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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구한말 대한제국 최초 전차 운행 및 파괴 장면

集賢堂 2016. 2. 23.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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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 이전 최초 전차 운행 모습 - 신기한 물건에 남녀노소 탑승하여 전차 내부는 만원이다. 전차 앞은, 가만 서 있다가 자칫하면 쓰러져 깔리기 쉽게 되어있다. 이후 전차는 전후에 의자와 같은 구조물을 달고 운행한다. 전차 운전하는 이가 일본인이고, 바로 옆에 제복 입은 자가 한국인 차장이 아닌가 한다.


전차 파괴 장면 - 어디서 구했는지 전봇대만한 통나무로 전차를 쓰러트리고 있다. 제복을 입은 자들도 손을 쓰지 못해 손 놓고 구경하고 있다.


파괴된 전차의 잔해


- 위키백과 설명


서울전차 설치는 대한제국의 전기 도입 사업의 부대사업으로 이루어졌다. 1898년에 경성(지금의 서울) 일대의 전력공급권 사업권을 취득하고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를 개업한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위크(H.R. Bostwick)가 전력의 주요 소요처로서 전차 부설을 검토하였다. 이러한 전차의 도입 과정에서 콜브란 등은 고종황제의 홍릉 행차시에 신하를 다수 동행해야 함으로 인한 재정 낭비와 불편함을 전차로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그 허가를 얻고, 황실의 투자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계약이 체결되자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들여 공사를 시작하고,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약 8 km) 길이의 단선궤도전차선을 설치하였다. 전차 철도를 개설하는 예식은 1898년 9월 15일 오후 4시에 흥화문 앞에서 거행되었다.[3]


이후 75kW급 직류 600V 발전기 및 100마력 증기기관을 동대문 안쪽에 설치하였고, 차량의 조립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899년 5월 3일 오후 3시에 첫 시험 운행을 하였다.[4] 1899년 5월 20일(음력 4월 초11일)에 개통식을 가지고 운행을 개시하였다.[5] 서울전차의 개통은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는 교토에 이은 두 번째였으며, 수도에 부설된 것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당시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개통 당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성내 주민들 역시도 매우 반응이 좋아서 개통 당일 운행에 지장이 발생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생업을 잊고 전차만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방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많아 파산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운전수는 교토시전의 일본인 경력자 중에서 선발하였으며, 차장은 한국인을 채용하였다. 승차권은 상등과 하등으로 구분하였으며, 특별히 정차장을 설정하지 않고 승객이 요구하면 차를 세우고 여객을 취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통 후 10일째 되는 날 종로2가쯤에서 다섯 살된 아이가 전차가 치어 죽는 일이 벌어졌다.[6] 아이의 아버지가 이를 보고 도끼를 빼들고 전차에 달려들자,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여 차량에 달려들었다. 당시 시내에 전차로 인해 가뭄이 일어난다는 둥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이로 인해 시민들의 반응이 과격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차장과 운전수는 요행이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전차는 파괴, 전소되었다.[7] 이후 다른 전차 역시 수난을 당하고, 발전소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소동은 곧 진정되고, 이러한 폭동 발생에 대해 조야에서는 책임자를 문책하고 사상자에 대한 배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전차 종업원은 운행 자체를 거부하고, 호신용 권총의 소지, 경찰 1인의 첨승, 그리고 유족 보호를 위한 공탁금 제도 실시 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협상은 난항을 겪어, 일본인 종업원은 전원 철수하였으며, 이로 인해 5개월간 운휴하게 되었다. 이에 한성전기회사측은 미국인 운전수 8명과 기계공 2명을 급거 모집하여 9월 말 경에 운행을 재개하였다.


