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국조명신언행록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3

諺解 2025. 4. 2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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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공 황희

 

황희(黃喜)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黃喜【翼成公。】
字懼夫, 初名壽老, 號厖村, 長水人。 至正癸卯生。 高麗恭讓王己巳登第。 入我朝, 歷代言、參知議政府事, 出按平安、江原二道, 再長柏府, 三掌銓注, 歷判六曹。 世宗朝拜相, 至領議政。 文宗壬申卒, 年九十。 配享世宗廟庭。

번역문:
황희(黃喜)【익성공(翼成公)¹이다.】
자는 구부(懼夫)이고,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였으며, 호는 방촌(厖村)²이고, 장수(長水)³ 사람이다. 지정(至正) 계묘년(癸卯年, 1363)⁴에 태어났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기사년(己巳年, 1389)⁵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우리 조정(我朝)⁶에 들어와 대언(代言)⁷,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⁸ 등을 역임하였고, 평안도와 강원도 두 도(道)의 안렴사(按廉使)⁹로 나갔으며, 두 차례 백부(柏府)¹⁰의 수장을 맡았고, 세 차례 전주(銓注)¹¹를 관장하였으며, 육조(六曹)¹²의 판서(判書)를 두루 지냈다. 세종(世宗) 시대에 재상(拜相)¹³에 임명되어 영의정(領議政)¹⁴에 이르렀다. 문종(文宗) 임신년(壬申年, 1452)에 졸(卒)하니, 나이 90세였다.¹⁵ 세종의 묘정(廟庭)¹⁶에 배향(配享)¹⁷되었다.

주석:

  1. 익성공(翼成公): 황희의 시호(諡號). 익(翼)은 '생각하고 계획함이 원대하다(思慮深遠)', '부드럽고 어질며 자애롭다(溫柔賢善)' 등의 의미를 가지며, 성(成)은 '안정과 공고함을 이룬다(安民立政)', '예법을 행하고 음악을 일으킨다(秉德遵業)'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의 공덕과 성품을 잘 나타내는 시호이다.
  2. 방촌(厖村): 황희의 호. '방(厖)'은 '크다, 많다, 두텁다' 등의 뜻을 가진다.
  3. 장수(長水): 본관(本貫)이 장수임을 나타낸다. 장수 황씨(長水黃氏)이다.
  4. 지정(至正) 계묘년(癸卯年, 1363): 지정은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연호(1341-1370). 1363년에 해당한다.
  5. 공양왕(恭讓王) 기사년(己巳年, 1389): 공양왕은 고려의 마지막 왕(재위 1389-1392). 황희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에 문과에 급제했다.
  6. 아조(我朝): '우리 조정'이라는 뜻으로, 글쓴이의 시점에서 조선 왕조를 가리킨다.
  7. 대언(代言): 고려 시대에는 중추원(中樞院)에 속하여 왕명 출납을 담당했고, 조선 초기에는 승정원(承政院)의 전신인 중추원에서 왕명 출납을 맡은 관직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의 도승지(都承旨)에 해당한다.
  8.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조선 초기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재상급에 속한다.
  9. 안(按): '살피다', '조사하다'는 뜻.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관리를 감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안렴사(按廉使)나 관찰사(觀察使)의 직무를 가리킨다.
  10. 백부(柏府): 사헌부(司憲府)의 별칭. 관청 뜰에 잣나무(柏)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황희는 두 차례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으뜸 벼슬)을 역임했다.
  11. 전주(銓注): 관리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인사 행정. 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담당했다. 황희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여러 차례 역임하며 인사권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12. 육조(六曹): 조선의 중앙 행정기관인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를 통칭한다. 판서(判書)는 각 조의 으뜸 벼슬(정2품)이다.
  13. 배상(拜相): 재상(相)에 임명됨. 조선 시대에는 보통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재상(정승)으로 칭했다.
  14. 영의정(領議政): 의정부의 최고위직. 정1품.
  15. 나이 90세: 당시 나이 계산법(세는나이)에 따른 것이다. 만으로는 89세이다.
  16.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17.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황희는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문:
公在麗季, 爲積城訓導, 自積城向松京, 路遇一老翁, 牽兩牛一黃一黑者而耕焉。 方脫耒耟息於林樾¹⁸之下, 公亦休馬於其側, 與翁相語, 問曰: “翁之兩牛皆肥大壯實, 其耕治之力, 亦無優劣乎?” 翁趨進, 附耳低聲而答曰: “某色者優, 而某色者劣矣。” 公曰: “翁何畏懼於牛, 而如是隱語乎?” 翁曰: “甚矣, 爾之年少而未有聞也! 畜物雖不通人語, 人言之善惡則皆知之。 若聞以己爲劣, 而不及於他, 則心之不平, 豈異於人乎? 甚矣, 爾之年少而未有聞也!” 公聞之, 不覺瞿然。 其平生謙厚之量, 自翁之一語而成。 麗氏之將亡, 君子之隱於耕稼者, 翁其一也。【《松窩雜記》。】

번역문:
공(公)께서 고려 말(麗季)에 적성(積城)¹⁹의 훈도(訓導)²⁰로 있을 때, 적성에서 송경(松京)²¹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노옹(老翁)을 만났는데, 누런 소 한 마리와 검은 소 한 마리, 두 마리 소를 끌고 밭을 갈고 있었다. 마침 쟁기(耒耟)²²를 벗겨놓고 나무 그늘(林樾) 아래에서 쉬고 있기에, 공 또한 그 곁에서 말을 쉬게 하며 노옹과 서로 이야기하다가 물었다. “어르신의 두 소는 모두 살지고 크며 튼튼한데, 밭을 갈고 다스리는 힘에 또한 우열(優劣)이 없습니까?” 노옹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답하였다. “아무 색깔 소가 낫고, 아무 색깔 소가 못합니다.” 공이 말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어찌 소를 두려워하여 이처럼 숨겨서 말씀하십니까?” 노옹이 말하였다. “심하구나, 그대가 젊어서 아직 듣지 못함이여! 가축(畜物)이 비록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나, 사람이 말하는 좋고 나쁨은 모두 안다네. 만약 자기가 못나서 다른 소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마음이 불편한 것이 어찌 사람과 다르겠는가? 심하구나, 그대가 젊어서 아직 듣지 못함이여!” 공이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놀라며 두려워하였다(瞿然)²³. 그의 평생 겸손하고 너그러운 도량(謙厚之量)은 노옹의 한마디 말로부터 이루어졌다. 고려 왕조(麗氏)가 장차 망하려 할 때, 군자(君子)로서 농사지으며 은둔한 자가 있었으니, 이 노옹이 그중 한 사람일 것이다.【《송와잡기(松窩雜記)》²⁴에서 인용】

주석:
18. [주-D001] 樾 : 《대동야승(大東野乘)・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초(楚)”로 되어 있다. '임초(林楚)'는 '숲 속의 가시나무'를 뜻할 수 있으나, '임월(林樾)'은 '나무 그늘'을 뜻하여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
19. 적성(積城): 현재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해당하는 고려 시대 지명.
20. 훈도(訓導): 고려, 조선 시대에 향교(鄕校)에 속하여 유생(儒生)의 교육을 담당하던 종9품 관직.
21. 송경(松京):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 현재의 개성)의 별칭.
22. 뢰사(耒耟): 쟁기의 손잡이 부분(耒)과 보습 부분(耟)을 아울러 이르는 말. 즉, 쟁기를 의미한다.
23. 구연(瞿然): 놀라거나 두려워서 눈을 크게 뜨고 보는 모양. 황희가 노옹의 말에 큰 깨달음과 충격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24. 《송와잡기(松窩雜記)》: 조선 중기 문신 이기(李墍, 1476-1552)가 지은 수필집. 인물 일화, 시화(詩話)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문:
定宗²⁵問知申事朴錫命: “誰能代君任喉舌者?” 錫命曰: “承樞都事黃喜, 眞²⁶可人也。” 上遂用之。【《日月錄》。】

번역문:
정종(定宗)²⁷께서 지신사(知申事)²⁸ 박석명(朴錫命)에게 물으셨다. “누가 임금을 대신하여 후설(喉舌)²⁹의 임무를 맡을 수 있겠는가?” 박석명이 아뢰었다. “승추도사(承樞都事)³⁰ 황희가 참으로 적합한 인물(可人)입니다.” 상(上)께서 마침내 그를 등용하셨다.【《일월록(日月錄)》³¹에서 인용】

주석:
25. [주-D002] 定宗 : 《대동야승・용재총화》 및 《해동잡록・박석명》, 《태종실록》 5년 12월 6일 기록에 근거할 때 “공정왕(恭定王, 정종의 시호)” 또는 “태종(太宗)”의 오류이다. 해당 《태종실록》 기록은 태종 5년(1405)에 박석명의 추천으로 황희가 승정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임명된 사실을 전하고 있어, 이 일화는 정종이 아닌 태종 때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6. [주-D003] 眞 : 저본(底本)에는 “직(直)”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진가인(眞可人)'은 '참으로 적합한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27. 정종(定宗): 조선 제2대 왕(재위 1398-1400). 주석 [주-D002]에서 보듯 태종(太宗)일 가능성이 높다.
28. 지신사(知申事): 조선 초기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에 해당하는 정3품 관직.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29.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 임금의 뜻을 전달하고 백성의 사정을 아뢰는 중요한 직책을 비유한다. 주로 승정원의 승지(承旨)나 대언(代言)을 가리킨다.
30. 승추도사(承樞都事): 고려 말, 조선 초 중추원(中樞院)에 속했던 관직. 왕명 출납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1. 《일월록(日月錄)》: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일기나 연대기 성격의 기록일 수 있다.


원문:
獻陵廢世子讓寧時, 引入大臣, 以其事語之, 黃喜、李稷堅執不可, 左徙, 俄謫于外凡六年, 柳廷顯獨贊其議。 獻陵一日命召黃喜, 喜至, 戴桶高頂笠子, 穿碧色麤布團領, 帶藍絛兒詣承政院。 喜方自田野而至, 形貌厖然而已, 人未甚奇之。 獻廟曰: “喜前日適誤耳, 此人終不可棄。 爲國不可無此人。” 卽拜禮曹判書。【《謏聞瑣錄》³²。】

번역문:
헌릉(獻陵)³³께서 세자(世子) 양녕(讓寧)³⁴을 폐하려 할 때, 대신들을 불러들여 그 일을 말씀하시니, 황희와 이직(李稷)³⁵이 굳게 불가(不可)를 주장하다가 좌천(左徙)³⁶되었고, 얼마 후 외직(外職)으로 폄谪(謫)되어 무릇 6년 동안 있었다. 유정현(柳廷顯)³⁷만이 홀로 그 논의에 찬성하였다. 헌릉께서 하루는 황희를 부르도록 명하시니, 황희가 이르렀는데, 통이 높은 갓(桶高頂笠子)³⁸을 쓰고 푸른색 거친 베로 만든 단령(團領)³⁹을 입고 푸른색 실띠(藍絛兒)⁴⁰를 두르고 승정원(承政院)에 나아갔다. 황희가 막 전야(田野)에서 온 터라 모습(形貌)이 촌스럽고 투박할(厖然)⁴¹ 뿐이어서, 사람들이 그다지 뛰어나게 여기지 않았다. 헌릉께서 말씀하셨다. “황희는 지난날 잠시 잘못했을 뿐이니, 이 사람은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위해서는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즉시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하셨다.【《소문쇄록(謏聞瑣錄)》⁴²에서 인용】

주석:
32. [주-D004] 瑣 : 저본(底本)에는 “쇄(鎖)”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소문쇄록(謏聞瑣錄)》 권수제(卷首題)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33. 헌릉(獻陵): 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의 능호(陵號). 여기서는 태종을 가리킨다.
34. 양녕(讓寧, 1394-1462): 태종의 맏아들 이제(李禔). 세자였으나 품행 문제로 폐위되고 동생 충녕대군(훗날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418년).
35. 이직(李稷, 1362-1431): 조선 초기의 문신. 당시 우의정이었다.
36. 좌사(左徙): 관직 등급을 낮추어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 좌천.
37. 유정현(柳廷顯, 1355-1426): 조선 초기의 문신. 당시 영의정이었다. 그는 양녕 폐위에 찬성했다.
38. 통고정립자(桶高頂笠子): 갓의 통(모자 부분)이 높고 끝이 뾰족한 형태의 갓. 당시 유행하던 형태일 수도 있고, 유배지에서 급히 올라오느라 격식에 맞지 않는 차림이었음을 나타낼 수도 있다.
39. 벽색추포단령(碧色麤布團領): 푸른색의 거친 베로 만든 단령. 단령은 조선 시대 관리들의 평상복 또는 관복이었으나, '추포(麤布)'는 질 낮은 베를 의미하므로 소박하거나 남루한 차림이었음을 시사한다.
40. 남조아(藍絛兒): 푸른색의 실로 짠 띠.
41. 방연(厖然): 크고 투박하며 세련되지 못한 모양. 꾸밈없고 소박한 모습을 나타낸다. 황희의 호 '방촌(厖村)'과도 연관된다.
42. 《소문쇄록(謏聞瑣錄)》: 조선 중기 조신(趙紳, 1505-?)이 편찬한 이야기 모음집. 인물 일화, 설화 등을 수록했다.


원문:
公謫在南原七年, 閉門端坐, 不接賓客, 手執韻書一帙, 凝神注目而已。 後雖年高, 於字書音義、偏傍、點畫, 百不一失。【《筆苑雜記》。】

번역문:
공(公)께서 남원(南原)⁴³에 폄谪되어 있은 지 7년 동안⁴⁴,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빈객(賓客)을 접견하지 않고, 손에는 운서(韻書)⁴⁵ 한 질(帙)을 들고 정신을 집중하여 주목할 뿐이었다. 뒷날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자서(字書)의 음(音)과 뜻(義), 편방(偏傍)⁴⁶, 점획(點畫)⁴⁷에 대해 백 가지 중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필원잡기(筆苑雜記)》⁴⁸에서 인용】

주석:
43. 남원(南原):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황희의 유배지였다.
44. 7년 동안: 양녕대군 폐위 문제로 좌천된 것은 1418년(태종 18)이고, 예조판서로 복귀한 것은 1422년(세종 4)이다. 실제 유배 기간은 약 4년 정도이며, 여기에 다른 사건으로 인한 파직 기간 등이 합쳐져 '7년'으로 기록되었을 수 있으나 정확한 계산은 어렵다.
45. 운서(韻書): 한자의 음(音)을 운(韻)에 따라 분류하고 그 뜻을 풀이한 책. 대표적으로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이 있다.
46. 편방(偏傍): 한자의 부수(部首). 글자의 왼쪽 부분을 편(偏), 오른쪽 부분을 방(傍)이라 하기도 한다. 한자의 구조를 가리킨다.
47. 점획(點畫): 한자를 구성하는 점(點)과 획(畫). 글자의 세부적인 형태를 의미한다. 유배 기간 동안 운서 연구에 몰두하여 한자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추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48.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중기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수필집. 시문(詩文), 인물, 제도, 풍속 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문:
江原道飢, 上憂之, 特命公爲監司, 悉心賑救, 荒政得宜, 民無捐瘠。 上嘉之, 陞崇政、判右軍府事, 仍監司。 公嘗憩蔚珍臨海之岡, 旣去, 民愛慕之, 就築臺, 名之曰召公臺。

번역문:
강원도(江原道)에 기근이 들자 상(上)께서 이를 걱정하시어, 특별히 공(公)을 감사(監司)⁴⁹로 임명하시니, 마음을 다하여 구휼(賑救)하고 황정(荒政)⁵⁰을 적절히 시행하여 백성들이 굶주려 죽거나 수척해지는(捐瘠)⁵¹ 일이 없었다. 상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숭정대부(崇政大夫)⁵²,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⁵³로 품계를 올리고 감사직은 그대로 겸하게 하셨다. 공께서 일찍이 울진(蔚珍)의 바닷가 언덕(臨海之岡)에서 쉬신 적이 있는데, 공이 떠나간 뒤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사모하여 그 자리에 대(臺)를 쌓고 소공대(召公臺)⁵⁴라 이름 지었다.

주석:
49. 감사(監司): 관찰사(觀察使)의 다른 이름. 각 도의 최고 행정관이다.
50. 황정(荒政): 흉년이나 재난 시에 백성을 구제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하는 정책.
51. 연척(捐瘠): '연(捐)'은 버려져 죽음, '척(瘠)'은 여윔. 굶주림으로 인해 죽거나 심하게 쇠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52. 숭정대부(崇政大夫): 조선 시대 문관 정1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53.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우군부(右軍府)의 으뜸 벼슬인 판부사(判府事). 정1품. 실제 군무를 보기보다는 명예직, 혹은 다른 관직을 겸임하는 고위 관료에게 주어지는 직책이었다.
54. 소공대(召公臺): 소공(召公)은 주(周)나라 초기의 현명한 재상이었던 소공 석(召公 奭)을 가리킨다. 그가 남쪽 지방을 순행하며 나무 아래에서 송사를 처리하고 백성을 교화했다는 고사(甘棠之愛)에서 유래하여, 선정을 베푼 관리의 공덕을 기리는 의미로 쓰인다. 황희의 선정을 소공에 비견하여 백성들이 그를 기렸음을 보여준다. (현재 울진 월송정 근처에 소공대 터가 전해진다.)


원문:
公內寬弘無圭角, 遇上下一以禮, 其議國事, 善守前規, 不喜改易。 世宗卽位, 首入爲相。【《謏聞瑣錄》。】

번역문:
공(公)은 안으로 너그럽고(寬弘) 모난 구석(圭角)⁵⁵이 없었으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대할 때 한결같이 예(禮)로써 하였다. 국사(國事)를 의논함에 있어서는 이전의 규정(前規)을 잘 지켰고, 함부로 고치는 것(改易)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종(世宗)께서 즉위하시자 첫 번째로 발탁되어 재상(相)이 되었다.【《소문쇄록(謏聞瑣錄)》에서 인용】

주석:
55. 규각(圭角): 규(圭)는 위가 뾰족한 홀(笏), 각(角)은 뿔. 사람의 성격이나 언행이 날카롭고 모난 것을 비유한다. 황희는 성품이 원만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初, 上遣朴好問、朴原⁵⁶茂于李滿住、沈吒納奴⁵⁷、林哈剌處, 審察入寇情僞及種類多少、山川險夷、道里遐邇。 至是來復命, 上引見, 密問野人聲息, 好問歷陳道路迂直、山川險夷、部落多少, 且言: “前到野人部落, 觀其勢, 皆空家登山, 今欲誘之安業, 掩其不意而擊之。 且大軍涉江時, 江流甚駛, 不可爲浮橋。” 上得好問之啓, 尤決意討之, 召政府六曹及三軍都鎭撫, 以好問之言議之。 黃喜曰: “所獲不償所失, 勞而無功, 貽笑彼賊。 乞依前日獻策, 令都節制使責還被擄人口牛馬家財, 如其不從, 宣言致討, 使之知懼, 不得安土耕耘而遠遁, 則名正言順, 直在我矣。 如不得已, 必待合氷。” 上曰: “當用四月草長時, 不可違也。” 黃喜等曰: “浮橋事, 不知水勢悍急、船橋便否, 而遙度實難, 令將帥或船或橋, 從宜造之。” 上又曰: “古人用兵, 皆有反間以觀勢。 予欲密遣人備知彼人情狀, 然後討之。” 黃喜等曰: “古之用反間也, 中國之人, 衣食無異, 語音相同, 雖混處而莫之知也。 本國之與野人, 言語服食, 絶不相類, 且人物不夥, 似難混跡, 若果見獲, 秖益爲害矣。”【竝⁵⁸《靑坡劇談》。】

번역문:
처음에 상(上)께서 박호문(朴好問)과 박원무(朴原茂)⁵⁹를 이만주(李滿住)⁶⁰, 심타납노(沈吒納奴)⁶¹, 임하라(林哈剌)⁶²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침입(入寇)의 실정(情僞)과 종족(種類)의 많고 적음, 산천(山川)의 험하고 평탄함(險夷), 도리(道里)의 멀고 가까움(遐邇)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들이 돌아와 복명(復命)하자, 상께서 인견(引見)하시고 은밀히 야인(野人)⁶³들의 동정(聲息)을 물으셨다. 박호문이 도로의 구불구불함과 곧음(迂直),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 부락(部落)의 많고 적음을 차례로 아뢰고, 또 말하였다. “지난번 야인의 부락에 도착하여 그 형세를 보니, 모두 집을 비우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그들을 유인하여 생업에 안정하게 한 뒤, 그들이 예상치 못한 때를 틈타 공격하고자 합니다. 또한 대군(大軍)이 강을 건널 때 강물의 흐름이 매우 빠르니 부교(浮橋)를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께서 박호문의 보고를 듣고 더욱 그들을 토벌할 뜻을 결정하시고, 정부(政府)⁶⁴, 육조(六曹) 및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⁶⁵들을 불러 박호문의 말로써 이를 의논하셨다. 황희가 아뢰었다. “얻는 것이 잃는 것을 보상하지 못하고(所獲不償所失), 수고롭기만 하고 공(功)이 없으면 저 도적들의 웃음거리만 될(貽笑彼賊) 뿐입니다. 바라옵건대 지난번에 올린 계책에 따라, 도절제사(都節制使)⁶⁶로 하여금 잡혀간 인구(人口), 우마(牛馬), 가재(家財)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고, 만약 그들이 따르지 않으면 토벌하겠다고 선언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하여, 자기 땅에서 편안히 농사짓지 못하고 멀리 달아나게 한다면, 명분(名分)이 바르고 명분(直)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만약 부득이하게 토벌해야 한다면, 반드시 강물이 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4월 풀이 자랄 때를 이용해야 하니, 이를 어길 수 없다.” 황희 등이 아뢰었다. “부교(浮橋)의 일은 물살(水勢)이 얼마나 사납고 빠른지(悍急), 배다리(船橋)가 편리할지 아닐지를 알지 못하니, 멀리서 헤아리기(遙度)는 실로 어렵습니다. 장수(將帥)로 하여금 배를 이용하든 다리를 놓든 적절한 방법을 따라 만들게 해야 합니다.” 상께서 또 말씀하셨다. “옛날 용병(用兵)에는 모두 반간(反間)⁶⁷을 사용하여 형세를 살펴보았다. 나도 은밀히 사람을 보내 저들의 실정(情狀)을 자세히 안 연후에 토벌하고자 한다.” 황희 등이 아뢰었다. “옛날에 반간을 사용한 것은 중국 사람의 경우 의복과 음식이 다르지 않고 말투(語音)가 서로 같아, 비록 섞여 지내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와 야인들은 언어와 의복, 음식이 전혀 서로 같지 않고, 또한 인물(人物)도 많지 않아 그들 속에 섞여 흔적을 감추기(混跡)가 어려울 듯합니다. 만약 정말로 잡히게 된다면, 단지 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이상 《청파극담(靑坡劇談)》⁶⁸에서 인용】

주석:
56. [주-D005] 原 : 저본(底本)에는 “후(厚)”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해동야언・세종》 및 《세종실록》 15년 2월 10일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박원무(朴原茂)가 정확한 이름이다.
57. [주-D006] 奴 : 저본(底本)에는 없다. 《방촌실기(厖村實紀)・유사(遺事)》, 《대동야승・해동야언・세종》, 《세종실록》 15년 2월 10일 기록 등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심타납노(沈吒納奴)가 정확한 이름이다.
58. [주-D007] 竝靑坡劇談 : 본서(本書)의 전후 서술 체제(套式)에 근거할 때 “병(竝)”은 연자(衍字, 불필요하게 들어간 글자)인 듯하다. 또한 《청파극담》에는 “초(初)……지익위해의(秖益爲害矣)。” 부분이 없다. 이 부분은 다른 기록(예: 《세종실록》 15년 2월 10일)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으며, 출처 표기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59. 박원무(朴原茂): 조선 초기의 무신.
60. 이만주(李滿住): 여진족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조선 초기에 자주 국경을 침범하였다.
61. 심타납노(沈吒納奴): 여진족 추장 이름. 정확한 표기나 인물 정보는 불명확하다.
62. 임하라(林哈剌): 여진족 추장 이름. 정확한 표기나 인물 정보는 불명확하다.
63. 야인(野人): 조선 시대에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을 통칭하던 말.
64.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65.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 삼군(三軍)은 조선 초기의 중앙 군사 조직. 도진무(都鎭撫)는 각 군(軍)의 지휘관 중 하나이다.
66. 도절제사(都節制使): 조선 시대 변방 지역의 군사 지휘관.
67. 반간(反間): 적의 첩자를 역이용하거나, 아군 첩자를 적에게 보내 정보를 얻거나 적을 교란시키는 간첩 활동.
68. 《청파극담(靑坡劇談)》: 주석 [주-D007]에서 지적하듯, 이 내용 전체가 《청파극담》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일화는 세종 15년(1433) 파저강(婆猪江) 유역의 여진족 토벌(정벌)을 논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세종은 적극적인 토벌을 주장하고, 황희는 신중론을 펴며 명분과 실리를 따진다. 이는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있어 군주와 재상 간의 견해 차이와 토론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세종의 뜻대로 토벌이 단행되었다.


원문:
左議政黃喜丁母憂, 不出其代, 過數朔起復, 喜拜之, 時世子將朝京, 欲以喜隨行也。 喜上箋懇辭, 至再不許。 及天朝勅世子不必入覲, 又控辭曰: “世子旣不朝覲, 且國家無事, 請終三年。” 英廟以大臣起復, 祖宗成憲, 不允, 仍傳曰: “古者六十雖在衰服, 猶許食肉。 今黃喜旣已起復, 年踰六十, 豈可素食而行之乎? 予欲親見開素, 而適氣不平, 政院招而勸肉。” 喜詣賓廳, 知申事鄭欽之傳上旨勸肉, 喜頓首曰: “臣時無疾病, 豈敢食肉乎? 請善啓。” 欽之對以不敢, 於是稽顙哭泣開素。

번역문:
좌의정(左議政) 황희가 어머니 상(丁母憂)⁶⁹을 당하였는데, 그를 대신할 사람을 내지 않고(不出其代)⁷⁰ 여러 달이 지난 뒤 기복(起復)⁷¹시키니, 황희가 절하며 이를 받았다. 이때 세자(世子)⁷²가 장차 명나라 수도(朝京)⁷³로 조회(朝)하러 가려 하여 황희를 수행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황희가 전문(箋文)을 올려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두 번에 이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명나라 조정(天朝)에서 세자가 입근(入覲)⁷⁴할 필요가 없다는 칙서(勅書)가 오자, 또 글을 올려 사양하며 아뢰었다. “세자께서 이미 조회하러 가지 않게 되었고, 또한 국가에 별다른 일이 없으니, 삼년상(三年)을 마치게 해주십시오.” 영묘(英廟)⁷⁵께서 대신(大臣)의 기복은 조종(祖宗)의 성헌(成憲)⁷⁶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으시고, 이어서 전교(傳)하시기를, “옛날에는 육십 세가 넘으면 비록 상복(衰服)을 입고 있더라도 오히려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였다. 지금 황희가 이미 기복하였고 나이가 육십을 넘었는데, 어찌 채식(素食)만 하며 다닐 수 있겠는가? 내가 친히 개소(開素)⁷⁷하는 것을 보려 하였으나 마침 몸이 불편하니, 정원(政院)⁷⁸에서 불러 고기를 권하라.” 하셨다. 황희가 빈청(賓廳)⁷⁹에 나아가니,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가 상의 뜻(上旨)을 전하며 고기를 권하자, 황희가 머리를 조아리며(頓首) 아뢰었다. “신(臣)이 지금 질병이 없는데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잘 아뢰어 주십시오.” 정흠지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니, 이에 머리를 땅에 대고(稽顙) 곡하며 울면서 개소하였다.

주석:
69. 정모우(丁母憂): 어머니의 상(喪)을 당함.
70. 불출기대(不出其代): 상중에 있는 관리의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는 것. 이는 그 관리가 복귀할 것을 염두에 둔 조치이다.
71. 기복(起復): 상(喪) 중에 있는 신하를 상기(喪期)가 끝나기 전에 조정에 다시 나와 일하게 하는 것.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행해졌다.
72. 세자(世子): 당시 세자는 훗날 문종(文宗)이 되는 이향(李珦)이다.
73. 조경(朝京): 명나라의 수도(당시 북경)에 조회하러 감.
74. 입근(入覲): 제후가 천자를 배알하는 것.
75. 영묘(英廟): 세종(世宗)의 또 다른 묘호(廟號) 후보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세종'으로 정해졌다. 여기서는 세종을 가리킨다.
76. 성헌(成憲): 이미 정해진 법규나 제도.
77. 개소(開素): 상중(喪中)에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소식(素食)'이라 하는데, 기복 등의 이유로 상중에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것을 '개소(開素)'라고 한다.
78.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을 가리킨다.
79. 빈청(賓廳): 관청 안에 손님을 맞거나 신하들이 대기하는 장소.


원문:
憲府劾左議政黃喜, 欲緩監牧官太石均⁸⁰之罪⁸¹, 請於臺官李審之子伯堅, 使圖之, 請罷黜, 以杜請托枉法之漸。 英廟答曰: “大臣不可輕罪。” 後允之, 罷喜職, 而不出其代, 翼年復除之。 諫院上封章, 略曰: “黃喜曾爲議政, 不顧大體, 私於所厚, 請托憲府, 只罷其職, 是喜之大幸也。 又請受交河屯田, 與古之去織婦拔園葵者遠矣。 曾未踰年, 遽置百官之首, 偃然受之, 恬不爲愧, 請罷之。” 答曰: “凡事是非間, 無隱盡陳, 予甚嘉之。 然調元大臣, 不可聽爾等之言, 輕易拒絶。”

번역문:
헌부(憲府)⁸²에서 좌의정 황희를 탄핵하기를, 감목관(監牧官)⁸³ 태석균(太石均)의 죄⁸⁴를 가볍게 해주려고 대관(臺官)⁸⁵ 이심(李審)의 아들 백견(伯堅)⁸⁶에게 청탁하여 그 일을 도모하게 하였으니, 파출(罷黜)하여 청탁으로 법을 왜곡(枉法)하는 조짐(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영묘(英廟)께서 답하시기를, “대신(大臣)을 가벼이 죄줄 수는 없다.” 하셨다. 후에 이를 윤허하시어 황희의 관직을 파면(罷職)하되 그를 대신할 사람을 내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임명(復除)하였다. 간원(諫院)⁸⁷에서 봉장(封章)⁸⁸을 올려 대략 아뢰었다. “황희는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서도 대체(大體)를 돌아보지 않고, 친한 자(所厚)에게 사사로이 하여 헌부(憲府)에 청탁하였으니, 단지 그 직책만 파면한 것은 황희에게 큰 다행입니다. 또 교하(交河)⁸⁹의 둔전(屯田)⁹⁰을 받기를 청하였으니, 옛날 베 짜는 아내를 내보내고 아욱을 뽑아버린 사람⁹¹과는 거리가 멉니다. 일찍이 해가 지나기도 전에 갑자기 백관(百官)의 으뜸 자리에 두시니, 거만하게(偃然) 이를 받으며 부끄러워하지 않으니(恬不爲愧), 그를 파면하기를 청합니다.” 답하시기를, “모든 일의 시비(是非)에 대해 숨김없이 다 아뢰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조원대신(調元大臣)⁹²은 너희들의 말을 듣고 가벼이 거절할 수 없다.” 하셨다.

주석:
80. [주-D008] 均 : 《대동야승・해동잡록・황희》 및 《세종실록》 12년 10월 13일 등에는 “균(鈞)”으로 되어 있다. 태석균(太石鈞)이 정확한 이름이다.
81. [주-D009] 罪 : 저본(底本)에는 “벌(罰)”로 되어 있다. 《방촌실기・유사》 및 《국조보감・세종조》 신해(13년)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82. 헌부(憲府): 사헌부(司憲府).
83. 감목관(監牧官): 국영 목장을 감독하는 관리.
84. 태석균(太石鈞)의 죄: 태석균이 관물(官物)을 사사로이 사용한 죄 등으로 탄핵받았는데, 황희가 사헌부 관리에게 그를 변호하도록 청탁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세종실록》 12년 10월 13일)
85. 대관(臺官): 사헌부 관리.
86. 이심(李審)의 아들 백견(伯堅): 황희에게 청탁을 받은 것으로 지목된 인물. 이심(李審)은 당시 사헌부 관리였다.
87. 간원(諫院): 사간원(司諫院).
88. 봉장(封章): 임금에게 올리는 봉한 상소문.
89. 교하(交河): 현재 경기도 파주시에 속하는 지역.
90. 둔전(屯田): 군량(軍糧) 조달이나 관청 경비 충당을 위해 설치, 경작하던 토지. 황희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국가 토지를 받으려 했다는 비판이다.
91. 거직부발원규자(去織婦拔園葵者): 베 짜는 아내를 내보내고 아욱을 뽑아버린 사람.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현명한 재상 공의휴(公儀休)를 가리킨다. 그는 집에서 짠 베가 좋고 뜰의 아욱이 맛있는 것을 보고는, 관영 수공업과 채소밭을 관리하는 관청의 이익을 침해할까 염려하여 아내를 내보내고 아욱을 뽑아버렸다고 한다. 청렴결백하고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하는 관리의 모범으로 인용된다. 황희의 둔전 요구는 이와 반대된다는 비판이다.
92. 조원대신(調元大臣): '조화롭게 으뜸으로 다스리는 대신'이라는 뜻으로,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최고위 재상을 의미한다. 세종이 황희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 사건들은 황희가 청렴함과는 거리가 있는 현실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종은 그의 경륜과 능력을 높이 사 그를 계속 중용했다.


원문:
司諫院論: “領議政黃喜請田于交河守, 以爲農莊, 不宜在百僚之上。” 上不允, 謂安崇善曰: “喜, 圖政大臣, 且太宗所信任, 予豈忍輕絶? 太宗嘗謂予曰: ‘讓寧之爲世子, 具宗秀之徒依阿, 多行不義, 使讓寧失道。 問於喜曰: 「處之何如?」 喜曰: 「世子年少, 所失不過鷹犬。」’ 當時謂喜爲中立觀變, 以今思之, 喜實無罪。 太宗又引史冊事解之, 因泣下。 言猶在耳, 予何從新進諫臣言絶之耶?”

번역문:
사간원(司諫院)에서 논하기를, “영의정 황희가 교하수(交河守)⁹³에게 밭(田)을 청하여 농장(農莊)으로 삼으려 하니, 백료(百僚)의 위에 있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上)께서 윤허하지 않으시고, 안숭선(安崇善)⁹⁴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황희는 정사를 도모하는 대신(圖政大臣)이고 또한 태종(太宗)께서 신임하시던 바이니, 내 어찌 차마 가벼이 끊어버리겠는가?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양녕(讓寧)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 구종수(具宗秀)⁹⁵ 무리가 아첨(依阿)하여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여 양녕으로 하여금 도(道)를 잃게 하였다. 황희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니, 황희가 답하기를 「세자께서는 나이가 젊으시니, 잘못된 것이라야 매(鷹)와 개(犬)⁹⁶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황희가 중립을 지키며 형세를 살핀다(中立觀變)고 여겼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 태종께서 또 사책(史冊)의 일을 인용하여 해명하시고는 이내 눈물을 흘리셨다. 말씀이 아직 귀에 생생한데, 내 어찌 신진(新進) 간관(諫臣)들의 말을 따라 그를 끊어버리겠는가?”【《東閣雜記》⁹⁷에 함께 있음】

주석:
93. 교하수(交河守): 교하(交河)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守令).
94. 안숭선(安崇善, 1392-1452): 조선 초기의 문신.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95. 구종수(具宗秀): 양녕대군의 측근. 양녕의 비행에 연루된 인물로 지목된다.
96. 응견(鷹犬): 매와 개. 사냥에 쓰이는 도구로, 여기서는 세자의 사소한 잘못이나 오락거리를 의미한다. 황희는 양녕의 잘못을 심각한 정치적 문제보다는 젊은 시절의 방탕 정도로 축소하여 변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97.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인물 일화, 시화, 고증 등을 담고 있다. 이 단락은 앞의 《동각잡기》 인용 부분과 이어지는 내용일 수 있으나, 주석 [주-D011]에 따르면 아닐 수도 있다. 세종이 황희를 얼마나 깊이 신뢰하고 보호했는지, 특히 태종과의 관계 속에서 황희의 입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원문:
宣德辛亥冬至賀禮時, 領議政黃喜於望闕禮則入參, 而本朝賀禮, 則以病不入。 憲府招通禮門令史問其故, 令史對以實, 憲府笞其令史。 政府遣舍人啓之曰: “通禮門令史無預焉而受笞。 且政府, 百官之長, 堂上進退, 告于憲府, 固無前例。 今乃受辱, 慙愧實多。” 傳曰: “憲府處置, 實爲未安, 下司諫院推考。”

번역문:
선덕(宣德) 신해년(辛亥年, 1431)⁹⁸ 동지(冬至) 하례(賀禮)⁹⁹ 때, 영의정 황희가 망궐례(望闕禮)¹⁰⁰에는 참여하였으나, 본조(本朝)의 하례¹⁰¹에는 병(病)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통례문(通禮門)¹⁰²의 영사(令史)¹⁰³를 불러 그 까닭을 묻자 영사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는데, 헌부에서 그 영사를 태(笞)¹⁰⁴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사인(舍人)¹⁰⁵을 보내 아뢰기를, “통례문 영사는 아무 관계가 없는데 매를 맞았습니다. 또한 정부는 백관(百官)의 으뜸인데, 당상관(堂上)¹⁰⁶의 출입(進退)을 헌부에 보고하는 것은 진실로 전례(前例)가 없습니다. 이제 모욕을 당하였으니 실로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하였다. 전교(傳)하기를, “헌부의 처치는 실로 온당하지 못하니, 사간원(司諫院)에 내려 추고(推考)¹⁰⁷하라.” 하였다.

주석:
98. 선덕(宣德) 신해년(辛亥年, 1431): 선덕은 명(明)나라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연호(1426-1435). 1431년에 해당한다.
99. 동지 하례(冬至賀禮): 동짓날에 조정에서 임금에게 축하하는 의례.
100. 망궐례(望闕禮): 중국 황제가 있는 궁궐(闕)을 향해 멀리서(望) 예를 올리는 의식. 사대(事大) 의례의 하나이다.
101. 본조 하례(本朝賀禮): 조선 조정 자체의 하례 의식.
102. 통례문(通禮門): 통례원(通禮院)의 다른 이름. 조선 시대 궁중 의례(儀禮)를 담당하던 관청.
103. 영사(令史): 조선 시대 각 관청에 소속된 하급 서리(胥吏).
104. 태(笞): 태형(笞刑). 작은 가죽 채찍으로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벌.
105.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은 정4품으로, 문서 작성과 실무를 담당했다.
106. 당상(堂上): 당상관(堂上官). 조선 시대 정3품 상계(上階) 이상의 품계를 가진 고위 관료.
107. 추고(推考): 죄나 잘못을 조사하여 따지는 것. 이 사건은 황희가 사대 의례인 망궐례에는 참여하면서 국내 의례에는 불참한 것을 사헌부가 문제 삼아 발생한 일이다. 의정부(정부)는 사헌부가 정승(황희)의 동향을 직접 조사하고 관련 없는 서리에게 형벌을 가한 것은 월권이며 의정부의 권위를 실추시킨 행위라고 반발했다. 세종은 사헌부의 조치가 지나쳤다고 판단하여 사간원에 조사를 명함으로써 의정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원문:
英廟嘗召領議政黃喜、判中樞府事許稠, 議視學試取次第, 喜等啓曰: “爲試取視學, 則不合於古制, 而視學爲輕。” 傳曰: “卿等之言宜矣。”

번역문:
영묘(英廟)께서 일찍이 영의정 황희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¹⁰⁸ 허조(許稠)¹⁰⁹를 불러 시학(視學)¹¹⁰과 시취(試取)¹¹¹의 절차(次第)를 의논하시니, 황희 등이 아뢰었다. “시험하여 뽑는 것(試取)을 위해 시학을 한다면 옛 제도(古制)에 맞지 않고, 시학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전교하시기를, “경(卿)들의 말이 마땅하다.” 하셨다.

주석:
108.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주로 다른 관직을 가진 원로대신이 겸임하는 명예직이었다.
109. 허조(許稠, 1369-1439): 조선 초기의 명재상. 청렴하고 강직하며 법 집행을 엄격히 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희와 함께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이다.
110. 시학(視學):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에 행차하여 유생(儒生)들의 학업을 살피고 격려하는 의식.
111. 시취(試取):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것. 여기서는 시학 때 임금이 직접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여 뽑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황희와 허조는 시학의 본래 목적(학문 장려)이 인재 선발(시취) 때문에 퇴색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한 것이다.


