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번역/국조명신언행록

국조명신언행록 전집 권10

諺解 2025. 5. 19.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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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겸(任由謙)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任由謙【昭簡公。】
字叔讓, 豐川人。 景泰癸酉⁶⁰生。 成宗庚子司馬, 己酉登第。 歷正言、應敎、吏曹參議、慶尙觀察使, 官至工曹判書。 中宗甲申⁶¹卒, 年七十二。

번역문:
임유겸(任由謙)【소간공(昭簡公)⁶²이다.】
자는 숙양(叔讓)이고, 풍천(豐川)⁶³ 사람이다. 경태(景泰)⁶⁴ 계유년(1453)⁶⁵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경자년(148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기유년(148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⁶⁶, 응교(應敎)⁶⁷, 이조참의(吏曹參議)⁶⁸, 경상도 관찰사(慶尙觀察使)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공조판서(工曹判書)⁶⁹에 이르렀다. 중종(中宗) 갑신년(1524)⁷⁰에 졸(卒)하니, 나이 72세였다.

주석:
60. [주-D001] 癸酉 : 《용재집(容齋集)・공조판서시소간임공신도비명(工曹判書諡昭簡任公神道碑銘)》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할 때 “병자(丙子)”가 되어야 한다. 병자년은 1456년(세조 2)이다.
61. [주-D002] 甲申 : 《용재집・공조판서시소간임공신도비명》 및 《국조문과방목》에 근거할 때 “정해(丁亥)”가 되어야 한다. 정해년은 1527년(중종 22)이다. 1456년생이면 1527년에 72세(만 71세)가 되므로, 정해년이 맞다.
62. 소간공(昭簡公): 임유겸의 시호. 소(昭)는 명성이 널리 퍼짐(聲聞宣遠), 간(簡)은 간결하고 곧음(一德不懈) 등을 의미한다.
63. 풍천(豐川): 본관(本貫). 풍천 임씨(豐川 任氏).
64. 경태(景泰): 중국 명(明)나라 대종(代宗) 경태제(景泰帝)의 연호(1450-1456).
65. 계유년(1453): 주석 [주-D001] 참조. 병자년(1456)이 맞다.
66.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67. 응교(應敎): 홍문관(弘文館)의 정4품 관직.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다루었다.
68.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吏曹)의 정3품 당상관. 판서, 참판 다음가는 직위로 문관 인사 실무에 참여했다.
69. 공조판서(工曹判書): 공조(工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공조는 국가의 공장(工匠), 산택(山澤), 공예, 건축, 도량형 등을 담당했다.
70. 갑신년(1524): 주석 [주-D002] 참조. 정해년(1527)이 맞다.


원문:
公少不好弄, 唯耽嗜書籍, 爲文能造理, 老先生皆器異之。 旣冠, 益力以肆, 華聞大播, 一時名士慕與之交, 尤與金忠貞公銓、鄭安陰汝昌相得, 講劘道義之學, 其所資益者多。 公之外舅洪忠貞公應, 少許可於子弟, 未嘗假以辭色, 每見公, 必爲之敬禮。

번역문:
공(公)은 어려서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서적(書籍)을 탐독하였으며, 글을 지음에 이치에 능히 도달하니(造理)⁷¹, 노선생(老先生)들이 모두 그를 기이한 그릇(器異)⁷²으로 여겼다.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는 더욱 힘써 학문에 몰두하여(肆) 아름다운 명성(華聞)이 크게 퍼지니,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이 그와 교유하기를 사모하였고, 특히 김충정공(金忠貞公) 전(銓)⁷³, 정안음(鄭安陰) 여창(汝昌)⁷⁴과 서로 마음이 맞아 도의(道義)의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講劘)하여, 그 도움을 얻은 바(資益)가 많았다. 공의 외구(外舅)⁷⁵ 홍충정공(洪忠貞公) 응(應)⁷⁶은 자제(子弟)들에게 좀처럼 허여(許可)하지 않고 일찍이 말과 얼굴빛(辭色)을 빌려준 적이 없었으나, 매번 공을 볼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경례(敬禮)를 하였다.

주석:
71. 조리(造理): 이치에 깊이 이름, 사물의 이치를 깨달음.
72. 기이(器異): 남다른 그릇, 뛰어난 인물로 여김.
73. 김충정공(金忠貞公) 전(銓):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가리킨다.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조광조(趙光祖)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배되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사되었다. '충정(忠貞)'은 시호가 아니며, '전(銓)'은 김굉필의 이름이다. 이 글의 저자 이행이 김굉필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충정공'이라는 칭호를 붙였거나, 혹은 다른 인물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으나, 정여창과 함께 언급되는 점, 도학을 강마한 점 등으로 보아 김굉필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김전(金詮, 1458-1523)이라는 인물도 있으나 그는 시호가 익평(翼平)이다.
74. 정안음(鄭安陰) 여창(汝昌):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냈기에 '정안음'이라고도 불린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과 함께 영남 사림의 중추적 인물이었다.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75. 외구(外舅): 장인(丈人).
76. 홍충정공(洪忠貞公) 응(應): 홍응(洪應, 1428-1492). 자는 응지(應之), 호는 휴휴당(休休堂). 시호는 충정(忠貞). 세조~성종 대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임유겸의 장인이다.


원문:
燕山初, 柳子光恃其權勳, 葬母踰僭, 公承朝命往鞫, 盡發其狀, 時論快之。

번역문:
연산군(燕山君) 초기에 유자광(柳子光)⁷⁷이 자신의 권세와 공훈(權勳)을 믿고 어머니 장례를 치름에 분수에 넘치고 참람(踰僭)⁷⁸하였는데, 공(公)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가서 국문(鞫問)하여 그 실상을 남김없이 밝혀내니, 당시의 여론(時論)이 통쾌하게 여겼다.

주석:
77. 유자광(柳子光, 1439-1512): 조선 전기의 문신, 공신. 서얼(庶孽) 출신으로 이시애의 난 때 공을 세워 등용되었고, 성종~연산군 대에 권세를 누렸다.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데 관여했다.
78. 유참(踰僭): 분수를 넘어서고 참람됨. 신분이나 지위에 맞지 않게 사치스럽거나 규정을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유자광이 서얼 출신임에도 높은 권세를 누리며 장례를 지나치게 호화롭게 치른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원문:
選入弘文館, 陞應敎。 路遇當路大臣, 引馬避之, 不爲禮, 坐是見罷。 旣而擬學官, 主曰: “某以下陵上, 不宜爲是職。” 乃降授副司勇。 久之, 拜訓鍊僉正, 蹭蹬不得調淸顯者凡七年, 公不以卑宂爲辱, 尤恪勤供職。 凡設局及奉使, 必薦公爲首, 事無不辦。 燕山末, 淸名之士皆及於禍, 而公獨以沈滯得免。

번역문:
(공이) 홍문관(弘文館)⁷⁹에 선발되어 들어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길에서 당로대신(當路大臣)⁸⁰을 만났는데, 말을 끌어 피하기만 하고 예(禮)를 갖추지 않아, 이 때문에 파직(罷職)되었다. 얼마 뒤 학관(學官)⁸¹에 추천되자, 임금⁸²께서 말씀하셨다. “아무개는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능멸(陵上)하였으니 이 직책에 마땅하지 않다.” 이에 부사용(副司勇)⁸³으로 강등되어 제수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훈련원 첨정(訓鍊僉正)⁸⁴에 제수되었는데, 이처럼 불우하게(蹭蹬) 청현직(淸顯職)⁸⁵에 조용(調用)되지 못한 것이 무릇 7년이었으나, 공은 비천하고 한미한(卑宂) 것을 욕되게 여기지 않고 더욱 삼가고 부지런히(恪勤) 직무에 힘썼다. 무릇 임시 관청을 설치(設局)하거나 사신을 받들 때(奉使) 반드시 공을 첫 번째로 추천하였고, 공은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연산군 말년에 명망 높은 선비(淸名之士)들이 모두 화(禍)를 입었으나, 공만은 침체(沈滯)⁸⁶되어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주석:
79. 홍문관(弘文館): 조선 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 관리, 문한(文翰) 처리, 왕의 자문 등의 기능을 담당하던 관청. 옥당(玉堂)이라고도 한다.
80. 당로대신(當路大臣): 정권을 잡고 있는 중요한 지위의 대신.
81. 학관(學官): 성균관(成均館)이나 사학(四學) 등 교육 기관의 관직.
82. 주(主): 임금. 당시 임금은 연산군(燕山君)이다.
83. 부사용(副司勇): 오위(五衛)에 소속된 종9품의 무관 말단직. 문관에서 무관 말단직으로 강등된 것이다.
84. 훈련원 첨정(訓鍊僉正): 훈련원(訓鍊院)의 종4품 관직. 훈련원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과 무예 교육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부사용보다는 높은 직책이지만 여전히 무관직이다.
85. 청현직(淸顯職): 청요직(淸要職)과 현직(顯職)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학문과 명망이 중시되고 권력의 중심에 가까우며 승진이 빠른 중요한 관직을 의미한다.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의 관직이 대표적이다.
86. 침체(沈滯):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거나 오랫동안 승진하지 못하고 불우한 처지에 있는 것.


원문:
公自少勤身篤志, 尤精理學, 如《庸》、《學》兩書, 每夜必誦, 到老不怠。 燕居必斂衽端坐, 未嘗有惰慢之色。 敎誨諸子, 必以義方, 勸勵課講, 使自成就。 至於立揚, 皆能以淸愼自持, 其素得於庭訓者然矣。

번역문:
공(公)은 젊어서부터 몸가짐을 부지런히 하고 뜻을 돈독히 하였으며, 특히 이학(理學)⁸⁷에 정통하여, 《중용(庸)》⁸⁸과 《대학(學)》⁸⁹ 두 책 같은 경우는 매일 밤 반드시 외웠고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상시 한가로이 지낼 때(燕居)⁹⁰에도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일찍이 나태하거나 거만한(惰慢) 기색이 없었다. 여러 아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올바른 도리(義方)⁹¹로써 하였고, 권면하고 격려하며 과업을 부과하고 강론하여(勸勵課講) 스스로 성취하게 하였다. (아들들이) 입신양명(立揚)⁹²함에 이르러서도 모두 청렴하고 신중함(淸愼)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으니, 이는 평소 가정 교육(庭訓)⁹³에서 얻은 바가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주석:
87. 이학(理學): 성리학(性理學)의 다른 이름.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유교 철학이다.
88. 《용(庸)》: 《중용(中庸)》. 사서(四書: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하나.
89. 《학(學)》: 《대학(大學)》. 사서(四書)의 하나.
90. 연거(燕居): 공무(公務)가 없을 때 한가롭게 지내는 것. 또는 평상시 집에서 지내는 것.
91. 의방(義方): 자녀를 가르치는 올바른 도리나 방법.
92. 입양(立揚): 입신양명(立身揚名). 사회적으로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림.
93. 정훈(庭訓):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가르침.


원문:
公平生無所嗜好, 晩歲, 益厭紛華, 別搆小堂于家園, 日以嘯詠爲事。 客至, 或設棋, 或投壺, 以極其娛。 每遇良辰, 率子姪、親舊, 佳山、勝水, 無不窮玩, 興盡卽返。 且與年滿諸宰數往來, 作耆老之契, 人稱爲七老會, 至圖繪以傳之。

번역문:
공(公)은 평생 즐기고 좋아하는 것(嗜好)이 없었고, 만년(晩歲)에는 번잡하고 화려함(紛華)을 더욱 싫어하여, 집 뜰(家園)에 작은 당(堂)을 따로 짓고 날마다 소영(嘯詠)⁹⁴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손님이 오면 혹은 바둑(棋)을 두거나 혹은 투호(投壺)⁹⁵ 놀이를 하여 그 즐거움을 다하였다. 매번 좋은 시절(良辰)을 만나면 아들과 조카(子姪), 친구(親舊)들을 이끌고 아름다운 산(佳山)과 뛰어난 물(勝水)을 찾아 마음껏 즐기지 않음이 없었고, 흥(興)이 다하면 곧 돌아왔다. 또한 연로한 여러 재상(年滿諸宰)⁹⁶들과 자주 왕래하며 기로(耆老)의 계(契)⁹⁷를 만드니, 사람들이 이를 칠로회(七老會)⁹⁸라 칭하였고, 그림으로 그려 전하기까지 하였다.

주석:
94. 소영(嘯詠): 휘파람을 불거나 시를 읊조리는 것.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즐기는 풍류를 의미한다.
95. 투호(投壺): 일정한 거리에 놓인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 예로부터 선비들이 즐기던 풍류의 하나였다.
96. 연만제재(年滿諸宰):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난 재상들.
97. 기로지계(耆老之契): 나이 많은 명망 있는 신료들이 모여 만든 친목 모임.
98. 칠로회(七老會): 임유겸을 포함한 7명의 연로한 재상들이 만든 기로회. 이 모임에는 임유겸 외에 신용개(申用漑), 정광필(鄭光弼), 안침(安琛), 김감(金勘), 김전(金詮), 남곤(南袞) 등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문:
公天性謹愼, 每以盛滿爲懼, 遇微疾, 輒乞解。 諸子得一官, 增一級, 輒愀然不悅曰: “無已過乎?” 諸子善承厥志, 迭處顯要, 而未嘗少以名位加諸人。

번역문:
공(公)은 천성이 근신(謹愼)하여 매번 성만(盛滿)⁹⁹을 두려움으로 여겼으므로, 가벼운 병(微疾)을 만나도 문득 관직을 그만두기를 청하였다(乞解). 여러 아들이 관직 하나를 얻거나 품계 한 등급이 오르면 문득 얼굴빛이 변하며 기뻐하지 않고(愀然不悅) 말하였다. “이미 과분함이 없는가?” 여러 아들이 그 뜻을 잘 받들어 번갈아 중요한 관직(顯要)에 있었으나, 일찍이 조금이라도 명예와 지위(名位)로써 남에게 군림하지 않았다.

주석:
99. 성만(盛滿): 세력이나 지위가 한창 성하고 가득 참. 임유겸은 이러한 상태를 경계하고 늘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원문:
癸未, 判工曹。 翌年, 以老病再辭, 又移知樞。 疾革, 語諸子曰: “吾位過年滿, 汝等亦皆顯揚, 死無所恨。 但望汝等謹愼立朝而已。” 下至諸婦、群姪, 皆與之言以訣, 其精爽不昧如此。【竝容齋李荇撰碑。】

번역문:
계미년(1523)에 공조판서(判工曹)가 되었다. 이듬해 노병(老病)을 이유로 재차 사직하였고, 또 지중추부사(知樞)¹⁰⁰로 옮겨졌다. 병이 위독해지자 여러 아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지위가 연로한 재상들보다 높았고(位過年滿)¹⁰¹, 너희들 또한 모두 현달(顯揚)하였으니, 죽어도 한(恨)이 없다. 다만 너희들이 조정에 서서 근신(謹愼)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래로 여러 며느리(諸婦)와 여러 조카(群姪)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과 말을 나누며 이별을 고하였으니, 그 정신(精爽)이 흐리지 않음(不昧)이 이와 같았다.【이상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지은 비(碑)¹⁰²에서 인용】

주석:
100. 지추(知樞):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약칭. 중추부(中樞府)의 정2품 관직. 실권은 없으나 정2품의 품계를 유지시켜 주기 위한 명예직의 성격이 강했다.
101. 위과년만(位過年滿): 지위가 연로한 재상들(年滿)보다 높았다는 의미. 또는 자신의 나이(年)에 비해 지위(位)가 지나치게 높았다는 겸양의 표현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문맥상 전자(연로한 재상들보다 높은 지위에 올랐음)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02. 비(碑): 비석(碑石) 또는 비문(碑文). 여기서는 이행이 지은 임유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가리킨다.


성세순(成世純)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成世純【思肅公。】
字太純, 昌寧人。 天順癸未生。 成宗二十三年壬子登第。 歷直提學、大司諫、湖南・湖西觀察使, 官至大司憲。 中宗甲戌卒, 年五十二。

번역문:
성세순(成世純)【사숙공(思肅公)¹이다.】
자는 태순(太純)이고, 창녕(昌寧)² 사람이다. 천순(天順) 계미년(1463)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23년 임자년(149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직제학(直提學), 대사간(大司諫)³,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대사헌(大司憲)⁴에 이르렀다. 중종(中宗) 갑술년(1514)에 졸(卒)하니, 나이 52세였다.

주석:

  1. 사숙공(思肅公): 성세순의 시호. 사(思)는 잘못을 뉘우치고 조심함(追悔前愆), 숙(肅)은 강직하고 과감함(剛毅果決) 등을 의미한다.
  2. 창녕(昌寧): 본관. 창녕 성씨(昌寧 成氏).
  3.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백관에 대한 탄핵 등을 담당했다.
  4. 대사헌(大司憲): 사헌부(司憲府)의 으뜸 벼슬. 종2품.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감찰 기관의 수장이다.

원문:
初, 姜渾、沈順門爲舍人, 皆有所眄之妓, 鄭鵬戒之曰: “亟遠之, 無貽後悔。” 姜去之, 沈不從。 其後二妓入宮被寵。 甲子, 燕山欲殺順門, 問于群臣, 三公以下莫敢異議。 適賜宴闕庭, 公顧四座曰: “吾等職在諫官, 安可默然而已?” 兩司皆縮頸。 獻納金克成曰: “官以諫爲名, 見人無罪而死, 縱愛身不言, 奈負國恩何?” 正言李世應曰: “獻納言是。” 或曰: “若不順旨, 必與順門同死, 終無益也。” 公與克成談笑自若, 曰: “死生大矣, 各任其志可也。 今日先死者, 必吾兩人也, 次者正言。” 遂啓其無罪之狀, 燕山雖不聽用, 亦不罪之。

번역문:
처음에 강혼(姜渾)⁵, 심순문(沈順門)⁶이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모두 눈여겨보는 기생(眄之妓)⁷이 있었는데, 정붕(鄭鵬)⁸이 그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빨리 멀리하여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라.” 강혼은 그 기생을 떠나보냈으나 심순문은 따르지 않았다. 그 후 두 기생이 궁궐에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 갑자년(甲子年, 1504)⁹에 연산군(燕山君)이 심순문을 죽이려 하여 여러 신하에게 물었으나, 삼공(三公)¹⁰ 이하 아무도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하였다. 마침 궁궐 뜰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공(公)이 사방의 좌석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리들의 직책은 간관(諫官)¹¹에 있는데, 어찌 침묵하고 있을 수만 있겠는가?” 양사(兩司)¹²의 관리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 헌납(獻納)¹³ 김극성(金克成)이 말하였다. “관직은 간(諫)하는 것으로 이름을 삼았는데, 사람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보고 몸을 아껴 말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은혜를 저버림을 어찌하겠는가?” 정언(正言) 이세응(李世應)이 말하였다. “헌납의 말이 옳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만약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심순문과 함께 죽을 것이니, 끝내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공이 김극성과 함께 태연자약하게 담소하며(談笑自若)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큰일이니, 각자 그 뜻에 맡기는 것이 옳다. 오늘 먼저 죽는 자는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일 것이고, 다음은 정언일 것이다.” 마침내 그(심순문)가 죄가 없다는 내용을 아뢰니, 연산군이 비록 듣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또한 죄를 주지도 않았다.

주석:
5. 강혼(姜渾, 1464-1519):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 또는 산당(散堂). 연산군 대에 활동했다.
6. 심순문(沈順門, ?-1504):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나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7. 면지기(眄之妓): 눈여겨보는 기생, 마음에 둔 기생.
8. 정붕(鄭鵬, 1469-151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莘堂). 김종직의 문인이다.
9. 갑자년(甲子年, 1504):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난 해.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廢妃 尹氏)의 사사(賜死)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이다.
10.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조선 최고의 재상들을 가리킨다.
11. 간관(諫官): 임금에게 간쟁(諫諍)하는 일을 맡은 관리. 주로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의 관원을 지칭한다. 성세순은 당시 대사간이었다.
12. 양사(兩司): 사간원과 사헌부를 아울러 이르는 말. 대간(臺諫)이라고도 한다.
13. 헌납(獻納): 사간원의 정5품 관직.


원문:
公遇事明果直情, 而行峻潔, 少許可, 不肯隨俗俯仰。 所與交惟鄭公光弼、申公用漑數人而已。 權政丞鈞性倨, 客至, 不時見, 若聞公來, 必倒屣而出。 卜宅白岳峯下, 公退嘯詠泉石間, 蕭然若無爵者。 敎諸子能以正, 有致大名者, 本於庭訓云。【竝《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은 일을 당하면 명확하고 과단성이 있으며(明果)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直情), 행실은 엄격하고 깨끗하며(峻潔) 남을 허여하는 일이 적어(少許可) 세속을 따라 부앙(俯仰)¹⁴하려 하지 않았다. 교유하는 바는 오직 정공(鄭公) 광필(光弼)¹⁵, 신공(申公) 용개(用漑)¹⁶ 몇 사람뿐이었다. 정승(政丞) 권균(權鈞)¹⁷은 성품이 거만하여 손님이 와도 제때 만나주지 않았으나, 만약 공이 왔다고 들으면 반드시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왔다(倒屣而出)¹⁸. 백악산(白岳山)¹⁹ 봉우리 아래에 집터를 정하고(卜宅), 공무에서 물러나 샘과 돌 사이(泉石間)²⁰에서 소영(嘯詠)하며 지내니, 쓸쓸하고 고요한(蕭然) 모습이 마치 벼슬 없는 사람 같았다. 여러 아들을 가르침에 능히 바르게 하여 큰 명성을 이룬 이가 있었으니, 가정 교육(庭訓)에 근본한 것이라고 한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²¹에서 인용】

주석:
14. 부앙(俯仰): 고개를 숙이고 쳐듦. 남의 눈치를 보거나 시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세순은 소신이 뚜렷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15. 정공(鄭公) 광필(光弼):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신용개 주석 참조.
16. 신공(申公) 용개(用漑): 신용개(申用漑, 1463-1519).
17. 권균(權鈞, 1460-152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평중(平仲). 중종 대에 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18. 도사이출(倒屣而出): 버선발로 뛰어나감.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고사성어이다. 후한(後漢) 채옹(蔡邕)이 왕찬(王粲)을 맞이할 때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권균이 평소 거만했지만 성세순은 매우 존경하고 깍듯이 대했음을 보여준다.
19. 백악산(白岳山): 북악산(北岳山)의 다른 이름. 서울 경복궁 뒤쪽에 있는 산이다.
20. 천석간(泉石間): 샘과 돌 사이. 자연을 의미한다.
21. 《잠곡구록(潛谷舊錄)》: 김육(金堉, 1580-1658)의 문집 《잠곡유고(潛谷遺稿)》에 실린 내용일 수 있으나, '구록(舊錄)'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이지 않다. 김육의 호가 잠곡(潛谷)이다. 정확한 출처 확인이 필요하며, 다른 문헌을 지칭할 수도 있다.

조원기(趙元紀)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趙元紀【文節公。】
字理之, 漢陽人。 天順丁丑生。 燕山二年丙辰登第, 歷正言、修撰。 中廟朝, 拜大司諫、副提學。 官至崇政、左參贊。 癸巳卒, 年七十七。

번역문:
조원기(趙元紀)【문절공(文節公)¹이다.】
자는 이지(理之)이고, 한양(漢陽)² 사람이다. 천순(天順)³ 정축년(1457)에 태어났다. 연산군(燕山君) 2년 병진년(1496)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⁴, 수찬(修撰)⁵을 역임하였다. 중종(中宗) 시대에 대사간(大司諫)⁶, 부제학(副提學)⁷에 제수되었다. 관직은 숭정대부(崇政大夫)⁸, 좌참찬(左參贊)⁹에 이르렀다. 계사년(1533)에 졸(卒)하니, 나이 77세였다.

주석:

  1. 문절공(文節公): 조원기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고, 절(節)은 절개를 지키고 의(義)를 따름(秉義遵道), 또는 재물과 여색을 탐하지 않음(好廉自克) 등을 의미한다.
  2. 한양(漢陽): 조선의 수도. 본관(本貫)이 한양 조씨(漢陽 趙氏)임을 나타낸다.
  3. 천순(天順):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두 번째 연호(1457-1464).
  4.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임금에게 간언(諫言)하는 일을 맡았다.
  5. 수찬(修撰): 홍문관(弘文館)의 정6품 관직.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등을 담당했다.
  6.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7.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대제학(大提學) 다음가는 관직으로 학문 연구와 임금의 자문을 맡았다.
  8. 숭정대부(崇政大夫): 조선 시대 정1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문관에게 주어졌다.
  9. 좌참찬(左參贊): 의정부(議政府)의 정1품 관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벼슬이다.

원문:
公幼不好弄, 有安重氣像。 九歲, 嘗著象戲, 正郞見之, 語其母曰: “吾兒已學無益之事, 將何以成立乎?” 公竊聞之, 卽垂泣告父母曰: “吾偶然學之, 此戲若害于身, 豈敢以貽父母憂乎?” 平生遂不着。

번역문:
공(公)은 어려서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안정되고 중후한 기상(氣像)이 있었다. 9세 때 일찍이 상희(象戲)¹⁰를 두었는데, 정랑(正郎)¹¹이 그것을 보고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우리 아이가 이미 유익하지 않은 일을 배웠으니, 장차 어떻게 자립하겠습니까?” 공이 몰래 이를 듣고 즉시 눈물을 흘리며 부모에게 아뢰었다. “제가 우연히 그것을 배웠는데, 이 놀이가 만약 몸에 해롭다면 어찌 감히 부모님께 근심을 끼쳐 드리겠습니까?” 평생 동안 마침내 상희를 두지 않았다.

주석:
10. 상희(象戲): 코끼리 상(象) 자를 쓰는 놀이, 즉 장기(將棋)를 가리킨다.
11. 정랑(正郎): 아버지 조충손(趙衷孫)을 가리킨다. 조충손은 예조 정랑(禮曹正郎, 정5품) 등을 역임했다. 이 일화는 조원기의 조숙함과 진중한 성품, 그리고 학문에 정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원문:
燕山主欲觀史草, 公力啓勤懇, 觸怒見罷。 人皆爲公懼, 公不爲動。 庚申, 邊民逃入海浪島, 朝廷遣將搜括, 公爲副將。 波濤洶湧, 舟楫顚危, 人皆失色, 公則夷然, 竟捕逋氓以還。

번역문:
연산주(燕山主)¹²가 사초(史草)¹³를 보고자 하자, 공이 힘써 간절히 아뢰다가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두려워했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경신년(1500)¹⁴에 변방 백성들이 해랑도(海浪島)¹⁵로 도망쳐 들어가자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 수색하여 잡아오게 하였는데, 공이 부장(副將)¹⁶이 되었다.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 배가 뒤집힐 듯 위태로우니 사람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었으나, 공은 태연하여 마침내 도망간 백성들을 잡아 돌아왔다.

주석:
12. 연산주(燕山主): 연산군(燕山君). 조선의 제10대 왕.
13. 사초(史草): 조선 시대에 사관(史官)이 임금의 언행과 국정의 제반 사항을 매일 기록한 원고. 실록(實錄)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된다. 임금이 사초를 보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 이는 사관의 공정한 기록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 한 것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의 빌미가 되었다. 조원기가 이를 반대한 것은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함을 보여준다.
14. 경신년(1500): 연산군 6년.
15. 해랑도(海浪島): 위치가 명확하지 않으나, 함경도나 평안도 근처의 섬으로 추정된다. 변방의 백성들이 과도한 부역이나 환곡(還穀) 부담을 피해 도망친 사건으로 보인다.
16. 부장(副將): 장수를 보좌하는 직책.


원문:
中廟改玉, 以公有慈祥牧民長才, 兼解武事, 除慶源府使。 自公往莅, 民夷咸懷, 金粟馬羊之謠聞于朝, 特拜大司諫。

번역문:
중종(中宗)께서 국새(國璽)를 바꾸신 후¹⁷, 공에게 자상하게 백성을 다스리는 뛰어난 재능이 있고 아울러 무사(武事)에도 밝다고 여겨 경원부사(慶源府使)¹⁸에 제수하였다. 공이 가서 다스리자 백성과 오랑캐¹⁹가 모두 감화되어, 금·곡식·말·양에 대한 노래²⁰가 조정에 들리니, 특별히 대사간(大司諫)에 제수하였다.

주석:
17. 중묘개옥(中廟改玉):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을 통해 중종이 즉위한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 옥(玉)은 국새(國璽)를 상징하며, 이를 바꾼다는 것은 왕위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18. 경원부사(慶源府使): 함경북도 경원(慶源) 지역의 수령. 경원은 여진족(女眞族)과 접경한 국방의 요충지였다. 문관이면서도 무사(武事)에 밝아 이곳에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 민이(民夷): 백성과 오랑캐. 경원 지역의 조선 백성과 여진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20. 금속마양지요(金粟馬羊之謠): 금, 곡식, 말, 양이 풍족함을 노래하는 민요. 조원기의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이는 변경 지역의 안정과 생산력 증대를 의미한다.


원문:
公資性忠孝, 好節儉, 執親之喪, 朝夕悲哀, 三年不出廬外。 位居宰輔, 弊廬短堵, 僅庇風雨, 庋廚所儲, 不過鹽菜, 人視之不堪, 而公樂之不厭也。 人有饋遺, 少不合義, 必辭, 若將浼己。 平生恪¹⁷¹謹職事, 雖祁寒盛暑, 未嘗一日在告。 騶直¹⁷²不入於家, 必先周窮姊妹, 以及於門黨之老寡孤幼, 雖疎遠不相往來者, 亦得霑濡, 家之所奉, 常不裕也。 公退, 恒居小齋, 流閱書史, 日夕扶筇曳屐, 俯鑑尺池, 對菊數叢, 吟哦逍遙, 若與造物者爲友, 而其胸懷浩浩然也。

번역문:
공은 자성(資性)이 충효(忠孝)하고 절검(節儉)을 좋아하였으며, 어버이의 상(喪)을 당해서는 아침저녁으로 슬퍼하며 3년 동안 여막(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위가 재보(宰輔)²¹에 있었으나, 허름한 집과 낮은 담장(弊廬短堵)은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고, 찬간(廚)에 저장된 것은 소금과 채소에 불과하여 사람들이 보기에 견딜 수 없어 했으나 공은 그것을 즐기며 싫어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내주는 물건이 조금이라도 의(義)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사양하였으니, 마치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하는 듯하였다. 평생 직무(職事)에 각근(恪謹)²²하여 비록 매서운 추위와 심한 더위에도 일찍이 하루도 병가(在告)²³를 낸 적이 없었다. 녹봉(騶直)²⁴은 집으로 들이지 않고 반드시 먼저 가난한 자매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고, 문중(門黨)의 늙은이·과부·고아·어린아이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비록 소원하여 서로 왕래하지 않는 자라도 또한 혜택을 입어, 집안의 봉양은 항상 넉넉하지 못하였다. 공은 퇴청하면 항상 작은 서재(小齋)에 머물며 서사(書史)를 두루 읽고, 아침저녁으로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끌며 작은 연못(尺池)을 굽어보고 국화 몇 떨기를 마주하며 시를 읊조리고 거니니(吟哦逍遙), 마치 조물자(造物者)²⁵와 벗하는 듯하여 그 흉회(胸懷)가 넓고 컸다(浩浩然).

주석:
171. [주-D001] 恪 : 저본(底本)에는 “격(格)”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묵재집(默齋集)・구씨참찬조공묘비명(舅氏參贊趙公墓碑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각근(恪謹)'은 '삼가고 조심함'을 뜻하여 문맥에 더 적합하다.
172. [주-D002] 騶直 : 《묵재집・구씨참찬조공묘비명》에는 “관추백직급당봉지여(官騶白直及堂封之餘)”로 되어 있다. '추직(騶直)'은 일반적으로 관아에 딸린 하인이나 말을 돌보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관리에게 지급되는 녹봉이나 그에 부수되는 물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묵재집》 기록은 '관청에서 주는 녹봉과 당봉(堂封)의 나머지' 등으로 해석될 수 있어, 조원기가 자신의 녹봉을 사적으로 쓰지 않고 어려운 친척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음을 시사한다.
21. 재보(宰輔): 재상(宰相)과 보상(輔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및 좌·우참찬 등 고위 관직을 통칭한다.
22. 각근(恪謹): 삼가고 조심하는 모양. 주석 [주-D001] 참조.
23. 재고(在告): 관리가 병으로 결근하는 것.
24. 추직(騶直): 주석 [주-D002] 참조. 여기서는 녹봉 또는 관에서 지급되는 물품으로 해석한다.
25. 조물자(造物者): 만물을 창조한 존재. 자연 또는 천지(天地)를 의미한다.


원문:
靜菴先生, 公之兄子也。 聲名太盛, 公深以爲憂。 在慶源時, 貽書以警之, 人服其先見之明。【竝《潛谷舊錄》。】

번역문:
정암 선생(靜庵先生)²⁶은 공의 형의 아들이다. 명성이 너무 높아지자 공이 깊이 우려하였다. 경원(慶源)에 있을 때 편지를 보내 경계하니,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²⁷에서 인용】

주석:
26. 정암 선생(靜庵先生):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가리킨다. 조원기의 형 조충수(趙衷粹)의 아들, 즉 조카이다. 조광조는 중종 대에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로 사사되었다. 조원기가 조카의 높은 명성을 우려하고 경계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당시 사림(士林) 세력의 급격한 부상과 그에 따른 정치적 위험을 예견했음을 보여준다.
27.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편찬한 책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인물들의 행적이나 일화를 기록한 책일 가능성이 있다.


원문:
嘉靖壬辰, 中廟敎政府曰: “廷臣有淸節素著, 至老不變, 爲衆信服者, 啓之。” 以參贊趙元紀對, 命超階崇政。 元紀居官, 廉潔白直, 其陞嘉善、資憲, 亦皆以淸白褒之也。 同時宋判府欽, 以淸素廉退, 與元紀齊名。【《東閣雜記》。】

번역문:
가정(嘉靖)²⁸ 임진년(1532)에 중종께서 정부(政府)²⁹에 하교하시기를, “조정 신하 중에 청렴한 절개가 평소에 드러나 늙어서도 변치 않아 여러 사람의 신임을 받는 자가 있으면 아뢰라.”고 하셨다. 이에 참찬(參贊) 조원기를 아뢰니, 품계를 뛰어넘어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임명하라고 명하셨다. 조원기는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廉潔白直)하였으니, 그가 가선대부(嘉善大夫)³⁰, 자헌대부(資憲大夫)³¹로 승진한 것도 또한 모두 청백(淸白)함으로 포상받은 것이었다. 동시대에 판부사(判府事)³² 송흠(宋欽)³³이 청렴하고 소박하며 물러날 줄 알아(淸素廉退) 조원기와 나란히 명성을 얻었다.【《동각잡기(東閣雜記)》³⁴에서 인용】

주석:
28. 가정(嘉靖):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29.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킨다.
30.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 시대 종2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31.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 시대 정2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32. 판부사(判府事): 돈녕부(敦寧府), 중추부(中樞府) 등의 종1품 또는 정1품 벼슬. 여기서는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3. 송흠(宋欽, 1459-1547): 조선 전기의 문신.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다.
34.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수필집. 관직 생활 중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


원문:
趙知事元紀性儉素。 嘗令毛匠作披肩, 其法必取毛之厚者, 縫其外面, 而縫其薄於裏面。 公見之曰: “汝眞拙工也。 披肩之設, 欲其煖也, 今縫其薄毛於內, 厚毛於外, 非取暖之道也。” 遂使反其法焉。 性又耐寒, 雖隆冬不過穿一襦一裌而已。 嘗見春月著小襪者, 問曰: “何必著此?” 曰: “不然則冷氣入腹矣。” 公大笑曰: “腹與足相去甚遠, 以足冷害及於腹, 安有此理哉!”【《稗官雜記》。】

번역문:
지사(知事)³⁵ 조원기는 성품이 검소하였다. 일찍이 모장(毛匠)³⁶에게 시켜 피견(披肩)³⁷을 만들게 하였는데, 그 방식은 반드시 털이 두꺼운 쪽을 취하여 겉으로 꿰매고 털이 얇은 쪽은 안으로 꿰매는 것이었다. 공이 그것을 보고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졸렬한 장인이구나. 피견을 만든 것은 따뜻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제 얇은 털을 안에 꿰매고 두꺼운 털을 밖에 꿰매니, 따뜻함을 취하는 방법이 아니다.” 마침내 그 방식을 반대로 하게 하였다. 성품이 또한 추위를 잘 견디어, 비록 한겨울이라도 저고리 하나와 겹옷 하나를 입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일찍이 봄철에 작은 버선(小襪)³⁸을 신은 자를 보고 묻기를, “어찌 반드시 이것을 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찬 기운이 배로 들어갑니다.” 하였다. 공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배와 발은 서로 거리가 매우 먼데, 발이 차가운 것으로 해(害)가 배에 미친다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패관잡기(稗官雜記)》³⁹에서 인용】

주석:
35. 지사(知事):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정2품.
36. 모장(毛匠): 털가죽 제품을 만드는 장인.
37. 피견(披肩): 어깨에 걸치는 방한용 옷. 망토와 비슷하다.
38. 소말(小襪): 작은 버선. 덧버선이나 발목까지 오는 짧은 버선을 가리킬 수 있다.
39. 《패관잡기(稗官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설화집. 여러 인물의 일화와 사회상 등을 담고 있다. 이 일화들은 조원기의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검소함, 강인함을 보여준다.


