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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 해혼후 유하묘 출토《제논어(齊論語)·지도(知道)》죽간 해석 (논문 번역)

集賢堂 2017. 2. 20.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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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제나라의 논어는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해혼후 유하 무덤 발굴을 통해 전모가 다시 드러났다. 그리고 이에 관한 논문이 2016년 12 문물지에 실렸다. 논어를 즐겨 읽는 한 사람으로서 저녁에 우연찮게 이 글을 흥미롭게 읽은 나머지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여 번역 소개한다.


楊軍 (장시성문물고고연구소 부연구관원 江西省文物考古研究所 副研究館員)

王楚寧 (베이징연합대학응용문리학원 석사연구생 北京聯合大學應用文理學院 碩士研究生) 

徐長青 (장시성문물고고연구소 연구관원 江西省文物考古研究所 研究館員) 


해혼후 유하묘에서 출토된 죽간 약 5,000매에 대한 기초 정리와 보호 과정 중에서 볼 때, 죽간의 내용은 《도망부(悼亡賦)》、《논어(論語)》、《역경(易經)》、《예기(禮記)》、《효경(孝經)》、《의서(醫書)》、 《육박기보(六博棋譜)》 등의 문헌을 포괄하며, 그 중에서 《논어(論語)·지도(知道)》 편은  《논어(論語)》 중 《제론(齊論)》에 해당한다. 본문에 첨부한 도판은 동일한 한 죽간의 앞면과 뒷면이다. 일반적으로 죽간의 문자는 대부분 한 면에 쓰여지나, 이 죽간은 앞면과 뒷면 두 면에 모두 문자가 쓰여있으므로 이 편은 죽서의 편수(篇首)임이 마땅하다.


서한 시기에 《논어(論語)》는 《노론(魯論)》、《제론(齊論)》、《고론(古論)》 세 개의 판본으로 나뉘었다. 《제논어(齊論語)》와 《논어(論語)》 여타 판본의 구별에 관해서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논어[齊(論語)]》는 22편이다.  《문왕(問王)》과 《지도(知道)》편이 더 있다." 


「지도(智道)」는 「지도(知道)」로서, 이 죽서의 편제(篇題)임이 분명하다. 한대에는 「지(知)」와 「지(智)」가 서로 통가자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지(知)는 사(詞)이다.」 이에 관해 단옥재(段玉裁)의 주(注)에서는 「지(知)와 지(智)는 뜻이 똑같다.」라고 하였다. 앞서 공포된 해혼후묘 출토 죽간에서는 또한, 금본(今本) 《논어(論語)》 중에 나오는 「지자요수(知者樂水)」 한 구를 「지자요수(智者樂水)」라고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해당 죽간 뒷면에 쓰인 「지도(智道)」는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기재된 《제논어(齊論語)》 제22편의 편제인 「지도(知道)」인 것이다.


 

「지도(智道)」의 반대면에는「공자지도(孔子智道)」 등 24글자가 쓰여 있다. 편제(篇題) 「지도(智道)」는 본구(本句) 앞부분 「공자(孔子)」 바로 뒤 두 글자에서 취한 것으로 《논어(論語)》 각 편 편제의 명명 규칙에 부합한다. 예를 들어 《향당(鄉黨)》 편의 편제는 수장(首章)의  「공자우향당(孔子於鄉黨)」에서 「향당(鄉黨)" 두 글자를 취한 것이다. 이로 볼때, 이 구절도 《지도知道》 편의 수장임이 분명하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해혼후 유하묘에서 출토된 죽간은 아직도 해독되지 못하고 있으나 다만 죽간에 대한 기초적인 정리와 보호 과정 중에서 《논어(論語)》에 있는 《지도(知道)》 편을 발견하였다. 이로 인해 필자는 해혼후 유하묘 죽간 《논어(論語)》를 《제논어(齊論語)》로 추정한다.




一 수장(首章) 고석(考釋)


해당 죽간의 정면은 《논어(論語)·지도(知道)》 편의 수장(首章)으로 간문(簡文)은 총 24자이다. 논의의 편의성을 위해 간문과 표점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孔]子智(知)道之昜(易)也。 昜(易)昜(易)云者三日。 子曰:「此道之美也,莫之御也。 」 [공자께서  행하는 것이 간단함을 아시쉽도다라고 말씀하시기를 사흘 동안 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 도는 아름답지만 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구나."] 