원문:
丙辰, 英廟傳于政府曰: “古有四時之田, 以講武除害, 此先王之定制, 而軍國之重事也。 祖宗參酌古制, 定爲春秋講武之法, 垂訓子孫, 思慮周備矣。 新進儒生以爲國君逸豫之擧, 每請停行, 大臣亦或有請停者, 予以祖宗成法, 不可廢而不從矣。 曩歲當講武之期, 予適病不得親行, 欲命將代行, 大臣議以爲兵權授之將臣, 不安於義, 故寢之。 今年凶荒太甚, 予恐懼, 姑停秋等講武, 而明春講武, 亦欲停之, 以休民力。 頃者兵曹請曰: ‘大事不可再廢。’ 予亦以爲凶荒之歲, 益修武備, 非常之道也, 故姑從其請。 諸事欲務從簡約, 國君一動, 其弊必多矣。 世子職在撫軍, 欲令世子代行, 如此則不廢重事, 而供費必減, 庶乎兩全, 擬議以啓。” 領議政黃喜等啓曰: “兵權不可授之世子, 且今年凶歉, 請停之。” 上從之。【竝《東閣雜記》。】¹¹²

번역문:
병진년(丙辰年, 1436)¹¹³에 영묘(英廟)께서 정부(政府)에 전교하셨다. “옛날에 사시(四時)의 사냥(田)¹¹⁴이 있어 무예를 익히고(講武) 해로운 것을 제거(除害)하였으니, 이는 선왕(先王)께서 정하신 제도(定制)이며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이다. 조종(祖宗)께서 옛 제도를 참작하여 봄가을로 강무(講武)¹¹⁵하는 법을 정하시어 자손에게 교훈으로 남기셨으니, 생각하고 헤아림이 두루 갖추어졌다. 신진(新進) 유생(儒生)들은 이를 국군(國君)이 편안히 즐기는(逸豫) 행사라 여겨 매번 중지하기를 청하고, 대신(大臣) 중에도 혹 중지를 청하는 자가 있으나, 나는 조종의 성법(成法)이므로 폐지할 수 없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지난 해 강무를 행할 시기에 내가 마침 병이 들어 친히 행하지 못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대신 행하게 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이 의논하기를 병권(兵權)을 장신(將臣)에게 맡기는 것은 의(義)에 불안하다 하여 그만두었다. 금년에는 흉년과 기근(凶荒)이 너무 심하여 내가 두려워하여 우선 가을 등의 강무를 중지하였는데, 명년 봄 강무 또한 중지하여 백성의 힘(民力)을 쉬게 하고자 한다. 근래 병조(兵曹)에서 청하기를 ‘큰일을 두 번 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나 또한 흉년이 든 해일수록 더욱 무비(武備)를 닦는 것이 비상(非常)한 방도라 여기므로, 우선 그 청을 따랐다. 모든 일은 힘써 간략하게 하고자 하니, 국군이 한 번 움직이면 그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세자(世子)의 직책은 군사를 어루만지는 것(撫軍)에 있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중요한 일을 폐하지 않으면서도 소요되는 비용(供費)이 반드시 줄어들어 거의 양쪽을 온전히(兩全) 할 수 있을 것이니, 의논하여 아뢰라.” 영의정 황희 등이 아뢰었다. “병권(兵權)을 세자에게 맡길 수는 없으며, 또한 금년은 흉년이 들었으니 중지하기를 청합니다.” 상(上)께서 이를 따르셨다.【이상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인용】

주석:
112. [주-D011] 竝東閣雜記 : 《대동야승・동각잡기》에는 “사간원론(司諫院論)……여하종신진간신언절지야(予何從新進諫臣言絶之耶)?” 부분이 없다. 이 주석은 앞의 '사간원론' 단락이 《동각잡기》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 단락(병진 강무 논의)은 《동각잡기》에서 인용된 것이 맞을 수 있다.
113. 병진년(丙辰年, 1436): 세종 18년.
114. 전(田): 사냥. 고대 중국에서는 사계절마다 사냥을 행하며 군사 훈련을 겸했다.
115. 강무(講武): 무예를 강습하고 익히는 것. 조선 시대에는 주로 봄가을에 임금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행하는 대규모 사냥 의식을 통해 군사 훈련과 시찰을 겸했다.
이 대화는 강무의 시행 여부를 둘러싼 세종과 황희 등 대신들 간의 논의를 보여준다. 세종은 강무가 조상의 법도이며 국방상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부담과 자신의 거동으로 인한 폐단을 염려하여 세자에게 대행시키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황희 등은 병권을 세자에게 맡기는 것의 위험성과 흉년이라는 현실적 어려움을 들어 강무 자체의 중지를 건의했고,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군주의 권한과 신하들의 견제, 현실적인 민생 문제 고려 등 당시 정치 운영의 단면을 보여준다.


원문:
公天姿雄偉, 稟性寬仁, 深沈有度, 寡於言笑, 喜怒不形。 居家淸儉自守, 不事産業, 身爲首相, 而蕭然如書生。

번역문:
공(公)은 타고난 모습(天姿)이 뛰어나고(雄偉)¹¹⁶, 타고난 성품(稟性)이 너그럽고 어질었으며(寬仁), 깊고 침착하며(深沈) 법도(度)가 있었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寡於言笑),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喜怒不形). 집에서는 청렴하고 검소하게(淸儉) 스스로를 지켜 산업(産業)¹¹⁷을 경영하지 않았으니, 몸은 수상(首相)¹¹⁸이었으나 쓸쓸하기(蕭然)가 서생(書生)과 같았다.

주석:
116. 웅위(雄偉): 외모나 기상이 뛰어나고 위엄이 있음.
117. 산업(産業): 재산을 늘리는 일. 생업.
118.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을 가리킨다.


원문:
公在政府二十四載, 務遵祖宗成憲, 不喜紛更。 處事循理, 規模遠大, 綱擧目張, 事無不治, 從容靜鎭, 得大臣體。 自太宗至世宗, 眷倚甚重, 事無大小, 以至宮闈之密, 苟有難斷, 必召咨之, 公片言以定。 旣退, 未嘗言所議於上者。 世宗每稱公識局宏深, 善斷大事, 至擬之龜蓍權衡。 時或有獻議更變舊制者, 公必曰: “臣乏變通, 凡有更制, 不敢輕議。” 持論平恕, 而及議大事, 面斥是非, 毅然不可奪, 異議者愧屈, 人皆倚公爲重。 年至九十, 聰明不少衰, 朝廷典章, 經史子書, 若燭照算數。 論者稱我朝賢相, 必以公爲首, 而勳業德量, 比宋之王文正、韓忠獻云。【竝保閑齋申叔舟撰墓誌。】

번역문:
공(公)께서 정부(政府)¹¹⁹에 있은 지 24년¹²⁰ 동안, 힘써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따르고 함부로 변경하는 것(紛更)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을 처리함에 이치(理)를 따랐고 규모(規模)가 원대(遠大)하여, 강령(綱)을 들면 세목(目)이 펼쳐지듯(綱擧目張)¹²¹ 하여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조용하고 침착하게 진정(鎭定)시키니(從容靜鎭) 대신(大臣)의 체모(體)를 얻었다. 태종(太宗) 때부터 세종(世宗) 때까지 보살펴주고 의지함(眷倚)이 매우 두터워, 일이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궁궐 안의 비밀스러운 일(宮闈之密)¹²²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불러 자문하였고, 공은 짧은 말 한마디(片言)로 결정하였다. 물러 나와서는 위에서 의논한 바를 일찍이 말하지 않았다. 세종께서 매번 공의 식견과 도량(識局)¹²³이 넓고 깊으며(宏深) 큰일을 잘 결단한다고 칭찬하시며, 귀蓍(龜蓍)¹²⁴와 권형(權衡)¹²⁵에 비유하기까지 하셨다. 때때로 혹 옛 제도(舊制)를 변경하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공은 반드시 말하기를, “신(臣)은 변통(變通)¹²⁶에 부족하니, 무릇 제도를 변경하는 일이 있으면 감히 가벼이 의논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주장하는 바(持論)는 평이하고 너그러웠으나(平恕), 큰일을 의논함에 미쳐서는 옳고 그름(是非)을 면전에서 꾸짖어(面斥) 의연(毅然)하여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으니,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이 부끄러워 굴복하였고,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나이 90에 이르러서도 총명(聰明)이 조금도 쇠하지 않아, 조정의 법도와 규범(朝廷典章),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백가 서적(子書)에 대해 마치 촛불로 비추어 보듯 환하고(燭照) 수를 세듯 명확하였다(算數). 평론가들은 우리 조정(我朝)의 현명한 재상(賢相)을 칭찬할 때 반드시 공을 첫째로 꼽으며, 그 공훈과 업적(勳業), 덕과 도량(德量)을 송(宋)나라의 왕문정(王文正)¹²⁷과 한충헌(韓忠獻)¹²⁸에 비견된다고 말한다.【이상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¹²⁹가 지은 묘지(墓誌)에서 인용】

주석:
119.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
120. 24년: 황희는 세종 9년(1427) 좌의정에 임명된 이후, 잠시 파직되거나 사직한 기간을 제외하고 세종 31년(1449) 영의정에서 물러날 때까지 약 23년간 재상직에 있었다. '24년'은 햇수를 헤아리는 방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21. 강거목장(綱擧目張): 그물의 벼리(綱)를 들면 그물코(目)가 저절로 펼쳐진다는 뜻. 일의 요점만 잡으면 나머지 부분은 저절로 처리됨을 비유한다. 황희의 정치가 효율적이고 체계적이었음을 나타낸다.
122. 궁위지밀(宮闈之密): 궁궐 안 깊숙한 곳의 비밀스러운 일. 왕실 내부의 문제까지 황희와 상의했음을 의미한다.
123. 식국(識局): 식견(識見)과 국량(局量).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과 도량.
124. 귀蓍(귀시): 점을 치는 데 사용하던 거북 등껍질(龜)과 시초(蓍草) 줄기. 미래를 예측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판단하는 능력을 비유한다.
125. 권형(權衡): 저울추(權)와 저울대(衡). 사물의 경중이나 시비를 공정하게 판단하는 기준이나 능력을 비유한다.
126. 변통(變通):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함. 황희가 기존 제도를 존중하고 급격한 변화를 선호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27. 왕문정(王文正): 송나라의 명재상 왕단(王旦, 957-1017). 시호가 문정(文正)이다. 너그럽고 신중하며 공평한 재상으로 평가받는다.
128. 한충헌(韓忠獻): 송나라의 명재상 한기(韓琦, 1008-1075). 시호가 충헌(忠獻)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뛰어난 정치력으로 명망이 높았다.
129.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호는 보한재(保閑齋).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원문:
黃翼成公喜度量寬洪, 有人臣之體, 居相位三十年, 享年九十, 論決國事, 務從寬大。 平居淡如, 雖兒孫童僕, 羅列左右, 啼呼戲噱, 略不呵禁。 或有挽胡批頰者, 亦從其所爲。 嘗引僚佐議事, 方濡筆書牘, 有童奴溺其上, 公無怒色, 但以手拭之而已, 其德量如此。【《筆苑雜記》。】

번역문:
익성공(翼成公) 황희는 도량(度量)이 너그럽고 커서(寬洪) 신하(人臣)의 체모(體)가 있었으며, 재상(相位)의 자리에 30년¹³⁰ 동안 있으면서 향년(享年) 90세였고, 국사(國事)를 논의하고 결정함에 있어 힘써 너그럽고 큰 원칙(寬大)을 따랐다. 평소 생활(平居)은 담담하였으며(淡如), 비록 아들과 손자(兒孫), 어린 종(童僕)들이 좌우에 늘어서서(羅列) 울고 부르짖고(啼呼) 장난치며 웃어도(戲噱) 거의 꾸짖거나 금하지(呵禁) 않았다. 혹 수염(胡)을 잡아당기거나 뺨(頰)을 치는(批) 자가 있어도 또한 그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일찍이 동료(僚佐)들을 이끌고 일을 의논할 때, 마침 붓에 먹을 묻혀 글(書牘)을 쓰는데 어린 종(童奴)이 그 위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은 노한 기색(怒色) 없이 다만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으니, 그 덕과 도량(德量)이 이와 같았다.【《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인용】

주석:
130. 30년: 황희가 재상직에 있었던 기간을 대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는 약 23년이다.


원문:
黃翼成公寬弘大度, 不拘細事, 年高位重, 愈自謙抑。 嘗¹³¹坐一室, 終日無言, 互開兩眼看書而已。 室外霜桃爛熟, 隣兒爭來摘之, 公緩聲呼曰: “勿盡摘之, 吾亦欲嘗之。” 少焉出視之, 一樹之實盡矣。 每晨夕餐飯, 群兒來集, 公除飯與之, 叫噪爭食, 公但笑而已, 人皆服其量。【《慵齋叢話》。】

번역문:
익성공(翼成公) 황희는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寬弘大度) 자잘한 일(細事)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年高位重)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낮추었다(謙抑). 일찍이 한 방에 앉아 종일 말이 없이, 두 눈을 번갈아 뜨며¹³² 책을 볼 뿐이었다. 집 밖의 서리 맞은 복숭아(霜桃)가 무르익자 이웃 아이들이 다투어 와서 따 가는데, 공이 부드러운 목소리(緩聲)로 불러 말하기를, “다 따 가지 마라, 나도 맛보려 한다.” 하였다. 조금 뒤에 나가 보니, 나무의 열매가 다 없어졌다. 매일 아침저녁 식사 때면 여러 아이들이 모여드는데, 공이 밥을 덜어 그들에게 주면 시끄럽게 떠들며(叫噪) 다투어 먹어도, 공은 다만 웃을 뿐이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도량(量)에 감복하였다.【《용재총화(慵齋叢話)》¹³³에서 인용】

주석:
131. [주-D012] 嘗 : 《대동야승・용재총화》에는 앞에 “년구십여(年九十餘)”가 더 있다. 황희가 90세가 넘었을 때의 일임을 명시한다.
132. 호개량안(互開兩眼): '두 눈을 번갈아 뜬다'는 표현은, 나이가 많아 한쪽 눈을 감고 다른 쪽 눈으로 보거나, 졸음을 참으며 책을 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
133.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선 전기 문신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필기집. 인물, 제도, 문물, 풍속, 설화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문:
黃翼成公喜當世宗朝爲首相, 幾三十年, 喜怒未嘗一見於面。 遇童僕有恩, 未嘗加以箠楚。 所幸侍婢與小奴戲謔甚狎, 公見輒笑, 嘗語曰: “奴僕, 彼亦天民, 豈合虐使之也?” 至爲書以遺其子孫。 嘗獨步園中, 隣有狂童投石, 有梨方熟, 零落滿地。 公大聲呼侍僮, 狂生謂: “呼僮必拿吾輩去也。” 驚懼皆走, 匿暗中潛聽之。 侍僮至則曰: “將柳器來。” 器來則曰: “將梨以與隣生。” 竟亦無一言。

번역문:
익성공(翼成公) 황희는 세종(世宗) 시대에 수상(首相)이 되어 거의 30년 동안 있었는데, 기쁨과 노여움(喜怒)을 일찍이 한 번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어린 종(童僕)들을 대함에 은혜(恩)가 있었고, 일찍이 채찍질(箠楚)¹³⁴을 가하지 않았다. 총애하는(所幸) 시비(侍婢)가 어린 종(小奴)과 매우 스스럼없이(甚狎) 장난치며 희롱(戲謔)하는 것을 공이 보면 번번이 웃었으며, 일찍이 말하기를, “노복(奴僕)들도 저들 역시 하늘이 낸 백성(天民)인데, 어찌 학대(虐使)함이 합당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남기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홀로 동산(園中)을 거닐고 있는데, 이웃의 미친 아이(狂童)¹³⁵가 돌을 던져 마침 익은 배(梨)가 땅에 가득 떨어졌다. 공이 큰 소리로 시동(侍僮)을 부르자, 미친 아이들이 말하기를, “시동을 부르니 반드시 우리들을 잡아갈 것이다.” 하고는, 놀라고 두려워 모두 달아나 어두운 곳에 숨어 몰래 엿들었다. 시동이 이르자 (공이) 말하기를, “버들로 만든 그릇(柳器)¹³⁶을 가져오라.” 하였다. 그릇이 오자 말하기를, “배를 이웃 아이들에게 갖다 주어라.” 하였다. 끝내 또한 (꾸짖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주석:
134. 추초(箠楚): 회초리(箠)와 가시나무 채찍(楚). 매질하는 형벌 도구를 통칭한다.
135. 광동(狂童): 미친 아이, 또는 철없이 날뛰는 아이.
136. 유기(柳器): 버드나무 가지로 엮어 만든 그릇. 바구니 등을 의미한다.


원문:
李文康公石亨壯元及第, 直拜正言, 投刺於公, 公出《綱目通鑑》一帙, 命文康書題目。 俄而有一惡婢持小饌倚公坐, 俯視文康, 謂公曰: “將進酒。” 公徐曰: “姑安之。” 婢更倚立良久, 厲聲曰: “何遲遲也?” 公笑曰: “進之。” 旣進之, 則有小童數輩, 皆藍縷跣足, 或挽公髥, 或踏公衣, 盡攫其饌而食之。 且歐公, 公曰: “痛矣痛矣!” 小童者, 皆奴婢之兒也。【竝《靑坡劇談》。】

번역문:
문강공(文康公)¹³⁷ 이석형(李石亨)¹³⁸이 장원(壯元)¹³⁹으로 급제하여 바로 정언(正言)¹⁴⁰에 제수되어 공(公)에게 명함(刺)¹⁴¹을 올리니, 공이 《강목통감(綱目通鑑)》¹⁴² 한 질(帙)을 꺼내어 문강(文康)에게 제목(題目)을 쓰도록 명하였다. 얼마 후에 한 사나운 계집종(惡婢)이 작은 반찬(小饌)을 들고 와서 공에게 기대앉아 문강을 굽어보며 공에게 말하였다. “술을 올리려 합니다.” 공이 천천히 말하였다. “우선 놓아두어라.” 계집종이 다시 기댄 채 한참 서 있다가 사나운 목소리(厲聲)로 말하였다. “어찌 이리 더딥니까?”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올리거라.” 이미 올리자, 어린아이(小童) 두어 명이 있었는데 모두 남루(藍縷)¹⁴³하고 맨발(跣足)이었으며, 혹은 공의 수염(髥)을 잡아당기고 혹은 공의 옷을 밟으며 그 반찬을 모조리 빼앗아(攫) 먹었다. 또한 공을 때리니(歐), 공이 말하기를, “아프다, 아프다!” 하였다. 어린아이들은 모두 노비(奴婢)의 아이들이었다.【이상 《청파극담(靑坡劇談)》에서 인용】

주석:
137.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의 시호.
138. 이석형(李石亨, 1415-1477): 조선 초기의 문신. 세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139. 장원(壯元): 과거 시험, 특히 문과(文科)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
140.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을 담당했다. 장원 급제 후 바로 정언에 제수된 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141. 자(刺): 명함. 종이에 이름과 관직 등을 적어 방문 시에 제출하던 것.
142. 《강목통감(綱目通鑑)》: 정식 명칭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바탕으로 강(綱)과 목(目)의 형식으로 편찬한 역사서. 황희가 젊은 관리의 학문과 서체를 시험해 보려 한 듯하다.
143. 남루(藍縷): 옷이 해지고 더러운 모양.


원문:
黃翼成公喜爲相, 金宗瑞爲工判, 嘗會于公處, 宗瑞令工曹略備酒果而呈之。 喜問: “備出何處?” 下吏對以工曹判書慮日晏, 諸位虛腸, 暫使公備耳。 喜怒曰: “國家設禮賓寺於政府傍者, 爲三公也。 若虛腸, 則當令禮賓寺備來矣, 何以私自公辦乎?” 欲入啓請罪, 諸宰救之, 乃止。 致宗瑞于前而峻責之, 金相克成以此事啓於經席曰: “大臣當如是, 可以鎭壓朝廷也。”【《東閣雜記》。】

번역문:
익성공(翼成公) 황희가 재상(相)으로 있고 김종서(金宗瑞)¹⁴⁴가 공조판서(工判)¹⁴⁵로 있을 때, 일찍이 공의 처소에서 모였는데, 종서가 공조(工曹)에 명하여 간략히 술과 과일(酒果)을 준비하여 올리게 하였다. 황희가 묻기를, “어디에서 준비하여 나왔는가?” 하리(下吏)가 답하기를, “공조판서께서 날이 저물어 여러 분들께서 속이 비었을까(虛腸) 염려하여 잠시 공적으로 준비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황희가 노하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¹⁴⁶를 정부(政府)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¹⁴⁷을 위한 것이다. 만약 속이 비었다면 마땅히 예빈시로 하여금 준비해 오게 해야 하는데,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것으로 마련하였는가?” 하고는, 들어가 죄(罪)를 청하려 하자 여러 재상(諸宰)들이 말려서 이에 그만두었다. 종서를 앞으로 오게 하여 엄하게 꾸짖으니(峻責), 김상(金相) 극성(克成)¹⁴⁸이 이 일을 경석(經席)¹⁴⁹에서 아뢰기를, “대신(大臣)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 그래야 조정(朝廷)을 진압(鎭壓)¹⁵⁰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인용】

주석:
144. 김종서(金宗瑞, 1383-1453): 조선 초기의 문신, 무신. 6진(鎭) 개척에 공을 세웠고,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살해되었다.
145. 공판(工判): 공조판서(工曹判書).
146. 예빈시(禮賓寺): 조선 시대에 외국 사신의 접대 및 연회, 종친(宗親)과 재상에 대한 음식 공급 등을 담당하던 관청.
147.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세 정승을 가리킨다.
148. 김상(金相) 극성(克成):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김상(金相)'은 '김씨 성을 가진 재상'이라는 뜻일 수 있으나, 김극성(金克成)이라는 인물은 당대에 재상급 인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른 인물의 오기이거나, 덜 알려진 인물일 수 있다. 혹은 김종서를 존칭하여 '김상(金相)'이라 하고, '극성(克成)'은 다른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다. 문맥상 황희의 행동을 칭찬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다.
149. 경석(經席):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150. 진압(鎭壓): 여기서는 '기강을 바로 세우고 안정시킨다'는 의미로 쓰였다. 황희가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하고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원문:
黃翼成爲首相, 將詣政府, 有一老翁衣裳繿縷, 曳杖而前, 字翼成而謂曰: “我今要見而來, 君何往¹⁵¹乎?” 公駐車答曰: “適有公事, 不久當還, 君到吾家, 討飯姑留。” 翁至公之家, 謂公之子弟曰: “爾爺令我到家候之, 作飯而來。” 如其言饋之。 俄而公還, 與翁同入一室, 偃臥數日, 爾汝相語, 其所論議之爲何事, 則雖家人子弟, 亦莫知也。 翁將去, 謂公曰: “近患糧饌俱磬, 君可周乎?” 公略以數種置諸橐, 令丘史擔持, 從翁所往而與之。 翁渡露梁至冠岳山底, 迤邐而上至腹, 問丘史曰: “汝朝食乎?” 曰: “未也。” 翁曰: “前途尙遠, 不可不食而行。” 仍指山下人家曰: “彼家之主, 吾與之素厚, 汝往以吾言求, 必厚飯之。 我姑坐此樹下, 待汝之還矣。” 丘史至其家, 傳翁之言, 其家叱曰: “所謂翁者誰歟? 汝何爲者而求食於我乎?” 擧杖逐之。 丘史茫然, 還至翁之所留之處, 則翁與所擔之物皆無有, 竟莫知所往也。【《昭代粹言》。】

번역문:
익성공(翼成公) 황희가 수상(首相)으로 있을 때, 장차 정부(政府)로 가려는데, 한 노옹(老翁)이 의상(衣裳)이 남루(繿縷)¹⁵²한 채 지팡이를 끌고(曳杖) 앞으로 와서, 익성공의 자(字)¹⁵³를 부르며 말하였다. “내가 지금 (자네를) 만나려고 왔는데,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공(公)이 수레를 멈추고(駐車) 답하였다. “마침 공사(公事)가 있어 가지만, 오래지 않아 마땅히 돌아올 것이니, 그대는 우리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으며(討飯) 우선 머무르시게.” 노옹이 공의 집에 이르러 공의 자제(子弟)들에게 말하였다. “너희 아버지가 나더러 집에 와서 기다리라 하였으니, 밥을 지어 오라.” 그 말대로 그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饋之). 얼마 후 공이 돌아와 노옹과 함께 한 방에 들어가 여러 날 동안 편안히 누워(偃臥) 서로 격의 없이(爾汝)¹⁵⁴ 이야기하였는데, 그 논의한 바가 무슨 일이었는지는 비록 집안 식구(家人)나 자제들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였다. 노옹이 장차 떠나려 할 때 공에게 말하였다. “근래 양식과 반찬(糧饌)이 모두 떨어졌으니(俱磬), 그대가 도와줄(周)¹⁵⁵ 수 있겠는가?” 공이 대략 몇 가지 물품을 자루(橐)에 넣어 구사(丘史)¹⁵⁶에게 지고 가게 하여, 노옹이 가는 곳을 따라가 그에게 주도록 하였다. 노옹이 노량(露梁)¹⁵⁷을 건너 관악산(冠岳山) 기슭에 이르러, 구불구불(迤邐) 올라가 산 중턱(腹)에 이르러 구사에게 물었다. “너는 아침밥을 먹었느냐?” 답하기를, “못 먹었습니다.” 하였다. 노옹이 말하였다. “앞길이 아직 머니, 밥을 먹지 않고 갈 수는 없다.” 이어서 산 아래 인가(人家)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 집 주인은 내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素厚) 사람이니, 네가 가서 내 말로써 구하면 반드시 밥을 후하게 줄 것이다. 나는 우선 이 나무 아래 앉아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 구사가 그 집에 이르러 노옹의 말을 전하니, 그 집에서 꾸짖으며(叱) 말하였다. “이른바 노옹이란 누구인가? 너는 무엇 하는 자인데 나에게 밥을 구하는가?” 지팡이를 들어 그를 쫓아냈다. 구사가 망연(茫然)하여 노옹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 보니, 노옹과 지고 갔던 물건이 모두 없어지고,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소대수언(昭代粹言)》¹⁵⁸에서 인용】

주석:
151. [주-D013] 往 : 저본(底本)은 공란(空欄)이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152. 남루(繿縷): 옷이 낡고 해져 너절한 모양.
153. 자(字): 황희의 자는 구부(懼夫)이다. 노옹이 황희의 자를 부른 것은 매우 격의 없는 행동이다.
154. 이여(爾汝): '너(爾)' '자네(汝)' 하고 서로 부르는 것. 격식 없이 친밀하게 지냄을 의미한다.
155. 주(周): '두루 미치게 하다', '돕다', '구휼하다'는 뜻.
156. 구사(丘史): 관청이나 사대부 집에서 잡일을 맡아 하던 하인.
157. 노량(露梁):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鷺梁津) 부근. 당시 한강의 주요 나루터였다.
158. 《소대수언(昭代粹言)》: 조선 후기 윤봉구(尹鳳九, 1683-1767)가 편찬한 이야기 모음집. 주로 조선 시대 인물들의 일화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황희의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겸손함과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만난 노옹이 평범한 인물이 아닌 신이(神異)한 존재였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맹사성(孟思誠)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孟思誠【文貞公。】
字□□¹, 新昌人。 高麗典校副令希道之子。 至正庚子生。 辛禑十二年丙寅, 登魁科。 入我朝, 相世宗, 官至左議政。 辛亥卒, 年七十二。

번역문:
맹사성(孟思誠)【문정공(文貞公)²이다.】
자는 □□¹, 신창(新昌) 사람³이다. 고려 전교부령(典校副令)⁴ 희도(希道)의 아들이다. 지정(至正)⁵ 경자년(庚子年, 1360)⁶에 태어났다. 신우(辛禑)⁷ 12년 병인년(丙寅年, 1386)⁸에 문과(文科)에 장원⁹으로 급제하였다. 아조(我朝)¹⁰에 들어와 세종(世宗)¹¹을 보좌하여(相) 벼슬이 좌의정(左議政)¹²에 이르렀다. 신해년(辛亥年, 1431)¹³에 졸(卒)하니, 나이 72세였다.

주석:

  1. [주-D001] □□ : 《세종실록(世宗實錄)》 20년 10월 4일 조에는 “자명(自明)”으로 되어 있고,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에는 “성지(誠之)”로 되어 있다. 맹사성의 자(字)에 대해 기록이 다른 두 가지가 전해진다. 자는 관례(冠禮) 때 받는 이름이다.
  2. 문정공(文貞公): 맹사성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절개를 지킴(淸白守節) 등을 의미한다.
  3. 신창인(新昌人): 본관(本貫)이 신창(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일대)임을 나타낸다. 신창 맹씨(新昌 孟氏)이다.
  4. 전교부령(典校副令): 고려 시대 전교서(典校署)의 종5품 관직. 전교서는 경적(經籍)의 교정과 간행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부령(副令)은 차관(次官)에 해당한다.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孟希道)가 이 벼슬을 지냈다.
  5. 지정(至正): 중국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연호(1341-1368).
  6. 경자년(庚子年): 육십갑자(六十甲子)의 하나. 지정 연간의 경자년은 1360년이다.
  7. 신우(辛禑): 고려의 제32대 왕인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신우(辛禑)'라고 칭하기도 하나, 정식 묘호나 시호는 없다.
  8. 병인년(丙寅年): 우왕 12년은 1386년이다.
  9. 괴과(魁科): 과거 시험, 특히 문과에서 수석(首席, 장원)으로 합격하는 것.
  10. 아조(我朝): '우리 왕조'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를 가리킨다.
  11. 세종(世宗): 조선의 제4대 왕(재위 1418-1450).
  12. 좌의정(左議政):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벼슬. 영의정 다음가는 재상직이다.
  13. 신해년(辛亥年): 세종 13년은 1431년이다.

원문:
公誠孝出天, 十歲能盡子職。 母喪, 水漿不入口者七日。 及葬, 廬墓啜粥三年。 植柏墓前, 有豕觸而枯, 公痛哭, 翌日豕爲虎所殺, 人¹⁴以爲孝感。【《三綱行實》。】

번역문:
공(公)은 성효(誠孝)¹⁵가 천성(天性)에서 나와, 10세에 능히 자식의 직분(子職)을 다하였다. 어머니 상(喪)에는 물과 미음(水漿)¹⁶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7일이었다. 장례를 마치고는 여묘(廬墓)¹⁷살이를 하며 3년간 죽(粥)¹⁸을 먹었다. 묘 앞에 잣나무(柏)¹⁹를 심었는데, 돼지가 들이받아 마르자 공이 통곡하였더니, 다음 날 그 돼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으니, 사람들²⁰은 효성(孝誠)에 감응(感應)한 것이라 여겼다.【《삼강행실(三綱行實)》²¹에서 인용】

주석:
14. [주-D002] 人 : 《세종실록》 15년 9월 10일 조에는 앞에 “야(野)”가 더 있다. 즉 '야인(野人)'으로 되어 있어, '시골 사람들' 또는 '일반 백성들'이라는 의미를 더 명확히 한다.
15. 성효(誠孝): 정성스러운 효도. '출천(出天)'은 하늘로부터 타고났다는 의미로, 지극한 효심을 강조한다.
16. 수장(水漿): 물과 미음(묽은 죽이나 음료). 최소한의 음식물조차 거부하며 슬픔을 극진히 표현했음을 보여준다.
17. 여묘(廬墓): 부모의 묘 옆에 초막(廬)을 짓고 살면서 묘를 돌보는 것. 효의 극진한 표현으로 여겨졌던 전통적인 상례(喪禮) 풍습이다.
18. 철죽(啜粥): 죽을 마심. 상중(喪中)에는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19. 백(柏): 잣나무. 무덤가에 흔히 심는 나무 중 하나이다.
20. 효감(孝感):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나 자연이 감동하여 상서로운 또는 경이로운 현상을 나타내는 것. 유교 사회에서 효를 장려하기 위해 강조되었던 관념이다.
21. 《삼강행실(三綱行實)》: 조선 세종 때 설순(偰循)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책.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의 세 가지 기본 윤리(三綱)에 모범이 되는 행적들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여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맹사성의 효행 이야기가 여기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


원문:
公爲大司憲, 朴公安信爲持平, 鞫平壤君趙大臨, 不啓而栲訊之。 上大怒, 載二人于車, 將戮之市, 公失色無言, 朴公意氣安閑, 略無懼色。 時獨谷爲左政丞, 輿疾詣闕極諫, 上亦霽威, 竟赦而不誅。【《謏聞瑣錄》。】

번역문:
공(公)이 대사헌(大司憲)²²으로, 박안신(朴安信)²³ 공(公)이 지평(持平)²⁴으로 있을 때,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²⁵을 국문(鞫問)하면서 임금께 아뢰지(啓) 않고 고신(栲訊)²⁶하였다. 상(上)²⁷께서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수레에 싣고 저자에서 처형(戮之市)²⁸하려 하시니, 공은 얼굴빛을 잃고 말이 없었으나 박공은 의기(意氣)가 편안하고 한가하여(安閑)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때 독곡(獨谷)²⁹이 좌정승(左政丞)³⁰으로 있었는데, 병든 몸으로 수레(輿)³¹를 타고 대궐에 나아가 극력 간(諫)하니, 상께서도 노여움을 푸시고(霽威)³² 마침내 용서하고 죽이지 않으셨다.【《소문쇄록(謏聞瑣錄)》³³에서 인용】

주석:
22.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종2품).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관장했다.
23. 박안신(朴安信, 1369-1447): 조선 초기의 문신.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24. 지평(持平): 사헌부의 정5품 관직. 대사헌을 보좌하며 감찰 업무를 담당했다.
25.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 1387-1430): 태종(太宗)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남편으로, 태종의 부마(駙馬)이다. 왕실의 인척을 국문하면서 절차를 무시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26. 고신(栲訊): 형틀에 묶고 때리며 죄상을 심문하는 것. 형讯(형신). 조선시대에는 국문 시 고문이 행해졌으나, 왕족이나 종친, 고위 관료 등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했고, 특히 왕에게 보고 없이 임의로 고문하는 것은 큰 죄가 될 수 있었다.
27. 상(上): 임금. 당시 임금은 세종(世宗)이다.
28. 육지시(戮之市): 저자(시장)에서 죄인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것. 매우 중한 처벌 방식이었다.
29.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의 호(號).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재상이다.
30. 좌정승(左政丞): 좌의정(左議政). 당시 성석린은 좌의정이었다.
31. 여(輿): 사람이 타는 수레나 가마. '여질(輿疾)'은 병이 들어 수레나 가마를 타고 감을 의미한다.
32. 제위(霽威): 임금의 노여움이 풀림. 비나 눈이 개는 것(霽)에 비유한 표현이다.
33. 《소문쇄록(謏聞瑣錄)》: 조선 중기 조신(曺伸)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여러 가지 자잘하게 듣고 본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이다.


원문:
上曰: “《太宗實錄》垂成, 予欲觀之。” 右議政孟思誠曰: “《實錄》所載, 皆當時之事, 以示後世, 皆實事也。 殿下見之, 亦不得爲太宗更改。 今一見之, 後世人主效之, 史官疑懼, 必失其職, 何以傳信將來?” 上從之。【《國朝寶鑑》。】

번역문: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태종실록(太宗實錄)》³⁴이 거의 완성되었으니, 내가 보고자 한다.” 우의정(右議政)³⁵ 맹사성이 아뢰었다. “《실록(實錄)》에 실린 것은 모두 당시의 일로서 후세에 보이기 위한 것이니, 모두 실제 사실이어야 합니다. 전하(殿下)께서 보신다 해도 역시 태종(太宗)을 위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한번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들이 이를 본받아 사관(史官)³⁶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반드시 그 직분을 잃게 될 것이니³⁷, 어떻게 믿음(信)³⁸을 장래에 전하겠습니까?” 상께서 그 말을 따랐다.【《국조보감(國朝寶鑑)》³⁹에서 인용】

주석:
34. 《태종실록(太宗實錄)》: 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 실록은 다음 왕 대에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편찬된 실록은 해당 왕이 볼 수 없었다. 이는 사관(史官)이 권력을 의식하지 않고 공정하게 기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35.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 벼슬. 영의정, 좌의정 다음가는 재상직이다.
36. 사관(史官):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속되어 왕의 언행과 국정 전반을 기록했다.
37. 실기직(失其職): 그 직분을 잃음. 임금이 실록을 열람하는 선례가 생기면, 사관들이 후일 임금이 볼 것을 의식하여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지 못하게 되어 역사가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다.
38. 전신(傳信): 믿을 만한 기록을 전함. 역사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의미한다.
39.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 시대 역대 왕들의 모범적인 언행과 치적(治績)을 모아 후대 왕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편찬한 책. 이 일화는 실록 편찬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지키려는 맹사성의 원칙적인 자세와 이를 수용한 세종의 현명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원문:
王半車等乞受許和敎旨而還, 上議於政府、六曹、承文院提調曰: “下敎旨無前例。 禮曹若兵曹、議政府承敎移牒, 何如?” 孟思誠等曰: “今來人心誠求通書, 則不可遏。 具錄請書之意, 繼曰: ‘汝等自搆釁端, 不得已往討, 如其改心納款, 則必當待之如舊。’ 以此禮曹承敎移牒, 無害於義。 自今其來朝者, 與子弟入侍者, 竝皆許之, 合乎時宜。” 上姑從思誠等議。【《靑坡劇談》。】

번역문:
왕반차(王半車)⁴⁰ 등이 화친(和親)을 허락하는 교지(敎旨)⁴¹를 받고 돌아가기를 간청하자, 상(上)께서 정부(政府)⁴², 육조(六曹)⁴³,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⁴⁴에게 의논하며 말씀하셨다. “교지를 내리는 것은 전례(前例)가 없다. 예조(禮曹)나 병조(兵曹) 혹은 의정부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이첩(移牒)⁴⁵하는 것은 어떠한가?” 맹사성 등이 아뢰었다. “지금 온 사람들이 진실로 통교(通交)하기를 구한다면 막을 수는 없습니다. 청하는 글의 뜻을 갖추어 기록하고, 이어서 ‘너희들이 스스로 분쟁의 단서(釁端)⁴⁶를 만들었으므로 부득이 가서 토벌하였으나, 만약 개심(改心)하고 항복(納款)⁴⁷한다면 반드시 예전처럼 대우할 것이다.’라고 하십시오. 이를 예조에서 왕지를 받들어 이첩한다면 의(義)⁴⁸에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조회(朝會)하러 오는 자와 자제(子弟)를 데리고 와서 입시(入侍)⁴⁹하는 자들을 모두 허락하는 것이 시의(時宜)⁵⁰에 합당할 것입니다.” 상께서 우선 맹사성 등의 의견을 따랐다.【《청파극담(靑坡劇談)》⁵¹에서 인용】

주석:
40. 왕반차(王半車): 당시 대마도(對馬島) 등지의 일본인 세력이나 왜구(倭寇)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인물. 이름의 정확한 표기나 실체는 불분명하다. 세종 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조선은 강경책(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등)과 회유책을 병행했다.
41. 교지(敎旨):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문서. 외국 세력에게 직접 교지를 내리는 것은 그들을 신하로 인정하는 듯한 모양새가 될 수 있어 신중하게 여겨졌다.
42.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43. 육조(六曹):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6개 중앙 행정 관서.
44.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 승문원(承文院)의 으뜸 벼슬. 승문원은 외교 문서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제조(提調)는 다른 관서의 고위 관리가 겸임하는 명예직 성격이 강했다.
45. 이첩(移牒): 관청 사이에 주고받는 공문서. 여기서는 조선의 관청 명의로 일본 측에 보내는 문서를 의미한다. 임금의 직접적인 교지 형식을 피하면서도 의사를 전달하는 방안으로 제시되었다.
46. 흔단(釁端): 분쟁이나 싸움의 실마리. 왜구의 노략질 등을 가리킨다.
47. 납관(納款): 항복하거나 복종의 뜻을 표하는 것. 조공(朝貢)을 바치는 행위를 포함할 수 있다.
48. 의(義): 옳음, 정의, 대의명분. 외교 관계에서 명분과 실리를 따지는 것을 의미한다.
49. 자제입시(子弟入侍): 자제들을 데리고 와서 조정에 머물게 하거나 관직에 나아가게 하는 것. 일종의 인질 성격이나 복속의 표시로 해석될 수 있다.
50. 시의(時宜): 그때의 사정이나 상황에 적절함. 강경책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유화책도 써야 한다는 현실적인 외교론을 보여준다.
51. 《청파극담(靑坡劇談)》: 조선 중기 문신 이륙(李陸)이 지은 설화집.


