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람(權擥)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權擥【翼平公。】
字正卿, 近之孫。 永樂丙申生。 世宗三十二年庚午, 擢魁科。 癸酉, 策靖難功臣。 世祖卽位, 超拜同副承旨, 策佐翼功臣, 陞吏曹參判, 進授判書, 典文衡。 辛巳拜相, 至左議政, 封吉昌府院君。 乙酉卒, 年五十。 配享世祖廟庭。
번역문:
권람(權擥)【익평공(翼平公)¹이다.】
자는 정경(正卿)이고, (권)근(近)²의 손자이다. 영락(永樂) 병신년(1416)³에 태어났다. 세종(世宗) 32년 경오년(1450)에 문과에 장원으로 뽑혔다⁴. 계유년(1453)에 정난공신(靖難功臣)⁵에 책록되었다.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동부승지(同副承旨)⁶에 파격적으로 제수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⁷에 책록되었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하고 판서(判書)⁸에 올랐으며, 문형(文衡)⁹을 관장하였다. 신사년(1461)에 재상¹⁰이 되어 좌의정(左議政)¹¹에 이르렀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¹²에 봉해졌다. 을유년(1465)에 졸(卒)하니, 나이 50세였다. 세조의 묘정(廟庭)¹³에 배향(配享)¹⁴되었다.
주석:
- 익평공(翼平公): 권람의 시호(諡號). 익(翼)은 ‘생각이 깊고 멀리 내다봄(思慮深遠)’ 등을, 평(平)은 ‘일을 처리함에 법도가 있음(治而有法)’ 등을 의미한다.
- 근(近): 권근(權近, 1352-1409).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학자이자 문신. 호는 양촌(陽村). 권람은 그의 손자이다.
- 영락(永樂) 병신년(丙申年): 영락은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의 연호(1403-1424). 병신년은 1416년(태종 16)이다.
- 괴과(魁科): 과거 시험, 특히 문과에서 장원(壯元)으로 뽑힘.
- 정난공신(靖難功臣):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권람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비서 기관으로, 동부승지는 부승지(副承旨)와 함께 도승지(都承旨)를 보좌했다. '초배(超拜)'는 격식을 뛰어넘어 특별히 제수함을 의미한다.
-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권람은 좌익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 판서(判書): 조선 시대 육조(六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권람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겸임하며 문형을 관장하였다.
- 배상(拜相): 재상(宰相)에 임명됨.
- 좌의정(左議政): 의정부(議政府)의 버금 벼슬. 정1품.
-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작위. 권람은 공신으로서 길창부원군에 봉해졌다.
-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다.
-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원문:
公幼好讀書, 宏達博雅, 志大多奇策。 載笈尋名山¹, 無所不到, 必與韓公明澮俱。 所至輒留讀, 著文章遣懷。 不事仕宦, 年三十五, 尙落落事奇遊, 人勸赴第, 一擧連三魁。 公爲大夫人設宴, 鶴髮在堂, 軒蓋塡門。 世祖時以領議政亦押宴, 親壽大夫人, 榮輝一世。 世祖知公有大才, 待之極款。 公首建大策, 且薦明澮, 出入甚密。【申高靈叔舟撰碑。】
번역문:
공(公)은 어려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식견이 넓고 학문이 깊었으며(宏達博雅)¹⁵, 뜻이 크고 기묘한 계책이 많았다. 책 상자를 싣고 명산(名山)¹⁷(과 고적(古蹟))¹⁶을 찾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반드시 한공(韓公) 명회(明澮)¹⁸와 함께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번번이 머물러 독서하고, 문장을 지어 회포를 풀었다. 벼슬살이에 힘쓰지 않아 나이 35세에도 여전히 초연하게 기이한 유람(奇遊)¹⁹을 일삼으니,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기를 권하자 단번에 향시, 회시, 전시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다(連三魁)²⁰. 공이 대부인(大夫人)²¹을 위해 잔치를 열자, 백발의 노모가 당(堂)에 있고 수레와 덮개[軒蓋]²²가 문을 메웠다.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으로서 또한 잔치에 참석하여(押宴)²³ 직접 대부인에게 축수(祝壽)하니, 영광이 한 시대에 빛났다. 세조는 공에게 큰 재능이 있음을 알고 매우 정성껏(極款)²⁴ 대우하였다. 공이 맨 먼저 큰 계책을 세웠고, 또 한명회를 추천하여 출입이 매우 비밀스러웠다.【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비문(碑文)²⁵에서 인용】
주석:
15. 굉달박아(宏達博雅): 도량이 넓고 사리에 통달하며 학식이 넓고 품위가 있음.
