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글

독서 読書

集賢堂 2016. 2. 16. 07:30
반응형

독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 되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확실히 책이 좋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성벽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렸을 때 쓸쓸해서 무서웠지만, 혼자서 창고 2층에 올라 옛날 할아버지가 읽었다는 네 상자 또는 다섯 상자 정도의 한문 서적을 보는 것이 좋았다. 물론 그것을 해석했을 리가 없다. 단지 크고 어려운 한자 책을 펼쳐보고, 그 안에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써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독서라는 것은 엿들여다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가능한 많은 책을 들여다봤고, 또 지금도 들여다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말 읽었다는 책은 극히 미미한 것이다.


 그래도 젊은 시절에는 감격하며 읽은 책도 있었다. 스물 조금 넘은 무렵, 처음으로 쇼펜하우워를 읽고 매우 감동했다.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를 거치면서 그러한 책은 없게 되었다. 닐 아도미라리라고하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내게는 남의 책을 열심히 읽고 그 사람의 사상을 열심히 연구하자는 생각이 얇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가의 사상이라는 것은 자신의 사고가 진행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배울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의 플라톤이나 현대의 헤겔과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헤겔을 처음 읽은 것은 스물 무렵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헤겔은 나의 좌우에 있는 것이다. 처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은 것이 서른 넘은 때였지 않나 싶다. 처음 본즈 라이브러리의 번역과 다음으로 오래된 필로 조 피시 비브리오 테-크의 롤 페스의 번역으로 읽었다. 그것은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십 가까이되고, 졸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에게 살아온 듯,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거기까지 가지 않으면 안된다. 일맥 상통에 이르면 어두운 밤에 불을 밝히는 바와 같이 일시에 전체가 분명해진다. 위대한 사상가의 사상이 자신​​의 것이 될 때에 그것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종종 젊은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위대한 사상가의 책을 읽고, 그 사람의 뼈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잡아야한다. 그리고 약간이라도 자신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위대한 사상가에게는 반드시 뼈라고 하는 것이 있다. 위대한 조각가에게는 조각의 뼈, 위대한 화가에게는 붓의 뼈가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뼈 없는 것 같은 사상가의 책은 읽기에 족하지 않다. 안진경의 책을 배운다해도 글자 모양을 흉내내는 것은 아니다. 아주 최근에도 나는 라이프니츠에게 포함된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수십 년 전에 한 번 라이프니츠를 수용하여 얻은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물의 견해 사유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칼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다소라도 손에 넣으면은 어디 까지나 자세하게 읽지 않아도 이런 문제는 그로부터 이와같이 사고해야지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예상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개 그러한 곳을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전집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칸트와 헤겔의 전집이라는 것도 없다. 물론 나는 그것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결코 그런 방법을 남들에게 권하지도 않는다. 그런 독서법은 진정으로 그 사상가의 골수에 도달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관적 독단적인 해석에 빠짐을 면할 수 없다. 독서는 어디 까지나 언어가 있는 곳이라면 정확하고 면밀히 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만명이 준거하는 독서법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그렇다고 너무 그런 방향으로만 매달려 단지 자구라는 것을 해석하고 그 근저에 움직이고 있는 생물을 잡지 않는 것도 얕은 독서법이라고 한다. 정밀한 것에 오히려 조잡한 것도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들여다보는 방법이니까 잡독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늙어 가면서 이해가 둔해지고 인상도 얕고 기억력도 나쁘고, 한 번 읽은 책도 즉시 그 내용을 잊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저 내가 생각하는 것에 관련되는 책이 있으면, 매우 그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남는다. 나는 지금까지 인류학 책을 읽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번 여름 마리노스키과 해리슨 등을 말하는 것을 읽고 그 사람이 적고 있는 원시 사회 구조라는 것이 내가 로기슈 · 온토로기슈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관련해서 자신의 사고가 실증적으로 증명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재미있다고 느꼈다. 


