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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장경동 출토 사본 - 《삼국지•촉지•제갈량전》

集賢堂 2020. 7. 16.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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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간만에 흥미로운 사본을 보았습니다. 이 사본은 서진(西晋) 원강 8년(298)에 삭림이란 사람이 필사한 《삼국지》의 일부입니다. 이성택(李盛鐸, 1859-1937)이라는 분이 제발을 달았습니다. 편찬자 진수가 297년에 사망하고 바로 다음 해 봄에 필사된 것입니다.

• 앞부분은 사라지고 뒷부분만 온전히 남았습니다. 낙찰가만 해도 5억인데, 다루어지는 인물이 제갈공명이고 상당히 오래된 사본이다 보니, 매우 좋습니다. 직권으로 5억짜리 물건을 자기 걸로 만들 수 있었다니, 권력이 좋긴 합니다.

 

燉煌石室所出漢晉遺墨甚夥,此三國《蜀志•諸葛亮傳》,幸為余所獲,不勝快慰。題名索琳,考係索靖之子,書法精美,較之所得佛經為獨特之寶,可不十襲藏諸子孫其永寶之。木齋謹誌。

돈황 석실에서는 한나라, 진나라 때의 유묵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 《삼국촉지•제갈량전》은 다행히 내가 얻은 것인데 기쁜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울 정도다. 제명에 쓰인 삭림은 살펴보니 삭정(索靖, 239-303)의 아들이다. 서법이 정미하여, 갖고 있는 불경과 비교해도 매우 뛰어난 보물이다. 여러 겹으로 잘 싸서 보관해야 할 것이다. 부디 자손들도 오래도록 보배로 간직하기를 바란다. 목재가 삼가 썼다.

 

躬耕于野,不求闻达。时左将军刘备以亮有殊量,乃三顾亮于草庐之中;亮深谓备雄姿杰出,遂解带写诚,厚相结纳。及魏武帝南征荆州,刘琮举州委质,而备失势众寡,无立锥之地。亮时年二十七,乃建奇策,身使孙权,求援吴会。权既宿服备,又观亮奇雅,甚敬重之,即遣兵三万以助备。备得用与武帝交战,大破其军,乘胜克捷,江南悉平。后备又西取益州。益州既定,以亮为军师将军。备称尊号,拜亮为丞相,录尚书事。及备殂没,嗣子幼弱,事无巨细,亮皆专之。于是外连东吴,内平南越,立法施度,整理戎旅,工械技巧,物究其极,科教严明,赏罚必信,无恶不显,至于吏不容奸,人怀自厉,道不拾遗,疆不侵弱,风化肃然也。
当此之时,亮之素志,进欲龙骧虎视,包括四海,退欲跨陵边疆,震荡宇内。又自以为无身之日,则未有能蹈涉中原、抗衡上国者,是以用兵不戢,屡耀其武。然亮才,于治戎为长,奇谋为短,理民之干,优于将略。而所与对敌,或值人杰,加众寡不侔,攻守异体,故虽连年动众,未能有克。昔萧何荐韩信,管仲举王子城父,皆忖己之长,未能兼有故也。亮之器能政理,抑亦管、萧之亚匹也,而时之名将无城父、韩信,故使功业陵迟,大义不及邪?盖天命有归,不可以智力争也。
青龙二年春,亮帅众出武功,分兵屯田,为久驻之基。其秋病卒,黎庶追思,以为口实。至今梁、益之民,咨述亮者,言犹在耳,虽甘棠之咏召公,郑人之歌子产,无以远譬也。孟轲有云:“以逸道使民,虽劳不怨;以生道杀人,虽死不忿。”信矣!论者或怪亮文彩不艳,而过于丁宁周至。臣愚以为咎繇大贤也,周公圣人也,考之尚书,咎繇之谟略而雅,周公之诰烦而悉。何则?咎繇与舜、禹共谈,周公与群下矢誓故也。亮所与言,尽众人凡士,故其文指不得及远也。然其声教遗言,皆经事综物,公诚之心,形于文墨,足以知其人之意理,而有补于当世。
伏惟陛下迈踪古圣,荡然无忌,故虽敌国诽谤之言,咸肆其辞而无所革讳,所以明大通之道也。谨录写上诣著作。臣寿诚惶诚恐,顿首顿首,死罪死罪。泰始十年二月一日癸巳,平阳侯相臣陈寿上。
乔字伯松,亮兄瑾之第二子也,本字仲慎。与兄元逊俱有名于时,论者以为乔才不及兄,而性业过之。初,亮未有子,求乔为嗣,瑾启孙权遣乔来西,亮以乔为己适子,故易其字焉。拜为驸马都尉,随亮至汉中。〔一〕年二十五,建兴(元)六年卒。子攀,官至行护军翊武将军,亦早卒。诸葛恪见诛于吴,子孙皆尽,而亮自有胄裔,故攀远复为瑾后。
瞻字思远。建兴十二年,亮出武功,与瑾书曰:“瞻今已八岁, 聪慧可爱,嫌其早成,恐不为重器耳。”年十七,尚公主,拜骑都尉。其明年为羽林中郎将,屡迁射声校尉、侍中、尚书仆射,加军师将军。瞻工书画,强识念,蜀人追思亮,咸爱其才敏。每朝廷有一善政佳事, 虽非瞻所建倡,百姓皆传相告曰:“葛侯之所为也:”是以美声溢誉, 有过其实。景耀四年,为行都护卫将军,与辅国大将军南乡侯董厥并平尚书事。六年冬,魏征西将军邓艾伐蜀,自阴平由景谷道旁入。 瞻督诸军至涪停住,前锋破,退还,住绵竹。艾遣书诱瞻曰:“若降者,必表为琅邪王。”瞻怒,斩艾使。遂战,大败,临阵死,时年三十七。众皆离散,艾长驱至成都。瞻长子尚,与瞻俱没。次子京及攀子显等,咸熙元年内移河东。
董厥者,丞相亮时为府令史,亮称之曰:“董令史,良士也。吾每与之言,思慎宜适。”徙为主薄。亮卒后,稍迁至尚书仆射,代陈祗为尚书令,迁大将军,平台事,而义阳樊建代焉。延熙(二)十四年 ,以校尉使吴,值孙权病笃,不自见建。权问诸葛恪曰:“樊建何如宗预也?”恪对曰:“才识不及预,而雅性过之。”后为侍中,守中书令。自瞻、厥、建统事,姜维常征伐在外,宦人黄皓窃弄机柄,咸共将护,无能匡矫,然建特不与皓好往来。蜀破之明年春,厥、建俱诣京都,同为相国参军,其秋并兼散骑常侍,使蜀使慰劳。
评曰:诸葛亮之为相国也,抚百姓,示仪轨,约官职,从权制, 开诚心,布公道;尽忠益时者虽仇必赏,犯法怠慢者虽亲必罚,服罪输情者虽重必释,游辞巧饰者虽轻必戮;善无微而不赏,恶无纤而不贬;庶事精炼,物理其本,循名责实,虚伪不齿;终于邦域之内,咸畏而爱之,刑政虽峻而无怨者,以其用心平而劝戒明也。可谓识治之良才,管、萧之亚匹矣。然连年动众,未能成功,盖应变将略,非其所长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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