16. [주-D001] 山 : 《보한재집(保閑齋集)・수충위사……권공신도비(輸忠衛社……權公神道碑)》 및 《동문선(東文選)・유명조선국……권공비명(有明朝鮮國……權公碑銘)》에는 뒤에 “고적(古蹟)”이 더 있다.
17. 명산(名山): 이름난 산.
18. 한공(韓公) 명회(明澮): 한명회(韓明澮, 1415-1487). 권람과 함께 계유정난을 계획하고 성공시킨 핵심 인물.
19. 기유(奇遊): 기이한 유람. 세속적인 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20. 연삼괴(連三魁):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의 세 단계 과거 시험에서 연달아 장원(魁)을 함. 이는 매우 드문 일로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
21.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권람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22. 헌개(軒蓋): 높은 사람이 타는 수레와 그 덮개. 높은 벼슬아치들이 많이 모였음을 나타낸다.
23. 압연(押宴): 잔치에 참석하여 주관하거나 자리를 빛냄. 영의정이라는 최고위직 신분으로 참석했음을 의미한다.
24. 극관(極款): 지극히 정성스럽고 성실함. 세조가 권람을 매우 신임하고 중히 여겼음을 보여준다.
25.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비문(碑文): 신숙주(1417-1475)는 세종부터 성종 대까지 활약한 문신이자 학자. 호는 보한재(保閑齋). 권람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원문:
先是, 永樂甲午秋親試, 讀卷官河崙等取擧子三人卷子以進, 太宗曰: “當依古焚香祝壯元故事。” 信手抽之, 乃權文景蹈也。 太宗喜曰: “予悼父近之早逝, 今得其子爲壯元, 聊此自慰。” 顧語崙曰: “此榜乃予門生, 卿等不得爲自家桃李也。” 崙等終不受禮謁。 蹈後改名踶。 至是年庭試, 讀卷官等取權擥擬第四人。 榜旣出, 文宗曰: “權擥居幾²⁶?” 督令左右進諸卷子, 讀至第四曰: “此誠壯元也。” 遂親置壯元。 擥之父子壯元, 皆御賜也。 擥於是年鄕、會、殿三試皆居魁, 金秀光於三試皆爲尾, 時人笑曰: “三場壯元, 古人多; 三場爲尾, 天下所無。”【《紀年通攷》。】
번역문:
이보다 앞서 영락 갑오년(1414) 가을 친시(親試)에서 독권관(讀卷官)²⁷ 하륜(河崙) 등이 과거 응시자 세 사람의 답안지를 뽑아 올리자, 태종(太宗)²⁸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옛날에 향을 사르고 장원(壯元)을 축하하던 고사(故事)에 따라야겠다.” 손 가는 대로 뽑으니, 바로 권문경(權文景) 도(蹈)²⁹였다. 태종께서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그의 아버지 근(近)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는데, 이제 그 아들이 장원이 되었으니, 그런대로 이로써 스스로 위안하노라.” 하륜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이 방(榜)은 바로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卿) 등은 자기 집의 도리(桃李)³⁰라고 할 수 없다.” 하륜 등은 끝내 예방(禮訪) 인사를 받지 않았다. 도(蹈)는 뒤에 이름을 제(踶)³¹로 고쳤다. 이 해(1450년)의 정시(庭試)³²에 이르러, 독권관 등이 권람을 제4인으로 의정(擬定)하였다. 방(榜)이 이미 나오자 문종(文宗)³³께서 말씀하셨다. “권람이 몇 등에 있는가?”