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국조명신언행록

국조명신언행록 후집 권3

諺解 2025. 5. 19.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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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욱(黃廷彧)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黃廷彧
字景文, 號芝川, 長水人。 嘉靖十一年壬辰生。 壬子司馬, 明宗十三年戊午登第。 選入史局, 歷春坊、三司。 癸未, 魁文臣庭試。 陞資拜忠淸觀察使。 宣廟朝, 錄光國勳, 封長溪府院君。 典文衡。 官至判中樞。 丁未卒, 年七十六。

번역문:
황정욱(黃廷彧)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장수(長水) 사람¹이다. 가정(嘉靖) 11년 임진년(1532)²에 태어났다. 임자년(1552)³에 사마시(司馬試)⁴에 합격하였고, 명종(明宗) 13년 무오년(1558)⁵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⁶에 선발되어 들어갔고, 춘방(春坊)⁷과 삼사(三司)⁸를 거쳤다. 계미년(1583)⁹에 문신 정시(文臣庭試)¹⁰에서 장원하였다. 자급(資級)¹¹이 올라 충청도 관찰사(忠淸觀察使)에 제수되었다. 선조(宣廟) 시대에 광국훈(光國勳)¹²에 녹훈되어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¹³에 봉해졌다. 문형(文衡)¹⁴을 관장하였다. 관직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¹⁵에 이르렀다. 정미년(1607)¹⁶에 졸(卒)하니, 나이 76세였다.

주석:

  1. 장수인(長水人): 본관이 장수임을 나타낸다. 장수 황씨(長水 黃氏).
  2. 가정(嘉靖) 11년 임진년(1532): 서기 1532년.
  3. 임자년(1552): 명종 7년. 이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4. 사마시(司馬試):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를 가리킨다.
  5. 명종(明宗) 13년 무오년(1558): 서기 1558년. 이 해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6.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들이 실록 편찬 등 사초(史草) 관련 업무를 보던 곳. 또는 임시로 설치된 실록 편찬 기관.
  7.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
  8.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한다. 언론 기능을 담당하던 핵심 관청이다.
  9. 계미년(1583): 선조 16년. 이 해에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壯元) 급제하였다.
  10. 문신 정시(文臣庭試): 정시(庭試)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비정기적으로 시행하던 과거 시험이다. 문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었다.
  11. 자급(資級): 관원의 품계(品階) 등급.
  12. 광국훈(光國勳): 광국공신(光國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평양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호. 황정욱은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을 개정할 때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3.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공신에게 내리는 작위(爵位)의 하나.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봉작(封爵)이다. 장계(長溪)는 그의 본관인 장수(長水)의 옛 이름이다.
  14.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겸임했다. 황정욱은 대제학을 역임했다.
  15.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실권은 없으나 품계가 높은 문관이나 공신에게 주던 명예직이다.
  16. 정미년(1607): 선조 40년.

원문:
明廟末年, 世子薨, 儲位久虛。 公請博選文學人, 以敎宗屬。 又於玉堂僚席, 倡言建儲之議, 將上箚以請, 以僚議不一而止。 未幾, 宣廟入承大統, 而公未嘗一言及此。

번역문:
명종 말년에 세자(世子)¹⁷가훙서(薨逝)¹⁸하여 저위(儲位)¹⁹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공(公)이 문학(文學)에 뛰어난 사람을 널리 선발하여 종속(宗屬)²⁰을 가르치도록 청하였다. 또 옥당(玉堂)의 동료들 자리에서 건저(建儲)²¹의 의논을 제창하여 장차 차자(箚子)²²를 올려 청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그만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조(宣廟)께서 대통(大統)²³을 이어받으셨는데, 공은 일찍이 한마디 말도 이에 언급하지 않았다.

주석:
17. 세자(世子):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 이부(李暊, 1551-1563). 1563년(명종 18) 1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18. 훙서(薨逝): 왕자, 왕녀, 왕세자, 왕세자빈 등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19. 저위(儲位): 왕위 계승자의 자리. 세자위(世子位).
20. 종속(宗屬): 종실(宗室)에 속한 사람들. 왕의 친족.
21. 건저(建儲): 저군(儲君), 즉 세자(世子)를 세우는 것.
22.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상소(上疏)보다 격식이 간략하다.
23. 대통(大統):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는 큰 계통. 왕통(王統).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이 즉위하니, 이가 선조이다.


원문:
宣廟勵精求治, 公每於經席, 據理論事, 辭約意明, 上虛心聽納。 而盧穌齋守愼爲同僚, 亟稱以爲眞講官才也。 奇高峯大升亦語其學者曰: “吾爲汝得師, 他日至京, 可執贄請見也。”

번역문:
선조께서 정력을 다하여 다스림을 구하자, 공은 매번 경연(經筵)²⁴ 자리에서 이치에 근거하여 일을 논하였는데, 말이 간결하고 뜻이 분명하여 상(上)께서 마음을 비우고 경청하여 받아들이셨다. 동료였던 노소재(盧穌齋) 수신(守愼)²⁵은 공을 자주 칭찬하며 진정한 강관(講官)²⁶의 재목이라고 하였다. 기고봉(奇高峯) 대승(大升)²⁷ 또한 그에게 배우는 학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스승을 얻었으니, 다른 날 서울에 가거든 마땅히 예물(贄)을 가지고 찾아뵙기를 청하라.”고 하였다.

주석:
24. 경석(經席): 경연(經筵) 자리.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하던 자리.
25. 노소재(盧穌齋) 수신(守愼):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호와 이름.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영의정을 지냈다.
26. 강관(講官): 경연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관원.
27. 기고봉(奇高峯) 대승(大升):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호와 이름. 조선 중기의 저명한 성리학자. 이황(李滉)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유명하다.


원문:
舊例宗廟祝號當國哀, 則書以哀子國王某, 公上疏曰: “宗廟之祭, 鍾鼓鏗鏘, 列聖之靈, 洋洋在上, 而殿下自稱以哀, 則是以新喪事列聖也。” 朝議是之, 遂改稱以孝。

번역문:
옛 관례에 종묘(宗廟)의 축호(祝號)²⁸에 국상(國哀)을 당했을 때는 ‘애자(哀子) 국왕 모(某)’라고 썼는데, 공이 상소하여 아뢰었다. “종묘의 제사에는 종(鍾)과 북(鼓) 소리가 鏗鏘²⁹하고 열성(列聖)³⁰의 영혼이 양양(洋洋)³¹하게 위에 계신데, 전하께서 스스로 ‘애(哀)’라고 칭하신다면 이는 새로 상(喪)을 당한 처지로 열성을 섬기는 것입니다.” 조정의 의논이 이를 옳다고 여겨, 마침내 ‘효(孝)’³²라고 고쳐 칭하게 되었다.

주석:
28. 축호(祝號): 제사 때 축문(祝文)에서 제주(祭主)가 자신을 칭하는 말.
29. 갱장(鏗鏘): 금속이나 옥(玉) 등이 부딪쳐 맑게 울리는 소리. 종과 북 소리가 장엄하게 울리는 것을 형용한다.
30. 열성(列聖): 역대의 임금.
31. 양양(洋洋): 신령(神靈)이 강림하여 충만하게 있는 모양.
32. 효(孝):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이라는 의미. 국왕이 종묘 제사에서 자신을 칭할 때 쓰는 일반적인 축호이다. 황정욱은 국상 중이라도 종묘 제사에서는 평상시의 축호인 '효자(孝子)'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원문:
時朝廷論貞陵廢復事, 太無微辭。 公援據聖人答司敗之義, 草疏論之, 公伯氏力止, 不果上。

번역문:
당시 조정에서 정릉(貞陵)³³ 폐복(廢復)의 일을 논의하는데, 너무 미사여구(微辭)³⁴가 없었다. 공이 성인(聖人)이 사패(司敗)³⁵에게 답한 뜻³⁶을 원용(援據)하여 상소 초안을 잡아 이를 논하려 하였으나, 공의 백씨(伯氏)³⁷가 힘써 말리는 바람에 결국 올리지 못하였다.

주석:
33. 정릉(貞陵):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능.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 이후 정순왕후는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肅宗) 때 복위되었다. 황정욱이 활동하던 선조 시대에는 아직 복위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을 수 있으나, 관련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인 태릉(泰陵)을 정릉(靖陵)으로 잘못 기록한 것일 수도 있으나, 문맥상 정순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일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사건 경위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주: 일반적으로 정릉 폐복 논의는 숙종 때 본격화되므로, 이 기록의 정확한 맥락은 추가 검토가 필요함. 선조 대의 특정 사건을 지칭할 수도 있음.)
34. 미사(微辭): 은미(隱微)한 말. 완곡하고 함축적인 표현. 여기서는 논의가 너무 직설적이고 거칠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35. 사패(司敗): 고대 중국의 관직명. 형벌과 감옥을 맡았다.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사패가 공자(孔子)에게 군주가 형제를 죽이고 즉위한 것에 대해 묻자, 공자가 직접적인 비판 대신 원론적인 답변으로 회피한 고사가 있다.
36. 성인(聖人)이 사패(司敗)에게 답한 뜻: 《논어》 〈헌문〉에 나오는 고사를 가리킨다. 사패(司敗)가 공자에게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아우 규(糾)를 죽이고 즉위한 관중(管仲)이 인(仁)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묻자, 공자는 관중의 공적을 들어 직접적인 평가를 피했다. 이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신중하고 완곡하게 접근해야 함을 시사한다. 황정욱은 정릉 폐복 논의가 너무 직설적이므로, 이 고사처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취지로 상소를 쓰려 한 것으로 보인다.
37. 백씨(伯氏): 맏형. 황정욱의 형 황정량(黃廷亮)을 가리키는 듯하다.


원문:
先是, 璿系受誣, 本朝極力陳辨, 而猶未能盡行刊正。 適聞皇朝《會典》垂完, 朝議以爲當亟遣一代文學之士, 毋失事機。 於是召公爲承旨, 以充行人。 上謂曰: “今此使事, 一惟卿爲重。” 至京師, 皇上例下原奏于該部。 公詣禮部, 頓首求哀, 極陳事情。 尙書于愼行見公呈文, 再三披讀, 亟稱好文字好文字, 謂譯官曰: “你宰相是宿搆耶? 何其神速若是?” 卽以奏御, 皇上特命改正, 仍令謄示《會典》。 又設彩紅氈于皇極門內, 翰林學士將禮而授勅, 蓋異數也。 使還, 上喜甚, 告廟頒赦, 殊死以下皆宥。 加公嘉善階, 賜御衣一襲及田宅、奴婢。 其後行人得《會典》印本而來, 其書我國宗系, 盡改前誣, 昭雪無餘。 上又諭公曰: “今日之功, 予無以報卿。” 遂特陞戶曹判書。【竝尤菴宋時烈撰墓誌。】

번역문:
이에 앞서 선계(璿系)³⁸가 무고(誣告)를 당하여 본조(本朝)에서 극력 진술하고 변론하였으나, 여전히 모두 간행하여 바로잡지는 못하였다. 마침 황조(皇朝)³⁹의 《회전(會典)》⁴⁰이 완성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의 의논은 마땅히 속히 한 시대의 문학에 뛰어난 선비를 파견하여 일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에 공을 불러 승지(承旨)로 삼아 행인(行人)⁴¹에 충원하였다. 상(上)께서 이르기를 “이번 사행(使行)의 일은 오로지 경(卿)에게 달려 있어 중요하다.”라고 하셨다. 경사(京師)⁴²에 도착하자, 황상(皇上)께서 관례에 따라 원래의 주문(奏文)을 해당 부서(該部)⁴³에 내려 보내셨다. 공이 예부(禮部)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애처롭게 구하며 사정을 극진히 진술하였다. 상서(尙書) 우신행(于愼行)⁴⁴이 공의 정문(呈文)⁴⁵을 보고 재삼 펼쳐 읽고는 자주 “좋은 글이다, 좋은 글이다.”라고 칭찬하며 역관(譯官)에게 이르기를 “너희 재상(宰相)⁴⁶은 미리 구상해 둔 것인가? 어찌 그리 신속함이 이와 같은가?”라고 하였다. 즉시 이를 황제께 아뢰니, 황상께서 특별히 개정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회전》을 등사(謄寫)하여 보여주도록 명하였다. 또 황극문(皇極門)⁴⁷ 안에 채색 비단과 붉은 담요(氈)를 설치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예를 갖추어 칙서(勅書)를 내려 주었으니, 대개 이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사신이 돌아오자 상께서 매우 기뻐하여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여, 사형수 이하를 모두 용서하였다. 공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⁴⁸의 품계를 더하고 어의(御衣) 한 벌과 전택(田宅), 노비(奴婢)를 하사하였다. 그 후 행인(行人)이 《회전》의 인쇄본을 얻어 돌아왔는데, 그 책에 우리나라의 종계(宗系)가 이전의 무고한 내용이 모두 고쳐져 남김없이 밝혀지고 씻겨 있었다(昭雪). 상께서 또 공에게 유시(諭示)하여 “오늘의 공(功)은 내가 경에게 보답할 길이 없다.”라고 하시고, 마침내 특별히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승진시키셨다.【이상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⁴⁹이 지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38. 선계(璿系): 옥(玉)처럼 귀한 계통이라는 뜻으로, 왕실의 계통, 즉 종계(宗系)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명나라의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잘못 기록된 것을 말한다. 이를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39. 황조(皇朝): 황제의 조정. 명(明)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40. 《회전(會典)》: 《대명회전(大明會典)》. 명나라의 법령, 제도, 판례 등을 집대성한 책이다. 여기에 조선의 종계가 잘못 기록되어 있어 조선 조정에서 여러 차례 개정을 요청했다.
41. 행인(行人): 사신(使臣)을 가리킨다.
42. 경사(京師): 수도(首都).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43. 해당 부서(該部): 여기서는 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가리킨다.
44. 우신행(于愼行, 1539-1607):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의 관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을 역임했다.
45. 정문(呈文): 관청에 올리는 글. 여기서는 종계 변무를 요청하는 황정욱의 글을 가리킨다.
46. 재상(宰相): 명나라 상서가 황정욱을 높여 부른 말이다.
47. 황극문(皇極門): 명나라 자금성(紫禁城)의 정문 중 하나.
48.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명.
49.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정치가. 서인(西人) 노론(老論)의 영수이다.
50.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 옆에 묻는 돌이나 도판, 또는 거기에 새긴 글.


원문:
時⁵¹逆賊鄭汝立出於從班, 人情莫不憤鬱, 草野之士爭上章論, 語激而不知裁。 公上箚言: “政在草野, 非國家美事。 且故相朴淳曾於上前面斥汝立夸誕不靖, 不容於時, 遯荒野而卒, 極可憐愍。 請依張曲江故事, 賜祭以慰。” 朝野韙之。

번역문:
이때⁵¹ 역적 정여립(鄭汝立)⁵²이 종반(從班)⁵³ 출신이어서 인정(人情)이 분하고 답답해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초야(草野)의 선비들이 다투어 상소를 올려 논하는데 말이 격하여 절제할 줄 몰랐다.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었다. “정치(의 비판)가 초야에 있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고(故) 재상 박순(朴淳)⁵⁴이 일찍이 상(上)의 앞에서 정여립의 과장되고 허황하며 안정되지 못함을 면전에서 배척하여 당시에 용납되지 못하고 황야(荒野)로 은둔하여 졸(卒)하였으니, 지극히 가련하고 불쌍합니다. 청컨대 장곡강(張曲江)⁵⁵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제사를 내려 위로하소서.” 조정과 재야(朝野)가 이를 옳다고 여겼다.

주석:
51. 時 : 《학곡집(鶴谷集)・장계부원군지천황공신도비명(長溪府院君芝川黃公神道碑銘)》에는 뒤에 “의(議)” 자가 더 있다. '시의(時議)'는 당시의 여론, 의논을 뜻한다.
52. 정여립(鄭汝立, ?-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589년(선조 22) 모반 혐의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자결하였다.
53. 종반(從班): 조반(朝班), 즉 조정의 반열. 정여립이 조정의 관료 출신이었음을 의미한다.
54. 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사암(思庵). 영의정을 지냈다. 정여립의 사람됨을 비판한 바 있다.
55. 장곡강(張曲江):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재상 장구령(張九齡, 678-740). 곡강(曲江)은 그의 고향으로, 그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장구령은 안록산(安祿山)의 야심을 간파하고 경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을 애석해했다. 황정욱은 박순이 정여립의 위험성을 미리 경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장구령의 고사에 비유하여 그의 넋을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원문:
庚寅, 拜禮曹判書。 公以廟享奏樂, 只以國初所撰若而章, 分侑列聖神位, 其事功各異, 不相合着, 請一室各撰一章。 宣廟有意張施而未遑, 因循至今, 識者慨恨不已。【竝鶴谷洪瑞鳳撰神道碑。】

번역문:
경인년(1590)⁵⁶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다. 공은 종묘 제향(廟享)의 주악(奏樂)이 단지 국초(國初)에 지은 몇 개의 악장(樂章)만으로 나누어 여러 성왕(列聖)의 신위(神位)에 권해 올리는데⁵⁷, 그 사적과 공로(事功)가 각기 달라 서로 들어맞지 않으므로, 각 실(室)마다 각각 하나의 악장을 지을 것을 청하였다. 선조께서 이를 시행할 뜻이 있었으나 미처 겨를이 없어 그대로 답습하여 지금에 이르니, 식견 있는 이들이 개탄하고 한스러워 마지않는다.【이상은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⁵⁸이 지은 신도비(神道碑)에서 인용】

주석:
56. 경인년(1590): 선조 23년.
57. 분유(分侑): 제사 때 여러 신위(神位)에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권하는 것. 여기서는 제한된 수의 악장을 여러 왕의 제사에 나누어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58.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1572-1645):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원문:
宗系昭洗, 將親祭告慶, 公受命, 定著其儀, 情文甚具。 旣又入廟贊禮畢, 上曰: “彬彬可觀哉!” 賜鞍馬。

번역문:
종계(宗系)가 밝게 씻겨, 장차 친히 제사를 올려 경축하려 할 때, 공이 명을 받아 그 의식(儀式)을 정하여 지으니 내용(情)과 형식(文)이 매우 잘 갖추어졌다. 이윽고 또 종묘에 들어가 찬례(贊禮)⁵⁹를 마치자,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빛나고 성대하여(彬彬) 볼 만하구나!” 하시고 안장 갖춘 말(鞍馬)을 하사하셨다.

주석:
59. 찬례(贊禮): 제사나 의식 때 홀기(笏記)를 읽으며 절차를 진행하는 일,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원문:
辛卯, 倭酋秀吉貽書於我, 辭絶悖逆, 有直入大明之語。 上以問諸宰, 公請召大司憲尹斗壽。 斗壽至曰: “事係皇朝, 機關甚重。 殿下至誠事大, 天日在上, 豈可容隱? 亟宜奏聞。” 公曰: “斗壽言是。 臣亦以爲奏聞不可已。” 後於筵席復申前說, 仍請修飭兵馬, 上曰: “卿其勉之。” 公抄錄京外諸色軍兵, 以便考覈。 又請厚養爪牙之士, 仍薦李舜臣等可任閫寄。 後舜臣卒成大功, 以死報國, 如公言。

번역문:
신묘년(1591)⁶⁰에 왜(倭)의 우두머리 수길(秀吉)⁶¹이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왔는데, 말이 지극히 패역(悖逆)하여 바로 대명(大明)으로 쳐들어가겠다는 말이 있었다. 상께서 이를 여러 재상에게 물으시니, 공이 대사헌(大司憲) 윤두수(尹斗壽)⁶²를 부를 것을 청하였다. 윤두수가 이르러 아뢰었다. “일이 황조(皇朝)에 관계되니 기틀(機關)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사대(事大)하시니 하늘의 해와 달이 위에 있는데,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속히 주문(奏聞)⁶³하여야 마땅합니다.” 공이 말하였다. “윤두수의 말이 옳습니다. 신 또한 주문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후에 연석(筵席)⁶⁴에서 다시 이전의 주장을 아뢰고, 이어서 병마(兵馬)를 정비할 것을 청하니,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경(卿)은 힘쓰라.”고 하셨다. 공이 서울과 지방의 각 군병(軍兵)을 초록(抄錄)하여 고핵(考覈)⁶⁵하기 편리하게 하였다. 또 조아(爪牙)⁶⁶의 선비를 후하게 양성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이순신(李舜臣)⁶⁷ 등이 곤기(閫寄)⁶⁸를 맡을 만하다고 추천하였다. 후에 이순신이 마침내 큰 공을 세우고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니, 공의 말과 같았다.

주석:
60. 신묘년(1591): 선조 24년.
61. 수길(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62.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의 중진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63. 주문(奏聞):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것. 여기서는 일본의 동태와 국서 내용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64. 연석(筵席): 경연(經筵)이나 차대(次對) 등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자리.
65. 고핵(考覈): 자세히 조사하여 확인함.
66. 조아(爪牙): 손톱과 어금니라는 뜻으로, 임금을 보위하는 무신(武臣)이나 용맹한 장수(將帥)를 비유한다.
67.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조선 중기의 명장. 임진왜란 때 수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68. 곤기(閫寄): 성문(城門)의 문지방(閫)을 지키는 임무(寄)라는 뜻으로, 국방상의 중요한 임무나 요직, 특히 변방의 군사 지휘관을 의미한다.


원문:
先是, 鄭逆之發, 崔永慶遭飛語逮繫瘐死。 一番人以爲牛溪先生及鄭松江澈搆殺釋憾, 其親舊儕流一切株累。 公與尹公斗壽亦被斥逐。 冬, 倭情奏聞使回自京師, 皇帝褒賜甚渥。 上遂放還尹公, 而以公實撰奏文, 亟命復爵, 且錫以欽賜絹子。 始公之撰奏本也, 公曰: “必須詳載通信事, 以著聖上事君勿欺之義。” 時議以我國交通伊賊爲可諱, 刪沒其實。 其後乞師于天朝, 不能終諱, 而天朝邊帥已得前後實狀, 奏請討我矣。

번역문:
이에 앞서 정여립 역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최영경(崔永慶)⁶⁹이 유언비어(飛語)를 만나 체포되어 옥사(瘐死)⁷⁰하였다. 일반 사람들은 우계(牛溪) 선생⁷¹과 정송강(鄭松江) 철(澈)⁷²이 모함하여 죽여 한(憾)을 풀었다고 여겨, 그의 친구와 동료들이 모두 연좌(株累)⁷³되었다. 공도 윤공(尹公) 두수(斗壽)와 함께 배척당하여 쫓겨났다. 겨울에 왜의 정세를 보고한 사신(奏聞使)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는데, 황제의 포상과 하사품이 매우 두터웠다. 상께서 마침내 윤공을 석방하여 돌려보내고, 공이 실제로 주문(奏文)을 지었다 하여 속히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고 또 흠사(欽賜)⁷⁴ 비단(絹子)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공이 주문 초안을 지을 때, 공이 말하기를 “반드시 통신사(通信使)⁷⁵의 일을 상세히 실어 성상(聖上)께서 ‘임금을 섬김에 속이지 말라(事君勿欺)’는 의리를 드러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의논은 우리나라가 저 도적(伊賊)⁷⁶과 교통(交通)한 것을 숨겨야 할 만한 일이라고 여겨 그 사실을 삭제하였다. 그 후 천조(天朝)⁷⁷에 군사를 요청하였을 때 끝내 숨길 수 없었으며, 천조의 변방 장수(邊帥)가 이미 전후의 실상을 파악하고 우리나라를 토벌할 것을 아뢰어 청하기까지 하였다.

주석:
69.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조선 중기의 학자. 정여립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옥사하였다.
70. 유사(瘐死): 옥중에서 병이나 굶주림 등으로 죽는 것.
71. 우계(牛溪) 선생: 성혼(成渾, 1535-1598)의 호.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서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다.
72. 정송강(鄭松江) 철(澈): 정철(鄭澈, 1536-1593)의 호와 이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가사 문학의 대가. 서인의 영수로서 기축옥사를 주도하였다.
73. 주루(株累):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이 함께 처벌받는 것. 연좌(連坐).
74. 흠사(欽賜): 황제가 특별히 하사하는 것.
75. 통신사(通信使):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던 공식 사절단. 1590년(선조 23) 황윤길(黃允吉, 서인)과 김성일(金誠一, 동인) 등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당시 일본 정세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당파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엇갈렸다.
76. 이적(伊賊): 저 도적.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가리킨다.
77. 천조(天朝): 하늘의 조정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왕조, 즉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원문:
壬辰, 公聞賊報, 自田里急馳詣闕, 略陳機宜。 大略以爲: “朝廷雖禁都民逬出, 而平時無固結之恩, 臨亂欲望其勿去難矣。 請分命王子, 召聚都民, 宣示德意, 庶幾保合矣。” 語頗觸犯時諱。 寇深, 上方夜西幸, 公追及於東坡。 上命公父子護王子順和君入關東, 仍以號召四方, 以期恢復。 公承命雪涕, 至鐵原, 歃血誓士, 移書元帥諸公, 勉以忠義, 傳檄八路。 有曰“廟堂力主和金, 秦檜之肉足食; 奸臣首倡幸蜀, 國忠之頭可懸”, 見者吐舌。

번역문:
임진년(1592)⁷⁸에 공이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듣고 시골집(田里)에서 급히 달려 대궐로 나아가 대략적인 계책(機宜)을 진술하였다.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조정에서 비록 도성 백성들이 달아나는 것을 금하지만, 평시에 굳게 결속시킨 은혜가 없었으니 난리를 당하여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렵습니다. 청컨대 왕자들에게 나누어 명하시어 도성 백성들을 불러 모아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보이시면 거의 보전하고 화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이 자못 당시의 기휘(時諱)⁷⁹를 건드렸다. 왜적이 깊이 침입하여 상께서 바야흐로 밤에 서쪽으로 행행(西幸)⁸⁰하실 때, 공이 동파(東坡)⁸¹에서 따라잡았다. 상께서 공 부자(父子)에게 명하여 왕자 순화군(順和君)⁸²을 호위하여 관동(關東)⁸³으로 들어가게 하고, 이어서 사방에 호소하여 회복을 기약하게 하셨다. 공이 명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며 철원(鐵原)에 이르러, 피를 나누어 마시며 군사들에게 맹세하고(歃血誓士)⁸⁴ 원수(元帥) 제공(諸公)에게 글을 보내 충의(忠義)에 힘쓰도록 권면하였으며, 팔도(八路)에 격문(檄文)을 전하였다. 격문에 “묘당(廟堂)⁸⁵에서 강화(和)를 강력히 주장하니 진회(秦檜)⁸⁶의 살점을 먹을 만하고, 간신(奸臣)이 촉(蜀)으로 행행하기를 앞장서 주장하니 양국충(國忠)⁸⁷의 머리를 매달 만하다.”라는 구절이 있어, 보는 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주석:
78. 임진년(1592):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이다.
79. 시휘(時諱): 당시의 상황에서 꺼리는 말이나 행동. 여기서는 임금이 피난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민심 수습 방안을 직설적으로 건의한 것이 임금이나 조정의 심기를 건드렸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80. 서행(西幸): 임금이 서쪽으로 행차함.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 임금이 의주(義州)로 피난 간 것을 가리킨다.
81. 동파(東坡): 경기도 파주(坡州) 동쪽 지역으로 추정된다. 임금이 피난 가는 길에 따라잡은 장소이다.
82. 순화군(順和君): 순화군 이보(李𤣰, 1580-1607). 선조의 서자(庶子).
83. 관동(關東): 철령(鐵嶺) 동쪽 지방. 강원도 지역을 가리킨다.
84. 삽혈서사(歃血誓士): 희생 제물의 피를 나누어 마시며 맹세하는 의식. 군사들의 충성심과 결의를 다지는 행위이다.
85. 묘당(廟堂): 종묘(宗廟)와 명당(明堂)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조정(朝廷) 또는 최고위 정책 결정 회의를 의미한다.
86. 진회(秦檜, 1090-1155): 남송(南宋)의 재상. 금(金)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며 주전파(主戰派)인 악비(岳飛) 등을 모함하여 죽인 인물로, 대표적인 간신으로 꼽힌다. 왜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이들을 진회에 비유하여 극렬히 비판한 것이다.
87. 양국충(楊國忠, ?-756):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 양귀비(楊貴妃)의 친척으로 권세를 휘둘렀으며, 안사의 난 때 현종을 따라 촉(蜀)으로 피난 가던 중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임금의 피난을 주장한 이들을 양국충에 비유한 것이다.


원문:
自關東迤向北路。 會寧亂民鞠敬仁等謀執王子一行致賊。 賊將淸正待王子, 稍加禮貌, 以公及金相貴榮幽置別所。 而以公長男承旨赫, 爲王室姻親, 每有要脅, 必使爲狀以聞。 公欲因此細達賊情, 每令爲眞假二狀, 假以示賊以謾之。 會倡義使金千鎰諉以起居王子, 遣幕下以來, 赫復爲二狀, 以授千鎰幕下。 金公以傳於體使, 體使執假狀違例爲罪, 持之甚急。 後以皇帝威靈, 公奉王子還自釜山, 遂置對力辨, 猶命編管吉州。 又誣以餘犯, 再罣吏議。 丁酉, 特命解放, 例當敍復, 而又公不悅者在議讞之地, 故只令任便居住。

번역문:
관동에서 북쪽 길(北路)로 향하였다. 회령(會寧)의 난민(亂民) 국경인(鞠敬仁) 등이 왕자 일행을 붙잡아 왜적에게 넘기려 모의하였다. 적장(賊將) 청정(淸正)⁸⁸은 왕자를 대우함에 조금 예모(禮貌)를 더하였으나, 공과 김상(金相) 귀영(貴榮)⁸⁹은 별도의 장소에 유폐(幽置)하였다. 공의 장남인 승지(承旨) 혁(赫)⁹⁰이 왕실의 인척(姻親)이 되므로, 매번 요긴한 협박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로 하여금 글(狀)을 지어 보고하게 하였다. 공이 이로 인하여 왜적의 실정을 상세히 전달하고자 매번 진짜와 가짜 두 개의 글을 짓게 하여, 가짜는 왜적에게 보여 그들을 속였다. 마침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⁹¹이 왕자의 기거(起居)를 문안한다는 핑계로 막하(幕下)를 보내 오자, 혁(赫)이 다시 두 개의 글을 지어 김천일의 막하에게 주었다. 김공(金公)이 이를 체찰사(體使)⁹²에게 전하였는데, 체찰사가 가짜 글을 가지고 규례를 어겼다 하여 죄로 삼아 매우 급하게 몰아세웠다. 후에 황제의 위령(威靈)으로 공이 왕자를 받들고 부산(釜山)에서 돌아오자, 마침내 대질 심문(置對)⁹³하여 힘써 변론하였으나, 여전히 길주(吉州)에 편관(編管)⁹⁴시키도록 명하였다. 또 남은 죄가 있다고 무고하여 다시 이의(吏議)⁹⁵에 걸렸다. 정유년(1597)⁹⁶에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여 규례상 마땅히 서용(敍用)되고 복직(復職)되어야 했으나, 또 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가 의얼(議讞)⁹⁷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단지 임의로 거주하게 할 뿐이었다.

주석:
88.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임진왜란 때 일본군 제2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여 함경도 방면으로 침공했다.
89. 김귀영(金貴榮, 1519-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순화군(順和君)을 수행하다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가 되었다.
90. 혁(赫): 황혁(黃赫, 1551-1612). 황정욱의 장남. 임진왜란 때 승지로서 부친과 함께 순화군을 호종하다 포로가 되었다.
91.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92. 체사(體使): 체찰사(體察使). 조선 시대에 변란이나 재난이 발생했을 때 지방에 파견되어 군무(軍務)와 민정(民政)을 총괄하던 임시 관직.
93. 치대(置對): 죄인과 관계자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 서로 대질하며 신문하는 것.
94. 편관(編管): 죄인을 먼 지방으로 보내 지정된 곳에 살게 하며 감시하던 형벌. 유배(流配)보다는 가벼운 형벌이다.
95. 이의(吏議): 관리들의 논의. 여기서는 죄를 논하는 관리들의 의논, 즉 탄핵이나 처벌 논의를 의미한다.
96. 정유년(1597): 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이다.
97. 의얼(議讞): 죄를 심의하고 판결함.


