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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0_청강집_淸江集_번역

諺解 2026. 6. 13.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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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집(淸江集)

  • 저자: 이제신(李濟臣)
  • 생몰년: 1536-1583
  • 원문: 한국고전번역원_한국문집총간
  • 번역: gemma-4-12b-it-qat-hanmun-q4_0 로컬 기계번역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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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淸江集序[白沙]

문체: 序跋類 / 序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85B, ITKC_MO_0200A_A043_485C ...

원문

坱然太虛。人不見其合散者。浮游紛擾。其出也。猶磨之牝乎。升降飛揚。其運也猶槖之籥乎。天以之不墜。地以之不陷。日月山嶽以之而無殞闕枯塌者。是有孰把持而迴幹歟。而其翕斂之根。未嘗無敷播之機。降而感遇。凝聚爲變。則散殊而可象者。或瑩然淸通。或昏然粗濁。亦或坎然餒乏。爐錘一手。賦或萬品。以無制有。其猶埏埴。而凡所鼓而奮而動之者。在人爲純剛爲浩然爲沈深。豪爽者。何可類擧。而皆本之天得。匪容人力。如世所傳孟氏集義以直養。史遷詭觀而增長者。雖有內外粹駁之異。而其所以培植變化。又豈無人力之可容歟。間有隨感遇物。變現色相。曄然成采。則有俎豆節文之容。鍧然成聲。則有律呂鏗鏘之音。音由於思。有思斯有言矣。徒言不行。出而形容之者爲文。而必是資乎。向所謂鼓而奮而動之者爲之配而來持之。然後可以驗所賦之厚薄矣。唯厚賦而薄發者。淸江李先生是已。今去先生歿二十有六年。其胤子命俊。以先生詩若文。因以介於申玄老。屬余剞劂之。余受知先生有年矣。猶不能悉先生之有。今得本稿。伏而讀之。益知所賦之厚。非恒人所可歷階。是豈非韓子所謂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者乎。後之學先生之爲者。唯善養其氣幾矣。

번역

태허(太虛)에 둥실 떠서 사람들은 그 합산(合散)을 보지 못하고, 부유(浮游)하여 어지러운 것은 그것이 나온 것이니 마치 숫돌의 암석과 같고, 오르내리고 날아다니는 것은 그것이 운행하는 것이니 마치 주머니의 붓과 같다. 하늘은 그것으로 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고, 땅은 그것으로 하여 빠지지 않게 하며, 일월(日月)ㆍ산악(山嶽)을 그것으로 하여 무너지거나 결함이 없게 하는 것은 누가 잡아 돌려 움직여서인가? 그러나 그 합침의 근원에는 펴고 퍼뜨리는 기미가 없지 않아서, 내려와 감응하여 응집되어 변하게 되면 산란한 것이 서로 달라져 형상할 수 있게 되니, 어떤 것은 환히 맑게 통하고 어떤 것은 어둡게 거칠고 탁하며, 또 어떤 것은 움푹 패어 부족하기도 하다. 한 손으로 다스려 만물을 부여하여 무(無)로 유(有)를 제어하니, 이는 마치 진흙을 이어서 만드는 것과 같아서 모든 두드리고 떨치고 움직이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순강(純剛)이 되고 호연(浩然)이 되고 침심(沈深)이 된다. 호탕한 것은 어찌 다 같이 거론할 수 있겠는가마는, 모두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인력(人力)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맹자(孟子)의 집의(集義)와 같은 직양(直養)이나 사마천(司馬遷)의 괴이한 관점과 같은 증장(增長)은 비록 내외가 순수하고 배척하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기르고 변화시키는 데에 또 어찌 인력을 용납할 수 없겠는가. 간혹 감응하여 사물을 만나면 변하여 색상(色相)을 드러내어 환히 빛이 나면 제사 지내는 의식의 모습이 되고, 둥글게 이루어져 소리를 내면 음률이 있고, 소리는 생각에서 말미암고 생각이 있으면 말이 있으니,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문장으로 형용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이것에 근거해야 한다. 앞서 이른바 두드리고 떨치고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와서 배합한 뒤에야 부여받은 것의 후박을 알 수 있다. 오직 후박함을 받아도 발현이 부족한 사람은 청강(淸江) 이 선생뿐이다. 지금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26년이 되었는데, 그 아들 이명준(李命俊)이 선생의 시를 문장으로 삼아 신현로(申玄老)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각서(刻書)하게 하였다. 내가 선생을 알아온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아직도 선생에 대해 다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원고를 얻어 읽어보니 부여받은 것이 후박함을 더욱 알게 되었다. 이는 보통 사람이 단계마다 거쳐 갈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것이 어찌 한자(韓子)가 이른바 “물이 크면 물건이 뜨고 크고 작은 것들이 모두 떠 있다.”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뒤에 선생을 배우는 자들은 오직 그 기미를 잘 기르는 것이라 하겠다.

원문

庚戌仲夏。白沙老人序。

번역

경술년 여름에 백사 노인이 서하다.

2. 淸江先生世系及子孫譜

문체: 傳記類 / 系譜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87B, ITKC_MO_0200A_A043_487C ...

원문

淸江先生世系及子孫譜,始祖李棹公,全義人,初名齒事麗祖涉錦江有功,賜今名。爲統合三韓開國翊贊功巨三重大匡太師墓在貫縣五雲住山城,卽公舊居也。大將軍公子子允寬,刑部侍郞。夫人邊氏,藉加思立中之女。密宜司公子子得榮,子康,精勇衛大將軍子順,係勝別將。夫人蔡氏,籍陰城,中郞將冲之女。子丘直,始入本朝。子秀英,兵部尙書。子仟,正憲大夫·鷹楊軍大將軍·知禮部事。夫人張氏,籍川寧,中郞將仁起之女。子貞幹。子文景,千牛衛大將軍子子華,密直司事。夫人辛氏,藉靈山佐郞佐宣之女。高麗史,李混弟子和,非和字也,乃華字也。此特麗史之誤也。子士寬。

번역

청강 선생(淸江先生)의 세계 및 자손보. 시조 이조공(李棹公)은 전의(全義) 사람이다. 처음 이름은 치사(齒事)로, 고려 태조가 금강을 건너갈 때 공이 있어 지금의 이름을 하사받았다. 통합삼한개국익찬공거삼중대광태사(統合三韓開國翊贊功巨三重大匡太師)이다. 묘는 관현(貫縣) 오운주산성(五雲住山城)에 있는데, 바로 공의 옛집이다. 대장군 공자윤관(大將軍公子允寬)은 형부 시랑(刑部侍郞)이고, 부인은 변씨(邊氏)로 저가사립중(藉加思立中)의 딸이다. 밀의사 공자득영(密宜司公子得榮)과 자강(子康)은 정용위 대장군(精勇衛大將軍) 자순(子順)으로, 계승 별장(係勝別將)이다. 부인은 채씨(蔡氏)로 저 음성(陰城) 중랑장(中郞將) 충(冲)의 딸이다. 자구직(子丘直)은 처음 본조에 들어왔다. 자수영(子秀英)은 병부 상서(兵部尙書)이고, 자천(子仟)은 정헌대부(正憲大夫)ㆍ응양군 대장군 지례부사(鷹楊軍大將軍知禮部事)이다. 부인은 장씨(張氏)로 저 천녕(川寧) 중랑장 인기(仁起)의 딸이다. 자정간(子貞幹)과 자문경(子文景)과 자천우위 대장군(子千牛衛大將軍) 자자화(子子華)는 밀직사사(密直司事)이고, 부인은 신씨(辛氏)로 저 영산좌랑 좌선(靈山佐郞佐宣)의 딸이다. 《고려사》에 이혼(李混)의 제자 화(和)는 화가 자(字)가 아니라 바로 화(華)이니, 이는 고려사의 잘못이다. 자사관(子士寬)이 있다.

원문

典郞夫人柳氏,籍文,監察大夫靖之女也。子長,字子女贈正憲大兵判書·修殿大提學金君謚于簡公,行推忠靖難佐迎對員憲大夫·參贊議敢府事·行嘉善大夫·戶曹典書。貞大夫人金氏,籍樂安,典校仁琯之女,壽至百二歲,墓在豐德與天里。子譸疇捴字贈喜忠大夫·曹參判·同知羲事,行通故大夫·掌院判决事字夫公事百歲,每至孝,世宗嘉之,特公資憲大夫·中樞號事,仍九杖封公妣爲貞大夫人。一時公卿咸賦詩頌,有慶壽集行。母卒,贈謚孝靖公夫久女氏,籍南平,門下理順平君達漢之女,在長湍于里。子公違,字坤贈善大夫·尹曺參判,爲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揚州牧使。夫人金氏,籍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縝疑觀象監事·金城府院君·行嘉靖大夫·漢府尹,卽義也。夫人韓氏,籍淸州,西原府院君女,簡公尙敬之女,墓在坡州馬塲原。子諱文誠,字明仲,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折衝將軍·守慶尙右道兵馬節翼功臣·通政大夫·兵曹參議。夫人洪氏,籍南陽,中軍司正興祖之女,典書矩孫,墓在廣州胎藏里。府尹公第六子子諱恕長,字子忠,精忠出氣敵愾功臣·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全城君贈謚襄簡公。夫人宋氏,籍淸州,大丘郡事處恭之女,墓在坡州馬塲原。節度公子子諱濟臣。夫人李氏,籍固城,兵馬使垤之女。墓上同。子諱允純,字一之,贈通政大夫·刑曹參議·行通訓大夫·司䨣監副正。夫人南氏,籍宜寧,庶尹任之女,莫在衿川馬塲子耆俊,光州光原君伯謙之女。墓上同。子諱仁孫,字宗孝,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㪧谷縣令。夫人柳氏,籍文化,瑞興府使季孫之女,墓上同。無嗣,以節度公爲後。節度公,卽淸江先生之考也。子重基,度使。夫人禹氏,籍丹陽,富寧府使禮孫之女,墓在揚根西倻美谷,出後縣令公子行健,字夢應,號淸江。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蟄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行,嘉善大夫·咸鏡北道兵馬節度使。夫人尙氏,籍木川,領議政成安公震之孫,宣務郞鵬南之女,墓在。字孚先,號負暄。少有能詩名,登文科,不幸早世,官上承文院副正字,娶監役金益輝女子。壽俊字台微,號志范。天性娶縣監豐川任穡女,子厚基,前娶都事宜寧南琥女,生三子三女。子學基無后,娶坡平尹儼女,娶完山李廷幹女,女鄭涌。子行遠娶監司鍗城朴東說女女。女子行進女。女子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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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랑부인(典郞夫人) 유씨는 적문(籍文) 감찰대부 정지(靖之)의 딸이다. 아들 장(長)은 자가 자녀(子女)로 증직(贈職)이 정헌대병판서수전대제학(正憲大兵判書修殿大提學) 김군시(金君謚)이고, 행추충정난조영대원헌대부참찬의감부사행가선대부호조전서(行推忠靖難佐迎對員憲大夫參贊議敢府事行嘉善大夫戶曹典書)이다. 정대부인 김씨는 적문 낙안(樂安) 전교 인관(典校仁琯)의 딸로, 102세에 죽었다. 묘소는 풍덕(豐德)과 천리(天里)에 있다. 아들 -원문 빠짐.-자(字) 증희충대부조참판동지희사행통고대부장원판결사자부공사백세(贈喜忠大夫曹參判同知羲事行通故大夫掌院判決事子夫公事百歲)이다. 매번 효도할 때마다 세종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공자헌대부 중추호사(公資憲大夫中樞號事)로 삼고, 이어 구장(九杖)을 내려 봉비(封妣)를 정대부인(貞大夫人)으로 삼았다. 한 시대의 공경들이 모두 시를 지어 송축하였다. 경사스러운 일로 수연(壽宴)을 행하였다. 모친이 돌아가셨다. 증시 효정공 부구여씨는 남평(南平)의 적호(籍戶)를 가진 문하리순평군(門下理順平君) 달한(達漢)의 딸로 장단(長湍) 우리(于里)에 살았다. 아들 공위(公違)는 자가 곤(坤)이며 증시 선대부 윤조 참판으로 동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 양주 목사를 지냈다. 부인 김씨는 적호가 증순충적덕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진의관상감사 김성부원군(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縝疑觀象監事金城府院君) 행 가정대부 한부윤(行嘉靖大夫漢府尹)인데, 바로 의야(義也)이다. 부인 한씨는 적호가 청주(淸州)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의 딸로 간공 상경(簡公尙敬)의 딸이며 묘소는 파주 마장원(馬塲原)에 있다. 아들 휘 문성(文誠)은 자가 명중(明仲)이며 증시 가선대부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절충장군 수경상도 병마절익공신 통정대부 병조 참의이다. 부인 홍씨(洪氏)는 남양(南陽) 출신으로 중군사정(中軍司正) 홍흥조(洪興祖)의 딸이다. 전서구(典書矩) 손자(孫子)의 묘소는 광주(廣州) 태장리(胎藏里)에 있다. 부윤공(府尹公) 제6자 자휘(子諱) 서장(恕長)은 자(字)가 자충(子忠)이다. 정충출기적호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전성군(全城君)에 증직(贈職)되고 시호는 양간공(襄簡公)이다. 부인 송씨(宋氏)는 청주(淸州) 출신으로 대구군(大丘郡) 사처공(事處恭)의 딸인데 묘소는 파주 마장원(馬塲原)에 있다. 절도공자(節度公子) 자휘(子諱) 제신(濟臣)이다. 부인 이씨(李氏)는 고성(固城) 출신으로 병마사(兵馬使) 이숙(李垤)의 딸인데 묘소는 위와 같다. 아들 자휘(子諱) 윤순(允純)은 자가 일지(一之)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刑曹參議), 행 통훈대부(行通訓大夫), 사도감 부정(司䨹監副正)에 증직되었다. 부인 남씨(南氏)는 의령(宜寧) 출신으로 서윤(庶尹) 임지(任之)의 딸인데 묘소는 금천 마장(衿川馬塲)에 있다. 아들 자기준(子耆俊)은 광주(光州) 광원군(光原君) 이백겸(李伯謙)의 딸이다. 묘소는 함께 있다. 아들 인손(仁孫)은 자가 종효(宗孝)이고, 증직이 가선대부 호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 섭곡 현령이다. 부인 유씨(柳氏)는 본관이 문화(文化)로 서흥부사(瑞興府使) 계손(季孫)의 딸인데, 묘소는 함께 있다. 자식이 없어 절도공을 후사로 삼았는데, 절도공은 곧 청강 선생의 아버지이다. 아들 중기(重基)는 도사(度使)이다. 부인 우씨(禹氏)는 본관이 단양(丹陽)으로 부사(富寧府使) 예손(禮孫)의 딸인데, 묘소는 양근(揚根) 서야미곡(西倻美谷)에 있다. 후손으로 현령 공자 행건(公子行健)이 나왔는데 자가 몽응(夢應)이고 호가 청강이다. 증직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사 홍문관 칩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행 가선대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다. 부인 상씨(尙氏)는 적목천(籍木川) 영의정 성안공(成安公) 진(震)의 손자이며 선무랑(宣務郞) 붕남(鵬南)의 딸이다. 묘소는 있다. 자는 부선(孚先), 호는 부훤(負暄)이다. 젊어서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 관직은 상승문원 부정자(上承文院副正字)이며 감역(監役) 김익휘(金益輝)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수준(壽俊)은 자는 태미(台微), 호는 지범(志范)이다. 천성(天性)은 현감 풍천(豐川) 임석(任穡)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아들 후기(厚基)는 전에 도사 의령남(宜寧南) 남호(南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3아들과 3딸을 낳았다. 아들 학기(學基)는 후사가 없어 파평(坡平) 윤엄(尹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완산(完山) 이정간(李廷幹)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딸 정용(鄭涌)은 아들 행원(行遠)을 감사 팔성(四城) 박동설(朴東說)의 딸에게 시집보냈다. 딸 행진(行進)의 딸은 없다.

원문

孝友負氣義,喜施與,咸稱韙人。登文科,官止通政。前娶同知安東權恂之女,生學基。中娶陽川許漑女,無后。後娶陽川許昊女,生子女。閔有慶文科子碩基子閔聖淸娶府使晋州柳時會女,女鄭廣敬子。閔聖和娶府尹李弘冑女女。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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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으며 기의(氣義)를 지녔다. 베풀기를 좋아하여 모두들 어진 사람이라 칭송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그쳤다. 전처는 동지 안동 권순(權恂)의 딸을 맞이하여 학기(學基)를 낳았다. 중전은 양천 허개(許漑)의 딸을 맞이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후전은 양천 허호(許昊)의 딸을 맞이하여 자식을 낳았다. 민유경의 문과 급제한 아들 석기(碩基)의 아들 민성청(閔聖淸)은 부사 진주 유시회(柳時會)의 딸을 맞이하였고, 딸 정광경(鄭廣敬)의 아들을 맞이하였다. 민성화는 부윤 이홍주(李弘冑)의 딸을 맞이하였고, 딸은 없다.

원문

女申欽女科。子耇俊前娶豐川任繼老女,生二子五女。後娶書川宗義女女韓正國女。女朴儫子申翊聖東陽尉,尙宣宗大王第二女貞淑翁主女趙啓遠女。女子申翊全女子裕基娶府使咸陽呂祐吉女女女子女子命俊,文科,娶義城金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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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신흠녀(申欽女)는 과거에 급제하였다. 아들 고준(高俊)은 전에 풍천(豐川) 임계로(任繼老)의 딸을 얻어 두 아들과 다섯 딸을 낳았다. 뒤에 서천(書川) 종의(宗義)의 딸과 한정국(韓正國)의 딸을 얻었다. 딸 박봉(朴儫)은 신익성(申翊聖) 동양위(東陽尉)와, 상선종대왕(尙宣宗大王)의 둘째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딸 조계원(趙啓遠)과, 여자 신익전(申翊全)의 딸을 얻었다. 자식 유기(裕基)는 부사 함양 여우길(咸陽呂祐吉)의 딸을 얻었고, 딸은 명준(命俊) 문과에 급제하여 의성 김찬조(義城金纘祖)를 얻었다.

원문

女側室女朴葵英妾女女子,聖基女女子,顯基女女子子側室子耕俊學官,娶礪山宋男女。側室子仂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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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실 여인 박규영(朴葵英)의 첩 여인 자자(女子), 성기의 여인 자자(女子), 현기의 여인 자자(女子)의 아들 측실 자경준(耕俊)은 학관이 되어 여산 송남녀를 맞이하였다. 측실 자륙준(子仂俊)의 아들이다.

3.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世子師。行嘉善大夫,咸鏡北道兵馬節度使兼鏡城都護使。淸江李公神道碑銘。〔原注:崔岦□撰〕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1B, ITKC_MO_0200A_A043_491C ...

원문

余與淸江李公。太學生時相知。旣而。仕先後出入異。二十年不相聚也。公之將赴晉陽。過余而言曰。近得予爲人爲碑碣文者而讀之。殊有古作者法。吾甚愛之。以吾亦從事於此。而知其至之不易也。余雖讓不敢當。竊幸其知之非衆人之知也。次日走謝焉。公則出其所爲者曰。願有相止。余亦覺于時輩得之。罕有此文字也。蓋歡然以爲眞相知之新然。遂以作千里之別。自後出入愈不同。不得相益爲歎。乃五年而聞其奄忽。則終古之痛也又十八年。至今。公之仲子江華使君。來謂余曰。先君入地久。中經兵亂。未克有墓隧之刻。敢以文請。嗚呼。以向所辱公之知。而效之於公。宜無以辭。獨可悲者。公亦何嘗遽以此相期哉。抆涕而諾之。謹按公之系曰。全義李氏。本高麗開國功臣太師棹之後。代有簪組。以入□本朝。而自佐翼功臣,兵曹參議。□贈兵曹判書平簡公諱禮長。掌隸院判決事。□贈兵曹參判諱時珤。行楊州牧使。□贈戶曹參判諱公達。於公考守慶尙右道兵馬節度使。□贈兵曹參判諱文誠。爲曾祖考,祖考,考三代。而公考出後於同宗家。則自敵愾功臣。司憲府大司憲。襄簡公諱恕長。司宰監副正。□贈刑曹參議諱允純。歙谷縣令。□贈戶曹參判諱仁孫。實爲三代公。妣貞夫人丹陽禹氏。□贈兵曹參議諱孝從之孫。行富寧都護府使諱禮孫之女。以嘉靖丙申生公。諱某。字某。五歲始學文字。便自嗜好。不易以它弄。七歲作句語。往往驚人。八歲。大人在邊郡。而王父見背。則獨當喪。入承諸內。出應客辦。治哀盡。一如成人之爲。十歲隨大人任于昌原也。行遇水石稍淸致處。輒卸馬吟賞。及監司入府。觀者甚盛。獨不肯觀曰。吾復不當如是耶。旣而。益喜讀書。不釋手。大人顧懼其傷。夜則爲不設燈火。然不可禁。曺南冥植一見異焉。期以遠大。十七歲。受學於趙龍門昱。業日進。是歲。聘于尙成安公之門。成安常稱大器大器。戊午。中司馬試。甲子。登文科。補承文院權知正字。乙丑。至副正字。而錄弘文館選。□上御養和堂。進文臣凡在選者。試用□御題近體詩五首。公作皆第一。□命超資以褒之。丙寅。薦入藝文館。爲閱檢。至奉敎。例帶春秋館記事官。其書事無所避。而引後輩不阿。則側目者多。蹭蹬職此始矣。隆慶戊辰。遷成均館典籍。轉刑,工,戶三曹佐郞,司憲府監察。薦授兵曹佐郞兼記事官。與修□明廟實錄。在本曹。剸煩發奸。聲出諸郞上。吳判書祥常重之。已而。兼監察。從事賀至□中朝。一行肅淸。爲近古稱首。歸未復。□命。由典籍。還曹■。以能故。庚午。由學官。拜禮曹正郞,知製□敎兼記注官。自後宅遷多帶。此在所略也。蔚山郡缺守。朝議以郡多土豪難治。須遣材望文臣。三易而適公。旣至。立法號令。期月而逋糴輸恐後。帖然無敢爲橫。民有兄弟爭財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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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강(淸江) 이공과 태학생 시절에 서로 알았다. 그 뒤로 벼슬살이하면서 선후가 달라 출입이 달라서 20년 동안 만나지 못하였다. 공이 진양(晉陽)으로 부임하러 가면서 나를 지나가며 말하기를, “근래 내가 남을 위해 지은 비갈문(碑碣文)을 얻어 읽었는데, 매우 고인의 작품과 같아서 내가 매우 좋아한다. 나도 이 일에 종사하여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 않음을 알았다.” 하였다. 나는 비록 사양하고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남들과는 다른 것을 알아준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 다음 날 달려가 사례하였다. 공은 자신이 한 일을 꺼내면서 말하기를, “그치기를 원한다.” 하였는데, 나도 그때에야 그가 얻은 것이 보통 사람들은 얻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참으로 기뻐서 진정한 지기(知己)를 새로 얻었다고 여겼다. 드디어 천 리 밖으로 이별을 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출입이 더욱 달라서 서로 도움을 받지 못함을 스스로 탄식하였다. 5년 뒤에 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예로부터의 통탄이요 또 18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공의 둘째 아들인 강화 부사가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선군(先君)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고 중간에 병란을 겪어 능침을 마련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감히 문청(文請)을 올리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공의 지우(知遇)를 받들었던 것을 본받는 것이니 사양할 수 없습니다. 다만 슬픈 것은 공께서도 어찌 일찍이 이렇게 기약하였겠습니까. 눈물을 훔치고 승낙하였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본래 고려 개국공신 태사(太師) 조(棹)의 후손으로 대대로 벼슬을 지내다가 본조에 들어와 좌익공신(佐翼功臣)과 병조 참의를 지냈습니다. □ 증 병조 판서 평간공(平簡公) 휘 예장(禮長)은 예문관 판결사(判決事)를 맡았고, □ 증 병조 참판 휘 시곤(時珤)은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지냈으며, □ 증 호조 참판 휘 공달(公達)은 공의 고모부로서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습니다. □ 증 병조 참판(贈兵曹參判)휘는 문성(文誠). 증조고(曾祖考), 조고(祖考), 고고(考考)가 3대에 걸쳐 공신이 되었는데, 공고(公考)가 같은 종가의 집안에서 나온 뒤로는 적대적으로 대립하였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양간공(襄簡公)휘는 서장(恕長),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 □ 증 형조 참의(贈刑曹參議)휘는 윤순(允純), 흡곡 현령(歙谷縣令). □ 증 호조 참판(贈戶曹參判)휘는 인손(仁孫). 실로 3대 공신이다. 비 정부인(貞夫人) 단양 우씨(丹陽禹氏). □ 증 병조 참의(贈兵曹參議)휘는 효종지손(孝從之孫), 행 부령 도호부사(行富寧都護府使)휘는 예손(禮孫)의 딸. 가정(嘉靖) 병신년에 태어났다. 공은 휘가 모(某)이고 자가 모(某)이다. 5세에 글씨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곧 스스로 좋아하여 다른 장난을 하지 않았다. 7세에 시구를 지었는데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8세에 어른이 변방 고을에 있을 때 왕부(王父)가 죽으니 홀로 상을 당하였다. 궁중에 들어가서 여러 일을 맡아 처리하고 나가서는 손님 접대를 도맡아 하였다. 애를 다스리는 것이 성인과 똑같았다. 10세에 대인을 따라 창원(昌原)으로 부임하였는데, 가다가 물과 돌이 조금 깨끗한 곳을 만나면 매번 말을 타고 내려와 시를 읊고 감상하였다. 감사가 부(府)에 들어오자 보는 이가 매우 많았는데도 유독 보려고 하지 않으며 “내가 다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 뒤로 독서를 더욱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대인이 밤에는 등불을 켜지 말도록 하였으나 금할 수 없었다. 조남명(曺南冥)은 남명(南冥)은 장종정(張宗正)의 자호이다. 남명이 한 번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서 원대한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17세에 조 용문(趙龍門) -용문은 조광조(趙光祖)의 자호이다. - 옥에게 배워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다. 이해에 상성안공(尙成安公) -상성안은 김창흡(金昌翕)의 자호이다. -의 문하에 빙문(聘問)하였는데, 성안이 항상 “큰 그릇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무오년 중사마시(中司馬試)에 급제하고 갑자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 을축년에 부정자(副正字)에 이르렀고 홍문관의 선발에 기록되었다. 윗부분 빠짐 상께서 양화당(養和堂)에 나아가 문신으로서 선발된 자들을 진현하였다. 시험 삼아 어제(御題) 근체시 5수를 지어내게 하였는데, 공이 지은 것이 모두 제일이었다. 이에 명을 내려 자급을 올려 포상하였다. 병인년에 추천되어 예문관에 들어가 열검(閱檢)이 되었고 봉교(奉敎)에 이르러는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였는데, 글짓는 일이라면 피하지 않았으나 후배를 끌어대어 아첨하지 않으면 눈을 흘기는 자가 많았으니, 이 직책에서 서성거린 것이 이때부터였다. 융경(隆慶) 무진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겨졌다가 형조ㆍ공조ㆍ호조의 좌랑을 거쳐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추천되어 병조 좌랑 겸 기사관이 되어 명묘실록(明廟實錄)을 편찬하였는데, 본조에서 번거롭게 간통을 발각시키자 그 소문이 여러 낭관에게까지 퍼졌다. 오 판서 상상(吳判書祥常)이 중시하여 얼마 안 가서 감찰을 겸임하였다. 하계에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한 차례 숙청되어 근고(近古)의 으뜸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는데,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명은 전적에서 조참으로 돌아갔다.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경오년에 학관을 거쳐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지제교 겸기주관(知製敎兼記注官)은 후택(後宅)이 옮겨진 뒤로 많이 띠게 되었으니, 이는 소략한 부분이다. 울산군에 수령이 비었을 때 조정의 의논에는 군에 토호가 많아 다스리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재주와 명망 있는 문신을 보내어 세 번 바꾸어 적임자를 뽑고, 도착하면 법을 세워 호령하여 한 달 안에 포흠(逋欠)과 수송이 지체되는 일이 없게 하고, 백성들이 형제간에 재물을 다투는 일도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원문

公不問曲直。直諭以友愛之理。言下卽已。有欲專婦家財者。不嫁婦妹年幾卌。公繫治其人。而資其婚。析其産。俾業焉。公之剛明。聞一道。訟小大歸之。庭亦無留。例得紙布甚羸。悉以付幹事吏。方便取息。以代徭賦。民得廿年比兵前無一事。壬申。罷還。猶以散秩。隸習承文。萬曆癸酉。敍復軍器寺僉正。轉成均司藝。乃拜司諫院正言。及以禮曹正郞。出湖西御史。還成均直講內贍僉正。出爲淸州牧使。値有籍岳之擧咄嗟而足元額。餘以設二隊。甲戌。解還直講。乃拜司憲持平。公之去蔚去淸。皆以母夫人疾。故不盡其能。間有兩南公幹敬差之命三。亦皆以故辭不行。其入臺諫。最後於人。則宜歸譏當時。而公且無意以此自見矣。尋由漢城府庶尹。丁內艱。乙亥。又丁外艱。戊寅。制除。復司僕僉正。乃拜司諫。則辭不出。晉爲州。地大物衆。豪橫爲患。什倍於蔚。自公在服。朝議待公以大治。至是果拜牧使。旣下車。首訪弊之在民者。一釐革之。糶糴之際。右戶百計毋受。使下戶獨困。而粟積於陳。公按佃簿以爲給。無敢頡者。削鄕社司馬所賸占田奴。歸之書院。且觸事折揠。强者不饒。鼠輩害公之爲。與亦吏謀竊公兵符。以冀坐免。事聞。□上命鞫尤者數人。其黨散抵□輦下。大肆誣謗。公卽疏陳不可在任狀。踵而去官。行奉批旨勉留。已無奈矣。歸則扁其居曰歸愚。圖書花竹以自娛。不與人往還。若將終身焉。後十年。余爲晉則豪強大衰息。自經公政已然云。卽公亦果。豈必其效於身哉。庚辰。以江界西塞重鎭而凋甚。有用儒帥之議。起廢公。超通政階。拜府使。至則撫摩爬搔。氓卒大蘇。可使悅而忘勞。然後從事版築。復自運石。以倡用能。不閱歲而城池器械。噲然改觀。御史上甚最。□賜表裏一襲。寵嘉之。帥褊裨以嚴。而時因較射。饗賚厚。士知威愛。至沿江諸帥。亦化於公。不敢爲非曰。得無公聞乎。壬午。復用議者。□命陞公嘉善。拜咸鏡北道兵馬節度使。其卽政一如在西時。而體統加大。規設白殊矣。恤役戍之苦。則贖無留藏。勸列鎭以廉。則優其廩餼。及備災荒。已毒癘。尤盡心焉。至嘗自貶其食。放出侍妓。以供民艱。癸未。藩胡告亏酋來屯兵。公曰。乘我之饑。■不自相讐殺而已。卽爲布置。有申砬,金遇秋等之分遣。未幾。賊果犯慶源。而府使金璲。不稟節制。輕出兵以敗。猶復聲援未接。而賊再至敗之。然乃後訓戎乾原之戰。我顧乘勝。焚蕩胡家八十餘區。斬獲二百三十餘級。則公本遣諸將力也。于時公平生不相悅者。起而攻其敗。會公馳啓亦至。□上欲以功掩罪。而論益峻。且以涖斬金璲留日。爲棄□君命。遂致之理。□命減死律。謫于義州之麟山鎭。在配所也。官給使令則却。有勞以酒樂及問餽稍優則辭。一味酸苦。惟以文墨自遣。數月。聞長子死。哀傷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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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곡직(曲直)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우애의 이치로써 유시하면 말이 끝나자마자 이미 이루어졌다. 부가재(婦家財)를 독차지하려는 자가 있으면, 시집가지 않은 부매(婦妹)가 나이 40에 가까운 경우에도 공은 그 사람을 잡아다 다스리고 혼사를 마련해 주며 재산을 나누어 주어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공의 강명함이 한 도에 알려져서 크고 작은 송사(訟事)가 모두 결말이 나게 되었고, 뜰에는 머무는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써 지포(紙布)를 얻은 것이 매우 적었는데, 모두 간사리(幹事吏)에게 주어 편의대로 취하여 요부(徭賦)를 대신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20년 동안 전쟁을 치르기 전에는 한 가지 일도 없었다. 임신년에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여전히 산질(散秩)로 습승문관(習承文官)에 예속되었다가 만력 계유년에 군기시 첨정으로 서복(敍復)되고, 성균사 예문관 직강 내선첨정(成均司藝文館直講內贍僉正)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예조 정랑으로 호서 어사가 되었다가 돌아와서 성균사 직강 내선첨정을 거쳐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갔는데, 이때 적악(籍岳)의 일이 있어 갑자기 발밑에 족액(足額)을 썼다. 그 나머지는 두 대(隊)를 설치하였다. 갑술년에 직강(直講)을 해제하고 돌아와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울산과 청주로 떠난 것은 모두 모친의 병 때문에 능력을 다하지 못한 것이었다. 중간에 두 번이나 양남(兩南)의 공무를 맡으라는 명을 받았으나 또한 모두 사유를 들어 거행하지 못하였다. 대간으로 들어가서는 마지막에 남에게 비난받았으니, 마땅히 당시의 일로 돌려야 하는데도 공은 이로 인해 스스로 흠이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곧이어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정내간(丁內艱)과 을해년에 또 정외간(丁外艱)을 지냈고, 무인년에 제수되어 사복시 첨정으로 복직되었다. 이에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진주 부사(晉州府使)가 되었다. 진주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호횡(豪橫)이 근심거리였는데, 울산보다 열 배나 더 심하였다. 공이 부임한 뒤 조정의 의논은 대대적인 정치를 기대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목사(牧使)에 제수되어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는 것을 제일 먼저 찾아내어 한결같이 바로잡았고, 환곡을 분급할 때에는 우호백계(右戶百計)를 받지 않았다. 고을 수령이 된 뒤로 하호(下戶)만 홀로 고통받고 곡식은 묵어 쌓여 가는데, 공이 전부(佃簿)를 조사하여 나누어 주게 하고 감히 거절하는 자가 없도록 하였다. 향사(鄕社)와 사마(司馬)가 남겨 먹던 전노(田奴)를 삭탈하여 서원(書院)에 귀속시켰다. 또 일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자는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쥐새끼 같은 무리가 공의 행위를 해치려고 아전과 함께 공의 병부(兵符)를 훔쳐 가지고 앉아서 면직되기를 바랐다. 이 일이 보고되어 상이 우악한 몇 사람을 국문하라고 명하자 그 무리가 흩어져서 연하(輦下)에 이르러 크게 무함하고 비방하였다. 공은 즉시 소장(疏章)을 올려 직임을 맡아 있을 수 없다고 진달하고 곧바로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비지(批旨)를 받들고 머물라는 명을 행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가서는 그 집을 귀우(歸愚)라고 편액을 걸고 도서와 화초로 스스로 즐기며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으니, 마치 종신토록 그렇게 하려는 듯하였다. 10년 뒤에 내가 진주(晉州)의 수령이 되었는데, 호강(豪強)들이 크게 쇠퇴하고 잠잠해진 것이 공의 정사를 거친 뒤부터 그러했다고 한다. 이는 바로 공도 과연 몸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강계는 서쪽 변방의 중요한 진영인데 매우 쇠락하였으므로 유수(儒帥)를 쓰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래서 공을 파직하였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려 부사(府使)에 제수하였다. 그곳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애무하며 긁어 주어서 백성들이 크게 위로받아 기뻐서 고생을 잊게 하였고, 그런 뒤에 공사를 감독하여 돌을 운반하는 일을 다시 시켜 능한 자를 쓰도록 권장하였다.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성과 치성과 기계(器械)가 완전히 바뀌어 어사(御史)의 상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하였다. 이에 표리(表裏)로 된 옷 한 벌을 하사하여 총애하고 가상히 여겼다. 수령은 엄격하게 하고 신하들은 두려워하였으며, 때때로 활쏘기를 시켜서 주어 주는 물품이 후하니, 선비들은 위엄과 사랑을 알았다. 연강(沿江)의 여러 수령들도 공에게 감화되어 감히 잘못된 짓을 하지 않았으니, 공의 명성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임오년에 다시 의논한 자가 있어 공을 가선대부로 올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하였다. 그 즉위 정사는 서쪽 지방에 있을 때와 같았으나 체통은 더욱 커지고 규정은 매우 특별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그가 죄를 씻을 때에는 남겨 두거나 감추는 것이 없었고, 진열(鎭列)을 권면할 때에는 그들의 양식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재난과 기근이 닥치고 전염병이 돌았을 때는 더욱 마음을 다하였다. 심지어 자기의 음식을 줄이고 시기(侍妓)를 내보내 백성들에게 주기도 하였다. 계미년에 번호(藩胡)가 고구려(故句麗)의 추장(酋長)이 와서 병사를 주둔시켰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의 기근을 틈타 서로 싸워 죽일 뿐만 아니라 즉시 포위하고 공격할 것이다.” 하고는 신진(申砬), 김우추(金遇秋) 등을 나누어 파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적이 과연 경원(慶源)을 침범하였는데, 부사 김신(金璲)이 절제(節制)를 여쭈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군사를 내보냈다가 패배하였다. 그래도 다시 성원(聲援)을 받지 못하고 적이 두 번 와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훈련도감에서 건원(乾原)의 전투를 치를 때에 우리 군사가 승세를 타고 호가(胡家) 80여 구역을 불태우고 적병 230여 명을 베어 죽였으니, 이는 공이 본래 파견한 장수들의 힘이었다. 이때에 공과 평생 서로 좋아하지 않던 자들이 일어나서 그 패배를 공격하였다. 공회(公會)에서 공초를 올려서도 이르렀다. □ 상이 공으로 죄를 덮으려고 하였으나 논의가 더욱 준엄하였다. 또 금인(金璲)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어 날짜를 끌었던 것을 군명을 버린 것으로 여겨 마침내 사형을 감하여 의주(義州)의 인산진(麟山鎭)에 귀양 보냈다. 배소(配所)에 있었다. 관청에서 내리는 음식과 물품은 거절하고, 수고로이 보내 주는 술과 음악 및 조금 넉넉하게 보내 주는 음식을 사양하며 한결같이 괴롭고 고달프게 지내면서 오직 문묵(文墨)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몇 달 뒤에 장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

원문

因疾以卒。乃十月六日。而夕有雷動之異。臨絶。聲在喉間。猶吟老杜出師未捷身先死之句。所恨。□上恩莫報。而以勉其子弟。無一語及家。甲申正月。歸襯都下。李知申友直。啓言公一生淸白及北事亦有功。□上亟是之。復其官。四月某日。以葬于楊根郡西水回里寅坐申向之原。旣而。□上重念公罪微功著。淸節可尙。欲追贈兵曹判書。親札激切。下大臣議。議無不合。獨前未逞憾者。猶在爭執紛然。竟□命郞官祭于墓。公風姿峻茂。氣槪磊落。如小節曲務。非唯不爲。亦不肯言。顧於家行。細大必謹。奉親之怡。居喪之戚。以及祠堂如在之常。諱日終身之變。有或過禮而無不及。其在公所。凡有尊敬如望闕,祭社稷與先聖廟,先賢祠。必躬以時不怠。推是道也。友愛同氣。比分異先業。自以逮親榮故得。視姊爲多。則更優與之。幷諸庶弟。加其數。厚於宗族。尤先貧約。其爲騎曹久。騶直入門。卽以頒施之。無所留。夫人外舅無子。欲託後事於公。悉歸其財則固讓。勸立姓姪乃已。與人交。必意氣相許。一輸以肺肝。則不復有所變節。急人之急。憂人之憂。有古人所難能者。然見有傾巧以赴時。貪邪以失己者。則心疾而面攻之。不少恕。公之仕旣故讓夷而急病。其志也。聞有遠外之□命。盤錯之寄。則樂往而勇爲之。聽事必朝服。事至綜理。事過而省。大事則沈幾先。不以宴居廢也。敎子弟。有恒言曰。財物視之當如糞土。又曰。學者而有富貴利達之心。反不如不學之爲愈。爲子女求婚。惟視家法如何耳。所爲詩文若干卷。尤長於文。有樹立。書行草篆隸具工。嘗作淸江居士對。以發其所以自謂者。貞大人木川尙氏。宣務郞諱鵬南之女。實領議政成安公諱震之孫。十五歲。歸公。後公卒十一年。癸巳。隨仲子通津任。避賊江華。三月望日以卒。越某年某月某日。祔葬。其爲婦爲母。咸有法式。以公生不治家。而飣餖必豐潔。不以有無聞公。公歿而衆妾羣孼。有所仰以恃。如公在時。此尤過人之行也。生子男四人女二人。男長耆俊。官止承文副正字。次壽俊。卽江華府使。皆文科也。次耈俊。業文。次命俊。生員。女適長閔有慶。弘文修撰。次適申欽。弘文副提學。正字娶監役金益輝女。生二男。重基,厚基。竝上舍生。府使初娶同樞權恂女。生男學基。早死。再娶士人許漑女。無子。三娶士人許昊女。生二男。幼。耈俊氏娶士人任繼老女。生二男三女。長裕基。餘幼。命俊氏娶士人金纘祖女。生男女。幼。修撰生二男。聖淸,聖和。二女幼。副學生男翊聖。東陽尉。尙貞淑翁主。女幼。側出子八俊,耕俊,仂俊。八俊早死。女適虞倭朴葵英。曾孫男女。幼不載。後以仲子累參原從功。故例贈公議政府領議政兼兩館者。□國家所爲。伸未用公▣▣也。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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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으로 죽은 것은 10월 6일인데, 저녁에 우레가 치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임종할 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면서 오히려 두보(杜甫)의 ‘출사하지 못하고 몸 먼저 죽다니.’라는 구절을 읊었다. 한스럽게도 성상의 은혜를 갚지 못하였고, 자제들을 면려하는 데 있어서는 집안에 한마디 말도 미치지 않았다. 갑신년 1월에 도성으로 돌아왔는데, 친구 이지신(李知申)이 아뢰기를 “공은 일생을 청백하게 살았고 북병양전(北兵兩戰)의 일에도 공로가 있으니, 성상께서는 속히 이를 인정하고 관직을 회복시켜 주소서.”라고 하였다. 4월 모일에 양근군(楊根郡) 서수회리(西水回里) 인좌신향(寅坐申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얼마 뒤 성상이 공의 죄는 작고 공은 드러났으며 청결한 절개는 가상하다고 거듭 생각하여 병조 판서에 추증하고자 하셨다. 친필로 내린 비답이 격절(激切)하였고, 대신에게 의논을 구하자 모두 합당하다 하였다. 다만 전에 미치지 못한 자가 아직도 분분하게 다투고 있었으므로 끝내 낭관으로 하여금 묘소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공의 풍모는 준엄하고 성대하였다. 기개는 웅대하고 당당하여 작은 일에 곡진하게 힘쓰지 않았고, 오직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집안일을 돌아보건대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삼갔다. 어버이를 모실 때 기쁘게 하였고 상중에 슬퍼하였으며, 사당을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받들었고 휘일(諱日)에 변통하는 일은 혹 예법에 지나치더라도 미치지 못함이 없었다. 공무에 있어서는 모든 존경할 만한 곳인 망궐사(望闕祠), 제사(祭社)와 사직(社稷), 선성묘(先聖廟), 선현사(先賢祠)를 반드시 몸소 시기에 맞추어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이 도리를 미루었다. 형제간의 우애는 나이 차이를 따지지 않았다. 친한 형제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보다 많은 자매를 돌보았고, 여러 아우들에게도 더 많이 주었으며, 종족에 후하게 베풀었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더욱 먼저 도왔다. 기조(騎曹)에서 오래 근무하였고, 직책이 문지기였는데 바로 반포하여 시행되었으며, 남겨 둔 것이 없었다. 부인이 외가에 아들이 없어 공에게 후사를 부탁하려고 하였는데, 그 재산을 모두 주었으니 진실로 양보한 것이다. 성질(姓姪)을 세우기를 권하였는데, 이미 그쳤다. 남과 사귈 때 반드시 의기(意氣)가 서로 허락하고 한 번 폐간(肺肝)을 다 보여 주면 다시 변절하는 일이 없게 된다. 남의 급한 일을 급하게 여기고 남의 근심을 근심하는 것은 옛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교묘한 방법으로 때에 맞추어 가거나 탐욕과 사특함으로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미워하면서도 얼굴로는 공격하지 않고 조금도 너그러운 면모를 보이지 않는다. 공이 벼슬에서 물러난 것은 이미 이(夷)에게 양보하고 급병(急病)에 시달린 것이니, 그 뜻이다. 먼 지방의 부름을 받으면 복잡한 일이라도 기꺼이 가서 용감하게 처리하며, 일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조복(朝服)을 입고, 일이 끝나면 반성한다. 큰일은 미리 깊이 생각하여 안일함에 빠져 폐기하지 않는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 항상 하는 말이 “재물은 똥과 같게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이 부귀와 영달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면 도리어 배우지 않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자녀의 혼사를 구하는 일에 대하여 오직 가법(家法)을 어떻게 보았는가. 시문이 약간 권 있는데, 특히 문장에 능하여 수립한 바가 있었다. 서(書)는 행서ㆍ초서ㆍ전서ㆍ예서를 모두 잘 썼다. 일찍이 청강거사(淸江居士)에게 대답하는 글을 지어 그 스스로 말한 바를 드러낸 적이 있다. 정대인(貞大人) 목천 상씨(木川尙氏)는 선무랑(宣務郞) 휘 붕남(鵬南)의 딸로 실은 영의정 성안공(成安公) 휘 진(震)의 손녀이다. 15세에 공에게 시집갔다. 뒤에 공이 죽고 나서 11년이 지난 계사년에 중자(仲子) 통진임(通津任)을 따라 적을 피해 강화도(江華島)로 갔다가 3월 보름날에 세상을 떠났다. 모년 모월 모일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내로서나 어머니로서나 모두 법식(法式)이 있었다. 공은 생전에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하였으나 음식을 반드시 풍성하고 깨끗하게 차렸으며, 음식의 유무를 공에게 알리지 않았다. 공이 죽고 나서 여러 첩과 자식이 우러러 의지할 바가 있었으니, 공이 살아 있을 때에 이보다 더한 행실은 없었을 것이다. 아들 4명과 딸 2명을 낳았다. 장기준(長耆俊)은 관직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그쳤고, 차수준(次壽俊)은 바로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모두 문과(文科)를 거쳤다. 차수준(次耈俊)은 문장을 업으로 삼았고, 차명준(次命俊)은 생원이다. 딸은 장민유경(長閔有慶)에게 시집갔는데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며, 다음으로는 신흠(申欽)에게 시집갔는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다. 정자(正字)는 감역(監役) 김익휘(金益輝)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 중기(重基), 후기(厚基)를 낳았는데 모두 상사생(上舍生)이며, 부사는 처음에는 동중추부사 권순(權恂)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학기(學基)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재차는 사인(士人) 허개(許漑)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자식이 없었으며, 세 번째로는 사인 허호(許昊)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 유(幼), 준(耈)을 낳았다. 수준씨는 사인 임계로(任繼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장남은 유기(裕基)이고 나머지는 유(幼)이다. 명준씨는 사인 김찬조(金纘祖)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유(幼)이며 수찬은 두 아들 성청(聖淸), 성화(聖和)와 두 딸 유(幼)를 낳았다. 부학생 남익성(男翊聖)은 동양위(東陽尉)이다. 상정숙옹주(尙貞淑翁主)는 여유(女幼)이다. 측출(側出)한 아들로는 팔준(八俊), 경준(耕俊), 역준(仂俊)이 있었는데, 팔준은 일찍 죽었다. 딸은 우왜(虞倭) 박규영(朴葵英)에게 시집갔다. 증손녀는 남녀가 있으나 어렸으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뒤에 중자(仲子)가 여러 차례 원종공(原從功)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예(例)로 공의정부 영의정 겸 양관사(公議政府領議政兼兩館事)를 추증하였다. □ 국가에서 한 일은 미용공(未用公)을 펴는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不用其文。□而用其武。□不伸于身。□而伸于後。□在公何憾。□亦公之故。

번역

그 문장을 쓰지 않고 -원문 빠짐-/□ 그 무용을 쓴다면 -원문 빠짐-/□ 자신에게 미치지 않으리니 -원문 빠짐-/□ 남의 뒤에만 미치겠네 -원문 빠짐-/□ 공에게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원문 빠짐-/□ 또한 공의 탓이 아니네

4. 祭文[尹根壽]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4D

원문

大司諫尹根壽敬祭于淸江李公之靈。嗚呼維公。而止斯耶。身騎箕尾。遽長辭耶。電光石火。杳難追耶。修短茫茫。誰所尸耶。矯然英聲。後世思耶。云亡興嘆。殄瘁詩耶。嗚呼哀哉。昔公西遷。分手南坡。丁寧祝公。願葆天和。相思千里。日月飛梭。中間音耗。僅一相過。公有冢嗣。繼鑠巍科。倏焉則亡。舐犢悲纏。窮荒海隅。孰與節宣。二豎乘之。一疾沈綿。楓林關塞。奄忽百年。孤魂北望。素旐東旋。迢迢旅櫬。越幾山川。卽路有期。又上歸船。終天一訣。有淚如泉。嗚呼哀哉。惟子文章。蓋難其伍。一洗骫靡。冥心往古。咀嚼左氏。韓柳幷取。吐辭雄健。自闢堂戶。聞諸同甫。文中有虎。公亶其然。有目皆覩。登三不朽。炳烺東土。戚矣賢胤。撰次將擧。不鄙謂余。相期就緖。追惟平昔。在我寧拒。詞以述哀。敢幷略敍。何以酹公。束芻芳醑。公其不昧。一聽我語。嗚呼哀哉。尙饗。

번역

대사간 윤근수가 청강 이공의 영전에 경제(敬祭)하다. 아, 공이여 여기에서 그치시는가 기미를 타고서 갑자기 떠나시니 번개와 불꽃처럼 아득하여 따르기 어렵네 수명은 짧고 길어 망망하니 누가 깃들 것인가 곧은 영명(英名)을 후세에 생각하리 운망의 탄식은 진췌의 시로다 아, 슬프도다 옛날 공이 서쪽으로 귀양 갈 때 남파에서 손을 놓으며 정성스레 축원하기를 천하가 태평하기를 원한다 하였네 천리 밖에서 그리워하며 세월은 세월처럼 흘렀는데 중간에 소식은 겨우 한 번 서로 지나갔네 공에게 후사가 있어 위대한 과거를 계승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구나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서 누가 절의를 지켰는가 두 명의 종이 타고 가서 한 번 병에 걸려 오래도록 앓다가 풍림관새에서 갑자기 죽었네 외로운 혼은 북쪽을 바라보고 흰 만장(挽章)은 동쪽으로 돌아오니 아득히 먼 길 떠나는 상여는 몇 산천을 넘어가나 곧바로 갈 기약이 있어 또 배에 오르네 하늘 끝까지 한 번 이별하니 샘처럼 눈물이 흐르네 아, 슬프도다 공의 문장은 대개 짝하기 어려웠으니 한 번 비루함을 씻고 마음 가라앉혀 옛날을 돌아보았네 좌씨를 음미하고 한유와 소동파를 아울러 취하였네 웅건한 말을 토해내어 스스로 당호(堂戶)를 열었으니 동보에게 들은 바에 문장 속에 호랑이가 있었다 하였네 공이 참으로 그러하여 눈 있는 자라면 모두 보았으니 삼대에 걸쳐 불후하여 동방을 밝게 비추었네 슬프다, 어진 자손이여 문장을 지어 장차 올리려 하니 비루하다고 여긴 나에게 서로 이 일을 이루기를 기약하네 돌이켜 생각건대 평소에 내가 어찌 거절하겠는가 말로써 슬픔을 서술하고 감히 대략 섞어서 말하네 무엇으로 공에게 제사 지낼까 향초와 향기로운 술로 공은 어둡지 않으니 한 번 내 말을 들어주게나 아, 슬프도다 부디 흠향하게나

5. 淸江行錄[鰲城]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5B, ITKC_MO_0200A_A043_495C

원문

公狀貌魁傑。器局峻整。恬於勢利。臨事不苟。文章草隸。時儕稱雄。而尤長於行文。性又剛果。當官抗議。未嘗挫抑於人。人亦不敢干以私。皆側目而避之。至與親戚故舊。私相燕語。諄諄不倦。或雜以調笑。咸得其歡心。父母歿。與兄弟分財。以其姊別給。比己差尠。別擇奴婢强壯者十餘口以與之。至於庶弟。亦加其數而與之。以遵先志。此不足爲公之德。而可想臨財之一節也。性喜施與。嘗爲兵部郞官。騶直到門。不入於室。而先與窮族。久久成例。故親族亦習以爲常。或時催促曰。期日已晩。老爺何不分騶直耶。嘗爲晉州。罷還居家。杜門息交。日以文籍自娛。有勸公以交歡時望者。公正色曰。虛受人爵。而實獲天譴。孰爲利害。其人大慙。持身淸謹。擺脫家累。位至宰列。妻子常假貸於人。然不爲皎厲之行。以沽於世。而世或有知之者。壬午。爲北道兵使。臨行。余作詩以戲之曰。約束羆熊老黃卷。推移文字作長城。蓋以羆熊自況。而文字調公也。公見詩呵詰曰。你小儒何敢乃爾。遂極謔而別。及拿下□禁府。時論勃鬱。罪將不測。親戚子弟。皆潛泣隨行。論者謂公曰。必無生理。余於道次候之。公握手莞爾而戲曰。今日遂成小儒之先見也。又問曰。聞讀綱目。已到幾篇。因論讀史節目數語。略無戚容。頃之。顧謂獄吏曰。此非我久留地。可速就囚。乃與親舊歡笑而別。此可見其氣象也。

번역

공의 장모(狀貌)는 씩씩하고 기국(器局)은 준엄하였다. 세력과 이익에 태연하였고 일에 임하여 구차하지 않았으며, 문장으로는 초리(草隸)로서 당대에 으뜸으로 칭송받았는데, 특히 행문(行文)에 능하였다. 성품이 또 강하고 과단성이 있어 관직에 있을 때 항의하는 일을 사람에게 눌려 본 적이 없었고, 사람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 간섭하지 못하여 모두 눈치를 보며 피하였으며, 친척이나 친구와는 사적으로 정답게 이야기할 때에도 진지하게 권면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더러 농담을 섞어 모두 기쁘게 하였다. 부모가 죽었을 때 형제들과 재산을 나누었는데, 그 누이에게 별도로 준 것이 자신에게 준 것보다 조금 적어서 노비 중 강장한 자 10여 명을 따로 골라 주었고, 서제(庶弟)에게도 더 많이 주어 선조의 뜻을 따랐다. 이것은 공의 덕으로 볼 것도 없지만 재물을 대하는 한 가지 일면을 알 수 있다. 성품이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병부 낭관(兵部郞官)이 되었을 때, 신하가 곧장 문에 이르렀으나 방 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궁벽한 친족과 오래도록 교분을 맺어 왔기 때문에 친족들도 이를 익숙하게 여겨서 때때로 재촉하기를 “기일이 이미 늦었는데 어찌하여 노야께서는 직임을 분담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일찍이 진주(晉州)에 부임하였다가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교분을 끊은 채 날마다 문집으로 스스로 즐거워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공에게 교분 맺기를 권하기를 “공의 명망이 높습니다.”라고 하니, 정색하고 말하기를 “헛되이 남의 작위를 받고서 실로 하늘의 견책을 받았으니, 누구의 이해가 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몸을 청렴하고 근신하여 집안의 누를 떨쳐 버리고 지위는 재상 반열에 이르렀다. 처자식은 항상 남에게 빌려 주는데도 교활한 행실로 세상에 구걸하지 않았으나, 세상에는 혹 이를 아는 자가 있었다. 임오년에 북도 병사(北道兵使)가 되어 부임할 때 내가 시를 지어 농담으로 말하기를 “약속은 비웅이 황권과 맺고 문자는 장성으로 만들어 놓았네.[約束羆熊老黃卷 推移文字作長城]”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비웅을 자신에 비유하고 문자를 조정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공이 시(詩)를 보고 비웃고 꾸짖기를, “너 같은 소유(小儒)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고 마침내 극도로 해학을 부리고는 헤어졌다. 그 뒤에 공이 잡혀서 금부(禁府)에 갇히게 되자 시론(時論)이 들끓어 죄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친척과 자제들이 모두 몰래 눈물을 흘리며 따라갔다. 논자들이 공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살 길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도중에서 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이 손을 잡고 빙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기를, “오늘 드디어 소유의 선견지명이 이루어졌구나.” 하고는 또 묻기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몇 편까지 읽었느냐?” 하였다. 이어서 《독사절목(讀史節目)》 몇 구절을 논하면서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얼마 뒤에 공이 옥리(獄吏)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기는 내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니 속히 죄수에게 가라.” 하고는 친척과 벗들과 즐겁게 웃으며 헤어졌다. 이 일에서 공의 기상을 알 수 있다.

6. 書示李上舍[尙成安公震]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疾痛殊無賴。逢君意氣生。菊觴初發興。繡句轉挑情。不醉看晴月。無眠度夜更。盈樽美酒在。直到五鷄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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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으로 전혀 의지할 데 없다가 그대 만나니 의기가 생겨나네 국화주에 처음 흥이 일더니 수놓은 시구는 더욱 정을 자아내네 취하지 않고 맑은 달빛 바라보며 잠 못 이루고 밤을 보내노라 술통 가득 좋은 술 있으니 닭 울 때까지 마시리라

7. 次李書狀韻[吳祥]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長慶門前路。橫枝補石矼。樓居臨古寺。山影壓秋江。縹緲眞遺世。虛明不礙窓。霜臺馳筆力。端欲束降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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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문 앞의 길에 돌다리 가로놓여 가지가 뻗어 다리를 보완하였네 누각은 옛 절을 마주하여 서 있고 산 그림자는 가을 강을 누르고 있네 아득한 경치는 참으로 세상 벗어나고 텅 비고 밝아 창문에도 막힘이 없네 서릿발 같은 필력으로 붓을 휘두르니 정녕코 강항을 묶어 내리고 싶구나

8. 東湖次淸江韻[李悠]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日落江煙暝。停舟水氣侵。平沙歸雁集。蕭寺暮鐘沈。別鶴三聲篴。新腔數尺琴。忘形同一醉。千載幸知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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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자 강 안개 어둑어둑 배 멈추니 물기운이 스며드네 모래밭에 기러기 모여들고 쓸쓸한 절에 저녁 종소리 잠기네 이별하는 학은 세 번 피리를 불고 새로운 가슴은 두어 자 거문고로다 형체 잊으니 함께 취한 듯하니 천 년 만에 다행히 지음이 있구나

9. 追次寄石州[徐益]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榮落紛紛不定時。關山此別豈長辭。一言悟主應天與。百戰無功是數奇。男子自來思道直。女兒休更念身危。孤城滿酌迎春酒。遠揖高風寄好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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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몰락 분분하여 정해진 때 없으니 관산에서의 이별 어찌 영원한 작별이랴 임금의 뜻 깨달음은 하늘이 준 것이고 백전에도 공 없으니 기구한 운명이라네 남자는 본래 도가 곧음을 생각해야 하고 여인은 다시 몸이 위태로움을 염려 마라 외로운 성에서 봄맞이 술 가득 따라 놓고 높은 풍모 멀리서 읍하며 좋은 시 부치노라

10. 敬次大人浩浩亭韻[男□耆俊]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陟幾崇岡涉幾灣。危亭登眺破寒慳。平臨鰲背騰靑黛。俯壓鯨波噴雪山。客裡黃花驚節序。海邦紅蓼老秋顔。明朝又向端州去。棧道磨雲縹緲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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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 오르고 몇 굽이 물을 건너서 높은 정자 올라 바라보니 추위가 가시네 평평한 자라 등엔 푸른 빛이 일렁이고 굽어보는 큰 파도는 눈산에서 뿜어내네 객지에서 국화 피니 계절이 놀랍고 바닷가에 홍여뀌는 가을 모습 늙었구나 내일 아침 또 단주를 향해 떠나면 구름 스치는 잔도 아득한 곳으로

11. 讀詩九罭有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如見東人癡。周公避流言。久詠鴟鴞詩。■■■■■。天下其殆而。雷風旣示戒。親逆禮誠宜。■■苦■悲。■息公歸爲。東人汝毋爾。天心非汝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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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 빠짐 - 동인의 어리석음 보았네 주공이 유언 피하려 오랫동안 치효시를 읊었네 - 원문 빠짐 - 천하가 거의 망하였네 우레와 바람으로 이미 경계 보이니 친척과 역적에 대한 예법 진실로 마땅하리 - 원문 빠짐 - 슬프고 슬프도다 - 원문 빠짐 - 공이 돌아가시니 동인아 너는 어찌하여 천심을 알지 못하는가

12. 翠月堂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7B

원문

■■翠■■。明月入楹宇。王孫享此居。所事將安取。■■■■■。■日筵花塢。相將詠恩波。象闕瞻聖主。■陵■柏■。■祝君和父。光明百鍊鏡。此心長千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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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산이 둘러싸고 밝은 달이 창에 드네 왕손이 이 집에 살면서 무슨 일을 하려 하는가 -원문 빠짐.-꽃밭에서 잔치 열고 서로 은파를 읊조리네 대궐을 바라보며 성주를 우러르니 -원문 빠짐.-백년토록 변함없으리라 〔원문 결락 다수〕-

13. 伯牙鍾子期畫贊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峩峩者意在山歟。洋洋者興入水歟。當年尙歎子期亡。萬古知音■己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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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 솟은 것은 뜻이 산에 있나 넘실대는 것은 흥이 물에 드는가 당시에 자기가 죽은 것을 탄식했으니 만고의 지음이 이미 그쳤구나

14. 滌襟軒八詠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7C, ITKC_MO_0200A_A043_497D

원문

■■■■■。一■良解事故。投靑白雲爲。冠倒鑑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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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빠짐- 한 사람의 좋은 일은 사고를 잘 이해함이네 청백운으로 던지니 관이 거꾸로 비어 있네 -원문 빠짐-

원문

大地渾烘窯。淸風誰滌熱。橫抱銀■■江來。晩作秋空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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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가 온통 가마처럼 달궈졌으니 맑은 바람이 누가 더위를 씻어 줄까 은빛 물결을 가로지른 강물 따라와서 저녁에 가을바람 부는 소리 내누나

원문

便風漲大帆。嘯竹支剛綆。度曲經洲一瞥間。依帒新月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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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돛이 크게 부풀고 휘파람 불며 낚싯대를 지탱하네 굽은 물길 지나 모래톱을 순식간에 건너니 새로 뜬 달 그림자가 배에 비치네

원문

遙分喚渡頭。許箇沿汀樹。江氣炊煙曰。夕凝微茫特地霧。

번역

멀리 나루터에서 헤어지니 물가에 늘어선 나무들 강 기운이 밥 짓는 연기라 하네 저녁에 안개 끼어 아득히 땅을 뒤덮었네

원문

瓦店寄平蕪。陶煙生處處。無端返照忽交輝。風外東西去。

번역

기와집이 들판에 흩어져 있고 도자기 구운 연기 곳곳에서 피어나네 무단히 석양이 홀연 빛을 비추니 바람결에 동서로 가누나

원문

新雨濯汀洲。明沙亘十里。銀盤壓處盡霜天。僅辨無星地。

번역

소나기가 모래톱을 씻어 내니 밝은 모래가 십 리에 펼쳐졌네 은반이 누른 곳엔 온통 서리 내린 하늘 별 없는 땅인지 겨우 분별할 수 있겠네

원문

煙郊綠草肥。雨後牛羊喜。橫笛臨風大平音。牧兒吾羨爾。

번역

연무 낀 들판에 푸른 풀이 무성하니 비 온 뒤라 소와 양이 기뻐하네 피리 소리 바람 타고 태평성대 울리니 목동아, 나는 네가 부럽구나

원문

生潮好水頭。趁卽收魚罩。墼火相將送白醪。菱歌回月棹。

번역

조수 생길 때 좋은 물가에서 곧장 그물을 거두고 화롯불에 서로 마주 앉아 막걸리 보내며 달빛 아래 노를 돌려 뱃노래 부르네

15. 移來山。示同遊。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一股移來地。巉巖控海門。朝昏生日月。上下失乾坤。滅沒樓浮蜃。扶搖翼化鯤。從今河泊見。始信予陽尊。

번역

한 줄기 물이 옮겨져 온 곳 높은 바위가 해문을 굽어보네 아침저녁으로 일월이 뜨고 지니 위아래로 천지가 어지러워라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은 신기루이고 날개를 펼치고 오르는 것은 큰 곤어라 이제부터 하박을 보게 되면 비로소 나의 양이 존귀함을 믿으리

16. 留全成之同年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萍水天涯會。琴尊日夕同。眼從雙刮碧。顔各半凋紅。海氣常連瘴。秋霖易作風。街頭泥政滑。征馬若爲通。

번역

하늘 끝에서 부평초처럼 만났으니 거문고와 술로 밤낮을 함께했네 눈은 두 번 긁어 푸르름이 사라지고 얼굴은 반쯤 시들어 붉음이 줄었네 바다 기운에 항상 장기가 이어지고 가을 비는 쉽게 바람을 일으키네 거리엔 진흙탕이 미끄러운데 가는 말을 어떻게 통행할까

17. 浮碧樓席上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凉氣秋生嫩。危樓上石矼。遠山圍大野。靑壁瀉長江。風日開雙眼。乾坤敝入窓。前途有牧老。誰續筆如杠。

번역

서늘한 기운이 가을에 생겨나니 높은 누각 위에 돌다리 놓였네 먼 산은 큰 들판을 에워싸고 푸른 절벽엔 긴 강물이 쏟아지네 바람과 햇살은 두 눈을 열어주고 하늘과 땅은 창문으로 들어오네 앞길에 목로가 있으니 누가 지팡이 같은 붓을 이을까

18. 統軍亭。賦得一律。錄呈。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去國今千里。登樓日暮城。天從窮眼闊。江入亂山縈。夷夏分三界。朝昏替二明。西風一聲笛。獨立遠人情。

번역

도성 떠나온 길 천 리인데 해 저문 성에 누각 올랐네 하늘은 궁벽한 곳에서 넓고 강물은 어지러운 산을 굽이돌아 흐르네 오랑캐와 중화는 삼계로 나뉘고 아침과 저녁은 두 해가 번갈아 비추네 서풍에 한 가락 피리 소리 들려오니 홀로 서서 먼 곳 사람 그리워하네

19. 松站道中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鎭堡名松站。城池間兩坡。枯楊生意少。古屋毁垣多。長嶺蟠雲遠。梢河走野濄。蕭蕭風日冷。征馬倦鳴珂。

번역

진보의 이름은 송참이라 하는데 성과 못 사이에 두 언덕이 있네 마른 버드나무는 생기가 적고 옛집엔 무너진 담장 많구나 긴 고개에 구름 덮여 멀리 있고 시내 물결 들판을 달려가는데 쓸쓸히 바람 불어 날씨 차가워 지친 말은 피곤하게 우네

20. 酬楓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萍跡元無蔕。琴樽偶此臺。逢場初失喜。臨別自生哀。列嶽千層矗。長江▣帶廻。天風安借便。吹送玉輪來。

번역

부평초 같은 신세 본래 뿌리 없는데 거문고와 술로 우연히 이 누대에 올랐네 만나자마자 처음엔 기쁨을 잃었고 이별에 임해 절로 슬픔이 생기누나 천 겹으로 늘어선 산들은 높이 솟았고 긴 강물은 두른 듯이 휘돌아 흐르네 하늘 바람 어찌 편의를 빌려 주었나 옥 같은 달을 불어서 보내 왔구나

21. 雜詠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8C

원문

眞界何天好。幽居是處寬。雲霞元自富。凡俗不相干。風止松陰定。溪恬月色安。蘆花叢畔石。嘯傲一黃冠。

번역

진계의 어느 하늘이 이토록 좋은고 그윽한 거처가 이곳에 넓구나 구름과 노을은 본디 절로 풍부하고 세속과는 서로 간섭하지 않네 바람 그치니 솔 그늘 고요하고 시냇물 잔잔하니 달빛 편안하네 갈대꽃 핀 떨기 옆 바위에서 한 황관 쓰고 소요하노라

22. 東湖口吟。索同遊和。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日落蒼江暮。幽然瞑色侵。汀沙光漸白。浦樹影逾沈。逸興傳深爵。狂歌托短琴。琳宮疑近地。風外聽鐘音。

번역

해는 저물고 푸른 강은 어두운데 그윽하게 어둠이 침노하네 강가의 모래는 빛이 점점 희어지고 포구의 나무 그림자는 더욱 깊어지네 호방한 흥취는 큰 술잔에 전하고 미친 노래는 짧은 거문고에 의탁하네 절간이 가까운 듯하여 바람 밖에서 종소리 들리네

23. 送成大同壽益於尙相成安公家。賞牧丹。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8D

원문

笑矣吾儕事。誰將此意諳。丹心懸日月。白首走西南。樓疊頭流翠。亭臨浿水涵。天恩隨處在。報答祗難堪。

번역

우습구나 우리들의 일 누가 이 뜻을 알겠는가 일월처럼 붉은 마음으로 흰머리로 남쪽 서쪽으로 달리네 누각은 푸른 두류산에 쌓여 있고 정자는 넘실대는 패수 가에 있네 임금의 은혜 어디나 있으니 보답하기 참으로 어렵구나

원문

先輩風流盡。春秋幾歲華。生來鍾間氣。身後有衰花。虛閣香留篆。前庭草蝕沙。離懷同此地。心事爛瓊霞。

번역

선배의 풍류 다하였으니 춘추 몇 해나 되었던가 살아서는 종중의 기운 모았고 죽은 뒤엔 시든 꽃이 남았네 빈 누각에 향불 연기 남아 있고 앞뜰에는 풀이 모래를 덮었네 이별의 회포 이 땅에서 같으니 마음속 일은 구슬과 노을처럼 찬란하네

24. 贈李大諫叔獻,鄭執義季涵,兩庚伯曁牛溪。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星廣天難測。山啼地失寧。古今無此日。畢竟是何禎。耈造多卿相。憂勤獨聖明。諸公當蹇蹇。豈可更茹貞。

번역

별이 드물어 하늘을 헤아리기 어렵고 산이 울어 땅이 편안하지 못하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날 없었으니 필경 무슨 재앙인가 태조는 경상 많은데 근심하고 부지런한 이는 성명뿐이네 제공들은 마땅히 힘써야 하니 어찌 다시 정절을 지키겠는가

25. 次霽景樓韻〔原注:泗川〕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夜雨翻盆後。朝暉試上樓。詩眸生別彩。歸計怯新流。海晏邊無警。年豐國不憂。賓筵當景賞。樂事且淹留。

번역

밤에 비가 동이 엎은 듯 내리더니 아침 햇살에 누각 위에 올라 보니 시인의 눈에 별다른 빛 생겨나고 돌아갈 계책은 유배지 두려워하네 바다 평온해 변방엔 경보 없고 풍년 들어 나라 걱정 없으니 손님 자리에서 좋은 구경하니 즐거운 일로 잠시 머물러 있노라

26. 楊將軍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9A

원문

冠軍眞勇將。挺代一奇男。涅背忠師岳。穿甎志勵南。指揮驅電霹。掀蕩掃氛嵐。阨路驚龎統。奇功折耿弇。蜮沙無避影。馬革只遺䤴。死尙揚鷹氣。生如視虎眈。魁梧身近丈。神俊略韜三。厲鬼精應結。長城鎖孰堪。美名忠壯洽。華廟寵靈覃。龜背鑱聯石。廉風重起貪。

번역

진정 용맹한 장수라 으뜸가는 분 당대에 드문 기이한 사내로다 등에 문신 새긴 충성은 태산 같고 돌을 뚫는 뜻은 남쪽을 위했네 지휘하여 번개와 우레 몰아치니 어지러운 요기를 쓸어버렸네 험한 길에서 용통을 놀라게 하고 기이한 공으로 경엄을 꺾었네 사막에는 피할 그림자 없었고 말 가죽에 남은 것은 뿔뿐이었네 죽어서는 오히려 매의 기상 떨치고 살아서는 범을 보는 듯하였네 늠름한 몸은 한 장에 가까웠고 신묘한 지략은 삼국을 다스렸네 사나운 귀신과 정밀하게 응했으니 장성을 누가 감당할 수 있으랴 충성스럽고 씩씩한 아름다운 이름 화려한 사당에 영령이 가득하네 거북 등 같은 비석에 연이어 새기니 청렴한 기풍이 다시 탐욕을 일으키네

27. 吾助川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驛路驅馳倦客遊。忽逢靑壁刮塵眸。奇巖劍古雲千丈。病樹巢危鶴萬秋。吹篴已傳黃媼答。題詩應起老龍愁。他時會作溪山主。一誓丁寧語白鷗。

번역

역로에서 말 몰아 나그네 길에 지쳤는데 갑자기 푸른 절벽 만나 눈을 씻어 보네 기이한 바위엔 검이 오래 걸려 구름 천 장이고 병든 나무엔 둥지 위태해 학 만 년을 살았네 피리 소리는 이미 황로의 답시를 전하고 시를 쓰니 응당 노룡의 시름을 일으키리 훗날에 계산의 주인 되어 한 번 맹세 정성스레 백구와 말하리라

28. 東郊秋興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9B

원문

東郊物色媚淸秋。天末高褰宿雨收。絳實下苞聞滴砌。黃雲圍野看盈疇。霜繁老樹風騰葉。水淺前溪蟹下流。箇裡幽人端合着。茶甌煙細伴詩愁。

번역

동쪽 교외의 물색이 맑은 가을에 어여쁜데 하늘 끝에서 비가 그치고 구름이 높이 걷히네 붉은 열매가 포장을 터뜨려 섬돌에 떨어지고 누런 구름이 들판을 에워싸 온 들판이 가득하네 서리 내린 늙은 나무엔 바람에 낙엽이 날리고 얕은 앞 시내에는 게가 물결 따라 내려오네 그 속에 은자는 단연코 어울릴 만하니 찻잔의 연기 피어올라 시름과 짝하였네

29. 秋懷。用前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從來心事愴高秋。老去嘔吟不耐收。文擧秪今沈北海。淵明何日事西疇。階前病葉蕭蕭下。頭上光陰鼎鼎流。爲語吾儕須着力。丈夫終豈死窮愁。

번역

예로부터 심사가 쓸쓸한 가을날이었는데 늙어가며 읊조림은 거두어 감당 못하겠네 문거는 지금 북해에 잠겼으니 연명은 어느 날 서주를 일삼았던가 섬돌 앞의 병든 잎 쓸쓸히 떨어지고 머리 위의 세월은 쉴 새 없이 흐르네 우리들에게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하노니 장부가 어찌 끝내 궁한 시름에 죽으랴

30. 哭軒軒翁叔〔原注:代家君作〕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9C

원문

磊落生平志不羈。空將事業付無爲。圖書滿室羅千帙。松菊當窓列一墀。晩歲襟期顔巷樂。中年憂患𣸡園悲。傷心前昔承溫話。那復陞堂拜舊儀。

번역

우뚝한 생애에 뜻이 얽매이지 않아 부질없이 사업을 무위로 부쳤네 집안 가득 도서가 천 권이나 되고 창 앞의 송국은 한 섬돌에 늘어섰네 만년에는 안항의 즐거움을 기약했고 중년에는 우환으로 -원문 빠짐.-슬퍼했지 지난날 따뜻한 말씀 들었던 일 상심하니 어찌 다시 집안에 올라 옛 의식 받들까

31. 漢江樓偶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指外重山高或卑。唾前深水碧而漪。倘求天下無多偶。豈特東藩第一奇。霽雨前宵花發後。暖風長浦柳均時。蕭條漁屋無情思。眼着吟人盡是詩。

번역

손가락 밖의 높은 산은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며 입 앞의 깊은 물은 푸르고 잔물결 일렁이네 천하에 우연한 것 많지 않음을 구한다면 어찌 동방에서 가장 기이한 것만 있겠는가 비 갠 어젯밤 꽃이 피고 난 뒤요 따뜻한 바람 부는 긴 포구 버들 가지 늘어진 때로세 쓸쓸한 어부의 집은 정이 없는데 시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시뿐이네

32. 又賦早桃。寄趙敬伯。趙嘗詆此桃。故詩意反之。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垂楊枝上班班萼。分種燕都祇十年。信較梅足春又早。係聯桃譜節猶堅。孤根饒抗霜威虐。素質羞從俗態姸。世與海棠同恨汝。誰知仲郢却爲賢。

번역

수양버들 가지에 층층이 꽃 피었으니 연경에서 심은 지 겨우 십 년 되었네 매화와 비교하면 봄이 또 일찍 왔고 도화와 연관되어 절기 오히려 굳세네 외로운 뿌리 혹독한 서리 잘 견디고 흰 바탕은 고운 속태 부끄러워하네 세상에서 해당화와 함께 한을 품었으니 중영이 도리어 어질 줄 누가 알았으랴

33. 用松溪次唐人九日登臺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499D

원문

蒼崖斷處石爲臺。天餉詩人卽此開。極海浮天天若沒。亂山騰地地如來。秋風白髮生新種。客路黃花泛幾回。胸次後前雲夢九。醉看三島點洿杯。

번역

푸른 절벽 끊어진 곳에 돌로 된 누대 있어 하늘이 시인에게 바로 이곳을 열어 주었네 바다 끝에 하늘 떠 있으니 하늘은 마치 잠긴 듯하고 산이 땅에 솟아오르니 땅은 온 듯이 다가오네 가을바람에 백발은 새로 자라나고 객지 길에 국화는 몇 번이나 피었나 가슴속에 전후의 구운몽을 품고서 취하여 삼도의 오배를 바라보네

34. 永平府地。謁夷齊廟。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尙鐫孤竹在荒城。廟宇千尋石岸平。父子君臣兄弟義。乾坤夷夏古今名。一家遺像當時表。萬代長風昨日淸。滿掬灤波盈握蕨。洗乾塵肺改精明。

번역

외로운 대나무가 황량한 성에 남아 있어 천 길의 사당이 돌 언덕에 평평히 서 있네 부자 간 군신 간 형제 간의 의리이며 천지간 이화 간 고금의 이름이로다 일가의 유상은 당시의 표상이요 만대의 장풍은 어제의 맑음이라 한 움큼 난파를 손에 가득 담아 마른 폐를 씻어 정명을 바꾸네

35. 堂成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0A

원문

塵埃乾沒白頭迷。四載經營卜此棲。山頂伐雲擎作柱。溪頭汲月漑爲泥。雖非秦客桃源裡。或似唐人瀼水西。避俗誰能同我所。藤林蘿逕共扶携。

번역

티끌 속에 파묻혀 백발이 희끗희끗한데 사 년 동안 경영하여 이곳에 살 곳 정했네 산마루 구름 베어 기둥으로 삼고 시냇가 달을 길어 흙을 적시네 비록 진나라 객의 무릉도원은 아니지만 혹 당나라 사람의 양수 서쪽과 비슷하네 세속 피하는 걸 누가 나와 함께할까 등나무 숲 덩굴길에서 서로 이끌고 가리

36. 次韓天使謁宣聖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環聳橋門萬有餘。龍旌欣覩久踟躊。周旋禮數威儀中。誘掖溫言色笑舒。極地漸摩昭代化。窮天祠廟素王居。斯文一脈無遐邇。敦實儒風不尙虛。

번역

높이 솟은 교문에는 만여 명의 백성들 용 깃발을 기쁘게 보고 오래도록 서성였네 예법과 위의를 갖추어 주선하고 온화한 말로 이끌고 웃는 얼굴로 위로했네 지극한 곳에 점차 소대의 교화를 베풀고 하늘 끝까지 사당에 선왕이 계시네 사문의 한 맥은 멀고 가까움 없으니 돈후 실질적인 유풍을 헛된 것 숭상하지 않네

37. 白知事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一介危忠萬仞山。緘章幾灑血於肝。廿年嶺外仍鄕曲。末路朝端半退閑。議論剩憑良史在。精靈留與列星還。妖生木稼云亡遽。老淚居然爲國潸。

번역

한 조각 높은 충정 만 길 산과 같아 봉함한 글 몇 번이나 간에 피 뿌렸던가 이십 년 영남에서 고향 곡조 읊었고 말년의 조정 반은 물러나 한가했네 논의는 여전히 좋은 사관에게 의지하고 정령은 남아서 열성으로 돌아갔네 요망한 자 죽으니 목가가 갑자기 사라져 늙은이 눈물 어느새 나라 위해 흐르네

38. 庚辰二月。將赴楊根先塋。道出□康陵下。少憩有感。寄申閔兩郞。求和。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攀斷龍胡十四年。短鞭今卸畢原前。周遭龍虎圍金盞。掩藹松杉冪瑞煙。祕殿猥叨修曆筆。玉音那復聽經筵。俳佪且輟須臾路。未覺漣漣涕若懸。

번역

용호의 십사 년을 붙잡아 끊고서 짧은 채찍 이제 필원 앞에 내려놓네 주위에는 용과 호랑이가 금잔을 둘러싸고 우거진 소나무 삼나무는 상서로운 안개에 싸였네 비전에서 외람되이 역서를 짓는 붓 잡았는데 옥음은 어찌 다시 경연에서 들으리오 잠시 동안이나마 장난삼아 길을 떠나니 끊임없이 눈물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겠네

39. 宋正郞景繁關東行錄後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多君健筆掞星鋩。截取關東一半强。溢海紅波臨出日。插天飛路歷層岡。英靈已徹雲霞幌。造物還輸錦繡腸。歸與同心開絶賞。臥遊無事理山裝。

번역

그대의 굳센 필치 별빛을 뽑아내어 관동의 절반 남짓한 경치를 잘라냈네 바다에 넘치는 붉은 물결 해 뜨는 곳에 임하고 하늘에 치솟은 비탈길은 층층 산을 지나가네 영령이 이미 구름과 노을을 꿰뚫고 조물주가 도리어 비단 무늬를 내어 주었네 돌아와 마음 맞는 이와 함께 절경을 감상하고 누워서 유람하며 일 없이 산행 차림을 정리하네

40. 次趙敬伯樂飢堂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0C

원문

逍遙非必駕風遊。薖軸從前在澗謳。榮啓自誇生世樂。顔回寧有食貧憂。歸田松菊眞如晉。知足功名不待留。一酌泌洋猶舊業。外餘休復向人求。

번역

소요가 어찌 꼭 바람 타고 노는 것이랴 전부터 시축에 간구의 노래 있었네 영계는 세상 사는 즐거움 스스로 자랑했으니 안회가 어찌 가난한 생활 걱정했으랴 송국을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간 진나라와 같고 공명에 만족할 줄 알아 머물기를 기다리지 않았네 비양의 한 잔 술은 오히려 옛날 일인데 남에게 구하지 말고 남은 것을 즐기게나

41. 行至箕城。書別徐庶尹君受,崔察訪嘉運。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聯袂江樓此一時。向來俱坐和陶辭。徐君通介寧隨俗。崔子文章久擅奇。多病自生當酒怯。絶關誰念取途危。行藏氣味良相似。離席那無惜別詩。

번역

강루에서 함께한 이 한 때에 지난날 모두 도연명과 화답했네 서군의 통계는 어찌 세속을 따르랴 최자의 문장은 오랫동안 기이함을 독차지했네 병이 많아 술 마시기 두려워하고 절교함에 누가 험한 길 취할 줄 생각하랴 출처의 기미가 참으로 비슷하니 자리 떠나며 어찌 이별 시 없으랴

42. 豚犬之來。承旨仲益,士稚,鮐卿送問。兼謝子進,大仲諸內相。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0D

원문

多謝諸公訊死生。龍文餘彩爛縱橫。城頭擊柝弓刀冷。閣下承綸日月明。形影縱分千里迹。肝腸不隔寸心誠。只應毛髮渾邊雪。親故如能記舊聲。

번역

제공이 안부 물어주니 매우 감사하오 용문관의 남은 빛깔 종횡으로 찬란하네 성 위에서 북을 치니 궁도 소리 싸늘하고 각하께서 윤음을 받드니 일월처럼 밝구나 형체는 비록 천 리 밖으로 떨어졌으나 간장은 조금도 막히지 않아 정성이 지극하네 다만 머리카락에 눈이 온통 쌓였으니 친한 벗들이 예전 목소리를 기억할는지

43. 府城東松亭。暫與裨曲設飮。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四月之終端午前。新晴風日媚山顚。松吹細粉迷金霧。柳放飛花作雪天。萬戶星羅官道正。長江龍屈白沙旋。烏號半醉彎空月。翟羽纔傾鼉鼓傳。

번역

사월의 마지막 날 오전이 되니 맑게 갠 바람과 햇살 산마루에 곱구나 솔바람은 고운 가루 불어 금안개 자욱하고 버들은 꽃을 날려 눈 내리는 하늘 이루었네 일만 집 별처럼 늘어서고 관도는 곧고 긴 강물 용이 굽이쳐 백사장이 휘돌았네 오호는 반쯤 취해 빈 달에 활 쏘고 적우는 막 기울여 자고의 북소리 전하네

44. 侍中臺。示諸偏裨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嶺側松臺是侍中。將軍擡目弭花驄。新陽瀉海金掀地。宿霧收山玉插空。小鳥塡沙憐大志。巨魚騫翼想長風。盈前說與挐熊士。恢拓胸襟若箇雄。

번역

고개 옆의 송대는 바로 시중의 자리인데 장군이 눈을 들어 꽃무늬 말을 멈추네 새 봄볕 바다에 퍼지니 금빛이 땅에 일렁이고 묵은 안개 산에서 걷히니 옥이 하늘에 꽂혔네 작은 새가 모래를 메우니 큰 뜻 가련하고 큰 물고기가 날개를 치니 긴 바람을 상상하네 앞에 가득한 말로 파웅의 무사에게 말해 주니 흉금을 넓히는 것이 어찌 그리 웅장한지

45. 秋思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登山憀慄送將歸。宋玉從前說楚辭。聽葉今宵多少恨。明朝臨鏡始應知。

번역

산에 올라 두려워하며 돌아가니 송옥이 예전에 초사를 말했지 오늘 밤 나뭇잎 소리 얼마나 한스러운지 내일 아침 거울을 보고서야 알게 되리라

46. 秋懷一絶。贈尹士初惟新之行。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十分涼露夜如何。獨臥空階月似波。喞喞秋虫緣底恨。近人還欲和悲歌。

번역

서늘한 이슬 흠뻑 내린 밤 어떠한가 빈 뜰에 홀로 누우니 달빛이 물결 같네 왱왱대는 가을 벌레 무슨 한 때문인가 사람 가까이 오면 슬픈 노래 화답하고 싶어라

47. 次梁山澄心軒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山光雲影俯淸流。六月危欄爽欲秋。白鳥相飜晞竹露。羨他元自不知愁。

번역

산 빛과 구름 그림자 맑은 물에 비치는데 유월의 높은 난간 서늘하여 가을 같구나 흰 새가 서로 날아 대나무 이슬 말리니 부러워라 저들은 본디 시름을 모르는구나

48. 次驪興淸心樓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1B

원문

郊外靑山檻外江。浮光騰翠帀虛白。淸宵最是難描處。上下星河月一雙。

번역

교외의 푸른 산과 난간 밖의 강물에 부는 빛은 푸르름을 솟구쳐 허공을 가득 채우네 맑은 밤이 가장 묘사하기 어려운 곳이니 위아래로 은하수와 한 쌍의 달이 떠 있구나

49. 次松溪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門外澄流綠勝苔。入庭山影翠交堆。吟鬚撚了無新語。辜負如今一度來。

번역

문밖의 맑은 물결 이끼보다 푸르고 뜰에 들어온 산 그림자 푸르게 쌓였네 시 읊는 수염 비틀어도 새로운 말 없으니 오늘 한 번 온 걸 저버렸구나

50. 次星牧柳德純贈別韻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山號龍門卽我家。千重雲水障塵譁。懸知猿鶴愁無主。春雨欺人滯百花。〔原注:百花。軒名。〕

번역

산 이름이 용문이라 바로 우리 집인데 천 겹의 구름과 물이 세속을 막아 주네 원숭이와 학은 주인 없어 시름겨울 테고 봄비는 사람 속여 온갖 꽃을 머물게 하네 -원주(原注)에 ‘백화(百花)’는 헌(軒)의 이름이다.-

51. 離懷一首寄松溪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1C

원문

孤懷寂寞向誰論。蕭瑟江城獨掩門。明月滿庭秋葉下。美人今夜隔川原。

번역

외로운 회포 적막한데 누구와 논할꼬 쓸쓸한 강성에서 홀로 문을 닫았네 밝은 달빛 뜨락 가득하고 가을 낙엽 지는데 미인은 오늘 밤에 시내 건너 멀리 있구나

52. 途中口占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男子平生在。星文古劍寒。重磨鴨綠水。新倚白頭巒。

번역

남자의 평생은 이 몸에 달렸으니 별빛 문장 옛 검처럼 차갑네 압록강 물에 거듭 갈고 새로 백두산에 기대노라

53. 惜餘春辭

문체: 詩類 / 辭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2B, ITKC_MO_0200A_A043_502C

원주

〔原注:臣竊惟。天有四時。首序爲春。有萬林林。必生於春。而後乃得長而成實。當生而失養。則物無長成之理。不生而求成之。容有是乎。此聖人重夫春元。而人君對莅。必尙於體元者也。邵夫子以三皇爲春。五帝爲夏。此則統言歷代傳承之序也。若說約於人身。則人之老少。亦各有一四時之序。故詩家以少美者爲靑春。歐陽脩亦以人老爲秋。詎不信歟。伏見□聖上膺萬年福履之綏。而今玆御治。僅閱一十二年。亦豈非□聖曆之一春乎。臣糞土賤外。極無知識。仰捧詞頭。竊寓惜春之意。欲望□聖上及時行仁。以循其序。獻曝微誠。不勝至願。其辭曰。〕

원문

惜餘春之無幾。行替序於朱家。浩蕩兮爛熳兮。人怨落絮與流花。獨余心之不然。竊永思而倍嗟。兼萬情之含懷。冀及事於芳菲。天一元而四時。有生成而歸收。矧出震以體莅。統人物之春秋。當□聖歷之鼎盛。亦我□王之一春。覽華實之有時。察種穫之相因。朝化日而行天。夕乾■乎對帝。□喣仁風於鴨東。□闢春臺於一世。壽萬年以錫福。豈獨網遊絲而留餘暉。靑春兮不再。火車兮如飛。臨浴沂而有慕。緬堯舜而增唏。

번역

남은 봄이 얼마 안 남은 것이 애석하여 주씨 집안에 계절을 바꾸니 호탕하고 난만하기만 하여 사람들은 버들개지 지고 꽃이 져서 원망하네 나 홀로 마음이 그렇지 않아 남몰래 길이 생각하고 배나 탄식하노니 온갖 정을 품은 채 꽃다운 시절에 일을 이루기를 바라네 하늘의 한 근원이 사시가 되어 생성하여 수렴되는데 더구나 진(震)에서 나와 체리(體莅)하여 인물과 봄가을을 통솔하였네 당시 성상의 치적이 융성할 때 또한 우리 왕의 첫 번째 봄이 되었으니 꽃과 열매를 보아 계절이 있음을 알고 씨앗과 수확을 살펴 서로 인연됨을 알았네 아침에 해가 떠올라 하늘을 운행하고 저녁에 달이 떠올라 임금을 마주하네 인풍을 압록강 동쪽에서 불어오게 하고 춘대를 온 세상에 열어 주었네 만년의 수명을 누리도록 복을 내려주시니 어찌 그물에 노는 실처럼 남은 빛을 머무르게 하겠는가 청춘이 다시 오지 않고 불꽃 수레가 나는 듯하니 기수(沂水)에서 목욕한 것을 흠모하고 요순을 멀리 생각하며 더욱 탄식하네

54. 夫子文章贊

문체: 雜著類 / 贊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2D

원문

玄而上。日月星辰。森列而昭回。黃而下。山嶽河海。深廣而崔嵬。聖也參之。元氣四時。金聲玉振。允集宣尼。溫良儉讓。穆穆威儀。刪定贊修。有炳文辭。能言三代。文獻不足證我。暫語太師。雅樂猶蒙過化。卑謙竊比。功實兼作者述者。推尊祖述。德則邁堯也舜也。巍然煥然。不可以言語褒揚。萬古光明。夫子文章。

번역

검은 것은 위로 올라가니 해와 달과 별이 빽빽이 늘어서서 밝게 빛나고, 누른 것은 아래로 내려가니 산과 강과 바다가 깊고 넓으며 높고 크네. 성인이 이를 참작하여 원기가 사시절에 금성옥진(金聲玉振)하였으니, 진실로 공자에게 모였네. 온화하고 겸손하며 검소하고 양보하는 모습은 엄숙한 위의가 있었고, 삭제하고 정정하고 찬수(贊修)한 것은 빛나는 문장이 있었네. 능히 삼대를 말하기에 문헌으로는 나를 증명할 것이 부족하여 잠시 태사에게 말을 하였으니, 아악을 오히려 과화의 은덕을 입었네. 겸손함을 훔쳐 비유하니 공은 실로 작자와 술자를 겸하였고, 추존과 조술은 덕이 요순에 미쳤네. 우뚝하고 빛나서 언어로 포양할 수 없으니 만고에 광명하리라. 부자의 문장일세.

