義則諡。若提督臣趙憲,招討使臣高敬命之諡忠烈,文烈。是也。世或以死事爲重。而自古徇國之士。或死或不死者。特係一時之幸與不幸。其心則一也。所當依疏辭。特□贈嘉諡。以激頹波是白乎矣。事係□恩典。臣曹不敢擅便。□上裁何如。□啓依回□啓施行。癸未十月初七日。

번역

전 주부 정삼(鄭杉)이 상소하기를, “계목(啓目)에 ‘연련(粘連)□’이라고 계하(啓下)하신 것은 백유(白有)입니다. 이전에 주부 정삼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면, 신의 증조부 □ 좌찬성 문부(文孚)는 일찍이 문예로 명성을 떨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습니다. □ 선묘(宣廟) 임진년 판탕(板蕩)의 때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土賊)인 굴세필(鞠世弼) 등을 죽이고 왜장 청정(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찰사가 은폐한 탓에 공로에 대한 포상이 합당하지 못하였습니다. □ 인묘(仁廟)가 정권을 되찾은 뒤에는 즉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어 당시 대용(大用)으로 의논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횡액을 당해 옥사에 연루되었고, 마침내 시안(詩案) 때문에 형틀에 매달려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이것이 신의 조부의 본말입니다. 그 뒤 판서인 신 이식(李植)이 일찍이 북막(北幕)에서 평사로 있으면서 많은 것을 채록하였으므로 상신 민정중(閔鼎重)이 북로(北路)를 안찰할 때……” 기청포증립사(啓請褒贈立祠)에 이르러 을사년에 유신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변론하기를, “문부충절은 평소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에 충절을 드러냈습니다. □ 선왕께서 품계를 뛰어넘어 □ 증직하고 자손을 녹용하게 하셨으며, 또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가 □ 계청하여 특별히 □ 증액치제하도록 하였습니다. 다만 □ 증시(贈諡)하는 한 가지 일은 아직까지 상청하지 못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담당 관사에게 명하여 시호를 고치는 전례를 의논하게 하소서. 문부충절은 그 자손이 유양한 말은 비록 믿을 수 없으나, 선배 명신들이 혹 그 의열을 진술하거나 혹은 억울하게 죽은 것을 호소하거나 혹은 증직하고 자손을 녹용할 것을 청하거나 또 사당을 세우고 □ 증액치제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렬과 절의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 □ 국가의 고사(故事)에 실직 정2품 이상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합당한 시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취하여 시호를 주는 것은 또한 이 한도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절의가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독신(提督臣) 조헌(趙憲)과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에게 충렬(忠烈)과 문렬(文烈)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혹 죽은 일을 중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선비들은 죽거나 죽지 않는 것은 단지 한때의 다행이나 불행에 관계될 뿐 그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러니 상소한 내용에 따라 특별히 가시(嘉諡)를 내려서 무너진 기상을 격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일은 은전(恩典)에 관계되므로 신들이 감히 멋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성상께서 어떻게 재결하십니까? 회답하신 계사에 따라 시행하겠습니다.

177. 會寧府顯忠祠□賜額致祭文〔原注:乙酉。會寧儒生立祠祀公。以本府起義人僉知申世俊,主簿吳允迪崔彥英許灌,奉事鄭汝慶,守門將李希白,奉事尹岦,守門將吳遵禮等配享。因道臣上聞請額。丁亥。□賜額致祭。〕[知製□敎尹弘离行]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71B, ITKC_MO_0284A_A071_171C

원문

粤在壬辰。島夷逞毒。彌湖滿畿。踰嶺而北。血肉生靈。巢穴幽關。奸民媚寇。闖發其間。爰拘國宰。遂及□王子。助虐養禍。俾賊益肆。卿時倡義。起自幕府。聞風響應。遠近接武。四人先奮。八士繼起。張膽賈勇。唾手爭死。磔裂叛兇。次第殲盡。鼓衆惴敵。神人快憤。得保餘燼。實賴爾曹。誌錄俱存。事蹟孔昭。惟鏡刱祠。闕不咸秩。一堂配食。齒四遺八。妥靈無所。久欠追報。群情壹鬱。湮沒是懼。合謀經營。就府別構。事未聞朝。獨無旌美。使臣筵白。藩奏且至。烈武偉躅。炳赫耳目。一猶光國。矧爾輩出。激礪忠勇。亶由首事。同心效死。實籍衆士。功可均褒。禮宜同享。盍樹風聲。丕聳瞻聽。肆推盛典。寵錫華額。特遣禮官。酹以洞酌。不昧者存。庶幾歆假。