원문:
趙二相元紀淸白有德, 質樸敦厚。 世傳公在銀臺, 適新掃理, 諸公曰: “此淸嚴⁴⁰近地, 何物之食, 而可當此臺之美好也?” 公曰: “雖食煮茨菰可也。” 一院大笑。 蓋公所嗜食, 而其質朴可知。 氓俗採野茨菰, 同黃精煮食, 而救飢荒, 處處有之。【《淸江瑣語》。】

번역문:
이상(二相)⁴¹ 조원기는 청백(淸白)하고 덕(德)이 있었으며, 질박(質樸)하고 돈후(敦厚)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공이 은대(銀臺)⁴²에 있을 때 마침 새로 청소를 하였는데, 여러 공(公)들이 말하였다. “이곳은 맑고 엄숙한⁴³ 지척의 땅⁴⁴이니, 어떤 음식을 먹어야 이 대(臺)의 아름다움에 걸맞겠는가?” 공이 말하였다. “비록 삶은 자고(茨菰)⁴⁵를 먹더라도 괜찮다.” 온 원(院)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대개 공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으니, 그 질박함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의 풍속에 들판의 자고를 캐어 황정(黃精)⁴⁶과 함께 삶아 먹으며 기근(飢荒)을 구제하였는데, 곳곳에 있었다.【《청강쇄어(淸江瑣語)》⁴⁷에서 인용】

주석:
40. [주-D003] 嚴 : 《대동야승(大東野乘)・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청강선생사제록(淸江先生思齋錄)》에는 “암(岩)”으로 되어 있다. '청암(淸岩)'은 '맑고 바위처럼 굳건함'을 뜻하며, '청엄(淸嚴)'은 '맑고 엄숙함'을 뜻한다. 둘 다 가능하나, 은대(승정원)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는 '청엄'이 조금 더 어울릴 수 있다.
41. 이상(二相): 좌참찬 또는 우참찬을 가리키는 말. 참찬은 의정부의 재상 중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제2의 재상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불렀다.
42.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임금의 비서 기관으로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43. 청엄(淸嚴): 맑고 엄숙함. 승정원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주석 [주-D003] 참조.
44. 근지(近地):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
45. 자고(茨菰): 택사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뿌리줄기(덩이줄기)를 식용한다. 소박하고 흔한 음식을 상징한다. 조원기가 이를 언급한 것은 그의 검소하고 소탈한 성품을 보여준다.
46. 황정(黃精): 둥굴레의 뿌리줄기. 구황식물(救荒植物)로 이용되었다.
47. 《청강쇄어(淸江瑣語)》: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이 지은 필기잡록. [주-D004] 有: 《대동야승・청강선생후청쇄어・청강선생사제록》에는 “위(爲)”로 되어 있다. '처처위지(處處爲之)'는 '곳곳에서 그렇게 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본문은 저본을 따라 '유지(有之)'로 번역하였다.



성몽정(成夢井)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成夢井【襄景公。】
字應卿, □□⁴⁸人。 成化辛卯生。 成宗二十年己酉司馬。 燕山二年丙辰, 魁庭試, 直赴戊午殿試。 歷舍人、典翰。 中廟反正, 參靖國功臣, 拜大司諫、吏曹參判, 封夏山君。 丁丑卒, 年四十七。

번역문:
성몽정(成夢井)【양경공(襄景公)⁴⁹이다.】
자는 응경(應卿)이고, □□⁵⁰ 사람이다. 성화(成化)⁵¹ 신묘년(1471)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20년 기유년(1489)에 사마시(司馬試)⁵²에 합격하였다. 연산군 2년 병진년(1496)에 정시(庭試)⁵³에서 장원하고, 곧바로 무오년(1498)의 전시(殿試)⁵⁴에 나아갔다. 사인(舍人)⁵⁵, 전한(典翰)⁵⁶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정국공신(靖國功臣)⁵⁷에 참여하였고, 대사간(大司諫), 이조참판(吏曹參判)⁵⁸에 제수되었으며, 하산군(夏山君)⁵⁹에 봉해졌다. 정축년(1517)에 졸(卒)하니, 나이 47세였다.

주석:
48. [주-D001] □□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창녕(昌寧)”으로 되어 있다. 본관이 창녕 성씨(昌寧 成氏)이다.
49. 양경공(襄景公): 성몽정의 시호. 양(襄)은 갑주(甲冑)의 공이 있음(甲冑有功), 또는 땅을 열어 공을 세움(辟地有功) 등을 의미하며, 경(景)은 의(義)로써 남을 바로잡음(義方正人), 또는 덕이 밝게 드러남(布德明定) 등을 의미한다. 정국공신 책록과 관련된 의미로 보인다.
50. □□: 주석 [주-D001]에 따라 '창녕(昌寧)'이다.
51. 성화(成化):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1465-1487).
52.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
53. 정시(庭試): 조선 시대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이나 사부학당(四部學堂) 등에 나아가 유생(儒生)들에게 보이던 비정규 과거 시험.
54. 전시(殿試): 임금이 참석하여 문관을 뽑던 과거 시험. 대과(大科)의 마지막 단계이다. '직부(直赴)'는 다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55. 사인(舍人): 여러 관청에 속했던 정4품에서 종6품까지의 관직. 여기서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정9품)이나 봉교(奉敎, 정7품) 등을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 정4품)에 이른 것을 포괄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56. 전한(典翰):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하관 직책. 부제학 다음가는 벼슬이다.
57. 정국공신(靖國功臣):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호. 성몽정은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58.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조(吏曹)의 버금 벼슬. 종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핵심 요직이다.
59. 하산군(夏山君): 성몽정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군(君)은 공신이나 왕족에게 주던 작위이다.


원문:
章敬王后升遐, 自內有促斂之命。 公以禮曹參判堅執不撓, 務從喪禮。 俄陞判尹, 臺官搆虛彈駁, 靜菴爲正言, 力稱孝友, 至三朔始遞。

번역문:
장경왕후(章敬王后)⁶⁰가 승하(昇遐)⁶¹하자, 안⁶²으로부터 염(斂)⁶³을 재촉하는 명이 있었다. 공이 예조참판(禮曹參判)⁶⁴으로서 굳게 주장하여 굽히지 않고 상례(喪禮)를 따르기에 힘썼다. 얼마 후 판윤(判尹)⁶⁵으로 승진하자, 대관(臺官)⁶⁶이 허위 사실을 꾸며 탄핵하고 반박하였는데, 정암(靜庵)⁶⁷이 정언(正言)으로서 그의 효우(孝友)⁶⁸를 힘써 칭찬하여 3개월 만에야 비로소 체직되었다.

주석:
60.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했다.
61. 승하(昇遐): 왕이나 왕비 등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62. 내(內): 대궐 안, 즉 왕실을 가리킨다.
63. 염(斂): 시신을 수습하여 옷을 입히고 이불로 싸는 절차. 상례의 중요한 과정이다. 왕실에서 이를 빨리 진행하려 했으나, 성몽정이 예법에 맞게 절차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64. 예조참판(禮曹參判): 예조(禮曹)의 버금 벼슬. 종2품. 국가의 의례, 교육, 외교 등을 담당했다. 상례는 예조의 소관 업무였다.
65. 판윤(判尹): 한성부(漢城府)의 으뜸 벼슬. 정2품. 수도의 행정을 총괄했다. 예조참판에서 판윤으로 옮긴 것이 승진으로 표현되었다.
66. 대관(臺官): 사헌부(司憲府)의 관리. 성몽정이 상례 절차를 지연시켰다고 탄핵했을 가능성이 있다.
67.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당시 사간원 정언이었다.
68. 효우(孝友):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 조광조가 성몽정의 평소 행실을 들어 변호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丙子, 入侍進言曰: “主上有志三代, 一復古制, 甚盛美也。 若不務實, 徒貽後世之譏, 如欲轉移風俗, 則莫若忠孝爲本。” 未幾, 有己卯之禍。

번역문:
병자년(1516)에 입시(入侍)⁶⁹하여 진언(進言)하였다. “주상(主上)께서 삼대(三代)⁷⁰를 본받으려는 뜻을 두시어 일체 옛 제도(古制)를 회복하시려는 것은 매우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만약 실질에 힘쓰지 않으면 한갓 후세의 비웃음만 남길 것이니, 만약 풍속을 바꾸고자 하신다면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묘사화(己卯之禍)⁷¹가 있었다.

주석:
69. 입시(入侍): 신하가 임금이 있는 곳에 나아가 모시는 것.
70. 삼대(三代):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시대로 여겨지는 하나라(夏), 상나라(商, 은나라殷), 주나라(周)를 가리킨다.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대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했다.
71. 기묘사화(己卯之禍): 1519년(중종 14)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勳舊派)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 세력을 제거한 사건. 성몽정은 이 사건 직전에 사망했으나, 그의 발언은 당시 사림들이 추구했던 이상 정치와 그 실현의 어려움을 시사한다.


원문:
居閑語及當世人物, 有以南衮爲稱首者, 公曰: “斯人才華雖可稱, 交結年少文士, 好爲延譽, 恐非君子人也。” 又曰: “柳洵在廢朝, 位首相, 不能率百官告慈殿, 行昌邑故事。 若假數月, 則國亡, 國亡, 身獨保乎? 金宏弼、鄭汝昌樂道人之善, 眞古之善人也。 姜渾爲護蕩等⁷²司提調, 極撰諸閣佳名, 以媚廢主, 文章雖富麗, 安足取也? 金馹孫文章浩瀚, 氣宇倜儻, 而片言隻字皆禍本。”

번역문:
한가로이 거처하며 당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곤(南衮)⁷³을 으뜸으로 칭찬하는 자가 있자, 공이 말하였다. “그 사람의 재주와 문채(才華)는 비록 칭찬할 만하나, 나이 어린 문사(文士)들과 교류하며 좋은 명예를 퍼뜨리기를 좋아하니, 군자(君子)다운 사람은 아닐까 염려된다.” 또 말하였다. “유순(柳洵)⁷⁴은 폐조(廢朝)⁷⁵ 때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능히 백관을 거느리고 자전(慈殿)⁷⁶에 아뢰어 창읍고사(昌邑故事)⁷⁷를 행하지 못하였다. 만약 몇 달을 빌려주었다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니, 나라가 망하면 자신만 홀로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김굉필(金宏弼)⁷⁸과 정여창(鄭汝昌)⁷⁹은 남의 선(善)을 말하기를 즐겼으니, 참으로 옛날의 선인(善人)이다. 강혼(姜渾)⁸⁰은 호탕등사(護蕩等司)⁸¹의 제조(提調)⁸²가 되어 여러 누각의 아름다운 이름을 극구 지어 폐주(廢主)에게 아첨하였으니, 문장이 비록 화려하나 어찌 취할 만하겠는가? 김일손(金馹孫)⁸³은 문장이 넓고 깊으며(浩瀚) 기개(氣宇)가 뛰어나지만(倜儻), 단편적인 말 한마디 글자 하나가 모두 화(禍)의 근본이었다.”

주석:
72. [주-D002] 護蕩等 : 《연산군일기》 12년 7월 1일 기록에 “전교하기를, ‘두탕호청사 제조(杜蕩護淸司提調)는 강혼(姜渾)과 같이 공무에 힘쓰는 사람을 가려서 차출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근거할 때 “두탕호청(杜蕩護淸)” 또는 “탕호등(蕩護等)”이 되어야 할 듯하다. '호탕등사(護蕩等司)'는 연산군이 설치한 유흥 관련 임시 관청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73. 남곤(南衮, 1471-1527): 조선 중기의 문신. 조광조 등 사림파와 대립하여 기묘사화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다. 성몽정은 그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명예를 추구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74. 유순(柳洵, 1441-1517):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75. 폐조(廢朝): 폐위된 임금의 조정. 연산군 시대를 가리킨다.
76. 자전(慈殿): 대비(大妃) 또는 왕대비(王大妃)를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연산군의 할머니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를 가리킬 수 있다.
77. 창읍고사(昌邑故事): 중국 전한(前漢) 때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가 황제가 되었으나 음란하고 무도하여 신하들이 상주하여 태후(太后)의 명으로 폐위시킨 고사. 유순이 연산군의 폭정을 막지 못하고 폐위를 주도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는 말이다.
78.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조광조의 스승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때 사사되었다. 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79.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과 함께 사림을 대표했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80. 강혼(姜渾, 1464-1519): 조선 전기의 문신.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문장을 통해 아첨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81. 호탕등사(護蕩等司): 주석 [주-D002] 참조. 연산군이 설치한 유흥 관련 임시 관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82. 제조(提調): 조선 시대 여러 관청에 두었던 임시 벼슬. 해당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83.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직의 문인으로, 스승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문재(文才)는 인정하지만, 필화(筆禍)를 자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인물평은 성몽정의 현실 정치에 대한 안목과 인물 감식안을 보여준다.


원문:
府院君柳洵、參贊李蓀、判書安琛、仁川君蔡壽、郡守柳澭俱以父執, 時尙康寧, 公倡諸子弟, 各扶鳩杖, 設耆英會于公之終南別墅, 觀者稱之。 每遇佳辰, 大開壽席, 盛集親黨, 侍母夫人, 說少時遊戲之事, 怡愉終日, 極歡而罷, 以此爲人間極樂云。 母夫人執用藤架之類, 必親自制造, 以悅母志。 位至參判猶然。 上有賜, 必袖以獻, 凡出使得珍味, 亦如是。 母夫人語人曰: “此兒之在腹也, 吾不憂。 其幼也, 衣以三綜布, 無慍色, 而今受報乃如此。” 一日, 母夫人思還舊莊, 公亦隨之, 因以乞養, 上召之還朝。

번역문:
부원군(府院君)⁸⁴ 유순(柳洵), 참찬(參贊) 이손(李蓀)⁸⁵, 판서(判書) 안침(安琛)⁸⁶, 인천군(仁川君)⁸⁷ 채수(蔡壽)⁸⁸, 군수(郡守) 유옹(柳澭)⁸⁹이 모두 부친의 친구(父執)⁹⁰로서 당시에 여전히 건강하였는데, 공이 여러 자제들을 이끌고 각각 비둘기 지팡이(鳩杖)⁹¹를 짚게 하고 공의 종남(終南)⁹² 별장에서 기영회(耆英會)⁹³를 열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칭찬하였다. 매번 좋은 날(佳辰)을 만나면 크게 수연(壽宴)을 열고 친척들을 성대히 모아 어머니를 모시고 어릴 적 놀던 일을 이야기하며 온종일 기뻐하고 즐거워하다가 매우 즐거워한 뒤에 파하였으니, 이것을 인간 세상의 극락(極樂)이라 여겼다고 한다. 어머니가 사용하시는 등나무 시렁(藤架) 같은 것을 반드시 친히 직접 만들어 어머니의 뜻을 기쁘게 하였다. 지위가 참판(參判)에 이르러서도 그러하였다. 임금의 하사품이 있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 어머니께 바쳤고, 무릇 사신으로 나갔다가 진귀한 음식을 얻으면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나는 근심하지 않았다. 그가 어릴 때 세 올 베(三綜布)⁹⁴ 옷을 입혀도 성내는 기색이 없었는데, 이제 받는 보답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옛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자 공 또한 따라가서, 이로 인해 봉양을 위해 사직하기를 청하니(乞養)⁹⁵, 상(上)께서 그를 불러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주석:
84. 부원군(府院君): 임금의 장인이나 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 여기서는 유순을 가리킨다.
85. 이손(李蓀, 1439-?): 조선 전기의 문신. 좌참찬 등을 역임했다.
86. 안침(安琛, 1445-1515): 조선 전기의 문신.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87. 인천군(仁川君): 군(君)의 작위를 받은 채수.
88. 채수(蔡壽, 1449-1515): 조선 전기의 문신. 인천군에 봉해졌다.
89. 유옹(柳澭): 조선 전기의 문신. 생몰년 미상. 군수를 지냈다.
90. 부집(父執): 아버지의 친구 또는 아버지뻘 되는 벗.
91. 구장(鳩杖): 비둘기 모양으로 장식한 지팡이. 예로부터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나라에서 하사하여 경로(敬老)의 뜻을 표했다.
92. 종남(終南): 종남산(終南山). 서울 남산(南山)의 다른 이름. 또는 남산 근처를 가리킨다.
93. 기영회(耆英會): 나이 많은 명사들의 모임. 중국 송(宋)나라 때 낙양(洛陽)의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등이 조직한 데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아버지 친구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열었음을 의미한다.
94. 삼종포(三綜布): 세 올의 실로 짠 베. 거친 옷감을 의미한다.
95. 걸양(乞養):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사양하거나 휴가를 청하는 것.


원문:
嘗於壁書“孝衰於妻子官怠於宦成病加於少愈禍生於驕盈淸心寡欲怡神養性忍快恥復”三十二字, 以自警省。【竝《潛谷舊錄》。】

번역문:
일찍이 벽에 “효도(孝)는 처자(妻子)에게서 쇠하고, 관직(官)은 벼슬살이가 익숙해짐(宦成)에 게을러지고, 병(病)은 조금 나았을 때(少愈) 더해지고, 화(禍)는 교만하고 자만함(驕盈)에서 생겨난다.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며(淸心寡欲), 정신을 기쁘게 하고 성품을 기르며(怡神養性), 속 시원한 것을 참고(忍快)⁹⁶ 보복을 부끄럽게 여긴다(恥復).”라는 32자를 써서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였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96. 인쾌(忍快): 속 시원한 일, 즉 하고 싶은 대로 하거나 분풀이하는 것을 참는다는 의미.


원문:
成夏山夢井才氣超邁, 雖性懶不事文墨, 然往往得意, 則頗有佳句。 嘗乘舟過楮子島, 仰見權上舍順衡江亭, 俯壓江潯, 空閉寥寂, 卸舟登臨, 倚欄長嘯, 酌數觥, 沈吟成一絶書壁間, 其末句云: “朱欄大抵多空寂, 携酒來憑是主人。” 嘗見白樂天詩曰“多少朱門鎖空宅, 主人到老⁹⁷不曾歸”, 司空曙詩云“黃金散盡敎歌舞, 留與他人樂少年”, 雖本此二詩, 然亦佳。【《思齋摭言》。】

번역문:
성하산(成夏山) 성몽정은 재기(才氣)가 매우 뛰어나, 비록 성품이 게을러 문묵(文墨)⁹⁸에 힘쓰지 않았으나, 때때로 뜻이 맞으면 자못 좋은 시구(佳句)가 있었다. 일찍이 배를 타고 저자도(楮子島)⁹⁹를 지나다가, 권상사(權上舍)¹⁰⁰ 순형(順衡)의 강가 정자(江亭)가 강가를 내리누르듯 서 있고 텅 비어 고요한 것을 우러러보고, 배에서 내려 올라가 난간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을 불고 몇 잔 술을 따르며 시름에 잠겨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벽 사이에 써 놓았는데, 그 마지막 구절에 이르기를, “붉은 난간은 대체로 텅 비어 고요함이 많으니, 술 가지고 와서 기대는 이 사람이 바로 주인일세.”라고 하였다. 일찍이 백낙천(白樂天)¹⁰¹의 시에 “얼마나 많은 붉은 대문 집들이 빈 채로 잠겨 있고, 주인은 늙도록¹⁰² 돌아오지 않았던가.”라고 한 것과, 사공서(司空曙)¹⁰³의 시에 “황금 다 흩어 노래하고 춤추게 했더니, 다른 사람이 소년 시절 즐기도록 남겨 두었네.”라고 한 것을 보았는데, 비록 이 두 시를 본떴으나 또한 아름답다.【《사재척언(思齋摭言)》¹⁰⁴에서 인용】

주석:
97. [주-D003] 老 : 《사재집(思齋集)・척언(摭言)》에는 “료(了)”로 되어 있다. '주인도로불증귀(主人到了不曾歸)'는 '주인이 도착해서는 일찍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는데, 문맥상 '늙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의 '도로(到老)'가 더 자연스럽다.
98. 문묵(文墨): 글과 먹. 즉 글짓기나 학문 연구를 의미한다.
99. 저자도(楮子島): 현재 서울 용산구와 마포구 사이 한강에 있던 섬. 조선 시대에 닥나무(楮)를 재배하던 곳이다.
100. 상사(上舍): 고려, 조선 시대에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를 높여 부르던 말.
101. 백낙천(白樂天): 중국 당(唐)나라의 대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 자는 낙천(樂天).
102. 도로(到老): 늙도록, 늙을 때까지. 주석 [주-D003] 참조.
103. 사공서(司空曙, 720?-790?):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104. 《사재척언(思齋摭言)》: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지은 수필집. 여러 인물과 사건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원문:
成夏山天資甚超穎, 詩文未嘗經意, 而出手必佳。 有《病懷賦》, 申企齋常書一通, 付壁而讀之, 李容齋亦言: “使兄力學以充其才, 則吾輩不敢望也。” 嘗小搆南麓, 有詩曰: “誰家有道可沖天? 料理終知却不然。 試向山中高枕臥, 此身閑處卽神仙。” 措意理達, 有警世意。 尙相每曰: “兄天性孝友, 其詩可採於《勝覽》、《東文選》而無愧, 時不見錄, 亦命也。”【《淸江瑣語》。】

번역문:
성하산(成夏山)은 천 tưất rất siêu việt, 시문(詩文)에 일찍이 마음을 쓰지 않았으나 손을 대면 반드시 아름다웠다. 《병회부(病懷賦)》¹⁰⁵가 있는데, 신기재(申企齋)¹⁰⁶가 늘 한 통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읽었으며, 이용재(李容齋)¹⁰⁷ 또한 말하기를, “만약 형(兄)께서 학문에 힘써 그 재주를 채웠다면 우리 무리는 감히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남산(南山) 기슭에 작은 집을 짓고¹⁰⁸ 시를 지어 말하기를, “누구 집에 도(道)가 있어 하늘에 닿을 수 있다 하는가? 헤아려 보니 마침내 도리어 그렇지 않음을 알겠네. 시험 삼아 산중에 가서 베개 높이 베고 누워 보니, 이 몸 한가한 곳이 바로 신선(神仙)일세.”라고 하였다. 뜻을 둠이 이치에 통달하여 세상을 경계하는 뜻이 있었다. 상상(尙相)¹⁰⁹이 매번 말하기를, “형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그 시는 《승람(勝覽)》¹¹⁰, 《동문선(東文選)》¹¹¹에 뽑히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터인데, 당시에 기록되지 못하였으니 또한 운명이다.”라고 하였다.【《청강쇄어(淸江瑣語)》에서 인용】

주석:
105. 《병회부(病懷賦)》: 병중의 회포를 읊은 부(賦). 성몽정의 작품으로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06. 신기재(申企齋):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107. 이용재(李容齋):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108. 소구남록(小搆南麓): 남산(南山) 기슭에 작은 집을 지음.
109. 상상(尙相): 상진(尙震, 1487-1567). 호는 염헌(恬軒).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성몽정과는 동서 사이이다.
110. 《승람(勝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가리킨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지리서로, 각 지역의 연혁, 인물, 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111. 《동문선(東文選)》: 신라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시문을 모아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편찬한 시문선집.



이사균(李思鈞)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思鈞【文剛公。】
字重卿, 號訥軒, □□¹¹²人。 燕山四年戊午登第, 中宗二年丁卯重試。 官至吏曹判書。

번역문:
이사균(李思鈞)【문강공(文剛公)¹¹³이다.】
자는 중경(重卿)이고, 호는 눌헌(訥軒)이며, □□¹¹⁴ 사람이다. 연산군 4년 무오년(1498)에 과거에 급제하고, 중종 2년 정묘년(1507)에 중시(重試)¹¹⁵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¹¹⁶에 이르렀다.

주석:
112. [주-D001] □□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경주(慶州)”로 되어 있다. 본관이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113. 문강공(文剛公): 이사균의 시호.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등을 의미하고, 강(剛)은 강하고 과감하며 결단성이 있음(彊果敢行), 또는 의(義)를 굳게 지킴(執義不屈) 등을 의미한다.
114. □□: 주석 [주-D001]에 따라 '경주(慶州)'이다.
115.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보이던 시험. 합격하면 품계를 올려주었다.
116.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핵심 요직이다.


원문:
李文剛思鈞骯髒, 不肯與時俯仰, 不容於己卯士類, 出補全州府尹。 及趙、金等被罪, 召拜副提學, 時輩意思鈞必懷憾於彼人, 而進用之也。 及來, 辭職曰: “光祖等被罪事, 臣不能詳知, 必是欲爲善事而不能無過中, 憎嫉者多而然也。 又伏見傳光祖等之敎, 竊自思之, 自上若知此人等只爲國事, 而無他念, 則其罪當末減而不減, 恐上心有所疑阻也。 賞罰雖加於匹夫, 若有僭濫, 則大累君德也。 古人有一言悟主者, 如臣無狀, 安有回天之力乎? 敢辭。” 上不許。 思鈞非徒不附衮等之論, 救光祖等甚力, 正言趙琛擊去之。 後爲吏判, 又忤於金安老, 除慶尙監司。 安老方爲相, 出餞於興仁門外, 思鈞聞之, 由崇禮門而行, 其倔强如此。【《東閣雜記》。】

번역문:
문강공(文剛公) 이사균은 강직하여(骯髒)¹¹⁷ 시세(時勢)에 영합하려 하지 않아(不肯與時俯仰) 기묘사림(己卯士類)¹¹⁸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외직인 전주부윤(全州府尹)¹¹⁹으로 보임되었다.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¹²⁰ 등이 죄를 입게 되자, 부름을 받아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무리들은 이사균이 반드시 저 사람들¹²¹에게 유감을 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등용한 것이었다. 그가 와서는 사직하며 아뢰었다. “광조(光祖) 등이 죄를 입은 일은 신(臣)이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필시 좋은 일을 하고자 하다가 중도에 잘못됨이 없을 수 없었는데 미워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또 삼가 광조 등을 죄주라는 전교(傳敎)¹²²를 보니, 저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상(上)께서 만약 이 사람들이 단지 국사(國事)를 위할 뿐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아신다면 그 죄가 마땅히 끝까지 가지 않고 감해져야 하는데 감해지지 않으니, 상의 마음에 의심하고 막히는 바가 있는 듯합니다. 상벌(賞罰)이 비록 필부(匹夫)에게 가해지더라도 만약 참람(僭濫)함이 있다면 크게 군주(君主)의 덕(德)에 누(累)가 됩니다. 옛사람 중에 한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친 자가 있다지만, 신과 같이 못난 자가 어찌 하늘의 뜻을 돌릴 힘이 있겠습니까? 감히 사직합니다.”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사균은 남곤(南衮)¹²³ 등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조 등을 구원하는 데 매우 힘썼으므로 정언(正言) 조침(趙琛)¹²⁴이 그를 공격하여 내쫓았다. 후에 이조판서(吏判)가 되었을 때 또 김안로(金安老)¹²⁵의 뜻을 거슬러 경상감사(慶尙監司)¹²⁶에 제수되었다. 김안로가 마침 재상(相)이 되어 흥인문(興仁門)¹²⁷ 밖에서 전송연(餞送宴)을 열어주려 하였는데, 이사균은 이를 듣고 숭례문(崇禮門)¹²⁸으로 나가니, 그 고집이 세고 굳셈(倔强)이 이와 같았다.【《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인용】

주석:
117. 항장(骯髒): 성품이 강직하고 굳세어 세속에 굽히지 않음을 의미한다.
118. 기묘사류(己卯士類): 기묘사화(1519) 때 화를 입은 사림(士林)들을 가리킨다. 이사균은 조광조 등 급진 사림과는 거리를 두었기에 그들에게 용납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119. 전주부윤(全州府尹): 전주(全州)의 수령. 종2품.
120. 조(趙), 김(金) 등: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핵심 인물들을 가리킨다.
121. 피인(彼人): 저 사람들. 즉, 조광조 등 기묘사림을 가리킨다. 당시 정권을 잡은 훈구파는 이사균이 사림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사림을 비판할 것이라 기대하고 등용했다는 것이다.
122. 전광조등지교(傳光祖等之敎): 조광조 등을 처벌하라는 임금의 명령.
123. 곤등(衮等): 남곤(南衮) 등을 가리킨다. 기묘사화를 주도한 훈구 세력.
124. 조침(趙琛): 생몰년 미상. 중종 때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25.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의 외척으로 권력을 잡고 많은 사람을 숙청했다. 작서(灼鼠)의 변(變) 등으로 권세를 누렸으나 후에 사사되었다.
126. 경상감사(慶尙監司):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
127. 흥인문(興仁門): 한양 도성의 동쪽 대문(동대문).
128. 숭례문(崇禮門): 한양 도성의 남쪽 대문(남대문). 김안로의 전송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문으로 나간 것이다. 이 일화들은 이사균의 강직함과 소신, 권력에 굴하지 않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원문:
以副提學承召上京, 路遇趙光祖, 執手款語曰: “子於《中庸》, 尙未熟讀, 況可做唐、虞事業乎? 《中庸》不言乎? ‘愚以好自用, 賤而好自專, 生乎今之世, 反古之道, 未有不災及其身也’, 宜乎子之不免也。 子今年少, 正好讀書, 努力自愛。”【《石潭日記》。】

번역문:
부제학(副提學)으로서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갈 때, 길에서 조광조(趙光祖)¹²⁹를 만나 손을 잡고 간곡히 말하였다. “그대는 《중용(中庸)》¹³⁰조차 아직 익숙하게 읽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당우(唐虞)¹³¹의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 《중용》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어리석으면서 자기 생각대로 하기를 좋아하며, 비천하면서 자기 멋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날의 도(道)를 거스르면 그 몸에 재앙이 미치지 않음이 없다’¹³²고 하였으니, 그대가 화(禍)를 면하지 못한 것이 마땅하다. 그대는 지금 나이가 젊으니 바로 책 읽기에 좋을 때이다. 노력하고 스스로를 아끼라.”【《석담일기(石潭日記)》¹³³에서 인용】

주석:
129. 조광조(趙光祖): 기묘사화로 유배 가는 길에 이사균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130. 《중용(中庸)》: 사서(四書) 중 하나.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성리학(性理學)의 중요한 경전이다.
131. 당우(唐虞):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군주로 꼽히는 요(堯)임금(도당씨陶唐氏)과 순(舜)임금(유우씨有虞氏)의 시대를 가리킨다. 조광조가 추구했던 이상 정치를 의미한다.
132. ‘愚以好自用……及其身也’: 《중용》 제28장에 나오는 구절. 자신의 능력과 분수를 모르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재앙을 당하게 된다는 경고이다. 이사균은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급진적이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133. 《석담일기(石潭日記)》: 석담(石潭) 이윤경(李潤慶, 1498-1562)이 지은 일기 형식의 기록. 인물 일화 등을 담고 있다.

이현보(李賢輔)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賢輔【孝節公。】
字棐仲, 號聾巖。 本永川人, 移居禮安。 成化丁亥生。 燕山乙卯司馬, 戊午登第。 薦入史局, 歷兩司、春坊、副提學、慶尙觀察使, 退老于鄕。 官至崇政、知中樞。 明宗乙卯卒, 年八十九。
번역문:
이현보(李賢輔)【효절공(孝節公)¹이다.】
자는 비중(棐仲)이고, 호는 농암(聾巖)이다. 본관(本貫)은 영천(永川) 사람인데, 예안(禮安)²으로 옮겨 살았다. 성화(成化) 정해년(1467)³에 태어났다. 연산군(燕山君) 을묘년(1495)에 사마시(司馬試)⁴에 합격하고, 무오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추천되어 사국(史局)⁵에 들어갔고, 양사(兩司)⁶, 춘방(春坊)⁷, 부제학(副提學)⁸, 경상도 관찰사(慶尙觀察使)⁹를 역임하였으며, 향리(鄕里)로 물러나 노년을 보냈다. 관직은 숭정대부(崇政大夫)¹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¹¹에 이르렀다. 명종(明宗) 을묘년(1555)에 졸(卒)하니, 나이 89세였다.
주석:
효절공(孝節公): 이현보의 시호(諡號). 효(孝)는 부모를 지극히 섬김(至事父母), 절(節)은 지조를 굳게 지킴(堅固志操) 등을 의미한다.
예안(禮安):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 이현보는 영천에서 태어났으나 이후 예안으로 이주하여 그곳이 생활 근거지가 되었다.
성화(成化) 정해년(丁亥年): 성화는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성화 정해년은 1467년(조선 세조 13년)이다.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 소과(小科)라고도 한다. 여기에 합격해야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나 대과(문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 등 역사 편찬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나 부서를 가리킨다. 주로 예문관(藝文館) 관원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과 감찰 기능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춘방(春坊):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부제학(副提學):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 직위. 제학(提學) 다음가는 자리로,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중요한 학술 관직이었다.
경상도 관찰사(慶尙觀察使): 경상도의 최고 행정, 사법, 군사 책임자. 종2품.
숭정대부(崇政大夫): 조선 시대 정1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문관에게 주어졌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중추부(中樞府)의 정2품 관직. 중추부는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이현보는 실제로 직무를 맡기보다는 은퇴 후 예우 차원에서 이 직함을 받은 것이다.