55. 揖觶亭銘

문체: 雜著類 / 箴銘類

원문

發的祈爵。必志彀率。省括釋度。序賢觀德。揖耦登取。不怨勝已。失而反之。爭也君子。

번역

과녁을 쏘아 과녁에 맞히는 것은 반드시 활시위를 당기는 힘을 뜻하고, 성찰하여 도를 해석하는 것은 어진 이를 살펴 덕을 관찰하는 것이다. 부부로 함께 올라서 취함은 이긴 자에게 원망하지 않는 것이고, 잘못하면 고쳐서 돌이키는 것이 군자의 다툼이다.

56. 魯陽戈辨

문체: 雜著類 / 論說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3A, ITKC_MO_0200A_A043_503B ...

원문

或曰。誠則動。動則變。此至理也。故精誠所感。日星致應。魯陽撝戈。退日三舍。吁。不其信矣乎。余曰。然。至誠。固無不動者。雖頑如金石。尙可開。曾謂理氣所凝聚。聰明自人之天乎。然天旣有是理是氣而爲天。人亦得於天以理以氣而爲人。天人未嘗二也。故人有理順而合天之理。氣順而和天之氣。然後其誠可動。而其應可致。安有不孚於在天之理氣。而獨以私心之憤切而反可致其動且應乎。自古。聖人以下順而致之者可數。六責未已。千里方雨。舊政纔擧。祥穀乃枯。雷風反於出郊。凶星退於罪已。豈非先修在我之天。以應在彼之天。故如是速也。然則彼魯陽之事。順己之理。以合天理而爲之者歟。順己之氣。以和天氣而致之者歟。諸侯擅兵。殺人爭強。其氣固悖。其理固乖矣。悖於氣。乖於理。則不順乎天。而滋益罪也。其爲天者。舍曰是人之私心誠切。而曲聽其瞞而欺乎。使彼蒼蒼者不可知。而唯其願之是聽。則王郞之追漢。非不切也。荊軻之報丹。其誠極矣。滹沱之氷。不必徵也。白虹之災。不宜兆也。塡然鼓之。兩壘相敵。安危死生之形。勝敗存亡之分。當時急切。孰非誠也。而每每揮戈。日必可退。則不知是日何時而暮乎。惟其順理合天者。其誠可激。其氣可動。則魯陽之說。不待智者而知其誣也。古今來好事者非一。尨言誕說。上至於誣二儀。矯三精而不覺也。石可鍊而天金。斧可修而月明。誠果有此事歟。然則援戈退日。其說安在。曰。與虞公指劍。后羿射烏。同出於淮南子云。

번역

어떤 이가 말하기를, “정성스러우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는 것이 지극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정성스러운 마음이 감동시키면 해와 별도 응하여 노양(魯陽)의 창을 거두고 퇴일(退日)이 삼사(三舍)가 된다.” 하였으니, 아, 믿지 않을 수 없겠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지극한 정성은 진실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어서 아무리 금석처럼 완악한 것도 오히려 열 수 있다. 일찍이 이치와 기운이 응집된 것이 사람의 천성이라고 여겼던가? 그러나 하늘에 이미 이러한 이치와 기운이 있어서 하늘이 되고, 사람도 하늘에서 이치와 기운을 얻어서 사람이 된다면 하늘과 사람은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치를 따라 하늘의 이치에 합하고 기운을 따라 하늘의 기운에 화합한 뒤에야 그 정성이 움직일 수 있고 그 응함이 이루어질 수 있다. 어찌 하늘의 이치와 기운에 부합하지 않고 사사로운 마음으로 분절(憤切)하기만 하여 도리어 그 움직임과 응함을 이루게 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성인 이하로 순종하여 이루어낸 자를 셀 수 있다.” 하였다. 육책(六責)이 끝나기도 전에 천 리에 비가 내리고, 옛 정사가 겨우 거행되자 상곡(祥穀)이 마르고, 우레와 바람이 교외를 나선 뒤에 도리어 일어나고 흉성이 죄가 끝난 뒤에 물러갔으니, 어찌 선조(先祖)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늘의 은덕이 저곳에 있는 하늘을 감응시켜 이처럼 속히 응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저 노양(魯陽)의 일은 자기의 이치를 따라 천리(天理)에 합치되게 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기운을 따라 천기(天氣)와 화합하여 이루어낸 것인가? 제후가 군사를 마음대로 부리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강함을 다투는 것은 그 기운이 본래 어긋나고 그 이치가 본래 어그러진 것이다. 기운에 어긋나고 이치에 어그러지면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 못하여 죄를 더하는 것이니, 하늘이 만약 이 사람의 사심(私心)을 버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곡진히 듣고 속이고 속이는 것을 미혹하게 하여 저 알 수 없는 창창(蒼蒼)한 기운을 오직 그가 원하는 대로만 들어주었다면 왕랑(王郞)이 한(漢)나라를 추종한 것이 절실하지 않았겠으며, 형가(荊軻)가 진단(秦丹)에게 보답한 것도 어떠했겠는가. 그 정성이 지극하면 호타(滹沱)의 얼음이 녹는 것을 징험할 필요가 없고, 흰 무지개의 재앙을 조짐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가득 차서 북을 치면 두 진영이 서로 대적하여 안위와 사생의 형세가 결정되고 승패와 존망의 분수가 나뉘는데,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누가 정성을 다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매번 창을 휘둘러 날마다 반드시 물러날 수 있다면 어느 때에 해가 저물 줄 알겠는가. 오직 이치에 순응하고 하늘에 부합하는 것이면 그 정성이 격발되고 기운이 움직일 수 있으니, 노양(魯陽)의 설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아도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고금에 일에 호기심을 가진 자가 한둘이 아니어서 허황된 말을 하여 위로 이의(二儀)를 무함하고 삼정(三精)을 굽히면서도 깨닫지 못하였다. 돌은 녹여서 천금을 만들고 도끼는 갈아서 달빛을 밝힐 수 있으니, 참으로 이런 일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창을 끌어당겨 물러난 날이 어디에 있는가? 우공(虞公)과 지검(指劍), 후예(后羿)와 사오(射烏)의 이야기가 《회남자(淮南子)》에 똑같이 나온다고 한다.

57. 淸江居士對

문체: 公車類 / 對策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3D, ITKC_MO_0200A_A043_504A

원문

或問淸江居士李某曰。子以淸江居士爲號。子眞見居於淸江者乎。應之曰。余世居京城。家在南山之下。焉得以居淸江乎。然則子以淸江爲號。其說有無。曰。古之聖賢。以物取譬者多矣。未有若水之易見而能近也。故自夫子川上之臨。而亟稱於水曰。水哉水哉。又曰。智者樂水。至於孟子。乃曰。觀水有術。必觀其瀾。朱夫子感興詩曰。恭惟千載心。秋月照寒水。則不獨有取於不捨晝夜。盈科以進者。其逝如斯。而江河之左而爲長者。以其卑也而止耳。且論學者須如上水。不進則退。論聲名者。詠其流久而不廢。萬古爲政者。觀其淸淨。論敎者。譬諸方圓。若此又不可殫記。若余之所慕。勞竊觀瀾之義。實尙感興之旨。夫江之爲物。納衆流之歸。爲百川之宗。心之爲靈。受衆理之會。爲一身之宰。則大理一體。殆無異者。利慾起而心地亂。風波興而江水濁。心之與江。豈不同乎。風波靜而江水淸。利慾熄而心地明。江之與心。豈不同乎。因江水之淸濁而察吾心之明亂。吾將推類於江淸。而欲吾心之明。故吾之身。雖寄於山。吾之心。未嘗不居於江。身。外也非內也。內也非外也。外之身居。不足爲名。內以心居爲號。故乃以淸江稱居士也。子聞吾言。余是南山之居士乎。淸江之居士乎。或者蹶然起曰。子眞淸江之居士。因編其語爲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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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청강거사(淸江居士) 이모(李某)에게 묻기를, “그대가 청강거사라는 호를 쓰는데, 그대는 정말로 청강에 살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집은 남산 아래에 있으니, 어찌 청강에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청강을 가지고 호를 삼았으니, 그 설이 유무(有無)가 있다.” 하였다. 옛날 성현들이 물을 가지고 비유한 자가 많다. 물처럼 쉽게 보면서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공자께서 천상(川上)에 임하여 곧바로 물을 일컬어 “물아, 물아.” 하였고, 또 “지자는 물을 즐긴다.” 하였으며, 맹자에 이르러서는 “물을 관찰하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보아야 한다.” 하였다. 주 부자(朱夫子)의 감흥시(感興詩)에 “공손히 생각건대 천 년의 마음은 가을 달이 찬 물을 비추는 것과 같으니, 밤낮으로 버려두지 않고 항상 채워 나가는 것만 취할 것이 있겠는가. 흘러감도 이와 같은데 강하(江河)의 왼쪽에서 길어지는 것을 이루었네.” 하였다. 그 비루한 점을 가지고 그치기 때문이다. 또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상수(上水)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야 한다. 성명을 논함에 있어서는 오래도록 흐르면서도 폐지되지 않은 것을 읊고, 만고의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는 청정함을 살피며, 교화를 논함에 있어서는 방원(方圓)에 비유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또 모두 기록할 수 없다. 내가 사모하는 바인 노절관란(勞竊觀瀾)의 뜻은 실로 감흥(感興)의 지취를 숭상한 것이다. 강이 만물을 받아들여 모든 시내의 종주가 되는 것처럼 마음은 영명하여 모든 이치를 받아들이고 한 몸의 주재가 되니, 대리(大理)와 일체로서 거의 차이가 없다. 욕심이 일어나면 심지가 어지럽고 풍파가 일어나면 강물이 흐려지니, 마음과 강이 어찌 같지 않겠는가. 풍파가 잔잔하면 강물이 맑아지고 욕심이 사라지면 심지가 밝아지니, 강과 마음이 어찌 같지 않겠는가. 강물의 청탁을 인하여 나의 마음의 명란(明亂)을 살피노라. 나는 강(江)의 맑음으로 미루어 내 마음이 밝아지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나의 몸은 비록 산에 붙어 있지만 나의 마음은 일찍이 강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몸은 밖인가 안인가, 안인가 밖인가? 밖의 몸에 머무는 것은 이름할 만하지 않으니, 안의 마음에 머무는 것으로 호칭을 삼는다. 그러므로 청강(淸江)으로 거사라 일컬었으니, 자네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남산의 거사라고 하겠는가, 청강의 거사라고 하겠는가? 어떤 이는 벌떡 일어나서 “자네는 참으로 청강의 거사일세.”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그 말을 편찬하여 대답을 삼는다.

58. 倭躑躅說

문체: 雜著類 / 論說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4B, ITKC_MO_0200A_A043_504C

원문

家有躑躅。自日本來者。凡四株花。人謂余曰。物性離土。寒暖氣異。必趁初冬。裹束以藁席。至過明年寒食乃解。余從其敎。謹開闔之。今年春。余家有事。乏於用席。而早解其一焉。莫春者。三株爛熳。竝時俱發。而唯早解者。以春晩有霜。不能齊萼敷榮。次第而開。兄躑躅之盛者。不越半月之玩。而獨此自三月。歷初閏兩四月。以迄於端午。何其久也。嫩葉靑枝。其華尤麗。來賞者咸異之。而不能無訝焉。余曰。解之早。故霜掣之。掣於霜也。故開有序。唯其序也。故久矣。解不以早。則焉有其傷。不有傷也。焉得其久。幸其着土有根。眞性不損耳。雖有淸霜冷吹。未足爲深病。而適爲持久之道。進退倚伏。未可知也。君以爲何如。訝者怡然曰。子又於是木。觀一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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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진달래가 있는데 일본에서 온 것이다. 모두 네 그루인데, 꽃이 피면 사람들이 나에게 “물성(物性)이 흙을 떠나 오고 기후도 달라서 반드시 초겨울에 짚자리에 싸서 보관했다가 내년 한식(寒食)이 지나야 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따라 삼가 열고 닫았는데, 금년 봄에 집안에 일이 있어서 자리를 쓸 것이 없어서 일찍 하나를 풀었다. 그런데 초봄에는 세 그루만 활짝 피었고, 일찍 푼 것만은 늦봄에 서리가 내려 꽃이 다 같이 피지 못하고 차례로 피었다. 형의 진달래는 반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감상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3월부터 윤4월과 5월을 거쳐 단오까지 피었으니 어찌 그리 오래가는가? 연한 잎새와 푸른 가지에 꽃이 더욱 아름다워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을 품는다. 내가 말하기를, “일찍 풀었기 때문에 서리에 상한 것이니, 서리에 상했기 때문에 차례대로 피는 것이다. 오직 그 차례 때문이니 오래가는 것이다. 일찍 풀지 않았다면 어찌 상할 것이 있겠으며, 상하지 않았으면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다행히 흙에 뿌리를 내렸으니 진정한 성질이 손상되지 않아서라네. 비록 맑은 서리가 차갑게 불어오지만 깊은 병통이 되지는 못하니, 마침 오래가는 방도가 되었네. 나아갈지 물러날지 의지할지 엎드릴지는 알 수 없네.”라고 하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심하던 자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 또한 이 나무로 한 가지 사물을 관찰한 것이네.” 하였다.

59. 蠟牧丹說

문체: 雜著類 / 論說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4D

원문

木芍藥爲花。擅聲於名園。尙矣。好事家。常以易謝爲惜。計厥開落。則一朶之賞。不盈七日。雖有次第開者。大約不過十許日。而全株空矣。古人所謂花開花落二十日者。否也。余居閑無事。日以花竹遣興。而逮諸花盡謝。殆將無所賴矣。忽然思之。則花之爲取色艶而止爾。相馬意足。猶不辨其驪黃。矧今寓賞。眞假乎何擇。命工鎔蠟。作淺深紅白三色。備其開末開者。而分綴於三株之間。時在端陽後晦也。見者斷斷。或祥或怪。而終不知假物之爲逞也。噫。假之欺人。若是之甚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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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작약(木芍藥)은 명원(名園)에서 이름난 꽃이다. 아, 호사가(好事家)는 항상 쉽게 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 피고 지는 것을 헤아려 보면 한 송이의 감상도 7일을 넘기지 못하고, 비록 차례로 피는 것이 있더라도 대개 열흘 정도면 온 가지에 꽃이 다 지고 만다. 그러니 옛사람이 말한 ‘꽃이 피고 지는 데 이십 일이 걸린다.’라는 것은 틀린 것이다. 나는 한가하여 일 없이 날마다 꽃과 대나무를 가지고 흥취를 보내는데, 꽃이 다 지게 되면 거의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문득 생각하니, 꽃은 그 색깔이 고운 것을 취하는 것이고 말 뿐이다. 말을 살필 때에 뜻이 충분하면 오히려 검은 말이건 황마(黃馬)이건 구별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금 감상하는 데 진짜와 가짜를 어찌 가리겠는가. 왁스 공장을 시켜서 연한 빛과 깊은 빛의 홍색ㆍ백색 세 가지 색으로 만들어서 피고 지는 것을 갖추어 세 그루 사이에 나누어 심었다. 때는 단오 뒤 그믐이었는데, 보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보고 혹 상서롭다 하고 혹 괴이하다 하였으나 끝내 가짜가 흉내를 내는 것인 줄은 몰랐다. 아, 가짜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 이와 같이 심한가.

60. 后谷說

문체: 雜著類 / 論說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5A, ITKC_MO_0200A_A043_505B ...

원문

趙君敬伯。家在靑坡。以后命其谷。請余以文之。余就而徵其指。則曰。陋巷廁在東西兩隣之間。東西各前其前。以後稱歸吾居。吾亦隨人之后之而自后也。余喟曰。敬伯居介二隣。則谷實中之。非后也明矣。蓋中者。道之貴。后者。位之下。世之人。於是乎取舍。君則異於是。抑中爲後。受而安之。不但安之。又欲揚之。其意豈無尙歟。昔者。劉潛夫以後名其村。陳無己以后名其山。其前却向背。其辭指所在。未可知也。從君所安。姑論其尙。則豈孔子所謂知天下之不可先也。故後之者耶。若因其尙。更求其實。則仕不前人。年不後人者。君所固有。而一罷官祿。收身歛迹。不與射時者偕逐。諒爲家居是谷。雋永是後之腴者也。況君有才有學。出應時需。不落他人之后。而怡然於自后。扁其谷中之室。重以樂飢名之。則不獨安之。且又樂之者也。然則其與不寧方來之後而凶者。不可同年而較矣。易曰。先迷失道。後順得常。知進退而不失其中者。余於敬伯。見之矣。然物理來往。未始窮也。安知后者之未必非先。而先者之必不后耶。世間多事之敗。何嘗不由爭先而錯了。此皆不安爲后之過也。勉之。敬伯益守其中。益堅其后。可也。抑從君后。復有祝焉。義理無窮。許多精密。未可徒然以人事之后於人者。遽足而自止。當如繫辭之說。安其身而後動。易其心而後語。定其交而後求。馴至於大學之自知止而后。以至於能得。自物格而后。以至於治平。方可謂之知所先後。而得於道矣。然則居雖后之。身雖后之。功名利勢。莫不后之。而道德之造。未應不進於高遠。而先於先者萬萬。用后之能事畢矣。余亦中央於兩地。見后於彼此。慕見龍而無首者。於谷之說。不得不張而言之。不知敬伯無作歇後看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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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군 경백(趙君敬伯)의 집이 청파(靑坡)에 있는데, 뒤로 그 골짜기를 명하여 나에게 문장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가서 그 이유를 물으니, “누항(陋巷)이 동서 양쪽 이웃 사이에 있는데, 동서가 각각 앞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뒤로 하여 우리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나도 사람들의 뒤를 따라 스스로 뒤에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경백은 두 이웃의 중간에 살고 있으니 골짜기가 실로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지 뒤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대개 가운데는 도(道)의 귀한 것이요, 뒤는 지위가 낮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에 취사(取舍)를 하는데, 경백은 이와 다르다. 중을 후로 삼아 받아들여 편안하게 할 뿐 아니라 또 드러내고자 하니, 그 뜻에 어찌 높은 바가 없겠는가. 옛날 유잠부(劉潛夫)는 뒤로 그 마을을 이름 지었고 진무기(陳無己)는 뒤로 그 산을 이름 지었는데, 그 앞과 뒤의 향배를 보면 그 말이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경백이 편안하게 여기는 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우선 그 상(尙)을 논하자면, 어찌 공자께서 “천하에 앞서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아서 뒤에 오는 자가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 상을 인하여 다시 그 실상을 구한다면, 벼슬은 남보다 앞서지 않고 나이는 남보다 뒤처지는 것은 군의 본래 소유입니다. 한 번 관록(官祿)을 버리고 몸을 거두어 사시(射時)에 함께 따르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집안에서 편안히 지내고 오래도록 후진(後進)을 양성하는 데 넉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군은 재주와 학식이 있어 세상의 요구에 응하여 남보다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즐겁게 스스로 뒤로 물러나 골짜기 안의 집을 편액하고 “낙기(樂飢)”라는 이름으로 중첩한다면, 홀로 편안할 뿐만 아니라 또 즐거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평스럽게 벼슬길에 나갔다가 흉한 자와 같은 해를 살아서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역》에 “먼저 길을 잃고 뒤에 상도(常道)를 따르니, 진퇴에 있어서 중도를 잃지 않음을 안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경백에게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이치는 오고 감이 처음부터 궁구한 것이 아니니, 뒤에 오는 것이 반드시 앞서는 것이 아니고 앞서는 것이 반드시 뒤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세상의 많은 일의 실패가 어찌 앞서기를 다투다가 잘못된 데에서 말미암은 적이 없었습니까. 이는 모두 뒤에 서기를 편안하게 여기지 않은 허물입니다. 힘쓰십시오. 경백(敬伯)은 더욱 중도(中道)를 지키고 더욱 후진을 견고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를 따르는 데에도 다시 축원합니다. 의리는 무궁하고 정밀한 것이 많아서, 한갓 인사(人事)가 남보다 뒤에 있다고 해서 갑자기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시경》 〈계사(繫辭)〉의 말과 같이 몸을 편안하게 한 뒤에 움직이고 마음을 바꾼 뒤에 말을 하고 교분을 정한 뒤에 구하여, 《대학》의 “자신이 그칠 줄을 안 뒤에야 그치고, 사물에 격식을 갖춘 뒤에야 다스려 평정할 수 있다.”는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후를 알고 도(道)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살더라도 뒤에 있고 몸도 뒤에 있으며 공명과 이세(利勢)를 추구함에도 모두 뒤에 있지 않겠는가. 도덕의 경지에 나아감은 응당 높고 원대함에 진보하여 앞서가는 사람보다 훨씬 앞서야 하니, 뒤에 있는 능사(能事)를 다 쓴 것이다. 나 또한 두 가지 가운데 중간에 있으면서 피차간에 뒤처진 것을 보았으니, 용을 사모하면서도 머리가 없는 것에 대해 곡의 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경백은 작설(作歇)이 없단 말인가?

61. 送趙克己序

문체: 序跋類 / 序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5D, ITKC_MO_0200A_A043_506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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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嘗謂天地之生久矣。時世之變易屢矣。命於其間者。物物人人。類不少矣。物固物矣。而人而爲人者。蓋亦多類焉。於其多類之中而同生一天地一時世。不爲夷狄而同爲人。不爲貴賤而同爲士。業之治同。志之尙同。年齒不甚殊。而托交契又同。抑可謂幸矣。誠千載未易之同也。雖不可必謂之相期。亦不可不謂之以如有期也。然則其同者。旣已同矣。其不同者。宜無不相同矣。而聚散去留。尋常不一。而每有所不得同者。是何同同之中而有此不同同乎。旣使之不同。則雖使之不同。而彼造物者。吾無恨焉。旣使之同而又使之不同。則其不同者。吾不得而不恨於造物矣。僕之與子知也。當初一笑而同者。無不同焉。悠悠十年。心不能謀身。飄蓬南北。其不同者。無一同焉。是誠造物之不使同者歟。吾人之不與同者歟。未可知也。觀夫世人。有以事同者。有以勢同者。富貴同者。利欲同者。同之之途不一。而同之之■。又不同焉。然以事同者。事已則去。以勢同者。勢薄則疏。同富貴而相同者。其終必忌。同利欲而相同者。其末必爭。此等之人。當其同也。身未嘗不與同也。數者之同。似同而實異之心乃見。雖曰同矣。不可謂之同也。古有神交而同者。夢寐而同者。若高宗之傅說。孔聖之周公是已。曷嘗同時同聚而同哉。只以誠同而志同。故極此不同之異而妙而同也。其曰。友一鄕,一國,天下。至於尙而論之者。皆以所同同也。然則所貴者心同。而不貴於身同的矣。心苟同矣。身雖不同。不害爲同。雖曰不同。安可謂之不同乎。身是軀殼。而寄於宇內。心存方寸。而用之在我。此亦古人之身不必同。而心必同之者也。若就取友而言其同。則不忘平生。其利斷金。死生不遷。失得不搖。毁譽榮辱。一而不二。然後君子之同。可見矣。僕之於君也。其不同者極矣。聚散去留。身不得自由者。則奈何。猶幸其同者不異。是豈可以不同乎。故於君之歸。不以不同者爲恨。只以所可同者勉之。若孔子所謂同而不和者。非此同之謂也。於同之中。又有不同者在焉。斷不可以混同而同之。吾子其知同哉。他日同升。得以同寅。則同之幸也。與子同歸。同棄於世。則同之不幸也。天將同此同而同於幸歟。於不幸歟。噫。同之如有期也如此。同之不可期也又如此。則可慰者非同。而同亦不可悲也歟。於是乎書。上以同之在我者語君。下以同之在天者問君。癸亥初冬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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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천지의 생성이 오래되었고 시세의 변천이 자주 있었으나 그 사이에 명을 받은 사람과 물건은 종류가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건은 본래 물건이지만 사람이 사람 노릇 하는 것은 또한 여러 종류가 있다. 그 많은 종류 가운데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한 시대에 태어나 오랑캐가 되지 않고 똑같이 사람 되고 귀천이 되지 않고 똑같이 선비 되며, 생업의 다스림도 같고 지향하는 바도 같으며 나이가 많이 다르지 않으면서 교분을 맺는 것도 같다면 참으로 다행이라 할 만하니, 이는 진실로 천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비록 서로 기약했다고 반드시 말할 수는 없으나 또한 기약한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같은 것은 이미 같고 다른 것은 마땅히 같지 않아야 하는데, 모이고 흩어지고 가고 머무는 것이 평상시에 한 가지가 아니어서 매번 같지 않은 점이 있다. 이것이 어찌 같은 가운데에 이러한 같지 않음이 있는가. 이미 같지 않게 하였으면 비록 같지 않더라도 저 조물주에게 내 한스러울 것이 없는데, 이미 같게 하였다가 또 같지 않게 한다면 그 같지 않은 것은 내가 조물주를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자네와 안 지는 것은 당초에 한번 웃고 함께한 일로 같지 않음이 없었으나, 10년 동안 유유히 마음으로 몸을 도모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떠돌아다닌 것은 같지 않은 것이 한 가지도 없었다. 이것은 참으로 조물주가 같게 하지 않은 것인가, 우리들이 함께하지 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일로써 같은 자도 있고 형편으로 같은 자도 있으며 부귀로 같은 자도 있고 이욕으로 같은 자도 있으니, 같아지는 길이 한 가지가 아니어서 같아지는 것이 또 같지 않다. 그러나 일로써 같은 것은 일이 끝나면 떠나간다. 형세가 같은 자는 형세가 박복하면 소원해지고, 부귀를 같이 하여 마음이 같으면 그 끝에 반드시 시기하고, 이욕을 같이하여 마음이 같으면 그 말년에 반드시 다투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서로 같을 때에는 몸이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몇몇의 같은 것은 같으나 실상은 다르니,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비록 같다고는 하나 같다고 할 수 없다. 옛날에 정신으로 교유하여 마음이 같았던 자와 꿈속에서나마 마음이 같았던 자가 있었으니, 고종(高宗)과 부열(傅說), 공자(孔子)와 주공(周公)이 이것이다. 어찌 일찍이 함께하고 모여서 마음을 같이한 적이 있겠는가? 단지 성의가 같고 뜻이 같기 때문에 이처럼 다른 것을 극복하여 오묘하게 같게 된 것이다. “친구를 한 고을, 한 나라, 천하에 두었다.”라고 하여 높여 논한 것은 모두 같은 것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귀중한 것은 마음이 같음이지 몸이 같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진실로 같다면 몸은 비록 같지 않더라도 같다고 해도 해가 되지 않으며, 비록 같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어찌 같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몸은 육신으로 우주 안에 붙어 있고 마음은 방촌(方寸)에 있으나 내게 쓰이는 것이니, 이것이 또한 옛사람이 “몸은 반드시 같을 필요 없으나 마음은 반드시 같아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벗을 사귀는 데 있어 그 같음을 말한다면 평생을 잊지 않고 이익과 손해를 단칼에 자르며 죽고 삶에 변치 않고 얻고 잃음에 흔들리지 않으며, 비방과 칭찬과 영광과 치욕이 하나로 되어 둘이 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군자의 같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같지 않은 것은 극도이니 모이고 헤어지고 가고 머무름에 몸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래도 다행히 같은 점이 다른 것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같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돌아가는 데 대해 같지 않은 것으로 한탄하지 않고 다만 같게 할 만한 것에 힘쓰니, 공자가 이른바 “같으면서도 화합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이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것 가운데에도 또 같지 않은 것이 있으니, 결코 혼동하여 똑같이 볼 수 없다. 그대는 잘 알 것이다. 훗날 함께 올라가서 함께 어울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다행한 일이고, 그대와 함께 돌아가 세상에 버려진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늘이 이 같은 것을 함께 하여 다행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불행하게 할 것인가? 아, 기약이 있는 것처럼 같게 하는 것은 이와 같고, 기약할 수 없는 것으로 같게 하는 것은 또 이와 같으니, 위로할 만한 것이 같음이 아니고, 같음도 슬퍼할 것이 못 된다. 이에 글을 올려서 위로는 나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그대에게 말하고 아래로는 하늘에 있는 것을 가지고 그대에게 묻는다.

62. 送尹思叔〔原注:儼〕赴長水縣監序

문체: 序跋類 / 序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6D, ITKC_MO_0200A_A043_507A ...

원문

人之好好爵。尙矣。易曰。吾與尒縻之。詩曰。逸豫無期。先經彖雅。所擬猶若。則矧降世利名。日日滔滔之末耶。間有不事高尙。若考槃樂泌之儔。雖獨詣物表。抑有潔亂之尤。亦非中行者所貴。自餘捷徑終南。充隱山中。焉足數哉。尹君思叔。吾友也。與余生同年。自髫幼素。科未四十。而人稱其晩。選居槐院。人惜其屈。門下有注書之官。載筆柱下。日接晉晝。地部有員外之郞。上應列宿。專總國財。人情所榮。而世謂之淸要職也。思叔兩於門下。□遭地部。皆以病辭焉。今之仕者。以內外區輕重。邑得湖嶺之遠者。爲尤薄。斗縣長水。又是窮處之甚。而監務之俸。不足以奉養甘旨。則相識者。莫不齎咨。思叔乃欣然自奮曰。昔者之疾愈矣。徧分華牋。要別於諸朋。如欲鋪張歌詠。以頌其自得之行李者。是何情尙殊異。不符於詩易之謂乎。余切思之。人之所好。好有不同。有以好好之者。有以不好而好之者。以好爲好者。常情也。不好而爲好者。唯獨見過人者能之。思叔之不以好爵爲榮。而反耽殘薄之遠縣者。豈其心之不欲而僞好之乎。其以不好而爲好者。必有過於人之好之。故其所取舍如此耳。吾聞思叔之縣。山水其窟也。居民鮮而訟牒稀。出而莅衙。簿書期會之易辦也。入而承顔。斑衣弄雛之多暇也。選其於身安便而於心無營者居焉。則思叔之好之。殆無若作縣之爲好矣。世有求時之好爵。而營苦身心。任重力微。不克盡於君親者衆矣。則吾思叔之所好者。雖若好人之所不好。政其可好而好之者也。非過人獨見眞得可好之正者。疇克尒耶。想琴歇黃堂。鳥啅苔庭。柱笏頤神。泛穎爲嬉。當是時也。長水之山。卽思叔考槃之阿。長水之川。卽思叔樂飢之泌也。初無絶人之累。自怡吏隱之樂者。卓高超於詩,易之外也明矣。但世有好事。魔者戲之。蛟鳳鍾靈。棘池非所。好爵所縻。吾恐安石之不免。久矣。彼若自彼而倘來。則吾亦固有。以之致君揚親。亦無非可好之爵也。若不幸而惹不虞之謗。有曰。自我而致之。則其在思叔。反爲不好之爲好矣。其與捷徑充隱。幾何尺寸。而非今日赴縣之意也。余之愛思叔。誠也。送其初行。而兼祝其終歸焉。料吾思叔。亦必以余之言爲好矣。萬曆七年秋。全城李某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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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좋은 벼슬을 좋아함은 당연한 일이다. 《주역》 〈비괘(彖卦)〉에 “나와 너는 서로 얽매인다.”라고 하였고, 《시경》 〈소아(小雅)〉에 “편안하게 지낼 기약이 없다.”라고 하였다. 먼저 주역의 단사(彖辭)와 악사(樂辭)를 경전으로 삼았으니, 비유하는 바가 오히려 비슷하다. 하물며 세상의 이익과 명예를 좇아 날마다 물결처럼 밀려드는 끝에 이르겠는가. 간혹 고상한 일을 하지 않고 산림에서 은거하며 즐기는 무리도 있으니, 비록 홀로 세속을 벗어나더라도 어지러운 곳에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점이 없으니 또한 중도(中道)를 행하는 자의 귀중함이 아니다. 그 밖에는 지름길인 종남산(終南山)이나 은거처인 은산(隱山) 같은 것이 있으니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윤 사숙(尹思叔)은 나의 벗으로 나와 동갑이다. 어려서부터 평소에 과거를 보지 않았으므로 나이 마흔을 넘어서야 사람들은 그가 늦게 급제했다고 일컬었다. 괴원(槐院)의 선거(選居)로 있으니 사람들은 그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문하(門下)에 주서관(注書官)이 있어 필주(筆柱) 아래에서 매일 진주(晉晝)를 접하며, 지부(地部)의 원외랑(員外郞)으로 상응(上應)하는 별자리에 있으니 나라의 재물을 전담하여 관장한다. 사람들의 인정이 영예롭게 여기는 것이고 세상에서는 청요직(淸要職)이라고 한다. 사숙(思叔)이 두 번이나 문하에서 지부(地部)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지금의 벼슬아치들은 안팎으로 구별하여 경중을 따지는데, 고을은 호남과 영남의 먼 곳을 얻는 것이 가장 박하다. 두현(斗縣)과 장수(長水)는 또 매우 궁한 곳인데 감무(監務)의 봉록으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에 부족하므로, 서로 아는 자들은 모두 편지를 보내어 물었다. 사숙이 이에 기뻐하며 스스로 분발하여 말하기를, “옛날에는 병이 나았을 때 화려한 종이를 두루 나누어 주면서 다른 벗들과 구별하였는데, 만약 노래를 지어 그 행차를 송축하려고 한다면 이는 무슨 정상이기에 시(詩)와 역(易)에 이르러서도 특별히 다르게 말했는가?” 하였다. 내가 깊이 생각하니,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같지 않다. 좋아해서 좋아하는 자가 있고 좋지 않은데도 좋아한다는 자가 있다. 좋아해서 좋아하는 것은 상정(常情)이고, 좋지 않은데도 좋아한다는 것은 오직 남보다 나은 것을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숙이 높은 벼슬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잔박한 먼 고을을 탐하는 것은 어찌 그 마음이 좋아하지 않으면서 좋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겠는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삼는 것은 반드시 남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이니, 취사(取舍)가 이와 같은 것이다. 내 듣건대 사숙의 고을은 산수가 그 골짜기를 이루고 있고 거주하는 백성이 적어 송사 문서도 드물어서 나가서 관아에 부임하면 부서(簿書)를 처리할 기회가 쉽고, 들어와서 윗사람을 모시면 화려한 옷 입고 아이들 희롱할 여유가 많다고 한다. 몸이 편안하고 마음에 영리함이 없는 것을 골라 그곳에 살면 사숙이 좋아하더라도 고을 수령이 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때를 구하여 높은 벼슬을 좋아하면서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중한 임무와 미약한 힘으로 군주와 부모에게 다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그렇다면 사숙이 좋아하는 것은 비록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정히 좋아할 만한 것을 좋아함이네. 남을 지나치게 보고 홀로 진실을 얻어 좋아할 만한 바른 것을 누가 그대만 하겠는가. 황당(黃堂)에서 거문고를 쉬고 새들은 이끼 낀 뜰에 지저귀며, 홀을 세우고 신명을 기르며, 쌀을 떠서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이러한 때에 장수산(長水山)은 바로 사숙고(思叔考)가 은거한 산이요, 장수천(長水川)은 바로 사숙(思叔)이 즐겁게 굶주리던 곳이네. 처음부터 남을 끊어버리는 누를 지었거나 스스로 이은(吏隱)의 즐거움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니, 시와 역(易) 밖에 탁월하고 초월함이 분명하네. 다만 세상에 호사꾼이 있어 마귀가 장난을 치면 교룡과 봉황 같은 영험한 기운이 모이는 곳이 가시나무 우물은 아니네. 좋은 벼슬에 매인 것은 내가 안석(安石)의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오래되었네. 저들이 만약 저쪽에서 우연히 오면 나도 본디 가지고 있으니, 이것으로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봉양함이 또한 좋아할 만한 벼슬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뜻하지 않은 비방을 불러일으키면, 이른바 -원문 빠짐.- 내가 스스로 이룬 것이라면 사숙(思叔)에게는 도리어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여길 것입니다. 그와 첩경충은 은(隱)과 거의 차이가 없으니, 오늘 현에 부임하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사숙을 사랑함은 진실입니다. 그의 첫 걸음을 보내고 아울러 끝까지 돌아오기를 축원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사숙도 반드시 나의 말을 좋게 여길 것입니다. 만력 7년 가을에 전성 이모는 쓰다.

63. 送宋景繁赴治金山郡序

문체: 序跋類 / 序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0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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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爲嶺南巨郡。又多強宗。素號巖邑。□朝廷雖選人以畀。齒舌於中者。踵相接。今擧工曹正郞宋君景繁爲之。人皆以爲得。余獨不可焉。景繁。吾友也。稔其爲人。非以簿書之不能期會。米鹽之不可出納也。詩曰。瑟彼玉瓚。黃流在中。又曰。有鶴在林。若吾景繁。端敏而靜。和易而守。屈指夙夜之流。未必人後者的也。玉瓚固宜於黃流。皐音何必於在林而可耶。或曰。漢家試人。必先於治民。故公卿莫非循吏。方今□聖上右民。尤重治行。然則景繁之出。安知非鯤圖之北海乎。余曰。不然。漢相固多循吏。車千秋一言取相。旬月封侯。何嘗歷試而騰踔乎。不幸使景繁。直而不阿。奉公無他志。務安民。惟病之欲祛。則■■之下。必有射影之沙。豈不可念千萬。景繁。尙愼■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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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 영남의 큰 고을인데 또 강한 종족이 많아 평소 암읍(巖邑)이라 불린다. 조정에서 비록 사람을 뽑아 맡기지만, 입에 오르내리는 자가 계속 이어지곤 한다. 지금 거공조 정랑 송경번(宋景繁)을 그곳의 수령으로 삼으니 사람들이 모두 적임자라고 여긴다. 그러나 나는 유독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번은 나의 벗으로 그 사람됨을 잘 알고 있다. 부서(簿書)를 기회에 맞추지 못하거나 미염(米鹽)을 출납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시에 이르기를, 저 옥찬(玉瓚)이 황류(黃流) 가운데 있네.”라고 하였고, 또 “학이 숲 속에 있네. 마치 우리 경번 같네.”라고 하였다. 그는 단정하고 민첩하며 조용하고 화락하며 지조를 지키는 사람으로, 밤낮으로 노력하는 자들 중에서 반드시 남보다 뒤처지는 사람이 아니다. 옥찬은 진실로 황류에 마땅하지만, 고음(皐音)이 어찌 꼭 숲 속에 있어야만 되겠는가. 어떤 이는 “한(漢)나라에서 사람을 시험할 때 반드시 먼저 백성을 다스리는 일로 시험하였으므로 공경(公卿)이 모두 순리(循吏)였다. 지금 성상께서 백성을 위중히 여기시어 치행(治行)을 더욱 중시하시니, 그렇다면 경번의 출임이 어찌 곤(鯤)이 북해(北海)에서 노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한나라의 재상 중에 진실로 순리가 많았지만, 거천추(車千秋)는 한마디 말로 상신(相臣)에 뽑혀서 한 달 만에 봉후(封侯)되었으니, 어찌 일일이 시험하여 급격히 승진한 적이 있었겠는가. 불행하게도 경번은 곧고 아첨하지 않아 공무를 받들면서 다른 뜻이 없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힘쓰며 오직 병을 제거하기만을 생각하니, 벼슬자리에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를 쏘아 맞히는 모래밭이 있을 것이다. 어찌 천만 가지로 염려할 것이 없겠는가.”라고 말한다. 경번은 더욱 신중하라.

64. 送奏請書狀高而順序

문체: 序跋類 / 序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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讒奸造孼。日月蒙迷。我國□宗■。不盡湔洗者。殆且二百年。于今歷十有四□王。冤痛迫切。常如一日。則聖朝一視之仁而獨棄朝鮮於覆盆之下。不爲之□昭雪哉。惟誠動天。惟天聽卑。自□成祖文皇帝。明降准改之旨。□列聖繼照。類有恩命。迄于□世宗肅皇帝。至賜勑諭曰。滌瑕傳信。炳如日星。則小東維人。庶幾復父子之倫。而自拔於亂賊之中矣。然□祖訓無改。而會典未降。則錄諸信史。播之普率。終有所不慊焉。念我朝鮮。首被東漸。累朝洪恩。天海無涯。痛玆莫大之晻昧。而未訖於萬一之終白。則□大明麗天。萬國咸寧。飛潛惷植。莫不生遂。敝邑。雖無有腆文獻。不足要一藩邦。提封數千里。竟爲無父無君之鬼耶。一日無父。卽爲一日之非子。一日無君。卽爲一日之非臣。此春秋汲汲正名。而大一統者之急先務也。一日不可以無父無君。一日不可以不子不臣。故雖極知會典之頒。匪朝伊夕。而臣民合口。萬聲同云。徯之一日。不啻百年之遠也。況□殿下尊祖之誠。繼志之孝。其可謂有後□命。而居安日昔之息。抑此一國。搥胸扣心。冀亟終畢之願乎。今復命价赴訴。乃得金公。贊以書狀高君。越若質正崔君。皆極時選。誦詩之責。不但專對。其難矣哉。往欽□天朝。瀝血籲哀。卒包胥秦庭之志。達芋尹寡君之誠。則年將二百。望之久矣。□世歷十四。情已蹙矣。□聖天子賢公卿。不諒人只。自是返命。而東方之父子定矣。君臣順矣。□宗祊滌矣。祖訓正矣。豈但私國之慶。抑實□天朝之懿也。高君。余舊也。封緘勤渠。以牋求送。某老作邊關。腰弓擬敵。不近筆硏。久矣。安敢一言而去子。契闊廿年之別。迢遞萬里之行。亦豈無一言而去子。先之心痛之不可緩者。分留月軒之杯。以談平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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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간악한 짓을 저질러 일월이 어두워지니, 우리나라가 종묘를 모시면서도 죄명을 깨끗이 씻지 못한 지 거의 20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14왕(王)을 거치도록 원통함과 절박함이 항상 하루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조(聖朝)께서 모든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인자한 마음으로 유독 조선만을 엎어진 팥그릇[覆盆] 아래에 버려두고서 죄명을 밝혀 주지 않으십니까. 오직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하늘이 낮은 자의 소리를 들어주시니, □성조 문황제(文皇帝)로부터 명백히 고치라는 뜻을 내리셨습니다. □열성(列聖)께서 이어 비추어 은혜로운 명이 있었고, □세종 숙황제(世宗肅皇帝)에 이르러서는 칙유를 내려 죄명을 깨끗이 하고 진실을 전하여 해와 별처럼 밝게 하면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부자간의 윤리를 회복하여 난적 가운데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부(祖父)의 가르침은 고치지 못하고 회전(會典)이 내려오지 않았으니, 역사에 기록하고 널리 선포하는 데 끝내 마음에 맞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동방에서 가장 먼저 침략을 당하였습니다. 여러 대에 걸친 성상의 크나큰 은혜는 하늘과 바다처럼 끝이 없는데, 이 막대한 어두움을 통회하면서도 만분의 일도 밝히지 못한다면, 천하가 크게 밝아지고 온 나라가 모두 편안해져서 날아다니는 새와 물속의 고기, 땅에 묻힌 풀과 나무가 모두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고을은 비록 두터운 문헌이 없어서 하나의 번방(藩邦)을 요량하기에는 부족하나, 수천 리의 제봉(提封)이 끝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귀신이 되어 버린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루라도 아비가 없으면 바로 하루 동안 자식이 아니게 되고, 하루라도 임금이 없으면 바로 하루 동안 신하가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춘추(春秋)》에서 급급하게 이름을 바로잡아 대일통(大一統)을 이루려 했던 급선무입니다. 하루라도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는 안 되며, 하루라도 자식도 아니고 신하도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회전(會典)이 반포되는 것이 조석간에 되지 않더라도 신민들이 한목소리로 모두 말하기를 “하루만이라도 아비와 임금이 계시기를 바란다.”라고 하니, 이는 백 년의 먼 미래가 아니라 단지 하루일 뿐입니다. 더구나 존조(尊祖)하시는 전하의 정성을 생각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효성으로 선대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후손이 복을 받았다고 할 만합니다. 편안히 지내시던 지난날의 안식을 이제 그만두시고 이 한 나라가 가슴을 치고 애를 태우며 속히 일을 마치기를 바라는 소원을 들어주소서. 이제 다시 명을 받들고 부소(赴訴)하러 가는 길에 김공(金公)을 얻었고, 서장관으로 고군(高君)을 보냈으며, 질정(質正) 최군(崔君)과 같은 이들도 모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시를 외우는 일은 전대(專對)만 할 뿐만이 아니니 그 어려움이 어떠하겠습니까. 가서 천조(天朝)에 공경을 표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애걸하여, 마침내 포서(包胥)가 진(秦)나라 조정에서 했던 뜻을 이루고 우윤(芋尹)이 과군(寡君)에게 바친 정성을 다한다면, 나이가 장차 200세에 가까워지기를 바라온 지 오래되었고, 세상은 14번이나 바뀌었으니, 마음이 이미 답답합니다. 성스러운 천자 현공경(賢公卿)께서 어진 사람을 알아주지 않으시어 이제 명을 돌려보내신다면, 동방의 부자가 안정되고 군신의 질서가 순조로워져 종묘사직이 깨끗해지고 조상의 가르침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라만의 경사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실로 천조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고군은 나의 옛 친구이다. 봉함(封緘)을 보내어 정성스럽게 편지를 구하여 보내 주셨습니다. 모로(某老)는 변방에 나가서 활을 허리에 차고 적과 싸울 일만 생각하고 붓과 먹은 가까이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어찌 감히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를 떠나겠습니까. 이별한 지 20년 만에 만 리 먼 길을 떠나니 또한 어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마음속에 느꺼운 것을 누그러뜨릴 수 없으니, 월헌(月軒)의 술자리에 나누어 머물러 평생을 이야기합시다.

65. 王摩詰寫黃梅出山圖跋

문체: 序跋類 / 題跋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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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右丞維。盛唐人也。詩畫俱絶代。古人互論以有無之聲。此可知也。距今千載。地之相遠。又阻以華徼之限。獲覩眞迹。誠難矣哉。匪懈堂用尊貴。最名好書畫。多臧去。高靈記云。於王維。只得其一。況其餘乎。完溪子長。示余以一軸。乃王維所寫黃梅曹溪出山圖也。曾爲王晉卿所藏。而晉卿自題其上曰。王仲至閱吾家畫。最愛此圖。晉卿以宋室駙馬。手執彩管。擅名一時。出於時賢詩韻。若煙江疊嶂之類。無慮數百首。其家至建寶繪之堂。盛蓄古今名畫。子瞻記之。戒勿爲累。則晉卿之好畫。固非不知而苟有之者也。仲至名欽臣。亦一時文人。宋史稱其淸亮嗜古。亦爲鑑賞之明昭矣。以寶繪之多有。王維之能事而獨選此一幅。則此一點細墨。豈非無價之上乎。重以柳子,虞公。皆元朝翰苑之首。雖除却三王。而兩家親墨。猶足可尙。況詠而張之。發明此畫之實歟。分身二禪。黃梅卽弘忍。曹溪卽慧能。事載傳燈。皆祖師也。噫。物理無窮。去就靡常。明皇不能有菩薩之板。終失於火賊。今玆綃面。乃其同時之物。而僅盈尺餘。傳觀百代。幸不磨滅。以迄于今。槪而論之。疑亦有數者非耶。因子長之欲。詳書以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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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우승(王右丞) 왕유(王維)는 당나라 성세의 사람으로 시와 그림 모두가 절세이다. 옛사람이 서로 논할 때 ‘있느냐 없느냐’로 말하였으니, 이로써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이나 떨어져 있고 지리적으로도 멀고 또 중국이라는 국경에 막혀 있어 진적(眞迹)을 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게다가 계당(懈堂)이 존귀한 사람을 대우하여 가장 시화(詩畫)를 좋아한다고 이름났는데, 많은 것을 버리고 좋은 것만 남겼다. 고령기(高靈記)에 이르기를, “왕유에게는 단지 한 폭의 그림만을 얻었으니, 더구나 그 나머지는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완계자장(完溪子長)이 나에게 한 폭을 보여 주었는데, 바로 왕유가 그린 황매조계출산도(黃梅曹溪出山圖)였다. 일찍이 왕진경(王晉卿)이 소장하였는데, 진경이 그 위에 제하기를, “왕중지(王仲至)가 우리 집의 그림을 두루 보았는데 이 그림을 가장 좋아하였다.” 하였다. 진경은 송나라 부마(駙馬)로서 채관(彩管)을 손에 잡고 당시에 명성을 독차지하였으며, 시운(詩韻)으로는 연강첩봉(煙江疊峯)의 유(類)와 같은 것이 수백 편이 넘는다. 그의 집에는 보회당(寶繪堂)을 세워 고금의 명화를 많이 소장하였는데, 자첨(子瞻)이 이를 기록해 두면서 누를 끼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진경이 그림을 좋아한 것은 참으로 모르고서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왕중지는 이름이 흠신(欽臣)인데 역시 당대의 문인이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청렴하고 고상하며 옛것을 좋아하였다.” 하였으니, 또한 감상(鑑賞)이 분명하다. 보회가 많고 왕유가 능사(能事)를 지녔는데 이 한 폭만을 유독 골랐다면, 이 한 점의 세밀한 필치가 어찌 더없이 귀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유자(柳子)와 우공(虞公)은 모두 원나라 조정의 수석이니, 비록 삼왕(三王)을 제외하더라도 두 집안의 친필은 오히려 숭상할 만하다. 더구나 시를 읊어 이 그림의 실상을 드러냈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분신한 두 선사로 황매는 바로 홍인(弘忍)이고 조계는 곧 혜능(慧能)이니, 그 일이 전등(傳燈)에 실려 있어 모두 조사이다. 아, 사물의 이치는 무궁하고 거취는 일정하지 않다. 명황제는 보살판(菩薩板)을 소유할 수 없었으므로 끝내 화적에게 빼앗겼는데, 지금 이 초면(綃面)은 바로 그 당시의 물건이다. 겨우 한 자 남짓한 크기로 백대에 전해져 다행히 마멸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대강 논해 보면 또한 운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장의 뜻을 위해 자세히 써서 돌려준다.

66. 蔚州八景詩跋

문체: 序跋類 / 題跋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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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嘗莅蔚。偶得雪谷題壁一律。板于東軒。今見本集中。有蔚州八景。皆效一段雲詞曲。余始驚蔚有此景。而追惜其不能探討。以續古人風迹。適有蔚人。連踵訪我。因就扣之。亦不能盡知其處。況於雪谷之詞乎。蓋蔚之是景。雪谷之外。未之前聞。則江山風月。始呈於雪谷。而還復沒沒至今。豈不落莫可嘆也乎。謹錄一通。付諸鄕人申侃。轉告今郡伯先生。刻而掛之。若又按輿志。盡覓八者所在。俾後來風流。竟引賡和。則山媼水靈。想復感遇於千年矣。雪谷字仲孚。麗季名人也。以諫議。謫郡爲守。有惠政。其師友淵源。牧,益二老詩序。盡之矣。況其胤子樞。與李公存吾。共論旽賊。其家風世業。尤可尙已。想像遺風。吟詠其歌者。豈獨八景而止哉。第某後進。未有一日之雅於主伯先生。不乃唐突而罪之乎。是可念也。萬曆六年戊寅初冬日。晉州牧使全城李某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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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울주(蔚州)에 부임하였을 때 우연히 설곡(雪谷)이 벽에 쓴 율시 한 수를 얻어 동헌(東軒)에 걸어 두었다. 지금 본집(本集)을 보니, 울주의 팔경(八景)이 모두 한 구절의 운사(雲詞)를 흉내 내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울주에 이런 경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가 뒤늦게는 그곳을 탐방하여 고인의 풍격과 자취를 이어서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마침 울주 사람이 연이어 나를 찾아와서 물어보았으나, 또한 그곳의 팔경이 어디인지 다 알 수 없었으니, 하물며 설곡의 시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개 울주의 이 경치는 설곡 이외에는 전에 들어 보지 못하였으므로 강산과 풍월이 비로소 설곡에서 드러났다가 도리어 다시 지금까지 묻혀 버렸으니, 어찌 쓸쓸하여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삼가 시 한 통을 기록하여 향인(鄕人) 신간(申侃)에게 주어 전해 주게 함으로써 지금 군백(郡伯) 선생이 새겨 걸게 하였다. 만약 또 《동국여지승람》을 살펴 팔경의 소재를 모두 찾아내서 후세의 풍류가 마침내 화답하게 한다면, 산신령과 수신령이 천년 뒤에 다시 감응할 것이라 생각한다. 설곡은 자중부(字仲孚)로 고려 말의 명인이다. 간의대부로서 울주에 귀양 와서 수령이 되었는데,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그의 사우(師友)와 연원(淵源)은 목계(牧溪)ㆍ익산(益山) 두 노인의 시서(詩序)에서 모두 말하였다. 더구나 그 아들 설추(雪樞)는 이공 존오(李公存吾)와 함께 척신(戚臣)의 역적을 논하였으니, 그 가풍과 세업은 더욱 숭상할 만하다. 남겨진 풍도를 상상하여 시를 읊조리는 것이 어찌 팔경에만 그치겠는가. 다만 모후(某後)의 진보(進步)가 하루도 군백 선생에게 온화하지 못하였으니, 당돌하다고 죄주지 않겠는가. 이것은 생각할 만한 일이다. 만력 6년 무인년 초겨울 어느 날에 진주 목사 전성 이모는 쓰다.

67. 淮陽府新安驛設倉記

문체: 雜著類 / 記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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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楸池兩嶺。雄峙百里。而脊于江原之盡地。一以限關之東北。一以界嶺之東西。淮之爲府。是焉宅治。厥土。山。厥田。火。厥木。松柏。厥民。羸而鮮。惟其地勢最上。寒暑特早遲。嘉生不熟。唯菽黍瞿麥生之。又多虫獸。不勝於撝訶。其爲生樂否。可知也已。加之幅員迤廣。道里迂峻。民之糶糴于官倉者。春夏霧雨。秋冬氷雪。傾崖急水。相輔爲害。或載或負。莫不顚頓踣斃。戶口日耗。欠責積歲。前此亦由其然。分立五倉于境內。以殺其勞。長楊,水入,嵐谷,和川,文登。是也。今□上卽位之十年。以彫薄比甚。特簡慈良。以濟用監正尹侯。爲之侯。方擅能聲。擢諧庶尹。而外授窮處。親舊交嗟。識者謂山民福。越明年。秋霖災穫。公私將赤。侯單心溫撫。幾不飮食。勞來著效。袴火騰謠。□上以民之阻飢。在春尤急。分遣□御史。潛衣廉訪。果得實政。□特賜表裡。書以嘉之。卽古者璽書賜金之遺典也。府之四東二東等面。亦在重山之外。轉輸之險。有倍於五倉之所歸。其民願加營一倉于新安驛傍。等其歇息。而未得者久。侯因民所欲。條便于當道而轉聞之。□上議下廷輔。擧以爲宜。於是。民歡赴事。不程而勸。監臨宿庖之所。庫舍門垣之等。數月而畢。吁速也。與新安租入。合置簿吏。豆區管鑰。無不備具。旣成。父老相慶以落之。跽于侯曰。殘民之望。不但百年而適遂於今。若蔑紀績。無以耀□上仁而錄侯惠也。侯旣讓未獲。以來命余。余念前麗。以先民之害多矣。其設城居。咸據高絶。今雖盡廢。而其倉庾所置。往往猶用山上者。備寇亂也。及本朝昇平。人唯見利而不圖害。邑官之苟徇民譽者。多設別社於通衢衍陸。雖邊陲尙然。余嘗過慮不虞。以爲邊陲則當移於鍞堡。以資防守。內鄕則宜置諸郵傳。以需館穀。今侯此擧。政與鄙算契。他日北征。兩嶺爲扼。而新安是路。則近惠遠念。不亦兼善矣乎。凡今施設。願以此爲準。故不辭而言之。侯名自新。字敬修。龍城人也。徵文於余。非選也。舊也。萬曆七年十月日。全城後人李某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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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추지(鐵楸池)의 양쪽 고개는 웅장하게 치솟아 백 리나 되는데, 그 등성이 강원도의 끝자락에 있다. 하나는 관북과 관동을 한계 지어 나누고, 하나는 영남과 호남을 경계 지어 나눈다. 회천(淮川)이 부(府)가 된 것은 이곳에 집을 짓고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 땅의 산과 밭, 불과 나무,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그 백성들이 야위고도 희소하다. 오직 지세가 가장 높아서 더위와 추위가 유독 일찍 오고 늦게 가니, 곡식이 익지 않아 오직 콩이나 기장이나 보리나 메밀만 난다. 또 벌레와 짐승이 많아 물리치기 어려우니, 그곳에 사는 즐거움은 알 만하다. 게다가 면적이 넓고 도리가 멀고 험준하여 백성들이 관창(官倉)에서 곡식을 운반할 때 봄여름에는 안개와 비가 내리고 가을겨울에는 얼음과 눈이 쌓이며, 가파른 절벽과 급한 물이 서로 도와서 해를 끼치니, 짐을 싣거나 지고 갈 때에 넘어지고 죽지 않는 경우가 없다. 호구(戶口)는 날로 줄어들고 세금은 해마다 미루어 내지 못하니, 이전에 또한 이러한 까닭으로 경내에 다섯 창고를 나누어 세워 그 수고를 줄이게 하였다. 장양(長楊), 수입(水入), 남곡(嵐谷), 화천(和川), 문등(文登)이 바로 이곳이다. 지금 □ 상이 즉위한 지 10년인데, 조세가 매우 심하였다. 이에 자량(慈良)을 간택하여 용감정사(用監正事) 윤후(尹侯)를 제수하였는데, 그는 바야흐로 능망이 뛰어났다. 여러 고을의 수령에 발탁되었으나 밖으로는 궁벽한 곳에 제수되니 친척과 벗들이 모두 탄식하였다. 식자들은 산골 백성들의 복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장마가 들어 농사가 망쳐 공사(公私)가 모두 곤궁해지자, 후는 한마음으로 어루만져 주어 거의 먹지도 않고 수고하여 성과를 나타내니, 바지가 타도록 백성들이 요란하게 노래하였다. □ 상은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것이 봄철에 더욱 급박하다 하여,□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어 은밀히 조사하고 염탐하게 하였는데, 과연 실정(實政)을 얻었다. □는 특별히 표리(表裏)를 내려 쓰고서 가상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옛날에 왕이 옥새를 찍은 글을 써서 금을 내리던 유전(遺典)이다. 부의 사동(四東)과 이동(二東) 등의 면도 중산(重山) 밖에 있으니, 옮겨 나르는 험난함이 오창(五倉)으로 가는 것보다 배나 더하였다. 그 백성들은 신안역(新安驛) 옆에 창고 하나를 더 세우기를 원한다. 그가 쉬기를 기다렸으나 오래도록 얻지 못하다가, 후(侯)가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따라 도(道)에 편리한 곳을 두루 듣고서 위로 상의하고 아래로 조정과 보좌관에게 의논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기뻐하며 일에 달려와 정해진 시기보다 앞당겨 권면하였다. 감시하고 숙소로 삼은 부엌과 창고ㆍ문ㆍ담장 등이 몇 달 만에 다 이루어졌으니, 아, 빠르도 하다. 신안(新安)의 조세가 들어오는 것과 합하여 장부와 관리를 두어 구역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완성되자 부로들이 서로 경축하며 내려와서 후에게 무릎 꿇고 말하기를, “남은 백성들의 바람이 백 년에 한 번 이루어지는 것뿐만이 아니니, 만약 기적을 세우지 못한다면 인자한 상(上)을 빛내고 후의 은혜를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후가 이미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아서 나에게 명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예전에는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 선조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그 성을 쌓고 거처하는 곳은 모두 높은 절벽에 의지하였다. 지금 비록 다 폐허가 되었지만 창고에 보관된 것은 이따금 여전히 산 위에 있는 것을 사용한다. 왜구의 난이 있을 때는 평화로운 시대에 이르면 사람들은 오직 이익만 보고 해를 도모하지 않는다. 고을 관리가 백성들의 명예를 구차하게 따르는 자는 큰길이나 들판에 별사(別社)를 많이 세우는데, 변방에서도 오히려 그러하다. 내가 일찍이 지나가다 생각하고 염려한 바에 “변방은 마땅히 수루(戍樓)나 보루(堡壘)로 옮겨서 방수(防守)에 도움이 되게 하고, 내향(內鄕)은 우전(郵傳)에 두어 관곡(館穀)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이 고을의 수령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바로 나의 생각과 부합한다. 훗날 북쪽으로 정벌할 때 두 고개는 요충지인데 신안은 그 길목이니, 가까운 곳을 편하게 하고 먼 곳을 염려하는 것이 또한 겸선(兼善)하지 않겠는가. 지금 설치한 것은 이대로 기준이 되기를 바라므로 사양하지 않고 말한다. 수령의 이름은 자신(自新)이고 자는 경수(敬修)이며, 용성(龍城) 사람이다. 나에게 글을 청한 것은 선발된 것이 아니라 옛날에 부탁한 것이다. 만력 7년 10월 모일에 전성 후인 이모가 기록하다.

68. 歸愚堂記

문체: 雜著類 / 記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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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上舍時。得破家於南坊會賢里。始構小庵二間。泛謂之書堂。友人吉哉氏。有抛梁之文以助擧。今投晉印。居息於此。乃以歸愚名之。客詰其義。余曰。此取古人詩語。而在余則迹其實也。客曰。子之愚。吾得之矣。家無甁甔。而弃三品之俸。盤闕虀鹽。而輟陸海之珍。輕脫五馬轓蓋。而東驢無借之者。厭見矗石風煙。而矮屋不勝於打頭。人皆劫劫。我獨夷猶。人皆咄咄。我獨邈如。啼妻號子。莫以嬰于心者。玆非其實歟。余曰。未也。余生于今世四十有四年。立乎本朝一十有六年。齒髮已易。愚性不變。更歷許久。愚氣未艾。其在公也。不惟險夷。唯事之欲了。頻爲邑官。輒自劾而歸。蓋雖自知其愚。而人亦莫容其愚故也。及其旣老。其愚已熟。如聖之集成。無以復加也。朝野云云。咸怪其愚。聖上獨以愚忠而恕之。噫。父母之愛劣子。實矜悶而保其癡也。夫職者。任事之名。官爲治任之所。非聰明慧哲。莫宜居之。故主人名存仕版。家食居多。班登上士。恒若白身。亟黜於明時。歸無所處。蚌蝸有甲。亦鷦之枝。惟玆二間。幸備俛仰之遣。四圍圖書。抽繹先古。寄傲南曲。寓興花竹。日夕佳趣。在彼南山。則浪吟退之秋懷之作曰。歸愚識夷塗。汲古得修綆。此乃愚人之實迹也。客曰。有是哉。其自道也。余未及此。遂爲記。糸之銘曰。愚非堂無歸。堂非愚誰宅。堂之廣丈一。愚之放彌國。以小畜大其道何。壁四立書千軸。萬曆七年九月日。歸愚主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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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사(上舍)로 있을 때 남방(南坊) 회현리(會賢里)에서 집을 얻어 처음으로 작은 암자 두 칸을 지었는데, 대충 서당(書堂)이라고 불렀다. 친구 길재씨(吉哉氏)가 포량(抛梁)의 시를 지어서 거조(擧助)해 주었다. 이제 진인(晉印)에 투고하여 이곳에 살면서 귀우(歸愚)라고 이름을 붙였다. 객이 그 뜻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는 옛사람의 시어를 취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실상을 드러낸 것이다.”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대의 어리석음을 알겠다. 집에는 병과 항아리가 없는데 삼품(三品)의 봉록을 버렸고, 밥상에 김치와 소금이 없는데 육해(陸海)의 진미를 끊었으며, 오마(五馬)의 수레와 일산(笠衫)을 가볍게 벗어버리고 동려(東驢)도 빌릴 곳이 없다. 높은 집의 풍연(風煙)을 보기 싫어서 작은 집에서도 머리 부딪칠 것 같지 않다. 남들은 모두 껄껄 웃는데 나만은 망설이고, 남들은 모두 혀를 차는데 나만은 아득하다. 아내와 아이가 울부짖어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 실상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 하였다. 나는 지금 세상에 태어난 지 44년이요, 본조(本朝)에 선 입은 지 16년이다. 나이는 이미 변하였으나 어리석은 성질은 변하지 않아 다시 오랜 세월을 지나도 어리석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공무를 맡았을 때에는 위험과 평탄함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일을 끝마치려고만 하여 자주 고을 수령이 되었다가 번번이 스스로 탄핵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내가 비록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지만 남들도 그 어리석음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늙어서는 어리석음이 이미 익숙해져서 성인의 집대성처럼 다시 더할 것이 없게 되었다. 조정과 재야에서 모두 나의 어리석음을 괴이하게 여겼으나, 성상께서는 오직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나를 용서하셨다. 아, 부모가 열등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실로 그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 보호하기 때문이다. 대개 직(職)이란 일을 맡는 명칭이고 관(官)은 다스리는 임무를 맡는 곳이니, 총명하고 현철하지 않으면 적임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인은 이름만 사판에 남아 있고 집안에서 먹고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반열에는 높은 선비가 있다. 항상 백신(白身)으로 밝은 시대에 내쳐져 돌아가도 처할 곳이 없었으니, 조개와 달팽이의 껍데기 같은 것이며 또한 꾀꼬리의 가지와 같았다. 오직 이 두 사이에 다행히 부앙하는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사방에 도서(圖書)를 두고 옛날 것을 연구하고 남쪽 구석에 은거하여 꽃과 대나무에 흥취를 붙이니, 밤낮으로 아름다운 정취가 저 남산에 있다. 퇴지(退之)의 〈추회(秋懷)〉 시에 “돌아와 어리석은 지식으로 오도(誤道)를 깨닫고 옛것을 구하여 낚싯줄을 수선하네.[歸愚識夷塗 汲古得修綆]”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어리석은 사람의 실제 행적이다. 객이 말하기를 “이런 일이 있었는가? 그대 스스로 말해 보라.”고 하여 내가 미처 말하지 못하고 마침내 기록하였다. 이 명(銘)을 짓다. 어리석은 나는 돌아갈 집 없는데 집이 넓어도 어리석은 사람 누구의 집인가 집은 한 길이나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나라를 버렸으니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감싸는 그 도가 어떠한가 사방에 서 있는 책 천 권이여 만력(萬曆) 7년 9월 일 귀우 주인 기(歸愚主人記)

69. 灑然亭記

문체: 雜著類 / 記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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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余至石州之數月。病牙居湫隘。無爽豁以導滯。步屧北郭。得地曲陴之上。選穀旦三月之吉。命豫需材料。落之踏靑之會。皆如其素。不斲椽剪茨。無欂櫨節梲者。馬退山茅亭之昭儉也。遠呑山光。平挹江瀨者。齊安竹樓之勝槪也。爰曁賓僚。旣相與瞻眺。酒數巡曰。凡爲居止。未有無名以揭。新登此亭。令人有灑然出塵之想。不乃以是名之而可乎。僉曰。得。余復曰。唉府之爲治。隔王京數千里。違虜帳無一日程。俗習弓馬以業。民籍遷徙爲戶。亭而望之。右通仁風之樓。思宣覃聖化。奠安字保之術。左對文廟賢祠。思右文左武。樹德不朽之道。高候北峙。夕火飛輝。則守封之備。蔑得以監。萬嶠東帀。朝省曠時。則遠憂之情。不容以遣。睇眄所觸。罔非沈吟。寧有灑然之助耶。雖然。事爲之來在彼。虛明之主在我。苟克擧三者。自反無慊。則雖去國萬里。未始不身在王家。此心方快闊旁通。本然之澄澈著矣。然後顥氣精靈。得爲我有。挾霽月凌光風。猶之可也。又何但灑然而已乎。登玆亭者。或以失路遐荒爲累。無聊落莫。借興高賞。職不思居。唯以脫略經務。爲灑然之致。則春明未出。卽爲天涯。何必驀狄嶺。亂禿魯。然後爲遠哉。然則岳陽雄湖。徒成悲感。零陵好山。是亦狴牢。況此入楹茅簷。豎諸丈土之高乎。自餘利臼顚暝。亭之罪魁。草堂有靈。能無勒移之謝耶。灑然之名亭。旣有之。名亭之實。願從諸君子勉之。因書之記。其翼日也。在萬曆九年。行兵馬節制使全城李某夢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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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석주(石州)에 온 지 몇 달이 되었는데, 병든 치아 때문에 좁고 비좁은 곳에 살면서 시원스럽게 막힌 것을 소통시킬 길이 없었다. 그래서 북쪽 성곽을 거닐다가 땅의 모퉁이에 있는 성가퀴 위에 이르러 곡단(穀旦) 3월의 길일을 택하여 미리 재료를 마련해 두었다가 답청일(踏靑日)에 모두 평소처럼 지붕을 얽어 만들고 기둥을 잘라 세웠다. 삐딱하게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은 마퇴산(馬退山)의 초가 정자의 소박함과 같았고, 멀리 산 빛을 삼키고 평평하게 강물을 끌어당긴 것은 제안(齊安) 죽루(竹樓)의 좋은 모습이었다. 이에 빈료(賓僚)까지 함께 와서 바라보며 술을 몇 차례 돌려 마시면서 말하기를, “무릇 거처하는 곳에 이름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새로 이 정자에 오르니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에서 벗어난 느낌이 드니, 이것으로 이름을 지어도 되겠습니까?” 하기에 모두들 좋다고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아, 부(府)의 치적은 왕경과 수천 리 떨어져 있고 오랑캐 진영과는 하루 거리도 되지 않아서 풍속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업으로 삼고 있다.” 하였다. 민적(民籍)을 옮겨서 호(戶)를 만들고 정자에 올라 바라보니, 오른쪽으로는 인풍루(仁風樓)가 통하여 성화(聖化)를 널리 베풀어 안자(安字)의 보도(保道)하는 술법을 생각하게 하고, 왼쪽으로는 문묘와 현사(賢祠)를 마주하여 우문좌무(右文左武)로 덕을 세워 영원히 전할 도리를 생각하게 한다. 높은 산이 북쪽에 솟아 저녁 불빛이 번쩍이니 봉수대(烽燧臺)의 방비가 감시할 수 없음을 알겠고, 만교(萬嶠)가 동쪽으로 둘러 있어 아침에 성묘할 때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먼 곳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모두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니 어찌 시원하게 해 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은 저쪽에 있고 허명(虛明)한 주인이 내게 있으니, 진실로 세 가지를 잘 거행하여 스스로 반성함에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면 비록 나라에서 만 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몸이 왕가(王家)에 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 마음이 바야흐로 시원하고 넓으며 두루 통하여 본연의 맑음이 드러난 뒤에야 거룩한 기운과 정령(精靈)이 내게 있게 될 것이니, 비구름을 몰아내는 밝은 달과 바람을 곁에 두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는가. 또 어찌 씻어 버리고 말 뿐이겠는가. 이 정자에 오르는 자들은 혹 길을 잃고 먼 곳에 있는 것을 누(累)로 여겨 무료하고 쓸쓸하게 흥취를 빌려 감상할 뿐 직분으로 살아가기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경무(經務)에서 벗어나는 것을 씻어 버리는 것으로 여기니, 봄이 밝아 나오지 않았을 때에도 곧 천애가 되는 법이다. 어찌 꼭 적령(狄嶺)에 올라서 머리털이 다 빠진 뒤에야 먼 곳이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악양의 큰 호수도 슬픈 감회만 이루고 영릉의 좋은 산도 이 또한 갇힌 감옥이니, 더구나 이곳은 기둥과 처마를 들여다보이는 높은 땅에 세워졌음에랴. 나머지는 이익을 좇다가 어두운 곳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니 정자의 죄가 가장 크다. 초당의 신령이 능히 옮겨 주기를 청하지 않겠는가. 사연정이라는 이름은 이미 있으나 명정의 실상은 여러 군자들을 따라 힘쓰기 바라노라. 이로써 기록을 쓰노라. 그날은 만력 9년이다. 행 병마절제사 전성(全城) 이모몽응이 기록하다.