이 죽간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문자의 자취가 분명하다. 죽간 윗부분은 평평하고 문자 앞에 공백을 두었다. 죽간의 아랫 부분은 대체로 훼손되었으나 문자가 쓰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 죽간은 예서(隸書)에 먹으로 썼다. 문자는 단정하고 말끔하며 중첩되는 문자는 중문(重文) 부호를 쓰지 않았다. 문장의 의미도 끊김없이 완전하다.


이 죽간의 간문은 현재 전하는 문헌들에는 완전하지 않으며 동일한 간문이 肩水金關漢簡 중에서 일찍이 발견되었다. 肩水金關簡 73EJT22 : 6 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孔子知道之昜(易)也。 昜(易)昜(易)云者三日。 子曰:‘此道之美也’」。 


이 죽간은 「지도(智道)」를 「지도(知道)」라고 썼으며 이는 《漢書·藝文志》의 기록과 일치한다. 「昜昜」은 「昜=」으로 중문(重文) 부호를 사용했다. 「者」는 원문에서는 「省」으로 해석했으나, 필자는 죽간의 사진에 의거해 「者」로 고쳤다. 「此道之美也」 이후의 간독은 파손되어 「莫之御也」 등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金關簡에 관해 「국경 이졸(吏卒)이 문자를 익히던 죽간」 또는 「서북 변방에는 제나라 지방에서 온 이졸(吏卒)들이 많았다.」라고 하며 학자들은 일찍이 「이 간문은 일혹 《논어(論語)·지도(知道)》의 일문이다.」라고 생각했다.


《제논어(齊論語)》의 존실에 대한 추측에 대해서는 陳東의 《歷代學者關於〈齊論語〉的探討》에 매우 자세하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이 책의 추측은 대부분 억측이지만 劉恭冕의 《論語正義補》「知道」條에서 인용한  汪宗沂의 말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 「《지도(知道)》 일문에 관해서는 참고할 문헌히 전연 없다. 내 생각에는 《대기(戴記)·향음주의(鄉飲酒義)》에 ‘孔子曰:吾觀於鄉,而知王道之易易也。 ’라고 쓰인 것이 바로 《知道》이다. 」[9]  《鄉飲酒義》 중 「吾觀於鄉,而知王道之易易也」라는 구절에 관한 해석으로 《예기정의(禮記正義)》에서는 정현(鄭玄) 주(注)를 인용하였다. 「향(鄉)은 향음주(鄉飲酒)이다. 이이(易易)는 교화지본(教化之本)은 존현(尊賢)과 상치(尚齒)일 뿐임을 말한 것이다. 」  공영달(孔穎達)의 소(疏)는 다음과 같다.  「공자(孔子)께서 우선 향음주(鄉飲酒)의 예(禮)를 보시고, 왕도(王道)의 이이(易易)를 알았다고 일컬으신 것이다. 그래서 기록한 자가 인용하여 향음주의 의(義)로서 구성하였다. ‘吾觀於鄉’이라는 것의 향(鄉)은 鄉飲酒이다. 내가 향음주의 예를 보니 존현(尊賢), 상치(尚齒)의 법이 있은 즉, 왕자(王者)의 교화지도(教化之道)는 그 사업이 매우 쉬우니 尊賢, 尚齒를 교화지본(教化之本)으로 삼은 까닭을 알겠다고 말한 것이다. 곧바로 ‘이(易)’를 말하지 않고 ‘이이(易易)’라고 말했으니, 간단하다는 뜻을 취해 거듭 ‘이이(易易)’라고 말한 것이다. 마치 《상서(尚書)》에서의 ‘王道蕩蕩’, ‘王道平平’과 같다. 모두 중언(重言)으로 말씀을 조리있게 하기 위해서다. 」  


《論語·知道》 편 首章의 전반부인 「孔子智道之昜也,昜昜雲者三日」은 기본적으로 《禮記· 鄉飲酒義》에서 「孔子曰:‘吾觀於鄉,而知王道之易易也’」와 동일하다.


