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지 夷堅志/갑지 제2권

1.1.2.11.30 - 이견지 갑지 제2권 - 조령금의 아들에게 복수하다

集賢堂 2016. 2. 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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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금의 아들에게 복수하다趙表之子報

  조령금(趙令衿)은 자(字)가 표지(表之)이다. 선화(宣和) 5년(1123년)에 남강(南康: 현재 장시성 싱쯔) 사록(司錄)에 부임하여, 가족을 데리고 임지로 가는 도중 기주(蘄州: 현재 후베이성 치춘)를 지나다 오조산(五祖山: 황매현에 있는 빙무산憑茂山을 가리킴. 선종의 오조 홍인 대사가 지냈다고 함)을 유람하였다. 그는 홀로 비바람을 무릅쓰고 정상에 올라 백련지정(白蓮池亭)에 이르러, 커다란 반석에서 쉬었다. 


  그때 잠중에 꿈을 꾸듯 하였는데. 한 늙은 승려가 나타나 지팡이에 의지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이대로 여산(廬阜: 현재 장시성 싱쯔현 서북에 있는 산)에 가면, 고난이 없을 테지만, 진주(晉州: 현재 산시성 린펀시)로 가면 자식을 잃는 슬픔이 있을 것이네. 이는 그대가 옛날 진주에서 관리를 노릇을 하였을 때, 한 백성의 어미를 붙잡을 일로 자식을 잃게 만든 일이 있었으니 지금 그 응보를 받는 것이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조령금이 주위를 살피니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잘 생각하니 부인을 붙잡았던 일도 없었는데, 진주는 하동(河東)에 있어, 언젠가는 그곳에 부임할 수 있다고는 생각했다.


  돌아가 집안 사람에게 말하자 이상하게 여겼다. 온 가족이 조산(祖山)에서 다시 황매현(黃梅縣: 현재 후베이성에 속함. 598년에 황매현으로 개칭됨)에 이르렀다.


  다음날, 비가 와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때 조령금의 어린 자식인 선랑(善郎)이 갑자기 병에 걸렸다. 


  이와중에 그곳 현령(縣令) 오우(吳宇)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연히 그 고을의 연혁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곳이 당나라 때는 남진주(南晉州)에 속했는데, 지금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라고 하였다. 


  조령금이 깜짝 놀라 탄식했다. 그리고 꿈에서 본 듯한 승려가 한 말이 근거가 있다고 보고, 자식이 오래 못살 것을 염려하여, 자식으로 하여금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흘 뒤, 결국 조령금의 아들 선랑은 황매현에서 겨우 30여리 떨어진 호역(湖驛)에서 죽고 말았다. 


  조령금이 이 일을 친히 기록하였다.




원문

趙令衿,字表之。宣和五年,赴南康司錄,過蘄州,遊五祖山,冒風雨獨履絕頂。至白蓮池亭,憩磐石上,若夢寐間,見一老僧倚杖而言曰:“公此去廬阜無苦,但至晉州,當有哭子之戚,以昔守晉州,因事系民母,遂失所生子,今報也。”言訖不見。表之審非夢所,又思慮未嘗及,而晉在河東,意他時當官於彼,歸為家人說,嗟異之。自祖山至黃梅縣,翌日,以雨不克行。幼子善郎忽感疾。縣令吳宇至,偶言邑之因革,曰:“唐時嘗為南晉州,鮮有知者。”表之驚嘆,知僧言有證,疑其子必不久,乃許祝發為浮屠。越四日,竟死於白湖驛,去邑才三十餘里。表之親記其事。



남송南宋 양해梁楷 팔고승고사도八高僧故事圖 제2단상해박물관장上海博物館藏


이 그림에서 오조 홍인(五祖 弘忍: 601~674)은 가운데 인물이 아니라 오른편의 어린 아이입니다.


왼편에 쓰인 내용은 이러합니다.


오조 홍인 대사는 기주 황매현 사람으로 성은 주씨이니 태어날부터 범인과 달리 뛰어났다. 어릴 적 놀 때에 한 지자智者를 만났는데, 그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 아이는 칠종상이 부족하여 여래에는 미치지 못하구나.” 후에 도신 대사를 만나 법맥을 잇고, 파두산에서 불법을 가르쳤다.


칠종상이 부족하다는 말은, 아이가 부처님을 많이 닮았지만 부처님과는 조금 다르구나 하는 말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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