70. 江界李文元公廟記

문체: 雜著類 / 記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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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晦齋先生贈領議政李文元公之廟也。先生事我□中,仁兩聖。際遇甚盛。以迄□明廟之初。見揑權奸。纍于玆土。違其鄕四千餘里。不得終養于太夫人。深居闇室。不視天日。爰曁八年之多。而竟以裳帷。奉遺骸。噫。先生之學之造。有退溪文純公之狀。非末劣贅贊。以衆目所共覩。忠瀝引君之章。孝備奉先之節。立言若求仁諸錄。自警若元日諸箴。皆先生平日庸言實蹋。不渝於造次顚沛者。則先生之心之行。洞符神明。自禱于天久矣。蒼蒼邈邈。若是乎厲者。何也。雖然。天之閟毖。必以悠久爲徵。先生之暫替於晩年。豈病其終泰於萬歲乎。予貢以夫子之厄。爲道大莫能容。卽顔氏所謂不容然後見君子也。先生初黜於庚寅。後竄於丙午。若使隱默官京。遇寒無汗。則先生之道。未免貶用徇時。等閑衛社之一封君而足也。卽今天風蕩翳。白日騰明。顯戮快行於凶鬼。幽枉普滌於重泉。朝廷追褒諡贈。登配大享之庭。士子競立祠院。至請從食於孔廡。則先生玉山之居。正爲考亭之紫陽。而金鎔於始也。先生江界之遷。是亦陸相之忠州。而玉成於終也。抑而升之。辱而榮之。奸人當日之噤齘。旨不知扶植先生。而不遺餘力者。寧非福善之天。由此苦節於動忍空乏之末。永樹之無窮之域耶。蓋天郞理也。先生雖遭人變。唯素履不疚於天理。故往無不復。而定必有勝者如此。推驗到底。益信性命之難欺。而其快闊光明。又如此者。有欲學之。只箇方寸。恒存此理。而是夫豈多哉。丙子歲。參判金公繼輝。觀察本道。己任斯文。巡到熙川。立兩賢祠。敝府亦爲先生。營于文廟之右。時釋采從祀之奠。而竝薦一爵。簠盛籩實。咸視其品。某嘗過慶州。禮於鄕賢祠下。忝視府事。卽詣靈庭。第位題陳供。有未盡式者。謹齊祭而告釐之。熙祠。旣記其事。此猶闕焉。金公送某而屬之。鄙人不敢承。廣倩文人。乃反見委。懼歲月之泯沒而僭書之。仍別寫先生六箴于板。棲之黌壁。俾學者。知先生用功之所自。萬曆九年十月日。行府使通政大夫。江界鎭兵馬僉節制使全義李某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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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선생이 영의정 문원공(文元公) 이문원(李文元)에게 사당을 지어 주었다. 선생이 나를 섬길 때에 인자한 두 성상을 만나 매우 성대한 시대를 만났는데, 명종 초기에 권간(權奸)에게 억울하게 당하여 이곳에 죄수가 되어 고향에서 4천여 리 떨어진 곳에서 태부인(太夫人)을 모시지 못하고 깊은 방에 숨어 지내며 하늘과 해를 보지 못한 것이 8년이 넘었다. 마침내 상의(裳衣)와 휘장으로 유해를 받들었다. 아, 선생의 학문과 도량은 퇴계 문순공(文純公)의 모습이 있었으니, 말류(末流)나 잔인(殘人)이 덧붙여 찬양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눈에 모두 보였다. 충성스럽게 임금을 끌어낸 장문(章文)과 효성으로 선조를 받든 절개는 《입언약인제록(立言求仁諸錄)》과 《자경원일제잠(自警元日諸箴)》에 나타나 있으니, 모두 선생이 평소에 겉으로 말하고 속으로 실천하여 위급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은 것이었다. 선생의 마음과 행실은 신명(神明)과 통하였으니, 하늘에 기도한 지 오래되었다. 어둡고 아득하여 이처럼 험악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하늘이 감추고 경계하는 것은 반드시 유구(悠久)함을 징조로 삼는다. 선생께서 만년에 잠시 세상을 떠나신 것이 어찌 만세에 태평하기를 병통으로 여겨서이겠는가. 나는 공자께서 당한 액운을 가지고 도가 크게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노니, 이는 바로 안회(顔回)가 “용납되지 않은 뒤에야 군자를 볼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선생께서는 처음에 경인년에 쫓겨났고 뒤에는 병오년에 찬배되었는데, 만약 침묵하고 관직을 지키면서 추운 날씨를 만나도 땀이 나지 않았더라면 선생의 도는 시세에 영합하여 등한하게 위사(衛社)에서 봉군(封君)이나 되는 데 그쳤을 것이다. 이제 천풍(天風)이 구름을 걷어내고 태양이 밝게 떠올라 흉악한 귀신은 현륙(顯戮)으로 통쾌히 처단되고 깊은 땅에 묻힌 원통함은 두루 씻겨져서 조정에서 추증하여 시호를 내리고 배향하여 대향(大享)의 뜰에 올리며, 선비들은 앞다투어 사원을 세우고 심지어는 공자께서 계신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내기를 청하고 있으니, 선생의 옥산(玉山)에 계시는 영령이여. 정(正)은 고정(考亭)의 자양(紫陽)을 위하여 금이 처음 녹아내린 것이요, 선생의 강계(江界)가 옮겨진 것은 또한 육상(陸相)의 충주(忠州)로 옥이 끝내 이루어진 것이다. 억눌려도 올라가고 욕되게 해도 영화롭게 되었으니, 간사한 사람이 당일에 입을 다물고 부지불식간에 선생을 붙들고 세워 주어 남은 힘을 쓰지 않은 것이 어찌 선을 복 주는 하늘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고절(苦節)과 동인(動忍)의 공핍한 끝에서 영원히 무궁한 경지를 세웠으니, 이는 대개 천리(天理)이다. 선생은 비록 사람들의 변고를 당하였으나 평소의 행실이 천리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지난날을 돌이켜 보아도 반드시 승자가 있을 것임을 이와 같이 미루어 알 수 있다. 끝까지 미루어 증험해 보면 성명(性命)은 속이기 어렵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는데, 그 통쾌하고 광명함이 또 이와 같으니 배우고자 하는 바이다. 다만 한 조각 마음속에 항상 이 이치를 두면 어찌 많은 것이 있겠는가. 병자년에 참판 김공 계휘(金公繼輝)는 쓰다. 관찰사가 본도(本道)의 사문(斯文)을 맡아 희천(熙川)에 순행하여 두 현인의 사당을 세웠고, 우리 고을에서도 선생을 문묘(文廟)의 오른쪽에 모셨습니다. 그때 석채(釋采)를 종사하는 제전(祭奠)이 있었는데, 함께 한 잔 술을 올리면서 음식을 차려 놓고 모두 그 품격을 보았습니다. 내가 일찍이 경주를 지나가다가 향현사(鄕賢祠) 아래에서 예를 행하고 부사에게 나아가 영정(靈庭)에 참배하였습니다. 다만 위제(位題)와 진공(陳供)을 갖추지 못한 것이 있어 삼가 제사를 지내고 고쳐서 바로잡았습니다. 희천의 사당에는 그 일을 기록하였는데, 이곳은 아직도 빠져 있습니다. 김공 송모(送某)에게 부탁하였으나 내가 감히 받들 수 없어서 문인에게 널리 부탁하였는데 도리어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까 두려워서 외람되게 적고 이어 선생의 육잠(六箴)을 별도로 판에 써서 학교 벽에 걸어두어 학자들이 선생이 공부한 바를 알게 하였습니다. 만력 9년 10월 일 행 부사 통정대부(行府使通政大夫)는 강계진 병마첨절제사(江界鎭兵馬僉節制使) 전의 이모는 삼가 기록합니다.

71. 揖觶亭記〔原注:江界〕

문체: 雜著類 / 記類

원문

厥初蔬畦地。金侯實經始。面前設鴊位。吾以名揖觶。壬午春月。季淸江居士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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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채소밭이었던 땅에 금후가 실로 경륜을 펼쳤네 내 앞에 계위(鴊位)를 설치하니 나는 읍례로 술잔을 올리노라 임오년 봄, 계청 강 거사(江居士)는 기록하다.

72. 上曺典籤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13A, ITKC_MO_0200A_A043_513B

원문

某昔於髫年。隨家公在文昌。伏遇尊駕戾止。得拜下塵。厚蒙奬勉。至賜敬義之符。悠悠京洛十五餘年。未嘗不遙瞻少微。景仰如山。中間。家公雖屢授本道。某則常侍王母。故未得離京一步。南覲嚴顔。仍趨座下。仰承緖論。某縱極頑愚。自在孩幼。傾想高風。常以不得續執鞭御爲恨。□先王末年。先生特膺虛席之□召。某叨以內翰。載筆隨列。當□閤門會坐之際。欣瞻顔華尙韶。及□黼座就對之間。伏聞敷□奏明允。私心喜幸。得覩盛事。尤切執謁趨邸。自列微悰。而館規鎖宿下僚。不聽一日出閤。方且鬱陶。而先生之駕。亟已南首矣。壤虫黃鵠。悲慕奈何。某今得符分海涯。來守近程之邑。雖迹繫雷封。身非自由。恭候起居。乃所宿願。第以某賤名改易。非昔所呼。先生大人。若不記昔時童子之爲誰。則必有紹介爲之先。然後乃可以末禮隨之。故不敢唐突干冒。趑趄籌度。欲奉而還止者。不日月矣。卽者。族兄有自晉陽來者曰。南溟先生記汝名字。良是幸事。某初聞驚聳。以喜以躍。非但以凡劣見念於大賢爲榮。承敎門墻。庶或有路。則一脈微誠。感幸如何。況未學而仕。治民者賊。撫存餓羸。雖是本志。莅事弛張。實所未曉。日夜戰兢。唯無以奉職仰稱明旨。而見絶於大賢先生是懼。伏望特示包荒之量。姑容定館之罪。倘以與進之道。許採束修之禮。不勝切祝之至。某頓首頓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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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는 옛날 어린 나이에 집안 어른을 따라 문창(文昌)에 있었는데, 존가께서 이곳에 오셔서 뵙게 되었습니다. 가르침을 두터이 받고 경의(敬義)의 부절까지 주셨습니다. 서울에서 보낸 15여 년 동안 늘 멀리서 바라보며 산처럼 우러렀습니다. 중간에 집안 어른이 여러 번 본도(本道)의 수령이 되었으나 모는 항상 왕모(王母)를 시중들어야 했으므로 서울을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남쪽으로 엄안(嚴顔)을 뵙고 이어 좌하에 나아가 서론(緖論)을 받들었습니다. 모가 비록 우둔하고 어리지만 항상 고풍(高風)을 생각하여 늘 편어(鞭御)를 이어서 잡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여겼습니다. 선왕 말년에 선생께서 특별히 허석(虛席)의 부름에 응하셨는데, 모가 외람되이 내한(內翰)으로 붓을 들고 뒤따랐습니다. 합문(閤門)에서 회좌할 때에 기쁘게 보신 얼굴은 여전히 젊으셨고, 보좌에 나아가서 대면할 때에는 삼가 부절을 펼쳐 주상께 아뢰어 윤허를 받았으니, 개인적으로는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성대한 일을 보았습니다. 우절(尤切)집알(執謁)로 궁궐에 나아갔을 때부터 저의 미천한 마음이 절로 드러났는데, 관규(館規)가 하료(下僚)를 닫아두고 하루도 출궐하지 못하게 하여 답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의 행차가 급히 남쪽으로 향하니, 땅에 묻힌 벌레와 황곡(黃鵠)이 슬퍼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부절을 얻어 바닷가로 분관되어 와서 근정(近程)의 고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우봉(禹封)에 매여 있어 자유롭지 못하지만, 공손히 기거를 기다리는 것이 평소의 소원입니다. 다만 저의 미천한 이름이 바뀌어 예전과 같지 않으니, 선생께서 만약 옛날 동자가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반드시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말례(末禮)로 따라갈 수 있으므로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 머뭇거리며 헤아려 보다가 받들려고 하다가도 도로 그만두는 것이 날짜를 세어 볼 수 없습니다. 방금 진양(晉陽)에서 온 족형이 말하기를, “남명 선생께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다.” 하였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모가 처음 듣고 놀라 기뻐서 뛰었습니다. 비루한 사람을 대현(大賢)께서 생각해주신 것만도 영광스러운데, 가르침을 받게 되어 혹시라도 길이 열릴 수 있다면 한 줄기 미천한 정성이 감격하고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배우지 않고 벼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적(賊)이니, 굶주린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 비록 본의이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실로 알 수 없습니다.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오직 직무를 받들어 밝은 뜻을 우러르며 칭송할 길 없이 대현 선생과 인연이 끊어질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량한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을 특별히 보이시어 우선 정관(定館)의 죄를 용납하시고, 혹 진보하는 방도로서 속수(束修)의 예물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모는 머리를 조아리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73. 論答文元公祠廟記。與成牛溪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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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尊兄洎大學士批抹。誠中陋文之疵。發藥又切。百拜欽領。但謬見則此非先生本祠。乃記謫所之廟。故專言不容見君子。以爲綱旨。因題立意。固各有所重也。向使先生。竝肩權奸。終始同朝。與享衛社之勳。則雖曰道德高詣。豈免殉人之責乎。安富尊榮。雖大賢分內。而孔孟以來。蔑無有之。皆由時莫可也。此固先生之見忤權奸。流落不幸。而益見先生道德無瑕。眞有不容之實也。然非專以有等貶斥。全贊儒先。而抑揚其辭也。退溪先生旣備狀本行。若更贊以他語則贅矣。故篇首固已先擧矣。其辱而榮之一端。只論其放謫之終難誣。而洩其不勝憤憤之痛。故辭有激也。其曰衆目所共覩者。旣以退溪之狀爲重。故其敍求仁六箴等條。亦不敢以自家僭論。而竊比於闚觀之後。亦卑謙之說也。實蹋字。自司馬公脚踏實地來。蹋與踏。本一字也。有欲學之恒存此理云者。只勸後學勉勉孜孜。自强不已之意也。旣着欲字。以爲工夫則。借用其文。恐亦不涉於太高。如何如何。廣倩見委云者。曾請於大學士及數三相知。皆不見送。似聞尊兄亦屬鄙手。混下其語。接其文序。措辭果不瑩。然非范公。不能記嚴祠。非東坡。未足誌潮碑。以僕僭述。寧無招議。從此覆瓿不張之。乃爲得。故不得塗改本藁以往耳。且拙文。常以淺腐爲恥。反以新奇見謂。可笑笑笑。樊紹述作文太奇澁。至如歐陽公。未免怪吁之嘆。而昌黎贊之曰。文從字順。各職職若此者。當俟後子雲。然後可。安可倉卒。尊兄旣以新奇見戲。僕亦以大言自侮。皆善謔也。豈可作實看乎。早晩留與兩兄一噱。兼質宿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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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형(尊兄)이 대학사(大學士)의 비말(批抹)을 받들고서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누추한 글의 흠을 드러내어 약방문처럼 또 절실하게 말씀해 주시니, 백배 절하고 공경히 잘 받았습니다. 다만 저의 잘못된 견해는 이 곳이 바로 선생의 본사(本祠)가 아니라 유배지(流 exile)를 기념하는 사당이기 때문에 오로지 군자를 볼 수 없다고 말하여 강령으로 삼았으니, 제목을 붙이고 뜻을 세운 것은 진실로 각각 중시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선생이 권간(權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종일관 조정에 함께 있으면서 사직(社稷)을 지킨 공훈을 함께 누렸다면, 비록 도덕이 높다고 말하더라도 어찌 남의 죄에 연좌되는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부귀와 영화를 편안하게 누리는 것은 대현(大賢)에게도 분수 안의 일이지만,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이후로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시대가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실로 선생이 권간과 뜻이 맞지 않아 불행하게 유배를 갔던 것인데, 이를 통해 선생의 도덕에 흠이 없음을 더욱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용납할 수 없는 실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등급을 두어 비방하는 것으로 선유(先儒)를 전적으로 찬양하고 그 말을 억제하거나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퇴계 선생이 이미 장본(狀本)을 지어 행하였으니, 만약 다시 다른 말로 찬(贊)한다면 군더더기가 될 것이므로 편두에 진실로 먼저 거론하였다. 그 욕되면서도 영광스러운 한 가지 일은 다만 귀양 간 끝에 속이기 어렵다는 것을 논하고 분통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말이 격렬하다. ‘뭇사람의 눈이 함께 본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퇴계의 장본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구인(求仁)의 여섯 가지 잠언 등의 조목도 감히 자기 집안에서 참람하게 논하지 못하고, 엿보아 아는 것에 비유하여 또한 겸손한 설로 삼은 것이다. ‘실지(實地)’라는 말은 사마공(司馬公)이 실지를 밟고서 나온 것인데, 답(蹋)과 답(踏)은 본래 한 글자이다. “학문하려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라고 한 것은 후학에게 힘쓰고 부지런히 하여 스스로 힘써 그치지 말라는 뜻일 뿐이다. 이미 ‘욕(欲)’ 자를 붙여 공부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문장을 빌려 쓴 것이다. 두려운 것은 또한 너무 고상하지 않다는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광천(廣川)에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신 일은 일찍이 대학사(大學士)와 몇몇 아는 사람에게 청하였으나 모두 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듣건대 존형께서도 저의 손을 거쳐 그 편지에 섞여 들어갔다고 하는데, 문장의 순서를 이어 붙이다 보니 과연 말이 매끄럽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범공(范公)이 아니면 엄사(嚴祠)를 기록할 수 없고 동파가 아니면 조비(潮碑)를 기록할 만하지 않으니, 제가 참람하게 지었다면 어찌 의논을 초래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로부터 엎어진 항아리처럼 넓히지 않는 것이 바로 얻는 것이기에 본고(本藁)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보냅니다. 그리고 저의 글은 항상 천박하고 부패한 것을 수치로 여기는데 도리어 신기하다고 하니 우습습니다. 번소술(樊紹述)의 문장은 너무 기괴하여 구양공(歐陽公) 같은 사람도 괴이하게 여겼고, 창려(昌黎)는 찬(贊)을 지어 “문장과 글자가 순서에 맞고 각 직책이 이와 같으니 후자운(後子雲)을 기다려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창졸간에 하겠습니까. 존형(尊兄)께서 이미 신기한 것으로 희롱을 하셨고 저 또한 큰소리로 스스로 비웃었으니, 모두 좋은 농담입니다. 어찌 사실로 보겠습니까. 조만간 두 형과 함께 한번 웃으며 묵은 미혹을 따져보겠습니다.

74. 聽松書院營創始。與成牛溪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諸學子爲尊先先生。欲建祠院。今雖似晩。誠爲盛事。然鄙人有一說焉。僕久在尙成安門下。飽聞尊先府德業學問行義。與尊叔父先達先生。眞可魯衛。雖甚享年不永。新學後生。聞知未廣。若以金慕齋誌文參之。則成安之論。亦爲深知。而質之無差。若當起院之日。幷奉兩先生于其中。則河南兩賢。復有光於東國矣。此意如何。望與栗谷學士。相議于景慕之徒。爲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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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자들이 존선(尊先) 선생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려고 합니다. 지금 비록 늦은 듯하지만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한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상성안(尙成安)의 문하에 있으면서 존선 부친의 덕업과 학문, 행의를 두루 들었는데, 존숙부 선달 선생과 진실로 노위(魯衛)와 같았습니다. 비록 매우 장수하지 못하여 신학 후생들이 듣고 아는 것이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만약 김모재(金慕齋)의 지문(誌文)을 참고한다면 상성안에 대한 논의도 깊이 알 수 있고 질정해도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사당을 세우는 날에 두 선생을 함께 모신다면 하남(河南)의 두 현인이 다시 동국에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율곡 학사(栗谷學士)와 경모(景慕)의 무리들과 상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75. 上提督王主事書

문체: 書簡類 / 書簡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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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陪臣戶曹參判柳從善,工曹參判朴承任等。再拜上書于執事大人。從善等來接公館。適執事司提督之柄。趨拜下塵。山仰心切。而蹤跡微末。階級峻絶。未敢唐突於謦咳之側。但情有所懇。事涉非輕。不敢自默。輒以尺牘。仰穢淸聽。本國接壤東隅。密邇□聖化。名爲外藩。實同內服。拱□北之誠。久益無替。□朝廷亦鑑忠順。嘉其慕義。遇以殊禮。別於他邦。其□字小之仁。無間內外。□眷待寵榮。靡所不至。下邦亦感戴□皇恩。猶恐獲戾于□天威。今者卑職等。齎擎冬至賀表。進至□天閽。不期鴻臚寺將卑職一行人等。退班於無職生員及褻衣人之後。又朔望朝見。不許入□皇極殿內庭。只令門外行禮。較諸久遠。現行事例。尊卑懸絶。遠人惶惑。罔知厥由。卽欲呈稟于該部。以未行見□朝之禮。不敢輕進干冒。姑循新令。隱忍遷就。靦面汗背。無地容措。始令通事。仰達微懇于執事。且稟呈文辨白之意。則執事不以煩訴爲罪。特賜溫慰。又敎以不須呈文。只可面稟于該司郞中大人。亦驚訝其變易之輕率。卽稟議于尙書閤下於進賀之日。別遣下史。曲諭序班。使之依舊規隨班。得側冠佩之後。告而有復。喜幸良深。從善等拜受執事之賜。以爲自是盡遵舊規而無憂矣。日昨望日朝見。鴻臚寺猶執變例。止之戟門之外。與左衽羶醜。分庭比級。悶默而退。無以自解。切念邦禮。掌在春官。而小邦亦忝隸屬於□下庭。則陪臣失班之意。不可取正於他。而亦賢執事之所當垂軫焉者也。夫□上國所以接遇藩服。自有權度曲折。雖在春秋之時。其入覲王朝。未聞以下國陪賤而卑夷之。抑之賤流之末也。今朝廷於小邦。遣使須□詔。特掄近侍之臣。而況且□郊後慶成之宴。則陪臣之坐。亦腸殿內。以此見之。陪臣朝賀班例。似當有級。而朝見之際。則序於流品之次生員雜類之前。賤价後生。雖未知此儀肇於何時。而自□先朝以來。未常移易。則亦後世不可率爾更變之成規也。司□朝儀者。固宜率由舊章。堅如金石。設或流弊妨政。在所損益。則亦當申□奏。委諸該部。詳議定奪。取裁□聖斷。昭布知會。使無疑訝。如是則處事得體。遠人無辭矣。今者□朝廷不與知。該部不經議。無半行文字。無片言端緖。而迫令序班。舌掉臂揮。破開□先朝已定之久規。易置一時無弊之成法。從善等反覆思惟。竊所未喩。必以爲偏荒賤价。蔑無知識。呼來斥去。誰敢違逆。所以隨意指使而然也。然竊謂□朝廷接待外國。其一號一令。實體統所關。一進一退。皆等威所係。一朝無故貶降班品。區隔內外。豈不妨於體統。而缺於慕望之心乎。且王者之政。有善然後升陟。則人無不勸。有罪然後降黜。則人無不懲。我小邦事大至誠。累世如一日。別無違忤。□皇朝祖宗所以眷厚優待。褒嘉錫予。綸言俱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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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朝鮮國)의 배신(陪臣)인 호조 참판 유종선(柳從善), 공조 참판 박승임(朴承任) 등이 재배하고 상서(上書)를 올렸습니다. 종선 등이 와서 공관(公館)에 접견하였는데, 마침 집사 사제독(執事司提督)의 지휘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절하고 먼지 속에 엎드려 산처럼 우러르며 간절한 마음을 가졌으나, 종적은 미천하고 계급이 매우 높아 감히 가까운 곳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정성스레 아뢸 바가 있고 사안이 가볍지 않아서 감히 스스로 침묵할 수 없어 번번이 서찰을 올려 청명한 귀에 더럽혔습니다. 본국은 동쪽 모퉁이에 접해 있어 성화(聖化)와 매우 가까워 명색은 외번(外藩)이지만 실상은 내복(內服)과 같아서 북극성을 향하는 정성이 오래되어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조정에서도 충성스럽고 순종함을 감찰하여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특별한 예우를 베풀어 다른 나라와 구별하였으며, 자소(字小)의 인자함은 내외에 차이가 없어서 은총과 영예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하방(下邦)도 황제의 은혜에 감격하여 오히려 하늘의 위엄을 거스릴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저희 등은 동지(冬至)를 축하하는 표문을 가지고 황제의 궁궐에 이르렀는데, 홍려시(鴻臚寺)의 장관이 저희 일행을 무직 생원 및 벼슬하지 않은 사람과 옷차림이 초라한 사람의 뒤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또 삭망조(朔望朝)를 맞이하여 황극전(皇極殿) 안뜰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문밖에서 예물을 올리게 하였으니, 오래된 전례와 현재 시행되는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존비가 현격하였습니다. 멀리서 온 사람으로서 황공하고 의혹스러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므로 즉시 해당 부(部)에 여쭈어 보려고 하였으나, 아직 황제의 조회를 받지 못하였기에 감히 경솔하게 나아갈 수 없어 우선 새로운 명령을 따라 참고 견디고 있었는데, 얼굴이 붉어지고 등에서 땀이 나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에 통역관에게 시켜 집사(執事)에게 간절한 뜻을 전달하고 또 문서를 올려 변론하겠다는 뜻을 여쭈게 하였더니, 집사는 번거롭게 호소하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특별히 온화하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또 “문서를 올릴 필요 없이 해당 관사의 낭중(郞中) 대인에게 직접 여쭈면 된다.”고 전교하였습니다. 또한 그 변고가 경솔하게 바뀌어 놀랍습니다. 진하하는 날 상서(尙書) 합하에게 여쭈어 별도로 하사(下史)를 보내 반열을 곡진히 타일러 옛 규례대로 반열에 따라 측관(側冠)과 패옥(佩玉)을 착용하게 하여, 고하고 나서 복구되게 하였으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참으로 깊습니다. 선(善)을 따르는 등은 사신에게 주신 벼슬을 받아들여 이로부터 모두 옛 규례를 준수하여 근심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망일조(望日朝)에 홍려시(鴻臚寺)가 여전히 변례(變例)를 고집하여 격문(戟門) 밖에 머물러 좌림(左衽)과 비추(羶醜)와 함께 뜰에서 나란히 서게 하였으므로, 답답한 마음으로 침묵하고 물러나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나라의 예절을 생각하면 봄관(春官)이 담당해야 할 일인데도 소방(小邦) 또한 외람되이 □ 하정(下庭)에 속해 있으니, 배신(陪臣)이 반열에서 이탈한 뜻은 다른 곳에서 바로잡을 수 없고, 또한 사신이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상국(上國)이 번방의 복장을 접대하는 것은 권도(權度)의 곡절이 있었던 때가 비록 춘추 시대에 있었지만, 그가 왕조에 입근할 때 하국(下國)의 신하들이 천한 자를 모시고 낮은 곳에 앉았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천류(賤流)의 말단에서 억제된 것이다. 지금 조정이 소방(小邦)에 사신을 보낼 때 조서를 받들게 하고 특별히 근시(近侍)의 신하를 뽑는데, 하물며 황제의 교외(郊外)에 나가서 경사(慶事)를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할 때에는 배신(陪臣)이 앉는 자리도 장전(長殿) 안에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배신의 조하(朝賀) 반열은 등급이 있어야 할 듯한데, 조정에서 만날 때에는 유품(流品)의 차서로 생원(生員)과 잡류(雜類)보다 앞선다. 천한 자가 뒤에 앉는 이 의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선왕조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변하지 않았으니, 또한 후세에 함부로 고칠 수 없는 성규(成規)이다. 조정의 예식을 맡은 관원은 진실로 옛 규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고 금석처럼 굳게 지켜야 한다. 설혹 폐단이 생겨 정사를 방해한다면 손익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또한 마땅히 거듭 아뢰어 해당 부서에 맡겨 자세히 의논하여 결정하고, 성상의 결단을 취재(取裁)하여 분명하게 선포해 알림으로써 의심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일 처리가 체모를 얻고 먼 나라 사람들도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는 모르는 채 해당 부서에서도 의논을 거치지 않고 반행문자(半行文字)나 단서가 되는 한마디 말도 없이 갑자기 서반(序班)을 바꾸게 하여, 혀를 놀리고 팔을 휘둘러 선왕 때부터 정해진 오래된 규례를 깨뜨리고 일시적으로 폐단이 없던 성법(成法)을 쉽게 바꾸었습니다. 선을 따르는 등의 반복적인 생각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반드시 편벽되고 미천한 나라의 사신을 지식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 불러오고 내쫓는 것을 누가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대로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것은 한 번 호칭하고 한 번 명령하는 것이 실로 체통에 관계되고, 한번 나아가고 한번 물러나는 것이 모두 위엄과 관련되는데, 하루아침에 아무런 사유 없이 반품(班品)을 낮추는 것은 내외를 구별하는 것이 어찌 체통에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마는 흠모하고 바라는 마음에 부족하지 않겠는가. 또 왕자의 정사는 잘하면 승진시키고 죄가 있으면 내치니, 사람들은 권장하지 않는 이가 없고 징계되지 않는 이가 없다. 우리 소방(小邦)의 일은 지극히 성실하여 여러 대를 한결같이 하여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황조(皇朝) 조종(祖宗)께서 은혜롭게 우대하고 포상하신 것이 모두 윤음(綸音)에 있다.

원문

不知今者有何罪犯。遽加貶降。若或懲之者也。我□嗣王畏□天之威。不違咫尺。陪臣回自京師。則必□召進于前。恭問□聖壽無彊。至如進貢物件。有無汚損。拜稽儀節。有無差失。瞻仰□天光。祇受宴賞。皆所詢訪。一依前度。別無違異。則一國大小相慶。以爲庶免於有■之責矣。今從善等之歸。我□王有問。其何辭以對。■王若聞使臣班列。橫被抑奪。而又斥在□大庭之■。則必驚惶憂恐曰。我向□上之誠。不逮前而□朝■降之罰歟。陪臣無狀。干犯□朝儀。而有司裁以法歟。與一國臣民。戰焉寢食不安。必究其所以。而陳謝于纊聰也。陪臣當此。其將何辭以陳之耶。執事其亮之哉。我□寡君守小邦。有朝夕之務。不能自行。使一二陪臣。冒獻貢篚于下執事。然則陪臣雖賤。實代□寡君而行事者也。□天朝之接之也。於陪臣之賤。何有。亦以□寡君所使而優待焉尒。今者失所立之班。降拜於門外。是雖陪臣之失位。實則□寡君之羞也。是雖鴻臚之抑黜陪臣。實乃□朝廷抑黜小邦也。□皇朝設秩宗之官。置賢公卿大夫。以講明辨定。而鴻臚。乃奉行成範。不使廢墜之一有司尒。今將□祖宗累朝常行無弊之廷儀。遽革一言。雖尙書閤下郞中大人之特加眷眷。而猶未快正。固滯如前。賤价之微命不足惜。而□皇朝寵眷之隆意。□寡君懸慕之純誠。擧皆委之於虛。此從善等所以區區仰籲覼縷而不已者也。轉告堂司。曲賜施行。以復舊班。無墜成規。不勝幸甚。伏惟執事垂察焉。干瀆威尊。無任悚慄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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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갑자기 폄강(貶降)을 당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혹여 징계하는 것이라면, 우리 □ 왕은 □ 천자(天子)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지척에 계신 분을 어기지 않으시니, 배신이 서울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공손히 성수(聖壽)가 무궁하시기를 묻고, 진공 물건에 오손이 있는지 여부와 절하는 의절에 차질이 없는지를 묻습니다. 천자의 광채를 우러러보고 공경히 잔치와 상을 받으시는 것은 모두 물어보는 바입니다. 한결같이 전례대로 하여 별다른 어긋남이 없다면 온 나라의 크고 작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여 거의 ■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종선(從善) 등이 돌아가서 우리 □ 왕께서 묻는다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겠습니까? □ 왕께서 사신들의 반열이 멋대로 빼앗기고 또 궁궐의 큰 뜰에서 배척당한 것을 들으시면,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하며 “내가 천자를 향한 정성이 전조(前朝)에 미치지 못하여 □ 조(朝)의 벌을 받은 것인가.” 하실 것입니다. 배신이 형편없이 □ 조의 의절을 범하였습니다. 유사(有司)가 법으로 재단한 것인가? 온 나라의 신민이 싸우고 먹고 자는 데 편치 않으니, 반드시 그 까닭을 밝혀 황제께 진달해야 하는데, 배신이 이런 때에 장차 무슨 말로 진달하겠는가. 집사는 잘 헤아리게. 우리 □(나라 이름)의 임금은 작은 나라를 지키느라 조석으로 바쁜 일 때문에 직접 행하지 못하고 한두 명의 배신을 시켜 황제의 문밖에서 공물을 바치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배신이 비록 천하나 실은 □(나라 이름)의 임금을 대신하여 일을 행한 것이다. □(명나라)가 배신을 접대함에 있어 배신의 천함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또한 □(나라 이름)의 임금이 시켜서 우대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자리에서 물러나 문밖에서 절한 것은 비록 배신의 잘못이지만 실은 □(나라 이름)의 수치이고, 비록 홍려시(鴻臚寺)가 배신을 물리친 것이지만 실은 □(명나라) 조정이 작은 나라를 물리친 것이다. □(명나라)는 종관(宗官)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현명한 공경(公卿)과 대부(大夫)를 두어 강론하고 분별하여 정하게 하였고, 홍려(鴻臚)는 봉행(奉行)하는 성범(成範)을 받들어 폐기하거나 실추되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제 장차 조종 누조(祖宗累朝)의 항상 행해져 온 폐단 없는 조정의 의례를 갑자기 혁파하려 합니다. 비록 상서 각하 낭중대인(尙書閤下郞中大人)께서 특별히 권면하시지만, 오히려 시원스럽게 바로잡지 못하고 여전히 예전처럼 지체되고 있습니다. 미천한 저의 작은 명은 아낄 것이 없으나 황조(皇朝)의 두터운 총애와 과군(寡君)의 순수한 사모의 정이 모두 헛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을 따르는 사람들이 구구하게 자세히 호소하는 까닭입니다. 당사(堂司)에 전하여 곡진히 시행해 주시어 옛 반열을 회복하고 성규(成規)를 실추하지 않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집사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높은 권위를 침범하였으니 지극히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76. 論乙巳削勳復職不允疏

문체: 公車類 / 疏箚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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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近者以復爵削券之事。言者日多。自□上聽之日遠。非但群臣惶惑而未解。人心亦爲之沮喪。蓋人心至靈。好惡同情。一豈任,瑠之親眷。而芑等之仇讐哉。其伸其罷。大抵皆枯骨也。皆鬼簿也。然衆怒如水若壅而愈激者。徒以同爲有國之臣民。憤切□先朝之見誣。凶奸之自酬私怨而橫造反逆之獄。凶奸之自固其惡而勒成帶礪之勳。□中宗之愛子。□仁廟之血屬而駢驅於鯨鯢之誅。□文定之塞淵。□明廟之寬仁而馴導以殺戮之治。遂使□國運衰替。變故非常。苟非□宗社之垂佑。則□朝鮮之得有今日。幸矣。至於□恭殿。母臨臣子。而□仁廟之殯體未冷。外內之揑飾萬端。不得□文定□明廟之慈仁孝友。則不知已置□恭殿於何地。而其不能享有今日。必然明矣。故雖知已斷之不可復續。已死之不可復誅。而猶欲執是非之公名。繳功罪之正案者。一向人心爲國家養恩而已。爲□殿下正事而已。非私利也。非私怒也。臣竊觀壅水爲防者。爲日漸久。則水勢益廣。遺有早晩。而決有大小。決有大小。故防有難易。防之難者。必快決而痛注之。然後水得其性而安焉。安有壅之三十年之久而不決自止者乎。□殿下不恤人心。力咈公論。日加一日。壅之愈固。臣聞人心所存。卽天意所在。□殿下何不以人心而承天意。不亟□一命之決乎。□殿下之諭群臣。一則曰不知。二則曰重難。三則曰不可擅改。四則曰驅迫。五則曰當時俯首風靡。臣請條陳之。奸人之蹤迹詭祕。爲謀巧密。當時□聖明。亦罔覺於熒惑。加以大小積怯。各以族掩口。是非罔罔。埋在人心。□殿下以後聖龍潛。其不知者固然矣。曁逮□光紹。更閱日久。□先王曖昧之敎。非不聞矣。□先后開釋之擧。非不與矣。章疏之論列。亦已極矣。其情狀本末之可痛可愕者。知之不爲不熟。察之不爲不詳。而每諉以不知。此群臣之未解於□殿下者也。且兇謀雖慘。然卽就私嫌。遽加國逆。亦自家之所重難也。故初則曰不自安而已。將行大戮。旋有優容之請。旣加逆號。擬去謀危之語。若以有形囊書。上構□國母者而校之。則以下私讐。何憚無形之聲罪。而猶且疑遲。則反逆大罪。非但雪之重難。雖使以讐加讐。亦不敢輕易者。較然矣。至於公喙。雖鉗以厲威。亦料人情之不可力勝。則闊大其事。肆爲眩弄。乃瞞天地以要之。乃辱□祖宗以臨之。蓋因其造端之重難。而固且重難其事。欲望其重難於終者也。今□殿下重難之敎。果中死賊之遺計。甚可惜也。苟知罪名之必不然者。而克遵□先王實無叛逆之旨。則只箇怪鬼之自作尒。夫何剗革之重難哉。此群臣之未解於□殿下者也。凡天下國家之刑政。觀其理之當否而已。苟違於理。則雖先人所自行而無他意者。當如焚溺而改之。若乙巳之事。凶奸所逞。本非□沖聖所爲。及□聖學高明。自照幽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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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생각건대, 근래에 관작을 회복하고 옥사(獄事)를 삭제하는 일로 말하는 자들이 날로 많아지는데, 위에서 들은 지 오래되어 신하들은 황혹하여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심도 저상(沮喪)되고 있습니다. 대개 인심이 지극히 영민하여 호오(好惡)가 동정(同情)이니, 어찌 한 명의 임금과 친척인 자와 한 명의 신하와 원수 사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관작을 회복하고 옥사를 삭제하는 것은 대체로 모두 죽은 사람에 대한 일입니다. 모두 귀부(鬼簿)에 기록된 것인데도 대중의 노여움이 물과 같아서 막아도 더욱 격렬해지는 것은, 한 나라의 신민으로서 선왕께서 무고한 죄를 입으신 것을 분개하고 흉악한 간신이 사사로운 원수를 갚기 위해 멋대로 반역의 옥사를 만들어 내고 흉악한 간신이 자신의 악행을 굳히려고 강제로 공훈을 세운 것에 대해 똑같이 분개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 나라의 운명이 쇠퇴하여 변고가 상상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진실로 □ 종사(宗社)의 보우가 아니었다면 □ 조선이 오늘날을 얻었을 것이 다행입니다. □ 공전(恭殿)에 이르러서는 어미가 신하를 대하는 처지인데, □ 인묘(仁廟)의 빈체(殯體)가 아직 식지 않아 외내(外內)의 온갖 장식물을 갖추지 못하였고, □ 문정(文定)과 □ 명묘(明廟)의 자인효우(慈仁孝友)를 본받지도 못했으니, 이미 공전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누리지 못한 것은 필연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미 끊어진 일은 다시 이을 수 없고 이미 죽은 사람은 다시 주벌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오히려 공정한 명분으로 시비를 잡고 정당한 근거로 공과 죄를 따지려고 하는 것은, 한결같이 인심이 국가의 은혜를 기르는 것이며, □ 전하를 위한 바른일이지 사사로운 이익이나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이 아닙니다. 신은 꽉 막힌 물을 방어하는 것을 보건대, 시간이 갈수록 물의 형세가 더욱 넓어져서 언젠가는 터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결단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으므로 방어하기에 어렵고 쉬운 것이 있습니다. 방어하기 어려운 것은 반드시 결단하여 통렬히 징계한 뒤에야 물이 그 성질을 얻어 편안해집니다. 어찌 막힌 지 30년이나 되어서도 스스로 그치지 않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 전하께서는 인심을 돌보지 않고 공론을 힘써 거스르시니, 날마다 더 심해져서 막힌 것이 더욱 견고합니다. 신이 듣건대, 인심이 있는 곳에 천의가 있다고 하였는데, □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인심으로 천의를 받들지 않으시고 속히 결단하지 않으십니까. □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게 하신 말씀은 첫째는 모르겠다고 하고 둘째는 중대하고 어렵다고 하며 셋째는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하고 넷째는 몰아붙인다고 하며 다섯째는 당시에는 모두 머리를 숙이고 따랐다고 하였는데, 신이 조목조목 진달하겠습니다. 간신의 종적이 교묘하고 은밀하여 모의가 치밀하였으므로 당시 □ 성명께서는 또한 미혹에 빠진 줄을 모르셨습니다. 대소의 두려움이 쌓여서 각기 자기 족속을 위해 입을 막으니, 시비가 아득하여 사람의 마음에 묻혀 버렸습니다. □ 전하 이후로 성룡(聖龍)이 숨어 살았으니 그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 광소(光紹)를 만나서 다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 선왕께서 애매하게 하신 가르침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며, □ 선후의 열린 해석을 함께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장소(章疏)에서 논열한 것 또한 이미 극진하여 그 정상이 본말에 대해 통탄스럽고 놀라운 것을 익숙하지 않게 안 것이 아니고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매번 모른다고 핑계 대니, 이것이 신하들이 □ 전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흉악한 음모가 참혹하기는 하지만 곧 개인적인 혐의로 갑자기 나라의 역적을 삼은 것은 또한 자기 집안에서 중히 여기고 어렵게 여긴 바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스스로 편치 않다고만 하였고, 장차 대륙(大戮)을 시행하려다가 이내 너그럽게 용납해 주기를 청하였으며, 이미 역적의 호칭을 내렸으면서도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제거하는 말을 의논하였습니다. 만약 형체가 있는 낭서(囊書)로 국모를 모함한 것을 가지고 비유한다면, 아래의 사적인 원수로 말하면 어찌 형체가 없는 성토를 꺼리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의심하여 주저하니, 반역이라는 큰 죄는 설복하기가 중하고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원수로써 원수를 갚는다 하더라도 감히 경솔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론에 대해서는 비록 위엄으로 입을 막아 버리더라도 인정을 억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으니, 큰일을 크게 벌여서 멋대로 농락하여 마침내 천지를 속이려고 하였고, 마침내 조종을 욕되게 하여 임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그 일을 시작하기가 중하고 어렵기 때문에 굳이 그 일을 중하고 어렵게 여겨 끝까지 중하고 어렵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중하고 어렵다고 하신 말씀은 과연 죽은 역적의 남긴 계책이니, 매우 애석합니다. 만약 죄명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선왕의 실로 반역이 없다는 뜻을 따랐다면 그저 괴이한 귀신이 스스로 한 짓이니, 어찌 혁파하기가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겠는가. 이는 신하들이 전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천하 국가의 형정(刑政)은 그 이치가 합당한지를 볼 뿐이다. 진실로 이치에 어긋나면 비록 선인(先人)이 행하였고 다른 뜻이 없었더라도 불태우거나 물에 빠뜨려 고쳐야 한다. 을사년의 일은 흉악한 간신이 제멋대로 한 것으로 본래 □충성(□忠聖)이 한 것이 아니다. □성학(□聖學)이 고명해지자 스스로 그릇된 것을 살피셨다.

원문

屢形□王者。晩年。召收放逐。追爵死亡。伸討之事。大槪已擧。□仁順權同。乃與□殿下亟奉以行。未盡洗淨者。朽根斷株而已。明廟旣發其始。□仁順克從其中。□殿下當成其終。可也。況承□上殿之冤痛。卒□寧王之圖事。跡未見擅。志實善繼。而不究在理之當否。以洩神人之共憤。徒以擅改爲疑。此亦群臣之所未解也。臣之事君。猶子事父。諫父不聽。號泣而隨。迫切之至也。於此有孝子。父反以驅迫訶之。不亦冤乎。今玆之事。以始禍言。則自乙巳以來。天道之變。三易其紀。以始請削勳而計之。則越自庚午。旋發旋止。又復八年。其事誠遲。以迄于今。今且伸之未盡。削之不果。殆將永無滌辨之期。故擧朝爭之。冀此千一之時。此乃不得已號泣之類也。自□上非唯邁邁。或以驅迫折之。脅迫君父。乃臣子無上之罪。其與乙巳之凶勳者何異。古者忠臣愛君。深於爲國。唯期格正。不顧其他。故折檻者近狂。還笏者近逆。牽裾碎衣者。實近於慢上。至於痛哭裂麻。補綴毁奏。引燭焚詔。封還內勑。若此之倫。皆可以驅迫論乎。百僚盈庭。所諍一兪。罔不精白。一心願補聖政。其情誠可悲也。於枯骨鬼簿。有何恩怨之切已。而若是其支離哉。□殿下曲庇凶人。嚴譴隨之。此亦羣臣之所未解也。至於當時俯首風靡者。□殿下之言。誠中群臣之罪矣。然方群兇行臆之日。以黨逆一名。爲一大阱。毫髮忤恨。輒以藉陷。怯脅以王獄。制斷以邦憲。故顯言於朝則殺之。私議於家則竄之。殺有先後。而欲殺則必殺。竄有遲速。而欲竄則必竄。孥戮者何限。杖斃者何限。藥死者何限。遐荒者何限。至在同功之人。一堂之親。或以論議適異。或以規諫稍違。或直筆記史之策。或不印僞揑之書。反唇腹誹。或被烈禍。士林無翹肖。廷紳一赤。此皆不能俯首風靡者也。今之在庭公卿。當乙巳之時。尊顯諷議者。蓋亦少矣。顧此打網之餘漏。固不免風靡之無取。而□殿下爲今之道。只宜勉在上之所當爲。不必責在下之所未爲也。釁起於二尹之交埒。而樂禍者乘之。報怨者在是。圖利者在是。故厥後羅織。若是之蔓延。□殿下推此占彼。其無赫然斯怒。恨不得生致群兇。擢髮以數之念乎。權衡在度。闔闢在手。而不卽引斷。乃曰後世自有公論。未知今日之公論。不足爲後日之公論。而後日之公論。抑可有別樣議乎。□殿下執德雖貞。施仁不竟。見事已澈。決義不勇。譬如當門者。內外植足。去就靡定。坐立俱礙。仍致元兇半賞半罰。至冤半陷半伸。刑政半正半斜。議論半屈半直。名物半有半無。國體半上半落。古今天下。寧有是哉。任,瑠之子壻。皆敍以無辜。則逆名雪矣。其爵之未復。厥義何居。芑等之官職。咸奪以有罪。則僞功判矣。其券之不刊。所主安在。□殿下不思其皮之不存。而姑且仍傳其毛。雖欲勉留繪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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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차 왕자(王者)의 뜻을 드러내어 만년에는 쫓겨난 사람들을 불러들여 추작(追爵)하고 죽은 자를 살려 토죄하는 일을 대개 이미 거행하였습니다. 인순공과 권전하가 곧바로 받들어 행하여 아직 깨끗이 씻지 못한 것을 뿌리까지 뽑아 버렸습니다. 명종께서 이미 그 시작을 열었고 인순공이 중간을 잘 이었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끝을 이루셔야 합니다. 더구나 왕의 상전(上殿)에 대한 원통함과 영왕(寧王)의 도모한 일을 받들어 자취가 멋대로 한 것이 없고 뜻은 실로 선대(先代)를 잘 이었으나, 그 일이 합당한지 여부를 따져서 신명(神明)과 사람들의 공분(共憤)을 풀어주지 않고 단지 멋대로 고친 것으로 의심받고 있으니, 이것도 여러 신하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신이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아서, 아버지가 간언을 듣지 않으시면 울면서 따르는 것이 지극히 절박한 일입니다. 이럴 때 효자가 있으면 아비가 도리어 몰아붙이고 꾸짖으니,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일을 가지고 화(禍)를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을사년 이후로 천도(天道)의 변고가 세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훈신(勳臣)을 삭제하기를 청한 것을 가지고 계산해 보면 경오년부터 시작해서 곧 발발했다가 곧 중지되고 또다시 8년이 걸렸으니, 그 일이 참으로 더디게 진행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미진한 점이 있어 삭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거의 영원히 죄를 씻을 기약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온 조정이 다투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런 때를 만나서입니다. 이는 바로 부득이 호소하는 무리들입니다. 위에서부터 단지 힘쓰기만 할 뿐만이 아니라 혹 핍박하여 꺾기도 하니, 임금을 협박하는 것은 신하로서 가장 큰 죄입니다. 을사년의 흉훈(凶勳)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옛날 충신들은 임금을 사랑함이 나라를 위하는 것보다 깊었으므로 오직 바른 도리에 맞기를 기약하고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난간을 부순 자는 미친 것에 가깝고, 홀(笏)을 돌려준 자는 역적에 가까웠으며,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옷을 찢은 자는 실로 임금을 업신여기는 데 가까웠습니다. 통곡하며 마포를 찢은 경우에 이르렀습니다. 훼방을 가하고 주상께 아뢰며 촛불을 끌어다가 조서를 불태우고 내칙(內勅)을 봉하여 돌려보내는 등의 행위는 모두 몰아붙이고 핍박하는 것으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백관이 조정에 가득 차서 한 가지 일로 논쟁할 때마다 정밀하고 공정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한마음으로 성상의 정사를 보필하고자 했던 그들의 정성이 참으로 슬픕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이 명부에 있는 것에 대해 무슨 절실한 은원(恩怨)이 있기에 이처럼 지루하게 굴겠습니까. □ 전하께서 흉악한 사람을 두둔하고 엄중한 견책이 뒤따랐으니, 이것도 신하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당시 머리를 숙이고 추종했던 자들은 □ 전하의 말이 참으로 신하들의 죄입니다. 그러나 흉악한 무리가 멋대로 행세하던 때에 당역(黨逆)이라는 이름 하나가 큰 함정이 되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이를 빌미로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겁을 주고 위협하여 왕의 법으로 처결하고 나라의 법으로 제재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드러내 말하면 죽이고 집에서 사사로이 의논하면 찬배(竄配)하였습니다. 살리는 것은 선후가 있지만 죽이는 데는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귀양 가는 데는 빠르고 더딘 것이 있지만 귀양을 가고자 하면 반드시 가게 마련이다. 처자식을 죽이는 자가 얼마나 많으며, 장형(杖刑)에 맞아 죽는 자가 얼마나 많으며, 약물로 죽는 자가 얼마나 많으며, 먼 변방으로 귀양 가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같은 공적을 세운 사람이나 한 집안의 친척이 혹 논의가 조금 다르거나 간언이 조금 어긋났다고 해서 혹은 곧장 사책(史策)에 기록하는 계책을 쓰거나 혹은 거짓된 책을 인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목과 비방을 받아 혹 열화(烈禍)를 당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사림에는 우뚝 솟은 이가 없고 조정의 신료는 모두 적색(赤色)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께 고개를 숙이고 따르지 못한 자들이다. 지금 조정에 있는 공경(公卿) 중에 을사년 때 존현(尊顯)을 풍자하고 논의한 자가 대개 적은데, 이 그물을 쳐서 잡은 나머지 빠져나간 자들은 진실로 따를 만한 것이 없는 풍미(風靡)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전하께서 지금의 방도를 취하는 데에는 단지 위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힘쓰고 아래에서 아직 하지 않은 것을 책망할 필요가 없다. 분란이 두 윤(尹)의 동등한 지위에서 일어났다. 화(禍)를 즐기는 자가 이를 틈타서 보복을 도모하는 자가 여기에서 나오고 이익을 도모하는 자가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뒤에 이와 같은 역적들이 줄줄이 이어져 번져 나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것을 미루어 저것을 점쳐 보시되, 분명히 성내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뭇 흉악한 무리들을 뽑아 머리를 세어 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권형(權衡)은 도량에 달려 있고 합폐(闔闢)는 손에 달렸는데도 즉시 결단을 내리지 않고서 후세에는 본디 공론이 있을 것이라고만 하셨으니, 오늘날의 공론이 후일의 공론이 되기에 부족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후일의 공론이 또 별다른 의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덕을 지키는 데는 곧았으나 인(仁)을 베푸는 데는 끝까지 하지 못하여, 사리에 밝으면서도 결단에 용맹하지 못하였습니다. 비유하자면 문 앞에 서서 안팎으로 발을 딛고 있어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앉아 있거나 서 있는 것이 모두 방해가 되는 격입니다. 그리하여 원흉(元兇)은 반은 상을 받고 반은 벌을 받으며, 지극히 원통한 자는 반은 죄에 빠지고 반은 억울함이 풀리며, 형정(刑政)은 반은 바르고 반은 기울어지며, 의론은 반은 굴복하고 반은 곧게 되었습니다. 명물(名物)은 반은 있고 반은 없으며, 국체는 반은 위엄이 있고 반은 무너졌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임(任), 유(瑠)의 사위들은 모두 무고하다고 서계(敍啓)하였으니 역적이라는 이름이 씻겼습니다. 그 관작을 아직 회복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의리입니까? 기(芑) 등의 관직은 죄가 있다고 모두 빼앗았으니 거짓 공로가 판명되었습니다. 그 권문(券文)을 간행하지 않는 주관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 전하께서는 가죽이 없는데도 우선 털만 그대로 전하는 것을 생각지 않으시니, 비록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서라도 머물게 하려고 애쓰고 싶습니다.

원문

而粉地亡矣。人心積鬱如此。天意所存可知。伏惟□殿下。勿以洞照爲不知。勿以反掌爲重難。唯理是視。而勿以擅改自沮。但察其誠。而勿以驅迫過慮。勿壅人言。以享天心。霈然無留。若決江河。使一國臣民。鼓舞踊抃。咸知□大聖人所作。出於萬萬尋常。不勝至願。愚下之民。悠悠塗聽。皆曰。敗露奸僞。□聖上之觀火已明。一言一字之所易辦也。於何或尼久而未訖也。故人心駭異。有甚於前。其爲沮喪。亶在此矣。臣本庸謭。受□恩深重。又叨□隆委。忝尹舊都。大庭逐隊。微踪亦絶。區區蟻忱。不敢自抑。伏願聖慈垂諒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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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옥석을 가려 내는 일이 없어지고 인심이 이와 같이 쌓여 답답해졌으니,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환히 다 알고 계시면서도 모르는 체하지 마시고, 손바닥을 뒤집는 것이 중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지 마소서. 오직 이치만을 기준으로 삼으시고 마음대로 고쳐서 스스로 저지하지 마시며, 다만 그 정성만을 살피고 몰아붙여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며, 사람들의 말을 막지 않아서 천심을 받들어 흠뻑 내리시는 은택이 강물을 터놓은 것처럼 남김없이 미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온 나라의 신민들이 고무되어 기뻐하며 모두가 □대성인(大聖人)의 행위가 만만치 않은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신은 지극한 소원을 이루어 아랫사람이 멍하니 듣고 있다가도 모두들 간사한 짓이 드러나 성상의 관찰이 이미 밝아졌으니 한마디 말과 한 글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혹시라도 오래 끌면서 끝내지 않으십니까? 그러므로 인심의 놀라움이 이전보다 심하니, 저해되는 것이 진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은 본래 용렬한 사람으로서 깊고 중한 은혜를 받았는데 또 외람되게도 □가 높이 위임하여 옛 도읍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대궐 뜰에 나아가는 일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구구한 충성을 감히 스스로 억제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헤아려 주소서.

77. 司諫院請留直提學李珥箚字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18D, ITKC_MO_0200A_A043_519A

원문

伏以。國家以人才爲本。人主以用賢爲務。國非人才。則是作舍而無材。君不用賢。則是涉川而棄檝。其不能濟必矣。臣等伏見。直提學李珥好古力學。行方言直。其所蘊抱。決非凡倫。前日職居論思諫諍之列。雖未能盡行其志。其愛君憂國之誠。則深有可惜者矣。頃因羸病。久在田野。屢膺□召命。力辭不就。然其不能忘世之意。則□聖鑑昭照。必察於陳狀之中矣。今者。特承非常之□命。謝恩闕下。旋貢衷懇。再三乞身。其言非矯情也。其事非沽名也。矧其疏辭。切中時弊。當今日□側席之求。固當褒其難進易退之節。留盛玉堂。以責論思匡救之任。而初無晉晝之接。竟靳谷駒之縶。臣等竊悶焉。臣等則知□聖上許遂素尙。以礪淸節。非無意也。但珥經幄舊臣。□殿下亦知其才之可用。而形迹之著於外者。似若訑訑而退之。則□國家雖有弓旌之招。巖穴懷藏之士。固非磨礱世事者。必不知□殿下樂士之心也。是所謂無材而作舍。棄檝而涉川。此果爲國知所本。而爲君急先務乎。一人之進退。乃千萬人之進退也。伏願□殿下。亟收成命。以反其去。□丕示優賢愛才之誠。不勝幸甚。取□進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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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생각건대, 나라는 인재를 근본으로 삼고 임금은 어진 이를 등용하는 것을 일삼습니다. 나라에 인재가 없으면 집을 지으면서 재목이 없는 것과 같고 군주가 어진 이를 쓰지 않으면 강을 건너면서 노를 버리는 것과 같으니, 그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 필연적입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직제학 이이(李珥)는 옛것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쓰며 행실은 곧고 바르다고 하였으니, 그 품은 결코 보통 사람의 윤리가 아닙니다. 전날 논사간쟁(論思諫諍)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비록 그 뜻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는 깊이 애석한 점이 있었습니다. 지난번 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시골에 있었으므로 여러 번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힘껏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잊지 못하는 뜻은 성상께서 진상(陳狀) 가운데를 밝게 살피셨을 것입니다. 지금 특별히 부르는 명을 받들어 하직 인사를 하고 곧바로 충심을 다해 두세 번이나 사직을 청하였으니, 그 말은 거짓이 아니며 그 일은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의 상소 내용은 시폐(時弊)의 핵심을 찌르고 있으니, 오늘날 곁에 앉아 가르쳐 주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진퇴가 어려운 절개를 포상하여 성대한 옥당에 머물게 하여 논사하고 구제하는 직임을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접견도 없었고 끝내 벼슬을 내려 붙잡지도 않으시니, 신들은 안타깝습니다. 신들은 성상께서 평소의 지조를 이루고 청렴한 절개를 기르도록 허락하신 것이 뜻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경연(經筵)에 있던 옛 신하로서 전하께도 그 재주가 쓸 만하다는 것을 아실 텐데, 겉으로 드러난 행적이 마치 우물쭈물 물러나는 것 같으니, 나라에서 비록 궁정(弓旌)을 내리더라도 산골짝에 숨어 지내는 선비는 본래 세상일에 연마된 자가 아니므로 반드시 전하께서 인재를 아끼는 마음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재목 없이 집을 짓고 노를 버리고 강을 건너는 것이니, 이것이 과연 나라가 근본으로 삼아야 할 일이며 임금이 먼저 힘써야 할 일이겠습니까. 한 사람의 진퇴가 바로 수많은 사람의 진퇴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명을 거두어 그를 돌아오게 하시고 어진 이를 우대하고 인재를 아끼는 정성을 크게 보이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78. 有明朝鮮國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知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平陽君金公墓誌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20B, ITKC_MO_0200A_A043_520C ...

원문

爲國者注意安危。惟相與將。人才之應世爲需。惟文與武。然讀書取宰相者。雖曰我有志氣。年邁官怠。比比媕娿。至於武將。植志忠勤。老而彌篤。求之前史。蓋亦僅有。況備有福德。沒世紆恩。見重朝著。令享考終。則近世惟平陽君一人而已。若稽先牒。順天之金。自出新羅氏。有引駕摠死食本府。進禮山城隍。其鼻祖也。本朝初。襄景公諱承霔。翼□太祖□太宗。策佐命勳。封平陽府院君。生禮曹參議有溫。寔公高祖。諱元石。判繕工寺事。□贈戶曹參議。諱若鈞。善工監正。□贈刑曹參判昇平君。諱粹洪。進士。□贈戶曹判書順天君。則公三代。推□恩追秩。竝視公貴。公諱舜皐。字虞卿。弘治己酉十二月二十六日生。未齕而順天君卒。妣安東權氏。將仕郞瑀之女。以盛族有節行。自爲未亡人。絶不下粒。從以哀殞。公零丁孤孑。鞠於外王母宣城金氏許。金乃文節公淡之女。敎養有方。其在弱弄。已有奇骨。識者卜其非凡。將及成童。昇平君命其子牧使粹潭收恤。於公爲季父。雖以武進。亦以文行名。撫愛特甚。見其强力意氣。命■■■。以■功屬忠義衛。正德乙亥。捷武科別試。■訓鍊院。習讀官。明年。旋擢重試。卽拜宣傳官。己卯。出判鏡城。本府乃節度留營。接承剸摩。素號巖邑。公雖妙齡。製錦得宜。元師柳庸謹以下。莫不愛慕。秩滿。入拜軍資監判官。俄以刑曹正郞兼內乘。卽日陞理山郡守。癸未。□中廟命兩界。驅逐胡人冒居閭延等四郡者。再遣公先審道路。及大軍行。擧爲前鋒。點虜埋伏峪裡。誘引虛空橋留陣衛將韓珪,李菡等敗之。主帥李之芳聞變恇怯。一意殺回。無復命令行伍。公所搗虜巢。距虛空程且四日。焚撤五十餘區。俘斬得夥。遂殿後收亡。且戰且還。諸將皆受譴謫。獨以功免。入爲尙衣院僉正,忠勳府經歷。陞富寧府使。聲生尤藉。超移穩城。及瓜。授訓鍊院都正。壬辰。薺浦留館倭子生變。殺掠人。拿罷鎭將。遣公爲節制使。自後□國家命帥。常以公爲先。故養安淮陽。僅數月而已。我□國外焉爲分閫禦侮之重。設兵馬節度使,水軍節度使。以命虎臣之選者。兵馬七道。公授其五。慶尙左右道也。平安道也。咸鏡北道也。忠淸道也。右道則重莅。而會有邊報。又留一年。唯南道全羅。亦屢見擬。未及膺□命。水軍六道。公授其三。湖南左道。則自薺浦移鎭。授而未赴者。嶺右也。京畿也。由前則蜚英於一時之同進。而被造飛謗。由後則刻責其乙卯之逗遛。而反斥蔑敵。內焉爲禁旅軍機之密。而置五衛都摠府都副摠管,訓鍊院知事,捕盜大將,備邊苑囿等司提調。以待文武鉅卿。公以平陽君。一時而幷進領之。絶等諸將。於中樞府。屢爲僉知事,同知事。至於知事。於漢城府。前爲右尹。後爲左尹。公立朝六十年。春秋八十有六。戊子。陞堂上官。爲通政大夫。己亥。陞嘉善大夫。丁未。

번역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안위(安危)에 주의하는데 오직 재상과 장수뿐이며, 인재가 세상에 응하여 필요한 것은 오직 문관과 무관이다. 그러나 독서하고 재상이 된 사람은 비록 지기(志氣)가 있다고 하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관직을 게을리하고 여색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무장(武將)의 경우는 뜻을 세워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늙어서 더욱 독실한 자를 찾아보더라도 대개 거의 없는데, 하물며 복덕까지 갖추어 죽을 때까지 은총이 두터웠던 사람에 있어서야 어찌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조정에서 중시되어 영원히 제향(祭享)을 받게 된 사람은 근세에는 오직 평양군 한 사람뿐이다. 선대의 첩보를 상고해 보면, 순천(順天)의 김씨는 신라씨(新羅氏)에서 나왔는데, 인가총사식본부(引駕摠死食本府)가 예산성황(禮山城隍)에 진헌한 것이 그 비조(鼻祖)이다. 본조 초기에 양경공(襄景公) 휘는 승수(承霔)로, 익(翼)ㆍ□ㆍ태조(太祖)ㆍ□ㆍ태종(太宗)을 보좌하여 명훈(命勳)에 책봉되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조 참의 유온(有溫)은 본조에서 태어났는데, 실로 공의 고조이다. 휘는 원석(元石)으로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를 지냈다. □ 증 호조 참의(贈戶曹參議) : 휘는 약균(若鈞)이다. 선공감 정(善工監正). □ 증 형조 참판 승평군(贈刑曹參判昇平君) : 휘는 순(粹) 홍(洪)이다. 진사(進士). □ 증 호조 판서 순천군(贈戶曹判書順天君) : 공의 삼대(三代)를 추증하여 은전을 베풀어 관질을 올린 것은 모두 공의 귀한 신분에 비추어 본 것이다. 공의 휘는 순고(舜皐)이고 자는 우경(虞卿)이다. 홍치(弘治) 기유년 12월 26일에 태어났는데, 아직 이빨도 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순천군이 세상을 떠났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장사랑 우(瑀)의 딸인데, 명문가 출신으로서 절행(節行)을 지켜서 스스로 미망인이 되어 밥 한 톨도 먹지 않고 슬픔에 잠겨 죽었다. 공은 외롭게 홀로 남아서 외왕모(外王母) 선성 김씨(宣城金氏)에게 맡겨졌는데, 김씨는 바로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딸이다. 가르치고 기르는 데 방도가 있어 어린 나이에 이미 빼어난 골격이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범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점쳤다. 장차 성인이 될 무렵에 승평군이 그 아들 목사(牧使) 수담(粹潭)에게 거두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는데, 공에게는 계부(季父)가 되었다. 무진(武進)으로도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나고 사랑을 특별히 받았는데, 그 힘과 의기를 보고는 15년 을미에 20공을 충의위(忠義衛)에 소속시키라고 명하였다. 정덕(正德) 을해년에 별시로 무과를 치르니 훈련원 습독관(習讀官)이 명년에 곧바로 중시(重試)에 뽑혀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기묘년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가니 본부(本府)는 절도유영(節度留營)으로서 맹마(剸摩)를 이어받아 평소 암읍(巖邑)이라 불렸는데, 공은 비록 나이가 젊었으나 제금(製錦)이 적합하여 원사(元師) 유용근(柳庸謹) 이하가 모두 사랑하고 사모하였다. 품계가 차서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들어가 벼슬을 올렸는데, 곧 형조 정랑 겸 내승으로 승진되었다가 그날 바로 이산 군수(理山郡守)로 올랐다. 계미년에 중묘(中廟)께서 양계(兩界)에 명하여 오랑캐를 몰아내고 여연(閭延) 등 4개 고을에 함부로 거주하는 자들을 축출하라고 하셨는데, 공을 먼저 보내 길을 살피게 하고 대군이 행진할 때에는 앞장서서 적을 정찰하고 매복한 골짜기에서 오랑캐를 유인하여 빈 다리에 진영을 치게 하였다. 위장(衛將) 한규(韓珪)는 이함(李菡) 등이 패하였다. 주수 이지방(李之芳)은 변고를 듣고 겁을 먹어 한결같이 도망치기만 하고 더 이상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공이 노소(虜巢)를 쳐서 허공의 거리가 또 사흘이나 되는 곳에 이르러 오십여 구역을 불태우고 철거하였으며, 포로와 참수된 자가 많았다. 마침내 전후를 수습하여 도망간 자들을 모았는데, 여러 장수가 모두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갔으나 공만은 유일하게 공을 세운 것으로 면제되어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과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에 들어갔다.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승진하고 명성이 더욱 높아져 온성(穩城)으로 옮겨 갔으며, 과산(瓜山)에 이르러서는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에 제수되었다. 임진년에 제포(薺浦)의 유관왜(留館倭)가 변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살육하고 약탈하자 진장(鎭將)을 파직하고 공을 절제사로 보내니, 그 뒤로는 나라에서 장수를 임명할 때 항상 공을 우선시하였다. 그러므로 양안(養安)과 회양(淮陽)의 일은 겨우 몇 달 만에 끝났다. 우리나라는 밖으로 나가 어찌 변방을 지키고 오랑캐를 막는 중책을 맡기겠는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두었다. 명호신(命虎臣)으로 선발된 자는 병마사 7도 중 공이 5도를 맡았는데, 경상 좌도와 우도이며 평안도이며 함경북도며 충청도이다. 우도는 자주 부임하고 또 변방의 보고가 있으면 또 1년을 머물렀다. 오직 남도 전라도는 또한 여러 번 의망되었으나 미처 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수군(水軍) 6도 중 공이 3도를 맡았는데, 호남 좌도는 제포(薺浦)에서 옮겨 진수(鎭守)하였고, 부임하지 않은 자는 영우(嶺右)와 경기이다. 전으로 보면 한때 함께 나아갔던 사람들에게 명성이 드날렸으나 뒤로 보면 을묘년에 지체한 것을 탓하여 도리어 적을 무시하는 비방을 받았다. 안으로는 금군(禁軍)과 군기(軍機)의 비밀이 되어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ㆍ도부총관, 훈련원의 지사, 포도대장의 직책에 두었다. 비변사의 원유(苑囿) 등 사(司)의 제조는 문무 대경(大卿)을 기다렸다. 공은 평양군(平陽君)으로 일시에 함께 영을 맡아 여러 장수와 더불어 중추부에서 자주 첨지사(僉知事)와 동지사(同知事)를 지냈고, 지사에 이르러서는 한성부에서 전에는 우윤(右尹)이 되고 뒤에는 좌윤(左尹)이 되었다. 공은 조정에 선 60년 동안에 나이가 86세였다. 무자년에 당상관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기해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다.

원문

以功臣冢嫡。又陞嘉義大夫。庚午。進階資憲大夫。爲宰樞四十七年。奉□國忠勤。惓惓一節。故□朝廷待之。亦以優特。事當肯綮。必使公辦之。自倭變來。加軫隄備。始革花梁爲水營。乃以公爲之。始揀宿將。提調武庫。乃以公爲之。京江創戰船。亦使公監之。畿甸仍立舟師大將。亦使公領之。所往。必欲立事圖效。故恩威幷行。聲績俱顯。移慶尙左水營於沒雲臺北。設加德,天城於熊川海中。皆由建議。及再鎭合浦。以天城築狹。請加改築。繞隍種枳。設柵藏船。卓有長算。且慮倭寇。亦使鐵九就戰船。左右置輪。首尾設砲。以濟勝略。船砲自公謀始。而賴之至今。丁未年。聞慶興府連被水災。□朝廷虞民艱食。設木柵於仍巨島。俾越江耕墾。送公鎭北以規之。公至則見其爲□穆祖肇迹之地。且木柵非可久遠。與府使金秀文。竭力經始。就加石築。□朝家亦輦布助償。不數月。城宇俱成。先在甲辰。公以冬至副使□陛辭。□中廟素器重公。傳諭曰。卿歸。當處以騎曹亞卿。同進猜訝。東還。禮部主事。書前回使臣用銀事。俾告□殿下。乃尹元衡所爲也。迨復□命。舌人有與元衡同行者。潛剝姓名。□上令巡軍問之。一行皆以文定故。慽不敢言。公獨直斥。遂結大怨。及築仍巨。適採海人爲胡掠擄。公使堡將。執賈胡兌換。其不肯刷還者。作耗於西水羅。時虞候崔豪。乃尹家婢膝。承諷欲賈公罪。唱言新城啓讐。遣巡察使李浚慶驗之。尹春年方長玉堂。元衡嗾合三司。至請大法。□廷議欲待浚慶。再仍公任。論者益力。經與秀文詣獄。配于江界上土鎭。在壬子十月。新城之設。創自廟謨。而祇緣元衡私構罪網。竝革成事。視怯裔虜。得尺淺深。良可痛心。甲寅夏。大臣言爲□國作事。不可深治。與秀文蒙原。公獨拘止。亦春年以都憲。力主前議故也。及湖南報變。起廢卽謫所復封平陽君。傳遽召京。與策軍機如故。其在謫也。有黃允寬者爲滿浦。事公甚謹。及締元衡。復莅江界。遇之極慢。倚枕睨公曰。憶得赴京事乎。公但唯唯。以此艱苦萬狀。寧邊官屬。感戀遺愛。爭負衣絮。請以覆寒。其窮雖甚。處之裕如。允寬尋坐贓拿究。□朝廷逮訊府證。公勉使營解。俾脫大禍。以德報怨。非恒人所及。厥後論及仍巨事。猶憤切不置。諸宰曰。不毖羹熱耶。公曰。此心耿耿。九死靡悔。況一謫乎。公之友方好義。曾帥關西。諭撤四屯胡落。論者攻以欺罔。方懟曰。吾自今無意□國事。公大訶曰。人臣爲□國。所當終始。豈可以一折中沮乎。一座聳警。公以鍊院敎場步短。射遠者常過人居。且謂目外奸行。請退築新臺於院北。自是試藝無缺。尙領相震。常欲沿鴨綠築長城。保障西塞。曾議廷中。論者寡和。嘆曰。吾識平陽獨致誠□國事。那使斯人。不日成之。公旣老。雖不行邊。常籌畫軍國。特進□經幄。急言竭論。靡有餘蘊。

번역

공신(功臣)의 맏아들로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경오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재상으로 있던 47년 동안 나라를 위하여 충성심을 다한 일절이 지극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그를 대우하는 것도 특별하였다. 중요한 일을 맡길 때면 반드시 공에게 맡겼다. 왜변(倭變) 이후에 방비에 더욱 힘쓰고자 하여 처음으로 화량(花梁)의 수영(水營)을 개혁할 때 공을 수령으로 삼았고, 숙장(宿將)을 뽑아 무고(武庫)를 맡길 때도 공을 제조로 삼았다. 서울과 강도의 전선(戰船)을 창설할 때에도 공에게 감독하게 하였으며, 경기 지방에 주사대장(舟師大將)을 두었을 때도 공이 거느리게 하였다.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일을 이루고 성과를 내고자 하였으므로 은혜와 위엄이 함께 행해져 명성과 업적이 모두 드러났다. 경상 좌수영(慶尙左水營)을 몰운대(沒雲臺) 북쪽으로 옮기고 가덕(加德)ㆍ천성(天城)을 웅천 바다에 설치한 것도 모두 공의 건의로 말미암았다. 재진(再鎭)이 합포(合浦)를 지키게 되었을 때 천성을 쌓아 방비하였다. 성곽을 개축하고 황하(隍河)를 둘러 감싸고 귤나무를 심으며, 참호를 설치하고 배를 숨기는 등 장기적인 계책이 탁월하였다. 또 왜구(倭寇)를 염려하여 철구(鐵九)로 하여금 전선(戰船)을 만들게 하고 좌우에 바퀴를 달아두고 선두와 후미에 포를 설치하여 승리를 도모하게 하였다. 배포는 공이 처음 계획한 것인데, 지금까지도 그 덕을 보고 있다. 정미년에 문경부(聞慶府)가 연이어 수재를 당하였다고 하니 조정에서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릴 것을 염려하여 영거도(仍巨島)에 목책을 설치하고 강을 건너 농사를 지으면서 공을 북쪽으로 보내 규찰하게 하였다. 공이 도착해서 그곳이 선왕께서 처음 자취를 남기신 곳임을 알았고, 또 목책은 오래갈 수 없다고 여겨 부사 김수문(金秀文)과 힘을 다해 시작하여 가석(加石)으로 성을 쌓았다. 조정에서도 연포(輦布)로 보상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는데, 몇 달이 안 되어 성곽이 모두 완성되었다. 먼저 갑진년에 공이 동지 부사로서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다. 중묘께서 평소 공을 중히 여겨 전유하기를, “경이 돌아가면 기조 아경(騎曹亞卿)에 임명하겠다.”고 하였다. 동진(同進)이 시기하고 의심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예부 주사(禮部主事)가 서신을 보내어, 전 사신이 은을 쓴 일에 대해 황제께 고하도록 한 것은 바로 윤원형(尹元衡)이 한 짓이었다. 곧바로 복명(復命)할 때에 혀를 잘라 내는 형벌을 받는 자 중에 윤원형과 동행한 자가 있었는데, 몰래 성명을 빼앗아 황제께 보고하고 순군(巡軍)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으니, 일행이 모두 문정공(文定公)의 후예라서 슬퍼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공만은 곧장 지적하여 마침내 큰 원한을 맺었다. 축성(築城)이 거대해지자 마침 바다에서 호략(胡掠)에 잡혀 온 사람들을 채집했는데, 공이 보장(堡將)으로 하여금 장사꾼과 오랑캐에게 환전(換錢)하게 하였는데, 그중 환전하지 못하고 남은 것이 서수라(西水羅)에서 모조리 잃어버렸다. 이때 우후(虞候) 최호(崔豪)가 바로 윤씨 집안의 여종으로, 공을 죄주려고 풍자하였고 신성(新城)이 원수를 갚으려 한다고 창언하였다. 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을 보내 조사하게 하였는데, 윤춘년(尹春年)은 바야흐로 장옥당(長玉堂)이었다. 윤원형이 삼사(三司)를 사주하여 법대로 처벌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의 의논은 이준경이 두 번이나 공임(公任)을 맡기를 기다리려고 하였다. 논자(論者)가 더욱 힘을 썼다. 경(經)과 수문(秀文)이 옥에 가 강계(江界)의 상토진(上土鎭)에 정배되었는데, 임자년 10월이었다. 신성(新城)을 설치하는 것은 처음부터 묘당에서 계획한 일이었으나, 단지 원형(元衡)의 사사로운 죄가 그물에 걸린 탓으로 모두 혁파되었다. 겁이 많은 오랑캐를 보아 자를 대고 깊이를 재는 격이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갑인년 여름에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저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니 심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수문은 용서받았으나 공만 홀로 구속되었으니, 또한 젊은 나이에 도헌(都憲)으로서 앞의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호남에 변고가 생겨 일어나 폐위된 곳이 바로 귀양지였는데, 다시 평양군(平陽君)으로 봉해지고 서울로 급히 부름을 받아 군사 책략을 예전처럼 썼다. 귀양살이할 때 황윤관(黃允寬)이라는 자가 만포(滿浦)에 있었는데, 공에게 매우 근신하였다. 원형과 결탁한 뒤 다시 강계에 부임하였는데, 만나면 매우 거만하게 베개를 베고서 공을 곁눈질하며 “서울로 갔던 일을 기억하는가?”라고 하였으나, 공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처럼 온갖 고난을 겪었다. 영변(寧邊)의 관속(官屬)들이 남은 은혜를 그리워하여 다투어 옷과 솜을 보내 추위를 막아 주었다. 그 궁핍함이 비록 심하였으나 너그럽게 대우해 주었으므로, 진실로 관대하게 용서하였다. 그러나 곧장 장오죄(贓汚罪)를 조사하고 포박하여 죄를 캐내고 조정에 보고하여 부증(府證)을 받았다. 공이 힘써 사영(使營)으로 하여금 풀어 주어 큰 화를 면하게 하였으니, 덕으로 원수를 갚는 것은 보통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 뒤로 거사(巨事)를 논할 때에 오히려 분통하여 놓아둘 수 없었다. 여러 재신이 “국상(國喪)을 당해 경계하지 않는가?”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데 하물며 한 번 귀양 가는 것을 어찌 꺼리겠는가.” 하였다. 공의 벗 방호의(方好義)는 일찍이 관서(關西)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사둔(四屯)의 호락(胡落)을 철거하도록 유시하였는데, 비판하는 자들이 속였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방호의가 “나는 이제부터 나라의 일을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하자, 공이 크게 꾸짖기를, “신하 된 자는 나라를 위해 처음과 끝까지 힘써야 하니 어찌 한 번 중간에 그만두어 중단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온 좌석이 모두 놀라 경계하였다. 공은 연원(鍊院)의 교장(敎場)에서 보(步)를 짧게 하고 활을 멀리 쏘아 항상 남보다 뛰어났다. 또 눈에 띄지 않는 간사한 행위를 말하고, 원북(院北)에 새 대를 쌓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본래 시예(試藝)에 결함이 없었다. 상령상 진(尙領相震)은 항상 압록강을 따라 장성을 쌓아서 서쪽 변방을 보호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에서 의논할 때 논의하는 자가 적어서 탄식하기를, “내가 평양(平陽)에 대해 아는 것은 오직 국사에 정성을 다한 것뿐인데, 어찌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루도 안 되어 이루지 못하게 하는가.” 하였다. 공이 이미 늙어 변방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항상 군국을 계획하고 특별히 경연(經筵)의 자리에 나아가 급박한 말을 남김없이 다 논하였다.