번역

임진년에 왜적의 독기가 성해져서 미호가 경기까지 가득 차고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와 생령을 도륙하고 깊은 관문에 소굴을 만들었다. 간사한 백성이 왜적에게 아첨하여 그 사이로 튀어나왔다. 이에 국재를 포박하고 마침내 ○ 왕자에게 미쳐서 악행을 도와 화를 키우니, 적이 더욱 방자하게 되었다. 경은 이때 의병을 일으켜 막부에서 시작하였고,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원근의 무사들이 합세하였다. 네 사람이 먼저 분발하고 여덟 선비가 뒤이어 일어났으며, 담력을 떨치고 용맹을 부리며 손을 핥으면서 죽기를 다투었다. 반역한 흉적들을 갈라 찢어 차례로 모두 섬멸하니, 군중은 두려워하고 적은 위축되어 신명과 사람이 통쾌하게 분노하였다. 남은 불씨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그대들 덕분이다. 기록이 모두 남아 있어 사적(事蹟)이 매우 분명하다. 오직 경당을 세우는 일에만 차례가 없었으니, 한 당에 배향하여 네 분과 여덟 분의 자리를 마련해 영령을 편안히 모셔야 한다. 오래도록 보답하지 못해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답답하였고 묻혀 버릴까 두려웠다. 이에 뜻을 모아 계획을 세워 관부(官府)에 별도로 건물을 지었다. 조정에 알리지 않아 아직 표창이 없었으나 사신이 연석에서 아뢰고 번국(藩國)의 상소도 이르렀다. 씩씩한 무사들의 위대한 자취가 눈과 귀에 찬란하니, 한 사람만으로도 나라를 빛내는데 하물며 그대들이 나와서 충성심과 용기를 격려했으니, 이는 진실로 일을 주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마음으로 죽음을 바친 것은 실로 여러 선비들의 공적이니, 공을 고르게 포상하고 예법에 따라 함께 배향해야 한다. 어찌 명성을 드높여 듣는 이들을 우러러보게 하지 않겠는가. 성대한 전례를 베풀어 화려한 비석을 내리고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 술을 부어 올리니, 잊지 않은 자가 있다면 부디 흠향하소서.

178. 壬辰倡義行[崔有海]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71D, ITKC_MO_0284A_A071_172A

원문

妖星照夜白。獰飆震地黑氛腥。蠻猘飛鷁踔怒鯨。陰虹吐血赭重溟。兇燹(火+霍)(火+霍)玉輦行。殺氣漫漫天晦冥。凌煙遺裔控血誠。斗膽輪囷發霜硎。傑廈垂傾隻手擎。張拳雄呼編伍丁。匡時仗義托血盟。報國輸忱昭景星。魁梧鄭帥文武英。凜烈精忠髓骨銘。雄壇虎視指敎精。義旅熊咆傾耳聽。探機密樹大小征。荷戟潛環長短亭。猰㺄磨牙出重城。烈焰煽風爍前坰。猿臂彎弧霹靂鳴。鳥章掣電連輜輧。陰密藏兵鳥歸程。縱橫排陣雲龍形。奸鋒急頓震雷轟。霜鋩環帀嚴拘囹。漆齒爭祝几上生。禿頭催加腦後釘。刵耳椎髓亟塡坑。剝膚楊臭延變蓂。枯𩨨杈路逼霄崢。燐火連宵燦流螢。雄虺竄首凶膽驚。怪雀思巢愁鎩翎。豼貅整肅樂還營。義聞燀赫殷奔霆。雲消關塞漢月明。笛弄梅花海天靑。黎氓競奮戀國情。賊囮先磔宣威靈。槍鏖騎踏臨野平。刳腹劌腸撑沙汀。群烏晩噪啄食爭。積屍夜燒焰靑熒。端刺姜侯華岳精。衋傷西望血淚零。協義披肝揀奇兵。示弱誘兇蹴石屛。揮矛奮挺孰爭衡。蹀血漂杵混濁涇。班衣咋指暗呑聲。怵威癙憂牢閉扄。先隊籲施密將迎。還輪夜脂催行鈴。金甌旣完劃塵淸。瑞雲蔥瓏豐沛庭。褒功還嫌賞典輕。培義誰能明國經。慶蔓雲仍應底成。金榜輝煌標名馨。摭實搆詞植邦紘。播揚義風垂典刑。