원문:
世宗嘗駕幸東郊, 迎致讓寧大君, 設宴慰之。 翌日, 兩司論其不可, 又於常參日極論之。 時公與刑曹參判申槩入侍, 而默無一言。 法司請依律科罪, 上留中, 仍命思誠就職。 公啓曰: “政丞長百官, 人不得以間之, 然後可謂能盡其職。 今被臺劾, 不可就職。” 上不允。【《東閣雜記》。】

번역문:
세종께서 일찍이 동쪽 교외(東郊)로 거둥(駕幸)⁵²하시어 양녕대군(讓寧大君)⁵³을 맞아들여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셨다. 다음 날 양사(兩司)⁵⁴에서 그 불가함을 논하였고, 또 상참일(常參日)⁵⁵에도 극력히 논하였다. 이때 공(公)이 형조참판(刑曹參判)⁵⁶ 신개(申槩)⁵⁷와 함께 입시(入侍)하였으나, 침묵하며 한마디 말도 없었다. 법사(法司)⁵⁸에서 법률에 따라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께서 그 상소를 머물러 두고 결재하지 않으셨고(留中)⁵⁹, 이어 맹사성에게 관직에 나아가도록 명하셨다. 공이 아뢰기를, “정승(政丞)은 백관(百官)의 으뜸이니, 사람들이 그를 이간(離間)하지 못하게⁶⁰ 한 연후에야 그 직분을 다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대간(臺諫)의 탄핵(彈劾)⁶¹을 받았으니 관직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동각잡기(東閣雜記)》⁶²에서 인용】

주석:
52. 가행(駕幸):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
53.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세종의 맏형. 본래 세자였으나 폐위되고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이 왕위를 이었다. 세종은 형인 양녕을 우대했으나,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종종 신하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54.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임금이나 고위 관료의 잘못을 비판하고 탄핵하는 간쟁(諫諍) 기관이었다. 양사는 임금이 폐세자(廢世子)인 양녕대군을 공개적으로 우대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55. 상참일(常參日): 임금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조회를 여는 날.
56. 형조참판(刑曹參判): 형조(刑曹)의 버금 벼슬(종2품).
57. 신개(申槩, 1374-1446): 조선 초기의 문신. 세종 대에 좌의정까지 지냈다.
58. 법사(法司): 법률을 담당하는 관청이나 관리. 주로 사헌부 관리를 지칭한다. 여기서는 양녕대군과의 연회에 동석하고도 간언하지 않은 맹사성과 신개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59. 유중(留中): 임금이 신하의 상소나 보고를 받고 즉시 결재하지 않고 궁중에 보류해 두는 것. 사실상의 거부나 보류를 의미할 때가 많다.
60. 인부득이간지(人不得以間之): '사람들이 그를 이간질하지 못하게 하다' 또는 '사람들이 그를 틈 탈 수 없게 하다'. 정승의 권위가 확고해야 제대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대간의 탄핵을 받은 상태에서는 권위가 손상되어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61. 대핵(臺劾): 대간(臺諫), 즉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
62.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수필집.


원문:
公之家甚狹小, 兵曹判書以稟事進去, 適値驟雨, 處處漏下, 衣冠盡濕。 判書還家而歎曰: “相公之家如是, 我何以外行廊爲哉?” 遂撤方搆之廊。【《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의 집은 매우 좁고 작았는데, 병조판서(兵曹判書)⁶³가 일(事)을 아뢰러(稟) 들어갔다가 마침 소나기(驟雨)를 만나니, 집안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衣冠)⁶⁴이 모두 젖었다.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며 말하기를, “상공(相公)⁶⁵의 집이 이러한데, 내가 어찌 바깥 행랑(外行廊)⁶⁶을 지으랴?” 하고는, 마침 짓고 있던 행랑을 즉시 철거하였다.【《잠곡구록(潛谷舊錄)》⁶⁷에서 인용】

주석:
63. 병조판서(兵曹判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정2품). 국방 및 무관 인사 등을 담당했다.
64. 의관(衣冠): 옷과 갓. 관리의 공복(公服) 차림을 의미한다.
65. 상공(相公): 정승(政丞)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맹사성을 가리킨다.
66. 외행랑(外行廊): 대문 밖에 지은 행랑채. 주로 하인들이 거처하거나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다. 고위 관료의 집에는 으레 행랑채가 있었으나, 맹사성의 청렴함을 본 병조판서가 자신의 사치를 부끄럽게 여겨 짓던 것을 멈추었다는 일화이다.
67. 《잠곡구록(潛谷舊錄)》: 조선 중기 문신 김육(金堉)의 저술로 추정되는 책. 잠곡(潛谷)은 김육의 호이다.


원문:
公覲省溫陽, 往來時不入官家, 常簡僕從, 時或騎牛。 陽城、振威兩倅聞公下來, 候于長好院, 見騎牛過去之人, 使下人呵禁。 公曰: “汝以溫陽孟古佛言之。” 其人歸告, 兩倅驚惶走出, 印墜於岸下深淵。 後人名曰印沈淵。

번역문:
공(公)이 온양(溫陽)⁶⁸으로 근친(覲省)⁶⁹갈 때, 왕래(往來)할 때 관가(官家)⁷⁰에 들르지 않고 항상 복종(僕從)⁷¹을 간소하게 하였으며, 때로는 소(牛)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⁷²과 진위(振威)⁷³의 두 수령(倅)⁷⁴이 공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장호원(長好院)⁷⁵에서 기다리다가,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하인(下人)을 시켜 꾸짖어 막았다(呵禁). 공이 말하기를, “너는 온양(溫陽)의 맹고불(孟古佛)⁷⁶이라고 말하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가 고하니, 두 수령이 놀라 황급히 달려 나오다가 도장(印)⁷⁷을 언덕 아래 깊은 연못(深淵)에 떨어뜨렸다. 뒷날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⁷⁸이라 이름하였다.

주석:
68. 온양(溫陽):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일대. 맹사성의 고향인 신창(新昌)과 가깝다.
69. 근성(覲省): 벼슬하는 자식이 부모를 찾아뵙는 것.
70. 관가(官家): 관아(官衙)나 관사(官舍). 고위 관리가 행차할 때 지방 관아에서 접대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맹사성은 이를 사양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음을 보여준다.
71. 복종(僕從): 하인과 수행원. 그 수를 간소하게 하여 위세를 부리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72. 양성(陽城): 현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일대.
73. 진위(振威): 현재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
74. 최(倅): 지방 수령(守令). 현감(縣監)이나 현령(縣令) 등을 가리킨다.
75. 장호원(長好院): 당시 역원(驛院)의 이름. 현재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의 지명 유래와 관련이 있을 수 있으나,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역원은 여행자들이 쉬어가던 공공 숙박 시설이었다.
76. 맹고불(孟古佛): '맹씨 성을 가진 오래된 부처'라는 뜻으로, 맹사성의 인품과 덕망을 부처에 비유하여 부른 별칭이다. 그의 청렴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나타낸다.
77. 인(印): 관인(官印). 수령의 직무 수행에 필수적인 도장이다. 이를 잃어버릴 정도로 당황했음을 보여준다.
78. 인침연(印沈淵): '도장이 잠긴 연못'이라는 뜻. 이 일화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원문:
公自溫陽還朝, 中路遇雨, 入于龍仁旅院。 有一人騎從甚盛, 先處樓上, 公入處一隅。 登樓者是嶺南人, 欲爲錄事取才上來也。 見公, 招與共登, 談論博戲, 且約以公字、堂字爲問答之言。 終公問曰: “何以上京公?” 其人曰: “錄事取才上去堂。” 公笑曰: “我爲公差除公。” 其人曰: “嚇不堂。” 後日政府之坐, 其人以取才入謁, 公曰: “何如公?” 退伏而對曰: “死去之堂。” 一坐驚怪, 公以其實言, 諸宰大笑。 公以爲陪錄事, 賴公之薦, 屢典郡縣。 後世稱之曰《公堂問答》。【《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이 온양(溫陽)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던 중 길에서 비를 만나 용인(龍仁)의 여관(旅院)⁷⁹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말을 탄 수행원(騎從)이 매우 성대하게 먼저 누각 위(樓上)에 자리 잡고 있었고, 공은 들어와 한쪽 구석에 자리하였다. 누각에 오른 자는 영남(嶺南) 사람⁸⁰으로, 녹사(錄事) 선발 시험(取才)⁸¹에 응시하려고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가 공을 보고 불러 함께 오르게 하여 담론(談論)하고 박희(博戲)⁸²를 하였으며, 또한 공(公) 자와 당(堂) 자를 넣어 문답(問答)하기로 약속하였다. 마지막에 공이 묻기를, “어찌하여 상경(上京)하시오, 공(公)?”⁸³ 하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녹사 취재(取才) 보러 올라갑니당(堂).”⁸⁴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공(公)⁸⁵을 위하여 공(公)⁸⁶을 차제(差除)⁸⁷하겠소, 공(公)⁸⁸.”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놀래키지 마시옵소서, 당(堂)⁸⁹.” 하였다. 뒷날 정부(政府)의 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이 취재(取才)로 들어와 아뢰니(謁), 공이 말하기를, “어떠시오, 공(公)?”⁹⁰ 하니, 그가 물러나 엎드려(退伏) 대답하기를, “죽었사옵니당(堂)⁹¹.” 하였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자, 공이 그 실제 있었던 일을 말하니 여러 재상(宰相)들이 크게 웃었다. 공이 그를 배록사(陪錄事)⁹²로 삼았는데, 공의 추천에 힘입어 여러 차례 군현(郡縣)을 다스렸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일러 《공당문답(公堂問答)》⁹³이라 하였다.【《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79. 여원(旅院): 나그네가 묵어가는 숙소. 역원(驛院)과 유사한 시설이다.
80. 영남인(嶺南人): 영남 지방(경상도) 사람.
81. 녹사취재(錄事取才): 녹사(錄事)를 선발하는 시험. 녹사는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아의 하급 실무 관리였다.
82. 박희(博戲): 장기, 바둑, 쌍륙 등 여러 가지 놀이.
83. 하이상경공(何以上京公): "왜 서울(上京)에 가십니까, 공(公)?" '공(公)'은 존칭 또는 문답 놀이의 약속된 글자.
84. 녹사취재상거당(錄事取才上去堂): "녹사 시험 보러 올라갑니다, 당(堂)." '당(堂)'은 존칭의 어미 또는 문답 놀이의 약속된 글자.
85. 공(公): 국가, 조정.
86. 공(公): 그대 (영남 사람).
87. 차제(差除): 관직을 제수함, 임명함.
88. 공(公): 그대 (영남 사람). 또는 문답 놀이의 약속된 글자. 맹사성의 말은 "내가 (조정 일을 하는) 공무(公務)로 그대(公)를 (녹사로) 임명(差除)하겠소, 공(公)."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89. 혁불당(嚇不堂): 직역하면 "놀라지 않습니다, 당(堂)." 또는 "놀랍지 않습니까, 당(堂)?" 의역하면 "놀래키지 마십시오, 당(堂)." 또는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당(堂)." 영남 사람이 맹사성의 정체를 모르고 농담으로 받아쳤거나, 혹은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90. 하여공(何如公): "어떠십니까, 공(公)?" 안부를 묻는 동시에 이전의 문답을 상기시키는 질문이다.
91. 사거지당(死去之堂): "죽을 지경입니다, 당(堂)." 또는 "죽은 목숨입니다, 당(堂)." 극도의 송구함과 놀라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92. 배록사(陪錄事): 정식 녹사가 아닌, 임시직이나 보좌역 성격의 녹사로 추정된다.
93. 공당문답(公堂問答): '공(公)' 자와 '당(堂)' 자를 넣어 주고받은 문답이라는 뜻. 맹사성의 소탈하고 해학적인 면모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원문:
孟思誠爲世宗朝政丞, 淸潔簡苦, 不事生産, 飮食常以祿米。 一日, 家以新米飯進之, 公問曰: “何處得新米來?” 夫人答曰: “祿米甚陳久, 不可食, 故借於隣家耳。” 公惡曰: “旣受祿, 當食其祿, 何事於借?”【奇遵《戊寅記聞》。】

번역문:
맹사성은 세종조(世宗朝)의 정승(政丞)으로, 청렴결백(淸潔)하고 간소하며 검약(簡苦)하여 생산(生産)⁹⁴에 힘쓰지 않았고, 음식은 항상 녹미(祿米)⁹⁵로 하였다. 어느 날 집안에서 햅쌀밥(新米飯)을 올리자, 공(公)이 묻기를, “어디서 햅쌀을 얻어왔는가?” 하니, 부인(夫人)이 답하기를, “녹미가 매우 오래되어(陳久) 먹을 수가 없어서 이웃집에서 빌려왔을 뿐입니다.” 하였다. 공이 언짢아하며⁹⁶ 말하기를, “이미 녹(祿)을 받았으면 마땅히 그 녹을 먹어야지, 어찌 빌리는 일을 하는가?” 하였다.【기준(奇遵)의 《무인기문(戊寅記聞)》⁹⁷에서 인용】

주석:
94. 생산(生産): 생업(生業), 재산 증식 활동. 고위 관료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95. 녹미(祿米): 관리에게 봉급으로 지급되던 쌀. 당시에는 현물로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오래된 쌀이 지급되기도 했다.
96. 오(惡): 싫어하다, 미워하다. 여기서는 언짢아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김을 의미한다.
97. 기준(奇遵)《무인기문(戊寅記聞)》: 기준(1492-152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한 사림파 학자이다. 《무인기문》은 그가 귀양지에서 기록한 견문록으로 추정된다. 이 일화는 맹사성의 철저한 청렴성과 원칙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원문:
孟文貞公淸簡端重, 在相府持大體。 年庚子, 嘗因戲托癸卯契。 一日, 在上前, 上問公年有幾, 文貞對以庚子。 朝退, 契中以非同庚黜之, 一時傳笑。

번역문:
맹문정공(孟文貞公)은 청렴하고 간소하며(淸簡) 단정하고 신중하였으며(端重), 상부(相府)⁹⁸에 있으면서 대체(大體)⁹⁹를 견지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360) 생인데, 일찍이 장난삼아 계묘년(癸卯年, 1363) 생들의 계(契)¹⁰⁰에 가입하였다. 어느 날 임금 앞에서 상(上)께서 공의 나이를 물으시니, 문정(文貞)이 경자년(庚子年) 생이라고 대답하였다. 조회가 끝나고 물러나오자, 계원(契員)들이 동갑(同庚)¹⁰¹이 아니라 하여 그를 계에서 내쫓으니,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다.

주석:
98. 상부(相府): 정승(相)이 있는 관청, 즉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99. 대체(大體): 일의 큰 줄거리나 중요한 원칙.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국정의 큰 방향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100. 계(契): 특정 목적이나 유대를 바탕으로 조직된 모임. 동갑내기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는 동갑계(同甲契)가 흔했다. 계묘년은 1363년으로, 맹사성의 출생년인 1360년(경자년)과 다르다.
101. 동경(同庚): 나이가 같음. 같은 해에 태어남.


원문:
文貞性解音律, 常執一笛, 日弄三四聲。 關門不接賓客, 有稟事, 令人開門引接。 夏則坐松陰, 冬則坐房內蒲茵, 左右無他物。 稟事者去, 卽關門。 稟事者到洞口聞笛聲, 則知公之必在也。【《筆苑雜記》。】

번역문:
문정(文貞)은 천성적으로 음률(音律)¹⁰²을 이해하여 항상 피리(笛)¹⁰³ 하나를 잡고 하루 서너 가락씩 연주하였다. 문을 닫고 손님(賓客)을 접대하지 않았으며, 아뢸 일(稟事)이 있는 경우에만 사람을 시켜 문을 열어 만나주었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松陰)에 앉고 겨울에는 방 안의 부들자리(蒲茵)¹⁰⁴에 앉았는데,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아뢰는 사람이 가면 즉시 문을 닫았다. 아뢰는 사람이 동네 어귀(洞口)에 이르러 피리 소리를 들으면 공이 반드시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었다.【《필원잡기(筆苑雜記)》¹⁰⁵에서 인용】

주석:
102. 음률(音律): 음악의 가락과 법칙. 맹사성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향악(鄕樂) 정비에 기여하기도 했다.
103. 적(笛): 피리. 가로로 부는 저(橫笛)를 가리킬 수도 있고, 세로로 부는 피리를 통칭할 수도 있다.
104. 포인(蒲茵): 부들(갈대의 일종)로 엮어 만든 자리. 검소한 생활 용품을 상징한다.
105.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필기잡록.


원문:
孟相少時, 曾以享官齋于昭格殿, 假寐之際, 夢有皁隷, 傳呼七星入矣。 公下庭祗迎, 六丈夫已入, 第七人則獨谷成相。 及公獲罪, 將殉于市, 賴獨谷諫救之力, 得免於死。 平生事獨谷甚謹, 沒後, 雖雨雪, 過祠堂, 必下馬。【《慵齋叢話》。】

번역문:
맹정승(孟相)이 젊었을 때, 일찍이 향관(享官)¹⁰⁶으로서 소격전(昭格殿)¹⁰⁷에서 재계(齋戒)¹⁰⁸하다가 잠시 졸던(假寐) 중에, 꿈에 조례(皁隷)¹⁰⁹가 있어 ‘칠성(七星)¹¹⁰께서 드십니다’라고 전하며 외쳤다. 공(公)이 뜰 아래로 내려가 공경히 맞이하니 여섯 장부(丈夫)는 이미 들어왔고, 일곱 번째 사람이 바로 독곡(獨谷) 성정승(成相)¹¹¹이었다. 공이 죄를 얻어 장차 저자에서 죽게 되었을 때(殉于市), 독곡(獨谷)이 간(諫)하여 구해준 힘에 의지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평생 독곡을 섬기기를 매우 삼갔으며(謹), 돌아가신(沒) 후에는 비록 눈비가 와도 그 사당(祠堂)¹¹²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용재총화(慵齋叢話)》¹¹³에서 인용】

주석:
106. 향관(享官): 나라의 제사(祭祀) 때 제주(祭主)를 대신하여 제물을 올리는 등의 역할을 맡은 임시 관직.
107. 소격전(昭格殿): 조선 시대에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던 도교(道敎)적 성격의 관청. 소격서(昭格署)라고도 한다.
108. 재계(齋戒): 제사나 중요한 의식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목욕하고 부정한 일을 피하며 근신하는 것을 포함한다.
109. 조례(皁隷): 관아에 소속된 하급 심부름꾼.
110. 칠성(七星): 북두칠성(北斗七星). 도교에서는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중요한 신으로 여겨졌다.
111. 독곡 성상(獨谷成相): 성석린(成石璘)을 가리킨다. (Segment 3 참조)
112. 사당(祠堂): 조상이나 공신 등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집.
113.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필기잡록. 용재(慵齋)는 성현의 호이다. 이 일화는 맹사성과 성석린의 특별한 인연과 맹사성의 의리 깊은 면모를 보여준다.

 

조연(趙涓)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趙涓【良襄公。】
初名卿, 後改涓, 漢陽人。 洪武甲寅生。 十三, 中高麗進士。 壬申, 我太祖開國卽位, 爲雲劍之任。 太宗朝, 策佐命功臣, 拜工曹判書, 封漢平府院君。 官至右議政。 世宗己酉卒, 年五十六。

번역문:
조연(趙涓)【양양공(良襄公)¹이다.】
처음 이름은 경(卿)이었으나 뒤에 연(涓)으로 고쳤으며, 한양(漢陽) 사람이다.² 홍무(洪武) 갑인년(甲寅年, 1374)에 태어났다.³ 열세 살에 고려(高麗)의 진사(進士)⁴ 시험에 합격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392)에 우리 태조(太祖)⁵께서 개국(開國)⁶하고 즉위(卽位)하시자, 운검(雲劍)⁷의 임무를 맡았다. 태종(太宗)⁸ 시대에 좌명공신(佐命功臣)⁹에 책록(策錄)되고, 공조판서(工曹判書)¹⁰에 제수(拜)되었으며,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¹¹에 봉(封)해졌다. 관직은 우의정(右議政)¹²에 이르렀다. 세종(世宗)¹³ 기유년(己酉年, 1429)에 졸(卒)¹⁴하니, 향년(享年)¹⁵ 쉰여섯 살이었다.

주석:

  1. [주-D001] 양양공(良襄公): 조연의 시호(諡號)이다. 시호는 사후에 왕이나 공신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이름이다. 다만, 《세종실록》 11년 10월 11일 기사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인물 조에 따르면 시호가 ‘양경(良敬)’으로 기록되어 있어, 본문의 ‘양양(良襄)’은 ‘양경(良敬)’의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높다. 양(良)은 온화하고 선량함(溫良慈惠), 경(敬)은 밤낮으로 경계하며 삼감(夙夜儆戒) 등을 의미한다. 본 번역에서는 원문을 따라 ‘양양공’으로 표기하되, ‘양경공’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밝힌다.
  2. 한양인(漢陽人): 본관(本貫)이 한양(漢陽)임을 나타낸다. 한양 조씨(漢陽 趙氏)이다.
  3. 홍무(洪武) 갑인년(甲寅年): 홍무는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연호이다. 갑인년은 1374년이다.
  4. 진사(進士): 고려 및 조선 시대에 소과(小科) 시험의 한 과목. 주로 시(詩), 부(賦), 표(表) 등 문학적 능력을 시험하여 합격자에게 주던 칭호이다. 13세(한국 나이)에 합격한 것은 그의 재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5. 태조(太祖):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묘호(廟號).
  6. 개국(開國): 조선 왕조의 건국(1392년)을 의미한다.
  7. 운검(雲劍): 의장용(儀仗用) 칼의 일종. 국가의 큰 의식이나 왕의 행차 시에 고위 관료나 무관이 차던 칼이다. '운검지임(雲劍之任)'은 이러한 운검을 차고 왕을 시위(侍衛)하는 직책을 맡았음을 의미하며, 건국 초기에 왕의 가까이에서 신임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8. 태종(太宗): 조선의 제3대 왕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의 묘호.
  9. 좌명공신(佐命功臣):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들에게 내린 공신호. 조연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0. 공조판서(工曹判書): 육조(六曹)의 하나인 공조(工曹)의 으뜸 벼슬(정2품). 공조는 국가의 공장(工匠), 산택(山澤), 공예, 건축, 도량형 등을 관장했다.
  11.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부원군(府院君)은 정1품 공신이나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던 작호이다. 한평(漢平)은 조연에게 내려진 구체적인 봉호이다.
  12. 우의정(右議政):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중 하나. 정1품.
  13. 세종(世宗): 조선의 제4대 왕 이도(李祹, 1397-1450)의 묘호.
  14. 졸(卒): 관리가 죽었을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15. 향년(享年): 한평생 살아 누린 나이. 한국식 나이(세는나이)로 56세이다. (1429 - 1374 + 1 = 56)

원문:
定宗卽位, 命公領六十餘人與太祖潛邸時心腹十餘人入侍, 除通政中樞院右承旨, 賜良馬、寶劍。

번역문:
정종(定宗)¹⁶께서 즉위하시자, 공(公)¹⁷에게 명하여 육십여 명을 거느리고 태조께서 잠저(潛邸)¹⁸에 계실 때의 심복(心腹)¹⁹ 십여 명과 함께 입시(入侍)²⁰하게 하였으며, 통정대부 중추원우승지(通政大夫 中樞院右承旨)²¹에 제수(除)하고 좋은 말(良馬)과 보검(寶劍)을 하사하였다.

주석:
16. 정종(定宗): 조선의 제2대 왕 이방과(李芳果, 1357-1419)의 묘호. 태조의 둘째 아들로,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이후 왕위에 올랐다.
17. 공(公): 조연을 높여 부르는 말.
18. 잠저(潛邸):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여기서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시기 및 그를 따르던 핵심 세력을 의미한다.
19. 심복(心腹):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부하. 태조의 초기 핵심 지지 세력을 뜻한다.
20. 입시(入侍): 궁궐에 들어가 임금을 모시는 것. 정종 즉위 직후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조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의 옛 심복들과 함께 궁궐 경비를 맡긴 것은 그에 대한 깊은 신임을 보여준다.
21.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 시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명. 중추원우승지(中樞院右承旨): 중추원(中樞院)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명 출납 및 숙위(宿衛) 등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후의 승정원(承政院)에 해당한다. 우승지(右承旨)는 승지(承旨) 중 하나로,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원문:
太宗與公親愛甚篤, 登寶位, 封佐命功臣。 丁亥, 拜資憲大夫、都摠制。 己丑, 上以公德威兼全, 除吉州道安撫節制使, 領吉州牧, 往鎭朔方。 公至朔方, 野人果入寇, 乃剿除巨魁, 擊却之, 威振北方。 上特遣使宣醞, 仍留宣化。

번역문:
태종께서 공과 더불어 친애(親愛)함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보위(寶位)²²에 오르시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봉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407)²³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도총제(都摠制)²⁴에 제수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409)²⁵에 상(上)께서 공이 덕(德)과 위엄(威)을 겸비(兼全)하였다고 여겨, 길주도 안무절제사(吉州道 安撫節制使)²⁶ 겸 길주목사(吉州牧使)²⁷에 제수하여 북방(朔方)²⁸으로 가서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공이 북방에 이르자 야인(野人)²⁹들이 과연 침입(入寇)하였는데, 이에 그 거괴(巨魁)³⁰들을 소탕(剿除)하고 격퇴하니, 위세가 북방을 진동시켰다. 상께서 특별히 사신을 보내 위로의 술(宣醞)³¹을 내리고, 이어서 머물며 선화(宣化)³²하게 하였다.

주석:
22. 보위(寶位): 보배로운 자리라는 뜻으로, 임금의 자리를 가리킨다.
23. 정해년(丁亥年): 1407년(태종 7년).
24.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명. 도총제(都摠制): 조선 전기 중앙 군사 지휘부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 또는 후의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고위 무관직(정2품). 군대를 총괄 지휘하는 역할이다.
25. 기축년(己丑年): 1409년(태종 9년).
26. 길주도 안무절제사(吉州道 安撫節制使): 길주도(吉州道)는 함경도 지역의 옛 이름이다. 안무절제사(安撫節制使)는 해당 지역의 민정(民政)을 안정시키고(安撫) 군사(軍事)를 통제(節制)하는 임시 군정관(軍政官)이다.
27. 길주목사(吉州牧使): 길주목(吉州牧)의 수령(정3품). 목(牧)은 조선 시대 주요 지역에 설치된 큰 행정 구역 단위이다. 안무절제사와 목사를 겸하게 한 것은 해당 지역의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장악하게 한 것이다.
28. 삭방(朔方): 북쪽 지방. 함경도 지역을 가리킨다. 당시 여진족(野人)과의 접경 지역으로 국방상 요충지였다.
29. 야인(野人): 조선 시대에 함경도와 평안도 북쪽 변경 지역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을 주로 가리키던 말.
30. 거괴(巨魁): 우두머리, 괴수. 침입한 여진족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31. 선온(宣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 임금의 특별한 위로와 격려를 나타낸다.
32. 선화(宣化): 임금의 덕화(德化)를 널리 폄. 사신을 보내 술을 내렸을 뿐 아니라, 계속 머물게 하여 왕의 위엄과 은덕을 북방 지역에 알리고 민심을 안정시키게 한 것이다. 이는 조연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公自幼年受職, 列位廊廟, 不殖貨財, 不慮家事, 無有見貶歇祿矣。 己酉九月, 得疾, 歎曰: “無復得見天顔, 我命盡矣。”

번역문:
공은 어린 나이부터 관직을 받아 조정(廊廟)³³에 반열(列位)하였으나, 재물(貨財)을 늘리지(殖) 않고 집안일(家事)을 염려하지 않았으며, 관직에서 폄하(貶)되거나 녹봉(祿)이 끊기는(歇) 일이 없었다.³⁴ 기유년(己酉年, 1429) 구월에 병을 얻어 탄식하며 말하기를, “다시는 천안(天顔)³⁵을 뵙지 못하겠구나, 내 목숨이 다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주석:
33. 낭묘(廊廟): 궁궐의 복도와 사당이라는 뜻으로, 조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4. 무유견폄헐록(無有見貶歇祿矣): 폄(貶)은 관직이나 지위를 깎아내리는 것, 헐록(歇祿)은 녹봉(祿俸)을 멈추거나 중단하는 것으로, 둘 다 처벌이나 좌천을 의미한다. 조연의 관직 생활이 큰 좌절 없이 순탄했으며 청렴했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35. 천안(天顔): 하늘의 얼굴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얼굴을 높여 부르는 말. 죽음을 앞두고 임금을 다시 뵙지 못함을 탄식하는 것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준다.


원문:
公天資明敏, 風采照耀, 爲臣四朝, 皆得寵遇。【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은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풍채(風采)가 빛났으며(照耀), 네 조정(四朝)³⁶에서 신하 노릇을 하면서 모두 총애(寵遇)를 받았다.【이상은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36. 사조(四朝): 네 왕조, 즉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의 치세를 가리킨다. 조선 초기 네 임금을 섬기며 오랫동안 고위직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변계량(卞季良)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卞季良【文肅公。】
字巨卿, 號春亭, 密陽人。 洪武己酉生。 高麗辛禑十一年乙丑登第。 入我朝, 太宗七年丁亥, 魁重試。 官至贊成。

번역문:
변계량(卞季良)【문숙공(文肅公)¹이다.】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밀양(密陽) 사람²이다. 홍무(洪武) 기유년(己酉年, 1369)³에 태어났다. 고려 신우(辛禑) 11년 을축년(乙丑年, 1385)⁴에 과거에 급제(登第)⁵하였다. 우리 왕조(我朝)⁶에 들어와 태종(太宗) 7년 정해년(丁亥年, 1407)에 중시(重試)⁷에서 장원(魁)⁸하였다. 관직은 찬성(贊成)⁹에 이르렀다.

주석:

  1. 문숙공(文肅公): 변계량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며, 숙(肅)은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음(剛德克就), 또는 몸가짐을 엄숙히 함(執心決斷) 등을 의미한다.
  2. 밀양인(密陽人): 본관(本貫)이 밀양임을 나타낸다. 밀양 변씨(密陽 卞氏)이다.
  3. 홍무(洪武) 기유년(己酉年): 1369년. 홍무는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연호이다.
  4. 고려 신우(辛禑) 11년 을축년(乙丑年): 1385년. 신우(辛禑)는 고려 우왕(禑王)의 즉위년(1375)이 을묘년(乙卯)이므로, 간지(干支)로 왕의 재위 기간을 나타낸 것이다. 우왕 11년에 해당한다.
  5. 등제(登第): 과거 시험에 합격함.
  6. 아조(我朝): '우리 왕조', 즉 조선 왕조를 가리킨다.
  7. 중시(重試): 이미 문과(文科)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임금이 친히 보이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관직을 승진시켰다.
  8. 괴(魁): 으뜸, 첫째. 여기서는 중시에서 장원(壯元), 즉 수석으로 합격했음을 의미한다.
  9. 찬성(贊成):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우찬성(右贊成)이 있었으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었다.

원문:
公自幼聰明絶人, 好學不倦, 以硏窮性理爲務。 游牧隱、圃隱、三峯¹⁰、陽村諸先生之門, 得師友淵源之正, 所聞益廣, 所造益深。【行狀。】

번역문:
공(公)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성리학(性理學)¹¹을 연구하고 궁구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목은(牧隱)¹², 포은(圃隱)¹³, 삼봉(三峯)¹⁴, 양촌(陽村)¹⁵ 여러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노닐며 스승과 벗의 학문적 연원(淵源)의 올바름을 얻어, 듣는 바가 더욱 넓어지고 이룬 바(所造)가 더욱 깊어졌다.【행장(行狀)¹⁶에서 인용】

주석:
10. [주-D001] 三峯 : 《춘정집(春亭集)・행장(行狀)》에는 “도은(陶隱)”으로 되어 있다. 삼봉 정도전(鄭道傳)이 아니라 도은 이숭인(李崇仁)을 가리킨다는 이문(異文)이다.
11. 성리(性理): 성리학(性理學). 인간의 본성(性)과 우주의 원리(理)를 탐구하는 유학의 한 갈래로, 송대(宋代)에 정립되어 고려 말 조선 초에 수용되었다.
12.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호.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13.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호. 고려 말의 충신이자 성리학의 대가.
14.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호. 조선 건국의 핵심 설계자. 주석 [주-D001]에서 보듯, 《춘정집》 행장에는 이숭인(李崇仁)으로 기록되어 있다.
15.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호.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 변계량은 이들 당대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수학했음을 알 수 있다.
16. 행장(行狀): 고인의 생애와 업적, 성품 등을 기록한 글. 주로 장례 후 지인이나 제자가 짓는다.


원문:
卞季¹⁷良語李薈曰: “自古政權、兵權, 不可兼任一人, 兵權宜在宗室, 政權宜在宰輔。 今鄭道傳、趙浚、南誾等旣專兵權, 又掌政權, 實爲不可。” 太祖聞之, 怒曰: “此數人, 皆我股肱, 終始一心者, 如或可疑, 誰可信者? 爲此言者, 必有以也。” 竝命流之。【《紀年通攷》。】

번역문:
변계량(卞季良)¹⁸이 이회(李薈)에게 말하였다. “예로부터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은 한 사람에게 겸임시켜서는 안 되니, 병권은 마땅히 종실(宗室)¹⁹에게 있어야 하고, 정권은 마땅히 재보(宰輔)²⁰에게 있어야 합니다. 지금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남은(南誾)²¹ 등이 이미 병권을 독점하고 또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실로 옳지 않습니다.” 태조(太祖)께서 이를 들으시고 노하여 말씀하셨다. “이 몇 사람은 모두 나의 고굉(股肱)²²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음인 자들인데, 만약 의심할 만하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을 하는 자는 반드시 다른 이유(以)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유배(流)를 명하셨다.²³【《기년통고(紀年通攷)》²⁴에서 인용】

주석:
17. [주-D002] 季 : 《국조보감(國朝寶鑑)・태조조(太祖朝)》 임신(壬申, 1년) 및 《삼봉집(三峯集)・사실(事實)》에 근거할 때 “중(仲)”이 되어야 한다. 즉, 이 발언을 한 인물은 변계량(卞季良)이 아니라 그의 형인 변중량(卞仲良)이라는 것이다. 이 설이 더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18. 변계량(卞季良): 주석 [주-D002]에서 지적하듯, 이 발언의 주체는 변계량이 아니라 그의 형 변중량(卞仲良)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변계량은 아직 젊은 관료였고, 이처럼 민감한 정치적 발언을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르다.
19. 종실(宗室): 임금의 친척. 왕족(王族)을 의미한다.
20. 재보(宰輔): 재상(宰相)과 보상(輔相). 임금을 보좌하는 최고위 문신 관료를 의미한다.
21.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남은(南誾): 모두 조선 건국의 핵심 공신으로, 당시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정도전은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등을 추진하며 군권 장악에 힘썼다. 이 발언은 이러한 권력 집중을 비판하는 것이다.
22. 고굉(股肱): 넓적다리와 팔뚝.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중요 신하를 비유한다.
23. 유배(流)를 명하셨다: 주석 [주-D002]에 따라 변중량의 일로 본다면, 변중량은 이 발언으로 인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24. 《기년통고(紀年通攷)》: 편찬자와 시기 미상의 역사서. 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을 바탕으로 한 편년체 사서로 추정된다.


원문:
時有建議以海靑進獻, 請免金銀者。 上王曰: “海靑, 得之最難。 且日食一雉, 調養亦難。 又不調馴, 或時逸去, 則鷹師尋捕, 闌入村落, 侵擾爲民害。 予欲悉放之。” 卞季良曰: “殿下此言, 可書史策, 垂法萬世。”【《日月錄》。】

번역문:
당시에 해청(海靑)²⁵을 진헌(進獻)하고 그 대신 금은(金銀)을 면제해 달라고 건의하는 자가 있었다. 상황(上王)²⁶께서 말씀하셨다. “해청은 얻기가 가장 어렵다. 또한 하루에 꿩 한 마리를 먹으니 길들이고 보살피기도 어렵다. 또 잘 길들여지지 않아 혹 때때로 달아나기라도 하면, 응사(鷹師)²⁷가 찾아 잡느라 마을에 함부로 들어가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해가 된다. 나는 이것들을 모두 놓아주고자 한다.” 변계량이 아뢰었다. “전하(殿下)²⁸의 이 말씀은 역사책(史策)에 기록하여 만세(萬世)에 법(法)으로 드리울 만합니다.”【《일월록(日月錄)》²⁹에서 인용】

주석:
25. 해청(海靑): 송골매. 주로 만주나 연해주 등 북방 지역에서 나는 우수한 매의 일종이다. 고려, 조선 시대에 원(元)이나 명(明)에 바치는 중요한 공물(貢物) 중 하나였으며, 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26. 상황(上王): 왕위를 물려준 전임 왕. 여기서는 태종(太宗)을 가리킨다. 태종은 1418년 세종(世宗)에게 양위한 후 상황으로 있으면서 군권 등을 장악하고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7. 응사(鷹師): 매를 부리는 사람. 응장(鷹匠)이라고도 한다.
28. 전하(殿下): 본래 현직 임금을 칭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상황인 태종을 높여 부르는 말로 사용되었다.
29. 《일월록(日月錄)》: 편찬자와 시기 미상의 기록. 주로 왕실 관련 일화나 언행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世宗六年, 上召卞季良曰: “民間生業之艱難, 徭役之煩苦, 卿其逐月作圖。” 仍述警戒等語以進。

번역문:
세종(世宗) 6년(1424)에 상(上)께서 변계량을 불러 말씀하셨다. “민간(民間)의 생업(生業)의 어려움과 요역(徭役)³⁰의 번거롭고 괴로움을 경(卿)은 매달 그림(圖)으로 그려오라.” 이어서 변계량은 경계(警戒)하는 등의 말을 아뢰었다.

주석:
30. 요역(徭役): 국가가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노동력 동원. 성곽 축조, 궁궐 건축, 군수품 운반 등 다양한 부문에 동원되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세종이 민생의 고통을 직접 파악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원문:
命卞季良撰箕子碑, 立其祠。【竝《紀年通攷》。】

번역문:
변계량에게 명하여 기자비(箕子碑)³¹를 짓게 하고, 그의 사당(祠)을 세우게 하였다.【이상 《기년통고(紀年通攷)》에서 인용】

주석:
31. 기자(箕子): 중국 상(商)나라 말기의 현인(賢人).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을 멸망시키자 동쪽으로 와서 조선(朝鮮)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상의 인물. 조선 시대에는 기자(箕子)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이 전래되었다고 믿어, 그를 유교 문명의 시조로서 숭배하고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기자비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세워진 비석이다.


원문:
禮曹判書卞季良啓曰: “殿下命除諸道進膳, 其謙謹之意則至矣。 然人主一身, 宗社生靈之所托, 奉養調護, 不宜不謹。” 上不允。

번역문:
예조판서(禮曹判書)³² 변계량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여러 도(道)의 진선(進膳)³³을 없애도록 명하시니, 그 겸손하고 삼가시는 뜻은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임금(人主)의 한 몸은 종사(宗社)³⁴와 생령(生靈)³⁵이 의탁하는 바이니, 봉양(奉養)하고 조호(調護)³⁶하는 것을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上)께서 윤허(允)하지 않으셨다.

주석:
32. 예조판서(禮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예악(禮樂), 제사(祭祀), 외교(外交), 과거(科擧) 등에 관한 업무를 총괄했다.
33. 진선(進膳): 지방에서 생산된 특산물이나 음식을 임금의 수라상(水剌床)에 올리기 위해 바치는 것. 혹은 그 음식 자체. 이는 지방관과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은 이러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진선을 줄이거나 없애려 했다.
34. 종사(宗社):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 국가 또는 왕조를 상징한다.
35. 생령(生靈): 살아있는 모든 것. 주로 백성(百姓)을 가리킨다.
36. 봉양(奉養)하고 조호(調護): 임금의 식사와 건강을 잘 보살피는 것. 변계량은 임금의 건강이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다는 논리로 진선 폐지를 반대한 것이다.


원문:
上論宋朝名臣事蹟, 卞季良對曰: “溫仁謹厚, 司馬溫公爲最, 先儒以王安石爲小人之才者也。”³⁷

번역문:
상(上)께서 송(宋)나라 명신(名臣)들의 사적(事蹟)을 논하시자, 변계량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온화하고 어질며 삼가고 후덕하기로는 사마온공(司馬溫公)³⁸이 으뜸이며, 선유(先儒)³⁹들은 왕안석(王安石)⁴⁰을 소인(小人)의 재주를 가진 자⁴¹라고 여겼습니다.”

주석:
37. [주-D003] 先儒……者也 : 《세종실록(世宗實錄)》 즉위년 11월 7일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안석(王安石)은 선유(先儒)들이 소인(小人)이라 하였으나, 그의 문장(文章)과 정사(政事)와 그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 모두 남이 미칠 바가 아니니, 오로지 소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다.’ 상(上)께서 말씀하시기를, ‘안석(安石)은 소인(小人)으로서 재주가 있는 자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변계량은 왕안석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소인이라는 평가를 소개했고, 최종적으로 세종이 '소인의 재주를 가진 자'라고 규정한 것으로 나타난다. 본문의 기록은 이를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38. 사마온공(司馬溫公): 송나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유명하며,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한 보수파의 영수였다. 온공(溫公)은 그의 시호이다.
39. 선유(先儒): 앞선 시대의 유학자들. 주로 주희(朱熹)를 비롯한 송대 성리학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왕안석의 신법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40.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송나라 신종(神宗) 때 재상으로,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 정책인 신법(新法)을 추진했다. 그의 개혁은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후대에도 평가가 엇갈린다.
41. 소인지재자(小人之才者): 소인(小人)은 군자(君子)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즉, 왕안석이 재주는 뛰어났으나 인격이나 도덕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평가이다. 주석 [주-D003] 참조.


원문:
上曰: “向者大臣請復立號牌之法, 太宗亦已行之, 以民不願而罷之。 今若復行, 恐民之怨咨也。” 卞季良曰: “爲一邑之主, 則當知一邑之戶口; 爲一國之主, 則當知一國之戶口; 爲天下之主, 則當知天下之戶口。 大抵民之願惡, 不可苟從。 今民憚號牌者, 欲脫漏戶籍, 規避賦役耳。 號牌之法, 宜當擧行。”

번역문: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지난번에 대신(大臣)들이 호패법(號牌法)⁴²을 다시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태종(太宗)께서도 이미 시행하셨으나 백성들이 원하지 않아 폐지하셨다. 지금 만약 다시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할까 염려된다.” 변계량이 아뢰었다. “한 고을의 주인이 되면 마땅히 한 고을의 호구(戶口)를 알아야 하고, 한 나라의 주인이 되면 마땅히 한 나라의 호구를 알아야 하며, 천하(天下)의 주인이 되면 마땅히 천하의 호구를 알아야 합니다. 대체로 백성들이 원하고 싫어하는 바를 구차하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백성들이 호패를 꺼리는 것은 호적(戶籍)에서 누락되어 부역(賦役)을 피하려 할 뿐입니다. 호패법은 마땅히 거행해야 합니다.”