원문

載筆者至患殫記。公旣歿。諸相會議邊事。每言平陽若在。以爲何如。且有鑑識。甄拔南致勤,金秀文,李榮,崔守仁諸人。時稱將才。其餘武列金貂。什九爲公桃李。自諸連帥率舊褊裨。尊仰稟敎。推爲武宗。薦人。必取先公淸履者。其巧曲攀緣之流。雖才不屑。歷事□四朝。未嘗千人求托。方元衡,李樑之熾。傾朝波奔。公獨訟樑奪婢。在湖西。請還元衡勳奴。使復屬營。其爲抗直。雖屢被蜮射。不顧復怒。公嘗自錄邊地要害。賊路形勢。森列胸中。故遇人論之。指曉甚明。使如親歷。公深以西海坪耕胡爲憂。每聞師熸。必蹶然起曰。老身雖耄。尙能跨馬。設若送我。當復如是乎。癸酉冬。有新除上土者。再三招呼。授以方略。邊情虜態。靡不委曲。時公得疾危劇。綿息僅存。而堅誠益厲。聞者欽嘆其忠。前後承□恩。賜物稠疊。壬寅。□東宮災。公朝衣奔走。撲滅盡心。□仁廟卽勞以玲瓏之硯。癸亥。□明廟御後苑。命宗宰觀德。□上曰。有終者賞。公乃命中。卽拜殊□賜。其矍鑠如此。故敎閱驅獸。無不□命公爲大將者。內備盜賊。亦無遺策。公長身九尺三寸。容儀傑魁。見者知其環器。莫是高山深林龍虎變化者非歟。性質仁厚。度宇弘廓。持己接物。無矯飾之爲。作事優爲。常有大人模範。自以偏承餘慶。奉先以誠。年猶大耋。躬祭不攝。不聽兄弟輪設。念季父恩重。逮事夫人。如奉親妣。子女之出。有當婚者。幷自主之。撫濟窮族。一向敦款。隣舊有喪。必致優賻。亡友遺孤。有窮輒賑。故咸意有蓄。及家有火警。一里共救。徒見立壁。然後方信其能貧。公遭□中,仁兩大王喪。期年食素。□文定□明廟之薨。公年已垂八袠。子弟因病請權。公怒曰。爾欲使吾衰絰啗肉乎。竟守卒哭。萬曆甲戌冬。宿衛□昌德宮。感風移告。遂不淑。將及屬纊。對人猶說□國事諄諄。訃聞。□上悼甚輟朝。賜弔若祭。賻贈有加。公暮晩。思退桑鄕。且治命。祔葬百源山先壟。諸孤將永遷于尙州。禮曹□啓其著勞最久。淸貧有素。宜護其喪。□上下旨三道監司。俾示優待。終始哀榮。可謂至矣。塴用翌年二月丁酉。與後夫人同兆。宗室李氏。象山令性仝之女。慶州金氏。節度使賢孫之女。公兩夫人也。皆封貞爵。有三男二女。曰瑾。僉正。登武科。曰監察宋宇。淑人李出也。曰琛。萬戶。曰琮。生員。曰參奉朴敦仁。宜人金出也。僉正娶忠順衛孫世澣女。生男玉。判官亦武科。女長適直長林潝。次適府使李忠伯。次適金演。萬戶娶判校元壽長女。生男光燁。女長適卞乾元。餘四女幼。生員娶我先公節度使諱某女。生男光潤。女長適宋惟敬。餘二女幼。參奉生男思沉。女適李熙春。側室男珍。女長淳原尉趙義貞妾。次忠義衛柳丁生妻。次承旨鄭彦智妾。曾孫男女及庶孫若干人。嗚呼。公之武奮亦應時。生有汾陽福德而壽踰一年。得絳候注意而世遭太平。

번역

붓을 쥐고서 지극한 고통을 다해 기록한 자가 공이 이미 죽은 뒤에 여러 신하들이 변방의 일을 의논할 때마다 매번 평양(平陽)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어떠냐고 물었다. 또 감식안을 가지고 남치근(南致勤), 김수문(金秀文), 이영(李榮), 최수인(崔守仁) 등 여러 사람을 뽑아 발탁하였는데, 당시 장수의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그 나머지 무열(武列)과 금초(金貂)의 9품은 공이 도리(桃李)로 삼았고, 제련수(諸連帥)는 옛날의 편비(褊裨)를 거느리고서 존숭하고 우러러 교문을 받들어 무종(武宗)으로 추대하였다. 사람을 천거할 때에는 반드시 선공이 청렴한 자를 취하였고, 교활하게 권세를 좇는 무리들은 비록 재주가 없더라도 사조(四朝)를 두루 섬겼으나 천 명의 사람이 부탁하는 적이 없었다. 방원형(方元衡)과 이양지치(李樑之熾)는 온 조정이 그들에게 달려갔는데, 공은 홀로 양지가 비첩을 빼앗아 간 것을 고발하고 호서에 있으면서 원형에게 돌려주기를 청하여 다시 영문(營門)에 소속되게 하였으니, 그 곧고 바른 행동으로 자주 뭇사람의 미움을 받았으나 돌아보지 않았고, 또 성내어 복수하지 않았다. 공이 일찍이 변방 요해지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적의 길과 형세는 다음과 같다. 가슴속에 가득한 것을 낱낱이 늘어놓아 사람을 만나 논하면 지극히 분명하여 마치 직접 경험한 것과 같았다. 공은 서해 평야에서 오랑캐를 경작하는 일을 깊이 근심하여, 매양 사옹원 도제조(司饔院都提調)가 되면 반드시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늙은 몸이 비록 노쇠하지만 그래도 말을 탈 수 있으니, 만일 나를 보내게 한다면 응당 다시 이와 같이 하겠다.” 하였다. 계유년 겨울에 새로 상토(上土)에 제수된 자가 두세 번 불러서 방략을 주었으니 변방의 정세와 오랑캐의 형편이 자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때 공은 병을 얻어 위독하여 실낱같은 목숨만 겨우 붙어 있었으나, 그 굳센 정성은 더욱더 지극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은 그의 충성에 감탄하였다. 전후로 은혜를 입어 물품이 많이 내렸는데, 임인년에 동궁(東宮)에게 재변이 생기자 공은 조정의 옷을 입고 분주히 달려가 온 마음을 다해 진압하였다. 인묘(仁廟)께서 즉시 아름다운 옥연(玉硯)으로 위로하였고, 계해년에 명묘(明廟)께서 후원(後苑)에 거둥하여 종재(宗宰)에게 덕을 보라고 명하시자, 명묘께서 “끝까지 충성을 다한 자는 상이 있다.” 하셨다. 공은 이에 명을 받고서 즉시 특별히 제수되었으니, 그 굳센 기상이 이와 같았다. 고교(故敎)가 맹수를 몰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공을 대장으로 삼지 않은 자가 없었고, 도적을 막는 데도 남은 계책이 없었다. 공의 키는 9척 3치이고 용모가 늠름하여 보는 사람마다 그 기상이 고산(高山)과 심림(深林)에서 용호(龍虎)가 변화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천성이 인후하고 도량은 넓고 크며, 자신을 지키고 남을 대함에 거짓이 없었고, 일을 할 때면 항상 대인의 모범이 있었다. 스스로 편벽되게 여경(餘慶)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는데 나이가 80세가 되어서도 몸소 제사를 지내지 않고 형제들이 돌아가며 제사 지내는 것을 따르지 않았다. 계부의 은혜가 중함을 생각하여 부인에게 시집간 뒤로는 친비(親妣)를 모시듯 하였고, 자녀 중에 혼인을 할 나이가 된 자는 모두 스스로 주관하였으며, 궁한 친족을 돌보아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대하고 이웃의 상사(喪事)가 있으면 반드시 넉넉하게 부의(賻儀)를 보냈으며, 친구의 남은 자식 중에 궁한 자가 있으면 진휼해 주었으므로 모두들 저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집에 화재가 생기자 한 고을이 함께 구제해 주었으나 벽에 세워진 것을 보았을 뿐이니, 그 후에야 가난할 수 있음을 믿게 되었다. 공은 □중(□中)과 인양대왕(仁兩大王)의 상을 당하여 1년 동안 소식을 먹었다. □문정(□文定)과 □명묘(□明廟)가 훙서했을 때 공의 나이가 이미 여든이 다 되었는데, 자제들이 병으로 권한을 청하자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쇠약해져서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게 하려는 것인가.” 하고 마침내 졸곡(卒哭)을 지켰다. 만력 갑술년 겨울에 □창덕궁(□昌德宮)을 숙위하다가 감기에 걸려 옮겨 가고서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려고 할 때에는 사람을 대하고도 오히려 □나라의 일을 자세히 말하였는데 부음을 듣고는 □상께서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중지하고 조문을 내릴 때는 제사 지내듯 하고 부의와 증여에 더하였다. 공은 만년에 상향(桑鄕)으로 물러나서 치명(治命)하려 하였는데, 백원산(百源山) 선산에 부장하였고 자제들은 장차 상주로 옮기려고 하였다. 예조가 그 노고가 가장 오래되었고 청빈한 평소의 행실이 있었으니 의당 그 상을 보호해야 한다고 아뢰자 □상께서 세 도의 감사에게 하지를 내려 우대하도록 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애영(哀榮)이 있었다.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촌(塴)은 다음 해인 2월 정유일에 후부인과 함께 조천(兆遷)하였다. 종실 이씨(李氏)는 상산 영(象山令) 성동(性仝)의 딸이고,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절도사(節度使) 김현손(金賢孫)의 딸인데, 공의 두 부인이다. 모두 정작(貞爵)에 봉해졌다. 세 아들과 두 딸이 있으니, 근(瑾)은 첨정으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감찰 송우(宋宇)는 숙인 이출(李出)이며, 흠(琛)은 만호이고, 종(琮)은 생원이고, 참봉 박돈인(朴敦仁)은 의인 김출(金出)이다. 첨정은 충순위장군(忠順衛將軍) 손세환(孫世澣)의 딸을 맞이하여 아들 옥(玉)을 낳았는데, 판관도 무과에 급제하였다. 딸 큰애는 직장 임협(林潝)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부사 이충백(李忠伯)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김연(金演)에게 시집갔으며, 만호는 판교 원수(元壽)의 큰딸을 맞이하여 아들 광엽(光燁)을 낳았고, 딸 큰애는 변건원(卞乾元)에게 시집갔다. 나머지 네 딸은 어리다. 생원은 우리 선공 절도사 휘모(諱某)의 딸을 맞이하였다. 아들 광윤(光潤)은 송유경(宋惟敬)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두 딸은 어렸는데 참봉 생남(參奉生男)이 이희춘(李熙春)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 진(珍)은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의 첩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충의위(忠義衛) 유정생(柳丁生)의 처가 되었으며, 셋째는 승지 정언지(鄭彦智)의 첩이 되었다. 증손자녀와 서손자녀가 약간 있다. 아, 공의 무용은 또한 시대에 응하였으니, 태어날 때 분양공(汾陽公)의 복덕을 지녔고 수명은 한 살을 넘겼으며, 강후(絳候)를 얻어 세상이 태평한 시대를 만났다.

원문

度兵先制。謀勝據鞍。志烈■■。若以倫儗。其充國,馬援之流匹乎。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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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을 통달하고 먼저 제압하며 전략을 세워 승리를 꾀하였네 지열이 -원문 빠짐.-윤리로써 다스렸으니 충국과 마원의 무리에 비할 만하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金橫帶。□禁有牧也。□星墜陣。□城與復也。□韜不試奇兮。□國之福。□志不伏老兮。□忠之確。□百源之山之象祈連只。□龍泉之氣之射斗躔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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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金)은 띠를 비스듬히 두른 것이니, 금성(禁星)이 목성(牧星)에 있다. 별이 진영에 떨어지니 성(城)과 복(復)이다. 도(韜)가 기략을 시험하지 않으니 나라의 복이고, 지(志)가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충성이 확고하다. 백원산(百源山)은 산의 형상이 기연(祈連)에 해당하고, 용천강(龍泉江)의 기운이 북두 자리에 닿는다.

79. 貞夫人金氏墓誌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23D, ITKC_MO_0200A_A043_524A

원문

知中樞府事平陽君金公舜皐繼室貞夫人慶州金氏。永安節度使繼宗之孫。慶尙節度使賢孫之女。外祖故相李原之孫府使庚也。生而淑哲。擇對移天。歲己卯。年二十。平陽新判鏡城未赴。用禮雁親逆。良人漸貴。累封至貞爵。嘉靖戊戌八月。卒于京。平陽時帥嶺南。躬葬尙州百源山先壟。在世三十九春秋。平陽以名將。常在劇邊。夫婦偕居。以日月計者。未足三歲。後卅六年。平陽卒。乃定其右。生二男。曰琛。萬戶。有男光燁。女長適卞乾元。曰琮。生員。有男光潤。女長適宋惟敬。餘女孫幼。壻曰參奉朴敦仁。有男思沉。女適李熙春。爲贅者。皆聞家子。夫人奉君子以禮。育初室孤幼甚恩。治家敍族。下待妾孼。咸有儀則可尙。平陽敬慕之。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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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추부사 평양군(平陽君) 김공 순고(金公舜皐)의 계실 정부인 경주 김씨는 영안절도사(永安節度使) 김계종(金繼宗)의 손녀이며, 경상절도사 김현손(金賢孫)의 딸이고, 외조부 고 상신 이원(李原)의 손자 부사 이경(李庚)의 딸이다. 태어날 때부터 어질고 슬기로워 천명을 받들기에 합당하였다. 기묘년에 나이 20세로 평양군이 새로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서 예의를 갖추어 시집을 왔는데, 남편이 점차 귀하게 되어 여러 번 봉작되어 정작(貞爵)에 이르렀다. 가정 무술년 8월에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양군이 영남의 수령으로 있을 때 직접 상주 백원산(百源山) 선산에 장사를 지냈다. 세상에 태어나 살았던 나이는 39세이다. 평양군은 명장으로서 항상 변방에 있었으므로 부부가 함께 산 기간은 일월로 계산하면 세 해가 채 되지 않았다. 36년 뒤에 평양군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 오른쪽을 정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는 만호(萬戶) 김침(金琛), 둘째는 광엽(光燁)이다. 딸은 맏딸 김종(金琮)은 변건원(卞乾元)에게 시집가고 생원은 송유경(宋惟敬)에게 시집갔다. 나머지 딸들은 어렸는데, 사위 참봉 박돈인(朴敦仁)은 아들 사침(思沈)이 있고, 며느리 이희춘(李熙春)은 첩으로 들어갔다. 모두 집안의 자제로서 부인이 군자를 예로 받들고 초실(初室)의 고아와 어린아이를 잘 길러 주었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친족을 대우하는 데 있어 아랫사람과 첩에게까지 모두 본받을 만한 의표가 있었으므로 평양군이 공경하고 사모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畀德洎貴。天非不厚。不贏者壽。留穫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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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주고 귀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후하지 않은 것이 아니네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였으나 남은 수확은 후세에 있네

80. 聘君宣務郞聘母宜人墓合誌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24B, ITKC_MO_0200A_A043_524C ...

원문

尙聘君宣務郞諱鵬南字大翼。木川人。近世有成安公諱震。事□中,仁,明三宗。爲議政十六年。□賜几杖以優之。竟乞老。領西樞卒。時稱德相。君其胤子也。配宜人。全州□國姓李氏。同知中樞府事諱亨順女。咸以名家子。夙結委禽。惜其俱不永年。君生正德辛未。卒以嘉靖壬寅。凡三十二春秋。宜人生癸酉。歿在丁未。剩者三歲。祔葬果川治東霜草里成安兆次。徵君平生於李大諫湛。曰。器宇弘遠。沈遲不外見。且明達多識。魁然有長德風。學博經史。才工詩隸。左右圖書。杜門養素。雅好丘壑。良辰麗景。必嘯咏遊陟以放懷。自號得月子。不屑意貢擧業。成安異之。亦不勸仕。散階宣務。蔭資而已。所交無不名人。若今大學士鄭公惟吉,副學閔公起文。洎余尤磨戛最親。金文敬安國。宿慕其賢。實與未際。以詩哭其死曰。難憑天有記。倘得地修文。升聞宰列。有蒙推許如此。宜人性資明敏。凡百修整。侍奉尊章。克擧禮則。成安嘗曰。亡子婦苦郞可念。哭夫來決分必死。溢飮絶口。逮返虞。氣力綿乏。猶且扶人設祭。有以稚孤寬譬者。必曰。王父母在。偸生獨視。非我志也。柴到骨鑠。尙廷五載。果知人命。非能自制也。某嘗見申企齋集中。有尙節婦挽曰。簡編稀苦節。門表合旌題。眞可謂儷德對美。交輝不爽者矣。君男蓍孫。始仕東宮洗馬。監二縣。先娶故相沈通源女。生女。嫁洪遵。繼室以參判李澤孫。生男女。幼。君女長適東萊鄭麟壽。曾爲州縣。見任開城府都事。女次適全義李氏。卽某。亦竊科。叨從官後。半子兩家。有男六女五。男曰思敏,思敬,思愼,思謹。女一嫁郡守沈信謙。一嫁金鏡淸。餘幼者。鄭出也。有男四女二。男曰耆俊,壽俊,耈俊,命俊。女幼者。吾出也。曾孫男女。又十餘人。墓而追誌。非古也。然痛玆尊靈。秀而不實。以惑爲善。永念川谷之變。而懼無以昭顯於終古。欲窮蒼茫。求正於主張是者。故寧略而不敢華。謹系之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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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빈군(尙聘君) 선무랑(宣務郞) 휘는 붕남(鵬南)이고 자는 대익(大翼)이다. 목천(木川) 사람이다. 근세에 성안공(成安公) 휘 진(震)이 인(仁), 명(明) 세 종실을 섬기고 의정(議政)으로 16년 동안 재직하였는데, 임금이 궤장(几杖)을 하사하여 우대하였다. 마침내 늙었다고 사양하고 서추(西樞)를 맡아 죽으니, 당시 덕상(德相)이라 일컬었다. 군은 그의 아들이다. 배필은 의인(宜人) 전주(全州) □국성(國姓) 이씨(李氏)로 동지중추부사 휘 형순(亨順)의 딸인데, 모두 명문가 자제로서 일찍이 혼인을 맺었는데 불행히도 둘 다 오래 살지 못하였다. 군은 정덕(正德) 신미년에 태어나 가정 임인년에 죽으니, 나이가 32세였다. 의인은 계유년에 태어나 정미년에 죽었으니, 군보다 세 살이 적었다. 과천(果川) 치동(治東) 상초리(霜草里) 성안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이대간(李大諫) 담(湛)에게 군의 평생을 물으니, “기국(器局)이 넓고 멀며 침착하고 조용하여 외면하지 않았고, 또 명철하고 식견이 많아 우뚝하게 장덕(長德)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하였다. 학문은 경사에 박식하고 재주는 시와 서예에 능하였으며, 좌우에는 도서가 가득하고 문을 닫고 청수한 생활을 하였으며, 산수를 좋아하여 좋은 날과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반드시 시를 읊조리며 유람하며 회포를 풀었다. 스스로 ‘월자(月子)’라고 자호하였는데,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으므로 성안(成安)이 이상하게 여겼으나 또한 벼슬하기를 권하지 않았다. 선무사(宣務使)의 계제(階梯)에 분산되어 있었던 것은 음관(蔭官)으로 자리 잡은 것일 뿐이다. 교유한 이들은 모두 명인인데, 지금의 대학사 정공 유길(鄭公惟吉)과 부제학 민공 기문(閔公起文)이 나에게는 더욱 친하였고, 김 문경 안국(金文敬安國)은 평소에 그 어짊을 사모하였으나 실로 만나 보지 못하였다. 시를 지어 그의 죽음을 곡하기를, 하늘의 기록 의지하기 어려우니 땅에서 글을 닦았으리라 듣건대 재상 반열에 올라 이와 같이 추대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됨과 자질이 밝고 민첩하여 모든 일을 잘 단속하고 시봉하는 존장에게 예법을 잘 행하였네 성안이 일찍이 말하기를, “죽은 아들이 고생한 남편을 생각할 만하니, 남편을 곡하며 와서 결의하고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입에 물을 머금고도 말을 못하다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기력이 쇠약해지면서도 오히려 사람을 부축하여 제사를 지내며 어린 자식과 외로운 아내를 위로한 것이 있었다. 반드시 “왕의 부모가 계신데 홀로 생명을 도둑질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시신이 돌아와 뼈가 녹아 없어지도록 5년이나 조정에 머물렀으니, 과연 사람의 목숨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겠다. 내가 일찍이 신기재(申企齋)의 문집을 보니 상절부(尙節婦)를 만사한 시가 있었다. “간편한 책에서 고절을 찾고, 문표에 정제(旌題)를 합하니 참으로 짝하는 덕과 아름다움이 어긋남 없이 서로 빛난다.”라고 하였으니, 군의 아들 윤시손(尹蓍孫)이 처음 동궁세마(東宮洗馬)로 벼슬하여 두 고을을 관찰하였고, 먼저 고 상신(相臣) 심통원(沈通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딸을 낳았으며, 홍준(洪遵)에게 시집간 뒤에 참판 이택손(李澤孫)을 이어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다. 어렸을 때 군의 큰딸은 동래 부사 정인수(鄭麟壽)에게 시집갔는데, 일찍이 주현(州縣)을 지냈고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를 맡았으며, 둘째 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에게 시집갔는데 바로 나도다. 또한 벼슬에 올랐다. 외람되이 관직에 오른 뒤로 아들 둘과 딸 다섯을 두었는데, 아들은 사민(思敏), 사경(思敬), 사신(思愼), 사근(思謹)이고, 딸은 하나는 군수 심신겸(沈信謙)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김경청(金鏡淸)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 어린애는 정출(鄭出)이다. 아들은 기준(耆俊), 수준(壽俊), 소준(耈俊), 명준(命俊)이고, 딸은 어린애가 나이다. 증손자녀는 또 10여 인인데, 무덤을 만들고 뒤에 지문(誌文)을 쓰는 것은 옛날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 존령(尊靈)의 슬픔이 크다. 빼어난 것은 실속이 없고 잘못된 것을 선으로 삼았으니, 영원히 천곡(川谷)의 변고를 생각하면 두려워 끝까지 밝게 드러낼 수 없을까 걱정된다. 그래서 아득한 세월을 다 헤아리고 이치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바른 지침을 구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간략하게 하고 미화하지 못한다. 삼가 묘지명을 쓰노라.

원문

旣不媚於天祿。乃欲訴於方祇。追辭下隧。有聽無知。

번역

이미 하늘의 복에 아첨하지 않고 이에 방지를 하소연하려 하니 지하로 내려가서 말해도 들어줄 이 없네

81. 亡少女從娘壙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25A

원문

從順。余之第五女。惠且季也。得娿孃鍾憐。余嘗贊价在燕。改命曰從娘。隆慶庚午。蔚山郡缺官宰。臺府特以地在南角。民不見治。奸滋以負責多。爲彫劘甚。三易新除守。余以春官郞受□命。盡室以行。時天沍。自京九日而到尙州。娘發痘疹。母尙氏臥抱簾轎內。至新寧縣死焉。以尸赴郡。殯於城北。明春。歸瘞衿川馬場原家塋。生四歲矣。夭未及殤。吁短哉。昔韓文公貶揭陽女挐死於道。余嘗慘之。今何契也。丙寅丁卯間。余在翰林。及是冬。一時同僚外出者三人。旣而與安君士默,鄭君弘遠。竝有子喪。抑有數者存耶。又何怪也。銘曰。

번역

종순은 나의 다섯째 딸로, 어질고도 막내딸이다. 득구(得娿)의 종련(鍾憐)을 얻어 내가 일찍이 연경에 있을 때 이름을 ‘종랑’으로 고쳤다. 융경(隆慶) 경오년에 울산군(蔚山郡)에 관재(官宰)가 비게 되었는데, 대부(臺府)에서 특별히 그 지역이 남쪽 모퉁이에 있어 백성들이 다스림을 보지 못하고 간사함이 퍼져서 책임질 사람이 많아 깎고 쪼는 것이 심하다고 하여 세 번이나 새로 수령을 임명하였다. 내가 춘관랑(春官郞)으로 부임 명을 받고 온 집안 식구와 함께 길을 떠났는데, 때가 한겨울이라 서울에서 9일에 출발하여 상주에 이르렀다. 종순이 천연두를 발병하자 어머니 상씨(尙氏)가 여염 안에서 요(轎) 안에 누워 안고 있다가 신녕현(新寧縣)에 이르러 죽었다. 시신을 가지고 군으로 가서 성 북쪽에 빈소(殯所)를 차렸다가 이듬해 봄에 돌아와 금천(衿川)의 마장(馬場)에 있는 친정 무덤에 묻어 주었는데, 태어난 지 겨우 4년이었다. 요절하여 상(殤)이 되지는 않았지만 아, 짧은 목숨이다. 옛날 한 문공(韓文公)이 계양(揭陽)의 여인이 길에서 죽은 것을 비방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참담하게 여겼다. 지금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는가. 병인년과 정묘년 사이에 내가 한림에 있을 때 이 겨울에 함께 외출한 세 사람이 얼마 안 가서 안사묵(安士黙), 정홍원(鄭弘遠)과 더불어 모두 자식을 잃었으니, 또한 운수가 있는 것인가. 또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명을 짓다.

원문

孰致也而有生。一出門而不歸。從先祖與二兄。幸魂骨之有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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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르게 하여 살게 하였나 한번 문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네 선조와 두 형님을 따르니 다행히 혼백이 의지할 곳 있네

82. 外祖富寧府使丹陽禹府君墓誌文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25B, ITKC_MO_0200A_A043_525C ...

원문

嘗觀子朱子感陶蘇之文。亦自記其外祖祝公遺事。欽仰其贊揚世德。以耀自出。某罪逆起禍。慈天遽喪。尙念追贖而可盡心者。謹按。我外大父諱禮孫。字子讓。丹陽望閥禹姓。有觀察使諱希烈。卽公曾祖。祖義興縣監君諱敬之。考副司直。□贈兵曹參議君諱孝從。外祖曰萬戶楊公諱春伯。某之生也後。竊以有聞者言之。爲性則正直而坦厚。持身則峻潔而質儉。閨門孝友以立行。官府忠勤以體國者。外宗人之傳誦如此。余始仕。闕朝衣。公曰。一襲脫在外廊。汝亟穿去。勿覺細君。知吾父死無歸。公曰。生而相厚。沒豈不可於吾家。汝於我殯。勿使存亡異者。受恩人之稱說如此。兵械有缺。必與修精利。罪咎可懲。必先譙後誨者。恩威撫卒。而以之自訪民瘼。一心興利。痛抑禳𥙴。期變流俗者。政治臨民。而以之取友必端。藻鑑不頗於後日者。張牧使屹之所歎服。天資近道。可使比肩於孔門者。李校理延慶之所推高。淸苦安貧。不居資斧。余未及委禽於女氏。而借戰乘西征者。先君子之詔先懿也。潔白爲官。不近絲毛。與我交承於北塞。却官席而棄道者。金平陽之敎念祖也。高風卓節。落落如此。故尙成安公曰。縕袍而無狐貉者。結纓之後。僅乃祖尒。不可使沒聞於來後。嗚呼。蒼蒼之不佑賢久矣。大父晩應武擧。登庚午第。雖被己卯諸賢知。由萬戶。擢掌苑於六品。又用巡邊使高荊山薦。以察訪陟郡守於渭源。其後。僉正於司贍寺。外出爲富寧府。旣而。神不畀壽。在仕路。人不知者半世。立□本朝而未足十年。居人世閱春秋者短。期中百齡。而尙欠二歲。海牧之除。乃□命於降體。丹旌未題。冢胤之賢。不竟於業家。姓享又絶。福善者理其可問乎。然則凱風,寒泉之種於無似。豈徒三君子而已哉。配權氏夫人。安東盛族。考寔副護軍諱腰。文忠公近五世孫也。葬龜合吉于忠州治北犬峴先塋。公宅在上。而夫人在下。公丈夫子鎔。有善行。早卒。女子二人。長卽先君節度使諱某。貞夫人有男某。竊名文榜。叨歷州牧臺司。姊壻生員金琮。乃平陽君舜皐子。以文行知名。季舅母歸副護軍尹鐺。有男希愿。忠義衛。女嫁幼學安師道。某生男耆俊,壽俊,耈俊,命俊及二女。耆俊又生男重基,厚基。琮生男光潤洎三女。長爲宋惟敬妻。惟敬又生一女。希愿生男幼。師道生男愼言,愼行,愼德與二女。嗚呼。某嬛嬛欒棘。死滅朝夕。風韻旣負。袁公宅相。莫成陽元。非敢僭擬於贊揚。竊祔朱夫子時出以厲子孫之義。掩幽明豎。各爲一通文。幷備家訓云。

번역

일찍이 주자(朱子)가 도소(陶蘇)에게 감동한 글을 보았는데, 또한 외조부 축공(祝公)의 유사를 스스로 기록하여 세덕(世德)을 찬양함으로써 자출(自出)을 빛낸 것을 흠앙하였다. 모죄역(某罪逆)이 화를 일으켜 하늘이 갑자기 어버이를 빼앗았으니, 아직도 추속(追贖)하여 마음을 다할 만한 것이 생각난다. 삼가 상고하건대, 나의 외조부 휘는 예손(禮孫)이고 자는 자양(子讓)이다. 단양(丹陽)의 명문가 우씨(禹氏)로 관찰사 휘 희열(希烈)이 있는데 바로 공의 증조이며, 조부는 의흥 현감(義興縣監) 군 휘 경지(敬之)이고, 고조는 부사직(副司直) □ 증 병조 참의 군 휘 효종(孝從)이다. 외조부는 만호 양공(萬戶楊公) 휘 춘백(春伯)인데 모가 태어난 뒤에 들은 바를 가지고 말하자면, 성품은 곧고 정직하며 담박하고 후덕하였으며, 몸가짐은 준엄하고 깨끗하며 질박하고 검소하였다. 규문(閨門)에서는 효우로써 행실을 세웠고 관부(官府)에서는 충근으로 나라를 받들었으니, 외종인들이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내가 벼슬살이를 시작할 때에 조복(朝服)을 빠뜨리고서 공이 말하기를, “한 벌의 옷을 외랑(外廊)에 벗어 놓았으니 너는 속히 입고 가서 내 아내로 하여금 내가 죽어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살아서 서로 두터운 사이가 되었으니 죽어서 어찌 우리 집안에서 떠나갈 수 있겠느냐. 네가 나의 빈소에 있을 때에 생사(生死)가 다른 자로 하여금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게 하지 말라.” 하였다. 병기(兵器)에 결함이 있으면 반드시 정밀하고 예리하게 만드는 것과 죄를 지으면 반드시 먼저 꾸짖고 나중에 가르치는 것, 군졸들을 위무(慰撫)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백성들의 고통을 찾아내게 하는 것, 한마음으로 이익을 일으키고 통탄하며 억제하여 재앙을 물리치며 기필코 유속(流俗)을 변화시키는 것, 정치가 백성을 다스릴 때에 반드시 단정한 사람을 벗 삼아 후일의 거울로 삼는 것은 장 목사(張牧使) 익지(屹之)가 감탄하고 복종한 바이다. 천품이 도(道)에 가까워 공자(孔子)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사람은 이 교리 연경(李校理延慶)을 추앙한 것이다. 청고(淸苦)하고 안빈(安貧)하여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아직 여씨(女氏)에게 시집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빌려 서쪽으로 정벌한 것은 선군자(先君子)가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한 것이고, 청렴결백하게 벼슬살이하면서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북변에서 나와 교분을 나누다가 관직을 버리고 떠난 것은 김 평양(金平陽)이 조상을 생각한 것이다. 고상한 풍도와 우뚝한 절조가 이와 같았으므로 상성안공(尙成安公)이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여우나 범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은 갓끈을 매는 뒤에야 겨우 조상을 본받는다.”라고 하였으니, 후세에 알려지지 않게 해서는 안 된다. 아, 하늘이 어진 이를 돕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대부(大父)께서 만년에 응무(應武)로 과거에 급제하여 경오년에 등제하였으니 비록 기묘년의 제현(諸賢)에게 알려졌고, 만호(萬戶)를 거쳐 6품으로 장원(掌苑)에 발탁되었으며, 또 순변사(巡邊使) 고형산(高荊山)의 천거로 위원(渭原)의 척방 군수(陟方郡守)가 되었다. 그 뒤 첨정(僉正)으로 사섬시(司贍寺)에 있다가 지방으로 나가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신이 수명을 주지 않아 벼슬길에서 반평생을 남들이 알아주지 못하였다. 본조(本朝)에 세운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고, 세상에 산 지가 짧아 백수를 기대하기에도 아직 두 해가 모자라다. 해목(海牧)의 제수됨은 바로 천명을 받들어 몸을 낮춘 것이었으나, 단정(丹旌)을 쓰기도 전에 훌륭한 후손이 가업을 이으려 하지 않고 성향(姓享)마저 끊어졌으니, 선을 행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이치를 어찌 따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개풍(凱風)과 한천(寒泉)의 무시한 종자가 어찌 세 군자뿐이겠는가. 권씨 부인 안동 성족(安東盛族) 고식부호군(考寔副護軍) 휘요(諱腰) 문충공(文忠公) 근 5대손이다. 충주 치소 북쪽 견현(犬峴) 선영에 장사 지냈다. 공의 집은 위쪽에 있고 부인의 집은 아래쪽에 있다. 공의 아들 요(鎔)는 선행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딸 둘인데, 큰딸은 곧 선군 절도사 휘모(諱某)의 정부인(貞夫人)으로 아들 모(某)가 있어 문과에 급제하고 주목(州牧)과 대사(臺司)를 지냈다. 누님 시집간 평양군(平陽君) 김순고(金舜皐)의 아들 금종(金琮)은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났으며, 계외숙모 귀부호군(歸副護軍) 윤당(尹鐺)에게는 아들 희원(希願)이 있었는데 충의위(忠義衛)가 되었고 딸은 유학 안사도(安師道)에게 시집갔다. 모생(某生)은 아들 기준(耆俊), 수준(壽俊), 준준(耈俊), 명준(命俊)과 두 딸이 있었으며, 기준에게는 아들 중기(重基), 후기(厚基)가 있었다. 금종에게는 아들 광윤(光潤)과 세 딸이 있었는데 큰딸은 송유경(宋惟敬)의 아내가 되었고 유경에게도 한 딸이 있었다. 희원에게는 아들 유(幼)가 있었으며, 안사도에게는 아들 신언(愼言), 신행(愼行), 신덕(愼德)과 두 딸이 있었다. 아아, 모환환란극(某嬛嬛欒棘)은 죽음이 조석간에 닥쳤으니 풍운(風韻)을 이미 저버렸고 원공의 택상(宅相)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감히 찬양하는 데에 참람하게 비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부자(朱夫子)가 때로 자손을 위하는 의리로써 유명을 덮어 주는 것을 본받아 각기 한 통의 글을 지어 아울러 가훈(家訓)을 갖추고자 한다.

83. 有明朝鮮國淑人高靈申氏墓誌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26C, ITKC_MO_0200A_A043_526D

원문

淑人高靈申氏。故通訓大夫。成均館司成李公諱秫之夫人。府使諱淵之女。牧使諱從沃之孫。領議政文忠公叔舟。其高祖也。妣全義李氏。監察承重之女。卽文義公彦沖之後。世咸以尹姞稱。內外鍾慶。以弘治壬戌七月某甲生。家庭承訓。夙著婉娩。溫和率性。習聞孝經,小學之義。及筓移天。受禽于韓山稼,牧之門。爲舅牧使諱耘,姑淑夫人安氏所愛重。抑淑人承君子。孝以奉尊章也。司成登□中廟乙未文科第一人。共享官祿。莅歷五郡府。夫婦居室四十年。無違德而尙勤儉。內贊能賢。與有榮焉。司成旣沒。安夫人幾百歲固無恙。滫瀡供奉。未嘗廢弛。今萬曆七年。春秋七十有八。八月某甲。以疾卒。爲未亡一十三年。用是年十一月某甲。窆于龍仁器谷李氏家隴左於庚坐之原。右卽司成宅也。凡七乳。地至在墩四男也。進士沈鏵,別坐南訥,生員韓景濂。三女也。地前後娶。判官閔命世。士人趙磻女。至中進士。亦再娶。齊陽君許淳。奉事楊天錫女。有子天根。許出也。在娶宗室順川都正琯女。生子承休。墩娶忠義衛朴世光女。鏵三子。克明。進士。宗明彦明。訥,景濂。俱有子女。內外曾孫若干人。皆幼。

번역

숙인(淑人) 고령(高靈) 신씨는 고(故)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 사성 이공(李公) 휘 술지(秫之)의 부인이요, 부사 휘 연지(淵之)의 딸이요, 목사 휘 종옥(從沃)의 손자이며,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숙주(李叔舟)가 그 고조부이다. 비는 전의(全義) 이씨로 감찰 승중(承重)의 딸인데 바로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沖)의 후손으로 세상에서 모두 윤후(尹姞)라고 일컬었다. 내외가 다 복을 받았는데 홍치(弘治) 임술년 7월 모일에 갑일생이다.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아 일찍부터 온화하고 순한 기질이 드러났으며 《효경》과 《소학》의 뜻을 익혀 들었다. 이사하여 한산가목(韓山稼牧)의 문하에 들어가 외숙 목사 휘 운(耘)과 고모 숙부인 안씨(安氏)의 사랑을 받았으니, 숙인이 군자의 덕을 이어받아 효성으로 존장(尊章)을 받든 것이다. 사성이 중묘(中廟) 을미년 문과에 급제하여 제일인이 되었고 관록을 함께 누리며 5군부(郡府)를 두루 다스렸으며, 부부가 40년을 살면서 덕을 어기지 않고 근검을 숭상하였으며, 내조가 능숙하고 현명하여 남편과 함께 영화를 누렸다. 사성이 죽은 뒤 안 부인은 거의 백 년이 되어도 건강에 아무 탈이 없었으며, 제사를 받드는 일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만력 7년 8월 모일에 갑일생으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망인이 된 지 13년이 되어서는 금년 11월 모일에 용인 기곡 이씨 집의 남쪽 언덕에 있는 경좌(庚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여기가 바로 사성의 집이다. 자식은 모두 일곱 명인데, 지재돈(地在墩)의 네 아들은 진사 심선(沈鏵), 별좌(別坐) 남눌(南訥), 생원 한경렴(韓景濂)이고 세 딸은 지전취(地前後娶) 판관 민명세(閔命世), 사인 조반(趙磻)의 딸인데 중진사(中進士)에 이르렀고, 또 재취한 제양군 허순(許淳), 봉사 양천석(楊天錫)의 딸로 아들 천근(天根)이 있으니 허씨 집안에서 낳은 것이다. 종실 순천 도정 관(順川都正琯)의 딸을 취하여 아들 승휴(承休)를 낳았고, 지돈취 충의위 박세광(朴世光)의 딸을 취하였는데 심선이 세 아들을 두었으니, 극명(克明)은 진사이고 종명(宗明)과 언명(彦明)이다. 남눌과 한경렴도 모두 자식이 있으며 내외 증손이 몇 사람인데 모두 어리다.

84. 通訓大夫。前行牛峯縣令閔公墓誌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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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牛峯縣令閔公諱季良字德佐。萬曆七年九月某甲。捐寢于第。距其生弘治己未十一月某甲。八十有一祀。孤淑,混濬。卜得越三月中冬之某甲。將葬于廣州治慶安里子坐原亡淑人之右而祔之。前事。使從弟生員善氏。次其族世,官歷,德行爲狀。問銘於某曰。以親以知無若子。謹按。其族世曰。麗初有諱稱道。官奉御。歷四世。文景公令謨。爲毅宗所夢想。位平章。自後仍累代顯赫。至文度公抃。有子霽,開。霽誕我□獻陵元敬王后。開官都評議使,集賢學士。寔生公高祖贈參判不貪。大司憲章節公諱騫。曾祖也。迎曙察訪諱禮達。祖也。奉先殿參奉諱球。考也。妣東陽申氏。副司果永保之女。統合元勳壯節公崇謙之裔。其官歷曰。凡三爲參奉。奉事典獄署永崇殿,社稷署也。敦寧府,濟用監,繕工監也。各一爲直長。主簿掌樂院也。又濟用監也。兩爲判官。縣令。內贍寺,漢城府也。永平,牛峯也。前後入臺憲。爲殿中者。亦再焉。其德行曰。公爲人平易和厚。與物無忤。雖甚不喜。不以色加人。奉祭以誠。老猶不攝。撫賬窮族。不以貧故輟施。少遭愍釁。三歲失恃。繄慈訓是賴。克有學志。屢選試解。晩筮廕薦。立朝三十年。勤愼莅職。未嘗爲廷評所及。逮至終年。猶欲扶病省墓。先世有應遞之主。以家無廟宇。爲終身慕。豈誠恪植素。年邁而志不衰歟。淑人昌寧曺氏。父僉使淑衡。祖訓鍊都正漢孫。性度溫惠。順承無違。理家勑整。縫冪敏精。禮資婚嫁。恩存從僕。門黨歸稱。先公十年。以庚午六月某甲卒。享年六十四。生六子。男三人。長宣務郞。先娶萬戶金賢洽女。生女。適進士慶箕疇。後娶別坐韓承祚女。仲娶忠義衛金敬祖女。生二男一女。男友參。以進士趙應聖女爲妻。季辛酉進士。甲子文科。求養爲白川郡守。娶尙衣正李安忠女。生五男三女。男友顔,友孟。以縣監李坰,士人趙揚庭女爲妻。女適幼學李竤公。女三人。長士人蘇克善。仲縣監尹時忱。季士人李汝泌。其壻尹洎李。俱一男。幷餘孫皆幼。惟閔氏出驪興。甲三韓。公先二世。比不大振。公階三品。官五品。仕又非遂。就公錫類。卜其來慶。則猶爲積而種之。以留其穫者乎。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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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우봉 현령(牛峯縣令) 민공(閔公) 휘는 계량(季良)이고 자는 덕좌(德佐)이다. 만력 7년 9월 모일 갑일에 제사 지내던 곳에서 죽었다. 그가 태어난 홍치 기미년 11월 모일 갑일로부터 81년이 되는 해에 외아들 혼준(混濬)이 장사를 치르려고 월 3월 중순의 모일 갑일을 택하여 광주(廣州) 치경리(治慶里) 자좌원(子坐原) 망숙인(亡淑人)의 오른쪽에 장사 지내고 부묘하려고 한다. 이전에 종제 생원 선씨(善氏)로 하여금 그 족세와 관직을 거친 것과 덕행을 기록하여 명(銘)을 짓게 하였는데, 모에게 물었다. “친한 사람이나 아는 사람 중에 자네만 한 사람이 없으니, 삼가 부탁하네.” 삼가 살피건대, 그 족세에 이르기를, “고려 초에 휘칭도(諱稱道)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관직은 봉어(奉御)를 지냈고 4대를 거쳐 문경공(文景公) 영모(令謨)가 되었는데 의종(毅宗)이 꿈에서 보았다. 지위는 평장사(平章事)였으며, 그 뒤로 여러 대에 걸쳐 현혁하였고 문도공(文度公) 이지(李抃)에 이르러 아들 제(霽)와 개(開)를 두었는데, 제는 우리 □헌릉(獻陵) 원경왕후(元敬王后)를 낳았다.” 하였다. 개관도평의사(開官都評議使) 집현학사(集賢學士) 실생공(寔生公) 고조 증 참판 불탐(不貪), 대사헌 장절공(大司憲章節公) 휘건(諱騫)은 증조이다. 영조 찰방(迎曙察訪) 휘예달(諱禮達)은 조부이다.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 휘구(諱球)는 부친이다. 비(妣) 동양 신씨(東陽申氏)는 부사과 영보(永保)의 딸로, 통합원훈 장절공(統合元勳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예이다. 그 관직이 모두 세 번이나 참봉을 지냈는데, 봉사전옥서(奉事典獄署), 영숭전(永崇殿), 사직서(社稷署), 돈녕부(敦寧府), 제용감(濟用監), 선공감(繕工監)이다. 각 한 번씩은 직장(直長)을 지냈는데, 주부(主簿)로 장악원(掌樂院)과 제용감을 맡았고, 두 번은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현령으로 내섬시(內贍寺), 한성부(漢城府), 영평(永平), 우봉(牛峯)을 맡았다. 전후로 대간에 들어갔는데, 전중(殿中)이 된 것도 두 번이다. 그의 덕행은 공이 사람됨이 평이하고 온화하며 후덕하였다고 한다. 남과 어긋남이 없어서 매우 기뻐하지 않더라도 남에게 색을 보이지 않았고, 제사를 받들 때 정성을 다하였으며, 늙어도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가난한 친족을 돌보았고, 가난하다고 해서 베풀기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젊은 시절에 재앙을 만나 삼 년 동안 신임을 잃었으나 자애로운 가르침에 힘입어 학문에 뜻이 있었고, 여러 번 시관(試官)에 뽑혀 만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조정에 입신한 지 30년 동안 근신하여 직무를 행하였고, 한 번도 조정의 비평을 받지 않았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병든 몸으로 성묘하려고 하였으니, 선대의 응대(應遞)하는 주인이 가문에 사당이 없음을 이유로 종신토록 사모한 것이 어찌 진실하고 정성스럽게 평소에 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숙인 창녕 조씨는 아비는 첨사 조숙형이고, 할아버지는 훈련도정(訓鍊都正) 조한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워 어버이를 잘 모셨고, 가정을 다스려 질서 정연하였으며, 바느질을 민첩하고 정교하게 하였다. 시집갈 때 예물을 보내 주었고, 은혜가 종복에게까지 미쳤으며, 문당(門黨)이 돌아와 칭송하였다. 선공의 10년이다. 경오년 6월 모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64세이다.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선무랑(宣務郞)으로 먼저 만호(萬戶) 김현흡(金賢洽)의 딸을 얻어 딸 하나를 낳고 진사 김경기(金慶箕)와 혼인하였으며, 뒤에 별좌(別坐) 한승조(韓承祚)의 딸을 얻었다. 둘째는 취충의위(取忠義衛) 김경조(金敬祖)의 딸을 얻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고 진사 조응성(趙應聖)의 딸을 얻어 혼인하였다. 셋째는 신유년에 진사로 급제하고 갑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구양(求養)으로 백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었는데 상의정 이안충(李安忠)의 딸을 얻고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았다. 친구 안(顔), 친구 맹(孟)이 현감 이진(李坰), 사인(士人) 조양정(趙揚庭)의 딸을 얻어 혼인하였으며, 딸은 유학(幼學) 이공(李竤)에게 시집갔다. 셋째는 사인 소극선(蘇克善)이고, 둘째는 현감 윤시침(尹時忱)이며, 막내는 사인 이여필(李汝泌)이다. 사위인 윤(尹)과 이(李)가 모두 아들 하나씩을 두었으며, 나머지 손자들은 모두 어리다. 민씨는 여흥에 나와서 삼한의 으뜸이 되었는데, 공은 선조 두 대를 거쳐 크게 진작하지 못하였다. 공의 계급은 3품이고 관직은 5품으로 벼슬살이가 또 이루지 못하였으니, 공을 시집보내어 그 경사를 점치자니 오히려 쌓아 두고 씨 뿌린 것이라서 그 결실을 남겨 두는 것이리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集善之報。□天之施。□埋土之文。□質諸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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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을 모은 보답은 하늘의 베풂이요 흙에 묻는 글씨는 공경한 정성이다

85. 議政府左議政貞愍安公墓誌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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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自古端人正士。含忠履潔。直道自遂。唯國事是正。見螫奸人。罹讒以隕者何限。天不泯理。公言復恢。則譬諸草木。根伐蓋久。欲加封植。朽壤而止尒。然諉之無奈。不復以追。則是非終亡。國亦無矣。□聖世所軫。厥有然哉。越我朝鮮故議政府左議政安公。當□中廟改紀之日。首擢諫長。光翊中興。曁名位益顯。□上眷益隆。士論益信。任責益重。植正登賢。排奸激濁之政所以贊己卯以前之治者。公之力有重焉。至於終年。天降鞠凶。日月迷晶。鬼神無靈。此亦蒼茫之一大會也。公諱瑭。字彦寶。竹溪其出也。自文成公裕。至公身凡九世。八以儒科發。開城留後景質公瑗。海州牧使。□贈判書從約。檢漢城。□贈贊成璟。成均司藝。□贈領議政敦厚。貞夫人宜寧南氏。政丞輝珠之女。□贈貞夫人東萊鄭氏。良度公良生之女。貞敬夫人白川趙氏。肅魏公胖之女。貞敬夫人密陽朴氏。司藝融之女。此公之四代考妣也。初隸國子學諭。薦柱下記事。自是回翔內外。燕山之末。由南陽府使。昇通政大夫。逮際聖化。入銀臺。以右副至左承旨。烏府則四爲都憲。秋曹則三莅亞卿。工,兵皆再。而兵則辭之。一爲參判者春官。再授方節者湖西,嶺南。其陟正卿。漢城判尹者一。戶曹判書者再。工,刑判書者各一。吏曹判書者亦再。知中樞府事者四。議政府贊成者一。竟被爰立。此公之仕宦履歷也。擧成化庚子生員。登辛丑別試。罷正德己卯。立朝三十有九年也。生天順辛巳三月壬戌。沒正德辛巳十月十七日。春秋周甲有一歲也。貞敬夫人全義李氏慶源府使永禧之女。公之室也。成均學諭處謙,弘文副修撰處諴,弘文博士處謹。公之子也。璐,瑮,,玧,士人許悌,忠義權銖,敎官趙希孟,主簿鄭震,士人禹弼成。公之孫男女也。應達,應建,應進,應吉,應福,應德,守基金慶胤,宗室桂城令桷,奉事崔敬立,宗室杆城令格,進士韓彦忱,生員李宜永,幼學許暾,成洌,權仁經,義經,李潭,張彦忱,南益壽,金興宇,鄭應善,明善,從善,生員李崑玉,幼學禹致勤,致儉,致勣韓惺。公之曾孫男女也。玄孫男女。又若干人。嗚呼。若稽禍由。三子俱中薦科。公旣以盛滿爲惕。俄而亂作。公落職而科又削。所謂奸人日打士網。靜庵先生卒焉。公之伯子乘忿忿有違言。爲畜狗上告。二憾交逞。公壽竝論。闔門坐錮。二十年錮始解。又七年科復。又廿年。公爵復。又十年。大常議易公名。直道不撓。在國逢艱。而賜之曰貞愍。公首尾殆六十年。□列聖之扶正道。起國脈。以紀人性者。可謂至矣。顧其人已壞。獨如朽壤何。次第昭雪。士痛彌甚。豈非慰泣而增哭者乎。公葬在廣州東退村里。迄未碑誌需于復也。宗孫璐。以某忝葭莩。嘗草公狀。徵隧文。固屢辭面請益勤。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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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로부터 단정하고 바른 선비는 충성을 간직하고 행실이 깨끗하여 곧은 도를 스스로 이루었으니 오직 나라의 일을 바로잡는 것뿐이었다. 간사한 사람에게 쏘이고 참소에 걸려 곤경을 당한 자가 어찌 한량 있겠는가. 하늘이 이치를 없애지 않아 공론이 다시 회복되면 초목(草木)과 같아서 뿌리가 베어진 지 오래되어 봉식(封植)하려 해도 썩은 땅이라 그만두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남에게 떠넘겨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면 시비가 끝내 없어지고 나라 또한 없게 되니, 성세(聖世)에서 진념하는 바가 그러한 것이다. 우리 조선의 고 의정부 좌의정 안공은 중묘께서 기년(紀元)을 고치던 때에 맨 먼저 대사간으로 발탁되어 중흥의 공로를 빛내고 이름과 지위가 더욱 드러났으며, 성상의 총애와 신하들의 신뢰가 더욱 높아져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다. 바른 사람을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배척하는 정사는 기묘년 이전의 정치를 찬양하는 것이니 공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해가 저물자 하늘이 흉악한 일을 내렸다. 일월이 빛을 잃고 귀신도 영험하지 않으니, 이 또한 창망한 가운데 한 차례의 큰 모임이다. 공의 휘는 당(瑭)이고 자는 언보(彦寶)이며 죽계(竹溪)가 그 출신이다. 문성공(文成公) 유(裕)로부터 공의 몸에 이르기까지 9대 동안 8대가 유가(儒家)로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개성(開城)에 머물렀던 후경질공 원(瑗), 해주 목사(海州牧使) 증 판서 종약(從約), 검한성(檢漢城) 증 찬성 경(璟), 성균사예(成均司藝) 증 영의정 돈후(敦厚)가 있다. 정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정승 휘주(輝珠)의 딸이고, 증 정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양도공(良度公) 양생(良生)의 딸이며, 정경부인 백천 조씨(白川趙氏)는 숙위공(肅魏公) 방(胖)의 딸이고, 정경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사예융(司藝融)의 딸이니, 이들은 공의 4대 고비이다. 처음에는 국자학 유(國子學諭)에 예봉(禮奉)으로 들어가 주하사기(柱下事記)를 기록하였는데, 이후로는 안팎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연산(燕山)의 말년에 이르렀다.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성상의 교화가 미치자 승문원에 들어가 우부(右副)에서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고, 사헌부에서는 네 번 도헌(都憲)을 지냈으며, 형조에서는 세 번 아경(亞卿)을 지냈고, 공조와 병조는 모두 두 번 지냈는데 병조는 사양하였다. 한 번 참판이 된 것은 예조이고, 두 번 방절(方節)에 제수된 것은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이다. 정경(正卿)에 오른 것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한 번이고, 호조 판서가 두 번이며, 공조와 형조의 판서는 각각 한 번씩이고, 이조 판서도 두 번이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네 번이고, 의정부 찬성이 한 번이다. 마침내 원자(爰子)로 추대되었으니, 이것이 공의 벼슬살이 이력이다. 성화(成化) 경자년에 생원과에 합격하고 신축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였다. 정덕(正德) 기묘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조정에 나아온 지가 39년이다. 천순(天順) 신사년 3월 임술일에 태어나 정덕 신사년 10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춘추(春秋) 주갑(周甲)이 되는 한 해에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의 이씨(全義李氏) 경원 부사(慶源府使) 영희(永禧)의 딸로 공의 처이다.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처겸(處謙),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처섬(處諴),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처근(處謹)은 공의 아들이다. 노(璐), 열(瑮), 윤(玧), 사인(士人) 허제(許悌), 충의(忠義) 권주(權銖), 교관(敎官) 조희맹(趙希孟), 주부(主簿) 정진(鄭震), 사인 우필성(禹弼成)은 공의 손자이다. 응달(應達), 응건(應建), 응진(應進), 응길(應吉), 응복(應福), 응덕(應德), 수금부사(守金府使) 김경윤(金慶胤), 종실 계성령(宗室桂城令) 각(桷), 봉사 최경립(崔敬立), 종실 간성령(宗室杆城令) 격(格), 진사 한언침(韓彦忱), 생원 이의영(李宜永), 유학 허돈(許暾), 성열(成洌), 권인경(權仁經), 의경(義經), 이담(李潭), 장언침(張彦忱), 남익수(南益壽), 김흥우(金興宇), 정응선(鄭應善), 명선(明善), 종선(從善), 생원 이곤옥(李崑玉)은 유학(幼學) 우치근(禹致勤), 우치검(禹致儉), 우치적(禹致勣), 한성(韓惺)은 공의 증손자들이다. 현손자들도 또 몇 사람이다. 아, 만약 재앙이 생긴 원인을 따져 본다면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이미 성대하고 풍족한 것을 두려워하여 조금 뒤에 난을 일으켰다. 공은 벼슬에서 떨어지고 과거에도 또 삭제되었으니, 이른바 간사한 사람이 날마다 선비의 그물을 치는 것이었다. 정암 선생이 죽자 공의 큰아들 승분(乘忿)은 여론에 어긋난 말을 하고서 개를 기르다가 상고하여 고발하였는데, 두 가지 원한이 서로 드러나 공과 아들이 모두 논죄되어 온 집안이 20년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비로소 풀려났다. 또 7년 뒤에 과거에 합격하고 또 20년 뒤에 공작(公爵)을 회복하였으며, 또 10년 뒤에는 대상을 의논하여 공의 이름을 바루었다. 곧은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면 정민공(貞愍公)으로 추증받았다. 공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의 60년을 살았는데, 열성조께서 올바른 도리를 붙들어 세우고 나라의 맥락을 일으켜 인성을 기르신 것이 지극하였다. 그 사람을 돌아보건대 이미 무너져 버렸으니, 홀로 썩은 땅과 같음이 어떠하겠는가. 차례로 죄명이 깨끗하게 밝혀지니 선비의 슬픔이 더욱 심해졌네. 어찌 위로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슬픔을 더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장사는 광주(廣州) 동퇴촌(東退村) 촌리에 있는데, 아직까지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네. 종손 노(璐)가 모(某)가 외람되이 가초(葭莩)를 맡아 일찍이 공의 장문(狀文)을 초고하고 묘비문을 지었으므로 면대하여 청한 것을 진실로 누차 사양하였네. 명(銘)은 다음과 같네.

원문

身可轢。□道不衄。□節惠貞愍。□天與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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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짓눌릴 수 있어도 -원문 빠짐-/ 道不衄, 절개는 굽히지 않으리라 -원문 빠짐-/ 節惠貞愍, 하늘이 바름을 주었네

86. 秀才韓生墓誌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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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有明朝鮮國秀才韓君諱戩。字禧叔。淸州人。自出高麗太尉蘭。曾祖世桓。本國吏曹判書。祖諱㞳。刑曹參判。父曰克昌。儀賓府都事。都事出後伯父宗親府典簿諱巘。母恩津宋氏。今知中樞府事麒壽之女。以嘉靖壬子八月庚申生。君生而端慤。稟有誠孝。雖得細物。必先奉親。早礪爲學。求師如渴。不承程督。業日進。自餘技弄。泊如也。謹祭祀。友兄弟。約以守身。愼於交知。性又慷慨。好氣節。是非明析。未嘗毛髮詭隨。家稱幹蠱。人謂遠到。不幸屢選解額。終以白身亡。萬曆己卯十二月戊子也。得年二十八。用翌年二月癸酉。厝楊州長興里梨洞姑峴先塋辰坐之穴。君妻許氏。陽川名閥縣監從吉女。有二女。皆幼。都事重愍其無子。命以仲兄學諭戭次子守良後之。惜也。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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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수재(秀才) 한군(韓君) 휘는 욱(戩)이고 자는 희숙(禧叔)이다. 청주(淸州) 사람으로, 고려 태위(高麗太尉)의 후손인 한란(韓蘭)을 시조로 삼았다. 증조 세환(世桓)은 본국의 이조 판서였고, 휘는 㞳이며, 조부 극창(克昌)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였으며, 도사가 죽은 뒤에 백부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인 휘는 巘이 되었다. 어머니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지금 지중추부사 기수(麒壽)의 딸이다. 가정 임자년 8월 경신일에 태어났다. 군은 태어나서부터 단정하고 성실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웠다. 비록 작은 물건을 얻더라도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올렸고, 일찍이 학문에 힘써 스승을 구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하였다. 정독(程督)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으나 학업은 날로 진보하였고, 기타 기예는 전혀 하지 않았다. 제사를 삼가 지냈으며 형제와 벗에게는 몸을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교제를 신중히 하였고 성품이 또 강개하여 기절(氣節)을 좋아하였으며 시비에 대해 분명하게 판단하여 일찍이 털끝만큼도 남의 의견을 따라 어긋나 본 적이 없었다. 집안에서는 근신(謹愼)하다고 일컬었고, 사람들은 원대한 뜻을 지녔다고 하였다. 불행히도 누차 선발되어 급제하였으나 끝내 백성으로 죽었는데 만력 기묘년 12월 무자일이었다. 나이는 28세였다. 이듬해 2월 계유일에 양주 장흥리(長興里) 이동 고현(梨洞姑峴)의 선영에 안장하였다. 군의 처 허씨는 양천(陽川)의 명문가 현감 종길(從吉)의 딸이다. 두 딸이 있으나 모두 어렸고, 도사 중민(重愍)은 아들이 없는 것을 슬퍼하여 맏형 학유(學諭)의 둘째 아들 수량(守良)의 후손으로 삼으라고 명하였으니 애석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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聰明與能。始實何喜。蒼茫中折。後亦何累。長號訴天。有聞誰追。埋文殉地。父母之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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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하고 능하였으니 처음에는 어찌 그리 기뻤던가 어둠 속에 중절되니 뒤에 또한 어찌 그리 슬프던가 길게 울며 하늘에 호소하니 듣는 이 누가 따르겠나 글을 묻고 땅에 순장하니 부모의 슬픔이로다

87. 有明朝鮮國通訓大夫。敦寧府正。□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朴公墓誌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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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之朴。剖自大卵。遂蔓東方。其牒咸陽者。由樞密院事信淸遷焉。其後。有敦寧府正朴公。歷事我□靖陵□孝陵□康陵。至嘉靖壬子七月乙巳。卒于漢城盤松坊第。距其生成化庚子十二月乙巳。七十有三歲。其諱世榮。景仁字。爲人深純忠實。越以剛正植中最名。有孝友至行。多爲人所難能者。自餘睦族治官。皆非肯綮。少孤勤學。善於書述。屢擧不諧。只中甲子進士。素與己卯諸賢友善。及禍起北門。遂不樂與世俯仰。公務之外。一絶投訪。有酒則日與諸弟親朋痛飮。無何。公初仕四山監役官。實被上舍生共薦。於內贍寺,司憲府,工曹,翊衛司,禮賓寺。皆各一爲主簿,監察,佐郞,司禦,判官。在掌隸院,刑曹。則皆再歷。而爲司評,佐郞,司議,正郞。無非陞敍也。三爲守令。一判官則全州。二郡守則豐德,草溪也。其爲府正則自都摠府經歷,司饔院僉正。爲本府副正而陟焉。公立朝三十五年。階窮通訓大夫。秩視九卿之優。俸入三品之正。而守先人之廬。無一畝之營。居家未免稱貸者。不給於祭祀周恤之費也。貧富榮落。未嘗一毫而動怵於勢利。及遺子孫。厥以孝友爲弓冶。公可謂達理者。非君子耶。諸孤曾得公卒之第某月某日。葬公于揚州神穴里先原。後十年。乃奉公配光州金氏祔之。□朝廷用公伯子大立之貴。累推□恩三世。庚辰。□上特命贊成政府。視其秩。加□贈公貳公。公考生員仲儉吏曹判書。祖考從仕郞信童吏曹參判。諸先妣咸秩次貤封。而金氏亦尊貞敬夫人。貞敬亦名家子。惠和克內。光原君伯謙之孫。副司正漢佑。其考也。凡生三男一女。男次思立。宣務郞。次希立。吉州牧使。女壻金鵬未官。孫男知天。奉事。知性。進士。知命。部將。知進。縣監。知遠。學生。知述。監役官。知遇,知遂。曾孫男由健,由恒,由益,由謙,由忠,由恕,由憲,由精,由敏。噫。今壬午距壬子。又卅一年。贊成公俾某銘公之德。辭不獲。又曰。旣銘神道。宜幷誌壙。若可誌也。又安敢無銘。銘曰。□豐剝任運。□公守之有。□積累見發。公德之厚。□公藏在下。□公續在後。□公此宅。□萬年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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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박씨가 큰 알에서 태어나 마침내 동방에 번성하였다. 그 첩(牒)이 함양(咸陽)으로 옮겨진 것은 추밀원 사신 청(淸)이 천도한 일로 말미암았다. 그 뒤에 돈녕부 정(敦寧府正) 박공(朴公)이 우리 나라의 정릉(靖陵), 효릉(孝陵), 강릉(康陵)을 두루 모셨다. 가정 임자년 7월 을사일에 한성 반송방(盤松坊) 제(第)에서 졸하였으니, 그가 태어난 경자년 12월 을사일로부터 73세였다. 그의 휘는 세영(世榮)이고 자는 경인(景仁)이다. 사람은 깊고 순수하며 충실하였다. 게다가 강직하고 바름이 심중에서 우뚝하여 가장 명망이 있었으며, 효성과 우애의 지극한 행실은 많은 사람들이 능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친족 간에 화목하고 관리를 다스리는 데 모두 핵심이 되었다. 젊어서는 고아로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고 글을 잘 짓고 외웠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단지 갑자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평소 기묘년의 제현과 우애가 좋았는데, 화가 북문(北門)에서 일어나자 마침내 세상에 함께 살기를 즐거워하지 않았다. 공무 이외에는 한 절구(絶句)를 보내어 찾아왔는데, 술이 있으면 날마다 여러 아우와 친한 벗들과 함께 통음(痛飮)하였다. 공은 처음 벼슬할 때 사산 감역관(四山監役官)이었는데, 실상은 상사생(上舍生)의 추천을 받아 내선시(內贍寺), 사헌부(司憲府), 공조(工曹), 익위사(翊衛司), 예빈시(禮賓寺)에 모두 각각 주부(主簿), 감찰(監察), 좌랑(佐郞), 사어(司禦), 판관(判官)을 지냈고,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에서는 모두 두 번씩 거쳐서 사평(司評), 좌랑, 사의(司議), 정랑(正郞)이 되었으니, 모두 승진한 것이었다. 수령은 세 번 지냈는데, 판관은 전주(全州)였고 군수는 풍덕(豐德)과 초계(草溪)였다. 부정(府正)이 된 것은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에서 사옹원 첨정(司饔院僉正)을 거쳐 본부의 부정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공은 조정에 벼슬한 지 35년 만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는데, 품계는 구경(九卿)의 우대와 같고 봉록은 3품 정직과 같았으며 선친의 집을 지켰다. 한 뙈기 땅도 자기 소유가 없어 살면서 남의 집을 빌려 산다고 불리게 되었는데, 제사 지내고 주위를 돌보는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하였다. 가난하고 부유하며 영예롭고 몰락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세력과 이익에 흔들린 적이 없었고 자손에게는 효성과 우애를 가르쳤으니, 공은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군자가 아니겠는가. 여러 고아들이 일찍이 공의 졸곡(卒哭)을 받았는데 모월 모일에 양주(揚州) 신혈리 선원(先原)에 장사 지냈다. 10년 뒤에야 공을 받들어 광주 김씨(金氏)에게 배향하고 부묘하였다. □ 조정에서 공의 백자대립(伯子大立)의 귀함을 써서 누차 세대에 걸쳐 은혜를 미루었다. 경진년에 □ 상이 특별히 명하여 찬성부(贊成府)에 두어 그 품계를 보고 증직하여 공을 추증하였다. 공의 고조는 원중검 이조 판서이고, 조부는 종사랑 신동 이조 참판이며, 여러 선비들은 모두 지위가 같고 봉호를 받았다. 김씨도 존호가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다. 정경(貞敬)은 또한 명문가의 자식이다. 혜화부인(惠和夫人)이 내조를 잘하였는데, 광원군(光原君) 백겸(伯謙)의 손자이고 부사정(副司正) 한우(漢佑)의 아들이다. 모두 세 아들과 한 딸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사립(思立)은 선무랑(宣務郞)이 되었고, 셋째 아들 희립(希立)은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으며, 딸의 신랑 김붕미(金鵬未)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손자로는 지천(知天)은 봉사(奉事), 지성(知性)은 진사(進士), 지명(知命)은 부장(部將), 지진(知進)은 현감(縣監), 지원(知遠)은 학생(學生), 지술(知述)은 감역관(監役官), 지우(知遇)와 지수(知遂)가 있었고, 증손자는 유건(由健), 유항(由恒), 유익(由益), 유겸(由謙), 유충(由忠), 유서(由恕), 유헌(由憲), 유정(由精), 유민(由敏)이 있었다. 아, 지금 임오년은 임자년으로부터 또 31년이 지났으니, 찬성공 비모(俾某)가 공의 덕을 명문하기에 말이 부족하다. 또 말하기를, “이미 신도비에 명문을 새겼으니, 묘지명도 아울러 써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 쓸 만하다면 어찌 감히 쓰지 않겠는가.” 하였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 풍박임운(豐剝任運)□ 공수지유(公守之有)□ 적루견발(積累見發)공덕지후(公德之厚) 공의 장지는 아래에 있고 공의 묘소는 뒤에 있으니이 집에서 만년토록 오래 계시리라

88.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歙谷縣令,江陵鎭管兵馬節制都尉府君墓誌。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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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全義之李。自大師諱棹佐麗祖。統三韓。世爲官族。十一世。至孝靖公諱貞幹。善養百歲母。□世宗大加褒擢。以旌純孝。寔公高祖。曾大父漢城府尹。□贈領議政全城府院君諱士寬。有六子登科。其季曰敵愾功臣。司憲府大司憲全城君襄簡公諱恕長。公其孫也。公諱仁孫。字宗孝。初以蔭授將仕郞。陞從仕。旋用門功。屬忠義衛。爲修義副尉。積十八階。至禦侮將軍。屢爲司勇,司猛,司正,司直等職。正德二年。始授東班通訓大夫資。歷成歡,金泉兩道察訪。北部司䆃豐儲。南部典獄。五司主簿。四佩縣符。聞慶,歙谷,靑陽,高靈也。一莅憲臺。監察也。天性樸素醇愨。奉親養祭以誠。臨官守撫惟謹。宗族鄕黨。咸以恩厚遇之。無嗣。以再從兄楊州牧使府君諱公達第三子諱某爲後。卽我先君也。登武科。官至兵馬節度使。□國家以職在卿秩。追錫先爵。□贈公考通訓大夫,司宰監副正。府君諱允純。爲通政大夫,刑曹參議。妣漢城府庶尹諱任之女。淑人宜寧南氏。爲淑夫人。□贈公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封配淑人文化柳氏爲貞夫人。令有司月致酒肉。夫人亦我鼻祖同功大丞車達之後。正憲中樞院使諱殷之之曾孫。佐理功臣文城君諱洙之孫。瑞興都護府使諱季孫之女。義州牧使張公孟昌之外孫也。婦則修備。閨範飭整。事親接族。雍雍如也。奉蘋主饋。踖踖如也。一時稱內助之賢者咸歸焉。公生於成化十三年丁酉正月七日。以嘉靖二十二年癸卯六月十九日。卒于正寢。壽六十有七歲。夫人生於成化十七年辛丑十月十七日。後公二十一年嘉靖四十二年癸亥十一月七日終。壽八十有三歲。卜公兆。曾窆于衿川縣治北冠岳山北馬場原。逮夫人之葬。啓其左而祔焉。墓在參議府君洎南夫人上下玄宅之後。先君皆就而廬焉。先君之事二親極誠。故公與夫人。亦遇之盡愛。忘其爲置後之子。我先妣貞夫人丹陽禹氏。卽富寧都護府使諱禮孫之女。生男女各一人。女適生員金琮。生一男三女。男光潤。女長宋惟敬妻。餘幼。某娶宣務郞尙鵬南女。生四男二女。男耆俊,壽俊,耈俊,命俊。女幼。耆俊生二男。重基,厚基。先君嘗爲壟碣。伐石而未文。蓋有待也。幽坎之誌。亦以故未遑。某自降胞蒙收鞠。以至成立。不至於甚窶而無衣食。惷然而全無知覺。罔非我祖考祖妣之訓賜是休。大懼無以報德於終天。泣述世歷行治。不敢華溢。追納封前。告願於萬世之下。知此爲德人之藏。而有所欽敬云。某年月日。孫中訓大夫。行司憲府持平,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李某。百拜謹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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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전의(全義) 이씨는 대사(大師) 휘(諱) 조좌(棹佐) 이조(李祖)로부터 삼한을 통일하고 대대로 관족이 되었다. 11대 효정공(孝靖公) 휘(諱) 정간(貞幹)에 이르러 백세모(百歲母)를 잘 봉양하여 세종(世宗) 때 크게 포상받아 순효(純孝)로 표창되었다. 이분은 공의 고조부이다. 증대부 한성부원군(贈大父漢城府院君) 휘(諱) 사관(士寬)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은 여섯 아들이 등과하였고, 그 막내 적호공신(敵愾功臣) 사헌부 대사헌 전성군 양간공(全城君襄簡公) 휘(諱) 서장(恕長)이 공의 손자이다. 공 휘(諱) 인손(仁孫) 자는 종효(宗孝)로, 처음에는 음관으로 장시랑에 제수되었다가 종사관으로 승진되었고 곧바로 문공(門功)을 써서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어 수의부위(修義副尉)가 되었다. 18계단을 거쳐 어무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으며, 여러 차례 사용(司勇), 사맹(司猛), 사정(司正), 사직(司直) 등의 직임을 맡았다. 정덕(正德) 2년에 비로소 동반 통훈대부(東班通訓大夫) 자급을 제수되었다. 역성환(歷成歡)은 금천(金泉)과 양도(兩道)의 찰방(察訪)을 지냈고, 북부(北部)에서는 군량미를 비축하는 일을 맡았으며, 남부(南部)에서는 전옥(典獄)을 맡았다. 오사(五司)의 주부(主簿)를 거쳤고, 네 고을의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문경(聞慶), 흡곡(歙谷), 청양(靑陽), 고령(高靈)이다. 한 번은 사헌부를 맡아 감찰(監察)을 하였는데, 천성이 박소(樸素)하고 순후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관직에 임해서는 조심스럽게 다스려 종족과 향당이 모두 은혜롭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자식이 없어서 재종형 양주 목사(楊州牧使) 부군(府君) 휘 공달(公達)의 셋째 아들 휘 모(某)를 후사로 삼았는데, 바로 우리 선군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국가에서 경질(卿秩)에 해당하는 직임에 있었으므로 추후에 선작(先爵)을 하사하였다. 공고(公考) 통훈대부 사재감 부정(通訓大夫司宰監副正)을 증직하고, 부군 휘 윤순(允純)은 통정대부 형조 참의를 지냈으며, 비는 한성부 서윤 휘 임지(任之)의 딸 숙인(淑人)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다. 숙부인(淑夫人)□ 증공 가선대부 호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贈公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봉배 숙인 문화 유씨(柳氏) 정부인(貞夫人)으로 삼고, 유사로 하여금 매달 술과 고기를 보내게 하였다. 부인은 우리 비조(鼻祖) 동공대승(同功大丞) 차달(車達)의 후손이며, 정헌 중추원사(正憲中樞院使) 휘는 은지(殷之)의 증손이고, 좌리공신(佐理功臣) 문성군(文城君) 휘는 수(洙)의 손자이며, 서흥도호부사(瑞興都護府使) 휘는 계손(季孫)의 딸이며, 의주 목사(義州牧使) 장공(張公) 맹창(孟昌)의 외손이다. 부인으로서 가사를 잘 돌보았고 규범이 단정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기고 친족을 대함에 온화하였고, 음식을 받들고 내놓음에 정성스러웠다. 한 시대에 현명한 내조자로 일컬어진 이들이 모두 여기에 귀결되었다. 공은 성화(成化) 13년 정유월(丁酉月) 7일에 태어나 가정(嘉靖) 22년 계묘년(癸卯年) 6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정침에서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67세였다. 남편은 성화(成化) 17년 신축 10월 17일에 태어나서 후공(後公)이 21년인 가정(嘉靖) 42년 계해 11월 7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83세였다. 남편의 묘는 일찍이 금천현(衿川縣) 치소 북쪽 관악산(冠岳山) 북쪽 마장원(馬場原)에 묻혀 있었는데, 부인의 장례 때에 그 왼쪽을 열어 부식을 하였다. 묘는 참의부군(參議府君)과 지남부인(之南夫人) 상하현택(上下玄宅)의 뒤에 있는데, 선군이 모두 가서 살았다. 선군은 두 어버이를 섬기는 데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공과 부인도 그를 만나면 다 사랑하여 자식으로 둔 사람이라는 것을 잊었다. 나의 선비 정부인 단양 우씨는 바로 부령 도호부사(富寧都護府使) 휘례손(諱禮孫)의 딸이다. 아들딸을 각각 한 명씩 두었는데, 딸은 생원 김종(金琮)에게 시집갔다.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은 광윤(光潤)이고 딸은 큰딸 송유경(宋惟敬)의 처이며 나머지 어린이는 모(某)가 선무랑 상봉남(尙鵬南)에게 시집보내 네 아들과 두 딸을 두게 하였다. 아들은 기준(耆俊), 수준(壽俊), 곤준(耈俊), 명준(命俊)이고, 딸은 유(幼)이다. 기준이 두 아들 중기(重基)와 후기(厚基)를 두었다. 선군께서 일찍이 능의 비석을 세우려고 돌을 깎았으나 아직 글을 새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개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무덤에 비문을 쓰는 것도 또한 바쁘시어 미처 하지 못하였다. 모는 스스로 강포(降胞)로부터 거두어 주심을 입고서 성립할 때까지 이르러 매우 가난하여 의식도 없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어리석은 생각으로 전혀 지각이 없었으니, 모두 우리 조부모의 가르침이 아니면 이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대단히 두려워 끝내 은덕에 보답할 수 없기에 눈물을 흘리며 세력(世歷)과 행치(行治)를 기록하노니, 감히 화려하게 꾸미지 못하고 뒤늦게 봉분 앞에 바쳐 만세토록 공덕을 기리고 경모하기를 원한다. 모는 연월일에 손중 훈대부(孫中訓大夫) 행 사헌부 지평, 지제교 겸춘추관기주관 이모는 백배하고 삼가 적는다.

89.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楊州牧使府君誌文。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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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惟。我祖考□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府君諱公達。字善卿。姓李氏。全義人。麗祖功臣大師棹之胄。□本朝孝靖公諱貞幹。奉壽母至孝。代積仁敬。以世來慶。子觀察使□贈領議政諱士寬有七男。登八科。策三勳。其夙題龍虎。申歃帶礪府君曰諱禮長。官參議。□贈判書。諡平簡公。寔生判決事□贈參判府君諱時珤。貞敬夫人南平文氏。上黨郡大夫人淸州韓氏。貞夫人南陽洪氏。貞夫人固城李氏。公之四世考妣也。以忠義衛。至禦侮副護軍。除□東宮左翊衛。轉通訓忠勳府經歷。超折衝,僉知中樞府事。以事仍前階。授楊州牧使。公之官歷序次也。沖襟保和。率性有裕。詩書文字。以承有家。孝友雍睦。敬戒玆仁者。志行之儀宗戚也。晩躋膴仕。早退急流者。出處之笑顚瞑也。當迎□晉邸。有排奸翊運之勞。而不見錄於元功。則不伐之量著矣。逮歸田園。有中貴承問之□眷。而必自牢而多病。則辭爵之節昭矣。生於天順甲申。卒於正德己卯。中間五十六春秋。其壽考也。京而漢城則寬仁坊。外而海州則太公里。廣州則胎藏里先塋者。前後存亡之宅也。光原君諱伯謙之女。□贈判書諱革之孫。□贈貞夫人光州金氏。有德有壽。生旣無違。沒又同室者。一生伉儷之重也。曰應誠。察訪。曰思誠。副護軍。曰諱某。節度使。曰恕誠。早歿。曰處士權遇鸞。曰生員李和。卽公親男及壻也。伯出曰艎。有子忠孝男。艤有子弘,挺俊。仲出曰艇。有子克,宅俊。叔出曰某。有子耆,壽,耈,命俊。權出曰翼。有子慶,賀喜。李出曰塢。有子畹。墉有子疇。卽公內外孫與曾孫也。嗚呼。吾家之慶。久未艾也。以裔未所聞知。自孝靖以下。皆推貴先人。追伸未畢之孝。至於先君。琢石待辭。非敢緩也。□明宗大王。竟訖□恩錫。俾續先趾。我儕雲仍。共粉何骨。以得無忝。以對□國家之寵靈耶。孤孫某敢因墓道之豎而且誌之。幷埋玄下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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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고(祖考) □ 증(贈) 가선대부 호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부군(府君) 휘는 공달(公達)이고 자는 선경(善卿)이며 성은 이씨(李氏)로 전의(全義) 사람이다. 고려 태조의 공신 대사조(大師棹)의 후손으로, □ 본조 효정공(孝靖公) 휘는 정간(貞幹)인데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세대를 거듭해 인자하고 공경하여 세상에 경사가 이어졌다. 아들 관찰사 □ 증 영의정 휘는 사관(士寬)으로 7남이 팔과에 급제하였고 3훈을 책봉받았으며, 일찍부터 용호문(龍虎門)에 과거를 보였고 신읍부군(申歃府君)휘는 예장(禮長)이고 관직은 참의로 □ 증 판서이다. 시호는 평간공(平簡公)이다. 실생(寔生)인 판결사(判決事)□ 증 참판 부군 휘는 시곤(時珤)이며, 정경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 상당군 대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 정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 정부인 고성 이씨(固城李氏)가 공의 4대 조고비이다. 충의위(忠義衛)에서 어무부호군(禦侮副護軍)에 이르기까지, 동궁좌익위(東宮左翼衛)를 제수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을 거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오르기까지는 일로 인하여 벼슬의 계제가 그대로 되었고,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제수하기까지는 공의 관직 이력이 순차적이었다. 충심이 보화(保和)와 같아 타고난 성품이 여유가 있었고, 시서 문자를 가업을 이어받았으며, 효우 옹목으로 인자한 이를 경계하였다. 지행은 종척(宗戚)의 의표였고, 만년에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일찍 급류에서 물러났으니 출처가 어긋난 것이 우스웠다. 당저(當邸)를 맞이할 때 간신을 물리치고 왕업을 도운 공로가 있었으나 원공록(元功錄)에 기록되지 않았으니, 벼슬을 버린 도량이 드러난 것이며, 전원으로 돌아갔을 때 중귀(中貴)가 문안하는 인척의 정이 있었으나 반드시 스스로 거절하고 병이 많았으니, 벼슬을 사양한 절개가 분명하였다. 천순 갑신년에 태어나 정덕 기묘년에 졸하였다. 중간에 56세가 되셨으니, 그 수명이다. 서울에서는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이고, 지방에서는 해주(海州)의 태공리(太公里), 광주(廣州)의 태장리(胎藏里) 선영이 전후로 거처하던 집이다. 광원군(光原君) 휘는 백겸(伯謙)인데 그의 딸인 증 판서 휘 혁(革)의 손녀이며, 증 정부인 광주 김씨(廣州金氏)이다. 덕이 있고 수명이 있어 태어나서도 어긋남이 없었고 죽어서도 한집에 함께 있으니, 일생 동안 부부 사이가 중하였던 것이다. 맏아들 응성(應誠)은 찰방이고, 둘째 아들 사성(思誠)은 부호군이며, 셋째 아들 휘모는 절도사이다. 네째 아들 서성(恕誠)은 일찍 죽었고, 다섯째 아들 처사 권우란(權遇鸞)과 생원 이화(李和)는 바로 공의 친남아 및 사위이다. 첫째 아들 닻[艎]은 아들 충효(忠孝)가 있고, 둘째 아들 닻[艇]은 아들 홍(弘)ㆍ정준(挺俊)이 있고, 셋째 아들 택(宅)은 아들 준(俊)이 있고, 넷째 아들 모는 아들 기(耆)ㆍ수(壽)ㆍ숙(耈)ㆍ명준(命俊)이 있다. 권출오(權出塢)는 아들 권익(權翼), 권경(權慶), 권하희(權賀喜)가 있고, 이출오(李出塢)는 아들 이원(李畹)이 있으며, 용(墉)은 아들 용주(墉疇)가 있으니, 바로 공의 내외손과 증손이다. 아아, 우리 집안의 경사가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으니, 후손들이 듣고 알지 못하였다. 효정왕(孝靖王) 이래로 모두 선인(先人)을 귀하게 여겨 미처 다하지 못한 효를 추후에 펴서 선군에게 이르러 돌을 갈아 비문을 기다리게 하였으니, 감히 늦추려는 것이 아니었다. 명종대왕께서 마침내 은택을 베풀어 주시어 선조의 자취를 이어서 우리들이 함께 무덤에 뿌려 욕되이 하지 않고 국가의 총애와 영령에 대답하게 하였다. 외손 모(某)는 감히 묘도(墓道)를 세우고 비석을 세워 아울러 현하(玄下)에 묻는다.