번역

요망한 별이 밤을 비추어 하얗고 사나운 바람이 땅을 흔들어 검은 기운이 비리다 오랑캐와 맹수가 날고 붕새가 날며 노한 고래가 뛰놀고 음산한 무지개가 피를 토해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흉악한 불길 속에 황제의 수레가 가니 살기가 하늘에 가득하여 어둡고 침침하다 능연의 후예가 피의 정성을 다하고 두려움 없는 용사가 거대한 돌을 발로 차서 던지네 거대한 기둥이 기울어지는데 한 손으로 떠받치고 주먹을 쥐고 웅장하게 부르며 군사를 편성하고 시국을 바로잡으려는 의로운 마음으로 혈맹을 맺는다 나라에 보답하는 정성을 다하여 경성처럼 밝게 빛나니 늠름한 정 장군은 문무의 영재로 강렬한 충성이 골수에 새겨져 있다 웅장한 단상에서 호랑이처럼 노려보며 가르침이 정밀하고 의로운 군사들이 곰처럼 포효하여 귀에 들린다 기밀을 탐지하는 나무는 크고 작은 정찰이다 창을 메고 고리를 숨긴 채 장정(長亭)과 단정(短亭)에서 잠복한다 맹수가 이빨을 갈며 성을 나와 불길이 바람을 부채질하여 앞산에 타오르니 원숭이 팔 같은 활시위가 굽어지며 천둥소리 울리고 새 모양의 화살은 번개를 끌어당겨 수레를 이어간다 음밀하게 병사를 숨긴 곳에서 새가 돌아오는 길이다 구름과 용의 형상으로 종횡으로 진을 치니 교활한 칼날이 급히 들이치고 우레가 울리네 서릿발 같은 창은 두루 겹쳐져 감옥처럼 엄하고 칠치(漆齒)는 다투어 궤 위에서 자라나네 대머리는 머리 뒤에 못을 박으라고 재촉하고 귀를 베고 수골을 찔러 구덩이에 채우게 하네 피부를 벗겨 양의 냄새가 나게 하고 변명(變蓂)으로 이어지게 하며 마른 해골은 갈라져 하늘에 닿으리 도깨비불은 밤새도록 반딧불처럼 빛나고 큰 뱀이 머리를 숨기니 흉악한 간담이 놀라네 괴이한 새는 둥지를 생각하니 날개 깃털을 걱정하네 용맹한 무사들은 정돈되어 즐겁게 돌아오고 의로운 소문은 번쩍번쩍 우레처럼 퍼지네 구름이 걷히니 관새에 한나라 달이 밝고 피리 소리는 매화 같고 바다는 푸르네 백성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다투어 분발하네 적의 미끼는 먼저 베어 위엄을 선포하고 창으로 찌르고 말로 밟아 들판을 평평하게 하네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모래톱에 펼치니 까마귀 떼가 저녁에 시끄럽게 다투어 먹네 시체 더미는 밤에 타서 푸른 불꽃이 번쩍이네 단사(端刺)는 강후의 화악 정기라 서쪽을 바라보며 상심하여 피눈물을 흘리네 협의로 간담을 드러내어 기병을 가려 뽑고 약한 척하여 흉적을 유인해 돌 울타리를 차버렸네 창을 휘두르고 용맹을 떨치니 누가 대등하게 겨룰까 피를 뿌리고 도끼를 띄우니 탁한 물이 뒤섞였네 반의(班衣)는 손가락질하며 몰래 침을 삼키고 위엄에 놀라 근심으로 문을 굳게 닫았네 선대(先隊)가 호소하여 밀장(密將)이 맞이하고 환륜(還輪)은 밤 기름에 행령을 재촉하네 금구는 이미 완성되어 먼지를 쓸어내고 상서로운 구름은 풍패의 뜰에 무성하네 공을 포상함에 상전이 가볍다고 여겨지니 누가 의리를 배양하여 국경을 밝힐까 경사가 번져 구름이 이어지니 응당 이루어지고 금방(金榜)은 찬란하게 이름이 빛나네 실상을 채집해 글을 지어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의로운 풍속을 널리 전하여 법도를 남기네