원문:
上嘗曰: “黃某乃祖宗之功臣, 屢申收復之命, 輒爲言者所沮。” 由關海移畿輔, 上四賜食物, 勞問備至。 而嘗以病聞, 卽遣醫藥, 公上牋謝恩, 有云: “長安北望, 幸近天日之光; 淸渭東流, 益注終南之戀。”

번역문:
상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황모(黃某)⁹⁸는 바로 조종(祖宗)의 공신인데, 여러 차례 거두어 회복시키라는 명을 내렸으나 번번이 말하는 자들(言者)⁹⁹에게 저지당하였다.”라고 하셨다. 관해(關海)¹⁰⁰ 지역에서 기보(畿輔)¹⁰¹ 지역으로 옮겨 살았는데, 상께서 네 차례나 음식을 하사하시고 위로하며 묻는 것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병들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즉시 의원과 약을 보내니, 공이 전문(箋文)을 올려 은혜에 감사하며 아뢰기를 “장안(長安)¹⁰²을 북쪽으로 바라보니 다행히 천일(天日)¹⁰³의 빛에 가깝고, 맑은 위수(渭水)¹⁰⁴가 동쪽으로 흐르니 더욱 종남(終南)¹⁰⁵의 그리움을 기울이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98. 황모(黃某): 황 아무개. 황정욱을 가리킨다.
99. 언자(言者): 말하는 자. 대간(臺諫) 등 언관(言官)을 가리킨다.
100. 관해(關海): 관동(關東)과 해서(海西, 황해도) 지역을 아울러 이르거나, 혹은 관동 해안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황정욱이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머물던 곳이다.
101. 기보(畿輔): 수도와 그 부근 지역. 경기도 일대를 가리킨다.
102. 장안(長安): 중국 한(漢)·당(唐)나라의 수도. 여기서는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을 비유한다.
103. 천일(天日): 하늘의 해. 임금 또는 임금의 은혜를 비유한다.
104. 위수(渭水): 중국 관중(關中) 지방을 흐르는 강. 장안(長安) 부근을 지난다. 여기서는 한양 부근의 강(한강)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105. 종남(終南): 중국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여기서는 한양의 남산(南山)이나 관악산(冠岳山) 등 임금이 계신 곳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종남지련(終南之戀)'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원문:
公最與尹月汀相善, 嘗爲公作壽序曰: “公奉兩王子向北也, 草檄馳諭, 首以廟堂之主和爲非, 而至比之秦檜, 故遂被其切齒, 日俟隙而未得發也。 會公陷賊中, 狀陳賊情, 而賊若覺其有據實之狀, 則必見攔阻, 故別作假狀誑示賊, 而一竝出送。 適其時廟堂之嗛公者, 得其假狀, 便作陷公之機穽, 指以無罪, 而故峻其語。 然若直送其假狀, 則一見當卽知其非眞狀也。 故遂置其狀, 謄寫以送, 而其辭曰: ‘其狀有臣子所不忍見者, 未敢送。’ 公遂坐此。 其自賊中還也, 父子竝置對, 幾至不免, 而遂遠謫矣。 假狀雖諉以不忍見, 他日議罪, 必執此然後方可擬讞而輕重之也, 何至不忍達於君父之前乎? 罪之輕重, 係於一狀之眞假, 而必廋之者, 令人不得覺其贗而將必置死地也。 旣累年, 聖明以元勳之不可久在謫中也, 特命放還, 而言官之論執者, 閱數月而猶未允兪。 言者旣止, 而成命將行, 又有不悅公者, 實爲下石之語, 遂被再論, 而公僅還田里矣。 是何輦上君子, 乘時修郄者多也?” 此書可以爲論公之案矣。

번역문:
공은 윤월정(尹月汀)¹⁰⁶과 가장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그가 일찍이 공을 위해 수서(壽序)¹⁰⁷를 지어 말하였다. “공이 두 왕자를 받들고 북쪽으로 향할 때, 격문을 초(草)하여 급히 알리면서 첫머리에 묘당(廟堂)의 강화 주장(主和)을 그르다고 하여 진회(秦檜)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들의 이를 가는 바가 되어 날마다 틈을 엿보았으나 터뜨리지 못하였다. 마침 공이 적중(賊中)에 함락되었을 때, 글(狀)로 적의 실정을 진술하였는데, 적이 만약 사실에 근거한 글이 있음을 알았다면 반드시 가로막혔을 것이므로, 일부러 가짜 글을 따로 지어 적에게 거짓으로 보여주고 함께 내보냈다. 마침 그때 묘당에서 공을 미워하던 자들이 그 가짜 글을 얻자, 곧바로 공을 함정에 빠뜨릴 계책(機穽)을 꾸며 죄가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일부러 그 말을 준엄하게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 가짜 글을 직접 보냈다면, 한번 보고 마땅히 즉시 진짜 글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침내 그 글은 놓아두고 등사(謄寫)하여 보내면서 그 글에 ‘그 글에 신자(臣子)로서 차마 볼 수 없는 내용이 있어 감히 보내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공이 마침내 이로 인해 죄를 받았다. 그가 적중에서 돌아왔을 때 부자(父子)가 함께 대질 심문을 받아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할 뻔하였으나, 마침내 멀리 유배되었다. 가짜 글을 비록 차마 볼 수 없다고 핑계 댔으나, 다른 날 죄를 의논할 때 반드시 이것을 근거로 삼은 후에야 비로소 죄를 헤아려(擬讞) 경중(輕重)을 정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 군부(君父)의 앞에 차마 전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죄의 경중이 글 한 장의 진위(眞假)에 달려 있는데 반드시 그것을 숨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가짜임을 알지 못하게 하여 장차 반드시 사지(死地)에 두려 한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나 성명(聖明)께서 원훈(元勳)을 오랫동안 유배지에 둘 수 없다 하여 특별히 석방하여 돌려보내도록 명하였으나, 언관(言官)으로서 논하여 고집하는 자들이 여러 달이 지나도록 오히려 윤허하지 않았다. 말하는 자들이 그치자 이미 내려진 명이 장차 시행되려 하는데, 또 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가 있어 실로 하석(下石)¹⁰⁸하는 말을 하여 마침내 다시 논박을 당하였고, 공은 겨우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이는 어찌하여 연상(輦上)의 군자¹⁰⁹ 중에 시세를 틈타 원한(郄)을갚으려는 자가 많은 것인가?” 이 글은 공을 논하는 안험(按驗) 자료¹¹⁰로 삼을 만하다.

주석:
106. 윤월정(尹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호. 윤두수(尹斗壽)의 아우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07. 수서(壽序):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글의 서문.
108. 하석(下石):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리어 괴롭히는 것을 비유한다. (落井下石).
109. 연상(輦上)의 군자(君子): 임금이 타는 수레 위, 즉 조정(朝廷)에 있는 군자들. 조정의 신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반어적으로 비판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110. 안험(按驗) 자료: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증험할 수 있는 자료.


원문:
翼成公祠廟頹圮, 與族人協謀重新, 歲常一祭, 仍講花樹之會。 族人有貧乏不能存者, 則雖裘馬, 立與之無靳焉。 立朝, 以孤忠自信獨立無朋自許, 故自釋褐至隮崇品, 皆由己致, 未嘗假人游揚, 人亦不敢以聲勢相助。

번역문:
익성공(翼成公)¹¹¹의 사당(祠廟)이 퇴락하여 무너지자, 족인(族人)들과 협력하여 새로 짓기를 꾀하고 해마다 항상 한 차례 제사를 지냈으며, 이어서 화수회(花樹之會)¹¹²를 열었다. 족인 중에 가난하고 궁핍하여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으면 비록 가죽옷(裘)과 말(馬)이라도 즉시 주며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외로운 충성심(孤忠)을 스스로 믿고 홀로 서서 붕당(朋黨)이 없음을 자부하였으므로, 석갈(釋褐)¹¹³한 때부터 높은 품계(崇品)에 오르기까지 모두 자신에게서 말미암았고 일찍이 다른 사람의 유양(游揚)¹¹⁴을 빌리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도 감히 성세(聲勢)로써 도와주지 못하였다.

주석:
111.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 1363-1452)의 시호. 조선 초기의 명재상으로, 황정욱의 선조이다.
112. 화수회(花樹之會): 일가친척들이 모여 서로의 우의를 다지는 모임.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편의 “상체지화 악불위위(常棣之華 鄂不韡韡, 아가위나무 꽃이여, 꽃받침이 빛나지 않는가)” 구절에서 유래했으며,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한다.
113. 석갈(釋褐): 처음 관직에 나아가는 것.
114. 유양(游揚): 다른 사람의 장점을 널리 알리고 칭찬하여 등용되도록 돕는 것.


원문:
少時嘗語子弟曰: “蘇武若在今世, 則必置死地。 藉令議武之罪, 曰‘匈奴令你牧羊則牧羊, 又治小單于弓弩, 又娶胡女生子, 安在其守節也’云爾, 則武何辭自解哉?” 此雖一時激發之言, 亦豈其讖耶?【竝尤菴宋時烈撰墓誌。】

번역문:
젊었을 때 일찍이 자제(子弟)들에게 말하였다. “소무(蘇武)¹¹⁵가 만약 지금 세상에 있다면 반드시 사지(死地)에 두었을 것이다. 가령 소무의 죄를 논하여 ‘흉노(匈奴)가 너에게 양을 치라 하니 양을 치고, 또 어린 선우(單于)의 활과 쇠뇌를 다루어 주고, 또 오랑캐 여자(胡女)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았으니, 그 절개를 지켰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한다면, 소무가 무슨 말로 스스로 해명하겠는가?” 이는 비록 한때 격분하여 나온 말이지만, 또한 어찌 그것이 참언(讖言)¹¹⁶이 아니겠는가?【이상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115. 소무(蘇武, 기원전 140?-기원전 60):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소제(昭帝) 때의 인물.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19년 동안 북해(北海) 가에서 양을 치며 절개를 지켰다. 황정욱은 소무의 고난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며, 자신의 행적이 오해받을 수 있음을 토로한 것이다.
116. 참언(讖言): 장래의 길흉화복에 대해 예언하는 말. 황정욱이 젊었을 때 소무의 처지를 들어 한 말이, 훗날 자신이 왜적에게 억류되어 겪은 고초와 오해를 예견한 것처럼 되었다는 의미이다.


원문:
癸酉, 丁先祖妣許夫人憂。 服闋, 贈議政公又棄世, 首尾六年。 讀禮之暇, 旁及諸子書, 孜孜探討, 究極要歸。 如星命、堪輿、醫方、算數諸家, 無不參究。 嘗謂子赫曰: “自吾居廬, 心虛無別念, 便覺學力長進, 頗窺見古人微蘊, 禪家所謂頓悟, 良以此也。”【公子赫撰家狀。】

번역문:
계유년(1573)¹¹⁷에 선조비(先祖妣) 허부인(許夫人)¹¹⁸의 상(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친 후, 증 의정공(贈議政公)¹¹⁹께서 또 세상을 떠나시니, 처음부터 끝까지 6년¹²⁰이었다. 예서(禮書)를 읽는 여가에 널리 제자(諸子)¹²¹의 책에 미쳐 부지런히 탐구하여 요점과 귀착점을 궁구하였다. 성명(星命)¹²², 감여(堪輿)¹²³, 의방(醫方)¹²⁴, 산수(算數)¹²⁵ 등 여러 분야에 이르기까지 참고하고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아들 혁(赫)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여묘살이(居廬)를 한 뒤로부터 마음이 비어 별다른 생각이 없으니, 문득 학력(學力)이 크게 진전되어 자못 옛사람의 은미한 뜻(微蘊)을 엿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선가(禪家)에서 이르는 바 돈오(頓悟)¹²⁶라는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일 것이다.”【공의 아들 혁(赫)이 지은 가장(家狀)¹²⁷에서 인용】

주석:
117. 계유년(1573): 선조 6년.
118. 선조비(先祖妣) 허부인(許夫人): 할머니인 허씨 부인을 가리킨다.
119. 증 의정공(贈議政公): 사후에 의정(議政)으로 추증(追贈)된 공(公). 황정욱의 아버지 황림(黃琳)을 가리킨다. 황림은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20. 수미육년(首尾六年): 할머니와 아버지의 상(喪)을 연이어 치르느라 6년 동안 상중(喪中)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부모상과 조부모상은 각각 3년 상이다.
121. 제자(諸子):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사상가 및 그 학파의 저술.
122. 성명(星命): 별자리 운행을 보고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학술. 점성술(占星術).
123. 감여(堪輿): 땅의 형세를 보고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학술. 풍수지리(風水地理).
124. 의방(醫方): 병을 치료하는 방법. 의술(醫術).
125. 산수(算數): 수를 계산하는 방법. 수학(數學).
126. 돈오(頓悟): 불교 선종(禪宗)에서 점진적인 수행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 여기서는 학문 연구 중에 갑자기 이치를 깨닫는 경험을 비유한 것이다.
127. 가장(家狀): 자손이 선조의 행적을 기록한 글. 행장(行狀)이나 신도비명(神道碑銘), 묘지명(墓誌銘) 등을 짓는 기본 자료가 된다.


원문:
栗谷雅重公文學, 評騭國朝以來詩家曰: “黃某之詩, 發於經學, 重以自得義理之文也, 當與佔畢齋竝驅, 餘人不可及也。”【神道碑。】

번역문:
율곡(栗谷)¹²⁸이 공의 문학(文學)을 매우 중시하여, 국조(國朝) 이래의 시인(詩家)들을 평론(評騭)¹²⁹하며 말하였다. “황모(黃某)의 시는 경학(經學)에서 출발하였고 자득(自得)한 의리(義理)의 문장(文章)을 중시하니, 마땅히 점필재(佔畢齋)¹³⁰와 나란히 달릴 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미칠 수 없다.”【신도비(神道碑)에서 인용】

주석:
128. 율곡(栗谷): 이이(李珥).
129. 평즐(評騭): 인물이나 사물의 우열, 선악, 시비 등을 평론하여 결정하는 것.
130.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 조선 전기 사림파(士林派)의 영수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율곡 이이가 황정욱의 시문(詩文)을 김종직에 버금간다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구사맹(具思孟)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具思孟【文懿公。】
字景時, 號八谷, 綾城人。 嘉靖辛卯生。 己酉, 中進士。 明宗十三年戊午登第。 選入史局, 歷玉堂、吏郞、舍人、五道方伯、吏判, 官至左贊成。 甲辰卒, 年七十四。 贈綾安府院君。

번역문:
구사맹(具思孟)【문의공(文懿公)¹이다.】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능성(綾城)² 사람이다. 가정(嘉靖) 신묘년(1531)³에 태어났다. 기유년(1549)⁴에 진사시(進士試)⁵에 합격하였다. 명종(明宗) 13년 무오년(1558)⁶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⁷에 선발되어 들어가, 옥당(玉堂)⁸, 이조정랑(吏曹正郞)⁹, 사인(舍人)¹⁰, 오도방백(五道方伯)¹¹, 이조판서(吏曹判書)¹²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좌찬성(左贊成)¹³에 이르렀다. 갑진년(1604)¹⁴에 졸(卒)하니, 나이 74세였다.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¹⁵에 추증(追贈)되었다.

주석:

  1. 문의공(文懿公): 구사맹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고, 의(懿)는 부드러운 성품에 어짊을 갖춤(溫柔聖善), 또는 도(道)를 따르고 덕(德)을 행함(履道懷德) 등을 의미한다.
  2. 능성(綾城): 현재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일대. 능성 구씨(綾城 具氏)의 본관(本貫)이다.
  3. 가정(嘉靖) 신묘년(1531): 가정은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이다. 가정 신묘년은 1531년(중종 26)이다.
  4. 기유년(1549): 1549년(명종 4).
  5. 진사시(進士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의 하나. 합격자에게는 진사(進士)의 칭호를 주었다.
  6. 명종(明宗) 13년 무오년(1558): 1558년(명종 13).
  7. 사국(史局): 사관(史館). 춘추관(春秋館) 또는 예문관(藝文館) 등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청을 말한다. 문과 급제자 중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사관(史官)으로 임명하였다.
  8.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담당하던 핵심적인 학술 및 정책 자문 기관이었다.
  9. 이조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文官)의 인사(人事)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직(要職)이었다. 줄여서 ‘이낭(吏郞)’이라고도 한다.
  10.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 문하부(門下府), 예문관(藝文館), 중추부(中樞府) 등에 소속되어 문서 작성, 왕명 전달 등의 임무를 맡았다. 여기서는 문맥상 예문관 검열(檢閱)이나 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1. 오도방백(五道方伯): 다섯 도(道)의 방백(方伯). 방백은 관찰사(觀察使)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사맹이 여러 도의 관찰사를 역임했음을 의미한다.
  12. 이판(吏判):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의 으뜸 벼슬(정2품)로, 문관 인사를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13. 좌찬성(左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다.
  14. 갑진년(1604): 1604년(선조 37).
  15.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왕비의 아버지나 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위이다. 구사맹은 그의 딸이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에게 시집갔고, 그 아들이 인조(仁祖)로 즉위하면서 왕의 외조부가 되어 추증되었다. ‘능안(綾安)’은 본관인 능성(綾城)과 관련이 있다.

원문:
公天性恬靜, 而確有內守。 李樑之張甚也, 公居與之隣, 未嘗踵其門。 及其子登第, 慶席傾朝廷, 樑懇邀公, 公竟以疾辭。 其遠避權勢皆類此。 宣廟之世, 新進間舊, 彈劾苛峻, 士多劫劫改操, 而公介立其間, 絶不與後輩相昵。 以此數爲¹⁶當路所掎摭, 公終不屑意。 其於知舊之深者, 雖在衆棄中, 必以信義相先後, 公論多之。 及黨目相軋, 公以中歲外調之故, 得爲完人, 無間彼此, 稱爲宿德老成。 自連姻宮禁, 益持謙謹, 子弟奴僕, 一無憑恃以爲力者。 篤于孝友, 常痛早孤, 奉養大夫人, 誠禮甚至。 前後之喪, 廬墓終制, 祭必謹潔, 非甚疾病, 不廢沐浴。 莊以莅職, 詳以綜務, 不以矯飾爲能, 故所至有去後思。 世婚王室, 豪貴鼎列, 安於儉素, 不置莊宅家僮, 常不給使令。 惟耽墳籍, 以文翰自娛。 其詩文根據《六經》, 質愨精鍊, 粹然成章。 由其未嘗與人酬唱談說, 世之知之者絶少, 及遺集行布, 而諸公靡不心服, 咸以爲不可及。【澤堂李植撰碑。】

번역문:
공(公)은 천성(天性)이 고요하고 차분(恬靜)하였으나, 확고하게 내면의 지킴(內守)¹⁷이 있었다. 이량(李樑)¹⁸의 세력이 매우 성행할 때, 공은 그와 이웃하여 살았으나 일찍이 그의 문(門)을 찾지 않았다. 그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경축하는 자리에 온 조정이 기울었을 때, 이량이 공을 간절히 초청하였으나 공은 끝내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가 권세(權勢)를 멀리 피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선조(宣祖)¹⁹ 시대에 신진(新進) 세력이 구신(舊臣)을 이간질하고 탄핵(彈劾)이 가혹하고 심하여, 선비들이 많이 두려워하며(劫劫) 지조(操)를 바꾸었으나, 공은 그 사이에 굳건히 서서(介立) 후배들과 서로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당로자(當路者)²⁰에게 견제받고 배척당했으나(掎摭)²¹, 공은 끝내 개의치 않았다(不屑意). 교분이 깊은 옛 친구(知舊)에 대해서는 비록 여러 사람에게 버림받은 가운데 있더라도 반드시 신의(信義)로써 서로 대우하니(相先後)²², 공론(公論)²³이 이를 좋게 여겼다. 당파(黨) 간의 알력(軋)이 심해지자, 공은 중년(中歲)에 외직(外職)으로 나갔던 까닭에 완전한 사람(完人)²⁴이 되어 피차(彼此) 간에 거리낌 없이 숙덕(宿德)과 노성(老成)²⁵으로 칭송받았다. 궁궐(宮禁)과 연인(連姻)한 뒤로부터는 더욱 겸손하고 삼가는 자세(謙謹)를 지켜, 자제(子弟)와 노복(奴僕) 중에 조금도 (권세를) 믿고 의지하여 힘으로 삼는 자가 없었다. 효도와 우애(孝友)에 독실하여 늘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마음 아파하였고, 대부인(大夫人)²⁶을 봉양함에 정성과 예절이 지극하였다. 전후(前後)의 상(喪)에는 여묘(廬墓)하며 상제(喪制)를 마쳤고, 제사에는 반드시 삼가고 정결하게 하였으며, 심한 질병이 아니면 목욕(沐浴)²⁷을 폐하지 않았다. 엄숙하게 관직에 임하고(莊以莅職), 상세하게 사무를 총괄하였으며(詳以綜務), 거짓으로 꾸미는 것(矯飾)을 능함으로 삼지 않았기에, 이르는 곳마다 떠난 뒤에 그리워함이 있었다. 대대로 왕실(王室)과 혼인하여 호탕하고 귀한(豪貴) 이들이 정족(鼎足)처럼 늘어서 있었으나²⁸, 검소함(儉素)에 편안히 여기고 장원(莊園)과 저택(宅), 가동(家僮)을 두지 않아 항상 부릴 사람이 부족하였다. 오직 분적(墳籍)²⁹에 탐닉하여 문한(文翰)으로 스스로 즐겼다. 그의 시문(詩文)은 《육경(六經)》³⁰에 근거하여 질박하고 성실하며(質愨) 정밀하게 연마되어(精鍊), 순수하게 문장(文章)을 이루었다. 일찍이 다른 사람과 수창(酬唱)³¹하거나 담설(談說)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그를 아는 자가 극히 적었으나, 유집(遺集)³²이 간행되어 퍼지자 여러 공(公)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고,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택당(澤堂) 이식(李植)³³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16. [주-D001] 爲 : 《대동야승(大東野乘)・기재사초(寄齋史草)》에는 “이(以)”로 되어 있다. 의미상의 큰 차이는 없다. ‘이차(以此)’는 ‘이 때문에’로 해석된다.
17. 내수(內守): 내면의 지조나 원칙. 외적인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확고한 기준을 의미한다.
18. 이량(李樑, 1519-1563): 조선 명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인종의 장인인 윤임(尹任)의 외조카이며, 명종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외숙이다.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사림(士林) 세력을 탄압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의 정국 혼란을 가중시켰으나, 결국 사림의 탄핵을 받아 실각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19. 선묘(宣廟):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묘호(廟號). 선조 시대는 붕당(朋黨) 정치가 시작되고 심화된 시기이다.
20. 당로자(當路者):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 당시 집권 세력을 가리킨다.
21. 기척(掎摭):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거나 헐뜯어 배척함.
22. 상선후(相先後): 선배로서 후배를 이끌어주고 후배로서 선배를 따른다는 의미, 또는 서로를 먼저 생각하고 뒤를 돌보아 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문맥상 신의를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관계를 유지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23. 공론(公論): 여러 사람의 공정한 의견. 사사로운 감정이나 당파적 이해관계를 떠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의미한다.
24. 완인(完人):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 당쟁의 와중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지켜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구사맹이 중년에 외직에 나가 중앙 정치의 격랑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당파적 색채가 옅어질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25. 숙덕노성(宿德老成): 오랫동안 덕을 쌓아 경험이 많고 원숙함. 또는 그런 사람. 당파를 초월하여 존경받는 원로임을 나타낸다.
26.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구사맹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27. 목욕(沐浴): 몸을 깨끗이 씻는 것. 유교 예법에서는 제사 등 중요한 의식을 앞두고 심신을 정결하게 하는 목욕재계(沐浴齋戒)를 중시하였다. 평소에도 이를 실천했다는 것은 그의 근신(謹身)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28. 세혼왕실(世婚王室), 호귀정렬(豪貴鼎列): 구씨 가문이 대대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구사맹의 딸은 정원군의 부인, 즉 인조의 어머니가 된다), 권세 있고 부유한 친척들이 솥발처럼 늘어서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검소하게 살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29. 분적(墳籍): 옛 서적, 고전(古典). 삼분(三墳)과 오전(五典)을 합쳐 부르는 말에서 유래했다.
30. 《육경(六經)》: 유교의 여섯 가지 중요 경전.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그의 학문과 문장이 유교 경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31. 수창(酬唱): 서로 시를 주고받는 것.
32. 유집(遺集): 죽은 뒤에 남은 글을 모아 엮은 문집. 구사맹의 문집은 《팔곡집(八谷集)》이다.
33.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 4명(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을 '월상계택(月象谿澤)' 또는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라고 칭한다.


원문:
萬曆辛卯, 駙馬揀擇取同姓事, 公獻議曰: “配匹之際, 婚姻之禮, 人倫之始, 不可輕也。 先儒以爲人之不取同姓者, 爲其近禽獸也。 自古人君爲天下之廣, 爲子擇婿, 非不欲極天下之才, 而觀諸史冊, 未聞有取同姓者也。 此則蓋嫌其姓字之同, 而非如今日必欲得本貫同異而定其姓之同不同也。 士大夫家, 或有詳知其非一姓而取之者, 然未免有識者之譏刺, 豈以堂堂國家下效無識者之所爲乎? 況世宗朝事, 雖未得其詳, 而不過爲一過擧也。 《大典》之作, 出於其後, 亦安知世宗悔淑儀之事而著之令甲, 定金石之典也? 然則今日之所當法者, 《大典》而已。 至於自我作古之語, 恐惹萬世之疑也。”

번역문:
만력(萬曆) 신묘년(1591)³⁴에 부마(駙馬)를 간택하면서 동성(同姓)을 취한 일³⁵에 대해, 공이 의논을 올리며 말하였다. “배필(配匹)을 정하는 때와 혼인(婚姻)의 예(禮)는 인륜(人倫)의 시작이니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선유(先儒)³⁶들은 사람이 동성(同姓)을 취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금수(禽獸)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천하의 넓음을 위하여 자식(공주)을 위해 사위(부마)를 택할 때 천하의 인재를 극진히 구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 역사책(史冊)을 살펴보아도 동성을 취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대개 그 성자(姓字)³⁷가 같은 것을 꺼린 것이지, 오늘날처럼 반드시 본관(本貫)의 같고 다름을 따져서 그 성(姓)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를 정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는 혹 한 성씨가 아님을 상세히 알고서 취하는 자도 있으나, 식견 있는 자의 기롱과 비난(譏刺)을 면하지 못하는데, 어찌 당당한 국가가 아래로 무식한 자들의 행위를 본받겠습니까? 하물며 세종(世宗) 때의 일³⁸은 비록 그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한 차례의 잘못된 거행(過擧)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전(大典)》³⁹의 제정은 그 뒤에 나온 것이니, 또한 세종께서 숙의(淑儀)의 일을 후회하여 이를 영갑(令甲)⁴⁰에 저술하여 금석(金石)⁴¹과 같은 법전(典)으로 정하신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마땅히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은 《대전》일 뿐입니다. ‘나로부터 옛것을 만든다(自我作古)’⁴²는 말에 이르러서는, 만세(萬世)의 의혹을 불러일으킬까 염려됩니다.”

주석:
34. 만력(萬曆) 신묘년(1591): 만력은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만력 신묘년은 1591년(선조 24)이다.
35. 부마 간택 동성 취사(駙馬揀擇取同姓事):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동성(同姓)인 능성 구씨(綾城 具氏) 구신(具愼)의 아들 구문룡(具文龍)이 간택된 사건을 가리킨다. 당시 동성동본(同姓同本) 뿐만 아니라 동성(同姓) 간의 혼인도 금지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 간택은 논란 끝에 이루어졌다. 구사맹은 같은 능성 구씨로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36. 선유(先儒): 앞선 시대의 유학자.
37. 성자(姓字): 성(姓)과 이름(字). 성씨만을 의미할 수도 있다.
38. 세종조사(世宗朝事): 세종(世宗) 때 신빈 김씨(愼嬪 金氏) 소생의 서자(庶子)인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이 같은 청주 한씨(淸州 韓氏)인 한확(韓確)의 딸과 혼인한 사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성(姓)만 같고 본관(本貫)은 달랐다는 주장도 있다. 구사맹은 이를 예외적인 사례 또는 잘못된 조치로 보고 있다.
39. 《대전(大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리킨다.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예전(禮典)〉 ‘혼인(婚姻)’ 조항에는 동성(同姓)끼리 혼인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40. 영갑(令甲): 법령(令) 중의 으뜸(甲). 중요한 법조문을 의미한다.
41. 금석(金石): 쇠와 돌. 변하지 않고 영원함을 비유한다. 금석 같은 법전이란 확고부동한 법규를 의미한다.
42. 자아작고(自我作古): 나로부터 새로운 선례(古)를 만든다는 뜻. 이는 혁신적인 일을 시작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기존의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새로운 관례를 만드는 것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다. 즉, 동성혼 금지라는 《경국대전》의 원칙을 어기고 새로운 (잘못된)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윤두수(尹斗壽)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尹斗壽【文靖公。】
字子仰, 號梧陰, 善山府海平縣人。 嘉靖癸巳生。 明宗十年乙卯, 司馬第一。 戊午登第。 薦入史局, 歷弘文正字、吏郞、舍人、吏曹參議、平安監司、大司憲、戶曹判書。 壬辰, 起謫中, 拜御營大將, 進拜右相, 至領議政。 錄光國、扈聖兩勳, 封海原府院君。 辛丑卒, 年六十九。

번역문:
윤두수(尹斗壽)【문정공(文靖公)¹이다.】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선산부(善山府) 해평현(海平縣)² 사람이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³에 태어났다. 명종(明宗) 10년 을묘년(1555)⁴에 사마시(司馬試)⁵에 장원(第一)으로 합격하였다. 무오년(1558)⁶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국(史局)⁷에 추천되어 들어가,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⁸, 이조정랑(吏曹正郞)⁹, 사인(舍人)¹⁰, 이조참의(吏曹參議)¹¹, 평안감사(平安監司)¹², 대사헌(大司憲)¹³, 호조판서(戶曹判書)¹⁴를 역임하였다. 임진년(1592)¹⁵에 적소(謫所)¹⁶에 있던 중 기용되어 어영대장(御營大將)¹⁷에 제수되고, 우의정(右相)¹⁸으로 승진하여 영의정(領議政)¹⁹에 이르렀다. 광국공신(光國功臣)²⁰과 호성공신(扈聖功臣)²¹ 양쪽 공신에 녹훈(錄勳)되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²²에 봉해졌다. 신축년(1601)에 졸(卒)하니, 나이 69세였다.

주석:

  1. 문정공(文靖公): 윤두수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고, 정(靖)은 너그럽고 고요하게 공을 이룸(寬樂令終), 또는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음(恭己鮮言) 등을 의미한다.
  2. 선산부(善山府) 해평현(海平縣):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대. 해평 윤씨(海平 尹氏)의 본관(本貫)이다.
  3. 가정(嘉靖) 계사년(1533): 1533년(중종 28).
  4. 명종(明宗) 10년 을묘년(1555): 1555년(명종 10).
  5.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아울러 이르는 말. 합격자에게는 생원(生員) 또는 진사(進士)의 칭호를 주었다. 윤두수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6. 무오년(1558): 1558년(명종 13). 같은 해에 구사맹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7. 사국(史局): 사관(史館). 춘추관(春秋館) 또는 예문관(藝文館) 등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청.
  8.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 홍문관의 정9품 관직. 교서(校書) 등의 업무를 맡았다.
  9. 이조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文官) 인사(人事)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직(要職)이었다. 줄여서 ‘이낭(吏郞)’이라고도 한다.
  10.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 문하부(門下府), 예문관(藝文館), 중추부(中樞府) 등에 소속되어 문서 작성, 왕명 전달 등의 임무를 맡았다.
  11.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판서, 참판 다음가는 관직이다.
  12. 평안감사(平安監司): 평안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외관직이다.
  13.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14. 호조판서(戶曹判書): 호조(戶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국가의 재정, 조세, 호구 등을 담당했다.
  15. 임진년(1592):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이다.
  16. 적소(謫所): 귀양살이하는 곳. 윤두수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세자 책봉 문제(건저의 사건)에 연루되어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다.
  17. 어영대장(御營大將): 임진왜란 중 왕을 호위하고 수도 방위를 위해 설치된 어영청(御營廳)의 최고 지휘관.
  18. 우상(右相):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재상.
  19.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으뜸 벼슬. 정1품.
  20. 광국공신(光國功臣):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기축옥사)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 윤두수는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21.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책록된 공신. 윤두수는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22.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 등에게 내리는 작위이다. 해원(海原)은 본관인 해평(海平)과 관련된 봉호(封號)이다.

원문:
拜吏曹佐郞。 時李樑張甚, 强以其子干銓郞薦, 公堅不可。 以是名流六人同日獲罪, 公褫奪職名, 屛居坡州。 俄而樑敗, 敍復修撰。

번역문:
이조좌랑(吏曹佐郞)²³에 제수되었다. 이때 이량(李樑)²⁴의 세력이 매우 성하여, 그의 아들을 억지로 전랑(銓郞)²⁵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공(公)이 굳게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명망 있는 선비(名流) 여섯 사람이 같은 날 죄를 얻었는데²⁶, 공은 직명(職名)을 삭탈당하고 파주(坡州)에 물러나 살았다(屛居). 얼마 뒤 이량이 패망하자, 서용(敍用)되어 수찬(修撰)²⁷으로 복직되었다.

주석:
23. 이조좌랑(吏曹佐郞): 이조(吏曹)의 정6품 관직. 정랑과 함께 문관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전랑(銓郞)의 하나이다.
24. 이량(李樑, 1519-1563): 조선 명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이조판서로서 자신의 아들 이전(李湔)을 전랑으로 삼으려 하는 등 인사권을 남용하여 사림의 반발을 샀다.
25. 전랑(銓郞): 이조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아울러 이르는 말. 비록 품계는 낮았으나,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하는 자대권(自代權)과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원을 선발하는 통청권(通淸權) 등의 막강한 권한을 지녀 청요직(淸要職) 중의 청요직으로 꼽혔다.
26. 명류 육인 동일 획죄(名流六人同日獲罪): 1563년(명종 18) 이량의 전횡에 반발하여 윤두수, 윤근수(尹根壽) 형제와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기대승(奇大升), 이산해(李山海) 등 6명이 파직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는 이량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27. 수찬(修撰): 홍문관(弘文館)의 정6품 관직.


원문:
戊寅, 有姨弟李銖獄事, 公兄弟坐罷。 金大諫繼輝特言: “二人學行才器竝著, 且士類進退非輕, 不得以晻昧累人。” 有識是之。 然自後不安在內, 求外便養, 除羅州牧使, 以親老任三百里外, 准法不赴。 已而得延安府使。【竝簡易崔岦撰碑。】

번역문:
무인년(1578)²⁸에 이종사촌 동생 이수(李銖)의 옥사(獄事)²⁹가 있어, 공(公) 형제가 연좌(坐)되어 파직되었다. 대간(大諫) 김계휘(金繼輝)³⁰가 특별히 아뢰었다. “두 사람(윤두수, 윤근수)은 학문과 행실(學行), 재주와 기량(才器)이 모두 뛰어나며, 또한 사류(士類)의 진퇴(進退)는 가벼운 일이 아니니, 불명확한 일(晻昧)로 사람에게 누(累)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식견 있는 이들이 이를 옳게 여겼다. 그러나 이후부터 내직(內職)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외직(外職)을 구하여 부모님을 편히 봉양(便養)하고자 하였는데,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어버이가 연로하여 삼백 리 밖의 임지(任地)에는 법(法)에 준하여 부임하지 않았다³¹. 얼마 후에 연안부사(延安府使)³²를 얻었다.【이상은 간이(簡易) 최립(崔岦)³³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28. 무인년(1578): 1578년(선조 11).
29. 이수옥사(李銖獄事): 윤두수의 이종사촌 동생인 이수(李銖)가 서얼(庶孽)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처형된 사건. 이 사건으로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尹根壽)도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당시 동인(東人)이 서인(西人)을 공격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설도 있다.
30. 김계휘(金繼輝, 1526-1582):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의 중진으로, 당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었다.
31. 친로임삼백리외 준법불부(親老任三百里外 准法不赴): 조선 시대 법규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전(吏典)〉 ‘피혐(避嫌)’ 조항에 따르면, 연로한 부모가 있는 관리는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수도(京)에서 삼백 리 이내의 가까운 곳에 부임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나주(羅州)는 당시 수도 한양에서 삼백 리가 넘는 먼 곳이었으므로, 윤두수는 이 규정을 근거로 부임하지 않았다.
32. 연안부사(延安府使): 황해도 연안(延安) 지역을 다스리는 부사(府使). 정3품 외관직이다. 연안은 한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다.
33.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 조선 중기의 문신.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외교 문서 작성에 능했다. 윤두수의 비문을 지었다.