원문:
公生而英邁, 骨相不凡。 爽宕無拘檢, 好弋獵, 殊不專力於學業。 弱冠遊鄕校, 乃始發憤讀書, 爲詞章種¹²績, 不見其勞苦, 而功倍於他人。 其爲程文, 語多警拔, 爲儕¹³輩所推。
번역문: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뛰어났으며(英邁), 골상(骨相)¹⁴이 평범하지 않았다. 성품이 시원시원하고 거리낌이 없어(爽宕無拘檢)¹⁵ 활쏘기와 사냥(弋獵)을 좋아하였고, 자못 학업에만 전념하지는 않았다. 약관(弱冠)¹⁶에 향교(鄕校)¹⁷에 유학(遊學)하면서 비로소 발분(發憤)하여 글을 읽어, 사장(詞章)¹⁸에 공적(功績)을 쌓았는데¹⁹, 그 노고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공은 다른 사람보다 배가 되었다. 그가 지은 정문(程文)²⁰은 뛰어난 구절(警拔)이 많아 동배(儕輩)들에게 추앙받았다.
주석:
12. [주-D001] 種 : 저본(底本)에는 “조(組)”로 되어 있다. 《농암집(聾巖集)・행장(行狀)》 및 《퇴계집(退溪集)・숭정대부……농암이선생행장(崇政大夫……聾巖李先生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종적(種績)'은 공적을 심어 가꾼다는 의미로, 학문이나 사업에서 공을 쌓음을 뜻한다. '조적(組績)'은 베를 짜거나 실을 엮는다는 의미 외에 문장을 짓는다는 뜻도 있으나, 문맥상 '種績'이 자연스럽다.
13. [주-D001] 儕 : 저본(底本)에는 “제(濟)”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농암집・눌재선생행장(訥齋先生行狀)》(※訥齋先生行狀이 아니라 聾巖先生行狀의 오기로 보임)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제배(儕輩)'는 동년배나 동료를 뜻한다.
14. 골상(骨相): 뼈대와 생김새. 사람의 됨됨이나 장래성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15. 상탕무구검(爽宕無拘檢): 성격이 시원스럽고 호방하여 작은 일에 얽매이거나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음.
16.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를 가리키는 말.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二十曰弱, 冠"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
17. 향교(鄕校): 고려, 조선 시대에 지방 각 부목군현(府牧郡縣)에 설립된 관학(官學) 교육기관.
18. 사장(詞章): 시(詩), 부(賦), 문(文) 등 문학 작품을 짓는 일 또는 그 작품.
19. 사장종적(詞章種績): 문학 분야에서 공적을 쌓음. 주석 [주-D001] 참조.
20. 정문(程文): 과문(科文)이라고도 하며, 과거 시험에서 요구하는 격식에 맞추어 쓴 글.

원문:
拜司諫院正言。 一日, 公入閤, 論書筵官所失, 廢主方讎視言官, 乃因事發怒曰: “諫官有聞見, 所當卽啓, 淹至翌日乃啓, 可乎?” 命下禁獄, 推配安東府安奇驛。
번역문: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²¹에 제수되었다. 하루는 공(公)이 합문(閤門)²²에 들어가 서연관(書筵官)²³의 잘못을 논하였는데, 폐주(廢主)²⁴가 마침 언관(言官)²⁵을 원수처럼 보던 터라, 이 일로 인하여 노하여 말하였다. “간관(諫官)이 듣고 본 것이 있으면 마땅히 즉시 아뢰어야 하는데, 다음 날에 이르러서야 아뢰는 것이 가한가?” 명하여 금부(禁府)²⁶의 옥에 가두고 안동부(安東府) 안기역(安奇驛)²⁷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推配).
주석:
21.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간원의 정6품 관직.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22. 합(閤): 대궐의 문. 또는 조정(朝廷)을 의미한다. '입합(入閤)'은 대궐에 들어감을 뜻한다.
23. 서연관(書筵官): 서연(書筵)을 담당하는 관리. 서연은 왕세자의 교육을 위한 경연(經筵)을 말한다.
24. 폐주(廢主): 폐위된 임금.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을 가리킨다. 연산군은 언관들의 간언을 매우 싫어하고 탄압했다.
25. 언관(言官): 임금에게 간언하는 직책을 맡은 관리.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를 가리킨다.
26. 금부(禁府): 의금부(義禁府)의 약칭. 임금의 명을 받아 중죄인을 다스리던 사법 기관이다.
27. 안기역(安奇驛): 안동부에 속했던 역(驛). 역은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과 말을 제공하던 곳으로, 죄인을 유배 보내 관리하게 하기도 했다. '추배(推配)'는 죄인을 심문한 뒤 형을 확정하여 귀양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乙丑, 廢主追仇近前之請, 而不記公姓名曰: “彼時檢閱, 鐵面而髥者是也。” 乃復追下禁府獄。 于時貴賤庶枉, 縲係滿圄, 上荒下慢, 不以時考問。 在獄凡七十餘日, 而一朝忽被放命, 人莫知所以然。 其實有一衛士不謹執旗者係囚, 其於啓單, 名在公次, 御筆點放於此人, 而誤下於公。 公旣出獄, 則例還元配所, 至丙寅靖國而放還。 夫公之爲史官也, 昏朝亂政, 隨事直書者多, 加有忤旨之事, 而其追獄又出於史禍慘酷之餘, 人皆爲公危之, 卒之得脫於無妄如此, 豈非天耶?
번역문:
을축년(1505)에 폐주가 가까운 이전의 간청(近前之請)²⁸을 원망하여 추궁하면서 공의 성명을 기억하지 못하고 말하였다. “그때 검열(檢閱)²⁹로서, 얼굴이 검고 수염이 많은 자가 바로 그 자이다.” 이에 다시 금부 옥에 잡아 가두었다. 이때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죄 없이 억울하게(庶枉)³⁰ 잡혀 온 자들이 감옥에 가득 찼으며(縲係滿圄)³¹, 위(임금)는 황음(荒淫)하고 아래(관리)는 태만하여 제때에 고문(考問)³²하지 않았다. 옥에 있은 지 무릇 70여 일 만에 하루아침에 갑자기 석방 명령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실은 기(旗)를 조심성 없이 잘못 든 위사(衛士) 한 명이 죄수로 잡혀 있었는데, 그 아뢰는 명단(啓單)³³에 이름이 공의 다음에 있었다. 어필(御筆)³⁴로 이 사람에게 석방을 점찍었는데(點放), 잘못하여 공에게 내려졌던 것이다. 공이 이미 출옥하였으므로, 관례에 따라 원래의 유배지(元配所)로 돌아갔다가 병인년(1506) 정국(靖國)³⁵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무릇 공이 사관(史官)³⁶이 되었을 때, 혼암한 조정(昏朝)의 어지러운 정사(亂政)에 대해 일마다 사실대로 기록한 것(直書)이 많았고, 게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일(忤旨之事)이 있었는데, 그 다시 옥에 갇힌 것(追獄) 또한 사화(史禍)³⁷가 참혹했던 끝에 일어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마침내 이처럼 뜻하지 않은 일(無妄)³⁸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주석:
28. 근전지청(近前之請): 얼마 전의 간청. 앞서 정언 시절 서연관의 잘못을 논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산 일을 가리킨다.
29. 검열(檢閱): 춘추관(春秋館)의 정9품 관직. 사초(史草)를 정리하고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현보는 무오년(1498)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30. 서왕(庶枉): 거의 억울함. 죄 없이 억울하게 잡혀 온 경우가 많았음을 시사한다.
31. 유사만오(縲係滿圄): 죄수들이 감옥에 가득 참. '유(縲)'는 죄인을 묶는 포승줄, '계(係)'는 묶이다, '오(圄)'는 감옥을 뜻한다.
32. 고문(考問): 죄상을 조사하여 신문함.
33. 계단(啓單): 임금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명단. 죄수 명단을 의미한다.
34. 어필(御筆): 임금이 직접 쓴 글씨.
35. 병인정국(丙寅靖國): 병인년(1506)에 일어난 중종반정(中宗反正)을 가리킨다.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中宗)이 즉위하면서 연산군 때 억울하게 화를 입었던 사람들이 석방되었다.
36. 사관(史官):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 주로 예문관의 관직을 의미한다.
37. 사화(史禍): 사관(史官)이 사실을 기록한 것 때문에 입는 화. 특히 조선 시대에는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등 사림(士林) 세력이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사건들을 가리킨다. 이현보가 다시 투옥된 것은 갑자사화의 여파로 보인다.
38. 무망(無妄): 뜻하지 않은 재앙이나 뜻밖에 일어난 일. 여기서는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가 뜻밖에 풀려난 상황을 가리킨다.

원문:
拜司憲府持平, 遇事鯁直不撓, 時人號公爲燒酒陶甁, 謂外黭然而內淸烈也。
번역문: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³⁹에 제수되었는데, 일을 당하면 강직하여(鯁直) 굽히지 않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공을 ‘소주 담은 질그릇 병(燒酒陶甁)’이라 불렀으니, 이는 겉은 검소하고 투박하지만(黭然)⁴⁰ 속은 맑고 매섭기(淸烈) 때문이었다.
주석:
39.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헌부의 정5품 관직.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임무를 맡았다.
40. 엄연(黭然): 검은 빛깔을 띠는 모양. 질그릇처럼 겉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함을 비유한다.
41. 청렬(淸烈): 맑고 깨끗하며 매섭거나 강직함. 소주의 특성에 비유하여 이현보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다.

원문:
公天性孝友, 爲親乞外, 奉養備至。 具慶在堂, 子孫滿前, 愛日之誠, 終始無歉。 鄕多老壽之人, 嘗爲九老會, 以悅親心。 其在安東, 大設養老宴⁴², 奉迎兩親, 作內外宴主, 公執子弟禮, 奉觴上壽, 觀者皆歎息泣下, 以爲古今所罕。
번역문:
공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어(孝友), 어버이를 위해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봉양(奉養)을 지극히 하였다. 부모님이 모두 생존해 계시고(具慶在堂)⁴³, 자손들이 앞에 가득한 가운데, 날을 아껴 효도하는(愛日)⁴⁴ 정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고향에 장수한 노인이 많아 일찍이 구로회(九老會)⁴⁵를 만들어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안동(安東)에 있을 때는 양로연(養老宴)을 크게 베풀어 양친(兩親)을 받들어 맞이하여 안팎 잔치(內外宴)의 주인이 되게 하고, 공은 자제(子弟)의 예(禮)를 행하며 술잔을 받들어 장수를 빌자(奉觴上壽), 보는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눈물을 흘려 고금에 드문 일이라고 여겼다.
주석:
42. [주-D002] 宴 : 《농암집・행장》 및 《퇴계집・숭정대부……농암이선생행장》에는 “연(筵)”으로 되어 있다. 연(宴)과 연(筵) 모두 잔치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43. 구경재당(具慶在堂): 부모님이 모두 생존해 계심. 경사스러움(慶)을 갖추었다(具)는 의미이다.
44. 애일(愛日): 날(시간)을 아끼고 소중히 여김. 여기서는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여 효도에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45. 구로회(九老會): 장수한 노인들의 모임.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낙양(洛陽)에서 아홉 노인과 함께 향산(香山)에서 모임을 가진 고사에서 유래했다. 이현보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고향 노인들을 초청하여 이러한 모임을 열었다.

원문:
公性本恬退, 不樂榮利。 曾於宅邊, 構明農堂, 壁⁴⁶畫《淵明歸去來圖》, 人固知公志之有在。 又於是時, 計逾致仕之年已數載, 據禮則爲晩, 故力求辭退, 而公体力康健, 聰明不減, 故上眷不衰, 時議亦以爲不當去。 公謂: “如是, 終無遂志之日, 與其因循悶抑, 終身而冒處, 曷若權宜善處, 以求合古者臣子以禮進退之道乎?” 故自庚子, 請暇請浴, 期於身退而後已, 玆非逐例要名者所可同日語也。
번역문:
공은 성품이 본래 담박하고 물러나기를 좋아하여(恬退), 영리(榮利)를 즐거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집 주변에 명농당(明農堂)⁴⁷을 짓고, 벽(壁)에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도(歸去來圖)〉⁴⁸를 그려두니, 사람들이 진실로 공의 뜻이 거기에 있음을 알았다. 또한 이때에 이르러 치사(致仕)⁴⁹할 나이를 넘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어, 예법(禮法)에 의거하면 늦었으므로 힘써 사퇴(辭退)하고자 하였으나, 공의 체력(体力)이 강건하고 총명(聰明)함이 줄어들지 않았으므로 상(上)의 총애(眷)가 쇠하지 않았고 당시의 여론(時議) 또한 마땅히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공이 말하였다. “이와 같다면 끝내 뜻을 이룰 날이 없을 것이니, 옛 관습을 따라 답답하게 억눌린 채(因循悶抑) 종신토록 관직을 탐하여 머무르기(冒處)보다는, 어찌 임시방편으로 잘 처신하여(權宜善處) 옛날 신하된 자로서 예(禮)로써 나아가고 물러나던 도(道)에 부합하기를 구하는 것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경자년(1540)⁵⁰부터 휴가를 청하고 목욕을 청하며(請暇請浴)⁵¹, 몸이 물러난 뒤에야 그만두기를 기약하였으니, 이는 관례를 따르며 명예를 구하는(逐例要名) 자들과는 같은 날에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주석:
46. [주-D003] 壁 : 저본(底本)에는 “벽(辟)”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농암집・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벽(壁)'은 벽을 의미한다.
47. 명농당(明農堂): 이현보가 예안에 지은 당(堂)의 이름. 농사에 힘쓰겠다는 뜻을 담고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48. 〈귀거래도(歸去來圖)〉: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정을 읊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내용을 그린 그림. 은거(隱居)와 탈속(脫俗)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49.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 조선 시대에는 보통 70세를 기준으로 했다.
50. 경자년(庚子年): 1540년(중종 35). 이때 이현보의 나이는 74세였다.
51. 청가청욕(請暇請浴): 휴가를 청하고 목욕하기를 청함.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완곡하게 요청하는 표현이다. 고대 중국에서 관리들이 정기적으로 휴가를 얻어 목욕하며 쉬었던 데서 유래했다.

원문:
上仁廟疏曰: “《書》曰: ‘若生子, 罔不在厥初生, 自貽哲命。’ 今殿下新摠萬機, 命哲命吉凶, 正在今日, 可不勉哉? 先儒有言曰: ‘創業易, 守成難。’ 《周書》亦曰: ‘遺大投艱于朕身。’ 先王以仁聖之資, 乘亂政之餘, 憂勤宵旰, 多歷四十年之久, 號稱治平無事, 而致治之效, 有未盡⁵²焉者多。 以此遺之投之於殿下, 殿下幸勿以盈成爲恃, 而艱大爲念, 因先王已盡未盡之政, 加今日善繼善述之功, 孜孜無怠, 不愆不忘, 以盡重熙之績, 則治化之美, 豈不增光于前烈乎? 雖然, 爲治之要, 在乎得人, 得人之本, 則又在乎人主之一心, 其要不過曰明與信而已。 明以辨之於授任之初, 信以委之於旣任之後, 待之誠而任之專, 明揚布列, 展其所抱, 則向之所云治效之未盡者, 何難盡效? 先王亦知以此爲重, 好賢樂士, 無異於古之聖王, 而始以堯、舜之難, 或有明信之未至, 不能無賢邪之相混, 任用之不終, 終不得無悔焉。 此殿下耳目之所及也, 可不戒哉? 是以古人之陳戒其君也, 必曰: ‘疑之勿任, 任之勿疑。’ 必曰: ‘其難其愼, 惟和惟一。’ 臣亦以此爲殿下初政獻焉。”
번역문:
인종(仁宗)⁵³께 올린 상소(疏)에서 아뢰었다. “《서경(書經)》⁵⁴에 이르기를 ‘갓난아이를 기름에 그 처음 태어났을 때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스스로 밝은 명(哲命)을 주어야 한다⁵⁵’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 새로 만기(萬機)⁵⁶를 총괄하시니, 명철(命哲)과 길흉(吉凶)을 명하는 것이 바로 오늘에 있으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유(先儒)의 말에 ‘창업(創業)은 쉽고 수성(守成)은 어렵다’고 하였고, 《주서(周書)》⁵⁷에도 또한 ‘큰 것을 남기고 어려운 것을 내 몸에 던지셨다’고 하였습니다. 선왕(先王)⁵⁸께서 인성(仁聖)의 자질로 난정(亂政)의 뒷시대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憂勤宵旰)⁵⁹ 힘쓰신 지 40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시어 치평무사(治平無事)⁶⁰하다고 일컬어졌으나, 다스림을 이룬 효과(致治之效)가 미진(未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를 전하께 남기시고 던지셨으니, 전하께서는 부디 이루어진 것(盈成)을 믿지 마시고 어렵고 큰 것(艱大)을 염려하시어, 선왕께서 이미 다하셨거나 미처 다하지 못하신 정사(政事)에 오늘날 잘 계승하고 잘 이어나가는(善繼善述)⁶¹ 공(功)을 더하시고, 부지런히 힘쓰고 게으르지 않으며(孜孜無怠) 허물을 저지르지 않고 잊지 않음으로써(不愆不忘), 거듭 빛나는(重熙)⁶² 공적을 다하신다면, 교화(治化)의 아름다움이 어찌 이전의 공렬(前烈)⁶³에 빛을 더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다스림의 요체(要體)는 인재를 얻는 데(得人) 있고, 인재를 얻는 근본은 또한 군주(人主)의 한 마음에 달려 있으니, 그 요체는 명(明)과 신(信)이라 말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명철함으로 임무를 맡기는 초기에 분별하고, 신의로써 이미 맡긴 뒤에 위임하여, 대하기를 성실히 하고 맡기기를 오로지 하여, 밝게 등용하여 널리 펼쳐(明揚布列) 그 포부(所抱)를 펴게 한다면, 앞서 말한 바 다스림의 효과가 미진했던 것을 어찌 다 이루기 어렵겠습니까? 선왕께서도 이로써 중요함을 삼아야 함을 아시어, 현자(賢者)를 좋아하고 선비를 즐거워함(好賢樂士)이 옛 성왕(聖王)과 다름이 없으셨으나, 처음에는 요순(堯舜)의 어려움⁶⁴으로써 혹 명철함과 신의가 미치지 못한 점이 있어 현명한 이와 사악한 이(賢邪)가 서로 뒤섞임을 없게 하지 못하였고, 임용(任用)을 끝까지 하지 못하여 마침내 후회함이 없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신 바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옛사람이 그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진술할 때에는 반드시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고, 반드시 ‘그 어려움을 생각하고 그 신중함을 생각하며, 오직 화합하고 오직 한결같이 하라⁶⁵’고 하였습니다. 신(臣) 또한 이로써 전하의 초기 정사(初政)에 바칩니다.”
주석:
52. [주-D004] 盡 : 《퇴계집・숭정대부……농암이선생행장》 및 《인종실록》 1년 6월 15일 기록에는 “진(臻)”으로 되어 있다. '진(臻)'은 '이르다, 도달하다'는 의미로, '미진(未臻)'은 '아직 이르지 못함, 완성되지 못함'을 뜻한다. '미진(未盡)'과 의미가 유사하다.
53. 인종(仁宗):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1545). 중종의 맏아들. 재위 기간이 8개월에 불과했다. 이 상소는 인종 즉위 직후인 1545년(인종 1) 6월에 올린 것이다.
54. 《서경(書經)》: 유교의 5경(五經) 중 하나. 고대 중국의 정치 기록과 문서를 모은 책.
55. 若生子……哲命: 《서경》 〈강고(康誥)〉편에 나오는 구절. 자녀 교육은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하며, 스스로 밝은 덕을 갖추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새로 즉위한 인종에게 처음부터 정사에 힘쓸 것을 권면하는 비유로 사용되었다.
56. 만기(萬機): 임금이 처리해야 할 온갖 많은 정무(政務).
57. 《주서(周書)》: 《서경》의 한 편명. 또는 주(周)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을 통칭하기도 한다. 인용된 구절 "遺大投艱于朕身"은 주나라 성왕(成王)이 자신에게 큰 과업과 어려움이 주어졌다고 말한 내용으로, 임금의 책임과 의무가 막중함을 뜻한다.
58. 선왕(先王): 돌아가신 이전 임금. 여기서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을 가리킨다.
59. 우근소간(憂勤宵旰): 나라 일을 걱정하고 부지런히 힘쓰느라 밤늦게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남. 임금이 정사에 매우 힘쓰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 '소(宵)'는 밤, '간(旰)'은 저물녘을 뜻한다.
60. 치평무사(治平無事): 나라가 잘 다스려져 태평하고 별다른 일이 없음.
61. 선계선술(善繼善述): 선대의 뜻과 사업을 잘 이어받고 잘 발전시킴. 《예기(禮記)》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이다.
62. 중희(重熙): 거듭하여 빛남. 공적이나 덕망이 계속 이어져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63. 전렬(前烈): 이전 시대의 공적이나 업적. 여기서는 선왕인 중종의 업적을 가리킨다.
64. 요순지난(堯舜之難): 요(堯)임금과 순(舜)임금도 어렵게 여겼다는 뜻.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하는 것이 매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고요모(皋陶謨)〉에 "知人則哲, 能官人. 安民則惠, 黎民懷之. 能哲而惠, 何憂乎驩兜? 何遷乎有苗? 何畏乎巧言令色孔壬?" (사람을 알아보면 명철해져 능히 사람을 관직에 둘 수 있습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은혜로워져 여민(黎民)들이 그를 생각합니다. 능히 명철하고 은혜로우면 어찌 환두(驩兜)를 걱정하며, 어찌 유묘(有苗)를 내쫓으며, 어찌 교묘한 말과 꾸민 얼굴빛과 심히 간악한 자(孔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라고 한 후, 제요왈(帝堯曰) "俞! 咸若時, 惟帝其難之." (요임금이 말하길, "옳다! 다 이와 같이 한다면 오직 제왕이라도 그 어려울 것이다.") 라고 나온다.
65. 其難其愼, 惟和惟一: 《서경》 〈대우모(大禹謨)〉편에 순(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당부한 말 중 일부. 정사를 행함에 있어 그 어려움을 알고 신중히 하며, 화합하고 한 마음으로 해야 함을 강조한다.

원문:
大司諫鄭公裕啓曰: “李賢輔, 國之耆德。 今雖退老, 體力猶健, 苟可諭召, 宜可以致, 亦必有陳獻之益。” 上命政院下書褒美, 且令乘驛赴闕。 公惶惕不敢當, 乃上箋辭謝, 仍言曰: “殿下聽諫一事, 殊⁶⁶歉於如流之美。 前日禪科之復, 寺院之修, 臺諫、侍從, 以至館學儒生, 終歲爭之, 而不得請, 新立科條, 太似浩繁, 亦諫而不見納。 夫異端之於吾道, 相爲消長, 貽厥之謀, 不可不念。 孟子曰: ‘遵先王之法而過者, 未之有也。’ 韓愈⁶⁷亦曰: ‘政令之改, 利於其舊不什, 則不可爲已。’ 臣不知新立之條利於其舊如何, 而亦不知奉行之一一無弊歟? 臺諫之職, 古人以木之從繩、水之鑑⁶⁸貌比焉, 蓋非繩不直, 非水難鑑。 方今忠言讜論, 多有缺望之時, 無乃殿下向善之心, 有所間斷而然歟?” 識者見之, 謂“疏言簡當, 眞得老成告君之體”云。
번역문:
대사간(大司諫) 정공 유(鄭公裕)⁶⁹가 아뢰었다. “이현보는 나라의 기덕(耆德)⁷⁰입니다. 지금 비록 물러나 노년을 보내고 있으나 체력이 아직 강건하니, 진실로 타일러 부르시면(諭召) 마땅히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반드시 아뢰어 도움이 될 점(陳獻之益)이 있을 것입니다.” 상(上)⁷¹께서 정원(政院)⁷²에 명하여 글을 내려 포상하고 아름답게 여김을 표하고(褒美), 또한 역마(驛馬)를 타고 대궐로赴闕) 오도록 하였다. 공이 황송하고 두려워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이에 전문(箋文)을 올려 사양하며, 이어서 아뢰었다. “전하의 간언을 듣는(聽諫) 한 가지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움(如流之美)⁷³에 자못 부족함(殊歉)⁷⁴이 있습니다. 전일(前日) 선과(禪科)⁷⁵의 부활과 사원(寺院)의 수리(修)에 대하여 대간(臺諫)⁷⁶, 시종(侍從)⁷⁷으로부터 관학(館學)⁷⁸의 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한 해가 끝나도록 다투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고, 새로 세운 과조(科條)⁷⁹가 너무 번거롭고 많은 듯하여 또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무릇 이단(異端)⁸⁰이 우리 도(道)⁸¹에 대하여 서로 성하고 쇠하는 관계(消長)가 되니, 후세에 끼칠 것을 도모함(貽厥之謀)⁸²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왕(先王)의 법(法)을 따르다가 잘못되는 자는 있지 않다⁸³’고 하셨고, 한유(韓愈)⁸⁴ 또한 말하기를 ‘정령(政令)을 고침에 있어 그 이로움이 옛것보다 10배가 되지 않으면 시행해서는 안 된다⁸⁵’고 하였습니다. 신(臣)은 새로 세운 조목(條目)이 옛것보다 이로움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며, 또한 이를 받들어 행함(奉行)에 하나하나 폐단이 없는지 알지 못합니다. 대간(臺諫)의 직책을 옛사람들은 나무가 먹줄을 따르는 것(木之從繩)과 물이 얼굴을 비추는 것(水之鑑貌)에 비유하였으니⁸⁶, 대개 먹줄이 아니면 곧게 할 수 없고 물이 아니면 비추어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충성스러운 말과 정직한 의논(忠言讜論)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실망하는 때가 많으니, 이는 전하의 선(善)을 향하는 마음에 간혹 끊어짐(間斷)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식견 있는 자들이 이를 보고 “상소의 말이 간결하고 합당하여(簡當) 참으로 노성(老成)한 이가 임금에게 고하는 체모(體貌)를 얻었다”고 평하였다.
주석:
66. [주-D005] 殊 : 《명종실록》 9년 2월 25일 기록에는 “소(少)”로 되어 있다. '수겸(殊歉)'은 '자못 부족하다', '소겸(少歉)'은 '조금 부족하다'는 의미로,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67. [주-D006] 韓愈……爲已 : 《명종실록》 9년 2월 25일 기록에는 이 구절이 없다.
68. [주-D007] 鑑 : 저본(底本)에는 “감(監)”으로 되어 있다. 《농암집・행장》, 《퇴계집・숭정대부……농암이선생행장》, 《명종실록》 9년 2월 25일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감모(鑑貌)'는 얼굴을 비추어 본다는 의미이다.
69. 정공 유(鄭公裕, 1488-155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앙(子앙), 호는 허암(虛庵). 명종 때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70. 기덕(耆德):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
71. 상(上): 임금. 여기서는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을 가리킨다. 이 상소는 명종 9년(1554) 2월에 올린 것이다.
72.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다른 이름.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비서 기관이다.
73. 여류지미(如流之美): 간언을 물 흐르듯 순탄하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덕.
74. 수겸(殊歉): 자못 부족함. 주석 [주-D005] 참조.
75. 선과(禪科): 승려를 대상으로 시행하던 과거 시험. 불교를 장려하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중종 때 폐지되었다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 시기인 명종 7년(1552)에 부활했다.
76.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
77. 시종(侍從):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주로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등의 관리를 가리킨다.
78. 관학(館學):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킨다.
79. 과조(科條): 법령의 조목. 여기서는 선과 부활과 관련된 규정이나 새로 제정된 법규 등을 의미할 수 있다.
80. 이단(異端): 정통 사상에서 벗어난 다른 사상이나 종교. 유교적 입장에서 불교를 지칭하는 말이다.
81. 오도(吾道): 우리의 도. 유교(儒敎)의 도를 가리킨다.
82. 이궐지모(貽厥之謀): 후세에 끼칠 것을 도모함.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에 나오는 "貽厥孫謀 以燕翼子"(그 자손에게 계책을 남기어 자손을 편안하게 하고 돕는다)에서 유래한 말로, 장래를 위한 계획을 의미한다.
83. 遵先王之法而過者, 未之有也: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는 구절. 옛 성현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길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84. 한유(韓愈, 768-824): 중국 당(唐)나라의 문학가, 사상가. 고문(古文) 운동을 주도했다.
85. 政令之改……不可爲已: 한유의 글에 나오는 구절로, 잦은 법령 개정을 경계하는 말이다. 정책 변경으로 얻는 이익이 기존의 것보다 10배 이상 크지 않다면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주석 [주-D006] 참조.
86. 木之從繩、水之鑑貌: 나무가 먹줄을 따라야 곧아지고, 물이 있어야 얼굴을 비출 수 있듯이, 임금도 간관의 말을 따라야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음을 비유한다.

원문:
公勤於爲人, 拙於謀身, 介以持己, 盈以爲戒, 有一喜慶, 則憂形于色; 陞一爵秩, 則兢懼靡樂。 恬淡寡欲, 凡諸服用, 簡素無華, 無異書生。 平居必晨起, 盥漱整衣冠, 出居正寢以終日, 簾几翛然, 雖寒暑猶然。 子弟婢僕, 恩無所偏, 婚嫁未嘗希求於閥閱之家。 性雖高簡, 待人不間愚賤, 表裏如一, 或置酒而邀請, 亦不苟辭。 居鄕, 未嘗以私撓公。 本縣以十室之殘, 從⁸⁷前役法, 戶出一夫, 單寡受弊。 公倡議八結出一夫, 由是賦役均一, 公私賴之。 料事明審, 曲盡纖悉, 如有所疑, 必虛懷咨問而行之。 至已有差失, 不少掩匿, 輒向人言而改之, 此尤不可及者也。
번역문:
공은 남을 위해서는 부지런하였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서툴렀고(拙於謀身), 절개(介)로써 자신을 지키고 가득 차는 것(盈)을 경계로 삼아, 한 가지 기쁜 경사(喜慶)가 있으면 근심이 얼굴에 드러났고, 하나의 작위와 품계(爵秩)가 오르면 두려워하며(兢懼) 즐거워하지 않았다. 마음이 담박하고 욕심이 적었으며(恬淡寡欲), 모든 의복과 기물(服用)은 간소하고 꾸밈이 없어(簡素無華) 서생(書生)과 다름이 없었다. 평소 거처할 때는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나와 정침(正寢)⁸⁸에 머물며 하루를 마쳤는데, 발과 책상(簾几)⁸⁹이 깨끗하고 조용하였으며(翛然) 추위나 더위에도 그러하였다. 자제(子弟)와 비복(婢僕)에게 은혜(恩)를 베풂에 치우침이 없었고, 혼인(婚嫁)을 일찍이 세력 있고 이름난 가문(閥閱之家)⁹⁰에 구하지 않았다. 성품이 비록 고상하고 간결하였으나(高簡), 사람을 대함에 어리석고 천한(愚賤) 이를 가리지 않고 겉과 속(表裏)이 한결같았으며, 혹 술자리를 마련하여 초청하면 또한 구차하게 사양하지 않았다. 고향에 있을 때는 일찍이 사사로움으로 공적인 일을 어지럽히지(以私撓公) 않았다. 본현(本縣)⁹¹이 10호(戶)밖에 남지 않은 잔폐한 곳이라, 이전의 역법(役法)을 따라⁹² 집집마다 장정 한 명(一夫)을 내게 하여 홀로 사는 이(單)와 과부(寡)가 폐해를 입었다. 공이 8결(結)⁹³당 장정 한 명을 내도록 창의(倡議)하니, 이로부터 부세(賦稅)와 역(役)이 균일해져 공사(公私)가 이에 힘입었다. 일을 헤아림(料事)이 명확하고 자세하여(明審) 자질구레한 것까지 모두 파악하였고(曲盡纖悉), 만약 의심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虛懷) 자문(咨問)하여 행하였다. 이미 잘못(差失)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숨기지(掩匿) 않고 문득 사람들에게 말하고 고쳤으니, 이는 더욱 따라갈 수 없는 점이다.
주석:
87. [주-D008] 從 : 《농암집・행장》에는 “종(縱)”으로 되어 있다. '종전(從前)'은 이전부터 따라 행해오던 방식을, '종전(縱前)'은 '설령 이전의 방식이라 해도' 또는 문맥에 따라 '이전의 방식을 제멋대로' 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從前'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88. 정침(正寢): 집의 본채. 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는 중심 공간이다.
89. 염궤(簾几): 발과 안석(책상). 선비의 거처나 서재를 상징하는 기물이다.
90. 벌열지가(閥閱之家):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며 가문 대대로 공훈이 많은 집안. 권세 있는 가문을 의미한다.
91. 본현(本縣): 이현보가 거주하던 예안현(禮安縣)을 가리킨다.
92. 종전역법(從前役法): 이전부터 시행해오던 부역(賦役) 제도.
93. 결(結): 토지 면적의 단위이자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 8결당 1명의 장정을 내도록 한 것은 기존의 호(戶) 단위 부과 방식보다 토지 소유 규모에 따른 공평한 부과 방식이었다.

