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교토 여행

교토京都 여행 - 교토교엔京都御苑 교토고쇼京都御所 3 清所門 宜秋門 御車寄

集賢堂 2016. 2. 13.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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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쇼의 출입구는 세이쇼몬清所門-청소문으로서, 독특하게 가와라부키瓦葺-기와지붕이다. 왼편에 있는 건물 창구에서 참관 예약 여부를 확인한다.


세이쇼문을 들어올 때에 무슨 용무로 왔는지 경비원이 살피며 왼편에 있는 건물 창구에 가서 참관 예약증을 그대로 보이라고 한다.  창구에서는 안내서를 주니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창구 옆에 대기하는 곳이 있는데, 아래 지도에 보이듯 고친 지 오래되지 않은 건물이니 참관객을 많이 유치하기 위해서 그러한 것 같다.

이 건물 안 의자에 앉아서 영상을 시청하다가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나와 이동한다.


■역사와 교토고쇼

간무천황은 784년에 수도를 나라의 헤이조쿄에서 교토의 나가오카쿄로 천도한 후, 794년에 다시 헤이안쿄로 천도하였다. 헤이안쿄는 현재 교토시가 중심지에 해당하는 곳에 조영되었으며 남북 약5.3km, 동서 약4.5km의 사각형 모양으로, 동서의 중앙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스자쿠오지 큰길(현재의 센본도리 도로) 을 중심으로 사쿄(동쪽)와 우쿄(왼쪽)로 나뉘어져 있으며, 큰 길과 작은 길이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어 있다. 또한, 헤이안쿄 북쪽 끝의 이지조오지 큰길에 내접하는 곳에 남북 약1.4km, 동서 약1.2km 크기의 다이다이리(궁성)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정무와 의식을 주관하는 조도인, 부라쿠인, 다이조칸 및 그 밖의 관청이 들어서 있다. 조도인은 다이다이리(궁성)의 남쪽 중앙에 있고 남쪽으로 스자쿠오지 큰길에 접하며,  원내의 북쪽에는 정청인 다이고쿠덴(현재의 센본마루타마치 부근)이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현재의 헤이안 진구 신사의 건물은 당시의 다이고쿠덴 을 축소하여 복원한 것이다. 천황이 머무는 곳은 다이리라고 불리웠으며, 천황이 일상생활을 보내는 곳이었다. 다이다이리(궁성)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 조도인의 북동쪽에 있으며 남북 300m, 동서 220m 크기의 규모였다. 정전인 시신덴 이외에도 세이료덴, 고키덴, 레이케이덴, 히교샤 등 헤이안 시대의 왕조 문학으로 낯익은 궁중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으로 천도하여 166년이 지난 960년에는 다이리 궁전에 처음으로 화재가 발생하여 당시의 무라카미천황은 레이제이인(후원)을 임시거처로 사용하였으며 다이리 궁전은 바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다이리 궁전은 여러번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천황은 다이리 궁전이 완성될 때까지 귀족의 저택 등을 임시거처로 사용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이 임시궁전을 사토다이리로 부르게 되었는데,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다이다이리 궁성 내에 있었던 천황의 거처인 다이리 궁전은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사토다이리가 일상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이때, 다이다이리 궁성의 다이고쿠덴 등에도 여러번에 걸쳐 화재가 발생하였고, 잦은 전란 등으로 재건되지 못하고 있다가 폐허가 된 것처럼 마침내 다이리 궁전도 이같은 과정을 거쳐 폐허가 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교토고쇼는 「쓰치미카도 히가시노토인도노(土御門東洞院殿)」 라고 불리웠던 사토다이리의 하나로써, 헤이안쿄 다이리 궁전이 폐허가 되기 전후부터 자주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331년 고곤천황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후, 1869년 도쿄로 수도를 천도하기 직전까지 오랜기간에 걸쳐 궁전으로써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자주 화재와 재건을 반복하였는데 1788년 재건시, 에도막부는 로추(쇼군의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돌보는 직책)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재건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당시의 전례와 고사에 밝았던 우라마쓰 고젠(우라마쓰 미쓰요) 의 고증에 따라 시신덴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의 의장을 헤이안 시대의 건축 양식에 따라 복원하였으며, 또한 하교샤 등 소실되었던 건축물의 일부를 복원하고 옛 건축 양식으로 복원하여 새로운 다이리 궁전은 1790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이 건축물들도 1854년에 소실되었지만, 막부는 고카쿠천황 시대의 다이리 재건 계획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여 다음해인 1855년에 이례적인 빠른 속도로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요약