원문:
延安府使尹斗壽拜辭, 上引見問曰: “卿何以治郡?” 斗壽對曰: “延安之民好訟, 簿牒甚煩。 如臣才劣望輕, 罔知所爲。” 上默然良久曰: “予之待卿, 不以內外爲間, 卿亦勿以內外爲貳, 暫煩出守, 後當復召。” 斗壽退語人曰: “初意當久別天顔, 欲一仰視, 而及聞天語丁寧, 感淚如泉, 竟不敢仰視矣。” 因掩泣不能止, 同坐者皆下淚。【《石潭日記》。】

번역문:
연안부사(延安府使) 윤두수가 배사(拜辭)³⁴하자, 상(上)께서 인견(引見)³⁵하여 물으셨다. “경(卿)은 어떻게 군(郡)을 다스리겠는가?” 두수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연안의 백성들은 송사(訟事)를 좋아하여 관련 장부와 서류(簿牒)가 매우 번거롭습니다. 신(臣)과 같이 재주가 변변찮고 명망이 가벼운 자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께서 한참 동안 잠잠히 계시다가 말씀하셨다. “내가 경을 대우함에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으로 간격을 두지 않으니, 경 또한 내직과 외직으로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잠시 번거롭더라도 나가서 지키면 뒷날 마땅히 다시 부를 것이다.” 두수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처음 생각에는 마땅히 오랫동안 천안(天顔)³⁶을 이별할 것이라 여겨 한번 우러러보고자 하였는데, 임금님의 정녕(丁寧)하신 말씀을 듣게 되자 감격의 눈물이 샘솟듯 하여 끝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소.” 이내 눈물을 가리며 그치지 못하니, 함께 앉아 있던 자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석담일기(石潭日記)》³⁷에서 인용】

주석:
34. 배사(拜辭): 임명된 관리가 부임하기 전에 임금께 하직 인사를 드리는 것.
35. 인견(引見): 임금이 신하를 가까이 불러 만나는 것.
36. 천안(天顔): 임금의 얼굴. 용안(龍顔)과 같은 말이다.
37. 《석담일기(石潭日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일기. 호가 석담(石潭)이다. 선조 대의 정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원문:
公奉母夫人備甘旨之養, 惟知上恩, 無幾微在外色。 庚辰、辛巳之饑, 極意賑活, 遠近流民就食, 日可千計。 御史以聞, 特賜綺纈表裏嘉之。 時設宴以養老, 里置學以訓蒙, 四境鼓舞。 建平遠堂, 公餘輒處其中, 以湖山詩酒自娛。 會公弟居守松京, 往來便近, 良辰吉日, 魚組聯翩, 稱觴上壽, 一道稱爲盛事。

번역문:
공(公)은 어머니(母夫人)를 받들어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甘旨之養)³⁸함을 갖추었고, 오직 임금의 은혜만 알 뿐 조금도 외직에 있는 기색이 없었다. 경진년(1580)과 신사년(1581)³⁹의 기근(饑饉) 때에 지극히 마음을 써서 구휼하여 살리니(賑活), 원근(遠近)의 유민(流民)들이 나아와 먹는 자가 하루에 천 명을 헤아릴 만하였다. 어사(御史)⁴⁰가 이를 아뢰자, 특별히 비단옷 안팎감(綺纈表裏)⁴¹을 하사하여 가상히 여기셨다. 이때 잔치를 베풀어 노인을 봉양하고(養老), 마을에 학당(學)을 두어 아동을 가르치니(訓蒙), 사방의 경내(四境)가 기뻐 뛰었다(鼓舞). 평원당(平遠堂)⁴²을 짓고 공무 여가(公餘)에는 문득 그 안에 거처하며 호수와 산(湖山), 시(詩)와 술(酒)로 스스로 즐겼다. 마침 공의 아우가 송경(松京)⁴³을 지키고 있어 왕래가 편리하고 가까웠는데, 좋은 때와 길일(良辰吉日)이면 물고기 떼처럼 행렬이 이어져(魚組聯翩)⁴⁴ 술잔을 올려 장수(長壽)를 빌었으니, 온 도(一道)에서 성대한 일(盛事)이라고 칭송하였다.

주석:
38. 감지(甘旨)의 봉양(養): 달고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 지극한 효성을 의미한다.
39. 경진년(1580), 신사년(1581): 각각 1580년(선조 13), 1581년(선조 14). 이 시기에 큰 기근이 있었다.
40. 어사(御史):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민정(民政)을 살피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던 임시 관직.
41. 기힐표리(綺纈表裏): 무늬 있는 비단(綺)과 홀치기 염색을 한 비단(纈)으로 만든 옷의 겉감(表)과 안감(裏). 임금이 내리는 귀한 옷감을 의미한다.
42. 평원당(平遠堂): 윤두수가 연안부사 시절 지은 정자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43. 송경(松京): 개성(開城)의 별칭. 고려 시대의 수도였다. 당시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尹根壽)가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었다.
44. 어조연편(魚組聯翩): 물고기 떼(魚組)가 줄지어 펄럭이며 나아가는(聯翩) 모습. 형제가 자주 왕래하며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원문:
拜平安道觀察使。 西塞有建州酋聲息, 公策應綽然。 防戍之卒四番相代, 不勝其數, 日就流亡。 公頗捐營屬, 且括閑丁, 增額若干, 而六其番以紓之。 沿江民舊不識種木綿, 公爲具種敎之藝, 至于今稱賴。 以病露章乞休, 上特遣名醫賚藥診視, 且諭有曰: “卿有才有智, 雖使老酋來, 自可談笑處之, 不足動我一髮。” 凡累數十言。

번역문: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서쪽 변방(西塞)에 건주위(建州衛) 추장(酋)⁴⁵의 움직임(聲息)이 있었으나, 공이 대처함(策應)에 여유가 있었다(綽然). 변방 수자리(防戍)를 서는 병졸들이 네 번(四番) 교대하였는데, 그 수를 감당할 수 없어 날로 유망(流亡)하는 자가 많아졌다. 공이 자못 군영의 예속 재원(營屬)⁴⁶을 내고 또한 한가한 장정(閑丁)들을 찾아내어 액수를 약간 늘리고, 그 교대 횟수를 여섯 번(六番)으로 하여 부담을 덜어주었다(紓之). 압록강 연안(沿江)의 백성들이 예전에는 목화(木綿) 심는 법을 알지 못하였는데, 공이 씨앗을 마련해 주고 심는 기술(藝)을 가르쳐주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덕택을 칭송한다. 병으로 노장(露章)⁴⁷을 올려 휴가를 청하자, 상(上)께서 특별히 명의(名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서(賚藥) 진찰하게 하시고, 또한 교지(諭)를 내려 말씀하셨다. “경은 재주도 있고 지혜도 있으니, 비록 늙은 추장(老酋)⁴⁸이 온다 하더라도 스스로 담소(談笑)하며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터럭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무릇 수십 마디 말씀을 하셨다.

주석:
45. 건주추(建州酋): 건주위(建州衛) 여진족(女眞族)의 우두머리. 당시 압록강 유역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누르하치(努爾哈赤) 세력을 가리킬 수 있다. 윤두수가 평안감사로 재직하던 시기는 1580년대 초반으로, 누르하치가 점차 세력을 통합해가던 시기였다.
46. 영속(營屬):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 등에 소속된 물자나 재정.
47. 노장(露章): 봉하지 않고 올리는 상소문. 주로 긴급한 사안이나 사직(辭職), 휴가 요청 등에 사용되었다.
48. 노추(老酋): 늙은 우두머리. 여기서는 건주위 여진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선조가 윤두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안심시키는 말이다.


원문:
倭酋秀吉使以書契來, 言極兇悖, 至云必犯上國, 事留中甚秘。 會朝講日, 公以都憲侍講, 諸臣將退, 上曰: “倭書來, 欲與大臣及備邊諸宰密議處之。 都憲有計慮, 雖非當與, 可毋退。” 議臣皆言此不必奏聞。 公獨請據事具奏: “臣之於君, 直當如此, 它不暇計。” 旁引經義確甚, 上竟從公請。

번역문:
왜(倭)의 우두머리 수길(秀吉)⁴⁹이 사신을 보내 서계(書契)⁵⁰를 가져왔는데, 말이 지극히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났으며(兇悖), 심지어 반드시 상국(上國)⁵¹을 침범하겠다고까지 하였으므로, 일이 궁궐 안에 머물러(留中) 매우 비밀에 부쳐졌다. 마침 조강(朝講)⁵² 날에 공이 도헌(都憲)⁵³으로서 시강(侍講)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장차 물러가려 하자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왜의 서신이 왔는데, 대신(大臣) 및 비변사(備邊司)⁵⁴의 여러 재상(宰相)들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처리하고자 한다. 도헌은 계책과 사려(計慮)가 있으니, 비록 마땅히 참여할 자리는 아니나 물러가지 않아도 좋다.” 의논하는 신하들이 모두 이는 주청(奏請)하여 아뢸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공만이 홀로 사실에 근거하여 자세히 아뢸 것을 청하며 말하였다. “신하가 임금에게 곧바로 이와 같이 해야 할 뿐,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곁으로 경전의 뜻(經義)을 인용함이 매우 확고하니, 상께서 마침내 공의 청을 따르셨다.

주석:
49. 수길(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50. 서계(書契): 국가 간에 주고받는 외교 문서.
51. 상국(上國): 윗나라. 당시 조선이 사대(事大)하던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정명가도, 征明假道)하며 협박하는 국서를 보냈다.
52. 조강(朝講): 아침에 열리는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들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이다.
53. 도헌(都憲): 대사헌(大司憲)의 별칭. 사헌부의 으뜸 벼슬.
54. 비변사(備邊司): 조선 중기 이후 국방 문제를 비롯한 국가의 중요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던 최고 의결 기구.


원문:
辛卯, 坐黨附松江, 兩司合啓。 初論罷, 展轉益深, 至於遠竄, 配會寧, 特命改中途, 遂配洪原。 居無何, 陳奏使還, 皇上嘉我奏悉倭情, 勅書褒美。 上念公首先請奏, 卽日賜環。 復有言者, 量移海州。 時有浙江人擄在倭中, 密報中朝, 至有倭與朝鮮連謀之語。 向非陳奏, 則我國之情, 何以暴白? 人皆服公先見。

번역문:
신묘년(1591)⁵⁵에 송강(松江)⁵⁶에게 당부(黨附)하였다는 죄목으로 연좌되어 양사(兩司)⁵⁷가 합계(合啓)⁵⁸하였다. 처음에는 파직(罷)으로 논의되었으나, 이리저리 바뀌어(展轉) 더욱 심해져서 멀리 귀양(遠竄) 가게 되어 회령(會寧)⁵⁹에 유배(配)되었다가, 특별 명령으로 중도에 (유배지를) 변경하여 마침내 홍원(洪原)⁶⁰에 유배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진주사(陳奏使)⁶¹가 돌아왔는데, 황상(皇上)⁶²께서 우리가 왜(倭)의 실정을 상세히 아뢴 것을 가상히 여겨 칙서(勅書)로 포상하고 아름답게 여기셨다. 상(上)께서 공이 맨 먼저 아뢸 것을 청한 것을 생각하시어, 즉시 사환(賜環)⁶³하셨다. 다시 말하는 자⁶⁴가 있어, 형량을 헤아려 해주(海州)⁶⁵로 이배(量移)되었다. 이때 절강(浙江)⁶⁶ 사람이 왜에 사로잡혀 있다가 명나라 조정(中朝)에 비밀리에 보고하였는데, 왜가 조선과 공모(連謀)하였다는 말까지 있었다. 만약 그때 진주(陳奏)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실정이 어떻게 명백히 드러났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先見)에 감복하였다.

주석:
55. 신묘년(1591): 1591년(선조 24).
56.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호. 서인의 영수였다. 이 해에 정철이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세울 것을 건의(건저의 사건)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실각하고, 이 사건에 연루된 서인들이 대거 축출되었다. 당시 동인이 집권하고 있었다.
57.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58. 합계(合啓): 양사가 함께 임금에게 아뢰는 것.
59. 회령(會寧): 함경북도 북쪽 끝에 있는 도시. 당시 대표적인 유배지 중 하나였다.
60. 홍원(洪原): 함경남도 남쪽에 있는 지역. 회령보다는 가까운 곳이다.
61. 진주사(陳奏使): 어떤 사실을 아뢰기 위해 외국에 보내는 사신. 여기서는 왜의 침략 가능성과 조선의 입장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해 파견된 사신 김응남(金應南) 등을 가리킨다. 윤두수의 건의로 파견되었다.
62. 황상(皇上): 중국 황제. 당시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를 가리킨다.
63. 사환(賜環): 귀양 간 신하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 고리에 환(環)과 돌아올 환(還)의 음이 같은 데서 유래했다.
64. 다시 말하는 자(復有言者): 윤두수의 석방에 반대하는 동인 세력의 탄핵을 의미한다.
65. 해주(海州): 황해도의 중심 도시. 홍원보다는 한양에 더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긴 것이다.
66. 절강(浙江): 중국 남동부의 성(省).


원문:
壬辰, 倭寇大入, 上思公特召之, 日再三問其至。 上西幸, 公陪駕到東坡館, 召公前敦諭至曰“卿兄弟可勿離予, 死生勿負”, 因解佩囊賜之。 到開城, 衆志崩潰, 一夜四五驚。 上命公爲御營大將, 號令統攝, 始充定。

번역문: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자, 상(上)께서 공을 생각하여 특별히 부르시고, 날마다 두세 번씩 그의 도착 여부를 물으셨다. 상께서 서쪽으로 행차(西幸)⁶⁷하실 때, 공이 어가(駕)를 모시고 동파관(東坡館)⁶⁸에 이르자, 상께서 공을 앞으로 불러 돈독히 타이르며 말씀하셨다. “경(卿)의 형제는 나를 떠나지 말 것이며, 죽고 사는 데 있어 서로 저버리지 말라.” 이어서 차고 있던 주머니(佩囊)⁶⁹를 풀어 하사하셨다. 개성(開城)에 이르자 여러 사람들의 마음(衆志)이 무너져 내려, 하룻밤에도 네댓 번씩 놀라는 일이 있었다. 상께서 공에게 명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삼으시니, 호령(號令)으로 군대를 통솔하고 감독하여(統攝) 비로소 안정되었다(充定).

주석:
67. 서행(西幸): 임금이 도성을 떠나 서쪽으로 피란 가는 것.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한양을 떠나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義州)까지 피란 간 것을 말한다.
68. 동파관(東坡館): 개성 부근에 있던 객관(客館)의 이름.
69. 패낭(佩囊): 허리띠에 차는 주머니. 임금이 자신의 소지품을 하사하는 것은 깊은 신임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원문:
拜右議政。 旣拜, 請上御南大門, 撫諭父老, 近侍遍傳城中, 下罪己書于八道, 遣使召集義兵, 卽舊都甄用人才, 此其設施之首事也。 公聞夫人自畿邑將從公行, 則曰: “我以此時大臣, 何得家累相隨?” 使止之。 到寶山站, 問廟社主至否, 則禮官已於蒼皇中瘞于穆淸殿。 公愕然啓遣禮官等載而追及。 旣而賊入開城, 掘發無所不至云。

번역문: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다. 이미 제수되자, 상께서 남대문(南大門)⁷⁰에 나아가시어 부로(父老)⁷¹들을 위로하고 타이르실 것(撫諭)과, 근시(近侍)들이 성안에 두루 전파할 것과, 죄기서(罪己書)⁷²를 팔도(八道)에 내릴 것과, 사신을 보내 의병(義兵)을 소집할 것과, 즉시 옛 도읍(舊都)⁷³에서 인재를 가려 등용(甄用)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베푼 정책(設施)의 첫 번째 일이었다. 공이 부인(夫人)이 기읍(畿邑)⁷⁴에서 장차 공을 따라오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말하였다. “내가 이때의 대신(大臣)인데, 어찌 가족의 누(家累)를 데리고 다닐 수 있겠는가?” 사람을 시켜 그만두게 하였다. 보산역(寶山站)⁷⁵에 이르러 종묘(廟)와 사직(社)의 신주(主)⁷⁶가 도착했는지 여부를 물으니, 예관(禮官)⁷⁷이 이미 창황(蒼皇) 중에 목청전(穆淸殿)⁷⁸에 묻었다고 하였다. 공이 깜짝 놀라 아뢰어 예관 등을 보내 신주를 싣고 뒤쫓아 오게 하였다. 얼마 뒤 적(賊)이 개성에 들어와 파헤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주석:
70. 남대문(南大門): 개성(開城)의 남문.
71. 부로(父老): 나이 많은 백성들.
72. 죄기서(罪己書): 임금이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고 반성하는 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론을 모으기 위해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73. 구도(舊都): 옛 도읍. 여기서는 개성을 가리킨다.
74. 기읍(畿邑): 경기도의 고을. 윤두수의 가족이 있던 곳을 의미한다.
75. 보산역(寶山站): 평안도 평양 부근에 있던 역참(驛站).
76. 묘사주(廟社主):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에 모시는 신주(神主). 왕조의 정통성과 국가의 상징물이다. 피란길에는 반드시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가야 했다.
77. 예관(禮官): 예조(禮曹)의 관리 또는 종묘서(宗廟署), 사직서(社稷署) 등 제사 관련 관청의 관리.
78. 목청전(穆淸殿): 경복궁 안에 있던 전각. 예관들이 경황 중에 신주를 궁궐 안에 묻어두고 피란길에 오른 것을 말한다. 이는 매우 중대한 과실이었다.


원문:
到平壤, 進拜左議政, 郡國諸務, 規畫措置, 悉中機宜, 無少底滯, 上下倚之。 一日, 議遣大臣經紀浿南, 咸欲以公入啓。 金判書應南耳語李參判恒福曰: “尹相去此, 大事瓦解。” 遂啓他相。

번역문: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 제수되니, 군국(郡國)⁷⁹의 여러 업무를 계획하고 조치함(規畫措置)이 모두 기미와 마땅함(機宜)에 들어맞아 조금도 막히거나 지체됨(底滯)이 없으므로, 상하(上下)가 그에게 의지하였다. 하루는 대신(大臣)을 보내 패수(浿水)⁸⁰ 남쪽을 경략하고 다스리게(經紀) 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모두 공을 추천하여 아뢰고자 하였다. 판서(判書) 김응남(金應南)⁸¹이 참판(參判) 이항복(李恒福)⁸²에게 귓속말로 말하였다. “윤 상(尹相)⁸³이 이곳을 떠나면 대사(大事)가 와해(瓦解)될 것이다.” 마침내 다른 재상(他相)을 아뢰었다.

주석:
79. 군국(郡國): 군(郡)과 국(國). 국가 전체 또는 국가의 군사 및 행정 업무를 의미한다.
80. 패수(浿水): 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 패수 남쪽은 평양 이남 지역을 가리킨다.
81.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조선 중기의 문신. 당시 예조판서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82.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하며 국난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병조참판이었다.
83. 윤상(尹相): 윤 정승. 윤두수를 가리킨다.


원문:
公聞夫人喪在私舍, 文牒委塡, 諸相殊不能辦。 遣郞請公, 日昃乃詣, 裁處便空。

번역문:
공(公)이 부인(夫人)의 상(喪)이 사사로운 집에 있다는⁸⁴ 소식을 들었으나, 문서와 서류(文牒)가 산더미처럼 쌓여(委塡) 여러 재상(諸相)들이 자못 처리할 수 없었다. 낭관(郞官)⁸⁵을 보내 공을 청하니, 해가 기울어서야(日昃) 이르러 재결하여 처리하자(裁處) 즉시 비었다(便空).

주석:
84. 부인상재사사(夫人喪在私舍): 부인의 상(喪)이 사적인 집에 있다는 의미. 즉,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또는 부인의 상례(喪禮)를 사가(私家)에서 치르고 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당시 피란 중이라 공식적인 상례 절차를 갖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85. 낭관(郞官): 정랑(正郞)이나 좌랑(佐郞) 등 중앙 관청의 실무 관리.


원문:
公建請今年八道稅入, 一依上年踏驗之數, 歲亦果大稔, 翌年接濟天兵, 賴以無闕。 西路調兵撥糧之事, 皆由公素籌記在胸中者, 輒如取一家物而用之, 同事者歎服。 又行文州縣, 卽賊來迫, 毋得妄焚燬倉廒, 只得散給百姓, 以備收糴。 如黃州、中和官吏, 尤奉公令, 及天將至, 非唯無罪, 以能見稱。

번역문:
공(公)이 건의하여 청하기를, 금년 팔도(八道)의 세금 수입(稅入)은 한결같이 작년의 답험(踏驗)⁸⁶한 수치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그해 또한 과연 크게 풍년(大稔)이 들어, 이듬해 천병(天兵)⁸⁷을 접대하고 보급(接濟)하는 데 힘입어 부족함이 없었다. 서쪽 길(西路)⁸⁸의 군사를 징발하고(調兵) 군량을 배분하는(撥糧) 일은 모두 공이 평소 가슴속에 헤아려 기억해 둔 것(素籌記在胸中者)에 따라, 문득 집안의 물건을 가져다 쓰듯 하니, 함께 일하는 자(同事者)들이 탄복하였다. 또 주문(州縣)에 공문(行文)을 보내, 만약 적(賊)이 쳐들어와 핍박하더라도 망령되이 창고(倉廒)를 불태우지 말고, 다만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곡식을 거둘 때(收糴)를 대비하게 하였다. 황주(黃州)와 중화(中和)⁸⁹의 관리들처럼 특히 공의 명령을 받든 자들은, 천장(天將)⁹⁰이 이르렀을 때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하다고 칭찬받았다.

주석:
86. 답험(踏驗): 관리나 양반이 직접 논밭을 돌아다니며 작황을 조사하여 수확량을 예측하고 세액을 결정하던 방식.
87. 천병(天兵): 천자(天子)의 군대. 명나라 구원병을 가리킨다.
88. 서로(西路): 평안도, 황해도 등 서쪽 지역을 가리킨다.
89. 황주(黃州), 중화(中和): 황해도의 지명.
90. 천장(天將): 천자(天子)의 장수. 명나라 장수를 가리킨다.


원문:
大小從臣控疏顧親者相屬, 行朝體貌日加寒心。 公啓引臣子惟所在致死之義, 自後的聞父母變故者外, 不聽便私, 以存大防。【幷碑。】

번역문:
크고 작은 종신(從臣)⁹¹ 중에 상소(控疏)하여 어버이를 돌보겠다(顧親)는 자들이 서로 이어져, 행재소 조정(行朝)⁹²의 체모(體貌)가 날로 한심하게 되었다. 공이 아뢰기를, 신자(臣子)는 오직 있는 곳에서 죽음을 바쳐야 한다는 의리(義)를 인용하고, 이후부터는 부모의 변고(變故)를 들은 자 외에는 사사로운 편의(便私)를 들어주지 않아 대방(大防)⁹³을 보존하게 하였다.【이상은 비문(碑)에서 인용】

주석:
91. 종신(從臣): 임금을 따라다니는 신하. 피란길에 선조를 호종(扈從)한 신하들을 가리킨다.
92. 행조(行朝): 임금이 도성을 떠나 머무는 곳에 임시로 설치된 조정. 행재소(行在所) 조정.
93. 대방(大防): 큰 방비.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이나 기강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국난 상황에서 신하가 임금을 버리고 사사로움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기강을 뜻한다.


원문:
上下備忘記曰: “自古遇變之王, 必有自貶之擧。 自今以後, 諭內外臣民, 凡於疏章勿稱聖睿, 且尊號一切勿用可也。” 李誠中曰: “此盛擧也。 爲臣子者, 不可不承順以成其美。” 尹斗壽曰: “今日之變, 無非臣子之罪, 而豈有人君獨先自貶之理乎?” 遂以不可貶遜之義爲對。

번역문:
상(上)께서 비망기(備忘記)⁹⁴에 쓰셨다. “예로부터 변고(變)를 만난 왕은 반드시 스스로를 낮추는(自貶) 거동이 있었다. 지금 이후로 내외(內外)의 신민(臣民)에게 이르노니, 무릇 상소문(疏章)에 성스럽고 예지롭다(聖睿)고 칭하지 말고, 또한 존호(尊號)⁹⁵도 일절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성중(李誠中)⁹⁶이 말하였다. “이는 성대한 거동입니다. 신하된 자는 받들어 순종하여 그 아름다움을 이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두수가 말하였다. “오늘날의 변고는 신하의 죄가 아님이 없는데, 어찌 임금께서 홀로 먼저 자신을 낮추는 도리가 있겠습니까?” 마침내 자신을 낮추는 겸양(貶遜)은 불가하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주석:
94. 비망기(備忘記):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약식 명령서 또는 임금 자신의 메모.
95. 존호(尊號): 임금이나 왕족의 덕을 기리어 올리는 칭호.
96. 이성중(李誠中): 이항복(李恒福)의 자(字)이다.


원문:
臨津失守, 聲息漸急, 上命廟堂議去就。 寅城府院君鄭澈首曰: “此非京城死守之比, 可令一大將守之, 奉駕而出可也。” 沈忠謙、李德馨又從而和其說, 衆議皆以爲然。 獨尹斗壽、李幼澄、朴東亮曰: “此大不可。 我國封疆, 南北不過數千里。 欲往北道, 則窮無可去之地, 欲渡鴨綠, 則一渡之後, 無復可爲。 雖或偸生朝夕, 亦何益哉? 平壤四面絶險, 易以防守, 軍士過萬, 城中壯士不下數千, 糧食且多。 離此一步, 國事決矣。” 上召對問之, 斗壽又力主固守之說。 上曰: “國事已付卿, 好爲也。”

번역문:
임진강(臨津) 방어선이 무너지고(失守)⁹⁷, 소식(聲息)이 점점 급박해지자, 상(上)께서 묘당(廟堂)⁹⁸에 명하여 거취(去就)를 의논하게 하셨다.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⁹⁹이 먼저 말하였다. “이는 경성(京城)을 사수(死守)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한 명의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게 하고, 어가(駕)를 받들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충겸(沈忠謙)¹⁰⁰, 이덕형(李德馨)¹⁰¹ 또한 따라서 그 말에 동조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衆議)이 모두 그렇다고 여겼다. 유독 윤두수, 이유징(李幼澄)¹⁰², 박동량(朴東亮)¹⁰³만이 말하였다. “이는 크게 불가합니다. 우리나라의 봉강(封疆)은 남북이 수천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북도(北道)로 가고자 한들 막다른 곳이라 갈 만한 땅이 없고, 압록강(鴨綠)을 건너고자 한들 한번 건너간 뒤에는 다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혹 아침저녁으로 목숨을 구차히 보전(偸生)한다 한들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평양(平壤)은 사면이 절벽으로 험준하여 방수(防守)하기 쉽고, 군사(軍士)는 만 명이 넘으며 성안의 장사(壯士)도 수천 명 아래가 아니고, 양식 또한 많습니다. 이곳을 한 걸음이라도 떠나면 국사(國事)는 결정될 것입니다.” 상께서 불러 대면하여 물으시니, 두수가 또 굳게 지키자는 주장(固守之說)을 강력히 개진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국사를 이미 경에게 맡겼으니, 잘 하도록 하라.”

주석:
97. 임진실수(臨津失守): 1592년 5월, 임진강 방어선이 왜군에게 돌파당한 사건. 이로 인해 개성이 함락되고 선조는 평양으로 피란길을 재촉하게 된다.
98. 묘당(廟堂): 의정부(議政府) 또는 비변사(備邊司) 등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조정을 가리킨다.
99.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 호는 송강(松江). 서인의 영수. 당시 좌의정이었다.
100. 심충겸(沈忠謙, 1545-1594):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 당시 병조판서였다.
101.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한음(漢陰). 이항복과 절친한 친구였다. 당시 예조판서였다.
102. 이유징(李幼澄): 미상.
103. 박동량(朴東亮, 1569-1635):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오창(梧窓).


원문:
上召群臣, 議去就。 尹斗壽曰: “一城之人皆曰‘願與大駕死守此城, 大駕若出, 當一時皆潰’云。 人心如此, 若能協守, 足以抵敵。 況以事勢言之, 此城之外, 不知何地可避, 何地爲固也。” 上曰: “卿之言, 太沓沓也。”

번역문:
상(上)께서 여러 신하들을 불러 거취(去就)를 의논하셨다. 윤두수가 말하였다. “온 성(城)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원컨대 대가(大駕)¹⁰⁴와 함께 이 성을 사수(死守)하고자 하며, 대가께서 만약 나가시면 마땅히 일시에 모두 붕괴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인심(人心)이 이와 같으니, 만약 협력하여 지킬 수 있다면 충분히 적(敵)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사세(事勢)로 말하건대, 이 성 밖에는 어느 땅으로 피할 수 있을지, 어느 땅이 견고할지 알 수 없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경의 말은 너무 답답(沓沓)하구나.”¹⁰⁵

주석:
104.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임금 또는 어가(御駕)를 의미한다.
105. 답답(沓沓): 사리에 어둡고 고지식함을 의미한다. 선조가 윤두수의 고수 주장을 현실성 없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원문:
上又與群臣議去就, 時上顔色慘沮, 語甚悲切, 臣僚莫敢仰視。 鄭澈出謂尹斗壽曰: “左相之言, 好則好矣, 獨不見天顔乎? 爲臣子者, 安忍挽留, 强欲守城乎?” 斗壽厲聲曰: “公何爲發此誤國之言耶? 若使京城早有固守之計, 豈至於今乎? 公不欲守此城, 奉駕獨去之可耶?” 澈無以應。【竝《寄齋雜記》。】

번역문:
상(上)께서 또 여러 신하들과 거취(去就)를 의논하셨는데, 이때 상의 안색(顔色)이 참담하고 기가 꺾여(慘沮) 말씀이 매우 슬프고 간절하여(悲切), 신료(臣僚)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정철(鄭澈)이 나와 윤두수에게 일러 말하였다. “좌상(左相)¹⁰⁶의 말씀이 좋기는 좋으나, 유독 천안(天顔)을 보지 못하였소? 신하된 자로서 어찌 차마 만류(挽留)하여 억지로 성(城)을 지키려 하겠소?” 두수가 준엄한 목소리(厲聲)로 말하였다. “공(公)은 어찌하여 나라를 그르치는(誤國) 이런 말을 하시오? 만약 경성(京城)에서 일찍이 굳게 지킬 계책(固守之計)이 있었더라면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소? 공은 이 성을 지키려 하지 않고, 어가(駕)를 받들고 홀로 떠나는 것이 옳단 말이오?” 정철이 응답하지 못하였다.【이상은 《기재잡기(寄齋雜記)》¹⁰⁷에서 인용】

주석:
106. 좌상(左相): 좌의정(左議政). 윤두수를 가리킨다.
107.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후기의 학자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호가 기재(寄齋)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경험과 견문 등을 기록하였다.


원문:
賊益西逼, 議者咸言咸興可往, 上亦意向之。 公又極言: “以堅城則寧邊優於咸興, 可往守, 猶且事危則趣義州, 赴愬天朝有便。 且北方人心獰甚, 非可保之地。” 言咸興者猶盛, 公以死爭之, 卒之上不幸咸興者, 公力也。 其後咸興爲賊所陷, 兩王子在會寧, 土人縛致之, 賊人始大驚信公見。

번역문:
적(賊)이 더욱 서쪽으로 핍박해오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함흥(咸興)¹⁰⁸으로 갈 만하다고 말하였고, 상(上) 또한 그럴 의향이 있으셨다. 공이 또 극력 말하였다. “견고한 성(堅城)으로는 영변(寧邊)¹⁰⁹이 함흥보다 나으니, 가서 지킬 만하고, 만약 또 일이 위태로워지면 의주(義州)로 달려가 천조(天朝)¹¹⁰에 하소연(赴愬)하기에도 편리함이 있습니다. 또한 북방(北方)의 인심(人心)은 매우 사나우니(獰甚), 보전할 만한 땅이 아닙니다.” 함흥으로 가자고 말하는 자들이 여전히 성하였으나, 공이 죽음으로써 다투니, 마침내 상께서 함흥으로 가지 않으신 것은 공의 힘이었다. 그 후 함흥이 적에게 함락되고, 두 왕자(兩王子)¹¹¹가 회령(會寧)에 있었는데 토착민(土人)들이 묶어서 적에게 바치니, 적들이 비로소 크게 놀라 공의 견해를 믿었다.

주석:
108. 함흥(咸興): 함경도의 중심 도시.
109. 영변(寧邊): 평안북도에 있는 도시. 약산동대(藥山東臺)로 유명하며,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110. 천조(天朝): 천자(天子)의 조정. 명(明)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111. 양왕자(兩王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과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 선조의 서자들로, 임진왜란 중 함경도로 피란 갔다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혔다.


원문:
上之出平壤也, 留公以守, 治城繕械, 頗有條理。 夜抄精銳斫賊營, 晝鳴金鼓設疑兵, 爲必守之計。 而江灘失戒, 賊勢直衝, 旣不可守, 則遣將結陣於城外, 踰¹¹²出人士, 以全一城之命。 公亦追及行在於宣川。【竝碑。】

번역문:
상(上)께서 평양을 나오실 때, 공을 남겨 지키게 하시니, 성(城)을 정비하고 무기(械)를 수리함(治城繕械)이 자못 조리(條理)가 있었다. 밤에는 정예병(精銳)을 뽑아 적의 군영(賊營)을 치고, 낮에는 징과 북(金鼓)을 울리고 의병(疑兵)¹¹³을 설치하여, 반드시 지킬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강가 여울(江灘)에서 경계를 잃어¹¹⁴ 적의 기세(賊勢)가 곧바로 돌격해오니, 이미 지킬 수 없게 되자 장수(將)를 보내 성 밖에 진(陣)을 치게 하고, 인사(人士)들을 성 너머로 내보내어(踰出) 온 성의 생명(一城之命)을 보전하게 하였다. 공 또한 행재소(行在)가 있는 선천(宣川)¹¹⁵까지 뒤쫓아 갔다.【이상은 비문(碑)에서 인용】

주석:
112. [주-D001] 踰 : 저본(底本)에는 “유(諭)”로 되어 있다. 《간이집(簡易集)・의정부영의정구겸직해원부원군윤공신도비명(議政府領議政具兼職海原府院君尹公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성을 넘어 나가게 했다는 의미의 ‘유(踰)’가 적절하다.
113. 의병(疑兵): 적을 속이기 위해 실제보다 많아 보이게 하거나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꾸미는 위장 병력.
114. 강탄실계(江灘失戒): 대동강 여울목에서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115. 선천(宣川): 평안북도 서북쪽에 있는 도시.


원문:
至龍川郡, 尹斗壽啓曰: “今日之行, 專爲赴訴天朝, 以此兼程疾馳, 已到于此。 但遽到義州, 人心尤駭, 將無以收拾。 況今賊勢頗緩, 先使義州等官收集散民, 諭以不卽渡遼之意, 使有所恃, 然後更觀二三日後, 緩緩征進, 則遠近不至失望矣。” 上從之。【《寄齋雜記》。】

번역문:
용천군(龍川郡)¹¹⁶에 이르자, 윤두수가 아뢰었다. “오늘의 행차는 오로지 천조(天朝)에 가서 하소연(赴訴)하기 위함이니, 이 때문에 길을 재촉하여 빨리 달려(兼程疾馳) 이미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만 갑자기 의주(義州)에 도착하면 인심(人心)이 더욱 놀라 장차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적의 기세가 자못 누그러졌으니, 먼저 의주 등지의 관리로 하여금 흩어진 백성(散民)을 수습하게 하고, 즉시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타이르며(諭) 믿는 바가 있게 한 연후에, 다시 2, 3일 뒤를 보아 천천히 나아가면(緩緩征進)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실망함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상께서 그 말을 따르셨다.【《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인용】

주석:
116. 용천군(龍川郡): 평안북도 서북쪽 압록강 하구에 있는 지역. 의주 바로 남쪽에 있다.


원문:
駕到義州, 吾東地圖窮處, 國脈不絶如線。 公獨以忠義精誠, 激仰奮厲, 正色朝端, 屹如山岳, 雖極顚沛之中, 人望之有所恃焉。 是時, 渡遼之議已成, 公竭力救止, 一日之內, 啓辭者三, 請對者再, 有曰: “宗社臣民, 擧將何托而輕爲匹夫之行乎?”