주석:
42. 호패법(號牌法):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신분을 증명하는 패(牌)를 차고 다니게 한 제도. 호구 파악, 인구 이동 통제, 조세 및 군역(軍役) 대상자 확보 등을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태종 때 처음 시행되었으나 백성들의 반발로 중단되었다가 세종 때 다시 논의되어 결국 시행되었다. 변계량은 국가 통치와 재정 확보를 위해 호패법 시행을 강력히 주장했다.


원문:
上聞晉州民殺父, 瞿然曰: “此予否德所致也。 向者許稠每以上下之嚴分勸我, 我聞而嘉之, 今果然矣。” 遂召群臣議所以敦孝悌厚風俗之方。 卞季良請廣布《孝行錄》等書, 使閭巷小民尋常讀之, 使之駸駸然入於孝悌禮義之俗。 乃命偰循改撰《孝行錄》以進。

번역문:
상(上)께서 진주(晉州)의 백성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들으시고, 놀라시며(瞿然)⁴³ 말씀하셨다. “이는 나의 부덕(否德)⁴⁴이 부른 바로다. 지난번에 허조(許稠)⁴⁵가 매번 상하(上下)의 엄격한 구별⁴⁶로 나를 권면(勸勉)하였는데, 내가 듣고 가상히 여겼더니, 이제 과연 그렇구나.” 마침내 여러 신하를 불러 효제(孝悌)⁴⁷를 돈독히 하고 풍속(風俗)을 두텁게 할 방도를 의논하셨다. 변계량은 《효행록(孝行錄)》⁴⁸ 등의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여항(閭巷)의 소민(小民)들이 평상시에 읽게 하여, 점차(駸駸然)⁴⁹ 효제와 예의(禮義)의 풍속으로 들어가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설순(偰循)⁵⁰에게 명하여 《효행록》을 개찬(改撰)하여 올리게 하였다.

주석:
43. 구연(瞿然): 놀라서 두리번거리는 모양. 매우 놀람을 나타낸다.
44. 부덕(否德): 덕(德)이 없음. 임금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던 말이다.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진 책임을 자신의 부족함으로 돌리는 유교적 군주의 자세를 보여준다.
45. 허조(許稠, 1369-1439):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문신. 원칙과 기강을 중시한 보수적인 관료로 유명했다.
46. 상하지엄분(上下之嚴分):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관계와 본분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관. 허조는 이러한 엄격한 신분 질서와 예법 준수를 통해 사회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47. 효제(孝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 유교의 핵심적인 실천 덕목이다.
48. 《효행록(孝行錄)》: 효자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효행을 장려하기 위해 편찬된 책.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여러 종류가 편찬되었다.
49. 침침연(駸駸然): 말이 빨리 달리는 모양. 여기서는 일이 빠르게 진척되거나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모양을 나타낸다. 교화(敎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50. 설순(偰循, ?-1435): 조선 초기의 문신. 문장과 학문에 능했다.


원문:
初, 鄭道傳、鄭揔等修史, 因李穡、李仁復所撰《金鏡錄》撰之。 道傳以元王以下事多僭⁵¹擬, 稱宗者書王, 稱節日者書生日, 朕則書予, 詔則書敎, 乃多更改, 以沒其實, 是非出於愛惡, 善惡謬於舊史。 河崙獻議於朝, 稽舊史就加筆削, 未訖而卒。 初, 上命柳觀與卞季良讎校, 觀欲倣《朱子綱目》編之, 季良欲仍道傳等所改, 頗失當時之實。 史官李先齊等曰: “官號雖皆僭, 當時之制。 稱制稱勅, 亦不可沒實。 雖曰正名分, 當與《春秋》郊禘、大雩同垂以爲鑑戒, 何可更改?” 季良不以爲然。【竝《國朝寶鑑》。】

번역문:
처음에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⁵² 등이 역사를 편수(修史)하면서 이색(李穡), 이인복(李仁復)⁵³이 지은 《금경록(金鏡錄)》⁵⁴에 의거하여 편찬하였다. 정도전은 원(元)나라 간섭기 이후 왕들의 일에 참람되게 황제의 격식에 비긴 것(僭擬)⁵⁵이 많다 하여, ‘종(宗)’으로 칭한 것을 ‘왕(王)’으로 쓰고, ‘절일(節日)’로 칭한 것을 ‘생일(生日)’로 쓰며, ‘짐(朕)’은 ‘여(予)’로 쓰고, ‘조(詔)’는 ‘교(敎)’로 쓰는 등 많이 변경하여 그 사실(史實)을 없앴으니, 시비(是非)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愛惡)에서 나오고 선악(善惡)은 옛 역사 기록과 어긋났다. 하륜(河崙)⁵⁶이 조정에 의견을 내어 옛 사서를 상고하여 수정(筆削)을 가하려 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처음에 상(上)께서 유관(柳觀)⁵⁷과 변계량에게 교정(讎校)을 명하셨는데, 유관은 《주자강목(朱子綱目)》⁵⁸을 모방하여 편찬하고자 하였고, 변계량은 정도전 등이 고친 것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여 자못 당시의 사실을 잃을 우려가 있었다. 사관(史官) 이선제(李先齊)⁵⁹ 등이 아뢰었다. “관직의 명칭이 비록 모두 참람되나 당시의 제도였습니다. 제(制)라 칭하고 칙(勅)이라 칭한 것⁶⁰ 또한 그 사실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비록 명분(名分)을 바로잡는다고⁶¹ 하지만, 마땅히 《춘추(春秋)》에서 제후가 천자의 제사인 교사(郊祀)와 체사(禘祀)를 지내고 기우제(大雩)를 지낸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 감계(鑑戒)⁶²로 삼은 것과 같이 해야 하는데, 어찌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변계량은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다.【이상 《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 인용】

주석:
51. [주-D004] 僭 : 저본(底本)에는 없다. 《국조보감・세종조(世宗朝)》 계묘(癸卯, 5년) 및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세종조고사본말(世宗朝故事本末)・찬술제작(纂述制作)》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52. 정총(鄭摠, 1347-139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도전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 편찬에 참여했다.
53. 이인복(李仁復, 1308-1374): 고려 말의 문신, 학자.
54. 《금경록(金鏡錄)》: 이색과 이인복 등이 공민왕의 명으로 편찬한 고려 시대의 역사서. 현재 전하지 않는다.
55. 참의(僭擬): 분수에 넘치게 황제의 격식이나 명칭 등을 사용하는 것. 고려는 원 간섭기 이후 격하된 국제를 사용하다가 공민왕 때 일부 복구하였는데, 정도전은 이를 명분에 맞지 않는 참람된 행위로 보았다. 예를 들어, 황제만이 쓸 수 있는 묘호(廟號)인 ‘종(宗)’, 황제의 생일인 ‘성절(聖節)’이나 ‘천추절(千秋節)’ 등의 ‘절일(節日)’, 황제 자신을 칭하는 ‘짐(朕)’, 황제의 명령인 ‘조(詔)’, ‘제(制)’, ‘칙(勅)’ 등을 고려 후기 왕들이 사용한 것을 문제 삼았다. 정도전은 이를 제후국의 격식에 맞게 ‘왕(王)’, ‘생일(生日)’, ‘여(予)’, ‘교(敎)’ 등으로 고쳐 기록했다.
56. 하륜(河崙, 1347-1416): 조선 초기의 문신. 태종의 핵심 측근이었다. 그는 정도전의 역사 서술 방식에 비판적이었다.
57. 유관(柳觀, 1346-1433): 조선 초기의 문신.
58. 《주자강목(朱子綱目)》: 정식 명칭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송나라 주희(朱熹)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바탕으로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강(綱, 큰 줄기)과 목(目,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포폄(褒貶, 칭찬하고 비판함)을 엄격히 적용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계승하여 후대 동아시아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관은 이 방식에 따라 고려사를 재정리하고자 했다.
59. 이선제(李先齊, 1390-1453): 조선 전기에, 첨지중추원사, 호조참판,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60. 제(制)라 칭하고 칙(勅)이라 칭한 것: 고려 후기 왕들이 황제의 명령 형식을 사용한 것을 가리킨다.
61. 명분(名分)을 바로잡는다: 각자의 신분과 지위에 맞는 명칭과 역할을 규정하고 실천하는 것. 유교 정치 이념의 핵심 요소이다. 정도전과 변계량은 고려 후기의 용어 사용이 명분에 어긋난다고 보아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2. 《춘추(春秋)》... 감계(鑑戒):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춘추》는 노(魯)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를 간결한 용어 선택을 통해 드러내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사용했다. 이선제 등은 《춘추》가 제후들이 분수에 맞지 않게 천자의 제사인 교사(郊祀), 체사(禘祀), 기우제(大雩) 등을 지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여 후세의 경계(鑑戒)로 삼게 한 것처럼, 고려 시대의 참람된 용어 사용도 사실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논쟁은 역사 기록에서 사실(史實)과 명분(名分)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보여준다.


원문:
卞文肅公性執。 宣德年間, 《賀白雉表》詞中有惟玆白雉之語, 文肅曰: “玆字宜中行。” 諸公曰: “不屬上, 何⁶³爲中行?” 文肅固執之, 諸公曰: “宜取旨。” 世宗是諸公之議, 文肅復啓曰: “耕當問奴, 織當問婢。 殿下爲國, 若鷹犬, 宜問文孝宗輩。 至於詞命, 當倚任老臣, 不可輕許他議。” 世宗不得已從之。【《筆苑雜記》。】

번역문:
변문숙공(卞文肅公)은 성품이 고집스러웠다(性執). 선덕(宣德) 연간⁶⁴에 흰 꿩(白雉)⁶⁵을 하례하는 표문(表)⁶⁶ 가운데 ‘오직 이 흰 꿩이(惟玆白雉)’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였다. “‘자(玆)’ 자는 마땅히 중행(中行)⁶⁷으로 써야 한다.” 여러 공(公)들이 말하였다. “(이 글자가) 상(上, 임금)과 관련되지 않는데, 어찌하여 중행으로 쓴단 말인가?” 문숙공이 자신의 주장을 굳게 고집하자, 여러 공들이 말하였다. “마땅히 임금의 뜻(旨)을 받아야 한다.” 세종(世宗)께서 여러 공들의 의견을 옳다고 여기셨으나, 문숙공이 다시 아뢰었다. “밭 가는 일은 마땅히 노비에게 물어야 하고, 길쌈하는 일은 마땅히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⁶⁸. 전하께서 나라를 위해 매나 개와 같은 일⁶⁹이라면 마땅히 문효종(文孝宗)⁷⁰ 무리에게 물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명(詞命)⁷¹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늙은 신하(老臣)⁷²에게 의지하고 맡기셔야지, 다른 의견을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세종께서 마지못해 그의 의견을 따르셨다.【《필원잡기(筆苑雜記)》⁷³에서 인용】

주석:
63. [주-D005] 何 : 저본(底本)에는 “구(句)”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필원잡기(筆苑雜記)》 및 《해동잡록(海東雜錄)・변계량(卞季良)》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64. 선덕(宣德) 연간: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1426-1435).
65. 백치(白雉): 흰 꿩. 고대 중국에서부터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져, 이것이 나타나면 태평성대의 징조로 보고 임금에게 바쳤다.
66. 표(表):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형식. 주로 진정(陳情)이나 하례(賀禮)의 내용을 담는다. 여기서는 흰 꿩이 나타난 것을 축하하며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외교 문서이다.
67. 중행(中行): 글을 쓸 때 특정 글자나 구절을 줄의 가운데에 한 글자씩 내려쓰는 방식. 주로 임금이나 존귀한 대상을 지칭하는 글자에 사용하여 경의를 표하는 데 쓰였다. 변계량은 '자(玆)' 자가 '이'라는 뜻으로 흰 꿩을 가리키는 대명사임에도 불구하고, 상서로운 징조를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서식(중행)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68. 耕當問奴, 織當問婢: 밭 가는 일은 농사짓는 노비에게, 길쌈하는 일은 길쌈하는 계집종에게 물어야 한다는 속담. 즉, 전문적인 일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69. 응견(鷹犬): 매와 개. 사냥에 쓰이는 동물로, 주로 무력이나 실무 능력을 비유한다. 변계량은 자신을 문장(文章)과 사명(詞命)의 전문가로 자처하면서, 다른 실무적인 일은 다른 신하들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70. 문효종(文孝宗, ?-1430): 조선 초기의 문신.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변계량이 그를 '응견'의 예로 든 것은 다소 폄하하는 뉘앙스가 있을 수 있다.
71. 사명(詞命): 외교 문서나 임금의 명령서 등 국가의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는 일. 변계량은 자신이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임을 자부하고 있다.
72. 노신(老臣): 늙고 경험 많은 신하. 여기서는 변계량 자신을 가리킨다.
73.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수필집. 문인들의 시문(詩文)과 일화, 고사(故事), 풍속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원문:
典文衡二十餘年, 事大交隣詞命皆出其手。【《輿地勝覽》。】

번역문:
문형(文衡)⁷⁴을 맡은 지 20여 년간, 사대(事大)⁷⁵와 교린(交隣)⁷⁶의 사명(詞命)⁷⁷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여지승람(輿地勝覽)》⁷⁸에서 인용】

주석:
74. 문형(文衡): 문관(文官)의 선발과 문풍(文風)을 관장하는 직책 또는 그 권한. 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이 겸임하며 문단(文壇)의 최고 권위를 상징했다. 변계량은 세종 대에 오랫동안 대제학을 역임하며 문한(文翰)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75. 사대(事大):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으로, 조선의 대(對)중국 외교 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다.
76. 교린(交隣): '이웃 나라와 사귄다'는 뜻으로, 일본, 여진(女眞), 유구(琉球) 등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의미했다.
77. 사명(詞命): 외교 문서. 변계량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 조선 초기의 중요한 외교 문서를 거의 전담하여 작성했다.
78. 《여지승람(輿地勝覽)》: 정식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 성종(成宗) 때 편찬을 시작하여 중종(中宗) 때 완성된 관찬(官撰) 지리서. 각 지역의 연혁, 인물, 풍속, 산물, 시문(詩文) 등을 망라하고 있다.

 

허조(許稠)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許稠【文敬公。】
字仲通, 河陽人。 高麗恭讓王庚午登第。 入我朝, 相世宗, 官至左議政。 配享世宗廟庭。

번역문:
허조(許稠)【문경공(文敬公)¹이다.】
자는 중통(仲通)이고, 하양(河陽)² 사람이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경오년(1390)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우리 왕조(我朝)³에 들어와 세종(世宗)을 보좌하여 재상(相)⁴이 되었고, 관직은 좌의정(左議政)⁵에 이르렀다. 세종의 묘정(廟庭)⁶에 배향(配享)⁷되었다.

주석:

  1. 문경공(文敬公): 허조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며, 경(敬)은 밤낮으로 경계함(夙夜儆戒), 또는 공손하고 일을 잘 살핌(恭敬撙節) 등을 의미한다.
  2. 하양(河陽): 본관(本貫).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일대이다. 하양 허씨(河陽 許氏)의 시조이다.
  3. 아조(我朝): 우리 왕조, 즉 조선 왕조를 가리킨다.
  4. 상세종(相世宗): 세종(世宗)을 도와 재상(宰相)의 역할을 함.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재상이었음을 나타낸다.
  5. 좌의정(左議政):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버금 벼슬. 정1품. 영의정 다음가는 지위이다.
  6.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7.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허조는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원문:
太祖元年, 禮樂散逸, 太常職廢, 許稠爲奉常丞, 務去因循, 盡遵典故。 權近亟稱之曰: “異日典禮我國者, 必此人也, 當爲第一。”

번역문:
태조(太祖) 원년(1392)에 예악(禮樂)⁸이 흩어져 없어지고 태상시(太常寺)⁹의 직책이 폐지되었는데, 허조가 봉상승(奉常丞)¹⁰이 되어 인습적인 것을 제거하기에 힘쓰고 전고(典故)¹¹를 모두 따랐다. 권근(權近)¹²이 그를 매우 칭찬하여 말하기를, “훗날 우리나라의 예(禮)를 주관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니, 마땅히 제일인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8. 예악(禮樂): 예법(禮法)과 음악(音樂). 유교 사회의 통치 이념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조선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서 이러한 예악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9. 태상시(太常寺): 고려 시대의 관청으로 국가의 제사, 시호(諡號), 음악 등에 관한 일을 맡았다. 조선 건국 초기에 그 기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거나 폐지되었던 상황을 나타낸다. 이후 예조(禮曹)와 봉상시(奉常寺) 등에서 그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10. 봉상승(奉常丞): 봉상시(奉常寺)의 종6품 관직. 봉상시는 조선시대 국가 제사, 시호, 능묘 관리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허조가 건국 초 예악 정비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11. 전고(典故): 옛 법식이나 제도, 선례(先例). 허조가 예악을 정비함에 있어 고대 중국 및 고려의 전례를 철저히 따랐음을 의미한다.
12. 권근(權近, 1352-1409): 여말선초의 대학자이자 문신.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예악·법제 정비에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칭찬은 허조의 예학(禮學)에 대한 전문성과 장래성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太宗八¹³年, 世子褆朝京師, 許稠以書狀, 行李之事, 一委糾察, 約明令嚴, 衆皆懾縮不敢犯。 凡事涉制度, 悉書, 而來道謁先聖廟, 見董仲舒、許魯齋從祀, 揚雄被黜, 建白施行。【竝《紀年通攷》。】

번역문:
태종(太宗) 8년¹⁴(1408)에 세자(世子) 제(褆)¹⁵가 경사(京師)¹⁶에 조현(朝見)할 때, 허조가 서장관(書狀官)¹⁷으로서 행차와 관련된 일¹⁸을 전적으로 위임받아 규찰(糾察)하니, 규약은 명확하고 명령은 엄하여 따르는 무리가 모두 두려워 움츠리고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무릇 제도(制度)와 관련된 일은 모두 기록하여 왔으며, 돌아오는 길에 선성묘(先聖廟)¹⁹에 배알하여 동중서(董仲舒)와 허형(許衡, 허노재)이 종사(從祀)²⁰되어 있고 양웅(揚雄)은 배척되어 있는 것을 보고,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이상 《기년통고(紀年通攷)》²¹에서 인용】

주석:
13. [주-D001] 八 : 《동문선(東文選)・유명조선국……허공묘지명(有明朝鮮國……許公墓誌銘)》 및 《태종실록》 7년 9월 25일 기록에 근거할 때 “칠(七)”이 되어야 한다. 즉, 태종 7년(1407년)의 일이다.
14. 태종(太宗) 8년: 1408년. 주석 [주-D001]에 따라 실제로는 태종 7년(1407년)이다.
15. 세자 제(世子 褆):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褆, 1394-1462). 당시 왕세자였다.
16. 경사(京師): 수도. 당시 명(明)나라의 수도인 남경(南京)을 가리킨다.
17. 서장관(書狀官): 사신 행렬을 따라가서 외교 문서를 기록하고 관리하며 실무를 담당하던 임시 관직.
18. 행리지사(行李之事): 사신 행렬의 이동, 숙박, 물품 관리 등 제반 실무 및 수행원들의 기강 단속 등을 포함한다. 허조의 엄격한 일 처리 방식을 보여준다.
19. 선성묘(先聖廟):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 문묘(文廟) 또는 공자묘(孔子廟)라고도 한다. 당시 명나라 국자감(國子監)에 있는 문묘를 가리킨다.
20. 동중서(董仲舒), 허노재(許魯齋) 종사(從祀), 양웅(揚雄) 피출(被黜): 동중서는 한(漢)나라의 유학자, 허노재는 원(元)나라의 성리학자 허형(許衡)이다. 양웅은 한나라의 학자이다. 당시 명나라 문묘에서는 성리학적 정통론에 따라 동중서와 허형은 공자의 제자들과 함께 배향(종사)되었지만, 양웅은 그의 사상(특히 《태현경(太玄經)》)이 유교의 정통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져 배향되지 못하고 있었다. 허조가 이를 보고 돌아와 조선의 문묘에도 이를 반영하도록 건의하여 시행케 함으로써,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를 명나라의 기준에 맞추어 강화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21. 《기년통고(紀年通攷)》: 조선 후기의 학자 유계(兪棨, 1607-1664) 등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로 추정되나, 정확한 실체는 불분명하다. 혹은 다른 유사한 이름의 서적일 가능성도 있다.


원문:
公以臺官坐言事, 出補全州判官, 及吏曹正郞有闕, 太宗閱官案, 指公名曰: “此人可合。” 遂除之。【《東閣雜記》。】

번역문:
공(公)이 대관(臺官)²²으로서 직언(直言)한 일로 연좌(坐)되어 전주 판관(全州判官)²³으로 좌천(出補)되었는데, 이조 정랑(吏曹正郞)²⁴ 자리에 결원이 생기자 태종(太宗)께서 관원 명부(官案)를 보시다가 공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합당하다” 하시고 마침내 그를 임명하셨다.【《동각잡기(東閣雜記)》²⁵에서 인용】

주석:
22. 대관(臺官):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의 관리를 통칭하는 말. 간쟁(諫諍)과 탄핵(彈劾)을 담당했다. '좌언사(坐言事)'는 대관으로서 직무상 발언한 내용 때문에 죄를 입거나 처벌받는 것을 의미한다.
23. 전주 판관(全州判官): 전주부(全州府)의 버금 수령. 종5품. 중앙의 대관에서 지방의 하위직으로 좌천되었음을 보여준다.
24.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文官)의 인사 실무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要職)으로, '정랑(正郞)' 자리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거쳐 가는 중요한 경력이었다. 태종이 좌천되었던 허조를 이 중요한 자리에 발탁한 것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25.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조정의 일화나 인물평 등을 담고 있다.


원문:
知寧越郡事, 郡俗爲父母只行百日喪。 公諭民以禮, 勸行三年喪, 喪需率多助之, 遂成厚俗。【《輿地勝覽》。】

번역문:
영월군(寧越郡) 지사(知事)²⁶로 있을 때, 그 군의 풍속이 부모를 위해 단지 백일 상(百日喪)만 치렀다. 공이 백성들을 예(禮)로써 깨우치고 삼년상(三年喪)²⁷을 행하도록 권장하며, 상례(喪禮)에 필요한 비용(喪需)을 자주 많이 도와주니, 마침내 두터운 풍속(厚俗)²⁸이 이루어졌다.【《여지승람(輿地勝覽)》²⁹에서 인용】

주석:
26.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 영월군의 수령(守令).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교화하는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27. 삼년상(三年喪):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만 2년(햇수로는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근신하는 유교의 중요한 상례(喪禮).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아직 민간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허조는 성리학적 예법을 지방에 보급하려 노력했다.
28. 후속(厚俗): 인정이 두텁고 예의 바른 풍속. 허조의 노력이 풍속 교화에 성과를 거두었음을 나타낸다.
29. 《여지승람(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성종(成宗) 때 편찬을 시작하여 중종(中宗) 때 증보된 전국 지리서로, 각 지역의 연혁, 인물, 풍속, 산물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원문:
除許稠世子右輔德。 先是, 拜文學, 上曰: “僚友孰賢?” 世子擧稠以對。 至是, 世子聞之, 謂左右曰: “許文學復來耶?” 蓋素憚其嚴也。

번역문:
허조를 세자 우보덕(世子右輔德)³⁰에 임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학(文學)³¹에 임명되었을 때, 상(上)³²께서 “동료들 중에 누가 현명한가?” 하고 물으시니 세자께서 허조를 들어 대답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세자께서 그 소식을 듣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허 문학(許文學)이 다시 오는가?”라고 하였으니, 대개 평소 그의 엄격함을 꺼렸기(憚) 때문이다.

주석:
30.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3품 관직.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 중 하나이다.
31. 문학(文學): 세자시강원의 정5품 관직. 역시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다.
32. 상(上): 임금. 여기서는 태종(太宗)을 가리킨다. 태종이 세자(훗날 세종)에게 스승들의 현명함을 물었음을 알 수 있다.
33. 허문학(許文學): 허조를 그의 관직명으로 부른 것. 세자(세종)가 허조의 학문과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엄격한 성품 때문에 가까이하기를 부담스러워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원문:
十四年, 遣許稠巡視平安道山城, 復命啓曰: “講武雖不敢廢, 馳騁險阻, 危不可言。 願勿親獵。” 仍流涕極言講武場猥多之弊, 上嘉納之。

번역문:
14년(1414)에 허조를 보내 평안도(平安道)의 산성(山城)을 순시(巡視)하게 하였다.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강무(講武)³⁴를 비록 감히 폐할 수는 없사오나, 험준한 곳을 말을 달려 달리는 것은 그 위험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친히 사냥하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강무장(講武場)³⁵이 지나치게 많은 폐단을 극력 말하니, 상(上)께서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셨다.

주석:
34. 강무(講武): 무예(武藝)를 강습(講習)하고 연마(練磨)하는 군사 훈련. 종종 대규모 사냥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35. 강무장(講武場): 강무를 행하는 장소. 사냥터를 의미한다. 강무장을 너무 많이 설치하면 백성들의 농경 생활에 피해를 주고 국력을 낭비할 수 있다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허조가 임금의 안전과 민생의 안정을 염려하여 직언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以許稠參贊議政, 上王謂上曰: “斯人眞宰相也。” 嘗侍豐壤離宮, 上王前呼稠拄肩, 謂上曰: “此予柱石也。” 稠驚感隕涕。【竝《紀年通攷》。】

번역문:
허조를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³⁶로 삼으니, 상왕(上王)³⁷께서 상(上)³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참다운 재상(宰相)이다”라고 하셨다. 일찍이 풍양(豐壤)의 이궁(離宮)³⁹에서 상왕을 모실 때, 상왕께서 앞으로 허조를 불러 어깨를 짚으시며(拄肩)⁴⁰ 상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이는 나의 주석(柱石)⁴¹이다”라고 하셨다. 허조가 놀라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이상 《기년통고(紀年通攷)》에서 인용】

주석:
36.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좌·우찬성(左右贊成)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다. 흔히 줄여서 참찬(參贊)이라고 한다.
37. 상왕(上王): 왕위를 물려준 임금. 여기서는 태종(太宗)을 가리킨다. 당시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있었다.
38. 상(上): 현재의 임금. 여기서는 세종(世宗)을 가리킨다.
39. 풍양 이궁(豐壤離宮): 풍양현(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 일대)에 있던 별궁(別宮). 태종이 상왕 시절 자주 머물렀던 곳이다.
40. 주견(拄肩): 어깨를 짚거나 기대는 행위. 상왕인 태종이 신하인 허조에게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그에 대한 깊은 신뢰와 친밀감을 나타내는 파격적인 모습이다.
41. 주석(柱石): 기둥과 주춧돌. 나라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태종이 허조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보여준다.


원문:
時修勤政殿, 參贊許稠啓曰: “初搆之時, 凡殿宇丹雘, 太祖務從儉約, 願殿下勿令侈美。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上曰: “丹雘用金, 予亦以爲太侈。” 卽命董役官勿用。

번역문:
이때 근정전(勤政殿)⁴²을 수리하였는데, 참찬(參贊) 허조가 아뢰기를, “처음 지을 때(初搆)에 무릇 전각(殿宇)의 단청(丹雘)⁴³은 태조(太祖)께서 검약(儉約)함을 따르려 힘쓰셨으니, 원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사치스럽고 아름답게 하지 마옵소서.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더 심하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말씀하시기를, “단청에 금(金)을 사용하는 것은 나 또한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시고, 즉시 공사를 감독하는 관리(董役官)에게 명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다.

주석:
42. 근정전(勤政殿):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고 조회를 받던 곳이다.
43. 단확(丹雘): 붉은색과 황백색 안료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단청(丹靑)을 의미한다. 건물의 기둥, 벽, 천장 등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려 장식하는 것이다. 단청에 금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허조는 태조의 검소함을 예로 들어 세종에게 사치를 경계하도록 간언하고 있다.


원문:
世宗謁文廟, 禮曹判書許稠言: “臣謹稽古制, 唐用靴袍謁先聖, 靴袍雖不詳其制, 疑卽今之絳紗袍也。” 上曰: “絳紗袍, 臨群臣之服, 豈可服此謁先聖乎? 我將服衮冕以謁。”

번역문:
세종께서 문묘(文廟)⁴⁴에 배알하실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⁴⁵ 허조가 아뢰었다. “신(臣)이 삼가 옛 제도(古制)를 상고하건대, 당(唐)나라에서는 화포(靴袍)⁴⁶를 입고 선성(先聖)⁴⁷께 배알하였다고 합니다. 화포의 제도는 비록 상세하지 않으나⁴⁸ 아마도 지금의 강사포(絳紗袍)⁴⁹인 듯합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강사포는 뭇 신하들을 대할 때 입는 옷인데, 어찌 이것을 입고 선성께 배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장차 곤면(衮冕)⁵⁰을 입고 배알하겠다.”

주석:
44.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 성균관(成均館) 내의 문묘를 가리킨다. 국왕이 문묘에 직접 제사를 지내거나 배알하는 것은 유교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문치(文治)를 강조하는 중요한 의례였다.
45. 예조 판서(禮曹判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국가의 의례, 교육, 외교 등을 담당했다.
46. 화포(靴袍): 장화(靴)와 도포(袍)를 아울러 이르는 말. 당나라 때의 관복(官服) 차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47. 선성(先聖): 먼저 가신 성인(聖人). 여기서는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48. 불상기제(不詳其制): 그 제도가 상세하지 않음. 허조가 당나라의 정확한 복식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9. 강사포(絳紗袍): 붉은 색 비단(紗)으로 만든 도포(袍). 조선시대 국왕이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입던 공복(公服)이다. 허조는 당나라의 화포를 국왕의 상복(常服)인 강사포에 해당한다고 추정했다.
50. 곤면(衮冕): 곤룡포(衮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아울러 이르는 말. 국왕이 종묘사직 제사나 조회 등 가장 중요한 국가 의례에 착용하는 최고 등급의 예복이다. 세종은 문묘 배알의 격(格)을 높여, 신하를 대하는 평상 집무복인 강사포가 아니라 최고의 예복인 곤면을 입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문묘 제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유교 이념에 대한 존숭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원문:
御便殿視事。 參贊金漸⁵¹進曰: “殿下爲政, 當一遵今上皇帝法度。” 禮曹判書許稠進曰: “中國之法, 有可法者, 有不可法者。” 漸曰: “臣見皇帝親引罪囚, 詳⁵²加審覈, 願殿下效之。” 稠曰: “不然。 設官分職, 各有攸司。 若人主親決罪囚, 無問大小, 則將焉用法司?” 漸曰: “萬機之務, 殿下宜自摠攬, 不可委之臣下。” 稠曰: “不然。 勞於求賢, 逸於任人, 任則勿疑, 疑則勿任。 殿下當愼擇大臣, 俾長⁵³六曹, 委任責成, 不可躬親細事, 下行臣職。” 漸曰: “臣見皇帝威斷莫測, 六部長官奏事失錯, 卽命錦衣衛官脫帽曳出。” 稠曰: “體貌大臣, 包容小過, 乃人主之洪量。 今以一言之失, 誅戮大臣, 略不假借, 甚爲不可。” 漸曰: “時王之制, 不可不從。 皇帝崇信釋敎, 故中國臣庶, 無不誦讀《名稱歌曲》者, 其間豈無儒士不好異端者? 但仰體帝意, 不得不然。” 稠曰: “崇信釋敎, 非帝王盛德, 臣竊不取。” 漸每發一言, 支離煩瑣, 怒形於色; 稠徐徐折之, 色和而言簡, 上是稠而非漸。【竝《國朝寶鑑》。】

번역문:
편전(便殿)⁵⁴에 나아가 정사를 보셨다. 참찬(參贊) 김점(金漸)⁵⁵이 나아가 아뢰었다. “전하께서 정치를 하심에 마땅히 지금의 황제(皇帝)⁵⁶ 법도(法度)를 한결같이 따르셔야 합니다.” 예조 판서 허조가 나아가 아뢰었다. “중국의 법은 본받을 만한 것도 있고, 본받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김점이 말하였다. “신이 보건대 황제께서는 친히 죄수(罪囚)를 끌어다가 상세히 심문하고 조사하시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도 이를 본받으소서.” 허조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눈 것은 각자 맡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크고 작음을 묻지 않고 친히 죄수를 판결하신다면, 법을 담당하는 관청(法司)⁵⁷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김점이 말하였다. “모든 정무(萬機之務)⁵⁸는 전하께서 마땅히 스스로 총괄하셔야지, 신하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허조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명한 이를 구하는 데는 수고롭고, 사람을 임용하는 데는 편안해야 합니다⁵⁹.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면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신중하게 대신(大臣)을 가려 뽑아 육조(六曹)의 으뜸⁶⁰으로 삼으시고, 임무를 맡기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으셔야지⁶¹, 몸소 자잘한 일까지 하시어 신하의 직분을 행하셔서는 안 됩니다.” 김점이 말하였다. “신이 보건대 황제께서는 위엄 있는 결단이 예측 불가능하시어, 육부(六部)⁶² 장관이 아뢰는 일에 실수가 있으면 즉시 금의위(錦衣衛)⁶³ 관리에게 명하여 모자를 벗기고 끌어내게 하십니다.” 허조가 말하였다. “대신을 예우하고(體貌) 작은 허물을 포용하는 것이 바로 임금의 넓은 도량(洪量)입니다. 지금 말 한마디의 실수로 대신을 죽이고 벌하며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김점이 말하였다. “당대 임금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제께서 불교(釋敎)⁶⁴를 높이 믿으시므로, 중국의 신하와 백성들은 《명칭가곡(名稱歌曲)》⁶⁵을 외우고 읽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어찌 이단(異端)⁶⁶을 좋아하지 않는 유학자가 없겠습니까? 다만 황제의 뜻을 우러러 받들어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뿐입니다.” 허조가 말하였다. “불교를 높이 믿는 것은 제왕(帝王)의 훌륭한 덕(盛德)이 아니므로, 신은 삼가 취하지 않습니다.” 김점은 말을 할 때마다 지리멸렬하고 번잡하며 노여움이 얼굴에 드러났으나, 허조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의 말을 반박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고 말은 간결하니, 상께서 허조를 옳다고 여기고 김점을 그르다고 여기셨다.【이상 《국조보감(國朝寶鑑)》⁶⁷에서 인용】

주석:
51. [주-D003] 漸 : 저본(底本)에는 “점(點)”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본 인물 전후 서술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김점(金漸)이 올바른 표기이다.
52. [주-D002] 詳 : 저본(底本)에는 “상(祥)”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53. [주-D004] 長 : 저본(底本)에는 “장(將)”으로 되어 있다. 《국조보감・세종조》 기해(1년) 및 《세종실록》 1년 1월 11일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육조의 으뜸으로 삼다(俾長六曹)'라는 의미가 되어야 문맥에 맞다.
54. 편전(便殿):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궁궐 안의 건물. 정전(正殿)보다 격식이 덜한 공간이다.
55. 김점(金漸, ?-1433): 조선 초기의 문신.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명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56. 금상 황제(今上皇帝): 현재 재위에 있는 황제. 당시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또는 선덕제(宣德帝)를 가리킬 수 있다.
57. 법사(法司): 법률과 형벌을 담당하는 관청. 조선에서는 형조(刑曹)나 사헌부(司憲府), 의금부(義禁府) 등을 가리킨다.
58. 만기지무(萬機之務): 임금이 처리해야 할 모든 종류의 수많은 정무(政務).
59. 노어구현 일어임인(勞於求賢 逸於任人): 현명한 인재를 구하는 데는 노력을 아끼지 않되, 일단 인재를 등용하여 맡겼으면 편안한 마음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뜻. 군주의 용인술(用人術)에 대한 유교적 격언이다.
60. 육조(六曹): 조선시대 중앙 행정의 중추를 이루던 여섯 관청(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육조의 으뜸(長)'은 판서(判書)를 의미한다.
61. 위임책성(委任責成): 임무를 맡기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함.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신하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성과를 감독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62. 육부(六部): 명나라의 중앙 행정기관으로, 조선의 육조에 해당한다(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
63. 금의위(錦衣衛): 명나라 황제 직속의 특수 경찰 및 정보 기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관리들을 감찰하고 처벌하는 역할을 했다. 황제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기관 중 하나이다.
64. 석교(釋敎): 불교(佛敎)를 가리킨다. 석가모니(釋迦牟尼)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65. 《명칭가곡(名稱歌曲)》: 불경(佛經)이나 부처, 보살의 명호(名稱)를 노래 형식으로 만든 것, 또는 그러한 내용을 담은 서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명나라 황실이 불교를 숭상하여 민간에까지 불교 경전이나 의례가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66. 이단(異端): 정통 사상이 아닌 다른 사상이나 종교. 성리학적 관점에서 불교나 도교 등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67.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 시대 역대 임금의 모범이 될 만한 언행과 정치를 기록하여 후대 왕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편찬한 책.

해설:
이 대화는 세종 시대 조선의 통치 철학에 대한 중요한 논쟁을 보여준다. 김점은 명나라의 제도와 황제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허조는 중국의 법이라도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군주는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기보다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여 권한을 위임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올바른 통치 방식이라고 반박한다. 또한 명나라 황제의 가혹한 처벌 방식이나 불교 숭상 등은 본받을 것이 못 된다고 명확히 선을 긋는다. 세종이 허조의 견해를 지지한 것은,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성리학적 원칙에 기반한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정치를 추구했음을 시사한다.


원문:
世宗曰: “予聞中朝士大夫進退帝前, 絶無俛伏之禮。” 公對曰: “中朝之事, 則天下萬機, 皆決於帝, 人衆事煩, 未暇爲禮。 《經》曰: ‘元首叢脞哉, 股肱惰哉。’ 是誠嘉言也。” 上曰: “然。 君而親庶務, 則有司皆待決於上, 而必生怠惰之心矣。” 公又曰: “昔太宗欲本國女服, 悉從華服, 臣啓曰: ‘臣昔赴京, 過闕里, 入見孔子家廟, 見女服畫像, 與本國無異, 但首飾異耳。’ 事竟不行。 中國之禮, 安可盡從乎?”【《潛谷舊錄》。】

번역문:
세종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듣기로 중조(中朝)⁶⁸의 사대부(士大夫)들은 황제 앞에서 나아가고 물러날 때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는 예(俛伏之禮)가 전혀 없다고 한다.” 공(公)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중조의 일은 천하의 모든 정무(萬機)를 모두 황제가 결정하므로, 사람들은 많고 일은 번거로워 예를 갖출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경(經)》⁶⁹에 이르기를, ‘원수(元首)⁷⁰가 자잘한 일에 힘쓰면 고굉(股肱)⁷¹이 게을러진다’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임금이 직접 자잘한 업무(庶務)를 처리하면 담당 관리(有司)⁷²들이 모두 위에서 결정해주기만 기다리게 되어 반드시 게으른 마음이 생길 것이다.” 공이 또 아뢰었다. “옛날 태종께서 우리나라 여성의 복식(女服)을 모두 중국식(華服)⁷³을 따르게 하려 하셨을 때, 신이 아뢰기를, ‘신이 옛날 경사(京師)에 갔을 때 궐리(闕里)⁷⁴를 지나다가 공자(孔子)의 가묘(家廟)에 들어가 보니, 여성 복식을 그린 화상(畫像)이 우리나라와 다름이 없었고 다만 머리 장식(首飾)만 다를 뿐이었습니다’라고 하니, 그 일이 결국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예(禮)를 어찌 모두 따를 수 있겠습니까?”【《잠곡구록(潛谷舊錄)》⁷⁵에서 인용】

주석:
68. 중조(中朝): 중국 조정을 가리킨다. 명나라를 지칭한다.
69. 《경(經)》: 경서(經書). 여기서는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편을 가리킨다.
70. 원수(元首): 으뜸가는 머리. 임금을 비유한다.
71. 고굉(股肱): 넓적다리와 팔뚝. 임금의 손발 역할을 하는 신하를 비유한다.
72. 유사(有司): 직책을 맡은 관리.
73. 화복(華服): 중국(華)의 복식.
74. 궐리(闕里): 공자가 살던 마을 이름.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 있다.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면서 공자묘(孔子廟)와 공부(孔府, 공자 후손의 저택) 등이 있는 유교의 성지이다.
75.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편찬한 책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주로 조선 전기의 일화를 모은 것으로 보인다.

