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한국문집총간

0130_범허정집_泛虛亭集_번역

諺解 2026. 6. 11. 06:34
반응형


범허정집(泛虛亭集)

  • 저자: 상진(尙震)
  • 생몰년: 1493-1564
  • 원문: 한국고전번역원_한국문집총간
  • 번역: gemma-4-12b-it-qat-hanmun-q4_0 로컬 기계번역 초안

이 글은 기계번역 초안입니다. 인용이나 학술 사용 전에는 원문 대조와 검수가 필요합니다.

1. 泛虛亭集序[鄭萬朝]

문체: 序跋類 / 序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03B, ITKC_MO_0130A_A026_003C

원문

余先祖守夫公。相□靖陵居首揆。私第與泛虛亭相公隣。一日。尙公以新進見。大器之。飭家人治垣屋縮其舊而廣其外曰。尙翰林不久作相。其出入之路。不可隘也。後守夫公被宵人誣。禍將叵測。尙公力爭之得輕。守夫公歿十年餘。尙公果入相。世之談相業者。以二公爲一揆。蓋守夫公。値南衮,金安老之用事。尙公際□明宗時尹元衡之當路。皆時不可爲而勢不相容矣。而猶挺身巖廊。不費聲色。而一以救生靈護善類。引君當道爲自任。此乃二公之所同也。守夫公之孫林塘公。亦躡尙公爲相。而嘗有挽公詩三篇。二篇。述公之德業勳庸之盛。一篇。道平生里仁之美。陪遊之懽。景仰之深。因此而其時進而同寅。退而同隣。兩家相好之篤。槩可想也。尙公歿而未幾遭兵燹。文獻莫有徵者。後孫之惓惓收拾傳家者。只詩文若干。附以遺事碑狀爲一卷而已。後孫渭恨其少。力加廣裒。爲二卷。將梓而壽之。介其族兄潗。與余貫者偕來。問序於余。余拜而讀。作而歎曰。公以道學則節孝成先生切偲之友也。文章則靜菴趙文正公奬詡而選擧者也。以謨猷箚奏則金石竹帛之所博載也。以豐功盛德則垂千載赫赫人耳目也。顧何俟乎區區咳唾之餘而傳之。又何藉乎寥寥一言之序而有輔焉。又何假乎空疏無文如余者之手乎。然昔吾兩家俱居京城之南。有韋杜尺五天之謠。今焉岸移谷變。萍漂蓬轉。欲追當時相好之篤。而不可復得矣。無寧使吾兩家後世子孫。得讀是集。而知有先世相好之篤如此。亦豈非稍幸歟。是以於邑而書之。公歿後六庚午敫秋。通家後學東萊鄭萬朝。謹序。

번역

나의 선조 수부공(守夫公)은 정릉(靖陵)에 살던 상신(相臣)으로 수상이 되셨다. 사저가 범허정(泛虛亭) 상공과 이웃하였는데, 어느 날 상공이 신진(新進)을 만나 대기(大器)라고 칭찬하고는 집안사람에게 지시하기를, “집의 담장을 고쳐서 옛날보다 넓게 만들라. 상 한림이 머지않아 정승이 될 것이니 그가 출입하는 길이 좁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뒤에 수부공이 밤중에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아 화(禍)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는데, 상공이 힘써 간쟁하여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수부공이 죽은 지 10여 년 후에 상공이 과연 정승이 되었다. 세상에서 재상감(宰相鑑)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두 분을 한결같이 정승으로 평가한다. 대개 수부공은 남곤(南袞)과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던 때를 만났고, 상공은 명종(明宗) 때 윤원형(尹元衡)이 벼슬길에 오르던 때를 만나 모두 당시에 할 수 없는 일이고 형세상 서로 용납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앞장서서 조정에 나가 성색을 쓰지 않고 한결같이 백성을 구하고 선인을 보호하였다. 군을 이끌어 길에 나서는 것을 자임(自任)한 것은 바로 두 분 공의 공통점이다. 수부공(守夫公)의 손자인 임당공(林塘公)도 상공을 따라 정승이 되었는데, 일찍이 공에게 만시 3편을 지어 보냈다. 그중 2편은 공의 덕업과 훈용의 성대함을 기술하였고, 1편은 평생에 인덕을 행한 아름다움과 함께 노닐었던 즐거움과 깊이 존경했던 마음을 말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에는 나아가 함께 조정에서 일하고 물러나서는 함께 이웃하여 두 집안의 우정이 돈독했음을 대략 상상할 수 있다. 상공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병란(兵亂)을 당하였는데, 문헌에 증거가 없었다. 후손이 애써 가업을 수습한 것이 시문 약간과 유사 비장(遺事碑狀) 한 권뿐이었다. 후손 위한(渭恨)이 그 양이 적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힘을 다해 널리 모아 두 권으로 만들고 간행하려고 하였다. 그의 족형인 위협(渭潗)과 함께 온 관자(貫子)가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내가 절하고 읽고 나서 읊조리며 탄식하기를, 공은 도학(道學)으로 말하면 절효성 선생의 절친한 벗이요, 문장으로 말하면 정암 조 문정공이 가르치고 뽑아 세운 사람이며, 계책과 주도로 말하면 금석(金石)과 죽백(竹帛)에 널리 실려 있는 것이며, 큰 공적과 성대한 덕으로 말하면 천년토록 눈과 귀에 혁혁하게 전해질 것이다. 구구한 나의 시문을 어찌 기다려서 전하겠으며, 또 어찌 한마디의 서문이 없다고 해서 보탬이 되겠는가? 또 어찌 나처럼 문장도 없고 소박하기만 한 사람에게 손을 빌리겠는가. 그러나 옛날에 우리 두 집안은 모두 서울 남쪽에 살았으므로 위두척오천(韋杜尺五天)의 노래가 있었는데, 지금은 언덕이 옮겨지고 골짜기가 변하여 부평초처럼 떠돌고 쑥대처럼 구르니 당시의 돈독한 우정을 추구하려 해도 다시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 두 집안의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이 문집을 읽고 선대의 두터운 우의가 이와 같음을 알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조금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고을에서 이를 기록한다. 공이 죽은 뒤 6년째 되는 해인 오오년 가을에 통가의 후학 동래 정만조(鄭萬朝)는 삼가 서문을 쓴다.

2. 泛虛亭集序[李重明]

문체: 序跋類 / 序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03D, ITKC_MO_0130A_A026_004A ...

원문

昔。叔梁紇禱于尼丘山誕孔子。固天縱之大聖。爲魯司寇三月。群方取則。我東木川華閥察訪尙公甫。亦禱于聖住山。生泛虛亭相國成安公。禱是正理。古今靈應。維嶽降神。繼周佐韓。應時而出。一也。聖則不同。所願則學孔子。公姊壻夏山君成公夢井。欽服其聰明氣質學問篤實曰。無讓於孔門弟子。自壯歲。爲當時衆賢所推。□靖陵,□康陵之世。立身者四十六年。居相者十六年之間。風雲之會。魚水之契。出類拔萃。凡關□朝家典禮。政事得失。天災時變。進賢退姦。冤枉賞罰。潛德幽行。武備條例。一一明白。惓惓陳啓。懇懇獻議。言言瀝血。納約自牖。□王鑑孔昭。□寵命特殊。言聽計用。能致君民於堯舜。是豈凡宰相所能爲哉。乃不允者。辭職也。干時也。朝野無遺彥。嚴斥戕害趙靜菴先正之人。力薦高明李退溪先生之賢。且立通庶孼科規。以廣用人材之路。昭載於史乘。實大匡輔國之容量也。今公之遠胤渭。孝思根天。旁蒐遺跡。附以諸作。作爲四冊。方謀刊行。能於數百載未遑之役。迺請弁文於不佞。蔑學後學。且兼衰癃。何敢當也。嗚呼惜哉。恨未得當年全而廣布。厄于燹。燼餘無幾。君幸勤勞。積祀成編。馨香光輝。益振後世。雖晩何患。最大者。啓議疏箋句句字字。聳動精神。可埒伊訓,說命。允爲百世人主之龜鑑。囱壁六當之箴。亦足以牖來學矣。於虖盛哉。君臣際遇。若是其親密無間歟。辭相位也。批曰。予貴耆德。人間七十古來稀。居相一紀世不多。仍不允。至於玉手侑爵。霜天掃塋。送迎設宴。賜豹皮與御用雨具。於是乎大可以知公。公願同魯論中點也舍瑟而對。莫春者。風雩浴沂。詠而歸。可想有道氣像。公退也。每抱琴而彈感君恩一曲三章而終身。又號向日。公之丹心一片。斷斷無他。無災無難。望八年來。共享上下太平之樂者。李朝以來。惟公是已。得君行道。羽儀明廷。久專其位則猶有賢於夫子云。

번역

옛날에 숙량(叔梁)이 이구산(尼丘山)에서 공자(孔子)를 낳기를 빌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내신 대성인이다. 노나라의 사구(司寇)가 된 지 석 달 만에 여러 지방에서 본받았고, 우리나라 목천(木川)의 명문가인 찰방(察訪) 상공보(尙公甫)도 성주산(聖住山)에서 공자가 계신 곳을 빌어 범허정(泛虛亭) 상국 성안공(成安公)을 낳았다. 빌었다는 것은 바른 이치이니, 고금에 신령이 응답하였다. 산악에 신이 내려와 주나라를 계승하고 한나라를 보좌하였으니, 때에 맞게 나와서 하나로 된 것이다. 성인의 도가 같지 않으나 공자를 배우기를 원한 것이니, 공의 누님 시집간 하산군(夏山君) 성공(成公)이 꿈에서 우물을 보고 그 총명한 기질과 학문의 독실함을 흠복하고는 “공자의 문하생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젊은 나이에 당시 여러 현인들에게 추앙을 받았고, 정릉(靖陵)과 강릉(康陵)의 시대에 입신(立身)한 지가 46년이고 재상으로 있었던 지가 16년이다. 풍운의 만남이며 어수지계이니, 출중한 인물로서 조정의 전례에 관계되는 바이다. 정사(政事)의 득실, 천재와 시변, 어진 이를 등용하고 간신을 내치는 일, 원통한 사람에 대한 상벌, 덕을 숨기고 은거하는 행위, 무비(武備)의 조례 등에 대해 하나하나 명백하게 진언하였고, 간절히 아뢰고 정성껏 의견을 바치며 말마다 피를 쏟아 내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왕이 그를 거울로 삼아 밝게 보았고 특별한 은총을 내려 그의 말을 듣고 계책을 쓰니, 능히 군민(君民)을 요순(堯舜)의 경지로 이르게 하였다. 이것이 어찌 보통 재상들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가 윤허받지 못한 것은 사직하였기 때문이고 때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조정과 민간에 훌륭한 선비가 다 죽어 버린 때에 조 정암(趙靜菴) 선정(先正)의 사람을 엄히 배척하고 고명(高明) 이 퇴계 선생의 어진 행실을 힘껏 천거하였으며, 또 통서독과(通庶孼科)의 규정을 세워 인재를 널리 등용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것이 역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실로 대광보필(大匡輔弼)할 만한 도량이다. 지금 공의 먼 후손인 위(渭)는 효심이 하늘에 뿌리를 두어 여러 유적을 수집하고 여러 작품을 부록으로 붙여서 4책을 만들어 간행하려고 한다. 수백 년 동안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내고서 마침내 불초한 나에게 편문(編文)을 청하였네.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또 노쇠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 애석하네. 당시에 온전히 넓게 선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데 화재로 인해 남은 것이 얼마 없네. 그대가 다행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제사를 쌓고 편찬을 이루었으니 향기로운 제향이 후세에 더욱 빛날 것이네. 비록 늦었다 하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가장 큰 것은 《계의소》와 《소전》의 구절마다 정신을 진작시켜 주어 《이훈(伊訓)》과 《설명(說命)》에 견줄 만하고, 참으로 백세의 군주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네. 창문에 걸린 여섯 가지 경계는 또한 후학들을 깨우치기에 충분하니, 매우 훌륭하네. 군신 간의 만남이 이처럼 친밀하여 어긋남이 없었는가. 사직(辭職)한 상소에 대한 비답이다. 나는 나이가 많아 인간 세상에서 일흔 살은 예로부터 드물다네 한 시대에 한 번씩만 태어나는 것이니 이어 윤허하지 않네 옥수유작(玉手侑爵)에 이르러 서리 내린 하늘 아래 성묘를 하고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는데, 표피(豹皮)와 어용 우구(御用雨具)를 하사하였다. 이로써 공의 마음을 크게 알 수 있었으니, 공은 노론(魯論) 가운데 중도에 있는 사람으로서 거문고를 버리고 임금을 대하는 것을 원하였던 것이다. 봄이 오면 풍우(風雩)와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니, 도의 기상을 상상할 수 있었다. 공이 물러나서는 매양 거문고를 안고서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는 곡을 연주하여 평생토록 마쳤는데, 또 ‘향일(向日)’이라 하였다. 공의 한 조각 단심은 변함이 없고 다른 것이 없어서 재앙도 없고 어려움도 없었다. 8년 동안 상하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은 이조 이후로 오직 공뿐이었다. 임금을 얻어 도를 행하여 조정에 우의(羽儀)가 밝았으니, 오래도록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오히려 부자보다 나았다.

원문

昭和十六年辛巳淸秋上澣。後學完山李重明。謹序。

번역

소화(昭和) 16년 신사 가을에 상강(上江)에서 목욕하고 돌아온 일. 후학 완산(完山) 이중명(李重明)이 삼가 서문을 쓰다.

3. 先生遺墨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仲玉兄□棣案此行一登楓岳。東臨大海。北自叢石。南望竹西。昨又乘船。歷探北壁龜島。山海之觀。可謂爛熳。虛其中而驚操外。勞於目而無得於心。儘可笑也。他行文字有數紙。雖甚拙陋。不可[缺]輩。而書在亂藁。留竢精寫仰呈耳。餘不宣。

번역

중옥(仲玉)형께. 이 행차에 한 번 풍악산에 올라 동쪽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북쪽으로는 총석대(叢石臺)로부터 남쪽으로는 죽서(竹西)까지 바라보았으며, 어제는 또 배를 타고 북벽(北壁)의 구도(龜島)까지 두루 탐방하였으니 산해(山海)의 경관이 훌륭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비어 있어 조외(操外)에 놀라고 눈만 수고로울 뿐 마음에는 얻은 것이 없으니 참으로 우습습니다. 다른 행차에서 지은 글이 몇 장 있는데, 매우 졸렬하고 누추하지만 -원문 빠짐.-무리에 두어서는 안 되기에 난잡한 원고 속에 두고 정사(精寫)하기를 기다려 올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원문

己□暮春念八。□弟□起夫。

번역

기사년 늦은 봄에 여덟 살을 생각하고 -원문 빠짐.-아우는 일어나 아버지를 섬기네.

4. 伏惟秋風節。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尊雅履佳迪。遙慰遙慰。震粗遣。而若有一麾南土。可得源源。何可必也。□貴洞中京居尙生玄氏。即震之宗人。新接未免艱楚。須十分□□顧恤。以爲保完之地如何。餘萬困憊。臥草不備。謹拜

번역

그대의 안부가 편안하시리라 생각하니 멀리서 위로가 됩니다. 저는 대충 지내고 있습니다. 만약 남쪽으로 한번 내려갈 수 있다면 계속해서 뵐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기필할 수 없겠습니까. 귀동(貴洞)의 중경(中京)에 사는 상생현씨(尙生玄氏)는 바로 저의 종인인데, 새로 이사하여 생활이 어렵습니다. 부디 십분 보살펴서 잘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머지는 너무 피곤하여 누워서 쓰느라 다 적지 못합니다. 삼가 절을 올립니다.

5. 上狀。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05D, ITKC_MO_0130A_A026_006A ...

원문

尊照。□壬十月念二。□記下震拜。

번역

존조(尊照)임진년 10월 2일 기하진이 절을 올립니다.

원문

仲玉奉復[手決]雖未對君。承書動心。不能已已。金醫已蒙右相之肯。秋夕定可訪。君。其進之。謂君今夏。定到聽松話舊。期必得之。卒爲小兒所誤。奈何奈何。唯望愼攝。所服之藥。不惜示及。吾當盡力圖送。八月十三。□起夫仲玉上日□聽松堂[手決]久聞公在坡山別墅。未敢次。身可浴。髮可沐。惟此心解能濯。坡之翁爲是憂。遁于山得天遊。泛虛翁

번역

중옥(仲玉)이 답장을 보냈는데, 손으로 쓴 글씨였다. 비록 그대를 만나지 못했으나 편지를 받고 마음이 움직여 어찌할 수 없었다. 김의(金醫)가 이미 우상(右相)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추석에는 반드시 찾아갈 것이다. 그대는 나아가 보라. 군(君)은 올여름에 청송(聽松)에 가서 옛 친구와 이야기하기로 하였는데, 기필코 만나기로 하였으나 끝내 어린아이의 잘못으로 어그러졌으니, 어찌하면 좋으랴? 오직 삼가 몸을 잘 돌보기를 바란다. 먹는 약은 아끼지 말고 알려 주면 내가 힘을 다해 보내도록 하겠다. 8월 13일 기(起)가 중옥에게 쓰다. 일기청송당 오래전에 들으니 공이 파산 별장에 계시어 감히 찾아뵙지 못했네 몸은 목욕할 만하고 머리도 씻을 만한데 오직 이 마음만 씻을 수 없었네 파산의 노인이 이를 걱정하여 산으로 숨어 천유를 얻었네 범허옹(泛虛翁)

6. 寄題聽松堂〔原注:成守琛〕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憐君溪上堂。歲暮掩重林。多病絶來去。草生松逕深。物猜良獨苦。玆事亦驚心。竹有淸宵韻。梅斜缺月陰。故人汾水想。秋日屢沾襟。鍊骨須良藥。安情非物侵。商飄激涼氣。蘇健定從今。早晩臨鳴磵。松嵐看暝沈。〔原注:公年二十時〕

번역

가련해라 그대 시냇가의 집이여 세모에 겹겹 숲을 닫고 지내네 병이 많아 오고 감도 끊어졌는데 풀은 자라 솔길이 깊어만 가네 물건의 시기란 참으로 괴로운 것 이런 일 또한 마음 놀라게 하네 대나무는 맑은 밤에 소리 내고 매화는 이지러진 달빛에 비끼네 벗님과 분수에서 만났던 일 생각하니 가을날 자주 옷깃 적시었지 뼈를 단련하려면 좋은 약이 필요하고 마음을 편안히 함은 물욕의 침범이 아니네 상전(商傳)의 표는 서늘한 기운 격동시키고 소식(蘇軾)의 건강함은 이제부터 정해졌네 조만간에 시냇가에 나아가면 솔바람이 저녁에 잠기는 것을 보리라 원주(原注): 공의 나이가 20세 때이다.

7. 書示李上舍〔原注:濟臣〕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0B

원문

疾病須無賴。逢君意氣生。菊觴初發興。繡句轉挑情。不醉看晴月。無眠度夜更。盈樽美酒在。直到五鷄鳴。

번역

병든 몸이라 의지할 데 없었는데 그대 만나니 의기가 솟아나네 국화주에 처음 흥이 일더니 수놓은 시구에 더욱 정이 이끌리네 취하지 않고 맑은 달을 바라보고 잠 못 이루고 밤을 지새네 술동이에 좋은 술 가득하니 닭이 다섯 번 울 때까지 마시세

원문

右乃成安公筆蹟。相公以厚德重望。歷事□三朝。身居鼎軸。享太平之樂者十六年。文翰特餘事。而遒媚足法如是。始知前輩風流非後生所易及。相公曾孫子華氏。得此軸於林川人家。粧爲一帖。求余言而壽之。蓋林川。相公桑梓也。噫。相公之歿。已易一世。其文字益貴重矣。若子華氏。可謂篤於追遠而不忘其親者也。萬曆三十九年仲春下浣。東陽申欽。書。

번역

이것은 바로 성안공(成安公)의 필적이다. 상공은 두터운 덕과 중한 명망으로 세 조정에 걸쳐 재상으로 있으면서 몸소 정축(鼎軸)을 맡아 16년 동안 태평성대의 즐거움을 누렸다. 문장 솜씨는 특별히 여사(餘事)였는데, 힘차고 아름다운 필법이 이와 같으니, 선배의 풍류를 후생이 쉽게 미칠 수 없음을 비로소 알겠다. 상공의 증손 자화씨가 임천(林川) 사람의 집에서 이 축을 얻어 한 첩으로 꾸미고 나에게 말을 구하여 이름을 붙여 주었다. 대개 임천은 상공의 고향이다. 아, 상공이 돌아가신 지 이미 한 세대가 바뀌었으니 그 문자가 더욱 귀중하다. 자화씨는 먼 조상을 독실히 추모하고 자기 친척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만력(萬曆) 39년 중춘 하浣에 동양 신흠은 쓴다.

8. 與子弟坐月設小酌。微醺。令各賦詩。因吟一絶。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誰謂月輪天上到。醉看杯底分明倒。杯傾月亦入吾腹。表裏淸光交更好。

번역

누가 말했나 달이 하늘에 떴다고 취해 보니 잔 속에 분명히 비쳤네 잔을 기울이자 달도 내 배 속으로 들어가니 안팎의 맑은 빛 서로 어울려 더욱 좋구나

9. 題竹西樓〔原注:二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0D

원문

閬苑曾聞十二樓。爭如登眺竹西幽。山圍簾箔雲鬟列。水繞汀洲玉液流。丹壁勢欹楓倒影。翠松棲冷鶴生愁。此身苦被浮名絆。愧爾滄波浩蕩鷗。

번역

낭원의 열두 누각을 일찍이 들었지만 죽서루에 올라 바라봄과 어찌 같으랴 주렴 둘러싼 산은 구름 머리 늘어선 듯 물결 두른 모래톱엔 옥액이 흐르누나 붉은 절벽 기운 모습 단풍 그림자 비끼고 푸른 소나무 서늘한 곳 학은 시름 일겠네 내 몸은 부질없는 명예에 얽매여 괴로우니 너는 창파에 호탕하게 노니는 갈매기 부럽구나

원문

百年身勢寄浮萍。暇日鉤簾獨倚樓。洲渚有痕秋水落。英雄無跡短章留。尋常入夢坡公鶴。造次知心海上鷗。俛仰古今人白髮。山川長在護名區。

번역

백 년 인생의 신세 부평초에 붙은 듯하여 한가한 날 발을 걷고 홀로 누각에 기대네 물가에는 흔적 있어 가을 물이 떨어지고 영웅은 자취 없어 짧은 시만 남았구나 늘상 꿈속에 들어오는 건 파공의 학이요 조급할 때 마음 아는 건 바닷가의 갈매기라 고금의 사람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백발 되었는데 산천은 길이 남아 명승지를 보호하네

10. 題降仙樓〔原注:二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1A

원문

十二雲霄活畫開。隔樓春水沒洲來。當時事業知何在。千載山河亦壯哉。片夢忽隨鷗浩蕩。淸情飜與句安排。澄潭風定明如鏡。苔壁陰凝翠作堆。捲釣漁翁供雪膾。凌波仙子換橘杯。古愁今恨堪抛擲。須敎蘭舟上楚臺。

번역

열두 층의 구름 하늘이 살아 그림처럼 열리니 누각 너머 봄 물결이 모래섬에 잠기어 오네 당시의 사업이 무엇이었는지 알겠거니와 천 년의 산하 또한 장대하기만 하구나 한 조각 꿈은 문득 갈매기 따라 호탕해지고 맑은 정은 도리어 시구와 함께 배열되네 잔잔한 못에 바람 멎어 거울처럼 밝고 이끼 낀 절벽에 그늘 짙어 푸른빛이 쌓였네 낚시를 거두는 어옹은 눈 속의 회를 대접하고 물결을 타는 선자는 귤주로 바꾸어 마시네 옛 시름과 지금 한을 던져 버릴 만하니 모름지기 난주 타고 초대에 올라야 하리

원문

尖峯六六錦屛開。不阻劉郞又一來。造物從前眞戲爾。淸遊隨處亦奇哉。千年往事人誰問。一首新詩悶莫排。晩渡空明靑瀲灎。朝雲濃沫白培堆。官家淑景薰楊柳。客路春心倚酒杯。煙裏依然見神女。煩公試踏夢中臺。

번역

뾰족한 봉우리 여섯 개가 비단 병풍처럼 펼쳐져 유랑이 다시 오더라도 막지 않네 조물주는 예전부터 참으로 장난을 쳤으니 맑은 유람 곳곳마다 또한 기이하구나 천년의 지난 일을 누가 물어보랴 한 수의 새 시에 근심을 떨칠 수 없네 저녁 무렵 건너니 하늘은 푸르고 강물은 넘실대고 아침 구름 짙게 피어나 흰 거품이 쌓였네 관청의 좋은 경치 버드나무에 가득하고 나그네 길 봄마음 술잔에 의지하네 안개 속에 여전히 신녀가 보이니 번거로워라 공에게 꿈속의 대를 밟아보게 하네

11. 題江陵連谷倉〔原注:嘉靖乙未。江原監司時。〕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1B

원문

關山篴裏思悠哉。遠客愁腸日九回。漢水終南何處是。五雲空復夢邊來。

번역

관산의 피리 소리에 생각이 아득하여라 먼 길 가는 나그네 시름에 날마다 구중을 맴도네 한수와 종남산은 어디에 있는가 오색구름 속에서 공연히 꿈결에 찾아가네

원문

淸篇三復永懷哉。壁上紗籠歲幾回。玉節觀風攸憩地。棠陰不改待余來。

번역

맑은 시를 세 번 읽고 길이 그리워하노니 벽 위의 사롱에 몇 해나 지났던가 옥절로 풍속을 살피러 쉬는 곳에 감당나무 그늘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네

원문

〔原注:外裔李廷謙〕

번역

원주(原注)에 “외예(外裔) 이정겸(李廷謙)”이라 하였다.

12. 題江界客舍〔原注:二首○嘉靖庚子春。平安監司時〕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西塞山重阻。玆關釰弟兄。峯攢天亦小。江倒震長聲。曲壑通微逕。危矼不幷行。一夫應莫效。分閫愼休兵。〔原注:秋嶺口拈〕

번역

서쪽 변방 산이 겹겹으로 막혀 있으니 이곳 관문은 형제와 같네 봉우리 모여 하늘도 작고 강물 거꾸로 흐르니 진동하는 소리 길구나 굽은 골짝에 오솔길 나 있고 높은 다리는 함께 다니지 못하네 한 사람도 응당 본받을 수 없으니 관할 구역 나누어 병사 쉬게 함을 삼가라 원주(原注) : 추령구(秋嶺口)에서 읊었다.

원문

絶域孤城外。群山亦壯哉。小兒搏擭苦。眞宰主張恢。扃鐍天爲限。揶揄鬼敢咍。運籌能制勝。却在仗全才。〔原注:近城口拈〕

번역

외진 지역의 외로운 성 밖에는 여러 산이 또한 장대하구나 어린아이도 힘껏 싸우고 잡으니 참된 신령이 주관하여 넓히는구나 성문을 지키는 것은 하늘이 한계로 삼았으니 비웃음을 귀신이 감히 비웃으랴 전략을 짜서 능히 승리를 제압하니 도리어 재주를 온전히 믿음에서 나오네 원주(原注)에 “성문 근처의 입구”라고 하였다.

13. 次老杜秋興〔原注:八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1C, ITKC_MO_0130A_A026_011D ...

원문

日夕金風搖桂林。岸容山意忽蕭森。江涵陣雁參差影。渚落浮雲點綴陰。時序百年渾謾興。世間機事已無心。悠悠不趁沙鷗約。怕聽遙村獨暮砧。

번역

아침저녁으로 가을바람이 계림에 불어오니 산의 모습 언덕 모양이 문득 쓸쓸해지네 강에는 떼 지은 기러기 그림자 어른거리고 물가엔 뜬 구름이 점점이 그늘 드리우네 백 년 세월의 계절 변화는 모두 부질없는 흥취요 세간의 일들은 이미 관심이 없구나 유유히 갈매기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 마을에 저녁 다듬이 소리 들릴까 두렵구나

원문

秋來謾興正橫斜。鏡裏頻驚髮已華。度怯剩嫌嬰世網。尋眞直欲上仙槎。幽情酷似霜邊菊。浪恨渾如月下笳。何處獨無搖落節。會從金母折桃花。

번역

가을 들어 흥취는 정녕 엇갈려 가는데 거울 속엔 백발이 되어 자주 놀라노니 세상 그물에 걸린 게 두려워 싫은데 진리를 찾아 곧바로 신선 배를 타고 싶네 그윽한 정은 서리 맞은 국화와 같고 부질없는 한은 달 아래 피리 소리와 같네 어디인들 홀로 낙엽 지는 계절이 없으랴 모름지기 금모의 복숭아꽃을 꺾어야 하리

원문

江樓爽氣護晴輝。半落汀洲半翠微。秋水有容龍偃臥。碧空無礙鳥高飛。浮生潦倒身多病。心事支離世所違。可愛沙鷗相識在。拂人如報蟹鼇肥。

번역

강루의 상쾌한 기운이 맑은 햇살을 감싸고 반쯤 물에 잠긴 모래톱 반쯤 푸른 산 가을 물결 용이 누울 만하고 푸른 하늘 새가 높이 날기 좋네 부생이라 실의에 빠져 몸엔 병이 많고 심사는 지루하여 세상과 어긋나네 사랑스럽다 백사장의 갈매기여 사람에게 다가와 게와 자라 살쪘다고 알려주네

원문

江寒蘆折雁催回。物外無爭釣有隈。煙渚宿盟慙海鳥。滄洲幽想托霞杯。投林暮雀時時噪。出岫輕雲故故來。射斗龍光空在袖。布帆早晩趁風開。

번역

강 차가워 갈대 꺾이고 기러기 돌아가는데 세상 밖에 다툼 없어 낚시터에 물이 고였네 안개 낀 물가에서 해조와 맹약한 게 부끄러워 창주에서 그윽한 생각으로 술잔을 의탁하네 숲에 들어간 저녁 참새는 때때로 지저귀고 산에서 나온 가벼운 구름은 자주 오네 북두성 향하는 용의 빛이 공연히 소매에 있으니 돛단배를 조만간 바람 따라 띄우리라

원문

九州何處是三山。萬古同忙蟻穴間。誰料壑舟窺有力。爭媒鬼谷作重關。忽驚蝶夢前身忘。虛絆名躔一世〔原注:缺〕。秦女采餘叢菊在。蓬壺終欲問仙班。

번역

구주 어디에 삼신산이 있나 만고토록 개미굴에서 바삐 살았네 누가 골짜기 배에 힘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투어 귀곡을 매개로 중관을 만들었네 갑자기 놀라 나비의 꿈에 전신을 잊으니 헛되이 명성 얽매여 한 세상 살았네 원주(原注)는 빠짐. 진나라 여인이 남은 국화 따니 봉래산에서 끝내 신선에게 물어보려 하네

원문

十年蹤跡九街頭。徒使潘郞鬢已秋。叢菊與人多苦意。征鴻叫月送羈愁。風塵吾道慙前輩。湖海初盟負白鷗。欲補聖明才固拙。將身忍向橘蘆洲。

번역

십 년 동안 도성 거리에 종적을 남기면서 부질없이 반랑처럼 귀밑머리만 세었네 국화는 사람과 함께 괴로운 뜻이 많고 기러기는 달에 울며 나그네 시름 보내네 풍진세상 나의 도가 선배에게 부끄럽고 호해의 처음 맹약은 백구를 저버렸네 성명을 보필하려 하나 재주가 졸렬하니 어찌 차마 몸을 이끌고 귤로주에 가랴

원문

誰遣小蟲催獻功。恐令貧婦泣機中。辛勤囱外窺床日。蕭摵簷前落木風。酬盡官租無尺帛。活來餘歲藉陳紅。死生萬事秋將暮。獨向空堂愧老翁。

번역

누가 작은 벌레 시켜 공을 바치게 했나 가난한 아낙이 베틀에서 울까 두려워라 창밖의 볕은 부지런히 침상에 비추고 처마 앞의 낙엽 바람은 쓸쓸하게 불어오네 관전(官租)을 다 갚아도 한 필의 비단도 없고 남은 생애를 지내자니 낡은 이불뿐이로세 죽고 삶 만사가 가을처럼 저물어가는데 홀로 빈당에서 노옹에게 부끄럽구나

원문

山下孤村一逕迤。趁風霜葉下荒陂。層陰迢遞來牛野。斜日扶疏倦鳥枝。人跡小橋衰草沒。玉簪遙嶂斷雲移。籬邊採菊誰相問。歲晏荊門橘柚垂。

번역

산 아래 외로운 마을 오솔길이 뻗어 있고 바람에 낙엽 지는 황량한 언덕으로 가네 층층 그늘 아득히 소가 우는 들판에서 저물녘 나뭇가지엔 새들이 쉬고 있구나 사람 자취 없는 작은 다리에 시든 풀만 무성하고 옥 같은 먼 산봉우리에 구름이 끊기어 옮겨가네 울타리 가 국화 딴 사람 누구에게 물을꼬 한 해 저무는 사립문에 귤과 유자 주렁주렁

14. 奉題閱武亭□御製軸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忘言醉飽均天裏。敬德惟關獻曝誠。〔原注:首句缺〕

번역

말 잊고 취하고 배불리 먹는 것 모두 하늘의 일이고 공경과 덕은 오직 성심을 바치는 데에 달려 있다네 원주(原註)에 “첫 구절이 빠졌다.”라고 하였다.

15. 無題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安危大臣在。何恨滯江湖。〔原注:首句缺〕

번역

나라의 안위가 대신에게 달렸으니 어찌 강호에 머무는 것을 한하랴 -원주(原註)에 “첫 구절이 빠졌다.”라고 하였다.-

16. 記夢〔原注:夢於高樓華筵作近律。未成末句而驚悟。仍記夢中之語足之。蓋其氣量甚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百尺高樓倚半天。三行粉黛列華筵。前江一帶圍平野。遠岫千岑露抹煙。時有嬌鶯穿翠柳。更〔原注:缺〕輕燕點朱絃。樓居非是幕中客。不用金屛在眼邊。〔原注:詩話叢林〕

번역

백 자 높은 누각이 반공에 기대어 있고 세 줄의 미인들이 화려한 자리 늘어섰네 앞 강은 한 띠로 평야를 에워쌌고 먼 산은 천 봉우리에 안개가 걷혔네 때때로 예쁜 꾀꼬리 푸른 버들 사이로 날아오고 다시〔原注: 缺〕가벼운 제비는 붉은 거문고 줄을 건드리네 누각에 있는 이들은 막부의 손님이 아니니 금병이 눈앞에 있을 필요 없겠지 -원주(原註)에 “《시화총림(詩話叢林)》”이라고 하였다.-

17. 申大諫〔原注:光漢〕挽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2C

원문

文章亦餘事。人物曾賢儔。世仰霑霖澤。天催記玉樓。駱峯春自媚。麟閣畫空留。不廢長江在。聲名共一流。

번역

문장 또한 일상에 여유가 있어 인물은 진작부터 어진 벗이었네 세상은 우러러 은택을 입었고 하늘은 서둘러 옥루를 기록했네 낙봉의 봄빛 절로 아름다웠는데 기린각의 초상만 공연히 남았구나 장강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 명성 한 줄기로 함께 흐르리

18. 題成聽松坡山酬唱帖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2D, ITKC_MO_0130A_A026_013A ...

원문

身可浴。髮可沐。惟此心鮮能濯。坡之翁爲是憂。遁于山得天遊。

번역

몸은 목욕할 수 있고 머리털도 씻을 수 있지만이 마음은 깨끗하게 씻기 어려워 파옹이 이 때문에 근심하였네 산에 들어가서 천유를 얻었으니

원문

坡山之下。可以休沐。古磵淸泠。我纓斯濯。飮之食之。無喜無憂。奧乎玆山。孰從我遊。〔原注:原韻〕

번역

파산 아래에서 쉴 수 있으니 옛 시냇물 맑고 차가워 나의 갓끈을 여기서 씻노라 먹고 마시며 기쁨도 근심도 없으니 깊숙한 이 산에 누가 나를 따르리 원운(原韻)

원문

〔原注:聽松成守琛〕

번역

원주(原注) : 청송 성수침(成守琛)의 말이다.

원문

誰讀盤銘。而浴而沐。坡山之翁。其心之濯。斯人不見。我懷其憂。解佩言歸。與子優遊。

번역

누가 반명(盤銘)을 읽고서 몸을 씻었는가 파산의 노인이여 그 마음이 깨끗하네이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내가 그 걱정을 품노라 패옥 풀고 돌아와 그대와 한가로이 지내리

원문

〔原注:靈川子申潛〕

번역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은 “사람의 마음은 마치 맑은 물과 같아서, 더러운 것이 들어가면 그 물이 흐려진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에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여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원문

坡山之水。宜浴宜沐。坡翁之心。如洗如濯。漁樵無伴。曷云其憂。溪雲山鹿。盡是同遊。

번역

파산의 물은 목욕하기에 마땅하고 파옹의 마음은 씻어 내는 것 같네 고기 잡고 나무하는 벗이 없으니 무엇을 근심하랴 시내 구름과 산속 사슴이 모두 함께 노니네

원문

〔原注:企村宋純〕

번역

기촌(企村) 송순(宋純)은,

원문

髮本有垢。貴在日沐。巾本有纓。貴在日濯。日日新之。我亦何憂。聽松有人。請與子共遊。

번역

머리털은 본래 더러움이 있으니 날마다 씻는 것이 귀중하고 두건은 본래 끈이 있으니 날마다 빨아 주는 것이 귀중하네 날마다 새로워지는데 내가 또한 무엇을 근심하랴 소나무를 듣는 사람이 있어 그대와 함께 노닐기를 청하네

원문

〔原注:武陵白髮周世鵬〕

번역

원주(原注) : 무릉의 백발은 주세붕이다.

원문

馬之島海。老人之角。坡之江水。織兒之濯。之子之遠。而道之憂。曷之覯乎。與之夢遊。

번역

말은 바다의 섬이요 노인은 뿔이로다 파는 강물이고 직녀는 빨래하는 아이로세 그대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찌하면 그대를 만나 볼꼬 꿈속에서나마 함께 노닐고 싶네

원문

〔原注:人聲散押非古也。叨竊改焉。第恨公紙太狹。儉於一寸。此是方寸相輸之意耶。居接馬島□缺。〕

번역

원주(原注) : 사람의 소리가 흩어지고 압박하는 것은 옛날 방식이 아니다. 외람되이 고쳐 보았다. 다만 공지(公紙)가 너무 협소하여 한 치도 아끼는 것이 이 방촌(方寸)을 서로 주고받는 뜻인가 하는 점이 유감이다. 거접마도(居接馬島)□결.-원문 빠짐-

원문

〔原注:南冥曺植〕

번역

원주(原注)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이다.

원문

髮之求解。無漆以沐。山之郊國。乃成濯濯。眷彼碩人。離索是憂。結蘭延佇。思與同遊。

번역

머리털을 씻으려 해도 칠이 없어 씻지 못하더니 산골에서 도성으로 나와서 비로소 깨끗하게 씻었네 저 큰 사람을 생각하니 외로운 생활이 근심이라네 난초를 묶고 기다리며 함께 노닐기를 생각하네

원문

〔原注:乙卯仲春○花朝退溪李滉〕

번역

원주(原注) : 을묘년 3월 화조일(花朝日)에 퇴계 이황이 지었다.

원문

坡山之松。色如膏沐。龍門之水。可飮可濯。子有其樂。我無其憂。東西雖隔。願同斯遊。

번역

파산의 소나무는 기름에 씻은 듯한 빛깔이요 용문의 물은 마실 만하고 씻을 만하네 그대는 그 즐거움이 있으나 나는 그런 근심 없으니 동서로 비록 떨어져 있지만 함께 노닐기를 원하노라

원문

〔原注:葆眞菴趙昱〕

번역

-원주(原註)에 “보진암(葆眞菴) 조욱(趙昱).”이라 하였다.-

원문

逃名罣名。惡濕強沐。所恃者心。或時不濯。遙望坡山。實貽我憂。何時掛冠。雲壑從遊。

번역

이름을 피함과 이름에 걸림은 습기를 싫어하고 억지로 목욕하는 것과 같으니, 믿는 것은 마음인데 때때로 씻지 못한다네. 멀리 파산을 바라보니 실로 나에게 근심을 끼치는데, 어느 때나 관을 벗고 구름 낀 골짜기에서 노닐까

원문

〔原注:東洲笑仙成悌元〕

번역

원주(原注)에 “동주(東洲)는 선성제(仙成悌)의 이름이다.” 하였다.

원문

世皆垢汚。誰浴且沐。乃如之人。江漢以濯。道勝以肥。樂以忘憂。夢成于思。鄒魯其遊。

번역

세상에 모두 더러운 것이 있으니 누가 씻고 목욕할까 이런 사람과 같으니 강한으로 씻었네 도승은 살찌고 즐거움은 근심을 잊는 것 꿈은 우사에서 이루어지나니 추로에 노닐리라

원문

〔原注:大谷成運〕

번역

원주(原注) : 대곡(大谷) 성운(成運)

원문

坡江之流。而可沐斯。坡江之水。而可濯斯。翛然獨樂。與世同憂。卒歲逍遙。優哉遊哉。

번역

파강의 물결이여 여기서 목욕할 수 있네 파강의 물이여 여기서 씻을 수 있네 홀로 즐거워하며 세상과 함께 근심하네 한 해를 소요하며 유유자적 노니네

원문

〔原注:嘉靖戊午五月上旬後日。○河西金麟厚。〕

번역

원주(原注) : 가정 무오년 5월 상순 이후의 날이다.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지었다.

원문

髮本無垢。何勞乎沐。巾本無纓。何事於濯。有終身樂。無一朝憂。若比於古。其逍遙遊。

번역

머리털은 본래 더러움이 없으니 어찌 씻는 데 수고를 하겠나 두건은 본래 끈이 없으니 무슨 일로 빨 것인가 평생토록 즐거움이 있어 하루아침의 근심이 없으니 만약 옛날에 비한다면 그 얼마나 소요유였을까

원문

〔原注:石川林億齡〕

번역

원주(原注)에 석천 임억령(石川林億齡)이라 하였다.

원문

坡山之水。可以澡沐。余纓之塵。願言斯濯。道里阻矣。俾我懷憂。歲云暮矣。行與子歸遊。

번역

파산의 물은 목욕할 만하거니와 나의 갓끈 먼지는 씻고 싶구나 도리는 멀어 내게 근심을 주는데 한 해는 저물어 가네 그대와 함께 돌아가서 노닐리라

원문

〔原注:知足菴吳謙〕

번역

지족암(知足菴) 오겸(吳謙)은,

원문

昔也拜床。旣熏以沐。今焉承敎。如熱斯濯。人皆汲汲。公獨無憂。曷其能爾。心有天遊。

번역

옛날에 상을 뵈었을 때 이미 향 피우고 목욕하였는데 지금 가르침 받으니 더운 물로 씻는 듯하네 사람들 모두 급급한데 공만 홀로 근심이 없으니 어찌 그리 능한가 마음에 천유의 도가 있구나

원문

〔原注:礪城尉宋寅〕

번역

○ 여성(礪城)의 위 송인(宋寅)이다.

원문

畸人長往。笑傲休沐。有山可樵。有水可濯。味此顏瓢。任他人憂。浩浩方寸。的的天遊。

번역

기인이 멀리 떠나니 웃고 오만하게 쉬노라 나무할 산이 있고 목욕할 물이 있네 이 안표의 맛을 보며 남의 근심은 내버려두네 넓고 넓은 마음으로 천유를 분명히 하노라

원문

〔原注:石峯韓濩〕

번역

원주(原注)는 석봉(石峯) 한획(韓濩)이다.

19. 請嚴正宮闈箚〔原注:中宗二十六年辛卯三月丙戌朔丁未。□司諫院獻納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6B, ITKC_MO_0130A_A026_016C ...

원문

內治不嚴。無以正外。家而不刑。無以化遠。是故。古先哲王。未有不自身而家。自家而國者也。□殿下臨御以來。專精□聖學。其於修齊治平之道。存省深矣。頃年以來。持循寢弛。宴安漸壞。內寵日盛。婦言日廣。宮闈以之不肅。內政以之不嚴。甚至疾病有家。或有養疾於閭閻。產室有所。或有就館於私邸。婦人之義。遠父母兄弟。而後宮出覲。經宿曠日。會宗族而宴飮。主婚有人。官辦嘉禮。親母在外。誇美爲事。招外庭而享之。巨奸宿猾。攀援而有所囑。富商大賈。寅緣而有所托。外言由此而入于內。內言由此而出於外。溷亂宮政。螮蝀□聖治。無所不至。□祖宗以來。所以嚴宮禁者非不密矣。虎旅警夜。閹人守閽。典言掌傳。女史有記。所以嚴內外正宮闈也。桂掖椒房之邃。雖侍婢下賤。猶不得出入。恐紊亂家政。況嬪御媵姬之近。而留連外間。混雜閭閻哉。壞古來宮政。亂□祖宗家法。莫此爲甚。今者洪遇龍之事。瀆褻奸慝。至於此極。原情案罪。悖逆莫甚。是雖出於遇龍之奸慝。亦有宮人在外之過也。向使禁掖嚴密。內外截然。則邪僻之心。無自而生矣。此言一出。孰不痛憤。遠近聞之。以□殿下內政爲何如。而後世觀之。以當今宮闈爲何如耶。□太宗大王。書大學衍義中宮闈之可法可戒者以敎宮人。□成宗大王。採歷代聖后賢姬以圖于屛者。無非所以正宮闈之道。謹內外之事也。伏願□殿下深體家法。以謹宮闈之治。克去牽私。以嚴內外之別。自今後。後宮嬪御以至侍婢下賤。勿許出私第。而所謂問安之婢。亦計親疏。勿令宂入闕內。以絶外褻。以臻修齊之治。不勝幸甚。

번역

내치(內治)가 엄하지 않으면 외치를 바르게 할 수 없고,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면 멀리까지 교화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옛날 선철왕(先哲王) 중에 자신을 다스려 집안을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려 나라를 다스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오로지 성학(聖學)에 정진하여 수신치국평천하의 도리에 깊이 보존하고 살피셨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예전의 자세를 고수하는 것이 해이해지고 편안함에 젖어 점차 무너져 갔다. 내궁(內宮)의 총애가 날로 성대하여 부인들의 말이 날로 많아지니, 궁궐은 이 때문에 엄숙하지 못하고 내정(內政)은 이 때문에 엄격하지 못하다. 심지어는 질병이 있는 집안에 대해서도 혹 여염에서 병을 요양하게 하고, 산실(産室)이 있는 경우에도 혹 사저(私邸)로 가서 머물게 하였다. 부인의 의리는 부모와 형제를 멀리한 뒤에야 후궁(後宮)으로 나가서 뵙는 것인데, 경숙(經宿)하고 날짜를 비우며 종족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혼인을 주관하는 사람이 있어 관청에서 가례(嘉禮)를 마련해 주고 친모가 밖에 있으면 과시하고 자랑하기를 일삼으며 외정(外庭)에 초청하여 즐기게 하니, 큰 간사한 자와 교활한 자들이 깃들어 산다. 붙잡고 의지할 곳이 있어서 부상(富商)과 대가(大賈)를 끌어들였고, 인연을 맺은 것이 있어서 외부의 말이 이로 인해 안으로 들어오고 내부의 말이 이로 인해 외부로 나갔다. 궁정(宮政)이 혼란해져서 성상의 다스림에 해로운 일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종조 이래로 궁궐을 엄하게 단속한 것이 비밀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호려(虎旅)가 밤을 경계하고 환관이 문을 지키며, 전언(典言)이 주관하여 전하고 여사(女史)가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내외의 정궁(正宮)과 궁궐을 엄하게 단속한 것이다. 계액(桂掖)과 초방(椒房)이 깊고 멀어서 비록 시비(侍婢)와 하천(下賤)이라도 출입하지 못하여 가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하였는데, 더구나 빈어(嬪御)의 수종하는 여인이 외간에 머물러 여염과 뒤섞이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고래부터 궁정의 정사를 무너뜨리고 조종조 가법을 어지럽힌 것으로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 지금 홍우룡(洪遇龍)의 일은 외람되고 간악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원정(原情)과 죄안(罪案)에서 패역함이 더할 나위 없었으니, 이는 비록 우룡의 간악함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궁인이 밖으로 나가는 잘못이 있습니다. 만약 금액(禁掖)을 엄밀하게 하고 안팎을 확실히 구분한다면 사특한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이 한 번 나오게 되면 누가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원근에서 듣고서 □전하의 내정(內政)이 어떠하다고 여기며, 후세에 이르러 당금 궁위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태종대왕께서 《대학연의》 중궁위(中宮闈)의 본받을 만한 것과 경계할 만한 것을 써서 궁인을 가르치신 것과 □성종대왕께서 역대의 성후(聖后)와 현희(賢姬)를 채록하여 병풍에 그려 넣은 것은 모두 궁위를 바로잡는 도리이고 안팎의 일을 삼가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가법(家法)을 깊이 체득하시어 궁위의 다스림을 삼가고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리는 것을 제거하여 안팎의 구분을 엄격히 하소서. 지금 이후로 후궁과 빈어(嬪御)에서부터 시비(侍婢)와 하천(下賤)에 이르기까지 사제(私第)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고, 이른바 문안하는 비녀[問安之婢] 또한 친소(親疏)를 헤아려 함부로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외척의 참람함을 끊고 수신제가치(修身齊家致治)의 정사에 이르게 한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원문

傳曰。今觀箚子。嚴肅宮闈事。予當留念焉。遇龍之事。至爲駭愕。時方推之。自有其律矣。

번역

전교하기를, 지금 차자를 보니 궁중의 일을 엄숙히 하라고 하였다.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우룡(遇龍)의 일은 매우 놀랍다. 때가 바야흐로 추고할 때이니 자연 그에 따른 법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20. 陳天災時變。勉□上懲愆圖治箚。〔原注:中宗二十八年癸巳六月丁亥。□司諫院大司諫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7A, ITKC_MO_0130A_A026_017B ...

원문

人主一念。遇災而不懼。事過而忽焉。故災咎之作。變亂之來。無時已也。悔往戒來。處平泰如危亡。乃責躬答天之實。數年來。天之象告極矣。彗星之應。前史昭載。仁愛之警。豈無所自。曩在灼鼠之變。□殿下旣自知悔。而不常惕懼。馴致近日之禍。深宮燕閑。不知□聖念今復何如。昔者聖王。四方有罪。猶曰在予。今凶逆之起。常在至親。〔原注:時有灼鼠之變。賜死朴嬪及其子福城君嵋。廢兩翁主爲庶人。〕省愆悔尤。寧或少緩。人情寵過則驕。驕過則僭。非獨婦寺爲然。恩寵之偏。非所以厚下。自古驕僭之極。鮮有終保者。宮闈不肅。戚里之婢。出入無禁。邪徑之所由開也。袵席浸潤。亦安保其終必無也。王者所恃而爲治者士氣。而偸靡成習。以畏怯爲得計。當國家大變。欲觀朝廷之議。天顏咫尺。循例苟對。以孤平日之殊遇。間選新進。舊規尙存。釋褐未久。圭角已磨。敗院僚之議。循宰相之指揮。使初不與選者。旋獲參其列。朝廷間氣習之鄙。一至於此。他日誰復爲□國家當大事者。生民休戚。係於守令。軍卒撫禦。專在邊將。割剝自肥。溪壑不盈。甚者犯贓。亡命賊倭。侵邊奪貨。湖嶺二南。□國家富庫。而民迫凶歲。枕藉溝壑。麥秋又失。不耘何穫。天災時變。莫此時爲甚。危亡之禍。恐起於朝夕。雖有智者。將何策以救其後。敬天勤民。不可以文。九重夕惕。解謝玄穹。則非外人所敢知。若賑恤遣官。雖出於懇惻。及其竣事而歸。不□召問其流離困頓之狀。哀矜惠鮮之誠。亦不如遣救之初也。伏願□殿下懲旣往之愆。加日新之工。振士氣。革偸靡之習。斥貪黷。除民卒之病。以弛天災。以壽國脈。

번역

임금의 한 생각이 재앙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이 지나가면 소홀해지기 때문에 재앙이 일어나고 변란이 닥쳐서야 그치지 않는 것이다. 지난 일을 후회하고 앞으로 올 일을 경계하여 평안할 때에도 위태로운 것처럼 처신해야만 자신을 책망하고 하늘에 보답하는 실질적인 방법이 된다. 수년 이래로 하늘의 조짐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혜성이 나타난 것은 전사(前史)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어진 사랑에 대한 경계가 어찌 근본이 없겠는가. 지난번 작서(灼鼠)의 변고가 있었을 때 □전하께서는 이미 스스로 후회할 줄 알았으나 항상 두려워하지 않아서 오늘날의 화를 자초하였다. 깊은 궁궐에서 한가로이 지내시니, 성상의 생각이 지금 다시 어떠하신지 모르겠다. 옛날에 성왕(聖王)은 사방에 죄가 있으면 오히려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흉역(凶逆)이 일어나면 항상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서 발생한다. -원주(原註)에 “당시에 작서의 변고가 있어서 박빈(朴嬪)과 그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를 사사하고 두 옹주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하였다.--자신의 허물을 살피고 후회하는 데 어찌 조금이라도 느슨할 수 있겠는가. 인정은 총애가 지나치면 교만해지는 법이다. 교만함이 지나치면 참람한 것이니, 부인과 시녀들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은총이 치우치는 것은 아랫사람을 후하게 대하는 방법이 아니니, 예로부터 교만하고 참람함이 극에 달하여 끝까지 보전된 자가 드물었다. 궁중의 기강이 엄하지 않아 척리의 비녀들이 출입에 제한이 없으니, 사특한 길이 열리는 곳이다. 부인과 시녀들의 자리에서 은총을 입는 것이 또한 어찌 반드시 그치지 않을 것인가. 왕자가 믿고서 다스리는 것은 사기(士氣)인데, 도둑질하는 습관이 생겨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을 꾀로 삼는다. 국가에 큰 변고가 있을 때 조정의 의논을 보고자 하였는데, 임금의 얼굴이 지척에 있어 관례대로 구차하게 대답하였으니 평소의 특별한 대우를 저버린 것이다. 신진(新進)을 간간이 뽑는 옛 규례가 남아 있어서 벼슬한 지 오래되지 않아 이미 높은 자리에 올랐다. 패원료(敗院僚)의 의논은 재상의 지휘에 따라 처음에는 선발하지 않았던 자를 곧바로 그 반열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조정의 기풍이 이처럼 비루해졌다. 훗날 누가 다시 국가의 큰일을 담당하겠는가?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군졸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것은 전적으로 변장(邊將)에게 달렸습니다. 백성을 착취하여 스스로 살찌니 계곡이 가득 차고 심지어 장오죄를 범하니 도망친 왜적이 변방을 침범하고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호남과 영남 두 지방은 나라의 부유한 창고인데 백성들은 흉년을 당해 구덩이에 누워 있고 보리 수확철에도 김매지 않았으니 어찌 거둘 것이 있겠습니까. 천재와 시변이 이보다 심한 때가 없으니 위태로운 화가 조만간에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다 해도 장차 무슨 계책으로 그 후를 구제하겠습니까.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는 것은 문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대궐에서 저녁까지 근심하여 하늘에 사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감히 알 수 없습니다. 진휼사(賑恤使)를 보내는 것이 비록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으나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떠돌아다니며 고통받는 백성들의 상황을 물어보지 않는다면,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푸는 정성이 또한 처음 구제하러 보낼 때만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하소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더하여 사기를 진작하고, 도둑질하는 습속을 개혁하여 탐욕스러운 짓을 배척하며, 백성의 병통을 제거하여 천재(天災)를 완화하고 나라의 맥락을 장수하게 하소서.

원문

〔原注:按史註。二月二十五日。東宮誕日也。是日。東宮亥地。懸灼鼠。以水桶木片。作榜書掛之。時謂東宮咀呪也。宮中捕可疑人鞫之。指朴嬪所爲。賜死朴嬪及其子福城君嵋。其侍女及唐城尉洪礪奴僕。多被誣服。賜之自盡。光川尉金仁慶竄配。沈貞以締結朴嬪正刑。□東宮誠孝出人。而文定王后少無保護之心。灼鼠之變。諉之於朴嬪。而母子及壻俱死。人皆惜之。鄭領相光弼。謂涉疑獄。且王室至親。不可拷掠。欲緩之而金安老主張。鍛鍊成獄。擠陷其平日有隙者。痛哉。〕

번역

2월 25일 동궁의 탄신이다. 이날 동궁이 해지(亥地)에 걸린 쥐를 발견하고는 물통과 나무 조각으로 방서(榜書)를 만들어 걸었는데, 이때 동궁이 주술을 부렸다고 하였다. 궁중에서 의심스러운 사람을 잡아다 국문하였는데 박빈의 소행을 지적하여 박빈과 그 아들 복성군 미(嵋)에게 사사(賜死)하고, 시녀와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의 노복이 많이 무고하게 죄를 입어 자결하도록 하였으며,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찬배(竄配)하였다. 심정(沈貞)은 박빈과 결탁한 것으로 정형을 받았고, 동궁의 성효는 남보다 뛰어났으나 문정왕후가 보호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쥐를 걸었던 변고를 박빈에게 뒤집어씌워 모자(母子)와 사위가 모두 죽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정승 광필(光弼)은 의심스러운 옥사이고 또 왕실의 지친이니 고문할 수 없다고 하여 완화하려고 하였으나, 김안로(金安老)가 주장하여 형구를 가해 옥사를 이루고 평소에 빈틈이 있던 자들을 몰아넣었으니 통탄스럽다.

원문

答曰。今觀上箚。所言當矣。天災時變。人心風俗之惡。莫此時甚。予常懷念慮。事雖已往。不知更有何事。心常憂之。如戚里之婢。出入無禁云。此則未知必爲問安婢子也。然出入已有規限。何至猥煩乎。若有汎濫則予當察之。且三館分屬。甚不如古。承文院偏多。成均館二。校書館則一云。若已選。雖提調之言。不可及也。法司當察之。守令,僉使,萬戶之無狀。每論於經筵。殿最之嚴。漸不如古。是人無所懲。賑恤官時未畢來。來當引見。可問民瘼。

번역

답하기를, “지금 주상의 차자를 보니 말한 것이 옳다. 천재와 시변(時變)으로 인심과 풍속의 악함이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 내가 항상 염려하고 생각하는 바이다. 지난 일이지만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늘 근심한다. 척리(戚里)의 비(婢)가 출입에 금제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반드시 문안비자(問安婢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출입에는 이미 규정이 있으니 어찌 외람되게 번거롭기까지 하겠는가. 만약 범람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살필 것이다. 또 삼관(三館)의 분속이 옛날만 못하다. 승문원(承文院)은 편중되어 많고 성균관(成均館)은 두 곳이며 교서관(校書館)은 한 곳이라고 한다. 이미 선발되었다면 비록 제조의 말이라도 어쩔 수 없으니, 법사(法司)가 마땅히 살필 것이다. 수령과 첨사(僉使), 만호(萬戶)의 무상함에 대해서는 매번 경연에서 논하였다. 전최(殿最)의 엄격함이 점차 옛날만 못하니 이는 사람들이 징계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진휼관(賑恤官)이 아직 다 오지 않았으니, 오면 인견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보겠다.” 하였다.

21. 請重□恩命明國是箚〔原注:中宗二十八年癸巳十月甲戌。副提學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8A, ITKC_MO_0130A_A026_018B ...

원문

明者。因微而知著。智者。徵影而察形。知著故因微而豫防之。察形故見影而能絶之。邇者天地失常。災異幷見。季秋之月。震電不寧。天之警告。豈無所因。朝廷之間。變故不一。國是不定。今雖粗安。而人心乖舛。幸災樂禍。窺覦以逞者。難以一二計也。公論不立。士氣頹懦。共事之人。意向阻異。一席之間。言議矛盾。禍患之機。漸就於明顯之地。自權奸生亂於朝廷。爲物論所不容者。非但不可見擬於顯秩。如提調兼帶之職。亦不授之者。爲國家大計者。必有深見。銓曹爲市恩之地而薦擬絡繹。士論尙軟熟之態而恬不爲怪。至於諂事權奸。情迹著見。獲罪於公論。或竄或罷者。決不可復齒朝列。以混已定之國是。有識之人。欲售私恩。以爲某也不可不放。某也不可不敍。此論一出。狐鼠彈冠。爲己謀則得矣。於國事何。況恩命。人主之大柄。豈臣下所可干預哉。數年來。得罪流竄者。雖罪非一科。不可因其自訴。容易移近。以開群邪覬還之路。當初權奸欲生事朝廷。則必先營救微者。以試□殿下之聽。而未久蒙恩。豈無幸其計之中。而窺視朝廷之淺深者哉。罪有輕重。伸理之恩。宜出於上。而呈訴則得伸。豈王者刑政之當哉。況名爲量移。偃臥桑梓。有司之滅公循私。亦可見矣。今之闕政。雖難遍擧。災變疊出。國論喜乖。豈不爲明智者之所深憂乎。燭微防患。寔在默運中也。

번역

현명한 사람은 미세한 것을 통해 드러난 것을 알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림자를 통해 형체를 살피니, 드러난 것을 알기에 미세한 것을 통해 미리 방비하고, 형체를 살피기에 그림자를 보고 능히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근래에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고 재이(災異)가 함께 나타나서 늦가을 달에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였으니, 하늘의 경고가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조정 사이에 변고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비록 대충 안정을 찾았으나 인심이 어그러져서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고 화를 즐기며 기회를 엿보아 욕심을 부리는 자들을 하나둘로 헤아리기 어렵다. 공론(公論)이 서지 않고 사기(士氣)가 무너져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뜻이 서로 어긋나 한자리에서 언의(言議)가 모순되니, 화란의 기미가 점점 분명한 지경에 이르렀다. 권간(權奸)이 조정에 난을 일으켜 물론(物論)에 용납되지 않는 자는 현직(顯職)에 의망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제조나 겸대하는 직책과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제수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큰 계책을 위하여 반드시 깊은 견해가 있어서이다. 전조(銓曹)는 시사(市事)로 은혜를 베푸는 곳이기에 천거하여 의망하는 것이 끊이지 않고, 사론(士論)은 아직도 연루된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태도를 숭상하여 조용히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첨하고 권간(權奸)을 섬긴 정황이 드러나 공론에 죄를 얻어 찬배되거나 귀양 간 자는 결코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워 이미 정해진 국시(國是)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식견 있는 사람들이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고자 하여 ‘아무개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되고, 아무개도 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논하는 것이 한번 나오면 간사한 무리들이 관을 쓴 채 자기의 이익만을 도모할 뿐이니, 나라의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더구나 은명(恩命)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어찌 신하가 간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겠는가. 몇 년 동안 죄를 얻어 유배된 자들은 비록 죄가 한 가지가 아니지만, 스스로 호소하는 것으로 인하여 쉽게 가까운 곳으로 옮겨서 무리 지어 사악한 짓을 도모하고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 돌아올 길을 열어서는 안 된다. 당초에 권간(權奸)이 일을 일으키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미천한 자를 구제하여 전하께서 들어주시는지 시험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그 계책 가운데 다행히도 조정의 깊이를 엿본 것이 없겠는가. 죄에는 경중이 있으니 이치를 펼치는 은혜는 위에서 나와야 하는데, 소장을 올리게 함으로써 이치를 펼 수 있게 하였으니 어찌 왕자의 형정(刑政)에 합당한 것이겠는가. 더구나 명색은 양이(量移)로 고향에 편안히 누워 있으면서 유사(有司)가 공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사사로이 처리하였으니, 또한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의 궐정(闕政)을 비록 두루 거론하기는 어렵지만 재변(災變)이 연이어 나오고 국론이 어긋나기만 좋아하니, 어찌 명철한 자가 깊이 근심하지 않겠는가. 미세한 것을 살피고 재변을 방지하는 것은 실로 묵묵히 운용하는 가운데에 있다.

원문

答曰。今觀上箚。所論至當。大抵人心無常。操則存。捨則亡。初雖公論奮發。久則怠之。日者權奸之事。上下莫不非之。日久則以爲尋常。可不念哉。災異亦可懼也。近者。因呈訴量移者。計其身則似非關。故移之。果若關他人窺覬之心。則不可量移也。

번역

답하기를, 지금 상이 올린 차자를 보니 논의한 것이 매우 마땅하다. 대체로 인심은 변덕이 있어서 지키면 보존되고 버리면 없어지니 처음에는 비록 공론(公論)을 분발하였으나 오래되면 게을러진다. 일전에 권간(權奸)의 일을 상하가 모두 그르다고 하였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면 예사로 여기게 되니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이(災異) 또한 두려워할 만하다. 근자에 소장을 올린 사람을 인하여 양이(量移)한 것은 자신의 몸에는 관계되지 않는 것 같아서 옮긴 것이지만, 과연 다른 사람이 엿볼 마음을 갖게 한다면 양이해서는 안 된다.

22. 請李芑等罪狀推鞫正刑箚〔原注:同癸巳十一月己亥朔丁未。□弘文館副提學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8D, ITKC_MO_0130A_A026_019A

원문

凡訊獄務得其實。用法必據其律。罪得其實。法當乎律。然後政刑得宜。而人心服矣。今者李芑以陰兇之首。冀濟不逞之計。指嗾狐鼠。搆亂朝廷。遊說卿相。誘脅國舅。首尾形迹。畢露於金泂所供。其兇謀祕計。悉出於芑。所當窮詰以其罪。而反諉病重。遽施輕典。是殿下忽大計而廢王法也。一國臣民。孰不痛憤。非古者刑人與衆共之之義也。雖罪輕。猶當據實以從其律。況罪關□宗社。形迹已露者。豈可謂之言語間事。而不究竟其實乎。以實則泂已盡輸。以法則芑在必推。當推者不窮而輸實者末減。凡在見聞。扼腕竊歎。近來奸黨之罪。取服案律。尙搖群邪之喙。況今獄未究竟。而徑定其罪乎。是壞先王之法。而藉群邪之口。兇逆之徒。又無所懲其惡也。伏願□殿下快從公論。以定王法。

번역

무릇 옥사를 신문하여 실상을 알아내면 법을 적용함에 반드시 그 형률에 근거해야 합니다. 죄가 실상과 일치하면 법은 마땅히 그 형률에 따라야 하니, 그런 뒤에야 정사와 형벌이 합당해지고 인심이 복종하게 됩니다. 지금 이기(李芑)는 음흉한 자들의 우두머리로 불순한 계책을 이루려고 여우와 쥐를 지휘하여 조정에 어지러움을 일으키고 경상(卿相)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국구(國舅)를 협박하였는데, 그 수미의 형적이 김형(金泂)이 공초한 내용에서 모두 드러났습니다. 그 흉악한 음모와 비밀스러운 계책이 모두 이기에게서 나왔으니 마땅히 그의 죄를 캐물어야 하는데 도리어 병이 중하다는 핑계로 갑자기 가벼운 형벌을 시행하셨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큰 계책을 소홀히 하고 왕법(王法)을 폐하신 것이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누군들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옛날에 사람을 처벌할 때 뭇사람과 함께한다는 의리가 아닙니다. 비록 죄가 가볍더라도 오히려 사실에 근거하여 그 형률을 따라야 합니다. 더구나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고 형적이 이미 드러난 경우를 어찌 언어상의 일이라고 하여 실상을 끝까지 캐내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로 보면 김형은 이미 모두 자백하였고 법으로 보면 이기는 반드시 추궁해야 합니다. 마땅히 추궁해야 할 죄가 다 밝혀지지 않았는데 사실을 자백한 자의 형벌이 줄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무릇 보고 들은 사람들은 손을 꽉 움켜쥐고 속으로 탄식합니다. 근래 간당(奸黨)의 죄를 법률에 따라 처벌해도 오히려 사특한 무리의 입을 놀리게 하는데, 더구나 지금 옥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지레 그 죄를 정하셨습니까. 이는 선왕의 법을 무너뜨리고 사특한 자들의 입을 빌려 흉역(兇逆)의 무리가 또 그 악행을 징계받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론에 따라 왕법을 정하소서.

원문

答曰。今觀上箚。所論似當。然此罪人等。予雖減。若不當則大臣必啓之。上無減命。而廷議皆曰。不可斷以一罪。公卿等豈偶然計而議之乎。□祖宗朝。士大夫稀置重刑。近來雖自致大罪。多置重刑。豈可謂美事乎。人君與廷臣。若惑於邪議。則雖日日置大罪。無益也。若不惑於邪議。雖減何妨。廷議已詳知之。不可改也。〔原注:臺諫亦極論。□不允。〕

번역

답하기를, “지금 상의 차자를 보니 논한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이 죄인들을 내가 감처한다 하더라도 만일 부당하면 대신이 반드시 아뢰어 주상께서 감명(減命)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조정의 의론은 모두 한 가지 죄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공경들이 어찌 우연히 계산하여 논의하였겠는가. □ 조종조에는 사대부에게 중형을 내리는 일이 드물었는데 근래에는 비록 큰 죄를 지었어도 대부분 중형에 처하니, 이것이 어찌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임금과 조정 신하가 만일 사특한 의론에 미혹되면 비록 날마다 큰 죄에 처하여도 무익할 것이고, 만일 사특한 의론에 미혹되지 않으면 비록 감처한다 한들 무슨 해가 되겠는가. 조정의 의론은 이미 자세히 알고 있으니 고칠 수 없다.”하였다.-원주(原注)에 “대간들도 극력 논핵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23. 論斥大臣沮抑言官箚〔原注:同癸巳十二月丙戌。□副提學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19B, ITKC_MO_0130A_A026_019C ...

원문

國家之治亂。由於言路之通塞。自古人君虛懷迎納於上。大臣平心開導於下。然後士氣振作而讜言日進。日者處謙〔原注:安相瑭之子也〕記內。付名之人。放釋之人。出於收議大臣之後。而侍從之進言。雖在其前。只以所見。陳其所懷而已。大臣乃曰。恩威不自□上出。發微臣之言。至以威福下移之說。以啓□聖上置疑之端。恩威之柄。固當在上。進言之路。豈限大小。斯言一出。上下疑惑。士氣沮喪。雖有讜論之士。必將杜口結舌。無有爲國敢言者。豈不寒心。大抵進言之士。雖延納而開導之。猶恐退縮不敢自盡。況顯斥而沮抑之哉。當初收議大臣之意。上合□聖衷。事遂施行。而反咎言者。未知其意之所在也。若其所言出於私。持言論者豈無所言。言苟有用。雖在芻蕘。尙或可採。況在侍從之列。有懷必達。乃其職分者耶。今反見擠於大臣。此定言路閉塞之機。國家亂亡之兆也。臣等職在論思。不敢默默。取進止。

번역

국가의 치란(治亂)은 언로(言路)가 통하고 막히는 데서 말미암습니다. 예로부터 인군이 위에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고 대신(大臣)이 아래에서 공평한 마음으로 인도한 뒤에야 사기(士氣)가 진작되어 바른 말이 날마다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처겸(處謙)- 원주(原注)에 “안상당(安相瑭)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문(記文)을 작성할 때, 부명(付名)한 사람과 석방한 사람을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뒤에 결정하였는데, 시종신(侍從臣)이 진언(進言)한 것이 비록 그 전에 있었지만 단지 자신이 본 바를 가지고 소회(所懷)를 진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대신이 “은위(恩威)는 위에서 나오지 않고 신의 말을 발미(發微)하여 위복(威福)을 아래로 옮긴다.”라는 말까지 하면서 성상께서 의심하는 단서를 열어 놓았습니다. 은위의 권한은 본래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진언하는 길에 어찌 대소(大小)를 한정하겠습니까. 이 말이 한번 나오자 상하가 의혹을 품고 사기가 꺾여서 비록 바른 말을 할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입을 다물고 결설(結舌)하여 나라를 위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진언하는 선비는 비록 받아들이고 인도하더라도 오히려 물러나 움츠려 감히 자신을 다 드러내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공개적으로 배척하고 억제하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당초에 대신에게 수의한 뜻은 성상의 마음과 부합하여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는데 도리어 진언한 사람을 허물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말이 사사로운 데서 나온 것이라면 언론을 지키는 자가 어찌 할 말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말이 참으로 쓸모가 있다면 비록 미천한 자라도 오히려 채택될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시종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반드시 진달해야 하는 직분(職分)이 있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도리어 대신에게 배척을 당하였으니, 이는 언로가 폐쇄되는 기미이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망하는 조짐입니다. 신들은 논사(論思)의 직책에 있으니 감히 침묵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진퇴를 정하소서.

원문

答曰今觀箚子。大抵人臣進言。可用則採之。不可用則置之。擇其可否而已。此言似當。然此事非然也。殿講之日。大臣等所啓之言。予詳聞之。不以下人有懷言之者爲非也。恩數宜在上。而因下之人。輕用恩數則如處謙記內付人賤人則不足數也。雖大罪之人。亦如是矣。欲杜其漸。故言之也。況大臣明言曰。疏通己卯人之事與此事。言之者有不公之意云。此必有所指。而持公論者亦不尋其言之有緖矣。大臣不分明言之。故下情疑惑。言雖少有不公之意。而爾等反非大臣之言。不可也。古云恩歸於己。怨歸於何處。恩命則當在上。而不可下移也。大臣之言。必爲此也。

번역

답하기를, “지금 차자를 보니 대저 신하가 진언(進言)한 것은 쓸 만하면 채택하고 쓸 만하지 않으면 버려 두고 가부를 선택할 뿐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마땅할 것 같으나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전강(殿講)하던 날 대신들이 아뢴 말을 내가 자세히 들었는데, 아랫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을 비난하지 않았다. 은혜는 위에서 내리는 것이 마땅한데 아래의 사람을 통해 가벼이 은혜를 베풀면 처겸(處謙)과 같이 기내(記內)에 붙인 사람이나 천인(賤人) 같은 자는 헤아릴 것도 없으니,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또한 이와 같다. 그 조짐을 막고자 해서 말한 것이다. 더구나 대신이 ‘소통시킨 기묘년의 일과 이 일에 대해 말하는 자가 공정하지 못한 뜻이 있다.’라고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가리키는 바가 있을 것이고 공론(公論)을 지키는 사람도 그 말이 단서가 있음을 찾지 못하였다. 대신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랫사람의 마음이 의혹스러워 비록 조금 공정하지 못한 뜻이 있었으나, 너희들이 도리어 대신의 말을 반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옛말에 ‘은혜는 자기에게 돌아가고 원망은 어디로 돌아가는가.’라고 하였으니, 은명(恩命)은 마땅히 위에서 내려야 하고 아래로 옮겨서는 안 된다. 대신의 말이 반드시 이럴 것이다.” 하였다.

24. 請重言官箚〔原注:同丁酉三月。□司諫院大司諫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0A, ITKC_MO_0130A_A026_020B

원문

伏以君臣一體。元首於耳目。必以誠契。無一毫相間。然後聰明必達。事無不濟矣。日下政院備忘記。答臣等辭避之□敎。直指憲府非一辭。至憲府累辭。輒以非指臺諫爲敎。可謂誠意相契乎。內非而善遇。匹夫交際。尙不可爲。況元首待耳目之道乎。□聖衷旣以憲府爲不是。當擧其實而明□敎。不當苟其辭而終諱。君臣之間。情貴相孚。任言責者不可強顏擧職。爲上者亦不可外待而寬假之也。□殿下之待臺官。有異前日之殊遇。臣等竊恐風憲之地自此而輕也。爲臺官者旣不退縮。是在其位。辭避不得則職當扈從。而乃於上馬宴之日。三嚴旣傳。緩不卽來。□大駕已發。不及者有之。臺官之體。已自失矣。其何以整頓紀綱。伏願□殿下虛心示誠。以重言地。

번역

삼가 생각건대 군신(君臣)은 일체로서 임금은 신하의 귀와 눈과 같으니 반드시 진실로 마음이 합치되어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야만 총명이 반드시 통하여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전에 승정원의 비망기에서 신들이 사피(辭避)한 것에 대해 답하신 하교에 곧바로 의금부라고 지적하셨고, 여러 번의 사피에 대해서도 번번이 대간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고 하교하셨으니 진실로 성의가 합치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에서 좋게 대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잘해 주는 것은 필부(匹夫)의 교제에서도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더구나 임금이 신하를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성상의 마음이 이미 의금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면 마땅히 그 사실을 들어 분명하게 하교해야지 구차하게 사피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끝내 숨기시면 안 됩니다. 군신 간에는 진실로 서로 믿는 것이 중요하니, 말을 맡은 자는 억지로 얼굴을 들고 직무를 행해서는 안 되고 임금도 외면하고 관대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대관(臺官)을 대우하는 것이 예전과 달라 신들은 풍헌(風憲)의 지위가 이로부터 경시될까 두렵습니다. 대관이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면서 사피를 할 수 없다면 마땅히 호종해야 하는데, 말에 오르는 날 세 번이나 전하셨음에도 느릿느릿 즉시 나오지 않아 대가가 이미 출발하여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니, 대관의 체모가 이미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 어찌 기강을 정돈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진실한 뜻을 보여 언론의 자리를 중하게 하소서.

원문

傳曰。前日備忘記所云非愚則豈不知之云者。非指臺官也。予若擧其失而明敎則何不遞之。予意不然。故不允矣。今者諫院以爲非則憲府被論矣。其盡遞之。

번역

전교하기를,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대관(臺官)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내가 만약 그 잘못을 들어 분명하게 가르쳤다면 어찌 체차하지 않았겠는가. 나의 뜻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사간원이 ‘잘못하면 의금부도 논핵을 받는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25. 辭左議政疏〔原注:明宗十二年丁巳十二月庚辰〕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0C, ITKC_MO_0130A_A026_020D

원문

臣本以愚鈍庸質。駑劣下材。荷蒙□中廟作養拔擢之恩。遭逢□聖代簡注眷遇之盛。名登仕籍。三十九秋。身到台躔。亦將十載。能薄而官大。祿厚而功微。識不足審察事機。才不能贊理政務。自來無分寸之補。畢竟有丘山之愆。耆艾之年。益以逾邁。致仕之限。迫在前頭。雖效枯蝸之尤。頓乏老馬之志。撫躬汗背。循省靦顏。遂致天怒降災。國切危亡之戒。鬼哭媒孼。身佩滿覆之憂。無狀而詎逭堯明。罔功則宜被舜黜。況臣夙嬰疾病。向來漸深。氣血俱虛。精神短少。聽重視暗。骨痛齒搖。或口眼喎斜。或頭目眩暈。四肢羸弱。身不勝衣。雖欲勉強策駑。筋力有所不逮。年多病深者。去未遂遠。力綿任重者。持久必顚。知進不退。違於天受。弛直怠事。傷於臣義。以臣不職。未敢妨賢。自劾乞恩。事非獲已。如蒙□聖明愍臣衰朽之疾。寬臣尸素之誅。特容先時致休。俾延殘年餘喘。別擇俊傑。替贊機衡則賢才亦展匪懈之初心。衰骨猶霑生死之大德。伏願□聖慈垂察。

번역

신은 본래 어리석고 용렬한 자질로 노둔하고 열등한 재주를 지녔는데, 중묘(中廟)께서 길러 주시고 발탁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고, 성대(聖代)를 만나 간택하여 우대해 주시는 성대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39년 동안 사적(仕籍)에 이름이 올라 대각(臺閣)의 자리에 있게 된 것도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직위는 낮지만 관직은 크고 녹봉은 후하지만 공은 미미합니다. 식견이 부족하여 일의 기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재주가 부족하여 정무를 보좌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결국에는 산처럼 큰 허물을 저질렀습니다.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더욱 심해져 치사(致仕)할 시기가 눈앞에 닥쳤으니, 비록 고와(枯蝸)의 우매함은 본받았으나 노마(老馬)의 뜻이 전혀 없습니다. 스스로 돌아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얼굴을 붉히면서 마침내 하늘의 진노로 재앙이 내려 나라가 위태롭다는 경계에 절박해지고 귀신이 울부짖으며 요망한 자를 매개하여 신에게는 온 집안이 뒤덮일 우환을 지게 하였습니다. 무능한 신이 어찌 요(堯) 임금의 밝음을 피하겠으며, 공로가 없으면 순(舜) 임금처럼 쫓겨나는 것이 마땅합니다. 더구나 신은 일찍부터 질병을 앓아 근래에는 점점 심해져 기혈(氣血)이 모두 허약하고 정신이 짧고 어두우며 골통이 아프고 치아가 흔들리며 간혹 입과 눈이 비뚤어지기도 하고 머리와 눈이 어지럽기도 하며 사지가 약하여 몸에 옷을 이기지도 못합니다. 비록 억지로 노둔한 말을 채찍질하려 해도 근력이 미치지 못하고, 나이가 많고 병이 깊은 자는 떠나도 멀리 가지 못하며 힘이 모자라 중임을 맡으면 오래 버티다 반드시 쓰러집니다. 진퇴를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것은 하늘의 은혜를 어기는 것이고,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은 신하의 의리에 손상되는 것입니다. 신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감히 현자(賢者)의 자리를 방해할 수 없으니, 스스로 탄핵하고 치사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 만약 성명(聖明)께서 노쇠한 신의 질병을 불쌍히 여기시고 죽음을 앞둔 신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특별히 시일보다 먼저 치사하게 하여 남은 목숨을 연장해 주시며, 별도로 준걸한 인재를 뽑아 대신 정무를 보좌하게 하신다면 현명한 인재는 또한 비루한 초심을 펼 수 있고 노쇠한 신도 오히려 생사를 아끼시는 큰 덕에 감격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살피소서.

원문

傳曰。不允。

번역

전교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26. 辭左議政箚〔原注:明宗十四年戊午正月壬子〕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1A

원문

夫盡忠竭力。糜粉乃已。雖職分之當然。振弱扶羸。不能不止。亦在義而可恥。日前。同僚因諫院之箚。進啓以弛災之方。及此正朔。百僚陳賀。而臣獨息偃一室。置職務於相忘。嘗聞宋臣朱熹有言曰。一日不得乎其君則不可一日立乎其位。臣常誦此明訓。慙懼益深。且臣之辭免職任。與古之乞骸骨者不同。旣蒙□聖恩。獲遞臣職。而猶在輦轂之下。得參朝賀之班。則□上之所以優厚微臣者終始自如。而臣之所以輸盡心力。圖報涓埃者。亦無異於在廊廟之日。請速遞臣職。

번역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몸이 가루가 되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직분이나, 약자를 진작시키고 병든 자를 부축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도 의리에 있어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전에 동료들이 사간원의 차자로 인하여 재이를 완화할 방도를 아뢰었는데, 이달 초하루에 백관이 하례를 올리는데도 신은 홀로 집에서 누워 직무를 잊고 있습니다. 일찍이 송(宋)나라 신하 주희(朱熹)가 “하루라도 임금을 섬기지 못하면 하루라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다.”라고 한 말을 들었는데, 신은 항상 이 명확한 가르침을 외우며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더욱 깊습니다. 그리고 신이 직임을 사양하는 것은 옛날에 목숨을 구걸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이미 성상의 은혜를 입어 신의 직임이 체차되었지만 여전히 도성 안에 있어서 조하(朝賀)하는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미천한 신에게 후대해 주시는 것이 시종 변함이 없으시니, 신이 심력을 다하여 티끌만큼이나 보답하려는 것은 낭묘(廊廟)에 있을 때와 다름없습니다. 속히 신의 직임을 체차해 주소서.

원문

傳曰。不允。

번역

전교하였다.-윤허하지 않았다.-

27. 辭領議政疏〔原注:明宗十四年己未三月丙子〕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1B, ITKC_MO_0130A_A026_021C

원문

明主之圖治。必極一時才德之選。作爲輔弼。事體相須。然後馨香上格而天應以祥。光輝旁達而民興於善。置相非人。治不獨定。功不徒成。古人論相業者有曰。上佐人主。理陰陽順四時。下遂萬物之宜。外鎭撫四夷。使卿大夫各得其職。□主上睿智聰明。霄旰緝煕。方將上格旁達。而臣居樞要。以乖氣蒙蔽沮遏之。致五災召五凶。使含生失遂。不宣揚□聖德神武。夷虜反側。百姓不親附。庶官不盡職。輔相無狀。於斯難掩矣。台鼎之位。人主所以待賢尊德之重器。而聖經中言位言職。必加天字者。蓋曰天物。人不得私之也。君而謬授非人則不天。臣而濫受非分則褻天。謬授濫受。皆非畏天之道。今有荊璞於此。必使玉人治之。將使斲輪。亦必假手於輪扁。在治國則乃使下材。臣愚亦任其責。其於致治。大有逕庭〔原注:缺。〕擧此一隅。亦可想時君不以天物私其臣也。臣往在己酉。始累□殿下知人之明。不自揣分。誤入台府。忘恥養病。敗政貽患。今已十有一年。身非鼠雀。心豈小安〔原注:缺。〕

번역

명주(明主)가 나라를 다스리려 할 때는 반드시 한 시대의 재덕(才德)을 갖춘 사람을 뽑아 보필하게 해야 합니다. 일의 체모상 서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뒤에야 향기가 위로 올라가 하늘이 상서로움을 응답하고 광휘가 널리 퍼져 백성들이 선(善)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정승으로 두면, 다스림이 안정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정승은 위로는 임금을 도와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의 마땅함을 이루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무하여 경대부(卿大夫)로 하여금 각기 그 직분을 잘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주상께서는 지혜롭고 총명하시어 밤낮으로 정사에 힘쓰시니 바야흐로 위로는 하늘에 감동시키고 밖으로는 백성들을 감화시켜 선을 행하게 하시려 합니다. 그런데 신이 중추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기운(氣運)을 가리고 막아 오재(五災)와 오흉(五凶)을 불러내어 생명을 가진 자로 하여금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성덕(聖德)과 신무(神武)를 선양하지 못하여 오랑캐가 반역하고 백성이 따르지 않으며 관원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보필하는 정승이 형편없다는 것을 이에서 가릴 수 없습니다. 태정(台鼎)의 자리는 임금이 현명한 사람을 존중하고 덕 있는 사람을 높이는 중대한 자리입니다. 《맹자》에 “위(位)와 직(職)은 반드시 ‘천(天)’ 자를 붙여 말한다.” 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준 물건이라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임금이 잘못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제수하면 천명을 어기는 것이고 신하가 분수에 넘치게 받는다면 천명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 제수하고 분수에 넘치게 받는 것은 모두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옥돌 속에 박힌 형박(荊璞)이 있으니 반드시 옥인(玉人)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해야 하고, 바퀴를 만들려고 할 때에도 반드시 윤편(輪扁)에게 손을 빌려야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하재(下材)로 하여금 책임을 맡기더라도 신의 어리석음이 치세에 크게 차이가 나게 될 것입니다.-원주(原注)-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임금이 하늘이 준 물건을 신하에게 사사롭게 하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지난 기유년에 비로소 전하의 지혜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에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잘못 대부(臺府)에 들어가서 부끄러움을 잊고 병만 키워 정사를 그르치고 환란을 끼쳤으니, 이제 11년이 지났습니다. 신의 몸이 참새도 아닌데 어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겠습니까.-원주(原注)-

원문

批曰。觀卿疏辭。予意缺然。卿情雖切。豈宜輕免。但當安心調理。

번역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 내용을 보건대 내 마음이 허전하다. 경의 심정이 비록 간절하지만 어찌 가벼이 면직할 수 있겠는가. 다만 안심하고 조리(調理)하라.” 하였다.

28. 辭領議政疏〔原注:明宗十五年庚申六月丁巳〕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1D

원문

自春徂夏。旱澇相仍。民將無食。厥咎在臣。小臣入台府十二年。未有毫末之微勞仰報□聖恩之萬一。只竊榮寵。日飽廩食。人雖不明言臣之無恥。己獨不怍於人而愧於天乎。自知頑冥若是其無類。故累陳愚衷。懇乞天□恩。正爲此耳。臣豈以去爲要君哉。誤國妨賢之罪。隨年與積。心之危悚。若阽懸崖。寢食不能自安。目今衰朽日甚。耳聾眼眩。膝節酸痛。坐則難立。雖欲力疾在職。氣力不遂。竊自憂㦖。伏乞□命遞臣職。〔原注:史註。性度淳厚。接物慈惠。心不忌克。務尙寬重。〕

번역

봄부터 여름까지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이 장차 먹을 것이 없게 되었으니, 그 허물이 신에게 있습니다. 소신이 대부(台府)에 들어온 지 12년 동안 성은의 만분의 일도 미천한 보답을 하지 못하고 단지 은총만 입어 날마다 녹봉을 받아먹고 있으니, 남들은 비록 신의 부끄러움을 분명히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하늘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이처럼 완악하여 무리한 줄을 알기에 여러 번 어리석은 충정을 진달하여 간절히 성상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오직 이 때문입니다. 신이 어찌 떠나는 것을 중시하여 임금을 버리려 하겠습니까. 나라를 그르치고 현자를 방해하는 죄가 해마다 쌓여 가니, 마음의 두려움이 마치 벼랑에 매달린 듯하여 잠을 자거나 먹는 것도 스스로 편안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노쇠함이 날로 심해져 귀가 어둡고 눈이 어지러우며 무릎이 아파서 앉았다가 일어서기도 어렵습니다. 비록 병을 무릅쓰고 직무에 있으려 하나 기력이 미치지 못하니, 스스로 걱정스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직임을 체차하라는 명을 내리소서.-원주(原註)에 “사적(史籍)의 주에 ‘성품이 순후하여 사람을 대할 때 자애롭고 마음은 억제하는 것을 꺼려 너그럽고 중한 것을 힘쓴다.’라고 하였다.”-

원문

批曰。〔原注:御筆〕予以涼德。叨承丕緖十六年來。水旱相繼。近日霖雨亦至朔餘。致此之災。實由於予。常切兢惶。若臨深淵。累觀辭職。予心豈安。惟卿以休休老德。忠厚大臣。爲相十餘年。輔寡躬多稗益。予依恒切。方深嘉悅。居位則朝廷堂堂。去位則衆望必缺。如卿重望。有幾人哉。今非大臣求退之時也。勿辭。〔原注:四啓。□不允。〕

번역

비답하기를, 어필(御筆)이다. 내가 미천한 덕으로 외람되이 16년 동안 왕위를 이어받은 뒤로 홍수와 가뭄이 서로 이어졌고 근래에는 장마가 한 달 넘게 계속되었다. 이러한 재앙을 초래한 것은 실로 나에게 원인이 있으므로 늘 심연(深淵)에 임한 듯 두렵고 황공하다. 여러 차례 사직하는 말을 보니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경은 온화하고 노숙한 덕과 충후한 대신의 자질을 지니고서 10여 년 동안 정승이 되어 과인의 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므로 내가 항상 매우 고마워하며 지금 깊이 기뻐하고 있다. 그대가 직위에 있으면 조정이 당당하다가도 그대가 직위를 떠나면 여러 사람의 기대가 반드시 부족해지니, 경과 같이 중망(重望)을 받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은 대신이 물러날 때가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원주에 4차례 아뢰었다고 되어 있다.-윤허하지 않는다.

29. 經筵請給災民公債啓〔原注:中宗二十四年己丑八月丁丑。朝講。□司憲府掌令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今年失農。近古所無。外方守令等。以去年稍稔。而不計今年之失稔。多給公債。以其失農報之則恐其不得捧納公債。解由難出。而率爲不給災傷。至爲非也。

번역

금년의 농사를 망친 것은 근고에 없던 일이다. 지방 수령들이 작년에 조금 풍작이었다는 이유로 금년의 흉년을 계산하지 않고 공채(公債)를 많이 지급하였는데, 만약 농사를 망쳤다고 보고한다면 공채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두려워서 해결책을 찾기 어려워 대부분 재해를 입은 곳에 지급하지 않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

30. 辭掌令啓〔原注:同己丑八月戊戌。梁淵同辭。〕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2B

원문

議國事論人物。臺諫之職也。臣等苟處言地。禍亂之囮。危疑之媒已成。而不敢論啓。致此議論。〔原注:弘文館駁遞臺諫〕臣等固當不可在職。請遞。

번역

국사를 논의하고 인물을 논평하는 것은 대간(臺諫)의 직분입니다. 신들이 진실로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화란을 꾀하는 도구와 의심을 일으키는 매개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감히 논핵하여 아뢰지 못해 이러한 논의를 초래하였으니, 신들은 진실로 직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원주(原注) : 홍문관이 대간을 체차할 것을 논박하였다.

원문

傳曰。弘文館若以臺諫爲非而上箚。則當分明指斥。何以如此泛言乎。其曰。自古云之言。乃是泛稱也。非斥今時之臺諫也。勿辭。

번역

전교하기를, “홍문관이 만약 대간(臺諫)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차자를 올렸다면 분명히 지적했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범범하게 말하였는가. 그가 ‘예로부터 운운한 말’이라고 한 것은 바로 범칭(泛稱)이지, 지금의 대간을 배척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사양하지 말라.

31. 經筵陳軍民兩政之弊啓〔原注:同己丑八月丁未。朝講。□掌令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2C

원문

今年旱乾。近歲所無。遠近失稔。民之窮困。實爲可慮。自□上軫念於此者。固非偶然。雖累下矜恤之旨。下不奉行。外方守令徵斂之弊。視古尤甚。憑公營私者多。民間疾苦。焉能盡形哉。其所恒公之物則雖凶歲。不可廢也。如不善守令。侵漁者非一途也。凡官中所用一分。則受之三分。尤甚者則六七分。或至於八九。侵奪無厭。民不得備納。流離相繼。雖値豐稔。禾粟未及登場而已輸諸官府。民之困於徵斂。不可勝言。而況如此凶歲。雖云當秋。已極困悴。將至流散。至於明春。其撫恤之事。將何以爲之乎。此在道司所當察而爲之也。然言念及此。實爲寒心。且軍卒。敎養於平日。用之於有事之秋。豈可侵勞而致怨哉。臣聞都摠府點考不分明。徵斂苛酷。故士卒若被捉。則咸願寧爲受杖於刑曹。而不欲納贖。軍卒之在闕下者尙如此。況於外方者。其弊可量哉。軍民之情可㦖。敢啓之。

번역

올해의 가뭄은 근래에 없던 일입니다. 원근이 모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궁핍함이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위에서 이 점을 염려하시는 것은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여러 차례 구휼하는 뜻을 내리셨으나 아래에서 받들어 행하지 않아 지방 수령들이 세금을 거두는 폐단이 예전보다 더욱 심해졌고,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사로이 취하는 자가 많아 민간의 고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항상 공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은 비록 흉년이라도 폐지해서는 안 되는데, 잘 지키지 못하는 수령들이 침탈하는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관청에서 쓰는 1푼을 3푼이나 받아들이고 심한 경우는 6, 7푼에 이르고 더러는 8, 9푼까지도 되어 가차 없이 빼앗아 백성들이 제대로 바치지 못하여 떠돌아다니는 자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풍년이 들더라도 곡식이 아직 수확되지 않았는데 관부(官府)로 실어 보내게 하여 백성들이 세금을 거두는 데 곤궁해하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는데, 더구나 이와 같은 흉년에 가을이 되기 전에 이미 지극히 피폐하여 장차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니, 내년 봄에 구휼하는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는 도사(道司)가 살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 실로 한심합니다. 군졸은 평소에 가르치고 길러 두었다가 일이 있을 때에 쓰는 것인데 어찌 침탈하여 고생시키고 원망을 사게 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도총부(都摠府)의 점고(點考)가 분명하지 않아 세금을 거두는 것이 가혹하고 혹독하기 때문에 군졸들이 만약 체포되면 모두 차라리 형조에서 장을 맞는 편이 낫지 속전을 바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궐 아래에 있는 군졸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지방의 경우는 그 폐단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군민의 정상이 가련하여 감히 아룁니다.

32. 臺諫論事後有異議。引責請遞啓。〔原注:中宗二十六年辛卯四月乙卯朔己巳。司憲府獻納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2D, ITKC_MO_0130A_A026_023A

원문

凡臺諫論事。當議論未定之時。各陳所懷。商確是非。或有異議。而至於議定之後。則僉議已合。不可退有後言。若已定公論。中生異議。反覆角立則當論大事。人懷忌避。相視其口。莫敢先發。一開其端。國家危亡。決在於此。徐祉論李沆之事。初與臣等議定時。別無異辭。自三公論兩司之後。遽生異議。談論之際。卒然言曰。李沆貪汚之名。豈其盡實。年少諸僚。隨所聞言之。賤李沆如狗彘。而我意則以爲多是不實之事云。今於避嫌時。曲爲之辭。巧飾不實之言。其反覆無狀極矣。如此大關之事。未卽論迫以辨是非。殊失臺諫之體。請遞臣等之職。

번역

대간이 일을 논할 때에는 의논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에 각자 소회를 진달하여 시비를 상의하고 확정해야 합니다. 혹 이견이 있더라도 이미 의논이 정해진 뒤에는 모두의 의견이 합치되었으니 물러나 뒷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공론이 이미 정해졌는데 중간에 이견이 생겨서 번복하여 대립한다면, 이는 큰일을 논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기피하고 서로 입을 다물고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할 것입니다. 한번 그 단서를 열어 놓으면 국가의 위망(危亡)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서지가 이항의 일을 논할 때에 처음 신들과 의논하여 정할 때는 별다른 다른 말이 없었는데, 삼공(三公)이 양사(兩司)를 논한 뒤부터 갑자기 이견을 내었습니다. 담론하는 사이에 갑자기 말하기를, “이항이 탐오(貪汚)했다는 명성이 어찌 모두 사실이겠는가. 나이 어린 여러 동료들은 들은 대로 말을 하니, 천박한 이항을 개돼지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사실과 다른 일이 많다고 여겨서 이제 피혐할 때에 그를 위해 곡진히 말해 주려고 사실이 아닌 말을 교묘하게 꾸며 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번복하는 모양새가 매우 형편없습니다. 이와 같이 큰일에 관계되는 일을 즉시 논박하여 시비를 변별하지 못하였으니 대간의 체모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신들의 직임을 체차하소서.

원문

傳曰。今觀徐祉之事。大抵臺諫議論之際。則各陳所懷而論可否也。及其已定之後則雖有大臣之議。何可中變乎。況徐祉之論。多有私論。又有難容之事。遞之可也。且諸臺諫雖未卽辨是非。徐祉若不先發其辭職之意。則不必先辨也。其勿辭。

번역

전교하기를, “지금 서지의 일을 살펴보건대 대개 대신(臺臣)과 간관(諫官)이 논의할 때에는 각자 소회를 진달하여 가부(可否)를 논하는 것이다. 이미 결정된 뒤에는 비록 대신의 의논이 있더라도 어찌 중간에 변통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서지의 논의는 사사로운 의견이 많고 또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으니 체차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여러 대신과 간관이 비록 즉시 시비를 분변하지 못했으나, 서지가 먼저 사직하겠다는 뜻을 내지 않았다면 굳이 먼저 분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3. 臺諫被三公議。辭職啓。〔原注:同辛卯五月甲午朔丁未。□獻納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3B, ITKC_MO_0130A_A026_023C

원문

三公因災變。歷數近來被罪之人。累次論啓曰。皆臣等所未知也。是以旱乾之災。皆歸咎於近來獄事之不實。臣等以臺諫。被三公之議。不可一日在職。且聞今曉。有人掛榜於鍾樓。歷詆臺諫。其所言皆國是所關。非無賴人所爲。然此匿名之類。不可取實。至以臺諫之名。掛榜於稠人大都之中。亦近古所無。尤不可在職。請遞臣等之職。

번역

삼공이 재변(災變)으로 인하여 근래에 죄를 받은 사람들을 두루 열거하고 누차 논핵하였는데, 모두 신들이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가뭄의 재해가 모두 근래 옥사(獄事)가 사실과 다르게 처리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신들은 대간으로서 삼공의 의논을 받아 한 날도 직임에 있을 수 없었다. 또 듣건대 오늘 새벽에 어떤 사람이 종루(鍾樓)에 방(榜)을 걸어 대간들을 두루 비방하였는데, 그 말은 모두 국시(國是)와 관계된 것이어서 무뢰배가 한 짓이 아니었으나, 이 익명의 부류는 사실로 취할 수 없다. 심지어 대간의 이름으로 인파가 많은 도성 가운데에 방을 걸었으니, 또한 옛날에도 없던 일이라 더욱 직임에 있을 수 없었다. 신들의 직임을 체차해 주소서.

원문

傳曰。旱災如此。上下各當憂勤惕慮。恐懼修省。豈可以災變。的指爲某事之應也。大臣以近來被罪之人。擧名啓之。予亦未知其意。鍾樓掛榜。此亦奸狡之徒所爲也。如此之事。尙忍爲之。何事不可忍爲乎。是無君上也。無朝廷也。大臣之言。適在射矢之際。故予以鎭定人心答之。況臺諫尤不可搖動。其勿辭。〔原注:三啓□不允〕

번역

전교하기를, “가뭄이 이와 같으니 상하가 각자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반성해야 한다. 어찌 재변(災變)을 가지고 굳게 지적하여 모(某)의 일에 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신이 근래 죄를 받은 사람들을 거론하여 아뢰었으나 나도 그 뜻을 모르겠다. 종루에 방을 걸어 놓은 것도 간교한 무리들이 한 짓이다. 이런 일을 오히려 차마 하였으니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이는 임금이 없으니 조정이 없는 것이다. 대신의 말이 마침 과녁을 맞힌 격이므로 내가 인심을 진정시키는 뜻으로 답하였다. 더구나 대간은 더욱 흔들려서는 안 되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원주에 ‘세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34. 因大臣論臺諫之失明辨啓〔原注:同辛卯五月戊申。兩司同啓。□獻納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3D, ITKC_MO_0130A_A026_024A ...

원문

三公因旱災。歷數近來被罪之人。皆歸於不實。累次啓之。臣等未知其意之所在也。沈貞以權奸之首。欲逞凶計。謀去異己。陰囑成世昌。斥去臺諫。一網打盡士林。專擅朝廷而世昌聽其密約。作爲爪牙。以肆姦謀。諸狀盡著供招。此非交結濁亂而何。豈止於一事之失而已乎。三公以爲世昌駁遞臺諫。而其初收議時。沈貞之議。與臣等之議果異。其後聞之。世昌果與沈貞相議而爲之云。雖只以此照律。其罪當抵極罪。而其得保首領。特出於一時之恩貸也。李沆貪黷無厭。賂賄盈門。其受朴雲犀段子。物主已服。沆亦自服。法官據其供辭。依律錄案。此非分明閱實之事乎。沆之貪濁之狀。前已盡啓。而今者歸配所時。行到龍仁縣。有人曾賂臧獲而求官不得者。責還侵辱。以一事觀之。則此非貪黷之人乎。其見錄於贓案。顧可惜乎。李瀣以臺諫。諂附權奸。欲陷士林。構捏無根之言。闇入疏章。以試陰計。金魯居侍從之列。以宗社關係之事。倡爲邪說。動搖國是。此等人所爲。所關至重。豈委之於一時言語之失。而不治其罪乎。洪遇龍在國喪卒哭前。瀆褻宮禁侍婢。情狀昭著。罪惡甚重。凡常等人強奸未成者。尙流千里。況宮禁侍婢乎。其以一罪擬之。豈爲過乎。洪遇世國恤卒哭內。率歸京妓於任所。恣肆無忌。黷敗綱常。錄案。法之常也。其奸宿雖久。名在樂籍。方立妓役。不可以妾論也。三公亦以衙內淹留不送爲非云。則初非家畜之妾。而卒哭內。淹留衙中。非敗常而何。李宗翼本非狂人。實巧詐毒害之人。構飾虛辭。謀害言官。奸詐情狀。昭昭見著。豈可謂之狂人乎。此是隨其情犯。依律罪之。國是已定。而反有異同之議。使奸凶之徒。交相喜慶。窺伺動搖。無所不至。臣等竊恐朝廷不靜。國是無時而定也。大臣臺諫。一心可否。以鎭定爲務。猶恐邪說或起。況援已定之事。開群疑之門乎。此正自□上明燭是非。益堅□聖志之時也。臣等累次煩瀆。至爲惶恐。不敢更啓。□傳曰。近來被罪人等事。予已知其是非昭昭判然也。安有搖動之理乎。奸凶之徒。不得逞憤。三處射矢。又掛榜通衢。詆毀臺諫侍從。是不有朝廷也。不有上下也。其所爲旣極且甚矣。大臣欲申理被罪人而來啓。是雖無心而言之。予恐陷於奸人之術也。此上下務欲鎭定之時。卿等所啓正是。予何不留念乎。

번역

삼공이 한재(旱災)로 인하여 근래에 죄를 받은 사람들을 두루 열거하였는데, 모두 사실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누차 아뢰었으나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심정은 권간의 우두머리로 흉악한 계책을 부리려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제거하려고 성세창(成世昌)에게 은밀히 부탁하여 대간을 축출하고 사림을 일망타진하여 조정에서 전횡하였는데, 성세창은 그의 밀약을 듣고 수하가 되어 간악한 계책을 부렸습니다. 여러 정황이 공초에 다 드러났으니, 이것이 교결(交結)하여 혼란하게 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어찌 한 가지 잘못에 그치겠습니까. 삼공은 성세창이 대간을 박척(駁斥)한 것은 처음 수의(收議)할 때 심정의 의견이 신들의 의견과 과연 달랐고, 그 후에는 성세창이 과연 심정과 상의하여 그렇게 했다고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이것으로만 조율하더라도 그 죄는 극죄에 해당합니다. 그가 목숨을 보전한 것은 단지 한때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이항은 탐욕이 끝이 없어 뇌물이 문에 가득하였습니다. 그가 박운서(朴雲犀)에게 받은 돈에 대해서는 물주가 이미 자백하였고 이항도 스스로 자백하였으며, 법관이 그의 공사(供辭)를 근거로 하여 형률대로 녹안(錄案)하였으니, 이것이 분명한 사실을 살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항의 탐욕스러운 정상은 전에 모두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귀배소에 갈 때 용인현(龍仁縣)에 이르렀는데, 어떤 사람이 일찍이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책망하고 욕보였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보더라도 이것이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장안(贓案)에 기록된 것을 돌아보건대, 애석할 뿐입니다. 이해는 대간으로서 권세 있는 간신에게 아첨하여 사림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 몰래 상소에 넣어 음흉한 계책을 시험하였습니다. 김노거(金魯居)는 시종의 반열에서 종묘사직과 관계된 일로 사설(邪說)을 앞장서서 주장하여 국시(國是)를 동요시킨 것은 이 같은 자가 한 짓으로 그 관계된 것이 지극히 중하니, 어찌 일시적으로 말을 잘못한 것으로만 치부하고 그 죄를 다스리지 않겠는가. 홍우룡(洪遇龍)은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궁금(宮禁)의 시비(侍婢)를 욕보인 정상이 분명하니, 그 죄악이 매우 중하다. 보통 사람도 강간을 미완으로 끝낸 자는 천리 밖으로 유배되는데 하물며 궁금의 시비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한 가지 죄로 의율(擬律)하는 것이 어찌 지나친 일이겠는가. 홍우세(洪遇世)는 국휼(國恤)과 졸곡 중에 경기(京妓)를 데리고 임소(任所)에 돌아와서 거리낌 없이 방자하게 행하여 강상을 무너뜨렸으므로 녹안(錄案)한 것은 법의 상도이다. 그 간숙(奸宿)이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명단이 악적(樂籍)에 있어 지금 기역(妓役)을 세우고 있으니 첩으로 논할 수 없다. 삼공(三公)도 아내를 관아 안에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하였으니, 애당초 가축의 첩이 아닌데 졸곡 중에 관아에 머물러 있게 한 것이다.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이종익은 본래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실로 교활하고 사악한 사람으로 거짓말을 꾸며내 언관(言官)을 해치려 하였으니, 간사한 정상이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어찌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 상황에 따라 법률에 의거하여 죄를 주어야 합니다. 국시가 이미 정해졌는데 도리어 이의가 있어 간악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서로 기뻐하며 기회를 엿보고 동요하는 일이 없지 않으니, 신들은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국시가 때때로 정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대신과 대간은 한마음으로 가부를 결정하여 진정시키는 것을 일삼아야 하는데, 오히려 사설(邪說)이 혹시라도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미 정해진 일을 끌어다 의심의 문을 열어 놓는 데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바로 위에서 시비를 밝혀 성상의 뜻을 더욱 굳게 하는 때입니다. 신들이 누차 번거롭게 아뢰어 황공하기까지 하여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합니다.-원문 빠짐- 전교하기를, “근래에 죄를 받은 사람들의 일로……” 나는 이미 그 시비가 분명함을 알고 있으니 어찌 흔들릴 리가 있겠는가. 간흉의 무리가 분풀이를 하지 못하여 세 곳에서 활을 쏘고 또 큰길에 방(榜)을 걸어 대간과 시종신을 비방하였으니, 이는 조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상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위가 이미 극심하였다. 대신이 신리(申理)를 죄주려고 와서 아뢰었으니, 이것은 비록 무심코 한 말이지만 나는 간신의 술수에 빠질까 두렵다. 이는 상하가 진정시키려고 힘쓰는 때이니 경들이 아뢴 것이 참으로 옳다. 내가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35. 經筵論群奸罪狀。請斷案啓。〔原注:同辛卯十一月辛亥朔癸酉。朝講。□侍講院侍講官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4D, ITKC_MO_0130A_A026_025A ...

원문

沈思順以文學小技。久處侍從之列。而其用心之極。至於作榜文掛於通衢。所不可忍言者也。李沆放逐時。臣爲言官矣。其時臺諫啓其事。而大臣啓曰。臣未知其意也。臺諫又啓某事。而大臣亦言之如此。故公論角立。而群小不得志者。因緣而多讒謗。乃言曰。竄逐沈貞,李沆者。其氣脈原於爲安老之地云。而臣以言官見之。則沈貞,李沆者。士林指以爲小人。而其形跡終爲顯著。豈可謂議論之出於一處〔原注:謂金安老〕耶。當日放逐安老時。臣亦在言官之列。聞南衮首唱。以爲竄逐之謀。而沈貞亦曰。吾子思順在弘文館。亦力贊之云。安老之人物。臣未之知也。其建議陷逐之者。盡一時文章之士。亦是小人之所爲也。及其見放而爲六卿。初以爲速也。人皆以爲許通。雖爲之可也。故無有他議焉。大臣以爲無啓之者。故不得已啓之云。六曹亦曰。持公論之人。有所難而不啓云。此乃以持論之人。歸之於不是之處。而欲自行其計也。何有如此駭愕之事乎。李荇文章儉素。其性有執拗自是之偏。故其意以爲沈貞,李沆曾在崇品。而其被罪見竄如是之易。吾何能終保乎。先自疑惑。遽生險計。如曺繼商。性本躁妄。不足數也。六卿之會。議論異同。而終見制於繼商之從傍贊劃。其謀害士林之事。可謂慘矣。今則定罪有等而是非已定。請自□上堅定。光弼之避小嫌似不可。常時未聞光弼傾陷士林之議也。

번역

심사순(沈思順)은 문학의 작은 기예로 오래 시종의 반열에 있었는데, 그 마음을 쓰는 것이 극도에 이르러 방문(榜文)을 지어 큰 길에 걸게 하는 등 차마 말할 수 없는 짓을 하였다. 이항(李沆)이 귀양 갈 때 신이 언관(言官)이었다. 그때 대간(臺諫)이 그 일을 아뢰자 대신(大臣)이 “신의 뜻은 모르겠다.”라고 하였고, 대간이 또 어떤 일을 아뢰자 대신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래서 공론이 서로 엇갈리고 군소(群小)가 뜻을 얻지 못하자 인연을 빙자하여 참소하는 말이 많아져서 마침내 “찬축(竄逐)된 심정(沈貞)과 이항은 그 기맥이 김안로(金安老)를 위하여 한 데에서 나왔다.”라고 말하였다. 신이 언관으로서 보건대, 심정과 이항을 사림(士林)에서는 소인이라고 지적하였는데도 그 행적이 끝내 현저하게 드러났으니, 어찌 논의가 한 곳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원주에 “김안로를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당시 안로(安老)를 내쫓을 때 신도 언관의 반열에 있었는데, 남곤이 앞장서서 찬탈할 모의를 주장하고 심정 또한 “우리 아들 사순(思順)이 홍문관에 있으니 힘써 찬성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안로의 인물됨은 신이 알지 못하지만 그가 함축을 권유한 자는 모두 당대의 문장사들이었으니, 이 역시 소인의 짓입니다. 그가 내쫓긴 뒤 육경(六卿)이 되자 처음에는 속히 이루어질 것으로 여겼고 사람들은 모두 허통(許通)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다른 의논이 없었습니다. 대신은 아뢰지 않은 자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뢰었다고 하고, 육조도 공론을 지키는 사람이 난처하게 여겨 아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공론을 지키는 사람을 옳지 못한 곳에 귀속시켜 자기의 계획을 행하려는 것이니, 어찌 이처럼 놀라운 일이 있단 말입니까. 이행(李荇)은 문장이 검소하지만 그 성품에 고집이 있어 본래 편벽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뜻에는 “심정(沈貞)은 일찍이 숭품(崇品)을 지냈는데 이처럼 쉽게 죄를 받아 귀양 가는 것을 보았으니, 내가 어찌 끝까지 보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먼저 의혹을 품고 갑자기 위험한 계책을 내었으니, 조계상(曺繼商)과 같은 성품이 본래 조급하고 망녕되어 따질 것도 없습니다. 육경(六卿)의 모임에서 논의가 서로 달랐는데도 끝내 조계상이 옆에서 찬성하는 바람에 제약을 받게 되었으니, 사림을 해치려는 그 계책은 참혹하다고 할 만합니다. 지금은 죄가 정해져서 시비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부디 위에서부터 굳게 마음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광필(光弼)이 작은 혐의를 피하는 것은 불가할 듯합니다. 평소에 광필이 사림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의론은 듣지 못했습니다.