90. 伯父通訓大夫。行黃山道察訪李公墓誌。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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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東國以李姓者非一家。若我全義氏。佐一三韓。歷久彌聞。則指屈無夥。世序官位。備梓前後譜。照人耳目。姑敍隴墓所宅。勝國以前子孫。唯知鼻祖大師諱棹。墓在貫縣南五里。噫。遠也。入□國家。戶曹典書諱丘直。在洛河西豐德郡興天里。中樞院使孝靖公諱貞幹。在長湍府臨江縣于勤里。見勝覽。漢城府尹□贈領議政諱士寬。在坡州馬場原。全城君平簡公諱禮長。在廣州樂生里胎藏原。以嘗安□國胎。故名。判決事□贈兵曹參判諱時寶。在平簡公之右同麓也。楊州牧使□贈戶曹參判諱公達。在判決府君之東。非同麓也。牧使府君之右有攴原。則牧使府君之外舅光原君□贈使府君之外舅光原君□贈謁大師墓。爲制殊大。然莫詳與夫人祔也。亦嘗拜府尹以下。皆同兆異室。唯王父牧使府君。與貞夫人金氏同墓。其下有域。乃伯父察訪公也。伯父諱應誠。字若天。居儒業。屢選發解。□靖陵龍潛。以王父爲□貞顯表親。甚賜禮遇。及乘九五。乃歸鄕不仕。□上久猶追眷。俾官其子。伯父由是得領鷹師。職雖宂。勉就□異恩。明年癸巳。調東銓。察訪黃山道。來寧太夫人子漢城。止昌寧。遽徵山裂怪夢。遂大還於客榻。乙未八月十五日也。距其生弘治丁巳八月廿五。壽僅三十羸九。有□命三道監司護喪。是年月日。克妥體魄。至今萬曆丁丑四十三年也。配淳昌趙氏。捐養於是歲十月之望。孤艎,艤。分崩隕絶。謂其堂弟某曰。先人之禍。長者十四年。少者十二年。稚昧多罪。傷哉亦甚。奉襄窀穸。禮物未充。迨玆有知。含棘終天。今罹罪逆。偏天又崩。如就改先襯。合祔如王考妣則何如。某亦哭而言曰。遷防固切。孝亦從勢。雨露經久。動啓尤重。東漢樊宏謂旣藏。不宜復見。以傷孝子之心。遺命與夫人異窆。然則不唯生者未忍。亦恐靈理失妥。況三鼎五鼎。莫非稱有以爲禮。分封二室。上從判決以上。理勢所然。亦木爲無恔。僉曰。若尒。所可追者。文誌而已。子必勉之。俾掩兩壙之央。哀其少洩乎。旋以雙幼。未究行烈爲冤。某鉅創未愈。安敢以承。門尊義篤。亦安敢不承。恭惟。我家忠孝傳聲。式至有年七百。門範世澤。就英廟璽書可徵。有慶壽詩集可歌。莫不劬躬燾後。委祉啓慶。伯父修警。褒於門族宿矣。目擩耳染。有造必深。某生也。亦後公卒之翌年。敷貞揚懿。又不可臆鑿。信哉其痛矣。嘗聞伯父姿儀端莊。剛方簡默。及赴南宦規理。凋耗以勤。會時災年。賑活以單。郵卒恩之。羣來負土。遠具奠祭。哭而後去。則一命存心。可類餘惠。挈器未食。收成有地。固就子姓。爲之後卜可乎。趙夫人。亦華閥。六世祖廉事忠肅王。入元登制科。摠管遼陽等路。歸終密直副使。考曰演。文科禮賓副正。祖曰愉。泰仁縣監。惠順克媲。妯娌歸稱。守義未亡。沈疾長年。逮亞兄揚立。供奉藥膳之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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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이씨는 한 집안이 아니다. 우리 전의(全義) 이씨로 말하면, 삼한을 도와서 오래도록 명성을 쌓아 굴곡이 없었고, 대대로 관직이 높았으며, 전후의 족보가 갖추어져 있어 사람들의 눈과 귀에 익숙하다. 우선 농산(隴山)에 있는 묘소에서 살았던 승국(勝國) 이씨의 자손들을 서술한다. 오직 비조(鼻祖)인 대사(大師) 휘는 조(棹)이고, 묘소는 관현(貫縣) 남쪽 5리에 있는데 멀다. □ 국가에 들어간 호조 전서휘 구직(丘直)은 낙하 서풍덕군(洛河西豐德郡)의 흥천리(興天里)에 있고, 중추원사 효정공 휘 정간(貞幹)은 장단부(長湍府) 임강현(臨江縣) 우근리(于勤里)에 있다. 《승지이람》을 보면 한성부윤 □ 증 영의정 휘 사관(士寬)은 파주 마장원(坡州馬場原)에 있고, 전성군 평간공 휘 예장(禮長)은 광주 낙생리(廣州樂生里) 태장원(胎藏原)에 있는데, 일찍이 안□국(安□國)의 태(胎)를 모셨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판결사 □ 증 병조 참판 휘 시보(時寶)는 재평(在平) 간공(簡公)의 우동록(右同麓)이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 증 호조 참판(贈戶曹參判) 휘는 공달(公達)이다. 판결부군(判決府君)의 동쪽에 있으니, 동록은 아니다. 목사의 부군이 우측에 있는 홰원(攴原)에는 외구 광원군(外舅光原君) □ 증 사부군(贈使府君)과 외구 광원군 □ 증 알대사(贈謁大師)의 묘가 있으니, 제도가 매우 크다. 그러나 부인과 합장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일찍이 부윤 이하에게 절을 하였는데 모두 같은 무덤에 모시지 못하였다. 오직 왕부 목사의 부군만이 정부인(貞夫人) 김씨와 한 무덤에 모셔져 있는데, 그 아래 구역은 바로 백부인 찰방공(察訪公)이다. 백부의 휘는 응성(應誠)이고 자는 약천(若天)이며 유업(儒業)에 종사하였다. 여러 번 선발되어 발탁되었고 □ 정릉(靖陵) 용잠(龍潛)으로, 왕부를 정현(貞顯)의 표친(表親)으로 삼아 매우 예우를 베풀었다. 구오(九五)에 오르자 곧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았는데, □ 위에서 오래도록 오히려 후의를 베풀었다. 관아의 관원으로 삼게 하니, 백부(伯父)가 이로 말미암아 으레 응사(鷹師)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직책이 비록 낮았으나 힘써 임명되어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명년 계사년에 동전(東銓)을 조절하여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으로 오다가 영태부인 자(子)의 한성(漢城)에 머물렀는데 창녕(昌寧)에 이르러 갑자기 산이 갈라지는 괴이한 꿈을 꾸고 마침내 객사에서 크게 돌아가니, 을미년 8월 15일이었다. 그 태어난 홍치년 8월 25일에 비하면 나이가 겨우 서른아홉이었는데, 세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상을 지키게 하였다. 이날에야 능침에 안치되었으니, 지금 만력 정축년 43년이다. 순창 조씨(淳昌趙氏)와 배필이 되었는데, 이 해 10월 보름에 부모를 여의고 외로운 배가 갈라지듯 형제들이 죽으니, 당제 모에게 이르기를 “선인(先人)의 화는 장자는 14년이고 소자는 12년이니, 어리석은 죄가 많아 매우 슬프다. 선인의 능침을 봉양하는 예물이 부족하다.” 하였다. 이제는 지각이 있어 가시를 머금고서 하늘까지 죽을 터인데, 지금 죄역에 걸려 하늘이 또 무너졌으니, 만약 선친의 곁으로 가서 부묘(祔廟)하는 것이 왕고비(王考妣)와 같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모(某)가 또한 곡하면서 말하기를, “천장(遷葬)은 진실로 절실한 일이고 효도 또한 형세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로(雨露)의 은택을 받은 지 오래되었으니 움직여서 고하는 것이 더욱 중합니다. 동한(東漢)의 번굉(樊宏)이 ‘이미 장사 지냈으면 다시 볼 수 없어서 효자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라고 하였고, 유명(遺命)은 부인과 달리 묻는 것이니, 그렇다면 산 사람만 차마 못할 뿐 아니라 영령도 편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삼정(三鼎)과 오정(五鼎)이 모두 ‘칭유(稱有)’로써 예가 되었으니, 두 집을 나누어 봉분하는 것은 위로는 판결을 따르는 것이 이치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목(木)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추후에 비문이나 지을 수 있을 뿐이니, 자식은 반드시 힘써 두 무덤의 언덕을 덮어 주어 슬픔이 조금이나마 풀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곧이어 쌍유(雙幼)가 행렬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원통한데, 모거창(某鉅創)이 아직도 낫지 않았습니다. 어찌 감히 문중의 존장과 의리가 독실한 분을 받들지 않겠으며, 또한 어찌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집안은 충효를 전해 온 지 700년이 되었습니다. 가문의 법도와 세대의 복록은 영조(英祖)의 서신에서 증명할 수 있고, 경사로운 시집을 노래할 만합니다. 모두 몸을 수고롭게 하여 후손들을 보호하고 복과 경사를 열어 주셨습니다. 백부께서는 훌륭한 행실로 문중에서 포상받은 지 오래되었으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있어 조문하러 가는 길이 반드시 깊었습니다. 모생(某生)도 공이 돌아가신 다음 해에 태어났으니, 정숙하고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기에도 또 짐작할 수 없으니 참으로 슬픕니다. 일찍이 듣건대 백부께서는 자태가 단정하고 강직하며 간결하고 침묵하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남쪽 지방의 관리가 되어서는 규율과 다스림에 힘을 다하였고, 재해가 든 해에는 진휼(賑恤)을 혼자서 주관하여 우졸(郵卒)에게 은혜를 베풀어 많은 사람들이 곡식을 실어 왔습니다. 멀리서 제물을 갖추어 놓고 곡한 뒤 떠나니, 한 명의 목숨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남은 은혜에 비할 만합니다. 그릇을 가지고 가서 먹지 못하였으니, 거두어 가실 곳이 있습니다. 본래 자성(子姓)을 취하여 후손의 복을 점칠 수 있겠는가. 조 부인은 또한 화벌(華閥)이다. 6대조 염사충숙왕(廉事忠肅王)은 원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고 요양 등지(遼陽等地)를 총관(摠管)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종밀 직부사(終密直副使)가 되었는데 고(考)는 연(演)이고 문과로 예빈부정(禮賓副正)이 되었고, 조부(祖父)는 유(愉)인데 태인 현감(泰仁縣監)이었다. 혜순(惠順)의 짝이 되어 시집와서 형제간으로 일컬어졌는데, 의를 지키며 죽지 않고 오랜 세월 병을 앓다가 아형(亞兄) 양립(揚立)에 이르러 약선(藥膳)을 공봉(供奉)하였다.

원문

以訖康寧。歷養專城。榮樂孔湛。享年七十加九。越三月某甲。乃離厝于左。凶儀不期。祖事無欠。可謂能子。然据今愍昔。其如何何。凡生十男。頻死不育。長立者三。艎。副司果。艤。登壬子武科。曾用靖敵。賞衣緋。定省一十九年。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持服二子也。一女適縣監吳景顔。司果子忠男,孝男。皆副司猛。僉樞子弘俊,挺俊。俱有文。女一人。忠男一子。弘俊子女。幼。所丨者後。殆其在此。物理消盈。壅必快決。襲聞繩宗。詎可一子而艾耶。嗚呼。某仍釁草土。四朞不死。何依嬛嬛。秪戴猶子之視。西暉未遮。有木皆風。衰麻色混。同從一慘。怨哉云憎。獨於我家憮矣。瀝血爲辭。至哀無文。〔原注:挺俊。後改尙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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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편안하게 지내시며 고을살이로 온전히 봉양하시니 영광과 즐거움이 매우 넉넉하였습니다 향년이 일흔아홉에 이르러 지난 3월 모일에 비로소 좌천(左遷)으로 이장하셨습니다 흉의는 기약할 수 없으나 조사를 빠뜨림이 없었으니 능한 자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지금을 기준으로 옛날을 생각하면 어떠합니까 열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자주 죽어 자식 못 키웠고 장립(長立)한 자는 세 분이니 -부사과(副司果)인 이복(李艤)은 임자년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적을 평정하고 비의(緋衣)를 하사받았으며, 정성(定省)한 지 19년 만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지복(持服)한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한 딸은 현감 오경안(吳景顔)에게 시집갔고, 사과(司果)인 충남(忠男)과 효남(孝男)은 모두 부사맹(副司猛)이며, 첨지중추부사인 홍준(弘俊)과 정준(挺俊)은 모두 문장(文章)이 있습니다. 딸 하나와 아들 하나는 아직 어립니다.- -죽은 자가 뒤에 있으니 거의 이 집에 있을 것입니다.-물리는 차고 차서 가득하면 반드시 시원하게 터지기 마련입니다 종족을 잇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날 수 있겠습니까 아, 모(某)는 땅속에 묻혀 사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무엇을 의지하여 슬퍼하겠습니까 다만 자식처럼 여겨 주시니 서쪽 해가 가려지지 않아 나무마다 바람이 부는 듯합니다 최마(衰麻)의 색깔이 뒤섞여 함께 한 가지 슬픔을 겪으니 원망스럽고 미워하는 마음이 유독 우리 집안에 깊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글을 지으니 지극히 슬퍼서 문장이 없습니다 -원주(原注)에 정준(挺俊)은 나중에 상준(尙俊)으로 고쳤다.-

91. 先妣墓誌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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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我先妣姓禹氏。籍出丹陽。先世顯於麗季。爲望閥。高祖曰戶曹典書希烈。其下縣監諱敬之。察訪□贈兵曹參議諱孝從。富寧都護府使諱禮孫。寔三代。外王父由武擧以進。淸白賢能。最出儕流。而不射勢利。久滯下位。始爲己卯諸賢所推重。奬擢未竟。不幸早世。配永嘉權氏。副護軍諱腰之女。陽村先生文忠公近之後也。先妣以正德戊辰五月初七日生。棄代於萬曆甲戌九月十六日。壽止六十七歲。天姿仁慈和厚。粹然有德容。二十三。歸于我。承事嚴君。婉而有度。孝奉姑氏。敬順無違。嚴君出繼別宗。則又移其孝於養父母。終始極其誠愛。嘉靖壬辰。嚴君捷□中廟朝武科。庚戌。□明宗擢授折衝將軍。先妣以□命婦。封淑夫人。癸亥。加□賜貞夫人號。亦以嚴君分閫嶺南。職視二品故也。同食官祿四十五年。嚴君歷典鎭邑一十有二。帶家者。二府三州。而不屑産業。賓戚恒滿堂。家居實患不裕。爲之勤勞經紀。酒肉必豐。少在介婦。和易以處。妯娌無違言。旣老而尊。睦恤門族。罔有內外。故疾病。問謁交道。訃出而莫不號哭。至於衆妾。率以恩待。撫視孼庶。無異己出。使之莫不服順。終以慕戴厚德。難能有如此者。用是年十一月壬辰。安厝于楊根治西梨浦倻美谷之原。新兆也。凡生三男二女。成長者二。姊適生員金琮。生一男三女。男光潤。女長爲宋惟敬妻。生一女。餘幼。某娶宣務郞尙鵬南女。生四男二女。男耆俊,壽俊,耈俊,命俊。妾産又有三子。耆俊娶監役金益輝女。生二男。重基,厚基。壽俊娶權恂女。餘皆幼。某僥倖佔畢。竊名科第。前年冬。受□恩于□朝。出牧淸州。先妣自春初感疾。某遂棄官來侍。沈綿九朔。竟至於此。嗚呼。先妣旣有厚德。宜享高年。卒以不孝子無誠心。醫療乖方。卜筮無靈。攀號擗踊。奄忽莫追。罪逆之積。於玆發矣。上天有鑑。明神已知。重列不孝之狀。措之幽陰。幷告地中之祗。以澈上下。昊天罔極。嗚呼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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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의 선비(先妣) 우씨는 단양(丹陽) 출신이다. 선대의 현달은 고려 말에 문벌을 이루었다. 고조부 호조전서사(戶曹典書事) 희열(希烈), 그 아래 현감(縣監) 휘 경지(敬之), 찰방(察訪)□ 증 병조 참의(贈兵曹參議) 휘 효종(孝從), 부령도호부사(富寧都護府使) 휘 예손(禮孫)이 바로 삼대이다. 외가 쪽은 왕부(王父)가 무과로 진출하였는데 청백하고 어질며 능력이 뛰어나서 가장 동류에서 출중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꾀하지 않아 오랫동안 낮은 지위에 머물다가 비로소 기묘년에 여러 현인들에게 추중을 받았으나 장려되어 발탁되지 못하고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 영가(永嘉) 권씨 부호군 휘 요지(腰之)의 딸인데 양촌 선생 문충공(文忠公) 김근(金近)의 후손이다. 선비는 정덕(正德) 무진년 5월 7일에 태어나 만력 갑술년 9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67세였다. 타고난 자질이 인자하고 온화하였다. 순수하고 덕스러운 용모를 지녔으며, 23세에 우리 집으로 시집왔다. 엄군을 섬기기를 엄숙하게 하였고, 온화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고씨(姑氏)를 효성으로 받들며 공경하고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다. 엄군이 별종에게 출계되자 또 그 효성을 양부모에게 옮겨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정성스럽고 사랑하였다. 가정 임진년에 엄군이 중묘조(中廟朝) 무과에 급제하였고, 경술년에 명종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발탁하였다. 선비는 명부(命婦)로 봉해져 숙부인(淑夫人)이 되었고, 계해년에 정부인(貞夫人)의 호를 더 받았는데, 또한 엄군이 영남을 분관(分閫)하여 직위가 2품이었기 때문이다. 관록을 함께한 지 45년 동안 엄군은 12고을의 전진(典鎭)과 고을을 두루 거쳤으며, 가산을 맡은 자는 2부(府)와 3주(州)였으나 재산 모으기를 꺼렸다. 빈객이 항상 집안에 가득하여 살림살이가 실로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를 위하여 부지런히 경영하였는데, 술과 고기가 반드시 풍족하였다. 젊어서는 계부와 화목하게 지냈다. 며느리로서 남편의 말을 어기지 않았고, 이미 늙어서는 존경을 받았으며, 친척들을 화목하게 보살펴서 내외가 없었으며, 질병이 있으면 문안하고 왕래하였으며, 부고가 나면 모두 곡하였다. 여러 첩에게도 은혜로 대우하여 자식처럼 어루만져 주어 모두 복종하게 하였으니, 끝내 두터운 덕을 사모한 것이 이와 같았다. 이러한 분이 드물다. 이해 11월 임진일에 양근(楊根) 치서리포(治西梨浦)의 아름다운 골짜기 언덕에 새로 무덤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삼남(三男)과 이녀(二女)를 낳았는데, 성장한 자는 둘이다. 첫째 딸은 생원 김종(金琮)에게 시집갔고, 둘째 아들 광윤(光潤)이 있다. 셋째 딸은 송유경(宋惟敬)의 아내가 되었고, 넷째 딸은 나이가 어려서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다섯째 아들은 선무랑 상숭(尙崇)에게 시집갔는데 남녀가 있어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아들은 기준(耆俊), 수준(壽俊), 순준(倈俊), 명준(命俊)이고, 첩이 낳은 세 아들 중 기준은 감역 김익휘(金益輝)의 딸에게 시집갔다. 두 아들 중기(重基)와 후기(厚基)를 낳았다. 수준은 권순(權恂)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내가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전년 겨울에 □조에서 은혜를 입어 청주 목사로 나갔다. 선비께서 초봄부터 병을 앓으시기에 나는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와서 모셨는데, 구월 동안 병이 깊어져 결국 이렇게 되셨다. 아, 선비께서는 이미 두터운 덕이 있으니 장수를 누리셔야 하는데, 끝내 불효한 자식이 성심으로 간병하지 못하여 의술이 잘못되고 점괘도 영험하지 않았다. 부르짖고 발버둥을 쳐도 갑자기 돌아가시어 미칠 것만 같으니 죄악이 쌓인 것이 이로 인해 드러났다. 하늘에 감응하는 신명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불효한 자의 모습을 거듭 나열하여 저승으로 보내니, 지중(地中)의 제사를 아울러 고하여 상하가 통하게 하라. 하늘이 망극하니 슬프다.

92. 宗室鳳林守墓碣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34C, ITKC_MO_0200A_A043_534D

원문

公諱守仁。字德源。考諱沃。玉泉副正。□贈玉泉君。祖諱璆。臨瀛大君。卽我□世宗大王第四子。妣洪氏。永同縣監剛女。公生於弘治己酉。歿于嘉靖癸未。春秋三十有五。以宗人授鳳林守。祿視四品之正資。陞彰善大夫。宗班三品階也。性醇厚。姿儀甚美。識文字。解音律。配愼人丹陽禹氏。訓鍊院副正□贈兵曹參判仁孫女。祖□贈兵曹參議孝從。曾祖義興縣監敬■。外祖。進士宋讚。皆望閥也。生四男。達。明海副守。■。明川副守。巡。明溪副守。建。缶林副守。公卒■■■■。■長始十歲。愼人賢明過人。內治極修。敎■■■■。義方守寡四十七年。壽七十五。終在隆慶己巳。葬于■陽郡東上道里。爲上下室。先兆也。明海娶虞候柳克儉女。生男希英。明川娶察訪柳克恭女。■■■說。明溪娶參奉洪世雄女。生二男一女。男■■■■。女適禹應龍。缶林先娶僉知閔崇英女。生三女。女適吳應麒。次適金沔。季未歸。後娶幼學金夢錫之女。孫男女幷七人。俱幼。明溪以上。皆先愼人繼殞。唯缶林終養焉。公有側室子。明州令通。亦早歿無後。其於■人。爲堂妹。出視猶子。缶林兄來囑碣文。義難辭。謹次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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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수인(守仁)이고 자는 덕원(德源)이다. 고(考)의 휘는 옥천(玉泉) 부정(副正)을 지내고 옥천군에 추증된 옥(沃)이고, 조부의 휘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인 우(璆)인데 바로 우리 세종대왕의 네 번째 아들이다. 비는 홍씨(洪氏)로 영동 현감 강(剛)의 딸이다. 공은 홍치(弘治) 기유년에 태어나 가정(嘉靖) 계미년에 죽었으니, 향년이 35세였다. 종인(宗人)으로 봉림수(鳳林守)에 제수되어 녹봉은 4품 정자급을 보았고, 장선대부(章善大夫)로 승진되었으니 종반(宗班)의 3품 계급이다. 성질이 순후하고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글씨를 잘 알고 음률에 밝았다. 신인 단양 우씨(禹氏)와 혼인하였는데, 훈련원 부정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된 인손(仁孫)의 딸이다. 조부는 증 병조 참의 효종(孝從)이고, 증조는 의흥 현감 경(敬)이며, 외조부인 진사 송찬(宋讚)은 모두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달(達)은 명해 부수(明海副守), 맹(孟)은 명천 부수(明川副守), 순(巡)은 명계 부수(明溪副守), 건(建)은 간림 부수(缶林副守)이다. 공이 죽은 뒤에 신인은 장시(長始)에서 10세로 살았고, 신인은 현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가르침이 지극하였다. 의방(義方)은 과부로 47년 동안 지내다가 75세에 죽었는데, 끝내는 융경 기사년에 장사 지냈다. 장사는 명양군(明陽郡) 동상도리(東上道里)에 하실과 상실을 만들어 선조를 모셨다. 명해는 우후(虞候) 유극검(柳克儉)의 딸을 맞아 아들 희영(希英)을 낳았고, 명천은 찰방 유극공(柳克恭)의 딸을 맞아 아들을 두었고, 명계는 참봉 홍세웅(洪世雄)의 딸을 맞아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모두 죽고 딸은 우응룡(禹應龍)에게 시집갔다. 간림은 먼저 첨지 민숭영(閔崇英)의 딸을 맞아 세 딸을 낳았는데, 첫째는 오응기(吳應麒)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김면(金沔)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는 시집가지 않았다. 뒤에 유학 김몽석(金夢錫)의 딸을 맞아 아들과 딸이 모두 일곱 명인데 모두 어리다. 명해 이상은 모두 신인이 먼저 죽어 계승하지 못하였고, 오직 간림만이 끝까지 봉양하였다. 공에게는 측실의 아들로 명주 영통(明州令通)이 있었는데 역시 일찍 죽어 후사가 없었다. 신인과는 당매(堂妹) 사이인데도 자식처럼 대우하였다. 간림의 형이 와서 묘갈문을 부탁하였으나 의리상 사양하기 어려워 삼가 위와 같이 차운한다.

93. 宗室玉堂副守碣銘〔原注:代作〕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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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公諱壽長。字耼叟。以我□恭靖大王玄孫。授玉堂副守。階至彰善大夫。義平君某。梓田正孝溫。連江守義孫。卽公上世。妣愼人順興安氏。司直貴孫之女。公天性溫雅。喜書畫。聘愼人安東權姓。考曰經歷寬。克辦內治。夫婦共享稀壽。嘉靖癸巳。隔月俱逝。祔葬果川治東亏音安里家塋。男司勇鵬。女二。長適弘文博士安漢彦。次歸我先君學諭諱某。司勇一女。訓鍊奉事具眉壽。博士三女。奉常副正鄭世紹。秉節校尉趙抃。掌令李彦忱之室也。璐二弟瑮,。一妹適儒士許悌。自曾孫以下。又五十餘人。司勇先公夭。命瑮食我。後瑮死。其子應吉猶奉祭不墮。銘曰。

번역

공의 휘는 수장(壽長)이고 자는 복수(耼叟)이다. 우리 공정대왕(恭靖大王)의 현손으로서 옥당 부수(玉堂副守)에 제수되었고, 계급은 창선대부 의평군(彰善大夫義平君) 모(某)와 같았다. 자전 정효온(梓田正孝溫) 연강 수의손(連江守義孫)은 바로 공의 선조이다. 비는 신인 순흥 안씨(愼人順興安氏)로 사직 귀손(司直貴孫)의 딸이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고상하여 서화를 좋아하였다. 신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시집갔다. 고(考)는 경력이 넓어 내치를 잘 다스렸고, 부부가 함께 장수를 누리기를 기약하였는데 가정(嘉靖) 계사년에 한 달 간격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다. 과천 치동(治東)의 궤음 안리(安里) 집터에 부장하였다. 아들 사용 붕(鵬)과 딸 둘이 있는데, 첫째는 홍문박사 안한언(安漢彦)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우리 선군 학유(學諭) 휘 모(某)에게 시집갔다. 사용의 한 딸은 훈련봉사 구미수(具眉壽)와 혼인하였고, 박사의 세 딸은 봉상부 정(奉常府正) 정세소(鄭世紹), 병절교위(秉節校尉) 조우(趙抃), 장령 이언침(李彦忱)의 처가 되었다. 여덟째 아들 노(璐)의 둘째 아우 율(瑮)과 한 여동생은 유사 허제(許悌)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로 또 50여 인이다. 사용 선공이 요절하자 명하여 율에게 봉양하게 하였는데, 뒤에 율이 죽고 나서 그 아들 응길(應吉)이 오히려 제사를 받들어 버리지 않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於乎。天椓敝族幾乎赤。以紹罔滅維祖德。噬指瀝血鐫玆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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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늘의 재앙으로 쇠잔한 우리 종족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망할 지경에서 조상의 덕을 이어 가기 위해 손가락 깨물고 피를 짜서 이 비석에 새긴다.

94. 某官某墓碣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維行行以激。維罔罔以轢。命耶時乎。不可訟者理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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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고 행하여 격동시키고 망하고 망하여 짓밟으니 운명인가, 때인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어찌 따지리오

95. 某官某墓碣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午曜麗空。釜覆疊之。琢珪解璞。推掣亟之。若曰天也。機也穽也。若曰人也。時也命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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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해가 하늘에 빛나고 솥이 엎어지듯 겹치네 옥을 갈아 패옥을 만들 듯 밀고 당기기를 재촉하네 하늘이라고 하든 기심(機心)과 함정이라 하든 사람이라고 하든 시운과 운명이라 하든

96. 外祖通訓大夫。行富寧都護府使,丹陽禹府君墓碣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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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嘗聞。我外王父有忠信正直之德。有孝友粹潔之行。卓絶一世。追邁古風。旣無嗣胤。某又弱植。恐終泯泯無聞。一日侍妻祖父尙領相成安公震。語及墓樹事。成安詔家人勿豎己石曰。謾鐫虛辭。死未埋恥。余曰。外王父有篤美。迄玆無表。若此者當得已乎。成安方憊且臥。蹶然推枕曰。如汝富寧公。安沒顯刻。汝必勖之。某拜而請其實。成安曰。汝祖德烈靡不聞。余亦晩交。其詳則未。委富寧日。余在北幕。當時亦近古。□朝廷無使問民疾苦等事。汝祖則居官氷白。不犯毫毛。常衣敝陋。御款段而已。以此只從一僮。出入村曲。歷諮軍民宿瘼。官政秕纇。田翁里嫗。咸不意其官人。相談爾汝甚悉。明日卽取以盡更之。唯民願欲。萎暍膏醒。列邑尊服。某又聞之門長。公少善張公屹。就與訪友。張薦金公舜皐。公一見定契曰。氣宇非凡。又薦一人。公亦一見掉頭。張請其故。曰。大丈夫只尙內守。遺落外具。此子不然。卑瑣人也。後張官至吉州牧使。金封平陽君。皆魁越於武班中有名。見絶者。雖致位祿。果劣下。其藻識。又如此者。某後質於平陽。如門長之謂。又與同郡李校理延慶友。嘗稱曰。子讓天資。雖在孔門。無多讓。公諱禮孫。子讓。字也。丹陽之禹。盛於麗季。公卽仲大之裔。四世祖。侍中福生。曾祖曰典書諱希烈。祖曰縣監諱敬之。考曰副司直諱孝從。□贈兵曹參議。聘萬戶楊春伯之女。以成化己亥。生公。業武藝。早屬內禁衛。丙寅。翊扈中廟晉邸。號原從功臣。正德庚午。上第。久落拓不偶。甲戌。乃調永登萬戶。得軍情。聲生藹鬱。及瓜。歸臥忠州村舍。猶不求知。始被己卯名人交口薦。不次擢掌苑。亟置將選中。由魚川察訪。昇渭源郡守。召拜司贍僉正。嘉靖癸未。□朝廷命同元帥。由咸鏡南道征逐閭延等四郡胡落。明年。出富寧。爲都護府使。乙酉。以秋稅失應罷。丙戌夏。授海州牧使。公在忠州。已於四月二十五日卒矣。春秋四十八。平陽。代赴富寧。見公妾抱孩兒。共載一馱。在路冒塞寒。無重襖。愍之。徹一毛席以追。公大怒曰。不圖虞卿遇我卑薄。敢以官物相累耶。遂却之。留家無一長物。其窮屢空。在官。唯單盡奉公。臨下。威撫幷濟。痛禁淫祀。所莅。不敢爲巫者。公事親克孝。倫愛又篤。至於宗族。生者交穿衣服。死者歸殯於家。與朋友信。有過必擧正。故久而滋慕。夫人安東權氏。陽村先生近之後。縣令諱博孫。副護軍諱腰女。後公三十五年卒。祔葬忠州治北犬峴。爲上下宅。在參議公兆右麓。公卒也。一男二女皆幼。男鎔。良善人。無後。先夫人亡。女長卽先妣貞夫人。歸我先君節度使諱某。柔日。張公在賓位嘆曰。子讓姱節。固有此嬌客。生男某。女生員金琮妻。琮乃平陽子。某生男耆俊,壽俊,耈俊,命俊洎二女。琮生男光潤。女幷宋惟敬妻三人。公女季適司直尹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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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듣건대, 우리 외조부께서 충신(忠信)하고 정직한 덕과 효우(孝友)하고 순결한 행실을 지니셨는데 탁월하여 한 세대를 압도하고 옛날의 풍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후사가 없고 나 또한 미약하니, 끝내 묻혀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어느 날 처조부 상령상(尙領相) 성안공 진(成安公震)을 모시고 있다가 묘수(墓樹)에 관한 일을 말하자, 성안공이 집사람에게 명하여 자기의 비석을 세우지 말게 하면서 “헛된 말을 새기면 죽어서도 부끄러움을 묻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외조부께서 독실하고 아름다우신 덕이 있으시는데 지금까지 표문(表文)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경우에 어찌 그냥 두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성안공이 피곤하여 누워 있다가 갑자기 베개를 밀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너의 부녕공(富寧公)처럼 어찌 드러나지 않게 묻힐 수 있겠느냐. 너는 반드시 힘쓰도록 해라.” 하였다. 내가 절하고 사실을 청하자 성안공이 말하기를, “너의 조부의 덕과 공렬은 듣지 못한 이가 없는데 나도 만년에 교분을 맺었다. 그 자세한 것은 부녕공이 죽던 날에 내게 맡겼다.” 하였다. 내가 북막(北幕)에 있을 때였는데, 당시에도 조정에서 백성들의 질고를 물어보는 등의 일이 없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털끝만큼도 죄를 범하지 않았고 항상 입는 옷은 해지고 누추한 단(段) 차림뿐이었다. 이 때문에 종 한 명을 시켜 마을 구석구석을 출입하며 군민의 고충과 관정(官政)의 폐단을 두루 물어보았는데, 늙은 농부와 아낙네들이 모두 그 관리가 그런 사람일 줄 생각지도 못하였다. 너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내일 즉시 가서 다 바꾸도록 하라. 오직 백성들의 소원대로 더위 먹은 정신이 깨어나고 열읍(列邑)의 존경이 쏟아질 것이다. 모(某)가 또 문장(門長)에게 들으니, 공이 젊었을 때 장공 억(張公屹)과 친하게 지내면서 친구를 찾아가자고 권하였는데, 장공이 김공 순고(金公舜皐)를 추천하자 공이 한번 보고는 마음을 정하고 또 한 사람을 추천하였다. 공이 역시 한번 보고는 고개를 돌려 버리니, 장공이 그 까닭을 묻자 “대장부란 단지 내면의 수양만을 중시하고 외적인 꾸밈은 버리는 법인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뒤에 장공은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고 김공은 봉평 군수(封平郡守)가 되었는데, 모두 무반(武班) 중에서 으뜸으로 이름이 있었다. 세상과 인연이 끊어진 자는 비록 높은 지위에 오르더라도 과연 하찮은 것이고, 그 문장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모후(某後)가 평양(平陽)에서 질박하게 살았는데, 문장(門長)이 말하기를, “그의 천품은 비록 공자(孔子)의 문하에 있었더라도 많이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휘는 예손(禮孫)이고 자양(子讓)은 자(字)이다. 단양(丹陽)의 우씨(禹氏)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성대하였는데, 공은 바로 중대(仲大)의 후예이다. 4대조 시중 복생(福生), 증조 전서(典書) 휘 희열(希烈), 조부 현감 휘 경지(敬之), 고부 부사직 휘 효종(孝從)이 있었고, □는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만호 양춘백(楊春伯)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성화(成化) 기해년에 공을 낳았다. 무예를 익혀 일찍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고, 병인년에는 중묘(中廟)를 호종하여 진저(晉邸)로 모시니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불렸다. 정덕(正德) 경오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오랫동안 낙척(落拓)하여 벼슬에 오르지 못하다가, 갑술년에 비로소 영등만호(永登萬戶)에 조용되었다. 군정(軍情)을 얻어 소문이 자자하였다. 과일이 충주(忠州)의 시골집에 돌아와서도 오히려 벼슬을 구하지 않다가 비로소 기묘년에 명인(名人)들이 입을 모아 천거하여 차례를 어기고 장원(掌苑)에 발탁되었다. 곧장 장선(將選) 가운데 두어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승진시켜 위원 군수(渭源郡守)로 삼고, 사섬 첨정(司贍僉正)으로 소명하여 전배하였다. 가정(嘉靖) 계미년에 조정에서 명하여 동 원수(同元帥)로 삼았다. 함경남도(咸鏡南道)를 거쳐 여연(閭延) 등 4개 고을의 오랑캐들을 정벌하고 이듬해 부령(富寧)으로 나가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었다. 을유년에 추세(秋稅)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병술년 여름에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충주에 있을 때 이미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이다. 평양(平陽)이 부령에 대신 갔다가 공의 첩이 아이를 안고 함께 한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길에서 변방의 추위를 무릅쓰면서도 두꺼운 갖옷을 입지 않은 것이 가엾어 모시(毛席) 하나를 보내 주었다. 공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우경(虞卿)이 나의 비박함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였다. 감히 관물(官物)을 서로 누를 수 있겠는가 하여 마침내 물리쳤다. 집에 남은 것은 좋은 물건이 하나도 없어서 그 궁핍함이 자주 비었으나, 관에 있을 때에는 오직 단지 공무만을 받들었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위엄과 어루만짐을 겸하여 다스렸으며, 음사(淫祀)를 통렬히 금하였고, 부임한 곳에서는 감히 무당이 되지 않았다. 공사(公事)에 친애(親愛)하고 효성스러웠으며, 윤리적으로 사랑하는 마음 또한 독실하였다. 종족에 이르러서는 산 사람은 옷을 서로 꿰매어 주고 죽은 사람은 집에 돌아와 빈소에 안치하였으며, 벗들과는 신의가 있어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았다. 그러므로 오래될수록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양촌 선생(陽村先生) 근후(近後)이다. 현령 휘 박손(博孫), 부호군 휘 요녀(腰女)가 뒤에 공의 35년 만에 졸하였다. 충주 치북(治北) 견현(犬峴)에 부장하였는데, 상하택이 참의공 조우(兆右)의 산기슭에 있다. 공이 졸할 때 아들 하나와 딸 둘이 모두 어렸는데, 아들 용(鎔)은 선량한 사람으로 후사가 없었다. 선부인이 죽고 나서 큰딸이 곧 선비 정부인이다. 나의 선군(先君)인 절도사(節度使) 휘 모유일(某柔日)과 장공(張公)이 빈객으로 있을 때 탄식하기를, “자양(子讓)의 아름다운 절개는 본래 이처럼 고운 객을 두었구나.” 하였다. 아들 모(某)를 낳았는데, 딸은 원김종(元金琮)의 아내이다. 김종은 바로 평양(平陽) 사람이다. 모가 아들 기준(耆俊), 수준(壽俊), 호준(耈俊), 명준(命俊)과 두 딸을 낳았고, 김종이 아들 광윤(光潤)과 딸 세 사람을 낳았는데 모두 송유경(宋惟敬)의 아내이다. 공의 딸 계적(季適)은 사직 윤당(尹鐺)이다.

원문

生男希愿。忠義衛。女安師道妻。希愿生男瑄。師道生男愼言,愼行,愼德。女幼。高孫男女若干人。側室女。虞候宋璟妾。有子女。公天分甚高。其所謂卓絶追邁者。後生之聞知不及。然徵諸數三公。餘可類見。不幸早世。壽位俱未享。姓祀又絶。彌甥如某。旣非敷揚先懿者。凱風,寒泉。雖切于思。其能得陶蘇之信而冀其久遠傳耶。是可冤哉。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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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남희원(生男希願)은 충의위(忠義衛)의 여식이다. 안사도(安師道)의 처로서 생남희원을 두었다. 사도가 낳은 아들은 신언(愼言), 신행(愼行), 신덕(愼德)이며, 딸은 유(幼)이고, 손자ㆍ손녀는 몇 사람이다. 측실인 여우후 송경(宋璟)의 첩으로서 자식을 두었다. 공은 천품이 매우 높아 탁월하고 뛰어난 점을 후생들이 미치지 못하였으나, 수삼공(數三公)에게서 증거를 찾아보면 나머지도 비슷하다.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 장수와 지위를 모두 누리지 못했고 성씨의 제사도 끊어졌다. 미숙한 생질 모(某)는 이미 선대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자가 아니니, 쾌풍(凱風)과 한천(寒泉)이 비록 생각에 간절하나 도소(陶蘇)의 신념을 얻어 길이 전해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원통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粹乎其有之。天必錫。昧乎其止此理實。或狀高明。安敢曰。祇留來者知此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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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그 존재가 있으니 하늘이 반드시 내리었네 어둡게 이치에 그침을 알지 못하고 혹 고명함을 형상하였으니 어찌 감히 말하랴 오직 오는 자만이 이 돌을 안다네

97. 綾城縣令李公墓碣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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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公諱績。字子成。□國初。有義安大君和。□太祖弟也。以功進封爲伯。公其五世孫。卽□國姓李氏。高祖湛。知敦寧府事。曾祖孝孫。司贍主簿□贈戶曹參議。祖從胤。金城縣令□贈刑曹參判。考諱亨順。事□靖陵爲將臣。卒官同知樞府事。聘慶源府使全義李永禧之門。弘治八年正月日。公生。爲人溫恭儉約。事親以孝。曁其當室。日省家廟。志尙儒術。餘事弓馬。兩不成。嘉靖乙未。始蔭仕。司畜署別提,東部主簿,奉化縣監,長興庫主簿,司憲府監察,尙瑞院判官。綾城,陽川,金溝三邑縣令。階至通訓大夫。凡十七年矣。間在奉化,綾城。丁考妣憂外。餘無咎眚。潔己奉職。重以勤謹。早有官譽。以故喪闋亟敍。未嘗淹滯。竟以官卒。辛亥十一月二十二日也。壽零耳順三祀。余叔姑久居陽川。每歎近世賢令一人而已。余常識名以慕之。今知爲婦舅。余娶後也。未及拜。後屢負笈於投金一帶江舍。遇父老好訪良吏咸嘖嘖稱公。隣境皆然。然後始信惠澤入人在婦人。良公論也。其政鉅細條理。必損上益下。尤善鉤奸而束吏。若躬禋釋菜。力奬校學。又非時尙所知。陽川時。有親嫌易縣。民借留不果。其在綾城。嘗失左符。綾民群詣京丐貰。□朝廷亦靳其治行。不問。惜不年而久大施也。配咸安李氏。從仕郞麟趾之女。惠順克媲。未亡十四年。甲子十二月初一日逝。加得年七歲。祔墓在廣州朽栗里卯坐之原。先兆也。生玉男。曰高明。別坐。曰文明,欽明,克明,誠明。俱未仕。一女適幼學趙應吉。孫男澍,潤,沃。孫女適注書黃珹,佐郞尹渟,正字崔彦慶。又一女處。皆別坐出也。欽明,克明洎潤,渟。皆生二女。誠明男女。澍二男一女。皆幼。趙氏婦一女。適蘇純福。系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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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혁(績)이고 자는 자성(子成)이다. □국 초에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가 있었는데, □태조의 아우로서 공을 세워 봉해져 백씨(伯氏)가 되었다. 공은 그 5세손으로 바로 □국의 성이 이씨(李氏)이다. 고조 담(湛)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이고, 증조 효손(孝孫)은 사섬주부(司贍主簿)□ 증 호조 참의이며, 조종윤(祖從胤)은 김성 현령(金城縣令)□ 증 형조 참판이며, 고휘 형순(考諱亨順)은 □ 정릉(靖陵)을 섬겨 장신이 되었고 졸관(卒官)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다. 경원 부사(慶源府使) 전의 이영희(全義李永禧)의 문하에 빙문(聘問)하였다. 홍치(弘治) 8년 정월 일에 공이 태어났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검소하였고, 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러웠으며, 집안일을 돌보아 날마다 가묘(家廟)를 살폈다. 뜻은 유학을 지향하였으나 나머지 궁마(弓馬)는 이루지 못하였다. 가정 을미년에 비로소 음관으로 벼슬하여 축서 별제(畜署別提), 동부 주부(東部主簿), 봉화 현감(奉化縣監),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으로 양성(綾城), 양천(陽川), 금구(金溝) 세 고을의 현령을 지냈다. 품계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기까지 무릇 17년이 되었는데, 중간에 봉화(奉化)와 양성에 있었다. 정묘년에 고비(考妣)를 여읜 뒤로 다른 허물은 없었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게다가 근면하고 신중하여 일찍부터 관직의 명예가 있었다. 이 때문에 상이 끝나자마자 속히 서용되어 지체된 적이 없었는데, 마침내 벼슬살이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신해년 11월 22일이다. 나이는 60세였다. 삼사(三祀)를 지낼 때에 나는 숙고(叔姑)로서 양천에 오래 살았는데, 매양 근세에는 어진 수령이 한 명뿐이라고 탄식하였다. 내가 항상 이름을 알고 사모하였는데, 이제 그가 부질(婦姪)이 된 것을 알았다. 내가 장가를 들었을 때 미처 찾아뵙지 못했는데, 뒤에 여러 번 투금(投金)의 강가 집으로 가서 공부를 하였다. 부로들을 만나니 어진 수령을 좋아하여 모두 칭찬하였고 이웃 고을도 모두 그러하였다. 그 후에야 비로소 은택이 부인에게까지 미쳤음을 알았으니,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그 정사는 크고 작은 조리가 반드시 위를 줄이고 아래를 이롭게 하였다. 간사한 자를 잡아내어 아전들을 단속하는 것을 특히 잘하였으며, 직접 제사를 지내고 채소 반찬을 올리며 힘써 교학(校學)을 장려하였으니, 또 시상(時尙)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양천(陽川)에 있을 때 친척이라는 혐의로 현감 자리를 바꾸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빌려 준 것을 돌려주지 않았다. 능성(綾城)에 있을 때 좌부(左符)를 잃어버리자 능성의 백성들이 서울에 가서 구걸하여 사 왔으나 조정에서는 또한 그 치행을 묻지 않았으니, 오래도록 크게 베풀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함안 이씨(咸安李氏)에게 시집갔다. 종사랑(從仕郞) 이인지(李麟趾)의 딸로, 효성스럽고 순종하여 부부 사이가 좋았다. 미망자 14년 만에 갑자년 12월 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7세였다. 부묘(祔墓)는 광주(廣州)의 휴율리(朽栗里) 모좌(卯坐) 언덕에 있는데 선조(先祖)의 무덤이다. 아들로 옥남(玉男) 고명(高明)을 낳았는데 별좌(別坐)가 있고, 문명(文明), 흠명(欽明), 극명(克明), 성명(誠明)이 있었으나 모두 벼슬하지 못하였다. 딸 하나는 유학(幼學) 조응길(趙應吉)에게 시집갔다. 손자로는 주(澍), 윤(潤)이 있다. 옥(沃)은 손녀가 주서(注書) 황성(黃珹), 좌랑 윤정(尹渟), 정자 최언경(崔彦慶)에게 시집갔다. 또 한 명의 딸이 시집갔는데, 모두 별좌(別坐)에서 나왔다. 흠명(欽明)과 극명(克明)과 지윤(洎潤)과 윤정은 모두 두 딸을 낳았다. 성명(誠明)은 아들딸을 낳았고, 주(澍)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렸다. 조씨 부인(趙氏婦人)의 한 명의 딸이 소순복(蘇純福)에게 시집갔다. 계보이다.

원문

焯矣李公。惟行之貞。克施有政。龔杜之聲。四縣遺愛。民以歌碑。一丘坎中。我文銘之。

번역

밝은 이공이여 행실이 곧아서 정사를 잘 펼치니 공두의 명성이었네 사현에 남긴 사랑으로 백성들이 비석을 세웠으니 한 언덕 구덩이 속에 내 글을 새기노라

98.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敦寧府正朴公墓碣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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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東國。固多賢閥。至稱孝友。無出朴氏先者。蓋有自也。萬曆六年夏。松京留守朴公。將以日月。豎文先參判墓道。走价九百里。逐臭於南海之上。某豈敢人而■■■■■。朴姓皆出赫居世。國族於新羅。子孫散居。各貫原鄕。其爲咸陽人者。以追封樞密事信淸爲祖。□國初有諱習。再判兵曹。其後未振者三世。監察義孫。從仕郞□贈司僕正信童。生員□贈左承旨仲儉。寔坐門累。冤也。天行往返。理無恒否。承旨得祚胤三珠。參判。長也。公諱世榮。字景仁。魁顔峻儀。威風有凜。志氣骯髒。不作千人謁私。襟量豁易。亦不以城府遇物。人推長德。公於諸行咸純。在孝友尤篤。年十九而孤。母夫人全義李氏。潭陽府使寬植之女也。亦名家女士。泣謂公曰。余非惜死。望女勅稚昧。復有朴門。唯此而已。時公弟軍資監正世茂。甫十二。吏曹參議世蓊。六歲。公拜敎督勵。或時豫怠。必自撾墓前曰。幽明望切。弟學不勤。乃兄知罪矣。監正室哀女。不能作生。公慮其妨學。悉取妻拏食俸入。旣皆擢顯科。登名仕。終慈命也。事太夫人。奉盈執玉。愉婉備至。家雖貧。滫瀡必供。夜屢候寢。未嘗安眠。前後居廬。喪致哀。祭盡禮。朔望參廟。夙戒乃行。節物非薦不食。泣廢蒿莪。不但王裒爲然。款洽宗姻。周濟困阨。從妹夫妻。有遘癘偕亡者。自以兩柩。卽其鄕殯之。嘗在郡。聞冢男釋褐。終日臨公。了無喜色。仕宦積三紀。不營毫毛業。有時家食稱貸不給。乙巳□康陵當壁。固辭從龍功不錄。其立中有定。委順達天。不撓於死生榮利類此。好古樂善。恒如飢渴。敎子弟。痛戒侈靡。里人猶不敢服美來候。居官奉公。終始勤敬。簡賦平訟之外。唯自娛圖史。筆法道健。一時□國書士家碑障。幾半過墨。公少有嘉問。久與己卯名人友善。其始仕。亦泮中疏薦也。逮神武左入。士習大壞。交游者反擠排求逞。公醜之。絶迹造請。日呼醇醪。以遣磊磈。豈亦憤世而無聊者歟。公初中甲子生員。戊寅。敍四山監役。轉內贍主簿,司憲監察,掌隸司評,刑,工曹佐郞,禮賓判官,掌隸司議,刑曹正郞,豐德郡守,都摠經歷,司饔僉正,敦寧府副正。仍■其正。嘉靖壬子七月乙巳。以官卒。其生成化庚子十一月某甲也。配□贈貞夫人金氏。光州大姓。敵愾功臣光原君諱百謙孫。副司正漢佑女。柔順媲德。克相孝奉。未亡十一年。壬戌十一月丁亥終。壽竝稀有三年。祔葬楊州神穴里家塋辰向之麓。有三男一女。曰大立。卽留守。經學登身。歷踐臺閣。遵成濟美。益以敬睦弘家。□贈公天曹亞卿。推貴先代。咸從秩。次曰思立。宣務郞。有子知天。司贍參奉。知性。進士。知命。兼司僕。曰希立。承用家經。官至吉州牧使。有子知進。武科縣監。知遠,知述,知遇,知遂洎二女。述出繼伯後。曰金鵬。女壻也。生一女。嫁趙璫。俱士子。知天有子由健,由恒,由益,由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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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진실로 현명한 가문이 많지만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은 것으로는 박씨(朴氏)보다 앞서는 이가 없으니, 이는 대대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만력(萬曆) 6년 여름 송경 유수(松京留守) 박공(朴公)이 장차 일월에 문선참판의 묘도를 세우려고 900리를 달려 남해 위에서 죽었다. 내가 어찌 감히 사람을 해치겠는가? 박씨는 모두 혁거세(赫居世)를 시조로 삼고 신라의 국족(國族)으로서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각기 원향(原鄕)을 관할하고 있다. 함양(咸陽)에 사는 자들은 추봉된 추밀사(樞密事) 신청(信淸)을 시조로 삼고 있는데, 고려 초에 휘습(諱習)이 있었다. 재차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그 뒤 3대에 걸쳐 떨치지 못하였다. 감찰 의손(義孫)은 종사랑으로 사복시 정신동(司僕寺正信童)을 추증하고, 생원으로 좌승지 중검(仲儉)을 추증하였는데, 이는 실로 가문의 누를 쓴 것이니 원통하다. 하늘의 운행이 오고 감에 이치상 항상 옳거나 그르지 않은 법이다. 승지는 3대를 얻었으니 참판은 장수(長壽)하였다. 공의 휘는 세영(世榮)이다. 자는 경인(景仁)으로, 준수한 얼굴과 늠름한 의표에 위풍이 엄숙하였고 지기가 강직하여 천 사람에게 사사로이 알현하지 않았으며, 도량이 넓어 또한 성부(城府)가 물건을 만나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의 덕이 크다고 추중하였다. 공은 모든 행실이 다 순수하였는데 효우(孝友)에 더욱 독실하였다. 19세의 나이에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를 여읜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완식(李寬植)의 딸인데, 역시 명문가의 여인이다. 공이 죽을 때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딸을 가르칠 사람으로 다시 박씨 집안 사람이 있기를 바랐는데 오직 이 사람뿐이었다.” 하였다. 이때 공의 아우 군자감 정(軍資監正) 세무(世茂)가 12세이고, 이조 참의 세옹(世蓊)이 6세였는데, 공이 가르치고 독려할 때에 혹시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반드시 스스로 묘 앞에서 매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유명(幽明)에서 간절히 바라노니 아우가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형이 죄를 알 것이다.” 하였다. 감정실(監正室)의 슬픈 딸은 아이를 낳지 못하였는데, 공이 그것이 학업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모두 가져다가 식봉(食俸)을 받아 들였다. 이미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니, 이는 끝내 자애로운 명을 받은 것이다. 태부인을 섬길 때에는 음식을 차리고 옥을 잡는 데 온화한 기색이 지극하였고, 집이 비록 가난해도 반드시 풍성하게 마련하였다. 밤이면 자주 침소를 살피느라 잠을 편히 잔 적이 없었다. 전후로 거처할 때 상중을 당하면 슬픔에 젖어 제사를 지낼 때도 예법을 다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길을 떠났다. 절기 음식은 올리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호아(蒿莪)를 눈물로 버렸으니, 왕포(王裒)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었다. 종인(宗姻)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곤궁한 자들을 도와주었으며, 종매부부가 역병에 걸려 함께 죽은 일이 있었는데, 스스로 두 구의 관을 가지고 그 고향으로 가서 빈소에 모셨다. 일찍이 군수(郡守)로 있을 때 장남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종일 공무를 보면서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벼슬한 지 삼십여 년 동안 아무런 사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때때로 집안의 음식을 빌려달라고 하면 주지 않았다. 을사년에 강릉(康陵)의 당벽(當壁)이 되었으나, 용공(龍功)을 따르겠다는 말을 굳이 사양하여 그 공로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도에 뜻을 정하고 하늘의 명에 순종하여 죽고 사는 것과 영예와 이익에 흔들리지 않았으니, 이러한 부류이다. 옛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는 것이 항상 굶주리고 목마른 것과 같았으며,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는 사치와 화려함을 통렬히 경계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오히려 감히 좋은 옷을 입고 찾아오지 못하였고, 관직에 있으면서 공무를 수행할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지런하고 공경하였다. 간소한 봉록과 평범한 송사(訟事) 외에는 오직 도서(圖書)와 역사(歷史)를 즐겼으며 필법(筆法)이 굳세고 건강하여, 한 시대에 나라의 서사(書士)와 가문(家門)의 비장(碑障)을 거의 절반이나 지었다. 공이 젊었을 때 좋은 문장을 지어 기려졌는데, 오래도록 기묘년에 명망 있는 사람들과 우의를 나누었는데, 그가 처음 벼슬에 나아간 것도 성균관에서 소천(疏薦)한 것이었다. 신무사(神武士)가 좌입(左入)하여 사습(士習)이 크게 무너져 교유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밀어내고 배척하며 자기의 뜻을 드러내려고 하였는데, 공은 이를 추하게 여겨 자취를 끊고 조청(造請)하여 날마다 순주(醇酒)를 불러서 답답한 심정을 달랬으니, 어찌 또한 세상을 미워하고 무료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처음에는 갑자년에 생원으로 급제하였고 무인년에 사산감역(四山監役)으로 서용되었으며, 내섬주부(內贍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장례사 평사헌(掌隷司評事憲), 형조 좌랑(刑曹佐郞), 공조 좌랑(工曹佐郞), 예빈시 판관(禮賓寺判官), 장례사 의정(掌隷司議政)을 지냈다. 형조 정랑(刑曹正郞), 풍덕 군수(豐德郡守), 도총경력(都摠經歷), 사옹청 첨정(司饔廳僉正), 돈녕부 부정(敦寧府副正)으로, 그 정직을 잇게 하였다. 가정 임자년 7월 을사일에 관졸(官卒)로 죽었는데, 그 생년은 경자년 11월 모갑이다. 정부인 김씨에게 배필이 되었다. 광주(光州)의 대성(大姓)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광원군(光原君) 휘는 백겸(百謙), 부사정 한우(漢佑)의 딸이다. 유순하고 덕을 갖추어 효성스럽게 봉양하였고, 미망 11년 만인 임술년 11월 정해일에 세상을 떠났다. 수명이 3년으로 드물었다. 양주 신혈리(神穴里) 집터의 산기슭에 부장하였다.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는데, 큰아들은 대립(大立)으로 유수(留守)를 지냈고 경학(經學)이 뛰어나 대신(臺臣)을 거쳤으며, 성제(成濟)의 아름다움을 따랐다. 더욱 공경하고 화목하여 집안을 크게 번성시켰다. □ 증공 천조 아경(贈公天曹亞卿)으로 선대의 귀함을 미루어 모두 질(秩)을 따랐다. 둘째는 사립(思立)이다. 선무랑(宣務郞)에 아들 지천(知天)이 있고, 사섬서 참봉(司贍寺參奉)에 지성(知性)이 있으며, 진사(進士)에 지명(知命)이 있고, 겸사복(兼司僕)에 희립(希立)이 있다. 승용가경(承用家經)은 관직이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이르렀고, 아들 지진(知進)이 있으며, 무과 현감(武科縣監)에 지원(知遠), 지술(知述), 지우(知遇), 지수(知遂)가 있고, 두 딸은 지숙(知述)이 나가서 백후(伯後)를 이었다. 며느리는 김붕(金鵬)인데, 아들 장인이다. 딸 하나를 낳아 조당(趙璫)에게 시집보냈는데, 모두 사자(士子)이다. 지천은 아들 지건(知健), 지항(知恒), 지익(知益), 지근(知謹)이 있다.

원문

知性有子由忠,由恕,由憲。知命有子由敏。又各有一女。知遠有子由孚,由需。璫亦有一子。由恒已下幼。噫。公性於孝友。連倫蒙篤。各成先志。亨屯續絶。自躬重始。外內莅事。䔽有官譽。殆無間然矣。公亦非不可文請進者。□中廟視學。第公文高等。名封誤拆。欲唱旋沮。公素知有命。不復應選。然二孝趾業。恢拓增光。卽我不做。兒必做也。況世仰公家。不但以筆貴。啓厥法象。源根深固。枝流蕃遠。若此之盛。則其錫類不匱。其福慶無艾矣。是應銘法。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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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知性)의 아들로는 유충(由忠), 유서(由恕), 유헌(由憲)이 있고, 지명(知命)의 아들로는 유민(由敏)이 있으며, 또 각각 한 명씩 딸이 있다. 지원(知遠)의 아들로는 유부(由孚), 유수(由需)가 있고, 당(璫) 역시 아들이 하나 있으나 유항(由恒)은 아직 어리다. 아, 공성(公性)은 효우(孝友)에 연륜이 두터워 각각 선조의 뜻을 이루었으나 형제들 간에 계속 끊어져서 스스로 중시하여 외내(外內)를 다스렸으니, 관직과 명예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공 또한 문청(文淸)에 오르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중묘(中廟)께서 시학(視學)을 하였으나 공의 문장이 높고 이름이 잘못 봉해져서 낭송하려다 곧 중지하였다. 공은 평소 명을 받았음을 알고 다시 선발에 응하지 않았으나, 두 효자의 업적이 크게 확대되어 더욱 빛났으니 바로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아이가 반드시 한 것이다. 더구나 세상에서 공의 집안을 우러르는 것은 다만 글씨를 귀하게 여겨서만이 아니니, 법상을 열어 근원이 깊고 굳건하며 지류(枝流)가 번성하고 멀리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처럼 성대하면 그 후손이 끊이지 않고 복과 경사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명을 새기는 법에 응하니, 명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

受鞠怙恃疇非子。□一胞先生皆曰兄。□彝傷慾蝕全者絶。□燭玆墑埴公獨卓。□旣慕終身百源純。□亦戒無忝聯鴻漸。□公行平地日用間。□人儗高崇仰止山。□命靳一第仇行藝。□緖推有政服勤敬。□世欺穽石賣友權。□公托冥逃聽理夫。□施不盡爲業諸兒。□食遺餘祿饗備物。□報豈吾求錫自類。□象賢亢宗寧有匱。□若堂高墳龜負雲。□恩貤耀赫天卿秩。□我銘直之非私刻。□赤幟衰薄孝友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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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굴의 믿음은 어찌 자식이 아니겠는가 일포 선생을 모두 형이라 하였네 이상 욕심에 온전함 잃은 자 끊어지고 촉지 여인으로 공 홀로 탁월하였네 이미 평생토록 백원 순함을 사모했고 또한 연홍의 잘못 없기를 경계했었네 공은 일상생활에서 행실을 바르게 하여 사람들은 고상한 지조를 우러러 보았네 명은 한 자리에 갇혀 행예를 원망했지만 후손은 정사에 힘쓰고 공경을 다하였네 세상은 석함에 빠져 권모술수를 부리는데 공은 은둔하여 이부의 가르침을 들었네 베푼 것 다하지 않아 자식에게 업으로 삼고 남은 녹봉으로 제사 지내며 물품 갖추었네 보답이 어찌 내가 구해서 받은 것이랴 자손들이 스스로 훌륭하게 되었으니 상현과 숭항에 어찌 부족함이 있으랴 약당의 높은 무덤에 거북이 구름을 저버렸네 은총으로 내린 관직 천경의 반열 빛나니 내 명정은 사사로움 아닌 바른 마음이라 적치의 효우한 법도 쇠락해졌네

99. 通訓大夫。行文川郡守李公墓碣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39C, ITKC_MO_0200A_A043_539D

원문

吾宗李。出全義。自大師諱棹。佐統麗業。繩繩七百年。爲苗裔散東土者。莫非善良。譬如美穀隨播。卽爲嘉生。由慶遠矣。我玄祖□贈領議政諱士寬有七子。登八科。禮曹參判諴長。其第五也。聘于丹城一枝。半爲南士。公諱忠榮。字伯純。實居宜寧。判官壽孩之孫。司正昌祖之子。卽參判曾孫也。妣晉州姜氏。龍驤司正末仝之女。公天性坦■。捐去屑屑。有長者風。業武藝。捷□靖陵癸未科。明年。拜宣傳官。選也。時有劇盜。乃以□命公。公卽縛獻。□上嘉之。賜資堂上官。論者以驟寢。只敍主簿。轉司憲監察。丙戌。出監務安縣。自後除司僕主簿。爲羅州判官。親疾未赴。漢城參軍,熊川,海南縣監,都摠都事,文川郡守。皆其宦歷也。居官務公廉。在家不業産。旣晩。送老桐鄕。享年六十八。卒於癸丑九月三日。葬于本縣治東正骨里先兆。配朴氏。考曰□贈都承旨漢柱。密陽臣閥。壽七十有五。戊辰八月二十三日終。祔窆公左。子男二人。長弘,長文。女一人。適梁自泓。長弘生一女。幼。長文生男女。男山立。女適尹銑。自泓二男。濬溥。公旁室子長雲,長龍。某少日趨庭。知先人相睦厚。今玆長文氏謁銘。安敢不文而辭宗人。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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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씨 종족은 전의(全義)에서 나왔다. 대사(大師) 휘조(諱棹)로부터 가업을 계승하여 700년 동안 이어져 왔으니, 동쪽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들은 모두 선량하다. 비유하자면 좋은 곡식을 뿌리면 곧 좋은 열매를 얻는 것과 같아서 경사가 멀리까지 미치는 것이다. 우리 현조(玄祖) 증 영의정 휘 사관(士寬)은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여덟 명의 자식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예조 참판 휘 장(諴)이 다섯째인데, 단성(丹城) 한 가지에서 혼인을 하여 절반은 남쪽 지방 사람이다. 공의 휘는 충영(忠榮)이고 자는 백순(伯純)이며, 실제로는 의령(宜寧)에 살았다. 판관 수해(壽孩)의 손자요 사정 창조(昌祖)의 아들이니 바로 참판의 증손이다. 비는 진주 강씨로 용용사(龍驤司) 정말동(正末仝)의 딸이다. 공은 천성이 담박하여 세속적인 일에 욕심을 버리고 장자의 풍모가 있었다. 무예를 익혀 계미년 정릉과(靖陵科)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선전관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선발된 것이었다. 이때 극악한 도적이 있었는데 공이 곧바로 잡아서 바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당상관에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논자들은 갑자기 죽은 것을 가지고 단지 주부(主簿)를 서용하고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병술년에 무안 현감(務安縣監)으로 나갔다가 이후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제수되고 나주 판관이 되었는데, 부모의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성 참군(漢城參軍), 웅천 현감(熊川縣監), 해남 현감(海南縣監), 도총도사(都摠都事), 문천 군수(文川郡守)는 모두 그가 지낸 관직이다. 관직에 있을 때는 공무를 청렴하게 처리하였고, 집에 있을 때는 생업을 삼지 않았다. 늦게야 동향(桐鄕)으로 노모를 보내고 향년 68세로 계축년 9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본현 치동 정골리 선조(先兆)에 장사 지내고 박씨(朴氏)에게 배필을 삼았다. 고(考)는 증 도승지 한주(漢柱)로 밀양의 신하로서 문벌이 있는 집안 사람이다. 75세에 무진년 8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공의 좌우에 부묘하였다. 아들 두 명은 장홍(長弘), 장문(長文)이고 딸 한 명은 양자홍(梁自泓)에게 시집갔다. 장홍은 어린 딸 하나를 낳았고, 장문은 아들 산립(山立)과 딸을 낳았는데 윤선(尹銑)에게 시집갔다. 양자홍의 두 아들은 준(濬), 부(溥)이다. 공의 방실(旁室) 자식인 장운(長雲), 장룡(長龍)은 젊어서부터 선인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배웠다. 이제 장문씨가 묘명을 지으면서 어찌 감히 종인(宗人)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緖祖大師傅也久。科發自躬承亦有。惟位不盡。以俟其世。惟文不諛。以證千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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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대사부(大師傅)가 오래되었고 과거에 급제한 것도 직접하였네 오직 지위는 다하지 않았으니 그 세대를 기다리게 하고 오직 문장은 아첨하지 않아서 천년토록 증명되리라

100. 通政大夫。戶曹參議柳公墓誌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40A, ITKC_MO_0200A_A043_540B ...

원문

皇帝隆慶三年日南至。□朝廷選賀使。得戶曹參議柳公攝卿爲上价。某忝贊佐。尙其有友悌之行而慕之。竣事東還。重以淸約加敬。逮在歸塗。共籌難處之故。公曰。吾年邁宦滿。豈容阿曲。依違當路。於是惕然毛豎。益服其持正焉。戊寅四月某日。遽聞公訃。以方束南裝。靡暇一哭爲負。今玉潤韓進士仲厚謁銘神道。致其孤錫輔之言曰。唯子知先人。謹易石以俟。僭不忍拒。贖前慢也。公諱從善。字擇仲。嘉靖癸卯。中進士。丙午。捷文科。選承文院。爲副正字。序陞至博士。遷司憲監察。楊口爲縣。十室窮處。時更▦瘵。擧公爲監。有靳其去者。以善漢吏請留啓。不聽。公儉奉恤惠。勤渠勞來。及瓜。民守□闕借年。俄以親嫌。入爲禮曹正郞。乙卯。充書狀官。隨□聖節使朝京。還拜司憲持平。當鞫宰相無賴子。僚議欲恕。公不饒。父相亦能其有守。復郞春官。陞宗簿僉正兼春秋。丁巳。□順懷世子將入學。用公爲通禮院奉禮。導儀咸中。□明宗進二階嘉之。陞司宰副正,知製□敎,侍講院文學。錄弘文館爲修撰。司憲掌令。尋陟司贍正。復登春坊玉堂。爲弼善校理。以司諫院司諫。移副應敎。先是。公仲兄順善爲典翰。以共侍□經幄爲過幸。引免。辛酉。復拜司諫。外戚方恣。公進□榻前。請治貪縱之罪。聞者以韙。改弘文應敎,議政府檢詳,舍人。從典翰。昇直提學。公侍講六年。□恩顧頗隆。夜對。□上必親賜爵曰。聞爾善飮也。儕流榮之。甲子春。□特授刑曹參議。夏。入銀臺。自同副。轉左右副承旨。病遞。由都官判決事。移戶曹參議。丙寅。永興府使代還。復爲地官。壬申。驪州牧使。萬曆癸酉。兼五衛將。明年。坡州牧使。又明年。富平府使。丁丑。僉知中樞府事。明年卒。旣卒。窮無以庀襄。六月某甲。將賻助葬于楊州述堂里未坐之麓。夫人新兆也。公生在正德己卯甲子。纔一周。公少孤貧。弱冠未室。又丁外艱。辛勤爲學。以克有立。言及二親。輒嗚咽感泣。有終身之慕者也。韻致端溫。莅官居家。不屑産業。室人告罄。只曰。分定。公餘。門戶冷落如寒士。日與仲氏對飮無何而已。公歸自永興。已有羸忘之疾。同在燕邸。因自道曰。前赴楊口。庫無留米。不設午食。以剩餘儲。老作大府。猶用宿規。忍飢治劇。精爽損敝。與副价朴公承任。相謔其太拙。而實歎淸苦之篤。屢典畿邑。連以病歸。位不大受。良以此也。殆臨觀化。亦無大痒。惜也。柳氏之譜。自出文化。高麗大承車達之裔也。派別爲晉州人。有文簡公琰。判漢城。其五世也。考曰柔。戶曹參判。大父曰自恭。刑曹參議。曾大父曰繼源。司僕寺正。皆追貤也。妣曰貞夫人任氏。廣興守文載之女。公聘別坐金澤女。封淑夫人。先歿。生男女各一人。卽錫輔洎進士妻。孫男。元朋,英朋,景朋。外孫男。猷遠。女三人。側室一男。皆幼。公學於叔父典籍貞。典籍。己卯薦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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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융경(隆慶) 3년 일남지(日南至)에 조정에서 하사(賀使)를 선발하여 호조 참의 유공섭 경(柳公攝卿)을 상가(上价)로 삼았는데, 모(某)는 외람되이 보좌하였네. 공은 우애하고 화목한 행실이 있어 존경을 받았는데, 일을 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올 때에 청약(淸約)과 가경(加敬)의 덕이 거듭되었네. 돌아가는 길에 어려운 처지를 함께 헤아리자 공이 말하기를, “내 나이가 벼슬살이를 한 지 오래되었으니 어찌 아첨을 하겠는가.” 하고서 당당하게 행동하였네. 이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어나 더욱 그 바른 지조에 감복하였네. 무인년 4월 모일에 갑자기 공의 부음을 들었으나, 한창 남쪽으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한번 곡할 겨를도 없이 떠나게 되었네. 이제 한 진사 중후(仲厚)가 신도의 명을 지어 올리면서 그 외로운 후손이 보좌한다는 말을 전하니, 오직 자식은 선인을 알아서 삼가 비석을 세워 기다리는 법인데, 참람한 일이라도 차마 거절할 수 없으니, 이는 지난날의 태만함을 속죄하는 것이네. 공의 휘는 종선(從善)이고 자는 택중(擇仲)이며, 가정(嘉靖)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네.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뽑혔다. 차례가 올라 박사(博士)에 이르렀고, 사헌부 감찰로 옮겨 양구현(楊口縣)이 되었다. 10호의 가난한 마을에 시국이 변하여 전염병이 돌았는데, 공이 그곳을 다스리게 되자 떠나려는 자를 막는 사람이 있었다. 선한 아전이 머물기를 청하였다고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 공은 흉년을 당해 백성들을 구휼하고 수고롭게 일하였으며, 과일이 익으면 백성들이 지키고 빌려주었다. 조금 뒤에 친척이라는 이유로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들어갔다. 을묘년에 서장관(書狀官)을 채워 성절사(聖節使)를 따라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재상 무뢰자(無賴子)의 국문(鞫問)을 담당하였는데, 동료들이 용서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용서하지 않았다. 부상(父相)도 그의 지조를 인정하여 춘관(春官)의 낭관으로 복직시키고 종부시 첨정 겸 춘추관사로 올렸다. 정사년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입학할 때 공을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로 삼아 인도하였다. 의식이 모두 중후하고 명종(明宗)이 두 단계나 올려 가상히 여겼다. 사재부 정(司宰副正)으로 올랐다. 지제교(知製敎)와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있었고, 홍문관 수찬에 녹용되었으며, 사헌부 장령을 거쳐 곧바로 선전관 정(宣傳官正)이 되었다. 다시 춘방(春坊)과 옥당(玉堂)에 올랐으며, 필선(弼善)과 교리(校理)를 지냈고, 사간원 사간으로 있다가 부응교로 옮겨졌다. 이보다 앞서 공의 중형(仲兄) 순선(順善)이 전한(典翰)이 되었는데, 함께 경연에 참여하는 것이 지나친 영광이라 하여 인혐(引嫌)하여 면직되었다. 신유년에 다시 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외척이 방자하게 굴 때 공이 탑전(榻前)에 나아가 탐욕스럽고 방종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홍문관 응교와 의정부 검상사(檢詳事)ㆍ사인(舍人)을 거쳐 전한을 따라 직제학으로 올랐다. 공이 시강 6년 동안 은혜가 두루 융숭하여 야대(夜對) 때 임금이 반드시 친히 작위를 내려 주었다. 듣건대, “그대는 술을 잘 마신다고 하니 동료들이 영광스럽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갑자년 봄에 특별히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여름에는 승정원에 들어가 부승지에서 좌부승지로 옮겨졌다가 병으로 체차되었다. 도관 판결사(都官判決事)를 거쳤다. 이호 조참의(移戶曹參議)병인년에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대신하여 돌아갔다가 다시 지방관이 되었다. 임신년에는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지냈고 만력 계유년에는 오위장(五衛將)을 겸임하였으며 이듬해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냈고 또 이듬해 부평 부사(富平府使)를 지냈다. 정축년에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는데 이듬해에 졸하였다. 이미 죽은 뒤에도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어서 6월 모갑일에 양주 술당리(述堂里)에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언덕에 부인과 아들의 무덤을 마련하려고 장례비를 보태어 주었다. 공은 정덕 기묘년 갑자생으로 겨우 한 살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고아로 가난하여 약관이 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하였고 또 부친의 죽음 이후로 생활이 더욱 곤궁하였으나 근면하고 부지런히 학문을 하여 입신(立身)할 수 있었다. 부모를 언급하면 번번이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으니, 평생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지녔던 것이다. 운치 있고 단아하며 온화하여 관직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재산을 쌓는 것을 탐하지 않았다. 집안의 식량이 떨어지면 “분수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였고 공무를 마친 뒤에는 문호가 한산하여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일전에 중씨(仲氏)와 마주하여 술을 마신 것은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공이 영흥(永興)에서 돌아올 때 이미 쇠약해져서 잊어버리는 병이 있었다. 함께 연경에 있을 때 스스로 말하기를, “앞으로 양구(楊口)로 가면 창고에 남은 곡식이 없어 점심을 차리지 못할 것이니, 남은 것을 저축하여 노년에 큰 고을의 수령이 되어도 오히려 옛 규례를 써서 굶주림을 참고 극심한 일을 다스리려 한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이 손상되어 부관(副官) 박공 승임(朴公承任)과 서로 너무 졸렬하다고 농담하였지만 실로 청고(淸苦)함을 독실히 지키는 것을 탄식하였다.” 하였다. 여러 번 경기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나 연이어 병으로 돌아왔으니, 높은 벼슬을 받지 못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거의 죽음에 임하여도 크게 아파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유씨(柳氏)의 족보에 “문화(文化)에서 나왔다.” 하였는데, 고려 대승차(大承車) 달지(達之)의 후예이다. 파별은 진주인(晉州人)으로 문간공 염(琰)이 한성 판관(漢城判官)을 지냈으니, 그의 5대조이다. 고(考)는 유(柔)로 호조 참판을 지냈고, 대부(大父)는 자공(自恭)으로 형조 참의를 지냈으며, 증대부(曾大父)는 계원(繼源)이다.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모두 추증하였다. 비는 정부인 임씨(任氏)인데, 광흥수 문재(廣興守文載)의 딸이다. 공은 별좌 김택(金澤)의 딸로 봉숙부인(封淑夫人)이 되었는데, 먼저 죽었다. 아들딸을 각각 한 사람씩 낳았으니 바로 석보(錫輔)와 진사(進士)의 처이다. 손자로는 원붕(元朋), 영붕(英朋), 경붕(景朋)이 있고, 외손자는 우원(猷遠)이 있으며, 딸은 세 명이고, 측실의 아들은 한 명인데 모두 어리다. 공은 숙부 전적(典籍) 정(貞)에게 배웠는데, 전적이 기묘년에 천거되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원문

亟稱公爲起頹門者。果然。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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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쇠퇴한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급히 일컬었으니, 과연 그러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有哲維人。□朝右之望。□外溫內剛。□金玉其相。□塞守不易。□其志也確。□達施未究。□其病也拙。□主張阿誰。□豐嗇相偏。□司命有鬼。□請訟其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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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이가 있으니 -원문 빠짐-/朝右之望. 겉은 온화하고 속은 강건하니 -원문 빠짐-/外溫內剛. 금옥과 같은 모습이네 -원문 빠짐-/金玉其相. 변방의 지키는 일 바꾸지 않으니 -원문 빠짐-/塞守不易. 그 뜻이 확고하네 -원문 빠짐-/其志也確. 널리 베푸는 것 미치지 못하니 -원문 빠짐-/達施未究. 그 병통은 졸렬함일세 -원문 빠짐-/其病也拙. 주관하는 이 누구인가 -원문 빠짐-/主張阿誰. 풍요와 흉작이 서로 치우치네 -원문 빠짐-/豐嗇相偏. 운명을 맡은 귀신이 있으니 -원문 빠짐-/司命有鬼. 송사 청함이 그러하네 -원문 빠짐-/請訟其然.

101. 安政丞貞敬夫人李氏墓碣陰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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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貞敬夫人全義李姓。高麗大師諱棹之後。□本朝通政大夫,慶源府使永禧之女。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貞愍公安瑭之室也。在家。鞠於外王父左贊成文靖韓公繼禧。以明惠溫莊。爲鍾愛。夙有嘉約。貞愍登辛丑第。乃迎。婦行修謹。共享尊榮三十有八年。能以儉節持家。己卯。貞愍位中台。三男俱薦科。夫人以爲憂。六月二十九日卒。壽幾堋。用越四月十日。葬訖而士難起。喪畢而家禍作。時人無不福夫人者。貞愍之兆。距夫人幾步。子姓列大墓石。不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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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부인(貞敬夫人) 전의(全義) 이씨는 고려 대사(高麗大師) 휘(諱) 조(棹)의 후손이다. 본조 통정대부 경원 부사 영희(永禧)의 딸이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 정민공 안공당(安公安瑭)의 처이다. 집안에서 외왕부(外王父) 좌찬성 문정공 한계희(韓繼禧)를 모시면서 명철하고 온화하며 단아한 성품으로 사랑을 받았고, 일찍이 혼인을 약속하였다. 정민이 신축년에 과거에 급제하자 맞이하여 시집갔다. 부인으로서 행실이 바르고 근신하여 존귀와 영화를 함께 누린 지 38년이 되었다.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으로 집안을 다스렸는데, 기묘년에 정민의 지위가 중태(中台)에 오르자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부인은 이를 근심하였다. 6월 29일에 졸하였으니 나이는 60세였다. 4월 10일로 날짜를 바꾸어 장례를 치렀다. 장례가 끝나고 나서도 선비들은 일어나기 어려워하였고, 상이 끝나자 집안에 화가 일어났으니, 당시 사람 중에 부인에게 복을 빌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민의 묘는 부인의 묘와 몇 걸음 떨어져 있고, 자손들의 성씨를 큰 비석에 나열하고 여분은 두지 않았다.