번역문:
어가(駕)가 의주(義州)에 도착하니, 우리 동방(吾東) 지도가 다한 곳(地圖窮處)¹¹⁷으로, 국맥(國脈)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실오라기 같았다. 공만이 홀로 충의(忠義)와 정성(精誠)으로 격앙되고 분발하여(激仰奮厲), 조정(朝端)에서 안색을 바로 하고(正色) 우뚝하기가 산악(山岳)과 같으니, 비록 지극히 위태롭고 어려운(顚沛)¹¹⁸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믿는 바가 있었다. 이때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자는 의논(渡遼之議)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공이 힘을 다해 구원하고 막으니(救止), 하루 안에 아뢰는 말이 세 번이었고 대면하여 청하는 것이 두 번이었으며, 말하기를 “종묘사직(宗社)과 신하와 백성(臣民)을 모두 장차 어디에 맡기고 가벼이 필부(匹夫)¹¹⁹의 행동을 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주석:
117. 오동지도궁처(吾東地圖窮處): 우리 동쪽(조선)의 땅이 다한 곳. 국토의 마지막 끝인 의주를 가리킨다.
118. 전패(顚沛): 엎어지고 자빠짐. 몹시 위태롭고 곤궁한 상황을 의미한다.
119. 필부(匹夫): 평범한 사내. 여기서는 왕으로서의 책임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는 것을 비유한다.


원문:
上以公大臣獨勞, 欲官其子婿, 而子皆持母服, 且無婿, 獨長子昉因金革起復, 故命超資陞敍, 繼有絮衾之賜。

번역문:
상(上)께서 공(公)이 대신(大臣)으로서 홀로 수고로운 것을 생각하시어, 그 아들과 사위(子婿)에게 벼슬을 주려 하셨으나, 아들들은 모두 어머니 상중(持母服)¹²⁰이었고 또한 사위도 없었으며, 유독 장자(長子) 방(昉)¹²¹만이 군무(金革)¹²²로 인해 기복(起復)¹²³하였으므로,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승진 임명(超資陞敍)하도록 명하시고, 이어서 솜이불(絮衾)을 하사하셨다.

주석:
120. 지모복(持母服):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상복(喪服)을 입고 있음.
121. 방(昉): 윤두수의 장남 윤방(尹昉, 1563-1640). 조선 중기의 문신.
122. 금혁(金革): 쇠(金)와 가죽(革). 무기와 갑옷을 의미하며, 전쟁 또는 군무(軍務)를 뜻한다.
123.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있는 관리를 특별히 기용하여 관직에 복귀시키는 것. 국가 비상시 등에 행해졌다.


원문:
癸巳, 賊之據京城者, 望天兵潰而南。 然京城惟丘墟, 人心亦不甚保, 上下未有前進意。 公極陳不可, 奉駕東轅, 由海州還都。

번역문:
계사년(1593)¹²⁴에 경성(京城)을 점거했던 적(賊)이 천병(天兵)¹²⁵을 보고 무너져 남쪽으로 갔다. 그러나 경성은 오직 폐허(丘墟)뿐이었고, 인심(人心) 또한 심히 보전되지 않아 상하(上下)가 앞으로 나아갈 뜻이 없었다. 공이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고, 어가(駕)를 받들어 동쪽으로 수레를 돌려(東轅) 해주(海州)를 경유하여 환도(還都)하였다.

주석:
124. 계사년(1593): 1593년(선조 26).
125. 천병(天兵): 명나라 군대.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탈환하자, 서울에 주둔하던 왜군이 남쪽으로 철수했다.


원문:
倡義使金千鎰頓兵江華, 秋義將禹性傳尤無見效, 俱以病不赴西徵。 上有嚴峻之敎。 公啓言: “千鎰起義最先, 使八道人心, 翕然大回, 特兵寡無助, 不能有爲。 性傳多病, 國人所知, 責以觀望, 大不近情。” 聞者允公之論。 晉州之陷, 城中人士死者數萬, 公請褒贈金千鎰、崔慶會等, 及賜弔祭, 遍慰義魂, 蓋上欲有少待, 而固請行之, 中外稱快。

번역문: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¹²⁶이 강화(江華)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추의장(秋義將) 우성전(禹性傳)¹²⁷ 또한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모두 병 때문에 서쪽 정벌(西徵)¹²⁸에 나아가지 않았다. 상(上)께서 엄준(嚴峻)한 하교(敎)를 내리셨다. 공이 아뢰어 말하였다. “김천일은 의병을 일으킨 것이 가장 먼저여서 팔도(八道)의 인심(人心)으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크게 돌아오게 하였으나, 다만 병사가 적고 도움이 없어 능히 공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우성전은 병이 많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이니, 관망(觀望)한다고 책망하는 것은 크게 실정(實情)에 가깝지 않습니다.” 듣는 자들이 공의 의논을 옳다고 여겼다. 진주(晉州)가 함락¹²⁹되어 성안의 인사(人士) 중에 죽은 자가 수만 명이었는데, 공이 김천일, 최경회(崔慶會)¹³⁰ 등에게 포상하고 증직(褒贈)하고 조문하고 제사(弔祭)를 내려주며 의로운 영혼(義魂)들을 두루 위로할 것을 청하였다. 대개 상께서는 조금 기다리고자 하셨으나, 굳게 청하여 시행하니 중외(中外)가 통쾌하게 여겼다.

주석:
126.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으며,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창의사(倡義使)는 의병을 일으킨 장수에게 내린 칭호이다.
127. 우성전(禹性傳, 1542-159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추강(秋江).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관찰사 등으로 활동했다. 추의장(秋義將)은 그의 호를 딴 별칭으로 보인다.
128. 서징(西徵): 서쪽으로 정벌하러 감. 당시 남쪽 해안에 주둔한 왜군을 토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29. 진주지함(晉州之陷):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된 사건. 이 전투에서 김천일, 최경회, 황진(黃進), 고종후(高從厚) 등 많은 의병장과 관군, 백성들이 순절했다.
130.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서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지휘하다 순절했다.


원문:
上以黃海道無節度使, 命議設置。 公執言: “祖宗朝旣設而罷, 誠以本道民力, 不堪貳營。” 至於軍兵統屬, 自有鎭營, 設之無益有害。 上猶屢下其議, 後至必設, 至今果稱巨弊。

번역문:
상(上)께서 황해도(黃海道)에 절도사(節度使)¹³¹가 없으므로 설치할 것을 의논하도록 명하셨다. 공이 주장하여 말하였다. “조종조(祖宗朝)¹³²에 이미 설치했다가 폐지한 것은, 진실로 본도(本道)의 민력(民力)이 두 개의 군영(貳營)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군병(軍兵)의 통솔(統屬)에 이르러서는 자연히 진영(鎭營)¹³³이 있으니, 절도사를 설치하는 것은 이익은 없고 해만 있습니다. 상께서 여전히 여러 차례 그 의논을 내리셨고, 후에 마침내 반드시 설치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과연 큰 폐단(巨弊)이라 일컫는다.

주석:
131. 절도사(節度使): 각 도의 병마(兵馬)를 지휘하던 종2품 무관직.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준말이다.
132. 조종조(祖宗朝): 역대 임금들의 시대.
133. 진영(鎭營): 각 도의 주요 거점에 설치된 지방 군영(軍營).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가 관할하는 병영(兵營), 수영(水營) 등이 있었다. 윤두수는 기존의 진영 체계로도 군 통솔이 가능하므로 별도의 절도사 설치는 불필요하며 민력만 낭비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원문:
天將史遊擊儒戰歿平壤, 軍中做出朝鮮兵一營投倭之語。 公馳見楊總兵紹勳於遼左, 辨白備悉, 誠意所感, 言下釋然。 李提督如松回軍遽爾, 公赶見於劍水站, 苦辭請東, 淚隨言發, 李爲之動色, 遂有泣閣老之稱。

번역문:
천장(天將) 사유격(史游擊) 유(儒)¹³⁴가 평양에서 전몰(戰歿)하자, 군중(軍中)에서 조선 병사 일영(一營)이 왜(倭)에 투항했다는 말이 나왔다. 공이 요동(遼左)¹³⁵에 있는 양 총병(楊總兵) 소훈(紹勳)¹³⁶을 급히 찾아가 만나 변명하고 해명(辨白)하기를 자세히 갖추니, 성의(誠意)에 감동하여 말을 마치자 의혹이 풀렸다(釋然). 이 제독(李提督) 여송(如松)¹³⁷이 갑자기 군대를 돌리자, 공이 검수참(劍水站)¹³⁸에서 뒤쫓아 만나 괴로운 말로 동쪽으로 돌아오기를 청하며(苦辭請東) 눈물이 말을 따라 나오니, 이여송이 그 때문에 얼굴빛이 변하여(動色), 마침내 ‘각로(閣老)¹³⁹를 울렸다’는 칭송이 있게 되었다.

주석:
134. 사유격(史游擊) 유(儒): 명나라 장수 사유(史儒). 유격(游擊)은 명나라의 군관직이다. 1593년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135. 요좌(遼左): 요하(遼河)의 동쪽. 요동(遼東) 지역을 가리킨다.
136. 양 총병(楊總兵) 소훈(紹勳): 명나라 장수 양소훈(楊紹勳). 총병(總兵)은 명나라의 군사 지휘관 직책이다.
137. 이 제독(李提督) 여송(如松):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 제독(提督)은 명나라의 고급 군관직이다.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패배한 뒤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철군하려 했다.
138. 검수참(劍水站): 평안도 의주 부근에 있던 역참(驛站).
139. 각로(閣老): 명나라 때 대학사(大學士) 또는 내각(內閣)의 재상을 높여 부르던 말. 여기서는 이여송을 존칭하는 의미로 쓰였거나, 윤두수 자신(당시 영의정)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문맥상 이여송을 울렸다는 의미보다는, 윤두수가 나라를 위해 눈물로 호소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우는 정승(泣閣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원문:
自京承命往見劉總兵綎於嶺南。 將行, 敎曰: “今當遠離, 無以爲懷。 國事至急, 煩卿往來, 凡事可便宜行之。” 公因引見, 從容啓言: “回鑾之後, 連有三省之鞫。 京城久陷賊中, 還集之人, 豈無自疑之心乎? 恐非所以鎭定。” 上曰: “固是。 但辭涉陵寢, 不得不爾, 當善處。” 獄竟開釋。 歲比飢饉, 畿輔尤患缺種。 公募收兩湖之粟, 運致京江, 根本大賴。 又以帝勅中擧公名, 俾同光海君前往全、慶間, 經理邊事, 卽陪世子南下, 仍加三道都體察使之命。 莅湖南時, 賊空言捲歸, 久屯瀕海, 天兵又斂不肯出, 物力剝盡, 無復可繼之勢。 公大會諸將, 以義激勸, 合左右舟師, 擊巨濟之賊, 陳箚于朝, 有曰: “勝則皇天祚宋, 不勝, 猶將有辭于祖宗。” 聞者至比之《出師表》。

번역문:
서울(京)에서 명(命)을 받들어 영남(嶺南)에 있는 유 총병(劉總兵) 정(綎)¹⁴⁰을 찾아보러 갔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임금께서 하교하셨다. “이제 마땅히 멀리 떠나게 되니, 마음에 품을 것이 없다. 국사(國事)가 지극히 급하여 경(卿)을 번거롭게 왕래하게 하니, 모든 일을 편의(便宜)¹⁴¹에 따라 행해도 좋다.” 공이 이로 인해 인견(引見)을 청하여 조용히 아뢰어 말하였다. “환궁(回鑾)¹⁴²하신 뒤에 연이어 삼성추국(三省之鞫)¹⁴³이 있었습니다. 경성(京城)이 오랫동안 적(賊)에게 함락되었었으니, 돌아와 모인 사람들 중에 어찌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민심을 진정(鎭定)시키는 방법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그렇다. 다만 말이 능침(陵寢)¹⁴⁴에 관련되니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으나, 마땅히 잘 처리하겠다.” 옥사(獄)가 마침내 해결되어 석방되었다. 해마다 기근(飢饉)이 들어 기보(畿輔)¹⁴⁵ 지역이 특히 종자 부족(缺種)을 근심하였다. 공이 양호(兩湖)¹⁴⁶의 곡식을 모아 거두어 경강(京江)¹⁴⁷으로 운반해 오니, 근본(根本)이 크게 힘입었다. 또 황제의 칙서(帝勅) 중에 공의 이름을 들어 광해군(光海君)¹⁴⁸과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全慶間)로 가서 변방의 일(邊事)을 경략하고 다스리게(經理) 하였으므로, 즉시 세자(世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이어서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¹⁴⁹의 명(命)이 더해졌다. 호남(湖南)에 임(莅)하였을 때, 적이 헛되이 돌아간다고 말하며 오랫동안 해안 가까이(瀕海)에 주둔하였고, 천병(天兵) 또한 움츠리고 나아가려 하지 않아 물력(物力)이 다하여 다시 이어갈 형세가 없었다. 공이 여러 장수들을 크게 모아 의리(義)로써 격려하고 권하며(激勸), 좌우(左右)의 수군(舟師)을 합쳐 거제(巨濟)의 적을 치고, 조정에 차자(箚)¹⁵⁰를 올려 아뢰었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이기면 황천(皇天)이 송(宋)¹⁵¹을 도우실 것이요, 이기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장차 조종(祖宗)께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듣는 자들이 《출사표(出師表)》¹⁵²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주석:
140. 유 총병(劉總兵) 정(綎):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 1558-1619).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참전했다.
141. 편의(便宜): 형편에 따라 마땅하고 편리하게 처리함. 임금이 신하에게 재량권을 부여할 때 쓰는 말이다.
142. 회란(回鑾): 임금의 수레가 돌아옴. 환궁(還宮)과 같은 말이다.
143. 삼성지국(三省之鞫): 삼성추국(三省推鞫). 의금부(義禁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관원들이 합동으로 죄인을 국문(鞫問)하는 것. 임진왜란 중 왜군에게 부역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국문으로 보인다.
144. 능침(陵寢): 임금이나 왕비의 무덤. 왜군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친 사건을 가리킨다.
145. 기보(畿輔): 수도와 그 부근 지역. 경기도 일대를 말한다.
146. 양호(兩湖): 호서(湖西, 충청도)와 호남(湖南, 전라도)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곡창 지대이다.
147. 경강(京江): 서울 부근의 한강. 조세곡 등을 운반하는 중요한 수로였다.
148.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선조의 둘째 아들. 임진왜란 중 세자(世子)로서 분조(分朝)를 이끌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무를 총괄했다.
149.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군무를 총괄하는 임시 최고 지휘관.
150. 차(箚):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종류. 차자(箚子)라고도 한다.
151. 송(宋): 중국 송(宋)나라. 여기서는 조선을 송나라에 비유하여 명나라(皇天)의 도움을 기대하는 의미와 함께, 왜적을 물리치려는 결의를 나타낸다.
152. 《출사표(出師表)》: 중국 촉(蜀)나라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로, 위(魏)나라를 정벌하러 떠나면서 충정과 결의를 밝힌 명문이다. 윤두수의 차자가 《출사표》에 비견될 만큼 비장하고 충성심이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於書若嗜欲然, 不以旣仕而廢。 晩又喜《朱子綱目》, 日手一卷, 或至夜分, 通卒業者累遍。 蓋將以措諸事業, 故其作爲隱然皆稽古之力。

번역문:
공(公)은 책(書)에 대해 즐기고 좋아하는 것(嗜欲)처럼 여겨, 이미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여 폐하지 않았다. 만년(晩)에는 또 《주자강목(朱子綱目)》¹⁵³을 좋아하여, 날마다 한 권(卷)씩 손에 들고 혹 밤중(夜分)에 이르기까지 하여, 통독하여 마친 것(通卒業)이 여러 번이었다. 대개 장차 이를 사업(事業)에 조치(措)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의 작위(作爲)¹⁵⁴에는 은연중에 모두 옛것을 상고한(稽古) 힘이 있었다.

주석:
153. 《주자강목(朱子綱目)》: 정식 명칭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재편찬한 역사서이다.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154. 작위(作爲): 행위, 행동. 정치적 행위나 정책을 의미한다.


원문:
李相恒福爲都憲時, 言事語侵公。 公後與同事首尾十年, 無一毫形於辭色。 李公退, 謂人曰: “吾爲尹公所包容久矣。”

번역문:
이 상(李相) 항복(恒福)¹⁵⁵이 도헌(都憲)¹⁵⁶으로 있을 때, 일을 논하며 말이 공을 침범(侵)하였다. 공은 후에 그와 함께 일한 지(同事) 10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首尾) 조금도(一毫) 말과 얼굴빛(辭色)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공(李公)이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윤공(尹公)에게 포용(包容)된 지 오래되었소.”

주석:
155. 이 상(李相) 항복(恒福): 이항복(李恒福, 1556-1618).
156. 도헌(都憲): 대사헌(大司憲).


원문:
公之相行在也, 其心所賢如成公渾, 則不以君臣未契而推引不力; 以爲將才如權公慄, 則起守宰致元師而果收偉績。 其他除拜, 一惟其人, 雖古情義相阻, 處之形要, 寧人負我而不悔, 無愧古人以人事君先國家之急。 列劾宰執臺史棄君忘義之罪, 而言議之間, 務主平恕, 不至已甚; 面規僚屬岐路從違之謬, 而異日救免見論以逋播; 峻折一宰因民詿誤發所不敢道之言, 而旋復掩藏, 亦不以語子弟。【幷碑。】

번역문:
공(公)이 행재소(行在)에서 재상(相)으로 있을 때, 그 마음에 현명하다고 여기는 이가 성공(成公) 혼(渾)¹⁵⁷과 같으면 임금과 신하(君臣)의 뜻이 맞지 않는다(未契) 하여 끌어주고 이끌어줌(推引)에 힘쓰지 않음이 없었고, 장수의 재목(將才)이라고 여기는 이가 권공(權公) 율(慄)¹⁵⁸과 같으면 수령(守宰)에서 일으켜 원수(元帥)¹⁵⁹에 이르게 하여 과연 위대한 공적(偉績)을 거두게 하였다. 그 외의 제수(除拜)도 한결같이 그 사람됨(其人)에 따랐으며, 비록 예전에 정의(情義)가 서로 막혔던(相阻) 이라도 중요한 자리(形要)에 두어,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후회하지 않아, 사람을 써서 임금을 섬김에 국가의 위급함을 우선시했던 옛사람(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재상(宰執)과 대관(臺史)¹⁶⁰들이 임금을 버리고 의리를 잊은(棄君忘義) 죄를 열거하여 탄핵(列劾)하였으나, 말과 의논(言議) 사이에는 힘써 공평하고 너그러움(平恕)을 주장하여 너무 심한(已甚) 데 이르지 않았고, 동료(僚屬)들이 갈림길(岐路)에서 따르고 어김(從違)을 잘못한 것을 면전에서 꾸짖었으나(面規), 다른 날 논핵(見論)을 당하여 도망가고 흩어졌을(逋播) 때 구원하여 면하게 해주었으며, 한 재상(宰)이 백성으로 인해 잘못됨(詿誤)을 꾸짖고 감히 말하지 못할 바의 말을 하였을 때 준엄하게 꾸짖었으나(峻折), 이내 다시 감싸주고 숨겨주어(掩藏) 또한 자제(子弟)들에게 말하지 않았다.【이상은 비문(碑)에서 인용】

주석:
157. 성공(成公) 혼(渾): 성혼(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우계(牛溪). 서인의 영수 중 한 명으로 이이(李珥)와 함께 서인 학맥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임진왜란 중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동인들의 반대로 취임하지 못했다.
158. 권공(權公) 율(慄): 권율(權慄, 1537-1599). 조선 중기의 문신, 명장.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끌었으며, 도원수(都元帥)를 역임했다.
159. 원수(元帥): 군대의 최고 지휘관. 도원수(都元帥)를 가리킨다.
160. 대사(臺史): 사헌부(臺)와 사관(史). 감찰 관료와 사관(史官)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원문:
公與諸宰相議事, 事有不可已而戾於上旨者, 卽他宰相輒逡巡兩可, 不正言。 公獨命掾吏筆, 惟所欲言而必盡言, 或被上震怒, 不顧也。 竊瞯視之, 則他宰相有面赤者, 而公色怡如也, 其棼不可定者, 竟賴公一言而定。【象村申欽撰陰記。】

번역문:
공(公)이 여러 재상(宰相)들과 일을 의논할 때, 일이 불가피하게 상(上)의 뜻(旨)에 어긋나는(戾) 경우가 있으면, 다른 재상들은 문득 머뭇거리며(逡巡) 이러나저러나 괜찮다고 하며(兩可) 바른말(正言)을 하지 않았다. 공만이 홀로 연리(掾吏)¹⁶¹에게 명하여 붓을 잡게 하고, 오직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다 말하여, 혹 상의 진노(震怒)를 입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몰래 엿보니(竊瞯視之), 다른 재상 중에는 얼굴이 붉어지는 자도 있었으나, 공의 안색은 태연자약(怡如)하였으니, 그 어지러워 정할 수 없던(棼不可定) 일도 마침내 공의 한마디 말에 힘입어 정해졌다.【상촌(象村) 신흠(申欽)¹⁶²이 지은 음기(陰記)¹⁶³에서 인용】

주석:
161. 연리(掾吏):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아에 속한 아전(衙前). 주로 문서 기록 등을 담당했다.
162.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상촌(象村), 현헌(玄軒). 영의정을 지냈으며, 이정구, 장유, 이식과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163. 음기(陰記): 신도비(神道碑)의 비석 뒷면(陰)에 새긴 글. 주로 비문(碑文)에서 다루지 못한 행적이나 일화 등을 기록한다.


원문:
梧陰作相之後, 頗以時事擔當, 崔、兪二公拱手而已。 一日, 梧陰聞妻喪, 不出備邊司, 諸宰聚首終日, 不得了一事。 李判書誠中曰: “今日始知政丞之不可無也。 如群雛之失其長, 論議而無所折衷焉。” 或曰: “領、右獨非政丞乎?” 誠中掉頭曰: “論議則可, 折衷非所能也。”

번역문:
오음(梧陰)¹⁶⁴이 재상(相)이 된 뒤로 자못 시사(時事)를 담당하니, 최(崔)¹⁶⁵, 유(兪)¹⁶⁶ 두 공(公)은 팔짱만 끼고 있을(拱手) 뿐이었다. 하루는 오음이 아내의 상(妻喪) 소식을 듣고 비변사(備邊司)에 나오지 않으니, 여러 재상들이 온종일 머리를 맞대고도(聚首) 한 가지 일도 처리하지 못하였다. 이 판서(李判書) 성중(誠中)¹⁶⁷이 말하였다. “오늘 비로소 정승(政丞)이 없어서는 안 됨을 알았도다. 마치 병아리 떼(群雛)가 그 어미(長)를 잃은 듯하여, 논의는 하나 절충(折衷)하는 바가 없구나.” 어떤 이가 말하였다. “영의정(領)과 우의정(右)¹⁶⁸은 홀로 정승이 아니란 말인가?” 성중이 머리를 내저으며(掉頭) 말하였다. “논의는 가능하나, 절충은 능한 바가 아니오.”

주석:
164. 오음(梧陰): 윤두수의 호.
165. 최(崔): 최흥원(崔興源, 1529-1603)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의정이었다.
166. 유(兪):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의정이었다가 파직된 상태였으나, 여전히 영향력 있는 원로였다. 또는 다른 유씨 성의 재상을 가리킬 수도 있다.
167. 이 판서(李判書) 성중(誠中): 이항복(李恒福).
168. 영(領), 우(右): 영의정(領議政)과 우의정(右議政).


원문:
梧陰與衆論, 人有所壓而不敢紛挐。 一日, 上令諸宰議事, 左右各言所見, 自以爲是, 必欲行其說。 上亦以衆說不一難之。 尹曰: “古之人獻言而已, 其所施用, 已不與焉。 不然, 何謂屈群策?” 上曰: “誠然。” 衆遂默然。

번역문:
오음(梧陰)이 여러 사람들과 논의할 때에는 사람들이 그에게 눌리는 바가 있어 감히 어지럽게 다투지(紛挐) 못하였다. 하루는 상(上)께서 여러 재상(宰)들에게 일을 의논하도록 명하시니, 좌우(左右)에서 각기 자기 소견을 말하며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반드시 자기 주장을 행하고자 하였다. 상께서도 여러 주장이 일치하지 않아 이를 어렵게 여기셨다. 윤두수가 말하였다. “옛사람은 말을 올릴(獻言) 뿐이었고, 그 시행(施用)에는 이미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여러 계책을 굽힌다(屈群策)¹⁶⁹고 하겠습니까?” 상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그렇다.” 여러 사람들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주석:
169. 굴군책(屈群策): 여러 사람의 계책을 굽힌다는 뜻. 즉, 여러 의견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신하는 의견을 제시할 뿐이고 최종 결정과 시행은 임금의 몫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원문:
梧陰不欲請兵。 旣遣晦夫之後, 國事漸急, 明甫大言於朝堂, 急請兵于天朝。 梧陰遂快從之, 反有若自初主張者然。【竝《寄齋雜記》。】

번역문:
오음(梧陰)은 군대를 청하는 것(請兵)을 원하지 않았다. 회부(晦夫)¹⁷⁰를 보낸 뒤에 국사(國事)가 점점 급해지자, 명보(明甫)¹⁷¹가 조당(朝堂)에서 큰 소리로 말하며 급히 천조(天朝)에 군대를 청하였다. 오음이 마침내 쾌히 그를 따르며, 도리어 마치 처음부터 주장했던 사람처럼 하였다.【이상은 《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인용】

주석:
170. 회부(晦夫):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자(字). 윤두수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請兵使)으로 파견되었다.
171. 명보(明甫):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자(字). 당시 영의정이었다.


원문:
岦, 下流也。 瞻仰公於廟朝之上蓋少, 而獨屢造私第, 且嘗從使遠行, 竊瞯而得之。 閑居一團春和, 言笑怡怡, 孺子可狎。 至大故談論, 聲氣疏亮, 色莊而不可犯。 平生服用隨分, 無意奢儉, 尤恥示人以布被之行。 唯遇賞心淸致處, 不過美酒一樽佐以山野之味, 如飣餖最盛則不樂, 誠一世之偉人。【碑。】

번역문:
나 입(岦)¹⁷²은 하류(下流)¹⁷³이다. 조정(廟朝) 위에서 공(公)을 우러러본(瞻仰) 것이 대개 적었으나, 유독 여러 차례 사사로운 댁(私第)을 찾아뵈었고, 또한 일찍이 사신(使)을 따라 멀리 갔을 때¹⁷⁴ 몰래 엿보아(竊瞯) 알게 되었다. 한가로이 거처하실 때는 한 덩이 봄날처럼 온화(春和)하여, 말씀하고 웃으심(言笑)이 온화하고 기뻐(怡怡) 어린아이도 가까이할 만하였다. 큰 변고(大故)에 이르러 담론(談論)하실 때는 성음과 기운(聲氣)이 트이고 밝으며(疏亮), 안색이 엄숙(莊)하여 범할 수 없었다. 평생 의복과 음식(服用)은 분수(分)를 따르고 사치와 검소(奢儉)에 뜻이 없었으며, 특히 남에게 베옷과 베이불(布被)¹⁷⁵의 행실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셨다. 오직 마음에 드는(賞心) 맑은 운치(淸致)가 있는 곳을 만나면, 좋은 술 한 동이(美酒一樽)에 산과 들의 맛(山野之味)을 곁들이는 데 지나지 않았고, 만약 음식을 매우 성대하게 차려놓으면(飣餖最盛) 즐거워하지 않으셨으니, 진실로 한 시대의 위인(偉人)이셨다.【비문(碑)에서 인용】

주석:
172. 입(岦): 최립(崔岦, 1539-1612). 이 글(비문)의 저자이다.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표현이다.
173. 하류(下流):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 변변찮은 사람.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174. 종사원행(從使遠行): 최립은 1580년(선조 13) 윤두수를 정사(正使)로 하는 성절사(聖節使) 일행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다.
175. 포피(布被): 베로 만든 이불.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남에게 일부러 검소함을 과시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의미이다.


원문:
壬辰之變, 固載籍所未有, 使他人暴起當之, 則智者失其見, 勇者喪其守, 其不顚沛錯亂者希矣。 於是而能垂紳整笏, 立於百僚之上, 儼然人仰而恃之者公也; 於是而能獻可替否, 謨於殿陛之下, 毅然君倚以爲重者公也; 於是而能宰物平施, 休休有容, 綽然於進退之間者公也; 於是而能寵不加榮, 辱不加挫, 恢然於休戚之際者公也。 方公之盛年顯宦, 公在毁譽之中, 曁公之中年貶斥, 公在坎困之會, 雖識公者, 未必識公能樹立末年事業如是之卓犖炳烺。 而惟宣祖大王拔公於衆斥之中, 擧國而委之公, 而二百年宗社之重, 一朝而復其舊焉, 足以觀君臣矣。【陰記。】

번역문:
임진년(壬辰)의 변고(變)는 진실로 역사 기록(載籍)에도 있지 않던 바로서, 만약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갑자기 일어나 이를 당하게 하였다면, 지혜로운 자는 그 견해를 잃고 용감한 자는 그 지킴을 잃어, 위태롭게 넘어지고 뒤섞여 어지럽지(顚沛錯亂) 않을 자가 드물었을 것이다. 이때에 능히 관복 띠를 드리우고 홀(笏)을 바로잡고(垂紳整笏)¹⁷⁶ 백관(百僚)의 위에 서서, 엄연(儼然)히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의지한 이가 공(公)이었으며, 이때에 능히 옳은 것을 아뢰고 그른 것을 막으며(獻可替否)¹⁷⁷ 임금 계시는 섬돌 아래(殿陛之下)에서 계책을 도모하여, 굳센 모습(毅然)으로 임금께서 의지하여 중하게 여긴 이가 공이었으며, 이때에 능히 만물(백성)을 주재하고 공평하게 베풀며(宰物平施), 너그럽고 여유 있게 포용하며(休休有容)¹⁷⁸ 진퇴(進退)의 사이에 여유로운(綽然) 이가 공이었으며, 이때에 능히 총애(寵)를 받아도 영화로움이 더해지지 않고 치욕(辱)을 당해도 좌절(挫)됨이 더해지지 않아, 기쁨과 근심(休戚)의 때에 너그러운(恢然) 이가 공이었다. 바야흐로 공의 한창 때(盛年) 높은 벼슬(顯宦)에 있을 때 공은 헐뜯음과 칭찬(毁譽) 속에 있었고, 공의 중년(中年)에 폄척(貶斥)되었을 때 공은 험난하고 곤궁한(坎困) 처지에 있었으니, 비록 공을 아는 자라도 반드시 공이 만년(末年)의 사업(事業)을 이와 같이 뛰어나고 빛나게(卓犖炳烺) 세울 수 있음을 알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오직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여러 사람의 배척 속에서 공을 발탁하여 온 나라를 공에게 맡기시니, 이백 년 종사(宗社)의 중함이 하루아침에 그 옛것을 회복하였으니, 족히 군신(君臣) 관계를 볼 수 있도다.【음기(陰記)에서 인용】

주석:
176. 수신정홀(垂紳整笏): 관복의 큰 띠(紳)를 드리우고 홀(笏, 신하가 임금을 뵐 때 손에 쥐던 판)을 바로잡음. 조정에 나아가 공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177. 헌가체부(獻可替否): 옳은 것은 아뢰고 그른 것은 폐하게 함.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諫言)하는 것을 의미한다.
178. 휴휴유용(休休有容): 마음이 너그럽고 여유가 있어 남을 잘 받아들임. 《서경(書經)》〈군아(君牙)〉편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
宣廟朝, 完平李相國元翼初入臺閣, 以簠簋不飾彈尹海原斗壽。 後因公事往謁海原, 海原無幾微見於色, 留與語曰: “貧族之行婚遭喪者皆責具於我, 爲副其須。 凡有饋遺, 不得不領留。 臺啓之發, 理所當然, 吾何介念?” 酬酢良久, 言皆由中。 適有鄕族書乞婚需, 尹公卽命侍婢曰: “曩日譯官某有所餉匹緞, 爾其取來。” 侍婢入而復還曰: “本無是物矣。” 公笑曰: “婦人輩以公在座, 欲諱之耳。” 促令取出, 全封畀之, 略不動色。 李公服其偉量, 終身敬重焉。【《公私見聞》。】

번역문:
선조(宣廟) 시대에 완평(完平) 이상국(李相國) 원익(元翼)¹⁷⁹이 처음 대각(臺閣)¹⁸⁰에 들어갔을 때, 푸궤(簠簋)¹⁸¹가 꾸며지지 않았다 하여 해원(海原) 윤두수를 탄핵하였다. 후에 공적인 일(公事)로 인해 해원을 찾아가 뵈었는데, 해원은 조금도 얼굴빛에 드러냄(見於色)이 없이 머물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말하였다. “가난한 친족(貧族) 중에 혼인(婚)을 행하거나 상(喪)을 당한 자들이 모두 나에게 요구하여 갖추게 하니, 그 필요(須)에 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무릇 보내온 예물(饋遺)이 있으면 부득이 받아 머물러 둘 수밖에 없습니다. 대계(臺啓)¹⁸²가 나온 것은 이치상 당연한 바이니, 내 어찌 마음에 두겠습니까(介念)?”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酬酢) 한참 동안 이야기하는데, 말이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왔다. 마침 시골 친족(鄕族)이 혼인 비용(婚需)을 구걸하는 편지(書)가 있었는데, 윤공(尹公)이 즉시 시비(侍婢)에게 명하여 말하였다. “지난날 역관(譯官) 아무개가 보내온 바 있는 필단(匹緞)¹⁸³을 네가 가져오너라.” 시비가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말하였다. “본래 그런 물건이 없습니다.”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부인(婦人) 무리들이 공(公)¹⁸⁴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숨기려(諱) 할 뿐이다.” 재촉하여 가져오게 하여, 온전히 봉하여(全封) 그에게 주면서(畀之) 조금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이공(李公)이 그의 위대한 도량(偉量)에 감복하여 종신토록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공사견문(公私見聞)》¹⁸⁵에서 인용】

주석:
179. 완평(完平) 이상국(李相國) 원익(元翼): 이원익(李元翼, 1547-1634). 호는 오리(梧里).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영의정(相國)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다.
180. 대각(臺閣): 사헌부(臺)와 홍문관(閣)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조정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사헌부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원익은 젊은 시절 사헌부 지평(持平) 등을 역임했다.
181. 푸궤(簠簋): 제사 때 곡식을 담는 네모난 그릇(簠)과 둥근 그릇(簋). 제기(祭器)를 통칭하는 말이다. 공적인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또는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문맥상 윤두수가 뇌물로 받은 물건이 많아 집안이 화려하다는 식의 탄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82. 대계(臺啓): 사헌부(臺)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啓).
183. 필단(匹緞): 필(疋) 단위로 파는 비단(緞). 옷감으로 쓰이는 비단이다.
184. 공(公): 여기서는 손님인 이원익을 가리킨다.
185. 《공사견문(公私見聞)》: 저자 미상의 필기잡록집. 조선 시대 인물들의 일화 등을 담고 있다.

윤근수(尹根壽)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尹根壽【文貞公。】
字子固, 號月汀。 斗壽弟也。 嘉靖丁酉生。 明宗十三年戊午登第。 歷吏郞、舍人、應敎, 賜暇湖堂。 壬申, 陞拜承旨, 歷大成、副學。 宣廟庚寅, 拜禮判, 策光國勳, 封海平君。 典文衡。 官至左贊成。 丙辰卒, 年八十。

번역문:
윤근수(尹根壽)【문정공(文貞公)¹이다.】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이다. 윤두수(尹斗壽)의 아우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 32)에 태어났다.² 명종(明宗) 13년 무오년(1558)에 과거에 급제하였다.³ 이조 정랑(吏曹正郎)⁴, 사인(舍人)⁵, 응교(應敎)⁶를 역임하였고, 호당(湖堂)⁷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 5)⁸에 승지(承旨)⁹에 승진 제수되었고, 대사성(大司成)¹⁰, 부제학(副提學)¹¹을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경인년(1590, 선조 23)¹²에 예조 판서(禮曹判書)¹³에 제수되었고, 광국공신(光國功臣)¹⁴에 책록되어 해평군(海平君)¹⁵에 봉해졌다. 문형(文衡)¹⁶을 관장하였다. 관직은 좌찬성(左贊成)¹⁷에 이르렀다. 병진년(1616, 광해군 8)¹⁸에 졸(卒)하니, 향년 80세였다.