³⁴ 좌우 신하들에게 명하여 여러 답안지를 올리게 하고 제4등의 답안지를 읽으시더니 말씀하셨다. “이것이 진실로 장원이로다.” 마침내 친히 장원으로 두셨다. 권람 부자(父子)의 장원은 모두 임금이 내려준 것[御賜]이었다. 권람은 이 해에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의 세 시험에서 모두 장원하였고, 김수광(金秀光)³⁵은 세 시험에서 모두 꼴찌를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웃으며 말하였다. “세 번 장원한 것은 옛사람 중에 많지만, 세 번 꼴찌 한 것은 천하에 없는 일이다.”【《기년통고(紀年通攷)》³⁶에서 인용】
주석:
26. [주-D002] 幾 : 《대동야승(大東野乘)・필원잡기(筆苑雜記)》에 근거할 때 뒤에 “좌우왈(左右曰) 제사(第四).”가 더 있어야 한다. 즉, "좌우에서 '4등입니다.'라고 아뢰었다"는 내용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7. 독권관(讀卷官): 과거 시험의 답안지를 채점하는 시험관.
28. 태종(太宗): 조선 제3대 왕 이방원(李芳遠, 1367-1422).
29. 권문경(權文景) 도(蹈): 권도(權蹈, 1386-1419). 권근의 아들이자 권람의 아버지. 자는 문경(文景).
30. 도리(桃李):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 제자나 문하생을 비유하는 말. 태종은 권도가 자신의 문생임을 강조하여 하륜 등이 스승으로 대우받지 못하게 한 것이다.
31. 제(踶): 권도의 개명(改名)한 이름.
32. 정시(庭試): 임금이 궁궐 뜰에서 직접 보이는 과거 시험. 전시(殿試)라고도 한다.
33. 문종(文宗): 조선 제5대 왕 이향(李珦, 1414-1452). 세종의 맏아들.
34. “권람이 몇 등에 있는가?”: 주석 [주-D002]에서 지적하듯, 이 뒤에 신하가 4등이라고 답하는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5. 김수광(金秀光): 생몰년 미상. 본문에 따르면 권람과 같은 해에 세 번의 과거 시험에서 모두 꼴찌를 했다고 한다.
36. 《기년통고(紀年通攷)》: 조선 후기 홍만종(洪萬宗)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로 추정된다.
원문:
魯山幼沖嗣位, 八大君强盛, 人心危疑。 光廟有靖亂之志, 權擥出入邸下甚密。 每進見, 日晏不退, 進膳失時, 宮人見擥之至, 目曰: “寒羹郞又來矣。” 及卽位, 召入內殿, 設宴慰之, 顧貞熹王后曰: “此乃昔日寒羹郞也。”【《東閣雜記》。】
번역문:
노산군(魯山君)³⁷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잇자, 여덟 대군(大君)³⁸들이 강성하여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웠다. 광묘(光廟)³⁹께서 정난(靖亂)의 뜻이 있었는데, 권람이 저하(邸下)⁴⁰에 출입함이 매우 비밀스러웠다. 매번 나아가 뵐 때마다 날이 저물도록 물러가지 않아 수라[進膳]⁴¹ 올릴 때를 놓치니, 궁인(宮人)들이 권람이 오는 것을 보면 눈짓하며 말하였다. “찬 국[寒羹] 도령⁴²이 또 왔구나.” 즉위함에 미쳐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정희왕후(貞熹王后)⁴³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바로 옛날의 찬 국 도령이다.”【《동각잡기(東閣雜記)》⁴⁴에서 인용】
주석:
37. 노산군(魯山君):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을 폐위시킨 후 낮추어 부른 이름. 여기서는 단종(재위 1452-1455)을 가리킨다.