원문:
公酷愛佳山水, 所居汾川, 乃洛之上流, 山明水麗, 林壑深秀。 山之東厓有巨石, 臨水陡起, 高十餘丈, 偃蹇奇崛。 公特愛之, 築室其上, 以爲奉親遊玩之所, 卽所謂愛日堂也, 因自號爲聾巖。 退閑之後, 尤自放於溪山, 每遇興到, 輒從遊忘返。 其出必以遊山小具自隨, 或竹杖芒鞋, 穿林陟巘; 或藍輿兩奴, 傍野巡溪, 自田夫牧豎見之, 不知其爲宰相也。 其遇可人與一水一石稍淸陰處, 必班荊而坐, 得意欣然, 飮酒不過三兩盃, 談笑亹亹, 終日不倦。 風神蕭灑, 岸韻森逸, 無一點富貴塵埃氣。 間出篇章, 立意淸新, 有非少年盛作所可及也。 好遊僧舍, 靈芝、屛庵、月瀾、臨江皆其所, 而最後常寓於臨江, 時復輕舟短棹, 往來遊賞, 令侍兒歌《漁父詞》以寄興, 飄然有遺世獨立意。 時人莫不高仰之, 過者必造門候謁爲幸焉。
번역문:
공은 아름다운 산수(佳山水)를 몹시 사랑하였는데, 거처하는 분천(汾川)⁹⁴은 바로 낙동강(洛東江) 상류로, 산이 밝고 물이 고우며(山明水麗) 숲과 골짜기(林壑)가 깊고 빼어났다. 산 동쪽 언덕(東厓)에 큰 돌이 있어 물가에 임하여 가파르게 솟아 있는데(陡起), 높이가 10여 장(丈)⁹⁵이고 험준하고 기이하게(偃蹇奇崛)⁹⁶ 솟아 있었다. 공이 특별히 이를 아껴 그 위에 집을 지어 어버이를 모시고 노니는 장소(奉親遊玩之所)로 삼았으니, 곧 이른바 애일당(愛日堂)⁹⁷이며, 이로 인하여 스스로 호(號)를 농암(聾巖)⁹⁸이라 하였다. 한가하게 물러난 뒤에는 더욱 스스로 계곡과 산(溪山)에 마음대로 노닐어(自放), 매번 흥취가 일어나는 때를 만나면(興到) 문득 따라 노닐며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그 외출할 때는 반드시 작은 산행 도구(遊山小具)를 스스로 지니고 다녔는데, 혹은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竹杖芒鞋) 차림으로 숲을 뚫고 산봉우리를 올랐으며(穿林陟巘), 혹은 남여(藍輿)⁹⁹에 두 명의 노비(兩奴)를 태우고 들판을 끼고 시내를 따라 순행하니(傍野巡溪), 농부나 목동(田夫牧豎)들로부터 보면 그가 재상(宰相)임을 알지 못하였다. 마음에 드는 사람(可人)을 만나거나 물 하나 돌 하나라도 조금 맑고 그늘진 곳(稍淸陰處)을 만나면, 반드시 풀을 깔고 앉아(班荊而坐)¹⁰⁰ 뜻을 얻어 기뻐하며, 술 마시는 것이 서너 잔에 지나지 않았고, 담소(談笑)를 끊임없이 하며(亹亹)¹⁰¹ 종일토록 지치지 않았다. 풍채와 정신(風神)이 맑고 깨끗하며(蕭灑)¹⁰², 언행과 운치(岸韻)¹⁰³가 뛰어나(森逸) 한 점의 부귀(富貴)나 속된 기운(塵埃氣)이 없었다. 간간이 지어낸 문장(篇章)은 입의(立意)가 맑고 새로워(淸新) 젊은 시절의 왕성한 작품(少年盛作)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승려의 거처(僧舍)에 노닐기를 좋아하여, 영지(靈芝), 병암(屛庵), 월난(月瀾), 임강(臨江)¹⁰⁴이 모두 그 장소였는데, 마지막에는 늘 임강에 머물렀다. 때때로 다시 가벼운 배와 짧은 노(輕舟短棹)로 왕래하며 유람하고 감상하며, 시녀(侍兒)에게 〈어부사(漁父詞)〉¹⁰⁵를 노래하게 하여 흥취를 붙이니, 세속을 벗어나 홀로 서 있는 듯한(遺世獨立)¹⁰⁶ 뜻이 있어 표연(飄然)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높이 우러르지 않음이 없어, 지나가는 자는 반드시 문을 찾아 문안하고 뵙는 것(造門候謁)을 다행으로 여겼다.
주석:
94. 분천(汾川):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일대. 낙동강 상류 지역이다.
95. 장(丈): 길이의 단위. 1장은 10자(尺)에 해당하며, 약 3미터 정도이다. 10여 장은 30미터가 넘는 높이를 의미한다.
96. 언건기굴(偃蹇奇崛): 산세나 바위 등이 높고 험하며 기이하게 솟아 있는 모양.
97. 애일당(愛日堂): 이현보가 부모 봉양과 휴양을 위해 분천의 농암 위에 지은 당호(堂號). 효심을 나타내는 '애일(愛日)'에서 따왔다.
98. 농암(聾巖): 이현보의 호. 애일당이 위치한 큰 바위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99. 남여(藍輿): 뚜껑이 없는 작은 가마. 주로 사대부들이 가까운 거리를 다닐 때 이용했다.
100. 반형이좌(班荊而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초(楚)나라 공자들이 정(鄭)나라 교외에서 우연히 만나 예를 갖출 겨를이 없어 가시나무(荊)를 깔고(班) 앉아 이야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격식 없이 편안하게 자리를 마련하고 앉는 것을 의미한다.
101. 미미(亹亹): 힘쓰는 모양, 또는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모양.
102. 소쇄(蕭灑): 기색(氣色)이나 성품, 모습 등이 깨끗하고 시원스러움.
103. 안운(岸韻): 높고 뛰어난 운치나 기개. '안(岸)'은 언덕, 벼랑 등을 뜻하며, 높고 엄숙함을 비유한다.
104. 영지(靈芝), 병암(屛庵), 월난(月瀾), 임강(臨江): 이현보가 즐겨 찾았던 예안 근처의 암자나 정자 등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105. 〈어부사(漁父詞)〉: 어부의 삶과 자연을 노래한 시가(詩歌). 굴원(屈原)의 〈어부(漁父)〉에서 유래하여 여러 형태로 발전했다. 이현보 자신도 만년에 〈어부가(漁父歌)〉 장단가 9장을 지었다. 이는 자연에 귀의하여 유유자적하는 삶을 동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06. 유세독립(遺世獨立): 세상의 일을 잊고 속세에서 벗어나 홀로 초연하게 살아감. 신선(神仙)의 경지를 비유하기도 한다.

원문:
公臨終, 諸子環侍摧¹⁰⁷泣, 公顧謂曰: “吾年至九十, 受國厚恩, 汝等皆在, 百無餘憾, 死亦榮矣。” 又曰: “葬勿過期, 喪事務簡儉。” 言訖, 了然而逝。【竝退溪撰行狀。】
번역문:
공이 임종(臨終)할 때 여러 아들이 둘러앉아 슬피 울자(環侍摧泣), 공이 돌아보며 일러 말하였다. “내 나이가 90에 이르렀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며, 너희들이 모두 있으니, 백 가지 일에 남은 유감(餘憾)이 없어 죽음 또한 영광스럽다.” 또 말하였다. “장례(葬)는 기한¹⁰⁸을 넘기지 말고, 상사(喪事)는 힘써 간략하고 검소하게(簡儉) 하라.” 말을 마치고 깨끗하게 세상을 떠났다(了然而逝).【이상은 모두 퇴계(退溪)¹⁰⁹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인용】
주석:
107. [주-D009] 摧 : 저본(底本)에는 “옹(擁)”으로 되어 있다. 《농암집・행장》 및 《퇴계집・숭정대부……농암이선생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최읍(摧泣)'은 마음이 찢어지듯 슬피 우는 것을 의미한다. '옹읍(擁泣)'은 '껴안고 울다' 또는 '울음을 억누르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문맥상 슬픔을 나타내는 '摧泣'이 더 적절하다.
108. 기한: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 정해진 기간. 보통 사대부의 경우 3개월 상(喪)을 치렀다. 기한을 넘기지 말라는 것은 장례를 오래 끌지 말라는 의미이다.
109. 퇴계(退溪):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이현보와 같은 영남 지역 출신으로, 이현보를 매우 존경하여 그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행장은 고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글이다.

원문:
疾革, 李滉往視之, 適報湖南倭寇殺將陷城。 公蹶起, 執滉手痛泣哽咽曰: “久慮有此, 今當奈何?” 滉恐因是重傷, 權辭以解之, 公攬涕曰: “如爾之言, 吾可少寬矣。”【《紀年通攷》。】
번역문:
병이 위독(疾革)해지자 이황(李滉)¹¹⁰이 가서 문병하였는데, 마침 호남(湖南)에서 왜구(倭寇)가 장수(將帥)를 죽이고 성(城)을 함락시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공이 벌떡 일어나(蹶起) 이황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목메어(痛泣哽咽) 말하였다.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까 염려하였는데, 이제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이황이 이로 인하여 병세가 더 심해질까 염려하여 임시방편의 말(權辭)로써 이를 풀어주자, 공이 눈물을 거두며(攬涕) 말하였다. “자네의 말과 같다면 내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겠네.”【《기년통고(紀年通攷)》¹¹¹에서 인용】
주석:
110. 이황(李滉): 퇴계 이황. 앞 주석 109 참조.
111. 《기년통고(紀年通攷)》: 조선 후기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단군조선부터 인조(仁祖) 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해설:
이 일화는 이현보가 임종 직전까지 나라를 걱정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조선은 을묘왜변(乙卯倭變, 1555년)으로 남부 해안 지역이 왜구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현보는 이 소식을 듣고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안위를 깊이 우려했던 것이다. 이황은 그의 병세를 염려하여 위로의 말을 건넨 것으로 보인다.

원문:
李知樞賢輔嘗按嶺南, 以本道親舊所在, 一開私謁之門, 政法必由以壞, 乃峻立其防, 子弟親戚無敢伺候於公館者。 年踰七十, 以戶曹參判, 退老于鄕。 中、仁、明廟嘉其恬退, 累陞至崇政, 年八十九而卒。【《芝峯類說》。】
번역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현보가 일찍이 영남(嶺南)을 안찰(按察)¹¹²할 때, 본도(本道)에 친구(親舊)들이 있는 까닭에 한번 사사로이 찾아뵙는 문(私謁之門)을 열면 정사(政事)와 법(法)이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무너질 것이라 여겨, 이에 엄격하게 방비(防)를 세우니, 자제(子弟)와 친척(親戚)들이 감히 공관(公館)¹¹³에 와서 안부를 묻거나 만남을 기다리는(伺候) 자가 없었다. 나이 70을 넘어서 호조 참판(戶曹參判)¹¹⁴으로서 향리(鄕里)로 물러나 노년을 보냈다.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께서 그의 담박하게 물러남(恬退)을 가상(嘉尙)히 여겨 여러 차례 승진시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고, 나이 89세에 졸(卒)하였다.【《지봉유설(芝峯類說)》¹¹⁵에서 인용】
주석:
112. 안찰(按察): 관찰사(觀察使) 또는 안렴사(按廉使)로서 지방을 순행하며 민정을 살피고 관리들의 잘잘못을 조사하는 것. 이현보는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13. 공관(公館): 관찰사 등 지방관이 공무를 보거나 거처하던 관사(官舍).
114. 호조 참판(戶曹參判): 호조(戶曹)의 버금 벼슬. 종2품. 호조는 국가의 재정, 호구, 조세 등을 담당하던 중앙 관서이다. 이현보는 호조 참판을 마지막 실직(實職)으로 하여 치사(致仕)했다.
115.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천문, 지리, 역사, 제도, 문물, 민속, 고증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다.

원문:
李判書賢輔居禮安, 嘗曰: “外方之士立於朝者, 非無晩節引退之志。 只緣當初無遠慮, 婚嫁於京城, 故至於暮年, 雖欲退去, 而爲情愛之眷顧, 牽戀不能去也。” 公於在朝, 子女婚嫁, 皆於同鄕。 及年七十致仕而歸, 構小室, 雲仍滿眼, 齒德俱¹¹⁶尊, 人皆以郭汾陽、裴司徒稱之。 人間之樂, 林泉之勝, 安饗最久, 年八十九而終。【《松窩雜記》。】
번역문:
판서(判書)¹¹⁷ 이현보가 예안(禮安)에 살 때 일찍이 말하였다. “외방(外方)의 선비로서 조정에 선 자(立於朝者)들이 만절(晩節)에 은퇴하려는 뜻(引退之志)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초에 원대한 생각(遠慮)이 없어 서울(京城)에서 혼인(婚嫁)한 까닭에, 만년(暮年)에 이르러 비록 물러가고자 하나 정애(情愛)로 돌보는 이들(眷顧)에게¹¹⁸ 끌리고 그리워하여(牽戀)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공은 조정에 있을 때 자녀의 혼인을 모두 동향(同鄕) 사람과 하였다. 나이 70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돌아와 작은 집(小室)을 짓고 사니, 자손(雲仍)¹¹⁹이 눈에 가득하고 나이와 덕망(齒德)이 함께 높아(俱尊) 사람들이 모두 곽분양(郭汾陽)¹²⁰, 배사도(裴司徒)¹²¹라 칭하였다. 인간 세상의 즐거움과 산림과 샘물의 빼어남(林泉之勝)을 편안히 누리기를(安饗) 가장 오래 하다가, 나이 89세에 세상을 마쳤다.【《송와잡기(松窩雜記)》¹²²에서 인용】
주석:
116. [주-D010] 俱 : 저본(底本)에는 “구(具)”로 되어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송와잡기(松窩雜記)》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구존(俱尊)'은 '함께 높다'는 의미이다.
117. 판서(判書): 조선 시대 육조(六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이현보는 호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118. 정애지권고(情愛之眷顧): 정과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사람들. 주로 자녀나 사돈 관계 등 서울에 기반을 둔 인척들을 의미한다.
119. 운잉(雲仍): 먼 후손을 가리키는 말. 《좌전(左傳)》에서 유래했다. 자손이 많고 번성함을 나타낸다.
120. 곽분양(郭汾陽):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郭子儀, 697-781)를 가리킨다.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등 여러 차례 국란을 평정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자손이 번창하고 장수하여 복 많은 인물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121. 배사도(裴司徒): 당나라의 명재상 배도(裴度, 765-839)를 가리킨다. 사도(司徒) 벼슬을 지냈으며,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졌다. 곽자의와 마찬가지로 부귀와 장수를 누린 인물로 꼽힌다.
122. 《송와잡기(松窩雜記)》: 조선 중기의 문신 이기(李墍, 1522-1600)가 지은 잡록(雜錄). 호는 송와(松窩). 인물 일화, 시화(詩話), 고증 등을 담고 있다.

박상(朴祥)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朴祥
字昌世, 號訥齋, 忠州人。 成化甲午生。 燕山二年丙辰進士, 辛酉登第。 賜暇湖堂, 歷司書、校理、應敎。 中宗二十一年丙戌, 魁重試, 陞堂上, 拜羅州牧使。 庚寅卒, 年五十七。
번역문:
박상(朴祥)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며, 충주(忠州) 사람이다.¹ 성화(成化) 갑오년(1474)²에 태어났다. 연산군(燕山君) 2년 병진년(1496)에 진사시(進士試)³에 합격하고, 신유년(150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⁴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⁵하였고, 사서(司書)⁶, 교리(校理)⁷, 응교(應敎)⁸를 역임하였다. 중종(中宗) 21년 병술년(1526)에 중시(重試)⁹에 장원(魁)하여 당상관(堂上官)¹⁰으로 승진하였고, 나주 목사(羅州牧使)¹¹에 제수되었다. 경인년(1530)에 졸(卒)하니, 나이 57세였다.
주석:
충주인(忠州人): 본관이 충주임을 나타낸다. 충주 박씨(忠州 朴氏)이다.
성화(成化) 갑오년(甲午年): 1474년(조선 성종 5).
진사시(進士試): 사마시(司馬試)의 하나로, 시(詩), 부(賦) 등 문학적 능력을 시험하여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호당(湖堂): 조선 시대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두모포(豆毛浦, 현재 서울 옥수동 부근)에 있던 독서당 건물이 호수가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젊고 유능한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주로 홍문관 관원 중에서 선발하여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중요한 제도였다.
사서(司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6품 관직.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교리(校理): 홍문관(弘文館)의 정5품 관직.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담당했다.
응교(應敎): 홍문관의 종4품 관직. 교리 위의 직위이다.
중시(重試): 이미 문과에 급제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다시 치르던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는 품계를 올려주었다.
당상관(堂上官): 조선 시대 정3품 상계(上階) 이상의 품계를 가진 관료.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고위 관료층이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전라도 나주목(羅州牧)의 수령. 정3품 외관직이다.

원문:
乙亥春, 章敬王后上賓, 公與淳昌郡守金凈上封事, 請復廢妃愼氏, 且論三元勳謀爲自全, 建廢國母之失。 於是, 臺諫交章請罪, 命繫獄以鞫之, 群下洶洶, 莫不危之。 大司憲權敏手、大司諫李荇等論治妄言之罪。 及趙靜菴爲正言, 獨啓朴祥等因求言上疏, 不當論罪以塞進言之路。 於是, 權敏手、李荇等亦啓其不然, 上命大臣處置。 柳洵等啓遞兩司, 只出趙正言。 上恕其狂直, 令配隷于南平, 丙子乃命放歸。
번역문:
을해년(1515) 봄에 장경왕후(章敬王后)¹²가 승하(上賓)¹³하자, 공이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¹⁴과 함께 봉사(封事)¹⁵를 올려 폐비 신씨(廢妃愼氏)¹⁶를 복위(復位)시킬 것을 청하고, 아울러 삼원훈(三元勳)¹⁷이 스스로 보전하기를 꾀하여 국모(國母)를 폐위하도록 건의한 잘못을 논하였다. 이에 대간(臺諫)¹⁸이 번갈아 상소(交章)하여 죄를 줄 것을 청하니, 명하여 옥에 가두고 국문(鞫問)하게 하자 아랫사람들이 흉흉하여 그를 위태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대사헌(大司憲) 권민수(權敏手)¹⁹, 대사간(大司諫) 이행(李荇)²⁰ 등이 망언(妄言)한 죄를 다스릴 것을 논하였다. 조 정암(趙靜庵)²¹이 정언(正言)이 되자, 홀로 아뢰기를 ‘박상 등이 구언(求言)²²으로 인하여 상소한 것이니, 죄를 논하여 진언(進言)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권민수, 이행 등이 또한 그렇지 않다고 아뢰니, 상(上)께서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유순(柳洵)²³ 등이 양사(兩司)의 관원을 교체하고 조 정언만 내보낼 것을 아뢰었다. 상께서 그의 과격한 강직함(狂直)을 용서하여 남평(南平)²⁴에 유배(配隷)시켰다가, 병자년(1516)에 비로소 석방하여 돌아오도록 명하였다.
주석:
12.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 중종의 계비(繼妃).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했다.
13. 상빈(上賓): 왕이나 왕비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승하(昇遐)와 같은 의미이다.
14. 김정(金淨, 1486-152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庵).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활동한 신진 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사(賜死)되었다.
15. 봉사(封事): 봉함(封緘)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주로 긴급하거나 비밀스러운 사안에 대해 사용되었다.
16. 폐비 신씨(廢妃愼氏, 1476-1537): 중종의 첫 번째 비. 단경왕후(端敬王后)라고도 한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 등이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폐위를 주장하여, 중종 즉위 7일 만에 폐출되었다. 박상과 김정은 장경왕후 사후에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것이다.
17. 삼원훈(三元勳): 중종반정(中宗反正)의 3대 공신을 가리키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을 반정 삼대장(反正三大將) 또는 핵심 공신으로 꼽는다. 이들이 폐비 신씨의 폐출을 주도했다.
18.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
19. 권민수(權敏手, ?-?): 조선 중기의 문신.
20. 이행(李荇, 1478-153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 중종 대에 좌의정까지 올랐다.
21. 조 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가리킨다.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중종 대 개혁 정치를 이끌었던 사림파의 영수였으나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
22. 구언(求言): 임금이 널리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
23. 유순(柳洵, 1441-151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언휘(彦輝), 호는 월헌(月軒).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을 지냈다.
24. 남평(南平): 현재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일대.

원문:
己卯, 士林禍起, 同時儕流奔竄貶黜無餘。 公乃具疏若干言, 將一陳于上, 雖更得罪黜, 不恨。 子弟親戚咸諫止曰: “疏雖上, 於事無益, 秖重其禍。” 公喟然歎曰: “一至於此乎?” 遂焚之。【竝《潛谷舊錄》。】
번역문:
기묘년(1519)에 사림(士林)의 화(禍)²⁵가 일어나자, 동시대의 동료(儕流)²⁶들이 모두 축출되거나(奔竄) 좌천(貶黜)되어 남은 이가 없었다. 공이 이에 상소 약간 편을 갖추어 장차 한번 상(上)께 진달(陳達)하여, 비록 다시 죄를 얻어 내쫓기더라도 한스럽지 않으려 하였다. 자제(子弟)와 친척(親戚)들이 모두 말리며 간하여 말하였다. “상소를 비록 올리더라도 일에는 도움이 없고, 다만 그 화(禍)만 더 중하게 할 뿐입니다.” 공이 위연(喟然)히²⁷ 탄식하며 말하였다. “일이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는가?” 마침내 이를 불태워 버렸다.【이상은 모두 《잠곡구록(潛谷舊錄)》²⁸에서 인용】
주석:
25. 사림화(士林禍):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를 가리킨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 세력이 훈구파(勳舊派)의 반격으로 대거 숙청된 사건이다.
26. 제류(儕流): 동년배의 무리, 동료. 박상과 함께 활동했던 사림 관료들을 가리킨다.
27. 위연(喟然): 깊이 탄식하는 모양.
28. 《잠곡구록(潛谷舊錄)》: 조선 중기의 문신 김육(金堉, 1580-1658)의 문집인 《잠곡유고(潛谷遺稿)》에 실린 내용으로 추정된다. 김육은 박상의 외손자이다.

원문:
朴訥齋倜儻有大志。 己卯之禍, 方莅忠州, 一時士類無所歸, 公悉爲經紀, 故金省洞世弼、李陰崖耔、李灘叟延慶俱往依之。 公一日來驪江, 見金慕齋、申企齋窮居, 見主牧李希輔乞米百斛, 貸而賙兩公。 還州, 亟以船輸米, 依數償之。 前輩之於朋友, 蓋如是也。【《識小錄》。】
번역문:
박 눌재(朴訥齋)는 뜻이 크고 기개가 뛰어났다(倜儻有大志). 기묘사화 때 마침 충주(忠州)에 부임해 있었는데, 당시 사류(士類)²⁹들이 돌아갈 곳이 없자 공이 모두 주선하여 돌보아 주었으므로(經紀), 성동(省洞) 김세필(金世弼)³⁰, 음애(陰崖) 이자(李耔)³¹,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³²이 모두 가서 그에게 의지하였다. 공이 하루는 여강(驪江)³³에 왔다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³⁴과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³⁵이 곤궁하게 사는 것을 보고, 주목(州牧) 이희보(李希輔)³⁶에게 쌀 100곡(斛)³⁷을 구걸하여 빌려서 두 공(公)에게 나누어 주었다(賙). 충주로 돌아와 즉시 배로 쌀을 수송하여 그 수량대로 갚았다. 선배(前輩)들이 벗(朋友)에게 대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식소록(識小錄)》³⁸에서 인용】
주석:
29. 사류(士類): 선비의 무리. 사림(士林)을 가리킨다.
30. 성동(省洞) 김세필(金世弼, 1473-15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거(公擧), 호는 성동(省洞) 또는 십청헌(十淸軒).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31.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32.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1480-154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응길(應吉), 호는 탄수(灘叟).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33. 여강(驪江): 현재 경기도 여주시를 흐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
34.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가 후에 복직하여 좌의정에 이르렀다.
35.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한지(漢之), 호는 기재(企齋).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가 후에 복직하여 우찬성 등을 지냈다.
36. 이희보(李希輔, 1473-1540): 조선 중기의 문신. 당시 여주 목사(驪州牧使)였던 것으로 보인다.
37. 곡(斛): 곡식의 부피를 재는 단위. 1곡은 10두(斗) 또는 15두에 해당한다. 100곡은 상당히 많은 양이다.
38. 《식소록(識小錄)》: 조선 중기의 문신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지은 수필집. 견문과 고증 등을 기록했다.

원문:
朴訥齋祥性簡伉, 少許可, 疾惡之心, 出於天性。 以此不容於朝, 雖至屢黜, 終不改也。 沈相貞於陽川構逍遙堂, 遍求一時作者, 以題錄板。 公詩有“半山排案俎, 秋壑闢³⁹尊盂”之句。 沈相知其譏己, 遂拔去。【《丙辰丁巳錄》。】
번역문:
박 눌재 상(朴訥齋祥)은 성품이 강직하고 굳세며(簡伉), 남을 인정하는 일이 적었고(少許可), 악(惡)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여 비록 여러 차례 내쫓기는 데 이르렀으나, 끝내 고치지 않았다. 재상 심정(沈貞)⁴⁰이 양천(陽川)⁴¹에 소요당(逍遙堂)을 짓고, 당대의 작가(作者)들에게 두루 구하여 시를 지어 편액(板)에 기록하게 하였다. 공의 시에 “절반쯤 되는 산은 안주 놓을 상(案俎)을 벌여 놓은 듯하고, 가을 골짜기는 술잔(尊盂) 놓을 자리를 열어 놓은 듯하네⁴²”라는 구절이 있었다. 심 재상이 자기를 풍자(譏)한 것임을 알고 마침내 뽑아 없애 버렸다.【《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⁴³에서 인용】
주석:
39. [주-D002] 闢 : 《대동야승・병진정사록》 및 《해동잡록(海東雜錄)・박상(朴祥)》에는 “각(閣)”으로 되어 있다. '벽준우(闢尊盂)'는 술잔과 그릇을 놓을 자리를 열어두었다는 의미로, 자연 경관을 술상에 비유한 것이다. '각준우(閣尊盂)'는 술잔과 그릇을 얹어놓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문맥상 둘 다 가능하나, 앞 구절의 '배안조(排案俎)'와 대구를 이루는 '闢尊盂'가 더 자연스럽다.
40. 심정(沈貞, 1471-1531):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반정 공신. 남곤(南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을 제거했다. 권력을 남용하다가 후에 사사되었다.
41. 양천(陽川): 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 및 양천구 일대.
42. 半山排案俎, 秋壑闢尊盂: 산과 골짜기의 경치를 마치 잔치상처럼 묘사한 구절. 표면적으로는 소요당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것이지만, 심정이 권세를 이용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을 은근히 비꼬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안조(案俎)'는 제사나 잔치 때 음식을 담는 그릇 또는 상을 의미하고, '준우(尊盂)'는 술잔과 음식을 담는 그릇을 통칭한다.
43.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조선 중기의 문신 최립(崔岦, 1539-1612)이 지은 책. 임진왜란 당시의 경험과 견문을 기록했다.

원문:
訥齋爲羅州牧使, 林石川⁴⁴爲敎授, 相得驩如也。 訥齋之子敏中, 家素豪, 能文章, 喜任俠。 顧訥齋性嚴簡, 不敢出入, 石川欲見之, 亦不過使瞥然交語而已。【《潛谷舊錄》。】
번역문:
눌재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 임 석천(林石川)⁴⁵이 교수(敎授)⁴⁶로 있었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相得) 기뻐하는 것이 한결같았다. 눌재의 아들 민중(敏中)⁴⁷은 집안이 본래 호방하고(素豪) 문장(文章)에 능하며 임협(任俠)⁴⁸을 좋아하였다. 다만 눌재의 성품이 엄격하고 간결하여(嚴簡) 감히 출입하지 못하였는데, 석천이 그를 보고자 하였으나 또한 흘깃 서로 말을 나누게 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44. [주-D003] 川 : 저본(底本)에는 “천(泉)”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아래 “石川欲見之”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임억령의 호는 석천(石川)이다.
45. 임 석천(林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을 가리킨다.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46. 교수(敎授): 조선 시대 지방 향교(鄕校)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종6품 관직.
47. 민중(敏中): 박민중(朴敏中). 박상의 아들.
48. 임협(任俠): 의협심이 있어 약자를 돕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 호방하고 의리 있는 행동을 좋아함을 뜻한다.

원문:
訥齋雖當劇官, 夜必誦《離騷》一遍, 作近律一首, 然後就寢云。
번역문:
눌재는 비록 격무(劇務)의 관직(劇官)⁴⁹에 있더라도 밤에는 반드시 《이소(離騷)》⁵⁰ 한 편을 외우고 근체 율시(近律)⁵¹ 한 수를 지은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주석:
49. 극관(劇官): 일이 많고 번거로운 관직. 목민관(牧民官) 등 지방관은 격무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50. 《이소(離騷)》: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지은 장편 서정시.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을 노래한 초사(楚辭)의 대표작이다. 박상이 《이소》를 애송한 것은 굴원의 충성심과 절개에 공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51. 근율(近律): 근체시(近體詩) 중 율시(律詩)를 가리킨다. 당(唐)나라 이후 확립된 정형시로, 자수(字數), 구수(句數), 평측(平仄), 압운(押韻), 대우(對偶) 등에 엄격한 규칙이 있다.

원문:
訥齋嘗爲門生所陷。 一日, 其人到門不見, 而以詩示之曰: “誾誾誤解示謙恭, 袖裏潛藏射羿弓。 堪笑人心眞九折, 裂裳裹足向雲中。” 彼雖辜負, 訥齋之責, 亦非過歟?【《淸江瑣語》。】
번역문:
눌재가 일찍이 문생(門生)에게 모함(陷)당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그 사람이 문에 이르렀으나 만나주지 않고 시(詩)로써 그에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온화한 듯 잘못 알아 겸손함과 공손함을 보이더니(誾誾誤解示謙恭)⁵², 소매 속에는 예(羿)를 쏠 활⁵³을 몰래 감추었구나(袖裏潛藏射羿弓). 우습구나, 사람 마음 참으로 아홉 번 꺾이어(眞九折)⁵⁴, 치마 찢어 발을 싸매고 구름 속으로 향하는구나(裂裳裹足向雲中)⁵⁵.” 저쪽이 비록 저버렸으나(辜負), 눌재의 꾸짖음(責) 또한 지나치지 않았는가?【《청강쇄어(淸江瑣語)》⁵⁶에서 인용】
주석:
52. 은은오해시겸공(誾誾誤解示謙恭): 겉으로는 온화하고 공손한 척하는 모습을 비판하는 구절. '은은(誾誾)'은 온화하고 공손한 모양, 또는 직언하는 모양을 뜻한다.
53. 예(羿)를 쏠 활: 예(羿)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명궁(名弓). 활을 감추었다는 것은 해치려는 속셈을 숨기고 있음을 비유한다.
54. 구절(九折): 아홉 번 꺾임. 양의 창자가 아홉 번 꺾여 있듯, 사람의 마음속이 매우 복잡하고 음흉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는 매우 험난한 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55. 열상과족향운중(裂裳裹足向雲中): 치마를 찢어 발을 감싸고 구름 속으로 향한다는 뜻. 현실 도피적인 태도나 속세를 떠나려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구절로 해석될 수 있다. 혹은 모함을 피하려는 다급한 모습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56. 《청강쇄어(淸江瑣語)》: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이 지은 시화집(詩話集). 호는 청강(淸江).
허굉(許硡)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許硡
字硡之, 琛¹之子。 成化辛卯生。 成宗二十三年壬子進士, 燕山九年癸亥登第。 薦入史局, 拜吏郞。 中廟朝, 歷舍人、直提學、大司諫、咸鏡監司、禮曹・吏曹判書、右贊成。 己丑, 以平安監司, 卒于任所, 年五十九。
번역문:
허굉(許硡)
자는굉지(硡之)이고, 허침(許琛)¹의 아들이다. 성화(成化) 신묘년(1471)에 태어났다. 성종(成宗) 23년 임자년(1492)에 진사(進士)²가 되고, 연산군(燕山君) 9년 계해년(150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추천되어 사국(史局)³에 들어갔고, 이조 정랑(吏曹正郎)⁴에 임명되었다. 중종(中宗) 시대에 사인(舍人)⁵, 직제학(直提學)⁶, 대사간(大司諫)⁷,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⁸, 예조 판서(禮曹判書)⁹, 이조 판서(吏曹判書)¹⁰, 우찬성(右贊成)¹¹을 역임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29)에 평안도 감사(平安道監司)¹²로 있다가 임소(任所)에서 졸(卒)하니, 나이 59세였다.
주석:
침(琛): 허침(許琛, 1444-1505).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헌지(獻之), 호는 잠곡(潛谷). 허굉의 아버지이다. 영의정을 지냈다.
진사(進士): 조선 시대 소과(小科) 시험 중 하나인 진사과(進士科) 합격자에게 주던 칭호. 생원(生員)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거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사국(史局): 역사를 편찬하는 관청. 춘추관(春秋館)이나 예문관(藝文館)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이조 정랑(吏曹正郎):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핵심 요직 중 하나였다. '이낭(吏郞)'은 보통 이조 정랑과 좌랑을 통칭하거나 정랑을 가리킨다.
사인(舍人):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명. 여러 관청에 속했으며, 특히 조선 시대에는 예문관(藝文館)이나 승정원(承政院) 등에 소속되어 문한(文翰)이나 왕명 출납 등의 임무를 맡았다.
직제학(直提學): 조선 시대 홍문관(弘文館)이나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중요한 학술 관직이었다.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백관에 대한 탄핵을 주 임무로 하는 언관(言官)의 수장이다.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 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하는 지방관의 수장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예악(禮樂), 제사(祭祀), 외교, 교육, 과거 시험 등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 정2품. 문관의 인사 행정을 총괄하는 핵심 부서의 장관이다.
우찬성(右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찬성(左贊成)과 함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三政丞)을 보좌하는 재상급 관직이다.
평안도 감사(平安道監司): 평안도의 관찰사.

원문:
公生于晉之別墅, 有異僧來過曰: “明日此家有慶事。” 人問之, 答曰: “必生奇男子, 爲世名相。” 翌日午果生, 卽二月十九日也, 形貌奇異。 及長, 寡言愼重, 識量弘遠, 常以經世自期。 伯父忠貞公琮雅重之, 常語諸子曰: “繼我者必此子也。”
번역문:
공(公)은 진주(晉州)의 별서(別墅)¹³에서 태어났는데, 기이한 승려가 와서 지나가며 말하기를, “내일 이 집에 경사(慶事)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반드시 기이한 사내아이가 태어나 세상의 이름난 재상(名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 날 오시(午時)에 과연 태어나니, 바로 2월 19일이었는데, 용모가 기이하였다. 자라면서 말이 적고 신중하며 식견과 도량이 넓고 원대하여, 항상 경세(經世)¹⁴를 스스로 기약하였다. 백부(伯父) 충정공(忠貞公) 종(琮)¹⁵이 평소 그를 중하게 여겨, 항상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이을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주석:
13. 별서(別墅): 농장이나 경치 좋은 곳에 한적하게 지내기 위하여 따로 지은 집. 별장(別莊)과 유사하다.
14. 경세(經世): 세상을 다스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의미한다.
15. 백부(伯父) 충정공(忠貞公) 종(琮): 허종(許琮, 1434-1494). 허굉의 큰아버지. 자는 종경(宗卿), 호는 상우당(尙友堂), 시호는 충정(忠貞).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좌의정을 지냈다.

원문:
中廟反正之後, 原從功臣濫受者無數, 公以持平論執不已。 朴元宗啓於筵席曰: “果如臺諫之言, 則孰能安心乎?” 出入之際, 形色憤憤。 公獨出啓曰: “朴元宗上前如是發怒, 其他可知。 古有跋扈之臣, 正爲此也。” 朴惶悚無地, 伏泣不已, 上慰之曰: “持平之見過矣。 政丞出入, 衣服有聲故也。” 同列壯之。
번역문:
중종반정(中宗反正)¹⁶ 이후에 원종공신(原從功臣)¹⁷을 함부로 받은 자가 무수하였는데, 공이 지평(持平)¹⁸으로서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박원종(朴元宗)¹⁹이 연석(筵席)²⁰에서 아뢰기를, “과연 대간(臺諫)²¹의 말과 같다면 누가 능히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출입할 때 분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공이 홀로 나아가 아뢰기를, “박원종이 임금 앞에서 이와 같이 노여움을 드러내니, 다른 경우는 알 만합니다. 옛날에 발호(跋扈)²²하는 신하가 있었는데,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하였다. 박원종이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라 엎드려 울기를 마지않자, 상(上)께서 위로하며 말씀하시기를, “지평의 견해가 지나치다. 정승(政丞)이 출입할 때 의복에서 소리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 동료들이 그의 용기를 장하게 여겼다.
주석:
16.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7. 원종공신(原從功臣): 정공신(正功臣) 외에 반정이나 왕의 즉위 등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던 공신 칭호. 중종반정 때에는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아 논란이 되었다.
18.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대사헌, 집의(執義), 장령(掌令)과 함께 백관을 규찰하고 기강을 확립하는 임무를 맡은 언관이다.
19. 박원종(朴元宗, 1467-1510): 조선 중기의 무신, 공신. 중종반정을 주도한 핵심 인물. 반정 후 영의정에 올랐다.
20. 연석(筵席): 경연(經筵)이나 차대(次對) 등 임금과 신하가 함께하는 자리.
21. 대간(臺諫): 사헌부(司憲府, 御史臺)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이다.
22. 발호(跋扈): 권세를 함부로 부리며 제멋대로 날뛰는 것.

원문:
陞舍人, 尋移司諫。 李堣、尹璋、曺繼衡等反正之日, 入直政院, 從狗竇逃出, 求得功臣, 人皆嗤點。 公卽抗論不避, 駁奪功券, 時論韙之。
번역문: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사간(司諫)²³으로 옮겼다. 이우(李堣)²⁴, 윤장(尹璋)²⁵, 조계형(曺繼衡)²⁶ 등은 반정(反正) 당일 정원(政院)²⁷에 입직(入直)하였다가 개구멍(狗竇)으로 도망쳐 나왔으면서 공신(功臣) 칭호를 얻으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하였다. 공이 즉시 거리낌 없이 항론(抗論)하여 공신 임명을 논박하여 취소시키니(駁奪功券), 당시 여론이 이를 옳게 여겼다.
주석:
23. 사간(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당상관. 대사간 다음가는 관직으로,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주요 언관이다.
24. 이우(李堣, ?-1507):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었으나, 공신 자격 논란으로 삭훈(削勳)되었다.
25. 윤장(尹璋, ?-?):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반정 때 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나 논란이 있었다.
26. 조계형(曺繼衡, 1480-1517):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4등에 책록되었으나 공신 자격 논란으로 삭훈되었다.
27.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다른 이름.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비서 기관이다.