주석:

  1. 문정공(文貞公): 윤근수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정(貞)은 청렴하고 곧음(淸白守節) 등을 의미한다.
  2.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1537년. 가정은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조선 중종(中宗) 32년에 해당한다.
  3. 명종(明宗) 13년 무오년(戊午年): 1558년. 이 해에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4. 이조 정랑(吏曹正郎):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이다. 원문의 ‘이량(吏郞)’은 보통 정랑을 가리킨다.
  5. 사인(舍人): 여러 관서에 속했던 관직. 여기서는 문맥상 승문원(承文院)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사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 문서 작성이나 임금의 명령 작성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6.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4품 관직. 경연(經筵)에서 강독하거나 임금의 명령을 짓는 일을 담당했다.
  7. 호당(湖堂): 조선 시대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또는 그 장소(독서당).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도 한다.
  8.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宣祖) 5년.
  9.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왕의 핵심 측근이었다.
  10.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국립대학의 총장 격이다.
  11.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책으로 학문 연구와 경연 등을 담당했다.
  12.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
  13. 예조 판서(禮曹判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예악(禮樂), 제사(祭祀), 외교, 교육, 과거 등을 관장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14. 광국공신(光國功臣):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윤근수는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5. 해평군(海平君): 공신 책봉과 함께 받은 군호(君號). 봉군(封君)은 종친이나 공신에게 주어지는 작위이다.
  16. 문형(文衡): 문운(文運)을 저울질한다는 뜻으로,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달리 이르던 말.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상징하는 자리였다.
  17. 좌찬성(左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영의정, 좌·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벼슬이다.
  18.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光海君) 8년.

원문:
公聰明穎悟, 鍾於天賦。 甫十歲, 已通《孝經》、《小學》、《四子》等書, 能曉歷代事迹。 議政公【名忭。】在三陟時, 嘗閱《類聚》文字, 公皆暗記, 擧問一二, 應對如響。 先公奇愛之, 語夫人曰: “此兒必大成。 吾雖未及見, 夫人當享其養。” 未久卒于官, 公隨母夫人還京終喪。 業日進, 聲名出前輩。

번역문:
공은 총명하고 영오(穎悟)함¹⁹은 천부적으로 타고났다. 겨우 10세에 이미 《효경(孝經)》, 《소학(小學)》, 사서(四書)²⁰ 등의 책에 통달하였고, 역대 사적(事迹)을 능히 알았다. 의정공(議政公)²¹【이름은 변(忭)이다】이 삼척(三陟)에 있을 때 일찍이 《유취(類聚)》²²의 문자를 열람하였는데, 공이 모두 암기하여 한두 가지를 들어 질문하자 메아리처럼 응대하였다. 선공(先公)²³께서 기특하게 여겨 부인(夫人)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이다. 내가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부인께서는 마땅히 그 봉양(奉養)을 누리실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에서 졸(卒)하시니,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상(喪)을 마쳤다. 학업이 날로 진보하여 명성이 선배들을 능가하였다.

주석:
19. 영오(穎悟): 지혜와 재능이 뛰어남. 명석함.
20. 사자(四子): 사서(四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가리킨다. 유학의 기본 경전이다.
21. 의정공(議政公): 윤근수의 아버지 윤변(尹忭, 1493-1549)을 가리킨다. 윤변은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22. 《유취(類聚)》: 사물이나 문장을 종류별로 모아 엮은 책.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예문유취(藝文類聚)》 등 중국의 유서(類書)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23. 선공(先公): 돌아가신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윤변(尹忭)을 가리킨다.


원문:
時士論携貳, 喜事者搆公兄弟, 謀陷機辟。 金繼輝爲大諫, 言“公兄弟才學竝著, 士類進退非輕, 不可以闇昧累人”, 士論是之。

번역문:
당시 사론(士論)이 나뉘어 대립하였는데²⁴,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자들이 공의 형제를 얽어 음해하고 죄에 빠뜨리려 하였다. 김계휘(金繼輝)²⁵가 대간(大諫)²⁶이 되어 “공의 형제는 재주와 학문이 함께 뛰어나 사류(士類)의 진퇴(進退)가 가볍지 않으니, 어둡고 모호하게 남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자, 사론이 이를 옳게 여겼다.

주석:
24. 사론휴이(士論携貳): 선비들의 여론이 나뉘어 서로 대립함. 당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당(分黨) 및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윤근수 형제는 서인(西人)의 주요 인물이었다.
25. 김계휘(金繼輝, 1526-1582): 조선 중기의 문신. 서인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26. 대간(大諫):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정3품).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김계휘는 윤근수 형제를 변호하여 동인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원문:
授開城留守。 開城俗逐什一爲業, 文風漸替, 公至則一新之。 多士爲公設斯文宴以相慶, 彬彬有絃誦之風。 梧陰同被斥, 知延安府, 吉日良辰, 侍母夫人來往, 軒蓋聯翩, 當世傳以爲盛事。

번역문:
개성 유수(開城留守)²⁷에 제수되었다. 개성(開城)의 풍속이 이익(什一)²⁸을 좇는 것을 일삼아 문풍(文風)이 점차 쇠퇴하였는데, 공이 부임하자 이를 일신(一新)하였다. 많은 선비들이 공을 위해 사문연(斯文宴)²⁹을 열어 서로 축하하며, 빛나게 학문하는(彬彬) 현송(絃誦)³⁰의 풍조가 있었다. 오음(梧陰)³¹도 함께 배척당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좋은 날 좋은 때에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내왕하니 수레(軒蓋)³²가 줄을 이어, 당세에 성대한 일로 전해졌다.

주석:
27. 개성 유수(開城留守):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開城府)를 다스리던 종2품 외관직.
28. 십일(什一): 본래는 10분의 1세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상업적 이익이나 이윤 추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개성이 상업 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29. 사문연(斯文宴): 선비들의 잔치. 유학(儒學)과 관련된 모임을 의미한다.
30.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음. 학문과 풍류를 함께 즐기는 모습을 나타낸다. 문풍이 진작되었음을 보여준다.
31.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의 호. 윤근수의 형이다.
32. 헌개(軒蓋): 높은 사람이 타는 수레의 총칭. 여기서는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높은 지위와 위세를 보여준다.


원문:
以申奏兼進賀使朝京, 敷奏明允。 禮部尙書于愼行見其文, 大異之曰: “藩邦有人矣。” 皇上特命宣示內閣秘史所載本國世系正本, 竝頒《會典》全編, 宣勅于皇極門內, 翰林學士將禮。 還朝, 上嘉悅, 告成于宗廟, 進公資憲、刑曹判書。

번역문:
신주사(申奏使) 겸 진하사(進賀使)³³로 명나라 조정에 가서 아뢰었는데, 보고(敷奏)가 명확하고 타당하였다. 예부 상서(禮部尙書) 우신행(于愼行)³⁴이 그 글을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번방(藩邦)³⁵에 인물이 있구나!” 하였다. 황제가 특별히 명하여 내각(內閣)의 비사(秘史)³⁶에 실린 본국(本國) 세계(世系)의 정본(正本)³⁷을 선시(宣示)하고, 아울러 《회전(會典)》³⁸ 전편(全編)을 반포하였으며, 황극문(皇極門) 안에서 칙서(勅書)를 선포할 때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예를 집행하게 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상(上)께서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시어 종묘(宗廟)에 성공을 고하고, 공을 자헌대부(資憲大夫)³⁹, 형조 판서(刑曹判書)⁴⁰로 승진시켰다.

주석:
33. 신주사(申奏使) 겸 진하사(進賀使): 신주사는 특정 사안을 보고하기 위해 파견되는 사신, 진하사는 황제의 즉위나 탄신 등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사신이다. 윤근수는 1575년(선조 8)에 이 두 임무를 겸하여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34. 우신행(于愼行, 1539-1607):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의 문신. 예부 상서 등을 역임했다.
35. 번방(藩邦): 제후국. 명나라가 조선을 부르던 칭호이다.
36. 비사(秘史): 비밀스러운 역사 기록 또는 궁중 기록 보관소. 여기서는 명나라 황실 기록을 의미할 수 있다.
37. 본국 세계 정본(本國世系正本): 조선 왕실의 계보에 대한 올바른 기록. 이는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된 명나라의 기록(종계변무, 宗系辨誣)을 바로잡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윤근수의 사행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38. 《회전(會典)》: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리킨다. 이를 하사받은 것은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신뢰와 인정을 상징한다.
39.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정2품 상계(上階) 문관의 품계명.
40. 형조 판서(刑曹判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법률, 소송, 형벌, 노비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원문:
半歲之間, 三赴廣寧, 六赴遼東, 開陳請援, 無不動聽。 宋經略之來, 公膺接伴之命。 經略雅重公, 其還也, 亦同公入遼。 上將還故都, 公以接伴故, 未得從駕。 上解所佩寶刀及雕玉賜之, 曰: “此予平日手中物, 卿可佩之, 時以念予。”

번역문:
반년 사이에 세 번 광녕(廣寧)⁴¹에 가고 여섯 번 요동(遼東)⁴²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정을 설명하니(開陳), 들어주지 않음이 없었다. 송경략(宋經略)⁴³이 왔을 때 공이 접반사(接伴使)⁴⁴의 명을 받았다. 경략이 평소 공을 중히 여겨, 돌아갈 때에도 또한 공과 함께 요동으로 들어갔다. 상(上)께서 장차 옛 도읍으로 돌아가려 하셨으나, 공은 접반(接伴) 때문에 어가(御駕)를 따르지 못하였다. 상께서 차고 있던 보도(寶刀)와 조각한 옥(玉)을 풀어 하사하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가 평소 손에 지니던 물건이니, 경은 이것을 차고 때때로 나를 생각하라.” 하였다.

주석:
41. 광녕(廣寧): 명나라 요동(遼東) 지역에 있던 군사적 요충지.
42. 요동(遼東): 현재의 랴오닝성 일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명나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요동 지역의 명나라 관리 및 장수들과 긴밀히 교섭하였다. 윤근수는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3. 송경략(宋經略): 송응창(宋應昌, 1536-1606).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총지휘관(경략, 經略)이었다.
44. 접반사(接伴使): 외국 사신이나 장수를 맞이하여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 관직. 윤근수는 명나라 지원군을 맞이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원문:
丁酉, 倭再搶近畿, 公陪中殿在遂安, 聞大駕將南幸, 陳箚願執羈靮, 仍赴朝, 兼判議禁府事。 庚子, 知經筵, 同校《周易》。 辛丑, 梧陰公卒。 公時近七十而持服哭泣不懈。

번역문:
정유년(1597, 선조 30)⁴⁵에 왜적이 다시 경기(近畿)를 노략질하자, 공은 중전(中殿)⁴⁶을 모시고 수안(遂安)⁴⁷에 있다가 대가(大駕)⁴⁸가 장차 남쪽으로 행차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차자(箚子)⁴⁹를 올려 고삐(羈靮)⁵⁰를 잡기를 원하고, 이어서 조정에 나아가 의금부 판사(議禁府判事)⁵¹를 겸하였다. 경자년(1600, 선조 33)⁵²에 지경연사(知經筵事)⁵³가 되어 함께 《주역(周易)》을 교정(校正)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 34)⁵⁴에 오음공(梧陰公)⁵⁵이 졸(卒)하였다. 공은 당시 70세에 가까웠으나 상복을 입고 곡읍(哭泣)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석:
45. 정유년(丁酉年):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한 해이다.
46. 중전(中殿): 왕비(王妃)를 가리킨다. 당시 왕비는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이다.
47. 수안(遂安): 황해도 수안군. 당시 피난지 중 한 곳이었다.
48. 대가(大駕): 임금의 행차. 어가(御駕)와 같은 말이다.
49.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형식. 상소(上疏)보다 격식이 간략하다.
50. 기적(羈靮): 말의 고삐와 굴레. 임금을 모시고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51. 의금부 판사(議禁府判事): 의금부(議禁府)의 으뜸 벼슬. 종1품. 주로 왕명에 의한 중죄인을 다루는 사법기관의 장이다.
52.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
53. 지경연사(知經筵事): 경연(經筵)의 실무를 주관하는 직책. 종1품 이상이 겸임했다.
54.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55. 오음공(梧陰公): 윤두수(尹斗壽).


원문:
戊申, 宣廟昇遐, 廟號稱祖。 公引經陳之, 且言奴酋必動之形, 自請往見吳游擊宗道, 以得其情。 因言西北邊備甚悉, 其言後竟驗。 自以年侵, 擬未亡展省先王陵寢, 移書選部, 請爲康、穆兩陵獻官。 內批以公爲先朝一品宰臣, 年滿八十, 賜米豆、酒肉, 歲以爲常。 繼有賜几杖之議, 公固辭于宗伯止之。

번역문: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⁵⁶ 선조께서 승하(昇遐)하시자 묘호(廟號)를 조(祖)로 칭하였다⁵⁷. 공이 경서(經書)를 인용하여 그 부당함을 아뢰고, 또 노추(奴酋)⁵⁸가 반드시 움직일 형세임을 말하며, 스스로 청하여 가서 오유격(吳游擊) 종도(宗道)⁵⁹를 만나 그 실정을 알아내고자 하였다. 이어서 서북 변경의 방비에 대해 매우 상세히 말하였는데, 그 말이 훗날 마침내 증험되었다. 스스로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미망인(부인)과 함께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찾아뵙고자(展省)하여, 선부(選部)⁶⁰에 글을 보내 강릉(康陵)⁶¹과 목릉(穆陵)⁶² 양릉(兩陵)의 헌관(獻官)⁶³이 되기를 청하였다. 내비(內批)⁶⁴로 공이 선조(先朝)의 1품 재신(宰臣)이고 나이 80이 되었으므로 쌀, 콩, 술, 고기를 하사하고 해마다 이를 상례(常例)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궤장(几杖)⁶⁵을 하사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공이 종백(宗伯)⁶⁶에게 굳이 사양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주석:
56.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光海君) 즉위년.
57. 묘호칭조(廟號稱祖): 선조의 묘호를 ‘선종(宣宗)’이 아닌 ‘선조(宣祖)’로 정한 것을 말한다. 왕조의 정통 계승자가 아닌 방계 출신 임금에게 주로 ‘조(祖)’를 붙이는 전례에 비추어, 재조(再造)의 공이 있다는 명분으로 조(祖)를 칭한 것에 대해 당시 논란이 있었다. 윤근수는 이를 비판한 것이다.
58. 노추(奴酋): 여진족(女眞族)의 추장. 당시 세력을 키우던 누르하치(努爾哈赤)를 가리키는 말로,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윤근수는 후금(後金)의 위협을 예견하고 대비해야 함을 주장했다.
59. 오유격(吳游擊) 종도(宗道): 명나라의 무관. 유격(游擊)은 군사 직책명이다. 윤근수는 명나라와의 협력을 통해 후금의 동태를 파악하고자 했다.
60. 선부(選部): 이조(吏曹)의 별칭.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이다.
61. 강릉(康陵): 조선 제13대 왕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의 능.
62. 목릉(穆陵):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와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
63. 헌관(獻官): 제례(祭禮) 때 술잔을 올리는 임무를 맡은 제관(祭官).
64. 내비(內批): 임금이 신하의 글에 대해 직접 의견이나 결재를 표시하는 것.
65. 궤장(几杖): 궤(几, 안석)와 장(杖, 지팡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원로대신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물건으로, 큰 영예로 여겨졌다.
66. 종백(宗伯):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별칭. 주(周)나라 관제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문:
公少好學, 從事性理之書, 訪退溪、南冥, 論朱、陸同異, 得其印證。 退溪稱曰: “子固聰穎絶異, 他日造詣必遠。” 從栗谷、牛溪遊, 爲莫逆交, 皆稱公文雅, 世罕其比云。

번역문:
공은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性理學) 서적에 종사하였고, 퇴계(退溪)⁶⁷와 남명(南冥)⁶⁸을 방문하여 주자(朱子)와 육상산(陸象山)⁶⁹의 같고 다름(同異)⁷⁰을 논하여 그 인증(印證)⁷¹을 받았다. 퇴계가 칭찬하기를, “자고(子固)는 총명하고 뛰어남이 남달라, 훗날 학문적 조예(造詣)가 반드시 깊을 것이다.” 하였다. 율곡(栗谷)⁷², 우계(牛溪)⁷³와 교유(交遊)하여 막역(莫逆)한 벗이 되었는데, 모두 공의 문아(文雅)함⁷⁴이 세상에 그 짝을 찾기 드물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주석:
67.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호.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다.
68.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호. 실천을 중시한 성리학자이다.
69. 육상산(陸象山): 육구연(陸九淵, 1139-1193). 중국 남송(南宋) 시대의 유학자. 심학(心學)을 주장하여 주희(朱熹)와 논쟁하였다.
70. 주륙동이(朱陸同異): 주희(朱熹)의 이학(理學)과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의 같고 다른 점에 대한 논쟁. 성리학의 중요한 철학적 쟁점 중 하나이다.
71. 인증(印證):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 인정하고 증명함. 퇴계와 남명에게 학문적 정통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72.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호.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73.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호. 이이와 절친했던 성리학자이다. 윤근수는 이이, 성혼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맺었다.
74. 문아(文雅): 문채(文彩)가 있고 아담(雅淡)함. 학문과 덕행이 우아하고 품위 있음을 의미한다.


원문:
好善愛士, 寵引儒學, 布衣、寒素屨滿于戶外。 功冠一代, 位班三事, 歷事三朝五十九年。 自公卿以及郞署, 多門生故吏, 所至莫不俯伏擎跽執子弟禮, 公益謙卑無矜容。 宣祖常答公箚曰: “卿學高勳高, 予愛其博雅。”【竝申象村欽撰碑。】

번역문: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아꼈으며 유학(儒學)을 높이고 이끌어, 포의(布衣)⁷⁵와 한미한 선비(寒素)⁷⁶의 신발이 문밖에 가득하였다. 공(功)은 한 시대의 으뜸이었고 지위는 삼공(三事)⁷⁷의 반열이었으며, 삼조(三朝)⁷⁸를 59년간 섬겼다. 공경(公卿)⁷⁹에서부터 낭서(郎署)⁸⁰에 이르기까지 문생(門生)과 고리(故吏)⁸¹가 많아, 이르는 곳마다 몸을 굽혀 예를 갖추고(俯伏擎跽) 자제(子弟)의 예⁸²를 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공은 더욱 겸손하고 낮추어 교만한 기색이 없었다. 선조께서 일찍이 공의 차자(箚子)에 답하시기를, “경(卿)은 학문이 높고 공훈이 높으며, 나는 그 박학하고 아담함(博雅)⁸³을 아낀다.” 하였다.【이상은 상촌(象村) 신흠(申欽)⁸⁴이 지은 비문(碑文)에서 인용】

주석:
75. 포의(布衣): 베옷. 벼슬 없는 선비 또는 일반 백성을 가리킨다.
76. 한소(寒素):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선비.
77. 삼사(三事):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키는 말로, 최고위 관직을 의미한다. 윤근수는 좌찬성까지 올랐으므로 삼공의 반열에 준하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78. 삼조(三朝): 명종, 선조, 광해군 세 임금의 시대를 의미한다.
79. 공경(公卿):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고위 관료층을 통칭한다.
80. 낭서(郎署): 정랑(正郎), 좌랑(佐郎) 등 ‘낭(郎)’ 자가 붙는 관직 또는 그 관청. 주로 육조(六曹)의 실무 관료들을 가리킨다.
81. 문생고리(門生故吏): 학문적 제자(門生)와 예전에 부하였던 관리(故吏). 그의 영향력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82. 자제지례(子弟之禮): 아랫사람이나 제자로서 행하는 예의.
83. 박아(博雅): 학식이 넓고 품행이 아담함.
84. 신흠(申欽, 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상촌(象村), 현헌(玄軒) 등.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이정구, 장유, 이식과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힌다.


원문:
常曰: “人能孝悌忠信, 雖不談義理通天人, 不害爲善人也。 爲學將以行之, 學而不知事親敬長則非學也。” 平生未嘗以惡言詈人, 亦不調戲玩狎。 人有摘抉人隱微者, 必痛責而禁戒之, 若見人肆爲非義者, 深惡之, 少不假借。 淸白自守, 食無重肉, 坐客無氈, 衣服無奢靡之飾。 喪亂之後, 未有家舍, 文靖公捐貲買與之。 公不益治, 所居寢室, 不施屛帷床第, 敗簷短椽, 不庇風雨, 怡然處之。 門庭之內, 未嘗見聲伎、玩好、博奕之具。

번역문:
항상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효(孝)·제(悌)·충(忠)·신(信)⁸⁵을 능히 행하면, 비록 의리(義理)를 담론하고 천인(天人)의 이치에 통하지 못하더라도 선인(善人)이 되는 데 해롭지 않다. 학문을 하는 것은 장차 이를 행하고자 함이니, 배우고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면 이는 학문이 아니다.” 하였다. 평생 일찍이 나쁜 말로 남을 꾸짖지 않았고, 또한 희롱하거나 버릇없이 굴지 않았다. 남의 은밀한 잘못을 들추어내는(摘抉) 자가 있으면 반드시 통렬히 꾸짖고 금지시켰으며, 만약 의롭지 못한 짓을 거리낌 없이(肆) 하는 자를 보면 심히 미워하여 조금도 용납하지(假借) 않았다. 청렴결백하게 스스로를 지켜 음식에는 고기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않았고(食無重肉)⁸⁶, 손님이 앉는 자리에는 모직 담요(氈)⁸⁷가 없었으며, 의복에는 사치스러운 장식이 없었다. 상란(喪亂)⁸⁸ 이후에 집이 없었는데, 문정공(文靖公)⁸⁹이 재물을 내어 사서 주었다. 공은 더 꾸미지 않아, 거처하는 침실에는 병풍, 휘장, 평상(屛帷床笫)⁹⁰도 없었고, 허물어진 처마와 짧은 서까래(敗簷短椽)는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였으나, 편안하게(怡然) 지냈다. 집안(門庭)에는 일찍이 음악과 기예(聲伎), 완호(玩好)⁹¹, 노름(博奕)⁹² 도구를 볼 수 없었다.

주석:
85. 효제충신(孝悌忠信): 효도, 우애, 충성, 신의. 유교의 기본적인 윤리 덕목이다.
86. 식무중육(食無重肉): 밥상에 고기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않음. 검소한 생활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87. 전(氈): 짐승의 털로 두껍게 누벼 만든 모직 자리나 담요. 당시에는 귀한 물품에 속했다.
88. 상란(喪亂):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남. 여기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가리킨다.
89.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의 시호. 형인 윤두수가 동생 윤근수를 도왔음을 보여준다.
90. 병유상자(屛帷床笫): 병풍, 휘장, 침상(평상). 기본적인 침실 가구를 의미한다. 이것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할 정도로 검소했음을 나타낸다.
91. 완호(玩好): 좋아하여 가지고 노는 물건. 장난감이나 사치스러운 기호품 등을 의미한다.
92. 박혁(博奕): 박(博)은 쌍륙(雙六)과 같은 보드게임, 혁(奕)은 바둑(圍棋). 도박이나 오락거리를 멀리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平生嗜書, 蓄古今圖籍, 左右列置, 終日手卷不釋, 至老而猶篤。 遇疑難處, 輒自手抄, 客至號習於文者, 雖卑幼, 一一叩問。 爲文以西京爲主, 酷好太史公。 詩法盛唐, 晩又好觀皇明諸大家, 聚精會神, 深得其髓。 皇朝勅使熊化序公集, 有曰“沈鬱澹雅, 有古作者風”云。 書法瘦勁古奇, 宣廟嘗論群臣善書者, 稱公爲首。

번역문:
평생 책을 좋아하여 고금의 도서(圖籍)를 쌓아두고 좌우에 늘어놓아, 종일 손에서 책(卷)을 놓지 않았으며 늙어서도 여전히 독실하였다. 의심나고 어려운 부분을 만나면 번번이 직접 손으로 베꼈고, 손님 중에 문장에 익숙하다고 일컬어지는 이가 오면 비록 아랫사람이나 어린이라도 일일이 물었다. 문장(文)을 지을 때는 서경(西京)⁹³을 위주로 하였고, 태사공(太史公)⁹⁴을 매우 좋아하였다. 시(詩)는 성당(盛唐)⁹⁵을 법으로 삼았고, 만년에는 또 명(明)나라 여러 대가(大家)들의 작품 보기를 좋아하여 정신을 집중하여 깊이 그 정수(髓)를 터득하였다. 황조(皇朝)⁹⁶ 칙사(勅使) 웅화(熊化)⁹⁷가 공의 문집에 서문을 쓰며, “침울(沈鬱)하고 담아(澹雅)하여 옛 작가(古作者)의 풍격이 있다”고 하였다 한다. 서법(書法)은 수경(瘦勁)⁹⁸하고 고기(古奇)⁹⁹하였는데, 선조께서 일찍이 여러 신하 중 글씨를 잘 쓰는 이를 논하며 공을 으뜸으로 칭찬하셨다.

주석:
93. 서경(西京): 서한(西漢) 시대의 수도는 장안(長安)으로 서경이라 불렸다. 여기서는 서한 시대의 문장, 특히 사마천(司馬遷)이나 가의(賈誼) 등의 산문(散文)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94.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 문학가. 《사기(史記)》의 저자이다. 그의 문장은 고문(古文)의 모범으로 꼽힌다.
95. 성당(盛唐): 당(唐)나라 시(詩)의 황금기(대략 713-766).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등 대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이다.
96. 황조(皇朝): 황제의 조정. 여기서는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97. 웅화(熊化): 명나라의 문신.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인물로 추정된다.
98. 수경(瘦勁): 글씨체가 가늘면서도 힘참.
99. 고기(古奇): 예스럽고 기이함. 독특한 품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원문:
國家最重迎詔禮, 詔使來, 必推公居前, 或往境上講定禮儀, 或在上前導達詞命, 蓋以公嫺於禮, 曉漢音也。 許翰林國雅有藻鑑, 見公謂曰: “眞佳士也。” 屢入中國, 中國人士多願識者, 聞公來, 有候於中路, 接歡乃去。 後公諸姪朝京, 爭問公起居。

번역문:
국가에서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예(迎詔禮)를 가장 중시하여 조서 사신(詔使)이 오면 반드시 공을 앞세웠는데, 혹은 국경에 가서 예의(禮儀)를 강정(講定)하거나 혹은 상(上) 앞에서 사명(詞命)¹⁰⁰을 전달(導達)하게 하였으니, 이는 공이 예(禮)에 익숙하고 한음(漢音)¹⁰¹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림(翰林) 허국(許國)¹⁰²은 아담하고(雅) 조감(藻鑑)¹⁰³이 있었는데, 공을 보고 이르기를, “참으로 아름다운 선비이다.” 하였다. 여러 차례 중국에 들어가니, 중국 인사(人士) 중에 알기를 원하는 이가 많아,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중도(中路)에서 기다리다가 반갑게 접하고서야 돌아가는 이도 있었다. 훗날 공의 여러 조카들이 명나라 조정에 갔을 때, 다투어 공의 안부(起居)를 물었다.

주석:
100. 사명(詞命): 임금의 명령이나 외교 문서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중국 사신과의 대화나 외교적 언사를 뜻할 수 있다.
101. 한음(漢音): 중국어 발음. 당시 명나라의 표준 중국어를 의미한다. 외교 활동에 능통했음을 보여준다.
102. 허국(許國, 1527-1596):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의 문신. 대학사(大學士) 등을 역임했다. 이름 뒤의 ‘국(國)’ 자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으며, 《명사(明史)》 등에는 ‘허국(許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문을 존중하여 표기한다.
103. 조감(藻鑑): 문장이나 인물을 감식하는 능력. 뛰어난 안목을 의미한다.


원문:
公參耆英社一再, 後不肯往。 或問其故, 公曰: “余實眇福, 何敢每當殷禮?” 不喜紛華, 安於恭儉, 皆此類。【竝金淸陰撰諡狀。】

번역문:
공이 기영사(耆英社)¹⁰⁴에 한두 번 참여하고는 뒤에는 가려 하지 않았다. 혹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복(福)이 적으니(眇福), 어찌 감히 매번 성대한 예우(殷禮)¹⁰⁵를 받겠는가?” 하였다. 화려함(紛華)을 좋아하지 않고 공손하고 검소함(恭儉)에 편안히 여기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이상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¹⁰⁶이 지은 시장(諡狀)¹⁰⁷에서 인용】

주석:
104. 기영사(耆英社): 나이 많은(耆) 뛰어난(英) 인물들의 모임. 조선 시대에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원로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 기관이었다.
105. 은례(殷禮): 성대한 예우. 극진한 대접.
106.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청음(淸陰). 척화파(斥和派)의 대표적 인물로 병자호란 때 항복을 반대했다.
107. 시장(諡狀):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글. 대상의 가계, 생애, 공적, 성품 등을 상세히 기록한다.


원문:
金淸陰祭公文曰: “先生之文學, 少而專, 壯而勵, 老而不怠。 酷好太史公及班氏, 赤幟藝苑, 竟集大勳, 手握機衡, 示正後學。 我盛朝二百年起衰之責, 先生實自任焉。 皇明勅使極峰熊公, 文雅正士, 見先生文稿亟稱之, 曰修古前茅, 宜乎競爽者之彬彬也; 曰典則溫雅, 一洗激詭叫咷之習; 曰文核事該, 有古良史氏之風; 曰詩澹雅沈鬱, 得作者之體; 曰與北地、瑯琊、濟南、新安諸名家竝列。 識者謂非誣, 是豈盡私於先生歟? 先生筆法, 深得虞秘書骨力, 世爭慕之, 莫有能彷彿者。 人得先生尺牘, 如得拱璧。” 又挽詞曰: “筆得鍾、王三昧法, 文追班、馬兩京風。”

번역문:
청음 김상헌이 공에게 보낸 제문(祭文)¹⁰⁸에 이르기를, “선생의 문학은 어려서 전일(專一)하였고, 장성하여 힘썼으며,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태사공(太史公)과 반씨(班氏)¹⁰⁹를 매우 좋아하여 예원(藝苑)¹¹⁰에 붉은 기¹¹¹를 세우고 마침내 큰 공훈을 모았으며, 손수 문형(機衡)¹¹²을 잡아 후학(後學)에게 바른 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 성조(盛朝) 200년의 쇠퇴한 문풍을 일으킬 책임을 선생께서 실로 자임하셨습니다. 황명(皇明) 칙사 극봉(極峰) 웅공(熊公)¹¹³은 문아(文雅)한 정사(正士)인데, 선생의 문고(文稿)를 보고 극구 칭찬하기를, ‘옛것을 닦는 데 앞장서시니(修古前茅)¹¹⁴, 마땅히 재능을 다투는 자들이 빛날(彬彬) 것입니다’, ‘법도 있고(典則) 온화하고 아담하여(溫雅), 과격하고 기괴하며 부르짖는(激詭叫咷)¹¹⁵ 습성을 일소하였습니다’, ‘글이 정밀하고(文核) 사실을 갖추어(事該), 옛 양사씨(良史氏)¹¹⁶의 풍격이 있습니다’, ‘시는 담아(澹雅)하고 침울(沈鬱)하여 작자(作者)의 체(體)¹¹⁷를 얻었습니다’, ‘북지(北地)¹¹⁸, 낭야(瑯琊)¹¹⁹, 제남(濟南)¹²⁰, 신안(新安)¹²¹의 여러 명가(名家)들과 나란히 설 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식견 있는 이들이 그 말이 그르지 않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모두 선생께 사사로이 한 말이겠습니까? 선생의 필법(筆法)은 우비서(虞秘書)¹²²의 골력(骨力)¹²³을 깊이 얻었으므로 세상에서 다투어 이를 사모하였으나 능히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선생의 편지(尺牘)¹²⁴를 얻으면 마치 큰 옥(拱璧)¹²⁵을 얻은 듯이 여겼습니다.” 하였다. 또 만사(挽詞)¹²⁶에 이르기를, “붓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¹²⁷의 삼매법(三昧法)¹²⁸을 얻었고, 글은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 양경(兩京)¹²⁹의 풍격을 따랐네.” 하였다.