38. 팔대군(八大君): 세종의 여덟 아들, 즉 문종, 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安平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광평대군(廣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평원대군(平原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을 가리킨다. 이들 중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의 세력이 강성하여 정치적 긴장감이 높았다.
39. 광묘(光廟): 세조(世祖)의 원래 묘호. 예종(睿宗) 때 세조로 개정되었다. 여기서는 세조를 가리킨다.
40. 저하(邸下): 왕자, 특히 대군(大君)의 거처 또는 그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수양대군(세조)을 가리킨다.
41. 진선(進膳): 임금이나 왕족에게 음식을 올리는 것. 수라(水剌)를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42. 한갱랑(寒羹郞): 찬 국 도령. 권람이 수양대군과 비밀리에 오래 의논하느라 식사 때를 놓쳐 국이 식기 일쑤였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43.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의 비(妃). 윤번(尹璠)의 딸.
44.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원문:
公自幼患氣虛, 每厭宂劇, 至是乞閑。 上手札報曰: “卿之於予, 非可以知心德合論也, 天實爲生。 得有今日, 卿實功業主人。 今見卿林泉之趣, 驚嗟不已。” 遂拜右贊成。【碑。】
번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기허증(氣虛症)⁴⁵을 앓아 매번 번잡하고 심한 일(宂劇)⁴⁶을 싫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한가한 직책을 구걸하였다. 상(上)께서 손수 편지[手札]⁴⁷를 내려 답하셨다. “경(卿)과 나의 관계는 지심(知心)⁴⁸과 덕합(德合)⁴⁹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실로 내신 것이다.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경이 실로 공업(功業)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경이 임천(林泉)⁵⁰의 취미를 가지는 것을 보니, 놀랍고 탄식스러움을 그치지 못하겠다.” 마침내 우찬성(右贊成)⁵¹에 제수하였다.【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45. 기허증(氣虛症): 기운이 허약한 병증. 쉽게 피로하고 기운이 없는 증상.
46. 용극(宂劇): 일이 번잡하고 심함. 책임이 무겁고 힘든 관직이나 업무를 가리킨다.
47. 수찰(手札): 손수 쓴 편지. 어찰(御札).
48. 지심(知心): 마음을 알아줌.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49. 덕합(德合): 덕(德)이 서로 부합함. 서로의 덕을 알아보고 뜻이 맞는 것을 의미한다.
50. 임천(林泉): 숲과 샘. 자연, 또는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사는 것을 비유한다. 권람이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을 벗 삼아 지내려는 뜻을 비친 것을 가리킨다.
51. 우찬성(右贊成):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좌찬성과 함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보좌했다. 세조가 권람의 사직 요청을 만류하며 상대적으로 덜 번잡한 직책을 준 것으로 보인다.
