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지 夷堅志/갑지 제3권

1.1.3.4.38 - 이견지 갑지 제3권 - 이상인 李尚仁

集賢堂 2016. 2. 1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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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인李尚仁

 승가(承可) 왕부(王鈇)는 소흥(紹興) 신유년(辛酉歲: 1141년)에 절동로(浙東路: 현재 저장성 일대)의 제봉다염공사(提舉茶鹽公事)에 임명되었는데, 관청이 회계(會稽: 현재 저장성 사오싱시) 자성(子城)의 동녘에 있는 옛날의 용흥사(龍興寺)였다. 


 승가(承可)의 셋째 아들인 왕유(王洧)가 자포(紫袍)를 입은 장부가 나타나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장부가 말하기를, "나의 유골이 복숭아나무 아래에 매장되어 있어서 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나를 가엽게 생각하신다면 부디 유골을 다른 곳으로 이장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유가 깨어난 뒤에 그의 부친에게 아뢰었다. 건물 주위를 살펴보니 과연 커다란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다. 이에 나무 아래를 파내어 유골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거두지 못하였다.


 다음 해 8월 그믐날에 다시 왕유의 꿈에 누군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조청대부(朝請大夫) 이상인(李尚仁)입니다."라고 하였다. 


 다가가 보니, 저번에 꿈에서 본 자였다. 


 그리고 근심어린 낯빛에 머리를 조아리며 저번에 하였던 부탁의 말을 거듭하면서 소매에서 시문 한 수(首)를 왕유에게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복숭아나무에 숨어지내면서 맑은 향내 만족하다가, 지난 해에 혼령은 그대 만나게 되었네. 

팔십 년을 오래도록 살았으나 뵌 사람 있지 아니하였고, 건물의 풍채는 세상에 소문나지 않았다네. 

세상을 바로잡고 폐단을 고칠 때는 충(忠)으로 주의를 삼고, 사물을 구제하고 죽음을 슬퍼할 때는 덕(德)으로 은혜 베푸네. 

불쌍한 백골은 멀지 않은 땅에 묻혔으니, 손모아 그대에게 바랐을 뿐인데도 보답은 무궁하네.

[桃林隱伏厭清芬 去歲幽魂得見君 八十壽齡人未有 一堂風採世無聞 濟時革弊忠為主 救物哀亡德作恩 白骨可憐埋近地 願公舉手報無垠]


 왕유가 깨어난 뒤에 급히 촛불을 들고 종이에 기록하였다. 당시 승가는 임기가 다하여 떠나려고 하였는데, 이군(李君)의 사정이 딱하여 저버릴 수 없었다. 급히 하급 관리를 모아 서쪽 행각(西廡)에 있는 복숭아나무 아래를 샅샅이 뒤지도록 하였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승가도 손수 삼태기를 지고 삽으로 파내며 살폈는데, 한 자(尺) 남짓 더 파내고 나서야 유골을 찾았다. 아울러 조그마한 빗 두 개가 썩은 채 있었고, 오건(烏巾)도 겨우 몇 치 남짓 있었다. 유골 곁에는 큰 못도 네 개나 있었다. 수습된 유골은 우묘(禹廟) 뒷편에 세 그루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옮겨 묻고, 술과 음식을 차려 제사지내었다. 


 오흥(吳興: 현재 저장성에 속함) 사람 붕주(朋儔) 막수(莫壽)와 낙양(洛陽: 현재 허난성에 속함) 사람 희진(希真) 주돈유(朱敦儒)가 모두 그 사건을 기록하였고, 꿈 속에서 얻은 시문을 길상(吉祥)이라 여겼다. 십사 년이 지난 후에 왕유는 광동(廣東)으로 귀양을 가 살았는데, 광동 땅에 공교롭게도 이상인(李尚仁)이라 하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원문

王承可(鈇),紹興辛酉歲,提舉浙東茶鹽,公廨在會稽子城東,蓋古龍興寺。承可第三子洧,嘗夢一丈夫,衣紫袍,來言曰:“我朽骨埋桃樹下,幽魂無所歸,君幸哀我,使得徙葬。”洧覺,白其父。視舍旁有巨桃一本,因下穿求骨,弗獲。明年八月晦,又夢有通謁者曰:“朝請大夫李尚仁。”既進,乃向所夢者,頫首慘蹙,​​以舊懇申言,袖詩一紙以贈洧,曰:   桃林隱伏厭清芬,去歲幽魂得見君。   八十壽齡人未有,一堂風采世無聞。   濟時革弊忠為主,救物哀亡德作恩。   白骨可憐埋近地,願公舉手報無垠。   洧覺。急燭火筆於簡。會承可將代還,以李君精爽不可負,亟集吏卒,盡西廡之桃下,大索數日,無所見。承可躬督畚鍤,复穿尺許,乃得之。有小象梳二,已朽,烏巾才餘方寸,骨旁存大釘四,乃遷葬於禹廟後三喬松下,具酒食祭之。吳興莫壽朋(儔)、洛陽朱希真(敦儒)皆記其事,意以夢中詩為吉祥。後十四年,洧以事謫廣東,而廣東自有寓客曰“李尚仁”云。


송宋 전선錢選 복숭아나무 가지와 다람쥐 桃枝松鼠圖 도지송서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장臺灣 國立故宮博物院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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