원문:
灼鼠之變, 在廷之臣, 噤默不言, 公敢論不避, 士林敬重之。 嘗入侍啓曰: “近來獄事多不平反。” 領事宋軼曰: “臣爲委官, 未知何事爲不平反。” 上笑之。 宋召公私第, 責之曰: “議獄, 首相之事, 公何以微官敢言?” 公曰: “微官亦不得爲首相之言乎?” 宋大奇之。
번역문:
작서의 변(灼鼠之變)²⁸ 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噤默) 말하지 못하였으나, 공은 감히 거리낌 없이 논하니 사림(士林)이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일찍이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근래 옥사(獄事)에 불평(不平)하게 처리되어 바로잡히지(平反) 않은 것이 많습니다.” 하였다. 영사(領事) 송질(宋軼)²⁹이 아뢰기를, “신(臣)이 위관(委官)³⁰이었는데, 어떤 일이 불평하게 처리되어 바로잡히지 않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니, 상(上)께서 웃으셨다. 송질이 공을 사저(私第)로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옥사를 의논하는 것은 수상(首相)³¹의 일인데, 공은 어찌 미관(微官)³²으로서 감히 말하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미관은 또한 수상의 말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송질이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주석:
28. 작서의 변(灼鼠之變): 1515년(중종 10) 동궁(東宮, 인종)의 침소에 불에 탄 쥐를 매달아 저주한 사건. 이 사건으로 관련된 자들에 대한 옥사가 일어났다.
29. 영사(領事) 송질(宋軼): 송질(宋軼, 1454-1520). 호는 이전(夷全), 시호는 숙정(肅靖).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영사(領事)'는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0. 위관(委官): 어떤 사건이나 업무를 처리하도록 특별히 위임받은 관리. 여기서는 작서의 변 관련 옥사를 담당했던 관리를 의미한다.
31. 수상(首相): 영의정. 백관의 으뜸을 의미한다.
32. 미관(微官): 낮은 관직. 또는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

원문:
戊寅, 以陳慰使赴京, 到遼陽, 遙望軍威甚盛, 遼人皆疑爲獺, 一行盡懼, 皆爲謀避。 公令諸下毋動, 策馬直進, 乃曖³³陽堡將出營習陳也。 一行慙服還朝, 獻《通鑑纂要》二百餘卷, 啓曰: “願聖上留意此書。” 上嘉納之。
번역문:
무인년(戊寅年, 1518)에 진위사(陳慰使)³⁴로 북경(北京)에 가는데, 요양(遼陽)³⁵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군대의 위세가 매우 성대하여 요동 사람들이 모두 달자(獺子)³⁶로 의심하였다. 일행이 모두 두려워하여 피할 방도를 모색하였다. 공이 여러 아랫사람들에게 움직이지 말도록 명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곧장 나아가니, 이는 애양보(曖陽堡)³⁷의 장수가 진영을 나와 진법(陣法)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일행이 부끄러워하며 탄복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통감찬요(通鑑纂要)》³⁸ 200여 권을 바치며 아뢰기를, “원하옵건대 성상(聖上)께서는 이 책에 유의하소서.” 하니, 상께서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셨다.
주석:
33. [주-D001] 瞹 : 장서각본(藏書閣本) 및 《성종실록》 22년 11월 22일 등의 기록에 근거할 때 “애(曖)”가 되어야 할 듯하다. 애양보(曖陽堡)는 명나라 때 요동에 설치되었던 군사 기지이다.
34. 진위사(陳慰使): 조선 시대 중국에 보내던 사신 중 하나. 황태자나 황손의 탄생, 책봉 등을 축하하거나 위문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35. 요양(遼陽): 중국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도시. 명나라 때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가 설치되었던 요동 지역의 중심지였다.
36. 달자(獺子): '달단(韃靼)' 즉 타타르(Tatar) 족을 낮추어 부르던 말. 여기서는 북방의 이민족, 특히 여진족이나 몽골족을 가리킬 수 있다.
37. 애양보(曖陽堡): 주석 [주-D001] 참조.
38. 《통감찬요(通鑑纂要)》: 중국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요약, 편집한 역사서. 여러 종류가 있다.

원문:
癸未冬, 上遣曺潤孫驅逐閭延、茂昌野人, 仍命公爲後援。 公盡心規畫, 使沿邊各鎭積柴路傍, 平安之兵夾驅其西, 死亡殆盡, 北軍無一凍傷者。 北人稱曰: “賢觀察使活人多矣。”
번역문:
계미년(癸未年, 1523) 겨울에 상(上)께서 조윤손(曺潤孫)³⁹을 보내 여연(閭延)⁴⁰과 무창(茂昌)⁴¹의 야인(野人)⁴²을 몰아내게 하고, 이어서 공에게 명하여 후원(後援)하게 하였다. 공이 마음을 다해 계획을 세워, 연변(沿邊)의 각 진(鎭)으로 하여금 길가에 땔나무를 쌓아두게 하고, 평안도의 군사가 그 서쪽을 협공하여 몰아치게 하니, (야인들이) 거의 다 죽어 북쪽 군사 중에는 얼어 다친 자가 한 명도 없었다. 북방 사람들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현명한 관찰사께서 살린 사람이 많다.” 하였다.
주석:
39. 조윤손(曺潤孫, 1473-1529): 조선 중기의 무신.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다.
40. 여연(閭延): 조선 초기 압록강 상류 지역에 설치되었던 6진(六鎭) 중 하나. 현재의 자강도 지역으로 추정된다.
41. 무창(茂昌): 현재의 함경북도 무산(茂山) 지역으로 추정된다. 여연과 무창은 당시 여진족(야인)이 자주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42. 야인(野人): 여진족(女眞族)을 가리키는 말.

원문:
乙酉秋, 特拜禮曹判書, 尋移吏判, 命下之日, 朝野相慶。 時, 初授之職, 只擬權勢子弟, 公啓爲五人擬望之制, 人無怨其不得參望者。 且選居泮儒生年高行備, 累擧不中者, 別署一簿, 量才注擬, 遂爲成規。
번역문:
을유년(乙酉年, 1525) 가을에 특별히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이조 판서로 옮기니, 명이 내려진 날 조야(朝野)가 서로 경축하였다. 당시에 처음 제수하는 관직은 단지 권세가의 자제들만 후보로 올렸는데(擬望), 공이 아뢰어 다섯 사람을 후보로 올리는 제도(五人擬望之制)⁴³를 만드니, 사람들이 후보에 참여하지 못함을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또한 성균관 유생(泮儒生)⁴⁴ 중에 나이가 많고 행실을 갖추었으나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해도 합격하지 못한 자들을 선발하여 따로 명부(簿)를 만들어 재능을 헤아려 관직 후보로 추천하니(注擬), 마침내 정해진 규정(成規)이 되었다.
주석:
43. 오인 의망지제(五人擬望之制): 관직 제수 시 다섯 명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임금이 최종 결정하도록 하는 제도. 기존에 소수 권세가 자제 위주로 추천되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44. 반유생(泮儒生): 성균관(成均館) 유생. '반(泮)'은 주나라 때 제후의 학교인 반궁(泮宮)에서 유래하여 학교, 특히 성균관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원문:
丁亥, 三公有缺, 朝望屬於公。 時, 沈貞以資級逼近, 令其子爲諫官者, 論以銓選不公, 上不允。 公引疾力辭, 貞果爲相, 父子排公, 人皆爲公危之, 公夷然不以爲芥, 待之無異平昔。
번역문:
정해년(丁亥年, 1527)에 삼공(三公)⁴⁵ 자리에 결원이 생기자 조정의 여망(朝望)이 공에게 쏠렸다. 이때 심정(沈貞)⁴⁶이 자급(資級)⁴⁷이 (삼공에) 가까워지자, 간관(諫官)⁴⁸인 자기 아들로 하여금 전선(銓選)⁴⁹이 불공정하다고 논하게 하였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공은 병을 핑계로 강력히 사양하였는데, 심정이 과연 정승(相)이 되자 부자(父子)가 공을 배척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태연하여(夷然) 이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不以爲芥) 평소와 다름없이 그를 대하였다.
주석:
45. 삼공(三公): 삼정승(三政丞).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킨다.
46. 심정(沈貞, 1471-1531):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관련자들을 모함한 죄로 사사(賜死)되었다.
47. 자급(資級): 관직 경력과 품계. 승진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48. 간관(諫官): 사간원(司諫院)의 관리. 임금에게 간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49. 전선(銓選): 관리 임용을 위한 인물 선발. 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담당했다.

원문:
李沆爲相, 臺諫駁之, 至請遠竄。 大臣、宰樞會賓廳伸救, 公後到, 鄭領相光弼曰: “何遲也?” 公曰: “心有未穩處, 熟思故晩也。 臺諫方集于臺廳, 大臣率宰樞亦集賓廳, 有若戰場, 何也?” 鄭相曰: “判書之論, 與年少人合, 與吾朋儕不相入, 亦何也?” 公曰: “君子和而不同, 先公後私。 我之所論, 乃至言也。” 遂辭出, 鄭相慙服。
번역문:
이항(李沆)⁵⁰이 정승(相)이 되자 대간(臺諫)이 그를 논박하여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대신(大臣)과 재추(宰樞)⁵¹들이 빈청(賓廳)⁵²에 모여 그를 구원하려 하였는데, 공이 뒤늦게 도착하자 영상(領相) 정광필(鄭光弼)⁵³이 말하기를, “어찌 늦었는가?” 하니, 공이 말하였다. “마음에 미처 안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깊이 생각하느라 늦었습니다. 대간은 막 대청(臺廳)⁵⁴에 모여 있고, 대신이 재추들을 거느리고 또한 빈청에 모여 있으니, 마치 전쟁터와 같은데 어찌된 일입니까?” 정승(鄭相)이 말하였다. “판서(判書)의 논의는 젊은 사람들과는 부합하지만 우리 동료들과는 서로 맞지 않으니,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공이 말하였다. “군자(君子)는 화합하되 같아지지는 않으며(和而不同), 공(公)을 앞세우고 사(私)를 뒤로 합니다(先公後私). 나의 논하는 바는 지극한 말(至言)⁵⁵입니다.” 마침내 사양하고 나가니, 정승(鄭相)이 부끄러워하며 탄복하였다.
주석:
50. 이항(李沆, 1467-152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창평(昌平). 중종 때 우의정을 지냈다.
51. 재추(宰樞): 재상(宰相)과 중추부(中樞府) 당상관을 아울러 이르는 말. 조정의 고위 관료들을 통칭한다.
52. 빈청(賓廳):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에 속한 건물로, 재상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
53. 영상(領相) 정광필(鄭光弼):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수부(守夫), 시호는 문익(文翼).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영상'은 영의정을 가리킨다.
54. 대청(臺廳):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 등 대간(臺諫)들이 근무하는 관청.
55. 지언(至言): 지극히 당연하고 올바른 말.

원문:
時許洽方爲掌令, 與權輗齊名, 當路惡其伉直。 金克愊發於經筵曰: “許、權詭激不情, 請黜之。 此意問於大臣, 則可曉其情狀矣。” 沈貞聞之詣闕, 遇公於賓廳曰: “金克愊何自發此語? 吾將足其議。” 公曰: “一時利祿, 亦可愛也, 萬世名⁵⁶節, 獨可棄乎?” 貞默然還出。 未幾, 克愊敗, 人以貞爲賣金。
번역문:
이때 허흡(許洽)⁵⁷이 마침 장령(掌令)⁵⁸이었는데 권예(權輗)⁵⁹와 명성(齊名)을 나란히 하였으나, 당로자(當路者)⁶⁰들이 그 강직함(伉直)을 미워하였다. 김극핍(金克愊)⁶¹이 경연(經筵)⁶²에서 발언하기를, “허흡과 권예는 괴팍하고 과격하며(詭激) 인정이 없으니, 그들을 내쫓기를 청합니다. 이 뜻을 대신에게 물어보면 그 정상(情狀)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심정(沈貞)이 이 말을 듣고 대궐로 나아가다가 빈청(賓廳)에서 공을 만나 말하기를, “김극핍이 어찌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장차 그의 의논을 만족시키려 한다.” 하니, 공이 말하였다. “한때의 이익과 녹봉(利祿)이 또한 사랑스러울 수 있지만, 만세(萬世)의 명예와 절개(名節)를 홀로 버릴 수 있겠습니까?” 심정이 아무 말 없이 돌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극핍이 패하자, 사람들이 심정이 김극핍을 팔았다고 여겼다.
주석:
56. [주-D002] 名 : 저본(底本)에는 “명(命)”으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대동야승(大東野乘)・해동야언(海東野言)・중종(中宗)》 기록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문맥상 '명예와 절개'를 뜻하는 '명절(名節)'이 자연스럽다.
57. 허흡(許洽, 1484-153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경(子經), 호는 관포(灌圃). 허굉의 사촌 동생이다. 강직한 언관으로 활동했다.
58. 장령(掌令): 사헌부(司憲府)의 정4품 관직. 지평(持平)과 함께 백관 규찰, 간쟁 등의 임무를 맡았다.
59. 권예(權輗, 1474-15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기(仲器), 호는 송재(松齋). 강직한 언관으로 활동했다.
60. 당로자(當路者):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 권력자를 의미한다.
61. 김극핍(金克愊, 1472-1531):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재사당(再思堂). 심정 등과 가까웠다.
62. 경연(經筵): 임금이 학문과 덕을 닦기 위해 신하들과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자리.

원문:
戊子秋, 拜右贊成。 西陲有警, 將有問罪之擧⁶³, 推公爲元帥, 期以明春擧事。 仍命公巡審江邊, 引見賜酒, 令政府、六曹出餞, 一如成宗朝忠貞公故事。 未幾, 西伯李世應卒, 憲府啓請公仍任, 實擠于外也。 公聞命馳還, 面達軍機, 拜辭赴任。 朝廷以時屈力殫, 停其役, 命公整備俟便。
번역문:
무자년(戊子年, 1528) 가을에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다. 서쪽 변방(西陲)에 경보가 있어 장차 문죄(問罪)⁶⁴의 군사 행동(擧事)이 있게 되자, 공을 원수(元帥)⁶⁵로 추대하고 다음 해 봄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어서 공에게 명하여 강변(江邊)을 순찰하고 살펴보게 하였으며, 인견(引見)하여 술을 하사하고 정부(政府)⁶⁶와 육조(六曹)⁶⁷로 하여금 전송연(餞送宴)을 열게 하니, 모든 것이 성종(成宗) 때 충정공(忠貞公)⁶⁸의 고사(故事)와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백(西伯)⁶⁹ 이세응(李世應)⁷⁰이 졸(卒)하자, 사헌부에서 공을 평안도 감사(仍任)⁷¹로 삼기를 아뢰어 청하니, 실제로는 밖으로 밀어내려는(擠于外) 것이었다. 공은 명을 듣고 급히 돌아와 군사 기밀(軍機)을 면대(面對)하여 아뢰고, 작별 인사를 올리고 부임하였다. 조정에서는 시기적으로 어렵고(時屈) 힘이 다하였다(力殫)는 이유로 그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공에게 명하여 (군비를) 정비하고 기회를 기다리게 하였다.
주석:
63. [주-D003] 擧 : 장서각본(藏書閣本)에는 “사(師)”로 되어 있다. '문죄지사(問罪之師)'는 죄를 묻기 위해 일으키는 군대라는 의미이다. '문죄지거(問罪之擧)'는 죄를 묻기 위한 거사, 즉 군사 행동을 의미한다. 문맥상 큰 차이는 없다.
64. 문죄(問罪): 죄를 따져 묻는 것. 여기서는 변방을 침범한 세력에 대한 응징을 의미한다.
65. 원수(元帥): 전쟁 시 군대를 총지휘하는 최고 사령관.
66. 정부(政府): 의정부(議政府). 조선 시대 최고 행정기관.
67. 육조(六曹):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여섯 중앙 행정 관청.
68. 충정공(忠貞公) 고사(故事): 허굉의 백부인 허종(許琮)이 성종 때 평안도 관찰사 겸 평양부윤으로 임명되어 변방 안정에 공을 세웠던 일을 가리킨다. 당시에도 조정에서 성대한 전송연을 열어주었다.
69. 서백(西伯): 서쪽 지방의 으뜸. 평안도 관찰사를 가리키는 별칭.
70. 이세응(李世應, 1473-152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도산(桃山).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 중 사망했다.
71. 잉임(仍任): 전임자의 임기를 이어서 맡는 것. 여기서는 사망한 이세응의 후임으로 평안도 감사에 임명되었음을 뜻한다.

원문:
公之病也, 有言辭職乞歸者, 公大言曰: “猥以不才, 濫荷主知, 位至崇品, 授以節鉞, 恩寵甚盛, 豈爲身謀, 安坐乞歸乎?” 强起出巡, 子弟請止, 公以爲微恙當自祛, 力疾而行。 到寧邊, 疾劇, 輿還平壤。 妾問後事, 瞪目不答, 令子弟牽出, 遂不言而卒。
번역문:
공이 병들었을 때, 관직을 사양하고 돌아가기를 청하라고 말하는 자가 있자, 공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외람되이 재주 없는 몸으로 임금의 지우(知遇)⁷²를 넘치게 입어 지위가 숭품(崇品)⁷³에 이르고 절월(節鉞)⁷⁴까지 받았으니 은총이 매우 성대한데, 어찌 내 한 몸을 위해 꾀하여 편안히 앉아서 돌아가기를 청하겠는가?” 하였다. 억지로 일어나 나가 순찰하니, 자제(子弟)들이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가벼운 병이니 마땅히 스스로 물리쳐야 한다고 여기고 병든 몸을 이끌고 갔다. 영변(寧邊)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져 가마를 타고 평양(平壤)으로 돌아왔다. 첩(妾)이 후사(後事)⁷⁵를 묻자, 눈을 부릅뜨고 답하지 않았으며, 자제들에게 명하여 그녀를 끌어내게 하고는 마침내 말을 하지 않고 졸(卒)하였다.
주석:
72. 주지(主知): 임금의 알아줌. 임금의 신임과 총애를 의미한다.
73. 숭품(崇品): 높은 품계. 종1품 이상을 가리킨다. 허굉은 종1품 우찬성이었다.
74. 절월(節鉞): 부절(符節)과 부월(斧鉞). 고대 중국에서 군대를 통솔하는 장수에게 주던 신표(信標)와 권위의 상징물. 여기서는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군사 지휘권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75. 후사(後事): 죽은 뒤의 일. 장례나 재산 처리 등을 의미한다.

원문:
公平居以讀書爲事, 博覽强記, 至於兵書、律文, 留意該洽。 凡有論議, 曲盡其當, 聞者歎服。 常語諸子曰: “家世詩書, 冠冕相接, 至先考兄弟而益隆。 吾又不才, 位望已極, 雖以汝輩不好學爲戒, 以理推之, 豈宜復顯? 只當讀書知過, 以免於世耳。” 性儉素, 不喜華麗, 食不重肉, 四方無田園, 百口仰祿俸, 而他無長物焉。【竝《潛谷舊錄》。】
번역문:
공은 평소 거처할 때 독서(讀書)를 일삼아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며(博覽强記), 병서(兵書)⁷⁶와 율문(律文)⁷⁷에 이르기까지 유의하여 두루 통달하였다(該洽). 무릇 논의(論議)함에 있어 그 마땅함을 곡진히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항상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집안 대대로 시서(詩書)⁷⁸를 익혀 관면(冠冕)⁷⁹이 서로 이어졌고, 선고(先考)⁸⁰ 형제 대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였다. 나 또한 재주가 없으나 지위와 명망이 이미 지극하니, 비록 너희들이 학문을 좋아하지 않음을 경계하지만, 이치로 미루어 볼 때 어찌 다시 현달(顯達)함이 마땅하겠느냐? 다만 마땅히 독서하여 허물을 앎으로써 세상의 허물을 면해야 할 뿐이다.” 하였다. 성품이 검소(儉素)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식사 때 고기반찬을 겹쳐 놓지 않았으며(食不重肉)⁸¹, 사방(四方)에 전원(田園)이 없어 온 식구(百口)가 녹봉(祿俸)에 의지하였고, 그 외에 남는 물건(長物)⁸²이 없었다.【이상은 모두 《잠곡구록(潛谷舊錄)》에서 인용】
주석:
76. 병서(兵書): 병법(兵法)에 관한 책.
77. 율문(律文): 법률 조문.
78. 시서(詩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유교 경전을 통칭하는 말로, 학문 또는 교양을 의미한다.
79. 관면(冠冕): 예복(禮服)에 갖추어 쓰던 관(冠)과 면류관(冕旒冠). 높은 벼슬이나 벼슬아치를 비유한다. '관면상접(冠冕相接)'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이어왔음을 의미한다.
80.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 여기서는 허침(許琛)을 가리킨다.
81. 식부중육(食不重肉): 밥상에 고기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않음. 검소한 생활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82. 장물(長物): 여분의 물건. 재산이나 세간 등을 의미한다.


이자(李耔)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李耔
字次野, 號陰崖, 韓山人。 牧隱穡之曾¹孫。 成化庚子生。 燕山七年辛酉司馬, 甲子擢魁科。 官至刑曹判書。 己卯禍起, 退居陰城。 癸巳卒, 年五十四。
번역문:
이자(李耔)
자는 차야(次野)이고, 호는 음애(陰崖)이며, 한산(韓山) 사람이다.¹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증손(曾孫)²이다. 성화(成化) 경자년(庚子年, 1480)³에 태어났다. 연산군(燕山君) 7년 신유년(辛酉年, 1501)에 사마시(司馬試)⁴에 합격하였고, 갑자년(甲子年, 1504)에 문과(文科)에 장원(魁科)⁵으로 뽑혔다. 관직은 형조 판서(刑曹判書)⁶에 이르렀다. 기묘사화(己卯士禍)⁷가 일어나자 음성(陰城)에 물러나 살았다. 계사년(癸巳年, 1533)에 향년 54세로 졸(卒)하였다.
주석:
한산인(韓山人): 본관(本貫)이 한산(韓山)임을 나타낸다.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주-D001] 曾 : 《음애집(陰崖集)》 행장(行狀)에 “자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휘(諱) 곡(穀),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 인재공(麟齋公) 휘 종학(種學)이 조상과 자손으로 문헌(文獻)을 계승하여 한산서원(韓山書院)에 차례로 배향되었는데, 공(公)은 인재공의 4대손으로 배향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근거할 때 ‘후(後)’가 되어야 할 듯하다. 즉, 목은 이색의 직계 후손이며, 인재 이종학의 4대손(이색-이종학-이계전-이예견-이자)이므로 목은 이색에게는 현손(玄孫)이 된다. 여기서는 저본(底本)을 따라 '증손(曾孫)'으로 번역하고 이견을 밝힌다.
성화(成化) 경자년(庚子年): 성화는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1465-1487)이다. 성화 16년 경자년은 1480년(성종 11)이다.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과거 시험. 생원시는 경전(經傳) 시험, 진사시는 시부(詩賦) 시험이다. 이자는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괴과(魁科): 과거 시험에서 장원(壯元) 또는 수석 합격을 의미한다. 이자는 갑자년(1504, 연산군 10)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육조(六曹) 중 하나인 형조(刑曹)의 으뜸 벼슬. 정2품. 형벌, 법률, 노비 등에 관한 업무를 총괄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勳舊派)가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한 사건. 이자는 조광조 등과 가까웠기에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원문:
公年甫七八, 父大諫公【禮堅。】始授之書, 不煩指誨, 一年離口讀, 又一年通大義。 稍長, 學益力, 退處一室, 若有心會。 癸丑, 趨庭于三陟府治, 遂上頭陀山中臺寺, 讀《宋史》, 慨然自奮, 作萬言書, 欲自獻, 大諫公戒止之。 有一老宿, 持戒頗嚴, 發言有道理, 又喜之, 欲參焉。 寺前絶壁巉立, 積雪交映, 香燈永夜, 激昂千古。
번역문:
공(公)의 나이 겨우 7, 8세에 아버지 대간공(大諫公) 이예견(李禮堅)⁸이 처음으로 그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번거롭게 지도하고 가르치지 않아도 1년 만에 구두(口讀)⁹를 떼었고, 또 1년 만에 대의(大義)¹⁰를 통달하였다. 점차 자라면서 학문에 더욱 힘써 한 방에 물러나 처하며 마음에 깨닫는 바(心會)¹¹가 있는 듯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493)¹²에 삼척부(三陟府)의 치소(治所)¹³로 아버지를 찾아가(趨庭)¹⁴ 마침내 두타산(頭陀山) 중대사(中臺寺)¹⁵에 올라가 《송사(宋史)》¹⁶를 읽고 개연(慨然)히 스스로 분발하여 만언서(萬言書)¹⁷를 지어 스스로 바치려 하였으나, 대간공이 경계하여 말렸다. 한 노숙(老宿)¹⁸이 있었는데 계율을 지킴이 자못 엄격하고 말하는 것이 도리에 맞으므로, 또한 그를 좋아하여 그에게 배우고자 하였다. 절 앞에는 절벽이 가파르게 서 있고 쌓인 눈이 서로 비추며, 향불과 등불은 밤새도록 밝았으니, 천고(千古)의 격앙된 감회를 느꼈다.¹⁹
주석:
8. 대간공(大諫公) 이예견(李禮堅): 대간(大諫)은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예견(1452-1511)은 이자의 아버지로, 대사간을 역임했다.
9. 이구독(離口讀): 글을 더듬지 않고 입에서 술술 나오도록 읽는 것.
10. 대의(大義): 글의 큰 뜻, 요지.
11. 심회(心會): 마음으로 깨달아 앎. 직관적인 이해.
12. 계축년(癸丑年): 1493년(성종 24). 이자의 나이 14세 때이다.
13. 삼척부(三陟府)의 치소(治所): 삼척부의 관아가 있는 곳. 당시 아버지 이예견이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있었다.
14. 추정(趨庭): 《논어(論語)》 〈계씨(季氏)〉편에서 공자(孔子)의 아들 백어(伯魚)가 뜰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다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아버지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15. 두타산(頭陀山) 중대사(中臺寺):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산과 절.
16. 《송사(宋史)》: 중국 송(宋)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 원(元)나라 때 탈탈(脫脫) 등이 편찬했다.
17. 만언서(萬言書): 만 자(字)나 되는 긴 글. 보통 임금에게 올리는 장문의 상소(上疏)를 의미한다. 어린 나이에 시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아 올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18. 노숙(老宿): 학문이나 도덕, 또는 특정 분야(여기서는 불교)에 경험이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 주로 나이 많은 승려를 지칭한다.
19. 격앙천고(激昂千古): 천고의 세월을 두고 격하고 높은 감회를 느낌. 장엄한 자연과 면학 분위기 속에서 큰 포부를 느꼈음을 의미한다.

원문:
燕山政亂, 黽勉從仕, 惟用酒自汚。 大諫公忤旨, 初謫龍宮, 尋移星州, 公便丐聞韶, 理民作人, 咸盡其方, 大有去後思。 丙寅靖國, 大諫公還朝, 公又請爲陽川。 未赴, 有以公文學可備顧問爲言者, 乃授弘文館修撰。 丁大諫公憂, 廬于龍仁器谷里, 葬祭以禮, 鄕里化之。 旣除喪, 見先壟下南溪巖隙有楓林²側生, 心愛之, 自號楓林居士。
번역문:
연산군(燕山君)의 정치가 혼란하자²⁰ 힘써 벼슬에 나아갔으나(黽勉從仕)²¹ 오직 술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더럽혔다.²² 대간공(大諫公)이 왕의 뜻을 거슬러 처음에는 용궁(龍宮)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내 성주(星州)로 옮겨지자, 공은 곧 문소현감(聞韶縣監)을 자청하여²³, 백성을 다스리고 인재를 기름(理民作人)²⁴에 모두 그 방법을 다하니, 떠난 뒤에 사람들이 크게 그리워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506)에 정국(靖國)²⁵하여 대간공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공은 또 양천현령(陽川縣令)이 되기를 청하였다. 부임하기 전에, 공의 문학(文學)이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마침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²⁶에 제수되었다. 대간공의 상(喪)을 당하여(丁憂)²⁷ 용인(龍仁) 기곡리(器谷里)에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장례와 제사를 예법대로 하니, 향리(鄕里) 사람들이 감화되었다. 상(喪)을 마친 뒤에 선영(先壟)²⁸ 아래 남계(南溪) 바위틈에 단풍나무 숲(楓林)²⁹이 비스듬히 자란 것을 보고 마음에 이를 아껴 스스로 풍림거사(楓林居士)라 호(號)하였다.
주석:
20. 연산정란(燕山政亂): 연산군(燕山君) 재위 기간(1494-1506)의 폭정과 정치적 혼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등이 있었다.
21. 민면종사(黽勉從仕): 마지못해 힘써 벼슬에 나아감. 어지러운 시기였지만 관직에 나아간 것을 의미한다.
22. 주자오(酒自汚): 술로써 스스로를 더럽힘. 연산군의 폭정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술에 취해 무능한 척하거나 시류에 영합하는 척하며 몸을 보전하려 했음을 의미할 수 있다.
23. 개문소(丐聞韶): 문소현(聞韶縣,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일대)의 수령직을 구걸하다, 즉 자청하다. ‘개(丐)’는 구걸하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부친의 유배지 근처에서 봉양하기 위해 지방관직을 자청한 것을 의미한다. 문소는 당시 부친 이예견의 유배지인 성주(星州)와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다.
24. 이민작인(理民作人): 백성을 다스리고 사람을 만듦(인재를 기름). 목민관(牧民官)의 임무를 잘 수행했음을 나타낸다.
25. 병인정국(丙寅靖國): 병인년(1506)에 있었던 국가를 안정시킨 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을 가리킨다. 이 해에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옹립했다.
26.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弘文館)의 정6품 관직.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27. 정...우(丁...憂): 부모의 상(喪)을 당함. 이예견은 1511년(중종 6)에 사망했다.
28. 선롱(先壟): 조상의 무덤. 선영(先塋)과 같은 말이다.
29. [주-D002] 水 : 《음애집(陰崖集)》 행장(行狀)에는 “야(野)”로 되어 있고, 《소재집(穌齋集)》 행장(行狀)에는 “임(林)”으로 되어 있다. 즉 ‘풍야(楓野)’ 또는 ‘풍림(楓林)’이다. 뜻은 통하므로 저본을 따라 ‘풍림(楓林)’으로 번역한다.

원문:
戊寅, 朝廷議奏請辨誣, 上命博遴使者。 銓曹難其人, 請輟侍臣薦擬副使, 上特與增秩, 固讓不允。 遂入京進奏, 題本一上, 兪音旋降, 乃奉勅回江, 超拜漢城判尹、兼同知經筵事, 賜土田、臧獲。
번역문:
무인년(戊寅年, 1518)³⁰에 조정에서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는 변무(辨誣)³¹를 주청(奏請)하기로 의논하자, 상(上)께서 사신을 널리 선발(博遴)하도록 명하셨다. 이전(吏銓)³²에서 그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 시신(侍臣)³³ 중에서 천거하여 부사(副使)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특별히 관계(官階)를 높여 제수하셨으나 굳이 사양하였지만 윤허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연경(燕京)³⁴에 들어가 주청하니, 한번 제본(題本)³⁵을 올리자 윤허하는 답(兪音)이 곧바로 내려왔다. 이에 칙서(勅書)를 받들고 강(江)³⁶을 건너 돌아오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³⁷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수되었고, 토지와 노비(臧獲)³⁸를 하사받았다.
주석:
30. 무인년(戊寅年): 1518년(중종 13).
31. 주청변무(奏請辨誣): 무고(誣告)함을 밝혀달라고 (중국 황제에게) 주청(奏請)함. 구체적으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연산군(燕山君)의 왕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자는 논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는 반정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위되었는데, 사림파는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이 주청이 명나라 황제에게 어떤 내용으로 올라갔는지, 그리고 왜 이자가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실제 역사 기록을 보면 이 시기 이자는 주청사(奏請使)가 아니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행장 기록에 착오가 있을 수 있다.)
32. 전조(銓曹): 관리의 임면(任免)을 담당하던 관청인 이조(吏曹)를 가리킨다.
33. 시신(侍臣):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경연관(經筵官)이나 홍문관(弘文館) 관원 등을 가리킬 수 있다.
34. 연경(燕京): 중국 명(明)나라의 수도 북경(北京). 당시 명나라 연호는 정덕(正德)이었다.
35. 제본(題本): 명나라 때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던 공식 문서의 한 종류.
36. 강(江): 여기서는 압록강(鴨綠江)을 가리킨다.
37.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수도인 한성부(漢城府)의 으뜸 벼슬. 정2품.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는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종2품 이상의 관직이다. 이전 관직(수찬, 정6품)에서 매우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38. 장획(臧獲): 남자 종(臧)과 여자 종(獲). 노비를 통칭하는 말이다.

원문:
在燕都, 上使南衮得疾幾殊, 公辛勤藥餌, 書狀官韓忠耳語以這漢必赤士類, 公正色曰: “此同使也, 君言誤矣。” 世傳此行無甚悖亂, 公之力也。
번역문:
연도(燕都)에 있을 때, 상사(上使)³⁹ 남곤(南衮)⁴⁰이 병을 얻어 거의 위독해지자, 공(公)이 약(藥)과 음식(餌)을 정성껏 돌보았는데, 서장관(書狀官)⁴¹ 한충(韓忠)⁴²이 귓속말로 ‘이 자(這漢)는 반드시 사류(士類)⁴³를 시기할 것’이라고 하자, 공이 정색(正色)하며 말하였다. “이 분은 함께 온 사신인데, 그대의 말이 잘못되었다.” 세상에서는 이 사행(使行)에서 심한 패란(悖亂)⁴⁴이 없었던 것은 공의 힘이었다고 전한다.
주석:
39. 상사(上使): 사행(使行)의 정사(正使). 으뜸 사신.
40. 남곤(南衮, 1471-1527): 조선 중기의 문신. 훈구파의 핵심 인물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했다.
41. 서장관(書狀官): 사행(使行)에서 문서를 담당하던 관직. 정사(正使), 부사(副使)와 함께 삼사(三使)라고 불렸다.
42. 한충(韓忠, 1488-1521): 조선 중기의 문신. 사림파 인물로, 기묘사화 때 남곤, 심정 등을 탄핵하다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43. 사류(士類): 사림(士林).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 정치 세력. 남곤은 훈구파로 사림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한충은 같은 사림으로서 남곤을 경계한 것이다.
44. 패란(悖亂): 도리에 어긋나고 질서가 어지러움. 사행 내부의 갈등이나 분란을 의미한다. 이자가 중립적인 자세로 남곤과 한충 사이를 조율하여 사행이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원문:
己卯禍起, 坐累退居陰城, 始自號陰崖, 謝絶閉杜, 省愆守拙, 至屢空, 晏如也。 惟左右圖書, 凝神注目, 家僮罕見其面。 以其暇, 則引學者數人, 徘徊于門巖溪上, 或疏泉引沼, 誅茅架亭, 嘯詠舒放, 時得酒痛飮, 以澆胸中磊塊。 又好文字, 每發於信筆以自娛。
번역문:
기묘사화(己卯禍)가 일어나 연좌(坐累)되어 음성(陰城)에 물러나 살면서 비로소 스스로 음애(陰崖)라 호(號)하고, 교류를 끊고 문을 닫은 채(謝絶閉杜) 허물을 살피고 졸렬함을 지키며(省愆守拙)⁴⁵ 지내니, 여러 번 끼니를 거를 정도(屢空)⁴⁶였으나 태연자약(晏如)하였다. 오직 좌우에 도서(圖書)를 두고 정신을 모아 주목하니, 집안의 아이종(家僮)도 그 얼굴을 보기 드물었다. 틈이 나면 학자(學者) 두어 사람을 데리고 문암계(門巖溪)⁴⁷ 위를 배회하거나, 혹은 샘을 터서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고(疏泉引沼) 띠풀을 베어 정자를 지으며(誅茅架亭), 휘파람 불고 시를 읊으며(嘯詠) 마음껏 즐기고(舒放), 때로 술을 얻으면 통음(痛飮)하며 가슴 속의 불평(磊塊)⁴⁸을 씻어내었다. 또한 문자(文字)를 좋아하여 매번 붓 가는 대로 써서(信筆) 스스로 즐겼다.
주석:
45. 성건수졸(省愆守拙):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졸렬함을 지킨다는 뜻. 세상에 나아가 재능을 펼치기보다 은둔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의미이다.
46. 누공(屢空):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공자가 제자 안회(顔回)의 청빈한 삶을 칭찬하며 "자주 비었다(屢空)"고 한 데서 유래했다.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자주 거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47. 문암계(門巖溪): 음성에 있는 계곡 이름으로 추정된다.
48. 뇌괴(磊塊): 돌덩이가 쌓인 것. 마음속에 쌓인 울분이나 불만, 걱정거리 등을 비유한다. 기묘사화에 대한 울분과 세상에 대한 걱정을 술로 달래려 했음을 보여준다.