 누구든지 말하고 있고,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한 시대에 획을 그은 위대한 사상가, 큰 사상의 흐름의 연원이 되는 사람의 글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상가의 사상을 잡게 되면 그 유파라고 하는 것은 마치 덩굴을 감아들이 듯이 이해해 갈 것이다. 물론 어려운 사상가는 다소 입문서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만, 단순히 개론적인 것이나 말서末書적인 것들을 많이 읽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종종 무슨 책은 어렵다고 한다. 단지 어렵고 내용이 없는 것이라면 읽을 필요도 없지만 자신의 생각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면, 어디까지나 부딪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위대한 사상의 연원이 된 사람의 책을 읽는다고 해도, 예를 들어 플라톤만 읽으면 거기서 좋다고 말하는 바와 같은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사상을 안다는 것은 사상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과 같은 뜻. 특히 그러한 사상이 어떤 역사적 지반에서 발생했고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오늘날과 같이, 기존의 사상이 막혔다고 생각되어, 우리가 뭔가 새로운  도약을 내야한다고 생각하는 시대에는 더욱 생각해야 한다. 어찌되었든 위대한 사상가라도, 일파의 생각이 정해진다는 것은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막혔을 때, 그것을 넘는 것은 이대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로 돌아가 생각해 보는 것에 의하여야 한다. 어떻게 해서 이런 방향으로 왔는지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러한 의미에서도 또한 사상의 연원을 이룬 사람의 글을 읽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 방향을 정한 사람의 책에서 다른 이런 행방도 있었다는 것을 제안받는 일이 있기도 하다. 


쇼와 13년(1938년) 11월





読書


西田幾多郎



 私は或は人から沢山の書物を読むとでも思われているかも知れない。私はたしかに書物が好である。それは子供の時からの性僻であったように思う。極ごく小さい頃、淋しくて恐いのだが、独りで土蔵の二階に上って、昔祖父が読んだという四箱か五箱ばかりの漢文の書物を見るのが好であった。無論それが分ろうはずはない。ただ大きな厳しい字の書物を披いて見て、その中に何だかえらいことが書いてあるように思われたのであった。それで私の読書というのは覗のぞいて見るということかも知れない。そういう意味では、可なり多くの書物を覗いて見た、また今でも覗くといってよいかも知れない。本当に読んだという書物は極ごく僅わずかなものであろう。

 それでも若い時には感激を以て読んだ本もあった。二十少し過ぎの頃、はじめてショーペンハウエルを読んで非常に動かされた。面白い本だと思った。しかし年を経るに従い、そういう本はなくなった。ニル・アドミラリというような気分になってしまった。私には或人の書物を丹念に読み、その人の考を丹念に研究しようという考が薄い。

 しかし偉大な思想家の思想というものは、自分の考が進むに従って異なって現れて来る。そして新に教えられるのである。例えば、古代のプラトンとか近代のヘーゲルとかいう如き人々はそうと思う。私はヘーゲルをはじめて読んだのは二十頃であろう、しかし今日でもヘーゲルは私の座右にあるのである。はじめてアリストテレスの『形而上学』を読んだのは、三十過ぎの時であったかと思う。最初ボンス・ライブラリの訳と次に古いフィロゾフィッシュ・ビブリオテークのロルフェスの訳で読んだ。それはとても分らぬものであった。然るに五十近くになって、俄にアリストテレスが自分に生きて来たように思われ、アリストテレスから多大の影響を受けた。私は思う、書物を読むということは、自分の思想がそこまで行かねばならない。一脈相通ずるに至れば、暗夜に火を打つが如く、一時に全体が明あきらかとなる。偉大な思想家の思想が自分のものとなる、そこにそれを理解したといい得るようである。私はしばしば若い人々にいうのであるが、偉大な思想家の書を読むには、その人の骨というようなものを掴まねばならない。そして多少とも自分がそれを使用し得るよう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偉大な思想家には必ず骨というようなものがある。大なる彫刻家に鑿のみの骨、大なる画家には筆の骨があると同様である。骨のないような思想家の書は読むに足らない。顔真卿の書を学ぶといっても、字を形を真似するのではない。極ごく最近でも、私はライプニッツの中に含まれていた大切なものを理解していなかったように思う。何十年前に一度ライプニッツを受用し得たと思っ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