해설:
이 대화 역시 앞선 김점과의 논쟁과 맥을 같이 한다. 세종은 명나라의 간소한 궁중 예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허조는 명 황제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느라 예를 갖출 겨를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는 오히려 군주가 자잘한 일에 매몰되어 신하들이 게을러지는 폐단이 있음을 《서경》을 인용하여 지적한다. 이어서 허조는 태종 때 자신이 중국 공자 가묘의 여성 복식 화상을 근거로 들어 조선 고유의 복식을 유지하도록 건의했던 사례를 들어, 중국의 제도나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취사선택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원문:
上曰: “功臣當太祖、太宗忌辰, 就寺社設水陸, 雖是忠厚⁷⁶之意, 恐違《禮經》⁷⁷。” 吏曹判書許稠曰: “水陸本是非禮之正, 矧設神位於下壇, 尤爲褻慢。 祭祀之禮, 各有定分, 截然不可僭踰。 古禮, 支庶不得祭先祖, 大夫不得祖諸侯, 安有以一時私意, 僭禮犯分之理?” 上從之。

번역문:
상께서 말씀하셨다. “공신(功臣)들이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기신(忌辰)⁷⁸에 사찰(寺社)⁷⁹에 나아가 수륙재(水陸齋)⁸⁰를 베푸는데, 비록 이것이 충성스럽고 두터운⁸¹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예경(禮經)》⁸²에 어긋날까 염려된다⁸³.” 이조 판서 허조가 아뢰었다. “수륙재는 본래 예(禮)의 올바른 것이 아니며, 하물며 신위(神位)를 아래 단(壇)에 설치하는 것은 더욱 외람되고 불경스러운(褻慢) 일입니다. 제사(祭祀)의 예는 각기 정해진 분수(定分)가 있어, 단호히 넘어서거나 분수를 어겨서는(僭踰) 안 됩니다. 옛 예법에 지서(支庶)⁸⁴는 선조(先祖)에게 제사 지낼 수 없고, 대부(大夫)⁸⁵는 제후(諸侯)를 조상으로 모셔 제사 지낼 수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한때의 사사로운 뜻으로 예를 참람되게 행하고 분수를 어기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상께서 그의 말을 따랐다.

주석:
76. [주-D005] 厚 : 《국조보감・세종조》 갑진(6년) 및 《세종실록》 6년 5월 15일 기록에는 “효(孝)”로 되어 있다. '충효(忠孝)'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77. [주-D006] 恐違禮經 : 《세종실록》 6년 5월 15일 기록에는 “여칙이위미편(予則以爲未便)” 즉, “나는 그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로 되어 있다. 《예경》 위반을 직접 언급하기보다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8. 기신(忌辰): 돌아가신 날. 기일(忌日).
79. 사사(寺社): 절(寺)과 사당(社). 여기서는 불교 사찰을 가리킨다.
80. 수륙재(水陸齋): 불교 의식의 하나. 물과 육지에 있는 외로운 영혼들과 아귀(餓鬼) 등에게 음식을 베풀어 구제하고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재(齋) 의식이다. 고려시대부터 성행했으며, 조선 초기에도 왕실이나 공신들이 선왕(先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행하는 경우가 있었다.
81. 충후(忠厚): 충성스럽고 인정이 두터움. 주석 [주-D005] 참조.
82. 《예경(禮經)》: 유교의 예법에 관한 경전.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 등을 통칭한다.
83. 공위예경(恐違禮經): 《예경》에 어긋날까 염려됨. 주석 [주-D006] 참조.
84. 지서(支庶): 종가(宗家)에서 갈려 나간 방계(傍系) 자손. 종법(宗法) 질서에서 제사는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종가에서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85. 대부(大夫): 고대 중국의 관직 등급 중 하나. 제후(諸侯) 아래의 신분이다. 신분에 따라 제사 지낼 수 있는 조상의 범위가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 허조는 이러한 고례(古禮)를 들어 공신들이 비록 충성심에서 우러나왔다 하더라도 분수를 넘어 선왕을 위해 불교식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성리학적 예법 질서를 확립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원문:
集賢殿上書言守令六期之不便, 上不允。 初, 久任之議, 起於河崙, 然未得建議施行, 常自言: “大明專以久任官職, 維持天下。” 領議政府事柳廷顯、禮曹判書許稠亦嘗勸太宗立中外久任之法, 太宗亦嘉納其言, 而未卽從之。 及上卽位, 廷顯、稠每勸上行之。 至是, 稠爲吏曹判書, 上遂決意立法, 而中外喧然, 皆以爲不便, 或言不可變祖宗成法, 或言有害於民, 或言官制紊亂, 或言養親久闕, 或言子女婚嫁失時, 上皆不聽。

번역문:
집현전(集賢殿)⁸⁶에서 상서(上書)하여 수령(守令)을 여섯 임기(六期)⁸⁷로 나누어 임명하는 것의 불편함을 아뢰었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처음에 관리를 오래 임용하는(久任) 논의는 하륜(河崙)⁸⁸에게서 시작되었으나, 건의하여 시행되지는 못하였고, 하륜은 늘 스스로 말하기를, “대명(大明)⁸⁹은 오로지 관직에 오래 임용하는 것으로써 천하를 유지한다”고 하였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유정현(柳廷顯)⁹⁰과 예조 판서 허조 역시 일찍이 태종께 중앙과 지방 관리의 장기 임용법(久任之法)을 세우도록 권하였고, 태종께서도 그 말을 가상히 여기고 받아들이셨으나 즉시 따르지는 않으셨다. 상께서 즉위하시자 유정현과 허조가 매번 상께 이를 시행하도록 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허조가 이조 판서가 되자 상께서 마침내 뜻을 결정하여 법을 세우셨는데, 중앙과 지방(中外)이 시끄러우며 모두 불편하다고 여겼다. 어떤 이는 조종(祖宗)의 정해진 법(成法)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백성에게 해롭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관직 제도(官制)가 문란해진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어버이 봉양(養親)을 오래도록 못 하게 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녀의 혼인(婚嫁) 시기를 놓치게 된다고 말하였으나, 상께서는 모두 듣지 않으셨다.

주석:
86. 집현전(集賢殿): 세종 때 설치된 학문 연구 및 정책 자문 기관.
87. 수령육기(守令六期): 조선 초기에 지방관인 수령의 임기를 6개월 또는 1년 단위로 짧게 하여 자주 교체하던 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30개월(6期=6*5개월?) 임기 후 교체하는 제도를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 정확한 의미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나, 잦은 교체로 인한 폐단을 지적하는 맥락이다. (세종실록에는 '6년 임기'를 건의하는 내용이 있으므로, 잦은 교체를 비판하며 6년 임기를 건의한 것을 상이 불윤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아래 문맥은 '구임법' 시행을 설명하므로, 집현전에서는 구임법의 불편함을 상소했으나 상이 듣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88. 하륜(河崙, 1347-1416): 조선 초기의 문신. 태종의 핵심 측근으로 정사(政事)와 제도 정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
89. 대명(大明): 명나라. 명나라의 관리 장기 임용 제도를 모범 사례로 제시한 것이다.
90. 유정현(柳廷顯, 1355-1426): 조선 초기의 문신. 영의정을 역임했다. 하륜과 함께 구임법(久任法)을 주장했다.
91. 이조 판서(吏曹判書): 허조가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이조 판서가 되면서 구임법 시행이 본격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92. 중외훤연(中外喧然): 중앙과 지방이 시끄러움. 관리 임용 방식의 큰 변화에 대한 반발이 심했음을 보여준다. 여러 반대 이유(조종 성법, 민폐, 관제 문란, 봉양 문제, 혼인 문제 등)는 당시 관리들이 겪었던 현실적인 어려움과 기득권 변화에 대한 저항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세종과 허조가 이를 강행한 것은 행정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고 지방 통치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문:
上謂政府、六曹曰: “今年夏罹旱暵, 冬値愆陽, 十二月乃藏氷之節, 氣暖如春, 又昨日大霧。 靜思厥愆, 實由寡人。 願聞讜言, 以答天譴。” 許稠曰: “天之譴告, 實由人爲。 近日天氣不調, 臣恐禍亂之作已兆, 願殿下⁹³惟日戰兢。”

번역문:
상께서 의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 일러 말씀하셨다. “금년 여름에는 가뭄(旱暵)을 겪었고 겨울에는 철 아닌 따뜻한 날씨(愆陽)⁹⁴를 만났으며, 12월은 바로 얼음을 저장하는 계절(藏氷之節)인데 날씨가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또 어제는 큰 안개(大霧)가 끼었다. 조용히 그 허물(愆)을 생각해보니 실로 과인(寡人)⁹⁵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다. 충직한 말(讜言)을 듣기를 원하니, 하늘의 꾸짖음(天譴)⁹⁶에 답하고자 한다.” 허조가 아뢰었다. “하늘의 꾸짖음과 경고는 실로 사람의 행위(人爲)⁹⁷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근래 날씨가 고르지 못하니, 신은 화란(禍亂)의 조짐이 이미 나타난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오직 날마다 두려워하고 조심하소서(戰兢)⁹⁸.”

주석:
93. [주-D007] 願殿下 : 《세종실록》 7년 12월 8일 기록에는 “단신등망지소조(但臣等罔知所措)” 즉, “다만 신 등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로 되어 있다. 실록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94. 건양(愆陽): 철에 맞지 않는 따뜻한 날씨 또는 햇볕. 겨울철의 이상 고온 현상을 가리킨다.
95. 과인(寡人):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
96. 천견(天譴): 하늘의 꾸짖음.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자연재해나 이상 기후 현상을 군주의 부덕(不德)이나 정치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해석하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보편적이었다.
97. 인위(人爲): 사람의 행위. 허조는 자연재해의 원인을 임금의 잘못을 포함한 인간 사회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98. 전긍(戰兢):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함. 《시경(詩經)》 〈소민(小旻)〉편의 “전전긍긍(戰戰兢兢) 여림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薄氷)”(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는 듯 하라)에서 유래한 말로, 늘 경계하고 삼가는 자세를 의미한다. 허조는 임금에게 더욱 근신하고 정사에 힘쓸 것을 촉구하고 있다.


원문:
十二月, 大雷電以雨。 上曰: “今雷電失時, 天之譴責深矣。” 許稠曰: “冬月雷電, 古亦有之, 然未有今日之甚也。 殿下軫慮太甚, 臣反恐憂勞成疾。”

번역문:
12월에 큰 천둥과 번개(雷電)가 치고 비가 내렸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천둥과 번개가 때를 잃었으니, 하늘의 꾸짖음(譴責)이 깊다.” 허조가 아뢰었다. “겨울철의 천둥과 번개는 옛날에도 또한 있었습니다만,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걱정하심(軫慮)이 너무 심하시니, 신은 도리어 근심과 노고로 병이 나실까 염려됩니다.”

주석:
99. 12월 뇌전(十二月雷電): 겨울철의 천둥 번개는 매우 드문 이상 기상 현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100. 진려(軫慮): 깊이 염려하고 근심함.
101. 허조의 답변: 허조는 겨울철 뇌전이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 심각성은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임금이 지나치게 상심하여 건강을 해칠 것을 염려하며 위로하고 있다. 이는 앞선 재해 때와는 다소 다른 반응으로, 상황에 따라 임금을 안심시키는 역할도 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上聞晉州民弑父, 瞿然曰: “此予否德所致也。 向者許稠每以嚴上下之分勸我, 我聞而嘉之, 今果然矣。”【竝《國朝寶鑑》。】

번역문:
상께서 진주(晉州) 백성이 아비를 죽였다(弑父)¹⁰²는 말을 들으시고, 두려워하는 모습(瞿然)¹⁰³으로 말씀하셨다. “이는 나의 부덕(否德)¹⁰⁴이 부른 것이다. 지난번 허조가 매번 상하(上下)의 분수(分)를 엄격히 할 것을 나에게 권하였는데, 내가 듣고 가상히 여겼더니, 이제 과연 그렇구나.”【이상 《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 인용】

주석:
102. 시부(弑父): 아버지를 죽임. 유교 윤리에서 가장 극악한 범죄인 강상죄(綱常罪)에 해당한다. 이러한 패륜적인 사건은 사회 기강의 해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103. 구연(瞿然): 놀라거나 두려워서 눈을 크게 뜨고 보는 모양. 세종이 이 사건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보여준다.
104. 부덕(否德): 덕이 없음. 임금이 자신을 낮추는 말이다. 세종은 사회의 극단적인 범죄조차 자신의 통치 부족 탓으로 돌리고 있다.
105. 엄상하지분(嚴上下之分):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분수를 엄격히 함. 허조가 평소 사회 질서와 기강 확립을 강조했음을 보여준다. 세종은 패륜 범죄의 발생을 허조가 경고했던 사회 기강 해이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다.


원문:
上將討滿住也, 衆皆以爲當討。 許稠獨曰: “此輩倔强, 一與之讎, 世世報復, 不可輕擧。” 後因邊將之策, 上欲招撫忽剌野人, 稠曰: “獷俗喜人怒獸, 谿壑無厭, 不可招撫。” 皆不允。

번역문:
상께서 장차 만주(滿住)¹⁰⁶를 토벌하려 하시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고 여겼다. 허조만이 홀로 말하였다. “이 무리들은 고집 세고 강하니(倔强), 한번 원수(讎)를 맺으면 대대로 보복할 것이므로 가볍게 군사를 일으켜서는(輕擧) 안 됩니다.” 후에 변방 장수의 계책에 따라 상께서 홀라(忽剌)¹⁰⁷ 야인(野人)¹⁰⁸을 초무(招撫)¹⁰⁹하려 하시자, 허조가 말하였다. “사나운 풍속(獷俗)은 사람에게 기뻐하다가도 짐승처럼 노여워하며¹¹⁰ 계곡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谿壑無厭)¹¹¹을 가졌으니, 초무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윤허되지 않았다.

주석:
106. 만주(滿住): 여진족(女眞族)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이름. 당시 조선의 북방을 자주 침범하였다. 세종은 1433년(세종 15)에 최윤덕(崔潤德), 김효성(金孝誠) 등을 보내 만주를 토벌하였다(파저강(婆猪江) 토벌).
107. 홀라(忽剌): 홀라온(忽剌溫) 또는 올량합(兀良哈) 등 다른 여진 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오도리(斡朶里) 부족일 가능성도 있다.
108. 야인(野人): 여진족을 낮추어 부르던 말.
109. 초무(招撫): 불러서 어루만져 달램. 즉, 회유하여 복속시키는 정책을 의미한다.
110. 광속희인노수(獷俗喜人怒獸): 사나운 풍속이 사람에게는 기뻐하는 듯하다가도 짐승처럼 성을 냄. 즉,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며 신뢰할 수 없는 성품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111. 계학무염(谿壑無厭): 계곡은 아무리 물을 채워도 차지 않는다는 뜻으로, 끝없는 탐욕을 비유하는 말이다.
112. 허조의 주장: 허조는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토벌)과 유화책(초무) 모두에 대해 신중론 또는 반대 입장을 취했다. 토벌은 장기적인 보복을 초래할 수 있고, 초무는 그들의 탐욕과 변덕스러운 성품 때문에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여진족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그의 깊은 고민과 현실적인 판단을 보여주지만, 결과적으로 세종의 정책 방향과는 달랐다.


원문:
以許稠復判吏部。 稠累典銓事, 鑑裁公明, 關節屛跡, 孝順忠賢之後, 率先甄錄。 或謂: “烏有孝順若是之多耶?” 公曰: “間雖有假, 不已勵俗乎。” 上嘗引問群臣賢否, 一時聞人多其所擧¹¹³。【竝《紀年通攷》。】

번역문:
허조를 다시 이부(吏部)¹¹⁴ 판서로 삼았다. 허조는 여러 차례 전선(銓選)¹¹⁵ 업무를 맡아 관리를 감별하고 재정(裁定)하는 것이 공정하고 명확하였으며, 청탁(關節)¹¹⁶이 자취를 감추었고, 효순(孝順)하고 충현(忠賢)한 이들의 후손을 우선적으로 살펴 기록(甄錄)¹¹⁷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어찌 효순한 사람이 이처럼 많단 말인가?”라고 하자, 공이 말하였다. “간혹 거짓이 있다 하더라도 풍속을 권장(勵俗)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께서 일찍이 불러들여 여러 신하들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賢否)을 물으시면,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聞人) 중에 그가 추천(擧)한 이가 많았다.【이상 《기년통고(紀年通攷)》에서 인용】

주석:
113. [주-D008] 擧 : 저본(底本)은 공란(空欄)이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114. 이부(吏部): 이조(吏曹)의 다른 이름. 문관의 인사를 담당했다. '복판이부(復判吏部)'는 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음을 의미한다.
115. 전선(銓選): 관리를 선발하고 임용하는 일. 인사 행정.
116. 관절(關節): 부정한 청탁이나 뇌물 수수 등 인사 비리. 허조의 공정함으로 인해 이러한 폐단이 사라졌음을 강조한다.
117. 견록(甄錄): 살펴서 기록함. 여기서는 인재를 발탁하여 명부에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허조는 유교적 덕목인 효(孝), 순(順), 충(忠), 현(賢)을 중시하여, 이러한 덕을 갖춘 인물의 후손을 우선적으로 등용하는 정책을 폈다. 이는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가문의 도덕성을 인재 선발의 기준으로 삼았던 당시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118. 여속(勵俗): 풍속을 권면하고 장려함. 허조는 비록 가식적인 효행이 있더라도 효행 자체를 장려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도덕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보았다. 이는 현실적인 정책 판단을 보여준다.


원문:
公守法剛正, 人不敢干以私。 每遇父母忌, 必服母夫人手縫幼年所衣碧色小團領, 流涕以致齋。 公兄周以判漢城府事致仕, 公每政府合坐, 鷄鳴而必詣之, 必屛騶從于洞口, 下車步入。 判府亦知公必至, 每夜正衣冠, 張燈設坐, 倚床以待公之至, 至必設小酌。 公徐問曰: “今日府中有某事, 何以處之?” 判府曰: “以某之意, 理當如此。” 公喜而退曰: “人樂有賢父兄, 此之謂也。”【《靑坡劇談》。】

번역문:
공은 법을 지키고 강직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간여하지 못하였다. 매번 부모의 기일(忌日)을 맞으면 반드시 어머니(母夫人)께서 손수 꿰매주신 어릴 때 입던 푸른색 작은 단령(團領)¹¹⁹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재계(齋戒)¹²⁰를 하였다. 공의 형 허주(許周)¹²¹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¹²²를 지내고 치사(致仕)¹²³하였는데, 공은 매번 의정부에서 회의(合坐)¹²⁴가 있는 날이면 닭이 울 때 반드시 형을 찾아뵙고, 반드시 수행원(騶從)들을 동네 어귀에서 물리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판부(判府)¹²⁵ 역시 공이 반드시 올 것을 알고 매일 밤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등불을 밝히고 자리를 마련하고 상(床)에 기대어 공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자리(小酌)를 베풀었다. 공이 천천히 묻기를, “오늘 조정(府中)¹²⁶에 아무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면, 판부가 말하기를, “아무개의 뜻으로는 이치가 마땅히 이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기뻐하며 물러나와 말하기를, “사람들이 현명한 아버지나 형이 있음을 즐거워한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라고 하였다.【《청파극담(靑坡劇談)》¹²⁷에서 인용】

주석:
119. 단령(團領): 깃이 둥근 형태의 포(袍). 조선시대 관리들의 대표적인 관복(官服)이자 평상복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준 옷을 기일에 입는 것은 지극한 효심의 표현이다.
120. 재계(齋戒): 제사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삼가는 것.
121. 허주(許周, 1374-1439): 허조의 형. 동생과 마찬가지로 문과에 급제하여 고위 관직을 지냈다.
122.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한성부(漢城府, 조선의 수도)의 으뜸 벼슬. 정2품.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격이다.
123. 치사(致仕):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 정년 또는 고령으로 퇴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124. 정부합좌(政府合坐): 의정부(議政府)의 정승(政丞)과 참찬(參贊) 등이 함께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회의.
125. 판부(判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줄여 부르는 말. 형 허주를 가리킨다.
126. 부중(府中): 관청 안. 여기서는 의정부 또는 조정을 가리킨다. 허조가 좌의정이라는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퇴직한 형에게 국정 현안에 대한 자문을 구했음을 보여준다.
127. 《청파극담(靑坡劇談)》: 조선 중기의 문신 이륙(李陸, 1438-1498)이 지은 설화집.

해설:
이 일화는 허조의 두 가지 중요한 면모를 보여준다. 첫째는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 기일에 어릴 적 어머니가 지어준 옷을 입고 슬퍼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둘째는 형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이다. 자신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퇴직한 형을 매일 찾아뵙고 예를 갖추며 국정 자문을 구하는 모습은 우애(友愛)와 겸양(謙讓)의 미덕을 보여준다. 형 허주 역시 동생을 깍듯이 예우하며 기다리는 모습에서 형제간의 깊은 정과 상호 존중을 엿볼 수 있다.


원문:
公之兄周, 仕宦至判書, 有家法, 祀事一從朱文公禮。 子弟有過, 必告廟罰之。 嘗病不能躬行祀事, 使文敬攝之, 少變改舊例。 判書公聞之曰: “支子於宗家, 擅變舊例, 是無宗子也。” 怒而不見, 且使閽者拒之。 文敬惶懼, 曉往其門, 坐到日晏, 不得通, 夕又往, 又到夜深, 如是者累日, 方許接見。 家法之嚴蓋如此。【《筆苑雜記》。】

번역문:
공의 형 허주(周)는 벼슬이 판서(判書)¹²⁸에 이르렀고, 가법(家法)¹²⁹이 있어 제사(祀事)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¹³⁰의 예법을 따랐다. 자제(子弟)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廟)에 고하고 벌하였다. 일찍이 병이 들어 몸소 제사를 행할 수 없게 되자 문경(文敬)¹³¹으로 하여금 대신 지내게(攝) 하였는데, 옛 관례(舊例)를 조금 바꾸었다. 판서공(判書公)¹³²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지가(支子)¹³³가 종가(宗家)에서 제멋대로 옛 관례를 바꾸는 것은 종자(宗子)¹³⁴를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노하여 만나주지 않고 또한 문지기(閽者)를 시켜 막게 하였다. 문경이 황공하고 두려워 새벽에 그 문으로 가서 해가 저물도록 앉아 있었으나 통하지 못하고, 저녁에 또 가서 밤이 깊도록 있기를 여러 날 동안 이와 같이 한 후에야 비로소 접견을 허락받았다. 가법의 엄격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필원잡기(筆苑雜記)》¹³⁵에서 인용】

주석:
128. 판서(判書): 각 조(曹)의 으뜸 벼슬. 정2품. 허주는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29. 가법(家法): 집안의 법도나 규칙.
130. 주문공(朱文公): 주희(朱熹, 1130-1200). 송나라의 대학자로 성리학을 집대성했다. 그의 저서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관혼상제(冠婚喪祭) 기본 예법서로 널리 채택되었다. 허주가 《주자가례》를 엄격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131. 문경(文敬): 허조의 시호. 여기서는 허조를 가리킨다.
132. 판서공(判書公): 허주를 높여 부르는 말.
133. 지자(支子): 종가(宗家)에서 갈려 나온 방계(傍系)의 아들. 허주는 허조의 형이므로 종가(宗家)에 해당하고, 허조는 지가(支家)에 해당한다.
134. 종자(宗子): 종가(宗家)의 대를 잇는 맏아들. 종법(宗法) 질서의 중심이다. 형 허주는 동생 허조가 비록 사소한 절차라도 종가의 제사 예법을 임의로 변경한 것을 종법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간주하여 크게 노한 것이다.
135.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필기잡록.

해설:
이 일화는 앞선 형제간의 우애 이야기와는 다른 측면, 즉 허씨 집안의 엄격한 가법과 종법 질서를 보여준다. 동생인 허조가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었지만, 종가인 형의 집 제사에서 예법을 조금이라도 변경하자 형이 크게 노하여 문전박대하고, 허조는 여러 날 동안 문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 했다. 이는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종법과 예법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그리고 허조 형제가 이러한 원칙을 얼마나 철저히 지켰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원문:
世宗朝, 申商爲禮曹判書, 許稠爲吏曹判書。 申日中而往, 日側而還; 許侵晨而往, 日沒乃還。 一日, 許先坐曹, 聞申到南宮, 未幾還出, 許令人往告曰: “何晩仕早罷?” 申大笑曰: “大人早仕, 有何加益之事? 余雖晩仕, 有何加損之事? 不如各弄掌而已。” 申臨機善決, 許勤苦刻行, 所性不同也。

번역문:
세종조(世宗朝)에 신상(申商)¹³⁶은 예조 판서였고 허조는 이조 판서였다. 신상은 한낮(日中)에 출근하여 해가 기울 때(日側) 퇴근하였고, 허조는 새벽(侵晨)에 출근하여 해가 진 뒤(日沒)에야 퇴근하였다. 하루는 허조가 먼저 관청(曹)¹³⁷에 앉아 있다가 신상이 남궁(南宮)¹³⁸에 도착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나가는 것을 듣고, 허조가 사람을 시켜 가서 고하기를, “어찌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신상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대인(大人)¹³⁹께서 일찍 출근하신들 무슨 보탬이 되는 일이 있으며, 제가 비록 늦게 출근한들 무슨 손해가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각자 맡은 바¹⁴⁰나 잘하는 것만 못합니다.” 신상은 일에 임하여 결단(決斷)을 잘했고, 허조는 근면하고 고생스러울 정도로 철저히 실행(勤苦刻行)¹⁴¹하였으니, 타고난 성품(所性)이 같지 않았다.

주석:
136. 신상(申商, ?-1445): 조선 초기의 문신. 호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37. 조(曹): 관청. 여기서는 이조(吏曹)를 가리킨다.
138. 남궁(南宮): 예조(禮曹)를 가리키는 별칭. 고대 중국의 관청 위치에서 유래했다.
139. 대인(大人): 높은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는 말. 신상이 허조를 지칭한다.
140. 농장(弄掌): 손바닥을 희롱하다. 여기서는 '맡은 바 직무를 처리하다', '자기 소관의 일을 하다' 정도의 의미로 쓰인 듯하다. 신상은 출퇴근 시간 자체보다는 업무 처리의 효율성과 결과가 중요하다고 반박하는 것이다.
141. 근고각행(勤苦刻行): 부지런하고 애쓰며(勤苦) 자신에게 엄격하게 실행함(刻行). 허조의 성실하고 철저한 성품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142. 소성(所性): 타고난 성품. 신상과 허조의 서로 다른 업무 스타일과 성격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원문:
許文敬公操心淸厲, 治家嚴而有法, 敎子弟皆用《小學》之禮, 毫忽細行, 皆自謹。 人言“許公平生不知陰陽之事”, 公笑曰: “詡、訥從何而生?” 時有欲革州邑娼妓之議, 命問於政府大臣, 皆言革之可當, 惟未及於公。 人皆意其猛論, 公聞之, 乃笑曰: “誰爲此策? 男女, 人之大欲, 而不可禁者也。 州邑娼妓, 皆公家之物, 取之無妨。 若嚴此禁, 則年少奉使、朝士, 皆以非義奪取私家之女, 英雄俊傑, 多陷於辜。 臣意以爲不宜革也。” 竟從公議。

번역문:
허문경공(許文敬公)은 마음가짐이 맑고 엄격(淸厲)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림(治家)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고, 자제(子弟)들을 가르침에 모두 《소학(小學)》¹⁴³의 예법을 사용하였으며, 터럭만큼이라도 소홀한 작은 행동(毫忽細行)¹⁴⁴도 모두 스스로 삼갔다. 사람들이 “허공(許公)은 평생 음양(陰陽)의 일¹⁴⁵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허후(詡)와 허눌(訥)¹⁴⁶은 어디에서 생겨났겠는가?” 당시에 주읍(州邑)의 창기(娼妓)¹⁴⁷를 혁파하려는 논의가 있어, 의정부 대신들에게 명하여 물으니 모두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고, 오직 공에게만 아직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하게 (혁파를) 주장할 것(猛論)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공이 이를 듣고 이에 웃으며 말하였다. “누가 이런 계책을 내었는가? 남녀 관계는 사람의 큰 욕망이어서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읍의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의 물건¹⁴⁸이니, 이를 취하는 것은 무방하다. 만약 이 금지령을 엄하게 하면, 젊은 나이에 사신으로 가는 자(奉使)나 조정 관리(朝士)들이 모두 의롭지 못하게 민간(私家)의 여자를 빼앗을 것이니, 영웅호걸과 준재(俊才)들이 많이 죄(辜)에 빠질 것이다. 신의 생각으로는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긴다.” 마침내 공의 의견을 따랐다.

주석:
143. 《소학(小學)》: 주희(朱熹)가 편찬한 아동용 유교 윤리 교과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기본 덕목과 예절을 가르치는 책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자제 교육의 필독서였다. 허조가 자녀 교육에 《소학》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성리학적 기본 윤리를 매우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144. 호홀세행(毫忽細行): 터럭만큼 소홀히 하거나 아주 작은 행동. 사소한 언행조차 스스로 조심했음을 의미한다.
145. 음양지사(陰陽之事): 남녀 간의 성적인 관계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 허조가 워낙 근엄하여 부부 관계조차 모를 것이라고 사람들이 수군댔음을 보여준다.
146. 허후(許詡), 허눌(許訥): 허조의 아들들. 특히 허후는 아버지의 강직함을 이어받아 단종(端宗) 복위 운동과 관련하여 희생되었다 (아래 문단 참조). 허조는 아들들의 이름을 대며 유머러스하게 세간의 풍문을 반박하고 있다.
147. 주읍창기(州邑娼妓): 지방 관아에 소속되어 잔치나 연회에서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고 때로는 관리들의 성 상대가 되기도 하던 기녀(妓女). 관기(官妓)라고도 한다.
148. 공가지물(公家之物): 공적인 기관(公家)에 속한 물건 또는 사람. 허조는 관기를 국가가 관리하는 존재로 보고, 이를 이용하는 것은 사적인 영역에서의 성 문제와는 다르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현실적이고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는 금욕적인 도덕론보다는, 금지로 인해 발생할 더 큰 사회적 문제(민간 여성에 대한 성폭력 증가)를 우려하여 관기 제도의 존속을 주장했다. 이는 그의 철저한 원칙주의 이면에 현실을 고려하는 실용적인 면모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원문:
許文敬公稠簡嚴方正, 公廉淸謹, 動慕聖賢。 每鷄鳴盥櫛, 冠帶正坐, 終日不見惰容, 唯矻矻常以國事爲念, 言不及私。 論議國政, 自信獨守, 不與人軒輊, 時稱賢宰相。 家法亦嚴, 子弟有過, 必告祠堂罰之; 奴婢有罪, 按律治之。

번역문:
허문경공 조(稠)는 과묵하고 엄격하며(簡嚴) 방정(方正)하였고, 공정하고 청렴하며(公廉) 맑고 신중(淸謹)하였으며, 행동거지에 성현(聖賢)을 흠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 빗고(盥櫛) 의관(冠帶)을 정제하고 바르게 앉아, 종일토록 게으른 모습(惰容)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부지런히(矻矻) 항상 국사(國事)를 염려하고 사사로운 일(私)은 말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때는 스스로 확신하는 바를 홀로 지켜 다른 사람과 함께 의견을 높이거나 낮추지 않았으니(軒輊)¹⁴⁹, 당시에 현명한 재상(賢宰相)이라 칭송받았다. 가법(家法) 또한 엄하여, 자제(子弟)에게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하였고, 노비(奴婢)에게 죄가 있으면 법률(律)에 의거하여 다스렸다.

주석:
149. 불여인헌치(不與人軒輊):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의견을 올렸다 내렸다 하지 않음. 즉, 여론이나 타인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굳게 지켰음을 의미한다. '헌치(軒輊)'는 수레 앞부분이 높은 것(軒)과 낮은 것(輊)을 뜻하며, 사물의 높고 낮음, 우열, 또는 의견의 변화를 비유한다.

해설:
이 문단은 허조의 인품과 행실을 종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공사(公私) 양면에서 엄격하고 청렴하며, 성현의 도리를 따르려 노력하고, 국사에 전념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집안에서도 엄격한 법도를 세워 자제와 노비를 다스렸다는 내용은 그의 원칙주의적인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원문:
公自幼銷瘦如削, 肩背傴僂。 嘗判禮曹, 定上下服色儀制, 截然有分, 市井輕薄子深疾之, 號曰瘦鷹宰相。 蓋鷹肥則颺去, 瘦則思搏禽也。

번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몸이 마르고 깎은 듯하며(銷瘦如削) 어깨와 등이 굽었다(傴僂)¹⁵⁰. 일찍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상하(上下)의 복색(服色)과 의례 제도(儀制)를 정함에 있어 분명하게 구분(截然有分)¹⁵¹을 두니, 시정(市井)의 경박한 자(輕薄子)들이 이를 매우 미워하여 ‘수응 재상(瘦鷹宰相)’¹⁵²이라고 불렀다. 대개 매(鷹)는 살찌면 날아가 버리고, 마르면 사냥감 잡을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¹⁵³.

주석:
150. 구루(傴僂): 등이 굽은 모습. 허조의 외모적 특징을 묘사한다.
151. 절연유분(截然有分): 명확하게 끊어 나누듯이 구분이 있음. 허조가 예조 판서로서 복식과 의례 제도를 정비하면서 신분과 등급에 따른 구분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했음을 의미한다.
152. 수응재상(瘦鷹宰相): '여윈 매 재상'이라는 뜻의 별명.
153. 응비칙양거 수칙사박금야(鷹肥則颺去 瘦則思搏禽也): 매는 살찌면 게을러져 날아가 버리지만, 여위면 굶주려서 사냥감을 잡으려 한다는 속설. 이 별명은 허조의 마른 외모와 더불어, 그가 예리하고 집요하게 원칙을 추구하며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던 모습을 '굶주린 매'에 비유한 것이다. 이는 그의 엄격함과 집요함에 대한 경외심과 동시에 반감이나 두려움이 섞인 평가를 반영한다.


원문:
麗季, 倭寇充斥, 以其沿海四面無置鎭防守處也。 自太祖開國以後, 於海港要害之處, 皆置萬戶營, 以水軍處置使領之, 由是倭變稍息。 其後倭亦作梗, 世宗命三軍征對馬島, 雖不得大捷, 而倭亦畏威不敢肆。 有倭數戶, 欲居三浦, 世宗嘉其慕義而許之。 許稠泣諫曰: “倭奴乍臣乍叛, 其心難測, 豈可使鱗介之胡, 間我衣裳之人? 後日生齒漸繁, 當爲國之巨害。” 臨卒, 亦再三陳啓, 請及未盛而刷還之。 當其時, 人皆以稠言爲尋常, 而不甚駭。 至今三浦有蔓延難圖之弊, 然後服其先見之明也。【竝《慵齋叢話》。】

번역문:
고려 말기(麗季)에 왜구(倭寇)가 들끓었던(充斥) 것은 해안 사방에 진(鎭)을 설치하여 방수(防守)하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조께서 개국하신 이후, 항구의 요해처(要害之處)에 모두 만호영(萬戶營)¹⁵⁴을 설치하고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¹⁵⁵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왜구의 변란(倭變)이 조금 잠잠해졌다. 그 후에도 왜인(倭)들이 또한 방해(作梗)¹⁵⁶하므로, 세종께서 삼군(三軍)¹⁵⁷에 명하여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게 하시니(1419년), 비록 대승(大捷)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왜인들 역시 위세(威)를 두려워하여 감히 제멋대로 굴지 못하였다. 몇 가구의 왜인들이 삼포(三浦)¹⁵⁸에 거주하기를 원하자, 세종께서 그들이 의(義)를 사모함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셨다. 허조가 눈물을 흘리며 간언(泣諫)하기를, “왜놈(倭奴)¹⁵⁹들은 갑자기 신하가 되었다가 갑자기 배반하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어찌 물고기나 갑각류 같은 오랑캐(鱗介之胡)¹⁶⁰로 하여금 우리 의관(衣裳)의 사람¹⁶¹ 사이에 섞여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인구(生齒)가 점점 번성하면 마땅히 나라의 큰 해(巨害)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종(臨卒)할 때에도 또한 재삼 아뢰어, 아직 창성(昌盛)하기 전에 쓸어내어 돌려보낼(刷還) 것을 청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허조의 말을 예사롭게(尋常) 여기고 심하게 놀라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 삼포가 만연하여 도모하기 어려운 폐단¹⁶²이 있은 연후에야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복하게 되었다.【이상 《용재총화(慵齋叢話)》¹⁶³에서 인용】

주석:
154. 만호영(萬戶營): 고려 말 조선 초에 연해 지역의 요충지에 설치되었던 군영(軍營). 만호(萬戶)가 지휘관이었다.
155.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수군(水軍)을 지휘 통솔하던 무관직.
156. 작경(作梗): 방해하다, 훼방놓다. 왜구의 노략질이나 침입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157. 삼군(三軍): 육군 전체를 의미하거나, 중군(中軍)·좌군(左軍)·우군(右軍)의 세 부대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조선의 주력 군대를 동원했음을 의미한다.
158. 삼포(三浦): 조선 전기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개방했던 세 항구. 부산포(釜山浦, 현 부산), 염포(鹽浦, 현 울산), 내이포(乃而浦) 또는 제포(薺浦, 현 창원시 진해구)를 가리킨다.
159. 왜노(倭奴): 왜인을 매우 낮추어 부르는 말.
160. 인개지호(鱗介之胡): 비늘(鱗)과 껍데기(介)가 있는 동물에 비유하여 왜인을 야만시하는 표현. '호(胡)'는 오랑캐를 뜻한다. 당시 조선의 화이관(華夷觀)을 보여준다.
161. 의상지인(衣裳之人): 의관(衣冠)을 갖추어 입는 문명인. 즉, 조선 사람을 가리킨다.
162. 삼포가 만연하여 도모하기 어려운 폐단(三浦有蔓延難圖之弊): 삼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 통제가 어려워지고, 결국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과 같은 큰 변란으로 이어진 것을 염두에 둔 서술이다. 이후 임진왜란까지 포함하여 왜인으로 인한 폐해가 커졌음을 의미한다.
163.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선 전기의 문신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필기잡록.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와 사회 풍속 등을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해설:
이 일화는 허조의 유명한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세종이 교린(交隣) 정책의 일환으로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허락했을 때, 허조는 왜인들의 변덕스러운 속성과 장래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강력히 반대했다. 임종 시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며 왜인들을 돌려보낼 것을 청했다는 것은 그의 우려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후일 삼포왜란과 임진왜란 등 일본과의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의 예견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는 내용이다.


원문:
許文敬稠官大宗伯時, 爲其外孫女擇婿。 嘗坐四學試諸生於南學, 得廣陵李克培而妻之。 文敬居第在南部, 傳之廣陵。 其行廊蓋以草, 至廣陵不復改葺, 二公淸德¹⁶⁴可敬也。 其第今爲柳相公㙉宅云。【《月汀漫錄》。】

번역문:
허문경 조(稠)가 대종백(大宗伯)¹⁶⁵으로 관직에 있을 때, 그의 외손녀(外孫女)를 위해 사위를 택하였다. 일찍이 사학(四學)¹⁶⁶에서 남학(南學)¹⁶⁷의 유생(諸生)들을 시험할 때 자리에 참석하였다가, 광릉(廣陵)¹⁶⁸ 이극배(李克培)¹⁶⁹를 얻어 사위로 삼았다. 문경의 집(居第)은 남부(南部)¹⁷⁰에 있었는데, 이를 광릉에게 전해주었다. 그 행랑(行廊)¹⁷¹은 초가(草)로 덮여 있었는데, 광릉에게 이르러서도 다시 기와로 바꾸어 잇지(改葺) 않으니, 두 공(公)의 청렴한 덕(淸德)¹⁷²이 존경할 만하다. 그 집은 지금 유상공(柳相公) 산(㙉)¹⁷³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월정만록(月汀漫錄)》¹⁷⁴에서 인용】

주석:
164. [주-D009] 德 : 《대동야승(大東野乘)・월정만필(月汀漫筆)》에는 “검(儉)”으로 되어 있다. '청검(淸儉)' 즉 청렴하고 검소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165. 대종백(大宗伯):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별칭. 주(周)나라 관제에서 따온 말이다.
166. 사학(四學):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 안에 설치된 네 개의 중앙 교육기관. 동학(東學), 서학(西學), 남학(南學), 중학(中學)을 가리킨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기 전의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167. 남학(南學): 사학 중 하나. 한성부 남부에 위치했다.
168. 광릉(廣陵): 이극배의 봉호(封號).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169. 이극배(李克培, 1422-1495): 조선 초기의 문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허조의 외손녀 사위가 되었다.
170. 남부(南部): 한성부의 행정 구역 중 하나.
171. 행랑(行廊): 대문 좌우로 길게 이어진 건물. 주로 하인들이 거처하거나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다. 재상의 집 행랑채가 초가였다는 것은 그의 검소함을 보여준다.
172. 청덕(淸德): 청렴한 덕. 주석 [주-D009] 참조. 사위인 이극배 역시 장인의 검소함을 본받아 집을 사치스럽게 고치지 않았음을 칭찬하고 있다.
173. 유상공 산(柳相公 㙉): 상공(相公)은 정승을 높여 부르는 말. 유산(柳㙉, 1691-175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허조와 이극배가 살았던 집이 후대에 유산의 소유가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74. 《월정만록(月汀漫錄)》: 조선 중기의 문신 윤희정(尹熙正, 1572-1619)이 지은 수필집. 《대동야승》 등에 《월정만필(月汀漫筆)》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기도 하다.


