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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4, 5년 경의 도쿄제국대 문과대학 선과 明治二十四、五年頃の東京文科大学選科

集賢堂 2016. 2. 1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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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4, 5년(서기 1891, 2년) 경의 도쿄제국대 문과대학 선과 明治二十四、五年頃の東京文科大学選科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내가 고향 가나자와에서 처음 도쿄에 왔을 때는 스이도 바시水道橋부터 포병 공창 근처는 아직도 쓸쓸한 곳이었다. 그리고 닭고기 구이의 포장 마차 등이 있고, 인력거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스가쵸春日町 근처 혼고소바本郷側 벼랑 아래로는 논이 있고 개구리가 울고 있었다. 혼고라도 대학 앞에서 고마고메駒込 쪽으로 조금 가면 변두리에서 모래 먼지 속 많은 거름 차를 만났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대학 정문인 곳에 허름한 나무 문이 있었다. 다츠오카쵸竜岡町 쪽에 정문이 있으니 그곳은 정문이 아니였던 것 같다. 그곳으로 들어서면 지금은 지진으로 아주 흔적도 없어진 법문과 대학 건물이 있다. 그것은 아오야마 고쇼青山御所를 세운 콘도르コンドル라는 영국인이 지은 그다지 크지도 않은 벽돌 건물이었으나 당시의 법문과는 그 한 건물 안에 끝났던 것이다. 게다가 이층에는 도서실과 학장실 등이 있어 굵은 바지를 입은 토야마外山 씨가 열쇠를 떠들썩하니 학장실에 출입하는 것을 보았다. 법문의 교실은 아래층만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선과생이라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다. 물론 학교의 입장에서 보아 마땅한 일이라도 있었을 것이지만, 선과생이라는 것은 이런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이었다. 지금 말한 것처럼 이층에 도서실이 있고, 그 중앙의 큰 방이 열람실이었다. 그러나 선과생은 그 열람실에서 독서할 수 없었고 복도에 진열되어 있던 책상에서 독서하게 되어 있었다. 삼학년이 되면 본과생은 서고 안에 들어가 책을 검색할 수 있었지만, 선과생에게는 물론 그런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편견일지 모르지만 선생님을 방문해도 선생님에 따라 문턱이 높은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전까지도 고교에서 함께 있던 동창생과 금세 동떨어진 대우의 아래에 놓이게 되었으니, 감상적인 나의 마음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삼년 동안을 구석에 웅크리고 지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무 일도 재촉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해서, 속으로 스스로 즐기게 됐다. 초연스레 스스로 긍지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때는 고교에서 독일어를 조금밖에 하지 않아서 처음 한해는 주로 영어 주석이 달린 독일 문학서를 읽었다.


 그 당시 철학과에는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郎 선생도 한두 해 전에 돌아오고 모토요시元良, 나카지마中嶋 두 선생님이 간신히 교수가 되어, 일본인 교수가 갖춰지었지만 주로 루ー도우이히 부세가 철학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 무렵 아직 삼십 안팎의 나이 든 사람이었다. 베를린에서 롯치에의 만년 강의를 들었다든가 해서 아주 롯치에 학파였다. 철학 개론이라 하더라도 롯치에 철학 개요에 불과했다. 그 무렵에는 독일인도 영어로 강의했다. 좀처럼 기운찬 강의를 하는 사람은, 가락이 붙다보면 어느새, 영어 발음이 독일어처럼 되고, 게네라쵸ー은·애프터·게네라쵸ー은*1 따위가 되었다. 이런 외국인 교사와 함께 아직 시마다 고손島田重礼 선생과 같은 한학의 대유도 계셨다. 선생님은 교단에 오르면 허리에서 연초를 꺼내, 천천히 한모금 피우고, 그리고 강의를 시작하시기도 하셨다. 내가 삼학년 때 케베루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그때 벌써 마흔을 넘어 일견 철학자답게, 전임자와 대비되었다. 처음에 쇼ー펭하우엘에 대해서 무슨 강의하신 것이 기억난다. 이 선생님의 강의는 부세 교수와 다르게 책상에 앉은 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케베루 씨는 처음 일본에 와서 일본의 학생이 고전어를 모르고 철학을 배운다는 것을 정말로 천박하게 느낀 것 같았다. 내가 어느 날 선생님을 방문하고 아우그스티누스의 근대어 번역이 아니냐고 질문했더니 선생님은 너는 왜 고전어를 배우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고전어를 배우는 것은 좀처럼 어렵다고 말씀 드리면 그래도 너와 동급의 이와모토岩元 군은 그리스어를 읽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You must read Latin at least.*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선생님은 당시에 손수 담배를 권유하셨는데, 나는 (당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씀 드리자 선생님은 Philosoph muss rauchen.*3라고 조롱하셨다.