179. 贈農圃〔原注:芝川〔原注:黃廷彧〕〕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鐵騎橫馳十萬軍。少年才子立殊勳。今來獨領千人去。一箭應淸漲海氛。

번역

철기병이 십만 군사 앞을 가로질러 달려가니 젊은 재주 있는 선비가 특별한 공을 세웠네 지금 홀로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니 화살 하나로 바다에 이는 풍랑을 말끔히 없애리라

180. 長德山。次黃長溪韻。[澤堂〔原注:李植〕]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曾於此地破蠻軍。關北誰論第一勳。耆老至今思大樹。塞門何日淨妖氛。

번역

일찍이 이곳에서 오랑캐 군대를 격파했으니 관북에서 누가 제일의 공로를 논하겠는가 기로들은 지금까지도 큰 나무를 생각하는데 변방의 문은 어느 날에야 요망한 기운이 맑아질까

원문

長德山。卽鄭文孚破賊處。中興以來。未有此捷比。而當時沒其賞。後亦無人傳述者。獨黃長溪贈鄭公詩曰云云。稍爲得實云。

번역

장덕산(長德山)은 바로 정문부(鄭文孚)가 적을 격파한 곳이다. 중흥(中興) 이후로 이와 같은 승리는 없었으나, 당시에는 그 공적에 대한 보상이 없었고 뒤에도 이를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황장계(黃長溪)가 정공(鄭公)에게 준 시에서 “운운”한 것이 조금이나마 사실을 얻은 것이다.

181. 過彰烈廟有感[北評事申翼相]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彰烈新祠表大名。北方千載樹風聲。誰知一片漁郞里。衛國功賢萬里城。

번역

창렬사(彰烈祠)에 표창된 그 큰 이름은 북방 천 년토록 풍성한 명성을 떨쳤네 어찌 알았으랴 한 조각 어부의 마을이 나라를 지킨 공로 만 리 성을 호위했음을

182. 次申評事叔弼韻[松磵李端夏]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滎陽千載樹勳名。同事諸公著義聲。聞道新詩題廟宇。一言應復敵長城。

번역

영양에서 천 년 동안 공훈을 세운 이름이요 여러 공들과 함께 의로운 명성을 드높였네 듣건대 새로운 시를 사당에 쓰셨다니 한마디 말이 장성보다 낫겠구려

183. 彰烈祠[咸鏡監司南九萬]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72D, ITKC_MO_0284A_A071_173A

원문

鏡城府南一百里。有禦亂里。或稱漁郞里。里有八景臺。臺南十里許。有茂溪湖。乃壬辰倭亂時。義士李鵬壽邀鄭評事文孚。起兵處也。今□上乙巳。評事李端夏倡議立祠于湖上。享鄭公。而以同盟人鵬壽等配之。又作燭龍書堂于其側。以爲儒生居業之所。祠在西峯下高阜。而前有小山橫抹如新月之吐。半浸湖水。蒼翠蔚然。四面諸山。削立如彩屛之圍。而其中平圓成湖。縱廣九里。芰荷菱芡。綠淨如拭。蘊藉淸麗。殆不可名言。北地山川。大抵麤壯軒豁之觀。則固可易得。而山彎水環。未有如此地之幽靚者。豈天亦欲彰鄭公之忠烈。特設別區於荒裔之域。以妥其靈也耶。

번역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쯤에 어란리(禦亂里)가 있는데, 혹 어랑리(漁郞里)라고도 한다. 마을에 팔경대(八景臺)가 있고 대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무계호(茂溪湖)가 있다. 이곳은 바로 임진왜란 때 의사(義士) 이붕수(李鵬壽)가 정 평사 문부(鄭評事文孚)를 초청하여 군사를 일으킨 곳이다. 지금 □상(□上) 을사년에 평사 이단하(李端夏)가 창의(倡議)하여 호숫가에 사당을 세워 정공(鄭公)을 모시고 동맹인 이붕수 등을 배향하였으며, 또 그 옆에 촉룡서당(燭龍書堂)을 지어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다. 사당은 서쪽 봉우리 아래 높은 언덕에 있는데, 앞에는 작은 산이 가로질러 마치 초승달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으로 호수에 반쯤 잠겨 있고 푸르름이 무성하다. 사방의 산들은 채색 병풍처럼 깎아지른 듯 서 있고 그 가운데 평평하고 둥근 곳에 호수가 이루어져 있는데, 가로세로가 9리나 된다. 연꽃과 마름이 자라 있어 깨끗함이 마치 닦은 듯하고 은은하고 청려하여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북쪽 지방의 산천은 대체로 거칠고 장대하며 탁 트인 경관을 쉽게 볼 수 있지만, 산이 휘어지고 물이 감싸 안은 것이 이처럼 그윽하고 아름다운 곳은 없으니, 어찌 하늘도 정공의 충렬(忠烈)을 드러내고자 황량한 변방에 특별히 별도의 구역을 마련하여 그 영령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인가.