주석:
108. 제문(祭文): 죽은 사람을 추모하며 제사 때 읽는 글.
109. 반씨(班氏): 중국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班固, 32-92)를 가리킨다. 《한서(漢書)》의 저자이다.
110. 예원(藝苑): 문학·예술계. 문단(文壇)과 비슷한 의미이다.
111. 적치(赤幟): 붉은 깃발. 군대에서 선두를 나타내거나 경계 표시로 사용했다. 여기서는 문학계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비유한다.
112. 기형(機衡): 저울대와 저울추. 문형(文衡)과 같은 의미로 쓰여, 문단의 기준을 세우고 평가하는 권위를 상징한다.
113. 극봉(極峰) 웅공(熊公):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극봉은 그의 호일 수 있다.
114. 수고전모(修古前茅): 옛것을 닦는 데 앞장섬. 고문(古文) 부흥에 기여했음을 의미한다. 전모(前茅)는 행군 시 앞에 들고 가던 띠 풀을 가리키며, 선구자를 비유한다.
115. 격궤규호(激詭叫咷): 과격하고 기괴하며 소리 지르며 우는 듯한 문장. 당시 유행하던 과장되고 공허한 문풍을 비판하는 말이다.
116. 양사씨(良史氏): 훌륭한 역사가. 사마천이나 반고 등을 가리킨다.
117. 작자지체(作者之體): 뛰어난 작가(시인)의 격식과 품격.
118. 북지(北地): 중국 송(宋)나라의 문학가 이반(李攀龍, 1514-1570) 또는 명(明)나라의 문학가 왕세정(王世貞, 1526-1590)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이들은 복고주의 문학을 이끌었다. (정확한 인물 특정이 어려움)
119. 낭야(瑯琊): 명나라의 문학가 왕세정(王世貞)의 별칭.
120. 제남(濟南): 명나라의 문학가 이반(李攀龍)이 제남(濟南) 출신이므로 그를 가리킬 수 있다.
121. 신안(新安): 명나라 휘주(徽州) 신안현(新安縣) 출신의 문인들을 가리킬 수 있다. (예: 왕도(汪道), 정민(程敏) 등) 이들은 당시 문단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122. 우비서(虞秘書): 당(唐)나라 초기의 서예가 우세남(虞世南, 558-638). 비서감(秘書監)을 지냈기에 우비서라고도 불린다. 그의 글씨는 단정하고 우아한 것으로 유명하다.
123. 골력(骨力): 글씨의 뼈대와 힘. 서예에서 필획의 강인함과 구조적 힘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124. 척독(尺牘): 길이가 한 자(尺) 정도 되는 나무 조각(牘)에 쓴 글이라는 뜻으로, 주로 편지를 가리킨다.
125. 공벽(拱璧): 두 손으로 받쳐 들 만한 큰 옥(玉). 매우 귀중한 보물을 비유한다.
126. 만사(挽詞):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 주로 시(詩)의 형식이다.
127. 종요(鍾繇, 151-230), 왕희지(王羲之, 303-361): 각각 중국 후한(後漢) 말기, 동진(東晉) 시대의 서예가. 서예의 성인(書聖)으로 추앙받는다.
128. 삼매법(三昧法): 삼매(三昧)는 불교 용어로 정신 집중의 경지를 뜻하며, 여기서는 서예의 깊은 경지나 정수를 의미한다.
129. 양경(兩京): 서한(西漢)의 수도 장안(長安)과 후한(後漢)의 수도 낙양(洛陽)을 가리키며, 한(漢)나라 시대 전체 또는 그 시대의 문풍(文風)을 의미한다. 반고와 사마천은 각각 후한과 전한을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원문:
癸卯九月, 對馬島倭請開市, 命二品以上會議朝堂。 皆以爲: “我國與倭國義不共一天, 而經亂十年, 尙且玩愒, 兵力、人心無可恃, 姑試羈縻¹³⁰, 徐圖長策, 似合權時之宜。” 尹根壽以爲: “此賊之退, 專仗天朝兵力。 今日通市一事, 如不獲已, 則宜且陳可虞之情形, 奏聞天朝, 似爲合宜。” 備局回啓: “請權宜處置, 姑緩凶鋒事, 明白咨奏, 聽其裁處。” 上從之。【《宣廟寶鑑》。】

번역문:
계묘년(1603, 선조 36)¹³¹ 9월에 대마도(對馬島) 왜인(倭人)이 개시(開市)¹³²를 요청하자,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조정 당상(堂上)에서 회의하게 하였다. 모두 생각하기를, “우리나라와 왜국은 의리상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으나, 난리를 겪은 지 10년에 아직도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고(玩愒) 있고 병력과 인심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우선 기미(羈縻)¹³³ 정책을 시험하여 서서히 장기적인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시의(時宜)에 맞는 권도(權道)인 듯합니다.” 하였다. 윤근수가 생각하기를, “이 도적이 물러간 것은 오로지 천조(天朝)¹³⁴의 병력에 힘입은 것입니다. 오늘 통시(通市)하는 한 가지 일은, 만약 부득이하다면 마땅히 우선 우려되는 정형(情形)을 아뢰어 천조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¹³⁵에서 회계(回啓)하기를, “권도(權道)에 맞게 처리하여 우선 흉악한 칼날(凶鋒)을 늦추는 일을 명백히 자문(咨文)¹³⁶으로 아뢰어, 그 재처(裁處)를 듣도록 청합니다.” 하니, 상(上)께서 이를 따랐다.¹³⁷【《선조보감(宣祖寶鑑)》¹³⁸에서 인용】

주석:
130. [주-D001] 縻 : 저본(底本)에는 “미(靡)”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조(宣祖朝)》 계묘(36년)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기미(羈縻)가 올바른 표기이다.
131.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 임진왜란이 끝난 지 5년 후이다.
132. 개시(開市): 시장을 열어 교역을 허락함.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교역 재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다.
133. 기미(羈縻): 굴레(羈)와 고삐(縻)라는 뜻으로, 직접 통치하지 않고 느슨하게 통제하는 외교 정책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적절히 관리하려는 입장을 나타낸다.
134. 천조(天朝): 하늘의 조정이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명(明)나라 조정을 높여 부르던 말이다.
135. 비변사(備邊司): 조선 중기 이후 국방 및 외교 문제를 총괄하던 최고 합의 기구.
136. 자문(咨文)으로 아룀[咨奏]: 자문(咨文)은 조선이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던 공식 외교 문서의 한 종류이다. 일본과의 교역 재개 문제를 명나라에 보고하고 허락 또는 지침을 받으려 한 것이다.
137. 상(上)께서 이를 따랐다: 선조는 비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본과의 교역 재개를 신중히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전후(戰後) 대일(對日) 정책 수립의 중요한 과정이었다.
138. 《선조보감(宣祖寶鑑)》: 선조 시대의 중요한 사실과 언행을 모아 편찬한 책.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원문:
海嵩尉嘗引見, 上下敎曰: “海平行高學高, 詩文駸駸乎漢、唐, 筆法亦高古可敬。 爾有家法, 安用他求? 予每思欲與海平從容相對, 討論今古, 得聞所不聞, 而萬機多事, 願莫能遂, 良可嘆也。” 因以延齡固本酒一壺付臣, 曰: “持餉海平, 說與予意, 得其謝書, 示予可也。”【《玄洲集》。】

번역문:
해숭위(海嵩尉)¹³⁹가 일찍이 인견(引見)하였을 때, 상(上)께서 하교하시기를, “해평(海平)¹⁴⁰은 행실이 높고 학문이 높으며, 시문(詩文)은 한(漢)·당(唐)¹⁴¹에 육박하고(駸駸乎), 필법(筆法) 또한 고고(高古)하여 존경할 만하다. 너에게는 가법(家法)¹⁴²이 있으니 어찌 다른 것을 구하겠는가? 내가 매번 해평과 조용히 마주 앉아 고금(古今)을 토론하며 듣지 못한 바를 듣고 싶으나, 만기(萬機)¹⁴³가 많아 원(願)을 이룰 수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하였다. 이어서 연령고본주(延齡固本酒)¹⁴⁴ 한 병을 신(臣)¹⁴⁵에게 주며 말씀하시기를, “가지고 가서 해평에게 보내고 나의 뜻을 말해주며, 그의 사은 편지(謝書)를 받아 나에게 보여주면 좋겠다.” 하였다.¹⁴⁶【《현주집(玄洲集)》¹⁴⁷에서 인용】

주석:
139.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1582-1657). 윤근수의 사위이자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남편이다.
140. 해평(海平): 윤근수의 봉호(封號)인 해평군(海平君)을 가리킨다.
141. 한(漢)·당(唐):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 문학과 예술이 크게 융성했던 시기로, 시문이나 필법의 모범으로 자주 언급된다.
142. 가법(家法):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이나 법도. 여기서는 장인인 윤근수의 학문과 덕행을 배우라는 의미이다.
143. 만기(萬機): 임금이 처리해야 하는 온갖 정무(政務).
144. 연령고본주(延齡固本酒): 수명을 늘리고 몸의 근본을 튼튼하게 한다는 약용주(藥用酒)의 이름.
145. 신(臣): 신하가 임금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여기서는 해숭위 윤신지를 가리킨다.
146. 이 일화는 선조가 윤근수의 학문과 인품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신임했음을 보여준다.
147. 《현주집(玄洲集)》: 신흠(申欽)의 문집 중 하나로 추정된다. 또는 신흠이 편찬에 관여한 문헌일 수 있다. 신흠의 호 중 하나가 현주(玄洲)이다.

신응시(辛應時)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辛應時【文莊公。】
字君望, 號白麓, 寧越人。 嘉靖壬辰生。 壬子進士, 明宗十四年己未登第, 丙寅重試。 賜暇湖堂, 歷玉堂、舍人、藝文、應敎、大司成、副提學。 乙酉卒, 年五十四。 贈吏曹判書。

번역문:
신응시(辛應時)【문장공(文莊公)¹이다.】
자는 군망(君望)이고, 호는 백록(白麓)이며, 영월(寧越)² 사람이다. 가정(嘉靖)³ 임진년(1532)에 태어났다. 임자년(1552)에 진사(進士)⁴가 되고, 명종(明宗) 14년 기미년(155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인년(1566)에 중시(重試)⁵에 합격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⁶를 하였고, 옥당(玉堂)⁷, 사인(舍人)⁸, 예문관(藝文館)⁹, 응교(應敎)¹⁰, 대사성(大司成)¹¹, 부제학(副提學)¹²을 역임하였다. 을유년(1585)에 나이 54세로 졸(卒)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¹³에 추증(追贈)되었다.

주석:

  1. 문장공(文莊公): 신응시의 시호(諡號).
  2. 영월(寧越): 본관(本貫)이 영월임을 나타낸다. 영월 신씨(寧越 辛氏)이다.
  3. 가정(嘉靖):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4. 진사(進士):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의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
  5. 중시(重試): 조선 시대에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보이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관계(官階)를 올려주었다.
  6.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인 호당(湖堂)에서 학문을 연마하게 하던 제도.
  7. 옥당(玉堂): 옥서(玉署)라고도 하며,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았다.
  8. 사인(舍人):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4품 관직. 조선 초기에는 의정부(議政府)에 속한 정4품 관직이었으나 세조 때 폐지되었다. 신응시가 역임했다는 기록은 확인이 필요하며, 다른 관직의 오기이거나 고려 시대의 용례를 따른 것일 수 있다. 문맥상 예문관 검열(檢閱) 등 다른 문한직을 의미할 수도 있다.
  9. 예문관(藝文館): 조선 시대 왕의 교서(敎書)를 작성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응교(應敎), 봉교(奉敎), 대교(待敎), 검열(檢閱) 등의 관직이 있었다.
  10.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4품 관직.
  11.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12.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책으로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했다.
  13. 이조판서(吏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행정을 총괄했다. 추증(追贈)은 죽은 뒤에 관직을 주는 것이다.

원문:
十一歲, 讀書于隣塾, 有偸兒竝取竊衣衾書冊而去。 群兒大驚, 無不走告于其父母, 而公言笑自若, 略不以屑意。 識者已知公爲大器。

번역문:
11세 때 이웃 글방(隣塾)에서 글을 읽는데, 도둑 아이가 와서 옷과 이불, 책을 모두 훔쳐 달아났다. 여러 아이들이 크게 놀라 자기 부모에게 달려가 알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공(公)은 말하고 웃는 것이 평소와 같아(言笑自若)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식견 있는 자들은 공이 큰 그릇(大器)¹⁴임을 이미 알았다.

주석:
14. 대기(大器): 큰 인물이 될 만한 자질. 또는 그런 인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범한 침착함을 보인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원문:
年十六, 明廟謁聖取士, 公所製入格。 時安左相玹爲考官, 知爲公作, 卽以筆句之, 納諸袖, 曰: “此人大器, 少年登科, 是不幸也。” 公聞而喜曰: “安公愛我哉!” 時議兩美之。

번역문:
나이 16세 때 명종(明廟)께서 알성(謁聖)¹⁵하여 인재를 뽑으셨는데, 공이 지은 글이 격식에 들었다. 당시 좌상(左相) 안현(安玹)¹⁶이 고관(考官)¹⁷이었는데, 공이 지은 것임을 알고 즉시 붓으로 표시하여[筆句之] 소매에 넣으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큰 그릇인데, 소년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공이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안공(安公)께서 나를 아끼시는구나!” 당시의 여론이 양쪽 모두를 아름답게 여겼다.

주석:
15. 알성(謁聖): 임금이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에 나아가 공자(孔子)에게 제사 지내는 것. 이때 특별히 과거 시험을 실시하여 인재를 뽑기도 하였는데, 이를 알성시(謁聖試)라 한다.
16. 안현(安玹, 1501-156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진(仲珍), 호는 퇴휴당(退休堂).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17. 고관(考官): 과거 시험의 시험관.


원문:
甲子, 聽松成徵士守琛卒。 公於湖堂, 製進《有懷成處士》詩三十韻, 具道安貧守道, 養德丘園, 國家宜加褒贈之意, 上卽命施行。 後於徐處士敬德亦然。

번역문:
갑자년(1564)에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¹⁸ 징사(徵士)¹⁹가 졸(卒)하였다. 공이 호당(湖堂)²⁰에서 〈성처사(成處士)를 생각하며(有懷成處士)〉라는 시 30운(韻)을 지어 올려,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구원(丘園)²¹에서 덕(德)을 길렀으니 국가에서 마땅히 포상하고 추증(褒贈)해야 한다는 뜻을 갖추어 아뢰자, 상(上)께서 즉시 시행하도록 명하셨다. 훗날 서경덕(徐敬德)²² 처사(處士)에 대해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주석:
18. 성수침(成守琛, 1493-1564):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
19. 징사(徵士): 학문과 덕행이 높아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은 선비. 처사(處士)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20. 호당(湖堂):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독서당(讀書堂)을 가리킨다. (주석 6 참조)
21. 구원(丘園): 언덕과 동산이라는 뜻으로, 은자(隱者)가 거처하는 시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2.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


원문:
明廟末年, 未有儲嗣, 中外憂遑而莫敢言。 時公與芝川黃公廷彧同在玉堂, 倡議將建白, 竟爲長官所沮。 未幾, 明廟昇遐, 公自以久侍經幄, 特被恩遇, 倍加哀隕。 每朝退, 別處一室, 面壁垂泣, 家人不敢仰視。

번역문:
명종(明廟) 말년에 저사(儲嗣)²³가 없어 안팎에서 걱정하고 황망해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공이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공(公)²⁴과 함께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건의할 것을 앞장서서 주장하였으나, 마침내 장관(長官)²⁵에게 저지당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종께서 승하(昇遐)하시자, 공은 오랫동안 경악(經幄)²⁶에서 모시며 특별히 은총을 입었으므로 슬픔이 배가 되었다. 매번 조회에서 물러나면 별도의 방에 있으면서 벽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리니, 집안사람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주석:
23. 저사(儲嗣): 왕위를 이을 후계자. 세자(世子)를 가리킨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를 일찍 여의고 후사가 없었다.
24. 황정욱(黃廷彧, 153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25. 장관(長官): 으뜸 벼슬아치. 여기서는 홍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이나 부제학(副提學) 등을 가리킬 수 있다.
26. 경악(經幄):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던 자리인 경연(經筵)을 의미한다.


원문:
宣廟卽位, 每經筵進講, 音韻洪暢, 討論詳明, 至於理亂安危之機, 引諭古事, 開陳剴切。 一日, 上問: “《皇明通紀》甚是好書?” 公啓曰: “殿下從何得此書乎? 筵中所講書外, 一切勿觀可也。 況其卷末所論, 有傷統序。” 蓋以朝廷方議私親典禮, 而《通紀》篇末, 極論興獻帝追尊之當理也。 又言: “國家治亂, 未嘗不由於君子、小人之用舍, 而用舍之要, 必先嚴擧主之法, 然後人不敢妄擧也。” 大槪宣廟初服, 輔導、啓沃之功, 公實居多焉, 慈殿嘉之, 賜以表裏。

번역문:
선조(宣廟)께서 즉위하시자, 매번 경연(經筵)에서 나아가 강론할 때 음률이 우렁차고 거침이 없었으며 토론이 상세하고 명확하였고,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편안함과 위태로움의 기미에 이르러서는 옛 사례를 인용하여 깨우쳐 설명함이 간절하고 적절하였다. 하루는 상(上)께서 물으셨다. “《황명통기(皇明通紀)》²⁷가 매우 좋은 책인가?” 공이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어디서 이 책을 얻으셨습니까? 경연에서 강론하는 책 외에는 일절 보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물며 그 책의 권말(卷末)에 논한 바는 통서(統序)²⁸를 해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조정에서 막 사친(私親)의 전례(典禮)²⁹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황명통기》의 편(篇) 끝부분에서 흥헌제(興獻帝) 추존(追尊)의 당연함을 극력으로 논하였기 때문이다. 또 아뢰었다.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등용 여하에 말미암지 않은 적이 없는데, 등용의 요체는 반드시 먼저 천거한 사람에 대한 법(擧主之法)³⁰을 엄격히 한 뒤에야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천거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체로 선조께서 처음 상복을 입으셨을 때³¹, 보도(輔導)하고 계옥(啓沃)³²한 공은 실로 공이 많았으므로, 자전(慈殿)³³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표리(表裏)³⁴를 하사하셨다.

주석:
27. 《황명통기(皇明通紀)》: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저자는 진건(陳建).
28. 통서(統序): 왕위 계승의 정통성 및 순서.
29. 사친전례(私親典禮): 임금의 사적인 친족에 대한 예법.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는 명나라 가정제(嘉靖帝)가 생부 흥헌제(興獻帝)를 황제로 추존한 '대례의(大禮議)' 사건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황명통기》가 흥헌제 추존을 긍정적으로 서술했기에, 신응시는 선조가 이를 읽고 덕흥대원군 추존 논의에 영향을 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30. 거주지법(擧主之法): 인재를 천거한 사람에게 연대 책임을 묻는 법규. 천거한 인재가 문제를 일으킬 경우 천거한 사람도 처벌하여, 신중한 인재 천거를 유도하려는 제도이다.
31. 선묘초복(宣廟初服): 선조가 즉위 초 명종(明宗)의 상(喪)을 당하여 상복(喪服)을 입었던 시기.
32. 계옥(啓沃): ‘마음을 열어 적셔준다’는 뜻으로, 임금의 마음을 열어 선(善)한 길로 인도함을 이르는 말.
33. 자전(慈殿): 왕대비(王大妃) 또는 대왕대비(大王大妃)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를 가리킨다. 당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다.
34.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안감. 임금이 신하에게 옷감을 내리는 것은 큰 은총의 표시였다.


원문:
戊辰, 太監張朝、行人歐希稷來宣詔書, 思菴朴公淳爲遠接使, 公與李山海爲從事官。 歐公見公儀表, 語譯官曰: “此實海東偉人, 王國之寶也。” 及以詩酬唱, 益嘖嘖歎賞焉。 己巳, 翰林檢討成憲、給事中王璽出來, 公又與鄭公澈、李公海壽從焉。 義州有古津江, 山水迅駃, 又大雨漲溢, 支供舟船觸石渰死者四十餘人。 諸公所乘繼而危急, 舟中無不失色, 公獨凝然不動, 幸而得免, 而公又夷然無喜色, 諸公歎服以爲不可及。

번역문:
무진년(1568), 태감(太監) 장조(張朝)와 행인(行人) 구희직(歐希稷)³⁵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자, 사암(思菴) 박순(朴淳) 공(公)³⁶이 원접사(遠接使)³⁷가 되고, 공은 이산해(李山海)³⁸와 함께 종사관(從事官)³⁹이 되었다. 구공(歐公)이 공의 의표(儀表)⁴⁰를 보고 역관(譯官)에게 말하였다. “이분은 실로 해동(海東)⁴¹의 위인(偉人)이며 왕국(王國)의 보배이다.” 시(詩)로 수창(酬唱)⁴²하게 되자 더욱 쯧쯧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기사년(1569), 한림검토(翰林檢討) 성헌(成憲)과 급사중(給事中) 왕새(王璽)⁴³가 나오자, 공은 또 정철(鄭澈) 공(公)⁴⁴, 이해서(李海壽)⁴⁵와 함께 수행하였다. 의주(義州)의 고진강(古津江)⁴⁶은 물살이 매우 빠르고 또 큰비로 물이 불어나서, 지공(支供)하던 배가 돌에 부딪혀 빠져 죽은 자가 40여 명이었다. 여러 공들이 탄 배가 연이어 위급해져 배 안 사람들이 모두 실색(失色)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공만 홀로 엉긴 듯 움직이지 않았다(凝然不動). 다행히 벗어날 수 있었는데, 공은 또 태연하여 기뻐하는 기색이 없으니, 여러 공들이 탄복하며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주석:
35. 장조(張朝), 구희직(歐希稷): 명나라 사신.
36. 박순(朴淳, 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영의정을 지냈다.
37. 원접사(遠接使): 중국 사신이 오면 국경까지 나가서 맞이하여 서울까지 안내하며 접대하던 임시 벼슬.
38.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영의정을 지냈다.
39. 종사관(從事官): 원접사나 도순찰사 등을 보좌하던 임시 관직.
40. 의표(儀表): 용모와 거동. 외적인 풍채를 의미한다.
41. 해동(海東): ‘발해(渤海)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
42. 수창(酬唱): 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르는 것.
43. 성헌(成憲), 왕새(王璽): 명나라 사신.
44.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좌의정을 지냈다.
45. 이해수(李海壽): 조선 중기의 문신. 정보 부족.
46. 고진강(古津江): 의주 부근 압록강의 옛 나루터.


원문:
公久處經幄, 眷遇益隆, 乃效古人丹扆進戒之意, 進《勤學》、《愛民》、《親賢》、《納諫》等六箴, 上深納焉。

번역문:
공이 오랫동안 경악(經幄)⁴⁷에 머물러 권우(眷遇)⁴⁸가 더욱 두터워지자, 이에 옛사람들이 단의(丹扆)⁴⁹에 경계하는 글을 올린 뜻을 본받아, 〈근학(勤學)〉, 〈애민(愛民)〉, 〈친현(親賢)〉, 〈납간(納諫)〉 등 여섯 잠(箴)⁵⁰을 올리니, 상께서 깊이 받아들이셨다.

주석:
47. 경악(經幄): 경연(經筵)을 의미한다. (주석 26 참조)
48. 권우(眷遇): 임금이 특별히 돌보아 주는 대우.
49. 단의(丹扆): 붉은 칠을 한 병풍. 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치는 것으로, 임금의 자리를 상징한다. 옛날에는 이 병풍에 경계의 글을 써 붙여 임금이 항상 보도록 하였다.
50. 잠(箴): 경계하는 내용을 담은 글의 한 형식. 주로 네 글자 구절로 이루어진다.


원문:
甲戌正月, 拜同副承旨, 隨事覆逆, 忠益甚多。 時上命進黃蠟數百斤, 公極陳以爲: “凡上供之物, 無非出於生民膏血。 當初詳定, 本有其數, 一歲之入, 自足以供一歲之用。 或於經用之外, 少加毫分, 則其勢必至加賦於民, 一加之後, 便成舊例, 民將不堪。 昔宋仁宗因夜飢思食燒羊, 恐爲規例而終不索。 況此物, 御供日例之外, 更無所用之地, 故外人或云聖上欲輸於鑄佛之用。 此雖必無之事, 而臣竊歎殿下取索若是之多, 以來群下之疑, 重貽生民之弊也。” 時天顔不怡, 玉音甚厲, 公不爲屈, 從容開導, 而與栗谷李先生先後爭論, 終得回天。 宦官輩有橫濫之漸, 公據例防塞, 宦官側目。

번역문:
갑술년(1574) 정월, 동부승지(同副承旨)⁵¹에 제수되어 일을 따라 아뢰고 아뢰는 데 충성스럽고 유익함이 매우 많았다. 이때 상께서 황랍(黃蠟)⁵² 수백 근을 올리라고 명하시자, 공이 극력으로 진술하며 아뢰었다. “무릇 상공(上供)⁵³하는 물건은 생민(生民)의 고혈(膏血)⁵⁴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당초 상세히 정할 때 본래 그 수량이 있었으니, 한 해의 수입은 자연히 한 해의 쓰임에 충당하기에 족합니다. 만약 경상 비용 외에 조금이라도 보탠다면, 그 형세는 반드시 백성에게 부세를 더하는 데 이를 것이고, 한번 더한 뒤에는 그대로 구례(舊例)가 되어 백성들이 장차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 송(宋) 인종(仁宗)⁵⁵은 밤에 배가 고파 구운 양고기가 생각났으나 관례가 될까 두려워 끝내 찾지 않으셨습니다. 하물며 이 물건은 어공(御供)⁵⁶의 일상적인 예(例) 외에는 다시 쓸 곳이 없는데, 그러므로 외인(外人)들이 혹 성상(聖上)께서 불상을 주조하는 데 쓰려고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비록 반드시 없는 일이겠으나, 신은 삼가 전하께서 요구하심이 이처럼 많아서 아래 신하들의 의심을 불러오고 생민에게 폐해를 거듭 끼치게 됨을 탄식합니다.” 이때 천안(天顔)⁵⁷이 기쁘지 않으시고 옥음(玉音)⁵⁸이 매우 노여웠으나, 공은 굽히지 않고 조용히 개도(開導)하였으며,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⁵⁹과 앞뒤로 논쟁하여 마침내 천심(天心)을 돌릴 수 있었다. 환관(宦官) 무리들이 방자하고 넘치는 기미가 있자, 공이 예(例)에 근거하여 막으니 환관들이 곁눈질하며 미워하였다.

주석:
51.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승지(承旨)의 하나로, 육방(六房) 중 이방(吏房)을 담당하는 도승지(都承旨) 다음가는 자리였다.
52. 황랍(黃蠟): 누런 밀랍(蜜蠟). 벌집에서 채취하여 정제한 것. 초를 만들거나 약재로 쓰였다.
53. 상공(上供): 임금이나 나라에 물품을 바치는 것.
54. 고혈(膏血): 기름과 피. 백성들이 힘들여 생산한 재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55. 송 인종(宋仁宗, 1010-1063): 중국 북송(北宋)의 제4대 황제. 어질고 검소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56. 어공(御供): 임금이 쓰는 물품. 또는 그것을 공급하는 것.
57. 천안(天顔): 임금의 얼굴.
58. 옥음(玉音): 임금의 목소리.
59. 율곡 이선생(栗谷李先生):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원문:
爲光州牧使, 日治簿書, 無少倦怠, 而其於按獄, 尤盡心焉。 有明火賊擊殺人, 其人將死曰: “殺我者, 某甲也。” 其妻來告, 卽捕某甲, 訊之無驗, 且多有疑端。 公爭之於同推官及監司, 而不能得。 未幾, 有僧行劫, 就鞫而服, 仍歷數前後所殺, 則其人亦在其中。 其妻認其僧所取絛帶而號泣曰: “是吾夫之物也。” 於是某甲得免。

번역문:
광주목사(光州牧使)⁶⁰가 되어서는 날마다 장부와 서류를 처리함에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고, 옥사(獄事)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더욱 마음을 다하였다. 대낮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때려 죽인 도적(明火賊)⁶¹이 있었는데, 그 피해자가 장차 죽으려 할 때 말하기를 “나를 죽인 자는 모갑(某甲)이다.”라고 하였다. 그 아내가 와서 고발하자 즉시 모갑을 체포하여 신문하였으나 증험(證驗)이 없고 또한 의심스러운 단서가 많았다. 공이 동료 추관(推官)⁶² 및 감사(監司)⁶³에게 이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중(僧)이 강도짓을 하다가 국문(鞫問)을 받고 자복하였는데, 이어서 전후에 죽인 사람들을 열거하니 그 피해자 또한 그 안에 있었다. 그 아내가 그 중이 빼앗은 도대(絛帶)⁶⁴를 알아보고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내 남편의 물건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갑이 풀려날 수 있었다.

주석:
60. 목사(牧使): 조선 시대 각 목(牧)에 파견된 지방관. 정3품.
61. 명화적(明火賊): 대낮에 횃불을 들고 떼를 지어 다니며 재물을 약탈하던 도둑.
62. 추관(推官): 조선 시대에 죄인을 신문하던 임시 관직. 또는 형사 사건을 담당하던 관원.
63. 감사(監司): 각 도(道)의 으뜸 벼슬인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64. 도대(絛帶): 끈이나 실로 엮어 만든 띠.


원문:
立朝尙名節, 臨大事決大疑, 據經援古, 守正秉公, 確乎不拔。 明於治體, 達於時務, 邊情、兵務, 悉皆曉暢。 與栗谷先生議論協同, 終始不渝。 愛君憂國, 出於至誠, 遇事直前, 無所回避, 咫尺天威, 雷霆震疊, 而不少撓奪, 必盡所懷。 雖累遭廢斥, 悠然不以爲意。 其爲郡縣, 必以愛民敎士爲先; 其敎士也, 要以窮理篤行爲本, 不徒尙文辭。

번역문:
조정에 서서는 명분과 절의(名節)를 숭상하였고, 큰일에 임하여 큰 의혹을 결단할 때는 경전(經)에 근거하고 옛 사례를 인용하며(據經援古) 정도(正道)를 지키고 공정함(秉公)을 견지하여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치체(治體)⁶⁵에 밝고 시무(時務)⁶⁶에 통달하였으며, 변경(邊境)의 사정(邊情)과 군사 업무(兵務)에도 모두 환히 통하였다. 율곡 선생과 의론(議論)이 서로 같아(協同) 시종 변함이 없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愛君憂國)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고, 일을 만나면 곧바로 나아가 회피하는 바가 없었으며, 지척(咫尺)의 천위(天威)⁶⁷가 우레처럼 진동하여도 조금도 꺾이거나 빼앗기지 않고 반드시 품은 바를 다하였다. 비록 여러 차례 폐척(廢斥)⁶⁸을 당하였으나, 유연(悠然)히 개의치 않았다. 군현(郡縣)의 수령이 되어서는 반드시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가르치는 것(愛民敎士)을 우선으로 삼았고, 선비를 가르침에는 궁리(窮理)⁶⁹와 독행(篤行)⁷⁰을 근본으로 삼도록 힘쓰고 한갓 문사(文辭)만을 숭상하지 않았다.

주석:
65. 치체(治體):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나 체계.
66. 시무(時務): 당대의 중요한 일이나 정세.
67. 천위(天威): 임금의 위엄.
68. 폐척(廢斥): 관직에서 내쫓김.
69. 궁리(窮理):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 성리학(性理學)의 중요한 공부 방법 중 하나이다.
70. 독행(篤行): 학문이나 도의(道義)를 실제로 힘써 행함.


원문:
祿仕幾三十年, 累守大邑, 而家無長物, 俸祿之外, 絶不爲分寸經營計。 居家有泉石之勝, 處之若幽禪也。 居常不樂仕宦, 每有閑退之心, 而只以大夫人在堂, 黽勉隨行。 常得一佳處於懷德之甲川上, 欲營菟裘以爲終老之所, 而終不得成, 慨然之懷屢見於詩什。

번역문:
녹(祿)을 받으며 벼슬한 지 거의 30년 동안 여러 차례 큰 고을을 지켰으나, 집에는 남는 물건이 없었고 봉록(俸祿) 외에는 조금치(分寸)⁷¹의 생계 계획(經營計)도 세우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은 샘과 돌이 빼어난 경치(泉石之勝)⁷²가 있어, 그곳에 머물기를 마치 고요한 선방(禪房)에 있는 듯하였다. 평소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아 매번 한가로이 물러날 마음(閑退之心)이 있었으나, 다만 대부인(大夫人)⁷³께서 집에 계시므로 힘써 관직을 따라다녔다. 항상 회덕(懷德)의 갑천(甲川) 가에 좋은 곳을 봐 두어, 은퇴 후 거처(菟裘)⁷⁴를 마련하여 노년을 마칠 곳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개탄하는 마음이 여러 차례 시(詩)에 나타났다.

주석:
71. 분촌(分寸): 아주 작거나 적음을 나타내는 말.
72. 천석지승(泉石之勝): 샘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 경치.
73.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신응시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74. 토구(菟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11년 조에 나오는 지명. 은자(隱者)가 은거하는 곳, 또는 은퇴 후 거처할 곳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원문:
時論乖張, 士類角立, 出入彼此, 互相傾軋, 朝著之間, 非復曩日氣像。 公與一二諸公務欲保合鎭定, 以圖和衷之美而不可得, 則歎曰: “凡人之邪正是非, 當於人人上求之。 若以彼此爲是非, 同異爲邪正, 則進退用舍不係於人之賢否, 而銳於進退, 迎合時好者必勝矣。 所謂廉恥名節, 漸至墜地, 世道凌夷, 終不可爲矣。” 數十年之後, 公言益驗焉。【竝尤菴宋時烈撰行狀。】

번역문:
시론(時論)이 어그러지고(乖張) 사류(士類)⁷⁵들이 대립하여(角立) 서로 드나들며(出入彼此)⁷⁶ 서로 기울게 하니(傾軋), 조정(朝著)의 모습이 지난날의 기상(氣像)이 아니었다. 공이 한두 제공(諸公)과 함께 힘써 화합을 보전하고 진정시켜(保合鎭定) 화목함(和衷)의 아름다움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탄식하며 말하였다. “무릇 사람의 사(邪)·정(正)·시(是)·비(非)는 마땅히 개개인에게서 찾아야 한다. 만약 피차(彼此)로써 시비(是非)를 삼고 동이(同異)⁷⁷로써 사정(邪正)을 삼는다면, 진퇴(進退)와 용사(用舍)⁷⁸가 사람의 현명함과 불초함(賢否)에 관계없이, 나아가고 물러남에 재빠르고 시세(時勢)에 영합(迎合)하는 자가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이른바 염치(廉恥)와 명절(名節)이 점차 땅에 떨어져 세도(世道)가 능이(凌夷)⁷⁹해지면 마침내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수십 년 뒤에 공의 말이 더욱 증험되었다.【이상은 모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⁸⁰이 지은 행장(行狀)⁸¹에서 인용.】

주석:
75. 사류(士類): 선비의 무리. 여기서는 조정의 관료 집단, 특히 붕당(朋黨)을 형성한 사림(士林) 세력을 가리킨다.
76. 출입피차(出入彼此): 이 당(黨)에 들어갔다가 저 당으로 나오는 등 소속 붕당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77. 동이(同異): 의견이나 주장이 같고 다름.
78. 진퇴용사(進退用舍):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 등용되고 버려짐.
79. 능이(凌夷): 점차 쇠퇴함.
80.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대학자, 정치가.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81.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자, 호, 본관, 행적 등을 기록한 글.