102. 中訓大夫。行成均典籍李公墓碣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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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李君諱希良。字仲淳。□璿系也。高祖諱裶。以□太宗子。封敬寧君。曾祖諱植。牟陽君。祖諱承孫。□贈仙槎君。考諱裕。河東副令。妣愼人晉州柳氏。兼掌樂院直長坤元之女。□國制。宗職限四代。君連倫七人。始赴士業。文譜進者四也。世多耀之。君序居二。最顯者第四。希儉。官判書兵曹。君。進士在嘉靖甲午。大科在戊申秋。爲人醇厚長大。家庭無子弟之過。訒有餘愼。所與治書。一覽成誦。人不覺而業日就。餘事詞翰。筆迹俱善。音律又其天得。可謂曰器。初授成均館學諭。序陞學錄,學正,博士。壬子戌月。始遷典籍。是月二十八日逝。致遠之用。未萬而■試。八十之壽。中半而僅二焉。惜也。葬卜楊州治北甕巖里先隴坐巽之穴。一男。司圃別提重光。三女。訓鍊參軍黃奎,忠義衛金就仁,內禁衛吳洵之妻。君正室載寧康氏。習讀莅權之女之出也。內外孫幷八人。側室男元孫。女郡守申仲淹妾。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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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李君)의 휘는 희량(希良)이고 자는 중순(仲淳)이다. □ 선계(璿系)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징(裶)으로, □ 태종(太宗)의 아들로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증조(曾祖)의 휘는 식(植)으로 무양군(牟陽君)이다. 조부의 휘는 승손(承孫)으로□ 선사군(仙槎君)에 추증되었다. 아비의 휘는 유(裕)로 하동 부령(河東副令)이고, 어머니는 신인(愼人) 진주 유씨(晉州柳氏)인데 겸장악원직장(兼掌樂院直長) 곤원(坤元)의 딸이다. □ 나라 제도가 종족(宗族)의 직책은 4대까지로 한정하였는데, 군륜(君倫)이 7명이나 되어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가 4명이었다. 대대로 빛나는 이가 많았는데, 군이 두 번째였고 가장 현달한 사람은 네 번째였다. 희검(希儉)은 관직이 판서 병조사(判書兵曹事)이다. 군은 진사(進士)는 가정 갑오년에 급제하고 대과(大科)는 무신년 가을에 급제하였다. 사람은 순후(醇厚)하고 장대(長大)하였으며 가정에는 자제의 허물이 없었다. 말은 신중한 데 여유가 있었고, 글씨를 쓰는 것은 한 번 보고 바로 외웠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학업이 날로 진취되었고, 기타 문장과 필적도 모두 좋았으며, 음률(音律) 또한 타고난 재능을 지녔으니, 그릇이 갖추어졌다고 할 만하였다. 처음에는 성균관의 학유(學諭)에 제수되었다가 차례로 학록(學錄), 학정(學正), 박사(博士)로 승진하였고, 임자년 8월에 비로소 전적(典籍)으로 옮겨졌다. 이달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치원(致遠)의 쓰임이 만에 못 미치니 시험을 보게 된 것이고, 팔십의 수명이 반도 채 되지 않으니 겨우 두 번이나 되었으니 애석하다. 장사는 양주(楊州) 치북(治北) 옹암리(甕巖里) 선농(先隴)의 좌손(坐巽) 자리에 있는 무덤에 하였는데, 아들은 사포 별제 중광(司圃別提重光)이 있고, 딸은 훈련 참군 황규(黃奎), 충의위 김취인(金就仁), 내금위 오순지(吳洵之)의 처가 있다. 군의 정실은 재령강씨(載寧康氏)로 습독리 권지(習讀吏權之)의 딸이다. 내외손이 모두 8명이고, 측실의 아들은 원손(元孫)이며, 딸은 군수 신중엄(申仲淹)의 첩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원문

天之命才。□如必以施。□其之未定。□而止於斯。□追而壽之。□有銘贖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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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재주를 명할 때에는 반드시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정하지 못하고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뒤미처 오래 살게 하고 명문으로 속죄하게 하노라

103. 通訓大夫。行溫陽郡守沈君墓碣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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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萬曆八年冬。靑松沈讓叔。受溫陽□命。余續拜江界。相次赴治。中路聞其訃。噫。於十一月十七日逝矣。得年四十八。惜也。今秋。余□陛辭到京。靑陽君義謙氏。泣授二紙曰。吾兄之懿而止於斯。懸■之石。托子以求。則一其祭文。一乃春川府使忠謙狀也。余從遊三十年。瞷君稔。及讀此。益自信。君爲人坦夷。恢疏有量。平生任眞。物無競忤。族爲國華。由靑城伯諱德符。佐創本朝。彌大以昌。安孝公諱溫,恭肅公諱澮。仍父子領議政。間二世。忠惠公諱連源。亦領議政。翼孝公諱鋼。領敦寧。寔君祖若考。□仁順王后。卽我□明廟正壼。而君爲母弟。一時門闌。烜赫貴盛。君未嘗有挾盈加人意。惟自持恂恂。戊午。選上庠。齒多士。儕流慕愛甚。蓋畜於忠惠許。特見鍾愛。不承外傳。旁通經傳。其得家庭有素。藝業夙成。敏述善隸。解發頻高等。泮衿推章疏。朝夕科達。人擬摘頷。亦未嘗以才名自有。常懼門戶太盛。逮兩親旣喪。弟仕登顯。年未及強。遂不赴擧。急流之勇。君庶幾焉。惟其率性。內外無他。故機牙矯飾之念。譊屑卑薄之談。絶於心口。承顔之下。無子弟之過。兄弟和而樂。朋友群而信。執喪有法。奉先能禮。善讓於財。不屑營爲。居處圖書花竹而已者。雖問學有助。實於天得爲優。若其居公莅務。不用苛細。一以長者行之。橫譴落職。受咎不白。此豈君子徒有古人風者非耶。君諱仁謙。讓叔字。妣完山府夫人。□贈參判李𥵢之女。宗室孝寧大君𥙷之後。君嘉靖癸巳六月某甲生。至甲子歲。三十有二年也。始以翼孝命蔭仕。補活人署別提。槪前後履歷。南部禮賓寺,軍器寺,司醞署主簿,司圃署司圃。再爲工,刑曹佐郞,掌隸院司評,司議,繕工監判官,都摠府都事,戶,工,刑三曹正郞,漢城府庶尹,判官。外敍則天安,豐德洎溫陽三郡守也。君先隴在通津甕井里。用翌年二月某甲。返葬于某向之原。自君初卒。□上命有司賻贈。禮官弔祭。又別□賜內藏。以庀喪襄。皆異數也。□恩視渭陽。哀榮盡矣。君妻李氏。佐郞拔之女。無子。以靑陽次子㤿後之。㤿娶觀察使具思孟女。生二男一女。皆幼。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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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8년 겨울에 청송 심양숙이 온양 부사로 임명되었는데, 내가 이어 강계 부사에 임명되어 서로 차례로 지방으로 나갔다가 중도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11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48세였다. 애석하다. 올가을에 내가 하직 인사를 하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청양군(靑陽君) 의겸(義謙)이 눈물을 흘리며 두 장의 종이를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형님은 아름다운 행실이 이 정도에서 그쳤으니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자 자네에게 부탁하네.” 하였다. 하나는 그의 제문이고, 하나는 춘천 부사(春川府使) 충겸(忠謙)의 장문이다. 내가 그와 종유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의겸은 나를 잘 알았다. 이 글을 읽고 더욱 믿게 되었다. 군은 사람됨이 공평하고 너그러웠으며, 넓고 소탈하여 도량이 있었고, 평생에 진실함을 맡아 물욕과 다툼이 없었다. 그 집안은 나라의 꽃이 되었으니 청성백(靑城伯) 휘덕(諱德)으로 말미암아 창업을 도와서 큰 공을 세웠다. 안효공(安孝公) 휘 온(溫)과 공숙공(恭肅公) 휘 회(澮)는 부자로서 영의정을 맡았다. 두 대를 건너뛰어 충혜공(忠惠公) 휘는 연원(連源)으로 역시 영의정을 지냈고, 익효공(翼孝公) 휘는 강(鋼)으로 영돈녕을 지냈으니, 실로 군의 조부와 고모이다. 인순왕후(仁順王后)께서는 바로 우리 명종(明宗)의 정비이신데, 군은 모친과 아우가 되어 한 시대에 문벌이 빛나고 귀성(貴盛)하였다. 그러나 군은 남을 압도하려는 뜻이 없었고 오직 스스로 조용하고 신중하였으며, 무오년 상학(上庠)에 뽑혔는데 나이가 많아 많은 선비의 추앙을 받았으니, 이는 대개 충혜공에게 축적된 덕으로 특별히 사랑을 받은 것이었다. 외전(外傳)을 따르지 않고 경전을 두루 통달하였으며 가정에서 배운 바가 평소에 있었고, 문예(文藝)를 일찍 이루어 글씨를 잘 썼다. 해발(解發)은 자주 등급이 높았고 반금(泮衿)으로 추장(推章)과 소(疏)를 지었으며, 조석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장원(壯元)을 의망하였으나 또한 재주와 명예가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여겨 항상 문호가 너무 성대해질까 두려워하였다. 양친이 돌아가시고 아우가 벼슬길에 올라 높은 자리에 오르자 나이가 아직 장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니, 급류를 용감하게 헤쳐나간 것이다. 군서(君庶)는 어떠하였던가. 오직 천성을 따랐을 뿐이다. 안팎으로 다른 것이 없었으므로 기심(機心)과 아욕(牙慾)에 얽매여 꾸미려는 생각이나 비루하고 박절한 담론이 마음에서 입으로 나오는 데 끊어졌다. 어른을 대할 때는 자제(子弟)의 허물이 없었고, 형제간에는 화목하여 즐거웠으며, 벗들과는 무리 지어 신뢰를 받았고, 상사(喪事)를 치르는 데는 법이 있었으며, 선조를 받드는 데는 예가 있었다. 재물에 대해서는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영리를 도모하는 일은 꾀하지 않았으며, 거처에는 도서와 화초만 있을 뿐이었다. 비록 학문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실로 하늘이 준 것이 더 좋았다. 공무(公務)를 맡았을 때에 혹독하게 다스리지 않고 한결같이 어른의 행실을 본받았으며, 억울한 죄를 받아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군자가 옛사람의 풍모만 지녔던 자가 아니겠는가. 군(君)의 휘(諱)는 인겸(仁謙)이고 양숙(讓叔)은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이진(李𥵢)의 딸이며, 종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연(李𥙷)의 후손이다. 군이 가정(嘉靖) 계사년 6월 모일(某日)에 태어나서 갑자년에 이르렀다. 나이는 32세였다. 처음에는 익효(翼孝)의 명으로 음관에 뽑혀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를 지냈고, 그동안의 이력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부부(南部), 예빈시(禮賓寺), 군기시(軍器寺),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 사포서(司圃署) 사포(司圃), 재차 공조와 형조 좌랑,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 사의(司議), 선공감 판관(繕工監判官),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호조ㆍ공조ㆍ형조 정랑,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과 판관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천안(天安), 풍덕(豐德), 온양(溫陽) 세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군선(君先)은 통진(通津) 옹정리(甕井里)에 있었는데, 이듬해 2월 모일에 돌아가 장사 지내어 모향(某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군이 처음 세상을 떠났을 때 임금이 유사에게 명하여 부의를 주고 예관이 조제(弔祭)하게 하였으며, 또 별도로 내장(內藏)에서 내린 물품을 주어 상례를 치르게 하였으니, 모두 특수한 은혜였다. 위양(渭陽)을 본받은 은혜로 애영(哀榮)이 다하였도다. 군의 처 이씨는 좌랑 발지(拔之)의 딸이다. 아들이 없었다. 청양(靑陽)의 차자 구후(具厚)가 아내로 맞이하였다. 구후는 관찰사 구사맹(具思孟)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렸다. 명에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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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讓叔古人風。人華盛族。我眞持沖。歛藝不試。位固無隮。不年與子。天道則奚。二弟最。銘于乃友。安君以直。詔之來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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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양숙은 옛사람의 풍모를 지녔으니 화려한 집안에서 태어났네 나는 참으로 맑음을 지니고서 학문을 배우고 시험하지 않았네 지위가 진실로 떨어질 것이 없었는데 나이도 많지 않으면서 그대와 함께 떠났으니 천도는 어찌 된 것인가 두 아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여 그대의 벗에게 명하노니 안군은 곧은 사람이라 조서가 온 뒤에

104. 進士蔡君墓表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4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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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君無畏字伯强。仁川人。高麗禮部尙書寶文之後。高祖□本朝左弼善諱倫。□贈禮曹參議。曾祖南陽府使諱申保。□贈吏曹參判,邵城君。祖諱年。松永縣監。□贈左承者。考諱洛。以同副承旨坐門譴。在罷卒。妣尙州金氏。從仕郞漢鼎女。麗季名臣得培裔也。君生於嘉靖庚寅。歿於隆慶丁卯。在世三十有八年。少善學。十歲通經傳。以奇童聞。中年連遭三喪。自是世味涼薄。擧業亦不刻苦。中戊午進士。余同年也。晩家崇禮門南塘。余同里也。故余與君厚而知君悉。性不矯飾。無表襮。賓朋至。喜以杯酒歡謔。君怙恃早世。友愛甚篤。凡二季曁庶姝婚嫁。專辦其資。或時有匱乏者。俾率家累就食。此亦難已。君先兆在咸昌。常曰。吾死必歸骨於父母之側。及逝。家人遠不克遂。乃厝于淸州水落山下。從妻黨也。配益齋先生遠孫李溟之女。系慶州。賢而克治。生一女未歸。君疾革。以詩訣曰。孤寡相持無處托。此生天地恨難平。輩流聞而慟嗟。卒用爲挽。君弟無易扺余曰。孤嫠未亡。願得君言表墓。某不敢辭。槪述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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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외(蔡無畏)군은 자는 백강(伯强)이고 인천 사람이다. 고려 예부 상서 보문(寶文)의 후예인데, 고조는 본조 좌필선(左弼善) 휘는 윤(倫)이며 □ 증 예조 참의이다. 증조는 남양 부사(南陽府使) 휘는 신보(申保)이며 □ 증 이조 참판 소성군(邵城君)이다. 조부는 휘는 년(年) 송영 현감(松永縣監)이며 □ 증 좌승자(左承者)이다. 고휘락(考諱洛)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된 뒤에 세상을 떠났다. 비는 상주 김씨(尙州金氏)인데, 종사랑 한정(漢鼎)의 딸로 고려 말 명신(名臣)인 김득배(金得培)의 후예이다. 군은 가정(嘉靖) 경인년에 태어나 융경(隆慶) 정묘년에 죽었으니, 세상에 산 지가 38년이었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잘하여 열 살에 경전(經傳)을 통달하였으므로 기이한 아이로 알려졌다. 중년에 연이어 세 번의 상을 당하자 이로부터 세상살이가 냉담해져서 학업에도 각고하지 않았다. 무오년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는데, 내가 동년이다. 만년에 숭례문 남당(南塘)에 집을 지었는데, 나와는 같은 마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군과 친하게 지내면서 군의 모든 것을 알았는데, 성품이 꾸밈이 없고 표리(表裏)가 없었다. 빈객이나 벗들이 찾아오면 기꺼이 술잔을 권하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군은 일찍 세상을 떠날 것을 믿고 친구를 매우 독실하게 사랑하여 두 계제(季弟)와 서자(庶子)의 혼인을 전적으로 마련해 주었으며, 혹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먹게 하였으니, 이 또한 그만둘 수 없는 일이었다. 군의 선조가 함창(咸昌)에 살면서 항상 “나는 죽으면 반드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에 집안사람들이 멀리 가기 어려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고 청주(淸州) 수락산(水落山) 아래에 안장하였으니, 처가 쪽이다. 익재 선생(益齋先生)의 먼 후손인 경주(慶州) 이명(李溟)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어질고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한 명의 딸을 낳았으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시訣(詩訣)에 “홀로 남은 아내 의탁할 곳 없으니 이 세상 천지에 한스러움 그지없네.”라고 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듣고서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마침내 이것을 만사(挽詞)로 삼았다. 군의 아우 무역(無易)이 나에게 “홀로 남은 아내가 죽지 않고 있으니 군의 시를 묘비에 쓰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대략 위와 같이 썼다.

105. 祖考歙谷縣令府君夫人柳氏墓合表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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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國重世閥有數者。必曰三韓之甲。惟天降子靑木中。專畀我有東。峕則英雄奔走服力。誕翊以登之。全義人李公諱棹。通木道濟師。位大師。儒州人柳公諱車達。出車秉運餽。位大丞。同策統合功。各爲兩家初祖。大師之世曰大將軍康兵部尙書秀英,大將軍文景,刑部侍郞允寬,保勝別將順知,禮部事仟,密直司事子華,典法佐郞得榮,戶曹典書丘直,孝靖公貞幹,觀察使士寬,襄簡公恕長,副正允純凡十三。仁孝名家。克生賢嗣。寔我王考。妣卽漢城庶尹南公任之女。大丞之世曰左尹孝金,大將軍金奐,大將軍盧一,少監寶春,少監寵,文簡公公權,左僕射澤,文正公璥,貞愼公陞,章敬公墩,代言總,判府事曼殊,中樞院使殷之,文城君洙,府使季孫凡十五。忠烈耀門。克生淑媛。寔我王毋。妣卽義州牧使張公孟昌之女。王考諱仁孫。字宗孝。以門地。歷成歡,金泉等道察訪,北部司䆃寺豐儲倉,南部典獄署等司主簿,聞慶靑陽高靈縣監,歙谷縣令,司憲府監察。壽六十七歲卒。嘉靖癸卯六月壬辰也。王母與享祿位。以命婦爲淑人。壽八十三歲卒。嘉靖癸亥十一月壬午也。合葬于衿川馬場原大墓兆後。王考天性恭儉。事親以誠。奉祭以謹。承基傳緖。甚得理義。王母資識明達。克裕內蠱。遇有艱疑。所助尤深。善慶攸鍾。媲美作求。宜錫不匱。卒蔑有續。以我先君諱某後之。乃襄簡公之兄。平簡公禮長之曾孫。判決事時寶孫。楊州牧使諱公達第三子也。曾分虎符。節度累道。視秩追崇。竝□命二親戶曹參判。妣皆封貞夫人。曾祖副正府君。亦□贈刑曹參議。王毋逮奉□恩麻。泣曰。我始婦於女家。術者謂乃祖雖無血胤。當膺子貴。豈知泉下廿載。有此戾契。每感奉養勤至。歎曰。脫使老身。生子不賢。寧享是孝乎。□國家亦命有司。月繼酒肉。其享□天恩。又至矣。嗚呼。孤孫某。以奉褓兒。最承恩愛。薦名儒科。曾穢臺省。繄遣訓是承。敬述先志。琢玆密石。備列勳德之高貴有自。以揭吾門之不但三韓甲姓而已。某且有子耆俊,壽俊,耈俊,命俊。有孫重基,厚基。恪守宗事。庶幾無忝云。萬曆四年歲次丙子九月庚寅朔八日丁酉。孤孫前中訓大夫。司憲府持平,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某。泣血謹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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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세벌(世閥)이 중시되는 것은 필시 삼한의 으뜸이라고 말한다. 오직 하늘이 자청목(子靑木)에서 내린 것을 나에게 주어 동쪽을 맡기게 하였으니, 강석(峕石)은 영웅들이 분주히 힘써서 타고 올라갔다. 전의인(全義人) 이공(李公) 휘는 조(棹)인데 통목도제사(通木道濟師)이고, 위는 대사(大師)이며, 유주인(儒州人) 유공(柳公) 휘는 차달(車達)인데 출차병운(出車秉運)으로 제사(餽師)이며, 위는 대승(大丞)이다. 함께 책략을 세워 통합한 공이 각각 두 집안의 시조가 되었으니, 대사의 대에는 대장군 강병부상서(康兵部尙書) 수영(秀英), 대장군 문경(文景), 형부시랑(刑部侍郞) 윤관(允寬), 보승별장 순지(保勝別將順知), 예부사천(禮部事仟), 밀직사사(密直司事) 자화(子華), 전법좌랑(典法佐郞) 득영(得榮), 호조전서구직(戶曹典書丘直),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 관찰사 사관(觀察使士寬), 양간공(襄簡公) 서장(恕長), 부정(副正) 윤순(允純) 등 모두 13명으로, 인효의 명가이다. 극생(克生)의 현사(賢嗣)는 우리 왕고(王考)이다. 비는 한성 서윤(漢城庶尹) 남공 임지(南公任之)의 딸인데, 대승(大丞)의 세대에 좌윤(左尹) 효금(孝金), 대장군(大將軍) 김환(金奐), 대장군 노일(盧一), 소감(少監) 보춘(寶春), 소감 총(寵),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 좌복사(左僕射) 택(澤), 문정공(文正公) 긍(璥), 정신공(貞愼公) 승(陞), 장경공(章敬公) 돈(墩), 대의총(代言總), 판부사 만수(判府事曼殊), 중추원사(中樞院使) 은지(殷之), 문성군(文城君) 수(洙), 부사 계손(府使季孫) 등 15명이다. 충렬(忠烈)의 문호에 극생의 숙원(淑媛)은 우리 왕모(王母)이다. 비는 의주 목사(義州牧使) 장공(張公) 맹창(孟昌)의 딸인데, 왕고 휘(諱)는 인손(仁孫), 자는 종효(宗孝)이다. 문지(門地)로 환산(歡山), 금천(金泉) 등 도찰방(道察訪), 북부사(北部司) 돈사(屯寺) 풍저창(豐儲倉), 남부전옥서(南部典獄署) 등 사의 주부(主簿), 문경(聞慶) 청양(靑陽) 고령 현감(高靈縣監)을 역임하였다. 흡곡 현령(歙谷縣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수(壽) 67세에 졸하였다. 가정(嘉靖) 계묘년 6월 임진일이다. 왕모와 함께 향록위(享祿位)를 받았고 명부(命婦)로서 숙인(淑人)이 되었다. 수 83세에 졸하였다. 가정 계해년 11월 임오일이다. 금천 마장원(衿川馬場原) 대묘(大墓) 뒤에 합장하였다. 왕고는 천성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제사를 받드는 데 근신하였으며, 가업을 계승하는 데 이치와 의리를 잘 지켰다. 왕모는 자질이 명철하여 집안일을 잘 보살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움을 준 것이 더욱 깊었다. 복이 모여서 부부가 서로 어울려 살았으니, 마땅히 무궁한 복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죽어서 후사가 없으므로 우리 선군(先君) 휘 아무의 뒤에 묻어주니, 바로 양간공(襄簡公) 이예장(李禮長)의 증손이며 판결사(判決事) 시보손(時寶孫) 양주 목사(楊州牧使) 휘 공달(公達)의 셋째 아들이다. 일찍이 호부(虎符)를 나누어 주었다. 절도사(節度使)와 누도사(累道使)는 지위를 추숭(追崇)하는 데에 비중을 두어, 아울러 명하여 부친은 호조 참판으로 봉하고, 어머니는 모두 정부인(貞夫人)으로 봉하였으며, 증조부 부정부군(副正府君)도 명하여 형조 참의로 추증하였다. 왕이 마침내 보필하는 은혜를 받들고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에 술사(術士)가 ‘그대의 조부는 비록 혈연으로 낳은 자식이 없으나 응당 아들의 귀함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알았으랴. 죽은 지 20년 만에 이와 같은 복이 있을 줄을. 매양 봉양(奉養)하는 정성이 지극함에 감격하여 탄식하기를 ‘만일 노신이 자식을 낳아 어질지 못했다면 어찌 이런 효도를 받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나라에서 또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매달 술과 고기를 계속 바치게 하니 그 은혜를 입은 것이 또 지극하다. 아, 외손인 모(某)는 포옹에 싸인 아이로서 가장 큰 사랑을 받았고, 유생의 과거에 이름이 올라 일찍이 대성(臺省)에 들어가 훈계를 받았다. 공경히 선조의 뜻을 계승하여 이 밀석(密石)을 다듬어 높은 덕과 공로를 열거함으로써 우리 집안이 삼한(三韓)의 갑성(甲姓)일 뿐만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였다. 아무개는 자식으로 기준(耆俊), 수준(壽俊), 소준(耈俊), 명준(命俊)이 있고 손자로 중기(重基), 후기(厚基)가 있습니다. 종사를 지켜서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력 4년 병자년 9월 경인일 초하루 정유일에 고손(孤孫) 전중훈대부 사헌부 지평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 아무개는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표문을 올립니다.

106.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楊州牧使府君墓表。

문체: 傳記類 / 碑誌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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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惟我大父。卜吉于廣州之胎藏里。今玆五十有九年。孤孫某始樹墓道之石。蓋追卒先人有待之志也。我李氏。出全義縣。鼻祖諱棹。佐登王太祖。爲統合元功。位都大師。積慶所流。世濟祉德。入□本朝。孝靖公諱貞幹稀年。奉百歲母至孝。□世宗璽書褒美。恩典靡不擧。一時公卿。咸以詩頌。有慶壽集。生府尹諱士寬。六子登八科。二子策三勳。□贈領議政。其第三曰諱禮長。靖難佐翼功臣。兵曹參議。卒□贈本曹判書,全城君。諡平簡。生判決事。□贈兵曹參判諱時寶。聘貞夫人固城李氏。左議政諱原之孫。少尹□贈兵曹判書諱垤之女。卽公考妣。天順甲申十一月二十五日。生公。諱公達。字善卿。以門功。屬忠義衛。積散階。至禦侮將軍。遷軍職。至副護軍。弘治十八年。始敍銓擬。拜□世子左翊衛。昇忠勳府經歷。未幾。超堂上官。授折衝,僉知中樞府事。後用言者改之。除楊州牧使。丁外艱未赴。自後遺榮抹摋。優游海州村庄。享年五十六卒。正德己卯正月十七日也。時先君未勝冠。伯父無壽考。諸孫共謀昭刻。未究德烈。顧無韓丈可證四夔。痛玆先美昧掩不彰。謹掇一二聞覩。庶正直而無媿辭。某有聞於先君。公姿儀和粹。度宇沖醇。樂易存心。人服長者。少志學。不成擧子名。□中廟龍潛。以公爲□貞顯外親。禮遇甚厚。改玉日。三大將以兵先衛晉邸。□上初實虞疑。促召公訊外事。公保謳歌無他。上便賜寶劍。以譏非常。臨機變。有辦理難夷。不射時求衒。故只錄之原從功。□上或非時召訪。公內懷感激。恐涉同宗之吝。乃以肥遯之利。及居鄕家食。□上屢賜存問。欲使復仕。自疏老疾。竟不承□旨。壬辰。余登第。□上認親名。卽召見賜問。至稱亡叔。命輟□御膳。歸遣老嬸。追眷至矣。某又見公手抄詩賦軸。字法端雅。平生逐日有紀事。決非無恒者可企。家有一錄。起戊寅。盡己卯正月十四日。噫。絶筆也。見其處事。必奉先爲首。得味。必頒親以均。遇伯祖年執。敍析形之餘慟。救隣舊有喪。盡匍匐之可及。故下逮鄕婆里傁。無不日執誠餽獻者。其厚德之推。波及於得人懽心類此。夫人光州金氏。敵愾功臣,光原君諱百謙女。郡事□贈戶曹判書諱革之孫。媲德克相。嚴而有法。先君判定州。迎以就養。戊戌正月十三日。卒于公府。壽七十一。同室而祔厝焉。有男四女二。男長應誠。察訪。次思誠。副護軍。次先君諱某。武科。官兵馬節度使。□明廟視秩推恩。□贈公戶曹參判。夫人亦封貞爵。所謂有待者此也。季恕誠早沒。女適處士權遇鸞,生員李和。伯父娶副正趙演女。生男艎。副司果。艤。武科僉知樞府。女適縣監吳景顔。仲父娶參奉崔瑤女。生男艇。忠義衛。先君聘府使禹公諱禮孫女。某與忝遺休。曾廁從臣。無兄弟。一姊適生員金琮。權氏姑生男翼。儒士。女適承旨鄭源。李氏姑生男塢,垍,基,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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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생각건대, 우리 대부(大父)께서 길일을 택하여 광주(廣州) 태장리(胎藏里)에 묘소를 마련하신 지 지금 59년이 되었습니다. 외손인 모(某)가 비로소 묘도의 비석을 세우니, 이는 선조를 추모하고 후손을 기다리는 뜻에서입니다. 우리 이씨는 전의현(全義縣) 출신으로 시조(始祖) 휘(諱) 조(棹)께서 왕태조(王太祖)를 도와 통합한 원공(元功)이 되셨습니다. 지위가 도대사(都大師)로 경사가 쌓인 곳에서 유래하였고, 세제지덕(世濟祉德)으로 본조에 들어왔습니다. 효정공(孝靖公) 휘 정간(貞幹)께서는 백세모친을 받든 지극한 효성으로 세상에 드물었으며, 세종께서 보문(褒文)을 내려 칭찬하셨고 은전이 두루 베풀어졌으므로 당시의 공경들이 모두 시를 지어 송축하였습니다. 《경수집(慶壽集)》이 있습니다. 생부윤 휘 사관(士寬)은 여섯 아들이 팔과에 급제하였고, 두 아들은 세 번 훈신(勳臣)에 발탁되었으며, 증(贈) 영의정인 그 셋째 휘 예장(禮長)은 정난(靖難) 때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병조 참의를 지냈고, 졸(卒) 증 본조 판서 전성군(全城君)에 시호가 평간(平簡)입니다. 생판결사(生判決事)□ 증 병조 참판 휘 시보(時寶), 빈정부인 고성 이씨(固城李氏)와 좌의정 휘 원지(元之)의 손, 소윤 □ 증 병조 판서 휘 석지(垤之)의 딸이다. 바로 공의 고비(考妣)이다. 천순(天順) 갑신년 11월 25일에 태어났다. 휘는 공달(公達)이고 자는 선경(善卿)이다. 문공(門功)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어 적산계(積散階)를 거쳐 어무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군직(軍職)으로 옮겨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홍치(弘治) 18년에 비로소 서용되어 전의(銓擬)를 통해 세자좌익위(世子左翊衛)에 제수되었다.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으로 승진하였고 얼마 안 되어 당상관(堂上官)으로 뛰어올라 절충첨지중추부사(折衝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는데, 뒤에 언관(言官)의 말로 인하여 개차(改差)되어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정외간(丁外艱) 때 부임하지 못하고 이후 유영(遺榮)으로 해주의 촌장에 머물다가 향년 56세에 졸하였다. 정덕 기묘년 1월 17일이다. 당시 선군(先君)이 아직 관례를 치르지 못하였고 백부(伯父)는 수명이 짧았으므로 여러 손자가 함께 묘갈명을 지어 그 덕과 공렬을 드러내고자 하였는데, 미처 다하지 못한 데다 돌아보건대 증명해 줄 한장(韓丈)이 없었으니, 이 선조의 아름다운 행적이 가려져 드러나지 못함을 통탄하였다. 삼가 듣고 본 것 중 한두 가지를 모아 묘갈명을 지어 바치니, 부디 바로잡아서 부끄러운 말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 모(某)는 선군에게 들은 바로, 공의 자태와 의표는 화순하고 순수하였으며 도량은 넓고 순박하였다. 즐겨 이치를 탐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장자(長者)를 본받아 따랐다. 젊어서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 이름을 떨치지는 못하였다. 중묘(中廟)께서 용잠(龍潛)으로 계실 때 공을 정현(貞顯) 외친(外親)으로 삼으시고 예우가 매우 두터웠다. 개옥일(改玉日)에 세 명의 장수가 군사를 앞세워 진저(晉邸)를 지키고 있었는데, 상이 처음에는 실로 의심을 품고 공을 불러 외사(外事)를 물으려 하였으나, 공은 구가(謳歌)하는 마음으로 다른 일에 관심이 없었다. 상이 곧 보검(寶劍)을 내려 주어 비상한 일을 기롱하였는데, 기회를 만나 변통할 때에는 처리하기 어려운 일도 능숙하게 해내고, 쏘지 않을 때에는 과시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단지 원종공(原從功)에만 기록하였다. 상이 혹 시의적절하지 않게 부르거나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공이 내심 감격하여 동종(同宗)의 인색함을 범할까 두려워하면서도, 비둔(肥遯)의 이로움을 가지고 고향에 살면서 밥을 먹게 하려고 상께서 누차 안부를 물어 주시며 다시 벼슬하길 원하셨다. 그러나 노질(老疾)을 이유로 소를 올린 뒤 끝내 성지(聖旨)를 받들지 않았다. 임진년에 내가 과거에 급제하니 상께서 친명(親名)으로 인정한 뒤 즉시 불러서 보고 안부를 물으시고 망숙(亡叔)이라고 칭하시며 어선(御膳)을 그만두라고 명하고 노침(老嬸)을 보내어 추후의 보살핌이 지극하였다. 모(某)는 또 공이 손수 초한 시부축(詩賦軸)을 보니 글씨가 단아하였고 평생 날마다 기사(紀事)를 기록하였으니, 결코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에 한 권의 기록이 있는데 무인년에 시작하여 기묘년 1월 14일에 끝났다. 아, 절필이다. 그 처사를 보면 반드시 선조를 받드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고, 맛을 얻으면 반드시 친척에게 나누어 고르게 하였다. 백조(伯祖)의 연로함이 형제간에 헤어진 뒤의 슬픔을 풀어 주었고, 이웃에 옛날부터 상이 있으면 기어가는 사람이라도 다 구제하였으므로, 아래로는 시골 아낙네와 마을 노인에게까지 미쳤다. 무불일(無不日)에 정성을 다해 제물을 바치니, 그 후덕한 덕이 미쳐서 사람을 얻고 기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부인 광주 김씨는 적화공신(敵愾功臣)광원군(光原君)휘 백겸(百謙)의 딸이고, 증 호조 판서 휘 혁지(諱革之)의 손이다. 덕을 짝하여 서로 어울리니 엄하면서도 법이 있었다. 선군이 정주 부사로 있을 때 맞이하여 봉양하였는데, 무술년 1월 13일에 공부에서 졸하였다. 나이는 71세였다. 같은 방에 부묘(祔廟)하였다. 아들 4명과 딸 2명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응성(應誠)은 찰방이고 둘째 아들 사성(思誠)은 부호군이며, 셋째 아들은 선군의 휘가 모(某)인데 무과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랐다가 명종이 시질(視秩)하여 추은(推恩)해 주어 증 공 호조 참판에 올랐고 부인 또한 정작(貞爵)에 봉해졌다. 이른바 기다렸다는 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막내 아들 서성(恕誠)은 일찍 죽었고, 딸은 처사 권우난(權遇鸞)과 생원 이화(李和)에게 시집갔으며, 백부(伯父)는 부정 조연(趙演)의 딸을 맞이하였다. 아들 생남(生男)은 부사과(副司果)로, 배를 띄웠다. 무과(武科)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딸은 현감 오경안(吳景顔)에게 시집갔다. 중부(仲父)는 참봉 최요(崔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정(艇)을 낳았는데 충의위(忠義衛)이다. 선군(先君)은 부사 우공(禹公) - 휘는 예손(禮孫)이다. - 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모(某)와 전유휴(曾遺休)는 종신(從臣)으로 지냈는데 형제가 없었다. 한 언니는 생원 김종(金琮)에게 시집갔다. 권씨 고모는 아들 익(翼)을 낳았는데 유사(儒士)이며, 딸은 승지 정원(鄭源)에게 시집갔다. 이씨 고모는 아들 오(塢), 기(垍), 기(基), 용(墉)을 낳았다.

원문

艎之子忠男,孝男。艤之子弘俊,挺俊。女幼。艇之子克俊,宅俊。女金鐩妻。餘幼。某之子耆俊,壽俊,耈俊,命俊。二女幼。琮之子光潤。女宋惟敬妻。餘幼。翼之子慶,賀,喜。塢之子畹。墉之子疇。玄孫男女幷六人。嗚呼。諸父之外除。屬先人以麗牲。斬石久矣。嘗欲使不肖圖懿詞。不幸罪逆仍禍。實懼亟死墜命。以重不孝。不敢以緩。萬曆四年歲次丙子七月壬辰朔。孤孫某。泣血謹表。

번역

배(艎)의 아들 충남(忠男), 효남(孝男), 배홍준(裵弘俊)과 정준(挺俊), 딸 유(幼), 정(艇)의 아들 극준(克俊)과 택준(宅俊), 딸 금공(金甌)의 처, 나머지 아이들, 모(某)의 아들 기준(耆俊), 수준(壽俊), 소준(耈俊), 명준(命俊), 두 딸, 유(幼), 종(琮)의 아들 광윤(光潤), 딸 송유경(宋惟敬)의 처, 나머지 아이들, 익(翼)의 아들 경(慶), 하(賀), 희(喜), 오(塢)의 아들 원(畹), 용(墉)의 아들 주(疇), 현손(玄孫) 남녀 모두 여섯 명입니다. 아, 여러 부친의 외제(外除)를 선인에게 속하여 아름다운 제사를 드리게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일찍이 불초한 제가 의사(懿詞)를 짓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죄역(罪逆)을 저질러 화가 미쳐 실로 죽음이 임박할까 두려워 효성을 무겁게 하는 일이 될까 감히 지체하지 못하였습니다. 만력(萬曆) 4년 병자년 7월 1일 초하루에 고손 모는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표문합니다.

107.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神道碑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46B, ITKC_MO_0200A_A043_546C ...

원문

完山李氏。□國宗姓也。自司空諱翰。至我□太祖。直爲渭源。中出於□穆,翼,度,桓。而爲別派者。號四王子孫。有義安伯和。出桓王。季於□太祖。佐運草昧。連策開國,定社,佐命三勳。位特進領三司。配享□太祖廟庭。公實後之。公諱亨順。通父字。始以門功。屬心義衛。旋試才武。補兼司僕。授永建萬戶。丙寅。□中廟靖國。公受幹於三大將。與有大功。及頒鐵券。不乘時矜衒。只錄原從上等。明年別試。登武科。榜未唱。拜宣傳官。冬。遭母喪。喪除。復前職。壬申。遷軍器主簿。出監扶安縣。十考取最。陞內贍判官。戊寅。虞候關西。周歲就本道。爲府使昌城。任滿。召還以典設守。嘉靖二年。□國家征遂閭延胡人。公時倅龜城。充雷奔都將以行。諸將多失律抵罪。公獨善運機策。物議多歸。尋超折衝將軍。咸鏡北道虞候。未及赴。進牧吉州。及瓜。護軍兼五衛將。戊子正月。建州衛逆胡。虐殺滿浦節制使沈思遜。□朝廷震駭。歷揀武臣。咸謂無如公者。卽其日。上引見敦諭。□賜弓馬送代之。狺猘返順。棘圉以靖。入敍訓鍊都正。辛卯。擢嘉善。會寧府德府乃北界大藩。常選重人而帥臣爲尤重已而示戎缺登公拜之三公□啓以在府未幾。亟領本營。材器雖倫恐見瞷於彼敵。謂我□國乏使。仍之。甲午。以上護軍還□朝。兼五衛都摠府副摠管。冬。充謝□恩使朝京。明年。復□命爲同知中樞府事。餘如故。夏。□命鎭平安道。將出節。忤權要。托沮以他事。俄爲公議所惜。得節度忠淸兵馬。終更入帶禁旅。閑慢四年。蓋前之不喜■。猶權地也。以僉知中樞府事。卒於正寢。辛丑三月胐也。享壽六十有七。公性質厚重雄遠。寡言笑。不喜聲色。事親孝謹。與朋友信。待宗黨加惠愛。婚喪助給不怠。至取鞠孤幼嫁娶之。居家。未嘗營業。莅官。奉公惟謹。故官雖達。屋不潤。屢膺邊劇。克遵委寄。類有遺愛。以聲績稱。會寧日。城中失火。藩胡爭奔走救滅。人皆異之。及逢燕路。莫不叩首涕泣。其施恩所濡。在敵猶然。某嘗聞尙成安公。每稱公眞可任將曰。雖泰山崩於前。目不瞬者。唯公然尒。公考諱從胤。金城縣令。□贈刑曹參判。祖諱孝孫。司膳主簿。□贈戶曹參議。皆推公貴。曾祖諱湛。知敦寧府事。卽義安子。公妣。戶曹參判淳伯之女。公配慶源府使永禧之女。俱全義李氏■近派。幷封貞夫人。公葬在先隴廣州治東■■■坐之原。夫人享年七十有八。丁未八月二十九日卒。追而祔焉。後公凡七年。男三人。續。縣令。綱。漢城參軍。繼。通政郡守。縣令郡守。咸有治郡名。女一人。適宣務郞尙鵬南。乃成安子。有文行。早沒。側室子三人。綰,紡,繕。女三人。伯季爲鄭世湖,鄭待善妻。中爲判書蔡世英妾。縣令五男。高明。別坐。文明,欽明,克明,誠明。一女適趙應吉。參軍。一男就明。三女適宋耆壽,李暮,孟惟白。宣務一男。蓍孫。司紙二女。長適縣令鄭麟壽。次某荊布。

번역

완산 이씨는 □ 나라의 종성(宗姓)이다. 사공(司空) 휘 한(翰)으로부터 우리 □ 태조에 이르기까지 곧바로 위원(渭源)이 되었고, 중간에 □ 목(穆), 익(翼), 도(度), 환(桓)이 나왔는데 별파가 된 자는 사왕자손(四王子孫)이라 호칭한다. 의안백 이화(李和)는 환왕(桓王)에게서 나와 □ 태조의 계씨(季氏)이다. 운수(運數)가 어두운 때를 도와 연이어 개국과 정사(定社)에 책략을 내고, 명을 도와 세 번 공훈을 세웠다. 지위는 특진(特進)으로 삼사(三司)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공 실후(公實後)는 휘가 형순(亨順)이고 통부자(通父字)이다. 처음에는 문공(門功)으로 심의위(心義衛)에 소속되었고, 곧이어 재주와 무예를 시험하여 겸사복(兼司僕)에 보임되었다. 영건만호(永建萬戶)에 제수되었다. 병인년에 □ 중묘가 정국(靖國)되니 공이 삼대장(三大將)의 대장으로 뽑혀 큰 공을 세웠다. 철권(鐵券)을 반포할 때에는 시기를 이용하여 자랑하지 않고 단지 원종상등(原從上等)에만 기록하였다. 이듬해 별시(別試)에서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방목(榜目)이 불리기 전에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상기(喪期)가 끝났다. 전직에 복명하였다. 임신년에 군기시 주부로 부안현(扶安縣)의 수령으로 나가서 10번 고과를 받아 최우를 차지하고 내섬시 판관(內贍寺判官)으로 승진하였다. 무인년에 우후(虞候)로 관서(關西)에 가 있다가 1년이 지나 본도(本道)로 돌아와 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지냈다. 임기가 차자 소환되어 전설수(典設守)가 되었다. 가정(嘉靖) 2년에 중국에서 수려연호(遂閭延胡)의 오랑캐를 정벌할 때 공이 당시 귀성 현감으로 우후로 충군(充軍)되어 도장(都將)으로 갔는데, 여러 장수가 대부분 법을 어겨 죄를 받았으나 공만은 홀로 기책(機策)을 잘 써서 물의가 많이 그에게 돌아갔다. 곧바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초고되고 함경북도 우후가 되었는데,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길주목(吉州牧)으로 옮겨 갔다. 과일이 됨에 이르러 호군 겸 오위장이 되었다. 무자년 1월에 건주위(建州衛)의 역적 오랑캐가 만포 절제사(滿浦節制使) 심사손(沈思遜)을 잔인하게 죽였다. 조정이 크게 놀라 여러 무신을 두루 뽑았는데 모두 공만 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바로 그날에 상이 불러서 보고 돈유(敦諭)하고 활과 말을 하사하여 대신 보냈다. 맹수도 순복되고 가시나무도 평온해졌다. 훈련도정(訓鍊都正)에 들어가서 서훈(敍訓)을 받았다. 신묘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발탁되었다. 회령부(會寧府)와 덕천부(德川府)는 북쪽 변방의 큰 번진이다. 항상 인재를 뽑아 수신(帥臣)으로 삼는데, 더욱 중시하여 군사적 결함이 보이면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다. 삼공(三公)에 제수되었으나 계사(啓辭)에 “부(府)에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속히 본영(本營)을 맡으셨습니다.” 하였다. 재주와 기량이 뛰어났지만 저 적들에게 비웃음을 받을까 염려하여, 우리 나라에 사신이 부족하다고 하여 그대로 두었다. 갑오년에 상호군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겨울에 사은사(謝恩使)로 조경(朝京)하였다. 이듬해에 복명하여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나머지는 예전과 같았다. 여름에 평안도 진무사(鎭撫使)로 나가려 하였는데 권세 있는 자의 비위를 거스르자 다른 일로 핑계를 대었다가 곧 공론에서 안타깝게 여겨졌다. 절도사로 충청 병마절도사를 얻었으나 끝내 다시 금군을 데리고 들어왔다. 한만(閑慢)한 4년 동안은 대체로 앞에서 비위를 거스르지 않았다. 유권지(猶權地)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정침(正寢)에서 졸하였다. 신축년 3월에 죽었는데, 향수는 67세였다. 공은 성품이 후중하고 의지가 굳건하며 말이 적고 웃음이 없었으며, 성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근면하였으며, 벗들과는 신의를 지켰다. 종당(宗黨)을 대할 때에는 은혜와 사랑을 더해 주어 혼사나 상사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심지어 고아들을 거두어 시집보내기도 하였다. 집안살이에는 일삼는 것이 없었고 관직에 나아가서는 공무를 오로지 근신하였으므로 벼슬이 높아도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여러 차례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맡았으나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하여 후인들에게 사랑을 남겼다. 명성과 업적이 칭송되었는데, 회령(會寧)에 화재가 발생하자 번호(藩胡)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불을 끄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연경(燕京)으로 갈 때에는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렸으니, 그 은혜를 베푼 것이 적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모(某)가 일찍이 듣건대 상성안공(尙成安公)이 매번 공을 진정 장수(將帥)로 맡길 만하다고 칭찬하면서 “비록 태산이 눈앞에 무너지더라도”라고 하였다고 한다. 눈을 깜박이지 않는 것은 오직 공연(公然)이 그러하였다. 공의 아버지는 휘는 종윤(從胤)으로 김성 현령(金城縣令)을 지냈고, 추증(追贈)되어 형조 참판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휘가 효손(孝孫)으로 사선부 주부(司膳府主簿)를 지냈고, 추증되어 호조 참의가 되었으니 모두 공귀(公貴)에 추대되었다. 증조는 휘가 담(湛)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였는데 바로 의안(義安)의 아들이다. 공의 어머니는 호조 참판 순백(淳伯)의 딸이고, 공이 배필로 삼은 사람은 경원 부사(慶源府使) 영희(永禧)의 딸인데 모두 전의 이씨(全義李氏) 근파(近派)로서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공을 장사 지낸 곳은 선농 광주(先隴廣州) 치동(治東)의 묘소 앞이다. 부인은 향년이 78세로 정미년 8월 29일에 졸하였는데, 뒤에 추후에 부묘하였다. 공이 죽은 뒤 7년 동안 아들 3명이 있었는데, 이어 현령 강(綱)과 한성 참군(漢城參軍), 통정 군수(通政郡守), 현령 군수(縣令郡守)를 지내어 모두 고을을 잘 다스렸다는 명성이 있었다. 딸 하나는 선무랑 상숭남(尙崇南)에게 시집갔는데, 바로 성안(成安)의 아들이다.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측실의 아들 3명은 완(綰), 방(紡), 선(繕)이고, 딸 3명은 첫째와 막내는 정세호(鄭世湖)와 정대선(鄭待善)의 처가 되었고, 둘째는 판서 채세영(蔡世英)의 첩이 되었다. 현령(縣令)의 아들 5명은 고명(高明), 별좌(別坐)인 문명(文明), 흠명(欽明), 극명(克明), 성명(誠明)이고, 딸 하나는 조응길(趙應吉)과 혼인하였다. 참군(參軍)의 아들 하나는 주명(就明)이요, 딸 셋은 송기수(宋耆壽), 이모(李暮), 맹유백(孟惟白)과 혼인하였고, 선무사(宣務使)의 아들은 시손(蓍孫)이고, 사지(司紙)의 두 딸 중 첫째는 현령 정인수(鄭麟壽)와 혼인하였고, 둘째는 모형(某荊)과 포시(布氏)에게 시집갔다.

원문

餘內外曾玄若干人。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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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내외(餘內外)는 증현(曾玄)의 약간의 사람이다. 명에 이르기를,

원문

帝錫岐周。姬公上之。民戴朝鮮。義安諒之。親同魯懿。咸休俾熾。赳赳將軍。纘翊中興。勞謙不伐。射科由登。外內靡監。歷紀于勤。三邊莫淸。公遏其氛。屹如長城。莫埒吾聲。逮不媚人。亦數攸丁。惟恩在敵。有構非情。反縮何嫌。餘福餉後。嶄然見角。不十其數。治廣伊東。度鮮伊原。若堂四尺。桓王之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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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기주를 내리시니 공이 그 위에 오르셨고 백성들이 조선을 받드니의로운 안평을 헤아렸네 친척은 노나라 의로움과 같아서 모두가 아름다움을 번성케 하였네 용맹스러운 장군이여 중흥을 도왔네 겸손하여 공을 세우지 않았고 과거에 급제하였네 안팎으로 감시하지 않고 부지런히 다스렸네 삼면의 변방이 평안치 못했으나 공이 그 기운을 막았네 높기가 장성과 같아서 우리 명성 견줄 이 없었네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또한 자주 정벌하였네 오직 은혜가 적에게 있었으니 구덩이를 파는 것은 본심이 아니었네 도리어 물러나는 것을 어찌 꺼리랴 남은 복을 후세에 전하려 함이었네 우뚝한 뿔이 보이니 열에 열이 아니었네 동쪽 이주를 다스리고 선원도를 두루 살폈네 사척당과 같으니 환왕의 자손이로다

108. 折衝將軍。守全羅道兵馬節度使李公神道碑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47C, ITKC_MO_0200A_A043_547D ...

원문

李公諱大伸。字舒仲。姓出杞城。高祖曰時。漢城府尹。曾祖曰興德。嘉善中樞院使。祖孟孫。□贈刑曹參議。考承根。□贈戶曹參判。妣載寧鄭氏。□贈貞夫人。以正德庚午。生公。公生而異。特有氣槪。用武藝。登□靖廟朝丁酉科。甲辰。調部將。自後歷鍾城府,軍資監判官。轉郭山郡守。辦理聲生。昇朔州府使。□御史以廉卹聞。□明宗褒書。賜表裡。俄擢折衝將軍,麟山鎭僉節制使。旋移滿浦鎭。蓋邊胡益近。禦衝尤重也。先是。立巖胡人。冒耕滋蔓。公亶告撤還。□朝憂得紓。遷府使穩城。□御史又白其淸謹。嘉錫之典。至是再焉。代還五衛將。庚申。出牧海州。明年。淸洪道水軍節度使。陟慶尙左道兵馬節度。班視從卿。□恩推先代。及瓜。以事罷。未幾。節度淸洪兵馬。所管洪州。有內農。隷僕張甚。凌駕營邑。方伯亦不敢何。公迺啓拿抵法。近土以淸。丙寅。還朝。□上特授內乘。冬。又帥慶尙右道。秩滿。移鎭湖南。尋超嘉善大夫,會寧府使。邊上方苦饑。公單心賙恤。壬申。又典禁旅。會平安道西海坪。又有冒禁之胡。先前伐粟。未得善利。□廷議以節度擧公。復使行之。裨下僨機。累逮主將。責配沃溝。明年。□賜環。疏陳六鎭戶布之弊洎茂山移堡等事。□上可其言。敍衛將。連牧畿甸。爲廣州,江華。拜訓鍊院都正兼衛將。以疾卒於漢京之寓邸。己卯十一月十一日也。壽七十。訃聞。□上悼之。弔孤祭靈。賻贈如禮。諸孤奉輤幃。明年二月某甲。返葬于鎭岑某里先塋坐乾之麓。公身頎八尺。風神軒豁。率履坦夷。有長者風。南冥曺先生亦許與氣義。立朝四十年。儉約自居。不犯官營私。京鄕不立一室。居公莅政。撫摩軍民。類有遺惠。處兄弟友。在朋友信。其施親舊。雖蒙闊大之譏。亦有尙義可觀者。性喜觀書。議事。頗據古人行迹。涉獵詩家。有或唱酬於人。在乙巳。嘗錄原從勞。戊寅。元功削而受一告者。幷追之。公亦等降焉。時論方擬復之。鷄夢遽妖。斯可歎已。貞夫人宋氏。忠順衛碩挺之女。克內相。先沒十九年。葬在公左。生一男二女。男森。先娶朴衡之女。生男女。男慶龍。後娶金夢弼之女。生二女。公女長適愼某。生男女。男友仁。次適忠義衛金應善。側房生八男。梅,析,柏,桐,檜,松,相,楷。孼孫男女幷二十人。皆幼。梅之女爲承旨宋應漑妄。介而問余銘。吾先執也。不敢辭。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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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李公)의 휘는 대신(大伸)이고 자는 서중(舒仲)이다. 성은 기성(杞城)에서 나왔다. 고조(高祖) 이시(李時)는 한성부 윤(漢城府尹)이었고, 증조(曾祖) 이흥덕(李興德)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원사(中樞院使)였으며, 조부 이맹손(李孟孫)은 □에 증직(贈職) 형조 참의(刑曹參議)이고, 고조 이승근(李承根)은 □에 증직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다. 비는 재령 정씨(載寧鄭氏)로 □에 증직 정부인(貞夫人)이다. 정덕(正德) 경오년에 공이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라 특별히 기개(氣槪)가 있었다. 무예를 익혀 정묘조(靖廟朝) 정유과(丁酉科)에 급제하였다. 갑진년에 조부장(調部將)이 되었다. 그 뒤 종성부 판관(鍾城府判官),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전곽산 군수(轉郭山郡守)를 지내면서 일을 잘 처리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삭주 부사(朔州府使)에 올랐다가 □ 어사(御史)로 있으면서 청렴하고 백성을 구제한 것으로 이름이 났고, □ 명종(明宗)의 포서(褒書)를 받았다. 표리(表裡)가 갖추어졌다고 하여 곧 절충장군 인산진 첨절제사(折衝將軍麟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되었다가 이내 만포진(滿浦鎭)으로 옮겨 갔으니, 이는 변방의 오랑캐가 더욱 가까이 와서 방어하는 일이 더욱 중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입암(立巖)의 호인(胡人)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점차 번식하였다. 공이 진실로 고하여 철환(撤還)되니, 조정의 근심이 풀렸다. 옮겨 부사(府使)가 된 온성(穩城)에 어사가 또 그 청렴과 근신함을 아뢰어 가상히 여겨 내린 은전이 이에 이르러 두 번이나 있었다. 오위장으로 대신되어 돌아와 경신년에 해주(海州)의 목사로 나갔다. 이듬해 청홍도 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가 경상 좌도의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오르니, 반열이 종경(從卿)과 같았다. 은혜가 선대에서 미쳤다. 구과(瓜果)로 인하여 파직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절도사 청홍 병마절도사가 관할하는 홍주(洪州)에 내농(內農)이 있었는데, 예복(隷僕) 장심(張甚)이 영읍을 능멸하니 방백(方伯)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 공이 아뢰어 잡아다 법대로 처벌하게 하였다. 근토(近土)가 청정해졌다. 병인년에 조정으로 돌아오니 상이 특별히 내승(內乘)을 주었다. 겨울에 또 경상 우도(慶尙右道)를 거느리고 관직이 차서 호남(湖南)의 진무(鎭務)로 옮겨 갔다. 곧바로 가선대부 회령 부사(嘉善大夫會寧府使)에 초진(超晉)되었다. 변방이 몹시 기근을 당하자 공이 혼자 힘써 구휼하였다. 임신년에 또 전금려(典禁旅)가 되어 회평(會坪) 평안도 서해(西海)로 갔다. 또 금령을 어기고 호란(胡亂)이 일어났는데, 앞서 곡식을 베는 데에 잘하지 못하였다. □ 조정의 의논으로 절도사로 공을 뽑아 다시 사행하게 하였으나 비하(裨下)가 기회를 엿보아 여러 번 주장을 잡았으므로 책임을 물어 옥구(沃溝)에 정배되었다. 이듬해에 □ 환을 내리고, 육진의 호포(戶布)에 대한 폐단과 무산성(茂山城)을 옮겨 성을 쌓는 등의 일을 상소하여 진달하니, □ 주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위장(衛將)으로 서용하고 기전(畿甸)을 연이어 목민하게 하였는데, 광주(廣州)와 강화(江華)를 맡았다. 훈련원 도정 겸 위장에 제수되었는데, 병이 들어 한양의 우저(寓邸)에서 졸하였다. 기묘년 11월 11일이다. 나이는 70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 주상이 슬퍼하여 고아를 조문하고 영제(靈祭)를 지내며 예법대로 부의물을 보내어 주고, 여러 고아들을 거마에 태워 돌보았다. 이듬해 2월 모일에 진잠(鎭岑) 모리 선영의 건방(乾傍) 기슭으로 돌아와 장사 지냈다. 공은 키가 8척이나 되고 풍신이 호탕하여 걸음걸이가 평탄하고 여유가 있어 장자의 풍모를 지녔다. 남명 조 선생도 또한 그 기상의 의리를 인정하였다. 벼슬에 나아간 지 40년 동안 검소한 생활을 스스로 지켜 관청의 물건을 범하여 사사로이 쓰지 않았으며, 서울과 지방에서 집 한 채도 세우지 않았다.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면 군민들을 어루만져 은혜를 베푼 것이 마치 남긴 것이 있는 듯하였고, 형제와 벗에게는 신의를 지켰다. 친척들에게 베푼 것은 비록 널리 베풀었다는 기롱을 받았으나 또한 의리를 중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성품이 책 보기를 좋아하여 일을 논할 때에 자못 옛사람의 행적에 근거하였고, 시가(詩家)를 두루 탐구하여 혹 남과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을사년에 일찍이 원종공(原從公)을 기록하고 무인년에 원공(元功)이 삭직되었다가 한 번 고명(告命)을 받고 돌아온 것을 모두 추증하였는데, 공도 똑같이 강등되었다. 시론(時論)이 바야흐로 복직시키려 하였으나 갑자기 요망한 계몽(鷄夢)이 있었으니, 이것은 탄식할 만하다. 정부인 송씨는 충순위(忠順衛) 석정(碩挺)의 딸로서 내조를 잘하였다. 선친보다 19년 먼저 죽어 공의 왼쪽에 장례 지냈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삼(森)은 박형(朴衡)의 딸과 먼저 혼인하여 남녀를 낳았고, 아들 경룡(慶龍)이 있다. 뒤에 김몽필(金夢弼)의 딸을 얻어 두 여식을 낳았다. 첫째딸은 신(愼)씨의 어떤 사람에게 시집가서 남녀를 낳았고, 둘째딸은 충의위(忠義衛) 김응선(金應善)에게 시집갔다. 측방(側房)에서 여덟 아들을 낳았는데 매(梅), 석(析), 백(柏), 동(桐), 회(檜), 송(松), 상(相), 해(楷)이다. 손자ㆍ손녀가 모두 20명인데, 모두 어린아이들이다. 매의 딸이 승지 송응개(宋應漑)의 망인(妄人)이 되어 나에게 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먼저 이 일을 맡았으므로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명을 짓는다.

원문

有矯虎臣。邦之特之。六于元戎。王之擢之。居不家爲。公之愊之。載有石琢。人之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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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호랑이 같은 신하가 있어 나라에서 특별히 높였네 육우의 원융에 임명되어 왕이 발탁하였네 집안을 다스리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니 공이 진실하게 보았네 이제 비석이 세워지니 사람들이 본받으리라

109. 折衝將軍。守慶尙右道兵馬節度使李公神道碑銘。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48D, ITKC_MO_0200A_A043_549A ...

원문

惟李氏出忠淸之全義縣。吾宗也。知其世。麗祖之一三韓也。鼻祖克先後有大伐。賜名棹。位大師。肇自來代有令人。簪笏仍業。未嘗有替。大師入世政堂文學彦沖。號芸齋。用才德文章。最爲名臣。入□本朝。有諱龜。判漢城。於政堂。間二代。公高祖也。曾祖諱直幹。刑曹正郞□贈司僕寺正。祖諱宏植。求禮縣監。□贈吏曹判書。考諱益禧。繕工監副正。□贈兵曹參判。妣東萊鄭氏。□贈貞夫人。卽左議政恭肅公諱佸之女。公諱俔。字磬叔。生成化丁未。越正德乙亥。登武科。榜未唱。鄭夫人卒。壬午。始拜宣傳官。選也。遷主簿廣興倉。移司贍寺。出監務安縣。未幾罷。由部將。復爲宣傳。己丑。□靖廟謁□光陵。公承□命進退。應對捷敏。□上才之。□御批本職兼內乘。轉□世子翊衛司。爲左司禦。改司贍判官。自是至丁酉八年之間。歷正郞刑曹,僉正司僕,內贍等寺,典籤宗親府,副正禮賓寺正,司饔訓鍊二院。訓院缺都正。□上特命昇之。班賜折衝擇軍。兼將五衛。帶內乘。猶如故。戊戌。出爲潭陽府使。刻戒前案曰決誤知非。有天臨罰。時華使□詔□國中。事不擾民。供晏以辦。公有第甚光顯。旣而獲譴。公亦以親故。鐫罷數年。始節制花梁鎭。入爲僉知中樞府事兼衛將。甲辰冬。牧使驪州。□英陵在州治。供奠之爲。褻不如式。□聞于朝。一依太常規。乙巳。以事遞。丙午。復授僉樞。丁未。拜慶尙右道水軍節度使。代還。旋□命授鉞。節度前路兵馬。鎭昌原。辛亥。陳軍民十條弊瘼以復命。□上嘉納之。壬子。訓鍊都正。明年。拜咸鏡南道節度使。□明廟用言者。不果遣。然猶憖之。甲寅。府使龜城。遐氓不知祭先之禮。公諭令設主。旌異孝者以勸視之。丁巳春。病歸。夏。除僉樞。庚申。牧廣州。壬戌。復都正鍊院。此乃西班華選。至是而公獨三之。享年七十九卒。嘉靖乙丑九月十六日也。訃聞。□上賜弔祭若賻如禮。公少業弓馬。才冠世。遭遇□中廟眷顧超卓。十年近侍。常被□召接。賜賚亦多。嘗受書籍筆硯。寶之傳家。居官奉職。勤幹擧事。故東江浸斥漢都。□命公築防新川。泰安郡漕路有礙。亦□命公疏鑿。安興梁。皆專任之。凡所履歷。擧有聲稱。其爲邑宰。未嘗私服臨公。其在營鎭。撫存軍民。遭時飢凶。必力賑。及瓜。至有願借者。謹於追遠。厚於敦睦。年登大耋。子孫蕃昌。立三□朝五十餘年卒。以功名終。豈無德而致哉。公居在西湖上。構亭家後。扁曰知足。後以三樂。迺自敍曰。叨恩二品。追寵先代。一樂也。夫婦偕老。年到八袠。二樂也。子孫滿眼。三樂也。竟終於此。諸孤奉治命。用是年十月二十七日。窆于仁川田反里。世葬也。配貞夫人趙氏。義禁府經歷澈之女。漢陽望族本朝開國功臣溫之後。今八十七歲。尙無慈。子男五人。女一人。男長思舟。郡守。次思舫次思航二人。皆先公早卒。次思艇。趾美武科。今以僉知中樞府事。典禁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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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충청도 전의현(全義縣) 출신으로 나의 종친이다. 그 대를 살펴보면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한반도를 통일한 때부터 시작되는데, 비조(鼻祖)가 앞서 큰 정벌을 이루어 조로(棹櫓)의 이름을 하사받고 지위가 대사(大師)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고려 태조 때부터 인망이 있는 사람으로 벼슬아치로서 가업을 계승하여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대사가 세상에 나와 정당(政堂)의 문학(文學)인 언충(彦沖)으로 호는 운재(芸齋)이다. 재덕과 문장으로 가장 명신(名臣)으로 이름났으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諱)가 귀(龜)로 한성 판서(漢城判書)를 지냈는데 정당의 두 대 사이에 낀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직간(直幹)으로 형조 정랑을 지내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의 휘는 홍식(宏植)으로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조의 휘는 익희(益禧)로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바로 좌의정 공숙공(恭肅公) 휘 합(閤)의 딸이다. 공의 휘는 현(俔)이고 자는 경숙(磬叔)이다. 정미년에 태어나고 을해년에 정덕(正德)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방목(榜目)이 나오자 아직 불리기도 전에 정 부인(鄭夫人)이 졸하였다. 임오년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는데, 선발된 것이다. 주부 광흥창(廣興倉)으로 옮겼다가 사섬시(司贍寺)로 옮겨서 무안현(務安縣)의 감무사(監務使)가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파직되었다. 부장(部將)을 거쳐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 기축년에 정묘(靖廟)께서 광릉(光陵)에 전알(展謁)할 때 공이 명을 받들어 나아갔다 물러갔는데 응대하는 것이 민첩하여 상이 재주를 칭찬하였다. 어필(御批)로 본직과 겸내승(兼內乘)을 주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옮겨 좌사어(左司禦)가 되었다. 사섬시 판관으로 고치고, 이후 정유년까지 8년 동안 정랑(正郞) 형조(刑曹), 첨정(僉正) 사복시(司僕寺), 내선시(內膳寺) 등을 거쳐 전첨(典籤) 종친부(宗親府), 부정(副正) 예빈시 정(禮賓寺正), 사옹원(司饔院)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지냈는데, 훈련도감의 도정(都正)이 비었으므로 상이 특별히 명하여 승진시켰다. 반사 절충택군(班賜折衝擇軍)에 겸장오위(兼將五衛)로 내승을 대동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다. 무술년에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나가서 전안(前案)을 각기 새기기를 “잘못을 알고도 바로잡지 않으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라고 하였다. 이때 화사(華使)가 조서를 가지고 국중에 들어와 일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공양을 편안하게 마련하여 공의 명성이 매우 빛났다. 얼마 뒤에 책임을 지고 돌아왔는데, 공도 친한 벗이 있었으므로 몇 년 동안 파직되었다가 비로소 화량진(花梁鎭)을 절제(節制)하고 들어와 첨지중추부사 겸 위장(僉知中樞府事兼衛將)이 되었다. 갑진년 겨울에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는데, 영릉(英陵)이 주치(州治)에 있어서 공양을 올리는 것이 예법에 맞지 않다고 조정에서 듣고 태상(太常)의 규례대로 하도록 하였다. 을사년에 일로 인하여 체차되었다가 병오년에 다시 첨추부사가 되었다. 정미년에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에 제수되어 대신으로 돌아왔다가 곧바로 명을 받들어 부임하여 전로 병마(前路兵馬)를 진창원(鎭昌原)에 두었다. 신해년에 군민의 10조 폐막(弊瘼)을 아뢰고 복명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임자년에 훈련도정(訓鍊都正)이 되었다.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에 제수되었다. □ 명종(明宗)이 말로만 내리고 실제로 보내지 않았으나 그래도 잊지 않았다. 갑인년에 부사(府使)로 귀성(龜城)에 있을 때 먼 지방 백성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예절을 몰랐으므로 공이 주상(主喪)을 세우도록 일러 주고 효행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정문(旌門)을 내려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본받게 하였다. 정사년 봄에 병으로 돌아왔다. 여름에 첨추(僉樞)에 제수되었다. 경신년에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임술년에 도정(都正)으로 연원(鍊院)에 복직되었다. 이는 바로 서반(西班)의 화선(華選)인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유독 세 번이나 제수되었다. 79세에 향년(享年)을 누리고 졸하였다. 가정 을축년 9월 16일이다. 부고를 듣고 □ 상이 조제(弔祭)와 부의(賻儀)를 예법대로 내려 주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재주가 세상에 드물었다. 중종 때 우연히 임금의 총애를 받아 매우 탁월하였다. 10년 동안 근시(近侍)하면서 항상 부름을 받았고, 하사품도 많아서 일찍이 서적과 필연(筆硯)을 받아 집안 대대로 보배로 전해 왔다. 관직에 있으면서 직무를 받들어 일을 성실히 처리하였으므로 동강(東江)이 한양 도성을 덮어 버렸다. □ 명공이 신천(新川)에 방책을 쌓고, 태안군(泰安郡)의 조운로(漕運路)가 막힌 곳에 또한 □명공이 소통시켰다. 안흥(安興)과 양주(梁州)를 모두 전임(專任)하였는데, 거쳐 간 모든 고을에서 모두 칭송이 있었다. 그가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사사로이 공무에 임한 적이 없었고, 영진(營鎭)에 있을 때에는 군민들을 보살펴서 기근을 당하면 반드시 힘써 진휼하였으며, 과일이 익으면 빌려 달라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 조상을 추모하는 데는 근실하고 동방(同坊)의 화목을 돈독히 하는 데는 후하니, 나이가 팔순에 이르렀고 자손이 번창하였다. 3대(代)를 세우고 50여 년 동안 조정에서 벼슬하며 공명을 이루었으니, 어찌 덕이 없어서 이룬 것이겠는가. 공은 서호(西湖) 가에 살면서 집 뒤에 정자를 지어 ‘지족(知足)’이라 편액을 걸었다. 뒤에 삼락(三樂)으로 고쳤는데, 스스로 서술하기를 “외람되이 은총을 입어 2품의 관직에 오르고 선대의 은총을 이어받은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부부가 해로하여 나이가 팔순에 이른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자손들이 눈에 가득한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마침내 이렇게 끝이 났으니, 여러 고아들을 거두어 다스리라는 명을 받들겠다.” 하였다. ○ 이해 10월 27일 인천(仁川) 전반리(田反里)에 안장하였다. 세장(世葬)이다. 정부인 조씨(趙氏)를 배향하였다. 의금부 경력 철지(澈之)의 딸로, 한양(漢陽)의 명문가이며 본조(本朝) 개국공신 온(溫)의 후손이다. 지금 87세인데 아직 자식이 없다. 아들 다섯에 딸 하나이다. 첫째 아들 사주(思舟)는 군수였고, 둘째 아들 사방(思舫)과 셋째 아들 사항(思航) 두 사람은 모두 선친을 일찍 여의었고, 넷째 아들 사정(思艇)은 지미 무과(趾美武科)로 지금은 첨지 중추부사 전금시 판서이다.

원문

階視尊考。次思艦。生員。女適縣監許震。郡守生三男。希說,希啓,希舜。思舫生一女。適參奉趙仁賓。思航生一男。希容。奉事。生員生一男二女。男希昌。女長適判官尹景祺。次幼。縣監生一男四女。男講。女長適趙繼韓。次適李晦。餘幼。希說生二男三女。男謙亨兌亨。女長適李鎬。餘幼。希啓生二男一女。男長升亨。餘幼。希舜生一男。幼。仁賓生四男二女。男孝,忠,孝,信。女長適權省。餘幼。希昌,景棋,講升亨,孝忠。皆生一男。幼。公之神道。宜藉巨筆。僉知推宗兮。獨以命某。見聞之稔。宜莫易也。遂爲銘。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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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階視)의 존고(尊考)는 함(艦)을 차사(次思)하고, 생원(生員)은 여가 현감 허진(許震)에게 시집갔으며, 군수(郡守)는 세 아들 희설(希說), 희계(希啓), 희순(希舜)을 낳았고, 사방(思舫)은 딸 하나를 낳아 참봉 조인빈(趙仁賓)에게 시집갔으며, 사항(思航)은 아들 하나 희용(希容)을 낳았고, 봉사(奉事)는 생원(生員)이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희창(希昌), 딸 중 큰애는 판관 윤경기(尹景祺)에게 시집갔으며, 차남은 현감(縣監)이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는데 아들은 강(講), 딸 중 큰애는 조계한(趙繼韓)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이회(李晦)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 어린아이는 희설(希說)이 아들 둘과 딸 셋을 낳았는데 아들은 겸형(謙亨)ㆍ태형(兌亨), 딸 중 큰애는 이호(李鎬)에게 시집가고, 나머지 어린아이는 희계(希啓)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장승형(長升亨)이고, 나머지 어린아이는 희순(希舜)이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어린아이는 인빈(仁賓)이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효(孝), 충(忠), 효(孝), 신(信)이고 딸 중 큰애는 권성(權省)에게 시집가고 나머지 어린아이는 희창(希昌), 경기(景棋), 강(講), 승형(升亨), 효충(孝忠)이 모두 아들 하나를 낳았다. 공의 신도에 의당 거필을 빌려야 하니, 모든 종손들이 추대하여 유독 모에게 명한다. 보고 들은 것이 익숙하니 바꾸기 어려워 마침내 명문을 지었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

雲住之山李城高。□翊扶神嵩輸大勞。□遠慶衮衮皆英髦。□文義公孫判漢城。□五世入國公又生。□啓之自躬遭聖明。□天閑十載雨露渥。□三領敎院恩除擢。□竟授登壇擁節鐸。□韜鈐莫施太平天。□獨享三樂汾陽年。□我詩不夸惟其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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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산 이성 고을이여 -원문 빠짐-/ 돕고 받들어 신숭을 부지하여 큰 수고를 하였네 -원문 빠짐-/ 먼 경사 이어져서 모두가 영모라 -원문 빠짐-/ 문의공손은 한성을 판관하였고 -원문 빠짐-/ 오대째 나라에 들어와 국공이 되었네 -원문 빠짐-/ 계지는 스스로 성명을 만나 -원문 빠짐-/ 십 년 동안 우로의 은택을 입었으니 -원문 빠짐-/ 세 번이나 교원의 은혜를 받고 발탁되어 -원문 빠짐-/ 마침내 등단에 제독을 받들게 되었네 -원문 빠짐-/ 도금은 태평성대에 시행하지 못했으나 -원문 빠짐-/ 분양의 삼락을 홀로 누렸으니 -원문 빠짐-/ 내 시는 과장 않고 오직 사실만을 말하노라

110. 領府事尙震妾節婦金氏狀

문체: 傳記類 / 行狀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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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正金胤宗良出女也。資性英敏。涉獵列女傳。粗識其理。領府事震喪夫人。而歸幹家事。閨治有法。無異夫人之時。撫視諸孫。克盡恩愛。辦其婚娶。誠意備至。接遇親屬。咸有禮意。領府公亦以此重之。迨其季年。尤被厚德所化。敬順承事。有加於舊。領府久病沈綿。幾過半歲。金廢食忘梳。晝夜侍疾。終始不懈。病旣日篤。每於子夜。焚香祝天。臨卒之夕。知必有變。搥胸噎塞。先自氣絶。領府屬纊之後。久而乃甦。襄事之前。哭不絶聲。慟極必絶。自分必死。分處家事於宗婦。水飮不入口者十餘日。其後雖因親切之勸。間或強飮。不過數呷而氣塞胸逆。不能安下。故又必隔日。然後乃擧。初欲隨嫡孫。別廬墓側。以供奠需。因僉共力止。未得遂意。則又倩畫師。欲寫遺像。日久而模。不逼眞。乃歎曰。妾誠心不至。故不能通神於筆下尒。爲文告殯。冀或入夢於畫師。而庶有所憑倣也。數日。忽因夢自悟曰。國相大人之靈。其肯降感於賤工而要爲像耶。乃及永遷之際。奉衣服冠帶以告曰。願奉遺物。以爲依歸。遂精灑別舍。安於□賜几之上。而兼設平生文墨器用於左右。朝夕上食。日三奠酒。務潔而不務豐。以爲可繼之道。奠必親執。而哭必盡哀。有時往省于墓。則雖絰旬過月。斷絶水飮。隆冬極暑。恒着裌衣。枕藉寒廳。悲哭益甚。故形銷骨鑠。不復舊樣人貌。常伏怵褥。起居須人。扶而後行。自初喪哭過。眼瞳已不如舊。又常着厚帽。蒙至半面。未嘗開視。故積淚浸淫。馴成腐爛。左眼已枯。右眼亦如緦隔。不能見物。終制之後。神主上廟。朔望及俗節。必精備奠具。參祭于祠堂。而陳衣之祭。則猶不輟焉。其哀慟迫切之情。哭泣悲慕之慘。恒若袒免之口。非但衰服之不除。飯醬薰辛之不食。而饘粥之厚者。尙不下咽。唯以米飮數匙爲命。聲氣纔續。而哭聲則猶若。隣里之人。聞其哀號。莫不悲憐。日月旣逝。追慕尤深。待遇諸孫。加意於前曰。亡人血氣。尙在於玆也。至於婢僕之賤。見憐於生時者。則撫恤異常。且其母家所傳臧獲田土甚多。乃盡錄給於承祠幼孫。尋常至願。唯以速從地下爲心。故雖或疾病甚劇。呻痛之苦。不發於聲。或有以醫藥爲說者。必却之曰。吾得死所幸也。此外操節。多有可觀。不可縷錄。而其精白之誠。淑潔之行。雖古之節婦。未必多讓。且甚天稟。雖有良性。而豈非承事君子。得於薰炙而其所感發者多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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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都正) 김윤종(金胤宗)은 어진 딸을 낳았는데, 자질이 영민하여 《열녀전(列女傳)》을 두루 읽어 그 도리를 대략 알았다. 영부사 진(震)의 상부인(喪夫人)이 되어 집안일을 맡아 다스렸는데, 규중(閨中)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 부인으로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여러 손자들을 어루만져 사랑을 다하고 혼인을 치를 때 성의가 지극하였으며 친속을 접대할 때 모두 예의가 있었다. 영부사 공(公)도 이 때문에 중히 여겼다. 그 늦은 나이에 더욱 두터운 덕이 드러나서 공경하고 순종하여 섬기는 데에 이전보다 더하였다. 영부사가 오래 병을 앓아 반년이 넘었는데, 김씨는 음식을 끊고 머리 빗는 것도 잊은 채 밤낮으로 간호하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병이 날로 심해지자 매번 한밤중에 향을 피우고 하늘에 축원하였는데, 죽음이 임박한 저녁에는 반드시 변고가 있을 줄 알고 가슴을 치며 목이 메어 먼저 기절하였다. 영부사가 돌아가신 뒤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하다가 장례를 치르기 전에야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애통함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죽을 줄로 여깁니다. 분수상 종부의 집안일을 맡아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한 지 열흘 남짓 되었고, 그 뒤에는 비록 친척들의 권유로 간혹 억지로 마시기도 하였으나 두어 모금만 마셔도 기가 막히고 가슴이 거슬러 편안히 삼키지 못하였으므로 또 반드시 하루를 걸러서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적손(嫡孫)을 따라 별장(別莊)에 묘소 옆으로 가서 제수를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려 말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화사(畫師)를 시켜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오래 그려도 진상(眞像)에 가깝지 않자 탄식하기를 “첩의 정성이 미치지 못해서 붓끝으로 신령과 통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고, 빈소에 고하는 글을 지어 화사에게 꿈속에 들어와서나마 의지할 만한 바가 있게 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갑자기 꿈에서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어 “국상대인(國相大人)의 영령이 어찌 천한 나를 내려보내 감응하여 초상을 그리게 하였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영구히 이장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봉분(奉墳)의 의복과 관대(冠帶)를 가지고 가서 고하기를, “유물을 받들어 의귀처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고 마침내 별사(別舍)에 정결히 씻어 놓고 사궤(賜几) 위에 안치하고 아울러 평생 쓰던 문묵기(文墨器)를 좌우에 배치하였다.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고 하루 세 번씩 술을 올리되, 풍성함보다는 청결함을 힘써서 계속할 수 있는 방도로 삼았다. 제사는 반드시 직접 집행하고 곡은 반드시 슬픔을 다하였으며, 때때로 묘소에 가서 살피면 비록 질건(絰巾)과 순(旬)이 지나고 달이 지났어도 물도 끊고 먹지 않았으며, 한겨울이나 혹서에도 항상 솜옷을 입고 차가운 방에서 잠을 자면서 슬퍼하고 곡하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그러므로 형체가 녹아내리고 뼈가 녹아서 예전의 모습이 아니어서 늘 두려워 떨며 일어나거나 거둥할 때에는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였다. 초상(初喪)을 치른 뒤로 눈동자가 이미 예전 같지 않았고, 또 항상 두꺼운 모자를 써서 얼굴 반쪽까지 가리고 보지 않아서 쌓인 눈물이 스며들어 썩어 문드러져 왼쪽 눈은 말라 버렸다. 오른쪽 눈이 실로 깁을 낀 것처럼 사물을 볼 수 없었다. 종제(終制)한 뒤에 신주를 상묘(上廟)에 올리고, 삭망 및 세시절에는 반드시 정성껏 제수를 갖추어 사당에서 참배하였다. 진의제(陳衣祭)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았으니, 애통하고 절박한 마음과 곡소리 내며 슬퍼하는 모습이 항상 상복을 입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밥이나 장아찌 같은 향기 나는 음식은 먹지 않고 죽조차도 진한 것은 삼키지 못하여 오직 쌀뜨물 몇 숟가락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목소리는 겨우 이어졌으나 곡소리는 여전히 마치 이웃 사람들이 그 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 비련(悲憐)해하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추모의 정이 더욱 깊어졌다. 여러 손자들을 대할 때에는 “망인의 혈기가 아직도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며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생전에 가엾게 여겼던 비복(婢僕)에게는 보통과 다르게 보살펴 주었다. 또 그 어머니 집에서 전해 받은 장획(臧獲)한 토지가 매우 많았다. 이에 모두 기록하여 승사(承祠)의 어린 손자에게 주었다. 평소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직 속히 지하로 가는 것이었으므로, 비록 혹 질병이 심하게 생겨서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할 때에도 그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혹 의약(醫藥)을 쓰자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물리치고는 “나는 죽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이 밖에 절조를 지킨 것이 볼만한 점이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는 없지만,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과 순박하고 청렴한 행실은 옛날의 절부(節婦)라 할지라도 반드시 많이 못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또 타고난 성품이 비록 선량하였으나 어찌 군자를 섬기면서 그 가르침을 받아 감화된 것이 많지 않겠는가.