원문

鄭公祠傍茂溪湖。湖上靑峯一抹孤。九里湖平纖纊息。四圍巒疊畫屛紆。人當板蕩彰忠節。地到窮荒創別區。更讀燭龍書室記。遙思二李望京都。

번역

정공의 사당 곁에 무계호가 있고 호수 위 푸른 봉우리 하나 외로이 서 있네 구리호는 평평하여 가느다란 물결 일고 사방으로 산봉우리가 겹쳐져 병풍처럼 둘러 있네 사람은 판탕에서 충절을 드러내었고 땅은 궁황에 이르러 별도의 구역을 만들었네 다시 촉룡서실의 기문을 읽으며 멀리 도성을 바라보는 이씨 두 분을 생각하네

184. 鏡城感懷[北評事金昌協]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73B

원문

島夷昔搆患。兵塵彌玆土。鄭公奮幕佐。登壇建旗鼓。感激列鎭動。雲蒸義旅聚。涕淚望行在。談笑取逆豎。長驅無留行。破敵若風雨。功高有媒蘖。事眛限聞睹。忠績鬱不揚。幽憤久乃吐。新廟抗海陾。椒荔永終古。來者亦可勸。天定固有數。

번역

섬 오랑캐가 예전에 화를 일으켜 전쟁의 먼지가 이 땅에 가득했네 정공이 막부에서 분발하여 단에 올라 깃발과 북을 세웠네 감격한 군사들이 진영을 움직이고 구름처럼 의로운 군대가 모였네 눈물을 흘리며 행차를 바라보고 담소하며 역적들을 사로잡았네 길게 몰아쳐 머무르지 않고 적을 바람과 비처럼 격파했네 공이 높아 매개체가 있었고 일은 잊혀져 듣고 보는 데 한계가 있네 충성스러운 공적이 드러나지 않아 깊은 분노를 오래도록 품다가 새로운 사당을 바닷가에 세우니 향나무와 오얏나무가 영원하리라 후세 사람들도 권면할 수 있으니 하늘이 정한 것은 본디 운명이네

185. 農圃集跋文[鄭相點]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위치: ITKC_MO_0284A_A071_174A, ITKC_MO_0284A_A071_174B ...

원문

先祖遺集與附錄。往歲戊子。左君吳公重周之莅統藩也。先人蓋嘗請而登諸梓。太常之狀。卽其後所成。且未有弁卷之文。常以不得竝刊爲恨。頃年相點求得閔中丞之序。遂幷狀文及先祖檄文見佚而追得者。欲繼入刊。以遂先志。顧私力未易就矣。適左尹公之世侄。復持是節。余又以先人之所以請於左尹公者請焉。公乃倂惠板材與雕手。踰旬而功訖。斯集之竟得完整。皆賴於前後吳公之力。余烏得無感哉。且先祖龍蛇之烈。集中諸公所記。固爲詳實。尙恨有未盡闡者。蓋不論所與抗之賊將耳。當時賊將淸正,行長二酋爲魁。而淸正視行長尤雄焉。異日晉陽之破。閑山之衊。摠淸正爲之。其鷙悍有如是矣。而方其分攻北入。蹂殘一路。臬帥鎭宰。竄伏縛執。無敢誰何。儻非公糾率白徒。制梃奮呼。落觜距而剪爪翼。則賊乘累勝之威。售射天之計。渡江直西。震驚乎遼廣之境。亦無異矣。而卒回翔躑躅。逃遁而晦焉。至於殲賊之夥。尤爲諸陣最。雖以平壤之勝。斬馘僅六百。幸州延安。又復下焉。而若公長坪之捷。一戰所斬。已過八百餘級。雙浦鏖殺之壯。人至畫圖而傳之。其功烈誠卓矣。夫敵之堅脆。當論其將。將苟强焉。其勝莫難。故武侯鹵城之敗司馬懿。朱子特書之。以見其難。然則公之摧敗淸正者。亦豈非於其莫難克者。能取金勝。而一無有論及此者。是可慨也。敢於卷尾著之如此。覽者勿以子孫之私言。而尙克以是益知公之鴻績則幸矣。□皇明甲申後百十五年戊寅暮春上澣。玄孫相點。謹識。