 당시의 철학과 학생은 나의 위 클래스는 두 마츠모토松本나 요네야마 야스사부로米山保三郎 등의 수재가 있었고 이 년 뒤 클래스에는 쿠와키 겐요쿠桑木巌翼 군을 비롯해 아네사키姉崎, 다카야마高山 등 이른바 이십구년 천재 조가 있었다.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군은 한 학년 위의 영문학에 있었는데, 플로 렌츠의 시간에서 함께 ‘헤르만 운트 도로테ー아’를 읽고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내 반에서는 오시마 요시나가大島義脩 군이 수석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후에 독특한 존재가 된 것은 최근에 사망한 이와모토 테이岩本禎 군이었다고 생각한다. 동군은 위에서 말한대로, 그때부터 그리스어를 시작하고 항상 열람실에서 사전을 그어 조금씩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의 책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어딘가 케베루 씨와 비슷한 곳이 있었다. 나는 이와모토 군과는 메이지 이십칠년 졸업 이후 만난 기회가 없었다. 내 머리에는 마르고 굽은 허리의 학생복을 입은 이와모토 군밖에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내내 가마쿠라鎌倉에 온 뒤로 한번 동군을 찾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이야말로라고 생각하면서 게으른 나는 항상 분발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동군이 서거했다는 것을 듣고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신문에 따르면 수천명의 회장자가 있었던 것 같다. 동군은 어딘가에 대단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이유로 고교 시절에는 활발하고 유쾌한 추억이 많은 것과는 달리 대학 시절에는 선생님께도 사랑 받지 못하고 친구라는 것도 만들지 못했다. 묵묵히 매일 도서실에 들어가, 혼자 책을 읽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정말 내가 배웠다든가, 감동받았다는가 하는 강의는 없었다. 그때는 대학 졸업 학사로 취직난이라는 것이 없었지만 선과選科에 대해 말하자면 별로 고려해볼 것이 없어서 학교를 나오자마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십년 정도 도쿄의 흙을 밟지 않았다.


*1 세대에서 세대로, 몇 세대.

*2 적어도 라틴어는 읽지 않으면 안 된다.

*3 철학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안 된다.


明治二十四、五年頃の東京文科大学選科


西田幾多郎





 私共が故郷の金沢から始めて東京に出た頃は、水道橋から砲兵工廠こうしょう辺はまだ淋しい所であった。焼鳥の屋台店などがあって、人力車夫が客待をしていた。春日町辺の本郷側の※(「厂+圭」、第3水準1-14-82)がけの下には水田があって蛙が鳴いていた。本郷でも、大学の前から駒込の方へ少し行けば、もう町はずれにて、砂煙の中に多くの肥車こえぐるまに逢うた。

 その頃には、今の大学の正門の所に粗末な木の門があった。竜岡町の方が正門であって、そこは正門ではなかったらしい。そこから入ると、すぐ今は震災で全く跡方もなくなった法文科大学の建物があった。それは青山御所を建てたコンドルという英人が建てたとか、あまり大きくもない煉瓦の建物であったが、当時の法文科はその一つの建物の中に納っていたのである。しかもその二階は図書室と学長室などがあって、太いズボンをつけた外山とやまさんが、鍵をがちゃつかしながら、よく学長室に出入せられるのを見た。法文の教室は下だけで、間に合うていたのである。当時の選科生というものは、誠にみじめなものであった。無論、学校の立場からして当然のことでもあったろうが、選科生というものは非常な差別待遇を受けていたものであった。今いった如く、二階が図書室になっていて、その中央の大きな室が閲覧室になっていた。しかし選科生はその閲覧室で読書することがならないで、廊下に並べてあった机で読書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三年になると、本科生は書庫の中に入って書物を検索することができたが、選科生には無論そんなことは許されなかった。それから僻目ひがめかも知れないが、先生を訪問しても、先生によっては閾しきいが高いように思われた。私は少し前まで、高校で一緒にいた同窓生と、忽ちかけ離れた待遇の下に置か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少からず感傷的な私の心を傷つけられた。三年の間を、隅の方に小さくなって過した。しかしまた一方には何事にも促らわれず、自由に自分の好む勉強ができるので、内に自ら楽むものがあった。超然として自ら矜持きんじする所のものを有もっていた。私の頃は高校ではドイツ語を少ししかやらなかったので、最初の一年は主として英語の注釈の附いたドイツ文学の書を読んだ。