원문

答曰。凡定罪推服。然後罪之可也。況在六卿之列。不推服而罪之。亦未可謂得也。若誠公論。則何不論於爲判尹時。而及爲判書。然後可論之耶。他大臣。初不知爲其然而苟從焉。今則知其情狀。何可謂避嫌乎。〔原注:六卿。指金安老。大臣。謂鄭光弼。〕

번역

답하기를, “무릇 죄를 정하여 추복(推服)한 뒤에야 그를 죄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육경의 반열에 있으면서 추복하지도 않았는데 그를 죄하는 것도 옳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참으로 공론이라면 어찌 판윤이 되었을 때에는 논죄하지 않다가 판서가 된 뒤에야 논죄할 수 있겠는가. 다른 대신(大臣)들은 애당초 그가 그렇게 한 줄 모르고 구차하게 따랐던 것이다. 지금은 그 정상을 알고 있으니, 어찌 피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원주(原註)에 “육경(六卿)은 김안로를 가리키고 대신(大臣)은 정광필을 가리킨다.” 하였다.-

36. 辭執義啓〔原注:中宗二十七年壬辰四月丙戌。□司憲府執義時。大司諫黃士祐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弘文館齊會而議臣等曰。更推崔嵬。非也。不駁朴稑。非也。柳渰特蒙□恩宥。而不擧法啓之。非也。如此等議論。正中臣等之失。有言責者被論如此。不可一日在職。請速遞。〔原注:六啓。□不允。〕

번역

홍문관이 모두 모여 신들을 의논하기를, “최외(崔嵬)를 다시 추고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연(朴稑)을 논박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유계(柳渰)가 특별히 은혜로운 용서를 받았는데도 법에 따라 계사를 올리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의론은 바로 신들의 잘못이다. 언책이 있는 자가 이와 같이 논의를 당하였으니, 하루라도 직임에 있을 수 없다. 속히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원주(原注)에 “여섯 번 계사하였다. □는 윤허하지 않았다.” 하였다.-

37. 大內投書事啓〔原注:同壬辰四月癸丑。□執義時。掌令宋麟壽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5C

원문

臣等聞裹石投書于大內。前古所無。此必奸人。內外相應。以逞凶謀。指之者雖在外。投之者必在內。乘間肆毒。至爲可畏。此豈細民之所爲。亦豈平心者之所爲哉。必近來凶黨懷憤。百計逞惡。期陷社稷而後已。是可忍也。孰不可忍也。臣等不勝痛憤。街巷處處貼榜。所言皆爲不道。臣皆知其邪類所爲。置之不問矣。沈思順旣以此被鞫。而凶黨猶且不懲。至於投書大內。顯示不軌之謀。此亂逆之魁也。朝廷視此以爲尋常。則凶徒甘心。益張其惡。□社稷之禍。將不可勝言。自□上明灼凶謀。卽召廷府議之。速懲奸凶。此□社稷之福也。事非尋常。則當處以非常矣。

번역

신들이 듣건대, 돌에 싸서 대내(大內)에 투서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전고에도 없던 일입니다. 이것은 필시 간사한 사람이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흉악한 모의를 이루려 한 것입니다. 지적하는 자가 비록 밖에 있더라도 던진 자는 반드시 안에 있을 것이니, 기회를 틈타서 독을 부리는 것이 매우 두렵습니다. 이것이 어찌 일반 백성이 할 수 있는 일이겠으며, 또한 어찌 평심(平心)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필시 근래의 흉당들이 분함을 품고 온갖 계책으로 악행을 저질러 기필코 사직을 함락시킨 뒤에야 그만두려 하는 것이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신들은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거리마다 방(榜)을 붙였는데, 말한 내용이 모두 부도(不道)하였습니다. 신은 모두 그 사특한 무리가 한 짓임을 알고서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습니다. 심심순(沈思順)이 이미 이 일로 인해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흉당들은 오히려 징계되지 않고 대내에 투서하기까지 하여 불의한 모의를 드러냈으니, 이는 난역의 괴수입니다. 조정에서 이것을 예사롭게 본다면 흉도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더욱 악행을 부릴 것이니, 사직의 화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흉악한 모의를 분명히 밝혀 즉시 의정부(議政府)를 불러 논의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속히 징계하는 것이 바로 사직을 위한 복입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은 예사롭지 않게 처분해야 합니다.

원문

傳曰。予欲痛治。議于大臣則大臣以爲如此之類。自然敗露。今不可更議。

번역

《전(傳)》에 이르기를, “내가 통렬히 다스리고자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대신이 ‘이런 부류는 자연히 패로될 것이니 지금 다시 의논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38. 經筵入對前日投書事□回啓〔原注:中宗二十八年癸巳六月癸酉。朝講。司諫院大司諫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6A

원문

近者獄事緩漫。如洪礪〔原注:朴尙宮壻唐城尉。以灼鼠之變伏罪。〕事。非一朝一夕之故。以事勢推之則始於朴氏〔原注:尙宮福城君母也。〕恩寵過甚。僭越之心漸生。知人主之不疑。然後奪嫡之謀起焉。此事已往。將來之事。亦可省察。凶徒已伏天誅。〔原注:朴嬪母子及洪礪賜死。〕然孝德之書箱若出。則獄事不止於此也。臣恐餘孼潛跡於宮中。權奸諂附於朴氏。情狀於此盡顯。〔原注:光川尉金仁慶竄配。沈貞以締結朴嬪正刑。兩翁主廢爲庶人。〕朴氏之陰謀。外附權奸。雖有策謀。朝廷士大夫不爲欺蔽。則無能爲也。必邪人附之者多。故有如此變事也。又曰。李沆欲謀害士林。凡直言之人。皆指以爲己卯餘黨。必欲除去者。以其自知不正而恐不能自保也。

번역

근래에 옥사(獄事)가 느슨해져서 홍려(洪礪)-원주(原注)에 “박 상궁의 사위 당성위(唐城尉)이다. 쥐를 태운 일로 죄를 자복하였다.”라고 하였다.-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일의 형편으로 미루어 보면 박씨(朴氏)-원주에 “상궁 복성군(福城君)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였다.-에게 은총이 지나치게 많아서 참람한 마음이 점차 생겨났고, 임금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뒤에 적통을 빼앗으려는 모의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은 이미 지나갔지만 장래의 일을 또한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흉도들이 이미 천벌을 받았으니-원주에 “박빈(朴嬪)의 모자 및 홍려에게 사사(賜死)하였다.”라고 하였다.-그러나 효덕(孝德)의 서신이 만일 나오게 된다면 옥사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남은 죄악들이 궁중에 숨어 있고 권세 있는 간신들이 박씨에게 아첨하여 붙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실상이 여기에 다 드러났으니-원주에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을 찬배(竄配)하고, 심정(沈貞)은 박빈과 결탁하였다고 정형(正刑)하였으며, 두 옹주(翁主)는 폐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라고 하였다.-박씨의 음모가 권세 있는 간신에게 외부에 붙더라도 비록 계책이 있더라도 조정의 사대부들이 속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간사한 사람들이 붙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또 말하건대, 이항(李沆)은 사림을 해치려고 하여 직언하는 사람들을 모두 기묘년의 잔당이라고 지목하여 반드시 제거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그가 스스로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서 자신을 보전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39. 臺諫廳壁上牌書事啓〔原注:同癸巳七月壬寅朔辛酉。□大司諫時。臺諫廳壁上掛木牌書。犯觸至尊。又有草塑爲人像。政院三司會議。〕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6B, ITKC_MO_0130A_A026_026C

원문

臣見其牌。則其布置施爲。與前如一。〔原注:前時。東宮懸灼鼠木牌書。字體略不相似。〕以臣斟酌。若他人則雖與之千金。豈忍書之乎。此必一家之人得罪。不容人類。廢爲窮鬼。自作罪犯耳。以前獄事見之。守堅輩則皆一一服招而死矣。但孝德焚其藏書之箱云。其書若出則辭連之人。豈一二乎。其書不出。故餘黨脫漏者必多。其凶計以爲前人已死。而今又爲此。則自□上必以爲其人等已死。而猶有如此事則前獄之事。亦非其人之所犯。而脫其大逆之罪則其奴僕輩。亦不分定於他處。甚便於己。故疑其形迹。多方以誤之。若自上疑之。自下棄釋。而不歸大逆之罪。則其奴僕亦皆被放。豈如今之窮無歸乎。畜憤積惡。怨毒未消。故爲之耳。今者兩翁主。雖已廢爲庶人而猶在都下。家人奴僕。根據盤結。其兇謀邪計。皆發於此。非他人可忍爲之事。今廢在都下則難有未已。如金仁慶妻。則自有可歸之鄕則一家僕屬。皆隨而往。都下皆去如此之人則禍可稍息矣。臣亦非欲屢興大獄也。但慮天地間安有如此窮凶極惡之事乎。

번역

신이 그 패를 보니, 배치하고 시행한 것이 이전과 같았습니다.- 원주(原注)에 “이전에는 동궁에서 쥐가 갉아먹은 나무패를 걸어 놓고 글씨를 썼는데, 자체는 대략 비슷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신이 헤아려 보건대, 다른 사람이라면 비록 천금을 주더라도 어찌 차마 쓰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한집안 사람이 죄를 지어 인류에 용납되지 못하고 버려져 궁귀(窮鬼)가 되어 스스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전의 옥사로 보면 수견(守堅)의 무리는 모두 하나하나 자백하고 죽었습니다. 다만 효덕이 그 장서함을 불태웠다고 하니, 그 책이 나온다면 연루된 사람이 어찌 한둘이겠습니까. 그 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무리가 빠져나간 것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그들의 흉악한 계책은 ‘앞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지금 또 이런 일을 하면 위에서 반드시 이 사람들이 이미 죽었으면서도 오히려 이런 일이 있다고 여길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의 옥사에서도 그 사람이 지은 죄가 아니고 대역죄를 모면할 수 있었다면, 그 종들도 다른 곳으로 분정(分定)하지 않아 자신에게 매우 편리하기 때문에 그 형적을 의심하여 여러 방면에서 잘못되게 하였습니다. 만약 위에서 의심하고 아래에서 버려두어 대역죄로 귀결시키지 않았다면 그 종들도 모두 석방되었을 것이니, 어찌 지금처럼 돌아갈 곳 없는 궁벽한 처지가 되었겠습니까. 분노를 쌓아 두고 악행을 저질러 원통함과 독기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두 옹주가 비록 이미 폐인(廢人)이 되어 도성에 있으나, 그 집안사람과 종들이 근거로 삼고 결탁하여 그들의 흉악한 모의와 사특한 계책이 모두 여기서 나왔으니 다른 사람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폐인이 된 채 도성에 있으면 그치지 않을 것이니, 김인경(金仁慶)의 처처럼 본래 돌아갈 고향이 있다면 온 집안 종들이 모두 따라가서 도성에서 이런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야 화가 조금이나마 그칠 것입니다. 신도 자주 큰 옥사를 일으키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천지 사이에 어찌 이와 같은 극악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40. 弘文錄擬單望。事體未穩意啓。〔原注:同癸巳七月壬寅朔庚午。□大司諫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6D

원문

頃者弘文館南行塡差時。收議以金祺正字單望事甚未穩。大抵人物不足之時。則雖有相避之人。不計而注擬。前亦有傳□敎之時。今則爲弘文館者。七品以下有四人云。而如此微細之事。至於收議。□特命單望。於事體何如。使該曹議而爲之則似爲無偏。〔原注:執義金希說曰。弘文館錄人少則二人擬望時有之。未有單望爲之例。〕

번역

지난번 홍문관 남행(南行)을 채워 차임할 때에 김기(金祺)를 정자(正字)로 단망(單望)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수의(收議)하였다. 대체로 인물이 부족한 때에는 비록 서로 피해야 할 사람이 있더라도 따지지 않고 주필하여 의망하였고, 예전에도 전교를 전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홍문관에 7품 이하인 자가 4명이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미세한 일로 수의까지 하고 특명으로 단망을 하니 사체(事體)에 어떠하겠는가? 해당 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하게 하면 치우침이 없을 듯하다.-원주(原註)에 “집의 김희설(金希說)이 말하기를, ‘홍문관에 녹인(錄人)이 적으면 두 사람을 의망할 때가 있었고 단망으로 한 예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원문

上曰。弘文館下番。獨有博士洪暹。亦歸讀書堂。而擬望者只有李元孫。又卽駁遞。予計之必無注擬者。故使之收議。苟有之則何難於擬差。而必至收議乎。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홍문관 하번(下番)에 유독 박사 홍섬(洪暹)이 있어 또한 독서당으로 돌아갔는데, 의망한 사람은 이원손(李元孫)뿐이었고 또 즉시 논박하여 체차하였다. 내가 반드시 주망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수의하게 하였으니, 만약 있었으면 어찌 의망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반드시 수의하기까지 하였겠는가.” 하였다.

41. 因被侍從官論駁辭職啓〔原注:同癸巳七月壬寅朔庚午。□大司諫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7A, ITKC_MO_0130A_A026_027B

원문

宋純事。物論騰播。臣等不啓推。而直請罷職。昨日夕講。洪春卿啓曰。宋純以誤言被罪。雖微細之人。推而後罪之則其情見而無後弊。今以汝乃目睹之言罪之。臣亦參坐。未聞其言。一時臺諫。亦皆以謂不出於宋純之口。以臺諫侍從之人。噤默不言而被罪。恐有後弊。臣等職在言責。使臺諫之人。噤默不言而被罪。以招侍從之駁。決不可在職。請速遞臣等之職。

번역

송순의 일에 대해 여론이 퍼지자 신들은 계발하여 추궁하지 않고 곧바로 파직을 청하였습니다. 어제 석강(夕講)에서 홍춘경(洪春卿)이 아뢰기를, “송순은 잘못된 말로 죄를 받았는데 비록 하찮은 사람이라도 미루어 죄를 주면 그 실정이 드러나서 뒷날의 폐단이 없게 됩니다. 지금 당신이 직접 본 것을 가지고 죄를 주었는데 신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하였으면서도 그의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때의 대신(臺臣)과 간관(諫官)들도 모두 송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대간과 시종신으로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다가 죄를 받는다면 뒷날의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신들의 직책은 언관(言官)인데 대신과 간관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 시종신에게 반박하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은 결코 직책에 있는 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속히 신들을 체차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원문

傳曰。此事非特司諫院啓之。弘文館已先論之。若宋純不言而被罪。則果似瞹眛。此非隱微之事。臺諫諸會處。與朴洪麟相詰則言與不言。必有知之者。豈以弘文館,臺諫所言爲虛哉。其時予答曰。如他事則可推之。臺諫中相詰之事必分明。故果依所啓。今若以洪春卿之言爲是。則臺諫,弘文館之言。歸於不實。必有公論矣。不知是非。而何可遽遞臺諫乎。勿辭。今朝經筵。領議政〔原注:張順孫〕亦曰。若推宋純。則是不信弘文館,臺諫之言也。不可推也。此言亦當。予初意如是。故不推宋純也。〔原注:三辭。□不允。〕

번역

전교하기를, 이 일은 사간원만 아뢴 것이 아니라 홍문관에서 먼저 논의하였다. 만약 송순이 말하지 않고서 죄를 받았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듯하다. 이것은 은미한 일이 아니니 대간들이 여러 번 회계(會啓)하였고, 박홍린과 서로 따져 물었으니, 말하고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찌 홍문관과 대간의 말을 허위라고 하겠는가. 그 당시 내가 답하기를, “다른 일이라면 미루어 알 수 있겠지만, 대간이 서로 따진 일은 필시 분명할 것이므로 과연 아뢴 대로 하겠다. 지금 만약 홍춘경의 말이 옳다고 한다면 대간과 홍문관의 말은 사실이 아니게 되니 반드시 공론(公論)이 있을 것이다. 시비를 모르겠는데 어찌 갑자기 대간을 체차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양하지 말라. 오늘 아침 경연에서 영의정〔원주: 장순손(張順孫)〕도 송순을 미루어 처벌한다면 홍문관과 대간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니, 미루어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말도 옳다. 내 처음 생각도 이와 같았기 때문에 송순을 미루어 처벌하지 않았다.〔원주: 세 번 사양하니 윤허하지 않는다.〕

42. 木牌事入對啓〔原注:同癸巳七月癸未。□大司諫時。木牌事。三次發見。□命招入對。〕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7C

원문

臣之意與光彥無異。〔原注:大司憲沈光彥〕前者請推不得。〔原注:二次木牌時〕常懷未穩。今則已在必推之地。推官當以數條推之。期於得情。詮聞之。宦官房末同。洪礪妻出歸時。〔原注:城外黜送時〕呈式暇狀于其房。〔原注:長房〕送至門外。痛哭而還云。此其相重之意現然。而如此人在闕內。入省記之人。皆欲推之則恐未可勝推。

번역

신의 뜻은 심광언(沈光彥)과 다름이 없습니다.- 원주에 “대사헌 심광언이다.”라고 하였다. -앞서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2차 목패(木牌) 때이다. -늘 마음에 편치 않았습니다. 지금은 반드시 추고해야 할 상황이니, 추고관이 몇 가지 조목으로 추고하여 기필코 실정을 캐내야 합니다. 전문(詮聞)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관방 말단 동지(同知) 홍려(洪礪)의 처가 출귀할 때.- 원주에 “성 밖으로 내쫓아 보낼 때이다.”라고 하였다. -그 방장에게 휴가를 청하는 장계를 바치고는.- 원주에 “장방(長房)이다.”라고 하였다. -문밖에 이르러 통곡하고 돌아갔다고 하니, 이 일로 볼 때 그가 상중이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대궐 안에 있으면서 성기(省記)에 들어간 사람을 모두 추고하려고 한다면 추고를 감당할 수 없을 듯합니다.

원문

上曰。闕庭上下甚多。不可急急全數推訊。推官得其端由。然後推其辭連者則罪人或可得之。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궐정(闕庭)에 오르내린 자가 매우 많으니 급급하게 전부 추문해서는 안 된다. 추국관이 그 단서를 얻은 다음에 연루된 자들을 추문하면 죄인을 혹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43. 請李芑,金泂等獄事窮推明律啓〔原注:同癸巳十一月丙午。□副提學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7D

원문

李芑,金泂等獄事。時不承服而徑斷其罪未便。以一時之議。不據律定罪。尤爲未安。□先王之法。不可廢而不遵。近來奸黨之獄。雖據法定罪。猶有藉口而爲之辨。況不據法。輕易論斷。將何以鎭人情而示後世也。大抵罪人知其罪極。自分必死而不服。豈可預慮其殞命。不窮推取服。又不照律而輕斷乎。如此不分明定罪則雖□下諭丁寧。愈恐惑無益也。請還收成命。窮極推考。照律定罪。

번역

이기(李芑)와 김형(金泂)의 옥사(獄事)입니다. 지금 복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지레 죄를 단죄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한때의 의논으로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죄를 정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선왕의 법은 폐기하고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근래 간당(奸黨)의 옥사에서 비록 법에 근거하여 죄를 정하였으나 오히려 구실을 내세워 변론하였습니다. 더구나 법에 근거하지 않고 경솔하게 논단한다면 장차 어떻게 인정을 진정시키고 후세에 보일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죄인이 자신의 죄가 극에 달했음을 알고 스스로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복을 받지 않는다면 어찌 그 목숨이 끊어질 것을 미리 염려하여 끝까지 추문(推問)하여 자복을 받아내지 않으며, 또 법률을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분명하게 죄를 정하지 않으면 비록 아래에 내리신 하유가 간곡하더라도 더욱 의혹만 일으킬 뿐 무익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어들여 끝까지 추고하여 법률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원문

答曰。今朝大臣等來啓泂等病重。予意戀爲罪人等他事已服。節次及爪牙心腹。雖不服之。若加刑殞命則終不得明示國法也。故因昨日啓下之律。減死決杖。極邊安置。此非照律外之罪也。照律減死決杖者。例爲流三千里。而猶以流爲輕。而至於安置。此雖減死。亦示嚴法也。

번역

답하기를, “오늘 아침 대신(大臣)들이 와서 아뢰기를 ‘홍등(泂等)의 병이 중합니다.’ 하였는데, 내 생각에는 연위 죄인들의 다른 일은 이미 자백하였고 절차와 심복들은 자백하지 않았지만 만약 형벌을 가하여 죽는다는 명을 내린다면 끝내 국법을 분명히 보일 수 없으므로 어제 계하한 법률에 따라 사형을 감하여 장(杖)으로 처결하고 극변(極邊)에 안치하는 것이니, 이는 조율(照律) 이외의 죄가 아니다. 조율하여 사형을 감하고 장으로 처결하면 으레 유배 3천 리를 보내는 것인데 오히려 유배를 가볍게 여겨 안치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사형을 감한 것이지만 또한 엄한 법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였다.

44. 經筵臨文啓〔原注:中宗二十九年甲午閏二月己卯。夕講。□經筵參贊官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8A

원문

臨文曰。淸明在躬。志氣如神者。乃聖功之極致也。大抵天理人欲。相爲消長。人欲淨盡。以後天理流行。若淸明在躬。則至誠前知。君子小人之辨。治亂存亡之幾。如黑白之判於前矣。非惟著見於事者爲然。雖禍機之藏於細微者。亦無不前知也。聖門顏淵。遵四勿而極致之。卒至於淸明在躬。而況人主乃民之父母。必法天地日月之無私。使天下之民。皆欽敬而尊仰之。則天下自治矣。古昔三代聖王。心無私慾。故令聞不已。大抵人主之所以學問者。必欲使私慾淨盡。以淸明在躬也。爲民父母。而有一毫私慾於方寸之間。則政事施爲。多失其宜。而民受其害矣。此篇之意。當服膺而體念焉。

번역

임문(臨文)에 이르기를, “청명(淸明)이 몸에 있음과 지기(志氣)가 신령함 같음은 바로 성인의 공부의 극치이다. 대체로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서로 소장(消長)하는데, 인욕이 다 없어지고 나서 후천(後天)의 천리가 유행하면 청명이 몸에 있게 된다. 이럴 때 지극한 정성으로 앞을 알게 되어 군자와 소인, 치란과 존망의 기미가 흑백이 분명하게 갈리는 것과 같아 드러나 보이는 일뿐만 아니라 비록 은미한 곳에 숨겨진 화기(禍機)도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성문(聖門) 안연(顔淵)은 사물(四勿)을 준수하여 극치에 이르러 마침내 청명이 몸에 있게 되었다. 더구나 임금은 백성의 부모이니 반드시 천지의 무사(無私)함을 본받아 천하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공경하고 존앙하게 하면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다. 옛날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은 마음에 사욕이 없었기 때문에 명성이 끊이지 않았다. 대체로 임금이 학문을 하는 것은 반드시 사욕을 깨끗이 없애서 청명이 몸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사욕이 있으면 정사(政事)를 행함에 마땅함을 잃게 되어 백성이 그 해를 받는다. 이 글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45. 論明大臣誤啓啓〔原注:中宗二十九年甲午四月丁酉朔。□大司諫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8C, ITKC_MO_0130A_A026_028D

원문

昨日大臣所啓。臣等聞之。未知其意之所在。決訟官吏等事。臣等初不知事之首尾。就大臣所啓而觀之。李世榮打殺女人石今。本安今丁婢也。雖曰傳係於世榮。非父子祖孫夫妻妾間。則法不當用其白文也。其白文旣不可用。則世榮當論以殺凡人。不可謂奴主之分已定而免其死也。刑曹,漢城府官吏累見他事移文。必有其情。或不捉送其人。或不卽輸送其案。則法司以故爲淹延之律。比而用之。於法未有牴牾也。用法若無正條。比律而用。其事亦久。況大臣以法司所不照。知非誤決之律。謬引以爲咎。此若言語間錯誤則已矣。如有其情則其爲害有不勝言者。此等事。法司爲公事。蒙允而後施行。大臣必欲盡改之。不知有何意而然也。今若取實白文。以李世榮殺婢而免其死。決訟官吏改律而復其職。譴責法官而遞其職。則恩固有在。怨當歸誰。大臣於臺諫所爲。未嘗求無過於有過之中。輒隨事指點而見其疵。豈樂易愛士同心共國之道乎。〔原注:前一日。三月晦丙申。領議政張順孫,左議政韓效元,右議政金謹思。啓以法司論啓之事曰。世榮與石今。奴主之分已成則免死。決訟官知非誤決照律。則亦可分揀云云也。〕

번역

어제 대신이 아뢴 것을 신들이 듣고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송사를 판결한 관리를 처벌하는 일은, 신들은 애당초 그 일의 전말을 모르는데 대신이 아뢴 것을 가지고 보면 이세영(李世榮)이 여인 석금(石今)을 때려 죽였는데 석금은 본안(本安) 김정(金丁)의 비녀입니다. 비록 이세영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자, 조손, 부부, 첩 사이가 아니라면 법에 그 백문(白文)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백문을 이미 적용할 수 없다면 이세영은 일반 사람을 죽인 것으로 논죄해야 하고 노비와 주인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다고 해서 죽음을 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형조와 한성부의 관리가 여러 가지 다른 일로 이문(移文)을 받았는데, 반드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혹 그 사람을 잡아 보내지 않았거나 혹은 즉시 그 죄안을 실어 보내지 않았으면 법사(法司)는 고의로 지연시킨 것으로 율문을 적용해야 하니, 이와 비교하여 적용해도 법에 어긋나는 점이 없습니다. 만약 법에 정해진 조문이 없어서 비례하는 율문을 적용한다면 그 일도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대신은 법사가 잘못 판결한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율문을 잘못 끌어다 허물을 삼았으니, 이는 말 사이에 착오가 있었던 것이라면 그만이지만 만약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그 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법사에서 공사(公事)로 윤허를 받은 뒤에 시행하는 것인데 대신이 반드시 모두 고치고자 하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만약 백문을 취하여 이세영이 비녀를 죽인 것으로 하여 그가 죽음을 면하게 하고, 송사를 판결한 관리는 율문을 고쳐서 그 직임을 회복시키고 법관을 견책하여 체차한다면 은혜는 진실로 있을 것이나 원망은 누구에게 돌아갈지 모르겠습니다. 대신이 대간의 행동에 대해 지나친 잘못보다는 차라리 있는 잘못을 구하지 않고 매사에 지적하여 허물을 드러내니, 어찌 선비를 사랑하고 나라를 함께 다스리는 도리입니까.-원주(原注)에 “그 전날인 3월 그믐일 병신일에 영의정 장순손(張順孫), 좌의정 한효원(韓孝元), 우의정 김근사(金謹思)가 법사의 논계에 대해 아뢰기를 ‘이세영과 석금은 노비와 주인의 분수가 이미 이루어졌다면 죽음을 면해야 하고, 송사를 판결한 관리는 잘못 판결한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율문을 적용하면 또한 용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원문

答曰。此事。大臣啓之意。未可知也。必是宰相多罷。未安而至此也。然李世榮白文。法不當用。而京外官吏取實則誤也。法司公事當然。近來京外官吏難斷之事則已矣。雖已決之事。故爲淹延。已爲弊習。不可不懲。法司當用大典故爲淹留之法。法司亦無誤事也。殺人免其罪淹留官吏。卽復其官。無過臺諫論其失。則事體顚倒。果如卿所言也。但大臣必有誤料而已。豈有他情乎。

번역

답하기를, “이 일에 대해 대신(大臣)이 아뢴 뜻은 모르겠다. 반드시 재상이 자주 파직되는 것이 온당치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세영의 공초문은 법으로 보아 적용해서는 안 되는데, 서울과 지방의 관리가 사실을 취한 것은 잘못이다. 법사(法司)가 공무를 처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근래 서울과 지방의 관리가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결정된 일을 고의로 지체하는 것은 폐습이 되었으니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법사는 마땅히 《경국대전》을 적용하여 지체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니, 법사도 잘못한 것이 없다. 사람을 죽인 죄를 면해 주고 관리를 지체시킨 자는 즉시 그 관직에 복귀시키고 대간의 논박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도리어 경이 말한 바와 같으니, 다만 대신이 반드시 잘못 헤아린 것이 있을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하였다.

46. 經筵陳僧徒之弊。規戒闕內事啓。〔原注:中宗三十一年丙申十二月己卯。朝講。大司諫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9A, ITKC_MO_0130A_A026_029B

원문

臣等以僧徒詐稱事啓之者。燃燈雖出於內旨。而其所以大作。則憑藉詐稱也。故以詐稱啓之。而後聞□上敎以爲雜物亦出於內。故停啓也。但自內所爲之事。外間必爭效之。近聞婦人會於空家。觀優人之戲曰。豈獨吾儕之所爲乎。闕內亦觀此戲。然則闕內之事。亦非乎云。以此觀之。外人視效宮中之事。無所不至。今此燃燈。雖曰小事。下民趨向視效之不已。則末流之弊。何可勝言乎。內之所爲。外必效之。則華藏寺之事。豈無效之者乎。

번역

신들이 승도(僧徒)가 거짓으로 칭한다는 일로 아뢴 것은 연등이 비록 임금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크게 행한 것은 거짓으로 칭하는 데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거짓으로 칭한다고 아뢰었습니다. 그 뒤에 상교를 듣건대 잡물(雜物)도 내궁에서 나온 것이므로 아뢰는 것을 정지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내궁에서 하는 일을 외간에서 반드시 본받으려고 합니다. 근래 들으니 부인들이 빈집에 모여서 부유한 사람의 놀이를 보고 말하기를, “어찌 우리들만 하는 일이겠는가. 궁중에서도 이런 놀이를 구경한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외인이 궁중에서 하는 일을 본받으려고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연등이 비록 작은 일이라 해도 백성들이 좇아 본받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말류의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안에서 하는 것을 밖에서 반드시 본받는다면 화장사(華藏寺)의 일을 어찌 본받는 자가 없겠습니까.

원문

答曰。宮中之事。外間果有效之者也。然所謂觀優戲之事則宮中未嘗有也。但歲時觀儺。自是古事。非自今創之而害於義者也。

번역

답하기를, “궁중의 일은 외간에도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관우희(觀優戲)라는 것은 궁중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다만 세시(歲時)에 관나(觀儺)하는 것은 본래부터 전해 오는 옛일이지, 지금 새로 만들어 의리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47. 經筵論朝中士氣不振啓〔原注:同年丙申十二月己卯。同日朝講。□大司諫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9C

원문

大抵人之議論。豈得盡同。或是或非。惟意所適而展吐無餘。自□上採擇之如何耳。□祖宗朝。在上前至相駁擊。而出就賓廳則懽若平生。其和洽之氣象。豈不美哉。今則不然。人各異心。莫肯發言。此何等風氣耶。臣入侍講幄久矣。未嘗見特進官等以一言陳規者。此豈非□上無樂聞之實而然也。但以弊習成風。人爲自保之計耳。如是不已則脫有緩急。誰任其責。言之至此。豈不寒心乎。

번역

대저 사람들의 의론이 어찌 모두 같을 수 있겠습니까. 혹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데, 오직 마음 가는 대로 여지없이 토로하고 위에서 채택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선조의 조정에서는 위에서부터 재상에 이르기까지 서로 반박하였으나 빈청(賓廳)에 나가면 평소처럼 기뻐서 그 화락한 기상이 어찌 아름답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사람마다 각자 마음이 달라서 말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풍조입니까. 신이 입시강악(入侍講幄)한 지 오래되었는데 특진관(特進官)들이 한마디 말이라도 진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위에서 기꺼이 들으려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폐습이 풍조를 이루어 사람들이 스스로 보전할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속한다면 만일 완급(緩急)이 있을 때 누가 그 책임을 맡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이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48. 經筵追論三兇之黨罪狀啓〔原注:中宗三十二年丁酉十一月壬午。夕講。□經筵特進官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29D, ITKC_MO_0130A_A026_030A ...

원문

頃者三兇〔原注:金安老,蔡無擇,許沆。〕定罪之時。臣適患疾。未能隨參。而今始出。故尙未啓三兇之黨所行矣。臣於前日。爲臺諫侍從。與蔡無擇,許沆。爲同僚而見之。其托爲公論。風聞而發之者。皆人隱微之過及閨中可疑之事。此皆構成虛罪。使人人畏戢。不敢斥言己事。而欲張威勢。專擅用事之術也。其時宋純顯與臣言曰。今者許沆,蔡無擇等。聽安老指嗾。肆毒搏噬。專制一時。擊去安老可也。貞,沆〔原注:沈貞李沆〕雖去。安老復用。朝廷豈得安靜。臣曰。安老見屈久矣。豈無悔過之心乎。純曰。小人見枉則肆毒必深。自古然也。如安老之奸邪者。豈萌悔過之念乎。不可不駁去也。其時臣爲執義。林百齡,宋麟壽爲掌令。朴洪麟,蔡無擇爲持平。大司憲乃黃士祐也。安老之爲吏判也。宋麟壽到本司語臣曰。昨見林百齡。仍欲見汝。日晩未果也。隨以小簡示臣曰。欲駁安老。臣意以爲士祐乃安老之四寸。洪麟。安老之同鄕。二人在座而無擇以疾不仕進。無擇之不來者。亦爲有心矣。若或輕發則必有重禍矣。顧答麟壽曰。此事似爲重難。麟壽遂發議於座中。士祐曰。予於安老爲四寸。不可參論。洪麟則無一言是非。百齡則訥於言者。只曰可駁。而麟壽則多有所論。然終不得行其計也。臣於其時。當與僚友共論擊去矣。乃怵於禍。不從麟壽之論。遂使爲惡至此。及三兇定罪之後。敢追論其過惡。臣則死有餘罪矣。臣竊見安老之事。他如貪黷等事。不可彈論。如偃臥江亭而使收議史官奔馳往來。無君之心著矣。洗馬〔原注:太僕寺出廏馬。以時刷洗之。曰洗馬。〕時儀仗。一如動駕節次。故大小人員。皆下馬而過之。安老則不徒不下馬。反以着紅衣乘御馬者。爲犯路而罪之。其無君之心尤著矣。方安老以此人〔原注:乘御馬者〕治罪公事入啓時。自□上可施雷霆之威。而猶復優容也。臣又聞闕庭觀火時。安老使其年長之子。入闕庭觀火。其倨傲無禮極矣。人臣如此。而能保終始者未之有也。許沆,蔡無擇,黃士祐等。一聽安老指揮而羅織人罪。陷之重辟。□聖明亦已痛照其奸狀矣。士祐則國典未加而天誅及之。若使士祐保存。以至今日。其肆毒施惡。曷可容言乎。大抵榮寵。宜施於君子而不可施於小人也。

번역

지난번 세 흉신(三兇)-원주(原註)에 ‘김안로(金安老), 채무택(蔡無擇), 허항(許沆)’이라고 하였다.-이 죄가 정해졌을 때 신은 마침 병을 앓고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비로소 나와서 아직 세 흉신의 당파가 행한 바를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지난날 대간 시종(臺諫侍從)으로 채무택, 허항과 동료로서 그들을 보았는데, 공론을 빙자하여 풍문으로 발설하는 것은 모두 남의 은미한 잘못이나 규중(閨中)에서 의심스러운 일이었으니, 이는 모두 거짓 죄를 꾸며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위축되게 해서 감히 자기 일을 배척하지 못하게 하고 위세를 떨치고 멋대로 일을 처리하려는 수단이었습니다. 그 당시 송순현(宋純顯)이 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허항과 채무택 등이 김안로의 사주를 받고서 독을 뿜어대며 한때를 전횡하였으니, 안로를 제거하는 것은 괜찮으나 심정(沈貞)과 이항(李沆)-원주에 ‘심정(沈貞), 이항(李沆)’이라고 하였다.-은 제거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안로복(安老復)이 다시 등용되니 조정이 어찌 안정을 얻을 수 있겠는가. 신이 말하기를, “안로복이 굴욕을 당한 지 오래되었으니 어찌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였더니, 순(純)이 말하기를, “소인이 억울함을 당하면 독기를 부리는데 반드시 심해지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안로복과 같은 간사한 자가 어찌 잘못을 뉘우칠 생각이 있겠는가. 논박하여 제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 당시 신이 집의(執義)였고, 임백령(林百齡), 송인수(宋麟壽)가 장령이었으며, 박홍린(朴洪麟), 채무택(蔡無擇)이 지평이었다. 대사헌은 바로 황사우(黃士祐)였다. 안로복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송인수가 본사(本司)에 도착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어제 임백령을 보고 이어 너를 보려고 하였는데 날이 저물어서 이루지 못하였다.” 하고는, 뒤이어 소간(小簡)을 보내어 신에게 보여 주기를, “안로복을 논박하려고 한다.” 하였다. 신의 생각에는 황사우가 안로복의 사촌이고 박홍린은 안로복의 동향인데, 두 사람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채무택이 병을 핑계 대고 진출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선택하지 않은 자가 오지 않는 것도 또한 마음이 있어서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가볍게 발의했다면 반드시 큰 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답린수(顧答麟壽)가 말하기를, “이 일은 중대하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마침내 윤선수가 좌중에서 의논하였는데, 이사우는 ‘나는 안로와 사촌간이니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홍인열(洪麟則)은 시비를 가리는 말이 하나도 없었으며, 김백령은 말을 잘하지 못하여 단지 ‘반박할 만하다.’라고만 하였습니다. 윤선수는 논의한 것이 많았으나 끝내 그 계책을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그때 동료들과 함께 논의해서 물리쳤어야 했는데 화를 두려워하여 윤선수의 주장을 따르지 않아 마침내 악행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 흉적에게 죄가 정해진 뒤에 감히 그 허물을 추후에 논하였으니, 신은 죽어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신이 삼가 안로의 일을 보건대 탐욕을 부리는 등의 일은 탄핵할 수 없으나 강정(江亭)에 누워서 의사관을 시켜 분주하게 왕래하게 한 것과 같은 것은 논해야 합니다.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세마(洗馬)- 원주(原注)에 “태복시(太僕寺)에서 마구간의 말을 내어 때때로 씻기는데, 이를 ‘세마’라고 한다.” 하였다. -할 때 의장(儀仗)이 한결같이 동가(動駕)할 때의 절차와 같았으므로 대소 인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안로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붉은 옷을 입고 어마(御馬)를 탄 사람에게 길을 범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주었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안로가 이 사람- 원주에 “어마를 탄 사람”이라고 하였다. -을 공사(公事)로 다스려 죄를 주려고 입계(入啓)할 때에 상께서 뇌성벽력 같은 위엄을 베풀 수 있었는데도 오히려 다시 너그럽게 용서하셨다고 합니다. 신이 또 듣건대, 안로가 그의 나이 많은 아들을 궁정으로 들어가 관화(觀火)하게 하였으니, 오만하고 무례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신하로서 이와 같이 하고도 끝까지 보전된 자는 없었습니다.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황사우(黃士祐) 등이 모두 안로의 지휘를 듣고서 남을 죄로 엮어 만들었습니다. 함지중(陷之重)을 처형한 것은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그 간악한 정상(情狀)을 통렬히 살피셨습니다. 사우는 국법이 시행되기 전에 천벌이 미쳤으니, 만약 사우가 목숨을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면 그가 악독한 짓을 얼마나 저질렀겠습니까. 대저 영예와 총애는 군자에게 베풀어야 하고 소인에게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49. 經筵陳安老斷罪無疑啓〔原注:同十一月丙子朔辛丑。朝講。□特進官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0D

원문

上敎以爲安老之定罪。適發於至親論法之後。下人恐有生疑者。安老以小人之魁。位極人臣。奸狀暴著。朝野共憤。人孰以此爲疑也。安老常以爲保全之難。在尹之任之門。〔原注:之任。國舅也。安老終始假托。輔衛東宮。故疑爲國母之門所不容。〕故黃士祐〔原注:士祐。安老從妹夫。與安老共濟其謀。〕與臣。同爲臺諫。欲攻之。臣以爲此是國舅也。別無可攻事。不可輕發。士祐果不搖動。而至今擊元老。皆外托公論而陰爲保存之計也。今斥奸兇。豈有一毫之疑乎。〔原注:十一月朔日。□上謂刑判尹任曰。安老。卿可圖之。任乃與大司憲梁淵謀之。使大司諫黃憲一啓。卽命宣傳官。發卒圍其第定配。尋命安老及其黨許沆,蔡無擇伏罪。〕

번역

주상이 하교하기를, “안로(安老)의 죄가 정해진 것은 마침 지친(至親)이 법을 논한 뒤에 발각된 것이니, 아랫사람 중에 의심하는 자가 있을까 두렵다. 안로는 소인의 괴수로서 신하의 지위에 있으면서 간악한 행적이 드러나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분개하고 있으니, 누가 이 때문에 의심하겠는가. 안로는 항상 보전하기 어려운 것이 국구(國舅)의 집안에 있다고 여겼다.-원주(原注)에 “국구는 윤임(尹任)이다. 안로가 시종토록 동궁을 보위하는 데 가탁하였으므로 의심스럽게도 국모의 집안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황사우(黃士祐)-원주(原注)에 “사우는 안로의 종매부(從妹夫)로서 안로와 함께 그 계책을 도왔다.”라고 하였다.-와 신이 똑같이 대간이 되어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신은 이것이 국구이기 때문에 별로 공격할 만한 일이 없다고 여겨서 경솔하게 발설하지 못하였다. 사우가 과연 흔들리지 않았는데도 지금까지 원로를 공격하는 것은 모두 겉으로는 공론을 빙자하고 속으로는 보전하려는 계책을 꾸미는 것이다. 지금 간흉(奸兇)을 배척하는데 어찌 조금이라도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원주(原注)에 “11월 초하루에 주상이 형조 판서 윤임에게 말하기를 ‘안로를 경이 도모하라.’라고 하니, 윤임이 대사헌 양연과 모의하여 대사간 황헌일(黃憲一)로 하여금 계사를 올리게 하였다. 즉시 선전관을 명하여 군졸을 보내 그 집을 포위하고 정배하게 하고, 이어 안로와 그 무리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에게 죄를 자복하라고 명하였다.”라고 하였다.-

50. 請褒貶狀啓〔原注:中宗三十三年戊戌十一月戊子。□京畿監司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廣州牧使林千孫。獄訟不決。盜賊興行。處事失當。民怨頗多。坡州牧使沈光彥。居官恬靜。守法不撓。聽理明決。訴冤者咸就。褒貶以示勸懲之意何如。

번역

광주 목사(廣州牧使) 임천손(林千孫)은 옥송(獄訟)을 결단하지 못하여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게 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적절치 못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자못 많습니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심광언(沈光彥)은 관직에 있으면서 조용하고 법을 지키는 데 흔들림이 없으며, 송사를 처리함에 분명하게 판결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이 모두 찾아오고 있습니다. 포폄(褒貶)으로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을 보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傳曰。宜加褒貶以示勸懲。光彥。其賜鄕表裏。千孫。罷黜可也。

번역

전하기를, “포폄을 더하여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 하였다. 이광언은 향표(鄕表)와 이향표(裏鄕表)를 내리고, 윤천손은 파출해야 마땅하다.

51. 進戒□主上擧動失儀啓〔原注:中宗三十四年己亥九月辛亥。□大司憲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1A

원문

今日慕華館親閱後。還宮之命。出於不意。諸事未備。卒迫動駕。非徒扈從之人。至於道路。皆不知其由。相顧惶駭。人君動靜云爲。上應於天。跬步之間。亦不可不謹。況出城外。以習武事。非擧動之小也。率爾如此。雖曰有天變。在己擧措。先失其儀。亦非所可克承天心者也。臣等隨駕目睹。不可不啓。

번역

오늘 모화관(慕華館)에서 친히 열람하신 뒤에 궁으로 돌아오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여러 가지 일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동가(動駕)를 하셨으므로, 호종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길을 가는 사람들도 모두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서로 돌아보며 황공해하였습니다. 임금의 동정은 하늘에 응하는 것이니, 걸음걸이 하나에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성 밖으로 나가서 습무(習武)하는 일은 거동이 작은 일이 아닌데 이처럼 소홀히 하셨으니, 비록 천변(天變)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에 달린 것입니다. 먼저 그 의식을 잃으신다면 또한 하늘의 마음을 잘 받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들이 수가(隨駕)하여 직접 목격하였으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문

答曰。今日慕華館試才時。適有雷震。今日乃冬節啓始之日則此乃冬雷也。可不恐懼而修省乎。聞其雷聲。而仍殿坐未安。故問于大臣而還宮。還宮後又雷動大雨。予以爲非有所失也。〔原注:憲府又啓。不允。〕

번역

답하기를, “오늘 모화관(慕華館)에서 시재(試才)할 때 마침 천둥이 쳤다. 오늘은 바로 동절(冬節)이 시작되는 날이니 이것은 겨울에 치는 우레이다. 두려워하며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우레 소리를 듣고서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온당치 못하여 대신에게 물어보고 궁으로 돌아왔다. 궁으로 돌아온 뒤에 또 천둥이 치고 큰비가 내렸으니, 내가 잘못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하였다.-원주(原註)에 “사헌부에서 또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52. 請淸白吏宋欽褒賞啓〔原注:同年己亥九月癸卯。□大司憲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1B

원문

前者擇淸白吏。各別褒賞。此實美事也。近者宋欽以年老。呈辭棄官。而有淸白過人之行。國家之所當尊尙者也。

번역

이전에 청백리(淸白吏)를 가려 특별히 포상하였으니, 이는 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근래 송흠(宋欽)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올리고 관직을 버렸는데, 청백한 행실이 남보다 뛰어났으니, 국가에서 마땅히 존숭해야 할 것입니다.

원문

答曰。宋欽以年老呈辭。故不得已從之。然其勸賞之典。不可不擧也。

번역

답하기를, “송흠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그가 권장하고 감상한 은전은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53. 慶尙鄕試作羅。請擧子,試官幷推啓。〔原注:同年己亥十月乙丑朔辛未。朝講。□上敎遣敬差官推鞫擧子。□大司憲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1C

원문

武人等頑暴無識。欲罷其榜。〔原注:時於慶尙道試武科。擧子等作羅。〕敢爲此大羅也。然鄕試官例用私情而不公。故擧子等往往懷憤而作亂也。先治擧子。後幷推試官何如。

번역

무인(武人)들은 완악하고 무식하여 그 방목을 없애려고 합니다. -원주(原註)에 “이때 경상도에서 시무과(試武科)를 행하였는데, 거자(擧子)들이 포로(布羅)를 쳤다.” 하였다.- 감히 이 큰 포로를 하였으니, 그러나 향시관(鄕試官)은 관례적으로 사정(私情)을 사용하여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자들이 왕왕 분함을 품고서 난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먼저 거자들을 다스리고 뒤에 시관까지 모두 추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答曰。擧子之作亂。實由於試官之失道。所當推之也。然罪試官而罷其榜。則恐陷於術中。姑待擧子之招辭而推之未晩也。

번역

답하기를, “거자의 난동은 실로 시관이 도리를 잃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마땅히 추궁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관을 죄주어 그 방목을 파면한다면 술수에 빠질까 염려되니 우선 거자의 공초를 기다려 추궁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54. 陳達民瘼。請恤刑政啓。〔原注:同日。□大司憲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1D, ITKC_MO_0130A_A026_032A ...

원문

今年失農尤甚。而守令等專不恤民。常時不爲救荒之備。至於飢饉荐臻。乃備草食。古人云。三年耕。餘一年之食。九年耕。餘三年之食。方今畜積無幾。公債之散在民間者。虛張其數。故若少有凶歉則民必飷飢。此乃由於侈用傷財。而不尙儉素之所致也。且每遣御史。摘奸其守令不法之事。此固美事也。然其貪汚虐民者。見罷宜矣。其間雖或愛民之吏。亦以御史所捉而見罷。非徒迎送有弊而已。見罷未久。旋卽敍用。又無懲戒之意。如此凶年。發遣御史。恐無益也。慶州府尹吳準。雖庸愚之人。爲一邑之主。而官奴突入凌辱。此頑暴之甚者也。常時以賤凌貴。固不可也。況以官奴。凌辱其邑宰乎。令敬差官推鞫則自知其爲重事也。以賤人而打士族。則全家徙邊。此律外之法。棄而不用宜矣。前者。金謹思奴子有打傷生員李友閔。其時以爲過甚而建白此法。徙謹思奴子於邊地。大明律良賤相歐條。其法不重。我國則貴賤名分甚嚴。如此人。不可不嚴治也。笞杖之刑。亦非小事。用刑之際。所當愼也。刑官等類多不知推鞫之道。而欲以威力制之。自以爲寧失於濫刑。而不致意於謹刑。臣意以爲棠陰比事。折獄之要。無不詳載。請印出頒賜。使之熟習。則折獄之際。庶有所補。

번역

올해는 농사가 심하게 흉년이 들었는데도 수령들이 전적으로 백성을 돌보지 않고 평상시에 구황(救荒)할 준비를 하지 않다가 기근이 거듭 닥치게 되어서야 비로소 초식(草食)을 마련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3년 농사지으면 1년 먹고, 9년 농사지으면 3년 먹는다.” 하였습니다. 지금 축적해 놓은 것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민간에 흩어져 있는 공채(公債)가 허장(虛張)되어 있으므로 조금만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반드시 굶주리게 됩니다. 이는 바로 사치스럽게 재물을 써서 검소함을 숭상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매번 어사(御史)를 보내어 수령의 불법을 적간(摘奸)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탐오하고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파직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사이에 혹시라도 백성을 사랑하는 관리가 있더라도 어사가 적발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니, 이는 단순히 영송(迎送)에 폐단이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파직된 지 얼마 안 되어 곧바로 서용(敍用)하니 또한 징계하는 뜻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흉년에 어사를 보내는 것은 무익할 듯합니다. 경주 부윤(慶州府尹) 오준(吳準)은 비록 용렬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 관노(官奴)가 갑자기 들어가 능욕하였으니, 이는 매우 완악하고 포학한 자입니다. 평상시에 천인이 귀인을 업신여기는 것은 참으로 안 될 일인데 더구나 관노로서 그 고을의 수령을 능욕했단 말입니까. 경차관(敬差官)으로 하여금 추국(推鞫)하게 하면 스스로 중대한 일임을 알 것입니다. 천인으로서 사족(士族)을 때리면 온 집안이 변방으로 이주하는 것이 이 율법 이외의 법이니, 버리고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난번 김근사(金謹思)의 노자(奴子)가 생원(生員) 이우민(李友閔)을 때려 다치게 하였는데, 그때 너무 심하다고 하여 이 법으로 건의하여 김근사의 노자를 변방에 이주시켰습니다. 《대명률》 양천상구조(良賤相毆條)에는 그 법이 중하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귀천과 명분이 매우 엄중하니 이런 사람은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형이나 장형도 작은 일이 아니니 형을 시행할 때에 신중해야 합니다. 형관(刑官) 등은 추국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위력으로 제압하려고 하니, 스스로 함부로 형벌을 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데는 뜻을 두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에 《당음비사(棠陰比事)》는 옥사를 판결하는 요점이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인쇄하여 반포해서 익숙하게 하게 한다면 옥사를 판결할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원문

答曰。全家徙邊之法。古無是律。而頃者權奸之所立。則議于大臣而不用。然當隨其罪狀而輕重也。刑官者以欽恤爲心。則不至於濫刑矣。今之刑官。每遇推鞫之事。期於得情。而每致傷於杖下。其間豈無冤枉之事乎。棠陰比事。斯速印出而頒布於中外。使知決訟首尾則庶無此弊也。

번역

답하기를, “온 가족이 변방으로 이배되는 법은 옛날에 이런 형률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번 권간(權奸)이 세운 것은 대신에게 의논하였으나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마땅히 그 죄의 실상에 따라 경중을 따져야 한다. 형관(刑官)이 흠휼(欽恤)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함부로 형벌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형관은 추국(推鞫)하는 일을 만날 때마다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려고 하다가 매번 장(杖) 아래에서 사람을 다치게 하니, 그 사이에 어찌 원통한 일이 없겠는가. 당음(棠陰)의 비사(比事)를 속히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해서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전말을 알게 한다면 이러한 폐단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였다.

55. 鴨綠江唐人入漁禁戢事狀啓〔原注:中宗三十七年壬寅正月甲午。平安監司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鴨綠江越邊居唐人等。解氷時攔入江中捉魚。不無仍而生釁之弊。至爲可慮。上國之人禁戢勢難。事最關重。不得擅便定奪。大臣處回議施行何如。

번역

압록강(鴨綠江) 건너편에 사는 당인(唐人)들이 얼음이 녹을 때마다 강 가운데로 들어가 고기를 잡는데, 이 때문에 인하여 생기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매우 염려할 만합니다. 상국(上國)의 사람들을 금지하기는 형세상 어려우니, 일의 중대함에 가장 관계되지만 마음대로 정해 결정할 수 없습니다. 대신께서는 의견을 모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傳曰。如啓。

번역

전(傳)에 이르기를, “아뢴 것과 같다.” 하였다.

56. 請孝友特行者旌閭狀啓〔原注:同年壬寅二月庚寅。禮曹據平安道觀察使尙某狀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2C, ITKC_MO_0130A_A026_032D

원문

平壤士官金質。年十三喪母。及其長成。慕母切哀。白衣素帶。不食肉。又孝養其父。每節獻壽。時時致祭母墳。父死後。幷造亡母神主。守廬三年。哀毀不撤。不改衣裳。不食鹽菜。蔬食水飮。小祥及四名日及每月朔望。盡誠祭奠。大祥後朔望祭祀。一如三年。孝行卓異。私奴巾金。其母得惡疾氣絶。自截其指。出血和酒飮之。燒其指骨。又和酒飮之。其母復甦而還死。孝行尤異。營奴江哲年十三歲時。其兄得惡疾。斷指飼之。使瘳其病。友愛尤篤。請賞物復戶何如。甑山縣校生元亨貞。父死後設神位。朝夕祭奠。不離喪次。不進鹽菜。蔬食水飮。不近妻孥。親執祭物。終三年後一年。母又死。依父喪禮。至誠哀毀。請幷依大典。旌門復戶何如。下于政院曰。旌門復戶。例施於父子間。而父子兄弟有異。然江哲以年少之人。於兄弟之間。友愛極至。亦可旌閭。以勵薄俗。〔原注:上命更議于三公。領議政尹敫輔,右議政尹仁鏡議曰。江哲以十三歲兒童。㦖其兄惡疾。不惜肌膚。斷指燒饋。以利其病。其友愛恩情。誠爲可嘉。此實古所未聞也。特旌門閭。以勵薄俗。上敎允當。〕

번역

평양(平壤)의 사관(士官) 김질(金質)은 나이 13세에 어머니를 여읜 뒤로 장성해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통함이 간절하여 흰 옷에 흰 띠를 두르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또 아버지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명절마다 수연(壽宴)을 베풀고 때때로 어머니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망모(亡母)의 신주까지 함께 만들어 놓고 3년 동안 상차(喪次)를 지키면서 슬픔과 애통함을 거두지 않았으며, 의상을 바꾸지도 않고 염채(鹽菜)를 먹지도 않으면서 채소와 물로만 생활하였다. 소상(小祥) 및 사명일(四名日)과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고 대상을 치른 뒤에도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 지내는 것은 3년 동안과 똑같이 하였다. 효행이 탁월하여 사노(私奴)가 두건을 금으로 꾸몄다. 그의 어머니가 악질(惡疾)을 얻어 기력이 다하자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술에 타서 마시고, 또 손가락 뼈를 태워 술에 타서 마시게 하였는데, 그 어머니가 다시 살아났다가 돌아가셨다. 효행이 더욱 기특하였다. 영노(營奴) 강철은 나이 13세 때에 그의 형이 악질을 얻자 손가락을 잘라 먹여서 병을 낫게 하였으니,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다. 상으로 정려(旌閭)해 주기를 청하니 어떠한가? 증산현(甑山縣)의 교생 원형정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 신위를 설치하고 조석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상차를 떠나지 않았으며, 염채를 먹지 않고 채소와 물로만 생활하였고, 처자식과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친히 제물을 잡았다. 3년이 지난 뒤에 어머니가 또 죽자 아버지의 상례대로 정성을 다해 애통해하였다. 대전(大典)에 따라 모두 정려해 주기를 청하니 어떠한가? 승정원에 내리기를, “정려와 복호는 부자간에 으레 시행하는 것인데 부자와 형제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강철은 나이 어린 아이로서 형제 사이에 우애가 지극하였으니 또한 정려하여 박한 풍속을 권장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원주(原注)에 “위에서 삼공에게 다시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윤임보와 우의정 윤인경이 의견을 올리기를 ‘강철은 13세의 어린아이로서 형의 악질을 위하여 자신의 살과 손가락을 아끼지 않고 잘라 먹이고 태워 먹여서 병을 낫게 하였으니, 그 우애와 은정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이는 실로 옛날에도 듣지 못했던 일입니다. 특별히 정려하여 박한 풍속을 권장하는 것은 성상의 하교가 합당합니다.’ 하였다.” -

57. 強盜殺人事發。請降□密旨啓。〔原注:明宗元年丙午十一月甲寅朔庚申。□兵曹判書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3A

원문

近見忠淸道兵使書狀。新昌境內。強盜竊發。白晝殺害士族。赤脫婦人衣服之事。至爲駭愕。朝廷不可置而不問。殺害之事。發於官庭近處。尤爲可疑。請降□密旨于兵使。與監司同議。祕密捕捉。勿使無辜橫罹何如。

번역

근래 충청도 병사의 서찰을 보니, 신창(新昌) 경내에서 강도가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대낮에 사족(士族)을 살해하고 여인의 옷을 벗겨 버린 일이 있었는데, 매우 놀랍습니다. 조정이 그냥 두고 물어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살해한 일이 관아의 뜨락 근처에서 발생하였으니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병사에게 비밀 지시를 내려 감사와 함께 의논하여 비밀리에 포착해서 무고한 사람이 횡령(橫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傳曰。啓意至當。其速降密敎于兵使。

번역

전교하기를, “아뢴 뜻이 지당하다. 속히 병사에게 비밀 교서를 내리라.” 하였다.

58. 請勿禁貿馬啓〔原注:明宗二年丁未正月甲寅朔乙亥。朝講。□特進官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馬之於國。爲用最大。今者國馬缺乏。雖有急難。禁軍鮮有騎馬。何以爲用。胡馬耐飢耐寒。宜於戰陣。唐馬馴擾。合於御乘。今若不禁其貿則庶乎有益於國矣。問諸大臣。施行何如。

번역

말은 나라에 있어 쓰임이 가장 크다. 지금 나라의 말이 부족하여 비록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금군(禁軍) 중에 말을 타는 자가 드무니, 어떻게 쓸 것인가? 오랑캐 말은 굶주림과 추위를 잘 견디므로 전장(戰場)에 적합하고 당나라 말은 길들여져서 어승(御乘)에 합당하다. 지금 만약 그 매매를 금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대신들에게 물어보고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59. 請遞右贊成啓〔原注:明宗三年戊申六月己卯朔甲辰〕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3B

원문

小臣乃迷劣庸人也。□中宗朝除授本職。被駁見遞。遭遇□聖明。再忝名器。弘化之任。豈如臣闒茸者之所堪處哉。除授之後。日夜憂懼。罔知所措。五六年來。累經喪患。心神散亂。形骸徒存。目暗耳聾。已成無用。廷府非養病之地。請速遞臣職。

번역

소신은 어리석고 못난 사람입니다. 중종조에 본직(本職)에 제수되었다가 비판을 받고 체차되었는데, 성명(聖明)을 만나 다시 명기(名器)를 맡게 되었습니다. 홍화(弘化)의 임무를 어찌 신처럼 무능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제수된 뒤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5, 6년 동안 여러 번 상을 당하여 정신이 산란해지고 형체만 남았으며 눈은 어둡고 귀는 먹어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승정원은 병을 요양하는 곳이 아니니 속히 신의 직임을 체차해 주소서.

원문

傳曰。卿仕累朝。未聞有失。其勿辭。〔原注:再辭不允。〕

번역

전교하기를, “경이 여러 조정에서 벼슬하였는데 잘못을 들은 적이 없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원주(原註)에 ‘두 번이나 사양해도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60. 再辭右贊成啓〔原注:同年戊申九月辛酉〕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3C

원문

贊成。重任也。小臣本無才德功勞。誤蒙□聖恩。叩據非分。福過災生。必然之理也。臣素患上氣邊頭痛症。比來尤劇。得釋重任。庶可將護。請遞臣職。仍賜軀命。且開賢路。以進可人。

번역

찬성은 중임(重任)입니다. 소신은 본래 재덕과 공로가 없는데 잘못 성상의 은총을 입어 분수에 넘치는 직임을 맡게 되었으니, 복이 지나치면 재앙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신은 평소 상기(上氣)와 변두통증(邊頭痛症)을 앓고 있는데 근래 더욱 심해졌습니다. 중임에서 해방된다면 몸을 보중할 수 있을 것이니, 신의 직임을 체차하고 이어 신의 목숨을 살려 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을 열어 가인(可人)을 진출시켜 주소서.

원문

傳曰。在廷宰臣。誰無風症。不可以此輕遞重職。調理以行。〔原注:再辭。不允。〕

번역

전(傳)에 이르기를, “조정의 재신(宰臣) 중에 누가 풍증이 없겠는가. 이 때문에 중한 직책을 가벼이 체차해서는 안 되니 조리하여 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원주(原注)에 ‘두 번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61. 河億水罪狀照律啓〔原注:明宗四年己酉三月乙卯。□義禁府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3D

원문

河億水罪狀。若以妄君敗常語觀之則實關綱常。非惟錄案。死有餘辜矣。凡照律必據前例。故移文相考則宗簿寺回牒內。有宗室德山令。卒哭後動樂會飮。淫姦娼類。罪杖一百。告身盡行追奪云。億水罪犯類此。故律官用此例照律。且引宥旨前事。臣心知其不可。而援例已照。故因□啓之。至爲惶恐。

번역

하억수(河億水)의 죄상을 ‘왕을 망녕되이 여기고 상도(常道)를 무너뜨렸다.’라는 말로 본다면 실로 강상에 관계되는 것이니, 녹안(錄案)에 기록된 것만으로는 죽어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율률(律律)을 적용하는 데에는 반드시 전례(前例)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상고하기 위해 이문(移文)한 종부시의 회답 첩내(回答牒內)에 ‘종실 덕산령(德山令)이 졸곡(卒哭) 뒤에 음악을 연주하고 술자리를 베풀었으며, 창류(娼類)와 음란한 짓을 하였으므로 죄로 장(杖) 100대를 치고 고신(告身)은 모두 추탈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억수의 죄가 이와 유사하기 때문에 관률(官律)에서 이 예에 의거하여 조율(照律)하였고, 또 유지(宥旨)를 내리기 전의 일을 끌어대었으니 신은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례를 원용하여 이미 조율했기 때문에 계사(啓辭)를 인하여 아뢰게 되었으니 지극히 황공합니다.

원문

答曰。德山令罪狀。似同河億水。而無妄君敗常之語。凡照律時。律官不無低仰矣。如此之類。必非一二。□祖宗朝前例廣考之。

번역

답하기를, “덕산령(德山令)의 죄상은 하억수와 같은 것 같으나 무망군이 상도(常道)를 어겼다는 말이 없으니, 율관(律官)이 조율할 때에 낮추거나 높이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이러한 부류가 반드시 한두 명만이 아닐 것이다. □조종조의 전례를 널리 상고하라.” 하였다.

62. 經筵請李賢輔,魚得江給馬啓。〔原注:同年己酉八月乙卯。□知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近聞李賢輔,魚得江皆□命召。斯二老。廉退有節槩者也。今若徵收。孰不激勵。但皆年過八十。途路且遠。私備騎從亦難。給馬上來似當。

번역

근래에 듣건대 이현보(李賢輔)와 어득강(魚得江)이 모두 명소(命召)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 두 노인은 청렴하고 절개 있는 분들입니다. 지금 만약 불러들이면 누가 격려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나이가 모두 80세가 넘고 길도 멀며 사적으로 기종(騎從)을 마련하기도 어려우니 급상차(給上車)하여 오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원문

傳于政院曰。如尙震所啓。李賢輔,魚得江上來時。給馬可也。

번역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상진(李尙震)이 아뢴 바와 같이 이현보(李賢輔)와 어득강(魚得江)이 올라올 때에 말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63. 因北虜搶奪事。請修武防邊啓。〔原注:同年己酉十一月甲戌。□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4B

원문

都叱骨,尼麻車等四姓于知介。聚兵衆搶奪穩城。兵勢熾張。恐將嘯聚諸部。恣行虜掠爲慮深。況今六鎭飢荒。軍民流亡。防禦之策。百不得一。尤可慮。下諭兵使。巡視各鎭堡。修城池。理機械。軍卒之有武才者。存撫之。將士之有智勇者。甄別之。復其雜役。優其廩食。以之固守本鎭。且禦戎之策。儲糧是上。而弓馬之才尤重。近來人不習武。凡屬軍士。有名無實。至於禁軍。亦不能彎強弓騎卜馬。如此軍卒。將何以防禦。令兵曹各別精選。四時運觀射。亦依舊擧行。是備邊之一策也。

번역

도질골(都叱骨)ㆍ니마거(尼麻車) 등 4개 성씨가 지개(知介)에 모여 군사를 모아 온성(穩城)을 약탈하였다. 군사의 형세가 크게 번져서 여러 부(部)를 불러 모아 멋대로 노략질할까 염려가 깊다. 더구나 지금 육진(六鎭)이 기근으로 군민들이 떠돌고 있어 방어하는 대책이 하나도 없으니 더욱 걱정스럽다. 병사에게 하유하여 각 진보(鎭堡)를 순시하고 성과 못을 수리하며 무기를 정비하게 하고, 무예에 재주가 있는 군졸은 보살펴 주고 장수 중에 지혜롭고 용맹한 자는 선발해 주어 잡역(雜役)에서 벗어나게 하고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본진(本鎭)을 굳건히 지키게 하라. 또 오랑캐를 막는 대책은 식량을 비축하는 것이 제일이지만 활과 말을 다루는 재주가 더욱 중요하다. 근래에 사람들이 무예를 익히지 않아 군사라고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으며, 금군(禁軍)도 강궁을 당기거나 말을 탈 줄 모른다. 이런 군졸로 어떻게 방어하겠는가. 병조로 하여금 각별히 정선(精選)하게 하고 사시(四時)에 관사(觀射)를 거행하는 것도 예전대로 시행하게 하라. 이것이 비변사의 한 가지 대책이다.

원문

答曰。如啓。

번역

답하기를, “아뢴 대로이다.” 하였다.

64. 經筵請北鎭修築長城啓〔原注:明宗五年庚戌二月丙辰。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4C

원문

北方所築長城。名雖爲城。實如土墻。桀驁之賊。輕騎馳突則如入無人之境。臣意以爲修築長城。使之固守則長驅之侮。庶得以禦矣。修築之策。亦有便宜。各邑守令,僉使,萬戶。計軍多少。分定看築。多送價布。水軍番價。亦聽願納。傭力而築。俾償其勞。可以無弊。又擇剛明淸白者。使典其任。限十年修築則何有不成。臣聞金宗瑞創立六鎭也。□世宗大王。任之專而信之篤。故專心爲國。戮力效忠。流矢落盤。略無懼色。鞏固邦基。終致百年之昇平。在今日。盡心國事者豈無其人。自□上先立其志。愼簡其人。專任而信篤。臨機善措。則北顧之憂。庶可弛矣。

번역

북방에 쌓은 장성은 이름은 성이라 하지만 실상은 토담과 같아서 사나운 적이 가벼운 기병을 타고 돌진해 오면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장성을 수축하여 굳게 지키게 하면, 장구하게 몰아오는 적의 모욕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축하는 방책에도 편리한 방법이 있으니, 각 고을의 수령, 첨사(僉使), 만호(萬戶)가 군사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나누어 맡겨서 쌓게 하고, 값으로 지급할 포(布)를 많이 보내며, 수군(水軍)의 번가(番價)도 자원하는 대로 납부하게 하여 용력(傭力)을 묶어서 성을 쌓게 함으로써 그들의 노고를 보상해 준다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또 강명하고 청백한 사람을 가려서 그 직임을 맡기고, 10년 동안 수축하도록 한다면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창설하였을 때 세종대왕께서 전적으로 맡기시고 독실히 믿으셨기 때문에 전심으로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해 충성을 바쳐 화살이 쟁반에 떨어질 정도로 대범하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며, 나라의 기반을 공고히 하여 마침내 백 년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국사에 전심하는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위에서부터 먼저 그 뜻을 세우고 사람을 신중하게 선발하여 전적으로 맡기고 독실히 믿으며 기미를 살펴 잘 조처한다면 북방의 근심이 거의 풀릴 것입니다.

65. 經筵請多造創制輪船。以便運糧啓。〔原注:同年庚戌二月庚申。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4D

원문

前者。安玹觀察嶺南。見大學衍義補遺。審究輪船之制。卽令兵使金舜皐創造輪船。構層六七。今若多造此船。使善操舟子。如意折旋。糧穀之轉運。實不難也。諸葛伐魏之日。以木牛流馬運其糧。此臨機制敵之良策也。以此創制觀之。造船之規矩。一依中原之制。有益也。

번역

이전에 안현(安玹)이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 《대학연의보유(大學衍義補遺)》를 보고 윤선(輪船)의 제도를 자세히 연구하여 즉시 병사 김순고(金舜皐)에게 명하여 윤선을 만들게 하였는데, 층을 6~7층으로 쌓았다. 지금 만약 이 배를 많이 만들어 잘 다루는 뱃사람으로 하여금 뜻대로 조종하게 한다면 양곡의 운반이 실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이 위나라를 칠 때에 목우류마(木牛流馬)를 이용해 양식을 운반하였으니, 이것은 적을 대면하여 싸울 때의 좋은 계책이다. 이처럼 처음 만든 것을 보면 배를 만드는 규구는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야 유익할 것이다.

66. 申前請修築北鎭長城啓〔原注:同年二月辛酉。□右議政□,左相沈連源,左贊成申光漢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5A

원문

咸鏡道五鎭。沿江一帶。曾築長城。而年久頹圮。故鎭將箇滿內。限尺修築。已有其法而慢不擧行。若復修築則雖有虜變。勢不得衝矣。況今軍卒單弱。尤當營築。而各鎭軍丁數少。難以抄役。南方不緊屯田。給民幷耕。治水軍及各鎭每番水軍。除出十分之一二。從便宜收其價布。入送五鎭。募民築城則北人可以得衣。南方水卒亦便於納價。一擧而有三益。應行事目。令該曹磨鍊施行何如。

번역

함경도의 5개 진(鎭)은 강을 따라 이어진 일대에 옛날에 장성을 쌓았는데, 오래되어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진장(鎭將)이 각기 안쪽의 한 치를 채우는 것을 기준으로 수축하는 법이 이미 있으나 게을러서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다시 수축한다면 비록 오랑캐가 변란을 일으키더라도 뚫고 들어올 형세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군졸이 적으니 더욱 성을 쌓아야 하는데, 각 진의 군정(軍丁) 수가 적어서 역사를 뽑아 쓰기가 어렵습니다. 남방은 긴요하지 않은 둔전(屯田)에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하고, 치수군(治水軍)과 각 진의 매번 수군(水軍)에서 10분의 1이나 2를 제하고 편의에 따라 그 값을 포(布)로 받아 5개 진으로 들여보내어 백성을 모아 성을 쌓게 한다면, 북쪽 사람은 옷을 얻을 수 있고 남방의 수졸도 값을 바치기에 편리할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이익이 있으니, 응당 시행해야 할 사목(事目)을 해당 조로 하여금 마련해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67. 經筵陳私議爲犯者。不可以法治啓。〔原注:同年二月甲辰。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5B

원문

前日引見時。外間之人好議之弊。已爲□啓達矣。古者有道之世。下無私議。自漢末多有外議。至有納錢除職。而問外議於其子者。夫外議出於天下無道之時。若使朝廷之上。君臣上下截然有紀綱。則議論不出於外矣。今者以外間私議。欲施於朝廷。此我國之大弊。然古人云。不敎而殺。謂之殃民。若不明敎。而犯此者遽治以法。固爲未安。昔唐虞三代。典謨訓誥。皆以朝廷之事。著之於書。示之於四方。且漢時。山東吏布詔令。父老扶杖往聽。使見德化也。臣意以爲使能文之人。備書其由來之弊。以曉諭中外。以矯此弊。自□上宣德音總紀綱。以激勵士氣則孰不自新革其舊染乎。

번역

전날 인견(引見)할 때에 외간(外間)의 사람들이 사사로운 의논을 좋아하는 폐단을 이미 계발하여 아뢰었습니다. 옛날 도가 있는 세상에는 아래에서 사사로운 의논이 없었는데, 한나라 말기부터 외간의 의론이 많아져서 돈을 바치고 관직을 면제받는 일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자식에게 외간의 의론을 물은 일까지 있었습니다. 대저 외간의 의론이란 천하에 도가 없는 때에 나오는 것이니, 만약 조정 위에서 군신 상하가 기강이 분명하다면 논의가 외간으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외간의 사사로운 의논을 조정에 시행하려고 하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큰 폐단입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을 백성에게 재앙을 끼치는 것이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고서도 이런 죄를 범한 자를 갑자기 법으로 다스린다면 참으로 온당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당(唐)나라와 우(虞)나라, 삼대(三代)의 《전모(典謨)》나 훈고(訓誥)는 모두 조정의 일을 책에 기록하여 사방에 보여 주었습니다. 또 한(漢)나라 때에는 산동(山東) 지방의 관리가 조령(詔令)을 반포하자 부로(父老)들이 지팡이를 짚고 가서 들었는데, 이는 덕화(德化)를 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문장(文章)에 능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폐단의 유래를 자세히 기록하여 중외(中外)에 효유함으로써 이 폐단을 바로잡게 하고, 위에서 선덕음(宣德音)을 내려 기강을 총괄하고 사기를 격려한다면 누가 스스로 옛날의 버릇을 고치지 않겠습니까.

원문

傳于政院曰。近來弊習成風。多有外議。依右議政尙震所啓。使能文人備書弊端之由。曉喩中外。〔原注:命申光漢製曉喩文〕

번역

정원에 전교하기를, “근래에 폐습이 풍조가 되어 외의(外議)가 많으니, 우의정 상진(尙震)이 아뢴 대로 문장 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폐단의 원인을 자세히 적게 해서 중외(中外)에 효유하게 하라.” 하였다.-원주(原註)에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효유문을 짓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68. 經筵陳流言謗說之弊啓〔原注:同年庚戌七月辛亥。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5D, ITKC_MO_0130A_A026_036A

원문

周公之於成王。親則叔父。義則君臣。遭流言之變。天若不爲反風則成王之惑。終難釋矣。大抵無根之說。眩亂黑白。雖父子君臣之間。亦使離間。唐虞之世。亦有巧言讒說之人。後世亦或以利言爲賢。爲人君者苟能明在我之智。洞照奸邪則奸邪不得以蔽焉。且後世之人。忠信者少。媢嫉者多。構成流言。無代無之。以我國親見之事言之。則柳仁淑見人。則自語曰。近日囂囂之說何如。此指其將易樹事也。出於自中所造之言。而□中宗大王。亦難鎭定。欲傳位東宮。頃者又有奸臣。敢爲口不可道之言而辱及於君父。不勝痛憤。周禮有造言之刑。大典,大明律。有亂言妖言之律。中原又於闕內立牌。書謗說者斬。此皆帝王之不得已爲之。而非固欲防人之口也。乃欲其勿爲妨賢病國之語也。浮薄之時。則有此流言之弊。自□上固宜洞照也。稽之於古。戰國之時。有遊說之習。漢承秦之後。政尙寬大。黎民淳厚。恥言人過。豈不爲美乎。小臣前日所啓曉喩中外之意。欲使彼人感激。懲諸旣往之咎也。或曰。人君求言則可也。雖私議。使之勿言則恐有妨於言路。其意圓滑也。然臣之意則蓋欲其勿爲私論。而務爲忠厚也。

번역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에 대해 친척으로는 숙부이고 의리로는 군신(君臣)입니다. 유언비어의 변고를 당했을 때 하늘이 바람을 돌려 주지 않았다면 성왕의 의혹을 끝내 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대저 근거 없는 말은 흑백을 어지럽혀 비록 부자나 군신 사이에도 이간질하게 합니다. 당우(唐虞) 시대에도 교묘한 말과 참소하는 말이 있었고, 후세에도 혹 이익이 되는 말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임금 된 자가 진실로 자기의 지혜를 밝히고 간사함을 환히 꿰뚫어 본다면 간사함이 가려질 수 없습니다. 또 후세 사람들은 충신은 적고 시기하는 자가 많아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직접 본 일로 말하면, 유인숙(柳仁淑)이 어떤 사람을 만나면 스스로 “요즘 떠들어 대는 말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장차 역모를 일으키려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자기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말입니다. 중종대왕께서는 또한 진정하기 어려워 동궁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셨고, 지난번에는 또 간신이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하여 군부(君父)를 욕되게 하였으니, 통분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주례》에는 조언(造言)의 형벌이 있고, 《대전(大典)》과 《대명률(大明律)》에는 난언(亂言)과 요언(妖言)에 대한 율문이 있으며, 중국에서는 또 대궐 안에 패를 세워 비방하는 말을 하는 자는 참형을 처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임금이 부득이하게 한 것이지 진실로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현인을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경박한 시대에는 이러한 유언비어의 폐단이 있으니, 위에서부터 진실로 환히 꿰뚫어야 합니다. 옛날에 상고해 보면, 전국의 시대에는 유설(遊說)하는 습속이 있었고, 한나라가 진나라를 계승한 뒤에는 정치가 관대하고 백성이 순후하여 남의 허물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소신이 지난날 아뢰어 중외에 효유(曉諭)한 뜻은 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해서 지난 잘못을 징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이 구언(求言)하는 것은 괜찮지만 비록 사사로운 의논이라도 말하지 못하게 하면 언로를 막는 데 방해가 될 듯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원만합니다. 그러나 소신의 뜻은 사사로운 논의가 되지 않게 하고 충성스럽고 후덕한 일을 힘쓰게 하려는 것입니다.

69. 陳欽敬閣規制及標書事啓〔原注:同年庚戌八月甲子。□觀象監提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臣見欽敬閣製作。極爲精巧。後世莫能及也。但行鈴之路。預爲詳察。學其矩制。若有敗毀。則改修爲當。且十二朔。分明書標。畋獵稼穡等事合於豳風七月之詩者。亦隨日書之。付標其處亦當。

번역

신이 흠경각을 보니, 지은 것이 매우 정교하여 후세에는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행령(行鈴)의 길을 미리 자세히 살피고 그 규제를 배워서 만약 무너진 곳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12개월에 나누어 분명하게 표식을 써서, 빈풍(豳風) 7월의 시에 합당한 사냥이나 농사일 등을 날짜에 따라 적어서 그곳에 붙이는 것도 마땅합니다.

70. 陳終傑等罪囚事啓〔原注:同年庚戌八月辛丑。□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6B

원문

臣以委官。推鞫先拿來人等。跟捕告變人。以滅其口。事狀昭著。而皆殞命於杖下。只一人不死。維新逆黨。近古所無。其時推鞫之事。至有不忍筆之於書者。忠義之士。餘憤未殄。必欲窮推此人。臺諫之啓當矣。其後拿來之人。見其所持公文則似乎誣人。終傑等皆援引私嫌之人。有同告變。而下人不敢擅便□啓達。自□上洞照其情而特放。凡在見聞。孰不歎服。

번역

신이 위관(委官)으로서 추국(推鞫)을 시행하여 먼저 잡아 온 사람들을 뒤따라 체포하고 고변한 사람을 죽여 입을 막았으니, 그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모두 장(杖) 아래에서 목숨을 잃고 단 한 사람만 살아남았으니, 이는 신역당(新逆黨)의 근고에 없던 일입니다. 그때 추국한 일을 차마 글로 쓰지 못할 정도였는데 충의(忠義)를 지닌 선비가 남은 분노가 다하지 않아 반드시 이 사람을 끝까지 캐내고자 하였으니, 대간이 아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뒤에 잡아 온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공문(公文)을 보니, 남을 무함한 것 같았습니다. 종걸(終傑) 등은 모두 사사로운 혐의를 끌어댄 사람으로서 고변하는 일에 동참하였는데 하인이 감히 마음대로 보고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스스로 위에서 그 실정을 살펴보고 특별히 풀어 주었으니, 이를 보고 들은 자라면 누군들 감탄하여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71. 慈殿□命復立禪敎兩宗。陳其不可意回啓。〔原注:同年庚戌十二月甲戌。□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6C

원문

民丁避役者。率多爲僧。方今軍額之縮。未必不由於此。至有盜賊被捉。僧居其半。若無統制。終必有難救之患。愚氓等聞奉恩寺僧輩特蒙恩護。妄託自□上崇佛。爲僧者漸多。□聖學高明。豈有崇信異端之慮乎。愚氓妄動。乃至如此。帝王累德。莫大於崇信異敎。臣等若發爲議論。依大典施行。則恐或有害也。

번역

민정(民丁)이 군역을 피하는 자는 대부분 승려가 되는데, 지금 군액(軍額)이 줄어든 것이 이 때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도적을 잡았을 때에 절집의 절반이 승려로 되어 있어 통제할 인원이 없으면 끝내 반드시 구제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봉은사(奉恩寺)의 승려들이 특별히 은혜를 입어 보호받는다는 말을 듣고서, 함부로 자청하여 불법을 숭상하는 자가 되려고 하여 승려가 되는 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성인(聖人)의 학문이 고명하시니 어찌 이단(異端)을 숭신할 염려가 있겠습니까마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왕(帝王)의 누적(累積)된 덕은 이교(異敎)를 숭신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신들이 만약 논의를 제기하여 대전(大典)대로 시행한다면 혹 해가 있을 듯합니다.

원문

史臣曰。□上性聰敏。學問日就。而□慈殿導之以異端之事。禁儒上寺。立標齋刹。仁壽之役方興。而兩宗之命又降。人人莫不憂其終如何也。聽國政。輔□幼主。上違□中廟斥邪之志。下失父母輔治之道。可勝痛哉。

번역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 상(上)은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는데, □ 자전(慈殿)이 이단(異端)의 일을 가르쳐 유생들을 금지시키고 절에 표석을 세우게 하였다. 인수(仁壽)의 공사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 두 종실의 명을 또 내리니, 사람마다 끝내 어찌 될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국정을 듣고 어린 임금을 보필해야 하는데 상은 □ 중묘(中廟)가 사설(邪說)을 배척한 뜻을 어기고, 아래로는 부모의 보좌하는 도리를 잃었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하였다.

72. 因兩宗復設事被人疑言辭職啓〔原注:明宗六年辛亥正月辛丑。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6D, ITKC_MO_0130A_A026_037A

원문

去十二月。自□上憂賊僧滋蔓。以復設兩宗下敎。仍命承旨。依大典施行事捧承傳。臣雖驚憫。不敢迫切。略擧異敎之非以啓之。自後疑言遂播。謂臣有勸崇之意。臣之平昔所願欲者。不至於爲惡。一朝得此名。慙懼與俱。惘然忘言者久矣。第恐所啓之誤。謄本啓辭而觀之則此其回啓之辭〔原注:上篇啓辭〕也。臣則不能無私。故不知此言之必涉於勸行異敎也。妄料啓辭不可如臺諫之直斥。故其日回啓。摘取攻乎異端斯害也已之害字。以諷微衷未始有勸行之意焉。況臣曾與諸宰相語及僧徒事。輒云義當力諍。逮承□下敎。反覆而勸行。非人所可忍爲。然其日不能如救焚拯溺而極言敢諫。此則昧於引君之道。失正救之義。雖責免示譴。亦不足懲臣之罪。若夫苟悅逢順則非臣之本心。近來箚中。多指臣過。〔原注:某以事詣闕。是日。有復兩宗之命。人疑其不爲力諍。〕臣將何顏復居百僚之長。行呼唱而辱名器哉。伏願□聖明。特憐臣冒據之難。亟遞臣職。

번역

지난 12월에 □에서 상이 우려하는 적승(賊僧)의 번성으로 양종을 복설하라는 하교를 내리시고, 이어 승지에게 대전대로 시행하라고 명한 것을 봉승(捧承)하여 전하게 하셨습니다. 신은 비록 놀랍고 안타까웠으나 감히 핍박할 수 없어서 이교의 잘못을 대략 거론하여 아뢰었습니다. 그 뒤로 의심스러운 말이 마침내 퍼져서 신이 이교를 권장하고 추숭하는 뜻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평소에 바라고 원했던 것은 악한 짓을 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 것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런 명예를 얻게 되니 부끄럽고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한참 동안 말을 잊었습니다. 다만 아뢴 내용이 잘못되었을까 염려되어 계사(啓辭)의 등본을 보니 이것은 회계하는 말이었습니다.-원주(原注)에 “위쪽 편지의 계사이다.”라고 하였다.-신이 사심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말이 반드시 이교를 권장하고 행하도록 한다는 데에 관련될 줄 몰랐습니다. 망녕되이 생각하기를 ‘계사는 대간처럼 곧장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날 회계할 때에 이단(異端)을 공격하는 말에서 ‘사해(斯害)’라는 글자를 취하여 은미하게 풍자하였으니, 권장하고 행하도록 하려는 뜻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신은 일찍이 여러 재상과 승도(僧徒)의 일을 논할 때마다 의리로 볼 때 힘써 간쟁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서 양종을 복설하라는 하교를 받들고서 번복하여 권장하고 행하도록 하는 것은 사람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 불에 타는 사람을 구해주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듯이 극언(極言)으로 감히 간쟁하지 못한 것은 군자를 인용하는 도리에 어두워 바른길로 인도해 주는 의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책임을 면하고 견책을 보여 주시더라도 신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만약 진실로 기쁘게 순종한다면 이는 신의 본심이 아닙니다. 근래 차자에서 신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많습니다.-원주에 “모(某)가 일 때문에 대궐에 나아갔는데, 이날 양종을 복설하라는 명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가 힘써 간쟁하지 않았다고 의심하였다.”라고 하였다.-신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백관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아서 호창(呼唱)을 행하며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 성명께서는 신이 무릅쓰고 직임을 맡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어 속히 신의 직임을 체차해 주소서.”

원문

答曰。人心囂囂故如是耳。不可以人言辭職也。勿辭。

번역

답하기를, “인심이 시끄럽기 때문에 이와 같을 뿐이니, 남의 말로 인하여 사직해서는 안 된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73. 再辭右議政啓〔原注:同年辛亥正月甲辰。□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7B

원문

臣素多疾病。虛羸轉劇。非一二旬所可調理。古人亦言一日不職。不可一日在位。且兩宗之設。乃吾道異端消長之幾。爲大臣者義當力爭。以期回天。臣前日承敎。略達微衷。將以是塞責。尤爲無狀。請□命遞臣職。〔原注:□不允。〕

번역

신은 본래 질병이 많아 허약한 증세가 점점 심해져 한두 열흘이면 조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도 “하루라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하루도 자리에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두 종묘의 설치는 바로 우리 도(道)의 이단이 소멸하고 성장하는 기미이니 대신으로서 의당 힘껏 간쟁하여 천심을 돌리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신은 전일에 하교를 받고 대략 미천한 충정을 진달하였는데, 장차 이것으로 책임을 때우려 한다면 더욱 형편없습니다. 신의 직임을 체차하소서.-원주(原註)에 □는 윤허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74. 禪敎兩宗復設不可事。率政府,六卿,判尹等啓。〔原注:同年辛亥正月己丑。□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7C

원문

殿下自卽位以來。勤御□經筵。學問日就高明。中外臣民。翹首跂足。相望至治。而仁壽宮之擧。群情皆疑。然尙保□聖學高明。必不至於崇信邪敎也。今者復兩宗之命。出於不意。擧國之人心。罔不失望。臺諫侍從。至于儒生。伏闕爭論。已逾旬月。□殿下尙不覺悟。牢執不回。物情汹汹。朝野解體。君依於國。國依於民。民心一散。收之甚難。伏願快從公論。以安衆心。

번역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경연(經筵)에 부지런히 나오시어 학문이 날로 고명해지니, 중외의 신민들이 목을 빼고 발꿈치를 들고서 서로 지극한 다스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인수궁(仁壽宮)의 거조는 뭇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성학(聖學)이 고명함을 보존하고 계시니, 필시 사교를 숭신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양종을 복위하라는 명은 뜻밖에서 나왔으므로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실망하였고, 대간과 시종 및 유생들이 궁궐에 엎드려 논쟁한 지 이미 열흘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서 고집을 굳게 지키시어 돌이키지 않으시니, 여론이 거세어 조정과 재야가 해체되었습니다.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데, 민심이 한 번 흩어지면 수습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삼가 바라건대 공론을 시원스레 따라 뭇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소서.

원문

答曰。□祖宗朝雖闢異端。不廢此法者。有意存焉。廢朝亂政時廢之。其後百弊生焉。至於僧徒滋蔓。或爲盜賊。弊將難救。故今復此法。欲救一分之弊耳。以此疑上之崇信則未可知也。不允。

번역

답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비록 이단을 배척하였으나 이 법을 폐지하지 않은 것은 뜻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조정이 혼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울 때에는 이를 폐지하였는데, 그 뒤로 온갖 폐단이 생겨났고 승도(僧徒)가 번식하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으니, 폐단을 장차 구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제 이 법을 회복하여 조금이나마 폐단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의심하는 것은 윗사람을 숭상하고 믿는 것이니, 그럴지는 알 수 없다.” 하였다.-부윤(不允)하였다.-

75. 兩宗復設不可事。率政府六曹東西班二品以上再啓。〔原注:同年辛亥正月壬寅。□右議政,左相沈連源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7D, ITKC_MO_0130A_A026_038A ...

원문

昨蒙□聖敎曰。燕山朝以亂政廢兩宗。而□中廟初年。始欲復之。因大臣動搖民心之語。遂廢而不復。□中廟非不知□祖宗之法。而因燕山之廢而不復者何也。此實□祖宗之疵政。燕山因亂政而廢之。然其廢之者。一善也。□中廟明知佛敎之爲邪。能卓然不惑於禍福之說。故因其廢而不復之。□殿下以□中廟反正之政。猶不若燕山之亂政。而必欲復其所廢者耶。□中廟不廢燕山之一善。而□殿下必廢□中廟卓越百王之善政耶。噫。□中廟一時之臣。能導君於無過之地。致之於百王之上。而臣等獨陷君於有過之地。貽譏於萬世之下乎。□中廟之初政。異於□殿下之初政也。□中廟繼統於大亂後。一國之人。如出於膏火。如解其倒懸。尙慮人心之動搖。夫人心之動搖。慘於敵國。不可不爲之懼也。□殿下初年。奸臣構逆。亂民繼起。迪屢而不靖。其視□中廟之初政爲何如也。□殿下猶不恤臣等之忠言。以兩宗之復。足以鎭人心。袪百弊。此臣等之所以寒心也。□聖敎又曰。此法一廢。百弊俱生。所謂百弊者何事耶。惟慮僧徒之滋蔓。欲崇其敎而止之。正所謂抱薪而救火者也。至於軍丁之減縮。臣等之罪而有司之責也。夫堯舜。聖人也。尙須弼直之言。□殿下沖年嗣服。德化未孚。而必欲惟予言而罔予違。上拂天心。下失人望。上拂天心。故白虹貫日。霧塞地震。以示陰盛之變。下失人望。故儒士言之。臺諫言之。侍從言之。宰臣言之。擧國汹汹。而□殿下邈然不察。此臣等之所以痛憫而流涕者也。至以爲若以人言改之。初豈發此言也。是孔子所謂一言喪邦之歸。而非大舜舍己從人之意也。伏願亟從公論。以快人心。

번역

어제 성상께서 “연산조(燕山朝)는 난정(亂政)으로 양종(兩宗)을 폐지하였는데, □ 중묘(中廟) 초년에 비로소 복구하려고 하다가 대신이 민심을 동요시킨 말로 인하여 마침내 폐지하고 다시 복구하지 않았다. □ 중묘가 □ 조종의 법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연산조가 폐지한 것을 인하여 다시 복구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실로 □ 조종의 잘못된 정사이다. 연산조는 난정으로 인해 폐지하였지만, 그 폐지한 것이 하나의 선(善)이었다. □ 중묘는 불교가 사설(邪說)인 것을 분명히 알고 화복(禍福)의 설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연산조가 폐지한 것을 인하여 다시 복구하지 않은 것이다. □ 전하께서는 □ 중묘이신 분이 반정(反正)하신 정사도 오히려 연산조의 난정과 같지 않으신데, 반드시 폐지된 것을 복구하려고 하시는가? □ 중묘께서 연산조의 한 가지 선을 폐지하지 않았는데, □ 전하께서는 반드시 □ 중묘의 탁월한 선정을 폐지하시려는 것인가. 아, □ 중묘의 일시 신(一時臣)은 능히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여 백왕의 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신들만은 유독 임금을 허물이 있는 곳에 빠뜨려 만세에 비방을 남기게 하는 것입니까. □ 중묘(中廟) 초기의 정치는 □ 전하 초기의 정치와 다릅니다. □ 중묘께서는 대란 후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기름 속에 불이 붙은 듯하고 거꾸로 매달린 듯하여, 오히려 인심의 동요를 염려하였습니다. 임금의 마음이 동요하는 것은 적국에 참혹한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전하 초년에 간신이 역모를 꾸미고 난민이 계속 일어나서 여러 번 타이르어도 진정되지 않았으니, □ 중묘 초기의 정치와 비교하면 어떠합니까. □ 전하께서는 오히려 신들의 충언을 아끼지 않으시어 양종(兩宗)을 회복하는 것으로 인심을 안정시키고 온갖 폐단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한심하게 여긴 것입니다. □ 성상의 하교에 또 이르기를, 이 법을 한번 폐한다면…… 온갖 폐단이 함께 생겨나고 있으니, 이른바 온갖 폐단이란 무슨 일입니까. 오직 승도(僧徒)가 번식하는 것을 염려하여 그 가르침을 높여서 막으려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땔나무를 안고 불을 끄는 격입니다. 군정(軍丁)이 줄어든 것은 신들의 죄이고 유사(有司)의 책임입니다. 요순은 성인인데도 오히려 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젊은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덕화가 미치지 못하였는데, 반드시 나의 말만 따르고 내 말을 어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위로는 천심(天心)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인망(人望)을 잃으셨습니다. 위로 천심을 거스리시니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안개가 땅을 뒤덮는 등 음기가 성한 변고가 나타났으며, 아래로 인망을 잃으시니 유사(儒士), 대간(臺諫), 시종신(侍從臣), 재신(宰臣)이 모두 거론하여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아득히 살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통분하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입니다. 심지어 남의 말을 듣고 고치시기를 바랄 정도입니다. 애당초 어찌 이런 말을 하셨습니까. 이는 공자(孔子)가 이른바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치고 돌아간다.”라고 한 것이지, 대순(大舜)이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공론을 따라 인심을 시원하게 하소서.

원문

答曰。非爲無端而欲復此法也。僧徒滋蔓。良丁日縮。故欲矯一分之弊。非惑於異敎而崇奉之也。

번역

답하기를, “무단하게 이 법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승도가 늘어나고 양인(良人)이 날로 줄어들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지, 이교에 미혹되어 숭상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76. 兩宗勿復事。率百官三啓〔原注:同年辛亥正月庚戌。□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勿復兩宗·禪科。

번역

양종(兩宗)과 선과(禪科)를 다시 행하지 말라.

77. 兩宗勿復事。率百官四啓。〔原注:同年辛亥正月乙卯。□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8C

원문

勿復兩宗禪科答曰。予之不惑於異敎。大臣皆知之。宰臣累日論執。百事皆廢。深爲未安。□慈殿以此至於廢膳。予意尤爲未安。臺諫侍從。論之已極。宰臣則廢政。亦不可不慮。此事決不可改。不允。

번역

두 종파(宗派)의 선과(禪科)에 답하지 말라. 내가 이교(異敎)에 대해 의혹이 없다는 것을 대신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재신(宰臣)이 여러 날을 논집하여 모든 일이 폐지되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 □ 자전께서 이 때문에 폐선(廢膳)하기까지 하셨으니 내 생각에 더욱 온당치 못하다. 대간과 시종은 이미 극진히 논하였고, 재신은 정사를 폐하는 것도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 일은 결코 고칠 수 없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원문

史臣曰。□慈殿於□大殿。有三從之道。無專制之義。自□上每以□慈殿爲辭。已爲憫鬱。今又以廢膳未安。欲抑止群情。□上意所在。亦未可知也。果若廢膳。猶當以理力陳。豈可以知其不可而牽制強從。誤國家大事也。

번역

사신이 말하기를, “자전(慈殿)께서는 대전(大殿)을 위하여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고 전제(專制)의 뜻은 없으시니, 자상하신 성상께서 매양 자전을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민망하고 답답한데, 지금 또 폐선이 온당치 않다고 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억제하려고 하시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과연 폐선하는 것이 옳다면 그래도 이치로써 힘써 진달해야 할 것인데, 어찌 그 불가함을 알고서도 견제하고 강제로 따르게 하여 국가의 대사를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78. 辭右議政啓〔原注:同年辛亥三月庚戌〕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臣素不愼疾。所患非一。心熱耳聾。至於聯席之語。不能審聽。無異揭置土木。況臣心地愚妄。言計多誤。動輒被論。而爵位依舊。無地自容。中夜自省。汗出沾背。況今災變之作。皆由臣無功伴食之所致。貪寵無恥之罪。固難逃於公論。請速命遞。求賢作相。以補盛治。則不惟小臣之幸。實國家之福也。

번역

신이 평소에 질병을 조심하지 않아 앓고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심열(心熱)과 이롱(耳聾)으로 인해 연석(聯席)에서 하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니, 이는 마치 토목(土木)을 걸어 놓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구나 신의 심지가 어리석고 망녕되어 말하고 계책하는 데에 잘못이 많아 행동할 때마다 번번이 논박을 받는데도 작위는 그대로이니 스스로 용납될 곳이 없습니다. 한밤중에 스스로 반성하다 보면 땀이 등까지 흥건해집니다. 더구나 지금 재변(災變)이 일어난 것은 모두 신이 공로 없이 녹봉만 축내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총애를 탐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죄는 진실로 공론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속히 체차하라고 명하시고 어진 사람을 구하여 정승으로 삼아 성대한 치세를 보좌하게 하신다면, 이는 소신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실로 국가의 복이 될 것입니다.

원문

答曰。人之一身。孰無風疾乎。卿之所失。予實不知。災變迭作。由予不德。豈由於卿。其勿辭。〔原注:再啓。□不允。〕

번역

답하기를, “사람의 한 몸에 누가 풍질이 없겠는가. 경이 잘못한 것은 내가 실로 모르겠다. 재변(災變)이 번갈아 일어나는 것은 나의 덕이 부족해서이지 어찌 경에게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원주에 “두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79. 經筵請推鞫普雨啓。〔原注:同年辛亥四月乙亥。夕講。□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9A, ITKC_MO_0130A_A026_039B

원문

凡干亂逆之事。其罪不容於天地。故虛實間不得已推之。可以得其情也。不可置而不問。普雨隱匿逆瑠之事。已現於所聞。不得不推也。弘文館所啓當矣。若以不緊之事。而論臺諫之非則謂之騷擾可也。此事則實□宗社之大罪。故論臺諫之不卽來啓。豈可徒然諉諸弊習。而反以玉堂爲非乎。若一切以駁臺諫爲非。則亦不無後弊。憲府則來啓。而諫院則非連日仕進之司。故未及聞之。□國忌後將欲來啓之際。弘文館駁之。此皆小失。玉堂非欲遞臺諫也。欲責備勸勉而然也。請令臺諫就職。

번역

무릇 난역(亂逆)에 관계된 일은 그 죄가 천지에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허실 간에 부득이 추론하여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으니, 그대로 두고 묻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우은(雨隱)과 역류(逆瑠)의 일을 두루 숨긴 것이 이미 들리는 바에서 드러났으니, 추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문관에서 아뢴 것은 마땅합니다. 만약 긴요하지 않은 일로 대간이 잘못을 논한 것을 가지고 소란스럽게 한다고 말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실로 종묘사직에 큰 죄가 되기 때문에, 대간이 즉시 와서 아뢰지 않는 것을 어찌 한갓 폐습으로 돌리고 도리어 옥당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일체 대간의 잘못을 논박한다면 또한 뒷날의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사헌부는 와서 아뢰었으나, 사간원은 연일 출사하는 관사가 아니기 때문에 미처 듣지 못하였고, 국기(國忌)가 지난 뒤에 장차 와서 아뢰려고 할 때 홍문관에서 논박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작은 잘못이니, 옥당이 대간을 체차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완비하고 권면하기를 요구하여 그런 것입니다. 대간으로 하여금 직임에 나아오게 하소서.

원문

答曰。近來人心士習皆不正。而經席之上。疏箚之中。多發無根之言。雖曰山僧。是亦民也。豈可以浮言罪之乎。玉堂之駁臺諫。亦甚騷擾矣。大臣雖不啓之。自上亦欲矯此弊。故強令就職也。

번역

답하기를, “근래 인심과 선비의 습속이 모두 바르지 못하여 경연 자리에서나 소차(疏箚)에서 근거 없는 말을 많이 발설하고 있다. 비록 산승이라 해도 이 또한 백성인데 어찌 뜬소문으로 죄를 주겠는가. 옥당이 대간을 논박하는 것도 매우 소란스럽다. 대신이 아뢰지 않더라도 위에서도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므로 억지로 직임에 나가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80. 請疏決冤獄啓〔原注:同年辛亥五月壬辰。□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獄訟之間。冤枉必多。亦足以傷和召災。令中外官吏。凡獄囚經年久滯者。情涉冤枉者。一切審理。又事干疑獄者。具由啓聞。廣議疏決。

번역

옥송(獄訟)하는 사이에 억울한 일이 반드시 많게 되니, 또한 화기를 손상하고 재앙을 부르기에 충분하다. 중외의 관리는 모든 죄수 중에서 해를 넘겨 오래도록 체류하고 있는 자와 정상이 억울한 자는 일체 자세히 심리(審理)하고, 또 의심스러운 사건에 관계된 죄수는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여 널리 의논해서 소결(疏決)하라.

원문

答曰。如啓。

번역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81. 請停□大妃拜陵啓〔原注:同年辛亥八月庚申。右議政,左議政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9C

원문

拜陵事。□先王朝未嘗輕擧也。況王后上陵。於禮無文。丙午拜陵。則國恤三年之內。不勝哀痛之情而爲之矣。禮文所無之事。豈容再擧乎。請停之。

번역

배릉(拜陵)하는 일은 선왕조에서 가벼이 거행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왕후를 능에 올리는 것은 예문(禮文)에 근거가 없는데, 병오년에 배릉을 한 것은 국상 3년 안에 애통한 심정을 견디지 못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문에 없는 일을 어찌 다시 거행할 수 있겠습니까. 중지하소서.

원문

答曰。王后拜陵。雖云禮文所無。罔極之情。豈有久近乎。不允。

번역

답하기를, “왕후가 능에 전배하는 것은 비록 예문에 없다고는 하지만 망극한 정이 어찌 오래되거나 가까운 데에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82. 因災警請□中宮殿幸行減饋啓。〔原注:同年辛亥九月辛卯。□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39D

원문

去夜災變。〔原注:雷電暴發〕至爲警懼。大抵天失其度。人爲感之。如臣庸劣。居百僚之上。不能燮理故也。自□上豈有過擧乎。今□中宮殿幸行。乃歸寧大禮。未敢請停。但宗宰供饋。裁減其數。以示警懼之意。答曰。中宮幸行。亦以爲未安而欲停之。日已迫矣。而府院君〔原注:沈鋼〕家。凡事已備。不能停止。宗宰供饋之物亦已備。何必裁減乎。

번역

지난밤에 재변(災變)이 있었는데, 원주에는 ‘뇌전이 갑자기 발생하였다.’라고 하였다. 매우 놀랍고 두려웠다. 대체로 하늘이 법도를 잃으면 사람은 그것을 감응하는 것이니, 신처럼 용렬한 자가 백관의 위에 있으면서 잘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건대 어찌 잘못된 일이 있었겠는가. 지금 중궁전(中宮殿)의 행행(幸行)은 바로 귀령(歸寧)하는 큰 예식이라 감히 정지하기를 청할 수 없었다. 다만 종재(宗宰)에게 제공하는 음식물은 그 수를 줄여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보이겠다고 답하니, 답하기를 “중궁의 행행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 정지하려고 하였으나 날짜가 이미 임박하였고 부원군(府院君)- 원주에는 ‘심강(沈鋼)’이라고 하였다. -집에 모든 일이 이미 준비되어 중지할 수 없으며, 종재에게 제공하는 음식물도 이미 준비되었으니 어찌 줄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83. 因都民怨訴。請楮貨施行寬限啓。〔原注:同年辛亥九月癸丑。□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0A

원문

米布者。衣食之資。用之於賣買。日就耗盡。故以楮貨爲幣而行之者。不欲傷民衣食之資。而出於救弊不得已之策也。今朝市廛之人。幾至五六百。遮道呼怨於臣曰。楮貨無賴於朝夕之急。而使之行用如此則四方米布。無路至京而京城之人。將有餓死之患矣。臣竊思之。其言亦似有理。然臣等之意。亦非欲專依於此而廢其米布也。不過以無用爲有用。以補米布之不足。而通一國之有無而已。今司贍寺所藏楮貨。厥數不多。雖散之民間。豈能家裕而戶給乎。且戶曹施行之期限甚迫。是以。民滋不悅。第寬其限。以觀民情何如。

번역

쌀과 베는 의식(衣食)의 밑천인데, 매매에 사용하면 날로 줄어들기 때문에 저화(楮貨)를 화폐로 삼아 유통한 것은 백성의 의식의 밑천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것이고 폐단을 구제하기 위한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조시전(朝市廛)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5, 6백 명이나 되어 길을 막고 신에게 원망을 쏟아 대기를 “저화는 당장 급한 일에는 쓸모가 없는데 이렇게 쓰게 한다면 사방의 쌀과 베가 서울에 이르지 못할 것이고 서울 사람들은 장차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그들의 말도 이치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뜻도 오로지 이것에만 의존하여 쌀과 베를 폐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있게 하여 부족한 쌀과 베를 보충하고 온 나라의 유무(有無)를 통일하고자 할 뿐입니다. 지금 사섬시(司贍寺)에 저장된 저화는 그 수량이 많지 않으니, 비록 민간에 뿌린다 하더라도 어찌 집집마다 넉넉하게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또 호조에서 시행하는 기한이 매우 촉박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더욱 불쾌해합니다. 다만 그 기한을 늦추어 민정(民情)이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84. 儒生獄事。使內官參鞫不可意啓。〔原注:同年辛亥十一月癸丑。□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0B, ITKC_MO_0130A_A026_040C

원문

趙應奎事。非徒臺諫侍從書啓。臣等亦嘗啓之。若無大關。豈爲一狂童。如是煩瀆乎。凡帝王鞫人。宜付有司。豈可令內侍參之。此固□祖宗朝所無之事。一啓其端。終必有宦寺干政之漸。況庶獄罔敢攸知。文王之美德乎。自□上於此一事。旣於外方。推考定罪。又拿致禁府。初欲驗其傷處。卒據其自明之招。今又移文更覈而照律加罪。無乃已甚乎。凡四方斷獄。罪不稱情者。亦多有之。而自□上法文王罔敢知之大德。而未嘗綜核於其間。獨此狂儒歐僧之事。累軫□聖念。廷臣則固知□上意之不在於護僧而出於好生。外方聞者必曰。儒生打僧被囚。罪至不測云爾則僧徒日橫。士氣日喪。臣在輔弼之地。見如此累德之擧。不敢退去而來啓。

번역

조응규의 일은 대간과 시종이 서계(書啓)한 것뿐만이 아니라 신들도 일찍이 아뢰었습니다. 만약 크게 관계되는 일이 없었다면 어찌 한 미친 아이 때문에 이처럼 번거롭게 하였겠습니까. 모든 제왕(帝王)이 사람을 국문할 때에는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맡겨야지 어찌 내시가 참여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조종조(祖宗朝)에 없던 일입니다. 한 번 그 단서를 아뢰면 끝내 반드시 환관이 정사에 간여하는 조짐이 있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문왕(文王)의 아름다운 덕을 망측하게도 알지 못하고서 외방에서 추고하여 죄를 정한 데다 또 의금부로 잡아다 처음에는 상처를 확인하려고 하다가 마침내 자명(自明)하는 공초에 근거하였으며, 지금 또 이문(移文)하여 다시 조사해서 조율(照律)하여 죄를 더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사방의 옥사(獄事)를 결단할 때에 죄가 정당하지 않은 경우가 또한 많았는데, 문왕의 법을 망측하게도 알지 못하고서 그 사이에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유독 이 미친 유생과 승려의 일로 성상의 심회를 여러 번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조정 신하들은 진실로 성상의 뜻이 승려를 보호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방에서 듣는 자들은 반드시 ‘유생이 승려를 때리다가 갇힌 죄가 망측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승도(僧徒)가 날마다 기세등등하고 사기(士氣)가 날로 떨어질 것입니다. 신은 보필하는 처지에서 이처럼 덕을 해치는 일을 보고서 감히 물러나 가지 못하고 와서 아룁니다.

원문

答曰。今人心不畏國法。不計生死。殘傷人物。故欲矯此弊而已。內官非以己事而爲之。持公文付有司而推之。見白川招案及應奎招辭則可知矣。

번역

답하기를, “지금 사람들의 마음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사를 따지지 않아서 인물을 잔혹하게 해치고 있으므로 이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일 뿐이다. 내관은 자기 일로 행한 것이 아니라 공문(公文)을 가지고 유사에게 주어 추문하게 한 것이다. 백천의 공초와 윤응규의 공초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85. 帝京使行絶勿齎物通貿啓〔原注:明宗七年壬子四月癸丑朔甲子。□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0D

원문

我國使臣赴帝京者。到玉河關。門禁甚嚴。此自□祖宗以來所未聞也。非徒以早牌晩牌出入於辰申兩時。一似山海關之事。至於墻上設棘。圍如囚㺚子。此無他。門牌館夫之輩。以物貨潛相貿賣。故牙子不得專利。遂訴於提督主事曰。門禁不嚴則朝鮮人出入自恣。若事泄則非徒吾身有禍。其責亦及於主事。內實陰阻門牌館夫之潛貿。而爲專利之計耳。主事不知其情而反惑之。嚴禁如此。我國之人。雖訴於禮部。使之勿禁。而旋卽禁之。出入皆搜探。其爲慙愧。孰大於此。始由我國齎物貨通貿之故也。請自今以後。絶勿爲之。

번역

우리나라의 사신이 중국에 갈 때 옥하관(玉河關)에 이르면 문지기가 매우 엄격하니, 이는 우리 조종조(祖宗朝) 이후로 들어 보지 못한 일입니다. 다만 진시(辰時)와 신시(申時) 두 번만 출입하는 것이 산해관(山海關)의 일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담장 위에 가시를 설치하고 성가퀴를 둘러 마치 죄수를 가두듯 하니, 이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문지기와 관부(館夫)들이 물건을 몰래 서로 사고팔기 때문에 아자(牙子)가 독차지할 수 없어서 마침내 제독(提督)과 주사(主事)에게 호소하기를, “문지기가 엄격하지 않으면 조선 사람이 마음대로 출입하여 만일 일이 새어 나간다면 내 몸에 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이 또한 주사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실상은 문지기와 관부가 몰래 사고팔기를 방해하고 독차지할 계책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주사는 그 정상을 모르고 도리어 의심하여 이와 같이 엄히 금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록 예부(禮部)에 호소하여 금하지 말게 하였으나 곧바로 금지하였고, 출입할 때마다 모두 수색하고 조사하니, 그 부끄러움이 무엇보다 큽니다. 이는 처음부터 우리나라에서 물건을 가지고 가서 중국과 통상하는 일로 말미암은 것이니, 앞으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문

答曰。如啓。

번역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86. 辭左議政啓〔原注:明宗八年癸丑正月戊寅朔乙巳。□召對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3B, ITKC_MO_0130A_A026_043C

원문

臣本愚妄。無小善可取。猥荷謬恩。久忝重地。衰朽日催。疾病日加。物理人事。自可知也。頃者除夕元朝。宰相咸詣闕庭。臣未隨行。客使押宴。未進合座。議事亦不參。廢職已過旬朔。寵祿自如。非才處高位不祥。不事食祿爲恥甚。竊自料君臣間名分雖嚴。與父子間情誼惟均。不隱不欺。臣子之道也。仁恕保全。君父之德也。然則臣情可愬。臣職可辭。今臣非獨疾病作祟。又多過誤。不稱台職。固非一二。臣少孤陋。惟事狂妄。長來趨向不正。喜談老莊之說。得罪於名敎者多。況於在家。持身無法。所行皆違於古道。人子之奉先儀節。具載禮經。小臣則朔望不參。薦禮累缺。或拘俗忌。至廢四仲之享。親忌是終身之喪。有尊客至。強與說話。有時取酒療病。或至於變貌。皆非愼修之道。古人有身爲宰相而無田園者。臣則爲子孫或營之。古人有不犯秋毫者。臣於故舊饋遺。人非貧瘠。物非干請則不却。古人有人不敢干以私者。臣則被人哀鳴。意不勝情則勢雖非便。或冒煩而救。旣而悔之。旋復如此。初無忌憚也。事多類此。餘又何觀。抑又聞宰相。須用讀書人。斯言最切治體。臣於經史。涉獵不多。縱有些少聞見。善忘愈甚。一掩書卷。都不省了。議大事決大疑。何據而能之。無行檢如彼。無才識又如此。是果合於議政者乎。今天之示異。無月不有。豈非尸素如臣濫蒙不世之寵而致然也。伏願審察微情。亟遞不疑。〔原注:按史註曰。右議政尹漑輕狠自用。某不自安。托老病而辭。〕

번역

신은 본래 어리석고 망녕되어 취할 만한 작은 선도 없는데, 외람되이 잘못된 은혜를 입어 오래도록 중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쇠하고 늙는 것은 날로 재촉되고 질병은 날로 더해지니, 사물의 이치와 사람의 일은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 제석(除夕)과 원조(元朝)에 재상들이 모두 대궐 뜰에 나아갔는데 신은 따라가지 않았고, 객사(客使)가 연회를 주관하여 합좌(合座)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의사(議事)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직무를 폐한 지 이미 열흘이 넘었는데도 총애와 녹봉은 그대로이니, 재주 없는 자가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불상합니다. 녹을 먹지 않는 것이 매우 부끄럽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군신 간의 명분은 비록 엄하지만 부자간의 정의는 오직 균등하니, 숨기지도 속이지도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고 인자하고 너그러워 보전해 주는 것이 임금의 덕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심정은 고할 만하고 신의 직무는 사양할 만합니다. 지금 신이 질병으로 인한 문제뿐만 아니라 또 허물이 많아 재상의 직책에 걸맞지 않은 것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은 어릴 때부터 고루하여 오직 망녕되고 거친 짓을 일삼았습니다. 오래도록 벼슬살이를 하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노장(老莊)의 설을 즐겨 말하여 명교(名敎)에 죄를 지은 자가 많습니다. 더구나 집안에서 몸가짐이 법도에 어긋나서 행하는 일이 모두 옛 도리에 위배됩니다. 자식이 선조에게 예를 올리는 의절(儀節)은 예경(禮經)에 갖추어져 있는데, 소신은 삭망제(朔望祭)에 참석하지 않고 천례(薦禮)를 누락하였으며, 혹 세속의 기일(忌日)을 구애하여 사중(四仲)의 제사를 폐하기도 하였습니다. 친척의 기일은 평생토록 지켜야 하는 상(喪)인데도 손님이 오면 억지로 말을 나누고 때로는 술을 가져다 병을 치료하기도 하여, 심지어는 변모하기까지 하니 모두 신중히 행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옛사람 중에는 재상이 되어서도 전원(田園)이 없었던 자가 있었는데, 소신은 자손을 위하여 혹 경영하기도 합니다. 옛사람 중에는 털끝만큼의 잘못도 범하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소신은 고우(故友)가 보내 준 선물에 대해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고 물건이 청탁한 것이 아니면 거절하지 않습니다. 옛사람 중에는 남에게 사사로운 일로 간여하지 못했던 자가 있었는데, 소신은 남의 애걸을 당하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형편이 비록 편치 않더라도 상황에 따라 합니다. 혹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구제했다가 이내 후회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니, 애당초 꺼리고 거리낌이 없습니다. 일이 이런 경우가 많으니 나머지는 또 어찌 보겠습니까. 또한 듣건대 재상은 반드시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이 가장 치국에 절실합니다. 신은 경사(經史)를 섭렵한 것이 많지 않아 비록 조금 들은 바가 있더라도 잘 잊어버리는 것이 더욱 심하여 한번 책을 덮으면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큰일을 의논하고 큰 의문을 결정하는 데 무엇을 근거로 할 수 있겠습니까. 행검(行檢)이 저와 같지 않고 재식(才識)도 이와 같으니, 이것이 과연 의정의 자리에 합당하겠습니까. 요즘에 신에게 이상한 일이 한 달도 빠짐없이 있으니, 어찌 시소(尸素) 같은 신이 세상에 드문 총애를 함부로 입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미천한 심정을 살피시어 속히 의심 없이 체차해 주소서.-원주(原註)에 “사주(史註)를 살펴보니, 우의정 윤개(尹漑)는 경솔하고 혹독하게 자기 마음대로 하였으므로 모(某)가 편치 않게 여겨 노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라고 하였다.-

원문

答曰。人受天地之氣以成形。豈能無疾病乎。大抵天之示變。專由自上否德。而號令不行。人事不順之致也。豈以卿之過失而然乎。勿辭。

번역

답하기를,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아 형체를 이루었으니 어찌 질병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하늘이 변고를 보여 주는 것은 오로지 위에서 덕이 없어서 호령이 행해지지 않고 인사가 순조롭지 못한 탓이지, 어찌 경의 과실 때문에 그러하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87. 經筵薦進在野才賢啓。〔原注:同年癸丑正月戊寅朔壬申。朝講。□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宋純,吳謙,李潤慶。俱以才賢。流落荒野。宜□特賜宣召。責以盡忠愛民之實何如。

번역

송순(宋純), 오겸(吳謙), 이윤경(李潤慶)은 모두 재주와 덕행이 뛰어났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황야에서 은거하였으니, 특별히 불러서 부르기를 마땅히 해야 한다. 충성스럽고 백성을 사랑하는 실천을 어떻게 하였는가?