원문:
許丞相稠對案兀坐, 夜半偸兒入其室, 盡輸家貲。 丞相不寐, 冥然若泥塑人。 盜去良久, 家人始覺, 追之無及, 頗恨焉。 相公曰: “賊之有甚於此者, 來戰於心, 何暇警止外賊乎?” 先輩克己之功如此, 學者所當法。【《靜菴集》。】

번역문:
허승상(許丞相) 조(稠)가 책상(案)을 마주하고 꼿꼿이 앉아(兀坐)¹⁷⁵ 있는데, 한밤중(夜半)에 도둑(偸兒)¹⁷⁶이 그 방에 들어와 집안의 재물(家貲)을 모두 가져갔다. 승상께서는 잠들지 않았으나, 멍하니 진흙으로 빚은 사람(泥塑人)¹⁷⁷ 같았다. 도둑이 가고 한참 뒤에야 집안사람들이 비로소 알아차리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자못 한탄하였다. 상공(相公)¹⁷⁸께서 말씀하셨다. “이보다 더 심한 도둑¹⁷⁹이 마음에 와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바깥 도둑을 경계하고 막겠는가?” 선배(先輩)들의 극기(克己) 공부가 이와 같았으니, 배우는 자(學者)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이다.【《정암집(靜菴集)》¹⁸⁰에서 인용】

주석:
175. 올좌(兀坐): 우뚝하게 홀로 앉아 있는 모습.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176. 투아(偸兒): 도둑 아이. 좀도둑을 가리킨다.
177. 이소인(泥塑人):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 아무런 움직임이나 반응이 없는 상태를 비유한다.
178. 상공(相公): 정승(丞相)을 높여 부르는 말. 허조를 가리킨다.
179. 적지유심어차자 내전어심(賊之有甚於此者 來戰於心): 이(바깥 도둑)보다 더 심한 도둑이 마음에 와서 싸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 욕심, 잡념 등을 외부의 도둑보다 더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허조가 외부 상황에 동요하지 않고 내면의 수양(克己)에 몰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180. 《정암집(靜菴集)》: 조선 중기의 개혁 정치가이자 성리학자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문집. 조광조가 허조의 일화를 인용하며 학자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許文敬公稠求得陳友諒子陳理家廟神主式, 假作尺¹⁸¹本¹⁸², 又於議郞姜天霔家, 得紙本周尺, 乃其父判三司事姜碩¹⁸³第有元院使金剛所藏¹⁸⁴象牙尺所傳也。 面書云: “神主尺定式, 以今官尺, 去二寸五分, 用七寸五分。” 卽與《家禮附註》潘時擧所云周尺當今省尺七寸五分弱之語同, 二本相較, 不差尺¹⁸⁵, 於是始定尺制。 凡士大夫家廟神主與天文漏器¹⁸⁶、道路里數、射場步法, 據此以爲定式。 後司譯判事趙忠佐赴京買得新造神主來, 復以此尺較之, 寸分相合。 今我國所用周尺與中國同, 無疑矣。【《筆苑雜記》。】

번역문:
허문경공 조(稠)가 진우량(陳友諒)¹⁸⁷의 아들 진리(陳理)¹⁸⁸ 집안의 가묘(家廟) 신주(神主) 양식(式)을 구하여 얻어서 임시로 자(尺)의 표준(本)¹⁸⁹을 만들고, 또 의랑(議郞) 강천주(姜天霔)¹⁹⁰의 집에서 종이로 된 주척(周尺)¹⁹¹을 얻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판삼사사(判三司事)¹⁹² 강석덕(姜碩德)¹⁹³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원(元)나라 원사(院使) 금강(金剛)¹⁹⁴이 소장했던 상아 자(象牙尺)에서 전해진 것이었다. 그 표면에 쓰여 있기를, “신주 자의 정식(定式)은 지금의 관청 자(官尺)¹⁹⁵로 2치(寸) 5푼(分)을 덜어내고 7치 5푼을 쓴다”고 하였다. 이는 곧 《가례부주(家禮附註)》¹⁹⁶에서 반시거(潘時擧)¹⁹⁷가 말한 ‘주척은 지금의 성척(省尺)¹⁹⁸ 7치 5푼이 조금 안 된다’는 말과 같았으며, 두 표준본을 서로 비교하니 자가 차이가 없었다. 이에 비로소 자의 제도(尺制)를 정하였다. 무릇 사대부 가묘의 신주와 천문 관측 기구 및 물시계(天文漏器)¹⁹⁹, 도로의 이수(里數), 활터의 보법(步法)²⁰⁰ 등은 이를 근거로 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후에 사역원 판사(司譯判事) 조충좌(趙忠佐)²⁰¹가 경사(京師)에 가서 새로 만든 신주를 사 가지고 돌아와 다시 이 자로 비교해보니 치(寸)와 푼(分)이 서로 들어맞았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주척은 중국과 같으니, 의심할 바가 없다.【《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인용】

주석:
181. [주-D012] 尺 : 저본(底本)에는 없다. 《대동야승・필원잡기》 및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기록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182. [주-D013] 本 : 저본(底本)에는 “분(分)”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필원잡기》 및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척본(尺本)' 즉 자의 표준으로 삼을 만한 본(本)이라는 의미이다.
183. [주-D010] 碩 : 저본(底本)에는 “석(石)”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필원잡기》,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고려사・공민왕세가》 원년 10월 18일 등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강석덕(姜碩德)이 올바른 표기이다.
184. [주-D011] 藏 : 저본(底本)에는 “장(莊)”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필원잡기》 및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85. [주-D012] 尺 : 주석 [주-D012] 참조. 문맥상 '불차척(不差尺)' 즉 자의 치수가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186. [주-D014] 天文漏器 :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기록에는 이 부분이 없다. 《필원잡기》의 저자가 추가한 내용일 수 있다.
187. 진우량(陳友諒, 1320-1363): 원나라 말기의 군웅 중 한 명. 주원장(朱元璋)과 천하를 다투다 패배하여 사망했다.
188. 진리(陳理): 진우량의 아들. 아버지 사후 잠시 황제 자리에 있었으나 주원장에게 항복했다. 고려 말에 조선으로 귀화하여 살았다. 그의 집안에 옛 예법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 척본(尺本): 자의 표준이 되는 본(本). 주석 [주-D013] 참조.
190. 강천주(姜天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191. 주척(周尺): 주(周)나라 시대의 표준 자로 여겨진 길이 단위. 유교 경전에 나오는 도량형의 기준으로 중시되었다.
192. 판삼사사(判三司事): 고려시대 재정 기관인 삼사(三司)의 으뜸 벼슬.
193. 강석덕(姜碩德, ?-1360): 고려 말의 문신. 강천주의 아버지. 주석 [주-D010] 참조.
194. 원사 금강(元院使 金剛): 원나라 관청의 사신(使)이었던 금강이라는 인물. 그가 소장했던 상아 자가 강석덕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195. 관척(官尺):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표준 자. 영조척(營造尺) 등을 가리킬 수 있다.
196. 《가례부주(家禮附註)》: 주희의 《가례(家禮)》에 대한 주석서.
197. 반시거(潘時擧): 송원(宋元) 시대의 학자. 《가례부주》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198. 성척(省尺): 관청(省)에서 사용하는 표준 자. 여기서는 당시 통용되던 자를 가리킨다.
199. 천문누기(天文漏器): 천문 관측 기구와 물시계. 정확한 도량형은 과학 기기 제작에도 필수적이었다. 주석 [주-D014] 참조.
200. 도로이수(道路里數), 사장보법(射場步法): 도로의 거리 측정이나 활터에서의 거리 계산 등에도 표준화된 자가 필요했다.
201. 사역원 판사(司譯判事) 조충좌(趙忠佐): 사역원(司譯院)은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던 관청이고, 판사(判事)는 그 으뜸 벼슬이다. 조충좌라는 인물이 명나라에서 신주를 구해와 허조가 정한 주척과 비교해보니 일치했다는 내용이다.

해설:
이 일화는 허조가 도량형 통일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옛 주척(周尺)의 기준을 확인하고, 이를 당시 사용하던 관청 자와 비교하여 환산 기준을 마련했다. 이렇게 확립된 주척은 가묘의 신주 제작뿐만 아니라 천문 기기, 도로 측정, 활터 규격 등 다양한 분야의 표준으로 사용되어 국가의 제도 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그의 실용적인 일면과 함께 예법과 제도를 중시하는 원칙주의가 결합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원문:
許詡者, 故相稠之子, 事雖不係於丙子, 其抗節抱冤, 大略相符。 故南孝溫《六臣傳》, 與爲七臣。 世家忠孝, 喪父事母色養。 世宗朝二十餘年, 謹身守口, 仕文宗, 官稱其職。 文廟昇遐, 顧命大臣皇甫仁、金宗瑞爲首相, 輔幼主, 詡爲右參贊。 光廟以首陽大君赴京, 詡請曰: “方今梓宮在殯, 少主當國, 大臣未附, 百姓狐疑。 公子爲國宗臣, 去國將何之?” 光廟不從, 而心偉²⁰²其說。 癸酉, 光廟密與權擥、韓明澮定謀靖亂, 誅金宗瑞于其第, 領議政皇甫仁、吏曹判書趙克寬等皆死, 詡以前請停赴京之語得免。 召入, 行酒樂作, 宰相鄭麟趾、韓確等拊掌喧笑, 詡愀然不樂, 亦不食肉。 光廟問曰: “何故?” 托以祖父忌, 光廟知其意而不問之。 已而梟宗瑞、仁等首于市, 誅其子孫, 詡曰: “此人胡大罪, 至於梟首孥戮乎? 且詡與宗瑞, 交道未孚, 其心未可知, 若仁也, 詡平生審知其人, 萬無謀逆之理。” 光廟曰: “汝不食肉, 意固在此。” 對曰: “然。 朝廷元老, 同日盡死, 詡生且足矣, 又從而食肉乎?” 卽流涕, 光廟怒甚, 然猶愛其才德, 不欲置之死。 李季甸力讚²⁰³謫外, 而竟縊殺之。 自此人等之死, 朝廷盡變矣。 初, 詡之拜承宣也, 人皆來賀, 稠獨有憂色。 人問之, 稠曰: “天道滿招損, 稠無功德於世, 而位極人臣, 子又承宣, 許氏之禍無日矣。” 詡死而許氏弟姪皆禁錮, 其言果驗矣。【《日月錄》。】

번역문:
허후(許詡)²⁰⁴는 고(故) 재상 허조(稠)의 아들인데, 그 일이 비록 병자호란(丙子胡亂)과는 관계가 없으나, 그의 절개를 지키고 원통함을 품은(抗節抱冤) 것은 대략 서로 부합한다. 그러므로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²⁰⁵에서는 그를 더하여 칠신(七臣)으로 삼았다. 대대로 충효(忠孝)한 가문(世家) 출신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김에 색양(色養)²⁰⁶을 다하였다. 세종조 20여 년간 몸가짐을 삼가고 입을 조심하였으며(謹身守口), 문종(文宗)을 섬겨 관직이 그 직책에 걸맞았다. 문종께서 승하(昇遐)하시자 유명(遺命)을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²⁰⁷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가 수상(首相)²⁰⁸이 되어 어린 임금(幼主)을 보좌하였고, 허후는 우참찬(右參贊)²⁰⁹이었다. 광묘(光廟)²¹⁰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서 경사(京師)에 갈 때, 허후가 청하기를, “지금 막 재궁(梓宮)²¹¹이 빈소(殯所)에 있고, 어린 주상께서 나라를 맡으셨으며, 대신들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未附)²¹², 백성들은 의심하고 있습니다(狐疑). 공자(公子)께서는 나라의 종친(宗臣)으로서 나라를 떠나 장차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광묘가 따르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그 말을 훌륭하게 여겼다²¹³. 계유년(癸酉年, 1453)에 광묘가 몰래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난(亂)을 평정할 모의(靖亂)를 정하고, 김종서를 그 집에서 죽였으며, 영의정 황보인, 이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는데, 허후는 이전에 경사행을 멈추도록 청했던 말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불러들이자 술과 음악을 베풀었는데, 재상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등은 손뼉을 치며 떠들고 웃었으나, 허후는 슬픈 표정(愀然)으로 즐거워하지 않았고 또한 고기도 먹지 않았다. 광묘가 묻기를, “무슨 까닭인가?” 하니, 조부(祖父)의 기일(忌日)이라고 핑계를 대자, 광묘는 그의 뜻을 알았지만 묻지 않았다. 얼마 뒤 김종서, 황보인 등의 머리를 시장에 매달아 놓고(梟首) 그 자손들을 죽이니, 허후가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가 있어 머리를 매달고 가족까지 죽이는(孥戮) 지경에 이른 것인가? 또한 나와 종서(宗瑞)는 교분이 두텁지 않아 그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인(仁)의 경우라면 내가 평생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아니, 만 번 죽어도 모반할 리가 없다.” 광묘가 말하였다. “네가 고기를 먹지 않은 뜻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구나.” 허후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조정의 원로(元老)들이 같은 날 모두 죽었는데, 제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족한데, 어찌 따라서 고기를 먹겠습니까?” 즉시 눈물을 흘리니, 광묘가 매우 노하였으나, 오히려 그의 재능과 덕(才德)을 아껴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이계전(李季甸)²¹⁴이 외직으로 내쫓을 것을 강력히 주장(譖)하여²¹⁵ 마침내 목매어 죽였다(縊殺)²¹⁶. 이 사람들 등이 죽은 후로부터 조정이 완전히 변하였다. 처음에 허후가 승선(承宣)²¹⁷에 임명되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였으나, 허조만이 홀로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허조가 말하였다. “하늘의 도(天道)는 가득 차면 손해를 부른다(滿招損)²¹⁸. 나 조(稠)는 세상에 공덕(功德)이 없는데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에 이르렀고, 아들 또한 승선이 되었으니, 허씨(許氏)의 화(禍)가 멀지 않았구나.” 허후가 죽고 허씨의 형제 조카들이 모두 금고(禁錮)²¹⁹를 당하니,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일월록(日月錄)》에서 인용】

주석:
202. [주-D015] 偉 : 《대동야승・해동야언・무오당적(大東野乘・海東野言・戊午黨籍)》에는 “위(韙)”로 되어 있다. '옳다고 여기다'라는 뜻이다.
203. [주-D016] 讚 : 《대동야승・해동야언・무오당적》에는 “참(譖)”으로 되어 있다. '헐뜯다, 참소하다'라는 뜻이다. 문맥상 이계전이 허후를 참소하여 처벌을 주장했다는 의미의 '참(譖)'이 더 적절해 보인다.
204. 허후(許詡, ?-1457): 허조의 아들. 아버지처럼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졌다.
205. 남효온(南孝溫) 《육신전(六臣傳)》: 생육신(生六臣) 중 한 명인 남효온(1454-1492)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희생된 사육신(死六臣)의 행적을 기록한 책. 허후는 사육신은 아니지만 계유정난에 반대하고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다 희생되었기에, 남효온 등이 그를 사육신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하여 '칠신'으로 칭하기도 했다는 의미이다.
206. 색양(色養): 부모를 섬길 때 늘 온화하고 기쁜 얼굴빛을 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효행(孝行)을 의미한다.
207. 고명대신(顧命大臣): 임금이 임종 시에 어린 후계자를 부탁하며 뒷일을 맡긴 대신.
208. 수상(首相): 으뜸 재상. 당시 영의정(황보인)과 좌의정(김종서)을 가리킨다.
209. 우참찬(右參贊): 의정부의 종1품 관직.
210. 광묘(光廟): 세조(世祖)의 원래 묘호. 예종(睿宗) 때 세조로 개칭되었다. 여기서는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를 가리킨다.
211. 재궁(梓宮): 임금의 관(棺)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문종의 관을 가리킨다.
212. 미부(未附): 신하들이 아직 새 임금에게 마음으로 복종하거나 정국이 안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213. 심위기설(心偉其說): 마음속으로는 그 말을 훌륭하다고 여김. 주석 [주-D015] 참조.
214. 이계전(李季甸, 1404-1459):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
215. 역찬적외(力讚謫外): 외직으로 내쫓을 것을 강력히 주장함. 주석 [주-D016] 참조. '참(譖)'으로 볼 경우, '강력히 참소하여 외직으로 내쫓으려 했다'는 의미가 된다.
216. 액살지(縊殺之): 목매어 죽임. 허후는 계유정난 때는 살아남았으나, 1457년(세조 3)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사사(賜死)되었다. 이 기록은 계유정난 직후의 상황과 연결하여 그의 죽음을 서술하고 있다.
217. 승선(承宣):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도승지(都承旨) 다음가는 직책으로 왕명을 출납하는 중요한 자리이다.
218. 만초손(滿招損): 가득 차면 손해를 부른다는 뜻.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편의 "만초손(滿招損) 겸수익(謙受益)"(가득 차면 손해를 부르고 겸손하면 이익을 받는다)에서 유래한 말이다. 허조는 가문의 지나친 번성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219. 금고(禁錮): 죄인의 자손이나 친족에게 벼슬길을 막는 형벌.

해설:
이 마지막 문단은 허조의 아들 허후의 삶과 죽음을 통해 허씨 가문의 충절과 강직함, 그리고 허조의 선견지명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허후는 아버지처럼 원칙을 지키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으며, 계유정난이라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희생되었다. 이는 아버지 허조가 예견했던 '가득 차면 손해를 부른다'는 우려가 현실이 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동시에 허후의 절의(節義)는 후대에 높이 평가받아 사육신에 버금가는 인물로 기려졌음을 보여준다.

 

조말생(趙末生)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趙末生【文剛公。】
字平仲, 號華山, 一號杜¹谷, 楊州人。 洪武庚戌生。 太宗元年辛巳, 登魁科。 丁亥重試。 歷兵曹判書、集賢殿大提學, 官至領中樞院事。 世宗丁卯卒, 年七十八。

번역문:
조말생(趙末生)【문강공(文剛公)²이다.】
자는 평중(平仲), 호는 화산(華山)이며, 또 다른 호는 두곡(杜谷)³이고, 양주(楊州) 사람이다. 홍무(洪武) 경술년(1370)에 태어났다. 태종(太宗) 원년 신사년(1401)에 문과 장원(魁科)⁴으로 급제하였다. 정해년(1407)에 중시(重試)⁵에 합격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⁶,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⁷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⁸에 이르렀다. 세종(世宗) 정묘년(1447)에 졸(卒)하니, 나이 78세였다.

주석:

  1. [주-D001] 杜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사(社)”가 되어야 할 듯하다. 즉, 호가 사곡(社谷)일 가능성이 있다.
  2. 문강공(文剛公): 조말생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강(剛)은 강하고 과감하여 결단성이 있음(彊毅果敢) 등을 의미한다.
  3. 두곡(杜谷): 막을 두, 골 곡. 호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으나, 은거지의 지명 등과 관련될 수 있다. 주석 [주-D001]에 따라 사곡(社谷)일 수도 있다.
  4. 괴과(魁科): 과거 시험, 특히 문과(文科)에서 수석(首席), 즉 장원(壯元)으로 급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5.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현직 관료들을 대상으로 10년마다 보이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품계를 올려주었다. 조말생은 태종 7년(1407) 문과중시에 병과(丙科) 1등으로 합격했다.
  6. 병조판서(兵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국방, 군사, 무관 인사 등을 담당했다.
  7.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집현전(集賢殿)의 최고 관직. 정2품. 경연(經筵)과 학문 연구, 서적 편찬 등을 총괄했다. 조선 시대 최고의 명예직 중 하나로 꼽혔다.
  8.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중추원(中樞院)의 으뜸 벼슬. 정1품. 중추원은 왕명 출납, 병기(兵機), 군정(軍政) 등을 관장하던 기관이었으나 점차 실권이 줄어 원로대신을 예우하는 명예직 성격이 강해졌다.

원문:
太宗十一年, 御經筵, 講《孟子》至“有事君人者, 事是君則爲容悅者也”, 曰: “臣之事君, 禮也。 其曰事君則爲容悅也, 何也?” 趙末生對曰: “臣之於君, 陳善閉邪, 匡救其失, 職也。 一以事君爲心, 見君之失而不言, 則是阿徇以爲容, 逢迎以爲悅者也。” 上曰: “然。”

번역문:
태종 11년(1411), 경연(經筵)⁹에 임하시어 《맹자(孟子)》를 강독하다가 “임금을 섬기는 사람(事君人者)이 있어, 이 임금을 섬기는 것을 곧 아첨(容悅)¹⁰하는 것으로 여기는 자가 있다”¹¹는 구절에 이르러 말씀하셨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예(禮)이다. 그런데 ‘임금을 섬기는 것을 곧 아첨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조말생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선(善)을 아뢰고 사(邪)를 막으며(陳善閉邪) 그 잘못을 바로잡아 구하는 것(匡救其失)이 직분입니다. 오로지 임금을 섬기는 것만을 마음으로 삼아, 임금의 잘못을 보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아첨하여 따르는 것(阿徇)을 용(容)¹²으로 삼고, 비위를 맞추는 것(逢迎)을 열(悅)¹³로 삼는 자입니다.”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석:
9.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강론하고 정사를 논의하던 자리.
10. 용열(容悅): 얼굴빛을 꾸미고 남의 비위를 맞추어 기쁘게 함. 아첨(阿諂)과 유사한 의미이다.
11. "有事君人者, 事是君則爲容悅者也":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편에 나오는 구절. 원문은 맹자가 제자 공손추에게 신하의 도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맹자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저 섬기기만 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12. 용(容): 얼굴빛을 꾸미는 것. 즉, 겉으로만 복종하고 비위를 맞추는 태도를 의미한다.
13. 열(悅): 기쁘게 하는 것. 임금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조말생은 맹자의 뜻을 풀이하여, 진정한 섬김은 직언(直言)과 보필(輔弼)에 있지 단순한 순종이나 아첨에 있지 않음을 강조했다.


원문:
禮曹上元會樂章次第, 以《夢金尺》、《受寶籙》爲首。 上謂承政院曰: “《夢金尺》、《受寶籙》是夢與圖讖之說耳, 豈可爲樂章之首?” 右副代言趙末生曰: “麒麟之生, 異於犬羊; 神人之生, 異於常人。 故美稷之生者曰: ‘履帝武敏歆。’ 美契之生者曰: ‘天命玄鳥, 降而生商。’ 《受寶籙》、《夢金尺》實太祖受命之符也。 以爲樂章之首, 未爲不可。”【竝《國朝寶鑑》。】

번역문:
예조(禮曹)¹⁴에서 원회(元會)¹⁵의 악장(樂章)¹⁶ 순서를 올리면서 《몽금척(夢金尺)》¹⁷과 《수보록(受寶籙)》¹⁸을 첫머리에 두었다. 상(上)께서 승정원(承政院)¹⁹에 이르셨다. “《몽금척》과 《수보록》은 꿈과 도참(圖讖)²⁰의 설일 뿐인데, 어찌 악장의 첫머리로 삼을 수 있겠는가?” 우부대언(右副代言)²¹ 조말생이 아뢰었다. “기린(麒麟)의 태어남은 개나 양과 다르고, 신인(神人)의 태어남은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시경에서) 직(稷)²²의 탄생을 아름답게 여긴 자는 말하기를 ‘상제(上帝)의 발자취를 밟고 감응하여 잉태하였네(履帝武敏歆)’²³라 하였고, 설(契)²⁴의 탄생을 아름답게 여긴 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검은 새(玄鳥)에게 명하여 내려와 상(商)나라를 태어나게 하였네(天命玄鳥, 降而生商)’²⁵라 하였습니다. 《수보록》과 《몽금척》은 실로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을 받으신 징표(符)입니다. 이를 악장의 첫머리로 삼는 것이 불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이상 《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 인용】

주석:
14. 예조(禮曹): 육조(六曹) 중 하나. 예악(禮樂), 제사(祭祀), 교육, 외교 등을 담당했다.
15. 원회(元會): 정월 초하루 아침에 열리는 조회(朝會). 임금이 백관의 하례를 받는 큰 의식이다.
16. 악장(樂章): 국가의 공식적인 의례나 연회 때 연주되던 노래와 악곡.
17. 《몽금척(夢金尺)》: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상징하는 악곡.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꿈에 신인(神人)에게 금척(金尺, 금으로 된 자)을 받았다는 설화에 기반한다. 이는 천명(天命)을 받았음을 상징한다.
18. 《수보록(受寶籙)》: 역시 이성계의 건국을 상징하는 악곡. 보록(寶籙)은 천명(天命)이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상서로운 문서나 징표를 의미한다.
19. 승정원(承政院):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비서 기관.
20. 도참(圖讖): 그림(圖)이나 예언서(讖)를 통해 미래의 길흉화복이나 왕조의 흥망 등을 예언하는 사상.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있어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되기도 했다.
21. 우부대언(右副代言):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 승지(承旨) 중 하나로, 왕명을 전달하고 신하의 상소를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22. 직(稷): 이름은 기(棄). 주(周)나라 시조로 농사의 신으로도 불린다. 어머니 강원(姜嫄)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했다고 전해진다.
23. "履帝武敏歆": 《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生民)〉편의 첫 구절. 주나라 시조 후직(后稷)의 신이한 탄생을 노래한 부분이다.
24. 설(契): 상(商, 은나라)의 시조. 어머니 간적(簡狄)이 제비(玄鳥) 알을 삼키고 잉태했다고 전해진다.
25. "天命玄鳥, 降而生商": 《시경(詩經)》 〈상송(商頌) 현조(玄鳥)〉편의 첫 구절. 상나라 시조 설(契)의 신이한 탄생을 노래한 부분이다. 조말생은 고대 성인(聖人)들의 신이한 탄생 설화를 인용하여, 태조의 건국 신화 역시 비록 도참설에 기반하더라도 건국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악장의 첫머리에 둘 수 있다고 변론한 것이다.


원문:
黃海觀察使報: “節制使李思儉等候賊于海州延平串, 爲賊所圍, 賊語之曰: ‘我非爲朝鮮來, 向中國, 因絶糧至此。 若給之, 當退。’ 思儉乃遺米五斛、酒十甁, 又遺米四十斛, 乃解去。” 兩上召柳廷顯、朴訔、趙末生、李明德、許稠等, 議乘虛殄殲對馬島邀賊還之策, 皆曰: “不可乘虛, 當待賊還而攻之。” 末生獨曰: “可乘虛攻之。” 上王曰: “若不掃除, 每被侵擾, 何異漢主之見辱凶奴乎? 不如乘虛伐之。”【佔畢齋²⁶《彛尊錄》。】

번역문:
황해도 관찰사(觀察使)²⁷가 보고하였다. “절제사(節制使)²⁸ 이사검(李思儉) 등이 해주(海州) 연평곶(延平串)²⁹에서 적(賊)³⁰을 기다리다가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적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조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 향하다가 식량이 떨어져 여기에 이르렀다. 만약 식량을 준다면 마땅히 물러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사검이 이에 쌀 다섯 곡(斛)³¹과 술 열 병(甁)을 보내주고, 또 쌀 사십 곡을 보내주니, 이에 포위를 풀고 갔습니다.” 양상(兩上)³²께서 유정현(柳廷顯)·박은(朴訔)·조말생(趙末生)·이명덕(李明德)·허조(許稠) 등을 불러, 적이 없는 틈을 타(乘虛) 대마도(對馬島)³³를 섬멸(殄殲)하고 돌아오는 적을 요격(邀賊還)할 계책을 의논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적이 없는 틈을 타서는 안 되고, 마땅히 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조말생만이 홀로 말하였다. “적이 없는 틈을 타 공격할 수 있습니다.” 상왕(上王)³⁴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소탕하지 않으면 매번 침략과 소란을 당할 것이니, 한(漢)나라 황제(漢主)가 흉노(凶奴)³⁵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적이 없는 틈을 타 정벌하는 것만 못하다.”【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이존록(彛尊錄)》³⁶에서 인용】

주석:
26. [주-D002] 畢 : 저본(底本)에는 “𠌫”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 및 《점필재집(佔畢齋集)・신도비명(神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점필재(佔畢齋)가 올바른 표기이다.
27.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총괄했다.
28. 절제사(節制使): 조선 초기 각 도의 군사를 지휘하던 무관직.
29. 연평곶(延平串): 현재의 연평도(延坪島) 부근으로 추정된다.
30. 적(賊): 여기서는 왜구(倭寇), 즉 일본 해적을 가리킨다.
31. 곡(斛): 곡식의 부피를 재는 단위. 1곡은 15말(斗)에 해당한다.
32. 양상(兩上): 상왕(上王)인 태종(太宗)과 당시 임금인 세종(世宗)을 함께 이르는 말. 이 사건은 세종 즉위 초,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사권 등 실권을 행사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33.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섬. 당시 왜구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34. 상왕(上王): 태종(太宗) 이방원. 당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있었다. 이 대화는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己亥東征) 직전에 있었던 정책 결정 과정을 보여준다.
35. 한주지견욕흉노(漢主之見辱凶奴): 한(漢)나라 초기, 강력한 흉노(匈奴)의 침입에 시달리며 때로는 공주를 시집보내고 많은 물자를 보내는 등 굴욕적인 화친(和親) 정책을 폈던 것을 가리킨다. 태종은 왜구의 노략질을 방치하는 것이 이와 같은 굴욕과 같다고 여겨 강경책을 주장했다.
36. 《이존록(彛尊錄)》: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편찬한 책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주목할 만한 인물들의 언행과 일화를 기록한 것이다.


원문:
對馬島倭犯邊, 上王遣三軍都體察使李從茂將三軍往征。 又命兵曹判書趙末生致書諭都都熊瓦曰: “本曹奉宣旨, 若曰: ‘古昔帝王, 奉若天道, 敎民稼穡, 樹藝五穀, 以養其形, 因其固有之義理而開導之, 以淑其心。 若有强梗不率, 殺越人于貨, 暋不畏死者, 小則刑戮, 大則征伐, 堯、舜、三王君人之道, 如是而已。 對馬爲島, 隷於慶尙之鷄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 第以其地甚小, 又在海中, 阻於往來, 民不居焉。 於是倭奴之黜於其國而無所歸者, 咸來投集, 以爲窟穴, 或時竊發, 劫掠平民, 孤寡人妻子, 焚蕩人室廬, 窮凶極惡, 積有年紀。 惟我太祖康獻大王以至仁神武, 應天革命, 凡有血氣者, 莫不慴伏。 于斯時也, 命一褊³⁷將殄殲對馬之小醜, 有如泰山之壓鳥卵, 賁、育之搏嬰兒。 我太祖乃敷文德, 載戢威武, 示以恩信。 予紹大統, 克承先志, 益申撫恤。 雖或間有草竊不恭之事, 尙念都都熊瓦之父宗貞茂慕義輸誠, 犯而不校, 每接信使, 館焉以留, 仍命禮曹厚加勞慰。 又念生理之艱, 許通商舶, 慶尙道之米粟, 運于馬島者, 歲率數萬餘石, 予之用心, 蓋亦勤矣。 不意忘恩背義, 自作禍胎, 爰命邊將領兵船, 進圍其島, 以待降附。 今其島人, 尙且執迷不悟, 予甚憫焉。 島中之人, 計不下數千, 思其生理, 良用惻然。 島中之地, 類皆石山, 未有肥衍之土, 稼穡樹藝, 無所施功, 但欲乘隙竊發, 盜人財穀耳。 蓋其罪惡貫盈, 幽則天地神祗, 默降殃禍; 明則良馬大船, 水陸之備甚嚴, 焉往而不遭誅戮之患哉? 只有捕魚買賣, 乃爲生理所資, 而今已背恩負義, 是自絶之矣, 非予先有絶之之心也。 失此生業, 不免飢餓, 坐待死亡而已。 若能幡然悔悟, 卷土來降, 則其都都熊瓦, 錫之好爵, 頒以厚祿, 其代官等, 亦當優恤, 其餘群小, 竝齒吾民, 一視同仁, 俾知盜賊之可恥、義理之可悅。 若猶懷草竊之計, 仍留于島, 則當大備兵船, 厚載糧餉, 環島而攻之, 歷時旣久, 必將自斃。 若又精選勇士十萬餘人, 面面入攻, 則囊中之物, 進退無據, 靡有孑遺, 而陸爲烏鳶之食, 水充魚鼈之腹也, 無疑矣。 古人有言曰: 「禍福無不自己求之者。」 又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今對馬一島之人, 亦皆有降衷秉彝之性矣, 豈無知時識勢, 通曉義理者哉? 兵曹其移文對馬島, 諭予至懷, 開其自新之路, 俾免滅亡之禍, 以副予仁愛生民之意。’ 今錄宣旨, 遣人諭意, 惟足下思之。”【《國朝寶鑑》。】

번역문:
대마도 왜(倭)가 변방을 침범하자, 상왕(上王)께서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³⁸ 이종무(李從茂)를 보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게 하셨다. 또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명하여 글을 보내 도도웅와(都都熊瓦)³⁹를 타이르게 하시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본조(本曹, 병조)는 선지(宣旨)⁴⁰를 받들었다. 이르시기를, ‘옛날의 제왕(帝王)은 하늘의 도(天道)를 받들어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稼穡)⁴¹을 가르치고 오곡(五穀)을 심고 가꾸게(樹藝)⁴² 하여 그 몸을 기르게 하였으며, 그 본래 가지고 있는 의리(義理)에 따라 열어 인도하여 그 마음을 선하게 하였다. 만약 강하고 포악하여 따르지 않고(强梗不率), 재물을 탐하여 사람을 죽이며(殺越人于貨)⁴³, 사납고 어두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暋不畏死者)⁴⁴가 있으면, 작게는 형벌로 죽이고(刑戮) 크게는 군대로 정벌(征伐)하였으니, 요(堯)·순(舜)과 삼왕(三王)⁴⁵이 백성을 다스리던 도(道)는 이와 같을 뿐이었다. 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慶尙道)의 계림(鷄林)⁴⁶에 예속되어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문서와 서적(文籍)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 왕래가 막히므로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노(倭奴)⁴⁷ 중 그 나라에서 쫓겨나 돌아갈 곳 없는 자들이 모두 와서 모여들어 소굴(窟穴)로 삼고는, 때때로 몰래 일어나 평민들을 겁탈하고 약탈하며, 사람들의 처자(妻子)를 외롭게 만들고, 사람들의 집을 불태우고 쓸어버리니(焚蕩), 흉악함이 극에 달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오직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⁴⁸께서는 지극한 인(仁)과 신묘한 무(武)로써 하늘에 응하여 혁명(革命)⁴⁹하시니,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자는 두려워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에 한 명의 편장(褊將)⁵⁰을 명하여 대마도의 작은 도적떼(小醜)를 섬멸하는 것은 태산(泰山)이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고, 분(賁)·육(育)⁵¹이 갓난아이를 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우리 태조께서는 이에 문덕(文德)을 펴시고 위엄과 무력(威武)을 거두시어 은혜와 신의(恩信)를 보이셨다. 내(予)⁵²가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능히 선왕의 뜻(先志)을 계승하여 더욱 어루만져 구휼(撫恤)하였다. 비록 간혹 도둑질하고 불손한 일(草竊不恭之事)⁵³이 있었으나, 오히려 도도웅와의 아버지 종정무(宗貞茂)⁵⁴가 의(義)를 사모하여 정성을 바친 것을 생각하여, 침범하여도 따지지 않았고(犯而不校) 매번 신사(信使)를 접견하여 관사(館)에 머무르게 하고는 이어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였다. 또 생계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통상선(通商舶)을 허락하니, 경상도의 쌀과 곡식이 대마도로 운반된 것이 해마다 수만여 석(石)에 이르렀으니, 나의 마음 씀씀이가 대개 또한 부지런하였다. 뜻밖에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여(忘恩背義) 스스로 재앙의 씨앗(禍胎)을 만들므로, 이에 변방의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 섬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지금 그 섬사람들이 아직도 미혹됨을 고집하고 깨닫지 못하니(執迷不悟), 내가 심히 딱하게 여긴다. 섬 안의 사람들은 헤아려 보건대 수천 명 아래가 아니니, 그 생계를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한 마음이 든다. 섬 안의 땅은 대부분 돌산이고 비옥하고 넓은 땅이 없어서 농사짓고 나무 심는 일(稼穡樹藝)에 공을 들일 곳이 없으니, 다만 틈을 타서 몰래 일어나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치려 할 뿐이다. 대개 그 죄악이 가득 찼으니(罪惡貫盈), 은밀하게는 천지신명(天地神祗)이 조용히 재앙과 화(殃禍)를 내릴 것이고, 드러나게는 좋은 말과 큰 배 등 수륙(水陸)의 방비가 매우 엄하니, 어디를 간들 주륙(誅戮)의 환란을 만나지 않겠는가? 오직 고기잡이와 매매(捕魚買賣)만이 생계를 꾸리는 밑천이 되는데, 이제 이미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등졌으니, 이는 스스로 끊은 것이지 내가 먼저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생업(生業)을 잃으면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여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만약 갑자기 잘못을 뉘우치고(幡然悔悟) 세력을 되찾아 항복해 온다면(卷土來降)⁵⁵, 그 도도웅와에게는 좋은 벼슬(好爵)을 내리고 후한 녹봉(厚祿)을 나누어 줄 것이며, 그 대관(代官)⁵⁶ 등에게도 마땅히 우대하고 구휼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리들(群小)도 아울러 우리 백성(吾民)으로 삼아 한결같이 똑같이 인(仁)으로 보아(一視同仁), 도둑질이 부끄러운 일이며 의리가 기뻐할 만한 것임을 알게 할 것이다. 만약 여전히 도둑질할 계책(草竊之計)을 품고 그대로 섬에 머무른다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준비하고 군량(糧餉)을 두텁게 실어 섬을 에워싸고 공격할 것이니, 시간이 오래 지나면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自斃). 만약 또 정예 용사 십만여 명을 뽑아 여러 방면에서 들어가 공격한다면,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되어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進退無據) 처지가 되어 한 명도 남김없이(靡有孑遺)⁵⁷ 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니, 의심할 바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화(禍)와 복(福)은 스스로 구하지 않음이 없다(禍福無不自己求之者)」⁵⁸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열 집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사람이 있다(十室之邑, 必有忠信)」⁵⁹고 하였다. 지금 대마도 한 섬의 사람들도 또한 모두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降衷秉彝之性)⁶⁰이 있을 것이니, 어찌 시세(時勢)를 알고 의리를 아는 자가 없겠는가? 병조는 대마도에 공문(移文)을 보내 나의 지극한 마음을 타일러 알려,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自新之路)을 열어주어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여, 내가 생민(生民)을 아끼고 사랑하는 뜻(仁愛生民之意)에 부응하게 하라.’ 이제 선지(宣旨)를 기록하여 사람을 보내 뜻을 타이르니, 오직 족하(足下)⁶¹는 생각하라.”【《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 인용】

주석:
37. [주-D003] 褊 : 저본(底本)에는 “편(偏)”으로 되어 있다. 《동문선(東文選)・유대마주서(諭對馬州書)》 및 《춘정집(春亭集)・유대마주선지(諭對馬州宣旨)》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편장(褊將)은 작은 부대를 이끄는 장수 또는 지위가 낮은 장수를 의미한다.
38.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조선 초기에 전쟁 등 유사시에 임시로 임명되던 최고 군사 지휘관. 좌군, 중군, 우군의 삼군(三軍)을 총괄 지휘했다.
39. 도도웅와(都都熊瓦):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를 가리키는 음차 표기. 일본식 이름은 소 사다모리(宗貞盛, 1408?~1452)로 추정된다.
40. 선지(宣旨): 임금의 명령.
41. 가색(稼穡):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 농사.
42. 수예(樹藝): 곡식이나 과일나무 등을 심고 가꾸는 일.
43. 살월인우화(殺越人于貨): 재물을 탐하여 사람을 죽임. 《서경(書經)》 〈강고(康誥)〉편에 나오는 구절로, 포악한 행위를 비난하는 말이다.
44. 민불외사자(暋不畏死者): 사납고 어리석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역시 《서경(書經)》 〈강고(康誥)〉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왜구의 잔인함과 무모함을 지적한다.
45. 요(堯)·순(舜)·삼왕(三王):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성군(聖君). 하나라 우왕, 상나라 탕왕, 주나라 문왕(또는 무왕)을 가리킨다. 이들의 통치를 이상적인 군주의 도리로 제시하고 있다.
46. 계림(鷄林): 원래 신라(新羅) 또는 그 수도 경주(慶州)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 지역, 나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47. 왜노(倭奴): 왜인(倭人)을 낮추어 부르는 말.
48.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강헌(康獻)은 그의 시호이다.
49. 혁명(革命): 천명(天命)이 바뀌어 왕조가 교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50. 편장(褊將): 작은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 또는 지위가 낮은 장수. 주석 [주-D003] 참조. 대마도 정벌이 조선에게는 쉬운 일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51. 분(賁)·육(育):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장사(壯士)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이들이 갓난아이를 상대하듯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52. 여(予): 나. 임금이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 여기서는 상왕 태종을 가리킨다.
53. 초절불공지사(草竊不恭之事): 풀숲에 숨어 몰래 훔치는 것처럼 소규모로 행해지는 도둑질과 불손한 행위. 왜구의 노략질을 가리킨다.
54. 종정무(宗貞茂): 도도웅와(소 사다모리)의 아버지인 소 사다시게(宗貞茂, 1385-1418). 그는 비교적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55. 권토래강(卷土來降): 땅을 말아 올 듯한 기세로 다시 온다는 '권토중래(卷土重來)'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56. 대관(代官): 주군(主君)을 대신하여 특정 지역이나 업무를 관리하는 관직. 대마도주의 부하 관리들을 가리킨다.
57. 미유혈유(靡有孑遺): 외로이 남은 자가 하나도 없음. 완전히 섬멸됨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운한(雲漢)〉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58. "禍福無不自己求之者": 화와 복은 모두 자기 자신이 불러들이는 것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및 《좌전(左傳)》 등 여러 문헌에 비슷한 구절이 보인다.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59. "十室之邑, 必有忠信": 열 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사람은 있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말이다.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현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기를 촉구하는 의미이다.
60. 강충병이지성(降衷秉彝之性): 하늘이 내려준 착한 마음(降衷)과 떳떳한 본성(秉彝之性).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烝民)〉편에서 유래했다.
61. 족하(足下):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2인칭 대명사. 여기서는 대마도주 도도웅와를 가리킨다.