 その頃の哲学科は、井上哲次郎先生も一両年前に帰られ、元良、中嶋両先生も漸く教授となられたので、日本人の教授が揃うたのだが、主としてルードヴィヒ・ブッセが哲学の講義をしていた。この人はその頃まだ三十そこらの年輩の人であった。ベルリンでロッチェの晩年の講義を聞いたとかいうので、全くロッチェ学派であった。哲学概論といっても、ロッチェ哲学の梗概に過ぎなかった。その頃ドイツ人でも英語で講義した。中々元気のよい講義をする人で、調子附いて来ると、いつの間にか、英語の発音がドイツ語的となって、ゲネラチョーン・アフタ・ゲネラチョーン*1などとなった。こういう外人の教師と共に、まだ島田重礼先生というような漢学の大儒たいじゅがおられた。先生は教壇に上り、腰から煙草入を取り出し、徐おもむろに一服ふかして、それから講義を始められることなどもあった。私共の三年の時に、ケーベル先生が来られた。先生はその頃もう四十を越えておられ、一見哲学者らしく、前任者とコントラストであった。最初にショーペンハウエルについて何か講義せられたように記憶している。この先生の講義はブッセ教授と異って机に坐ったままで低声で話された。ケーベルさんは始めて日本へ来て、日本の学生が古典語を知らないで哲学を学ぶということが、如何にも浅薄に感ぜられたらしい。私が或日先生を訪問してアウグスチヌスの近代語訳がないかとお聞きしたところ、先生はお前はなぜ古典語を学ばないかといわれた。私は日本人として古典語を学ぶのは中々困難であると申上げると、それでもお前と同クラスの岩元君はギリシャ語を読むではないかとのことであった。You must read Latin at least. *2といわれた。しかしまた先生は時に手ずから煙草をすすめられ、私は(当時)煙草を吸いませぬと申上げると、先生は Philosoph muss rauchen. *3とからかわれた。

 当時の哲学科の学生には、私共の上のクラスには、両松本や米山保三郎などいう秀才がおり、二年後のクラスには桑木巌翼君をはじめ姉崎、高山などいわゆる二十九年の天才組がいた。有名な夏目漱石君は一年上の英文学にいたが、フローレンツの時間で一緒に『ヘルマン・ウント・ドロテーア』を読んでいたように覚えている。私共のクラスでは、大島義脩君が首席であった。しかしそれでも後に独特の存在となられたのは、近年亡くなられた岩本禎君であったと思う。同君は上にいったように、その頃からギリシャ語を始められ、いつも閲覧室で字引を引いて、少しずつソクラテス以前の哲学者のものを読んでおられたようであった。あの人は何処かケーベルさんと似た所があった。私は岩元君とは明治二十七年卒業以来、逢う機会がなかった。私の頭には、痩せた屈かがみ腰の学生服を着た岩元君をしか想像することはできない。私は始終鎌倉に来るようになってから、一度同君を尋ねて見たいと思っていた。しかし今度こそはと思いながら、無精な私はいつも奮発できなかった。その中うち、同君の逝去せられたのを聞いて残念に堪えない。新聞によれば、何千人かの会葬者があったらしい。同君は何処かにえらい所があったのだと思う。

 右のような訳で、高校時代には、活溌な愉快な思出の多いのに反し、大学時代には先生にも親しまれず、友人というものもできなかった。黙々として日々図書室に入り、独りで書を読み、独りで考えていた。大学では多くのものを学んだが、本当に自分が教えられたとか、動かされたとかいう講義はなかった。その頃は大学卒業の学士に就職難というものはなかったが、選科といえば、あまり顧みられなかったので、学校を出るや否や故郷に帰った。そして十年余も帝都の土を踏まなかった。


*1「世代から世代へ、いく世代も。」

*2「少くともラテン語は読まなければいけない。」

*3「哲学者は煙草を吸わざるべからず。」





底本:「日本の名随筆 別巻95 明治」作品社 

   1999(平成11)年1月25日第1刷発行

底本の親本:「西田幾多郎随筆集」岩波文庫、岩波書店

   1996(平成8)年10月

※「*1」の形の注釈は、底本では、直前の文字の右横にルビのように付いています。

入力:ふろっぎぃ

校正:しだひろし

2006年2月16日作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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