원문

傳于政院曰。慶州府尹。以吳謙差遣事。

번역

정원에 전교하기를,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오겸(吳謙)으로 차출하라.” 하였다.

88. 經筵陳王家私蓄不可意啓。〔原注:同年癸丑二月丁未。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4A

원문

今者書題印信。有妨事體。王者富有一國。不蓄私儲。今之內需。猶唐之瓊林大盈庫。大不合於王政。且前自□上求言。而無一人抗疏於闕下。此於□聖朝。不能無憾。參奉李世銘獨陳疏。□上初欲罪之。言雖不合。止於不用可也。不可以示致罪之意也。

번역

지금 서제(書題)와 인신(印信)은 사체에 방해가 된다. 왕자가 한 나라를 부유하게 하면 개인의 저축을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수(內需)는 오히려 당나라 경림대영고(瓊林大盈庫)와 같으니, 왕정(王政)에 크게 합당하지 않다. 또 앞서 □에서 구언하였는데도 궐하에 항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의 성조(聖朝)에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참봉 이세명(李世銘)이 홀로 상소를 올렸는데, □가 처음에는 그를 죄주려고 하였으나, 말이 비록 합당하지 않더라도 쓰지 않는 데 그쳤으면 될 것이지, 죄를 주겠다는 뜻을 보일 수는 없다.

89. 經筵論陳北界軍情。請勿興師征虜啓。〔原注:同年癸丑五月丙午朔丁巳。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4B

원문

王者以民爲國。民生飢困若此。脫有兵變。何以措置。今之國勢。有如大病之人。所當撫安之時。而人之所見不同。故南訥于知介〔原注:野虜名〕居豆滿江北三十餘里。衆議有征逐之計。臣獨以爲不可。如大病之人。雖乘怒持杖而欲制人。其可能乎。況夷狄自居其地。則何可動兵征逐乎。臣聞北道軍卒不實。敵若入寇。將何以應之。北道之軍。本不過五千餘名。今雖爲軍籍。人民畏其杖訊。以死爲生。雖曰定其軍額。實爲虛張。五千之中。選其精兵。則應不滿二千。甚可慮也。今若興師動衆。征討野人。我國之民。反多死傷。古稱小不忍則亂大謀。必有忍。然後可以有濟矣。

번역

왕은 백성을 나라로 삼습니다. 백성이 이처럼 굶주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만일 병란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조치하겠습니까. 지금의 국세는 마치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같아서 어루만져 안심시켜야 할 때인데, 사람들이 보는 바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눌(南訥)이 지개(知介)- 원주(原注)에 “오랑캐의 이름이다.” 하였다. -는 두만강 북쪽 30여 리에 살고 있는데, 여론은 오랑캐를 몰아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은 유독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비록 성이 나서 지팡이를 들고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오랑캐가 자기 땅에 살고 있으니, 어찌 군사를 동원하여 몰아낼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북도의 군졸이 실속이 없다고 하니, 적이 침구하면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북도의 군사는 본래 5천여 명에 불과합니다. 지금 비록 군적(軍籍)을 만들었지만 백성들이 그들의 장신(杖訊)을 두려워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살아 있으니, 비록 군사의 액수를 정하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허풍입니다. 5천 명 중에서 정예병을 뽑는다면 응당 2천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지금 만약 군사를 일으키고 백성을 동원하여 오랑캐를 토벌한다면 우리나라의 백성들이 도리어 많이 죽거나 다칠 것입니다. 옛말에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책을 어지럽힌다.” 하였으니, 반드시 참아야만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90. 大妃歸政于□主上。因陳規戒啓。〔原注:同年癸丑七月丙辰。□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4C, ITKC_MO_0130A_A026_044D

원문

主上天姿卓越。卽位之初。能辨群奸而罪之。雖漢昭之明。無以及矣。嘗見古史。太后攝政。非徒樂其干預也。嗣君幼沖則勢不得專委機務。且必專於學問而後治國之要亦由此明。故不得已居攝也。今我□聖上學問高明。雖高宗之明敏。成王之緝煕。蔑以加矣。□慈殿知其可以獨運萬機。故決意歸政。而自□上固辭不已。在□上罔極之心。雖不得不已。然□慈殿春秋亦高。久勤萬機。深所未安。自□上依□慈殿聽斷。在所不能已也。〔原注:上遜辭不得。勉從受政。〕又曰。古者人君卽政。則群臣規戒之切而要者。莫如敬之一字。故召誥一篇之中。言敬之處至於七八。伊尹告太甲之辭。傅說進高宗之言。周公戒成王之事。□聖鑑已爲洞燭。伏願以此日省焉。且國朝寶鑑。嘉言善政亦多。宜時時考閱。嘗聞□成宗卽位未久。每於進講。臨文論難。今我□主上。亦當追法。書曰。學子古訓。乃有獲。事不師古。以克永世。非說攸聞。伏願□主上敬之以師古訓。如欲見太平之治。必君臣同德。情誼交孚。言聽計從而後可以有爲。今□聖學高明。洞察賢否。如臣者退之。擇賢而置之。則可以致治矣。

번역

주상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즉위한 초기부터 간신들을 잘 분별하여 죄를 주었으니, 비록 한나라 소제(昭帝)의 명철함이라도 이와 같지는 못할 것입니다. 일찍이 고사(古史)를 보니, 태후가 섭정하는 것은 그저 간여하기를 즐겨서가 아니라, 후사가 어리고 미숙하면 기무(機務)를 전적으로 맡길 수 없고 또 반드시 학문에 전념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도 이로써 밝혀지기 때문에 부득이 섭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 성상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시어 비록 고종(高宗)의 명민함이나 성왕(成王)의 집착(緝績)으로도 더할 수 없습니다. □ 자전께서 홀로 만기를 운용하실 수 있음을 알고서 정사를 돌려주기로 결심하셨으나, □ 상께서는 굳이 사양을 그치지 않으시니, □ 상의 망극한 마음에는 비록 부득이한 일이나 □ 자전의 연세도 높고 오랫동안 국정을 맡아 온 터라 매우 편치 못하시니, □ 상께서 □ 자전의 뜻에 따라 결단하시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바입니다. - 원주(原注)에 “상께서 사양을 거두지 않으시어 섭정하는 것을 힘써 따르셨다.” 하였다. 또 고하기를, 옛날 임금이 즉위하면 신하들이 경계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敬)’ 한 자이니, 《소고(召誥)》 한 편 가운데서도 경에 대한 말이 일곱 여덟 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고한 말과 부열(傅說)이 고종에게 진달한 말과 주공이 성왕을 경계한 일이 □ 성상의 거울이 되어 이미 환히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날에 이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또 《국조보감》에는 가언(嘉言)과 선정(善政)이 많으니 때때로 상고하셔야 합니다. 일찍이 듣건대 □ 성종께서 즉위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 매번 진강(進講)에서 임문(臨文)하여 논란하였는데, 지금 우리 □ 주상께서도 마땅히 이를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서경》에 “학자의 옛 가르침은 바로 얻는 것이니, 일을 옛것을 본받지 않으면 영원할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들리는 말만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 주상께서는 옛 가르침을 본받아 태평성대의 정치를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임금과 신하의 덕이 같고 정의(情誼)가 서로 믿어야 하며, 말씀에 귀 기울이고 계책을 따르는 뒤에야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어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환히 통찰하고 계시니, 신 같은 자는 물러나게 하고 어진 사람을 뽑아 두신다면 치세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원문

答曰。大臣盡心國事。未知朝廷有德優於卿者也。

번역

답하기를, “대신(大臣)이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조정에 경보다 덕이 우월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91. 經筵陳春生之時論斷死囚不可意啓。〔原注:明宗九年甲寅正月甲寅朔乙巳。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5A

원문

王者代天理物。一言一行。皆法天道。當春發生。啓覆論斷死囚。不知其可也。待秋節行之未晩也。

번역

왕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니, 한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 모두 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봄에 생장하는 것을 계발하고 죽은 죄수를 논단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시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원문

上曰。察而爲之。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살펴서 시행하라.” 하였다.

92. 經筵因妖言進戒啓。〔原注:同年甲寅正月甲寅朔癸未。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5B

원문

妖言如此〔原注:時有重新景福之役。妖說者云。當以稚兒生瘞於柱礎下。閭巷喧傳。人皆惶惑。至有中間恐喝受財。人心訛誤難定。〕者。人心不定之所致也。大抵人君愛民。如保赤子則民皆父母望之。豈以殺無辜之事。致疑於吾君哉。邇來。自□上如保之念至矣。每於監司守令拜辭之時。恤民之敎。非不丁寧。而政化尙有所不通。故人心如此。臣竊憂之。我國之人。心志不定。類多如是。頃者傳言女子產龍。擧城奔波。中外疑惑。古之人君。從事於定靜安慮之學以新其民者。良以此也。今者民窮財盡。加之以人心疑亂如此。當此之時。卒有豪傑出而梗化。則將何以禦之。又有天災地變。間現層出。可以見天心之示警。伏願政事施爲。弗咈天理。以答天譴。

번역

요망한 말이 이와 같으니, 원주(原注)에 “당시에 경복궁을 중수하는 공사가 있었는데, 요망한 말하는 자가 ‘어린아이를 주초 아래 묻어야 한다.’라고 하니, 여항이 떠들썩하게 전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의혹하였다. 심지어 중간에서 위협하여 재물을 받아 내는 일까지 있어 인심의 잘못된 것이 안정되기 어려웠다.” 하였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소치이다. 대체로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기를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면 백성들은 모두 부모처럼 바라볼 것이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로 인해 우리 임금을 의심하게 하겠는가. 근래에 위에서부터 백성을 보살피려는 생각이 지극하여 매번 감사와 수령이 하직 인사를 할 때마다 백성을 돌보라는 하교를 정성스럽게 내리셨다. 그러나 정치의 교화가 아직 미치지 못한 곳이 있기 때문에 인심이 이와 같으니, 신은 삼가 근심스럽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과 뜻이 안정되지 못하여 이런 경우가 많다. 지난번에 여자가 용을 낳았다는 말이 전해져 온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중외(中外)가 의혹하였다. 옛날의 임금들이 정심(定心)하고 안려(安慮)하는 학문에 종사하여 백성을 새롭게 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 지금은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데다 인심이 이처럼 의심스럽고 어지러우니, 이런 때에 마침내 호걸한 자가 나와서 교화를 거스른다면 장차 어떻게 막겠는가. 또 천재와 지변(地變)이 간간이 겹쳐 나타나니, 하늘의 경계를 알 수 있다. 삼가 바라건대 정사를 행함에 있어 천리를 어기지 말아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

원문

史評曰。尙某平生不喜害人。有長者氣象。

번역

사평(史評)에 이르기를, “상모는 평생 남을 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장자의 기상이 있었다.” 하였다.

93. 經筵請正闕修繕役夫給價啓。〔原注:同年甲寅二月壬寅朔乙丑。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5C

원문

年年凶荒。災變連綿。正闕焚蕩。〔原注:前癸丑九月。景福宮大內火災。〕土木之役方興。民力疲困。且農時耕作。不可廢也。繕修雖不得已。而役夫給價償役。則民弊庶幾稍歇也。司贍寺有細木綿二萬七千餘同。出給償役何如。〔原注:同知經筵事李浚慶曰。尙某之言果是也。但聞市上無米。抱布貿穀。貨賤穀貴。無以得食也。以米散給。使之立役則其或可也云云。〕

번역

해마다 흉년이 들어 재변(災變)이 연이어 발생하고, 정궐(正闕)을 불태워〔원주(原注)에 “지난 계축년 9월에 경복궁 대내(大內)에 화재가 있었다.”라고 하였다.〕토목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백성들의 힘이 피곤한 데다 농사철이라 농사를 중단할 수 없다. 그러니 사직을 고쳐 수리하는 것이 비록 부득이하지만 역부(役夫)에게 값을 주어 일하게 하면 민폐가 거의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사섬시(司贍寺)에 세목면(細木綿) 2만 7천여 동(同)이 있으니, 이를 내주어 일하는 비용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원주(原注)에 “동지경연사 이준경(李浚慶)이 ‘상모(尙某)의 말이 과연 옳습니다. 다만 시중에 쌀이 없어서 베를 안고 곡식을 사니, 값은 싸고 곡식은 비싸서 먹을 수 없습니다. 쌀로 나누어 주고 일하게 한다면 혹시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94. 經筵陳法司書吏亂犯事啓。〔原注:同年甲寅二月壬寅朔丁卯。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5D

원문

禁亂書吏。乃法官所差。□中宗朝臣爲承旨時。法司書吏。亂入益陽君女子避寓處。扶執女子之衣衾。事聞。□上怒捧傳旨推拷。臺諫論啓以臣捧傳旨之故見遞也。扶曳乳母之事。比於扶執女子衣衾則相去遠甚。願適中裁決。

번역

난서리(亂書吏)를 금하는 것은 바로 법관(法官)이 차출한 자이다. □ 중종조에 신이 승지일 때, 법사 서리(法司書吏)가 익양군(益陽君)의 여자가 피우처(避寓處)에 들어갈 때 난입하여 여자의 의금(衣衾)을 붙잡고 끌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 상이 노하여 전지(傳旨)를 받들고 추고하였는데, 대간이 논핵하여 아뢰기를, “신이 전지를 받았기 때문에 체차된 것입니다.” 하였다. 유모(乳母)를 부축한 일은 여자의 의금을 붙잡고 끈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매우 크니, 적절히 재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答曰。若以法司之吏而容恕則不無後弊矣。

번역

답하기를, “법사(法司)의 하리(下吏)로서 용서한다면 뒷날의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95. 罪囚覆決。依六典施行啓。〔原注:同年甲寅五月庚子朔甲子。□領議政,右相李浚慶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6A

원문

古者大辟之罪。必須三覆五覆奏。然後斷決者。乃所以愼重之而爲囚求生道也。今李瓊輪對再覆。依初三覆之例。亦必親啓。與衆詳讞。以重人命。正合古人愼刑之意。然初覆三覆。與朝廷共議處決。再覆則只啓下。此乃祖宗朝規制。行之已久。不須更改。經濟六典續集內。待時死罪囚。畢推後隨卽啓聞云。此帝王順時行令之意。今亦依此施行何如。

번역

옛날에는 대죄(大罪)를 다스릴 때 반드시 세 번이나 다섯 번을 반복하여 아뢰고 난 뒤에야 결단하였으니, 이는 신중히 하여 죄수를 살려 주는 방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이경륜(李瓊輪)의 경우에 대해 두 번이나 반복해서 아뢴 것은 처음 세 번을 반복하는 예에 의거한 것이니 또한 반드시 친히 아뢰어 여러 사람과 자세히 헤아려 인명을 중시해야 합니다. 이는 바로 옛사람이 형벌을 신중히 하던 뜻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반복할 때에는 조정에서 함께 의논하여 처결하고, 세 번째를 반복할 때에는 단지 계하(啓下)하는 것은 바로 조종조의 규례로 시행한 지 오래되었으니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경제육전속집》 안에 “시사죄수(時死罪囚)는 추문이 끝나면 즉시 아뢰어 알린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제왕이 시대를 따라 행하는 명령의 뜻입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答曰。依啓施行。

번역

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96. 因星變乞退啓〔原注:同年甲寅五月庚子朔己巳。□命召求聞。□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6B, ITKC_MO_0130A_A026_046C ...

원문

臣伏覩下敎之辭。洞徹天人之理。的見休咎之徵。遇災警懼。省愆思過。不暫安寧。汲汲欲聞修省之道。仰答天譴。以圖消弭。臣等不勝感激之至。臣以無似。冒據燮理之地。上有畏天之誠如此其至矣。而下無贊襄之功以裨萬一。古云。三辰不軌。擢士爲相。今豈非其時乎。所當退斥臣等。更求賢才。上下協心。同寅共畏。以求弭災之術。今日之事無急於此。臣非敢姑爲遜避之說。以飾非情於□聖上恐懼之日也。近來災變之臻。隨日而多。恒雨之災。將害稼穡。又有妖星見於北斗魁中。臣等所當奔走來啓。以陳憂懼之意。不待□召命之及。而第以妖星之見。在於二十七日之夜。只聞日官之啓。而八九兩日。連陰不開。臣等未及仰察其形。不敢遽爲名之以某星。故欲待天開。詳察其形而來啓也。雖然。或彗或孛。災害則一也。臣等歷考文獻通考象緯之變。妖星之犯北斗。占驗之慘。莫斯爲甚。臣等愚昧。不知將爲何應而有此大異也。雖不可指言某事之失有以致之。然弭災轉移之機。惟在於□聖上一念之間。敬畏之念。兢惕之心。無所間斷於食息之頃。屋漏之地。小心翼翼。以服人心則災無不消之理。□聖上孜孜學問。乾健不息。庶政萬務。無不曲當。豈有疵累。然以今人心察之。內需司,僧徒之弊。莫不以爲光明之累。妨政害治之大。臺諫之言及此二者。延納之美。不如他事之轉圜。偏繫之私。未釋群下之疑惑。臣固知惟此一事。黽勉奉順□慈旨。有所不得已者。然人心不服。天意不順則豈可徒知奉順之爲孝而不爲諫止乎。□慈殿雖因□祖宗之舊。而終爲□聖德之累。政治之害。則又豈不可計乎。遇災修省。仰答天譴之實。無如察納善言。以廣聰明。使嘉言罔攸伏也。避殿減饍。卽爲修省之文。而在所當後。疏放亦赦宥之類。有罪者幸免。豈宜汲汲擧行。但滯獄之久遠者。特從末減。以示不忍人之心。恐不遠於疏放之意也。求言一事。帝王之所急也。上自卿士。下至草莽。若能開陳善道。盡言不諱。而上有喜納之誠。豈不爲修省之一助乎。但近年以來。求言之敎。無歲不下。或至於再。而未聞百僚之中。有一人進封章。正君德。陳時弊者。草野之人。雖有一二陳疏論時弊。而見識凡庸。所言罕有可採。守令之目見時弊。不忍默默。抗章陳啓者間或有之。而不見納於□聖聰。〔原注:指延安府使金彥琚之疏〕此所以求言之敎數下。而有識之人不樂進言者也。臣意聽言求諫。以爲修省之實。先自臺諫之言始。而又下敎求言。則庶有樂告以善。出應□明敎者矣。臣庸愚。旣無格君之學。又無救時之才。雖欲盡犬馬之力。爲之柰何。乞早退臣。別求賢能。以圖長久。臣猥承無隱之敎。只以上數事。仰答□聖問。豈能塞其萬一。□聖明垂察。

번역

신이 삼가 하교하신 말씀을 보니 천인(天人)의 이치를 환히 통찰하고서 재앙을 당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허물을 살피고 잘못을 생각하여 잠시도 편안하지 못하시면서 급급하게 수양하는 도리를 듣고자 하시어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여 재앙이 그치기를 도모하셨습니다. 신들은 지극히 감격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은 무능한 몸으로 외람되게 조정의 중심에 있으니, 위로는 이처럼 지극하게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이 있으신데 아래로는 보좌하여 도와서 만분의 일이나마 보태는 공이 없으니, 옛말에 “세 개의 별이 어긋나면 선비를 뽑아 재상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이 어찌 그럴 때가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신들을 물리치고 다시 현재(賢才)를 구하여 상하가 마음을 합하고 함께 두려워함으로써 재앙을 그치게 할 방법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일은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으니, 신이 감히 우선 사양한다는 말로 성상께서 두려워하시는 날에 실정이 아닌 것을 꾸미려는 것이 아닙니다. 근래에 재변(災變)이 닥친 것은 날마다 비가 많이 내려서 항상 농사를 망치고 있는데, 또 요성이 북두의 궤성(魁星) 가운데에 나타났습니다. 신들이 마땅히 분주히 와서 아뢰어 우려와 두려움을 진달해야 할 것이므로 소명(召命)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선 요성이 나타난 날짜가 27일 밤이었고, 다만 일관(日官)의 보고를 통해 들었을 뿐 8, 9일 양일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려 신들이 미처 그 모습을 살피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갑자기 어떤 별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개기를 기다려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고 와서 아뢰려고 합니다. 그러나 혹 혜성(彗星)이든 보성(孛星)이든 재앙은 마찬가지입니다. 신들이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상위(象緯)에 관한 변고를 두루 살펴보니, 요성이 북두를 범한 것은 점검(占驗)이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이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신들은 장차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크게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어떤 일의 잘못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인지는 지적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재앙을 그치고 옮길 기회는 오직 성상께서 한결같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조심스러운 마음을 식사할 때나 잠잘 때에도 중단하지 않고, 집안의 지붕이 새는 곳까지도 조심조심 하여 인심을 감복시키시는 데에 달려 있으니, 그렇게 하신다면 재앙이 사라지지 않을 이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시어 천지의 건곤(乾坤)처럼 쉬지 않으시고 모든 정무를 모두 곡진하게 처리하시어 어찌 허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의 인심으로 살피건대, 내수사(內需司)와 승도(僧徒)에 관한 폐단은 모두 광명(光明)을 잃게 하는 누(累)가 되고 정사를 방해하고 치국(治國)을 해치는 큰일이 됩니다. 대간(臺諫)의 말이 이 두 가지를 언급한 것은, 연납(延納)하는 아름다움이 다른 일에 대해 의견을 바꾸는 것만 못하고 편벽된 사심으로 인해 신하들의 의혹을 풀지 못한 것입니다. 신은 오직 이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봉양하는 마음으로 힘써 따르시는 것이 부득이한 점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심이 따르지 않고 하늘의 뜻이 순하지 않다면 어찌 그저 봉순(奉順)을 효도라고만 알고 간지(諫止)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자전(慈殿)이 비록 조종의 옛날을 따르시기는 하였으나 끝내 성덕에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정치에 해가 되는 것은 또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재이를 만나서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하늘의 꾸짖음에 실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좋은 말을 잘 받아들여 총명을 넓혀서 좋은 말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게 하시는 것만 못합니다. 궁전을 피하고 음식을 줄이는 것은 곧 자신을 반성하는 글인데 마땅히 뒤에 해야 할 일입니다. 소치(疏致)를 풀어주는 것도 사면의 종류이니, 죄가 있는 자가 다행히 면제되었는데 어찌 서둘러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다만 옥에 오래 갇혀 있는 자는 특별히 말단에서 줄여서 차마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소치를 풀어주는 뜻과 멀지 않을 듯합니다. 구언(求言)은 제왕의 급선무입니다. 위로는 경사(卿士)로부터 아래로는 초야에까지 만약 능히 선한 도리를 진달하고 숨김없이 다 말한다면, 위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정성이 있다면 어찌 자신을 반성하는 데 한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근년 이래로 구언(求言)하는 하교가 해마다 내려오고 더러는 두 번이나 내리기도 하는데, 백관 중에 한 사람도 봉장(封章)을 올려 임금의 덕을 바로잡고 시폐(時弊)를 진달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초야의 사람이 비록 한두 명은 상소하여 시폐를 논하기도 하였으나 견식이 범상하여 채택할 만한 말이 드물었고, 수령 중에 시폐를 목격하고서 차마 묵묵히 있을 수 없어 소장을 올려 진달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나 성상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원주(原注)에 연안 부사(延安府使) 김언거(金彦琚)의 상소를 가리킨다.-이것이 구언하는 하교를 여러 번 내렸는데도 식견 있는 사람들이 기꺼이 진언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말을 듣고 간언을 구하여 수양하고 반성하는 실질로 삼는 것은 먼저 대간(臺諫)의 말부터 시작해야 하고 또 구언하라는 하교를 내리신다면 아마도 기꺼이 선을 고발하여 밝은 성상의 명에 응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이미 임금의 뜻에 맞는 학문이 없습니다. 또 시국을 구제할 인재가 없으니, 비록 미천한 신의 힘을 다하고자 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을 일찍 물러나게 하고 별도로 현능한 사람을 구해 장구한 계책을 도모하소서. 신이 외람되이 숨김없이 말하라는 하교를 받들어 단지 몇 가지 일을 아뢰어 성상의 물음에 답하였으니,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밝은 성상께서는 잘 살피소서.

원문

答曰。自上不能答天譴。故災變相仍。今年農事。庶有西成之望。而淫雨不止。終不知何如也。此皆自上失德之致。豈大臣有所誤之故哉。勿辭。內需司。非自今別立之事也。爲彗爲孛。名號雖異。爲災則一也。縱不疏放。欲避殿減饍。以答天譴也。

번역

답하기를, “상께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재변이 계속되고 있다. 올해 농사는 거의 잘될 가망이 있었는데 장마가 그치지 않으니 끝내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는 모두 상께서 덕을 잃은 소치이지 어찌 대신이 잘못한 까닭이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내수사(內需司)를 지금부터 별도로 세울 일은 아니다. 혜성과 패성은 명칭은 비록 다르지만 재변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비록 소방(疏放)하지 않더라도 전감선(殿減膳)을 피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자 한다.” 하였다.

97. 請鄭夢周書院建立啓〔原注:同年甲寅七月己酉。□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謹按鄭夢周道德節行。無讓於安裕。於其生長之地。建立書院。使學徒修藏。敦勵風化。甚是美事。宜宣□賜扁額。頒降書冊奴俾田結等事。令該曹依紹修書院例磨鍊施行何如。

번역

삼가 살피건대, 정몽주(鄭夢周)의 도덕과 절행은 안유(安裕)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 서원을 세워 학도들이 책을 보관하고 공부하게 함으로써 풍속을 돈독히 하고 교화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마땅히 편액을 하사하고, 서책과 종을 나누어 주고 전결(田結) 등을 주도록 해당 조로 하여금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예에 따라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98. 經筵請還歸胡女啓〔原注:同年甲寅七月癸亥。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7C

원문

今者時羅孫〔原注:胡人名〕獨漏天誅。每來搆釁。詮聞造山堡被圍之時。有一胡高聲大呼曰。我乃時羅孫也。我無得罪於朝鮮。而擄我三妻。死者則已矣。聞一妻生存。請還給我則我無讐怨矣。今來胡女三人中必有時羅孫之妻。而問之則皆諱。使之嫁夫。則以死自誓曰。忍結婚於讐人乎。此似烈女之操也。我國雖存此女。其何用乎。昔漢之時。凶奴爲亂。以家人女爲公主而給之。唐太宗亦議于房玄齡。以公主出嫁焉。皆爲安邊而然也。此女雖拘留。不足爲國家之輕重。則有何嫌於還其土乎。

번역

지금 시나손(時羅孫)-원주(原注)에 “오랑캐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이 홀로 천벌을 면하고서 매번 와서 화근을 만들고 있다. 듣건대, 오랑캐가 조산보(造山堡)를 포위하였을 때 어떤 오랑캐가 큰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시나손인데 조선에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내 아내 세 사람을 잡아갔다. 죽은 자는 이미 끝났지만 한 사람이 살아있다고 들었으니 돌려주면 나는 원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 온 오랑캐 여인 세 사람 중에 반드시 시나손의 아내가 있을 터인데 물어보아도 모두 숨기고, 남편에게 시집가게 하려고 하면 죽기로 맹세하기를, “원수를 남편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는 열녀의 지조인 듯하다. 우리나라에 비록 이 여인이 있다 해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옛날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가 난을 일으키자 자기 집안의 딸을 공주로 삼아 시집보내 주었고, 당 태종도 방현령(房玄齡)에게 의논하여 공주를 시집보내게 하였으니, 모두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여인을 잡아두는 것이 국가의 경중이 될 일은 아니니, 그 나라로 돌려보내는 데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99. 請景錫,安國等諸將緩刑啓〔原注:明宗十年乙卯七月癸巳朔己丑。□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7D, ITKC_MO_0130A_A026_048A

원문

景錫不能救解唐津之圍。亦不得遏絶其焚蕩閭閻之賊。終不追擊殄滅。固不得無罪。然於靈巖之戰。斬獲至於百數級。方張之賊。由此而奔北。亦不可謂無却賊之功矣。景錫以年老之人。已受刑三次。不無殞命杖下之慮。趙安國。自羅州赴靈巖。雖似不爲快疾。然安國到羅州。李浚慶已爲先到。軍卒已付兩防禦使。他兵未集。不可以孤軍輕犯方張之賊。姑留待之。翌日。發向靈巖。已過榮山津。更承李浚慶之招。往復聽令。且約束以二十六日夾攻。故以此未及靈巖之戰。其情不似故爲逗遛。而亦已受刑三次。慮或斃於杖下。恐累□聖明欽恤之仁。此兩人之事。請自□上斟酌。他餘諸將所犯。亦不無輕重之異。若欲一槩取服。則恐多殞命於杖下。請自□上量其事勢之難易。犯罪之輕重。分等科斷何如。

번역

김경석은 당진(唐津)의 포위를 구제하지 못하였고, 또한 여염을 불태우는 도적들을 막지 못한 채 끝내 추격하여 섬멸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암(靈巖) 전투에서 백여 명을 베어 내어 방장(方張)의 적들이 이로 인해 북쪽으로 달아나게 하였으니, 또한 도적을 물리친 공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김경석은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서 이미 세 차례 형벌을 받았으므로 장(杖) 아래에서 목숨을 잃을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조안국은 나주에서 영암으로 갔는데, 비록 병을 다스리지 못한 듯하나, 안국이 나주에 도착했을 때 이준경이 이미 먼저 도착하여 군졸들을 두 방어사에게 맡겼고 다른 병사들이 아직 모이지 않았으므로 고군(孤軍)으로 가볍게 방장의 적을 범할 수 없어서 우선 머물러 기다렸습니다. 다음 날 영암을 향해 출발하여 이미 영산진(榮山津)을 지났는데, 다시 이준경의 부름을 받고 왕래하며 명령을 들었으며, 또 26일에 협공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이 때문에 영암 전투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 정황이 고의로 머뭇거린 것 같지는 않으나 또한 이미 세 차례 형벌을 받았으므로 장 아래에서 죽게 될까 염려되니, 성상의 흠휼(欽恤)하는 인자함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일은 상께서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나머지 여러 장수들의 범죄도 경중의 차이가 있으니, 만약 모두 취복(取服)하고자 한다면 장 아래에서 목숨을 잃는 자가 많을 듯합니다. 상께서 사세의 난이와 범죄의 경중을 헤아려 등급을 나누어 결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答曰。景錫等雖置重典。不足惜也。大臣如是苦救。予意未便。自上終當斟酌。

번역

답하기를, “김경석(金景錫) 등을 무거운 형전(刑典)에 처하더라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다. 대신이 이처럼 고심하여 구제하려고 하니 내 뜻은 온당치 않다. 위에서 마땅히 참작할 것이다.” 하였다.

100. 請罷備邊司啓〔原注:明宗十一年丙辰正月己亥。□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8B

원문

昔在□祖宗朝。凡邊方備禦之事。專委兵曹。□中宗朝丁丑年間。別設備邊司。厥後朝議以爲未便。故罷之。至辛丑年復設。至今行之。雖然備邊諸事。不使兵曹主之。別設他局。甚妨事體。況提調員多。動經數日。坐致稽緩。以失機會。其害甚大。請依□祖宗朝古事。凡干軍政。皆使兵曹掌之。

번역

옛날 □조(□祖)의 조정에서는 변방을 갖추어 방비하는 일은 전적으로 병조에 맡겼습니다. □ 중종조 정축년 연간에 별도로 비변사를 설치하였는데, 그 뒤 조정에서 온당치 않다고 여겨 폐지하였습니다. 신축년에 다시 설치하여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변사의 여러 일은 병조가 주관하게 하지 않고 별도로 다른 관청을 두는 것은 일의 체모에 매우 방해가 됩니다. 더구나 제조(提調)와 원사(員仕)가 많아서 움직이는 데 수일이 걸리므로 앉아서 지체되어 기회를 놓치게 되니, 그 해로움이 매우 큽니다. □조의 옛일을 본받아 군정과 관계되는 모든 일은 모두 병조에서 관장하게 하소서.

원문

答曰。欲革備邊之意。前旣啓之矣。自上之意。亦已盡言。在平時。猶不可卒革。況於事變憂慮之時。尤不可輕議。自上以爲不可革也。

번역

답하기를, “비변사를 혁파하려는 뜻은 이전에 이미 아뢰었고 성상의 뜻도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평상시에도 오히려 완전히 혁파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사변이 일어나 우려되는 때에 더더욱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성상께서 혁파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하였다.

101. 旱天閱武。請勿張樂啓。〔原注:同年丙辰五月庚申。□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旣復正殿。今日自□上閱武。當用樂。而但旱災太甚。請勿張樂。以示憂災之意。

번역

이미 정전(正殿)을 복구하였으므로 오늘부터 궁중에서 열무(閱武)할 때에는 마땅히 음악을 써야 하는데, 다만 한재가 너무 심하니 음악을 연주하지 말아서 재해를 걱정하는 뜻을 보이소서.

원문

答曰。未安之意。予亦欲言之。其勿用樂。

번역

답하기를, “편치 않다는 뜻은 나도 말하고 싶다. 그가 음악을 쓰지 말게 하라.” 하였다.

102. 經筵請召李滉啓。〔原注:同年丙辰五月壬申。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李滉雖年少人也。持身淸高。如此之人。可以激薄俗。而使之接待天使。則亦可以華國也。□上以誠召之。則必來矣。

번역

이황은 비록 나이는 젊지만 몸가짐이 청고하니, 이와 같은 사람이면 박속(薄俗)을 격발시켜 천사를 접대하게 할 수 있고 나라를 빛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심으로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다.

원문

答曰。李滉文翰非偶然而行又淸簡。今病在草野。自上每留念。而前則以病不來矣。然不可棄也。

번역

답하기를, “이황의 문장과 글씨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또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지금 병으로 초야에 있으니 상께서 매양 염두에 두시는데, 이전에는 병 때문에 오지 못하였지만 버려서는 안 된다.” 하였다.

원문

傳于政院曰。李滉事。日前有啓者。〔原注:鄭士龍〕而今日朝講。左相亦啓之。以啓意爲書下諭。

번역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이황의 일로 며칠 전에 아뢰는 자가 있었고〔원주(原注)에 정사룡(鄭士龍)이라고 되어 있다.〕오늘 조강(朝講)에서 좌상이 또한 아뢰었다. 계사의 뜻을 써서 하유한다.” 하였다.

103. 經筵陳妾子奉祀事立限爲當啓。〔原注:同年丙辰九月己巳。朝講。領經筵事,知經筵事洪暹。啓以大典有妾子奉祀之語。□命議于大臣。〕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8D

원문

臣意繼後事。□先王朝以特恩爲之者多。今若一切改之則爭端紛起。而事體亦未便。自今立限。則可無爭端。且存□先王之意也。

번역

신은 후사를 잇는 일에 대해, □ 선왕의 특별한 은혜로 한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 만약 일체 고친다면 다툼이 분분하게 일어나고 사체도 온당치 않으니, 이제부터 기한을 정한다면 다툼이 없을 것이며 또한□ 선왕의 뜻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문

答曰。此事無立限。而一切改之。則爭端多起。且改□先朝之事。亦爲不可。宜立其限。當更議于大臣。

번역

답하기를, “이 일은 기한을 정하지 않고 일절 고치면 다툼이 많이 일어날 것이고 또 선왕의 일을 고치는 것도 불가하니 마땅히 그 기한을 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대신과 의논하겠다.” 하였다.

104. 因雷電示變。請遞職啓。〔原注:同上日〕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9A

원문

今九月九日。臣自成均館課試後。還家途中遇雷電風雹之變。惶駭失儀。其日之變。似專爲小臣而發也。臣歸語家屬曰。不賢者在相位。天必爲我示變也。如小臣者。遞之以答天譴可也。臣非循例啓之。素有所懷。故敢啓。昨日又有雷變。與日前無異。皆發於霜降之後。必有天怒之意。須加警省。以答天譴。

번역

오늘 9월 9일 신이 성균관에서 과시(課試)를 치른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둥과 번개와 바람과 우박의 변고를 만나 황공하고 두려워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날의 변고는 오로지 소신을 위하여 일어난 것 같습니다. 신이 집에 돌아와서 가족에게 말하기를, “현명하지 못한 자가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하늘이 반드시 나를 위해 변고를 보여 준 것이다. 소신 같은 자는 체차하는 것으로 하늘의 견책에 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으레 아뢰는 것이 아니라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어제 또 천둥이 치는 변고가 있었는데 전날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모두 서리가 내린 뒤에 일어났으니 반드시 하늘이 노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경계하고 반성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해야 합니다.

원문

上曰。近來衆災連緜。由予否德故也。豈大臣以致乎。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근래에 여러 재해가 연이어 일어나는 것은 나의 부덕한 탓이다. 어찌 대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하니,

105. 經筵。□上憂災異。有□敎陳戒啓。〔原注:同年丙辰九月癸酉。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9B

원문

三代以後稱盛治者。必曰漢文景。而文景之時。災變多書。在於簡策。然而致富庶之效。恢漢家四百年不拔之基業。是知遇災而懼。克謹天戒。愛養斯民。則雖有其災。而無其應也。文帝下詔。勸農桑。減租賦。其心誠在於養民。而使百姓安居樂業。景帝亦恭儉養民。克遵前烈。則災異雖多而無應者。不亦宜乎。近來災變。甚於文景之時。然恭儉養民。以答天譴如文景。必轉災爲祥矣。且雖幷稱文景。而景帝天姿刻深。而又多忌克。不及文帝矣。惟節儉育民。以致豐富則一也。

번역

삼대(三代) 이후로 성치(盛治)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반드시 한 문제(漢文帝)와 한 경제(漢景帝)의 때를 말한다. 문경(文景)의 시대에 재변(災變)이 많았다는 것이 간책(簡策)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부서(富庶)하게 된 효과는 한나라 4백 년을 끌고 온 불패의 기업(基業)을 넓힌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재변을 만나 두려워하여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백성을 사랑하고 길러 주었으니, 비록 그 재변이 있더라도 응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조서를 내려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조부(租賦)를 감면하였으니, 그 마음은 참으로 백성을 기르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며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는 데 있었다. 경제 또한 공손하고 검소하며 백성을 길러 주어 선대의 행실을 잘 따랐으니, 재변이 비록 많았으나 응하는 것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근래의 재변은 문경 때보다 심하다. 그러나 공손하고 검소하며 백성을 길러 주는 것으로서 하늘의 꾸짖음에 답한다면 반드시 재앙을 상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록 함께 문경이라고 일컬어지지만 경제의 천품이 각박하고 또 기벽(忌癖)이 많아 문제만 못하였다. 오직 절검(節儉)과 육민(育民)으로 풍요를 이루는 것은 한결같다.

106. 經筵請立後奉祀已定者勿改事議啓〔原注:同上日。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9C

원문

大典。奉祀與立後。各有其法。見者未解其用法。未免有差。今者廷議已定。從大典本意。非新立法之事。似不當定限。但事在□先朝者。或蒙特恩。或因該曹受敎。皆經□先王聖斷。一切改之未安。凡繼後者通奉祖以上之祀者。在□先朝所定。則勿令更改。以杜紛紜之弊何如。

번역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봉사(奉祀)와 입후(立後)에 각각 그 법이 있으나, 보는 자들이 그 용법을 이해하지 못하여 차이가 생기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조정의 의론이 이미 정해졌으니 《경국대전》의 본뜻을 따르되 새로 법을 세우는 일이 아니면 기한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다만 선왕(先王)에 계신 분들의 일은 혹 특별한 은전을 입기도 하고 혹은 해당 조(曹)의 수교(受敎)로 인하여 모두 선왕의 성단(聖斷)을 거쳤으니, 일절 고치는 것이 온당치 않습니다. 대개 후사를 잇는 자가 통봉조(通奉祖) 이상에 대한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왕이 정한 바에 있으니, 고치지 못하게 하여 분분한 폐단을 막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원문

答曰。定限事。依議施行。

번역

답하기를, “기한을 정하는 일은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07. 不意□幸行陳規啓〔原注:同年丙辰九月己酉。□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49D

원문

人君擧動。必須愼重。不可輕動。雖禮當往處。必□命有司稟所之而先爲淸道。頃者。不意□幸行于元子避寓所。扈從諸事。非徒急遽。閭閻所見。亦甚顚倒。物情騷然。極爲未安。臣不敢不啓。

번역

임금의 거동은 반드시 신중하여야 하고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비록 예에 마땅한 곳이라도 반드시 □□명(命)을 내려 유사에게 여쭈어 먼저 길을 닦게 해야 합니다. 지난번 뜻밖에 □□행차를 원자께서 피우처하신 곳으로 하여, 호종하는 여러 일이 급작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여염에서 본 것도 매우 전도되어 물정(物情)이 소란하였으니,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신이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문

答曰。所啓當矣。其日之事。果爲急迫也。非徒欲見元子。是予潛邸所居之地。而□先王亦有幸行之時。故謂可臨時暫往見矣。啓意知道。

번역

답하기를, “아뢴 바가 옳다. 그날의 일은 과연 급박하였다. 단지 원자를 보고자 해서가 아니라 이곳이 내가 잠저(潛邸)로 있을 때 살던 곳이고 선왕께서도 행차할 때에 들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가서 잠시 가 보아도 될 것이라고 여겼다. 아뢴 뜻을 잘 알았다.” 하였다.

108. 請停望闕禮及□大妃殿陳賀啓〔原注:同年丙辰十二月丙戌朔。左議政,領議政沈連源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0A

원문

明日自□上欲行望闕禮。近者日氣甚寒。若昧爽前三刻。尤爲寒冽。□祖宗朝若隆冬盛暑之日則有權停之時。請望闕禮權停何如。且明日問安□幸行時。亦定於辰初。而辰初亦日出前一刻。陽氣未發。請於巳初□動駕。而□兩大妃殿陳賀。幷以權停禮行之。常時自□上易於感冒。故敢啓。

번역

내일 궁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려고 하는데, 근자에 날씨가 매우 차서 새벽 3각(刻) 전에 나가면 더욱 추울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 혹 한겨울이나 한여름에는 임시로 정지한 때가 있었으니, 망궐례를 임시로 정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내일 문안하러 행차하실 때도 진초(辰初)로 정하였는데, 진초는 또한 해가 뜨기 1각 전이라 양기(陽氣)가 아직 발하지 않았습니다. 사초(巳初)에 동가(動駕)하시고 두 대비전의 진하례(陳賀禮)도 모두 임시로 정지하고 예법대로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평소 궁에서 감기에 걸리기 쉬우므로 감히 아룁니다.

원문

答曰。近者日氣甚寒。所啓之意當然。自上氣平無事之時。爲上之事。安敢不爲乎。明日問安則非如常時。不允。〔原注:再啓。□依允。〕

번역

답하기를, “요즘 날씨가 매우 추우니 아뢴 뜻이 당연하다. 상께서 기분이 평안하고 아무 일이 없을 때에 상을 위한 일을 어찌 감히 하지 않겠는가. 내일 문안하는 것은 평상시와 같지 않으니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주(原註)에 재차 아뢰니, 윤허한다고 하였다.-

109. 陵行儀禮。一依前例未便啓。〔原注:明宗十三年丁巳三月癸亥。□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拜陵時。不用五禮儀。而一依□祖宗朝例。永爲定規則未便。陵有遠近。或依五禮儀。或着戎服。自□上臨時傳敎則可矣。

번역

능에 전배할 때 《오례의》를 쓰지 않고 한결같이 □조(□祖)의 조종조(祖宗朝) 예에 의거하여 영구히 정규로 삼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능이 원근이 있으니, 혹 《오례의》에 의거하고 혹은 융복을 입는 것은 □상께서 때에 따라 전교하시면 될 것입니다.

110. 犯邊倭船。審察形勢處置啓。〔原注:同年丁巳四月甲辰。□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0B

원문

前者有議論。故議之。倭人之現形。邊將例爲勦捕。是爲邊將之當爲。然犯邊之船則勦捕可矣。至於漂流船。亦盡勦殺。以此結怨。亦不可不慮。自今以後。審察形勢。若持兵器。爲戰計犯邊之船則勦滅。載物貨無兵器之船則使不得下陸。趁急馳啓。以待朝廷處置之何如。

번역

이전에 논의한 바가 있었으므로 의논합니다. 왜인이 정체를 드러내면 변장(邊將)이 으레 체포하는 것이 변장의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변방을 침범한 배는 체포해도 좋으나 표류해 온 배까지 모두 체포하여 죽이면 이로 인해 원망을 사게 되니 또한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후로는 형세를 자세히 살펴 병기를 지니고서 전쟁을 도모하기 위해 변방을 침범한 배라면 체포하여 멸하고, 물화(物貨)를 실었으나 병기가 없는 배라면 하륙하지 못하게 하고 급히 장계하여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11. 自□上緦服中宴禮事回啓〔原注:同年丁巳八月癸卯。□傳敎以緦服欲退宴享。收議三公。□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0C

원문

服有輕重。情因隆殺。故緦麻等服。不在停朝市之列。安南都正妻金氏。於當代爲緦麻之親。則自□上行明日大禮。是乃禮經所謂諸侯絶之之義也。若大夫則在服中不與宴樂。今王子君以服制不參。禮也。自□上不以緦麻停退亦禮也。然自□上聞訃。欲退宴禮。是亦出於□聖衷親親之至情。臣何敢異議。雖退一兩日。無不可。

번역

복제(服制)에는 경중이 있고 정세에 따라 변동되므로 시마복(緦麻服) 등은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안남도정(安南都正) 김씨가 당대에 시마복을 입어야 하는 친척이 되었으니, □ 상께서 내일 대례(大禮)를 행하시는 것은 예경(禮經)에서 ‘제후는 끊는다.’라고 한 뜻입니다. 만약 대부(大夫)라면 복중(服中)에 연악(宴樂)에 참여하지 않는데, 지금 왕자군이 복제 때문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예법입니다. □ 상께서 시마복을 입고 조시를 정지하지 않는 것 또한 예법입니다. 그러나 □ 상께서 부음을 듣고서 연례에서 물러나고자 하시는 것은 성상의 지극한 친친(親親)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신이 어찌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비록 하루 이틀 물러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112. 申救曺植啓〔原注:年月日未詳。左議政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曺植疏。專襲古人告君之語。極言□國家孤危之勢。非慢語也。〔原注:按是時。曺南冥植。初除丹城。辭職疏有慈殿淵塞。不過深宮之一寡婦。□殿下幼沖。不過□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人心之億萬。何以當之之語。□上以寡婦二字。語涉不遜。怒幾欲罪之。公深思可救之方。使李淸江濟臣。抽考宋史英宗記歐陽脩告君曰。慈聖太后。深宮之一婦人。臣等五六書生之語。以此救解。□上竟不問。〕

번역

조식(曺植)의 상소는 전적으로 옛사람이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답습하여 국가가 외롭고 위태로운 형세를 극언하였으니, 만언(慢言)이 아니다. 【원주(原注) : 살피건대, 이때 조남명(曺南冥) 식(植)은 처음 단성 군수(丹城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사직하는 상소에서 “자전(慈殿)은 깊은 궁궐의 한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 전하께서는 어린 나이로 □ 선왕의 한 외로운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백천 가지요 인심이 억만 가지이니, 어떻게 당해 내시겠습니까.”라는 말이 있었다. □ 임금이 ‘과부’ 두 글자를 가지고 말하기가 불손하다고 여겨 노하여 거의 죄주려고 하였는데, 공이 깊이 생각하여 구제할 방도를 마련하였다. 이청강(李淸江) 제신(濟臣)으로 하여금 《송사(宋史)》 영종기(英宗記)에 오양수(歐陽脩)가 임금에게 고한 말을 뽑아내어 “자성태후(慈聖太后)는 깊은 궁궐의 한 부인이고, 신들은 다섯 여섯 서생입니다.”라는 말로 이로써 구제하여 해명하게 하니, □ 임금이 마침내 묻지 않았다.】

113. 因災異請遞職啓〔原注:同年丁巳十一月乙酉。□左議政,領相沈連源,右相李浚慶。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近日衆災連緜。彗星又見。而昨日冬雷之變。極爲非常。臣等俱以無狀。久忝相位。故致此變異也。古者。有因災變責免三公之事。速遞臣等。更求賢德。以答天譴。

번역

근일 여러 재변이 연이어 발생하고 혜성(彗星)까지 나타났으며 어제는 겨울에 천둥이 치는 매우 비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들이 모두 무능한 자로서 오랫동안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옛날에는 재변을 계기로 삼공(三公)에게 책임을 물어 면직시킨 일이 있었으니, 속히 신들을 체차하고 다시 어진 이를 구하여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소서.

원문

答曰。近災疊見。又有星變而昨日冬雷。甚於夏月。天怒非常。是予薄德。不能答天譴故也。勿辭。〔原注:三啓。□不允。〕

번역

답하기를, “근래에 재해가 겹쳐 나타나고 또 별의 변괴가 있었으며 어제 겨울에 친 우레는 여름철보다 심하였다. 하늘이 노하여 예사롭지 않은 벌을 내린 것은 나의 부족한 덕으로 하늘의 견책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양하지 말라.”- 원주(原注)에 ‘세 번 아뢰었다.-라고 하였다.

114. 請仍任領議政沈連源啓〔原注:明宗十三年戊午二月乙巳。□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1A, ITKC_MO_0130A_A026_051B

원문

小臣昨日。伏承遞領相之命。卽欲以不可遞之意面□啓。而却念臣亦嘗以衰病不職。懇乞辭避。而在同僚則反請勿遞。恐臣前日之辭嫌於僞。故悶默而退。終夜以思。如臣衰病不能者卽被遞。朝家之福也。若連源宿德元老。聲望宿著。固宜處百僚之上。而裁決要務。匡輔時政者也。居位則朝廷爲重。去位則人望有缺。輕重所係。其機如此。況其年齡雖暮。精力不衰。疾若少痊。便可出仕。而自□上不待調攝之效。上辭未幾。遽令遞職。請仍任以待其瘳。

번역

소신이 어제 영의정을 체차하라는 명을 받들고 즉시 체차할 수 없다는 뜻으로 면대하여 아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득 생각건대, 신도 일찍이 노쇠하고 병든 몸으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간곡히 사직을 청하였는데 동료들은 도리어 체차하지 말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지난날의 말이 거짓이라는 혐의가 있을까 두려워 근심에 잠겨 침묵한 채 물러나 밤새도록 생각하였습니다. 신처럼 노쇠하고 병들어 제대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자는 즉시 체차되는 것이 조정의 복입니다. 그러나 연원(連源) 같은 숙덕(宿德)을 지닌 원로(元老)는 명망이 오래전부터 드러나 있어 진실로 백관의 위에 처하여 시정(時政)을 바로잡고 보좌하는 요무를 맡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조정이 중시하고, 그 자리를 떠나면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납니다. 경중이 관계되는 기미가 이와 같습니다. 더구나 연세는 비록 노쇠하였으나 정력이 쇠하지 않았고 병도 조금 나으면 곧바로 출사할 수 있으며, 스스로 조섭(調攝)하는 효과를 기다리지 않고도 상사(上辭)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체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로 직임을 맡겨서 그가 회복하기를 기다리소서.

원문

答曰。啓意固當。在平時則可以待痊。而今當政煩之時。故不得已從其請。似難仍任。再啓曰。三公之職。雖無上下。至於責任。在於首相。苟非其人。不可冒處。連源正合是任。不可以病遞之。待其病愈。允合事體。朝廷公議皆然。故敢啓。

번역

답하기를, “아뢰는 뜻이 진실로 마땅하다. 평상시라면 낫기를 기다릴 수 있으나 지금은 정무가 번다한 때이다. 그러므로 그 청을 따르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삼공의 직임은 비록 상하가 없으나 책임은 수상에게 달려 있다. 진실로 적임자가 아니면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되니, 연원이 바로 이 직임을 맡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병으로 체차해서는 안 되고 병이 낫기를 기다리는 것이 참으로 사체에 합당하다. 조정의 공의가 모두 그러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원문

答曰。如啓仍任。遣史官于領相曰。昨雖不得已從請。心有所缺然。左相從公議再啓。是以仍任。安心調理。出仕。

번역

답하기를, “아뢴 대로 잉임(仍任)하겠다. 사관을 보내 영의정에게 이르기를 ‘어제는 비록 부득이 청한 대로 하였으나 마음속에 서운함이 있었다. 좌상이 공론을 따라 다시 아뢰었으므로 잉임하는 것이니, 안심하고 조리하여 출사하라.’라고 하라.” 하였다.

115. 因楊震疏。請任用李滉啓。〔原注:同年戊午四月丙申。□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楊震之疏曰。人主以得賢爲本。斯言至矣。草野豈無可用之人哉。自□上求賢如渴。則必有至者矣。頃者有學行之人。〔原注:指李滉〕或以身病。不能從仕而歸者有之矣。自□上如知其賢。則必委心任之可也。

번역

양진(楊震)의 상소에 이르기를, “임금은 어진 이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으니 이 말이 지극합니다. 초야에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임금께서 어진 사람을 구하기를 목마른 듯이 한다면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학문과 행실을 갖춘 사람이〔원주(原注)에는 이황(李滉)을 가리킨다.〕신병으로 인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임금께서 만일 그 어짊을 안다면 반드시 마음을 다해 맡기셔야 합니다.

116. 請優遇遞相沈連源啓〔原注:同年戊午五月丙寅。□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1D

원문

沈連源以先朝舊臣。遭遇□聖明。豈敢無故而強欲辭退乎。只以病勢沈緜。經時曠職爲未安。故欲辭重任耳。今特□允所請。用副其願。□聖恩至重。必有痊復之日矣。前世。大臣以病去位。或因事暫免。而苟係人望之人。旋復其任。我□祖宗朝。亦多有之。連源之病完差。則復用爲當。且連源當病辭之日。條疏嘉言。不忘進啓之意。其篤於愛君憂國之誠至矣。自□上優示深納之意。又命詞臣。作一敎書。答其惓惓之意何如。臣又聞連源以病辭之故。不受四月之祿云。宜命有司輸送而優之。

번역

심연원은 선왕조의 옛 신하로서 성명(聖明)을 만나서 어찌 감히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억지로 사퇴하려고 하겠습니까. 다만 병세가 깊어지면서 한동안 직무를 비우는 것이 미안하다고 하여 중임을 사양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하여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성은이 지극하시니 반드시 완쾌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전에도 대신(大臣)이 병으로 자리를 떠나거나 혹 일 때문에 잠시 면직되었으나 인망에 관계되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직임을 회복하였습니다. 우리 조종조에서도 또한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연원의 병이 완전히 나으면 다시 부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심연원이 병을 이유로 사양하던 날 올린 조목별 상소의 가언(嘉言)에 진계(進啓)할 뜻을 잊지 않았으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위에서 깊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우애 있게 보이시고 또 사신에게 명하여 한 통의 교서로써 그의 간절한 뜻에 답하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또 듣건대 심연원이 병으로 사양한 까닭으로 4월분 녹봉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실어 보내 주어 우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원문

答曰。見此啓辭當矣。自古人臣以病去位。是乃優老恤病。使之安心調病之意也。今者沈連源。予豈欲遞乎。但以累次辭病。一以使安心調理。一以計國家重任。故特副其願也。幷如啓。

번역

답하기를, 이 계사를 보았으면 당연하다. 예로부터 신하가 병을 이유로 벼슬자리를 떠나는 것은 노인을 우대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아 안심하고 조리하게 하려는 뜻이다. 지금 심연원이 어찌 체차되기를 바랐겠는가마는 다만 누차 병을 사양한 것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그를 안심시켜 조리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국가의 중임을 생각하여 특별히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문

史官曰。尙某持重寬和。有大臣之度。雅性愛人。無忮害之心。

번역

사관(史官)이 말하기를, “상모는 지중하고 관대하여 대신의 도량이 있었고, 천성이 사람을 사랑하여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 하였다.

117. 經筵辭新授領議政啓。〔原注:同年戊午六月丁丑朔壬寅。晝講。〕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2A

원문

小臣稟氣迂闊。計慮愚妄。自始忝台輔。極知薄劣小才。不足以當重大之任。而累辭未蒙□允許。強顏待罪。奄過十年。其間豈有裁決之獨見。常賴同僚之共濟。不意今日又陞首相。夫台輔之職。雖無上下。首相則其任尤重。同僚議論國事之際。其所可否。取決於首相者有之矣。臣有何德望識見。而敢爲可否於其間哉。冒居百僚之上。將以何物。上報涓埃。下稱表率。羞當時之賢。招後來之譏。臣竊悶焉。請速□命遞臣職。

번역

소신은 타고난 기질이 우활하고 계략과 생각이 어리석고 망녕되어 처음부터 태보(台輔)의 자리에 있으면서 박렬한 소신의 재주가 중대한 책임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억지로 얼굴을 들고서 직무를 수행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어찌 독단적으로 재결(裁決)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항상 동료들의 도움에 힘입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오늘 또다시 영의정으로 승진하였으니, 태보의 직책은 비록 상하가 없으나 영의정의 임무는 더욱 중하여 동료들이 국사를 논할 때 그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 영의정에 달려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이 무슨 덕망과 식견이 있다고 감히 그 사이에 가부를 논하겠습니까. 백관의 위에 함부로 있으면서 장차 무엇으로 위로는 티끌만큼이라도 보답하고 아래로는 모범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당대의 현인에게 부끄럽고 후세의 비난을 초래할 것이니, 신은 매우 민망합니다. 속히 체직하라는 명을 내려 주소서.

원문

答曰。卿德望素重。識見周備。爲相十年。予已知正合於重任。今陞首相。尤切補衮之望。卿宜勿辭。務盡燮理之職。

번역

답하기를, “경의 덕망은 평소 중시되었고 식견이 두루 갖추어져서 1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니, 내가 이미 중임에 꼭 합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영의정에 오르는 것은 더욱 나라를 보좌할 것이라는 기대가 간절하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다스리는 직분을 힘써 다하라.” 하였다.

118. 經筵陳風俗之變進戒啓。〔原注:同年戊午六月丁丑朔乙酉。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2C

원문

近來人心風俗。漸不如古。殺親者或有之。此實時變之大者也。盜賊之類。以爲殺一士族。重於殺賤十人。相戒勿犯。近來士族之見害於盜賊者多有之。此年歲凶荒。鄕無善俗。不知有朝廷故也。國家之憂。不在於夷狄之禍。而在風俗之薄。自□上當惕然戒懼。深思轉移之機何如。

번역

근래 인심과 풍속이 점차 옛날만 못하여 친족을 죽이는 자가 더러 있습니다. 이는 실로 시변(時變)의 큰 것입니다. 도적의 무리들은 한 명의 사족(士族)을 죽이는 것이 천인(賤人) 열 명을 죽이는 것보다 중하다고 여겨 서로 범하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근래에 사족이 도적에게 해를 입는 경우가 많으니, 이는 풍년이 들지 않아 흉년이 들어서 향리에 선한 풍속이 없어 조정이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걱정은 오랑캐의 재앙에 있지 않고 풍속이 박해지는 데 있으니, 위에서부터 마땅히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깊이 생각해서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색해야 합니다.

원문

史臣曰。昔者魏尙爲漢相。而不以逆賊風雨爲憂。而以子殺父妻殺夫爲憂。輒先奏之。漢史美之。今尙某之啓。眞宰相之言也。

번역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옛날에 위상(魏尙)이 한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역적 풍우(風雨)가 걱정되지 않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것을 걱정하여 번번이 먼저 아뢰었으므로 《한서》에서 그를 칭찬하였다. 지금 상모(尙某)의 계사(啓辭)는 참으로 재상의 말이다.” 하였다.

119. 因星變辭職啓〔原注:同年戊午七月丙午朔壬申。□領議政。左議政尹漑,右議政李浚慶。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自□上遇災而懼。〔原注:前夜。彗星見。□上欲避殿減饍。有傳旨。〕避殿減膳之敎。不待在下之啓請。□聖誠至矣。可以感天弭災矣。大抵災變之出。由於輔相之非人。臣等俱以無狀。失職甚矣。在職不安。請速遞。

번역

상께서 재이를 만나 두려워하셨습니다.- 원주(原注)에 “전날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 상이 궁전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려고 하였는데 전지(傳旨)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궁전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라는 하교는 아래에서 계청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으니, 성상께서 지극히 정성스러우시니 하늘을 감동시켜 재이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재변(災變)이 일어나는 것은 보좌하는 신하가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인데, 신들은 모두 무능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직책에 있는 것이 불안하니 속히 체차해 주소서.

원문

答曰。天人一理。顯微無間。予以渺末。叨承丕緖。多有闕政。以致災變之連緜。卿等有何失職乎。勿爲未安。勉輔寡躬。

번역

답하기를, “천인(天人)은 하나의 이치로 현미(顯微)에 차이가 없는데, 내가 미천한 몸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을 계승하여 정사를 제대로 행하지 못해 재변이 잇따르게 하였으니, 경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미안하게 여기지 말고 힘써 이 몸을 보좌하라.” 하였다.

120. 陳庶孼科擧立法啓〔原注:同年戊午七月丙午朔己巳。□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3A

원문

庶孼一依中朝之制。欲勿禁錮。此古昔聖人立賢無方之美意。士大夫間。或有此議。然我國庶孼。不許赴擧。著在令甲。頃年因政議。只令良妾孫許赴兩科。是亦依中國愛惜人材之意。而物論尙有未便者。今不可以其陳疏。〔原注:時朴漢懋上言。漢懋。庶孼欲赴擧者也。〕勿論良賤。幷廢禁錮之法也。但臣等聞之。良妾孫赴擧之法已立。而錄名之際。四館憑藉。考覈派係文藉。不肯許赴。以此抱冤者甚多云。令該曹諭于四館。可赴者許赴。使無冤悶何如。且頃以彗星之變避正殿矣。近者妖星已滅。日氣漸寒。乃於簷下。頻御□經筵。至爲未安。請復正殿。

번역

서얼(庶孼)을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금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옛날 성인께서 어진 이를 세우는 데 방법이 없다고 하신 아름다운 뜻입니다. 사대부들 사이에도 혹 이런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서얼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근년에 정론(政論)을 통해 양첩(良妾)의 손자에게만 두 가지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으니, 이 또한 중국에서 인재를 아끼는 뜻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여론에는 아직도 온당치 않다고 여기는 점이 있으니, 지금 그가 상소한 것을 가지고〔원주(原註)〕 박한무(朴漢懋)가 상언하였다. 박한무는 서얼로서 과거에 응시하고자 한 사람이다. 양천과 천인(賤人)을 막론하고 모두 금고하는 법을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신들이 듣건대, 양첩의 손자가 과거에 응시하는 법이 이미 세워졌는데도 녹명(錄名)할 때 사관(四館)에서 벼슬자리를 빙자하여 문적(文籍)과 파계(派系)를 조사하고서 응시하도록 허락하지 않아 이 때문에 원통함을 품은 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해당 조로 하여금 사관에 유시하여 응시할 수 있는 자는 응시하게 함으로써 원망이 없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지난번 혜성(彗星)의 변고로 정전(正殿)을 피하였는데, 근래에는 요성(妖星)이 이미 사라지고 날씨가 점차 추워졌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첨하(簷下)에서 경연(經筵)을 자주 행하시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정전을 회복하소서.

원문

答曰。彗雖已滅。遽復正殿。於心未安。但明日啓覆死囚。月廊似窄。如啓。朴漢懋上言事。啓意當矣。令該曹諭于四館事。如啓。

번역

답하기를, “혜성이 비록 이미 사라졌으나 갑자기 정전(正殿)에 다시 나타났으니 마음에 편치 않다. 다만 내일 계복사죄수(啓覆死囚)는 월랑(月廊)이 좁을 것 같으니 아뢴 대로 하라. 박한무가 상언한 일은 아뢴 뜻이 옳다. 해당 조로 하여금 사관에게 유시하게 하는 일도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1. 請明審刑獄啓〔原注:同年戊午九月甲戌朔壬辰。□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人君必待善人君子爲之輔佑。然後事得其序。物得其和。而善治可興。災害可消矣。如刑獄之間。人物係焉。小有失誤。冤枉必多。伸其滯冤。是亦弭災之一道。而有罪者輕釋。亦非答天譴也。當明審得中可矣。

번역

임금은 반드시 선인(善人)과 군자(君子)가 보좌하고 도와주기를 기다린 뒤에야 일이 그 순서를 얻고 만물이 그 조화를 얻어 잘 다스려져서 재앙이 사라지게 된다. 형옥(刑獄)의 경우 인물과 관계되는데,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원통한 사람이 반드시 많아진다. 억울하게 갇혀 있는 사람을 풀어 주는 것도 재앙을 막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죄가 있는 자를 가볍게 석방하는 것 또한 하늘의 견책에 답하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분명하고 자세히 살펴서 중도(中道)를 얻어야 한다.

122. 左相尹漑。以巧言當罷。請恕容啓。〔原注:同年戊午九月甲戌朔乙巳。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臣見漑之爲人。〔原注:左相尹漑〕稟性剛明。有爲國之心。每事欲盡其道。故不無多言之病。豈至於巧飾乎。當金啓進啓之日。臣若入侍則必贊其言〔原注:獻納金啓啓事。忤□上意。有狂誕買直之敎。尹漑贊美金啓。□上亦指漑爲巧言。皆當罷。〕如尹漑矣。人主一言。重於雷霆。若以言而責之。則新進之士。恐皆有戒言之風也。上曰。予意盡諭矣。

번역

신이 윤개를 보고는, 좌상(左相) 윤개(尹漑)이다. 성품이 강명(剛明)하고 나라를 위한 마음이 있어서 매사에 그 도리를 다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말이 많은 병이 없지 않았으니, 어찌 교묘하게 꾸미는 데까지 이르렀겠는가. 김계진(金啓進)이 아뢰던 날에 신이 만약 입시하였다면 반드시 윤개처럼 그의 말을 찬성했을 것이다.-원주(原注)에 “헌납 김계(金啓)의 일이다. 상의 뜻을 거스르자, 미친 듯이 직언을 사들이라는 하교가 있었다. 윤개가 김계를 찬미하자 상도 윤개를 교묘한 말이라고 지적하였다. 모두 파직되어야 한다.” 하였다.- 임금의 한마디는 뇌성벽력보다 중하니, 만약 말로 책망한다면 신진 선비들은 모두 말을 삼가는 풍조가 있을 것이다.-임금이 “내 뜻을 다 유시하였다.” 하였다.

123. 遷陵事回啓〔原注:同年己未四月壬寅朔甲子。□傳敎于賓廳。以靖陵遷封事。□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3C

원문

風水之說。出於後世。其論吉凶不足憑。況近日爲地理之術者。互相排擠。其言亦難取信。但□聖意旣以爲未安。則在下者不敢容議於其間。然遷陵事體至爲重大。更加□聖念。

번역

풍수설은 후세에 나온 것으로 길흉을 논하는 것이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근일에 지리술(地理術)을 행하는 자들이 서로 배척하고 있으니, 그 말도 믿기 어렵습니다. 다만 성상의 뜻이 이미 온당치 않다고 여기시니, 신하들은 감히 그 사이에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능을 옮기는 일은 체모가 매우 중대하니, 다시 한번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원문

答曰。自古不無遷陵。而高陽坐地。〔原注:靖陵〕自□祖宗朝累議而不用。豈無其意。士大夫葬父母之地。必欲擇盡美而用之。況□皇考之陵。少有不吉之議。則何敢安然不遷。以懷平生之恨乎。勢不得不遷。不可以風水之說爲難取信。而不擇吉凶也。

번역

답하기를, “예로부터 능을 옮기지 않은 적이 없으나 고양(高陽)- 원주(原注)에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은 땅이 좋아서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누차 의논하였으나 쓰지 않았으니 어찌 그 뜻이 없었겠는가. 사대부들이 부모를 장사 지낼 곳을 반드시 가장 좋은 곳으로 택하여 쓰고자 하는데, 더구나 황고(皇考)의 능에 조금이라도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다면 어찌 감히 편안하게 옮기지 않고 평생의 한을 품겠는가. 형세상 옮기지 않을 수 없으니 풍수설 때문에 믿기를 어렵게 여겨 길흉을 가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124. 因雨雹之變。請罷職啓。〔原注:同年己未四月壬寅朔戊子。□領議政。左相安玹,右相李浚慶。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4A

원문

臣等伏見平安道觀察使狀□啓。〔原注:狀云。嘉山郡。四月二十一日。風雨大作。天地晦冥。雷電振動。雹下如注。大如鉢。小如鷄卵。所觸之物如人家醬甕。無不破碎。木葉盡脫。飛禽觸死。田疇間積厚布尺二尺許。麻麥木花。只餘根莖。幷爲全災。定州。同日雨雹。大如鷄卵。老人男子一名及十六歲女兒一口。耘苗田間。被雹致死。義州,安州,价川,宣川,博川,郭山,鐵山。同日風雹。拔木飛瓦。禾穀被災。大槩皆同。赤地無餘。督令改反耕付種。而民生號泣。生理無路云云。〕氷雹之災。至於殺人。此前古所無之變。至爲駭怪。遍考歷代雨雹之變。未有無事應之時。當時或有刑罰過中者。或有抑賢用邪者。其應不一。皆有感召而發此等事變。不可殫記。且夏雹者。政令煩苛。敎令數變。無有定法之應云。大槩皆陰脅陽之象也。臣等俱以非才。謬居台鼎之位。輔理無狀。實致此變。反躬自省。不覺慙懼。請罷臣等之職。更卜忠賢。務致中和之功。以弭天變。

번역

신들이 삼가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狀啓)를 보았는데, 원래 주석에 ‘장계라고 하였다. 가산군(嘉山郡)은 4월 21일에 비바람이 크게 불고 천지가 어두워지며 우레와 번개가 진동하고 우박이 쏟아져서 큰 것은 사발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여 부딪히는 물건이 인가(人家)의 장독과 같아서 모두 깨졌으며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나는 새들은 부딪혀 죽었으며 논밭 사이에는 두꺼운 베나 1, 2척이나 쌓여서 삼과 보리[麻麥]와 나무꽃[木花]이 뿌리와 줄기만 남고 모두 재앙을 입었다. 정주(定州)는 같은 날 우박이 달걀만 하게 내려 노인과 남자 한 명 및 16세 여아 한 명이 밭에서 김맬 때 우박에 맞아 죽었다. 의주(義州), 안주(安州), 개천(价川), 선천(宣川), 박천(博川), 곽산(郭山), 철산(鐵山)은 같은 날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려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으며 곡식이 재해를 입었으니 대체로 모두 같아서 땅이 온통 붉게 드러나 남은 것이 없어서 독려하여 다시 갈고 씨를 뿌리게 하였으나 백성들이 울부짖어 살길이 없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박의 재해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니, 이는 이전에도 없던 변괴로 매우 해괴합니다. 역대의 우박에 관한 변고를 두루 살펴보아도 아무 일도 없다가 응한 때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혹 형벌이 지나친 자가 있었거나 혹은 어진 이를 억누르고 사악한 자를 등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응하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니었으니 모두 감응하여 이러한 변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일들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또 여름에 우박이 내린 경우는 정령(政令)이 번다하고 교령(敎令)이 자주 바뀌어 법으로 정해진 응함이 없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모두 음(陰)이 양(陽)을 위협하는 현상입니다. 신들은 모두 재주가 없는 자로서 잘못 대신과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보좌하고 다스리는 것이 형편없어 실로 이러한 변고를 초래하였습니다. 스스로 반성해 보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들의 직임을 파직하고 다시 충신과 어진 이를 뽑아 중화(中和)의 공을 이루게 하여 천변(天變)을 그치게 하소서.

원문

答曰。頃見平安氷雹之災出於非常。予心驚怪。方切未安之懷。今見卿等之啓。尤爲未安。天示如此之變。實由予否德而然。卿有何輔理之失乎。宜勿辭。

번역

답하기를, “지난번 평안도에 얼음과 우박이 내리는 비상한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나는 마음이 놀랍고 괴이하여 매우 미안하게 여겼다. 지금 경들의 계사를 보니 더욱 미안하다. 하늘이 이와 같은 변괴를 보인 것은 실로 나의 부덕함에서 비롯된 것인데, 경에게 무슨 보리(輔理)의 잘못이 있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25. 因雨雹之變。請罷職啓。○再啓〔原注:同日〕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4B

원문

當今自□上勵精圖治。凡發政施仁。未有差失。而天變至此。緣臣等素無才德。謬當燮理之地。不能宣揚□聖化。致有陰陽失和。災沴來干之應。反覆思量。罪實由於臣等。請速斥罷。以回天意。

번역

당금에 상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하여 정사를 행하고 인을 베푸는 데에 잘못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변고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들에게 본래 재덕(才德)이 없어 그릇되게 조정의 중책을 맡아 성상의 교화를 펴지 못하여 음양의 조화가 어긋나서 재앙이 침범하는 응험이 있게 된 것입니다. 깊이 생각건대 죄는 실로 신들에게 있으니, 속히 파직하심으로써 하늘의 뜻을 돌리소서.

원문

答曰。變異之現。由予不敏。不能答天譴故也。宜勿再辭。

번역

답하기를, “변고가 일어난 것은 내가 어질지 못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26. 因風災請遞職啓〔原注:同年己未六月辛丑朔壬戌。□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4C

원문

臣伏見各道狀啓。頃日大風之災。近古所無。至於大木拔折。方穗之穀。盡爲摧偃。哀我民生。已無卒歲之資。根本旣瘁。國將何依。念及於此。莫知仰喩。況此風變。考諸前史。或以爲風者。象人君號令。或以爲大臣專恣氣盛則致云。方今自□上雖無號令之顚倒。至於專恣氣盛之感則臣以匪材。冒居台輔。其於言動。豈無專恣之罪乎。故上動天象。致此非常之變。不勝恐懼。請□命遞臣職。

번역

신이 각 도의 장계를 보니, 지난번 큰 바람은 근고에 없던 재해로 대목(大木)이 뽑히고 꺾여서 방수(方穗)의 곡식이 모두 쓰러졌습니다. 슬프도다 우리 백성들은 이미 한 해를 지낼 양식이 없게 되었으니, 근본이 이미 피폐해졌는데 나라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우러러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이 바람의 변고는 전사(前史)를 상고해 보면 혹자는 ‘바람은 임금의 호령을 본받는다.’라고 하였고, 혹은 ‘대신이 전횡하고 기세가 성하면 미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위에서 비록 호령이 전도된 적은 없으나 전횡하고 기세가 성한 감통(感通)에 이르렀으니, 신은 재주 없는 자로서 외람되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니 언동에 어찌 전횡하는 죄가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위에서 천상의 기상을 움직여 이처럼 비상한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두려움을 금할 수 없으니, 부디 명을 내려 신의 직임을 체차해 주소서.

원문

答曰。十三日大風之災。京外皆然。予見各道狀辭。心實未安。將予兢惶之意。欲喩卿等。而近因心氣不安。姑默不言矣。予以否德。叨主臣民。號令之顚倒。必多有之。予嘗慮焉。卿有何專恣氣盛之事乎。但當上下交修。以應天變而已。勿辭。

번역

답하기를, “13일의 큰 바람 재해는 서울과 지방이 모두 그러하였다. 내가 각 도의 장계(狀啓)를 보고 마음이 실로 편치 못하여 나의 두렵고 황공한 뜻을 경들에게 말하려고 하였으나 근래 심기가 편치 않아서 우선 침묵하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부덕한 것으로 신민을 다스리니 호령이 전도된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염려하였는데, 경에게 어찌 독단하고 기세등등한 일이 있겠는가. 다만 상하가 서로 수양하여 천변(天變)에 대응해야 할 뿐이다.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27. 自□上親行禱雨。請罷免啓。〔原注:同年己未七月庚午朔丁丑。□領議政。左,右相。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4D, ITKC_MO_0130A_A026_055A

원문

今年旱暵。振古所無。湖嶺二南。江原,淸洪兩道。自春靳澤。已無西成之望。畿甸則雨澤不愆。百穀向盛。而正當熟成之時。遽罹枯旱之災。自□上憫慮。竝走群望。凡所以求雨之方。靡所不擧。頓無欲雨之意。臣等竊自憂憫。未遑寢食。今又傳聞□聖上親勞玉體。禁中禱雨。臣等俱以無狀。致此大變。不能格天。反貽君父之憂。措身無地。伏乞罷斥臣等。更求賢輔。改紀時政。然後庶幾天必悅豫。膏澤時注。民無菜色之憂矣。答曰。予以否德。致此災變。憫雨之念。頃刻不弛。果於禁中禱雨。雲集雨下而旋霽。數日以來。雖有雨徵。未見滂沱。此實予誠不能格天故也。卿等有何不能調燮乎。宜勿辭。

번역

올해의 가뭄은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호남과 영남, 강원도와 청주(淸州)ㆍ홍주(洪州) 두 도는 봄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이미 곡식이 익을 가망이 없습니다. 경기에는 비가 제때에 내려 모든 곡식이 풍성해지려 하였는데, 마침 잘 익어야 할 때 갑자기 가뭄의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상께서 민심을 염려하여 두루 많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비를 구하는 방도를 일일이 다 거론하셨으나 전혀 비가 내릴 기미가 없습니다. 신들은 삼가 스스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잠자고 밥 먹는 것도 잊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듣건대 성상께서 친히 몸을 수고롭게 하여 궁중에서 기도하기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신들이 모두 무능한 탓에 이와 같은 큰 변고를 초래하여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임금의 근심을 끼쳤으니, 처신할 곳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들을 파면하고 다시 어진 보좌관을 구하여 시정(時政)을 바로잡으소서. 그렇게 하시면 하늘이 반드시 기뻐하여 때맞춰 단비를 내려 백성들이 굶주릴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부덕한 탓에 이런 재변을 초래하였기에 비가 내리기를 염려하는 마음이 잠시도 놓이지 않았다. 과연 궁중에서 기도하자 구름이 모이고 비가 내려서 곧바로 개었으나, 며칠 이래로 비가 올 조짐은 있어도 주룩주룩 내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는 실로 나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한 까닭이니, 경들이 어찌 잘 다스리지 못했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28. 請講論文義。有關治道者採取啓。〔原注:同年己未八月庚子朔丁卯。□上御翠露亭。□命公進前曰。接待臣僚。勸奬文雅雖恒規。然君臣之間。當使情誼相通無妨。故今日特令賜暇人員。殿講製述矣。〕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成廟朝培養文學之士。故當時人材蔚然輩出。今日之事。近古所無也。令講論文義。有關治道者。自□上採取。見諸施爲。尤有實效矣。

번역

성묘조(成廟朝)에 문학을 배양한 선비가 있었으므로 당시 인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오늘날의 일은 근고(近古)에 없던 것입니다. 강문(講文)과 의리(義理)를 논하는 것으로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자들을 위에서부터 뽑아서 그들의 시위를 보신다면 더욱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원문

〔原注:上以□御題下于入侍人員及賜暇學士。令製進講經及製述。入格者賞賜有差。宣醞賜爵。使各極歡。至於日暮將罷。皆賜宮燭。各其還家。道路拭目。以爲曠世盛事焉。是日。君臣皆醉。震於□上前。醉不能起。時尹元衡爲領府事。尹春年爲吏曹判書。皆無故不得預。而□御題中有親賢辨奸箴。人益知□上意所在。〕

번역

원주(原注) : 위에서 □가 어제(御題)를 지어 입시한 인원과 사하학사(賜暇學士)에게 내리고,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입격한 자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고 술을 내려 주며 작위를 하사하여 각기 기뻐하게 하였다. 해가 저물고 파하려고 할 때에 모두 궁촉(宮燭)을 하사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길에서 눈을 씻고 바라보아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로 삼았다. 이날 군신이 모두 취하여 □의 앞에서 진동하면서도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때 윤원형(尹元衡)이 영부사(領府事)가 되고, 윤춘년(尹春年)이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모두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의 어제에 “현인을 친애하고 간신을 분별하라.”는 잠언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더욱 □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129. 陰沍之月有雷驚。待罪啓。〔原注:同年己未十二月戊戌朔癸亥。□領議政。左相李浚慶。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5C

원문

近來冬月之雷。頻發於各道。衆災又從而疊見。臣等俱以無狀之人。猥居台鼎之位。日復一日。恐懼益深。曾欲將此意啓達辭退。而適□上體未寧。憂慮遑遑。未暇及此。昨日伏見,慶尙,全羅道狀啓。則陰沍已極之時。大雨雷電。有甚於夏月。而至於震破樹木。非常之變。非止一再。而臣等頑然在位。尙稽引咎自退。臣等之罪。無所逃逭。惶恐待罪。

번역

근래 겨울에 각 도에서 자주 천둥이 치고 여러 재해가 잇달아 나타났습니다. 신들은 모두 무능한 사람으로 외람되게 대각(臺閣)의 자리에 있으면서 날마다 두려움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이러한 뜻을 아뢰고 사퇴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상체(上體)가 편치 않으셔서 근심과 걱정으로 황망하여 미처 이를 여력이 없었습니다. 어제 삼가 경상도와 전라도의 장계를 보니, 음산한 날씨가 극에 달한 때에 여름철보다 심한 큰 비와 천둥이 쳐서 나무를 부러뜨리는 등 정상적이지 않은 변고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신들은 우매하게 자리에 있으면서 아직까지 인책(引責)하고 스스로 물러나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죄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待罪)합니다.

원문

答曰。災異實由予否德。徒切兢惶。卿等引咎。已非不足。宜勿待罪。〔原注:三啓。□不允。〕

번역

답하기를, “재이가 실로 나의 부덕함에서 비롯한 것이니 두려운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 경들이 잘못을 인책하는 것은 이미 부족하지 않으니 죄를 짓기를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원주(原注)에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

130. 經筵陳風俗之變。盜賊之患。進戒啓。〔原注:明宗十五年庚申二月丁酉朔。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近來人心極惡。風俗大敗。子而殺其父者有之。奴而戕其主者有之。誠非細故。黃海賊黨則朝廷別遣武臣捕獲。而猶不畏戢。至於射殺官軍。奪其黨而去。極爲駭愕。自古國家。以人心扶持。今至於如此。自□上留念。幸甚。

번역

근래에 인심이 극도로 악해져 풍속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일도 있고 종이 주인을 해치는 일도 있으니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황해의 도적 무리는 조정에서 별도로 무신을 보내 포획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고 관군을 쏘아 죽이고 자기 무리를 빼앗아 가 버렸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예로부터 국가는 인심에 의해 부지되는데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위에서 유념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원문

上曰。近來累有綱常之大變。盜賊熾盛。亦至此極。皆由敎化不行之所致也。徒切傷歎而已。啓意至當。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근래에 강상(綱常)이 크게 변한 일이 여러 번 있었고 도적이 성행하는 것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두 교화가 행해지지 않은 소치이다. 다만 안타깝게 여길 뿐이다. 아뢰는 뜻이 매우 타당하다.” 하였다.

131. 因旱災辭職啓〔原注:同年庚申四月丙戌。□領議政。左議政李浚慶。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6A

원문

伏見今歲不雨至於三月之久。而今方農月。其雨之望。日復一日。天意邈然。今雖得雨。已絶望秋之期。臣等俱以不肖無狀之人。枉據台衡燮理之地。夙夜煎念。致此之由。專在臣等非德冒居之咎。臣等已欲將此意辭避。而不能有所匡益。屑屑煩瀆。徒勞□聖上引躬自責之謙。慮此未安。猶稽一辭。今則災異切迫。凡弭災祈禱之方。無所不至。更無可爲之事。故敢來辭職。臣等非苟爲例避。以取遜讓之名也。伏望斥退臣等。改紀其政。以回天意。

번역

삼가 보건대, 올해는 비가 오지 않은 지 3개월이나 되어 지금이 한창 농사철인데도 비가 내리기를 날마다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아득하여 지금 비를 얻는다 하더라도 이미 가을 수확의 기약이 끊어졌습니다. 신들은 모두 불초하고 형편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대각(臺閣)에 앉아 정사를 다스리는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애태우고 염려하였으나,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오로지 덕이 없는 신들이 외람되게 자리를 차지한 죄에 있습니다. 신들은 이미 이러한 뜻으로 사직하려고 하였으나 보필하는 바가 없어서 번거롭게 성상께 폐를 끼쳐서 부질없이 성상께서 몸을 이끌고 스스로 책망하시는 겸양의 정성을 수고롭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온당치 못할까 염려되어 오히려 한마디 말씀 올립니다. 지금은 재이가 절박하여 재이를 그치게 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방도에 모든 방법이 다 쓰였으므로 다시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와서 사직합니다. 신들은 구차하게 예로써 피하여 겸손하고 양보하는 명분을 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들을 물리치고 그 정사를 고쳐서 하늘의 뜻을 돌리소서.

원문

答曰。今年之旱。正當農月。靡神不擧。天聽邈然。數日以來。密雲不雨。憫極于中。此皆由予政多闕失。而誠不能格天故也。卿等有何咎而致此變乎。古之輕免大臣。此非美事。後世不可爲法。宜勿辭。〔原注:再啓。□不允。〕

번역

답하기를, “금년의 가뭄은 바로 농사철에 당한 것이다. 신이 아니면 어찌 거행할 수 있겠는가마는 하늘이 멀리서 듣고 있어 며칠 동안 구름만 자욱하고 비가 오지 않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극에 달한다. 이는 모두 나의 정사에 허물이 많아 진실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들에게 무슨 허물이 있어서 이러한 변고를 초래하였겠는가. 옛날에는 대신(大臣)의 죄를 가볍게 용서해 주었으나,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후세에 법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원주(原注)에 “재차 아뢰었다. -□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132. 經筵請開納言路啓〔原注:同年庚申九月甲子朔甲申。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6B

원문

徐希呂適爲學宮之官。有失擧之事。恐終有弊。故□上疏論之。臣等以爲□聖殿至嚴之地。世子幼弱。恐或驚動。故令宦寺侍入。希呂懷儒者之心。敢陳疏以聞。自□上終雖用其言。初不樂聞。下情深以爲未安。且試官出題。兩所偶與之同也。而自□上以衰世之事策士爲非。至於□下問。洪暹自聞此□敎。廢食惶恐。憔悴欲枯。自□上須於言路。優容開納。雖不中之言。不用而已。

번역

서희려(徐希呂)가 학궁의 관원이 되었을 때, 실거(失擧)하는 일이 있었는데, 끝내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 상소하여 논하였다. 신들은 “성전(聖殿)은 지극히 엄중한 곳이고 세자께서는 나이가 어리시어 혹 놀라실까 염려되므로 환관으로 하여금 모시고 들어가게 하였는데, 희려는 선비의 마음을 품고 감히 상소를 올려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그 말을 쓰기는 하였으나 애초에 기꺼이 듣지는 않으셨다. 신들은 심히 미안하게 여겼다. 또 시관(試官)이 출제한 것이 두 곳에서 우연히 같았는데, 상이 쇠퇴한 세상의 일로 책사(策士)를 비난하였다. “□” 아래에 물은 것에 대해 홍섬(洪暹)이 이 하교를 듣고는 음식을 끊고 황공해하여 초췌하게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 상이 모름지기 언로(言路)를 넉넉히 수용하고 받아들여 비록 중하지 않은 말이라도 쓰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133. 請勿差送陳寔義州啓〔原注:同年庚申九月甲子朔戊戌。朝啓。□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6C

원문

義州牧使陳寔。無弓馬之才。故臣等與備邊司同議。皆欲勿送。自□上以爲久爲備邊司郞廳。必知方略。不須遞之。然昨日聞鴨綠江西。有㺚子聲息。物情皆以此人守邊爲懼矣。定州牧使李壽鐵。可合義州。而家眷往來。迎送有弊。當日爲政。文臣中勿論堂上堂下差出。明日內下送何如。臣與李浚慶之意則皆欲勿送陳寔。而獨通源以爲寔是好人。豈不善措戎務乎。〔原注:當初陳寔爲義州。大臣皆欲勿送。而通源托辭如此。人以爲見忤於通源。故有是行。〕然臣見其爲人。則疏迂一雅儒耳。果不合也。

번역

의주 목사(義州牧使) 진식(陳寔)은 궁마(弓馬)에 재능이 없기 때문에 신들이 비변사와 함께 모두 보내지 말자고 의논하였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오래도록 비변사의 낭청을 지냈으니 반드시 방략(方略)을 알 것이므로 체차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제 압록강 서쪽에 왜적의 소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론이 모두 이 사람이 변방을 지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수철(李壽鐵)이 의주에 적합합니다만, 집안사람들이 왕래하는 데 불편함이 있으니 당일로 정사를 행하도록 문신 중에서 당상이나 당하를 논하지 말고 내일 안으로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과 이준경(李浚慶)의 뜻은 모두 진식을 보내지 말자는 것인데, 유독 통원(通源)만 진식이 좋은 사람이라 어찌 군무(軍務)를 잘 처리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원주(原註)에 “당초 진식이 의주가 되었을 때 대신들이 모두 보내지 말자고 하였는데, 통원이 이와 같이 핑계를 대었다. 사람들이 통원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에 이렇게 행하였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그러나 신이 그 사람됨을 보니, 소박하고 오활한 한 명의 선비일 뿐이니 과연 적합하지 않습니다.

원문

上曰。當初以陳寔爲備邊司郞廳。故命勿遞矣。今聞聲息如此。而況李壽鐵方以假將。往在義州。以其道相換。有何迎送之弊乎。以陳寔代定州。李壽鐵義州。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당초에 진식을 비변사 낭청으로 삼았기 때문에 체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지금 소문이 이와 같은데 더구나 이수철이 현재 가도절도사(假道節度使)로 의주(義州)에 있으니 그 도를 서로 바꾸더라도 어찌 영송하는 폐단이 있겠는가. 진식을 정주로 대신 정하고 이수철을 의주로 삼으라.” 하였다.

134. 因冬月虹見辭職啓〔原注:同年庚申九月甲子朔己亥。□領議政。左議政李浚慶。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6D

원문

近日氣候不調。正當冬月。虹見雷動。與夏無異。此必人爲感召。以致失節而然也。臣等俱以菲才。苟忝台鼎。其於天意人心。皆所爲厭。以致變異。職此之由。惶恐罔措。請免臣等之職。以答天譴。

번역

요즈음 기후가 조화롭지 못하여 한겨울에 무지개가 나타나고 우레가 치는 것이 여름과 다름없습니다. 이는 필시 사람들이 감응을 불러서 절기를 잃게 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재주로 외람되이 대각(臺閣)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천심과 인심이 모두 싫어하여 변괴가 일어나게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의 직임을 면하게 하여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게 하소서.

원문

答曰。冬月虹見雷動。皆予否德所致。卿等宜勿辭。〔原注:再啓。□不允。〕

번역

답하기를, “겨울에 무지개가 나타나고 우레가 치는 것은 모두 나의 부덕한 탓이니 경들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원주(原註)에 ‘두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

135. 因雷變請修省求言啓〔原注:明宗十六年辛酉四月庚寅朔。□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7A

원문

去夜雷震殿門。又折纛竿。災變非常。至爲惶駭。天變雖不可指爲某事之應。感召如有其由。上下皆當省愆交修。自□上亦別加修省。自古人君。遇如此之變。必有罪己求言之擧。此雖近於文具。遇災恐懼之道。無過於此。請依古禮爲之。且□下敎使悉陳無隱。今日諸臣。必各有所懷。欲陳冕旒之前。□祖宗朝遇如此變。必延訪群臣。詰問闕失。此亦應災不可廢之規也。請姑待異日□上體平和。別爲延訪。以盡下情。

번역

지난밤에 천둥이 궁궐 문을 진동하고 또 깃발대를 부러뜨렸습니다. 재변(災變)이 비상하여 지극히 황공합니다. 하늘의 변고를 어떤 일에 대한 응보라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감응하는 것이 그 연유가 있는 듯하니, 상하가 모두 잘못을 반성하고 교화를 닦아야 합니다. 위에서부터 또한 특별히 수양해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이와 같은 변고를 만나면 반드시 죄를 자책하고 구언(求言)하는 조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형식적인 일에 가깝지만 재변을 당하여 두려워하는 도리로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옛 예법대로 하소서. 또 아래에서 하교하신 대로 숨김없이 모두 진달하겠습니다. 오늘날 신하들이 반드시 각자 품고 있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임금 앞에서 진달하고자 합니다. □ 조종조(祖宗朝)에 이러한 변고를 만나면 반드시 여러 신하를 불러서 궐실을 따져 물었으니, 이것도 재변에 응하는 데 폐지할 수 없는 규례입니다. 청컨대 우선 다른 날까지 기다렸다가 임금의 체후가 평온해지시면 별도로 신하들을 불러 진심을 다하게 하소서.

원문

答曰。啓意當矣。求言。前者或有或無。故初不諭矣。然爲之無妨。延訪則俟予氣快安候。徐當爲之。

번역

답하기를, “아뢴 뜻이 마땅하다. 구언(求言)은 이전에는 있었던 적도 있고 없었던 적도 있기 때문에 애당초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연방(延訪)하는 일은 내 기운이 회복되고 안정이 된 뒤에 서서히 하겠다.” 하였다.

136. 自□上因災求言。請修省啓。〔原注:明宗十六年辛酉四月庚寅朔戊申。□上延訪群臣于□宣政殿。□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7B

원문

近者雷震之變。疊見旬日之內。若人之相警戒者。人主代天理物。作善降百祥。作不善降百殃。若影響然。若於一念之間。不協于天。而有一毫偏係之私。則皆足以致天災也。自□上慮有闕政。乃下求言之□敎。孰不感激而欲言乎。爲今弭災之道。莫如敬天勤民。側身修行而已。

번역

요즘 천둥이 치는 변고가 열흘 사이에 거듭 발생하니, 마치 사람이 서로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자이니,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祥瑞)를 내리고 불선(不善)을 행하면 온갖 재앙을 내립니다. 만약 이와 같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한 생각 사이에 하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거나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데 치우치는 마음이 있다면 모두 천재지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정사에 흠이 있을까 염려하여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내리셨으니, 누가 감격하여 말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재이를 그치게 할 방도로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다스리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137. 經筵陳災應之理。勉□上省察啓。〔原注:同年辛酉四月庚寅朔壬子。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7C

원문

夫雹。四時皆爲災也。昨日雨雹。乃在純陽之月。其爲變尤大矣。春秋事應之說。漢儒牽合之論。先儒非之。雖不可的知某事之兆。然災變以氣類求之。古人云。人君惡聞其過。抑賢用邪。則雨與雹交下。大抵賢屬陽。邪屬陰。今在純陽之月而雨雹。此必正不能克邪之應也。自□上更加省察焉。

번역

무릇 우박은 사시(四時)에 모두 재앙이 되는데, 어제 내린 비와 우박은 바로 순양(純陽)의 달에 있었으니 그 변고가 더욱 큽니다. 《춘추》에서 일어난 일에 응한다는 설과 한나라 유학자들이 견합한 논의를 선유(先儒)들은 비판하였습니다. 어떤 일의 조짐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재변(災變)을 기(氣)의 종류로 구해보면 옛사람이 “임금이 자신의 허물을 듣기 싫어하고 어진 사람을 쓰지 않고 사악한 사람을 쓰면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린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어진 사람은 양에 속하고 사악한 사람은 음에 속하는데, 지금 순양의 달에 비와 우박이 내렸으니 이는 반드시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한 응험입니다. 위에서 더욱더 성찰하십시오.

원문

上曰。災變如此。益憂慮耳。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재변이 이와 같으니 더욱 걱정스럽다.” 하였다.

138. 更擇世子嬪不可意啓〔原注:同年辛酉五月庚申朔癸未。承□命于賓廳。□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7D

원문

臣等伏覩□傳敎。〔原注:以世子定嬪有腹病。累退嘉禮。更擇他嬪之意傳□敎。〕不勝驚愕。冊命旣行。名位已定。病勢今雖如此。其終不能永却與否。未可預料。而一朝遽降名號。事之重大。無過於此。請自□上更爲商量。

번역

신들이 삼가 전교를 보건대- 원주(原注)에 “세자 정빈(定嬪)이 복병(腹病)으로 인하여 누차 가례(嘉禮)를 미루고 다른 빈을 다시 택하라는 뜻의 전교를 내렸다.” 하였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책명(冊命)이 이미 행해졌고 명위가 이미 정해졌습니다. 병세가 지금 비록 이와 같지만 끝내 영원히 거절하지 못할지 여부를 미리 헤아릴 수 없으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명호를 내리시는 것은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없습니다. 청컨대 상께서 다시 헤아려 주소서.

원문

答曰。此事曾欲議于卿等。而事甚重難。故未果。病勢今雖或差。後若頻發。則國家安能見子孫乎。降等良姊雖重事。而宗社尤重大。故不得已如是處之也。再□啓曰。此事至爲重難。故臣以更爲商量□啓之矣。□上敎如此丁寧。更無可啓之辭。

번역

답하기를, “이 일은 일찍이 경들에게 의논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매우 중대하고 어려워서 하지 못하였다. 병세가 지금 비록 혹 차도가 있더라도 나중에 다시 자주 발병한다면 나라가 어찌 자손을 볼 수 있겠는가. 강등(降等)하는 것은 양자(良姊)에게는 중한 일이지만 종사(宗社)에 대해서는 더욱 중대하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처리하였다.” 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이 일이 지극히 중대하고 어려우므로 신이 다시 헤아려 보겠다고 아뢰었습니다. 상께서 이와 같이 정성스럽게 하교하시니 더 이상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원문

答曰。啓意知道。仍□傳于政院曰。以此意捧承傳。

번역

답하기를, “아뢴 뜻을 잘 알았다.” 하고, 이어서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러한 내용으로 봉승(奉承)하라.” 하였다.

139. 捕盜方策啓〔原注:同年辛酉十月丁巳朔甲申。□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盜賊旣聚而復散。則必挺身單行。恒托於民家稠密之處。松西兩京。乃其窟穴。都下尤甚。可依□聖敎。閉城門搜捕。未爲不可。但恐城外隱匿者竊笑。不若使管捕者或聽告。或探問。的知賊徒隱伏處。登時捕獲之爲得。

번역

도적이 모였다가 흩어지면 반드시 홀로 나서서 항상 민가가 조밀한 곳에 의탁하는데, 송악(松岳)과 양산(兩山) 두 고을이 바로 그 소굴입니다. 도하(都下)의 경우는 더욱 심하니 성교(聖敎)에 따라 성문을 닫고 수색하여 포획하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 밖에 숨어 있는 자들이 비웃을까 염려되니, 관포사(管捕使)로 하여금 혹 고발을 듣거나 혹은 탐문하여 도적의 무리가 은복한 곳을 정확히 알아 즉시 포획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140. 國慶設科爲當啓〔原注:同年辛酉十月丁巳朔乙酉。□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式年取士。今未閱月。復議別擧。似爲煩數。然國有大慶。與士子同之。亦國家故事。來二月間取士似當。□傳曰。嘉禮。國之大慶。設科取士。此乃廣示喜悅之情於國中之意也。今依領相之議。以明春爲別試。

번역

식년시(式年試)를 거행하여 선비를 뽑는 것이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별시(別試)를 거행하는 것은 번거로울 듯하다. 그러나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사자(士子)와 함께 기뻐하는 것도 국가의 고사(故事)이니, 2월 사이에 선비를 뽑아야 할 것 같다. 《가례전》에 이르기를, “가례는 나라의 큰 경사이니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뽑는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기쁜 마음을 온 나라에 널리 보여 주는 뜻이다. 지금 영의정의 의론대로 내년 봄에 별시를 거행하겠다.

141. 遷陵之役。使僧徒來赴啓。〔原注:同年辛酉十一月丁亥朔壬辰。□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8B

원문

今次遷陵。〔原注:禧陵遷安之役〕功役百倍他陵。人力不給。而僧徒常時遊手遊食。如此國家緊急之時。雖一出助役。其閒遊之日甚多。且兩南僧人。輪遞之際。未及赴役。使兩道僧人。給糧助役。來赴無妨。但前日赴役之僧。已受糧價。今此赴役。獨未受價。似爲不均。欲給例價。國儲已竭。欲募民丁則亦無可償之備。只役兩南之僧。給其半價。以資助役之力。則似可以無怨赴役。

번역

이번에 능을 옮기는 일〔원주(原注)에 “희릉(禧陵)을 천안(遷安)하는 공역이다.”라고 하였다.〕은 다른 능보다 공역이 백배나 더하여 인력을 대지 못하고 있는데, 승도들은 평소 놀고 먹기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국가의 긴급한 때에 비록 한번 나와서 공역을 돕더라도 그 한가롭게 노는 날이 매우 많다. 또 양남(兩南)의 승인(僧人)은 돌아가며 교체하는 사이 미처 공역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두 도의 승인에게 양식을 지급하여 공역을 돕게 하여 오게 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다만 전에 공역에 나간 승인은 이미 양식값을 받았는데 이번에 공역에 나가는 승인은 유독 값을 받지 못하면 불공평할 것 같다. 그러나 예전의 값을 주려고 하니 나라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고, 민정(民丁)을 모집하려고 해도 또한 갚을 만한 비축이 없다. 다만 양남의 승인에게 반값만 지급하여 공역을 돕는 데에 보태게 한다면 원망 없이 공역에 나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원문

傳曰。依議爲之。

번역

전교하기를, “의논한 대로 하라.” 하였다.

142. 年當七十致仕啓〔原注:同年辛酉十一月丁亥朔甲午。□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小臣犬馬之年。今乃七十。禮當致仕。衰病日甚。理難在職。請速□命遞。

번역

소신은 나이가 이제 칠십이 되었으니 예법에 치사해야 마땅합니다. 노쇠와 병이 날로 심해져서 이치상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우니 속히 체차하라는 명을 내려 주소서.

원문

答曰。卿至稀年。當賜几杖而安之。不宜許退。故不允。乃□傳政院曰。領相賜几杖事。言于禮曹。

번역

답하기를, “경이 70세에 이르렀으니 의당 궤장(几杖)을 하사하여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하고 물러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에 전정원(傳政院)에 이르기를, “영의정에게 궤장을 하사하는 일로 예조에 말하라.” 하였다.

143. 辭□賜几杖啓〔原注:同上日〕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8C

원문

人臣爵秩雖高。必須係□國家輕重。然後乃□賜几杖。庸劣老臣。不足爲輕重。而□聖上眷顧愈深。名不稱實。顏厚忸怩。若蒙□聖慈許臣致仕。又停几杖之□賜則□聖恩益大矣。

번역

신하의 작질(爵秩)이 비록 높더라도 반드시 국가의 경중(輕重)에 관계되어야만 그 후에야 비로소 궤장(几杖)을 하사받을 수 있습니다. 용렬한 노신은 국가의 경중에 부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성상의 총애가 더욱 깊어 명망이 실정에 맞지 않으니, 얼굴이 두꺼워 부끄럽습니다. 만약 자애로운 성상께서 신에게 치사(致仕)를 허락하시고 또 궤장을 하사하는 것을 정지하신다면 성은이 더욱 크리이다.

원문

答曰。予以寡昧。荷重耆舊。卿何敢求退乎。〔原注:五啓。□不允。〕

번역

답하기를, “내가 어리석은 탓에 기로(耆老)의 무게가 무겁다. 경이 어찌 감히 물러나기를 구하는가.” 하였다.-원주에 오계(五啓)라고 되어 있다. -윤허하지 않았다.

144. 別宴席上使廷臣起舞不可意啓〔原注:明宗十七年壬戌三月甲午。□王世子嘉禮。設曲宴于後苑銀杏亭。□上傳札于公曰。今日苑中別宴。非如大庭法會。群臣和悅。上下情厚則豈不美哉。酒酣起舞。古或有之。□祖宗朝亦或不無也。如或無妨則卿等以下堂上侍臣侍從。起舞何如。其與禮曹同議以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8D

원문

伏見□傳敎。欲使群臣和悅。至於起舞。非但臣等不勝感激。滿庭諸臣。孰不歡忭。但□祖宗朝縱或不無。或於便殿。引見勳舊。偶一爲之。今日之會。雖非大庭法宴。廷臣多會。無異法宴。若至起舞。恐妨禮法。

번역

삼가 전교를 보니, 신하들을 화락하게 하여 춤을 추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신들은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가득한 여러 신하들이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선조의 조정에서 혹시 편전(便殿)에서 공신들을 불러서 보고 우연히 한번 춤을 추게 한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임은 비록 대정(大庭)에서 행하는 법연(法宴)은 아니지만, 조정 신하들이 많이 모였으니 법연과 다름없습니다. 만약 춤을 추게 하신다면 예법에 방해가 될까 염려됩니다.

원문

答曰。君臣和悅。上下情孚。則可以爲之。然自上亦以爲似不合。故命卿等議之。啓意果當。

번역

답하기를, “군신이 화락하고 상하가 서로 신뢰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합당하지 않은 듯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한 것이다.” 하였다. 아뢰는 내용이 과연 마땅하다.

145. 陳老病不職之狀乞退啓〔原注:明宗十八年癸亥正月庚辰朔丙申。□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9A

원문

臣氣力俱虛。百病乘之。筋力日漸困乏。理難運身奉職。前日累爲乞免。□聖恩如天。特命賜暇。使之安心臥調。此從古罕有之隆□恩。臣身雖百靡粉。固不能報酬於萬一。聞□命以來。只有感泣。不知所云。臣之衆病。隨老俱生。非藥治調攝所可救。而經年廢事。仍帶職銜。悶且未安。請速□命遞。

번역

신은 기력이 모두 허약하여 온갖 병이 이를 때마다 근력(筋力)이 날로 점점 곤하고 부족해져서 이치상 몸을 움직여 직무를 봉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전일에 누차 면직을 청하였는데, 성은이 하늘과 같으셔서 특별히 휴가를 주어 안심하고 누워서 조섭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로부터 드물었던 융숭한 은혜이니, 신의 몸이 비록 백번 천번 죽더라도 진실로 만분의 일도 보답할 수 없습니다. □명을 들은 이래로 다만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 뿐 무슨 말씀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의 여러 병은 늙음에 따라 함께 생겨나는 것이라 약으로 치료하거나 조섭하는 것으로 구제할 수 없는데, 해를 넘기도록 일을 폐하고 그대로 직함을 지니고 있으니 답답하고 미안합니다. 속히 □명을 내려 체직해 주소서.

원문

答曰。卿以老病。累爲懇辭。不可不解職調治。卿之所願。予其勉從。卿其知悉。仍□傳曰。與領中樞府事尹元衡換授事。言于吏曹。

번역

답하기를, “경이 노병(老病)을 이유로 여러 번 간절히 사직하였으니 해직하여 조리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의 소원을 내가 힘써 따르겠으니 경은 잘 알라.” 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영중추부사 윤원형과 바꾸어 제수하는 일에 대해 이조에 말하라.” 하였다.

146. 陳整軍備衛國策啓〔原注:同年癸亥七月丁丑朔。□領府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59B, ITKC_MO_0130A_A026_059C

원문

臣伏覩京畿,黃海,淸洪,全羅,慶尙道防備狀啓。則各官各浦。船艦機械。一皆朽破。軍器諸具。多有虧缺。至於禦敵。最關銃筒。亦多遺失。極爲駭愕。大抵衛國之策。莫先於訓兵鍊卒。其在平時。預擇勇健。試射養銳。作爲部統。使不忘戰。及其有變。登時赴敵。庶無蒼黃失措之患。而各官能射之抄。其如武業良家子弟。一不參選。率以不解操弓。下賤之類。備數編錄。脫有賊變。無所捍禦。土崩之患。難保其必無。至爲寒心。治戰艦。備器械。選兵卒等事。兵使,水使當任其責。而惰慢已痼。雖有朝廷命令。略不動念。廢而不擧。使防備解弛至此。罪應難逭。觀察使專制一道。受任方面。殊無委寄兼察之意。亦不可不同受其責。固當幷治其不職之罪矣。姑以此意。嚴辭下書峻責。勅令修備。而明年摘奸。一有愆違之狀。則當以不饒之意。全羅,慶尙觀察使。兵,水使處下諭何如。

번역

신이 삼가 경기, 황해, 청홍도(淸洪道), 전라도, 경상도의 방비에 관한 장계를 보니 각 관부와 각 포구의 선함과 기계는 모두 썩고 부서졌으며 군기(軍器) 등은 대부분 결손이 있었고 적을 막는 데 가장 중요한 총통(銃筒)도 많이 유실되어 매우 놀랍습니다. 대체로 나라를 지키는 계책으로는 병사를 훈련시키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니, 평상시에 용맹하고 건장한 자를 미리 뽑아 시사(試射)하여 예봉을 기르고 부장과 장수로 삼아서 싸움을 잊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변고가 생겼을 때 즉시 적에 맞서 창황하게 대처하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각 관부에서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은 것은 무예를 익힌 양가의 자제들은 한 명도 선발되지 않았는데 모두 활을 다룰 줄 모른다고 하였고, 천한 부류들을 수십 명씩 기록해 두었으니 적의 변고가 있을 때 방어할 인력이 없어서 나라가 무너질 우려가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매우 한심합니다. 전함(戰艦)을 다스리고 기계를 갖추며 병졸을 선발하는 등의 일은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그 책임을 맡아야 하는데 게으르고 태만한 것이 이미 고질이 되어 조정의 명령이 있어도 대략 신경 쓰지 않고 폐기한 채 거행하지 않아 방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관찰사는 한 도(道)를 전제(專制)하고 한 방면을 맡아 다스리면서 위임받은 지역을 겸하여 살피는 뜻이 전혀 없으니 또한 그 책임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진실로 모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우선 이러한 뜻으로 엄한 말로 서찰을 내려 준엄하게 꾸짖고 칙령(勅令)을 내리되, 수비하는 일을 잘 갖추게 하고 내년에는 적간(摘奸)하여 만약 어기는 일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전라 관찰사와 경상 관찰사, 병사, 수사를 처벌하라고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答曰。如啓。

번역

답하기를, “아뢴 바와 같다.” 하였다.

147. 對馬島主潛買物貨事啓〔原注:中宗三十七年壬寅七月己酉朔庚申。□漢城判尹時。領相尹敫輔。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自□祖宗朝。日本商物。送之幾何。貿之幾何。臣等未知。故令禮曹査考謄錄後更欲議啓。對馬島主潛相買賣物貨。熊川驛子等許授而不償其價。送明文請徵給則禮曹欲發遣京官。窮推得情事□啓之矣。

번역

우리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일본에서 물건을 보내온 것이 얼마나 되었으며, 사 온 것이 얼마나 되는지 신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조로 하여금 등록(謄錄)을 조사해 본 뒤에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습니다. 대마도주가 몰래 매매한 물화는 웅천역자(熊川驛子) 등에게 주었으나 그 값을 갚지 않았습니다. 명문(明文)을 보내어 청징(請徵)해 주기를 예조에서 서울의 관원을 파견하여 궁구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하려고 계본(啓本)을 올렸습니다.

148. 論陳拒絶倭和有難啓〔原注:中宗三十九年甲辰五月戊戌朔癸亥。□特進官時。〕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0B, ITKC_MO_0130A_A026_060C ...

원문

拒絶倭和。朝議則已定矣。請以臣所懷□啓達。倭寇之來往。非徒各邑受弊。渡海輸糧及商品貿易。實巨害也。際此微釁。絶之似可。但帝王待人之道。不可太迫。天子之於諸侯。一不朝則貶其爵。再不朝則削其地。三不朝然後六師移之。且以治盜事見之。初犯再犯。各異其律。彼本化外之人。不可以治我民之法治之。今一犯邊。何可輕絶。當此曲直已在之時。嚴辭書契。以責島主曰。爾能盡斬賊倭。以見服罪之誠云。而罪惡貫盈。然後絶之未晩。以前朝事見之。倭寇至入喬桐,江華。而雲峯之戰。以□太祖聖武。又有李豆蘭。故雖以阿只拔都之天下奇才。亦摧敗。不然。殆矣。今則防備比前朝稍固。然連年凶荒。軍卒單弱。加以邊邑無城者亦多。不可謂固。且馬島土地磽薄。皆於石上加土。耕麥而食。不見接於我國。則無所資活。將爲窮寇。不得已以抄竊爲事矣。西北邊事。亦甚虛疏。恐有被寇之患也。前朝末。契丹長驅入楊根,忠州,原州之間。至文班宗親。皆充軍額。深爲可懼。且以時運推之。國無百年昇平之運。而今之拒絶日本。〔原注:大內二小殿〕恐爲輕易也。

번역

왜(倭)와의 교역을 거절하는 것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니, 신의 소회를 아뢰어 주소서. 왜구의 왕래는 각 고을이 폐해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너 양식을 실어 나르고 상품을 무역하는 것이 실로 큰 해악입니다. 이러한 때에 작은 틈도 끊어야 할 듯합니다. 다만 제왕(帝王)이 사람을 대하는 도리로 볼 때 너무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 천자가 제후에게 한 번 조공하지 않으면 그 작위를 강등하고, 두 번 조공하지 않으면 그 땅을 빼앗으며, 세 번 조공하지 않으면 육군을 옮겨 줍니다. 또 도적을 다스리는 일로 보면 처음 범한 것과 거듭 범한 것은 각각 형률이 다릅니다. 저들은 본래 교화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니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지금 한 번 변방을 침범했다고 해서 어찌 가볍게 교역을 끊겠습니까. 곡진히 따져야 할 때이니, 엄중한 사서(辭書)를 보내 도주(島主)에게 책망하기를 ‘너는 능히 적의 왜구를 모두 죽여서 죄에 복종하는 정성을 보이도록 하라.’라고 하고, 죄악이 가득 찬 뒤에 교역을 끊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 조정의 일을 가지고 보면 왜구가 교동(喬桐)과 강화(江華)까지 들어왔는데 운봉(雲峯) 전투에서 태조대왕의 성무(聖武)로써 대적하였고 또 이두란(李豆蘭)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천하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역시 패배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의 망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방비가 이전 조정보다 조금 견고하지만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군졸이 하나하나 약해졌습니다. 게다가 변방의 고을 중에 성이 없는 곳도 많으니 견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마도(馬島)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 돌 위에 흙을 쌓아 놓고 보리를 심어 먹는데, 우리나라와 접촉하지 않으면 살길이 없어서 장차 궁지에 몰린 도적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도적질을 일삼게 될 것입니다. 서북 변방의 일도 매우 허술하니 왜구에게 침탈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이전 조정 말기에 거란(契丹)이 떼를 지어 양근(楊根), 충주(忠州), 원주(原州) 사이로 들어와서 문반 종친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액(軍額)을 채웠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또 시운으로 미루어 볼 때 나라에 백 년의 태평한 운이 없는데 지금 일본과의 교역을 거절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될 듯합니다.-원주에는 대내(大內)와 이소전(二小殿)이 있다.-

원문

上曰。拒絶重難之意。予亦累言之。適朝議皆然。故不得已從之。今不可撓改。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거절하는 것이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뜻은 나도 여러 번 말하였다. 마침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따랐던 것이다. 지금은 고칠 수 없다.” 하였다.