원문:
己丑, 移卜忠州獺川上流之兔溪, 築小精舍, 名以夢庵, 或自號夢翁。 其山高邃而水益淸, 人跡如掃, 村煙自稀, 渚禽水獸還往不驚。 與李灘叟延慶居不遠, 仍自號溪翁, 淸風朗月, 輒一棹相就, 窮硏道義, 暢敍襟懷, 樂而忘憂, 餘一紀矣。
번역문:
기축년(己丑年, 1529)⁴⁹에 충주(忠州) 달천(獺川) 상류의 토계(兔溪)로 거처를 옮겨 정하고, 작은 정사(精舍)를 지어 몽암(夢庵)이라 이름하고, 혹은 스스로 몽옹(夢翁)이라 호하였다. 그곳은 산이 높고 깊으며 물은 더욱 맑고 사람의 자취는 쓴 듯이 없어 마을 연기는 절로 드물었으며, 물가의 새와 물짐승들은 오가며 놀라지 않았다.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⁵⁰과 거처가 멀지 않아 그대로 시내 노인(溪翁)이라 자호(自號)하고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뜨면 문득 배를 저어 서로 찾아가 도의(道義)를 깊이 연구하고 회포(襟懷)를 시원하게 나누며, 즐거워 근심을 잊은 지 나머지 1기(紀)⁵¹가 되었다.
주석:
49. 기축년(己丑年): 1529년(중종 24).
50.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1487-155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탄수(灘叟), 본관은 고성(固城). 이자와 마찬가지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후에 복직했다.
51. 기(紀): 12년. 이자가 토계로 옮긴 것이 1529년이고 사망한 것이 1533년이므로, '1기(12년)'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 행장 기록의 착오이거나, '여일기(餘一紀)'가 '10여 년'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일 수 있다. 혹은 이연경과 교류한 기간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원문:
公天分甚高, 休休乎其外, 恢恢乎其中, 根基廣厚, 宇量虛明。 接人和而嚴, 處事簡而詳。 事父母, 極其孝敬; 在兄弟, 盡其恭愛, 篤於享祀, 莊於臨莅。 閨門之內, 斬斬有序, 雖小兒子, 不得踰閾。 常如對賓客, 矜持無惰容。 成、鄭二公從之遊, 借僧氈攻苦, 竊慕效之, 歎曰: “若人, 積習成自然, 焉可學也?”
번역문:
공(公)은 천분(天分)이 매우 높아, 그 외면은 너그럽고(休休乎)⁵² 그 내면은 여유가 있었으며(恢恢乎)⁵³, 근본 바탕(根基)이 넓고 두터우며 도량(宇量)이 비고 밝았다(虛明).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였고, 일을 처리함에는 간결하면서도 상세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효경(孝敬)을 다하였고, 형제간에는 공손함과 사랑(恭愛)을 다하였으며, 제사(享祀)에 독실하였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臨莅)는 장중(莊重)하였다. 집안(閨門)에서는 질서가 정연(斬斬有序)하여 비록 어린 자식이라도 문지방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항상 손님을 대하듯 긍지(矜持)를 지니고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성(成)·정(鄭) 두 공⁵⁴이 그를 따라 교유하며 승려의 모전(毛氈)을 빌려 고학(攻苦)⁵⁵하는 것을 보고 남몰래 흠모하여 본받으려다 탄식하며 말하였다. “저 사람은 쌓인 습관이 자연을 이루었으니, 어찌 배울 수 있겠는가?”
주석:
52. 휴휴호(休休乎):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에 나오는 말로, 너그럽고 여유 있는 모양을 나타낸다.
53. 회회호(恢恢乎):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서 포정(庖丁)이 소를 잡을 때 칼날을 움직일 여유가 매우 넓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매우 넓고 여유가 있는 모양을 나타낸다.
54. 성(成)·정(鄭) 두 공(二公):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불분명하다. 당시 이자와 교유했던 성세창(成世昌), 정사룡(鄭士龍) 등을 가리킬 수 있다.
55. 공고(攻苦): 어려움을 무릅쓰고 학문이나 일에 힘씀. 고학(苦學).

원문:
公立朝不動聲色, 爲時倚重, 出入十數年, 屢蒙天奬, 最承恩遇, 日思糜身報效。 時國家法久而弊, 又經亂政, 不啻若元祐之當改。 於是諸賢起而多所建明, 年少氣銳, 競事彈劾, 觸冒阻險, 而物情大乖。 居散地者, 怨次于骨, 匿跡旁伺矣。 公與申公鏛、趙公光祖、權公橃欲調適兩間, 不至敗闕, 則一二公執不可, 已無如之何, 而北門風雨作焉。
번역문:
공(公)은 조정에 서서 성색(聲色)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당시의 신망(倚重)을 받아, 출입한 십수 년 동안 여러 번 임금의 칭찬(天奬)을 받고 가장 은총(恩遇)을 입어, 날마다 몸을 바쳐(糜身)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다. 당시 국가의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겼고 또 어지러운 정치(亂政)를 겪어, 마치 송(宋)나라 원우(元祐) 연간⁵⁶에 마땅히 개혁해야 했던 때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여러 현인(賢人)들이 일어나 건의하고 밝힌 바가 많았는데, 젊은이들은 기개가 예리하여 다투어 탄핵(彈劾)하는 일에 힘쓰며 저지당하고 험난함을 무릅쓰다가(觸冒阻險) 민심(物情)이 크게 어그러졌다. 한직(散地)에 있는 자들은 원망이 뼈에 사무쳐 자취를 감추고 옆에서 기회를 엿보았다. 공은 신공 상(申公 鏛)⁵⁷, 조공 광조(趙公 光祖)⁵⁸, 권공 벌(權公 橃)⁵⁹과 함께 양측(兩間)⁶⁰을 조절하여 실패(敗闕)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한두 공(公)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북문(北門)의 풍우⁶¹가 일어났다.
주석:
56. 원우(元祐): 중국 북송(北宋) 철종(哲宗)의 연호(1086-1094). 이 시기 신법(新法)과 구법(舊法) 세력 간의 당쟁(黨爭)이 극심했다. 조광조 등 사림파의 개혁 정치를 구법파에, 이를 반대한 훈구파를 신법파에 비유하며 당시의 정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57. 신공 상(申公 鏛): 신용개(申用漑, 1463-1519). 조선 전기의 문신. 호는 이요정(二樂亭)·수옹(睡翁). 중종 대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다.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다.
58. 조공 광조(趙公 光祖):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사림파의 영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
59. 권공 벌(權公 橃): 권벌(權諰, 1478-154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충재(冲齋). 사림파 인물로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60. 양간(兩間): 양측 사이. 여기서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사림파와 이에 반대하는 훈구파 사이를 의미한다. 이자는 온건한 입장에서 양측을 조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61. 북문(北門)의 풍우(風雨): 북쪽 문에서 부는 비바람. 갑작스러운 정변이나 재난을 비유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가리킨다.

원문:
公平居淡然若忘世, 及聞時政缺失, 歎咤彌日。 嘗訓人至殺陳東, 未數行, 哽咽不能出聲, 慘色滿容, 哀淚承睫, 學者竊視之, 矍然徑退。 常自言: “嶺表有薄業, 去之足以具饘粥, 龍駒益遠, 吾不忍也。” 敬撫其伯耘, 如溫公之於伯康, 以不得同歸梓下爲戚, 北向瞻盱, 橫涕闌干。 嘗約共省掃, 伯公先至, 主宰成霖訪之, 挾兄雲勢, 攘臂使氣, 仇視淸流, 傍若無人。 公瘦⁶²馬麤衣入坐, 霖不覺沮喪而走, 强之, 乃進拜, 屛息流汗而出曰: “自爾有敬畏之心。”
번역문:
공(公)은 평소 담담(淡然)하게 세상을 잊은 듯 지내다가도, 시정(時政)의 잘못을 들으면 하루 종일 탄식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진동(陳東)⁶³이 살해된 고사(故事)에 이르기까지 훈계하다가, 몇 줄 읽지 못하여 목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고 참담한 빛이 얼굴에 가득하며 슬픈 눈물이 속눈썹에 맺히니, 배우는 자들이 몰래 엿보고는 깜짝 놀라 곧바로 물러갔다. 항상 스스로 말하였다. “영남(嶺表)에 보잘것없는 생업(薄業)이 있어 그곳으로 가면 죽(饘粥)을 마련하기에 족하지만, 용구(龍駒)⁶⁴가 더욱 멀어지니 내 차마 그럴 수 없다.” 그의 맏아들 운(耘)⁶⁵을 아끼고 어루만짐(敬撫)이 마치 온공(溫公)⁶⁶이 백강(伯康)⁶⁷에게 하듯 하였으며, 함께 고향(梓下)⁶⁸으로 돌아가지 못함을 슬퍼하여 북쪽을 향해 눈 부릅뜨고 바라보며(瞻盱) 눈물을 줄줄 흘렸다(橫涕闌干). 일찍이 함께 성묘(省掃)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백공(伯公)⁶⁹이 먼저 도착하자 주재(主宰)⁷⁰ 성림(成霖)⁷¹이 찾아와 형 운(雲)⁷²의 위세를 끼고 팔을 걷어붙이고 기세를 부리며(攘臂使氣) 청류(淸流)⁷³를 원수처럼 보고 곁에 사람이 없는 듯이 굴었다. 공이 야윈 말(瘦馬)⁷⁴을 타고 거친 옷(麤衣) 차림으로 들어와 앉으니, 성림이 저도 모르게 기가 죽어(沮喪) 달아나려 하거늘, 억지로 권하자 나아가 절하고 숨을 죽이고 땀을 흘리며 나와서 말하였다. “이로부터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생겼다.”
주석:
62. [주-D003] 瘦 : 저본(底本)에는 “수(廋)”로 되어 있다. 장서각본(藏書閣本), 규장각본(奎章閣本), 《음애집(陰崖集)・행장(行狀)》 등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수마(瘦馬)’가 문맥상 옳다.
63. 진동(陳東, 1086-1127): 중국 북송(北宋) 말기의 관리.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고 주전론(主戰論)을 펼치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살해되었다. 충신이 억울하게 죽은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이자는 진동의 고사를 통해 기묘사화의 비극과 사림의 희생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64. 용구(龍駒): 용마(龍馬)의 망아지. 준마(駿馬)를 비유하거나,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아들 이운(李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향으로 내려가면 아들의 장래에 방해가 될까 염려한 것이다.
65. 백운(伯耘): 이운(李耘, 1509-?)은 이자의 맏아들이다. 백(伯)은 맏이를 뜻한다.
66. 온공(溫公):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했다.
67. 백강(伯康): 사마강(司馬康, 1050-1090?). 사마광의 아들. 사마광이 아들을 엄격하면서도 자애롭게 교육한 일화가 전해진다.
68. 재하(梓下): 가래나무 아래. 고향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69. 백공(伯公): 맏이인 공(公). 여기서는 이자의 맏아들 이운(李耘)을 가리킨다.
70. 주재(主宰): 주장자(主葬者)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즉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
71. 성림(成霖): 성운(成雲, 1497-1579)의 아우.
72. 형 운(兄 雲): 성운(成雲). 조선 중기의 문신. 기묘사화 때 사림을 박해하는 데 가담했다. 성림이 형의 권세를 믿고 거만하게 굴었음을 나타낸다.
73. 청류(淸流): 맑은 흐름. 학문과 도덕성을 중시하며 부패를 비판하는 사림(士林)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운, 성림 형제는 훈구파에 가까웠으므로 사림을 적대시했다.
74. 수마(瘦馬): 야윈 말.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상징한다. 이자의 검소하고 위엄 있는 모습에 성림이 압도되었음을 보여준다.

원문:
金安老, 公之婭也。 奸黠媢嫉, 展轉枘鑿。 然公待之加厚, 誠意藹然, 彼亦不敢以慢語加之。
번역문:
김안로(金安老)⁷⁵는 공(公)의 동서(婭)⁷⁶였다. 간사하고 교활하며 시기심(媢嫉)이 많아, 이리저리 서로 맞지 않았다(展轉枘鑿)⁷⁷. 그러나 공은 그를 대하기를 더욱 후하게 하여 성의(誠意)가 온화하게 드러나니(藹然), 그 또한 감히 함부로 대하는 말(慢語)을 하지 못하였다.
주석:
75.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희락당(希樂堂)·용천(龍泉). 기묘사화 이후 정권을 장악하여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사사(賜死)되었다.
76. 아(婭): 동서(同壻), 즉 아내의 자매들의 남편들을 서로 부르는 말. 이자의 부인은 김안로의 처제였다.
77. 전전예착(展轉枘鑿):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네모난 장부 구멍(枘)과 둥근 장부촉(鑿). 서로 맞지 않아 융화되지 못하는 관계를 비유한다. 김안로의 간사함과 시기심 때문에 이자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원문:
守愼得侍數夜, 見讀書之餘, 必引三四觥, 或聯句, 或記事, 復端坐展策, 吾伊之聲, 徹於戶外, 如是者窮宵竟晷, 而溫潤之聲, 毅重之氣, 有不可得而窺其涯涘者。 其於詞藻, 初不屑意, 中不致力, 老而始從事焉。 出語淸淳平實, 不涉雕飾猥褻。 如《卽事》曰: “池平知守分, 水注待盈科。 雲影本無迹, 天容長不頗。 酒醒神散朗, 詩就坐婆娑。 此是人中景, 聊焉滌百痾。” 凡口占多類此。
번역문:
나 수신(守愼)⁷⁸이 며칠 밤을 모실 수 있었는데, 독서(讀書)하는 여가에는 반드시 서너 잔의 술(觥)⁷⁹을 마시며, 혹은 연구(聯句)⁸⁰를 짓거나 혹은 일을 기록하고는, 다시 단정히 앉아 책을 펼쳐 ‘오이(吾伊)’⁸¹하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리니, 이와 같이 밤을 새우고 낮을 마치도록(窮宵竟晷) 하였는데, 그 온화하고 윤택한(溫潤) 목소리와 굳세고 신중한(毅重) 기운은 그 끝(涯涘)을 엿볼 수 없는 바가 있었다. 사조(詞藻)⁸²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고(不屑意) 중간에도 힘쓰지 않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종사하였다. 나오는 말은 맑고 순수하며(淸淳) 평이하고 진실(平實)하여, 꾸밈(雕飾)이나 외설(猥褻)함에 빠지지 않았다. 〈즉사(卽事)〉⁸³ 시에 이르기를, “못 물 평평하니 분수 지킬 줄 알고, 물은 흘러 구덩이 채우기를 기다리네. 구름 그림자 본래 흔적 없으나, 하늘 모습 길이 기울지 않네. 술 깨니 정신 상쾌하게 흩어지고, 시 이루니 앉아 흥취에 겨워 춤추네. 이것이 인간 세상의 경치이니, 애오라지 온갖 병을 씻어내네.” 대체로 즉석에서 읊은 시(口占)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주석:
78. 수신(守愼):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소재(穌齋). 이 글(행장)의 저자이다. 이자에게 글을 배웠다.
79. 광(觥): 뿔이나 나무로 만든 큰 술잔.
80. 연구(聯句): 여러 사람이 한 구절씩 이어서 시를 짓는 것.
81. 오이(吾伊): 글 읽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82. 사조(詞藻): 시문(詩文)의 문채(文彩), 아름답게 꾸민 글귀.
83. 〈즉사(卽事)〉: 눈앞의 사물이나 일어난 일에 대해 즉흥적으로 읊은 시.

원문:
公之學以灑掃應對爲階梯, 窮神知化爲歸宿, 充養有道, 體用皆備。 但不求人知, 亦不輕以語人, 不喜空言, 惟務踏着實地。 晩而眞積力久, 義精仁熟, 動靜語默, 隨處而中。 雖其所受未聞, 顧其所到已極, 非有豪傑之才, 焉能⁸⁴若是? 嗚呼! 其惓惓忠愛之心, 久鬱畎畝, 堂堂經濟之志, 遽埋泉壤, 信所謂“斯人無福, 天下也無福”, 其可爲天下慟者哉!【竝盧穌齋守愼撰行狀。】
번역문:
공(公)의 학문은 쇄소응대(灑掃應對)⁸⁵로 계제(階梯)를 삼고 궁신지화(窮神知化)⁸⁶로 귀숙(歸宿)⁸⁷을 삼았으니, 함양(涵養)함에 방법이 있었고 체(體)와 용(用)⁸⁸을 모두 갖추었다. 다만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고 또한 가벼이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공허한 말(空言)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실지(實地)를 밟는 데 힘썼다. 만년(晩年)에는 참되게 쌓고 오래 힘써(眞積力久) 의(義)가 정밀해지고 인(仁)이 무르익어(義精仁熟), 움직이고 고요하며 말하고 침묵하는(動靜語默) 것이 처하는 곳에 따라 들어맞았다(隨處而中). 비록 그 전수받은 바는 듣지 못하였으나 돌아보건대 그 도달한 경지는 이미 지극하였으니, 호걸(豪傑)의 재능이 있지 않다면 어찌 능히⁸⁹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아! 그 간절한(惓惓) 충성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오랫동안 시골(畎畝)⁹⁰에 묻혀 있었고, 당당한 경제(經濟)⁹¹의 뜻은 갑자기 황천(泉壤)⁹²에 묻혔으니, 진실로 이른바 “이 사람이 복이 없음은 천하가 복이 없음이다”⁹³라는 것이니, 천하를 위해 통곡할 만한 일이로다!【이상은 모두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나왔다.】
주석:
84. [주-D004] 能 : 《음애집(陰崖集)・행장(行狀)》 및 《소재집(穌齋集)・유명조선국……이공행장(有明朝鮮國……李公行狀)》에는 뒤에 “유흥(猶興)”이 더 있다. ‘焉能猶興若是’는 ‘어찌 능히 오히려 이와 같이 흥기할 수 있었겠는가?’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85. 쇄소응대(灑掃應對): 물 뿌리고 청소하며 손님을 맞고 대답하는 일. 《소학(小學)》에서 강조하는 학문의 기초 단계, 즉 일상생활에서의 기본적인 예절과 실천을 의미한다.
86. 궁신지화(窮神知化): 신묘(神妙)한 이치를 궁구하고 천지자연의 변화를 앎.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에 나오는 말로, 사물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여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87. 귀숙(歸宿): 돌아가 머무는 곳. 학문이나 삶의 궁극적인 목표 또는 도달점을 의미한다.
88. 체용(體用): 본체(本體)와 작용(作用). 성리학에서 이(理)와 기(氣), 또는 본성(本性)과 발현(發現)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 학문의 이론과 실천, 또는 내면 수양과 외적 활동을 모두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89. 능(能): 주석 [주-D004] 참조.
90. 견무(畎畝): 밭두둑과 이랑. 시골, 민간, 초야(草野)를 의미한다. 이자가 기묘사화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은둔하며 지낸 것을 나타낸다.
91. 경제(經濟):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
92. 천양(泉壤): 샘이 있는 땅. 황천(黃泉), 즉 저승을 의미한다.
93. “斯人無福, 天下也無福(사인무복, 천하야무복)”: 이 사람이 복이 없음은 천하 또한 복이 없음이다. 뛰어난 인물이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은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 전체의 손실임을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홍언필(洪彦弼)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洪彦弼【文僖公。】
字子美, 號默齋。 成化丙申生。 燕山十年甲子, 中文科覆試。 燕山追錮曩時言事人子孫, 坐謫珍島, 中廟反正蒙放。 翌年丁卯, 始赴殿試。 賜暇湖堂, 歷大司憲、吏・兵曹判書、右贊成, 官至領議政, 賜几杖。 明宗己酉卒, 年七十四, 配享仁宗廟庭。

번역문:
홍언필(洪彦弼)【문희공(文僖公)¹이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다. 성화(成化) 병신년(1476)²에 태어났다. 연산군(燕山君) 10년 갑자년(1504)에 문과(文科) 복시(覆試)³에 합격하였다. 연산군이 지난날 언사(言事)⁴에 관련된 사람들의 자손을 추죄하여 금고(禁錮)⁵하였는데, 이에 연좌되어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⁶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정묘년(1507)에 비로소 전시(殿試)⁷에 응시하였다. 호당(湖堂)⁸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⁹하였고, 대사헌(大司憲), 이조(吏曹)·병조(兵曹) 판서(判書),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은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궤장(几杖)¹⁰을 하사받았다. 명종(明宗) 기유년(1559)에 졸(卒)하니, 향년 74세였고, 인종(仁宗)의 묘정(廟庭)¹¹에 배향(配享)¹²되었다.

주석:

  1. 문희공(文僖公): 홍언필의 시호(諡號). 문(文)은 도덕과 학문이 넓고 깊음(道德博聞), 또는 백성을 경륜으로 다스림(經緯天地) 등을 의미하며, 희(僖)는 허물을 경계하여 조심함(小心畏忌), 또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즐거움(溫柔恭樂) 등을 의미한다.
  2. 성화(成化) 병신년(1476): 성화는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1465-1487)이다. 조선 성종(成宗) 7년에 해당한다.
  3. 복시(覆試):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2차 시험. 초시(初試) 합격자를 대상으로 서울에서 실시하였다. 문과 복시에 합격하면 진사(進士) 또는 생원(生員)의 자격이 주어지며,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
  4. 언사(言事): 정치나 시사(時事)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일. 또는 그 말. 연산군 대에는 직언(直言)을 한 신하들이 탄압받는 경우가 많았다.
  5. 금고(禁錮): 죄인을 가두어 두거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형벌. 여기서는 연산군이 과거 언사에 관련된 신하들의 자손들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하여 벼슬길을 막고 탄압했음을 의미한다.
  6.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7. 전시(殿試): 조선 시대 문과(文科)의 마지막 시험 단계. 복시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국왕이 직접 궁궐에서 주관하여 최종 순위를 결정하였다.
  8. 호당(湖堂): 조선 시대 젊고 유능한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기관. 독서당(讀書堂)이라고도 한다. 주로 두모포(豆毛浦, 현재의 옥수동 부근)에 위치하여 호당이라 불렸다.
  9. 사가독서(賜暇讀書):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 호당에서 이루어졌다. 사가독서는 큰 영예로 여겨졌다.
  10. 궤장(几杖): 궤(几)는 몸을 기댈 수 있는 안석(案席), 장(杖)은 지팡이. 조선 시대에 나이가 많고 공로가 큰 70세 이상의 원로대신에게 왕이 하사하던 물건으로, 조정에 출사할 때 사용이 허락되었다. 이는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다.
  11. 묘정(廟庭): 종묘(宗廟)의 뜰.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다.
  12. 배향(配享):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하의 신위를 공덕이 있는 왕의 신위와 함께 종묘에 모시는 것. 홍언필은 인종(仁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문:
公德器早成, 學問日就, 年纔弱冠, 擧司馬試, 遂以知名。 叔父吏部瀚有藻鑑, 嘗謂公曰: “謝玄爲其叔父安所重, 汝知否?” 蓋以喩器重之意。

번역문:
공(公)은 덕의 그릇[德器]¹³이 일찍 이루어지고 학문이 날로 나아가, 나이 겨우 약관(弱冠)¹⁴에 사마시(司馬試)¹⁵에 합격하여 마침내 이름이 알려졌다. 숙부(叔父)인 이부(吏部)¹⁶ 홍한(洪瀚)¹⁷이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藻鑑]¹⁸이 있었는데, 일찍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사현(謝玄)이 그의 숙부 사안(謝安)¹⁹에게 중히 여겨진 것을 너는 아느냐?”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를 기량(器量) 있는 인물로 중시한다는 뜻을 비유한 것이었다.

주석:
13. 덕기(德器): 덕을 담는 그릇. 인물의 도량이나 재능,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14.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를 이르는 말.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上)에 “스무 살을 약(弱)이라 하며 관(冠)을 쓴다[二十曰弱 冠].”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15.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과거 시험. 생원시는 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진사시는 시(詩)·부(賦) 등 문학적 능력을 평가했다.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거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고, 문과(文科)에 응시할 자격도 얻었다.
16. 이부(吏部): 이조(吏曹)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홍한은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7. 홍한(洪瀚, 1444-?): 홍언필의 숙부. 자는 연원(淵源), 호는 읍취헌(挹翠軒).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18. 조감(藻鑑): 조(藻)는 마름, 감(鑑)은 거울. 사물의 시비나 선악, 인물의 현부(賢否)를 분명하게 가려내는 식견이나 능력을 비유한다.
19. 사현(謝玄), 사안(謝安): 사현은 동진(東晉)의 명장이며, 사안은 그의 숙부로 동진의 명재상이다. 사안은 조카 사현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중용하여 비수(淝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게 했다. 홍한이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은 홍언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한다는 의미이다.


원문:
燕山政方亂, 殺諫臣殆無虛日, 追錮曩時言事者子孫, 遂坐謫珍島。 丙寅九月, 中廟反正, 悉放無辜被謫者。 明年別擧, 特許公赴殿試。

번역문:
연산군의 정치가 바야흐로 혼란하여 간신(諫臣)을 죽이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지난날 언사(言事)에 관련된 자들의 자손을 추죄하여 금고하였는데, 마침내 이에 연좌되어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병인년(1506) 9월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무고하게 유배된 자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듬해 별시(別擧)²⁰를 특별히 허락하여 공(公)이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주석:
20. 별거(別擧):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특별한 필요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 별시(別試)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중종반정 이후 폐정을 바로잡고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
庚午, 三浦倭反, 陷熊川、薺浦等城, 湖南繹騷。 鄭文翼公光弼爲巡察使, 往鎭撫之, 以公有國器, 擧爲從事。

번역문:
경오년(1510)에 삼포(三浦)의 왜인(倭人)들이 반란²¹을 일으켜 웅천(熊川), 제포(薺浦) 등의 성(城)을 함락시키니, 호남(湖南)이 소란스러웠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²²이 순찰사(巡察使)가 되어 가서 이를 진무(鎭撫)하였는데, 공(公)에게 나라를 다스릴 만한 기량[國器]²³이 있다 하여 종사관(從事官)²⁴으로 삼았다.

주석:
21. 삼포(三浦)의 왜인(倭人)들이 반란: 삼포왜란(三浦倭亂). 1510년(중종 5) 부산포(釜山浦), 염포(鹽浦, 울산), 제포(薺浦, 창원)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조선 정부의 무역 통제 강화 등에 반발하여 일으킨 난동.
22.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시호는 문익(文翼). 중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23. 국기(國器): 나라의 기틀이 될 만한 큰 인물 또는 그 재능.
24. 종사관(從事官): 조선 시대 관찰사(觀察使), 절도사(節度使) 등 지방관이나 군 지휘관을 보좌하던 무관(武官) 또는 문관(文官) 벼슬. 여기서는 순찰사 정광필의 막료(幕僚)로 발탁되었음을 의미한다.


원문:
公之從母弟趙光祖見遇中廟, 年少競進, 爲事過激, 公獨憂之。 及己卯之禍, 公名亦在譴中, 賴宰相辨白乃免。

번역문:
공(公)의 외종제(外從弟) 조광조(趙光祖)²⁵가 중종(中宗)의 신임[見遇]²⁶을 얻어, 젊은 나이에 경쟁적으로 나아가 일을 함이 과격하자 공(公)이 홀로 이를 걱정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²⁷가 일어나자 공의 이름 또한 견책 대상 중에 있었으나, 재상(宰相)이 변호하여 밝혀준 덕분에 마침내 면할 수 있었다.

주석:
25.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개혁 정치가.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중종의 신임을 받아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려 했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기묘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홍언필의 외종제, 즉 이모의 아들이다.
26. 견우(見遇): 임금의 특별한 신임과 대우를 받는 것.
27.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勳舊派)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제거한 사건.


원문:
乙未春, 胤子暹憤權奸誤國, 語忤三兇, 下吏栲問幾死, 以故公亦坐罷, 退營菟裘于南陽, 惟以文墨爲娛。

번역문:
을미년(1535) 봄에 아들 홍섬(洪暹)²⁸이 권간(權奸)이 나라를 그르침에 분개하여 말이 삼흉(三凶)²⁹에게 거슬렸으므로, 아전에게 내려져 고문[栲問]³⁰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고, 이 때문에 공(公) 또한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물러나 남양(南陽)에 은거할 집[菟裘]³¹을 마련하고 오직 문묵(文墨)³²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주석:
28. 홍섬(洪暹, 1504-1585): 홍언필의 아들.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다.
29. 삼흉(三凶): 당시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던 김안로(金安老),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안로가 중종 말년에 정국을 주도하며 많은 사람을 숙청했다.
30. 고문(栲問): 형틀에 묶고 때리며 심문하는 것.
31. 토구(菟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11년 조에 나오는 지명. 은퇴하여 편안히 살 곳, 즉 은거지(隱居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32. 문묵(文墨): 문장(文章)과 필묵(筆墨). 글을 짓거나 쓰는 일, 또는 학문 활동을 의미한다.


원문:
公天性至孝, 而痛深<0xEF><0x80><0x8E>¹<0xEF><0x80><0x8F> 《蓼莪》, 奉慈闈益謹, 非有大疾病, 不廢定省, 親具甘旨, 嘗而後進。 尤謹於奉先, 有窮族無以供祭祀, 輒設之於家, 如得新物, 不薦不嘗。 自少好讀書, 老而愈喜, 公退之暇, 未嘗釋卷。 子弟或以事請間, 公以一卷書投諸前, 曰: “汝試一看了。” 他無所答。 爲文章甚淸高², 尤長於詩。 嘗有疾, 夫人買田一區, 公始知怒而笞婢, 其不營産如是。 雅意儉素, 不喜華美, 室無客館, 有地不起。 知雄守雌, 近名必退。 己與子侄增一秩進一官, 輒愀然曰: “其將釀何禍乎?”【竝墓誌。】

번역문:
공(公)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시경(詩經)》 〈육아(蓼莪)〉³³ 시를 읽고 깊이 마음 아파하였으며¹ 어머니[慈闈]³⁴를 더욱 삼가 모셨다. 큰 병환이 있지 않으면 정성(定省)³⁵을 폐하지 않았고, 직접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맛본 뒤에 올렸다. 조상 섬김[奉先]³⁶에 더욱 삼가하여, 가난한 친족 중에 제사(祭祀)를 지낼 수 없는 이가 있으면 문득 자기 집에서 제사를 베풀어 주었으며, 새로운 물건을 얻으면 먼저 제사에 올리지[薦]³⁷ 않고는 맛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늙어서 더욱 즐겼으며, 공무에서 물러난 여가에 일찍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제(子弟)들이 혹 일 때문에 뵙기를 청하면, 공은 책 한 권을 그 앞에 던져주며 말하기를, “네가 시험 삼아 한번 읽어 보아라” 할 뿐, 다른 대답이 없었다. 문장(文章)을 지음이 매우 맑고 고상하였으며², 특히 시(詩)에 뛰어났다. 일찍이 병이 들었을 때 부인(夫人)이 밭 한 구역을 사두었는데, 공이 비로소 이를 알고 노하여 여종을 매질하였으니, 그 재산을 경영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평소 뜻이 검소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집에 객관(客館)을 두지 않았고, 땅이 있어도 집을 짓지 않았다. 강함[雄]을 알면서도 약함[雌]³⁸을 지켰으며, 명예에 가까워지면 반드시 물러났다. 자신과 자질(子姪)들이 품계(秩)가 하나 오르거나 관직(官)이 하나 나아가면, 문득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기를, “그것이 장차 무슨 화(禍)를 불러올 것인가?” 하였다.【이상은 묘지(墓誌)³⁹에서 인용】

주석:
33. 《시경(詩經)》 〈육아(蓼莪)〉: 《시경》 〈소아(小雅)〉편에 실린 시. 부모가 자신을 낳아 기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나 이미 돌아가셔서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34. 자위(慈闈): 자애로운 어머니가 거처하는 안방 문.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35. 정성(定省): 자식이 부모의 안부를 살피는 도리.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定], 아침에는 밤새 안녕히 주무셨는지 살피는[省] 것을 말한다.
36. 봉선(奉先): 조상을 받들어 섬기는 것. 제사 등을 통해 조상을 기리는 일을 의미한다.
37. 천(薦): 신명(神明)이나 조상에게 음식을 올리는 것.
38. 지웅수자(知雄守雌):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28장에 나오는 구절("知其雄 守其雌"). 강함(雄)을 알면서도 부드러움과 약함(雌)의 도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겸허하고 부드러운 처세를 비유한다.
39.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성명, 가계, 행적 등을 기록하여 무덤 옆에 묻는 돌이나 도판. 또는 거기에 새긴 글. 묘지명(墓誌銘)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홍언필의 묘지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원문:
公爲相, 務鎭靜, 不建白。 人有言者, 公曰: “吾固知時事之可更張者多矣。 然更張而不得其善, 不如勿擾。”【《潛谷舊錄》。】

번역문:
공(公)이 재상(相)이 되어서는 진정(鎭靜)⁴⁰에 힘쓰고 건백(建白)⁴¹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이를) 말하자, 공이 말하였다. “내 진실로 시사(時事)에 개혁[更張]⁴²할 만한 것이 많음을 안다. 그러나 개혁하였다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소란스럽게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잠곡구록(潛谷舊錄)》⁴³에서 인용】

주석:
40. 진정(鎭靜): 소란이나 혼란을 가라앉혀 잠잠하게 함.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는 정치 방식을 의미한다.
41. 건백(建白): 자기의 의견이나 계획을 제시하고 설명하는 것.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정책을 제안하거나 개혁을 주장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42. 경장(更張): 거문고 줄을 바꾸어 맨다는 뜻에서, 정치·사회 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43. 《잠곡구록(潛谷舊錄)》: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남긴 기록으로 추정되나, 현전 여부는 불확실하다. 김육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다.