 例えば、アリストテレスならアリストテレスに、物の見方考え方というものがある。そして彼自身の刀の使い方というものがある。それを多少とも手に入れれば、そう何処までも委しく読まなくとも、こういう問題は彼からは斯くも考えるであろうという如きことが予想せられるようになると思う。私は大体そういうような所を見当にしている。それで私は全集というものを有っていない。カントやヘーゲルの全集というものも有たない。無論私はそれで満足というのでもなく、また決してそういう方法を人に勧めもせない。そういう読み方は真にその思想家の骨髄に達することができればよいが、然らざれば主観的な独断的な解釈に陥るを免れない。読書は何処までも言語のさきざきまでも正確に綿密でなければならない。それはいうまでもなく万人の則るべき読書法に違いない。それかといってあまりにそういう方向にのみ走って、徒らに字句によって解釈し、その根柢に動いている生きものを掴まないというのも、膚浅ふせんな読書法といわなければならない。精密なようでかえって粗笨そほんということもできるであろう。

 私は最初にいったように、覗くという方だから、雑読といわれるかも知れない。老いるに従って理解が鈍くなり、印象も浅く記憶が悪しくなり、一度読んだ本であっても、すぐその内容を忘れてしまうことが多い。それでもちょうど私の考えている所に結び附いて来る書物であると、非常にそれが面白いと思い頭に残るようである。私はこれまで殆んど人類学的な書物を読んだことがない。然るにこの夏マリノースキやハリソンなどいうものを読み、それらの人の書いている原始社会の構造というものが、私がローギシュ・オントロギシュに考えていたものと結び附き、自分の考が実証的に証明せられた如くに思い、面白く感じた。

 何人もいうことであり、いうまでもないことと思うが、私は一時代を劃したような偉大な思想家、大きな思想の流の淵源となったような人の書いたものを読むべきだと思う。かかる思想家の思想が掴まるれば、その流派というようなものは、恰あたかも蔓つるをたぐるように理解せられて行くのである。無論困難な思想家には多少の手引というものを要するが、単に概論的なものや末書的なものばかり多く読むのはよくないと思う。人は往々何々の本はむつかしいという。ただむつかしいのみで、無内容なものならば、読む必要もないが、自分の思想が及ばないのでむつかしいのなら、何処までもぶつかって行くべきでないか。しかし偉大の思想の淵源となった人の書を読むといっても、例えばプラトンさえ読めばそれでよいという如き考には同意することはできない。ただ一つの思想を知るということは、思想というものを知らないというに同じい。特にそういう思想がどういう歴史的地盤において生じ、如何なる意義を有するかを知り置く必要があると思う。況まして今日の如く、在来の思想が行き詰ったかに考えられ、我々が何か新に蹈み出さねばならぬと思う時代には尚更なおさらと思うのである。如何に偉大な思想家でも、一派の考が定まるということは、色々の可能の中の一つに定まることである。それが行詰った時、それを越えることは、この方に進むことによってでなく、元に還って考えて見ることによらなければならない。如何にしてこういう方向に来たかということを。而しかしてそういう意味においても、また思想の淵源をなした人の書いたものを読むべきだといい得る。多くの可能の中から或一つの方向を定めた人の書物から、他にこういう行方もあったということが示唆せられることがあるのでもあろう。(昭和十三年十一月)





底本:「続思索と体験『続思索と体験』以後」岩波文庫、岩波書店

   1980(昭和55)年10月16日第1刷発行

底本の親本:「西田幾多郎全集第十二巻」岩波書店

   1950(昭和25)年

初出:「改造 第二十巻第十一号」

   1938(昭和13)年11月

入力:土屋隆

校正:荒木恵一

2014年2月14日作成

青空文庫作成ファイル:

このファイルは、インターネットの図書館、青空文庫(http://www.aozora.gr.jp/)で作られました。入力、校正、制作にあたったのは、ボランティアの皆さんです。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