 

한상덕(韓尙德) 관련 기록 번역 및 주석

원문:
韓尙德
字□□¹, 尙敬之弟。 高麗辛禑十一年乙丑登第。 入我朝, 歷知司諫院事、代言, 官至漢城府尹。

번역문:
한상덕(韓尙德)
자는 계덕(季德)¹이며, 한상경(韓尙敬)²의 아우이다. 고려 신우(辛禑)³ 11년 을축년(1385)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아조(我朝, 조선)에 들어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⁴, 대언(代言)⁵ 등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한성부윤(漢城府尹)⁶에 이르렀다.

주석:

  1. [주-D001] □□ : 《등과록전편(登科錄前篇)》 및 《전조과거사적(前朝科擧事蹟)》에는 “계덕(季德)”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자는 계덕이다.
  2. 한상경(韓尙敬, 1360-1425): 한상덕의 형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영의정을 역임했다.
  3. 신우(辛禑): 고려 제32대 왕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조선 건국 세력에 의해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성을 신씨로 폄칭하였다.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당상관 벼슬.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지사(知事)'는 해당 관청의 업무를 관장한다는 의미이다.
  5. 대언(代言):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벼슬인 승지(承旨)의 조선 초기 명칭. 왕명을 출납하는 핵심 측근 역할을 했다.
  6. 한성부윤(漢城府尹): 수도인 한성부(漢城府)의 행정 책임자. 종2품 벼슬이다.

원문:
太宗九年, 上御廣延樓, 知司諫院事韓尙德進曰: “舜爲聖人, 皐陶以無若丹朱爲戒; 唐太宗亦英明之主, 魏徵以無若隋煬帝戒之。 今臣亦以無若辛禑爲戒。 殿下久不聽政, 臣意謂未寧也。” 上曰: “予當此節, 每發眼疾, 今年亦然。” 尙德曰: “事大以誠, 御寇以威⁷, 號爲太平。 然願常自敬畏, 明四目達四聰, 進賢退不肖, 安不忘危, 治不忘亂, 則今日之治, 三王可及。” 上欣然曰: “三王安可及哉?” 尙德曰: “殿下正心、誠意, 與天地合其德, 毋曰予不敏焉, 則能及古之聖矣。” 尙德出, 上曰: “韓尙敬言甚切, 至其弟亦然。 自予卽位以來, 諫官進戒, 未有如尙德也。”

번역문:
태종(太宗) 9년(1409), 상(上)께서 광연루(廣延樓)⁸에 계실 때 지사간원사 한상덕이 나아가 아뢰었다. “순(舜)임금은 성인(聖人)이셨으나 고요(皐陶)는 단주(丹朱)⁹와 같이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고, 당 태종(唐太宗) 역시 영명한 군주였으나 위징(魏徵)은 수 양제(隋煬帝)¹⁰와 같이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이제 신(臣) 또한 신우(辛禑)¹¹와 같이 되지 마시라고 경계하고자 합니다. 전하(殿下)께서 오랫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으시니, 신의 생각으로는 편안하지 못한 듯합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 절기만 되면 매번 눈병이 나는데, 올해도 역시 그러하다.” 한상덕이 아뢰었다. “큰 나라를 성실히 섬기고(事大以誠) 외적을 위엄으로 막아내어(御寇以威)¹² 태평(太平)하다 일컬어지고 있습니다.¹³ 그러나 원하옵건대 항상 스스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시며(敬畏), 사목(四目)을 밝히고 사총(四聰)을 통하게 하시며¹⁴, 현명한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시며(進賢退不肖),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安不忘危) 다스려질 때 혼란을 잊지 않으신다면(治不忘亂), 오늘날의 다스림이 삼왕(三王)¹⁵의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상께서 흔연히 말씀하셨다. “삼왕의 수준에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 한상덕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시어(正心誠意)¹⁶ 천지(天地)와 더불어 그 덕(德)을 합하시고, ‘내가 불민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능히 옛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실 수 있습니다.” 한상덕이 나가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한상경의 말이 매우 간절하더니, 그 아우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구나. 내가 즉위한 이래로 간관(諫官)이 나아가 경계한 것이 한상덕과 같은 자가 없었다.”

주석:
7. [주-D002] 威 : 《국조보감(國朝寶鑑)・태종조(太宗朝)》 기축(己丑, 9年)에는 뒤에 “중외무사(中外無事)”가 더 있다. 즉, '외적을 위엄으로 막아 안팎으로 일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8. 광연루(廣延樓): 경복궁 안의 누각.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거나 경서를 강론하던 장소 중 하나였다.
9. 순(舜), 고요(皐陶), 단주(丹朱): 순은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성군, 고요는 순의 현명한 신하, 단주는 순의 아버지인 요(堯)임금의 불초한 아들이다. 《상서(尙書)》 〈고요모(皐陶謨)〉 등에 고요가 순에게 단주처럼 교만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내용이 나온다.
10. 당 태종(唐太宗), 위징(魏徵), 수 양제(隋煬帝): 당 태종은 당나라의 명군, 위징은 그의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명재상, 수 양제는 폭정으로 수나라를 멸망시킨 군주이다. 위징이 당 태종에게 수 양제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자주 간언했다는 고사는 유명하다.
11. 신우(辛禑): 고려 우왕. 한상덕은 우왕의 실정(失政)과 폐위를 상기시키며 태종에게 경계를 촉구하고 있다.
12. 사대이성(事大以誠), 어구이위(御寇以威): 당시 조선의 기본 외교·국방 정책을 요약한 말이다. 명나라(大)를 성실히 섬기고, 북방의 여진족이나 남방의 왜구(寇)를 위엄으로 막는다는 뜻이다.
13. [주-D002]에 따르면, 《국조보감》에는 이 구절 뒤에 '중외무사(中外無事)' 즉, '안팎으로 일이 없다'는 구절이 더 있다. 이는 당시 비교적 안정된 상황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4. 사목(四目), 사총(四聰): 임금이 사방을 널리 보고(明四目) 사방의 소리를 막힘없이 듣는 것(達四聰)을 비유하는 말이다. 《상서》 등 고전에 나오는 표현으로, 군주가 민의(民意)와 실정(實情)을 정확히 파악해야 함을 강조한다.
15. 삼왕(三王):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군주로 꼽히는 하나라 우왕(禹王), 상나라 탕왕(湯王), 주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 등을 가리킨다. 유교에서 최고의 치세(治世)를 상징한다.
16. 정심성의(正心誠意):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양의 단계.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뜻을 참되게 하는(誠意) 것은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 된다고 여겨졌다. 군주의 자기 수양을 촉구하는 말이다.


원문:
他日視事, 尙德又進曰: “今當炎夏, 氣失其調, 天久不雨, 凄風如秋。 臣未知君德之失歟? 時政之爽歟?” 上曰: “政事闕失, 諫官宜自知之。” 尙德曰: “命令之出, 政府承行, 臣等雖或有聞, 事已施行。 前日請屬諫官于政府, 以此也。” 上問故事如何, 黃喜曰: “國初李文和、尹思脩, 皆以諫官兼經歷。” 上曰: “此非美法。 經歷雖重任, 宰相屬吏。 君上之動靜, 政令之得失, 皆得規正者, 諫官也。 以諫官兼經歷, 非所以尊朝廷重諫官也。” 尙德又曰: “近者臺諫俱以言事罷黜, 非惟罪止其身, 鞫問相與論議之人。 是以士林相戒, 不過諫官之門。” 又曰: “殿下言動之間, 政敎之施, 無可規者。 然不曰政已治民已安, 每當淸燕, 請自警省曰: ‘所存之念, 何者獲戾于天? 所行之政, 何事見咈於民?’ 非惟懼其已然, 亦嘗慮其將然, 則禍患可消。 古昔聖賢莫不如此。” 上曰: “昌言也。” 尙德猶不退, 上曰: “復有所言乎?” 尙德曰: “去歲凶歉, 人不聊生。 柳廷顯在忠淸道, 厚斂督責, 重困百姓, 臣等旣已劾問, 適經赦宥, 未得請罪。 臣聞傳曰: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¹⁷ 自今觀之, 盜國財似重, 斂民財似輕, 古人垂戒, 其旨深矣。” 上曰: “代言在予左右, 尙且不言, 予何從知之?” 卽命都堂覈實以聞。

번역문:
다른 날 정사를 볼 때, 한상덕이 또 나아가 아뢰었다. “지금 무더운 여름인데 기후가 조화를 잃어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고 서늘한 바람이 가을과 같습니다. 신은 임금의 덕(君德)에 잘못이 있는 것인지, 시정(時政)에 잘못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¹⁸ 상께서 말씀하셨다. “정사의 잘못은 간관(諫官)들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다.” 한상덕이 아뢰었다. “명령이 나가면 의정부(政府)¹⁹에서 받들어 행하니, 신들이 비록 혹 듣더라도 일이 이미 시행된 뒤입니다. 전날 간관을 의정부에 소속시켜 달라고 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상께서 이전의 사례(故事)가 어떠했는지 물으시니, 황희(黃喜)²⁰가 아뢰었다. “나라 초기에 이문화(李文和)²¹, 윤사수(尹思脩)²²는 모두 간관으로서 경력(經歷)²³을 겸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좋은 법이 아니다. 경력은 비록 중요한 임무이나 재상(宰相)의 속관(屬吏)이다. 임금의 동정(動靜)과 정령(政令)의 잘잘못을 모두 규찰하고 바로잡는 자가 간관이다. 간관으로 하여금 경력을 겸하게 하는 것은 조정(朝廷)을 높이고 간관을 중히 여기는 방법이 아니다.” 한상덕이 또 아뢰었다. “근자에 대간(臺諫)²⁴들이 모두 말을 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는데, 죄가 그 자신에게 그칠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의논한 사람까지 국문(鞫問)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림(士林)²⁵들이 서로 경계하여 간관의 문 앞을 지나가지 않으려 합니다.” 또 아뢰었다. “전하의 언동(言動)과 정교(政敎)의 시행에는 규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이미 잘 다스려지고 백성이 이미 편안하다고 말하지 마시고, 매번 한가로이 계실 때(淸燕) 스스로 경계하고 살피시며(警省) ‘마음에 품은 생각 중에 어떤 것이 하늘에 죄를 얻었는가? 시행한 정치 중에 어떤 일이 백성에게 거슬림을 당했는가?’라고 자문하소서. 비단 이미 그러한 것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그럴 것을 염려하신다면 화환(禍患)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성현(聖賢)들께서 모두 이와 같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한 말이다(昌言).” 한상덕이 여전히 물러가지 않자, 상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할 말이 있는가?” 한상덕이 아뢰었다. “지난해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생업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유정현(柳廷顯)²⁶이 충청도에 있으면서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독촉하여 백성들을 심히 곤궁하게 하였으므로, 신들이 이미 탄핵하여 문책하였으나 마침 사면령(赦宥)을 거쳐 죄를 청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듣건대 《예기(禮記)》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신하(聚斂之臣)를 두느니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盜臣)를 두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나라 재물을 훔치는 것은 무거운 듯하고 백성의 재물을 거두는 것은 가벼운 듯하지만, 옛사람이 경계를 남긴 뜻은 깊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대언(代言)들이 나의 좌우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말하지 않으니, 내가 어디를 통해 알겠는가?” 즉시 도당(都堂)²⁷에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주석:
17. 《예기(禮記)》 〈대학(大學)〉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은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 此謂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 (재물을 마구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두느니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는 것이 낫다. 이는 나라를 이(利)로써 이롭게 여기지 않고 의(義)로써 이롭게 여김을 말한다.) 백성을 수탈하는 것의 해악이 국가 재물을 훔치는 것보다 더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8. 당시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자연재해나 이상 기후를 군주의 부덕(不德)이나 정치의 잘못(失政)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보편적이었다. 한상덕은 이를 근거로 군주의 반성과 정치 쇄신을 촉구하고 있다.
19. 정부(政府): 여기서는 조선의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20. 황희(黃喜, 1363-1452): 조선 초기의 명재상. 태종과 세종대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하며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1. 이문화(李文和, ?-1408): 조선 초기의 문신. 태조 때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22. 윤사수(尹思脩,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23. 경력(經歷): 고려 말, 조선 초의 관직. 주로 의정부나 육조 등 중앙 관서에 속하여 실무를 담당했다.
24. 대간(臺諫): 사헌부(司憲府, 臺)와 사간원(司諫院, 諫)의 관원들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들은 풍속을 바로잡고 백관을 규찰하며 국왕에게 간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25. 사림(士林): 학문과 덕행을 갖춘 선비들의 집단. 조선 시대 정치와 사회의 중요한 기반 세력이었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탄압받는 상황에 대한 사림의 위축된 분위기를 지적하고 있다.
26. 유정현(柳廷顯, 1355-1426): 조선 초기의 문신. 태종 때 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행정 능력이 뛰어났으나 때로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7. 도당(都堂): 고려 말, 조선 초에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키던 다른 이름. 최고 정무 기관을 의미한다.


원문:
十一年, 上謂議政府、六曹曰: “今國家無事, 予當冱寒, 每日視朝, 欲與卿等克勤無怠。” 韓尙德對曰: “勤政, 帝王之美德; 宴安, 古人之所戒。 雖無事, 每日視朝, 誠美法也。”

번역문:
11년(1411), 상께서 의정부와 육조(六曹)²⁸에 이르셨다. “지금 국가에 별다른 일이 없으나, 내가 몹시 추운 날씨에도 매일 조회를 보며(視朝)²⁹ 경(卿)들과 함께 부지런히 힘쓰고 게으르지 않고자 한다.” 한상덕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는 것(勤政)은 제왕(帝王)의 아름다운 덕이며, 편안히 즐기는 것(宴安)은 옛사람들이 경계한 바입니다. 비록 별다른 일이 없더라도 매일 조회를 보시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법입니다.”

주석:
28. 육조(六曹):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여섯 중앙 행정 관서를 통칭한다.
29. 시조(視朝): 임금이 매일 아침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보고 듣는 일. 근정(勤政)의 상징적인 행위였다.


원문:
上謂代言等曰: “《大學衍義》爲書, 德刑先後之分, 田里休戚之實, 尤其要者也。” 乃命右副代言韓尙德, 大書殿壁, 使群臣觀之。

번역문:
상께서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셨다. “《대학연의(大學衍義)》³⁰라는 책은 덕(德)과 형벌(刑罰)의 선후(先後) 관계를 분별하고 전리(田里)³¹의 휴척(休戚)³² 실상을 담고 있는 것이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에 우부대언(右副代言)³³ 한상덕에게 명하여 궁궐 벽(殿壁)에 큰 글씨로 써서 여러 신하들이 보게 하였다.

주석:
30. 《대학연의(大學衍義)》: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大學)》의 내용을 부연하여 편찬한 책.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중시되었다. 군주의 수양과 통치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31. 전리(田里): 농촌, 백성들이 사는 마을. 즉 민간(民間)을 의미한다.
32. 휴척(休戚): 기쁨과 근심. 백성들의 삶의 실상, 애환(哀歡)을 의미한다.
33. 우부대언(右副代言): 승정원(承정원)의 정3품 승지(承旨) 중 하나.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원문:
十三年, 上謂代言韓尙德曰: “刑房之任至重, 卿其愼之。” 對曰: “殿下代天理物, 賞罰宜無一毫差謬。 臣亦夙夜敬謹, 猶恐一夫無辜獲罪, 以累殿下好生之德。” 上曰: “予若誤斷, 卿其直言無諱。”

번역문:
13년(1413), 상께서 대언 한상덕에게 이르셨다. “형방(刑房)³⁴의 임무가 지극히 중요하니, 경은 신중히 하라.” 한상덕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시니(代天理物)³⁵ 상벌(賞罰)에 마땅히 털끝만큼의 차이나 잘못도 없어야 합니다. 신 또한 밤낮으로(夙夜) 공경하고 삼가며, 오히려 한 명의 지아비라도 죄 없이 죄를 얻어 전하의 생명을 아끼는 덕(好生之德)³⁶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합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만약 잘못 판단하거든, 경은 거리낌 없이 직언(直言無諱)하라.”

주석:
34. 형방(刑房): 승정원의 육방(六房) 중 하나로, 형조(刑曹) 및 법률, 형옥(刑獄)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35. 대천리물(代天理物): 군주가 하늘(天)을 대신하여 만물, 즉 세상과 백성을 다스린다는 유교적 통치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군주의 책임과 권위의 근거를 설명한다.
36. 호생지덕(好生之德):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덕. 하늘의 덕성으로 여겨졌으며, 군주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형벌을 신중히 사용해야 함을 뒷받침하는 논리이다.


원문:
世宗七年, 上曰: “往昔太平之時, 尙有挽裾切諫者。 今雖小康, 不及古必矣, 未有敢言面爭者, 何今人之不如古也?” 上又曰: “漢宣帝內則吏民安, 外則匈奴稱藩, 後之議者以爲基禍之主; 宋安石爲相, 自以爲輔國安民, 神宗亦勵精圖治, 而未免後世之譏, 可不懼乎?” 韓尙德曰: “殿下今日之言, 實宗社生民之福也。”【竝遺事。】

번역문:
세종(世宗) 7년(1425), 상께서 말씀하셨다. “지난날 태평성대에도 오히려 옷자락을 붙들고 간절히 간하는 자(挽裾切諫者)³⁷가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소강(小康)³⁸ 상태이기는 하나 옛날에 미치지 못함이 분명한데, 감히 말하고 면전에서 다투는 자(敢言面爭者)가 없으니,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이 옛사람들만 못합니까?” 상께서 또 말씀하셨다. “한 선제(漢宣帝)³⁹는 안으로는 관리와 백성이 편안했고 밖으로는 흉노(匈奴)가 번신(藩臣)이라 칭하였으나, 후세의 논자들은 그를 화근(禍根)을 심은 군주라고 여깁니다. 송나라 안석(宋安石)⁴⁰이 재상이 되어 스스로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고 여겼고 신종(神宗) 역시 정치를 잘하려고 힘썼으나 후세의 비난을 면치 못했으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한상덕이 아뢰었다. “전하의 오늘 말씀은 실로 종묘사직(宗社)과 생민(生民)의 복입니다.”【이상은 모두 유사(遺事)⁴¹에서 인용】

주석:
37. 만거절간(挽裾切諫): 옷자락을 붙잡고 간절하게 간언함. 신하가 임금에게 직언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고사성어이다. 위(魏)나라 신하 신비(辛毗)가 황제 조예(曹叡)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언했다는 고사 등에서 유래한다.
38. 소강(小康):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개념으로, 대동(大同) 사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예의(禮義)로써 다스려지는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의미한다. 세종은 당시를 소강 상태로 평가하면서도 언로(言路)가 막힌 것을 우려하고 있다.
39. 한 선제(漢宣帝, B.C. 91-49): 전한(前漢)의 황제. 중흥(中興)의 군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법치(法治)를 강조하고 외척(外戚)과 환관(宦官)의 세력이 커지는 등 후대의 혼란 요인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40. 송 안석(宋安石): 북송(北宋)의 정치가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신종(神宗)의 신임 아래 부국강병을 목표로 신법(新法)이라는 개혁 정치를 추진했으나, 구법당(舊法黨)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후대에 당쟁(黨爭)을 격화시키고 국력을 소모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41. 유사(遺事): 빠뜨린 사실이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 정사(正史) 외의 기록이나 개인적인 기록 모음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이맹균(李孟畇)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孟畇【文惠公。】
字□□¹, 韓山人。 牧隱穡長孫。 洪武辛亥生。 高麗辛禑十一年乙丑登第。 入我朝, 官吏曹判書、右贊成、集賢殿大提學。

번역문:
이맹균(李孟畇)【문혜공(文惠公)²이다.】
자는 □□¹이고, 한산(韓山) 사람이다.³ 목은(牧隱) 이색(李穡)⁴의 장손(長孫)이다. 홍무(洪武) 신해년(1371)⁵에 태어났다. 고려 신우(辛禑) 11년 을축년(1385)⁶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아조(我朝)⁷에 들어와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⁸, 우찬성(右贊成)⁹,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¹⁰에 이르렀다.

주석:

  1. [주-D001] □□ : 《세종실록(世宗實錄)》 22년 8월 30일 기록에 근거할 때 “사원(士原)”이 되어야 할 듯하다. 원문에는 자(字)가 누락되어 있다.
  2. 문혜공(文惠公): 이맹균의 시호(諡號). 문(文)은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勤學好問) 등을, 혜(惠)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함(愛民好與) 등을 의미한다.
  3. 한산인(韓山人): 본관(本貫)이 한산(韓山)임을 나타낸다. 한산 이씨(韓山 李氏)이다.
  4.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문신.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정몽주, 권근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갈 때 절의를 지키려 노력했다. 이맹균은 그의 큰손자이다.
  5. 홍무(洪武) 신해년(辛亥年):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연호인 홍무 4년, 즉 1371년.
  6. 고려 신우(辛禑) 11년 을축년(乙丑年): 고려 우왕(禑王) 11년, 즉 1385년. 신우(辛禑)는 우왕의 이름이다. 등제(登第)는 과거(科擧)에 급제함을 뜻한다.
  7. 아조(我朝): 우리 왕조, 즉 조선 왕조를 가리킨다.
  8. 이조판서(吏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文官)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핵심 요직이었다.
  9. 우찬성(右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직위이다.
  10.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 집현전(集賢殿)의 최고 책임자. 정2품. 학문 연구, 서적 편찬, 경연(經筵) 등을 담당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가 임명되는 영예로운 자리였다.

원문:
李公孟畇學問精深, 筆跡高妙, 有韓山稼、牧風。 位至貳公, 晩節以非罪蹉跌, 且無後。 嘗有詩云: “自從人道起於寅, 父子相傳到此身。 我罪伊何天不弔, 未爲人父鬢絲新?” 有轗軻不盡之意。 人皆曰: “伯道無兒, 天道未可知, 於文惠亦然。”【《筆苑雜記》。】

번역문:
이공(李公) 맹균(孟畇)은 학문이 정심(精深)¹¹하고 필적(筆跡)¹²이 고묘(高妙)¹³하여, 한산(韓山)의 가(稼)¹⁴와 목(牧)¹⁵의 풍모가 있었다. 지위는 이공(貳公)¹⁶에 이르렀으나, 만절(晩節)¹⁷에 죄 없이 좌절(蹉跌)¹⁸하였고, 또한 후사(後嗣)¹⁹가 없었다. 일찍이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인도(人道)가 인(寅)에서 시작된 이래로²⁰,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전하여 이 몸에 이르렀네. 나의 죄가 무엇이기에 하늘이 돌보지 않아(不弔)²¹, 사람의 아비 되지 못하고 귀밑머리는 새로 희어졌는가(鬢絲新)²²?” 하니, 불우(轗軻)²³하여 다하지 못한 뜻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백도(伯道)에게 아들이 없었으니²⁴, 하늘의 도(道)는 알 수 없구나. 문혜공(文惠公)에게도 그러하다.” 하였다.【《필원잡기(筆苑雜記)》²⁵에서 인용】

주석:
11. 정심(精深): 정밀하고 깊음. 학문적 깊이가 매우 깊음을 의미한다.
12. 필적(筆跡): 글씨.
13. 고묘(高妙): 품격이 높고 묘함. 글씨가 매우 뛰어남을 의미한다.
14. 가(稼): 이맹균의 아버지인 가정(稼亭) 이종학(李種學, 1361-1392)을 가리킨다. 이종학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5. 목(牧): 이맹균의 할아버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가리킨다. '한산가목풍(韓山稼牧風)'은 한산 이씨 가문의 학문과 문장의 전통, 즉 이종학과 이색의 학문적, 인격적 풍모를 이맹균이 이어받았음을 뜻한다.
16. 이공(貳公): 버금가는 공(公).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지위, 즉 찬성(贊成)이나 참찬(參贊) 등 재상급 관직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우찬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7. 만절(晩節): 생애의 만년(晩年).
18. 차질(蹉跌): 발을 헛디뎌 넘어짐.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실패하거나 좌절함. 죄 없이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어려움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과의 연관성 등으로 의심을 받아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 후사(後嗣): 대를 이을 자손. 아들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20. 인도기어인(人道起於寅): 천개어자(天開於子), 지벽어축(地闢於丑), 인상어인(人生於寅)이라는 천지창조 설화에 기반한 표현으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라는 뜻이다. 유구한 가문의 혈통이 자신에게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21. 불조(不弔): 하늘이 위로하거나 돌보지 않음. 자신의 불행, 특히 후사가 없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돌리며 한탄하는 표현이다.
22. 빈사신(鬢絲新): 귀밑머리(鬢)가 실(絲)처럼 새로워짐(新), 즉 백발이 됨을 의미한다. 아들도 얻지 못하고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구절이다.
23. 감가(轗軻): 길이 험하여 수레가 잘 가지 못하는 모양. 인생의 길이 순탄하지 못하고 불우함을 의미한다.
24. 백도무아(伯道無兒): 백도(伯道)는 중국 진(晉)나라 사람 등유(鄧攸)의 자(字)이다. 그가 난리 통에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살렸는데, 이후 다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질고 착한 사람이 불행하게도 후사를 얻지 못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25.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시문(詩文)에 대한 평론, 인물 일화, 역사적 사실 등을 수록하고 있다.


원문:
李公孟畇承藉世業, 有文名, 尤長於詩。 嘗作《悲松都》²⁶詩云: “五百年來王氣終, 操鷄搏鴨²⁷竟何功? 英雄已逝山河在²⁸, 人物南遷市井空。 上苑鶯花²⁹微雨後, 諸陵草樹夕陽中。 我來此日偏多感³⁰, 往事悠悠水自東。” 夫人妬悍, 搆家患, 公因此得病, 竟流寓而卒。 弟孟畛, 官至判中樞, 其子謀亂伏誅。【《慵齋叢話》。】

번역문:
이공(李公) 맹균(孟畇)은 세업(世業)³¹을 이어받아 문명(文名)³²이 있었고, 특히 시(詩)에 뛰어났다. 일찍이 《비송도(悲松都)》²⁶ 시를 지어 이르기를:
“오백년 내려온 왕기(王氣)³³ 마침내 끝나니,
닭 잡고 오리 치던 일³⁴ 결국 무슨 공인가?
영웅은 이미 가고 산하(山河)는 남아 있는데²⁸,
인물은 남쪽으로 옮겨가 시정(市井)은 비었네.
상원(上苑)의 꾀꼬리와 꽃²⁹은 가랑비 온 뒤인데,
여러 능(諸陵)의 풀과 나무는 석양(夕陽) 속에 잠겼네.
내가 온 오늘따라 유독 감회가 많으니³⁰,
지나간 일 아득하고 물은 절로 동으로 흐르네.”
하였다. 부인(夫人)이 질투하고 사나워(妬悍)³⁵ 집안의 우환(家患)을 만들었고, 공(公)은 이로 인해 병을 얻어 마침내 유배지에서 객사하여(流寓而卒)³⁶ 죽었다. 동생 맹진(孟畛)³⁷은 관직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³⁸에 이르렀는데, 그 아들이 모반(謀亂)을 꾀하다가 복주(伏誅)³⁹되었다.【《용재총화(慵齋叢話)》⁴⁰에서 인용】

주석:
26. [주-D002] 悲松都 : 《동문선(東文選)・송경회고(松京懷古)》에는 “송경회고(松京懷古)”로 되어 있다. 송도(松都)와 송경(松京)은 모두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開城)을 가리킨다. 《비송도》는 '송도를 슬퍼함', 《송경회고》는 '송경을 회고함'이라는 뜻이다.
27. 조계박압(操鷄搏鴨): 글자 그대로는 '닭을 잡고 오리를 친다'는 뜻이다. 고려 말의 혼란한 정치 상황이나 권력 다툼, 또는 보잘것없는 공적 등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다. 망국의 허망함을 나타내는 맥락에서 쓰였다.
28. [주-D003] 已逝山河在 : 《동문선・송경회고》에는 “일거호화진(一去豪華盡)”으로 되어 있다. "영웅은 이미 가고 산하는 남아있다(英雄已逝山河在)"는 두보(杜甫)의 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를 연상시키는 구절로, 왕조는 망했지만 자연은 그대로라는 무상함을 나타낸다. 《동문선》의 "한번 가니 호화로움 다하였네(一去豪華盡)"는 과거의 번영이 사라졌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29. [주-D004] 鶯花 : 《동문선・송경회고》에는 “연하(煙霞)”로 되어 있다. '앵화(鶯花)'는 꾀꼬리와 꽃으로 봄의 경치를 나타낸다. '연하(煙霞)'는 안개와 노을, 즉 아름다운 자연 경치를 의미한다.
30. [주-D005] 我來此日偏多感 : 《동문선・송경회고》에는 “추풍객한지다소(秋風客恨知多少)”로 되어 있다. "내가 온 오늘따라 유독 감회가 많다(我來此日偏多感)"는 현재의 감회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동문선》의 "가을바람에 나그네 시름 얼마인지 아는가(秋風客恨知多少)"는 계절적 배경과 함께 나그네의 시름을 강조한다.
31. 세업(世業): 대대로 이어온 가업(家業). 여기서는 한산 이씨 가문의 학문적, 문학적 전통을 의미한다.
32. 문명(文名): 문학 또는 학문으로 얻은 명성.
33. 왕기(王氣): 왕업(王業)의 기운. 한 왕조의 운수를 상징한다. 고려 왕조의 500년 역사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34. 닭 잡고 오리 치던 일(操鷄搏鴨): 주석 27 참조. 고려 말의 혼란이나 헛된 공적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35. 투한(妬悍): 부인이 질투심이 많고 성질이 사나움.
36. 유우이졸(流寓而卒): 흘러 다니며 객지에서 살다가 죽음. 정확한 유배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곤궁하게 객지에서 생을 마감했음을 시사한다.
37. 맹진(孟畛): 이맹균의 동생. 이름은 이맹진(李孟畛)이다.
38.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실권은 없으나 명예직으로 원로대신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39. 복주(伏誅):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함. 이맹진의 아들, 즉 이맹균의 조카가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맹균 가문의 불행을 더하는 요소이다.
40.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선 전기의 문신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수필집. 인물, 제도, 풍속, 문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조선 초기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종무(李從茂) 번역 및 주석

원문:
李從茂
字□□, □□人¹。 太宗朝, 參佐命²功臣, 封長川君。 世宗朝, 以都體察使, 討對馬島有功。 官至贊成。

번역문:
이종무(李從茂)
자(字)는 □□이고, □□ 사람이다.¹ 태종(太宗) 시대에 좌명공신(佐命功臣)²에 참여하여 장천군(長川君)³에 봉해졌다. 세종(世宗) 시대에 도체찰사(都體察使)⁴로서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는 데 공이 있었다.⁵ 관직은 찬성(贊成)⁶에 이르렀다.

주석:

  1. □□人: 본관(本貫)이 기록되지 않음. [주-D001] 《세종실록》 7년 6월 9일 졸기(卒記)에 근거할 때, 본관은 장수(長水)로 보인다. 자(字) 역시 실록 등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2. [주-D002] 佐命: 저본(底本)에는 공란(空欄)이다.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좌명공신(佐命功臣)은 1401년(태종 1)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책봉된 공신이다. 이종무는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3. 장천군(長川君): 군(君)은 조선 시대 종친(宗親) 또는 공신에게 주던 작위(爵位)이다.
  4. 도체찰사(都體察使): 조선 시대 변방이나 전시에 군무(軍務)를 총괄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하던 최고 군직(軍職). 해당 지역의 군사 지휘권을 통합하여 행사했다.
  5. 대마도 토벌(討對馬島): 1419년(세종 1) 왜구(倭寇)의 근거지였던 대마도(쓰시마섬)를 정벌한 사건.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6. 찬성(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정식 명칭은 찬성사(贊成事)이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다.

원문:
永樂己亥五月, 倭寇庇仁, 又圍節制使李思儉于海州延平串。 上王及上召柳廷顯、朴訔、趙末生、李明德、許稠等, 議乘虛殄對馬島, 以邀賊還, 皆曰不可, 末生獨曰可。 上王曰: “若不掃除, 每被侵擾, 後日之患, 庸有極乎?” 卽命公爲三軍都體察使, 將下三道兵船二百艘, 以領議政柳廷顯爲三道都統使。 二上幸漢江亭北餞之, 賜鞍馬、弓矢、衣笠及靴。 公率九節度⁷、二百二十七艘、卒一萬七千二百八十五, 齎六十五日糧, 到對馬島。

번역문:
영락(永樂) 기해년(己亥年, 1419) 5월에 왜구(倭寇)⁸가 비인현(庇仁縣)⁹을 노략질하고, 또 해주(海州) 연평곶(延平串)¹⁰에서 절제사(節制使) 이사검(李思儉)을 포위하였다. 상왕(上王)¹¹ 및 상(上)¹²께서 유정현(柳廷顯), 박은(朴訔), 조말생(趙末生), 이명덕(李明德), 허조(許稠) 등을 불러 그 허점을 틈타 대마도를 섬멸하여 적이 (본국으로) 돌아오도록 유도할 것¹³을 의논하였는데,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조말생만이 홀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상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소탕하지 않으면 매번 침략과 소란을 당할 것이니, 후일의 우환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시고, 즉시 공(公)¹⁴을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¹⁵로 임명하여 하삼도(下三道)¹⁶의 병선(兵船) 200척을 거느리게 하고, 영의정(領議政) 유정현(柳廷顯)을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¹⁷로 삼았다. 두 분 상¹⁸께서 한강 정자 북쪽에 행차하시어 전별연(餞別宴)¹⁹을 베풀어 주시고, 안장 얹은 말(鞍馬), 활과 화살(弓矢), 옷과 갓(衣笠), 신발(靴)을 하사하셨다. 공은 9명의 절도사(節度使)⁷, 227척의 배, 군사 17,285명을 거느리고 65일 치 식량을 가지고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주석:
7. [주-D003] 度 :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야언(海東野言)・세종(世宗)》 및 《세종실록》 1년 6월 17일에 근거할 때 “제(制)”가 되어야 한다. 즉, 절제사(節制使) 9명을 의미한다. 절제사는 각 도(道) 또는 진(鎭)의 군사를 지휘하던 무관직이다.
8. 왜구(倭寇):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침략하고 약탈하던 일본 해적 집단.
9. 비인현(庇仁縣): 현재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일대.
10. 해주(海州) 연평곶(延平串): 황해도 해주 근방의 해안 지역. 연평도(延坪島)와는 다른 곳으로 추정된다.
11. 상왕(上王):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난 임금. 당시 상왕은 태종(太宗) 이방원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군사권 등 실권을 행사하며 국정에 영향력을 미쳤다.
12. 상(上): 현재의 임금. 당시 임금은 세종(世宗)이다.
13. 승허진대마도 이요적환(乘虛殄對馬島 以邀賊還): 왜구가 한반도 연안을 약탈하러 나와 본거지인 대마도가 비어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고, 이를 통해 약탈 나간 왜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한다는 전략이다.
14. 공(公): 이종무를 높여 부르는 말.
15.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의 삼군(三軍)을 총지휘하는 도체찰사. 이종무가 출정군의 실질적인 야전 사령관이었음을 의미한다.
16. 하삼도(下三道):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가리킨다.
17.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 하삼도의 군대를 총괄하는 명목상의 최고 사령관. 영의정 유정현은 원정군의 총책임자로서 후방 지원 및 전략 수립 등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18. 이상(二上): 두 분의 상. 상왕 태종과 임금 세종을 함께 지칭한다.
19. 전(餞): 멀리 떠나는 사람을 위해 송별 잔치를 베풀어 줌.


원문:
奪賊船大小百二十九, 擇可用二十艘, 餘皆焚之, 又焚賊戶千九百三十九, 斬首百十四, 擒二十一口, 擄中國男婦百三十一。 廷顯遣從事趙義昫, 自馬島來告捷, 三品以上詣壽康宮賀。

번역문:
적선(賊船) 대소(大小) 129척을 빼앗아, 사용 가능한 20척을 고르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웠다. 또한 적의 가호(家戶) 1,939채를 불태우고, 114명의 목을 베고(斬首), 21명을 사로잡았으며(擒), 사로잡혀 있던 중국(中國) 남녀 131명을 구출하였다(擄)²⁰. 유정현이 종사관(從事官)²¹ 조의구(趙義昫)를 보내 대마도로부터 와서 승첩(勝捷)을 보고하니, 3품(品) 이상의 관리들이 수강궁(壽康宮)²²에 나아가 축하하였다.

주석:
20. 로(擄): 일반적으로 '사로잡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왜구에게 잡혀있던 사람들을 되찾아 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中國男婦'는 명(明)나라 사람들을 가리킨다.
21. 종사관(從事官): 고려, 조선 시대에 상급 지휘관을 보좌하던 무관직.
22. 수강궁(壽康宮): 당시 상왕 태종이 머물던 궁궐. 현재의 창경궁(昌慶宮) 자리에 있었다.


원문:
公住船豆知浦, 復火其戶六十八, 焚船十五, 斬賊九級, 獲漢人十五、本國人八。 至尼老郡, 令三軍分道下陸, 欲與一戰, 左軍朴實敗績, 收兵還上船; 右軍李順蒙、金孝順等力戰拒之, 賊乃退。 我師戰死及墜崖死者百數十人, 中軍竟不下陸。 都都熊瓦奉書乞退師。 公引舟師還, 泊巨濟。 以公爲贊成, 順蒙等皆陞職。【《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은 선두지포(船豆知浦)²³에 머무르며, 다시 그곳의 가호 68채를 불태우고 배 15척을 불태우고 적 9명의 목을 베고, 한인(漢人)²⁴ 15명과 본국인(本國人)²⁵ 8명을 구출하였다. 니로군(尼老郡)²⁶에 이르러 삼군(三軍)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 상륙하게 하여 한번 싸우고자 하였으나, 좌군(左軍) 박실(朴實)²⁷이 패전(敗績)하자 군사를 거두어 배로 돌아왔고, 우군(右軍) 이순몽(李順蒙)², 김효순(金孝順)²⁹ 등은 힘써 싸워 막아내니 적이 이에 물러났다. 우리 군사 중 전사하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수십 명이었고, 중군(中軍)은 끝내 상륙하지 않았다. 도도웅와(都都熊瓦)³⁰가 글을 받들어 군대를 철수해달라고 빌었다. 공은 수군(舟師)을 이끌고 돌아와 거제도(巨濟島)에 정박하였다. 공을 찬성(贊成)으로 삼고, 이순몽 등도 모두 관직을 올려주었다.【《잠곡구록(潛谷舊錄)》³¹에서 인용】

주석:
23. 선두지포(船豆知浦): 대마도의 주요 항구 중 하나인 오우라(尾浦, 현재 이즈하라 항 내만) 또는 그 부근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에는 선월포(船越浦)로 기록되어 있다.
24. 한인(漢人): 중국인. 당시 명나라 사람을 가리킨다.
25. 본국인(本國人): 우리나라 사람. 즉, 조선인을 의미한다.
26. 니로군(尼老郡): 대마도 북부의 니이(仁位)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조선군은 왜구의 저항에 부딪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27. 박실(朴實): 대마도 정벌 당시 좌군 절제사(左軍節制使)를 맡았던 무신.
28. 이순몽(李順蒙, 1386-1449): 대마도 정벌 당시 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를 맡았던 무신.
29. 김효순(金孝順): 대마도 정벌 당시 중군 첨절제사(中軍僉節制使)였으나, 우군의 전투를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30. 도도웅와(都都熊瓦): 대마도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 1385-1452)를 가리키는 당시 조선 측의 호칭 또는 음차 표기. 그가 항복 문서를 보내 철군을 요청하였다.
31.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의 저술로 추정되는 문헌. 조선 후기 인물인 김육이 이전 시대의 기록을 모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최윤덕(崔潤德)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崔潤德【貞烈公。】
字□□¹, 歙谷²人。 襄莊公雲海之子。 登武科。 世宗朝, 討李滿住有功。 官至領中樞府事。 配享世宗廟庭。

번역문:
최윤덕(崔潤德)【정렬공(貞烈公)³이다.】
자는 □□¹이고, 흡곡(歙谷)² 사람이다. 양장공(襄莊公)⁴ 최운해(崔雲海)의 아들이다. 무과(武科)⁵에 급제하였다. 세종(世宗)⁶ 조(朝)에 이만주(李滿住)⁷를 토벌하는 데 공이 있었다. 관직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⁸에 이르렀다. 세종의 묘정(廟庭)⁹에 배향(配享)¹⁰되었다.