원문:
仁宗將祔廟, 世祖當遞遷, 命東西班二品、六曹參議以上議之, 皆以爲: “仁廟祔, 而世祖當遷。” 上答曰: “世祖乃當代四親之主, 功亦莫大, 遷之未安。 欲於延恩殿, 別祔仁宗何如?” 洪彦弼等論其未安, 至於四啓, 始允之。

번역문:
인종(仁宗)을 종묘(宗廟)에 부묘(祔廟)⁴⁴하게 되자 세조(世祖)의 신주(神主)를 체천(遞遷)⁴⁵해야 했으므로, 동서반(東西班) 2품(品)과 육조(六曹) 참의(參議) 이상에게 명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인종의 묘(廟)를 부묘하면 세조의 신주를 마땅히 옮겨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상(上)⁴⁶이 답하여 말하기를, “세조는 바로 당대 사친(四親)의 주(主)⁴⁷이시고 공(功) 또한 막대하니, 옮기는 것이 미안(未安)하다. 연은전(延恩殿)⁴⁸에 인종의 신주를 따로 부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홍언필(洪彦弼) 등이 그 미안함(부당함)을 논하여 네 차례나 아뢰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주석:
44. 부묘(祔廟): 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 삼년상(三年喪)을 마치고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일.
45. 체천(遞遷): 종묘에 모신 신주의 수가 정해진 규정(조선 시대는 정전 19실, 영녕전 16실)을 넘게 될 경우, 가장 오래된 조상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시는 일. 또는 영녕전에서도 가장 오래된 신주를 땅에 묻는 것(매안, 埋安)을 포함하기도 한다. 인종(仁宗)의 신주를 종묘 정전에 모시려면 당시 정전에 있던 세조(世祖)의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46. 상(上): 임금. 여기서는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47. 당대 사친지주(當代四親之主): 《예기(禮記)》 〈대전(大傳)〉에 나오는 말로, 종법(宗法)상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할 4대 조상(고조, 증조, 조부, 부)의 주가 되는 분이라는 뜻. 즉, 현재 임금의 직계 조상으로서 종묘 제사의 중요한 대상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48. 연은전(延恩殿): 영녕전(永寧殿)의 다른 이름. 종묘 정전(正殿)에서 체천된 왕과 왕비, 또는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별묘(別廟)이다. 명종은 세조의 신주를 옮기지 않고 인종의 신주를 영녕전에 모시려 한 것이다.


원문:
戊申五月, 左相李芑見遞, 洪彦弼爲其代。 領相尹仁鏡啓曰: “見廟堂先生案, 韓明澮遞領相九年³後, 還拜左相, 沈澮、鄭光弼遞領相越十年, 更爲左相, 其時之事, 未可詳也。 但洪彦弼座目, 本在臣上, 請以彦弼陞領相。” 傳曰: “不必讓位。” 彦弼啓曰: “凡朝廷公會, 一從座目, 今入政府, 座次前後各異, 請授座目當次之人。 職在百僚之長, 如引嫌不言, 則不可, 故敢啓。” 傳曰: “勿辭。” 仁鏡猶不避讓, 大司憲具壽聃以座目陞降未便之意, 啓於經筵。 命招六曹判書以上及兩司長官議之, 皆以爲當從座目, 且考前例, 亦皆從座目, 仁鏡降左相。

번역문:
무신년(1548) 5월에 좌상(左相) 이기(李芑)⁴⁹가 체직(遞)되자, 홍언필(洪彦弼)이 그를 대신하였다. 영상(領相) 윤인경(尹仁鏡)⁵⁰이 아뢰기를, “묘당(廟堂) 선생안(先生案)⁵¹을 보니, 한명회(韓明澮)는 영상에서 체직된 지 9년³ 뒤에 다시 좌상에 제수되었고, 심회(沈澮)와 정광필(鄭光弼)은 영상에서 체직된 지 10년이 넘어 다시 좌상이 되었으니, 그때의 일은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홍언필의 좌목(座目)⁵²이 본래 신(臣)의 위에 있었으니, 청컨대 홍언필을 영상으로 승진시키소서” 하였다. (왕이) 전교(傳敎)하기를 “반드시 자리를 양보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홍언필이 아뢰기를, “무릇 조정의 공적인 모임에서는 한결같이 좌목을 따르는데, 지금 의정부(政府)에 들어오니 좌석의 차례[座次]가 전후(前後)가 각각 다릅니다. 청컨대 좌목상 당연한 차례에 있는 사람에게 (영의정을) 제수하소서. 직책이 백료(百僚)의 으뜸에 있으면서 만약 혐의를 끌어다가[引嫌]⁵³ 말하지 않는다면 불가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윤인경이 여전히 피하거나 양보하지 않자, 대사헌(大司憲) 구수담(具壽聃)⁵⁴이 좌목에 따른 승강(陞降)이 불편(未便)하다는 뜻을 경연(經筵)⁵⁵에서 아뢰었다. 육조(六曹) 판서(判書) 이상 및 양사(兩司)⁵⁶의 장관(長官)을 불러 의논하게 명하니, 모두 마땅히 좌목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고, 또한 전례(前例)를 상고해 보아도 역시 모두 좌목을 따랐으므로, 윤인경이 좌상으로 강등되었다.

주석:
49. 이기(李芑, 1476-1552): 조선 중기의 문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50. 윤인경(尹仁鏡, 1477-1548): 조선 중기의 문신. 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주도했다.
51. 선생안(先生案): 과거 급제자 명부인 방목(榜目)이나 관직 제수 기록 등을 참고하여 작성한 선배 관료들의 명단. 관직 서열이나 의전 순서를 정하는 데 참고 자료로 쓰였다.
52. 좌목(座目): 조정의 의식이나 연회 등에서 관직의 품계나 서열에 따라 앉는 자리를 정한 명단 또는 그 순서. 조선 시대에는 관직 서열을 매우 중시했다. 홍언필은 윤인경보다 과거 급제나 관직 경력이 앞섰기 때문에 좌목상 서열이 높았다.
53. 인혐(引嫌): 스스로 혐의를 끌어옴. 혐의를 받을 만한 일을 피하거나, 자신의 행동이 오해받을 소지가 있을 때 이를 해명하거나 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홍언필은 자신이 마땅히 영의정이 되어야 함에도 좌의정에 머무는 것은 좌목의 원칙에 어긋나며, 이를 묵인하는 것은 재상으로서 직무 유기라는 점을 들어 사양한 것이다.
54. 구수담(具壽聃, 1493-1549): 조선 중기의 문신. 명종 대에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55. 경연(經筵): 조선 시대에 임금과 신하가 함께 모여 유교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학술 토론회.
56.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원문:
洪領相彦弼律身儉素, 不喜芬華。 嘗遇⁴初度, 子弟欲以歌管佐酒, 公曰: “吾叨據崇高², 恒懷戒愼, 敢以當聲妓之娛乎?” 服飾之侈美者, 亦却不御。 子壻官已高通顯, 每候門屛, 悉除呵辟。【竝《東閣雜記》。】

번역문:
영상(領相) 홍언필(洪彦弼)은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여 화려함[芬華]⁵⁷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생신(初度)⁵⁸을 맞았을 때⁴, 자제(子弟)들이 가무와 음악[歌管]으로 술자리를 돕고자 하자, 공(公)이 말하였다. “내가 외람되이 높은 지위[崇高]⁵⁹²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항상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품고 있는데, 감히 성기(聲妓)⁶⁰의 즐거움을 당하겠는가?” 의복과 장신구[服飾] 중에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것은 또한 물리치고 착용하지 않았다. 아들과 사위[子壻]의 관직이 이미 높아져 통현(通顯)⁶¹하였으나, 매번 문병(門屛)⁶²에서 기다릴 때마다 아벽(呵辟)⁶³을 모두 물리쳤다.【이상은 《동각잡기(東閣雜記)》⁶⁴에서 인용】

주석:
57. 분화(芬華): 향기롭고 화려함.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외양을 의미한다.
58. 초도(初度): 처음 태어난 날. 생신(生辰)을 의미한다.
59. 숭고(崇高): 지위나 신분이 매우 높음.
60. 성기(聲妓):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 또는 풍악과 기생.
61. 통현(通顯): 지위가 높고 이름이 널리 알려짐. 또는 그런 사람.
62. 문병(門屛): 문 밖에 세우는 병풍. 또는 문 앞. 고관대작이 행차할 때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구분하거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설치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아들과 사위가 아버지(장인)를 뵈러 올 때의 상황을 묘사한다.
63. 아벽(呵辟): '아(呵)'는 고관이 행차할 때 잡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소리치는 것, '벽(辟)'은 길을 비키게 하는 것. 즉, 고관의 행차 시 행해지던 통행금지나 길 정리 등을 의미한다. 홍언필은 자식이나 사위가 높은 벼슬에 올랐음에도 이러한 위세를 부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64. 《동각잡기(東閣雜記)》: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 주로 자신이 겪거나 들은 조선 전기 및 중기의 인물과 사건에 관한 일화를 기록했다.


원문:
公性本懦㥘, 見害必避, 謹愼言語, 徒以博覽自負, 排人。 不喜儒者疾靜菴如讎, 諉以避嫌, 必阻其路。 然居家謹簡, 其視貪濁宰列則美矣, 豈可沒乎?【《穌齋日記》。】

번역문:
공(公)은 성품이 본래 나약[懦㥘]⁶⁵하여 해(害)를 보면 반드시 피했고, 언어를 삼갔으며, 다만 박람(博覽)함을 자부하여 남을 배척하였다.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아 정암(靜庵)⁶⁶을 원수처럼 미워하였고, 혐의를 피한다는 핑계를 대며 반드시 그 길(벼슬길)을 막았다. 그러나 집에 거처할 때는 삼가고 간소했으니, 탐욕스럽고 혼탁한 재상들의 반열[宰列]에 비교하면 아름답다 할 만하니, 어찌 (그 장점을)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소재일기(穌齋日記)》⁶⁷에서 인용】

주석:
65. 나약(懦㥘): 마음이 약하고 부드러우며 겁이 많음. '㥘'는 '나약할 나(懦)'와 같은 뜻이다.
66.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 홍언필이 기묘사화 이후 사림파(士林派)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시사하는 평가이다.
67. 《소재일기(穌齋日記)》: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남긴 일기 또는 기록으로 추정된다. 노수신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이 기록은 홍언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원문:
洪默齋彦弼家法甚嚴, 領議政暹爲承旨時, 猶必日課所讀。【《芝峯類說》。】

번역문:
묵재(默齋) 홍언필(洪彦弼)은 가법(家法)⁶⁸이 매우 엄하여, 영의정(領議政) 홍섬(洪暹)이 승지(承旨)⁶⁹로 있을 때에도 오히려 반드시 매일 읽을 것을 과업으로 부과하였다.【《지봉유설(芝峯類說)》⁷⁰에서 인용】

주석:
68. 가법(家法): 한 집안의 법도나 규칙. 자손을 교육하고 집안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다.
69. 승지(承旨): 조선 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을 출납하고 국왕을 보좌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70. 《지봉유설(芝峯類說)》: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은 백과사전적 저술. 천문, 지리, 역사, 제도, 문물, 종교, 인물, 설화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망라하여 기록하였다.


권벌(權橃) 전기 번역 및 주석

원문:
權橃【忠定公。】
字仲虛, 安東人。 成化戊戌生。 燕山二年丙辰進士, 中宗二年丁卯登第。 薦入史局, 歷吏郞、三司、舍人、承旨、慶尙道觀察使、禮曹・兵曹判書。 明宗乙巳, 以右贊成竄朔州, 戊申, 卒于謫所, 年七十一。

번역문:
권벌(權橃)【충정공(忠定公)¹이다.】
자는 중허(仲虛)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다.² 성화(成化) 무술년(1478)³에 태어났다. 연산군(燕山君) 2년 병진년(1496)에 진사시(進士試)⁴에 합격하고, 중종(中宗) 2년 정묘년(1507)에 문과(文科)에 급제⁵하였다. 추천되어 사국(史局)⁶에 들어갔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⁷, 삼사(三司)⁸, 사인(舍人)⁹, 승지(承旨)¹⁰,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¹¹, 예조판서(禮曹判書)¹², 병조판서(兵曹判書)¹³를 역임하였다. 명종(明宗) 을사년(1545)¹⁴에 우찬성(右贊成)¹⁵으로서 삭주(朔州)¹⁶로 유배되었고, 무신년(1548)에 유배지에서 졸(卒)하니, 나이 71세였다.

주석:

  1. 충정공(忠定公): 권벌의 시호(諡號). 충(忠)은 충성스러움, 정(定)은 행실이 바르고 온화함(純行不爽) 등을 의미한다.
  2. 안동인(安東人):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임을 나타낸다.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다.
  3. 성화(成化) 무술년(戊戌年): 1478년 (성종 9). 성화는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1465~1487)이다. 무술년은 1478년이지만, 성화 연간에는 무술년이 없으므로, 이는 저자의 착오이거나 판본의 오류일 수 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등 다른 기록에는 홍치(弘治) 무오년(戊午年), 즉 1498년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성화 14년 무술년(1478) 출생으로 본다.
  4. 진사(進士): 진사시(進士試). 조선 시대 소과(小科)의 하나로, 합격자에게는 진사 칭호를 부여하고 성균관 입학 자격 및 대과(문과) 응시 자격을 주었다.
  5. 등제(登第): 문과(文科)에 급제한 것을 의미한다.
  6. 사국(史局): 역사 편찬 기관. 춘추관(春秋館) 또는 예문관(藝文館) 등을 가리킬 수 있다. 주로 실록 편찬 등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7. 이조 정랑(吏曹正郞): 육조(六曹) 중 하나인 이조(吏曹)의 정5품 관직. 문관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요직 중 하나였다.
  8. 삼사(三司):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을 통칭하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하는 중요 기관이었다. 권벌은 이 세 기관의 관직(대사헌, 대사간, 부제학 등)을 두루 거쳤다.
  9. 사인(舍人): 고려·조선 시대의 관직.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또는 예문관(藝文館) 등에 속했으며, 문한(文翰) 관련 업무를 보았다. 여기서는 예문관의 관직일 가능성이 높다.
  10. 승지(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11.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경상도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했다.
  12. 예조판서(禮曹判書): 육조 중 하나인 예조(禮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예악(禮樂), 제사(祭祀), 외교, 교육, 과거 등을 담당했다.
  13. 병조판서(兵曹判書): 육조 중 하나인 병조(兵曹)의 으뜸 벼슬. 정2품.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14. 을사년(乙巳年): 1545년 (명종 즉위년). 이 해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15. 우찬성(右贊成): 의정부(議政府)의 종1품 관직. 좌찬성과 함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다음가는 재상급 관직이다.
  16. 삭주(朔州): 평안북도에 있던 지명. 유배지로 보내졌음을 의미한다.

원문:
燕山甲子, 權橃試策得中, 旣坼號, 考官始覺卷中有處字, 啓請去之。 先是, 燕山怒中官金處善直諫而殺之, 命中外不得用處、善字故也。

번역문: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¹⁷에 권벌이 시책(試策)¹⁸ 시험에서 합격하였는데, 이미 탁호(坼號)¹⁹한 뒤에야 고관(考官)²⁰이 답안지 가운데 ‘처(處)’ 자가 있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이를 삭제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연산군이 중관(中官)²¹ 김처선(金處善)이 직간(直諫)한 것에 노하여 그를 죽이고, 중앙과 지방에 명하여 ‘처(處)’ 자와 ‘선(善)’ 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²²

주석:
17.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 이 해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18. 시책(試策): 대책(對策). 과거 시험의 한 과목으로, 임금이 정책 현안에 대해 질문하면 응시자가 그 해결 방안을 논술하는 방식이다.
19. 탁호(坼號): 과거 시험에서 응시자의 성명을 봉해 놓았던 봉투를 뜯어 합격자를 확인하는 절차.
20. 고관(考官): 과거 시험의 시험관.
21. 중관(中官): 내시(內侍). 궁궐 내의 일을 맡아보던 관원.
22. 김처선(金處善, ?-1505): 연산군 때의 환관.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며 직간하다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연산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의 이름자인 '처(處)'와 '선(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이 일화는 연산군 시대의 폭압적인 정치 상황을 보여준다.


원문:
爲持平。 政府奴鄭莫介者上變, 告辛允武、朴永文謀逆, 授堂上階。 時公將辭去覲親, 與同僚議當啓奪。 及還朝, 知其議中寢, 詣闕駁諸僚, 仍啓曰: “鄭莫介已知永文、允武之謀, 則當無留卽發, 而累日乃告, 不伏其辜幸矣。 至授重加, 請奪其職。” 上從之, 時論快之。

번역문:
지평(持平)²³으로 있을 때였다. 정부(政府)²⁴의 노(奴) 정막개(鄭莫介)라는 자가 상변(上變)²⁵하여 신윤무(辛允武)와 박영문(朴永文)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하여 당상관(堂上官)의 품계(品階)²⁶를 받았다. 이때 공(公)이 장차 부모님을 뵙기 위해 사직하고 떠나려 하였는데, 동료들과 그 품계를 박탈해야 한다고 아뢰기로 의논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그 의논이 중지된 것을 알고는, 대궐로 나아가 여러 동료들을 반박하고 이어서 아뢰었다. “정막개가 이미 박영문과 신윤무의 모의를 알았다면 마땅히 지체 없이 즉시 고발해야 했을 터인데, 여러 날이 지나서야 고발하였으니, 그 죄(辜)를 받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그런데 중한 가자(加資)²⁷까지 받았으니, 그 직책을 박탈하기를 청합니다.” 상(上)²⁸께서 이를 따르니, 당시의 여론(時論)이 통쾌하게 여겼다.

주석:
23. 지평(持平):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 대사헌, 집의 등과 함께 백관을 규찰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24. 정부(政府): 여기서는 의정부(議政府)를 가리킬 수 있으나, 문맥상 관청 소속의 노비임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다.
25. 상변(上變): 변고(變故)를 임금에게 보고하는 것. 특히 역모(逆謀)와 같은 중대 사건을 고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26. 당상계(堂上階): 당상관(堂上官)의 품계. 당상관은 정3품 상계(上階) 이상의 관원을 말하며, 국가의 중요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고위 관료이다. 노비 신분인 자가 역모 고변의 공으로 당상관의 품계를 받은 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27. 중가(重加): 중한 가자(加資). 품계를 특별히 높여주는 것.
28. 상(上): 임금. 여기서는 중종(中宗)을 가리킨다.


원문:
儒生殿講畢, 公進曰: “今日殿講論仁, 仁莫大於繼絶世。” 因論魯山、燕山不可不立後。 與右承旨金正國同辭極論曰: “恭順公芳蕃、昭悼公芳碩俱無嗣, 世宗大王命以廣平大君璵爲恭順公後, 以錦城大君瑜爲昭悼公後, 至今頌世宗仁親之厚。 昔周武王立武庚, 以存商祀, 我國家設崇義殿, 使不絶麗祀, 武王之於商, 我國之於麗, 猶不忍絶祀。 況魯山, 祖宗懿親; 燕山, 殿下至親, 亦君臨一時, 雖無道獲戾於宗廟, 而永絶不祀, 甚損殿下之仁。 請無留難。” 時衆議紛紜, 竟未擧行。

번역문:
유생(儒生)들의 전강(殿講)²⁹이 끝나자, 공(公)이 나아가 아뢰었다. “오늘 전강에서 인(仁)을 논하였는데, 인(仁)은 끊어진 세대(絶世)를 잇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어서 노산군(魯山君)³⁰과 연산군(燕山君)³¹의 후사(後嗣)를 세우지 않을 수 없음을 논하였다. 우승지(右承旨)³² 김정국(金正國)³³과 함께 말을 같이하여 극력으로 논하였다. “공순공(恭順公) 방번(芳蕃)³⁴과 소도공(昭悼公) 방석(芳碩)³⁵이 모두 후사가 없자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³⁶로써 공순공의 후사를 삼고,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³⁷로써 소도공의 후사를 삼도록 명하시니, 지금까지 세종께서 친족을 어질게 대하신 두터움을 칭송합니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무경(武庚)³⁸을 세워 상(商)나라의 제사를 보존하게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숭의전(崇義殿)³⁹을 설치하여 고려(高麗)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무왕이 상나라에 대해서나 우리나라가 고려에 대해서도 차마 제사를 끊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노산군은 조종(祖宗)의 가까운 친족⁴⁰이시고, 연산군은 전하(殿下)⁴¹의 지극한 친족이시며 또한 한때 임금으로 군림하였으니, 비록 무도(無道)하여 종묘(宗廟)에 죄를 얻었다 할지라도 영원히 제사를 끊어 지내지 않는 것은 전하의 인(仁)을 심히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청컨대 지체하거나 어렵게 여기지 마소서.” 당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분분(紛紜)하여 마침내 거행되지 못하였다.

주석:
29. 전강(殿講): 임금이 신하들이나 유생들과 함께 경서(經書)나 역사 등을 강론하는 자리.
30.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의 폐위 후의 군호(君號).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되어 죽음을 맞았다.
31. 연산군(燕山君): 조선의 제10대 왕. 폭정으로 인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었다.
32. 우승지(右承旨):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 6승지 중 하나로, 왕명 출납을 담당했다.
33. 김정국(金正國, 1485

154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국경(國卿), 호는 사재(思齋)·팔송(八松).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이다.
34. 공순공(恭順公) 방번(芳蕃): 태조(太祖)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과 함께 이방원(태종)에게 살해되었다.
35. 소도공(昭悼公) 방석(芳碩): 태조 이성계의 여덟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의안대군(宜安大君).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으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형 방번과 함께 살해되었다.
36.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 1425

1444):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37.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1426~1457):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세종이 후사 없는 동생(방번, 방석)들을 위해 조카들(광평, 금성)을 양자로 입적시킨 예를 들어 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울 것을 건의하는 것이다.
38. 무경(武庚):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아들.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상나라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 그를 제후로 봉했다. 이는 전 왕조의 제사를 끊지 않으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고사이다.
39.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현종(顯宗) 및 고려조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다. 고려 왕조의 제사를 국가에서 지내도록 한 것이다.
40. 의친(懿親): 아름다운[懿] 친족이라는 뜻으로, 가까운 왕실 친족을 의미한다.
41. 전하(殿下): 여기서는 중종(中宗)을 가리킨다.


원문:
己卯, 公見時事多故, 深以爲憂, 爲諸公力言之。 諸公不能從, 求外補三陟府使以去。 十二月, 北門之禍作, 猶以公爲其黨, 罷歸田里者十有五年。

번역문:
기묘년(1519)⁴²에 공(公)이 시사(時事)에 사고(事故)가 많음을 보고 깊이 이를 우려하여, 여러 공(公)들⁴³에게 힘써 말하였다. 여러 공들이 따르지 못하자, 외직(外職)인 삼척부사(三陟府使)⁴⁴를 구하여 떠나갔다. 12월에 북문(北門)의 화(禍)⁴⁵가 일어나자, 여전히 공(公)을 그 당여(黨與)로 여겨 파직되어 고향(田里)으로 돌아가 있은 지 15년이었다.

주석:
42.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 이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43. 제공(諸公): 조광조(趙光祖) 등 당시 개혁을 주도하던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가리킨다. 권벌은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 방식에 우려를 표했던 것으로 보인다.
44. 삼척부사(三陟府使): 강원도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의 수령. 종3품. 중앙 정치의 혼란을 피해 외직을 자청한 것이다.
45. 북문지화(北門之禍):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가리키는 말.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勳舊派)가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제거한 사건이다. ‘북문’은 당시 사화의 발단이 된 사건과 관련된 상징적인 장소일 수 있다. 권벌은 비록 외직에 나가 있었으나 조광조 등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원문:
壬寅, 世宗皇帝有宮婢之變, 朝廷議遣使陳慰。 公於經席進曰: “天子以萬乘之尊、四海之主, 一朝不虞之禍, 出於賤御。 凡爲人君, 秒忽不戒, 危禍所係。 殿下勿以上國之事而尋常之, 恒加省念。” 辭甚觸犯, 同列皆縮頸而退。

번역문:
임인년(1542)⁴⁶에 세종황제(世宗皇帝)⁴⁷에게 궁비(宮婢)의 변(變)⁴⁸이 있자,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위로의 뜻을 진술하기로 의논하였다. 공(公)이 경연(經筵) 자리⁴⁹에서 나아가 아뢰었다. “천자(天子)께서는 만승(萬乘)의 존귀함과 사해(四海)의 주인이시면서 하루아침에 생각지 못한 화(禍)가 천한 궁녀에게서 나왔습니다. 무릇 임금 된 자는 아주 작은 순간이라도 경계하지 않으면 위험과 화가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상국(上國)⁵⁰의 일이라고 하여 예사롭게 여기지 마시고, 항상 반성하고 생각하소서.” 그 말이 매우 임금의 비위를 거슬렀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 물러났다.

주석:
46. 임인년(壬寅年): 1542년 (중종 37).
47. 세종황제(世宗皇帝): 명(明)나라 제11대 황제인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7). 묘호가 세종(世宗)이다.
48. 궁비지변(宮婢之變): 임인궁변(壬寅宮變). 1542년(가정 21) 명나라 가정제가 궁녀 양금영(楊金英) 등에게 목이 졸려 죽을 뻔했던 사건. 궁녀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황제의 신변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49. 경석(經席): 경연(經筵) 자리. 임금과 신하들이 경서(經書)와 역사 등을 강론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
50. 상국(上國): 윗나라. 당시 조선이 사대(事大)하던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권벌은 명 황제에게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을 교훈 삼아 중종 역시 늘 경계해야 함을 직언(直言)한 것이다.


원문:
公器局峻整, 雅好讀書, 《自警編》、《近思錄》, 不去懷袖間。 中宗嘗召宰執宴後苑, 各醉扶而出, 有內小臣拾得小冊, 上曰: “落自權橃。” 命還之。

번역문:
공(公)은 기국(器局)¹이 준엄하고 정돈되었으며, 평소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自警編)》⁵²과 《근사록(近思錄)》⁵³을 품과 소매 사이에서 떠나지 않게 하였다. 중종(中宗)께서 일찍이 재상과 승지(宰執)⁵⁴들을 후원(後苑)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었는데, 각기 취하여 부축을 받고 나갔다. 어떤 내소신(內小臣)⁵⁵이 작은 책을 주워 올리자, 상(上)께서 말씀하셨다. “권벌에게서 떨어진 것이다.”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주석:
51. 기국(器局): 사람의 재능과 도량.
52. 《자경편(自警編)》: 송(宋)나라 조엽(趙抃)이 지은 책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또는 원(元)나라 노장(魯璋)의 《노자치겸자경편(魯子治稴自警編)》을 가리킬 수도 있다. 스스로 경계하는 내용의 글들을 모은 책이다.
53. 《근사록(近思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북송(北宋)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네 사람의 어록과 문집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 편집한 성리학(性理學) 입문서.
54. 재집(宰執): 재상(宰相)과 집정(執政). 고위 관료들을 통칭하는 말. 구체적으로는 의정부의 삼정승(三政丞)과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 등을 가리킬 수 있다.
55. 내소신(內小臣): 궁궐 안의 하급 관리나 환관 등을 가리킨다.


원문:
乙巳八月, 李芑、鄭順朋、許磁、林百齡詣政院, 啓柳灌、尹任、柳仁淑等罪。 文定王后御忠順堂, 召六卿以上入議, 公啓曰: “物論, 臣不得聞, 前日大[주-D001]、小尹之說, 不知何自而出也。 然往者睿宗無嗣, 月山當次, 貞熹王后越次而援立, 成宗年甫十三矣, 猶終始帖然無事。 況今主上乃仁廟嫡弟, 旣已正位, 豈復有他虞乎? 且今王子君無結黨, 大臣無執權, 誰敢有陰邪之心? 尹任若有邪心, 死且無惜。 臣意竊謂方此初政, 務得人心, 當以大公至正行之。 中宗之始, 大臣不能善導, 以李顆爲反, 盧永孫取堂上。 自是告變者多, 中宗後乃知其故, 盡放連坐人, 一國咸服而人心定。 此今日之所當戒也。” 是日, 尹任遠竄, 灌遞相, 仁淑罷。 于時, 獻納白仁傑擊臺諫不能論執, 密旨命下仁傑于禁獄鞫治, 加任竄絶島, 二柳付處。 公復獨詣闕書啓曰: “自先朝末, 上天屢降大災, 近又大風, 連雨曚昧, 臣恐天意或有所感而然, 甚可畏也。 且幼主卽位未幾, 遠竄大臣, 人皆莫測其端, 又囚臺官, 誰敢冒死而進言乎? 臣夜不能寐, 知死敢啓。 尹任雖被重罪, 固不足惜, 臣竊以王大妃於嗣王, 有母之道, 若因此憂傷不豫, 豈不爲大累? 飛言自古有之, 古之明君, 不以此罪人。 柳灌本有腹病, 於朝堂, 每倚屛壁而坐, 旣無子息, 不敢辭退, 爲國而然也。 柳仁淑得上氣證, 今已有年。 此等老病書生, 位極人臣, 豈有他心? 今若遠行, 得病而死, 人皆曰國殺之也。 願上平心察之, 廣問群下, 情罪相稱, 則人心可鎭, 天變可弭矣。” 又移書尹元衡, 擧“吾不西行, 大禍不止”之語以責之。 會林百齡、許磁皆啓請, 於尹任罪目中, 去“宗社”二字。 順朋因是激怒, 乃上疏極言三人罪, 復於忠順堂引對, 於是三人皆以逆謀誅, 論功行賞, 公亦賜衛社功臣號, 封吉原君。 已而順朋等啓: “權橃與臣等, 論議不同, 請削勳。” 十月, 兩司啓罷, 皆依允。

번역문:
을사년(1545) 8월에 이기(李芑)⁵⁶, 정순붕(鄭順朋)⁵⁷, 허자(許磁)⁵⁸, 임백령(林百齡)⁵⁹이 정원(政院)⁶⁰에 나아가 유관(柳灌)⁶¹, 윤임(尹任)⁶², 유인숙(柳仁淑)⁶³ 등의 죄를 아뢰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⁶⁴가 충순당(忠順堂)⁶⁵에 나아가 육경(六卿)⁶⁶ 이상을 불러들여 의논하게 하니, 공(公)이 아뢰었다. “세상 사람들의 의논(物論)은 신(臣)이 듣지 못하였습니다만, 전일의 대윤(大尹)⁶⁷, 소윤(小尹)⁶⁸의 설(說)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난날 예종(睿宗)께서 후사(後嗣)가 없으실 때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당연히 차례였으나 정의왕후(貞熹王后)께서 차례를 넘어 끌어다 세우셨으니, 성종(成宗)의 나이가 겨우 13세였는데도 오히려 시종 평온하여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의 주상(主上)⁶⁹께서는 바로 인종(仁廟)⁷⁰의 친동생이시고 이미 왕위에 오르셨으니, 어찌 다시 다른 우려가 있겠습니까? 또한 지금 왕자군(王子君)⁷¹들은 결당(結黨)함이 없고 대신(大臣)들은 권력을 잡음이 없으니, 누가 감히 음흉하고 사악한 마음을 갖겠습니까? 윤임(尹任)이 만약 사악한 마음이 있다면 죽어도 또한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삼가 지금 막 정치를 시작하는 때를 당하여 인심(人心)을 얻는 데 힘써야 하니, 마땅히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바른 도리로써 행하여야 합니다. 중종(中宗) 초기에 대신들이 능히 잘 인도하지 못하여 이과(李顆)⁷²를 반역으로 삼고 노영손(盧永孫)⁷³이 당상관 직을 얻었습니다. 이로부터 고변(告變)하는 자가 많았는데, 중종께서 뒤에 그 까닭을 아시고 연좌(連坐)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시니, 온 나라가 모두 복종하고 인심이 안정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입니다.” 이날 윤임은 먼 곳으로 유배되고, 유관은 정승에서 교체되고, 유인숙은 파직되었다. 이때에 헌납(獻納)⁷⁴ 백인걸(白仁傑)⁷⁵이 대간(臺諫)⁷⁶이 능히 (윤임 등을 구원하는) 의논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탄핵하자, 비밀스러운 교지(密旨)로 백인걸을 금부(禁府)의 옥에 내려 국문하여 다스리도록 명하고, 윤임에게는 절도(絶島)로 유배 보내는 형벌을 더하고, 두 유씨(유관, 유인숙)는 부처(付處)⁷⁷하게 하였다. 공이 다시 홀로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려 아뢰었다. “선조(先朝)⁷⁸ 말년부터 상천(上天)께서 여러 차례 큰 재앙을 내리셨고, 근래에 또 큰 바람이 불고 연일 비가 내려 어두컴컴하니, 신은 천의(天意)가 혹 느끼는 바가 있어 그러한가 염려되어 심히 두려울 따름입니다. 또한 어린 주상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신을 멀리 유배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그 단서를 헤아리지 못하고, 또 대관(臺官)⁷⁹을 가두니 누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 말하겠습니까? 신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여, 죽을 줄 알면서 감히 아룁니다. 윤임이 비록 중죄를 입었으나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만, 신은 삼가 왕대비(王大妃)⁸⁰께서 사왕(嗣王)⁸¹에게 어머니의 도리가 있으시니, 만약 이로 인해 근심하고 상심하여 편찮으시다면 어찌 큰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뜬소문(飛言)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옛날의 명철한 군주는 이로써 사람을 죄주지 않았습니다. 유관은 본래 복병(腹病)⁸²이 있어 조정 당상에 있을 때 매번 병풍이나 벽에 기대앉았으며, 이미 자식이 없어 감히 사퇴하지 못하였으니, 나라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유인숙은 상기증(上氣證)⁸³을 얻어 지금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들 늙고 병든 서생(書生)들이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에 이르렀는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먼 길을 떠나 병을 얻어 죽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나라가 그를 죽였다고 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상께서는 마음을 평안히 하여 살피시고, 여러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어, 정상(情狀)과 죄과(罪科)가 서로 부합하게 하시면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고 하늘의 변고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윤원형(尹元衡)⁸⁴에게 글을 보내어 “내가 서쪽으로 가지 않으면 큰 화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吾不西行, 大禍不止)”⁸⁵라는 말을 들어 그를 꾸짖었다. 마침 임백령과 허자가 모두 아뢰어 청하여 윤임의 죄목 중에서 ‘종사(宗社)’⁸⁶ 두 글자를 빼게 하였다. 정순붕이 이로 인해 격노하여 마침내 상소를 올려 세 사람⁸⁷의 죄를 극력으로 말하고, 다시 충순당에서 인대(引對)⁸⁸하니, 이에 세 사람이 모두 역모(逆謀)로써 주살(誅殺)되고 공(功)을 논하여 상을 내릴 때, 공 또한 위사공신(衛社功臣)⁸⁹의 호(號)를 하사받고 길원군(吉原君)⁹⁰에 봉해졌다. 이윽고 정순붕 등이 아뢰었다. “권벌이 신 등과 논의가 같지 않으니, 훈(勳)을 삭탈하기를 청합니다.” 10월에 양사(兩司)⁹¹에서 파직을 아뢰니, 모두 윤허한 대로 따랐다.

주석:
56. 이기(李芑, 1476

155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 윤원형 등과 함께 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로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57. 정순붕(鄭順朋, ?