원문:
辛應時碩德博學, 實爲明、宣朝名臣, 處經幄則盡啓沃之責, 莅藩帷則著澄淸之績, 孝友篤於家庭, 忠藎孚於朝廷。 交友先正臣李珥、成渾, 講磨道義, 砥勵名節, 而與故相臣朴淳、鄭澈淸操重望, 實相先後, 蔚然竝稱於一時。 蓋其材德、學識, 早抱公輔之器, 而天不慗遺, 未克展布其用, 士類至今嗟惜, 而此皆一二儒賢據實之定論, 則有足以考信於百世者。【禮曹回啓。】

번역문:
신응시는 석덕(碩德)이고 박학(博學)하여⁸² 실로 명종(明宗)·선조(宣祖) 시대의 명신(名臣)이니, 경악(經幄)에 있을 때는 계옥(啓沃)의 책임을 다하였고, 번유(藩帷)⁸³에 임해서는 징청(澄淸)⁸⁴의 공적을 드러냈으며, 효도와 우애(孝友)는 가정에서 돈독하였고 충성(忠藎)⁸⁵은 조정에서 미더웠다. 벗으로 선정신(先正臣)⁸⁶ 이이(李珥)·성혼(成渾)⁸⁷과 교유하며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명절(名節)을 지려(砥勵)하였으며, 고(故) 상신(相臣) 박순(朴淳)·정철(鄭澈)과 더불어 청렴한 지조(淸操)와 두터운 명망(重望)이 실로 서로 선후(先後)가 되어 한 시대에 울연(蔚然)히 함께 칭송되었다. 대개 그 재주와 덕(材德), 학식(學識)은 일찍이 공보(公輔)⁸⁸의 그릇을 품었으나, 하늘이 남겨주지 않아⁸⁹ 그 쓰임을 능히 펼치지 못하였으니 사류(士類)들이 지금까지 애석하게 여기는데, 이는 모두 한두 유현(儒賢)들이 실(實)에 근거한 정론(定論)⁹⁰이니, 백세(百世) 뒤에도 상고하여 믿을 만함이 있다.【예조(禮曹)의 회계(回啓)⁹¹에서 인용.】

주석:
82. 석덕박학(碩德博學): 큰 덕을 지니고 학식이 넓음.
83. 번유(藩帷): 번(藩)은 울타리, 유(帷)는 장막. 지방의 관청이나 지방관의 임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84. 징청(澄淸): 맑게 함. 혼란한 정치나 사회를 바로잡고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85. 충신(忠藎): 충성스러운 마음. 신(藎)은 향초의 일종으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비유한다.
86. 선정신(先正臣): 학문과 덕행이 높아 후세의 모범이 되는 선대의 신하.
87. 성혼(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88. 공보(公輔): 공(公)과 보(輔)는 모두 재상(宰相)을 의미한다. 즉, 재상의 재목.
89. 천불철유(天不慗遺): 하늘이 (인재를) 남겨주지 않음. 뛰어난 인재가 요절하거나 제 뜻을 다 펴지 못하고 죽었을 때 쓰는 말. ‘철(慗)’은 ‘아끼다’, ‘인색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90. 정론(定論): 여러 논의를 거쳐 확정된 올바른 견해.
91. 회계(回啓): 왕명에 따라 조사하거나 의논한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


구봉령(具鳳齡)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具鳳齡
字景瑞, 號栢潭, 綾城人。 嘉靖丙戌生。 丙午, 中司馬。 明宗十五年庚申登第。 薦入史局, 錄玉堂南床, 賜暇湖堂, 歷吏郞、舍人、直提學、承旨、大司成、忠淸・全羅觀察使、大司諫、副提學、吏曹參議・參判、大司憲。 丙戌卒, 年六十一。

번역문:
구봉령(具鳳齡)
자는 경서(景瑞)이고, 호는 백담(栢潭)이며, 능성(綾城)¹ 사람이다. 가정(嘉靖)² 병술년(1526)에 태어났다. 병오년(1546)에 사마시(司馬試)³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15년 경신년(156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추천되어 사국(史局)⁴에 들어가 옥당(玉堂) 남상(南床)⁵에 기록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⁶를 하였으며, 이조정랑(吏曹正郞)⁷, 사인(舍人)⁸, 직제학(直提學)⁹, 승지(承旨)¹⁰, 대사성(大司成)¹¹, 충청도·전라도 관찰사(觀察使)¹², 대사간(大司諫)¹³, 부제학(副提學)¹⁴, 이조참의(吏曹參議)¹⁵·참판(參判)¹⁶, 대사헌(大司憲)¹⁷을 역임하였다. 병술년(1586)에 나이 61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1. 능성(綾城): 현재의 전라남도 화순(和順). 본관(本貫)이 능성임을 나타낸다. 능성 구씨(綾城 具氏)이다.
  2. 가정(嘉靖):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3.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를 달리 이르던 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로 나뉜다.
  4. 사국(史局): 사초(史草)를 편찬하는 임시 관청. 또는 춘추관(春秋館)을 가리키기도 한다.
  5. 옥당남상(玉堂南床): 옥당(玉堂, 홍문관)의 남쪽에 있는 책상. 홍문관의 관원 명부에 이름이 오름을 의미한다. 홍문관 관원이 되는 것은 큰 영예였다.
  6.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인 호당(湖堂)에서 학문을 연마하게 하던 제도.
  7. 이조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전랑(銓郎)의 하나로 인사 행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조좌랑(吏曹佐郞, 정6품)’과 함께 통칭 ‘이좌(吏佐)’ 또는 ‘이조낭관(吏曹郎官)’이라 불렸다. 원문의 ‘이낭(吏郞)’은 이를 가리킨다.
  8. 사인(舍人):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4품 관직. 조선 초기에는 의정부(議政府)에 속한 정4품 관직이었으나 세조 때 폐지되었다. 구봉령이 역임했다는 기록은 확인이 필요하다. 신응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관직의 오기이거나 고려 시대 용례를 따른 것일 수 있다.
  9.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하관. 제학(提學) 다음가는 직책이다.
  10.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도승지(都承旨),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의 여섯 명이 있었다.
  11.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12.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감사(監司)라고도 한다.
  13.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14.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직책으로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했다.
  15.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 판서(判書), 참판(參判) 다음가는 벼슬이다.
  16.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조(吏曹)의 종2품 벼슬. 판서(判書) 다음가는 벼슬이다.
  17.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원문:
十一歲, 聞外從祖權公彭老游玄沙山刹, 以諺書請業, 權公特奇之。 初授《小學》, 通朗易曉, 首卷纔訖, 其餘迎刃而解。 同門之士甚衆, 權時使公授書, 公儼然不假辭色, 或有小失, 忠告而切責之, 人皆尊畏。【行狀。】

번역문:
11세 때 외종조(外從祖)¹⁸ 권팽(權彭) 공(公)¹⁹이 현사산(玄沙山) 절에 노닐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언서(諺書)²⁰로 학업을 청하니, 권공이 특별히 기특하게 여겼다. 처음 《소학(小學)》²¹을 가르치자, 시원스럽게 통하여 쉽게 이해하였고(通朗易曉) 첫 권(卷)을 겨우 마치자 그 나머지는 칼날을 대면 쪼개지듯 쉽게 풀었다(迎刃而解)²². 동문(同門)의 선비들이 매우 많았는데, 권공이 때때로 공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자, 공은 엄연(儼然)하여 말을 빌리지 않고²³ 혹 작은 실수가 있으면 충고하고 간절히 꾸짖으니,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행장(行狀)²⁴에서 인용】

주석:
18. 외종조(外從祖): 어머니의 남자 형제, 즉 외삼촌.
19. 권팽(權彭, 1470-1555):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노팽(老彭), 호는 자재암(自在庵).
20. 언서(諺書): 언문(諺文), 즉 한글로 쓴 편지.
21. 《소학(小學)》: 중국 송(宋)나라 유자징(劉子澄)이 주희(朱熹)의 지도를 받아 편찬한 아동용 수신서(修身書).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필독서였다.
22. 영인이해(迎刃而解): 칼날을 대면 저절로 쪼개진다는 뜻으로, 일이 매우 쉽게 해결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23. 불가사색(不假辭色): 말씨나 얼굴빛을 빌리지 않음. 즉, 남의 안색을 살피거나 아첨하지 않고 엄격하고 공정하게 대함을 의미한다.
24.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성명, 자, 호, 본관, 행적 등을 기록한 글.


원문:
十六讀《論語》, 至“食無求飽, 居無求安”, 嘅然歎曰: “人之所以不能自立, 飽食與安居害之也。 苟於此而能任分無求, 則何事不可做?” 沈潛反覆, 如有所得。 旣冠, 執經退溪之門, 先生稱其有文行。

번역문:
16세에 《논어(論語)》를 읽다가 “먹는 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거처하는 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 居無求安)”²⁵는 구절에 이르러, 개연(嘅然)히²⁶ 탄식하며 말하였다. “사람이 자립(自立)하지 못하는 까닭은 배불리 먹는 것과 편안히 거처하는 것이 해치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에 대해 분수를 지켜 구함이 없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깊이 생각하고 반복하며(沈潛反覆) 마치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하였다.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는 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서 경전(經傳)을 배웠는데(執經)²⁷, 선생께서 문행(文行)²⁸이 있다고 칭찬하셨다.

주석:
25.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구절. 군자(君子)는 물질적인 욕구보다 도(道)를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26. 개연(嘅然): 감개(感慨)가 일어나는 모양. 탄식하는 모양.
27.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 집경(執經)은 경전을 가지고 스승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28. 문행(文行): 학문(文)과 품행(行).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가르친 네 가지 과목(四科: 德行, 言語, 政事, 文學) 중 하나인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원문:
拜修撰。 時尹元衡威權震中外, 公倡議首論之, 百僚動容。

번역문:
수찬(修撰)²⁹에 제수되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³⁰의 위세와 권력이 조야(朝野)를 진동하였는데, 공이 앞장서서 의논을 제기하여 그를 논핵(論劾)하니 백관(百僚)들이 얼굴빛을 바꾸었다(動容).

주석:
29. 수찬(修撰): 홍문관(弘文館)의 정6품 관직.
30. 윤원형(尹元衡, 1503-1565): 조선 명종 때의 외척이자 권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원문:
出檢全羅道災傷, 兼持繡斧, 先聲所至, 一路肅然, 黠吏悍民莫敢行詐。 入爲吏曹正郞, 乞告爲退守丘壟計。 退溪先生贈詩問行止, 有笑指白雲心悠然之句。

번역문:
전라도(全羅道)의 재해 상황(災傷)을 조사하러 나가면서 수놓은 도끼(繡斧)³¹를 겸하여 지니니, 명성(先聲)이 이르는 곳마다 온 길이 숙연(肅然)하여 교활한 아전(黠吏)과 사나운 백성(悍民)들이 감히 속임수를 쓰지 못하였다. 들어와 이조정랑(吏曹正郞)³²이 되었으나, 고향에 물러가 분묘(丘壟)를 지킬 계획으로 사직을 청하였다(乞告). 퇴계 선생께서 시를 지어주며 행지(行止)를 물으셨는데, “웃으며 흰 구름 가리키니 마음이 유연하네(笑指白雲心悠然)”라는 구절이 있었다.

주석:
31. 수부(繡斧): 수놓은 도끼. 어사(御史)가 지방에 나갈 때 임금이 하사하던 신표(信標) 중 하나로, 어사의 직권 또는 어사 자체를 상징한다. 즉, 재해 조사뿐 아니라 감찰 임무도 겸했음을 의미한다.
32. 이조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주석 7 참조)


원문:
拜忠淸道觀察使。 民有兄弟相訟, 公諭之以理, 至於泣下, 二人叩頭自引, 遂成敦睦。

번역문: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백성 중에 형제가 서로 소송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이치로써 그들을 깨우쳐 눈물을 흘리기에 이르자, 두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물러나 마침내 돈독하고 화목하게 되었다.


원문:
庚辰, 拜大司成, 勸課有方, 叩擊無倦, 士風丕變, 成就者衆。 大臣啓曰: “士習不競, 由師道不立也。 師表今得人, 可久任責效也。” 有疾請去。 上曰: “邃學有行, 足爲多士之表, 勿爲退閑計。”

번역문:
경진년(1580), 대사성(大司成)³³에 제수되어, 권면하고 과업을 부과함(勸課)에 방법이 있고 가르치고 이끌어줌(叩擊)³⁴에 게으름이 없으니, 사풍(士風)이 크게 변하여 성취한 자가 많았다. 대신(大臣)이 아뢰었다. “선비의 풍습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사도(師道)가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표(師表)³⁵가 이제 적임자를 얻었으니, 오래 맡겨 효과를 책임지게 할 만합니다.” 병이 있어 떠나기를 청하자,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학문이 깊고 행실이 있어(邃學有行) 족히 많은 선비들의 표상(表)이 되니, 물러나 한가로이 지낼 계획을 하지 말라.”

주석:
33. 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의 으뜸 벼슬. 정3품. (주석 11 참조)
34. 고격(叩擊): ‘두드리면 울린다’는 뜻으로, 스승이 제자의 질문이나 능력에 맞추어 적절히 가르치고 이끌어 줌을 비유하는 말. 《예기(禮記)》 〈학기(學記)〉편에 보인다.
35. 사표(師表): 학식과 덕행이 높아 스승으로서 모범이 되는 사람.


원문:
是時朝論携貳, 公旣求去不得, 將協和朝著, 培埴國脈, 而或以標榜形迹而詆之。 癸未, 出按湖南, 秩未滿, 進貳選部, 從大臣請也。 公志在同寅, 用人惟賢, 不以論議異同爲取舍, 雖時論嘵嘵, 而處之超然。

번역문:
이때 조정의 여론(朝論)이 나뉘어[携貳] 있었는데, 공이 떠나기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장차 조정(朝著)을 협화(協和)하고 국맥(國脈)을 배식(培植)³⁶하고자 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표방(標榜)하고 형적(形迹)³⁷을 드러낸다 하여 그를 비방하였다. 계미년(1583), 호남(湖南)에 안찰사(按察使)³⁸로 나갔다가 임기(秩)가 차기도 전에 선부(選部)³⁹의 차관(貳)⁴⁰으로 승진하였으니, 대신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공은 뜻을 동인(同寅)⁴¹에 두어 사람을 씀에 오직 현명함을 기준으로 삼고 논의(論議)의 같고 다름으로써 취사(取舍)하지 않으니, 비록 시론(時論)이 시끄러웠으나(嘵嘵) 초연(超然)히 대처하였다.

주석:
36. 배식(培植): 식물을 북돋아 심음. 인재를 양성하거나 세력을 키우는 것을 비유한다.
37. 표방(標榜): 명목이나 주장 따위를 내세움. 형적(形迹): 외형적인 자취. 여기서는 붕당(朋黨)의 일원으로 간주될 만한 언행을 의미하는 듯하다. 당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38. 안찰사(按察使):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주석 12 참조)
39. 선부(選部): 관원의 선발과 임명을 담당하는 부서. 이조(吏曹)를 가리킨다.
40. 이(貳): 버금, 차관. 이조참판(吏曹參判) 또는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가리킨다.
41. 동인(同寅): 함께 공경하며 일하는 동료. 또는 같은 관청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


원문:
公聰穎出人, 讀書過目成誦, 旁綜百家, 無不融會, 然後乃復淹貫《六經》, 歸之於約。 早喪怙恃, 常以失養爲至痛。 築室居墓下, 逐日展省。 游宦之日, 設位以拜, 諱日則毁惙如初喪, 齋素疏布以終月。 憂國愛民, 一心眷眷, 嘗謂: “一念或私, 不可以對君父。” 隨事論列, 辭氣毅然, 不以利害貳之。 或遇災異, 卽容色愀然, 飮膳爲減。 君喪則居外盡制, 國忌必食素。 屬纊之前夕, 仁廟諱日也, 猶却肉不御。【竝蒼石李埈撰碣銘。】

번역문:
공은 총명함(聰穎)이 남보다 뛰어나, 책을 읽으면 한번 보고도 암송하였으며(過目成誦), 널리 백가(百家)⁴²를 종합하여 융회(融會)⁴³하지 않음이 없었고, 그런 뒤에야 다시 육경(六經)⁴⁴에 깊이 통달하여(淹貫) 요체(要諦)로 귀결시켰다. 일찍이 부모(怙恃)⁴⁵를 여의어, 항상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슬픔으로 여겼다. 집을 짓고 묘 아래 살면서 날마다 찾아가 살폈다(展省). 벼슬살이할 때에는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절하였으며, 기일(諱日)⁴⁶에는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기를(毁惙) 처음 상(喪)을 당한 것처럼 하였고,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며 거친 베옷(疏布)을 입고 한 달을 마쳤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함(憂國愛民)에 한마음으로 간절하였으며(眷眷), 일찍이 말하기를 “한 생각이라도 혹 사사로움이 있다면 군부(君父)⁴⁷를 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일을 따라 논하여 아룀에 말과 기색(辭氣)이 의연(毅然)하여 이해(利害)로써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不以利害貳之). 혹 재앙과 이변(災異)을 만나면 즉시 얼굴빛이 근심스러워졌고(愀然) 음식(飮膳)을 줄였다. 임금의 상(喪)에는 상례(喪禮)를 다하였고(居外盡制)⁴⁸, 국기일(國忌)⁴⁹에는 반드시 소식(素食)하였다. 숨을 거두기(屬纊)⁵⁰ 전날 저녁이 인종(仁廟)⁵¹의 기일이었는데, 여전히 고기를 물리치고 드시지 않았다.【이상은 모두 창석(蒼石) 이준(李埈)⁵²이 지은 갈명(碣銘)⁵³에서 인용.】

주석:
42. 백가(百家): 제자백가(諸子百家).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학자와 학파. 넓게는 각종 학술 서적을 의미한다.
43. 융회(融會): 여러 가지가 녹아서 하나로 합쳐짐. 여러 지식을 종합하여 깊이 이해함.
44. 육경(六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춘추(春秋)의 여섯 가지 유교 경전.
45. 호시(怙恃): 아버지를 의지하고(怙) 어머니를 믿는다(恃)는 뜻으로, 부모를 이르는 말.
46. 휘일(諱日): 돌아가신 날. 기일(忌日).
47. 군부(君父): 임금과 아버지. 또는 임금을 아버지처럼 여겨 이르는 말.
48. 거외진제(居外盡制): 상중에 있는 신하가 관청에 근무하면서 상례(喪禮)를 행하는 것.
49. 국기(國忌): 나라의 기일. 역대 왕이나 왕비가 죽은 날.
50. 속광(屬纊):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코와 입에 솜을 대어 숨이 넘어가는지를 살펴보는 것. 임종(臨終)을 의미한다.
51. 인종(仁廟):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기간이 8개월로 짧았다.
52. 이준(李埈, 1563-163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헌(叔獻), 호는 창석(蒼石).
53. 갈명(碣銘): 갈(碣, 머리 부분이 둥근 작은 비석)에 새긴 글. 죽은 사람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을 담는다.


원문:
常以立于本朝而道不行爲恥, 雖擢用狎至, 非其所樂, 每除拜告暇之日, 居其半。 雅性沖澹, 不好紛華, 尤不喜燕樂, 人或置酒邀之, 皆以疾辭。 褒衣博帶, 終日端坐, 雖在宴閑, 未嘗有怠容。 平居不行關節, 鄕居不以毫髮事托州縣。 敎子弟和而實嚴, 自飮食衣服, 以至進退容止, 一一照檢, 事之稍有害理者, 必加禁絶。 書所持夾板曰: “整衣冠, 尊瞻視, 謹言行, 戒酒色。”

번역문:
항상 본조(本朝)에 서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부끄러움으로 여겼으므로, 비록 발탁되어 등용됨이 자주 있었으나(狎至) 즐거워하는 바가 아니어서, 매번 제수(除拜)되어 사은(謝恩) 숙배(告暇)하는 날 중에 그 절반은 집에 머물렀다. 본래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沖澹)하여 화려함(紛華)을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연회와 음악(燕樂)을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이 혹 술자리를 마련하고 초청하면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넓은 옷과 큰 띠(褒衣博帶)⁵⁴ 차림으로 종일 단정히 앉아, 비록 편안히 쉬는(宴閑) 때에도 일찍이 게으른 모습(怠容)이 없었다. 평소 청탁(關節)⁵⁵을 행하지 않았고, 시골에 살 때도 털끝만큼의 일도 주현(州縣)에 부탁하지 않았다. 자제(子弟)를 가르침에 화목하면서도 실제로는 엄격하여, 음식과 의복에서부터 나아가고 물러나는 용모와 행동거지(進退容止)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살피고 점검하여, 조금이라도 이치에 해로운 일은 반드시 금지하였다. 가지고 다니는 협판(夾板)⁵⁶에 쓰기를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보고 듣는 것(瞻視)을 존엄하게 하며, 말과 행동(言行)을 삼가고, 주색(酒色)을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주석:
54. 포의박대(褒衣博帶): 넓은 옷과 큰 띠. 유학자나 선비의 복장을 가리킨다.
55. 관절(關節): 뇌물이나 청탁을 통해 일을 성사시키는 것.
56. 협판(夾板):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밑에 받치는 판. 또는 중요한 문서나 글귀를 적어 가지고 다니던 판.


원문:
遇人無賢不肖, 皆待以至誠, 而胸中了然不可混。 閨庭之間, 內外斬斬, 禮節分明, 一家之人皆恪遵家法, 不敢踰越。 常時寡默, 言若不出口。 至於臨利害、決是非, 一刀兩段, 截然不可奪。【竝行狀。】

번역문:
사람을 대함에 현명하거나 불초하거나(賢不肖) 상관없이 모두 지극한 정성으로 대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분명하여(了然) 뒤섞이지 않았다. 규문(閨門)과 가정(家庭) 사이에 안팎이 질서정연하고(斬斬) 예절(禮節)이 분명하여,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삼가 가법(家法)을 따라 감히 넘어서지 못하였다. 평소에는 과묵(寡默)하여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는 듯하였다. 이해(利害)에 임하고 시비(是非)를 결단함에 이르러서는 칼로 내리쳐 두 조각을 내듯(一刀兩段)⁵⁷ 단호하여(截然) 빼앗을 수 없었다.【이상은 모두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57. 일도양단(一刀兩段): 한 칼에 두 동강을 냄. 일이나 문제를 명확하고 과단성 있게 처리함을 비유한다.


원문:
常訪李一齋恒, 論許魯齋仕元之非, 一齋以爲行中權, 公曰: “去就之失, 常由於認權爲經。” 議不合而罷。【碣銘。】

번역문:
항상 일재(一齋) 이항(李恒)⁵⁸을 방문하여, 허노재(許魯齋)⁵⁹가 원(元)나라에서 벼슬한 것이 잘못임을 논하였는데, 일재는 중권(中權)⁶⁰을 행한 것이라고 여기자, 공이 말하였다. “거취(去就)⁶¹의 잘못은 항상 권도(權道)를 경도(經道)⁶²로 잘못 인식하는 데서 말미암는다.” 의논이 합치되지 않아 그만두었다.【갈명(碣銘)에서 인용.】

주석:
58. 이항(李恒, 1499-1576):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59. 허노재(許魯齋): 허형(許衡, 1209-1281). 중국 원(元)나라 초기의 학자, 정치가. 자는 중평(仲平), 호는 노재(魯齋).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를 섬겨 유학(儒學) 진흥에 힘썼으나, 이민족 왕조에 출사(出仕)했다는 점에서 후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60. 중권(中權): 권도(權道)에 맞게 행함. 권도(權道)는 정상적인 방법(經道)으로는 일을 처리할 수 없을 때 임시방편으로 쓰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항은 허형의 출사를 당시 상황에 맞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본 것이다.
61. 거취(去就):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나아감.
62. 경(經): 변하지 않는 원칙, 정도(正道). 구봉령은 허형의 출사가 원칙(經)에 어긋나는 것이며, 이를 권도(權)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원문:
李珥見具鳳齡曰: “士林乖張, 人心洶洶, 而人謂公主論云, 果然乎?” 鳳齡曰: “吾病伏一隅, 亦安能主論? 若今日更有所處分, 則時事誤矣, 當靜而鎭之。” 珥曰: “此吾意也。”【《石潭日記》。】

번역문:
이이(李珥)가 구봉령을 만나 말하였다. “사림(士林)이 어그러지고(乖張) 인심(人心)이 흉흉(洶洶)한데, 사람들이 공(公)이 주론(主論)⁶³한다고 이르니, 과연 그러합니까?” 구봉령이 말하였다. “내가 병으로 한구석에 누워 있는데, 또한 어찌 능히 주론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오늘날 다시 어떤 처분(處分)이 있다면 시사(時事)가 잘못될 것이니, 마땅히 조용히 진정시켜야 합니다.” 이이가 말하였다. “이것이 나의 뜻입니다.”【《석담일기(石潭日記)》⁶⁴에서 인용.】

주석:
63. 주론(主論): 여론을 주도함. 당시 동서(東西) 분당(分黨)이 심화되던 상황에서, 구봉령이 특정 당파의 여론을 이끌고 있다는 시각이 있었던 듯하다.
64. 《석담일기(石潭日記)》: 이이(李珥)의 제자이자 처남인 이기(李垍)가 기록한 이이의 언행록.


원문:
先生早以文行見賞於溪上, 忠節之偉, 又爲西厓之所稱述。 古人云: “不逢師涓, 勿與審音。” 惟此數字題品, 豈非先生之師涓乎?【《道東編》。】

번역문:
선생은 일찍이 문행(文行)⁶⁵으로 계상(溪上)⁶⁶에게 인정을 받았고, 충절(忠節)의 위대함은 또 서애(西厓)⁶⁷에게 칭술(稱述)된 바 되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연(師涓)⁶⁸을 만나지 못하면 음률(音律)을 심의(審議)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오직 이 몇 글자의 제평(題品)⁶⁹이 어찌 선생의 사연(師涓)이 아니겠는가?【《도동편(道東編)》⁷⁰에서 인용.】

주석:
65. 문행(文行): 학문과 품행. (주석 28 참조)
66. 계상(溪上): 시냇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 (주석 27 참조)
67.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힘썼다.
68. 사연(師涓): 고대 중국 위(衛)나라 영공(靈公) 때의 악관(樂官). 음률에 매우 정통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사물의 진가를 알아보는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을 비유한다.
69. 제품(題品): 서화(書畫)나 문장(文章) 등에 대해 논평하는 것. 여기서는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이 구봉령에 대해 내린 평가를 가리킨다.
70. 《도동편(道東編)》: 퇴계 이황의 문인(門人)들의 행적과 학문 세계를 기록한 책.

이산해(李山海)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山海
字汝受, 號鵝溪, 韓山人。 嘉靖己亥生。 明宗十三年戊午, 中司馬。 辛酉登第。 賜暇湖堂, 歷弘文正字、吏曹佐郞、舍人、直提學、藝文應敎、承旨、大司成、三司長官、吏・兵判、右¹贊成。 策光國、平難兩勳, 封鵝城府院君。 典文衡。 官至領議政。 己酉卒, 年七十一。

번역문:
이산해(李山海)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이며, 한산(韓山) 사람이다.¹ 명(明) 가정(嘉靖) 기해년(己亥年, 1539)에 태어났다. 명종(明宗) 13년 무오년(戊午年, 1558)에 사마시(司馬試)²에 합격하였고, 신유년(辛酉年, 1561)에 문과(文科)³에 급제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⁴를 하였으며,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이조 좌랑(吏曹佐郞), 사인(舍人), 직제학(直提學),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승지(承旨), 대사성(大司成), 삼사(三司)⁵의 장관⁶, 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 우찬성(右贊成)⁷을 역임하였다. 광국공신(光國功臣)⁸과 평난공신(平難功臣)⁹ 양쪽 공훈에 책록되어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¹⁰에 봉해졌다. 문형(文衡)¹¹을 관장하였고, 관직은 영의정(領議政)¹²에 이르렀다. 기유년(己酉年, 1609)에 졸(卒)하니, 향년 71세였다.

주석:

  1. 한산인(韓山人): 본관(本貫)이 한산(韓山)임을 나타낸다.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2.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과거 제도의 하나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를 말한다. 여기에 합격해야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大科)인 문과(文科)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3. 문과(文科): 조선 시대 관리를 선발하던 과거(科擧)의 본과(本科). 대과(大科)라고도 한다.
  4.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 시대에 젊고 재능 있는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 일명 호당(湖堂))에서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큰 영예로 여겨졌다.
  5. 삼사(三司): 조선 시대 언론 기능을 담당하던 세 관청, 즉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한다.
  6. 삼사 장관(三司長官):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가리킨다. 이산해는 이 세 직책을 모두 역임했다.
  7. [주-D001] 右 : 《아계유고(鵝溪遺稿)》의 〈아계이상국연보(鵝溪李相國年譜)〉, 《선조실록(宣祖實錄)》 18년 4월 28일 및 21년 10월 29일 기록에 근거할 때 “좌(左)”가 되어야 한다. 즉 좌찬성(左贊成)이 옳다. 좌찬성은 의정부의 정1품 관직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이다.
  8. 광국공신(光國功臣):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기축옥사)을 평정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이산해는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9. 평난공신(平難功臣): 1590년(선조 23) 건저 문제(建儲問題, 세자 책봉 문제)로 일어난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책봉된 공신. 이산해는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0.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 공신에게 내려진 작위.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봉작(封爵)이다. 아성(鵝城)은 그의 호 아계(鵝溪)와 관련지어 붙인 봉호(封號)로 보인다.
  11.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는 권한 또는 그 직책.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겸임하며 문단(文壇)과 학계(學界)의 최고 권위를 상징했다.
  12. 영의정(領議政):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원문:
生有異質, 未解語, 已知書。 家有東海翁草書掛壁, 引姆抱看, 欣然指畫。 五歲, 始受學, 季父土亭公敎以《太極圖》, 一語便知天地陰陽之理, 指圖論說。 嘗讀書忘食, 土亭公念其傷也, 令輟讀待食。 公作詩曰: “腹飢猶悶況心飢? 食遲猶悶況學遲? 家貧尙有治心藥, 須待靈臺月出時。” 土亭公益奇之。

번역문: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말을 아직 배우기 전에 이미 글자를 알았다. 집에 동해옹(東海翁)¹³의 초서(草書)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유모(乳姆)를 끌어당겨 안겨서 보기를 청하고는 기뻐하며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다섯 살에 비로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계부(季父) 토정공(土亭公)¹⁴이 《태극도(太極圖)》¹⁵를 가르치자 한마디 말에 곧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아듣고, 그림을 가리키며 논설(論說)하였다. 일찍이 책을 읽느라 식사를 잊으니, 토정공이 그의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여 읽기를 멈추고 식사를 기다리게 하였다. 공(公)이 시를 지어 말하였다. “배고픔도 오히려 답답한데 하물며 마음의 굶주림이랴? 밥 늦음도 오히려 답답한데 하물며 배움의 더딤이랴? 집은 가난해도 마음 다스릴 약은 아직 있으니, 모름지기 영대(靈臺)¹⁶에 달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지.” 토정공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주석:
13. 동해옹(東海翁): 누구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다. 호(號)에 동해(東海)가 들어가는 인물이거나, 단순히 동해 바닷가에 사는 노인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14. 계부(季父) 토정공(土亭公): 숙부(叔父)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을 가리킨다. 이산해는 이지함의 형인 이지번(李之蕃)의 아들이다.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저명한 학자이자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다.
15. 《태극도(太極圖)》: 중국 북송(北宋)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가 그린 그림과 그 해설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말한다. 우주의 생성 원리와 인간 본성을 태극(太極)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설명한 성리학의 핵심 도상(圖像)이다.
16. 영대(靈臺): 마음(心)을 가리키는 말. 《장자(莊子)》 〈경상(庚桑)〉 편 등에 보인다. 마음의 수양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경지를 달이 떠오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원문:
六歲, 能作大字書, 握筆蹣跚揮灑, 字形壯偉, 若龍拏虎攫之狀。 一時名公、鉅人, 無不招尋求筆蹟, 指爲神童。

번역문:
여섯 살에 큰 글씨(大字書)를 쓸 수 있었는데, 붓을 잡고 비틀거리며 휘두르는데도 글자의 형태가 장대하고 위엄 있어, 마치 용이 꿈틀거리고 호랑이가 할퀴는 듯한 모양이었다. 당시의 이름난 공경(名公)들과 저명인사(鉅人)들이 그를 불러 글씨(筆蹟)를 구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그를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원문:
七歲, 作“一犬吠, 二犬吠, 三犬亦隨吠。 童言山外月如鏡, 滿庭樹影閑婆娑”。

번역문:
일곱 살에 “개 한 마리 짖으니, 두 마리 짖고, 세 마리 또한 따라 짖네. 아이는 말하네, 산 너머 달이 거울 같다고. 뜰 가득한 나무 그림자 한가로이 춤추네.”라는 시를 지었다.


원문:
壬戌, 拜弘文正字。 翌日, 明廟引見, 卽榻前, 命題景福宮大額。

번역문:
임술년(壬戌年, 1562)¹⁷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¹⁸에 제수되었다. 다음 날 명종(明廟)¹⁹께서 인견(引見)²⁰하시고, 평상(平牀)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경복궁(景福宮)의 대액(大額)²¹에 글을 짓도록 명하셨다.

주석:
17. 임술년(壬戌年): 1562년. 이산해가 24세 되던 해이다.
18.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홍문관(弘文館)의 정9품 관직. 문한(文翰)과 경연(經筵) 등을 담당하는 홍문관의 초임직이다.
19. 명묘(明廟): 명종(明宗)의 묘호(廟號). 여기서는 명종 임금을 가리킨다.
20. 인견(引見): 임금이 신하를 직접 만나보는 것.
21. 대액(大額): 궁궐이나 문루(門樓) 등에 거는 큰 현판(懸板). 여기에 들어갈 글귀나 명칭을 짓는 것은 높은 학식과 문장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원문:
宣廟亟稱。 公言若不出口, 體若不勝衣, 一團眞氣充積於中, 望之常起敬。 批公辭章曰: “聞卿爲吏判, 門外雀羅可設, 予將何以報卿?”

번역문:
선조(宣廟)²²께서 자주 칭찬하셨다. 공(公)은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는 듯하고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한 덩어리 참된 기운(眞氣)이 속[中]에 가득 차 있어서, 바라보면 항상 공경심이 일어났다. 공(公)의 사직 상소[辭章]에 비답(批答)하여 말씀하시기를, “경(卿)이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니 문밖에 새그물을 칠 만하다²³고 들었는데, 내 장차 무엇으로 경에게 보답하겠는가?”라고 하셨다.

주석:
22. 선묘(宣廟): 선조(宣祖)의 묘호. 여기서는 선조 임금을 가리킨다.
23. 문외작라가설(門外雀羅可設): 문밖에 새그물을 칠 만하다는 뜻. 권력 있는 자리에 올라도 사사로운 청탁이나 방문객이 없어 문전이 한산함을 이르는 고사성어이다. 이산해가 이조판서(吏曹判書, 인사권을 담당하는 핵심 요직)가 되었음에도 청렴하고 공정하여 청탁하는 사람이 없음을 칭찬하는 말이다.


원문:
有一輪對官進啓: “一人久秉銓柄, 恐權勢偏重。” 上怒曰: “汝不聞吏判爲予社稷臣乎?” 後公臨政, 每擬其人。 上謂公曰: “彼欲害卿而卿用之, 卿量不可及矣。”

번역문:
어떤 윤대관(輪對官)²⁴이 나아가 아뢰기를, “한 사람이 오랫동안 전형(銓衡)의 권한²⁵을 잡고 있으니, 권세가 한쪽으로 치우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조판서가 나의 사직지신(社稷臣)²⁶임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셨다. 후에 공(公)이 정사를 맡았을 때 매번 그 사람을 관직에 추천하였다[擬]. 상(上)께서 공(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저 자가 경(卿)을 해치려 하였는데도 경이 그를 등용하니, 경의 도량(度量)은 따라갈 수가 없구나.”라고 하셨다.

주석:
24. 윤대관(輪對官): 정해진 차례에 따라 돌아가며 임금을 대면하여 정사를 아뢰던 관리.
25. 전병(銓柄): 관리 임용의 권한. 전형(銓衡)의 권한. 주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관장했다.
26. 사직지신(社稷臣): 사직(社稷, 국가)을 지키고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하. 임금이 신하에게 내릴 수 있는 최상의 칭찬 중 하나이다.


원문:
嘗謂: “守令, 民之所托命者, 不擇守令, 是殘民。” 每當一窠, 必求得其人, 得之則喜若家事, 不得則晨夜思度, 或秉燭箚記, 待明而入。

번역문:
일찍이 말하기를, “수령(守令)²⁷은 백성이 목숨을 맡기는 자이니, 수령을 잘 가려 뽑지 않는 것은 백성을 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매번 한 자리[窠]²⁸가 날 때마다 반드시 적임자를 구하였는데, 얻으면 집안일처럼 기뻐하고, 얻지 못하면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리다가, 혹은 촛불을 잡고 차기(箚記)²⁹를 작성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려 입궐하였다.

주석:
27. 수령(守令): 지방관을 통칭하는 말. 부윤(府尹), 목사(牧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을 가리킨다.
28. 과(窠): 빈자리, 관직의 공석.
29. 차기(箚記): 간단한 기록이나 메모. 여기서는 관직 후보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은 메모를 의미한다.