주석:

  1. [주-D001] □□ : 《두암집(斗庵集)・좌의정정렬공호연정최공신도비명(左議政貞烈公浩然亭崔公神道碑銘)》에는 “여화(汝和)”로 되어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 27년 12월 5일에는 “백수(伯脩)”로 되어 있다. 자(字)가 무엇인지 기록이 달라 정확히 알 수 없음을 나타낸다.
  2. [주-D002] 歙谷 : 《두암집・좌의정정렬공호연정최공신도비명》에는 “통천(通川)”으로 되어 있다. 본관(本貫) 또는 출신지에 대한 기록이 다름을 보여준다. 통천 최씨(通川 崔氏)로 알려져 있다.
  3. 정렬공(貞烈公): 최윤덕의 시호(諡號). 정(貞)은 청렴하고 결백하며 절개를 지킴(淸白守節) 등을, 열(烈)은 공적이 뚜렷함(有功安民) 등을 의미한다.
  4. 양장공(襄莊公): 최윤덕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 1347-1403)의 시호. 최운해 역시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장으로 왜구 토벌 등에 공을 세웠다.
  5. 무과(武科): 조선 시대에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과거 시험.
  6. 세종(世宗): 조선의 제4대 왕(재위 1418-1450).
  7. 이만주(李滿住): 여진족(女眞族)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조선 초기에 여러 차례 국경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8.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조선 시대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 정1품. 중추부는 군사 기밀, 왕명 출납 등을 담당했으나 후기에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 혹은 원로대신을 예우하기 위한 관직이 되었다.
  9.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다.
  10.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신하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다. 최윤덕은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문:
公生而母卒, 父雲海鎭邊不能擧, 托養于同隣楊水尺家。 稍長, 膂力過人, 挽强射堅。 時隨水尺出獵, 所獲實多。 一日, 牧山中, 有大蟲瞥出林莽, 頭畜奔散, 公騎驏馬¹, 一箭斃之, 來報。 水尺往見, 乃一大虎也。 水尺異之。 家君出鎭合浦, 水尺以公往謁, 譽公不已, 家君曰: “當試之。” 及與較獵, 公左右馳射, 發無不中。 觀者嘖嘖稱美, 家君笑曰: “兒手雖敏, 尙未識軌範。 兒今所爲乃小¹²虞技耳。 不可謂之長技。” 乃敎射御之方, 遂爲名將。【《筆苑雜記》。】

번역문:
공(公)이 태어나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최운해는 변방을 진수(鎭守)하느라 돌볼 수 없어 이웃의 양씨 성을 가진 수척(水尺)¹³의 집에 맡겨 길렀다. 조금 자라자 체력(膂力)이 남보다 뛰어나고 강한 활을 당기고 단단한 것을 쏘아 맞혔다. 때때로 수척을 따라 사냥을 나가면 잡는 것이 실로 많았다. 하루는 산속에서 가축을 치는데, 큰 벌레[大蟲]¹⁴가 숲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자 가축들이 놀라 흩어졌는데, 공이 짐 싣는 말(驏馬)¹⁵을 타고 화살 한 대로 쏘아 죽이고 와서 알렸다. 수척이 가서 보니, 바로 큰 호랑이였다. 수척이 그를 비범하게 여겼다. 아버지(家君)¹⁶가 합포(合浦)¹⁷로 진(鎭)을 나가게 되자, 수척이 공을 데리고 가서 뵙게 하며 공을 칭찬해 마지않으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시험해 보아야겠다.” 함께 사냥을 겨루자, 공이 좌우로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데 쏘는 것마다 맞히지 않음이 없었다. 보는 자들이 혀를 차며(嘖嘖) 아름답다고 칭찬하자, 아버지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이의 솜씨가 비록 민첩하나 아직 규범(軌範)¹⁸을 알지 못한다. 아이가 지금 하는 것은 작은 산지기(小虞)¹⁹의 기술일 뿐이니, 장기(長技)라 할 수 없다.” 이에 활쏘기와 말 타는 법(射御之方)²⁰을 가르치니, 마침내 명장(名將)이 되었다.【《필원잡기(筆苑雜記)》²¹에서 인용】

주석:
11. [주-D003] 騎驏馬一箭 : 저본(底本)에는 “참기일마전(驏騎一馬箭)”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규장각본(奎章閣本)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의미는 "짐 싣는 말을 타고 화살 한 대로"로 동일하다.
12. [주-D004] 小 : 《대동야승(大東野乘)・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산(山)”으로 되어 있다. '산우(山虞)'는 산을 지키는 관리 또는 사냥꾼을 의미하며, '소우(小虞)'는 작은 사냥 기술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문맥상 둘 다 가능하나, 아버지의 평가는 아직 정식 무예의 규범을 모르는 미숙한 기술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13. 수척(水尺): 고려, 조선 시대의 천민 집단 중 하나. 주로 도살, 고리(筐) 제조, 사냥 등에 종사했다. 최윤덕이 천민인 수척의 집에서 자랐다는 것은 그의 성장 배경이 평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14. 대충(大蟲): 큰 벌레. 옛날이야기나 문헌에서 호랑이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였다.
15. 참마(驏馬): 안장을 얹지 않고 짐을 싣는 데 주로 쓰는 말. 전투용 말이 아닌데도 이를 타고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은 그의 담력과 기예가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16. 가군(家君):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 여기서는 최운해를 지칭한다.
17. 합포(合浦): 현재의 경상남도 마산(馬山) 지역.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 방어의 중요한 군사 기지였다.
18. 궤범(軌範): 규칙과 본보기. 정식 무예의 체계와 원칙을 의미한다.
19. 소우(小虞): 주석 [주-D004] 참조. 여기서는 체계 없이 본능적인 재주에 의존하는 사냥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0. 사어지방(射御之方): 활쏘기(射)와 말 타기(御)의 방법. 무관의 기본 소양인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 중 두 가지로, 정식 군사 훈련을 의미한다.
21. 《필원잡기(筆苑雜記)》: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여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일화를 담고 있다.


원문:
永樂己亥, 倭寇庇仁, 遣李從茂、崔潤德等, 率舟師討之, 斬獲甚衆。 捷至, 上王下書勞之。【《紀年通攷》。】

번역문:
영락(永樂) 기해년(己亥年, 1419)²², 왜구(倭寇)가 비인(庇仁)²³을 침략하자, 이종무(李從茂), 최윤덕 등을 보내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니, 베고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승전보(捷報)가 이르자 상왕(上王)께서 글을 내려 그 노고를 치하하셨다.【《기년통고(紀年通攷)》²⁴에서 인용】

주석:
22. 영락 기해년(永樂己亥年): 명나라 영락제의 연호로, 1419년(세종 1)이다.
23. 비인(庇仁): 현재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일대. 해안가 지역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24. 《기년통고(紀年通攷)》: 편찬자와 시기가 명확하지 않은 역사서. 연대순으로 기록된 역사 참고 자료로 보인다. 이 기록은 세종 원년에 있었던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을 가리킨다. 상왕은 당시 왕위를 물려주고 군사권 등 실권을 쥐고 있던 태종(太宗)이다. 이종무가 총사령관(삼군도체찰사)이었고, 최윤덕도 주요 장수로 참전했다.


원문:
自閭延之變, 上留意邊事, 屢聚武士, 觀射後苑, 將討野人, 命群臣議可將三軍, 皆曰: “潤德將中軍。” 於是以潤德爲平安道都節制使, 上引見, 賜鞍馬、弓矢。【《日月錄》。】

번역문:
여연(閭延)²⁵의 변란 이후로, 상(上)께서 변방의 일에 유의하시어 여러 차례 무사들을 모아 후원(後苑)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시고, 장차 야인(野人)²⁶을 토벌하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삼군(三軍)을 지휘할 만한 사람을 의논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최윤덕이 중군(中軍)을 지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²⁷로 삼으시니, 상께서 불러 보시고(引見) 안장 얹은 말(鞍馬)과 활과 화살(弓矢)을 하사하셨다.【《일월록(日月錄)》²⁸에서 인용】

주석:
25. 여연(閭延): 조선 초기 북방 4군(四郡) 중 하나가 설치된 지역. 압록강 중상류 유역으로, 여진족과의 접경 지대였다. '여연의 변(閭延之變)'은 이 지역에서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6. 야인(野人): 조선 시대에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살던 여진족 등 북방 민족을 통칭하던 말.
27.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평안도의 군사 지휘관. 종2품. 북방 방어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중군(中軍)은 군대의 주력 부대를 의미하며, 이를 지휘한다는 것은 총사령관 격의 역할을 맡는다는 뜻이다.
28. 《일월록(日月錄)》: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일월(日月)'은 임금을 상징하거나 날마다의 기록을 의미할 수 있으므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나 유사한 연대기적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원문:
公以二相兼平安道都節制使、安州牧使。 公務之暇, 治廳後隙地, 種苽手自鋤之。 有訟者不知是公, 乃問曰: “相公今在何所?” 公紿曰: “在某所。” 入而改服聽決焉。 有一村婦泣而曰: “虎殺妾夫。” 公曰: “吾爲汝報仇。” 跡虎手射之, 剖其腹取其骨肉支節, 裹以衣服, 備棺埋之, 其婦感泣不已。 一州之人, 至今慕之如父母。【《靑坡劇談》。】

번역문:
공(公)이 이상(二相)²⁹으로서 평안도 도절제사와 안주목사(安州牧使)³⁰를 겸하였다. 공무(公務)를 보는 틈틈이 관청(治廳) 뒤의 빈 땅에 오이[苽]³¹를 심고 손수 김을 매었다. 어떤 소송을 하러 온 자가 공인 줄 모르고 묻기를 “상공(相公)³²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니, 공이 속여 말하기를 “아무 곳에 계십니다”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판결을 들었다. 어떤 시골 부인이 울면서 아뢰기를 “호랑이가 제 남편을 죽였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너를 위해 원수를 갚아주겠다” 하고는, 호랑이의 발자취를 따라가 손수 쏘아 잡아서는, 그 배를 갈라 뼈와 살, 팔다리 마디(骨肉支節)를 꺼내어 옷으로 싸고 관(棺)을 갖추어 묻어주니, 그 부인이 감격하여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온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를 부모처럼 사모한다.【《청파극담(靑坡劇談)》³³에서 인용】

주석:
29. 이상(二相): 두 재상. 보통 좌의정, 우의정 중 한 명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재상급의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최윤덕은 후에 우의정에 임명된다.
30. 안주목사(安州牧使): 평안도 안주(安州)의 수령. 종3품. 도절제사가 목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31. 과(苽): 오이 또는 참외류의 열매 채소.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손수 농사를 짓는 소탈하고 근면한 성품을 보여준다.
32. 상공(相公): 재상이나 높은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는 말.
33. 《청파극담(靑坡劇談)》: 조선 중기의 문신 이륙(李陸)이 지은 설화집.


원문:
婆豬江野人李滿住等犯邊, 掠殺軍民, 上遣崔潤德往征之。【《國朝寶鑑》。】

번역문:
파저강(婆豬江)³⁴ 유역의 야인 이만주 등이 국경을 침범하여 군인과 백성을 약탈하고 살해하자, 상(上)께서 최윤덕을 보내 정벌하게 하셨다.【《국조보감(國朝寶鑑)》³⁵에서 인용】

주석:
34. 파저강(婆豬江): 압록강의 중국 쪽 지류인 혼강(渾江) 유역으로, 건주 여진의 주요 거주지였다. 이만주 세력의 근거지를 가리킨다.
35.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 시대 역대 임금의 모범이 될 만한 언행과 정치적 업적을 모아 편찬한 책. 이 기록은 1433년(세종 15)의 파저강 정벌을 가리킨다.


원문:
崔潤德會諸將令曰: “有違主將條令者, 當以軍法從事, 無忽。” 其條令: “臨戰, 麾而不應者、聞鼓不進者、不進救將帥者、漏洩軍情者、發妖言惑衆者, 告大將斬。 失其牌而從他牌者、亡章者、喧譁者罰, 伍中失三人者罰, 不救牌頭者斬。 入賊里, 令前收拾財寶者斬。 入賊里, 老弱男婦勿擊, 雖壯者降, 則勿殺。 行軍險阻, 忽遇賊人, 止而擊之, 角報其軍, 諸軍角報主將, 退北者斬。 勿殺鷄犬牛馬, 勿焚家舍。 大抵攻伐之法, 以義誅不義, 改其心而萬全, 義也, 若有侵殺老幼, 要殺唐人, 欲釣軍功者、犯干條令者, 竝依軍法施行。 越江時, 須要伍什次第上船, 無得輒爭, 違者論罪。”

번역문:
최윤덕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명령하였다. “주장(主將)의 조령(條令)³⁶을 어기는 자는 마땅히 군법(軍法)으로 처리할 것이니, 소홀히 하지 말라.” 그 조령은 다음과 같다. “전투에 임하여, 지휘하는데도(麾) 응하지 않는 자, 북소리를 듣고도 나아가지 않는 자, 나아가 장수(將帥)를 구하지 않는 자, 군사 기밀(軍情)을 누설하는 자, 요사스러운 말을 퍼뜨려 무리를 현혹하는 자(發妖言惑衆者)는 대장(大將)에게 고하여 목을 벤다. 자신의 패(牌)³⁷를 잃고 다른 패에 따라다니는 자, 휘장(章)³⁸을 잃은 자, 시끄럽게 떠드는 자(喧譁者)는 벌(罰)한다. 오(伍)³⁹ 중에서 세 명을 잃은 자는 벌하고, 패두(牌頭)⁴⁰를 구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 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명령보다 앞서 재물을 거두는 자는 목을 벤다. 적의 마을에 들어가서, 늙고 약한 남자와 부녀자는 공격하지 말고, 비록 장정이라도 항복하면 죽이지 말라. 험난한 곳을 행군하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면, 멈추어 공격하고, 각(角)⁴¹으로 그 군대에 알리고, 여러 군대는 각(角)으로 주장(主將)에게 보고하며, 퇴각하는 자(退北者)는 목을 벤다. 닭, 개, 소, 말을 죽이지 말고, 가옥을 불태우지 말라. 대저 공격하고 정벌하는 법은, 의(義)로써 의롭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이니, 그 마음을 바꾸어 온전하게 하는 것이 의(義)이다. 만약 늙은이나 어린이를 침범하여 죽이거나, 당인(唐人)⁴²을 죽여 군공(軍功)을 낚으려는 자, 조령을 범하는 자는 모두 군법에 의거하여 시행한다. 강을 건널 때는 모름지기 오(伍)와 십(什)⁴³의 차례대로 배에 올라 함부로 다투지 말 것이며, 어기는 자는 죄를 논한다.”

주석:
36. 조령(條令): 조목별로 나누어 정한 명령이나 규칙. 군율(軍律)을 의미한다.
37. 패(牌): 군대에서 소속 부대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
38. 장(章): 군대의 깃발이나 휘장 등 부대를 상징하는 표식.
39. 오(伍): 고대 중국 및 조선 시대의 군대 기본 편제 단위. 보통 5명을 1오(伍)로 편성했다.
40. 패두(牌頭): 오(伍)나 십(什) 등 작은 부대의 우두머리.
41. 각(角): 뿔로 만든 나팔. 군대에서 신호용으로 사용했다.
42. 당인(唐人): 당나라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당시에는 중국인, 즉 명(明)나라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여진족 지역에는 명나라 사람들도 거주하거나 왕래했을 수 있으므로, 이들을 오인하여 살해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43. 십(什): 군대 편제 단위. 보통 2오(伍), 즉 10명을 1십(什)으로 편성했다. 엄격한 군율과 함께 민간인 보호, 항복자 관용 등 비교적 명분 있는 전쟁 수행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문:
崔潤德遣崔致雲啓曰: “今承內傳, 伏審征討婆猪江野人, 發軍三千, 臣竊惟虜地險阻, 每於所經要害, 須留兵守險。 臣心竊計, 一道自滿浦, 一道自碧潼, 共向兀刺等處, 一道自甘洞向馬遷木柵等處, 東西齊擧, 臣則欲自小甫里, 向吒⁴⁴納奴林⁴⁵哈刺居處, 須用萬兵乃可。” 上引見曰: “初與群臣議軍數, 或言七八百, 或言一千, 紛紜甲乙, 終定三千, 予以謂少也。 朴好問亦言: ‘當不下萬。’ 今觀上書⁴⁶果然。 召政府、六曹及三軍都鎭撫議之, 或曰應加五百, 或曰加一千, 或曰不必加, 議論不一。” 致雲啓曰: “潤德言: ‘初來時, 只欲攻吒納奴哈刺等, 若得精兵一千, 足以辦事, 今更思之, 自馬遷至兀刺等處, 野人散居山谷, 鷄犬相聞。 若擊一⁴⁷二部落, 則必相救援, 成敗難知。 古人有動大衆而爲小寇所敗, 況大軍固難再擧! 每一二落, 各遣一軍, 則彼將自救不暇, 不能援他人矣, 故非萬兵不可。’” 上曰: “然。” 致雲曰: “潤德言: ‘黃海之兵遠赴, 則疲弊不可用。 平安之兵幾至三萬⁴⁸, 不必黃海之兵。’” 上曰: “然。” 問曰: “潤德欲於何時擧兵?” 致雲曰: “潤德計端午時, 賊俗相聚爲戲, 草亦長, 但慮雨水, 待二十四五日, 欲擧事。” 仍啓曰: “潤德言: ‘征討之日, 宜寫彼人罪名, 張榜而還。’” 上命安崇善與判承文院事金⁴⁹聽, 草榜文以送。 兵曹啓: “自募赴征人, 如能立功者, 閑良則賞職, 鄕吏、驛子則免役, 官奴則免賤以賞功。”

번역문:
최윤덕이 최치운(崔致雲)을 보내 아뢰었다. “지금 내전(內傳)⁵⁰을 받들어 보니, 삼가 파저강 야인을 정벌하는 데 군사 3천 명을 동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오랑캐 땅은 험하고 막혀 있어, 매번 지나는 요해처(要害處)마다 반드시 군사를 남겨 험한 곳을 지켜야 합니다. 신의 마음속으로 가만히 헤아려보니, 한 길은 만포(滿浦)에서, 한 길은 벽동(碧潼)에서 함께 올자(兀刺) 등지로 향하고, 한 길은 감동(甘洞)에서 마천(馬遷) 목책(木柵) 등지로 향하여 동서에서 일제히 공격해야 하며, 신은 소보리(小甫里)에서 자납노(吒納奴)와 임합자(林哈刺)⁵¹의 거처로 향하고자 하니, 모름지기 군사 1만 명을 써야 가능할 것입니다.” 상(上)께서 불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여러 신하들과 군사의 수를 의논할 때, 혹은 78백 명, 혹은 1천 명이라고 하여 의견이 분분(紛紜甲乙)하였으나, 최종적으로 3천 명으로 정하였는데, 나는 적다고 여겼다. 박호문(朴好問)⁵² 또한 ‘마땅히 1만 명은 되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이제 올린 글을 보니 과연 그렇구나. 정부(政府)⁵³, 육조(六曹)⁵⁴ 및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⁵⁵를 불러 의논하니, 혹은 5백 명을 더해야 한다고 하고, 혹은 1천 명을 더해야 한다고 하며, 혹은 더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의논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최치운이 아뢰었다. “최윤덕이 말하기를 ‘처음 올라올 때는 단지 자납노, 합자 등을 공격하려 했기에, 만약 정병(精兵) 1천 명을 얻으면 족히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마천에서 올자 등지에 이르는 곳까지 야인들이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아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입니다. 만약 한두 부락만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서로 구원할 것이니 성공과 실패를 알기 어렵습니다. 옛사람 중에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작은 도적에게 패한 경우가 있었으니, 하물며 대군을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다시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매 한두 부락마다 각각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면, 저들은 장차 스스로를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니, 이 때문에 1만 명의 군사가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최치운이 아뢰었다. “최윤덕이 말하기를 ‘황해도(黃海道)의 군사는 멀리서 오면 피폐하여 쓸 수 없습니다. 평안도의 군사는 거의 3만 명⁵⁶에 이르니, 황해도의 군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물으셨다. “최윤덕은 어느 때에 군사를 일으키려 하는가?” 최치운이 아뢰었다. “최윤덕의 계산으로는 단오(端午)⁵⁷ 때가 되면 적들의 풍속에 서로 모여 놀고 풀 또한 길게 자라겠지만, 다만 비가 올 것을 염려하여 245일쯤을 기다렸다가 거사하고자 합니다.” 이어서 아뢰었다. “최윤덕이 말하기를 ‘정벌하는 날에는 마땅히 그들의 죄명(罪名)을 써서 방(榜)을 붙이고 돌아와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께서 안숭선(安崇善)과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⁵⁸ 김청(金聽)⁵⁹에게 명하여 방문(榜文)을 초안하여 보내게 하셨다. 병조(兵曹)에서 아뢰었다. “정벌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여, 만약 공을 세울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한량(閑良)⁶⁰에게는 관직을 상으로 주고, 향리(鄕吏)⁶¹, 역자(驛子)⁶²에게는 역(役)을 면제해주며, 관노(官奴)⁶³에게는 천민 신분을 면하게 하여 공을 포상해야 합니다.”

주석:
44. [주-D010] 吒 : 《세종실록》 15년 5월 7일에는 앞에 “심(沈)”이 더 있다. '심타납노(沈吒納奴)'가 완전한 이름일 수 있다.
45. [주-D005] 林 : 《세종실록》 15년 3월 7일에는 없다. 즉 '합자(哈刺)' 또는 '임합자(林哈刺)'로 기록이 다르다.
46. [주-D006] 今觀上書果然 : 《세종실록》 15년 3월 7일에는 “予以謂少也。” 뒤에 있다. 문맥의 흐름상 큰 차이는 없다.
47. [주-D007] 一二 : 저본(底本)에는 “삼(三)”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해동야언・세종》 및 《세종실록》 15년 3월 7일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한두 부락을 의미한다.
48. [주-D008] 三萬 : 《세종실록》 15년 3월 7일에는 “이만이삼천(二萬二三千)”으로 되어 있다. 평안도 병력 규모에 대한 기록이 약간 차이가 난다.
49. [주-D009] 金 : 저본(底本)에는 “전(全)”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해동야언・세종》 및 《세종실록》 15년 3월 10일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김청(金聽)이 올바른 이름이다.
50. 내전(內傳): 임금이 내리는 비밀스러운 명령이나 전교.
51. 자납노(吒納奴), 임합자(林哈刺): 당시 파저강 유역 여진족의 추장 이름으로 추정된다. 주석 [주-D010], [주-D005] 참조.
52. 박호문(朴好問): 조선 초기의 문신. 세종 때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53.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
54. 육조(六曹):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6개 중앙 행정 관청.
55.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 조선 초기의 군사 관직. 군대의 규율과 감찰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56. 평안도 군사 3만 명: 주석 [주-D008] 참조. 평안도가 북방 방어의 핵심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57. 단오(端午): 음력 5월 5일. 여진족의 풍속에 이때 모여 놀이를 한다는 정보를 활용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58.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승문원(承文院)의 으뜸 벼슬. 정3품. 승문원은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59. 김청(金聽): 조선 초기의 문신. 외교 문서 작성 능력을 인정받았다. 주석 [주-D009] 참조.
60. 한량(閑良): 벼슬이 없는 양반 또는 무예를 익히는 사람.
61. 향리(鄕吏): 지방 관청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
62. 역자(驛子): 역(驛)에 소속되어 공무를 수행하던 사람.
63. 관노(官奴): 관청에 소속된 노비. 이들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여 참전을 독려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潤德自所灘下時番洞口, 過江住師, 江邊有四獐, 自投營中, 營軍獲之。 潤德曰: “獐, 野獸也。 今自來見獲, 實野人殲滅之兆也。” 至魚虛江邊, 留兵六百設柵。 十九日昧爽, 攻林哈刺寨里, 仍住營, 吒納奴寨里皆遁去。 見江邊, 虜十餘輩出射, 潤德令通事馬邊者呼語之曰: “我等行兵, 只爲忽剌溫, 非爲爾也。 毋恐。” 虜皆下馬叩頭。 遣吳明義奉箋賀, 又遣朴好問啓曰: “宣德八年, 敬奉符敎: ‘將討婆猪江寇, 送至左符, 參驗發兵。’ 敬此, 卽發馬・步兵一萬、黃海道軍五千, 四月初十日, 會江界府, 分屬諸將, 七道俱進, 本月十九日, 諸將潛師勦捕, 擒男婦二百三十六名, 斬獲一百七十名, 得牛馬一百七十餘頭。 我軍戰死者四人, 中箭者五人。” 上賜明義、好問衣⁶⁴各二領, 遣宣慰使朴信生至軍, 賜酒勞諸將, 宣旨曰: “今日之事, 實賴天地祖宗之靈, 以至於此, 非予所敢當也。 還師之日⁶⁵, 宜有報復, 其生擒人除老幼外, 丁壯悉斬之, 沿江等處, 益謹守禦。”

번역문:
최윤덕이 소탄(所灘) 아래 시번동(時番洞) 입구에서 강을 건너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강변에서 노루 네 마리가 스스로 진영 안으로 뛰어들어와 군사들이 이를 잡았다. 최윤덕이 말하기를 “노루는 들짐승인데, 이제 스스로 와서 잡혔으니, 실로 야인(野人)을 섬멸할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어허강(魚虛江) 가에 이르러 군사 6백 명을 남겨 목책(柵)을 설치하였다. 19일 새벽(昧爽)에 임합자(林哈刺)의 채리(寨里)⁶⁶를 공격하고 그대로 주둔하니, 자납노(吒納奴)의 채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강변을 보니 오랑캐(虜) 십여 명이 나와 활을 쏘므로, 최윤덕이 통사(通事)⁶⁷ 마변자(馬邊者)⁶⁸를 시켜 소리쳐 말하게 하기를 “우리들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단지 홀라온(忽剌溫)⁶⁹을 위한 것이지, 너희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니, 오랑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오명의(吳明義)를 보내 전문(箋文)을 받들어 하례하고, 또 박호문(朴好問)을 보내 아뢰었다. “선덕(宣德) 8년(1433)에 부교(符敎)⁷⁰를 공경히 받들어 ‘장차 파저강 도적을 토벌하려 하니, 좌부(左符)⁷¹를 보내니 이를 맞추어보고 군사를 동원하라’ 하셨습니다. 이를 공경히 받들어 즉시 기병과 보병 1만 명, 황해도 군사 5천 명⁷²을 동원하여 4월 10일에 강계부(江界府)에 모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일곱 길(七道)로 함께 나아가, 이달 19일에 여러 장수들이 몰래 군사를 움직여 소탕하고 사로잡아, 남자와 부녀자 236명을 사로잡고, 170명을 베거나 사로잡았으며, 소와 말 170여 마리를 얻었습니다. 아군(我軍)의 전사자는 4명이고, 화살에 맞은 자는 5명입니다.” 상(上)께서 오명의와 박호문에게 옷 각 두 벌을 하사하시고, 선위사(宣慰使)⁷³ 박신생(朴信生)을 군대에 보내 술을 내려 여러 장수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지(旨)를 내려 말씀하셨다. “오늘의 일은 실로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이에 이른 것이니, 내가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니다. 군대를 돌릴 때⁷⁴ 마땅히 보복이 있을 것이니, 그 사로잡은 사람들 중에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장정(丁壯)들은 모두 목을 베고, 강가 등지에는 더욱 삼가 수비하라.”

주석:
64. [주-D012] 衣 : 저본(底本)에는 “원(院)”으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해동야언・세종》 및 《세종실록》 15년 5월 26일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옷(衣)을 하사한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65. [주-D011] 日 : 《대동야승・해동야언・세종》에도 “일(日)”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 15년 5월 7일에 근거할 때 “후(後)”가 되어야 한다. 즉, '군대를 돌린 후에(還師之後)' 보복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본문은 저본을 따라 '환사지일(還師之日)'로 번역하였다.
66. 채리(寨里): 방어 시설을 갖춘 마을이나 부락.
67. 통사(通事): 통역관. 여진족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했다.
68. 마변자(馬邊者): 통사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69. 홀라온(忽剌溫): 압록강 북쪽의 여진족 부락 또는 지역 이름.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 세력과는 다른 집단임을 강조하여 회유하려는 전략이다.
70. 부교(符敎): 명나라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군사 동원 등을 명하거나 허락하는 문서.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 관계에 있었으므로, 대규모 군사 작전 시 명나라의 양해나 승인을 구하는 절차를 밟았다. 선덕(宣德)은 당시 명나라 황제 선종(宣宗)의 연호이다.
71. 좌부(左符): 부신(符信). 명령의 신표로 사용되는 물건으로, 보통 좌우 두 쪽으로 나누어 하나는 발령자가 갖고 하나는 전달자에게 주어 서로 맞추어봄으로써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72. 기병과 보병 1만 명, 황해도 군사 5천 명: 총 1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앞서 최윤덕이 황해도 군사는 불필요하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동원되었을 가능성, 혹은 보고 과정에서의 차이일 수 있다. 혹은 1만 명은 평안도 병력, 5천 명은 황해도 병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실록 기록 등을 교차 확인할 필요가 있다.
73. 선위사(宣慰使): 임금의 명을 받아 장병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파견되는 임시 관직.
74. 환사지일(還師之日): 군대를 돌리는 날. 주석 [주-D011] 참조.


원문:
崔潤德等班師, 命知申事迎慰, 以捷音布告中外, 賜諸將職賞有差, 仍設宴榮之。 上謂代言金宗瑞曰: “卿記去年之言乎? 與卿曾言潤德可爲首相, 然其任至重, 不可賞戰功也。 今潤德雖有戰功, 若無才德, 斷不可授也。 予先後取捨如此, 卿具陳此意於大臣, 熟議以啓。” 大臣皆曰: “潤德公廉正直, 勤謹奉公, 雖爲首相, 無愧也。” 上曰: “予意如此, 而大臣之意亦如此, 其代權軫之職。” 以潤德爲右議政。 上御勤政殿, 宴慰潤德等及將吏, 分賜尙衣衣靴, 令服而赴宴。 上親執爵賜潤德等, 又命世子行酒, 仍命潤德勿起受酒。 命軍官相對起舞, 潤德亦酒酣起舞。

번역문:
최윤덕 등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자(班師), 지신사(知申事)⁷⁵에게 명하여 맞이하여 위로하고, 승전 소식(捷音)을 중앙과 지방(中外)에 널리 알렸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직책과 상을 차등 있게 내리고, 이어서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영화롭게 하였다. 상(上)께서 대언(代言)⁷⁶ 김종서(金宗瑞)⁷⁷에게 이르셨다. “경(卿)은 지난 해의 말을 기억하는가? 경과 함께 일찍이 최윤덕이 수상(首相)⁷⁸이 될 만하다고 말했으나, 그 임무가 지극히 중요하므로 전공(戰功)만으로 상을 줄 수는 없다. 이제 최윤덕이 비록 전공이 있으나, 만약 재주와 덕(才德)이 없다면 단연코 임명할 수 없다. 나의 선후(先後) 취사(取捨)⁷⁹가 이와 같으니, 경은 이 뜻을 대신(大臣)들에게 자세히 아뢰어 충분히 의논한 후 보고하라.” 대신들이 모두 아뢰었다. “최윤덕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고(公廉正直), 부지런하고 삼가 공무를 받드니(勤謹奉公), 비록 수상이 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뜻이 이와 같고 대신들의 뜻 또한 이와 같으니, 권진(權軫)⁸⁰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라.” 이리하여 최윤덕을 우의정(右議政)⁸¹으로 삼았다. 상께서 근정전(勤政殿)⁸²에 납시어 최윤덕 등과 장수 및 관리들을 위한 위로 연회를 베풀고, 상의원(尙衣院)⁸³의 옷과 신발을 나누어 하사하며 이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상께서 친히 술잔(爵)을 잡아 최윤덕 등에게 내려주시고, 또 세자(世子)⁸⁴에게 명하여 술을 따르게 하셨으며, 이어서 최윤덕에게는 일어나지 말고 술을 받으라고 명하셨다. 군관(軍官)들에게 명하여 서로 마주보며 일어나 춤추게 하니, 최윤덕 또한 술에 취하여 일어나 춤을 추었다.

주석:
75. 지신사(知申事):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에 해당.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
76. 대언(代言): 승정원 승지(承旨)의 다른 이름. 임금의 말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77. 김종서(金宗瑞, 1383-1453):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무장. 세종 때 6진(六鎭) 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78. 수상(首相): 으뜸 재상.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키나, 넓게는 의정부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79. 선후취사(先後取捨): 먼저 고려할 것과 나중에 고려할 것, 취할 것과 버릴 것을 판단하는 기준. 즉, 인물 등용의 원칙을 의미한다. 세종은 전공보다는 인물의 됨됨이(재덕)를 더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80. 권진(權軫): 조선 초기의 문신. 당시 우의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1.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삼정승 중 하나. 정1품.
82. 근정전(勤政殿): 경복궁의 정전(正殿). 국가의 중요한 의식이나 행사를 거행하는 곳.
83. 상의원(尙衣院): 조선 시대 임금의 의복과 궁중의 재물을 관리하던 관청.
84. 세자(世子): 왕위를 이을 왕자. 당시 세종의 세자는 훗날 문종(文宗)이 되는 이향(李珦)이다. 임금과 세자가 직접 술을 따라주고, 앉아서 술을 받도록 한 것은 최윤덕에게 내린 파격적인 예우였다.


원문:
上謂群臣曰: “攻戰之後, 守禦不可不嚴。 閭延防禦, 解氷後雖云不緊, 然野人心懷報讎, 計出不測, 不可不慮。 欲以右議政爲都按撫察理使, 築城設柵, 以固彊圉, 何如?” 盧閈、安純、許稠曰: “平安人民, 受弊多端。 今當農月, 別無措置, 至秋而遣, 亦未晩也。” 秋七月, 上御慶會樓, 餞都按撫察理使崔潤德及諸軍官等。 又命知申事安崇善, 餞于洪濟院。

번역문:
상(上)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씀하셨다. “공격하여 싸운 뒤에는 수비하고 방어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연(閭延)의 방어는 얼음이 풀린 뒤에는 비록 긴급하지 않다고 하나, 야인(野人)들이 마음속으로 보복할 생각을 품고 있어 예측할 수 없는 계책을 낼 수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의정(右議政)을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⁸⁵로 삼아 성(城)을 쌓고 목책(柵)을 설치하여 국경(彊圉)⁸⁶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노한(盧閈), 안순(安純), 허조(許稠)⁸⁷ 등이 아뢰었다. “평안도 백성들이 여러 가지로 폐해를 입고 있습니다. 지금 농사철(農月)이니 별다른 조치 없이 가을에 이르러 보내셔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가을 7월에 상께서 경회루(慶會樓)⁸⁸에 납시어 도안무찰리사 최윤덕과 여러 군관(軍官) 등을 위해 전별연(餞別宴)을 베푸셨다. 또 지신사 안숭선(安崇善)에게 명하여 홍제원(洪濟院)⁸⁹에서 전별하게 하였다.

주석:
85.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理使): 조선 시대 변방 지역에 임시로 파견되던 고위 관직. 해당 지역의 군사, 행정, 민정을 총괄하며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안무(按撫)'는 어루만져 안정시킨다는 뜻이고, '찰리(察理)'는 자세히 살펴 다스린다는 뜻이다.
86. 강어(彊圉): 국경, 변방.
87. 노한(盧閈), 안순(安純), 허조(許稠): 모두 세종 때의 명망 있는 재상 또는 고위 관료들이다. 이들은 군사적 필요성보다는 백성들의 부담과 농사철임을 고려하여 파견 시기를 늦출 것을 건의했다.
88. 경회루(慶會樓): 경복궁 안에 있는 누각. 주로 외국 사신 접대나 공신들을 위한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89. 홍제원(洪濟院): 조선 시대 한양 서쪽 외곽에 있던 역원(驛院). 관리들이 여행하거나 부임할 때 머물거나 전송하던 곳이다.


원문:
崔潤德遣朴好問啓曰: “野人到江界言‘前日送還被擄人, 滿住喜甚。 我輩家屬若生好, 乞相見於江邊’云。 今沿邊防禦軍馬疲極, 且欽差奉勅而來, 俘虜中一二人, 或入送, 或送江邊相見, 以遂彼歸順之心。” 上令好問還諭潤德曰: “今野人乞還妻孥, 且使臣出來, 沿邊防禦南道兵, 限氷合之後, 以慈山以南兵代之。 然事難遙度, 臨機措置。”

번역문:
최윤덕이 박호문(朴好問)을 보내 아뢰었다. “야인(野人)들이 강계(江界)에 와서 말하기를 ‘전날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돌려보내 주니, 이만주(李滿住)가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들의 가족들이 만약 살아 있다면, 강변에서 서로 만나게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지금 강변의 방어 군마(軍馬)가 매우 지쳐 있고, 또한 흠차(欽差)⁹⁰가 칙서(勅書)를 받들고 왔으니⁹¹, 포로(俘虜) 중에서 한두 사람을 들여보내거나 혹은 강변으로 보내 서로 만나게 하여, 저들의 귀순(歸順)하려는 마음을 이루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上)께서 박호문에게 명하여 최윤덕에게 돌아가 다음과 같이 알리게 하셨다. “이제 야인들이 처자(妻孥)를 돌려달라고 빌고, 또한 (명나라) 사신이 와 있으니, 강변을 방어하는 남도(南道)의 군사⁹²는 얼음이 언 뒤를 기한으로 하여 자산(慈山) 이남의 군사로 교대시키도록 하라. 그러나 일을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기회(機)에 임하여 조치(措置)하라.”

주석:
90. 흠차(欽差): 황제의 명을 받고 파견된 사신. 명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91. 흠차가 칙서를 받들고 왔으니: 명나라 사신이 도착한 상황을 고려하여, 인도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명나라에 좋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수 있다.
92. 남도(南道)의 군사: 북방 방어를 위해 남쪽 지방에서 차출되어 온 군사들을 의미한다.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평안도 내의 군사로 대체하려는 계획이다.


원문:
賜崔潤德書: “甚苦暴露。 卿奉國忠勤, 宣勞中外, 以廟堂重臣, 出鎭藩垣, 威敵鎭邊, 以紓予憂, 深用嘉之。 屬當嚴冱之時, 愼興居之節。 今遣內官嚴自治錫宴以勞, 仍賜衣一襲, 至可領也。”【竝《日月錄》。】

번역문:
최윤덕에게 글을 내려 말씀하셨다. “바깥에서 고생함(暴露)이 심하겠구나. 경(卿)이 나라를 받듦에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며(忠勤), 중앙과 지방(中外)에서 노고를 펼쳐, 묘당(廟堂)⁹³의 중신(重臣)으로서 외직으로 나가 변방(藩垣)⁹⁴을 진무(鎭撫)하며, 적을 위압하고 변방을 안정시켜 나의 근심을 덜어주니,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마침 심한 추위(嚴冱)의 때를 당하였으니, 기거(興居)의 절도⁹⁵를 삼가라. 이제 내관(內官) 엄자치(嚴自治)를 보내 연회(宴)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이어서 옷 한 벌(衣一襲)⁹⁶을 내리니, 받도록 하라.”【이상 《일월록(日月錄)》에서 인용】

주석:
93. 묘당(廟堂): 조정(朝廷) 또는 정부를 의미한다. 묘당의 중신은 조정의 핵심 대신이라는 뜻이다.
94. 번원(藩垣): 번방(藩邦)과 울타리(垣). 나라를 지키는 변방 지역을 비유하는 말이다.
95. 흥거지절(興居之節): 일어나고 거처하는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절도. 즉, 건강 관리에 유의하라는 당부이다.
96. 의일습(衣一襲): 옷 한 벌. 임금이 신하에게 옷을 하사하는 것은 큰 은총으로 여겨졌다.


원문:
宋希美守慶源, 坐軍法賜死。 其死也, 路經靑坡, 崔政丞潤德與宋有舊, 備酒果相屬而永訣曰: “毋傷公法當死! 況人生會有一死, 吾亦朝夕當從公耳。”【《靑坡劇談》。】

번역문:
송희미(宋希美)⁹⁷가 경원(慶源)⁹⁸을 지키다가 군법(軍法)에 연좌되어 사사(賜死)⁹⁹되었다. 그가 죽으러 갈 때 길이 청파(靑坡)¹⁰⁰를 지나게 되었는데, 정승(政丞) 최윤덕이 송희미와 옛 정(舊)이 있어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서로 잔을 나누며 영원히 작별(永訣)하며 말하였다. “슬퍼하지 말게! 공법(公法)에 따라 마땅히 죽는 것이네. 하물며 인생은 누구나 한 번 죽음이 있는 법이니, 나 또한 조석(朝夕)으로 마땅히 공(公)을 따를 뿐이네.”【《청파극담(靑坡劇談)》에서 인용】

주석:
97. 송희미(宋希美): 조선 초기의 무신. 구체적인 죄목은 이 글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경원 수비 임무 중 군법을 어겨 사형에 처해졌음을 알 수 있다.
98. 경원(慶源): 조선 초기 북방 6진(六鎭) 중 하나. 두만강 유역의 중요한 국경 요충지였다.
99. 사사(賜死): 임금이 죄인에게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형벌. 형식상으로는 임금이 내리는 은전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사형이었다.
100. 청파(靑坡):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일대. 당시 한양 도성 밖 지역이었다. 최윤덕의 집이나 그가 머물던 곳이 근처에 있었을 수 있다. 이 일화는 최윤덕이 개인적인 정분보다는 공적인 법 집행을 더 중시하는 엄격한 성품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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