번역

선조의 유집(遺集)과 부록을 지난 무자년에 좌군 오중주(吳重周)가 통번(統藩)으로 있을 때 선인께서 청하여 간행하였는데, 태상(太常)의 장문(狀文)은 그 후에 완성되었고 아직 변권(弁卷)의 글이 없었다. 항상 함께 간행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근년에 민 중서(閔中丞)가 지은 서문을 구하여 얻어 마침내 장문과 선조의 격문 및 실전(失傳)되었다가 뒤에 찾은 것들을 아울러 간행에 넣어 선인의 뜻을 이룩하고자 하였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쉽지 않았다. 마침 좌윤공(左尹公)의 세조카가 다시 이를 청하였고, 나도 선인께서 좌윤공께 청했던 것을 청하니 공이 판재와 조각꾼을 아울러 베풀어 주어 열흘이 넘도록 공을 마쳤다. 이 유집이 마침내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모두 전후 오공(吳公)의 힘에 힘입었으니, 내가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선조의 용사(龍蛇) 같은 훌륭한 업적은 여러 공이 기록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은 참으로 상세하고 사실적이나, 아직 다 드러내지 못한 것이 있어 한스럽다. 대개 저항한 적의 장수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적장 청정(淸正)과 행장(行長) 두 수령이 우두머리였는데, 청정이 행장보다 더욱 웅맹하였다. 일찍이 진양(晉陽)을 함락하고 한산(閑山)을 유린한 것은 모두 청정이 한 것이니, 그 사나움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북쪽으로 나누어 공격하여 길을 짓밟고 지나갈 때 관찰사와 수령들이 도망치거나 숨어서 잡혀서도 감히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였다. 만약 공이 백성들을 규율하고 지휘하며, 창을 휘두르고 소리쳐 적의 코를 베고 발톱과 날개를 자르지 않았다면, 적은 연달아 승리한 위세를 타고 하늘에 닿으려는 계책을 부려 강을 건너 곧바로 서쪽으로 가서 요동(遼東)과 광주(廣州) 지역을 진동시키고 놀라게 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돌아와서 웅크리고 숨어 도망쳐 어두운 곳으로 달아났으니, 적을 섬멸한 것은 여러 전투 중에서도 특히 가장 컸다. 비록 평양의 승리라 해도 참과 목을 베어낸 것이 겨우 600명에 불과했는데, 다행히 주(州) 연안(延安)에서 또다시 패배하였고, 공이 거둔 장평(長坪)의 승리는 한 번 싸워 참과 목을 베어낸 것이 이미 800여 명을 넘었으며, 쌍포(雙浦)에서 적을 섬멸한 장엄함은 사람들이 그림으로 그려서 전하기까지 하니 그 공렬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대저 적의 강약은 그 장수를 논해야 합니다. 장수가 진실로 굳세면 승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후(武侯)가 노성(鹵城)에서 사마의(司馬懿)에게 패한 것을 주자(朱子)가 특별히 기록하여 그 어려움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공이 청정(淸正)을 꺾은 것도 어찌 어렵지 않은 자를 능히 이겨서 승리를 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 번도 이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개탄스럽습니다. 감히 권말에 이렇게 적으니, 보는 이는 자손의 사사로운 말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이를 통해 공의 큰 업적을 더욱 알게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 황명(皇明) 갑신년 이후 115년인 무인년 늦은 봄에 상환(上澣)이 쓰다. 현손(玄孫)이 상점(相點)을 합니다. 삼가 알립니다.

반응형

'AI번역 > 한국문집총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0287_수은집_睡隱集_번역  (1) 2026.06.15
0285_금계집_錦溪集_번역  (1) 2026.06.15
0283_취흘집_醉吃集_번역  (0) 2026.06.15
0281_경당집_敬堂集_번역  (0) 2026.06.15
0280_수색집_水色集_번역  (0) 2026.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