이후 전차사업은 차량이 개방형이어서 추위와 비바람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고 의자 역시 나무의자로 불편했으나,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에 상당히 인기를 끌어서 선로 연장 요구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개통 당해에 운행 계통을 남대문까지 연장하였고, 그 이듬해(1900년)에 남대문에서 구 용산까지 연장할 것을 결정하여, 공사를 실시, 운행을 개시하였다. 특히 구 용산까지 연장하면서, 용산의 포구로부터 성내까지 화물 수송을 실시한 바 있다. 이후 서대문까지의 연장, 그리고 남대문에서 서소문 간을 의주로를 따라 운행하는 루트가 추가되었으나, 승객이 많지 않아 2~3년 뒤에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노선 연장 과정중 특히 서대문 연장 시에는 당시 부설된 경인철도주식회사의 경인철도와의 평면 교차 문제가 발생하여, 일본측과 상당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외교적 노력에 의해서 무마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자금난에 빠져 미국의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에 합자, 광무8년(1904년)에 그 명칭을 한미전기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고종과 한미전기주식회사'(고승제 저)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한성전기회사는 수익원을 개척하는 긴급대책으로 1901년 1월까지 전차 노선을 종로에서 남대문을 거쳐 용산에 이르기까지 확장했다. 이처럼 사업규모가 확대됨에 따라서 외자를 도입하는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코네티컷주에 있는 미들섹스(Middlesex)지방의 세이브루크(Saybrook)시에 있는 엠파이어 트리스트라는 금융회사에서 30만달러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 차관의 도입은 고종의 내략을 얻고자 한 처사이었으나 한성전기회사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30만달러의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미국회사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04년에 한성전기회사라는 상호는 사라져 버리고 한미전기주식회사(American Korean Electric Co)가 탄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8]


서울전차의 출처 정보

- 실록의 관련 기사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5월 27일 양력 3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전차가 운행되면서 백성들 중 사상자가 발생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방금 들으니, 전차(電車)를 운행할 때 백성들 중 사상자가 많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내부(內部)에서 낱낱이 찾아내어 구휼금을 넉넉히 지급함으로써 조정에서 근심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의정부(議政府)에서는 농상공부(農商工部), 경무청(警務廳), 한성부(漢城府)에 특별히 신칙하여, 법을 만들어 보호하고 거듭 효유하여 전차를 운전할 때는 반드시 사람들이 철길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살펴서, 다시는 차에 치어 다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달 17일 한성 전기 회사(漢城電氣會社)에서 전차 개통식을 시작하였는데, 26일 전차가 종로(鐘路) 거리를 질주할 때 다섯 살 난 아이를 치어 죽였다. 여러 사람들이 격노하여 차체를 파괴하고 기름을 뿌려 불태워 버렸다. 또 전차가 전복되어 죽거나 다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래서 이런 조령이 있었다.】

詔曰: "卽聞電車運行之際, 人民多有死傷者, 極爲驚慘。 令內部這這訪探, 優給恤金, 以示朝家憫惻之意。 自政府另飭農商工部、警務廳、漢城府, 設法保護, 申複曉諭, 使車運必審, 人不犯轍。 無至更有轢傷之患 【本月十七日, 漢城電氣會社始行電車開通式, 越二十六日, 電車疾走於鍾路之際, 轢殺五歲兒。 群衆激怒, 破壞車體, 且灌油燒之。 又顚覆一車, 出死傷者若干。 故有是詔。】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5027_003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5월 30일 양력 2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전차 사장과 민영기를 추궁하도록 하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백성들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 과연 어떠합니까? 그런데 전차(電車)를 운행할 때 백성들 가운데 사상자가 많아 심지어 불쌍히 여기는 조칙(詔勅)까지 있었습니다.

대저 전차의 철로는 운반을 편리하고 빠르게 하여 백성과 나라에 이익을 주자는 것입니다. 지금 붐비는 복잡한 거리에 가로질러 설치하고, 또 앞을 잘 살피면서 운행을 하지 못하고 속도를 내어 몰아댄 결과 사람을 치어 죽게 하였으니, 이 어찌 나방이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어 죽은 것일 뿐이라고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일을 그르쳐 백성들을 상하게 한 죄는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해당 사장(社長)은 법부(法部)로 하여금 잡아다 징계하여 처벌하도록 하고, 제대로 신칙하지 못한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민영기(閔泳綺)에게도 견책(譴責)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議政府參政申箕善奏: "國家之重民命, 顧何如? 而電車運行之際, 人民多有死傷, 至有憫恤之詔勅。 夫電車鐵路, 將以便捷搬運, 利益民國也。 今橫設於闉闍肩摩之衢, 又不能護前審運, 而乘快颼驟, 轢斃人命, 是豈可諉之於飛蛾自撲而已乎? 僨事傷民之罪, 不可不問, 該社長令法部拘拿懲勘, 不能操飭之農商工部大臣閔泳綺, 亦施譴責何如?" 允之。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5030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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