149. 陳南北邊憂啓〔原注:明宗元年丙午九月己卯朔壬午。□兵曹判書。〕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1A

원문

近見軍政。極爲虛疏。自日本絶和之後。事變恐發於朝夕。我國軍糧不裕。散在民間者過半。加以士馬不精。軍器不整。脫有緩急。將何以處之。日本資我國爲生者。不敢輕易犯邊。今則絶和年久。若食盡則必得盡死力而來賊也。朝廷非但憂南方。兩界之事。亦可慮也。平安道內地兵十人。不如土兵之一人。是以土兵雖少。可以禦賊。咸鏡道六鎭。每年早霜。飢饉連仍。邊民流亡。或入于野人之境。而爲邊將者恐其被罪。匿不以聞。其憂可勝言哉。

번역

근래 군정(軍政)을 보니 매우 허술합니다. 일본과 절화(絶和)한 뒤로 사변이 조만간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우리나라의 군량은 넉넉하지 못하고 민간에 흩어져 있는 것이 반 이상이며, 게다가 군사도 정예롭지 못하고 무기도 정비되어 있지 않으니 만약 비상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위해 살고 있는 자들은 감히 경솔하게 국경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절화한 지 오래되었으니,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반드시 죽을 힘을 다해 와서 적이 될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남쪽 지방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양계(兩界)의 일도 염려해야 합니다. 평안도의 내지병(內地兵) 10명은 토병(土兵) 1명만 못합니다. 이 때문에 토병이 비록 적지만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함경도의 육진(六鎭)은 해마다 이른 서리로 기근이 계속되어 변방의 백성들이 유망하여 혹 야인(野人)의 경내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변장(邊將)들은 죄를 받을까 두려워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니, 그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150. 經筵陳僧徒赴役事及許和日本啓〔原注:明宗二年丁未正月甲寅朔己巳。朝講。□兵曹判書。〕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1B

원문

僧徒滋蔓。甚於崇佛之時。良賤避役者。日漸投入。軍額減耗。實由於此。誠非細故。然其勢不可一日盡驅而定役。當先立條約。明示以信。往者犬項,蟻項之役。赴役者雖給號牌。終爲虛物。不赴者未見追懲。國家已爲失信矣。今宜各道關防要害城子修築及公廨修理等處。先須審定所在諸寺僧人。悉令赴役。考其勤慢。給號文牌免身役。其不赴役者。令各道一時推刷。以定軍額。年五十以上僧人有願納丁錢者。各其監司開數啓聞。亦許號文免役。前於犬項,蟻項受牌僧人。勿令推刷何如。對馬島許和事。朝廷會議。可否相半。其曰不可和者固當。臣等更思。日本之來請。已至再矣。使者之辭亦懇切。今可以許和。但前定約條。可以更立者多。今爲嚴峻改定。若不欲遵行。不許亦當。

번역

승려들이 번식하는 것이 불교를 숭상하던 때보다 심하여 양민과 천민이 역(役)을 피하려고 날로 점점 승려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군액(軍額)이 줄어드는 것은 실로 이 때문에 생긴 것으로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형편상 하루아침에 모두 몰아내어 역정(役定)할 수 없으니, 우선 조약(條約)을 세워 분명히 보여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지난번 개목(犬項)과 의항(蟻項)의 역사(役事) 때에는 부역한 자에게는 비록 호패(號牌)를 주었지만 끝내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고, 부역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추징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국가가 이미 신뢰를 잃은 것입니다. 이제 각 도의 관방(關防)과 요해지인 성곽을 수축하거나 공청(公廳)을 수리하는 등의 일에 먼저 승려들이 있는 여러 절을 자세히 살펴서 모두 부역하게 하고, 그들의 근면 여부를 고과하여 호문패를 주어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역하지 않은 자는 각 도로 하여금 일시에 추쇄(推刷)하여 군액을 정하게 해야 합니다. 50세 이상인 승려로서 정전(丁錢)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에 대해서는 각 감사가 수효를 파악해서 보고하고, 또한 호문패를 주어 신역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번 개목과 의항의 역사를 지내고 패를 받은 승려들에 대해서는 추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마도(對馬島)의 화친에 관한 일은 조정에서 회의한 결과 찬성과 반대가 반반입니다. 화친을 불가하다고 말하는 자가 진실로 옳습니다. 신들이 다시 생각해 보니, 일본이 와서 청한 것이 이미 두 번이나 있었고 사자의 말이 또한 간절하였으니 지금은 화친을 허락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전에 정한 약조(約條) 중에서 다시 세울 만한 것이 많으므로 지금 엄중하게 고쳐 정하고, 만약 준행하지 않으려고 하면 허락하지 않는 것도 마땅합니다.

원문

答曰。馬島之事。其曰不許者是矣。然日本旣爲累請。而辭甚懇切。今若不許。則有乖於交隣之義。嚴立條約。許和爲便。僧徒事。依啓施行。

번역

답하기를, “대마도(對馬島)의 일은 허락하지 말라고 한 것이 옳다. 그러나 일본이 이미 여러 번 청하였고 그 말이 매우 간절하니 지금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의리에 어긋난다. 조약을 엄히 세워 화친을 허락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승도(僧徒)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51. 經筵論陳邊情勿使輕動啓。〔原注:明宗八年癸丑七月辛酉。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1D, ITKC_MO_0130A_A026_062A

원문

南方漂流倭船。自□上以爲深入大洋者。勿令追窮。實仁者之心。王者之事也。備邊司則以爲盡殱無遺。臣意此言其於王者含弘之道甚不可。而衆議已定。故不敢言耳。彼若犯邊。則嚴示兵威。拒戰可也。追至水路四十餘息者。危道也。海島居民甚繁。若不追逐。恐有撈掠之虞。故近於海邊者。追之可也。且頃見金胤鼎上疏。深陳南方之弊及士卒疲困之狀。於臣之意似是矣。夫選兵搜討倭賊。使民不得耕作。則不獲倭賊。而士卒先至疲困。脫令日本或有將略者。不卽擧兵入寇。輕出侵略。而待我軍先疲。大擧而來則何以敵之。兵法。不恃其不攻。恃吾所以待之。必使邊圉防備牢固。則豈能易犯乎。僉萬戶兵水使等。自當殊死力戰。若至窘急則助防將亦可遣也。今者聞小變而輒送助防將。似爲輕動矣。常備於無事之日。而勿爲窮迫之敎。深得王者之體也。

번역

남쪽 바다에 표류해 온 왜선(倭船)을 스스로 위로 ‘대양(大洋) 깊숙이 들어갔다고 하여 추격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인자한 마음으로 왕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비변사는 ‘모두 다 죽여서 남김이 없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말이 왕자의 포용하는 도리에 매우 불가하다고 여겼으나 중론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이 만약 국경을 침범하면 군대의 위엄을 엄하게 보여 주어 싸움을 막는 것이 옳습니다. 추격하여 수로(水路) 40여 리에 이르렀다면 위험한 길입니다. 그리고 해도(海島)의 주민이 매우 많으니, 만약 추격하지 않으면 약탈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바닷가 근처까지는 추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 지난번 김윤정(金胤鼎)의 상소를 보니 남쪽 지방의 폐단과 사졸(士卒)들의 피곤한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이 말이 옳은 듯합니다. 무릇 군사를 뽑아 왜적을 수색하여 토벌하느라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짓지 못하게 하면 왜적을 잡지도 못한 채 사졸들이 먼저 지쳐 피곤해질 것입니다. 만약 일본에 장략(將略)이 있는 자가 즉시 군대를 일으켜 침구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서 침략하다가 우리 군사가 먼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대적하겠습니까. 병법에는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대처할 수 있음을 믿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변방의 방비가 견고하게 되어야만 어찌 쉽게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첨만호(僉萬戶)와 병사(兵使), 수사(水使) 등이 마땅히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워야 합니다. 만약 곤궁하고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는 조방장(助防將)도 보낼 수 있습니다. 지금 작은 변고가 생겼다고 번번이 조방장을 보내는 것은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에 준비해 두고 위급한 상황이 되기 전에 미리 대처하라는 하교가 왕자의 체모에 깊이 부합합니다.

원문

上曰。日人前年。來戰于濟州。今又作亂。留館倭人亦曰。作賊於中原。疑或漂泊於本國地方云。此關係上國之事。故備邊司之意出於此也。然政丞之言甚是。古人亦云。來者拒之。往者勿追。倭人果欲犯邊而來。所當殄滅。見此漂流船。追入大洋之中。徒勞無益矣。

번역

주상이 말하기를, “일본인이 전년에 제주(濟州)에 와서 싸웠는데 지금 또 난을 일으켰다. 유관왜인도 중원(中原)에서 도적질을 하다가 혹시 본국 지방으로 표류해 온 것 같다고 하였다. 이는 상국의 일과 관계되기 때문에 비변사의 뜻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정승의 말이 매우 옳다. 옛사람도 ‘오는 자는 막고 가는 자는 쫓지 말라.’라고 하였다. 일본인이 과연 변방을 침범하려고 오는 것이라면 진멸해야 마땅한데, 이 표류선을 보고 대양으로 추격해 들어가는 것은 공연한 수고일 뿐이다.” 하였다.

152. 經筵陳日本通和爲便啓。〔原注:明宗十一年丙辰三月辛巳。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古者兩國相戰。亦相通情。日本。世世通情之國也。今之爲賊。國王或不知之。雖不可先遣使臣。其國使臣若來則陳利害。爲書契通情可也。兵興則雖或大勝。死傷者必多。而民皆失業矣。且其爲賊。必不止於今年。年年侵伐則我先危矣。

번역

옛날에 두 나라가 서로 싸울 때에도 또한 서로 통정(通情)하였다. 일본은 대대로 통정을 하던 나라이니, 지금 적이 된 것도 국왕은 혹시 모를 것이다. 비록 먼저 사신을 보낼 수는 없으나 그 나라의 사신이 오면 이로움과 해로움을 진술하여 서계(書契)를 맺고 통정하는 것이 옳다. 전쟁이 일어나면 아무리 크게 승리하더라도 죽거나 다친 자가 반드시 많아 백성들이 모두 생업을 잃게 된다. 또 그 적의 행위는 반드시 금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해마다 침범하여 약탈한다면 우리가 먼저 위태로워질 것이다.

153. 請對馬島使授職啓〔原注:同年丙辰四月己丑朔。□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2B

원문

調久〔原注:對馬島主所送使。來報賊變者。〕來報聲息。今至於再。可授司猛卑品之職。以慰其心。本曹意則與沈連源意同。當何以之。

번역

조구(調久)〔원주(原注)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보낸 사신으로 적변(賊變)을 보고하러 온 자이다.” 하였다.〕가 와서 소식을 보고한 것이 지금 두 번째이니, 사맹비품(司猛卑品)의 직책을 주어 그 마음을 위로해야 합니다. 본조의 뜻은 심연원(沈連源)의 뜻과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문

傳曰。左相不欲使激怒。似合於懷柔遠人之道。但每授賞職亦難。今後賊船頓絶我境。則當依所願事。善辭諭之。優給賞物可也。

번역

전교하기를, “좌상이 격분시키지 않으려 하니, 원근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하다. 다만 매번 상과 관직을 주는 것도 어렵다. 앞으로 적선이 우리 경내에 들어오는 일이 완전히 끊어지면 마땅히 소원이 이루어진 대로 잘 말로 타일러주고 상물(賞物)을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154. 請加給日本使啓〔原注:明宗十三年丁巳正月乙亥。□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2C

원문

客使所言。多涉悖慢。一國之人。孰不痛憤。然犯而不較。不報無道可也。彼旣來報賊變。且斬賊馘來獻。以此爲名而加給五船。則可以釋躁憤之心也。遣使臣往見防備。而加給亦可也。〔原注:客使。日本使也。〕

번역

객사(客使)가 말한 것이 대부분 패악하고 오만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누가 통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범하였어도 따지지 않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 도리에 맞다. 저들이 이미 와서 적의 변고를 보고하고 또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이것을 명분으로 삼아 5척의 배를 더 주면 조급하고 분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사신을 보내 방비(防備)를 보게 하고 또한 더 주는 것도 괜찮다. 원주(原注)에 “객사(客使)는 일본 사신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史臣曰。交隣之道。在於得中。時議之以爲薄待者。決非謀遠之策。但我國財力可許。則尙某之啓。亦遠慮也。

번역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이웃 나라와 교류하는 도리는 중도를 얻는 데에 달려 있다. 지금 의논 중에 박하게 대우한다는 것이 결코 먼 앞날을 도모하는 계책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재력으로 허락할 수 있다면 상모(尙某)의 계책도 원대한 생각이다.” 하였다.

155. 日本使及對馬島主施給事回啓〔原注:同年丁巳二月壬寅。□左議政。有□上敎收議政院。〕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2D

원문

臣伏覩備忘記。姑五船待數年無海賊後論功遣使之事。□上敎允當。此客使不受書契。發怒之際。遽施恩澤。近於示弱。島主亦將歸恩於日本。而無德於我國。且有後日憑藉日本。希望無厭之弊。島主所遣第一船今將來矣。因其陳請而給之。加給之後有海寇。則還奪之意。與之堅約而送甚當。且客使以商物之直不滿其意。至於書契不受。其無禮則甚矣。然異類之人。不足與較。而其心以從新價受直爲缺望。考之前例。該曹雖欲從時直。以新價磨鍊。而卒無從新價受去之時。今若從舊價一兩四疋之數。則其價當加一百六十餘同。如此則書契。亦不改矣。以此數給之何如。

번역

신이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니, “우선 5척의 배는 몇 년 동안 해적이 없기를 기다린 뒤에 공을 논하여 사신을 보내는 일은 주상의 하교가 합당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객사(客使)가 서계(書契)를 받지 않고 노한 나머지 갑자기 은택을 베푸는 것은 약함을 보인 데 가깝습니다. 도주(島主)도 장차 일본에 은혜를 돌릴 것이고 우리나라에는 덕이 없으며, 또 훗날 일본에 의지하여 희망을 다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도주가 보낸 첫 번째 배가 지금 오려고 하는데, 그들의 진청(陳請)으로 인하여 지급하되 더 지급한 뒤에 해구가 있으면 도로 빼앗겠다는 뜻을 그들과 굳게 약속하고 보내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또 객사가 물건값의 값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서계까지 받지 않았으니, 그 무례함이 심합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이라서 따질 것도 없지만, 그들의 마음은 신가(新價)를 따라야만 만족할 것입니다. 전례를 상고해 보면 해당 조(曹)에서 비록 시가(時價)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신가를 마련하여 마침내 신가를 따라 받아 간 적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구가(舊價) 1냥에 4필의 수효를 따른다면 그 값은 160여 동을 더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서계도 고칠 필요가 없을 것이니, 이 수효로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56. 經筵陳災害及待倭失當啓。〔原注:明宗十四年己未八月庚子朔甲辰。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3A, ITKC_MO_0130A_A026_063B ...

원문

自古雖有災變。未有如今日之甚也。平安道雨雹。至於撲殺人馬。兩南暴風。撞破兵船。改修之際。民力益殫。而下三南旱暵。赤地千里。咸鏡水災。覆沙數郡。春秋大水而傳曰。冤氣幷之所致。豈無其應。長白山爲主鎭。而前面崩頹。軍威又有川渴之變。如臣者豈能燮理陰陽。徒增憂懼。且倭變乙卯陷城之後。人懷痛憤之心。所當見輒捕殺。以雪前羞。然其時朝廷待夷之道。不無所失。不可徒責夷狄。而無自反之意。倭船滿載物貨者。必是因風漂到。非有意於作賊。而例皆捕殺。臣意未安。其逼近邊境。有意作賊者。固不可不捕。大洋所過之船。必皆追捕。非徒虛耗兵力。結怨必多。而其捕獲之際。所虜唐人。亦皆無故而死。其冤氣豈不傷天地之和。召水旱之災乎。臣意如黑山島,三島之外則不欲窮追。而不可以一人之見爲是。自□上參酌焉。且被虜唐人。解送奏聞。於至誠事大之道得矣。但歲運凶荒。府庫空竭。勢似難支。而平安一路。人馬凋殘。亦難輸轉。中原一路。滿目蕭然。亦未易多發車輛。且倭賊得罪於中原。中原人見我國勇於捕倭。欲因我而雪憤。則如元世祖共征日本之事。難保其必無也。且以天地生成之仁言之。倭亦幷生於天地之間。如初非作賊。而敗船登陸者。誘而殺之。豈不有害於生成之仁乎。前者日本書契云。漂流人若到貴國。毋令殺害。答曰。貴國漂流民到我境。若去兵呈身則自當護送。其後答武衛殿書契。亦曰。貴國之赤子。猶吾之赤子。當在一視同仁之中。若去兵呈身。明供漂流之由則非惟不殺。亦當資給護送云。前日所答如是。而今皆殺之。安在於信義也。其乞降者。若一刷還。又致書於酋長。喩以不殺之意則庶乎其可也。上曰。近年以來。災變連緜。蓋人事失於下。故天變應於上。予以否德。叨主臣民。不能修省。故衆災如此。夙夜憂懼。罔知攸措。且倭人不由於常行之路。而由於他路者。作賊明矣。不可不除。若不辨漂到者而幷殺之。則果有害於幷生之仁矣。我國以至誠事大而捕獲叛民。〔原注:被虜唐人中。有中原叛民導倭作賊者。〕不可不奏聞。但靡費之害。勢所難支矣。且中原有倭寇之亂。亦有㺚子之患。若以我國爲武勇之國。則請兵之事。亦不可不慮矣。

번역

예로부터 비록 재변(災變)이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평안도에 우박이 떨어져 사람과 말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양남(兩南)에는 폭풍이 불어 병선(兵船)을 부수었으며, 고쳐 수리하는 과정에서 백성의 힘이 더욱 고갈되었습니다. 그리고 삼남(三南)은 가뭄으로 천리가 붉게 타들어 갔고, 함경도는 홍수로 인해 몇 군의 모래가 뒤집혔습니다. 《춘추대수(春秋大水)》에 전하기를, “원기(冤氣)가 함께한 소치이다.” 하였으니, 어찌 그 응험이 없겠습니까. 장백산은 주진(主鎭)인데 앞면이 무너져 내렸고, 군위(軍威)에는 또 천갈(川渴)의 변고가 있었습니다. 신 같은 자가 어찌 음양을 조화롭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근심과 두려움만 더할 뿐입니다. 게다가 왜변 을묘년에 함락된 뒤로 사람들은 통분한 마음으로 매번 포살하여 이전의 치욕을 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조정이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에 잘못이 없지 않으니, 오랑캐만 꾸짖고 스스로 반성할 뜻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선(倭船)에 물화가 가득 실려 온 것은 반드시 바람에 떠내려온 것이지 도적을 지을 뜻이 없는데도 으레 모두 포살(捕殺)하니 신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변방에 가까이 와서 도적질할 뜻을 가진 자는 진실로 잡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큰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은 반드시 모두 추격하여 잡으니, 이는 병력을 헛되이 소모할 뿐만 아니라 원한을 맺게 되는 일이 필시 많습니다. 그리고 포획하는 과정에서 포로가 된 당인(唐人)들도 모두 아무런 잘못 없이 죽으니 그 원통한 기운이 어찌 천지의 화기를 상하게 하여 수재와 한재를 불러오지 않겠습니까. 신은 흑산도(黑山島)와 삼도(三島) 이외에는 끝까지 추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한 사람의 의견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으니 위에서 참작하소서. 그리고 포로가 된 당인을 풀어 보내고 주문(奏聞)하는 것이 지성으로 사대(事大)하는 도리에 맞습니다. 다만 올해 운세가 흉년이 들어 부고(府庫)가 비어 버렸고 형편상 지탱하기 어려울 것 같으며, 평안도 일대의 인마(人馬)가 다 떨어져서 또한 수송하기 어렵습니다. 중원(中原)의 한 길은 눈에 가득 쓸쓸하여 수레를 많이 내기 어렵다. 또 왜적이 중원에 죄를 지었으므로 중원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왜적을 잡는 데 용감하다는 것을 보고 우리를 통해 분한 마음을 풀고자 한다면,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했던 일과 같은 일이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또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인(仁)으로 말하자면 왜적도 천지 사이에 함께 생겨난 것인데, 처음부터 적이 되지 않았는데 배가 파선되어 육지에 올라온 자를 꾀어 죽인다면 어찌 생성의 인에 해로움이 없겠는가. 앞서 일본에서 보낸 서계(書契)에 “표류민이 귀국에 도착하면 살해하지 말라.” 하였는데, 답하기를 “귀국의 표류민이 우리 국경에 이르면 군사를 버리고 몸을 바치면 마땅히 호송하겠다.” 하였다. 그 뒤 무위전(武衛殿)에 보낸 서계에도 “귀국의 적자(赤子)는 나의 적자와 같으니, 한결같이 인을 행하는 가운데 있어야 한다.” 하였다. 만약 병사를 제거하고 몸을 드러내어 표류한 연유를 분명히 고한다면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물자를 지급하여 호송해야 한다고 전날 답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지금 모두 죽이니, 신의(信義)가 어디에 있습니까. 항복을 청하는 자는 한 번 씻어 주고 또 추장에게 편지를 보내 죽이지 않겠다는 뜻을 일깨우면 아마도 될 것입니다. 상이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재변(災變)이 계속되는 것은 대체로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변고가 위에서 응하는 것이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게 신민을 다스리면서 제대로 수양하고 반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앙이 이와 같으니,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또 왜인이 정상적인 항로를 따르지 않고 다른 길로 온 것은 적이 되었음이 분명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표류해 온 자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 죽인다면 과연 함께 살리려는 인(仁)에 해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반역한 백성을 포획한다.” 하였다. 〔원주〕: 당나라에 포로가 된 사람 중에 중원의 반란한 백성이 왜를 인도하여 도적질을 한 자가 있으니, 주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비용이 많이 드는 해악은 형세상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또 중원에 왜구의 난이 있고 또한 일자(㺚子)의 근심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를 무용의 나라로 여긴다면 병사를 청하는 일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문

史臣曰。臣謹按自經乙卯倭變。朝廷深憤小醜之陸粱。如遇賊船。必窮追而盡殱之。未及追捕者。坐以逗遛之律。不但此也。前者尹漑建議襲擊骨幹。震歎曰。潛師掩襲。盜賊之謀也。以堂堂國家。敢爲盜賊之謀。可恥之甚。不嗜殺人。先賢美之。窮兵黷武。前史譏之。震可謂深得大臣之體也。

번역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을묘년 왜변(倭變) 이후로 조정에서 소추(小醜) 육량(陸梁)을 깊이 분개하여 적선(賊船)을 만나면 반드시 끝까지 추격해서 모두 죽였으며, 미처 추격하여 포획하지 못한 자는 지체한다는 죄로 처벌하였으니 이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윤개가 습격하여 골간(骨幹)을 치기를 건의하자 진탄(震歎)하기를 ‘은밀히 군사를 모아 기습하는 것은 도적의 계책이다. 당당한 국가가 감히 도적의 계책을 쓰다니 매우 부끄럽다.’라고 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현(先賢)이 칭찬하였고, 무력만 남용한다는 점에서 전사(前史)가 비난하였으니 진은 대신(大臣)의 체모를 깊이 터득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157. 因雷警。請停□親閱習陣啓。〔原注:同年己未八月庚子朔丙午。□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伏聞□命停西郊觀稼。其戒懼天變〔原注:是日。□上命政院曰。去夜雷電發於收聲之月。予心未安。來十一日慕華館親閱。在所不已。觀武才觀稼等事。幷勿爲之也。〕之誠至矣。然十一日習陣。幷□命姑停何如。

번역

삼가 듣건대, 서교(西郊)에서 농사를 살피는 것을 정지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하니, 천변(天變)을 두려워하는 그 정성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11일 습진(習陣)까지 모두 정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答曰。親閱非如他事。而慕華館亦非遠行之地。故不命停之。啓意當矣。如啓。

번역

답하기를, “친히 열람하는 것은 다른 일과 같지 않지만 모화관도 먼 길을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정지하라고 명하지 않았으니, 아뢴 뜻이 옳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58. 特進官連入□經筵不當議〔原注:明宗六年辛亥四月己未朔壬戌。□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今觀李戢所啓。與小臣所嘗料者正合。特進官之設。所以廣接宰相。而通言路。非群職帶經筵官。以講磨文義。開達心學爲任者也。使之連入晝,夕講。不知有何義而然也。臣不知古。不敢擅議。廣議施行。乃合事宜。

번역

지금 이집(李戢)이 아뢴 것을 보니, 소신이 일찍이 헤아린 것과 정확히 합치합니다. 특진관을 둔 것은 재상들을 널리 접견하고 언로를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여러 관직 중 경연관을 맡아 문의(文義)를 강마하여 심학(心學)을 개달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자가 아니니, 그들로 하여금 연이어 주강과 석강에 들게 함이 무슨 의리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옛일을 잘 몰라 감히 마음대로 논의할 수 없으니, 널리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159. 使庶官各自盡職議〔原注:同年辛亥四月己未朔甲寅。□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7B

원문

文官文蔭之職。各有其處。見文蔭之不能堪任。輒以文官差遣。勢有所不能。各驛之殘弊莫甚。況設官分職。□祖宗成憲。不宜輕變。爲監司者。嚴明黜陟。則地方守官。自當畏戢而盡職矣。

번역

문관(文官)과 문음(文蔭)의 직책은 각각 그 처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음이 맡을 수 없다고 보면 번번이 문관으로 차출하여 보내는 것은 형편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점이 있고, 각 역참(驛站)의 폐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어 준 것은 조종(祖宗)께서 정한 법이니 가볍게 고쳐서는 안 됩니다. 감사가 출척(黜陟)을 엄정하게 한다면 지방의 수관(守官)들이 저절로 두려워하며 본분을 다할 것입니다.

160. 請勿改舊章議〔原注:同年辛亥七月丁亥朔庚寅。□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7C

원문

輕改舊章。臣愚已知其不可。但罷職。所以懲戒。而災傷見罷者。己亦不知其罪。人亦不以爲罪。送舊迎新。徒貽吏民之害。故參考律文。以災爲實者。雖五十卜不罷之。此欲救一時之弊而有其議也。然變改舊章。已爲未安。不須膠固。宜依舊規。

번역

옛 규정을 가볍게 고치는 것은 신이 이미 옳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파직하는 것은 징계하기 위한 것인데, 재해를 당하여 파직된 자는 자신도 죄인 줄 모르고 남들도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하면 한갓 관리와 백성에게 해만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문(律文)을 참고하여 재해를 당한 자는 비록 50번이나 파직되더라도 파직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는 일시적인 폐단을 구제하고자 하여 논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옛 규정을 고치는 것은 이미 온당치 못하니, 굳이 고집할 필요 없이 예전 규례대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원문

傳曰。近年以來。拘於年凶。不遣敬差官覆審災傷。而遣御史巡視。御史星馳。其所見豈能詳盡乎。此所以民弊益滋也。且此法新立未久。紛紜更改。亦不爲當。依議勿改。

번역

전교하기를, “근년 이래로 흉년을 당하면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재해의 피해를 자세히 살피게 하는 것을 구애받아 어사(御史)를 보내 순시하게 하는데, 어사가 바삐 달려가서 본 것이 어찌 상세하고 완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백성의 폐단이 더욱 심해지는 까닭이다. 또 이 법을 시행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번거롭게 고치는 것도 마땅하지 않으니, 의논한 대로 고치지 말라.” 하였다.

161. 官制變更爲難議〔原注:同年辛亥七月丁亥朔癸巳。□右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7D

원문

外方殘驛。特差文官爲察訪。□聖上視民如傷之盛意。於此益可見。但近來多變□祖宗官制。是急於救民。而其於遵守成憲。固有所未安者。年凶民困。各驛之殘弊。將有甚於今時。則勢難以文官盡兼之。然業已□命下。事難旋止。姑依該曹所啓施行。

번역

외방의 쇠잔한 역참에 특별히 문관을 차출하여 찰방으로 삼는 것은, □ 성상께서 백성을 아끼시는 성대한 뜻이 여기에 더욱 잘 나타나 있다. 다만 근래 조종(祖宗)의 관제(官制)를 변통하는 일이 많으니 이는 백성을 구제하는 데 급급한 것이지만, 이미 정해진 법을 준수하는 데에는 진실로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하니 각 역참의 폐단이 장차 지금보다 심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형세상 문관으로 모두 겸임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미 명을 내리셨으니 일을 중지하기 어려우니, 우선 해당 조(曹)에서 아뢴 대로 시행하라.

원문

傳曰。大臣之議。與銓曹所啓同。依啓可也。

번역

전교하기를, “대신(大臣)의 의견은 전조(銓曹)에서 아뢴 것과 같으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62. 通用楮貨。以便貿遷議。〔原注:同年辛亥九月丙戌朔壬寅。□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8A

원문

近年以來。連歲凶荒。禾穀不登。棉花不收。貨幣乏絶。民生困苦。甚可矜憐。不可不立科條。以爲貿遷之用。銅錢或可用。然銅鐵非我國所產。而國儲不敷。若欲鑄錢。流布通行。必有難繼之患。恐不可行也。今之楮貨。古之寶鈔。自□祖宗朝。定爲國幣。載諸大典。以爲萬世通行之法。其廢而不用者。由官府不用之故也。如決訟作紙。犯罪徵贖。次知徵闕行廊。各市月稅。奴婢身貢餘錢。醫司賣藥之類及一應官府所出納之物。皆以從棉布時直。準計用之。使民知楮貨之有用。則皆樂於行用。而至於小小買賣。亦皆用之。則握粟之弊。庶或減矣。且帝王爲政。貴因俗而善導。我國緜布之用。習俗已久。不可全廢。麤惡常木。固無所用。所當禁絶。如三升緜布則民間猶可作衣。亦不至回俸之價重幷令參用。其如流通貿遷。大有便益。令該曹酌定其限。節目磨鍊施行何如。

번역

근년 이래로 해마다 흉년이 들어 곡식이 수확되지 않고 면화도 거두지 못하여 화폐가 부족해지고 민생이 고통을 겪고 있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과조(科條)를 세워서 무역에 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동전은 혹 사용할 만하지만, 동과 철은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저축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만약 돈을 주조하여 유통시키려 한다면 반드시 계속 쓰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것이니 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지금의 저화(楮貨)는 옛날의 보초(寶鈔)로, □ 조종조(祖宗朝)에서 국폐(國幣)로 정하여 《대전(大典)》에 실어 만세토록 통용하는 법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폐지되어 쓰이지 않는 것은 관부(官府)에서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송사(訟事)를 판결할 때 종이를 만들거나, 죄를 지은 자에게 속전(贖錢)을 징수하거나, 차지(次知)가 결행(闕行)한 데 대한 조세나 각 시장의 월세(月稅), 노비 신공(身貢)의 남은 돈, 의사(醫司)에서 약을 팔 때와 일체 관부에서 출납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모두 면포(綿布)를 종이로 바꾸는 시가를 기준으로 계산하여 쓰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저화가 쓸모 있음을 알게 한다면 모두 기꺼이 사용하고, 소소한 매매에도 모두 사용할 것이니 곡식을 움켜쥐고 있는 폐단이 아마도 줄어들 것입니다. 또 제왕(帝王)이 정사를 할 때는 속인(俗人)을 의지하여 잘 인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우리나라에서 면포를 사용하는 것은 습속이 오래되었으니 완전히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거칠고 나쁜 상목(常木)은 진실로 쓸 데가 없으니 금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3되짜리 면포는 민간에서 오히려 옷을 지을 수 있으니, 또한 환봉(還俸)의 값으로 무거운 것을 모두 사용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유통시키고 무역에 쓰면 크게 편리한 점이 있을 것이니, 해당 조로 하여금 그 한도를 참작하여 정하고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63. 弛盜安民策議〔原注:同年辛亥十一月乙亥朔癸酉。□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8B

원문

畿甸之盜賊者。乃迫於飢寒。鼠竊狗偸而已。非劫殺守令。藏兵山藪者之比也。旣擇守宰。又與之軍官。則似與防備外賊。四方聞之。必曰大盜起而京畿戒嚴。則非所以鎭撫民心也。況發千鈞之弩於鼠。古人所譏。古之善捕賊者。或以恩信懷。或以智術牢籠。雖不至加矢石。盡除之。使一境卒賴以安。今爲長湍府使者。〔原注:趙安國〕武班中有名。其隣州亦有武人。相與合謀。鍊卒而伺之。雖不別帶裨將。其弛盜不甚難矣。今觀該曹啓稟。其意亦當。主守無腹心。果難措手。使自擇其有才智者。稱中房帶去則隱然有濟事之具。而無輕動之形也。

번역

경기(京畿)의 도적은 바로 굶주림과 추위에 내몰려 쥐나 개처럼 훔치는 자들이지, 수령을 겁박하여 죽이고 산림에 병사를 숨겨 두는 무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미 수령을 뽑아 놓고 또 그와 함께 군관(軍官)까지 주었으니, 이는 외적을 방비하는 것과 같다고 사방에서 들은 자들은 반드시 ‘큰 도적이 일어나서 경기가 계엄 상태이다.’라고 할 것이니, 이것이 백성의 마음을 진무(鎭撫)하는 방법이 아니다. 더구나 쥐를 잡는 데 천근(千鈞)의 쇠뇌를 사용하는 것은 옛사람이 비웃은 바이다. 옛날에 도적을 잘 잡은 자들은 혹 은혜와 신뢰로 감싸기도 하고 혹은 지혜로운 술책으로 가두어 두기도 하여, 화살이나 돌을 던지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도 모두 제거하여 온 경내의 백성들이 마침내 안심하게 하였다. 지금 장단 부사(長湍府使)는- 원주(原注)에 조안국(趙安國)이라고 되어 있다. -무반(武班) 가운데 이름이 있고, 그 이웃 고을에도 무인(武人)이 있어 서로 함께 도모하여 군졸을 훈련시키고 도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으니, 비록 별도로 비장(裨將)을 두지 않더라도 도적이 줄어드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해당 조(曹)에서 아뢰는 것을 보니 그 뜻이 또한 마땅하다. 수령은 마음속에 품은 사람이 없으니 과연 손을 쓰기 어려울 것이니, 재주와 지혜가 있는 자를 스스로 뽑아 중방대(中房帶)로 삼아 데려가게 한다면 은연중에 일을 해결할 도구가 있게 되고 경솔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없을 것이다.

164. 親耕勞宴事議〔原注:明宗八年癸丑正月戊寅朔壬申。朝講。□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8C

원문

近來災變之作。比舊倍甚。然□親耕乃率先敦本之義。盛禮旣畢則進箋陳賀。幷不可廢也。結綵呈技。大張勞宴則固有所未安也。

번역

근래에 재변(災變)이 일어나는 것이 예전보다 갑절이나 심합니다. 그러나 친경(親耕)은 근본을 돈독히 하는 의리를 앞장서서 행하는 것이니, 성대한 예를 이미 마쳤다면 진선(進箋)하고 진하(陳賀)하는 것을 아울러 폐해서는 안 됩니다. 결채(結綵)하고 재주를 뽐내며 크게 잔치를 베푸는 것은 참으로 온당치 않습니다.

원문

傳于政院曰。歌謠結綵及勞酒宴。依左右相議行之。

번역

정원에 전교하기를, “가요(歌謠)와 결채(結綵), 노주연(勞酒宴)은 좌의정과 우의정이 의논한 대로 행하라.” 하였다.

165. 興師問罪野人不可議〔原注:同年癸丑正月戊寅朔庚辰。朝講。□領經筵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凡用兵。當審國勢。今兵食俱乏。災異不絶。當恐懼修省之日。非興師動衆之時。前日野人問罪之事。朝廷共議。臣未能止也。書曰。慮先而動。動惟厥時。我先失道。而強興憤兵。彼人先知。少壯先走而徒殺老弱。無以示威。而益招後來之患矣。

번역

무릇 군사를 쓰려면 국세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은 병사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고 재이가 끊이지 않으니, 두려워하며 반성해야 할 때이지 군사를 일으켜 동원할 때가 아닙니다. 지난날 야인이 죄를 물은 일에 대해 조정에서 함께 의논하였으나 신이 막지 못하였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생각을 먼저 하고 움직여야 하니, 움직임은 오직 그 때에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도를 잃고서 억지로 분노한 군사를 일으키면 저들은 먼저 알고 젊은이와 장정들이 먼저 도망가고 노인과 약자들만 죽게 되어 위엄을 보이지 못하고 후일의 근심만 더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166. 別科武人。講書入格後許試議〔原注:同年癸丑正月戊寅朔壬午。□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今次別擧。特爲覆試者。欲選實才。俾無僥倖也。文科與選之士。至製六篇。雖或不講。與講無異。至於武擧則不然。目不知書者。容或得中。於國家取人之道。亦失其本意。宜令該曹磨鍊。講一書入格。然後許赴殿試。似合特擧之典。

번역

이번 별과거(別科擧)를 특별히 복시(覆試)로 행하는 것은 실재(實才)를 뽑아서 요행을 바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문과(文科)와 선비의 과거는 제술(製述)이 6편(篇)에 이르면 비록 강경(講經)하지 않았더라도 강경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무과(武科)는 그렇지 않아서 눈으로 글자를 모르는 자도 혹 중을 얻을 수 있으니, 국가가 사람을 취하는 도리에 본의를 잃게 된다. 마땅히 해당 조로 하여금 한 책을 강하여 입격한 후에 전시에 응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니, 특별히 과거를 행하는 법에 합당할 듯하다.

원문

傳曰。依尙震議爲之。

번역

전하기를, “상진(尙震)의 의론대로 하라.” 하였다.

167. 庶孼子孫許赴科試爲當議〔原注:同年癸丑十月甲戌朔庚辰。□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9A, ITKC_MO_0130A_A026_069B ...

원문

謹按禮典諸科條。庶孼子孫勿許赴文武科生員進士試。如以爲庶孼多是娼女及婢子所出。不可齒諸士類。則士大夫有妻亡而不更聘娶。或妻存而無子。求娶良家處子而爲妾者。固非娼女婢子所出之同地也。竊念人之才否。在於資稟粹駁。不繫生地之貴賤。若茂才異等之人出於妾產。而以庶孼棄而不用。是豈王者取人無方之道乎。士夫之家。禮有定分。故曰嫡曰庶。雖至于孫累世。人皆知爲嫡爲庶。如吏民之類則取女不以正。故生子無完分。所以嫡庶難辨。良賤無別。是國法詳於貴者顯者。而略於賤者微者。有如訴者之稱怨。殆非□祖宗立法垂世之本意也。令禮曹詳立節目。其大小人員。娶良家女及士大夫孼爲妾者所生子孫與賤妾子贖身從良而娶良女爲妻者所生子孫。許赴文武兩科生員進士試。以通仕路。而勿授淸顯重職。不由科目出身者。則勿授東西班正職。似合情理。至於寒族被錮者。系雖卑微。別無痕咎。亦從此例。但爲庶孼者。幸其許通。或生凌嫡之心。以亂名分。此又可慮。其應赴擧者。在家能循禮守分。篤行孝悌。可堪應試者。必取嫡兄弟伯叔父或家門尊長保勘結狀。然後始許錄名。使知尊嫡敬宗之義。如是則庶孼人人。皆知自愛其身。勤學飭行。不如前日自暴自棄。人才多所成就任用。少可補於盛政也。

번역

삼가 예전(禮典)의 여러 조항을 살펴보건대, 서얼과 자손은 문무과(文武科)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생원과 진사의 시험에 응시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서얼이 대부분 창녀나 비자(婢子)의 소생으로 선비의 반열에 끼워 줄 수 없다고 여긴다면, 사대부로서 아내를 잃고 다시 혼인하지 않거나 아내가 있으면서 자식이 없어 양가(良家)의 처자를 얻어 첩이 되는 경우는 진실로 창녀나 비자의 소생과 같은 지위는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사람의 재주와 부족함은 타고난 바탕에 달려 있는 것이지, 태어난 신분의 귀천에 매인 것은 아닙니다. 만약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등(異等)의 사람이 첩에게서 나왔는데도 서얼이라고 버리고 쓰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왕자가 사람을 취하는 방도에 합당하겠습니까. 사대부 집안은 예법으로 정한 분수가 있으므로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라고 합니다. 비록 여러 대에 걸쳐 손자까지 이르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적자인지 서자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민(吏民)의 경우에는 딸을 취할 때 정실로 취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식(生殖)하는 자는 완벽한 분수가 없기 때문에 적서(嫡庶)를 구별하기 어렵고, 양천(良賤)의 구분이 없는 것은 국법이 귀한 자와 현달한 자에게 상세하고 천한 자와 미천한 자에게 대략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원망하는 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과 같아서 조종(祖宗)께서 법을 세워 세상에 전하신 본의가 아닐 듯합니다. 예조로 하여금 절목을 상세히 세우되, 그 인원 규모는 양가의 딸을 얻은 자와 사대부의 첩이 된 자의 소생 자손 및 천첩(賤妾)의 몸값을 바치고 양인으로 올라 좋은 집안의 딸을 얻어 아내로 삼은 자의 소생 자손에게 문과와 무과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어 벼슬길에 오르게 하되, 청현직(淸顯職)이나 중직(重職)에는 제수하지 말고, 과거를 거치지 않고 출신한 자는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정직(正職)에 제수하지 않는 것이 인정과 이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한족(寒族)으로 금고된 자의 경우는 계통이 비록 미천하나 별다른 허물이 없으니, 또한 이 예에 따라 다만 서얼로 삼아야 합니다. 다행히 그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으나, 혹 적자(嫡子)를 능멸하려는 마음이 생겨 명분(名分)을 어지럽힐까 염려됩니다. 응시하는 자는 집에서 예법을 따르고 분수를 지키며 효제(孝悌)를 독실히 행하여 시험에 응할 만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적형제나 백숙부, 혹은 가문의 존장(尊長)이 보감결장(保勘結狀)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녹명(錄名)을 허락함으로써 존적경종(尊嫡敬宗)의 의리를 알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서얼들도 모두 자기 몸을 아끼고 학문에 힘쓰며 행실을 단속하여 예전처럼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버리지 않아서 인재가 많이 성취되어 정사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원문

傳于政院曰。庶孼不得許通。雖曰□祖宗朝成法。國家愛惜人才。不可不變而通之。大槩依三公議得。良妾子則娶良妻至其孫。賤妾子則娶良妻至其曾孫許通。而勿敍顯職。一家之內。無得凌嫡之事。令禮曹詳盡磨鍊節目施行。〔原注:時李彥迪在謫所聞之曰。許通庶孼。其乃廣用人才之道。豈不美之。但權臣挾私。其法何可長也。〕

번역

정원에 전교하기를, “서얼을 통혼(通婚)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은 비록 조종조에서 법으로 정한 것이라고는 하나, 국가가 인재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변통하여 통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삼공(三公)의 의논에 따라 양첩(良妾)의 자식은 양처(良妻)에게 시집보내 그 손자 대에 이르도록 하고, 천첩(賤妾)의 자식은 양처에게 시집보내 그 증손 대에 이르도록 통혼을 허락하되 현직(顯職)에는 서용하지 말며, 한 집안 안에서 적자(嫡子)를 능멸하는 일이 없게 하라. 예조로 하여금 절목을 상세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원주(原注)에 “이때 이언적(李彦迪)이 귀양지에서 듣기를 ‘서얼의 통혼을 허락하는 것은 바로 인재를 널리 등용하는 방도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권신(權臣)이 사사로움을 끼치는 법은 어찌 장려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라고 하였다.-

168. 賑救策議〔原注:同年癸丑十二月癸酉朔。□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69D

원문

今年賑救之策。須出常規之外。別有以講究規劃。然後庶見萬一之效。故前日納粟償職之議所以止也。償止於士族。則其納必不裕。如公賤則免賤。鄕驛吏則免役。諸邑軍人則陞授相當職。補充隊入屬。而未準仕者。或漏落者從良。犯五刑者。獄雖成而情可恕者。許贖等事項。幷令該曹商確査定事目。果合救時之急務。

번역

올해 진휼할 대책은 반드시 상규(常規) 이외에 별도로 강구한 계획이 있어야만 만분의 일이라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일에 곡식을 바치고 직임을 대신하는 의논을 중지한 것입니다. 사족에게 중지한다면 그 납부할 것이 필시 넉넉하지 않을 것이니, 공천(公賤)은 천인(賤人)이 되는 것을 면제하고 향역리(鄕驛吏)는 역(役)을 면제하며 여러 고을의 군인은 상당한 직임에 올려 보충대(補充隊)에 소속시키고 아직 벼슬에 오르지 못한 자나 누락된 자는 양인으로 만들며, 오형(五刑)을 범한 자로서 감옥에 가 있더라도 정상이 참작될 만한 자는 속죄를 허락하는 등의 사항을 모두 해당 조로 하여금 상의하여 확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과연 진휼할 때의 급무에 합당합니다.

169. 義州築城議〔原注:明宗九年甲寅九月乙亥朔己丑。□上遣史官。收議于□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0A, ITKC_MO_0130A_A026_070B

원문

城者。保民之所。雖非要害之地。力有所可及。則迨其無事而爲之。衛國之急務也。彌串一堡。乃在鴨江。不與狄境相接。故曾無疊入之例。止設木柵。其來已久。然今隔江唐人。不但潛相買賣。至或劫奪邊氓畜產。馴致生釁。固可前知。依洪暹所啓。施行不妨。我國方隅。關防稍完。獨義州面。最爲虛疏。其在前□朝。置義,麟,靜三州於一州之地。豈爲徒然。必有深意。□中宗朝亦嘗有遠慮。自義順館至彌串。築城之議已定。至審城基而□啓聞。近來意見不一。其議乃寢。若於淸燕之暇。或軫□聖念及此。此宜在先不在後。患生而爲之備。非先事而慮者也。古人遇凶歲。建賑救之策。必先修城廓。則築城爲役。不論豐歉。皆可擧耳。以爲不可者。或曰沙土難築。或曰爲水所沈。然前□朝旣築之。今亦可築。占得岡脊。則何有水沙之患。人旣不可。臣不須喋喋。事係國家大勢。不忍容默。而此亦善繼之一事。相時議施。有益無害也。

번역

성(城)은 백성을 보호하는 곳이니, 비록 요해처가 아니더라도 힘이 미칠 수 있는 곳이라면 일이 없게 되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급선무입니다. 미곶(彌串)의 한 보루(堡壘)는 압록강에 있는데 적경(狄境)과 서로 접하지 않으므로 일찍이 겹쳐 들어간 예가 없고 목책(木柵)만 설치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 건너 당인(唐人)들이 몰래 매매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변방 백성의 가축을 약탈하기까지 하여 자연히 생기는 화근이 되니, 진실로 미리 알 수 있습니다. 홍섬(洪暹)의 계사대로 시행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나라는 방위가 완전한 곳이 적은데 의주면(義州面)만 가장 허술하니, 그 옛날 명종조에 의주(義州), 인주(麟州), 정주(靜州) 세 고을을 한 고을로 합친 것이 어찌 공연히 그런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중종조에도 일찍이 멀리 내다본 생각이 있어서 의순관(義順館)에서 미곶까지 성을 쌓자는 논의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성터에 이르러 조사한 뒤에 주상께 보고하였는데, 근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그 논의가 중지되었습니다. 만약 한가한 때에 혹시라도 성상의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면 이는 먼저 해야 할 일이지 나중에 해서는 안 됩니다. 화가 생기면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생각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흉년을 만나 진휼(賑恤)할 대책을 세울 때 반드시 먼저 성곽을 수리하였으니, 성을 쌓는 일은 풍년이든 흉년이든 따질 것 없이 모두 거행할 수 있습니다. 불가하다고 하는 자들은 모래로 쌓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고 물에 잠길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옛날 명종조에 이미 쌓았으니 지금도 쌓을 수 있습니다. 산등성이를 차지하면 어찌 물이나 모래가 문제 되겠습니까. 사람이 안 된다고 하면 신이 구구하게 말할 필요는 없으나, 일은 국가의 대세와 관계되어 차마 묵묵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또한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는 일이니, 때를 보아 의논하여 시행한다면 이로움이 있고 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170. 請設內禁衛於兩南議〔原注:明宗十年乙卯十一月壬辰朔己未。朝講。□上以諫院所啓慶尙南道。設內禁衛未便事。遣史官張士重。收議。〕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0C

원문

近年以來。慶尙之人。專不習武。才力出衆者。皆沈於保率。當此事變之時。多有遺材之患。故該曹與臣等同議。請設內禁衛兼司僕於兩南。使之鼓舞興起。而有益於備禦也。請令該曹於禁軍數內。略設額數。分防各鎭。待事變寢息後。令番上宿衛何如。

번역

근년 이래로 경상 사람들은 전적으로 무예를 익히지 않아 재주와 힘이 뛰어난 자들이 모두 보솔(保率)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일과 같은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인재를 잃게 되는 근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해당 조(曹)가 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양남(兩南)에 내금위 겸 사복시를 설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무시켜 일으켜서 나라의 방비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해당 조로 하여금 금군의 수효 안에서 대략 액수(額數)를 정해 각 진(鎭)에 나누어 배치하게 하고, 변고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번상(番上)으로 하여 숙위(宿衛)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上從之

번역

주상이 따랐다.

171. 文官復職議〔原注:同年乙卯十一月壬辰朔戊申。□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國家設官分職。自有定制。而近因凶歉。經費不敷。減省宂官。此出於不得已也。邇來文官。多有不復職者。未知緣何故而然也。今年農事。稍稔於往年則姑復文官四五窠。以處文官。未爲不可。如監寺五六品之職。以文官除之。亦無妨也。

번역

국가에서 관직을 설치하여 직무를 나누는 것은 본래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흉년으로 인해 경비가 부족하여 쓸모없는 관직을 줄인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근래에 문관(文官) 가운데 다시 직임을 맡지 않는 자가 많은데 무슨 연고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올해 농사가 지난 해보다 조금 풍작이라면 우선 문관 4, 5자리 정도를 다시 문관에게 주어 맡기게 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감시(監寺)의 5, 6품 관직을 문관으로 제수하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

172. 經筵夜對。立後公事議〔原注:明宗十一年丙辰二月庚寅朔戊申。□經筵夜對。□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0D

원문

禮曹取品立後公事。極爲詳著。若依癸丑年立法。而自前非同生之子爲後者。一切罷繼則非徒惹起訟端。妨貴習長。□先王判付。亦棄不用。事體未穩。擧行重難。癸丑年以後違法爲後。則聽理改正爲便。承重妾子不在。只祭考妣之列。大典註解。亦必載錄矣。

번역

예조가 취품(取品)하여 후사를 세우는 공사(公事)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만약 계축년에 법을 세운 대로 전부터 동생이 아닌 자를 후사로 삼은 것을 일체 파계(罷繼)한다면 송사(訟事)의 단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귀한 가문의 전통을 해치는 것이고, 선왕의 판부(判付)도 버리고 쓰지 않는 것이니 사체(事體)가 온당하지 못하여 거행하기에 매우 어렵습니다. 계축년 이후로 법을 어기고 후사가 된 자는 이치를 들어 바로잡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승중첩자(承重妾子)가 없으면 다만 고비(考妣)의 반열만 제사 지내는 것을 《경국대전》 주해에도 반드시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173. 兩南觀察使率家眷爲便議〔原注:同年丙辰十月丙戌朔己亥。□命議□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1A

원문

祖宗朝以兩界監司必兼府尹。兩期而遞者。重其道而久其職也。今之二南監司。有事則稱巡察使。其爲責任。豈不大於兩界哉。猶循故常。一期而遞則胸中甲兵。未試而徑還。其於制勝安邊之策。必不能盡其才略而貽悔者多矣。□世宗朝故事。昭載史冊。今雖復遵其睿算。限邊陲無事。使兼府尹。非新制也。兩界旣行之無弊。則二南獨何異焉。改置之際。雖有小弊而大體有益。則自□上斷然行之。不害時措之宜。而南顧之憂亦少紓矣。

번역

조종조(祖宗朝)에 양계(兩界)의 감사는 반드시 부윤을 겸하여 두 번씩 기한을 채우고서야 체차하였으니, 이는 그 지방을 중시하고 그 직책을 오래 맡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이남과 전남의 감사가 일이 있으면 순찰사라고 칭하는데, 그 책임이 어찌 양계보다 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옛날의 규례를 따라 한 번씩만 기한을 채우고 체차한다면, 가슴속에 품은 갑병(甲兵)을 시험해 보기도 전에 곧바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승리를 도모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는 계책에 반드시 그 재략을 다 발휘하지 못하여 후회를 남기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 세종조의 고사(故事)가 사책(史冊)에 분명하게 실려 있으니, 지금 비록 다시 그 예지(睿知)를 따르더라도 변방에 일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부윤을 겸하도록 하는 것은 새로운 제도가 아닙니다. 양계에서 이미 시행하여 폐단이 없었다면 이남과 전남의 경우는 어찌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개차(改差)할 때에는 비록 작은 폐단이 있을지라도 대개는 유익한 점이 있으니, □ 위에서 단연코 시행한다면 시기에 맞게 조처하는 데 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쪽을 돌아보는 근심도 조금은 덜어질 것입니다.

174. 宗親聘娶事議〔原注:明宗十二年丁巳五月癸丑朔己巳。□左議政。領議政沈連源。同啓。〕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1B

원문

宗親娶人妾產爲妻者一禁之條目。自辛酉受□敎。已爲來法。而習俗已成。因循踵行者。比比有之。自今以後。申明禁斷爲當。但已成婚者。旣以情願成禮聘娶。毋得率意更娶。以杜乖離紛擾之弊何如。

번역

종친(宗親)이 사람의 첩을 아내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조목은 신유년에 교서를 받들어 이미 법으로 삼았으나 습속이 이미 이루어져 그대로 답습하여 행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지금부터 거듭 금단해야 합니다. 다만 이미 혼인을 한 자는 정과 소망을 가지고 예의를 갖추어 혼인한 것이니, 마음대로 다시 혼인하지 못하게 하여 어그러지고 분란되는 폐단을 막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75. 方伯擇任議〔原注:同年丁巳八月辛巳朔丁酉。□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自頃年事變之後。慮或爲方伯者失於防備節制之任。擇有名望才略者差遣。蓋出於不得已也。今觀憲府所啓之辭。正合物情。今於兩南方伯。不用儒將之人。姑揀宰相中堪爲專制一方。嚴明黜陟之人差遣何如。

번역

경년(頃年)의 사변 이후로 방백이 혹시라도 방비와 절제하는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명망과 재략을 갖춘 사람을 뽑아 차출하여 보낸 것은 대체로 부득이한 조치였습니다. 지금 사헌부에서 아뢴 말을 보니 정히 합당합니다. 지금 두 지방의 방백에 유장(儒將)을 쓰지 않으니, 우선 재상 중에서 한 지방을 전제(專制)할 만하고 출척(黜陟)을 엄명하게 할 만한 사람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76. 請停陵行以答天譴議〔原注:同年丁巳九月甲戌朔乙亥。□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1C

원문

拜陵之禮。雖係於誠孝。天有譴告。則當靜以思愆。停行□命攝。允合應天之實。

번역

능(陵)에 전배하는 예는 비록 성의와 효성에 관계되지만, 하늘이 꾸짖어 경고한다면 마땅히 조용히 허물을 생각하여 행차를 정지하고 대리청정해야 하니, 진실로 하늘에 응하는 실정에 합당하다.

원문

傳于政院曰。啓意爲當。使右相攝行。

번역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아뢰는 뜻으로 보아 마땅히 우의정이 대행하게 하라.” 하였다.

177. 因災傷。論斥權纘失啓議。〔原注:同年丁巳九月甲戌朔戊子。□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1D

원문

災傷差錯守令。應罷其職。〔原注:時全羅道羅州,江原道平昌邑有雷雹。〕昭載法典。不可因其邑民之訴而廢其法。苟有善政。雖在罷中。收用遲速。在自□上斟酌。先是。戶曹判書權纘□啓以國用不足。申明踏驗災實之法。至請列書各邑田畓字數以啓。自□上落點。遣御史覆審列邑。守令之畏法懼罪者。或不計歉熟。全無給災之田。民生嗷嗷。號冤無所焉。蓋纘一以損下益上爲主。民之受困如此。可謂聚斂之臣也。

번역

재해를 당한 고을의 수령은 그 직임을 파직해야 한다. -원주(原注)에 “이때 전라도 나주(羅州)와 강원도 평창읍(平昌邑)에 우박이 내렸다.” 하였다.- 법전에 분명히 실려 있으니, 그 고을 백성들의 호소로 인하여 법을 폐할 수 없다. 진실로 정사를 잘한 자는 비록 파직 중이라 하더라도 거두어 쓰는 것은 주상께서 참작하는 데 달려 있다. 이보다 앞서 호조 판서 권찬(權纘)이 아뢰기를, “국용이 부족하여 재해를 입은 실상을 답험하는 법을 거듭 밝히고자 합니다. 각 고을의 전답 면적을 열거하여 아뢰면 주상께서 낙점하고 어사를 보내 여러 고을을 덮어 살피게 하소서.” 하였다. 수령 중에 법을 두려워하고 죄를 무서워하는 자는 혹 작황이 좋지 않은 것을 계산하지 못해 재결(災結)로 지급할 전답이 전혀 없어서 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해도 소용이 없다. 대체로 권찬은 위에서 아래를 손상시켜 위를 이롭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니, 백성이 이와 같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재물을 모으는 신하라고 할 만하다.

178. 殿試生罷榜有難議〔原注:同年丁巳九月丙戌朔庚子。朝講。□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殿試非如初覆試之例。□聖上親臨大庭。進諸生而策試之。旣賜一榜出身。文武第一人。俱拜官供職。幾於兩月之久。而旋復罷之。〔原注:殿試上試官鄭士龍罷職。兩司啓請罷榜。收議于大臣。〕事體重難。且□祖宗朝。若一榜中有涉於不公者。則抽而去之。臣於□中廟朝。嘗再見之。〔原注:指成守琮,李叔琮事〕今外議之汹汹。亦必有指的者。〔原注:愼思獻〕臣意只去其人似可也。

번역

전시는 처음의 복시(覆試)와 같은 예가 아닙니다. 성상께서 직접 대궐 뜰에 나아가서 여러 선비를 불러다 책문(策文)을 지어 시험하시고, 이미 한 방(榜)의 출신(出身)을 주셨는데 문과와 무과의 제일인(第一人)은 모두 관직에 제수되어 직무를 수행한 것이 거의 두 달이나 되었는데도 곧바로 다시 파방(罷榜)하셨습니다.-원주(原注)에 “전시 상시관(上試官) 정사룡(鄭士龍)을 파직하였다. 양사(兩司)가 계청하여 방목을 파기할 것을 청하자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였다.” 하였다.-사체(事體)가 중대하고 어렵습니다. 또 조종조(祖宗朝)에 한 방 안에 공정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그를 뽑아 버렸는데, 신이 중묘조(中廟朝)에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원주(原注)에 “성수종(成守琮), 이숙종(李叔琮)의 일을 가리킨다.” 하였다.-지금 밖에서 떠들어 대는 의론도 반드시 지적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원주(原注)에 “신사헌(愼思獻)을 가리킨다.” 하였다.-신의 생각에는 그 사람만 파직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179. 文武職適用議〔原注:同年丁巳十一月甲戌朔己亥。□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2A

원문

專委字牧則文臣當先。專委折衝則武臣亦急。而兩責俱萃一職。則必擇文武者而授之。庶乎民衆可保。外患可防。若選用之際。少有偏輕偏重之弊。未有保民而弭患者也。平安道乃是關防重地。近來多用文臣。雖皆才識者。或有未便之意。如滿浦,巨鎭。果如□聖敎矣。

번역

전임(專任)으로 목민관을 맡기면 문신이 우선되어야 하고, 전임으로 절충사를 맡기면 무신도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책임을 한 직책에 모두 모으게 되면 반드시 문신과 무신의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려 임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을 보호하고 외환(外患)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선발하여 임용할 때 조금이라도 치우치거나 경중을 두는 폐단이 있다면, 백성을 보호하고 화를 그치게 한 적이 없습니다. 평안도는 관방(關防)의 중대한 지역인데 근래에는 문신을 많이 썼습니다. 비록 모두 재주와 식견이 있는 자들이지만 혹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만포(滿浦)나 거진(巨鎭) 같은 곳은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180. 請文武官擇任適所議〔原注:同年丁巳十二月癸卯朔丙午。□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2B

원문

今當文武合求之時。邊事可虞。而滿浦及兵使。以文官差遣未穩。請依□上敎遞之。擇遣武臣。義州則應接遼東及江沿臺文移文答之事。亦有避亂攔入之人意外措置之事。而武臣乏可當之員。請勿遞何如。

번역

지금 문관과 무관을 함께 구해야 할 때에 변방의 일을 염려할 만합니다. 그런데 만포(滿浦)와 병사(兵使)를 문관으로 차출하여 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상교대로 체차하고 무신을 뽑아 보내소서. 의주(義州)는 요동 및 강연(江沿)의 대문(臺文)에 답하는 일과 피란민이 난입한 일을 뜻밖에 조처해야 하는데, 무신 중에 감당할 만한 인원이 없으니 체차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81. 申救鄭士龍愼思獻科試獄事議〔原注:同年丁巳十二月癸卯朔庚戌。□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推鞫之下。各人所供。例多違端。今此獄事。證干皆士類。〔原注:李師聖,楊士彥,李光禎,朴忠侃之類。〕其辭符合。思獻〔原注:愼思獻。削科人。〕與士龍〔原注:鄭士龍。試官。已罷職。〕相應情理。似不現著。而猶被刑訊。則□聖明之世。含冤必深。士龍初不愼密。旣受罪譴。此亦足以革科擧後日之弊。原情參酌。實在□睿斷。

번역

추국(推鞫)을 시행한 결과 각 사람의 공초가 으레 허위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옥사(獄事)는 증거가 모두 선비들의 무리이다.-원주에 “이사성(李師聖), 양사언(楊士彥), 이광정(李光禎), 박충간(朴忠侃)의 무리이다.”라고 하였다.-그 말이 서로 부합하고, 신사헌-원주에 “신사헌은 과거에 낙방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과 정사룡-원주에 “정사룡은 시관(試官)으로 이미 파직되었다.”라고 하였다.-이와 서로 응하는 것이 정리상 드러나지 않을 것 같은데도 오히려 형신을 당하였으니, 성명(聖明)한 세상에서 원통함을 품는 것은 반드시 깊다. 정사룡이 처음부터 신중하지 못하여 이미 죄를 받아 책임을 지고 있으니, 이것 또한 과거를 행한 뒤의 폐단을 혁파하기에 충분하다. 원정(原情)을 참작해 주시는 것이 실로 예단(睿斷)이다.

182. 平安道文官守令不可盡遞議〔原注:明宗十四年己未正月癸酉朔辛巳。□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2C

원문

平安道內地守令中文官南行居多。萬一有警。差衛部將。使之赴賊者絶少。兵使〔原注:平安兵使金秀文啓請本道守令。皆差武官。〕之啓似當。然不可一日輕遞。雖文官。而有弓馬之才者。仍任固可。其餘則該曹斟酌遞改。庶免迎送騷擾之弊。而禦賊撫民。各得其人。此策之善者也。

번역

평안도의 내지 수령(內地守令)은 문관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만일 적의 경보가 있으면 위부장(衛部將)을 차출하여 적에게 달려가게 하는 일이 아주 드물다. 병사(兵使)- 원주(原注)에 “평안 병사 김수문(金秀文)이 본도의 수령은 모두 무관을 차임할 것을 계청하였다.” 하였다. -의 계사가 마땅한 듯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체차해서는 안 되니, 비록 문관이라도 궁마(弓馬)에 재주가 있는 자는 그대로 맡겨 두어도 좋고, 그 나머지는 해당 조에서 참작하여 체차한다면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소란스러운 폐단을 면할 것이며 적을 막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각기 적임자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좋은 계책이다.

183. 因黃海道監司陳弊啓回議〔原注:同年己未三月癸酉朔辛巳。□領議政。左議政安玹,右議政李浚慶。同議。黃海道觀察愼希復啓瓮津弊狀。□上令三公議策。〕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2D, ITKC_MO_0130A_A026_073A

원문

瓮津縣流亡人戶。多至七百六十三。救之之策。當如救焚拯溺。而監司愼希復。凡引進上旅外立馬。而不條陳被侵之由。宜依去年珍山等官陳弊之規。令監司訪問本邑弊瘼。一一縷柝啓聞。特有□明降。然後可以蘇復矣。他邑小民一段之疏。〔原注:文化學生魯世弼上疏陳弊故云〕豈能盡之乎。就其所陳言之。則本道立馬。不依軍籍均定。以致偏苦。本縣立馬。四戶量移他官宜當。流亡軍戶則今年改軍籍時議定不遠。其間入防便否。專在監司量度撫恤以待之也。他官一面千家。僅十戶之處甚多。軍人破定。不可偏施於此邑也。況皁隷匠人諸員水軍。在他道則爲苦力。而在本道則軍籍時人皆樂屬。今若破定則竝與他等人而流亡矣。今聞此道皁隷匠人等。聞魯世弼陳疏破定之事。莫不駭懼奔走。人心不安云。此人敢疏論他邑之事。妄欲變法。而監司未及知道內人情之所在。尤不可行也。場馬非經數年調養則難用。勢不急用於年限之內。何益乎。莫如今監司條陳□啓聞。然後依施。使得蘇復也。

번역

옹진현(瓮津縣)의 유망민(流亡民)이 763호나 되니, 구제하는 방책은 불에 타는 사람을 구하고 물에 빠지는 사람을 건져 내듯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감사 신희복(愼希復)은 인진상(引進上)으로 여외(旅外)에서 입마(立馬)한 것을 가지고 침탈당한 사유를 조목조목 진술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작년에 진산(珍山) 등 관원이 폐단을 진달한 규례에 따라 감사가 본읍의 폐막을 방문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아뢰게 한 뒤 특별히 분명하게 내리신 다음이 되어야 소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고을의 백성들에 대한 일은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원주(原注)에 “문화학생(文化學生) 노세필(魯世弼)이 상소하여 폐단을 진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그 진달한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본도의 입마를 군적(軍籍)에 의거하여 균등하게 정하지 않아서 고통을 치우치게 받게 하였으니, 본현의 입마 4호는 다른 관으로 옮겨 가는 것이 마땅하다. 유망민이 된 군호는 금년 개군적(改軍籍)할 때 논의하는 날이 머지않았으니, 그동안 방어영에 들어가는 것이 편리한지는 전적으로 감사가 헤아려 살피고 어루만져 주기를 기다리는 데 달려 있다. 다른 관은 1면에 집인데 겨우 10집인 곳이 매우 많으니 군인의 파정(破定)을 이 고을에 치우치게 시행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소례장인(皁隷匠人)과 수군(水軍)은 다른 도에서는 고역이지만 본도에서는 군적을 정할 때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속하려 하는데, 지금 만약 파정한다면 모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망민이 될 것이다. 지금 듣건대 이 도의 소례장인 등이 노세필이 상소하여 파정하는 일을 진달한 것을 듣고 놀라 두려워하며 분주해하고 인심이 불안하다고 하니, 이 사람이 감히 다른 고을의 일을 상소로 논하여 망녕되게 법을 바꾸려고 하는데 감사가 미처 내인(內人)의 정황을 알지 못하였으니 더욱 시행해서는 안 된다. 장마(場馬)는 몇 년 동안 조양하지 않으면 쓰기 어려우니, 형세가 연한 안에 급히 쓸 것이 아닌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지금 감사로 하여금 조목조목 아뢰어 주상께 보고하게 한 뒤에 시행하여 소생시킬 수 있게 하는 것만 못하다.

184. 慶尙右道兵使仍任意回議〔原注:同年己未三月癸酉朔戊子。□領議政。左議政安玹。同議。慶尙右道兵使仍任可否。收議於三公。〕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今者隄備緊急。三道兵使。一時遞罷。極爲重難。自□上權輕重。特許戴罪盡職。□睿算所在。言官豈不仰體乎。〔原注:憲府啓請依法罷職〕

번역

지금은 제방이 긴급한 상황인데 3도 병사(兵使)를 한꺼번에 체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상권(上權)의 경중을 고려하여 특별히 죄를 지고 직무를 다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예산(睿算)의 뜻에 언관이 어찌 우러러 헤아리지 않겠는가.-원주(原注)에 “사헌부에서 아뢰어 법대로 파직하기를 청하였다.”라고 하였다.-

185. 開城都事各別擇送議〔原注:同年己未三月癸酉朔乙亥。晝講。□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3C

원문

開城府都事。以武臣擇遣。□上敎至當。但雖以武臣差遣。不別措置。循常爲之。則猶無其益。伏聞近來。強盜多萃本府城底。戕害人民甚多。而人畏報復。不能進告。官吏雖或見聞。無設伏捕捉之計。頃者林居叱正〔原注:黃海道巨賊。來居于本府之地。〕跟尋之際。不聽牌頭之言。只給軍人廿餘名。孤單齟齬。以致牌頭見殺。亦不登時窮追。遂令賊勢鴟張。至爲駭愕。今遣武臣。講究捕捉之方。或率兵捍捕。或聞見尋捉。期令必獲。如或縱逸不捕。怯懦不追則以軍法論罪事。各別開諭下送。留守處亦以此意下諭何如。都事之職。平時則治本府之務乃其任也。而凡軍務之事。又其所職掌。如有此等盜賊之變。則不可不以軍法從事。大典內。境內盜賊不能捕捉。守令亦有其罪。故敢□啓。

번역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를 무신으로 뽑아 보내라는 상교가 지당합니다. 다만 비록 무신을 차출하여 보내더라도 별도로 조치하지 않고 평상시대로 한다면 오히려 그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근래에 강도가 본부(本府) 성 밑에 많이 모여들어 백성을 해치는 일이 매우 많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고발하지 못하고 관리는 혹 보고 들었더라도 복병을 설치하여 포착할 계획이 없어서 지난번 임거질정(林居叱正)-원주(原注)에 “황해도 거적(巨賊)으로 본부의 땅에 와서 살았다.” 하였다.-을 추격할 때에 패두(牌頭)의 말을 듣지 않고 단지 군인 20여 명만 주어 외롭고 어설프게 대처하다가 패두가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는데도 즉시 궁추하지 못하여 마침내 도적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게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이제 무신을 보내 포착할 방도를 강구하게 하고, 혹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아 잡거나 혹은 보고 들은 대로 추격하여 반드시 잡도록 하며, 만일 놓치고도 잡지 못하거나 겁이 나서 추격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논죄하겠다고 각별히 개유(開諭)하여 내려보내고 유수에게도 이러한 뜻으로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사의 직책은 평상시에는 본부를 다스리는 일이 그 임무이고, 무릇 군무에 관한 일 또한 그 소관이므로 이와 같은 도적의 변고가 있으면 군법을 따라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국대전》에 “경내(境內)의 도적을 포착하지 못하면 수령도 죄가 있다.”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186. 搜銀御史勿遣議〔原注:同年己未五月壬申朔癸酉。□領議政。經筵官尹春年。搜銀御史勿遣事啓之。□命議于大臣。〕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3D

원문

搜銀御史。每行發遣。欲痛革赴京者汎濫之弊。此亦未爲不可。但往來頻數。徒勞驛路。未聞禁奸。物論皆以爲無益而有害。故臣前侍經幄。乃陳見聞之萬一。赴京使,書狀。皆一時之選。而不委任責效。別設□祖宗所無之官。已爲未安。況法愈密而姦愈甚乎。後續錄纂集者。別立此條。識者少之。書狀拜辭時。若丁寧下敎。而使書狀能盡其職。豈下於別遣之人哉。〔原注:左相安玹,右相李浚慶議與某同。〕

번역

은을 수색하는 어사(御史)를 매번 행차할 때마다 파견하여 서울로 가는 자들의 범람하는 폐단을 통렬히 혁파하고자 하였으니, 이것도 불가하지는 않다. 다만 왕래가 빈번하여 역로만 헛되이 고생시키고 금간(禁奸)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물론은 모두 무익하고 해롭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신이 전에 경연에 참석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진달하기를, “서울로 가는 사신과 서장은 모두 한때의 선발인데도 그들에게 책임을 맡기지 않고 별도로 조종조(祖宗朝)에도 없던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이미 온당치 못합니다. 더구나 법이 더욱 엄격해질수록 간사함이 더욱 심해지는 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후속록(後續錄)에 이 조목을 별도로 편찬하여 기록한 자는 적습니다.” 하였다. 서장관이 하직 인사를 할 때에 정중히 하교하시어 서장이 그 직무를 다하게 한다면 어찌 별도로 파견하는 사람보다 못하겠는가.-원주(原註)에 “좌상 안현(安玹), 우상 이준경(李浚慶)의 의견이 모와 같다.” 하였다.-

187. 王家服制及停朝市禮議〔原注:同年己未六月辛丑朔壬戌。□領議政。□時有完山府夫人喪。議禮于三公。〕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4A

원문

考觀禮文。□王妣父母卒。至有□殿下至其第臨哀之禮。又曰。衰服三日則聞訃之日。卽停朝市。固協於義。且大典輟朝條。只擧宗姓之服輕重久近。而多寡其日數。外姓則不論。臣未知輟朝幾日方合於禮也。經云。禮雖先王未之有。可以義起。大典雖不明載。令禮官及弘文館。參酌情理。以定後日永行之制。勿復事過生悔至當。再□啓曰。□王妃母喪。停朝市。合於情禮矣。然聞訃卽日行之當矣。追行則事體未穩。

번역

예문(禮文)을 살펴보니, □ 왕비의 부모가 졸(卒)하면 □ 전하께서 그 집에 이르러 임애하는 예가 있고, 또 말하기를 ‘최복 3일은 부고를 들은 날이니 즉시 조시(朝市)를 정지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의리에 합당합니다. 또 《대전(大典)》의 뇌조조(輟朝條)에는 종성(宗姓)의 복(服)에 대한 경중과 구근(久近)만을 거론하였을 뿐, 그 날수를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것은 외성(外姓)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뇌조하는 것이 며칠이 예에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예가 비록 선왕에게 없었더라도 의리로써 일으킬 수 있다.’ 하였고, 《대전》에는 비록 분명하게 실려 있지 않으나 예관(禮官)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정리(情理)를 참작하여 후일 영구히 행할 제도를 정하게 하고 다시 일이 지나간 뒤에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재차 □가 아뢰기를, “□ 왕비의 모상(母喪)에 조시를 정지하는 것은 인정과 예법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부고를 들은 날 즉시 행해야 하는데 추후에 행하면 사체(事體)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원문

答曰。予亦知追行似難。故但喩予意而已。

번역

답하기를, “나도 뒤따라 가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 뜻을 일러 주었을 뿐이다.” 하였다.

188. 請優奬權纘,權紹孝友特行議〔原注:同年己未七月庚午朔乙酉。□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4B

원문

權纘,權紹。〔原注:咸昌人也〕年幼遭父喪。已能盡禮廬。及其顯揚。盡誠奉養其母。至於遭喪。孝誠益著。足以感天而友愛尤至。非徒一家化之。鄕黨敬信。爲朝著所知。至於□上聞。誠宜優奬以勵薄俗。

번역

권찬(權纘)과 권소(權紹)- 원주(原注)에 “함창(咸昌) 사람이다.” 하였다. -는 나이가 어렸을 때 부친의 상을 당하여 이미 예루(禮廬)를 다하였고, 그가 현달한 뒤에는 정성을 다해 모친을 봉양하였다. 그가 또 상을 당하자 효성과 정성이 더욱 드러나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였고 우애가 더욱 지극하여 한 집안만 교화된 것이 아니어서 향당(鄕黨)이 공경하고 믿어 조정에서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임금께까지 보고되었으니, 진실로 넉넉히 장려하여 박한 풍속을 면려해야 할 것이다.

189. 王妃父母喪輟朝與否議〔原注:同年己未八月庚子朔己卯。三公,六曹堂上會議廷中。□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4C

원문

大王妃父母喪輟朝與否。參考五禮儀及大典。則乃互相發明之義也。五禮儀爲□王妃父母擧哀儀下註云。與外祖父母擧哀之禮同。惟衰服三日而除云。旣進衰服三日則不可以衰服臨朝。旣不臨朝則此乃輟朝也。此則不易之定禮。故大典喪葬條。只擧宗親大臣應擧哀而無服者。□啓聞輟朝也。蓋□王妃父母之喪。乃應行常事。故大典輟朝之條。初不別擧。而議者不解其意。乃謂爲□王妃父母輟朝。大典所無云。以情禮言之。擧哀重而輟朝輕。豈可擧重禮而遺輕典乎。議者又以爲□王妃父之卒則依大典輟朝二日。何獨於外喪而擧大典所無之禮乎。此則乃一時禮官。不曾詳考禮文。而只據大典。因循行之之失也。非儀禮註與大典不同而然也。臣等之意。一遵□先王已定之禮。不須更議。

번역

대왕비(大王妃)의 부모 상에 조참을 중지하는가 여부에 대해 《국조오례의》와 《경국대전》을 참고해 보면, 이는 곧 서로 발명한 뜻입니다. 《국조오례의》 〈부왕비거애의(婦王妃擧哀儀)〉 하주에 “외조부모를 위해 거애하는 예와 같으나 오직 최복 3일이 지나면 벗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최복을 입은 지 3일이 지났으면 최복 차림으로 조정에 나아갈 수 없으니, 이미 조정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조참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치기 어려운 정례(定禮)입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 상장조(喪葬條)에는 종친과 대신 가운데 거애해야 하는데 복이 없는 자가 계문에 따라 조참을 중지한다는 것만 거론하고, 부왕비의 부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부왕비의 부모 상은 응당 행해야 할 일상적인 일이므로 《경국대전》에서 조참을 중지하는 조항에 애초에 별도로 거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왕비의 부모를 위해 조참을 중지한다는 것은 《경국대전》에 없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인정과 예로 말하자면, 거애는 중하고 조참은 가벼우니 어찌 중한 예를 행하면서 가벼운 전례(典禮)를 빠뜨릴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또 “부왕비의 부모 상에 《경국대전》을 따라 이틀 동안 조참을 중지하면 되는데, 어찌 유독 외조부모 상에 《경국대전》에도 없는 예를 거행하겠는가.”라고 합니다. 이는 예관(禮官)이 일찍이 예문(禮文)을 상세히 고찰하지 않고 단지 《경국대전》만을 근거로 하여 관례대로 행한 잘못입니다. 의례의 주석과 《경국대전》이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한결같이 선왕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예를 따르고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원문

上從公議

번역

주상이 공의(公議)를 따랐다.

190. 南衮,李荇,姜渾三人詩文不可印布議〔原注:同年己未十月戊戌朔庚申。□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4D

원문

南衮李荇姜渾三人詩文。實間世才華。泯滅可惜。然公論如此。此乃三人實錄也。若愛其文章。私印傳布則在所不禁。至於朝廷收拾遺稿。印布中外則似妨事體。

번역

남곤(南袞), 이행(李荇), 강혼(姜渾) 세 사람의 시문은 실로 세상에 드문 재화(才華)인데, 묻혀 버린 것이 애석하다. 그러나 공론이 이러하니, 이는 곧 세 사람의 실록이다. 만약 그 문장을 사랑하여 사사로이 인쇄하여 전파하는 것은 금할 바가 아니나, 조정에서 유고를 수습하여 중외에 간행하는 것은 일의 체모에 방해될 듯하다.

원문

傳曰。勿印。

번역

전(傳)에 이르기를, “인쇄하지 말라.” 하였다.

191. 西海賊勦捕策議〔原注:明宗十五年庚申十二月壬辰朔癸巳。□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5A

원문

西海之賊。非若倭野人。其衣服言語。與齊人無異。聚散無常。人不發告。則雖動千兵。下手無地。不得已使諳委情狀者。潛伺密告。然後守令以輕兵掩襲則其事可諧。若遣將臣。先聲纔到。賊輩鳥散。徒勞軍民。勦捕難必。臣之愚意如是。昨日會議時。自□上下敎懇惻。且事近敵愾。故乃從衆策。今見府啓。與臣之本意相似。專責方伯守令。得功者重賞。緩怠不效者重罰則日月不多。窮盜可掃。雖不遣將。殊非失策也。

번역

서해의 도적은 왜(倭)나 오랑캐와 같지 않아서 의복과 언어가 제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사람들이 고발하지 않으면 비록 천병을 동원하더라도 손쓸 곳이 없으니, 부득이 사정을 잘 아는 자를 시켜 몰래 엿보고 은밀히 보고한 뒤에 수령으로 하여금 경병(輕兵)으로 기습하게 하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약 장신(將臣)을 보내 먼저 소문이 퍼지기만 하면 도적들이 새처럼 흩어져서 군민만 고생시키고 포획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와 같습니다. 어제 회의할 때에 상께서 하교를 간곡하고도 측은하게 내리셨고, 또 적과 맞붙을 일에 가까웠기 때문에 마침내 중론을 따랐습니다. 이제 부(府)의 장계에서 본 신의 뜻과 비슷하여 오로지 방백과 수령에게 책임을 지우고 공을 세운 자는 무겁게 상을 주고 태만하여 성과를 내지 못한 자는 무겁게 벌을 주었으니, 날이 많지 않더라도 도적들을 소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장신을 보내지 않았지만 전혀 잘못된 계책은 아닙니다.

192. 遷陵服制議〔原注:明宗十七年壬戌二月乙卯朔辛巳。□領議政。右議政李浚慶。同議。〕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5B

원문

謹按歷代遷陵之制。皆用緦服。中國緦麻之制。用極細熟布。而有冠服之制。我國只有齊斬。朞功以下之服則只着布帶。俗禮已成。今難準用中國之制。況□英廟遷陵之時。已有前規。遷陵發靷時。代奠官及侍衛百官。白布帽熟麻帶。所經各官守令之服色亦同。在京百官則其時適以國喪卒哭之後。已服白衣,烏紗帽,黑角帶。故別無變服之禮。請依此規。自□上服色。應亦不過此制。應行節目。令該曹磨鍊。

번역

삼가 살펴보건대, 역대의 능을 옮길 때의 제도는 모두 시마복(緦麻服)을 사용하였습니다. 중국의 시마복 제도에는 아주 가는 숙포(熟布)를 사용하여 관복(冠服)의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다만 제참(齊斬)이 있을 뿐이고, 기년복 이하의 복색은 단지 포대(布帶)만 착용하는 것이 속례로 이미 이루어졌으니, 지금 중국의 제도를 준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영묘를 옮길 때에 이미 전규가 있었고, 능을 옮기기 위해 발인할 때 대전관 및 시위 백관은 백포모(白布帽)와 숙마대(熟麻帶)를 착용하였으며, 거쳐 가는 각 관청의 수령들도 복색이 같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백관은 그 당시 마침 국상으로 졸곡한 뒤라 이미 백의(白衣), 오사모(烏紗帽), 흑각대(黑角帶)를 입고 있었으므로 별도로 변복하는 예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규례에 따라 상복을 입어야 할 □부터 응당 이 제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행해야 할 절목은 해당 조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소서.

193. 文官補缺議〔原注:明宗十八年癸亥三月己卯朔己酉。□領府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文官六品。缺多難補則四館別薦。古例也。今觀□聖敎。欲令講製拔出。居首者別薦。是實勸奬之美意也。然講製論賞。其事不一。今則依舊例爲之何如。

번역

문관(文官) 6품의 결원이 많아 보충하기 어려우면 사관(四館)에서 별천(別薦)하는 것이 옛 규례입니다. 지금 □ 성교(聖敎)를 보니 강제(講製)로 뽑아서 수석을 차지한 자를 별천하게 하려고 하시니, 이는 실로 권장하는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강제의 논상(論賞)은 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지금 옛 규례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傳于吏曹曰。四館別薦。依舊例爲之。

번역

이조에 전교하기를, “사관의 별천은 구례대로 하라.” 하였다.

194. 儒生試場作羅事議〔原注:同年癸亥八月丁未朔庚午。□領府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5C

원문

淸洪左道儒生作羅之事。駭愕莫甚。儒生讀古書。識禮義。將爲國家有用之才。而不有國法。成群作亂。叱辱試官。擅罷場屋。有同胡虜之行。士習至此。極爲寒心。不可不痛治。嚴示國威。速遣京官。爲首儒生等。一一推治爲當。〔原注:時淸洪道監司朴忠元。以儒生作羅事。狀啓以□聞。〕

번역

청홍(淸洪)의 좌도 유생이 나사(羅絲)를 만든 일은 매우 놀랍기 그지없다. 유생들은 옛글을 읽고 예의를 알아 장차 국가에 쓸모 있는 인재가 될 것인데, 국법이 없어서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키고 시관(試官)을 꾸짖고 모욕하며 멋대로 과장(科場)을 폐쇄하였으니 오랑캐와 다름없다. 선비의 습속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매우 한심하여 통렬히 다스려 국위(國威)를 엄히 보여 주지 않을 수 없다. 속히 서울 관원을 보내어 우두머리 유생들을 하나하나 추문하여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다.-원주(原注)에 “당시 청홍 도감사(淸洪道監司) 박충원(朴忠元)이 유생들이 나사를 만든 일로 장계하여 보고하였다.” 하였다.-

원문

傳曰。依議施行。

번역

전교하기를,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95. 救解朴素立等。幷請尹漑,洪暹還敍議。〔原注:同年癸亥九月丙子朔己丑。夕講。□領府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5D

원문

尹漑,洪暹事。三公所啓至當。□聖意亦欲依舊收敍。小臣所望。不止於此。兩人之事。其時□傳敎之意。臣等非不知之。然廷臣言語之失。文字之誤。〔原注:尹漑。左議政時。辭涉煩碎。忤□上遞罷。洪暹。試官時。出策題有未穩。見罷。〕自□上當優容。使人人皆得展布所懷。以廣進言之路可也。不須深譴。況漑等近年以來。爲李樑所擠。常懷悶鬱。未得擧頭朝端。物論皆以爲未安。故今日啓解朴素立等〔原注:奇大升,尹斗壽,李文馨,尹根壽。幷爲樑黨李戢之構陷重典。一幷罷黜。〕而幷啓兩人之事。洪暹。今日之政。已長金烏矣。尹漑。幷還□領經筵。許參朝議爲當。

번역

윤개(尹漑)와 홍섬(洪暹)의 일에 대해서는 삼공이 아뢴 것이 마땅합니다. □ 성상의 뜻도 예전대로 거두어 서용하고자 하시지만, 소신은 이보다 더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일에 대해 그 당시 □ 전교하신 뜻을 신들이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의 말실수와 글자의 잘못이 있었으니 -원주(原注)에 “윤개는 좌의정 때 말이 번다하고 자질구레하여 성상의 비위를 거슬러 체차되어 파직되었다. 홍섬은 시관(試官) 때 출책(出策)한 제목에 온당하지 못한 것이 있어 파직을 당하였다.” 하였다.-□ 위에서 너그럽게 용서하셔서 사람마다 모두 소회를 펼쳐 진언하는 길을 넓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깊이 견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윤개 등은 근년 이래로 이량(李樑)에게 배척당하여 항상 답답한 마음으로 머리를 들고 조정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므로, 여론이 모두 온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계해 박소립(朴素立)-원주(原注)에 “기대승(奇大升), 윤두수(尹斗壽), 이문형(李文馨), 윤근수(尹根壽)가 모두 양당(樑黨)과 이침(李戢)의 모함으로 무거운 법을 적용받아 모두 파직되었다.” 하였다.-등을 해임하고 아울러 두 사람의 일을 아뢰었습니다. 홍섬은 오늘 정사에서 이미 금오(金烏)를 길렀으니, 윤개는 아울러 경연관에 도로 임명하여 조정의 의논에 참여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원문

傳于政院曰。觀此議皆當。依議捧承傳。今政差下。

번역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 의논을 보니 모두 합당하다. 의논대로 봉승(奉承)하라.” 하였다. 이번 정사에서 차하하였다.

196. 世子葬禮發靷由□御間出不可議〔原注:同年癸亥十月丙午朔己巳。□領府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6A

원문

伏見諫院所□啓。〔原注:諫院啓世子之葬禮發靷。由鍾樓御間出不可意。〕辭嚴義正。自□上不可不從。敦義門外。雖不撤人家。猶可周旋發靷。則當依懿敬□世子之例。由其門而出。乃合於禮而安於義耳。〔原注:尹漑,尹元衡,李浚慶議與尙某同。〕

번역

삼가 간원(諫院)의 계본을 보니, ‘세자의 장례를 치르는데 종루(鍾樓) 어간(御間)을 거쳐 나가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원주: 간원이 세자의 장례를 치르는 데 종루 어간을 거쳐 나가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아뢰었다.〕 말이 엄정하고 의리가 바르니, 위에서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의문(敦義門) 밖은 비록 인가를 철거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주선하여 발인할 수 있으니, 마땅히 의경대부(懿敬大夫) 김세자(金世子)의 예에 따라 그 문을 거쳐 나가는 것이 예법에도 합당하고 의리에도 편안합니다.〔원주: 윤개(尹漑), 윤원형(尹元衡), 이준경(李浚慶)의 의견이 상모와 같다.〕

197. 對馬島賀禮使許對爲當議〔原注:明宗六年辛亥十一月乙亥朔癸酉。□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壬申年約條所謂勿遣勿航云者。必指歲遣外任意私遣者也。對馬島主歲蒙國恩。聞我國大慶。拘約廢禮。有所未安。故遣使來賀。〔原注:時對馬島主遣使來賀誕生元子。〕違約可責。而誠款亦可許也。特令許對何如。

번역

임신년의 약조에 이른바 ‘보내지 말라.’라고 한 것은 반드시 세차례 보내는 것 외에 임의로 사사로이 보내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대마도주가 나라의 은혜를 입고 우리나라의 큰 경사를 듣고서 구약(拘約)과 폐례(廢禮) 때문에 미안한 바가 있어서 사신을 보내어 하례하게 한 것이니 -원주(原注)에 “이때 대마도주가 사신을 보내어 탄생한 원자에게 하례하였다.”라고 하였다.-약조를 어긴 것은 책망할 만하지만 정성스러운 마음 또한 허락해 줄 만합니다. 특별히 대면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98. 武衛殿,畠山殿兩日本使接待議〔原注:明宗七年壬子正月甲戌朔乙酉。□左議政。領相沈連源。同議。〕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7B

원문

武衛殿。八十年來絶不來朝。今始通使。似有詐僞。畠山殿亦久不來朝。在庚戌年始復出來。今又隔年復來。雖曰頻數。然□祖宗朝世修通聘。今賚符驗文而引來。所當接待。似難拒却。如商物許貿之事。臨時酌量處置何如。

번역

무위전(武衛殿)이 80년 동안 전혀 조공을 오지 않다가 이제야 비로소 통사(通使)를 보냈으니, 속임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학산전(畠山殿)도 오래도록 조공을 오지 않다가 경술년에 비로소 다시 나와서 올해 또 해를 걸러서 다시 왔으니 자주 온다고는 하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세습하여 통신하고 있는데 지금 부절과 문서를 가지고 와서 인도해 가니, 마땅히 접대해야 하며 거절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상물(商物)을 사게 해 주는 일은 그때 가서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傳曰。畠山,武衛。依議待之。

번역

《전(傳)》에 이르기를, “확산과 무위는 의논을 기다린다.” 하였다.

199. 日本使接待議〔原注:同年壬子十一月己卯朔甲辰。□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7C

원문

丁未年約條。去絶日本九州諸倭受圖書通使者。前日議時。臣意以爲處置年久事。不可更改。當以權辭修答矣。今因禮曹所啓。考究海東記則九州是近於馬島。與我國不遠。其所以懷接待。必有深意。今未有顯然之罪。而槩以四十年之久而幷絶之。慮有缺望懷怨。以致後日之悔也。壬申所絶煕久〔原注:日人名〕及其餘。還許接待。以存羈縻之意何如。

번역

정미년의 약조에 따라 일본 구주(九州) 등 여러 왜인 중 도서를 받아 가는 통사(通使)를 끊기로 하였는데, 지난번 의논할 때 신은 처치한 지 오래된 일이라 고칠 수 없으니 마땅히 임시로 답장을 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조의 계사를 인하여 《해동일기(海東日記)》를 상고해 보니 구주는 마도(馬島)에 가까워 우리나라와 멀지 않아서 그들이 접대를 바라는 데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에는 분명한 죄가 없는데 대략 40년이나 된 일로 모두 끊어 버린다면, 기대에 어긋나 원망을 품게 하여 후일의 후회를 초래할까 염려됩니다. 임신년에 끊었던 희구(煕久)-원주(原注)에는 일본인의 이름이라고 하였다.-와 그 나머지는 다시 접대를 허락하여 예우하는 뜻을 보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答曰。日人接待事。依大臣議。

번역

답하기를, “일본 사람을 접대하는 일은 대신의 의견대로 하라.” 하였다.

200. 倭船尺量及船夫點數事議〔原注:明宗八年癸丑正月戊寅朔己卯。□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7D

원문

倭船尺量。又點船夫。雖載於海東諸國記。而其後欲防三浦倭代點奸僞。只量船體分三等。定船夫之額。不復點數而計給料。行來已久。甚得事體。今亦依該曹所啓。□特從其請。因作後式。允合待夷之道。

번역

왜선(倭船)의 척량(尺量)과 또 선부(船夫)를 점수(點數)하는 것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삼포 왜인(三浦倭人)이 대신 점수를 매기는 일을 농간질하고 거짓으로 하는 것을 막고자, 다만 선체의 크기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선부의 액수(額數)를 정하였고 다시는 점수를 매겨 요미(料米)를 계산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래전에 행한 것이 사체에 매우 합당합니다. 지금도 해당 조(曹)에서 아뢴 대로 그 청을 특별히 따르고 이를 인하여 후식(後式)으로 삼는다면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에 진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원문

傳曰。依議爲之。

번역

전교하기를, “의논한 대로 하라.” 하였다.

201. 漂流唐倭人。具由奏□聞爲當議。〔原注:同年癸丑二月戊申朔辛丑。□左議政。領相沈連源。同議。〕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8A

원문

生擒倭人三甫羅古羅等招辭。雖曰與唐人同舟。買賣於南京。中路漂風而來。其言固所難信。而以近年赴京書狀官聞見事件與對馬島主書契。比而觀之。則薩摩州等處倭人與唐人來居其地者。同謀作賊於寧波府者。雖不直輸其情。亦莫敢逃其情。姑諉之於他人也。且年前旌義來舶倭船船敗所載銃筒上。有刻記嘉靖戊申軍門鑄發前所等字樣。分明是作賊摽掠所得。則近日漂到我境諸船。安知非作賊奔敗者未暇占候風汛。而致漂散。而唐人之潛居彼土。與倭同謀同利者。亦是中國之叛賊。王法所必誅。以此見之。前後入擒之倭。幷其軍器。具由奏達□朝廷。於事大之道甚當。〔原注:時黃海道倭船入賊。左議政尙某。爲委官推鞫。〕

번역

생포한 왜인 삼보라(三甫羅)와 고라(古羅) 등의 공초에, “당인과 같은 배를 타고 상경하는 길에 남경(南京)에서 장사를 하다가 중도에 풍랑을 만나 왔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진실로 믿기 어렵다. 근년에 상경한 서장관의 문건과 청나라 대마도주(對馬島主)와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비교해 보면, 살마주(薩摩州) 등지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당인들과 함께 모의하여 영파부(寧波府)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비록 그 실정을 곧바로 자백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감히 그 사실을 피할 수 없으므로 우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것이다. 게다가 연전에 정의현(旌義縣)에 들어온 왜선이 침몰한 곳에서 발견된 총통(銃筒) 위에 ‘가정 무신 군문주발전(嘉靖戊申軍門鑄發前)’이라고 각기(刻記)되어 있었으니, 이는 분명 반란을 일으키고 약탈할 때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근일에 우리나라에 표류해 온 여러 척의 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주하여 미처 풍진(風塵)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표류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그리고 중국에서 저곳에 몰래 거주하면서 왜인들과 함께 모의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도 중국의 반역자로 왕법으로 반드시 처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그동안 포로로 잡은 왜인들을 그들의 군기(軍器)와 함께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아뢰는 것이 사대(事大)의 도리로 보아 매우 합당하다. 원주 : 이때 황해도에 왜선이 침입하였는데 좌의정 상모가 위관(委官)이 되어 추국하였다.

원문

傳于政院曰。今見倭人三甫羅古羅招辭則大槩承服矣。以我國事大之義。明知其作耗於上國。而不爲奏聞乎。依領左相議。具由奏聞可也。

번역

정원에 전교하기를, “지금 왜인(倭人) 삼보라(三甫羅)와 고로라(古羅羅)의 초사(招辭)를 보니 대개 우리에게 항복을 하였는데, 우리나라가 상국(上國)을 섬기는 의리로 볼 때 그들이 상국에 손해를 끼칠 줄 분명히 알면서도 주문(奏聞)하지 않았는가. 영의정 좌상의 의견대로 사유를 갖추어 주문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202. 對馬島別使。勿許接待議。〔原注:同年癸丑七月乙巳朔辛巳。□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8B

원문

前者□特賜米豆三十石。乃出於一時之恩數。如欲致謝於例遣船。猶可爲之。而島主欲添新賜。至於別遣船陳賀。以試我國待之之如何。其漸不可不杜。依該曹公事。不許接待何如。

번역

이전에 특사(特使)를 보내어 쌀과 콩 30섬을 특별히 하사한 것은 한때의 은혜로 베푼 것이니, 만약 예차선(例差船)을 보내서 사례하고자 한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도주가 새로 하사받은 것을 더하여 별차선을 보내어 진하(陳賀)함으로써 우리나라가 대우하는 것이 어떠한지 시험하려고 하니, 그 조짐을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해조의 공사대로 접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03. 唐倭人漂到事。奏聞□明朝爲當議。〔原注:明宗九年甲寅七月乙亥朔。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8C

원문

唐倭人處置事。臣等反覆籌之。不得其宜。乃敢以奏達□明朝爲正。而今聞朝議。多以奏達爲未便。臣豈敢固執。憲府所啓事大交隣兩得其道之言。似宜當。只招辭唐人與倭人同船貨買。遭風敗船。僅得船板。漂到我境之意。依走回人例。交割遼東。又將此意移咨禮部。倂及倭人放還之意。倭人則依初議。具舟楫口糧。自全羅道發還本國。修書契俱錄倭人等名字。送于對馬島。使之轉報日本何如。

번역

당나라와 왜인(倭人)을 처치하는 일에 대해 신들이 반복해서 헤아려 보았으나 마땅한 방도를 찾지 못하여 감히 주달(奏達)하여 명조(明朝)에 아뢰는 것을 정론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조정의 의논이 대부분 주달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하니, 신이 어찌 감히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사헌부에서 아뢴 ‘중국과 이웃 나라와 모두 그 방도를 얻는다.’라는 말은 마땅한 것 같습니다. 다만 당나라 사람과 왜인을 한 배에 태우고 선물을 사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어 겨우 선판(船板)만 가지고 우리 국경으로 표류해 온 뜻을, 도망친 자를 돌려보낸 전례대로 요동(遼東)에 넘겨 주고 또 이 뜻을 예부(禮部)에 자문하여 왜인을 돌려보내는 뜻까지 아울러 언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왜인은 처음 의논한 대로 배와 양식을 갖추어 전라도에서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서계(書契)를 작성하여 왜인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고 대마도(對馬島)에 보내 일본에 통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傳于政院曰。大臣之議當矣。然於唐人招辭。因倭人作賊于中原。被虜而來云。如議以唐人爲交通倭人買賣。而漂到于我境。故入送云爾。唐人於中原推問之時。招供又如此。則與奏□聞之辭異矣。其遣史官更議于大臣。

번역

정원에 전하기를, “대신들의 의논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인(唐人)의 공초에 ‘왜인이 중원(中原)에서 반란을 일으켜 노예가 되어 왔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당인이 왜인과 교통하여 매매하다가 우리 경내로 표류해 들어왔기 때문에 들여보냈다.’라고 의논한다면 당인이 중원에서 추문(推問)받을 때 공초를 또 이와 같이 할 것이니, 아뢰어 보고한 말과는 다릅니다. 사관을 보내 다시 대신과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204. 唐倭人漂到事。奏聞□明朝爲當議。□回議〔原注:同上日〕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8D, ITKC_MO_0130A_A026_079A

원문

今此唐倭之人。不爲奏達。而各還其國。實從權道也。倭人若以處決聞於□皇朝。而護送其國則雖曰權道。於義大有未安。漳州之人。語音大異。雖北京之人。無能解聽者。況我國譯士。只學京話。不知南語。前日漂來者。僅以文字通之。今來三人。若不解文則雖推問。難明其意。移咨禮部。從實以未解其語爲辭。則□皇朝亦不以爲怪矣。旣不解其語。復誰有問。執此爲辭。猶之可也。若以處決移咨。而□皇朝萬一知我護送之意而問之則不知何以爲辭。臣等之意。依前所□啓似當。且唐倭人率來推問後。如有別意。則更議處之何如。

번역

이번에 당나라와 왜(倭)의 사람들이 주달하지 않고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실로 임시방편을 따르는 것입니다. 왜인이 만약 처결한다는 소식을 □황조(□皇朝)에 보고하고 그들을 호송하여 자기 나라로 보내 준다면 비록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의리에 크게 온당치 못합니다. 장주 사람들은 어음이 매우 달라서 북경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가 없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나라 역관은 단지 북경의 말을 배워서 남쪽 지방의 말을 알지 못하니, 전에 표류해 온 자는 겨우 문자(文字)로 통역하였고 지금 온 세 사람은 만약 문자를 모르면 추문하더라도 그 뜻을 밝히기 어렵습니다. 예부(禮部)에 자문을 보내 사실대로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황조에서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니 다시 누가 물어보겠습니까. 이것으로 말을 한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입니다. 만약 처결한다는 내용으로 자문을 보냈다가 □황조에서 만일 우리가 호송해 준다는 뜻을 알고서 묻는다면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전에 □계(啓)한 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당나라와 왜의 사람들이 데리고 온 자를 추문한 뒤에 별다른 뜻이 있으면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문

傳曰。依議施行。

번역

전교하기를,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05. 唐人尋捕處決議〔原注:同年甲寅十二月丁卯朔乙未。□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9B

원문

義州與上國地面。只隔一江。彼此交易。勢所難禁。故爲禁斷節目。極爲嚴密。而謀利邊氓。猶不知畏。乃復誘引唐人。可謂頑悍。唐人所謂面生二人。定在城中。尋捕質示。置法不赦。但官吏等依事。自坐以大罪。則開他日匿不以聞之路。今旣報之。不可全科治之。捕告者。亦宜賞物以勸後來。唐人取供解送。聽遼東都事處決爲當。

번역

의주(義州)는 상국(上國)과 지면이 한 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라 피차 간에 교역하는 것은 형세상 금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금단절목(禁斷節目)을 극히 엄밀하게 만들었는데도 이익을 도모하려는 변방의 백성들은 오히려 두려워할 줄 모르고서 다시 당인을 유인하였으니, 완악하다고 할 만합니다. 당인이 말한 ‘면생(面生)’이란 두 사람은 반드시 성 안에 있을 것이니, 즉시 잡아다가 질문하여 죄를 보여주고 법에 따라 처벌하되, 관리는 일의 전말을 자백하는 것으로 대죄(大罪)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날 숨기고 보고하지 않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미 보고하였으니 모두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포고한 자에게도 상을 주어 후인들을 권장해야 합니다. 당인은 공초를 받아 해송(解送)하고, 요동 도사(遼東都事)가 처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원문

史官曰。尙某爲相。論議務在寬弘。深得大臣之體。

번역

사관(史官)이 아뢰기를, “상모(尙某)가 정승이 되었을 때 논의를 반드시 너그럽게 하였으니 대신(大臣)의 체통을 깊이 얻었습니다.” 하였다.

206. 軍糧措置及防邊策議〔原注:明宗十年乙卯正月丁酉朔戊申。□左議政。□領右相同議。〕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9C

원문

全羅道甲寅年奴婢身貢作米事。初爲救荒設也。其受□敎行移已久。雖未盡納。想必收納已多。其已納之數。與各官倉儲米斗。厥數甚多。若以全羅田稅。準其數納于海南。送于濟州則京中經費必不足。恐難施行。寇萃于濟州。兵力不能獨當。則加里浦僉使當先赴援。此亦勢難獨救則亦當有繼援。沿海守令及兵水使虞候。有弓力勇敢者。擇差預定繼援。將直待通報。領兵入援事。令備邊司節目磨鍊。知會爲當。傳曰。所啓軍糧事。依議得爲之。

번역

전라도가 갑인년에 노비의 신공을 쌀로 바꾸어 바치기로 한 일은 애초에 흉년을 구제하기 위해 시행한 것입니다. 그 수령이 교지를 받고 행미(行移)를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비록 다 납부하지는 못했더라도 수납한 것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미 납부한 수량과 각 관창(官倉)에 저장된 쌀의 양이 매우 많습니다. 만약 전라도의 전세(田稅)로 그 수량만큼 해남(海南)에 바치고 제주(濟州)로 보내게 한다면 서울의 경비가 반드시 부족할 것이니 시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구수(寇萃)가 제주에 모여들 경우 병력만으로는 혼자 감당할 수 없으니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가 먼저 가서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형세상 혼자서 구원하기 어려우니 뒤따라 구원할 인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연해의 수령 및 병사ㆍ수사ㆍ우후 가운데 활을 잘 다루고 용맹한 자를 가려 차출하여 미리 정해 두었다가 통보가 오면 곧장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가 구원하도록 비변사로 하여금 절목을 마련하고 통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전교하기를, “아뢴 군량에 관한 일은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07. 大明會典奏請事議〔原注:同年乙卯三月丙申朔壬寅。□上遣史官。以大明會典奏請事。收議于左相。〕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79D

원문

宗系事。本國明實具奏非一再。始自□太宗文皇帝已下準他改正之□命。而時無會典改撰事。故至于百年。未見施行。至□正德及□當代。復申前請。俱蒙勅諭。迄今十七年。未聞印頒。今奏請則似涉欲速。不爾則經覽無期。一國悶鬱。徒使每行使臣。聞見禮部所答。不過一辭。在我之道。宜自敬順。直待□命下之日。□聖上卽祚十年。始見一奏。恐亦已遲。□皇上待本國恩禮隆至。一封之奏。或可格天。使文章之士。指意措辭。務合事體。以致感動。則譴責所不慮。而仁恩或可冀望。

번역

종계(宗系)의 일은 본국에서 명확한 사실을 갖추어 아뢴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처음 □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이하부터 다른 나라를 준용하여 고치라는 명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회전(會典)을 개찬할 일이 없었으므로 100년이 지나도록 시행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 정덕(正德)과 □ 당대(當代)에 이르러 다시 이전의 청을 거듭하여 모두 칙유를 받았으나, 지금까지 17년 동안 인쇄하여 반포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아뢰어 청하는 것은 속히 하려고 하는 데에 관계될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두루 볼 기약이 없어 온 나라가 답답할 것입니다. 다만 사신이 갈 때마다 예부(禮部)에서 답한 것이 한마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듣게 되니, 우리나라의 도리로 볼 때 마땅히 스스로 공경하고 순종하여 곧 명을 내리는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10년이 되어 비로소 한 번 아뢰었으니, 또한 이미 늦은 듯합니다. □ 황제께서는 본국에 대한 은혜와 예우가 융숭한 것을 기다리시니, 한번 봉하여 아뢴 것이 혹 하늘을 감동시켜 문장하는 선비들이 뜻을 지어 말을 만들기를 사체에 합치하도록 힘써 감동시키게 한다면 견책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인자하고 은혜로운 대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원문

傳曰。昨日大臣等以爲勢難。而今左相以爲奏請無妨。試一陳。幸□皇帝有覺悟之理也。差出使臣與聖節使。一時入送。

번역

전교하기를, “어제 대신(大臣)들은 형세가 어렵다고 하였는데, 지금 좌상은 아뢰는 것이 무방하다고 하니 한번 진달해 보라. 바라건대 황제가 깨닫는 이치가 있기를.” 하였다. 사신과 성절사(聖節使)를 차출하여 동시에 보내게 하였다.

208. 摛獲唐人處置議〔原注:明宗十一年丙辰九月癸巳朔丁未。□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0A

원문

今此許秀委是唐人。其所供招。雖不得其情。然在此處置實難。略具邊將摛獲之由。幷錄供辭。解送遼東交割。使之轉達□朝廷。允合事宜。

번역

지금 이 허수는 바로 당나라 사람인데, 그가 공초한 내용에서 비록 실정을 알 수는 없으나 이곳에 두어 처리하기는 실로 어렵다. 대략 변장(邊將)이 포획한 사유를 갖추고 아울러 공사(供辭)를 기록하여 요동으로 해송(解送)하여 교할(交割)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중국 조정에 전해 알게 하는 것이 진실로 사리에 합당하다.

원문

傳于政院曰。今觀群議。大槩皆同。文書速爲磨鍊。付冬至使之行。交割遼東。

번역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지금 여러 사람의 의견을 살펴보니 대개 모두 같으니 문서를 속히 마련하여 동지사(冬至使)가 가는 편에 요동(遼東)에 넘겨 주도록 하라.” 하였다.

209. 日本國解送被擄兒童措處議〔原注:同年丙辰四月己丑朔丁未。□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0B

원문

安國〔原注:日本國人名〕解送我國兒童甚詐。年前被擄者不知其幾。而安國苟誠心解送我國之人以要賞。則壯男壯女。豈無其人。惡其備諳其地虛實。而必送七八歲孩童。其計不過以此試我淺深而已。今若因其詐而以示喜悅之意。則乃陷於奸術。而啓後日無窮之弊。雖拒而不受可也。第以爲民父母之心。拒而不納。所不忍焉。令邊將受之。而一享於浦所。略示酬勞之意。賞物亦從略□賜送。以折詐謀。

번역

안국(安國)- 원주(原注)에 “일본 사람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이 우리 나라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 매우 사특하다. 연전에 납치된 자가 몇 명인지 모르겠는데, 안국이 진실로 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나라 사람을 보내려 했다면 장정이나 미녀가 어찌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 나라의 지리적 상황에 익숙한 것을 싫어하여 반드시 7~8세 아이들을 보낸다. 그 계책은 이 방법으로 우리의 깊이를 시험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만약 그들의 사특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뜻을 보인다면 곧 간사한 술수에 빠져서 후일의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이다. 비록 거절하고 받지 않는 것이 옳으나, 백성의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니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받아들여 포소(浦所)에서 한 번 대접하여 조금이나마 수고에 보답하는 뜻을 보이게 하고 상물도 대략 적은 것으로 주어 사특한 계책을 꺾어야 한다.

원문

傳曰。雖陷於術中。解送我國童子。以爲不關而不受。爲民父母之意所不忍也。受之而從略賞賜。予之意也。依左相議施行。

번역

전교하기를, “비록 술수에 빠졌더라도 우리 나라의 동자를 풀어 보내는 것은 관계가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백성의 부모 된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받아들여 대략 상사(賞賜)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좌상의 의론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10. 赴京通事等罪案回議〔原注:同年丙辰十一月丙辰朔戊辰。□上傳曰。去冬赴京通事等。以禁物賚持濫貿物貨之罪。方下禁府推鞫。而其治之輕重。遣史官於三公處收議。□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0C

원문

罪惡極重者。殺人與盜。而若不得行兇之器。偸竊之跡。則未敢輕易論死。獄事固不可率易以斷也。今者冬至使,通事之類。其挾禁物。斷無可疑。只不現捉於該禁官及華人則是猶爲盜而無贓者也。止據所聞。窮訊不恕。非所愼重庶獄。□聖問及此。仁亦至也。然過輕猶過重。未若得中之爲貴。一行之中。亦必有輕重。其中尤甚泛濫者。治以次律。似合於事情。

번역

죄악이 지극히 중한 것은 살인과 도둑질인데, 만약 흉기를 사용한 자취와 도둑질한 흔적을 얻지 못하면 감히 쉽게 사형을 논할 수 없으니, 옥사(獄事)는 진실로 경솔하게 결단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 동지사(冬至使)의 통역꾼 무리가 금물(禁物)을 소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다만 해당 금관(禁官)과 화인(華人)에게 현장에서 잡히지 않은 것이라면 이는 도둑질은 하였으나 장물이 없는 자이다. 단지 들은 바를 근거로 곤궁하게 신문하여 용서하지 않는 것은 삼가고 신중해야 할 일반적인 옥사에서 하는 일이 아니다. 성상께서 이에 대해 물으시니 어질기까지 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볍거나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 중도(中道)를 얻는 것보다 귀하지 않다. 한 가지 일 가운데에도 반드시 경중이 있으니, 그중에서 더욱 심하고 범람한 자는 차율(次律)로 다스리는 것이 사정에 합당할 듯하다.