교토고쇼는 기와를 얹어 만든 흙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북 약 450m, 동서 약 250m의 사각형 모양으로 면적은 약11만㎡이다. 남쪽에 흰모래가 깔린 단테이 정원을 둔 시신덴 건물이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북서쪽에는 세이료덴, 북동쪽에는 고고쇼, 오가쿠몬조가 모두 동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고고쇼와 오가쿠몬조 앞에는 흰모래가 깔린 공간이 조성되어 있으며, 웅대한 오이케니와 정원을 두고 있다. 그 북쪽에 있는 흰색 흙담의 문을 빠져나가면 오쓰네고텐이 있으며 다시 북쪽에는 고메이천황이 독서를 하기 위한 방으로 만들어진 고슌, 그 복도를 따라서는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오스즈미쇼, 개방감이 느껴지고 정취있는 연결 복도를 따라가면 다실 조세쓰로 이어진다. 가장 북쪽에는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후가 거처하는 쓰네고텐과 궁녀 등의 거처였던 히교사가 있다. 히교샤의 남쪽 정원에는 등나무가 심어져 있어 후지쓰보라고도 불린다. 신덴즈쿠리, 쇼인즈쿠리, 스카이후 등, 역사상 대표적인 건축 양식을 조화시켜 만들어진 교토고쇼는 문화재로써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교토 오미야고쇼, 센토고쇼, 가쓰라리큐, 슈가쿠인리큐 등의 별궁과 함께 황실재산(국유재산)으로써 궁내청이 관리하고 있다.


1914년에 제작된 교토고쇼 전도 - 기슈몬 옆에 원래 건물과 담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이 그림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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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슈몬宜秋門-의추문. 우리나라처럼 원래는 문마다 편액이 있었던 것 같다. 예전 편액 탁본에는 宜穐門이라 썼다. 우리나라 경희궁 서문도 의추문이다.


화반華盤에 신선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마다 있는데 가에루마타蟇股-마고라고 한다. 헤이안 시대 건축에는 저렇게 화려한 조각을 새기지 않는 데 신기하다.


신선과 동자, 그리고 학.



잉어를 탄 금고선인琴高仙人



학을 탄 수노인壽老人


오쿠루마요세御車寄-어차기. 수레를 데는 곳으로 지붕이 둥글게 굽는 것이 특징인 가라하후唐破風-당파풍으로 지었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일왕이 생활하는 세이료덴清涼殿-청량전이 보인다.



히와다부키檜皮葺-편백 껍질 지붕 시공 모습


히와다부키檜皮葺


수령 70년 이상의 충분히 자란 노송나무에서 벗긴 껍질을 성형하여 시공한다. 노송나무 껍질을 취할 때 노송 나무를 벌채하지 않고 표피만 벗기는 채취 방법이라 친환경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두꺼운 노송나무와 모토카와시原皮師라고 불리는 노송 나무 껍질 채취 장인이 감소하고 있다.


668년 숭복사崇福寺 제당을 노송나무 껍질로 덮었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되나 그 이전부터 기술로서는 존재했다고 여겨진다.

아스카 시대 즈음 사원의 건축 기술의 하나로서 가와라부키가 전래되면서 사찰 건물의 대부분은 기와가 이용됐지만 히와다부키는 부속적인 건물의 지붕에 이용됐다.

또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에서는 공적인 건축물은 기와 지붕이었지만 사적인 건축물에는 히와다부키가 이용되었다. 예를 들면 조정의 공적인 의식 장소인 다이고쿠덴大極殿은 기와 지붕이었지만, 천황의 사저인 시신덴紫宸殿과 세이료덴清涼殿은 히와다부키이다. 또 헤이안 시대 이후 귀족의 사저인 신덴즈쿠리寝殿造도 히와다부키이다.

전래 초기에는 가와라부키가 더 격식이 높은 기법으로 있었지만,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국풍 문화의 영향으로 히와다부키가 지붕 공법 중 가장 격식 높은 기법이 됐다.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에는 공적 의식 장소도 가와라부키의 다이고쿠덴에서 히와다부키의 시신덴으로 이동하였다. 현재 남는 기법은 헤이안 시대 이후의 것으로 여겨진다.


노송나무 껍질을 1.2센티미터씩 미루면서 거듭 이어가면서 대나무 못으로 노송나무 껍질을 고정한다. 이를 통해 처마 끝을 두껍게 보여 무게감을 가진 경쾌하고 우아한 곡선의 지붕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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