111.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尙公行狀。

문체: 傳記類 / 行狀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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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震。字起夫。木川人。其先本縣吏。高麗太祖統合三韓。木州人以百濟遺民。屢有警擾。賜姓畜獸以辱之。公之先。得象爲姓。後改以尙焉。有諱國珍。生諱得儒。以崔文憲沖待聘齋生。始免鄕役。生諱愿。給事中。給事生諱元諝。通禮門奉禮郞。歷數四代。有諱天錫。監門衛大護軍。寔公高祖。曾祖諱英孚。累□贈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祖諱孝忠。忠淸道水軍虞候。累□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考諱甫。安奇道察訪。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三世推□恩。以公貴也。判書公鄕居林川。貲甚殷富。貸與貧民。隨年豐歉。與民收散。晩年。悉取券投火曰。吾其庶有後乎。議政公席先業。居鄕殆六十歲。足絶官庭。未嘗非義作事。鄕人莫不飫德。蓋其種之者久也。議政公聘博士金徽之女。累□贈貞敬夫人。乃延安望閥。前朝恭愍。親書八字以賜。提學金濤之後。□本朝刑曹判書文靖公自知之曾孫。議政年衰無嗣。躬禱於聖住山。越明年公生。弘治六年癸丑六月五日也。生而狀貌奇異。啼笑有時。議政公識其非常。手植三槐於廟庭。以擬宋王魏公故事。丁亡。公年五歲而貞敬卒。議政公憐愛公備至。然謂不學。無以成立。乃送寺讀書。歲且逾。猶不許往來。纔齔而議政繼逝。孤孑零丁。無所怙依。鞠於伯姊夏山君成夢井夫人。公自少氣道沈遲。飢寒俱不言。雖病甚苦。不以呻吟作形。人已服其非淺。初。議政公自占未及見公成長。擇奴婢可任者各一人。托家事。俾勿失業。以待其壯。受命者亦爲之盡。公年十三而奴死。公自京帖粟百斛。庀其葬。蓋亦難已。爲兒遊戲。卓越豪縱。或訝其難當。有識以奔踶千里期之。年過成童。尙不志學。馳馬試射。被慢於儕流。卽發憤策勵學業。居五月。已達文義。但從人質疑。未十朔。理無滯阻。自是刻意益篤。夏山欲見公志。勸就蔭仕。固問不對。强之乃曰。丈夫當讀書樹業耳。夏山喜曰。吾亦試汝耳。壬申。公年始弱冠。夏山稱其文才已成。蓋四年向學。所造如此。若金慕齋,李容齋及諸鉅公之來。必以公文示之。無不嘆奬。自此華聲大聞。夏山深服其德器。亟稱不置曰。尙某之質。雖在孔門。無讓於諸弟矣。公聞成公守琛,守琮兄弟有學行。乃以全紙大書以簡曰。聞公之名。切有願交之志。二成亦以大字許之。自是連榻。實多講磨。中丙子坐員。入泮課藝。連三製入高等。柳公雲時長皐比。大加褒稱。至訪于家曰。見君議論。知有經綸之才。公見儕類有忌色。遂有時晦之意。不復屑意於官試。柳公覺之。深恨其不能容人之才也。是時。趙公光祖遭遇□中廟。激勵學行。士方興起。而矯飾不眞者亦多。公心慕其善。而恥其僞曰。吾欲內顧無所愧而已。一日在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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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진(震)이고 자는 기부(起夫)이다. 목천(木川) 사람이다. 그의 선조가 본현(本縣)의 관리였다. 고려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에 목주(木州) 사람은 백제의 유민이라 하여 누차 경고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짐승을 잡아다 성(姓)을 주어 욕보였다. 공의 선조는 상(象)을 얻어 성을 삼았다가 나중에 상언(尙焉)으로 고쳤다. 휘 국진(國珍)은 최 문헌공(崔文憲公) 충대빈재생(忠待聘齋生)으로 처음 향역(鄕役)에서 면제되었고, 생휘 원(願)은 급사중(給事中)이었으며, 급사생 휘 원철(元諝)은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으로서 4대에 걸쳐 대를 이었다. 휘 천석(天錫)은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으로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영부(英孚)는 누차 □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효충(孝忠)은 충청도 수군 우후(水軍虞候)로 누차 □을 거쳐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고휘보(考諱甫)는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이다. 누차 증직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가 되었는데, 3대에 걸쳐 추증된 은혜는 공이 귀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판서공(判書公)은 고향인 임천(林川)에 살았는데 재물이 매우 많아서 빈민에게 빌려주었다. 풍년과 흉년에 따라 백성들과 함께 거두어 모았다가 만년에는 모두 권문(券文)을 가져다가 불태우면서 “내가 후손이 많으리라.” 하였다. 의정공은 선업(先業)에 앉아 고향에서 거의 60년을 살았는데, 관직이 없는 데에도 항상 의리에 맞게 일을 하였고, 고향 사람들이 모두 그 덕을 흠모하였으니, 대개 그 종자(種子)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의정공은 빈박사(聘博士) 김휘지(金徽之)의 딸로 누차 증직되어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는데, 바로 연안(延安)의 명문가로서 전조 공민왕(恭愍王)이 친히 팔자(八字)를 써서 하사하였다. 제학 김도(金濤)의 후손이며 본조 형조 판서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증손이다. 의정(議政)이 늙어 후사가 없어서 성주산(聖住山)에서 몸소 기도하였다. 이듬해에 명공이 태어났는데, 홍치(弘治) 6년 계축 6월 5일이다. 태어나서부터 장모가 기이하고 울고 웃는 것이 때가 있었다. 의정공은 그 비상함을 알아보고 손수 묘정(廟庭)에 세 그루의 괴목을 심어 송나라 왕위공(王魏公)의 고사에 비유하였다. 명공이 죽었을 때는 나이가 5세였는데, 정경부인(貞敬夫人)이 졸하였고 의정공은 공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배우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다고 여겨 절에 보내어 글을 읽게 하였다. 해가 지나도 오히려 왕래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겨우 젖을 떼자마자 의정공이 세상을 떠났다. 외롭고 고아하여 의지할 데가 없어 백씨(伯氏)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부인에게 맡겨져 자랐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침착하고 느렸으며, 굶주리고 추워도 모두 말하지 않았고 비록 병이 심하여 고통스러워도 신음하며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미 그의 깊지 않음을 알았다. 처음에 의정공이 스스로 점을 쳐 보았으나 공이 성장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다. 노비 중에서 맡길 만한 자를 각각 한 사람씩 택하여 가사를 부탁해서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고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명을 받은 자도 또한 그것을 다하였다. 공이 13세에 노비가 죽자, 공이 서울에서 쌀 100곡을 보내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니, 이는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놀이가 호방하고 뛰어난 점이 있어 혹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려울까 의심하였으나 식견 있는 자가 천 리를 달려 와서 기대를 걸었다. 나이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말을 타고 활쏘기를 하다가 동료들에게 무시를 당하자 즉시 분발하여 학업에 힘써 5월이 되어서는 이미 문장의 뜻을 터득하였다. 다만 남의 질문에 답하는 데에는 열 달이 걸릴 정도로 지체됨이 없었고, 이로부터 더욱 각오가 독실해졌다. 하산(夏山)이 공의 뜻을 보고 음관(蔭官)에 나아가기를 권하였으나 굳이 물어도 대답하지 않다가 억지로 권하자 “장부는 마땅히 글을 읽고 가업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하산이 기뻐하며 “나도 너를 시험해 보겠다.”라고 하였다. 임신년에 공이 비로소 약관이 되었다. 하산(夏山)은 문재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칭송받았는데, 이는 대개 4년 동안 학문을 하여 이룬 바가 이와 같아서였다. 김모재(金慕齋), 이용재(李容齋) 및 여러 거공(鉅公)이 찾아왔을 때 반드시 공의 글을 보여 주면 모두 감탄하고 장려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이 크게 퍼지자 하산은 그 덕성과 기량을 깊이 감복하여 곧바로 칭찬하며 놓아두지 않고 말하기를, “상모(尙某)의 자질은 비록 공자의 문하에 있더라도 여러 아우에게 뒤지지 않는다.” 하였다. 공이 성공 수침(成公守琛), 수종(守琮) 형제가 학문과 행실이 있다고 듣고는 종이에 크게 써서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공의 이름을 듣고 절실히 사귀고 싶은 뜻이 있다.” 하였는데, 두 성공도 큰 글씨로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연이어 함께 공부하며 실로 강마(講磨)가 많았다. 병자년에 원숙한 자리에 앉아 반과(泮課)의 예문관에 들어가 세 번이나 제술에서 높은 등급에 들었다. 유공운(柳公雲) 시장고(時長皐)가 크게 칭찬하고 집까지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의논을 보고 경륜의 재주가 있음을 알았다.” 하였다. 공이 동료들이 기색(忌色)을 품고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때로 숨어 지낼 뜻이 있어 다시 관시(官試)에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유공(柳公)이 이를 깨닫고는 인재를 포용하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였다. 이때 조공(趙公)이 중묘(中廟)를 만나 학행을 격려하여 선비들이 바야흐로 흥기하였는데, 거짓으로 꾸미고 진실되지 않은 자도 많았다. 공은 그 선함을 사모하면서도 그 위선을 부끄럽게 여겨 “나는 내면을 돌아보아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성균관에 있을 때였다.

원문

聞韓忠奉使嶺北。有一人出自山谷。披寬博之衣。立道上。呼韓之字。袖出陳弊一書以授曰。歸告□殿下云。一泮莫不唶唶曰。三代以下。乃有此等偉人。公獨不應。坐中詰其故。公徐曰。若果賢者。焉有自衒之理。衆共誹之曰。外若矜嚴。內必如之。公曰。豈無象恭者乎。衆益攻之。公竟不答。□朝廷問得其人。則乃燕山嬖孼家書題有罪長流者。然後知公之識見高矣。己卯冬。捷文科別試。前日辱公者慙甚。公謝曰。非君警我。無所成就。君實愛我。受惠多矣。選入承文院。爲副正字。俄薦藝文館。爲檢閱。轉待敎奉敎。入侍□經幄。經筵官金世弼。論趙光祖等事曰。新進好古。自□上登擢無漸。豈有他心。若裁節而用之。未必無效。初甚尊寵。一朝□賜死。□朝廷氣色。自此慘惔。公出曰。邇來。□經席未有此論。金相之言。正爲得之。旣而。金被謫。言者以公不合史局。請西敍。由龍驤司正義興副司果。始拜成均館典籍。公慕善有素。故其初釋竭歸鄕。有崔弘濟者。不爲士類所齒。乘趙公貶謫。上疏力詆。至請其死。□朝廷適加重罪。弘濟喜語稠中曰。果用吾言。已命斬光祖于謫所矣。公自少恥言人過。而聞之大惡。屢與所親。斥崔之爲人。其見遞於翰林。再駁於持平。皆以此也。遷禮曹佐郞。癸未。出爲北道評事。公素以善射名。亦托以出公。然自後常兼帶宣傳官。乙酉。陞戶曹正郞。移兵曹。丙戌五月。以禮曹正郞。兼持平。充□聖節使洪益城彦弼書狀官。甚爲益城所器重。十一月。兼春秋館記注官。戊子。復以兵曹。轉司饔僉正。時□仁廟在東宮。妙選諸儒。以備僚屬。公入侍講院。久爲弼善。進讀甚多。轉掌樂僉正。兼春秋館編修官。拜司憲府掌令。遞爲成均館直講。庚寅。□貞顯王后薨。參掌都監事。時金謹思爲提調。頗以葬物私施人。公執謂□國事未襄。大觸其怒。諸僚皆危公。而公不動。後累被其毒。事完。進階朝散,侍講院文學。辛卯。司諫院獻納兼春秋。復拜掌令。遞爲成均司藝。俄入弘文館。爲校理。壬辰。司憲執義。癸巳二月。弘文副應敎。是月陞典翰。五月。□特命超四階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先是。出入臺閣。論及己卯用事之臣曁福城之罪。雖人所難言者。亦不忌諱。物議多之。今玆特授。允協衆望。九月。遞爲護軍。是月爲弘文副提學。甲午。復拜大司諫。言時政觸三公。三公詣□闕辭職者三日。竟改戶曹參議。出爲江原道觀察使。將行。請敎於尹相殷輔。尹相爲陳方伯政要。公遵行不違。事無滯積。常曰。吾屢膺當道。常遵尹相之敎。後有爲方伯請敎於公者。必擧尹相之言以送之。江原有一嫗。告儀子欲蒸已。公審嫗貌。皤頭爛瘡。面如猿猴。公詰之曰。惡少不勝淫情。以色故也。爾子亦有本妻。必不犯極惡奸汝明明矣。若不承直。必先訊汝。嫗服曰。子果不順。欲構以重治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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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건대, 한충봉사(韓忠奉使)가 영북(嶺北)에 갔을 때 산골에서 나온 어떤 사람이 널찍하고 넓은 옷을 입고 길가에 서서 한중(韓中)의 글자를 부르고는 소매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주면서 “돌아가서 전하께 고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온 반석(泮席)이 모두 웅성거리며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이런 위대한 사람이 나왔는데 공만 응하지 않는가.” 하고는 좌중에서 그 까닭을 따져 물었다.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과연 현자라면 어찌 스스로 자랑할 리가 있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기를, “겉으로는 엄숙한 척하지만 속은 필시 이와 같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찌 상공(象恭)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더욱 공격하였다. 공이 끝내 대답하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그 사람을 알아냈더니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환관 집안에 죄가 길이 전해지는 자였다. 이 후에야 공의 식견이 높음을 알게 되었다. 기묘년 겨울에 문과 별시(別試)를 치르는데, 전에 공을 욕보인 자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이에 공이 사과하기를, “그대가 나를 깨우치지 않았다면 성취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군실(君實)이 나를 사랑하여 받은 은혜가 많았다. 승문원에 뽑혀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곧바로 예문관에 천거되어 검열이 되었다가, 전대교(轉待敎)로 봉교(奉敎)가 되어 경연의 자리에 입시하였다. 경연관 김세필(金世弼)이 조광조(趙光祖) 등의 일을 논하기를, “신진(新進)이 고상한 학문을 좋아하여 위에서 발탁해 줌을 점차적으로 받지 않고 곧바로 등용되었으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는가. 만약 절제해서 사용했다면 반드시 효과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처음에는 매우 존숭하고 총애하다가 하루아침에 사사(賜死)를 당하여 조정의 기색이 이로부터 참담하였다. 공이 나와 말하기를, “근래 경연에서 이런 논의가 없었는데 김 상지(金相之)의 말이 정히 옳다.” 하였다. 얼마 안 가서 김이 귀양을 가고 나서, 그 말을 한 자는 공이 사국(史局)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서서(西敍)를 청하였다. 용양사(龍驤司)의 정의흥 부사과(正義興副司果)가 처음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평소 학문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온 힘을 다해 귀향하였다. 최홍제(崔弘濟)라는 자는 선비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조공(趙公)이 폄봉당하여 귀양을 갔을 때 상소하여 힘써 비방하고 죽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 조정에서 마침 중죄를 가하였는데, 홍제(弘濟)가 여러 사람 가운데 기뻐하며 말하기를, “과연 내 말을 들어 이미 그를 유배지에 있는 곳에서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하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크게 미워하여 자주 친한 사람들과 함께 최씨가 사람됨을 배척하였으므로 한림(翰林)에서 체차되고 지평(持平)에서 두 번이나 탄핵당한 것이 모두 이 때문이었다. 예조 좌랑으로 옮겨졌다가 계미년에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나갔다. 공은 본래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이름이 났는데, 또한 출공(出公)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는 항상 선전관을 겸임하였고 을유년에 호조 정랑으로 승진되었다가 병조로 옮겨졌다. 병술년 5월에는 예조 정랑으로서 지평을 겸하여 성절사(聖節使) 홍익성(洪益城)의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었는데, 홍익성에게 매우 신임을 받았다. 11월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다. 무자년 다시 병조(兵曹)의 전사찬첨정(轉司饔僉正)으로 있었다. 이때 인묘(仁廟)가 동궁에 계실 때였는데, 묘선(妙選)한 여러 유생들을 요속(僚屬)으로 삼았다. 공이 입시강원(入侍講院)하여 오래도록 필선(弼善)을 지내면서 진독(進讀)한 것이 매우 많았고 전장악첨정(轉掌樂僉正)에 겸춘추관 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으로 있었다.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체차되었다. 경인년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훙서(薨逝)하여 장사도감의 일을 맡았는데, 이때 김근사(金謹思)가 제조(提調)로 있으면서 장례 물품을 사적으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공이 잡아서 “나라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크게 그 노여움을 샀다.”라고 하였는데, 동료들이 모두 공을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 여러 번 그의 독기를 받았는데, 일이 마무리되자 조산(朝散)과 시강원 문학으로 승진하였다. 신묘년에 사간원의 헌납 겸춘추로 제수되었다가 다시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체차되었다가 곧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가 되었다. 임진년에 사헌부 집의가 되었는데, 계사년 2월이다.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이 이달에 전한(典翰)으로 올랐다. 5월에 □가 특별히 명하여 4계통을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이에 앞서 대각(臺閣)에 출입하면서 기묘년에 일을 처리한 신하들과 복성(福城)의 죄를 논하였는데, 비록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또한 꺼리거나 숨기지 않아서 여론이 칭찬하였다. 이제 특별히 제수한 것은 참으로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한다. 9월에 호군(護軍)으로 체차되었다. 이달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갑오년에 대사간에 다시 제수되었다. 시정(時政)을 논하면서 삼공(三公)을 거스르자 삼공이 □에 나아가 사직한 지 3일 만에 마침내 호조 참의로 개차되었고, 나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장차 부임할 때 윤상인(尹相殷)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윤상이 방백의 정요(政要)를 진달하니 공이 그대로 행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일이 지체되거나 쌓이는 것이 없었다. 항상 “내가 여러 번 도신(道臣)을 지냈지만 항상 윤상의 가르침을 따랐다.”라고 하였다. 뒤에 방백이 되어 공에게 가르침을 청한 자가 있었다. 반드시 윤상(尹相)의 말을 들어서 보내야 한다. 강원도에 어떤 노파가 아들이 이미 음란한 짓을 저질렀다고 고하였는데, 공이 그 노파의 모습을 살펴보니 머리는 세고 얼굴은 원숭이 같았다. 공이 꾸짖기를, “네 아들이 젊어서 음욕을 이기지 못해 이런 짓을 한 것은 네가 색(色)을 탐하여 그런 것이다. 네 아들에게도 본처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극악한 간음의 죄를 범하지 않았을 리 없다.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먼저 너를 신문하겠다.” 하였는데, 노파가 “아들이 과연 순종하지 않아서 무거운 벌로 다스리려고 꾸며 낸 것입니다.” 하였다.

원문

公卽治其子不順之罪。其度事深詣類此。乙未。以承政院同副承旨被□召。陞右副。病遞。四月。復拜副提學。是月。復入政院。爲左副。公在銀臺。當奏覆。囚案盈抱。諸宰相顧曰。今日必暮。公擧條要。敷啓甚謙。晷不移刻。情僞畢露。旣出無不稱之。遞爲掌隷院判決事。丁酉。以禮曹參議。復拜大司諫。有一同僚。將□禧陵水石之說。議于圓席。公曰。玆事極重。當十分廣諮。然後乃可斟酌。不可容易。力止之。不數日。其人入□經筵獨啓之。時金安老方忌鄭文翼公光弼。正欲構陷而難其名。以□山陵時文翼實監其事。故乘其隙。乃發遷卜之議。因置之不測。聲勢甚張。公閉門謝客。究思可救之方。自第具諫草。率同僚以□啓。俄得輕論。竟遞爲刑曹參議。又送西爲上護軍。數日。□特命復授刑曹參議。十月。本曹缺參判。□上又特以參議陞授。□賜階嘉善大夫。與梁贊成淵。同入淸齋。時權奸益熾。公語及時事。梁公就執公手曰。令公先見。本如神龜。旣而。梁爲都憲。果擊去之。戊戌。兼五衛都摠府副摠管。出爲京畿觀察使。管邑人士。有連名狀公曰。某人不孝繼母。公悉招持狀人諭之曰。繼母子。不孝得名最易。爾等十分審察而來言耶。衆曰。人理不詳。不忍形諸文字。實烝之也。公訪其家人。不用刑杖。一言得情。上讞明白。□朝廷不復究訊。卽處以律。朝中大相有素服公者。嘉而戲之曰。令公寬柔。讞獄甚猛。己亥六月。□特超階資憲。授刑曹判書。公自顧驟陞。心誠憂悶。不敢出謝。會臺官論以人品雖當。陞級不久。遞爲同知中樞府事兼副摠管。是月。□特授漢城府右尹。尋陞左尹。九月。拜司憲府大司憲。遞爲同樞。十月。□上親政。以西方重。□特除公觀察平安道。時咸鏡北道節度使有缺。□上下議于大臣。北鄙可虞。必得文武全才。尙某遞西送北。何如。大臣以西北無輕重。而監司兼連帥。爲任尤重。遂□命仍往。公撫禦得宜。軍民兩安。辛丑冬。以同樞還□朝。壬寅二月。□特拜判尹。始陞階資憲大夫兼都摠管。冬。遞爲同樞。餘如故。癸卯春。陞知中樞府事。六月。轉工曹判書。後一月。□特命判兵曹。甲辰正月。知敦寧府事。時公爲謝□恩使。將赴京。□上以重臣出使。列邑有擾。□命遞。實重公不欲遠去也。已而。特授崇政階。拜議政府右贊成。公知遇不世。□特命除拜。前後絡繹。不知公者頗疑之。遂以他辭□啓遞。上曰。今姑從請。然此人終受大任。仍敦寧兼知義禁府事。復兼摠府。移刑曹判書。乙巳夏。遞爲同樞。時□二聖繼陟。忌者出公爲慶尙道觀察使。或詰之曰。□國憂方殷。若尙某。曾判三曹。不宜遠出。忌者曰。嶺南巨服。須得剸煩才耳。本道詞訟繁浩。例馱文簿自隨。公自下界。發慝治奸。酬決如流。常簿之外。不持一幅。李公彦迪深加贊服。今□上卽寶。丙午元月。以議政府右參贊徵還。兼帶摠府。三月。

번역

공은 자식이 순종하지 않는 죄를 다스렸으니, 일을 처리하는 도량이 이와 같이 깊었다. 을미년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불려가서 우부승지에 올랐다가 병으로 체차되었다. 4월에 부제학으로 다시 제수되었는데, 이달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좌부승지가 되었다. 공이 승정원에 있을 때 주상께 아뢸 일이 많았는데, 죄안(罪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여러 재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은 반드시 저녁이 되리라.” 하였다. 공의 거조는 요점만 간략하게 아뢰어 매우 겸손하였고, 시간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아 진실과 거짓이 모두 드러났으며, 이미 나온 것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체차되어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정유년에 예조 참의로 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제수되었다. 동료 중 한 사람이 장차 희릉(禧陵)의 수석(水石)에 관한 설을 원탁에서 의논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니 충분히 널리 물은 뒤에야 참작할 수 있고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힘써 저지하였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경연(經筵)에 들어가 독단적으로 아뢰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바야흐로 정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을 헐뜯으려 하였으나 그 명분을 찾기 어려웠다. □ 산릉(山陵) 때에 문익이 실제로 그 일을 감독하였기 때문에 기회를 틈타 옮겨 살 집터를 잡자는 의논을 내어 불측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는데, 그 성세가 매우 거세졌다. 공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다가 집에서 간초(諫草)를 갖추어 동료들을 이끌고 □ 계(啓)하였다. 얼마 안 되어 가벼운 논의에 의해 마침내 형조 참의로 체차되었고, 또 서쪽으로 보내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가 며칠 뒤에 □ 특명으로 다시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본조에 참판 자리가 비게 되자 □ 상께서 또 특임으로 참의를 참판으로 올려 제수하고, □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려 주었다. 양 찬성 연(梁贊成淵)과 함께 청재(淸齋)에 들었는데, 이때 권간이 더욱 기승을 부리자 공이 시사(時事)를 언급하였다. 그러자 양공이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공의 선견지력은 본래 신귀(神龜)와 같으시네.” 하였다. 얼마 뒤에 양공이 도헌(都憲)이 되어 과연 그들을 쳐서 제거하였다. 무술년에 겸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나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고을의 인사들을 다스릴 때 연명장공(連名狀公)이라는 장문이 있었다. “모(某)라는 사람이 계모에게 불효하였다.” 하니, 공이 모두 불러 놓고 장인(狀人)들에게 타이르기를, “계모자(繼母子)가 불효하면 이름이 가장 쉽게 난다. 너희들은 충분히 자세히 살펴보고 와서 말한 것인가?”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리(人理)에 어두워 차마 문자로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실로 죄를 짓는 것이다.” 하였다. 공이 그 집안을 찾아가 형장(刑杖)을 쓰지 않고 한마디 말로 사실을 알아내니, 성상의 심판이 명백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신문하지 않고 즉시 법률대로 처결하였다. 조정에 평소 공을 존경하는 대간이 있어 기뻐하며 장난삼아 말하기를, “공은 관용하시면서도 옥사를 다스릴 때는 매우 준엄하십니다.” 하였다. 기해년 6월에 특별히 자헌대부로 올려 형조 판서에 제수하니, 공이 스스로 돌아보며 갑자기 승진한 것을 걱정하고 근심하여 감히 나가 사은하지 못하였다. 마침 대관(臺官)이 인품이 합당하다고 논핵하였다. 승진한 지 오래되지 않아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에 체차되었다. 이달에 □ 한성부 우윤에 특별히 제수되고, 곧 좌윤으로 승진하였다. 9월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0월에 □ 주상이 친정(親政)을 하고 서방(西方)의 중함을 염두에 두고 □ 특별히 공을 관찰사 평안도에 제수하였다. 이때 함경북도 절도사에 결원이 있었으므로 □ 상이 대신에게 하의하기를, “북쪽 변방은 우려할 만하니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얻어야 한다. 상모(尙某)를 서쪽에 체차하여 북쪽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대신이 아뢰기를, “서북은 경중의 차이가 없으나 감사가 연임되어 수령을 겸하는 것은 임무가 더욱 중합니다.” 하고, 마침내 □ 명을 받들어 그대로 가서 관찰사를 지냈다. 공이 어민(撫民)과 군사(軍事)를 적절히 다스려 백성과 군사가 모두 편안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동지중추부사로 조정에 돌아왔다. 임인년 2월에 □ 특별히 판윤에 제수되고, 비로소 자헌대부 겸 도총관으로 승진하였다. 겨울에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지중추부사에 오르다. 6월에 공조 판서로 옮겨 갔다가 한 달 뒤에 □ 특별히 명하여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갑진년 정월에 돈녕부사로 있었다. 이때 공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장차 북경으로 가려 하였는데, □ 상이 중신(重臣)이 출사하면 여러 고을이 소란해질 것이라고 명하여 체차하였으니, 실상은 공이 멀리 떠나기를 원치 않아서였다. 얼마 뒤에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제수하고 의정부 우찬성을 제배하였다. 공은 지우(知遇)가 세상에 드물었는데 □ 특별히 명하여 제수하는 일이 전후로 계속되니, 공을 모르는 자들은 자못 의심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다른 사유를 들어 계사(啓辭)를 올려 체차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우선 청한 대로 따르겠다. 그러나 이 사람은 끝내 큰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하고는 돈녕부사를 겸임하고 의금부사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다시 총부(摠府)를 겸임하고 형조 판서로 옮겼다. 을사년 여름에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 두 성상께서 연이어 승하하시니, 기자가 공을 경상도 관찰사로 내보내고는 혹 힐문하기를, “□ 나라의 근심이 한창 깊은데.” 하였다. 상모(尙某)가 삼조(三曹)의 판서로 있을 때에 멀리 나가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기자(忌者)가 말하기를, “영남은 거룩한 복장으로 반드시 번거로운 일을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을 얻어야 한다.” 하였다. 본도(本道)의 사송(詞訟)이 많아서 으레 문서를 가지고 다니는데 공이 아래에서 간사한 무리를 내쫓고 간악한 자를 다스리며, 결정을 내리는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항상 지니는 문서가 한 폭도 없었다. 이공 언적(李公彦迪)이 깊이 찬탄하였다. 지금 보배로 올린다. 병오년 1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부름을 받고 돌아와서 총융부의 직임을 겸대하다가 3월에

원문

陞階正憲。就舊職。復加知春秋館事。與修□中宗□仁宗二聖實錄。八月。又兼知義禁府事。九月。□特命復判兵曹。戊申二月。辭遞爲知中樞。三月。復兼摠府。四月。又知□經筵。是月。特陞崇政議政府右贊成。別職皆如故。己酉正月。拜吏曹判書。餘如故。又加判義禁府事。九月。卜相。以公爲議政府右議政。階大匡輔國崇祿大夫。兼領□經筵,監春秋館事。公膺□命憂惶。跔蹐靡容。懇辭不獲。時□二聖實錄未畢。至是總裁焉。藁洗。□賜鞍馬以勞之。庚戌。緇徒適有不法事。僚相忿其放縱。謂公曰。此輩無所統。故如此。若依□祖宗朝故事。使有糾攝之地。則不乃有益乎。公曰。疾之已甚。亂也。此屬當治以不治。今若糾檢而復立統屬之規。則無識之徒。或反謂之崇佛而然。則事尤大闋。固不可爲也。未幾。公以事詣□闕。內旨下議曰。僧徒無統。欲復兩宗。治之何如。公□啓曰。僧徒雖無統攝。然起廢重難。故前日同僚。亦有此議。恐反有害。遂止耳。公實未知其漸將大。自以爲事幾之初。微言諷止。得大臣□啓事之體。未久。兩宗復。臺諫及儒生。交章抗疏。政府亦率百官以諫。不知者謂公之前議。似有迎合之意。公上辭請免。□優答不允。時□聖烈仁明大王大妃同聽政。自上親爲昭雪以曉之。公嘆曰。事機之難辨。則學識不明者。是非顚倒無怪。至如佛法之不可復。明如日星。雖欲逢君。不可得也。顧以平生所爲。不能取信於人。至以此事見疑。自反而已。尙誰咎哉。厥後僧徒頗橫。每謂沈相曰。兩宗之復。我二人在職。焉用之責。其能逃乎。辛亥。陞左議政。癸丑正月。公年已過耳順。不能無疾。尤以不勝重任爲憂。請辭累數百。自後至乙卯。求退益懇。皆□下批答不允。至終□附下傳旨曰。卿雖有疾。相位不可輕易。去就不計久近。安心調病。會有邊警。乃出視事。丁巳。封□世子。以公爲傅。戊午五月。□御批陞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秋。國家設別科。公爲讀卷官。其時主文柄者。欲擧□中朝事發策。公止之曰。此大事。可廟議。不可策士。猶以其意爲問目。旣而。公議譁然論罷主題試官。擧子亦削科。公自以首官。不能力止。詣□闕請自坐不爭之罪。□上曰。不聽公言。過在於彼也。初。公自試所。歸語子弟。頗有未愜之恨。旣而果然。公又自丙辰後。無歲不累辭。□上於批答外。常有附□旨。敦勉勿退。至己未春。又三上辭。皆□批答不允。又下□御札曰。觀卿累辭。予意缺然。毋多求退。以輔寘躬。乃上疏略曰。明主之圖治。必極一時才德之選。作爲輔弼。事體相須。然後馨香上格。而天應以祥。輝光旁達。而民興於善。置相非人。治不獨定。功不徒成。古人論相業者有曰。上佐人主。理陰陽。順四時。下遂萬物之宜。外鎭撫四夷。使卿大夫。各得其職。主上睿智聰明。宵旰緝熙。馨香光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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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여 옛 직임을 맡았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회복하고,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을 편찬하였다. 8월에 또 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9월에 □가 특별히 명하여 판병조(判兵曹)로 복직시켰다. 무신년 2월에 사직하고 체차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3월에 다시 총융대장을 겸임하였다. 4월에 또 □경연사를 맡았다. 이달에 특별히 승진하여 숭정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는데, 별직(別職)은 모두 예전과 같았다. 기유년 1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나머지는 예전과 같았다. 또 판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9월에 정승을 뽑아 공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계급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이고, 영경연사(領經筵事)와 감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공이 □의 명을 받들기를 두려워하고 황공하여 주저하며 용납하지 못하고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에 □의 실록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총재(總裁)를 맡았다. 원고를 세척한 공로로 □가 안마(鞍馬)를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경술년에 승려들이 불법을 행하는 일이 있었는데, 동료 상신이 그들의 방종함을 분하게 여겨 공에게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통솔할 곳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조종조의 고사(故事)대로 규섭(糾攝)할 곳을 두게 한다면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병이 이미 심해진 것은 난(亂)이니, 이는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리지 않은 탓이다. 지금 만약 규검하여 다시 통솔하는 규례를 세운다면 무식한 무리들이 도리어 불교를 숭상한다고 여겨서 그렇게 될 것이니, 일이 더욱 크게 끝날 것이다. 참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얼마 안 가서 공이 일로 인해 궁궐에 나아갔는데, 내지(內旨)가 내려와 의논하기를, “승도(僧徒)에게 통솔할 곳이 없으니 양종(兩宗)을 복구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공이 아뢰기를, “승도에게 비록 통솔할 곳이 없지만 폐지했다가 다시 일으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전날 동료들도 이러한 의논이 있었으나 도리어 해로울까 염려하여 마침내 그만두었습니다.” 하였다. 공은 실로 장차 크게 될 조짐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일의 기미를 잘 안다고 여겼다. 은미한 말로 간언하여 대신(大臣)이 계사(啓辭)를 올리는 체모를 얻었으니, 얼마 안 되어 양종의 복위가 이루어졌다. 대간과 유생들이 번갈아 상소하고 정부도 백관을 거느리고 간하였는데, 모르는 자들은 공의 이전 의논에 영합하는 뜻이 있는 듯하다고 하였다. 공이 사양하여 면직을 청하니, 우답(優答)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성열인명대왕 대비가 함께 정사를 보았으므로 상이 친히 소결(昭潔)하여 깨우쳐 주었다. 공이 탄식하기를, “일의 기미를 분별하기 어려우니 학식이 밝지 못한 자는 시비를 전도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불법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은 해와 별처럼 분명하니 비록 부처를 만나고자 해도 만날 수가 없다. 돌아보건대 평생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여 이 일로 의심을 받게 되었으니 스스로 반성할 뿐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하였다. 그 뒤 승도들이 자못 방자하게 굴면서 매번 심상(沈相)에게 “양종의 복위는 우리 두 사람이 직책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찌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신해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계축년 1월에 공의 나이가 이미 이순(耳順)을 넘었는데도 병이 없지 않았고, 더욱이 중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여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는데, 그 뒤로 을묘년까지 더욱 간절히 물러가기를 구하였으나 모두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끝내 전지를 내리기를 “경은 비록 병이 있지만 정승의 자리는 가볍게 맡길 수 없으니, 떠나더라도 오래 머물지 말고 안심하고 조섭하여 병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변방에 경보가 있을 것이니 나아가 일을 보라.” 하였으므로 나가서 일을 보았다. 정사년에 세자를 봉하고 공을 부사로 삼았다. 무오년 5월에 어필(御批)이 내려 영의정에 올리고 겸하여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의 일을 맡았으며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가을에 국가에서 별과(別科)를 행하였는데 공이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그 당시 문장(文柄)을 주관하는 자가 중조(中朝)의 일을 거론하여 시책(試策)을 내려고 하였으나, 공이 “이는 큰일이다.” 하고 말렸다. 가묘(可廟)의 의논은 책사(策士)로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오히려 그 뜻을 가지고 문목(問目)으로 삼았다. 그런데 공론이 시끌시끌하여 주제(主題)를 낸 시관(試官)을 파직할 것을 논하고 거자(擧子)도 과거에 합격한 자격을 취소하였다. 공은 스스로 수관(首官)으로서 힘써 막지 못하였으므로, □에 나아가 자사(自坐)하여 간쟁하지 않은 죄를 청하니, □ 상이 이르기를, “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저들에게 잘못이 있다.” 하였다. 처음에 공이 시소(試所)에서 돌아와서 자제(子弟)에게 말하기를, “자못 마음에 차지 않는 한이 있다.”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또 병진년 이후로 해마다 누차 사직하였는데, □ 상의 비답 외에 항상 부□지문(附□旨文)을 내려 물러가지 말라고 돈면하였다. 기미년 봄에 또 세 차례나 사직하였으나 모두 □비답이 윤허하지 않았고, 또 □ 어찰(御札)을 내리기를, “경이 누차 사직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허전하다. 많이 물러가려고 하지 말고 몸을 보필하라.” 하였다. 이에 상소하기를, “밝은 임금이 다스림을 도모할 때에는 반드시 한 시대의 재덕(才德)을 갖춘 사람을 극진히 선발하여 보필하게 해야 하니, 일의 체모상 서로 필요하다.” 하였다. 그 후에 향기로운 기운이 위로 올라가면 하늘이 상서로움을 응답하고, 빛나는 광채가 널리 미치면 백성들이 선에 감동한다. 정승을 두는 것은 사람을 잘 뽑아서가 아니니, 다스림이 홀로 안정되지 않고 공적이 이루어지기만 해서도 아니다. 옛사람의 말에 “상(相)이란 자는 위로는 임금을 도와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四時)를 순행하며 아래로는 만물의 마땅함을 이루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무하여 경대부(卿大夫)로 하여금 각기 그 직분을 잘 수행하게 한다.” 하였으니, 주상의 예지(睿智)와 총명(聰明)으로 밤낮 쉬지 않고 힘쓰면 향기와 광채가 이룰 것이다.

원문

方將上格旁通。而臣居樞要。以乖氣蒙蔽沮遏之。致五災。召五凶。使含生失遂。不能宣揚□聖德神武。夷虜反側。百姓不親附。庶官不盡職。輔相無狀。於斯難掩。夫台鼎之位。人主所以待賢尊德之重器。而聖經中言位言職。必加天字者。蓋曰天物。人不得私之也。君而謬授非人則不天。臣而濫受非分則褻天。謬授濫受。皆非畏天之道。今有荊璞於此。必使玉人治之。將使斲輪。亦必假手於輪扁。在治國則乃使下材。臣愚亦任其責。其於致治。大有逕廷。因歷擧前世宰相遞免之事曰。擧此一隅。亦可想時君不以天物私其臣也。臣往自己酉。始累□殿下知人之明。不自揣分。誤入台府。忘恥養病。敗政貽患。今已十有一年。身非鼠雀。心豈少安云云。□上亦優勉不許。八月。□上御翠露亭。簡召諸宰及賜暇儒臣。講其所讀書。仍□命諸宰。各製詩進爵。□賜燭以榮之。公以首相入侍。□上親爲侑爵。公不覺醺醉。伏苑中。□上乘小轝。將還大內。□下問爲誰。左右以領相對。□上曰。老相在此。不可輦過。□命設行帳。然後乃入。繼□命中人護歸。翌日。□與諸公上箋陳謝。旋以失禮待罪。□御批曰。昨見卿醉。甚洽予意。有何失禮。庚申六月。詣□闕。具衰病不職之狀。復申前請。□御批曰。予以涼德。叨承丕緖十六年來。水旱相繼。近日霖雨。亦連月餘。致此之災。咎實由予。常切兢惶。若臨深淵。卿以休休老德忠厚大臣。爲相十餘年。輔寘躬多益。予倚恒切。方深嘉悅。居位則朝廷堂堂。去位則衆望必缺。豈以身上微恙。年亦不衰。而欲退懇求乎。今非大臣求退之時也。再啓□御批曰。如卿重望。有幾人哉。予以不敏。當倚老成大臣。卿勿以久居爲未安。三□啓曰。□中廟朝名相。無如鄭光弼,尹殷輔,洪彦弼。而其入政府幷初再。或十三年。或九年。或十年。以三人比臣。不啻若黃鵠壤虫。而臣則一爲而至於十二年之久。且金時習嘲鄭昌孫曰。汝爲議政。如此其久。可謂朝廷有人乎。今臣眇然一身。亦千萬指目之所萃。口笑腹非。必有甚於時習者矣。御批曰。大臣重職。當以賢否進退。不可計久輊動也。卿德非不及於三相。雖過三相居位之年。固非不可。金時習嘲鄭相。亦豈美事乎。卿當益輔寘躬而已。何可慮他。公猶辭不已。至於七□啓。其辭尤切。□御批曰。卿至於七啓而辭。予意豈安。反覆思之。不可輕遞。□賜酒以遣。八月。□世子加元服。公以師贊禮。受鞍馬之□賜。重九日。□上御瑞蔥臺。簡召諸宰及近臣。各製詩進爵。仍□賜黃花蠟燭。翌日。上□箋謝。辛酉七月。□上又御閱武亭。召公卿侍從。如瑞蔥故事。因出□御軸。各製寫以進。公末句云。忘言醉飽鈞天裡。敬德唯關獻曝誠。雖文字之末。不忘箴規。見者皆曰。得大臣進戒之體。八月。展掃先壟於林川。將行。□啓曰。大臣往來本道。例設宴享。爲弊不貲。請於今行。下敎免設。

번역

바야흐로 상격(上格)을 방통(旁通)하려고 하는데 신이 추요(樞要)에 있으면서 기운(氣運)을 어기어 덮고 막아 다섯 가지 재앙과 다섯 가지 흉재를 불러서 생명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니, 성덕(聖德)과 신무(神武)를 선양하지 못하여 오랑캐가 반역하고 백성이 친근히 따르지 않으며 여러 관원이 직분을 다하지 않고 보상(輔相)이 형편없음을 이에서 가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저 태정(台鼎)의 자리는 임금이 현자(賢者)를 존중하고 덕자를 높이는 중한 기구입니다. 성경(聖經)에 ‘위(位)’와 ‘직(職)’을 말할 때 반드시 ‘천(天)’ 자를 붙인 것은, 대개 하늘이 준 물건이라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잘못된 사람에게 주면 하늘의 뜻이 아니며 신하가 분수에 넘치게 받으면 하늘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잘못 주고 함부로 받는 것은 모두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형박(荊璞)이 있으니 반드시 옥인(玉人)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해야 하고, 장차 수레바퀴를 만들더라도 반드시 윤편(輪扁)의 손을 빌려야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아래 재목을 쓰도록 하였으니, 신도 그 책임을 맡기겠습니다. 그가 치국(治國)에 관한 일로 크게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가 지난날 재상들이 체면(遞免)된 일을 두루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시군(時君)이 천물(天物)을 신하에게 사사로이 주지 않으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신은 지난 유월부터 비로소 전하의 지우(知遇)에 누를 끼치게 되었는데, 스스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잘못 대부(台府)에 들어가서 치욕을 잊고 병을 키워 정사를 그르쳐 환란을 끼쳤다. 지금 벌써 11년이 되었으니 몸이 미천한 자가 아니면 어찌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겠는가.” 하였는데, 주상이 또한 너그러운 말로 권면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8월에 주상이 취로정(翠露亭)에 나아가 여러 재상과 사하유신(賜暇儒臣)을 간략히 불러서 그들이 읽은 책을 강론하고, 이어서 명하여 재상들에게 각각 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술잔을 올려 영예롭게 하였는데, 공이 수상으로 입시하였으므로 주상이 친히 술잔을 권하였다. 공이 나도 모르게 취하여 원(苑) 안에 엎드려 있었는데, 주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대내로 돌아가려고 하자, 주상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영의정이라고 답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노상(老相)이 여기에 있으니 연을 지나갈 수 없다.” 하고, □ 행장(行帳)을 설치한 뒤에야 들어갔다. 이어서 □ 명중인(命中人)에게 호위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다음 날 □ 가 여러 공과 함께 상주를 올려 진사(陳謝)하고 곧바로 실례로 대죄(待罪)하니, □ 어필하기를, “어제 경이 취한 것을 보니 내 마음에 매우 흡족하였다. 무슨 실례가 있겠는가.” 하였다. 경신년 6월에 □ 궁궐에 나아가 쇠약하고 병든 몸으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정상을 갖추고 다시 이전의 청을 진달하니, □ 어필하기를, “나는 미천한 덕으로 외람되이 대업(大業)을 계승하여 16년 동안 다스리면서 수재와 한재가 번갈아 발생하였고 근래에는 장마비도 한 달 넘게 이어졌다. 이와 같은 재앙이 생긴 것은 실로 나에게 허물이 있으니 항상 심연(深淵)에 임한 듯 두려운 마음이 간절하다. 경은 온화하고 노숙하며 충후한 대신으로서 10여 년 동안 정승을 지내면서 보좌하여 내 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내가 의지하는 바가 늘 간절하였다. 지금 깊이 기쁘게 여기는 바이다. 자리에 있으면 조정이 당당하고 자리를 떠나면 여러 사람의 기대가 반드시 부족할 것이다. 어찌 몸에 작은 병이 있다고 해서…… 나이도 늙지 않았는데 물러가기를 간절히 구하려 하십니까. 지금 대신(大臣)이 물러가기를 구할 때가 아닙니다. 재차 아뢰니, 어필(御批)에 이르기를, 경과 같이 중망을 받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내가 불민하여 노성한 대신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경은 오래 있는 것을 편치 않게 여기지 말라.”하였다. 세 번째로 아뢰기를, “중묘조의 명상(名相)으로는 정광필(鄭光弼), 윤은보(尹殷輔), 홍언필(洪彦弼)만 한 사람이 없는데, 이들이 의정부에 들어간 기간이 모두 13년이나 9년 혹은 10년이었으니, 세 사람과 신을 비교하면 황곡(黃鵠)과 양충(壤蟲)의 차이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은 한번 맡아서 12년이나 되었습니다. 게다가 김시습(金時習)이 정창손(鄭昌孫)을 조롱하기를 ‘네가 의정을 이처럼 오래 맡고 있으니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보잘것없는 일신도 여러 사람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필시 김시습보다 심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어필(御批)하기를, “대신의 중직은 어진지 못 어진지에 따라 진퇴하는 것이니 오래 머물거나 자주 옮기는 것을 따질 수 없다. 경의 덕이 삼상(三相)에 미치지 못하지 않으니 비록 삼상이 재위한 해보다 지나더라도 진실로 안 될 것이 없다. 김시습(金時習)이 정승을 조롱한 것도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경은 마땅히 더욱 몸을 바쳐 보좌할 뿐이니, 어찌 다른 것을 염려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여전히 사양하기를 그치지 않고 일곱 번째 계사(啓辭)에 이르렀는데, 그 말이 더욱 간절하였다. □ 어필하기를, “경이 일곱 번이나 계사를 올려 사양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그러나 반복해서 생각해보니 경을 가벼이 체차할 수 없다.” 하고, □ 술을 내려 보냈다. 8월에 □ 세자가 원복(元服)을 더하였다. 공이 예식을 주관하는 관원으로 참여하여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중구일(重九日)에 □ 상이 서총대(瑞蔥臺)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과 근신들을 간략하게 불러 각기 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이어서 술잔을 내려 주고 황화(黃花 국화)와 촛불을 하사하였다. 다음 날 상이 □ 전문으로 사례하였다. 신유년 7월에 □ 상이 또 열무정(閱武亭)에 나아갔다. 공경(公卿)과 시종을 부르는 것은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는 고사(故事)에 따라, 어축(御軸)을 내어 각기 제사(製寫)하여 올리게 하였다. 공의 말구(末句)에, “말도 잊은 채 궁궐 안에서 취하고 배부르니 공경과 덕행 오직 성심으로 바치는 데 관계되네.[忘言醉飽鈞天裡 敬德唯關獻曝誠]”라고 하였다. 비록 문자(文字)의 말구이지만 훈계하는 규범을 잊지 않았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대신이 진계(進戒)하는 체모를 얻었다고 하였다. 8월에 임천(林川)에서 선륭전(先隆殿)을 전소(展掃)하였다. 장차 행하려 할 때 □가 아뢰기를, “대신이 본도(本道)에 왕래할 때마다 으레 연향(宴享)을 베풀어 폐단이 적지 않으니 이번 행차에는 하교를 내려 연향을 면제해 주소서.” 하였다.

원문

□上曰。老相遠往。豈無宴禮以慰乎。姑爲之。□命孫副率蓍孫。竝乘驛護行。遣□中使宣酒樂。餞於濟川亭。□特賜豹皮。是日雨。□上又命史官。追及江上。□賜簑衣諸具。皆□御用也。近古人臣。未有受此者。還□朝日。又□賜酒樂郊迎。公上□箋稱謝。上賜御札曰。卿以老德首相。霜天掃塋。豈不表贐薄物乎。是予敬大臣。優老德之微意也。勿謝。十一月。□世子行嘉禮。公又以師。受□賜馬。是月。以去稀年已迫。復詣□闕申前請。乞先時致休。□答曰。自古人君。倚重老成。予何許退。居相位。壽稀年。予所貴也。加勉重職。以輔寡躬。至四啓。□答曰。國家治亂。雖在於帝王之明暗。而亦係於大臣之賢否。卿謂雖聖君。必得賢佐。以致大平。我國古未擇人。雖或不精。如卿老德。予難輊捨。是日四□答。亦皆御筆也。壬戌。公年七十。請順天道致仕。□答曰。卿至稀年。禮當几杖而安之。不宜許退。再□啓几杖固不敢當。然人臣受此。例會廷臣。以榮□上寵。遷□陵在前。不可仍尸其位而遲之。□答曰。予意盡諭。几杖宴。徐當爲之。遲速亦何慮焉。三啓。□答曰。子豈從卿所請。宜勿固辭。四啓。□答曰。國家用人。當先純正。凡官尙然。況大臣乎。如卿純厚大臣去位。則予未知國事是也。五啓。□御批曰。君臣之間。所當情義相孚。爲人臣者。不得於君而在職。則予未知其可也。如卿老德大臣。久居台府。勉輔寘躬。此乃當然之事。不可以稀年輕遞。七月。公患痢苦。上聞之。遣內醫審疾曰。若言予命。恐起居有勞。諱而勿言。今若私問者以□啓。十月。乃受几杖。□四殿皆優賜酒果脯醢等物。以助宴需。公上□箋謝。□御筆批曰。人生七十古來稀。予貴耆德而居相一紀世不多。豈退老成乎。几杖安養。在所當爲。勉輔寘躬。卿宜勿謝。十二月。復上辭。又□批答不允。再辭。□答曰。欲復降批答。恐致重勞。□特命給暇。安心調養。癸亥正月。三辭。□上猶持難。久之。勉允所請。御批授領中樞府事。仍領□經筵。公求退十餘年。始蒙兪□允遞相之日。身氣輕健。始若無疾者。常曰。天馵已收。無往不適。約與兒輩。隨處命駕。水曲山傍。閑往閑來。作聖世無事物。祝□聖算以終天期耳。有時取酒微醺。緩歌起舞以自樂。或問前日。未嘗歡娛。今何如此。答曰。昔負重任。唯力不支是憂。今旣釋之。云胡不樂。九月。□世子卒。公奔訃哭位。連日廢食。悲慟過傷。心痛遽作。幾危數日。滿體痿黃。越三月。□順懷柩將發。公欲往祖于郊。或止之。公曰。我。□東宮舊僚。終始之禮。不可廢。是日心痛又作。幾不能救。自是。心熱大熾。疸證尤重。彌留數月。竟至不起。蓋病因憂□國感傷而危劇也。病中聞有星變。歎曰。吾安得死而塞是災乎。又聞宰相安瑋卒。嘆曰。此人能任厥職。今又逝矣。家人慰解之曰。身病心憂。豈易瘳之道。公曰。吾身雖病。敢忘國事乎。□上遣內醫問疾。□特賜御廚。庶幾可口。珍味無不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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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이 이르기를, “노상(老相)이 멀리 가는데 어찌 잔치와 예절로 위로하는 일이 없겠는가. 우선 그렇게 하라.” 하였다. □ 명하여 손부(孫副)와 이시손(李蓍孫)을 아울러 역마를 타고 호종하게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술과 음악을 주어 제천정에서 전별하게 하였다. □ 특별히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이날 비가 내렸다. □ 상이 또 사관에게 명하여 강가에 추격해 가서 □ 도롱이와 갖은 물품을 하사하게 하였는데, 모두 □ 임금의 어용(御用)이었다. 근고(近古)의 신하 중에 이런 것을 받은 자가 없었다. 돌아와서 □ 아침에 또 □ 술과 음악을 주어 교외에서 맞이하였다. 공이 올라 □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니, 상이 어찰(御札)을 내려 이르기를, “경은 덕이 높은 노상으로서 추운 날씨에 무덤을 치우는데 어찌 표문(表文)과 선물로 보잘것없는 물건을 주지 않겠는가. 이것은 내가 대신을 공경하고 노덕(老德)을 우대하는 작은 뜻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1월에 □ 세자가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공이 또 스승으로 참석하여 □ 하사한 말을 받았다. 이달에 기년(己年)이 다가왔으므로 다시 궁궐에 나아가 신전(申前)을 청하여 먼저 치휴(致休)하기를 청하니, □ 답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은……” 노성한 사람을 의중(倚重)하는 것은 내가 어찌 물러날 수 있겠는가. 정승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장수하기가 드문 법이니, 이것이 내가 귀하게 여기는 바이다. 중책에 더욱 힘써서 과인의 보좌를 하라. 네 번째 계사(啓辭)에 답하였다. “국가의 치란(治亂)은 비록 제왕의 명암(明暗)에 달려 있지만 또한 대신(大臣)이 어질고 어리석음에 관계된다. 경은 성군이라도 반드시 어진 보좌를 얻어야 대평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사람을 잘 뽑지 못하여 비록 정밀하지는 않았지만, 경과 같은 노덕(老德)을 가진 사람은 내가 버리기가 어렵다.” 이날 네 번째 계사에 대한 답서도 모두 어필(御筆)이다. 임술년에 공의 나이가 칠십이 되어 천도를 따라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다. 답하였다. “경은 장수하여 예법상 궤장(几杖)을 잡고 편안히 지내야 하니 물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 재차 계사에서 기장을 잡는 것은 진실로 감당할 수 없으나, 신하가 이것을 받으면 으레 조정의 신하들이 모여서 임금의 은총을 영광으로 여기고, 능(陵)이 앞에 있으면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 지체해서는 안 된다.” 답하였다. “나의 뜻을 다 말하였다.” 궤장연(几杖宴)은 천천히 하려고 한다. 더디고 빠름을 어찌 염려하겠는가. 세 번째 계사(啓辭)에 대한 답: 자네가 어찌 경이 청한 대로만 하겠는가. 굳이 사양하지 말게. 네 번째 계사에 대한 답: 국가에서 사람을 쓸 때는 순수하고 정결한 사람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모든 관직이 그러한데 더구나 대신(大臣)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과 같이 순후(純厚)한 대신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면, 나는 나라의 일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다섯 번째 계사에 대한 답: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마땅히 정과 의리가 서로 부합해야 한다. 신하 된 자가 임금을 따르지 못하면서 직임을 지키고 있다면,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경과 같이 노덕(老德)을 갖춘 대신이 오래도록 대부(台府)에 있으면서 몸을 바쳐 보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젊은 사람을 자주 체차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7월 공이 이질로 고생하자 상이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고 말하기를, “만약 나의 명이라고 말한다면 기거에 수고가 있을까 염려되니 숨기고 말하지 말라.” 하였다. 지금 만약 사적으로 묻는 자가 계사를 올린다면 10월 이에 궤장(几杖)을 받들었다. □ 사전(四殿)에서 모두 술과 과일, 포(脯), 젓감 등의 물품을 넉넉히 내려 연회에 쓰도록 하였다. 공이 올라 전문을 올려 사례하니, □ 어필하기를, “사람이 70세가 되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나는 귀한 나이와 덕망으로 한 세상을 살았으니, 어찌 노성(老成)에서 물러나야 하겠는가. 궤장과 안양(安養)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부지런히 몸을 보중하고 경은 사례하지 말라.” 하였다. 12월에 다시 사직하니, □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재차 사직하니, □ 답하기를, “다시 비답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거듭 수고롭게 하는 일이 될까 염려된다.” 하여, □ 특별히 휴가를 주어 안심하고 조섭하도록 명하였다. 계해년 1월에 세 번째 사직하니, □ 상이 여전히 어렵게 여기다가 오래되어 청한 바를 윤허하여 중추부사로 주고 이어 경연을 맡도록 하였다. 공이 물러나기를 구한 지 10여 년 만에 비로소 승낙을 받아 재상에서 체차된 날에는 몸과 기운이 가볍고 건강하여 처음에는 병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항상 “하늘의 말이 이미 거두어졌으니, 가는 곳마다 편안하다.”라고 하였다. 아이들과 약속하고 곳곳에 수레를 타고 물굽이와 산자락을 한가로이 오가며 성세(聖世)의 무사한 일상을 즐기면서 성상의 국운이 천명을 다하기를 축원하며, 때때로 술을 마시고 약간 취하여 느릿느릿 노래하고 춤추며 스스로 즐겼다. 혹 전날에는 즐겁게 놀지 않다가 지금은 어찌 이와 같으냐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예전에는 중임(重任)을 맡아 오직 힘이 지탱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이제는 이미 벗어났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하였다. 9월에 세자가 졸하였다. 공은 부고를 듣고 곡위(哭位)에 달려가 연일 음식을 폐하고 슬픔과 애통함이 지나쳐 심통(心痛)이 갑자기 발작하여 거의 며칠을 위태롭게 지내다가 온몸이 누렇게 시들었다. 3개월 뒤에 순회(順懷)의 영구(靈柩)를 출발시키려 할 때 공은 교외로 나가 조문하려고 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만류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동궁(東宮)의 옛 신하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예절을 폐할 수 없다.” 하였다. 이날 심통이 또 발작하여 거의 구제하지 못할 뻔하였고, 이후로는 심열(心熱)이 크게 치솟아 달증(疸證)이 더욱 심해져 몇 달 동안 고생하였다.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병이 나라를 근심하는 애통한 감정으로 인하여 위중해진 것이다. 병중에 별의 변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어찌 죽어서 이 재앙을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재상 안위(安瑋)가 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이 사람이 그 직책을 잘 수행하였는데 이제 또 떠나갔구나.”라고 하였는데, 집안사람이 위로하고 해명하기를, “몸에 병이 들고 마음에 근심이 있으니 어찌 쉽게 낫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 몸이 비록 병들었지만 감히 나라의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에서 내의(內醫)를 보내 문병하고 □에서 특별히 어주(御廚)를 내려서 입맛에 맞기를 바랐는데, 진귀한 음식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원문

公感戴曰。天若緩死。當有謝辭。甲子閏二月二十三日。遂易簀。享年七十有二。訃聞。震悼。卽□賜各種素物于家。以助奠需。輟朝三日。至不□御肉膳者有日。賻弔及祭。皆從重典。□別遣右承旨姜士弼弔喪。都承旨洪曇□賜祭。書堂月課。以悼老德大臣爲題。以寓□宸懷。喪葬諸具。一庀於□國。終始哀榮。可謂兩盡而無憾矣。公之爲學。不屑屑於規矩繩墨。而以不愧怍。矯揉氣質。涵養德性。自得應用爲貴。故居止常處。必以勤謹和緩四字及經當矯之以重。急當矯之以緩。褊當矯之以寬。躁當矯之以靜。暴當矯之以和。麤當矯之以細等語。題在窓壁。以寓常目。好讀自警就度量韜晦等卷。尤着力有得曰。如韓魏公王盞等事。容或及之。常謂一身所主。神明不測者。莫貴於天君。不可以些子塵物。點着其上。凡遇事來。爲之則已。却復掃除。以全本然虛靈可也。燕居無事。頗有自樂之時。謂子弟曰。爲善最樂。非樂。不足以語君子。汝試以論語中暮春者。春服旣成。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之語。永言之。似若歌調。而長詠之。則古人之氣象。可得矣。箕子過故殷墟。亡國之懷如何。而欲哭則不可。欲泣則爲近婦人。乃作麥秀之歌。古人之不輕用性情。可見矣。容色愉和。動止中適。雖在倉卒。未嘗疾言遽色。喜怒不形。雅不喜聲色技藝。待人開懷。不作町畦。必以忠信爲主。相對接話。亹亹忘倦。人有觸犯。必自降屈。不喜聞人過。聞之必先探其心。究其可恕之道。又必求其長處。聞人之善。必揚譽不已。雖婢僕之愚。有一小善。必謂子弟曰。某爲此言行此事。可善也。汝輩勿少也。有所陳善。必假色頷許曰。汝敎我矣。有過則諭誨不已。或有偸盜者。必反憐之曰。迫於飢寒。不得已也。還給其贓曰。汝若飢寒。須來告我。愼勿復然。如欲任使。必再三詳命。使之不迷。然後授之。他人若言公過云。則雖至微者所道。必思所以致謗之由而反己曰。吾果有之。民固至愚而神矣。或告曰。時人慢易公甚。或有因事而慍告者。公纔聞輒喜。至於笑倒曰。彼人是矣。安有畏我者乎。慍者亦解。畢竟偕笑而去。欲有所作爲。常以古人行事。將來己身上料理。於宋朝名相。多慕效之。最喜開襟下問。至訪於微賤。如得其善。必稱好而采用之。人有被薦者來謝。輒不悅曰。君才可用。何謝之有。爵祿。人主之柄。非私門所有。愼勿復然。常言有若無。實若虛。犯而不較。君子處世。事之無害於義者。從俗可也。害於義則不可從等語。公於文藝筆札。才品雖高。而不屑以此得名。至於嶢嶢之行。皎皎之事。皆欲掩蔽而韜晦。故公之才藝行實。多爲德量所蘊。人有不及知者。奉先祀。一遵瓊山儀節。必致誠敬。或有故不得與。或設於他家而攝之。則必候其當事之時。衣服冠而坐。

번역

공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죽음을 늦추어 준다면 마땅히 사례하는 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갑자년 윤2월 23일에 드디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72세이다. 부고를 듣고서 진동하고 슬퍼하였다. 즉시 여러 가지 소박한 물품을 집안에 내려 주어 제수(祭需)에 보태게 하였다. 조석을 거르는 것은 3일이 되자 어육선(御肉膳)을 먹지 않는 날이 있게 되었고, 부조와 조문 및 제사는 모두 중전(重典)을 따랐다. 별도로 우승지 강사필(姜士弼)을 보내어 조상하게 하고, 도승지 홍담(洪曇)에게 사제(賜祭)를 내렸으며, 서당의 월과(月課)는 ‘노덕 대신(老德大臣)’이라는 제목으로 삼아 성상의 회포를 부쳤다. 상장(喪葬)에 필요한 모든 물품은 모두 국상(國喪) 때와 같이 마련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애영(哀榮)이 모두 다하여 유감이 없다고 할 만하다. 공의 학문은 규구(規矩)와 성묵(繩墨)에 얽매이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기질을 바로잡고 덕성을 함양하며 스스로 얻어 응용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거처하고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근근화완(勤謹和緩) 네 글자를 중시하였다. 급한 것은 완만함으로 바로잡고, 좁은 것은 너그러움으로 바로잡으며, 조급한 것은 고요함으로 바로잡고, 포악한 것은 온화함으로 바로잡고, 거친 것은 섬세함으로 바로잡는다. 등의 말을 창문에 써서 항상 눈에 띄게 하여 읽을 때마다 스스로 경계하고 도량(度量)과 도회(韜晦) 등의 책을 공부하는 데 힘쓰는 것이 좋다. 한 위공 왕잔(王盞)의 일 같은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항상 “한 몸을 주관하여 신명(神明)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천군(天君)보다 귀한 것이 없으니, 작은 티끌과 같은 것으로 그 위에 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무릇 일이 생기면 처리하고 나서 다시 잊어버려 본연의 허령함을 온전히 하는 것이 옳다. 한가로이 지내며 별일이 없어 자득(自得)하는 때가 있으니, 자제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즐거움이 아니면 군자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너는 《논어》 〈모춘(暮春)〉을 한번 논해 보라. 봄옷을 다 지었는데 관(冠)을 쓴 사람이 다섯아홉 명이나 된다. 동자 6, 7명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부르고 돌아가는 말을 길이 말하면 마치 가조(歌調)와 같고 길게 읊으면 옛사람의 기상을 얻을 수 있다. 기자(箕子)가 고(故) 은나라 터를 지나갈 때 망국의 회포는 어떠하였으랴마는, 곡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부인에게 가까이 있어서 안 될 것이니, 이에 맥수(麥秀)의 노래를 지었다. 옛사람이 성정(性情)을 경솔하게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용색은 화락하고 행동거지는 중도에 합당하여 비록 창졸한 때에도 언사가 빠르거나 얼굴빛이 급박하지 않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고 평소 성음(聲音)이나 기예(技藝)를 즐기지 않는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을 열어 마을의 밭두둑처럼 하지 않고 반드시 충신(忠信)을 위주로 삼으며,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할 때는 부지런히 피곤함을 잊는다. 남이 자신에게 허물을 범하면 반드시 스스로 몸을 낮추고 남의 잘못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들으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탐구하여 용서할 만한 도리를 따지고 또 반드시 장점을 찾으려 한다. 남의 선행을 들으면 반드시 그 명예를 드날려 마지않는다. 비록 어리석은 비복(婢僕)이라도 작은 선행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아무개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일을 하였으니, 가선(可善)이다. 너희들은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한다. 선을 진술하면 반드시 얼굴빛을 바꾸고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고는, “너의 가르침에 힘쓰겠다.”라고 한다. 잘못이 있으면 꾸짖어 타이르기를 마지않는다. 혹 도둑질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되돌아보고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기한(飢寒)을 당하여 어쩔 수 없었겠구나.” 하고는 그 장물(贓物)을 돌려주면서, “너희가 만약 기한을 당하면 나에게 와서 고하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한다. 만일 일을 맡기고자 하면 반드시 두세 번 자세히 명하여 어두매어 헤매지 않게 한 뒤에 맡긴다. 다른 사람이 공의 허물을 말하면, 비록 지극히 하찮은 자가 말한 것이라도 반드시 비방을 초래한 까닭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돌려 말하기를, “내가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구나.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지만 신명(神明)이 깃들어 있다.”라고 한다. 혹 고하기를, “사람들이 공을 매우 업신여기네.” 하거나, 혹은 일로 인하여 화가 나서 고하는 경우도 있다. 공은 남이 칭찬하면 기뻐하고, 웃음이 터지면 “저 사람이 옳다. 어찌 나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화난 사람도 마침내 이해하여 함께 웃고 떠났다.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옛사람의 행실을 가지고 장차 자기 몸에 적용하였는데, 송나라 조정의 명상(名相)을 매우 사모하고 본받았다. 특히 마음을 열어 물어보는 것을 좋아하여 미천한 사람에게도 찾아와서 만일 그가 잘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채용하였다. 남이 천거를 받아 와서 사례하면, 번번이 불쾌해하며 “그대의 재주가 쓸만하니 무엇을 사례할 것이 있겠는가? 작록(爵祿)은 임금의 권한이지 사문(私門)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삼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라고 하였다. 항상 무시하는 듯이 말하고 실로 허심탄회하게 대하였으며,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 군자의 처세에 “일이 의리에 해롭지 않으면 세속을 따라도 괜찮고, 의리에 해로우면 따르아서는 안 된다.”라는 등의 말이 있는데, 공은 문예와 필찰(筆札)에 재주가 높았으나 이것으로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높은 행실과 밝은 일에 대해서는 모두 감추고 숨기려고 하였으므로 공의 재주와 행실이 대부분 덕량(德量)으로 덮여 있어서 남들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봉선사(奉先祀)는 한결같이 경산(瓊山)의 의절을 따랐는데, 반드시 성심과 경건함을 다하였으며 혹시라도 사정상 참여하지 못할 때에는 다른 집에 제사를 지내게 하되 그 집안에서 대신 모시도록 하였다. 그러면 반드시 제사 지내는 때를 기다려 의복과 관을 갖추고 앉았다.

원문

如當祭者然。時過乃復常。雖劇疾不廢。每嘆曰。吾生而爲人。不知父母之面。亦未嘗知呼父母。天地間罪人無如我也。故每遇初度。輒不樂曰。劬勞之日也。家人欲設壽觴。必痛抑之。居第在松峴之傍。自號松峴翁。或有故不得陪□扈。而□大駕過峴。則必具朝服。出伏於中門之外。或言宜伏於大門之外。公曰。處室則吾心不寧。所以伏地。若更出門。人必有見知者。是沽名也。常時出入。不敢當路。以避□輦迹。雖居深室旋便。必避日月。族屬貧窮。必力濟之。婚喪尤主焉以資之。常曰。先祖之餘氣。托在於玆。事雖難易。恝然者薄也。凡爲人謀。每曰。當設以身處其地。乃可以盡得其情。不可以非吾事而少忽之也。凡蟲獸可爲庭翫者。則必放之曰。飮啄自如。物我同情。滋味可供者。則必求生道曰。豈忍對生而思食乎。人有所餽。雖小物。必有酬謝。若稍多則必曰。吾爲宰相。豈不得食。當留什一。餘可自供。若其誠意。則已領之矣。人來求取。有則必從曰。不可以外物。害吾本心之無累。若取於人。則雖花卉之微。必曰。彼亦珍玩。吾今取來。得無不可乎。平生自奉甚薄。朝夕所供。不過數器味。若疊則必捨一器曰。古之賢相。食不重肉。況我乎。有時廚肉不繼。家人欲貿諸市。則止之曰。我家若買。則近於矯僞。況我本不多食。而又不嗜之耶。衣服之飾。不喜綾段。故朝襮之外。絶不用之。平居好穿舊澤。不嗜新鮮。每謂子弟曰。丈夫之志。不累外飾。服美于人。可恥之甚也。家居。未嘗言器用陋惡。家人欲試之。當對客之座。置一陋席。候之數月。不言易之。家人知終不言。代以新者。公又不言。其爲儉素。不事致飾。所性然也。公有藻鑑於後輩。常以奬進爲事。凡當試取。每欲爲□國家得人。而先以必得爲心。每謂子弟曰。君子所爲。雖暗中小事。不可枉曲。至於科第。則一身進退繫之。潛相代借者。固不論。至於遇前日所製之題。吾力可改則改之。如不得更構。雖至曳白。賢於隱默欺人。以賊吾心者萬萬。欲事君而先欺君。可乎。世俗有落第而傷懷者。安有大丈夫行事。決得失於一夫之目而爲之憂樂哉。其流之弊。馴至於鄙夫之患失。器量如此。其將安用。汝輩切宜戒之。家人嘗買貧人男口於十年之前。後奴率良妻之子來。公問其年。則乃買一歲所生也。卽招本主而與之。主以貧故。願復受直。感公德而輕其數。公曰。畜物價尙高。況人口乎。遂倍數而歸之。嘗婚嫁孤孫。事適連擧。悉取鄕家儲穀以來。舟乃覆沒。俄更聞之。則近涯遭風。皆得拯取。有謂公當責篙師。使之充納者。公曰。船敗有數。而吾家亦失財之時也。業已見失。必求復得。不亦鄙瑣哉。況忍責間關十生之人。使之辦出乎。竟不問。林川舊宅。先業甚厚。雖公髫孩之時而積粟有擬縣邑。自公之貴而其儲漸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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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지낼 때와 같아서 시기가 지나면 다시 평상시로 돌아갔다. 심한 병을 앓는 중에도 폐하지 않았는데, 매양 탄식하기를 “내가 태어나 사람으로 살면서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부모라고 부르지도 못하였으니 천지 사이에 죄인이 나만 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매번 초하루가 되면 기뻐하지 않고 “부모님을 모시는 날이다.”라고 하였으며, 집안사람이 생신 잔치를 베풀려고 하면 반드시 통렬하게 억제하였다. 거처하는 곳이 송현(松峴) 근처에 있어서 스스로 ‘송현옹’이라고 자칭하였는데, 혹 사정상 어가(御駕)를 모시지 못하고 어가가 송현을 지날 때면 반드시 조복을 갖추고 중문 밖에 나가 엎드렸다. 어떤 이가 대문 밖에 엎드려야 한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방 안에 있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땅에 엎드린 것이니, 다시 문밖으로 나가면 사람 중에 나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명예를 구하는 일이다.” 하였다. 평상시 출입할 때도 감히 길을 막지 못하여 어가의 행적을 피하였고, 비록 깊숙한 방에 있어 곧바로 편안하게 할 수 있었으나 반드시 해와 달을 피해 지냈다. 친족이 가난하면 반드시 힘을 다해 도와주었고, 혼사나 상사를 주관하여 비용을 대주었다. 항상 말하기를, “선조의 남은 기운이 여기에 의탁하고 있으니, 일이 비록 어렵고 쉬운 것이라 할지라도 무관심하게 하는 것은 박한 짓이다.” 하였다.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할 때면 매양 말하기를, “마땅히 내 몸으로 그 자리에 처해 보아야만 그 정상을 다 알 수 있으니, 나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뜰에서 구경할 만한 벌레가 있으면 반드시 풀어주면서 말하기를, “먹고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우니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정이 있다.” 하였고, 먹을 만한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살 길을 찾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차마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고서 먹을 것을 생각하겠는가.” 하였다. 남이 주면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사례하였고, 조금 많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내가 재상이 되었으니 어찌 먹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십분의 일은 남겨 두어야 나머지는 스스로 공급할 수 있다.” 하였는데, 그 성의는 이미 알 만하였다. 남이 와서 요구하면 있으면 반드시 따라주면서 말하기를, “외물(外物) 때문에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하였다. 나의 본심에 누가 되는 것을 해치지 않으려면, 만약 남에게서 취할 때에는 비록 꽃과 나무 같은 미미한 것이라도 반드시 저것이 진귀한 구경거리라고 말하고는 내가 지금 가져온다면 안 될 것이 없다고 한다. 평생에 스스로 지키는 것이 매우 박하여 아침저녁으로 먹는 것은 몇 가지 음식에 불과하다. 만약 겹쳐서 차린다면 반드시 한 그릇을 버리면서 말하기를, “옛날의 어진 재상들은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는데, 하물며 나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때때로 부엌에 고기가 떨어져 집사람이 시장에서 사 오려고 하면, 이를 만류하고 말하기를, “우리 집에서 사 온다면 허위의 겉치레에 가까운 일이다. 더구나 나는 본래 많이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좋아하지도 않는데, 하물며 어찌 사겠는가.”라고 한다. 의복을 꾸미는 데는 비단옷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조복(朝服)과 곤룡포 이외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평소에 해진 옷을 입기를 좋아하고 새 옷을 좋아하지 않으며, 매양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대장부의 뜻은 외적인 꾸밈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니, 남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한다. 집안에서 기용(器用)이 누추하고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다. 집안사람이 시험을 보이려고 객의 자리에 마땅히 한 칸의 누추한 자리를 놓아두고 몇 달을 기다려도 바꾸지 않았는데, 집안사람은 끝내 말하지 않을 줄 알고 새것으로 대신하였으며, 공 또한 말하지 않았다. 그 검소함에 치장하는 일을 일삼지 않은 것은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공은 후배들에게 조감을 베풀어 항상 권면하여 나아가게 하는 것을 일삼았다. 무릇 시험을 볼 때마다 매양 국가를 위하여 인재를 얻고자 하여 먼저 반드시 얻으려고 마음먹었다. 매번 자제에게 말하기를, “군자가 하는 일은 비록 암암리에 작은 일이라도 굽혀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과제(科第)에 이르러서는 한 몸의 진퇴가 여기에 달려 있으니, 몰래 서로 대신 빌려 주는 것은 진실로 논할 것이 못 되지만, 만일 전날 지었던 시제를 만나서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있으면 고치고, 다시 짓지 못하면 비록 백지를 내더라도 침묵하여 남을 속이는 것보다는 나으니,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을 만번이나 더 죄악스럽게 여겼다. 임금을 섬기고자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려 해서는 안 된다. 가당한 일이냐. 세속에 낙제하여 마음을 상하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대장부의 행사에 한 사람의 눈에 얻고 잃는 것을 가지고 근심하고 즐거워하겠느냐. 그 폐단이 점차 비루한 사람의 환실(患失)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기량이 이와 같으면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 너희들은 모쪼록 경계해야 한다. 집안에서 10년 전에 가난한 사람의 아들을 사 왔는데, 뒤에 종이 좋은 아내의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공이 그 나이를 물으니 이제 겨우 태어난 아이였다. 즉시 본주를 불러 주어 주고, 주인이 가난 때문에 다시 값을 치르고 받으려고 하자 감동하여 그 값을 줄여 주었다. 공이 말하기를, “가축의 값이 오히려 높은데 하물며 사람의 입이겠는가.” 하고 마침내 갑절로 값을 주어 돌려보냈다. 일찍이 외로운 손자에게 혼인을 시켜줄 때 일이 마침 연이어 거행되어 모두 향가의 저곡(儲穀)을 가져오게 했는데, 배가 뒤집혀서 없어졌다. 조금 전에 다시 들으니 근애(近涯)에 풍파를 만났다고 한다. 모두 건져내었으므로 공이 마땅히 뱃사공을 꾸짖어 채워 넣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이르기를, “배가 부서지는 것은 운수가 있어서인데 우리 집안도 재물을 잃는 때를 만난 것이다. 이미 잃은 것을 반드시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 비루하고 졸렬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간신히 열 명의 목숨을 구한 사람을 꾸짖어 마련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묻지 않았다. 임천(林川)의 옛집에는 선업이 매우 두터워 공이 어린아이 때부터 곡식을 쌓아 놓은 것이 고을에 비견될 정도였는데, 공이 귀해지면서 그 저축이 점점 줄어들었다.

원문

船敗之後。更無餘蓄。先世庫屋。久已頹壞。鄕奴有請復建。則必曰。於吾無穀何。竟不聽。公久爲宰相。而子孫皆仰資。用度常不給。至易布而取穀。公始爲相。感激有爲。常讀大學衍義。或至夜分。旣而嘆曰。吾讀此書。將以致用。而邇來謀議。動見齟齬。何也。爲政務存大綱。不用明察。唯以得事體爲先。遵守成憲。不喜紛更。持撫盈成。靜而安之者。乃其志也。嘗曰。□祖宗與先臣。經歷多。思慮深。後人遵之無敗足矣。作小聰明。要勝於□祖宗之上。於義安乎。故凡論人才。必以持重。不變更舊章爲首。嘗讀書。至人徒知有功之爲功。不知無功之爲功。三復喟然曰。知此者鮮矣。公提調太僕。謂畿民之困。多由箭串之柵也。欲築城而重用民力。請以國布。償民聽役。又曰。自古□中原有事。我□國必受其禍。義州一境。古設三鎭。猶不免躪轢之患。今則只有一鎭。襟袍極闊。脫有不虞。沮遏無策。長城不可無。亦建白償力而築之。其議論。必以先見遠慮爲主。若非其志也。不肯從多而苟合。亦不敢自以爲必是。雖擧朝皆同。獨執議以上曰。吾意則如此。唯聽□睿斷云。每言議事外庭。雖有異同。心之所懷。必盡於□上前而無隱。且曰。言有不同。所以下議。若皆雷同。非議事之體也。其議或蒙□採施。則輒縮然不安曰。鄙議無乃失當。而□聖鑑莫是謬用耶。其臨事規畫。多出人意表。而時人若不我用。則亦惡與人爭辨以勝之。唯以自克爲剛。性不喜事。不喜建白立條。久居相位。不欲以皎皎之事立名。人或稱公之美。輒應之曰。汝欲面諛我耶。必多方掩匿而韜晦之。故人鮮知其所爲之迹。而或謂其不事事者。非知公者也。若□國有難處之事。或災變異常。形於言色。悒悒若無所容。夜不成寐。起而開窓視天者屢矣。每當□經筵。必思程子齋宿之事。先日致敬。言動不敢放。入臨講章。必從容委曲。雜引經史。反覆陳□啓。及退家。移時靜默。思其所□啓之當否。常居有疾。呻痛似若不堪起者。及將入□侍。具服而出。則便覺蘇醒。歸而復呻猶若。豈非以志帥氣而然也。觀公儀貌。似若遲鈍。而其處事。剛克有勇。詳愼周備。卽始慮終。每欲萬全。然後乃擧。不但大者。雖尋常細事如簡札之末。莫不皆然。頃者。□朝廷欲設堡於慶興江北。公終始執不可曰。奪彼魚鹽往來之路。不久生變。未幾。果有警而罷。及鎭將皆被罪謫。旣而。反恕其人曰。事雖未宜。爲□國之心。亦可嘉也。嘗論待倭之道曰。□祖宗深懲麗季之禍。雖以□太祖神武。優結朝船款接。今者。有司不免出納之吝。頗失懷柔之義。傷於□國貌。益激其怒。早晩捲海而來。其可以米布禦之乎。至於乙卯。公言果驗。常以古今異宜。事非獨辦。自以無補於□國。而厚祿忸怩。未嘗一日安。故前後上辭。無慮數十餘章。而大意皆以慙愧羞恥爲主。其曰。此心之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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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망한 뒤로 다시 남은 재산이 없어서 선세(先世)의 고옥(庫屋)이 오래도록 무너져 있었는데, 향노(鄕奴)가 고쳐 세우기를 청하면 반드시 “나에게 곡식이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라고 하고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공이 오랫동안 재상이 되었으면서 자손들이 모두 그를 의지하여 쓰는 데에 늘 넉넉히 주지 않고 심지어는 베로 바꾸어서 곡식을 취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비로소 재상이 되자 감격하여 항상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었는데, 밤이 깊도록 읽고 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장차 실천에 쓰기 위해서인데 근래의 의논들은 어긋나는 것을 보게 되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정무(政務)를 행함에는 대강(大綱)이 있으면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없고 오직 사체(事體)를 얻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성헌(成憲)을 준수하여 번거롭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지키고 다스려 가득 채우고 이루어 놓은 것을 조용히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과 선신(先臣)의 경험이 많고 생각이 깊으니 후인이 그것을 따라 실패가 없으면 족하다. 소총명(小聰明)으로 조종보다 더 나으려고 할 필요 없다.” 하였다. 의리에 있어서는 안이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무릇 인재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지중(持重)하여 옛 법을 바꾸지 않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 일찍이 《서경》을 읽다가, “사람은 오직 공(功)이 있는 것을 공이라고 알고, 공이 없는 것을 공이라고 알지 못한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세 번이나 반복하고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하였다. 공이 태복시 제조로 있을 때 경기 백성들이 곤궁한 것은 대부분 화살과 창을 꽂아 놓은 성책(城柵) 때문이라고 하여 성을 쌓으려고 민력(民力)을 많이 쓰려 하였는데, 국포(國布)를 가지고 백성의 부역을 대신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중국에 일이 있으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그 화를 받는다. 의주(義州) 한 경계에는 옛날부터 세 진(鎭)이 있었으나 오히려 침략의 근심을 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단지 한 진만 있어서 옷깃이 매우 넓으니 만일 뜻밖의 변고가 생기면 막을 방책이 없다. 장성(長城)이 없어서는 안 되니 또한 건의하여 부역을 대신하고 성을 쌓아야 한다.” 하였다. 그의 의론은 반드시 선견지명과 원대한 생각을 위주로 하였으며, 만약 그 뜻에 맞지 않으면 많은 사람을 따라 구차하게 합치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감히 반드시 옳다고 자부하지 못하였다. 비록 온 조정이 모두 같은 의견이라도 의론을 집행하는 이상으로는 “내 생각은 이와 같으니, 오직 □의 결단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매번 의논할 때마다 뜰에서 하는 말에는 비록 의견이 다르더라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반드시 □ 앞에서 다 드러내어 숨김이 없었다. 또 말하기를 “의견이 다른 것은 의논하는 것이니, 만약 모두 똑같이 한다면 의논하는 체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의론이 혹 채택되어 시행되면 문득 움츠리며 불안해하며 “나의 의견이 잘못된 것인가? □ 성상께서 잘못 쓰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일에 임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뜻보다 뛰어났으나, 때로 사람들이 나를 쓰지 않으면 또한 남과 다투어 이기려 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극복하는 것을 강함으로 삼았다. 성품이 일을 좋아하지 않아 건의하고 규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래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도 맑은 일로 이름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혹 공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매번 응대할 때마다 “네가 나에게 아첨을 하려고 하는구나.”라고 하여 반드시 여러 방도로 숨기고 감추었으므로 친구들은 그가 한 행동의 자취를 잘 알지 못하고 혹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공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재변이 이상하여 언색(言色)에서 근심스러운 기색이 드러나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자주 있었다. 매번 경연에 나아갈 때마다 반드시 정자(程子)가 숙재(宿齋)한 일을 생각하였으며, 일전에 치경(致敬)할 때에는 언동이 감히 방종하지 못하였다. 강장(講章)을 지어 올릴 때는 반드시 조용하고 자세하게 경사(經史)를 두루 인용하여 반복해서 진달하였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한참 동안 침묵하며 진달한 것이 합당했는지를 생각하였고, 평소 질병이 있어 일어나지 못할 듯 신음하다가도 강연에 들어가려고 옷을 갖추어 입고 나가면 곧바로 소생하는 기분이 들었다가 집에 돌아오면 다시 신음하던 것과 같았으니, 어찌 뜻이 기운을 주관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의모(儀貌)를 보면 더디고 둔한 듯하나, 일을 처리할 때는 강하고 용맹하며 상세하고 신중하여 두루 갖추어 처음을 생각하고 끝을 염려해서 매양 만전이 되기를 바란 뒤에야 거행하였다. 큰일뿐만 아니라 심지어 간찰(簡札) 같은 일상적인 작은 일도 모두 그러하였는데, 지난번 조정에서 경흥(慶興) 강북(江北)에 보(堡)를 설치하려고 하자 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안 된다고 고집하여 저들의 어염(魚鹽)을 왕래하는 길을 빼앗았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변고가 생겼다. 얼마 안 되어 과연 경보가 울려 파하고 진장(鎭將)들이 모두 죄를 받아 귀양 갔는데, 그 뒤에 도리어 그 사람을 용서하면서 “일이 비록 마땅하지는 않았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가상하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왜(倭)를 대우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우리 조종(祖宗)께서 고려 말의 화를 깊이 징계하여 비록 태조 신무왕(神武王)으로 조정의 배를 우대하고 접대를 친절하게 하셨으나, 지금은 유사(有司)가 출납하는 데에 인색함을 면치 못하여 회유하는 의리를 자못 잃었으니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킨다.”라고 하였다. 그 분노가 더욱 격해져서 조만간에 바다를 거슬러 올라올 것인데, 쌀과 베로 막을 수 있겠는가. 을묘년의 공언이 과연 들어맞았다. 항상 고금의 이치가 다르고 일은 혼자서 처리할 수 없다고 여겨 스스로 나라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고, 후한 녹봉이 부끄러워 하루도 편안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후로 올린 상소가 수십 장이나 되는데 그 대의는 모두 부끄럽다는 것이 중심이었다. 이 마음의 부끄러움이란

원문

若撻于市。心之愧恥。若犯偸盜。身非鼠雀。心豈少安。則其情辭之懇。可見矣。每自笑曰。乃公相業眞可笑。議政十年。唯上辭一事而已。每受□內賜。必曰。吾少孤。長於奴隷人之中。無學無能。幸蒙□榮寵若此。□朝廷之辱極矣。凡間生民艱苦。必瑟縮不安。蹙額移時。尋常語子弟曰。吾生而無德於民。職在乘轎。每上人肩。平生靦顔。愧心不歇。我死。愼勿用擔轝。重赧已死之魂。公立朝久。更歷時變。雖孤踪踽涼。不事攀援。故洪益城知其然。常曰。吾喜尙君單獨而行也。自公郞潛。益城與鄭相光弼,尹相殷輔。皆以公輔期之。鄭相嘗修家垣。稍移舊址曰。吾爲尙某後日之行而廣此路也。□大王大妃之同聽政也。公奏事簾前。□大妃傳曰。相公致此。不獨未亡人與□殿下之意也。先□王常稱卿可大用。至於書名屛障以識之。不幸未及。今之用卿。實□先王意也。公感激進曰。小臣蒙□先王恩寵罔極。用□特旨除官。殆過十餘度。時人至疑臣以他道進也。□答曰。卿豈以他道進者。特知遇深耳。嘗自謂吾入仕輔國。極無可取。若不爲忮害。忌克勝己。則差或可謂云爾已矣。晩年每謂子弟曰。汝輩須趁富年力學。少時不讀書。老衰叨大任。斷決□國事。是非茫然。雖欲强談。精神眩暈。臨卷疾輒作。終至於負□國恩以死。誠可惜也。病篤。猶謂子弟曰。夜氣或淸。心神虛明。記得少日所習文字。頗有歷歷分明處也。又曰。無定力之人。少壯時。似有可觀。老死鮮不謬錯。因言論語中三戒曰。有定力之人。不如是。平時嘗戲家人曰。汝輩以我爲臨死。有遺言離訣之辭乎。若然。迷劣婦子誦言瑣屑之語而號哭尸前。則甚妨事體。殊非大人一視死生之道也。及其病革。痛若少定。精神言笑。不少差爽。至於屬纊以前。無異平常。每用寬言。以鎭靜一家之心。故外人皆危久疾。而家人則實未察也。果終無一言而歿。公聘宗室介山副守諱孝智之女李氏。貞敬夫人。夫人賢而克配。明哲過人。人不敢以非道干。或敎夫人鬻家儲魚藿以取貨。夫人正色曰。吾公未嘗爲不義以營利。汝欲使我以穢名加之乎。遂絶之。凡事皆類此。大抵公居家。怡愉和易。雖婦人小子。諄諄敎以義方。使得飽聞而心飫。故自夫人以下。皆知不義之可恥。生三男。二夭。一鵬南。宣務郞。亦先公亡。娶節度使李亨順之女。生一男二女。男蓍孫。司紙。女長適縣監鄭麟壽。次適生員李某。蓍孫娶左議政沈通源之女。生男女。男子儀。女幼。麟壽生四男二女。男思敏,思敬,思愼。餘幼。女長適監役沈信謙。次幼。某生二男二女。男耆俊壽俊。女幼。思敏娶舍人崔顒之女。信謙生男女。皆幼。夫人先公逝。以節度使金胤宗側室女幹家。無兒。又側室有一男存省。觀象監直長。娶郡守金鑌之女。生二女一男。皆幼。用是年五月十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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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저자에 매질을 당하면 마음이 부끄러워하고, 만약 도둑질을 하면 몸은 쥐나 참새가 아닌데 어찌 조금도 편안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정사(情辭)의 간절함은 알 수가 있다. 나는 늘 스스로 우스워하였다. 공상(公相)의 업적이 참으로 우습다. 의정(議政) 10년 동안 오직 임금께 사양한 한 가지 일뿐이었다. 매번 -원문 빠짐.-안에서 내린 것을 받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나는 어릴 때부터 노예들 가운데서 외로웠고 학문도 능력도 없는데 다행히 이와 같은 영광과 총애를 입었으니 조정의 수치가 지극하다. 모든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 반드시 움츠리고 불안해할 것이다.” 하고, 이마를 찌푸린 채 한참 동안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서 백성에게 덕이 없는데 직책은 가마를 타는 것이라 매번 사람의 어깨에 올라탄다. 평생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으니 내가 죽으면 삼가 가마를 쓰지 말아라.” 하였다. 죽어서도 부끄러운 혼을 무겁게 하였는데, 공은 조정에 오래 있으면서 다시 시변(時變)을 겪었다. 비록 외롭고 쓸쓸한 처지로 남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으나 홍익성(洪益城)이 그럴 줄 알았다. 항상 말하기를, “나는 상군(尙君)이 홀로 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공랑(公郞) 잠익성(潛益城)과 정상 광필(鄭相光弼), 윤상 은보(尹相殷輔)가 모두 공의 보좌를 기대하였다. 정상(鄭相)이 일찍이 집안의 담장을 수리하고 조금 옛터에서 옮기면서 말하기를, “나는 상군을 위하여 후일의 행차에 대비해 이 길을 넓히는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함께 정사를 들을 때 공이 발 앞의 주렴(珠簾)에서 일을 아뢰자, □대비가 전교하기를, “상공이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미망인과 □전하의 뜻뿐만이 아니다. 선왕께서 항상 경은 크게 쓰일 만하다고 칭찬하시고 심지어는 병풍에 이름을 써서 표시하기까지 하셨다. 불행히도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경을 쓰는 것은 실로 □선왕의 뜻이다.” 하였다. 공이 감격하여 아뢰기를, “소신은 선왕의 은총을 망극하게 입어 특지(特旨)를 받아 관직에 제수된 것이 거의 10여 차례나 되니, 사람들은 소신이 다른 길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하니, □대비가 대답하기를, “경이 어찌 다른 길로 진출하였겠는가.” 하였다. 특별히 깊이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다행이다. 일찍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벼슬에 들어가 나라를 보좌하는 데에는 전혀 취할 만한 점이 없으니, 만약 남의 해를 두려워하거나 기심(忌心)으로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조금은 괜찮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노년에는 매양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모름지기 젊어서 힘써 공부해야 한다. 젊었을 때 글을 읽지 않고 늙어서 대임(大任)에 임명되면 국사를 결단하는 데 시비가 아득하여 비록 억지로 말하려고 해도 정신이 어지러워 책을 보면 병이 생겨 결국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죽게 되니 참으로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병이 깊었으나 오히려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밤 기운이 혹 맑아지면 심신이 허명(虛明)해져서 젊은 시절 익힌 글자가 다소 분명하게 기억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정력이 없는 사람은 젊을 때에는 볼 만한 점이 있는 듯하지만 늙어 죽을 때는 잘못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논어》의 삼계(三戒)에 ‘정력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지 않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집안사람들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죽을 때 유언으로 이별의 말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미련한 부자(婦子)들이 자질구레한 말을 외우고 시신 앞에서 곡하는 것은 일의 체모에 매우 방해되니, 이는 대인(大人)이 생사를 똑같이 보는 도리가 전혀 아니다.”하였다. 병을 앓게 되었을 때에는 심하게 고통스러웠으나 조금 안정되면 정신과 언행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고, 죽기 직전까지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매양 너그러운 말로 온 집안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므로 외인들은 모두 위중하다고 하였지만 집안사람들은 실로 잘 살피지 못하였다. 과연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죽었다. 공빈(公聘) 종실(宗室) 개산 부수(介山副守) 휘(諱) 효지(孝智)의 딸 이씨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다. 부인은 어질고 슬기로워 남편과 잘 지냈으며, 명철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히 부도덕한 방법으로 부인을 시켜 집안의 저축을 팔아 물건을 사 오게 하지 못하였다. 부인 정색하고 말하기를, “우리 공이 일찍이 불의(不義)로 이익을 꾀한 적이 없는데, 너는 나에게 더러운 명예를 덮어씌우려 하는가.” 하고 마침내 끊어 버렸으니, 모든 일이 다 이와 같았다. 대체로 공은 집안에서 화락하고 온화하여 부인과 소자(小子)들에게도 의방(義方)을 자상하게 가르쳐서 충분히 듣고 마음으로 익숙하게 하였으므로 부인 이하가 모두 불의를 부리는 것이 부끄러운 줄 알았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둘은 요절하고 하나는 붕남(鵬南) 선무랑(宣務郞)이다. 또한 공이 죽기 전에 절도사 이형순(李亨順)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시손(蓍孫)으로 종이서원(紙署員)에 있었고, 딸 중 첫째는 현감 정인수(鄭麟壽)에게 시집갔으며, 둘째는 생원 이모(李某)에게 시집갔다. 시손은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의(儀), 딸은 유(幼)이다. 정인수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사민(思敏), 사경(思敬), 사신(思愼)이고 나머지는 어렸다. 딸 중 첫째는 감역 심신겸(沈信謙)에게 시집갔다. 차남. 모생(某生)의 둘째 아들 둘과 딸 둘이다. 아들은 기준(耆俊)ㆍ수준(壽俊)이고, 딸은 유(幼)ㆍ사민(思敏)인데 사인은 최영지(崔顒之)의 딸에게 시집갔다. 신겸(信謙)의 아들딸은 모두 어리다. 부인 선공(先公)이 세상을 떠났다. 절도사 김윤종(金胤宗) 측실의 딸 간가(幹家)는 아이가 없다. 또 측실에게 한 아들 존성(存省)이 있는데 관상감 직장(觀象監直長)으로 군수 김용(金鑌)의 딸에게 시집갔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이 해 5월 19일에 쓰다.