「智」는 「知」이며, 안다는 뜻이다. 「道」는 「王道」이며, 「王者教化之道」라는 뜻이다. 「昜」은 「易」이며, 「‘易’는 肩水金關漢簡에서 대부분 ‘昜’이라고 썼다. 예를 들어 肩水金關漢簡 T23 ∶ 161과 1058 등에 기재된 ‘趙國昜陽’은 《漢書·地理志》에 기재된 조국(趙國)의 ‘易陽’이다.」[11] 「昜昜」은 《鄉飲酒義》에서의 「易易」으로 「簡易之義」,「重言‘易易’......取其語順故也」이다.[12]  「三日」은 대략적인 일수이며, 앞의 「昜昜(易易)」을 수식한다. 《禮記·檀弓》에서 「水漿不入於口者三日」라고 한 것과 유사한 것이다.[13]


《論語·知道》 편 首章의 후반부인 「此道之美也,莫之御也」는 《공자가어(孔子家語)·안회(顏回)》 편에서 「孔子謂顏回曰:‘人莫不知此道之美, 而莫之御也,莫之為也。 何居為聞者,盍曰思也夫’.」[14]로 나타난다.


《論語·知道》 편 首章의 후반부인 「此道之美也,莫之御也」는 기본적으로 《孔子家語·顏回》 편에서 「人莫不知此道之美,而莫之御也」와 동일하다.


「此道」는 윗 글에서 말한 「智(知)」의 「道」이며[역자 주 : 원문의 ()””에서 ()”之는 지워야 할 것 같다. 지우지 않으면 뜻이 이상하다.], 뜻은 「王道」이다. 《論語》 중에 「莫之知也」는 주희(朱熹)의 注에 「人不知也」[15]이다. 그러므로 「莫之御也」는 「人不御也」라고 이해할 수 있다. 《孔子家語》 중에 「莫之御也」와 「莫之為也」는 병렬 구조로 「御」와 「為」 두 글자는 관련이 있다. 王肅의 注에 「御」 는 「御,猶待也」이라고 하였다.[16] 「待」와 「為」 두 글자는 《孔子家語》 중에서 병렬로 나오는데, 예를 들어 「愛其死以有待也,養其身以有為也」[17]가 있다. 필자는 이에 의거해 「御」를 「待」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는 기다린다는 뜻이 된다. 


《禮記·鄉飲酒義》와 《孔子家語·顏回》 중에 연관된 기록과 종합해서 필자가 생각하기에 《論語·知道》 篇 首章에 기록된 내용은 공자가 鄉飲酒禮를 본 이후 안회에게 자신이 느낀 바를 말한 것이다. 공자가 王道가 쉽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飲酒禮 중에서 王道教化의 기본적인 의미인 「尊賢尚齒」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王道가 「美」가 되는 것은 왕도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귀중함을 실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도를 이행하기 쉽기 때문이다. 王道의 실현이 아름답고 王道를 이행하는 것이 쉽지만, 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고(莫之御也), 이와 반대로 하려는 사람도 없다.(莫之為也) 그래서 공자가 「何居為聞者,盍曰思也夫」라고 개탄한 것이다.



[1] 江西省文物考古研究所等 《南昌市西漢海昏侯 墓》,《考古》2016 年第 7 期。

[2] 《漢書·藝文志》,第1716頁,中華書局,1964年。 

[3] (漢)許慎《說文解字》,第 110 頁,中華書局,2005 年。 

[4] (漢)許慎撰、(清)段玉裁注《說文解字注》,第 227頁,上海古籍出版社,1983 年。

[5] 江西省文物考古研究所等編《五色炫曜——南昌

漢代海昏侯國考古成果》,第 186 頁,江西人民出版社,2016 年。

[6] 甘肅省簡牘保護研究中心等編 《肩水金關漢簡(貳)》上冊,第 94 頁,中西書局,2012 年。

[7] 蕭從禮、趙蘭香《金關漢簡「孔子知道之易」為〈齊 論·知道〉佚文蠡測》,《簡帛研究二〇一三》,廣西師範大學出版社,2014 年。

[8] 陳東《歷代學者關於〈齊論語〉的探討》,《齊魯學刊》2003 年第 2 期。

[9] (清)劉恭冕《論語正義補》,第 20 頁,(台北)藝文印書館,1966 年。

[10] 李學勤主編《禮記正義》,第 1633 頁,北京大學出版社,1999 年。 

[11] 同[7]。

[12] 同[10]。

[13] 同[10],第 200 頁。

[14] (三國)王肅注《孔子家語·顏回》,第 52 頁,上海古籍出版社,1990 年。

[15] (宋)朱熹《論語集注·憲問》,第 153 頁,中華書局,1983 年。

[16] (三國)王肅注《孔子家語·儒行解》卷一,第 10頁,上海古籍出版社,1990 年。 

[17] 同[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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