211. 日本使優待議〔原注:明宗十二年丁巳正月乙卯朔己巳。□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0D

원문

客使〔原注:日本使天富東堂〕之言。多有不實之語。又多悖慢之辭。雖不足一一與較。而亦不可不以溫言據理而答之。使自知反也。但每以薄待安心〔原注:安心。前來日本使也。〕爲言者。其意望有在。而今所得反少於安心所賚之數。所以不滿於心。托於他辭而強聒不已也。國計雖曰不裕。而隣邦交聘之用。不爲無名之費。臣等之意。商物價欲滿五百同之數。使不缺望而去。以固羈縻之意何如。答曰。議意宜矣。

번역

객사(客使) - 원주(原注)에 “일본의 사신 천부동당(天富東堂)이다.”라고 하였다. - 의 말에는 사실이 아닌 말이 많고 또 외람된 말이 많다. 비록 하나하나 따질 필요는 없지만, 또한 온화한 말로 이치에 근거하여 대답해서 스스로 잘못을 알게 해야 한다. 다만 매번 ‘안심(安心)’ - 원주에 “안심은 전에 일본으로 간 사신이다.”라고 하였다. - 으로 대접이 박하다는 말로 하는 것은 그 뜻이 바라는 바가 있어서인데, 지금 얻은 것이 도리어 안심에게 받은 수량보다 적기 때문에 마음이 불만족스러워서 다른 말을 핑계 삼아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나라의 재정이 비록 여유롭지 못하다고는 하나 이웃 나라와 교빙(交聘)하는 데 드는 비용은 명분 없는 지출이 아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물건값을 헤아려 500동(同) 수량을 채워서 부족하지 않게 보내어 사신을 붙잡아 두는 뜻을 굳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답하기를, “의논한 뜻이 마땅하다.” 하였다.

212. 對馬島通信事議〔原注:同年丁巳正月乙卯朔甲戌。□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1A

원문

若遣對馬島通信。則日本亦將有不得已遣使之勢。事似重難。然近年以來。欲還給歲遣船五隻。而無以爲辭。今如獻議。遣人審驗守海形止。然後給之。深得事宜。且遣使日期。自當不出三月間。〔原注:同月甲申。同知□經筵事洪暹□啓曰。三公,領府事處。小臣親往議之。三公之意略同。而尙震曰。震之慮恐有意外之變也。□祖宗朝盡給五十隻者。非有勳勞也。羈縻不絶爾。挾憾之人。在近作耗則吾民不得安。故欲遣官見其事。然後給歲船也。〕

번역

만약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을 보내 통신하게 한다면 일본에서도 장차 부득이하게 사신을 보낼 형세가 될 것이니, 일의 중대함과 어려움이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세견선 5척을 돌려주려고 하였으나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의논한 대로 사람을 보내 수해(守海)의 상황을 살펴본 뒤에 돌려주는 것이 사리에 깊이 부합됩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는 시기도 마땅히 3월 안에는 이루어질 것입니다.-원주(原注)-같은 달 갑신일에 동지경연사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삼공과 영부사에게 친히 가서 의논하였더니 삼공의 뜻은 대략 같았으나 김상진(金尙震)은 ‘뜻밖의 변고가 있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종조에 50척을 모두 돌려준 것은 공훈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유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 근래에 발생한 폐해로 인해 우리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원을 보내 그 일을 살펴본 뒤에 세견선을 돌려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213. 冊封後別試及使行議〔原注:同年丁巳正月乙卯朔己卯。□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冊封後別試事。禮曹考□先王朝日記則不得憑據。故臣等以爲無前例。不須爲之。然庚申年。申鏛〔原注:中廟朝禮曹判書〕等啓曰。冊封別試例也云。此必有所聞而言也。依□上敎。式年退行爲當。□聖節使兼行四事。果爲未便。□誥命奏請。退定於冬至使。□上敎尤當。

번역

책봉한 뒤 별시를 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예조가 선왕조의 《일기》를 상고해 보았으나 근거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들은 전례가 없으니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신년에 신철(申鏛)-원주(原注)에는 중묘조 예조 판서라고 되어 있다.-등이 아뢰기를 “책봉한 뒤 별시를 행하는 것은 전례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들은 바가 있어서 말한 것이다. 상교대로 식년과 퇴행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절사(聖節使)가 네 가지 일을 겸하여 행하는 것은 과연 온당치 못하니, 고명주청(誥命奏請)을 동지사에 물려 정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상교이다.-

원문

傳曰。知道。

번역

《예기》 〈전(傳)〉에 이르기를, “도(道)를 안다.” 하였다.

214. 對馬島遣使有難議〔原注:同年丁巳二月乙酉朔壬寅□左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1C

원문

對馬島遣使。自□祖宗朝有之。但在今日則未宜。彼自得罪以來。陽輸忠款。陰積怨憤有日。今之遣使也猝出於久廢之餘。彼將一信一疑。其心必二。倘或禮接之際。有一毫不敬。便爲辱□命。況復讐一心。彼此無異。年前敗倭。雖自送死諸島之中。豈無切齒者乎。變生呼吸。誰其及救。料事者咸曰。島主仰國如父母。迎護周備。知無意外之患。其言似是。然以帝王之勢威。不可使刺客混於凡人之列。不幸此去有難赦之犯。問罪之師。不得不擧。通信日本。亦將自此始則此行所係。豈曰輕乎。臣愚妄謂姑還給歲船若干隻。一以酬馬島斬獻之勞。一以從國王勤懇之意。其在待夷無甚不可。如此則日本之望可不孤。馬島之怨可小解。使彼類憾恨十消五六。兩無猜疑。然後更議遣使。猶爲未晩。

번역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을 보내는 일은, 예로부터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스스로 죄를 지은 이래로 겉으로는 충성을 바치는 듯하나 속으로는 원한과 분노가 날로 쌓이고 있습니다. 지금 사신을 보내는 일이 갑자기 오랫동안 중단했던 뒤에 나온 것이니, 저들은 한 번 믿었다가도 한 번 의심하여 그 마음이 반드시 두 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예접(禮接)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불경한 일이 있으면 곧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할 것입니다. 더구나 복수를 하려는 일념은 피차 간에 다를 것이 없으니, 연전에 패배한 왜인들이 비록 여러 섬으로 죽음을 자초하여 보내졌으나 어찌 이빨을 갈고 있는 자가 없겠습니까. 변란이 언제 생길지 모르니 누가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일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모두 ‘대마도주의 우러르는 마음은 나라를 부모처럼 여기는 것이니, 맞이하고 보호하는 일이 두루 갖추어지고 있으면 뜻밖의 근심거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옳을 듯합니다. 그러나 제왕의 위세로 볼 때 암살자가 일반 백성의 반열에 섞여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불행하게도 이번에 가는 길에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으니, 문죄(問罪)하는 군사를 거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신(通信)을 일본과 다시 시작하는 것도 이로부터 시작할 것이니, 이번 사행이 관계된 바가 어찌 가볍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어리석게도 우선 세선(歲船) 몇 척을 돌려주어 한편으로는 대마도가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을 바친 노고에 보답하고 한편으로는 국왕의 간절한 뜻을 따르는 것이 오랑캐를 대하는 데 있어 크게 불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일본의 기대가 외롭지 않고 대마도의 원한이 조금 풀려서 저들의 불만과 한이 10분의 5, 6은 사라져 양쪽 모두 의심이 없게 된 뒤에 다시 사신을 보낼 것을 논의해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215. 勅使迎接不可停退議〔原注:明宗十五年庚申三月丁卯朔乙亥。□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伏見禮記。諸侯相見則固不可停退。況□勅書已到近都郵亭。便留過數日。尤爲未安。明日仍行。不作鼓吹似當。〔原注:左相安玹卒。□上欲退行迎勅使。〕

번역

《예기(禮記)》를 보니, 제후가 서로 만날 때에는 진실로 멈추거나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칙서(勅書)가 이미 도성 근처의 우정(郵亭)에 도착하였는데, 편대로 머물면서 며칠을 보내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내일은 그대로 행하고 고취(鼓吹)를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원주(原注)에 “좌상(左相) 안현(安玹)이 졸하였다.” 하였다.-

원문

上從之。

번역

주상이 따랐다.

216. 代人奉使者加資不可議〔原注:明宗十六年辛酉七月己丑朔壬寅。□領議政。〕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自□上軫念萬里奉使之臣。不意代人之勞。欲給一加以慰其心。□聖上體下之念至矣。但嘉善重加。未可以代人遠行授之。前此亦多有急行者。而未有如此□命。今難開例。

번역

“위에서 만 리 사행(使行)을 가는 신하를 염려하여, 대신 가는 사람의 수고로움에 대해 위로하는 마음을 조금 더해 주려고 하셨으니, 성상의 아랫사람을 생각하시는 생각이 지극합니다. 다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거듭 더해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멀리 가는 데 줄 수는 없습니다. 이전에 또한 급히 떠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와 같은 명은 없었으니 지금 전례를 열기 어렵습니다.”

원문

傳曰。知道。

번역

《예기(禮記)》 〈전도(傳道)〉에 “도를 안다.” 하였다.

217. 迎引□勅書時。□宗廟洞口百官下馬與否議。〔原注:明宗十八年癸亥十二月乙巳朔壬子。□領府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2A

원문

臣子過□宗廟則下馬。乃不易之定禮。但□勅書乃□帝命也。迎引百官。所尊在此。雖不下馬。亦權而就經之道也。〔原注:尹漑,尹元衡議。與尙某同。〕

번역

신하가 종묘를 지나갈 때에 말에서 내리는 것은 바로 바꾸기 어려운 정례이다. 다만 칙서(勅書)는 곧 황제의 명이니, 백관을 맞이하고 인도하는 것이 여기에 존중되는 바이다. 비록 말에서 내리지 않더라도 또한 임시로 경전에 따르는 도리이다. 원주(原注): 윤개(尹漑), 윤원형(尹元衡)의 의론이다. 상모(尙某)와 같다.

원문

傳曰。觀此議皆當。然□帝命所當敬重。□宗廟洞口。百官不下馬無妨。

번역

전(傳)에 이르기를, “이 의논을 살펴보면 모두 합당하다. 그러나 □제명은 마땅히 공경하고 중시해야 하니, □종묘의 동구(洞口)에는 백관이 말에서 내리지 않아도 무방하다.” 하였다.

218. 宗系改正設慶科爲當議〔原注:同年癸亥十二月乙巳朔丁巳。□領府事。〕

문체: 公車類 / 疏箚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2B

원문

今此改正□宗系。實無前莫大之慶。別擧取人則多士亦荷□皇恩。依前例爲之。允合事體。但明年適是式年。科擧重疊。然有閏月則禮官排日得宜。必無窘迫之虞。

번역

이번에 종계(宗系)를 바로잡는 것은 실로 전에 없던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별도로 거행하여 사람을 뽑으면 많은 선비들도 황제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니, 전례대로 하는 것이 진실로 사체에 합당합니다. 다만 내년은 마침 식년(式年)이어서 과거 시험이 겹치는데, 윤달이 있으면 예관이 날짜를 배정하여 적절하게 할 수 있으니 반드시 곤란할 염려가 없습니다.

원문

傳曰。大慶後別試。當爲之也。但明年乃式年。事似重疊。別試當以秋成爲之。細考前例。詳量排日稟定。

번역

전교하기를, “대경(大慶)이 있은 뒤에 별시(別試)를 행해야 할 것이다. 다만 내년이 바로 식년(式年)이니 일이 중첩되는 듯하다. 별시는 추수(秋收)가 끝난 뒤에 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전례를 자세히 상고하고 날짜를 헤아려 주상께 여쭈어 정하라.” 하였다.

219. 上謝實錄廳□賜宴箋〔原注:明宗六年辛亥三月己丑朔丁酉。□中,仁二聖實錄編成。公以實錄廳堂上。率堂上郞廳上箋。□實錄廳堂上。〕

문체: 公車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3B

원문

雲馭繼陟。抱□二聖之遺弓。寶箋編成。荷九天之殊澤。撫跡增感。揆分踰涯。伏念臣等。俱以管窺。謬掌汗簡。未快闡微之義。反紆拜嘉之榮。戒供帳於黃扉。分禁臠於翠釜。宮壼瀲灎。替宣勸於日邊。仙樂鏘洋。怳夢登於帝所。方將舞手而蹈足。擧皆浹骨而渝肥。玆蓋伏遇□主上殿下。道繼華勳。心傳精一。祗承燕翼。期不忝於前功。揚厲鴻休。永垂信於後世。遂令庶屬。獲被□隆恩。臣等敢不共罄贊毗。仰圖報效。齊天等地。恒祝□聖齡。竭力盡心。益勵臣節。

번역

구름 수레가 계속해서 오르니 두 성인의 남은 활을 안고 가고, 보배로운 시권이 편찬되니 구천의 특별한 은택을 입었습니다. 자취를 어루만지매 감회가 더하고 분수를 헤아리매 한계를 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들은 모두 관규(管窺)로 잘못 간간(簡簡)을 맡고 있어 미천한 의리를 밝히지 못했는데 도리어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영광에 얽혔습니다. 황비(黃扉)에서 장막을 드리우고, 취부(翠釜)에서 고기를 나누어 주시니 궁중의 음식이 넘쳐흘러 임금님께 권면하는 것을 대신하고, 신선 음악이 요란하니 황제의 궁전에 오른 듯한 꿈을 꾸었습니다. 이제 춤추는 손과 발을 휘두르고 온몸에 살이 오르도록 하였으니, 이는 모두 주상 전하께서 화려한 공훈을 계승하고 정일(精一)의 마음을 전수하여 공경히 연익(燕翼)을 받들어 선대의 공로를 욕되게 하지 않고 큰 복을 드날려 후세에 길이 미치게 하신 덕분입니다. 마침내 여러 신하들이 융숭한 은택을 입었으니, 신들이 감히 함께 찬양하고 보답하는 데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늘과 땅처럼 항상 성상의 장수를 축원하며,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더욱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원문

答曰。昨日賜宴。非予私恩。□祖宗成憲也。勿辭。

번역

답하기를, “어제 연회를 베푼 것은 나의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라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다.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220. 上謝瑞蔥臺□賜宴箋〔原注:明宗十五年九月甲子朔癸未。前一日壬午。□上設曲宴于瑞蔥臺。以御題命侍臣製詩。觀武臣射。各賞賜。日暮而罷。□領議政。〕

문체: 公車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3C

원문

昨日□御瑞蔥臺。別設會筵。□命進爵製詩。仍□賜黃花。又□賜蠟燭。以寵榮之。□恩眷之隆。夐出尋常。奉箋稱謝者。伏以千年河淸。共遇生聖之會。雲天澤霈。濫荷在鎬之恩。撫躬何堪。銘骨難報。伏念臣等。才非適用。學昧通方。乘會依光。只霑雨露之渥。素餐尸位。有何涓埃之裨。方懷罔功之憂。還承非分之召。式燕以衍。許簪黃花之葩。不醉無歸。頻傳紫霞之醞。稱觴非漢殿之舊。賜燭邁宋朝之榮。豈但一時之美談。抑亦曠代之殊遇。玆蓋伏遇□主上殿下。天縱大德。日新丕顯。承守□祖宗之成憲。一張一弭。遵文武之䆖規。遂令樸樕之微才。均蒙湛露之異數。臣等敢不永肩素節。益勵丹衷。協共同寅。庶彈匪躬之責。舞手蹈足。恒祝齊天之壽。

번역

어제 서총대(瑞蔥臺)에 어가를 모시고 별도로 연회를 베풀고 황제의 명으로 시를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이어 황화(黃花 국화)와 촛불을 하사하여 은총을 베푸시니, 황제의 은혜가 보통의 수준을 훨씬 벗어났습니다. 이에 감사의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년 만에 중국이 태평해져서 성인이 탄생하는 시대를 함께 맞이하였고, 하늘에서 내리는 큰 은택으로 황제께서 계신 곳에 있는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몸을 어루만지며 어찌 감당하겠으며 뼈에 새기더라도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들은 재주가 쓰일 만하지 못하고 학문이 통하는 방도를 모르는데, 성세(盛世)를 만나 황제의 은택을 입어 단지 우로의 은택만 받았고, 한갓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습니까. 공을 이루지 못할까 근심하던 차에 도리어 분수에 넘치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연회를 베풀어 국화꽃을 꽂게 하시고,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말라 하여 자주 자하주(紫霞酒)를 보내 주셨습니다. 잔을 올리는 것은 한나라의 예전이 아니고 촛불을 내리신 것은 송나라의 영광보다 더하니, 어찌 한때의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대대로 없던 특별한 은총입니다. 이는 삼가 생각건대 황제 전하께서는 하늘이 주신 큰 덕이 날로 새로워지고 크게 드러나서, 조종(祖宗)께서 이루신 헌법을 계승하여 한 번 시행하고 한 번 중지하며 문무(文武)의 규범을 준수하시어 마침내 박엽(樸樕) 같은 미천한 재주를 가진 자에게도 똑같이 큰 은택을 입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감히 길이 절개를 지키고 더욱 충성을 다하여, 함께 힘을 합해 부당한 책임을 대신하고 손뼉 치며 발을 구르면서 항상 하늘처럼 장수하시기를 축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문

答曰。觀卿等謝箋。識卿等美意。君臣之間。不可阻隔。公卿侍從。禮當厚待。勿辭。

번역

답하기를, “경들이 사직하는 상소를 보니 경들의 아름다운 뜻을 알겠다. 군신 간에 막혀서는 안 된다. 공경(公卿)과 시종(侍從)은 예법상 후대해야 하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221. 仲玉兄棣案〔原注:成守琛。字仲玉。號聽松。〕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此行一登楓嶽。東臨大海。北自叢石。南望竹西。昨又乘船。歷探北壁龜島。山海之觀。可謂爛熳。虛其中而驚於外。勞於目而無得於心。儘可笑也。他行文字有數紙。雖甚拙陋。不可隱於兄輩。而書在亂稿。留俟精寫仰呈耳。餘不宣。〔原注:原本。保管於京城帝國大學圖書室。寫本。見大東名家筆譜。〕

번역

이번 걸음으로 한 번 풍악(楓嶽)에 올라 동쪽으로는 큰 바다를 굽어보고 북쪽으로는 총석산(叢石山)을 지나 남쪽으로는 죽서(竹西)를 바라보았네. 어제는 또 배를 타고 북벽(北壁)의 구도(龜島)까지 두루 탐방하였는데, 산과 바다의 경관이 참으로 훌륭하였다네. 속은 비어 있는데 겉모습에 놀라고 눈만 수고롭고 마음에는 얻은 것이 없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일세. 다른 행차 때 지은 글 몇 편이 있네. 비록 매우 졸렬하지만 형들에게 숨길 수 없지만, 원고가 어지러워 정사(精寫)하여 올리기를 기다리겠네. 나머지는 이만 줄이네.-원주(原注)에 “원본은 서울 제국대학 도서실(帝國大學圖書室)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사본은 《대동명가필보(大東名家筆譜)》에 보인다.-

원문

〔原注:己▣暮春念八。弟起夫。〕

번역

원주(原注) : 기사년 3월 초하루에 아우 기부(起夫)가 태어났다.

222. 仲玉奉復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5B

원문

雖未對君。承書。動心不能已已。金醫已蒙右相之肯。秋夕定可訪。君其進之。謂君今夏。定到聽松話舊。期必得之。卒爲小兒所誤。柰何柰何。惟望愼攝。所服之藥。不惜示及。吾當盡力圖送。〔原注:原本。傳來於成聽松嗣孫家藏帖。〕

번역

비록 그대를 만나지 못했으나 편지를 받고 마음이 움직여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김 의원(金醫元)은 이미 우상(右相)의 허락을 받았으니 추석에 찾아가기로 정했습니다. 그대는 나아가십시오. 그대가 이번 여름에는 반드시 청송(聽松)에 가서 옛날 이야기를 나누기를 기약했는데, 결국 어린아이에게 방해를 받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오직 몸조심하기 바라며 복용하는 약을 아끼지 말고 알려 주면 내가 힘을 다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원주(原註)에 “본래의 편지는 성청송(成聽松)의 후손 집에서 전해 온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원문

〔原注:八月十三。起夫。〕

번역

원주(原注) : 8월 13일이다. 기부(起夫)는

223. 與仲玉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恩命出於□聖衷。不可不來謝。〔原注:見李朝實錄。下同。〕

번역

은명(恩命)이 성상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니, 와서 사례하지 않을 수 없다. 원주(原註)에 이조실록(李朝實錄)에 보인다. 아래도 같다.

원문

昔者文立。不薦程瓊。知其素性謙退。年垂八十。無復當世之望故也。子非不知我者耶。

번역

옛날에 문립(文立)이 정경(程瓊)을 천거하지 않은 것은 그가 평소 겸손하고 물러나는 성품을 지녔으며, 나이가 팔십에 가까워 다시 세상에 쓰일 가망이 없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224. 與仲玉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賢胤。純正而能文。眞奇男子也。賀君有慶。

번역

현윤(賢胤)은 순정하고 문장도 잘하니 참으로 기이한 남자입니다. 그대에게 경사가 있음을 축하합니다.

225. 答李克裕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何樣侍奉。余僅不死耳。今春改立表石。故仲春晦。下去爲料。且燔瓦時所用柴木。亦宜扶惠。餘俟見耳。

번역

어떻게 시봉하고 계시는가? 나는 겨우 죽지 않고 있을 뿐이네. 올봄에 표석(表石)을 다시 세웠으니, 중춘(仲春) 그믐에 내려가서 살피게. 그리고 번와(燔瓦)할 때 사용할 땔나무도 도와주어야 하니, 나머지는 만나기를 기다리겠네.

원문

〔原注:丙元十二。尙。〕

번역

원주(原注) : 병원(丙元) 12년 상(尙).

226. 答李生昆季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花叢。爲喜爲喜。示意知悉。老身得閒疾。猶未去耳。惟冀愼重。幷謝克裕。

번역

꽃이 피었으니 기쁘고 기쁩니다. 말씀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늙은 몸은 한가로워도 병을 얻어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삼가고 신중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극유(克裕)에게도 감사합니다.

원문

〔原注:仲春念五。病翁。〕

번역

원주(原注) : 중춘(仲春) 5월이다. 병옹(病翁)은

227. 答李生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聞好樣侍側。爲慰。奴輩燔瓦時燒木。專恃公等之扶。公等若盡心相扶。吾豈敢忘其恩。吾亦秋來。欲下去爾。姑不具。

번역

모친을 모시고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으니 위로가 됩니다. 종들이 기와를 구울 때 땔나무를 태우는 일은 오로지 공들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공들이 마음을 다해 도와준다면 내가 어찌 감히 그 은혜를 잊겠습니까. 나도 가을이 되면 내려갈 생각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원문

〔原注:三日。起夫。〕

번역

3일. 기부(起夫)이다.

228. 答李座首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6A

원문

知悉書意。改號事。予何小忘。今判書前早先白之。而迄未擧行。柰何。今之勢與昔不同者。宰相私情勿爲事有□傳敎也。汝不知□朝廷間事體否。輒盡情言之。吾心豈安。姑遲天命爲佳。不一。

번역

편지의 내용은 잘 알았다. 개호(改號)하는 일은 내가 어찌 작은 일이라 잊었겠느냐. 지금 판서가 전에 미리 분명히 말하였는데도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지금의 형세는 옛날과 같지 않아서 재상의 사정(私情)을 일삼지 말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너는 조정 간의 일의 체모를 모르는 것이냐? 번번이 진정을 다해 말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느냐. 우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만 줄인다.

원문

〔原注:病夫。齒痛草。〕

번역

-원주(原註)-병든 사람의 치통에 쓰는 약이다.-초방(草方).-

229. 答李座首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汝事。每每面囑於銓相處而監役窠。今都正不出。欲擬末由云。徐徐圖之。

번역

너의 일은 매번 전조(銓曹)의 상신(相臣)에게 면대하여 부탁했는데, 감역(監役) 자리는 지금 도정(都正)이 나가지 않아 의망할 길이 없다고 하니 천천히 도모하거라.

230. 答李座首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前日京邸造米價收合時泛濫事。李世白被訴已遞。汝事。更聞見欲遞。姑留之。汝若呈辭則遞之無疑。汝又年老。何必爲。

번역

전일에 서울 저택에 쌀을 만들어 보내는 값으로 수합할 때 범람한 일로 이세백(李世白)이 고소를 당하여 이미 체차되었는데, 너의 일은 다시 들으니 체차하고 싶다고 하기에 우선 그대로 두었다. 네가 만약 사직서를 올리면 체차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네가 또 연로하니 어찌 굳이 그러겠느냐.

231. 與或人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6B

원문

同里阻闊。無異殊方。此懷未嘗少懈。伏惟比來。□兄候萬重。極慰且溯。弟家內不淨。將出避山寺而家事多有難便之端。尙此踟躕。可悶。乙奴之女。症涉可疑。出置山幕。仍欲蹲坐。未知此計以爲如何。早晩一進。姑不宣。謹狀。

번역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먼 타향과 다름이 없으니, 이 마음을 조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삼가 근래 □형의 기후가 만복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위로되고 그리웠습니다. 저는 집안이 불결하여 산사(山寺)로 피신하려 하였으나 집안일 중에 불편한 단서가 많아 아직까지 머뭇거리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을노(乙奴)의 딸은 증세가 의심스러워 산막(山幕)에 내놓고 그대로 앉아 지내려고 합니다. 이 계획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우선 이만 줄입니다.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원문

〔原注:卽夕。弟震。〕

번역

원주(原注)에 ‘저녁이다.’라고 하였다. 아우 진(震)은

232. 與或人

문체: 書簡類 / 書簡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6C

원문

伏惟秋風節。尊雅履佳迪。遙慰遙慰。虛粗遣而若得一麾南出。可得源源。何可必也。貴洞中京居尙生玄氏。卽虛之宗人。新接未免艱楚。須十分顧恤。以爲保完之地如何。餘萬困憊。臥草不備。謹拜上狀。尊照。〔原注:遺墨。傳來於後孫潗家。〕

번역

가을바람이 부는 계절에 존아(尊雅)의 체후가 편안하신지요? 멀리서 위로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저는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만일 한번 남쪽으로 나와서 원원(源源)을 얻을 수 있다면 어찌 기필할 수 없겠습니까. 귀동(貴洞)의 중경(中京)에 사는 상생현씨(尙生玄氏)는 바로 허허(虛虛)의 종인(宗人)인데, 새로 접한 것이 어렵고 고달프니 부디 십분 돌보아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머지는 온갖 괴로움에 누워서 쓰느라 갖추지 못합니다. 삼가 장문을 올려 존안(尊顔)께 보여 드립니다.-원주(原注)에 “유묵(遺墨)은 후손인 섭(潗)의 집에서 전해 왔다.”라고 하였다.-

233. 祭亡子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前年汝喪子。今年吾喪汝。父子之情。汝先知之。汝哭我哭。我哭誰哭。汝葬我葬。我葬誰葬。白首痛哭。靑山欲裂。〔原注:見芝峯類說〕

번역

지난해에 너는 자식을 잃었고 금년에는 내가 너를 잃었구나 부자의 정을 네가 먼저 알았으니 네가 곡하고 나도 곡하노니 내가 곡하면 누가 곡할 것인가 네 장례 치르고 내 장례 치르니 내 장례는 누가 치러 줄 것인가 백발의 몸으로 통곡하니 푸른 산이 찢어지려 하누나 원주(原注)에 “《지봉유설》을 보라.”라고 하였다.

234. 自銘

문체: 雜著類 / 箴銘類

원문

起自草萊。三入相府。晩而學琴。常彈感□君恩一曲。以終天年。

번역

초야에서 일어나 세 차례나 상부(相府)에 들어갔다. 늦게 거문고를 배워 항상 감군은곡(感君恩曲) 한 곡조를 연주하며 천수를 누렸다.

235. 自警銘

문체: 雜著類 / 箴銘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7A

원문

輕當矯之以重。急當矯之以緩。偏當矯之以寬。躁當矯之以靜。暴當矯之以和。麤當矯之以細。

번역

가벼우면 무거운 것으로 바로잡고, 급하면 느긋하게 바로잡으며, 치우치면 너그러운 것으로 바로잡고, 조급하면 고요함으로 바로잡고, 거칠면 부드러움으로 바로잡는다.

원문

右成安公手筆三十六字。公七世孫龜澤得之人家。手自粧帖。將爲子孫寶藏。忠厚長德。休休有古大臣風者。卽其點劃徑谿之間。可以得一二也。不如是。只可爲後昆巾衍之藏。又烏足爲世人貴也。

번역

이것은 성안공(成安公)의 필적 36자이다. 공의 7세손인 구택(龜澤)이 집안에서 얻어 직접 장첩(粧帖)하여 자손의 보배로 삼으려 한다. 충후하고 덕이 크며 아름답고 오래도록 전해지는 옛 대신의 풍모를 지닌 것은 바로 그 점획(點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다만 후손들의 헛된 장식품이 될 뿐이니, 어찌 세상 사람들에게 귀중하게 여겨질 수 있겠는가.

원문

〔原注:梧川李宗城謹識〕

번역

원주(原注)는 오천 이종성(梧川李宗城)이 삼가 기록하였다.

원문

嗚呼。成安公之相道。豈以重緩寬靜和細而得之歟。今其手墨三十六字。不獨子孫宜藏弆以爲寶。世之觀此者。有味乎其言。則當可薄夫敦矣。噫。微斯人。吾誰與歸。

번역

아, 성안공의 상도(相道)가 어찌 중하고 느리며 관대하고 조용하며 온화하고 세밀한 것으로 얻었겠는가. 지금 그 36자의 수묵을 자손이 마땅히 잘 간직하여 보물로 삼아야 할 뿐만이 아니니, 세상에서 이것을 보는 사람 중에 그 말에 맛이 있으면 의당 가볍게 여기지 않고 돈독하게 여길 것이다. 아, 이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갔겠는가.

원문

〔原注:棣泉吳遂采謹識〕

번역

원주(原注)는 제천 오수채가 삼가 쓴 것이다.

236. 古調

문체: 詩類 / 其他類

원문

흐리눅어괴여시든。에녹어좃니압。전차로전차로。벗님전차로。설면자가싀런지。벙어러좃니압。

번역

흐리눅어괴여시든 에녹어좃니압 전차로전차로 벗님전차로 설면자가싀런지 벙어러좃니압

237. 感□君恩曲〔原注:四章〕

문체: 詩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87C, ITKC_MO_0130A_A026_087D ...

원문

四海바다깁희난。닷줄로자히리어니와。님의德澤깁희난。어나줄로자히링잇고。享福無疆하사。萬歲를누리소서。享福無疆하사。萬歲를누리소서。一竿明月이。亦□君恩이삿다。

번역

온 세상의 바다는 깁희난 다섯 줄로 자히이어니와 님의 덕택은 깁희난 어느 줄로 자히링잇고 영원토록 복을 누리시어 만세를 누리소서 영원토록 복을 누리시어 만세를 누리소서 한 가닥 밝은 달이 또한 군의 은혜를 비추네

원문

泰山이놉다컨만난。하날못밋쳐거니와。님의恩과德과난。하날갓치놉흐삿다。享福無疆하사。萬歲를누리소서。享福無疆하사。萬歲를누리소서。一竿明月이。亦□君恩이삿다。

번역

태산은 높다지만 하늘에 미치지 못하고 하늘은 넓다지만 끝이 없지 않거니와 님의 은덕은 하늘과 같으시나이다 끝없이 복을 누리시고 만세를 누리소서 끝없이 복을 누리시고 만세를 누리소서 한 줄기 밝은 달빛도 또한 임금의 은혜를 받았나이다

원문

四海가넙다컨만난。한舟楫이면건너리어니와。님의넙은恩澤은。此生의갑사오리잇고。享福無疆하사。萬歲를누리소서。享福無疆하사。萬歲를누리소서。一竿明月이。亦□君恩이삿다。

번역

천하가 넓다고 하지만 배 한 척이면 건널 수 있거늘 임금의 은택은 이생에 갑사오리 끝없이 복을 누리소서 만세를 누리소서 한 줄기 밝은 달이 또한 임금의 은혜로다

원문

一片丹心을。하날하아라소서。白骨이糜粉인들。丹心잇단가링잇가。享福無疆하사。萬歲를누리소서。享福無疆하사。萬歲를누리소서。一竿明月이。亦□君恩이삿다。

번역

한 조각 붉은 마음을 하늘에 아뢰옵나이다 백골이 가루가 된다 한들 붉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끝없이 복을 누리시어 만세를 누리소서 끝없이 복을 누리시어 만세를 누리소서 한 자루 밝은 달이 또한 임금의 은혜를 비추나이다

원문

故尙成安公雅好琴。家置一琴。能按譜盡其妙。臨終自誌。有晩學琴。微醺。輒彈感□君恩一曲之語。人至于今。味其語而知其忠焉。公旣卒。副室有節婦金氏。以遺衣幷其琴。朝夕陳而祭之。及金沒而琴佚於兵。今年崇禎戊辰。距公亡六十年。琴佚且三十年。而公之外孫李佐郞厚基亦好琴。從人家復求得之。以示樂工。工曰。良材也。相公其知之矣。命匠象完其缺。象曰。此吾父斲也。吾幼時。尙相公實命吾父。今認之矣。蓋象父某亦良匠云。噫。此一琴也。而忠臣貞女子孫繼述之美具焉。象雖賤。以世技附書。其事益奇。後之傳者。幸勿褻焉。

번역

고 상성안공(尙成安公)은 거문고를 좋아하여 집에 거문고 하나를 두었는데, 악보에 능통하여 그 오묘함을 다 터득하였다. 임종을 앞두고 스스로 지은 글에 “만년에 거문고를 배우는데, 약간 취하면 문득 〈감군은(感君恩)〉 한 곡조를 연주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러 그 말을 음미하고서 그의 충성을 알게 되었다. 공이 죽은 뒤 부실(副室)인 절부(節婦) 김씨가 유의(遺衣)와 함께 거문고를 가지고 아침저녁으로 진설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김씨가 죽고 나서 거문고가 전쟁 중에 없어졌는데, 올해 숭정 무진년은 공이 돌아가신 지 60년이고 거문고가 없어진 지는 30년이다. 공의 외손 이좌랑(李佐郞) 후기(厚基)도 거문고를 좋아하여 남의 집에서 다시 찾아내어 악공에게 보여 주었는데, 악공이 “좋은 재목이다.”라고 하였다. 상공이 그를 알아보고 장인에게 명하여 결함을 보완하게 하였는데, 장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 아비가 깎은 것인데 내가 어렸을 때에 상공께서 실명(實命)으로 내 아비에게 부탁하셨던 것을 지금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대개 장인인 그의 아비도 뛰어난 장인이라고 한다. 아, 이 거문고 하나에 충신과 정절한 여인의 자손이 계승해 온 아름다움이 갖추어져 있다. 장인이 비록 천박하지만 대대로 전하는 기예로 글을 덧붙이니 그 일이 더욱 기이하다. 후세에 전하는 자들은 부디 함부로 하지 말라.

원문

銘曰。琴其人耶。人其琴耶。以人傳琴。以琴傳心。人琴不亡。更始自今。

번역

명에 이르기를, 거문고가 사람인가, 사람이 거문고인가?사람으로 거문고를 전하고 거문고로 마음을 전한다면 사람과 거문고가 없어지지 않으리니,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노라.

원문

〔原注:澤堂李植銘〕

번역

원주(原注)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명이다.

원문

刳木而竅之。揯絲而絃之。援而鼓之。有聲泠然。是泠泠者。生於木耶。生於絲耶。抑生於人耶。皆不可知也。子無伯牙指。我非鍾期耳。玄鶴上天。游魚入水。岸陶令之葛巾。酌嵇生之濁酒。竹几石榻。緩弄徐拊而已。成虧兩空。知此理者。惟齊物翁其然。

번역

나무를 쪼개어 구멍을 내고 실을 뽑아 줄을 만들어서 당겨서 타노라니 소리가 맑구나 이 맑은 소리는 나무에서 나왔는가 실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사람에게서 나왔는가 모두 알 수가 없네 자네는 백아가 가리키는 이 아니요 나는 종기 같은 귀도 아니라네 검은 학은 하늘로 올라가고 노니는 물고기는 물속으로 들어가네 도령의 갈건을 젖혀 쓰고 희생의 탁주를 마시며 죽궤와 석탑에서 느긋하게 연주하고 천천히 어루만지네 성공과 실패 모두 공허하니이 이치를 아는 이는 오직 제물옹뿐이로다

원문

萬曆紀元丙辰歲。德水張維持國甫銘。

번역

만력(萬曆) 기원 병진년에 덕수(德水) 장유지국보(張維持國甫)가 짓다.

238. [泛虛亭集年譜〔原注:後孫渭□編後孫灝□校〕]

문체: 傳記類 / 系譜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090B, ITKC_MO_0130A_A026_090C ...

원문

公諱震。字起夫。姓尙氏。貫木川。號泛虛亭。又松峴。又嚮日堂。

번역

공의 휘는 진(震)이고 자는 기부(起夫)이다. 성은 상씨(尙氏)이고 관직은 목천(木川)이며, 호는 범허정(泛虛亭), 또 송현(松峴), 또 향일당(嚮日堂)이다.

원문

癸丑〔原注:李朝成宗二十四年。李朝開國百二年。皇紀二千一百五十三年。明朝孝宗弘治六年。西曆一千四百九十三年。〕

번역

계축년 - 원주(原注)에 “이조(李朝) 성종 24년. 이조 개국 102년. 황기(皇紀) . 명조 효종 홍치 6년. 서력 .”이라 하였다. -

원문

六月五日。公生于林川閤下洞第。〔原注:今扶餘郡場巖面閤谷里。自公爲相。洞名稱閤下。今改爲閤谷。有遺墟。〕公皇考□贈議政公。年衰無嗣。躬禱于聖住山。〔原注:在原藍浦郡東〕越明年□弘治癸丑。公生而狀貌奇異。啼笑有時。議政公識其非常。手植三槐于廟庭。以擬宋王魏公故事。老槐至今尙存。〔原注:距今三十年前。二槐爲人翦伐。一槐獨存。〕

번역

6월 5일 공이 임천(林川) 합하동(閤下洞)에서 태어났다. 원주(原註) : 지금의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이다. 공이 정승이 되어서부터 동네 이름을 합하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합곡으로 고쳤다. 유허가 있다. 공의 황고(皇考) □ 증의정공(贈議政公)은 나이가 늙어 후사가 없자 직접 성주산(聖住山)- 원주 : 남포군 동쪽에 있다. -에 가서 기도하였다. 다음 해인 □ 홍치 계축년에 공이 태어났는데 장모가 기이하고 울고 웃는 것이 때가 있었다. 의정공은 그 상서로움을 알아 손수 홰나무 세 그루를 사당 뜰에 심어 송나라 왕위공(王魏公)의 고사(故事)에 비유하였는데, 늙은 홰나무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원주 :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두 그루는 사람에 의해 베어졌고 한 그루만 남았다. -

원문

丁巳。〔原注:燕山主三年〕公五歲。

번역

정사년 - 원주(原注)에 연산(燕山)은 주(周)나라의 고요(高堯)가 세운 나라이다.- 공이 5세였다.

원문

丁□贈貞敬夫人延安金氏憂己未。〔原注:燕山主五年〕公七歲。

번역

정(丁)나라가 정경부인 연안 김씨를 추증하였다. 김씨는 기미년에 태어났다.-원주(原註)-연산(燕山)의 임금 5년이다.-공은 7세였다.

원문

讀書于山寺。議政公敎方嚴督。歲逾不許往來。

번역

산사(山寺)에서 독서하였다. 의정공교(議政公敎)가 바야흐로 엄히 독촉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도록 왕래를 허락하지 않았다.

원문

庚申。〔原注:燕山主六年〕公八歲。

번역

경신년 - 원주(原注)에 연산(燕山) 6년이라 하였다. - 공이 8세가 되었다.

원문

丁議政公憂。零丁無依。鞠養於伯姊成夏山君夢井夫人。僑居于京長興洞。

번역

정의공(丁議政公)이 우환을 겪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백씨(伯氏)인 성하산군(成夏山君)의 꿈정부인(夢井夫人)에게 봉양받고 서울 장흥동에 살았다.

원문

乙丑。〔原注:燕山主十一年〕公十三歲。

번역

을축년 - 원주(原注)에 연산 11년이라고 하였다. - 공이 13세이다.

원문

林川家奴死。〔原注:議政公遺囑家事者〕公自京帖粟百斛庀其葬。人已服其偉量。

번역

임천의 종이 죽었는데 -원주(原註)에 “의정공(議政公)이 유언으로 집안일을 부탁한 것이다.” 하였다.-공이 서울에서 쌀 백 곡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니, 사람들이 이미 그의 크고 넓은 도량을 복종하였다.

원문

戊辰。〔原注:中宗三年〕公十六歲。

번역

무진년에 공의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다.

원문

公天姿卓越豪縱。馳馬試射。年過成童。尙不志學。被謾於儕流。始發憤策勵學業。居五月。已達文義。十朔。理無滯阻。從人質疑而已。

번역

공은 천품이 탁월하고 호방하여 말을 타고 활쏘기를 시험할 때 나이가 성인(成人)을 넘었어도 아직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아 동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 비로소 분발하여 학업에 힘쓰기 시작하였는데, 5개월 만에 이미 문장의 뜻을 터득하고 10개월 만에는 이치에 막힘이 없어 사람들의 질문에 답할 정도가 되었다.

원문

己巳。〔原注:中宗四年〕公十七歲。

번역

기사년 - 원주(原注)에는 중종 4년이라고 하였다. - 공이 17세였다.

원문

聘宗室介山副守諱孝智之女。孝寧大君諱補之曾孫女也。

번역

빈(聘)은 종실(宗室) 개산부수(介山副守) 휘는 효지(孝智), 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보(補)의 증손녀이다.

원문

辛未。〔原注:中宗六年〕公十九歲。

번역

공구(公九)는 19세이다. 주 : 중종 6년이다.

원문

十二月初四日。胤子鵬南。生于京第。

번역

12월 4일 윤자(胤子) 붕남(鵬南)이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원문

壬申。〔原注:中宗七年。開國一百二十一年。皇紀二千一百七十二年。明武宗正德七年。西曆一千五百十二年。〕公二十歲。

번역

임신년 - 원주(原注)에 “중종 7년. 개국 121년. 황기(皇紀) . 명 무종 정덕 7년. 서력 .”이라 하였다. - 공이 20세가 되었다.

원문

公學業已成。成夏山亟稱不置曰。尙某之質。雖在於孔門。無讓於諸弟子矣。因勸就蔭仕。不應曰。丈夫讀書。當樹大業耳。聞成公守琛,守琮兄弟有學行。全紙大書以簡曰。聞君之名。有願交之意。二公亦以大書許之。連榻講磨。終爲道義之交。是歲。有寄題聽松堂詩五律八韻。〔原注:詩見原集〕

번역

공의 학업이 이미 이루어지자 성하산(成夏山)이 서둘러 “모(某)의 자질은 비록 공자 문하에 있었지만 제자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라고 칭찬하고, 인하여 음사(蔭仕)에 나아가기를 권하였다. 이에 응하지 않고 말하기를, “장부(丈夫)가 글을 읽으면 마땅히 큰 사업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듣건대 성공 수침(守琛)과 수종(守琮) 형제는 학문과 행실이 있었는데, 종이에 크게 써서 간략하게 말하기를, “그대의 이름을 듣고 사귀기를 원한다.” 하였더니 두 공도 역시 크게 써서 허락하였다. 이어서 함께 강마(講磨)하여 끝내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이해에 청송당(聽松堂)에게 시 5수와 율시 8운을 부쳐 보냈다.- 원주(原注)에 “시는 원집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

원문

丙子。〔原注:中宗十一年〕公二十四歲。

번역

병자년 - 원주에는 중종 11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24세였다.

원문

中司馬。入泮課試。連三製入高等。柳公雲時長皐比。大加褒稱。至訪于家曰。見君製述。知有經綸之才。金慕齋,李容齋諸公。亦莫不歎奬。

번역

중사마(中司馬)가 성균관에 들어가 과시(課試)를 보았는데, 연속으로 세 번 제술(製述)에서 높은 등급에 들었다. 유공운(柳公雲)이 당시 장고(長皐)에 비견되어 크게 칭찬하였으며, 집까지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제술을 보고 경륜의 재주가 있음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김모재(金慕齋), 이용재(李容齋) 등 여러 공도 모두 감탄하고 장려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원문

己卯。〔原注:中宗十四年〕公二十七歲。

번역

기묘년 - 원주에는 중종 14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27세였다.

원문

十月。中別試〔原注:改宗系慶科〕丙科第三人。□命官趙光祖,南衮,金絿,金湜。

번역

중별시(中別試) - 원래 종계과(宗系科)를 개정하였다. -를 행하여 병과(丙科) 3인 조광조(趙光祖), 남곤(南袞), 김훈(金絿), 김식(金湜)을 선발하였다.

원문

選入承文院副正字。

번역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선발해 들였다.

원문

庚辰。〔原注:中宗十五年〕公二十八歲。

번역

경진년 - 원주(原註)에는 중종 15년이라 되어 있다. - 공이 28세이다.

원문

薦藝文館檢閱,待敎,奉敎。入侍□經幄。時經筵官金世弼。論趙光祖事於□經席曰。頃者趙光祖輩欲效唐虞之治。□殿下尊寵而信任之。於是新進之士。必欲於一朝革舊更新。以施三代之政。□殿下過用其言。反貽今日之憂。此等人一世之名勝。雖有過擧之失。不過引古之善政。徒煩欲速之誠而已。乃加竄逐。根連鉤黨。一朝賜死。至爲慘惔。□殿下亦勿憚勇改前愆。反覆陳說。言淚俱下。翰林尙某出而歎曰。今日始聞讜言。〔原注:燃藜室記述〕明日。南衮請詔獄推鞫。金公杖流陰竹。公亦被論。遞西敍。○公平生。恥言人過。至於排擊奸佞。少不回撓。屢斥己卯用事人及其奸黨崔弘濟。〔原注:己卯詆疏。請賜死光祖者。〕坐遞於翰林。再駁於持平。皆以此也。事載己卯士禍錄。

번역

천예문관(薦藝文館) 검열 대교 봉교가 입시하여 경연에 참석하였다. 이때 경연관 김세필이 조광조의 일을 경연 자리에서 논하기를, “지난번 조광조 무리가 당우(唐虞)의 정치를 본받고자 하였을 때 전하께서 존숭하고 총애하며 신임해 주셨습니다. 이에 신진 선비들이 반드시 하루아침에 구습을 혁파하고 새롭게 하여 삼대의 정치를 시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그들의 말을 지나치게 쓰시어 도리어 오늘날의 근심거리를 끼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일세(一世)의 명승(名勝)으로, 비록 잘못된 거조가 있었으나 옛날의 선정을 끌어다 쓸 뿐 한갓 빨리 이루고자 하는 정성만 번거로웠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마침내 찬축(竄逐)에 가깝게 하시고 뿌리가 서로 연계되어 당파를 지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사사(賜死)하게 하셨으니,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또한 용감하게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기를 꺼리지 마소서.” 하고, 말을 반복하여 진술하면서 눈물을 흘리니, 한림 상모가 나와서 탄식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바른말을 들었다.” 하였다.-원주(原注)에 ‘연려실(燃藜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다음 날 남곤이 조옥(詔獄)을 추국(推鞫)할 것을 청하고 김공(金公)은 음죽(陰竹)으로 장을 치고 유배되었으며, 공도 논핵을 받아 서서(西敍)에 체차되었다. ○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간신과 아첨꾼을 배척하는 데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기묘년에 자신에게 일을 시킨 사람과 그 간당(奸黨) 최홍제(崔弘濟)-원주에 ‘기묘년에 조광조를 비방한 상소로 사사할 것을 청한 자’라고 되어 있다.-를 누차 배척하다가 한림에서 체차되고 지평에서 재차 논박하였는데, 모두 이 일 때문이었다. 그 일이 《기묘사화록(己卯士禍錄)》에 실려 있다.

원문

辛巳。〔原注:中宗十六年〕公二十九歲。

번역

신사년에 공의 나이가 29세였다. 주 : 원주(原注)에는 ‘중종 16년’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拜禮曹佐郞壬午。〔原注:中宗十七年〕公三十歲。

번역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 원주(原注)에 중종 17년이라고 하였다. - 공의 나이 30세이다.

원문

二月。〔原注:丙戌〕被政院論啓。蒙原宥。○政院啓曰。禮曹佐郞尙某。昨日酉時。以□傳敎問致祭前例於領相家聽去。而至今尙不回。至爲緩漫。請推考。〔原注:李朝實錄〕

번역

2월. - 원주(原注)에 병술년이다.- 정원이 논핵하여 아뢰어 원래의 처벌을 면하였다. ○ 정원이 아뢰기를, “예조 좌랑 상모가 어제 유시(酉時)에 ‘치제(致祭)하는 전례를 영의정 집에서 물어보라.’라는 전교를 가지고 가서 듣고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매우 느리다. 추고하소서.” 하였다.- 원주에 이조실록(李朝實錄)이다.-

원문

七月。由禮郞。出爲北道評事。公素稱文武兼才。忌公者託以出。公自後常兼帶宣傳官。○成聽松贈送評事詩七絶三篇。〔原注:見聽松遺稿〕

번역

7월. 유예랑이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나갔다. 공은 본래 문무를 겸비한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졌는데, 공을 시기하는 자들이 출사한다는 핑계를 대었다. 공은 그 뒤로 항상 선전관을 겸임하였다. ○ 성청송이 평사를 보내며 지어 준 칠언 절구 3편. 원주(原注)는 《청송유고》에 보인다.

원문

乙酉。〔原注:中宗二十年〕公三十三歲。

번역

을유년- 원주(原注)에는 중종 20년으로 되어 있다. -공이 33세이다.

원문

還拜戶曹正郞。移拜兵曹。

번역

호조 정랑에 다시 제수하였다가 병조에 옮겨 제수하였다.

원문

丙戌。〔原注:中宗二十一年〕公三十四歲。

번역

병술년에 공의 나이가 34세였다. 주 : 원주(原注)에는 ‘중종 21년’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五月。遷拜禮曹正郞兼持平。充□聖節使書狀官。朝京還。洪益城〔原注:聖節使彥弼〕器重之曰。吾喜尙君。單獨而行也。

번역

5월. 예조 정랑 겸 지평에 천배(遷拜)하여 성절사 서장관을 충원하였다가, 서울에 갔다가 돌아왔다. 홍익성(洪益城)- 원주(原注)에는 ‘성절사 언필(彥弼)’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기중지(器重之)가 말하기를, “나는 상군(尙君)이 홀로 가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원문

丁亥。〔原注:中宗二十二年〕公三十五歲。

번역

정해년- 원주(原注)에는 중종 22년이다.-에 공이 35세가 되었다.

원문

四月。〔原注:壬戌〕被論遞持平。○是日。司憲府執義許洽啓曰。持平尙某。正言金漹。皆有物論。不合言官。請遞。傳曰。被論宜遞。

번역

사월. - 원주(原注)에 임술년이다. - 논핵을 당하여 지평에서 체차되었다. 이날 사헌부 집의 허흡이 아뢰기를, “지평 상모와 정언 김흡은 모두 여론이 있으니 언관으로 부합하지 않습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논핵을 당하였으니 체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원문

六月。〔原注:丁未〕陞知製□敎。被論遞。○是日。諫院啓曰。知製□敎乃文翰重任也。尙某,申瑛。本有物論。請幷改正。不允。〔原注:李朝實錄下同〕

번역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가 논핵을 받아 체차되었다. ○ 이날,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지제교는 문한(文翰)의 중임입니다. 상모와 신영은 본래 물론이 있으니 모두 개차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주 : 이조실록에는 ‘아뢰었다.’로 되어 있다.

원문

六月。〔原注:辛亥〕臺諫再啓請改。□允之。

번역

대간(臺諫)이 재차 아뢰어 고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원문

十一月。〔原注:乙亥〕復拜持平。兼春秋館記注官。

번역

11월. - 원주(原注)에 을해년이다. - 지평을 다시 제수하고 겸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으로 삼았다.

원문

十一月。〔原注:戊寅〕被臺論。遞持平。○是日。諫院啓曰。持平尙某越署經。請遞。□傳曰遞。尋拜司甕院僉正。

번역

11월. - 원주(原注)에 무인년이다. - 대간의 논핵을 받아 지평에서 체차되었다. ○ 이날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지평 상모(尙某)가 서경(署經)을 어겼으니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명나라전》에는 ‘체차하였다’고 전한다. -곧 사옹원의 첨정(司甕院僉正)에 제수되었다.

원문

戊子。〔原注:中宗二十三年〕公三十六歲。

번역

무자년에 공은 36세였다. 원주(原註)는 “중종 23년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四月。〔原注:壬子〕拜爲平安道巡邊使從事官。巡邊使許琓。〔原注:吏曹判書〕入對啓請也。

번역

4월. 임자년에 평안도 순변사 종사관으로 제수되었다. 순변사 허점(許琓)- 이조 판서 -이 입대하여 청한 것이다.

원문

九月。拜司憲府掌令。被論辭遞。○是日。司憲府啓曰。執義崔重寅。掌令尙某。持平李億孫。自□上親行大祭〔原注:上親祭于英陵〕時。不參受誓戒。所失甚重。請罷職。□傳曰。尙震,崔重寅。以病不得往。罷職則過耳。憲府翌日再啓遞。

번역

○ 이달에 사헌부 장령을 제수받았다가 논핵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 이날 사헌부가 아뢰기를, “집의 최중인(崔重寅)과 장령 상모(尙某), 지평 이억손(李億孫)이 주상께서 영릉(英陵)에 친히 대제(大祭)- 원주(原註)에 “주상이 영릉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였다. -를 행할 때에 수계(受戒)와 서계(誓戒)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잘못이 매우 중합니다. 파직을 청합니다.” 하니, □ 전하기를, “상진(尙震)과 최중인(崔重寅)은 병으로 가지 못하였는데, 파직하는 것은 지나치다. 헌부에서 다음 날 재차 아뢰어 체차하였다.” 하였다.

원문

十一月。〔原注:己亥〕特命拜爲□世子侍講院弼善。憲府啓遞爲成均館直講。○憲府啓曰。弼善尙某。前爲掌令時。左遷未久。而復授準品之職。未便。請遞之。□傳曰。尙震其時以病左遷。豈可以一時之事。長爲不用乎。臺諫及侍講院官。皆當擇差。不可遞。公因呈辭不就。

번역

○ 11월. ○ 원주(原注)에 기해년이다. 특명으로 세자시강원 필선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에서 아뢰어 성균관 직강으로 체차하였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필선 상모는 전에 장령을 지낼 때 좌천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다시 준품의 직책을 주었으니 온당치 않습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다. □ 《고려사》에 전하기를, “상진(尙震)은 그 당시 병으로 좌천되었는데 어찌 일시적인 일로 오랫동안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간과 시강원의 관원은 모두 가려서 차임해야 하고 체차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이 사직을 올렸으므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원문

己丑。〔原注:中宗二十四年〕公三十七歲。

번역

기축년 - 원주(原注)에는 중종 24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37세이다.

원문

三月。登賞楓嶽。東臨大海。遍覽叢石龜島之勝景。探勝中貽書于成聽松棣案。道山海之壯觀。題詩於降仙樓。有古愁今恨堪抛擲。須敎蘭舟上楚臺之句。悠然忘機於物外之像。可見矣。公自見駁於己卯奸黨以後。累被噬擠。至被論於典翰侍講迨十年也。因呈辭暇閒。都擲古今愁恨。灑然放懷於物外天風。

번역

3월에 풍악산(楓嶽山)에 올라 동쪽으로 바다를 굽어보며 총석도(叢石島)와 구도(龜島)의 승경을 두루 살펴보았다. 유람하는 중에 성청송제(成聽松棣)에게 편지를 보내 도산(道山)과 해산(海山)의 장관에 대해 시를 지어 강선루(降仙樓)에 쓰도록 하였는데, “옛날의 근심과 지금의 한을 던져 버릴 만하니 모름지기 목란 배로 초대(楚臺)에 올라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기심(機心)을 물외(物外)의 경치에서 유연히 잊은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기묘년 간당(奸黨)에게 비방을 받은 뒤로 누차 공격을 받아 전한(典翰)과 시강(侍講)에 논핵되기까지 10년이 지났다. 이에 사직하고 한가해지자 고금의 근심과 한을 모두 던져 버리고 물외의 천풍(天風)에 마음을 씻어 놓았다.

원문

八月。復拜掌令。被論呈辭。□上敦諭勿辭。再辭遞。○按是日。弘文館上箚。請遞臺諫。公與梁淵同辭。〔原注:啓辭見原集〕

번역

8월.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논핵을 당하여 사직서를 올렸으나, 상이 돈유(敦諭)하여 사직하지 말게 하였다. 두 번 사직하고 체차되었다. ○ 살펴보건대 이날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대간을 체차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양연과 함께 사직하였다.-원주에 계사(啓辭)가 보인다.-

원문

十月。拜弼善。入侍講院。□仁廟在東宮。僚屬極選一時淸望。公膺是□命。進讀甚多。

번역

○ 10월. 필선(弼善)에 제수되어 강원(講院)에 입시하였다.-인묘(仁廟)가 동궁에 계실 때 요속(僚屬)을 극선(極選)하여 한때 청망(淸望)이 있었는데, 공이 이 명에 응하여 진독(進讀)한 것이 매우 많았다.-

원문

庚寅。〔原注:中宗二十五年〕公三十八歲。

번역

경인년 - 원주에는 중종 25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38세이다.

원문

進階朝散。爲侍講院文學。差掌山陵都監。〔原注:貞顯王后尹氏薨。葬宣陵。〕時金謹思爲提調。以葬物私施人。公執言國事未襄。大觸其怒。人皆危之。公不動。事完進階。而後被其毒。論遞於判書贊成也。

번역

진계(進階)가 조산(朝散)이 되어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을 맡았다. 장릉도감(掌陵都監)에 차임되었다.- 원주(原注) :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가 훙서하여 선릉(宣陵)에 장사 지냈다. 이때 김근사(金謹思)가 제조(提調)로 있었는데, 장례 물품을 사적으로 베푼 사람 때문에 공이 나라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크게 노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이 완결되고 진계에 오른 뒤에 그 독기를 입었다. 판서와 찬성으로 논핵되어 체차되었다. -

원문

辛卯。〔原注:中宗二十六年〕公三十九歲。

번역

신묘년에 공은 39세였다.

원문

拜司諫院獻納。兼春秋。復拜掌令。遞爲成均司藝。

번역

사간원 헌납을 겸춘추로 삼았다가 다시 장령에 제수하였다. 그리고 체차하여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원문

十月。〔原注:己酉〕陞弘文館校理。

번역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다.

원문

十一月。以侍讀官入侍□經筵。陳□啓沈思順,李沆,金安老,曺繼商等群小之構陷士林之罪狀及己卯奸魁南衮,沈貞構禍之迹。〔原注:詳見原集啓篇〕

번역

11월. 시독관(侍讀官)이 경연에 입시하여, 진계(陳啓)를 올렸다. - 심사순(沈思順), 이항(李沆), 김안로(金安老), 조계상(曺繼商) 등 여러 소인들이 사림을 모함한 죄상 및 기묘년 간악한 괴수 남곤(南衮)과 심정(沈貞)이 화를 일으킨 자취에 대하여. 원주(原注)에는 《원집계편(原集啓篇)》에 상세히 보인다. -

원문

壬辰。〔原注:中宗二十七年。開國一百四十一年。皇紀二千一百九十二年。明世宗嘉靖十一年。西曆一千五百三十二年。〕公四十歲。

번역

임진년 - 원주(原注)에 “중종 27년이다. 개국 141년이다. 황기(皇紀)는 고, 명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11년이며, 서력은 다.” 하였다. - 공이 40세였다.

원문

三月。遷司憲府執義。

번역

3월에 사헌부 집의를 옮겼다.

원문

癸巳。〔原注:中宗二十八年〕公四十一歲。

번역

계사년에 공이 41세가 되었다.

원문

二月。遷弘文館副應敎。是月。陞典翰。

번역

2월.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로 옮겨졌다. 이달에 전한(典翰)으로 올랐다.

원문

五月。〔原注:丁卯〕□特命超四階。拜司諫院大司諫。先是。公出入臺閣。論及己卯用事臣及福城之罪。雖人所難言。直不忌諱。物議韙之。超階□特授。允協衆望。

번역

5월. - 원주(原注)에 정묘년이라고 되어 있다. - 특별히 4품으로 뛰어넘어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대각(臺閣)을 출입하면서 기묘년에 일을 처리한 신하들과 복성(福城)의 죄를 논하였는데, 비록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곧장 꺼리지 않고 숨기지 않아서 여론이 그를 칭찬하였다. 품계를 뛰어넘어 특별히 제수하니 참으로 여러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원문

九月。〔原注:庚申〕拜弘文館副提學。

번역

9월. - 원주(原注)에 ‘경신년이다.’라고 하였다. -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원문

甲午。〔原注:中宗二十九年〕公四十二歲。

번역

갑오년에 공이 42세가 되었다.

원문

三月。〔原注:戊子〕復拜大司諫。因言事遞。公言時政。觸三公。三公詣□闕辭職者三日。竟出公爲江原道觀察使。○朴佐郞達。己卯後棄官居江陵。是時公就訪之。退語人曰。斯人玉壺秋水。〔原注:見鄭文翼公遺稿〕

번역

3월. 원주(原注)에 무자년이다.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언사를 인하여 체차되었다. 공이 시정(時政)을 말하다가 삼공(三公)의 비위를 거슬러, 삼공이 궐에 나아가 사직한 지 3일 만에 마침내 공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 박좌랑 달은 기묘년 이후로 벼슬을 버리고 강릉에 살았다. 이때 공이 찾아가서 문안하고 물러나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옥호(玉壺)와 추수(秋水)이다.”라고 하였다. 원주에는 정문익공의 유고에 보인다.

원문

乙未。〔原注:中宗三十年〕公四十三歲。

번역

을미년 - 원주(原注)에는 중종 30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43세였다.

원문

春。巡域至江陵連谷倉。拈韻懸板。〔原注:詩見原集〕

번역

봄에 강릉 연곡창(連谷倉)에 이르러 시를 지어 현판을 걸었다.- 원문에는 주석이 없다. -

원문

四月。承□召。復拜副提學。

번역

4월. □소(□召)를 받들어 부제학에 다시 제수되었다.

원문

六月。〔原注:丙辰〕拜承政院同副承旨。尋陞右副承旨。

번역

6월. - 원주(原注)에 병진년이다.-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곧바로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원문

丙申。〔原注:中宗三十一年〕公四十四歲。

번역

병신년 - 원주에는 중종 31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44세였다.

원문

四月。〔原注:壬子〕拜爲承政院左副承旨。

번역

4월. - 원주(原注)에 임자년이다. - 승정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원문

四月。〔原注:乙丑〕承□命。指揮六陣閱兵。是日。□上親臨閱武于慕華館。以長蛇,鶴翼,魚鱗,鳥雲,偃月,却月六陣。□命公指揮。罷陣後又□命行方革騎射擊毬射毬。旣畢。□命公賞□賜居首者。公素兼武才。有□特命也。

번역

4월. ○ 을축년에 승명공이 6진을 지휘하여 열병하였다. 이날 □가 직접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무예를 살폈다. 장사(長蛇), 학익(鶴翼), 어린(魚鱗), 조운(鳥雲), 연월(偃月), 각월(却月) 6진을 승명공에게 지휘하도록 명하였다. 진법을 파한 뒤에 또 □가 직접 방혁기(方革騎)와 격구(擊毬)ㆍ사구(射毬)를 행하게 하였다. 마치고 나서는 □가 공에게 상을 주어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 하사하였다. 공이 평소 무예에도 재주가 있어 □가 특별히 명한 것이다.

원문

五月。〔原注:庚午〕□上幸東郊觀稼。公啓以御乘馬太疾。扈從難及。□上許不御。

번역

○ 5월. ○ 원주(原注)에 ‘경오년이다.’라고 하였다. □ 상이 동교(東郊)에 행차하여 농사를 살폈다. 공이 아뢰기를, “어승마(御乘馬)가 너무 빨라서 호종(扈從)이 미치기 어렵습니다.” 하니, □ 상이 말에 타지 않도록 허락하였다.

원문

十二月。〔原注:庚午〕復拜大司諫。〔原注:公行狀。載丁酉年以禮曹參議。復拜大司諫云。按李朝實錄。是日。復拜大司諫。從實錄書之。〕

번역

12월. - 원주(原注)에 ‘경오년’이라 하였다. -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 원주에 “공행장(公行狀)에 정유년에 예조 참의로 있다가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조실록》을 상고하니, 이날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므로 실록대로 쓴다.” 하였다. -

원문

丁酉。〔原注:中宗三十二年〕公四十五歲。

번역

정유년-원주(原注)에는 중종 32년이라고 하였다.-에 공이 45세가 되었다.

원문

五月。申救鄭文翼公光弼。時金安老方用事。忌文翼欲構陷而難其名。適有以□禧陵水石之說□啓上者。〔原注:李文楗〕安老乘隙。發遷卜之議。聲勢甚張。事將不測。公深思可救之方。自第具諫草。率同僚以□啓。俄得輕論。〔原注:禧陵之役。文翼公主之。明宗壬戌。移葬靖陵。〕

번역

5월. 신구(申救) 정문익공 광필(鄭文翼公光弼)이,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문익을 모함하려고 하였으나 그 이름을 밝히기 어려웠다. 마침 희릉(禧陵)의 수석(水石)에 관한 설을 가지고 계상(啓上)한 자가 있었는데, 원주에는 이문협(李文楗)이라고 되어 있다. 안로가 틈을 타서 옮겨 장사 지낼 것을 건의하여 그 기세가 매우 거세져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이 깊이 생각하여 구제할 방도를 마련하고 집에서 간초(諫草)를 갖추어 동료들을 이끌고 계상하니, 곧 가벼운 논의로 결론이 났다.-원주에 희릉의 역은 문익공주가 지냈으며 명종 임술년에 정릉으로 옮겨 장사 지냈다.-

원문

十月。□特命除刑曹參判。□賜階嘉善。公與梁贊成淵。同入淸齋。時權奸益熾。〔原注:指金安老〕公語及時事。梁公就執公手曰。令公先見。本如神龜。旣而。梁公爲都憲。相謀擊去安老。

번역

○ 10월. □ 특명으로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려 주었다. 공이 양 찬성 연(梁贊成淵)과 함께 청재(淸齋)에 들어갔는데, 이때 권세가 있는 간신이 더욱 성하였다.-원주(原註)에 김안로(金安老)를 가리킨다.-공이 시사(時事)를 언급하자 양공이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영공은 선견지명이 신귀(神龜)와 같으시구려.” 하였다. 얼마 뒤에 양공이 도헌(都憲)이 되자 서로 모의하여 안로를 쳐서 제거하였다.

원문

是歲。胄孫蓍孫。生于京第。

번역

이해에 주손(胄孫)과 시손(蓍孫)이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원문

戊戌。〔原注:中宗三十三年〕公四十六歲。

번역

무술년- 원주(原注)에는 중종 33년이라고 되어 있다. -공이 46세였다.

원문

七月。〔原注:丁亥〕兼五衛都總管。出爲京畿觀察使。時畿內有不祥之獄。有管內人士之連名狀。公審悉訪之。不用刑杖。得情上讞□朝廷。卽處以律。朝中大相服公猛斷。又有伸理冤獄之事。後有聞公訃音。老嫗夜哭。說其活命之恩。〔原注:事俱見公行狀〕

번역

7월. 원주(原注)는 정해년이다. 겸오위도총관이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경기 안에 불상한 옥사가 있어 관내의 인사들이 연명으로 장계하였는데, 공이 자세히 조사하고 형장(刑杖)을 쓰지 않고 실정을 알아내어 조정에 보고하니, 즉시 법률대로 처결하였다. 조정에서 크게 공의 과단성을 복종하였고, 또 억울한 옥사를 변론해 주는 일이 있었다. 뒤에 공의 부음이 들리자 노모가 밤중에 곡하며 그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말하였다.-원주에는 이 일들이 모두 공의 행장(行狀)에 보인다.-

원문

十一月。〔原注:戊子〕上書狀。啓廣州牧使林千孫不治之狀。坡州牧使沈光彥善治之蹟。□上卽褒貶。

번역

상서장(書狀)을 올려 광주 목사(廣州牧使) 임천손(林千孫)이 다스림이 좋지 못한 실상을 아뢰고, 파주 목사(坡州牧使) 심광언(沈光彦)이 잘 다스린 공적을 아뢰니, 상이 즉시 포폄하였다.

원문

己亥。〔原注:中宗三十四年〕公四十七歲。

번역

기해년 - 원주(原注)에는 중종 34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47세였다.

원문

六月。□特命超階資憲。授刑曹判書。公自顧驟陞。懇辭遞知中樞。是月。拜漢城府右尹。尋陞左尹。

번역

6월. □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를 뛰어넘게 하고 형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공이 스스로 갑자기 승진한 것을 돌아보고 간절히 사양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체차하였다. 이달에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다가 곧 좌윤으로 승진하였다.

원문

九月。拜司憲府大司憲。公以刑獄多濫。□啓請刊頒棠陰比事〔原注:決訟要綱〕於中外。以謹用刑。□上從之。卽□命刊布。

번역

9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공이 형옥(刑獄)에 관한 일이 많아 함부로 행하는 것을 문제 삼아 계청하여 《당음비사(棠陰比事)》〔원주에는 결송요강(決訟要綱)이라고 되어 있다.〕를 중외에 간행하여 반포해서 형벌을 신중히 쓰도록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고 즉시 명하여 간행하여 반포하였다.

원문

十月。因臺論辭遞。□上臨朝命招。公牢辭不就。〔原注:見李朝實錄〕

번역

○ 10월. 대간의 논사(論辭)로 인하여 ○ 임금이 조정에 나아오라고 명하였으나, 공이 굳게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원주(原註)에 보인다.-

원문

十一月。□上以西方重。特除公觀察平安道。時咸鏡北道節度有缺。□上欲遞西送北。從大臣議。兼帶咸鏡道連帥以往。辭闕。□上曰。知卿發行。欲引見而適因國忌未果也。平安道近來凶荒連仍。赴京使臣絡繹不絶。軍民凋殘。驛路困弊。莫甚於此。時天使之來。每當農時。民困於輸運卜馱。轉轉失業。令各官百姓。次次相轉。使不役久。庶使生民得蘇。卿其體予至意。公下車。撫禦得宜。軍民兩安。○蘇贊成世讓。贈送行詩。〔原注:詩見原集贈詩篇〕

번역

11월. ○ 상이 서방(西方)의 중함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공관찰사 평안도 관찰사를 제수하였다. 이때 함경북도 절도사가 비었으므로, 상이 서쪽에서 북쪽으로 옮기려고 하였는데 대신들의 의논을 따라 겸대함경도연수(兼帶咸鏡道連帥)로 보냈다. 사직하러 갔을 때에 상이 말하기를, “경이 출발하는 것을 알고서 인견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국기(國忌)가 있어 이루지 못하였다. 평안도는 근래 흉년이 계속되어 서울로 가는 사신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군민이 피폐하고 역로가 고달픈 것이 이보다 심한 곳이 없다. 때때로 사신이 올 때마다 농사철을 당하여 백성들이 수송과 운반에 시달려 생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각 관청의 백성들로 하여금 차례차례 바꾸어 일하게 해서 부역하는 기간이 오래되지 않게 하면 백성들이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공무를 마치고 돌아가서 잘 다스려 군민이 모두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 소 찬성 세양(蘇贊成世讓)이 시를 주었다.- 원주(原注)에 “시는 《원집증시편(原集贈詩篇)》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

원문

庚子。〔原注:中宗三十五年〕公四十八歲。

번역

경자년 - 원주(原注)에는 중종 35년이다.- 공이 48세였다.

원문

春。巡域到江界。拈韻揭板於客舍。〔原注:詩見首篇〕

번역

봄에 강계(江界)에 이르러 객사에서 시를 읊고 게판(揭板)하였다.-원주(原註)에 “시가 첫 번째 편에 보인다.” 하였다.-

원문

夏。課市民捕蠅。頒牛疫方。〔原注:見平壤誌〕

번역

여름에 백성들에게 파리 잡는 법을 가르치고 우역(牛疫) 치료법을 반포하였다.- 원주(原註)에 “평양지(平壤誌)에 보인다.” 하였다. -

원문

辛丑。〔原注:中宗三十六年〕公四十九歲。

번역

신축년 - 원주(原注)에는 중종 36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49세이다.

원문

九月。〔原注:甲申〕□特命超資爲漢城府判尹。啓遞。仍任西伯。〔原注:史註。公以平安道觀察使。特命超資爲判尹。物論以內輕外重啓遞。仍任。〕

번역

9월. - 원주(原注)에 갑신년으로 되어 있다. - 특명으로 자급을 뛰어넘어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체차되었다. 이어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 사주(史註)에 “공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특명으로 자급을 뛰어넘어 판윤이 되었는데, 여론에서 안으로는 가볍게 여기고 밖으로는 중하게 여긴다고 아뢰어 체차하고 이어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하였다. -

원문

壬寅。〔原注:中宗三十七年〕公五十歲。

번역

임인년 - 원주(原注)에 중종 37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50세이다.

원문

正月。以鴨綠江唐人漁獲事狀□啓。

번역

1월. 압록강 당인(唐人)의 어획에 관한 일로 장계하였다.

원문

二月。請孝友特行者旌閭狀□啓。□上允之。

번역

2월. 효우(孝友)를 특별히 행한 자에게 정려(旌閭)할 것을 청하는 장계(狀啓)를 올리니, 주상이 윤허하였다.

원문

八月二十四日。嗣子宣務郞夭逝。公傷歎曰。吾平生無害物事。獨於平壤。誅蠅太多。〔原注:平壤素多蠅汚。公監司時。課民捕蠅。時市廛有賣蠅者。〕是爲報歟。以文哭之。〔原注:祭文見原集〕

번역

8월 24일, 사자(嗣子) 선무랑(宣務郞)이 요절하였다. 공이 슬퍼하며 탄식하기를, “내가 평생에 해로운 일은 없었는데 유독 평양에서 파리 잡는 일이 너무 많았으니〔原注〕 평양에는 본래 파리가 많이 생겨 더러웠다. 공이 감사로 있을 때 백성들에게 파리를 잡도록 과업을 주었으며, 때로는 시장에서 파리를 팔기도 하였다.〔平壤素多蠅汚。公監司時課民捕蠅。時市廛有賣蠅者。〕 이것이 보응인가.” 하고, 문곡(文哭)하였다.-원주에 제문이 보인다.-

원문

癸卯。〔原注:中宗三十八年〕公五十一歲。

번역

계묘년에 공이 51세가 되었다. 주126 원주에는 ‘중종 38년’이라 하였다.

원문

春。陞知中樞。

번역

봄에 지중추부사로 올랐다.

원문

六月。轉工曹判書。

번역

전공조 판서(轉工曹判書)를 보냈다.

원문

八月。□特命拜兵曹判書。

번역

○ 8월. □ 특명으로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원문

甲辰。〔原注:中宗三十九年〕公五十二歲。

번역

갑진년에 공이 52세가 되었다.

원문

二月。〔原注:辛卯〕□特命拜議政府右贊成。

번역

2월. - 원주(原注)에 ‘신묘년이다.’라고 하였다. - 특명으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었다.

원문

二月。〔原注:癸巳〕因臺論辭遞。○是日。諫院□啓曰。右贊成尙某。爲資憲未久。遽陞貳公重地。未洽物情。請改正。□上答曰。尙震爲資憲雖未久。人物可用則可計資歷之久近乎。已經六卿。踐歷且久。不須改正。諫院,憲府累啓。□上曰。今姑從請。此人終可大任。□特識公名于□御座右。以寓□宸衷。

번역

○ 이달. 계사년에 대간의 논핵으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 이날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우찬성 상모가 자헌대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이공(貳公)의 중한 자리에 올랐으므로 물정(物情)에 맞지 않으니, 고치소서.” 하니, □ 상이 답하기를, “상진이 자헌대부 된 지는 비록 오래되지 않았으나 인물로 볼 때 쓸 만하다면 자력(資歷)의 구근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이미 육경(六卿)을 거쳤고 치적도 오래되었으니 고칠 필요 없다.” 하였다. 간원과 사헌부에서 누차 아뢰자, □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우선 청대로 하라. 이 사람은 끝내 큰 임무를 맡길 만하다.” 하고, □ 특별히 공의 이름을 □ 어좌(御座) 오른쪽에 써서 □ 성상의 마음을 붙였다.

원문

四月。〔原注:辛卯〕拜爲知敦寧府事。

번역

4월. - 원주(原注)에 ‘신묘년이다.’라고 하였다. - 지돈녕부사에 제수되었다.

원문

五月。〔原注:己未〕拜刑曹判書。

번역

5월. - 원주(原註)에 ‘기미년이다.’라고 하였다. - 형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원문

九月。〔原注:壬戌〕承□召詣賓廳。論斥尹任,尹元衡黨比私議事。

번역

9월. - 원주(原注)에 임술년이다. - 빈청(賓廳)에 나아가 윤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의 당비(黨比)가 사사로이 의논한 일을 논척(論斥)하였다.

원문

十一月。〔原注:己酉〕□上體不豫。詣□闕問安。□啓請釋囚事。〔原注:按李朝實錄。是日。□世子以書示于諸宰曰。□上證日數已久。藥不見效。罔極之憫。爲何如哉。以恤囚之意。再三懇達。尙未蒙□允云。於是議□啓。〕

번역

○ 상체(上體)가 좋지 않으셨다. ○ 궁궐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 죄수를 풀어 주기를 청하는 일로 아뢰었다. 【원주】 이조실록(李朝實錄)을 살펴보니, 이날 세자가 여러 재신에게 서면으로 알리기를 “상체께서 증세가 앓으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약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계시니, 망극한 슬픔이 어떠하겠는가. 죄수를 돌보아 주자는 뜻을 거듭 간절히 아뢰었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논하여 아뢰었다.

원문

十一月十五日酉時。□上昇遐于欽慶殿小寢。公與諸宰。詣□闕擧哀。

번역

11월 15일 유시(酉時)에 □가 올라가서 흠경전(欽慶殿) 소침(小寢)에 계셨다. 공이 여러 재신과 함께 □궐에 나아가 거애(擧哀)하였다.

원문

十一月十七日。奉審□殯殿。同諸宰開視□誥命而還。

번역

11월 17일 빈전(殯殿)을 봉심(奉審)하고, 여러 재신과 함께 고명(誥命)을 열어 보고 돌아왔다.

원문

十一月十九日。□大行大王大斂禮。入哭而出。

번역

11월 19일. □ 대행대왕(大行大王)의 대렴례(大斂禮)에 들어가 곡하고 나왔다.

원문

十一月二十八日。詣□闕參行成服奠。進賀□嗣位大禮。〔原注:按實錄。是日。□上居依廬。群臣皆易朝服就班。而陳鹵薄于明政殿。承旨奉□遺敎前導。史官隨之。百官繼入。就□殯殿。招內侍曰。時已至。請陳□遺敎。兼排設。內侍出曰。嗣王哀痛之極。無冕服之意。諸宰直入廬次門外。左右相□啓于慈殿曰。今者宗室及臺諫,弘文館長官與六卿皆已入來。此不可直入之處。然悶極故入來矣。乞更請。又□啓于嗣王曰。今日大禮。不以時退。朝廷諸臣。皆會于此。反覆計之。不可如此稽緩。內侍以嗣王之意出曰。有嘔逆證。夕奠不得哭臨。此意幷知悉。暫爲調理。當依所啓。諸臣皆退外庭。日已暮矣。□嗣王以冕服出次。左通禮引出殯殿前受□遺敎。□慈殿傳曰。昭信寶與大寶。同入一匣。今特幷與外匣而陳之則恐爲陋破。只於小褓裹出大寶爲當。承旨,禮官等奉進受寶如儀。卽位于昌慶宮。御明政殿。受群臣賀。宗親及文武百官。皆就于明政殿東西庭。通禮詣泰和門外。□啓請出次。時已昏黑。明燭乃出。太僕進轝。□上却而不御。行步至御座側。不忍當尊。良久鞠躬而立。承旨進前□啓曰。陞座然後群臣得以進賀。今不陞座。難以成禮。□上於是黽勉陞座而猶不安御。哀痛之極。泣下如瀉。左右廷臣。莫不嗚咽流涕。禮畢。□上又步入廬次。釋冕服。反喪服。〕

번역

11월 28일. □궐에 나아가 성복전(成服奠)을 행하고, 진하(進賀)와 □사위대례(嗣位大禮)를 행하였다.-원주(原注)에 “실록(實錄)을 살펴보니, 이날 □ 상이 여막에 계시므로 신하들이 모두 조복으로 갈아입고 반열에 나아가 명정전(明政殿)에 노박(鹵薄)을 진설하였는데, 승지가 □의 유교를 받들고 앞장서고 사관이 뒤따르며 백관이 이어 들어와 □의 빈전에 나아갔다. 내시를 불러 ‘시간이 되었으니 □의 유교를 진설하고 겸하여 배설(排設)하라.’ 하니, 내시가 나와 말하기를 ‘사왕께서 애통함이 극도에 달해 면복을 입으실 뜻이 없으십니다.’ 하였다. 여러 재신(宰臣)이 곧바로 여막의 문밖으로 들어가 좌우에서 서로 □하여 자전께 아뢰기를 ‘지금 종실과 대간, 홍문관 장관과 육경(六卿)이 모두 이미 들어왔으니 이곳에 곧장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매우 근심스러워서 들어왔습니다. 다시 청하소서.’ 하였다. 또 □가 사왕에게 아뢰기를 ‘오늘의 대례를 제때에 물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서 반복하여 헤아려 보았으나 이와 같이 지체할 수 없었다. 내시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나와 말하기를, “구역질이 나는 증세가 있어서 석전(夕奠) 때 곡을 하며 임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러한 뜻을 모두 알고 잠시 조리한 다음 마땅히 아뢴 대로 해야 할 것이었다. 신하들이 모두 외정으로 물러나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 왕이 면복을 입고 나와서 좌통례(左通禮)가 빈전 앞으로 인도하여 유교를 받았다. ○ 자전께서 전하기를, “소신보와 대보를 함께 하나의 갑에 넣었는데 지금 특별히 외갑과 함께 진열하면 누추하고 파손될까 염려되니, 다만 소포(小褓)에 대보만 싸서 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승지와 예관 등이 의식대로 보배를 받들어 올리자 즉시 창경궁으로 자리를 옮겨 명정전에 나아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종친 및 문무백관이 모두 명정전의 동서쪽 뜰에 나아갔다. 통례가 태화문 밖에 나아갔다. □ 계청(啓請)하여 출차(出次)하였다. 때가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밝은 촛불을 비추고서 태복이 가마를 내왔다. □ 상이 마주하고 돌아선 채 타지 않고 걸어서 어좌의 곁에 이르렀는데, 차마 존호를 받들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몸을 굽히고 서 있자 승지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어좌에 오르신 뒤에야 신하들이 진하(進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어좌에 오르지 않으시면 예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 상이 이에 힘써 어좌에 올랐으나 여전히 편안히 앉지 못하였다. 슬픔과 애통함이 극에 달하여 눈물이 쏟아져 내리니, 좌우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흐느껴 울었다. 예가 끝나자 □ 상이 또 걸어서 여차(廬次)로 들어가 면복을 벗고 반상복(反喪服)을 입었다.

원문

乙巳。〔原注:仁宗元年〕公五十三歲。

번역

을사년 - 원주(原注)에는 ‘인종(仁宗) 1년’이라고 하였다. - 공의 나이 53세이다.

원문

正月十五日。配貞敬夫人全州李氏捐世。

번역

정월 15일에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세상을 떠났다.

원문

夏。遞同樞。出爲慶尙道觀察使。忌公者託辭以嶺南巨服。必須剸煩才爲治。而出公也。公自下車。發匿治姦。酬決如流。一境大治。李文元公彥迪。深加贊服。公在外藩。而深憂□王室之疑危。有詩曰。安危大臣在。何恨滯江湖。〔原注:時仁宗孤危。尹元衡,李芑輩。內附於文定大妃。有疑危之勢。〕

번역

여름에 동지중추부사에서 체차되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공무를 꺼리는 자가 영남은 큰 옷을 입어야 하니 반드시 번거로움을 덜어내야만 다스릴 수 있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러나 공이 나가서는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간사한 무리를 적발하여 처결하기를 물 흐르듯 하여 온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다. 이 문원공(李文元公) 윤언적(尹彦迪)이 깊이 찬탄하였다. 공이 지방에 있으면서도 왕실의 위태로움을 매우 근심하여 시를 읊기를, 나라의 안위는 대신에게 달렸으니 어찌 강호에 머무는 것을 한하랴하였는데, 원주(原注)에 이르기를, “당시 인종(仁宗)이 외롭고 위태로워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이 문정대비(文定大妃)에게 내분을 붙여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형세가 있었다.” 하였다.

원문

七月朔卯時。□上昇遐于淸宴樓下小寢。〔原注:按實錄。此日。中殿以諺書□大行王□遺敎。付諸注書,承旨,史官等。環坐披讀。莫不痛哭。乃喪葬朴素。務除民弊之意也。史官曰。嗚呼痛哉。□大行王□遺敎。可忍觀哉。愛民之念。不弛聖懷。病革。歎曰。生民終何如也。臨薨。又以除民弊爲□敎。蓋以□中宗喪後山陵纔畢。繼以四使,明使之役。一國民生。財力已盡。□聖念之懇懇不已。夫豈非以是而切于中也。天假之以年。使其仁心仁政大展於吾東。則其治化可量哉。天不佑東。使吾民不得蒙至治之澤。痛哉。〕

번역

7월 초하루 묘시(卯時)에 □가 청연루(淸宴樓) 아래 소침(小寢)으로 올라갔다. ○ 원주(原注)를 상고하면, 《실록》에 “이날 중전이 언문으로 된 대행왕의 유교(遺敎)를 주서(注書), 승지, 사관 등에게 주어 둘러앉아 펼쳐 읽게 하였는데 모두 통곡하였다. 이는 장례를 소박하게 치르고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하는 데 힘쓰라는 뜻이었다. 사관이 ‘아, 슬프다! 대행왕의 유교를 어찌 차마 보겠는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성상께서 잊지 않으셨는데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면서도 탄식하기를 「백성들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하셨고, 임종하시기 전에 또 폐단을 제거하라는 유교를 내리셨다. 이는 대개 중종(中宗)의 상(喪)을 치른 뒤에 산릉(山陵)이 막 끝나자 이어서 사신과 명사(明使)의 일이 있었으므로 온 나라 백성들의 재력이 이미 다하였기 때문이다. 성상의 간절한 마음이 어찌 이 때문에 가슴 아프셨겠는가. 하늘이 우리에게 수명을 주어 그 인심과 인정을 우리나라에 크게 펼치게 하였으니, 그 치화(治化)를 헤아릴 만하다. 그러나 하늘이 동방을 돕지 않아 우리 백성들이 지극한 다스림의 은택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니 슬프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원문

七月。公還□朝。哭□大行大王殯殿。肅拜□嗣王。退□闕還營。

번역

7월. 공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 대행대왕(大行大王) 빈전(殯殿)에 곡하고, 사왕(嗣王)에게 숙배하였다. 궁궐에서 물러나 영으로 돌아왔다.

원문

八月。誣獄大起。公在嶺藩而士禍作。以是得免焉。〔原注:按史錄。中宗末年。□仁宗在東宮。長而無嗣。□嗣王幼爲大君。時尹任。世子之舅也。雖以武進。而與士類合心以輔王室。尹元衡,元老。大君之舅也。陰毒嗜利。見棄淸類。常憤嫉士林。遂有大小尹之稱。任爲大尹。而元衡爲小尹。金安老用事。以保護東宮爲名。欲以傾中宮。奏放元衡兄弟矣。安老之得罪。任與有功焉。元衡兄弟旣還朝。流言日播。東宮甚不自安。中宮亦以大君爲危。李芑陰進安固之計。以結元衡兄弟。□中宗嘗謂大臣曰。兩尹自相朋黨。一爲□世子。一爲大君。甚不可。遂幷黜之。□仁宗嗣位。朝野想望至治。善類稍進。而柳灌爲領袖。遂擢左相。柳仁淑爲吏曹判書。尹任以前贊成爲刑判。灌感激知遇。盡心國事。仁淑爲人剛直。援引名類。群小之見擯者。皆附元衡。□仁宗大漸。語大臣曰。□先王嫡子。惟吾與大君而已。吾歿。可立大君。至是。元衡欲乘時構禍。與李芑,鄭順朋,林百齡,許磁,金光準造言曰。柳灌,柳仁淑,尹任。欲謀叛廢□主上。立鷄林君瑠。且憚鳳城君岏之賢。亦指以爲姦臣推戴。遂入告慈殿。密旨欲罪尹任等。元衡囑臺諫。皆不從。遂與芑,順朋,百齡,磁等。詣廷院告變。逮三人安置。尋皆殺之。臺諫不從者皆竄配。元衡等皆錄衛社功臣。明日。殺鳳城君。連起大獄。一時士類。鮮有脫者。凡巷議之異己者。輒指以爲逆。又恐元老爭權。囑有司論罪殺之。元衡威勢大振。擅弄國權。〕

번역

8월. 무고한 옥사가 크게 일어났다. 공이 영남에 있으면서 사화가 일어나, 이로 인하여 면하게 되었다.-원주(原注) : 《사록(史錄)》을 살펴보니, 중종 말년에 □ 인종(仁宗)이 동궁에 계시다가 장수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 사왕(嗣王)이 어려서 대군이 되었는데, 이때 윤임(尹任)은 세자의 외숙이었다. 비록 무진(武進) 출신이지만 선비들과 마음을 합하여 왕실을 보좌하였다. 윤원형(尹元衡)과 윤원로(尹元老)는 대군의 외숙으로 음흉하고 탐욕스러워 청렴한 사람들을 버리고 항상 사림을 미워하였으므로 마침내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칭호가 있었다. 임은 대윤이 되고 원형은 소윤이 되었다.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동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궁을 무너뜨리고자 하여 원형 형제를 풀어 주기를 아뢰었다. 안로가 죄를 얻는 데에는 임과 공이 있었다. 원형 형제가 조정에 돌아오자 유언비어가 날로 퍼져서 동궁은 매우 불안해하였고, 중궁 또한 대군을 위태롭게 여겼다.- 이기(李芑)가 음험하게 진안(進安)과 원형(元衡)의 계책을 굳히고서, ○ 중종(中宗)이 일찍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두 윤(尹)은 서로 친한 무리로 한 명은 세자를 위하여, 한 명은 대군을 위하여 하니 매우 옳지 않다.” 하고 마침내 모두 내쳤다. ○ 인종(仁宗)이 왕위를 계승하자 조정과 민간에서 태평성대를 바라는 기대가 지극하여 선량한 무리가 조금씩 진출하였는데, 유관(柳灌)이 우두머리가 되어 드디어 좌상이 되었고, 유인숙(柳仁淑)은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윤임(尹任)은 전 찬성으로 형조 판서가 되었다. 유관은 은혜를 입은 것을 감격하여 국사에 마음을 다하였고, 인숙은 사람됨이 강직하여 명망 있는 무리를 끌어다 썼으므로 소인들이 배척당한 자들은 모두 원형에게 붙었다. ○ 인종이 대상을 당하여 대신에게 이르기를, “선왕의 적자(嫡子)는 오직 나와 대군뿐이니 내가 죽으면 대군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원형이 기회를 틈타 화를 일으키려고 이기, 정순붕(鄭順朋),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김광준(金光準)과 함께 말을 지어 올리기를,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윤임(尹任)이 폐위시키고 주상을 모반하려고 계림군(鷄林君) 유루(柳瑠)를 세우려 하였는데, 또한 봉성군(鳳城君) 유숙(岏)의 어짊을 꺼리고 또 간신이라고 지목하여 추대하였다. 마침내 자전(慈殿)에 들어가 고하고는 비밀스러운 전지(傳旨)로 윤임 등을 죄주려고 하였으나, 원형이 대신(臺臣)과 사간(司諫)에게 부탁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 마침내 유기(柳芑), 순붕(順朋), 백령(百齡), 자(磁) 등과 함께 승정원에 나아가 변고를 고하여 세 사람이 안치되자 곧 모두 죽였다. 대신과 사간으로 따르지 않은 자들은 모두 찬배(竄配)되었고, 원형 등은 모두 녹위사공신(錄衛社功臣)이 되었다. 이튿날 봉성군을 죽이고 연이어 큰 옥사를 일으켜 한때의 선비들 가운데 탈인(脫人)이 드물었다. 무릇 여론이 자신과 다른 자는 곧바로 역적이라고 지목하였고, 또 원로가 권력을 다툴까 두려워하여 유사에게 부탁하여 논죄하고 죽였다. 원형의 위세가 크게 진작되어 국권을 마음대로 농단하였다.

원문

九月。□徵還錄崇政陞吏曹判書。〔原注:按實錄。乙巳九月。春秋館奉□敎撰錄。尙某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而公行狀則丙午元月。以議政府右參贊徵還云。今從實錄書之。〕

번역

9월. □ 징환록(徵還錄)을 숭정대부로 승진시키고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원주(原注) : 《실록》을 상고하니, 을사년 9월에 춘추관에서 교서를 받들어 지은 《봉교지춘추관등록》에 “상모(尙某)는 숭정대부 행 이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이다.”라고 하였는데, 공행장에는 병오년 1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징환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실록》을 따라 기록한다. -

원문

十月。〔原注:乙亥〕復拜同知中樞府事。

번역

10월. - 원주(原注)에 을해년이다.- 동지중추부사에 다시 제수하였다.

원문

丙午。〔原注:明宗元年〕公五十四歲。

번역

병오년-원주(原注)에 명종(明宗) 원년이라고 하였다.-공이 54세였다.

원문

元月十五日。拜議政府右參贊。兼帶摠府。

번역

1월 15일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고, 겸하여 총부를 맡았다.

원문

三月。陞階正憲。加知春秋館事。與修□中,仁二聖實錄。

번역

3월.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리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더하고, 《수정중인성실록(修撰中仁聖實錄)》을 편찬하였다.

원문

八月。兼知義禁府事。

번역

8월. 겸지승지(兼知承旨)로 의금부사를 지냈다.

원문

九月。〔原注:丁巳〕□特命復拜兵曹判書。

번역

9월. - 원주(原注)에 ‘정사년’이라 하였다. - □ 특명으로 병조 판서에 다시 제수하였다.

원문

丁未。〔原注:明宗二年〕公五十五歲。

번역

정미년 - 원주(原注)에는 명종(明宗) 2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55세였다.

원문

正月。陳□啓備邊之策於□經席。□上從之。特書下諭于八道監司,兵,水使處。〔原注:按實錄。□明宗二年丁未正月己巳。□上御朝講。以備邊事書于八道觀察使及兵,水使曰。變生所忽。古今通患。安則忘危。人之常情。往者丙午之亂。蛇項之變。非作於絶和之時。皆出於和親之日。斯可鑑戒。今者倭雖已許和。其不虞之變。安保必無。防備之策。固不可少弛。常如敵至。罔或少忽。先是。兵曹判書尙某。建議於□經席以備邊之事。故下諭云。〕

번역

정월에 진(陳)이 계비변책을 경연에서 아뢰니, 상이 따랐다. 특별히 팔도 감사와 병사, 수사에 하유를 쓰셨다.-원주(原注)에 “실록을 살펴보니, 명종 2년 정미월 기사일이다. 상이 조강(朝講)에 나아와 비변사의 일로 팔도의 관찰사와 병사, 수사에게 쓰기를 ‘갑자기 생기는 변고는 예로부터 공통된 근심거리이니,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는 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심리이다. 지난번 병오년의 난과 사옹원의 변고가 화친을 끊은 때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모두 화친하는 날에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거울이 될 만하다. 지금 왜인들이 비록 이미 화친하기를 허락하였으나 뜻밖의 변고가 없을 것이라고 어찌 보장하겠는가. 방비책을 진실로 조금도 해이하게 해서는 안 되니 항상 적이 닥칠 것처럼 하여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라.’ 하셨다. 이보다 앞서 병조 판서 상모(尙某)가 경연에서 비변사의 일에 대해 건의하였기 때문에 하유를 내리신 것이다.” 하였다.-

원문

戊申。〔原注:明宗三年〕公五十六歲。

번역

무신년- 원주(原注)에는 명종 3년이라고 하였다. -공이 56세였다.

원문

二月。辭遞。爲知中樞府事。

번역

2월. 사직하고 체차되었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원문

六月。〔原注:戊戌〕□特陞崇政。爲議政府右贊成。〔原注:以正憲新陞。銓曹之請也。〕

번역

6월. - 원주(原注)에 무술년이다.- □ 특승(特陞)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삼고 의정부 우찬성을 삼았다. - 원주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새로 승진한 것은 전조(銓曹)의 청에 의한 것이다.” 하였다. -

원문

六月。〔原注:甲辰〕辭右贊成。再□啓不□允。

번역

○ 6월. - 원주(原注)에 갑진년이라고 되어 있다. - 우찬성(右贊成)을 사임하였다가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九月。〔原注:辛酉〕入侍夕講。以病辭右贊成。再□啓不□允。

번역

○ 9월. ○ 원주(原注)에 ‘신유년이다.’라고 하였다. 입시하고 저녁 강경을 행하였다. 병으로 우찬성을 사양하였으나 재차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己酉。〔原注:明宗四年〕公五十七歲。

번역

기유년 - 원주(原注)에는 명종 4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57세였다.

원문

正月。復拜吏曹判書。加判義禁府事。

번역

이조 판서와 판의금부사에 다시 제수하였다.

원문

三月。〔原注:壬辰〕□中,仁二聖實錄稿洗。□賞賜奴婢,田畓,家舍一座,熟馬一匹。

번역

인2성실록고세(仁二聖實錄稿洗)를 세척하였다. 상으로 노비, 전답, 가사 1좌, 숙마 1필을 주었다.

원문

八月。〔原注:丙辰〕承□召入對于思政殿。□上下敎以仁恕之罪狀。公與諸宰論斥。

번역

8월. - 원주(原注)에 병진년이다.- 승지가 소를 받들어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 입대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인서(仁恕)의 죄상을 공과 여러 재신(宰臣)들과 논척하라.” 하였다.

원문

八月。〔原注:乙卯〕□上命召李賢輔,魚得江。公奏請給馬。□上許之。

번역

8월. ○ 을묘년에 상이 이현보(李賢輔), 어득강(魚得江)을 불러서 공주에게 말[馬]을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원문

九月。〔原注:甲申〕卜相爲議政府右議政。階大匡輔國。公膺□命。憂惶跼蹐。再三懇辭。不獲□兪允。

번역

9월. - 원주(原注)에 갑신년이다. - 의정부 우의정에 상의를 정하고 계대광보국(階大匡輔國)으로 삼으려고 명을 내리셨다. 공이 그 명을 받들고는 근심스럽고 황공하여 두려워하며 재삼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원문

十月。〔原注:癸卯〕公與吏判尹漑。奉□命看審□靖陵。還□啓曰。相地官三人。〔原注:李淇煥,李龜相,金洙〕各有所見。而皆吉云。□上傳旨于公曰。曾聞□靖陵不吉。常懷未安矣。今者往審詳密。予意釋然。

번역

10월. 원주(原注)에 계묘년이다. 공이 이조 판서 윤개(尹漑)와 함께 명을 받들어 정릉(靖陵)을 간심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상지관(相地官) 세 사람- 원주에 이기환(李淇煥), 이귀상(李龜相), 김수(金洙)이다. -이 각각 소견이 있으나 모두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주상이 공에게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일찍이 듣건대 정릉이 불길하다 하여 늘 마음이 편치 못하였는데, 이제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내 마음에 놓인다.” 하였다.

원문

庚戌。〔原注:明宗五年〕公五十八歲。

번역

경술년 - 원주(原注)에는 명종 5년이라고 하였다. - 공이 58세였다.

원문

二月。〔原注:丙辰〕公以領□經筵事。入侍□朝講。建議北築六鎭城堡。以禦虜患之策。〔原注:詳見原集〕

번역

2월. - 원주(原注)에 병진년이다.- 공이 영경연사로 입시하여 조강을 행하였다. 북쪽의 6진 성보를 쌓아 오랑캐를 막는 계책을 건의하였다. - 원주에 상세하다. -

원문

二月。〔原注:庚申〕入侍□經筵。建白創造船舶。以便南運之策。○公每憂南北邊備虛疏。累度建議訓兵士。繕器械。修城池。造船舶等捍禦外侮之策。而朝論寡和。卒未得成就夙志。常歎國憂未紓。

번역

경연에 입시하여 선박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남쪽으로 운송하는 방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공이 매양 남북 변방의 비어 있고 성글게 된 것을 근심하여 여러 차례 군사를 훈련시키고 기계를 수리하며 성과 못을 쌓고 선박을 만드는 등 외적을 막는 방책을 건의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화합되지 않아 끝내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항상 나라의 근심이 풀리지 않은 것을 탄식하였다.

원문

四月。〔原注:壬子〕承□命施賞科次入格者。此日。上□御慶會樓觀武臣射。出□御題。〔原注:安不忘危。七言律。〕令宗宰,侍臣製進。□命公賞賜科次有差。

번역

4월. 임자년에 상명(上命)으로 시상과차(施賞科次)를 입격한 자에게 상을 내렸다. 이날 주상이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 무신(武臣)의 활쏘기를 관람하고, 어제(御題)를 내었다.- 원주(原注)에 ‘안불망위(安不忘危)’라고 되어 있다. 칠언 율시이다. -종재(宗宰)와 시신(侍臣)에게 지어 올리게 하고, 상명으로 공상(公賞)을 내리고 과차를 차등 있게 주었다.

원문

四月。〔原注:乙卯〕入侍□經筵。□啓陳刑曹取品強奸公事。極論風俗之敗。大司憲趙公士秀啓辭。略同公之意。○〔原注:按史錄。領相李芑之外孫安寬爲桂山君壻。而桂山之奴犯奸。故李芑用情容隱。有狀訴也。〕

번역

경연에 입시하여 형조가 취품(取品)한 강간 공사(強姦公事)를 아뢰고 풍속의 패란함을 극론하였다. 대사헌 조공 사수(趙公士秀)의 계사도 대략 공의 뜻과 같았다. ○ 안: 《사록》을 살펴보니, 영상 이기(李芑)의 외손인 안관(安寬)이 계산군(桂山君)의 사위인데, 계산군의 종이 간음한 죄를 범하였으므로 이기가 정에 끌려 용인하였다. 이에 장소(狀訴)가 있었다.

원문

四月。〔原注:戊寅〕入侍□經筵。論□啓宰臣不可杖律事。略曰。古者刑不及宰相。今檢擧照律。名之曰某杖一百。某杖八十。此甚不美。大臣若有罪則下禁府刑鞫。猶可也。細微命棄之罪則不可與同衆人也。

번역

○ 4월. ○ 원주(原注)에 무인년이다. 경연에 입시하여 계재신에게 장률을 적용할 수 없다는 일을 논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옛날에는 형벌이 재상에게 미치지 않았는데 지금은 거조율(擧照律)하여 ‘모(某)는 장 100이다’, ‘모는 장 80이다’라고 명명하니 이는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대신(大臣)이 만약 죄가 있으면 의금부에 내려 형구하고 국문하는 것이 오히려 괜찮지만, 사소한 일로 버리라는 명을 받은 죄까지도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원문

六月。承□命修改欽敬閣。按十二朔田獵,稼穡等制度。務合於豳風七月之象。〔原注:公時兼帶觀象監提調〕

번역

6월. 승정원 명으로 흠경각(欽敬閣)을 개수하였다. 12월에 사냥하고 농사짓는 등의 제도를 빈풍(豳風)의 7월의 상(象)에 맞추도록 힘썼다.- 원주(原注)에 “공이 이때 관상감 제조를 겸임하였다.”라고 하였다. -

원문

十二月。〔原注:甲戌〕諷諫禪科復設不可意。此日。公因他事詣□闕。□慈殿以備忘記下于公。□命復立禪科。公曰。帝王累德。莫大於崇信異敎。以微辭諷止。而未久兩宗復設。〔原注:史註曰。時宮中方崇佛事。監司鄭萬鍾。引進妖僧普雨。大張佛法。以靖陵報恩寺爲禪宗。光陵奉先寺爲敎宗。自明年復立兩宗。設禪科。節次略倣文科。八道寺刹。一時鼎新。三司爭之。大臣率百官。廷論普雨之罪。竝不允。館學儒生。請誅普雨。屢疏亦未得請。遂空館而去。三公四啓。弘文館五啓。兩司引退。如此汹汹數月之餘。尹元衡,李芑等終不參廷論。蓋不欲逆慈旨也。〕

번역

12월. - 원주(原注)에 갑술년이라고 하였다. - 풍간선과(諷諫禪科)를 다시 설치한 것이 뜻밖이었다. 이날 공이 다른 일로 대궐에 나아갔는데, 자전(慈殿)께서 비망기(備忘記)를 공에게 내려서 선과를 다시 세우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제왕의 덕을 쌓는 데에는 이교(異敎)를 숭상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미한 말로 풍자하여 그만두게 하였는데도 얼마 안 되어 두 종파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하였다. - 원주에 ‘사주(史註)에 이르기를, “이때 궁중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는데, 감사 정만종(鄭萬鍾)이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데려와서 불법을 크게 선양하고 정릉(靖陵)의 보은사(報恩寺)를 선종(禪宗)으로, 광릉(光陵)의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으로 삼았다. 이듬해부터 두 종파가 다시 세워지고 선과가 설치되었는데 절차는 대략 문과(文科)를 모방하였으며, 팔도의 사찰이 일시에 크게 새로워졌다. 이에 삼사(三司)에서 간쟁하고 대신(大臣)은 백관을 거느리고 정론(廷論)하여 보우의 죄를 논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보우를 주벌할 것을 청하며 누차 상소하였으나 또한 허락을 받지 못하고 마침내 헛되이 관학에 머물다가 떠나갔다. 삼공(三公)은 네 번이나 아뢰고, 홍문관은 다섯 번이나 아뢰고, 양사(兩司)는 인퇴(引退)하였는데 이와 같이 시끄럽게 한 것이 몇 달이 지났으나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은 끝내 정론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자전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였다. -

원문

辛亥。〔原注:明宗六年〕公五十九歲。

번역

신해년 - 원주(原註)에 명종 6년이라고 하였다. - 공이 59세였다.

원문

正月。〔原注:乙丑〕詣□闕。論□啓兩宗禪科不可復立事。引前日□啓辭。明辨疑言。因辭職。不允。○前日。公因事詣□闕。兩宗之□命適下。故被人疑。自□上親爲昭雪以曉之。公歎曰。事機之難辨者則學識不明者。是非顚倒無怪。至如佛法之不可復設。明如日星。雖欲逢君不可得。顧以此事見疑。不能取信於人故也。自反而已。復誰咎哉。

번역

○ 1월. ○ 을축년에 □궐에 나아가 두 종사(宗師)의 선과(禪科)를 다시 세울 수 없다는 일로 계사를 논하고, 전날의 계사(啓辭)를 인용하여 의심스러운 말을 분명히 분변한 다음 사직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 이전에 공이 어떤 일로 □궐에 나아갔을 때 두 종사의 선과가 곧 명해 내려졌으므로 남에게 의심을 받았는데, □상(□上)이 친히 소결(昭潔)하여 깨우쳐 주었다. 이에 공이 탄식하기를, “일의 기미를 분변하기 어려운 것은 학식이 분명하지 못한 자가 시비를 전도하는 것이니 괴이할 것이 없다. 불법을 다시 설행할 수 없다는 것은 해와 별처럼 분명하니 비록 임금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일로 의심을 받아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반성할 뿐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하였다.

원문

正月。〔原注:壬寅〕公與左議政沈公連源。率廷府六曹東西班二品以上。再□啓勿復兩宗禪科。□不允。

번역

○ 정월. 임인년에 공이 좌의정 심공 연원(沈公連源)과 함께 승문원의 6조 동반ㆍ서반 2품 이상을 거느리고 재차 선과를 폐지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正月。〔原注:庚戌〕率百官。三□啓勿復兩宗禪科。□不允。

번역

○ 정월. ○ 원주(原注)에 ‘경술’이라 하였다.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이나 계복(啓復)하여 양종(兩宗)의 선과(禪科)를 다시 열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正月。〔原注:乙卯〕率百官。四□啓勿復兩宗禪科。□不允。公終始極諫禪科之不可復。至於率百官四□啓。卒不得回天。歎謂沈相連源曰。兩宗之復。吾二人在職誤國之責。烏能逃乎。

번역

1월. ○ 을묘년에 백관을 거느리고 사대문에서 계문을 올려 선과를 다시 열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를 다시 여는 것이 불가하다고 극구 간언하였는데, 사대문에서 계문을 올리는 데 이르러서는 마침내 천심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에 심상(沈相) 연원(連源)에게 탄식하기를, “두 종실을 복위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직책에 있으면서 나라를 그르친 책임이니 어찌 도망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원문

三月。〔原注:丁酉〕□中,仁二聖實錄編成。自□上賜宴樂於實錄廳。公上箋謝。〔原注:公兼帶實錄廳堂上〕

번역

인2성실록(仁二聖實錄)을 편찬하였다. 주상께서 실록청에 연악(宴樂)을 내리셨다. 공이 선사(上箋)를 올려 사례하였다.- 원주 : 공은 겸임하여 실록청 당상을 맡고 있었다. -

원문

三月。〔原注:庚戌〕公以病呈辭請免。□不允。

번역

○ 3월. ○ 원주(原注)에 ‘경술년’이라고 되어 있다. 공이 병을 이유로 정사(呈辭)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四月。〔原注:乙亥〕入侍夕講。□啓請推鞫妖僧普雨。□不允。

번역

○ 4월. ○ 원주(原注)에 을해년으로 되어 있다. 입시하여 저녁에 강을 행하였다. - 계청하여 요승 보우(普雨)를 추국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八月。〔原注:丁丑〕卜相。陞公爲左議政。

번역

8월. - 정축년 - 의정으로 승진시켜 좌의정에 삼았다.

원문

九月。〔原注:壬寅〕□啓請楮貨施用事。公以連歲歉荒。貨幣乏資。國民無所資生爲憂。與領相沈連源,吏判尹漑。議立科條。以楮貨從緜布時直準用。以通貿易之資爲規劃。□啓請施行。後數日。市廛之民五六百。遮道訴冤於公曰。楮貨無賴於朝夕之急。而使之行用。則四方米布。無路至京。而京城之民。將有餓死之患矣。公詣□闕。□啓寬其通用期限。

번역

○ 계지(啓旨)를 올려 저화의 시용을 청하였다. ○ 원주(原注)에 임인년이다. 공이 해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화폐가 자원이 부족하여 백성들이 생계에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근심하여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이조 판서 윤개(尹漑)와 더불어 과조를 세워 저화는 면포(綿布)의 시가에 따라 준용함으로써 무역을 통행하는 자본으로 삼으려고 계지(啓旨)를 올려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며칠 뒤 시장의 백성 5, 6백 명이 길을 막고 공에게 원통함을 호소하기를, “저화는 조석간의 급한 일에 쓸 수가 없습니다. 저화를 쓰게 하면 사방의 미와 포가 서울로 올 길이 없어져서 서울의 백성들이 장차 굶어 죽을 근심이 있게 됩니다.” 하니, 공이 □궐(闕)에 나아가 통용하는 기한을 연장해 주었다.

원문

十一月。〔原注:甲子〕因雷變於寒沍之節請免。□不允。

번역

인뢰변(因雷變)을 추운 계절에 청면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壬子。〔原注:明宗七年。開國一百六十年。皇紀二千二百十二年。明世宗嘉靖三十一年。西曆一千五百五十二年。〕公六十歲。

번역

임자년에 공이 60세가 되었다. 주 : 명종 7년이다. 개국 160년이다. 황기(皇紀)는 고, 명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31년이며, 서력은 다.

원문

正月。〔原注:乙酉〕獻議以日本武衛殿,畠山殿兩使接待事曰。□祖宗朝世修通聘。今賚符驗文而來。所當接待也。後又議九州通使事曰。考究海東記則九州於我國不遠。今許接待以羈縻之。可也。

번역

○ 헌의(獻議)하기를, “일본의 무위전(武衛殿)과畠山殿 두 사신을 접대하는 일에 대해 아뢰옵니다. 조종조 때부터 세습하여 통빈(通聘)하였고 지금 부문(符文)과 검문(驗文)을 가지고 왔으니, 마땅히 접대해야 합니다.” 하고, 뒤에 또 구주통사(九州通使)의 일에 대해 아뢰기를, “《해동기(海東記)》를 상고해 보면 구주는 우리나라와 멀지 않으니 지금 접대를 허락하여 묶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원문

是年。迎孫女壻李濟臣。公一見稱大器。〔原注:淸江。時年十七。〕

번역

이해에 손녀사위 이제신(李濟臣)을 맞이하였는데, 공이 한번 보고는 큰 그릇이라 칭찬하였다. 원주(原註) : 청강(淸江)은 당시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원문

癸丑。〔原注:明宗八年〕公六十一歲。

번역

계축년에 공은 61세였다. 주 : 명종 8년이다.

원문

正月。〔原注:壬申〕入侍□經筵。薦進在野諸賢。□啓上曰。宋純,吳謙,李潤慶。俱以才賢。流落荒野。宜□特賜宣召。責以盡忠愛國之實。□上卽傳命于政院。以吳謙差遣慶州府尹。

번역

○ 1월. - 원주(原注)에 임신년이다. - 경연에 입시하여 재야의 제현을 천거하였다. ○ 아뢰기를, “송순(宋純), 오겸(吳謙), 윤경(潤慶)은 모두 재주와 덕이 있는데 황량한 들판에 떨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선조(宣召)를 내려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실천을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 상이 즉시 정원에 명을 전하여 오겸을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차출하였다.

원문

正月。〔原注:乙巳〕承□召入對。陳衰病不職之狀。懇乞退休。優批□不允。

번역

○ 1월. ○ 을사년에 승소(承召)하여 입대하였다. 병든 몸으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을 진달하고 은퇴하기를 간절히 청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正月。〔原注:癸亥〕入侍□經筵。論□啓曰。□先王舊法。不可輕改。立法之際。豈偶然參酌耶。今者僧徒日滋。此良民之所以日少。此之不禁。而欲變□祖宗之法。誤矣。時諫院有變法之請故拒之也。公不喜紛更舊章。每曰。作小聰明。要勝於□祖宗。其可乎。先是。領府事李芑病。公往見。芑曰。吾能知法善通變。竊自許不下於管,晏。公不答而還。此日。引此語諷□啓於上。隱然斥其變弄國法之非也。

번역

1월. - 원주(原注)에 ‘계해년이다.’라고 하였다. - 경연에 입시하여 논계(論啓)하기를, “선왕의 옛 법을 가볍게 고칠 수 없습니다. 법을 세울 때 어찌 우연히 참작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승도(僧徒)가 날로 늘어나니 이는 곧 양민이 날로 줄어드는 까닭입니다. 이것을 금하지 않고서 조종(祖宗)의 법을 바꾸려고 하니 잘못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간원(諫院)에서 법을 고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다. 공은 번거롭게 옛 규정을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매번 말하기를, “조금 총명해져서 조종의 법보다 나아지려고 하니, 이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부사(領府事) 이기(李芑)가 병을 앓고 있을 때 공이 가서 문병하였는데, 이기가 말하기를, “나는 법을 잘 알아 변통하는 것이 관중(管仲)과 안연(晏然)에 못지않다고 스스로 허여합니다.” 하였으나 공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왔다. 이날 이 말을 인용하여 논계에서 상에게 풍자하였으니, 은연중에 국법을 농락하는 잘못을 배척한 것이다.