원문:
其流落在外也, 或匹馬單童, 往來山水, 有時對景感時, 寓興遣懷, 輒形諸吟詠, 下筆凌厲飛動, 多自得者。 善作水墨圖, 不以示人。 時遇古畫, 融神賞會, 看書十行俱下, 亦未見嘗讀書也。

번역문:
그가 외직(外職)에 유락(流落)³⁰해 있을 때에는, 간혹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동자(童子)만 데리고 산수(山水)를 왕래하였는데, 때로는 경치를 대하고 시국을 느끼며 흥취를 붙이고 회포를 풀며 문득 시를 읊었다. 붓을 대면 기세가 매섭고 날아 움직이는 듯하여 스스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묵도(水墨圖)³¹를 잘 그렸으나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때로 옛 그림을 만나면 정신을 몰입하여 감상하고 이해하였으며, 책을 볼 때는 열 줄을 함께 내려 읽었으나, 또한 일찍이 책을 읽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석:
30. 유락(流落): 타향에서 떠돌아다님. 여기서는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외직에 있거나 유배, 파직 등으로 관직 생활에서 벗어나 있던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1. 수묵도(水墨圖): 먹의 농담(濃淡)만으로 그린 그림.


원문:
河西金先生謂公之詩文: “譬如空中樓閣, 無非出自天分, 若着工讀書, 則便是塵土語。”

번역문: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³²이 공(公)의 시문(詩文)에 대해 평하기를, “비유하자면 공중에 지은 누각(空中樓閣)³³과 같아서 천부적인 재능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약 공들여 책을 읽는다면 도리어 진부한 말[塵土語]³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32. 하서 김 선생(河西 金先生):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저명한 성리학자이자 문인이다.
33. 공중누각(空中樓閣): 공중에 지은 누각이라는 뜻으로, 현실적 기초가 없는 허황된 사물이나 생각을 비유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기발하며 인위적인 노력이 더해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경지를 칭찬하는 의미로 쓰였다.
34. 진토어(塵土語): 먼지나 흙과 같은 말. 즉, 세속적이고 진부하며 독창성이 없는 표현을 의미한다. 김인후는 이산해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학문적 노력(讀書)이 그의 천재성을 해칠 수 있다고 평한 것이다.


원문:
少負時望, 早致宰列, 未有一瓦之覆、一壟之植。 常僦屋以居, 荒涼艱楚, 客至或坐馬韉, 天雨以席蔽漏, 縕袍麤食, 晏如也。【竝李漢陰德馨撰墓誌。】

번역문:
젊어서부터 당시의 명망(時望)을 지녀 일찍이 재상(宰相)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지붕을 덮을 기와 한 장, 밭을 갈 만한 밭두둑 하나도 소유하지 않았다. 항상 집을 세내어(僦屋) 살았는데, 집이 황량하고 살림이 궁핍하여 손님이 오면 간혹 말안장(馬韉)에 앉고, 비가 오면 돗자리로 새는 곳을 가렸으며, 해진 솜옷[縕袍]을 입고 거친 음식[麤食]을 먹으면서도 태연자약(晏如)하였다.【이상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³⁵이 지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35.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1613): 조선 중기의 문신, 정승. 이산해와 동시대 인물이며, 그의 청렴함을 높이 평가하여 묘지명에 기록하였다.


원문:
以李山海爲刑曹判書, 上疏辭職, 不允。 拜恩後, 辭免至三, 皆不允。 山海少有文名, 出宦途後, 踐歷淸要, 馴至六卿。 爲人淸愼而少氣節, 巽懦避人言, 故無忤於上下, 不失物望。 自東西分黨之後, 議論一從東人, 不能樹立。 如李珥、鄭澈皆是執友, 而不恤相負, 識者笑之。 李珥語人曰: “吾友汝受不久必作政丞矣。” 人問其故, 珥曰: “我國政丞必淳謹, 無才氣無所猷爲, 而挾以淸名者居之, 汝受其人也。”

번역문:
이산해를 형조판서(刑曹判書)³⁶로 삼으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명 은혜에 감사드린 후 사직하여 면직을 청하기를 세 번에 이르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산해는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관직에 나아간 뒤 청요직(淸要職)³⁷을 두루 거쳐 마침내 육경(六卿)³⁸의 지위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신중(淸愼)하나 기개와 절개(氣節)가 부족하고, 유순하고 나약하여(巽懦) 남의 비판을 피하였으므로, 윗사람과 아랫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아 세간의 명망(物望)을 잃지 않았다. 동서(東西)로 당(黨)이 나뉜³⁹ 이후로는 의론(議論)이 한결같이 동인(東人)⁴⁰을 따랐고, 자신의 입장을 확립하지 못했다. 이이(李珥)⁴¹, 정철(鄭澈)⁴² 같은 이들은 모두 절친한 벗[執友]이었으나, 그들을 저버리는 것을 개의치 않았으므로 식견 있는 자들이 비웃었다. 이이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벗 여수(汝受, 이산해의 자)는 머지않아 반드시 정승(政丞)⁴³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이이가 말하였다. “우리나라 정승은 반드시 순박하고 근신(淳謹)하며, 재능과 기개(才氣)가 없고 꾀하는 바가 없으면서도, 청렴하다는 명성(淸名)을 지닌 자가 차지하는데, 여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주석:
36. 형조판서(刑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법률, 형벌, 노비 등에 관한 업무를 총괄했다.
37. 청요직(淸要職):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학문과 문벌이 중요시되는 명예로운 자리(예: 홍문관, 예문관)와 권력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자리(예: 이조, 병조, 승정원 등)를 의미한다.
38. 육경(六卿): 육조(六曹: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判書)를 통칭하는 말. 조선 시대 최고위 관료층을 의미한다.
39. 동서분당(東西分黨): 1575년(선조 8) 김효원(金孝元)을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동인)과 심의겸(沈義謙)을 중심으로 한 기성 사림(서인) 사이에 발생한 대립으로 시작된 조선 시대 최초의 본격적인 붕당(朋黨). 이후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40. 동인(東人): 조선 선조 때 형성된 붕당의 하나. 주로 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산해는 동인의 영수로 활동했다.
41. 이이(李珥, 1536-1584): 호는 율곡(栗谷).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서인(西人)의 영수로 간주된다.
42. 정철(鄭澈, 1536-1593): 호는 송강(松江).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가사 문학의 대가. 서인의 핵심 인물이었다.
43. 정승(政丞): 조선 시대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칭하는 말. 최고 재상직이다. 이이의 평가는 이산해의 청렴함과 신중함은 인정하지만, 정치적 결단력이나 추진력이 부족하여 오히려 최고위직에 오르기 쉽다고 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원문:
李山海謝病不出。 李珥往問之曰: “公受國厚恩, 當此國勢危急之時, 當盡職以報君恩, 何爲引疾以孤士望乎?” 山海曰: “冢宰是一國重任, 我何以當之?” 珥曰: “然則誰可當者? 二品以上皆是闒茸充斥, 如公幸拜此職, 甚愜士望, 公勿强辭。 且公旣在六卿之列, 必不能休官, 則惟吏曹合於公才, 他職則恐不能盡職。 如戶部、刑曹, 非公才可辨, 吏曹則公必不循私情, 大張公道矣。 此豈少補乎? 近來政事溷濁, 願公勉出, 一洗舊染之習。” 山海笑曰: “何以細知吾才乎? 公言甚切, 我當更思。” 不久而山海出視事, 爲政不用請托, 門庭冷落, 如寒士家。 珥聞之, 曰: “汝受爲政, 甚强人意, 可以求世道矣。”

번역문:
이산해가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 이이가 찾아가서 묻기를, “공(公)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지금과 같이 국세(國勢)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직분을 다하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터인데, 어찌 병을 핑계로 사림(士林)의 기대를 저버리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산해가 말하기를, “총재(冢宰)⁴⁴는 한 나라의 중임(重任)인데,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이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2품 이상은 모두 용렬한 자(闒茸)들로 가득 차 있는데, 공과 같은 분이 다행히 이 직책에 제수되니 사림의 기대에 매우 부합합니다. 공께서는 굳이 사양하지 마십시오. 또한 공께서 이미 육경(六卿)의 반열에 있으니 반드시 휴관(休官)할 수는 없을 터인즉, 오직 이조(吏曹)만이 공의 재능에 합당하고, 다른 직책은 아마도 직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호조(戶部)나 형조(刑曹) 같은 곳은 공의 재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이조에서는 공께서 반드시 사사로운 정(私情)을 따르지 않고 공도(公道)를 크게 펼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작은 보탬이 아니겠습니까? 근래 정사가 혼탁하니, 원컨대 공께서는 힘써 출사하시어 옛 폐단(舊染之習)을 한번 씻어내십시오.” 이산해가 웃으며 말하였다. “어찌 나의 재능을 그리 자세히 아십니까? 공의 말씀이 매우 간절하니,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머지않아 이산해가 출사하여 정사를 보니, 정사를 행함에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아 문정(門庭)이 한미한 선비의 집처럼 냉락(冷落)하였다. 이이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여수(汝受)의 정사(政事)는 사람들의 기대에 매우 부합하니, 세도(世道)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44. 총재(冢宰): 백관(百官)을 총괄하는 재상. 여기서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大司憲李珥因入侍經席白上曰: “凡人各有所能。 如李山海, 平時任職居官, 無以踰人。 及爲銓判, 盡心厥職, 除授一從公論, 請托一切不行, 門庭冷落如寒士家, 只以聞見善士, 以淸仕路爲心。 若如此數年, 則人心世道, 庶幾可變矣。” 上曰: “山海有才氣, 而無矜能底意思, 予嘗以爲有德之人也。”【竝《石潭日記》。】

번역문:
대사헌(大司憲)⁴⁵ 이이가 경연(經筵)⁴⁶에 입시(入侍)한 기회에 상(上)께 아뢰었다. “무릇 사람은 각기 잘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산해 같은 경우, 평소에 직책을 맡아 관직에 있을 때는 남보다 뛰어난 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판(銓判)⁴⁷이 되어서는 그 직책에 마음을 다하여, 제수(除授)⁴⁸를 한결같이 공론(公論)에 따르고 청탁(請托)을 일절 행하지 않아 문정(門庭)이 한미한 선비의 집처럼 냉락(冷落)하며, 다만 보고 들은 선량한 선비들을 등용하여 벼슬길[仕路]을 맑게 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몇 년을 한다면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거의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이산해는 재능과 기개(才氣)가 있으면서도 능력을 뽐내려는 생각이 없으니, 내 일찍이 덕(德)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이상은 《석담일기(石潭日記)》⁴⁹에서 인용】

주석:
45.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46.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강론하고 국정(國政)을 논의하던 자리.
47. 전판(銓判): 전조판서(銓曹判書), 즉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가리킨다.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48. 제수(除授): 관직을 임명하는 것.
49. 《석담일기(石潭日記)》: 율곡 이이가 쓴 일기. 자신의 정치 활동, 학문 연구, 주변 인물들과의 교류 등을 기록하였다. 조선 중기 정치사와 사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문:
李貴上疏爲亡師李珥訟冤。 上招貴問啓, 貴回啓曰: “有相識義謙非珥之比, 如李山海者矣。 時輩若以識義謙爲珥之罪, 則先攻此人可也。 徒以不忤時論, 故不攻此人, 而獨罪李珥。 臣之有憾於山海者, 珥之不與義謙締結, 他人雖或不知, 山海則必知之矣。 然而山海以珥故舊, 恝視被誣, 不曾一言發明其本心, 此必九原有憾也。 殿下若招山海, 問其相識義謙與珥孰爲淺深, 則天日在上, 豈敢有隱哉? 山海贈義謙詩曰: ‘洛下春來重見札, 山蹊夜墨慣相迎。 云云。’ 此果不識義謙之人乎? 此臣疏所謂曉夕相追逐者也。” 時山海爲吏判, 啓曰: “小臣壬戌秋入玉堂, 沈義謙癸亥爲玉堂, 甲子春, 又爲書堂同番, 自此同宿於玉堂、書堂, 非不久矣。 不曾追逐, 又不參其論議, 故甚被疎忌, 常詆臣曰: ‘李某非玉堂, 乃土堂也。’ 此則人所共聞也。 然而義謙待人極厚, 凡在同朝之士, 無不相結, 心雖忌臣, 豈不欲外示慇懃乎? 臣丁憂時, 義謙爲開城留守, 因人致慰, 及爲湖南方伯, 求別詩於臣, 且躬到臣家, 臣或諱而不見。 臣適罷仕暮還, 義謙伺候於臣家後洞山路而迎之, 厥後又乘昏來見。 赴湖南後, 伻書又追索別詩, 臣不敢堅托, 竟以一詩答之。 其贈義謙之句, 大抵是臣直述也。 吟詠之間, 不無情外之辭, 被人詆斥, 皆臣自取。” 答曰: “予嘗自詑得人, 以爲國家之不至顚覆者, 能用卿等數人故耳。 安可以一書生之言, 有所疑阻轉撓乎? 原其人之志, 不過痛厥師之被誣於時輩, 叫閽陳疏, 亦無害也。 卿須勿與相較, 但體予委寄之眷, 盡心國事。”【《休窩雜纂》。】

번역문:
이귀(李貴)⁵⁰가 상소를 올려 돌아가신 스승 이이(李珥)의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호소[訟冤]하였다. 상(上)께서 이귀를 불러 하문(下問)하시자, 이귀가 회계(回啓)하여 아뢰었다. “심의겸(沈義謙)⁵¹과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은 이이보다 이산해 같은 사람입니다. 당시 무리들이 만약 심의겸을 안다는 것을 이이의 죄로 삼는다면, 먼저 이 사람(이산해)을 공격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만 시론(時論)에 거슬리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은 공격하지 않고 유독 이이만 죄주는 것입니다. 신(臣)이 이산해에게 유감(有憾)이 있는 것은, 이이가 심의겸과 결탁하지 않았음을 다른 사람은 혹 알지 못할지라도 이산해는 반드시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산해는 이이의 옛 친구[故舊]이면서도 무고(誣告)당하는 것을 냉담하게 보고[恝視] 일찍이 한마디 말로 그 본심을 밝혀주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구천(九原)⁵²에서도 유감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 만약 이산해를 불러 심의겸과 이이 중 누구와 더 친분이 깊고 얕은지를 물으신다면, 하늘의 해가 위에 있는데 어찌 감히 숨기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산해가 심의겸에게 준 시에 ‘낙양(洛下)에 봄 오니 다시 편지 보게 되고, 산길에 밤 깊어도 맞이함에 익숙했네[山蹊夜墨慣相迎]⁵³. 운운.’이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과연 심의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이것이 신의 상소에서 이른바 ‘새벽과 저녁으로 서로 추종(追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산해가 이조판서였는데, 아뢰었다. “소신(小臣)은 임술년(1562) 가을에 옥당(玉堂)⁵⁴에 들어갔고, 심의겸은 계해년(1563)에 옥당이 되었으며, 갑자년(1564) 봄에는 또 서당(書堂)⁵⁵의 동료[同番]가 되었으니, 이때부터 옥당과 서당에서 함께 숙직한 것이 짧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추종한 적이 없었고, 또한 그 의론(論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소외되고 꺼리는 바가 되어, 항상 신을 헐뜯어 말하기를 ‘아무개 이씨는 옥당(玉堂)이 아니라 토당(土堂)⁵⁶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람들이 다 함께 들은 바입니다. 그러나 심의겸은 사람을 대함이 지극히 후하여, 무릇 같은 조정에 있는 선비는 서로 결탁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마음으로는 비록 신을 꺼렸지만 어찌 겉으로 은근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부모상[丁憂] 중일 때 심의겸이 개성유수(開城留守)였는데, 사람을 시켜 위로를 전했고, 호남 방백(湖南方伯)⁵⁷이 되어서는 신에게 이별의 시를 구하였으며, 또한 몸소 신의 집에 이르렀으나 신이 혹 피하여 만나지 않았습니다. 신이 마침 벼슬을 그만두고 저물녘에 돌아오는데, 심의겸이 신의 집 뒷동네 산길에서 엿보아 기다리다가 맞이하였고, 그 후 또 어두울 때를 타서 찾아왔습니다. 호남으로 부임한 후 편지를 보내 또 이별의 시를 재촉하기에, 신이 감히 완강히 거절하지 못하고 마침내 시 한 수로 답하였습니다. 그 심의겸에게 준 시구(詩句)는 대체로 신이 사실대로 서술한 것입니다. 시를 읊는 사이에 정(情) 외의 표현[情外之辭]⁵⁸이 없지 않아 사람들에게 헐뜯김을 당하니, 이는 모두 신이 자초한 것입니다.” 상(上)께서 답하셨다. “내 일찍이 인재를 얻었음을 스스로 자랑하며 국가가 전복되지 않음에 이른 것은 경(卿) 등 몇 사람을 등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어찌 한 서생(書生)의 말 때문에 의심하고 막히거나 동요되는 바가 있겠는가? 그 사람(이귀)의 뜻을 살펴보면, 그 스승이 당시 무리에게 무고당한 것을 통탄하여 대궐에 호소하며 상소를 올린 것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해로울 것은 없다. 경은 모름지기 서로 다투지 말고, 다만 내가 중임을 맡긴 뜻[委寄之眷]을 받들어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라.”【이상은 《휴와잡찬(休窩雜纂)》⁵⁹에서 인용】

주석:
50. 이귀(李貴, 1557-1633): 조선 중기의 문신.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서인(西人)의 중요 인물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이기도 하다.
51. 심의겸(沈義謙, 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다. 김효원(金孝元)과의 갈등이 동서 분당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인의 영수로 간주된다. 이이와 심의겸의 관계는 복잡했는데, 이이는 양측의 조정을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서인으로 분류되었다.
52. 구원(九原): 옛날 중국 진(晉)나라의 경대부(卿大夫)들의 묘역이 있던 곳. 전하여 무덤, 저승을 뜻한다.
53. 산혜야묵관상영(山蹊夜墨慣相迎): 이 구절은 이산해가 심의겸에게 준 시의 일부이다. 이귀는 이 구절을 근거로 두 사람의 친밀함을 주장했으나, 이산해는 의례적인 표현이었다고 해명했다. '묵(墨)'은 어두울 '매(昧)'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야매(夜昧)'는 밤이 어두움을 뜻한다.
54.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55. 서당(書堂):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곳.
56. 토당(土堂): 흙으로 만든 집. 격이 낮고 보잘것없음을 비유한다. 심의겸이 이산해를 폄하하여 부른 말이다.
57. 호남 방백(湖南方伯): 호남(湖南), 즉 전라도(全羅道)의 관찰사(觀察使)를 가리킨다. 방백(方伯)은 관찰사의 별칭이다.
58. 정외지사(情外之辭): 실제 감정 이상의 과장된 표현이나 의례적인 수사(修辭).
59. 《휴와잡찬(休窩雜纂)》: 조선 중기의 문신 허봉(許篈, 1551-1588)의 저작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모아 엮은 책이다.


원문:
李鵝溪四歲, 能讀書。 五六歲, 能作詩, 書屛簇, 名振都下。 二十三, 釋褐, 歷揚淸顯, 頗淸愼, 得時望。 旣登台座, 生患失之心。 有金公諒者, 金嬪之弟也。 金嬪寵冠後宮。 山海奴事公諒以固位, 昏夜乞哀, 不恤吮舐, 遂得罪淸議。 壬辰之亂, 李以首相, 建西幸之策, 大駕旣西, 從公論竄于平海, 而聖眷不衰。 乙未, 鄭政丞琢請放還, 蓋迎上意也。 李求復入, 時柳西厓當國沮之, 李怨入骨髓, 與其黨謀去之。 至戊戌, 遂逐西厓而代之, 獨亂朝廷。 上覺之, 命黜門外, 十年不召。

번역문:
이아계(李鵝溪, 이산해)는 네 살에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대여섯 살에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병풍과 족자[屛簇]에 글씨를 써서 명성이 도성 안에 떨쳤다. 스물세 살에 처음 벼슬길[釋褐]⁶⁰에 나아가 청현직(淸顯職)⁶¹을 두루 거쳤는데, 자못 청렴하고 신중하여(頗淸愼) 당시의 명망을 얻었다. 재상(臺座)⁶²의 자리에 오르자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患失之心]이 생겼다. 김공량(金公諒)⁶³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김빈(金嬪)⁶⁴의 동생이었다. 김빈은 총애가 후궁 중에서 으뜸이었다. 이산해는 김공량을 종처럼 섬겨[奴事] 지위를 굳히려 하였고, 어두운 밤에 애걸하며 비위를 맞추는 것[吮舐]⁶⁵도 마다하지 않아, 마침내 청의(淸議)⁶⁶에 죄를 얻었다. 임진왜란(壬辰之亂)⁶⁷ 때 이산해는 수상(首相)⁶⁸으로서 서쪽으로 피난[西幸]⁶⁹할 계책을 세웠는데, 임금의 행차[大駕]가 서쪽으로 떠나자 공론(公論)에 따라 평해(平海)로 유배되었으나, 임금의 총애[聖眷]는 쇠하지 않았다. 을미년(乙未年, 1595)에 정승 정탁(鄭琢)⁷⁰이 방환(放還)⁷¹을 청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상(上)의 뜻을 맞춘 것이었을 것이다. 이산해가 다시 조정에 들어가기를 구하였으나, 당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⁷²이 국정을 담당하며 이를 저지하자, 이산해의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그의 당여(黨與)들과 함께 유성룡을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598)에 이르러 마침내 서애를 내쫓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조정(朝廷)을 오로지 어지럽혔다. 상(上)께서 이를 깨닫고 문밖으로 내쫓도록 명하여 10년 동안 부르지 않았다.

주석:
60. 석갈(釋褐): 갈옷(褐衣, 평민의 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선비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61. 청현직(淸顯職): 청요직(淸要職)과 유사한 의미. 맑고(淸) 드러나는(顯) 중요한 관직.
62. 대좌(臺座): 재상(宰相)의 자리를 가리킨다. 삼정승(三政丞)이나 그에 준하는 고위 관직을 의미한다.
63. 김공량(金公諒, ?-1592):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씨(順嬪金氏)의 동생. 누이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렸다.
64. 김빈(金嬪): 선조의 후궁 순빈 김씨(順嬪金氏).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아버지)의 생모이다.
65. 연지(吮舐): 상처를 빨고 핥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아첨하며 비위를 맞추는 비굴한 행동을 비유한다.
66. 청의(淸議): 공정하고 깨끗한 논의. 주로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가리킨다.
67. 임진지란(壬辰之亂): 1592년(선조 25)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1598년까지 이어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68. 수상(首相): 영의정(領議政).
69. 서행(西幸):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 가는 것.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피난 간 일을 가리킨다.
70. 정승 정탁(鄭政丞琢, 1526-1605): 호는 약포(藥圃).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온건한 성품으로 당쟁 속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노력했다.
71. 방환(放還): 귀양에서 풀어 돌려보내는 것.
72.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정승.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 동인이었으나 남인(南人)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산해가 영수로 있던 북인(北人) 세력과 대립했다.


원문:
壬辰, 李鵝溪爲首相, 倡西幸之計。 公議攻之, 駕至松都, 命竄之。 黃判書愼撰諭軍民敎曰“奸臣首倡幸蜀, 國忠之頭可懸”, 指鵝溪也。 鵝溪諂諛固寵, 植黨倍公, 其禍至于今益甚, 罪固難赦, 至以西幸之擧幷爲罪案, 彼豈肯心服哉? 昇平日久, 人不知兵, 賊鋒未至, 聞聲崩潰, 以空闊傾圮之都城、市井不敎之子弟, 可以當秀吉之鋒銳耶? 《孟子》效死勿去之言, 非是之謂也。 靖康之難, 种師道請委城出避, 衆議以爲老怯, 竟取靑城之辱, 此固往事之可鑑者也。 我意鵝溪西狩之策, 其有功於宗社甚大, 不可幷致訾毁也。【竝《涪溪記聞》。】

번역문:
임진년(壬辰年, 1592)에 이아계(李鵝溪)가 수상(首相)으로서 서쪽으로 피난[西幸]할 계책을 앞장서 주장하였다. 공의(公議)가 이를 공격하여, 임금의 행차[駕]가 송도(松都)⁷³에 이르자 그를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판서 황신(黃愼)⁷⁴이 지은 군민(軍民)에게 타이르는 교서[諭軍民敎]에 “간신(奸臣)이 맨 먼저 촉(蜀)으로 피난 가기를 주장하였으니, 나라의 충신(國忠)⁷⁵이라면 그 머리를 베어 매달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계(鵝溪)를 가리킨 것이다. 아계가 아첨하여 총애를 굳히고 당파를 심어 공(公)을 배반하였으니 그 화(禍)가 지금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 죄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지만, 서쪽으로 피난 간 일[西幸之擧]까지 아울러 죄안(罪案)으로 삼는 데 이르러서는, 그가 어찌 기꺼이 마음으로 복종하겠는가?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되어 사람들이 전쟁을 몰랐고, 적의 칼날[賊鋒]이 이르기도 전에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내렸으니, 텅 비고 무너져가는 도성(都城)과 시정(市井)의 교화되지 않은 자제들로써 히데요시(秀吉)⁷⁶의 날카로운 칼날을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맹자(孟子)》의 ‘죽기를 각오하고 떠나지 말라[效死勿去]’⁷⁷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정강(靖康)의 난(難)⁷⁸ 때 종사도(种師道)⁷⁹가 성(城)을 맡기고 나가 피할 것을 청하였으나, 여러 의론이 늙고 겁 많다고 여겨 끝내 청성(靑城)의 치욕⁸⁰을 당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지나간 일로서 거울삼을 만한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아계의 서쪽 피난[西狩]⁸¹ 계책은 그 종사(宗社)⁸²에 공(功)이 매우 크니, 아울러 헐뜯고 비방해서는 안 된다.【이상은 《부계기문(涪溪記聞)》⁸³에서 인용】

주석:
73. 송도(松都): 개성(開城)의 옛 이름. 선조는 피난길에 개성에 잠시 머물렀다.
74. 판서 황신(判書 黃愼, 1562-1618):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활약했으며,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75. 국충(國忠): 당(唐) 현종(玄宗) 때의 권신 양국충(楊國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문맥상 나라의 충신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양국충은 안사의 난 때 피난을 주장했다가 처형당했다. 황신은 이산해를 양국충에 비유하여 비난한 것이다.
76. 수길(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일본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77. 효사물거(效死勿去): 죽기를 각오하고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뜻.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편에 나온다. 신하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인용되었다. 필자는 임진왜란 초기 상황이 맹자가 말한 경우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78. 정강지난(靖康之難): 1126-1127년 중국 북송(北宋) 시대에 금(金)나라의 침입으로 수도 변경(汴京, 카이펑)이 함락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사로잡혀 북송이 멸망한 사건. 정강(靖康)은 흠종의 연호이다.
79. 종사도(种師道, 1051-1126): 북송 말기의 명장. 금나라 침입 시 수도 방어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0. 청성지욕(靑城之辱): 정강의 난 때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모욕을 당한 일을 가리킨다. 청성(靑城)은 금나라의 도시 이름으로, 두 황제가 압송되어 간 곳 중 하나이다.
81. 서수(西狩): 임금이 서쪽으로 사냥을 간다는 뜻으로, 임금의 피난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서행(西幸)과 같은 의미이다.
82. 종사(宗社):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 국가 또는 왕조를 상징한다.
83. 《부계기문(涪溪記聞)》: 조선 중기의 학자 조경남(趙慶南, 1570-1641)이 쓴 일기 형식의 기록. 임진왜란 전후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글은 이산해의 피난 주장에 대한 옹호론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원문:
兵曹正郞具宬出自內門, 曰: “自上召三司入侍矣。” 時大小官列坐宮門外, 或言: “上若召對, 則政院豈不召入乎?” 判尹洪汝諄謂獻納李廷臣曰: “不可入。 豈具宬所當召乎?” 宬怒曰: “我親承傳敎, 爾等安得坐而不起乎?” 仍執大司諫金瓚手以起之, 諸臺諫遂從而入。 上曰: “今日之事, 誰任其咎?” 言未已, 衆官皆言: “領議政李山海交結金公諒爲心腹, 與洪汝諄、李弘老、趙挺、宋言愼諸人共作表裏, 大肆氣焰, 流毒士流, 誤國敗事。 至於去邠之日, 身爲首相, 旣不請止, 反請速出, 阿諛容悅之態, 到今益甚。 今日之事, 無非此人所致, 請正王法。” 上曰: “李山海雖與公諒相交, 豈以此誤國致寇? 此則不近之說也。” 皆曰: “士大夫去就, 無不與之主張, 山海主於外, 公諒主於內, 一國之人, 孰不知之?” 李憲國曰: “山海乘夜潛往公諒家, 蹤跡詭秘, 豈不痛憤?” 上曰: “山海豈必親往? 此則必非眞實之言也。” 憲國曰: “騎驢夜行, 爲邏軍所捉, 豈虛言乎?” 上曰: “去邠之事, 不獨山海言之, 左相亦言之, 崔二相亦言之。 今者獨請山海之罪, 予實未知。” 黃鵬曰: “當時之事, 危急特甚, 人誰不以去都城爲可也?” 具宬執鵬衣以出曰: “爾乃山海之姪也。 爾何敢開口?” 柳成龍免冠下階, 涕泣以拜, 曰: “願與山海同受誤國之罪。” 崔滉曰: “臣則只以事若危急, 暫避他處, 以圖後日之事爲言, 實異於山海等。” 上厲聲曰: “翰林、注書皆在此, 予豈虛言?” 仍顧謂史官曰: “爾等亦不聞之乎?” 史官皆曰: “滉亦直請去邠, 別無他言也。” 滉猶不避謝。 上遂罷山海, 以崔興源代之。【《寄齋雜記》。】

번역문:
병조 정랑(兵曹正郞) 구굉(具宬)⁸⁴이 내전 문[內門]에서 나오며 말하기를, “상(上)께서 삼사(三司)⁸⁵를 불러 입시(入侍)하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그때 대소 관원들이 궁문 밖에 줄지어 앉아 있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상께서 만약 소견(召見)하여 대면하신다면 정원(政院)⁸⁶을 어찌 불러들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판윤(判尹) 홍여준(洪汝諄)⁸⁷이 헌납(獻納) 이정신(李廷臣)⁸⁸에게 이르기를, “들어갈 수 없다. 어찌 구굉 따위가 부름을 받을 만한 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구굉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친히 전교(傳敎)를 받들었는데, 너희들이 어찌 앉아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대사간(大司諫) 김찬(金瓚)⁸⁹의 손을 잡고 일으키니, 여러 대간(臺諫)⁹⁰들이 마침내 따라서 들어갔다. 상(上)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의 일을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지겠는가?”라고 하셨다. 말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여러 관원들이 모두 말하였다. “영의정 이산해가 김공량(金公諒)과 교결(交結)하여 심복(心腹)으로 삼고, 홍여준(洪汝諄), 이홍로(李弘老)⁹¹, 조정(趙挺)⁹², 송언신(宋言愼)⁹³ 등과 함께 안팎에서 서로 협력하여[表裏] 기세(氣焰)를 크게 부리며 선비들에게 해독(害毒)을 퍼뜨리고,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망쳤습니다. 도성을 떠나던 날[去邠之日]⁹⁴에 이르러서는 몸소 수상(首相)이 되어 파천(播遷)을 멈추기를 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속히 나가기를 청하였으니,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阿諛容悅] 행태가 지금에 이르러 더욱 심합니다. 오늘의 일은 이 사람이 초래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왕법(王法)을 바로잡기를 청합니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이산해가 비록 김공량과 서로 교제하였으나, 어찌 이로써 나라를 그르치고 외적을 불러들였겠는가?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모두가 말하였다. “사대부(士大夫)의 거취(去就)에 그가 주장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산해가 밖에서 주장하고 김공량이 안에서 주장함을 온 나라 사람 중에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이헌국(李憲國)⁹⁵이 말하였다. “이산해가 밤을 틈타 몰래 김공량의 집에 가니, 종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운데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이산해가 어찌 반드시 친히 갔겠는가? 이는 반드시 진실한 말이 아닐 것이다.” 이헌국이 말하였다. “나귀를 타고 밤에 가다가 나졸[邏軍]에게 붙잡혔는데, 어찌 허언(虛言)이겠습니까?”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도성을 떠나는 일은 유독 이산해만 말한 것이 아니라, 좌상(左相)⁹⁶도 말하였고, 최이상(崔二相)⁹⁷도 말하였다. 이제 유독 이산해의 죄만 청하니, 내 실로 알지 못하겠다.” 황팽(黃鵬)⁹⁸이 말하였다. “당시의 일은 위급함이 특별히 심하였으니, 사람들 누가 도성을 떠나는 것이 옳다고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구굉이 황팽의 옷을 잡고 나가며 말하였다. “너는 이산해의 조카이다. 네가 어찌 감히 입을 여는가?” 유성룡(柳成龍)이 관(冠)을 벗고 섬돌 아래로 내려가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아뢰었다. “원컨대 이산해와 함께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받겠습니다.” 최황(崔滉)⁹⁹이 말하였다. “신(臣)은 다만 일이 위급하면 잠시 다른 곳으로 피하여 후일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니, 실로 이산해 등과는 다릅니다.” 상(上)께서 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한림(翰林)과 주서(注書)¹⁰⁰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내 어찌 헛말을 하겠는가?” 이어서 사관(史官)¹⁰¹을 돌아보며 이르시기를, “너희들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셨다. 사관들이 모두 말하였다. “최황 역시 도성을 떠나기를 직접 청하였고, 별다른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최황은 여전히 피하거나 사죄하지 않았다. 상(上)께서 마침내 이산해를 파직하고, 최흥원(崔興源)¹⁰²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이상은 《기재잡기(寄齋雜記)》¹⁰³에서 인용】

주석:
84. 구굉(具宬, 1558-1618): 호는 만오(晩悟). 조선 중기의 문신. 북인(北人) 계열로 활동했다.
85.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86.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비서 기관이다.
87. 판윤 홍여준(判尹 洪汝諄, 1542-1607):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문신. 이산해와 가까운 북인 계열이었다.
88. 헌납 이정신(獻納 李廷臣):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지낸 관리. 정5품 언관직이다.
89. 대사간 김찬(大司諫 金瓚, 1543-1599):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낸 문신. 정3품 언관직 수장이다.
90. 대간(臺諫): 사헌부(臺)와 사간원(諫)의 관원들을 통칭하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91. 이홍로(李弘老, ?-1592):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92. 조정(趙挺):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 계열로 활동했다.
93. 송언신(宋言愼, 1542-1612):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 계열로 활동했다.
94. 거빈지일(去邠之日): 도성(邠)을 떠나던 날. 선조가 임진왜란 때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날(1592년 음력 4월 30일)을 가리킨다.
95. 이헌국(李憲國, 1555-1619):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 탄핵에 참여했다.
96. 좌상(左相): 좌의정(左議政). 당시 좌의정은 유성룡(柳成龍)이었다.
97. 최이상(崔二相): 두 번째 재상인 우의정(右議政) 최황(崔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98. 황팽(黃鵬):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의 조카로서 그를 변호하려 했다.
99. 최황(崔滉, 1529-1599): 조선 중기의 문신. 우의정을 지냈다.
100. 한림(翰林), 주서(注書): 각각 예문관(藝文館)과 승정원(承政院)에 소속된 관리들로,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기록 등을 담당했다.
101.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 예문관의 관원들이 겸임했다.
102. 최흥원(崔興源, 1529-1603): 조선 중기의 문신. 영의정을 지냈다. 동인이었으나 후에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103.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쓴 잡록. 자신이 겪거나 들은 정치, 사회, 인물 등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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