원문

禮窆于果川治之東霜草里坤坐艮向之原。與夫人同兆異域。公嘗謂子弟曰。吾死。是非必有諡。汝爲狀起草。事迹無可述者。若曰。公晩好鼓琴。微醺。輒彈感君恩一曲以自娛。則當矣。公晩而學琴。按譜自得。音調深遠。然遇災不敢執。家人之外。一無聞者。公立朝四十六年。識量洪遠。忠厚和易。欿然沖挹。若有所闕。入居黃閣。卜有五載。位望隆重。休休有容。不露圭角。令始令終。計出之日。位無上下。人無愚智。莫不痛惜嗟歎。故吏宿隷。至有奔走號泣者。有一書生。讀書半夜。聞隣嫗之哭甚哀。因訪之。其亡夫嘗誣逮重獄。久未聽冤。公爲畿伯時。申理得活。感念存沒。不覺失聲云。以此觀之。公德之入人者。其他可推。公之平日所爲。可書者甚多。然不敢毛擧。得之家庭者。梗槪如右。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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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果川) 치지동(治之洞) 상초리(霜草里) 곤좌(坤坐) 간향(艮向)의 언덕에 예우하여 안장하였다. 부인과 같은 무덤이지만 다른 구역이다. 공이 일찍이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반드시 시호가 있을 것이니 너희들이 장문(狀文)을 지으라.” 하였는데, 서술할 만한 사적이 없었다. 그래서 “공은 늦게 거문고 타는 것을 좋아하여 조금 취하면 ‘감군은곡(感君恩曲)’ 한 곡조를 연주하며 스스로 즐겼다.”라고 하면 마땅하다. 공이 늦게 거문고를 배워서 악보에 의거해 스스로 터득하였는데, 음조가 깊고 원대하였다. 그러나 재앙을 만나면 감히 잡지 않았으므로 집안사람 이외에는 한 사람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조정에 선 지 46년으로 식견이 넓고 충후(忠厚)하며 온화하고 겸손하여 마치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 듯하였다. 황각(黃閣)에 들어가 살면서 5년을 보냈는데, 지위와 명망이 높고 중하였으며 여유가 있어 드러나지 않았고, 처음과 끝을 다스려 계책을 내는 날에는 지위의 상하가 없고 사람의 우열이 없었으므로 모두 애통해하고 탄식하였다. 그래서 하인과 종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곡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어떤 서생이 한밤중에 책을 읽다가 이웃 노파의 곡소리가 매우 슬프다는 것을 듣고 찾아가 보니, 그 죽은 남편이 일찍이 무함되어 중옥(重獄)에 갇혀 오래도록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경기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 진리를 밝혀 살려 주었으므로 생전과 사후의 은혜를 생각하여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공의 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다른 것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공이 평소에 한 일 중에 기록할 만한 것이 매우 많으나 감히 하나하나 거론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얻은 것을 대략 위와 같이 적는다. 삼가 장문(狀文)을 올린다.

112. 先府君行狀

문체: 傳記類 / 行狀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63A, ITKC_MO_0200A_A043_563B ...

원문

先君諱文誠。字明仲。姓李氏。系出全義。始祖諱棹。佐高麗太祖。統合二韓。官至大師。自後代襲簪纓。久而彌蕃。入□本國。有諱貞幹。奉百歲壽母。以純孝聞。□世宗超拜中樞院使。又□特賜几杖以榮之。一時公卿咸賦詩以頌。有慶壽集行世。卒諡孝靖。寔生諱上寬。卒官漢城府尹。府尹有七子。六人登入科。二人策三勳。累□贈領議政。全城府院君。其第三曰平簡公諱禮長。靖難佐翼功臣。□贈兵曹判書全城君。平簡生判決事諱時寶。□贈兵曹參判。判決生楊州牧使諱公達。平簡以下。寔先君三代也。妣曰貞夫人金氏。光州顯姓。敵愾功臣,光原君諱百謙之女也。先君以弘治十六年癸亥十二月十六日己酉生。有縣令府君諱仁孫。與先祖考同出。於府尹爲再從兄弟。無嗣。以先君置後焉。及先君職二品。推□恩兩祖。竝□贈戶曹參判。縣令之考副正諱允純。亦□贈刑曹參議。先君少讀書。通大義。不幸早孤。未究其業。習弓馬有名稱。嘉靖己丑。補內禁衛。壬辰春。捷別試武科第二人。未及唱名。拜宣傳官。宣傳。武班淸選。而榜前擢擾。人望有素故也。先君少時。客遊甲山。宿西軒。會監司韓公效元。行縣到府。夜半廉得之。翌日。迎先君。遇贈極厚。勉以遠大。人頗異之。及登第。韓公已爲相。始說甲山之夜得異夢。知君非常人也。□朝廷例選年少武臣。按月抽講所讀書。先君每對。必以能□聞。甲午。□中廟將郊閱。時久廢演習。兵曹判書黃士佑。慮諸將未曉陣法。至請留補外之官。先君曰。某等旣膺本職。各習乃事。寧可藉手於別人哉。設使此人便死。則□朝廷更不爲敎閱乎。士佑乃使先君專辦。卒事無差。中廟深器重之。□特進先君問曰。若使某衛某將行某事。則當以何令。對曰。立某旗。用旗則可矣。□上命先君使旗。已而果然。黃公亦大喜。言欲加奬擢。先君自以仕淺辭不聽。乃授都摠府都事。諫官果言其速。遞爲司果。尋復爲宣傳官,上護軍。乙未。始拜都摠府都事。丙申。以司僕判官。因事罷閑。不時。□中廟以諸將少。□命兵曹抄在散武臣以□啓。收用者只二人。而先君興焉。蓋記其郊閱事也。拜濟用判官。又移軍資判官。十月。拜定州判官。戊戌。丁外憂。庚子。外除。兄弟分占財物。先君自以食祿於□國。皆父母之賜。多所讓之。夏。義州缺判官。時與□上國有地界事。且言遼東都司使人將至。□朝議欲擇人。先君竟膺薦首。未三日而馳赴爲前。此州官頗托物貨於赴京者。先君終始不干。譯人稱道。壬寅正月。移陞理山郡守。癸卯春。□朝廷欲征建州衛。揀遣邊臣。先採本衛虛實。先君以先鋒。入捍後歸。旣設伏於要害。而後敢入。彼人果欲追截。而我兵已先據險。故賊不得逞。山川道路。竝皆圖畫而來。六月。丁縣令憂。乙巳八月。拜尙衣院僉正。□仁廟已賓天。監董□孝陵役。□賜廏馬以嘉之。

번역

선군(先君)의 휘는 문성(文誠)이고 자는 명중(明仲)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다. 계보는 전의(全義)에서 나왔는데, 시조(始祖)의 휘는 조(棹)로 고려 태조를 도와 두 한(韓)을 통합하였고 관직이 대사(大師)에 이르렀다. 그 뒤대에는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아 오래되어 번성하였다. 본국으로 들어와서 휘 정간(貞幹)이 백세의 장수를 누린 어미를 봉양하여 순효(純孝)로 이름이 알려졌다. ○ 세종 때에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초빙되었고, 또 특별히 궤장(几杖)을 하사하여 영화롭게 하였다. 당시 공경(公卿)들이 모두 시를 지어 송축하였다. 경수집행세(慶壽集行世) / 《경수집》이 세상에 행해지니 졸시효정(卒諡孝靖) / 졸시(卒諡)는 효정이다. 실생휘상관(寔生諱上寬) / 실생(寔生)의 휘는 상관(上寬)이다. 졸관한성부윤(卒官漢城府尹) / 관직은 한성부윤이었다. 부윤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여섯 명은 입과(入科)하였고 두 사람은 삼훈(三勳)에 책봉되었다. 누증영의정(累贈領議政) /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셋째는 평간공(平簡公) 휘 예장(禮長)으로 정난(靖難) 때 좌익 공신이 되었고, ○ 증병조판서전성군(贈兵曹判書全城君) / 병조 판서에 증직되고 전성군에 봉해졌다. 평간은 판결사(判決事) 휘 시보(時寶)를 낳았다. 증 병조 참판 판결생(判決生) 양주 목사(楊州牧使) 휘는 공달(公達)이다. 평간(平簡) 이하는 실로 선군(先君)의 3대이다. 비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인데, 광주 현성(光州顯姓)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광원군(光原君) 휘는 백겸(百謙)의 딸이다. 선군은 홍치(弘治) 16년 계해 12월 16일 기유일에 태어났다. 현령 부군(縣令府君) 휘는 인손(仁孫)으로, 선조고와 같은 출신으로서 부윤에게는 재종형제이다. 후사가 없어서 선군이 그를 양자로 삼았다. 선군의 직질이 2품에 이르자 두 분의 조부에게 추증하는 은전을 베풀어 모두 호조 참판에 증직하였으며, 현령의 고(考) 부정 휘는 윤순(允純)으로 역시 형조 참의에 증직하였다. 선군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하여 대의를 통달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부모를 여의어 그 학업을 이루지 못하였다.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명성이 있었으며, 가정 기축년에 내금위(內禁衛)에 보임되었다. 임진년 봄에 시무과(試武科)에서 2등을 차지한 사람으로서 미처 창명(唱名)하기 전에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선전관은 무반(武班)의 청선(淸選)인데, 방목(榜目)이 나오기 전에 발탁된 것은 평소 명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군께서 젊었을 때 갑산(甲山)에 객지 생활을 하다가 서헌(西軒)에서 묵고 있었는데, 마침 감사 한공 효원(韓公效元)이 현을 다스리다 부로 이르게 되어 밤중에 찾아왔다. 다음 날 선군을 맞이하고는 매우 후하게 대접하며 원대한 포부를 갖도록 권면하였는데, 사람들이 자못 이상하게 여겼다. 선군께서 등제(登第)하자 한공은 이미 정승이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갑산에서 밤에 꿈을 꾸고서 그대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고 하였다. □ 조정에서는 연소한 무신(武臣)을 뽑아 월별로 추강(抽講)하는 곳에 의무적으로 독서를 시키는데, 선군께서는 매번 대면할 때마다 반드시 능히 통과하였다고 알려 주셨다. 갑오년에 □ 중묘(中廟)께서 장차 교외(郊外)에서 열람을 하려 하였는데, 이때 오래도록 연습이 폐지되어 병조 판서 황사우(黃士佑)가 여러 장수들이 진법(陣法)을 모르는 것을 염려하여 외직의 관원을 유보해 두기를 청하였다. 선군께서 이르기를, “모들은 이미 본직에 임명되었으니.” 하였다. 각기 자기 일을 익히는 데 어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 있겠는가. 설사 이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다시 가르치지 않겠는가. 사우(士佑)가 선군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는데, 일을 마치고 차질이 없자 중묘께서 깊이 기특하게 여기셨다. □ 특진한 선군에게 물으시기를 “만약 모위(某衛)의 모장(某將)이 어떤 일을 행한다면 무슨 명령을 내리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모기(某旗)를 세우고 기를 사용하면 됩니다.” 하였다. □ 상이 선군에게 명하여 기를 쓰게 하였는데, 얼마 뒤 과연 그렇게 되었다. 황공(黃公)도 크게 기뻐하며 장려하고 발탁하겠다고 말하였으나, 선군은 벼슬이 낮다 하여 사양하고 듣지 않았다. 이에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 제수되었는데, 간관(諫官)이 과연 그가 빨리 승진하였다고 말하여 사과(司果)로 체차되었다가 곧바로 선전관으로 복직되고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을미년에 비로소 도총부 도사에 제수되었고, 병신년에는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으로 있다가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불시(不時) □ 중묘께서 장수가 부족하다고 하셨다. □ 명을 내려 병조에 재선(在散) 무신들을 뽑아 □ 아뢰게 하였다. 수용(收用)된 자가 두 사람뿐이었는데, 선군이 그 일을 일으킨 것은 대개 교열(郊閱)을 기록한 일이다. 제용 판관에 제수되고 또 군자 판관으로 옮겨졌으며 10월에는 정주 판관에 제수되었다. 무술년에 외우(外憂)를 당하고 경자년에 외직에 제수되었는데, 형제들이 재물을 나누어 차지하였다. 선군은 스스로 □국에서 녹봉을 받는 것은 모두 부모의 하사품이라고 여겨 많이 양보하였다. 여름에 의주 판관이 비게 되었는데, 이때 □상국(上國)과 지계(地界)에 관한 일이 있었고 또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사람을 장차 보내려 한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사람을 뽑으려고 의논할 때 선군이 마침내 추천되었는데, 3일도 안 되어 달려가서 앞장섰다. 이 고을의 관리는 서울에 가는 자에게 물건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선군은 시종 간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역인(譯人)들이 칭송하였다. 임인년 1월에 이산 군수로 옮겨 승진하였고, 계묘년 봄에는 □조정에서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려고 변방의 신하를 뽑아 보내려 하였는데, 먼저 본 위(本衛)의 허실을 살폈다. 선군이 선봉으로 들어가서 막고 뒤에 돌아왔다. 요해처(要害處)에 이미 매복을 설치한 뒤에야 감히 들어갔는데, 저들이 과연 추격하여 끊으려 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이미 먼저 험지(險地)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적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산천과 도로가 모두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6월 정현령 우(丁縣令憂)는 을사년 8월에 상의원 첨정에 제수되었다. □ 인묘께서 이미 승하하시고 나서 효릉(孝陵) 공사를 감독하였는데, □ 사마(賜馬)로써 가상히 여겼다.

원문

時先君將□山陵事。屢往來卿相家。衛杜元勳輩。見先君交言。欲注名於原從中。先君辭曰。先世旣有勳。足可減罪。焉用疊爲。冬。除昌原府使。丁未。以事將罷。府民群至京師請借。得降資仍任。戊申。復□賜通訓大夫階。在□中廟末。別揀堪爲將帥者。得十人養望。至是又被其選。庚戌春。陞堂上折衝將軍階。拜加德鎭水軍僉節制使。加德之設未久。襟袍尙虛。多分瞭卒。晝夜候守。軍情以苦。而守城亦單。先君悉取兵船之舊者三十餘隻。盡載大石。沈于海口。就加石築。極其壯固。以藏戰艦。又退設木柵。以捍外變。輟瞭卒之什九。悉入城守。其餘立譙樓。改城堞。規畫甚多。至今賴之。壬子冬。秩滿。入爲護軍。兼司僕將。癸丑春。兼五衛將。夏。拜慶尙右道水軍節度使。時南方大饑。戍卒餓餒。先君發軍倉。聽其納布換米。增減糶糴。一依常平之制。軍民賴而全活。水營亦無藏船之所。又爲之立柵設鎖。乘潮開闔。如加德之制焉。乙卯夏。倭寇湖南。先君所鎭。正當兩南之交。其是要害。□朝廷不許瓜代。以候賊平。全羅巡察使李公浚慶。通諭慶尙。欲使先君橫出海道。撞破賊船。先君卽領兵下海。以聽本道巡察使曺光遠節制。曺公以各有分守。賊發難測止之。後聞之。賊皆登陸。倭船無守者。先君每以此爲恨焉。湖南餘賊。分鈔本道加背梁曲浦等處。與右道兵馬節度使李夢麟同捕。李以主將。行軍無律。先君請分廂衛以張之。斬獲頗多。李要專功。欲使先君還鎭。先君卽回本營。李數月不獲一級。更請與同事。遂就以殲之。皆先君麾下所得也。悉送于李處錄之。又與李公。比次結陣。賊群揮劍突衝。李遂走。走且揚鞭。請與共退。先君勒馬麾兵盡殪之。將上首級。乃許李公同□啓焉。李旣罷陳而去。賊十餘人。奪漁船亟走。先君追及於蓮花島獲之。又有零賊入山。諸將以窮寇難之。曺公令以弊船短棹。誘使下海而殺之。夢麟慮其生疑。乃於新船。使具六櫓。賊盡力開使。幾不可及。曺公聞之大驚。先君邀截海路。使左右快船。交引大索。拘曳船柁。使不得前去。遂盡斬之。曺公大喜。乃褒錄前後事以□聞。而其間先君已忤敬差官崔堣。先被他事□啓罷。至於收奪。故軍功雖上。而只給爵收用而已。前後斬倭一百四十餘級。皆在罷未及受代時也。又與夢麟同陣丘墟驛。軍士夜驚。李欲避走。先君牢臥不動。令各以軍號相應。亂兵卽定。□國家承平日久。軍民喪膽於湖南之變。爭懷逃匿。軍令不擧。備禦無策。本營一管軍兵吏。與其番衆將入防。已至渡頭。乃謂其徒曰。禦敵亦死。避防亦死。等死。不可赴戰。遂各散去。以此一領之卒。皆闕防焉。先君捕得之。就於習陣。罷後以旗招。諸軍咸聚中軍。則取逃番首吏。斷頭梟示。莫不震懾。以故用命。且慮軍民畏敵生怯。

번역

이때 선군께서 장차 산릉(山陵)의 일을 맡아 여러 차례 경상(卿相)의 집에 왕래하였는데, 위두원훈(衛杜元勳) 등이 선군의 교언을 보고 원종(原從) 가운데에 이름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선군은 사양하기를, “선세(先世)에 이미 훈공이 있어 죄가 줄어들기에 충분하니 어찌 중첩해서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창원 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정미년에 일이 파면될 즈음 고을 백성들이 서울에 와서 청하여 자급을 낮추고 임무를 그대로 맡게 되었다. 무신년에 복직되어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가 내려졌다. □ 중묘(中廟) 말년에 장수로 삼을 만한 사람을 별도로 가려 10인을 얻어 기르고 명망을 쌓았는데, 이때 또 그 선발에 뽑혔다. 경술년 봄에 당상 절충장군(堂上折衝將軍)의 품계로 승진되어 가덕 진수군 첨절제사(加德鎭水軍僉節制使)에 제수되었다. 가덕이 설치된 지 얼마 안 되어 관복을 입은 사람이 아직도 없었고, 분담한 군졸들은 밤낮으로 수루하느라 군정(軍情)이 고달팠으며 성을 지키는 것도 단출하였다. 선군은 병선(兵船)의 옛것 30여 척을 모두 가져왔다. 큰 돌을 다 실어다가 바다 어귀에 가라앉히고 그 위에 석축(石築)을 쌓으니 매우 튼튼하여 전함을 감추기에 적합하였다. 또 물러나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외변을 막았는데, 군졸 10명 중 9명을 성으로 들어가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초루(譙樓)를 세우고 성첩(城堞)을 고치도록 하였다. 계획이 매우 많아 지금까지도 그 덕을 보고 있다. 임자년 겨울에 품계가 차서 입직하여 호군(護軍)이 되고 사복시 병마절도사를 겸하였다. 계축년 봄에 오위장(五衛將)을 겸하고, 여름에는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이때 남방에 큰 기근이 들어 수졸들이 굶주리자 선친께서 군창(軍倉)을 열어 포(布)를 바치면 환미(換米)해 주도록 하였고, 증감하여 환곡하는 것을 일체 상평청의 제도대로 시행하였으므로 군민이 그 덕에 힘입어 온전하게 살아났다. 수영에는 또한 배를 감출 곳이 없어서 또 목책을 세우고 빗장을 설치하여 조수를 이용해 열고 닫기를 가덕(加德)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을묘년 여름에 왜구가 호남을 침략하였는데, 선친이 지키던 곳은 바로 양남(兩南)의 교차점에 해당하였다. 그 요해처는 □조정에서 과일 대신을 허락하지 않아 도적의 평화를 기다리게 하였다.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공준(李公浚) 경(慶)이 경상에 통유하여 선군으로 하여금 해로를 가로질러 나가서 적선(賊船)을 부수기를 원하였는데, 선군은 곧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내려가 본도 순찰사 조광원(曺光遠)의 지휘를 받았다. 조공은 각자 분수대로 지키는 것이 도적의 출몰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하여 막았는데, 뒤에 듣건대 적이 모두 상륙하고 왜선에는 지키는 자가 없었다고 하니, 선군은 매양 이것을 한으로 여겼다. 호남의 남은 도적들은 본도 가배(加背)ㆍ양곡(梁曲)ㆍ포구(浦口) 등에 나누어 주둔하였는데, 우도 병마절도사 이몽린(李夢麟)과 함께 포획하였다. 이몽린이 주장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는 데에 법도가 없었다. 선군은 분상위(分廂衛)를 청하여 펼쳐 놓아서 적을 베고 잡은 것이 자못 많았는데, 이몽린이 공로를 독차지하려고 선군으로 하여금 본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선군은 곧 본영으로 돌아갔는데, 이몽린은 몇 달 동안 한 명도 잡지 못하였다. 다시 동료들과 함께 죽이기를 청하여 마침내 다 죽였는데, 모두 선군께서 지휘하신 덕분이었다. 이처에게 보내어 기록하게 하였다. 또 이공과 나란히 진을 치고 있으니 적들이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이공이 도망치면서 채찍질까지 하며 함께 물러나기를 청하자, 선군께서 말을 멈추고 군사를 지휘하여 모두 죽이고는 장수의 머리를 올리려 하다가 마침내 이공에게도 함께 계(啓)를 올리도록 허락하였다. 이공이 진을 파하고 떠나자 적 10여 명이 어선을 빼앗아 급히 도망하였는데, 선군께서 연화도에 가서 잡았다. 또 잔당들이 산으로 들어갔는데, 장수들이 궁지에 몰린 적들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하니, 조공이 낡은 배와 짧은 노로 유인하여 바다로 내려가 죽였다. 몽린(夢麟)이 의심을 살까 염려하여 새로 만든 배에 여섯 개의 노를 갖추게 하였는데, 적들이 힘을 다해 노를 저어 거의 미치지 못할 지경이었다. 조공이 듣고 크게 놀라 선군께서 해로를 차단하고 좌우의 빠른 배를 보내게 하였다. 큰 밧줄을 서로 끌어당겨 배의 노를 당기지 못하게 하고 마침내 모두 베어 버리니 조공(曺公)이 크게 기뻐하여 그동안의 일을 포상하고 기록하여 아뢰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선군께서 이미 경차관 최우(崔堣)와 어긋나서 먼저 다른 일로 파직을 당하였고, 나중에는 수탈까지 당했기 때문에 군공이 비록 높았으나 단지 작위만 주고 수용(收用)할 뿐이었다. 그동안 베어 버린 왜인 140여 명은 모두 파직되어 아직 후임자를 받지 못했을 때에 있었던 일이다. 또 몽린과 함께 진구역(陣丘驛)에서 군사들이 밤중에 놀라 이욕(李欲)이 피란하려고 하자 선군께서 단단히 누워 움직이지 않고 각기 군호(軍號)로 서로 응하게 하여 난병을 즉시 평정하였다.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군민들이 호남의 변고에 겁을 먹어 다투어 도망치려 하였는데, 군령이 거행되지 않아 방비할 계책이 없었다. 본영(本營)의 일관군병리(一管軍兵吏)가 그 번중장과 함께 방어하는 곳으로 들어가 이미 나루에 이르렀다. 이에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적을 막아도 죽고 피방(避防)해도 죽으니 똑같이 죽는 것이니 싸움터에 나갈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각자 흩어져 갔다. 이로 인하여 한 명의 병졸이 모두 방비를 포기하였는데, 선군께서 그들을 체포하여 습진(習陣)에 가서 파한 뒤에 깃발을 세우고 부르니 여러 군사가 모두 중군(中軍)에게 모였다. 이에 도망간 번수리(番首吏)를 잡아다 목을 베어 효시(梟示)하니, 두려워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용맹한 장수를 쓰며 또 군민이 적을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것을 염려하였다.

원문

日設宴張樂餉士。作將軍壯士之歌。令褊裨遞唱之。軍情恃而無恐。後有謀揑先君者。誣讒于執政曰。當時斬卒。實逞私憤。執政惑之。每廷議有薦。必爲暗沮。故終世坎坷。職此之由。未嘗開一口以自辨。待其讒者。無異平日。且其時兵使李公輕躁多言。同列鮮不被詆。先君旣推功與之。前後不言失誤退怯之狀。李每中心喜服。多所稱譽。拜龍驤護軍。兼內禁衛將。俄拜黃州牧使。丁巳夏。罷。秋復爲護軍。明年秋。爲楊州牧使。十月。移授吉州牧使。諫官以楊州疲弊且數遞。□啓請仍之。庚申正月。爲不悅者構罷。五月。復爲兼司僕將。時□明廟閱武于郊。諸將不稱□旨。以先君素解陣法。復授宣傳官。冬。海西獷賊猖獗。□朝廷至遣大將討捕。平山爲賊藪最。以先君爲副使。將行。□明廟親賜密書以□諭旨。先君受□命祇慄。顧以管下使令。半是賊徒。領兵明討。每被走透。徒勞無益。乃況機不露。密尋良民受賊寄妻者。許以免罪優賞。多給釀資。暗使置毒於酒中。且緩警備。欲使句引以取之。事適未及。而有隣邑要免己責者。斥報平山慢賊。方伯不知先君意。乃先置殿考。先君將右機密事。分付於他人。其人不用。後賊黨果。來飮其酒。而官軍不至。覺中其毒。遂盡屠一里而去。壬戌秋。以護軍兼內乘。癸亥春。拜慶尙右道兵馬節度使。兵營在合浦。乃先君舊典昌原地也。父老喜於重來。競以酒肉相謁。百十爲群。數月不絶。先君在昌原時。歲丁大侵。出境必載米醬。以周道饑。密陽路傍。見乳女飮於死母。命瘞其母。抱其兒。爲入守山縣。招一長老。盡傾行李使養之。其人欣然。自言無子。夢神人授我以子。殆其徵乎。後屢道是驛。其人必以其女來謁。至是垂廿載。女已生男育女。迎於節下。南人稱之。先君屢膺本道。頗得軍心。十月。祖妣貞夫人柳氏有疾。先君請歸侍藥。諸軍欲留不得。則中路潛遣人止其狀。先君覺之。乃使蒼頭齎達。□上初允之。臺諫以邊師不可輕遞。再辭乃□許。日馳數百里而來。庶及相訣。中路而訃及焉。軍士來京乞留者。已在半途。聞有喪。始皆回去。自縣令府君卒後。二十年間。承奉柳氏甚謹。雖一小婢。未嘗訶叱。恐傷慈心。柳臨終。自言受養備盡。但恨不得面訣耳。丙寅正月。服闋。卽除全羅右道水軍節度使。先君聞鎭前牧島。有白骨委積。因訪之。前此爲帥者。多徵辦於水軍。有未唯應者。越置玆島。皆餓死。無人收掩。先君愍之。命盡封瘞。爲文以祭。軍吏感戴。七月。有倭船犯海。卽捕斬以□聞。到京。驗其首級有差。竟以是遞。九月。爲忠武護軍。冬。復拜吉州牧使。戊辰冬。又以事遞。自己巳以後。先君雖已老。然□朝廷命閫帥及巨鎭。兩曹多以名擬□聞。嘗拜咸鏡忠淸兩道兵馬節度使及安州牧使。皆以老不赴。嘗典禁旅。宿衛無闕。四爲僉知中樞府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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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며 군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장수와 장사의 노래를 지어 좁은 비장(裨將)으로 하여금 번갈아 부르게 하니, 군정(軍情)이 믿음직하여 두려워하는 자가 없었다. 뒤에 선군을 모함할 계책을 꾸민 자가 있어 집정에게 참소하기를, “당시에 졸병을 죽인 것은 실로 사사로운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하니, 집정이 그 말에 속아 매번 조정에서 의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은밀히 저지하였다. 이 때문에 종신토록 불우하게 지냈으니,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이 입을 열어 스스로 변명하지 않고 참소한 자를 대할 때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또 그 당시 병사(兵使)인 이공경(李公輕)은 조급하고 말이 많아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치고 비방을 받지 않은 자가 드물었는데, 선군이 이미 공을 추중하여 그를 주어 주고 전후로 잘못과 겁을 낸 정상을 말하지 않자, 이공경은 매번 마음속으로 기뻐 복종하고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용양호군(龍驤護軍)에 제수되고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겸임하였으며, 조금 뒤에는 황주 목사(黃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정사년 여름에 파직되었다. 가을에 다시 호군이 되었고, 이듬해 가을에는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 10월.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옮겨 제수되었다. 간관이 양주(楊州)가 피폐하고 자주 체차된다고 아뢰어 그대로 두기를 청하였다. 경신년 1월. 불쾌한 자를 위하여 구파(構罷)하였다. 5월. 다시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다. 이때 명묘께서 교외에서 열무(閱武)를 행하였는데, 여러 장수가 명묘의 뜻에 맞지 않자 선군이 진법(陣法)을 잘 안다고 하여 선전관에 다시 제수하였다. 겨울. 해서(海西)에 흉악한 도적이 창궐하여 조정에서 대장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평산(平山)이 도적의 소굴로 가장 심하여 선군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장차 행차를 떠나려 할 때 명묘께서 친히 밀서(密書)와 유지를 내려 주시니, 선군은 그 명을 받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관하(管下)의 사령(使令)이 절반은 도적의 무리라서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할 때마다 매번 패주하였으므로 부질없이 수고만 하고 이익이 없었다. 더구나 기미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양민을 찾아내어 도적이 자기 아내를 맡기게 한 자는 죄를 면하고 우대하여 상을 주며, 술 빚을 밑천을 많이 지급해 주고 암암리에 술 속에 독을 넣게 하였다. 또 경비를 느슨하게 하여 구인(句引)으로 잡아오게 하려고 하였다. 일이 마침 미처 이르지 않았는데, 이웃 고을에서 자기의 책임을 면하려고 평산(平山)의 오만한 도적을 배척하여 보고하였다. 방백이 선군의 뜻을 모르고 먼저 전고(殿考)에 두었다. 선군이 장차 기밀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분부하였는데, 그 사람이 쓰이지 않자 뒤에 도적의 무리가 와서 그 술을 마셨다. 관군이 이르지 않아 중독되었음을 깨닫고는 마침내 온 마을을 도륙하고 갔다. 임술년 가을에 호군 겸 내승(護軍兼內乘)으로, 계해년 봄에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제수되었다. 병영이 합포(合浦)에 있었는데, 바로 선군의 옛날 전창원(典昌原)이다. 부로들이 거듭 오시기를 기뻐하여 다투어 술과 고기로 서로 알현하였으니, 백여 명이 무리를 이루어 몇 달 동안 끊이지 않았다. 선군이 창원에 계실 때 정사년에 왜적이 크게 침입하자 경계를 나갈 때 반드시 쌀과 장을 실어다가 길가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주었다. 어떤 여인이 죽은 어미의 젖을 먹는 아이를 보고 그 어미를 묻고 아이를 안고서 수산현(守山縣)으로 들어갔다. 한 장로(長老)를 불러 행장(行裝)을 다 내주어 길러 주니, 그 사람이 기뻐하며 “나는 아들이 없는데 꿈에 신이 나에게 아들을 주었다.” 하였으니, 아마도 징험일 것이다. 뒤에 여러 번 이 역참을 지나갈 때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자기 딸을 데리고 와서 알현하였다. 이때가 20년쯤 되었는데, 딸은 이미 아들을 낳고 딸을 길러서 절하(節下)에서 맞이하였으니, 남쪽 사람들이 이를 일컬었다. 선군께서 여러 번 본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군심(軍心)을 얻었었는데, 10월에 조비 정부인 유씨(柳氏)가 병이 나자 선군께서 돌아가서 약을 모시기를 청하였다. 군사들이 머물고자 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중도에서 몰래 사람을 보내 그 상황을 알리니, 선군께서 이를 알고는 창두(蒼頭)를 시켜 전달하게 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윤허하였으나 대간(臺諫)이 변방의 군사를 경솔히 체차해서는 안 된다고 재차 사양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날마다 수백 리를 달려와서 거의 서로 작별할 뻔하였다. 중도에 부고가 이르렀다. 군사들이 서울에 와서 머물기를 청한 자는 이미 반쯤 길을 떠났는데, 상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모두 돌아갔다. 현령(縣令)과 부군(府君)이 졸하신 뒤 20년 동안 승봉 유씨가 매우 근신하여 비록 한 명의 작은 여종이라도 꾸짖은 적이 없었으니 자애로운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유씨가 임종할 때 스스로 “양육을 잘 받았는데, 단지 면결(面訣)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병인년 1월에 복제(服制)를 마쳤고 곧바로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선군이 전임 목사(牧使) 섬에 백골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보니, 이전에 수령으로 있던 자들이 대부분 수군에게 징발하여 일을 시키고 제대로 응하지 않은 자들을 이 섬에다 넘겨 버려 모두 굶어 죽었는데 거두어 매장해 줄 사람이 없었다. 선군이 불쌍히 여겨 모두 봉분(封墳)을 만들어 매장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니, 군리들이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7월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침범해 와서 즉시 포획하여 베고 죽였다고 들었는데, 서울에 도착해서 그 수급을 확인하니 조금 차이가 있었다. 마침내 이 일로 체차되었다. 9월에 충무호군(忠武護軍)이 되었다가 겨울에 다시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무진년 겨울에 또 일 때문에 체차되었다. 기사년 이후로 선친은 비록 이미 늙었으나 조정에서 곤수(閫帥)와 거진(巨鎭)을 임명할 때 양조(兩曹)에서 대부분 명망 있는 사람을 의망한다는 말을 들었다. 함경도와 충청도의 병마절도사 및 안주 목사를 제수받았는데, 모두 연로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일찍이 전금군(典禁軍)에 숙위(宿衛)한 적이 없었고, 4번이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원문

六兼五衛將。領內禁衛者二。將兼司僕者亦再焉。萬曆三年乙亥冬。直宿□景福宮。感風移出。遂不祿。十二月十四日戊寅也。春秋七十有三。不孝子攀號無逮。昊天罔極。嗚呼慟哉。訃□聞。□上再遣禮官。行弔若祭。□賜賻助喪。□恩榮至矣。明年丙子二月二十日甲申。合葬于楊根郡治西終面梨浦倻美谷亡母之塋卯坐酉向之原。先君天性。魁偉重默。自童孩。已有長者氣度。爲牧使府君鍾愛。及長。神彩凜然有威風。里嫗隣叟。莫不尊慕。識者知其遠器。待遇宗族。一向款厚。其撫兄妹之遺孤。尤加恩愛。與人交。心上未嘗置町畦。見人危阨。隨力營濟。且人若有求。雖車馬。輒擧而與之。故家無長物。家居。賓客恒滿堂。必具酒肉。盡歡而罷。不問有無。亦未嘗對妻孥作契闊語。藏獲土田之應收者。不加經紀。是以。食祿幾五十年。先業亦不甚薄。而終無蓄積。每與親舊論敍。必曰。□上恩至重。於良足矣。〔原注:此取張子房傳語〕平居寘言。雖在群言衆辯之中。應諾不過數語。自言平生。未有以言語招嫌云。非徒不言人過。亦厭他人之是非人者。鮮與酧應。至於自身被情外之謗。雖至落職。不爲辨析。又不求知謗己者之姓名。但詔不肖曰。汝萬幸論地。常思吾浮謗。愼勿以傳言劾人。臨官莅職。爲□國事有誠心。但不苦瑣屑。必和衆共議。從長而行之。斷訟不饒權勢曰。世間事隨處豈無人情。然臨訟枉決。則必是遺殃後世者也。少時莅下。雖似嚴峻。亦以寬濟之。又不擿人隱惡。常掩覆而使之。故始畏而終懷。且先君盛怒。則輒囚罪人。或問之。答曰。乘怒杖人。恐或重傷。吾嘗受敎於長者。怒作。必思其言。故如是爾。亦嘗命不肖曰。吾仕宦有許多來歷。無以私怒斃命者。是其幸也。在楊州日。迎病姪調養。有賊挾書。作儒冠狀。誣病者欲爲迎醫。遂以先君所騎衙馬走。先君曰。病當求醫。罪但在賊。非伊過也。送酒慰解。更不擧問。不肖自省事來侍側久。除補外出入歷見外。抹嘗干一要津。其在州鎭。亦無與相問。故前途無吹噓挽助之力。名位恒滯。及權人勢敗。衆且牽連。而後常獨超然無累焉。嘗由外郡入□朝。自歎喫辱於人。或問之則曰。遇一文士。謂我聞君來京日久。何惜一訪。我謝以不暇。其人曰。武弁欲做好官。當先尋吾輩。君則不然。是君好處云。我縱欲做官。豈從渠求之。此人氣盈。不久敗也。爲邊鎭時。有一□御史。威稜籍甚。欲使屈禮迎己。持之太嚴。先君乃抽經國禮典以示之。□御史自覺其失。竟不敢有加焉。其不爲撓屈類此。我外王父富寧府使禹公諱禮孫。癸未。從北征。路由德源。捄馬於府使郭翰。郭曰。吾堂弟某新得好馬。政合戰秉。度其氣槪非庸常。必不吝惜。乃邀先君諭意。卽以奉之。相與歎服。後聘我先妣。封貞夫人。先一年卒。亦丹陽望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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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겸 오위장(六兼五衛將)으로 내금위(內禁衛)를 거느린 자가 두 명이고, 장겸 사복시(將兼司僕寺)를 거친 자도 두 명이었다. 만력 3년 을해년 겨울에 경복궁(景福宮)에서 직숙하다가 감기에 걸려 병을 옮겨 나가서 마침내 녹봉을 받지 못하였다. 12월 14일 무인일에 별세하였으니, 나이는 73세였다. 불효한 자식은 부르짖어도 미치지 못하니 하늘이 망극하여 슬프다. 부고를 듣고는 관상(官上)에서 재차 예관을 보내어 조문하는 예를 행하고 부조(賻助)와 상장(喪葬)을 도와주니, 은혜와 영광이 지극하였다. 이듬해 병자년 2월 20일 갑신일에 양근군치(楊根郡治) 서쪽 종면(終面) 이포(梨浦)의 아름다운 골짜기에 있는 망모의 무덤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선군의 천성은 웅장하고 중후하여 어릴 때부터 장자의 기상이 있었고, 목사 부군을 위해 사랑을 받았으며, 자라서는 신채가 늠연하고 위풍이 있어 이웃 노인들이 존경하였다. 존모(尊慕)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식자들은 그를 원대한 인물로 알고, 종족을 대할 때 항상 정성스럽고 후하였으며, 무형제(撫兄妹)의 남은 자식에게 더욱 은애하였다. 사람과 교유함에 마음속에 일찍이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면 힘닿는 대로 구제해 주었으며, 또 사람 중에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수레나 말을 가지고도 곧바로 가져다 주었다. 가문에는 장물이 없었고 집안에는 빈객이 항상 당에 가득하였는데,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모두 즐기고 나서야 그만두고는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으며, 또한 처자식에게 이별의 말을 한 적도 없었다. 토지에서 거두어야 할 응당의 수확을 경기(經紀)에 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녹봉을 받은 지 50여 년이 되었으나 선업(先業) 역시 그다지 박하지 않았는데, 끝내 축적한 것이 없어 매양 친지와 논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가 지극하니 참으로 만족하다.” 하였다.-원주에 “이는 장자방(張子房)이 한 말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평소에 말을 함에 비록 여러 사람의 말과 변론 가운데 있더라도 응낙(應諾)은 몇 마디 말에 불과하였는데, 스스로 평생에 언어로써 혐의를 초래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비방하는 것도 싫어하여 응대하는 자가 드물었다. 자기 자신이 정황(情狀) 외의 비방을 받아 낙직(落職)에 이르더라도 변론하지 않고, 또 자신을 비방한 사람의 성명을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불초한 아들에게 “너는 만다행히 관직에 있으니 항상 나의 허물을 생각하여 반드시 전해 들은 말로 남을 헐뜯지 말라.”라고 하였고, 관직에 임명되면 나라의 일을 위하여 성심(誠心)을 다하되 번거롭게 하지 않고 반드시 여론과 함께 좋은 쪽으로 행하며, 송사(訟事)를 판결할 때 권세가 있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세간의 일은 어디를 가나 어찌 인정이 없겠는가마는, 송사를 맡아 잘못 판결하면 반드시 후세에 재앙을 남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젊어서 지방관으로 있을 때 비록 엄준한 듯하였으나 또한 관대하게 처리하였고, 또 남의 은밀한 악행을 캐내지 않았다. 항상 덮어 두고서 쓰게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두려워하다가 나중에는 안심하였다. 또 선군(先君)의 성난 기운이 일면 곧바로 죄인을 가두고 혹 물으면 대답하기를, “성내면서 사람을 매질하면 중상을 입힐까 염려된다. 내가 일찍이 어른에게 ‘화가 나면 반드시 그 말을 생각하라.’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불초(不肖)에게 명하기를, “내가 벼슬살이를 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사사로운 분노로 목숨을 버린 자가 없으니, 이것이 다행이다.” 하셨다. 양주에 있을 때 병든 조카를 맞이하여 조리하였는데, 도적이 편지를 가지고 와서 유관(儒冠)의 형상을 그려 놓고 병든 사람을 속여 의원을 부르려고 하였다. 마침내 선군께서 타시던 아문(衙門)의 말을 내보내어 먼저 보내니, 선군께서 이르기를, “병이 나면 의원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죄는 도적에게 있으니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하고서 술을 보내 위로하여 풀어 주고 다시는 묻지 않으셨다. 불초가 스스로 반성한 일이다. 근래에 시중을 들고 있다가 외직으로 옮겨 나가 출입하면서 밖의 일을 두루 보았는데, 요진(要津)인 마상(抹嘗)이 주현(州縣)에 있었다. 또한 서로 물어줄 사람도 없었으므로 앞길에 북돋아 주고 끌어주는 힘이 없어 명위가 항상 막혀 있었다. 권세 있는 사람이 패망하고 뭇사람들이 연루된 뒤에야 늘 홀로 초연하게 누를 벗게 되었다. 일찍이 외군(外郡)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스스로 남에게 욕을 당한 것을 탄식하였다. 어떤 이가 물어보기에 “어떤 문사(文士)가 나에게 ‘그대가 서울에 온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한번 찾아오는 것을 아끼는가?’라고 하였는데, 나는 바쁘다고 사양하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무관들은 좋은 벼슬을 하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우리를 찾는다. 그런데 그대는 그렇지 않으니 그대가 좋은 곳에 있구나.’라고 하였다.”고 하기에, 내가 비록 벼슬하고 싶다 한들 어찌 저 사람에게 구하겠는가. 이 사람은 기운이 넘쳐서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변방의 진장(鎭將)이 되었을 때 어떤 □ 어사(御史)가 있었는데 위엄과 절도가 매우 엄격하여 나로 하여금 굴복하고 예우를 갖추어 맞이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가 너무나 엄격하게 구는 것을 보고 선군(先君)께서 《경국례전(經國禮典)》을 꺼내 보여 주시니, □ 어사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마침내 감히 더 이상 굴복하지 않았다. 그 굽히지 않는 성품이 이와 같은 부류이다. 나의 외조부인 부녕 부사(富寧府使) 우공(禹公)의 휘는 예손(禮孫)인데, 계미년에 북쪽을 정벌하러 갈 때 덕원(德源)을 경유하여 부사(府使)곽한(郭翰)에게 말을 빌리려고 하니, 곽이 말하기를, “저의 당제(堂弟) 모가 새로 좋은 말을 얻었는데, 바로 전쟁에 적합합니다. 그 기상을 헤아려 보니 보통 말이 아니어서 반드시 아끼지 않으리라 여겨 선군(先君)을 맞이하여 뜻을 말씀드리고 즉시 바쳤습니다.”라고 하였다. 서로 감탄하고 칭복하였다. 뒤에 나의 선비(先妣)에게 시집와서 정부인(貞夫人)으로 봉해졌는데, 선군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또한 단양의 명문가 출신이다.

원문

生男女各一人。男卽不肖。女適生員金琮。某娶宣務郞尙鵬南女。生四男二女。男耆俊,壽俊,耉俊,命俊。女幼。生員生一男三女。男光潤。女長適宋惟敬。餘幼。耆俊娶監役金益輝女。生二男。重基厚基。壽俊娶幼學權恂女。惟敬生一女。側室有一子。曰山壽。又有二女。皆幼。竊念古人。以稱揚先美爲孝。然記曰。無美而稱之。是誣也。先君有厚德。畜而不耀。且生於太平。不得有施。其僅見於乙卯者。聞變卽赴。未嘗遲留。然未足爲一分也。得歷事□四朝。無大罪戾。位雖不滿。享有考終。亦豈無由。某創鉅荒迷。論譔無次。不能敷揚。亦不敢厚飾非實。以誣免靈。更重不孝之罪。倘蒙掛採一二。以誌幽阡。苫塊餘生。死亦無憾。孤哀子某稽顙再拜。泣血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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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아들딸이 각각 한 명씩 있는데, 아들은 바로 불초한 저이고 딸은 생원 김종(金琮)에게 시집갔습니다. 모(某)는 선무랑(宣務郞) 상숭(尙崇)의 남쪽 여식과 혼인하여 사남 이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기준(耆俊), 수준(壽俊), 국준(耉俊), 명준(命俊)이고, 딸은 유(幼)입니다. 생원은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낳았는데, 아들은 광윤(光潤)이고 딸 중 장녀는 송유경(宋惟敬)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립니다. 기준은 감역(監役) 김익휘(金益輝)의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 중기(重基), 후기(厚基)를 낳았고, 수준은 유학 권순(權恂)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유경이 한 딸을 낳았습니다. 측실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는데 산수(山壽)라 하고 또 두 딸이 있으나 모두 어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옛사람들은 선대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것을 효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록에 ‘아름다운 일이 없는데도 그것을 칭송하는 것은 거짓이다.’라고 하였으니, 선군께서는 후덕한 덕이 있으셨으나 드러내지 않으셨고 또 태평성대에 나셔서 베풀 곳이 없었습니다. 을묘년에 겨우 세상에 나오시어 변고를 듣자마자 곧바로 달려가서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네 조정의 역사를 두루 겪으면서 큰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지위는 비록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고종(考終)을 누리신 것은 또한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모가 거친 언어로 논열하여 차서가 없어서 선군의 덕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였고, 또 감히 사실이 아닌 것을 두껍게 꾸며 영혼을 속여 불효의 죄를 더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한두 가지 기리는 글을 걸어 무덤에 기록해 주신다면 여생을 지내다가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외로운 아들 모가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장문을 올립니다.

113. 冬至箋文

문체: 公車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68A

원문

律入黃鍾。緹室驗七日之復。雲開丹陛。黼座受四方之來。罔間臣民。惟均蹈舞。恭惟位居元后。德爲聖人。心堯舜之正心。有堯舜聰明睿智。氣天地之和氣。順天地春夏秋冬。因致閉關之辰。益綏歸極之福。伏念臣庸庸末品。斷斷微誠。叨將閫寄之名。雖未效於禦侮。慶君子道長之會。切傛賀於履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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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黃鍾)에 율(律)이 들어가서 제실(緹室)에서 칠일의 복을 점검하고, 구름이 단배(丹陛)를 열어 사방에서 오는 백성들을 받으니, 신민들이 모두 다 춤추는 데 차이가 없네. 삼가 생각건대, 지위는 원후(元后)에 계시고 덕은 성인과 같으시니, 마음은 요순의 정심을 지녀 요순의 총명예지(聰明睿智)를 갖추셨고 기운은 천지의 화기(和氣)를 지녀 천지의 춘하추동을 순행하시네. 이에 폐관(閉關)하는 때를 인하여 더욱 돌아가시는 복을 누리시게 되었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용렬한 말품에 단단한 작은 정성으로 외람되이 곤기(閫寄)의 이름을 지니고서 비록 오랑캐를 막는 데에는 효험이 없었으나, 군자 도가 길어지는 경사를 맞이하여 절실히 축하하는 마음을 품고 있네.

114. 癸未正朝賀箋

문체: 公車類 / 其他類

원문

春歸王正。聿見上下之交。位在德元。誕受臣民之賀。百靈孚佑。萬彙咸生。恭惟睿智聰明。剛健純粹。調乾坤於玉燭。但可名者巍然煥然。撫□祖宗之金甌。極其道之悠也久也。屬玆人統之屆。益膺天福之來。伏念臣末葉冠裳。一方旗纛。子牟戀闕。身縱滯於楡關。華封祝堯。壽願添於海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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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돌아와 왕정(王正)을 맞이하여 위아래가 서로 교유하고, 덕의 근원에 위치하여 신민들의 축하를 받으시니, 온갖 신령이 믿고 도와 만물이 다 생동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지총명하시고 강건순수하시어 건곤을 옥촉(玉燭)에 조화시키니 명성만은 높고 빛날 뿐이며, 조종의 금구(金甌)를 어루만지시니 그 도가 지극하고 오래입니다. 이제 인통이 이르렀으니 더욱 천복이 오리라 받으실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말엽에 관상을 쓴 채 한 지방의 기병을 거느리고 자모(子牟)처럼 대궐을 그리워하며 몸은 비록 유관(楡關)에 머물러 있으나, 화봉(華封)에서 요 임금을 축원하듯 장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해옥(海屋)에 더해집니다.

115. 祭始祖墓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68C

원문

維萬曆元年歲次祭酉九月戊寅朔。十六代孫災傷御史奉正大夫,行禮曹正郞,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李某。敢昭告于始祖高麗統合三韓開國翊贊功臣大師,三重大匡府君。伏以。洪惟我祖。肇迹濟川。佐統鷄鴨。開運半千。豐功勒彝。康濟時民。積德種慶。敷遺後人。王姓雖君。天命中移。江都一遜。祚胤微衰。綿綿我家。代幸組紱。允承令聞。無忝世德。譬彼深根。條葉皆春。孱若無肖。與玷鵷紳。繡衣巡□命。于此原貫。舊城登址。曖然興歎。片瓦雖存。門館莫識。玄兆有丘。是曰永宅。恭將菲薄。掃除塋域。縱厥遙遙。誤認非郭。一氣猶然。有誠斯格。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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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원년 9월 무인일(20일)에 16대손 재상 어사 봉정대부 행 예조 정랑 지제교 겸춘추관기주관 이모는 삼가 시조 고려 통합삼한개국익찬공신 대사(大師) 삼중대광 부군께 고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상은 제천에서 자취를 시작하여 계압을 도와 천하의 운수를 열어 반천 년을 이어왔습니다. 큰 공로를 역사에 새겨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고, 덕을 쌓아 경사를 낳아 후인에게 끼쳐 주었습니다. 왕성(王姓)이 비록 군주가 되었으나 하늘의 명은 옮겨졌고 강도에서 한 번 물러나게 되어 자손의 복이 미약해졌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이어받아 영광스러운 명성을 받들었으니, 세덕(世德)을 욕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 깊은 뿌리에 비유하자면 가지와 잎새가 모두 봄이 되었습니다. 자손 중에 닮은 이가 없어서 조정의 반열에 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사(御史)로 순찰하라는 명을 받고 이곳 옛터에 오르니, 옛 성터가 희미하여 흥탄스럽습니다. 조각난 기와만 남아 있어 문관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덤이 있으니 이것이 영원히 살 집입니다. 공손히 변변찮은 제물을 차려 놓고 묘역을 정비합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잘못된 곳에 세우게 되었으나 한 기운이 여전하니, 정성이 있으면 감응할 것입니다. 부디 흠향하소서.

116. 晉州厲壇祭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68D, ITKC_MO_0200A_A043_569A

원문

維萬曆六年歲次戊寅七月庚戌朔十五日甲子。中訓大夫,守晉州牧使李某。致祭于闔境無祀鬼神。人生於世。孰無一死。惟尒衆神。不得良死。從古迄今。其類不一。或以戰陣死國。工築亡軀。水火盜賊。飢寒疾疫。墻屋頹壓。蟲獸螫噬。鬪敺橫傷。刑辟非罪。或因被掠財物而隕命。或因强奪妻妾而喪身。危急自縊。歿而無後。産難震墜。若此之類。不知其幾。孤魂無托。祭祀不及。悲號星月。冤哭風雨。陰魂未散。結而爲妖。興言及此。實可憯惻。是故。聖帝明王。發政施仁。旣使民人。無不被其澤。旁推人鬼之理。一肇稱殷禮。咸秩無文。亦無所不至。爰設壇場。徧祭無祀。先告城隍。召集群靈。携明挈儔。來享飮食。無爲災癘。以干和氣。則敬恭諸神。宜無悔怒。而近年以來。卽祀于旁。吏惰不躬。靈壇草沒。取具臨時。牲酒瘠酸。豆籩狼藉。神不顧享。職此之由。其何以通幽明之感。底民物之寧乎。風雨無節。五穀不熟。癘疫繁興。歷年不息。牛馬多斃。駢首槽櫪。□上勤宵旰之憂。下迫死亡之患。誠可悶也。某猥以無能。叨此劇邑。治民奉神。極知無狀。將其獲戾。反仰玄佑。謹以牲醴。粢盛庶品。躬來壇下。式陳明薦。雖因常事。實切祈請。伏惟諸靈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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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6년 세차 무인년 7월 경술삭(庚戌朔) 15일 갑자일에 중훈대부(中訓大夫) 수진주 목사(守晉州牧使) 아무개는 온 고을에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들에게 치제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한 번 죽기 마련인데, 오직 너희 여러 신들은 좋은 죽음을 얻지 못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혹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죽기도 하고 공을 세우다 목숨을 잃기도 하며 수화(水火)에 타 죽거나 도적에게 살해되기도 하고 기한(飢寒)이나 질병으로 죽기도 하며 집이 무너져 깔리기도 하고 벌레나 짐승에게 물려 죽기도 하며 싸움질하다가 다치기도 하고 죄도 없이 형벌을 받기도 한다. 혹 재물을 빼앗기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고 혹 아내와 첩을 강탈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며 위급한 상황에 스스로 목매어 죽고 죽어서는 자식조차 남기지 못하며 산진(産陣) 중에 떨어져 죽기도 한다. 이와 같은 부류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데, 외로운 혼백이 의탁할 곳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고 슬피 울부짖으며 별과 달을 바라보고 원통하게 울며 비바람에 목메어 가니 음산한 혼령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요괴가 된다. 이와 같은 말을 하니 실로 참담하다. 그러므로 성제(聖帝) 명왕(明王)께서 정사를 펼치고 인정을 베풀어서 백성들이 모두 그 은택을 입게 하였고, 사람과 귀신의 이치를 두루 미루어 한결같이 은례(殷禮)를 칭송하여 문물(文物)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또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받지 못하는 모든 귀신에게 두루 제사 지내며, 먼저 성황(城隍)에 고하고 여러 신령들을 불러 명철한 자와 동류를 거느리고 와서 음식을 받고 재앙과 역병이 없게 하여 화기(和氣)를 돕도록 하였다. 그러면 공경하고 공손한 여러 신들은 마땅히 후회하거나 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제사를 옆에서 지내고 관리들이 게을러 직접 받들지 않아서 영단(靈壇)은 풀에 덮이고 제수를 마련하는 것은 때가 지난 뒤라 희생과 술이 파리하고 비린데, 향기(香器)와 제기는 어지럽게 널려 있다. 신령이 돌아보아 주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유명 간의 감응을 통하게 하고 백성들과 만물을 편안하게 하겠는가. 비바람은 절기가 없고 오곡은 익지 않으며 역병은 번성하여 해마다 그치지 않고 우마(牛馬)는 많이 죽어 뿔과 머리가 마구 널려 있다. 위로는 밤낮으로 근심이 깊고 아래로는 죽을 걱정이 다급하니 참으로 답답하다. 아무개는 외람되게 무능한 몸으로 이 큰 고을의 수령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고 신령을 받들기에 매우 형편없음을 잘 알고 있다. 장차 화를 입을 것이나 거꾸로 하늘의 도움을 바라며 삼가 희생과 술, 제수와 여러 가지 물품을 가지고 직접 단 아래에 와서 정성껏 올리니, 비록 일상적인 일이기는 하나 실로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 신령께서는 흠향하소서.

117. 晉州城隍修造祝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69B

원문

維萬曆六年十一月戊申朔。州牧使李某。謹遣留鄕座首鄭夢虯。敢告祭于州城隍之神。惟爾城隍。爲一州羣神之主久矣。城中立祠以奉。每歲良日。將祭闔境無祀。則先告有神。召集北壇。是卽□國禮之常。而聖殿下之命也。頃因書生乘氣。不知文秩。一視淫祠。幷撤神棲。厥爲煬煙。神之版位。假寓非所。褻辱已甚。秋冬有事。實不知此。發告於神。而只因舊基。行之虛位。任土無狀。奉神又失。罪咎在躬。敢望玄佑。玆將卜日。復構前地。庶幾自今。無作神羞。謹以酒脯。先事告由。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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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6년 11월 무신(戊申) 초하루에 주목사 이모는 삼가 유향 좌수 정몽주를 보내어 감히 주성(州城)의 성황신에게 고합니다. 오직 그대 성황은 한 주의 여러 신들의 우두머리로 오래되었기에, 성 안에 사당을 세워 봉안하고 매년 좋은 날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온 경내에 제사 지낼 곳이 없으면 먼저 신령한 곳에 고하여 북단(北壇)에 모시는 것이 바로 -원문 빠짐.-나라의 예법이고 성전(聖殿)의 명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서생이 기운을 타고서 문질(文秩)을 모르고 음사(淫祠)를 똑같이 보아 함께 신주를 거두어 버렸습니다. 그 연기가 피어나자 신의 판위가 임시로 머무는 곳에 있게 되어 모욕이 이미 심하였습니다. 가을과 겨울에 일이 있을 때마다 실로 이 사실을 몰라 신에게 고하지 못하고 옛 터에서 빈 자리에 제사를 지내어 토지나 맡기고 형편없이 대우하였으니, 신을 봉안하는 데 또 잘못이 있었습니다. 죄가 자신에게 있으니 감히 신령의 도움을 바랍니다. 이에 날을 잡아 다시 이전의 터에 집을 짓고 오늘부터는 신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기를 바라며 삼가 술과 포로 먼저 사유를 고하니 흠향하소서.

118. 祭曺南溟先生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69C

원문

維萬曆六年歲次戊寅十一月戊申朔二十日丁卯。州牧使李某。敬祭于□贈大司諫南溟曺先生之墓。先生名成尊一。道協蠱九。留風季末。立頑來古。某髫承授符。敬義雷天。中叨載管。□衮麻金筵。鶴城曾奉。誨旨勤勖。山天今謁。鬣坏荒宿。至其處不見其人兮。敢忘東平之慕。構堂祠復其爲後兮。庶稽嚴州之故。頭流節兮萬仞。謂先生兮死未死。脯於籩豆於醢。冀盻蠁者在是。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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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6년 세차 무인년 11월 무신삭(戊申朔) 20일 정묘에 주목사 이모는 삼가 증 대사간 남명 조 선생의 묘에 제사를 올립니다. 선생은 이름이 성존일이고 도학은 고구와 같았네 풍도는 계말에 머물렀고 굳은 절개는 옛날에 왔네 나는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공경과 의리는 천둥처럼 컸네 중간에 관직을 맡아 황금 자리에 검은 비단 두르고 앉았네 학성에서 일찍이 모시면서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씀 지극하였네 산천에 지금 찾아와서 무덤이 황폐해진 것을 보았네 그곳에 선생의 모습 보이지 않지만 감히 동평의 사모함을 잊으랴 집을 지어 제사를 다시 모시니 엄주의 옛일을 살피리라 두류산은 만 길이나 높으니 선생이 죽었어도 죽지 않았네 제물로 고기와 술을 차렸으니 바라는 바가 여기에 있기를 바라나이다 부디 흠향하소서

119. 祭楊僉正〔原注:士俊〕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69D

원문

維萬曆七年歲次己卯五月乙巳朔初八日壬子。前牧使李某。略具小奠。遣男進士耆俊。敬祭于□楓皐楊先生之靈。前歲在春。余受晉命。遠別要贐。落紅爲請。欣然灑韻。伯仲聯詠。愛言含警。拱壁自慶。公餘披襲。用寓瞻敬。今我投簪。一朞未更。聞公大還。舊叢重映。憶始蒙筮。實與兄倂。凝標景北。卅載而幷。神與驁材。褻天光盛。驥蹄中踠。一何多病。詩窮蔑嗣。孰尸之柄。今臨永遷。奠斝猶倩。靈應不昧。謂余無竟。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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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7년 기묘년 5월 을사일 초8일 임자일에 전 목사 이모는 간단히 소제(小祭)를 차리고 아들 진사 기준을 보내어 공풍고 양 선생의 영전에 경건히 제사를 올립니다. 지난봄에 내가 진나라 사명을 받고 멀리 떠나려 하니 요분으로 낙홍시를 청하여 기쁘게 시운을 읊었습니다 형제와 함께 연이어 읊으니 사랑하는 말에 경계가 담겨 있었고 벽을 안고 스스로 경하하였으며 공무 여가에 시서를 펼쳐서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부쳤습니다 이제 내가 벼슬을 그만두고 한 해를 넘기지 않았는데 듣건대 공이 크게 돌아와 옛 무덤에 다시 빛나게 되었다 하니 생각건대 처음 점을 받았을 때 실로 형과 함께하였고 경북의 표본으로 모시어 30년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신령이 준 빼어난 재질은 하늘의 광명을 드러냈는데 준마가 중간에 넘어지니 어찌 그리 병이 많았던지요 시문이 궁하여 후사가 없으니 누가 그 명성을 이을 것입니까 이제 영원히 옮겨 가시니 제사를 올리는 일도 외려 빌립니다 영령은 어둡지 않으리니 나의 제사 받기를 바라옵니다 부디 흠향하소서

120. 祭白參贊〔原注:仁傑〕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70A

원문

維萬曆七年歲次己卯十月癸酉朔二十二日甲午。前牧使李某。謹具時羞之奠。敬祭于白知事先生之靈曰。惟靈。忠懸日月。□聖主已許其爭光。義貫通介。國人亦信其能常。公擺落室家妻子。未了者忠□君益國。公抹摋死生榮辱。未遣者頹風末俗。位參贊而猶痺。所貴者良。壽八十之非老。其存者長。金百鍊而方精。玉遭焚而知栗。不有罪也。何以表板蕩之誠。不有毁也。無以見獨立之卓。抑多時在淵之潛。而幾日來韶之儀。緬古人之齎沒。咸未際而莫施。而先生半千之風雲。卽曰時哉之行可。然猶有君實之未屬。不免爲流涕之屈賈。惟落落有志之不就。實滔滔誰昔而已。然彼鄒魯而坎軻。獨何恨後死之今賢。嗚呼已矣兮。一爵爲辭。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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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萬曆) 7년 기묘년 10월 계유삭(癸酉朔) 22일 갑오일에 전 목사 이모는 삼가 제수를 갖추어 공경히 백 지사 선생의 영전에 제사를 드리옵니다. 오직 영이시여 충성은 해와 달에 걸려 있으니 성주께서 이미 그 빛을 다투게 하셨고의리는 통계(通介)를 꿰뚫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또한 항상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공은 집안과 처자식을 버리고도 충성을 다하지 못한 자가 군익국(君益國)이요 공은 생사의 영욕을 마다하고도 퇴풍말속에 보내지 않은 자는 유비입니다 지위는 참판에 참여하였으나 오히려 병들었으니 귀한 것은 양심이었고 팔십의 나이는 늙음이 아니니 남은 것은 장수였습니다 쇠를 백 번 단련하여 바야흐로 정련되었고 옥을 불태우면 밤나무임을 알았으니 죄가 없는데 어찌 표판(表板)에 담긴 정성을 드러내겠으며 훼방이 없는데 어찌 독립의 높은 절개를 보겠습니까 오랜 세월 깊은 못에 잠겨 있었으나 어느 날 봄날의 의표가 되었고 옛사람이 묻혀 있는 것을 아득히 멀리하여 모두 만나지 못하고 베풀지 못하였지만 선생의 반천년 풍운을 이제야 행할 수 있다고 하였네 그러나 오히려 군실(君實)이 속하지 않아 눈물 흘리는 굴가(屈賈)를 면치 못하니 오직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이여 실로 도도한 물결이 어찌 옛날에 그쳤으리까 저 추로의 비극을 어찌 후세에 현인이 나옴을 한탄하겠습니까 아, 이제는 끝났으니 술 한 잔으로 작별합니다 부디 흠향하소서

121. 祭李同知〔原注:世麟〕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70B

원문

維年月日。前某官某。謹以庶羞之奠。敬祭于卒同知敦寧府事李公之靈。惟靈。與吾先君。越洎吳公。〔原注:諱誠〕夙有篤契。業尙參同。偕宣邊力。乃心勤忠。中年結隣。永期遊從。對溪靑坡。鼎宅西東。老參歸兵。白髮髼鬆。婆娑往來。金玉儀容。怡愉卒歲■■歡融。人榮地仙。有目咸崇。小子不天。先哭樹風。吳又繼禍。公惻在衷。公猶益壯。擬貞霜松。迄用康強。宿衛彌恭。如何一夕。不疾而終。幽明倏刻。奠叫而通。今遷几筵。遠卽泉宮。視旣猶子。慟實若翁。怨惟天椓。六年之中。喬木具頹。巷閭終空。已矣來生。更陪屨筇。一酌告訣。情則無窮。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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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월일에 전 모관(某官) 모는 삼가 여러 음식으로 공손히 졸동지돈녕부사 이공의 영전에 제사를 올립니다. 오직 영이여, 우리 선군과 우씨를 거쳐 오씨와 일찍부터 돈독한 교분이 있었고 -원주에 “휘(諱)는 성(誠)이다.”라고 하였다.--업은 상도(尙道)와 참동(參同)을 숭상하였으며, 함께 변방의 힘을 펼치니 마음은 충성스러웠습니다. 중년에는 이웃이 되어 길이 종유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시냇가 청파에 집을 마주하고 서쪽 동쪽으로 정사를 행하였습니다. 노참이 군대를 돌려 돌아오니 백발의 모습이었고, 오락가락 왕래할 때면 금옥 같은 의용이었습니다. 즐겁게 한 해를 마치니 -원문 빠짐.-기쁨이 넘쳤고, 사람들은 신선이라 칭송하였으며, 눈을 가진 자는 모두 우러렀습니다. 소자는 하늘의 뜻을 모르겠으니, 먼저 나무에 바람을 불어놓고 울었습니다. 오씨가 또 화를 이어받았는데 공은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공은 오히려 더욱 장성하여 곧은 서리 맞은 소나무와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강건하게 지내며 묵묵히 지키는 것이 더욱 공손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병들지 않고 돌아가셨습니까? 유명이 잠깐 사이에 끊어졌으니 제물을 차려 부르짖어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제 묘소를 옮겨서 멀리 천궁으로 가시니 자식처럼 보았고 실로 아비처럼 슬퍼하였습니다. 원망스럽기만 한 것은 하늘이 무심하여 6년 동안에 큰 나무가 모두 쓰러져 마을이 끝내 비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다시 태어나서 부모님을 모시겠지요. 한 잔 술로 작별을 고하니 슬픈 마음 끝이 없습니다. 흠향하소서.

122. 淸江集跋[申欽]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위치: ITKC_MO_0200A_A043_571B, ITKC_MO_0200A_A043_571C ...

원문

欽少通籍朝端。自郞署已廁遊諸巨公間。曁夫輩流。靡不上下左右。瞷其持行。矜式而習稱之矣。而迺若執矩履潔。易祿而難畜者。則蓋淸江公有焉。其解晉陽歸也。卽屛跡不與世交。家人數米以炊。往往不給。而逌然無顧慮。朝貴間致候問。不一謝。唯托於古文辭甚深。日講說兩漢文字自娛。晩乘邊障。起建節。而竟爲時所誣。從吏議。纍于西土而卒。天果有定乎哉。惡在持行之過人也。□宣宗大王追惜公。復其爵。又遣官致祀。後二十年。而以公中子勳。至贈領議政。而人亦稍稍識公。或有悼其不究者。抑不可謂天之無定。而公之持行之過人者。於斯焉徵矣。然非君子之不幸歟。其文章發於左氏,班固爲尤多。故氣厚而辭宏。其砰磕磋砑。如矢之飮石也。其沈深莾宕。如玉之剖璞也。及其意得而神會也。慫溢而不可遏。蓬蓬然欲揚𡏖而籟矣。使公而年。則詎不得擬議變化。以造夫極歟。月汀尹相公亟頌之曰一洗骫靡。自闢堂奧。信知言哉。文之付剞劂凡三卷。鰲城相國旣爲之序。而公之胤德山倅命俊氏。謂欽知公。不唯甥舅之好。固要一言而跋之。噫。巧倩妖睇。倚門自售者何限。而公以忠朴擠於當時。躡形付影。竊取射利者何限。而公以功實。罹於文罔。以公所遘觀之。則宜若終遂闇曶湮沒。不復見於後。而身歿而言立。言立而名傳。譬如珊瑚寶柯。灕漇於銕網。而卒爲希代之珍。烏可以一世淺論。易百世業哉。與蜍志之厭厭取媚。磨滅不紀者。何如也。仍語德山公曰。世有焚之而愈烈者。芳蘭是已。鍊之而愈光者。良金是已。防之而愈決者。江河是已。其得爲不焚之蘭。不鍊之金。不防之水者。其有乎無哉。何其寡也。欽旣跋公之文。重有所感。省□皇明萬曆紀元之三十八年庚戌中夏。女壻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知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藝文館提學申欽。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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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소(欽少)가 조반(朝班)에 통적(通籍)되자 낭서(郞署)에서부터 이미 여러 거공(巨公)들 사이에 끼어 노닐었으며, 그 무리들도 모두 위아래 좌우로 그 지행을 우러르고 본받아서 칭송하였다. 그러나 법도를 지키고 청렴결백하여 녹봉을 바꾸는 것도 어려워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청강공(淸江公)이다. 진양(晉陽)에서 돌아올 때에 자취를 숨기고 세상과 교유하지 않으면서 집안사람들에게 쌀 몇 섬으로 밥을 지어 먹게 하였는데도 간혹 주지 않아도 태연히 근심이 없었다. 조정의 귀인들이 문후를 보내면 한 번씩만 사례하였고, 오직 고문(古文)에 의탁하여 말씨가 매우 깊었으며 날마다 양한(兩漢)의 문자를 강론하며 스스로 즐겼다. 만년에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되어 절도사로 나갔다가 마침내 시세에 속아 이의(吏議)를 따라 서쪽 지방으로 귀양 가 있다가 죽었으니, 하늘이 과연 정해 둔 것이 있는 것인가? 그 지행이 남보다 뛰어난 데서 잘못이 있었던 것이다. 선종대왕(宣宗大王)이 공을 추모하여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또 관원을 보내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그 뒤 20년이 지나 공의 아들 중자(中子)가 영의정에 오르니, 사람들도 조금씩 공을 알아주어 혹 그를 애도하는 자도 있었으니, 하늘이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이 남보다 뛰어난 지행은 여기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군자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의 문장은 좌씨(左氏)에서 발현되었는데 반고(班固)의 것이 가장 많다. 그러므로 기운이 두텁고 말이 웅장하다. 그 치밀하고 정교함은 마치 화살로 돌을 마시는 것 같고, 그 깊고 광활함은 마치 옥을 갈아 다듬는 것 같다. 그의 뜻이 이루어지고 정신이 통하게 되면 넘쳐흘러 막을 수 없으니, 붕붕(蓬蓬)하여 하늘에 드높이 날아오르려 한다. 공에게 장수를 주었다면 어찌 의논하고 변화시켜서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겠는가. 월정(月汀) 윤 상공(尹相公)이 속히 송(頌)을 지어 말하기를, “한 번 씻은 듯이 무미(骫靡)함을 버리고 스스로 깊은 도리를 터놓았으니 참으로 말이 맞다.” 하였다. 그의 문장을 새긴 책이 모두 세 권이다. 오성(鰲城) 상국이 이미 그를 위해 서문을 지어 주었는데, 공의 아들 덕산(德山) 고을 수령 명준(命俊)이 나에게 공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였으니, 외숙과 사위 사이의 친분뿐만 아니라 진실로 한마디 말을 남겨야 할 것이다. 아, 교묘하게 꾀고 요망한 눈빛으로 문지방에 기대어 자기 욕심을 채운 자가 어찌 한량 있겠는가. 그러나 공은 충박(忠朴)함이 당시에 부딪혔다. 형체를 모방하고 그림자를 붙여 이익을 취한 자가 어찌 한량 있겠는가. 그러나 공은 실질적인 공으로 문망(文罔)에 걸렸다. 공의 처지를 가지고 본다면 마땅히 끝내 억울하게 죽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어야 하는데, 몸은 죽었으나 말이 서고 말이 서니 이름이 전해졌다. 비유하자면 산호와 보배 같은 나무가 철망에 빠졌다가 마침내 시대의 진귀한 보물이 된 것과 같으니, 어찌 한 시대의 얕은 논평으로 백세의 업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욕심을 부려 아첨하고 세월이 지나면 잊혀 버리는 자들과 비교하면 어떠하겠는가. 이어 덕산공에게 말하기를, “세상에는 불에 태워도 더욱 빛나는 것이 있다.” 하였다. 향기로운 난초는 이미 단련하면 더욱 빛나는 것이고, 좋은 쇠는 이미 막으면 더욱 잘 부러지는 것이며, 강하는 이미 막아도 되지 않는 것이다. 불태워지지 않는 난초와 단련하지 않은 쇠와 막지 못하는 물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어찌 그리 적은가. 나는 이미 발공(跋公)의 글을 읽고 거듭 감동한 바가 있다. 황명 만력(皇明萬曆) 기원(紀元) 38년 경술년 중하(中夏)에 여사위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예문관제학 신흠은 발한다.

원문

次知僧戒海崔彦謙眞默天月輝鑑幸眞元俊妙淳刻手僧雲藏

번역

차지승계(次知僧戒)해최언겸(海崔彦謙)진묵천월휘감(眞默天月輝鑑)행진원준묘순각수(幸眞元俊妙淳刻手)승운장(僧雲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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