원문

七月。〔原注:丙辰〕翊贊歸政大謨。是日。□仁明大妃出御垂簾。□上御簾外。□傳命歸政于□主上。□上下榻遜辭。顧謂大臣□啓請收命。公進曰。□主上天姿卓越。聖學高明。□慈殿知其可以獨運萬機。故決意歸政。況宣仁王后所謂母后當陽。非國家美事者乎。臣等將順懿旨而已。□上勉從受政。公反覆陳□啓以伊尹,傅說告戒於太甲,高宗之意。又曰。君子以小人謂小人。小人亦以君子謂小人。君子小人之別甚難。□聖鑑洞知則可以不惑也。

번역

7월. 병진년에 익찬이 정사를 맡아 다스리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인명대비가 휘장을 걷고 나오시니, 상이 휘장 밖에 나아가 명을 전하여 주상에게 돌아가 정사를 맡으라고 하였다. 상과 하탑이 사양하자, 돌아보며 대신들에게 아뢰기를, “주상은 천품이 탁월하고 성학(聖學)이 고명하시니, 자전께서도 홀로 만기를 운용할 수 있음을 알고 계시므로 결심하여 정사를 맡으려 하십니다. 더구나 선인왕후(宣仁王后)가 ‘모후는 당양(當陽)에 있는 것이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신들은 장차 의지를 받들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힘써 따르며 정사를 맡았으나, 공이 번복하여 아뢰기를,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이 태갑(太甲)에게 고계(告戒)한 것과 고종(高宗)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 군자는 소인을 가지고 소인이라 말하고 소인은 또한 군자를 가지고 소인이라 말하니,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매우 어렵습니다. 성상께서 환히 아신다면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원문

是時。公提調司僕。建白償布募役。以改修箭串。國設牧場。而在前設以木柵者。改以石築之。當川流處。設鐵索開閉。盡其規畫。前來輪次課布於畿內。逐年改修。吏緣爲姦而民困多矣。其弊遂絶。是歲頗飢。或言時屈。公曰。與其徒賑以糜穀。不若用就以立事。此乃春秋興工役以聚失業之義也。

번역

이때 공이 제조(提調)와 사복시(司僕寺)를 거느리고 상포모역(償布募役)을 건의하여 화살과 활을 만드는 곳을 개수하고, 나라에서 목장을 설치할 때에 앞서 나무 울타리로 만들었던 것을 돌로 쌓아 고치고, 물이 흐르는 곳에는 쇠사슬을 설치하여 열고 닫게 하였다. 그 계획은 전래(前來)가 차례대로 기내(畿內)에 과포(課布)를 바쳐서 해마다 개수하는 것이었는데,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이 고통받는 일이 많아져서 그 폐단이 마침내 끊어졌다. 이해에 흉년이 들어 혹시라도 시기가 늦어질까 우려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한갓 곡식을 나누어 진휼하는 것보다는 일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낫다.”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춘추(春秋)》에서 공역을 일으켜서 일 없는 백성들을 모으는 뜻이다.

원문

四留齋李廷馣時爲參下官。以取稟公事來謁公。公與之坐。饋酒而謂曰。吾家近得孫女壻李濟臣。其氣宇風味。與君沕合。相見否。使小奚命出來。使定交後遂入內。使二人從容談交。自此二公爲死生神交。〔原注:見淸江,四留齋二公遺稿。〕

번역

사류재(四留齋) 이정전(李廷馣)이 당시 참하관(參下官)으로 공무를 취품(取稟)하기 위해 와서 공을 뵈었다. 공이 그와 함께 앉아 술을 권하고 말하기를, “우리 집안에 근래 손녀사위 이제신(李濟臣)을 얻었는데, 그 기상과 풍모가 그대와 잘 맞으니 한번 만나 보겠는가?” 하고, 작은 종에게 명하여 나오게 한 다음 정교(定交)하게 한 뒤 마침내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조용히 교분을 나누었다. 이로부터 두 공은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었다.-원주에 청강(淸江)과 사류재 두 공의 유고에 보인다.-

원문

甲寅。〔原注:明宗九年〕公六十二歲。

번역

갑인년 - 원주(原注)에는 명종 9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62세이다.

원문

正月。〔原注:癸未〕史官特書曰。尙某平生。不喜害人。有長者氣象。爲相。論事寬重。深得大臣之體。

번역

정월. - 원주(原注)에 ‘계미년’이라 하였다. - 사관이 특별히 쓰기를, “상모는 평생 남을 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장자의 기상을 지녔다. 정승이 되었을 때 일을 논의하는 것이 너그럽고 중후하여 대신들의 체통을 깊이 얻었다.” 하였다.

원문

五月。〔原注:乙巳〕承□召入對。□傳旨求問。公列擧內需寺僧徒之弊。及言□君上不喜納諫之失。因乞退。

번역

5월. - 원주(原注)에 을사년이다. - 승지가 불러서 입대(入對)하였다.- 전지(傳旨)를 구문(求問)하였다. - 공열이 내수시의 승도(僧徒)들의 폐단을 거론하고, □군(□君)이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잘못을 말하자, 인하여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원문

七月。〔原注:己酉〕□啓請建立鄭圃隱書院。

번역

7월. - 원주(原注)에 기유년이다.- 정포은(鄭圃隱)의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원문

九月。〔原注:壬申〕□啓請褒賞孝子節婦。□上命禮曹書啓。

번역

계청(啓請)하여 효자(孝子)와 절부(節婦)를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원주에 임신년이라고 되어 있다. - 주상이 예조에 명하여 서계(書啓)하게 하였다.

원문

乙卯。〔原注:明宗十年〕公六十三歲。

번역

을묘년 - 원주(原註)에는 명종(明宗) 10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63세였다.

원문

正月。〔原注:辛未〕呈辭請遞。□不允。

번역

정사(呈辭)를 올려 체차를 청하였다.-원주에 ‘신미년이다.’라고 되어 있다.-허락하지 않았다.

원문

四月。〔原注:甲戌〕以病乞退。□上優批不允。會有邊警。仍出視事。

번역

4월. - 원주(原注)에 갑술년이라고 되어 있다. - 병을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니, 주상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변방의 경보가 있어 그대로 출사하였다.

원문

丙辰。〔原注:明宗十一年〕公六十四歲。

번역

병진년 - 원주(原注)에는 명종 11년이라고 되어 있다. - 공이 64세였다.

원문

正月。〔原注:乙亥〕公與領相沈連源同□啓請罷備邊司。使兵曹專委軍政事。

번역

○ 1월. ○ 을해년에 공이 영의정 심연원(沈連源)과 함께 계청하여 비변사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軍政)을 전담하도록 청하였다.

원문

二月。〔原注:己亥〕以病呈辭。□不允。

번역

2월. - 원주(原注)에 기해년이다. - 병으로 정사(呈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三月。〔原注:丁巳〕公病辭不出。是日。□上傳旨。以輔養元子議進。領相沈連源右相尹漑合□啓曰。待尙某出仕共議。□上答曰。待左相之出。詣闕同議可也。

번역

3월. 원주(原注)는 정사년이다.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날 □ 상이 전지를 내려 원자를 보양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나아오라고 하였다. 영의정 심연원(沈連源)과 우상 윤개(尹漑)가 합□ 아뢰기를, “상모(尙某)가 출사하기를 기다려 함께 의논하겠습니다.” 하니, □ 상이 답하기를, “좌상이 나오거든 대궐에 나아와 함께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문

五月。〔原注:壬申〕入侍□經筵。奏薦退溪李□滉。□啓曰。李滉雖年少人也。持身淸高。可以激薄俗。□上卽命政院。以公啓意。爲書下諭。

번역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퇴계 이황을 천거하였다. - 원문 빠짐 - 아뢰기를, “이황은 비록 나이는 젊지만 몸가짐이 청고하여 세속의 박절함을 격발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즉시 정원에 명하여 공계(公啓)의 뜻으로 하유를 쓰도록 하였다.

원문

九月九日。呈辭乞休。□不允。公自成均館課試罷還。道中遇雷雹。歸語人曰。不賢者在相位。天必爲我示變也。因呈辭乞致仕。□上之恩眷日隆。公尤戰兢如此。

번역

9월 9일에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공이 성균관에서 과시(課試)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도중에 우박을 만났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질지 못한 자가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하늘이 반드시 나에게 변고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하고는 사직을 청하였다. □ 상의 은총이 날로 높아지니 공은 더욱 이와 같이 두려워하였다.

원문

丁巳。〔原注:明宗十二年〕公六十五歲。

번역

정사년 - 원주(原注)에 명종 12년이라고 하였다. - 공이 65세였다.

원문

正月。拜爲□世子傅。〔原注:是時。冊封□世子。以公爲傅。〕

번역

○ 1월. □ 세자의 부(傅)가 되었다. 원주(原注) : 이때에 □ 세자를 책봉하고 공을 부로 삼았다.

원문

八月。〔原注:辛巳〕□啓請世子着忠靜巾。公爲□世子師。輔導儀禮之節。□世子年幼。不能着禮冠。故有是請。

번역

8월. - 원주(原注)에 ‘신사년이다.’라고 하였다. - ○ 세자에게 충정건을 착용하도록 청하였다. 공이 세자의 스승이 되어 의례의 절차를 보도하였는데, 세자가 나이가 어리어 예관(禮冠)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청한 것이다.

원문

十二月。〔原注:戊申〕上箚辭左相。□不允。

번역

상(上)이 차자를 올려 좌의정(左議政)을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救解曺南冥植。是時。南冥被□徵。初除丹城。辭職疏。有慈殿淵塞。不過深宮之一寡婦。殿下幼沖。不過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人心之億萬。何以當之之語。□上以寡婦二字。語涉不遜。震怒幾欲罪之。公使內史李濟臣。抽來宋史英宗記有歐陽脩告君。慈聖太后。深宮之一夫人。臣等五六書生之語。公曰。當以此救解也。明日。具諫草詣□闕啓曰。曺植疏。專襲古人告君之語。極言國家孤危之勢。非慢語也。□上竟不問。〔原注:按公之救解曺南冥事。在公左相時。而年月未詳。故編之於此。淸江年譜。則編此事於□明宗二十一年丙寅。而公易簀于□明宗十九年甲子則此必誤記年組也。〕

번역

조남명(曺南冥)을 구원하여 해명하였다. 이때 조남명이 □에게 징토를 당하고 처음 단성 부사(丹城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사직하는 상소에 “자전(慈殿)은 깊은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요 전하께서는 선왕의 한 고아 후사일 뿐이니, 천재지변과 인심의 어지러움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라는 말이 있었다. □가 ‘과부’ 두 글자가 불손한 말에 해당한다고 하여 진노하여 거의 죄주려고 하였는데, 공이 내사(內史) 이제신(李濟臣)에게 송사(宋史) 영종기(英宗記)에서 구양수(歐陽脩)가 임금에게 고한 “자성태후께서는 깊은 궁중의 한 부인이고 신들은 5, 6명의 서생입니다.”라는 말을 뽑아 오게 하고는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이로써 구원하여 해명해야 합니다.” 하였다. 다음 날 간초(諫草)를 갖추어 □의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조식의 상소는 전적으로 옛사람이 임금에게 고한 말을 답습하여 국가가 위태로운 형세를 극언하였으니, 만언(慢言)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가 마침내 묻지 않았다. 【원주 : 공이 조남명을 구원하여 해명한 일은 공이 좌상(左相)으로 있을 때인데 연월이 자세하지 않으므로 여기 편입하였다. 《청강연보》에는 이 일을 □ 명종 21년 병인년에 편입하였는데, 공이 □ 명종 19년 갑자년에 죽었으니 이는 반드시 연대 기록을 잘못한 것이다.】

원문

戊午。〔原注:明宗十三年〕公六十六歲。

번역

무오년 - 원주(原注)에는 명종 13년이라고 하였다. - 공이 66세였다.

원문

四月。〔原注:丙申〕奏薦退溪李滉。□啓于上曰。□上如知李滉之賢則委心任之可也。〔原注:時退溪以病辭歸〕○公前後薦進才賢。朝野無遺。而至如退溪先生。再度力薦。勸□上以委心任之。公之惓惓於進賢。可想。

번역

4월. 주 - 병신년에 - 진퇴계 이황을 천거하였다. ○ 상에게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이황의 어짊을 안다면 마음을 다해 맡기소서.” 하였다.- 원주(原注) : 이때 퇴계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 공이 그동안 재현(才賢)을 천거함에 조정과 지방에 빠뜨린 사람이 없었는데, 퇴계 선생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두 번이나 힘써 천거하고 상에게 마음을 다해 맡기기를 권하였으니, 공이 어진 이를 등용하는 데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원문

五月。〔原注:乙巳〕奉□旨卜相。是日。史官評三公曰。尙某持重寬和。有大臣之度。沈連源簠簋不飾。尹漑輕狼。不足論。

번역

○ 5월. - 원주(原注)에 을사년이다.- 상신을 뽑으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이날 사관이 삼공(三公)을 평하기를, “상모는 지중하고 관후하여 대신의 도량이 있고, 심연원은 밥그릇과 수저가 꾸미지 않았으며, 윤개는 경박하고 교활하여 논할 가치도 없다.” 하였다.

원문

五月。〔原注:丙午〕□御筆批。陞公爲領議政。

번역

5월. - 원주(原注)에 병오년이라고 되어 있다. - 어필(御批)을 내렸다. 공을 영의정에 올렸다.

원문

六月。〔原注:壬寅〕上辭請遞。□不允。

번역

상사(上辭)가 체차를 청하였다.- 원주에 임인년이라고 되어 있다. -허락하지 않았다.

원문

六月。〔原注:乙酉〕陳時弊於□經筵曰。國家之憂。不在於夷狄之禍。而在於風俗之薄。自□上當惕然戒懼也。○是日。史官特書比賢於漢之魏尙。〔原注:漢宣帝時賢相也〕

번역

6월. - 원주(原註)에 을유년이다.- 경연에서 시폐(時弊)를 진달하기를, “국가의 근심은 오랑캐의 화가 아니라 풍속이 박해지는 데 있으니, 위로부터 마땅히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날 사관이 특별히 한나라 위상(魏尙)- 원주에 ‘한 선제 때 현명한 재상이었다.’라고 하였다.-보다 어질다고 썼다.

원문

九月。〔原注:丁亥〕公以災異請免。三□啓□不允。

번역

9월. ○ 정해년에 재이(災異)를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으나,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十月。〔原注:甲辰〕朔。公卜相。以安玹奉單子入啓。□上答曰。書啓中首參者安玹。亦合予意。

번역

10월. ○ 1일 초하루에 공이 재상 후보를 뽑았다. 안현(安玹)이 단자(單子)를 받들고 들어와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서계(書啓) 가운데 수참(首參)은 안현으로 하는 것이 또한 내 뜻에 합당하다.” 하였다.

원문

己未。〔原注:明宗十四年〕公六十七歲。

번역

기미년 - 명종 14년이다. - 공의 나이 67세이다.

원문

正月朔。〔原注:癸酉〕詣□闕參賀。進班首酌。○是日。□上行望□闕禮于勤政殿庭。又賀聖烈仁明大王大妃及共懿大王妃。禮畢御殿。□上受百官賀。入大內進爵。呈于□兩殿。午時。具翼善冠,衮龍袍御勤政殿。行會禮宴。承旨,史官入侍。百官行四拜訖。同副承旨李彥璟進花盤。公以首相。進班首爵。□傳曰。敬奉卿等之觴。□命宗親文武百官各就坐。於是宗宰入就殿內。侍臣坐于階上。宗親文武百官。分東西列坐于庭。倭野人入參。行七爵而罷。

번역

1월 초하루. 계유년에 □궐에 나아가 참하하고 반열의 맨 앞에서 잔을 올린다. ○ 이날 □상께서 근정전 뜰에서 망□궐례를 행하였다. 또 성렬인명대왕 대비와 공의대왕비를 하례하고 예식을 마치고 전(殿)에 납시었다. □상께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내로 들어가서 작을 올리고 □두 전(殿)에 바쳤다. 오시에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근정전에 납시어 회례연을 행하였다.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고 백관이 사배를 행하였다. 동부승지 이언경(李彦璟)이 화반을 올리고 공은 수상으로서 반열의 맨 앞에서 작을 올렸다. □전(傳)에 이르기를, “경들의 잔을 공경히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명으로 종친과 문무백관에게 각각 자리에 나아가게 하니, 이에 종재가 들어가 전 안에 나아가고 시신은 섬돌 위에 앉았으며, 종친과 문무백관은 동서로 나누어 뜰에 줄지어 앉았다. 왜인과 야인이 들어와 참여하였다. 일곱 잔을 올리고 파하였다.

원문

正月。〔原注:戊戌〕□傳命以黃海道館軍事收議于大臣。兵曹判書權轍□啓曰。領相尙某以爲民有疾苦。不可不變而通之。但五年相遞之法。載在續錄。輕毀似難。立上等者加給一戶。少紓軍民之弊爲當也。左右相之議不一。□上從公之議。

번역

○ 정월. - 원주(原注)에 무술년이다. - □ 전명(傳命)이 황해도 관군(館軍)의 일로 대신에게 수의(收議)하라고 하였다. 병조 판서 권철(權轍)이 아뢰기를, “영상 상모(尙某)는 백성들의 질고가 있으니 변통하여 통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5년마다 서로 교체하는 법이 《속록(續錄)》에 실려 있어 가벼이 고치기는 어려울 듯하니, 상등(上等)으로 세운 자에게 한 호(戶)를 더 주어 군민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좌상과 우상의 의견이 같지 않으므로 □ 공론에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원문

三月。〔原注:丙辰〕上章辭職。□上優批不允。

번역

상소하여 사직하였다.-원주(原註)에 병진년이라고 되어 있다.-○ 주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六月。〔原注:壬戌〕病辭。□不允。

번역

6월. - 원주(原注)에 임술년이다.- 병사(病辭)를 올리니, 윤허하지 않았다.

원문

八月。〔原注:丁卯〕入侍翠露亭□賜宴。□上親爲侑爵。公不覺醺醉。伏於苑中。□上將還大內。問左右知公醉臥。不進輦曰。大臣在此。過行未安。□命設行帳後乃還宮。卽□命中使護歸。

번역

8월. ○ 원주(原注)에 정묘년이다. 취로정(翠露亭)에 입시하여 사연(賜宴)을 베풀었는데, □가 직접 술잔을 올렸다. 공이 자신도 모르게 술에 취해 원소(苑所) 안에 엎드려 있었다. □가 대내(大內)로 돌아가려고 좌우에게 물어보았는데, 공이 취하여 누워 있어 연(輦)에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대신이 여기에 있으니 지나가는 것이 온당치 않다.”라고 하였다. □가 명하여 행장(行帳)을 설치한 뒤에야 궁으로 돌아갔다. 곧바로 □의 명으로 호위사(護衛使)를 보내어 공을 모시고 돌아왔다.

원문

八月。〔原注:甲辰〕論□啓倭船載物貨因風漂到。無作賊之意者。例皆全船捕殺。事理不可云。○史臣曰。前者尹漑建議襲擊骨幹。尙某曰。潛師掩襲。盜賊之謀也。以堂堂國家。爲盜賊之謀。可恥之甚。不嗜殺人。先賢美之。窮兵黷武。前史譏之。某可謂深得大臣之體。○按實錄。□中廟己卯年間。會寧府野人速古乃通謀。入甲山府掠奪。朝議命李之芳往令伺隙掩捕。兵判柳聃年力主之。趙光祖進曰。此事正類盜賊狙譎之謀。非王者禦戎之道。且以堂堂大朝。爲一幺麽醜虜。行盜賊之謀。辱國損威。臣切恥之。事乃罷。公亦於尹相之議襲擊骨幹。止之曰。潛師掩襲。盜賊之謀。以堂堂國家。爲盜賊之謀。可恥之甚。前後兩賢之持國大體。嚴然有同也。

번역

8월. 갑진년에 논계(論啓)하기를, 왜선이 물건을 싣고 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해 온 경우 적의 행위를 하지 않은 자는 으레 모두 전선을 포살(捕殺)하는데, 사리로 볼 때 불가하다.”하였다. ○ 사신이 말하기를, “전에는 윤개가 골간(骨幹)을 습격할 것을 건의하였고, 상모는 ‘잠사(潛師)’로 은밀히 습격하는 것은 도적의 계략이다.’라고 하였으니, 당당한 국가가 도적의 계략을 행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살인을 좋아하지 않은 선현은 그를 칭찬하였고, 무력을 남용하는 것을 꺼린 전사(前史)는 그를 비난하였다. 상모는 대신의 체모를 깊이 터득했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 《실록》을 상고하니, □ 중묘 기묘년에 회령부(會寧府) 야인 속고내통(速古乃通)이 모의하여 갑산부(甲山府)에 들어가 약탈하였다. 조정에서 이지방에게 명하여 틈을 노려 포획하게 하였는데, 병조 판서 유담은 연력(年力)으로 주창하였고, 조광조는 아뢰기를, “이 일은 바로 도적이 교활한 계략을 부리는 것과 같아서 왕자가 오랑캐를 막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당당한 대조(大朝)가 한낱 추루(醜虜)와 함께 도적의 계략을 행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하니, 신은 매우 수치스럽습니다.” 하였는데,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공도 윤개가 골간을 습격할 것을 건의한 것에 대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잠사로 은밀히 습격하는 것은 도적의 계략이다. 당당한 국가가 도적의 계략을 행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럽다.” 하였으니, 전후 두 현인이 나라의 체모를 지킨 것이 엄연히 같았다.

원문

庚申。〔原注:明宗十五年〕公六十八歲。

번역

경신년 - 원주(原註)에 “명종 15년이다.”라고 하였다. - 공이 68세였다.

원문

六月。〔原注:丙申〕詣□闕。陳衰病不職之狀。上章乞退。□批曰。卿休休老德。居位則朝廷堂堂。去位則衆望必缺。至於七□啓。辭意尤切。□上以御筆優批。而□賜酒以慰。○同月。□世子加元服。以師贊禮。受鞍馬之□賜。

번역

6월. ○ 병신년에 □에 나아가 궐에 가서 노쇠하고 병든 몸으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을 진달하고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니, □가 비답하기를, “경은 편안히 덕을 누리며 늙어야 할 것이다. 자리에 있으면 조정이 당당할 것이고 자리를 떠나면 사람들의 기대에 반드시 어긋날 것이다. 7월의 계사(啓辭)에 이르러서는 그 내용이 더욱 절실하다.” 하고, □가 어필로 우대하여 비답하고, □는 술을 내려 위로하였다. ○ 같은 달에 □ 세자가 원복(元服)을 더하니, 사찬례(師贊禮)로서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원문

九月九日。〔原注:壬午〕□上御瑞蔥臺行曲宴。公以首相。上箋謝□恩。

번역

9월 9일(임오년)에 상이 서총대(瑞蔥臺)에 나아가 곡연(曲宴)을 행하였다. 공이 수상으로 있을 때였다. 상이 선사(宣賜)한 은혜에 대해 사례하는 글을 올렸다.

원문

九月。〔原注:丁亥〕□上御慶會樓觀射。親試儒生。□上問于公曰。□中廟朝丙申年。後苑取人有前例。但科擧事目。一式年內不得再爲別擧。此式年內未有別試。今日取人何如。公曰。式年後別科。有關於勸奬也。□上。從之。

번역

○ 9월. □ 상이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관사(觀射)하고, 유생을 친히 시험하였다. □ 상이 공에게 묻기를, “중묘조(中廟朝) 병신년에 후원(後苑)에서 사람을 뽑은 전례가 있다. 다만 과거 사목(科擧事目)에 ‘한 식년 내에는 별과를 두 번 행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식년 안에는 아직 별시(別試)를 행한 적이 없으니, 오늘 사람을 뽑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식년 뒤에 별과를 행하는 것은 권장하는 데 관계가 있습니다.” 하였다. □ 상이 그대로 따랐다.

원문

辛酉。〔原注:明宗十六年〕公六十九歲。

번역

공이 69세였다. 주 : 명종(明宗) 16년이다.

원문

五月。〔原注:丙戌〕公語人曰。吾與弘胤。自少相交。固知其無私心矣。只恐□主上以弘胤有私心也。○時大司憲金弘胤。直斥奸小李戢,李灌。反被其構陷論罷。公惜之也。○史臣曰。弘胤□啓戢等之罪。〔原注:李戢,李灌。諂事元衡。見李樑勢大。卽背元衡附樑。謀陷士林。故大司憲金弘胤啓請其罷黜。而反被論罷。〕其言則是。而奇大恒與李戢相濟。又聽李重慶之言。申救李戢。反以弘胤之言爲非。啓罷其職。大恒朋比黨惡之迹見矣。箝制臺諫之漸成矣。

번역

○ 5월. ○ 공어인이 말하기를, “나와 홍윤(金弘胤)은 어려서부터 서로 사귀었으므로 진실로 그가 사심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주상께서 홍윤에게 사심이 있다고 여길까 두렵다.” 하였다. ○ 이때 대사헌 김홍윤이 간신 소리 이침과 이관을 곧바로 배척하다가 도리어 그들의 모함에 걸려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으므로 공이 안타깝게 여겼다. ○ 사신이 말하기를, “홍윤이 이침 등의 죄를 아뢰었다.- 원주(原註) : 이침과 이관은 원형에게 아첨하다가 이량의 세력이 커지자 곧바로 원형을 배반하고 이량에 붙어 사림을 모함하였다. 그러므로 대사헌 김홍윤이 그들을 파직하기를 청하였는데 도리어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말이 옳았으나 기대항은 이침과 서로 결탁하고 또 이중경의 말을 듣고서 이침을 변호하며 도리어 홍윤의 말을 잘못이라고 하여 그를 파직하였다. 대항이 악인들과 패거리 짓는 자취가 드러났으니, 대신(臺臣)과 간관(諫官)을 구속하는 조짐이 이루어졌다.” 하였다.

원문

七月。〔原注:辛丑〕入侍閱武亭。公卿侍從隨班。如瑞蔥故事。出□御軸題詩。公一句云。忘言醉飽均天裏。敬德惟關獻曝誠。見者皆謂得大臣箴規之體。

번역

7월. 원주(原注)에 신축년이다. 입시열무정(入侍閱武亭)을 행하였다. 공경과 시종이 반열에 따라 나아갔는데, 서총(瑞蔥)의 고사(故事)와 같았다. 어축제시(御軸題詩)를 내었는데, 공이 지은 한 구절에 “말 잊고 취하고 배부름은 똑같이 하늘 안에서 하고, 공경과 덕행은 오직 관헌(關獻)에 정성을 바치네.[忘言醉飽均天裏 敬德惟關獻曝誠]”라고 하였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대신의 잠규(箴規)의 체를 얻었다고 하였다.

원문

七月。〔原注:壬寅〕上箋謝前日閱武亭□賜宴。□傳曰。昨日引見。欲使君臣之間情誼相孚也。卿等陳謝。予用嘉焉。仍□賜酒。

번역

7월. 원주(原注) 임인년에 주상이 전일 열무정(閱武亭)에서 연회를 베푼 것을 사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傳)하기를, “어제 인견(引見)한 것은 군신 간의 정이 서로 부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경들이 진하(陳謝)하니 나는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어서 술을 내렸다.

원문

八月。〔原注:甲申〕省墓次詣□闕拜辭。公展掃林川先塋。將行。□啓曰。大臣往來本道。例設宴享。爲弊不貲。請於今行。□下敎免設。□上曰。老相遠行。豈無宴禮以慰乎。□上命公之孫副率。乘馹護行。遣中使□宣酒樂。餞行於濟川亭。□特賜豹皮。是日雨。□上又命史官。追及江上。□賜蓑衣諸具。皆□御用也。還朝日。又□賜酒樂郊迎。公上箋謝。□御筆批曰。卿以老德大臣。霜天掃塋。豈不表贐薄物乎。是予敬大臣優老德之微意也。

번역

8월. 갑신년에 성묘하기 위해 □ 궐에 가서 하직 인사를 하고, 공이 임천 선영을 전소하러 가려고 하였다. □ 아뢰기를, “대신이 본도(本道)를 왕래할 때마다 으레 연향(宴享)을 베푸는데 폐단이 많고 비용이 많이 드니 이번 행차에는 연향을 베풀지 말게 하소서.” 하니, □ 하교하여 면제하도록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노신하가 먼 길을 가는데 어찌 연례(宴禮)를 베풀어 위로하는 일이 없겠는가.” 하고, □ 상이 공의 손자에게 부솔(副率)을 시켜 역마를 타고 호행(護行)하게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술과 음악을 마련하여 제천정(濟川亭)에서 전송하도록 하였다. □ 특별히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이날 비가 오자, □ 상이 또 사관에게 명하여 강가에 가서 □ 도롱이와 갖가지 물품을 하사하게 하였는데 모두 □ 어용(御用)이었다. 돌아오는 날 아침에 또 □ 술과 음악을 하사하고 교외에서 맞이하였다. 공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니, □ 어필 비답하기를, “경은 덕망 있는 노신하로서 추운 날씨에 선영을 전소하는데 어찌 표문(表貐)이 박하지 않겠는가. 이는 내가 대신을 공경하고 노덕(老德)을 우대하는 은미한 뜻이다.” 하였다.

원문

十一月。行□世子嘉禮。公以師受□賜馬。

번역

11월. ○ 세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 공이 사수사(師受使)로 갔다가 말을 하사받았다.

원문

壬戌。〔原注:明宗十七年〕公七十歲。

번역

임술년 - 원주(原注)에 명종 17년이라고 하였다. - 공이 70세가 되었다.

원문

正月。請順天道致仕。□上曰。卿至希年。當賜几杖而安之。不宜許退。至於四□啓。□答曰。國家用人。當先純正。凡官尙然。況大臣乎。如卿純厚大臣去位則予未知國事是也。五□啓。□御筆批曰。君臣之間。所當情誼相孚。爲人臣者。不得於君而在職。則予未知其可也。如卿老德大臣。久居台府。勉輔寡躬。此乃當然之事。不可以稀年輕遞。○時尹元衡用權猜位。公以此求退益急。□上旨亦有所指於此。

번역

1월에 순천도(順天道)가 치사(致仕)를 청하니, □ 상이 이르기를, 경은 희년(希年)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궤장(几杖)을 내려 편안하게 해야 하니, 물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하였다. 사□가 아뢰자, □ 답하기를, “국가가 사람을 쓰면 순수한 것을 먼저 써야 한다. 모든 관직이 그러한데 더구나 대신은 어떠하겠는가. 경과 같은 순후(純厚)한 대신이 자리를 떠나면 나는 국사가 어찌 될지 모르겠다.”하였다. 오□가 아뢰자, □ 어필 비답하기를, “군신 간에 마땅히 정이 서로 부합해야 한다. 신하 된 자가 임금을 미워하여 직무에 있지 못하면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경과 같은 노덕(老德)한 대신이 오래도록 대부(台府)에 있으면서 과고(寡躬)를 힘써 보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젊은 사람을 자주 체차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하였다. ○ 이때 윤원형(尹元衡)이 권력과 시기를 부려, 공이 이 때문에 물러나기를 더욱 급히 구하였는데, □ 상의 뜻도 여기에 지적한 바가 있었다.

원문

三月。〔原注:甲午〕入侍□王世子嘉禮曲宴。□上傳敎欲使近侍諸臣起舞。公□啓止以有妨禮法。

번역

○ 3월. - 원주(原注)에 갑오년이라고 되어 있다. - 입시하여 왕세자의 가례곡연(嘉禮曲宴)을 행하였다. ○ 상이 전교를 내려 근시(近侍)의 신하들에게 일어나 춤추게 하려 하자, 공□가 예법에 방해된다고 아뢰어 그만두었다.

원문

七月。公患痢疾。□上聞之。遣內醫審疾。□命內醫曰。若言予命。恐起居有勞。諱而勿言。令若私問。

번역

7월. 공이 이질을 앓았다. □ 상이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다. □ 내의에게 명하기를, “만약 나의 명이라고 말하면 거처에 수고가 있을까 염려되니, 숨기고 말하지 말고 마치 사적으로 물어보는 것처럼 하라.”하였다.

원문

十月。〔原注:庚午〕□上御講席。□賜公几杖。仍□賜酒樂。是日。大設供具。累日乃罷。奉常正任呂守樽所。待敎成壽益手握水靑木把門。吏胥相謂曰。判事司樽。翰林守門。領相之宴。可謂盛矣。公上箋謝□恩。因乞退。□御筆批曰。觀卿箋辭。予嘉卿意。人生七十古來稀。居相一紀世未多。豈可輕退老成乎。几杖之賜。所當爲。勿謝。○史臣曰。稀年告退。知人臣知足之意。無遺壽耇。有全優老之禮。可謂善矣。

번역

10월. ○ 상이 어강석(御講席)에 나아갔다. ○ 공궤장(公几杖)을 하사하고, 이어서 주악(酒樂)을 베풀었다. 이날은 큰 잔치를 벌여 여러 날 동안 계속하였는데, 봉상시 정임 여수준(呂守樽)이 대교 성수익(成壽益)의 손에 수청목파문(水靑木把門)을 들고서 이서(吏胥)에게 말하기를, “판사(判事)가 준(樽)을 맡고 한림이 문을 지키니 영의정의 잔치가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공이 선사(箋辭)를 올려 은혜에 사례하고 인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니, 어필(御筆)로 비답하기를, “경의 선사를 보니 내 경의 뜻을 가상히 여긴다.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고, 정승으로 한 기년(紀年)을 지내는 것은 세상에 많지 않으니, 어찌 노성한 나이에 가벼이 물러날 수 있겠는가. 궤장(几杖)을 하사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 사신(史臣)은 말하기를, “희년(稀年)에 물러나기를 고하니 신하로서 만족할 줄 아는 뜻을 알 수 있고, 노인을 버리지 않으니 늙은이를 우대하는 예가 온전하다. 잘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원문

十二月。公復上辭。□優批不允。□特命給暇安心調養。

번역

○ 12월. 공복(公復)이 사직을 청하였는데, □ 우비(優批)로 윤허하지 않았다. □ 특별히 명하여 휴가를 주어 안심하고 조양하게 하였다.

원문

癸亥。〔原注:明宗十八年〕公七十一歲。

번역

계해년 - 원주(原注)에 “명종 18년이다.”라고 하였다. - 공이 71세가 되었다.

원문

正月。〔原注:丙申〕復呈辭。極言衰病之狀。至三辭。□上猶持難。公辭意懇固。□上乃勉允。□御筆批。授領中樞府事。仍領□經筵。○公知遇不世。感激有爲。而當元衡之用事。內外掣肘。廟算未展。恒切危悰。懇懇求退十餘年。始得蒙□允。遞相之日。身氣輕健。始若無疾者。或命駕於水曲山傍。有時取酒微醺。緩歌起舞而自樂。

번역

1월. 병신년에 사직서를 다시 올리고, 쇠병의 상태를 극언하였다가 세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상이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간곡히 사직하니 상이 마침내 윤허하였다. ○ 어필(御筆)로 비답을 내리고 영중추부사에게 주어 이어 경연을 맡게 하였다. 공은 세상에 드문 지우를 받아 감격하여 일에 힘썼으나, 원형(元衡)이 권세를 부리자 안팎으로 제약을 받아 묘당의 계책을 펼치지 못하고 항상 위태로운 마음이 간절하였다. 10여 년 동안 간곡히 사직을 청하다가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재상에서 체차되는 날에 몸과 기운이 가볍고 건강하여 처음에는 병이 없는 사람처럼 여겼다. 혹 수곡(水曲)이나 산자락에 어가를 대고 때때로 술을 마시고 약간 취하면 느릿느릿 노래하고 춤추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원문

九月。□世子病重。□傳曰。世子病重。別行獄赦何如。遣史官議于公。公□啓曰。上懷罔極。臣何敢異辭。□世子卒。公奔赴哭泣。廢食過傷。心痛遽作。幾危數日。

번역

○ 9월. ○ 세자가 병이 중하였다. □ 전(傳)에 이르기를, “세자의 병이 중하니 별행(別行)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여, 사관을 보내 공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공이 □ 아뢰기를, “성상께서 망극한 마음을 품고 계시니 신이 어찌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 세자가 졸하였다. 공이 달려가 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끊고 지나치게 상심하여 심통(心痛)이 갑자기 생겨 며칠 동안 위독하였다.

원문

十二月。順懷柩將發。公欲往祖于郊。或止之。公曰。我□東宮舊僚。終始之禮。不可廢。是日。心痛又作。疸證尤重。病席聞星變。歎曰。吾安得死而塞是災乎。家人慰解之。公曰。吾身雖病。敢忘國憂乎。□上遣內醫問病。□特賜御廚。庶幾可口珍味。無不備至。病危篤。拳拳皆是憂國之語。終無一言及家後事。公平日。嘗戲語家人曰。汝輩以我爲臨死有遺言離訣之辭乎。若迷劣婦子誦言瑣屑。而號哭尸前則甚妨事體。殊非大人一視死生之道也。果終無遺一言。

번역

12월에 순회(順懷)의 널을 장차 출발시키려 하였는데, 공이 조천(郊遷)하러 가려고 하자 혹시라도 그만두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동궁(東宮)의 옛 신료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예절을 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날 심통(心痛)이 또 발작하고 담증(疸證)이 더욱 심해졌다. 병석에서 성변(星變)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어찌하면 죽어서 이 재앙을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집안사람들이 위로하여 해소시키자 공이 말하기를, “내 몸이 비록 병들었지만 감히 나라의 근심을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에서 내의(內醫)를 보내어 문병하고, □에서 특별히 어주(御廚)를 내려서 진미(珍味)가 갖추어져 입에 맞기를 바랐다. 병이 위독한데도 몹시 간절하게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말이었고, 끝내 집안의 뒷일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공이 평소에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농담으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죽을 때 유언(遺言)과 이별의 말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미련한 부자(婦子)처럼 시시콜콜한 말을 외면서 시신 앞에서 곡한다면 일의 체모에 매우 방해가 될 것이니, 이는 대인(大人)이 생사를 똑같이 보는 도리가 전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끝내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원문

甲子。〔原注:明宗十九年〕公七十二歲。

번역

갑자년 - 원주(原注)에 “명종(明宗) 19년이다.”라고 하였다. - 공이 72세가 되었다.

원문

閏二月甲戌朔二十三日丙申。公易簀于正寢。壽七十二。訃聞。□上震悼。輟朝三日。不御肉饍有日。賻弔及祭奠。皆從重典。別遣右承旨姜士弼弔喪。□命都承旨洪曇□賜祭。□傳敎書堂月課以悼老德大臣爲題。以寓□宸懷。是日。位無上下。人無賢愚。莫不痛惜嗟歎。故吏宿隷。奔走號泣。□上傳于政院曰。常時大臣病重。則廷院例啓遣承旨問病。而近者領府事尙震沈病久矣。至其危篤而不啓。何也。〔原注:公病革。痛若少定。精神言笑。少不差爽。至於屬纊以前。無異平常。每用寬言而鎭靜家人。不覺危篤。故政院不得知而不啓聞。〕今見停朝市之啓。老成大臣卒逝。予用驚悼耳。〔原注:李朝實錄〕

번역

윤2월 갑술삭(甲戌朔) 23일 병신일에 공이 정침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나이는 72세였다. 부고를 듣고 □ 위가 진심으로 슬퍼하며 조회를 중지하고 3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부조와 제전은 모두 중한 법을 따랐으며, 별도로 우승지 강사필(姜士弼)을 보내어 조문하게 하였다. □ 도승지 홍담□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전교에 “서당의 월과(月課)를 ‘노덕 대신을 애도한다.[悼老德大臣]’라는 제목으로 삼아 나의 마음을 붙인다.”라고 하였다. 이날은 위가 없으니 아래가 없고 사람이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어서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하인과 노복들이 분주히 다니며 통곡하였다. □ 위가 정원에 전교하기를, “평상시에 대신이 병이 중하면 조정과 승정원에서 으레 계본(啓本)을 올려 승지를 보내 문병하게 하는데, 근래에 영중추부사 상진이 병이 깊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위독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계본을 올리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원주 : 공의 병세가 위독하다가 조금 진정되어 정신과 언사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으며, 속근(屬纊) 이전에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매번 너그러운 말로 집안사람을 진정시키고 안심시켜서 위독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정원에서 알지 못하여 계본을 올리지 않았다. 지금 조시(朝市)를 중지한다는 계본을 보니 노성한 대신이 세상을 떠났으니, 나는 놀랍고 슬프다.” 하였다. 원주 : 《이조실록》

원문

五月十九日。□禮窆于果川治東瑞草里坤坐原。江寧君洪暹撰碑銘。礪城尉宋寅書。淸江李濟臣篆。

번역

5월 19일 과천(果川) 치동(治東) 서초리(瑞草里)의 곤좌원(坤坐原)에 예우를 갖추어 매장하였다.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이 비명을 지었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으며, 청강 이제신(李濟臣)이 전서로 새겼다.

원문

公沒後三百一年丁卯十月庚辰朔二十五日甲辰。□高宗命果川縣監李泰應。致祭于墓。〔原注:祭文見附錄〕

번역

공이 돌아가신 뒤 301년 정묘년 10월 경진일 초하루 갑진일에 고종께서 과천 현감 이태응에게 명하여 공의 묘소에 치제하게 하셨다. 원주(原注)에 “제문은 부록에 보인다.” 하였다.

239. 行狀

문체: 傳記類 / 行狀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06B, ITKC_MO_0130A_A026_106C ...

원문

宣務郞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李濟臣。撰。

번역

선무랑(宣務郞) 행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이제신(李濟臣)이 지었다.

원문

公諱震。字起夫。木川人。其先本縣吏。高麗太祖統合三韓。本州人以百濟遺民。累有警擾。賜姓畜獸以辱之。公之先。得象爲姓。後改以尙焉。有諱國珍。生諱得儒。以崔文獻公沖待聘齋生。始免鄕役。生諱愿。給事中。給事生諱元諝。通禮門奉禮郞。歷數四代。有諱天錫。監門衛大護軍。寔公高祖。曾祖諱英孚。累□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祖諱孝忠。忠淸道水軍虞侯。累□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考諱甫。安奇道察訪。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三世推□恩。以公貴也。判書公鄕居林川。貲甚敫富。貸與貧民。隨年豐歉。與民收散。晩年。悉取券投火曰。吾其庶有後乎。議政公席先業。居鄕殆六十歲。足絶官庭。未嘗非義作事。鄕人莫不飫德。蓋其種之者久矣。議政公聘博士金徽之女。累□贈貞敬夫人。乃延安望閥。前朝恭愍。親書〔原注:蘿葍山人。長濤源流。〕八字以賜。提學金濤之後。□本朝刑曹判書文靖公子知之曾孫。議政年衰無嗣。躬禱於聖住山。越明年。公生。弘治六年癸丑六月五日也。生而狀貌奇異。啼笑有時。議政公識其非常。手植三槐於廟庭。以擬宋王魏公故事。丁巳。公年五歲而貞敬卒。議政公憐愛公備至。然謂不學無以成立。乃送寺讀書。歲且逾。猶不許往來。纔齔而議政繼逝。孤孑零丁。無所怙依。鞠於伯姊夏山君成夢井夫人。公自少氣度沈遲。飢寒俱不言。雖病甚苦。不以呻吟作形。人已服其非淺。初。議政公自占未及見公成長。擇奴婢可任者各一人托家事。傳勿失業以待其壯。受命者亦爲之盡。年十三而奴死。公自京帖粟百斛庀其葬。蓋亦難已。爲兒遊戲。卓越豪縱。或訝其難當。有識以奔踶千里期之。年過成童。尙不志學。馳馬試射。被慢於儕流。卽發憤策勵學業。居五月。已達文義。但從人質疑。未十朔。理無滯阻。自是刻意益篤。夏山欲見公志。勸就蔭仕。固問不對。強之。乃曰。丈夫當讀書樹業耳。夏山喜曰。吾亦試汝耳。壬申。公年始弱冠。夏山稱其文才已成。蓋四年向學。所造如此。若金慕齋,李容齋諸鉅公之來。必以公文示之。無不歎奬。自此華聲大聞。夏山深服其德器。亟稱不置曰。尙某之質。雖在孔門。無讓於諸弟矣。公聞成公守琛,守琮兄弟有學行。乃以全紙大書以簡曰。聞公之名。切有願交之志。二成亦以大書許之。自是連榻。實多講磨。中丙子生員。入泮課藝。連三製入高等。柳公雲時長皐比。大加褒稱。至訪于家曰。見君議論。知有經綸之才。公見儕類有忌色。遂有時晦之意。不復屑意於官試。柳公覺之。深恨其不能容人之才也。是時。趙公光祖遭遇□中廟。激勵學行。士方興起。而矯飾不眞者亦多。公心慕其善而恥其僞曰。吾欲內顧無所愧而已。

번역

공의 휘는 진(震)이고 자는 기부(起夫)이다. 목천(木川) 사람이다. 그의 선조가 본현의 아전이었는데, 고려 태조(太祖)가 삼한을 통합할 때에 본주의 사람들이 백제의 유민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소란을 일으키자 짐승의 이름을 주어 모욕하였다. 공의 선조는 상(象) 자를 얻어서 성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상언(尙焉)으로 고쳤다. 휘 국진(國珍)은 최 문헌공(崔文獻公) 충대(沖待)의 빈사생(賓使生)으로서 처음 향역(鄕役)을 면하였고, 생휘 원(愿)은 급사중(給事中)이었으며, 급사생 휘 원철(元諝)은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으로 4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휘 천석(天錫)은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으로 실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영부(英孚)는 누차 □ 증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였고, 조부 휘 효충(孝忠)은 충청도 수군 우후(水軍虞侯)로 누차 □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였다. 고휘보(考諱甫)는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으로 누증 대광 보국숭록대부(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의 벼슬을 받았으며,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를 지냈다. 3대에 걸쳐 추증된 은혜는 공이 귀한 것이었다. 판서공은 고향에 살았는데 임천(林川)이다. 재물이 매우 많아 가난한 백성에게 빌려주었고, 풍년과 흉년에 따라 백성과 함께 거두어 나누어 주었다. 만년에는 모든 권문(券文)을 가져다 불태우면서 “내가 장차 후손이 있게 될까?”라고 하였다. 의정공은 선업(先業)에 앉아 고향에서 거의 60년을 살았는데, 관직의 벼슬이 끊어졌으나 일찍이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어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 덕에 배불렀으니, 대개 씨를 뿌린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의정공은 빈박사(聘博士) 김휘지(金徽之)의 딸로 누증 정경부인(累贈貞敬夫人)의 벼슬을 받았는데, 바로 연안(延安)의 명문가였다. 전조 공민왕이 친히 팔자를 써서 주었다.-원주에 “나복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김도(金濤)의 후손이고 본조 형조 판서 문정공자 지지(文靖公子知之)의 증손이다. 의정(議政)이 나이가 많아 후사가 없어서 성주산(聖住山)에서 몸소 기도하였다. 이듬해 공이 태어났는데, 홍치(弘治) 6년 계축 6월 5일이다. 태어나자부터 생김새가 기이하고 울고 웃는 것이 때에 맞았다. 의정공은 그 비상함을 알아서 손수 사당 뜰에 세 그루의 홰나무를 심어 송(宋)나라 왕위공(王魏公)의 고사(故事)에 비겼다. 정사년에 공이 5세였는데 정경왕후가 졸하였다. 의정공은 공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배우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겨 절로 보내어 글을 읽게 하였다. 해가 지나도록 오히려 왕래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겨우 말을 배우자마자 의정공이 세상을 떠났다. 외롭고 쓸쓸하여 의지할 곳이 없어서 큰누나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 부인에게 맡겨졌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질이 침착하고 느긋하였으며, 굶주리고 추워도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병이 심하여 괴로웠으나 신음하며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미 그 깊지 않음을 알았다. 처음에 의정공이 스스로 점치기를 “아직 공을 보지 못했으니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라고 하였다. 노비 중에서 일을 맡길 만한 자를 각각 한 사람씩 골라 가사(家事)에 맡기고, 전해 주어 일을 잃지 않게 하여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명을 받은 자도 또한 그를 위해 다하였다. 나이 열세 살에 노비가 죽자 공이 서울에서 첩속(帖粟) 백 곡(斛)을 마련하여 그 장례를 치렀으니, 이는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놀이가 호방하고 뛰어난 점이 있어 혹시 감당하기 어려울까 의심하였으나 식견 있는 자는 천 리를 달려가서 기약하였다. 나이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아 말을 타고 활쏘기를 하다가 동료들에게 무시를 당하자 즉시 분발하여 학업에 힘써 5월이 되어서는 이미 문의(文義)에 도달하였고, 다만 남들이 의심하는 것을 따르지 않았다. 열 달도 안 되어 이치에 막힘이 없었고, 이후로는 더욱 각별히 노력하였다. 하산(夏山)은 공의 뜻을 보고 음사(蔭仕)에 나갈 것을 권하였으나 굳이 물어도 대답하지 않다가 억지로 권하자 “장부는 마땅히 글을 읽어 학업을 쌓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하산이 기뻐하며 “나도 너를 시험해 보겠다.”라고 하였다. 임신년에 공이 처음으로 약관(弱冠)이 되었다. 하산(夏山)은 문재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일컬어졌다. 대개 4년 동안 학문을 한 바가 이와 같아서, 김모재(金慕齋), 이용재(李容齋) 등 여러 거공(鉅公)이 와서 반드시 공의 글을 보이고는 모두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이 크게 퍼지자 하산은 그 덕과 기량을 깊이 복종하여 ‘상모(尙某)의 자질은 비록 공자의 문하에 있더라도 여러 아우에게 뒤지지 않는다.’라고 극찬하였다. 공이 성공 수침(成公守琛), 수종(守琮) 형제가 학문과 행실이 있다고 듣고는 종이에 크게 써서 간략하게 말하기를, “공의 이름을 듣고 절실히 사귀고 싶은 뜻이 있다.” 하니, 두 성공도 크게 써서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연탑(連榻)하여 실로 강마(講磨)가 많았다. 중병자년에 생원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 시험에서 세 번이나 높은 등급에 들었다. 유공운 시장고(柳公雲時長皐)가 크게 칭찬하고 집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논의를 보고 경륜의 재주가 있음을 알았다.” 하였다. 공이 동료들이 기색(忌色)을 부리는 것을 보고 마침내 때에 따라 숨어 지낼 뜻을 두어 다시 관시(官試)에 마음을 쓰지 않자, 유공(柳公)이 이를 깨닫고 남의 재주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이때 조공(趙公) 광조(光祖)가 중묘(中廟)를 만나 학행(學行)에 대해 격려하여 선비들이 바야흐로 흥기하였는데, 겉만 꾸미고 진실하지 못한 자도 많았다. 공은 그 선함을 사모하고 그 거짓됨을 부끄럽게 여겨 말하기를, “나는 내면을 돌아보아 부끄러운 것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원문

一日在泮。聞韓忠奉使嶺北。有一人出自山谷。被廣博之衣。立道上呼韓之字。袖出陳弊一書以授曰。歸告□殿下云。一泮莫不唶唶曰。三代之下。乃有此等偉人。公獨不應。坐中詰其故。公徐曰。若賢者。焉有自衒之理。衆共誹之曰。外若矜嚴。內必如之。公曰。豈無象恭者乎。衆益攻之。公竟不答。朝廷問得其人。則乃燕山嬖孼家書題有罪長流者。然後知公之識見高矣。己卯冬。捷文科別試。前日辱公者慙甚。公謝曰。非君警我。無所成就。君實愛我。受惠多矣。選入承文院爲正字。俄薦藝文館爲檢閱。轉待敎,奉敎。入侍經幄。經筵官金世弼論趙光祖等事曰。新進好古。自□上登擢無漸。豈有他心。若裁節而用之。未必無效。初甚尊寵。一朝□賜死。朝廷氣色。自此慘惔。公出曰。邇來□經席。未有此論。金相之言。正爲得之。旣而。金被謫。言者以公不合史局。請西敍。由龍驤司正,義興副司果。始拜成均館典籍。公慕善有素。故其初釋褐歸鄕。有崔弘濟者不爲士類所齒。乘趙公貶謫。上疏力詆。至請其死。□朝廷適加重罪。弘濟喜語稠中曰。果用吾言。已命斬光祖于謫所矣。公自少恥言人過。而聞之大惡。屢與所親。斥崔之爲人。其見遞於翰林。再駁於持平。皆以此也。遷禮曹佐郞。癸未。出爲北道評事。公素以善射名。亦托以出公。然自後常兼帶宣傳官。乙酉。陞戶曹正郞。移兵曹。丙戌五月。以禮曹正郞兼持平。充□聖節使洪益城彥弼書狀官。甚爲益城所器重。十一月。兼春秋館記注官。戊子。復以兵曹。轉司甕僉正。時□仁廟在東宮。抄選諸儒以備僚屬。公入侍講院。久爲弼善。進讀甚多。轉掌樂僉正兼春秋館編修官。拜司憲府掌令。遞爲成均館直講。庚寅。□貞顯王后薨。參掌都監事。時金謹思爲提調。頗以葬物私施人。公執謂□國事未襄。大觸其怒。諸僚皆危公而公不動。後累被其毒。事完。進階朝散。侍講院文學。辛卯。司諫院獻納兼春秋。復拜掌令。遞爲成均司藝。俄入弘文館。爲校理。壬辰。司憲執義。癸巳二月。弘文副應敎。是月。陞典翰。五月。□特命超四階。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先是。出入臺閣。論及己卯用事之臣曁福城之罪。雖人所難言者。亦不忌諱。物議多之。今玆特授。允協衆望。九月。遞爲護軍。是月。爲弘文副提學。甲午。復拜大司諫。言時政觸三公。三公詣□闕辭職者三日。竟改戶曹參議。出爲江原道觀察使。將行。請敎於尹相殷輔。尹相爲陳方伯政要。公遵行不違。事無滯積。常曰。吾屢膺當道。常遵尹相之敎。後有方伯請敎於公者。必擧尹相之言以送之。江原有一嫗告義子欲烝己。公審嫗貌。皤頭爛瘡。面如猿猴。公詰之曰。惡少不勝淫情。以色故也。爾子亦有本妻。必不犯極惡奸汝明明矣。若不承直。必先訊汝。嫗服曰。子果不順。欲構以重治耳。

번역

어느 날 성균관에 있을 때, 한 충봉사(韓忠奉使)가 영북(嶺北)에 갔다가 어떤 사람이 산골에서 나왔는데 광박한 옷을 입고 길에 서서 ‘한(韓)’ 자를 부르며 소매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주면서 “돌아가면 □전하께 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성균관의 사람들이 모두 “삼대(三代) 이후로 이런 위대한 사람이 나왔는데 공만 응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며 좌중에서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현자라면 어찌 스스로 드러낼 이치가 있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기를 “겉으로는 엄숙한 척하지만 속은 반드시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찌 상공(象恭)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더욱 공격하였으나 공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그 사람을 알아냈더니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소신(嬖臣)과 역적의 집안에서 죄를 지어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서제(書題)였다. 그러고 나서야 공의 식견이 높음을 알게 되었다. 기묘년 겨울에 별시로 문과를 치렀는데, 그날 전에 공을 욕한 자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공이 사양하기를 “그대가 나를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어찌하였겠는가.” 하였다. 성취한 것이 없는데도 군실(君實)이 나를 사랑하여 은혜를 받은 것이 많았다. 선발되어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고, 이윽고 천거되어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으며, 전교(轉敎)와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거쳐 경연의 자리에 입시하였다. 경연관 김세필(金世弼)이 조광조(趙光祖) 등의 일을 논하기를, “신진(新進)은 옛날을 좋아하여 스스로 위로 올라 발탁되는 데에 단계가 없으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는가. 만약 절제해서 쓴다면 반드시 효과가 없을 것이 없다.” 하였다. 처음에는 매우 존총받다가 하루아침에 사사(賜死)를 당하였으므로 조정의 기색이 이로부터 참담하였다. 공이 나와 말하기를, “근래 경연석에서 이런 논의가 없었는데 김 상지(金相之)의 말이 바로 옳은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 김세필이 귀양을 가고 나서 그가 공이 사국(史局)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서서(西敍)를 청하였다. 용용사 정(龍驤司正), 의흥 부사과(義興副司果)를 거쳐 처음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공은 평소에 학문을 흠모하였으므로 처음 관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최홍제(崔弘濟)라는 자가 있어 사류(士類)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였다. 조공(趙公)이 폄봉(貶謫)당한 것을 틈타 상소하여 힘써 비방하고 심지어는 죽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 조정에서 마침 그에게 무거운 죄를 더하니, 홍제(弘濟)가 기뻐하며 여러 사람 가운데 말하기를, “과연 내 말을 써서 이미 유배지에 있는 광조(光祖)를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하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 말을 듣고 크게 미워하여 자주 친한 사람들과 함께 최씨가 사람됨을 배척하였으므로 한림에 체차되고 지평에서 두 번이나 논박된 것이 모두 이 때문이었다. 예조 좌랑으로 옮겨졌다가 계미년에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나갔다. 공은 본래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므로 또한 출공(出公)으로 의탁하였는데, 그 뒤로는 항상 선전관을 겸임하였다. 을유년에 호조 정랑으로 승진되었다가 병조로 옮겨졌다. 병술년 5월에 예조 정랑 겸 지평으로서 성절사(聖節使) 홍익성(洪益城)의 서장관에 충원되었는데, 익성에게 매우 중시를 받았으며 11월에는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였다. 무자년 다시 병조(兵曹)에 복명(復命)하여 전사옹 첨정(轉司甕僉正)이 되었다. 이때 인묘(仁廟)가 동궁(東宮)에 계실 때 유생들을 뽑아 요속(僚屬)을 갖추었는데, 공은 입시강원(入侍講院)에서 오랫동안 필선(弼善)으로 있으면서 진독(進讀)한 것이 매우 많았다. 전장악 첨정 겸 춘추관 편수관(轉掌樂僉正兼春秋館編修官)을 지내고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체차되었다. 경인년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훙(薨)하여 장례를 주관하는 도감의 일을 맡았는데, 이때 김근사(金謹思)가 제조(提調)로 있으면서 장례 물품을 사적으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공이 나라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집집(執執)하자 크게 노하였다. 동료들이 모두 공을 위태롭게 하였으나 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 여러 차례 그 독기를 받았는데, 일이 끝나고 나서는 벼슬이 올라 조산시강원 문학(朝散侍講院文學)이 되었다. 신묘년에 사간원 헌납 겸 춘추관 장령으로 다시 제수되었다가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체차되고, 곧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가 되었다. 임진년에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계사년 2월이다.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로 있었는데, 이달에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 5월에 특명(特命)으로 네 품계를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대각(臺閣)을 출입하면서 기묘년에 일을 처리한 신하와 복성(福城)의 죄를 논하였는데, 비록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또한 꺼리거나 숨기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그를 칭찬하였다. 이제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참으로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한다. 9월에 호군(護軍)으로 체차되었는데, 이달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갑오년에 대사간에 다시 임명되었다. 시정(時政)을 논하면서 삼공(三公)의 의견과 어긋나서 삼공이 궐에 나아와 사직한 지가 3일이나 되었는데도 끝내 호조 참의로 고쳐 제수하였다. 관찰사로 나가게 되자 윤상인(尹相殷)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윤상이 방백정요(方伯政要)를 진달하니 공이 그대로 행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일이 지체되는 것이 없었다. 항상 “내가 여러 번 도신(道臣)에 임명되었지만 늘 윤상의 가르침을 따랐다.”라고 하였다. 뒤에 방백이 공에게 가르침을 청한 자가 있었다. 반드시 윤상(尹相)의 말을 들어서 보내야 한다. 강원도에 어떤 노파가 아들이 자신을 성폭행하려 하므로 고발하였다. 공이 그 노파의 모습을 살펴보니, 머리는 세고 얼굴은 곰보 같았다. 공이 꾸짖기를, “젊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음란한 정을 이기지 못해서이니, 그것은 얼굴빛 때문이다. 네 아들에게도 본처가 있으니 반드시 극악한 간음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를 분명히 밝혀 주겠다.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먼저 너를 신문하겠다.” 하였는데, 노파가 고백하기를, “아들이 과연 순종하지 않아서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려고 꾸민 것입니다.” 하였다.

원문

公卽治其子不順之罪。其度事深詣類此。乙未。以承政院同副承旨被□召。陞右副。病遞。四月。復拜副提學。是月。復入政院爲左副。公在銀臺當奏覆。囚案盈抱。諸宰相顧曰。今日必暮。公擧條要。敷啓甚詳。不移晷刻。情僞畢露。旣出。無不稱之。遞爲掌隷院判決事。丁酉。以禮曹參議。復拜大司諫。有一同僚將□禧陵水石之說議于圓席。公曰。玆事極重。當十分廣諮。然後乃可斟酌。不可容易。力止之。不數日。其人入□經筵獨啓之。時金安老方忌鄭文翼公光弼。正欲構陷而難其名。以□山陵時文翼實監其事。故乘其隙乃發遷卜之議。因置之不測。聲勢甚張。公閉門謝客。究思可救之方。自第具諫草。率同僚以□啓。俄得輕論。竟遞爲刑曹參議。又送西爲上護軍。數日。□特命復授刑曹參議。十月。本曹缺參判。□上又特以參議陞授。□賜階嘉善大夫。與梁贊成淵。同入淸齋。時權奸益熾。公語及時事。梁公就執公手曰。令公先見。本如神龜。旣而。梁爲都憲。果擊去之。戊戌。兼五衛都摠府副摠管。出爲京畿觀察使。管邑人士有連名狀公曰。某人不孝繼母。公悉招持狀人諭之曰。繼母子不孝。得名最易。爾等十分審察而來言耶。衆曰。人理不祥。不忍形諸文字。實烝之也。公訪其家人。不用刑杖。一言得情。上讞明白。□朝廷不復究訊。卽處以律。朝中大相有素服公者。嘉而戲之曰。令公寬柔。讞獄甚猛。己亥六月。□特超階資憲。授刑曹判書。公自顧驟陞。心誠憂悶。不敢出謝。會。臺官論以人品雖當。陞級不久。遞爲同知中樞府事兼副摠管。是月。□特授漢城府右尹。尋陞左尹。九月。拜司憲府大司憲。遞爲同樞。十月。□上親政。以西方重。□特除公觀察平安道。時咸鏡北道節度使有缺。□上下議于大臣。北鄙可虞。必得文武全才。尙某遞西送北何如。大臣以爲西北無輕重。而監司兼連帥。爲任尤重。遂□命仍往。公撫禦得宜。軍民兩安。辛丑冬。以同樞還□朝。壬寅三月。□特拜判尹。始陞階資憲大夫。兼都摠管。冬。遞爲同樞。餘如故。癸卯春。陞知中樞府事。六月。轉工曹判書。後一月。□特命判兵曹。甲辰正月。知敦寧府事。時公爲謝□恩使將赴京。□上以重臣出使。列邑有擾□命遞。實重公不欲遠去也。已而。□特授崇政階。拜議政府右贊成。知遇不世。□特命除拜。前後絡繹。不知公者頗疑之。遂以他辭□啓遞。□上曰。今姑從請。然此人終授大任。仍敦寧兼知義禁府事。復兼摠府。移刑曹判書。乙巳夏。遞爲同樞。時□二聖繼陟。忌者出公爲慶尙道觀察使。或詰之曰。□國憂方殷。若尙某曾判三曹。不宜遠出。忌者曰。嶺南巨服。須得剸煩才耳。本道詞訟浩繁。例馱文簿自隨。公自下界。發慝治奸。酬決如流。常簿之外。不持一幅。李公彥迪深加贊服。今□上卽寶丙午元月。以議政府右參贊徵還。兼帶摠府。三月。

번역

공이 자식의 불순한 죄를 다스린 일로 보면, 일을 처리하는 도량이 이와 같이 깊었다. 을미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서 소명(召命)을 받고 우부승지로 올랐다가 병으로 체차되었다가 4월에 부제학에 다시 제수되었는데, 이달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와 좌부승지가 되었다. 공이 승정원에 있을 때 상소문과 죄안(罪案)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여러 재상들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은 반드시 저녁이 되리라.” 하였다. 공의 거조(擧條)가 요점은 잘 드러나고 부연 설명은 매우 상세하여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서 진실과 거짓이 모두 다 드러났으므로, 그가 나가자 모든 사람이 칭찬하였다. 장례원 판결사로 체차되었다가 정유년에 예조 참의로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한 동료가 장차 희릉(禧陵)의 수석(水石)을 옮기자는 의견을 원탁에서 의논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니 충분히 널리 물어본 뒤에야 헤아릴 수 있고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 하고서 힘껏 저지하였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경연(經筵)에 들어가 독단적으로 아뢰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정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을 기피하여 꾀를 내어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으나 그 명분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산릉(山陵) 때에 문익이 실로 그 일을 감독하였으므로 그 틈을 타서 옮겨 정박할 것을 주장하는 의논을 꺼내어 예측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성세가 매우 거세지자 공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구제할 방도를 궁리하다가 집에서 간초(諫草)를 갖추어 동료들을 이끌고 □에 아뢰었다. 얼마 안 가서 가벼운 논의로 끝내 형조 참의에 체차되고, 또 서쪽으로 보내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며칠 뒤에 □가 특별히 명하여 다시 형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10월에 본조에 참판 자리가 비자 □가 또 특별히 참의를 참판으로 올려 제수하고, □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려 주었다. 양 찬성 연(梁贊成淵)과 함께 청재(淸齋)에 들어갔다. 이때 권간(權奸)이 더욱 성하였는데 공이 시사(時事)를 언급하자, 양공이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공의 선견지력은 본디 신귀(神龜)와 같네.” 하였다. 얼마 뒤에 양공이 도헌(都憲)이 되어 과연 그들을 쳐서 물리쳤다. 무술년에 겸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경기도 관찰사에 나갔다. 고을의 인사(人士)가 연명으로 공에게 장계하여 아뢰기를, “모(某)라는 사람이 계모를 불효하고 있습니다.” 하니, 공이 모두 불러서 장계를 올린 사람들을 타이르기를, “계모를 불효한 자는 이름에 오르기가 가장 쉽다. 너희들은 십분 자세히 살피고 와서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사람들이 아뢰기를, “인리가 상서롭지 못하여 차마 글로 드러내어 실로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니, 공이 그 집안을 찾아가 형장(刑杖)을 쓰지 않고 한마디 말로 진상을 알아내었다. 성상의 심판이 명백하였고 조정에서 다시 신문하지 않아서 즉시 법대로 처결하였다. 조정에 평소 공을 추중하는 자가 있어 기뻐하며 농담하기를, “공은 관용하고 부드러우나 옥사를 심판할 때는 매우 준엄하다.” 하였다. 기해년 6월에 특지(特旨)로 자급을 뛰어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형조 판서에 제수되니, 공이 스스로 돌아보며 갑자기 승진한 것을 진심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감히 사은하지 못하였다. 마침 대관(臺官)이 인품은 합당하나 논핵하니, 승진한 지 오래되지 않아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에 체차되었다. 이달 □ 한성부 우윤에 특별히 제수되고, 곧 좌윤으로 승진하였다. 9월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0월 □ 주상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서방(西方)의 중함을 염두에 두고 □ 공을 관찰사 평안도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때 함경북도 절도사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 상이 대신에게 하의하기를 “북쪽 변방은 우려할 만하니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얻어야 한다. 상모(尙某)를 서쪽에 체차하여 북쪽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니, 대신이 아뢰기를 “서북은 경중의 차이가 없으나 감사가 연수(連帥)까지 겸하는 것은 임무가 더욱 중하니, □ 그대로 가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공이 평안도를 다스리면서 잘 적응하여 군민이 모두 편안하게 지냈다. 신축년 겨울에 동지중추부사로 조정에 돌아왔다. 임인년 3월에 □ 특별히 판윤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겸 도총관이 되었다. 겨울에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계묘년 봄에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6월에 공조 판서로 옮겨 갔다가 한 달 뒤에 □ 특별히 명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다. 갑진년 1월에 돈녕부사로 삼았다. 이때 공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서울로 가려 하였는데, □ 상이 중신(重臣)이 사행을 나가는 일로 인해 여러 고을이 소란스러울까 염려하여 체차하라고 명하였으니, 실상은 공이 멀리 떠나지 않기를 중시한 것이다. 얼마 안 되어 □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제수하고 의정부 우찬성으로 삼았다. 지우(知遇)가 세상에 드물었다. □ 특별히 명하여 제수하는 일이 전후로 계속되니, 공을 모르는 자들은 의심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다른 사유를 들어 계사(啓辭)를 올려 체차하니, □ 상이 말하기를, “지금은 우선 청한 대로 하겠다. 그러나 이 사람은 끝내 큰 임무를 맡길 것이다.” 하였다. 이어 돈녕부사를 겸임하고 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가 다시 총융부사를 겸임하고 형조 판서로 옮겨 갔다. 을사년 여름에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 두 성상께서 세상을 떠나자, 기자가 공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고는 묻기를, “□ 나라의 근심이 한창 심한 때이다.” 하였다. 상모(尙某)가 일찍이 삼조 판서(三曹判書)를 지냈으므로 멀리 나가서는 안 되는데, 기자가 말하기를, “영남의 거복(巨服)은 반드시 번거로움을 없애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본도(本道)의 사송(詞訟)이 많고 번잡하여 으레 문부(文簿)를 가지고 가는데, 공이 아래에서 악독한 자를 내쫓고 간사한 자를 다스려 결말이 물 흐르듯 순조로워 항상 문부를 한 폭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공 언적(李公彦迪)이 깊이 찬탄하였다. □□ 보병오년 1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부름을 받아 돌아왔다. 겸 총부사(摠府使)를 맡았다.

원문

陞階正憲。就舊職。復加知春秋館事。與修□中宗,仁宗二聖實錄。八月。又兼知義禁府事。九月。□特命復判兵曹。戊申二月。辭遞爲知中樞。三月。復兼摠府。四月。又知□經筵。是月。□特陞崇政府右贊成。別職皆如故。己酉正月。拜吏曹判書。餘如故。又加判義禁府事。九月。卜相。以公爲議政府右議政。階大匡輔國崇祿大夫。兼領□經筵,監春秋館事。公膺□命憂惶。跼蹐靡容。懇辭不獲。時□二聖實錄未畢。至是總裁焉。藁洗。賜鞍馬以勞之。庚戌。緇徒適有不法事。僚相忿其放縱。謂公曰。此輩無所統。故如此。若依□祖宗朝故事。使有糾攝之地則不乃有益乎。公曰。疾之已甚。亂也。此屬當治以不治。今若糾檢。而復立統屬之規。則無識之徒。或反謂之崇佛而然則事尤大關。固不可爲也。未幾。公以事詣□闕。內旨下議曰。僧徒無統。欲復兩宗治之何如。公□啓曰。僧徒雖無統攝。然起廢重難。故前日同僚。亦有此議。恐反有害。遂止耳。公實未知其漸將大。自以爲事幾之初。微言諷止。得大臣□啓事之體。未久。兩宗復。臺諫及儒生。交章抗疏。政府亦率百官以諫。不知者謂公前議似有迎合之意。公上辭請免。□優答不允。時聖烈仁明大王大妃同聽政。自□上親爲昭雪而曉之。公歎曰。事機之難辨則學識不明者。是非顚倒無怪。至如佛法之不可復。明如日星。雖欲逢君。不可得也。顧以平生所爲。不能取信於人。至以此事見疑。自反而已。尙誰咎哉。厥後僧徒頗橫。每謂沈相曰。兩宗之復。我二人在職焉用之責。其能逃乎。辛亥。陞左議政。癸丑正月。公年已過耳順。不能無疾。尤以不勝重任爲憂。請辭累數百。自後至乙卯。求退益懇。皆□下批答不允。至終。□附下傳旨曰。卿雖有疾。相位不可輕易。去就不計久近。安心調病。會有邊警。乃出視事。丁巳。封□世子。以公爲傅。戊午五月。□御批陞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秋。國家設別科。公爲讀卷官。其時主文柄者。欲擧□中朝事發策。公止之曰。此大事。可廟議。不可策士。猶以其意爲問目。旣而。公議譁然。論罷主題試官。擧子亦削科。公自以首官不能力止。詣□闕請自坐不爭之罪。□上曰。不聽公言。過在於彼也。初。公自試所歸。語子弟頗有未愜之恨。旣而果然。公又自丙辰後。無歲不累辭。□上於批答外常有附□旨。敦勉勿退。至己未春。又三上辭。皆□批答不允。又下□御札曰。觀卿累辭。予意缺然。毋多求退。以輔寡躬。乃上疏略曰。明主之圖治。必極一時才德之選。作爲輔弼。事體相須。然後馨香上格而天應以祥。輝光旁達而民興於善。置相非人。治不獨定。功不徒成。古人論相業者有曰。上佐人主。理陰陽。順四時。下遂萬物之宜。外鎭撫四夷。使卿大夫各得其職。主上睿知聰明。宵旰緝煕。馨香光輝。方將上格旁達。

번역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여 옛 관직에 제수되었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회복하여 중종과 인종 두 성인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8월에 또 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9월에 □가 특별히 명하여 판병조에 복직시켰다. 무신년 2월에 사직하고 체차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3월에 다시 총부를 겸임하였다. 4월에 또 □경연사를 맡았다. 이달에 □가 특별히 승숭정부 우찬성으로 올리고 별직은 모두 예전대로 하였다. 기유년 1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고 나머지는 예전과 같았으며 또 판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9월에 정승을 뽑아 공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다. 계급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이고, 영경연사(領經筵事)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임하였다. 공이 □의 명을 받들기를 두려워하고 황송하여 주저하며 용납하지 못하고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에 □ 두 성인의 실록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총재(總裁)하게 되었다. 초고를 씻어 내게 하고는 안마(鞍馬)를 하사하여 수고한 것을 위로하였다. 경술년에 승려들이 마침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있었는데, 동료 상신이 그들의 방종함을 분하게 여겨 공에게 이르기를, “이 무리들은 통솔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규찰할 곳을 두게 한다면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병이 이미 심해진 것은 난리이니, 이는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리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만약 규검(糾檢)하여 다시 통솔하는 법도를 세운다면 무식한 무리는 도리어 불교를 숭상한다고 여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은 더욱 크게 관계되니 진실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공이 일을 가지고 □궐에 나아가자 내지(內旨)가 의논하기를, “승도(僧徒)에게 통솔하는 곳이 없으니 다시 양종(兩宗)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이 □에 아뢰기를, “승도에게 비록 통솔하는 곳이 없지만 일으키고 폐하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날 동료들도 이 의논을 했으나 도리어 해가 될까 염려하여 마침내 그만두었습니다.” 하였다. 공은 실로 일이 장차 크게 될 줄 모르고, 스스로는 사태의 초기라고 여겼다. 은미한 말로 훈계하고 그치게 하는 것은 대신(大臣)이 계사(啓事)의 체모를 얻은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양종(兩宗)이 복위되자 대간과 유생들이 번갈아 상소하였고, 의정부도 백관을 거느리고 간언하였다. 이를 모르는 자들은 공의 전의가 영합하는 뜻이 있는 듯하다고 여겼다. 공은 사양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우답(優答)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성열(聖烈) 인명대왕비(仁明大王妃)께서 함께 정사를 보시다가 직접 밝혀서 해명해 주셨다. 이에 공이 탄식하기를, “일의 기미를 분별하기 어려운 것은 학식이 미천한 자가 시비를 전도하는 것이니 괴이할 것 없다. 불법(佛法)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은 해와 별처럼 분명하니 비록 부처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돌아보건대 평생의 행실이 남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여 이 일로 의심을 받게 되었으니, 스스로 반성할 뿐 누구를 탓하겠는가.” 하였다. 그 뒤 승도(僧徒)들이 자못 방자하게 굴어 매양 심상(沈相)에게 말하기를, “두 종실이 복위된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직책에 있으면서 제대로 쓰지 못한 책임이다.” 하였다. 그가 능히 도망하였는가? 신해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계축년 1월에 공의 나이가 이미 이순(耳順)을 넘었으므로 병이 없지 못하고, 더욱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는데, 그 뒤부터 을묘년까지 물러나기를 구하는 것이 더욱 간절하였다. 모두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다. 끝에 이르러 전지(傳旨)를 덧붙여 내리시기를, “경에게 병이 있더라도 정승의 자리를 경솔히 비울 수 없으니, 떠나는 것은 오래나 가까운 것을 따지지 말고 안심하고 조섭하여 병을 다스리라. 변방에 경보가 있을 것이니, 나아가서 일을 보라.” 하셨다. 이에 나가서 일을 보았다. 정사년에 세자를 봉하고 공을 부사로 삼았다. 무오년 5월에 어필(御批)이 내려 영의정에 올리고, 겸하여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의 일을 맡게 되었다. 세자의 스승으로 계셨다. 가을에 국가에서 별과(別科)를 행하였는데 공이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그 당시 문병(文柄)을 주관하는 자가 중조(中朝)의 일 가운데서 책문(策問)을 내고자 하였으나, 공이 막고 말하기를, “이는 큰일이니 묘당에서 의논해야 한다.” 하였다. ‘책사(策士)’를 가리켜서 오히려 그 뜻을 문목(問目)으로 삼았으므로, 이윽고 공론이 시끄러워져 주제시관(主題試官)을 파직하고 거자(擧子)도 삭과(削科)하였다. 공은 스스로 수관(首官)으로서 힘써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에 나아가 자진하여 불쟁(不爭)의 죄를 청하였는데, □ 상이 이르기를, “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저들에게 허물이 있다.” 하였다. 처음에 공이 시소(試所)에서 돌아와서 자제(子弟)에게 말한 것이 다소 마음에 차지 않는 한이 있었는데, 이윽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또 병진년 이후로 해마다 사직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 상이 비답 외에 항상 부□의 뜻을 담아 돈면하여 물러가지 말게 하였다. 기미년 봄에 또 세 번이나 사직하였는데, 모두 □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또 □ 어찰(御札)을 내려 이르기를, “경이 여러 차례 사직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서운하다. 많이 물러나기를 구하지 말고 과인의 보좌가 되라.” 하였다. 이에 상소하여 대략 말하기를, “밝은 임금이 다스림을 도모할 때는 반드시 한 시대의 재덕(才德)이 뛰어난 인재를 극진히 선발하여 보필하게 해야 하니, 일의 체모상 서로 도움이 된다.” 하였다. 그 뒤에 향기가 위로 올라가 하늘이 상서로 응하고 광휘가 곁으로 미쳐 백성들이 선에 흥기한다. 정승을 두는 것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니, 다스림은 홀로 안정되지 않고 공은 이루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의 말에 “상(相)이 하는 일은 위로는 임금을 도와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행하며 아래로는 만물의 마땅함을 이루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무하여 경대부로 하여금 각자 그 직분을 얻게 한다.” 하였다. 주상께서 총명으로 밤낮으로 정사를 돌보아 향기롭고 빛나서 바야흐로 위로 올라가고 곁으로 미치려 하신다.

원문

而臣居樞要。以乖氣蒙蔽沮遏之。致五災。召五凶。使含生失遂。不能宣揚□聖德神武。夷虜反側。百姓不親附。庶官不盡職。輔相無狀。於斯難掩。夫台鼎之位。人主所以待賢尊德之重器。而聖經中言位言職。必加天字者。蓋曰天物。人不得私之也。君而謬授非人則不天。臣而濫受非分則褻天。謬授濫受。皆非畏天之道。今有荊璞於此。必使玉人治之。將使斲輪。亦必假手於輪扁。在治國則乃使下材。臣愚亦任其責。其於致治。大有逕庭。因歷擧前世宰相遞免之事曰。擧此一隅。亦可想時君不以天物私其臣也。臣往自己酉。始累□殿下知人之明。不自揣分。誤入台府。忘恥養病。敗政貽患。今已十有一年。身非鼠雀。心豈少安云云。□上亦優勉不許。八月。□上御翠露亭。簡召諸宰及賜暇儒臣。講其所讀書。仍命諸宰各製詩進爵。□賜燭以榮之。公以首相入侍。□上親爲侑爵。公不覺醺醉。伏苑中。□上乘小轝。將還大內。□下問爲誰。左右以領相對。□上曰。老相在此。不可輦過。□命設行帳。然後乃入。繼□命中使護歸。翌日。與諸公上箋陳謝。旋以失禮待罪。□御批曰。昨見卿醉。甚洽予意。有何失禮。庚申六月。詣□闕。具衰病不職之狀。復申前請。□御批曰。予以涼德。叨承丕緖。十六年來。水旱相繼。近日霖雨。亦連月餘。致此之災。咎實由予。常切兢惶。若臨深淵。卿以休休老德。忠厚大臣。爲相十餘年。輔寡躬多益。予倚恒切。方深嘉悅。居位則朝廷堂堂。去位則衆望必缺。豈以身上微恙。年亦不衰。而欲退懇求乎。今非大臣求退之時也。再啓。□御批曰。如卿重望。有幾人哉。予以不敏。當倚老成大臣。卿勿以久居爲未安。三□啓曰。□中廟朝名相。無如鄭光弼,尹殷輔,洪彥弼而其入政府。幷初再或十三年。或九年。或十年。以三人比臣。不啻若黃鵠,壤蟲。而臣則一爲而至於十二年之久。且金時習嘲鄭昌孫曰。汝爲議政如此其久。可謂朝廷有人乎。今臣渺然一身。亦千萬指目之所萃。口笑腹非。必有甚於時習者矣。□御批曰。大臣重職。當以賢否進退。不可計久而輕動也。卿德非不及於三相。雖過三相居位之年。固非不可。金時習嘲鄭相。亦豈美事乎。卿當益輔寡躬而已。何可慮他。公猶辭不已。至於七□啓。其辭尤切。□御批曰。卿至於七□啓而辭。予意豈安。反覆思之。不可輕遞。□賜酒以遣。八月。□世子加元服。公以師贊禮。受鞍馬之□賜。重九日。□上御瑞蔥臺。簡召諸宰及近臣。各製詩進爵。仍□賜黃花蠟燭。翌日。上箋謝。辛酉七月。□上又御閱武亭。召公卿侍從如瑞蔥故事。因出□御軸。各製寫以進。公末句云。忘言醉飽鈞天裏。敬德唯關獻曝誠。雖文字之末。不忘箴規。見者皆謂得大臣進戒之體。八月。展掃先壟於林川。將行。□啓曰。大臣往來本道。例設宴享。爲弊不貲。請於今行。下敎免設。□上曰。

번역

신이 중추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기운을 어긋나게 하여 가리고 막아서 오재(五災)를 불러들이고 오흉(五凶)을 부르내어, 생명을 품은 자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니 성덕과 신무를 선양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랑캐는 도리어 반역하고 백성은 친근히 붙지 않으며 여러 관원은 직분을 다하지 않고 보상(輔相)은 형편없으니, 이 점은 감추기 어렵습니다. 대저 재상의 자리는 임금이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높여 대우하는 중한 도구입니다. 성경(聖經)에 말하기를 “위(位)와 직(職)에는 반드시 ‘천(天)’ 자를 붙인다.” 하였으니, 이는 하늘의 물건이라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임금이 잘못된 사람에게 제수하면 하늘을 어기는 것이고 신하가 분수에 넘치게 받으면 하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잘못 제수하고 분수에 넘치게 받는 것은 모두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거친 돌이 있으니 반드시 옥(玉)을 다루는 사람에게 맡겨야 합니다. 장차 수레바퀴를 만들더라도 반드시 윤편(輪扁)의 손을 빌리듯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도 하재(下材)를 신하로 임명하여 그 책임을 맡기면 치세(治世)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대유(大有)가 의견이 크게 달라서 역대 재상들이 체면당한 일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임금은 하늘의 물건을 가지고 신하를 사사로이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지난 기유년부터 비로소 전하의 명철한 안목에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잘못 재상 자리에 들어가서 부끄러움을 잊고 병을 키워 정사를 망치고 화를 끼쳤습니다. 지금 이미 11년이 지났는데, 몸이 새삼스럽지 않으니 마음이 어찌 조금이나마 편하겠습니까.” 하였는데, □ 상이 또한 너그러운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8월에 □ 상이 취로정(翠露亭)에 나아가 여러 재상과 사가 유신(賜暇儒臣)을 간략하게 불러서 그들이 읽은 책을 강론하고, 이어 재상들에게 각각 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는 □ 상이 촛불을 주어 영화롭게 하였다. 공이 수상으로 입시하였는데, □ 상이 친히 술잔을 권하자 공이 자신도 모르게 취하여 원(苑) 안에 엎드려 있었다. □ 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대내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 하인이 누구를 위하여 하는 것이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영상(領相)을 가리켰다. □ 상이 말하기를, “노상(老相)이 여기 있다.” 하였다. 어가가 지나갈 수 없으므로 □명(命)을 내려 행장(行帳)을 설치한 뒤에야 들어갔다. 이어서 □명(命)으로 중사(命中)를 시켜 호종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다음 날 여러 공과 함께 상주(上箋)를 올려 사은하고, 곧바로 실례하였다고 대죄하니, □ 어필(御批)에 이르기를, “어제 경이 취한 것을 보니 내 마음에 매우 흡족하였는데 무슨 실례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경신년 6월에 궁궐에 나아가 노쇠하고 병든 몸으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을 갖추고 다시 이전의 청을 진달하니, □ 어필(御批)에 이르기를, “나는 부족한 덕으로 외람되이 큰 기업을 이어받아 16년 동안 홍수와 가뭄이 계속되었으며 근일에는 장마가 또한 한 달 넘게 이어졌다. 이런 재앙이 일어난 것은 실로 나에게 허물이 있으므로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깊은 못에 임하는 듯하다. 경은 노련한 덕과 충후(忠厚)한 성품을 지닌 대신으로서 10여 년 동안 정승이 되어 과인의 몸을 보필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내가 의지하는 바가 항상 간절하고 기쁘고 흡족한 마음이 깊다. 자리에 있으면 조정이 당당해지고 자리를 떠나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반드시 어긋날 것이다. 어찌 몸에 작은 병이 있다고 해서 나이도 늙지 않았는데.” 하였다. 물러나기를 간절히 청하시려 하는데, 지금은 대신이 물러나기를 청할 때가 아니다.”하였다. 재차 아뢰니, 어필하기를, “경처럼 중망(重望)을 받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내가 불민하여 노성한 대신에게 의지해야 하니, 경은 오래 머무는 것을 편치 않게 여기지 말라.”하였다. 30일 아뢰기를, “중국 명나라의 재상으로 정광필(鄭光弼), 윤은보(尹殷輔), 홍언필(洪彦弼)만 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들이 의정부에 들어간 것은 모두 처음에는 1년, 두 번째는 3년 혹은 10년, 세 번째는 9년이나 10년이었다. 이 세 사람을 신에게 비유한다면 황곡과 양충(壤蟲)에 비할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신은 한 번 의정으로 있으면서 12년이나 오래 있었다. 또 김시습(金時習)이 정창손(鄭昌孫)을 조롱하기를 ‘너는 의정으로 이렇게나 오래 있었으니,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지금 신은 보잘것없는 일신이 또한 많은 사람들의 지목을 받고 있으니, 입으로는 웃고 배로는 미워하는 것이 반드시 김시습보다 심할 것이다.”하니, 어필하기를, “…… 대신의 중직은 마땅히 어질고 못 어질고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하니, 오래 계시기를 따지면서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경의 덕망이 삼상(三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 비록 삼상이 재위한 해를 넘기더라도 참으로 안 될 것이 없다. 김시습(金時習)이 정승을 조롱한 것도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경은 마땅히 더욱더 과인의 몸을 보필하면 될 뿐이니, 어찌 다른 것을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공이 여전히 사양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일곱 번째 계사(啓辭)에 이르렀는데, 그 말이 더욱 간절하였다. □ 어필(御批)하기를, “경이 일곱 번이나 계사를 올려 사양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마는, 반복해서 생각해보니 경을 가벼이 체차할 수 없다.” 하고, □ 술을 내려 보내어 위로하였다. 8월에 □ 세자가 원복(元服)을 더하여 공경이 예식을 주관하였는데,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중구일(重九日)에 □ 상이 서총대(瑞蔥臺)에 나아가 재신(宰臣)과 근신들을 간략히 불러 각기 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술잔을 돌린 다음, 이어서 □ 국화와 촛불을 하사하였다. 이튿날 상이 전문으로 사례하였다. 신유년 7월에 □ 상이 또 열무정(閱武亭)에 나아가 공경과 시종을 서총대의 고사처럼 불러 모았다. 임금이 어축(御軸)을 내어 각자 제사(製寫)하여 올리게 하였는데, 공의 말구(末句)에 “말도 잊은 채 취하고 배부른 것은 균천(鈞天) 속에서이고, 덕을 공경하는 것은 오직 진심을 바치는 데에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비록 문자(文字)의 말구이지만 잠규(箴規)를 잊지 않았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대신이 임금에게 경계하는 체모를 얻었다고 하였다. 8월에 임천(林川)에서 선륭(先壟)을 전소(展掃)하려고 할 때, □가 아뢰기를, “대신이 본도(本道)에 왕래할 때마다 으레 연향(宴享)을 베푸는 것이 폐단이 되고 비용이 적지 않으니 이번 행차에는 하교하여 면제해 주소서.” 하니, □가 상에게 말하기를, “……”

원문

老相遠往。豈無宴禮以慰乎。姑爲之。□命孫副率蓍孫。竝乘馹護行。遣中使宣酒樂。餞於濟川亭。□特賜豹皮。是日雨。□上又命史官。追及江上。□賜蓑衣諸具。皆□御用也。近古人臣。未有受此者。還□朝曰。又□賜酒樂郊迎。公上箋稱謝。□上賜御札曰。卿以老德首相。霜天掃塋。豈不表贐薄物乎。是予敬大臣。優老德之微意也。勿謝。十一月。□世子行嘉禮。公又以師受□賜馬。是月。以去稀年已迫。詣□闕申前請。乞先時致休。□答曰。自古人君倚重老成。予何許退。居相位。壽稀年。予所貴也。加勉重職。以輔寡躬。至四啓。□答曰。國家治亂。雖在於帝王之明暗。而亦係於大臣之賢否。卿謂雖聖君。必得賢佐以致太平。我國古來。擇人雖或不精。如卿老德。予難輕捨。是日四□答。亦皆御筆也。壬戌。公年七十。請順天道致仕。□答曰。卿至稀年。禮當几杖而安之。不宜許退。再□啓几杖固不敢當。然人臣受此。例會廷臣以榮□上寵。遷□陵在前。不可仍尸其位而遲之。□答曰。予意盡諭。几杖宴。徐當爲之。遲速亦何慮焉。三啓。□答曰。予豈從卿所請。宜勿固辭。四啓。□答曰。國家用人。當先純正。凡官尙然。況大臣乎。如卿純厚大臣去位則予未知國事是也。五啓。□御批曰。君臣之間。所當情義相孚。爲人臣者。不得於君而在職則予未知其可也。如卿老德大臣。久居台府。勉輔寡躬。此乃當然之事。不可以稀年輕遞。七月。公患痢苦。□上聞之。遣內醫審疾曰。若言予命。恐起居有勞。諱而勿言。令若私問者以□啓。十月。乃受几杖。□四殿皆優賜酒果脯醢等物以助宴需。公上箋謝。□御筆批曰。人生七十古來稀。予貴耆德。而居相一紀世不多。豈退老成乎。几杖安養。在所當爲。勉輔寡躬。卿宜勿謝。十二月。復上辭。又□批答不允。再辭。□答曰。欲復降批答。恐致重勞。□特命給暇。安心調養。癸亥正月。三辭。□上猶持難。久之勉允所請。□御批授領中樞府事。仍領□經筵。公求退十餘年。始蒙兪□允。遞相之日。身氣輕健。始若無疾者。常曰。天馽已收。無往不適。約與兒輩。隨處命駕。水曲山傍。閒往閒來。作□聖世無事物。祝□聖算以終天期耳。有時取酒微醺。緩歌起舞以自樂。或問前日未嘗歡娛。今何如此。答曰。昔負重任。唯力不支是憂。今旣釋之。云胡不樂。九月。□世子卒。公奔訃哭泣。連日廢食。悲痛過傷。心痛遽作。幾危數日。滿體痿黃。越三月。順懷柩將發。公欲往祖于郊。或止之。公曰。我□東宮舊僚。終始之禮不可廢。是日。心痛又作。幾不能救。自是心熱大熾。疸證尤重。彌留數月。竟至不起。蓋病因憂□國感傷而危劇也。病中聞有星變。歎曰。吾安得死而塞是災乎。又聞宰相安瑋卒。嘆曰。此人能任厥職。今又逝矣。家人慰解之曰。身病心憂。豈易瘳之道。公曰。吾身雖病。敢忘國事乎。□上遣內醫問疾。□特賜御廚。庶幾可口珍味無不備。公感戴曰。

번역

노상(老相)이 멀리 가는데 어찌 연례(宴禮)로 위로하는 일이 없겠는가. 우선 □명(命)에 따라 손부(孫副)와 시손(蓍孫)을 아울러 역마를 타고 호행(護行)하게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술과 음악을 선사하여 제천정(濟川亭)에서 전별하게 하였다. □ 특별히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이날 비가 오자 □ 상이 또 사관에게 명하여 강가까지 따라가게 하고, □ 도롱이와 여러 가지 갖춤을 하사하였는데 모두 □ 어용(御用)이었다. 근고(近古)의 신하 중에 이런 것을 받은 자는 없었다. 돌아와서 □ 조정에 아뢰기를 “또 □ 술과 음악을 하사하여 교외에서 맞이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상에게 올린 전문(箋文)으로 사례하니, □ 상이 어찰(御札)을 내려 이르기를 “경은 노덕(老德)을 지닌 정승으로서 서리 내리는 하늘에 무덤을 쓸고 가는데, 어찌 표문(表文)과 선물로 보낸 물건이 박하지 않겠는가. 이는 내가 대신을 공경하고 노덕을 우대하는 작은 뜻이니 사례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 세자가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공이 또 사수(師受)로 인하여 말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기년(己年)이 다가왔으므로 궁궐에 나아가 신하의 직임을 먼저 그만두기를 청하니, □ 답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은 노성한 사람을 의중(倚重)한다.” 하였다. 내가 어느 때에 물러나야 하는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명이 장수하는 것은 내가 귀하게 여기는 바이다. 중책을 더욱 힘써서 과인의 보좌를 하였는데, 네 번이나 계사(啓辭)를 올리기에 답하기를, “나라의 치란은 비록 제왕이 어둡고 밝음에 달려 있지만 또한 대신이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관계된다. 경은 성군이라도 반드시 어진 보좌관을 얻어야만 태평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인재를 뽑는 것이 비록 정밀하지 못한 적이 있었지만, 경과 같은 노덕(老德)을 내가 가벼이 버리기는 어렵다. 이날 네 번의 계사에 대한 답도 모두 어필(御筆)이다.” 하였다. 임술년에 공의 나이가 70세가 되어 천도를 따라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경이 장수하였으니 예법상 의당 궤장(几杖)을 주고 편안히 쉬게 해야지 물러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재차 계사를 올리기를, “기장은 진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하가 이런 은총을 받으면 으레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여겨 임금의 총애를 우러러야 합니다. 천릉(遷陵)이 앞에 있으니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면서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을 다 말하였다. 기장을 내리라.” 하였다. 서서히 해야 할 일인데, 더디고 빠름을 어찌 염려하겠는가. 세 번째 계사(啓辭)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내가 어찌 경이 청한 대로 하겠는가. 굳이 사양하지 말아야 한다.” 네 번째 계사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국가가 사람을 쓰는 데는 마땅히 순수하고 정결한 사람을 우선해야 한다. 모든 관직이 그러한데, 더구나 대신(大臣)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과 같은 순후(純厚)한 대신이 지위를 버린다면 국사가 어떠할지 모르겠다.” 다섯 번째 계사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군신 간에는 마땅히 정이 서로 부합해야 한다. 신하 된 자로서 임금에게 뜻을 얻지 못하고 직책에 있는 것은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경과 같은 노덕(老德)한 대신이 오랫동안 대부(台府)에 있으면서 과고(寡躬)를 힘써 보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 젊은 사람을 자주 체차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아니다.” 7월에 공이 이질로 고생하자, 주상이 그 소식을 듣고 내의원을 보내 병세를 살피게 하고 말하기를, “만약 나의 명이라고 말하면 기거에 수고가 있을까 염려되니, 숨기고 말하지 말고 사적으로 묻는 것처럼 □□으로 아뢰라.” 하였다. 10월에 비로소 궤장(几杖)을 받았다. ○ 네 전(殿)에서 모두 술과 과일, 포(脯), 젓감 등 여러 가지를 넉넉히 내려 연회에 쓰도록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사례하였다. ○ 어필(御批)에 이르기를,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문 일인데 나는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재상 자리에 있은 지가 한 세월이니 세상에 많지 않다. 어찌 물러나 노성(老成)의 길로 가겠는가. 안락하게 조섭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늙은 몸을 보필하기를 힘쓰고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2월에 다시 상소하였으나 ○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또 상소하였으나 ○ 비답을 내리기를 윤허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상소하자 ○ 답하기를, “다시 비답을 내리면 번거롭게 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 특별히 휴가를 주어 안심하고 조섭하라고 명하였다. 계해년 1월에 세 번째로 상소하였으나 ○ 주상이 여전히 어렵게 여기다가 오래되어 청한 바를 윤허하였다. ○ 어필을 내리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고, 이어 경연관(經筵官)을 맡았다. 공이 물러나기를 구한 지 10여 년 만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는데, 재상에서 체차되는 날에는 몸과 기운이 가볍고 건강하여 처음 병이 없던 때와 같았다. 항상 “천마(天馬)의 고삐가 이미 거두어졌으니 가는 곳마다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자식들과 함께 지내려고 하였다. 어디를 가나 수레를 몰아 물굽이와 산자락을 따라 한가로이 오고 가면서, 성세(聖世)에 아무런 일이 없음을 꾀하고, 성상의 계책이 하늘의 기한까지 이어지기를 축원하며, 때때로 술을 마시고 약간 취하여 느릿느릿 노래하고 일어나 춤추며 스스로 즐겼다. 혹시 전날에는 즐거워하지 않다가 지금 어찌 이와 같으냐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예전에는 중임을 맡아 오직 힘이 지탱되지 못할까 근심하였는데, 이제는 이미 내려놓았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하였다. 9월에 세자가 졸하였다. 공은 부고를 듣고 달려가 곡하고 울며 연일 음식을 폐하고 슬퍼하다가 심통이 갑자기 생겨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온몸이 누렇게 시들었다가 3개월이 지나 순회(順懷)의 영구를 장례 지내려고 할 때 공은 외교에 나가고자 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만류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동궁의 옛 신하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예절을 폐할 수 없다.” 하였다. 이날 심통이 또 생겨 거의 구제하지 못하였고, 이후로 심열(心熱)이 크게 치솟아 달증(疸證)이 더욱 심해져서 몇 달 동안 앓다가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대개 병이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과 나라의 상을 당한 감정으로 인해 위중해진 것이다. 병중에 별이 변괴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어떻게 죽어서 이 재앙을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재상 안위(安瑋)가 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이 사람은 그 직책을 잘 수행하였는데 이제 또 떠나갔구나.”라고 하였는데, 집안사람이 위로하고 해설하기를, “몸에 병이 들고 마음이 근심스러우니 어찌 쉽게 나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감히 나라의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에서 내의(內醫)를 보내 문병하게 하고 □에서 특별히 어주(御廚)를 하사하여 맛있는 진미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게 하였는데, 공이 감격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

원문

天若緩死。當有謝。甲子閏二月二十三日。遂易簀。享年七十有二。訃聞震悼。卽□賜各種素物于家。以助奠需。輟朝三日。至不□御肉膳者有日。賻弔及祭。皆從重典。別遣右承旨姜士弼弔喪。都承旨洪曇□賜祭。書堂月課。以悼老德大臣爲題。以寓□宸懷。喪葬諸具。一庀於□國。終始哀榮。可謂兩盡而無憾矣。公之爲學。不屑屑於規矩繩墨。而以不愧怍矯揉氣質。涵養德性。自得應用爲貴。故居止常處。必以勤謹和緩四字。及輕當矯之以重。急當矯之以寬。躁當矯之以靜。暴當矯之以和。麤當矯之以細等語。題在窓壁。以寓常目。好讀自警編。就度量韜晦等卷。尤着力有得曰。如韓魏公玉盞等事。容或及之。常謂一身所主神明不測者。莫貴於天君。不可以些子塵物。點着其上。凡遇事來。爲之則已。却復掃除。以全本然虛靈可也。燕居無事。頗有自樂之時。謂子弟曰。爲善最樂。非樂。不足以語君子。汝試以論語中暮春者。春服旣成。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之語。永言之似若歌調而長詠之。則古人之氣像可得矣。箕子過故殷墟。亡國之懷如何。而欲哭則不可。欲泣則爲近婦人。乃作麥秀之歌。古人之不輕用性情。可見矣。容色愉和。動止中適。雖在倉卒。未嘗疾言遽色。喜怒不形。雅不喜聲色技藝。待人開懷。不作町畦。必以忠信爲主。相對接話。亹亹忘倦。人有觸犯。必自降屈。不喜聞人過。聞之必先探其心。究其可恕之道。又必求其長處。聞人之善。必揚譽不已。雖婢僕之愚。有一小善。必謂子弟曰。某爲此言行。此事可善也。汝輩勿少也。有所陳善。必假色頷許曰。汝敎我矣。有過則諭誨不已。或有偸盜者。必反憐之曰。迫於飢寒。不得已也。還給其贓曰。汝若飢寒。須來告我。愼勿復然。如欲任使。必再三詳命。使之不迷。然後授之。他人若言公過云。則雖至微者所道。必思所以致謗之由而反己曰。吾果有之。民固至愚而神矣。或告曰。時人慢易公甚。或有因事而慍告者。公纔聞輒喜。至於笑倒曰。彼人是矣。安有畏我者乎。慍者亦解。畢竟偕笑而去。欲有所作爲。常以古人行事。將來己身上料理。於宋朝名相。多慕效之。最喜開襟下問。至訪於微賤。如得其善。必稱好而採用之。人有被薦者來謝。輒不悅曰。君才可用。何謝之有。爵祿。人主之柄。非私門所有。愼勿復然。常言有若無。實若虛。犯而不較。君子處世。事之無害於義者。從俗可也。害於義則不可從等語。公於文藝筆札。才品雖高。而不屑以此得名。至於嶢嶢之行。皎皎之事。皆欲掩蔽而韜晦。故公之才藝行實。多爲德量所蘊。人有不及知者。奉先祀。一遵瓊山儀節。必致誠敬。或有故不得與。或設於他家而攝之。則必候其當事之時。衣服冠帶而坐。如當祭者然。時過乃復常。

번역

하늘이 만약 죽음을 늦추어 주신다면 마땅히 사례해야 할 것이다. 갑자년 윤2월 23일에 드디어 세상을 떠나셨으니 향년은 72세였다. 부고를 듣고 진동하고 애통해하였는데, 즉시 각종 소반의 물품을 집으로 내려 주어 제수를 마련하는 데에 보태게 하였다. 조정을 3일 동안 정지하였는데, 어육선(御肉膳)을 내리지 않는 날이 이르러 부조와 조문 및 제사는 모두 중전(重典)을 따랐다. 별도로 우승지 강사필(姜士弼)을 보내어 조상하게 하고 도승지 홍담(洪曇)에게 사제(賜祭)하게 하였다. 서당의 월과(月課)를 ‘노덕대신을 애도한다.[悼老德大臣]’라는 제목으로 지어서 성상의 회포를 부쳤다. 상장(喪葬)에 필요한 모든 물품은 모두 국사(國事)로 마련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과 영광이 양쪽에서 다하여 유감이 없다고 할 만하다. 공의 학문은 규구(規矩)와 성묵(繩墨)을 구차하게 따르지 않고 부끄럽게 기질을 바로잡는 것을 꺼려 덕성을 함양하고 응용하는 것이 귀중함을 스스로 터득하였다. 그러므로 거처와 행동에 항상 근신화완(勤謹和緩) 네 글자를 두고, 가벼운 일은 중한 것으로 바로잡았다. 급한 것은 느긋함으로 바로잡고, 조급한 것은 고요함으로 바로잡으며, 거친 것은 부드러움으로 바로잡고, 거친 것은 섬세함으로 바로잡는다. 등의 말을 창가에 써서 늘 눈에 띄게 하여 읽을 때마다 스스로 경계하도록 하였다. 《호독자경편(好讀自警編)》은 《도량설(度量說)》과 《도회설(韜晦說)》 등의 권에 특히 힘을 들여 얻은 것이 있으니, 한 위공(韓魏公) 옥잔(玉盞)의 일 같은 것도 혹시 언급하였다. 항상 “일신(一身)을 주관하는 신명(神明)은 헤아릴 수 없으니, 하늘처럼 존귀한 것을 가장 귀하게 여겨서 작은 티끌 같은 것으로 그 위에 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 무릇 일이 생기면 처리하고 나면 다시 씻어 버려서 본연의 허령함을 온전히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한가로이 지내며 별일이 없으면 자득(自得)하는 때가 있으니, 자제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즐거움이 아니면 군자에게 말할 것도 없다.”라고 하고, 너희들은 《논어》의 ‘저물녘 봄[暮春]’에 관한 것을 논해 보라.” 하였다.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갔다. 이 말은 길게 말하면 마치 노래를 부르듯이 길게 읊조리는 것이니, 고인의 기상을 알 수 있다. 기자(箕子)가 지나가다가 옛날 은(殷)나라의 터를 보고 나라를 잃은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울고 싶어도 안 되고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부인에게 가까운 셈이 되므로, 마침내 〈맥수(麥秀)〉의 노래를 지었으니, 고인이 성정(性情)을 가볍게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용색은 화락하고 행동거지는 중도에 적합하여 비록 창졸한 때에도 일찍이 말을 빨리하거나 얼굴빛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고, 평소 성음(聲音)과 기예(技藝)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는 마음을 열어 주되 마을의 울타리처럼 하지 않았고, 반드시 충신(忠信)을 위주로 삼았다.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할 때면 부지런히 피곤함을 잊었으며, 남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낮추었다. 남의 허물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들으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탐구하여 용서할 만한 방도를 궁구하였으며, 또 반드시 그 장점을 찾아 남의 선행을 듣기를 좋아하였다. 반드시 칭찬을 그치지 않아서 비록 어리석은 종이라도 작은 선행이 있으면 반드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아무개가 이런 언행을 하였으니 이 일이 좋구나. 너희들은 조금도 게으르지 말고 선행을 베풀도록 해라.” 하고, 칭찬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하였다. 잘못이 있으면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혹 도둑질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불쌍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기한(飢寒)에 핍박을 받아 어쩔 수 없었구나.” 하고서 장물(贓物)을 돌려주며, “네가 기한에 핍박을 받으면 모름지기 나에게 와서 고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도록 삼도록 해라.” 하였다. 만일 일을 맡겨 줄 때는 반드시 두세 번 자세히 명하여 그로 하여금 어두매어 헤매지 않게 하고, 그런 뒤에 일을 주었다. 다른 사람이 공의 잘못을 말하면 지극히 하찮은 자가 한 말이라도 반드시 비방을 초래한 까닭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돌려 말하기를, “내가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였다. 백성들은 참으로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하여, 때로는 사람들에게 공이 매우 만만하다고 고하기도 하고, 혹 일로 인하여 성내어 고하는 자도 있었다. 공은 남이 칭찬하면 기뻐하고, 웃음이 터지면 “저 사람이 옳다. 어찌 나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화난 사람도 결국에는 함께 웃고 떠났다. 일을 할 때 항상 옛사람의 행실을 본받으려고 하여 송나라 조정의 명상(名相)들을 몹시 사모하고 모방하였다. 마음을 열어 물어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여 미천한 자에게까지 찾아가서 그 선함을 얻으면 반드시 좋다고 칭찬하고 채용하였다. 남이 천거를 받고 와서 사례하면 늘 기뻐하지 않고 “그대의 재주가 쓸 만하니 무엇을 사례하겠는가. 작록(爵祿)은 임금의 권한이지 사문(私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삼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라고 하고는 항상 없는 것처럼 말하고 실제로는 허심탄회하게 대하였다. “범하는 것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은 군자의 처세이다. 일에 의리에 해가 없으면 세속을 따라도 괜찮지만 의리에 해가 되면 따라서는 안 된다.”라는 등의 말을 공은 문예와 필찰(筆札)에 재주가 높았으나 이것으로 명성을 얻는 것을 꾀하지 않았다. 높은 행실과 밝은 일에 대해서는 모두 덮어 두고 감추려고 하였기 때문에 공의 재주와 행실이 대부분 덕량으로 인해 감추어져서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봉선사(奉先祀)는 한결같이 경산(瓊山)의 의절을 준수하여 반드시 성심과 경건함을 다하였다. 혹시라도 사정상 참여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집에서 대신 지내게 하되, 반드시 제사를 지낼 때가 되면 옷과 관대를 갖추고 앉아 마치 자신이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였다가 제사가 끝나면 다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원문

雖劇疾不廢。每歎曰。吾生而爲人。不知父母之面。亦未呼父母。天地間罪人無如我也。故每遇初度。輒不樂曰。劬勞之日也。家人欲設壽觴。必抑之。居第在松峴之傍。自號松峴翁。或有故不得陪□扈。而□大駕過峴。則必具朝服出伏於中門之外。或言宜伏於大門之外。公曰。處室則吾心不寧。所以伏地。若更出門。人必有見知者。是沽名也。常時出入。不敢當路。以避□輦迹。雖居深室旋便。必避日月。族屬貧窮。必力濟之。婚喪。尤主焉以資之。常曰。先祖之餘氣。托在於玆。事雖難易。恝然者薄也。凡爲人謀。每曰。當設以身處其地。乃可以盡得其情。不可以非吾事而少忽之也。凡蟲獸可爲庭翫者。則必放之曰。飮啄自如。物我同情。滋味可供者。則必求生道曰。豈忍對生而思食乎。人有所餽。雖小物。必有酬謝。若稍多則必曰。吾爲宰相。豈不得食。當留什一。餘可自供。若其誠意則已領之矣。人來求取。有則必從曰。不可以外物。害吾本心之無累。若取於人則雖花卉之微。必曰。彼亦珍玩。吾今取來。得無不可乎。平生自奉甚薄。朝夕所供。不過數器味。若疊進則必捨一器曰。古之賢相。食不重肉。況我乎。有時廚肉不繼。家人欲貿諸市。則止之曰。我家若買則近於矯僞。況我本不多食。而又不嗜之耶。衣服之飾。不喜綾緞。故朝襮之外。絶不用之。平居好穿舊澤。不嗜新鮮。每謂子弟曰。丈夫之志。不累外飾。服美于人。可恥之甚也。家居。未嘗言器用陋惡。家人欲試之。當對客之座。置一陋席。候之數月。不言易之。家人知終不言。代以新者。公又不言。其爲儉素。不事致飾。所性然也。公有藻鑑。於後輩常以奬進爲事。凡當試取。每欲爲□國家得人。而先以必得爲心。每謂子弟曰。君子所爲。雖暗中小事。不可枉曲。至於科第則一身進退繫之。潛相代借者固不論。至於遇前日所製之題。吾力可改則改之。如不得更構。雖至曳白。賢於隱默欺人。以賊吾心者萬萬。欲事君而先欺君。可乎。世俗有落第而傷懷者。安有大丈夫行事。決得失於一夫之目。而爲之憂樂哉。其流之弊。馴至於鄙夫之患失。器量如此。其將安用。汝輩切宜戒之。家人嘗買貧人男口於十年之前。後奴率良妻之子來。公問其年則乃買一歲前所生也。卽招本主而與之。主以貧故願復受直。感公德而輕其數。公曰。畜物價尙高。況人口乎。遂倍數而歸之。嘗婚嫁孤孫。事適連擧。悉取鄕家儲穀以來。舟乃覆沒。俄更聞之則近涯遭風。皆得拯取。有謂公當責篙師使之充納者。公曰。船敗有數。而吾家亦失財之時也。業已見失。必求復得。不亦鄙瑣哉。況忍責間關十生之人。使之辦出乎。竟不問。林川舊宅。先業甚厚。雖公髫孩之時。而積累有擬縣邑。自公之貴。而其儲漸縮。船敗之後。更無餘蓄。先世庫屋。

번역

심한 병을 앓으면서도 그만두지 않았는데, 매번 탄식하기를, “내가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면서 부모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부모를 부르지도 못하였으니 천지간에 죄인이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생일이 되면 늘 즐겁게 여기지 않고 “노고하는 날이다.”라고 하였으며, 집안사람들이 생신 잔치를 베풀려고 하면 반드시 억제하였다. 송현(松峴) 근처에 살면서 스스로 ‘송현옹(松峴翁)’이라 자칭하였는데, 혹 부모의 상중에 어가를 모시지 못하고 어가가 송현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조복을 갖추고 중문 밖에 나가 엎드렸다. 어떤 이가 대문 밖에 엎드려야 한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방 안에 있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땅에 엎드린 것이다. 다시 문밖으로 나가면 사람 중에 나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이는 명예를 구하는 것이다.” 하였다. 평상시에도 감히 길을 막지 못하여 어가가 지나가는 것을 피하였는데, 비록 깊은 방에 살면서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반드시 피하였다. 족속들이 가난하면 반드시 힘을 다해 도와주었고, 혼사나 상사(喪事)에도 참여하였다. 우주(尤主)가 그를 도와서 항상 말하기를, “선조의 남은 기운이 이 몸에 붙어 있으니, 일이 비록 어렵거나 쉽더라도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을 위해 도모할 때마다 매번 ‘마땅히 내 자신을 그 자리에 놓아 보아야만 그 실정을 다 알 수 있다.’라고 말하였고,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곤충이나 새를 보면 반드시 풀어 주면서 ‘먹고 마시는 것이 자연스럽게 하니 물아(物我)의 정이 같구나.’라고 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얻을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살 길을 찾으면서 ‘어찌 차마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고서 먹을 것을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남이 주는 것이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사례를 하였고, 만약 조금 많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내가 재상이 되었으니 어찌 먹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십일(什一)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스스로 마련하면 된다.’라고 하였다. 그 성의는 이미 알았지만, 남이 와서 가져가기를 요구하면 있으면 반드시 따라 주면서 ‘외부의 물건 때문에 나의 본심에 누가 되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였다. 남에게서 취할 때에는 비록 미천한 꽃이라도 반드시 저것이 진귀한 구경거리라고 말하고, 내가 지금 가져온다면 안 될 것이 없다고 한다. 평생에 스스로 지키는 것이 매우 박하여 아침저녁으로 먹는 것도 몇 가지 음식에 불과하다. 만약 겹쳐서 내놓으면 반드시 한 그릇을 버리고 “옛날의 현명한 재상은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는데, 하물며 나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때때로 부엌에 고기가 떨어져 집사람이 시장에서 사려고 하면 “우리 집에서 산다면 거짓된 데 가깝다. 더구나 나는 본래 많이 먹지도 않고 또 좋아하지도 않는데.”라고 한다. 옷의 장식은 능단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조복(朝服) 이외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평소에 낡은 비단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고 새롭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자제들에게 “대장부의 뜻은 외적인 꾸밈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니 남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한다. 집안에서 기용(器用)이 누추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집사람이 시험해 보려고 한다. 손님을 대할 자리에 누추한 방석 하나를 두고 몇 달 동안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다. 집안사람이 끝내 말하지 않음을 알고 새것으로 바꾸려 해도 공은 또 말하지 않는다. 그 검소함이 치장하는 것을 일삼지 않는 것은 타고난 성품이다. 공은 식견이 있어 후배들에게 항상 권면하고 진작시키는 일을 일삼았다. 무릇 과거에 응시할 때마다 매양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얻고자 하여 먼저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매번 자제에게 말하기를, “군자가 하는 일은 비록 남이 보지 않는 작은 일이라도 굽혀서는 안 된다. 과시에 있어서는 한 몸의 진퇴가 달려 있으니, 몰래 서로 대신 답안지를 빌려 주는 것은 논할 것도 없고, 만일 전날 지었던 시제(試題)를 만나서 내 힘으로 고칠 수 있으면 고치고, 다시 지을 수 없으면 비록 백지를 낸다 하더라도 침묵하고 남을 속이는 것보다는 나으니, 내 마음을 속이는 자는 만만치 않다. 임금을 섬기고자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세속에는 낙방하여 상심하는 자가 있다. 어찌 대장부의 행사에 한 사람의 일에 대해 득실을 따져서 근심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그 폐단이 흘러서 비루한 자에게까지 이르러 자기의 손해를 걱정하게 되었으니, 기량이 이와 같아서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너희들은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 집안 사람이 일찍이 10년 전에 가난한 사람의 아들을 사 왔는데, 뒤에 종이 좋은 아내의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공이 그 나이를 물으니 겨우 1살이었다. 그래서 즉시 본주를 불러 주어 주고, 주인은 가난하기 때문에 값을 돌려받기를 원하였으나 공의 덕에 감동하여 그 값을 줄였다. 공이 말하기를, “짐승을 기르는 값도 오히려 높은데 하물며 사람을 기르는 것이겠는가.” 하고 마침내 갑절로 주어 돌아갔다. 일찍이 외로운 손자에게 혼사를 치러 줄 때에 일이 마침 연이어 일어나서 모두 향가의 비축한 곡식을 가져오게 했는데, 배가 뒤집혀 물에 빠졌다. 조금 뒤에 다시 들으니 근해에서 바람을 만나 모두 건져냈다고 한다. 공이 사공을 꾸짖어 충당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공이 말하기를, “배가 침몰하는 것은 운수가 다한 것이니 우리 집안도 재물을 잃을 때이다. 이미 잃은 것을 반드시 회복하려고 하니 비루하고 졸렬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열 명의 사람에게 어떻게 마련해 내라고 책망하겠는가.” 하고, 끝내 묻지 않았다. 임천(林川)의 옛집은 선조의 기업이 매우 두터워 비록 공이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쌓아 놓은 것이 현읍(縣邑)에 견줄 만하였다. 그러나 공이 귀하게 된 뒤부터 그 저축이 점점 줄어들더니 배가 침몰한 뒤에는 다시 남은 재산이 없었다. 선대의 창고와 집이다.