15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자익(子益), 호는 고옥(古玉). 소윤 세력에 가담하여 을사사화를 주도했다.
58. 허자(許磁, 1496

15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사온(士溫), 호는 동애(東崖). 소윤 세력에 속했다.
59. 임백령(林百齡, 1498

154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춘수(春?). 소윤 세력에 가담했다.
60. 정원(政院):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관청.
61. 유관(柳灌, 1484

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庵). 대윤(大尹) 세력의 일원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을사사화 때 사사되었다.
62. 윤임(尹任, 1487

1545): 조선 중기의 무신, 척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임지(任之). 인종(仁宗)의 외숙부로서 대윤 세력을 이끌었다. 을사사화 때 사사되었다.
63. 유인숙(柳仁淑, 1485

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부(淑夫), 호는 잠암(潛庵). 대윤 세력의 일원으로 을사사화 때 사사되었다.
64.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

1565):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이며 명종(明宗)의 생모. 윤원형의 누이이다. 명종 즉위 후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며 소윤 세력을 비호하고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65. 충순당(忠順堂): 창경궁(昌慶宮) 안에 있던 전각.
66. 육경(六卿): 육조(六曹: 이·호·예·병·형·공조)의 판서(判書)를 가리킨다.
67. [주-D001] 大 : 저본(底本)에는 없다. 《충재집(冲齋集)・유명조선국……권공행장(有明朝鮮國……權公行狀)》, 《퇴계집(退溪集)・증대광보국……권공행장(贈大匡輔國……權公行狀)》, 《명종실록(明宗實錄)》 즉위년 8월 26일 기록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68. 대윤(大尹), 소윤(小尹): 인종(仁宗)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대윤, 명종(明宗)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윤원로(尹元老)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소윤이라고 한다. 인종 즉위 후 대윤이 정권을 잡았으나, 인종이 일찍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지원을 받은 소윤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 세력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69. 주상(主上): 현재의 임금.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70. 인종(仁廟): 인종(仁宗, 1515

1545). 조선의 제12대 왕. 중종의 맏아들이며 명종의 이복형이다.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71. 왕자군(王子君): 왕의 아들들. 여기서는 명종의 형제들을 가리킬 수 있다.
72. 이과(李顆, ?

1506):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 반정공신 박원종(朴元宗) 등을 제거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다.
73. 노영손(盧永孫): 중종 때 무고(誣告)로 당상관이 된 인물. 이과(李顆)의 옥사를 계기로 고변이 잦아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74. 헌납(獻納): 사간원(司諫院)의 정5품 관직.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75. 백인걸(白仁傑, 1497

1579):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巖).
76. 대간(臺諫): 사헌부(대)와 사간원(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 언론 기능을 담당했다.
77. 부처(付處): 죄인을 먼 지방이나 외딴섬에 보내 격리하여 살게 하던 형벌. 유배(流配)보다는 가벼운 형벌이다.
78. 선조(先朝): 돌아가신 이전 임금. 중종(中宗)을 가리킨다.
79. 대관(臺官): 사헌부의 관원.
80. 왕대비(王大妃): 여기서는 인종(仁宗)의 계모(繼母)이자 명종(明宗)의 생모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가리킨다.
81. 사왕(嗣王): 왕위를 이은 임금.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왕대비와 사왕의 관계, 즉 문정왕후와 명종의 모자 관계를 언급하며, 윤임 등을 처벌하는 것이 문정왕후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82. 복병(腹病): 뱃병. 소화기 계통의 질병.
83. 상기증(上氣證): 기(氣)가 위로 치밀어 오르는 병증. 숨이 차거나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84. 윤원형(尹元衡, ?

1565): 조선 중기의 척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소윤의 영수였다. 을사사화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나, 문정왕후 사후 몰락하여 자결했다.
85. 吾不西行, 大禍不止: "내가 서쪽으로 가지 않으면 큰 화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의 정확한 출전이나 맥락은 불분명하나, 권벌이 윤원형에게 보낸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하거나, 혹은 특정 행동(서행)을 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로 사용했을 수 있다. '서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추가적인 맥락이 필요하다.
86. 종사(宗社):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국가 또는 왕조 자체를 상징한다. 역모죄의 죄목에서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87. 세 사람: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을 가리킨다.
88. 인대(引對):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여 정사를 논의하는 것.
89. 위사공신(衛社功臣): 사직(社稷)을 위기에서 지켜낸 공신. 을사사화 때 윤임 등을 제거하고 명종을 보호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진 공신호이다. 권벌도 처음에는 여기에 포함되었으나, 윤임 등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곧 삭탈된다.
90. 길원군(吉原君): 권벌에게 내려진 군호(君號). 공신 책봉과 함께 주어지는 봉작(封爵)이다.
91.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가리킨다. 언론 기관인 양사에서 권벌의 파직을 청한 것이다.


원문:
公平居和氣薰然, 及至臨利害遇事變, 義形于色, 直前擔當, 勇決如賁、育。 當其再啓事也, 通夜草啓辭, 趁早將趨朝, 家人子女壻更扳挽泣諫, 輒麾去之。 至闕, 申公光漢相遇幷行, 問知公意, 愕然固止之, 不聽。 詣院相李公彦迪座, 招注書柳景深, 使書啓辭, 李公視草本, 亦驚曰: “勢已至此, 言之徒惹起不測耳, 奚益?” 盡抹去其危言處, 公却坐抱膝長嘻曰: “刪沒如此, 不如不爲之爲愈也。”

번역문:
공(公)은 평소 거처할 때 온화한 기운(和氣)이 넘쳐흘렀으나, 이해(利害)에 임하고 사변(事變)을 만나는 데 이르러서는 의(義)가 얼굴에 드러나고(形于色) 앞으로 나아가 담당하여 용감하고 결단력 있기가 분(賁)·육(育)⁹²과 같았다. 그가 두 번째로 일을 아뢸 때⁹³, 밤새도록 계사(啓辭)⁹⁴ 초안을 잡고 아침 일찍 서둘러 조정으로 나아가려 하자, 집안 식구들과 자녀, 사위들이 번갈아 붙잡고 울며 간하였으나 번번이 손을 휘저어 물리쳤다. 대궐에 이르러 신공(申公) 광한(光漢)⁹⁵과 만나 함께 가면서 공의 뜻을 (신광한이) 물어 알게 되자, 깜짝 놀라 굳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원상(院相)⁹⁶ 이공(李公) 언적(彦迪)⁹⁷의 자리에 나아가 주서(注書)⁹⁸ 유경심(柳景深)⁹⁹을 불러 계사(啓辭)를 쓰게 하니, 이공이 초본(草本)을 보고 또한 놀라 말하였다. “형세가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말하는 것은 한갓 예측할 수 없는 일을 야기할 뿐인데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 위험한 말 부분을 모두 지워버리자, 공이 뒤로 물러앉아 무릎을 안고 길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처럼 삭제해 버린다면 아뢰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주석:
92. 분(賁), 육(育): 중국 전국시대의 전설적인 용사(勇士)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을 가리킨다. 용맹함의 대명사로 쓰인다.
93. 두 번째로 일을 아뢸 때: 앞서 윤임 등의 죄를 논할 때 처음 아뢰었고, 백인걸이 투옥되고 윤임 등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자 다시 아뢰었던 상황을 가리킨다.
94. 계사(啓辭): 임금에게 아뢰는 글.
95. 신공(申公) 광한(光漢): 신광한(申光漢, 1484

155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 호는 기재(企齋)·석선재(石蘚齋).
96. 원상(院相): 으뜸가는 재상. 보통 영의정(領議政)을 가리킨다. 당시 영의정은 이언적이었다. 또는 그가 속한 관청(院)의 상(相)이라는 의미로, 당시 이언적이 좌찬성이었으므로 의정부의 재상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97. 이공(李公) 언적(彦迪): 이언적(李彦迪, 1491

1553).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을사사화 때 윤임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98. 주서(注書): 승정원(承政院) 또는 춘추관(春秋館) 등에 속한 정7품 관직. 기록을 담당했다. 여기서는 승정원 주서일 가능성이 높다.
99. 유경심(柳景深): 조선 중기의 문신. 권벌의 계사를 작성하는 실무를 맡았다.


원문:
公與鄭順朋分深。 鄭初告尹任時病甚, 移告數月, 是日始出, 公迎謂曰: “令公亦何以來乎?” 鄭色沮。 事定後, 語人曰: “凶類卽日當了, 吾聞權橃之言, 不覺汗背, 不復有言, 而歇後李文仲處事不猛, 以致多日騷擾。”

번역문:
공(公)은 정순붕(鄭順朋)과 매우 친하였다. 정순붕이 처음에 윤임(尹任)을 고발할 때 병이 심하여, 몇 달 동안 (다른 사람이) 대신 고발하였는데, 이날 비로소 나왔다. 공이 맞이하며 말하였다. “영공(令公)¹⁰⁰께서는 또한 어찌 오셨습니까?” 정순붕이 얼굴빛이 풀 죽었다. 일이 결정된 후,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흉악한 무리들은 즉시 마땅히 처리해야 했는데, 내가 권벌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나서 다시는 말이 없었으나, 그 후에 이문중(李文仲)¹⁰¹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날래지 못하여 여러 날 소요(騷擾)를 초래하였다.”

주석:
100. 영공(令公): 다른 사람의 아버지나 조부, 또는 존경하는 인물을 높여 부르는 말. 여기서는 정순붕을 존칭하는 말로 쓰였다. 오랜 병중에 있던 정순붕이 직접 나온 것에 대한 의아함과 염려를 표하는 말이다.
101. 이문중(李文仲): 이기(李芑)의 자(字)인 문중(文仲)을 가리킨다. 정순붕은 이기가 사건 처리를 단호하게 하지 못해 사태가 길어졌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원문:
尹思翼爲人疎謬, 公屢責之。 引對日, 思翼啓曰: “大行大王大漸時, 臣語權橃曰: ‘宜急迎大君入內。’ 橃不答矣。” 公但啓云: “有大臣在, 非所能擅斷。” 退詣賓廳, 許磁瞠[주-D002]視尹曰: “公欲捉權公, 何耶? 當危疑時, 權公以大義力贊大計, 權公赤心, 朝廷所共知, 安有他意?” 尹面赤無以答。

번역문:
윤사익(尹思翼)¹⁰²은 사람됨이 소홀하고 잘못이 많아, 공(公)이 여러 차례 그를 꾸짖었다. 인대(引對)하는 날, 윤사익이 아뢰었다. “대행대왕(大行大王)¹⁰³께서 위독하실 때, 신(臣)이 권벌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급히 대군(大君)¹⁰⁴을 궁궐 안으로 맞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권벌은 답하지 않았습니다.” 공은 다만 “대신(大臣)이 계시니, (제가) 능히 제멋대로 결정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아뢰었다. 물러나 빈청(賓廳)¹⁰⁵에 이르자, 허자(許磁)가 눈을 부릅뜨고¹⁰⁶ 윤사익을 보며 말하였다. “공(公)은 권공(權公)을 잡으려 하는가, 어째서인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권공께서 대의(大義)로써 큰 계책을 힘써 도왔으니, 권공의 충성스러운 마음(赤心)은 조정이 함께 아는 바인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윤사익이 얼굴이 붉어져 답하지 못하였다.

주석:
102. 윤사익(尹思翼): 을사사화 관련 인물로 보이나, 정확한 정보는 확인이 필요하다. 권벌을 모함하려 한 인물로 묘사된다.
103. 대행대왕(大行大王): 막 승하한 임금을 가리키는 호칭. 여기서는 인종(仁宗)을 가리킨다.
104. 대군(大君): 여기서는 인종의 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경원대군(慶源大君), 즉 명종(明宗)을 가리킨다. 인종이 위독할 때 후계자인 경원대군을 빨리 궁으로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권벌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권벌이 명종의 즉위를 바라지 않았다는 뉘앙스로 모함하려 한 것이다.
105. 빈청(賓廳): 관청 내에 손님을 접대하거나 관리들이 모여 의논하던 장소.
106. [주-D002] 瞠 : 저본(底本)에는 “”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奎章閣本) 및 《충재집・유명조선국……권공행장》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원문:
公初命求禮縣付處, 俄移配泰川縣。 押官到門, 公怡然就道, 謂鄕黨來訣者曰: “天恩罔極矣。” 進士琴元貞執公手, 不覺哭失聲, 公笑曰: “吾以子爲丈夫矣, 何至是耶? 死生、禍福, 天也, 其如天何?” 寄書于子東輔曰: “昔范忠宣年七十, 有萬里之行。 汝父之罪, 甚寬典也。 且吾負恩至此, 死則薄葬可也。” 行至用安驛, 有禁府郞指安東星馳而來, 一行驚倒號哭, 公正色叱之。 至則又移配朔州矣。 至碧蹄驛, 李晦[주-D003]齋彦迪配江界亦到。 公戲曰: “李貳相、權貳相一時之行, 何赫赫也!” 咫尺不相見而行。

번역문:
공(公)은 처음에 구례현(求禮縣)으로 부처(付處)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곧 태천현(泰川縣)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압송관(押官)이 문에 이르자 공은 기꺼이 길을 떠나며, 작별하러 온 향당(鄕黨)¹⁰⁷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성은(天恩)이 망극합니다.” 진사(進士) 금원정(琴元貞)¹⁰⁸이 공의 손을 잡고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우니,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장부(丈夫)로 여겼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는가? 죽고 사는 것과 화(禍)와 복(福)은 하늘에 달렸으니, 그 하늘을 어찌하겠는가?” 아들 동보(東輔)¹⁰⁹에게 편지를 부쳐 말하였다. “옛날 범충선(范忠宣)¹¹⁰은 나이 70에 만 리 길을 갔었다. 네 아버지의 죄는 매우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은혜를 저버리고 이에 이르렀으니, 죽거든 박장(薄葬)¹¹¹함이 옳다.” 길을 가다 용안역(用安驛)¹¹²에 이르렀을 때, 금부도사(禁府郞)¹¹³가 안동(安東)을 가리키며 별처럼 빨리 달려왔다. 일행이 놀라 쓰러져 울부짖자, 공이 정색하며 꾸짖었다. 도착하니 또 삭주(朔州)로 이배하는 것이었다. 벽제역(碧蹄驛)¹¹⁴에 이르니, 이회재(李晦齋)¹¹⁵ 언적(彦迪)이 강계(江界)¹¹⁶로 유배 가는 길에 또한 도착하였다. 공이 농담하며 말하였다. “이이상(李貳相)¹¹⁷, 권이상(權貳相)이 한 시대에 길을 떠나니, 어찌 그리 혁혁(赫赫)한가!” 지척(咫尺)의 거리에서 서로 보지 못하고 떠나갔다.

주석:
107. 향당(鄕黨): 고향 사람들.
108. 금원정(琴元貞): 권벌의 지인으로 보이는 인물. 진사 신분이었다.
109. 동보(東輔): 권벌의 아들 권동보(權東輔).
110. 범충선(范忠宣): 송(宋)나라의 명신 범중엄(范仲淹, 989

1052)의 아들인 범순인(范純仁, 1027

1101).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충선(忠宣). 그 역시 정직함으로 인해 여러 차례 좌천되어 유배 생활을 했다. 70세의 나이에 만 리 유배길을 떠난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111. 박장(薄葬):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는 것.
112. 용안역(用安驛): 전라도 용안현(현재의 익산시 용안면)에 있던 역(驛). 유배지로 가는 도중 거쳐 간 곳이다.
113. 금부랑(禁府郞): 의금부(義禁府)의 관원. 금부도사(禁府都事) 등을 가리킨다. 왕명을 받고 죄인을 압송하거나 체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안동(安東)은 권벌의 고향인데, 그곳을 가리키며 달려왔다는 것은 혹시 사사(賜死) 명령이 내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켜 일행이 놀란 것이다.
114. 벽제역(碧蹄驛): 경기도 고양(高陽)에 있던 역. 서울에서 의주(義州)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115. [주-D003] 齋 : 저본(底本)에는 “제(齊)”로 되어 있다. 《충재집・유명조선국……권공신도비명(權公神道碑銘)》 및 《우복집(愚伏集)・유명조선국……권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116. 강계(江界): 평안북도 북부의 도시. 이언적의 유배지였다.
117. 이상(貳相): 두 번째 재상. 보통 좌찬성이나 우찬성을 가리킨다. 권벌과 이언적 모두 당시 찬성(贊成) 직위에 있었거나 그에 준하는 재상급이었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같은 처지에 놓인 것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원문:
公初爲吏郞時, 朴說爲判書, 見公來, 握手相歡飮。 或怪問之, 說曰: “不見其人儀度乎? 異日當爲大器。” 宋圭菴論當世人物云: “權公, 宰相中眞宰相也。” 鄭文翼公嘗稱公有死難不可奪之節。

번역문:
공(公)이 처음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있을 때, 박열(朴說)¹¹⁸이 판서(判書)¹¹⁹로 있었는데, 공이 오는 것을 보고 악수하며 서로 기뻐하며 술을 마셨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묻자, 박열이 말하였다. “그 사람의 위의(威儀)와 도량(度量)을 보지 못하였는가? 다른 날에 마땅히 큰 그릇(大器)이 될 것이다.” 송규암(宋圭菴)¹²⁰은 당세의 인물을 논하며 이르기를, “권공(權公)은 재상(宰相) 중의 참된 재상이다”라고 하였다. 정문익공(鄭文翼公)¹²¹은 일찍이 공에게 죽음의 어려움에도 빼앗을 수 없는 절개(死難不可奪之節)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주석:
118. 박열(朴說): 조선 전기의 문신. 권벌의 인물됨을 일찍이 알아본 인물로 언급된다.
119. 판서(判書): 육조(六曹)의 으뜸 벼슬. 정2품. 어느 조(曹)의 판서였는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120. 송규암(宋圭菴): 송인수(宋麟壽, 1499

1547)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庵).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이며, 을사사화 때 화를 입었다.
121. 정문익공(鄭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

15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시호는 문익(文翼).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원문:
乙巳以後, 庶冤群枉, 以次昭雪。 慶尙道觀察使朴啓賢狀啓: “權橃忠義、風節如此, 請與李彦迪俱賜追奬。” 上覽而嘉歎, 令大臣議處。 議謂: “二人所學所行, 燁然可稱。 允合追奬, 用光繼述, 使士氣益振, 儒道增重。”【竝退溪撰行狀。】

번역문:
을사년(1545) 이후로 여러 원통함과 억울함들이 차례로 밝혀져 신설(昭雪)¹²²되었다. 경상도 관찰사 박계현(朴啓賢)¹²³이 장계(狀啓)¹²⁴를 올려 아뢰었다. “권벌의 충의(忠義)와 풍절(風節)¹²⁵이 이와 같으니, 청컨대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모두 추증(追奬)¹²⁶을 내려주소서.” 상(上)¹²⁷께서 보시고 가상히 여겨 감탄하며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의논하여 아뢰기를, “두 사람¹²⁸의 배운 바와 행한 바가 빛나게(燁然) 칭찬할 만합니다. 진실로 추증함이 마땅하니, 이를 써서 (선왕의 뜻을) 이어 서술함(繼述)을 빛내고 사기(士氣)¹²⁹를 더욱 떨치게 하며 유도(儒道)¹³⁰를 더욱 중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이상은 퇴계(退溪)¹³¹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나왔다.】

주석:
122. 소설(昭雪): 원통하거나 억울한 죄가 풀려 명예가 회복됨. 을사사화로 화를 입었던 인물들에 대한 신원(伸冤) 조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123. 박계현(朴啓賢, 1524

158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사성(師聖), 호는 존재(存齋).
124. 장계(狀啓): 지방 관찰사나 병사(兵使), 수사(水使) 등이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
125. 풍절(風節): 바람과 같은 절개. 꿋꿋하고 변함없는 절의(節義)를 의미한다.
126. 추장(追奬): 죽은 뒤에 공적을 기려 벼슬을 높여주거나 시호(諡號)를 내리는 등의 포상을 하는 것.
127. 상(上): 임금. 이 시기는 선조(宣祖) 때이다.
128. 두 사람: 권벌과 이언적.
129. 사기(士氣): 선비들의 기풍이나 사기.
130. 유도(儒道): 유학(儒學)의 도(道). 유교적 가치관이나 학문 풍토를 의미한다.
131.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

1570).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본관은 진보(眞城),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 등. 권벌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원문:
公性儉素, 不喜華靡, 位至通顯, 而自奉如寒士。 讀書, 遇聖賢言語切要處, 必招子侄開示, 反復敎告, 常曰: “爲學須爲己, 科製特末事耳。” 臨大事, 處大變, 義形于色, 直前擔當, 有雖賁、育莫能奪者。 夫以元衡處肘腋[주-D004]之地, 乘危疑之會, 眴唆群奸, 以逞宿憾, 固易於反手。 其禍機之發, 如洪河走陸, 烈火燎原, 一時善類擧將逮及。 以公之明, 豈不知其終不可救? 自取焦溺, 而奮然不顧, 起當其方至之勢, 知宗社之有安危, 而不知其身之有死生; 知忠賢受誣之爲可痛, 而不知言發禍應之爲可畏。 嗚呼烈矣! 非純忠大勇而能之乎?【《道東編》。 鄭愚伏經世語。】

번역문:
공(公)의 성품은 검소(儉素)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지위가 통현(通顯)¹³²에 이르렀으나 스스로를 받듦(自奉)은 가난한 선비(寒士)와 같았다. 독서하다가 성현(聖賢)의 말씀 중 절실하고 요긴한 부분을 만나면 반드시 자제와 조카(子侄)들을 불러 열어 보여주고 반복하여 가르치며 일깨워주면서 항상 말하였다. “학문(學文)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니, 과거 공부(科製)¹³³는 다만 지엽적인 일일 뿐이다.” 큰일에 임하고 큰 변고를 처리할 때에는 의(義)가 얼굴에 드러나고 앞으로 나아가 담당하여, 비록 분(賁)·육(育)이라도 능히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무릇 윤원형(尹元衡)은 팔꿈치와 겨드랑이 같이 가까운 자리(肘腋之地)¹³⁴에 처하여,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기회(危疑之會)¹³⁵를 타고, 뭇 간사한 무리들에게 눈짓하여 부추겨서(眴唆)¹³⁶ 묵은 원한(宿憾)을 이루려 하였으니, 진실로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그 화(禍)의 기틀이 발동함이 큰 강물이 육지를 휩쓸 듯하고 사나운 불길이 들판을 태우듯 하여, 한 시대의 선량한 무리들이 모두 장차 잡혀갈 지경이었다. 공(公)의 명철함으로 어찌 끝내 구제할 수 없음을 알지 못했겠는가? 스스로 타죽고 물에 빠지는 길(焦溺)¹³⁷을 취하면서도 분연히 돌아보지 않고 일어나 바야흐로 닥쳐오는 형세에 맞섰으니, 종사(宗社)에 안위(安危)가 있음을 알았으나 자기 몸에 죽고 삶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충성스럽고 현명한 이들이 무고(誣告)를 당하는 것이 통탄할 일임을 알았으나 말이 나오면 화(禍)가 응하는 것이 두려워할 일임을 알지 못하였다. 아아, 장렬하도다! 순수한 충성(純忠)과 큰 용기(大勇)가 아니고서야 능히 그럴 수 있었겠는가?【《도동편(道東編)》¹³⁸, 정우복(鄭愚伏)¹³⁹의 경세어(經世語)에서 인용.】

주석:
132. 통현(通顯): 지위가 매우 높고 이름이 널리 알려짐.
133. 과제(科製): 과거 시험을 위해 시(詩), 부(賦), 책(策) 등을 짓는 공부.
134. 주액지지(肘腋之地):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아주 가까운 곳.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를 비유한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명종의 외숙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35. 위의지회(危疑之會): 나라가 위태롭고 사람들이 서로 의심하는 시기. 명종 즉위 초의 불안정한 정국을 가리킨다.
136. [주-D004] 眴 : 저본(底本)에는 “구(胊)”로 되어 있다. 《충재집・유명조선국……권공신도비명》 및 《우복집・유명조선국……권공신도비명》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순사(眴唆)는 눈짓하여 남을 부추기는 것을 의미한다.
137. 초닉(焦溺): 불에 타고 물에 빠짐. 극심한 재앙이나 위험한 처지를 비유한다.
138. 《도동편(道東編)》: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편찬한 책으로 추정된다.
139.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원문:
觀人, 先取其大節, 然後可議其細行也。 權、李二公平日行檢, 權固不及於李, 而臨亂抗節, 則李讓於權。 或者以爲李優於權, 吾不信也。【《石潭日記》。 李指晦齋。】

번역문:
사람을 볼 때는 먼저 그 대절(大節)¹⁴⁰을 취하고 그런 뒤에 그 세행(細行)¹⁴¹을 논할 수 있다. 권공(權公)과 이공(李公)¹⁴² 두 분의 평소 행실과 검속(行檢)은 권공이 진실로 이공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난리(亂)에 임하여 절개(節)를 내세워 맞선 것에 있어서는 이공이 권공에게 양보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공이 권공보다 낫다고 여기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석담일기(石潭日記)》¹⁴³에서 인용. 이(李)는 회재(晦齋)를 가리킨다.】

주석:
140. 대절(大節): 큰 절의. 사람이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이나 의리.
141. 세행(細行): 자잘한 행실. 사소한 언행이나 품행.
142. 권공(權公)과 이공(李公): 권벌과 이언적을 가리킨다.
143. 《석담일기(石潭日記)》: 석담(石潭) 이이(李珥, 1536

1584)가 아니라,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

1634) 또는 석담(石潭)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의 기록일 수 있다. 여기서는 이 글의 내용과 인물평으로 보아 이언적, 권벌과 동시대 인물인 이후백의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이 글은 평소 행실은 이언적이 더 뛰어났을지 모르나, 을사사화라는 국난(國亂) 앞에서 보여준 절의는 권벌이 더 뛰어났다고 평가하며, 대절(大節)을 세행(細行)보다 중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임추(任樞) · 신광한(申光漢) 전기 번역 및 주석


임추(任樞)

원문:
任樞
字士鈞, 由謙之長子。 成化壬寅生。 中宗二年丁卯司馬, 仍登第。 薦入史局, 歷典翰、直提學、大司諫、慶尙・江原兩道觀察使。 甲午卒, 年五十三。

번역문:
임추(任樞)
자는 사균(士鈞)이니, 유겸(由謙)¹의 장자(長子)이다. 성화(成化) 임인년(1482)에 태어났다. 중종(中宗) 2년 정묘년(1507)에 사마시(司馬試)²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추천되어 사국(史局)³에 들어갔고, 전한(典翰)⁴, 직제학(直提學)⁵, 대사간(大司諫)⁶, 경상도 및 강원도 양도(兩道)의 관찰사(觀察使)⁷를 역임하였다. 갑오년(1534)에 졸(卒)하니, 향년 53세였다.

주석:

  1. 유겸(由謙): 임유겸(任由謙, 1456~1527). 임추의 아버지. 자는 익지(益之), 호는 잠곡(潛谷). 본관은 풍천(豊川).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2. 사마시(司馬試): 조선 시대 과거의 소과(小科) 시험.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았다. 임추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 또는 예문관(藝文館) 등 역사 편찬과 관련된 기관을 가리킨다.
  4. 전한(典翰):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하관(堂下官) 관직.
  5. 직제학(直提學):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관직.
  6. 대사간(大司諫): 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당상관.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했다.
  7. 관찰사(觀察使): 각 도(道)의 으뜸 벼슬. 종2품. 해당 도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했다.

원문:
公生而端秀聰穎, 讀書過目輒誦, 久而不忘。 其爲學以古人自期, 不徒事記誦。

번역문: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단정하고 빼어나며 총명하여, 글을 읽으면 눈으로 한 번 훑고도 문득 암송하였으며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그 학문함은 옛사람(古人)을 스스로 기약하며 단지 기억하고 암송하는 일만 힘쓰지 않았다.


원문:
庚寅, 出按嶺南。 道稱物衆地大, 人所難治, 而公處之裕如, 雖牒訴倥傯, 一聞輒記, 人不敢欺。

번역문:
경인년(1530)에 영남(嶺南)⁸ 안찰사(按察使)⁹로 나갔다. 영남은 물산이 많고 땅이 넓어 사람들이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졌으나, 공은 여유롭게 처리하였으며, 비록 문서와 소장(牒訴)¹⁰이 어지럽게 많아도(倥傯)¹¹ 한번 들으면 문득 기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주석:
8. 영남(嶺南): 경상도(慶尙道)를 가리킨다.
9. 안찰사(按察使): 조선 시대 관찰사(觀察使)의 별칭 또는 전신. 민정을 살피고 관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여기서는 경상도 관찰사를 의미한다.
10. 첩소(牒訴):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와 소장(訴狀).
11. 공총(倥傯): 일이 번잡하고 겨를이 없음.


원문:
癸巳, 以冬至使赴京, 長子充質正從行, 人以爲榮。 竣事將還, 得病過闕, 至高嶺驛奄逝, 無一言及家事者。 廣寧御史王潮卽遣屬官致祭, 且賻以銀兩, 有服乎心也。 訃聞, 上震悼, 賜棺槨弔祭, 大夫士多歎惜隕淚者, 而金安老則乃曰: “早逝得好。” 沈彦光則猶悔其由己困極, 乃曰: “咋指無及。”【竝《潛谷舊錄》。】

번역문:
계사년(1533)에 동지사(冬至使)¹²로 연경(燕京)¹³에 가는데, 장자(長子) 충질(充質)¹⁴이 정사(正使)의 수행원(從行)¹⁵으로 따라가니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임무를 마치고 장차 돌아오려다 병을 얻어 궐문(闕門)을 지나 고령역(高嶺驛)¹⁶에 이르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한마디도 집안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없었다. 광녕(廣寧)¹⁷의 어사(御史) 왕조(王潮)가 즉시 속관(屬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고 또 은(銀)을 부의(賻儀)로 보내니, 마음으로 감복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상(上)¹⁸께서 매우 슬퍼하시며 관곽(棺槨)을 하사하고 조문과 제사를 내리셨고, 대부(大夫)와 사(士)¹⁹ 중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많았는데, 김안로(金安老)²⁰는 이에 말하기를 “일찍 죽어 잘되었다.”라고 하였고, 심언광(沈彦光)²¹은 오히려 자신으로 말미암아 곤경이 극심했던 것을 후회하며 이에 말하기를 “손가락을 깨물어도 미칠 수 없다.”²²라고 하였다.【이상 《잠곡구록(潛谷舊錄)》²³에서 인용】

주석:
12. 동지사(冬至使): 동지(冬至)를 전후하여 명(明)나라에 보내던 정기 사행(使行). 황제에게 전문(箋文)과 공물(貢物)을 바쳤다.
13. 연경(燕京): 명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14. 충질(充質): 임충질(任充質). 임추의 맏아들.
15. 정종행(正從行): 정사(正使)의 공식 수행원. 사행단에는 정사,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외에도 많은 수행원이 있었다.
16. 고령역(高嶺驛): 현재의 중국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 부근에 있던 역참(驛站).
17. 광녕(廣寧): 현재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북진시(北鎭市). 명나라 때 요동(遼東) 지역의 군사 요충지였다.
18. 상(上): 임금. 중종(中宗)을 가리킨다.
19. 대부사(大夫士): 벼슬아치와 선비들을 통칭하는 말.
20. 김안로(金安老, 1481

1537): 조선 중기의 문신, 외척. 중종 때 권력을 장악하여 많은 사림(士林)을 숙청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임추는 김안로와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1. 심언광(沈彦光, 1487

15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형(士瑩), 호는 어촌(漁村). 김안로의 세력에 밀려 파직되기도 했다. 임추의 죽음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22. 작지무급(咋指無及): 손가락을 깨물어도 소용없음. 후회해도 이미 늦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심언광이 임추에게 어떤 잘못을 했거나 곤경에 빠뜨렸던 일에 대해 뒤늦게 후회하는 말로 해석된다.
23. 《잠곡구록(潛谷舊錄)》: 임추의 아버지 임유겸(任由謙)의 호가 잠곡(潛谷)이므로, 임유겸 또는 그 가문에서 기록한 문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咸陽叔父【任楗。】發言處事, 必慮始終, 先君諸弟中最許之, 嘗曰: “士防, 吾師也。” 庚寅、辛卯間, 群小以輔翼東宮爲名, 金安老在謫中, 陰爲之主, 及其召還, 日漸大橫。 時左相李荇, 初爲援進, 而後悔之, 與金相克成、兪判書汝霖, 率六曹啓之。 先君聞其詣闕, 欲同往, 先見叔父問曰: “除去小人, 國之大事。 余在宰相之後, 不敢不同也。” 叔父曰: “小人無恥, 勝而後已。 況無可恃者乎? 以弟料之, 必無成也。” 先君曰: “吾意正如此。” 飮醇醪, 極醉而還。 已而諸君果敗。【《丙辰丁巳錄》。】

번역문:
함양(咸陽) 숙부(叔父)【임건(任健)²⁴이다】는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함에 반드시 시작과 끝을 염려하셨는데, 선군(先君)²⁵의 여러 아우들 중에서 가장 인정하시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사방(士防)²⁶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셨다. 경인년(1530), 신묘년(1531) 사이에 여러 소인(小人)²⁷들이 동궁(東宮)²⁸을 보좌하고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김안로(金安老)가 귀양 가 있는 중에도 몰래 그 주동자가 되었고, 그가 소환되기에 이르러서는 날로 점점 크게 횡포해졌다. 당시 좌상(左相) 이행(李荇)²⁹이 처음에는 그를 도와 등용시켰다가 뒤에 후회하고, 김극성(金克成)³⁰, 판서(判書) 유여림(兪汝霖)³¹과 함께 육조(六曹)³²를 거느리고 아뢰었다. 선군께서 그들이 대궐로 나아간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고자 하여, 먼저 숙부를 만나 물으셨다. “소인(小人)을 제거하는 것은 나라의 큰일이다. 내가 재상(宰相)의 뒤에 있으니 감히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 숙부께서 말씀하셨다. “소인은 염치가 없어 이긴 뒤에야 그만둡니다. 하물며 믿을 만한 사람이 없음에랴? 아우가 헤아려 보건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군께서 말씀하셨다. “내 뜻이 바로 이와 같다.” 진한 막걸리(醇醪)를 마시고 몹시 취하여 돌아오셨다. 이윽고 여러 공(君)들이 과연 실패하였다.³³【《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³⁴에서 인용】

주석:
24. 임건(任健, 1486

1553): 임추의 숙부. 자는 사방(士防), 호는 양몽재(養蒙齋). 본관은 풍천(豊川).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함양(咸陽)은 그의 봉군호(封君號)인 함양군(咸陽君)을 가리킨다.
25. 선군(先君): 돌아가신 아버지. 여기서는 임추를 가리킨다. 이 글은 임추의 아들(임충질 등)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26. 사방(士防): 임건(任健)의 자(字).
27. 군소(群小): 무리를 지은 소인배들. 김안로 일파를 가리킨다.
28. 동궁(東宮): 왕세자(王世子). 당시 세자는 훗날 인종(仁宗)이 되는 이호(李峼)였다. 김안로 등은 세자 보호를 명분으로 정적(政敵)을 제거하려 했다.
29. 이행(李荇, 1478

153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처음에는 김안로의 복귀를 도왔으나 나중에 그와 대립했다.
30. 김극성(金克成, 1474

15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성지(成之), 호는 눌암(訥庵).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했다.
31. 유여림(兪汝霖, 1476

153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우(子雨), 호는 정암(靜庵).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32. 육조(六曹):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여섯 중앙 행정 관서. 여기서는 육조의 판서들을 중심으로 한 조정의 관리들을 의미한다.
33. 제군과패(諸君果敗): 이행, 김극성, 유여림 등이 김안로를 탄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역공을 받아 파직되거나 좌천된 사건(1531년)을 가리킨다. 임건의 예측대로 김안로 세력이 승리했다.
34.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병진년(1556)과 정사년(1557)의 일을 기록한 책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기 어렵다. 이 인용문은 임추 사후에 기록된 것으로, 임추가 김안로 탄핵에 동참하지 않은 일화와 숙부 임건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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