원문:
權翼平公擥弱齡有大志, 博覽强記, 才名挺出儕輩。 然屢屈場屋, 恬⁵²然自處, 不屑屑於懷。 予誦孟郊詩曰: “‘出門卽有礙, 誰謂天地寬’, 郊之落第, 悲瘁⁵³困窮, 若無所容其身者, 今子將無然乎?” 翼平笑曰: “得不得寧非命耶?” 予知其爲大器。 後翼平年三十五, 以白衣⁵⁴擢壯元, 四十六入相, 爲一代元勳之首。 蓋眊矂悲傷, 士之常情, 而公之大度如是。 郊之不遇, 豈非局小使然耶?【《筆苑雜記》。】
번역문:
익평공(翼平公) 권람은 젊은 나이에 큰 뜻이 있었고,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며(博覽强記)⁵⁵, 재능과 명성이 동배(儕輩)들 중에 뛰어났다. 그러나 여러 번 과거 시험[場屋]⁵⁶에서 낙방하였으나, 태연(恬然)⁵⁷하게 스스로 처신하며 마음에 개의치 않았다[不屑屑於懷]⁵⁸. 내가 맹교(孟郊)⁵⁹의 시 “‘문을 나서면 곧 걸리는 것이 있으니, 누가 천지가 넓다고 하였는가?’라고 한 구절을 읊으며 말하였다. “맹교가 낙제했을 때 슬퍼하고 고달파하며(悲瘁)⁶⁰ 곤궁하여, 마치 몸 둘 곳이 없는 사람 같았는데, 지금 그대는 장차 그렇지 않을까?” 익평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되고 안 되는 것이 어찌 운명(命)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가 큰 그릇(大器)임을 알았다. 뒤에 익평공은 나이 35세에 백의(白衣)⁶¹로 장원에 뽑혔고, 46세에 재상(宰相)이 되어 한 시대 원훈(元勳)의 으뜸이 되었다. 대개 눈 어둡고 조급해하며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眊矂悲傷)⁶²은 선비의 보통 감정이지만, 공의 큰 도량(大度)은 이와 같았다. 맹교가 불우했던 것은 어찌 국량(局量)이 작아서 그리된 것이 아니겠는가?【《필원잡기(筆苑雜記)》⁶³에서 인용】
주석:
52. [주-D003] 恬 : 《대동야승・필원잡기》에는 “이(怡)”로 되어 있다. '이연(怡然)'은 '기뻐하는 모양, 온화하고 기쁜 모양'을 뜻한다. '염연(恬然)'은 '마음이 편안하고 담담한 모양'을 뜻한다. 문맥상 과거 낙방에도 개의치 않았다는 의미이므로 둘 다 가능하나, 저본을 따라 '염연(恬然)'으로 번역하였다.
53. [주-D004] 瘁 : 규장각본(奎章閣本)에는 “췌(悴)”로 되어 있다.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고달프다, 수척하다).
54. [주-D005] 白衣 : 《대동야승・필원잡기》에는 “문(文)”으로 되어 있다. '백의(白衣)'는 벼슬이 없는 선비를 의미하고, '문(文)'은 문장이나 학문을 의미한다. 문맥상 '백의'가 더 적합하다.
55. 박람강기(博覽强記): 널리 보고 잘 기억함.
56.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 과거 시험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57. 염연(恬然): 마음이 편안하고 담담한 모양. 주석 [주-D003] 참조.
58. 불설설어회(不屑屑於懷): 마음에 개의하여 근심하거나 연연하지 않음.
59. 맹교(孟郊, 751-814):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가난과 불우한 삶 속에서도 강직한 시를 많이 남겼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고 늦게 등과했다. 인용된 시는 〈낙제(落第)〉 또는 〈재하제후상장(再下第後上場)〉 등으로 알려진 시의 일부이다.
60. 비췌(悲瘁): 슬퍼하고 고달파함. 주석 [주-D004] 참조.
61. 백의(白衣): 흰 옷. 벼슬하지 않은 선비를 가리킨다. 주석 [주-D005] 참조.
62. 모조비상(眊矂悲傷): 눈이 어둡고(시야가 좁고) 조급해하며 슬퍼하고 상심함. 불우한 처지에 대해 조급해하고 슬퍼하는 선비의 일반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63.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필기잡록. 이 글의 '나(予)'는 서거정 자신이다.
'AI번역 > 국조명신언행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6 - 강희안(姜希顔) (0) | 2025.04.27 |
---|---|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6 - 이예(李芮) (0) | 2025.04.27 |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6 - 신숙주(申叔舟) (0) | 2025.04.27 |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5 - 박원형(朴元亨) (0) | 2025.04.27 |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5 - 최항(崔恒) (0) | 2025.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