원문

久已頹壞。鄕奴有請復建則必曰。於吾無穀何。竟不聽。公久爲宰相而子孫皆仰資。用度常不給。至易布而取穀。公始爲相。感激有爲。常讀大學衍義。或至夜分。旣而歎曰。吾讀此書。將以致用。而邇來謀議。動見齟齬何也。爲政。務存大綱。不用明察。唯以得事體爲先。遵守成憲。不喜紛更。持撫盈成。靜而安之者乃其志也。嘗曰。□祖宗與先臣。經歷多。思慮深。後人遵之無敗足矣。作小聰明。要勝於□祖宗之上。於義安乎。故凡論人才。必以持重不變更舊章爲首。嘗讀書。至人徒知有功之爲功。不知無功之爲功。三復喟然曰。知此者鮮矣。公提調太僕。謂畿民之困。多由箭串之柵也。欲築城而重用民力。請以國布償民聽役。又曰。自古□中原有事。我國必受其禍。義州一境。古設三鎭。猶不免躪轢之患。今則只有一鎭。襟袍極闊。脫有不虞。沮遏無策。長城不可無。亦建白償力而築之。其議論必以先見遠慮爲主。若非其志也。不肯從多而苟合。亦不敢自以爲必是。雖擧朝皆同。猶執議以上曰。吾意則如此。唯聽睿斷云。每言議事外庭。雖有異同。心之所懷。必盡於上前而無隱。且曰。言有不同。所以下議。若皆雷同。非議事之體也。其議或蒙□採施。則輒縮然不安曰。鄙議無乃失當。而□聖鑑莫是謬用耶。其臨事規畫。多出人意表。而時人若不我用。則亦惡與人爭辨以勝之。唯以自克爲剛。性不喜事。不喜建白立條。久居相位。不欲皎皎之事立名。人或稱公之美。輒應之曰。汝欲面諛我耶。必多方掩匿而韜晦之。故人鮮知其所爲之迹。而或謂其不事事者。非知公者也。若□國有難處之事。或災變異常。形於言色。悒悒若無所容。夜不成寐。起而開囱視天者屢矣。每當□經筵。必思程子齋宿之事。先日致敬。言動不敢放。入臨講章。必從容委曲。雜引經史。反覆陳□啓。及退家。移時靜默。思其所□啓之當否。常居有疾呻痛。似若不堪起者。及將入□侍。具服而出。則便覺蘇醒。歸而復呻猶若。豈非以志帥氣而然也。觀公儀貌。似若遲鈍。而其處事剛克有勇。詳愼周備。卽始慮終。每欲萬全。然後乃擧。不但大者。雖尋常細事如簡札之末。莫不皆然。頃者。□朝廷欲設堡於慶興江北。公終始執不可曰。奪彼魚鹽往來之路。不久生變。未幾果有警而罷。及鎭將皆被罪謫。旣而反恕其人曰。事雖未宜。爲□國之心。亦可嘉也。嘗論待倭之道曰。□祖宗深懲麗季之禍。雖以□太祖神武。優給朝船款接。今者有司不免出納之吝。頗失懷柔之義。傷於□國貌。益激其怒。早晩捲海而來。其可以米布禦之乎。至於乙卯。公言果驗。常以古今異宜。事非獨辦。自以無補於□國。而厚祿忸怩。未嘗一日安。故前後上辭。無慮數十餘章。而大意皆以慙愧羞恥爲主。其曰。此心之恥。若撻于市。心之愧恥。若犯偸盜。

번역

오래도록 무너져 있었는데, 향노(鄕奴)가 다시 세우기를 청하자 반드시 “나에게 곡식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고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공이 오랫동안 재상이 되었는데 자손들이 모두 의지하여 쓰는 것을 늘 주지 않다가 심지어 베를 바꾸어 곡식을 취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이 감격하여 일을 하였고, 항상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기를 때때로 한밤중까지 하였다. 그러고 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장차 치용(致用)하려는 것인데 근래에 의논하는 것이 어긋나는 것을 보게 되니, 어째서인가? 정사를 함에는 대강(大綱)을 보존하는 데 힘쓰고 세밀하게 살피는 것은 쓰지 않으며 오직 사체(事體)를 얻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성헌(成憲)을 준수하여 번거롭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일을 이루어 평온하게 안주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과 선신은 경력이 많고 사려가 깊으니 후인이 이를 따라 실패함이 없으면 족하다.’라고 하였다. 소총명(小聰明)이 조종보다 더 뛰어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의리에 어긋난다.” 하였으므로, 무릇 인재를 논할 때에 반드시 지중(持重)하여 옛 법을 변개하지 않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 일찍이 책을 읽다가 “지인도(知人徒)는 공(功)이 되는 것이 공임을 알고, 무공(無功)이 되는 것이 공임을 알지 못한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를 아는 자가 드물다.” 하였다. 공은 제조 태복(提調太僕)으로서 경기 백성들이 곤궁한 것은 대부분 화살과 창을 꽂아 놓은 성책(城柵)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성을 쌓으려고 민력(民力)을 많이 쓰고자 할 때 국포(國布)로 대신하게 하고 백성들은 역(役)에 종사하도록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중국의 원래 있던 일은 우리나라도 반드시 그 화를 입는다. 의주(義州) 한 경계에는 옛날부터 세 진(鎭)을 설치하였는데도 오히려 짓밟히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다만 하나의 진만 있어서 옷깃이 매우 넓으니, 만일 뜻밖의 일이 생기면 막아낼 방책이 없다. 장성(長城)이 없어서는 안 되니 또한 건의하여 국포로 대신하게 하고 힘을 들여 쌓아야 한다.” 하였다. 그 의논은 반드시 선견지명과 원대한 생각을 위주로 하였고, 만약 자신의 뜻이 아니면 많은 사람을 따라 구차하게 합치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감히 스스로 반드시 옳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비록 온 조정이 모두 같은 의견을 내더라도 의정(議政) 이상은 “내 뜻은 이와 같으니 오직 성상의 결단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매양 의논할 일이 있으면 비록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반드시 성상에게 다 털어놓아 숨김이 없으며, 또 “의견이 서로 다르니 하의(下議)가 모두 똑같으면 의논하는 체모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논의가 혹 채택되어 시행되면 곧바로 움츠리고 불안해하며 “나의 의견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는데 성상께서 어찌하여 이처럼 잘못 쓰시는 것입니까?”라고 한다. 일을 처리할 때에 남의 생각보다 뛰어난 점이 많지만, 사람들이 나를 쓰려고 하지 않으면 또한 다른 사람과 논쟁해서 이기기를 싫어하고 오직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을 굳게 여기며, 성품이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건의하거나 규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래 정승에 있으면서도 깨끗하게 이름을 세우고자 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혹 공(公)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 번번이 “너는 나에게 아첨하려는 것이냐?”라고 대답한다. 반드시 많은 방면에서 숨기고 감추기 때문에, 친구들이 그가 하는 일을 잘 알지 못하고 혹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공을 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재변(災變)이 이상하여 언색(言色)에 나타나면 근심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자주 있었다. 매양 경연(經筵)에 나아갈 때마다 반드시 정자(程子)가 재숙(齋宿)한 일을 생각하여, 일전에 치경(致敬)할 때는 언동이 감히 방종하지 못하였고, 강장(講章)에 임할 때에는 반드시 조용하고 자세하게 경사(經史)를 두루 인용하여 반복해서 아뢰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한동안 고요히 침묵하면서 아뢴 것이 합당한지를 생각하였다. 평소에는 병이 있어 신음하며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에 들어가 시봉(侍奉)하려고 옷을 갖춰 입고 나가면 문득 소생하는 듯하다가 돌아와서 다시 신음하는 것은 어찌 뜻으로 기운을 주관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의모를 보면 느릿하고 둔한 듯하였으나, 일 처리는 강건하고 용맹하며 상세하고 신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두루 대비하였다. 항상 만전을 기한 뒤에야 거행하려 하였으니, 큰일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간찰(簡札) 같은 사소한 일도 모두 그러하였다. 지난번 조정에서 경흥(慶興) 강북에 보(堡)를 설치하려고 하자 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안 된다고 고집하였는데, 저들의 어염(魚鹽)을 실은 배가 왕래하는 길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변고가 생겨서 얼마 안 되어 과연 경보가 울려 중지되었고 진장(鎭將)들이 모두 죄를 받아 귀양을 갔다. 그 뒤에 도리어 그 사람을 용서하면서 “일은 비록 온당치 못하였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가상하다.” 하였다. 일찍이 왜인을 대우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우리 조종(祖宗)께서 고려 말의 화란을 깊이 징계하여 비록 태조 신무왕(神武王)으로 하여금 조선의 배를 넉넉히 지급하고 정중하게 접대하였으나 지금은 유사(有司)가 출납하는 데서 인색함을 면치 못해 회유하는 뜻을 상당히 잃고 나라의 체모를 손상하여 왜인의 노여움을 더욱 격발시킨다.” 하였다. 조만간 바다를 거두어 오면 쌀과 베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을묘년에 공의 말이 과연 맞았으니, 항상 고금의 이치가 다르고 일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스스로 나라에 보탬이 없는데도 후한 녹봉을 받는 것이 부끄러워 하루도 편안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후로 올린 상소가 수십여 장이나 되는데, 그 대의는 모두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이 마음의 부끄러움은 저자에 매 맞는 것 같고, 이 마음의 수치스러움은 도둑질을 범한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원문

身非鼠雀。心豈少安。則其情辭之懇可見矣。每自笑曰。乃公相業眞可笑。議政十年。唯上辭一事而已。每受□內賜。必曰。吾少孤。長於奴隷人之中。無學無能。幸蒙□榮寵若此。□朝廷之辱極矣。凡聞生民艱苦。必瑟縮不安。蹙額移時。尋常語子弟曰。吾生而無德於民。職在乘轎。每上人肩。平生靦顏。愧心不歇。我死。愼勿用擔轝。重赧已死之魂。公立朝久。更歷時變。雖孤踪踽涼。不事攀援。故洪益城知其然。常曰。吾喜尙君單獨而行也。自公郞潛。益城與鄭相光弼,尹相殷輔。皆以公輔期之。鄭相嘗修家垣。稍移舊址曰。吾爲尙某後日之行而廣此路也。□大王大妃之同聽政也。公奏事簾前。□大妃傳曰。相公致此。不獨未亡人與□殿下之意也。□先王常稱卿可大用。至於書名屛障以識之。不幸未及。今之用卿。實□先王意也。公感激進曰。小臣蒙□先王恩寵罔極。用□特旨除官。殆過十餘度。時人至疑臣以他道進也。□答曰。卿豈以他道進者。特知遇深耳。嘗自謂吾入仕輔國。極無可取。若不爲忮害忌克勝己。則差或可謂云爾已矣。晩年。每謂子弟曰。汝輩須趁富年力學。少時不讀書。老衰叨大任。斷決□國事。是非茫然。雖欲強讀。精神眩暈。臨卷疾輒作。終至於負□國恩以死。誠可惜也。病篤。猶謂子弟曰。夜氣或淸。心神虛明。記得少日所習文字。頗有歷歷分明處也。又曰。無定力之人。少壯時似有可觀。老衰鮮不謬錯。因言論語中三戒曰。有定力之人。不如是。平時嘗戲家人曰。汝輩以我爲臨死有遺言離訣之辭乎。若然。迷劣婦子誦言瑣屑之語。而號哭尸前則甚妨事體。殊非大人一視死生之道也。及其病革。痛若少定。精神言笑。不少差爽。至於屬纊以前。無異平常。每用寬言。以鎭靜一家之心。故外人皆危久疾。而家人則實未察也。果終無一言而歿。公聘宗室介山副守諱孝智之女。李氏貞敬夫人。賢而克配。明哲過人。人不敢以非道干。或敎夫人鬻家儲魚藿以取貨。夫人正色曰。吾公未嘗爲不義以營利。汝欲使我以穢名加之乎。遂絶之。凡事皆類此。大抵公居家。怡愉和易。雖婦人小子。諄諄敎以義方。使得飽聞而心飫。故自夫人以下。皆知不義之可恥。生三男。二夭。一鵬南。宣務郞。亦先公亡。娶節度使李亨順之女。生一男二女。男蓍孫。司紙。女長適縣監鄭麟壽。次適生員李濟臣。蓍孫娶左議政沈通源之女。生男女。男子儀。女幼。麟壽生四男二女。男思敏,思敬,思愼。餘幼。女長適監役沈信謙。次幼。濟臣生二男二女。男蓍俊,壽俊。女幼。思敏娶舍人崔顒之女。信謙生男女。皆幼。夫人先公逝。以節度使金胤宗側室女幹家。無兒。又側室有一男存省。觀象監直長。娶郡守金鑌之女。生二女一男。皆幼。用是年五月十九日。

번역

몸이 쥐나 참새가 아니면 마음이 어찌 조금이나마 편할 수 있겠는가. 그 정서와 말이 간절함을 알 만하다. 매양 스스로 웃으며 말하기를, “공의 재상(宰相) 지위는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의정(議政)을 10년 동안 맡았으면서 오직 임금의 명을 사양한 한 가지 일뿐이었다. 매번 궁중에서 하사하는 것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나는 젊어서부터 노예들 가운데서 외로웠다. 학문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다행히 이와 같은 영광과 총애를 입었으니 조정에 큰 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의 고통을 들을 때면 항상 움츠리고 불안해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자제(子弟)에게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서 백성들에게 덕이 없는데, 직책은 가마를 타는 것이라 매번 사람의 어깨에 올라탄다. 평생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그치지 않으니, 내가 죽으면 삼가 가마를 쓰지 말아 이미 죽은 나의 혼을 다시 부끄럽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공이 조정에 오래 있었고 여러 번 시변(時變)을 겪었지만 외로운 자취로 남아서 권세에 빌붙지 않았으므로, 홍익성(洪益城)이 이러한 것을 알고 항상 ‘나는 상군(尙君)이 홀로 행하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공랑(公郞)이 잠직(潛職)한 뒤로 익성(益城)과 정 상광필(鄭相光弼), 윤 상인보(尹相殷輔)가 모두 공을 보좌할 것으로 기대를 하였다. 정 상이 일찍이 집안의 담장을 수리하고 조금 옛터에서 옮기면서 말하기를, “나는 모후(某後)를 위하여 훗날의 행차를 위해 이 길을 넓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대왕대비께서 함께 정사를 하실 때 공은 발 앞까지 나아가 일을 아뢰었는데, □ 대비가 전교하기를, “상공이 이렇게 한 것은 미망인과 □ 전하의 뜻뿐만이 아니다. □ 선왕께서 항상 경을 크게 등용할 만하다고 칭찬하시고 심지어는 병풍에 이름을 써서 기록해 두기까지 하셨다. 불행히도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경을 등용하는 것은 실로 □ 선왕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감격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은 □ 선왕의 은총을 망극하게 입어 특지(特旨)를 받아 관직에 제수된 것이 거의 10여 차례나 되니, 사람들은 소신이 다른 길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하니, □ 답하기를, “경이 어찌 다른 길로 진출한 것이겠는가. 특별히 깊은 총애를 받은 것일 뿐이다. 일찍이 스스로 ‘내가 벼슬에 들어가 나라를 보좌하리라.’라고 생각하였다.” 하였다. 극도로 취할 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남을 해치고 자신을 이기기를 꺼리지 않는다면 조금은 혹시나 말할 만하다고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년에 매번 자제들에게 “너희들은 부디 젊어서 힘써 공부하라. 소싯적에 글을 읽지 않다가 늙어 쇠한 몸으로 외람되게 큰 책임을 맡아 국사를 결단하게 되면 시비가 아득하여 비록 억지로 읽고자 해도 정신이 어질어질하고 책을 펼치면 곧바로 병이 나서 마침내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죽게 되니 참으로 애석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이 깊었어도 오히려 자제들에게 “밤 기운이 혹 맑아지면 심신이 허명하여 젊은 시절 익힌 글자가 자못 역력하고 분명한 곳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정력이 없는 사람은 젊을 때는 볼만한 점이 있는 듯하나 늙어서는 틀리지 않는 것이 드물다. 《논어》의 삼계(三戒)에 ‘정력이 있는 사람은 이와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평소 집안사람들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죽을 때 남기는 유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부자(婦子)가 자질구레한 말을 외고 시신 앞에서 곡하는 것은 일의 체모에 매우 방해가 되니, 이는 대인(大人)이 생사를 똑같이 보는 도리가 전혀 아니다. 병을 앓다가 죽을 때에는 통곡이 조금 진정되고 정신과 언행이 조금이나마 차도가 있었으나, 기력이 떨어지기 전에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매양 너그러운 말로 온 집안의 마음을 진정시켰으므로 외부 사람들은 모두 위태롭게 오래 앓는다고 여겼지만, 집안사람은 실상은 알지 못하였다. 과연 끝내 한마디 말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공빈(公聘) 종실(宗室) 개산 부수(介山副守) 휘효지(諱孝智)의 딸 이씨 정경부인(李氏貞敬夫人)은 어질고 슬기롭고 명철하여 남보다 뛰어났으며, 사람들이 감히 비도(非道)로 간여하지 못하였다. 혹 부인에게 집안에 저장해 둔 생선과 채소를 팔아 재물을 취하라고 가르치자, 부인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우리 공은 일찍이 불의한 방법으로 이익을 경영한 적이 없는데, 너는 나로 하여금 더러운 명성을 더하게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드디어 세상을 떠났으니, 모든 일이 이와 같았다. 대저 공은 집안에서 화락하고 온화하여 부인과 자식들에게도 의리로써 가르침을 주어 충분히 듣고 마음으로 익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부인 이하 모두가 불의를 부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았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은 요절하고 하나는 붕남(鵬南)이요 선무랑(宣務郞)이다. 또한 공이 죽기 전에 절도사 이형순(李亨順)의 딸을 얻어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시손(蓍孫)으로 사지(司紙)이고, 딸 가운데 큰딸은 현감 정인수(鄭麟壽)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생원 이제신(李濟臣)에게 시집갔다. 시손은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의 딸을 얻어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아들은 의(儀), 딸은 유(幼)이다. 정인수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사민(思敏), 사경(思敬), 사신(思愼)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 가운데 큰딸은 감역 심신겸(沈信謙)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어리다. 이제신은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시준(蓍俊), 수준(壽俊)이고, 딸은 유(幼)이다. 사민은 사인 최원(崔顒)의 딸을 얻었다. 신겸이 남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렸다. 부인이 선공(先公)을 앞서 떠나고 절도사 김윤종의 측실인 간가(幹家)의 딸로서 아들이 없었다. 또 측실에게 한 아들 존성(存省)이 있었는데 관상감 직장으로 군수 김용(金鑌)의 딸을 맞아 두 딸과 한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렸다. 이해 5월 19일에 이 아이를 썼다.

원문

禮窆于果川治之東霜草里坤坐艮向之原。與夫人同兆異域。公嘗謂子弟。吾死。是非必有諡。汝爲狀起草。事迹無可述者。若曰。公晩好鼓琴。微醺。輒彈感君恩一曲以自娛則當矣。公晩而學琴。按譜自得。音調深遠。然遇災不敢執。家人之外。一無聞者。公立朝四十六年。識量洪遠。忠厚和易。欿然沖悒。若有所聞。入居黃閣十有五載。位望隆重。休休有容。不露圭角。令始令終。訃出之日。位無上下。人無愚智。莫不痛惜嗟歎。故吏宿隷至有奔走號泣者。有一書生。讀書半夜。聞隣嫗之哭甚哀。因訪之。其亡夫嘗誣逮重獄。久未聽冤。公爲畿伯時。申理得活。感念存沒。不覺失聲云。以此觀之。公德之入人者。其他可推。公之平日所爲。可書者甚多。然不敢毛擧。得之家庭者。梗槩如右。謹狀。

번역

과천(果川) 치지동(治之洞) 상초리(霜草里) 곤좌(坤坐) 건향(艮向)의 언덕에 예우를 갖추어 안장하였다. 부인과 같은 무덤이지만 다른 구역이다. 공이 일찍이 자제들에게 “내가 죽으면 시호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장문을 지으라.”라고 하였는데, 서술할 만한 사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공은 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약간 취하면 ‘감군은곡(感君恩曲)’ 한 곡조를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라고 하면 마땅하다. 공이 만년에 거문고를 배워 악보에 의거하여 스스로 터득하였는데, 음조가 깊고 멀었다. 그러나 재앙을 만나면 감히 손에 잡지 못하였다. 집안사람 이외에는 한 명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조정에 선 지 46년 동안 식견과 도량이 넓고 충후(忠厚)하고 화락(和樂)하며 온화하여 마치 들은 바가 있는 듯하였다. 황각(黃閣)에 들어가 거처한 지 15년 동안 지위와 명망이 높았으나, 여유롭게 용납하여 자신의 기량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시작과 끝을 잘 다스렸다. 부고가 전해진 날에는 상하의 신분이 없고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 모두 애통하고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하인과 종들이 달려와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어떤 서생이 한밤중에 책을 읽다가 이웃 노파의 곡소리가 매우 슬프다는 것을 듣고 찾아가 보니, 그 죽은 남편이 일찍이 중옥(重獄)에 갇혀 오래도록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경기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 신리(申理)를 얻어 살려 주었으므로 생전과 사후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공의 덕이 사람들에게 들어간 것을 다른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공이 평소 행한 일 중에서 쓸 만한 것이 매우 많으나, 감히 하나하나 거론할 수 없다. 가정에서 얻은 것을 대략 위와 같이 적는다. 삼가 장문(狀文)을 올린다.

240. 神道碑銘〔原注:幷序〕

문체: 傳記類 / 碑誌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18A, ITKC_MO_0130A_A026_118B ...

원문

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贈諡成安尙公神道碑銘。

번역

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사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를 맡았으며 세자의 스승이다. 증시 성안 상공 신도비명을 지었다.

원문

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總府都總管,江寧君洪暹撰。

번역

숭록대부는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성균관사(成均館事),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맡는다.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이 지었다.

원문

奉憲大夫。礪城君宋寅書。

번역

봉헌대부(奉憲大夫)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글이다.

원문

宣務郞,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李濟臣篆。

번역

선무랑(宣務郞) 행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이제신(李濟臣)을 전최(篆璽)하였다.

원문

國朝宰相。以功名終其身者。世不乏人。而歷事□屢朝。身無災眚。秉德壽耇。歿世紆□恩眷者。惟成安公一人而已。公諱震。字起夫。其先木川人。當高麗初。授姓以象。後改爲尙。有諱國珍。生子曰得儒。從崔文憲公學。始免鄕役。生給事中愿。其後有諱英孚。寔公曾祖。生水軍虞侯諱孝忠。虞侯生安奇道察訪諱甫。寔娶延安望族金濤之後博士徽之女。禱於聖住山。弘治癸丑六月五日生公。曾祖公居林川。家饒於財。嘗焚債卷曰。吾之後必昌。種德積慶。以至于公。公生而狀貌奇異。五歲而喪母夫人。八歲喪察訪。公鞠於伯姊夏山君成夢井夫人。渾厚重遲。已若成人。雖遭疾苦。不形辭色。察訪公以公尙幼。嘗囑老奴經紀家事。其奴死。公與之粟百斛使葬之。人已知其偉量也。年踰志學。不事儒業。見辱儕輩。遂奮勵學問。夏山欲試公意。勸之仕。公曰。所以讀書。欲樹大業耳。夏山奇其志。李容齋,金慕齋諸公。見公著述。幷加稱賞。公與成守琛,守琮兄弟。遊從講磨。所學日進。中丙子生員。入上舍。大司成柳公雲。好士尙氣槩。訪公于家曰。見公議論。知有經綸之才。己卯。捷別試。始入承文院爲副正字。以史才見薦。授藝文館檢閱。入侍□經幄。適有時宰言頗切直。在座不敢有繼之者。公獨指爲讜議。爲論者所忌。遞授西職。己卯年間。有迎合時議者。欲置士類于重典。公聞而疾其人。屢語所親。語頗泄。仍被彈擊。久滯郞署。癸未。以禮曹佐郞。出爲北道評事。以公有文武才。藉此擠之於外也。丙戌。以禮曹正郞。充□聖節使書狀官朝□京師。□仁廟在東宮。銳意學問。僚屬極一時之選。公爲弼善。久於勸學。開益弘多。己丑。爲司憲府掌令。復入講院爲文學。改司諫院獻納,弘文館校理,司憲府執義,弘文館應敎,典翰。癸巳。□特授通政。拜司諫院大司諫。遷弘文館副提學。出爲江原道觀察使。有一老嫗訴以義子欲烝己。公疑其詐。問詰備至。嫗服曰。彼果不順。欲構以重罪。人服公辨誣之明。乙未。被□召爲同副承旨。轉至左副。丁酉。復拜大司諫。下僚有希執政者。因禧陵水石之說。欲陷故相光弼于死地。公草疏力救。時論韙之。冬。□特授刑曹參判。平恕爲心。獄無冤枉。戊戌。觀察京畿。己亥。入爲刑曹判書。言者論其驟陞。遞拜同知樞府。是年秋。拜司憲府大司憲。冬。□特除公爲平安道觀察使。辛丑。□上欲召公判漢城尹。從諫官言。不果。冬。還□朝。同知樞府。壬寅春。申前□命。拜漢城判尹。兼都摠管。夏判工曹。未幾。□特命判兵曹。甲辰。超授崇政議政府右贊成。又有言者。□上勉從之曰。終當以大任付此人。其忠信外著。爲□人主所倚重。於此可見。改知敦寧兼知義禁府事。移判刑曹。乙巳。爲柳仁淑所忌。出按慶尙道。人皆惜之。丙午。遞爲右參贊。錄衛社原從功。陞正憲階。兼知春秋館。

번역

국조(國朝)의 재상으로서 공명으로 생을 마친 자는 세상에 인물이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여러 조정에서 벼슬하고도 몸에 재앙이 없으며, 덕을 지녀 장수를 누리고 죽어서까지 은총을 입은 이는 오직 성안공(成安公) 한 사람뿐이다. 공의 휘는 진(震)이고 자는 기부(起夫)이다. 그의 선조는 목천(木川) 사람으로 고려 초에 성을 주었을 때 상(象)으로 하였는데, 뒤에 고쳐 상(尙)이 되었다. 휘가 국진(國珍)인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 득유(得儒)를 두어 최 문헌공(崔文憲公)을 따라 학문을 익히고 나서야 비로소 향역(鄕役)에서 면제되었으며, 생계는 사중원(事中願)에서 공급받았다. 그 뒤에 휘가 영부(英孚)인 사람이 있었으니 실로 공의 증조이다. 우후(虞侯) 수군(水軍) 휘 효충(孝忠)을 낳았는데, 우후는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 휘보(諱甫)를 낳았다. 실로 연안(延安)의 명문가 김도(金濤) 후손 박사(博士) 휘지(徽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성주산(聖住山)에 기도하여 홍치(弘治) 계축년 6월 5일에 공을 낳았다. 증조는 임천(林川)에 살았는데, 집안이 재물이 많아 일찍이 채권(債券)을 불태우고 말았다. 나의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니, 덕을 심어 경사를 쌓은 것이다. 공에게 이르러서는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장모(狀貌)가 기이하였고, 5세에 모부인(母夫人)을 여의고, 8세에 찰방(察訪)을 여의었다. 공은 큰 누님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 부인에게서 자랐는데, 혼후(渾厚)하고 중지(重遲)한 것이 이미 성인과 같았다. 비록 질고를 당하여도 사색(辭色)을 드러내지 않았다. 찰방 공이 공이 아직 어리다고 하여 일찍이 노복에게 집안일을 맡기도록 부탁하였는데, 그 종이 죽자 공이 곡식 100곡을 주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의 위대한 도량을 알았다. 나이가 지학(志學)에 이르러서도 유업(儒業)에 힘쓰지 않아 동료들에게 욕을 당하자 마침내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하산이 공의 뜻을 시험해 보려고 벼슬길에 나오기를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큰 사업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하산은 그의 뜻을 기특하게 여겼고, 이용재(李容齋)와 김모재(金慕齋) 등 여러 공이 공의 저술을 보고 모두 칭찬하였다. 공은 성수침(成守琛), 성수종(成守琮) 형제와 친하였다. 강마(講磨)하는 모임에 참여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였다. 병자년에 생원으로 상사(上舍)에 들어갔다. 대사성 유공운(柳公雲)이 선비를 좋아하고 기개와 도량을 높게 여겨 공을 집에서 방문하여 말하기를, “공의 의논을 보고 경륜의 재주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기묘년에 별시(別試)에 급제하고 처음으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들어갔다. 사관으로서의 재주를 인정받아 추천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고, 경연(經筵)에 입시하였는데 마침 시재(時宰) 중에 말이 자못 간절하고 곧은 사람이 있었으나 좌중에서 감히 그 말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 공만이 유독 올바른 의논이라고 지적하자 논쟁하는 자들의 미움을 받아 서직(西職)으로 체차되었다. 기묘년에 시의(時議)에 영합하는 자가 있어 선비들을 중한 관직에 두려고 하였는데, 공이 그 사람을 듣고서 질책하고 여러 차례 친한 사람에게 말하였는데 그 말이 자못 새어 나가 탄핵을 받아 오랫동안 낭서(郞署)에 머물렀다. 계미년에 예조 좌랑으로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나갔으니, 공이 문무의 재주가 있음을 빙자하여 이로써 지방으로 내친 것이다. 병술년에 예조 정랑으로 성절사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갔다. 인묘(仁廟)가 동궁에 계실 때 학문에 뜻을 두어 요속(僚屬)은 당시에 가장 뛰어난 자들을 뽑았는데, 공은 필선(弼善)으로서 오래도록 권학(勸學)하여 많은 이익을 열었다. 기축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다시 강원(講院)에 들어가 문학(文學)이 되어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집의, 홍문관 응교, 전한(典翰)으로 개차되었다. 계사년에 특별히 통정대부로 추증되고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겨 갔다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한 늙은 아낙이 의자(義子)를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제사 지내게 하고 싶다고 호소하였는데, 공이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하여 자세히 캐물었더니, 아낙이 “그가 과연 순종하지 않아서 중죄로 엮으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사람들이 공의 변무(辨誣)함이 밝은 것을 믿었다. 을미년에 소명되어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좌부승지로 옮겨 갔다. 정유년에 대사간을 다시 제수하였다. 하료(下僚) 중에 집정(執政)이 되기를 바라는 자가 있었는데, 힐릉(禧陵)의 수석(水石)에 관한 설로 인하여 고 상신(相臣) 이광필(李光弼)을 사지(死地)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소장을 초안하여 힘껏 구원하니 시론(時論)이 칭찬하였다. 겨울에 □가 형조 참판에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마음을 평온하고 너그럽게 하여 옥사(獄事)에 원통한 일이 없었다. 무술년에 관찰경기에 제수되었다. 기해년에 들어와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승진하였다고 논박하자 동지중추부사에 체차하였다. 이해 가을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가 공을 평안도 관찰사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신축년에 □가 공을 불러 한성 판윤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간관의 말을 따라 이루지 않았다. 겨울에 □로 조정에 돌아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인년 봄에 신전□이 명하여 한성 판윤 겸 도총관에 제수하였다. 여름에 공조 판서가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가 특별히 병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갑진년에 숭정의정부 우찬성에 초빙되었다. 또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힘써 따르기를, “끝내 큰 책임을 이 사람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의 충신(忠信)이 밖으로 드러나서 군주가 의중(倚重)을 두는 바가 되니, 여기에서 알 수 있다.” 하였다. 개지돈녕겸지의금부사(改知敦寧兼知義禁府事)를 판형조에 옮겼다. 을사년에 유인숙(柳仁淑)의 시기를 받아 경상도 안찰사로 나갔는데 사람들이 모두 아까워하였다. 병오년에 우참찬으로 체차하고 위사원종공(衛社原從功)에 녹용(錄用)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에 올리고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를 삼았다.

원문

參修□二聖實錄。秋。復判兵曹。戊申秋。□特陞崇政。拜右贊成。己酉春。判吏曹。兼判義禁府。秋。進階大匡。拜議政府右議政。推□恩三世。有□賜皇考議政府右議政。祖考議政府左贊成。曾祖考吏曹判書。□文定王后垂簾同聽斷。欲復禪敎兩宗。語公曰。僧徒無統。欲設兩宗。令有統攝。公曰。復於久廢之餘。豈不重難。公意以謂微辭婉諷。庶幾回□上意。其不知公者。疑公迎合。公聞之曰。儒釋是非。皎如黑白。吾豈至於逢君者。蓋由平生所爲不能見信於人。致有此疑。但當自反而已。辛亥。陞左議政。丁巳。冊封□東宮。以公爲□世子傅。戊午夏。陞領議政。兼□世子師。己未春。公以夷虜反側。百姓不親。庶官不職。皆由置相非人。引咎自當。力請避位。□上慰諭不許。秋。□上御翠露亭。引見宰樞。□親執杯勸之。公感□恩至醉。伏□輦路傍不能起。□上命遮以行帳而過之。仍使內侍扶公而出。其見敬禮如此。庚申。加□東宮元服。而賞公鞍馬。辛酉秋。公將拜掃林川先壟。□上命公之孫蓍孫。乘馹隨公護其行。□遣中使賚豹皮以賜。又掇進御蓑衣以贈。蓋近古勳業所未曾有。公上箋謝□恩。□上答之曰。此予所以敬大臣優老德之意也。壬戌。公年七十。據禮致仕。□上答曰。人生七十古來稀。予貴耆德。居相一紀世不多。豈退老成。癸亥正月。求退益懇。□上重違公意。始□允其請。授領中樞府兼領□經筵。國有大事。必以咨之。未幾。□東宮不幸。公奔走哭泣。連日廢食。卒患心痛。病幾危。又欲相送□靈輀于郊外。或以疾未平止之。公曰。吾是□東宮舊僚。送終之際。禮不可廢。自是心痛胃疾。彌留數月。□上聞公病。醫問交道。至分□御廚珍味。凡所以慰安公者。無不備至。而天竟不救。易簀于甲子閏二月二十三日。享年七十有二。□上聞訃。輟朝市却肉膳以哀之。故事。大臣疾革。例遣承旨。問所欲言。時政院不知公阽危。闕於□上聞。不及遣問。□上用是悼恨尤深。賻□贈之典。於數爲優。卜五月十九日。葬于果川東霜草里坤坐艮向之原。與夫人同兆異域。公資稟忠厚。風采凝重。色愉而氣和。量洪而慮遠。處衆而不肯崖異。物犯而不與之校。擧止紓緩。雖當倉卒。未嘗疾言遽色。觀其貌似遲鈍。而內實剛勇。不露圭角。又多德量所掩。鄭文翼公光弼,尹靖成公殷輔及我先君文僖公。皆以公輔期之。謹於奉先。身有疾病。不得與祭。則雖不在其家。當祀之時。必冠服以坐。時過乃罷。每以不及事爺孃爲痛。如遇生日。不許子孫上壽曰。吾生而不知父母之面。又不知呼父母。實天地間一罪人也。其行己不屑屑於規矩繩墨。而常欲矯揉氣質。涵養德性。書牕壁自警曰。輕當矯之以重。急當矯之以緩。偏當矯之以寬。躁當矯之以靜。暴當矯之以和。麤當矯之以細。好讀自警編。尤致意於度量,韜晦等編。誦曾點舍瑟之對。

번역

삼수(參修)□이성실록(二聖實錄)에, 가을에 복판 병조 판서가 되었다. 무신년 가을에 □특승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삼아 우찬성을 제수하였다. 기유년 봄에 이조 판서를 겸임하고 의금부 판서를 겸임하였다. 가을에 대광(大匡)으로 승진되어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추은(推恩)이 삼대(三代)에 미쳐서 황고(皇考)에게는 의정부 우의정을, 조고(祖考)에게는 의정부 좌찬성을, 증조고(曾祖考)에게는 이조 판서를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휘장을 내리고 함께 단자(斷子)를 들었으며 선교(禪敎) 두 종파를 회복하려고 공에게 말하기를, “승도(僧徒)에 통솔하는 자가 없어서 두 종파를 세우려고 하는데 통섭(統攝)할 자가 있어야 한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폐지된 뒤에 어찌 중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공의 뜻은 미사일(微辭曰)로 완곡하게 풍자하여 상의(上意)를 돌리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을 모르는 자들은 공이 임금의 뜻에 영합한다고 의심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유교와 불교의 시비는 흑백처럼 분명한데 내가 어찌 임금을 만난 사람에게까지 그렇게 하겠는가.” 하였다. 이는 대개 평소의 행실이 남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갖게 하였으니,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신해년에 좌의정에 올랐고, 정사년에 동궁(東宮)을 책봉할 때 공을 세자부(世子傅)로 삼았다. 무오년 여름에 영의정에 올랐고 겸하여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기미년 봄에 공이 “오랑캐가 반역하고 백성들이 친근하지 않으며 여러 관원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재상으로 적임자를 두지 않은 탓입니다.”라고 인책(引責)하고 스스로 피혐하기를 힘써 청하였으나, 주상이 위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에 주상이 취로정(翠露亭)에 나아가 재신(宰臣)들을 불러서 보고 직접 잔을 잡고 권하니, 공이 지극한 은혜에 감동하여 술에 흠뻑 취해 엎드려 연로(輦路) 옆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주상이 명하여 행장(行帳)으로 가리고 지나가게 하고 이어 내시를 시켜 공을 부축해서 나가게 하였으니, 그 존경과 예우가 이와 같았다. 경신년에 동궁의 원복(元服)을 더하고 공에게 안마(鞍馬)를 상으로 주었다. 신유년 가을에 공이 임천(林川) 선산에 성묘하려 하였는데, 주상이 공의 손자 시손(蓍孫)에게 역마를 타고 공을 따라가서 그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다. □ 중사(中使)를 보내어 표피(豹皮)를 가지고 주었다. 또 어소의(御蓑衣)를 모아 바치고 증정하였다. 이는 근래에는 훈업이 있는 사람에게 일찍이 없던 일이다. 공이 상서(上書)하여 □ 은혜에 사례하니, □ 상이 답하기를, “이는 내가 대신을 공경하고 노덕(老德)을 우대하는 뜻이다.” 하였다. 임술년에 공의 나이가 70세가 되어 예법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니, □ 상이 답하기를, “사람이 70세까지 사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나는 노덕을 귀하게 여기는데, 한 시대에 기로(耆老)가 많이 있지 않으니 어찌 늙은이를 물러나게 하겠는가.” 하였다. 계해년 1월에 더욱 간절히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 상이 거듭 공의 뜻을 거스르다가 비로소 그 청을 윤허하고,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관(領中樞府兼領經筵官)을 주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 동궁(東宮)에게 불행한 일이 있어 공이 분주히 다니며 곡읍하면서 연일 음식을 폐하고 마침내 심통(心痛)을 앓아 병세가 위태로워지자 또 영구(靈柩)를 교외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혹 질병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만두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나는 □ 동궁의 옛 신하이다.” 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예(禮)를 폐할 수 없는데, 스스로 심통(心痛)과 위질(胃疾)로 몇 달을 앓았다. □ 상문이 공의 병을 듣고 의원에게 물어 약을 보내 주고, 어주(御廚)의 진미(珍味)까지 나누어 주어 공을 위로하는 데에 모든 것이 지극하였으나 하늘이 끝내 구제하지 않아 갑자년 윤2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72세이다. □ 상문이 부고를 듣고 조시(朝市)를 중지하고 육선(肉膳)을 물리치며 슬퍼하였다. 고사(故事)에 대신이 병으로 죽으면 으레 승지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런데 당시 정원(政院)에서 공의 위급함을 알지 못하여 상문에게 여쭈지 않았고, □ 상문은 이 때문에 더욱 애통해하였다. 부의(賻儀)와 증(贈)의 예가 수량으로도 넉넉하였다. 5월 19일에 과천 동상초리(東霜草里)의 곤좌(坤坐)에 건향(艮向)한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부인과 같은 무덤을 쓰고 다른 지역이다. 공은 충후(忠厚)한 자질을 타고나 풍채가 굳건하고 얼굴빛이 온화하였다. 도량은 넓고 생각은 원대하여, 무리 속에 처하면서도 남과 다르게 하려 하지 않았으며, 남이 범하는 것을 보고도 그와 교정하지 않았다. 거동은 느긋하고 여유로워 비록 창졸한 때에도 일찍 말을 하고 성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겉모습은 더디고 어리석은 듯하였으나 속마음은 실로 강하고 용맹하여, 굳센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덕량(德量)으로 가려 주는 것이 많았다. 정 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 윤 정성공(尹靖成公) 은보(殷輔) 및 우리 선군(先君) 문희공(文僖公)이 모두 공을 보좌할 사람으로 기약하였다. 선조를 받드는 데는 신중하여 몸에 병이 있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비록 그 집에 있지 않더라도 제사 때가 되면 반드시 관복을 갖추고 앉았다가 제사가 끝나면 파하였다. 매양 부모님께 미치지 못하는 것을 통탄스럽게 여겨 생일이라도 자손들이 축수(祝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나는 태어나서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또 부모를 부르는 것도 모르니 실로 천지간에 한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자기 행실은 규구(規矩)와 승묵(繩墨)에 얽매이지 않았다. 항상 기질을 바로잡고 덕성을 함양하고자 하여 서창(書牕)과 벽에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썼다. “경박하면 중하게 하고, 급하면 느리게 하고, 편벽되면 너그럽게 하고, 조급하면 고요하게 하고, 거칠면 화평하게 하고, 거칠면 세밀하게 한다.” 하였다. 《독서자경편(讀書自警編)》을 읽기를 좋아하였고, 특히 도량편(度量編), 도회편(韜晦編) 등에 뜻을 두었다. 증점(曾點)이 사슬(舍瑟)에게 대답한 것을 외웠다.

원문

隱括於燕居之中。有非徒事記聞者所能及也。坦懷待人。不置町畦。聞人過失。必先思可恕之道。雖婢僕之賤。有一善言。必假以辭色曰。汝敎我矣。如得偸盜者。必還給其贓曰。何不告我。如聞己過。必曰。吾果有此。有因事慍見者。公笑不與校曰。汝果是也。慍者不覺偕笑而去。嘗舟運鄕莊儲穀以資婚需。遭風舟覆。俄聞拯出。或勸公責徵篙師。公曰。船敗有數。何忍重困幾死僅生之人。竟不問。林川舊居。先業甚厚。自公之貴。其儲漸縮。子孫已嫁者。皆仰食於公。或至窘乏。而公不問其有無。平生行道。不敢當□輦路。雖居奧室。不向日月便旋。如見親戚貧窮。必傾儲以賑之。婚喪必爲之主。以周其窘。其判吏曹。愼於銓注。不敢單擬。以防後來專擅之弊。人有被公吹噓者聞而來謝。則必曰。爵祿當出於□人主。非私門所宜市。及爲相。休休然務存大臣之體。不察察爲明。不肯衒功能。其論人才。必以持重。不喜施爲變更舊章爲賢。或譏公不建白。公若爲不聞者。又不肯明其不然。深味古人徒知有功之爲功。不知無功之爲功之語。蓋公之所以自期者在此也。有時獻議于□上。如見採用則公蹙然不寧者久之。聞人譽己。必曰。汝欲諛我耶。自奉甚儉。朝夕所供。不過數器。過此則輒下一器于案下曰。古人食不重味。況如我者乎。□朝服之外。不用綾緞曰。服美于人。可恥之甚。朝廷設堡于慶興江北。公執以爲不可。後見挫。人皆服公先見。家人嘗於十年前買人男口。其後携被買前一歲所生女子以來。公命還其主。其主感之。欲輕價以賣。公竟倍價償焉。其推心不忍欺。皆此類也。晩年卜居松峴。自號松峴翁。或値□鑾輿西出。由峴路以過則公整衣冠。伏於中門外。俟□輦過而入。家人問何不伏於外門之外。公曰。出門外。則必爲人見。吾不欲沽名也。公嘗奏事簾前。□文定王后語公曰。□先王嘗稱卿可大用。至以卿名識諸屛障。公對曰。□先王特除臣官職凡十餘度。人或疑臣緣他道以進。□后曰。此特卿知遇於□先王者深耳。公秉心謙虛。不欲久於相職。自辛亥至甲子。首尾十四年。或因疾封章。或詣□闕乞免。至引金時習嘲鄭昌孫之語。無歲不辭。常自笑而語子弟曰。此老相業眞可笑。議政十年。惟求退一事而已。居位吾無可稱者。但於不忮害不忌克二者。差有所長。吾死必有諡。汝等述吾行。當曰。公晩好鼓琴。酒微醺。輒彈感□君恩一曲以自娛。足矣。旣病。語家人曰。人之無定力者。少壯或有可觀。老且死。鮮不錯謬。對妻子屬以後事。使無知婦人。誦遺言號哭屍傍。非君子一死生之道也。至於屬纊。作寬辭鎭一家。故侍病者實未覺其危篤。公娶介山守孝智之女。賢明過人。訓子弟以義方。不欲以非義浼公名節。故家庭肅然。爲門族所取則。生三男。其二夭。

번역

은거하여 지내는 가운데에 일상적인 기문(記聞)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있다.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대하면서 잣대와 울타리를 두지 않았으며, 남의 과실을 들으면 반드시 먼저 용서할 도리를 생각하였다. 비록 천한 종이라도 좋은 말을 하면 반드시 말과 표정을 갖추어 “네가 나를 가르쳤다.”라고 하였다. 도둑을 잡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장물을 돌려주면서 “왜 나에게 고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였고, 자신의 허물을 들으면 반드시 “내가 과연 이런 잘못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어떤 일로 인해 화가 난 사람이 보면 공은 웃으며 함께 꾸짖지 않고 “네가 과연 옳다.”라고 하여 화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함께 웃고 떠났다. 일찍이 배를 타고 향장(鄕莊)에 곡식을 운반하여 혼수를 마련했는데, 바람을 만나 배가 전복되었다가 조금 뒤에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이는 공에게 고사꾼을 꾸짖어 책임을 물으라고 권하였으나, 공은 “배가 파손된 것은 운수가 있는 것인데 어찌 차마 죽을 뻔한 사람을 거듭 괴롭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끝내 묻지 않았다. 임천(林川)의 옛집에 선업이 매우 두터웠으니, 공의 귀함에서 비롯되었다. 저축이 점점 줄어들었으나 자손 중에 이미 시집간 자가 모두 공에게 의지하여 먹고 살았는데, 혹 곤궁한 때가 되더라도 공은 그 유무를 묻지 않았다. 평생에 행하는 도리가 감히 대궐 길을 왕래할 수 없어서 비록 깊숙한 방 안에 있더라도 해와 달이 편할 때면 곧바로 돌아왔다. 친척 중에 가난한 자를 보면 반드시 저축을 털어 구제해 주었고, 혼사나 상사(喪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 일을 주관하여 곤궁함을 돌보아 주었다. 이조 판서로 있을 때는 전주(銓注)에 신중하여 감히 한 사람만 의망하지 못해서 후인들이 독단하는 폐단을 막았다. 남이 공의 추천을 받은 자가 듣고 와서 사례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작록은 마땅히 임금에게서 나와야지 사문(私門)에서 팔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정승이 된 뒤에는 한가로이 대신의 체모를 보존하는 데 힘썼으며, 살피지 않는 것을 밝게 하고 뽐내기를 꺼렸다. 인재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지중(持重)한 사람을 추천하고 옛 법을 바꾸어 시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혹 공이 건의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면 공은 듣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또 그 부당함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이 공을 세우는 것이 공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공을 세우지 않는 것이 공이라는 것은 몰랐다.”라는 말을 깊이 음미한 것이다. 대개 공이 스스로 기약하는 바가 여기에 있었다. 때때로 헌의(獻議)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만일 채택되는 것을 보면 공은 얼굴을 찌푸리고 편치 않아 하는 것이 오래되었고, 남들이 자신을 칭찬하면 반드시 “너는 나에게 아첨하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스스로 매우 검소하여 조석에 쓰는 그릇이 몇 개에 불과하였는데, 이보다 많으면 곧 하나를 안상(案上) 아래로 내려놓으며 “옛사람은 음식을 중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관복 외에는 능단(綾緞)을 입지 않으면서 “남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경흥강 북쪽에 보(堡)를 설치하자 공이 안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나중에 뜻이 꺾여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을 인정하였다. 집안사람이 10년 전에 남자를 사서 입양했는데, 그 뒤에 이불을 가지고 와서 전해 입양했던 해의 첫째 딸을 사 왔다. 공이 명을 내리자 그 주인이 감동하여 값을 낮추어 팔려고 하였는데, 공이 끝내 값을 배로 쳐서 갚아주었다. 이는 마음으로 미루어 보아 차마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니, 모두 이와 같은 부류이다. 만년에 송현(松峴)에 살면서 스스로 송현옹이라 일컬었다. 혹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나가는데 송현 길을 지나가면 공이 의관을 정제하고 중문 밖에 엎드려 있다가 어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집안사람이 “왜 외문 밖에서 엎드리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공이 말하기를, “문을 나가면 반드시 남의 눈에 보일 것이니 나는 명예를 구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이 일찍이 궁궐 안에서 일을 아뢰었는데 문정왕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선왕께서 일찍이 경을 크게 쓸 만하다고 칭찬하시고 심지어 경의 이름을 병풍에 쓰기까지 하셨다.”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선왕께서 특별히 신의 관직을 열 번 넘게 제수하셨으니 사람들이 혹시 다른 길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니, 왕후가 말하기를, “이는 단지 경이 선왕에게 깊은 인정을 받은 것일 뿐이다.” 하였다. 공은 마음을 가지고 겸허하였다. 나는 상직(相職)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서 신해년부터 갑자년까지 14년 동안에 병으로 인하여 봉장(封章)을 올리기도 하고 궁궐에 나아가 면직을 청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김시습(金時習)이 정창손(鄭昌孫)을 조롱한 말을 끌어다 써서 해마다 사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스스로 웃으며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의 재상 행위가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의정부의 직임을 10년 동안 맡았으면서 오직 물러나기를 구하는 일만 하였으니, 내가 지닌 덕망으로는 칭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이 나를 미워하지 않으며, 남을 시기하지 않고 남이 나를 기롱하지 않는 두 가지에 조금 장점이 있으니, 내 죽으면 반드시 시호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행실을 기록하면서 ‘공은 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술이 약간 취하면 늘 감군은곡(感君恩曲) 한 곡조를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라고 말하는 것이 족할 것이다.” 하였다. 병이 들자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사람 중에 정력(定力)이 없는 자는 젊었을 때에는 혹 볼만한 점이 있기도 하지만 늙어서 죽게 되면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처자식과 후사에 대해 말하자면, 아녀자를 모르게 하고 유언을 외우게 하여 시신 곁에서 호곡(號哭)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군자의 일생일사의 도가 아니었다. 며느리로 시집와서 한 집안을 편안하게 하였기 때문에 병간호하는 자는 실로 그 위독함을 깨닫지 못하였다. 공이 개산(介山) 수효지(守孝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현명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자제들을 의리 바른 방도로 가르치고 비의(非義)를 가지고 공의 명예와 절개를 더럽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정은 엄숙하여 문중의 모범이 되었다. 세 아들을 낳았는데, 두째는 요절하였다.

원문

一曰鵬南。先公而歿。男曰蓍孫。司紙。女長適縣監鄭麟壽。次適藝文檢閱李濟臣。蓍孫娶左議政沈通源之女。生一男二女。男曰子儀。女幼。縣監生四男二女。男思敏,思敬,思愼。餘幼。女長適主簿沈信謙。次幼。檢閱生二男一女。男曰耆俊,壽俊。女幼。思敏娶應敎崔顒女。主簿生一男一女。皆幼。夫人先公二十年而逝。以訓鍊都正金胤宗女。爲側室主家事。又有側室生一男。曰存省。觀象監直長。娶郡守金鑌之女。生二女。皆幼。葬旣完。蓍孫述公行蹟。囑以墓道之刻曰。孤方易石而俟之。嗚呼。暹之不文。何足以形容盛德。但以公之在玉署。嘗稱備下僚。其入台府。又忝二公。蒙許與而仰風裁者久。敢辭銘。銘曰。

번역

  1. 붕남(鵬南)은 선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 시손(蓍孫)은 종이 만드는 일을 맡았고, 딸 장적(長適)은 현감 정인수(鄭麟壽)에게 시집갔으며, 차적(次適)은 예문관 검열 이제신(李濟臣)에게 시집갔다. 시손은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자의(子儀), 딸은 유(幼)이다. 현감은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사민(思敏), 사경(思敬), 사신(思愼)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 장적은 주부 심신겸(沈信謙)에게 시집갔고, 차적 유는 검열이 낳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기준(耆俊), 수준(壽俊)이고 딸은 유(幼)이다. 사민은 응교 최엄(崔顒)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주부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부인은 선공보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훈련도정 김윤종(金胤宗)의 딸을 측실(側室)로 삼아 집안일을 맡게 하였다. 또 측실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존성(存省)으로 관상감 직장이다. 군수 김련(金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장례가 끝나자 시손은 선공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묘도(墓道)에 새기는 일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외로운 무덤이라 돌을 바꾸고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아, 선공이 문장력이 부족하니 어찌 성대한 덕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다만 공이 옥서(玉署)에 있을 때 일찍이 하료(下僚)를 갖추었다고 일컬어졌고, 대부(台府)에 들어갔을 때 또 이공(二公)의 자리를 차지하여 오래도록 허락을 받고 그 풍채를 우러렀다. 감히 명을 지어 올리노라. 명은 다음과 같다.

원문

培之廣厚。公稟之豐。望之茫洋。公量之洪。不忮不克。有長者風。和不肯黨。柔外剛中。具是六者。矧伊遭逢。闇然尙褧。日彰厥衷。權如浼己。過歸諸躬。事惡有跡。物被包容。不爲而爲。無功而功。款款乞骸。莫非危悰。公曰體元。何有愚憃。□王曰咈哉。鎭我臣工。旣不見釋。殊錫疊重。適丁遲暮。□震宮告凶。憂以國憂。百疾之攻。星墜台躔。朝著若空。信矣德人。令聞令終。冠岳之陽。若堂有封。用豎貞珉。載列勳庸。有來摩挲。式此淸忠。

번역

넓고 두터운 기풍을 배양하여 공은 타고난 자질이 풍부하였고 망망한 시야를 지녔으니 공의 도량은 크기도 하였네 남과 다투지 않고 남을 능가하지 않아 장자의 풍모를 지녔으며 화합하되 당파를 꾀하지 않았고 겉은 부드럽고 속은 강직하였네이 여섯 가지를 갖추었으니 더구나 이런 때를 만났음에랴 묵묵히 상복을 입고서 날마다 충심을 드러냈네 권한은 자신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허물은 모두 자기에게 돌렸으며 일은 자취가 없게 하였고 만물은 포용하였네 하지 않아도 하고 공이 없어도 공이 되었네 간절히 사직을 청하니 모두 위태한 마음에서였네 공은 근본을 체득했으니 어찌 어리석음이 있었으랴 왕이 “잘하였다.”라고 하였고 신하들이 진정하였네 이미 석방되지 않았는데 특별히 중첩된 은총을 내렸네 마침 늙은 나이에 궁궐에 흉보가 올라 나라의 근심으로 걱정했더니 온갖 병이 침범하여 태산(泰山)과 남산(南山)에 별이 떨어지니 조정이 텅 빈 듯하였네 참으로 덕 있는 사람은 영명하고 영종하리라 관악산 남쪽에 당을 세우고 정신을 모시는 비석을 세워 공의 공훈을 기록하니 오는 사람마다 어루만지며 이 청렴한 충성을 기리네

241. 祭文

문체: 哀祭類 / 祭文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22B, ITKC_MO_0130A_A026_122C

원문

維嘉靖四十三年歲次甲子五月壬寅朔初五日丙午。姻孫生員李濟臣。謹具薄需。敢昭告于卒聘大父領議政尙公之靈。牧丹擺久。芍藥隨萎。千日何時。尙臥不起。諄諄之誨。緩緩之儀。無復高山。此爵長辭。嗚呼哀哉。尙□饗。

번역

가정(嘉靖) 43년 갑자년 5월 임인삭(壬寅朔) 초닷새 병오일에 인손 생원 이제신은 삼가 변변찮은 제수를 갖추고 감히 졸빈 대부 영의정 상공의 영전에 고합니다. 모란은 오래도록 피지 않고 작약도 시들어 떨어졌는데 천일이 언제나 오겠습니까 아직도 누워 일어나지 못하네 자상한 가르침과 온화한 모습 다시는 볼 수 없으니 이 제사를 길이 고하고 떠납니다 아, 슬프도다 부디 흠향하소서

원문

靖陵作成。元氣眞淳。肫肫成安。其德孔醇。□御屛有名。受知重宸。□仁廟毓德。首應抄掄。授之冢宰。官不私人。進據台府。燮理昌辰。凝重若山。溫厚如春。儼爾袍笏。肅我衿紳。曷爲紛更。視此率循。老成在朝。□王有藎臣。不居其功。功莫與倫。丹心憂國。白首如新。中夜觀星。思殞厥身。跡卿始起。爰及秉均。或擠于仕。或値于屯。棘棘其言。懇懇其眞。竺禪揚豗。待卿以詢。西江障塞。長算莫伸。邇英綈几。夙戒興晨。豹尾從邁。箴規載陳。露亭春醞。霧幄香塵。彈琴一曲。感誦□君仁。進豈他道。退遠要津。卿有大者。學術之純。寤寐自警。矩矱是遵。于以契合。曰臣曰隣。肆予曠感。起卿何因。輦路之側。佳城蓁蓁。乃命守土。奠以藻蘋。靈如不昧。庶幾其臻。

번역

정릉을 조성할 때에 원기가 참으로 순수하였고 성안산이 이루어졌으니 그 덕이 매우 순수하였네 어제병(御製屛)에 이름이 있으니 임금의 인정을 받았네 인묘께서 덕을 기르시어 먼저 뽑아 선발하셨네 총재에 제수되니 관직은 사사롭지 않았네 나아가 대부(臺府)에 앉으니 창성한 시대 다스렸네 산처럼 굳건하고 봄처럼 온화하였네 엄숙하게 포홀을 갖추고 우리 선비들을 엄숙히 하였네 어찌 번거롭게 바꾸겠는가이 사람을 본받아야 하리 노성한 이가 조정에 있으니 왕에게 충신이 있었네 그 공을 차지하지 않았으나 공은 짝할 자 없었네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니 백발에도 새로웠네 한밤중에 별을 보며 죽기를 생각하였네 경의 자취가 처음 일어났으니 곧이어 병균에 이르렀네 혹 벼슬에서 배척당하고 혹 재앙을 만났으나 간절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동하였네 선비들이 명성을 드날리니 경에게 물으려고 기다렸네 서강이 막히고 장산이 펴지지 않으니 영묘의 영구(靈輴)가 새벽에 출발하네 표미를 따라 나아가니 경계하는 말이 진열되었네 노정의 봄 술과 무악의 향기로운 먼지 거문고 한 곡조에 감동하여 경의 인을 읊었네 나아감은 어찌 다른 길이 있겠는가 물러남은 먼 곳으로 가야 하네 경에게 큰 것이 있으니 학술이 순수하네 자나 깨나 스스로 경계하고 법도를 준행하였네 이에 부합하여 신하요 이웃이라 하였네 내가 깊은 감회가 있어 경을 일으킨 것이 무엇 때문인가 연로의 곁에 좋은 무덤이 우거졌으니 이제 수령으로 명하여 제수를 올리게 하네 영령이 어둡지 않다면 부디 이르시게

242. 挽詩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22D, ITKC_MO_0130A_A026_123A

원문

翦刁曾在十霜前。愚昧纔踰志學年。蕩蕩敢窺洪海量。空空難試大均權。公眉有色如垂帨。我性非良幸事賢。久荷恩情猶子視。幾蒙諄敎當師傳。春開座上敷容暖。天析談間示理玄。動靜無非毋我隱。提携皆爲導其先。混珍卞匱誰當琢。朽木尼門竟莫鐫。鑽仰久知其卓爾。沿洄更覺只茫然。門深未領宮墻富。樑折方看燕雀憐。道德餘音如在耳。儀刑爲夢倘交眠。未承終死遺嘉訓。敢述平生得僭編。憂國祗應催晩節。傷時乃或寄遲絃。酒家有讖聊云爾。階草無情亦已焉。天上有箕公不死。民間多病孰令痊。半千運啓宜名世。九五辰傷爲見田。一代哀榮終始罕。三朝忠業後前聯。黃扉萬事新松檜。綠野稀恩舊几筵。融洩樂全應視夜。崩摧怨極奈呼天。明靈此去知何所。玄駟今歸曷復旋。月酌賡緣來世已。泣將哀薤奉重泉。

번역

십 년 전에 벼슬을 그만두고서 어리석은 나이 겨우 지학의 나이를 넘었네 넓디넓은 홍해의 도량 감히 엿볼 수 있었으랴 텅 비어 대균의 권도 시험하기 어려웠네 공의 눈썹에 빛이 있어 마치 베를 드리운 듯했고 나의 성품 어질지 못하여 다행히 현인을 만났네 오래도록 은혜로운 정을 자식처럼 받았고 몇 번이나 가르침을 받아 스승에게 전수받았네 좌상에 봄이 열리니 온화한 모습 펼쳐졌고 담론 중에 하늘이 갈라지니 이치가 현묘하였네 동정은 모두 나를 숨기지 않는 것이었고 인도해 주신 것은 모두 앞을 인도하는 것이었네 진보와 구차함을 누가 감별하여 닦아주었나 썩은 나무는 문에 걸려 끝내 새길 수 없었네 우러러보고 오래도록 그 탁월함을 알았는데 어수선한 세상 따라가며 망연자실하였네 문이 깊으니 궁궐의 부유함 알지 못하고 들보가 꺾이니 연작을 가련하게 보았네 도덕의 여운은 귀에 있는 듯하고 모습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겠네 죽을 때까지 좋은 가르침 받지 못했으니 평생 얻은 것을 감히 외람되이 기록하네 나라 걱정으로 저녁 나절 재촉하였고 시대를 슬퍼하여 더디게 거문고 탔네 주가에 예언 있으니 애오라지 말할 뿐이고 섬돌의 풀 무심하니 또한 어찌하랴 하늘에는 기자가 죽지 않았는데 세상엔 병이 많으니 누가 고쳐줄까 반천의 운수가 열리니 세상에 이름났고 구오의 흉년이 들었으니 농사를 보았네 한 시대의 애영은 종시로 드물었고 세 조정의 충성은 앞뒤로 이어졌네 황비의 만사는 소나무와 회나무가 새로워지고 녹야의 은혜는 궤연과 자리가 옛것이 되었네 융성하고 쇠락함에 즐거움 온전하니 밤을 보아야 하고 무너지고 부서짐에 원망 극심하니 어찌 하늘을 부르랴 밝은 영혼 이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검은 수레 지금 돌아가면 다시 오시려나 월작의 인연이 다음 세상에 이르렀으니 눈물 흘리며 애도하는 노래를 황천에 올리네

원문

亹亹三朝老。巍巍百辟師。邦家依柱石。臣庶望蓍龜。世道催淪喪。皇天不憖遺。押班安所仰。空想舊威儀。

번역

부지런히 삼조를 섬긴 노신이요 우뚝하게 백관의 스승이었네 나라가 주석에 의지하였고 신하들은 시귀를 바라보았네 세도가 몰락을 재촉하니 황천은 남겨 두지 않았구나 반열에서 어디를 우러르랴 부질없이 옛 위엄만 생각하네

원문

十載巖廊上。咸稱長者風。納汚無較量。利物不居功。厚德留人腹。純心沃聖衷。風流話不盡。應照簡編中。

번역

십 년을 조정에서 벼슬살이 하니 모두들 장자의 풍도라 일컬었네 더러운 것 받아들임에 헤아림이 없고 만물을 이롭게 함에 공을 구하지 않았네 후덕한 덕은 사람의 마음속에 남았고 순수한 마음은 성상의 충심을 적셔 주었네 풍류는 말로 다할 수 없으니 응당 간편 속에 비치리라

원문

里閈惟仁美。詩禮託鯉賢。觀魚陪極浦。落筆侍華筵。衡嶽新摧柱。瑤琴擬絶絃。懷恩祗一哭。淚盡舊堂前。

번역

마을에 인자하고 아름다운 이가 있어 시와 예로 어진 이에게 부탁하였네 물고기 구경하며 극포에 모셨고 붓을 들고 화려한 자리에 모셨네 형산의 기둥이 새로 꺾였으니 요금의 줄 끊어질 듯하네 은혜를 생각하여 한 번 곡하니 눈물이 옛 당 앞에서 다하였네

원문

相公忠孝德恢恢。黃閣光輝極上台。際會□靖陵期大用。經綸當代展雄才。暮年豪氣傳琴韻。餘事文章付酒杯。樑壞吾生何所托。西州不忍醉中來。

번역

상공의 충효와 덕이 넓고도 크시어 황각에 빛나고 상대에서 극진했네 제회는 정릉에서 대용을 기약했고 경륜은 당대에 웅재를 펼쳤었지 노년의 호기는 금풍에 전해지고 여사의 문장은 술잔에 부치었네 들보가 무너진 내 삶 어디에 의탁할꼬 서주로 취중에 차마 오지 못하겠네

243. 諸賢贈詩

문체: 詩類 / 詩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23C, ITKC_MO_0130A_A026_123D ...

원문

幕中宜聚彥。君往喜人心。行路淸秋發。離亭落日深。孤城連海氣。荒塞接雲陰。矛戟雖光彩。羈思恐未禁。

번역

막부에는 어진 인재 모여야 하니 그대 가매 사람 마음 기뻐하네 길 떠나자 맑은 가을이 시작되고 이별하는 정자에 해는 저무는데 외로운 성 바다 기운과 이어지고 황량한 변방 구름 그늘 접했으리 창칼 비록 빛나고 화려하지만 나그네 시름 금하기 어려우리

원문

北地多戎服。平時鐵馬行。旌旗開曉塞。笳鼓動寒聲。脫劍坐論策。鳴弓出訓兵。飛騰書奏處。猶戒失軍情。

번역

북쪽 땅에 군복 입은 이 많으니 평시에도 철마가 다니는 곳 깃발이 새벽 변방을 열어젖히고 피리 북소리가 찬 공기를 진동하네 칼을 벗어놓고 앉아서 계책 논하고 활을 울려 병사들을 훈련시키네 말 타고 달려가서 글을 올려 아뢸 때에도 군정 잃지 말라고 경계하였네

원문

北塞非吾土。南人遠自愁。他皆兒女態。爾獨丈夫憂。雪路巡沙磧。霜天立戍樓。須看風氣異。筋力好爲謀。

번역

북쪽 변방은 내 고향이 아니니 남쪽 사람 멀리서 근심하네 다른 이들은 모두 아녀자 같고 너만 홀로 장부의 근심을 하네 눈길에 사막을 순찰하고 서리 내린 하늘 아래 수루에 서 있네 모름지기 기후가 다름을 보고 근력으로 잘 계책 세우게나

원문

華戎交界北西門。斧鉞仍兼節制尊。山水會心江繞郭。樓臺連賞酒盈樽。津亭日晩飛霙暗。嶺繳風高彩旆飜。賑餓撫邊俱屬望。獨將離恨謾銷魂。〔原注:監司兼咸鏡道連帥。故斧鉞兼節制。〕

번역

중국과 접경한 북서쪽 관문에서 부월을 지니고 절제까지 겸하였네 산수는 마음에 들어 강이 성곽을 감싸고 누대는 연이어 즐거워 술이 동이에 가득하네 나루터에 해 저물어 날리는 눈발 어둡고 고개에 바람 세차서 깃발이 나부끼네 굶주린 백성 구제하고 변방 다스림 모두 기대되는데 홀로 이별의 한으로 부질없이 애태우네 원주(原注): 감사가 함경도 연수(連帥)를 겸하였으므로 부월을 지니고 절제를 겸하였다.

원문

蕭蕭孤雁暮江潯。紅蓼花殘兩岸陰。謾向西風呼舊侶。不知雲水萬重深。

번역

쓸쓸한 외기러기 저물녘 강가에 날고 붉은 여뀌꽃 시들고 양쪽 언덕 그늘졌네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벗을 부르는데 구름과 물이 만 겹으로 깊은 줄 모르네

원문

楓落蘋香蘆荻花。疏影隨意汛淸波。塞天昨夜風霜厲。却愛江南有歲華。

번역

단풍 지고 연꽃 향기 갈대 꽃 피니 성긴 그림자 맑은 물결 따라 옮겨 가네 지난밤 변방 하늘에 바람 서리 매서웠는데 문득 사랑스럽구나, 강남에는 계절이 있음을

원문

〔原注:謹按。□公以金褆畫蘆雁二足。求詠於蘇陽谷。蘇公以二絶還。皆自諭。而淸江評曰。太逼畫樣。可謂絶唱。○見詩話叢林〕

번역

원주(原注) : 삼가 상고하건대, □공이 김구(金褆)에게 화상으로 그린 갈대와 기러기 두 발을 보고 소양곡(蘇陽谷)에게 읊어 주기를 청하자, 소공이 절구 두 수를 지어 돌려주었는데 모두 스스로를 비유한 것이었다. 그런데 청강(淸江)의 평론에 “너무도 화상과 흡사하니 절창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 《시화총림》을 보라.

원문

常憐吾姪靈川子。愛畫稍靈妙奪眞。能事肯留堂上樹。風斤聊運郢中身。奇姿幻出千夫長。雪節中含萬古春。遲見鳳凰枝未實。幾經風雨葉如新。山巖物色移黃閣。肉食軒名合綠筠。白首對君塵想絶。靑雲惟爾宿心親。子瞻去後無眞筆。與可亡來有此人。墨跡已能驅造化。詩聲添處更精神。

번역

항상 사랑스럽네 내 조카 영천자여 그림을 좋아하여 조금 신묘함이 진품을 압도하네 능사로 당 위의 나무를 어찌 남겨 두겠는가 풍금으로 애오라지 영중의 몸을 운용했네 기이한 자태 천 명의 장수보다 뛰어나고 눈 같은 절개 만고의 봄을 머금었네 봉황 가지 열매 맺기 전에 더디 보았는데 몇 번의 비바람에 잎은 새로워졌네 산암의 물색은 황각으로 옮겨지고 육식헌의 이름은 녹균에 합당하네 백발로 그대 대하니 속세 생각 끊어지고 청운은 오직 그대와 마음이 친했네 자첨이 떠난 뒤로 진실한 필치 없었는데 여가가 돌아오니 이 사람이 있었네 묵적은 이미 조화를 몰아낼 수 있고 시성은 더해진 곳에 더욱 정신이 있네

원문

渭川分種到遐方。幾處名園拂粉墻。比德却專姿勁直。醫人堪砭俗膏肓。班班雨送湘娥泣。細細香隨蜀客涼。巖谷下抽綳雅縳。煙中忽逬羽林槍。南烹不管調羹用。野賞寧饒問主忙。爭似貌深眞自得。正須觀妙兩相忘。神移蘇老三生習。勢倒文翁萬丈長。回首商山思縮地。爲君重掃紫毫芒。

번역

위천의 씨앗이 멀리까지 전해져서 몇 곳이나 이름난 정원에 분장을 칠했나 덕을 따를 때는 유독 곧은 자태 드러내고 병 고치는 사람도 고질병을 다스릴 만하네 줄줄 흐르는 비는 상아가 우는 듯하고 솔솔 부는 향기는 촉객이 시원해하는 듯 골짜기 아래에 얽매인 채 뽑혀 나왔는데 안개 속에 갑자기 우림의 창이 나타났네 남쪽에서 국 끓일 때 조리법은 상관없고 들판 구경할 때 어찌 주인이 바쁘다고 하랴 깊은 모습 참으로 자득한 것과 어찌 같으랴 정녕 오묘함을 보아 서로 잊어야 하리라 신령함은 소로의 삼생 습속을 옮겨 왔고 형세는 문옹의 만 장 긴 줄기를 뒤집었네 머리 돌려 상산을 바라보며 축지를 생각하니 그대 위해 거듭 자호의 털을 쓸어내네

원문

〔原注:謹按。□公有靈川子申潛畫竹晴雨二障。分請企齋,湖陰之詠。二公各以八韻排律歸之。李淸江評曰。其第七韻之用事措意一也。而立語骨法頓殊。兩家氣像可想。而天然峼崛。未易甲乙也。○見詩話叢林〕

번역

원주 : 삼가 상고하건대, □ 공(公)이 영천(靈川) 자신(子申)의 화죽청우(畫竹晴雨) 두 장을 가지고 기재(企齋)와 호음(湖陰)에게 나누어 청하여 읊게 하였는데, 두 분이 각각 팔운 배율(八韻排律)로 지었다. 이청강(李淸江)의 평에 이르기를, “그 일곱 번째 운에서 말을 쓰고 뜻을 둔 것은 한 가지인데, 입어 골법(立語骨法)은 갑자기 달라지니 두 집안의 기상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천연스럽고 우뚝하여 어느 쪽이 낫다고 하기 어렵다.” 하였다. ○ 《시화총림》에 보인다.

244. 贊〔原注:洪柱翼〕〔原注:守白齋〕

문체: 雜著類 / 贊頌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24C

원문

口有擇發。心無妄用。時値垂簾。十年養重。擊奸登良。遇大則勇。房杜之亞。公實姚宋。〔原注:房玄齡,杜如晦,姚崇,宋璟。皆唐之賢相也。〕

번역

입에는 가려 말하고 마음은 망령됨이 없었네 때는 수렴청정의 때를 만나 십 년 동안 거듭 기르니 간신을 쳐서 어진 이를 등용하고 큰일을 만나면 용감하였네 방현령과 두여회의 아우요 공실과 요숭, 송경이었네 원주(原注) :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요숭(姚崇), 송경(宋璟)은 모두 당나라의 어진 재상이다.

원문

〔原注:謹按。守白齋所撰十相臣贊。序次如下。故註記以爲考。□黃厖村翼成公喜。長水人。□許敬菴文敬公稠。陽川人。□鄭守夫文翼公光弼。東萊人。□安貞愍公瑭。順興人。□尙泛虛亭成安公震。木川人。□李東皐忠貞公浚慶。廣州人。□朴思菴文忠公淳。忠州人。□尹梧陰文靖公斗壽。海平人。□李白沙文忠公恒福。慶州人。□李梧里文忠公元翼。完山人。〕

번역

원주(原注) : 삼가 살펴보건대, 수백재(守白齋)가 지은 십상신찬(十相臣贊)의 서차는 다음과 같으므로 주석에 기록한다. 황익성공(黃翼成公) 희(喜) - 장수(長水) 사람이다. - 허경암 문경공(許敬菴文敬公) 추(稠) - 양천(陽川) 사람이다. - 정수부 문익공(鄭守夫文翼公) 광필(光弼) - 동래(東萊) 사람이다. - 안정민공(安貞愍公) 당(瑭) - 순흥(順興) 사람이다. - 상범 허정 성안공(尙泛虛亭成安公) 진(震) - 목천(木川) 사람이다. - 이동고 충정공(李東皐忠貞公) 준경(浚慶) - 광주(廣州) 사람이다. - 박사암 문충공(朴思菴文忠公) 순(淳) - 충주(忠州) 사람이다. - 윤오음 문정공(尹梧陰文靖公) 두수(斗壽) - 해평(海平) 사람이다. - 이백사 문충공(李白沙文忠公) 항복(恒福) - 경주(慶州) 사람이다. - 이오리 문충공(李梧里文忠公) 원익(元翼) - 완산(完山) 사람이다. -

245. 本傳〔原注:明宗十九年甲子閏二月甲戌朔丁酉○李朝實錄〕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26B

원문

領中樞府事尙震卒。字起夫。爲人寬重有度。沈厚不競。見者以公輔期之。少時豪邁不學。嘗爲同舍生所辱。遂發憤讀書。業日進。未久。中司馬試。己卯年間。士人方事修飾。震惡之。時游泮宮。故不冠箕踞而弄侮之。旣而登第。謁鄭光弼。旣出。光弼語人曰。朝廷出懶慢政丞矣。平生不言人過。一時有爲之才。引進者多。世皆歸德焉。嘗與逸士成守琛,趙昱相善。雖居相府。爲外方之交。終始不替。臨終。語子弟曰。吾死勿樹碑。但立短碣書曰。公晩學琴。常彈感□君恩一曲足矣。

번역

영중추부사 상진이 졸하였다. 자는 기부(起夫)이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중후하며 절도가 있었으며, 침착하고 후덕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공보(公輔)의 반열에 오를 것으로 기대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호방하고 거칠어 공부하지 않다가 일찍이 동사생(同舍生)에게 모욕을 당한 뒤에 분발하여 독서하였는데, 학업이 날로 진전되었다. 얼마 안 되어 중사마시(中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기묘년에 사인(士人)들이 한창 수식(修飾)을 일삼자 상진은 이를 미워하여 당시 반궁(泮宮)에서 놀고 있었으므로 관을 쓰지 않고 다리를 뻗고 앉아 모욕하였다. 얼마 뒤 급제하고 정광필(鄭光弼)을 알현하였는데, 그가 나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나만하면 되는 정승이 나왔다.” 하였다. 평생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으며, 한때에 위업을 이루는 재주가 있어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자가 많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덕으로 돌렸다. 일찍이 일사(逸士) 성수침(成守琛), 조욱(趙昱)과 서로 친하였는데, 비록 상부(相府)에 있으면서도 외방의 벗을 위하여 종시토록 변함이 없었다. 죽음에 임하여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죽으면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짧은 비갈(碑碣)을 세워 ‘공은 만년에 거문고를 배워 항상 감군은곡(感君恩曲) 한 곡조를 연주하였다.’라고 쓰라.” 하였다.

246. 遺事

문체: 傳記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26C, ITKC_MO_0130A_A026_126D ...

원문

尙氏之先。出於木川。麗朝統合之後。以百濟遺民屢有驚擾。賜畜姓以辱之。公之先。得象爲姓。後改以尙焉。公曾祖英孚。居林川。家甚殷富。與民收散。晩年悉取券投火曰。吾其庶幾有後乎。公考甫。年衰無嗣。禱於聖住山。越明年弘治癸丑。生公。名震。字起夫。五歲而喪母。纔齔而又孤。零丁無依。鞠養於姊夫夏山君成夢井家。爲兒遊戲。卓越豪縱。或訝其難當。年過成童。尙不志學。馳馬試射。被慢於儕流。卽發憤學業。居五月。已達文義。十朔。理無滯阻。夏山君欲見其志。勸就蔭仕。乃曰。丈夫當讀書樹業耳。年弱冠。文才已成。聞成聽松兄弟有學行。乃以全紙大書以簡曰。聞君之名。切有願交之志。二公亦以大書許之。自是聯榻。中丙子生員。柳公雲時長皐比。見公之製文。大加褒稱。至訪于家曰。見公議論。知有經綸之才。己卯冬。捷文科。爲弘文正字。薦入翰苑。時筵臣金世弼論靜菴事曰。初甚尊寵。一朝□賜死。朝廷氣色慘惔。公出曰。伊來經席。未有此論。金相之言。正爲得之。旣而金被謫。言者以公不合史局。請西敍。以司果拜典籍。由禮郞出爲北評事。陞戶曹正郞。歷禮曹。以書狀赴□京而還。□仁廟在東宮。抄選僚屬。以公爲弼善。□貞顯王后薨。掌都監事。時金謹思爲提調。頗以葬物私施人。公謂□國事未襄。大觸其怒。屢被其毒。辛卯。爲獻納,校理。壬辰。執義。癸巳。由典翰爲大司諫。論及己卯之用事臣曁福城君事。物議韙之。言時政。觸三公。三公詣□闕辭職者三。遞拜戶曹參議。出按關東。乙未。以承旨。還歷副學,大諫,判決,刑議。□特除刑參。戊戌。觀察京畿。己亥。超拜刑判。臺官論以驟陞。遞爲右尹。拜大司憲。□上以西方爲重。□親政。除公爲西伯。壬寅。陞資憲。癸卯。判工曹。後一月。□特除兵判。甲辰。以謝恩使將赴京。□上以重臣出使。列邑有擾。□命遞之。□上不欲遠去也。已而。□特拜右贊成。論者啓遞。□上曰。今姑從聽。然此人終授大任。移判刑曹。乙巳。□二聖繼陟。忌者出公爲嶺伯。己酉正月。拜吏判。九月。爲右相。辛亥。陞左相。戊午。爲領相。累辭不□允。壬戌。公年七十。請順天道致仕。五□啓不允。賜几杖。癸亥正月。始遞授領中樞。甲子閏二月卒。享年七十二。諡成安。〔原注:東國名臣錄〕

번역

상씨(尙氏)의 선조는 목천(木川)에서 나왔다. 고려 때 백제와 통합된 뒤에 백제의 유민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축성(畜姓)으로 욕보였다. 공의 선조가 상(象)을 얻어 성을 삼았는데, 나중에 고쳐서 상(尙)이 되었다. 공의 증조 영부(英孚)는 임천(林川)에 살았는데 집안이 매우 부유하여 백성들과 함께 재물을 거두었다. 만년에 모든 권문(券文)을 불태우면서 “내가 후손을 두게 될까?”라고 하였다. 공의 고부(公甫)는 늙어 자식이 없자 성주산(聖住山)에 기도하였다. 이듬해인 홍치(弘治) 계축년에 공이 태어나 이름을 진(震), 자를 기부(起夫)라 하였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겨우 젖을 떼자 또 아버지를 여의어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시부(姊夫)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아이로 있을 때 뛰어난 기상을 지니고 호방하여 혹시라도 감당하기 어려울까 의심을 받았으며, 나이가 10세가 넘어서도 학문에 뜻이 없었다. 말을 달려 활쏘기를 시험하다가 동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자 곧바로 분발하여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달은 5월이다. 문(文)의에 통달하여 10개월 동안 이치에 막힘이 없었다. 하산군(夏山君)이 그 뜻을 보고 음관(蔭官)으로 나아가기를 권하니, 이에 이르기를, “장부라면 마땅히 글을 읽고 가업을 계승해야 합니다.” 하였다. 나이가 약관인데 문재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성청(成聽)ㆍ송형제(松兄弟)의 학문과 행실이 좋다고 들었으므로 종이에 크게 써서 간략하게 말하기를, “그대의 이름을 듣고 절실히 사귀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두 공도 역시 크게 써서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함께 공부하였는데, 중병자(中丙子)에 생원 유공운(柳公雲)이 시장고(時長皐)로 있을 때 공의 제문(製文)을 보고 크게 칭찬하고 집까지 찾아와서 말하기를, “공의 의론을 보고 경륜할 재주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기묘년 겨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 정자(弘文正字)가 되고 한림원에 천거되었다. 이때 연신(筵臣) 김세필(金世弼)이 정암의 일을 논하기를, “처음에는 매우 존숭하고 총애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사사(賜死)하니 조정의 기색이 참담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공이 나와서 말하기를, “그때부터 경연(經筵)에서 모셨습니다.” 하였다. 이런 논의가 없었으니 김상(金相)의 말이 바로 옳았다. 그런데 그 뒤에 김이 귀양을 가자, 언관들이 공이 사국(史局)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서서(西敍)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사과로 전적(典籍)에 제수되었고 예조 낭관을 거쳐 북평사(北評事)가 되었으며, 호조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예조를 두루 거치다가 서장관이 되어 □경(□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 인묘(仁廟)가 동궁에 있을 때 요속(僚屬)을 뽑아 선발하여 공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 정현왕후(貞顯王后)가 훙(薨)하자 도감의 일을 맡았는데, 이때 김근사(金謹思)가 제조(提調)로 있었는데 장물(葬物)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베푼 일이 있었다. 공은 □ 나라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여 그의 노여움을 크게 샀고 여러 차례 그 독설을 받았다. 신묘년에는 헌납과 교리가 되었고, 임진년에는 집의가 되었으며, 계사년에는 전한(典翰)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기묘년에 용사신(用事臣)인 윤숙복(尹淑福) 성군(城君)의 일을 논하여 물의(物議)가 공을 칭찬하였다. 시정(時政)에 대해 말하다가 삼공(三公)과 충돌하였는데, 세 사람이 □궐에 나아가 사직한 적이 있었다. 호조 참의로 체차되었다. 관동 감사로 나갔다. 을미년에 승지로 있다가 돌아와서 부제학, 대사간, 판결(判決), 형의(刑議)를 거쳐 특별히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무술년에 관찰사로 서울에 있었다. 기해년에 형조 판서에 초빙되었는데, 대관이 갑자기 승진했다고 논핵하여 우윤으로 체차되었다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 주상이 서방을 중하게 여겼다. □ 친정(親政)에 공을 서백으로 제수하였다. 임인년에 자헌대부에 올랐다. 계묘년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한 달 뒤에 특별히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갑진년에 사은사로 서울에 갈 때 주상이 중신이 출사하면 열읍(列邑)이 소란해질 것이라고 하여 체차하였다. □ 주상이 멀리 가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뒤 특별히 우찬성에 제수되었는데, 논핵하는 자가 체차를 청하자 주상이 “지금은 우선 들어주겠다.”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이 끝내 큰 책임을 맡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판형조로 옮겼다. 을사년에 두 성인이 계승되었다. 기일이 되자 공이 영백으로 나갔다. 기유년 1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9월에 우상이 되었다. 신해년에 좌상으로 승진하였고, 무오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는데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술년에 공이 70세가 되자 순천도치사(順天道致仕)를 청하였으나 다섯 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계해년 1월에 비로소 체차되어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갑자년 윤2월에 졸하니 향년이 72세였다. 시호는 성안(成安)이다.-원주(原注)에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에 보인다.-

원문

公忠厚寬裕。度量宏大。平生無疾言遽色。好看自警,度量,韜晦等編。有得力。嘗自言若韓魏公玉杯等事。如某亦可及也。〔原注:淸江瑣語。以下同。〕

번역

공은 충후(忠厚)하고 관유(寬裕)하며 도량이 넓고 크다. 평생에 거친 말과 급한 기색이 없었다. 《호안자경(好顔自警)》, 《도량(度量)》, 《도회(韜晦)》 등의 책에서 힘을 얻은 바가 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한 위공(韓魏公)의 옥배(玉杯) 같은 일에 대해 모(某) 또한 미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주(原注)에 청강(淸江)의 자사(雜事)이다. 이하도 같다. -

원문

公自少。氣度沈遲。飢寒俱不言。雖病甚苦。不以呻吟作形。人服其非淺。年過成童。尙不志學。馳馬試射。被慢於儕流。卽發憤策勵學業。居五月。已達文義。但從人質疑。未十朔。理無滯阻。自是刻意益篤。成夏山夢井。公之姊夫也。欲見公志。勸就蔭仕。固問不對。強之。乃曰。丈夫當讀書樹業耳。夏山喜曰。吾亦試汝耳。壬申。公年始弱冠。夏山稱其文才已成。蓋四年向學。所造如此。若金慕齋,李容齋諸鉅公之來。必以公文示之。無不歎奬。自此華聲大闡。夏山深服其德器。亟稱不置曰。尙某之質。無讓於孔門諸弟子矣。

번역

공은 어려서부터 기질이 침착하고 느긋하여 굶주리고 추워도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병이 심하게 고통스러울 때에도 신음하며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깊지 못함을 꾸짖었다. 나이가 성인이 되었어도 아직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아 말을 달려 활쏘기를 시험하다가 동료들에게 무시를 당하자 즉시 분발하여 학업에 힘썼다. 5월이 되자 이미 문장의 뜻을 터득하였으나 다만 남의 질문에 답하는 것만으로도 열 달이 걸리지 않았고, 이로부터 더욱 각오하고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하산몽정(夏山夢井)은 공의 자부이다. 공을 만나보고 싶어 음관(蔭官)에 나아가기를 권하였으나 굳게 거절하자 강요하기에 “대장부는 마땅히 글을 읽고 학업을 쌓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하산몽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도 너에게 시험해 보겠다.”라고 하였다. 임신년에 공이 처음으로 약관이 되자 하산몽정이 그 문재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칭찬하였다. 대개 4년간 학문을 한 것이 이와 같아서 김모재(金慕齋), 이용재(李容齋) 등 여러 거공(鉅公)들이 찾아오면 반드시 공의 글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감탄하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로부터 명성이 크게 퍼지자 하산몽정은 그 덕과 기량을 깊이 복종하여 곧바로 칭송하기를 “상모의 자질은 공자의 문하에 있던 제자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원문

公常讀大學衍義。至夜半。旣而歎曰。吾讀此書。將以致用。而邇來謀議。動見齟齬。何也。爲政。務存大體。不用明察。惟以得事體爲先。遵守成憲。不喜紛更。持撫盈成。乃其志也。嘗曰。□祖宗與先臣。經歷多。思慮深。後人遵之無敗足矣。作小聰明。要勝於□祖宗之上。於義安乎。故凡論人才。必以持重不更舊章爲首。嘗讀書。至人徒知有功之爲功。不知無功之爲功。三復喟然曰。知此者鮮矣。

번역

공이 항상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다가 밤이 깊어서야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장차 실질적으로 쓰기 위해서인데 근래에 의논하는 것들은 어긋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째서인가? 정사를 함에는 대체를 보존하는 데 힘써 세세한 것을 살피지 말고 오직 사체(事體)를 얻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성헌(成憲)을 준수하여 번거롭게 고치기를 좋아하지 않고 지키고 다스려 이루어 가는 것이 나의 뜻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과 선신은 경험이 많고 생각이 깊으니 후인들은 그분들을 따라 실패가 없으면 족하다. 소총명(小聰明)한 자는 조종보다 더 나아지기를 요구하는 것이 의리에 어긋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재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중후하게 지키고 옛 법을 고치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하였다. 일찍이 《대학》을 읽다가 ‘사람은 오직 공(功)이 있는 것을 공이라고 알고, 공이 없는 것을 공이라고 모른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 세 번 반복하고 탄식하기를, “이것을 아는 자가 드물다.” 하였다.

원문

公聞成聽松守琛兄弟有學行。乃以全紙大書以簡曰。聞公之名。切有願交之志。二成亦以大書許之。自是連榻。實多講磨。中丙子生員。入泮課藝。連三製入高等。柳公雲時長皐比。大加褒稱。至訪于家曰。見君議論。知有經綸之才。公見儕流有忌色。遂有韜晦之意。不復屑意於館試。柳公覺之。深恨其不能容人之才也。

번역

공이 성청(成聽) 송수침(松守琛) 형제의 학행(學行)을 듣고는 종이에 크게 써서 간략하게 말하기를, “공의 이름을 듣고 절실히 사귀고 싶은 뜻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성(二成) 또한 큰 글씨로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연이어 함께 공부하며 실로 많은 강마(講磨)가 있었다. 중병자년에 생원시(生員試)에 들어가 반과(泮課)와 예과(藝課)에서 연이어 삼제(三製)를 지어 높은 등급에 들었다. 유공운(柳公雲)이 시장고(時長皐)에 비견되어 크게 칭찬하였는데, 집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논의를 보고 경륜(經綸)의 재주가 있음을 알았다.” 하였다. 공은 동료들이 시기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숨어 살려는 뜻을 두어 다시 관시(館試)에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유공운이 이를 깨닫고서 남의 재주를 용납하지 못한 것을 매우 한탄하였다.

원문

自公郞潛。洪益城與鄭相光弼,尹相殷輔。皆以公輔期之。鄭相嘗修家垣。稍移舊址曰。吾爲尙某後日之行而廣此路也。

번역

공랑(公郞)이 잠시 은거할 때 홍익성(洪益城)과 정상광필(鄭相光弼), 윤상인보(尹相殷輔)가 모두 공을 보좌하기를 기약하였다. 정상(鄭相)이 일찍이 집터의 담장을 수리하고 조금 옛 터로 옮기면서 말하기를, “내가 상모(尙某)의 후일을 위하여 이 길을 넓히는 것이다.” 하였다.

원문

箭串。爲□國家牧場。在前設木柵。輪之於畿邑。以民結造排。逐年修改。吏緣爲奸。弊甚不貲。公爲司僕提調。建白償布募役。築之以石。其弊遂絶。當川流未築處。設鐵索開閉。皆其規畫。時癸丑,甲寅年間。歲頗饑。或言時屈。公曰。與其徒賑以糜穀。不若因就以立事。此乃春秋興工役以聚失業之意也。

번역

화살촉을 꽂는 곳은 국가의 목장(牧場)으로, 앞에는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기읍(畿邑)에 두루 설치하였는데, 백성들의 결복(結卜)을 가지고 조배(造排)하여 해마다 수리하였다. 그런데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폐단이 심하여 제 기능을 못 하였다. 공이 사복시 제조가 되어 상포(償布)를 마련하고 역부(役夫)를 모집하여 돌로 쌓게 하니, 그 폐단이 마침내 없어졌다.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쌓지 못한 곳은 쇠사슬을 설치하여 열고 닫도록 하였는데, 모두가 그의 계획이었다. 계축년과 갑인년 연간에는 해마다 기근이 들었으므로 혹자는 시기를 굽혀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공은 “백성들을 곡식으로 진휼하는 것보다는 일을 시작하여 실업자들을 모으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춘추(春秋)》에서 공역을 일으켜서 실업자들을 모았다는 뜻이다.

원문

公每憂義州界連夷漢。而襟抱疏闊。自古中原有難。我國必與受其害。遠則衛滿。近則紅巾。可見矣。故前古有懲。於此一境。設巨鎭三四以防之。若麟州,抱州,義州等是也。今則只置義州。而防禦虛弱。又無城塹以閡之。若鐵騎乘氷。其將何以。□國家設長城價布。專爲是也。吾之欲築城箭串。爲江邊而爲之兆也。有志未就。心常恨之。

번역

공이 매양 의주(義州)가 오랑캐와 접경되어 있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마음이 소탈하고 너그러웠다. 예로부터 중국에 원래 난리가 있었으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그 피해를 입었으니, 멀리서는 위만(衛滿)이고 가까운 데서는 홍건적(紅巾賊)이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이 한 지역에 큰 진을 3, 4개 설치하여 방비하였는데, 인주(麟州), 포주(抱州), 의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의주만 두고 방어는 허약하며 또 성과 참호를 쌓아 막지도 못하고 있으니, 만일 철기병이 얼음 위를 타고 온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국가에서 장성(長城)을 쌓으려고 값을 마련한 것이 전적으로 이 때문이었다. 내가 성과 선창을 쌓고자 한 것은 강변에 하기 위한 조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마음속으로 항상 한스럽다.

원문

公性不喜事。不建白立條。久居相位。不欲以皎皎之事立名。人或稱公之美。輒應之曰。汝欲面諛我耶。必多方掩匿而韜晦之。故人鮮知其所爲之跡。或謂之不事事者。非知公者也。若□國有難處之事。或災變異。常形於言色。悒悒若無所容。夜不成寐。起而開囱視天者累矣。每當□經筵。必思程子齋宿之事。先日致敬。言動不敢放。入臨講章。必從容委曲。雜引經史。反覆陳□啓。及退家。移時靜默。思其所□啓之當否。大王大妃之同聽政也。公奏事簾前。□大妃傳曰。相公致此。不獨未亡人與□殿下之意也。□先王常稱卿可大用。至於書名屛障以識之。不幸未及。今之用卿。實□先王意也。公感激進曰。小臣蒙□先王恩寵罔極。用□特旨除官。殆過十餘度。時人至疑臣以他道進也。□答曰。卿豈以他道進。特知遇深矣。

번역

공은 본래 일을 좋아하지 않아 뚜렷하게 드러내어 세우는 것을 꺼렸다. 오랫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깨끗하고 밝은 일로 이름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공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 번번이 “너는 나에게 아첨하려는 것인가.”라고 응수하였고, 반드시 여러 방도로 가리고 숨기어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한 일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공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재변(災變)이 발생하면 항상 얼굴빛과 말에서 근심스러운 기색이 드러나서 마치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매번 경연에 나아갈 때면 반드시 정자(程子)가 재숙한 일을 생각하였다. 일전에 치경(致敬)은 언동을 감히 방자하게 하지 않았고, 강장(講章)에 임할 때는 반드시 조용하고 자세하게 경사(經史)를 두루 인용하여 반복해서 진달하였으며, 집으로 돌아가서는 한참 동안 침묵하며 진달한 것이 합당한지를 생각하였다. 대왕대비께서 함께 정사를 하실 때 공이 주상 앞에서 일을 아뢰면, 대비께서 전교하기를, “상공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전하의 뜻도 그러할 것이다. □ 선왕(先王)께서는 항상 경을 크게 등용해야 한다고 일컬으셨으며 심지어는 병풍에 이름을 써서 표시하기까지 하였는데 불행히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지금 경을 쓰는 것은 실로 □ 선왕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감격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은 □ 선왕의 은총을 망극하게 입어 특지(特旨)로 관직에 제수된 것이 거의 10여 차례나 되니, 사람들은 신이 다른 길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하니, □가 답하기를, “경이 어찌 다른 길로 진출하였겠는가. 특별히 깊이 알아주신 것이다.” 하였다.

원문

國家設別科。公爲讀卷官。其時主文柄者。欲擧□中朝事發策問。公止之曰。此大事。可廟議。不可策士。猶以其意爲問目。旣而公議譁然。論罷主題試官。擧子亦削科。公自以爲首官不能力止。詣□闕請自坐不爭之罪□上曰。不聽卿言。過在於彼也。初。公自試所歸。語子弟頗有未愜之恨。旣而果然。

번역

국가에서 별과(別科)를 베풀 때 공이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그때 문병(文柄)을 맡은 자가 중조(中朝)의 일을 거론하여 책문(策問)을 내려고 하자, 공이 이를 막고 말하기를, “이것은 큰일이니 묘당에서 의논해야 할 일이지 선비에게 책문으로 물을 일이 아니다.” 하였다. 그래도 그의 뜻을 문목(問目)으로 삼았는데, 얼마 안 가서 공론이 떠들썩해져서 주제시관(主題試官)을 파직하고 거자(擧子)도 삭과(削科)하였다. 공은 자신이 수관(首官)으로서 힘써 막지 못했다고 여겨 궁궐에 나아가 자진하여 불쟁(不爭)의 죄를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저들에게 허물이 있다.” 하였다. 처음에 공이 시소(試所)에서 돌아와서 자제(子弟)에게 말하기를, “자못 마음에 차지 않는 한이 있다.” 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과연 그렇게 되었다.

원문

公嘗敎子弟曰。士之立志。不可少容邪曲。至於科場發軔。不可不以正出身。若或暗相代借。終至於竊名則卽是終身玷累。不可改悔之過。自後雖有忠言讜論。皆誣而已矣。

번역

공이 일찍이 자제에게 가르치기를, “선비가 뜻을 세우는 데에 조금이라도 사특한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과장(科場)에서 발탁되는 데에는 정당하게 출신하지 않으면 안 되니, 만약 혹시라도 남의 이름으로 대신 시험을 보아 끝내 이름을 훔치게 되면 바로 종신토록 죄를 지어 고칠 수 없는 잘못이 되는 것이다. 그 뒤에 비록 충언(忠言)과 진론(眞論)이 있더라도 모두 무고일 뿐이다.” 하였다.

원문

公謂子弟落第者曰。擧子雖曰飮墨毷氉。〔原注:煩悶之意。唐人下第曰。毷氉。〕然若充其類。則其弊馴至於鄙夫之患失。古人云。豈有決得失於一夫之目而爲之憂樂哉。若於小小科擧之得失。猶以爲欣戚則他日立朝。當大段立落。其不爲失性之歸者幾稀矣。

번역

공이 자제(子弟)가 낙방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자제를 거두어 벼슬에 내는 것을 비록 먹물 마시고 흙을 파먹는다.”라고 한다. - 원주(原注)에 번민한다는 뜻이다. 당인(唐人)이 하제(下第)를 ‘흙을 파먹는다.’라고 하였다. - 하지만 만약 그 부류를 채우면, 그 폐단은 비루한 사람의 근심거리까지 미치게 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찌 한 사람의 득실에 대해 결론을 내고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즐거워하겠는가. 소소한 과거 시험의 득실에 대해서도 오히려 기뻐하거나 슬퍼한다면 뒷날 조정에 서서 크게 성패를 결정할 때에는 성품을 잃게 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 리가 거의 없다.”라고 하였다.

원문

上御翠露亭。簡召諸宰及□賜暇儒臣。講其所讀書。仍命諸宰。各製詩進爵。□賜燭以榮之。公以首相入侍。□上親爲侑爵。公不覺醺醉。伏苑中。□上乘小輿。將還大內。□下問爲誰。左右以領相對。□上曰。老相在此。不可輦過。□命設行帳。然後乃入。繼□命中使護歸。翌日。與諸公上箋稱謝。旋以失禮待罪。□御批曰。昨見公醉。甚洽予意。有何失禮。

번역

주상이 취로정(翠露亭)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과 휴가를 받은 유신(儒臣)을 간략히 불러서 그들이 읽은 책을 강론하였다. 이어 여러 재신에게 각각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 술잔을 내려 주어서 빛내도록 하였다. 공이 수상으로서 입시하였는데, 주상이 직접 술잔을 권하자 공이 나도 모르게 취하여 원(苑) 안에 엎드려 있었다. 주상이 소여(小輿)를 타고 대내(大內)로 돌아가려고 할 때, 신하가 누구를 위해 물으니 좌우에서 영상(領相)이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노신하가 여기 있으니 연(輦)이 지나갈 수 없다.” 하고는 행장(行帳)을 설치하도록 명한 뒤에야 들어갔다. 이어서 주상이 호종사(護從使)에게 명하여 공을 모시고 돌아가게 하였다. 다음 날 여러 공과 함께 상소하여 사례하고 곧바로 실례를 저질렀다고 대죄하니, 주상이 비답하기를, “어제 공이 취한 것을 보니 내 마음에 매우 흡족하였다. 무슨 실례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원문

上御閱武亭。召公卿侍從。如瑞蔥故事。因出□御軸。各製寫以進。公末句云。忘言醉飽鈞天裏。敬德唯關獻曝誠。雖文字之末。不忘箴規。見者皆曰。得大臣進戒之體。

번역

주상이 열무정(閱武亭)에 나아가 공경과 시종을 부르기를 서총(瑞蔥)의 고사(故事)와 같이 하고, 어축(御軸)을 내어 각기 제사(製寫)하여 올리게 하였다. 공이 말구(末句)에 “말도 잊은 채 균천(鈞天) 안에서 취하고 배부르니, 경덕(敬德)은 오직 성심을 바치는 데 달려 있네.”라고 하였는데, 비록 문자의 말구이지만 잠규(箴規)를 잊지 않았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대신이 진계(進戒)하는 체모를 얻었다고 하였다.

원문

公爲相十五年。當尹元衡用事之時。內外掣肘。不能行其志。每一念至。或中夜布席於中堂。仰面獨臥。歎咤良久曰。這翁今番行次。甚爲中間矣。〔原注:候鯖瑣語。下幷同。〕

번역

공이 정승으로 있던 15년 동안 윤원형(尹元衡)이 권세를 부릴 때가 있었는데, 안팎에서 제지당하여 뜻을 행할 수 없었다. 생각이 미칠 때면 한밤중에 중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 얼굴을 위로 향한 채 한참 동안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 늙은이가 이번에는 중간에 걸렸구나.” 하였다.-원주(原注)에 ‘후사(候鯖)’라고 되어 있다. 아래도 같다.-

원문

公求退十餘年。始蒙兪□允。遞相之日。身氣輕健。殆若無疾者。常曰。天馽已收。無往不適。約與兒輩。隨處命駕。水曲山傍。閒往閒來。作□聖世無事物。祝□聖算以終天期耳。有時取酒微醺。緩歌起舞以自娛。或問前日未嘗歡娛。今何如此。答曰。昔負重任。惟力不支是憂。今旣釋之。云胡不樂。

번역

공이 물러나기를 구한 지 10여 년 만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재상에서 체차되는 날에 몸과 기운이 가볍고 건강하여 거의 병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항상 “하늘의 고삐가 이미 거두어졌으니, 가는 곳마다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아이들과 함께 약속을 하고서 가는 곳마다 수레를 몰아 물굽이와 산자락에 한가로이 오갔다. 그리고 “태평성세에는 할 일이 없으니, 성상의 계책으로 하늘의 기한까지 마치기를 축원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때때로 술을 마시고 약간 취하여 느릿느릿 노래하고 춤추며 스스로 즐기곤 하였는데, 혹시 전날에는 즐거워하지 않다가 지금 어찌 이와 같으냐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예전에는 중임을 맡아 오직 힘이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였는데, 지금은 이미 내려놓았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원문

公燕居無事。頗有自樂之時。謂子弟曰。爲善最樂。非樂。不足以語君子。汝試以論語中暮春者春服旣成。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之語。永言之。似若歌調而長詠之。則古人之氣像。可得矣。箕子過故殷墟。亡國之懷如何。而欲哭則不可。欲泣則爲近婦人。乃作麥秀之歌。古人之不輕用性情。可見矣。

번역

공이 한가로이 지내며 일이 없어서 자득(自得)하는 즐거움이 있을 때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선을 행함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즐겁지 않다면 군자에게 말할 것도 없다. 너희들은 《논어》 〈모춘(暮春)〉 편의 ‘봄옷을 다 지었으니 관을 쓴 이가 다섯아홉 명이고 동자가 여섯일곱 명인데,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맞으며 노래하며 돌아간다.’라는 말을 한번 길게 말해 보라. 마치 가락에 맞춰 길게 읊조리는 듯하니, 옛사람의 기상을 알 수 있다. 기자(箕子)가 옛날 은나라 터를 지나갈 때 망국의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울고자 해도 안 되고 눈물을 흘리자니 부인에게 가까운 것이 되어서 마침내 〈맥수(麥秀)〉의 노래를 지었으니, 옛사람이 성정(性情)을 경솔하게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원문

公常謂子弟曰。吾死而若請諡則必有行狀矣。我行蹟無他可記。若曰。公晩好鼓琴。微醺。輒彈感□君恩一曲以自娛當矣。

번역

공이 항상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만약 시호를 청한다면 반드시 행장(行狀)이 있을 것이다. 나의 행적에는 달리 기록할 것이 없으니, ‘공은 노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약간 취하면 곧 감군은곡(感君恩曲) 한 곡조를 연주하며 스스로 즐겼다.’라고 하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원문

公在銀臺。當奏覆。囚案盈抱。諸宰相顧曰。今日必暮。公擧條要。敷啓甚詳。晷不移刻。情僞畢露。旣出。無不稱之。

번역

공이 승정원에 있을 때, 주상께 의견을 아뢰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죄안(罪案)이 가득 차서 여러 재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은 반드시 저녁이 될 것이다.” 하였다. 공이 거조(擧條)의 요점을 상세하게 진달하니,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사실과 거짓이 모두 드러났다. 이미 나오자 모두가 칭찬하였다.

원문

公爲大司諫時。有一同僚將□禧陵水石之說。議于圖席。公曰。玆事極重難。十分廣咨。然後乃斟酌。當不可容易。力止之。不數日。其人入□經筵獨啓之。時金安老方忌鄭文翼公光弼。正欲構陷而難其名。以□山陵時文翼實監其事。故乘其隙。乃發遷卜之議。因置之不測。聲勢甚張。公閉門謝客。究思可救之方。自第具諫草。率同僚以啓。俄得輕論。

번역

공이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에 어떤 동료가 장희릉(將禧陵)의 수석(水石)에 관한 설을 가지고 도석(圖席)에서 의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매우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니, 충분히 널리 자문한 뒤에야 참작할 수 있고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 하고, 힘써 저지하였다. 그런데 며칠 되지 않아 그 사람이 경연(經筵)에 들어가서 독계(獨啓)하였는데, 이때 김 안로(金安老)가 정 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을 미워하여 바야흐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탓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산릉(□山陵) 때에 문익이 실로 그 일을 감독하였기 때문에 기회를 틈타 천복(遷卜)의 의논을 꺼내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성세(聲勢)가 매우 거세지자 공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구제할 방도를 궁리하여 집에서 간초(諫草)를 갖추어 동료들을 이끌고 나아가 아뢰었는데, 곧 가벼운 논의에 그쳤다.

원문

金安老起呪咀獄。欲加罪惠順,惠靜兩翁主及福城君也。使人更爲假像。懸木片書不道語。而書字生熱。與前不同。筵奏請劾。命百官收議。大諫尙某曰。今書字與前書同則他人雖千金。豈忍書之乎。兩翁主僕隷。勿置都下則禍息矣。〔原注:朝野會通〕

번역

김안로(金安老)가 주시옥(呪咀獄)을 일으켜 혜순옹주(惠順翁主)와 혜정옹주(惠靜翁主) 및 복성군(福城君)에게 죄를 씌우려고 사람을 시켜 다시 가상(假像)을 만들고 나무 조각에 부도한 말을 써서 걸어 놓았는데, 글씨가 열이 나면서 앞과 같지 않아서 연석에서 아뢰어 논핵하기를 청하였다. 백관에게 수의(收議)하라고 명하자 대간 상모(尙某)가 아뢰기를, “지금 글씨가 이전 글씨와 같다면 다른 사람이 비록 천금으로도 어찌 차마 쓸 수 있겠습니까. 두 옹주와 복성군의 종들을 도성에 두지 않으면 화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원주(原注)에 ‘조야회통(朝野會通)’이라 되어 있다.-

원문

公忠厚寬裕。度量宏大。十六年相業。亞於黃,許。〔原注:燃藜室記述〕

번역

공은 충후(忠厚)하고 관유(寬裕)하며 도량(度量)이 크고 넓었다. 16년 동안 재상으로 있었는데, 황희(黃喜)와 허목(許穆)에 버금갔다. 원주(原注)에 “연려실(燃藜室)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원문

明廟領相尙成安。相業亞於黃,許。卒後湖堂月課。以悼老德大臣□命題。〔原注:東國氏族攷〕

번역

명묘(明廟)의 영상 상성안(尙成安)은 재상이 된 업적이 황희(黃喜)와 허목(許穆)에 버금갔다. 죽은 뒤 호당(湖堂)에서 월과(月課)를 행할 때 노덕 대신(老德大臣)을 애도하는 명제(命題)로 삼았다.-원주(原注)에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라고 하였다.-

원문

公不言人過。客有言某一脚短。公曰。無己則寧不若云一脚長也。蓋不忍斥其短也。其立朝也。駁擊奸佞。不肯隨波跼蹐。故卒爲名臣云。〔原注:芝峯類說〕

번역

공이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데, 어떤 손님이 “어떤 사람이 한쪽 다리가 짧다.”고 말하자 공이 “자신이 없으면 어찌 한쪽 다리가 길다고 말하는 것만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 사람의 단점을 차마 배척할 수 없어서였다. 조정에 서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논박하면서 남의 의견을 따라 굽신거리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명신이 되었다고 한다. 원주(原注)에는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보인다.

원문

武科赴擧者多僞濫。先時。以朝士爲保擧。公在庶僚。時武擧者爭求爲保。公皆許之。或未及門。而僞着署押者亦多。考試官以筆畫不同覈之。簡問於公。公答曰。或醉着。或睡着。或臥着。所以不同也。人謂之有量。後官至領相。術者洪啓寬曰。爲陰德默佐。其臨終。自銘曰。起自草萊。三入相府。晩而學琴。常彈感□君恩一曲。七十二。卒於正寢。感□君恩者。自作曲譜云。〔原注:星湖僿說〕

번역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자들 중에 허위로 응시하는 자가 많았다. 그 당시 조정의 선비들을 보장인(保證人)으로 삼았는데, 공이 서료(庶僚)에 있을 때 무과를 보는 자들이 앞다투어 보장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으므로 공이 모두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문에 미처 도착하지 못하고도 허위로 서압(署押)을 한 자가 또한 많았다. 고시관(考試官)이 필획(筆劃)이 같지 않다고 조사하여 간략하게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취해서 썼거나 졸아서 썼거나 누워서 썼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양심을 지켰다고 하였다. 뒤에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는데, 술사(術士) 홍계관(洪啓寬)이 말하기를, “음덕(陰德)으로 묵묵히 도와주었다.” 하였다. 공이 임종할 때 스스로 명(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야에서 일어나 세 번이나 정승에 올랐네 만년에 거문고 배우고 항상 감군은곡 한 곡조를 타노라 72세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였는데, 감군은곡은 스스로 곡보(曲譜)를 지었다. 원주(原註)에는 “성호(星湖)의 어리석은 설이다.” 하였다.

원문

卜者洪啓寬。算公造化一生。吉凶禍福。纖毫不差。至於棄世之年月。亦皆言之。公以所經之事無不沕合。至其年。豫爲身後具待。洪卜適以事往湖南。逢人自京來者。必問安否。一年已過。公姑無恙。洪大異之。還京。卽往公宅。公曰。吾信爾卜。自分命盡。今年不驗何。洪曰。推公之命。盡其心力。宜無差謬。而古之人有以陰德延壽者。公之厚德。必有是也。公曰。豈有是哉。但修撰時脫直還家。路上有紅袱。取而見之。乃純金盞一雙也。默而藏之。掛榜於闕門曰。某日有失物者。訪我家來。翌日。一人來謁曰。小人乃□大殿水剌間別監也。子姪有婚禮。竊借□御廚金盞而失之。已犯死罪。後日現露則必伏法而誅矣。公之所得。無乃此乎。答曰然。出給之。洪曰。公之延壽。必以此也。後十五年卒。〔原注:潛谷舊錄。下同。〕

번역

홍계관(洪啓寬)이라는 점쟁이가 있었는데, 공의 일생을 조화(造化)에 헤아려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다. 심지어 세상에서 죽는 해와 달까지도 모두 말하였다. 공은 지나온 일이 모두 점괘와 부합하였으므로, 그해에 이르러 미리 자신을 위한 장례 물품을 준비해 두었다. 홍계관이 마침 일 때문에 호남으로 갔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안부를 묻곤 하였는데, 한 해가 지나도 공은 아직 별고 없자 홍계관이 크게 의아하게 여겼다. 서울로 돌아와 곧바로 공의 집에 가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너의 점괘를 믿는다. 내 분명한 운명이 다하였으니 올해는 점괘가 맞지 않겠구나.” 하였다. 홍계관이 말하기를, “공의 명을 미루어 보건대 심력(心力)을 다했으니 어긋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옛사람 중에 음덕(陰德)으로 수명을 연장한 자가 있었으니 공의 두터운 덕에 필시 이런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다만 수찬(修撰) 때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붉은 보따리를 발견하여 가져다 보니 순금 잔 한 쌍이었다. 그래서 말없이 간직해 두었다가 대궐 문에 방을 걸어 놓기를 ‘모일(某日)에 물건을 잃어버린 자는 우리 집을 찾아오라.’ 하였더니, 다음 날 어떤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소인은 바로 □대전수라간별감(□大殿水剌間別監)입니다. 자질(子姪)의 혼례가 있어서 궁중 주방에서 쓰는 금잔을 몰래 빌려 갔다가 잃어버렸습니다.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뒷날 드러나면 반드시 법에 따라 처형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공이 얻은 것이 이 물건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답하기를, “그렇다.” 하고 내주니, 홍계관이 말하기를, “공의 수명이 연장된 것은 필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 1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원주(原注)에 ‘잠곡(潛谷)의 옛 기록이다.’라고 하였다. -

원문

公先世居林川。家業饒富。公曾祖公嘗貸與貧戶。契券甚多。悉取而焚之曰。吾後世必有昌貴者。手植三槐于廟庭。以擬王晉公故事。至公果登台輔。自公之貴。不營產業。先世廩庫。皆漸傾毀。有奴請建修葺。公笑曰。汝雖欲完。將以何物實之。竟至頹圮無餘。

번역

공의 선조가 임천(林川)에 살았는데 집안이 부유하였다. 공의 증조부께서 일찍이 가난한 사람에게 빌려준 계권(契券)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 가져다가 불태우고는 “내 후세에 반드시 창성하고 귀하게 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묘정(廟庭)에 세 그루의 괴목을 심어 왕진공(王晉公)의 고사(故事)에 비유하였다. 공이 과연 대보(臺輔)에 오르자, 공은 귀해지자부터 재산을 경영하지 않아서 선대의 창고가 모두 점차 기울어져 무너졌다. 어떤 종이 수리할 것을 청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비록 완비하려고 해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 하였다. 마침내 완전히 무너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원문

貞顯王后薨。公掌都監事。金謹思爲提調。頗以葬物私施人。公謂□國事未襄。大觸其怒。後累被中傷。拜判書,贊成。皆被論遞。〔原注:記年通攷。下同。〕

번역

정현왕후(貞顯王后)가 훙(薨)하였다. 공이 도감사(都監事)를 맡았는데, 김근사(金謹思)가 제조(提調)가 되어 장례 물품을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에 공은 “나라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크게 그 노여움을 샀다.”라고 하였다. 뒤에 누차 중상(中傷)을 입어 판서와 찬성으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논핵되어 체차되었다. 주 : 《기년통고》에는 아래와 같다.

원문

公爲江原道觀察使。將行。請敎於尹相殷輔。尹相爲陳方伯政要。公遵行不違。事無積滯。常曰。吾屢應當道。常遵尹相之敎。後有爲方伯請敎於公者。必擧尹相之言以送之。公東伯時。有一嫗告義子欲烝己。公審嫗貌。皤頭爛瘡。面如猿猴。公詰之曰。惡少不勝淫情。以色故。爾子亦有本妻。必不犯極惡奸汝明矣。若不直承。必先訊汝。嫗服曰。子果不順。欲構以重治耳。公卽治其子不順之罪。其度事深詣類此。

번역

공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부임하려 할 때 윤상(尹相)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윤상이 방백의 정요(政要)를 진달해 주었는데, 공이 그대로 행하여 어긋남이 없어서 일이 적체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여러 번 도신(道臣)으로 부임할 때마다 늘 윤상의 가르침을 따랐다.”라고 하였다. 뒤에 방백이 되어 공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윤상의 말을 들어서 보냈다. 공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어떤 노파가 자기 아들이 자신을 성교(性交)하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공이 노파의 얼굴을 살펴보니 머리는 세고 얼굴은 원숭이처럼 흉측하였다. 공이 꾸짖기를, “너는 젊은이를 미워하여 음란한 정욕을 이기지 못해 얼굴빛으로 유혹하는구나. 네 아들에게도 본처가 있으니 반드시 극악한 간음(奸淫)을 저질렀을 것이다. 만약 곧바로 고백하지 않으면 반드시 먼저 너를 신문하겠다.” 하니, 노파가 자복하기를, “아들이 과연 순종하지 않아서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려고 꾸민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즉시 그 아들의 불순(不順)한 죄를 다스렸다. 일을 헤아리는 깊은 도량이 이와 같았다.

원문

公爲京畿觀察使。管邑人士有連名狀曰。某人不孝繼母。公悉招持狀人諭之曰。繼母子。不孝得名最易。爾等十分審察而來言耶。衆曰。人理不祥。不忍形諸文字。實烝之也。公訪其家人。不用刑杖。一言得情。上讞明白。□朝廷不復究訊。卽處以律。朝中大相有素服公者嘉而戲之曰。令公寬柔。讞獄甚猛。

번역

공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고을의 인사(人士)가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기를, “모(某)라는 사람이 계모에게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하였다. 공이 모두 불러 놓고 장계한 사람들을 타이르기를, “계모와 자식 간에 불효를 저지른다는 것은 이름 붙이기 가장 쉽다. 너희들은 십분 자세히 살피고 와서 말하는 것인가?” 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륜이 상도(常道)에 어긋나서 차마 글로 드러낼 수 없으니 실로 죄를 지은 것이다.” 하였다. 공이 그 집안을 찾아가 형장(刑杖)을 쓰지 않고 한마디 말로 진상을 알아내어 위에서 분명하게 심리하여 조정을 거쳐 다시 신문하지 않고 즉시 법률에 따라 처결하였다. 조정의 대간 중에 평소 공을 칭송하던 자가 기뻐하면서 농담으로 이르기를, “공은 관용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옥사를 다스릴 때는 매우 엄격하십니다.” 하였다.

원문

公在泮時。聞韓忠奉使嶺北。有一人出自山谷。被寬博之衣。立道上呼韓之字。袖出陳弊一書以授曰。歸告□殿下云。一泮莫不唶唶曰。三代以下。乃有此等偉人。公獨不應。座中詰其故。公徐曰。若果賢者。焉有自衒之理。衆共誹之曰。外若矜嚴。內必如之。公曰。豈無象恭者乎。衆益攻之。公竟不答。□朝廷問得其人則乃燕山嬖孼家書題。有罪長流者。然後知公之識見高矣。

번역

공이 성균관에 있을 때, 한충봉(韓忠奉)이 영북(嶺北)으로 사신을 갔다가 어떤 사람이 산골에서 나와 관박한 옷차림으로 길가에 서서 ‘한(韓)’ 자를 부르며 소매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주면서 “돌아가서 □전하께 고하라.”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성균관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삼대 이후로 이런 위대한 사람이 있었다.”라고 떠들썩이 말하였는데, 공만 유독 응하지 않자 좌중에서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이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과연 현자라면 어찌 스스로 드러낼 리가 있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기를 “겉으로는 엄숙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찌 상공(象恭)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는데, 사람들이 더욱 공격하자 공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조정에서 그 사람을 알아냈더니 바로 연산군 때의 간신 집안에서 지은 책으로 죄가 길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후에야 공의 식견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문

公初釋褐歸鄕。有崔弘濟者。不爲士類所齒。乘靜菴貶謫。上疏力詆。至請其死。□朝廷適加重罪。弘濟喜語稠中曰。果用吾言。已而命斬光祖于謫所。公自少恥言人過。而聞之大惡。屢與所親。斥崔之爲人。其見遞於翰林。再駁於持平。皆以此也。

번역

공이 처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최홍제(崔弘濟)라는 자가 있어서 사류(士類)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정암(靜菴)이 비방을 당해 귀양 갈 때 상소하여 힘껏 비방하고 죽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조정에서 마침 그에게 무거운 죄를 더하니, 최홍제가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과연 내 말을 썼다.” 하였다. 얼마 뒤에 명을 내려 광조(光祖)를 귀양지에서 참수하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미워하여 여러 번 친한 사람들과 함께 최홍제의 인품을 배척하였다. 그가 한림(翰林)에 체차되고 지평(持平)에서 두 번 논박당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

원문

公在相府。緇徒有不法事。僚相忿其放縱。謂公曰。此輩無所統制。故如此。若依□祖宗朝舊例。使有糾攝之地則不乃有益乎。公曰。疾之已甚。亂也。此屬當治而不治。今若糾檢。而復立統屬之規則無識之徒。反謂之崇佛而然。則事又大關。固不可爲也。未幾。公以事詣□闕。內旨下議曰。僧徒無統。欲復兩宗治之。何如。公□啓曰。僧徒雖無統攝。然起廢重難。故前日同僚亦有此議。恐反有害。遂止耳。公實未知其漸將大。自以爲事機之初。微言諷止。得大臣□啓事之體。未久兩宗復。

번역

공이 상부(相府)에 있을 때, 승도(僧徒)들이 불법을 행하였다. 동료 정승들이 그 방종함을 노하여 공에게 이르기를, “이 무리들은 통제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니, 만약 조종조의 옛 규례대로 규섭할 곳을 두게 한다면 유익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병이 이미 심해진 것은 난(亂)이니, 이는 마땅히 다스려야 하는데도 다스리지 못한 것이다. 지금 만약 규검(糾檢)하여 통속(統屬)의 규칙을 다시 세우면 무식한 무리들이 도리어 불교를 숭상한다고 하여 일이 또 크게 관계되니, 진실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공이 일 때문에 대궐에 나아가자, 내지(內旨)가 내려 의논하기를, “승도들이 통솔하는 곳이 없으니 양종(兩宗)을 다시 다스리게 하려고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승도들은 비록 통섭하는 곳이 없지만 폐지하고 일으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전날 동료들도 이 의논이 있었으나 도리어 해로울까 염려하여 마침내 그만두었습니다.” 하였다. 공은 실로 장차 큰일이 될 줄을 알지 못하였는데, 스스로 일의 기미가 처음에는 미언(微言)으로 넌지시 말하는 것이 대신이 아뢰는 일의 체모를 얻었다고 여겼다. 얼마 안 되어 양종이 회복되었다.

원문

成聽松善居喪。太學諸儒。欲疏其居喪孝行于□朝。先生之友尙公。時居上庠。止之曰。守琛兄弟。力學士也。將期大成。不可使一善之名。早聞於世也。事不果。先生聞之。稱其識量。〔原注:栗谷全書〕

번역

성청송(成聽松)이 선거(善居)의 상을 치르자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들이 그 거상(居喪)의 효행을 조정에 소장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벗인 상공(尙公)이 당시 성균관에 있었는데, 이를 막고 말하기를 “수침 형제는 학문에 힘쓰는 선비이다. 장차 크게 이루기를 기약해야 하니, 한 사람의 선한 행실이 세상에 일찍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선생이 이 말을 듣고 그 식량(識量)을 칭찬하였다.-원주(原注)-율곡전서(栗谷全書)에 보인다.

원문

公欲治鴨綠築長城。保障西塞。會議廷中。論者寡和。歎曰。吾識平陽獨致誠□國事。那使斯人不日成之。〔原注:平陽君金舜皐墓誌〕

번역

공이 압록강에 장성을 쌓아 서쪽 변방을 방비하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의논하자 논의하는 자가 적었다. 탄식하기를, “나는 평양군(平陽君)만이 나라의 일에 정성을 다할 줄 안다. 어찌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루도 못 가게 하겠는가.” 하였다.-원주(原注)에 “평양군 김순고(金舜皐)의 묘지명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古人言。官至三品。不讀相書。自識貴人。以其閱人多故也。頃時相臣成希顏薦鄭光弼。尙某薦李浚慶。人謂有知人之鑑。蓋以是歟。〔原注:芝峯類說〕

번역

옛사람이 말하기를, “관직이 3품에 이르면 상서(相書)를 읽지 않아도 귀인을 알아본다.” 하였는데, 이는 사람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상신 성희안(成希顔)이 정광필(鄭光弼)을 천거하고, 상모(尙某)가 이준경(李浚慶)을 천거하였는데, 사람들이 지인의 안목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가? 원주(原注)에 ‘지봉유설(芝峯類說)’이라 하였다.

원문

曺南冥植。徵除丹城。其辭職疏。幷論時政。有□慈殿淵塞。只是深宮之一寡婦。□殿下幼沖。不過□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人心之億萬。何以當之之語。□明廟以寡婦二字。語涉不遜。□震怒。幾欲罪之。時尙某爲左相。使李濟臣抽宋史英宗紀出歐陽修言。慈聖太后。深宮之一婦人。臣等五六書生之語。以此救解曰。曺某專襲古人告君之語。極言國家孤危之勢。非慢語也。□上亦待以逸士。竟不加罪。〔原注:石潭日記,燃藜室記述。〕

번역

조남명(曺南冥)이 단성 부사(丹城府使)에 제수되자, 사직소에서 시정(時政)을 아울러 논하였다. 그 내용에 “자전(慈殿)께서는 다만 깊은 궁중의 한 과부(寡婦)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어리신 분으로 선왕의 한 고사(孤嗣)에 불과하시니, 천재(天災)가 백천 번 일어나고 인심이 억만 가지로 변하는 것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라는 말이 있었다. 명종(明宗)이 ‘과부’ 두 글자가 불손한 말이라고 여겨 진노하여 거의 죄주려고 하였는데, 이때 상모(尙某)가 좌상(左相)으로 있으면서 이제신(李濟臣)에게 《송사(宋史)》 영종기(英宗紀)에서 구양수(歐陽脩)의 말을 뽑아내게 하였다. 그 말에 “자성태후(慈聖太后)는 깊은 궁중의 한 부인이고 신들은 5, 6명의 서생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조남명을 변호하여 “조모가 오로지 옛사람이 임금에게 고하던 말을 이어받아 국가의 위태로운 형세를 극진히 말한 것이니, 불손한 말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명종도 그를 일사(逸士)로 대우하고 마침내 죄주하지 않았다. 주 : 《석담일기》 연려실(燃藜室)에 기록되어 있다.

원문

公亡子祭文曰。前年汝喪子。今年我喪汝。父子之情。汝先知之。嗚呼哀哉。可謂辭約而意切。〔原注:芝峯類說〕

번역

공이 아들을 잃고 지은 제문(祭文)에, “작년에는 네가 자식을 잃었고 금년에는 내가 너를 잃었으니 부자의 정을 네가 먼저 알리라.” 하였는데, 아, 슬프다. 간략한 말로 깊은 뜻을 표현하였다고 할 만하다. 원주(原注)에 지봉유설(芝峯類說)이라고 하였다.

원문

平壤城內。夏月素多蒼蠅。衣服飮食。須臾汚穢。公爲監司時。令民捕蠅日課。時市有賣蠅者。後公喪一子。哭之曰。吾平生未嘗有害物之事。獨於平壤。誅蠅太過矣。今日之哭。豈非報乎。〔原注:平壤誌〕

번역

평양성 안에는 여름철에 파리가 매우 많아서 옷이나 음식물이 잠시 사이에 더럽혀지곤 하였다. 공이 감사가 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매일 파리를 잡도록 하였는데, 때때로 시장에서 파리[蠅]를 파는 자가 있었다. 뒤에 공이 아들을 잃고 곡하면서 이르기를, “나는 평생 해로운 물건을 죽인 일이 없었는데 유독 평양에서 파리를 너무 많이 죽였다. 오늘 곡하는 것이 어찌 보응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원주(原注)에는 ‘평양지(平壤誌)’라고 되어 있다.

원문

歲庚申。□明廟特簡召先生名。□命除司紙。尙相公某。先生少時友也。與之書。力勸其出。先生答曰。昔文立不薦程瓊。知其性謙。年老無復當世意故也。公非知我者耶。尙公又貽書責之。竟不起焉。〔原注:退溪集○聽松墓碣〕

번역

경신년에 명묘가 특별히 선생의 이름을 뽑아 사지(司紙)를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상상공 모는 선생이 젊었을 때 친구로, 그에게 편지를 보내 출사하기를 힘써 권하였는데, 선생이 답하기를, “옛날 문립(文立)은 정경(程瓊)을 천거하지 않았으니, 그의 성품이 겸손함을 알았기 때문이고 나이가 들어 다시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은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상공이 또 편지를 보내 꾸짖었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원주(原注)에 퇴계집(退溪集)에 있다.-

원문

陳復昌方貴寵用事。嘗乘醉訪尙某。倨傲無禮。戲曰。尙爺歌。某素不能。卽欣然歌之。及歸。歎咤曰。吾爲此人所辱矣。〔原注:李朝實錄〕

번역

진복창(陳復昌)이 한창 귀총(貴寵)을 얻어 권세를 부릴 때에, 일찍이 술에 취해 상모(尙某)를 방문하였는데 거만하고 무례하여 장난삼아 이르기를, “상야가(尙爺歌)”라고 하였는데, 모는 평소에 노래를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즉시 기뻐하며 노래하였다. 돌아와서는 탄식하기를, “내가 이 사람에게 욕을 당했다.” 하였다.-원주(原注)에 이조실록(李朝實錄)이라 되어 있다.-

원문

徵士成守琛卒。先時。□上特命授司紙。時尙某爲首相。勸使來謝曰。恩命出於□上衷。不可不來。守琛時已老病。復書曰。文立不薦程瓊。知其素性謙退。年垂八十。無復當世之望故也。子非不知我者耶。竟不起。〔原注:李朝實錄。下同。〕

번역

징사(徵士) 성수침(成守琛)이 졸하였다. 선대왕께서 특별히 명하여 사지(司紙)에 제수하였는데, 당시 상모(尙某)가 수상(首相)이 되어 와서 사례하도록 권하기를, “은명(恩命)이 □상(□上)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오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성수침은 그때 이미 늙고 병들어 다시 편지로 말하기를, “문신으로 세워 정경(程瓊)을 천거하지 않은 것은 평소 겸손하고 물러나려는 성품을 알았기 때문이고, 나이가 여든이 다 되어 더 이상 세상에 쓰일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자네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면서 어찌하여 끝내 일어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원주(原注)에 이조실록(李朝實錄)이라고 되어 있다. 아래도 같다.-

원문

尙某成守琛兄弟。同榻之友也。尙公每語人曰。仲玉。成德之士也。

번역

상모(尙某) 성수침(成守琛) 형제는 나와 함께 공부한 벗이다. 상공이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옥은 덕을 이룬 선비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中宗三十四年己亥。命刊頒棠陰比事,折獄體要於中外。大司憲尙公。以刑獄多濫而請之也。

번역

중종 34년 기해에 《당음비사(棠陰比事)》를 간행하여 반포하고, 옥사의 체모를 중외(中外)에 알리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상공이 형옥에 외람된 일이 많다고 하여 청한 것이다.

원문

明宗卽位元年丙午元月十五日。以尙某爲左參贊。□仁廟卽位初。有忌公者。以嶺南巨服。必須剸煩才爲託。黜公爲嶺伯。至是拜是職。

번역

명종이 즉위한 원년 병오년 1월 15일에 상모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 인조가 즉위할 때 공을 시기하는 자가 있었는데, 영남의 거족(巨族)은 반드시 번거로운 일을 해야만 의탁할 수 있다고 하여 공을 내쫓아 영남의 도백으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원문

明宗四年己酉。命李賢輔,魚得江各加一資。下書招之。嘉其廉退有操也。公言二老皆年過八十。道路且遠。宜有給馬之典。遂命給馬。

번역

명종 4년 기유일에 이현보(李賢輔)와 어득강(魚得江)에게 각각 한 자급을 올려 주고 편지를 내려 불러서 그들이 청렴하게 물러나 지조를 지키고 있음을 가상하게 여겼다. 공이 두 노인이 모두 나이가 80이 넘었고 길도 멀으니 마를 지급하는 은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자, 마침내 마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원문

明宗五年庚戌六月。命觀象監候中星。修改宗廟洞口之仰釜日晷。昌慶宮之新報漏閣漏籌浮龜。復命觀象監提調。尙某金益壽等。修改欽敬閣十二朔田獵稼穡等制度。務合於豳風七月之象。

번역

명종 5년 경술 6월에 관상감에 명하여, 중성(中星)을 살피고 종묘 동구(洞口)의 우물에서 해 그림자를 고치게 하고 창경궁 신보루각(新報漏閣)의 누추(漏籌)와 부귀(浮龜)를 고치도록 하였다. 관상감 제조 상모 김익수(金益壽) 등에게 명하여 12개월 동안 종묘와 흠경각(欽敬閣)의 전답과 사냥 및 농사 등의 제도를 고쳐서 빈풍(豳風) 7월의 형상에 맞게 하도록 하였다.

원문

明宗八年癸丑。文定大妃御宣政殿。□上坐簾外。召三公入侍。□敎曰。婦人干國政。實非美事。以主上沖年。不得已居攝。而天災時變。疊見層出。恐由予否德也。況今主上長成。學問高明。自今歸政。當不復與聽也。□上下榻辭遜。顧謂大臣。使陳其不可。公與沈連源,尹漑等對曰。□慈殿今日下敎。正是宣仁王后所謂母后當陽。非國家美事者也。況□慈殿春秋亦高。久勤萬機。殊非頤養之道。臣等惟當將順□懿旨而已。□上不得已從之。

번역

명종 8년 계축에 문정대비가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좌(上坐)의 발 밖에 앉아서 삼공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부인이 국정을 관장하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주상이 아직 어리어서 부득이 섭정하였으나 천재와 시변이 거듭 발생하니 이는 나의 부덕함 때문인 듯하다. 더구나 지금 주상은 장성하여 학문이 고명(高明)하니, 이제부터는 정사를 돌려주어 다시 간여하지 않아야 한다.” 하였다. □상하탑(上下榻)이 사양하고 대신에게 돌아보며 진달하게 하니, 공이 심연원(沈連源), 윤개(尹漑) 등과 대답하기를, “□ 자전의 오늘 하교는 바로 선인왕후(宣仁王后)가 ‘모후께서 국정을 주관하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 자전은 연세도 높으시고 오랫동안 만기(萬機)에 힘쓰셨으니, 이는 이양(頤養)하는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 신들은 마땅히 의지(懿旨)를 받들 뿐입니다.” 하니, □ 상이 부득이 따랐다.

원문

明宗十二年丙辰夏。公與經筵官趙士秀□白于上曰。滉之爲人。可扶頹俗。□上乃以手札召之。仍除副提學。竟不至。〔原注:松岡遺稿〕

번역

명종 12년 병진 여름에 공이 경연관 조사수와 함께 백우(白于)를 올려 아뢰기를, “황은 사람됨이 무너진 풍속을 부지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곧바로 수찰로 불러서 부제학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원주(原注)는 송강의 유고이다.

원문

明宗十三年戊午秋八月。□上以災異。召大臣卿宰三司長官。訪問弭災之策。領議政尙某請伸理幽冤。以答天譴。□上曰。當省念焉。〔原注:李朝實錄〕

번역

명종 13년 무오 8월에 임금이 재이(災異)로 인해 대신ㆍ경재(卿宰)ㆍ삼사(三司)의 장관을 불러서 재이를 그치게 할 대책을 물으니, 영의정 상모가 “유원(幽冤)을 풀어 주어 하늘의 견책에 답해야 합니다.”라고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반성하겠다.” 하였다.-원주(原注)-이조실록(李朝實錄)에 보인다.

원문

明宗十四年己未。□上親試賜暇學士于翠露亭。製述經講。入格人賞賜有差。仍宣醞極歡。領議政尙某曰。□成宗朝培養文學。故人才蔚然輩出。今日之事。近古所無也。然其講論文義。有關治道者。自□上採取。見諸施爲則尤當有實效也。□上然之。夜深。賜宮燭各歸其家。道路拭目。以爲曠世盛事。及公卒。湖堂月課。以悼老德大臣爲題。〔原注:李朝寶鑑〕

번역

명종 14년 기미에 □가 상친시를 행하여 사하학사에게 취로정에서 제술과 경강을 시험 보이고, 입격한 사람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고 이어서 술을 베풀어 매우 즐거워하였다. 영의정 상모(尙某)가 아뢰기를, “□ 성종조에 문학을 배양하였기 때문에 인재들이 무성하게 많이 나왔습니다. 오늘날의 일은 고금에 없던 일입니다. 그러나 강론과 문장의 의리는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 상께서 취사하여 시행하는 데에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 상이 그렇게 하였다. 밤이 깊자 궁촉을 내려 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길에서 눈을 씻고 기다리면서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로 여겼다. 공이 졸한 뒤에는 호당 월과(月課)를 ‘노덕 대신을 애도한다.[悼老德大臣]’라는 제목으로 지었다.-원주(原注)에 이조보감(李朝寶鑑)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尙成安公世居林川。其先不大顯。其父察訪公筮仕。僑居于長興洞口。成安兒時。率群兒嬉戲於街上。鄭文翼光弼爲首揆。時見而異之。令小使挈來。至其第。啗以飮食。亟加稱賞曰。此兒異日。當坐吾座。但避事少建白耳。成安果登元輔。在相位者十六年。享太平之樂。而□女主臨朝。故雍容養重。一如文翼之言。異哉。〔原注:樂全謾錄〕

번역

상성안공(尙成安公)은 대대로 임천(林川)에 살았는데, 그 선조는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찰방(察訪) 공 서(公筮)가 장흥동(長興洞) 어귀에 우거하다가 아이 때 상성안이 아이들을 거느리고 거리에서 놀고 있는 것을 정문익 광필(鄭文翼光弼)이 수상이 되어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어린 종을 시켜 데려오게 하였다. 그 집으로 가서 음식을 먹이고는 속히 칭찬하기를, “이 아이가 뒷날 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니, 다만 일을 피하여 조금이나마 건의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상성안은 과연 정승에 올라 재상으로 있는 지 16년 동안 태평의 즐거움을 누렸고, 주부가 임금의 곁에서 온화하게 중후함을 기르니, 한결같이 문익의 말과 같았다. 이상하다. 원주(原注)에는 ‘악전만록(樂全漫錄)’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申企齋光漢。於正德己卯。爲大司成。尙公以上齋色掌。出入於明倫堂。是歲冬。登文科入翰苑。及群賢斥死。申公亦貶爲悉直府使。因罷黜。退居忠州之達川。二十年後至嘉靖丁酉。金安老被罪。戊戌春。公還□朝。復爲大司成。尙公時爲戶曹參判。相遇於道。驅軺至公之馬首而謂公曰。令公不識我乎。我乃己卯色掌生員尙某也。公曰。其然乎。令若不言。楚澤餘生。豈能記其舊時之面目乎。遂相揖而去。宦路翻覆。自古猶然。積薪之喩。不亦宜乎。〔原注:松窩雜記。下同。〕

번역

신기재(申企齋) 광한(光漢)이 정덕(正德) 기묘년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상공의 색장(色掌)으로서 명륜당(明倫堂)을 출입하였다. 그해 겨울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갔다가 여러 현인들이 배척되어 죽게 되자, 신공도 실직부사(悉直府使)로 폄봉되었다가 파출(罷黜)되어 충주(忠州) 달천(達川)으로 물러나 살았다. 20년 뒤 가정(嘉靖) 정유년에 김 안로(金安老)가 죄를 입고 무술년 봄에 공이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대사성이 되었는데, 상공은 이때 호조 참판이었다. 길에서 서로 만나 마차를 몰아 공의 말 머리까지 가서 이르기를, “영공께서는 저를 모르십니까? 저는 기묘년 색장 생원(生員) 상모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영공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초택(楚澤)에서 여생을 보내는 이 몸이 어찌 옛날의 면목을 기억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서로 읍하고 떠났다. 벼슬길의 번복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니, 쌓인 섶불에 불이 붙는다는 비유가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원주(原註) : 송와잡기(松窩雜記)에 있다. 아래도 같다.

원문

明廟申光漢。爲判中樞府事。尙公與沈相連源□啓以申某立朝最久。年高有學。而久在從二品。請陞秩領□經筵。資其勸講。於是□特陞正一品。今則時任大臣外。雖原任大臣。不得兼帶領□經筵。固非舊制也。

번역

명종(明宗) 때 신광한(申光漢)이 판중추부사로 있을 때 상공이 심상연원(沈相連源)과 함께 아뢰기를, “신 아무개는 조정에 나온 지 가장 오래되었고 나이가 많고 학식이 있으나 오랫동안 종2품에 머물러 있습니다. 품계를 올려 영경연사를 맡겨 강학을 권장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특지(特旨)를 내려 정1품으로 올렸다. 지금은 시임 대신 외에는 원임 대신이라도 영경연사를 겸대할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옛 제도가 아니다.

원문

尙某。字起夫。世居林川。少孤。鞠於姊夫夏山君成夢井家。夢井深服其德器。公兒時。文翼公一見。歎服其大器。大司成柳雲。見其課製。大加褒稱。訪于家曰。見公議論。知有經綸之才。被薦科不就。是冬。登科。□明廟朝。官至領議政。卒諡成安。〔原注:鄭文翼公遺稿。下同。〕

번역

상모는 자가 기부(起夫)이다. 세대가 임천에 살았는데,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시누이 남산군(南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봉양을 받았다. 몽정이 그 덕과 기량을 깊이 감복하였고, 공의 아들 문익공(文翼公)이 한 번 보고는 큰 그릇임을 탄복하였다. 대사성 유운(柳雲)이 그의 과제(課製)를 보고 크게 칭찬하며 집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공의 논의를 보니 경륜의 재주가 있음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과거에 추천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급제하였다. 명종조에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졸시(卒諡)는 성안(成安)이다.-원주(原注)에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이다.” 하였다.-

원문

朴佐郞達。己卯後棄官。退居江陵。尙某按東藩時就訪之。語人曰。斯人玉壺秋水。

번역

박 좌랑 달(朴佐郞達)이 기묘년 뒤에 관직을 버리고 강릉으로 물러가 살았는데, 상모(尙某)가 동쪽 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 그를 찾아가 보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옥호(玉壺)와 추수(秋水) 같은 사람이었다.” 하였다.

원문

沈葆菴連源爲首相時。勅使將至。公已嬰疾。上狀乞解。再三瀝懇。□上諭以在平日不宜輕許。今則勅使所視。不可使相臣有缺。故勉從所請。左議政尙某□啓曰。宿德元老。其去留足爲□朝廷輕重。請仍任待瘳。□上遣史臣諭曰。昨遞卿職。予不獲已。今左相啓留。是乃公議。卿其仍任調治。〔原注:李朝實錄〕

번역

보암(葆菴) 심연원(沈淵源)이 수상으로 있을 때 칙사가 오려 하는데, 공이 이미 병을 얻어 상소하여 해임을 청하였는데, 거듭 간곡히 청하였다. □ 상이 유시하기를, “평상시에는 경솔하게 허락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은 칙사가 보기에 재상이 결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청한 대로 하도록 권면한다.” 하였다. 좌의정 상모가 아뢰기를, “숙덕(宿德) 원로(元老)의 거류(去留)는 조정의 경중에 충분히 관계되니, 그대로 맡겨서 병이 낫기를 기다리소서.” □ 상이 사신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지난번 경의 직임을 체차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좌상이 머물러 있겠다고 아뢴 것은 공론이다. 경은 그대로 맡아서 다스리라.” 하였다.-원주(原注)에 이조실록(李朝實錄)에 보인다.-

원문

李左尹澯。暮年謝病家居。不受祿。尙公,沈相連源等白爲奉朝賀。及受其祿終其身。〔原注:於于野談。下同。〕

번역

좌윤 이분(李澯)은 늘그막에 병을 핑계로 집에 있으면서 녹봉을 받지 않았다. 상공(尙公)과 심상연원(沈相連源) 등이 그를 위해 백의(白衣)가 되어 봉조하(奉朝賀)를 위하여 청하였는데, 그가 녹봉을 받은 뒤로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받았다고 한다.-원주에 “어저 어저야담(於于野談)”이라고 하였다. 아래도 같다.-

원문

尙公嘗赴政府。卜相而還。其孫壻李公濟臣問曰。今日誰爲之。公默然。濟臣曰。似聞沈通源應在卜中。信乎。公曰。似爲之。其人髥好。髥好云者。憚濟臣也。

번역

상공(尙公)이 일찍이 정부(政府)에 나갔다가 정승 후보를 뽑고 돌아왔다. 그의 손자사위 이제신(李濟臣)이 묻기를, “오늘 누가 되었습니까?” 하니, 공이 묵묵히 있었다. 이에 이제신이 말하기를, “듣건대 심통원(沈通源)이 정승 후보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될 것 같네. 그 사람은 수염을 잘 가꾸었네.” 하였다. ‘수염을 잘 가꾸었다.’는 것은 이제신을 꺼려서 한 말이었다.

원문

淸江李濟臣年十七。聘于尙公之門。公常稱大器大器。〔原注:簡易集〕

번역

청강 이제신(李濟臣)이 17세에 상공의 집에 빙문(聘問)하였는데, 공이 항상 “큰 그릇이다. 큰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원주》 《간이집(簡易集)》

원문

一日。侍妻祖父尙公。語及墓樹事。公詔家人勿豎己石曰。謾鐫虛辭。死未埋恥。余曰。外王父有篤美。迄玆無表。若此者。當得已乎。公方憊且臥。蹶然推枕曰。如汝富寧公。安沒顯刻。汝必勖之。濟臣拜而請其實。成安曰。汝祖德烈靡不聞。余亦晩交。其詳則未。委富寧之日。余在北幕。當時亦近古。□朝廷無使聞民疾苦等事。汝祖居官氷白。不犯毫毛。常衣弊御款段而已。以此只從一僕。出入村曲。歷咨軍民宿瘼。官政秕纇。田翁里嫗。咸不意其官人。相談爾汝甚悉。明日。卽取以盡更之。惟民願欲萎暍膏醒。列邑尊服。高風卓絶。落落如此。故尙公曰。縕袍而無恥狐貉者。結纓之後僅乃祖耳。不可使沒聞於來後。〔原注:禹富寧公墓誌。淸江撰。〕

번역

어느 날 시처의 조부 상공(尙公)이 묘수(墓樹)에 관한 일을 말하면서, 공이 집안사람들에게 명하여 자기 돌을 세우지 말라고 하면서 “헛된 말을 새겨 죽어서도 부끄러움을 묻지 못하겠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외조부의 독실하고 아름다운 덕행이 지금까지 표문(表文)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경우에 어찌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한창 피곤하여 누워 있다가 갑자기 베개를 밀쳐내고 일어나며 말하기를, “너 부녕공(富寧公 우부녕(禹富寧))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묻어 두게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반드시 힘써서 그 사실을 알아내라.” 하였다. 제신이 절하고 그 사실을 알아낼 것을 청하니, 성안이 말하기를, “너의 조부의 덕행과 공렬은 듣지 못한 이가 없으니 나도 늦게나마 사귀었지만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부녕공이 죽던 날 나는 북막(北幕)에 있었는데, 당시에도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듣는 일 등이 거의 없었다. 너의 조부가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여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고 항상 해진 옷과 단출한 신발만을 착용하였으며, 한 명의 종만 데리고 마을을 출입하면서 군민(軍民)의 고통과 관정(官政)의 폐단을 두루 물어보았는데, 농부와 노인들이 모두 그 관리가 그런 사람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너는 이 일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내일 즉시 가져다가 다시 고치도록 하라. 오직 백성들은 쇠잔해져 가는 기력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열읍(列邑)에서는 존경하는 마음이 높으니, 그 고상한 풍모가 이와 같이 탁월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상공이 말하기를, “베옷을 입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여우나 살쾡이 같은 자는 갓끈을 매고 나서야 겨우 조부라 할 수 있으니, 후세에 알려지지 않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원주(原注)에 “우부녕공의 묘지(墓誌)를 청강(淸江)이 지었다.” 하였다. -

원문

尙公每稱李公亨順曰。眞可任將。雖泰山崩於前。目不瞬者。惟公然爾。〔原注:淸江集〕

번역

상공이 매양 이공 형순(李公亨順)을 일컬어 말하기를, “참으로 장수(將帥)에 맡길 만한 사람이다. 비록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진다 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는 오직 공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 원주(原注)에는 《청강집(淸江集)》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李忠穆公廷馣。爲參下官時。持公事取稟于尙公家。公與之坐饋酒。且曰。吾近得孫女壻。氣宇風味。與君相似沕合。君其見否。使小奚招新郞以出。新郞卽李濟臣也。兩人通姓名接話後。公因爲入去。其意蓋使從容談話也。〔原注:四留齋集〕

번역

충목공(忠穆公) 이정필(李廷馣)이 참하관(參下官)으로 있을 때 공사(公事)를 가지고 상공의 집에 나아가 여쭈었다. 공이 그와 함께 앉아 술을 대접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근래에 손녀의 사위를 얻었는데 기상과 풍모가 그대와 비슷하여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는, 작은 종을 시켜 신랑(新郞)을 불러 나오게 하였다. 신랑은 바로 이제신(李濟臣)이었다. 두 사람이 성명을 통하고 말을 나눈 뒤에 공이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게 하려는 것이었다. 원주(原注)는 《사류재집(四留齋集)》에 있다.

원문

聽松先生專力務學。不遑治產業。在洛尤貧。時至於竈絶炊火。晏如也。庭有古杏。其大數圍。朋儕之往來者所嘗見也。一日。尙公權相公撥同訪先生。入門顧庭杏不見。怪而問之。先生答曰。近値天寒。斫以充薪。尙公笑曰。主翁之貧。禍及庭樹。〔原注:成聽松遺事。成大谷記。〕

번역

청송 선생은 오로지 학문에 힘쓰느라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어서 서울에 있을 때에는 더욱 가난하여 때로는 부엌의 불을 땔 나무가 떨어질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안여(晏如)의 집에 오래된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크기가 몇 길이나 되어 친구들이 왕래하면서 일찍이 보았던 것이다. 어느 날 상공 권 상공(權相公)이 함께 선생을 방문하였다가 집안에 들어와 뜰의 살구나무를 돌아보고는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그러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요즘 추운 날씨를 만나서 나무를 베어 땔나무로 삼았습니다.” 하였다. 상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집주인의 가난함이 화가 되어 뜰의 나무에까지 미쳤구나.” 하였다. 원주(原注)에 “성청송의 유사(遺事)와 성대곡기(成大谷記)에 보인다.” 하였다.

원문

成節孝歿。家貧不能治喪。其友尙某,鄭源,洪奉世,李涵,鄭潚,元漑,愼希復,許淨,安曇。各出財棺斂。遂克葬。〔原注:成節孝墓誌〕

번역

성절효가 죽었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상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그의 벗 상모(尙某), 정원(鄭源), 홍봉세(洪奉世), 이함(李涵), 정집(鄭潚), 원개(元漑), 신희복(愼希復), 허정(許淨), 안담(安曇)이 각각 재물을 내어 관을 마련하고 염을 지내서 마침내 장례를 치렀다. 원주(原注)에 “성절효의 묘지(墓誌)”라고 하였다.

원문

節孝成公歿。家貧不能治喪。其友尙某,鄭源,洪奉世,李涵,鄭潚,元漑,愼希復,許淨,安曇等。各出財棺。以二月日。窆于坡山。又相與謀曰。以叔玉之賢。不能少試於時。又不得壽而遽歿。命固已矣。吾儕在世。使斯人名又竟泯滅而無傳。豈不尤慟矣哉。此吾輩責也。不可不誌于隧。以慰泉下。遂買石磨礱。以圖不朽。〔原注:慕齋集〕

번역

절효성공(節孝成公)이 죽었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상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그 벗인 상모(尙某), 정원(鄭源), 홍봉세(洪奉世), 이함(李涵), 정첩(鄭潚), 원개(元漑), 신희복(愼希復), 허정(許淨), 안담(安曇) 등이 각자 돈을 내어 관을 마련하고 2월 일에 파산(坡山)에 매장하였다. 또 서로 의논하기를, “숙옥의 어짊을 세상에서 조금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고 또 장수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으니 운명은 진실로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세상에 있으면서 이 사람의 이름이 또 마침내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게 한다면 어찌 더욱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니 비석을 세워 저승에서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돌을 사서 깎아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였다.- 원주(原註)에 보인다. -

원문

牛溪博通經史。文辭贍蔚。又學識行義。已爲人推服。尙公貽書聽松曰。賢胤純正而能文。眞奇男子也。賀君有慶。

번역

우계(牛溪)는 경사(經史)에 박통하고 문장도 풍부하였으며, 또 학식과 행의가 이미 남들의 추앙을 받았다. 상공이 편지를 보내어 청송(聽松)에게 말하기를, “현윤(賢胤)은 순정(純正)하면서 능문(能文)하니 참으로 기이한 남자이다. 그대에게 경사가 있음을 축하한다.” 하였다.

원문

諸學子爲尊先先生。欲建祠院。今雖似晩。誠爲盛事。然鄙人有一說焉。僕久在尙公門下。飽聞尊先府君德業學問行義。與尊叔父先生。眞可謂魯衛。雖享年不永。新學後生。聞知未廣。若以金慕齋誌文參之則成安公之論。亦爲深知而質之無差矣。〔原注:淸江集○貽牛溪書〕

번역

제학자들이 존선 선생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려고 하니, 지금 비록 늦은 것 같지만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한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상공(尙公)의 문하에 있으면서 존선 부군(尊先府君)의 덕업과 학문과 행의를 많이 들었는데, 존숙부 선생과 진실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처럼 대등하다고 할 만합니다. 비록 연세가 오래되지 않아 새로 배운 후생들이 듣고 아는 것이 넓지 못하지만, 만약 김 모재(金慕齋)의 지문(誌文)을 참고한다면 성안공(成安公)의 논의도 깊이 알고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원주(原注): 《청강집》에 우계(牛溪)에게 준 편지이다.

원문

尙成安嘗語子弟論詩麥秀章曰。箕子過敫墟。亡國之懷如何。而乃曰。欲哭則不可。欲泣則爲近婦人。詩人之不輕用性情如此。可見公之氣像矣。〔原注:栗谷全書〕

번역

상성안(尙成安)이 일찍이 자제에게 〈맥수(麥秀)〉 장(章)의 시를 논하면서 말하기를, “기자가 과(過)하여 허(墟)에 묻혔으니 나라를 잃은 회포가 어떠하였겠는가. 그런데도 ‘울고 싶어도 울 수 없고 눈물 흘리고 싶어도 눈물을 흘리는 것은 부인에게 가까운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시인이 성정(性情)을 경솔하게 쓰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아서 공의 기상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원주(原注)는 《율곡전서》에 보인다.

원문

尙公與丁贊成玉亨同監□仁廟胎峯于嶺南。咸昌倅。兩相舊知也。欲勸酒而先醉。因失溺流于座。丁公指尙公使見之。相視而笑。主倅因入衙而罷。其後丁公無一戲言及其事。公亦喜其量而默識之。返慶尙之路而終不說。常服難。以爲不戲人。小事如此。況言人大過乎。是行。於一邑。夕有哭聲起於丁相之所。問之。乃丁相遇先妣之族。而持泣云。〔原注:潛谷舊錄〕

번역

상공(尙公)이 정 찬성 옥형(丁贊成玉亨)과 함께 영남에 있는 인묘태봉(仁廟胎峯)을 감수(監修)할 때 함창 현감(咸昌縣監)이 두 상인(相人)의 옛 친구라서 술을 권하려고 하다가 먼저 취해 자리에 엎드려 젖어버렸다. 정공이 손가락으로 상공을 가리켜 보게 하자 서로 보고 웃었다. 주인이 관아에 들어가서 파직당하였다. 그 뒤로 정공은 한마디 농담도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공 또한 그의 도량을 기뻐하여 묵묵히 알고 있었으며 돌아오는 길에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상복(常服)을 입는 것도 어렵다고 하면서 남을 희롱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 작은 일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언인(言人)의 큰 과실이야 어찌 말하겠는가. 이 행차에서 저녁에 정공이 있는 곳에서 곡소리가 들려 물어보니, 바로 정공이 선비(先妣)의 친족을 만나서 울고 있었다고 하였다.-원주(原注)에는 잠곡(潛谷)의 옛 기록에 있다고 하였다.-

원문

几杖之宴。非但一家私慶。亦□國家稀事。故滿朝宰相皆與焉。孝靖之時。分韻作詩之宰。雖未知盡是赴宴之人。而一時交遊之盛。□國家之多名卿鉅弼。就可想已。聘祖尙公受几杖時余目覩。通三日設席。而前後宰相幾五十餘人。至於近年。金犀極少。六卿亞卿。僅得推移備員。贊成二位闕焉者殆五年矣。洪江寧慶筵。不過五六宰相云。與□明宗朝盛會。大不侔焉。〔原注:淸江鎖語〕

번역

궤장연(几杖宴)은 한 집안의 사적인 경사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드문 일이기 때문에 조정의 재상들이 모두 참여한다. 효정왕후(孝靖王后) 때에 시를 짓는 데 운을 나누어 준 재상들은 비록 모두 연회에 참석한 사람인지 모르지만, 한 시대에 교유가 성대하고 국가에 명망 있는 경필(卿弼)이 많았음을 상상할 수 있다. 빈조 상공(賓祖尙公)이 궤장을 받을 때 내가 직접 보았는데, 사흘 동안 자리를 베풀었는데 전후로 재상이 거의 50여 인이었다. 근년에는 금서(金犀)가 매우 적어서 육경(六卿)과 아경(亞卿)을 겨우 변통하여 인원을 채웠고, 찬성 두 자리는 비어 있는 지 거의 5년이 되었다. 홍강(洪江)의 경연(慶筵)은 재상이 다섯아홉 명에 불과하니, 명종조(明宗朝)의 성대한 모임과는 크게 다르다.-원주에 청강(淸江)의 말로 되어 있다.-

원문

盲人金孝命。可謂善卜者。至癸丑年別試。或問孝命曰。今年科擧何如。答曰。金姓當魁。李姓居末矣。及榜出。金慶元,李慶禧也。時尙公爲讀卷官。欲以洪大諫天民爲首。下官皆以金爲可。公固爭不得。且凡科擧。皆取入格文字。而其時□特命次中以上皆賜第。而李得參焉。尙公出試場。謂子弟曰。這老第試可笑。金慶元。自乃祖千齡乃考萬鈞。皆壯元也。此家必占三代魁星。而強欲以洪家置首。瑣力其可及乎。蓋亦言其前定也。以孝命之言觀之則可不謂然哉。臺諫論次等□賜第。不可久執。未□允。人衆豈能勝天乎。〔原注:涪溪見聞。下同。〕

번역

맹인 김효명(金孝命)은 점을 잘 치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계축년 별시(別試)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효명에게 “올해 과거는 어떠하겠습니까?”라고 묻자, 답하기를 “김씨가 장원을 차지하고 이씨가 최말을 차지할 것입니다.”하였다. 방목이 나오자 김경원(金慶元)과 이경희(李慶禧)였다. 이때 상공이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홍 대간 천민(洪大諫天民)을 수석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관원들이 모두 김씨가 적임자라고 하여 공이 굳이 고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릇 과거는 모두 입격한 문자를 취하는데, 그 당시에는 특별히 명하여 차중(次中) 이상은 모두 급제하게 하였는데 이득삼(李得參)이 거기에 들었다. 상공이 시장(試場)에 나가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저 늙은이가 제기한 시험은 우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김경원은 조부 김천령(金千齡)과 고조 김만균(金萬鈞)이 모두 장원이었으니, 이 집안에서 반드시 삼대의 괴성(魁星)을 점칠 것인데 억지로 홍씨를 수석에 두려고 하였으니, 작은 힘으로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또한 미리 정해진 것을 말한 것이니, 효명의 말을 가지고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겠다. 대간이 차등을 논하여 급제하게 한 것은 오래 고집할 수 없는데 윤허받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많다고 어찌 하늘의 뜻을 이길 수 있겠는가.-원주(原注)에 “부계(涪溪)가 보고 들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래도 같다.-

원문

尙公以檢閱罷歸。抹馬於衿川地。隴上有翁牧牛。公問曰。二牛孰優。翁不對。再三問之。終不對。公甚怪之。公旣上馬。翁隨而後。數十步密復曰。向者問。未卽奉對者。緣二牛服役歲久。未忍斥言故也。其實小者爲優。公下馬謝曰。翁是隱君子也。其敎我以處世法矣。遂服膺而勿失。自筮仕至懸車。未嘗忤於人云。

번역

상공(尙公)이 검열(檢閱)을 파직당하고 돌아갈 때 금천(衿川) 땅에서 말을 닦고 있었는데, 언덕 위에 소를 치는 노인이 있었다. 공이 묻기를, “두 마리 소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 하니,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세 번 물어도 끝내 대답하지 않자, 공이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이미 말에 오르자 노인이 뒤를 따라오더니 수십 보쯤 떨어져서 속삭여 이르기를, “아까 묻는 데 즉시 대답하지 않은 것은 두 소가 오래도록 부림을 받아 차마 버릴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작은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말에서 내려 사례하기를, “노인은 은자(隱者)로서 군자이니, 나에게 처세의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않고 스스로 벼슬길에 나가 높은 지위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에게 거스름이 없었다고 한다.

원문

公器宇洪大。未嘗言人長短。吳判書祥有詩曰。羲皇樂俗今如掃。只在春風杯酒間。公見之曰。何言之薄也。改以羲皇樂俗今猶在。看取春風杯酒間。改下數字而渾然不露。二人之氣像可見。〔原注:詩話叢林。芝峯評。〕

번역

공은 기상이 크고 넓어서 남의 장단(長短)을 말한 적이 없었다. 오 판서 상(吳判書祥)이 시에, “희황 시대 풍속 즐기던 것 지금도 쓸어내듯 사라졌으니, 다만 봄바람 불 때 술잔 사이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보고는, “어찌 이리 박한 말을 하는가?” 하고는, 고쳐서, “희황 시대 풍속 즐기던 것 지금도 남아 있으니, 봄바람 불 때 술잔 사이를 보라.”라고 하여 몇 글자를 바꾸고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니, 두 사람의 기상을 알 수 있다. 원주(原注)에 “시화총림(詩話叢林)에 지봉(芝峯)이 평하였다.” 하였다.

원문

成夏山君夢井。尙公姊夫也。天姿超穎。詩未嘗經意。而出手必有佳。病懷賦。申企齋常書一統。付壁讀之。嘗小構南麓詩曰。誰家有道可沖天。料理始終却未然。試向山中高枕臥。此身安處卽神仙。措意達理。有警世意。尙公每曰。兄天性孝友。而其詩亦可採於東文選而未愧也。時不見錄。亦命歟。〔原注:詩話叢林。淸江評。〕

번역

성하산군(成夏山君) 몽정(夢井)은 상공의 시부이다. 천품이 뛰어났는데, 시는 의식하지 않고 지었는데도 손을 대면 반드시 아름다웠다. 병중에 지은 부(賦)를 기재(企齋) 신상(申常)이 일통(一統)에 실어 벽에 붙여 읽었다. 일찍이 남쪽 산기슭에 작은 집을 짓고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구의 도가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 처음과 끝을 헤아려 보아도 어긋나네. 한번 산중에 올라 베개 높이 누워보게나. 이 몸 편안한 곳이 바로 신선세계라네.” 뜻을 두어 이치에 통달하였고 세상을 경계하는 뜻이 있었다. 상공이 매양 말하기를, “형은 천성적으로 효우(孝友)하고 시도 《동문선(東文選)》에 실려도 부끄럽지 않다.” 하였다. 당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또한 운명일 것이다. 원주(原注) : 《시화총림(詩話叢林)》 청강평(淸江評).

원문

英廟朝。每幸行崇禮門路也。掖隷呼稟所過街坊。而奏尙洞。則必式躬曰。此古賢相所居也。〔原注:聞見錄〕

번역

영묘조(英廟朝)에 숭례문 길을 행행할 때마다 액례가 지나가는 거리와 방소를 물어보고, 상동(尙洞)이라고 아뢰면 반드시 몸소 고하기를, “이곳은 옛날 현상(賢相)이 살던 곳이다.” 하였다. 《문견록》에 보인다.

원문

尙成安敎子弟曰。士之立心。不可少容邪曲。至於科場發軔。尤不可不以正出身。若暗相代借。終至竊名則卽是終身玷累。不可改悔之過。後雖有忠言讜論。皆誣而已矣云。余少時入場屋。所業賦也。而科題表也。或勸倩手。而余不聽。折卷而出。若聽人言。其不得罪於尙公乎。〔原注:任全齋集卷之八〕

번역

상성안(尙成安)이 자제들을 가르치기를, “선비가 마음을 세울 때에 조금도 사특한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니, 특히 과장(科場)에서 입시할 때는 더욱 정출신(正出身)으로 해야 한다. 만약 남의 손을 빌려 대필하게 하여 끝내 남의 이름을 훔치게 되면 이는 곧 종신토록 지워지지 않는 허물이 되는 것이니, 나중에 비록 충언(忠言)과 진론(眞論)이 있더라도 모두 무고일 뿐이다.” 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입시한 과장에서는 부(賦)를 짓는 것이 과제였는데 표문(表文)을 지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듣지 않고 시권을 접어 가지고 나왔다. 만약 남의 말을 들었다면 상공에게 죄를 받지 않았겠는가? 원주(原注)에 “임전재집(任全齋集) 제8권에 있다.” 하였다.

원문

不言脚短但言長。必諱其人欲勿傷。至若群邪無少貸。乘風搏擊氣堂堂。〔原注:比彭錄〕

번역

짧은 다리 말하지 말고 긴 다리만 말하여 반드시 그 사람을 피해서 상처 주지 않으려 하네 뭇 사악한 무리에게는 조금도 너그러이 대하지 않아 바람 타고 덮쳐 치니 기세가 당당하구나 원주(原注)에 “팽록(彭錄)에 비유한다.”라고 하였다.

원문

〔原注:尙公不言人過。客有言某一脚短。公曰。無已則不若云一脚長。不忍斥其短。然搏擊奸佞。無所回撓。〕

번역

원주(原注) : 상공은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어떤 손님이 “어떤 사람의 한쪽 다리가 짧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한쪽 다리가 길다.’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여 그 단점을 차마 배척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와 싸울 때는 흔들릴 줄을 몰랐다.

원문

趙敦艮齋曰。德性之淳厚。自有天賦中出來。如尙成安公論箕子過敫墟。欲泣則近於婦人。乃作麥秀歌。曰。古人之不輕用性情如此。〔原注:古人以下九字。卽尙公說。〕可以想見其氣像矣。〔原注:認齋集。雜識篇。〕

번역

조돈간재(趙敦艮齋)가 말했다. “덕성이 순후한 것은 본래 타고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니, 상성안공(尙成安公)이 기자가 과민하게 흙을 파는 것을 논하면서 눈물을 흘리려고 하면 부인에 가까울 것 같다고 여겨 맥수가를 지었다. ‘옛사람은 성정(性情)을 가볍게 쓰지 않음이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원주〕 ‘옛사람 이하의 아홉 글자는 바로 상공의 설이다.’라고 하였다. 그 기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원주〕 《인재집(認齋集)》 〈잡식편(雜識篇)〉에 보인다.

247. 改□宗系慶科別試榜目〔原注:中宗十四年己卯十月〕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39B, ITKC_MO_0130A_A026_139C

원문

命官趙光祖□南衮□金絿□金湜甲科二人生員金□珌〔原注:字子文。一云子脩。典籍。有心病。不仕居京。○父孟鋼〕

번역

명관(命官) 조광조(趙光祖)□ 남곤(南袞)□ 김훈(金絿)□ 김흡(金湜)갑과(甲科)생원 김□ 구(金□珌)〔원주에 “자는 자문(子文)인데, 한 사람은 자수(子脩)라고도 하였다. 전적(典籍)으로 심병이 있어 벼슬하지 않고 서울에 살았다. 아비는 맹강(孟鋼)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進士尹受亨〔原注:字衢仲。改名豐亨。湖堂,江原監司。號松月堂。○父碩輔〕

번역

진사 윤수형(尹受亨)-원주(原注)에 “자는 구중(衢仲)이고, 이름을 풍형(豐亨)으로 고쳤다. 호당(湖堂)ㆍ강원 감사(江原監司). 호는 송월당(松月堂)이다. 아비는 윤석보(尹碩輔)이다.” 하였다.-

원문

乙科三人進士宋□純〔原注:字守初。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號企村。又俛仰亭。〕父□泰進士許伯琦〔原注:字汝珍。同知監司。斥居水原。號浩齋。○父〕

번역

을과(乙科)에 진사로 급제한 세 사람이다. 송순(宋純)- 원주(原注) : 자는 수초(守初).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기촌(企村)- 또 부앙정(俛仰亭)이라고도 한다 -의 아버지 □태(□泰)와, 진사 허백기(許伯琦)- 원주 : 자는 여진(汝珍). 동지 감사로 수원(水原)에 쫓겨가 살았는데 호는 호재(浩齋)이다. ○ 아비 -

원문

生員權□迪〔原注:字君瑩。改名㻩。金海府使。居龍宮。○父〕

번역

생원 권필(權弼) - 원주(原註)에 “자는 군형(君瑩)인데 이름을 필(㻩)로 고쳤다. 김해 부사(金海府使)로서 용궁(龍宮)에 살았다.” 하였다.-○ 아비

원문

丙科十四人進士李壽福〔原注:字申之。永興府使。居金海。○父〕

번역

병과(丙科) 14인이다. 진사 이수복(李壽福)- 원주(原注)에 “자는 신지(申之)이고,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김해(金海)에 살았다.” 하였다. ○ 아비

원문

幼學成守琮〔原注:字叔玉。削籍。未筮仕。歿後追復。居京聽松堂。守琛弟。○父世純〕

번역

유학 성수종(成守琮)원주(原注)에 “자는 숙옥(叔玉)이다. 삭적(削籍)되어 벼슬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죽은 뒤에 추복(追復)되었다. 서울의 청송당(聽松堂)에 살았다.” 하였다. 성수침의 아우이다. ○ 아버지 성세순(成世純)

원문

生員尙□震〔原注:字起夫。領議政。號泛虛亭。諡成安。居林川。○父□甫〕

번역

생원 상진(尚震) - 원주(原注)에 “자는 기부(起夫)이다. 영의정으로 벼슬하였고, 호는 범허정(泛虛亭)이며, 시호는 성안(成安)이고, 임천(林川)에 살았다.” 하였다. ○ 아비는 상보(尙甫)이다.

원문

進士鄭□遍〔原注:字大受。府使。居善山。○父〕

번역

진사 정범(鄭範) - 원주(原注)에 “자는 대수(大受), 부사(府使)로 선산(善山)에 살았다.” 하였다. ○ 아비이다.-

원문

進士朴世煦〔原注:字仲溫。監司。居南陽。○父士華〕

번역

진사 박세확(朴世煦)-원주(原註)에 “자는 중온(仲溫)이고, 감사를 지냈으며 남양(南陽)에 살았다.” 하였다.-부(父)는 박사화(朴士華)이다.

원문

生員金就精〔原注:字子鎔。兵曹正郞。居善山。○父〕

번역

생원 김취정(金就精)- 원주(原注)에 “자는 자용(子鎔)이고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선산(善山)에 살았다.” 하였다. ○ 아버지는

원문

幼學鄭□源〔原注:字仲遠。承旨。○父有綱〕

번역

유학 정원(鄭源)- 원주(原注)에 “자는 중원(仲遠)이고 승지이다. 아버지는 정유강(鄭有綱)이다.” 하였다. -

원문

進士許□訥〔原注:字仁仲。奉常寺僉正。居水原。○父伯瑛〕

번역

진사 허불눌(許訥) - 원주(原注)에 “자는 인중(仁仲)이고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으로 수원(水原)에 산다.” 하였다. ○ 아비는 허백영(許伯瑛)이다.

원문

進士宋希奎〔原注:字天章。通政。牧使。居善山。號御溪。○父邦賢〕

번역

진사 송희규(宋希奎)-원주(原注)에 “자는 천장(天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고, 목사(牧使)로 선산(善山)에 살았으며, 호는 어계(御溪)이다. 아버지는 송방현(宋邦賢)이다.” 하였다.-

원문

幼學李夢弼〔原注:字殷卿。戶曹參判。居連山。○父孟元〕

번역

유학 이몽필(李夢弼)-원주(原注)에 “자는 은경(殷卿)이고, 호조 참판으로 연산(連山)에 살았다. 아비는 이맹원(李孟元)이다.” 하였다.-

원문

進士朴□翰〔原注:字奎甫。一云﨣夫。承文院判校。居永同。○父□峻〕〔原注:一云圭〕

번역

진사 박□한(朴□翰)-원주(原注)에 “자는 규보(奎甫)이다. 한 사람은 ‘규부(圭夫)’라고도 하였다.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로 영동(永同)에 살았다.” 하였다.-○ 아비는 □준(□峻)-원주에 “한 사람은 ‘규(圭)’라고 하였다.” 하였다.-

원문

幼學金光準〔原注:字淑藝。贊成。乙巳僞勳封君。後削。居尙州。○父〕

번역

유학 김광준(金光準)-원주(原注)에 “자는 숙예(淑藝). 찬성(贊成)이다. 을사년에 거짓으로 훈공 봉군(勳功封君)이 되었다가 뒤에 삭봉되었다. 상주(尙州)에 살았다.” 하였다.-부(父)

원문

進士金□埏〔原注:字季瑢。工曹佐郞。居尙州。○父〕

번역

진사 김-원문 빠짐.-(원주(原注)에 “자는 계용(季瑢)이다. 공조 좌랑으로 상주(尙州)에 산다.” 하였다.)-부(父)-

원문

生員高□雲〔原注:字從龍。刑曹佐郞。己卯名賢。居光州。霽峯敬命祖。○父〕

번역

생원 고운(高雲)- 원주(原注)에 “자는 종룡(從龍)이고 형조 좌랑이다. 기묘년 명현(名賢)으로 광주(光州)에 살았다.” 하였다. -제봉(霽峯) 경명(敬命)의 조부.-

248. 瑞蔥臺□賜宴座目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39D, ITKC_MO_0130A_A026_140A ...

원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原注:尙□震〕〔原注:號泛虛亭。科中宗。諡成安。木川人。〕

번역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사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世子師)〔원주(原注)에 상□진(尙□震)으로 되어 있다.〕〔원주에 “호는 범허정(泛虛亭)이다.”라고 하였다.〕 과중종(科中宗)의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목천(木川) 사람이다.

원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原注:李浚慶〕〔原注:號東皐。領相。諡忠正。廣州人。〕

번역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 - 원주(原注)에 이준경(李浚慶)이라고 하였다. - 호는 동고(東皐)이다. 영의정으로 재직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광주(廣州) 사람이다.

원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原注:沈通源〕〔原注:號▣▣連源弟。靑松人。〕

번역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 원주 : 심통원(沈通源)○ 원주: 호는 연원제(連源弟), 청송(靑松) 사람이다.

원문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靑陵府院君。〔原注:沈□鋼〕〔原注:國舅。諡翼孝。父連源。靑松人。〕

번역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청릉부원군(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靑陵府院君)- 원주(原注)에 심강(沈鋼)으로 되어 있다. -.- 원주에 국구(國舅)이다. 시호는 익효(翼孝)이다. 아버지는 연원(連源)이다. 청송(靑松) 사람이다. -

원문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知□經筵春秋館事,□世子貳師。〔原注:洪□暹〕〔原注:號忍齋。領相。諡景憲。南陽人。〕

번역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지경연춘추관사(議政府左贊成兼知經筵春秋館事)□세자이사(世子貳師)〔원주 : 홍□섬(洪□暹)〕〔원주 : 호는 인재(忍齋)이다. 영의정으로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남양 사람이다.〕

원문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光平君。〔原注:金明胤〕〔原注:光山人〕

번역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이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 광평군(光平君)김명윤(金明胤)광산 사람이다.

원문

資憲大夫。議政府右贊成,昌陽君。〔原注:曺光遠〕〔原注:判中樞。昌寧人。〕

번역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찬성 창양군(昌陽君)조광원(曺光遠)○ 원주(原注)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다. 창녕(昌寧)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資憲大夫。知中樞府事。〔原注:沈光彥〕〔原注:號鈍菴。吏判諡胡安。靑松人。〕

번역

자헌대부 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 - 원주(原註)에 ‘심광언(沈光彦)’이라 하였다. - - 원주에 ‘호는 돈암(鈍菴), 이조 판서로 시호를 호안(胡安)으로 받았고 청송(靑松)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

원문

資憲大夫。兵曹判書。〔原注:權轍〕〔原注:號雙翁軒。領相。諡康定。安東人。〕

번역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원주(原注)에 권철(權轍)이라 하였다. 원주에 “호는 쌍옹헌(雙翁軒)이다.”라고 하였다. 영의정으로 재임하였다.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안동 사람이다.〕

원문

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經筵事,□世子右賓客,錦陽君。〔原注:吳□謙〕〔原注:號菊齋。二相。諡貞簡。羅州人。〕

번역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금양군(錦陽君) - 원주(原注)에 오□겸(吳□謙)이라고 되어 있다. - - 원주에 ‘호는 옥재(菊齋)이다.’라고 되어 있다. 두 상신(相臣)이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나주 사람이다. -

원문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事,□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原注:元繼儉〕

번역

자헌대부 예조 판서 겸 지경연사(資憲大夫 禮曹判書兼知經筵事)ㆍ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ㆍ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다. 원주(元注)에는 ‘원계검(元繼儉)’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資憲大夫。刑曹判書。〔原注:趙彥秀〕〔原注:號信善堂。參贊。諡貞簡。楊州人。〕

번역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刑曹判書)- 원주(原注)에 조언수(趙彦秀)라고 하였다. -원주에 “호는 신선당(信善堂)이다.”라고 하였다. 참찬(參贊).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양주(楊州) 사람이다.

원문

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原注:李潤慶〕〔原注:號崇德齋。兵判。諡正獻。弟東皐。〕

번역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원주(原注)에 이윤경(李潤慶)이라고 하였다. -〔원주에 “호는 숭덕재(崇德齋)이고 병조 판서로 지냈으며,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아우는 동고(東皐)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原注:鄭惟吉〕〔原注:號林塘。左相。東萊人。〕

번역

자헌대부(資憲大夫)는 동지중추부사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 춘추관사를 맡는다. 원주(原注)에 정유길(鄭惟吉)이라고 하였다. 원주에 ‘호는 임당(林塘)이다.’라고 하였다. 좌상은 동래 사람이다.

원문

資憲大夫。知中樞府事。〔原注:安□瑋〕

번역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원주(原注)에 안위(安瑋)로 되어 있다. -

원문

資憲大夫。漢城判尹。〔原注:李夢亮〕

번역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 판윤(漢城判尹)- 원주(原注)에 이몽량(李夢亮) -이다.

원문

嘉義大夫。平陽君兼五衛都摠府副摠管。〔原注:金舜皐〕〔原注:順天人〕

번역

가의대부(嘉義大夫) 평양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平陽君兼五衛都摠府副摠管)- 원주(原注)에 김순고(金舜皐)라고 되어 있다. -원주에 순천 사람이다.-

원문

嘉善大夫。僉知中樞府事。〔原注:梁允義〕

번역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嘉善大夫僉知中樞府事) - 원주(原注)에 양윤의(梁允義)라고 되어 있다. -

원문

嘉善大夫。行義興衛大護軍。〔原注:宋孟璟〕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의흥위 대호군(行義興衛大護軍) - 원주에 “송나라 맹경(孟璟)이다.”라고 하였다. -

원문

嘉善大夫。行成均館大司成。〔原注:金□澍〕〔原注:號寓庵。又萬窩。花山君。安東人。〕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행 성균관 대사성(行成均館大司成)김수(金澍)원주에 김□수가 있다. 호는 우암(寓庵), 또 만와(萬窩)ㆍ화산군(花山君)이다. 안동 사람이다.

원문

嘉善大夫。行虎賁衛大護軍。〔原注:金景錫〕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호분위 대호군(行虎賁衛大護軍)- 원주(原注)에 김경석(金景錫)이라고 하였다. -

원문

嘉善大夫。行義興衛大護軍。〔原注:吳□誠〕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행 의흥위 대호군(行義興衛大護軍)- 원주(原註)에 오□성(吳□誠)이라 되어 있다. -

원문

嘉善大夫。行義興衛大護軍。〔原注:趙安國〕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의흥위 대호군(行義興衛大護軍)- 원주(原註)에 조안국(趙安國)이라고 하였다. -

원문

嘉善大夫。行義興衛大護軍。〔原注:李世麟〕〔原注:知敦寧〕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의흥위 대호군(行義興衛大護軍) - 원주(原注)에 이세린(李世麟)이라고 하였다.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 원주에 지돈녕부사라고 하였다. -

원문

嘉善大夫。虎賁衛上護軍。〔原注:朴永俊〕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호분위 상호군(虎賁衛上護軍)- 원주(原注)에 박영준(朴永俊) -

원문

嘉善大夫。漢城府左尹。〔原注:任□說〕〔原注:號竹岸。判尹。諡文靖。豐川人。〕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원주(原注)에 임(任)으로 시작하는 글자가 빠져 있다. -.- 호는 죽안(竹岸), 판윤(判尹)이다.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풍천(豐川) 사람이다.

원문

嘉善大夫。兵曹參判。〔原注:李□戡〕〔原注:大司憲。羽溪人。〕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 원주(原註)에 이□(李□)로 되어 있다. - 원주(原註)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우계(羽溪) 사람이다. -

원문

嘉善大夫。京畿道觀察使〔原注:愼希復〕〔原注:號梅川。諡莊貞。居昌人。〕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원주(原注) : 신희복(愼希復) -.- 원주(原注) : 호는 매천(梅川), 시호는 장정(莊貞), 거창(居昌) 사람이다. -.-

원문

嘉善大夫。行掌隷院判決事。〔原注:沈守慶〕〔原注:號聽天堂。右相。豐山人。龍門門人。〕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는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행하였다. - 원주(原註)에 심수경(沈守慶)이라 하였다. - - 원주(原註)에 청천당(聽天堂)이라고 불렀다. 우상(右相)은 풍산(豐山) 사람으로 용문(龍門)의 문인이다. -

원문

嘉善大夫。吏曹參判。〔原注:金□鎧〕〔原注:號獨松亭。吏判。光山人。〕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 김갑개(金甲鎧) - 원주(原注)에 ‘독송정(獨松亭)’이라 호하고, 이조 판서이다. 광산 사람이다.”하였다.-

원문

嘉善大夫。漢城府左尹。〔原注:金貴榮〕〔原注:號東園。明宗科。左相。上洛君。尙州人。〕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원주(原注)에 김귀영(金貴榮)- 원주에 ‘호는 동원(東園). 명종(明宗) 때 과거를 통해 급제하였다. 좌상(左相)을 지냈으며, 낙군(洛君) 상주(尙州)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嘉善大夫。牙善君兼五衛都摠府副摠管。〔原注:魚季瑄〕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아선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牙善君兼五衛都摠府副摠管)- 원주(原注)에 어계선(魚季瑄)이라 하였다. -

원문

嘉善大夫。禮曹參判。〔原注:李□樑〕

번역

가선대부 예조 참판 이□양(李□樑)이다.

원문

嘉善大夫。戶曹參判。〔原注:李文馨〕

번역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 이문형(李文馨)이다. 주 : 원문에는 문형(文馨)으로 되어 있다.

원문

通政大夫。丞政院都承旨,知製□敎兼藝文館直提學。〔原注:姜□昱〕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승정원 도승지, 지제교 겸 예문관 직제학이다.- 원주(原注)에 강□욱(姜□昱) -

원문

通政大夫。丞政院右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原注:柳昌文〕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승정원 우승지, 지제교 겸 경연관(知製敎兼經筵官), 참찬관이다. 주 : 유창문(柳昌文)

원문

通政大夫。丞政院左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原注:李希儉〕〔原注:號菊齋。兵判。全州人。〕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승정원의 좌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관, 참찬관이다. 원주(原注) : 이희검(李希儉)이다. 원주 : 호는 국재(菊齋)이고 병조 판서였다. 전주 사람이다.

원문

通政大夫。丞政院右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原注:盧□楨〕〔原注:號玉溪。諡文孝。豐川人。〕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승정원 우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관, 참찬관이다.- 원주(原注)에 노□정(盧□楨)- 원주에 ‘호는 옥계(玉溪)이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풍천(豐川)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

원문

通政大夫。丞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原注:奇大恒〕〔原注:幸州人。高峯弟。〕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관(兼經筵官), 참찬관(參贊官)이다.- 원주(原注)에 “기대항(奇大恒)이다.”라고 하였다. -원주에 “행주(幸州) 사람으로 고봉(高峯)의 아우이다.”라고 하였다. -

원문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原注:姜士尙〕〔原注:右相。諡貞靖。晉州人。〕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知製敎)이다. - 원주(原注)에 강사상(姜士尙)이라고 하였다. - 원주(原注)에 우의정(右議政)이다. 시호는 정정(貞靖)이고 진주(晉州) 사람이다. -

원문

折衝將軍,龍驤衛大護軍。〔原注:尹毅中〕〔原注:號駱村。贊成。海平人。〕

번역

절충장군 용양위 대호군(折衝將軍龍驤衛大護軍)○ 원주(原注)에 “윤의중(尹毅中)”이라 하였다. ○ 원주에 “호는 낙촌(駱村)이다. 찬성(贊成)으로 해서 평(海平)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原注:李重慶〕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사간원 대사간이다.- 원주(原注)에 “이중경(李重慶)이다.” 하였다. -

원문

通政大夫。兵曹參知。〔原注:朴大立〕〔原注:號無違堂。中宗科。二相。咸陽人。〕

번역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지(兵曹參知)○ 원주(原注)에 “박대립(朴大立)이다.”라고 하였다. ○ 원주에 “호는 무위당(無違堂)이다. 중종(中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두 번 정승을 지냈다. 함양(咸陽)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弘文館應敎。〔原注:洪天民○號栗亭。承旨。南陽人。石壁之子。〕

번역

통훈대부는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홍문관 응교이다.- 원주(原注)에 “홍천민(洪天民)은 호가 율정(栗亭)으로 승지이며 남양 사람이고 석벽(石壁)의 아들이다.” 하였다. -

원문

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原注:任□尹〕

번역

통훈대부(通訓大夫)는 예원 좌통례(禮院左通禮)- 원주(原註)에 임(任) 자가 빠졌다. -이다.

원문

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原注:權□信〕

번역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헌부 집의(行司憲府執義)이다.- 원주(原註)에 권신(權信)이라고 되어 있다. -

원문

通訓大夫。司諫院司諫。〔原注:李世琳〕承旨。陜川人。

번역

통훈대부(通訓大夫)는 사간원 사간이다.- 원주(原注)에 “이세림(李世琳)이다.”라고 하였다. -승지(承旨)는 합천(陜川) 사람이다.

원문

通訓大夫。□世子侍講院輔德。〔原注:趙光彥〕

번역

통훈대부(通訓大夫)□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원주(原注)에 조광언(趙光彦)이라고 되어 있다. -

원문

中訓大夫。弘文館典翰知製□敎。〔原注:成義國〕

번역

중훈대부(中訓大夫)는 홍문관 전한지제교(弘文館典翰知製敎)이다.-원주에 성의국(成義國)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朝散大夫。司憲府掌令。〔原注:宋□賀〕

번역

조산대부(朝散大夫)는 사헌부 장령이다.-원주에 송(宋)의 □하(賀)가 있다.-

원문

朝散大夫。司憲府掌令。〔原注:黃□琳〕

번역

조산대부(朝散大夫)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다.-원주에 황림(黃琳)이 있다.-

원문

禦侮將軍,五衛都摠府經歷。〔原注:朴□坤〕

번역

어무장군(禦侮將軍)은 오위도총부의 경력이다.- 원주(原注)에 박□곤(朴□坤)이라고 되어 있다. -

원문

奉正大夫。行司憲府持平。〔原注:金慶元〕

번역

봉정대부(奉正大夫) 행 사헌부 지평(行司憲府持平)- 원주(原注)에 김경원(金慶元)이라고 되어 있다. -

원문

奉列大夫。行議政府檢詳,知製□敎。〔原注:朴應男〕〔原注:號艮齋。司諫。諡文靖。潘南人。〕

번역

봉열대부(奉列大夫) 행 의정부 검상지제교(行議政府檢詳知製敎)○ 원주(原注)에 박응남(朴應男)이라 하였다. ○ 원주(原注)에 호는 간재(艮齋)이다. 사간(司諫)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반남(潘南) 사람이다.

원문

朝散大夫。行吏曹佐郞,知製□敎。〔原注:丁胤禧〕〔原注:號顧菴。贊成。祖玉亨。羅州人。〕

번역

조산대부(朝散大夫)이조 좌랑(吏曹佐郞), 지제교(知製敎)이다.- 원주에 “정윤희(丁胤禧)- 호는 고암(顧菴). 찬성(贊成)이다. 조부 옥형(玉亨)은 나주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다.

원문

中訓大夫。行兵曹正郞兼承文院校理。〔原注:金添慶〕〔原注:號東岡。禮判。諡肅簡。江陵人〕

번역

중훈대부(中訓大夫)는 병조 정랑 겸 승문원 교리이다. 원주(原註)에 김첨경(金添慶)이라 하였다. 원주에, 호는 동강(東岡)이고 예조 판서로 지냈으며 시호는 숙간(肅簡)이고 강릉 사람이다.”하였다.

원문

通德郞。兵曹正郞。〔原注:金悌甲〕〔原注:號毅齋。明宗科。壬辰節死。諡文肅。安東人。〕

번역

통덕랑(通德郞)은 병조 정랑이다. 원주에는 김제갑(金悌甲)이라고 되어 있다. 원주에는 호는 의재(毅齋)이며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하고 임진년에 절사하였으며 시호가 문숙(文肅)이고 안동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奉訓郞。守司憲府持平。〔原注:金億齡〕

번역

봉 훈랑(奉訓郞)이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원주(原註)에 “김억령(金億齡)이다.”라고 하였다. -

원문

朝散大夫。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原注:鄭□惕〕〔原注:號雙谷。承旨。海州人。〕

번역

조산대부(朝散大夫)홍문관 부교리 지제교(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 원주(原注)에 정(鄭)□ 척(惕)이라고 되어 있다. -호는 쌍곡(雙谷). 승지. 해주 사람이다.- 원주에 호가 쌍곡(雙谷)이라 되어 있다.

원문

奉正大夫。行弘文館修撰。〔原注:姜克誠〕〔原注:號醉竹。舍人。晉州人。仁齋希顏之孫。〕

번역

봉정대부(奉正大夫)행 홍문관 수찬(行弘文館修撰)강극성(姜克誠)○ 원주에 ‘취죽(醉竹)’이라 호한다. ○ 원주에 ‘사인(舍人)으로 진주(晉州) 사람이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의 손자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宣敎郞。守司諫院正言。〔原注:具思孟〕〔原注:號八谷。二相。諡文懿。綾城人。〕

번역

선교랑(宣敎郞)은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 원주에 구사맹(具思孟)- -호는 팔곡(八谷)이다. 두 번 재상이 되었고,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능성(綾城) 사람이다.- 원주 -

원문

宣敎郞。守司諫院正言。〔原注:李□選〕

번역

선교랑(宣敎郞)은 사간원 정언을 지낸다. 원주(原注)에 이□선(李□選)이라고 되어 있다.

원문

宣務郞。弘文館修撰,知製□敎。〔原注:李陽元〕〔原注:號鷺渚。領相。諡文憲。全州人。〕

번역

선무랑(宣務郞)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지제교(知製敎)이다.- 원주(原注)에 “이양원(李陽元)- 호는 노저(鷺渚). 영의정으로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며 전주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 원주에 “지제교(知製敎)는 지제교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

원문

禦侮將軍,五衛都摠府都事。〔原注:崔汝舟〕〔原注:郡守。海州人。靜菴門人。〕

번역

어무장군(禦侮將軍)은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이다.- 원주(原注)에 최여주(崔汝舟)- 원주(原注)에 군수(郡守)로 해주 사람이며, 정암의 문인이다. -

원문

承義郞。兵曹佐郞知製□敎。〔原注:李後白〕〔原注:號靑蓮。諡文靖。吏判。延安人。〕

번역

승의랑(承義郞)병조 좌랑 지제교(兵曹佐郞知製敎) - 원주(原註)에 이후백(李後白)이라 하였다. - - 원주(原注)에 청련(靑蓮)으로 호칭하고, 문정(文靖)으로 시호를 내렸다. 이조 판서이다. 연안 사람이다. -

원문

宣務郞。□世子侍講院司書。〔原注:河晉寶〕

번역

선무랑(宣務郞)은 세자시강원 사서이다.- 원주(原註)에 “하진보(河晉寶)”라 하였다. -

원문

啓功郞。守承政院注書。〔原注:尹根壽〕〔原注:號月汀。二相。諡文貞。海平人。〕

번역

계공랑(啓功郞)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지냈다. - 원주(原注)에 윤근수(尹根壽)- 원주에 “호는 월정(月汀)이다. 두 번 정승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해평(海平) 사람이다.” 하였다. -

원문

啓功郞。守承政院注書。〔原注:朴希立〕

번역

계공랑(啓功郞)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원주(原注)에 박희립(朴希立) -를 지키고 있었다.

원문

宣務郞。行□世子侍講院說書。〔原注:崔弘僴〕

번역

선무랑(宣務郞)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설서(說書)를 행하였다.- 원주(原註)에 최홍질(崔弘僴)이라고 하였다. -

원문

宣敎郞。行弘文館著作兼春秋館記事官。〔原注:尹仁涵〕〔原注:號竹齋。明宗科。戶判。坡平人。〕

번역

선교랑(宣敎郞)은 홍문관(弘文館)의 저작 겸춘추관 기사관(著作兼春秋館記事官)을 행하였다. 원주(原注)에 윤인함(尹仁涵)이라 하였다. 원주에 ‘호는 죽재(竹齋)이다.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호조 판서이다. 파평(坡平)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宣敎郞。藝文館待敎。〔原注:李齊閔〕〔原注:明宗科。三宰。全州人。〕

번역

선교랑(宣敎郞)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이다.- 원주(原注)에 “이제민(李齊閔)이다.”라고 하였다.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삼재(三宰)는 전주(全州) 사람이다.- 원주에 “삼재(三宰)는 전주(全州)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

원문

宣敎郞。行弘文館正字。〔原注:尹斗壽〕〔原注:號梧陰。領相。諡文靖。海平人。〕

번역

선교랑(宣敎郞)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행하였다. 원주(原註)에 윤두수(尹斗壽)라고 하였다. 원주에, 호는 오음(梧陰)이며 영의정으로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해평(海平) 사람이다.”하였다.

원문

通仕郞。行藝文館檢閱。〔原注:黃廷彧〕〔原注:號芝川。吏判。諡文貞。長水人。〕

번역

통사랑(通仕郞)은 행예문관 검열이다. 원주(原注)에 황정욱(黃廷彧)이라 하였다. 원주에, 지천(芝川)으로 호를 삼았다. 이조 판서로 벼슬하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장수(長水) 사람이다.”하였다.

원문

維我□主上殿下勤於爲治十有六年。朝野寧謐。時多暇豫。乃於庚申九月十七日。設□帳殿於昌德宮之瑞蔥臺。□禁籞曉闢。玉露浥塵。日出初。□上乘肩輿就黼座。六幕高搴。風日淸美。菊綴金而繞砌。楓染霜而粧林。前置法酒。樂奏於後。宰執以下入侍左右。文武皆與焉。太常供具。黃門□宣勸。□御筆降題。□令在座者賦詩以進。又□令武臣耦射以觀其能。散花簪帽。榮光可掬。酒數巡。□命三品以上升陛上壽。回杯訖。輒□親輟御饌以□賜之。無不飽□德飽恩。以至感泣。□上亦爲之逌然。日將暮。□命出內帑虎豹皮及太僕馬匹或物。□頒賜貴臣。以賞應製。武才中格者有差。加□賜貴近御燭各一條而罷。醉扶歸路。蠟炬盈街。觀者以爲近世以來所罕見也。翌日。詣□闕。上箋謝□恩。諸公因與謀曰。遭際之盛。感戴之深。必轉圖畫。然後可以久於其傳。遂以繪事。屬之於禮曹。甲子。軸始粧䌙。嗚呼。感□恩之不足則誇耀之。誇耀之不足則圖畫之。自今以往。掛諸壁寓諸目。尋常對越。何莫非忠孝之念所由激乎。此圖畫之不能已也。

번역

우리 □ 주상 전하께서 16년 동안 정치를 부지런히 하신 덕에 조정과 민간이 편안하고 태평하여 한가한 때가 많았다. 이에 경신년 9월 17일 창덕궁 서총대(瑞蔥臺)에 □ 장전(帳殿)을 설치하였다. □ 금문을 새벽에 열고 나니 이슬이 먼지를 적셨다. 해가 막 떠오를 때 □ 상께서 견여를 타고 보좌에 나아가니 여섯 개의 휘장이 높이 펄럭이고 바람과 햇살이 맑고 아름다웠다. 국화는 황금으로 엮어 섬돌을 둘렀고 단풍은 서리에 물들어 숲을 꾸몄으며, 앞에는 법주(法酒)를 진설하고 뒤에서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재신(宰臣)과 집신(執臣) 이하 입시한 좌우의 문무백관이 모두 참여하였는데, 태상(太常)이 음식을 마련하고 황문(黃門)이 □ 선권(宣勸)하였다. □ 어필(御筆)을 내리고 □ 영(令)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고, 또 □ 영은 무신에게 짝지어 활쏘기를 하게 하여 그 능력을 보았다. 꽃과 비녀와 모자를 뿌려 주니 영광이 손에 잡힐 듯하였고, 술을 두어 번 돌리고 □ 명하여 3품 이상으로 하여금 섬돌에 올라 축수를 올리게 하였다. 잔을 돌린 뒤에는 곧바로 □ 친히 어찬(御饌)을 중지하고 □ 하사하여 모두가 은덕에 배부르고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 상께서도 기뻐하셨다. 해가 저물려 할 때 □ 명하여 내탕고(內帑庫)의 호랑이와 표범 가죽과 태복시(太僕寺)의 말이나 물건을 □ 하사하고, 귀신에게는 응제(應製)에 합격한 것을 상으로 주었으며, 무예가 뛰어난 자에게는 차등을 두어 □ 사귀근(賜貴近)하게 하고 어촉(御燭) 각 1조를 하사하였다. 파하고 취하여 부축받고 돌아가는 길에는 촛불이 거리를 가득 채웠으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이튿날 □ 궁궐에 나아가 상소하여 □ 은혜에 감사하니, 여러 공이 인하여 모의하기를 “이렇게 성대한 때를 만나 깊이 감격하였으니 반드시 그림으로 그려야만 오래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화공(畫工)을 예조에 소속시켰다. 갑자년에 비로소 축(軸)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아아, □ 은혜에 감격하여 뽐내기에 부족하면 뽐내고, 뽐내기에 부족하면 그림으로 그려서 지금부터 벽에 걸어 두고 눈에 익히며 평상시 마주할 때마다 충효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겠는가.

원문

甲子孟夏旣望。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原任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兼知□經筵,春秋館事洪暹。謹識。

번역

갑자년 6월 15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원임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겸 지경연사춘관사(議政府左贊成原任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兼知經筵春秋館事) 홍섬은 삼가 적는다.

249. 癸丑甲契座目〔原注:甲契軸原本。世傳于嗣孫家。〕

문체: 雜著類 / 其他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44C, ITKC_MO_0130A_A026_144D

원문

豐川任弼亨〔原注:字亨之〕今僉知中樞府事〔原注:正月一日生〕

번역

풍천(豐川) 임필형(任弼亨)- 원주(原注)에 “자는 형지(亨之).” 하였다. -지금은 첨지중추부사(今僉知中樞府事)- 원주에 “1월 1일에 태어났다.” 하였다. -이다.

원문

慶州金萬億〔原注:字希之〕前忠翊府都事〔原注:正月十六日生〕

번역

경주(慶州) 김만억(金萬億)- 원주(原注)에 “자는 희지(希之).”라 하였다. -전 충익부 도사(前忠翊府都事)- 원주에 “1월 16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

원문

羅州朴□紹〔原注:字彥曹。號冶川。〕今司諫院司諫知製敎〔原注:二月十四日生〕

번역

나주 박소(羅州朴紹)지금의 사간원 사간 지제교이다. 원주(原注)에 “자는 언조(彦曹), 호는 야천(冶川)이다.”라고 하였다. 2월 14일생이다.

원문

昌寧成守琛〔原注:字仲玉。號聽松。〕前積城縣監〔原注:二月十九日生〕

번역

창녕 성수침(成守琛)-원주(原注)에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이라 하였다.-전 적성 현감(前積城縣監)-원주에 “2월 19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원문

海平尹□忭〔原注:字懼夫。知足菴。〕今淸州牧使〔原注:三月十日生〕

번역

해평 윤구(尹忭)-원주(原注)에 “자는 구부(懼夫)이고 지족암(知足菴)이다.” 하였다.-지금은 청주 목사(淸州牧使)-원주(原注)에 “3월 10일에 태어났다.” 하였다.-

원문

驪興閔齊仁〔原注:字希中。號立巖。〕今議政府左贊成〔原注:三月十三日生〕

번역

여흥(驪興) 민제인(閔齊仁)-원주(原注)에 “자는 희중(希中)이고, 호는 입암(立巖)이다.” 하였다.-지금은 의정부 좌찬성이다.-원주에 “3월 13일에 태어났다.” 하였다.-

원문

礪良宋之翰〔原注:字子藩〕前虎賁衛護軍〔原注:三月十八日生〕

번역

여량(礪良) 송지한(宋之翰)- 원주(原注)에 자는 자번(子藩)이다. -전 호분위 호군(前虎賁衛護軍)- 원주(原注)에 3월 18일에 태어났다. -

원문

慶州李□興〔原注:字楨夫〕今桃源察訪〔原注:五月二十一日生〕

번역

경주(慶州) 이□흥(李□興)-원주(原注)에 자는 진부(楨夫)이다.-지금은 도원 찰방(桃源察訪)-원주에 5월 21일생이라고 하였다.-

원문

木川尙□震〔原注:字起夫。號泛虛亭。〕今議政府左議政〔原注:六月五日生〕

번역

목천 상진(木川尙震)-원주에 “자는 기부(起夫)이고, 호는 범허정(泛虛亭)이다.” 하였다.-지금 의정부 좌의정-원주에 “6월 5일에 태어났다.” 하였다.-

원문

光州金明胤〔原注:字晦伯〕今議政府右參贊〔原注:六月十四日生〕

번역

광주(光州) 김명윤(金明胤)- 원주(原注) : 자는 회백(晦伯)이다. 지금 의정부 우참찬 - 원주 : 6월 14일에 태어났다. -

원문

金海許伯琦〔原注:字汝珍。號浩齋。〕今龍驤衛大護軍〔原注:七月十二日生〕

번역

김해(金海) 허백기(許伯琦)- 원주(原註)에 “자는 여진(汝珍), 호는 호재(浩齋)”라고 하였다. -지금의 용양위 대호군(龍驤衛大護軍)- 7월 12일에 태어났다. -

원문

文化柳□健〔原注:字天行〕今工曹佐郞〔原注:七月二十二日生〕

번역

문화(文化) 유건(柳健)-원주(原注)에 “자는 천행(天行)”이라 하였다.-지금의 공조 좌랑이다.-원주에 “7월 22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원문

咸陽朴世蓊〔原注:字景雲〕今吏曹參議〔原注:八月八日生〕

번역

함양(咸陽) 박세옹(朴世蓊)-원주(原注)-자는 경운(景雲)이다. 지금 이조 참의(吏曹參議)-원주-8월 8일에 태어났다.-

원문

鷄林崔景弘〔原注:字毅翁〕今承文院正字〔原注:八月二十四日生〕

번역

계림(鷄林) 최경홍(崔景弘)-원주(原注)에 “자는 의옹(毅翁)”이라 하였다.-지금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원주에 “8월 24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원문

竹山安從琠〔原注:字而厚〕今宗親府典籤〔原注:九月十四日生〕

번역

죽산 안종신(安從琠) - 원주(原注)에 ‘자이후(字而厚)’라 하였다. - 지금의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 원주에 ‘9월 14일 생’이라 하였다. -

원문

東萊鄭希弘〔原注:字彥毅〕今義興衛護軍〔原注:九月▣▣▣生〕

번역

동래 정희홍(鄭希弘)-원주에 “자는 언의(彦毅)이다.”라고 하였다.-지금 의흥 위호군(義興衛護軍)-원주에 “9월 20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원문

全州柳世龜〔原注:字應祥〕今宗親府典籤〔原注:九月二十三日生〕

번역

전주(全州) 유세귀(柳世龜)-원주에는 자가 응상(應祥)이라 하였다.-지금의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원주에는 9월 23일에 태어났다. -

원문

羽溪李光軾〔原注:字伯欽〕今同知中樞府事〔原注:九月三十日生〕

번역

우계 이광식(李光軾)- 원주(原註)에 “자는 백흠(伯欽)이다.” 하였다. -지금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원주에 “9월 30일에 태어났다.” 하였다. -이다.

원문

德水張□玉〔原注:字子剛。號柳亭。〕今承文院判校知製敎〔原注:十月三日生〕

번역

덕수(德水)장옥(張玉)-원주에 “자는 자강(子剛)이고, 호는 유정(柳亭)이다.”라고 하였다.-지금 승문원 판교 지제교(承文院判校知製敎)-원주에 “10월 3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원문

唐城洪德演〔原注:字叔容〕今永興大都護府使〔原注:十月二十七日生〕

번역

당성(唐城) 홍덕연(洪德演)-원주에 “자는 숙용(叔容)”이라 하였다.-지금의 영흥 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원주에 “10월 27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원문

新平宋□純〔原注:字守初。號企村。〕前同知中樞府事〔原注:十一月十四日生〕

번역

신평 송순(宋純) - 원주(原注)에 “자는 수초(守初), 호는 기촌(企村).”이라 하였다. - 전 동지중추부사(前同知中樞府事) - 원주에 “11월 14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

원문

延安李□巙〔原注:字士高。號靜軒。〕今掌隷院判決事〔原注:十一月十八日生〕

번역

연안(延安) 이□암(李□巖)-원주에 “자는 사고(士高), 호는 정헌(靜軒)”이라 하였다.-이 지금 예원 판결을 맡고 있다.-원주에 “11월 18일에 태어났다.” 하였다.-

원문

順天李思曾〔原注:字魯卿〕今慶尙左兵使〔原注:十二月二日生〕

번역

순천(順天) 이사증(李思曾)-원주에 “자는 노경(魯卿).”이라 하였다.--지금의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원주에 “12월 2일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원문

豐山洪思遜〔原注:字讓仰〕今滿浦僉使〔原注:▣▣▣▣▣生〕

번역

풍산(豐山) 홍사손(洪思遜)-원주에 “자는 양앙(讓仰)”이라 하였다.-지금은 만포 첨사(滿浦僉使)-원주에 “- - - - -생(生)이다.”라 하였다.-

원문

昂藏共作地行仙。算老重經癸丑年。官有卑高尊齒長。飮無多少任天眞。膻葷何必勝鮭菜。嘯詠猶堪替管絃。眞率家風柯不遠。聚蚊何許肆瓊筵。

번역

우뚝하고 늠름하여 함께 지상의 신선이 되었으니 나이 계산해 보니 거듭 계축년을 지냈네 관직은 높고 낮음 있으나 나이는 존장이고 술은 많고 적음 없으니 천진에 맡겨 두었네 비린내 나는 음식 어찌 꼭 생선과 채소로 이기랴 읊조리는 시가 오히려 관현악을 대신할 만하네 참되고 솔직한 가풍이 멀리 가지 않았는데 어디서 모여든 모기 떼가 좋은 잔치 자리를 차지하는가

250. 泛虛亭集跋[朴奎和]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46B, ITKC_MO_0130A_A026_146C

원문

明廟名臣泛虛亭尙相公先生遺蹟之藏于家者凡若干。今其肖孫渭。傷其遺落不完。乃廣蒐李朝實錄及各家文蹟。洽爲九卷四冊。於是乎先生之實蹟略具矣。嗚呼。其勳業之嵬赫。文章之彪炳。固已膾煮於國人之口。後更千百載。有不可磨滅者。則何待乎文字之傳也。雖然。先生之勳業文章。抑有所本焉。世之欲求其本者。不可以無事於此編也。先生之沒也。我先祖駱村公。以詩哭之。首揭以忠孝二字。可謂知先生。亦可謂知有所本矣。古有曰。夫子之道。忠恕而已矣。又有曰。堯舜之道。孝弟而已矣。蓋恕者。忠之推也。弟者。孝之推也。而已矣者。竭盡而無餘之辭也。然則忠孝二者。實堯舜孔孟之道。而不可以有餘不足言之者也。公之當日所行之道。非有它焉。而駱村公實知之。故首發之者然也。後之讀是集者。寧可不知其所本。而徒慕其勳業之巍然。文章之炳然而已哉。奎之淺陋無狀。猥荷渭君之索一言於末簡。特以事契之重。不可終辭。僭率如此。告我同志。欲其知古所謂三不朽者。先生實兼有之而得其本焉。

번역

명묘(明廟)의 명신 범허정 상상공(尙相公) 선생의 유적(遺蹟)이 집에 보관된 것이 몇 가지가 되는데, 지금 그 손자 위(渭)가 유실되어 온전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이조 실록과 각가의 문적을 널리 수집해서 구권 사책으로 완성하였다. 이에 선생의 실제 행적이 대략 갖추어졌다. 아아, 선생의 높은 공훈과 빛나는 문장은 진실로 나라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천백 년이 지난 뒤에도 마멸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문자로 전해지기를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공훈과 문장도 본보기가 있는 법이니 세상에서 그 본보기를 구하고자 하는 자들은 이 책을 무심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 선조 낙촌공(駱村公)이 시로 곡하면서 맨 앞에 충효 두 글자를 내걸었으니, 선생을 잘 안 것이고 또한 본보기가 있는 것을 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뿐이다.”라고 하였고 또 “요순의 도는 효제(孝弟)뿐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서(恕)는 충(忠)을 미루어 행한 것이고 제(弟)는 효(孝)를 미루어 행한 것이며, 뿐이다(而已)는 다하여 남김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충효 두 가지는 실로 요순 공맹의 도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이 당시에 행한 도가 다른 것이 아니었는데 낙촌공이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맨 앞에 내걸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는 후세 사람들은 어찌 그 본보기를 모르고 단지 선생의 높은 공훈과 빛나는 문장만을 흠모하고 말겠는가. 나는 천박하고 못난 자질로 외람되이 위군(渭君)에게 부탁을 받아 말미에 한마디 말을 쓰게 되었는데, 다만 일이 중대하여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이렇게 참람하게 하였으니,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고하노니 옛날에 이른바 삼불후(三不朽)를 선생이 실로 겸비하여 그 본보기를 얻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원문

昭和十六年辛巳仲春下澣。凝川後學朴奎和。謹跋。

번역

소화(昭和) 16년 신사년 중춘 하강(下澣)에 응천 후학 박규화는 삼가 발문한다.

251. 跋[黃義敦]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嘗聞夫泛虛亭尙成安公先生。於李朝□明宗時。在相位十五年之久。而以勳業德望。孚於君而洽乎民。街童走卒。亦莫不誦其字而記其功也。然文獻湮缺。先生之盛德宏謨。或略而未詳。隱而不著。人多以是爲憾。今先生之裔孫渭。發憤於此。考諸史乘。傍搜古典。得先生之詩文與紀蹟若干編。將附剞劂。以謀永傳。謂余慕先生之風不後於人。且於蒐集遺蹟。不無一助之緣。要一言之識。故不敢以不文辭。謹敍如右。

번역

일찍이 듣건대, 허정(虛亭) 상성안공(尙成安公) 선생은 이조(李朝) 명종(明宗) 때에 재상으로 15년이나 오래 있었는데, 공훈과 덕망이 임금에게 신뢰를 받고 백성들에게 흡족하여 길거리의 아이와 종들도 모두 그의 이름을 외우고 그 공을 기억하였다 한다. 그러나 문헌이 빠져서 선생의 성대한 덕과 큰 계책이 대략만 있고 자세하지 않아 드러나지 않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이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이제 선생의 후손 위(渭)가 이에 분발하여 사적(史籍)을 상고하고 곁에서 고전(古典)을 찾아 선생의 시문과 기적(紀蹟) 몇 편을 얻어 장차 간행하여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 나에게 “선생의 풍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남보다 뒤지지 않으며, 또 유적을 수집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인연이 있다.”라고 말하기에 한마디로 기록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므로 감히 문장을 갖추지 못하고 삼가 위와 같이 서술한다.

원문

昭和十六年辛巳六月□日。後學黃義敦。謹跋。

번역

소화 16년 신사 6월 □일에 후학 황의돈은 삼가 발문을 올립니다.

252. 跋[尙利鉉]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47A, ITKC_MO_0130A_A026_147B

원문

凡有祖先偉業美德。而克勉其壽傳於世者。誠賁先裕後之道。而書所謂迓述祖德。亦是義也。況有關於世道風敎者。則可不勖哉。我十一世祖泛虛亭□府君。旣賦以應世之姿。天分絶倫。學術純正。際遇明時。歷事□三朝。特以文武全才。見重於君上。出帥藩閾。入據廟堂。秉均鼎軸十五年。致君澤民。化洽一國。業垂千載。至今東國人人雖樵牧輿儓。莫不口誦其德。逸話奇談。處處相傳。而文獻散佚無徵。可勝歎哉。三從姪渭。嘗惕然傷之。孶孶裒輯。已有數十星霜于玆矣。嗚呼。今焉世脩代夐。物換星移。已爲散沒於數百載之前者。可得其萬一歟。雖然。大寶堙沒而必現。大德久後而愈彰。理數之然也。□府君手澤遺墨之傳於世者。實蹟遺事之著明於賢集野史者。往往出於意想之表。而五百年祕史。亦現於時。□府君謀國衛世之大模。載錄於簡冊者。得以輯之。果非寶不沒光。德不晦迹者乎。渭旣編之而歎曰。搜拾恐有未盡。校勘亦多不精。然時不可緩也。謀付手民爲急。不肖年今垂耄。一朝溘然。不得及見其完事。則將爲冥恨無窮矣。爲是愈懼。夯出些力。以相斯役。竊自幸與爲於慕先垂後之業也。

번역

무릇 조상의 위대한 업적과 아름다운 덕이 있어 그것을 힘써 세상에 전하는 것은 참으로 선조를 빛내고 후손을 풍요롭게 하는 도리이니, 책에서 말한 ‘선대의 덕을 계승한다.’라는 것도 의리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세도(世道)와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면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11대조 범허정(泛虛亭)□부군(府君)께서는 이미 세상에 응할 자질을 타고나 천품이 비범하고 학술이 순정(純正)하였으며, 명철한 임금을 만나 세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다. 특히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군상에게 중시되어 지방관으로 나가기도 하고 묘당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15년 동안 정승의 자리를 맡아 임금께서는 백성을 은택하게 하였고 교화는 온 나라에 두루 미쳤으며, 그 업적은 천 년을 전해 내려와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록 초야의 목동이나 여종이라도 모두 그의 덕을 입으로 외우고 있으며, 기이한 이야기들이 곳곳마다 서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문헌이 흩어져 없어 증거가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삼종질(三從姪) 위(渭)가 일찍이 이를 슬퍼하여 부지런히 모아 편집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다. 아, 지금 세상은 바뀌고 세월은 흘러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진 것이 되었으니, 만에 하나라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록 그렇지만 큰 보배는 묻혀 있어도 반드시 드러나게 되고 큰 덕은 오래 지난 뒤에 더욱 드러나는 법이니, 이것이 이치이다. □부군께서 손수 쓰신 유묵(遺墨)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실적과 유사가 현집(賢集)과 야사(野史)에 분명히 드러나서 종종 상상했던 것보다 더한 것이 나오기도 하니, 500년의 비사(祕史)가 또한 때를 만나 드러난 것이다. □부군께서 나라를 도모하고 세상을 지키신 큰 모범이 간략하게 기록된 책에 실려 있어 이를 편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과연 보배는 묻혀도 빛을 잃지 않고 덕은 오래되어도 자취가 가려지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가 이미 편찬하고 탄식하기를 ‘수습한 것이 다하지 못할까 염려되고 교감(校勘)이 정밀하지 못한 점이 많다. 그러나 시기를 늦출 수 없으니 모쪼록 손을 빌려서 급히 완성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불초는 나이가 이제 노쇠하여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면 그 일을 완결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니, 장차 한량없는 후회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더욱 두려워 조금이나마 힘을 내어 이 일에 참여하니, 선조를 사모하고 후손에게 전하는 업적에 참여하게 된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긴다.

원문

昭和十六年辛巳暮春。後孫利鉉。盥手謹稿。

번역

소화(昭和) 16년 신사년 늦은 봄에 후손 이현이 손을 씻고 삼가 베껴 쓰다.

253. 跋[尙灝]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我先祖泛虛亭公。起自扶餘。立朝四十六年。歷事三朝。以忠厚長者。受知於李朝。□明廟盛際。在相位十有五年。佐治太平。寬樂令終。名德勛業。昭載史乘。謨猷文章。皆可以扶植世敎。而散佚於兵燹。孰不恨之。先世蒐集之詩文及遺事一篇。傳來寶藏。圖鋟以壽者久矣。湖西族弟渭經營此事。裒集數年。而今乃成。可謂爲先之誠其至矣。

번역

나의 선조 범허정공(泛虛亭公)은 부여(扶餘)에서 태어나 조정에 나와 46년 동안 세 조정에 걸쳐 일하였는데, 충후한 장자로 이조(李朝)에서 인정을 받았으며 명종(明宗) 성세에 정승으로 15년을 재직하면서 태평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관대한 성품과 즐거운 마음으로 생을 마치고 덕행과 공업이 역사에 분명히 기록되었으니, 그 모훈(謨訓)과 문장도 모두 세교를 부식할 만하였는데 전쟁의 화재로 인해 흩어져 버렸으니, 누군들 한하지 않겠는가. 선세(先世)께서 수집하신 시문 및 《유사(遺事)》 한 편이 보배처럼 전해져 오고 있어 오래전부터 이를 모아 책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호서의 족제 위경(渭經營)이 이 일을 주관하여 몇 년을 모으고 편집하여 이제야 완성되었으니, 선조를 위한 정성이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원문

昭和十六年辛巳夏。十二世孫灝。謹識。

번역

소화 16년 신사 여름에 12대손 하(灝)는 삼가 기록한다.

254. 跋[尙渭]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47C, ITKC_MO_0130A_A026_147D ...

원문

吾先祖泛虛亭公。以天挺靈毓之姿。應出于□國家盛際。歷事三朝。周章王事四十六年。寬弘大度。忠厚重望。特以文武全才。出帥藩閾。入據廟堂。□中廟嘗器重之。以□御筆識名。期必大用。而未及□仁廟嗣服。乙巳禍作。先爲忌者所擠。暫屈於嶺藩。而政化大行。晦齋李文元公。大加贊服。旣而。□明廟卽位。委畀以首揆。時□文定垂簾。權奸用事。勢難圖治。而公毅然挺立於巖廊之上。輔幼主排群奸。盡瘁燮理十五年。□宗社賴安。其謨猷勳庸之盛。昭載於史乘。至今炳烺乎世目矣。謹按。當時儒宗成聽松,趙龍門諸先生。相許以道義。切偲講劘。雖居相府。山林之交。終始不替。而史傳特著而美之。此府君道學之篤也。幷世文衡柳醒齋,金慕齋,李容齋諸公。一見公製述之宏博。莫不稱歎。而靜菴趙文正公奬詡以選擧。此府君文章之華也。韜晦事功。推人容物。擧世歸德。猶謙虛若無。而□明廟曰。純正老德。國家依重。史官曰。寬洪大度。心無忮克。洪相國忍齋撰銘曰。洪量汪洋。物被包容。此府君德量之大也。體元遵憲。王章緝煕。崇儒進賢。人材蔚興。修武裕遠。島夷獻馘。朝野寧謐。致□明廟全盛之治。而太史與先儒氏。贊比於漢之魏尙。唐之房杜。此府君相業之盛也。嗚呼。府君之道德勳業。如彼卓卓。其餘緖之載輿誦垂後範者。固不可量也。而公易簀未幾。兵燹荐仍。黃閣遺藏文物。散佚殆盡。可勝歎哉。公玄孫進士子華氏與外裔佐郞李公厚基。嘗慨然復求於人家。僅得詩若文若干篇及遺墨遺琴。而申象村,李澤堂兩賢。隨事徵言之。至七世孫龜澤氏。又求得自警銘一篇三十六字手墨。而梧川李相國宗城徵筆之。編此詩文銘若遺事碑狀。爲小冊一卷。傳來於京居後孫潗之家已久。而渭僻居遐陬。未嘗與聞。竊以文獻無徵爲恨。曾於三十年前始來京師。得玩其傳來小冊。怳然如得天寶。然猶未爲全鳳之一文也。乃幡然遍搜於諸家遺集野史古帖中。而實蹟遺墨之粲然者。往往有得焉。會有開示祕史之制。乃復閱□中,仁,明三朝實錄。謄出公爲政事蹟。幷□王言史評之相爲根蒂者煌煌數千語。於是。公嵬勳盛德。瞭然復現矣。噫。一時散沒之蹟。至今四百載之下。歷然如新。若非國寶世珍之不朽不滅者。其可得哉。記曰。祖先有美而不知。不明也。知而不傳。不仁也。渭切戒懼乎此。謹編次卷帙。又纂年譜。合爲九卷四冊。將付剞劂。以圖壽後。後之尙論者讀此書。而徵其徽績偉業之亘千古而矜式者。則庶乎信夫斯言之不誣矣。斯集之役。三從叔利鉉氏。克盡誠力。擔補巨費。族叔奉鉉氏。族姪豐植亦隨力表誠。勤助於輯稿閱史者。族兄灝與潗,浚昆季也。謹述顚末如右。

번역

번역 실패/검수 필요: terminal_colophon_omission

원문

昭和十六年泛虛亭公歿後三百七十八年陽復之月。後孫渭。盥手謹識。

번역

번역 예정

255. 跋[尙奉鉉]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위치: ITKC_MO_0130A_A026_148D

원문

我先祖泛虛亭公。□李朝中葉□明廟之賢相也。位至台輔。不改陋席。德被邦家。而喜納卑言。偉歟盛矣。嗚呼。兵燼家替。文獻不傳。奚獨爲後者之所恨哉。至今四百載之後。稿集始成。□府君偉大之正體可徵也。族姪渭君之孝思亦盡矣。感泣而謹識。

번역

나의 선조인 허정공(虛亭公)이 이조(李朝) 중엽에 태어난 명묘(明廟)의 어진 재상이다. 지위가 대부(台輔)에 이르렀으나 누추한 자리를 고치지 않았고, 덕은 나라를 감동시켰으며 낮은 사람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니, 위대하고 성대하였다. 아아, 전쟁으로 집안이 텅 비어 문헌이 전해지지 않으니 어찌 후손의 한이 되겠는가. 지금 4백 년 뒤에야 고집(稿集)이 이루어졌으니, 부군(府君)의 위대한 정체(正體)를 증험할 수 있고, 조카인 위군(渭君)의 효심도 다하였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한다.

원문

昭和十七年二月▣日。後孫奉鉉。謹稿。

번역

소화 17년 2월 ▣일에 후손 봉현이 삼가 베껴 쓰다.

256. 跋[尙昌植]

문체: 序跋類 / 題跋類

원문

夫天地之生成。聖賢之施爲。其則一也。我先祖泛虛亭相公。以喬嶽之姿。涵海之量。應出明時。歷事三朝。闢邪尊賢。致君澤民。其德業勳庸之盛。已有先輩之定論。蒐稿鋟梓之顚末。今有伯父之徵記。何敢贅言爲哉。斯集發刊之日。不肖敢當轉寫遺墨。編纂卷帙之責。竊不勝於悒而謹記。

번역

번역 실패/검수 필요: terminal_colophon_omission

원문

昭和十七年二月▣日。十三世嗣孫昌植。謹記。

번역

번역 예정

반응형

'AI번역 > 한국문집총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0132_면앙집_俛仰集_번역  (0) 2026.06.11
0131_청송집_聽松集_번역  (0) 2026.06.11
0129_입암집_立巖集_번역  (0) 2026.06.11
0128_양심당집_養心堂集_번역  (0) 2026.06.11
0127_덕양유고_德陽遺稿_번역  (0) 2026.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